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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삶을 산 영화계 큰 별 최은희
2018년 05월 24일 01시 16분  조회:7405  추천:0  작성자: 죽림
○…한국영화의 큰 별 최은희가 지난 19일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1942년 연극 '청춘극장'으로 데뷔, 1947년 첫 영화 '새로운 맹서'를 시작으로 '성춘향' '지옥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상록수', '빨간 마후라' '한강' 등 13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1960년대 한국영화 전성기를 이끌었다. '민며느리'를 연출해 한국 3번째 여성감독으로서 족적을 남겼다. 안양영화예술학교 교장으로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고인은 신상옥 감독과 결혼했지만 남편과 배우 오수미의 스캔들로 1977년 이혼했다. 이후 1978년 홍콩에서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북됐다. 행방을 찾던 신상옥 감독 또한 그해 7월 납북돼, 198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동반 탈출하기까지 북한에서 영화 '돌아오지 않는 밀사' '소금' 등을 제작하기도 했다. 최은희는 남편 신 감독과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중 1999년 영구 귀국했다. 신상옥 감독은 2006년 4월 11일 80세 일기로 별세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이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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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배우 최은희, 영화보다 영화 같았던 삶
故 최은희, 16일 지병으로 별세… 향년 92세
최은희, 한국영화 배우 1세대… 연극 통해 데뷔
최은희, 김지미·엄앵란과 함게 '원조 트로이카'
최은희, 1978년 홍콩 여행 중 해변서 납북
김정일, 최은희 만나자 "오시느라 수고하셨다"
신상옥 감독, 최은희 찾아 떠났다 함께 납북돼
김정일, 신상옥 감독 시켜 북 최초 공상영화 제작
최은희-신상옥, 3년간 북한서 17편 영화 제작
최은희, 1985년 모스크바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최은희-신상옥, 북한 생활 8년 만에 극적으로 탈출
최은희-신상옥, 오스트리아 여행 중 美 대사관 진입



기사이미지
'섹션TV 연예통신' 최은희 / 사진=MBC 방송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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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투데이 오효진 기자] '섹션TV 연예통신' 최은희 별세 소식과 함께 북한에 납북됐던 사실을 회자했다. 

 
23일 방송된 MBC '섹션TV 연예통신'에서는 영화배우 최은희 별세 소식을 다뤘다.

최은희는 1926년생으로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17살 연극 '청춘극장'으로 데뷔했다. 이어 최은희는 1950~60년대 원조 트로이카로 큰 활약을 했다. 

하지만 최은희는1978년 홍콩을 방문했다 북한으로 피랍됐다. 전 남편인 신상욱 역시 최은희를 만나러 홍콩을 찾았다가 잇따라 납북됐다. 

두 사람은 5년 만에 재회한 뒤 8년 간 17편의 작품을 제작했다. 특히 1985년에 만든 영화 '소금'으로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으면 대한민국 최초 해외영화제에서 수상한 배우가 됐다. 이어 최은희는 1986년 납북 8년 만에 탈출에 성공하며 한국으로 돌아왔다.

실제로 최은희는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육성 파일을 공개하기도 했다. 공개된 육성 파일에서 그는 "자기 발로 자기 뜻대로 뜻을 가지고 오는 방법이 없냐. 신 감독을 유인하려면 뭐가 필요하냐"고 했다. 

최은희는 "오늘 무슨 얘기를 했는지 변명하고 설명해도 누가 알아주겠냐. 그러니 우리가 진실을 녹음하자고 했다"고 말했다. 

///오효진 기자  
<가장 가까이 만나는, 가장 FunFun 한 뉴스 ⓒ 스포츠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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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영화배우 최은희 별세

오로라M 2018.04.17 12:32

원로배우 최은희 별세

 

영화보다 더 파란만장한 삶을 산 영화배우 최은희가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가운데, 원로배우 최은희 장례가 가족장으로 치러진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날 17일 한 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최은희 아들 영화배우 신정균 씨의 말을 인용해 "영화인장으로 치러야 한다는 영화계 의견이 많았지만 어머님 생전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르기로 했다"고 보도했는데요.

 

김정일의 지시로 북에 납치됐다 탈출했던 여배우 최은희의 근황이 지난해 공개되면서 대중들의 큰 관심을 받은 바 있습니다.

 

 

 

당시 故 최은희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에 있는 한 요양원에서 지내며 척추협착증으로 6년 전부터 휠체어 신세를 졌고 2년 전부터는 일주일에 3회 신장투석을 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우려를 산 바 있었는데요.

 

 

고인이 직접 낳은 자식이 없는걸로 알려지고 있으며 대신 아들과 딸을 입양했습니다.

 

최은희 남편 신상옥 감독이 영화배우 고 오수미씨와 사이에 낳은 남매도 있는데요.

 

 

당시 한 매체에서 보도한 바에 따르면 이들은 연락도 자주하고 음식을 해가지고 요양원을 찾아와 함께 식사를 하기도 한다고 보도한 바 있습니다.

 


 

이에 병원생활이 어떠냐는 질문에 당시 故 최은희는 "외롭지는 않다"고 대답했는데요.

 

이런점으로 미뤄볼때 일각에서 제기한 영화배우 최은희 요양원 가슴아픈 사연 등은 사실이 아닌 루머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지난 1926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故 최은희는 1942년 연극 '청춘극장'으로 연기 생활을 시작해 1947년 영화 '새로운 맹세'로 영화계에 입문했는데요.

 

 

故 최은희는 1953년 다큐멘터리 영화 '코리아'를 통해 호흡을 맞춘 故 신상옥 감독과 결혼했습니다.

 

 

 

이후 '꿈' '젊은 그들' '지옥화' '춘희' 등 13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김지미, 엄앵란과 함께 1950~60년대 원조 트로이카로 떠올랐는데요.

 

 

하지만 순탄한 삶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76년 故 신상옥 감독과 이혼한 故 최은희는 1978년 홍콩에 방문했다가 북한 공작원에게 납치됐는데요.

 

 

당시 안양예고와 비슷한 성격의 학교가 있다는 지인의 말을 듣고 자매결연을 맺기 위해 홍콩을 찾았다가 북한 공작원에 의해 북한의 남포항으로 납북되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故 신상옥 감독도 故 최은희를 찾다가 납치돼 고초를 당하다가 5년 만에 김정일의 연회에서 두 사람이 만났는데요.

 

 

부부는 북한에서 8년간 머무르며 영화 '탈출기' '소금' '돌아오지 않는 밀사' 등 17편의 영화를 찍었습니다.

 

故 최은희는 북한에서 찍은 영화 '소금'으로 1985년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최은희 신상옥 부부는 결국 북한을 탈출했습니다.

 

1986년 오스트리아 빈을 방문하던 중 북한공작원들을 따돌리고 미국 대사관을 통해 망명에 성공했는데요.

 

 

이후 10년 넘게 망명 생활을 이어오다 1999년 고국 땅을 밟았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故 최은희는 2001년 극단 '신협'의 대표로 취임해 2002년 뮤지컬 '크레이즈 포 유'를 기획·제작하며 예술에 대한 뜻을 펼쳤는데요.

 

 

2006년 4월 남편인 故 신상옥 감독이 먼저 세상을 떠났고 이후 2007년 자신의 영화 인생을 담은 자서전 '최은희의 고백'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한편, 최은희는 지난 16일 지병으로 별세했는데요.

 

[데일리한국 전현정 기자] 남북을 오가며 '영화같은 삶'을 살아온 배우 겸 감독 최은희씨가 16일 오후 소천했다. 향년 92세. 

고인(故人·1926~2018년)은 배우이자, 신상옥(1926~2006년) 감독의 아내이며 우리나라의 세 번째 여성 감독이다. 

고인은 1947년 영화 '사랑의 맹서'로 데뷔했다. 고인은 당시 촬영감독이던 김학성 기사와 만나 혼인신고 없이 결혼했다. 고인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에게 납치됐다가 구사일생으로 청천강 부근에서 탈출했다. 


고인은 자신을 흠모하던 신상옥 감독(1952년 '악야'로 데뷔)을 1953년, 다큐멘터리 영화 '코리아'에서 만나 1954년 정식으로 결혼했다.
 

  • 배우 최은희가 1954년 주한 미군 위문 공연을 온 마릴린 먼로와 함께 찍은 사진. 로버트 캐넌과 로스 아담 감독의 2016년 다큐멘터리 '연인과 독재자(The Lovers and the Despot)' 가운데 한 장면. 사진=공식 예고편 유튜브 캡쳐
이후 고인은 신 감독과 '꿈'(1955) '지옥화'(1958) '춘희'(1959) '로맨스 빠빠'(1960) '백사부인'(1960) '성춘향'(1961)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로맨스 그레이'(1963) 등 1976년까지 130여편을 완성했다.

감독으로서의 재능도 있었던 고인은 '민며느리'(1965) '공주님의 짝사랑'(1967) '총각선생'(1972)을 연출했다. 이 가운데 배우로도 출연했던 연출작 '민며느리'로 대종상 여우주연상까지 거머 쥐었다.

 
고인과 신 감독은 대한민국은 물론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으로부터도 큰 주목을 받았다.

  • 배우 최은희가 북한에서 김정은 위원장(가운데), 신상옥 감독(왼쪽)과 함께 촬영한 사진. 로버트 캐넌과 로스 아담 감독의 2016년 다큐멘터리 '연인과 독재자(The Lovers and the Despot)' 가운데 한 장면. 사진=공식 예고편 유튜브 캡쳐
고인은 1973년 신 감독과 이혼했다. 

고인은 1978년 1월 홀로 홍콩에 갔다가 동월 14일 북한 공작원에 납치됐다. 당시 고인이 북한에 도착하자마자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나와서 인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신 감독도 7월에 고인을 찾으러 홍콩에 왔다가 동월 19일 납북됐다.

북한으로 끌려간 두 사람은 각각 서로의 생사도 모른채 수차례의 북한 탈출 시도와 좌절, 교화소 생활 등 우여곡절을 겪다가 1983년에서야 재회했다. 두 사람은 이곳에서 부부로 재결합했다.

북한에서 고인은 신 감독과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년) '사랑 사랑 내 사랑'(1984년) 등 모두 17편의 영화를 완성했다. 

이 가운데 영화 '소금'으로 고인은 1985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고인은 한국인 최초로 해외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배우가 됐다. 

  • 북한에서 활동하던 시절 촬영한 영화 현장 속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로버트 캐넌과 로스 아담 감독의 2016년 다큐멘터리 '연인과 독재자(The Lovers and the Despot)' 가운데 한 장면. 사진=공식 예고편 유튜브 캡쳐
고인은 신상옥 감독과 1986년 3월 베를린영화제 참석을 계기로 오스트리아 빈 방문 중에 미국 대사관에 진입, 드디어 북한 탈출에 성공했다. 

이후 두 사람은 미국으로 망명해 10년 넘게 생활 하다가 1999년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고인은 북한 탈출 당시 김정일 위원장의 육성을 담은 녹음기를 가지고 왔고 이는 2016년 로버트 캐넌과 로스 아담 감독의 다큐멘터리 '연인과 독재자(The Lovers and the Despot)를 통해 공개됐다.

고인은 2001년 극단 '신협'의 대표로 취임했고, 2002년 뮤지컬 '크레이즈 포 유'를 기획·제작했다.

2006년 남편 신상옥 감독의 타계 후 고인은 2007년에는 자서전 '최은희의 고백'을 펴냈다. 이 자서전은 이후 로버트 캐넌과 로스 아담 감독의 다큐멘터리로 부활했다. 

고인의 유족은 신정균(영화감독)·상균(미국거주)·명희·승리씨 등 2남2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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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옥 감독님의 대표작은 이렇습니다.

 

대표작: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로맨스 빠빠>(1960), <연산군>(1961), <성춘향>(1961), <빨간 마후라>(1964), <탈출기>(1984), <소금>(1985), <사랑 사랑 내 사랑>(1985), <심청전>(1985), <방파제>(1985), <불가사리>(1985) 등..

 

신상옥 감독님이 1978년에 납북되서 86년에 탈출을 하셨으니..

탈출기, 소금, 사랑사랑 내 사랑, 심청전, 방파제, 불가사리와 같은 영화는 북한에서 만드신 영화겠네요.


 

아래 내용은 신상옥 감독 소개내용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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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0년대 대표적인 한국 영화감독.
1925년 함경북도 출생. 경성중학교와 일본의 도쿄 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최인규 감독 밑에서 조감독 생활을 한 후 1952년에 <악야 惡夜>로 감독 데뷔했다.
1953년 인기 여배우 최은희와 결혼 한 후, 함께 영화활동을 하면서 한국 영화사의 한 장을 이루었다.
1961년 한국의 고전물을 각색한 <성춘향>이 기록적인 흥행 성공을 거두었고,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는 주요섭의 소설을 각색하여 만든 것으로서, 일본과 베니스 영화제, 아카데미 영화제에 소개되기도 했다.
1963년 안양 촬영소를 인수하여 1966년 한국 최대의 영화사였던 신필름을 세워 1970년까지 운영하였다.
1978년에는 홍콩을 비롯한 동남아 및 미국과 유럽에서 한국영화 홍보활동을 하던 중 그의 아내였던 여배우 최은희가 납북되었고, 6개월 후 신상옥도 납북되어 그곳에서 신필름영화촬영소 총장을 맡으면서 <소금>, <불가사리> 등을 만들었다.
1986년 3월 13일 극적으로 북한을 탈출한 최은희, 신상옥은 미국에 체류하다 2000년 한국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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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희

 

    

최은희(崔銀姬).

그녀를 빼놓고 우리나라 연극 영화를 얘기한다는 것은 무의미 하다.

 

경기도 광주 초월면 지월리에서

농사꾼 아버지의 9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최은희는

해공 신익희 선생과 동문수학한 아버지가 우체국 공무원이 되어

서울 신당동에 살게되면서 종로 효제보통학교를 나왔다.

 

순진무구한 소녀 최은희가 일생의 전기를 맞이한 것은

배우 문정복을 만나고 가출한 사건이다.

문정복은 문정숙의 언니다.

 

 

문정숙과 신성일

 

그녀의 나이 16세에 문정복의 소개로 극단 아랑에 입단한 최은희는

연습에 열중하다 아버지에 붙잡혀 집으로 끌려가 머리가 깎이고 금족령이 내려졌다.

배우의 길로 나가겠다는 딸의 의지를 확인한 어머니는 남편 몰래 그녀를 도왔다.

 

극단에 나가 연습하던 중 해방을 맞이한 그녀는

신경균감독에 발탁되어 <새로운 맹세>를 찍었다.

그녀의 첫 데뷔 영화다.

 

최은희는 여기에서 또 하나의 인생 전기를 맞이한다.

언니처럼 따르는 김연실(김학성의 누나)의 권유도 있었지만

촬영감독 김학성의 적극적인 구애에 그만 넘어가고 만 것이다.

 

이들은 결혼했지만

김학성은 총각이 아니라 전처소생 아이들이 둘이나 있는 이혼남이었다.

 

그 당시 연예 활동하던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궁핍한 생활을 타개하기 위하여 그녀가 명동 녹원다방에서 마담으로 일하게 되자

남편 김학성의 행패가 손찌검으로 까지 발전하여 그들의 부부관계도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와중에 6.25 한국전쟁이 터졌다.

미쳐 피난 가지 못한 최은희는 정보도 파악하고 식량을 구하러 거리에 나왔다가

그녀를 알아 본 북한군에게 붙잡혔다.

그녀가 끌려간 곳은 명동 성당에 진을 치고 있던 북한 내무성 경비대 합주단.

 

죽느냐? 사느냐?

그곳에서 갈등하던 그녀는 그들의 요구에 응할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처음 선 무대는 서울 시청 앞에 마련된 가설무대.

인민재판 하던 북한군을 위한 식전 공연 무대였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부역한 셈이다.

 

전선을 시찰하는 김일성과 중국인민지원군사령관 팽덕회

 

이때,

낙동강까지 남하하여 조국통일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한 북한군은

충청북도 수안보에서 축하 파티를 열었다.

그녀는 김일성까지 참석한 이 파티에 차출되었다.

이것이 그녀가 홍콩에서 납치된 원인이라고 회자 되었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으로 패주하던 북한군은

최은희가 속한 합주단을 이끌고 3.8선을 넘어 이북으로 끌고 갔다.

걸어서 평안북도까지 간 것이다.

일행이 청천강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부대를 이탈했다.

목숨을 건 탈출이다.

하지만 북한군에 부역한 그녀를 보는 국군의 시선은 싸늘했다.

여자로서 감내하기 어려운 치욕의 린치가 가해졌다.

 

국군에 투항하여 서울에 온 최은희는

정훈공작대에 배속되어 이제 국군으로 옷을 갈아입고

국군 장병들을 위한 위문공연에 나섰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다.

 

휴전직후, 철조망(군사분계선-휴전선)을 경계로 대치하고 있는 남북한군   

 

1953한국전쟁이 끝났다.

조국은 조국대로 전쟁의 참화에 피폐해졌지만

여자 최은희도 여인으로서 감내하기 어려운 파란을 겪었다.

이때그녀 앞에 등장한 것이 영화감독 신상옥 이었다.

 

잘생긴 젊은 남자가 국군 홍보 영화에 삽입할 춘향전을 같이 찍자는 것이다.

흔쾌히 승낙한 그녀는 같이 작업하면서 사랑도 뜨거워졌다.

하지만 남편 김학성이 잠자코 있을리 없었다.

간통죄로 고소한 것이다.

시중의 여론도 그들에게 차가웠다.

 

"선배 마누라를 가로챈 나쁜 감독"

"병든 남자를 버리고 젊은 남자를 찾아간 여자"

그들에게 던져지는 돌팔매는 매서웠다.

 

이러한 역경을 헤집고 그들은 결합했다.

남편 김학성과의 결혼 생활을 5년 만에 청산하고 결혼한 것이다.

그녀의 나이 26세였을 때다.

 

 

 

 

영화 <성춘향> 포스터

  

인생과 영화에 승승장구하던 그들의 분수령은 1961년 설 무렵이다.

공교롭게도 김지미가 주연하고 홍성기가 감독한 <춘향전>

최은희가 주연하고 신상옥이 감독한 <성춘향>이 설 극장가에서 맞붙었다.

결과는 성춘향의 압승이었다.

 

황금기를 맞이한 그들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상록수><폭군 연산

불후의 명작을 쏟아내며 대한민국 영화계를 평정했다.

 

행복도 잠깐,

신상옥이 신인 여배우에게 빠졌다.

신인 여배우를 발탁한 신상옥이 여배우와 하룻밤 풋사랑이 아니라

오수미가 신상옥의 아이를 낳게 되자 그들의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곧 정리 하겠다는 신상옥의 약속과는 달리

오수미가 둘째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이 전해오자 신상옥과 이혼했다.

 

이후, 신상옥의 그늘을 벗어나 안양예술학교 운영과

독자적인 영화 제작과 감독을 병행하던 최은희는

영화 합작 사업을 하자는 김규화와 이상희의 꾐에 빠져

홍콩에 들렸다가 북한으로 납치되었다.

그들은 북한 공작원이었다.

 

1978년 1월 4.

홍콩 퓨라마 호텔에서 눈이 가리운 채 납치된 그녀는

북한 공작선에 태워져 황해도 해주에 내렸다.

 

북한은 그녀의 납치사실마저 부인했다.

미국과 일본의 정보당국이 언론에 흘리는 정보 때문에 사실로 실토했지만

북한의 폐쇄성 때문에 그녀가 간간이 영화에 출연했다는

단편적인 소식만 한국에 전해졌을 뿐

북한에서 그녀의 행적은 그녀만이 알 뿐이다.

 

최은희 그녀가 최근 자신의 치부까지 드러내는 회고록을 집필 중에 있다니

인민군에 끌려 다닐 때

<일개 소대에게 당했다그래서 애도 못 낳는다>는 소문과

<수안보에서의 최은희를 잊지 못하는 김일성이 김정일을 시켜서 그녀를 끌어갔다>

납북당시 소문을 긍정할 것인지 터무니없는 헛소문에 불과하다고 일축할는지 두고 볼 일이다.

 

 

 

 

왼쪽부터 신상옥, 김정일, 최은희.

 

사랑하는 여자가

북한에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신상옥도 북한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북한당국의 요구에 순응하며 영화를 만들던 신상옥은

1986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최은희를 데리고 탈출에 성공했다.

그야말로 영화 같은 인생역전이다.

 

탈출 후한국으로 곧바로 오고 싶었으나

정치적인 여건상 미국에 한동안 머물다 한국에 들어왔다.

돌아와서 영화에 손을 대었으나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간간히 연극무대에 오르면서 조용히 살았다.

 

철없는 나이 열여섯에 집을 나온 가출 사건으로 시작한 그녀의 탈출 행로는

김학성이라는 아내로부터 탈출.

끌려가던 인민군으로부터 탈출.

신상옥이라는 남자로부터 탈출.

납치됐던 북한으로부터 탈출의 행로였다.

이다음 그녀가 선택한 탈출은 어디로부터 탈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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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영화배우 최은희

 

영화계에서 1961년은 춘향전의 해였다.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이 명보·수도극장,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이 국제·국도극장에 걸렸다. 신 감독 아내 최은희와 홍 감독 아내 김지미가 각각 춘향으로 나선 부부 대결이 호기심을 부채질했다. 결과는 '성춘향'의 압승이었다. '전무후무할 흥행-서울서만 74일간 38만명 관람' 1961년 4월 28일 자 조선일보는 '성춘향'의 성공을 톱기사로 실었다. 그해 서울 인구가 258만명이었으니 7명 중 1명꼴로 이 영화를 본 셈이다. 당시 최은희는 서른다섯, 이몽룡 역을 맡은 김진규는 서른여덟. 춘향전 역사상 최고령 커플이었다. 

▶최은희는 흰 저고리와 치마가 잘 어울리는 한국적 미인이었다. 주요섭 소설을 영화로 만든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나도향 원작 '벙어리 삼룡이' 등 신상옥 감독이 만든 영화에서 유교적 전통과 인습에 따르면서도 강인한 여인의 내면을 탁월한 연기력으로 담아냈다. 직접 메가폰을 잡고 '민며느리' '공주님의 짝사랑'을 연출하기도 했다.

 

▶최은희는 1978년 홍콩에서 북한 공작원에게 끌려갔다. 김정일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최은희는 '김정일은 거의 매주 금요일 나를 불러내 파티를 열었다'고 수기에 썼다. 김정일과 장성택 부부 등이 단골손님이었다. 어느 날은 김정일이 패티 김 '이별'을 불러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함께 납치된 신상옥에 따르면 '목포의 눈물' '노란 샤쓰의 사나이' '동백아가씨' '하숙생' 같은 남쪽 가요가 파티장 단골 레퍼토리였다. 최은희는 "북한에 있던 8년 동안 나는 인생에서 가장 긴 연기를 하며 살았다"고 회고했다. 

▶영국 감독 로버트 캐넌과 로스 애덤은 2016년 최은희-신상옥 부부의 납치·탈출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연인과 독재자'를 개봉했다. 두 사람은 "이 사건을 들었을 때부터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여전히 많은 진실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말했다. 다큐멘터리에는 최은희 부부가 북한에서 목숨 걸고 녹음한 김정일의 목소리가 담겼다. 

▶최은희가 그제 아흔두 살의 생애를 마쳤다. 사전 서약대로 두 눈까지 기증했다. 그는 생전에 입버릇처럼 "나의 애창곡은 김도향의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라고 했다. 혼을 담은 연기와 영화 같은 삶이었지만 그 자신에게는 '바보 같은 인생'이었을까. 우리 현대사의 격동 한가운데에 있었던 한 여배우가 그 자신이 역사가 돼 우리 곁을 떠났다. 

ⓒ 조선일보

김도향 바보처럼 살았군요 
 

 

 

 

 


 

그옛날 조용한 지적 여인상으로 최고의 미모와 연기력으로 한시대를 주름잡았던 그녀의 인생은 파란 만장한속에 지금은 경기도의 한 요양병원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혼자 떠날 날만 기다리시고 있답니다.
입양해서 키워준 자식들도 최은희를 모시지 않고 양로원에 맡겨놓고 있는 상황...


 

  

자신의 장례식엔 김도향의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를 장송곡으로 해달라고 하더군요!
참말 허무하고 아쉬움에 마음이 휑하였습니다.

아! 김정일이 탐내어 납치까지 한 이런 미모의 배우도 늙음과 죽음 앞에서 자신의 화려했던 삶에 무기력한채 빈손으로 저승길에 나서니...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삶’ 배우 최은희 잠들다

◇ 신장투석 합병증으로 투병…향년 92세 
1950~60년대 ‘원조 트로이카’ 인기 남편 신상옥 감독과 납북·탈출·망명

 

◇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은막의 스타’ 배우 최은희씨가 별세했다. 향년 92.
△ 사진: 영화배우 최은희씨가 16일 세상을 떠났다. 한겨레 자료사진
 

○··· 신장투석과 합병증으로 오랜 시간 투병생활을 했던 최씨는 16일 오후 5시30분께 자택인
서울 화곡동 근처 병원에서 돌연 눈을 감았다.1926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2년 연극 <청춘극장>으로 데뷔한 뒤 <새로운 맹서>로 영화계에 진출했다.
이후 <밤의 태양>(1948), <마음의 고향>(1949) 등으로 스타덤에 오르며
김지미·엄앵란과 함께 ‘1950~60년대 원조 트로이카’로 불렸다. 


 

△ 사진: 1954년 재혼녀와 총각으로
첫번째 결혼한 고 최은희(왼쪽)·신상옥(오른쪽) 감독 부부의 젊은 시절.
 

○··· 1953년 신상옥 감독의 <코리아>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이듬해 신 감독과 결혼했다.
이후 고인은 <무영탑>(1957),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성춘향>(1961) 등 13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한국 대표 여배우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1978년 홍콩을 방문했다
북한 공작원들에게 납치되면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야 했다.
신 감독 역시 그를 찾아 나섰다가 같은 해 7월 홍콩에서 납북됐다. 

북한에서 재회한 두 사람은 ‘신필름영화촬영소’를 세우고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년),
<탈출기>(1984), <소금>(1985> 등의 17편의 영화를 찍었다.
고인은 영화 <소금>으로 1985년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86년 두 사람은 오스트리아 빈의 미국대사관을 통해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했으며,
10여년의 망명생활 끝에 1999년 귀국했다.


 

△ 사진: 1978년 홍콩에서 잇따라 납북됐던 최은희(맨 오른쪽)·신상옥(맨 왼쪽) 부부가 북한에서
영화제작 활동을 하던 1984년 무렵 김정일(가운데) 국방위원장과 함께 한 모습이다.
이제는 모두 고인이 됐다. 


○··· 고인은 여성 감독으로도 선구적 기록을 세웠다. 1965년 <민며느리>의 감독 겸 배우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공주님의 짝사랑>(1967) <총각선생>(1972) 등을 연출했다.
고인은 2001년 극단 ‘신협’ 대표를 맡았으며, 2007년에는 자서전 <최은희의 고백>을 펴내기도 했다.
그는 아이를 낳지 않았지만 입양한 아이들과 신 감독이 배우 오수비와 사이에 낳은 남매 등 4남매를 거뒀다.

2006년 대한민국 영화대상 공로상, 2012년 제2회 아름다운예술인상 공로예술인상,
2014년 제5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보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신정균(영화감독)·상균(미국 거주)·명희·승리씨 등 2남2녀가 있다.  유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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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배우 최은희, '편히 쉬소서'


 
○··· 【서울=뉴시스】김선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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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같은 삶' 원로배우 최은희 별세, 향년 92세 

◇ 신상옥 감독과 함께 한국영화 중흥기 이끌어…납북
 
◇ 최씨의 장남인 신정균 감독은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오늘 오후 병원에 신장투석을 받으러 가셨다가 임종하셨다"고 밝혔다.
1926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2년 연극 '청춘극장'으로 데뷔했다.
△ 사진: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산 배우 최은희가 16일 오후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
사진은 1961년 신상옥 감독 작품 '성춘향'에 여주인공으로 출연한 최은희 씨.
연합뉴스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산 배우 최은희가 16일 오후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
 

○··· 연극 무대를 누비던 그는 1947년 '새로운 맹서'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이후 '밤의 태양'(1948), '마음의 고향'(1949) 등을 찍으며 스타로 떠올랐고,
김지미, 엄앵란과 함께 1950∼60년대 원조 트로이카로 떠올랐다.
1953년 다큐멘터리 영화 '코리아'에 출연하면서 신상옥 감독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
그는 1954년 결혼한 뒤 부부가 함께 한국 영화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 신상옥 최은희 부부 영화같은 납북 탈출기가
진짜 영화로 [리뷰] 다큐멘터리 영화 '연인과 독재자'
△ 사진: 신상옥과 최은희는 납북된 뒤 김일성과도 만나며 북한 생활에 적응해갔다. 엣나인필름 제공
 

○··· 고인은 신 감독과 찍은 '꿈'(1955), '지옥화'(1958), '춘희'(1959), '로맨스 빠빠'(1960) ,
'백사부인'(1960) '성춘향'(1961),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로맨스 그레이'(1963) 등
1976년까지 130여 편에 출연하며 은막의 스타로 자리매김했다.'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으로
대종상의 전신인 문교부 주최 제1회 국산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고인은 배우이자,
우리나라의 세 번째 여성 감독이기도 했다.
'민며느리'(1965) '공주님의 짝사랑'(1967) '총각선생'(1972) 등을 연출했다.
감독 겸 배우로 출연한 '민며느리'로는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 故 최은희, 남편 신상옥 감독과 납북 후 탈출 '세상 발칵'
△ 사진: 1983년 북한 피납 5년에만 상봉한 최은희·신상옥 부부가 김정일과 기념촬영하는 모습. 연합뉴스
 

○··· 1967년에는 안양영화예술학교의 교장을 맡아 후진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신 감독과 이혼한 최씨는 1978년 1월 홀로 홍콩에 갔다가 북한 공작원에 납치된다.
이후 신 감독도 그해 7월 납북돼 1983년 북한에서 재회한다.두 사람은 북한에서
신필름 영화 촬영소 총장을 맡으며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년), '사랑 사랑 내 사랑'(1984년) 등
모두 17편의 영화를 찍었다. 고인은 북한에서 만든 영화 '소금'으로 1985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이는 한국인 최초 해외영화제 수상으로 기록돼있다.
신 감독과 최씨는 김정일의 신뢰를 얻은 뒤 1986년 3월 오스트리아 빈 방문 중에
미국 대사관에 진입해 망명에 성공한다. 이후 10년 넘는 망명 생활을 하다가 1999년 영국 귀국했다. 

   
▲ 원로배우 최은희 별세 김정일 (사진: 엣나인필름) ⓒ뉴스타운
 


○··· 고인은 2001년 극단 '신협'의 대표로 취임했고, 2002년 뮤지컬 '크레이즈 포 유'를 기획·제작했다.
2007년에는 자신의 영화 인생을 담은 자서전 '최은희의 고백'을 펴내기도 했다.
2006년 4월 11일 신 감독을 먼저 떠나보낸 뒤 고인은 허리 수술을 받는 등 건강이 악화됐고,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일주일에 세 번씩 신장투석을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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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는 굴곡진 삶을 살았다.
경기도 광주의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최씨는 자기주장을 내세우지 않고, 수줍음이 많아 ‘늘보’라는 별명을 달고 살았다.
이후 경성기예학교에 입학해 연기를 배운 뒤로는 무대에서 적극적인 성격을 갖게 됐다.


1960~70년대는 배우로서의 최고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배우로서의 특출함이 독이 됐다.
최씨는 1978년 북한공작원에 의해 홍콩에서 납치됐다.
영화광이던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뜻이 반영된 것이었다.


최씨는 생전 한 언론 인터뷰에서 김 위원장과의 일화를 전하기도 했다.
그는 “김 위원장을 처음 만났을 때 ‘최 선생(최은희) 저(김정일) 어떻습니까.
저 난쟁이 똥자루 같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면서
“강제로 잡아오긴 했지만 인간적인 모습이었다”고 말했다.
또 “북한에 있을 때 (김 위원장이) 우리를 예술인으로 대우를 잘해줬고,
체제 찬양 영화 대신 예술영화를 만들게 해줬다”면서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탔을 때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고도 했다.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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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배우 최은희가 신장투석 중 사망한 사실이 알려졌다.

 


고 최은희는 배우이자 우리나라 세 번째 여자 영화감독으로 우리나라 영화 역사의 큰 획을 그었다.
우리나라 영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정작 영화 같은 삶을 산 것은 배우 최은희의 삶 그 자체다. 


최은희 신상옥 부부는 1978년 북한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로 북으로 납치됐다.
이들은 북한에서 17편의 영화를 만들며 김정일의 환심을 샀다.
두 사람은 지인들에게 마저 “위대한 수령님의 배려로 잘 지니고 있다”며 거짓 찬양까지 하며
탈출을 위해 안간힘을 썼다. 


최은희 신상옥 부부를 신뢰하기 시작한 김일성부자는 두 사람을 향한 철통보안도 서서히 느슨하게 풀었다.
최은희 신상옥 부부는 북의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오스트리아에서 탈출을 감행했다.


하지마 이들은 한국이 아닌 미국 망명을 선택했다.
탈출 당시 두 사람은 손도 잡지 않고 미국대사관을 향해 필사적으로 달렸다.
이들이 미국으로 탈출한 이유는 북한 간첩으로부터 위험해질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999년 귀국한 최은희는 연기에 대한 열정을 다양한 작품을 통해 풀어냈다.
남편의 별세 이후 2010년 신 감독의 공로상을 대신 수상하는 자리에서 최은희는 “열일곱 소녀시절 연예계 입문해
연극 드라마 나중에는 TV 드라마 그리고 영화에서까지 한평생을 오로지 한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저는 여배우로서의 위상과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해 늘 노력해왔다”며 한평생 배우로 살아왔던 인생을 되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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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 최은희가 향년 92세 나이로 별세하면서 최은희의 파란만장했던
영화 같은 삶이 다시금 화제가 되고 있다.


최은희는 1942년 연극 ‘청춘극장’으로 데뷔, 배우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특히 최은희는 남편 신상옥 감독과 함께 1978년 홍콩에서 북한 공작원들에게 납치당했다.
두 사람은 북한에서 총 17편의 영화를 찍은 후 8년 뒤 오스트리아에서 극적으로 탈출,
고국으로 돌아왔다.


북한 김정일 위원장은 북으로 납치되 온 최은희에게 “최 선생”이라고 부르며
깍듯하게 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은희의 생일에는 집으로 초대해 부인과 아들 김정남을 소개했다고 회상했다.
최은희는 북에서 고독을 달래기 위해 화초를 가꾸고 집 앞 땅을 일궈 감자나 콩을 심기도 했다고.


그렇게 5년 동안 농사를 짓고 바느질을 하며 기다린 끝에 1983년 김정일이 베푸는 연회에서
회색양복을 입은 신상옥 감독을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남한으로 돌아온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는 영화 ‘연인과 독재자’를 통해
북한에서의 삶을 다루어 세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영화 속에서 최은희는 “‘꼭두각시, 먹으시오’하면 밥 먹어야 하고
나 자신은 없었던 거 같아요”라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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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희 신상옥 부부는 1986년 탈출해서도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마련해준 안가에서 은둔 생활을 해야 했고,
1989년 일시 귀국해서도 중앙정보부에 갇혀 조사를 받아야 했다.
납북, 그리고 이어진 10여 년의 망명 생활은 노년까지 깊은 상처로 남았다.
최은희는 자서전 ‘고백’의 에필로그에서 다가올 죽음을 또 하나의 ‘납치’에 비유했다.
“아마도 이번에 납치된다면 영영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그곳은 이북이 아닌 지구상엔 없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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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옥 영화감독 생애



출생 1925년 함경북도 청진
사망 2006년 04월 11일
수상 1960년 대종상 감독상(<로맨스 빠빠>),
2006년 한국영화인복지재단 선정 영화인 명예의 전당 위대한 영화감독
데뷔 1952년 <악야>
 

생애와 이력

한국의 영화감독 겸 제작자. 신상옥은 1925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났고, 아버지가 한의사였던 덕분에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아버지는 신상옥이 집안의 가업을 이어받기를 원했으나, 그는 영화와 문학에 관심이 많아 찰리채플린의 영화와 한국의 고전영화를 보며 영화에 심취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1944년 신상옥은 화가가 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공부를 하였다. 그러나 신상옥은 미술공부를 중도에 포기하고 다음해 귀국하였다. 이즈음 신상옥은 생활고에 시달렸고, 형 신태선의 권유로 ‘고려영화협회’의 미술부에 입사하여 자신의 전공을 살릴 수 있는 그림으로 영화포스터를 그리거나 세트 제작 일을 도왔다. 그러다가 최인규의 영화 <자유만세>(1946)를 보고 영화에 대한 새로운 열망이 생겼고, 이에 신상옥은 영화인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이후 그는 최인규 밑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신상옥은 본격적으로 영화 일에 배우게 되었다(신상옥, 『나는 영화였다』).

신상옥은 최인규 감독에게 영화 촬영과 편집 기술 등을 직접 배우고, 익히면서 연출에 대한 감각을 익혀나갔고, 영화제반과 관련해서 많은 부분을 독학했다. 이후 신상옥은 고려영화협회를 떠나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1948년 영상예술협회를 차렸고, 이 영화사는 훗날 한국영화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던 영화사 '신필름'의 전신인 영화사였다. 그리고 1952년 스물여섯에 집안의 도움으로 <악야>(1952)를 제작, 연출하였고, 이 영화는 신상옥의 데뷔작이 되었다.

작품 세계

<악야>(1952)는 리얼리즘 경향의 작품이었다. 신상옥은 한국 전쟁 뒤의 비참하고 절망적인 사회현실을 미래가 보이지 않는 작가와 미군에게 몸을 파는 양공주의 모습을 통해 전달하려 했다. 집세를 내지 않아 쫓겨날 처지의 작가와 비참한 생활을 하는 양공주의 처지를 통해 참담한 현실을 살아가는 당대인의 표상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이 영화는 원래 한국전쟁 이전에 제작이 완료되었으나, 전쟁으로 인해 개봉이 늦추어졌고, 1952년에 비로소 첫 작품을 상영할 수 있었다.

신상옥은 여섯 번의 영화를 제작하고, 연출하는 동안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는데, 그는 비로소 일곱 번째 영화를 통해 그의 이름을 대중들에게 알리게 되었다. 프랑스 영화를 원작으로 하는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이라는 영화를 통해 대중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감독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멜로드라마에 강한 면모를 보여주었고, 이것을 기반으로 신상옥은 신필름의 기반을 닦아나가기 시작하였다.

1959년에는 임화수의 한국연예주식회사의 지원을 받아 대자본 스펙터클 사극영화 <독립협회와 청년 리승만>(1959)을 만들었다. 이 영화에서 이승만은 정의롭고 인간적이며 리더십이 넘치는 완벽한 영웅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자유당 정권 말기 정권유지를 위한 선전영화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1960년에는 영화제작을 위해 설립했던 ‘신상옥 프로덕션’과 ‘서울영화사’을 확장 개편하여 영화사 ‘신필름’을 창립하였다. 영화제작의 안정화와 전문화를 꿈꾸었던 ‘신필름’을 기반으로 신상옥은 1960년대 자신의 대표작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로맨스 빠빠>(1960)를 시작으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성춘향>(1961), <상록수>(1961), <연산군>(1962), <폭군 연산>(1962)<벙어리 삼룡>(1964), <빨간 마후라>(1964) 등이 이 시기 작품들이다.

로맨스 빠빠
로맨스 빠빠

<로맨스 빠빠>(1960)는 경쟁사회에서 밀려난 50대 가장의 고뇌를 그리고 있는데, 감원의 대상이 된 아버지를 위로하는 가족들의 따뜻한 정이 돋보이는 홈 드라마 계열의 작품이었다. 주요섭의 원작을 옮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는 한국 문예영화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영화는 흥행 뿐 아니라 대종상(감독상, 각본상, 특별장려상), 부일영화제(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아시아영화제(최우수작품상)에서 수상했고, 23회 베니스국제영화제, 35회 아카데미영화제, 13회 에든버러영화제 등에 출품되면서 작품성까지 인정을 받았다. <성춘향>(1961)은 당시 라이벌이었던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1961)과 동시 개봉 경쟁으로 화제에 오르면서 그 해 최고 흥행작에 등극하기도 했다.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성춘향>(1961)은 <춘향전>(1961)의 평면적인 색조에 비해, 코닥필름으로 촬영하고 일본 동양현상소에서 프린트를 제작하여 칼라는 현란하고 화려하면서도 고전적인, 본격화된 컬러”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는 신상옥이 미술공부를 위해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기 알게 된 일본영화계 인사와의 친분 때문에 가능했다고 그는 회상하였다. 또 일본의 영화 지인들은 <이조잔영>(1967), 북한에서 <불가사리>(1985)를 만들 때, 납북된 뒤 북에서 탈출할 때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제작자, 감독으로 전성기를 누린 1960년대에 비해 1970년대는 시련과 암흑의 시기였다. 1970년대 초 무리한 제작과 대형 합작영화로 인한 경영 부실, 국내 영화계 불황으로 인해 ‘신필름’은 부도에 이르고, 정부로부터 제작허가까지 취소당해 신상옥의 입지는 크게 축소되었다. 1973년 ‘신필름’은 ‘신 프로덕션’이라는 제작사로 전락하여 신필름 제작체제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 장르 영화감독으로 신상옥은 작품 활동을 계속했지만, 1978년 1월 부인 최은희가 홍콩에서 실종되어 납북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실종된 최은희를 찾고, 해외에서의 활동을 모색하기 위해 한국을 떠난 신상옥까지 6개월 뒤 납북되어, 그는 북한에서 활동을 하게 된다.

신상옥은 1986년 북한을 탈출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영화 제작에 전념했다. KAL기 폭파 사건을 소재로 한 <마유미>(1990), 정치영화 <증발>(1994), 할리우드에서 만든 아동 액션물 <닌자 키드>(1993) 등을 연출했다. 신상옥의 영화에 대한 집념은 말년까지 지속되어, 2004년에는 치매에 걸린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의 이야기를 다룬 <겨울이야기>를 연출했다. 2003년에는 ‘안양신필름예술센터’를 설립했고, 동아방송대학 석좌교수로 재직하는 등 후학양성에도 힘을 기울였으며, 제56회 칸국제영화제 회고전에 <상록수>(1961)가 초청되기도 했다. 2004년 간이식 수술을 받고 치료해오다 2006년 4월 11일 별세했다.

영화사적 평가

제작자 겸 영화감독으로서 신상옥은 유현목, 김기영, 김수용과 함께 1960-197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감독으로서 뿐 아니라 한국영화사에서 유일무이한 할리우드 식 메이저 스튜디오였던 ‘신필름’을 설립하고, 영화왕국을 꿈꾸었던 거물 제작자였다. 한국영화사가 이영일은 “영화예술에 몰두했고, 그의 작품 속 히로인을 아내로 삼았으며, 불령(不逞)스러울 만큼의 의지로 영화의 왕국을 만들려고 기도했다. 신상옥은 영화라는 신화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상옥 영화예술의 미와 함께 영화사회적인 모순 또는 트리비얼리즘도 함께 사랑하고 능글맞게 수용해야 한다.”라고 그의 『신상옥론』(『영상시대』 1978년 여름호)에서 밝히고 있다. 시대와, 장르, 국경, 이데올로기를 종횡무진 넘나드는 역동적인 영화 인생을 살았던 신상옥은 주제와 장르, 스타일 면에서 엄청난 양과 폭을 가진 작품 세계를 구축했던 전무후무한 대중영화 작가로 평가된다.

작품 목록

<악야>(The Evil Night (Ag-ya), 한국, 1952)
<코리아>(Korea(Koli-a(Korea)), 한국, 1954)
<꿈>(Dream (Kkum), 한국, 1955) 
<젊은 그들>(The Youth (Jeolm-eun geudeul), 한국, 1955)
<무영탑>(Muyoung Tap (The Shadowless Pagoda / The Pagoda of No-Shadow / Mu-yeongtab), 한국, 1957) 
<어느 여대생의 고백>(A College Woman’s Confess (Eoneu yeodaesaeng-ui gobaeg), 한국, 1958)
<지옥화>(The Flower in Hell (Ji-oghwa), 한국, 1958)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Independence Association and young Lee Shung-Man (Doglibhyeobhoe-wa cheongnyeon I Lee Seungman), 한국, 1959)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It’s Not Her Sin (Geu yeoja-ui joega anida), 한국, 1959)
<동심초>(Dongsimcho(Dongsimcho), 한국, 1959)
<춘희>(Chun-Hi(Chunhui), 한국, 1959) 
<자매의 화원>(A Sister’s Garden (Jamae-ui hwa-won), 한국, 1959) 
<이 생명 다하도록>(To The Last Day (I saengmyeong dahadolog), 한국, 1960)
<백사 부인>(Madam white snake (Baeksabu-in), 한국, 1960)
<로맨스 빠빠>(A romantic papa (Lomaenseuppappa(Romanceppappa)), 한국, 1960)
<상록수>(Evergreen Tree (Sangnoksu ), 한국, 1961)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Mother and a Guest (Sarangbang Sonnimgwa Eomeoni, 한국, 1961) 
<성춘향>(Seong Chun-hyang (Seong Chun-hyang), 한국, 1961) 
<연산군>(Prince Yeonsan (Yeonsan-gun), 한국, 1961)
<구봉서의 벼락부자>(An Upstart (Gu Bong-seo-ui Byeorakbuja), 한국, 1961, 제작)
<서울의 지붕 밑>(Under the Sky of Seoul (Seoul-ui Jibungmit), 한국, 1961, 제작)
<의적 일지매>(Iljimae the Chivalrous Robber (Uijeok Iljimae), 한국, 1961, 제작)
<돌아온 사나이>(A returned man (Dol-a-on sana-i), 한국, 1960, 제작)
<사랑의 역사>(A love history (Salang-ui yeogsa), 한국, 1960, 제작)
<열녀문>(Bound by Chastity Rule (Yeollyeomun), 한국, 1962)
<폭군연산>(Tyrant Yeonsan (Pokgun Yeonsan), 한국, 1962) 
<산색시>(A Wife from a Mountain Village (Sansaeksi), 한국, 1962, 제작)
<아름다운 수의>(Beautiful Shroud (Areumda-un Su-ui), 한국, 1962, 제작)
<불러도 대답없는 이름이여>(A Sad Cry (Bulleodo Daedab-eomneun Ireumi-yeo), 한국, 1962, 제작)
<무정>(Cool and Cold (Mujeong), 한국, 1962, 제작)
<대심청전>(The Story of Sim Cheong (Dae-Sim Cheong-jeon), 한국, 1962, 제작)
<가족회의>(Family Meeting (Gajog Hoe-ui), 한국, 1962, 제작)
<검풍연풍>(Swordsman and Love (Geompung-yeonpung), 한국, 1962, 제작)
<마음대로 사랑하고>(And Love as You Want (Maeum-daero Sarang Hago), 한국, 1962, 제작)
<원한의 일월도>(Revenge (Wonhanui Irwoldo), 한국, 1962, 제작)
<와룡선생 상경기>(Teacher Waryong’s Trip to Seoul (Waryong Seonsaeng Sang-gyeong-gi ), 한국, 1962, 제작)
<원한의 일월도>(Revenge (Wonhanui Irwoldo), 한국, 1962, 제작)
<강화도령>(A Reluctant Prince (Ganghwadoryeong), 한국, 1963)
<횃불>(The Torchlight (Hwaetbul), 한국, 1963) 
<로맨스 그레이>(Love Affair (Romanseugrei), 한국, 1963)
<철종과 복녀>(King Cheoljong and Bongnyeo (Cheoljonghwa Bongnyeo), 한국, 1963) 
<쌀>(Rice (Ssal), 한국, 1963)
<아무리 옷이 날개라지만>(No Matter How Fine Feathers Make Fine Birds (Amuri Osi Nalgaerajiman), 한국, 1963, 제작)
<쌍검무>(Ssangeommu (Ssanggeommu), 한국, 1963, 제작) 
<나는 비밀이 있다>(I Have a Secret (Naneun Bimiri Itda), 한국, 1963, 제작)
<아버지 결혼하세요>(Dad, Please Get Married! (Abeoji Gyeolhonhaseyo), 한국, 1963, 제작)
<후라이보이 무전여행기>(Flyboy’s Penniless Trip (Huraiboi Mujeon-yeohaenggi), 한국, 1963, 제작)
<공범자>(A Confederate (Gongbeomja), 한국, 1963, 제작)
<며느리의 비밀>(A Daughter-in-law’s Secret (Myeoneuri-ui Bimil), 한국, 1963, 제작)
<보은의 구름다리>(The Cloud Bridge of Gratitude (Boeunui Gureumdari), 한국, 1963, 제작)
<재회>(Re(Jaehoe), 한국, 1963, 제작)
<유쾌한 3형제와 40인의 처녀>(The Jovial Threesome Brothers and the Forty Women (Yukwaehan Samhyeongjewa Sasip-inui Cheonyeo), 한국, 1963, 제작)
<빨간 마후라>(The Red Scarf (Ppalgan Mahura), 한국, 1964) 
<벙어리 삼룡>(Deaf Samryongi (Beongeori Samryongi), 한국, 1964)
<해녀>(The women divers (Haeyeo), 한국, 1964, 제작) 
<갈매기 우는 항구>(The Port Sea Gulls Sing a Song (Galmaegi Uneun Hanggu), 한국, 1964) 
<님은 가시고 노래만 남어>(My Darling Has Passed Away, but His Song Still Remains (Nim-eun Gasigo Noraeman Nameo), 한국, 1964, 제작)
<김희갑의 청춘고백>(Kim Hee-gap’s "Confession of My Youth" (Kim Huigap-ue Cheongchungobaek), 한국, 1964, 제작) 
<황금벌판의 혈투>(The Bloody Fight in the Golden Field (Hwanggeumbeolpan-ui Hyeoltu), 한국, 1964, 제작) 
<검은상처의 부루스>(The Blues with the Black Scar (Geomeun Sangcheo-ui Bureuseu ), 한국, 1964, 제작)
<십자매 선생>(The Teacher with Ten Daughters (Sipjamae Seonsaeng), 한국, 1964, 제작) 
<비련의 왕비 달기>(Princess Dalgi (Dalgi), 한국, 1964, 제작) 
<이대로 죽을 수 없다>(I Cannot Die As It Is (Idaero Juk-eulsu Eopda), 한국, 1964, 제작)
<치마바위>(The Skirt Rock (Chima Bawi), 한국, 1964, 제작)
<배비장>(The Story of Bae Local Offcial (Baebijang), 한국, 1965)
<민며느리>(The Girl Raised as a Future Daughter-in-law (Minmyeoneuri), 한국, 1965, 제작)
<저 하늘에도 슬픔이>(Sorrow Even Up in Heaven (Jeo Haneul-edo Seulpeum-i), 한국, 1965, 제작) 
<만가>(The Elegy (Manga), 한국, 1965, 제작)
<상속자>(The Heir (Sangsokja), 한국, 1965, 제작)
<무명가의 지배자>(The Ruler of the Unnamed Street (Mumyeongga-ui Jibaeja), 한국, 1965, 제작)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The Sino-Japanese War and Queen Min the Heroine (Cheong-iljeonjaenggwa yeogeol Minbi), 한국, 1965, 제작)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Every Dog Has His Day (Jwigumeong-edo Byeotddeulnal Itda), 한국, 1965, 제작)
<이 여자를 보라>(Behold this Woman (I yeojareul Bora), 한국, 1965, 제작)
<나는 매국노>(I Am a Traitor (Naneun maegukno), 한국, 1966, 제작)
<흑도적>(Black Thief (Heukdojeok), 한국, 1966, 제작) 
<서유기>(Journey to the West (Seoyugi), 한국, 1966, 제작)
(SOS Hong Kong (SOS Hong Kong), 한국, 1966, 제작)
<대폭군>(Tyrant (Daepokgun), 한국, 1966, 제작)
<월남전선 이상 없다>(Vietnam Is All Right (Wolnamjeonseon Isangeobda), 한국, 1966, 제작) 
<숙부인>(Lady Suk (Sukbuin), 한국, 1966, 제작)
<다정불심>(Tender Heart (Dajeongbulsim), 한국, 1967)
<마적>(Mounted Bandits (Majeok), 한국, 1967) 
<꿈>(Dreams (Ggum), 한국, 1967)
<산>(Mountain (San), 한국, 1967)
<이조잔영>(Traces (Ijojanyeong), 한국, 1967) 
<66번가의 혈연(66번가의 무법자)>(Street N. 66 (66beongaui Hyeolyeon), 한국, 1967, 제작)
<돌지 않는 풍차>(Stationary Windmill (Doljianneun Pungcha), 한국, 1967, 제작)
<여자 베트콩 18호>(Female Viet Cong No. 18 (Yeojabeteukong Sippalho), 한국, 1967, 제작)
<여자의 일생>(The Life of a Woman (Yeoja-ui Ilsaeng), 한국, 1968)
<무숙자>(The Homeless Wanderer (Musukja), 한국, 1968)
<내시>(Eunuch (Naesi), 한국, 1968)
<대원군>(Prince Daewon (Dae-wongun), 한국, 1968) 
<지금 그 사람은>(Where is he now (Jigeum Geu Sarameun), 한국, 1968, 제작) 
<일식>(A Solar Eclipse (Ilsik), 한국, 1968, 제작) 
<갈망>(Desire (Galmang), 한국, 1968, 제작) 
<외출(흙바람)>(Outing (Oechul), 한국, 1968, 제작)
<밀명(密命)>(Secret Order (Milmyeong), 한국, 1968, 제작)
<풍랑객>(A Wonderer (Pungranggaek), 한국, 1968, 제작)
<언니의 일기>(The Sister’s Diary (Eunni-eui Ilgi), 한국, 1968, 제작)
<남자 식모>(A Male Housekeeper (Namja Singmo), 한국, 1968, 제작)
<밤하늘의 트럼펱>(Trumpet in Night Sky (Bamhaneurui Treompet), 한국, 1968, 제작)
<남>(Nam (Nam), 한국, 1968, 제작)
<눈보라>(Snowstorm (Nunbora), 한국, 1968, 제작)
<처녀의 조건>(Conditions of a Virgin (Cheonyeo-ui Jogeon), 한국, 1968, 제작) 
<풍운아>(A Child of Winds and Clouds (Pung-una), 한국, 1968, 제작) 
<여마적>(Female Bandits (Yeo Majeok), 한국, 1968, 제작, 기획)
<저 언덕을 넘어서>(Over the Hill (Jeo Eondeok-eul Neumeoseo), 한국, 1968, 제작)
<장한몽>(Day Dream (Janghanmong), 한국, 1969) 
<여성상위시대>(Women Placed Above Men (Yeoseong Sang-wi Sidae), 한국, 1969) 
<사녀>(Dead Woman (Sanyeo), 한국, 1969)
<이조여인잔혹사>(Women of Yi-Dynasty (Ijo Yeoin Janhogsa), 한국, 1969)
<천년호>(Thousand Years Old Fox (Cheonnyeonho), 한국, 1969) 
<속 내시>(Eunuch (Naesi), 한국, 1969)
<육군 김일병>(Private Kim (Yug-gun Gimilbyeong), 한국, 1969)
<오부자>(Father and Sons (Obuja), 한국, 1969, 제작) 
<내일은 죽을지라도>(Tomorrow (Naeil-eun Jugeuljirado), 한국, 1969, 제작) 
<시댁>(Husband’s House(Sidaeg), 한국, 1969, 제작)
<눈물의 여인> (A Women of Tears (Nunmul-ui Yeoin), 한국, 1969, 제작)
<독신녀>(Single Woman (doksinnyeo), 한국, 1969, 제작) 
<남자와 기생>(A Man And a Gisaeng (Namjawa Gisaeng), 한국, 1969), 제작 
<북경 열차>(A Train to Beijing (Bukgyeong Yeolcha), 한국, 1969, 제작)
<검은 야회복>(Black Evening Gowns (Geomeun Yahoebok), 한국, 1969, 제작) 
<팔없는 검객>(Armless Swordsman (Pareomneun Geomgaeg), 한국, 1969, 제작) 
<여자가 고백할 때>(Confess of Woman (Yeojaga Gobaeghal Ttae), 한국, 1969, 제작) 
<애와 사(말하는 인형)>(Love and Death (Ae-wa sa), 한국, 1970, 제작)
<만종>(The Evening Bell (Manjong), 한국, 1970) 
<이조괴담>(A Ghost Story of Joseon Dynasty (Ijogoedam), 한국, 1970) 
<사랑에 목숨걸고>(All for Love (Salang-e mogsumgeolgo), 한국, 1970, 제작)
<먼데서 온 여자>(A woman who came a long away (Meondeseo on yeoja), 한국, 1970, 제작)
<5인의 왼손잡이>(5inui oensonjabi, 한국, 1970, 제작) 
<연애도적>(Two thieves in love (Yeon-aedojeog), 한국, 1971, 제작)
<칠인의 협객>(Seven Warriors (7Inui Hyeopgaek), 한국, 1971, 제작) 
<음양도>((Finger of Doom (Eum-yangdo), 한국, 1971, 제작) 
<옥중도>(Invasion of Mongols (Ogjungdo), 한국, 1971, 제작)
<천마산의 결투>(Final facedown in Cheonma mountain (Cheonmasan-ui gyeoltu), 한국, 1971, 제작) 
<행복한 이별>(Glad to Say Goodbye (Hangboghan ibyeol), 한국, 1971, 제작)
<포상금>(Bounty (Posanggeum), 한국, 1971, 제작) 
<철랑자>(The iron lady (Cheolnangja), 한국, 1971, 제작) 
<대표객>(The great swordsman (Daepyogaeg), 한국, 1971, 제작)
<전쟁과 인간>(War and human being (Jeonjaenggwa ingan), 한국, 1971) 
<평양 폭격대>(The last flight to Pyongyang (Pyeong-yangpoggyeogdae), 한국, 1971)
<연애도적>(Two thieves in love (Yeon-aedojeog), 한국, 1971)
<철인>(The King Boxer /Five Fingers of Death /An iron man, 한국, 홍콩, 1972, 제작)
<장화홍련전>(Jang-HwaandHong-Ryeon:Astoryoftwosisters (JanghwaHongryeonjeon), 한국, 1972, 제작) 
<여당수>(Yeodangsu (Yeodangsu), 한국, 1972, 제작) 
<혈보산천>(Hyeolbosancheon (Hyeolbosancheon), 한국, 1972, 제작) 
<흑수도>(Heuksudo (Heugsudo), 한국, 1972), 제작
<궁녀>(A court lady (Gungnyeo), 한국, 1972)
<효녀 심청이>(Sim Cheong (Hyonyeo Sim Cheong-i), 한국, 1972) 
<흑객>(Black Swordman (Heuggaeg), 한국, 1972, 제작)
<삼일천하>(Three days of their reign (Sam-ilcheonha), 한국, 1973)
<반혼녀>(A woman with half soul (Banhonnyeo), 한국, 1973)
<이별>(Farewell (Ibyeol), 한국, 1973)
<교장선생 상경기>(The principal visits Seoul (Gyojangseonsaeng sanggyeonggi), 한국, 1973, 제작)
<누나>(Sister (Nuna), 한국, 1973, 제작)
<원녀>(A resented woman (Wonnyeo), 한국, 1973, 제작) 
<처녀수첩>(A young girl’s memorandum (Cheonyeo-ui sucheob), 한국, 1973, 제작, 각본) 
<대결투>(The Deadly Knives (Daegyeoltu), 한국, 1973, 제작)
<흑권>(Heukgwon (Heuggwon), 한국, 홍콩, 1973, 제작)
<한강>(The Han river (Hangang), 한국, 1974) 
<13세 소년>(A boy at his age of 13 (Sipsamse Sonyeon), 한국, 1974)
<장미와 들개>(Rose and Wild Dog (Jangmi-wa deulgae), 한국, 1975) 
<아이 러브 마마>(I Love Mama (A-ileobeu(I love) mama(mama), 한국, 1975)
<춘희 ’75>(Chun-Hee ’75 (Chunhui’75), 한국, 1975) 
<여수 407호>(Woman Prisoner No. 407 (Yeosu 407ho), 한국, 1976)
<속 여수 407호>(Woman Prisoner No. 407 II (Yeosu 407ho), 한국, 1976)
<탈출기>(Runaway (TalChulGi), 북한, 1984) 
<돌아오지 않은 밀사>(The Hero Noreturn (doraoji aneun milsa), 북한, 1984) 
<사랑 사랑 내 사랑>(Love, Love My Love (Sarang Sarang Nae Sarang), 북한, 1985)
<소금>(Salt (SoGeum), 북한, 1985) 
<불가사리>(Pulgasari (BulGaSaRi), 북한, 1985)
<심청전>(Sim Cheongjeon, 북한, 1985)
<방파제>(bangpaje, 북한, 1985)
<온달전>(OnDalJeon, 한국, 1986) 
<마유미>(Ma Yumi (Mayumi), 한국, 1990)
<닌자키드>(NinJaKiDeu, 미국, 1993)
<증발>(Vanished (Jeungbal), 한국, 1994, 각본) 
<닌자 키드 2 - 돌아온 닌자 키드>(NinJaKiDeu 2 - Ninjas Kick Back, 미국, 1994, 기획, 각본)
<닌자 키드 3>(NinJaKiDeu 3 - Ninjas Knuckle Up, 미국, 1995) 
<꿈>(Dream (Kkum), 한국, 1995, 각색)
<겨울이야기>(GyeoUrIyaGi, 한국,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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