륙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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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누에 댓글:  조회:670  추천:0  2019-08-19
누에 장유정(군포) 수백 년 전 누에의 분묘가 발굴되었다 모서리죽임 같이 흙으로 쌓아올린 사각기둥 실을 짓던 시간들이 뭉쳐있었다 무한한 옷 한 벌 품은 실들이 껍질 속에 있었다 집을 바라는 열의의 모형처럼 타임캡슐엔 우주에 관련한 보고서도 발견되었다 집 한 채 따로 들고 나앉듯 방안에는 숨을 뽑아 날개를 만들고 있었다 좁은 침낭 속에 들어 잠을 자는 듯 죽어있는 누에고치 자기만의 중심축으로 한곳에 치우침 없이 부드러운 곡선 속에 계속 굴러가는 방향지시등처럼 마찰계수가 작았을 것이다 뾰족한 끝이 보이고 자꾸만 균형 잃고 흔들릴 때 세상과 닿는 유연한 포장 쉼 없이 돌고 도는 지구의 자전처럼 모서리가 둥글다 잠자는 머리를 어느 쪽으로 돌리지 않은 것들은 화려한 변태를 겪을 수 있다는 듯 미사일저장고를 개조하듯 우주선 캡슐에 건전지 넣는다 긴급 피난형 집처럼 누에가 고치를 짓고 있다 우화등선처럼 손끝에는 하얀 벌레가 한 마리씩 꿈틀거렸다 [제19회 수주문학상 심사평] 수주문학상에 응모한 작품들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게 고르고, 개별적으로는 고유한 특징들을 갖추고 있어 심사하는 일이 즐거우면서도 쉽지 않았습니다. 최종적으로 논의된 작품들은 ‘첫차’외 4편, ‘대장간 칼’ 외 4편, ‘서큘레이터’ 외 4편, ‘방충망’ 외 4편, ‘누에’ 외 4편이었습니다. 시 ‘첫차’는 겨울 저녁 한 사람의 영면을 추모하기 위해 들른 장례식장에서 망자와의 스치듯 맺은 한때의 인연을 담담하게 떠올리는 작품입니다. 그러나 영정사진 속 망자의 그 뻐드렁니가 뜻하는 것의 시적 내용이 다소는 불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 ‘대장간 칼’은 전생에서 후생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시적 화자의 미래(내생)의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공간으로서 단철장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 단철장이 낫과 같은 날카로운 금속의 공구를 만드는 곳이라는 데에서 화자의 절망과 번민은 생겨납니다. ‘낫’-‘꽃’, ‘전생’-‘후생’, ‘나’-‘그’의 대비가 상징과 암시를 만들어내고 있지만 산문적 진술이 긴장을 떨어뜨리는 형국입니다. 시 ‘서큘레이터’ 외 4편의 작품들은 시 창작의 경험이 많아 보였고, 또 조리가 있게 하나의 시상을 직조하는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다만 시 ‘서큘레이터’'에서 보여지 듯 “나는 바람의 생산자. 버튼을 누르면 나의 심장은 뛰지”로 곧바로 진술이 옮겨가도 좋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진술의 보폭을 겹쳐가면서 비좁게 옮겨감으로써 읽는 편에서 갑갑증을 느끼게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방충망’ 외 4편의 작품들은 수상작과 마지막까지 경합했다는 것을 밝혀둡니다. 상상력이 참신하고 탄력이 느껴졌습니다만 작품들의 수준에 편차가 있었다는 점이 열세에 놓이게 했습니다. ‘누에’ 외 4편의 작품들은 유려한 생각을 드러내되 중량감이 있고 또 안정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특히 시 ‘누에’는 과거의 시간을 불러내고, 옛 시간이 쌓인 공간 즉 분묘를 누에의 공간으로 바라보지만, 그 유택에 보관된 시간만큼은 둥글고 유연한 것으로 해석하는 부드러운 상상력이 특별했습니다. 개성적인 시안을 갖추었다고 생각합니다.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심사위원 : 문효치(시인,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문태준(시인
127    조문 댓글:  조회:775  추천:0  2019-08-19
조문 / 이서연 빈 방에 남아 빈 방을 닦고 있는 거울처럼 그 집의 벽들은 아직 비에 젖고 있다 현관 앞에 쓰러진 우산이 있고 지붕을 넘어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소리 내어 운다 나는 꽃을 들고 있다 이른 새벽 청소부가 올 때까지 쓰레기봉투처럼 웅크리고 싶은 밤이 있다 자동차가 달리는 8차선 도로를 천천히 가로질러 죽어가는 밤과 죽은 뒤의 밤을 죽은 사람 곁에 앉아 산 사람이 지샌다 삶이 죽음으로 옮겨가는 낮을 지나 죽음이 삶을 전염시키는 밤으로 눈을 감고 있으면 생각 없는 몸이 어딘가로 간다 생각만 남아 몸을 생각한다 엎어진 화분처럼 방문을 쥐고 있는 젖은 손이 있다 손잡이를 말아 쥔 둥근 손등만 보인다 창문이 없는 방에 바람이 들이쳤다 먹구름과 흰 구름이 방 안을 지나간다 감은 눈 안으로 구름은 어떻게 들어 왔을까? ................................................. 심사평 / 심사위원 이하석, 장옥관 시인. 언어 몰고가는 힘 놀랍고 삶과 죽음 관계 새로운 인식 이끌어 예심에서 올라온 10명의 작품으로 우리 시단의 변화를 실감했다. 흔히 보아왔던 개인적 발화에 가까운 소통부재의 언술이나 실험이라는 방패 뒤에 숨은 책임방기(責任放棄)의 시편들이 확실히 줄어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신 새로움을 보여주는 시편들보다 익숙함이라는 달갑지 않은 현상이 눈에 띄어 안타까움을 지울 수 없었다. 두 심사자는 당선권에 든 작품으로 나동하씨의 ‘계단들’과 손명이씨의 ‘전모(全貌)’, 그리고 이서연씨의 ‘조문’을 최종 선정했다. 손명이씨의 작품은 ‘달’이라는 원형상징을 변주하면서 시상을 엮어가는 수법이 눈여겨볼 만했다. 그러나 관념을 구체성에 얹는 데 힘이 부치는 감이 있었다. 나동하씨의 작품은 ‘계단’이라는 대상을 삶의 보편적 국면으로 이어내는 인식의 깊이를 보여주었다. 대상을 치열하게 파고드는 힘, 긴밀한 구성력과 치밀한 묘사력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이서연씨의 작품은 참신한 비유와 더불어 언어를 몰고 가는 힘이 놀라웠다. 무엇보다 행간을 건너뛰는 경쾌한 어법이 신인의 예기(銳氣)를 느끼게 했다. “죽어가는 밤과 죽은 뒤의 밤을/ 죽은 사람 곁에 앉아 산 사람이 지샌다/ 삶이 죽음으로 옮겨가는 낮을 지나/ 죽음이 삶을 전염시키는 밤으로”와 같은 구절에서 보듯 활달한 어법을 통해 삶과 죽음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이끌어내고 있다. 구성의 측면에서 안정감을 주고 있다는 점도 이 작품의 또 다른 자랑거리다. 대상에 직핍해 들어가 인식의 상투성을 뒤집어내는 나동하씨의 작품과 감각적이고 개성적인 화법으로 일상 언어의 범박함에서 벗어난 이서연씨의 작품을 두고 논의 끝에, 두 심사자는 신춘문예 당선자에게 요구되는 새로움이라는 덕목에 좀 더 부합된다고 판단되는 이서연씨의 작품 ‘조문’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신춘문예 당선자의 영광은 단 하루다. 이 작은 성취에 머물지 말고 당선자는 언어의 모험에 기꺼이 몸을 던져 천 년을 버티는 교목이 되길 바란다.
126    시의 부활을 위하여 댓글:  조회:860  추천:0  2019-08-19
시의 부활을 위하여1/  이재무 왜 시가 읽히지 않을까 시가 읽히지 않는 이유로는 내외적 환경 변화를 들 수 있다. 우선 외적으로는 매체 환경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첨단 문화 매체에 의해 우리 나날의 일상이 전 방위적으로 포섭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기술 매체에 중독되어 하루 한시도 인터넷과 휴대전화에서 떨어져 살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즉,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들은 게임에 빠져 지내기 일쑤고 장년층들도 카톡, 페이스북, 트윗 등 SNS에 의존하지 않고는 나날의 무료를 견뎌내기 어려운 형편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른바 전자 사막시대를 살아가는 현대판 유목민들은 홀로 있는 시간을 두려워하며 각종 전자 기술 매체를 통해 타자와의 교감과 소통을 꿈꾸고 기대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방식으로는, 양말을 신은 채 가려운 발등 부위를 긁는 일처럼 진정한 의미에서 불통과 소외의 가려움을 해소할 수 없다. 요컨대 시가 독자 대중에게서 멀어진 이유는 이처럼 전자 기술 매체에 중독되어 삶의 권태를 일시적으로 배설할 뿐, 진중하게 앉아 책을 읽고 공감하며 사색하는 일의 수고로움을 기피하는 현상과도 맞물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내적 원인으로는 시인들의 시작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소통 불능의 자폐적 언어로 자기들만의 성채 안에 들어가 끼리끼리 암호를 주고받듯, 지극히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작동되는 현재의 소통 체계가 독자들의 시에 대한 흥미를 휘발시켜 왔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분재를 취미로 삼는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분재란 엄밀하게 말해서 장애수이기 때문이다. 왜 개인의 취향과 기호 때문에 멀쩡한 나무에 위해를 가해 장애를 만드는지 도통 그 가학 취미를 이해할 수가 없다. 시작에서도 나는 이런 현상을 본다. 언어를 분지르고 비틀고 학대하여 장애어를 만드는 현상이 소통 불능의 시를 낳는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좋은 시란 시상의 자연스러운 유로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난해 시의 효용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난해 시도 궁극적으로는 독자의 이해에 가 닿아야 한다. 해답이 없는 수수께끼는 수수께끼의 자격을 상실할 수밖에 없듯이 끝내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시는 시로서 자격을 지녔다고 보기 어렵다. 《시란 무엇인가》의 저자 유종호 선생의 말을 빌리면 아무리 수수께끼의 난도가 높다 하더라도 거기엔 답이 들어 있어야 비로소 수수께끼의 자격이 있듯 난해 시 역시도 궁극적으로는 소통이 이루어져야만 시의 자격이 있다. 난해 시가 양산되는 배경에는 전위적 실험을 추구하기 때문인 경우도 있지만 시인이 언어를 장악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전자의 경우라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곤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더불어 시에서 비문이 더러 비평가들의 상찬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이 또한 문제이다. 비문의 남발이 시의 덕목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도 예외는 있을 수 있다. 시의 효과를 위해 우리는 흔히 ‘시적 허용’이라 하여 일부러 문법을 창조적으로 일탈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적 허용이라는 것도 매우 조심스럽게 그리고 창의적으로 사용해야지 이것이 시 진술의 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죽하면 시인의 자질을 알려면 그가 쓴 산문을 읽어보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그것은 시인의 국어 사용 능력을 불신하기에 나온 말이 아니겠는가. 말이 길어졌지만 이런 내외적 이유로 인해 독자 대중으로부터 시가 멀어졌다고 생각되기에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게 되었다. 여기에 덧붙여 독자들 또한, 전혀 책임이 없다고 볼 수 없다. 이 대목 역시 유종호 선생의 말을 빌려 필자의 의견을 피력하자면 우리의 현실 독자들은 시와 친해지기 위한 지적 투자에는 인색하면서도 시가 어렵게 느껴지면 무조건 시인을 탓하는 경향들이 있는 것 같다. 가령 물리학이나 고등수학, 추상미술이나 고전음악이 어려운 것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무지를 탓한다. 그러나 시가 어려운 것에 대해서는 자신들을 탓하는 대신 시인들을 타매하길 망설이지 않는다. 시도 향수할 수 있으려면 지적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세상에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없다. 하다못해 우리는 스포츠 관전을 하기 위해서도 스포츠 ‘룰’을 알아야 한다. 룰을 모르면 모른 만큼 관전의 쾌감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아는 만큼 느낀다.’는 말이 있다. 시 역시도 충분히 즐길 수 있으려면 시에 대한 최소한의 ‘룰’ 즉 이미지, 어조, 비유, 상징, 신화, 반어, 역설, 패러디 등등 시의 구성요소에 대한 어느 정도의 숙지는 필요하다.  
125    틀리기 쉬운 글들 댓글:  조회:1624  추천:0  2019-08-19
'되다'와 '돼' 이것도 많이 틀리는 것 중 하나입니다. '되다'와 '돼다'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말이 아니고, '되다'에 '-어, -어라, -었-' 등이 결합되어 '되어, 되어라, 되었-'으로 활용한 것이 줄어서 '돼, 돼라, 됐-'의 형태가 되는 것입니다. 되다 되어 → 돼 되어라 → 돼라 되었다 → 됐다 '안 되'와 '안 돼' 우선 부사인 아니(안)는 뒷말과 띄어 씁니다. “영화 볼래?” “안 보(X) / 안 봐.(○)” 우리말은 위와 같이 어떤 경우도 어간(기본형 '보다'의 ‘보-)으로 끝날 수 없습니다. “이거 해도 돼?” “안 되(X) / 안 돼(○)” ‘안 되’는 ‘안 보’로 끝낸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안 되어'로 끝나야 하고 이를 줄인 것이 '안 돼'입니다. ‘넥타이 안 매, 그거 안 사’ 등은 ‘매다, 사다’에서 어미 없이 끝낸 문장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이것들은 뒤에 ‘-어/아’가 생략된 것입니다. #바른_말   #맞춤법 [맞춤법의 재발견] 비슷한데 다른 단어 ●맞히다 vs 맞추다 모양이 비슷해 적을 때마다 혼동되는 단어가 많다. 이들을 제대로 구분해 적는 법은 없을까? 이들은 일부러 묶어서 생각해야 한다. 표기가 비슷하다면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찾는 것이 먼저다. 묶어서 생각하여야 명확한 차이를 보기도 쉽다. 실제로 혼동되는 단어들 중 하나인 ‘맞히다’와 ‘맞추다’에 적용해 보자. 공통부분을 찾아보자. 모두 ‘맞다’를 가졌다. 이 단어들이 ‘맞다’라는 의미와 연관된다는 뜻이다. 공통부분을 빼 보자. ‘-히-’와 ‘-추-’가 남는다. ‘맞다’ ‘맞추다’ ‘맞히다’의 차이는 이 ‘-히-’와 ‘-추-’ 때문에 생겼겠다. 이들이 어떤 차이를 이끌었을까? 이들 단어가 들어간 문장을 떠올릴 순서다. 자신에게 익숙한 예문을 생각하여야 이 단어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 입을 맞추다, 양복을 맞추다, 줄을 맞추다 이들은 어떤 공통점을 가졌는가. ‘맞추다’를 이해하기 위한 과정이다. ‘맞추다’는 두 개 이상의 사물이 있을 때 사용되는 말이다. ‘양복을 맞추다’는 양복을 사람의 체형에 맞게 하는 일이다. ‘입을 맞추다’도 두 개의 입이 필요하다. ‘줄’ 역시 이를 맞추려면 대상이 필요하다. 원래 ‘맞추다’ 자체에 ‘둘 이상의 일정한 대상들을 비교해 살피다’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하지만 굳이 사전을 찾지 않더라도 자신에게 익숙한 예문을 떠올리고 공통점을 찾고 차이점을 비교하는 활동으로 단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맞히다’는 어떨까. 역시 자주 쓰는 예문을 보자. - 바람을 맞히다, 정답을 맞히다 ‘맞히다’에 든 ‘-히-’는 아래 단어들의 ‘-히-’와 같다. 모두 우리가 흔히 쓰는 단어들이다. - 읽히다, 입히다, 익히다, 눕히다, 식히다, 앉히다, 밝히다, 굽히다, 더럽히다, 간지럽히다 이들 ‘-히-’는 어떤 의미일까? 이들 ‘-히’는 ‘∼게 하다’의 의미를 갖는다. ‘읽히다’는 ‘읽게 하다’이고, ‘입히다’는 ‘입게 하다’이다. 원 단어에 ‘-히-’를 넣으면 그런 의미가 생긴다. ‘맞히다’ 역시 마찬가지다. ‘바람을 맞히다’는 ‘바람을 맞게 하다’의 의미다. 사실 ‘정답을 맞히다’는 ‘내가 문제의 정답을 맞게 한 것’이다. 신기한 것은 우리가 ‘∼게 하다’의 의미인지를 명확히 모르면서도 일상에서 ‘바람을 맞히다, 정답을 맞히다’와 같은 문장을 훌륭하게 쓴다는 것이다. 왜 비슷한 단어들이 만들어져 우리를 혼동시키는 것일까? 새 단어를 만드는 좋은 방법은 이미 있는 단어에 무엇인가를 덧붙이는 것이다. 그래야 이전 단어의 의미를 반영할 수 있다. ‘맞추다, 맞히다’에도 좋은 점이 있었다. 표기에 이미 ‘맞다’와 의미적 연관성을 지닌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 또 그리 어려워만 할 일은 아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문장을 활용하는 능력으로 그 의미를 알 수 있으니까. 이제 질문이 하나 나와야 한다. 국어의 모든 ‘-히-’가 ‘∼게 하다’의 의미일까? 멋진 질문이다. 안타깝게도 다른 ‘-히’도 있다. 우리는 그 다른 ‘-히-’에 대해서도 배울 것이다. ‘맞히다’에 든 ‘-히-’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김남미 홍익대 국어교육과 교수
124    다른 구멍에 넣다 댓글:  조회:720  추천:0  2019-08-19
  다른 구멍에 넣다 / 최영철 현금 인출기에 카드를 밀어 넣는데 구멍이 카드를 밀어낸다 자꾸 넣어도 자꾸 밀어낸다 구멍이 자기를 밀어낸다는 걸 알았는지 구멍이 밀어내기도 전에 카드가 먼저 비집고 나온다 몇 번을 그러고 있는데 뒤에 줄 선 아주머니 내 어깨를 툭툭 친다 아차 누가 이 많은 구멍을 만들었을까 현금 카드를 넣는다는 게 전화카드를 넣어버렸다 아주머니가 웃고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변창렬  (길림시)서울: 비누 / 강초선 그의 몸은 물에 닿으면 반드시 녹는다 그러나 젖은 제 몸의 향기를 지극히 사랑하는 까닭에 한순간의 生이 뜬금없는 거품일지라도 오래 전 세상 눈뜨기 전부터 키워온 제 몸의 향기를 흐르는 물에 아낌없이 게워낼 줄을 안다.
123    바깥에 같히다 댓글:  조회:768  추천:0  2019-08-19
  바깥에 갇히다 정용화 우리 집 현관문에는 번호키가 달려있다 세 번, 비밀번호를 잘못 누르면 가차 없이 문이 나를 거부한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다가 지갑도 휴대폰도 없이 제대로 바깥에 갇히고 말았다 안과 밖이 전도되는 순간 열리지 않는 문은 그대로 벽이 된다 계단에 앉아있는 30분 동안 겨울이 왔다 바람은 골목을 넓히려는 듯 세차게 불고 추위를 모르는 비둘기는 연신 모이를 쪼아댄다 내 것이면서 내가 어쩌지 못하는 것이 어디 문뿐이겠는가 낡을 대로 낡아버린 현수막이 바깥에 갇힌 나를 반성도 없이 흔든다 걸터앉은 계단이 제멋대로 흩어지는 길 위의 낙엽이 새들이 자유롭게 풀어놓은 허공이 나를 구속하고 있는 바깥이라니!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나는 지금 바깥이다 프로필 정용화 : 충북 ,동대 대학원 문창과,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바깥에 갇히다]외 다수 시 감상 어느 때 외출했다가 당혹할 때가 있다. 손에 아무것도 쥔 것이 없다. 현금도, 카드도, 전화기도, 차 열쇠도, 밀려드는 공포. 나는 여기에 이렇게 있는데, 세상의 밖에 나 홀로 있는 듯한 느낌. 어쩌면 나는 현금, 카드, 전화기, 열쇠로만 존재했던 것은 아닌지? 아니면 애초부터 나는 없었고 다만, 한 여름 땡볕에 울렁거리는 저 그림자가 진짜 ‘나’인지? 분명한 것은 바깥은 안의 반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지금 바깥이라는 것이다. [글/김부회 시인, 평론가] 변창렬  (길림시)서울: 7월의 바다 / 황금찬 아침 바다엔 밤새 물새가 그려 놓고 간 발자국이 바다 이슬에 젖어 있다. 나는 그 발자국 소리를 밟으며 싸늘한 소라껍질을 주워 손바닥 위에 놓아 본다. 소라의 천 년 바다의 꿈이 호수처럼 고독하다. 돛을 달고, 두세 척 만선의 꿈이 떠 있을 바다는 뱃머리를 열고 있다. 물을 떠난 배는 문득 나비가 되어 바다 위를 날고 있다. 푸른 잔디밭을 마구 달려 나비를 쫓아간다. 어느새 나는 물새가 되어 있었다. .
122    소금인형 댓글:  조회:836  추천:0  2019-08-19
소금인형 / 류시화   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 소금 인형처럼 당신의 깊이를 재기 위해 당신의 피 속으로 뛰어든 나는 소금인형처럼 흔적도 없이 녹아 버렸네 .
121    댓글:  조회:754  추천:0  2019-08-19
멍/인은주   그러지 말자 하고 기다리다 들뜬 저녁 그이는 오지 않고 노을이 덮쳤다 넘어진 무릎 아래로 붉은 피가 모였다 핏빛이 붉어야 하는 그 이유를 아는 순간 노을은 다급하게 어둠과 섞이고 이 세상 다 무너진듯 돌아보지 않았다   ㅡ『정형시학』(2019, 여름호)
120    현수막 댓글:  조회:807  추천:0  2019-08-19
바람과 현수막 / 이해리   빌딩에 매달린 현수막이 미친 듯 울부짖는다 바람 세차게 부는 날 귀신 곡하는 소리를 낸다 퍽퍽 벽을 때리며 돌덩이 던지는 소리를 낸다 ​어마어마하다 무섭고 괴상하다 ​머물지 않으려는 자를 억지로 품어 안은 자의 괴로움, 들어 주기엔 지나치게 사납다 ​죽어도 떠나야겠다는 자와 죽어도 못 보내겠다는 이의 팽팽한 절규   ​사랑에는 더 집착하는 이가 약자, 온몸이 얇은 가슴뿐인 현수막 차라리 내 가슴 찢어놓고 가라 사생결단 울부짖는 소리 귀 얇은 내 잠은 밤새 안절부절이다
119    수평선 댓글:  조회:785  추천:0  2019-08-19
수평선 / 배한봉 저 빨랫줄 참 길게 눈부시다 태양을 널었다가 구름을 널었다가 오징어 떼를 널었다가 달밤이면 은빛으로 날아다니는 갈치 떼를 널었다가   옛날에는 귀신고래도 너끈하게 널었다는 그래도 아직 단 한 번 터진 적 없는 저 빨랫줄 한라산과 백두산이 가운데 쯤 독도를 널어놓고 이쪽, 저쪽에서 팽팽하게 당겨주는 참 길게 눈부신 저, 한국의 쪽빛 빨랫줄
118    성냥 댓글:  조회:779  추천:0  2019-08-19
성냥 / 이세룡 감옥 속에는 죄인들이 가득하다 머리통만 커다랗고 몸들이 형편없이 야위었다 세계를 불태우려고 기회를 엿보는 어릿광대들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일생을 감옥에서 보낸다
117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 (시론에서 펌한글) 댓글:  조회:847  추천:0  2019-08-19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 사오정은 우중충한 집안 분위기를 바꿔볼 양으로 도배를 새로 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벽지를 얼마나 사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고민한 끝에 옆 아파트의 평수가 비슷한 집에 살고 있는 저팔계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팔계야, 저번에 도배할 때 벽지 몇 개나 샀니?" 저팔계는 기억을 더듬으면서 대답했다. "응, 그 때 열 두 롤을 샀어." 사오정은 저팔계의 말을 듣고 벽지 열두 롤을 사서 도배를 시작했다. 그런데 다 하고 나니 벽지 두 롤이 남는 것이었다. 사오정은 저팔계에게 가서 따지듯이 물었다 ."야, 벽지가 두 롤이 남잖아!" 그러자, 저팔계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응, 나도 그랬어."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해 아래 새 것은 없다고 이 땅에 존재하는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모방한 것입니다.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훌륭한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창의성이란 ‘전혀 새로운 어떤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베끼고 흉내 내는 것을 넘어 자신의 것으로 재 해석하고 재창조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기술을 익히는 것은 모방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모방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모방하십시오. 모방은 창조를 위한 실행의 첫 단추입니다. 모방이 쌓이면 어느 순간 창조라는 질적 변화를 맞게 됩니다. 모방은 학습이고 경험이며 배우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모방을 거치지 않은 새것은 없습니다. 모방은 창조의 필수 과정이자 가장 탁월한 창조 전략입니다. 물론 단순히 훔치라는 말이 아닙니다. 모방하되 창조적으로 모방하라는 말입니다. [오늘의 말씀] 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 (욥기 8:8)
116    갱년기 댓글:  조회:731  추천:0  2019-08-19
갱년기   안현미   국숫집에 와보니 알겠다 호르몬이 울고 호르몬이 그리워하고 호르몬이 미워하고 다 호르몬이 시키는 일이라는 걸   매일매일 죽지도 않고 찾아와 죽고 싶다고 말하는 나는 누구인가?  
115    택배 댓글:  조회:735  추천:0  2019-08-19
택배 / 박승연 어머니가 보내신 택배가 1박 2일 여행을 마치고 도착했다 서둘러 박스를 열어보니 당신의 투박한 손으로 꾹꾹 눌러 담은 채소가 자식 향한 어머니 마음처럼 부풀어 오른다 더운 공기에 시든 푸성귀를 다듬어 목욕시키니 당신의 푸른 미소로 살아난다 저녁상에 상추 쑥갓 담아내니 당신의 잊고 살아온 세월이 떠오른다 인고의 세월 견뎌내며 흙처럼 사신 당신 둥지 떠나 암 수술한 자식을 위해 산수(傘壽)에도 여전하신 사랑에 말할 수 없는 고마움이 넘쳐난다 상추 한 잎 입에 넣으니 밭 매시던 모습이 아른거린다 아! 가까이 계시나 언제나 그리운 당신 야채처럼 싱싱한 세월을 택배로 되돌려 보내드리고 싶다 .
114    댓글:  조회:790  추천:0  2019-08-19
꿈 / 김미경 파지사과를 한 입 베어 물자 갇혔던 비명이 서걱 씹힌다 혀를 지그시 눌러 오래 씹어도 낯설지 않은 질감 버림받는 일에 익숙한 내가 버려진 너를 아낌없이 먹는 일은 서로를 달래는 의식 살만하게 살지 않아 다행이라는 말에 진심을 걸고 외면당한 많은 것에 과감한 애정을 표하기로 하였으니 누구의 신부였던 조신한 가면은 더 과감하게 뜯어 버린다 이제는 절망이 절망을 끌어들여도 적막이 적막을 덮어버려도 아니 그럴수록에 나의 고민은 깊어져 걱정이 사라질 것이고 발끝에 뿌리내린 지독한 병이 지금의 결핍을 치유하고 더 비릿하고 질긴 슬픔에 전부를 빠뜨릴 것이다 비로소 뚜렷해진 나의 초상
113    안도현시론(1 . 2 , 3 , 4 , 5 , 6 , 7 , 8 ) 댓글:  조회:1064  추천:0  2019-08-19
 무엇’을 쓰려고 하지 말 것/ 안도현시론1 무엇을 쓸 것인가? 한 미국 작가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글을 쓰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이마에 피땀이 맺힐 때까지 그저 텅 빈 종이를 바라보고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파울러)라고. 말이 쉽지 그건 또 얼마나 고역일 것인가. 그렇게 했는데도 단 한 줄의 글도 써지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이 말은 어떤 소재를 취할 것인가에 대한 답은 아니다. 글을 쓰려면 집중적인 몰입의 자세가 그 어떤 것보다 우선이라는 말이다. 무엇을 쓸 것인지, 어떻게 쓸 것인지 고민하는 일은 글을 구상하는 순간부터 퇴고를 완료할 때까지 당신을 따라다닌다. 그 ‘무엇(내용)’과 ‘어떻게(형식)’ 때문에 쩔쩔매는 아이들을 위해 이오덕 선생은 생전에 이렇게 일갈하셨다. “똥 누듯이 쓰라”고. 괜히 어깨와 펜 끝에 힘을 주지 말고 자연스럽게 쓰라는 말이다. 일상생활에서 소재를 찾고, 예쁘게 꾸미려는 마음을 없애야 좋은 글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 뜻은 이해하지만, 그러나 똥을 누는 일은 또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면 다시 묻자. 도대체 무엇을 쓸 것인가? 첫째, 단 한번이라도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써라. 다른 사람에게 들은 것, 책을 읽어서 알게 된 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경험에 속한다. 하지만 자신의 시각으로 바라본 직접적인 경험만큼 생생하지는 않다. 남의 입을 통해 빠져나온 말을 받아 적다 보면 사실을 과장하거나 축소할 우려가 있고, 책으로 얻는 지식과 지혜를 말로 옮겨 적다 보면 현학이나 지적 허영의 늪에 빠질 수도 있다. 시인 김용택은 “내가 알고 있는 것만큼만 시를 쓴다”고 표현한 적이 있다. 이 말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의 다른 표현이면서, ‘너희들이 모르는 것을 내가 아니까, 나는 그것을 쓰겠다’는 그만의 독특한 창작 비결이기도 하다. 그는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적었더니 시가 되더라”는 말도 했다. 이때의 ‘어머니의 말씀’은 바로 어머니와 함께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것’이라는 의미다. 둘째, 먼 곳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을 써라. 시인 이정록의 말을 잠시 경청해 보자. “간혹 쓸 것이 없어서 못 쓰겠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나는 그에게 간곡하게 말한다. 당신이 지금 전화를 하는 곳에서 손에 잡힐 듯 가까이에 있는 것을 말해 보라고 한다. 그걸 쓰라고 한다. 곁에 있는 것부터 마음속에 데리고 살라고 한다. 단언컨대, 좋은 시는 자신의 울타리 안 문지방 너머에 있지 않다. 문지방에 켜켜이 쌓인 식구들의 손때와 그 손때에 가려진 나이테며 옹이를 읽지 못한다면 어찌 문밖 사람들의 애환과 세상의 한숨을 그려낼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을 그는 ‘문지방 삼천리’라는 말로 기발하게 압축했다. 삼천리는 아무리 발품을 팔아도 다 둘러보지 못한다. 애써 둘러볼 필요도 없다. 문지방 안에 삼천리가 다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시를 찾지 못하는 당신을 위해 한마디 더 귀띔한다. “오래 들여다보면 모두 시가 된다.” 역시 이정록의 어록이다. 기억해 두자. 어떤 시를 읽을 것인가에 대한 해답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좋은 시를 쓰려면 당신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장 젊은 우리나라 시인의 시부터 읽어라. 젊은 시인의 시는 교과서요, 늙은 시인의 시는 참고서다. 우리나라 시인의 시는 한 끼의 밥이지만, 외국 시인들의 시는 건강보조식품이다. 제발 릴케와 보들레르와 엘리어트를 읽었다고 거들먹거리지 말라. 두보와 이백을 앞세우지 말라. 볼썽사납다. 그들 대가의 시집은 두고두고 천천히, 읽어라. 셋째,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을 써라. 높은 곳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쓰지 말고, 낮은 곳에서 돌아앉아 우는 것에 대해 써라. 시는 절대로 ‘초월한 자의 향기’가 아니다. ‘고귀한 사랑’이 아니다. ‘인간과 자연의 합일’이 아니다. ‘고행을 이겨낸 구도자의 경지’가 아니다. 시는 초월하지 못한 인간의 발가락에서 나는 냄새고, 지저분한 사랑이며, 인간과 자연의 불화이며, 한 시간 아르바이트하면서 어렵게 번 돈 3천원이다. 시를 쓰려거든 두꺼운 문학이론서를 독파하지 말라. 창작보다 고매한 철학적 사유로 무장하는 게 우선이라고 여기지 말라. 이론이나 세계관이 시를 낳는 게 아니다. 당신의 시가 당신의 이론과 세계관을 형성한다고 믿어라. “사유가 먼저 있고, 그 도달한 사유에 맞춰 거꾸로 체험을 구성할 경우 작품은 파탄을 면치 못한다. 사유로부터 경험이 도출되는 것은 마치 몸에 옷을 맞추지 않고 옷에 몸을 맞춘 것처럼 어색하다. 몸에 옷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규범이듯, 경험에 사유가 뒤쫓아 가 그 경험을 완전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예술적 창조의 원리이다.”(김상욱의 ) 넷째, 화려한 것이 아니라 하찮은 것을 써라. 나의 경험 중에 행복했던 시간들이 남에게도 반드시 행복한 시간으로 전이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행복과 충족은 남의 불행과 결핍의 증거임을 잊지 말라. 장미와 백합의 우아한 향기에 취하지 말고, 저 들판의 민들레와 제비꽃의 무취에 취하라. 금메달을 목에 건 승리자의 영광보다는 꼴찌로 들어오는 선수의 실패를 경배하라. 성형수술 한 처녀의 얼굴을 경멸하고 주근깨로 뒤덮인 소녀의 얼굴을 사랑하는 법을 익혀라. “나 서른다섯 될 때까지/ 애기똥풀 모르고 살았지요/ 해마다 어김없이 봄날 돌아올 때마다/ 그들은 내 얼굴 쳐다보았을 텐데요// 코딱지 같은 어여쁜 꽃/ 다닥다닥 달고 있는 애기똥풀/ 얼마나 서운했을까요// 애기똥풀도 모르는 것이 저기 걸어간다고/ 저런 것들이 인간의 마을에서 시를 쓴다고”(졸시 )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떤 소재를 택해 쓰느냐는 게 아니다. 그 어떤 소재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느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적 경험은 나의 경험의 일부를 말하는 게 아니라 나의 경험 중에 나만의 시각으로 바라본 적이 있는 것을 우리는 시적 경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시인은 경험한 것에 대하여 쓴다. 하지만 경험한 것을 곧이곧대로 쓰지는 않는다. 이것저것 여러 가지 일을 해 본다고 많은 시적 경험이 쌓이는 것은 아니다. 바쁘게 한 세상을 살아왔다고 그 수많은 경험들이 글쓰기로 이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소재를 해석하는 능력, 즉 상상력의 도움 없이 어떤 소재에 매달리는 것은 소재주의의 늪에 빠질 위험이 있으니 특별히 경계해야 한다. ‘무엇’을 쓰려고 집착하지 말라. 시에서 소재주의는 시단의 특정한 경향을 답습하거나 이미 규범화한 유파의 문법을 비판 없이 추종할 때, 그리고 글쓰기의 목적의식이 지나치게 앞설 때 생겨난다. 초보자의 경우에는 시가 생겨나는 지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때 곧잘 소재주의에 빠진다. 그러므로 ‘무엇’을 쓰려고 1시간을 끙끙댈 게 아니라 단 10분이라도 ‘어떻게’ 풍경과 사물을 바라볼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아이칭(艾靑)의 생각도 우리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 “문제는 당신이 무엇을 쓰는가에 있지 않고, 당신이 어떻게 쓸 것이며, 어떻게 이 세계를 볼 것이며, 어떠한 각도에서 세계를 볼 것이며, 당신이 어떠한 태도로 이 세계를 포용할 것인가에 있다.” 여기 시의 소재로서 한 알의 사과가 있다. 당신에게 이 한 알의 사과에 대해 시를 쓰라는 과제가 떨어졌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은 적어도 다음에 제시하는 열 가지 정도의 행동을 수행하거나 사유를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시의 첫 줄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1) 사과를 오래 바라보는 일 2) 사과의 그림자를 관찰하는 일 3) 사과를 담은 접시를 함께 바라보는 일 4) 사과를 이리저리 만져보고 뒤집어보는 일 5)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어보는 일 6) 사과에 스민 햇볕을 상상하는 일 7) 사과를 기르고 딴 사람과 과수원을 생각하는 일 8) 사과가 내 앞에 오기까지의 길을 되짚어 보는 일 9) 사과를 비롯한 모든 열매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일 10) 사과를 완전하게 잊어버리는 일            (안도현/ 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제목'은 시쓰기의 처음이자 마지막/ 안도현시론2 나는 음식점을 고를 때 간판을 유심히 보는 편이다. 간판에 적힌 상호, 간판의 크기, 글자체, 디자인에 따라 그 음식점의 역사와 음식의 맛을 짐작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원조’라는 말이 붙어 있으면 일단 의심한다. 역사성의 과잉이거나 후발주자의 과장 광고일 수도 있다. 또 무슨 텔레비전에 출연했다고 요란하게 써 붙인 곳이 있으면 경계한다. 그게 설혹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내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맛없으면 돈을 받지 않는다는 문장도 아주 싫어하며, 할인가격을 보란 듯이 써 붙여 놓은 음식점도 꽝이다. 또 있다. 터미널 앞 식당가처럼 한 집에서 조리하는 음식의 수가 많아도 기피 대상이다. 최근엔 ‘웰빙’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간판을 달고 있는 보리밥집에는 아예 들어가지 않는다. 웃기고 있네, 비웃어주고 만다. ◇백석 시엔 멧새 깃털도 없어 후대 독자들 궁금할 수밖에 한 끼의 밥을 위해서도 이모저모 간판부터 살피는데, 하물며 시에서 간판이라고 할 제목을 어찌 소홀히 다룰 수 있으랴. 시의 제목을 이승하는 ‘첫인상’이라 했고, 강연호는 ‘이름’이라 하였다. 연암 박지원은 글을 병법에 비유하면서 “글의 뜻은 장수와 같고, 제목은 맞서 싸우는 나라와 같다”()는 문장을 남겼다. 그만큼 제목은 중요하다. “한 편의 시작품은 여러 부분이나 요소들이 모여 전체의 구조를 이루는데, 이때 제목은 전체 구조를 한 곳으로 응집하는 역할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구조의 확장에 기여하기도 한다.”(강연호, ) 처마 끝에 명태를 말린다 명태는 꽁꽁 얼었다 명태는 길다랗고 파리한 물고긴데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볕은 서러웁게 차갑다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명태다 문턱에 꽁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백석의 시다. 이 시의 제목은 이다. 그런데 시의 전면에 멧새 소리는커녕 멧새가 빠뜨리고 간 깃털 하나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처마 끝의 명태와 이를 동일시 한 시적 화자 ‘나’만이 꽁꽁 얼어 있을 뿐이다. 백석은 왜 이런 제목을 택했을까? 독자가 전혀 뜻하지 않은 의외의 제목을 제시함으로써 제목과 내용 사이에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노리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시각과 촉각이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이 시의 배경음악으로 멧새 소리를 삽입해 청각적 효과를 가미한 것일까? 후대에 이 시를 읽는 독자인 우리가 심심해 할까봐 일부러 그랬을까?(이 짧은 시 한 편을 두고 이런저런 생각을 접었다 폈다 하는 이유도 시에서 제목이 그만큼 중요한 탓이다) 김춘수는 (자유지성사)에서 시인이 제목을 붙이는 방식에 따라 시인의 태도가 결정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시를 쓸 때 제목을 붙이는 세 가지 태도가 있다. 첫째는 미리 제목을 정해 두는 것, 둘째는 시를 완성한 뒤에 제목을 다는 것, 셋째는 처음부터 제목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다. 그는 스타일리스트답게 시의 의미와 내용을 중시하는 휴머니스트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말한다. “제목이 정해져야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내용에 결백한 나머지 시의 기능의 중요한 면들을 돌보지 않는 일”이 있다며 시의 형식에 따라 내용이나 제목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무제’있지만 좋은 시 드물어 은근히 암시하되 언뜻 비치게 제목을 처음부터 붙이든 나중에 붙이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제목을 어떻게 붙일까 고심하는 그 과정이 창작자에게는 중요하다. 제목을 붙이는 일이 시 쓰기의 처음이면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라. 제목이 시의 성패를 좌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라. 제목을 고치거나 바꾸는 사이에 시는 진화하거나 퇴보하거나 둘 중 하나의 길을 간다. 그것은 제목이 시의 내용과 서로 밀고 당기는 관계에 놓여 있어서다. 실제로 제목을 이렇게 붙여야 한다는 시인들의 조언도 적지 않다. “시의 내용이 추상적일 때는 구체적인 제목으로, 구체적일 때는 추상적인 제목을 붙여주면”(박제천, , 문학아카데미>) 좋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이지엽은 “제목을 직접 드러내지 않는 것이 시의 격조와 긴장을 높이는 데 효과적”이라면서 “궁금증을 유발하게 하는 방법”과 “술어를 생략하거나 놀라움을 나타내거나, 감탄형으로 처리하는 방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성적 호기심이나 관능적인 욕구를 자극하는 방법으로 선정적인 제목을 다는 경우”도 예를 든다.(, 고요아침) 그런데 아무리 고민해 봐도 마땅한 제목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나? 그럴 때는 가 기다리고 있다. 대구 근교 과수원 가늘고 아득한 가지 사과빛 어리는 햇살 속 아침을 흔들고 기차는 몸살인 듯 시방 한창 열이 오른다. 애인이여 멀리 있는 애인이여 이런 때는 허리에 감기는 비단도 아파라. 박재삼의 시 다. 사실 나는 평소에 시든 그림이든 작품 앞에 ‘무제’라는 제목을 턱, 갖다 붙이는 걸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제목이 없다니! 그건 자기 작품에 대해 창작자가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소리로 들린다. ‘무제’라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제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제’를 제목으로 내건 작품 치고 제대로 된 작품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 대체로 예술가연 하는 허위의식이 발동하거나, 작품의 미숙성을 눈가림하거나, 작가의 상상력이 부족할 때 궁여지책으로 갖다 붙이는 제목이 ‘무제’를 제목으로 단 시나 그림일 터이다. 특히 비구상 계열의 그림이 이런 제목을 붙이고 화랑에 걸려 있는 것을 보면 작품을 감상하고 싶은 마음이 순식간에 달아나 버린다. 그런데 나의 이런 편견을 부분적으로 수정하도록 만든 시가 박재삼의 다. “허리에 감기는 비단”이 왜 아픈지 나도 아니까! 대체로 제목은 시의 중심 소재를 앞에 제시하는 경우(밋밋하고 단순해서 재미는 없지만 내용보다 어깨를 낮춤으로 해서 내용을 돋보이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시간이나 공간적인 배경을 취하는 경우(‘-에’'-에서’가 붙은 모든 제목이 그렇다), 주제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경우(김중식의 을 읽어보라), 첫 행을 아예 앞에다 내세우는 경우(최승자의 가 대표적이다)가 있다. 어떤 경우든 간에 호기심을 유발하되 난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며, 무겁되 가볍지 않게 해야 할 것이며, 은근히 암시하되 언뜻 비치게 해야 할 것이다. 다시 연암의 호쾌한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라. “억양을 반복하는 일은 맞붙어 싸워 죽이는 일과 같고, 제목의 뜻을 드러내 보인 다음 마무리하는 것은 먼저 성벽에 올라가 적군을 사로잡는 일과 같다. 짧은 말이나 글로 깊은 뜻을 담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는 일은 함락된 적진의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 일과 같고, 글의 여운을 남겨 놓는 것은 전열을 잘 정비하여 개선하는 일과 같다.”               (안도현/ 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시와 연애하는 법'/ 안도현시론3                                                    ◇ 한 줄을 쓰기 전에 백 줄을 읽어라 좋은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독(多讀)· 다작 (多作)·다상량(多商量), 곧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는 이 세 마디의 가르침은 10세기 중국 북송 때의 문인 구양수가 남긴 말이다. 자그마치 천 년 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때로 글쓰기를 가르치는 사람에 따라서 이 세 가지의 순서를 편의대로 바꾸기도 한다. 어떻게 하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세 가지를 한꺼번에 하기엔 실로 벅차기 짝이 없다. 시간도 많지 않다. ◇ 나는 시를 쓰려는 당신에게 색다른 세 가지를 주문하려 고 한다. 첫째, 술을 많이 마셔라. 그렇다고 혼자 마시면 안 된다. 술이란 타인과의 소통을 위한 매개이지 주정을 부리기 위한 약물이 아닌 것이다. 술을 마시면서 지루한 일상 너머를 꿈꾸는 일은 시인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시인은 일상이라는 유리그릇을 박살내는 자가 아니다. 유리그릇에 빗금을 긋는 자이기 때문이다. 한 편의 시를 쓰려거든 백 잔의 술을 마신 다음에 쓰라. 그렇다고 해서 술이 깨지 않은 비몽사몽의 시간에 펜을 잡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 ‘취중진담’이라는 말은 있어도 ‘취중진문’이라는 말은 없다. 나는 지금도 ‘주력(酒力)은 필력(筆力)’이라는, 세상에 있지도 않은 말로 학생들을 꼬드겨 술잔을 권한다.(단, 마시기 싫어하는 사람한테는 권하지 않으며, 그런 사람하고는 상종할 일이 별로 생기지 않는다.) 둘째, 연애를 많이 하라. 천하의 바람둥이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무릇 모든 연애는 나 아닌 것들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연애시절에는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연애의 상대와 자신의 관계를 통해 수없이 많은 관계의 그물들이 복잡하게 뒤얽힌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리고 훌륭한 연애의 방식을 찾기 위해 모든 관찰력과 상상력을 동원하기 마련이다. 연애는 시간과 공을 아주 집중적으로 들여야 하는 삶의 형식 중의 하나인 것이다. 연애감정도 없이 시를 쓰려고 대드는 일은 굳은 벽에 일없이 머리를 부딪치는 것과 같다. 담쟁이넝쿨은 담하고 연애하면서 담을 타고 오른다. 셋째, 시 한 줄을 쓰기 전에 백 줄을 읽어라. 많이 쓰지 말고, 많이 생각하지 말고, 제발 많이 읽어라. 시집을 백 권 읽은 사람, 열 권 읽은 사람, 단 한 권도 읽지 않은 사람 중에 시를 가장 잘 쓸 사람은 누구이겠는가? 초보자가 쓴 시의 성패는 분명히 독서량에 비례한다. 여기에서 시를 많이 읽는다는 것은 쓰기의 준비 단계이며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좋은 시를 접하지 않고서는 좋은 시를 선별할 수 없으며, 좋은 시를 쓸 수도 없다.(좋은 시가 무엇인가 하는 논의는 다음으로 미루자.) 조선 후기 실학자 최한기는 그의 방대한 저서 에서 “문장은 하루아침에 쌓을 수 있는 잔재주가 아니라 오랜 세월 노력이 쌓여야 한다”고 했다. 정약용은 두 아들에게 부치는 편지 형식의 글을 통해 읽기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한 바 있다. “삼대 이상 의원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병 치료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문장 또한 그렇다. 반드시 오래도록 노력한 다음에야 능숙하게 글을 지을 수 있다. 글을 쓰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세상을 다스리는 경학(經學)을 읽어서, 문장의 기초와 뿌리를 단단하게 세워두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역사 관련 서적들을 두루 공부하여 나라와 개인이 흥망성쇠하는 근원을 알아야 하고, 일상생활에 유용한 실용 학문에도 힘을 쏟아 옛사람들이 남겨 놓은 경제서를 즐겨 읽어야 한다. …내가 말한 대로 해 본 다음에 안개 낀 아침이나 달 밝은 밤, 짙은 나무 그늘과 가랑비 내리는 때를 만나면 문득 감흥이 일어나 시를 읊게 되고, 문장의 구상이 떠올라 글이 써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과 땅, 자연의 소리가 맑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생동감 있는 글을 짓는 문장가의 창작 활동이다.” 나는 시창작 강의 첫 시간에 반드시 읽어야 할 시집 목록을 프린트해서 학생들에게 나눠준다. 모두 200권쯤 된다. 목록을 받아든 학생들의 입이 딱 벌어진다. ‘어느 세월에?’ 하는 표정들이다. 내가 강의하는 건물에는 국악과가 있어 가야금이나 거문고 따위를 들고 오르내리는 학생들이 자주 보인다. 시를 쓰는 사람에게는 시집이 악기라고 설명한다. 시집은 악기처럼 비싸지 않고, 무겁지 않고, 고장이 나지도 않는다. 시집을 읽기 위해서는 연주 연습을 하듯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정하지 않아도 된다. 언제, 어디에서든 가방에서 잠깐 꺼내 읽을 수 있다. 고등학교 때는 시집을 읽다가 마음에 쏙 드는 시를 만나면 노트에 적어두었다. 그렇게 필사한 시가 대학노트 세 권에 가득하였다. 지금도 문예지를 읽다가 좋은 시를 만나면 반드시 따로 옮겨 적어 둔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도 필사를 권한다. 아니, 거의 강요한다. 한 학기를 마칠 때쯤이면 수백 편의 시가 적힌 자기만의 시집이 오롯이 남으니, 꿩 먹고 알 먹는 격이다. 다양한 시를 읽는 것은 다양한 음식을 맛보는 것과 같다. 나는 음식 만드는 일을 좋아하는데, 이것은 내가 요리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음식을 먹으면서 거기에 들어간 재료와 음식의 빛깔과 요리방법에 대해 꼼꼼하게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다. 그래서 한 번 먹어본 특이한 음식은 집에서 혼자 요리를 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 음식을 먹는 행위는 훌륭한 관찰의 소재가 되고, 그 기억은 또한 멋진 시의 재료가 되는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어본 사람이 맛있는 음식을 만들 줄 아는 법이다. 곧 맛있는 시를 많이 음미해본 사람이 맛있는 시를 쓸 수 있는 이치와 같다. 그런데 막상 주위에 시 한 편도 시집 한 권도 옆에 없다면 어찌해야 하나? 그때는 귀를 열고 들으면 된다. 세상의 여러 소리를 듣는 행위도 책을 읽는 행위와 별로 다를 게 없다. 기형도는 어릴 적에 열무를 팔러 시장에 간 엄마를 기다리며 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새어드는 빗소리를 들었다. 황동규는 (아래 시)에서 빗소리를 듣기 위해 세상 뜰 때 귀만 두고 가겠다고 한다. 손과 발과 입과 눈은 가지고 가겠다고 한다. 오직 귀만 두고 가는 이 마음 역시 세상을 귀로 읽으려는 귀한 자세다. 내 세상 뜰 때 우선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입을 가지고 가리. 어둑해진 눈도 소중히 거풀 덮어 지니고 가리. 허나 가을의 어깨를 부축하고 때늦게 오는 저 밤비 소리에 기울이고 있는 귀는 두고 가리. 소리만 듣고도 비 맞는 가을 나무의 이름을 알아맞히는 귀 그냥 두고 가리.                           (안도현/ 시인·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시를 쓰지 말고 시적인 것을 써라'/ 안도현시론4                                                       좋은 시란 어떤 시를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좋은 시란 이것이다, 라고 정의하는 순간, 모든 시는 그 낡은 기준에 갇혀버리는 나쁜 운명을 맞게 된다. 시가 늘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양식이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좋은 시란 이것이다, 라고 감히 정리해본다면 어렴풋하게나마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새로운 언어로 표현된 시. 둘째, 새로운 인식을 도출하는 시. 셋째, 새로운 감동을 주는 시. 여기에다 시인의 시작 태도가 공자의 말씀대로 ‘사무사’(思無邪) 바로 그것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의 감동은 일차적으로 시인과 독자와의 교감, 즉 소통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소통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모든 시가 다 울림을 갖는 것은 아니다. 허망한 소통보다는 고독한 단절이 오히려 서로를 행복하게 할 때도 있으니까 말이다. 시를 보는 미학적 관점과 언어에 대한 경험이 자연스럽게 일치할 때 시적 감동은 증폭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언어란 시인과 독자 사이에 놓인 가교인 동시에 보이지 않는 훼방꾼이기도 하다. 저 유서 깊은 ‘낯설게 하기’는 그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자 할 때 여전히 유효한 시적 방법이다. 독자를 편하게도 하고 불편하게도 하는 시, 이것인가 싶으면 저것인 시, 바른가 싶으면 이미 비뚤어져 있는 시…. 좋은 시를 쓰고 싶다면 당신은 표현의 리얼리티 속에서 감동의 요소를 찾으려고 끙끙대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일차적으로 당신은 가장 물기 많은 말, 가장 적합한 어휘를 행간에 배치하기 위해 헤매야 한다.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언어가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만날 때까지 찾고, 지우고, 넣고, 비틀고, 쥐어짜고, 흔들기를 마다하지 마라. 적어도 당신 하나쯤은 감동시킬 때까지 언어하고 치고 받고 싸워라. 완벽한 세계관과 정돈된 문학적 관점이 훌륭한 시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자신의 언어와 사투를 벌이는 동안 하나씩 껍데기를 벗고 성장하는 존재이다. 〈텍스트를 시가 되게 하는 건 그 안에 있는 어떤 ‘시적인 것’〉 황지우는 ‘시’를 쓰지 말고 ‘시적인 것’을 찾아 쓰겠다고 말한 적 있다. “어떤 텍스트를 얻은 문장을 시가 되게 만드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어떤 시적인 것”(, 한마당) 때문이라고. 이 말은 이미 ‘시’로 규정된 모든 규격화된 정의에 대한 부정을 통해 자신과 시를 갱신해 나가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그러므로 ‘시적인 것’은 딱히 정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시인에게 모험과 도전을 요구하는 지침으로 이해해야 한다. ‘시적인 것’은 살아서 꿈틀거리는, 손에 잡는 순간 또 달아나버리는 유기체와도 같은 것이다. 이것을 일찍이 간파한 고은 시인은 “시는 심장의 뉴스다”라고 멋들어진 화두를 토하기도 했다. 중국 송대의 시인 강기는 그의 시론집 에서 시에는 네 종류의 높은 경지가 있다고 했다. 첫째는 이치가 높은 경지요, 둘째는 뜻이 높은 경지요, 셋째는 상상력이 높은 경지요, 넷째는 자연스러움이 높은 경지다. ‘시적인 것’을 탐구하는 우리에게 꽤 유익한 사색을 제공해주는 시론이다.  그는 먼저 “막혀 있는 듯하나 실제로는 통하는 것을 이치가 높은 경지”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이치란 인간의 도리와 자연의 섭리를 두루 포괄하는 개념이다. 정경융합(情景融合)을 중요한 시의 가치로 여긴 동아시아의 시학과 동일성의 미학을 강조한 서양의 시학이 모두 이런 경지를 향한 시적 모색이라 할 수 있겠다. 천둥번개 지나간 곡우날 아침, 때아닌 우박과 꽃잎 사이 들숨과 날숨 부딪쳐 살아 오르며 낯선 우박이 자기를 녹여 꽃잎을 깨우네 낯선 꽃잎이 자기를 찢어 우박을 맞네 잘못 든 길을 알아차리고도 설레설레 봄꽃은 번지네 이안의 이다. 우박은 꽃잎을 찢는 공격적 주체가 아니고, 꽃잎은 우박에 찢어지는 소극적 객체도 아니다. 엄연한 자연의 질서 앞에 주체와 객체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우박은 꽃잎을 깨우고 꽃잎은 우박을 맞이할 뿐이다. 낯선 우박과 꽃잎 사이의 작지만 소중한 소통의 숨길이 우주 전체의 봄을 불러온다는 이치를 말하고 있는 시다. 이때 이 시를 읽는 독자의 마음속으로도 분명 “설레설레” 봄의 기운이 스며들 것이다. 〈내 자신의 언어 만날 때까지 찾고 넣고 비틀고 흔들어라〉 두 번째로는 “표현해낸 것이 표면적인 의미를 초월하게 되는 것을 뜻이 높은 경지”라고 했다. 문태준의 짧은 시 한 편()을 보자. 무논에 써레가 지나간 다음 흙물이 제 몸을 가라앉히는 동안 그는 한 생각이 일었다 사라지는 풍경을 본다 한 획 필체로 우레와 침묵 사이에 그는 있다 표면적으로는 써레질이 끝난 뒤 흙물이 가라앉는 모습이 시의 소재가 되고 있다. 흙물이 그저 가라앉는 게 아니라 “제 몸을 가라앉히는 동안”이라고 말하는 것도 범상하지 않지만, 그것을 “생각이 일었다 사라지는 풍경”으로 확장하는 상상력은 놀랍다. 그리하여 “우레와 침묵 사이에” 있는 존재의 고독과 무상함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여기에서 황새는 단순한 조류가 아니라 드높은 정신주의의 한 표상으로 읽힌다.(‘써레’와 ‘우레’라는 유사한 음성기호가 동일한 의미로 나란히 서 있는 언어유희도 볼만하다.) 세 번째로 “깊어 분명하지 않은 것을, 마치 연못이 맑아 밑바닥이 다 보이듯이 훤하고 분명하게 써내는 것을 상상력이 높은 경지”라고 했다. 나희덕의 시 를 보자. 두 딸과 꼽추인 어미 사이에 이어진 보이지 않는 실을 이토록 선명하고 감동적으로 부조한 것은 시인의 상상력이다. 그 실은 급기야 모녀를 바라보는 화자에게까지 연결되고, 독자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것이다. 세 자매가 손을 잡고 걸어온다 이제 보니 자매가 아니다 꼽추인 어미를 가운데 두고 두 딸은 키가 훌쩍 크다 어미는 얼마나 작은지 누에 같다 제 몸의 이천 배나 되는 실을 뽑아낸다는 누에 저 등에 짊어진 혹에서 비단실 두 가닥 풀려 나온 걸까 비단실 두 가닥이 이제 빈 누에고치를 감싸고 있다 그 비단실에 내 몸도 휘감겨 따라가면서 나는 만삭의 배를 가만히 쓸어안는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도록 만드는 사람이 시인이다. 다음은 김종삼의 인데, 이 시에서도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연결된 실을 본다.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 10전 균일 상밥집 문턱엔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 일제 때 10전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밥 한 상에 10전이라니 그리 많지는 않은 액수였을 것이다. 분명 구걸로 얻게 되었을 10전짜리 두 개를 부모의 생일 밥값으로 당당하게, 그러나 가련하게 내미는 어린 소녀의 손목이 보일 듯하다. 그 눈망울도 보일 듯하다. 이렇게 서럽도록 아름다운 시를 읽다가 보면 사랑이니 효도니 인정이니 하는 말들이 얼마나 낡고 뻔뻔한 소리인지 깨닫게 된다. “특이하지도 않고 기이하지도 않으면서 문채를 벗어 떨치고, 그것이 오묘하다는 것만을 느낄 뿐 그 오묘하게 되는 까닭을 알 수 없는 것을 자연스러움이 높은 경지”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묻자. 시인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시적이라는 말을 배반하는 방식을 통해 시적이라는 말을 진화시킬 수는 없을까”(이원, 2007년 가을호)를 고민하는 사람이 시인이 아닐까?                (안도현/시인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단순하고 엉뚱한 상상력으로 놀아라'/ 안도현시론5 비유는 일상적 언어 규범에서 일탈해 새로운 의미를 형성하는 언어 용법이다. 은유·직유·제유·환유의 뒷글자인 ‘유’(喩)는 ‘말하다’는 뜻의 ‘구’(口)와 ‘옮기다’라는 뜻을 가진 ‘유’(兪)의 결합이다. 즉 비유란 말의 원래 뜻을 옮겨 다르게 표현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개나리꽃은 노랗다”는 일상 언어를 “개나리꽃은 병아리 부리다”라는 비유적 표현으로 바꿔보자. 이 ‘병아리 부리’ 속에는 노란 색깔 이외에도 개나리꽃의 모양, 꽃잎의 연약함, 봄의 이미지 등이 첨가된다. ‘노랗다’는 일상 언어의 평이함이 전면 확장되어 의미의 전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상과 대상 연결하는 ‘은유' 비틀고 꼬며 덧칠해야 할까 여러 가지 비유 중에 은유는 차별성 속에서 동일성을 찾는 수사법 중의 하나다. 옥타비오 파스는 “시는 대립적인 것들의 역동적이고 필연적인 공존뿐만 아니라, 그들 사이의 최종적인 동일성을 선언한다”()고 말했다. 누가 뭐래도 시는 은유의 덩어리다. 은유적 표현을 한정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시라는 양식이 은유에 기대어 태어났고 성장하고 있는 존재다. 그런데 때로 은유의 폐해를 지적하는 연구도 우리의 흥미를 끌어당긴다. 구모룡의 에 따르면 시는 근대적 개념인 세계의 자아화나 동일성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은유는 다른 대상을 자기화하는 수사학이다. 다시 말해서 은유는 대상과 대상을 강제적으로 연결한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억압하는 논리이다.” 이러한 은유적 욕망이 근대에 와서 주체중심주의, 이성중심주의, 남성중심주의를 낳았다는 진단이다. 이처럼 “타자에게 폭력적”인 은유에 대한 대안으로 유기론을 바탕으로 하는 제유 시학의 가능성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말을 비틀고 교묘한 표현을 일삼는 이들에 대한 비판에 일찍이 허균도 가세했다. “에 실려 있는 여러 편의 명문장을 보라. 모두 문장으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어려운 말로 교묘하게 꾸민 구절이 있는가? (중략) 제자백가서만 보더라도 모두 자신들의 도리를 논했기 때문에 그 글은 쉽고 간결했다. 그런데 후대에 와서는 문장과 도리가 둘로 쪼개져 마침내 어렵고 교묘한 말로 글을 꾸미는 일이 생겨났다. 이것이야말로 문장의 재앙이다.”(허균 ) 나도 땅을 가지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민병하 선생님도 수원 근처에 오천평이나 가졌는데…… 싼 땅이라도 좋으니 한 평이라도 땅을 가지고 싶다. 땅을 가졌다는 것은 얼마나 좋으랴…… 땅을 가지고 싶지만, 돈이 있어야 한다.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 땅을 가지고 있으면, 초목을 가꾸고, 꽃을 심겠다. 천상병의 시 이다. 시인은 가진 땅이 한 평도 없어 “나도 땅을 가지고 싶다”고 직설적으로 욕망을 드러낸다. 땅을 가지기 위해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소유욕을 숨기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이라 할 만하다. 어떤 이들은 도대체 이런 게 무슨 시인가, 되묻고 싶을 것이다. 이 시에는 시적인 비유도 없고 시적인 발견도 없다고, 이런 시라면 하룻밤에도 수십 편을 쓰겠다고 투덜댈지도 모르겠다. 천상병이라는 유명한 시인이 쓴 것이니까 좋은 시라고 추어올리는 게 아니냐고 볼멘소리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땅을 소유하고자 하는 시인의 욕망은 “초목을 가꾸고,/ 꽃을 심겠다”는 아주 작지만 근원적인 꿈을 이루기 위해서다. 땅을 가진 뒤에 땅값이 오르기를 기다리거나 거기에 부동산을 짓겠다는 투기 욕망 따위는 일절 없다. 오히려 그런 심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시인은 그저 초목과 꽃을 심겠다고 한다(그러다 보면 땅값이 오르겠지, 하고 의심한다면 당신은 정말 속물이다). 이러한 단순성의 미학이 천상병이라는 시인을 만들었다. 이 시에서 무욕의 욕망을 읽고 은유 아닌 은유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바로 은유의 성채 입구에 도달한 사람이다. 그러니 시를 쓰기 위해 책을 뒤져 은유를 배우지 마라. 은유를 잘못 배우면 말을 요리조리 비틀고 무슨 문장이든 꾸미려 하고 교묘하게 꼬는 일이 시의 전부인 줄 알게 된다. 나는 그것을 ‘비유의 덧칠’이라고 부른다. 비유를 덧칠하지 않고 단순한 상상력의 깊이를 아는 사람은 저녁에 술 마시러 나갈 때 천상병의 이런 시 구절을 흥얼거릴지도 모른다. “저녁 어스름은 가난한 시인의 보람인 것을……”( 일부분) 내 늙은 아내는 아침저녁으로 내 담배 재떨이를 부시어다가 주는데, 내가 “야 이건 양귀비 얼굴보다도 곱네. 양귀비 얼굴엔 분때라도 묻었을 텐데?” 하면, 꼭 대여섯 살 먹은 계집아이처럼 좋아라고 소리쳐 웃는다. 그래 나는 천국이나 극락에 가더라도 그녀와 함께 가 볼 생각이다. 미당이 작고하기 두 해 전, 1998년 1월호에 발표한 시 다. 그 한 해 전에 나온 마지막 시집 (시와시학사)도 그렇지만 말년에 미당은 여든을 훨씬 넘은 나이에 놀랍게도 소년의 목소리를 얻었다. 어른은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세상사에 대해 이것저것 따지고 분석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소년은 단순하게 세상을 읽으려고 한다. 삶의 갈등과 고뇌에 물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당의 시에 나타나는 이 단순성은 이 세상을 한 바퀴 휘휘 돌아본 뒤에 마침내 다다른 시선(詩仙)의 경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문학과 인생의 산전수전 끝에 미당은 천진성이라는 새로운 문학적 눈을 갖게 된 것이다. ◇특정한 틀에 갇히지 말고 천진난만한 상상 표현하길 내 아내는 여기 등장하는 ‘늙은 아내’와 달리 내 담배 재떨이를 아침저녁으로 비워본 적이 별로 없었다. 집에서 내 재떨이는 담배꽁초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버린 휴지 조각, 방바닥에서 집어낸 머리카락, 손톱 따위들을 담는 쓰레기통쯤으로 취급되어 왔었다. 나는 이 시를 아내에게 보여주었다. 아내는 시를 보고 뭔가 찔리는 게 있었던 모양이다. 그 다음날부터는 정말 내 재떨이도 확연히 달라졌다. 아침저녁으로 담뱃재 하나 묻어 있지 않은 재떨이를 보면서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야 이건 양귀비 얼굴보다도 곱네. 양귀비 얼굴엔 분때라도 묻었을 텐데?” 담배 재떨이는 대체로 둥글다. 그 둥근 모양과 부부 관계가 알맞게 버무려진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보름달을 떠올린다. 모자라는 것도, 더 채워야 할 것도 없는 보름달의 원형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 닿아야 할 사랑의 종착지를 상징한다. “아 내곁에 누어있는 여자여./ 네 손톱 속에 떠오르는 초생달에/ 내 戀人(연인)의 꿈은 또 한 번 비친다.”(〈눈 오시는 날〉 일부분) 그동안 미당의 시에 숱하게 등장하던 초생달의 이미지는 이 시에 이르러 비로소 환한 보름달로 가득 차올랐다. 미당은 자연스럽게 보름달의 세계를 갖게 되었다. 단순함의 힘이다. 나주 들판에서 정말 소가 웃더라니까 꽃이 소를 웃긴 것이지 풀을 뜯는 소의 발밑에서 마침 꽃이 핀 거야 소는 간지러웠던 것이지 그것만이 아니라 피는 꽃이 소를 살짝 들어 올린 거야 그래서, 소가 꽃 위에 잠깐 뜬 셈이지 하마터면, 소가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한 것이지 윤희상의 이다. 근래 이 시를 읽고 한참 동안 행복했다. 특정한 개념과 틀에 갇히지 않은 상상력이 이런 유쾌한 시를 생산했다. 엉뚱함의 힘이다. 꽃이 소를 웃겼다고, 소의 발바닥을 간질였다고, 연약한 꽃이 육중한 소를 살짝 들어 올렸다고 한다. 정말 소가 웃을 일이다. 세상에 시인이 아니면 누가 이런 엉뚱한 발언을 하랴.               (안도현/ 시인,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사랑하라 그러면 써질지니'/안도현시론6 ● '몇몇 시인들이 들려주는 시작법' “시인은 진실을 말해야 한다.” 중국의 현대시인 아이칭의 에 나오는 제일 첫 문장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언어를 다는 저울을 하나씩 가지고 있으므로 시인은 양심을 속이거나 거짓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한편으로 “표연히 흩어지거나 순간에 지나가버리는 일체의 것을 고정시켜 선명하게, 마치 종이 위에 도장을 찍듯이 또렷하게 독자의 면전에 드러나게” 하는 시의 기교를 함께 강조한다. 내용과 형식의 조화를 중시하는 이러한 견해는 오래 전부터 내려온 중국 시론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정경융합론’을 펼친 왕부지의 시론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정(情)과 경(景)은 이름은 둘이지만, 실제로 그것은 분리될 수 없다. 시를 묘하게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은 양자를 자연스럽게 결합시킬 수 있어 가장자리를 남기지 않는다. 정교한 시는 정 가운데 경을 나타내고, 경 가운데 정을 나타낼 수 있다.” (류워이 지음, 이장우 옮김, )고 했다.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이덕무도 문장이란 “굳세면서도 막힘이 없고, 시원스럽게 통하면서도 넘치지 않고, 간략하면서도 뼈가 드러나지 않고, 상세하면서도 살찌지 않아야 한다”()는 말로 조화와 통합의 문장론을 내세웠다. 이는 에리히 프롬이 시적인 언어를 “내적인 경험, 감정 및 사고들이 마치 외적 세계에서의 감각적 체험과 사건들인 것처럼 표현된 언어”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마음/말, 진실/기교, 내용/형식, 정/경, 강함/부드러움, 내적 경험/외적 표현 등 모든 이항대립적인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조화와 결합을 이룰 때 좋은 시가 태어나는 법이다. 심지어 시인의 재능/노력도 서로를 격려하고 고무하는 유동적인 것이지 어느 한 쪽으로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다. 한 편의 시는 이처럼 시인들의 고뇌의 집적이며 총화라고 할 수 있다. ● 일상속 느낌 그냥 흘리지 말고 어린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기 그렇다면 시인들은 시를 창작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시를 쓰라고 말하고 있을까? 시작법에 관한 현역 시인들의 조언을 몇 가지 경청해 보자. 강은교 시인은 첫째, 장식 없는 시를 쓰라고 한다. 시는 관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이 구체화되고 형상화되었을 때 시가 될 수 있으므로 묘사하는 연습을 많이 하라고 한다. 둘째, 시는 감상이 아니라 경험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시적 경험이라는 것은 ‘나’를 넘어선 ‘나’의 시를 쓸 때 발현된다는 것. 셋째, 시가 어렵고 힘들게 느껴지는 순간엔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서 시가 처음 다가왔던 때를 돌아보며 시작에 대해 믿음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넷째, 좋은 시에는 전율을 주는 힘이 있으므로 늘 세상을 감동 어린 눈으로 바라볼 것을 주문한다. 다섯째, 자유로운 정신(Nomade)을 가질 것을 당부한다. 정신의 무정부 상태, 틀을 깬 상태, 즉 완전한 자유에서 예술의 힘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여섯째, ‘낯설게 하기’와 ‘침묵의 기법’을 익히라고 제안한다. 상투의 틀에 붙잡히지 말 것, 무엇보다 많이 쓰고 또 그만큼 많이 지우라고 한다.(시인이 에서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러고도 남은 시간은 침묵할 것”이라고 노래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끝으로 ‘소유’에 대한 시인의 마음가짐이 남달라야 한다고 매우 이색적인 의견을 제출한다. 즉 시의 성취를 맛보려면 약간의 결핍현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매사 풍요한 상태에선 시가 나오기 힘들기 때문에 시인이 되려는 사람은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해선 안 된다는 것! 강은교 시인다운 비결이라 하겠다. 최영철 시인은 시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느낌’이므로 이런 느낌들을 그냥 흘려버리지 말고 마음속으로 되새겨 보는 게 시창작의 첫 단계라고 한다. 바람이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면 속으로 ‘바람이 시원하다’고 한번 중얼거려 보라고, 그 다음 단계는, 바람이 어떻게 시원한지를 느껴 보라고 한다. ‘막혔던 가슴속 응어리를 뚫어 주듯이 시원하다’ ‘바람에 실려 그리운 사람의 향기가 전해져 오는 것 같다’처럼.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물과 현상들 모두에게 어떤 느낌을 가지려고 노력하다가 보면 그것들에게 새로운 가치와 생명을 부여하는 시인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는가’를 고민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글을 남과 다르게 쓸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라고 권한다. 그 또한 자신감을 강조한다. 글감을 먼 곳에서 찾지 말고 주변에서부터 찾을 것이며, 자신의 부끄럽고 추한 부분,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치미는 미세한 감정의 변화까지도 숨김없이 보여주어야 독자는 흥미와 감동을 느낀다고 말한다. 좀 비정상적이다 싶을 정도로 잡념이 많은 것도 괜찮은 일이며, 연속극이나 신문기사 한 줄에도 쉽게 눈시울을 적시는 사람이 오히려 시를 쓸 자격이 있다고 등을 두드린다. 대상을 향한 열린 시각, 치우침 없는 균형 감각, 부분을 보더라도 전체 속에서의 관계를 조망하는 태도, 그리고 세계를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무엇보다 앞세운다. 늘 보게 되는 밤하늘의 달과 별도 시인의 눈에 붙잡히면 다음과 같은 아름다움을 획득한다. 하늘로 가 별 닦는 일에 종사하라고 달에게 희고 동그란 헝겊을 주셨다 낮 동안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밤에 보면 헝겊 귀퉁이가 까맣게 물들어 있다 어두운 때 넓어질수록 별은 더욱 빛나고 다 새까매진 달 가까이로 이번에는 별이 나서서 가장자리부터 닦아주고 있다. ―최영철, 전문 장옥관 시인은 시적 발상을 획득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일상생활 속에서 다가오는 수많은 느낌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그것을 붙잡아야 감수성 훈련이 된다. 둘째, 사물들이 항복을 할 때까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마음의 눈을 열어야 한다. 셋째, 어린아이의 눈처럼 사물과 현상을 난생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보는 태도에서 출발해야 상상력이 커진다. 나의 관점을 버리고 대상의 눈으로 나를 보라는 것. 넷째, 자신의 숨기고 싶은 이야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다섯째, 가까운 곳에서 시를 찾는 눈이다. ● '어떡하면 다르게 쓸 수 있을까’ 자신의 숨기고픈 얘기서 출발 실제로 장옥관 시인이 시로 형상화하는 소재는 대단히 특별한 것들이 아니다. 이를테면 벚꽃 아래로 지나가는 개, 자신이 누는 오줌, 포도를 껍질째 먹는 일, 아스팔트에서 본 죽은 새, 옛 애인에게서 걸려온 보험 들어 달라는 전화……. 그러나 이것들이 시인의 눈에 포착되면 경이로운 존재의 실감을 여지없이 드러내며 빛을 뿜는다. 시인은 길을 걷다가 장애인을 인도하는 노란 안내선을 보며 놀랍게도 밑창으로 하나하나 핥으며 걷는 길의 등뼈를 발견한다. 신발의 밑바닥이 길을 핥는다는 통찰을 통해 시적 발상이 어떻게 발화하는지 보여주는 시다. 길에도 등뼈가 있었구나 차도로만 다닐 때는 몰랐던 길의 등뼈 인도 한가운데 우둘투둘 뼈마디 샛노랗게 뻗어 있다 등뼈를 밟고 저기 저 사람 더듬더듬 걸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밑창이 들릴 때마다 나타나는 생고무 혓바닥 거기까지 가기 위해선 남김없이 일일이 다 핥아야 한다 비칠, 대낮의 허리가 시큰거린다 온몸으로 핥아야 할 시린 뼈마디 내 등짝에도 숨어 있다                               ― 장옥관, 전문                   (안도현/ 시인,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새로 발명하지 말고 있는 것을 발견'/안도현시론7 생텍쥐페리의 에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을 바꿔보면, 가장 중요한 진실은 사막의 우물처럼 어디엔가 숨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시학도 이 마음의 눈을 강조한다. 사물의 껍질보다 본질을 꿰뚫어 보라는 것이다. 이른바 ‘관물론’(觀物論)이 그것이다. “관물론은 사물을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는 문제로 귀결된다. 어떻게 볼 것인가? 거기서 무엇을 읽을 것인가? 누구나 보고 있지만 못 보는 사실, 늘 지나치면서도 간과하고 마는 일상 사물에 담긴 의미를 읽어 낯설게 만들기, 나아가 그 낯섦으로 인해 그 사물과 다시금 새롭게 만나기, 이것이 관물론이 시학과 만나는 접점이다. 시인은 격물(格物) 또는 관물의 정신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주변 사물이 끊임없이 발신하고 있는 의미를 늘 깨어 만날 수 있다. 시인은 반란자다. 그의 눈이 포착하는 모든 것은 언제나 새롭다. 새로워야 한다.”(정민, )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곳, 보물 같은 의미들이 숨어있다 우리의 연암도 그림의 리얼리티가 단순히 사실적 묘사에서 오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좋은 그림은 그 물건과 꼭 닮게만 하는 데 있지 않다. 정신이 깃들어 있지 않고는 훌륭한 그림이랄 수 없다. 잣나무를 그리려거든 잣나무 형상에 얽매이지 마라. 그것은 한낱 껍데기일 뿐이다. 마음속에 푸른 잣나무가 서 있지 않고는, 천 그루 백 그루의 잣나무를 그려 놓더라도 잎 다 져서 헐벗은 나목과 다를 바가 없다. 정신의 뼈대를 하얗게 세워라. 마음의 눈으로 보아라.” 또 청대의 시인 심덕잠(沈德潛)도 유사한 말을 남겼다. “대나무를 그리는 자는 반드시 완성된 대나무의 모습이 가슴속에 있어야 한다.” 그렇다. 시인은 사물과 풍경을 바라보는 방식을 고민하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을 눈으로 발견해야 하는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 없는 멋진 이미지와 새로운 의미를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시인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진 ‘발명가’가 아니라 ‘발견자’에 가깝다고 생각하라. 이미 이 세상에 와 있으나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은 것들이 있다. 보물인 데도 보물로 보지 못하고, 숨겨진 의미가 있는데도 의미 를 찾지 못한 것들이 있다. 그것을 찾아내는 사람이 시인 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머리를 굴리며 하늘에서 뚝 떨어 지는 시를 기다리지 마라. 발명하려고 하지 말고 발견하 도록 애써라. 살갗을 보지 말고 뼛속을 보라.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 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 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 졸시 전문 이 시의 소재는 겨울 강가에 눈이 내리는 풍경이다. 실제로 어느 겨울 날 나는 강 가장자리에 살얼음이 깔리기 시작하는 섬진강을 갔고, 그 전날 내린 눈이 살얼음을 하얗게 덮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때 문득 얼음 위에 내린 눈은 왜 녹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물과 눈송이 사이에 어떤 약속이라도 있었던 게 아닐까 궁금했다. 그 둘 사이의 관계를 곰곰 생각하다 보니 이런 시 한 편이 태어났다. 시의 중간에 등장하는 “세찬 강물 소리”는 그 무렵 신문에서 읽은 과학상식 기사에서 힌트를 얻었다. 모든 물소리는 물방울들이 깨지면서 내는 소리가 모인 거라고 했다. 폭포 소리가 큰 것은 물방울들이 더 많이 깨지기 때문이고, 여울에서는 물방울들이 돌멩이에 걸려 깨지기 때문에 물소리가 난다는 것이다.(나는 초등학생들이 보는 과학이나 생물 관련 책을 자주 뒤적거린다. 거기에는 과학적 탐구의 대상인데도 시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 무궁무진하다. 나무가 새로 잎을 피워 내거나 떨어뜨릴 때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는 것, 나무를 노끈으로 묶거나 필요 이상으로 밤에 불빛을 쪼이면 나무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 등은 얼마나 매력적인 시의 소재들인가.) ◇삶을 관찰·발견·반성할 수 있게 가슴속 망원경·현미경 갖추길 시인도 과학자의 관찰에 버금가는 관찰의 자세로 사물을 봐야 한다. 아니, 사물의 현상이나 외피에 집중하는 과학자의 관찰을 넘어 시인은 현상의 이면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과학은 삶을 앞으로 진보시키지만 시는 삶을 반성하게 만드는 양식이기에 더욱 그렇다. “쉽게 지나치는 일상의 한 부분에서 중요한 진리를 발견해 내고 이것을 망각하고 사는 것에 대해 반성을 하고 그 관심이 타인에게로 전해지게 하는 것은 오로지 좀 더 여유롭고 또 세심한 관찰에서 비롯된다.”(김상욱, ) 김명수 시인의 짧은 시 한 편을 읽어보자. “바닷가 고요한 백사장 위에// 발자국 흔적 하나 남아 있었네// 파도가 밀려와 그걸 지우네// 발자국 흔적 어디로 갔나?// 바다가 아늑히 품어 주었네”( 전문). 바닷가 백사장 위에 찍힌 발자국은 누구나 볼 수 있다. 파도가 밀려와 그 발자국을 지우는 풍경도 바닷가에서는 흔하게 보게 된다. 그 당연한 사실에 의문을 가지는 데서 오롯이 시가 생겨난다. 발자국 흔적의 행방을 찾는 이 의문은 ‘품어주다’라는 동사를 만나 아연 시적 깊이를 획득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백사장 위의 발자국을 오래 바라보며 관찰하는 시인의 눈을 만나게 된다. 이 시가 실린 시집의 표제작인 다음 시의 제목은 이다. 관찰의 초점을 어디에 맞춰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이 시에서 ‘바다의 눈’은 바로 ‘시인의 눈’이다. 바다는 육지의 먼 산을 보지 않네 바다는 산 위의 흰 구름을 보지 않네 바다는 바다는, 바닷가 마을 10여 호 남짓한 포구 마을에 어린아이 등에 업은 젊은 아낙이 가을 햇살 아래 그물 기우고 그 마을 언덕바지 새 무덤 하나 들국화 피어 있는 그 무덤 보네 세상을 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먼 곳을 보려면 망원경이 필요하고, 미세한 것을 보려면 현미경이 필요하다. 거대담론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1970~80년대에 시인들은 주로 망원경으로 세상을 보았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시인들은 현미경으로 사물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미시적 세계에 관심을 가지는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광장’을 바라보던 시인의 눈이 ‘골방’으로 이동을 한 것이다. 광장에 서서 망원경을 들고 군중을 바라보던 ‘그’가 골방의 ‘나’로 회귀한 형세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외부를 향해 외치던 3인칭의 목소리를 1인칭의 내면 탐구 형식으로 전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광장의 햇빛을 뒤로 하고 골방의 그늘에 들어앉은 시는 그 이전보다 훨씬 촘촘한 상상력의 밀도를 과시하였다. 그러나 햇빛이 비치지 않는 골방은 음습해서 점점 자폐적 공간으로 바뀌어 가기 마련이다. 광장을 떠나온 자아는 아예 광장을 외면하거나 기억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현 단계 한국시의 자폐적 경향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추측해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시인의 눈과 자세를 다시 한 번 점검할 때가 되었다. 시인은 옆에 항상 망원경과 현미경을 함께 준비해 두어야 하고, 광장과 골방 사이에서 그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말고 그 둘 사이에서 긴장하는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시인이란 시를 빚는 사람이면서 자기 자신을 빚는 사람이므로.                (안도현/ 시인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시 한 편에 이야기 하나를 앉혀라'/ 안도현시론8 비탈진 달동네 개똥이네 집 지붕이 비만 오면 샌다거나 공장에 나가는 순이의 얼굴이 핼쑥하다는 이야기조차 마음 놓고 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 1970년대가 그랬다. 표현의 자유란 애초에 없었으므로 눈앞에 벌어지는 참담한 현실에 대해서도 침묵할 것을 강요받던 시절이었다. 그때 신경림의 가 솟아나왔다. 라는 한 권의 얇은 시집이 조근조근 따지듯이 되새겨낸 세계는 현실의 사실적 묘사 하나만으로도 크나큰 사건이 될 만했다. 얻어 쓴 조합 빚과 술집 색시의 분 냄새와 담뱃진내 나는 화투판이 소외의 장막을 활짝 걷어 젖히고 신선한 시어가 되어 한국문단의 주류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는 화두를 접한 ‘못난 놈’들이 비로소 소주잔을 들이키며 당당히 어깨를 흔들 수 있게 되었다. ◇침묵 강요하는 참담했던 시절, 신경림 ‘농무’ 현실묘사 ‘충격' 가 아직 내 책꽂이에 꽂히기 전, 까까머리 나는 이른바 고등학생 문단을 들락거리며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던 문학 소년이었다. 쥐뿔도 없는 내가 잘난 척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나이에 어른들의 입맛에 맞는 시를 척척 써낼 수 있었기 때문인데, 그 기술을 나에게 전수한 것은 요샛말로 모더니즘이었다. 나는 가증스러울 정도로 치밀하게 언어를 계산하는 데 몰두했다. 삶의 남루와 슬픔을 함부로 까발리지 않아야 한다는 창작의 원칙 같은 것도 나름대로 정해두고 있었다. 나는 그저 향기롭기만 한 시를 쓰고자 했다. 그런데 갑자기 눈물겨운 풍경들이 내 속으로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전에는 나와 어울려 놀았으나, 내가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 담겨 있던 풍경들이 생생하게 다시 인화가 되어 나타났다. 나는 깜짝 놀랐다. “우리는 가난하나 외롭지 않고, 우리는/ 무력하나 약하지 않다”()는 시집 속의 평범한 좌우명 하나가 실제로 시골 큰집 내 사촌형의 책상 앞에 붙어 있을 것만 같았다. 쓸쓸하고 고단한 줄로만 알았던 하찮은 세계가 한 권의 시집 속에 그렇게 눈부신 똬리를 틀고 들어앉아 있다니! 게다가 구태여 말을 비비꼬지 않더라도 시가 태어날 수 있으며, 한 토막의 이야기도 서정을 만나면 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새롭게 배웠다. 서정과 서사의 결합, 즉 시에다 이야기를 담는 우리 시의 전통은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화의 에 대하여 김기진은, 이 작품이 “생생한 소설적 사건”과 “현실, 분위기, 감정의 파악이 객관적, 구체적”임을 근거로 ‘단편서사시’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그는 객관적인 현실을 형상화해야 하는 프롤레타리아 시의 창작방법론으로 이 용어를 제시한 것이다. 이야기가 담긴 서정시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 시가 이용악의 이다. 이 시에서 이용악은 초근목피의 세월이 우리 민족의 생존을 송두리째 뒤흔들던 1930년대의 상황을 어린 화자의 눈을 통해 절실하게 보여주었다. 그 당시 민중들의 생활상을 마치 단편소설처럼 펼쳐 그려낸 것이다. 이 한 편의 시 안에는 오랜 세월 동안 한 가족이 겪어야 했던 슬픈 이야기가 들어앉아 있다. 아이들은 축복도 받지 못하고 태어나 가난하게 살아야 했고, 가장은 가장대로 식솔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야반도주를 감행해야 했다. 떠나지도 못하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북쪽을 향한 발자옥만 눈 우에 떨고’ 있는 것을 바라보아야 했다. 시에 하나의 사건이나 이야기를 들어앉히는 이 방법은 1970년대 김지하에 의해 ‘담시’라는 형식으로 발전했고, 신경림의 를 거쳐 1980년대에는 최두석 등이 ‘이야기 시’라는 개념으로 확대해서 정리한 바 있다. 달빛 밟고 머나먼 길 오시리 두 손 합쳐 세 번 절하면 돌아오시리 어머닌 우시어 밤새 우시어 하이얀 박꽃 속에 이슬이 두어 방울 이용악의 는 전체 5행으로 구성되어 있는 아주 짧은 시다. 언뜻 보면 이 시에는 세부적인 사건도 없고, 특정한 사회상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인물이나 배경도 존재하지 않는다. 장중한 서사적 뼈대를 갖추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짧은 시에도 이야기가 들어 있다.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어머니의 상실감을 아프게 바라보는 화자가 선명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의 슬픔은 ‘이슬이 두어 방울’ 속에 집약되어 있다. 이 두어 방울의 이슬은 이슬의 양이나 슬픔의 무게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이 두어 방울은 현실의 슬픔이 감당할 수 없이 벅차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반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슬픔을 이겨내려는 안간힘의 표상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용악은 ‘달빛·박꽃·이슬’이라는 전통적인 자연서정에다 당대 민중의 보편적인 삶의 고통을 ‘두어’라는 관형사로 압축하고 싶었으리라. 왜 사는가? 왜 사는가…… 외상값. 황인숙의 시 전문이다. 단 석 줄로 삶을 간명하게 정리하는 이 시는 자꾸 읽어볼수록 아프다. 문장의 끝에 찍은 물음표와 말줄임표, 그리고 마침표를 유심히 보기 바란다. 첫 행의 물음표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 두 번째 행의 말줄임표는 이루어지지 않는 꿈의 좌절과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 그리고 마지막 행의 마침표는 삶의 어찌할 수 없음으로 인한 체념, 혹은 그래도 살아가야 할,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이유 따위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시에서 외상값의 의미도 읽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로 확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부모에 대한 빚,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빚, 이웃에 대한 빚… 그런 외상값 때문에 사는 것, 그게 삶이라는 것을 이 시는 말하고 있다. ◇이야기-서정 만나면 ‘시’ 탄생 감정 구성하고 소재 장악해야 이렇듯 아무리 짧은 시라도 한 편의 시에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사건의 전개와 인물의 배치에 관심을 두는 서사지향의 시를 말하는 게 아니다. 때로는 하나의 관념이나 순간적인 이미지의 포착만으로도 충분히 한 편의 시가 탄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시인은 머릿속에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해 놓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소재에 대한 시인의 장악력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사를 쓸 때처럼 시에 도식적인 육하원칙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시의 독자가 바라는 바도 아니다. 그러나 시인의 머리는 매우 세밀한 육하원칙을 바탕으로 시를 통제해야 한다. 시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감정을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감정을 구성한다는 것은 드러내고 싶은 감정의 순서를 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에 시도 하나의 구조물이라고 하며 시에도 기승전결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시의 기승전결 구조가 겉으로 보이지 않고 시 속에 숨어 있는 것처럼 시인은 머리와 가슴 속에 이야기를 쟁여두고 시를 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들었어. 엄마가 깜박 잠이 든 사이 아기는 어떻게 올라갔는지 난간 위에서 놀고 있었대. 난간 밖은 허공이었지. 잠에서 깨어난 엄마는 난간의 아기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이름을 부르려 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 아가,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엄마는 숨을 죽이며 아기에게로 한걸음 한걸음 다가갔어. 그러고는 온몸의 힘을 모아 아기를 끌어안았어. 그런데 아기를 향해 내뻗은 두 손에 잡힌 것은 허공 한줌뿐이었지. 순간 엄마는 숨이 그만 멎어버렸어. 다행히도 아기는 난간 이쪽으로 굴러 떨어졌지. 아기가 울자 죽은 엄마는 꿈에서 깬 듯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달렸어. 아기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는 울음을 그치고 잠이 들었어. 죽은 엄마는 아기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 아랫목에 뉘었어. 아기를 토닥거리면서 곁에 누운 엄마는 그후로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지. 죽은 엄마는 그제서야 마음놓고 죽을 수 있었던 거야. 이건 그냥 만들어낸 얘기가 아닐지 몰라.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나는 비어 있는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어. 텅 비어 있을 때에도 그것은 꽉 차 있곤 했지. 속없이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그날밤 참으로 많은 걸 놓아주었어. 허공 한줌까지도 허공에 돌려주려는 듯 말야.                                  - 나희덕의 전문 좀 길지만 전문을 인용한다. 이 시에는 두 개의 이야기가 있다. 판타지의 힘을 빌린 아기 엄마 이야기 하나와 그 이야기를 듣고 옮기는, 귀가하는 화자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죽음으로 아기를 살리는 모성도 감동적이지만 삶의 어떤 집착으로부터 풀려나는 한 인간(화자)의 모습이 시를 읽는 독자까지도 시의 자장 안으로 끌어들여 해방시킨다. 시인의 뛰어난 소재 장악력이 감동을 낳았다.                (안도현/ 시인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112    시 평론 댓글:  조회:1734  추천:0  2019-07-19
#시론               원관념과 보조관념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도 습관에 관한 얘기를 더 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저의 경우로 말씀드렸듯이 첫번째는 같은 단어는 웬만해서 두번 이상 쓰지 말자 두번째는 인칭을 가능하면 사용하지 말자                 꼭 써야 한다면 한번만 어쩔 수 없을 때 두 번 꼭은 아니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시맛을 내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세번째로 드리고 싶은 말씀 중복된 단어 조심하자 입니다 초심자들의 경우 무엇을 강조하고자 할 때 이런 실수가 나옵니다. 강조를 하고 싶어 쓰다보면 이 말도 그 말이고 그 말도 이 말인데 자꾸 가져다 붙이게 됩니다 그런데다가 한글이 참 어려워서 단어 자체가 그런 것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구름이 운집한 이경우도 사실은 한문으로 운이 구름 운이라 중복이 되는 셈입니다 이런 것들 말고도 역전 앞에서도 전이 한문으로는 앞전자라 유의해야 합니다 아무튼 중복되는 단어를 조심해서 사용하자는 말입니다 지난 시간에  심상법에 관한 말씀을 드렸는데 조금 깊이를 더하려 합니다 어쩌면 진짜 시를 쓰는 법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원관념과 보조관념인데요 1. 원관념이란.? 내가 전하고자 하는 생각이고 2.보조관념은 내가 생각하는 원관념의 뜻이나 분위기가 잘 살도록 보조 해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원관념) 나룻배 (보조관념)                   당신은 (원관념)  행인(보조관념)이 됩니다   * 내 마음은 호수처럼 맑다. -------- ------- ☜ 직유법 * 내 마음은 맑은 호수요. ------------------------- ☜ 은유법 예시로 저의 졸시 배롱나무를 보겠습니다      배롱나무   너 없이 피고 지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 나는 배롱나무가 되었다 중구난방 피는 너를 안고 밑둥이 허예지도록 나는 야위웠는데 시든 날에 여름은 가고 내 모르는 눈물이 동강에 섞이었다 희나리처럼 설운 나는 먹빛 하늘에 살 수 없었으나 명패가 삼문三問인지라 마음만은 겹겹으로 지키었다 사는 것이 한 생만은 아니라서 나는 봄마다 너를 안고 일어나 햇불이 무색하도록 꽃 피게 하리라 이 글에서 너는 원관념 피는 꽃은 보조관념                  나는 원관념 배롱나무는 보조관념입니다   ■  '가려뽑은《무한화서》'/ 이성복 1 시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에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버리면 그 전제前提를 무시하는 거예요. 3 언어는 때 묻고 상스러운 것이지만, 언어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보고 들을 수 없어요. 언어는 어떤 대상이나 목적에 이르는 수단이 아니에요. 언어 자체가 대상이고 목적이에요. 언어를 수단으로 사용하면 언제나 결핍감을 느껴요. 글쓰기는 언어 자신의 탈주이며 모험이에요. 16 우리는 시를 쓰면서도 언어를 불신해요. 불성실한 하인쯤으로 여기는 거지요. 언어는 우리보다 위대해요. 언어를 믿어야 언어의 인도引導를 받을 수 있어요. 18 우리의 세계는 언어로 된 세계에요. ‘언어 너머’ 또한 언어이고, 지금 이 말조차 언어예요. 시인은 알몸으로 언어와 접촉하는 사람이에요. 20 머리는 의식적이고 사회적이지만, 손은 욕망과 무의식에 가까워요. 시는 머리를 뚫고 나오는 손가락 같은 거예요. 걸으면 벌어지고, 멈추면 닫히는 치파오라는 중국 치마 같은 거지요. 24 턱수염을 아래서 위로 쓸어 올릴 때의 느낌 아시지요. 그처럼 말에 저항이 없으면 바로 산문이에요. 시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느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35 말은 작고 가볍게 해야 해요. ‘…임에 틀림없다 must’ 보다는 ‘…일지 모른다 may’가 힘이 있어요. 판단 유보의 어조사 ‘의矣’를 즐겨 쓰는 공자에 비해, 단정적 어조사 ‘야也’를 자주 쓰는 맹자를 ‘아성亞聖’이라 한 대요. ‘성인’에는 좀 못 미친다는 것이지요. ‘삼천년뒤 성인이 다시와도 내 말은 못 바꾼다 百世聖人復起 不易吾言’는 그의 말은 너무 도도해서 힘이 떨어져요. 36 시는 빗나가고 거스르는 데 있어요. 이를테면 ‘서재’와 ‘책’대신 ‘서재’와 ‘팬티’를 연결하는 식이지요. 39 항상 입말에 의지하세요. 가볍고 쉽게 사라지기 때문에, 입말이 소중한 거예요. 우리 누구나의 인생처럼…… 65 시는 단도직입單刀直入이고 단도직입短刀直入이에요. 짧은 칼 한 자루 들고 적진으로 뛰어드는 거지요. 시는 백미터 달리기에요. 그 짧은 시간에 무슨 말을 주저리주저리 하겠어요. 말수를 줄여야 실수도 적어요. 67 가야금 탈 때 손으로 ‘지그시’ 눌러주어야, 깊고 부드러운 음이 나오지요. 멋진 이미지로 장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이 ‘지긋함’이에요. 85 시는 반전反轉의 힘이에요. 행과행, 연과 연사이에 전환이 있어야 해요. 가령 ‘꽃이 피었다 - 새가 울었다’는 연결보다 ‘꽃이 피었다 - 새가 죽었다’는 연결이 힘이 있어요. 86 '아주머니 속에 주머니가 있다’ 이런 식으로 말을 벗겨보세요. 주머니 속에는 또 머니가 있지요. 그러니까 아주머니의 주머니에 돈이 있다는 거잖아요. 이렇게 양파 껍질 벗기듯이 벗기다 보면 나중엔 아무것도 안 남아요. 시는 대상 뒤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99 시적 언어는 치타가 누의 목덜미를 무는 것처럼 대상의 급소를 공격해요. 그 한순간을 위해 '뜨거운 솥을 핥는 개'처럼 자꾸 말을 던져야 해요. 135 멋있는 것, 지적知的인 것, 심오한 것 찾지 마세요. 피상적이고 무의미한 것에서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시예요. 사소한 일상보다 더 잔인한 건 없어요. 죄수를 발가벗겨 대나무밭에 눕혀 놓으면, 나날이 커 올라오는 죽순竹筍에 찔려 서서히 죽어간다고 하지요. 170 시는 천둥벼락이고 집중호우예요. 머뭇거리지 말고 바로 써야 힘이 있어요. 악어가 누의 목덜미를 물고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 보셨지요. '저 미안하지만 손 좀 잡으면 안될까요' 이러지 말고 바로 잡아버리세요. 안 그러면 힘들어져요. 171 항상 보여줘야해요. 내가 왜, 어떻게 우울한지 알려고 글을 쓰는 건데, '나 우울해, 건드리지마!' 이러면 되겠어요. 보이게 쓸 형편이 아니라면 말의 꼬임새라도 만들어야 해요. 그래야 '나'도 살고, '우울'도 살아요. 174 시 쓰기는 봉오리가 피어나거나, 풍선이 부풀어 오르는 것과 같아요. 처음에는 어떤 모양이 나올지 짐작하기 어려워요. 또 시는 재즈 연주와 비슷해요. 과정이 목표이고, 멈추는 곳이 끝나는 곳이에요. 217 시는 침술과 같아요. 문제 되는 부위를 정확히 찔러 통증을 진정시키는 것. 투약이나 수술 없이도, 약간의 아픔만으로 고통을 제거할 수 있다는 거. 시는 한의학과 마찬가지로 오랜 전통이에요. 278 다친 새끼발가락, 이것이 시예요. 307 시는 알고 쓰는 게 아니라, 쓰는 가운데 알게 되는 거예요. 331 막막한 바다에서 어부는 어디에다 그물을 쳐야 할지 알아요. 간절함과 안쓰러움, 부질없음과 속절없음이 시의 포인트이고 기술이예요. 423 시하고 연애하고 같다고 하지요. 더 깊이 들어가면 저절로 빠져나올 텐데, 나오려고 하니까 못 빠져나오는 거예요. 425 이유 없이 상대가 함부로 대하더라도 속상해하지 마세요. 그 대신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살펴보세요. 나한테 잘못이 없으면 그 사람 문제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수신하지 않은 편지는 발신자에게 돌아간다 하잖아요. 430 왜 자기 눈에는 자기가 안 보일까? 470 '당랑거철螳螂拒轍'이란 말이 있지요. 사마귀가 겁 없이 수레 앞에 버티고 서서 한번 해보자고 덤비는 것이지요. 참 말도 안 되는 한심한 짓이지만, 시도 그런 것 아닐까 해요. 아름드리 나무 기둥을 뽑겠다고 부둥켜안고 용써보는 것.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에, 실패 안 할 수밖에 없다는 듯. 이 '올 인'하는 것. 그거라도 안 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겠어요. (이성복 시론집《무한화서》에서)   그림에 빗대어 말할 때, 시는 풍경화라고 할 수 있다. 시를 읽으며 선명하게 그려지는 어떤 풍경이 없다면 모호한 안개 속을 거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정지용 시인의 향수를 읽으면 유년의 한때가 머릴 스치고 지나간다. 향토적이며 묘사적이며 또한 감각적인 시의 전개는 누구나 읽는 순간부터 자신의 풍경을 그리게 된다. ‘향수’의 전개 방식은 후렴구가 반복되는 병렬식 구조로 되어 있으며 선명한 영상과 동시에 감각적 언어의 붓질로 인하여 화면 가득 고향에 대한 아득한 그리움에 젖어 들게 한다. 연마다 시상을 전개하거나 매듭지어 연결하는 영상미적 집약의 서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또한, 한 편 속에 시각적, 청각적, 공감각적, 촉각적 시상과 심상들이 자연스럽게 표현된 개연성과 당위성을 내포하고 있어 글이 아닌 그림을 감상한 듯한 느낌을 전달하고 있다. 누구나 아는 작품이지만 ‘시와 풍경’이라는 글제에 가장 적합한 작품이기에 전문을 인용해본다. 향수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傳說(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향수 / 정지용』전문 인용 문학의 장르는 다양하며 시 또한 시 속의 시 장르는 매우 다양하고 그것은 표현의 기법 이전에 심상의 전이와 시상의 표출 방식에 대한 시인 자신의 다양성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같은 풍경을 보고도 얼마든지 다른 그림이 나올 수 있다. 관찰자의 각도, 시간, 마음상태, 풍경의 배경 이 모든 것들이 달리 보이는 그림이 나오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그림과 시의 동질성을 분석해본다면 같으면서 다르다는 것이다. 있는 것을,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린다면 다만, 풍경화일 것이다. 하지만 풍경 뒤에 분명히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풍경을 그린 그림이 웅숭깊듯 시 역시 풍경 너머 보이는 풍경을 그려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독자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스스로 먼저 감동해야 한다. 자기 감동이 선행되지 않은 글은 사상누각이며 진정성을 훼손하는 일이다. 좋은 풍경화를 아무리 세밀하게 원본과 흡사하게 그려낸다 해도 복사본에서는 생명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타인의 글을 답습하거나 타인의 붓을 가져와 내 글에 현란한 채색을 한다 해도 그것은 이미 풍경으로서의 존재가 없다. 내 글에 대한 질감과 색채를 개발하고 연구할 때 그것이 풍경이 가진 배경의 의미를 정확하게 해석하는 일의 기초가 될 것이다. 시와 풍경, 풍경과 배경을 나름의 색으로 채색한 몇 작품을 소개해 본다. 안개 속 풍경 정끝별 깜깜한 식솔들을 한 짐 가득 등에 지고 아버진 이 안개를 어떻게 건너셨어요? 닿는 순간 모든 것을 녹아내리게 하는 이 굴젓 같은 막막함을 어떻게 견디셨어요? 부푼 개의 혀들이 소리없이 컹컹 거려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발 앞을 위태로이 달려가는 두 살배기는 무섭니? 하면 아니 안 무서워요 하는데요 아버지 난 어디를 가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바람 속에서는 바다와 별과 나무, 당신의 냄새가 묻어 와요 이 안개 너머에는 당신 등허리처럼 넓은 등나무 한 그루 들보처럼 서 있는 거지요? 깜박 깜박 젖은 잠에서 깨어나면 어느덧 안개와 한몸되어 백내장이 된 우우 당신의 따뜻한 눈이 보여요 덜커덩 덜컹 화물열차가 지나가요 그곳엔 당신의 등꽃 푸르게 피어 있는 거지요? 나무가 있으니 길도 있는 거지요? 무섭니? 물어주시면 아니 안 무서워요! 큰 소리로 대답할게요 이 안개 속엔 아직 이름도 모른 채 심어논 내 어린 나무 한 그루가 짠하게 자라는걸요! 나무는 언제나 나무인걸요! 『안개 속 풍경 / 정끝별』전문 인용 밥통의 계보를 묻다 서동인 부엌에 나뒹구는 파도 빛 얼룩진 밥통 뚜껑을 오랜만에 열었네 세상에, 주인이 먹다 남은 공양미 곰팡이 꽃망울 터뜨리는 텃밭에 나비도 없이 어디선가 검은 구름덩이 내려앉아 엉덩이를 살짝 살짝 내밀고 있었네 속의 것들이 울렁거리는 내 속도 내시경을 들이밀면 저런 풍경일까 하늘까지 뚫린 산동네 골목길을 기어 내려와 살아서도 싸늘한 지하 셋방이 싫어 공중에 매달린 거미집 옥탑방 까지 힘없는 주인을 따라 세간 옮길 때마다 용달차 한구석에 처박힌 불쌍한 녀석, 한강도 서너 번 건너 본 밥통은 현기증 때문인지 제대로 밥 지을 줄도 모르네 어느 해 였던가 유조선 시프린스호 기름띠 보상으로 바닷가 우리 家系에 걸어 들어온 너의 정체, 그 겨울 뚜껑을 연 양식장 굴껍데기 꺼먼 속살에 놀란 아버지 발길에 차여 파도 빛 멍든 너를 새 것으로 바꾸진 못하겠네 문득, 병들고 지친 밥통의 계보를 묻다가 거울 속 네 주인처럼 짠한 생각이 들었네 『밥통의 계보를 묻다 / 서동인』전문 인용 운주사 깊은 잠 이명윤 그들의 꿈에 잠시 스쳐가는 풍경처럼 다녀왔다 눈썹이 지워지고 입술이 지워져가는 석불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어느 날 눈이 사라졌으니 잠에서 번쩍 눈뜰 염려가 없고 입술이 지워졌으니 또다시 저녁이 와도 끼니 걱정 안하실 일 무심한 얼굴을 더듬어 내려오다 두 손으로 곱게 모은 기도를 보았는데 언젠가 불타는 세월이 기도 앞을 쿵쿵거리며 뛰어다녔을 때도 철없이 눈썹을 쪼던 새가 어느덧 눈이 멀어 발등에 떨어져 죽었을 때도 꿈쩍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 기도보다 깊은 잠에 빠진 까닭이다 점점 얼굴이 지워져가는 얼굴들이 착한 아이들처럼 나란히 앉아 세월 좋게 주무시고 있었다 덩그러니 코만 남은 얼굴이 아침도 벗고 저녁도 벗고 훌훌 표정도 벗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어떤 분은 아예 자리를 깔고 하늘 아래 누워 계셨다 신기한 듯 쳐다보는 사람들을 (허공에 주렁주렁 박힌 창백한 눈과 입들을) 본체만체 저들끼리 야속하게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운주사 깊은 잠 / 이명윤』전문 인용 위 인용한 세 편의 작품의 공통점은 풍경에서 풍경의 배경을 담아냈다는 점이다. 또한, 자신만의 붓을 들어 고유의 색을 채색하여 그 온도를 차별화했다는 점에서 본 글의 주제어인 시, 풍경화에 적합한 작품이라는 생각에 인용했다. 모던 포엠 6월호 글 감상의 주제는 시, 풍경화에 부합하는 작품 세 편을 선별하여 풍경이 담고 있는 시인의 시선을 주목해 본다. 단순하게 풍경을 그려내지 않고 세상을 담는 의미를 부여한 현상을 생각하며 시를 감상해 보자. 첫 작품은 송병호 시인의 [달동네의 손금을 읽는 오후]라는 작품이다. 달동네의 손금을 읽는 오후 송병호 좁은 고샅길 돌아도 돌아도 언제나 제자리인 그 골목에 숙명처럼 상처 안고 똬리 튼 골 깊은 손금들이 있다 명랑이발관의 해맑은 미소를 지나쳐 엇갈린 오복담뱃가게 생명선은 차마 풍년 쌀가게의 재물선과 영영 만날 수 없는 구획이 되었다 그나마 입시학원의 아직은 흐릿한 장래선만 또렷한 선이다 실선들, 흔들릴 때마다 칙칙한 배경의 가끔 끊어졌던 동시상영 두 편의 영화는 오간 데 없고 낡은 영사기 한 대 골목 짓무른 앵글로 바람을 채록하고 있다 한때는 민심을 쥐락펴락했을 선과 선의 공존 바닥이 다른 면 위의 또 다른 점선들 깨진 유리창 밖으로 하루를 점치지 못하는 도시의 손금으로 남아 있다 수면 手面의 수상학은 믿을게 못 된다고 툴툴거리며 다 닳아빠진 지문을 가지런히 포개 혼자 졸고 있는 노파 요즘은 거의 사라진 단어 달동네. 달동네는 도시의 외곽이나 산등성, 산비탈 등 비교적 높은 지대에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를 의미한다. 달동네의 연원은 해방 이후 귀국한 해외동포들과 종전 이후 월남한 난민들이 도시의 외곽에 판잣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달동네에 대한 의의와 평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1960년대 이후 약 40년 동안 도시빈민 주거지역의 전형이었던 달동네의 도시빈민촌은 이른바 달동네 문화라고 부를 만큼 능동적이고 건강한 빈민문화를 상징했다. 이농민들이 주로 거주했던 달동네는 값싼 주거지인 동시에 생존의 공동체였다. 농촌의 이웃관계가 지속되는 공동체였으며, 험난한 도시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기착지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진행된 재개발사업으로 달동네의 도시빈곤층은 주거비가 싼 곳을 찾아 단독주택지의 지하방, 옥탑방, 비닐하우스, 쪽방 등으로 흩어졌다. 일반인들에게 빈곤층은 눈에 띄지 않는 집단이 되었고, 빈곤층은 고립되면서 이전의 공동체를 통해 얻었던 물질적·정신적 이익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다음 백과 사전』인용 달동네와 손금. 얼핏 아무 관계도 없는 것 같지만 시인은 폐가처럼 변한 달동네의 스산한 풍경 속에서 그 배경을 읽고 있다. 시의 전반을 흐르는 기조는 관찰이 아닌 관조를 바탕으로 시인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오래된 기억의 골목과 병치하여 손금이라는 占 행위와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다. 돌아도 돌아도 언제나 제자리인 그 골목에 숙명처럼 상처 안고 똬리 튼 골 깊은 손금들이 있다 명랑이발관의 해맑은 미소를 지나쳐 엇갈린 오복담뱃가게 생명선은 차마 풍년 쌀가게의 재물선과 영영 만날 수 없는 구획이 되었다 시인이 채록한 달동네에 대한 온도는 2연 첫 행에 기록하고 있다. 달동네의 골목은 돌아도 돌아도 언제나 제자리인 골목에서 가난의 대물림이라는 단어를 연상하게 된다. 그 골목의 이리저리 난삽하게 이어진 골목과 골목의 입구와 출구는 입구라는 개념도 출구라는 개념도 없다. 들어오는 곳이 나가는 곳이며 나가는 곳이 들어오는 곳이라는 것은 나갈 곳이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느낌이다. 명랑이발관, 오복담뱃가게, 풍년 쌀가게가 의미하는 삶의 고단한 무게를 시인을 달동네라는 손바닥에서 보고 있다. 하지만 3행에서 시인은 달동네의 희망을 보여준다. 그나마 입시학원의 아직은 흐릿한 장래선만 또렷한 선이다 다른 모든 손금의 선들은 희미하고 퇴락하고 지워져 더 볼 것이 없지만 흐릿한 장래선은 또렷하다는 표현에서 시인이 던진 메시지는 경쾌하고 밝은 모습을 독자에게 던진다. 선과 선의 공존 바닥이 다른 면 위의 또 다른 점선들 도시의 손금으로 남아 있다 손바닥 위의 손금은 서로 공존하고 있다. 혹은 운명을 혹은 재물을 혹은 생명을 하지만 달동네가 만든 손금은 ‘도시’라는 새로운 사업화 시대를 건설하는 또 다른 점선의 기초가 된다. 도시의 손금이며 도시를 이루는 손금 일부가 되었다는 달동네 풍경의 배경, 시인이 읽는 달동네의 채색이 어떤 색인지는 시를 읽는 독자 누구라도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구 6행의 전체가 달동네와 현재와 과거, 미래의 모습을 담담한 어조로 조망하고 있는 것, 생의 막바지에 와있는 노파의 눈꺼풀에서 산업화 시대의 단면과 그 속에서 잃어버린 삶의 한 단면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이중성을 갖게 된다.    '관념적인 한자어를 척결하라' 어떤 말이 시가 될 수 있고 어떤 말이 시가 될 수 없을까? 일상어와 시어는 따로 존재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모든 일상어가 시어로 쓰일 수 있다는 데에는 동의하고 있는 듯하다. 문장과 대화에서 쓰이는 모든 말은 시어가 될 수 있다. 우리 현대시에는 표준어뿐만 아니라 꽤 오래 전부터 방언과 비속어까지 심심찮게 시어로 등장했다. 김용택은 “환장하것네 환장하것어/ 아, 농사는 우리가 쌔빠지게 짓고/ 쌀금은 저그들이 앉아 올리고 내리면서/(…)/ 풍년 잔치는 저그들이 먼저 지랄”()이라며 전라도 사투리를 통해 노골적으로 농민들의 편을 든다. 김진경은 “복어새끼처럼 왜 그런대유/ 배에다 바람을 잔뜩 집어넣구/ 가시를 있는 대루 세우믄 누가 무서워헐 줄 아남유”()하고 충청도 말로 능청을 부린다. 안상학은 “보래요. 삼시세끼 빵만 묵고 살라믄 살니껴? 대한민국 워델 가도 그런 사람 없을께시더”()라면서 경북 안동 말을 시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김수영이 일찍이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며 너스레를 떨자, 한참 후에 이에 화답하듯 황지우도 풍자의 대열에 합류한다. “간밤에도 그는 외국 바이어들을 만났고, “그년”들을 대주고 그도 “그년들 중의 한 년”의 그것을 주물럭거리고 집으로 와서 또 아내의 그것을 더욱 힘차게, 더욱 전투적이고 더욱 야만적으로, 주물러주었다.”() 이에 질세라 박남철은 한 발 앞서간다. “내 시에 대하여 의아해하는 구시대의 독자놈들에게→차렷, 열중쉬엇, 차렷,”() 하고 호통을 친다. 현대어뿐만 아니라 중세국어, 영어, 화살표 같은 기호까지 시어의 영역에 들어와 있다. 그리고 문장에 쓰이는 마침표·쉼표·물음표·따옴표·줄표와 같은 부호가 시에 끼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못해 절대적이다. 심지어 옥타비오 파스는 침묵도 말이라고 한다. “침묵조차도 무언가를 말하는데, 침묵은 무(無)가 아니라 여전히 기호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어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강철 조각이 아니다. 적어도 용접공이 강철과 강철을 이을 때 일어나는 불꽃이거나 그 불꽃의 뜨거움이거나 불꽃이 내장하고 있는 위험한 미래여야 한다. 그래서 때로 시어는 한글맞춤법이나 국어순화운동에 딴청을 부리기도 한다. 나는 자장면보다 ‘짜장면’이, 메리야스보다 ‘런닝구’가, 브래지어보다는 ‘브라자’가, 펑크보다는 ‘빵꾸’가, 머큐로크롬보다 ‘빨간약’이나 ‘아까징끼’가 더 시적인 말이라고 생각한다. 옥타비오 파스도 시적인 언어는 일상으로부터 일탈할 때 태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시적 창조는 언어에 대한 위반으로 시작한다. 이러한 작용의 첫 번째 행동은 말들을 지탱하고 있는 뿌리를 뒤흔드는 일이다. 시인은 일상적인 일들, 그리고 그것들과 맺고 있는 연관 관계에서 말들을 뿌리째 뽑아내어 일상적 언어의 획일적인 세계와 결별시킨다. 이때 단어들은 이제 막 태어난 것처럼 생생한 것이 된다.” 동아시아의 한자문화권 전통 속에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우리는 한자 혹은 한자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 시인들은 한자의 형상이 드러내고 있는 시각적 이미지에 끌릴 수밖에 없었다. 한자가 시인들을 자극하고 고민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기호의 의미는 같지만 ‘산’이라고 쓸 때와 ‘山’이라고 쓸 때 그 함의는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우스운 이야기 하나. 어릴 적에 나는 음식점 간판에 적힌 ‘산낙지’를 보고 한동안 산에 사는 낙지인 줄 알았다. 가재처럼 심산유곡의 돌덩이 밑 어디쯤 사는……) 그런데 뜻글자라고 해서 그 뜻과 형상이 다 미학적으로 완전한 것은 아니다. 관념적인 한자어는 시에서 척결해야 할 대표적인 낡은 언어다. 시적 언어의 성취 목표를 한 50년 이전쯤에 두고 있는 사람일수록 관념적인 한자어를 쉽게 지워버리지 못하는 습성이 있다. 유치환이 에서 “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라고 노래한 것은 1930년대 말이었고, 박인환이 “사랑의 진리마저 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라며 절망스러워한 것은 1950년대 한국전쟁 직후였다. 김현승이 ‘堅固한 고독’을 발표한 때는 60년대 중반이었다. 이 시인들이 ‘애수’와 ‘애증’과 ‘견고한 고독’을 노래할 즈음에 그 시어들은 ‘막 태어난 것처럼 생생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 그 시어들은 시간의 무덤에서 하얗게 풍화된 죽은 말들이다. 무엇보다 관념적인 한자어를 써야만 그럴 듯한 시가 된다는 착각이 문제다. 정진규는 시에서 관념이 ‘화자의 우월적 포즈’()라고 꼭 집어 말한 바 있다. 당신은 관념적인 한자어가 시에 우아한 품위를 부여한다고 착각하지 마라. 품위는커녕 한자어 어휘 하나가 한 편의 시를 누르는 중압감은 개미의 허리에 돌멩이를 얹는 일과 같다. 신중하고 특별한 어떤 의도 없이 아래의 시어가 시에 들어가 박혀 있으면 그 시는 읽어 보나마나 낙제 수준이다. 갈등 갈망 갈증 감사 감정 개성 격정 결실 고독 고백 고별 고통 고해 공간 공허 관념 관망 광명 광휘 군림 굴욕 귀가 귀향 긍정 기도 기억 기원 긴장 낭만 내공 내면 도취 독백 독선 동심 명멸 모욕 문명 미명 반역 반추 배반 번뇌 본연 부재 부정 부활 분노 불면 비분 비원 삭막 산화 상실 상징 생명 소유 순정 시간 신뢰 심판 아집 아첨 암담 암흑 애련 애수 애정 애증 양식 여운 역류 연소 열애 열정 영겁 영광 영원 영혼 예감 예지 오만 오욕 오한 오해 욕망 용서 운명 원망 원시 위선 위안 위협 의식 의지 이국 이념 이별 이역 인생 인식 인연 일상 임종 잉태 자비 자유 자학 잔영 저주 전설 절망 절정 정신 정의 존재 존중 종교 증오 진실 질서 질식 질투 차별 참혹 처절 청춘 추억 축복 침묵 쾌락 탄생 태만 태초 퇴화 패망 편견 폐허 평화 품격 풍자 피폐 필연 해석 행복 향수 허락 허세 허위 현실 혼령 혼령 화려 화해 환송 황폐 회상 회억 회의 회한 후회 휴식 희망 “진부한 말이란 보통 사람들이 일상에서 쓰는 말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모든 경서와 옛사람들이 이미 언급한 말의 대부분이 이른바 진부한 말이다.”(김창협,  외편) 시는 이런 진부한 시어의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다. 사유라는 것은 원래 그 속성상 관념적인 것이고 추상적인 법이다. 하지만 관념을 말하기 위해 관념어를 사용하는 것은 언어에 대한 학대행위다. 관념어는 구체적인 실재를 개념화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관념어가 시만 좀먹고 있는 게 아니다. 예식장에도 있다. 흔해빠진 주례사가 그것이다. 행복과 공경과 우애와 사랑이라는 말이 들어간 주례사가 귀에 들리면 한시바삐 밥을 먹으러 가고 싶어진다. 진정한 사랑은 개념으로 말하는 순간 지겨워진다. 황지우의 시처럼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것, 그게 사랑의 표현방식인 것이다. 관념어는 진부할 뿐 아니라 삶을 왜곡시키고 과장할 수도 있다. 또한 삶의 알맹이를 찾도록 하는 게 아니라 삶의 껍데기를 어루만지게 한다. 당신의 습작노트를 수색해 관념어를 색출하라. 그것을 발견하는 즉시 체포하여 처단하라. 암세포 같은 관념어를 죽이지 않으면 시가 병들어 죽는다. 상상력을 옥죄고 언어의 잔칫상이어야 할 시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관념어를 척결하지 않고 시를 쓴다네, 하고 떠벌이지 마라. 관념어를 떠나보내고 나면 그 휑하니 빈자리가 몹시 쓸쓸하게 보일 것이다. 당신은 그 빈자리를 오래 응시하라. 당신의 상상력이 가동하기 시작할 것이고, 상상력은 이미지라는 처녀를 데리고 올 것이다. 말로 그림을 그릴 줄 아는 그 처녀를 꽉 붙잡고 놓지 마라. 관념어를 떠나보낸 자리에 그 처녀를 정실부인으로 들어앉혀라. 그래도 관념어의 옛정이 그리워져 못 견디게 쓰고 싶거든 그 말을 처음 쓴 지 30년 후쯤에나 써라. 당신에게 시 한 편을 읽어주겠다. 이시영의  전문이다. 나는 이 시에서 ‘고독’이라는 말을 발견하고 온몸이 찌릿찌릿해졌다. 이쯤은 되어야 고독을 말할 자격이 있다. 고독을 모르는 문학이 있다면 그건 사기리 밤새도록 앞뜰에 폭풍우 쓸고 지나간 뒤 뿌리가 허옇게 드러난 잔바람 속에서 나무 한 그루가 위태로이 위태로이 자신의 전존재를 다해 사운거리고 있다 (안도현/ 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시창작 강의] (22) 오늘은 현대시의 난해성을 가져온 '해체시'와 '무의미시' 중에서,  해체시에 관해 얘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시대거나 모든 분야에 있어서 전통적인 것을 소중히 여기고 이를 계승하고자 하는 온건한 경향이 있는 반면, 이와는 달리 낡은 것보다는 새로운 것을 지향하고자 하는 진취적인 경향이 공존합니다. 전자를 보수파, 후자를 개혁 내지는 혁신파라고 부릅니다. 역사는 이 두 상반된 대립들이 빚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변증법의 이론이기도 합니다. 시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평시조에 대한 사설시조, 시조에 대한 신체시, 신체시에 대한 자유시 등의 대립들을 통해 현대시로 발전해 오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1930년대에 이르게 되면 이상(李箱)에 의해 소위 과격한 모더니즘의 혁신적인 실험시가 나타납니다. 이상(李箱)의 이러한 실험적인 시풍(詩風)은 한때 잠잠하다가 1980년대에 다시 기승을 부리며 일어납니다. 이것이 이른바 해체시(解體詩)라는 것입니다. 젊은 시인들에 의해 시도된 바 있는 이 해체적 경향은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서구적 풍조의 그늘 밑에 서식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 시단에서 시도된 해체적 경향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장르의 경계를 무너뜨림 시를 산문화(散文化)한다든지, 시에 희곡이나 시나리오 기법을 도입하기도 하고, 시 속에 회화나 도형을 삽입하기도 합니다. 둘째, 표현 매체의 개방 시는 언어 예술이지만 표현 매체를 언어만으로 한정하지 않고 그림, 사진, 도형, 기호 등을 동원하여 표현하기도 합니다. 셋째, 기존의 규범 문법에 구속되지 않음 사회적인 약속인 기존 문법에 구애되지 않고 비문(非文)이나 논리적 타당성이 없는 문장을 구사하기도 합니다. 넷째, 시적 주체의 소멸 독특한 개인의 생각이나 감정이 담긴 개성적인 글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고, 타인의 글들을 여기저기서 무작위로 끌어다 자신의 글처럼 쓴다든지[pastiche], 광고나 기사(記事), 사진 같은 것들을 오려 붙인다든지[collage] 하는 행위입니다. 다섯째, 탈이념(脫理念) 현상 어떤 주의(主義)나 사상(思想)에 예속되지 않고 자유를 추구합니다. 나아가서는 도덕과 윤리의 속박으로부터도 벗어나고자 합니다. 여섯째, 예술의 저속화[kitsch] 현상 일상의 저속한 것들 속에서 소재를 구한다든지, 속어나 욕설 등의 비어(卑語)들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경향으로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특징으로도 지적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해체시의 특징들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기존의 것들 곧 전통적인 것들에 대한 거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해체 사상이 80년대에 유행하게 된 것은 당시 인기를 얻고 있었던 프랑스의 사상가 데리다(J. Derrida)의 영향 때문으로 보입니다. 데리다의 해체 이론은 기존의 것을 왜 바꾸어 놓아야 하는가 하는 그 이유를 논리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데리다의 사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불확정성(不確定性)’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사물은 그것을 바라다보는 위치와 각도에 따라서 천태만상의 다른 모습들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사물의 양태를 하나로 확정지어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물의 시간적 존재 양태는 끊임없이 변해 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서구의 합리주의는 사물을 우열의 관계로 잘못 확정짓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성>감성, 남성>여성, 백인>유색인, 기독교>다른 종교 등으로 앞의 것을 우월한 것으로 확정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의 우열의 관계는 바른손과 왼손의 관계처럼 기회가 많이 주어지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결정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자리를 뒤바꾸어 후자에게도 기회를 주자는 것입니다. 기존의 제도, 전통, 관습 이러한 모든 것들이 잘못 굳어져 있으니 이를 해체(deconstruction)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해체는 결코 파괴(destruction)가 아니라고 합니다. 물론 잘못된 전통이나 편파적인 관습 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 한 사회가 향유하고 있는 문화는 수천 년 동안의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그렇게 형성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전통으로 자리 잡게 된 것들은 비교적 최선의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것들보다는 바람직한 것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태도는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새로운 것은 기존의 것보다 가치 있는 것으로 검증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그것은 개혁의 대열에 끼지 못하고 개악과 파괴로 규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해체시가 시도하고 있는 것들은 어떠한가 냉정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전통적인 시의 인습을 무너뜨리는 바람직한 혁신들인가. 아니면 기존의 것을 뒤집어 놓겠다는 데리다적인 단순한 거부의 발상인가를 신중히 검토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실험적인 시도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시(詩)로 불리어지려면 언어를 떠나서는 안 되고 또한 예술의 반열에 놓이려면 아름다움을 잃지 말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시에 대한 도전은 의미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름다운 언어의 구조물’이라는 한계를 넘어서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건필을 기대하며 다음주 무의미시에 대한 소개로 시창작 강의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시(詩)와 평론(評論)에 대한 소고(小考)/ 이담 정항석 일상적으로 시에 대한 것과 그 평에 대한 것은 많이 그리고 쉽게 접하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접근에 대한 마음가짐과 훈련이 없다면 지난(持難)한 것이 되고 마는 경우를 경험하게 된다. 이 글에서는 위와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역설하고자 한다. ‘시(詩 poem)는 짓는 것이고 평론(評論)는 쓰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선적으로 이에 대한 명제적(命題的)이고 선언적(選言的)인 주장을 어떻게 투영시켜야 하는가? 첫째는 그 접근의 마음가짐이다. 얼른 말하자면 이렇다. ‘시(詩)짓기는 절대적으로 글쓰기의 한 종류이다’. 글쓰기에 기본적인 바탕이 없이 ‘아귀가 맞는 글쓰기’가 어느 정도의 훈련이나 능력이 아니 되면 시를 짓는 것은 매우 어려워진다. 시가 다소 짧은 어휘나 단어들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만만해 보이지마는 결코 가벼이 다룰 것은 아니다. 예컨대, 1) 문학 장르로써 시가 만만치 않다는 것은 이렇다. ‘모를 잘 심는 농부’라 하여 벼의 생육 상태를 알 수 있어도 그 생물학적 분석은 하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이 둘을 다 해야 한다. 2)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 때에 따라서는 연구도 해야 한다. 아울러, 시대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시인(詩人 poet)의 역할이다. 그래야 가식(假飾)이 없이 선험적 진솔함을 담을 수 있다. 단지 시(詩)를 수백 편 읽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이러할 경우 시의 형식과 문장 등을 외어서 하는 것으로 이는 흉내에 불과하다. 3) 문학 장르에서 가장 짧은 것이지만 시는 시대를 반영하는 것으로 단지 고발이나 비판, 조소, 비아냥 등으로 그칠 것이 아니다(이것이 시라고 생각한다면 단세포적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볼멘소리는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볼멘소리는 생산적이고 긍정적이며 교훈적이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더 설명한다. 둘째, 평론(評論)은 글쓰기에 대한 훈련과 재능이 없다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평론에서도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잣대를 들이미는 것은 금기이다. 특히, 최근에서 포스트 모던(post-modern)적인(? 설명이 더 필요하지만, 이하 각설) 생각에 갇혀서 ‘감성적 위주의 시’를 폄하(貶下)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주목할 것은 그 글과 시가 1) ‘전체적인 글의 틀(frame)’, 2) ‘어법적 문장의 구성’, 그리고 3) ‘동원된 개념이 적절하게 스며있는가’를 면밀하게 고려해야 한다. 더러 신춘문예 심사를 한 이후에 나오는 심사평들은 매우 자의적인 느낌에 의존한 경우가 허다하며 때로는 모호한 경우가 많다. 이는 ‘시를 오랫동안 써 왔다’ 하여 다른 이들의 시를 쉬이 접근하여 자신의 눈짐작이나 눈대중으로 저울질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시(詩)짓는 것과 평론을 구분하지 못하는 우(愚)를 범하는 것이다. 못하는 것을 억지로 해서도 안 된다. 3. 시는 짧은 것이 결코 아니다. 함축적으로 의미를 담을 수 있다면 최고의 것이라고 이를 수 있지만, 세월을 두고 시(詩)짓기의 견본(見本)이 되며 그 의미에서 감동과 교훈을 주는 시들을 보면 결코 단어나 어휘 몇 개로 이루어진 것은 없다. 하여 시는 언어의 경제성을 감안(勘案)한다 하더라도 한 편의 논문(論文 an article)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글은 어떻게 써야 하는가? 간략하게 그 틀을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1. 서론(도대체 무엇이 문제(issue)인가?) 현상(자연적 사회적 현상=고발내용) 주장(화자의 느낌를 포함) 선험적 시각(이론과 가설) 주장과 선험적 시각에서 주장을 해야 되는 우선적 설명(說明)(기술(記述)과 서술(敍述)포함) 2. 자기 주장에 대한 개념을 구체화(무엇을 언급하려고 하는가?) 시에서는 관념적 그리고 추상적 언급도 가능하지만. 개념화는 분명하게 해야 한다. 이는 자기 논리적 사고가 접목되어야(embedded) 하기 때문이다. 자기주장에 대한 것을 정의적 개념화(시에서는 예를 들어, ‘누님같은 꽃이여’라는 것도 이에 해당)를 도식화시켜야 한다 자기 주장에 대한 이론화(理論化)를 갖추는 것이며 이는 비판적이고 우회적이지만 보편적 논리를 위반해서는 안 된다. 3. 현상의 구체적 언급(이 이슈가 이슈화가 되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1) ‘무엇이 문제인가’를 구체적으로 언급(=시에서는 묘사에 해당)한다 2) 화자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어야 한다(=시의 경우, 메타포가 동원될 수 있음) 3) 현상과 대상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관찰이 수반되어야 한다.(꽃의 경우도 언제 피는지, 생육과 그 발달에 대한 것, 그 꽃이 의미하는 보편적 인식을 접목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개념을 구분할 수 있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되 '왜 그러한지'를 필히 언급해야 하며 그 언급은 논리적이고 이성적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4. 분석적 접근 결국, 이 부분을 언급하기 위해서 위의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아야 한다. 2.와 3.를 대비하여 '대조한다든지' 혹은 '자기주장이 현상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를 언급해야 한다. 이를테면, (1) ‘현상은 이러했고’, (2) 그‘래서 이렇게 주장하는 데는 이러한 까닭이고’, (3) ‘이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것을 제시한다’는 내용이 절대적으로 분석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언급되어야 한다. 시의 경우에서는 이 부분만을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최근에는 카피라이터 식의 글이 이 경우만 언급하고, 그나마 더 자극적이고 호객 행위적인 것으로 종결짓고 마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집을 짓다가 만 경우와 같다. 정통성이 있는 운문(韻文)을 공부한 이후에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채, 디지털적인 사고방식으로 편하게(?) 다가가는 까닭에 전체를 아우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러 조소적(嘲笑的)이고 냉소적(冷笑的)인 시들이 여기에 해당하다. 앞뒤 자르고 이것만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사회의 어두운 면을 쓰기 위해서 동원되는 단어들을 비틀어 쓰고는 ‘이것으로 할 일을 다했다’는 식의 시들이 그것이다. 문제는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가끔 신춘문예에 당선작들이 여기에서 주춤거리다가 호기심을 유발하게 하지만 신춘문예 당선 이후에 글을 쓰지 못하는 경우(당선작에 대한 소감문과 그에 대한 설명을 못 하는 경우가 허다함)가 있다. 그리고는 시를 짓지 못하는 경우가 여기에서 비롯된다. 현대사회의 단면을 보고 고발(비아냥, 조소, 비판 등)하는 시들을 지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는 마치 어떤 현상을 보고 ‘욕’을 하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누군가 잘못을 했다고 한다면 이에 대해서 접근하는 방법은 크게 네 가지이다. 1) 무관심, 2) 애 둘러서 언급(누구who를 나무라지 않고 그의 편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하는 경우), 3) 비아냥 혹은 조소, 그리고 4) 비난 등이 그것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글과 시는 생산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4)는 제외된다. 그리고 주목할 것은 2)와 3)이다. 그동안 감성적 위주의 시들이 1)에 해당하여 나와 나를 이해주기를 바라는 공감적 공유에 초점을 두었다면 ’자신의 일기장이나 자신만 볼 수 있는 작기장에 옮겨야 할 것이다. 문제는 2)와 3), 특히, 최근 포스트모던적인 성향을 가지는 것이 돋보여서 그런 것 같은데 그저 고발만 하고 그것으로 그치고 있다 무책임하다. 생산적인 대안적 제시는 없다. 그러다 보니 ‘아니면 말고 식’의 비난적 무책임의 공공성을 함유하고 있다. 비판과 비난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비판을 생산적인 결과로 도출하기 위해서 ‘쓴소리’를 할 수 있지만, 비난은 그것으로 끝이다. 비난은 댓구의 필요성을 상실하게 만든다. 자기감정을 직접적으로 하지 않았을 뿐이지 ‘하늘에다 욕’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을 ‘그동안 사용하지 않는 단어들을 써놓고는 이전의 시들과 차별화되는 양 하지만, 그렇게 할 것이 아니다 또한, 시인이지만 평론을 못 하는 경우도 여기에 해당한다. 평론을 함부로 할 일도 아니지만 정작 본인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글쓰기가 기본바탕이 아니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를 짓기 전에 글쓰기를 절대적으로 훈련해야 한다. 5. 결어 혹은 결론: 앞서 했던 것들을 간추려서 요약 정리하면 된다. 결론적으로는 이렇다. ‘시를 짓는다’ 하는 것은 위의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것들만 언급하기 때문에 마치 헝겊을 기워서 색다른 작품을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짓는다’고 하는 것이다. 평론 역시 글쓰기의 연장이기 때문에 위의 과정을 반드시 밟아야 한다. 위의 과정이 체화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평론다운 평론이 있을 수 없으며, 시를 몇 편 지어봤다고 평론을 자처하는 어리석음에 처하는 경우를 피해야 한다. ** 의 내용 중에서 일부를 간추린 것입니다. 공유는 가능하지만, 저작권이 있으므로 반드시 출처와 저자를 밝히고 함께 옮겨가시기를 바랍니다.   바람과 구름 그리고 농담                                             하린     바람과 구름을 우려먹는 기술이 필요하다 만질 수 없는 것을 갖고 노는 비법이 필요하다 이성적인 혀와 몽롱한 감각이 만들어내는 혼종의 판타지가 필요하다 바람에게는 근사한 취미가 필요하고 구름에게는 우호적인 솜사탕이 필요하다 구름의 심장을 훔치거나 바람의 목덜미를 만지는 자질이 필요하다 구름의 목구멍에 손을 넣어 박힌 가시를 꺼내고 바람의 아래턱과 윗턱 사이에 얼굴을 집어넣는 여유가 필요하다 나에겐 그런 능력이 없으니 나는 구름과 바람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는 시인이다 수시로 바람과 구름을 식재료로 볶고 지지고 삶고 찌는 방식이 필요하다 바람의 소문과 구름의 험담을 구별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구름을 살해하고 바람을 수배하고 바람 속에 무덤을 만들고 구름의 사상을 읽어내는 경지가 필요하다 바람의 초대나 구름의 청혼을 듣는 귀가 필요하다    나는 언제쯤 바람의 시인 구름의 시인이라는 계급을 획득할 수 있을까  나는 지금 바람 빠진 시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구름의 썩어 문드러진 살점을 삼키고 있다  바람과 구름도 모르는 백만 가지 사용법이 나에겐 필요하다   - 2012년 여름호    
111    좋은 시 묶음 댓글:  조회:1246  추천:0  2019-07-19
채소를 다듬다가 / 강초선 채소를 다듬어본 사람은 알리라 밭에서 갓 캐어 왔다는 채소를 다듬다 보면 먹을 수 있는 속잎보다 먹을 수 없는 겉잎이 더 많았을 때, 속상했던 기억을... 한 뿌리에서 돋아나 속잎과 겉잎으로 갈라지는 채소, 우리네 삶의 가지에도 진짜와 가짜는 태어나는 법 그래, 어쩌면 꼭 필요한지 몰라 속잎을 보호하기 위한 겉잎으로... 진짜와 가짜, 예부터 귀하고 소중한 것은 깊은 곳에 꼭꼭 숨겨두었던 우리의 조상들 그 얼이 지나친 탓일까 세상 어느 장소 어디를 가도 가짜가 진짜의 주름잡고 화려한 조명발 받는 세상 사라져가는 것은 쓸쓸한 진짜들의 뒷모습 잃어버린 진짜들의 설 자리 바람과 햇살이 부족한 이 땅에서 볓 안되는 속잎마저 말라버린다면 속잎이 없는, 먹을 수 없는 겉잎으로만 자라나는 쓰레기밭을 가꾸는 세상이 될까 그 것 이 두 렵 다   비누 / 강초선 그의 몸은 물에 닿으면 반드시 녹는다 그러나 젖은 제 몸의 향기를 지극히 사랑하는 까닭에 한순간의 生이 뜬금없는 거품일지라도 오래 전 세상 눈뜨기 전부터 키워온 제 몸의 향기를 흐르는 물에 아낌없이 게워낼 줄을 안다.     다른 구멍에 넣다 / 최영철 현금 인출기에 카드를 밀어 넣는데 구멍이 카드를 밀어낸다 자꾸 넣어도 자꾸 밀어낸다 구멍이 자기를 밀어낸다는 걸 알았는지 구멍이 밀어내기도 전에 카드가 먼저 비집고 나온다 몇 번을 그러고 있는데 뒤에 줄 선 아주머니 내 어깨를 툭툭 친다 아차 누가 이 많은 구멍을 만들었을까 현금 카드를 넣는다는 게 전화카드를 넣어버렸다 아주머니가 웃고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경배 - 김소연   나쁜 짓을 이제는 하지 않아 나쁜 생각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이지 좋아하는 친구가 베란다에서 키운 부추를 주어서 나란히 누운 부추를 찬물에 씻지 좋아하는 친구가 보내준 무쇠 프라이팬에 부추전을 부치지 젓가락을 들고 전을 먹는 동안에 나쁜 음악을 이제는 듣지 않아 나쁜 생각들을 완성하는 데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지 부추를 먹는 동안엔 부추를 경배할 뿐 저편 유리창으로 젓가락을 내려놓는 너의 모습이 보였는데 왜 그렇게 맨날 억울한 얼굴이니 병이 멈추었니 비명이 사라졌니 나의 병으로 너의 병을 만들던 짓을 더 해주길 바라니 예의를 다해 평범해지는 일을 너는 경배하게 된 거니 참 독하다 참 무섭다 하면서 너를 번역해줄 일이 이제는 없겠다 모든 게 끔찍한데 가장 끔찍한 게 너라는 사실 때문에 너는 누워 잠을 자버리지 다음 생에 깨어날 수 있도록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모든 것에 익숙해져버렸지 익숙해져버린 나를 적응하지 못한 채 절절매지 젓가락을 들어 올려 전을 다 먹을 뿐 만약 이 세상이 대답이었던 것이라면 그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더 강하고 더 짙은 이 부추였을까 병이 멈추어버린 병은 어떻게 아픈 척을 해야 할까 부추를 받고 귀여운 인형을 친구에게 건넸지 무쇠 프라이팬을 받고 예쁜 그림책을 친구에게 건넸지 귀엽고 예쁘게 여리고 선량하게 혼자 있을 때마다 나쁜 것들만 떠올리는데 나쁜 짓은 더 이상 하지 않아 가지런한 부추들 파릇한 부추들 경배 / (김소연. 2015년 여름호.) ㅡㅡㅡㅡㅡ 오랜만에 제가 좋아하는 풍의 좋은 시를 만났습니다 시인은 아픈 소리를 한 마디도 내지 않고 세상의 아픔을 말하네요 날도 더운데 "그"  초록의 부추처럼 다들 오늘도 싱싱해지시기 바랍니다 오전 근무를 하고 플룻 레슨을 받고 산에 올라왔는데 시 올리느라 잠시 숲속 벤치에 앉았습니다 산새소리와 바람 속에서 한 잎의 온도             금시아 나뭇잎 한 장, 빙판에 갇혀 있습니다   반대편의 아이 하나, 피켓을 들고 침묵합니다   이파리 쪽으로 모여들거나 햇살 쪽으로 모이는 온도가 있습니다 초록도 온기도 없는 겨울이 짧은 햇살을 따라 저녁으로 갑니다   지구의 시간이 녹아내리고 금요일의 아이들 등교를 거부합니다   나뭇잎 주위의 얼음이 조금씩 녹고 있습니다 아무리 하찮은 한 잎의 곁도 흔들리는 촛불만큼의 온기가 있습니다 세상의 체감온도가 한 잎의 온도라면   금요일의 피켓은 창백한 지구의 어조입니다   얼음의 이불 같은 마른 나뭇잎 한 장, 지구를 걱정하는 어린 피켓 하나, 어쩌면 겨울의 숨통이거나 따듯한 봄의 근처들이겠지요   어떤 금요일의 약속에는 측정 불가능한 수치 밖의 온기가 있습니다   ㅡ『미네르바』(2019, 여름호)  ------------------------------------ 금시아 : 1961년 광주 출생. 2014년 《시와 표현》으로 등단. 시집 『툭,의 녹취록』 『금시아의 춘천詩_미훈微醺에 들다』. 한 잎의 온도             금시아 나뭇잎 한 장, 빙판에 갇혀 있습니다   반대편의 아이 하나, 피켓을 들고 침묵합니다   이파리 쪽으로 모여들거나 햇살 쪽으로 모이는 온도가 있습니다 초록도 온기도 없는 겨울이 짧은 햇살을 따라 저녁으로 갑니다   지구의 시간이 녹아내리고 금요일의 아이들 등교를 거부합니다   나뭇잎 주위의 얼음이 조금씩 녹고 있습니다 아무리 하찮은 한 잎의 곁도 흔들리는 촛불만큼의 온기가 있습니다 세상의 체감온도가 한 잎의 온도라면   금요일의 피켓은 창백한 지구의 어조입니다   얼음의 이불 같은 마른 나뭇잎 한 장, 지구를 걱정하는 어린 피켓 하나, 어쩌면 겨울의 숨통이거나 따듯한 봄의 근처들이겠지요   어떤 금요일의 약속에는 측정 불가능한 수치 밖의 온기가 있습니다   ㅡ『미네르바』(2019, 여름호)  ------------------------------------ 금시아 : 1961년 광주 출생. 2014년 《시와 표현》으로 등단. 시집 『툭,의 녹취록』 『금시아의 춘천詩_미훈微醺에 들다』.
110    좋은 시 묶음(1) 댓글:  조회:1474  추천:0  2019-07-19
채소를 다듬다가 / 강초선 채소를 다듬어본 사람은 알리라 밭에서 갓 캐어 왔다는 채소를 다듬다 보면 먹을 수 있는 속잎보다 먹을 수 없는 겉잎이 더 많았을 때, 속상했던 기억을... 한 뿌리에서 돋아나 속잎과 겉잎으로 갈라지는 채소, 우리네 삶의 가지에도 진짜와 가짜는 태어나는 법 그래, 어쩌면 꼭 필요한지 몰라 속잎을 보호하기 위한 겉잎으로... 진짜와 가짜, 예부터 귀하고 소중한 것은 깊은 곳에 꼭꼭 숨겨두었던 우리의 조상들 그 얼이 지나친 탓일까 세상 어느 장소 어디를 가도 가짜가 진짜의 주름잡고 화려한 조명발 받는 세상 사라져가는 것은 쓸쓸한 진짜들의 뒷모습 잃어버린 진짜들의 설 자리 바람과 햇살이 부족한 이 땅에서 볓 안되는 속잎마저 말라버린다면 속잎이 없는, 먹을 수 없는 겉잎으로만 자라나는 쓰레기밭을 가꾸는 세상이 될까 그 것 이 두 렵 다   비누 / 강초선 그의 몸은 물에 닿으면 반드시 녹는다 그러나 젖은 제 몸의 향기를 지극히 사랑하는 까닭에 한순간의 生이 뜬금없는 거품일지라도 오래 전 세상 눈뜨기 전부터 키워온 제 몸의 향기를 흐르는 물에 아낌없이 게워낼 줄을 안다.     다른 구멍에 넣다 / 최영철 현금 인출기에 카드를 밀어 넣는데 구멍이 카드를 밀어낸다 자꾸 넣어도 자꾸 밀어낸다 구멍이 자기를 밀어낸다는 걸 알았는지 구멍이 밀어내기도 전에 카드가 먼저 비집고 나온다 몇 번을 그러고 있는데 뒤에 줄 선 아주머니 내 어깨를 툭툭 친다 아차 누가 이 많은 구멍을 만들었을까 현금 카드를 넣는다는 게 전화카드를 넣어버렸다 아주머니가 웃고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경배 - 김소연   나쁜 짓을 이제는 하지 않아 나쁜 생각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이지 좋아하는 친구가 베란다에서 키운 부추를 주어서 나란히 누운 부추를 찬물에 씻지 좋아하는 친구가 보내준 무쇠 프라이팬에 부추전을 부치지 젓가락을 들고 전을 먹는 동안에 나쁜 음악을 이제는 듣지 않아 나쁜 생각들을 완성하는 데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지 부추를 먹는 동안엔 부추를 경배할 뿐 저편 유리창으로 젓가락을 내려놓는 너의 모습이 보였는데 왜 그렇게 맨날 억울한 얼굴이니 병이 멈추었니 비명이 사라졌니 나의 병으로 너의 병을 만들던 짓을 더 해주길 바라니 예의를 다해 평범해지는 일을 너는 경배하게 된 거니 참 독하다 참 무섭다 하면서 너를 번역해줄 일이 이제는 없겠다 모든 게 끔찍한데 가장 끔찍한 게 너라는 사실 때문에 너는 누워 잠을 자버리지 다음 생에 깨어날 수 있도록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모든 것에 익숙해져버렸지 익숙해져버린 나를 적응하지 못한 채 절절매지 젓가락을 들어 올려 전을 다 먹을 뿐 만약 이 세상이 대답이었던 것이라면 그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더 강하고 더 짙은 이 부추였을까 병이 멈추어버린 병은 어떻게 아픈 척을 해야 할까 부추를 받고 귀여운 인형을 친구에게 건넸지 무쇠 프라이팬을 받고 예쁜 그림책을 친구에게 건넸지 귀엽고 예쁘게 여리고 선량하게 혼자 있을 때마다 나쁜 것들만 떠올리는데 나쁜 짓은 더 이상 하지 않아 가지런한 부추들 파릇한 부추들 경배 / (김소연. 2015년 여름호.) ㅡㅡㅡㅡㅡ 오랜만에 제가 좋아하는 풍의 좋은 시를 만났습니다 시인은 아픈 소리를 한 마디도 내지 않고 세상의 아픔을 말하네요 날도 더운데 "그"  초록의 부추처럼 다들 오늘도 싱싱해지시기 바랍니다 오전 근무를 하고 플룻 레슨을 받고 산에 올라왔는데 시 올리느라 잠시 숲속 벤치에 앉았습니다 산새소리와 바람 속에서 한 잎의 온도             금시아 나뭇잎 한 장, 빙판에 갇혀 있습니다   반대편의 아이 하나, 피켓을 들고 침묵합니다   이파리 쪽으로 모여들거나 햇살 쪽으로 모이는 온도가 있습니다 초록도 온기도 없는 겨울이 짧은 햇살을 따라 저녁으로 갑니다   지구의 시간이 녹아내리고 금요일의 아이들 등교를 거부합니다   나뭇잎 주위의 얼음이 조금씩 녹고 있습니다 아무리 하찮은 한 잎의 곁도 흔들리는 촛불만큼의 온기가 있습니다 세상의 체감온도가 한 잎의 온도라면   금요일의 피켓은 창백한 지구의 어조입니다   얼음의 이불 같은 마른 나뭇잎 한 장, 지구를 걱정하는 어린 피켓 하나, 어쩌면 겨울의 숨통이거나 따듯한 봄의 근처들이겠지요   어떤 금요일의 약속에는 측정 불가능한 수치 밖의 온기가 있습니다   ㅡ『미네르바』(2019, 여름호)  ------------------------------------ 금시아 : 1961년 광주 출생. 2014년 《시와 표현》으로 등단. 시집 『툭,의 녹취록』 『금시아의 춘천詩_미훈微醺에 들다』. 한 잎의 온도             금시아 나뭇잎 한 장, 빙판에 갇혀 있습니다   반대편의 아이 하나, 피켓을 들고 침묵합니다   이파리 쪽으로 모여들거나 햇살 쪽으로 모이는 온도가 있습니다 초록도 온기도 없는 겨울이 짧은 햇살을 따라 저녁으로 갑니다   지구의 시간이 녹아내리고 금요일의 아이들 등교를 거부합니다   나뭇잎 주위의 얼음이 조금씩 녹고 있습니다 아무리 하찮은 한 잎의 곁도 흔들리는 촛불만큼의 온기가 있습니다 세상의 체감온도가 한 잎의 온도라면   금요일의 피켓은 창백한 지구의 어조입니다   얼음의 이불 같은 마른 나뭇잎 한 장, 지구를 걱정하는 어린 피켓 하나, 어쩌면 겨울의 숨통이거나 따듯한 봄의 근처들이겠지요   어떤 금요일의 약속에는 측정 불가능한 수치 밖의 온기가 있습니다   ㅡ『미네르바』(2019, 여름호)  ------------------------------------ 금시아 : 1961년 광주 출생. 2014년 《시와 표현》으로 등단. 시집 『툭,의 녹취록』 『금시아의 춘천詩_미훈微醺에 들다』.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이기철 잎 넓은 저녁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웃들이 더 따뜻해져야 한다 초승달을 데리고 온 밤이 우체부처럼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채소처럼 푸른 손으로 하루를 씻어놓아야 한다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을 쳐다보고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 같은 약속을 한다 이슬 속으로 어둠이 걸어 들어갈 때 하루는 또 한번의 작별이 된다 꽃송이가 뚝뚝 떨어지며 완성하는 이별 그런 이별은 숭고하다 사람들의 이별도 저러할 때 하루는 들판처럼 부유하고 한 해는 강물처럼 넉넉하다 내가 읽은 책은 모두 아름다웠다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나는 낙화만큼 희고 깨끗한 발로 하루를 건너가고 싶다 떨어져서도 향기로운 꽃잎의 말로 내 아는 사람에게  상추잎같은 편지를 보내고 싶다   서울의 우울 5                       김승희 오늘의 날씨, 모기가 힘이 없어요 우리는 일회용 건전지가 아니다 우리는 크리넥스 티슈가 아니다 우리는 편의점 나무젓가락이 아니다 우리는 당일치기 풍선이 아니다 말할수록 야위어가는 메아리가 아니다 모기에게 대포를 쏘지 말아달라 왜 우리는 불안한가 밥을 먹고 있어도 불안하고 약을 먹고 있어도 불안하고 일을 하고 있어도 불안하고 일이 없어 놀고 있어도 불안하고 아침에도 불안하고 저녁에도 불안하고 죄라면 열심히 일한 죄밖엔..... 유능해도 불안하고 무능해도 불안하고 낮에도 불안하고 밤에도 불안하고 왜 우리는 쥐새끼처럼 늘 불안한가 왜 이 도시엔 이렇게 골목마다 어린 소녀를 따라가는 성추행범이 많은가 성폭행하고 손목까지 잘라 유리컵에 꽂아놓는 미친놈이 많은가 왜 이 도시엔 이렇게 손바닥 뒤집는 거짓말이 많으며 왜 손바닥 뒤집는 그 손바닥들로 하늘이 자욱한가 왜 나의 하늘을 누가 가리고 누가 뒤집는가 왜 이 도시엔 이렇게 법이 허전한가 정녕 모기에게 대포를 쏘지 말아달라   ■  '나의 시론' / 장석주 건강한 시인, 잘 사는 시인, 당당한 시인보다 어쩐지 가난하고 병약해 보이는 시인들의 시에 더 이끌린다. 나는 박용래나 김종삼, 천상병이나 김관식의 시들이 좋다! * 자연 예찬의 시들이 순수하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자연 예찬의 시들은 정치성을 배제함으로써 교묘한 방식으로 당대 정치를 암묵적으로 승인한다. 자연 예찬의 시는 두드러지게 탈정치적이다. 탈정치적인 태도는 그 자체로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다. 다만 탈정치적인 게 순수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는 일이다. 자연 예찬의 시는 정치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것이다. * 순수시의 표상으로 꼽는 시인이 말년에 1980년 5월 광주 민중 학살의 원흉인 민정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나선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 시인의 정체성은 의인(義人)이 아니다. 어쩌면 시인의 정체성은 거지, 바보, 천치, 쪼다, 못난이에게서 더 많이 발견된다. 한심하고 하염없는 이들! 생물학적 이득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시에 자기를 던진 이들! 이들에겐 농경 정착민보다 변방인, 외부자, 밀입국자, 난민, 떠돌이 광대가 더 잘 어울린다  * 페르난두 페소아는 자기에겐 아무 야망도 욕망도 없다고, 그는 자신이 시인이 된 건 야망이 아니라 ‘내가 홀로 있는 방식’이라고 고백한다. 그는 죽는 날 이런 시를 남겼다. “오른손을 들어, 태양계에 인사한다. /하지만 잘 가라고 말하려고 인사한 건 아니었다. /아직 볼 수 있어서 좋다고 손짓했고, 그게 다였다.” * 김혜순 시집 『날개 환상통』(2019)을 읽는다. 김혜순 시는 이 시대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보이는 낯섦과 그로테스크함의 배후다. 김혜순 시는 ‘시적인 것’에 대한 인습적 이해를 부수고 그 경계를 넓혀왔다. 김혜순 시의 언어는 본질적으로 문법적 단일성에 대한 금지와 위반의 언어다. 김혜순 시의 어떤 구절이 보여주는 정신의 도약과 폭발은 인습적인 사유의 그물로는 포획되지 않는다. 김혜순 시를 읽는 게 불편하다고 말하는 당신은 자기 안에 있는 인습적 사고와 싸우기를 멈춘 사람이다. * 김혜순은 이번 시집에서 자꾸 새장을 탈출한 새로 변신하려고 시도한다. 몸의 증상은 곧 새의 증상이다. 새가 된 기분을 느껴보려는 걸까? “그 새의 신발끈은 풀어져 땅에 끌리고/그 새의 머리끈은 풀어져 측백나무를 칭칭 감고//하지만 나는 나는 것이 좋아/먼 길 떠나는 것이 좋아”. * 김혜순의 시가 다 어려운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이렇게 쉽게 다가오는 구절도 쓴다. “자아(自我)라는 이름의 뚱뚱한 소녀를 생각한다/그녀를 오늘 밤 굶겨 죽여야 한다”.   * 우리 시인 중에도 페르난두 페소아 같이 자기 본명을 감추고 필명이나 이명을 쓴 시인들이 있다. 김정식(金廷湜, 1902~1934)은 ‘김소월’로 더 알려져 있고, 김해경 (金海卿, 1910~1937)은 ‘이상’으로 더 유명하다. 이들에겐 끊임없이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려는 무의식의 심리가 숨어 있다. 이들은 자기를 부정함으로써 비로소 자기로 돌아간다. 필명은 이들이 선택한 정신적 망명지라고 할 수 있다. * 언어는 시를 이루는 기초 성분이다. 시는 언어를 매개로 성립하는 예술이다. 언어-도구는 시라는 물고기를 잡기 위한 통발이다. 고기를 잡은 뒤에는 통발은 더 이상 쓸모가 없다. 좋은 시인은 시를 얻은 뒤 그 언어를 벗어나 그 너머로 나아가고자 한다. 하지만 언어를 벗어나는 순간 그 언어에 기대어 숨 쉬던 시도 사라진다. 그런 뜻에서 언어는 시의 숙명이자 한계다. * 시가 없어도 우리는 살아남는다. 시 한 편 읽지 않아도 먹고 사는 일에 지장은 없다. 하지만 시를 모른다면 세상의 불확실성에 머리를 쿵 하고 박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시와 담 쌓고 지내는 사람이라면 세상이 얼마나 캄캄한 은총 속에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봄철 벚나무 가지마다 만개한 꽃잎 난분분 떨어져 온통 하얗게 만든 길바닥을 자동차가 짓이기고 지나가도 무감각할 수밖에 없다. * 세사르 바예호(1892~1938)는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라고, “음습한 포유동물, 빗질할 줄 아는 존재”라고 노래한다. 여기에 무슨 말을 더 보탤 것인가! 인간을 규정하는 말을 늘어놓으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테다. 하지만 시인들은 간략하게 말한다. 축약하고 비약하되 할 말은 다하는 것이다. * 배고파 우는 자식들은 어머니가 거두는 거지들이다. 어린 짐승 새끼들은 수시로 어머니에게 먹을 것을 내놓으라고 울며 보챈다. 세사르 바예호는 어린 시절을 어머니를 떠올리며 이렇게 노래한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달걀노른자로만/과자를 구워주시던 따스한 제과기, 어머니”라고! 나비는 날개로 운다 이근배 날개가 있다는 것만으로는 이 봄 산과 들을 뒤덮고 있는 저 꽃들을 다 찾아다닐 수는 없다 내 어리석은 더듬이로는 한사코 쏟아내는 질탕한 향기를 다 맡아낼 수도 없는 것 알에서 애벌레로 다시 번데기로 거듭 몸 바꾸기를 하면서 우주의 빛깔을 모두 담아 짜낸 비단날개로 하늘을 휘저으며 아지랑이 더불어 춤을 추는 것이나 나의 발은 허공에 더욱 시리고 달디단 황홀을 빠는 입맞춤은 혀끝에 죽음처럼 쓰다 겨우 봄 한 철도 못 건너고 적멸로 돌아가는 나의 가녀린 목숨 붉은 볼로 서럽게 웃는 저 어리고 아리따운 것들 속에서 어느 것 하나 내 몫으로 챙기지 못하고 헤프게 꽃가루로 날려버린 사랑 나는 춤으로 운다 날개를 바스러트리며 바스러트리며 쭈그러진 술 주전자   김인덕   먼저는 생업에 뛰여들기도 전에 이유 없이 주인의 망치에 흠씬 뚜들겨 맞았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홀에 호출되였다가 여기저기 술상 모서리에 맞히고 멋도 모르고 사정없이 땅바닥에 나동그라지고 상처를 훈장처럼 주렁주렁 가슴에 단 쭈그러진 술주전자   밤새도록 낯선 손에 목덜미를 잡히고 다람쥐 챗바퀴 돌듯 술잔을 오가며 귀때로 열물을 토했다   온갖 짓거리에 머리가 욱신거리고 몸마저 노근하다가 짓궂은 나그네의 육담에 잠시 마음이 설레이기도 했다   자정이 되여서야 시렁구석에 납작 엎드려 아무 것도 먹지 못한 빈속을 달래며 잠을 청한다   마침내 새벽이 가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 쭈그러진 술주전자끼리 부둥켜안고 스며드는 한점의 찬바람에 휘파람을 분다   쭈그러진 술주전자는 누구나 가슴에 쓰고 농렬한 소주쯤은 품고 사는 거라고 눈물이 마를 때까지 몸으로, 몸으로 말한다      박은영 ​ 아버지 몸엔 뾰족한 것으로 가득했다​ 아무도 찾아내지 못할 것 같았는데 친구들은 보자마자 어깨선에 숨겨둔 낫을 찾았고 바짓단에서 호미를 들춰냈다 바늘, 송곳, 펜촉, 압정…하나씩 찾아낼 적마다 나는 손톱 물어뜯는 버릇이 생겼다 몇 해 전 양지 바른 뒷산에 엄마를 숨겼을 때처럼 때때로 예상을 뒤엎기도 하였다 산새 우는 밤이 덥수룩한 턱수염에서 나오고 나란히 선 아버지와 나 사이 녹슨 열쇠가 잠긴 기억을 열고 윤곽을 드러냈다 체육시간에 잃어버린 실내화 한 짝처럼 눈 씻고도 보이지 않는 화상(畫像) 뒷장의 아버지를 훔쳐보았다 동그라미로 표시된 왼쪽 가슴 셔츠 주머니 가장자리에 양초가 숨겨져 있었다 나는 어둡고 누추한 그림자 속으로 숨어 들어가 촛농을 떨어뜨렸다 귓바퀴에 웅크려 있던 새가 울부짖고 낮달이 희미하게 보이는 학부모 모임날 아버지는 눈앞에 두고도 숨은 그림 하나를 찾아내지 못했다 ​ ​-제9회 조영관문학창작기금 수혜작.   폭탄 돌리기                     -신미균- 심지에 불이 붙은 엄마를/ 큰 오빠에게 넘겼습니다 심지는 사방으로 불꽃을 튀기며/ 맹렬하게 타고 있습니다 큰오빠는 바로 작은 오빠에게/ 넘김니다 작은 오빠는 바로 언니에게/ 넘김니다 심지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언니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나에게 넘김니다 내가 다시 큰오빠에게 넘기려하자/ 손사레를 치며 받지 않겠다는 시늉을 합니다 작은 오빠를 쳐다보자 곤란하다는 눈빛을 보냅니다 언니는 쳐다보지도 않고/ 딴청을  부립니다 그 사이 내손에 불이 붙었습니다 깜짝놀라 엉겹결에 들고 있던 폭탄을 공중으로 던져버렸습니다 엄마의 파편이 머리위로 분수처럼 쏟아집니다   물소의 뒷굽은 거룩하다 라고 / 정태중 시의 설계는 간혹 시어들이 떠나버리기도 해서 부도난 공사장 같기도 하였는데 공사장으로 신의 선물이랄까 하는 물음들이 녹슨 창으로 푸르게는 올라오기도 하였다 하얀 배꽃들이 지난 시간을 입었던 듯 옷들이 누렇게 먼저 바래고는 있는 듯 신문 기자의 탁본이 바래고는 있는 듯 배들이 어떤 문장들로 하여서 배가 불러오기도 한 점심시간이 지나자 부리나케 삐뽀삐뽀로 기선 잡는 불자동차와 헛배에 힘 잔뜩 부린 부도난 공사장 방귀와 상관도 없이 해는 쨍쨍 내리다가 굵은 빗방울 쏟아져 공사장을 내려치는데 부도난 말들이 튕겨 오르는 것이 풀들을 잡고 있는 눈물 같기만 하였는데 불화 가득 늙은 수소 큰 눈이 어리둥절 휘청이다가 눈물을 흘려주다가 음~매 라고 몇 번을 풀을 토악질하였다   사랑은                      채호기 1 사랑은 그렇게 왔다 얼음 녹는 개울의 바위틈으로 어린 물고기가 재빠르게 파고들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알 수 없는 차가움이 눈을 투명하게 한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 발가벗은 햇빛이 발가벗은 물에 달라붙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수양버드나무의 그늘이 차양처럼 물을 어둡게 한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 할 말 없는 수초가 말 잃은 채 뒤엉키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가라앉아도 가라앉아도 사랑은 바닥이 없다. 2 사랑은 그렇게 갔다. 미처 못다 읽은 책장을 넘겨버리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말하려고 입 벌리면 더러운 못물이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날아가며 남겨둔 여린 가지가 자지러지며 출렁이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만 꽃들은 예쁘게 피어났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이미 범람해버린 강물이 지루하게 제 수위를 회복해가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사랑이 어루만진 부위에 홍수가 휩쓸고 간 잔해가 남았다. 3 사랑은 그렇게 왔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기포가 떠오르고  말할 수가 없다.   새를 만나다       이화영 ​ ​ ​ 새 울음이 들려와 빨래를 널었습니다 펄럭이는 자락이 작은 깃 같아서 가만 귀를 기울였습니다 ​ 다시 볼 수 없는 대상은 다정합니다 적당히 마른 야생의 문장은 빨래사람 짓을 합니다 ​ 새에게 안녕하고 인사를 한 날은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안녕이란 단어를 싫어하는 감정이 습관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안녕에게 정복당하고 안녕에게 정보를 얻는 시간입니다 ​ 새의 이니셜은 고독합니다 나는 빨래를 걷어 무생물에 감정을 더할 것입니다 ​ 빨래의 오른 뺨에 대한 해석이 필요합니다 상처 있는 사과를 한 줄로 깎아먹었습니다 ​ 동이 터 옵니다 새하얀 눈발 같은 노래가 쏟아집니다 며칠 빨래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 ​웹진 '시인광장' 2019년 6월호   초대시 말하지 않은 말 / 유안진 말하고 나면 그만 속이 텅 비어버릴까봐 나 혼자만의 특수성이 보편성이 될까봐서 숭고하고 영원할 것이 순간적인 단맛으로 전락해버릴까봐서 거리마다 술집마다 아우성치는 삼사류로 오염될까봐서 '사랑한다' 참 뜨거운 이 한마디를 입에 담지 않는 거다 참고 참아서 씨앗으로 영글어 저 돌의 심장 부도 속에 고이 모셔져서 뜨거운 말씀의 사리가 되어라고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초대시 오래 말하는 사이/ 신달자     가족의 재구성                                         김연종   세상의 모든 호칭은 이모와 언니 오빠로 재편집 되었다 여보당신은 이미 삭제되었고 한 때 유행하던 자기야도 자취를 감추었다 할아버지 할머닌 고려장 모텔에 장기투숙 중 아빠는 아직까지 귀가하지 않고 엄마는 막장 드라마에 칩거 중이다   오랜만에 가족나들이를 간다 이모가 앞장서고 언니 오빠가 뒤따른다 매표소에도 마트에도 이모 투성이다 식당에 들러 맨 먼저 이모를 부른다 아줌마는 자취를 감춘지 오래고 너무 젊은 이모는 슬쩍 언니로 대체된다 뒤처리와 계산은 모두 오빠 몫이다   가로등에 가물거리는 식구들을 들여다본다 할아버지 할머닌 유령처럼 토닥거리고 엄마 아빠는 서로의 손톱자국 사이로 슬며시 빠져나간다 언니 오빠는 각기 다른 채널로 재빨리 발길을 돌린다 달빛에 취한 이모마저 슬쩍 酒房으로 사라지고 나면 룰루랄라 모텔의 네온 간판은 나른하거나 불안하다   - 웹진『시인광장』 2012년 9월호   말레이시아 클럽 황주은 참사랑회는 스무 명으로 시작했다 회원이 줄자 이름을 바꾸자는 의견이 나왔다 어린이집 봉고를 운전하는 7년 언니가 동그라미회가 어떠냐고 제안했다 가슴을 떼어 낸 언니들이 주로 반대했다 도배 다니는 9년 언니의 의견이 신선했다 우리 모두 찰고무같이 질기게 살아야 하니 세계최대 고무 생산국가 이름을 따자고 주장했다 참사랑의 본질도 생고무와 같다고 모두 주억거렸다 우리는 말레이시아 클럽의 언니들이 되었다 3년 언니와 5년 언니는 샘물요양원을 거쳐 영구 탈퇴를 했고 8년 언니는 소원대로 애인의 포도밭에 묻혔다 그녀의 애인은 고위 공직자라고 했다 우리 클럽의 강령은 '늦지 마, 죽지 마, 신입회원은 항시 환영!'이다 투병 연도를 앞에 붙여 이름 대신 부른다 닭발을 팔던 19년 언니도 들국화를 꽂고 우주로 포장마차를 몰았다 그해 겨울, 클럽에는 눈 대신 하얀 진액이 떨어지는 날이 많았다 우리들 가슴에는 구더기가 끓었다 말레이시아 클럽 가입은 무료다   ㅡ『문예바다』(2019, 봄호) ------------------------------- 황주은 : 경북 예천 출생.  2013년 격월간《시사사》로 등단.     거울 / 조용숙 가까이 다가오면 무엇이든 덥석덥석 삼켜버리는 나는 온몸이 입이라네 헛배만 불렀다 꺼지는 상상임신처럼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다네 거침없이 입에 넣은 것들이 깊은 망각의 늪에 떨어질 때면 나는 먹은 만큼 더 허기가 진다네 먹이를 찾아 나설 발이 없어 늘 뱃가죽이 납작하게 붙어 있는 나에겐 영양결핍에서 오는 폭식 습관이 있다네 늘 허겁지겁 삼켜봐도 먹을 수 있는 건 항상 생의 외피뿐이어서 깊이와 무게는 삼킬 수가 없다네 지독한 편식주의자인 나는 언젠가부터 만성 빈혈을 앓고 있다네 . .   걸레 / 이기순 몸으로 닦아준다 접근할수록 쌓여가는 삶의 흔적 겸손으로 핥고 지나간다 잔재 깊숙한 아픔까지 안으로 흡수시키는 나, 흥건하게 어두워진다 비웃지 마라 뒤엉킨 시간 속에 너덜거리는 세상의 먼지 뒤집어 쓴 건 내가 아닌 너다 네가 게워낸 삶의 잔재 몸으로 쓸어안고서도 흔쾌히 가슴을 여는 나, 인간이 만들어낸 시커먼 속내 기꺼이 들이마신다 하여 너는 나를 비웃을 자격이 없다   #디카시 꽃등심              김세연 등에 문신처럼 새겨진 문양이라 했다 살아서는 볼 수 없는 접시 위에 고이 핀 저 붉은 꽃   (           )                  안도현 내 애인은 바위 속에 누워 있었지 두 손 가슴에 모으고 눈을 감고 있었지 누군가 정으로 바위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 들렸지 내 애인은 문을 밀고 바깥으로 걸어나왔지 바위 속은 환했지만 바깥은 어두웠지 내 애인은 옛날부터 나를 알아보지 못했지 - 안도현, '익산고도리석불입상' 전문 누구에게나 사랑은 맹목, 눈 먼 석불 나에게도 눈 먼 석불이 있지 부모에게는 자식이 눈 먼 석불이요 칸트에게는 철학이 눈 먼 석불이지 한용운의 님이 모든 기리운 이의 눈 먼 석불이듯이 모든 사랑하는 이의 가심에는 하나의 눈 먼 바위가 있지 천 년이 가도 어두운 석불입상, 네Du가 있지......   민들레 저작권   김서하 ​ 꽃을 베끼는 복제의 계절 들뜬 바람이 열린 창문으로 들락거린다 틈을 보이면 위험한 시뮬라크르의 세상 원본을 밝히지 않는 강을 건너온 바람의 옷소매에서 물냄새가 났다 가벼운 생일수록 뿌리는 질기다 제멋대로 분양된 흰 민들레 그런데 너는 알고 있을까 이번 달에 월세 계약이 끝난다는 것을 봄의 작품들 발신지를 몰라 저작료를 지불할 필요 없으니 끝까지 꽃대를 밀어 올린다마는 너를 안고 궁핍의 페이지를 한 번 더 옮긴다. 시집『가깝고 먼』2019. 고요아침 열린선           상징법 그동안 기초적인 것과 좋은 습관 들이기 그리고 쉽게 시를 이해시켜 드리기 위해 한번에 하나씩만 정확히 전달하려 노력했습니다.오늘 공부하고자 하는 것은 상징법인데 시의 참 맛을 이제부터 알아가시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 원관념과 보조관념에 대해 말씀드렸는데요 상징법은 원관념을 숨기고 보조관념을 활용하여 사유를 깊게 하는 것입니다. 이때 보조 관념으로 사용하는 사물과 원래 쓰고자 하는 원관념의 공통점을 어떻게 잘 풀어내는가가 관건이 됩니다. 지난 주와 마찬가지로 저의 졸시 배롱나무를 예로 들겠습니다.        배롱나무 /  김시호   너 없이 피고 지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 나는 배롱나무가 되었다 중구난방 피는 너를 안고 밑둥이 허예지도록 나는 야위웠는데 시든 날에 여름은 가고 내 모르는 눈물이 동강에 섞이었다 희나리처럼 설운 나는 먹빛 하늘에 살 수 없었으나 명패가 삼문三問인지라 마음만은 겹겹으로 지키었다 사는 것이 한 생만은 아니라서 나는 봄마다 너를 안고 일어나 햇불이 무색하도록 꽃 피게 하리라 지난 주에 이 글에서 너는 원관념 피는 꽃은 보조관념                  나는 원관념 배롱나무는 보조관념이다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사실은 원관념인 너와 나를 숨긴 것이지요. 눈치채셨겠지만 이 글은 단종애사를 쓴 시입니다.. 즉 원관념 너는 단종이고, 나는 성삼문입니다 그래서 독자에게 힌트를 주기 위하여 본문에 삼문이라는 단어를 집어 넣은 것입니다.. 그러면 원관념인 성삼문과 보조관념인 배롱나무는 어떤 유사성이 있을까요..? 제가 이 글을 쓸 때는 처음 배롱나무를 한참 관찰하고 그다음 집으로 돌아와 배롱나무와 관련된 자료를 찾다가 우연찮게 성삼문이 좋아한 꽃이란 것을 알게되어 시나리오 구성을 위해 단종애사를 읽었습니다 그런다음 다시 배롱나무 앞에 앉아 성삼문을 생각하면서 나무를 보고 쭉 쓴 것입니다.. 첫 연의 너 없이 피고 지는 일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 (주군에 대한 신하의 도리) 나는 배롱나무가 되었다 (성삼문의 일편단심) 중구난방 피는 너를 안고 (주관적이지 못한 어린 단종에 대한 표현이면서 동시에 고문을 당할 때 전신에서 터져나오는 피와 실제 배롱나무꽃 피는 모양을 공통분모로 표현) 밑둥이 허얘지도록 나는 야위었는데 (실제 배롱나무의 밑둥은 허였기도 하며 옛날 고문 과정에서 정갱이 뼈가 하얗게 드러나는 것을 묘사) 시든 날에 여름은 가고 (수양대군의 찬탈) 내 모르는 눈물이 동강에 섞이었다 (동강이 흐르는 영월에서 단종의 죽음) 희나리처럼 설운 나는 (비통한 신하의 심정) 먹빛 하늘에 살 수 없었으나 (주인을 버리고 세조 밑에서 살수는 없었다) 명패가 삼문인지라 마음만은 겹겹으로 지키었다 (삼문을 독자들에게 힌트를 제공하기도 하였고 문을 세겹으로 빗장을 걸어 충성심을 지켰다) 사는 것이 한 생만은 아니라서 나는 봄마다 너를 안고 일어나 (다시 살아나더라도 나는 변함없이 주군을 모실 것) 햇불이 무색하도록 꽃 피게 하리라 (다시 태어나서라도 충성을 다하여 기어코 주인을 지키겠다) *요기서 잠깐 논란이 있었던 햇불은 김시호식 조탁입니다 흔히들 횃불의 오타가 아닌가 하셨는데 그것이 아니고 한 여름 이글거거리는 태양을 제나름으로 표현 한것입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원래는 시에 대한 해설은 확장성에 제한을 받기 때문에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글에서도 성삼문과 관련하여 시작을 하였으나 중의적으로 연인관계에서 일편단심 부모의 자식사랑에 대한 부분도 비쳐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상집법에 대한 이해가 되셨나요..?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한가지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 너무 원관념을 숨기는 것에 급급하다보면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우주의 말이 됩니다 많은 시인들이 이런 오류에 빠집니다..   별들이 모여 사는 마을                        김찬옥   지호가 유치원에서 올 시간이다 가방을 받아들고 집 앞 편의점에 들려 마이쭈를 사고 새콤달콤한 얼굴로 아파트 정문을 들어섰다 마당에 핀 꽃들이 오늘따라 유독 한가해 보인다 봄은 꽃들에게 먼저 왔건만 경비병보다 더 지루해진 오후, 한참 졸고 있을 꽃들에게 지호를 소개시켜 주기로 했다 "저 나무는 목련이라고 해, 꽃이 뭐 같아 보여?" "응 꽃잎이 하얀 날개 같으니까 백조 같아요" "그래 정말 백조 같네, 큰 소리로 말하면 백조 떼가 우르르 날아가 버릴지도 몰라" 지호는 살금살금 목련나무 아래로 걸어갔다 적막한 봄은 달아올라 모이를 쪼듯 연신 물어댄다 "저 건 벚나무인데 저 꽃은 뭐 같아?" "응 벚꽃나무 뒤에 하늘이 있으니 밤하늘 별자리 같아요 별들이 함께 모여 사는 아름다운 마을이 나무에 걸려있네요" "응 정말 그러네, 지호의 눈은 진짜 상상님이 주셨나 봐" 지나던 바람이 귀를 세우고 지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일까 백조 몇 마리 땅으로 내려앉아 날개 속에 부리를 감추자 지호의 머리 위에도 발등 위에도 낮 별들이 호호호 쏟아져 내렸다   ㅡ『시현실』(2019, 여름호) ------------------------------- 김찬옥 : 1996년 등단. 시집『물의 지붕』『벚꽃 고양이』등. 수필집『사랑이라면 그만큼의 거리에서』.    지문 김유진 여긴 무대인데 너무 누워 있는 건 아닌가 마지막 희극일 수도 있고 흥행하는 연극일 수도 있는데 너무 오래 액션이 없는 건 아닌가 침묵도 대답이라고 누군가가 말하지 않았다면 그냥 한 번쯤 움직였을 텐데 무언가를 계속 적는 관객 앞에서 나는 사물 여긴 무대인데 너무 대사가 뻔한 건 아닌가 특이사항 없음이라 적고 간호사가 포도당에 비타민을 타는 게 형식적인 건 아닌가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나는 사물 사물은 감정을 드러낼 수 없으니 역할을 하루 더 연장하는 수밖에…… 여긴 무대인데 조명이 너무 식상한 건 아닌가 조명 주위로 벌레들이 모여드는 것도 예정된 방치처럼 티 나게 노골적인 건 아닌가 암전되거나 말거나 천천히 어두워지거나 말거나 감은 눈은 더 이상 뜰 필요 없지 사물의 대사는 사물 속에 있을 테니까 - 격월간 《현대시학》, 2017년 11•12월호.       해설 어느 순간 당신은 이런 상상도 할 것이다. 내가 만약 식물인간이 된다면 나는 과연 무엇으로 존재할까? 식물일까? 아니면 동물일까? 아니면 식물적 동물일까? 동물적 식물일까? 다른 사람은 나를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나는 나를 인식할 수 있을까? 만약 나 혼자만 나를 인식한다면 과연 나는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방치되고 있는 것인가? 이런 질문에 의해 김유진 시인의 「지문」은 탄생했을 것이다. 그동안 식물인간에 대한 시는 많이 창작되어 왔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창작된 시들은 공통적으로 식물인간의 존재성을 어떻게 인식할 것이냐 하는 존재론적인 문제를 파고들어 시적으로 형상화했다. 그럴 때 식물인간이 주체자가 되어 적극적으로 발화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문」에 나온 화자는 주체자로서의 발화가 거리낌이 없고, 자신의 존재성에 대한 인식이 매우 능동적이다. 어차피 타자들이 식물인간인 ‘나’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면 ‘나’는 나름대로의 ‘나’를 표출하는 수밖에 없다 라는 의지가 돋보인다. 화자는 지금 연극에서 나쁜 역할을 맡았을 뿐이다. 그런데 이 연극에서 화자에게 부여된 지문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마지막 희극일 수도 있고/ 흥행하는 연극일 수도 있는데/ 너무 오래 액션”이 없이 생각만 하고 있다. 움직임은 없고 생각은 자유로운 것이 화자에게 주어진 역할이다. 역할의 본질은 ‘생각하는 사물’. 관객들은 ‘생각하는 사물’을 관찰하고 기록한다. 사물(事物)인지 사물(死物)인지 관찰하다 “특이사항 없음이라 적고” “포도당에 비타민을 타는” 형식적인 조치를 취한다. 마치 죽어가는 식물에 액체 비료를 투입해주는 식이다. 화자는 죽을 때까지 ‘사물’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물은 감정을 드러낼 수 없으니”, “감은 눈은 더 이상 뜰 필요” 없으니 “예정된 방치처럼” 노골적인 관객들에게 최선을 다해 “역할을 하루 더 연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화자가 끝까지 저항하면서 보여주려는 것은 무엇인가? ‘노골적인’ 가족들의 방치인가? ‘노골적인’ 의사와 간호사의 역할인가? 아니면 자신에게 주어진 ‘지문’에 대한 확고한 입장표명인가? 시인은 스스로 비참함에 비참함을 더하는 식물인간인 의지를 연극이라는 코드를 활용해 「지문」에서 미학적으로 보여주었다. 식물인간에겐 존재성을 나타내는 주체의 결핍이나 욕망의 환유가 없다. 그저 마지막까지 그들에게 주어진 한정된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의학적인 조치를 통해 생명연장을 하기에 과학적으로 보면 식물인간은 분명 피동적이다. 그러나 시인의 눈에 비친 그것은 주체적이다. 당신의 눈엔 어느 쪽으로 비치는가?(하린 시인)   28회 정지용문학상 국물 당선자 | 신달자 당선일 | 2016-04-25 국물 메루치와 다시마와 무와 양파를 달인 국물로 국수를 만듭니다 바다의 쓰라린 소식과 들판의 뼈저린 대결이 서로 몸 섞으며 사람의 혀를 간질이는 맛을 내고 있습니다 바다는 흐르기만 해서 다리가 없고 들판은 뿌리로 버티다가 허리를 다치기도 하지만 피가 졸고 졸고 애가 잦아지고 서로 뒤틀거나 배배 꼬여 증오의 끝을 다 삭인 뒤에야 고요의 맛에 다가옵니다 내 남편이란 인간도 이 국수를 좋아하다가 죽었지요 바다가 되었다가 들판이 되었다가 들판이다가 바다이다가 다 속은 넓었지만 서로 포개지 못하고 포개지 못하는 절망으로 홀로 입술이 짓물러 눈감았지요 상징적으로 메루치와 양파를 섞어 우려낸 국물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바다만큼 들판만큼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몸을 우리고 마음을 끓여서 겨우 섞어진 국물을 마주보고 마시는 그는 내 생의 국물이고 나는 그의 국물이었습니다    
109    야이야이(가사) 댓글:  조회:1832  추천:0  2018-12-03
    야이야이     장경매 좋으면 좋다고나 할거지 몇시냐고 왜 묻나요 당신께도 핸드폰이 있잖아요 야이야이 능청떨지 말아요 아닌척해도 좋아 없는척해고 좋아 보기만해도 절로 웃음나는 당신같은 그런 사람 좋아합니다 이쁘면 이쁘다고나 할거지 왜 하필 개나리  꽃인가요 당신은 개나리 꽃을 좋아 하나 봐 야이야이 능청떨지 마라요 둘러대도 좋아  엉뚱해서 좋아 생각만해도  절로 웃음나는  당신같은 그런사람 좋아합니다 2018.5월방송국련합합평회에서 제1임자로  호평받았으나 문슨 원인인지 곡 붙혀지지 않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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