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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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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그것이 알고싶다] - 초(秒)?... 댓글:  조회:3383  추천:0  2018-02-22
  유형 개념용어 분야 과학/과학기술 요약 시간과 각도(角度)의 단위- 초(秒)   내용 시간 단위로서의 초는 1분(分)의 60분의 1, 또는 1평균 태양일(太陽日)의 86,400분의 1에 해당하며, 시간 단위로서는 최소의 단위이다. 이보다 더 짧은 시간은 10분의 1초, 100분의 1초 등으로 표시하는데, 과학의 발달로 몇만분의 1초 또는 그보다 더 작은 시간의 측정도 가능하다. 일상생활에 사용되고 있는 시계 중 대부분은 초까지 측정하도록 제작되어 있다. 국제적으로는 파리에 있는 표준연구소가 측정한 1초의 길이를 1972년 1월 1일을 기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안정된 세슘원자(원자번호 133)의 진동수가 91억9263만1770번 반복하는 시간의 길이를 1초라고 규정한 것이다. 각도의 단위로서의 1초는 1분의 60분의 1, 또는 1도(度)의 3,600분의 1에 해당한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각도의 단위로는 최소의 단위가 ″라는 기호로 표시되고 있다. 예를 들면 1°35′15″ 등이다. 각도로서의 초는 일상생활에 사용되기에는 너무 작은 양이므로 사용되지는 않으나, 전문적인 지상 측량이나 천문관측에서는 널리 사용되며, 1,000분의 1초까지도 측정되는 예가 흔하다. 대단히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옛 문헌에는 1초보다 작은 단위도 있었다. 이것은 지구의 세차운동(歲差運動)에 의한 별들의 위치 변화를 각도로 표시할 때 사용한 1초보다 더 작은 1미(微)라는 단위이다. 1미는 1초의 60분의 1을 뜻하며, 기호로는 ‴을 사용하였다. 시간·각도의 단위로 동일한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는 초는 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서로 혼동하기 쉽다. 따라서 두 경우를 다 포함하거나, 그 가운데 하나만을 표기하는 경우에는 이를 분간하기 쉽도록 몇 초각(seconds of arc) 또는 몇 초시간(seconds of time) 따위로 분명히 해 두기도 한다.   '민속놀이 챠챠챠~'  [ 2018년 02월 26일 ]     민속체험 나들이 너무 신나요!    
1996    [동네방네] - 동계올림픽과 20년만에 공동 금메달 댓글:  조회:5605  추천:0  2018-02-22
동계올림픽 봅슬레이에서 20년 만에 공동 금메달이 나왔다. 동계올림픽 전체를 통틀어서는 아홉 번째다. 19일 강원도 평창 슬라이딩센터에서 열린 평창동계올림픽 남자 봅슬레이 2인승 경기가 모두 마무리됐을 때 저스틴 크립스-알렉산더 코파치(캐나다) 조와 프란체스코 프리드리히-토르스텐 마르기스(독일) 조가 1~4차 시기 합계 3분16초86으로 100분의 1초까지 기록이 똑같아 모두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제3회 동계올림픽인 1932년 미국 레이크플래시드대회부터 봅슬레이는 정식종목이 됐는데 1998년 일본 나가노대회에서 처음 피에르 루에더스-데이비드 맥이처런(캐나다) 조와 군터 후베르-안토니오 타르타글리아(이탈리아)가 공동 금메달을 딴 지 20년 만의 일이다. 3차 시기를 마쳤을 때 1위부터 5위까지 100분의 25초 안에 다닥다닥 모여 있었지만 4차 시기는 더욱 극적으로 갈렸다. 크립스 조가 프리드리히 조에 0.06초 앞서 있었지만 먼저 뛴 프리드리히 조가 4차 시기 두 번째로 빠른 기록을 냈다. 가장 빠른 기록은 오스카스 멜바디스-제니스 스트렝아(라트비아) 조가 라트비아 조가 작성해 합계 3분16초91로 동메달을 획득했다. 크립스 조는 결승선을 들어오고 난 뒤 TV 모니터에 녹색 불이 들어오지 않아 자신들이 은메달에 그친 줄 알았지만 나중에 공동 금메달이란 소식에 펄쩍 뛰어올랐다.   동계올림픽 역사에 첫 공동 금메달은 1928년 스위스 장크트모리츠에서 열린 제2회 대회에서 나왔다.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에서 베른트 에벤센(노르웨이)과 클라스 툰베리(핀란드)가 첫 공동 우승을 남겼다. 1956년 이탈리아 코르티나담페초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1500m에서 옛 소련의 예브게인 그리신과 유리 미하일로프가 2분08초6으로 공동 1위에 올랐다. 1000분의 1초까지 재는 현재 기술이라면 1위와 2위를 가를 수 있었지만 당시에는 도리가 없었다. 그리신은 4년 뒤 미국 스코밸리올림픽 같은 종목에서도 로알드 아아스(노르웨이)와 공동 우승하는 진기록을 작성했다. 4년 전 소치에서도 공동 금메달이 나왔다. 알파인스키 여자 다운힐 결선에서 나온 티나 메이스(슬로베니아)와 도미니크 기신(스위스)이 공동 1위를 차지했다. 평창올림픽에서는 지난 15일 크로스컨트리 여자 10㎞ 프리에서 마리트 비에르엔(노르웨이)과 크리스타 파마코스키(핀란드)가 25분32초4로 같은 시간을 기록해 둘 모두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편 같은 트랙을 이용해 경기를 벌이지만 1957년 봅슬레이스켈레톤에서 갈라져 나와 별도 연맹을 창설하고 1964년 인스브루크대회부터 정식종목이 된 루지는 1000분의 1초까지 따져 100분의 1초까지 재는 봅슬레이스켈레톤과 차별화된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동계올림픽 봅슬레이에서 20년 만에 공동 금메달을 수상하는 프란체스코 프리드리히(왼쪽부터)-토르스텐 마르기스(독일) 조와 저스틴 크립스-알렉산더 코파치(캐나다) 조가 19일 평창 슬라이딩센터의 남자 2인승 플라워 세리머니를 위해 시상대 맨 위에 올라 기뻐하고 있다. 평창 AP 연합뉴스   ///서울신문
1995    [이런저런] - 올림픽과 "찰나"와 시간의 의미 댓글:  조회:3584  추천:0  2018-02-22
아주 긴 시간을 '겁(劫)'이라고 한다. 하늘의 선녀가 천년에 한 번 땅에 내려와 집채만 한 바위를 옷깃으로 한번 스치고 올라간다. 그렇게 해서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이 겁이다. 반면 아주 짧은 시간을 찰나(刹那)라고 한다. 산스크리트어(語)에서 온 불교 용어다. 손가락 한번 튕기는 데 걸리는 시간이라고 한다. 어떤 계산법에 따르면 0.013초에 해당한다는 주장도 있다.  ▶평창에서 벌어지는 동계올림픽은 찰나의 게임이다. 일본은 피겨 간판 하뉴 유즈루가 환상적인 4회전 점프 기술로 첫 금메달을 선사해 열광하고 있다. 보통 4회전 점프에 드는 체공(滯空) 시간은 0.6~0.7초다. 이 시간에 스케이터는 점프 높이, 회전 속도, 몸의 기울기 등을 완벽하게 계산해 얼음 위로 내려와야 한다. 조금만 삐끗하면 나동그라지고, 환희와 좌절이 갈라진다.    ▶평창에서 찰나의 승부를 보여주는 드라마들이 잇따르고 있다. 그제 남자 500m 스피드스케이팅에 출전한 한국의 차민규가 우승을 눈앞에 뒀다가 0.01초 차이로 노르웨이 선수에게 금메달을 내줬다. 남자 봅슬레이에서는 독일과 캐나다 팀이 3분16초86으로 0.01초까지 똑같아 공동 우승을 차지하는 일이 벌어졌다.    ▶은메달 확정 후 차민규는 "0.01초의 의미가 뭔가" 묻자 "(나의) 짧은 다리"라고 했다. 신체 조건이 좋았으면 1등도 가능했을 거라는 아쉬움의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최선을 다했고 은메달은 충분히 값지다. 봅슬레이의 경우 이틀 동안 네 차례 달린 기록을 합산한 성적이 어떻게 이렇듯 완벽하게 같을 수 있는지 놀랍다. 이걸 우연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이상화는 100m를 통과한 후 '오늘 됐다' '오늘 이긴다' 생각했다고 한다. 그가 마지막 코너에 진입한 순간 왼발이 살짝 삐끗해 손해를 본 시간도 찰나였을 것이다.  ▶4년을 피땀 흘리며 훈련한 선수들에겐 짧게는 몇십 초, 길게는 단 몇 분에 승부가 결정되는 경기가 허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남자 500m 스피드스케이팅에서는 출발 신호가 울린 지 1초도 안 돼 넘어진 불운한 선수도 있었다. 그러나 바꿔보면 평창의 선수들은 0.01초를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역경과 시련을 넘은 사람들이다. 0.01초가 얼마나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나 생각하면 한순간 한순간 보내는 시간의 의미가 새삼 숙연하게 다가온다. 정상(頂上)의 대결이란 각자 모든 노력을 다한 후 찰나의 순간 맞붙는 것이다. ///조선일보/김태익 논설위원 =====================          남자 500m 스피드 스케이팅 차민규 선수 은메달 훌륭한 경기를 했어요! 1위 선수와 단 0.01초 차이가 나네요.  얼마나 적은 차이 일까요? 정말로 대단한 일을 했냈지만, 조금 안타깝네요 ^^  아주 아주 조금의 차이라 아쉬움이 크네요.           이런 경우에 사용하는 영어표현이 떠올라 포스팅 해요!  아슬아슬하게 졌다. 아깝다  lost a close game close, but no cigar That was close 하지만 대단한 일을 해냈어요 ! 화이팅! 응원해요 !! ///[웰브WELB 블로그] ========================== 1000분의 1초를 다투는 경기인 루지. [사진=osen] [헤럴드경제 스포츠팀=박건태 기자] ‘루지(luge)’는 프랑스어로 썰매라는 뜻이다. 유럽 알프스 지역의 썰매놀이가 스포츠로 정착됐다. 예능방송 ‘무한도전’으로 익숙해진 봅슬레이, 스켈레톤과 함께 3대 썰매 종목으로 묶인다. 1000분의 1초까지 측정돼 가장 빠른 속도를 필요로 한다. 루지는 발을 전방으로 향하고 얼굴을 하늘로 향한 자세로 소형 썰매를 타는 스포츠다. 종목은 남자 싱글, 여자 싱글, 더블, 팀 계주로 4개 종목이 있다.  출발하기 전 트랙에서 일하는 사람들과의 충돌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트랙 전 구간을 살피고 안전을 확인 한 뒤 “Track is Clear(트랙이 깨끗합니다)”라는 출발 신호를 보낸다. 신호 후 30초 내로 출발해야 한다. 출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루지 선수의 모습. [사진=osen] 싱글은 남자, 여자 개인 순위를 다투며 더블은 남녀 구분 없이 함께 경기를 치른다. 하루에 2차례 활주해 기록을 합산한 뒤 소요시간이 가장 빠른 팀 순서로 순위가 결정된다. 개인 종목은 이틀 간 4회 주행 기록을 합산하고, 2인승은 하루 2회, 팀 릴레이는 하루 1번 주행한다.  팀 계주는 여자 싱글, 남자 싱글, 더블 순으로 계주형식이다. 트랙을 주행한 뒤 기록을 합산해 최단 시간 순으로 순위를 결정한다. 앞 주자가 활주를 끝내고 결승선 터치 패드를 치면 후발 주자가 출발한다.  루지는 통일된 트랙을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국제루지연맹은 트랙 건설에 관한 규정을 세웠다. 남자 1인승 경기의 경우 최대 1,350m를 넘어서는 안 된다. 남자 경기의 출발 지점부터 가장 낮은 지점까지의 트랙 평균 경사는 10%를 넘길 수 없고, 두 번째 낮은 지점까지 평균 경사는 8%다. 계산된 최대 스피드는 시속 135km를 넘길 수 없다.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각 나라 선수들의 훈련을 위해 트랙을 제공하는 의무 규정시간을 명시했다. 올림픽 1주일 전, 올림픽 시즌 중 1주일을 제공한다. 한 주당 최소 6일 동안 하루 3번 훈련을 할 수 있다. 비슷한 실력을 가진 선수들이 경쟁하기 때문에 평창이 홈인 한국에 유리하다. 한국으로 귀화해 올림픽에 출전한 에일린 프리쉐. [사진=osen]  
1994    [그것이 알고싶다] - 올림픽과 "1000분의 1초"와 금메달 댓글:  조회:4064  추천:0  2018-02-22
종목마다 최소 계측단위 달라  크로스컨트리 등은 0.1초이지만, 여러명 순위 가려야 할 경우에는 초당 1만장 사진 판독해 결정   평창 올림픽에 걸려 있던 금메달 102개는 19일을 기점으로 103개로 늘어났다. 남자 봅슬레이 2인승에서 첫 공동 금메달이 나왔기 때문이다. 프란체스코 프리드리히-토르스텐 마르기스 조(독일)와 저스틴 크립스-알렉산더 코파츠 조(캐나다)는 4차 시기 합산 기록이 3분16초86으로 100분의 1초까지 같았다.  캐나다와 이탈리아가 금을 나눠 가진 1998년 나가노 올림픽 이후 20년 만에 나온 봅슬레이 공동 금메달이었다. 브레이크맨 코파츠는 “0.01초가 눈 한 번 깜빡하는 시간의 13분의 1이라고 한다. 그 차이는 상상하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종목이 봅슬레이가 아니라 같은 트랙을 사용하는 루지였다면 메달 색깔은 갈린다. 루지는 0.001초 차까지 공식기록을 계측하기 때문이다.  봅슬레이는 썰매 앞쪽 외부에 부착된 센서를 통해 기록을 재는데 그 계측에 사용되는 양자 타이머는 100만분의 1초 단위까지 포착이 가능하다. 그런데 왜 공동 금메달을 줄까. 이유는 개별 경기연맹별로 공식기록에 대한 규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루지는 타이기록이 나오면 1000분의 1초까지 따져 메달 주인을 가른다. 루지도 한때는 0.01초가 최소기록 단위였지만 1972년 더블 경기에서 공동 금메달이 나온 뒤 기준을 바꿨다.  19일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에서 차민규는 0.01초 차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동거리, 가속도 등을 배제하고 산술적으로 계산했을 때 금메달을 딴 호바르 로렌첸(노르웨이)에게 14.5cm가 늦은 셈이다. 경기 후 차민규는 “짧은 다리가 아쉽다”며 웃었다. 차민규의 키는 179cm였고, 금메달리스트 로렌첸은 187cm였다. 본인 말대로 좀 더 컸다면 결과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소치 올림픽 남자 1500m에서도 0.003초 차로 금메달 주인이 갈렸다. 물론 0.01초 단위로 기록을 측정했다면 공동 금메달로 남았을 것이다. 13일 평창 겨울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500m 준준결선에서 2위로 결승선을 통과한 최민정의 판독 사진 결과. 당시 최민정은 실격 판정을 받았다. 오메가 제공 스피드스케이팅처럼 속도를 겨루는 종목에서 0.01초 단위는 가장 흔한 ‘국제표준’이다. 소치 올림픽 스키 여자 활강에서도 티나 메이즈(슬로베니아)는 도미니크 가이신(스위스)이 41초57 타이를 기록해 알파인스키 사상 첫 올림픽 공동금메달이 나왔다. 당시 국제스키연맹(FIS) 관계자는 0.01초까지로만 승부를 가리는 이유에 대해 “더 작은 단위까지 고려하기에는 기록의 진정성을 담보할 수 없다. 추운 날씨에 야외에서 하는 경기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올림픽 공식 타임 키퍼(시간 기록원을 의미)인 오메가 타이밍 관계자는 “더 정확한 수치는 있지만 공식기록 최소 단위는 0.01초다. 오메가는 규정을 준수한 공식 기록만을 단체에 제공한다”고 밝혔다. 한편 18일 열렸던 바이애슬론 남자 15km 매스스타트에서 마르탱 푸르카드(프랑스)와 지몬 솀프(독일)는 똑같이 35분47초3을 기록했다. 바이애슬론의 최소 단위 측정은 0.1초다. 하지만 금은 푸르카드에게 돌아갔다. 피니시라인을 통과하는 순간 선수의 기록 비교가 명확히 가능했기 때문이다. 여러 명이 순위를 가르는 경기의 경우 오메가는 결승선에서 포토피니시카메라로 초당 1만 장의 이미지를 찍어 순위를 가른다. 판독 결과 푸르카드는 14cm 차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때 5분의 1초, 10분의 1초 단위까지 측정되던 공식 기록은 1972년 뮌헨 올림픽부터 1000분의 1초 단위까지 측정됐다. 종목마다 결승선 통과 기준은 다르다. 스피드스케이팅과 쇼트트랙은 모두 날이 기준이다. 선수들은 찰나의 순간이라도 앞당기기 위해 ‘날차기’ ‘날들이밀기’ 등 다양한 기술을 선보이고 있다.  스케이트와 달리 스키의 결승선 통과 기준은 날에 해당하는 플레이트가 아닌 스키 부츠가 된다. 결승선 지상 30cm를 지나는 레이저 빔을 차단하는 순간이 기록으로 남게 된다.     ///평창=임보미 /강릉=박은서 기자   ========================== [앵커] 평창올림픽에서는 찰나의 순간에 승부가 가려지곤 합니다. 여자 알파인 스키도 100분의 1초, 아주 작은 차이로 금메달이 가려졌습니다. 전영희 기자입니다.    [기자] 최고 시속 90km로 질주하는 이 선수, 스노보더인 체코 레데츠카는 몸풀기로 알파인 스키에 출전했습니다. 결승선을 통과하자 이번 대회 최대 이변이 펼쳐졌습니다. 1분21초11, 0.01초 차로 금메달을 땄는데 막상 본인은 어리둥절합니다. 남자 스피드스케이팅 5000m에서는 세계기록 보유자 캐나다 블로멘과 노르웨이 페데르슨이 끝까지 접전을 펼쳤습니다.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동시에 스케이트 날을 들이밀었는데 기록은 똑같았습니다. 느린 화면으로도 분간하기가 어려웠지만 사진 판독 결과 블로멘의 날이 1000분의 2초 빨라 은메달을 따냈습니다. 조금이라도 기록을 줄이기 위해 날이 아니라 몸을 써야하는 종목도 있습니다. 4년 전 소치올림픽 스키 크로스에서는 결승선 앞에서 3명이 동시에 넘어졌습니다. 스키에서는 몸이 결승선 통과 기준, 손을 뻗은 러시아 선수가 스키를 내민 선수들을 이겼습니다. 4년간 땀의 결실을 찰나의 순간으로 평가받는 선수들, 그래서 동계 올림픽에서는 작은 실수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1993    [이모저모] - 올림픽과 "0.01초"와 "짧은 다리" 댓글:  조회:3580  추천:0  2018-02-22
차민규, 100분의 1초 느려 銀  알파인스키·봅슬레이 남 2인승  두 명(팀) 기록 같아 공동 金 차민규가 19일 오후 강원 강릉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 경기에서 결승선을 통과할 때 0.01초라도 줄이기 위해 발을 앞으로 뻗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이데일리 평창특별취재팀 조희찬 기자] ‘0.01초의 싸움.’  동계스포츠에서 시간 싸움이 워낙 치열하다는 것을 묘사하기 위한 표현이다. 비유와 달리 실전에서 0.01초로 승부가 가려지는 장면은 흔하지 않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에선 유독 ‘0.01초’ 싸움이 자주 연출됐다. 썰매 종목인 루지는 0.01초 차로도 승부를 가리지 못해 1000분의1초 단위로 기록을 잰다. 쇼트트랙은 속도경쟁에 앞서 순위경쟁이어서 0.01초의 다툼보다 비디오 판독이 나올 정도로 더 정교한 승부를 겨룬다. ◇ 차민규, 0.01초 차로 금메달  차민규(25)는 19일 강릉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에서 열린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에서 은메달을 차지했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었는데) 짧은 다리가 아쉽다”며 현장에 있던 이들을 폭소하게 했다.  차민규가 툭 던진 농담 한마디에는 진심도 담겨있다. 그는 이날 1위 선수에게 0.01초가 부족해 패했다. 그의 말대로 키가 조금만 더 컸더라도 극복할 수 있는 격차다. 이종훈 스포츠평론가는 한 방송에 나와 “그게 농담 같지만 굉장히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며 “실질적으로 1cm만 더 컸더라면 0.01초 차는 극복이 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차민규는 0.01초 승부의 은메달이지만 기쁨은 금메달 이상이었다. 그는 “(내게 0.01초란)‘짧은 다리’”라며 “금메달가지 바라볼 수 있겠다 했는데 아쉽긴 아쉽다. 솔직히 상대 선수들이 실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재치있는 답변을 내놨다.  동계올림픽 최초로 스노보드와 알파인스키에 동시 출전한 체코의 에스터 레데츠카도 0.01초의 수혜자다. 그는 주종목이 스노보드지만 지난 17일 정선 알파인센터에서 열린 대회 여자 슈퍼대회전에서 1분 21초11 만에 결승선을 통과하며 1위로 골인했다. 2위를 차지한 안나 파이트(오스트리아)와는 불과 0.01초차였다. 경기 후 레데츠카는 리더보드를 한참이나 뚫어지게 쳐다봤다. 0.01초 차까지 숫자를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센 그는 끝까지 멍한 표정을 유지해 관중에게 큰 웃음을 선사했다. ◇ 봅슬레이, 0.01초 같아 금메달  0.01초의 냉정한 승부조차 승자와 패자를 가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19일 평창올림픽 슬라이딩센터에서 열린 대회 봅슬레이 남자 2인승 경기에선 캐나다의 저스틴 크립스-알렉산더 코파치와 독일의 프란체스코 프리드리히-토르스텐 마르기스가 1~4차 시기 합계 3분16초86을 기록해 100분의 1초까지 같은 기록으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결과는 공동 금메달. 봅슬레이가 100분의 1초까지만 기록을 재기 때문이다. 이날 캐나다와 독일은 함께 금메달을 가져가게 됐다. 4차 시기 가장 마지막 조였던 캐나다와 이를 지켜보던 독일팀 모두 경기가 끝나자 얼싸 안고 기뻐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시상대에는 네 명이 사이좋게 올라섰다. 은메달 수상자의 자리는 비워둔 채였다. 크립스는 이 ”특별한 순간”을 맞이한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올림픽 봅슬레이 종목에서 공동 금메달이 나온 건 이번이 두 번째다. 1998년 나가노동계올림픽 남자 2인승에서 이탈리아와 캐나다가 똑같은 기록으로 금메달을 나눠가졌다.  야후스포츠에 따르면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 이후 평창올림픽 전까지 공동 메달은 총 9번 나왔다. 이번이 10번째다. 이전까지 가장 최근 나온 공동 메달은 2014년 알파인스키 여자 다운힐 결선에서 나온 티나 메이즈(슬로베니아)와 도미니크 기신(스위스)의 공동 금메달이었다. ========================     2018 평창동계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 남자 500m 아깝다.. 차민규 0.01초 차이 값진 은메달     스피드 스케이팅 남자 500m 세계랭킹 17위 차민규 선수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도 마찬가지로 메달권에 드는 선수들은 대부분 세계랭킹 5위안에 드는 선수들이더라구요.   하지만..   34.42초 올림픽 신기록.     은메달을 획득후 태극기를 휘날리고 있는 스피드 스케이팅 국가대표 차민규 선수 정말 멋있습니다.     차민규 선수 경기장면. 일그러진 얼굴에서 투지가 보이네요.     2018 평창동계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 500m 차민규 선수 값진 은메달 정말 감사합니다.   차민규 은메달 따봉!   
1992    [그것이 알고싶다] - 문화재보호, 남의 일 아니다... 댓글:  조회:4954  추천:0  2018-02-22
현충사 현판 안 바뀐다... "숙종  .  박정희 현판 모두 의미 있어" (종합) 2018.02.21.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문화재위, 안동 도산서원 내 일본 특산종 나무 이전 결정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아산 현충사 현판.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충남 아산 이충무공 유허(사적 제155호) 내 현충사에 걸려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친필 현판과 숙종 친필 현판이 그대로 유지된다. 문화재청은 21일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가 현충사 현상변경 안건을 검토한 결과를 받아들여 현판을 현행대로 유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현재 현충사는 한국전쟁을 거친 뒤 성역화 사업을 통해 만들어진 신 현충사와 일제강점기인 1932년 6월 중건된 구 현충사가 있다. 구 현충사는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 헐린 사당을 국민 성금으로 다시 지은 것으로, 재건 직후 충무공 후손이 보관해 오던 숙종 현판이 걸렸다. 지금도 구 현충사에는 숙종 현판이 있고, 박 전 대통령 현판은 신 현충사에 걸려 있다. 문화재위원회는 "구 현충사에 걸려 있는 숙종 사액 현판을 떼어내 1960년대 지어진 신 현충사에 설치하는 것은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건물과 현판의 일체성을 훼손하는 문제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충무공파 후손들 간에도 서로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며 "두 개 현판에는 모두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숙종이 쓴 현충사 현판. [문화재청 제공] 현충사 현판 교체 검토는 이순신 가문의 15대 종부인 최순선씨가 지난해 9월 박 전 대통령이 한글로 쓴 현충사 현판을 숙종이 1707년 하사한 친필 한자 현판으로 바꿔 달라고 요구하면서 이뤄졌다. 당시 최씨는 현판을 교체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소유권이 있는 '난중일기'를 비롯한 충무공 관련 유물의 현충사 전시를 불허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덕수이씨 충무공파 종회가 1960년대 성역화 사업을 통해 제작된 박 전 대통령의 현판에도 나름의 역사성이 있다는 점을 들어 현판 교체에 반대 의사를 표명하면서 현판을 둘러싼 문중 갈등이 첨예화하기도 했다. 현충사 현판이 현행대로 유지된다는 소식을 접한 최씨는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지인들과 논의한 뒤 결정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현충사는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이 무과에 급제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으로, 조선 숙종 32년(1706) 사당이 세워졌다. 한편 문화재위원회는 경북 안동 도산서원(사적 제170호) 내에 있는 일본 특산종 나무인 금송을 사당 권역 밖에 옮겨 심기로 결정했다. 충남 금산 칠백의총(사적 제105호)의 금송 이전 문제는 조경정비계획이 수립되면 문화재위원회에서 심의하기로 했다. 앞서 문화재위원회는 지난해 11월 현충사 사당 권역에 있는 금송 이전 안건을 심의해 가결한 바 있다. ===================   [앵커] 충남 아산 현충사의 현판을 둘러싼 논란의 불똥이 국보인 난중일기로 튀게 됐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현판을 내리고 과거 숙종이 사액한 현판을 올리자는 게 후손들의 주장이었는데, 어제(21일) 문화재청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지금 것을 그대로 쓰기로 결정했죠. 이에 반발한 후손 측이 난중일기 진본 전시를 아예 중단하겠다고 했습니다. 윤영탁 기자입니다. [기자] 난중일기는 2013년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됐습니다. 이후 현충사측은 유네스코의 권고에 따라 진품은 수장고에 보관하고 복사본을 전시해 왔습니다. 그래도 충무공 탄신일이 있는 4월을 포함해 연간 몇 차례 진품을 꺼내 일반에 공개했습니다. 올해는 이마저도 어려울 전망입니다. 발단은 현판입니다. 충무공 후손 덕수 이씨 종가측은 숙종이 사액한 예전 것으로 바꿔 달라고 줄곧 요구해왔습니다. 논란이 계속되자 어제 문화재청이 심의를 했는데 결국 지금의 현판을 존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현재 사액현판은 1932년 재건된 구 현충사에 달려있습니다. 1960년대 성역화 작업을 통해 새로 지어진 현재의 현충사 현판 자리에는 크기가 맞지 않다는게 문화재청 판단입니다. 또 교체를 반대하는 후손들도 있어 종친 전체의 입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난중일기의 소유권이 있는 종가측은 문제가 해결될때까지 난중일기를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종가는 숙종 현판을 돌려달라며 서울중앙지법에 인도 소송을 내기로 했습니다.     ///ⓒJTBC, /윤영탁  
1991    [그것이 알고싶다] - 지진, 남의 일 아니다... 댓글:  조회:5752  추천:0  2018-02-22
지진 전문가들         "한반도 동남부 지진,                      지하 심부서 발생" 2018.02.21.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경북대 토론회서 "양산단층 아닐 수 있다" 견해도 나와 양산 단층(CG) [연합뉴스TV 제공] (대구=연합뉴스) 한무선 기자 = 경주, 포항 등 한반도 동남부에서 발생한 지진이 양산단층 때문만이 아니라 지하 심부 화강암과 관련이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런 견해는 경북대 지진특화연구센터가 21일 오후 경북대 자연과학대 교수세미나실에서 개최한 '한반도 동남부 지진활동 현황 및 전망' 전문가 토론회에서 제시됐다. 유인창 경북대 지구시스템과학부 교수는 지질 분포 분석을 통해 "경주 지진 발생 때 처음에는 양산단층이 주범이라 생각했는데 여진이 양산단층과 약간 차이를 두고 발생했다"며 "진원지 화강암체 내에 알려지지 않은 단층대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또 "포항은 구조나 단층이 잘 나타나지 않는데도 지진이 일어난 것을 보면 역시 화강암체가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며 "결론적으로 한반도 동남부 지진은 지하 심부 구조에서 발생했고 독립된 화강암체에서 발생했을 것이다"고 주장했다. 지진 전문가 토론회 (대구=연합뉴스) 한무선 기자 = 경북대 지진특화연구센터가 21일 경북대 자연과학대 교수세미나실에서 개최한 전문가 토론회에서 참석한 전문가들이 토론하고 있다. 2018.2.21 mshan@yna.co.kr 최승찬 독일 키일대 지구물리연구소 박사는 중력장과 자기장을 이용한 3차원 지각 구조 모델을 제시하며 "이 모델로 보면 양산단층을 따라 동쪽은 밀도 높고 서쪽은 밀도가 낮은 물질이 분포하는데, 밀도가 낮은 서쪽이 화강암 분포와 일치한다"고 분석했다. 그는 "경주 지진은 수직 응력이 굉장히 약하고 고립된 화강암 지대에서 일어난 것으로 분석돼 앞으로 다양한 연구 방향을 제시한다"며 "포항 지진은 아직 데이터가 부족하지만 같은 방법으로 분석한 결과 화강암으로 생각되는 암체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이달 11일 포항에서 발생한 규모 4.6 지진이 작년 11월 15일 5.4 규모 지진의 여진이냐 아니냐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이기화 서울대 지질학과 명예교수는 "11일 지진을 작년 지진 여진으로 보느냐 별개로 보느냐는 애매한 문제다"며 말을 아꼈고, 이덕기 기상청 지진화산연구과 과장은 "현재로서는 여진으로 판단한다"고 밝혔다. 지열발전소 건립이 지진 발생에 미친 영향에 대해선 당국 조사 결과를 지켜봐야 한다며 참석자들이 대체로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다만 김광희 부산대 지구환경과학과 교수는 "지열발전소가 영향 끼쳤을 것으로 생각한다"며 "지열발전소 때문에 지진이 발생한 것으로 보진 않지만 지열발전소가 지진에 단초가 됐을 수도 있다"고 했다.
1990    [이모저모] - 력사는 력사다...2 댓글:  조회:3659  추천:0  2018-02-21
1873년 -- 1890년까지 중국국기                 1890년--1912년의 중국 국기                     1911년10월 무창봉기시기의 기치                     1912--1915.10.12중화민국 5색기             1915.10.12--1916.3.22중화제국 국기                 1931.9.18--1932.3.9 만주국 국기           1939--1940년 위국민정부기               1932.9.3-1934.10.15중화쏘베트기             1928.10.8-1949.10.1 중화민국 국기                   1949.10.1--- 중화인민공화국 국기         출처 :중국에서 뜨는 별   글쓴이 : star-light
1989    [이모저모] - 력사는 력사다... 댓글:  조회:5232  추천:0  2018-02-21
태극기 변천사 한눈에… 나라사랑 `물씬` (ZOGLO) 2018년2월20일   ▲ 고종황제가 미국인 외교고문 데니(Denny) 에게 하사한 데니태극기.    /독립기념관 제공   태극기의 변천사를 한 눈에 보여주는 `문화재 태극기 사진전`이 대구에서 열린다. 대구백화점은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3·1절 99주년 기념 특별전시회`문화재 태극기 사진전`을 20일부터 다음달 4일까지 대구 대백프라자 11층 특별전시장에서 개최한다.  독립기념관의 특별기획 순회 전시의 하나인 이번 전시회는 역사의 순간마다 우리나라 민족을 대표하며 애환을 함께 했던 우리나라 국기인 태극기의 변천사를 통해 일제강점기, 독재정부, 민족분단 등 숱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한결같았던 선조들의 나라사랑의 마음을 함께 느껴보고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역사적 사실과 의미도 되새겨보기 위해 마련됐다.   전시품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데니태극기`, 독립만세 운동에 사용하기 위해 손바느질로 제작한 `남상락 자수 태극기`, 태극기를 찍어내기 위해 제작한 `태극기 목판`, 독립군·학도병 등의 친필이 담긴 `서명문 태극기` 등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태극기 21점에 대한 사진이다. 데니태극기는 고종황제가 미국인 외교고문 데니(Denny) 에게 하사한 태극기다. 데니는 1886년부터 1890년까지 고종황제의 정치·외교고문으로 활동했고, 귀국 때 태극기를 가져갔다 후손이 1981년 우리나라에 기증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태극기 실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불원복(不遠) 태극기(등록문화재 제394호)는 전남 구례 일대에서 활역한 고광순(1848~1907) 의병장의 태극기다. 일제가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하며,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자 의병투쟁에 나선 고광순이 태극기에 `머지않아 국권을 회복한다(不遠)`는 글자를 수 놓고 의병활동의 정신적 지주로 삼아 활용했다.      ▲ 대한독립만세태극기. /독립기념관제공 태극기 목판(등록문화재 제385호)은 3·1운동 당시 태극기를 찍어내기 위해 목재에 태극과 4쾌를 새긴 목판이다. 인쇄기술을 이용하기 쉽지 않았던 일제강점기에 만세운동에 필요한 태극기를 신속하게 대량으로 만들어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제작된 자료다.  김구(九) 서명문 태극기(등록문화재 제388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1876~1949)가 1941년 중국에서 미국으로 가는 매우사 신부에게 준 태극기다. 광복군에 대한 우리 동포의 지원을 당부하는 김구의 친필묵서가 쓰여 있어 김구의 나라사랑정신을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는 자료다. 대구백화점 관계자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소장중인 등록문화재 태극기를 한자리에 모아 감상할 수 있도록 한 이번 전시회를 통해 역사 속 태극기의 다양한 형태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태극기의 변천사를 이해하고 태극기 속에 담긴 역사적 의의와 나라사랑 정신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전했다.  /윤희정기자 경북매일 ==================     태극기의 의미     우선 각 모서리에 있는 4괘는 각각 '건곤리감'으로 읽는다. '건곤감리'라고 읽느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 (동서남북, 봄여름가을겨울 순으로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 ○ 4 괘 ○ 4괘는 태극 속에서 음과 양이 질적변화와 양적성장의 선회운동을 거치는 과정을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1. 건괘 - 하늘(天), 봄(春), 동쪽(東), 인(仁)을 뜻한다. 2. 곤괘 - 땅(地), 여름(夏), 서쪽(西), 의(義)를 뜻한다. ------- 이 건과 곤괘는 '무궁한 정신'이다. ------- 3. 리괘 - 해(日), 가을(秋), 남쪽(南), 예(禮)를 뜻한다. 4. 감괘 - 달(月), 겨울(冬), 북쪽(北), 지(知)를 뜻한다. ------- 이 리와 감괘는 '광명의 정신'이다. ------- ○바탕○ 흰색 바탕은 밝음과 순수, 그리고 전통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의 민족성을 의미한다. ○태극 ○ 태극 문양은 파랑색 음(陰)과 빨강색 양 (陽)으로 하늘과 땅의 의미도 있지만 음과 양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우주 만물이 음양의 상호 작용에 의해 생성하고 발전한다는 대자연의 진리 를 형상화한 것이다. 창조, 발전의 의미. ★정리★ 태극기는 단순히 나라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의식이나 미의식의 원천으로 우리 민족의 특성을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우리 민족을 형성케한 정신사상의 표현으로 진정한 의미의 나라의 얼굴이며 민족의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덤으로 더...   태극기의 역사 역사속의 태극기   구한말 워싱턴 공사관에 게양된 태극기       1910년 구한말 워싱턴 공사관에 게양된 태극기. 태극기의 모양이 현재와는 다소 다른 면이 있다. 국민기와 대조선국기 1910년 군인수첩에 그려져 있는 대조선 국민단원의 국민기와 대조선 국기. 의병들이 서명한 태극기   1942년 일제시대 말기 의병들이 서명한 태극기. '自主自立', '自由' 등의 글자들이 선명하게 쓰여있다. '불원복'기 태극기 1906년 제작된 불원복기 태극기. 동진학교에서 사용하던 태극기 1907년 동진학교에서 사용하던 태극기. 현재의 태극기와 모양이 다소 다르다. 고종의 최초 제정국기 1883년 3월6일 고종의 최초 제정국기.     김구선생의 친필로 서명한 태극기 1941년 임시정부 주석 김구선생의 친필로 서명한 태극기. 안중근의사가 단지혈서로 쓴 엽서의 태극기 1909년 안중근의사가 단지혈서로 쓴 엽서의 태극기. '大韓獨立' 이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서재필의 태극기 서기 1900년경 서재필이 만들어 사용하던 태극기. 현재의 태극기와 거의 흡사하다. 데니의 태극기 1890년 D.N 데니의 태극기. 학도병이 서명한 태극기 1950년 9월1일 학도병들이 서명한 태극기. '勝'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학도병들이 서명한 태극기 1950년 6.25사변 당시 학도병들이 서명한 태극기. '萬歲' '必勝' 등 학도병들의 의지가 담겨있다. 대한민국 태극기의 5개 시안 사진은 1949년 국기시정위원회에 건의한 대한민국 태극기의 5개 시안. 임시정부가 제정한 국기 1942년 6월29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제정한 국기. 현재의 태극기와 유사하다. 3.1운동 시위용 태극기 1919년 3월 1일 평양숭실학교에서 사용된 3.1운동 시위태극기. 남상락의 태극기 1919년에 사용된 남상락의 태극기. 태극과 쌍태극기 1919년 독립운동의 선전 외교책자와 태극과 쌍태극기. 쥬이 태극기 1884년 쥬이 태극기. 스미스 소니언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태극의 모습이 현재의 것과 다르다   ============================   태극기의 유래와 역사 1.  태극도형은 삼국시대에도 사용되었음.  2.  태극기로는 이조시대 어기라하여 태극주의에 8쾌를 그려넣어 어기로 사용한바 있었음.  3.  현재와 같은 태극주위에 4쾌가 그려진 태극기는 1874년 고려국기라하여 청국주재 미국인 공사에 의하여      청국에 소개된바 있음.  4.  1882년 8월(음)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 갔을때 대외공식적으로는 최초로 사용하였다함. 5.  1883년 1월(음) 고종 20년 태극4쾌가 그려진 기를 국기로 사용토록 왕명으로 공포하엿으나 정확한 제작 사      용방법등을 규정하지 않음.  6.  1949년 1월 대통령 특명으로 "국기시정위원회"를 구성한 이후 수차에 걸친 회의끝에 현행국기를 확정하였음  7.  1949년 10월 : 국기제작 방법공포(문교부고시 제2호)  8.  1950년 1월 : 국기게양방법공포(국무원고시 제8호)  9.  1966년 4월 : 국기에 관한건 공포(대통령 고시 제2호) 10. 1984년 2월 :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 제정공포(대통령령 제11361호)  11. 1987년 4월 :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 개정(대통령령 제12148호)       ※ 국기강하시각 변경  12. 1989년 3월 : 대한민국국기에 관한 규정 개정(대통령령 제12642호)       ※ 국기의 실내 게양방법 등 개선  13. 1996년 3월 12일 : 대통령령(제14943호)       ※ 국기에 대한 맹세 전문 개정  14. 1996년 12월 27일 : 대통령령(제15182호)       ※국기의 표준색도 및 국기게양방법 개정         마건충(馬建忠)이 제안한 태극도. 청(淸)나라 사신 마건충이 반홍, 반흑의 태극에 8쾌를 그려서 조선(朝鮮)의 국기로 사용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고종(高宗)이 크게 노하여 새로운 태극 기를 창안하였다.       조선왕조 말기 정치인이었던 박정양(1841~1904)이 서장하던 태극기. 1884년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그후 1900년 이화학당 4대 총장 쥬디씨가 똑같이 그려 사용하였고, 현재 스미스 소니언(Smith sonian)에서구입,소장 (所藏)중이다. 현존하는 태극기 중 가장 오래된 태극기이다.       1886년 외교 고문이었던 데니시(Deny, Owen N)가 재임시 고종황제(高宗皇 帝)로부터 하사(下賜)받은 태극기이다. 데니씨는 당시 조선왕조를 간섭하던 청(淸)나라를 신랄하게 비난하였던 미 국인 외교고문(顧問)이었다. 태극기의 특징은 통상약장 태극문양과 비슷하나 음방과 양방의 위치가 다르 며 몸체가 가늘고 길다.       ====================   일본국적 배 안에서 영국인 선장을 산파로 태어나 ‘붉은악마’ 속에서 펄럭이기까지         사진/ 월드컵 거리응원 현장에 나부끼는 태극기. (김종수 기자)   월드컵의 열풍 속에 온 나라가 붉게 물들었고, 우리 현대사에서 어쩔 수 없이 붉은색과 상극을 이루었던 태극기는 그 ‘붉은 무리’들의 상징으로 펄럭이고 있다. 그동안 국기 게양대에서 고고하게 펄럭이던 태극기, ‘국기에 대한 맹세’라는 희한한 주문의 대상이 되며 경건주의·엄숙주의의 상징이던 태극기는 두건으로, 치마로, 배꼽티로, 애교 있는 스티커로 다시 태어나 우리에게 가깝게 다가섰다. 올해는 태극기가 태어난 지 만 120년이 되는 해. 태극기가 이렇게 대중 속으로 파고든 것은 태극기의 짧지 않은 파란만장한 역사에서 처음이다.     마건충이 도안… 일본서 첫 게양         사진/ 민주세력에서도 큰일이 있으면 태극기를 들고 비장하게 애국가를 부르곤 했다. 88년 8·15 남북학생회담 출정식을 마치고 거리로 나서는 학생들. (한겨레)   원래 국기를 갖고 있지 않았던 조선은 국기 문제로 운요호(雲揚號) 사건 등에서 일본에 곤욕을 치르고, 문호개방을 강요받았다. 그 뒤 조선에서 국기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은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김홍집(金弘集) 일행이 중국의 황준헌(黃遵憲)이 쓴 이란 책을 가져오면서부터였다. 이 책에서 황준헌은 청의 용기(龍旗)를 그대로 쓰라고 사용하라고 권했다. 이는 조선이 청의 속국임을 만천하에 알리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당시 조선 정부는 청에 조선은 어떤 색의 용기를 사용하면 되겠냐고 물었다. 이에 청의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은 조선 국왕의 깃발인 용을 그린 네모난 기가 중국의 용기와 비슷하니 국기로 써도 좋다면서 한 가지 단서를 달았다. 발톱이 다섯개인 오조룡(五爪龍)은 천자의 상징이니 제후국인 조선 국기의 용은 발톱을 네개로 하라는 것이었다.   다행히 조선이 청의 국기를 그대로 쓰는 일은 없었지만, 태극기의 탄생에도 청의 입김은 깊숙이 작용했다. 태극기가 박영효가 일본에 사신으로 갈 때 만들어졌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지만, 그 도안을 누가 처음 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청의 사신으로 조선에 와 조선과 미국 간의 조미수호통상조약(1882) 체결을 주도한 마건충(馬建忠)과 김홍집 간의 필담을 담은 (淸國問答)을 보면 태극기의 도안자는 바로 마건충이었다. 1882년 4월11일 마건충은 김홍집과의 회담에서 개인의견임을 전제로 조선의 국기를 흰 바탕에 태극 그림을 사용하고 주위에는 팔괘를 그리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이런 회담이 있은 뒤 7월에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조선은 제물포조약에 따라 대관(大官)을 파견하여 일본에 사죄할 것을 강요받았다. 이때 사신으로 간 박영효는 일본 국적의 메이지마루(明治丸)란 배를 타고 갔는데, 이 배의 선장은 영국인 제임스였고, 조선주재 영국 총영사 애스턴도 동승했다. 박영효는 애스턴과 조선 국기에 관해 협의하였는데, 애스턴은 선장 제임스가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느라 각 나라의 국기에 정통한 사람이므로 그의 조언을 받으라고 충고했다. 제임스는 마건충의 도안대로 8괘가 다 들어가면 복잡하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따라 그리기 힘들다고 충고하였고, 이에 따라 태진손간(兌震巽艮) 4괘를 들어내고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만 남기면서 상하좌우에 있어야 할 정괘를 45도 왼쪽으로 돌려버린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태극기가 처음 게양된 곳은 일본 고베의 박영효 일행 숙소였다.태극기는 중국인의 기본 도안에 일본에 사죄하러 가는 일본 국적의 배 안에서 영국인 선장을 산파로 해서 태어나 조선 사람들에게 선보이기도 전에 일본에 나부끼는 기구한 운명을 갖게 된 것이다.     태극·괘 모양 싸고 끊임없이 시비     태극기뿐 아니라 최근에 일본에서 국가라는 공식적인 지위를 얻은 기미가요 역시 영국인 작곡에 독일인의 편곡을 거쳐 태어났으니, 동아시아에서 근대국가의 상징을 만들어내는 과정에는 외세의 침탈과 개입이 짙었던 것이다. 태극기는 탄생과정에서 외세가 깊게 개입했을 뿐 아니라, 그 내용도 우리 고유의 문화나 전통이 아닌 중국의 에서 빌려온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계사전’(繫辭傳)의 “태극이 양의(兩儀: 음양)를 낳고 양의가 사상(四象)을 생하고 사상이 8괘를 생한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태극기의 기본원리인 태극과 4괘는 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렇듯 출생과정도, 그 내용도 우리나라 사람이나 우리 고유의 것보다는 외국인과 외국적인 내용이 지배적이고, 애국가의 작사자로 확실시되는 윤치호(尹致昊)처럼 박영효도 말년이 친일로 얼룩지다 보니 민족주의자들의 입장에서 태극기를 민족의 상징으로 내세우는 것이 조금은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온 시도가 ‘태극기의 한국화’ 또는 ‘탈중국화’였다. 한 예로 1957년 ‘우리국기보양회’에서 펴낸 을 보면 태극팔괘를 단군성조(檀君聖祖)의 가르침에 따라 고래 조선에서부터 국기로 사용하였다고 하고 있다. 또 대한민국국기선양회에서 1995년에 태극기 변천사 전시회를 하면서 펴낸 도록에는 1392년에 제작되었다는 범종이 실려 있는데, 이 종에는 현재의 태극기와 흡사한 4괘를 가진 태극기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만일 사실이라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 이 종의 실물은 한번도 공개되지 않았다. 이 단체는 태극기가 단군의 홍익인간 이념을 반영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승만 정권 아래서 문교부 장관을 지냈고, 박정희 시절에는 박정희와 국무위원들에게 1년여에 걸쳐 국난극복사를 강의한 바 있는 이선근(李瑄根)은 이집트와 로마, 아테네, 비잔티움에서 멀리 미국 원주민의 토기 등 고대 유물과 신라의 곡옥(曲玉)에 이르기까지 태극 모양과 조금이라도 유사한 모양을 찾아내어 태극이 중국의 전유물이 아니라 ‘상고 인류 공통의 우주관’을 상징한다고 강변했다.   1949년 국기제정위원회가 현재의 도안대로 태극기의 모습을 확정한 이후에도 태극기의 음양의 각도와 괘의 배열을 둘러싸고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태극기의 모양이 에는 별로 소양이 없었을 영국인 선장의 조언에 따라 보기 좋게 8괘를 4괘로 줄이고, 4괘의 위치도 네 구석으로 배열하다 보니 당연히 깨나 한다는 분들의 입장에서 보면 태극기의 모양은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었다. 독립문에도 태극기가 조각되어 있는데, 그 모습을 보면 현재와는 괘의 위치가 다르게 배열되어 있다. 이탈리아와의 축구경기에서도 관중석 벽을 따라 여러 형태의 옛 태극기가 게양되었는데, 괘의 위치나 음양의 모습은 제각각이다. 윤봉길 의사는 폭탄을 던지러 가기 전에 백범 김구 선생과 대형 태극기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남겼는데, 사진 속의 태극기는 지금을 기준으로 보면 ‘잘못’(!) 게양되어 있다. 그런데 어떤 사진첩에는 이를 오늘날의 기준에 맞게 ‘바로잡아’ 놓아 쓴웃음을 짓게 한다.     일본 순사들의 놀라운 재활용 정신         사진/ 마건충이 제안한 국기도식(왼쪽)과 제임스가 그렸을 최초의 태극기 그림.   의 해석에 근거해서 태극기에 대한 시비가 끊이지 않자 이선근은 1959년에 태극기의 도안은 중국의 주역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며 태극기에 대해 “중국식 역학자의 사고방식”을 갖고 “더 이상의 부질없는 해석은 누구나 삼가야 한다”면서, “금후에는 누구든지 문교부가 이미 결정한 대로” 따라야 하며 “국기 도안의 역학적 해설을 고집하거나 함부로 내세우지도 말아 달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현재 서점에서 볼 수 있는 태극기에 관한 많은 책들의 대부분도 현재의 태극기를 잘못된 것이라 주장하면서 나름대로 바로 그린 태극기의 모습을 제시하는 것을 보면 이런 엄포로 태극기를 둘러싼 시비를 잠재울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태극기의 복잡한 내력을 고려하면 초등학교에서 태극기를 잘못 그렸다고 벌받는 학생들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게 된다. 물론 태극기를 받아쓰기에서 태국기로 잘못 써서 벌받는 학생들에게까지 동정심을 표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말이다.   일제강점기, 나라도 빼앗기고, 말도 글도 빼앗기고, 사람들의 성과 이름마저 빼앗겨버린 빼앗긴 들에 태극기가 휘날릴 곳은 없었다. 대한독립의군부 등에서 태극기 게양운동을 벌였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확산되지는 못했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일은 당시에는 사회주의자들도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운동을 벌였다는 점이다. 조선의용군의 경우 일부 젊은 층은 붉은 깃발을 내걸 것을 주장했지만, 당시 통일전선의 분위기와 태극기의 상징성을 고려하여, 그리고 중국공산당의 권유로 태극기를 그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시인의 말처럼 도둑처럼 해방이 왔다. 가장 재빨랐던 것은 일본 순사로 있던 조선인들이었다. 일장기의 원을 반을 먹으로 칠하고 귀퉁이에 4괘를 그려 순식간에 태극기를 만들어 들고 나왔으니, 그 재활용 정신(!) 하나만큼은 알아주어야 한다. 그렇다고 태극기가 해방 이후 꼭 일장기 위에서 친일파들의 보신 수단으로 다시 태어난 것만은 아니었다. 앞치마에도 그리고, 이불 홑청 떼어내어 그리고, 처녀 때 장만한 옥양목 치마를 한번도 안 입고 고이 간직해두었다가 쫙 찢어 사발을 대고 태극을 그린 아주머니들도 많았다. 그렇게 그린 태극기에서 태극 모양이 좀 틀리고 4괘의 위치가 바뀐다고 무슨 상관이 있었을까? 그런 분들이 딸 혼숫감에 그려주어 태극기가 다시 태어날 때가 태극기의 역사에서 가장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을 것이다.   해방이 되어 태극기에게 봄날이 왔나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나라는 반조각이 났지, 일장기가 나부끼던 자리는 성조기가 펄럭이지, 좌우대립은 극도로 격화되고, 게다가 일장기에 절하던 친일파들이 태극기를 높이 휘둘러대는 정신없는 순간이 온 것이다. 이북에서 새로운 국기를 제정하자는 이야기가 나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 “구한국의 군주정체에 맞던 국법이나 국기가 신조선의 인민정권에 맞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였다. 이북 공산주의자들은 일제강점기 태극기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인정했으나, 해방된 지 2년 동안 이북에 “선진적이며 인민적이며 민주주의적인 헌법”을 마련하게 되었으니 새 국가에 조선시대의 법전인 이 필요 없는 것처럼 낡은 태극기도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그들은 새 국기, 이른바 인공기를 만들어 1948년 7월10일 북조선인민회의 제5차 회의 제2일 회의 중에 그 기를 내걸었다. 1948년 10월이 되자 남로당에서는 이른바 ‘인공기 게양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10월5일 새벽을 기해 전국적으로 태극기가 걸렸던 많은 자리에 인공기가 내걸렸다. 남로당원들은 일반 주택가보다 학교나 면사무소 같은 공공건물마다 인공기를 내걸었고, 서울에서는 심지어 독립문과 중앙청에까지 인공기가 내걸렸다.     ‘국기 경례 거부’ 여호와의 증인들의 곤욕         사진/ 독립문에 조각된 태극기는 현재와는 괘의 위치가 다르게 배열돼 있다. (박승화 기자)   한국전쟁 이후 독재정권들은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를 휘날리자는 ‘우리의 맹세’나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자”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제정하고, 국기강하식 때면 전국에서 모두 행인들을 ‘동작 그만’의 상태로 만들었으며, 심지어는 극장에서도 애국가가 울릴 때면 관객들이 벌떡 일어나게 만들었다. 이렇게 하면 ‘국민’의 애국심이 솟구치리라고 독재정권이 기대했을까? 독재자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어느 누가 바쁜 걸음을 재촉하다가 말고 길바닥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듣는 것을 좋아하며, 연인이나 친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러 간 극장에서 벌떡벌떡 일어나며 애국심을 되새기겠는가? 독재권력이 노린 것은 태극기와 애국가를 통해 사람들을 길들이려는 것이었다. 태극기와 애국가에 대한 경배를 통해 그 뒤에 숨은 독재자에게 조건반사적으로 복종하게끔 만드는 것, 그것이 국민의례가 넘쳐나던 시기에 독재자들이 노린 것이다. 이 시기에는 학원에서도 군사주의·국가주의가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 종교적 신념에 따라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곤욕을 치르고, 줄줄이 퇴학당하기 시작했다. 사법부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의 국기에 대한 경례 거부를 ‘사교·이단 집단의 비애국적 행동’으로 몰아붙이면서 교내 질서가 지켜져야 한다고 못박았다. 이 같은 사법부의 판결은 헌법상의 권리인 종교의 자유를 고등학교 학칙이나 교내 질서보다 하위에 두는 행위였다.       사진/ 의거 직전 백범 김구와 기념사진을 남긴 윤봉길 의사. 사진 속의 태극기는 지금을 기준으로 본다면 '잘못' 게양돼 있다.   독재자들이 태극기와 애국가를 권력유지의 수단으로 많이 이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태극기나 애국가가 파시즘적 국가권력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민주세력에서도 큰일이 있으면 태극기를 들고 나오고, 비장한 마음으로 애국가를 부르곤 했다. 한 예로 1975년 8월 박정희 정권에 의해 의문의 죽임을 당한 장준하 선생의 장례식 때는 동지들이 임시정부에서 쓰던 오래된 태극기를 그의 관에 덮어 애국자의 마지막 길을 전송했다. 관동군 다카키 마사오에게 죽임을 당한 광복군 장준하는 그렇게 태극기를 덮고 이 땅을 떠났다.   1980년 광주에서 전두환 일당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분들을 급히 구해온 관에 모실 때 살아남은 시민들은 대형 태극기를 구해다가 한장 한장 덮어드렸는데, 어찌나 많은 분들이 죽었는지 광주시내에 태극기가 동이 났다고 한다. 태극기는 광주시민들이 그렇게 망월동에 묻힐 때 함께하기도 했지만, 광주의 학살자들이 민주정의당을 만들고, 대통령에 취임하는 놀음을 하는 현장에도 어김없이 나부꼈다. ‘황국신민서사’의 동생 격인 ‘국기에 대한 맹세’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학살자들이 휘두르던 태극기는 사라졌지만, 광주의 시민들과 함께 묻힌 태극기는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망월동 구묘역을 신묘역으로 이장할 때 20여장이나 거의 온전한 모습으로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열사들의 민주정신으로 불후(不朽)의 태극기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한국현대사에서 온갖 영욕을 함께한 태극기가 감정을 갖고 있다면 가장 민망했던 때는 80년대 학생들의 성조기 소각사건 때가 아니었을까? 광주 이후 반미의 무풍지대였던 한국은 갑자기 세계에서 반미운동이 가장 치열한 곳이 되었고, 학생들은 광주학살의 배후로 미국을 지목하고, 성조기를 태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부는 성조기를 불태운 학생들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학생들이 태극기를 태운 것도 아니고, 또 정작 미국에서는 성조기를 불태우는 행위가 헌법상의 표현의 자유로 인정받는데 말이다.     통일조국까지 간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     1987년 6월항쟁 때도 학생들과 시민들이 태극기를 많이 들고 나왔지만, 태극기가 본격적으로 시위현장에서 쓰인 것은 1988년의 통일운동 때부터일 것이다. 젊은 학생들은 태극기로 온몸을 감싸고 눈물을 흘리며 결연히 통일의 의지를 불태웠다. 70년대나 80년대 초반의 학생시위 현장에서 종종 태극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는 태극기를 독재정권이 학생운동을 빨갱이로 모는 것에 맞서 빨갱이 공세를 막아주는 호신부처럼 들고 나온 것이었다면, 80년대 후반의 태극기는 의미가 달랐다. 1986년 이후 학생운동에서 민족해방 사상이 널리 퍼지고, 재일동포 지도자인 배동호 선생의 이 널리 읽히면서 ‘애국’이란 독재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 민중들이 되찾아야 할 소중한 덕목으로 부활한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식민지 내 조국의 아들로 태어난’ 젊은이들이 가야 할 길을 노래한 이란 노래가 애창되었다. 물론 학생운동 일각에서는 이런 태도를 민족주의적 편향이고, 민족주의는 파시즘이나 독재권력과 쉽게 결합한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90년대 이후 한동안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다가 요즈음 태극기는 다시 때아닌 전성시대를 맞았다. 그리고 빼앗겼던 붉은색은 다시 살아났다. 이북의 노동당 행사에서도, 빨갱이들의 본고장인 소련의 붉은 광장에서도 수십수백만명이 길거리를 가득 메운 이런 붉은 물결은 있어본 적이 없었다. 30대 후반 이상이면 반공 포스터에나 그렸을 붉은악마는 이제 온 국민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동계올림픽 때 김동성 선수가 태극기를 내팽개쳤다면서 비난하던 가 네티즌들한테 혼이 날 때부터 조금 감지되기는 했지만, 이미 젊은이들은 태극기에 대해 군사독재정권이 강요하던 엄숙주의·경건주의를 벗어던졌다. 과연 온 나라를 붉게 물들인 붉은악마 현상이 레드콤플렉스의 진정한 극복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동원이 아닌 자발적인 참여, 그리고 이 집단적 열광 속에서도 분명히 발견되는 개인주의는 과연 민족주의가 나치즘이나 일본의 군국주의 같은 광기로 가는 데 충분한 안전판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민국을 외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일본인들이 히노마루를 흔들며 닛폰을 외치는 것은 섬뜩한 일일까? 이 모든 열풍은 그저 축구경기를 둘러 싼 90분 내셔널리즘으로 국한될 것인가? 한국 현대사의 맥락에서 보면 민족주의의 빅뱅과 레드콤플렉스의 약화 조짐이라는 잘 어울릴 것 같지 않는 일이 동시에 벌어지는 현상은 축구 4강의 신화만큼이나 신기한 일이다.   국가라는 조직이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국기는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국가는 절대로 스포츠 내셔널리즘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도 국가대항전이 열릴 때면 국기는 지금보다 더 힘차게 나부낄 것이다. 그러나 이 바라는 것처럼 주석궁을 국군 탱크가 점령하지 않는 한, 태극기나 애국가가 통일조국에서 계속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때는 몇 차례 실험을 해본 단일기처럼 남과 북 모두가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남과 북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새로운 상징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2002년06월26일 제415호 ///한홍구 ㅣ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 1.■ 최초의 태극기는 고종 황제 작품이었다 (서울신문발행 뉴스피플 1997년 10월 9일자 제288호 특종) 지금까지 우리 나라 국기인 태극기는 박영효가 창안, 도안한 것이 정설로 돼 있었다. 1882년 고종의 허락을 받아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하러 가던 중 메이지마루호 선상에서 일행과 숙의해 그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태극기의 유래는 잘못 알려진 것으로 드러났다. 박영효가 주도한 작품이 아니라 고종의 주체적이고 독창적인 작품으로 새삼 밝혀졌기 때문이다. 1882년 10월 2일자 일본 도쿄에서 발행된 일간신문 「시사신보」(1882년 3월 창간,1936년 폐간) 는 당시 일본을 방문한 박영효 수신사 일행과 기자 회견을 갖고, 태극기는 자국의 국기를 모방하라는 청나라의 압력을 뿌리치고 고종이 직접 도안을 하고 색깔까지 지정한 것으로 보도했다. 박영효는 고종이 구상한 작품을 고종의 지시에 따라 일본으로 가던  도중 단순히 그림만 그리는 역할을 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시사신보 기사는 생생하게 전하고 있어 태극기의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사실은 최초의 태극기가 게재된 시사신보 축쇄판을 동경도립중앙도서관에서 단독 입수, 지난 광복절날 일간신문(동아, 한  국일보)을 통해 태극기 그림을 공개한 서울시청 총무과 송명호씨에 의해 밝혀졌다. 송씨는 당시 일간지가 서둘러 보도하면서 최초의 태극기 발견 사실에만 기사의 초점을 맞추고 정작 태극기가 고종의 작품이라는 역사적인 사실을 간과한 점을 중시, 이를 널리 알려야겠다는 생각에서 관련 자료를 작성, 주요 도서관과 학술연구기관에 무료 배포하기에 앞서 뉴스피플에 제공했다. 그가 제공한 화제의 시사신보 관련 기사는 「잡보」란을 통해 수신사 박영효 일행의 일본 방문을 조선의 유신이라고까지 장황하게 극찬한 다음 「조선국기」라는 캡션이 붙은 태극기 그림과 함께 국기의 재정 배경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그 내용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때까지 조선에는 국기로 부를만한 것이 없어 지난번에 탁지부를 방문한 중국(원문에는 지나로 표기했으며 청나라를 지칭함)의 마건충(청나라 덕종때 사람으로 1882년 군함 수척에 군인 4천5백명을 인솔, 조선에 와 임오군란을 조정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대원군을 천진으로 압송하는 등 조정에 친청파를 구축하며 내정에 깊이 간여한자임)이 조선의 국기는 중국의 국기를 본받아 삼각형의 청색 바탕에 용을 그려야 하며 본국인 중국은 황색을 사용  하나 조선은 동방에 위치하는 나라이므로 동쪽은 청색을 귀히 여긴다는 뜻에 따라 청색 바탕을 이용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이에 국왕(고종)은 분하게 여겨 절대로 중국 국기를 흉내내지 않겠다고 해 사각형의 옥색 바탕에 태극원(두개의 소용돌이 모양)을 청색과 적색으로 그리고 국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역괘를 그린 것을 조선의 국기로 정한다는 명령을 하교하였다고 한다」 이 신문의 관련 기사 첫 머리는 「지난달 28일(1882년 9월 28일 가리킴) 하나부사공사와 함께 도쿄에 도착한 조선인의 이야기에 의하면....」이라고 돼 있어 박영효 수신사 일행중 한명과 인터뷰를 통해 기사를 작성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개혁파 지식인들인 김옥균, 서광범  등도 박영효와 동행했다고 이 신문은 적고 있어 이들중 한명과 인터뷰를 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관련 기사에서 고종은 청나라 마건충의 강요에 분노하며 독창성을 발휘, 도안과 도형의 설명, 그리는 방법까지 직접 언급하고 있다. 이는 국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외세를 단호히 배격했음을 의미한다.  당시는 청나라가 내정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고 임오군란을 이용, 제물포조약을 체결한 일본은 자국군의 서울 주둔을 강요하며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는 등 열강의 틈사이에서 국왕이 국정을 제대로 펴기조차 힘든 시기였음을 볼 때 고조의 이같은 자주정신은 높이 평가돼야 한다고 송씨는 설명했다. 태극기 연구가이기도 한 그는 「관련 기사가 발견되기 전에는 주역의 태극도를 그렸다는 등 태극기의 유래에 대해 별의별 억측이 많았으나 이젠 이러한 의구심을 말끔히 해소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우리 나라 최초의 태극기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1882년 9월 25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날 박영효 일행이 고베에 도착, 숙소인 니시무라야(西村屋) 옥상에 국기를 게양했다는 기록이 있거든요. 그로부터 사흘 뒤 일행이 도쿄에 도착했고 이를 시사신보 기자가 취재해 10월 2일자에 보도한 겁니다」 그에 따르면 우리 나라 태극기는 모두 다섯 번의 변천을 통해 오늘날의 모습으로 자리잡았다. 첫 번째는 시사신보의 보도처럼 고종의 지시에 따라 박영효에 의해 완성된 것이다. 두 번째는 1885년 고종이 외무담당 미국인 데니씨에게 선물한 태극기로 현재 독립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세 번째는 1896년 독립신문 제호에, 네 번째는 1900년 파리박람회 때 사용했던 태극기이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것은 1949년 정부에서 42인 국기제정위원회를 구성, 제정한 것이다. 그동안 태극기의 유래에 대해 가장 상세하게 언급한 것은 1961년 진단학회가 펴낸 「한국사」로 전문가들 사이에 금과옥조로 여겨왔다. 우리 나라에서 국기문제가 논의된 것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 체결 당시 강화도 회담에서부터 대두됐다. 이때부터 국기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고 이를 눈치챈 중국이 황준헌을 통해 중국의 용기를 본받아 그려서 전국적으로 사용하라는 간섭을 했다. 그후 우리 나라와 중국은 국기 제정에 따른 양국 위원을 임명했는데 우리측 위원은 이응준이었고 중국측 위원은 마건충이었다. 그러나 국기 제정이 지  지부진한 가운데 수신사 박영효 일행은 일본을 방문하게 됐고 이때 출발에 앞서 고종황제로부터 내략을 받았다. 일본 기선 메이지마루호 선상에서 동숭한 수신사 일행, 영국 영사관 아스톤, 선장 제임스 등과 태극 8괘의 도안을 가지고 숙의한 끝에 최종적으로 4괘의 태극기를  국기로 결정, 제작했다. 아마 이 결정은 일본으로 출발에 앞서 고종황제가 지시한 대로 따랐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국사」도 고종이 지시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지만 고종이 구체적으로 설명하며 태극 무늬의 모양과 색, 4괘, 바탕색까지 지정하는 등 그의 작품이라는 사실은 지나치고 말았다. 시사신보의 보도 내용에 대해 서울대 국사학과 한영우 교수는 처음 듣는 말이라며 「최초의 태극기 제정 배경 등 국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국사편찬위원회 김광남 연구관도 이같은 사실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태극기 변천사를 다시 써야 할 획기적인 발견이라고 평가했다. 최초의 태극기를 발견한 송씨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최초의 태극기 그림과 자료가 국내에서 발견되지 않고 일본서 찾게된 것은 부끄럽기 그지 없지만 태극기의 역사가 제가 만든 자료를 근거 삼아 새로 정리할 수 있게 된 점은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는 고종의 지시대로 박영효가 완성시킨 최초의 태극기는 애초 3점이 제작됐으나 왕조의 몰락 등 격변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실물이 자취를 감춰 아쉽다는 말을 덧붙였다.(김철호기자) 이번에 시사신보에서 태극기 그림을 발견하기까지 가장 힘들었던 점은 역사연표의 숱한 오류였다. 즉, 年 표기는 양력인 서기로 하고 달과 날짜를 음력으로 표기하므로써 우리 역사의 기록을 탐구하는데 심한 혼란을 초래시켰다. 가령 우리 나라의 여러 기록에 의하면 수신사 일행이 고베에 도착한 달을 1882년 8월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정확한 기록은 1882년 9월이었다. 이런 아이러니 때문에 115년이 지나서야 최초의 태극기 그림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서기로 표기한 것은 모두 양력으로 환산해야만 한다. 우리는 왜 캐캐 묵은 최초의 태극기를 찾아야 하는가라고 질문할지 모르나 그 질문 자체가 우둔할 뿐이다. 현재의 태극기가 제정되기 전에 최초의 태극기를 그려서 사용했다라는 기록이 엄연히 있는 한  그 실체를 찾지 않는다면 스스로 역사의 단절을 자행하는 과오를 저지르는 것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지금까지 최초의 태극기를 찾는데 진지하지 못했거나 방관하였다. 그 동안 잘못 알려진 태극기의 변천사를 다시 고쳐 쓰는 일은 발굴자의 즐거운 소명이 될 것이다. [리다이렉트 : 지식iNkin.naver.com]   다른뉴스   우리 나라에서 국기 제정이 처음으로 논의된 것은 1876년(고종 13년 1월)이었다. 윤요호 사건을 계기로 한ㆍ일(韓日)간에 강화도 죠약 체결이 논의되는 동안 일본측은 '윤요호에는 엄연히 일본의 국기가 게양되어 있었는데 왜 포격을 가하였느냐?'라며 트집을 잡고 늘어졌다. 그러나 당시 우리 조정의 대신들은 국기가 무슨 의미와 내용을 지니고 있는지초자 몰라서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비로소 조정에서는 국기제정의 필요성이 활발하게 거론되기 시작했다. 1882년 8월9일 특명전권대사겸 수신사인 박영효와 그 일행이 인천에서 일본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갈 때, 당장 게양할 국기가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전에 이어 이미 조정에서 구상되고 논의되어 어느정도 찬성을 본 국기의 디자인을 다소 수정한 태극 사괘의 기를 국기로 게양할 것에 의견을 모아 박영효가 타고간 일본 선박 메이지마루에서 이것을 만들었다. 이 때 메이지 마루에는 후일 개화당의 주역이었던 서광범, 김옥균등도 함께 타고 있었다. 이들 일행은 8월 14일 고베에 도착하여 니시무라야에 숙소를 정하고, 이 건물 옥상에다가 배안에서 만든 태극 사괘가 그려진 기를 게양하였으니, 이것이 태극기의 효시로 지금으로부터 110여 년 전의 일이다. 그 뒤 1883년 1월(음력), 고종은 왕명으로 태극 도형과 사괘가 그려진 국기를 공식으로 제정ㆍ반포 하였으나 그 구체적인 제작 및 사용 방법 등은 정하지 않았다. 태극기에 대한 유래는 크게 다음 두 가지로 전해 왔다. 첫째는 1882년 9월 朴泳孝 수신사가 일본을 방문하러 가던 중 선상에서 그렸으며, 둘째는 박영효 수신사에 의해 그려진 최초의 태극기와 현재의 태극기 모양이 다를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유래에도 불구하고 무슨 영문인지 최초로 만들었다는 태극기의 실물이나 그림이 보존되지 않은 채 115년이 흘러왔다. 애써 이유를 변명하자면 조선 왕조 몰락, 일본 36년의 침략과 탄압 등이 태극기의 유래를 그토록 어지럽게 했을 것이다. 내가 태극기의 그러한 유래에 관심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최초의 태극기를 찾겠다고 나선 것은 1978년 부터였다. 틈나는 대로 태극기의 각종 문헌과 자료를 열심히 수집하였으나 최초의 태극기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1882년 수신사 박영효가 그렸다는 최초의 태극기에 대한 실물은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림마저 나타나지 않은데 대해서는 분통이 터질 일이었다. 일단 국내에는 최초의 태극기 그림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일본에서 찾기로 하였다. 1993년에 일본을 방문하여 최초의 태극기를 찾아 나섰다. 비록 짧은 일정이었지만 몇 군데의 도서관과 박물관을 방문하여 나름대로 유익한 자료들을 수집하였다. 1882년 당시에 발행되었던 신문과 잡지 목록을 수집한 것은 아주 큰 수확이었다. 그 동안 수집해 온 자료들을 토대로 정리한 「태극기 변천 5단계」를 국민일보(1995년 4월 5일자)에 발표하기도 하였다. 끈질긴 집념과 오기를 발동한 끝에 드디어 1997년 8월 8일 동경도립중앙도서관에서 최초의 태극기 그림이 실린 시사신보(1882년 10월 2일자)를 찾아냈다. 이 기사속에서 또 하나의 획기적인 발견은 고종황제가 최초의 태극기를 창안했다는 점이다. 박영효는 단순히 고종황제의 지시대로 그렸을뿐이다. 이러한 사실이 새롭게 밝혀진 이상 과거의 태극기 관련 기록들은 마땅히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눈의 꽃 |  
1988    [그때 그사람] - 중국 축구계에서 최은택감독을 잊을수 없다... 댓글:  조회:3488  추천:0  2018-02-21
베트남에 박항서… 중국엔 최은택 (ZOGLO) 2018년2월20일    최근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는 베트남 U-23(23세 이하) 축구대표팀을 이끌고 2018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십 결승에 진출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는 베트남 축구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으며, 동남아에서도 처음이라고 한다. 베트남의 열광적인 반응은 마치 한국의 2002년 월드컵 4강 때와 비슷한 열기였다고 한다. 베트남전 참전, ‘라이따이한’이라 불리는 한국·베트남 혼혈 문제 등으로 존재했던 반한 감정도 이번을 계기로 많이 약화됐다고 한다. 그런데 한·중 관계 속에도 박 감독과 비슷한 인물이 존재한다. 한·중 교류 초기 아직 한류란 말이 낯설었을 때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크게 개선한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바로 축구감독 최은택이다. 축구 전문가가 아니라면 낯선 이름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초창기 한·중 관계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최 감독은 한양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1997년 안식년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치료차 중국에 들렀다가 옌볜(延邊) ‘오동(敖東)’팀 감독을 맡게 됐다. 당시 중국은 월드컵에 연속 진출한 한국 축구를 동경하고 있었다. 특히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의 선전이 화제가 됐는데, 한국에서 온 축구감독이라고 하니 중국에서 오퍼가 들어온 것이다. 옌볜 오동팀은 조선족 자치지역 프로축구팀으로 조선족이 주축을 이룬 팀이었다. 그런데 프로팀이라고는 하나 비기기만 해도 성공이라고 할 정도로 약체였다. 또한 변방 소수민족 팀이라 재정적으로도 넉넉하지 않았다. 최 감독은 무보수로 봉사 차원에서 팀을 맡았다.    최 감독은 2가지 조건을 걸었다고 한다. 성적과 선수 기용이었다. 프로축구에는 승강제가 있어서 성적이 나쁘면 2부 리그로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눈앞의 성적에 연연하기 마련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최 감독은 구단 측에 팀 성적에 시비를 걸지 말라고 요구했다. 또한 당시 중국에는 스포츠 도박 등으로 어두운 면이 많았다. 선수는 물론 구단 관계자도 관여되는 경우가 있었다. 중국에서 축구가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였으니 어두운 세력의 유혹은 더욱 강했다. 최 감독은 전권을 가지고 이런 부정적 영향력을 차단했다.   최 감독의 행보는 무척 특이했다. 그는 먼저 술과 담배를 즐기는 선수에게 경고했고, 이를 어긴 선수는 가차 없이 팀에서 내쫓았다. 결국 주전 선수 대부분이 팀에서 사라졌다. 그는 18~19세의 어린 선수 30여 명을 모아 기초훈련부터 다시 시작했다. 나름 이름 있던 선수들을 몰아냈으니 당연히 주변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으나 최 감독은 흔들리지 않았다.    결국 그의 뚝심은 최하위 팀을 리그 시즌 4위까지 끌어올렸다. 중국의 내로라하는 선수와 막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한 다른 프로팀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것이다. 경기 내용 면에서도 체력을 바탕으로 한 압박과 공격 축구를 구사했다. 유명 선수 한 명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이뤄낸 기적이었다. 당연히 옌볜이 들썩였고, 이 분위기는 중국 전체로 이어졌다.     최 감독은 약간의 생활비마저 선수들과 나눠 썼다고 한다. 그는 감독 이전에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2007년 최 감독이 별세했을 때 한국보다는 중국에서 더 슬퍼하며 그를 추모했다. 중국 인터넷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글이 가득했다. 박항서 감독의 인기를 보고 있으니 잊고 있었던 최은택 감독이 떠오른다. 부디 편안하시길 바라며….    /한양대 창의융합교육원 교수  ///문화일보  
1987    [그것이 알고싶다] - "바위지도"?... 댓글:  조회:5488  추천:0  2018-02-21
천전리 각석은 한반도를 그린 선사시대 바위지도였다     백무산 시인  2018-01-19       페이스북에서 공유하기! 트위터에서 공유하기! 미투데이에서 공유하기! 요즘에서 공유하기! C 공감에서 공유하기! 천전리 각석의 바위그림은 선사유적으로 제의와 주술의 공간으로 인식해 왔다. 그 문양들은 선사인의 신앙과 정신세계와 관련지어 전혀 해석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천전리에서 동남쪽을 향해서 그린 지도로 해석할 수 있다. 선사인의 지도라고 보기에는 그 영역이 방대한데, 현재 그려진 부분은 한반도 동남쪽이지만, 한반도 전체를 그려보려는 야심적 기획이 있었을 것이다.   천전리 각석 입체 스캔 이미지 ⓒ국립문화재연구소   인간은 지리를 이해하면서 삶과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대지는 인간 자신이 발을 딛고 사는 현재의 ‘이곳’이면서 동시에 외부세계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우리가 가장 흥미롭게 본 책 가운데 하나는 지도책임을 기억한다. 볼거리가 없어서이기도 했겠지만, 지도만큼 상상력을 자극하고 꿈을 불러오는 것도 없었다. 지도책을 펼치는 순간 미지의 세계가 눈앞에 전개되고, 온갖 상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고대인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이 광활한 땅의 끝은 어디인지, 저 너머에는 누가 살고 있는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끝없이 이어지는 의문과 함께 저 너머 세계를 동경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길을 나섰을 것이고, 낯선 세계의 이야기를 전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것을 기록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또 그것을 읽고 무한성과 영원성에 대한 사고를 시작했을 것이다. 선사인의 지리 감각은 현대인들보다 훨씬 뛰어났을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특히 먼 곳까지 조망할 수 있는 평원도 아닌 산악이 많고 복잡한 지형인 한반도의 선사인은 지리에 관한 지식과 감각이 남달랐을 것이다. 자칫하면 길을 잃거나 포식자들과 마주칠 위험 때문에 지도는 일찍 발달했을 수 있다. 고대의 바위그림에 지도로 보이는 암각화가 세계 여러 나라에 적지 않다고 한다. 거의가 주변지형에 한정된 것이지만, 별자리를 표기하고 나름의 세계를 그려보고자 하는 시도도 있었다. 하지만 지도처럼 보일지라도 실용성이 없다는 이유로 눈여겨보지 않거나 선사인 유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제의적 목적으로 그렸을 것이라고 추정해버린다. 또한 바위에 그려졌다해서 토테미즘과 연결시켜 신비한 정신세계로 돌려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선사인은 현대인과 인식체계가 다르겠지만, 지리에서 만큼은 비슷한 사고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하루의 주기가 동일하고 자력으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지리에 대한 이해는 인간의 행동 능력과 직접 대응하기 때문이다. 선사인들이 오히려 현대인들보다 더 통합적인 사고를 해왔다는 것은 수많은 신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 천전리 각석이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 단정하기 전에 먼저 그림 전체를 조망해 볼 필요가 있다. 문양 하나하나에 집착하지 말고 전체적 배치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전체적 특징은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바위면의 가운데 부분을 중심으로 문양이 밀집해 있고 세밀하게 그려진 반면 좌우로 멀어지면서 문양이 희박하고 표현이 세밀하지 못하다. 둘째, 문양의 크기와 형태가 일정하지 않고 체계적으로 배치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약속된 기호로 보기는 어렵다. 셋째, 문양이 매우 불규칙하게 배치되어 있고 단순하게 도식화되어 있어 의미를 내포한 상징적 표현으로 보기 어렵다. 넷째, 하단 절반이 비어 있고 배치가 불규칙한 것으로 보아 미완성 그림이라고 볼 수 있다. 다섯째, 그림의 분포와 공간 배치로 볼 때 전체적 기획에 따라 부분을 그려갔을 것이다. 여섯째, 가운데를 먼저 그리고 좌우로 넓혀갔을 것으로 보인다. 일곱째, 언어적 기호라고 보기에는 그 규칙성이 없다. 이러한 형태를 두고 주술이나 태양신앙 또는 우주의 표상물이라고 하기에는 상징적 내포가 매우 빈약하다. 오히려 형태의 다양한 변형의 나열로 보아 일정치 않은 대상물을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가운데 그림의 부분을 떼어서 보자. 어느 부분을 떼어서 보든 문양들이 서로 연결되지 못하고 독립적이다. 선으로 연결된 집합과 집합 사이에 연관성을 발견할 수도 없다. 이 그림은 불규칙하고 흩어진 사물을 그린 그림으로밖에 볼 수가 없다. 이 그림을 지도라고 의식하고 바라보면 그 형상이 꽤 익숙하게 다가온다. 문양의 형태는 마름모꼴과 선과 파형무늬가 대부분인데, 산과 물을 표현한다. 산의 경우 삼각형으로 그리는 것이 일반적인데, 삼각형은 산의 한쪽면만 표현된다. 반대쪽 면을 표현하려면 역삼각형을 마주보고 그려 넣으면 훨씬 입체적이다. 나름의 입체적 표기법을 고안해 내었다.   천전리 각석 중앙 부분 그림(왼쪽)을 90도 회전시킨 그림(오른쪽)   현재 울산 지형도와 천전리 각석 중앙 부분을 90도로 세운 그림 비교   떼어낸 그림을 90도로 세워서 보자. 오른쪽을 동쪽으로 보게 되면 익숙한 형태가 눈에 들어온다. 맨 아래쪽 끝은 방어진 부근이다. 산줄기를 따라 염포산(203.4m), 무룡산(450.6m), 동대산(446.7m), 그리고 불국사가 있는 조항산(596.2m)의 연결이다. 지형이 곶(串)이기에 돌출되게 표현되었다. 위쪽 여러 겹 동심원이 바위면 전체 그림의 중심이면서 현 위치를 의미한다. 그 옆의 인물상은 동심원의 구체적 표현일 것이다. 그 옆으로 연화산(532.5m), 묵장산(781.2m), 치술령(765.4m) 등이 마름모꼴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산자락을 타고 대곡천이 태화강을 형성하면서 합수 지점(늠내)도 가늠해 볼 수 있다. 아래쪽에 세 개의 마름모꼴이 있다. 위치로 추정해보면, 문수산(600.1m), 영취산(352.1m), 그리고 남산과 그 주변이다. 그 아래 물결무늬는 외항강의 위치와 형태가 일치한다. 주목할 점은 태화강의 표현이다. 망성리와 선바위 사이쯤에서 직선으로 곶이 바다로 트여있는 방향으로 그어져 있다. 이것은 태화강 흐름의 방향과 일치한다. 청동기 이전의 태화강은 지금과 달리 넓은 유역이 형성돼 있었다. 그 유역들이 공백으로 처리된 점도 지형적 특징을 뒷받침한다. 강이 직선으로 표현된 것은 강의 흐름 또는 항로의 표현일 수도 있다. 지금의 하구에서 태화강과 만나는 동천강의 표기가 없는 것 역시 당시에는 바닷물이 깊이 유입된 지역으로 강의 하구는 훨씬 위쪽에 있었을 것이다. 그 지점 역시 공백으로 처리되어 있다.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강의 표시가 끝나는 지점에 작은 마름모꼴이 이 보이는데, 마치 섬처럼 보이는 곳이다. 바로 그 지점에 바위산인 돋질산(89.2m)이 위치해 있다. 지금은 주변이 간척돼 있어 육지로 보이지만 그 시기에는 섬이었을 것이다. 돋질산은 또 두 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는데, 그 봉우리로 짐작되는 표기도 있다. 고헌산, 가지산, 신불산, 영취산 등은 모두 천 미터가 넘는 중요한 지형이지만 표기되지 못했는데, 이는 바위면의 중·하단에 위치하게 되는데, 전체적으로 비어있는 것은 작업이 더 확장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천전리 각석 중앙 오른쪽 부분을 90도 회전시킨 그림(왼쪽)과 현재 지형(오른쪽) 비교   위 그림은 울산의 남쪽지역에서 부산까지로 추정된다. 이곳의 중요한 지형은 천성산, 간절곶, 대운산 등인데 각각의 지점에 특정한 표기가 있다. 천성산(922m) 표기가 선명하고, 산줄기가 봉화산(117.5m)으로 이어지면서 간절곶의 해안선을 이루는 용골산(208.6m)의 표기도 확인할 수 있다. 대운산(742.6m)은 지점은 일치해 보이지만 표기 형태가 다른 산과 다른데, 산을 나타내면서 다른 점을 강조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천성산과 대운산 사이에 깔때기 모양의 특이한 문양이 보이는데, 지도와 비교해 보면 우시산국 유물이 대거 출토된 중대, 하대 지역과 겹친다. 이곳은 청동기시대 주거지인 검단리 유적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지역에서 빠뜨릴 수 없는 곳이 회야강인데, 한눈에 알아볼 수는 없으나 복잡한 선들을 이어보면 그 형태를 추정해 볼 수 있다. 회야강 하구의 넓은 지역을 나타내는 특이한 표기가 있다. 두 개의 동심원 가운데에 직선이 그어져 있다. 선으로 표시되는 강과는 사뭇 다르지만, 회야강 중·하류는 표고가 매우 낮은 지역으로 최근에도 자주 범람해 해마다 제방공사를 다시 해야 하는 지역이다. 당시에는 광대한 늪지를 형성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심원 바깥으로 물줄기처럼 표기된 두 개의 선이 바다로 향하고 있는데, 강의 하구로 추정이 가능하다. 간절곶과 회야강 옆을 공백으로 둔 것은 바다이기 때문인데, 현재 지형과 일치한다. 전체적으로 이 지도는 고대 우시산국 영역을 가장 상세하게 그리고 있다.    
1986    [그것이 알고싶다] - 얼굴그림그리기와 아이들 심리... 댓글:  조회:3712  추천:0  2018-02-21
[그림으로 알아보는 아이의 마음] 얼굴그림으로 본 심리 Q. 7살 여자아이를 둔 엄마입니다. 아이가 어느 날부터 사람을 그릴 때 입을 그리지 않습니다. 알려줘도 고치지 않고 이유도 말하지 않네요. 뭐가 문제일까요? 아이의 성향과 경험을 바탕으로 주기적으로 그림을 관찰해 주세요. ⓒ베이비뉴스 아이들은 사람을 그릴 때 자기 자신과 동일시합니다. 대부분 주인공이 되는 인물에게 자신의 감정과 모습을 반영시킵니다. 사람을 그릴 때 한 부위를 그리지 않거나, 눈에 띄게 강조하거나, 그렸다가 고치기를 반복할 때 그에 따른 아이의 감정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 입을 그리지 않는다면 입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영양분을 흡수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과의 의사소통을 위한 기능도 있습니다. 이런 입을 그리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존재감이 약하거나 위축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아동은 엄마와 아빠를 비롯한 가족들과 뽀뽀를 할 때도 입을 사용하기 때문에 가족과 애정을 주고받는 부분에 있어서 결핍을 느낄 때도 입을 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기 생각을 말하기 두려워하거나 낯선 사람과의 감정 및 정보 교류를 힘들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 눈을 그리지 않는다면 “눈을 바라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라는 말이 있듯이 눈은 사람의 마음을 보여주는 창문과도 같습니다. 타인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부분도 바로 눈의 역할입니다. 눈을 그리지 않는 경우는 드물지만, 만약 그리지 않거나 그리기를 매우 어려워한다면 상대방과 소통하는 부분에 있어서 불안하거나 어려움을 느끼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특별한 상황의 그림을 제외하고, 평소 그림 속 사람의 시선 처리가 정면이 아닌 한쪽으로 유난히 치우쳐 있거나 어딘가 어색해 보인다면 고집이 너무 세서 다른 사람의 말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혹은 동문서답을 하며 대답을 회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 코를 그리지 않는다면 얼굴 중심에 위치한 코는 외모에 대한 관심과 자신감을 나타냅니다. 코를 그리지 않는다면 자신의 외모에 별로 자신감이 없거나, 타인과 상호작용을 하는 과정에서 소극적인 행동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지 두려워하거나 예민하게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나이에 비해 자세하게 묘사하며 코를 그리거나, 지나치게 큰 코를 그린다면 외모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귀를 그리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귀를 그리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러니 평소에 귀를 그리지 않는다고 해서 막연하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귀를 그려보라고 요구했을 때 이를 완강히 거부하거나, 귀를 그리기는 하는데 자꾸 지운다든지 크기가 너무 작거나 크다면 아이의 그림을 주기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귀는 소리를 받아들이는 역할을 합니다. 잘 때도 끊임없이 입력되는 정보 중의 하나가 바로 소리이기 때문에, 이런 역할을 하는 귀를 그리는 데 어려움이 있다면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거나 타인의 감정과 상황을 받아들이는 부분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귀를 지나치게 크게 그리는 아이는 상대방의 감정과 말에 예민한 아이일 수 있습니다. ※ 아이는 엄마와 아빠의 그림, 다른 친구나 자료들의 영향을 받아 특정 부위를 생략하거나 확대하여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또 미술학원에서 배웠던 눈, 코, 입 그리는 방법을 습득하여 그대로 그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단순히 한 장의 그림으로만 아이의 감정 및 상태를 판단하면 안 됩니다. 아이의 성향과 경험을 바탕으로 주기적으로 그림을 관찰해 주세요. 아이의 그림과 감정은 사랑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칼럼니스트 안린지. 경희대학교 시각디자인과 졸업하고 그림 속 아이들의 생각이 궁금해 미술학원 강사로 2년간 근무하면서 미술심리상담 공부를 지속했다. 모든 아이가 행복한 꿈을 갖기를 진심으로 희망하며 소설과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Copyrightsⓒ베이비뉴스
1985    [쉼터] - 손 잃고 손을 그리는 사람, 발로 손을 그리는 사람... 댓글:  조회:6049  추천:0  2018-02-20
손을 잃고 손을 그리다 지체장애 1급 김밝은터 씨의 삶 - 1     에이블뉴스,   2017-12-22  ‘세상의 열매들은 왜 모두 둥글어야 하는가. 가시나무도 향기로운 그의 탱자만은 둥글다. 땅으로 땅으로 파고드는 뿌리는 날카롭지만, 하늘로 하늘로 뻗어가는 가지는 뾰족하지만 스스로 익어 떨어질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 덥석 한입에 물어 깨무는 탐스런 한 알의 능금 먹는 자의 이빨은 예리하지만 먹히는 능금은 부드럽다. 그대는 아는가, 모든 생성하는 존재는 둥글다는 것을 스스로 먹힐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 시는 오세영 시인의 ‘열매’다. 열매에는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사계를 비롯하여 우주가 들어 있다. 모나지 않고 둥근 열매 속에는 시련의 늪을 지나온 긴 여정과 인고의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열매를 맺기 위해 땅으로 뻗은 뿌리는 날카롭고, 하늘로 향한 가지는 뾰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씨앗이자 결과인 열매는 부드럽고 둥글어 모가 나지 않는다.   ▲ 김밝은터 씨. ⓒ이복남 김밝은터(1955년생)의 한자 이름은 김명기(金明基)다. 김명기 씨는 그림을 그리면서 한자이름을 밝은터(明基)라는 우리말로 풀어 쓰고 있다.  그의 고향은 경상남도 고성이다. 어린 시절은 고성에서 지냈지만 별다른 기억은 없다고 했다. 그는 3남 2녀의 장남인데 고성에 살 때는 혼자였다. 여섯 살 때 부산으로 이사를 와서 대신동에 살았는데 동생들은 부산 와서 태어났다.  “대신동 산동네에 살았는데 부모님은 고물장사를 하신 것 같습니다.”  그는 철모르던 시절이라 또래 친구들이랑 뒷산에서 주로 놀았다.    ▲ 제일 작은 꼬마가 김밝은터. ⓒ김밝은터 갤러리 집에는 전기도 없어서 호롱불을 켜고 살았는데 뒷산에는 고압선 철탑이 있었다. 7살 되던 해 봄이었다. 하루는 동네 형이랑 뒷산에서 놀았다. 고압선에 연이 걸려 있었던 모양이다.  “형이 가는 철사 줄에 돌멩이를 묶어서 저더러 던지라고 했습니다.”  고압선은 높지 않았을까?  “언덕에서 보면 그리 높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장난삼아 몇 번이나 돌멩이를 던졌는데 그러다가 악! 그대로 언덕 아래로 굴렀다. 놀란 형이 동네사람들을 불러 왔는지 어떤 아저씨의 등에 업혀 산을 내려갔던 것 같다. 정신이 들었을 때 어렴풋이 불꽃이 보였는데 그리고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감전에 의한 부상사고는 쇼크와 화상이다. 그는 어린 나이라 너무 놀라서 정신이 없었고 두 팔과 두 다리에 화상을 입었다. 검정고무신을 신고 있었기에 전기가 땅으로 흐르지는 못했는지 발목 뒷부분의 근육이 전부 파열되었다. 다행히 다리는 자르지 않았지만 화상자국이 선명한 다리 뒤쪽을 그는 바지를 걷어서 필자에게 보여 주었다. “며칠 만에 깨어났는지 잘 모르겠지만, 보수동에 있는 영국병원에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손을 자르고 그 자리가 썩어 들어가니까 이번에는 팔을 자르고……. 그러면서 병원을 여러 번 옮겨야 했다.    ▲ 돈 세는 손. ⓒ김밝은터 갤러리 “집에는 돈이 없었기에 구호병원이나 자선병원 같은 무료병원에 있었습니다.”  의사는 최선을 다했겠지만 팔을 너무 자르는 바람에, 어깨에서 10cm도 안 남아 갈고리 의수는 힘이 없단다. 당시 부모님의 고물상은 빈병이나 파지 등으로 형편이 조금씩이나마 나아지고 있었는데 그의 사고로 고물상도 할 수가 없었던 것 같았다.  어머니는 울었으나 그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너무 어린 때라 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1년 가까이 병원생활을 했다. 그리고 양 팔에 갈고리 의수를 하고 다시 서너 달 동안 다른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했다.  “의수를 하고 갈고리 집게를 사용하는 방법을 훈련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누가 어떻게 그를 치료했고 누가 그를 도와주었는지 잘 알지도 못했다. 아무튼 그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치료를 했고 경제적 지원도 받으면서 아홉 살이 되어서야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장애인이라고 다른 아이들이 놀리지는 않았을까.  “안 보는데서 놀렸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그는 다른 아이들이 놀린 기억이 없다고 했다. 정말 그랬을까? 그는 또래 아이들 보다 나이도 한 살이 많았고 덩치도 컸다. 그리고 아이들이 갈고리 손을 무서워해서 가까이 오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했다. 아마도 아이들은 그가 무서워서 대놓고는 놀리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 중국집에서 짜장면 먹기. ⓒ이복남 필자가 어린 시절 제일 무서웠던 것이 갈고리 손을 휘젓고 다니던 상이군인이었다. 생각하면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 때만 해도 6.25 전쟁에서 다친 상이군인들이 떼를 지어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누군가 ‘상이군인 온다!’ 하고 외치면 아이들은 무서워서 전부 숨었고 상이군인들은 집집마다 다니며 금품을 요구했다. 그리고 얼마 후부터 국가유공자 관련법이 제정되어 더 이상 거리에서 상이군인들을 볼 수 없었다. 초등학교를 다녔지만 공부는 재미없었다. 갈고리 손으로는 책가방을 들 수도 없었기에 아래 여동생이나 친구들이 책가방도 들어 주었다. 갈고리 집게손은 힘이 없어서 연필을 쥘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필기는 어떻게 했을까.  “집에 와서 발가락으로 글씨를 썼습니다.”  비뚤비뚤 못 쓰는 글씨지만 그 때부터 그의 발은 손이 되었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발로 글씨를 쓰는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시험 때는 어쩔 수 없이 발가락으로 시험을 쳐야 했다. 어린 마음에서인지 친구들 앞에서 죽기보다 싫고 수치스러웠던 모습이었다.  체육시간에는 피구나 배구 같은 공놀이를 했는데 그는 운동장 한편에서 아이들이 운동하는 모습을 구경해야 했다. 그러나 동네에서는 대부분이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친구들이고 가난한 동네였기에 제기차기 구슬치기 등을 할 때는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놀았다. 축구는 같이 어울렸고, 야구를 할 때는 공을 던질 수는 없었기에 심판을 보기도 했다.   ▲ 볼타바강 다리에서. ⓒ김밝은터 갤러리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는 안 갔습니다.”  공부도 재미가 없었지만 집에 돈도 없었기에 부모님도 그를 억지로 중학교에 보내지는 않았다. 어쩌면 친구들에게 발가락으로 글씨를 쓰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장차 무엇이 되려고 학교도 가지 않았을까. “학교를 다녀봤자 취직도 못 할 건데 공부는 해서 뭐하나 싶었습니다.”  철이 들면서 몇 번이나 죽고 싶었다. 그러다가 조금 나이가 들자 사람들의 손이 너무 너무 부러웠다. “첫째는 손이 부러웠고 둘째는 세계여행이었습니다.” 두 손을 가지고 캐리어를 끌고 세계여행을 나서는 사람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나는 언제 한 번 저렇게 해 보나!” 그에게는 언제나 동경과 절망이 함께 했다. 두 손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과 외국여행에 대한 동경이었다. 그저 가슴이 내려앉을 뿐이었다. 희망도 없고 앞으로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왜 절망이 없었겠습니까? 그래도 모진 목숨이라 죽어지지 않던데요.”  그는 날마다 절망했고 날마다 좌절하며 죽고 싶었다. 아무도 모르는 절망과 인고의 세월이었고 죽지 못해 사는 목숨이었다. 그 무렵 우연히 한자가 눈에 들어 왔다. 혼자서 천자문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하늘 天 따 地 검을 玄 누를 黃, 천자문은 선생이 없어도 혼자서 배울 수가 있었다. 그러다가 천자문 펜글씨를 연습했다.  * 이복남 기자 발로 손을 그리는 사람 지체장애 1급 김밝은터 씨의 삶 2 에이블뉴스, 2017-12-26  그 무렵 그의 유일한 친구는 라디오였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가 좋아서 발가락에 연필을 끼우고 노랫말을 따라 적기 시작했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는데’ 김정호의 ‘이름 모를 소녀’ 같은 노래들이 아직도 기억난다고 했다. 그렇게 노래 가사를 적었지만 그에게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불과했다. “그 때 노래 가사를 적은 노트가 몇 권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을 그렇게 지내다보니 노랫말이나 지어 볼까 싶어서, 한 때 작사가나 시인이 되려고 했었다. 그렇다면 시를 공부해야 하지 않을까. 모 대학 평생교육원에서 시를 공부했다.   ▲ 발로 그림을 그리는 김밝은터. ⓒ김밝은터 갤러리 노천명의 ‘사슴’을 좋아했다. 푸시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고야 말리니.’에서 그나마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그러면서 몇 편의 시를 쓰기도 했다. 아래 시는 그의 시 ‘사진첩’이다. ‘사진첩 추억을 펼쳐본다  지나간 시간을 붙들고 있는  조각 조각 조각들  나는 이렇게도 변치 않고 있는데  너는 왜 그렇게도 많이 변했느냐고 야단친다.  맑은 눈망울 부드러운 피부였는데 지금 너의 눈빛은  욕망이 가득찬 탁한 눈빛이고 거친 피부는 모진 풍파에  많이 시달렸음을 알 수 있구나  다른 조각을 펼쳐본다  나는 이렇게 소박하고 검소한데 너는 왜 그렇게 사치스럽고  뻔뻔해졌냐고 힐책 하네  또 다른 조각을 펼쳐본다  나는 이렇게 부지런하고 희망찼는데  너는 왜 그렇게 게으르고 의욕이 없냐고 한심스러워한다.  조각 조각 조각들…….’ 당시만 해도 나이 스물에 뭐라도 해야겠는데 시를 쓴다는 것은 돈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뭘 해 볼까 고민했다. 그가 해볼 만한 것은 웅변, 서예, 그림 등인데 모두가 학원에 다녀야 했다. 사실 돈이 들어가는 일을 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기초만 서너 달 배워 집에서 혼자 하면 되겠지 싶어 물색 하던 중 초상화 화실을 발견했다. 선생은 그를 보더니 난감해 했다. 그 때가 여름이었는데 너무 더워 땀이 비 오듯 했다. 땀을 줄줄 흘리면서 엄지발가락과 둘째발가락 사이에 연필을 끼우고 초상화를 그리는 모습을 선생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선생은 그런 저를 보더니 차라리 그림을 그려보라면서 화실 하나를 소개해 줍디다.”  그렇게 해서 만난 선생이 김용달 화백인데 선생님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김용달 선생도 처음에는 황당해 하시더니 그림을 어떻게 그리느냐고 물었다.  “발로 그립니다.”  선생님은 조그마한 반마스크 하나를 주시면서 집에서 데생을 해 오라고 했다. 데생을 해서 선생님에게 가져가니 잘 했다면서 또 다른 숙제를 주셨다.    ▲ 스승과 제자. ⓒ김밝은터 갤러리 그렇게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당시만 해도 미대 준비를 하는 아이들은 그런대로 살만한 집 아이들이고, 미술학원은 회비도 제법 비쌌다. 나름대로 기초 서너 달은 배울 예정이었으므로 한 달이 지나 선생님에게 회비를 드렸다. ‘니 한테는 안 받을 테니 회비 걱정하지 말고 나오너라.’ “선생님은 제 사정을 어찌 아시고 회비도 안 받겠다고 하시는지 목이 메었습니다.”  그래도 차마 그럴 수가 없어 얼마 후에는 조그만 화분을 하나 사들고 갔는데 다음부터는 그런 것도 하지 말라고 했다.  “선생님은 그림에 소질이 있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제게 소질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연습이었다. 하루 종일 발로 그림을 그리다 보니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팠다. 붓을 잡고 용을 쓰다 보니 어떤 때는 발가락에 쥐가 나기도 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릴 때는 혼자서 그리지만 큰 그림은 좀 높은 곳에 앉아서 그려야 되므로 의자나 탁자 등을 올려 줄 사람이 있어야 했다.  “요즘은 활동보조인이라는 제도가 있어 저도 도움을 좀 받을 수 있을까 싶어서 신청을 해 봤는데 하루에 몇 시간은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활동보조인도 포기를 하고 필요한 것은 동생들이 도와준단다.  처음 김용달 선생님에게 기초를 배우고 혼자서 피나게 노력했었다. 그 때가 1975년이었다.  “김용달 선생님과 그렇게 만났는데 벌써 40년이 되어 2015년에는 스승과 제자전을 부산에서도 하고 국회의사당에서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김밝은터·김용달 2인전도 했다. 처음에는 그는 화실에서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고 집에서만 그렸다. 발로 그림 그리는 모습을 다른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선생이 그에게 그림에 소질이 있다고 하자, 하루는 한 학생이 그 말이 진짜인지 확인을 해야 된다면서 그에게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다. 그는 싫다고 했다. 그러자 그 학생은 네 솜씨를 못 믿겠으니 자기가 보는 앞에서 직접 그려 보라며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렸다. “하는 수 없이 그날 처음으로 그 학생이 보는 앞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친구는 감탄했고, 그 후부터 그 친구하고는 오랫동안 잘 지냈다. 그 친구는 홍익대를 갔는데 언제부터인가 소식이 끊어졌단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학교 다닐 때도 무거운 가방은 들기 어려우므로 친구들이 들어 줬다. 화실에서도 가벼운 종이나 붓 등은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가 있었으나 무거운 캔버스나 이젤, 화구통 등은 누군가가 들어 주어야 했던 것이다.   ▲ 스승과 제자전 방송. ⓒ김밝은터 갤러리 김용달 선생님은 교사였는데 교사 과외금지령이 내렸다.  “선생님의 화실에서 사모님이 어린이 미술교실을 운영했습니다.”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사모님도 그에게 이것저것 챙겨 주셨는데 아이들이 돌아 간 밤에는 미술학원은 온전히 그의 차지였다.  “아이들이 소풍이라도 갔다 오는 날이면 사모님이 챙겨주시는 간식거리가 산더미 같았습니다.”  선생님과 사모님 덕분에 그는 무료로 개인지도를 받으면서 그림 공부를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가난했다. 아래로 동생들이 태어났고 부모님은 조그만 빵가게를 운영했지만 그가 돈을 번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성당은 언제부터 다녔을까.  “병원에서 성당가자는 사람이 있어서 어릴 때부터 다녔습니다.” 일요일이면 성당에 가고 밤이면 선생님의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바람과 그리움 그리고 동경의 대상은 손과 세계여행이었다.  그는 주로 창조적인 추상화를 그렸는데 그에게는 까마득한 꿈에 불과했기에 어느 날 부터인가 꿈을 그리기 시작했다. 인간의 손은 유능한 도구이고 아름다움의 표상이다. 그러므로 나뭇가지, 나뭇잎, 꽃, 과일, 덩굴손 등의 초목들도 동경했다.  그러나 동경하는 것들은 이들만은 아니었다. 언제나 손을 갈망했다. 유능하고 아름다운 그 도구를 다시 갖고 싶어 함은 잃어보지 않은 자는 잘 모를 것이다.    ▲ 김밝은터의 꿈꾸는 나무. ⓒ김밝은터 갤러리 그가 꿈꾸는 나무, 그것은 손이었다. 그의 화폭에는 손과 팔을 닮은 꿈의 형상들이 애절하고 그리고 처절하게 펼쳐졌다.  “처음에는 손을 그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잃어버린 손에 대한 기피이자 외면일지도 모른다. 1980년대 우연히 손을 찍은 사진을 보았는데 그때 처음으로 손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름다운 손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 아름다운 진리를 모두 가지고 있는데 언제까지 부러워만 하고 있을 건가 싶었다. “손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이름도 明基(명기)를 한글로 '밝은터'라고 풀었더니 사람들이 훨씬 잘 기억하더군요.” 정말 연애는 한 번도 안 해 봤을까?  “20대에는 생각도 못해 봤는데 30대부터 형편이 조금 나아졌습니다.”  취직이나 아니면 그림을 팔기라도 했다는 것일까.  “우연히 구족화가협회에 가입했더니 장학금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구족화가란 선천적 또는 후천적으로 팔을 쓰지 못하는 장애인이 입(口)이나 발(足)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을 말한다.    ▲ 빈 세계구족화가협회에서. ⓒ한국구족화가협회 독일인 에릭 스테그만은 소아마비로 팔을 쓰지 못하던 구족화가였다. 그는 장애로 인해 화가로서의 재능이나 실력이 있음에도 생계를 꾸리기도 어려웠다.  당시만 해도 장애인들을 적선이나 도움 없이는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의존적인 존재로 인식되었다. 이런 사실을 안타깝게 여긴 스테그만은 1950년대에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 비슷한 처지의 장애인들과 힘을 모으기로 했다.  그리고 1956년 중부유럽 구족화가들을 모아 구족화가협회(AMFPA)를 설립했다. 본부는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국경지대에 위치한 리히텐슈타인공화국에 두었다. 이를 토대로 현재는 전세계 70개 국, 700여 명의 재능 있는 구족화가들이 활동하는 국제적인 모임으로 성장했다.  한국에서는 1985년 구필화가 김준호 씨가 처음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의 활발한 작품 활동에 감명 받은 구족화가들이 하나둘 동참하기 시작했고 그 수가 7~8명으로 늘어나면서 1992년 1월 한국지부가 설립됐다. 현재 한국에서는 구필화가 14명과 족필화가 8명, 도합 22명이 국내에서 활동 중이란다. -한국구족화가협회에서 발췌- “돈이 생기니까 내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한국구족화가협회에서 나오는 장학금은 그가 그림을 그리고 먹고 살만큼은 된다고 했다. 그 때부터 주로 손과 나무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른 바 꿈꾸는 나무였다. 그리고 먹고 살만해지자 결혼해서 사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제가 좋아하는 여자는 제게 별로 관심이 없고, 다가오는 여자들은 제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먹고 살만해 지니까 눈이 높아진 것 같다고 했다. 여자 다음으로 그의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은 대학생이었다. 예전에는 대학생이 부럽기만 한 존재였는데 그에게도 약간의 여유가 생기니 대학생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대학생이 되기에는 많은 세월이 흘렀다.  “중입 검정고시를 치고, 고입을 치고 대학생이 되는데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살다보니 일본 사람들을 자주 만날 기회가 있어서 방송통신대학 일본어과에 입학했다. 처음에는 일어를 배우려고 입학했는데 일어보다는 문법이나 역사 등 다른 데 시간을 다 뺏기는 것 같아서 대학은 아직도 졸업을 못했단다.   ▲ 김명기 후원자. ⓒ플랜코리아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플랜코리아(PlanKorea)에 대해서 방송을 하고 있었는데 무심코 쳐다보다가 양친회라는 말에 그야말로 귀가 번쩍 띄었다. 아! 양친회,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이름이었다. 양친회가 뭘까?  “어릴 때 저를 후원해 주던 데가 양친회라고 했습니다.”  양친회란 플랜코리아의 한국이름이다. 플랜은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존 랭던 데이비스(John Langdon-Davies)와 그의 친구 에릭 머거리지(Eric Muggeridge)에 의해 1937년에 설립되었다.  스페인 내전의 종군기자로 참여하였던 존은 수많은 전쟁고아들을 돕기 위해 '포스트 페어런츠 플랜(Foster Parents Plan)'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였다. 당시 플랜의 활동목표는 스페인 내전으로 고통 받는 어린이들에게 음식과 쉴 곳, 그리고 교육을 지원해 주는 국제구호개발 NGO 단체였다. 플랜코리아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부터 1979년까지 양친회(養親會)라는 이름으로 활동 하였다. 전쟁으로 인한 폐허 속에서 굶주림과 추위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나라 어린이들을 위해 플랜은 전세계 후원국들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각국에서 전달된 후원금으로 매년 2만 5천여 명의 한국 어린이들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플랜코리아에서 발췌- 그는 1964년부터 양친회를 통해 스웨덴의 양부모로부터 후원을 받았었다. 그러나 잊고 있었다가 나이가 들어서야 우연히 플랜을 알게 되어 동남아 지역 어린이를 위해서 약간의 후원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스웨덴의 양부모님이 보내준 엽서를 보면서 외국여행의 꿈을 키웠어요. 꿈이라기보다는 이루어질 수 없는 동경이었죠.” 엽서에 있는 이국적인 모습들을 보면서 저기 한 번 가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살기도 힘든데 언감생심 외국은 그야말로 꿈에 불과했다. 그러면서 여기저기서 전시회를 하게 되었다. 단독으로 하는 전시회는 물론이고 그의 그림을 한 점 또는 두 점을 출품하는 전시회도 가지게 되었다.  * 이복남 기자 꿈꾸는 나무의 노래 지체장애 1급 김밝은터 씨의 삶 - 3 에이블뉴스, 2017-12-29  그러는 가운데 그에게는 두 손이 생기는 것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고 생각했던 세계여행의 기회가 왔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입니다.”  1997년 세계구족화가협회 초대로 스위스 등 유럽여행을 하게 되었다.  “처음 해외여행을 했을 때는 정말 꿈만 같았습니다.”  구족화가협회에 들렀다가 유럽 배낭여행을 했는데 그 때만 해도 영어라고는 예스, 오케이 밖에 몰랐다. 그래서 처음 여행에서 돌아 온 후 남동생하고 어학연수 겸 캐나다로 9개월간 여행을 갔다 오기도 했다.    ▲ 장가계에서. ⓒ김밝은터 갤러리 1 그리고 2004년 북경을 거쳐 장가계로 여행을 했다.  “‘사람이 태어나 장가계에 가보지 않았다면, 100세가 되어도 어찌 늙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이 있다던데 중국어는 잘 모릅니다.”  ‘人生不到張家界, 白歲豈能稱老翁’(인생부도장가계, 백세개능칭노옹) 이 말은 장가계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를 이야기하는 중국인들의 표현이란다. 장가계는 오랜 세월 동안의 침식작용 등 자연적인 영향으로 오늘과 같은 깊은 협곡과 기이한 봉우리로 남게 되어, 물 맑은 계곡이 어우러지는 자연 절경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상의 건축물 중 달에서도 유일하게 볼 수 있다는 만리장성도 돌아보았다.    ▲ 중국의 칸막이 없는 공중화장실. ⓒ김밝은터 갤러리 김밝은터의 갤러리를 둘러보니 중국에서 찍은 칸막이 없는 화장실이 있었다. 그런 화장실은 다른 곳에서도 가끔 보았었다. 문제는 김밝은터 씨가 갈고리 의수는 힘이 없다고 했는데, 필자가 조심스레 물어 본 것은 예전에는 비데도 없었는데 화장실은 어떻게 했을까?  “화장실에 비데를 놓은 것도 얼마 안 됩니다. 어렸을 때는 수도꼭지에 호스를 달았습니다.”  아, 그런데 밥은 어떻게 먹을까?  “젓가락은 못 쓰고, 숟가락이나 포크는 들 수 있습니다. 그릇을 앞에 놔 주면 먹을 수 있습니다.”  마침 필자의 이웃 사무실에서 과일을 한 접시를 깎아 왔다.  “접시를 앞에 놔 주고, 포크만 있으면 됩니다.”  그는 필자에게 과일을 먹어 보였다. 사진을 한 장 찍어도 될까요? 필자는 실례가 될까봐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 괜찮습니다. 이제는 부끄러울 것도 없습니다.”  과일 먹는 모습을 찍어도 된다고 했다.    ▲ 과일 먹는 모습. ⓒ이복남 2007년 세계구족화가협회 창립 50주년 기념행사에 초대를 받았다. 한국에서는 구족화가 아홉 명이 오스트리아로 출국했다. “저는 남동생하고 조카랑 같이 갔습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초대행사 일정을 마치고 동생과 조카와 배낭 여행길에 올랐다. 체코 프라하를 거처 독일 베를린을 지나 영국 런던으로 갔다. 휴식의 장소라고 말할 수 있는 트라팔카 광장 중앙에는 분수대의 물줄기가 시원하게 뿜어 올랐고 살아있는 비너스로 불리는 하얀 대리석상의 구필화가 엘리슨 쿠퍼(Lapper Alison)의 좌상도 있다.  “나라를 빛낸 장군도 정치가도 아닌데 양팔도 없고 양다리도 온전하지 않는 장애인을 만인에게 자랑스럽게 석상을 만들어 세워놓은 영국인의 의식은 역시 선진국인 것 같았습니다.”  런던 대영박물관은 입장료도 받지 않았고 이집트, 그리스, 로마, 아프리카, 이슬람 그리고 한국, 일본, 중국, 인도 등의 유물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한국실에는 김홍도의 화집, 공예품, 등과 백남준의 그림, 월전 장우성의 그림도 있었다.   ▲ 파리 몽마르트 언덕, 제일 아래 회색잠바. ⓒ김밝은터 갤러리 파리에서는 세느강과 에펠탑을 둘러보고 몽마르트언덕에서 파리 시가지를 내려다보기도 했다.  유럽 여행을 하는 동안 여러 나라의 문물을 접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런데 어린 조카와 같이 동행하다보니 여성들이 경계를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런 것이 배낭여행의 어려움이자 묘미가 아닐까 싶었다. 그는 세계 여행에서 돌아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의 일상이란 그림 그리는 일이다. 다행히 은사인 김용달 선생님 덕분에 그림을 계속 할 수는 있었지만 결코 쉬운 길은 아니었다.  “첫째는 남들이 손으로 그리는 것을 저는 발로 그려야 한다는 것부터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가 그릴 그림 앞에 오른발이 있어야 되는데 오른발은 어느 정도 높이에 있어야 된단다. 그의 그림은 언제부터 그가 꿈꾸는 손을 그리고 있는데 그의 그림은 추상화이므로 끊임없이 추구하고 고민해야 하므로 골치가 아프단다. 그리고 그의 그림이 처음부터 유명한 것은 아니었다.    ▲ 그가 꿈꾸는 김밝은터 미술관. ⓒ김밝은터 갤러리 “처음에는 돈도 없었지만 부산 미술대전에도 여덟 번 만에 입선했습니다.”  그 후 약간의 돈은 구족화가협회에서 장학금으로 지원을 받았지만 미술에 대한 것은 그야말로 7전8기였다. “누구는 33살까지만 살겠다고 했다지만 저는 그 때 15년만 더 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 몇 배로 살고 있습니다.”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시절이었다.  “지금도 꿈에서는 가끔 손을 봅니다.” 손은 그의 꿈이자 동경이었고, 다시는 가질 수 없는 손이기에 손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손은 그의 꿈이었기에 꿈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손이라면 독일 화가 뒤러의 ‘기도하는 손’이 많이 알려져 있다.  뒤러의 ‘기도하는 손’에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젊은 시절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그의 친구는 피아니스트가 꿈이었다. 뒤러와 친구는 의기투합하여 도시로 공부를 하러 떠났는데 돈이 없었다. 친구는 뒤러에게 내가 돈을 벌 테니 네가 먼저 그림공부를 하라고 했다. 그동안 친구는 뒤러의 학비를 벌기위해 노동을 했다. 뒤러는 친구의 도움으로 그림을 공부하여 제법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    ▲ 뒤러의 기도하는 손. ⓒ구글 이미지 그러던 어느 날 뒤러는 이제는 친구가 공부할 차례라고 생각해서 친구를 찾아 갔다. 그런데 창밖에서 바라 본 친구는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그 기도는 뒤러를 위한 것이었다.  “주여! 저의 손은 심한 노동으로 이미 다 망가지고 굳어서 더 이상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내 몫까지 뒤러가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주의 영광을 위해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하소서!” 뒤러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복받치는 감정을 억누르며 그 자리에서 친구의 기도하는 손을 스케치했다. 뒤러의 ‘기도하는 손’은 그렇게 탄생한 친구의 손이라고 한다.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다. 그런데 알브레히트 뒤러는 1471년 독일 남부 뉘른베르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성공한 세공사였고 뒤러의 대부는 안톤 코버거라는 갑부였다. 뒤러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야 할 만큼 가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도하는 손’은 1508년 뒤러가 그린 드로잉인데 당시 뒤러는 여러 가지 손 모양을 그리던 시절이었다. ‘기도하는 손’에 관한 이야기는 누군가가 지어낸 아름다운 한 편의 동화 일 뿐이라고 한다. “제 그림을 보시면 알겠지만 제 그림은 뒤러의 ‘기도하는 손’ 같은 사실화가 아니라 ‘꿈꾸는 나무’라는 추상화입니다.”  그는 손을 잃고 나서부터 손과 팔은 그의 좌절이자 이룰 수 없는 꿈이고 동경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제게도 팔이 있고 손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는 두 손으로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두 손이 있었다면 오늘 날과 같은 화가 김밝은터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 제9회 오늘의 작가상. ⓒ김밝은터 갤러리 그렇게 손을 많이 그리다보니 미술을 아는 사람들은 손 그림 하면 ‘김밝은터’라고 말할 지경이었다. 그러다보니 그런 손이 그에게 행운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2010년 1월 25일 부산미술협회 제68차 정기총회에서 제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자로 선정 된 것이다.  그동안 많은 대회에 나가서 입선을 했고, 은사인 김용달 선생과 ‘스승과 제자전’도 했었다. 그는 죽기 전까지는 계속 그림을 그릴 것이지만 그에게 손은 좌절이자 꿈이다. 그의 작품에는 언제나 손이 등장한다. 자연이 손으로 형상화되었다가, 훗날 그가 지을 미술관이 되기도 한다. 미술관을 지어 사회에 환원하는 게 그의 또 다른 꿈이란다. “아직은 꿈이겠지만 줄기세포전도 그런 의미를 담아서 그려 보았습니다.”  줄기세포가 활성화 되면 그도 다시 손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러나 손에 대한 꿈을 차마 지우지 못해 장애의 슬픔을 해소시킬 수 있도록 줄기세포의 연구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줄기세포와 관련된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다.  “잠에 취해 깨어나지 못하여 안타까운 날들을 보내는 줄기세포여, 너는 왜 깨어나지 못 하는가, 깨어나라, 뻗어라, 자라라, 잠에 취한 유능한 줄기세포여!”  깨어나지 못하고 멈추어 있는 것은 꿈을 꾸지 않기 때문이란다. 꿈을 꾸고 희망을 가져라 줄기세포여! 줄기세포는 언제쯤 그의 팔이 되고 손이 될 수 있을까.    ▲ 꿈꾸는 줄기세포展. ⓒ김밝은터 갤러리 “내 그림이 많은 사람들의 눈 속에 새겨지면 나는 슬픔에서 벗어나리라”  그는 그의 아픔을 주제로 그의 한을 발산하는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그렇지만 한을 풀기 위해 손을 그리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의 생활은 많이 불편하다. 그 불편을 감추려고 한을 눌렀지만 그 한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드러내 발산하는 것이 솔직한 것 같았다. 그래서 요즘은 그 한을 작품으로 승화시키고 있단다. “이제 감출 것도 숨길 것도 없기에 오라는 데만 있으면 강의도 다닙니다.”  얼마 전,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으로 학생들에게 그림을 보여 주면서 강의를 했단다. 그림이 무거울 텐데 어떻게 들고 갔을까. 그는 웃으면서 주머니에서 칩 하나를 꺼내 보였다.  “요즘은 그림을 안 들고 다녀도 되던데요?” 파워포인트로 만들어서 가면 된다고 했다. 아하,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어쩌다 보니 가톨릭신자가 되었는데, 성모병원이 개원할 때 작품 한 점을 기증했는데 어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필자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다음날 혼자 성모병원을 찾았다. 병원 카운터에 물어보니 다들 모른다고 했는데 마침 한 사람이 기획실에 물어 보더니 4층 베네딕도 강당 안에 있다고 했다.    ▲ 필자가 성모병원에서 찍은 선과 악. ⓒ이복남 한은 한을 가진 자만이 한을 이야기 할 수 있다. 그의 그림은 다른 사람들이 한을 가지지 않도록 한의 비애를 각인시키기 위한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단다. 사람들은 그의 꿈꾸는 나무에서 무엇을 볼 수 있으며 무슨 노래를 들을 수 있을까. 발로 그리다보니 허리도 아프고 발가락도 아프다. 그런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붓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그림을 그리면 행복할까.  “행복이요? 그런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추상화를 그리다보니 끊임없이 생각하고 창작해야 되므로 오히려 골치가 아픕니다.”  그동안 세상을 참 많이 원망했다. 그러나 이제는 담담하단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그림에 몰두하기 때문에 이제는 원망도 안하지만 고통도 원망도 다 잊어버립니다.”  그림은 어쩌면 그의 삶이자 희망이며 구원일지도 모른다. 세상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직분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학생은 공부를 하고, 피아니스트는 피아노를 치고, 저는 그림을 그리는 것 말입니다.”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욕심을 버리고 손을 가진 사람들은 손을 좀 올바르게 사용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남의 것을 탐내지 않았고 그의 꿈을 위해서 그의 꿈들이 그의 작품이 된다고 했다. 그는 꿈속에서도 손을 찾고 있다고 했다. 프로이트는 “꿈이란 어렸을 때 좌절된 무의식적 욕망의 표현”이라고 했다. 그도 무의식에서는 손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꿈속여행에서는 그가 정말로 손을 잃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손이 그를 잃어버린 것인지 또 다시 몽롱해진단다. 장자의 나비처럼. 현재 그는 세계구족화가협회, 부산미술협회. 부산창작미술협회, 부산사하미술인회, 부산환경문화연합, (사)한국전업미술가협회 부산지회, 부산가톨릭미술인회, 한국미술협회 등의 회원이다.  * 이복남 기자
1984    [동네방네] - 요지경이들 기상천외한 화장법 댓글:  조회:5448  추천:0  2018-02-20
#beauty_trend ANTI-BEAUTY 이거 실화냐?   본 기사를 페이스북에 공유 본 기사를 트위터에 공유 본 기사를 카카오스토리에 공유 본 기사를 구글플러스에 공유 본 기사를 이메일로 보내기 본 기사를 인쇄하기 16 0 editor 김자혜 2018.01.18 기상천외하지만 실화로 인정받았다. 뷰티가 안티인 올해의 트렌드  1. #코털 연장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던 코털이 뷰티 트렌드가 됐다. ‘이게 정말 뷰티 트렌드라고?’ 하며 의아해할 수 있지만, 해외 뷰티 인스타그래머들은 코털을 풍성하게 연장한 사진들을 업로드하고 있다. 풍성한 코털의 비결은 바로 인조 속눈썹. 인조 속눈썹을 동그랗게 말아 콧구멍 안쪽에 붙이면 끝! 글리터 속눈썹으로 화려한 코털을 선보이거나, 그린 컬러를 더해 트리처럼 연출한 인스타그래머도 있다. 2. #물결 눈썹 만화 캐릭터처럼 눈썹에 포인트를 더한 물결 모양 눈썹이 인기다. 눈썹 테두리를 물결 모양으로 그리고 본인의 눈썹에 아이브로나 투명 마스카라를 딱 붙여 정갈하게 연출한다. 물결 모양을 그리지 않고 물에 잘 녹는 수용성 접착제를 사용해 물결 모양을 잡는 인스타그래머들도 있다. 고도의 눈썹 그리기 스킬이 요구된다. 3. #주근깨 메이크업 #주근깨 시술 잡티 없는 깨끗한 피부가 로망인 우리나라와는 달리 해외에서는 주근깨를 그려 넣는 주근깨 메이크업이 이미 대세다. 볼이나 코 주위에 조금 그려 넣는 정도가 아닌, 얼굴 전체를 주근깨로 뒤덮는 경우도 많아졌다. 주근깨를 아예 문신처럼 그려 넣는 시술 또한 트렌드다. 기왕이면 자신의 별자리 모양대로 주근깨를 그려 넣는 것이 인기라고. 4. #겨털 염색 2011년 레이디 가가가 캐나다에서 열린 한 시상식에서 푸른색으로 염색한 겨드랑이털을 선보인 이후 해외에서는 페미니즘과 함께 ‘겨털 염색’을 하는 이들이 꾸준히 이어진다. 한 가지 컬러로 염색하는 방법부터 양쪽 컬러를 다르게 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 겨드랑이를 꾸미는 방법도 제각각. 우리나라에 수입, 정착할지 지켜보자. 5. #블랙 하이라이터 얼굴에 때가 낀 것이 아니다. 핼러윈 분장도 아니다. 블랙 하이라이터 메이크업이다. 지난해 한 뷰티 브랜드에서 핼러윈데이를 맞이해 한정판으로 출시한 블랙 하이라이터가 인기를 끌면서 해외에서는 블랙 하이라이터메이크업이 첨단 트렌드로 떠오른 것. 기존의 하이라이터 존 바로 아래에 블랙 하이라이터를 발라 입체감을 살리는 것이 포인트. 단, 너무 많이 바르면 좀비처럼 보일 수 있으니 주의할 것. ///designer 이지은 사진제공 인스타그램  
1983    중국 청나라 문인 - 원매(袁枚) 댓글:  조회:5502  추천:0  2018-02-20
원매 (청나라)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원매(袁枚, 1716년~1797년)는 청(淸) 중기의 문인이다. 자는 자재(子才), 호는 간재(簡齋), 또는 수원노인(隨園老人). 생애[편집] 저장 성(浙江省) 첸탕(錢塘) 사람으로, 24세로 진사에 합격하여 한림원 서길사(翰林院庶吉士)가 되었으나 만주어 성적이 나빠 지방관으로 율수·장닝(江寧) 등의 지현(知縣)을 역임하였고, 37세에 사직하여 장닝현의 소창산(小倉山)에 수원(隨園)을 영위하여 매문(賣文)에 의해서 취미의 세계에 사는 문인생활로 들어갔다. 시는 고인(古人)의 모방을 배제하고 자연의 성정(性情)을 노래하는 성령설을 제창하였고, 또한 부인에게 시작(詩作)을 권장하여 제자의 작품집 을 편집했다. 문은 변문을 특기로 했으며 고문·변문 공히 뛰어나서 기윤과 함께 '남원북기(南袁北紀)'라고 병칭되었다. 미식(美食)과 승경(勝景)을 찾아 각지를 유람하였고, 음식에 관해 쓴 과 등이 있다. 또한 귀신의 세계에 흥미를 나타내서 괴담집인 이 있으며 청년시대부터의 시문이 수록되어 있다. 시론으로서는 가 있다. 평가[편집] 원매는 조용히 은신하는 삶을 산 것이 아니라 ‘마음 가는 대로’ 자신이 좋아했던 것을 펼치고 살았던 이채로움을 가진 인물이었다. 일본의 중국 문학 연구자인 이나미 리쓰코(井波律子)는 ≪중국의 은자들≫[파주(坡州), 한길사, 2002]에서 그에 대해 “깊이 병든 데카당스와 감추어진 가능성에 대한 과감한 도전, 평생 이 양극단을 오간 원매는 중국의 수많은 은자들 중에서도 유난히 스케일이 크고 일종의 요기를 발산하는 괴물 은자”라고 평가한 바 있다. 그의 평을 통해서 우리는 원매라는 인간이 가진 이채로움을 충분히 실감할 수 있다. 그는 두 가지를 축으로 원매의 인생을 갈무리하고 있다. 우선 깊이 병든 데카당스는 원매가 호화로운 원림, 곧 수원(隨園)에서 거듭 만찬을 열어 강남 명사들과 교류하고 수많은 첩을 거느리며 호사스러운 생활을 했던 것, 그리고 전통 사회에서 서른 명이 넘는 여제자를 두었던 것과 여색뿐만 아니라 남색 또한 즐기며 화려한 애정 행각을 벌였던 그의 인생을 함축하는 것일 테다. 사실 이나미 리쓰코는 양극단의 또 다른 축으로 감추어진 가능성에 대한 과감한 도전을 거론하지만, 깊이 병든 데카당스에는 어느 때건 또 다른 탈주를 감행할 무궁한 가능성이 잠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원매의 당시 전통에 대한 부정, 사회적 금기에 대한 거부의 정서는 그런 점에서 그의 과감한 도전이면서 동시에 데카당스로 간주될 수 있는, 역시 원매를 구성하는 질료들이다. 18세기 중국 사회에서 원매는 어느 쪽으로건 쉽게 계열화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원매 산문집≫, 백광준 역, 2009년, 지만지,   =============================덤으로 더...  원매(1716~1797)는 중국 청나라 시대의 인물이다. 시인이었던 그를 후대의 사람들은 음식 사학자로도 기억한다. 그가 펴낸 고서적 때문이다. 서른세살 때 부친이 사망하자 그는 관직을 사임하고 낡은 정원을 사들여 ‘수원’이라 이름 짓고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평소 사람들과 교류하길 즐겼던 그는 초대받은 집의 음식이 맛있으면 반드시 요리사를 보내 배워 오게 했다. 40여년간 지속한 그의 음식 사랑이 360가지가 넘는 조리법을 담은 명저를 탄생시켰다. 그의 음식 철학은 투철했다. ‘요리사가 해서는 안 될 14계명’에는 ‘요리 이름만 번듯하게 지어서는 안 된다’ ‘요리를 미리 만들어 두면 안 된다’ 등이 꼼꼼히 적혀 있다. 무릇 사람의 몸에 들어가는 먹을거리를 만드는 이는 생각이 반듯해야 한다. 맛은 그다음이다.     ================================== 백지에 담긴 사연                  곽휘원의 아내   벽사창에 기대서서 봉투를 뜯어보니        碧紗窓下啓緘封(벽사창하계함봉) 조그만 종이 한 장 텅텅 비어 있습디다     尺紙終頭徹尾空(척지종두철미공) 옳거니, 낭군님이 이별 한을 품으시고      應是仙郞懷別恨(응시선랑회별한) 날 그리는 온갖 사연 침묵 속에 담았네요  憶人全在不言中(억인전재불언중)     사오 년 전이다. 참 어여쁜 여학생 하나가 겨울 방학 때 제법 두툼한 편지를 보내왔다. 화들짝 뜯어보다가, 그만 어안이 벙벙해서 하마터면 뒤로 넘어갈 뻔했다. 기나긴 편지에 뜨겁고도 진진한 사랑이 구석구석 넘쳐흘렀기 때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연인에게 보낸 편지였다. 아마 그녀의 연인도 그날쯤 난데없는 편지를 받고 망연자실했을 것이다. 자기에게 보낸 편지가 아니라, 연인이 선생에게 보낸 편지였을 테니까. 얼마 후에 그 여학생이 연구실로 나를 찾아왔다. 연인으로부터 돌려받은 편지를 꺼내면서 가만히 얼굴을 붉혔다. 나도 잘못 받은 편지를 돌려주며, 그냥 슬며시 웃어주었다. 서로 말 없이 마주 앉아서 아주 오래도록 차를 마시다가 헤어졌다.     이 일화가 생각날 때마다 청(淸)나라의 시인 원매(袁枚)의 ‘수원시화(隨園詩話)’에 수록되어 있는 이야기 한 토막이 떠오른다. 곽휘원(郭暉遠)이라는 사람이 고향을 떠나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그리운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를 다 써서 봉투에 넣을 때, 실수로 그만 사연 많은 편지 대신에 백지를 넣어 보내고 말았다. 아내가 남편의 편지를 받고 반가운 마음에 화들짝 뜯어보니, 어이없게도 백지 한 장이 전부였다. 이에 아내는 답장 대신에 위의 시를 써서 남편에게 보냈다. 눈 내린 들판 같이 하얀 편지, 바로 그 순도 100%의 무언(無言) 가운데 오롯이 담겨 있는 온갖 사연들을 잘 읽었다는 뜻이 되겠다. 재치가 넘치는 시이기도 하나, 꿈보다 해몽이 더 기가 막히는 견강부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심전심의 교감이 오고가는 부부 사이에, 말이 없다 해서 모를 게 도대체 무엇이 있겠는가.   사오년 전 학기말 시험 때다. 시험지를 나눠주자 말자, 조용하던 교실에 한동안 다각다각 말 달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하지만 불과 얼마 후에 여기저기서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우르르 답안지를 내고 나간다. 죄다 나갔는데, 텅 빈 교실에서 최후의 일각까지 몸부림을 치며 사투를 벌이는 여학생이 있다. 무슨 경천동지할 답안지를 작성하고 있나 보다 했는데, 정말 놀랍게도 완전 백지를 내고 나간다. 나는 이 눈 내린 들판같이 하얀 종이를 눈에 안 보이는 글씨로 충만한 엄청 사연 많은 백비(白碑: 글씨를 새기지 않은 비석)로 읽는다. 그러나 사연이 아무리 많아도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므로 어쩔 수 없이 에프를 주노니, 용서하시라 백비를 쓴 이여! 하지만 네 마음 내가 다 안다.                                              이종문: 시인, 계명대한문교육과 교수 ==================   제화題畫 그림에 부쳐 / 원매袁枚(청淸1716~1797) 촌락만청천村落晩晴天 시골 저녁 쾌청한 날씨에 도화영수선桃花映水鮮 복사꽃 물에 비쳐 곱다. 목동하처거牧童何處去 목동은 어디로 갔는고 우배일구면牛背一鷗眠 소등에 갈매기 한 마리 졸고 있다.   원매袁枚(1716~1797) 청淸 중기의 문인. 자는 자재子才, 호는 간재簡齋, 또는 수원노인隨園老人.   저장성浙江省 첸탕錢塘 사람으로, 24세로 진사에 합격하여 한림원서길사翰林院庶吉士가 되었으나 만주어 성적이 나빠 지방관으로 율수·장닝江寧 등의 지현知縣을 역임하였고, 37세에 사직하여 장닝현의 소창산小倉山에 수원隨園을 영위하며 매문賣文에 의해서 취미의 세계에 사는 문인생활로 들어갔다.   시는 고인古人의 모방을 배제하고 자연의 성정性情을 노래하는 성령설을 제창하였고, 또한 부인에게 시작詩作을 권장하여 제자의 작품집 을 편집했다. 문은 변문을 특기로 했으며 고문·변문 공히 뛰어나서 기윤과 함께 '남원북기南袁北紀'라고 병칭되었다. 미식美食과 승경勝景을 찾아 각지를 유람하였고, 음식에 관해 쓴 과  등이 있다. 또한 귀신의 세계에 흥미를 나타내서 괴담집인 가 있으며 청년시대부터의 시문이 수록되어 있다. 시론으로서는 가 있다.   원매는 조용히 은신하는 삶을 산 것이 아니라 ‘마음 가는 대로’ 자신이 좋아했던 것을 펼치고 살았던 이채로움을 가진 인물이었다.일본의 중국 문학 연구자인 이나미리쓰코井波律子는 ≪중국의 은자들≫[파주坡州, 한길사, 2002]에서 그에 대해 “깊이 병든 데카당스와 감추어진 가능성에 대한 과감한 도전, 평생 이 양극단을 오간 원매는 중국의 수많은 은자들 중에서도 유난히 스케일이 크고 일종의 요기를 발산하는 괴물 은자”라고 평가한 바 있다. 그의 평을 통해서 우리는 원매라는 인간이 가진 이채로움을 충분히 실감할 수 있다. 그는 두 가지를 축으로 원매의 인생을 갈무리하고 있다. 우선 깊이 병든 데카당스는 원매가 호화로운 원림, 곧 수원隨園에서 거듭 만찬을 열어 강남 명사들과 교류하고 수많은 첩을 거느리며 호사스러운 생활을 했던 것, 그리고 전통 사회에서 서른 명이 넘는 여제자를 두었던 것과 여색뿐만 아니라 남색 또한 즐기며 화려한 애정 행각을 벌였던 그의 인생을 함축하는 것일 테다. 사실 이나미리쓰코는 양극단의 또 다른 축으로 감추어진 가능성에 대한 과감한 도전을 거론하지만, 깊이 병든 데카당스에는 어느 때건 또 다른 탈주를 감행할 무궁한 가능성이 잠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그렇다면 원매의 당시 전통에 대한 부정, 사회적 금기에 대한 거부의 정서는 그런 점에서 그의 과감한 도전이면서 동시에 데카당스로 간주될 수 있는, 역시 원매를 구성하는 질료들이다. 18세기 중국 사회에서 원매는 어느 쪽으로건 쉽게 계열화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 확대 江到興安水最淸(강도흥안수최청):麗江을 거슬러 흥안에 이르니 물이 아주 맑구나,  靑山簇簇水中生(청산족족수중생):푸른 산은 무리지어 물 가운데 솟아 있네.  分明看見靑山頂(분명간견청산정):분명 푸른 산의 정상을 보았는데, 船在靑山頂上行(선재청산정상행):배가 푸른 산 봉우리를 지나가네. ----游桂林諸山記 / 袁枚(淸,1716 - 1797)     銷夏詩(소하시) - 원매(袁枚 1716~1797, 청나라 시인)  不著衣冠近半年(불착의관근반년) : 반 년 남짓 거추장스런 의관을 벗어 버리고 水雲深處抱花眠(수운심처포화면) : 물 안개 깊은 곳에서 꽃을 안고 잠잔다 平生自想無冠樂(평생자상무관락) : 벼슬 없는 즐거움을 평생 꿈꿔 왔거늘 第一驕人六月天(제일교인유월천) : 무더운 유월 더위에 내가 제일 낫구나.      春日偶吟(춘일우음) - 袁枚(원매)  봄날에 白髮蕭蕭霜滿肩(백발소소상만견 ) : 어깨 위에 백발을 서리처럼 드리우고 送春未免意留連(송춘미면의유련 ) : 이 봄 보내는 쓸쓸한 마음 牡丹看到三更盡(모단간도삼경진 ) : 밤이 늦도록 모란꽃 지켜보는 것은 半爲憐花半自憐(반위련화반자련 ) : 반은 꽃 서러워 반은 나 서러워서라네.       ===================================== 산꼭대기를 가는 배 (興安) / 원매(袁枚) 江到興安水最淸 (강도흥안수최청) 강은 흥안에 이르러 물이 가장 맑은데 靑山簇簇水中生 (청산촉촉수중생) 푸른산이 뽀죽뽀죽 물속에서 솟아나네 分明看見靑山頂 (분명간견청산정) 분명 내 눈으로 푸른 산꼭대기를 보았는데 船在靑山頂上行 (선재청산정상행) 배가 푸른산 꼭대기 그 위를 가고 있네 (興安) / 원매(袁枚) 청나라 계림에서 이강에 배를 띄우고 흥안까지 오는 동안 주변 산수경관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시인데, 강물에 비친 산 그림자와 강 위를 떠가는 배의 이미지가 중첩되어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興安(흥안): 광서 계림 동북쪽 60킬로미터 지점 簇簇(촉촉): 죽순이 여기저기 뾰죽뾰죽 솟아나는 모양    봄을 모르는 아이~ 반쯤 핀 매화가 반가워 대지팡이 짚고 한가로이 바라보네. 아이는 봄을 알지 못해 풀이 어째서 푸르냐고 묻네.                            청, 원매 偶作絕句   一首   우작절구     일수 偶尋半開梅  우심반개매 閑倚一竿竹  한기일간죽 兒童不知春  아동부지춘 問草何故綠  문초하고록 *이른 봄, 반쯤 핀 매화를 반기는 시인의 마음과  봄이 되면 풀이 왜 파랗게 자라는지 모르는 아이의 순진함이 짝을 이루어 청순함이 느껴집니다~^^*     =================================    連宵風雨惡(연소풍우악)   매일 밤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쳐     蓬戶不輕開(봉호불경개) 쑥대로 엮은 문조차 마음대로 열지 못하네     山似相思久(산사상사구) ​산은 오랫동안 나를 보고 싶었는 지     推窗撲面來(추창박면래) ​창문을 밀자 세차게 밀고 들어오네 [출처] 추창(推窓) / 청나라 원매|작성자 땅콩 /// ============================================== 連宵風雨惡(연소풍우악) 蓬戶不輕開(봉호불경개)  山似相思久(산사상사구) 推窓撲面來(퇴창박면래)   매일밤 비바람이 세차게 불어 쑥대로 엮은 문조차 마음대로 열지 못했네 산은 오랫동안 나를 생각한 듯 창문을 열자마자 세차게 밀고 들어오네     청 (淸)의 시인 원매(袁枚)의 시 '推窓(퇴창)' 입니다. 에코님의 그림에 얽힌 이야기를 읽고 문득 이 시를 생각했지요. 원매는 항저우 출신으로 잠깐 관직에 나가기도 했으나 평생 산 속에 파묻혀 야인 생활을 하면서 시를 짓고 산문을 썼던 사람입니다. 시작을 하는데 있어서도 형식보다는 자신의 감정과 눈 앞의 풍광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자유로운 영혼이었다고 하더군요.   그의 시 '퇴창'은 산 속의 오두막에서 산을 벗삼아 살아가는 가난한 선비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마주보던 산인데 오랜 장마비로 며칠을 문조차 못 열다가 참지 못하고 문을 열었더니 산 또한 그를 그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의 시야 안으로 왈칵 들어온다는 겁니다.참으로 절묘한 표현이지요? 고라니골에서 늘 앞 뒤의 산을 바라보며 살다가 그것을 보지 못하게 된 지금의 제게 그리움을 상기시켜 주는 절창이군요. 상사병처럼 산이 그리워집니다. 자연과의 일체감이 시인의 뛰어난 상상력을 통한 절묘한 표현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桃花吹落杳難尋 도화취락묘난심 복숭아꽃 떨어져 찾기 어려우니     人爲來遲惜不禁 인위래지석불금 늦게 온 사람들 애석해하네     我道此來遲更好 아도차래지갱호 ​나는 늦게 오는 게 낫다고 말하네 ​   想花心此見花深 상화심차견화심 꽃 그리는 마음이 꽃보는 마음보다 깊다고   [출처] 한 시 / 청나라 원매|작성자 땅콩  
1982    [이런저런] - "가족려행용차" 한대 살가말가... 댓글:  조회:4672  추천:0  2018-02-20
[해외RV] 캠핑카쇼에서 만난 이색 RV -1 더카라반 2018.02.20  SNS 공유하기   인쇄하기 글씨크기 조절하기   일본캠핑카쇼 2018을 통해 선보인 RV중에 신형 및 이색 모토홈과 카라반을 소개한다. + 가족을 위한 그뤠잇 모터홈 COMPASS Grand 화이트하우스는 일본에서 35년이란 오랜 시간동안 사랑받은  회사로 국내에도 화이트하우스 코리아가 진출해 성우모터스와 함께 올뉴카니발팝 캠핑카를 선보이고 있다. 일본에서 만난 화이트하우스 콤파스  그랜드 모델은 가족 중심으로 여가를 즐기기에 최적의 구성을 갖춘 모델이다.  4인 가족이 앉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거실 및 주방 루프탑 독립된 침실과 솬기팬 후면 독립된 침실로 어른 2명은 충분히 취침할 수 있는 넓은 공간 콤파스 리빙룸은 가족 모두가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 하기 좋다. 의자를 변형하면 분리형 베드로 어른 2인은 충분히 취침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다. 리빙룸 뒤쪽으로도 베드가 있고, 루프탑에서도 취침이 가능하다. 각각 개폐가 가능해 가족 구성원의 독립적인 공간을 제공하여 따로 또 같이 여가를 보낼수 있다. 싱크대, 버너, 포트까지 일렬 구조로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한 주방. 앞으로 단열성이 높은 아크릴 이중창은 채광과 환기용이 곳곳에 배치된 창문으로 비추는 자연광과 LED가 화이트 톤의 가구에 반사되어 안락함은 물론 청결감있는 공간 분위기를 연출해준다. + 워너비 카라반, 에어스트림 Tommy Bahama 19CB 에어스트림만의 클래식한 외형에 바닷가를 연상시키는 타프 누구나 가지고 싶어하는 워너비 브랜드 에어스트림의 2018년형 Tommy Bahama 19CB는 캐리비안 스타일의 무광택으로 마감된 디자인에 OceanAir 우드 블라인드, 꽃무늬로 악센트, 스티치 가죽 캐비닛핸들, 고급 직물 바닥 등 모든 면에서 바닷가에 자리 잡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실내 구조 곡선의 넓은 창문과 거실 테이블 주방 욕실과 밖으로 배치된 세면대와 수납장 와인바와 유리잔 보관장 Tommy Bahama는 내장된 바와 유리잔 보관함, 와인 랙 및 제빙기가 있고, 액세서리 키트에는 특수 유리 제품, 바 도구, 위스키 스톤, 수건, 양초, 쿨러, 의자 등이 편의를 위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 또한Polk Audio System의 음악을 XM 라디오로 재생하고, 스마트 TV에서 스트림을 보여주고, 좋아하는DVD를 재생할 수 있어 휴식을 즐기기엔 부족함이 없는 공간이다. + 변신하는 모토홈, 코이즈미 KARUCAN 카루캔 홈페이지(karucan.jp) 카루캔은 유럽과 북미의 모토홈과는 또 다른 일본만의 작고 아기자기함이 있는 모델이다. 하얀 바디에 초록의 디자인을 입혀 앙증맞음이 배가되는 작은 트럭형태의 카루캔은 그냥 보면 평범하게 비춰지지만 위로 옆으로 자동 확장되는 모습을 보면 모두 입을 다물지 못 할 것이다. 주행 시에는 평범한 모토홈이었다가 정박 시에는 세모난 지붕이 솓고 집모양으로 변형되는 볼거리 넘치는 모델이다. 카루캔의 제작자. 카루캔 오지상(할아버지)으로 불리는데 재미난 카루캔처럼 익살스럽고 유쾌함 카루캔 아저씨의 장난스러운 미소처럼 재미있는 모델로 작을 것 같은 실내는 위로 루프가 올라가고 옆으로 차체 박스가 늘어나면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카루캔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전시에 출품된 모델 외에도 브랜드 특성을 살린 카라반 형태의 카루캔이나 다양한 베이스 차량의 색다른 카루캔 라인도 만날 수 있다. + 일본의 전통 디자인에 배려를 담은 NTB  SHINOBI 시노비는 일본특종바디에서 2018년 내놓은 새로운 모델로 블랙의 시크한 외형과 달리 안을 들여다 보면 일본 느낌을 물씬 느낄 수 있는 구조와 디자인으로 도배되었다. 다다미와 원목, 창호지로 덧입힌 일본 전통의 느낌이 물씬 나는 디자인 좌식 다다미를 철거하면 홈이 깊은 바닥을 드러내며 입식으로 전환하여 사용이 가능 시노비는 내부 은은한 조명아래 다다미를 깔아 일본 전통 가옥이나 료칸에 있는 듯한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미닫이 창문과 앉아서 팔을 뻗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구조로 형형색색의 다양한 소품에 생활에 필요한 주방과 화장실, 있을 건 다 있는 모델이다. 젊은 사람뿐 아니라 노부부나 휠체어를 이용하는 알비어가 생활하기 편하게 최적화된 모델로 앉은 범위에서 손을 뻗거나 조금만 움직여도 닿는 동선으로 설계됐다고 한다.  좌식 구조가 불편하다면 다다미를 거두어 아래로 공간을 확장해 입식처럼 사용할 수도 있다. 운전석 위에도 벙커베드가 있고, 테이블을 치우고 다다미 위에서도 4~5인 가족이 충분히 취침할 수 있는 크기다. 편집 ┃ 더 카라반
1981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우리 연변지역에 늑대가 있는감?... 댓글:  조회:4529  추천:0  2018-02-20
길고 얇은 다리를 가진 갈기늑대를 아시나요?   갈기늑대는 날렵한 모습의 여우 같은 모습의 늑대인데요, 갈기늑대에 대해서 알아보아요! 서식지 파괴와 밀렵으로 희생되고 있는 갈기늑대를 사진에서만 볼 수 있게 되지 않도록 하려면 갈기늑대의 서식지를 보존하고 밀렵꾼들을 감시해야겠어요!
1980    [쉼터] - 30년 고민해 쓴 두 글자... 댓글:  조회:5117  추천:0  2018-02-20
추사가 30년 고민해 쓴             두 글자, 보물 된다 도재기 선임기자  2018.02.20.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경향신문]  ㆍ제자인 윤정현의 호 ‘침계’, 웅혼장쾌한 운필로 완성 ㆍ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의 다른 작품 2점도 지정예고 추사 김정희가 30년을 고민한 끝에 해서와 예서를 합친 서체로 쓴 ‘침계’. 제자인 침계 윤정현으로부터 호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30년이 지나서야 쓴 작품으로, 추사의 작품세계나 인품 등을 알 수 있는 작품이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 후기의 대표적 학자이자 예술가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30년 고뇌 끝에 해서와 예서를 합친 서체로 쓴 ‘심溪’(침계) 등 서예 작품 3건이 보물이 된다. 3건의 작품은 모두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품이다. 문화재청은 “문인이자 정치가로 활동하며 추사체를 창안해 한국 서예사에 큰 자취를 남긴 추사 김정희의 학문적·예술적 관심과 재능이 구현된 3건의 서예를 보물로 지정예고했다”며 “이들 작품은 그의 예술세계를 이해하는 데 지표가 될 것”이라고 20일 밝혔다. 보물로 지정예고된 ‘김정희 필 침계’(침계)는 추사가 글씨 부탁을 받고 30년의 고민 끝에 써낸 작품으로 자신의 작품세계 구축이나 작품 완성도에 얼마나 엄정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유명하다. ‘침계’는 추사의 제자로 이조판서를 지낸 윤정현(1793~1874)의 호다. 화면 왼쪽에 추사가 쓴 발문을 보면 추사는 윤정현으로부터 30년 전에 호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부탁을 받은 추사는 당초 예서체로 쓰려 했으나 한나라 비석 등에 ‘침’자가 없자 “함부로 쓰지 못하다가 30년 만에 해서와 예서의 합체로 쓴 북조시대의 금석문의 뜻을 살려” 썼다고 적었다. 화면 오른쪽에 크게 ‘침계’ 두 자를 쓰고 왼쪽에 8행의 발문으로 구성된 작품 ‘침계’는 세로 42.8㎝, 가로 122.7㎝로, 완성도뿐 아니라 추사의 학문적·예술적 태도나 인품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추사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최완수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은 지난해 펴낸 저서 에서 “웅혼장쾌(크고 듬직하며 씩씩하고 통쾌함)한 해예합체로 혼신의 힘을 기울여 쓴 것으로 보인다”며 “1851~1852년 늦가을 사이에 씌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문화재청이 보물로 지정예고한 김정희의 서예 작품 ‘大烹高會’(대팽고회·왼쪽)와 ‘且呼好共’(차호호공). 문화재청 제공 보물로 지정예고된 다른 2건의 작품 ‘大烹高會’(대팽고회)와 ‘且呼好共’(차호호공)은 각각 두 폭으로 구성된 대련이다. ‘김정희 필 대팽고회’(대팽고회)는 ‘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대팽두부과강채 고회부처아녀손)이란 글귀를 예서로 쓴 대련이다. 각 129.5×31.9㎝로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나물이고,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라는 의미다. 추사가 1856년(철종 7년) 세상을 뜨기 두 달 전쯤 쓴 만년작으로 추정되는 작품이다. 문화재청은 “글귀는 중국 명나라 문인 오종잠의 시 ‘중추가연(中秋家宴)’에서 글자를 바꿔 차용한 작품”이라며 “평범한 일상생활이 가장 이상적인 경지라는 내용에 걸맞게 꾸밈이 없는 소박한 필치로 붓을 자유자재로 운용해 노서예가의 인생관과 예술관이 응축된 대표작”이라고 밝혔다. 최 소장은 “늙은 소나무 가지처럼 고졸담박(예스럽고 어수룩하며 깨끗하고 순박함)한 느낌을 주는 추사체의 진면목이 함축된 대표작”이라고 평했다. ‘김정희 필 차호호공’(차호호공)은 ‘且呼明月成三友 好共梅花住一山’(차호명월성삼우 호공매화주일산)을 촉나라 때의 예서(촉예법)로 쓴 작품이다. 청나라 때의 서예가·전각가인 오희재의 시 ‘증우’에서 일부 글귀를 바꾼 작품으로, ‘또 밝은 달을 불러 세 벗(나와 청풍·명월)을 이루고 매화와 같이 한 산에 머물기를 좋아한다’는 뜻이다. 크기는 각 135.7×30.3㎝다. 문화재청은 “이 작품은 금석학에 조예가 깊었던 추사의 학문이 예술과 결합된 양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며 “필획 사이의 간격이 넉넉하고 자획의 굵기도 다양하면서 빠른 붓질로 속도감 있는 효과를 내는 등 운필의 멋을 최대한 살린 수작으로 꼽힌다”고 밝혔다. 추사의 작품은 이들 3건 외에도 국보와 보물이 이미 지정돼 있다. 추사가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제자인 이상적에게 그려준 것으로 조선 후기 대표적 문인화로 꼽히는 ‘세한도’가 국보 180호이며, 서예 작품 ‘김정희 해서 묵소거사자찬’과 ‘김정희 예서 대련 호고연경’은 각각 보물로 지정돼 있다. 문화재청은 앞으로 30일간의 보물 지정예고 기간 동안 각계 의견을 수렴해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보물 지정 여부를 최종 결정할 계획이다. ///도재기 선임기자
1979    [그것이 알고싶다] - "떡국"?... 댓글:  조회:3862  추천:0  2018-02-20
[ESC] 김태권의 고기고기 여행   만화가 김태권. 설음식은 역시 떡국. 떡에 따라 국물에 따라 종류도 많지요. 가래떡도 조랭이떡도 좋아요. (일본은 찰떡을 넣는대요) 멸치국물도 고깃국도 맛있죠. 저는 사골국물을 좋아해요. 달걀 지단과 김을 얹은 뽀얀 조랭이떡국을 생각하니 군침이 흐르네요.   뼈를 우려낸 국물 가운데 저는 제주에서 맛본 ‘접짝뼈국’이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접짝뼈”라는 돼지의 뼈(이 뼈가 어느 부위인지는 사람마다 말이 달라요)를 푹 끓인 다음 입이 쩍쩍 들러붙을 만큼 걸쭉하게 메밀가루를 풀어 먹지요. 접짝뼈국 한 그릇이면 제주의 겨울바람도 튕겨낼 것처럼 든든합니다.   그런데 뼈를 먹는 일을 불편해하는 문화도 있어요. 다음은 만화와 영화로 유명한 신 ‘토르’가 등장하는 북유럽 신화의 이야기입니다. 거대한 망치를 휘두르는 토르는 두 마리 염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여행합니다. 토르는 천하무적의 신인데 어째서 맹수가 아니라 염소와 함께 다닐까요? 배고플 때 잡아먹을 수 있거든요. 깨끗이 발라먹은 다음 가죽 위에 뼈를 모으고 망치를 휘두르면 염소들이 살아난대요. (어차피 다음에 다시 먹히겠지만요.)   한번은 토르가 가난한 농부의 집에 묵었어요. 얻어먹기는커녕 먹을 것을 나눠줘야 할 상황이었죠. 토르는 염소를 잡아 농부 가족과 함께 먹었습니다. 그런데 농부의 아들 티알피가 염소의 다리뼈를 분질러 골수를 빨아먹었어요. 살아난 염소가 다리를 절자, 토르는 화를 내며 티알피를 몸종으로 데려갔대요.   신화의 세계에서 뼈는 부활과 관계가 있나 봅니다. 다음은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이 들려주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이야기예요. 인간들이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하자 들소들이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기네 살을 내줬대요. 그 대신 우두머리 들소가 인간 소녀를 아내로 데려갔지요. 소녀의 아버지가 몰래 딸을 만나러 갔다가 소떼에게 들켜 흔적도 없이 짓밟혀 죽습니다. 우두머리 들소는 매정하게 쏘아붙였어요. “너희도 우리 가족을 이렇게 죽였지.”   서럽게 울던 소녀는 우물가에서 아버지의 등뼈 한 조각을 발견했어요. 소녀는 뼈 위에 담요를 덮고 마법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되살아났대요. 들소들은 깜짝 놀랐어요. “우리를 죽였을 때도 이렇게 해주지 않겠는가?” 이후로 동물들은 ‘자기들의 피가 대지로 돌아가면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기꺼이 죽임을 당했다’고 신화는 전합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 눈에는 우리처럼 뼛속까지 쪽쪽 빨아먹는 일은 지나쳐 보일 겁니다. 먹는 쪽이 먹어치우는 일에 바빠 먹히는 쪽이 되살아날 가능성까지 빼앗는 것 같으니까요. 반면 저는 기왕 목숨을 빼앗은 마당에 깨끗이 남김없이 먹어야 먹히는 쪽에 덜 미안하다고 생각하는 쪽이고요. 어느 쪽 생각이 맞을까요? 애초에 맞고 틀리고가 있는 문제일까요? 다시 생각해 보니 목숨을 빼앗긴 쪽은 이리 먹히나 저리 먹히나 마찬가지일 것 같네요.   조선 후기의 라는 책에는 엽기적인 떡국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세도가 집안에서 눈·코·입·귀에 팔다리까지 달린, 어린아이를 꼭 닮은 떡을 빚어 국을 끓였다나요. (오래 못 가 그 집이 망했다고는 하지만) 왜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이 이야기가 불편할까요? 인간의 아이가 상징적으로나마 육식의 대상이 되어 부와 권력을 거머쥔 자의 밥상에 오르는 모습 때문일 겁니다. 먹히는 쪽이 되는 일은 즐겁지 않은 법이죠.   ///김태권(먹기 좋아하는 만화가)
1978    [그것이 알고싶다] - 올림픽과 이상기후와의 "전쟁"은 진행형... 댓글:  조회:4926  추천:0  2018-02-20
이상기후와의 전쟁... 다된 축제 망칠라...          소금 뿌리는 평창 김기범 기자 2018.01.28.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경향신문] 평창 올림픽 스키장 제설작업 2주 앞으로 다가온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스키, 스노보드 등 설상경기를 앞두고 이상고온 현상이 일어나거나 비가 내릴 경우에 대책은 무엇일까. 애써 다져놓은 경기장 표면의 눈이 녹아내리는 아찔한 상황에 대처하는 주인공은 바로 ‘소금’과 미리 비축해둔 ‘저장눈’이다. ■ 설상경기장 비상상황에 소금이 특효약 28일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에 따르면 가장 극단적인 기상상황에서 활약하는 것은 소금이다. 경기장의 눈은 얼음처럼 단단한 상태가 유지돼야 하는데 기온이 높아지거나 비가 내리면서 눈이 물러질 경우 경기 시작 직전 소금을 뿌린다. 소금이 습기를 흡수하는 원리를 이용하는 것인데 소금을 뿌린 뒤 다시 중장비로 표면을 걷어내면 경기를 치르는 몇 시간 동안은 단단한 설질이 유지된다.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강원 평창군 진부면에 경기장 설질 유지 대책으로 마련해 놓은 소금.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 제공. 경사가 가파른 곳은 인력이 동원돼서 눈을 다지게 된다. 기상청에서 동계올림픽조직위에 파견나간 임장호 기상기후팀장은 “소금을 뿌리는 방법은 유효시간이 길지 않기 때문에 경기 직전에 사용하며 경기 중간에 다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기온이 올라가는 3월의 패럴림픽 기간에는 굵기가 각각 다른 소금이 곳곳에서 쓰일 가능성이 높다. 눈이 녹아내린 정도에 따라 소금 굵기도 다르게 적용한다. 또 조직위는 현재 1m가 넘는 눈을 저장눈으로 비축하고 있다. 일반적인 스키장의 슬로프는 30㎝ 정도만 쌓여도 영업이 가능하지만 국제대회는 이보다 더 많은 눈을 필요로 하며 특히 엄격한 동계올림픽 때는 설상경기장에 1.2m 이상 눈이 쌓여야 한다. 기온이 높아져서 눈이 녹아내리면 윗부분 눈을 걷어내면서 저장눈을 사용한다. 임 팀장은 “경기장 주변의 유휴지들에도 눈축제할 때 인공눈을 쌓는 것처럼 최대한 많은 눈을 쌓고 있다”며 “경기장의 눈 상태가 안 좋아지면 여분의 눈을 신속하게 가져다 사용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 5가지 이상기후 중 ‘이상고온이 최악’ 기상청이 평창 동계올림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상기후로 꼽는 상황은 이상고온과 많은 비, 폭설, 강풍, 짙은 안개, 혹한 등 5가지이다. 기상청의 분석에 따르면 평창 일대 산악지역 기온은 점점 올라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특히 최고기온은 계속해서 올라가는 추세이며 기온 변화폭이 매우 큰 것도 예측을 어렵게 하는 요소다. 올림픽 기간인 2월9일에서 25일 사이 평창의 평균 기온이 가장 높았던 해는 2009년으로 2월13일 10.5도까지 올라갔다. 기온이 이 정도로 오르면 눈이 녹는 속도가 빨라질 수 있기 때문에 눈을 단단하게 다져놔야 하는 경기장의 경우 비상상황이 될 수밖에 없다. 같은 기간 평창의 하루 중 기온이 가장 높게 치솟았던 해는 2004년이다. 이해 2월20일 낮 최고기온은 16.5도로 봄날씨를 방불케 했다. 단단한 눈이 필수적인 경기들이 사실상 어려워지는 온도다. 만약 이렇게 기온이 높아졌을 때 비까지 내린다면 애써 다져놓은 눈이 녹아내리는 것은 물론 소금이나 저장눈 같은 비상대책도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비가 내리기 전 미리 경기장 시설물들에 보호덮개를 씌우는 등의 대비가 필요한 이유다. 기온이 크게 올라가면 인공강설기도 사용이 어려워진다. 인공강설기는 영하 2도 안팎부터 눈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올림픽기상값 예를 들어 2009년 2월 평창에서 열린 바이애슬론 세계선수권대회의 경우 개막 하루 전인 13일 평균 기온이 10.5도까지 올라가고 18.5㎜ 비까지 내린 탓에 경기장이 물바다가 된 적 있다. 2013년에 열린 평창 동계스페셜올림픽 때는 대회 4일째였던 2월1일 18.5㎜ 비가 내린 탓에 스노보드, 크로스컨트리스키, 알파인스키 경기 등 설상경기가 무더기로 연기됐다. 패럴림픽 기간 평창의 평균 기온이 가장 높이 올라갔던 해 역시 2009년이다. 이해 3월18일 평균 기온은 13.8도까지 올라갔다. 최고기온이 가장 높았던 해는 5년 전인 2013년으로 3월9일 온도가 18.0도까지 올라갔다. 동계올림픽조직위가 걱정하는 부분도 패럴림픽 기간에 이런 포근한 날씨가 나타나는 것이다. 다음달 9일 개방형 건물인 평창 대관령면 올림픽플라자에서 열리는 개회식은 오히려 강추위가 변수다. 평창의 최저기온이 가장 낮아진 날은 1978년 2월15일로 평균 최저기온인 영하 9.8도보다 17.8도 낮은 영하 27.6도까지 떨어진 바 있다. 이는 한파경보 발령 기준보다도 훨씬 낮은 기온이다. 한파경보는 영하 15도 이하 날씨가 이틀 이상 지속될 것으로 예상될 때 발령된다. 강풍까지 불 경우 체감온도가 영하 30도 미만으로 내려갈 수도 있는데 이럴 때 장시간 야외활동을 할 경우 동상, 저체온증 등에 걸릴 우려가 있다. 실제 지난해 11월 같은 장소에서 열린 콘서트 때도 저체온증 환자가 발생했다. 개회식은 저녁 8시에 시작되기 때문에 영하의 기온이 확실시되며 이상저온 현상이 아니더라도 체감온도는 영하 10도 미만일 것으로 예상된다. 기상청에 따르면 풍속이 초속 1m 증가할 때 체감기온은 2도 정도 내려간다. 현재 올림픽조직위는 개·폐회식이 열리는 올림픽플라자에 대형 방풍막을 설치하고, 곳곳에 난방용 히터를 세웠다. 또 장시간 추위에 노출되는 관람객들에게는 개인 방한대책으로 판초 우의와 무릎 담요, 핫팩 방석, 손발 핫팩, 방한모자 등 6종의 방한용품을 나눠줄 예정이다. ■ 눈은 많아도 걱정, 적어도 걱정 눈은 너무 많이 와도 곤란하고, 너무 적게 와도 문제다. 동계올림픽 기간 평창의 평균 적설량은 41.3㎝로 동계올림픽을 치르기에 적절한 수준이지만 폭설이 내리면 얘기는 달라진다. 평창의 하루 적설량이 가장 많았던 해는 1989년으로 무려 87㎝ 눈이 내린 것으로 기록돼 있다. 폭설이 내리면 승객 수송에 차질을 빚고, 안전사고 발생 우려가 높아지면서 대회 운영 전반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개회식의 경우 폭설이 내리면 강릉으로 변경해 개최하는 플랜B도 마련돼 있다. 야외경기는 경기 당일에 눈이 오는 것 자체가 달갑지 않은 일이다. 이미 다져놓은 눈 위에 새로 눈이 내리면 경기 기록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직위 관계자는 “눈이 다져진 상태에서 새로 눈이 오면 코스 상태가 안 좋아지기 때문에 최상의 설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력을 동원해서 제설작업을 하는 것이 필수”라고 설명했다. 첫 주자와 마지막 주자 사이 설질의 차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눈이 녹는다거나 파이는 등의 현상을 최대한 막아야 한다. 이 관계자는 “경기 당일에 비가 오면 소금을 뿌려서 물을 빨아들이는 대책도 세워놓고 있다”며 “경기장 주변에 소금을 쌓아두는 창고를 마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반대로 눈이 내리지 않아 부족해지는 현상은 동계올림픽마다 조직위원회가 노심초사하는 부분이다. 2006년 열린 이탈리아 토리노대회는 경기 전달인 1월 강설량이 적었던 경우다. 인공강설기를 하루 20시간씩 가동시키는 등 조직위가 노심초사했지만 같은 달 하순 적지 않은 눈이 내리면서 눈 부족이 해소된 바 있다. 2010년 열린 캐나다 밴쿠버대회에서는 높은 기온이 문제가 됐다. 관측 사상 최고치인 13도까지 기온이 올라가면서 다른 지역의 눈을 헬기와 트럭으로 옮기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설질 문제로 알파인스키 경기는 며칠씩 연기되기도 했다. 2014년 열린 러시아 소치에서도 인공강설기가 장시간 가동됐고, 전년부터 단열재로 덮어 보관하고 있던 45만t가량의 눈을 사용하기도 했다.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경기는 강풍이 문제가 될 수 있다. 평창 지역에서는 1990년 초속 22.7m 풍속이 기록된 바 있다. 특히 산악지역에서는 지형효과가 더해지면서 국지적인 돌풍이 부는 경우가 많은데 대관령에서는 1991년 초속 34.2m 강풍도 불었다. 바람의 영향을 막기 위해 조직위는 설상경기장의 점프장들에 방풍막을 설치해뒀다. 짙은 안개가 끼는 것 역시 우려되는 부분이다. 산악지역에 국지적으로 발생하는 안개는 매우 오랫동안 지속되는 경우가 있다. 평년 기준으로 동계올림픽 기간 대관령에는 평균 3.8일 정도 안개가 발생하는 것으로 집계돼 있다. ■ 동계올림픽 치를 도시가 사라진다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은 이상고온이나 폭우 등의 이상기후만 아니면 대회를 무난히 마칠 가능성이 높지만 전 지구적인 기후변화는 앞으로 동계올림픽을 치를 수 있는 도시 자체를 줄여놓고 있다. 최근 학계는 기후변화로 인해 2050년쯤에는 역대 동계올림픽 개최지 가운데 9곳은 다시 치르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올림픽기상값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캐나다 온타리오 워털루대학 연구진은 2041~2070년 2월의 하루 평균 기온이 0도 이하일 확률을 분석해 이 같은 전망을 내놨다. 전체 개최지 및 개최 예정지 21곳 중 러시아 소치,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캐나다 밴쿠버 등 3곳은 0도 이하일 확률이 65% 미만, 노르웨이 오슬로, 프랑스 샤모니,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등 6곳은 85% 미만으로 나타났다. 특히 소치와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미국 스쿼밸리 등 3곳은 인공눈을 만들더라도 눈이 크게 부족해 동계올림픽 개최가 어려울 것으로 예상됐다. 나머지 12곳은 0도 이하 확률이 90% 이상이어서 재개최가 가능한 것으로 예상됐다. 평창은 2050년쯤에도 동계올림픽 개최가 가능한 곳으로 분류됐다. 2022년 동계올림픽을 개최하는 중국 베이징의 경우 거의 눈이 내리지 않아 인공눈을 대량으로 사용해야 할 것으로 보여 벌써부터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  
1977    [그것이 알고싶다] - 록색...? 갈색...? 댓글:  조회:5178  추천:0  2018-02-20
[디자인의 비밀] 왜 소주병은 녹색,      맥주병은 갈색일까 정현영  2018.01.15.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한국인의 술' 소주를 담는 병 색깔은 왜 녹색일까.  녹색병에는 '깨끗하고 독하지 않다'는 인상을 주기 위한 마케팅(홍보) 전략이 숨어 있다. 경제적으로는 제조가격을 낮춰 판매량을 늘리려는 의도를 품고 있었다.  소주와 같은 증류주는 10세기경 아라비아의 연금술사에 의해 전해진 증류 방법을 통해 탄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후기에 몽골로부터 유입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처음엔 증류식 소주였다가 19세기 이후 희석식 소주로 바뀌었다. 우리나라에 주정 공장이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는 일제강점기 때였다. 당시 증류식 소주를 담은 병 색깔은 전부 투명했었다. 하지만 판매량을 늘리기 위한 유통 전략에 따라 녹색 소주병으로 교체, 시판된다.  하이트진로는 "친환경 이미지를 살려 녹색 소주병으로 교체해 시판된 것으로 안다"면서 "녹색병 소주가 소비자들에게 투명병의 소주보다 깨끗하고 덜 독하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다. 술병을 처음 만들면 자연스럽게 녹색 빛깔을 내는데 투명한 병이나 다른 색의 병을 내놓으려면 여분의 돈(염료 등 첨가)이 든다.  이것이 소주 제조사들이 비싼 투명병 대신 녹색병을 사용하는 또 다른 이유다. 제조 가격이 올라가면 반대로 판매량은 줄어들어서다.  그렇다면 맥주병은 왜 갈색일까. 자외선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갈색병은 이른바 '품질유지기한'을 높여준다. 품질유지기한은 맥주를 맛있게 마실 수 있는 기간을 표시한다.  맥주는 일반적으로 햇빛이 들지 않고 서늘한 곳에 보관할 경우 표시된 기한 내에서 가장 맛있게 마실 수 있다.  맥주가 일정시간 동안 강한 빛(자외선)에 노출되면 주요 원료 중 하나인 호프의 성분에 변형이 발생, 좋지 않은 냄새와 불쾌감을 줄 수 있다.  이러한 맥주가 인체에 유해한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냄새가 나면 상품성이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맥주가 주로 자외선 차단률이 높은 갈색병을 사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색병을 사용하는 일부 제품도 있는데 이들 제품은 대부분 자외선에 안전하도록 특수 가공된 고가의 호프를 사용하고 있다.  ///정현영 한경닷컴 기자
1976    [그것이 알고싶다] - 약, 약, 약...또... 댓글:  조회:5823  추천:0  2018-02-20
"함께 먹지 마세요"...         약 복용시 피해야 하는 영양제 이보람 헬스조선 기자 2018.02.02.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항생제 복용 땐 유산균, 골다공증약은 철분제 금물 우울증이나, 골다공증 등을 앓고 있어서 약을 복용 중에 있다면 건강기능식품 복용 시 주의가 필요하다. 사진-헬스조선DB 우리나라 국민 10명 중 4명이 건강기능식품(영양제)을 섭취한다.(2013 국민건강영양조사) 영양제는 우리 몸에 부족한 영양 성분을 채워주고, 질병을 예방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런데 영양제를 챙겨 먹을 때는 스스로 챙기고 따져봐야 할 점들이 많다. 특히 앓고 있는 질환이 있어서 복용 중인 약이 있다면 더욱 영양제 섭취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약과 영양제가 충돌해 약효를 떨어뜨리거나 심할 경우 부작용까지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함께 먹으면 오히려 독이 되는 약과 영양제를 알아봤다. ◇항생제-> '유산균' NO 항생제는 우리 몸에 있는 나쁜 세균을 죽이는 약이다. 항생제를 복용 중에 있다면, 유산균 섭취를 잠시 중단하는 게 좋겠다. 유산균은 우리 몸에 들어가서 설사·변비 완화 등 건강에 좋은 효과를 준다. 그러나 유산균도 균이기 때문에 항생제와 함께 먹으면 안 된다. 항생제가 유산균을 죽이고, 유산균이 항생제의 약효를 감소시킨다. 단, 항생제 치료가 끝난 뒤 유산균을 먹거나 항생제가 완전히 흡수된 뒤(섭취 후 2시간)에 유산균을 먹는 건 상관 없다. ◇우울증약-> '맥주효모' NO 모노아민산화효소억제제 계통의 우울증약을 복용 중이라면, 맥주효모가 든 건강기능식품 섭취를 피하는 게 좋다. 맥주효모가 이 우울증약 성분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맥주효모에는 '티라민'이라는 성분이 풍부하다. 티라민은 몸속에서 모노아민산화 효소에 의해 분해되는데, 항우울제 모노아민산화효소억제제(MAOI)를 먹으면서 맥주효모 건강기능식품을 먹으면 티라민 수치 조절이 잘 안 돼, 몸속 티라민 농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진다. 티라민 농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지면 혈관이 수축돼 혈압이 높아지고 두통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도 모노아민산화효소억제제 계통의 약을 복용할 때는 맥주효모같이 티라민이 다량 함유된 식품을 피하라고 밝히고 있다. ◇부정맥약-> '세인트존스워트' NO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비정상적으로 되는 부정맥이 있어서 약을 복용 중이라면, 세인트존스워트가 든 건강기능식품 섭취를 하지 말아야 한다. 세인트존스워트는 갱년기 증상, 우울증 완화에 쓰이는 원료인데, 세인트존스워트와 부정맥약을 같이 먹으면 우리 몸에 있는 약물 대사 효소가 활발해지면서 약물이 빠르게 대사되고, 부정맥약의 약효가 떨어질 수 있다. 미국식품의약국(FDA)에서는 부정맥약을 복용 중에는 세인트존스워트 성분 섭취를 피하라고 권한다. ◇골다공증약-> '마그네슘·철분제' NO 뼈 밀도가 낮아지는 골다공증을 진단받아서, 관련 치료제를 복용 중이라면 마그네슘·철분보충제를 피해야 한다. 이들 성분이 골다공증약의 흡수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다만 복용이 필요하다면 1~2시간 간격을 두고 먹는 게 안전하다. ◇혈액응고방지약-> '오메가3지방산' NO 혈액응고방지제는 혈액을 묽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오메가3지방산 역시 혈액 속의 중성지방 수치를 낮춰, 혈액이 찐득거리지 않도록 만든다. 따라서 2가지를 함께 먹으면 혈액이 지나치게 묽어질 위험이 있다. 혈액이 지나치게 묽어지면 상처가 생겼을 때 피가 잘 멎지 않는다. 사고 등으로 응급 수술을 할 때 피가 제대로 멎지 않으면 수술이 어려워지며, 혈액이 한 곳에 고이면서 신경을 누르기도 한다. 비타민E와 은행나무잎추출물(징코빌로바) 역시 오메가3와 같은 작용을 하므로 피해야 한다.
1975    [그것이 알고싶다] - 약, 약, 약... 댓글:  조회:5158  추천:0  2018-02-20
복용시간 한참 지난 약, 먹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이보람 헬스조선 기자 2018.02.02.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소소한 약 복용 궁금증 풀이 물 없이 알약만 삼킬 경우 알약이 식도에 멈춰서 손상을 입힐 수 있다. 따라서 아무리 작은 알약이라도 꼭 물과 함께 섭취해야 한다. /사진=헬스조선DB 약 복용 시 고민되는 순간이 있다. 예를 들어 물 이외에 다른 음료와 약을 먹어도 되는지, 약 먹는 것을 깜박하고 있다가 생각났을 때 먹어도 될지 등이다. 약 복용과 관련된 대표적인 궁금증과 해답을 알아본다. ◇약 복용 시간을 놓쳤다면? 약 복용 시간을 깜박하고 있다가 생각이 났을 때 바로 챙겨 먹는 게 좋을까? 정답은 '아니다'이다. 다음 약을 먹을 시간이 약 복용 간격의 절반이 넘지 않았다면 먹지 말고, 절반이 넘었다면 즉시 챙겨 먹으면 된다. 예를 들어 하루 세 번 먹는 약은, 약을 먹는 주기가 8시간이다. 따라서 다음 약을 먹을 시간이 4시간 이상 남았다면 챙겨 먹고, 4시간 남지 않았다면 약효가 세지지 않도록 그냥 거르는 것이 낫다. 또는 잊었다 먹기 시작한 시간을 기준으로 새로운 약 복용 시간을 정해도 좋다. ◇작은 알약은 물 없이 삼켜도 될까? 아무리 작은 알약이라도, 물 없이 약만 삼켜서는 안 된다. 물 없이 약을 먹으면 알약이 식도에 멈춰 손상을 입힐 수 있다. 물 대신 우유나 주스, 커피나 녹차를 먹어도 안 된다. 물 이외의 음료에는 다양한 미네랄이 있어 함께 먹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약의 효능을 저해하거나 상응되는 작용으로 탈이 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칼슘이 많은 우유와 골다공증약, 우유와 제산제, 오렌지 주스와 항히스타민제, 녹차와 두통약 등이 해당된다. 약을 먹을 땐, 너무 뜨겁지 않은 온도의 물 1컵 정도를 약과 함께 쭉 들이키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약 복용 후에는 바로 눕지 말고 30분 이상 서 있거나 바로 앉아있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 ◇약에 포함된 위장약은 무조건 먹어야 할까? 감기로 약국을 찾으면 감기 증상에 도움이 되는 약과 위장약을 함께 처방해 준다. 반드시 복용할 필요는 없다. 처방된 위장약은 개인의 상태에 따라 선별적으로 선택해 먹으면 된다. 위장약은 위장장애를 일으킬 수 있는 약물을 복용할 때 제공한다. 항생제와 소염진통제가 대표적인 예다. 따라서 평소 위장장애가 적고 단기간으로 약을 먹을 때는 의사와의 상의 하에 위장약을 제할 수 있다.
1974    [그것이 알고싶다] - 거미야, 나와 놀쟈... 댓글:  조회:5488  추천:0  2018-02-20
꼬리 달린 '거미 조상' 발견...              "호박 속 1억 년 보존" 2018.02.06.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1억년전 거미류의 조상[미국 캔자스대 제공] (서울=연합뉴스) 이경욱 기자 = 다리가 8개 달려있고 송곳니와 채찍과 같은 꼬리를 달고 있는 거미 조상이 발견됐다. 이 거미는 1억 년 전 백악기 동남아시아 열대우림을 기어 다녔을 것이다. '키메라라크네 잉지'(Chimerarachne yingi)라는 이름이 붙은 이 거미는 호박 속에 갇혀 있는 상태로 발견됐다. 대자연이 마치 이 작은 공포의 거미 조상을 세상으로부터 떼어내려고 한 듯하다. 두 연구팀이 미얀마의 호박 판매시장에서 이 거미가 들어 있는 호박 4개를 발견해 냈다고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 등이 5일(현지시간) 전했다. 연구팀에 참여하지 않은 영국 런던 자연사박물관 무척추동물 고생물학자 그렉 에지콤브는 "거미 조상 호박의 보존 상태가 놀랄 정도로 완벽하다"며 "거미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무척 생소한 특징들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 조상 거미는 거미는 아니지만 수백 년간 생존했던 고대 거미들의 친척이라고 할 수 있다. 암놈이 수놈을 잡아먹는 미국산 독거미인 '블랙 위도'(black widow)와 독이 없는 큰 거미의 일종인 '헌츠맨 스파이더'(huntsman spider)와 비슷한 이 거미의 뒷부분에는 실을 뽑아내는 '방적(紡績)돌기'(spinneret)가 있다. 미국 캔자스대 홈페이지 이 거미 수컷은 머리 부분에 정액을 암컷에게 전달하는 주사기로 쓰였음 직한 2개의 촉수를 갖고 있기도 하다. 오늘날 거미와는 달리 이 거미는 전갈과 비슷하지만 긴 채찍 모양의 몸통에 독이 없는 '전갈부치류'(whip-scorpion)이나 '큰전갈'(vinegarroon)에서 볼 수 있는 긴 꼬리를 달고 있다. 이 거미는 길이가 불과 2.5㎜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체구가 무척 작다. 하지만 몸길이의 거의 2배에 이르는 꼬리를 달고 있는 게 특징이다. 꼬리는 전갈부치류에서 볼 수 있는, 산을 내뿜는 무기라기보다는 감각 기관과 흡사하다. 한 연구 참여자는 "꼬리가 안테나 역할을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이 거미가 멸종된 꼬리 달린 거미의 친척인 '우라라네이다'(Uraraneida) 그룹에 속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오늘날 거미들과는 달리 우라라네이다는 질척질척한 복부 대신 배 쪽에 몸을 보호하는 각질 '판'(plate)가 있다. 판 끝 부분에는 거미줄을 뽑아내는 기관이 있다. 연구팀은 우라라네이다가 이 거미의 가장 가까운 조상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이 거미 조상이 우라라네이다와 가까운 친척인지, 아니면 오늘날 거미와 더 가까운지 분류하는 것은 좀 더 연구를 해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런 내용은 5일 발행된 학술지 '자연 생태와 진화'(NEE)에 2건의 논문으로 다뤄졌다.
1973    [쉼터] - 도마배암아, 나와 놀쟈... 댓글:  조회:5092  추천:0  2018-02-20
"한반도서 세계최고 원시도마뱀 발자국 발견..두발로 달려" 2018.02.15.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한·중·미 공동연구진 국제 학술지에 연구결과 발표 이융남 교수 "1억1천만년전 두발로 뛰는 능력을 보여준 직접 증거" (서울=연합뉴스) 신선미 기자 = 건조한 지역에서 도마뱀들은 앞발을 들고 뒷발로만 달리곤 한다. 그런데 1억1천만년 전 한반도에서 살았던 원시도마뱀도 이런 '두발 달리기'를 했음을 보이는 도마뱀 발자국 화석이 발견됐다. 이 화석은 지금껏 발견된 세계 도마뱀 발자국 화석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 더욱 주목된다. 서울대와 한국지질자원연구원, 미국 페롯자연과학박물관, 중국지질과학원(CAGS) 등이 참여한 국제공동연구진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도마뱀 발자국 화석을 연구한 결과를 15일 온라인 국제학술지 '사이언티픽 리포츠'(Scientific Reports)에 발표했다. 논문의 교신 저자는 이융남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이며, 1저자는 이항재 지질자원연구원 지질박물관 연구원이다. 1억1천만년 전 한반도에서 살았던 원시도마뱀이 두 발로 달리는 모습을 나타낸 그림. [Chuang Zhao 제공] 이융남 교수와 이항재 연구원은 2004년 남해안 화석지를 조사할 때 경남 하동군 하동화력발전소 인근에서 이 도마뱀 발자국 화석을 발견했다. 발자국 화석은 1억2천700만년∼1억1천만년 전인 전기 백악기 하산동층에서 발견됐다. 하산동층은 우리나라에서 척추동물의 뼈 화석이 가장 많이 나오는 지층이다. 연구진이 찾은 화석은 세계 도마뱀 발자국 화석 중 연대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또 지금껏 보고된 바 없는 새로운 형태의 도마뱀 발자국이기도 하다. 다른 연구가 먼저 진행되며, 2016년에야 이 도마뱀 발자국 화석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됐다. 이번 연구에서 연구진은 화석에 도마뱀의 '앞발 발자국'이 거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도마뱀은 일반적으로 네 발로 걷기 때문에 화석엔 앞발과 뒷발의 발자국이 함께 남는다. 앞발 발자국 없이 뒷발 발자국만으로 보행렬을 만들었다는 것은 도마뱀이 두 발로 뛰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보폭이 큰 것과 발바닥보다 발가락 부분이 더 깊고 선명하게 찍혀 있는 특징 등도 이를 뒷받침한다. 화석엔 특히 발가락과 발바닥뼈가 만나는 관절 부분이 특히 더 깊이 찍혀 있는데, 이는 발가락으로 힘을 주며 지면을 박차고 나갔음을 시사한다. 화석에 남은 뒷발 발자국의 길이는 2cm를 조금 넘는다. 발자국의 크기를 바탕으로 연구진은 이 도마뱀의 꼬리를 제외한 몸통 길이가 6.8cm 정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도마뱀 발자국 화석. 오른쪽에 도마뱀 발자국을 볼 수 있다. [이융남, 이항재 제공] 이융남 교수는 "도마뱀은 종 수는 많지만, 몸집이 작고 화석화되기 어려운 환경에서 살기 때문에 뼈 및 흔적 화석은 매우 드물다"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마뱀 발자국을 발견했을 뿐 아니라, 도마뱀들이 최소 1억1천만년 전부터 두 발로 뛸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음을 직접적인 증거로 보여준 데 이번 연구의 의의가 있다"고 밝혔다.
1972    [그것이 알고싶다] - "신정"? 양력설, "구정"? 음력설, 춘절... 댓글:  조회:5275  추천:0  2018-02-20
[카드뉴스] 할아버지가 설날을 '구정'이라 부르는 이유 2018.02.15.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민족 최대 명절인 설이 다가옵니다. 벌써 고향 갈 생각에 마음이 바쁜 사람들이 많은데요. 음력 정월 초하루인 설은 '아직 익숙하지 않은 날', '새해에 대한 낯섦' 등을 뜻합니다. 설날의 기록은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요. 오랜 세월 추석과 함께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명절로 꼽혀 온 설날이, 한동안 우리 역사에서 ‘실종’되었다는 사실, 아시나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새해 달력에서 가장 먼저 확인하는 설 연휴. 그러나 설이 연휴는 커녕 휴일도 아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설날을 설날이라 부르지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양력을 쇠는 것이 '근대화'다” 바로 일본강점기의 일입니다. 1896년 일제는 태양력을 실시하면서 민족문화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음력설을 양력설로 대체하였고 '신정(新正)' 쇠기를 강요했습니다. 해방 후에도 '신정 우선'은 사라지지 않았고, 신정에 대비해 '구정(舊正)'이라는 이름이 생겼죠. 두 번 설을 쇠는 것은 산업화 시대에 낭비라는 이유로 음력설은 휴일로 복원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음력설을 지냈습니다. 매년 음력설에 지금과 마찬가지로 ‘민족 대이동’이 일어났으며 많은 가정에서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주고받으며 떡국을 해 먹었죠. 설날의 공휴일 지정 여부를 놓고 논란이 계속되던 중, 정부는 1985년이 되어서야 설날을 하루 휴일로 지정했습니다. 그러나 이때도 ‘설날’ 대신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이 대신 쓰였습니다. 설날이 ‘구정’과 ‘민속의 날’이 아니라 ‘설날’이라는 이름을 되찾은 것은, 일본강점기에 이름을 빼앗긴지 약 90년만인 1989년의 일입니다. 이후 1991년 설부터 3일 연휴제가 시행되었습니다. ‘구정’은 이처럼 아픔이 숨겨진 이름이지만 여전히 설날을 ‘구정’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중요한 건, 설날이 그 위상을 박탈당한 동안에도 사람들이 꿋꿋이 설 명절을 지켜냈다는 것이겠죠. 이번 설에도 성인의 42%가량이 ‘1박 이상 고향 방문 계획이 있다’고 합니다.* 가족, 친지와 함께하는 명절, 어렵게 되찾은 설날의 이름과 그 의미를 되새기며 뜻깊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 갤럽) ///(서울=연합뉴스) 전승엽 기자·김지원 작가·장미화 인턴기자
1971    [그것이 알고싶다] - 윤년?, 윤달?... 댓글:  조회:5217  추천:0  2018-02-20
"윤년? 윤달? 그게 뭐야?"...          알수록 오묘한 음력의 매력 이민우·유지만 기자 2018.02.15.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설 특집] 음력의 모든 것 직장인 조현씨(35)는 어린 시절 생일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1984년 2월29일에 태어난 조씨는 자신의 생일만 달력에 없는 모습을 보면서 서운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중에 4년에 한 번씩 하루가 추가되는 해를 ‘윤년(閏年)’이라 하고, 추가되는 하루를 ‘윤일(閏日)’이라고 한다. 조씨는 윤일에 자신이 태어나서 그렇다는 것을 고등학교에 들어간 뒤에 알았다. 흔히 1년은 365일이라고 배운다. 이는 실제와는 조금 다르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 바퀴 도는 공전 주기를 태양년이라고 하는데, 태양년은 정확히 365.2422일이다. 아주 사소해 보이는 차이지만, 오랜 기간 이 격차가 누적되면 큰 변화가 일어난다. 예를 들어 한반도에선 7월에도 한겨울이 찾아오고, 1월에 무더위가 시작되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때문에 실제 공전 주기와 태양년의 격차(0.2422일)를 4년마다 보정해 달력을 고쳐주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해도 발생하는 차이는 2000년과 같이 100으로 나눠 딱 떨어지는 해를 평년으로 하는 방식으로 추가 보정한다. 비슷한 개념으로 ‘윤달’도 있다. 윤달은 태양 시간의 오차를 줄여주는 윤년과 달리 음력과 양력의 차이를 채우기 위해 생긴 개념이다. 현재 한국에서 사용하는 달력(태양력)은 365일로 구성돼 있다. 하지만 음력(태음력)에서 한 달은 29일과 30일을 번갈아 가며 사용한다. 음력에서 1년 열두 달로 환산하면 354일에 불과하다. 대략 11~12일의 차이가 발생하는 셈이다. 이 변화를 일치시키지 않으면 계절의 추이를 담기 어려워진다. 3년에 한 달 혹은 8년에 세 달의 윤달을 음력에 넣는다.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윤달을 ‘공달’이라고 불렀다. 예년에 비해 한 달이 더 많기 때문에 조상이 알지 못하고 찾아오지 않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반대로 신이 없는 달로 알려져 묘를 이장하거나 수의를 장만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 때문인지 윤달에는 결혼이나 이사를 하면 안 된다는 속설도 생겼다.​  ==========================덤으로 더...   올해 무술년,지난 정유년보다 30일 적어 왜? (ZOGLO) 2018년2월19일 16일, 음력설 아침 일출이 무술년 개띠해의 시작을 알렸다. 올해 개띠해는 총 354일인데 2006년 개띠해보다 31일 적고 2017년 닭띠해보다 30일 적다고 천문학자가 밝혔다. 올해 무술년 개띠해는 2018년 2월 16일부터 시작해 오는 2019년 2월 4일까지인데 총 354일이다. 그렇다면 같은 음력 개띠해인데도 불구하고 왜서 31일간의 차이가 날까? 천문학자들은 이것은 “윤달”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양력은 태양이 춘분점에서 출발하여 황도를 따라 서에서 동으로 일주하여 다시 춘분점으로 회귀하기까지 1년의 시간이 걸리는데 이를 “회귀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음력은 삭망월의 변화주기에 의거하는데 평균 29.5306일이다. 때문에 음력 큰 달은 30일이고 작은 달은 29일이며 1년의 총 날수는 353일에서 355일이다. 따라서 양력과 음력을 비교해 보면 11일 정도 차이가 난다. 음력과 양력이 너무 어긋나는것을 막기 위해 19년 7윤법을 사용해 간간히 넣은 달은 윤달이라고 한다. 중국천문학회 회원이며 천진시천문학회 리사인 사지성의 말에 따르면 지난번 2006년 개띠해는 2006년 1월 29일부터 2007년 2월 17까지 인데 “윤7월”이 있어 총 385일이 됐고 지난해 2017년 닭띠해는 2017년 1월 28일부터 2018년 2월 15일까지인데 “윤6월”이 있어 총 384일로 됐다. ///신화사/길림신문      
1970    [그것이 알고싶다] - 신화, 전설속에서 등장하는 동물들?... 댓글:  조회:4588  추천:0  2018-02-19
  안녕하세요! 에이비펫입니다 :)   신화에 등장하는 전설의 동물들 하면 어떤 동물이 생각나시나요?   용? 주작?   이 동물들 이 외에도 많은  전설 속 동물들이 있습니다. 누가 있을까요?   바로 확인하시죠!   용 고대 중국이 상상한 영수(靈獸)인 용은 머리에 뿔, 몸통은 뱀과 같은 비늘이 있고 발톱이 날카로운 동물입니다. 용은 춘분(春分)에는 하늘로 올라가고 추분(秋分)에는 연못에 잠긴다고 여겨집니다. 출처 : 이미지출처[Forgotten Realms Wiki] 유니콘 유럽의 대표적인 전설적인 동물인 유니콘은 말과 같은 체구에 이마에는 한 개의 뿔이 있습니다. 또한 중세의 전설에 따르면 유니콘은 무적의 힘을 과시하지만, 오직 처녀의 매력 앞에서는 맥을 못 추고 처녀의 무릎을 베개 삼아 잠들어버리는 버릇이 있어서 유니콘을 사로잡을 때는 처녀를 미끼로 삼았고 합니다. 출처 : 이미지출처[Dreamicus] 기린 기린은 사슴의 몸에 소의 꼬리와 발굽을 가졌으며, 이마에는 한 개의 뿔이 달려있고 등에는 5가지 색이 섞여 있으며 몸길이는 5m 정도로 거대했다고 합니다. 기린은 실제 기린을 모티브로 한 게 아니라 실제 기린이 꼭 신수 기린처럼 생겼다고 해서 기린이라고 붙어졌다고 합니다. 출처 : 이미지출처[Pinterest] 맥 몸은 곰, 코는 코끼리, 꼬리는 소, 다리는 호랑이를 닮았다고 합니다. 맥은 질병이나 불행을 피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하고 악몽을 먹고 산다는 이야기로 유명해진 전설의 동물입니다. 출처 : 이미지출처[EmuNova] 주작 주작은 남방(南方)을 지킨다고 믿는 상징적인 동물로 닭의 머리, 제비의 턱, 뱀의 목, 학의 다리, 물고기의 꼬리, 원앙의 깃털, 거북의 등, 매의 발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작은 흔히 주조라고도 불리며, 중국 설화 등에서는 청룡, 백호, 현무 등과 함께 하늘의 4 신을 이룬다고 합니다. 출처 : 이미지출처[Pinterest] 해태 해태는 사자와 유사한 생김새를 가졌지만 머리에 뿔, 목에는 방울이 달려있고 몸 전체에는 비늘이 있고 겨드랑이에는 날개 같은 깃털이 있습니다. 해태는 선과 악을 판단하고 싸우는 사람을 보면 그 둘 중 악한자를 뿔로 들이받았다고 합니다. 출처 : 이미지출처[Pinterest] 그리핀 그리핀의 모습은 일반적으로 매의 머리와 날개를 가지고 있고 몸통은 사자인데 앞발은 매처럼 생겼습니다. 그리핀은 사막이나 산간 동굴에 살면서 금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금광이 있는 장소에 자주 나타났다고 합니다. 또한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가 기르고 있던 생물이라는 말도 있기 때문에, 술을 지키는 괴물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출처 : 이미지출처[pixabay] 히포그리프 히포그리프는 그리핀과 일반 말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괴물입니다. 시인 루드비코 알리 오스트의 ‘광란의 올랜드’ 서사시 속에서 처음으로 등장했으며, 그에 따르면 히포그리프는 북쪽의 얼음 산에 사는데, 전체적인 모습은 말을 닮았고 부리와 날개, 그리고 매서운 발톱이 달린 앞발이 그리핀과 그 모습을 같이 한다고 전해진다. 출처 : 이미지출처[Chronicles of Narnia Fanon Wiki]   영화나 소설속에서 한번쯤은 들어본 동물들이죠?   그래서인지 전설 속 동물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친숙하지 않으신가요? :)
1969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독수리 서식,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5277  추천:0  2018-02-19
[단독] 파주 민통선 장단반도 세계 최대 독수리 월동지 비상 전익진 입력 2018.02.17.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농민 60명 독수리 월동지 이전 촉구 독수리 먹이인 동물 사체로 환경훼손 잦은 정전으로 농사용 전기 사용 차질 "조류인플루엔자(AI)·구제역 우려" 조류보호협회, 월동지는 겨울철 사용 독수리 AI·구제역 감염된 사례 없어 민가와 격리된 민통선 월동지가 최적  전문가 "이전하면 독수리 생존 위협"   세계 최대 규모 독수리 월동지인 경기도 파주시 민통선 장단반도 내 독수리 월동지. [중앙포토]   경기도 파주시 민간인출입통제선(민통선) 내 장단반도에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독수리 월동지에 비상이 걸렸다. 월동지에서 농사를 짓는 농민 60명이 월동지 이전을 촉구하고 나선 때문이다. 군사분계선과 3㎞ 떨어진 장단반도에는 매년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독수리 700∼1000마리가 몽골에서 날아와 겨울을 난다. 장단반도는 6·25전쟁의 포성이 멎은 뒤 농사짓는 사람 등을 제외하고는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된 군 작전지역이어서 생태계가 잘 보존돼 있다.   세계 최대 규모 독수리 월동지인 경기도 파주시 민통선 장단반도 내 독수리 월동지. [사진 한국조류보호협회]   이곳에서는 조류보호협회 등에서 2000년부터 정기적으로 독수리 먹이를 주고 있다. 구릉지와 논밭이 넓게 형성돼 있고 오리 등 조류 사체가 많은 임진강 하구와도 가까워 국내 대표적 독수리 월동지가 됐다. 문화재청은 2020년 11월까지 예정으로 2014년 11월부터 장단면 거곡리 63번지, 63-1번지 1만2113㎡를 독수리 월동지로 공식 사용하고 있다. 14일 문화재청과 경기도 파주시·농민 등에 따르면 장단반도에서 농사를 짓는 영농인들은 최근 파주시 측에 독수리 월동지 이전을 요구했다. 파주시는 농민들 의견을 문화재청에 전달했다.   위치도/독수리 월동지(민통선 내 장단반도)   농민들은 “독수리가 먹이로 가져다 놓은 돼지고기 등 동물 사체를 물고 농경지로 날아와 환경을 훼손하고, 농경지에 남은 동물 뼈로 인해 다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또 독수리가 전선을 훼손하는 바람에 농업용 전기의 정전 피해도 잇따라 농사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했다. 농민들은 문화재청이 독수리 월동지 일대를 ‘독수리 보호구역’으로 추진 중인 것과 관련해서도 “지금도 피해가 상당한데 보호구역이 되면 아무런 개발을 할 수 없게 돼 재산권 행사 피해까지 우려된다”며 반대하고 있다. 또 “독수리 월동지로 인해 조류인플루엔자(AI)·구제역 등의 가축 전염병 발생과 확산도 우려된다”고 했다.   세계 최대 규모 독수리 월동지인 경기도 파주시 민통선 장단반도 내 독수리 월동지. [사진 한국조류보호협회]   파주시 민통선 마을인 통일촌의 이완배 이장은 “20년 전에는 민통선 바깥 파주시 적성면 임진강변 일대에서 먹이 주기가 이뤄지고 이곳에서 독수리가 월동했다”며 “당시처럼 월동지가 민통선 바깥 등지의 적합한 지역으로 이전되길 원한다”고 말했다. 한국조류보호협회는 “그렇지 않다”며 반박한다. 김성만 회장은 “세계적으로 멸종 위기에 처한 천연기념물인 독수리를 민가가 없는 민통선 내에서 안전하게 보호하는 게 최선의 방책”이라며 “게다가 독수리가 민통선 내에 머물면 민통선 바깥 지역 축산농가에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남궁대식 사무총장은 “독수리 월동지는 농사가 끝나는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만 운영되기에 영농에 피해가 없다”며 “그동안 독수리가 AI·구제역 등에 감염된 사례는 전무했다”고 주장했다.   독수리 이동경로. [사진 문화재청]   문화재청은 2007년 말 장단면 거곡리 63번지 일대 논과 갈대밭 5만1600㎡를 독수리 보호를 위한 문화재 지정 구역으로 예고했다. 하지만 재산권 침해 등을 이유로 지역 주민의 반발이 심해 추진 계획이 잠정 중단된 상태다. 문화재 지정 구역으로는 현재 낙동강 하류 철새도래지, 한강 하류 재두루미 도래지, 철원 천통리 철새 도래지 등 전국 30여 곳이 지정돼 있다. 문화재 지정 구역이 되면 지정 구역을 포함해 반경 500m 이내에서는 건물 신·증축 등 각종 개발 행위가 제한된다.   세계 최대 규모 독수리 월동지인 경기도 파주시 민통선 장단반도 내 독수리 월동지. [사진 한국조류보호협회]   문화재청과 파주시 측은 월동지 이전 요구에 대한 해결방안을 찾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월동지 이전에 대한 민원이 접수된 만큼 현재 다각도로 검토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파주시 관계자는 “일단 민통선 내 외곽으로 이전 대상지를 물색하는 한편 독수리 먹이로 인한 농경지 훼손 방지대책을 서두를 방침”이라고 말했다. 백운기 한국조류학회장은 “세계 최대의 독수리 월동지가 갑자기 이전되면 월동지 환경 변화로 인해 장단반도 독수리는 생존에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될 것이므로 월동지 유지가 필요한 상황”이라며 “다만 농민들이 우려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보완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파주=전익진 기자  ☞독수리=한국과 몽골을 오가며 서식한다. 동물의 사체를 먹어 ‘야생의 청소부’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수릿과 조류 중 덩치가 큰 맹금류를 흔히 ‘독수리’로 통칭하지만, 엄밀하게는 서로 다른 종(種)이다. 가령 ‘미국 독수리’는 흰머리수리를 말한다. 수릿과 조류 중 독수리·검독수리·참수리·흰꼬리수리 등 4종류가 천연기념물(제243호)로 지정돼 있다.   (포항=뉴스1) 최창호 기자 = 멸종위기 1급이자 천연기념물 제243-4호인 흰꼬리수리가 19일 올해 첫 경북 포항시 남구 연일읍 유강리 형산강에서 날개짓 하고 있다. 매년 12월이면 형산강에서 월동을 한 후 3월 초 고향인 러시아 등으로 돌아갔지만 부산지방국토관리청이 2017년 11월부터 시행 중인 형산강 개발사업으로 평년에 비해 약 3개월 가량 늦게 찾아왔다. 2018.2.19/뉴스1
1968    [쉼터] - 오너라 봄아... 봄아 오너라... 댓글:  조회:4974  추천:0  2018-02-19
봄으로... 봄으로... 2018.02.19.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낮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가자 자연이 겨울옷을 벗고 봄옷으로 갈아입으려나 봅니다. 땅에서도 물에서도 봄빛이 느껴집니다. ///사진가 무지개/박노희
1967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자연서식환경,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5028  추천:0  2018-02-19
멸종위기종 2급 '노랑목도리담비' 무등산 곳곳서 발견 류형근 2018.02.18.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광주=뉴시스】류형근 기자 = 멸종위기생물 2급 노랑목도리담비가 무등산 일대에서 잇따라 목격되고 있다. 【광주=뉴시스】류형근 기자 = 무등산에서 발견되고 있는 멸종위기생물 2급 노랑목도리담비. 무등산국립공원사무소는 노랑목도리담비 보호를 위해 개체수 확인에 나섰다고 18일 밝혔다. 2018.02.18. (사진=무등산국립공원사무소 CCTV 캡처) photo@newsis.com 18일 무등산국립공원사무소에 따르면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생물 2급 '노랑목도리담비'가 무등산에 서식하고 있는 모습이 포착돼 보호를 위해 개체수 확인 등의 작업을 하고 있다. 노랑목도리담비는 아시아 대륙에 분포하는 종류이며 한반도에는 노랑목도리담비와 대륙목도리담비라고 부르는 2종이 서식하고 있다. 크기는 몸길이 33~65㎝, 꼬리 길이 25~48㎝, 몸무게 0.8~3㎏으로 2~3마리가 무리 지어 다니는 습성이 있다. 목 아랫부분에 선명한 노란색 털로 덮여 있고 머리와 다리, 꼬리와 엉덩이 부분은 진한 검은색으로 길고 윤기가 흐르는 것이 특징이다. 먹이는 쥐나 작은 새, 노루를 잡아 먹는 등 최상위 포식자 중 하나로 불리고 있다. 1960년대 한반도 곳곳에 서식했지만 쥐덫 등 환경의 변화로 개체밀도가 급격히 줄어 현재는 산악지형 고지대에서 주로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광주=뉴시스】류형근 기자 = 무등산에서 발견되고 있는 멸종위기생물 2급 노랑목도리담비. 무등산국립공원사무소는 노랑목도리담비 보호를 위해 개체수 확인에 나섰다고 18일 밝혔다. 2018.02.18. (사진=무등산국립공원사무소 CCTV 캡처) photo@newsis.com 무등산국립공원사무소 관계자는 "노랑목도리담비를 목격했다는 제보가 잇따라 발견 지역에 특수 카메라를 설치해 개체수 확인 작업을 하고있다"며 "무등산의 서식 환경이 좋은 것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한편 노랑목도리담비는 지난해 6월 전남 순천만과 주암면 지역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1966    [타산지석] - 우리 연변에도 "옥수수대들불축제"가 있었으면... 댓글:  조회:4948  추천:0  2018-02-19
'들불의 소원, 하늘로'... 제주들불축제 내달 1∼4일 '활활'  2018.02.18.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21돌 맞아 대한민국 대표축제 자리매김..평창 패럴림픽 성화도 채화 (제주=연합뉴스) 변지철 기자 = 광활한 오름을 태우며 소원을 기원하는 압도적 스케일의 '불의 향연' 2018 제주들불축제가 내달 1일 개막한다. 2017 제주들불축제 오름불놓기 [연합뉴스 자료사진] 올해 21회째를 맞는 제주들불축제는 '들불의 소원, 하늘에 오르다'란 주제로 3월 1일부터 4일까지 나흘간 애월읍 새별오름 등 제주시 일원에서 열린다. 축제에서는 내·외국인 모두가 만족하고 즐기는 축제가 되도록 더 새롭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첫날(1일)인 '소원의 불씨 마중하는 날'에는 축제의 서막을 여는 전야제 행사가 펼쳐진다. 탐라 개국 신화의 무대인 제주시 삼성혈에서 채화한 불씨를 횃불에 옮겨 민속자연사박물관과 문예회관, 제주시청 광장으로 전달하는 '들불 불씨 채화 제례 및 봉송 퍼레이드'가 진행된다. 무사안녕 기원 횃불대행진 [연합뉴스 자료사진] 광장에 도착한 불씨는 불을 관장하는 '영감신'(令監神)을 소재로 한 영감놀이 마당극과 기념공연이 펼쳐지는 가운데 성화대에 안치된다. '들불의 소원 꿈꾸는 날'인 둘째날(2일)에는 불씨를 들불축제 행사장인 새별오름까지 전달하는 '불씨 봉송행사'를 진행한다. 봉송행사는 제주시청, 성산일출봉, 서귀포매일시장, 금능해수욕장 등을 경유해 새별오름까지 이어지며 풍물놀이 길트기팀의 공연과 함께 다양한 불씨 봉송 퍼포먼스와 퍼레이드가 펼쳐져 축제의 분위기를 한껏 달군다. 동시에 성화가 봉송되는 동안 새별오름 현장에서는 들불축제의 역사와 뿌리를 알리는 유래비 건립 제막식과 말의 고장 제주의 특성을 살린 '마조제'가 진행된다. 마조제는 고려 시대부터 말의 질병을 예방할 목적으로 말의 조상인 천사성(天駟星)에 지냈던 의례다. "제주 듬돌 들기 쉽지 않구만!"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외에도 이날 저녁에는 들불축제 개막식과 축하행사, 제주를 한 바퀴 돌아 축제장에 도착한 들불 불씨를 전 세계 장애인 동계스포츠 선수들의 열정의 장이 펼쳐질 2018 평창패럴림픽대회(장애인올림픽)로 보내는 '평창 패럴림픽 성화 채화' 행사도 열린다. 패럴림픽 성화는 국내 5곳과 외국 3곳 등 총 8곳에서 동시에 채화해 당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서 합화행사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축제의 백미는 셋째날(3일)인 '들불의 소원 하늘에 오르는 날'이다. 몽골 출신 공연단이 달리는 말 위에서 곡예와 무예, 마술을 선보이는 마상마예 공연, 듬돌들기·집줄놓기·넉둥베기 등 각종 체험행사, 세계문화 교류 특별공연이 펼쳐진다. 해가 지면 화산섬 제주의 탄생과 탐라국 탄생설화, 제주의 사계절, 4·3을 비롯한 제주 사람들의 고난·시련 등을 소재로 한 스토리텔링 주제공연 '화희대동'이 축제장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말 타고 아찔한 묘기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어 오름 전체를 대형스크린 삼아 조명을 비추는 '미디어 파사드 쇼'와 대형달집 점화, 오름 불놓기, 불꽃놀이로 이어지는 주행사를 통해 올 한해의 무사안녕과 만사형통을 기원한다. 마지막 날(4일)은 '들불의 행복 함께하는 날'로 새봄 맞이 묘목 나눠주기, 제주 청정농수축산물 그랜드세일, 읍면동 음악잔치 등으로 들불의 희망과 행복을 나누고 함께한다. 제주시는 올해 들불축제를 제주는 물론 대한민국 대표축제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각종 편의시설을 마련했다. 어린이와 장애인·어르신·외국인 등 모두가 축제를 즐기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쉼터·미아보호소·현장진료소·모유수유실을 만들고, 장애인 화장실과 외국어가 함께 표기된 안내판을 확대 설치했다. 도심지와 행사장 간 셔틀버스 운행 대수를 전년보다 30대 늘린 130대를 운영한다. 행사장과 도심지로 연결하는 주요 도로에 교통 혼잡이 빚어지지 않도록 지선을 이용한 셔틀버스를 운영하고, 달라진 대중교통 노선과 연계했다. 제주 들불축제 화산분출 쇼 [연합뉴스 자료사진] 문경복 제주시 문화관광체육국장은 "방문객 모두가 만족하고 즐기는 축제가 될 수 있도록 들불축제의 변화에 대해 고민하고 정성과 노력을 쏟았다"며 많은 참여를 당부했다. 제주들불축제는 소와 말 등 가축 방목을 위해 해묵은 풀을 없애고 해충을 구제하기 위해 마을별로 불을 놓았던 제주의 옛 목축문화인 '방애'를 현대적 감각에 맞게 재현한 문화관광 축제다. 2015∼2018년 4년 연속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지정하는 대한민국 우수축제로 선정된 것을 비롯해 2016∼2018년 3년 연속 대한민국축제콘텐츠 대상, 2016·2017 제주도 최우수축제, 2015 대한민국 올해의 히트상품 대상 등의 영예를 안았다.
1965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참대곰 때문에 웃고 우는 사람들 댓글:  조회:4830  추천:0  2018-02-19
'판다 노믹스'가 돌아왔다... 판다 '썅썅(香香)'에 웃고 우는 사람들... 2018.02.16.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서울신문] 일본 도쿄 우에노 동물원의 아기 자이언트 판다 ‘샨샨’(올 1월 9일 촬영). 우에노 동물원 홈페이지 지난해 6월 출생과 동시에 일본 최고의 동물스타로 떠올랐던 도쿄 우에노(上野) 동물원의 아기 판다 ‘썅썅’(香香)이 높은 인기 차원을 넘어서 동물원에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안겨주고 있다. 썅썅이를 보기 위해 나온 가족들의 장사진은 물론이고, 썅썅을 본떠 만든 봉제완구는 없어서 못 팔 정도다. 썅썅이 몰고온 경제적 효과가 워낙 크다 보니 일본에서는 ‘판다’와 ‘이코노믹스’(경제)를 합성한 ‘판다노믹스’라는 말이 다시 세간에 회자되고 있다. 일본 마이니치 신문의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13일자 ‘판다노믹스가 왔다!’ 기획기사를 통해 일본에서 5년 만에 태어난 새끼 자이언트 판다 썅썅이 가져온 경제적 효과에 대해 상세히 소개했다. 현재 우에노 공원 측은 썅썅을 보기 위해 밀려드는 입장객들로 즐거운 비명을 올리고 있다. 특히 이달 1일부터는 썅썅의 관람이 선착순으로 바뀌면서 더 큰 매출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1월 말까지는 추첨에서 뽑힌 하루 1500여명 정도의 사람들만 썅썅을 관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달부터 선착순제가 적용되면서 하루 평균 9500명 정도의 관람이 가능해졌다. 동물원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수익성 증대 요인이다. 우에노 동물원 입장객 수는 그동안에도 판다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다. 2008년 4월 판다 ‘린린’이 죽으면서 36년 만에 판다가 사라지자 일본에서 가장 큰 우에노 동물원의 입장객 수는 60년 만에 처음으로 300만명 밑으로 떨어졌다. 그러면서 홋카이도의 아사히야마(旭山) 동물원에 자국내 1위 자리를 넘겨줄 상황에까지 내몰렸다. 그러나 지난해에는 썅썅의 출생 전후 효과로 4월부터 12월까지 전년동기보다 10.4% 늘어난 318만 336명이 입장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에 따라 지난해 전체로 전년 입장객 수(384만 3200명)를 크게 넘어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도쿄 도립(都立)인 우에노 동물원은 실제 운영을 공익재단 ‘도쿄동물원협회’가 맡고 있다. 이 협회는 우에노 동물원 외에도 다마(多摩) 동물공원, 가사이(葛西) 임해수족원, 이노카시라(井頭) 자연문화원 등 4개의 도립 공원을 운영한다. 개별 공원의 내역은 밝히지 않는데, 2016년의 경우 4곳 합계 82억 9750만엔(약 830억원)의 경상수익과 82억 9999만엔의 경상비용을 기록했다. 250만엔 정도의 적자가 난 것이다. 도쿄동물원협회는 아직 확정되지 않은 지난해 실적이 예상보다 크게 높아졌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애초 지난해 우에노 동물원의 기념품 매점과 식당 등 수입은 총 15억 6400만엔으로 추산됐다. 그러나 이는 썅썅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어서 실제 수치는 대폭 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에노 동물원 측이 공개한 올 1월 2일부터 18일까지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70%나 늘었다. 썅썅을 응용한 기념품과 식음료들이 줄줄이 출시되면서 높은 인기를 얻은 게 결정적이었다. 이를테면 썅썅의 생후 10일째 모습을 재현한 봉제완구 ‘정말로 큰 아기 판다 284g’ 인형은 2376엔이나 하는데도 매진되는 날이 적지 않다. 심지어 일부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이 인형이 정가의 2배에 거래되기도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동물원 측은 썅썅의 사육공간 정비에도 갖은 정성을 쏟고 있다. 도쿄올림픽이 열리는 2020년 3월까지 완공을 목표로 새로운 판다 사육공간을 새로 짓고 있다. 22억엔을 들인 재건축이 완료되면 사육사는 총 2000㎡로 현재의 2배에 이르게 된다. 썅썅은 지난해 9월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가 직접 기자회견을 열어 명명식을 갖는 등 숱한 화제를 뿌려왔다. 실제로 썅썅이라는 이름은 지난해 7~8월 일본 열도 각지에서 인터넷과 우편, 우에노 동물원 내에 설치한 응모함 등을 통해 접수된 32만 2581건 중에서 뽑힌 것이다. 지난해 11월 일본의 20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올해 가장 마음에 남는 소리’ 설문조사에서는 썅썅의 울음소리가 4위에 오르기도 했다. ///김태균 기자 
1964    [쉼터] - 어디 한번 "고래사냥" 떠나볼가... 댓글:  조회:5334  추천:0  2018-02-18
[여행의 향기] '인도양의 진주' 스리랑카, 푸른 바다서 대나무 낚시 즐겨볼까... 입력 2018.02.18.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아니면 통나무 배 타고 밀림 속으로 떠나볼까 '대륙의 눈물' 스리랑카 호텔 테라스에 앉으면 장엄한 바다 풍경 펼쳐져 남쪽으로 한없이 이어진 해변서 느긋한 시간 즐기기 좋아 식민지 시절 세워진 성곽  도시 전체 둘러싼 풍경 장관 리조트 지역 '히카두아' 모든 해양스포츠 체험 가능 저렴한 게스트하우스 많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어 '도다앙 두어' 어촌에선 큰 다랑어 한 마리가 1000원 14세기 스리랑카의 명물 바닷가재 인도양의 짙푸른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섬나라 스리랑카. 그 생김새가 이제 막 떨어지려는 물방울처럼 생겼다고 해서 인도 대륙에서 떨어지는 ‘대륙의 눈물’이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또 곳곳의 밀림 속에는 지난날의 영화를 짐작하게 하는 고대 불교왕국의 문화유산이 찾는 이들을 압도한다. 때 묻지 않은 대자연과 사람들의 해맑은 웃음, 짙은 녹색의 야자수들 밑에 새하얗게 빛나고 있는 백사장과 푸른 파도까지 곳곳에서 손짓한다. 열대의 낭만을 느끼게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이 때문에 스리랑카를 일컬어 또 다른 애칭 ‘인도양의 진주’라고 부르던가. 가는 곳마다 매력이 넘쳐서 어느 한 곳 빼놓을 수 없지만, 한정된 시간이라면 인도양의 푸른 파도와 한 몸이 돼 숨은 전설을 찾아보는 것도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다. 아한가마 해변에서 스틸트 피싱을 체험하는 관광객 황금 해안으로 불리던 풍요로운 곳 스리랑카 남서해안에는 4~10월에 걸쳐 서쪽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이때가 되면 망망한 인도양에서 밀려드는 파도가 끝없이 해안가에서 부서진다. 옛날 유럽 여러 나라들이 앞다퉈 바다를 건너던 시절, 이 바람은 그들을 이 동쪽의 낙원으로 실어다 줬다. 시나몬 향기와 영원한 빛을 발하는 갖가지 보석, 야자수의 짙은 녹색으로 치장한 새하얀 모래사장. 이 섬은 유럽인들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풍요로운 세계였다. 섬은 전설이 됐고 사람들은 이 섬을 동경했다. 그리고 그 동경은 욕망으로 변해 탐욕이 바람에 실려 이 섬으로 밀려들었다. 이때부터 이 남서해안은 탐욕자들에게 ‘황금해안’이라고 불렸다. ‘풍요로운 부(富)를 가져다 준다’는 의미에서다. 항구가 생기고 성이 세워지면서 해안은 다른 나라를 향한 창구로서 크게 변모하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이곳 원주민에겐 계속 지켜온 생활이 있다. 지금도 이곳 황금해안의 여러 마을에는 식민지 시대 분위기가 강하게 남아 있지만 실제 모습은 모두 다 순박한 어항이다. 무엇보다도 이곳에는 멋진 사람들의 웃는 얼굴이 있다. 이제 바람은 새로운 전설을 싣고 조용히 불어오면서 함께 놀아줄 친구를 찾고 있다. 페라헤라 축제의 거리 식민지 시절 성곽 일품 남서해안의 매력은 수도인 ‘콜롬보’의 포트 지역에서부터 시작한다. 번잡한 시가지를 등지고 식민지 시절의 유산인 몇 문의 대포 옆에 앉아서 한눈에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한 일망무제(一望無際)의 바다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상쾌해진다. “아, 이곳이 인도양이구나!”, “바다의 실크로드가 저 거침없는 파도를 타고 이곳으로 이어졌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절로 난다. 어쩌다 말이라도 걸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곳에 앉아 있게 된다. 콜롬보 켈러니얼 사원 내부의 참배객들 그러다 오후가 되면 근교 남쪽 해변에 있는 호텔 ‘라비니아’로 간다. 한 소설가는 이렇게 썼다. “오후에는 물론 마운트 라비니아로 가야 한다. 거기에서 우리들은 오찬을 즐기고 석양을 바라보며 이 호텔에 얽힌 전설의 여인을 생각하고…그리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테라스에서는 장엄한 바다의 풍경이 내다보이는 예전에 총독의 별장으로 세워진 이 호텔이 얼마나 멋진가를.” 이처럼 아름다운 해변은 남쪽으로 한없이 이어진다. 그중에는 ‘밴토타’나 ‘히카두아’처럼 개발이 돼서 멋들어진 리조트 시설이 들어서 있는 곳도 있고, ‘갈레’라는 곳에는 바닷가에 제법 규모가 있는 식민지 시절의 성곽이 도시를 둘러싸고 있기도 하다. 아직도 자연 그대로의 백사장을 끼고 한가로운 어촌으로 남아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저 멀리 수평선이 바라보이는 맑고 시원스러운 바다지만 찾아가던 때가 계절적으로 파도가 이는 시기라서 바다색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곳을 가나 해맑은 웃음을 마주할 수 있고, 남국의 느긋한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갈레의 포트 위에서 다이빙하는 모습 최고 인기 리조트 지역 히카두아 해변을 따라 곳곳에 그림 같은 리조트가 들어서 있다. 히카두아는 스리랑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리조트 지역이었다. 해양 스포츠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모두 체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관광객 수용 능력이 엄청나다. 최고급 리조트에서 싸구려 게스트 하우스에 이르기까지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한때는 인도의 ‘고아’ 지역처럼 누드 비치가 들어선 적도 있어서 구미(歐美) 젊은이 문화인 히피 문화가 성행한 적이 있었다.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다는 자유로움 그 자체가 이 지역으로 구미 젊은이를 불러들였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좀 사정이 달라져 예전 같지는 않다. 10여 년 전 들이닥친 쓰나미로 인해 많은 피해를 봐 지금도 그 여파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옛날 방식으로 항해 중인 돛단배 이제 히피들은 사라졌지만 인도양에서 거침없이 밀려드는 파도를 벗삼아 느긋한 시간을 보내거나, 통나무배를 타고 바다 반대편의 밀림 속 수로를 누비고 다니면서 순박한 사람들과 정을 나누기에 히카두아는 부족함이 없다. 파도가 발밑까지 밀려드는 어느 찻집에서다. 차 한 잔을 마시고 일어나면서 계산하기 위해 종업원에게 돈을 건넸다. 종업원의 “잇스 투 티”라는 말에 나는 “노. 원 티(No. one tea)”라고 점잖게 말했다. 그러자 다시 종업원이 “노. 잇스 투 티”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차 두 잔을 마셨다고 말하는 것 아닌가. 나는 약간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검지를 펴 보이며 다시 한번 말했다. “노. 원 티(차 한 잔만 마셨단 말이야).” 이번에는 종업원이 답답하면서도 우습다는 듯이 “노. 노. 잇스 투 티. 잉글리시 생큐”라고 또박또박 말했다. ‘아하’ 하고 난 그때야 알아차리고 폭소를 터뜨렸다. 스리랑카 말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고 엉뚱한 말만 했으니…. 생기 넘치는 어촌 풍경 도다앙 두어 새벽에 일어나 히카두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도다앙 두어’라는 조그마한 어촌을 찾았다. 버스를 타고 남쪽에서 올라오면서 눈여겨봐둔 곳이다. 싱그러운 아침 햇살을 받으며 카트마란이라 부르는 수많은 어선이 밤새 고기잡이를 마치고 속속 포구로 들어오고 있었다. 잡아온 크고 작은 고기를 퍼 날라 땅바닥에 벌려 놓는다. 꽁치 비슷하게 생긴 것을 우를라라 했고, 돔처럼 생긴 것을 파라피시라 부른다. 고등어와 다랑어도 보인다. 여기저기 벌려 놓은 고기를 중심으로 사람이 몰려 금세 시장이 형성된다. 즉석 경매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제법 큰 다랑어 한 마리가 우리 돈 1000원쯤에 거래되고 있다. 벌려 놓은 고기는 잠깐 새 다 팔려 나간다. 그러면 또 다른 어선이 들어와 고기를 퍼낸다. 이래저래 북새통이다. 사고파는 사람 모두가 흡족한 표정이고, 비록 사지는 않았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는 구경꾼들의 표정이다. 이른 아침 생기가 넘치는 현장이다. 이제 어부들은 휴식을 취하고 나서 석양 녘이 되면 다시 카트마란을 타고 꿈을 낚으러 바다로 나갈 것이다. 끝없이 밀려드는 파도에서 잠시 벗어나 기분 전환하고 싶을 때 찾을 만한 곳이 있다. ‘암발랑고다’라는 곳이다. 역시 서쪽 해안의 작은 어촌인 이곳은 ‘악마의 가면’으로 유명하다. 대표적 토산품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이 가면은 악마보다 더 무서운 모습으로 만들어 악마가 놀라 도망치게 한다는 것인데, 이곳의 악마 또한 사람들처럼 순진한 것일까. 마을 도처에 있는 공방을 기웃거려보면서 이들의 순박함을 실감한다. 자연미 넘치는 항구 함반토타 남쪽에는 ‘아한가마’ ‘탕갈라’ ‘함반토타’ 등의 여러 해변이 손짓하고 있다. 소금 산지로 알려진 함반토타는 ‘이슬람의 항구’라는 뜻으로 14세기께 아랍 상인이 해양 실크로드를 타고 이 지역으로 들어오면서 문을 연 자연미가 넘치는 항구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놓치지 말아야 할 곳은 아한가마에서 볼 수 있는 스틸트 피싱이다. 해변을 따라가다 보면 군데군데 바다 위에 무리지어 세워진 나무 말뚝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중간에 발판이 달려 있는데 이곳에 올라서서 한 손은 나무 기둥을 잡고 또 다른 한 손으로는 낚싯대를 드리우고 낚시질을 한다. 물 위에 떠서 독특한 자세로 낚시질하는 모습이 특이해서 이런 이름이 붙은 것 같고,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라 관광객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렇다 보니 너도나도 체험해 보겠다고 달려들고 기념사진을 찍는 둥 야단법석을 떠는 와중에 이따금 원주민과 관광객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곤 한다. 낚시에는 마음이 없고 달려드는 관광객을 위해 잠깐 자세를 취하고서는 터무니없는 모델료를 요구하는 데서 작은 충돌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모두 웃음으로 넘기곤 한다. 인도양의 무역풍을 마주하며 때묻지 않은 작은 어촌의 백사장을 거닐어 보거나, 야자수 우거진 탕갈라 해변에서 대자연과 사랑을 속삭이다 보니 원시의 꿈은 더욱 깊어만 간다. 여행정보 전자비자 받아야 입국 허가  대한항공 등 직항편 운항 대한항공 직항편이 있고, 최근에는 에어아시아를 비롯한 저가 항공도 운항한다. 스리랑카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인은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었지만 최근에는 전자비자를 받아야 한다. 콜롬보 공항에 도착해서 비자를 취득해도 된다. 작은 나라여서 이동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는다. 리조트 호텔들은 수준급이고 다른 곳에 비해 가격 부담도 없다. 한 곳에 숙소를 정해 놓고 그때그때 차량으로 이동하면서 즐기기에 적합하다. ///콜롬보=글·사진 박하선 여행작가
1963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멸종위기동물,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5643  추천:0  2018-02-18
팜유 농장·밀렵에.. 보르네오섬 오랑우탄 16년 동안 15만마리 감소 김기범 기자  2018.02.18.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경향신문] ㆍ멸종 위기 ‘인간의 사촌’ 생존과 멸종 사이…갈림길에 서다 인도네시아 보르네오섬의 오랑우탄이 철로 위에 앉아 있다. 독일 막스플랑크진화인류학연구소 등 국제공동연구진은 1999년부터 2015년까지 16년 동안 인도네시아 보르네오섬에서 오랑우탄 14만8500개체가 줄어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막스플랑크진화인류학연구소 제공 영화 시리즈에 등장하는 유인원 가운데 리더인 침팬지 시저의 오른팔로서 어린 유인원들을 가르치는 스승 역할을 맡은 유인원이 있다. 모리스라는 이름을 가진 오랑우탄이다. 서커스단에서 수화를 배운 모리스는 유인원 무리 중에서도 지혜로운 존재로 묘사된다. 영화 속 유인원들은 인간이 만든 약품으로 인해 지능이 발달하면서 언어를 습득한 것이지만 모리스처럼 수화를 배운 오랑우탄은 현실에서도 존재했다. 미국 테네시대학에서 기르다가 지난해 39살에 죽은 찬텍이라는 오랑우탄은 수화를 배워 약 150가지 단어를 사용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인간에 가장 가까운 포유류인 유인원 중에서도 지능이 높은 편인 오랑우탄의 개체 수가 급감하면서 이들을 야생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우울한 연구결과가 나왔다. 기존에 언론을 통해 알려져 있던 오랑우탄 감소 이유인 ‘팜유 농장’ 증가 외에 밀렵과 불법거래 등이 개체 수 감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독일 막스플랑크진화인류학연구소와 영국 리버풀존무어스대학 진화인류학 및 고생태연구센터 등 국제공동연구진은 1999년부터 2015년까지 16년 동안 인도네시아 보르네오섬에서 오랑우탄 14만8500개체가 줄어든 것으로 추산된다는 내용의 논문을 지난 15일자 국제학술지 ‘커런트바이올로지’에 게재했다. 커런트바이올로지는 국제학술지 ‘셀(Cell)’이 격월로 발행하는 생물학 전문 학술지이다. 모두 38개의 연구기관이 참여한 이번 연구에서 연구진은 보르네오섬 내의 3만6555개 오랑우탄 서식지를 확인한 끝에 이 같은 결과를 얻었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오랑우탄의 주요 서식지 가운데 가장 개체 수가 많은 서부 슈와네르(schwaner)에서는 16년 동안 4만2700개체가 줄어들어 2015년 현재 4만700개체만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설명했다. 두번째로 개체 수가 많은 동부 슈와네르에서는 2만100개체가 줄어들어 1만6800개체만 남은 것으로 추산했다. 세번째로 개체 수가 많은 카랑간에서는 8200개체가 감소해 9000개체만 남은 것으로 추산했다. 연구진은 2050년이 되면 서부 슈와네르에는 3만1100개체, 동부 슈와네르에는 1만4700개체, 카랑간에는 6100개체만이 남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연구진이 앞으로도 오랑우탄의 개체 수가 급감할 우려가 크다고 본 것은 오랑우탄이 숲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오랑우탄은 생애의 대부분을 나무 위에서 보낸다. 연구진은 또 모두 64개의 오랑우탄 무리 가운데 38개 무리에만 100개체 이상의 새로운 오랑우탄이 태어난 것으로 추산된다고 밝혔다. 이는 오랑우탄 무리가 계속 유지되기 위한 최소한의 수치다. 오랑우탄은 세계자연보전연맹이 지정한 ‘심각한 위기종’인 유인원이다. 야생 상태에서 절멸되기 직전 단계라는 의미다. 유인원은 영장류 가운데 원숭이와는 구분되는 포유류 동물로 인간과 다른 유인원들은 대략 1000만년에서 500만년 전 공통조상으로부터 분리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확인된 유인원은 침팬지, 보노보, 보르네오오랑우탄, 수마트라오랑우탄, 서부고릴라, 동부고릴라 등이다. 열대우림 자리에 들어선 산업시설 인도네시아 보르네오섬의 열대우림을 파괴하고 조성한 산업시설의 모습. 막스플랑크진화인류학연구소 제공 연구진은 오랑우탄 수가 줄어드는 원인으로 팜유 농장, 고무나무 농장을 만들고, 광물과 종이를 얻기 위한 열대우림 파괴 등을 꼽았다. 특히 동남아시아 열대우림 파괴와 야생동물 급감의 주된 원인으로 꼽히는 팜유는 과자, 아이스크림, 초콜릿, 라면 등 우리가 매일 먹는 식품들 다수에 들어있고, 화장품, 세제, 비누, 바이오연료에도 들어가는 원료다. 소비자들이 팜유를 피하면서 생활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오랑우탄의 급감을 선진국 사람들이 모른 척해서는 안된다는 지적은 타당할 수밖에 없다. 연구진은 여기에 지역 주민들의 오랑우탄 멸종에 대한 무관심, 그리고 무관심을 넘어선 밀렵과 오랑우탄 도살이 큰 역할을 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연구진에 따르면 가장 많은 수의 오랑우탄이 사라진 지역은 숲이 완전히 없어진 곳이 아니라 자연상태가 유지된 숲 또는 일부만 벌목이 진행된 숲이었다. 막스플랑크연구소 마리아 보이트는 “오랑우탄 개체 수의 감소는 열대우림이 파괴되거나 산업적인 농경지역으로 바뀐 지역에서 극심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오랑우탄 개체 수가 더 많이 줄어든 곳은 여전히 밀림이 유지되고 있는 곳이었다”고 밝혔다. 숲이 파괴돼 개체가 줄어드는 데다 숲이 남은 곳에서는 인간이 농업 방해 등을 이유로 밀렵하면서 더 빨리 줄어들고 있다. 지난 4일에는 보르네오섬 동부 칼리만탄주의 한 호수에서 130여발의 총탄이 몸에 박힌 오랑우탄이 주민들에게 발견되기도 했다. 중상을 입은 채 발견된 이 오랑우탄의 몸에는 총상뿐 아니라 흉기에 맞은 상처도 있었으며 인근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지만 이틀 만에 죽었다. 이 섬에서는 1월에도 목이 잘리고 난자당한 오랑우탄 사체가 발견됐고, 경찰이 고무농장 노동자 두 명을 오랑우탄 도살 혐의로 체포한 바 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오랑우탄 보호정책을 추진하고 있으며 도살한 이들을 처벌하고 있지만 솜방망이 처벌에 가깝다는 지적이 나온다. 주민들이 오랑우탄을 단순히 농업에 방해되는 동물로 간주해 도살하는 것인지, 문화·역사적인 배경이 있는 것인지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는 아직 진행된 바 없다. 인도네시아 환경산림부가 지난해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보르네오섬의 원시림 16만㎢에 살고 있는 오랑우탄의 수는 5만7350개체 정도다. 밀림 100㎢당 서식하고 있는 오랑우탄은 13~47개체 정도로 추산된다. 2004년 조사결과의 100㎢당 45~76개체보다 2분의 1 내지 3분의 1로 줄어든 수치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보르네오섬에 지난해 현재 42개의 오랑우탄 개체군이 있지만 빠르면 100년 후에는 18개 개체군만 살아남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세계자연보전연맹은 보르네오섬의 오랑우탄 수가 1973년에는 28만8500마리 정도였다고 추산하고 있다. 오랑우탄뿐 아니라 대부분의 유인원들은 서식지 파괴, 밀렵 등으로 인해 멸종위기에 놓인 상태다. 지난해에는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에서 이미 멸종위기에 처해 있는 신종 오랑우탄이 발견되기도 했다. 발견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질 수도 있는 비운의 종인 셈이다. 스위스 취리히대학 등의 연구진은 지난해 11월 기존의 오랑우탄과는 완전히 다른 종인 타파눌리오랑우탄 약 800개체를 발견했다고 국제학술지 커런트바이올로지에 발표했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의 북쪽 고지대에만 사는 이 오랑우탄은 기존의 오랑우탄보다 먼저 아시아 본토에서 건너온 오랑우탄으로 추정된다. 이 발견은 지난해 말 국제학술지 사이언스가 선정한 ‘올해의 혁신성과’ 10개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리버풀존무어스대학 진화인류학 및 고생태학연구센터 서지 위츠 교수는 “오랑우탄은 숲이 벌목되고, 농장으로 바뀐 곳에서 적응할 수도 있겠지만 사냥당하는 것은 당해내지 못한다”며 “숲을 더 이상 파괴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은 물론 오랑우탄을 죽이지 않도록 주민 등을 설득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오랑우탄 멸종에 경각심을 일깨우고, 교육하고, 법적인 조치를 취하기에 앞서 주민들이 왜 오랑우탄을 죽이는지 연구하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기범 기자 
1962    [토깨비방망이] - "똑" 잘라갔다... "뚝" 붙잡히다... 댓글:  조회:3576  추천:0  2018-02-18
진시황 병마용 손가락 잘라간 미국 청년에 중국 ‘분노’ (ZOGLO) 2018년2월18일 [한겨레] 지난해말 필라델피아 전시중 훼손·도난 발생 병마용 ‘어깨동무 셀카’ 찍은 20대가 침실에 보관 중 당국 당사자 처벌과 손해배상 요구 방침 미국 필라델피아 프랭클린 인스티튜트 박물관에 전시중인 병마용 엄지손가락이 부러진 모습. 부러진 엄지손가락은 지난해 말 이 박물관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한 20대의 집에서 발견됐다. 명보 갈무리미국에서 대여 전시중인 중국 진시황 병마용을 훼손시키고 일부를 훔쳐서 달아난 사건이 발생했다. 중국 당국은 손해배상을 요구할 전망이다. 지난해 12월21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의 박물관 프랭클린 인스티튜트에서 마이클 로하나(24)가 행사 도중 비공개 전시장에 몰래 들어가 병마용 전시품의 엄지손가락을 훔쳐 달아난 혐의를 받고 있다고 영국 등이 미 연방수사국(FBI) 자료를 인용해 최근 보도했다. 수사 당국은 로하나의 모습이 촬영된 사진을 토대로 수사에 나섰으며, 지난달 13일 델라웨어주의 로하나 자택에서 ‘엄지손가락’을 회수해 박물관 쪽에 돌려줬다고 밝혔다. 진술서를 보면, 로하나는 이날 저녁 박물관이 주최한 ‘어글리 스웨터 파티’에 참가했다가, 애초 혼자서 비공개 전시장을 발견한 뒤, 이후 친구 2명을 대동하고 다시 들어왔다. 그는 병마용 어깨에 팔을 올린 채 ‘셀카’를 찍은 뒤, 현장을 떠나기 전 기병의 왼손에서 뭔가를 부러뜨려 자신의 호주머니에 넣었다. 이 과정에서 찍은 사진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려놓기도 했다. 지난달 13일 연방수사국 수사관이 집을 찾아와 “연방수사국에 제출할 물건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침실의 책상에서 ‘엄지손가락’을 꺼내 돌려줬다. 프랭클린 인스티튜트 쪽은 성명을 내어 보안업체가 문을 제대로 잠그지 않아 발생한 일이라며, 관련 조처를 취했다고 밝혔다. 이 박물관은 니콜라스 케이지가 주연한 영화 (2004)의 무대이기도 하다. 사건 내막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이번 전시에 병마용을 대여했던 중국 쪽은 분노하고 있다. 진시황 병마용의 본고장으로 중국 쪽 당사자인 산시성 문화교류센터(센터)는 미국 관련 당국의 책임을 묻고 사건 당사자의 엄중한 처벌을 요구하는 한편, ‘전시협약서’에 근거해 배상 절차를 개시할 예정이라고 가 17일 전했다. 센터 관계자는 이 신문에 “관련 소식을 접한 뒤 충격과 분노를 느꼈다. 우리 성의 문물이 40여년 동안 전세계 60개국에서 260여차례 전시됐는데, 이 같은 악랄한 사건은 발생한 적이 없다”며 “우리는 미국 전시 당국에 엄중한 항의를 전하고, 문화유산 파괴 및 절도 행위에 대해 강력한 분개와 항의를 표시했다”고 말했다. 센터의 조사 결과, 해당 ‘엄지손가락’은 발굴 당시 부러졌다가 복원 작업을 통해 붙여놓은 것으로, 로하나는 이 부분을 다시 부러뜨렸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전시는 지난해 9월 시작돼 올해 다음달 폐막할 예정이었다. 중국 당국은 현재 병마용이 별도로 전시되고 있는 미국 버지니아 미술관과 영국 리버풀 박물관에도 안전 조처 강화를 요구한 상태다.
1961    [쉼터] - 최대한 "0"으로 살아가자... 댓글:  조회:3450  추천:0  2018-02-18
‘최대한 없이’ 산다… 일본 ‘0엔 생활’ 인기 (ZOGLO) 2018년1월31일  ㆍ풍요 반작용이거나 미래 불안 산물 30대 중반의 자유기고가 야요이(필명)는 일본 요코하마의 월세 5만5000엔(약 54만원)짜리 원룸에 산다. 11㎡ 크기의 방에는 TV, 냉장고, 세탁기 등 ‘필수’ 가전제품이 없다. 컬러박스를 탁자 대용으로 사용한다. 의류는 20여벌.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다. 그는 “가능한 부분은 ‘0엔’으로 하고 싶다. 삭감할 수 있는 부분이 꽤 있다”고 마이니치신문에 말했다.  야요이처럼 최소한의 필요품으로 생활하는 사람은 ‘미니멀리스트’로 불린다. 일본에선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계기로 ‘탈(脫)원전의존’을 목표로 미니멀리스트가 된 이들이 늘었다. 2015년 ‘신조어·유행어 대상’ 후보에 오를 정도였다.  이런 흐름은 필요 없는 물건을 없애고, 지출을 최대한 줄이는 ‘0엔 생활’의 추구로 이어졌다.  최근 일본의 방송도 관심을 보인다. 연예인들이 최소한의 물과 조미료로 무인도에서 버티는 , 버린 식재료를 활용하는 등이 인기다. 출판계에서도 ‘0엔 생활’을 제목에 넣은 책들이 잘 팔리고 있다. ‘극도의 절약’ 지향은 통계 자료에서도 나타난다. 다이이치(第一)생명경제연구소가 지난해 전국 성인 1만7000명에게 한 설문조사에선 ‘최소한 물건으로 깔끔하게 살고 싶다’는 응답이 75%였다. 미야키 유키코 수석연구원은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어차피 필요 없어질 물건이라면 사지 않거나 빌리면 된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자동차 공유 서비스나 ‘셰어 하우스’ 등 공유경제의 확산도 비슷한 흐름으로 분석된다.  ‘0엔 생활’이 풍요로운 삶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미즈노 가즈오(水野和夫) 호세이대 교수는 “경제 성장을 이룬 일본에선 가정에 필요한 물건은 다 갖추어져 있어 가전제품 등 내구소비재를 바꾸는 수요밖에 없게 됐다”면서 “물건이 넘쳐나 원하는 물건이 별로 없는 상황이 개운하게 살고 싶다는 사람들을 낳은 것”이라고 밝혔다. 반면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미니멀리스트’로서의 생활을 강요당하는 사람들도 증가하고 있다. 미즈노 교수는 “기업은 사상 최고 이익을 내고 있어도 내부 유보금을 쌓고 있고, 임금으로 돌리지 않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절약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격차 문제를 지적했다. 실제 후생노동성이 종업원 5인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한 통계조사에 따르면 평균 급여는 1997년 37만1670엔에서 2016년 31만5590엔으로 15% 줄었다. 현대 일본 사회의 폐색감(꽉 막혀 있는 느낌)을 배경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앞서 다이이치생명경제연구소 조사에선 ‘향후 지출을 늘리고 싶은 항목’(복수 응답)에 ‘저축 등 재산 만들기’가 40%로 가장 많았다. 미야키 수석연구원은 “모든 세대가 미래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있으며, 소비에 신중하다”고 했다. ///경향신문
1960    "아직 다섯수레의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이 방에 들지 말라"... 댓글:  조회:5030  추천:0  2018-02-18
'책 읽기'의 멋 보여주는 박원규의 옛 글씨 (ZOGLO) 2018년2월6일 사진 크게보기    하석(何石) 박원규(朴元圭) 선생은 당대 최고의 서예가 중 한 사람이다.     서예평론가 김정환은 선생을 이렇게 말했다.   "걸작이 사라졌다는 시대지만,   시대가 수천 번 바뀌어도 여전히 좋은 작품, 역사를 다시 쓴대도 경이로움을 주는 작품은 그대로 존재할 것이다. 인간 세계에도 그런 걸작 같은 인물이 있는 건 아닐까.   아무리 다시 봐도 여전히 매력적이고 힘이 느껴지는 걸인(傑人)!"     하석의 최근작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회가 인문예술공간 순화동천에서 열린다.  전시의 주제는 '책+독서'다. 선인들의 독서와 책에 관한 생각과 정신을 작품으로 만들었다.      선생의 작품은 한자의 뿌리인 갑골문과 전서가 주류다. 한눈에 무슨 글자인지 알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한자는 표의문자라 유심히 바라보면 현대 한자의 뿌리를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다.      전시장 입구의 대형 작품이 그렇다. '책(冊)'이다. 대나무를 쪼갠 죽간(竹簡)을 이어붙인 모습이다. 책의 원형이다.             사진 크게보기    '冊'을 보고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보이는 글씨,     未讀五車書者勿入此室(미독오거서자물입차실)   "아직 다섯 수레의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이 방에 들지 말라!"     그렇다고 돌아서서 나갈 필요는 없다.         奪天巧(탈천교). 하늘의 솜씨를 압도하다.  가운데 사람의 형상을 한 글자는 하늘 천(天)이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      사진 크게보기    黃券靑燈(황권청등). 노란 책과 파란 기름 등잔.  어려움 속에서도 부지런히 밤에 책을 읽음을 이른다.  옛사람이 책을 베끼는 종이에 황벽나무즙을 물들여 좀을 방지해 책을 황권이라 했다.      사진 크게보기    얼굴 면(面)이다. 표정이 떳떳하지 않다.  북송의 학자 황정견이 이렇게 말했다.  "사대부가 사흘을 글을 읽지 않으면 가슴 속에서 義와 理가 서로 통하지 않고, 거울을 보면 그 면목이 가증스럽고, 사람에게 하는 말도 맛이 없다."      사진 크게보기    갑골문 '책(冊)'.     사진 크게보기    抱書眠(포서면). 책을 안고 잠들다.     사진 크게보기    웃음. 책을 읽으면 즐겁고, 즐거우면 웃는다.  한글도 표의(表意)문자인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     사진 크게보기    恨不十年讀書(한불십년독서).   십년 독서를 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사진 크게보기    觀書爲樂(관서위락). 글을 보는 즐거움.  박원규 선생은 전각(篆刻)에도 뛰어나다.      사진 크게보기    慧厪寂(혜근적). 지혜로움과 부지런함과 고요함.  학문의 세가지 요체.     사진 크게보기    전시공간인 순화동천의 양쪽 벽을 '책'과 '책'이 메우고 있다.       순화동천(巡和洞天)은 출판사 한길사가 마련한 공간이다.  한길사가 처음 시작한 서울 순화동과 노장사상의 이상향인 ‘동천’(洞天)을 결합했다.     사진 크게보기    下心(하심). 내 뜻을 내려놓고 남을 따름.     사진 크게보기    공경 경(敬).  이 간략한 필획이 경(敬)자다. 갑골문이다.  아래 '경'자와 비교해 보자.      사진 크게보기    敦敬(돈경). 인정이 두텁고 행실이 조신함.     사진 크게보기    新正(신정). 새해 첫날.     바를 정(正)은 서주(西周)시대 제기(祭器)에 입구(口)와 두 발자국 형태로 새겨져 있다.  두 발자국은 멈출 지(止)를 뜻하는 것일까.      사진 크게보기    蓮子聲(연자성).   갓끈에 매달린 연실(蓮實)이 책상에 가볍게 부딪혀 나는 소리.  선비가 의관을 갖추고 책을 읽을 때 나는 소리다.     사진 크게보기    券氣(권기). 서책의 기운.     사진 크게보기    讀書聲(독서성). 책 읽는 소리.     사진 크게보기    敬恭(경공). 삼가고 공손함.  왼쪽의 '경'자가 위 간략한 필획의 '경'자와 비슷하다.     사진 크게보기    鑿壁(착벽). 벽을 뚫다.  벽을 뚫고 이웃집 불빛에 책을 읽다.      사진 크게보기    焚膏繼日(분고계일). 기름을 태워 불빛을 이어가다.  갑골문이다.     사진 크게보기    敬時愛日(경시애일). 때를 공경하고 시간을 아끼다.  박원규 선생이 71세를 맞이하는 2018년 첫날 쓴 작품이다.     사진 크게보기    마지막 작품도 대형 '책(冊)'이다.     하석은 이렇게 설명했다.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 이 말은 안중근 의사께서 중국의 여순감옥에 계실 때 붓글씨로 쓴 후 세상에 유명해졌다.           [중앙일보] [서소문사진관] 
1959    [이런저런] - 맹장 수술 받고도 썰매 타다니... 댓글:  조회:5566  추천:0  2018-02-18
[평창올림픽] '맹장 수술 받고도 썰매 타다...   2018.02.18.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2월 5일 강릉에서 맹장 수술.."몸 상태 정말 좋다..4인승 기대" '한국에서 맹장 수술받은' 올센 "저, 건강합니다" (평창=연합뉴스) 하남직 기자 = 저스틴 올센(미국)이 18일 강원도 평창올림픽 슬라이딩센터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남자 봅슬레이 2인승 경기 뒤 연합뉴스와 인터뷰 하며 웃고 있다. 올센은 5일 강릉에서 맹장 수술을 받았지만, 빠르게 회복해 정상적으로 경기를 치렀다. 2018.02.18 jiks79@yna.co.kr (평창=연합뉴스) 하남직 기자 = 저스틴 올센(31·미국)은 봅슬레이 2인승 1, 2차 시기를 마치고 '한국 의사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수술 전과 몸 상태가 다르지 않다. 흉터도 거의 없다"고 웃은 올센은 "한국 의사들 덕이다. 고맙다"고 했다. 올센은 18일 강원도 평창올림픽 슬라이딩센터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남자 봅슬레이 2인승 경기에 에반 웨인스톡과 호흡을 맞춰 1, 2차 시기 합계 1분 39초 12로 전체 12위에 올랐다. 메달권과 멀어졌지만, 올센의 표정은 매우 밝았다. 미국 언론은 올센의 몸 상태를 물었고, 올센은 웃으며 "나는 이제 환자가 아니다"라고 밝게 웃었다. 올센은 5일 강원도 강릉시에서 맹장 수술을 받았다. 훈련 중 갑작스럽게 복통을 느꼈고, 수술대에 올랐다. 올림픽 출전을 포기할 위기였다. 하지만 올센은 빠르게 회복했고, 정상적으로 2인승 경기에 나섰다. 경기 뒤 만난 올센은 "한국 의사들이 정말 훌륭하게 수술을 했다. 흉터도 거의 없다. 경기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수술을 앞두고는 올림픽 무대에 나서지 못할까, 걱정이 컸다. 하지만 한국 의료진의 도움을 받고, 내가 포기하면 팀 동료들에게 끼칠 해를 생각하면 포기할 수 없었다"며 "수술이 끝난 뒤에는 평창올림픽 출전을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병원을 나오는 데 발걸음이 가벼웠다"고 떠올렸다. 올센이 속한 미국 봅슬레이 2인승 대표팀 (평창 AP=연합뉴스) 저스틴 올과 에반 웨인스톡(이상 미국)이 18일 강원도 평창올림픽 슬라이딩 센터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남자 봅슬레이 2인승 1차 시기에서 주행하고 있다. 올센은 2인승 1, 2차 시기에서 '건강'을 확인했다. 그는 "내일(19일) 3, 4차 시기에서는 더 좋은 기록을 내고 싶다"고 했지만, 사실 올센과 미국 대표팀의 시선은 24∼25일 열리는 봅슬레이 4인승을 향해 있다. 올센은 2010년 밴쿠버 올림픽 봅슬레이 4인승 금메달리스트다. 올센은 "2017년 3월에 이곳(평창올림픽 슬라이딩센터)에서 4인승 경기를 한 뒤, 4인승 훈련을 거의 하지 못했다"고 걱정하면서도 "우리 4인승 대표팀 실력이 많이 향상했다. 좋은 경쟁자들과 재밌는 경기를 할 것이다. 오늘도 사실 원윤종과 만나 서로를 격려했다"고 선의의 경쟁을 예고했다.
1958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까치야, 까치야, 네가 "유해조"라고? 댓글:  조회:4724  추천:0  2018-02-15
까치까치 설날은요~라는 노래에 나오는 까치가 유해조수라고요?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고 해서 길조로 여겨졌던 까치가 왜 유해조수가 되었을까요? 머리 좋아 농민들이 퇴치를 해도 퇴치 방법을 바로 학습해 농작물에 피해를 입혀서 유해조수로 지정된 까치.   점점 보기 어려워지는 까치가 갑자기 멸종해버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함께 살아가는 환경을 만들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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