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기차기
[정의]
제기를 가지고 발로 차는 놀이. 제기는 엽전이나 쇠붙이에 얇고 질긴 종이나 천을 접어서 싼 다음, 끝을 여러 갈래로 찢어 너풀거리게 한 놀이기구이다. 주로 겨울에서 정초에 걸쳐 노는 어린이 놀이이다.
[유래]
제기는 이미 고대의 공차기인 축국(蹴鞠)에서 비롯된 놀이이다. 제기 또는 제기차기라는 말도 축국을 우리말로 표현한 것이다. 원래 공을 차는 축국을 조선 초기에는 ‘뎌기’라고 했다가 18세기 이후 ‘져기’ 또는 ‘젹이’를 거쳐 ‘제기’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공을 제기로 사용하다가, 공 이 외에 새로이 건(毽), 건자(鞬子), 척건자(踢鈹毛子) 같은 제기가 출현하였다. 특히 척건자는 무거운 물체에 종이나 털을 엮어 만든 아동용 제기였다. 공을 쉽게 구하거나 만들 수 없던 상황에서 아이들이 간단히 만들 수 있는 제기가 등장한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내기를 위한 엽전제기가 등장하다가 근대 이후 쇠붙이에 플라스틱을 합쳐 만든 제품이 사용되고 있다.
축국의 방식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공중으로 높이 차서 떨어뜨리지 않는 방식이고 둘째는 땅에 구멍을 파놓고 공을 넣는 방식이다. 셋째는 공문을 만들고 차 넣는 방식이 그것이다. 첫 번째가 주로 민간의 놀이로 행해졌다면, 두 번째와 세 번째의 방식은 주로 군사 훈련의 일환으로 발달하였다. 제기차기는 이처럼 축국의 발달 과정에서 분리되어 나온 놀이이다.
우리나라는 제기차기 방식이 주로 성행한 것으로 짐작된다. 실제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 모두 축국을 즐겼다는 기록이 확인되는데, 특히 신라의 축국 기록에서 확인되는 놀이의 형태는 제기차기 방식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제기차기 방식의 축국이 왕실에서 민간에 이르기까지 놀이문화로 성행했기 때문이다. 축국은 고려 때에 이르러 돼지 방광으로 만든 기구(氣毬)라고 불리는 공기공을 사용하였다.
고려 때까지 비교적 다양한 계층의 놀이였던 축국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변화를 맞는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성리학 이념의 확산으로 인해 놀이가 곧 잡희(雜戱)로 인식되면서 축국은 아이들의 놀이로 굳어졌다. 그런데 공을 구하기가 어렵게 되자 새로운 놀이도구인 엽전제기가 출현하였다. 중종 22년(1527) 최세진(崔世珍)이 편찬한 『훈몽자회(訓蒙字會)』에 “건(鈹毛)을 ‘뎌기 건’이라 풀이하면서, 소아(小兒)들이 차는 것으로 민간에서는 척건자라 부른다.”라고 설명한다. 종래 죽방울이라고 불리던 공[毬] 이 외에 별도로 건, 건자, 척건자 같은 새로운 제기가 출현한 것이다. 특히 척건자는 무거운 물체 위에 종이나 털을 엮어 만든 아동용 제기였다. 그 결과 축국이라고 불리는 제기차기는 공을 이용한 방식과 척건자를 이용한 방식 두 가지 형태로 발전해 나갔다.
제기차기는 조선시대에 아동들의 놀이로 크게 유행하였다. 실제로 조선시대 재상을 지낸 이항복이 어린 시절에 씨름과 축국을 좋아했다는 기록은 이를 잘 증명한다. 제기차기가 아이들의 놀이로 발전한 사실은 19세기에 편찬된 『아희원람(兒戱原覽)』에서 축국 곧 제기를 아이들의 놀이로 소개한 데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제기차기는 어디에서나 아무 때나 가능했으나 주로 겨울에서 봄 사이에 즐기는 놀이로 더 발전하였다. 추운 날씨에 집 밖에서 공을 차면서 땀을 내고 체력을 기르며 건강도 유지한 것이다. 이미 신라 때 김춘추와 김유신이 정월 오기일에 축국을 한 것도 그 같은 이유에서였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제기차기는 조선 후기에는 아예 겨울철 세시풍속으로 정착하였다. 19세기 중엽에 편찬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그 같은 사실을 잘 말해준다. 당시 공기공에 꿩 깃을 꽂아 만들었다고 해서 이를 축치구(蹴雉毬)라고 불렀다.
조선 후기에는 청년들이 내기 축국을 자주 한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다 보니 아예 엽전제기가 만들어졌다. 소위 돈제기라고 불리는 엽전제기는 내기 축국에 좋은 수단이자 상품이었던 셈이다. 제기차기가 전국적으로 발달한 탓으로 그 칭호도 매우 많았다. 순조 때 편찬된 『재물보(才物譜)』에는 축국이 농주, 답국, 척국, 백타, 건자, 행두, 축융, 원사, 척구, 원정 따위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축국이 얼마나 성행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민간에서 성행한 제기차기는 근대 이후에도 여전히 계속되었다. 특히 제기차기는 석전(石戰)과 함께 구한말 서양의 선교사들이 가장 신기해 한 풍경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다가 서양의 근대식 축구가 도입되면서 공을 이용한 제기차기 형식의 축국은 점차 사라져 갔다. 그 결과 돈제기만 남은 셈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제기라고 하면 엽전제기를 생각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엽전제기는 오늘날 전국적으로 제기차기라 부르지만, 평안도에서는 테기차기, 체기차기, 전라도에서는 재기차기, 제주도에서는 쪽기차기라고도 한다.
내용
오늘날 제기차기는 축국이 발전해오는 과정에서 공 대신 제기로 바뀐 형태이다. 제기는 구멍이 뚫린 엽전을 얇은 미농지로 싸고 종이의 두 끝을 한 구멍의 같은 방향으로 꿰어서 그 끝을 갈래갈래 찢어서 만든다. 헝겊에 흙이나 마른 말똥을 싸서 잡아매고 꿩의 꽁지깃을 꽂아 만들기도 한다. 오늘날은 비닐로 된 상품을 많이 쓴다.
제기를 차는 방법에는 발들고차기, 양발차기, 외발차기, 뒷발차기가 있다. 제기는 한 사람씩 차기도 하고 여러 사람이 모여서 마주 차기도 한다. 서울에서는 한 번 차고 땅을 딛고 또 차고 땅을 딛는 제기차기를 땅강아지, 두 발을 번갈아가며 차는 것을 어지자지, 땅을 딛지 않고 계속 차는 것을 헐랭이라고 한다. 전남 고흥지방에서는 땅강아지를 땅지기, 어지자지를 양방지기, 헐랭이를 들지기라고 한다. 이 밖에 한번 차서 제기를 입에 물었다가 다시 차고, 다시 차고 입에 무는 ‘물지기’, 키를 넘게 올려 차는 ‘키지기’, 차서 머리 위에 얹었다가 떨어뜨려 다시 차는 ‘언지기’도 있다.
앞의 여러 방법 중에 어느 한 가지만을 미리 정해 차기도 하고, 삼세가지라고 하여 위의 세 가지를 모두 차서 합계를 내어 승부를 짓기도 한다. 잘 차는 사람은 한 가지만으로 몇 백까지 차는데, 차올린 제기를 머리 위나 어깨로 받아서 한참씩 다리를 쉬거나 발 안쪽과 바깥 쪽은 물론이고 발등과 발뒤축 또는 무릎으로 차는 재주를 부리기도 한다. 진 쪽에서는 종들이기라는 벌칙을 받는다. 종들이기는 진 사람이 상대의 서너 걸음 앞에서 제기를 발 앞부리에 던지면, 이긴 사람은 이것을 앞으로 멀리 차낸다. 진 쪽이 그것을 잡지 못하면 몇 번이고 반복해서 제기를 드려야 했다. 이긴 쪽에서는 찬 제기를 잡히거나 헛발질을 하면 죽는데, 이때 진 쪽은 종의 입장에서 벗어나게 된다.
차는 쪽에서는 죽지 않으면 혼자서 몇 번이고 차다가 주위에 서 있던 자기편에게 넘기기도 한다. 진 쪽에서는 이것을 받아 찬 사람에게까지 종들이기를 한다. 그러므로 종이 된 사람은 상대방이 제기를 차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의 몸을 손으로 쳐야 했다. 제기를 받은 사람은 종이 된 사람이 치기 전에 제기를 차야 했다. 만일 차기 어려울 경우에는 자기편끼리 제기를 손으로 주고받으며 기회를 본다. 제기를 서로 주고받는 과정을 서울에서는 ‘와따리 갖따리’라고 한다. 종이 된 술래는 제기를 잡든지 아니면 제기를 잡고 있는 상대편을 몸을 쳐 만져야 그칠 수 있다. 그러므로 종들이는 사람은 가능한 제기를 던지는 헛시늉을 하거나 일부러 다른 데로 던져서 상대의 헛발질을 유도한다.
또 세 사람 이상이 찰 때에는 갑이 을에게 차 넘긴 것을 다시 병이 받아 차면서 순서대로 다음 사람에게 넘기기도 하며, 여러 사람이 둥글게 둘러서서 순서 없이 아무나 차기도 한다. 이때에는 헛발질을 한 사람이 종을 들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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