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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더 다시 알아보기...
2018년 10월 10일 01시 50분  조회:3454  추천:0  작성자: 죽림

 

 
윤동주
윤동주 시인
생몰
1917년 12월 30일 (중국 만저우리) ~ 1945년 2월 16일 (향년 27세)
가족
동생 윤혜원, 동생 윤일주
학력
연희전문학교
데뷔
1936년 가톨릭소년지 동시 '병아리' 발표
수상
1990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  외 1건
 
 
 

             尹東柱 詩集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後記

                                                  정병욱鄭炳昱(1922~?) 국문학자. 수필가

                                                                  경남 하동 출생. 연희전문을 거쳐 서울대 국문과 졸업 

 

東柱 兄이 악착스러운 원수의 형벌에 못 견디어 차디찬 돌마루 바닥에서 차마 감기지 않는 눈을 감고 마지막 숨을 거둔 지 벌써 10년이 된다. 이 10년 동안 우리의 뼈를 저리게 하는 그의 詩는 조국의 문학사를 고치게 하였고, 조국의 문학을 세계적인 물줄기 속으로 이끌어 넣는 데 자랑스러운 힘이 되었다. 독재와 억압의 도가니 속에서 가냘픈 육신에 의지한 항거의 정신 아니, 인간으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의 권리이며 재산인 자유를 지키고자 죽음을 걸고 싸운 레지스탕스의 문학이 어찌 유럽의 지성인들에게만 허락된 특권일 수 있었으랴.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숨 막히는 현실 가운데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던’ 東柱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詩人이었기에 ‘詩人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지어야’ 했다. 아니, ‘한 줄 시를 적는다’기보다 뼈를 꺾어 골수에서 솟아나는 수장髓漿으로 눈물 없는 통곡을 종이에 올린 그의 시는 진정 ‘슬픈 족속族屬’의 혈서였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던 동주의 시혼은 ‘파아란 하늘’에서 독재와 억압의 거센 ‘바람에 스치우’며 조국과 자유를 밤새워 지키는 ‘별’을 노래하였다. ‘어느 욕된 왕조의 유물’인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을 ‘밤이면 밤마다 손바닥 발바닥으로 닦’으면서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을 기다리던 그는 드디어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의 뒤를 따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ʻ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스 그리스도에게처럼 十字架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ʼ기를 각오한 그는 ʻ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ʼ의 날에 ʻ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ʼ를 남기고 ‘진정한 고향’을 찾아 ‘白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故鄕에 가자’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이 어둠에서 배태되고 이 어둠에서 생장하여서 아직도 이 어둠 속에 생존ʼ하는 자기 자신을 증오하고 저주하지는 않았다. 오직 그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은 ‘밤’과 ‘어둠’과 ‘타협ʼ과 ‘굴복’이었다. 그렇다고 그는 또한 그가 그렇게 기다리고 꼭 오리라고 굳게 믿던 ‘아침’과 ‘봄’을 소경처럼 덮어놓고 믿는 범용한 시인은 아니었다. 동주의 민첩한 감각과 투명한 예지는 우리로 하여금 일찍이 우리 겨레가 가져보지 못했던 놀라운 靈感의 시인을 얻게 하였다. 보라, 다음에 드는 이 무서운 예언을 이제 닭이 홰를 치면서 맵짠 울음을 뽑아 밤을 쫓고 어둠을 내몰아 동켠으로 훤히 새벽이란 새로운 손님을 불러 온다 하자. 하나 경망스럽게 그리 반가워할 것은 없다. 보아라, 가령 새벽이 왔다 하더라도 이 마을은 그대로 암담하고 나도 그대로 암담하고 하여서 너나 나나 이 가랑지 길에서 주저하지 아니치 못할 존재들이 아니냐. 이 얼마나 놀라운 예언이냐. 天性을 시인으로 태어난 그는 ‘電信柱가 잉잉 울어 하느님의 말씀’을 정녕 들을 수 있었던가 보다.

 다가오는 새 시대를 믿고 앞날의 역사를 내다보는 靈感의 詩人 尹東柱, 모든 시인들이 붓을 꺾고 문학을 포기하며 현실과 담을 쌓아 헛된 한숨만 뿜고 있을 때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오직 혼자서 꾸준히 ‘주어진 길을 걸어 온ʼ 외로웠던 시인 윤동주, 조국을 팔아 영예와 지위를 사고, 자유를 바꾸어 굴욕과 비굴을 얻어 날뛰는 반역자들이 구더기처럼 들끓는 시궁창 속에 오직 한 마리 빛나는 은어인 양 청신하였던 시인 윤동주, 급기야는 조국과 자유와 문학을 위하여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며 원수의 땅 위에서 마지막 숨을 거둔 殉節의 시인 윤동주. 이리하여 그는 드디어 원수의 발굽에 짓밟혔던 일제 말기의 조국의 문학사를 빛나게 하는 역사적 시인으로서 움직이지 못할 자리를 잡게 되었고 독재와 억압의 횡포한 폭력에 끝까지 항거하며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하여 싸운 온 세계의 레지스탕스의 대열 가운데에 조국의 문학을 어엿이 끼울 자리를 차지하는 영광을 누리게 하였다. 

 슬프오이다. 尹東柱 兄. 형의 노래 마디마디 즐겨 외우던 ‘새로운 아침’은 형이 그 쑥스러운 세상을 등지고 떠난 지 반년 뒤에 찾아 왔고, 형의 ‘별’에 봄은 열 번이나 바뀌어졌건만, 슬픈 조국의 현실은 형의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게 하였을 뿐, ‘새로운 아침 우리 다시 정답게 손목을 잡자’던 친구들을 뿔뿔이 흩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형의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는 자랑처럼 풀이 무성’하였고, 형의 노래는 이 겨레의 많은 어린이, 젊은이들이 입을 모아 읊는 바 되었습니다. 조국과 자유를 죽음으로 지키던 형의 숭고한 정신은 겨레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뼈에 깊이 사무쳤삽고 조국과 자유와 문학의 이름으로 당신의 이름은 영원히 빛나오리니 바라옵기는 東柱 兄, 길이 명복하소서. 분향焚香.

                       1955년 2월 15일 正音社에서 발행한 시집 말미에 게재됨.

 

 尹東柱(1917~1945) 시인. 아명兒名 해환海煥

 북간도北間島 출생. 연희 전문 졸업(1941) 및 일본 도오지샤 同志社대학 영문과 수학(1943). 중학 재학시 간도 연길延吉에서 발행하던 ≪카톨릭 少年≫에 동시 <병아리> <빗자루> <오줌싸개 지도> 등을 발표했으나 정식으로 문단활동을 한 적은 없다. 1944년 독립운동의 죄목으로 체포되어 큐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이듬해 옥사하였다. 그 뒤 곧 고종 사촌인 宋夢奎도 옥사했다. 1946년 유고시遺稿詩인 <쉽게 씌어진 詩>가 경향신문에 처음 발표되었고, 1948년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가 간행되었다.

 그의 작품 경향은 고도의 메타포(은유)와 시적 기교로 내면적 인간의 자아성찰과 시대와의 비극적 대결을 통한 비극적 인식 속에서의 자아 윤리적 완성을 꾀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序詩> <十字架> <또 다른 故鄕> <自畵像> <별 헤는 밤> <懺悔錄> <病院> 

<슬픈 族屬> <쉽게 씌어진 詩> 등을 들 수 있다.

 

 

 

시 감상평⌟ 2014년 9월 25일 목요일

 

 

영원히 불리어질 별의 노래...’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을 읽고

 

이수진

 

 

영혼이 맑아 그 맑음이 겉으로 배어나와 드러나지 않을 수 없었던 시인 윤동주윤동주는 연희 전문 졸업을 앞두고 졸업 기념으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펴내기 위해 그 동안 쓴 19편의 시를 자필로 정리해 세 부를 시집으로 만들었다. 1부는 자기가 갖고, 1부는 연희전문 이양하 선생님께그리고 1부는 함께 기숙사 생활을 하던 후배 정병욱에게 주었다이것이 민족 시인 윤동주가 살아생전 가져 본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이었다이양하 선생님과 자신이 가졌던 시집은 없어지고 후배 정병욱에게 준 시집이 다행히 남아 1948년 윤동주의 3주기를 앞두고 출판되었다원래는 시집 제목을 일제 치하의 아픈 우리 민족을 어루만져 주면 좋겠다는 뜻에서 병원이라고 지으려 했다가 고통 받는 우리 민족을 병원에 가두는 것보다 우리 땅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을 보며 아픈 마음을 달래고 위로받는 게 좋을 것 같아 시집 제목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고 지었다고 한다이런 그의 염원이 담겨서 일까... 7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가슴이 답답하거나 먹먹할 때 나의 앞날이 어둡게 느껴질 때 그의 시집을 펼친다그의 시는 하늘처럼 푸르고 바람처럼 우리 마음을 스치며 별이 되어 가슴에 박힌다그가 하늘과 바람과 별을 이토록 아름답게 노래했기에 우리는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시를 감상할 수 있게 되었지만 더는 하늘과 바람과 별을 시에 붙들어 둘 수 없게 되었는지도 모른다그보다 더 아름답게 표현 하지는 못할 것이므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걸아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서시전문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이제 다 못 헤는 것은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 별 하나에 추억과별 하나에 사랑과별 하나에 쓸쓸함과별 하나에 동경과별 하나에 시와별 하나에 어머니어머니// (중략) //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 <별 헤는 밤>일부

 

그는 이미 자신의 슬픈 운명을 알았던 것일까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선택한 문학의 길문학을 통해 싹튼 민족의식창씨개명을 해서라도 배워서 민족을 구할 힘을 기르고자 했던 그는 이렇게 먼저 그리운 이름들을 별 하나 하나에 그려보며 언젠가는 자신의 이름도 별처럼 반짝이게 되기를풀처럼 무성해지기를 소망했는지도 모른다그리고 그가 흙으로 덮어버린 이름 무덤은 그의 뼈가 묻힌 무덤이 되고 그 이름은 시인으로 되살아나 무성하게 불리워지고 있다그의 동시를 비롯한 여러 시들이 동요로 가요로 불리어지고 있는 것은 우리와 후손들의 복이라 하겠다.

 

사이좋은 정문의 두 돌기둥 끝에서오색기와 태양기가 춤을 추는 날금을 그은 지역의 아이들이 즐거워하다.// 아이들에게 하로의 건조한 학과로해말간 권태가 깃들고/ ‘모순두 자를 이해치 못하도록머리가 단순하였구나.// 이런 날에는잃어버린 완고하던 형을/부르고 싶다. - <이런 날>전문

 

윤동주는 신사 참배 거부로 숭실중학교 교장이 일본에 의해 강제로 쫓겨나자 이에 대한 항의로 자퇴를 한다하지만 자퇴 후 고향 용정에 돌아온 뒤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친일 학교인 광명학원에 다시 편입을 한다신사 참배에 항의하며 자퇴를 했는데 다시 친일 학교에 편입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모순을 표현한 것이다우리는 얼마나 많은 모순속에서 살고 있는가이 두 자를 이해치 못하도록 머리가 단순해서인가알고도 무시하는 썩은 양심 때문인가. <이런 날>뿐만 아니라 그의 시 <십자가>, <참회록>, <새로운 길등은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들어 주는 시들이다.

옮기고 싶은 시가 너무나 많지만 생략하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윤동주 시집의 제목이 될 뻔 했던 병원이라는 시와 내가 닮고 싶은 시위로를 적어 본다.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병원 뒤뜰에 누워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나비 한 마리도 없다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이 지나친 시련이 지나친 피로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 <병원>전문

      

거미란 놈이 흉한 심보로 병원 뒤뜰 난간과 꽃밭 사이 사람발이 잘 닿지 않는 곳에 그물을 쳐 놓았다옥외 요양을 받는 젊은 사나이가 누워서 쳐다보기 바르게- //

나비가 한 마리 꽃밭에 날아들다 그물에 걸리었다-란 날개를 파득거려도 파득거려도 나비는 자꾸 감기우기만 한다거미가 쏜살같이 가더니 끝없느 실을 뽑아 나비의 온몸을 감아 버린다사나이는 긴 한숨을 쉬었다.//

나이보담 무수한 고생 끝에 때를 잃고 병을 얻은 이 사나이를 위로할 말이거미줄을 헝클어 버리는 것밖에 위로의 말이 없었다. - <위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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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의江 창간호 특집>

                시인 윤동주의 여동생 


        윤혜원의 삶과 문학적 공로

                                  -육필원고 가져와 증보판과 영인판 시집 발간-


                                                                                                                 申  吉  雨

 

 


          1. 윤동주 육필시와 윤혜원 부부

 


   시인 윤동주(1917~1945)의 여동생 윤혜원(尹惠媛) 여사가 2011년 12월 10일 오전 1시 20분 호주 시드니 자택에서 향년 88세로 작고하였다. 장례는 시드니에서 치른 뒤, 2012년 봄에 경기도 광주 가족묘원에 안장되었다. 유족으로는 부군 오형범 장로와 장남 철주 등 2남 2녀를 두었다. 윤

동주의 형 <윤혜원 여사> 제자매로 유일한 혈육이 떠난 것이다.

 

          <윤헤원 여사>


     가장 선호 받는 시인 윤동주(1917~1945)

    윤동주 유고를 가져온 윤혜원과 오형범 여동생 부부.

    우리는 이들을 따로 생각할 수가 없다. 이들이 친남매라서가 아니다. 100여 편이나 되는 윤동주의 시가 알려지고, 그 다량의 원본 원고를 확인할 수 있게 되기까지에는 여동생 부부의 노력과 활동이 없이는 가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동생 윤혜원 부부가 만주 용정(龍井)에서부터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오면서 윤동주의 육필원고를 가지고 월남하지 않았다면, 윤동주의 육필원고 영인본과 시집 증보판도 나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친여동생 부부로서보다도 90평생을 오로지 윤동주를 위해 살았다고 할 만큼 두 분의 한결같은 삶과 노력이 없었다면, 윤동주도 오늘과 같이 찬란한 빛을 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1948년 1월 30일에 정음사에서 발간한 윤동주의 첫 유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초판에는 모두 31편의 시가 실렸을 뿐이다. 

친구였던 정병욱 교수가 보관한 유고 19편에 강처중 등에게 보내서 보관된 12편을 골라 도합 31편을 묶어서, 정지용의 서문을 붙여 간행한 것이다.

    1955년 2월 윤동주 10주기를 기념하여 정음사에서 발행한 시집에는 88편의 시와 5편의 산문을 포함하여 그 수가 3배인 93편으로 늘어났다. 1976년의 3판에는 다시 23편을 추가하여 모두 116편이 됐다. 

이 증보판들과 1999년에 민음사에서 발간한《윤동주 자필시고집(사진판)》이 나온 것은 모두 윤혜원 여사 부부가 월남하면서 서울로 가지고 온 자료들 덕택이었다.

    따라서, 윤동주는 위대한 시인으로, 여동생 부부는 그를 더욱 빛나게 한 사람으로 각기 우리 현대문학사에 크게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들 부부는 1999년에 <윤동주 문학상>을 제정하여, 2000년부터 해마다 시상해오고 있다. 

연변에서 발행되고 있는 초중용과 고중용 <중학생> 잡지에 발표된 중국조선족 중고등학생들의 작품 수백 편을 대상으로 선정하여 시상한다. 윤동주를 기리기보다 윤동주 같은 훌륭한 문인들을 일찍 발굴하여 육성하자는 뜻이 더 많은 강하게 실린 사업이다.

    후원자로 참여하고 있는 연세대학교가 해마다 수상자들을 초청하여 1주일 정도로 국내 문화관광과 교육 활동을 맡아 하는 것도 같은 뜻이다. 나아가 대상 수상자를 4년 장학생으로 선발하기로 결정하여, 2007년에 처음으로 옌볜의 한국화(19) 양이 인문학부에 합격되었다.

    그리고 윤혜원 부부는 윤동주와 고종사촌 송몽규의 묘소 관리에도 지극 정성이었다. 

이들 묘소의 1차 개수는 1988년 6월에 재미동포인 현봉학(玄鳳學) 박사가 주도하는 미중한인우호협회 연증(捐贈)으로 용정중학교 동창회에서 수선(修繕)하였다. 이때 봉분 밑을 시멘트로 20여㎝ 높이로 둥글게 두르고, 묘비는 그 테두리 밖 정면에다 세웠다. 묘비 앞에 오석판(烏石板)을 맞춰 대어서 새로 상석을 설치했다.

    윤혜원 오형범 부부는 2003년 봄에 80세 노인으로 2개월여에 걸쳐 윤동주와 송몽규의 묘소를 개수했다. 사방 4m 위치에다 폭 60㎝의 대리석판을 둘러 세우고, 그 안을 잔디로 심어 네모진 봉분 모습으로 만들었다. 묘비는 역시 봉분 앞에다 그대로 세웠다. 상석은 새로 오석 하나로 만들어 설치했다. 묘의 왼쪽 앞에다 따로 개수비를 세웠다. 왼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고종사촌 송몽규(宋夢奎)의 묘소도 윤동주의 것과 똑같은 모양으로 개수했다. 묘비와 상석은 예전 그대로 설치했다. 본래 명동 장재촌에 있던 것을 1990년 4월 5일에 이곳으로 이장한 것이다.    
    윤혜원은 중국 길림성 용정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48년에 오형범과 결혼하고, 그해 12월에 함께 북한을 거쳐 서울로 월남했다. 1948년은 조부가 9월 4일에 작고하고, 모친도 9월 26일에 별세한 해였다. 이때 부부는 윤동주의 육필원고와 노트 3권 등을 가지고 왔다. 윤혜원 부부는 1970년 10월 15일 윤동주 25주기를 맞아, 고인의 친필 유고와 유품 전시회를 국립도서관에서 1주일 동안 개최한 바도 있다.

    이러한 의미 있는 삶을 산 윤혜원이 2011년 12월 10일에 작고했다. 이에 윤혜원 오형범 부부의 주요 활동을 소개하여 그들의 문학사적 사회적 기여와 의미를 살피고자 한다.

 


                 2. 윤혜원의 가족과 생애

 

    윤혜원(尹惠媛)은 파평 윤씨로 1923년 0월 0일에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 지금의 중국 길림성 용정시 지신진 명동촌에서 부친 윤영석(尹永錫, 1895~1965)과 모친 김룡(金龍, 1891~1948)의 3남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증조부 윤재옥(尹在玉)이 함경북도 회령에서 종성(鐘城)으로 이사하여 살다가 1886년에 4남1녀 가족을 이끌고 두만강을 넘어 북간도 자동(子洞,紫洞)으로 이주해왔고, 조부 윤하현(尹夏鉉, 1875~1948)이 1900년에 지금의 명동촌으로 이주를 하였다. 이들 일가는 1910년에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할아버지는 부유한 소지주로 기독교 장로였고, 아버지는 명동학교를 졸업한 뒤 북경과 일본에 잠시 유학했던 지식인으로 명동학교 교원으로 있었다. 광명중학의 윤동주 학적부 아버지의 직업란에는 ‘상업(포목상)’이라 되어 있다. 어머니는 교육자요 독립운동가인 규암(圭岩) 김약연(金躍淵)의 누이동생이다.

형제자매는 3남1녀인데, 윤혜원 여사는 외동딸이었다. 시인 윤동주(1917~1945)는 6살 위인 오빠이고, 남동생으로 윤일주(尹一柱, 1927~1985)와 윤광주(尹光柱, 1933~1962)가 있다.

   윤일주는 1946년에 월남하여 성균관대 건축과 교수를 지냈는데, 젊어서 많은 동시를 썼으나 형 동주에게 누가 될까 하여 발표를 않았는데, 간경화증으로 작고한 뒤에 아들 윤인석(尹仁錫, 성균관대) 교수가《민들레 피리》로 묶어 1987년 5월 30일 정음사에서 간행했다. 연세대 교정에 세운 윤동주 시비를 설계했다.

    윤광주는 신체가 허약했으나 30세에 폐결핵으로 용정에서 작고하였는데, 시인으로 활동하여 시 3편(「다시 만나자 고향아」「고원의 새봄」「아침 합창단」)이 중화인민공화국 창건30주년기념 시선집(1969)에 수록되었다. 발표된 24편의 시를 수집하여 연변일보 등에 게재되기도 했는데, 시인 심연수(沈連洙)의 남동생과 문학친구로 지냈다.

    출생지 명동촌은 윤동주의 큰외숙인 김약연(1868~1942) 목사가 1899년에 종성에서 가솔을 이끌고 이주해 와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정착한 곳이다. 그는 1901년 4월에 명동에 서당 규암재(圭岩齋)를 차리고, 뒤에 명동서숙(明東書塾), 명동소학교와 중학교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다. 아들 김정규(金定奎)는 교장을 지냈고, 손자 김석관(金錫觀)은 학감으로 윤동주의 스승이었으며, 뒤에 윤동주 묘비를 짓고 썼다.

    윤혜원은 용정에서 초등학교 교사로도 근무했는데, 1948년에 오형범(吳瀅範)과 결혼했다

오형범은 윤동주와는 면식도 없었고, 사후에 맞선으로 윤혜원과 결혼을 했다. 윤동주가 시인인 것도 월남하여 그가 시인으로 알려진 뒤에야 알았다고 하였다.

    부부는 1948년 함경북도 성진을 거쳐 함경남도 원산으로 왔다가, 12월에 3․8선을 넘어 서울에 도착했다. 이때 용정의 고향집에 남아 있던 윤동주의 육필원고와 노트 3권, 스크랩 철, 사진 등을 가져왔다. 대부분 윤동주의 초기와 중기에 쓴 작품들이다.

    그때, 사진 봉투는 원산에서 월남하고자 할 때 위험하다고 판단되어, 용정으로 되돌아가는 친척에게 넘겨주었다. 그런데 그가 열차에서 검문하는 것을 보고 두려운 마음에 사진들을 차창 밖으로 던져버렸다고 한다. 중요한 사진 몇 장은 지니고 월남할 것을… 하며 필자에게도 몇 번이나 아쉬워함을 말했었다. 윤동주의 사진들이 많지 않은 것은 이런 사유가 있었던 것이다.

    윤혜원 부부는, 6․25 직후 부산에서 많은 고아들을 돌보며 살았다. 그 뒤에 건축업에 종사하다가, 1970년에는 필리핀으로 가서 목재 사업을 하였다. 1986년부터는 아들과 함께 호주 시드니에 정착하여 살다가, 윤 여사는 2011년 12월 10일에 작고했다.

 


                3. 윤동주 묘소의 개수와 관리

 

    윤혜원 부부는 윤동주의 묘소 관리에도 지극 정성이었다. 그 주변 묘들도 배려하고, 가까이 있는 고종사촌 송몽규의 묘소도 똑같이 보살폈다.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에 일본 후쿠오까 감옥에서 죽었다. 만 27년 1개월 16일의 삶이다. 묘소는 1945년 3월 6일 길림성 용정시의 동북쪽인 합성리 마을 뒤 동산의 교회공동묘지에 설치되었는데, 봉분만 있는 평범한 잔디묘였다. 세로 검정 글씨로 “詩人尹東柱之墓”라 새긴 화강암 묘비는 1945년 6월 14일에 가족들이 세웠다.

                        

                                <2003년 7월에 윤혜원 오형범 부부가 개수한 윤동주 묘소>
    2003년 6월 28일 필자가 용정의 숙소로 초대받은 자리에서, 윤혜원 오형범 부부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라며 몇 가지 사실을 들려주었다. 이 내용들은 그 뒤 이들의 부탁을 받고,〈안 알려진, 잘못 알려진 윤동주 이야기〉로, 2004년 12월 1일에 발간한 윤동주 60주년 추모사화집《님을 그리며》에 싣고, 2004년 12월 11일 서울 문학의집에서 한국문인명예운동본부 주최로 연 <시인 윤동주 60주기 전야제> 행사에서 발표했다. 그 중에 묘비에 관련된 것 두 가지만 소개한다.

 

    윤동주의 묘비 전면 표제는 “詩人尹東柱之墓”로 되어 있다. 그런데 어째서 “詩人”이라 했을까?

사실 묘비를 세운 1945년에는 윤동주가 시인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창작일자로 가장 빠른 시는 1934년 12월 24일자로 된 3편이 있다. 최초로 공개된 시는 1935년 10월에 숭실중학교 학생회에서 간행한 <崇實活泉> 제15호에 게재된 「공상」이다. 동시는 1936년「병아리」가 연길의 <카토릭소년> 11월호에 발표되고, 이어서「빗자루」(12월),「오줌싸개지도」(1937.1.),「무얼 먹고 사나」(37.3.), 「거짓부리」(37.10.)가 발표되었다.

    1939년 1월 23일에는 시「遺言」이 조선일보 학생란에 실리고, 이어서 시「아우의 印象畵」와 산문「달을 쏘다」가 같은 난에 게재되었다. 동시「산울림」은 <少年>지에 발표되었다. 1941년에 연희전문 문과 발행의 <文友> 6월호에 시 「새로운 길」이 실리고, 「자화상」도 6월호에 발표되었다.

    사후에 최초로 발표된 시는 1947년 2월 13일 경향신문 4면에 게재된 「쉽게 씌어진 시」이다. 3월 13일에는 「또 다른 고향」이, 7월 27일자에 「소년」이 실렸다. 당시 경향신문 편집국장으로 있던 정지용이 게재한 것이다.

    이런 사실로 보아, 묘비에 “시인 윤동주”라 한 것은 의문이다.

    그런데, “詩人”이라고 붙인 사람은 조부와 부친이었다고 여동생 부부이 증언했다. 그 근거는 윤동주가 1941년 12월 27일 연희전문을 졸업하면서 19편을 묶어서 3벌을 만든 육필원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였다. 스승인 이양하 교수가 출판은 아직 때가 아니라 했던 그 시집이다. 출판은 되지 않았으나 시집은 이미 완성한 것이었고, 그 육필시집을 보았기 때문에 ‘시인’이라 한 것이라고 했다. 가족이 세운 묘비이니 충분히 그럴 만하다. 물론 윤동주가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1948년 1월 30일 정음사에서 발간한 첫 유고시집부터이다.

    또 하나, 묘비에는 연호(年號)가 아닌 서기(西紀)로 나온다. 어째서 연호가 아닌 서기를 썼을까?

윤동주는 서기 1945년 2월 16일에 일본 후꾸오까 감옥에서 작고하였다. 묘비는 같은 해 6월 14일에 세워졌다. 그런데, 윤동주의 묘비에는 연도가 모두 연호(年號)가 아닌 서기(西紀)로 되어 있다. 비문 속의 연도도 서기이고, 묘비문 끝에도 “1945년 6월 14일 謹竪”라 새겨져 있다. 당시에는 다들 연호를 사용했기 때문에 이것은 특이한 사실이다.

    같은 해 3월 7일에 작고한 송몽규(宋夢奎)의 묘비에는 서기가 아닌, 연호 “康德”으로 새겨져 있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현석칠(玄錫七) 목사의 묘비에도 “康德”으로 되어 있다. “강덕”은 일본이 세운 만주국의 당시 연호였다.

    비문은 은사인 김석관 선생이 지어서 썼고, 묘비는 가족들이 세웠다. 그러므로, 연호 대신 서기를 쓴 것은 이들이 의도적으로 했다고 할 수 있다. 왜 그랬을까?

    이에 대하여 오형범 장로는 다음과 같이 의견을 말해 주었다.

윤동주는 한국 사람인데 억울하게 잡혀가서 일본 감옥에서 죽었다. 그러니 어떻게 일본이 세운 만주국 연호를 쓰겠는가? 그래서 서양에서 두루 쓰고 있는 서기를 쓴 것이다.

    한창 나이의 자식을 잃은 어버이로서도, 윤동주의 스승으로서도 그들은 심정적으로 일본(만주국)의 연호는 쓰고 싶지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윤동주의 가족은 일찍부터 모두가 기독교 신자였기에 서기가 어렵지 않게 선택될 수 있었을 것이다.

 

    윤동주의 묘소 1차 개수는 1988년 6월에 재미동포인 현봉학(玄鳳學) 선생이 주도하는 미중한인우호협회 연증(捐贈)으로 용정중학교 동창회에서 수선(修繕)하였다. 이때 봉분 밑을 시멘트로 20여㎝ 높이로 둥글게 두르고, 묘비는 그 테두리 밖 정면에다 세웠다. 묘비 앞에 오석판(烏石板)을 맞춰 대어서 새로 상석을 설치하였다. 가로 90㎝, 세로 60㎝, 높이 20㎝ 정도이다.

    현봉학은 1984년 봄 재미동포인 신태민(전 경향신문 부사장) 댁에서 윤동주의 첫 유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읽고 크게 감명을 받고, 그해 여름에 재미동포 13명을 인솔하고 중국 연변을 방문하여, 여러 유지와 주정부에게 윤동주가 애국시인이며 그 묘소와 유적들을 찾아주기를 부탁했다. 그러나 당시 그들은 윤동주를 알지 못했고 관심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는 내년 재방문 때에는 꼭 묘소를 찾아볼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당부하였다.

    다음해 7월에 두 번째로 방문하여, 용정시 대외문화경제교류협회 최근갑 이사장, 용정중학교 유기천 교장, 연변대학 농학원 김동식 교수 등으로부터 묘소를 발견했으니 안내를 해주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폭우로 버스는 동산 묘지 언덕의 진흙땅에 빠지고, 걸어서 올라갈 수도 없어서 단념하고 말았었다.

    그런데, 윤동주 묘는 1985년 5월 14일에 일본의 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 교수가 찾아냈다. 1984년 여름 일본에 가 있던 윤일주 교수가 다음해에 연변대학 초빙교수로 가게 된 오무라 교수를 만나 윤동주 묘소 사진을 주며 묘소를 찾아줄 것을 부탁했다. 오무라 교수가 1985년 4월 12일에 연변대학 교환교수로 가서, 연변대학의 권철, 이산해 교수와 용정중학교의 한생철 선생의 도움으로 동산에 있는 묘지를 찾아냈다. 묘는 사진으로 찾아냈고, 묘비의 비문으로 확인하였던 것이다.

    오무라 교수는 그 뒤 용정중학에서 학적부을 발견하고, 송몽규 무덤, 윤동주 생가터, 영동교회터 등을 더 찾아냈다.

 

    윤동주 묘소의 2차 개수는 윤혜원 부부가 2개월 정도 직접 인부들을 데리고 작업하여 2003년 7월 15일에 완료하였다. 봉분 밑의 시멘트 테를 제거하고, 사방 4m 위치에 폭 60㎝의 대리석판을 둘러 세웠다. 그리고 석판 안쪽은 모두 잔디를 심어 봉분 모습을 네모진 모습으로 여유롭게 만들었다. 묘비는 역시 봉분 앞에다 세웠다. 전의 오 <윤동주 묘소 개수 현장에서 부부와 필자> 석판 상석을 치우고, 새로 오석 하나로 된 상석을 새로 설치했다. 가로 100㎝, 세로 60㎝, 높이 15㎝의 크기이다. 묘의 왼쪽 앞에 따로 가로 60㎝, 높이 40㎝의 개수비를 새로 만들어 세웠다.

    왼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고종사촌 송몽규(宋夢奎, 1917~1945)의 묘소도 윤동주의 묘소도 똑같은 모양으로 개수해 놓았다. 다만 개수비가 없는 것만이 다를 뿐이다. 강덕(康德) 12년 을유 5월 20일에 세운 묘비와 1991년 7월에 용정중학동창회에서 수선했다고 새긴 상석도 그대로이다. 본래 명동 장재촌에 있던 것을 1990년 4월 5일에 이곳으로 이장한 것이다.

    그런데 윤동주의 묘소 앞에는, 가로 300㎝, 세로 150㎝ 정도를 대리석으로 네모지게 테를 두르고 그 안에다 잔디를 심어 참배하기에 좋게 계절(階節)을 만들어 놓았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2003년 6월 6일 연길 문인들과 함께 묘소를 방문했을 때 노부부가 인부들을 데리고 개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뜻밖의 만남을 반기고, 우리가 비탈진 자리에서 참배하는 것을 보고 느껴서 계획에도 없는 계절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필자가 웃으면서, “보태 드린 것 없이 한 몫 했네요”라고 하자, 오형범 장로가 “윤동주는 29살 젊은이로 죽었는데 환갑을 지낸 분들이 절을 하는 것을 보니 민망했었지요” 하고 답변했다. 참배자를 위한 배려겠지만, 내 손을 꼬옥 잡아주던 부부의 손이 그냥 따스하기만 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80세 늙은 동생이 오빠에게 마지막 정성을 드리는 거지요”라며 웃던 그때의 노부부의 순수한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4. 윤동주 문학상 시행

 

    윤혜원 오형범 부부는 1999년에〈윤동주 문학상〉을 제정했다. 윤동주 같은 시인을 발굴하여 격려 육성하고, 윤동주의 삶과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는 취지와 목표로 만든 것이다.

    제1회 윤동주 문학상은 2000년 2월 16일에 연변에서 시상을 했다. 이 문학상은 재미동포 현봉학 박사가 주도한 ‘미중한인우호협회’의 후원으로 시작되었다. 윤동주 첫 유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읽고 감동하고, 1984년 봄에 맨 먼저 윤동주 묘를 찾으러 나섰던 열정이 만든 것이다.

    심사대상 작품은 연변인민출판사가 발행하는 초중과 고중용 <중학생> 월간지에 1년 동안 실린 중국 조선족 중고등학교 학생작품들로, 거의 1,000편을 대상으로 선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심사위원은 연변대학 교수 2명과 연변작가협회, 연변인민출판사와 연변교육출판사에서 각각 1명씩 모두 5명으로 구성되었었다.   

     <제4회 윤동주문학상 시상식, 2003,7.18. 연길빈관, 필자는 심사위원으로 윤헤원 오형범 부부와 참석>

    2003년 연변대학 수필창작 초빙교수로 근무하고 있던 필자도 그 해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5월 13일 연변대학의 최상철 교수, 허춘희(연변인민출판사), 김흠(연변교육출판사), 한석윤(연변작가협회)과 함께 5명이 심사했는데, 고중조와 초중조 각에 1등 1명, 2등 3명, 3등 6명씩 선정하고, 전체 대상 1명을 따로 선발했다. 시상식은 5월에 해왔는데, 조류독감으로 7월 18일 연길빈관에서 윤혜원 부부와 현봉학 박사가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윤동주 문학상은 연변인민출판사가 주관을 하는데, 시상식에는 호주 시드니에 거주하고 있는 윤혜원 오형법 부부는 해마다 참석해 왔고, 연변의 문인들과 각급 학교 교사, 언론인들이 참석하고 있다.

    문학상은 그 후에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사업회와 한국민족교육문화원(전남 광주), 국제라이온스 포항지부 등이 후원단체로 참여하고 있고, 수상자들을 해마다 한국으로 초청하여 모국 방문과 문화 관광을 시키고 있다.

    특히 연세대학교는 문학상 수상자들의 초청과 국내 체재 및 안내를 맡아왔는데, 대상 수상자를 4년 장학생으로 선발하기로 결정하여, 2007년에 처음으로 옌볜의 한국화(19) 양을 인문학부에 합격시킨 바 있다.

    문학상을 창립부터 후원했던 미국의 현봉학 박사도 작고하고, 윤동주 친여동생인 윤혜원 여사도 작년 연말에 별세하였다. 형제자매로 유일한 오형범 장로도 90세를 맞는 고령이다. 그러나 윤동주 문학상은 많은 분들의 관심과 후원으로 계속될 것이며, 유능한 문인들의 배출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5. 윤혜원 오형범 부부의 삶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출생하여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29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해방되기 꼭 6개월 전에 그는 만 27년 1개월 16일을 살고 갔다.

    윤혜원은 1923년 출생이니 6살 아래다. 오형범은 윤동주와 면식도 없었고, 1948년에 맞선으로 윤혜원과 결혼했다. 윤동주가 시인인 것도 월남하여 그가 시인으로 세상에 알려진 뒤에 알았단다.

    그런 그가 윤동주의 자필원고와 시작 노트 등을 가지고 와서 윤동주 시집의 증보판과 육필원고본을 펴내게 하였고, 90평생을 처남 윤동주을 위해 살아온 것이다.

    이들 부부는 오래 전부터 오빠 윤동주의 고결한 이미지에 한 점이라도 흠이 될까 봐 자신들이 노출되지 않도록 애를 쓰며 살았다. 그들이 월남하여 서울에서 부산으로, 필리핀과 호주로 옮겨 산 것도 그런 뜻이었다. 남들을 만나도 늘 조심하고, 누구에게나 겸손하게 대하며 항상 봉사하고 베푸는 삶을 살았다.

필자가 윤혜원 부부를 처음 만난 것은 2003년 6월 6일 윤동주 묘소에서였다. 연변의 문인 몇몇과 용정의 윤동주 묘소에 갔다가 개수 작업을 하고 있던 두 분을 뜻밖에 만난 것이다.

    이 개수가 평생에 다시는 할 수 없을 줄로 여기고 마지막 정성을 쏟는다는 말처럼 진지함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후에 연길 숙소에 초대되어 점심을 대접받은 적이 있는데, 평생에 80노인이 손수 마련한 식사는 처음이었다. 맛있는 음식에 셋이 반주로 먹었던 포도주 맛은 지금도 생각나게 한다.

    두 분의 요청으로 상지대 서시작품비 사진을 용정중학교 윤동주 전시실에 게시했고, 완공된 윤동주 묘소를 촬영한 사진들도 갖다 드렸다. 윤혜원 여사는 묘소 사진들을 보며 “내 남편한테 절하고 싶다”고 했다. 평생을 친오빠 윤동주를 위해 산 남편이고, 오늘의 윤동주가 있기까지에는 그의 공이 컸기 때문이다.

    윤동주가 연희전문을 지원할 때 집안의 기둥으로서 의과로 진학하라는 아버지의 권고에 밥도 안 먹고 고민했는데, 결국 할아버지가 젊은이의 뜻을 꺾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하여 문과로 진학한 것과, 일본 동지사대학에 윤동주 시비를 건립할 때 이를 계기로 만나지도 않던 민단과 조총련 인사들이 화합하고, 또 동지사대학 동포동문 모임인 코리아 클럽(Kore Clup)이 창설된 것을 감격해 하며 들려주었다.

    또 서시의 일본어 번역이 잘못된 소견과, 윤동주의 스크랩북 원본을 심연수의 형인 심연호 씨가 소장한 경위와, 윤동주가 사귄 여성들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윤동주가 ‘아리랑’과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노래를 자주 불렀다는 것도 말해 주었다.

   

                              <필자와 윤혜원 오형범 부부, 2004, 서울>
    나는 부부의 부탁으로, “안 알려진, 잘못 알려진 윤동주 이야기” 몇 가지를 한국문인명예운동본부가 발간한 추모사화집《님을 그리며》에 싣고, 2004년 12월 11일에 서울 문학의집에서 개최한 <윤동주 60주기 추모전야제> 한일세미나에서 발표한 바 있다. 이 기간에 문학의집에 <윤동주 사진전>을 마련하여 2주 동안 전시했었다. 2005년 2월 12일부터 15일까지는 일본 후쿠오카 감옥 마당에 가서 <윤동주 60주기 추모제>를 갖고 세미나도 개최하였다.

    <서시>에 감동을 받고, 2000년 7월에 학술대회에 참석했다가 앞장서서 용정의 동산공원 묘소를 찾아내어 참배했던 윤동주, 그리고 묘소 개수 현장에서 우연히 만난 윤혜원 여동생 부부, 나와는 인연이 참 많다. 그래선지 윤혜원 여사는 마치 나의 누님 같은 느낌과 생각이 드는 분이다. 삼가 다시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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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서시는 따로 발표한것이 아니라 1948년 유고시집으로 발표되었습니다.
대략적인 년도는 1938~1941사이입니다.

북간도(北間島) 출생. 용정(龍井)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을 거쳐 도일,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 재학 중 1943년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하다 사상범으로 일경에 피체, 1944년 6월 2년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용정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 연길(延吉)에서 발행되던 《가톨릭소년》에 여러 편의 동시를 발표했고 1941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도일하기 앞서 19편의 시를 묶은 자선시집(自選詩集)을 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가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그의 사후에 햇빛을 보게 되어 1948년에 유고 30편을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간행되었다. 
이 시집이 세상에 나옴으로써 비로소 알려지게 된 윤동주는 일약 일제강점기 말의 저항시인으로서 크게 각광을 받게 되었다. 주로 1938~1941년에 씌어진 그의 시에는 불안과 고독과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과 용기로 현실을 돌파하려는 강인한 정신이 표출되어 있다.
《서시(序詩)》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십자가》 《슬픈 족속(族屬)》 등 어느 한 편을 보더라도
거기에는 울분과 자책, 그리고 봄(광복)을 기다리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져 있다. 연세대학교 캠퍼스와 간도 용정중학 교정에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으며, 1995년에는 일본의 도시샤대학에도 대표작 《서시》를 친필과 함께 일본어로 번역, 기록한 시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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