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2월 16일, 윤동주(尹東柱)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외마디 비명을 높이 지르고 운명한 지 7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내년 12월 30일이면 그가 지린성 명동촌(明洞村)에서 태어난 지 꼭 100년이 된다. 그러나 시인이 떠난 지 한 세기가 지났음에도 그를 추모하는 열기는 식을 줄 모른다. 윤동주의 〈서시〉는 한국인들이 가장 애송하는 시로 꼽히고, 저예산 영화 〈동주〉는 적은 상영관에도 불구하고 100만 관객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은 대형서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4월 7일 서울역 인근 카페에서 윤동주의 장조카인 윤인석(尹仁石·60) 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를 만났다. 윤 교수는 아버지 윤일주 교수의 뒤를 이어 성균관대에서 2대째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문화재청의 근대문화재분과 위원장인 윤 교수는 근대문화재의 문화재 심의가 늘어나면서 수원에서 서울로 자주 온다고 했다. “시인 집안에서 건축학과 교수가 웬 말이냐”고 하자 “19세의 나이로 단신 월남한 아버지가 시로 생계를 이을 수 있었겠느냐”며 “결국 아버지도 생존을 위해 건축학과(서울대)에 들어갔던 것”이라고 했다. 유족의 책무
2005년 2월 16일 윤동주 시인 서거 60주기를 추념하는 행사가 연세대에서 열렸다. 맨 오른쪽이 윤인석 교수, 그 옆이 정창영 당시 연세대 총장. 사진=조선일보
— 영화 〈동주〉를 보니 엔딩 크레디트에 교수님 이름이 제일 먼저 나오더군요? “육필원고 파일을 제공했을 뿐입니다. 이준익(李濬益) 감독이 저예산으로 여러 시도를 하며 시사회를 7회나 여는 것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유족 입장에선 시인의 명예만 먹칠하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 픽션이 가미되더라도 관계없다고 생각해요. 《윤동주 평전》을 썼던 송우혜(宋友惠) 선생이 시나리오 작가가 일본어 시집을 낸다고 설정하자 펄펄 뛰는 바람에 시를 영국에서 보내 영역시집으로 내는 것으로 수정했습니다.” 윤 교수는 “영화를 본 사람들이 윤동주와의 관계를 물을 때,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라고 윤동주(강하늘)가 말하자, 누워 있던 아우 중에 ‘사람이 되지’라고 한 아이(윤일주)가 나의 아버지라고 말한다”라며 웃었다. 1917년 12월 윤동주는 지린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부친 윤영석(尹永錫·1895~1962)과 모친 김용(金龍·1891~1948) 사이의 3남 1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 아래로 누이동생 윤혜원(尹惠媛·1924~2011), 남동생 윤일주(尹一柱·1927~1985), 윤광주(尹光柱·1933~1962)가 있다. 윤동주 시인 3형제는 모두 시인이었다. 윤동주는 이역만리에서 요절했고, 윤일주 시인은 동주 형이 못내 안타까워 시작(詩作) 활동에만 전념했다. 형과 열 살 터울인 윤일주 교수는 1955년 《문학예술》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지만 시집 출간을 끝내 하지 않다가 아들 윤인석 교수가 부친 사후 1987년 동시집 《민들레 피리》(정음사)만 출간했다. 윤 교수는 “아버지가 김정(金正) 숭의여전 교수에게 삽화까지 부탁하는 등 시집을 완성해 놓으셨으나, ‘윤동주 동생’이란 부담으로 원고를 쥐고 계시다 돌아가셨다”고 했다. 막내 윤광주가 시인이란 사실을 알린 사람은 그의 매형 오형범(吳瀅範·1922~2015)씨다. 윤광주가 사망한 지 40년 만에 옌지에서 《옌볜일보》와 문학지 《천지》 등에 실린 그의 시 24편을 발굴한 것이다. 윤광주는 해방정국에서 월남하지 못하고 중국 공산치하에서 시인으로 활동하다 31세에 요절했다. 윤 교수는 3형제의 시를 한데 모아 시집을 출간할 계획을 갖고 있다. 2011년 12월 10일 윤동주의 여동생 윤혜원 여사가 호주 시드니에서 88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윤동주의 형제는 모두 저세상으로 갔다. 1948년 결혼한 윤혜원・오형범 부부는 그해 12월 월남하면서 룽징 고향집의 윤동주 육필원고와 노트 3권, 스크랩철, 사진 등 윤동주의 초기와 중기 작품 대부분을 위험을 무릅쓰고 갖고 나왔다. 1948년 1월 정음사에서 발간한 윤동주의 첫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31편만 실렸으나, 1955년 중판에서는 그 숫자가 3배나 늘어 93편이 됐다. 1976년 3판에서는 116편으로 크게 늘었다. 이 증보판과 1999년 《윤동주 자필시고 전집(사진판)》이 나온 것은 모두 윤혜원・오형범 부부 덕분이다. 윤혜원 여사는 생전에 “아버지가 갖고 나가라던 오빠의 대학노트 3권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몰랐다”고 했다. 윤 여사는 “남편 오형범 장로에게 절하고 싶다”고 했다. 이 부부는 2003년 윤동주와 고종사촌 송몽규(宋夢奎·1917~1945)의 묘를 보수하고, 윤동주 문학상을 후원하는 등 윤동주 추모사업에 생을 바쳤다. 윤인석 교수는 “고모와 고모부는 젊은 나이에 순절한 오빠의 고결한 이미지에 흠이 될까 자신들이 노출되지 않도록 애썼다”며 “그분들이 서울에서 부산으로, 필리핀과 호주로 계속 옮겨 산 것도 결국 그런 뜻을 실천한 것”이라고 했다. 연전 후배 정병욱, 동주 아우에게 누이동생 소개
윤인석 교수가 연세대에 기증한 윤동주 시인의 육필원고와 관련 자료들. 미공개 시 8편을 포함, 윤동주의 체취가 담긴 모든 육필원고가 공개됐다. 오른쪽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1948년 1월 정음사에서 간행한 첫 유고시집이고, 그 옆 큰 사이즈의 시집이 1955년판 증보판이다. 사진=조선일보
— 사람들이 교수님을 통해 윤동주의 모습을 연상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고모가 생전에 ‘4형제 중 제일 못난 것 둘이 넘어왔다’고 농담을 가끔 하시면서 사회적으로 활동을 활발히 하면 큰아버지의 이미지에 누(陋)가 될 것 같다고 했어요. 저도 사진 찍히는 걸 꺼리는 것을 보니 고모와 똑같은 콤플렉스가 생겼나 봅니다.” 큰아버지 세대가 모두 작고한 지금, 윤인석 교수는 유족대표 역할을 맡고 있다. 윤 교수는 “최근 큰아버지에 대한 문학 세계와 생애 연구가 다각도로 이뤄지고 있어, 유족들이 오히려 연구자분들에게 배우는 실정”이라고 했다. — 윤동주의 시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은 정병욱(鄭炳昱·1922~1982) 전 서울대 교수의 헌신적 노력으로 알려졌지요? “그분은 큰아버지가 다녔던 연희전문학교 문과의 두 해 후배입니다. 학교 기숙사에서 만나 문학에 대한 관심을 공유하며 교류했어요. 기숙사를 퇴사한 후에도 두 분은 하숙을 같이 구하고 졸업할 때까지 늘 함께 생활하셨다고 합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 졸업 기념으로 19편의 작품을 모아 시집 발간을 계획하였으나 일제강점기 상황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필로 3권을 묶어, 은사 이양하(李敭河) 선생, 룸메이트 정병욱에게 한 권씩 증정하고 한 권은 자신이 가졌다. 이양하 선생에게 증정한 것과 자신이 가졌던 것의 행방은 알 길이 없으나, 정병욱에게 증정한 것이 온전히 보관되어 오늘날 윤동주 시집의 근간이 되었다. 윤인석 교수의 말이다. “정병욱 선생은 1943년 학병으로 끌려나가면서 윤동주 육필 자선 시집을 자신의 고향집(전남 광양군 진월면 망덕리: 부친의 사업차 경남 하동에서 일가가 옮겨와 생활함) 어머니에게 맡기고 떠났습니다. 어머니는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마루 널을 뜯어 그 아래에 원고를 넣은 항아리를 묻고 지푸라기로 건조상태가 유지되도록 보관했습니다. 광복 후 귀국한 정병욱 선생은 이 원고를 다시 받아들고 뛸 듯이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 후 1947년 2월 16일 서울 소공동 ‘플라워 회관’에서 윤동주와 한 달 후 같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송몽규, 두 사람을 기리는 추도회가 열렸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유고시집을 간행하자는 데 뜻을 모으고, 유고 31편을 추려 이듬해 1월 정음사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했다. 그 후, 일반에게 조금씩 윤동주의 시가 알려지기 시작할 때 정병욱 선생은 대학입시에서 국어과목 문제 중 일부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중에서 출제함으로써 대중에 윤동주의 시를 알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1970년대에는 이 시가 드디어 중·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까지 실렸다. — 그 후 윤동주와 정병욱은 사돈지간이 됐다지요? “1955년 2월 증보판을 간행한 후 정병욱 선생은 외동누이(정덕희 여사)와 시인의 동생(윤일주 교수)이 혼인하도록 다리를 놓았습니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직후 부부를 불러 자신이 간직하던 자선시집을 아버지께 되돌려주셨지요. 이로 인해 큰아버지가 도일 전 ‘정병욱 형에게’라고 증정사를 쓴 자선시집 원본이 유족 품으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제 형제들은 이 동생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고, 저는 정병욱 선생을 큰외삼촌이라 부릅니다.” 강처중, 일본유학 시절의 詩 보관 정병욱 선생이 시집 출판 준비에 한창일 때, 윤동주의 자선시집에 실렸던 19편 외에 초판 시집에 같이 실린 12편의 시 원고를 가지고 있었던 강처중(姜處重)이라는 인물이 나타난다. 강처중은 낱장의 종이에 윤동주가 도일 전에 쓴 것으로 보이는 〈팔복〉 〈위로〉 〈병원〉 〈못 자는 밤〉 〈돌아와 보는 밤〉 〈간〉 〈참회록〉과 동경의 릿쿄대학 용지에 쓴 〈흰 그림자〉 〈흐르는 거리〉 〈사랑스런 추억〉 〈쉽게 쓰여진 시〉 〈봄〉이라는 작품을 윤일주 교수에게 전달했다. 함경도 원산의 한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강처중은 연희전문학교 문과학생회인 ‘문우회’ 회장을 지냈고, 해방 후 《경향신문》 기자로 일했다. 그는 1947년 2월 13일자 신문에 윤동주의 〈쉽게 쓰여진 시〉를 정지용(鄭芝溶)의 작가 소개와 함께 게재함으로써 윤동주를 세상에 알렸다. 윤인석 교수는 “강처중 선생은 큰아버지의 도일 후 관련 물건들을 빠짐없이 챙겨두셨던 분”이라며 “큰아버지가 보셨던 40여 권의 책과 앉은뱅이 책상, 연희전문학교 졸업앨범 같은 것을 갖고 계시다가 1946년 월남한 아버지에게 돌려주셨다”고 했다. — 1948년에 출판된 시집에는 강처중이 발문을, 정지용은 서문을 썼습니다. 그런데 1955년 증보판에는 이분들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까닭은 뭡니까.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정지용은 월북하고 강처중도 《경향신문》 기자로 좌익 활동하다 처형당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아버지와 정병욱 선생은 1955년의 증보판 시집에서 이분들의 글을 고민 끝에 삭제하셨던 것 같습니다. 남북의 이념대립 속에서 생겨난 슬픈 현실이었습니다.” 여동생 윤혜원 부부의 노력
여동생 윤혜원이 오형범과 결혼 직후인 1948년 윤동주 묘소를 찾은 모습. 왼쪽부터 윤동주의 매제 오형범, 막냇동생 윤광주, 여동생 윤혜원, 당숙 윤영춘의 동생 윤영선, 6촌동생 윤갑주.
— 중국 룽징 본가에 있는 윤동주 시인의 유품과 유고는 가져왔습니까. “1946년 19세의 나이로 단신 월남한 아버지는 이후 형님의 유품과 유고 수습에 몰두했습니다. 아버지는 시집 발간을 위해 고향에 남아 있는 원고 노트를 인편으로 가지고 나올 것을 계획하였습니다. 마침 갓 결혼한 고모(윤혜원)에게 이 소식이 전해졌고, 고모 내외는 기독교 탄압도 피할 겸 월남하기로 하고 봇짐 속에 원고와 사진첩을 숨겨 1947년 12월 룽징을 떠났습니다. 북한 청진과 원산에서 1년간 월남할 기회를 엿보다 1948년 12월 말에 경기도 연천을 통과해 서울로 왔습니다.” 윤혜원 내외는 북한 공안원의 단속을 피하려고 부피가 작은 원고 노트만 봇짐 속에 챙겨 넣고 부피가 큰 사진첩은 룽징으로 되돌아가는 이웃 사람에게 맡겼다고 한다. 그런데 기차가 두만강을 도강하기 직전 남양 근처 산중에서 공안원의 승객 짐 검사가 벌어졌다. 놀란 이웃 사람은 화장실로 몸을 피했고, 안타깝게도 앨범을 창밖으로 내던지고 말았다. 윤동주의 사진이 유독 적은 것은 앨범의 유실 때문이다. — 윤동주의 장례는 1945년 3월 6일 룽징 중앙장로교회 문재린(文在麟) 목사의 주관으로 치러집니다. 문재린 목사는 문익환(文益煥) 목사의 부친이지요? “큰아버지와 문익환 목사는 어릴 적 친구로서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 동창입니다. 문익환 목사는 평소 큰아버지의 편모(片貌)에 관한 말씀을 많이 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장덕순(張德順) 선생, 김정우 선생, 강원룡(姜元龍) 목사도 큰아버지와 동창이시고요. 유영(柳玲) 선생은 큰아버지의 연희전문 시절에 대해 생생하게 들려주셨습니다. 동경 생활은 당시에 동경에서 유학하던 큰아버지의 당숙 윤영춘(尹永春) 선생께서 추억을 기록해 놓으신 것이 있고요.” 윤인석 교수는 “윤영춘 선생은 큰아버지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할아버지와 함께 현해탄을 건너 후쿠오카로 달려가, 시신을 수습하고 화장해 고향으로 모시고 왔다”며 “영화 〈동주〉 말미에 등장하는 것처럼, 생존해 있던 송몽규 아저씨를 만나 감옥 안에서 이름 모를 약물주사를 매일 맞고 있다는 증언을 듣고, 전쟁의 와중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자들에게 생체실험이 있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고 전했다. 평전 출간 노력 윤동주의 생전 모습, 작품에 관한 기록, 재판에 관한 언급은 대체적으로 유고시집 1955년판 부록에 기록된 것과 최현배(崔鉉培)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정음사 내에 설치해 운영하던 ‘외솔회’의 계간지 《나라사랑》 1976년 6월호에 실린 글들이 있다. 재판에 관련된 자료들은 1977년·1979년·1980년에 발견됐고 그 내용이 《문학사상》 1982년 10월호에 번역 게재됐다. — 시집 발간과 더불어 윤동주 평전 작업도 진행했나요? “아버지는 자료와 기록이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군데 흩어져 있어 이들을 한데 묶고, 생전의 모습은 보충해 전기를 내실 생각을 하고 계셨습니다. 1970년대 말 《이상평전》을 엮어 내셨던 고은(高銀) 선생과 자료를 놓고 상의하시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본 적이 있거든요.” — 그런데 전기 작업은 왜 고은 선생께서 맡지 않으셨나요? “아버지께서 직접 집필하시는 것으로 생각을 바꾸셨어요. 사랑하는 형님의 일생을 다루는 일을 타인에게 맡기느니 당신 손수 챙겨서 생생하게 전하고 싶으셨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1980년대에 들어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시면서 이 일을 문장력이 있다고 생각되는 둘째아들(윤인하)에게 맡길까도 생각하셨습니다.” 윤인석 교수는 “이러던 차에 송몽규 아저씨의 조카인 작가 송우혜 선생이 평전 집필 의향을 밝혀오셨고 아버지는 여러 가지 자료들을 넘기시고 증언을 하셨다”고 했다. — 윤일주 교수는 1985년 11월 28일에 돌아가셨고 송우혜 선생의 《윤동주 평전》은 1988년 10월에 나왔네요? “생생하게 증언해 줄 분들 대부분이 세상을 뜬 가운데 이 책마저 없었다면 큰아버지에 대해 종합적으로 알아볼 자료를 찾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송우혜 선생은 간도 역사를 깊게 연구하던 역사학자이자 소설가여서 조각처럼 흩어진 것들을 한데 묶어 방대한 작업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 국회도서관 직원, 우지고 쓰요시
연희전문 시절의 윤동주와 정병욱(오른쪽). 두 사람의 인연 덕에 오늘날 윤동주의 육필원고들이 살아남아 ‘사진판 전집’ 출간으로 햇빛을 보게 됐다.
일본의 윤동주 재판 관련 기록 발굴은 우연한 기회에 시작됐다. 1970년대 후반, 윤동주를 알고 있던 일본인이 서울 출장길에 윤일주 교수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윤일주 교수는 종로 YMCA 호텔에서 그 일본인을 만났다. 우지고 쓰요시(宇治鄕毅)라는 일본 국회 도서관 직원으로, 국립중앙도서관과 교류차 출장 중이었다. 공무를 마친 후, 국립중앙도서관 정병완(鄭炳浣) 열람과장에게 “시인 윤동주에 대해 알고 싶다”는 개인적인 부탁을 했고, 정병완 선생(정병욱 선생의 동생)은 “내 매제가 시인의 동생이니 만나보라”고 주선했다. 우지고 선생은 당시에 한국어를 배우면서 윤동주 시를 알게 됐고, 일제강점기에 고초를 겪다가 옥사한 것, 시인이 자신의 모교인 도시샤 대학 학생이었다는 것이 동기가 되어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호텔 방에서 우지고 선생을 만난 윤일주 교수는 ‘원수의 땅’ 일본에서 그의 시를 알고 찾아온 일본인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윤일주 교수는 우지고 선생에게 일본에 있을 법한 윤동주의 유고, 유품, 관련 자료들을 찾아봐 줄 것을 부탁했다. 우지고는 자료 전문가답게 윤동주와 송몽규 관련 자료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윤인석 교수의 말이다. “그분이 틈나는 대로 관련 자료들을 수소문해 《특고월보》(내무성 경보국 보안과 발행), 《사상월보》(사법성 형사국 발행) 같은 비밀문서에 수록되어 있던 큰아버지와 송몽규 아저씨 관련 재판기록을 보내주면서 사건 전모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죄목 또한 ‘독립운동’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죠(윤동주는 건국훈장 ‘독립장’ 서훈). 요즘처럼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시대에 국내에서 이러한 자료를 구해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우지고 선생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묘소 찾기 작업에 나선 오무라 교수 — 1990년 한중수교가 이뤄지기 전까지 룽징의 윤동주 묘소는 방치된 겁니까. “사실상 그렇지요. 아버지는 고향 떠나오신 후 매일 밤 고향집 뒷동산에서 뛰노는 꿈을 꾸셨다고 해요. 형님의 산소가 어떻게 되어 있을까 궁금해하셨습니다. 1984년 한 해 동안 연구차 일본 동경에 머물면서 와세다대 오무라 마쓰오(大村益夫) 교수가 중국의 옌볜 대학에서 1년간 체재할 계획이란 이야기를 듣습니다. 아버지는 간단한 약도를 그려주면서 큰아버지의 묘소를 찾아봐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이분은 옌볜 지역의 한국문학에 관심이 있어 한국어 공부를 하셨던 분입니다.” 1985년 4월 중국의 옌볜 대학에 간 오무라 교수는 중국 내의 조선족 문학연구를 시작하면서 현지인들에게 위치를 설명하며 묘소를 찾아줄 것을 부탁했다. 당시만 해도 묘소가 있는 룽징은 외국인들에게 개방된 곳이 아니었고 날씨까지 추워 추위가 누그러들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윤인석 교수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의 무덤을 찾아달라 하니, 찾으러 나선 분들도 처음엔 뜨악했던 것 같다”며 “지성으로 부탁하는 뜻을 알아차린 분들이 몇 주를 고생해 드디어 1985년 5월 14일에 온전하게 버티고 서 있는 묘비석을 발견했다”고 했다. 윤 교수는 당시 묘비석이 쓰러져 있었다는 설에 대해 “우거진 풀만 제거했을 뿐 비석은 온전히 서 있었고 오무라 선생은 그 앞에서 간단한 과일과 술로 제사를 지내고 묘지 단장을 같이 했다”고 했다. — 윤동주 시집의 해외 번역 작업도 활발합니까. “이부키 고(伊吹鄕) 선생의 일역 시집 《天と風と星と詩》(1984년)를 비롯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중국어로 번역됐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수필가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 선생이 큰아버지의 시를 설명하는 글 속에 이부키 고 선생의 번역시 일부를 인용해 일본 고등학교 현대문 교과서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 교토의 도시샤(同志社) 대학 시비도 명소가 됐습니다. “도시샤 대학 측이 캠퍼스 내에 시비를 건립할 수 있게 해줘 남북한 학생들이 결성한 ‘코리아 클럽’에서 작은 시비를 건립하는 행사를 가졌습니다. 고베 한신 대지진 후의 어려움 속에서도 박희균 선생, 박세용 선생, 이우경 선생, 한석희 선생 등 시비 건립 사연을 듣고 아낌없이 지원을 해줘 기적이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이 밖에도 큰아버지의 묘를 찾는 것을 일본인(오무라 교수)에게 선수를 빼앗겨서 애석하다고 말씀하신 흥남철수의 영웅 고 현봉학(玄鳳學) 선생 등 많은 분께서 큰아버지의 작품세계와 유업을 기리는 일에 헌신하셨습니다.” 고오로기 형사, “기억할 수 없다”
일본 유학 첫해인 1942년 8월 4일 잠시 귀향한 윤동주(뒷줄 오른쪽). 앞줄 왼쪽부터 윤영선(윤동주의 당숙 윤영춘의 동생), 송몽규(윤동주의 사촌), 김추형(윤영선의 조카사위), 뒷줄 왼쪽이 윤길현(윤동주 조부의 육촌 동생). 윤동주의 삭발한 모습은 일본이 그해 4월 ‘학부 단발령’을 내린 결과다.
— 윤동주의 작품세계와 유업을 기리는 사업도 중요합니다만, 70년 전 이름 모를 주사로 생때같은 젊은이가 뼛가루가 돼 고향땅을 밟았다는 점에서 정부가 신원(伸冤) 차원에서 의혹규명에 나서야 하는 것 아닐까요. “이름 모를 주사는 아직 문서로 증명되지 못했습니다. 피골이 상접한 송몽규가 면회를 간 윤영춘 당숙에게 ‘저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 동주도 이 모양으로…’라는 말로 미뤄 예방접종이 아니라 당시 규슈제대에서 전시에 필요한 ‘혈장대용 생리식염수’를 죄수들에게 주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인간에 대한 생체실험이지요.” — 영화 〈동주〉에는 시종일관 윤동주를 취조하는 형사 고오로기 사다오(興梠定)의 취조장면이 나옵니다. 당숙 윤영춘이 교토의 시모가모(下鴨) 경찰서로 달려가니 취조실에서 윤동주가 형사 앞에 앉아 조선말 시와 산문을 일본어로 번역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원고 뭉치는 부피가 상당했다고 했는데, 고오로기 형사가 취조를 마치고 일건 서류와 함께 검찰청으로 넘겼을 것으로 추정합니다만. “약간 다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큰아버지는 유학 떠날 때 정병욱 선생에게 맡겼던 것과 같은 원고를 갖고 다녔던 것은 아닐까요? 강처중 선생에게 보낸 시를 필사해 놓았다거나 추가로 쓴 것이 있다면 발굴해 볼 만하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교토 시모가모 경찰서는 조사 자료 전부를 후쿠오카 형무소로 보냈을 겁니다. 후쿠오카 형무소는 제가 1988년 유학시절 현장에 가보니 형무소는 벌써 다른 곳으로 이전했고, 그 자리에 있던 구치소는 홀랑 불타버렸어요. 큰아버지를 화장했던 자리도 바다를 매립해 아파트들이 들어섰습니다.” 김수복(金秀福·62) 단국대 문창과 교수는 그의 책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평민사)에서 고오로기 형사를 만났던 유일한 인물 김찬정(金贊汀)씨를 소개하고 있다. 김찬정씨는 1982년 7월 교토의 시모가모 경찰서에서 〈경도부경찰부직원록(京都府警察部職員錄)〉을 통해 경찰부 특고과 내선계 순사부장 고오로기 사다오(당시 86세)란 이름을 확인한다. 그는 전화번호부 책을 통해 고오로기 형사의 자택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가메오카시(龜岡市) 자택으로 찾아갔다. 당시 상황을 인용한다. 〈낡은 경도 이조역(二條驛)에서 복지산선(福知山線)을 타고 오후 1시경 구강시에 도착했다. 도로에 면한 잡화점이 고오로기 사다오 순사부장의 집이었다. 큰소리로 부르니 도데라(실내복)를 입은 노인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 고오로기 씨입니까. “그렇습니다만.” — 실은 고오로기 씨가 경찰에 계셨을 때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방문했습니다(한순간 노인의 빛 잃은 눈이 동요하는 듯했다). “아, 옛날 일은 모두 잊어버려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 그렇습니까(과자꾸러미를 선물로 내밀었다). “싫소, 싫소, 갖고 돌아가시오.” — 시모가모 경찰서에서 취조한 학생 중에 조선인 학생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 나… 생각할 수 없소.” — 압수한 서류나 증거물은 패전 때 모두 태워버렸습니까. “내가 구강경찰서에 있을 때 종전이 돼, 부(府)의 특고과에서 관계서류는 전부 태워버리라는 지시를 받았소. 구강경찰서 특고관계 서류는 내 스스로 처분해 버렸소. 그 뒤에 서류는 태우지 말라는 통고가 왔지만 이미 다 태워버렸기 때문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소.” — 조선 학생으로부터 압수한 시나 산문을 번역시킨 듯한 기억은 없습니까. “생각할 수 없소.” 고오로기는 조선인 학생 이야기만 나오면 “알지 못한다” “기억할 수 없다”고 했다. 답변을 끝내고 빨리 안으로 들어가려는 고오로기 씨의 등 뒤로 “실례했습니다”라는 인사를 하고 나왔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소”라는 언어의 공허함이 분노가 되어 중얼중얼 토해지고 있었다. 윤동주의 유고를 찾아내 한국 근대문학사에 찬연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려는 장대한 시도는 멋지게 헛일로 끝났다.〉 서울역의 윤동주 시(詩) 점자블록
2008년 서울 중구 초동교회 인근에서 만난 윤혜원 여사와 오형범씨 부부. 사진 왼쪽부터 윤인석 교수, 윤혜원 여사의 막내딸 오인경씨, 윤동주 관련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다고 기치로 전 NHK 프로듀서, 기자, 오형범 장로, 윤혜원 여사. 윤혜원 여사는 기자의 “윤동주 시인이 시를 쓰지 않았다면 무엇이 됐을 것 같으냐”는 질문에 “늘 무슨 생각에 골똘한 사람이었으니, 교사나 목사가 됐을지 모른다”고 했다.
수원행 전철을 타려는 윤인석 교수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역으로 향하던 그가 기자를 서울역 옛 청사 옆 골목으로 이끌었다. 롯데아울렛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자, 서울역 신청사 사이 골목이 눈 아래 드러났다. 하얀 보도블록과 검은 보도블록으로 장식된 보도를 가리키며 윤 교수가 “윤동주의 시가 점자로 새겨져 있다”고 했다. 윤 교수는 “한화가 당시 갤러리아 콩코스 서울역점(현 롯데아울렛)을 개발하면서 윤동주의 여행 관련 시로 시각장애인용 모자이크 점자블록을 설치하겠다는 아이디어를 내 내게 사용 승낙을 받은 적이 있다”며 “지금은 입구에 안내표지도 없고, 점자 보도블록도 군데군데 깨져나갔지만 새겨진 시는 아마도 〈사랑스런 추억〉 등 3편의 시일 것 같다”고 했다.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나는 플랫폼에 간신히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 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 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 주어/ 봄은 다 가고 -동경(東京)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까운 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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