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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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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7    연변작가협회 60과 = 전 세계작가와의 만남... 댓글:  조회:4496  추천:0  2016-08-20
연변작가협회설립60주년기념 및 전국저명작가와 연변의 만남활동가동식이 8월19일 오전 연길에서 있었다. 연변작가협회는 1956년 8월15일에 정식으로 설립되였는데 설립당시 전국적으로도 몇 안되는 분회의 하나로 성급분회대우를 받았으며 전국 55개 소수민족가운데서 유일하게 전국적으로 조선족 회원을 둔 분회로 되였다. 60년래 연변작가협회는 광범한 문학창작일군들을 인솔하여 강렬한 민족적책임감과 사명감으로 새 중국과 새 연변건설의 제1선에서 사회에 초점을 맞추고 현실생활을 반영한 중국조선족 및 연변 기타 여러 민족의 부동한 력사시기의 진실한 생활과 시대적주선률을 반영한 우수한 작품들을 많이 창작하여 괄목할만한 성과들을 거두었다. 지금 연변작가협회의 회원들은 전국각지에 분포되여있으며 회원수가 800여명에 달하는데 그중 조선족회원이 600여명에 달한다. 작가협회산하에는 17개 창작위원회가 있는데 소설, 시가, 산문, 아동문학, 평론, 번역, 한문 등 7개 직속창작위원회와 북경, 청도, 상해 등 10개 지역들에 창작위원회를 두고있다.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1993년부터 2015년사이 연변작가협회 회원들이 창작, 출판한 문학작품은 1500여부에 달하며 적잖은 작품들이 국외에서 출판되였다. 그중45부의 작품이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을 받아 안았으며22부의 작품이 길림성정부의 “장백산문예상”을 받아안았다. 이외에도 “화림신인문학상” “김학철문학상” “새생활컵” 보고문학상 “가야하인터넷문학상” 등과 조선족문단의 최고상인 “단군문학상” “연변지용문학제” “중학생지용작문콩클” “중국조선족대학생 이륙사문학제” 등 다양한 문학상과 문학행사들을 통해 우수한 작가들과 작품들을 양성, 발굴했다. 1993년 2월에 비준, 설립된 연변작가협회 민족문학원은 이미 10회째 강습반을 성공적으로 조직해 300여명에 달하는 문학신인들을 양성하였다. 연변작가협회에서는 선후로 30여명에 달하는 작가들을 “로신문학원”에 보내 연수시키는것으로 작가들의 창작자질을 일층 제고시켰다. 60년래, 특히는 개혁개방이래 연변작가협회에서는 중국작가협회, 로신문학원, “민족문학”잡지 등 문학권위기구들과의 교류를 강화하고 호북성작가협회와 련계점을 맺고 교류와 합작을 추진하는것으로 연변문학사업의 발전에 적극적인 기여를 했다. 연변작가협회에서는 한국소설가협회와 일본, 카나다 미국 등 국외 문학단체 및 작가들과의 인문교류도 깊이있게 진행하고있다. 이날 행사에는 중공중앙 위원이며 중국작가협회주석인 철응, 길림성당위 상무위원이며 부성장, 연변주당위서기인 장엄, 호북성작가협회 당조서기이며 부주석인 주훈집 등 지도일군들이 참가해 격정에 넘치는 축사를 진행했다. 축사를 올리고있는 길림성당위 상무위원이며 부성장, 연변주당위서기인 장엄 장엄서기는 축사에서 연변작가협회가 걸어온 지난 60년은 당의 문예사업방침정책을 견결히 집행하고 정확한 문예방침을 견지하고 연변경제사회발전을 위해 중요한 기여를 한 60년이며 연변문화브랜드를 만들고 연변문화형상을 수립하고 연변문화의 대발전과 대번영을 추진한 60년이였다고 성적을 충분히 긍정했다. 장엄서기는 연변은 기나긴 력사행정가운데서 독특한 조선족문화, 두만강문화, 장백산문화, 발해문화 홍색문화를 형성한 문학창작의 옥토이며 이번에 중국작가협회에서 “전국의 저명한 작가들과 연변의 만남”활동을 조직했는데 이는 중앙의 문학창작 3접근의 요구를 충분히 체현했을뿐만아니라 중국작가협회가 변강민족지구 문학사업발전에 대한 관심과 편달이며 연변문학사업의 건전한 발전에 적극적이고 심원한 영향을 줄것이라고 말했다. 장엄서기는 작가들이 연변에 있는 기간에 많이 돌아보고 전방위적으로 연변을 료해하고 느껴보면서 연변의 독특한 매력을 담은 정품작들을 많이 창작할것을 기대했다. 이어 장엄서기는 연변의 광범한 작가들이 이번 활동을 기회로 습근평총서기의 문예사업좌담회의 중요한 연설정신을 참답게 관철락실하며 연변문학사업의 새로운 발전과 중국민족문학사업의 발전에 적극적인 기여가 있기를 희망했다. 축사를 올리고있는 중공중앙 위원이며 중국작가협회주석인 철응 중국작가협회주석 철응은 조선족은 중화민족대가정속의 일원이며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가 있다고 강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조선족집거지역인 연변은 독특한 지리적위치와 아름다운 자연풍광 독특한 민속풍정으로 문학창작자들에게 마를줄 모르는 문학창작의 충분한 원천이 되고있다고 말했다. 철응주석은 지난 60년래 연변의 조선족작가들은 중국의 기타 민족작가들과 함께 신근한 로동으로 민족특색이 선명하고 애국정감이 짙은 문학작품들을 대량 창작해 중국당대문학력사의 중요한 한페지를 장식했는바 연변의 각 민족작가들은 중국당대작가들속에서 빼놓을수없는 력량이라고 말했다. 그는 연변작가협회가 당과 정부가 광범한 작가들을 련계하는 교량뉴대작용을 놀고 련락, 협조, 봉사, 지도의 작용을 발휘해 중국조선족 및 연변 여러민족 사업에 많은 일들을 했다면서 특히 최근년간 연변작가협회는 인민군중을 위하는 창작방향을 견지하고 실제와 생활에 심입해 뚜렷한 효과를 보았다. 작가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주선률로 적극적으로 자금부축과 작가들의 창작을 고무하고 작가들의 권익을 보호해주었으며 작가들의 강습과 연수에 힘써 교류, 제고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어주었으며 문학정품창출과 신인양성을 목표로 많은 문학상을 내왔고 대외련력을 강화해 작품연구토론모임과 건전한 문학비평 등 많은 문학활동들을 진행하였는바 연변은 우수한 작품과 신인들이 용솟음쳐 나오고 기타 민족작가와 공동히 발전하는 좋은 형세가 형성되였다고 말했다. 철응주석은 60년을 맞는 오늘은 새로운 력사의 시작이라고 하면서 연변작가협회가 직능작용을 충분히 발휘해 작가대오를 단결인도하고 정품과 창작인재가 나오도록 량호한 문학창작환경을 만들어주며 작가협회가 진정한 작가의 집으로 거듭날것을 희망함과 동시에 연변문학이라는 중국문단백화원속의 진달래가 조국의 아름다운 동북변강에서 찬란히 빛뿌릴것을 기대했다. 연변작가협회 상무부주석 정봉숙은 이날 행사에서 한 사업보고에서 향후 사업에 대해 언급할 때 습근평총서기가 전국문예사업좌담회에서 한 중요연설정신을 참답게 관철락실하고 중국꿈 실현의 웅위로운 목표와 시대적 주제를 긴밀히 둘러싸고 문예는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근본방향을 견지하며 생활과 인민, 실제에 더욱 가까이한 문학작품들을 창작하기 위해 연변작가협회는 맡은바 소임을 다할것이라고 밝혔다. 길림신문 안상근 김성걸 기자 조글로 로고사진:조글로미디어 리계화 기자
476    중국 조선족과 무극 "아리랑꽃" 댓글:  조회:4254  추천:0  2016-08-18
대형무극 “아리랑꽃”의 종목기획과 씨나리오를 맡은 김영건시인을 만나 대형무극“아리랑꽃”의 종목기획과 씨나리오를 맡은 김영건시인 요즘들어 제5회 전국소수민족예술공연에 참가하는 연변가무단의 대형무극 “아리랑꽃”의 인기가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는다. 일전 기자는 대형무극 “아리랑꽃”의 종목기획과 씨나리오를 맡은 국가1급 연출이며 연변작가협회 부주석이고 《문화시대》잡지 주필인 김영건시인을 만나 취재했다. 김영건시인은 대형무극 "아리랑꽃"은 해방전부터 현재까지 한 조선족무용가의 삶의 그라프를 무용화했다고 말했다. 중화대가정속의 한 성원으로서 우리 민족의 백절불굴, 용왕매진의 민족기개로 이룩한 빛나는 력사와 오늘 희망찬 미래를 춤으로 그려낸 령혼의 아름다운 민속도가 바로 대형무극 “아라랑 꽃”이였다. 김영건시인이 소개하는 무극 “아리랑꽃”은 시와 음악, 무용이 화합을 이룬 아름다운 무극의 오색찬란한 향기가 짙게 풍겼다. 꽃이 핀다 어디에서 왔을가 꽃은 말없이 하늘만 쳐다본다 꽃향기 날린다 어디에 갔을가 꽃향기는 하늘과 땅 사이 조용히 내린다 꽃이 진다 비바람에 꽃잎이 날린다 꽃은 어디로 갔을가 두눈 조용히 감고 이 가슴 만나보니 꽃은 화안히 내안에서 웃고있다 -“아리랑꽃” 주제시 김영건시인은 “아리랑꽃” 주제시는 무극의 주인공인 로안무가가 향기속에 흠뻑 취하여 자신의 걸어온 길을 회억하고 비록 아름답던 시절은 갔지만 마음에 그 꿈만은 영원히 지지 않는 한떨기 꽃으로 피여있음을 말해주려 했다고 소개했다. 서막 《향기속으로》에서는 태초의 자연이 열리고 장백산이 우뚝 선다. 천지의 가슴복판을 툭 터치며 아리랑꽃이 핀다. 눈부신 향기에 흠뻑 취한 로주인공 순희는 편린처럼 스쳐간 세월을 돌아본다. 그속에서 회포와 눈물과 환희로 뒤엉킨 인생회귀는 전반 무용의 개시를 위한 환상곡이다.   대형무극“아리랑꽃”의 한 장면 제1막 《파란향기》는 태양의 이슬 깨치며 소녀 순희와 소년 광철이가 손을 잡고 봄길을 걷는다. 장백산 천지의 파란 물결처럼 때묻지 않은 순수와 빛살의 동심으로 하얀 버선발이 사뿐사뿐 돌다리를 넘는다. 순박한 농군들의 흥에 겨운 가락과 마당놀이가 한창이고 소녀는 그속에서 춤과의 첫 인연을 맺는다. 소녀의 수련과정을 통하여 파란 꿈을 향해 걷고 뛰고 나는 환상의 세계가 펼쳐진다. 제2막 《빨간향기》에서는 아릿다운 처녀로 성장한 순희가 장고수의 꿈을 실현하려고 수련을 거듭한다. 어엿한 문인으로 성장한 광철과 순희의 사랑은 시와 춤의 만남으로 무르익어간다. 청춘남녀의 사랑은 드디여 태양의 집에서 하나가 된다. 청실홍실 엮어가던 신혼의 행복을 뒤로하고 광철이는 나라와 고향을 지키기 위하여 전선으로 떠난다. 광철이는 순희의 장고끈에 시를 남기고 순희는 사랑하는 님의 평안을 빌며 첫날옷 고름을 떼여준다. 리별의 아픔을 토로하는 순희의 구성진 장고가락에 광철의 무거운 발걸음은 전선을 향한다. 제3막 《하얀향기》에서는 순희가 장고를 마주하고 그리운 님이 살아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허나 기다리던 님은 돌아오지 않고 전쟁포화속에서 조국과 고향을 위해 자기의 청춘을 바친다. 생과 사의 살을 찢는 아픔을 딛고 순희는 마침내 새 생명의 발자국소리를 듣는다. 제4막 《노란향기》에서는 중년 순희가 꿈속에서 천년학을 만난다. 학은 오매불망 그리던 사랑하는 님으로 변신하여 순희에게 잃었던 장고의 꿈에 날개를 펼쳐준다. 대지가 꿈틀거리고 천지가 돌아눕는다. 순희는 세월에 묻혔던 아픔을 털어내고 찬란한 빛을 타고 화려한 무대를 펼친다. 백발의 순희와 수많은 장고들이 천지를 가르고 산맥으로 뻗어나온다. 혼 들린 순희의 춤사위와 하늘땅을 진동하는 장고가락은 장백의 황혼빛을 타고 중화의 대지에 울려 퍼진다. 종막 《천년향기》에서는 아리랑꽃이 만발한다. 중화대지에 날리는 꽃향기는 꼬마의 구성진 장고가락과 돌아가는 상모의 칠색메아리로 세기를 넘어 천년향기로 길이길이 전해진다… 대형무극“아리랑꽃”의 한 장면 김영건시인은 전반 무극 싸나리오를 시로 썼다고한다. 매 막에 들어간 매수의 시들은 고도로 집중하여 15분 가량씩 되는 분량의 무용들을 표현하려 했다고 말했다. 또 전반 무용의 흐름을 잘 보여주고 문학과 음악과 무용의 어울림이 현대적 무대조명과 특수처리 등의 힘을 입어 연변에서는 처음으로 되는 전통무용의 틀을 깨고 현대적 기법을 도입했다고 소개했다. “내 인생으로 놓고 말하면 가장 힘들었고… 보람찼고 새로운 령역에서의 좋은 경험을 쌓은 빛나는 3년이였다.”고 김영건시인은 말했다. “아리랑꽃”의 종목기획과 씨나리오를 맡아 어언 3년 세월, “아리랑꽃”을 만민이 사랑하는 아름다운 “꽃”으로 활짝 피우기까지 로심초사해온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의 피타는 인내와 로고에 대한 김시인의 솔직한 심경이였다. 김영건시인이 “아리랑꽃”의 종목기획과 씨나리오를 맡게 된것은 지난 2014년 5월의 일이다. 연변가무단에서 민족성과 현대성, 전통성을 모두 아우르는 최고의 무대예술작품을 만들기로 하고 김영건시인에게 씨나리오를 맡아달라는 제의를 한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였다. 1990년대말부터 2000년대초까지 15년 동안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서 각종 《음력설문예야회》,《로천야회》,《주말극장》 등 문예프로들의 총연출로 많은 인기프로그램들을 만들었고 민족성과 현대성을 강조하는 시인으로서의 그의 종합적인 예술감각과 지혜의 재능이 단연 돋보였기때문이다. 무극 “아리랑꽃”의 시작단계에는 스토리도 없었다. 김시인은 무극의 줄거리를 세우는데에만 넉달이란 시간을 로심초사했다. 무슨 일이나 하면 반드시 최고로 한다는 배짱과 포부가 있었기에 그만큼 시작이 어렵고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전반 무극의 흐름인 스토리를 내오고나서는 선의 이미지로 력사와 성장을 말하고 색갈의 이미지로 정서를 말하면서 전통에서 현대를 결합하는 중국조선족무용의 첫시작을 내건것이 바로 “아리랑꽃”이 관중들의 심금을 울리는 최고의 무극으로 만들어질수 있은 조건이였다고 김시인은 강조했다. 그동안 “아리랑꽃”의 창작과정에 얼마나 많은 수정과 연구 그리고 실험과 연습이 반복되였는지 모른다. 세부적인 스토리를 중요시하는 김영건시인은 무극에서 작은 세부도 놓치지 않고 의미를 담기에 노력했다. “아리랑꽃”을 보면 매 장절마다 주제시가 몽땅 들어가있다. 무대에 오르는 자막마저도 고풍스럽고 고급스럽다. 원 연변주당위 선전부 부부장인 채영춘선생이 자막을 썼다고 한다. 김영건시인은 전통에서 현대로 나가는 력사를 알리는 스찔이 중요하다면서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특히 김시인은 텔레비죤방송국에서의 사업경력이 없었다면 시와 무용의 화합을 이루어내지 못했을것이라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대형무극“아리랑꽃”의 주요 출연진 김영건시인은 무극 “아리랑꽃”의 총연출인 김희안무가는 전통으로부터 우리의 민족적인 정서와 현대적감각을 살리는데는 최고의 안무가라고 말했다. 어쩌면 그가 전반 “아리랑꽃”의 무용언어에서 내심을 끄집어내는 무용의 현대성을 알리는 시작을 연변에서는 처음으로 보여주고있다는 평가이다. 대형무극 “춘향전”, 무용시극 “장백의 정” 등 무극음악의 최고1인자인 작곡가 박서성선생의 심금을 울리는 아름답고 장쾌한 음악도 빼놓을수 없다고 한다. 3년간의 각고의 노력끝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직 우리 민족 예술의 발전을 위해 묵묵히 기여하고 로고를 아까지 않은 무극“아리랑꽃”의 전반 스탭진과 출연자들의 심혈과 로고가 오늘날의 아름다운 무극 “아리랑꽃”을 이 세상에 태여나게 했다는 소개이다. 김영건시인은 우리 전통에서 무극력사의 과거를 깨고 무형문화유산에 기초해서 만든 무극“아리랑꽃”은 현대인들의 심안에 새로운 우리 민족의 무극력사로 길이 남을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시인은 특히 요즘들어 1위를 달리고있는 “아리랑꽃” 투표에 적극 참여하고 지지와 성원을 아끼지 않고있는 고마운 사람들이 바로 “아리랑꽃”의 진정한 출연자들이며 공로자들이라고 말했다. 김시인은 “우리 민족은 위대하다.” 면서 “‘아리랑꽃’투표로 낯도 코도 모르는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똘똘 뭉쳐 1위 창조의 기적을 이뤄내는것을 보면 정말 놀랍다.”고 말했다. 김시인은 “우리가 보여준 기적처럼 우리들이 지혜와 힘을 모은다면 그 어떤 신화라도 당당히 만들어낼수 있는 우리는 바로 자랑찬 중국조선족”이라고 당당히 말했다. 길림신문 안상근기자
475    [쉼터] - 올림픽 뒷이야기 댓글:  조회:4864  추천:0  2016-08-17
    2016년 리우 올림픽이 개막했다. 올림픽은 전세계인들의 축제의 장이며   선수와 국민들이 함께 울고 웃는 축제이다.   올림픽에 관해서 이색적인 이야기들을 알아봅시다.   "우리나라 올림픽 메달의 '최초'의 역사"   "올림픽 감동 실화"   "기대되는 올림픽의 선수들"   우리나라 올림픽 메달의 '최초' 역사           대한민국 최초의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누구인지 아시나요?   이 감동적인 이야기는 대한민국 해방 이전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1936년의 독일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손기정 선수와 남승룡 선수는 나란히 금메달과   동메달을 목에 걸게 됩니다. 많은 분들이 알다시피   두 선수는 올림픽 공식 기록에서 국적이 일본으로   되어있습니다. 이유는 일제강점기의 시대였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해방 이후에 대한민국 이라는 국가로   올림픽의 최초 메달을 딴 선수는   누구일까요? 그때는 1948년 영국 런던 올림픽.   복싱의 한수안 선수, 역도의 김성집 선수가   최초 메달의 주인공이었습니다.   두 선수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이름을 달고   첫 출전했던 런던올림픽에서 나란하게   우리나라 최초의 동메달을 선물해주었습니다.   [사진=자랑스러운 대한민국 복싱의 한수안 선수 경기중]     당시 올림픽 경험이 없었던 우리나라 선수단 이었지만,   역도의 김성집 선수는 두번째 날의 경기에서   동메달을 차지하게 되며 올림픽 무대에서   최초로 태극기를 휘날리며 다녔습니다.   김성집 선수에 이은 복싱에서도 좋은 메달소식이   들렸습니다. 바로 복싱 플라이급에서   동메달을 따게 된 한수안 선수, 그리고   한수안 선수에게는 웃기고도 슬픈 뒷이야기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경기내내 한수안 선수는   이탈리아 반디넬리 선수와 준결승전을 치르던   중이었습니다. 당시 양쪽 고막에 부상을 입은   한수안 선수는 경기시간을 잘못 듣고서   잠을 자다가 경기 시작 전에 허겁지겁   출전하게 되었죠. 결과적으로는 판정패를   받게되었지만, 동메달 결정전에서 분투해서   감격의 동메달을 따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메달을 알게 되었고   이쯤되면 대한민국 최초의 금메달과 은메달의 주인공은   누구일지 궁금하시지 않나요?   최초의 은메달 먼저 알려드리겠습니다.   1956년 호주 멜버른 올림픽에서   참가했던 복싱 송순천 선수 입니다.   당시에 호주 선수들과 겨룬 스파링에서   경량급 밖에 안되는 송순천 선수가   헤비급 선수를 다운 시켜버린 것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었죠.   송순천 선수는 결승전에서도 좋은   페이스로 월등한 실력을 보이면서 우세를   이어갔지만, 편파판정으로 인해서   판정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대회 이후에   금메달을 딴 독일의 베렌트 선수는   송순천 선수에게 말하길,   "그 날의 결승전, 당신이 이긴 게임이다."   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편파판정을 받은 것은 너무 아쉽지만   송순천 선수의 은메달은 대한민국   우리나라 최초의 은메달로   영광스럽게 기록되었습니다.   [사진 = 올림픽 당시 송순천 선수]   그리고 기대하시던 대한민국   우리나라 최초의 금메달의 주인공은 바로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 참가했던   레슬링의 양정모 선수 입니다.   양정모 선수는 제베그 오이도프(몽골)와   존 데이비스(미국) 선수들과 겨뤄서   가장 적은 벌점을 받고 금메달을 따냈습니다.   우리나라의 최초의 금메달인 만큼   그때의 감동은 정말 상당했다고 합니다.   당시에 각 방송사들은 긴급 뉴스로   대한민국 금메달 소식을 전하며   신문에서는 호외를 발행해서 모든 국민들이   우승의 기쁨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또, 개인종목의 메달 이외에도   '특별'한 최초의 메달을 가진 종목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한국여자배구"입니다. 여자배구 대표팀은   1976년에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구기종목 최초로 올림픽 메달을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한국은   조혜정, 유경화, 윤영내, 정순옥, 유정혜, 백명선, 변경자   선수 등이 주전이 되어서 구기 종목에서의 최초로   값진 동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사진= 대한민국 88올림픽]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열렸던 1988 서울 올림픽에서는   최초의 메달을 거머쥔 종목이 있습니다.   바로 기계체조의 세부종목에 속하는   '도마'종목 입니다. 도마의 박종훈 선수는   국내에서 최초로 개막한 올림픽에서   '도마' 최초로 첫 메달을 획득한   영광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올림픽은 영화보다 영화 같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을 기억하시나요?   당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게되었던 명승부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여자핸드볼' 결승전 입니다.   결승전에서 맞 붙게 된 대한민국 대표팀과   덴마크의 대표팀은 본 경기에서 동점을 기록하면서   연장전에 또 재연장전 까지 갔습니다.   결국 '승부 던지기'를 하게되고 두시간이 넘어가는   긴 시간 동안 접전을 펼치게 됐습니다.   [사진= 영화 "우리 생에 최고의 순간" 스틸컷]   접전끝에 결국 은메달을 따게 됐지만,   그 어떤 경기보다도 치열했고 열정적이었던   여자핸드볼 대표팀의 투혼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습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당시에 국내 핸드볼   실업팀수는 덴마크는 1035개   대한민국은 고작 5개 였습니다. 훈련 환경이   당연히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자핸드볼 대표팀 선수들은   최고의 승부를 보여주었고 국민들에게   뜨거운 감동을 선물 했습니다.       < 올림픽 비인기 종목, 설움을 이긴 '국가대표' >   올림픽이 열릴때마다, 뜨거운 관심을 받게되는 선수가   있는 반면에, 비인기 종목의 선수들은   메달을 따야만 관심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영화 '국가대표'는 동계올림픽에서 비인기 종목이던   '스키점프' 선수단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입니다.   2002년 동계 올림픽의 유치가 실패하며 스키점프   선수단은 해체 되기도 하며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선수들은   꿈을 잃지 않았으며, 영화에 보면 나오듯이   아르바이트도 병행하면서 훈련비를 벌며   열악한 훈련 환경들을 새로운 훈련법으로   대체하면서 훈련했다고 하네요. 오직   꿈을 이루기 위해서 끝까지 포기안했던   선수들의 열정과 집념은 많은 선수들에게   감동을 안겨주었습니다.  
474    [쉼터]- 올림픽 정신- 운동화는 필요 없다... 댓글:  조회:6482  추천:0  2016-08-15
운동화 찢기자 '맨발'로 질주…에티오피아 선수의 투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여자 육상경기에 참여한 에티오피아의 한 선수가 레이스 도중 넘어졌음에도 국제육상경기연맹의 판독 덕분에 결승전에 나갈 수 있게 됐다.  지난 13일(현지시간) 미국 피플지 등 외신들에 따르면 에테네쉬 디로(25)는 이날 리우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열린 여자 3000m 장애물 달리기 예선 3조 경기에 출전했다.  1000m를 3분9초52에 끊으며 가뿐하게 질주하던 디로. 하지만 다음이 문제였다. 디로의 뒤에서 쫓아오던 선수가 앞으로 넘어지면서 아무 탈 없이 달리던 그까지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만 것이다.      다시 일어나 뛰던 디로는 뭔가 허전했고, 오른발에 신고 있던 운동화가 찢겼다는 것을 알게 됐다.     디로는 운동화와 양말을 모두 벗고 맨발로 트랙을 달렸다. 그러나 저만치 앞서간 선수들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승선 통과 기록도 9분34초70. 본인의 개인 최고 기록보다 20초 이상 늦은 것이었다.  결국 디로는 24위로 예선을 통과하지 못했다. 허탈함에 디로는 눈물만 펑펑 쏟았다.  경기가 끝난 뒤 국제육상경기연맹은 비디오 판독으로 디로의 충돌 상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그에게 결승 출전권을 주기로 결정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함으로써 많은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던 디로는 결승에서 후회 없는 레이스를 다짐하고 있다.  /김동환 기자
473    [쉼터]- 넘어지고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우승... 댓글:  조회:4680  추천:0  2016-08-15
[Rio2016] 소말리아 난민 출신 英 패라, 육상 1만m 2連覇 '역전 드라마' 3600m 구간서 발 걸려 나뒹굴어… 코치에 엄지 척… 완주 사인 보내 난민캠프 지내다 8세 때 英으로 "기근 시달리는 소말리아 도울 것"   모하메드 패라가 14일(현지 시각) 남자 육상 1만m 결승 경기에서 결승선을 통과하며 머리 위로 양손을 모아 팔로 하트 모양을 만드는 모습(사진 위). 패라(붉은 점선 안)가 경기 도중 발에 걸려 넘어지는 모습(사진 아래). /연합뉴스·BBC 캡처 육상 중장거리 최강자 모하메드 패라(33·영국)가 14일(현지 시각) 남자 1만m 육상에서 넘어지고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우승했다. 2012년에 이은 올림픽 2연패다. 불운과 역경을 딛고 끝내 승리한 패라의 달리기는 그의 인생과 닮았다. 패라는 소말리아에서 태어났지만 내전으로 집을 잃고 난민 텐트에서 자랐고, 8세 때 아버지와 단둘이 전쟁을 피해 영국에 왔지만 당시 할 줄 아는 영어라곤 "화장실이 어디냐"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역경을 딛고 올림픽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다. ◇나뒹군 뒤 용수철처럼 일어나 '따봉' 선두그룹(1~5위)으로 3600m 구간을 통과하던 패라는 친구이자 훈련 파트너였던 게일런 럽(30·미국)의 다리에 걸리며 트랙에 나뒹굴었다. 오른쪽 어깨가 땅에 먼저 닿으며 크게 한 바퀴 앞으로 굴렀고, 뒤따르던 선수들이 패라의 얼굴과 몸을 밟을 뻔한 아찔한 사고였다. 하지만 패라는 용수철처럼 다시 일어나 달렸다. 그사이 순위는 17위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패라는 코칭스태프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완주할 수 있다'는 사인이었다.   결승선까지는 15바퀴 정도가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한 바퀴(400m) 만에 7명을 제친 패라는 이후로도 차분히 한 사람씩 따라잡아 6000m 구간을 3위로 통과했다. 마지막 두 바퀴를 남겨두고 선두로 치고 나간 패라는 200m를 남겨두고 이날 은메달을 차지한 타누이 폴(케냐)에게 한 차례 역전을 허용했으나 70m를 남긴 곡선 주로에서 다시 앞질러 결승선을 맨 먼저 통과했다. 27분05초17로 2위와 0.47초 차였다. 패라는 결승선을 통과할 때 양손을 머리 위로 모아 팔로 하트를 그렸다. 그 뒤 절하듯 머리를 트랙에 대고 두 팔로 'M자'를 만드는 그의 트레이드마크 '모봇(Mobot)' 세리머니를 선보였다. 패라는 경기 후에 기자들과 만나 "넘어지면 일어나면 된다. 스스로 당황하지 말자고 말했다. 그리고 그저 그 생각대로만 했다"고 말했다. ◇'소말리아 난민'에서 '달리기 영웅'으로 패라는 1983년 아프리카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은행원이었고 아버지는 IT 전문가였던 터라 비교적 풍족한 환경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 말 모가디슈에서 쿠데타가 벌어지자 패라 가족은 집을 잃었고, 모가디슈 인근 지부티의 난민 캠프로 거처를 옮겼다. 모국을 떠나기로 결심한 패라의 아버지가 먼저 영국으로 건너갔고, 패라는 영국에서 귀화가 준비되기까지 2년을 난민 캠프에서 지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8세 때 영국에 온 패라가 할 수 있었던 말은 "실례합니다" "화장실이 어디입니까" "이리 와" 세 마디뿐이었다고 한다.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패라는 운동으로 이를 극복해나갔다. 한때 축구 선수를 꿈꿨지만 2001년 유럽주니어선수권대회에서 5000m 금메달을 따내며 중장거리 육상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이후 케냐와 에티오피아가 석권하던 5000m와 1만m 중장거리 육상에서 세계육상선수권대회 5000m 금메달(2011년)을 따냈고, 런던올림픽에선 5000m와 1만m 2관왕을 달성했다. 리우올림픽 1만m 금메달을 목에 건 패라가 오는 21일 열리는 남자 5000m에서도 우승하면 올림픽 중장거리 2관왕 2연패라는 대기록 을 작성한다. 이 기록은 1976년 라세 바이렌(핀란드)이 달성한 후로 40년간 아무도 달성한 적이 없다. 패라는 이번 올림픽이 끝나면 모국 소말리아를 위해 봉사 활동에 나서기로 했다. 자신의 별명을 따서 만든 '모(모하메드) 패라 재단'을 통해 물 부족과 기근에 시달리는 소말리아를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다음 달 1일 첫 기금 모금 행사를 벌일 예정이다.  
472    [쉼터]- 위대한 작곡가와 "9의 징크스" 댓글:  조회:5721  추천:0  2016-08-13
  ​위대한 작곡가에게는 '9의 징크스'가 있다 ​     ​베토벤·슈베르트·브루크너 등 교향곡 9곡 남기고 목숨 잃어 17세기 오페라 반주였던 '심포니', 청중 요구에 맞춰 악기만 합주 하이든이 '4개 악장' 형식 갖췄죠 ​ ​      벤의 '운명' 슈베르트의 '미완성' 드보르자크의 '신세계'…. 클래식 음악이라고 하면 쉽게 떠오르는 이 작품들은 모두 교향곡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요.    스트라가 출연하는 대규모 음악회에서는 이런 교향곡을 반드시 한 곡은 연주한답니다. '교향곡(交響曲)'은 영어 '심포니(symphony)'를 번역한 말인데,    니는 '소리의 조화' 또는 '연주회'를 뜻하는 그리스어 '심포니아(symphonia)'에서 유래한 단어예요.   세기 말까지 유럽에서 심포니는 '함께 소리를 낸다'는 뜻이 있었다고 합니다. 즉 여러 악기가 함께 연주되는 '합주'를 가리키는 말이었어요.    처럼 '오케스트라가 조화로운 합주를 하는 클래식 작품'이라는 뜻을 갖게 된 것은 17세기 초부터라고 합니다. ◇오페라의 반주였던 '심포니'   만 17세기 초 유럽에도 지금 같은 거대한 오케스트라는 없었어요. 그저 음역이 높고 낮은 다양한 악기가 모여 합주하는 정도였죠.    합주는 주로 성악곡의 반주나 오페라의 배경음악으로 활용되었다고 해요. 그러다 성악가들이 쉬는 틈이나 오페라 막간에 관객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만 합주하는 '심포니'가 등장했다고 해요.    데 오페라보다 오히려 심포니를 더 재미있어하는 관객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자 오페라나 성악가의 콘서트가 아니라 심포니만을 연주하는 음악회도 생기기 시작했답니다.    스레 작곡가들도 이런 청중의 요구에 맞추어 '심포니'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게 바로 교향곡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어요.     만 이때 만든 심포니도 엄밀한 의미에서 교향곡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짤막하게 만든 합주 음악을 모아놓다 보니 악장이 너무 많고 중간중간에 춤곡을 많이 넣어 산만한 '댄스 메들리'처럼 들리는 작품이 많았어요.   이때 등장한 사람이 바로 '교향곡의 아버지' 요제프 하이든이에요.   하이든을 '교향곡의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이렇게 뒤죽박죽이던 교향곡을 어떻게 만들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제시했기 때문이죠.    든은 '교항곡의 악장은 넷이어야 한다'고 정하고 1악장은 소나타 형식, 2악장은 템포 느린 곡, 3악장은 세 박자로 된 춤곡,   4악장은 템포 빠른 곡으로 지어야 훌륭한 심포니가 될 수 있다고 믿었어요. 하이든은 이런 기준에 따라 직접 교향곡 104곡을 작곡했는데,    이 작품들이 비로소 초창기 심포니와 구별되는 '교향곡'이라고 할 수 있어요. ◇위대한 작곡가의 '교향곡 아홉수'   하이든이 교향곡 시대를 열자 천재적 작곡가들이 뒤를 이어 훌륭한 교향곡을 쏟아냈어요.   '불후의 천재' 모차르트는 35년이란 짧은 생애에 41곡을 남겼어요. 베토벤은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장점을 골고루 흡수해 자신의 독창성을 불어넣은 교향곡을 9곡 지었는데,    이 작품들은 지금도 위대한 걸작으로 일컫는답니다.     ▲ 왼쪽 상단부터 시계 방향으로 베토벤, 드보르자크, 슈베르트, 윌리엄스예요. 위대한 작곡가로 불리는 이들은 공교롭게도 4명 모두 죽기 전까지 교향곡 9곡을 남겼어요. /Getty Images / 이매진스·위키피디아        베토벤 이후 낭만주의 시대를 살았던 작곡가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베토벤의 교향곡을 능가하려고 애썼어요.   베토벤을 너무나 사랑했던 슈베르트는 베토벤의 교향곡과 비슷한 작품들을 작곡한 반면,    멘델스존이나 슈만 같은 작곡가들은 오케스트라의 다채로운 음색을 부각해 낭만적 정서를 강조한 교향곡을 지었어요.    프란츠 리스트는 교향곡 형식을 조금 부드럽게 한 '교향시'라는 장르를 새롭게 만들기도 했답니다.    안톤 브루크너와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은 지금도 세계적 지휘자의 내한 공연이나 명성 높은 오케스트라 공연 때 단골처럼 등장합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였던 두 사람은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위한 웅장한 교향곡으로 유명해요. 말러의 8번 교향곡이 처음 공연됐을 때에는    연주자가 무려 1000명 동원되기도 했답니다. 그래서 말러의 8번 교향곡을 '1000명의 교향곡'이라 부르기도 해요. 한편 음악계에서는 "위대한 작곡가는 교향곡을 10곡 이상 지을 수 없는 '9'의 징크스가 있다"는 말이 있어요.   브루크너를 비롯해 베토벤과 슈베르트, 드보르자크, 본 윌리엄스 같은 훌륭한 작곡가들 모두 교향곡 9곡을 작곡한 뒤 세상을 떠났어요.    말러도 10번 교향곡을 완성하지 못하고 1악장 악보만을 남긴 채 숨을 거두어 '9의 징크스'를 벗어나지 못했답니다.    하지만 '9의 징크스'가 모든 작곡가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에요. 20세기 러시아의 위대한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소련 공산주의 정권의 검열과 탄압에도 교향곡을 15곡 남겼고, 그의 선배 격인 니콜라이 먀스콥스키도 무려 27곡을 남겼답니다. ◇교향곡의 부제에는 비밀이 숨어있다   처음 교향곡을 접할 때에는 우선 제목에 흥미가 가는 교향곡부터 들어보는 것이 좋아요.    유명한 교향곡은 그 특징을 잘 보여주는 부제가 붙어 있어서 곡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답니다.    예를 들어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은 교향곡이 갖춰야 할 네 악장 중 1·2악장만이 남아있고    3·4악장의 완성된 악보가 발견되지 않아 '미완성'이라는 부제가 붙은 것이에요. 베토벤의 '5번 교향곡'은 베토벤이 1악장 첫 부분을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고 표현한 것을 계기로   '운명 교향곡'이라 부르게 된 것이랍니다. =======================================      `말러`도 못 피한 교향곡 9번의 징크스 말러는 왜 교향곡 9번의 작곡을 무서워했을까?    “그의 머리는 온통 일로 가득 차 있었고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면 화를 내었다... 나는 자신의 의지와 존재를 이미 포기했다. 그의 천재성은 나의 존재를 소모시켰고 나는 마치 줄에 묶여 끌려다니는 것처럼 균형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그는 그조차 몰랐다. 그에게는 작곡, 오직 그것 뿐이었다.” 오스트리아의 풍경화가 안톤 쉰틀러의 딸이자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부인이었던 알마 말러가 1902년 23살의 나이로 마흔 살이 넘은 말러와 결혼한 지 10년쯤 되던 시기에 남긴 글이다. 말러는 이 무렵 부인 알마가 나중에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이 되는 한 건축가와 가까워지자 젊은 아내를 잃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프로이트를 찾아 상담하는데 프로이트는 말러가 몇 마디 대화를 통해 자신의 정신분석학의 원리를 즉각 이해하는 천재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말러도 못 비껴간 교향곡 9번의 징크스     말러는 타고 난 천재이자 천재 특유의 신경증적 성향을 지닌 정서불안자였다. 유대인으로서 오스트리아의 소수 민족 중에서도 아웃사이더였던 말러는 어린 시절부터 인종적 차별로 인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또한 격렬한 성격의 독학자인 아버지와 교양 있는 집안의 섬세한 여성이었던 어머니의 끊임없는 갈등, 특히 아내에 대한 열등감을 육체적 학대로 보상받으려 한 아버지의 난폭함은 그로 하여금 아버지를 경멸하고 어머니에 대한 애착을 병적으로 갖게 했는데 나중에 그를 상담한 프로이트는 놀랍게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정확한 진단을 내린다. 14명이나 되는 말러의 열네 남매들 중에서 여섯 명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항상 앓거나 병들어 죽었으며 특히 막내는 자살까지 하는데 이같은 가족력은 죽음에 대한 말러의 남다른 공포를 이해하게 한다.     베토벤은 제9번 교향곡 ‘합창’까지 모두 9곡의 교향곡을 작곡했다. 슈베르트 또한 교향곡 8번을 ‘미완성’인 채 남겨두고 9번까지 작곡하고 세상을 등졌다. 어디 그 뿐인가. 브루크너와 드보르작 역시 교향곡 9번까지만을 남기고 떠났다. 교향곡 8번을 작곡한 후 말러는 “9번을 작곡하면 나도 죽는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사실상 교향곡인 다음 작품을 ‘대지의 노래’라고 이름 붙였다. 이후 9번 교향곡을 작곡하고 제10번 교향곡을 작곡하면서 “이제 겨우 위기는 사라졌다.”고 말했지만 그는 9번 교향곡의 초연 연주도 듣지 못하고 10번 교향곡을 완성하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만다. 그토록 9번 교향곡 징크스를 두려워하며 그로부터 도망치려 했던 말러도 결국 9번 징크스의 또다른 주인공이 된 셈이다.        거듭되는 실패, 그러나 계속되는 작곡     1888년 5월에 라이프치히 극장 일을 그만 둔 말러는 자신의 교향곡 제1번을 라이프치히에서 연주하고 싶어했지만 초연은 그의 부다페스트 시절 필하모니 협회의 연주회에서 이루어졌고 결과는 완전한 실패였다. 청중들은 야유를 퍼부었고 평론가들은 작곡가가 자신들을 조롱하고 있다고까지 여겼다. 첫 악장의 반응은 아주 나쁘지 않았지만 극장이 떠나갈 정도로 시끄럽게 울려대는 마지막 두 악장들을 청중들은 참지 못했다. 자신의 작품을 처음으로 지휘한 말러는 교향곡 1번의 초연 이후 친구들을 멀리 할 정도로 완전히 실의에 빠졌다.     이후 교향곡 2번의 작곡까지에는 무려 7년이나 걸렸다. 2번의 초연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주선으로 베를린의 필하모닉 콘서트장에서 1895년 3월 4일에 이루어졌다. 말러가 직접 지휘했지만 연주장은 절반 밖에 차지 않았고 비평가들의 평 또한 부정적이었다. 그로부터 9개월 후 함부르크의 부유한 후원자의 도움으로 그는 다시 한 번 베를린에서 연주하게 된다. 비록 표가 예매되지 않아 초대권을 남발했지만 청중들의 반응은 고무적이었다. 비평가들은 여전히 까다롭게 굴었으나 지휘자 아르투르 니키쉬, 펠릭스 바인가르트너, 작곡가 엥겔베르트 훔퍼딩크 같은 지지자들도 등장하였다. 그 뒤 말러는 실뱅 뒤퓌의 초청으로 리에지의 누로 콘서트에서 이 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1900년의 겨울 뮌헨 연주는 마침내 말러를 유명한 작곡가로 만들어 놓았다. 자신을 음악가 반열에 올리게 된 이 곡을 그는 1907년 비인에서 이별을 고할 때 그리고 1908년 뉴욕과 파리에 자신을 소개할 때 선택하기도 했다.     교향곡 3번의 초연은 1897년 3월 9일 베를린에서 열렸는데 대개의 말러의 작품 초연이 그랬듯이 역시 청중들의 야유로 끝났다. 비평가들 또한 적대적이어서 그 다음날 이들에 의해 말러는 '음악적 코미디언', '최악의 농담꾼'으로 묘사되었다. 이로부터 5년 후 1902년 6월 그의 교향곡 4번 전곡이 리네란트에서 연주되었는데 이번에는 비평가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했던 마지막 악장의 주제인 '사랑'의 힘이 승리를 거두어 비평가들이 '베토벤 이후 가장 아름다운 느린 악장'이라는 평가를 내릴 정도로 완전한 성공을 거두었다. 1904년 쾰른에서 자신의 지휘로 교향곡 5번을 초연한 말러는 스스로 “이 곡은 저주받은 작품이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 이 작품이 50년 후에 초연되었더라면 좋았으련만.”이라고 말한다.     그의 교향곡 중 초연에서 성공하고 호평을 받은 것은 1910년 8월 뮌헨에서 연주된 제8번 교향곡이 최초라고 할 수 있다. 말러의 교향곡은 지금도 여전히 음악 애호가들로부터 호평과 악평을 번갈아 듣는다.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명확히 구분되는 말러의 음악... 지금도 쾰른에서는 해마다 말러의 교향곡이 끊임없이 연주되고 있으니 그의 음악은 말러 자신의 말대로 50년 후는 아니었을지라도 100년 후에야 비로소 이해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빈 오페라의 황금시기를 이끌다     대부분의 음악가가 그랬듯이 말러 또한 작곡가이자 위대한 지휘자였다. 위대한 지휘자들의 경우 대체로 독재적 성향이 있지만 말러의 경우는 거의 광적인 수준이었다. 지휘봉을 잡는 순간 그는 작곡자보다 자신이 작품을 더 잘 알고 있다는 신념으로 작품을 해석하는 확신에 찬 이상주의자로 자신은 물론 단원들에게 완벽함을 요구했고 지칠 줄 모르는 정력으로 단원들을 몰아부쳤다. 말러 해석자인 브루노 발터는 지휘봉을 잡은 그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어쨋든 그는 거기에 그렇게 버티고 서 있었다... 그는 환상소설을 탐독한 소년들만이 상상할 수 있는 흥미롭고 마(魔)가 낀, 또한 사람을 위축시키는 악장 크라이슬러의 화신이었다.”     말러는 원하는 음악을 완벽히 만들어낸다는 목적 외에는 모든 것을 버렸다. 음악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되면 예술가들을 언제든지 해고했고 기량이 모자라는 단원은 따로 세워두고 솔로로 연주시켜 모욕을 주었다. 한마디로 그는 적을 만드는 데에는 타고 난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같은 말러를 모함하려는 온갖 모략에도 불구하고 그는 1898년부터 1907년까지 만 10년간을 오스트리아 빈 궁정극장 오페라단의 상임지휘자로 꿋꿋하게 버티는데 역설적으로 이 시기를 지금 ‘빈 오페라의 황금시기’라 부르고 있다. 빈 궁정극장 오페라 디렉터로서의 말러의 업적은 새로운 레퍼토리의 괄목할만한 증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당시 확립된 대가들의 오페라를 완벽한 공연수준으로 한 단계 끌어올린 데 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1903)’ ‘피델리오(1904)’ ‘돈 조반니(1905)’ ‘후궁으로부터의 도피(1906)’ ‘피가로의 결혼(1906)’ ‘마술피리(1906)’ ‘아우리데의 이피게니아(1907)’ 등 이른바 빈 오페라의 황금기에 말러의 손을 거쳐 다듬어진 오페라는 지금까지도 최고의 완벽한 공연이라 평가되고 있으니 지휘자이자 무대연출가로서의 재능 또한 가히 천재적이라 하겠다.     1910년과 1911년에 걸쳐 미국을 순회하며 개최한 65회의 공연 중 48회를 직접 지휘할 정도로 열정을 쏟아부은 말러는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카네기홀로 달려가 휴식시간에 잠시 정신이 혼미해지는 와중에도 다시 일어나 나머지 곡을 모두 지휘하는데 이것이 그의 생애 마지막 콘서트였다. 그로부터 3개월 후 빈으로 귀향한 말러는 1911년 5월 18일, 폭풍우가 몰아치는 한 밤중에 숨을 거두었다. 임종 직전에 그는 초점을 상실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손가락 하나로 지휘하는 시늉을 했는데 눈가에는 미소를 머금고 입으로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모차르트’라는 말이 두 번 새어나왔다. 죽음의 문턱에서조차 미소를 잃지 않는 일생이야말로 진정 행복한 일생이 아닐까. . . .   말러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였다는 건 몰랐던 사실인데, 당시 그의 주변상황들로 보아서 프로이트가 제대로 찝어낸 것 같긴하네요. 읽다보니 왠지 감동스럽다는. ^ㅡ^; ====================================================== ====================================================== 베토벤 에피소드~  어린 시절 베토벤은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궁중지휘자였는데 술주정뱅이에다 난폭했다고한다. 아들을 모짜르트처럼키우고 싶은 욕심때문에 매질도 서슴치않고했다한다. 어린 베토벤은 개구장이에다 골목대장이였는데 그래서 얼굴에 흉터가 많았다고.베토벤은 살짝 곰보에다 키는 160정도인데 어깨는 넓어서 친구들이 '몽골대왕'이라는 별명을. 성미가 급하고 다혈질이라 툭하면 친구들에게 주먹질. - 베토벤이 만난 작곡가들 어렸을때 모짜르트를 한번 알현(?)하고 피아노를 연주했는데 모짜르트는'그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베토벤이 Bach를 만나서는 (직접 만난건 아니고 음악을 접하고는..) '당신은 Bach가 아니라 Merr다'고말했다.(독일어로 Bach는 시냇물, Merr는 바다란 뜻) 비유를 제대로 한셈이다. 당시 빈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었던 로시니는 말년의 베토벤의 하숙집에서 그를 만났는데, 베토벤은 세빌리아의 이발사같은 좋은 곡을 많이 작곡하라는 덕담을 했다.후에 로시니는 자기처럼 별볼일 없는 작곡가는 가슴에 훈장을 달고 유복한 생활을 하는데 이 위대한 음악가는 어떻게 저렇게 궁핍할수 있느냐며 가슴아파했다. 또 후에 로시니는 베토벤을 위해 귀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슈베르트는 베토벤의 장례식때 관을 매고 장례행진을했다. 또 베토벤을 해부할때 슈베르트가 옆에서 지켜보기도 했다. - 베토벤의 피아노 레슨 베토벤은 신세진 귀족들의 자제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곤 했는데, 맘에 안들면 30cm자로 손등을 내려치기도. 심하면 어깨를 물어 뜯은 적도있다한다. 요하임이란 독일 음악학자의 견해로는 베토벤이 자기가 어렸을때 혹독하게 당한 체험을 복수하는 것이라고. 유달리 친절히 대해준 제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피아노 교본 체르니로 유명한 체르니란 사람이다. 체르니는 뛰어난 피아노 실력이 있었지만 넘 내성적인 성격이라 연주회를 거의 갖지않았다고한다. - 일상생활 베토벤은 새벽 5시면 일어나서 작곡을 시작하는 부지런한 아침형인간. 촛불의 심지를 자르는 시커멋게 그을린 가위로 식사후에 이를 쑤시는 습관. 칸트철학에 심취. "하늘엔 빛나는 별. 가슴엔 실천이성"이라 어디엔가 써놓기도.베토벤의 IQ를 추정한 수치는 140정도. 하지만 수리계산력은 0점인 듯. 홀애비 베토벤은 가계부를 직접 꼼꼼하게 적었는데, 169 곱하기 3을 169+169+169 하는 식으로 계산. 더구나 그 합도 틀렸다. - 베토벤과 조카 Karl 동생의 아들인 Karl을 놓고, 조카의 생모인 재수씨와 양육권 다툼으로 귀족법정에서 재판을 벌이기도.하지만 베토벤이 평민이라는게 들통나서(아마 귀족행세를 하고 다닌 모양이다)기각되었다. Ludwig Van Beethoven에서 중간의 Van이 독일에서는 귀족처럼 인식되지만(베토벤의 조부는 네델란드인. 따라서 베토벤은 네델란드계)당시 네델란드에서는 Van은 평민도 사용했다고한다. 귀족법정에서는 평민의 소송은 아예 취급하지 않아서 기각. 괴팍한 숙부에게 도망쳐서 엄마에게 가기도 여러번했다한다. 무슨 이유에선지, 좀 커서는 권총자살을 기도했지만 상처만입고 죽지는 않았다고한다.이 사건으로 베토벤은 상심이 컸다한다. 베토벤은 조카 Karl에 대단한 애정과 집착을 보인다. 이 비정상적인 관계를 상상해낸게 게리 올드만이 주연한 '불멸의 연인'이란 헐리우드 영화다. 베토벤의 연애편지 중 불멸의 연인이라 명명한 여성을 추적하는데, 결론은 그녀가 바로 베토벤 친동생의 아내라는거다. 영화는 조카 Karl이 베토벤이 친동생의 아내와 부적절한 관계로 낳은 베토벤의 아들이라는 설정이다. 조카도 되고 아들도되는...(정말 기분 나쁜 영화다) 어쨋든,악성의 조카인 Karl은 음악적 재능은 거의 없었다고한다. - 베토벤과 신틀러 베토벤의 숭배자인 신틀러란 사람이 무보수로 개인비서처럼 자원봉사하기도했다. 하지만 베토벤에게는 푸대접을 받았고 업신여김을 당하기도했다. 이 신틀러란 사람은 베토벤이 죽은 후에 생전의 베토벤을 증언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베토벤 전기의 스탠다드로 평가받는 로망롤랑의 '베토벤의 생애'는 신틀러의 증언을 토대로 쓰여진것. 하지만 어떤 베토벤 전기학자들은 신틀러가 많은 부분을 왜곡했다는 의심을 하곤한다. 신틀러가 베토벤 일가에게 푸대접 받은 원한으로 조카 Karl과 베토벤의 동생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증언한다는것. - 베토벤의 9개 교향곡과 9번 교향곡 징크스 마지막 9번 합창교향곡 후에 10번을 작곡했는데 1악장만 스케치로 남겨진채, 미완성. 최근에 들어서야 복원. (인터넷 뒤져보면 10번 1악장 들어볼수있음) 베토벤이래 제9번에서 종말을 맞은 작곡가들- 슈베르트, 드보르작, 브루크너,말러... -죽음 사인은 매독이라는 설과 납중독이라는설. 임종땐 천둥과 번개가 치는 날씨였는데, 한쪽 주먹을 불끈쥐어 올리며 "제군들이여 갈채하라. 희극은 끝났다"라는 말을 남겼다. 악성의 최후. 예전에는 로망롤랑의 '베토벤의 생애'같은 고전에서처럼 베토벤을 신으로 추앙해왔지만 요즘은 베토벤의 인간적 본모습 그대로를 만날수있는, 신에서 인간으로 끌어내리려는 추세인것 같다. ============================================= '9'라는 숫자에는 '많다', '완벽에 가깝다'라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지만,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안타깝게도 9번에 얽힌 '저주'(?)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는 바로 베토벤이 남긴 9개의 교향곡에서 비롯됩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향곡 작곡가로 꼽히는 베토벤이 9개의 교향곡만 남긴 이후, 내로라하는 작곡가들이 교향곡을 작곡했지만 어느 누구도 이 위대한 거인이 남긴 교향곡 9번을 결코 넘어설 수 없다는 기이한 징크스이지요. 교향곡을 작곡하는데 평생을 바친 브루크너의 마지막 교향곡 9번은 생전에 베토벤 9번의 짝퉁이라는 비야냥까지 받았던 작품입니다. 브루크너는 신에게 이 곡을 완성하게 해달라고 기원하며 약 10년간이나 작곡에 매달립니다. 하지만 끝내 3악장까지만 작곡해 미완성으로 남았습니다…    
471    [쉼터]- 금메달 12개 = 2000년만에 기록 달성 댓글:  조회:4871  추천:0  2016-08-13
                       [펠프스가 10일 열린 남자 계영 800m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사진=AP 연합뉴스 제공]   아주경제 김아름 기자 =  미국의 ‘수영 황제’ 마이클 펠프스가 기록한 개인전 금메달 12개는 이전에도 한 번 나온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무려 2000년 전이다.  12일(한국시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홈페이지에 따르면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접영 200m 정상에 오르며 통산 개인전 금메달수를 12개로 늘린 펠프스의 기록을 고대 스포츠인 레오니다스 오브 로즈(Leonidas og Rhodes)도 달성한 적이 있다. 레오니다스는 고대 올림픽 육상성수 중 가장 뛰어난 선수로 꼽히는데, 그는 기원전 164년에 열린 올림픽에서 스타디온(192m 달리기), 디아울로스(약 370m 달리기), 호프리토드로모스(무장한 채로 달리기) 종목 정상에 오른 바 있다. 기원전 160년, 156년, 그리고 36세이던 152년까지 올림픽에 연이어 출전한 레오니다스는 같은 종목 3연패를 달성해 총 12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고. 펠프스는 그 기록을 2000년만에 다시 달성한 셈이다.  레오니다스와 펠프스는 기록에서 뿐 아니라 선수로서 재능면에서도 비슷하다. 레오니다스가 잘하는 종목은 서로 다른 기술과 강점을 필요로 한다. 스타디온과 디아울로스는 속도가, 호프리토드로모스는 근육과 인내심이 필요한 종목이다.   
470    [록색평화문학주의者] - 廢지폐의 무한한 변신 댓글:  조회:5148  추천:0  2016-08-13
작년 3조원어치 재활용 韓銀, 소각비용 만만치 않아 재활용업체에 공짜로 넘겨 자동차 바닥 마감재 콘크리트 보강재 등 활용 車 한대에 부착된 방진패드 액면가 400만원 폐지폐 사용   당신의 승용차 바닥에는 지폐 수백만원이 깔려 있을 수 있다. 일부 골프장이나 공원 잔디밭에 수백억원어치 지폐가 흙과 뒤섞여 있기도 한다. 어떤 건물은 아예 콘크리트 벽에 지폐를 채워 넣었다. 모두 폐(廢)지폐다. 매년 수백t의 폐지폐가 재활용 업체를 거쳐 차 바닥 마감재나 잔디 성장 촉진제, 콘크리트 보강재 등으로 쓰이고 있지만,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지폐가 잘게 잘린 뒤 원통 모양으로 압착된 모습(왼쪽)과 이를 사용해 만든 자동차 방진 패드. / 김지호 기자·장련성 객원기자 한국은행이 재활용 업체에 넘기는 폐지폐 분량이 크게 늘면서 그 재활용 분야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2010년 재활용된 폐지폐는 총 415t에 액면가 1조3900억원이었으나 작년 총 560t, 3조3400억원어치로 크게 늘었다. 중량에 비해 액면가가 크게 는 것은 2007년과 2009년 각각 집중 발권한 1만원권과 5만원권 지폐가 수명을 다해 폐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 화성에 있는 A 재활용업체는 폐지폐로 자동차 바닥에 깔리는 방진(防振)·방음(防音) 패드를 만든다. 지폐를 갈아 아스팔트와 혼합해 압착한 뒤 자동차 좌석과 트렁크 바닥 규격에 맞는 패드로 만들면 자동차 공장에서 차 프레임에 붙이게 된다. 섬유질인 지폐가 푸석푸석한 아스팔트 입자 사이를 접착제처럼 연결해 줘 패드가 쉽게 부스러지는 걸 방지한다. 승용차 기준으로 차 한 대에 보통 패드 5㎏이 들어가는데, 이 중 5%인 250g 정도가 폐지폐로 이뤄져 있다. 1000원·5000원·1만원·5만원권 지폐 4종이 골고루 섞였다고 치면 액면가로 약 412만원이 들어간다고 한다. 이 패드의 실제 가격은 차 한 대당 1000원이다. 이 업체가 만든 패드는 현대·기아·쌍용 등 자동차 공장에서 연간 1800만 대의 자동차 바닥에 부착된다. 울산에 있는 B 업체는 연간 200t의 폐지폐를 받아 잔디 성장을 돕는 보조재와 콘크리트 강도를 높이는 보강재를 만들고 있다. 이 회사는 잘게 잘린 폐지폐를 고운 흙처럼 분쇄해 조경업체에 파는데, 조경업체들은 이 지폐 가루를 잔디 씨앗, 비료, 물과 함께 섞어 골프장이나 공원 땅에 뿌린다. 지폐의 섬유질이 수분을 보존하고 강한 햇볕으로부터 씨앗을 보호해 줘 발아를 촉진한다고 한다. 이후엔 거름이 돼 잔디 성장을 돕는다. 2010년까지 폐지폐를 공급받았던 경기 안성의 C 업체는 지폐 분말과 플라스틱을 섞어 연간 수만장의 건물 바닥재를 만들었다. 가로·세로 각각 50㎝인 이 합성 바닥재 한 장엔 지폐만 5㎏이 함유돼 있었다. C 업체 측은 "섬유질인 지폐를 섞으면 플라스틱 강도가 보다 세지는 효과가 있다"며 "서 울 금융감독원 건물을 비롯해 전국 수백 곳 공공·상업 건물에 수십~수백 장의 바닥재를 깔았다"고 말했다. 한국은행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폐지폐를 잘게 잘라 소각하거나 화학공장에서 용해시켰으나 이 비용이 만만치 않자 재활용업체에 무상으로 넘기기 시작했다. 박종남 한국은행 발권기획팀 과장은 "폐지폐를 언제부터 재활용 업체에 넘겼는지는 확실치 않다"고 말했다. ============================ [ 2016년 08월 02일 11시 39분 ]     8월 1일 장가계 제3 유리잔도(玻璃栈道)          
469    대한제국 마지막 皇女 덕혜옹주 - 천재 詩人 댓글:  조회:5156  추천:0  2016-08-13
덕혜옹주의 詩 13편 발견… 前 NHK PD 다고 기치로 韓日 오가며 시 발굴 옹주는 말이 없던 사람 박물관의 초록색 당의 옷이 대신 말하려는 듯해 한국인은 잘 몰라 안타까워 日 근대 유명 작곡가가 옹주가 열살 무렵 쓴 동시 '비'·'벌'에 곡을 붙일 정도 나한테 주어진 길   윤동주의 시에 반해 일본에 알려야겠다 생각… 韓日 공동 다큐 제작도 한국이 왜 좋으냐고? 존경하는 분들이 있기에… 그러니까 나라 사랑보다 사람 사랑이 먼저 다고 기치로(60)씨는 지금까지 덕혜옹주의 시 13편을 발굴했다. 그는 “덕혜옹주의 ‘말’을 더 찾아내 책을 쓰고 싶다”고 했다. 다고씨가 제일 좋아하는 시는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이다. / 이태경 기자 최근 영화로 개봉돼 재조명받고 있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皇女) 덕혜옹주(德惠翁主·1912~1989)는 한 맺힌 77년의 인생을 말이나 글로 거의 남기지 못했다. 유년 시절엔 그럴 자유가 없었다. 1919년 그의 아버지 고종(高宗)이 숨을 거둔 후 일제는 덕혜옹주의 삶을 옥죄기 시작했다. 그는 일본식 교육을 받아야 했고, 열세 살 때는 강제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1945년 광복이 된 후에도 덕혜옹주는 귀국하지 못했다. 조선 황실의 존재에 정치적 부담을 느낀 이승만 정부가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1962년 마침내 조국 땅을 밟았지만, 덕혜옹주는 제대로 말할 수 없었다. 열아홉 살 때인 1931년, 일제에 의해 대마도 백작과 정략결혼을 할 때쯤부터 앓아온 조현병(정신분열증)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한때 고종의 집무실로 쓰였던 창덕궁 낙선재(樂善齋)에서 지내다 1989년 숨을 거뒀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삐뚤빼뚤 쓴 짧은 낙서가 그가 유일하게 남긴 글로 알려졌었다. 일본인 다고 기치로(多胡吉郎·60)씨가 덕혜옹주의 동시를 찾아내기 전까지는. 일본 공영방송 NHK PD 출신으로, 현재 한국과 일본에서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인 다고씨는 지난 2010년 덕혜옹주가 10대 초반에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어 동시 4편을 발굴했다. 수년간 홀로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찾아낸 성과다. 그는 이를 논문으로 써서 2011년 한국의 한 월간 문예지를 통해 발표했다. 제목은 '비극적 공주의 혼의 외침'이었다. "덕혜옹주 시는 한국의 보물"   1925년 일본 동화잡지 ‘긴노 호시’에 천재 시인으로 소개된 덕혜옹주. 덕혜옹주가 쓴 동시 ‘비’도 함께 나와 있다. / 다고 기치로 제공 지난달 26일 서울 종로구 익선동 한 찻집에서 만난 다고씨는 "모든 게 덕혜옹주의 옷을 본 이후 시작됐다"고 했다. "1980년대 중반쯤 도쿄 한 박물관에 전시된 덕혜옹주의 초록색 당의(唐衣)와 붉은색 치마를 봤어요. 그날 아침에 누가 입었던 것처럼 색깔이 선명했어요. 보자마자 뭔가에 홀린 듯했어요. 덕혜옹주는 말이 없는 사람이었잖아요? 옷이 대신 뭔가 말하고 싶다, 그렇게 전하고 싶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이 찻집은 다고씨가 한국에 올 때마다 들르는 단골집이라고 했다. 찻집 주인은 "이분(다고 기치로) 좀 이상해. 일본 사람이 아닌 것 같아"라고 했다. 다고씨는 못 들은 척 유창한 한국어로 "여기 복분자 빙수 맛있어요"라고 했다. 그러더니 새로 쓴 논문을 쑥 내밀었다. 제목은 '천재 시인으로 불린 덕혜옹주, 그 시 작품으로 더듬는 삶의 궤적'이었다. "동시 4편 외에 추가로 덕혜옹주의 와카(和歌·일본의 정형시) 9편을 발굴해 쓴 논문이에요. 전에 찾은 4편이 덕혜옹주가 한국에서 쓴 시라면, 9편은 일본에 유학 간 후에 쓴 시입니다. 이 논문은 사실 3년 전에 썼어요. 이걸 들고 전에 제 논문을 발표했던 문예지를 찾아갔더니 실어 줄 자리가 없대요. 한국 사람들은 덕혜옹주 시를 알아야 해요. 이게 외국인인 제 마음속에만 있다면 너무너무 안타까운 일이에요. 덕혜옹주는 천재 시인이었어요. 한국의 보물이에요." 그중에는 이런 동시들이 있었다. "노란 옷 입은/ 작은 벌은/ 엉덩이에 칼/ 군인 흉내내며/ 뽐내고 있네"(벌·1922~1923년) "모락모락 모락모락/ 검은 연기가/ 하늘 궁전에 올라가면/ 하늘의 하나님 연기가 매워/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어"(비·1922~1923년) ―덕혜옹주가 천재 시인이었습니까. "시에서 영상적인 이미지가 도드라져요. 마음속에 있는 깊은 무언가를 드러내고 있어요. 시 '벌'에서 벌을 군인에 비유하고 있는데, 칼을 차고 뽐내는 군인은 조선을 힘으로 제압한 일본 군인을 나타내요. 시 '비'에선 옹주의 마음에 어두운 그림이 새겨져 있어요. 이 시에서 '하나님'은 그의 부친(고종)과 관계가 있다고 봐요. 동시라고 하지만 어린이가 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에요." ―당시 일본은 어떻게 평가했습니까. "근대 일본 음악계의 큰 별로 평가받는 미야기 미치오가 덕혜옹주의 시 '벌'과 '비'에 곡을 붙일 정도였어요. 미야기 미치오는 덕혜옹주를 '조선의 스미노미야 전하라고 불릴 만한 분'이라고 했는데, 스미노미야는 쇼와(히로히토) 일왕의 동생 미카사노미야를 뜻합니다. 미카사노미야는 동요에 특출해서 '동요의 왕자님'이라고 불렸는데, 덕혜옹주가 그와 견줄 정도로 재능이 있다고 했어요." "시는 덕혜옹주가 남긴 영혼의 기록"   덕혜옹주가 1929년 쓴 다음의 시 3수는 모두 제목이 따로 없다. "해뜨는 나라의 천세의 광영을 진하게 잎마다 다짐하는 배움터의 소나무" "친구들과 히노데의 뜰에서 함께 노닐던 어린 때가 그립구나" "스승님께 이끌려 헤쳐 들어간 글숲이 너무나 흥미로웠구나" ―새로 발굴된 덕혜옹주 시 중에는 친일(親日)이라고 비판받을 만한 작품도 있습니다. "일본에서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좋은 예로 덕혜옹주의 시를 이용하려고 했을 수 있어요. 이런 시는 덕혜옹주가 너무 어려운 시절을 살아야 했다는 숙명을 보여주고 있어요. 북한에 있는 작가들이 김정은에 대해 '만세'라고 해야 하는 것과 비슷할 수 있어요." ―덕혜옹주는 불운한 삶을 살았죠. "물론 비극의 인생을 살았지만 저는 단순히 역사의 피해자로만 보고 싶지 않아요. 어떻게든 자신의 인생을 살려고 했던 게 나타나요. 아주 적극적인 의지가 있었던 사람이에요. 당시 신문을 봐도 일본 도쿄여자학습원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승급했고, 와카에 천부적 재질이 있다고 나와요." ―어두운 시가 많은데요. " '해뜨는 나라'라고 시작하는 와카 3수를 보면 안타까워요. 1929년 그가 다녔던 히노데 공립 심상소학교의 창립 40주년 기념 동창회지에 실린 시인데, 당시 덕혜옹주는 열일곱 살이었어요. 3수 중 첫 번째 수가 그 시대의 인사말 같은 거라면 두 번째와 세 번째 수에서 내면을 토로하는데, 말할 수 없는 고독이 나타나요. '글숲'에서 망국의 옹주를 넘어 시인으로 눈을 떴지만, 이것은 모두 과거이고 현재는 없어요. 참고 참고 또 참을 수밖에 없었던 일본에서 결국 인생을 포기한 것처럼 느껴져요." 최근 개봉한 영화 '덕혜옹주'에서 덕혜옹주가 쓴 동시'쥐'와 관련된 장면이 나온다. 이 시도 다고씨가 발굴한 작품이다. ―덕혜옹주를 소재로 한 영화가 나왔습니다. "아직 영화를 보진 못했지만 덕혜옹주 시에 대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는 것 같아 아쉬워요. 그가 유일하게 스스로 남긴 영혼의 기록이 시니까요. 그래도 영화가 나와서 한국 사람들이 덕혜옹주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면 다행입니다." ―가장 좋아하는 덕혜옹주의 시는 무엇입니까. "'전단'이라는 작품이에요. 신문명을 상징하는 비행기에 대립하는 것으로 솔개가 나와요. 비행기와 솔개는 일본과 조선을 비유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봅니다. 특히 솔개의 존재감이 심상치 않아요. 신기한 생명력이 가득 차 있어요." "덕혜옹주 책 내는 게 나한테 주어진 길" 다고씨는 도쿄대에서 일본 문학을 전공한 후 1980년 NHK에 입사했다. 이후 4년간 기타큐슈에서 근무했는데, 불고깃집을 하는 재일교포 할머니와 친해지면서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다고씨는 독학으로 한국어를 공부했다. "그때 일본에 한국어 학원이 많지 않았어요. 조총련 계통의 학원에 가면 '김일성 만세' 같은 것을 많이 가르쳤는데, 그런 곳을 다닐 순 없잖아요?" 광복 50주년이었던 1995년, KBS와 공동으로 제작한 윤동주 다큐멘터리가 KBS와 NHK에서 방영됐다. 근대사를 다룬 한·일 공동 제작 프로그램이 양국에서 동시에 방영된 건 이때가 처음이라고 한다. 다고씨는 "1984년 일본에 윤동주 전작이 소개됐는데 작품들을 읽고 나서 윤동주 시를 일본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작년부터 우리나라의 한 문학 계간지에 7회에 걸쳐 윤동주 평론을 연재하기도 했다. ―윤동주 시를 왜 좋아합니까. "젊었을 때는 윤동주 시인을 통해서 일본의 이웃인 한국 사람들의 고뇌와 아픔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이제는 윤동주 시인과 그 시가 저 자신의 정신적인 지주가 된 것 같습니다. 제가 런던 주재원으로 나갔다가 2002년 PD를 그만두고 작가로 전업하기로 결정했어요. 그때 고민을 많이 했지만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생각한 거지요. '서시'가 항상 미숙한 저를 지도해 주는 것 같습니다. 물론 경제적으로는 고층 빌딩에서 떨어진 것 같아요(웃음). 하지만 저는 이 길을 계속 가겠습니다. 덕혜옹주가 잃어버린 '말'을 더 찾아서 꼭 책으로 쓰고 싶습니다." 찻집에는 그가 2008년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출간한 책 '또 하나의 가족―어느 일본 작가의 특별한 한국 사랑'이 비치돼 있었다. 그가 '형님'이라고 부르는 한국 도예가 조성주씨 가족과 맺은 인연을 엮은 책이다.'한국이 왜 좋습니까'라고 물었다.다고씨는 "제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분들이 한국에 살고 계시니까 한국을 좋아한다"며 "그러니까 나라 사랑보다 사람 사랑이 먼저"라고 했다.
468    <<수염족>>들과 <<수염전쟁>>과 그리고... 댓글:  조회:4743  추천:0  2016-08-11
  ▲ 똑같게, 더 똑같게… 로라, 니콜라, 앨리슨 세 쌍둥이 모델(왼쪽부터) ... ...그렇다면 이쯤에서 짚어볼까요, 왜 정치인들은 수염을 기르는 걸까요? [허은아 연구소장/한국이미지전략연구소 : 태도의 변화를 보여주겠다, 기존의 모습과 내가 약간의 각도를 트는 것을 변화된 것에서 이렇게 다시 속세로 나오면 이젠 이렇게, 하면서 내가 각도 트는 것을 딱 표현할 수가 있잖아요. 거기에 남자들은 기본적으로 이 수염 역할이 큰 거죠.] 네, 한마디로 말해서 이 수염이 바로 심경의 변화를 말해준단 거군요. 그런데요, 이들 '수염족'들에겐 모두 공통점이 보입니다. 첫 번째, 모두 '민생'이란 단어를 강조했단 겁니다. 수염을 기르는 동안 모두 여행을 했는데 모두 민생과 연관 지었죠. 두 번째 키워드는 바로 '주자들'입니다... 세 번째 키워드는 바로 '서민적'입니다. 수염을 깎지 않고 덥수룩하게 내버려두면서 서민적이고 소탈한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의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국내 정치인들뿐 아니라 세계적인 정치인들 중에도 수염이 트레이드마크인 정치인들이 적지 않았는데요. 대표적인 예가 바로 링컨 대통령이 있습니다. 링컨 대통령은 의원 시절엔 원래 수염을 기르지 않았는데 한 소녀가 보낸 편지에서 수염을 길러보면 어떠냐는 제안을 받고 수염을 길렀다는 에피소드는 유명합니다. [임소라 반장] 그런데 민생이나 대선하고 관계가 없는데 수염을 원래 기르신 분이 있거든요?... [정강현 반장] 스타일 아닐까요? 저분의 수염이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상상이 안 되네요. [강지영 아나운서] 수염이 어울릴 수도 있고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본인이 기르겠다고 하는데 남이 뭐라 할 순 없죠. 링컨 대통령도 원래 수염을 기르고 싶었는데 기를까 말까 하다가 소녀의 편지를 받고 자신감을 얻어서 길렀다고 하죠. 자 그래서, 우리 반장들에게 그러한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제가 시뮬레이션을 해봤습니다. 보시고 마음에 들면 맘대로 하시길 바랍니다. 자, 보여주세요. 정강현 반장은 야근한 러셀 크로 닮았네요. 이건 제 코너니깐 제 마음입니다. 아무튼 지금까지 정치인들이 수염을 기르는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해봤는데요. 수염 기르고 민생투어 하면서 주자행보 하는 걸 놓고 정치 쇼라는 비판 사실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왕 하는 거, 쇼라도 좋으니 진짜 제대로 민생 목소리를 듣고, 정치했으면 좋겠습니다. [앵커] 정치인들이 수염을 기르는 이유… 여러가지가 있겠죠. 하지만 일단 기르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보여주기에만 그치지 말고 정치적 비전도 함께 성숙하길 바라고요. 그나저나 제 수염 난 모습을 보니… 전 절대로 수염을 기르지 말아야겠다는... ( 필자; ㅡ 수염때문에 맨날 ... ㅋ ㅋ ㅋ...)
                              시조집 《겨울밤의 꿈》을 펴낸 리명호(왼쪽)시인의 행복한 가족.                                         리명호시조집 출간기념식 연길에서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6-06-11 ]               일전에 출판발행된 리명호시조집 《겨울밤의 꿈》출간기념식이 연변작가협   회아동문학창작위원회,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 교원시조사랑회의 주최로 6월 10   일 오전, 연길시 고려원식당에서 개최되였다.             출간기념회에서 문학박사이며 시조시인인 한국부산대학 임종찬명예교수가   평론 “지천명의 하늘과 바람과 토양”을 발표(대독)하였고 박송천, 류춘란 등 랑송   가들이 리명호시인의 시조를 랑송하였으며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 명예회장 한석   윤,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아동문학창작위원회 주임 최동일, 아동문학가 김득만   등이 축사를 하였다.                                                                                                           좌로부터 한석윤, 김득만, 최동일.              리명호시인은 답사에서 어려서 아버지가 사주는 책을 읽으며 문학의 꿈을 가   졌으며 대학을 다니고 교원사업을 하면서 꾸준히 문학창작을 견지해왔다고 하면   서 2012년부터 가장 늦게 접촉한 문학쟝르인 시조에 흠뻑 빠져들어 늦게나마 시조   집을 내놓게 되여 정말 행복하다고 말하였다.             연변작가협회 회원인 리명호시인은 1967년생이며 연변대학사범분원, 연변대   학 조선언어문학학부를 졸업하고 연길시국제합작기술학교 교원, 학생처주임 등으   로 근무하였으며 현재 남원인테리어회사를 경영하면서 작품창작을 하고있다.   =========================================            최금란의 동요동시집 《가로등》 출간                                                래원:연변일보  날짜  2016-6-30           최금란의 동요동시집 《가로등》이 일전 료녕민족출판사에 의해 출간됐다.       시집은 유년편, 동년편, 소년편 등 세개 부분으로 나뉘여 “개미들”, “감자와 도   마도”, “사랑의 한길-중국공산당 창건 90돐에 드리는 노래”, “아이들에겐 허리가   없다-청나라때 이야기” 등 도합 164편의 시를 묶어냈다.         최금란은 시집에 대해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소재들을 아이들의 눈으로 재미   있게 쓸려고 많이 노력했습니다. 아울러 이 동시집은 어린이들의 마음으로 세계와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저 하는 저의 마음을 담았으니 많이 사랑해주길 바랍니   다”고 말했다.         저자 최금란의 이번 시집에 머리말을 적은 아동문학작가 김득만은 이 동요동   시집을 놓고 “우리 아이들의 소소한 일상이 모두 담겨져있는 시집이다. 시집을 읽   으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기도 하고 다양한 대상을 만나서 온갖 상상놀이   를 할수 있다. 시인의 동시는 사소한 일상을 놀이터로 만드는 힘이 있다. 재치와 순   발력이 넘치면서도 따듯한 마음을 담은 시집이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과 어떻게 만   날지 기대된다. 큰 재미를 선물하는 이 시집이 아이들을 즐거운 놀이터의 세계로   안내할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신연희 기자   
466    전쟁도 없어야 하거니와 핵도 없어야... 댓글:  조회:7301  추천:0  2016-08-06
                                                                    '인천 상륙 작전'은 단 한번으로 전쟁의 역사를 바꾼 희대의 오퍼레이션이었다.     
465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보다... 댓글:  조회:5143  추천:0  2016-08-05
... ... ...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1950년 9월 15일 국제연합(UN)군이 맥아더의 지휘 아래  인천에 상륙하여 6.25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군사 작전인 인천상륙작전을 그린 이야기로 인천상륙작전의 발판이 된  일명 X-RAY 첩보작전과 팔미도 작전을 아우르는 전쟁실화 블록버스터영화.     ... ... ... .   인천상륙작전 (2016) Operation Chromite           
464    [록색평화문학주의者] - 지구온난화의 저주와 지구살리기 댓글:  조회:5756  추천:0  2016-08-05
고개 든 지구온난화의 저주, 시베리아 탄저균 고개 든 지구온난화의 저주,  언 땅 녹아 탄저균 감염된 시베리아    영국 BBC는 지난 8월 1일(현지시각), 시베리아 중북부에서  1941년 이후 처음으로 탄저병이 발생했다고 전했습니다. 75년 만의 일입니다.    12세 소년이 숨지고 20여 명이 감염됐으며  러시아 군병력이 투입돼, 주민들을 대피시켰습니다. 이 지역 순록 2300여 마리도 탄저균에 목숨을 잃었죠.    탄저병은 증세가 나타난 부위가 검게 썩어갑니다.  피부탄저 사망률은 20%, 내장탄저는 60%, 기관지 탄저는 무려 95% 사망률을 보이는 무서운 병입니다.    전문가들은 원인을 기후변화에서 찾고 있습니다. 얼어붙은 땅이 온난화로 녹으면서, 땅 속 죽은 동물사체의 탄저균이 공기를 통해 감염을 일으켰다는 해석입니다.    겨울이 길고 강설량이 적은 시베리아는 지층 온도가 연중 0℃ 이하(영구동토층)입니다. 하지만 이상기후로 언 땅이 녹고 있습니다.    지난달 세계기상기구(WMO)는 올해 지구 평균기온이 사상 최고치를 기록할 것이라 전망했죠. 상반기에만 반세기 중 3번째 고온을 기록했습니다.    전세계 온실가스는 대기권 안에 갇혀가고,  북극 얼음과 지구 상 빙하가 더 감소한다면 지구는 어떤 형태로 또 다시 경각심을 알려올까요?...  (필자;ㅡ 쓰레기와 가스 줄이기 생활운동화 합시다...)  
463    [고향 문단 소식 한토리]- 올해 연변 아동문학 풍년 닐리리 댓글:  조회:4844  추천:0  2016-08-04
2016년 8월 2일 연길 한성호텔에서 2016년 중한아동문학시상식 및 아동문학연구세미나가 열렸다. 한국 아동문학연구회, 한국 아동문예작가회, 한국 동심문화원, 연변조선족자치주조선족아동문학학회,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아동문학연구회가 공동 주최한 이번 행사에는 60여명의 아동문학을 사랑하는 지명인사들이 참석하였다. 수상자 김철호와 전춘식   이번 행사에서는 제8회 세계동시문학상에 김철호, 제9회 세계동화문학상에 전춘식, 제10회 '옹달샘'중한아동문학상에 리영철, 허송절, 제12회 동심컵중한아동문학상에 최길록이 각기 수상의 영예를 받아안았으며 동심컵수상작품집 '동심의 푸른 하늘'에 대한 기획조명으로 김룡운평론가의 '이슬과 별들의 향기'라는 론문발표가 있었다. 수상자 리영철과 허송절   이번 행사에는 또 김현순회장이 개회사를 하고 김만석, 한석윤, 우광훈, 김철학, 최동일이 조선족문단 여러 단체들을 대표하여 축하발언을 하였다. 수상자들은 이번의 수상을 계기로 금후 보다 알찬 주옥편을 써낼것을 다짐하였다. 수상자 최길록 시상식 및 세미나에 이어 동심컵아동문학상 수상작품집 '동심의 푸른 하늘' 출간식이 있었는데 아동문학회 김현순회장이 출판과정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사진 글 주청룡
462    기나긴 터널을 지나, 윤동주생가에 정지용시비 건립 추진 댓글:  조회:6821  추천:0  2016-08-01
[충북일보] 옥천군과 문화원은 매년 행사참가자를 모집해 연변지역에 거주하는 동포들에게 정 시인의 시세계를 널리 알리고 한민족의 자긍심을 위해 연변작가협회와 함께 매년 열고 있다.  올해(2015년)도 지난 7일부터 12일까지 5박6일간 일정으로 50여명의 방문단이 19회 연변지용문학제에 다녀왔다.  7일은 '4회 연변백일장', 8일은 '19회 지용 문학제', 9일부터는 역사문화탐방 등을 했다.  방문단은 전액 사비를 들여 문화원 관계자, 군 의원, 공무원, 문인협회, 일반인 등으로 꾸려 참가했다.  그러나 연변의 한 문인과 인연으로 의욕적으로 시작한 연변지용제는 그동안 많은 발전은 가져 왔으나 예산문제로 해마다 행사를 개최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에 예산을 늘려 제대로 된 행사로 발전시킬 것인지 아니면 이쯤에서 그만 둘 것 인지에 대한 냉철한 검토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이인석 전 문화원장은 "일부에서 무용론이 있지만 열악한 환경속에서 19회째 개최한 행사는 정 시인의 시 정신뿐만 아니라 동포사회에 잘 알려진 윤동주 시인과의 연관성, 아름다운 우리글, 우리말을 잊지 않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긍정적으로 평가돼야 한다"며 "통일 등 미래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지속돼야 한다"고 일축했다.  반면 유재목 군의원은 "작년에 행사에 참여했지만 백일장, 지용행사 등을 보며 행사인지 관광인지 옥천 군민들에게 주는 의미를 찾지 못했다"며 "문화원 관계자만 참가하는 방법도 있지만 오히려 연변지용제 예산을 옥천지용제에 투입해 내실 있고 알찬 행사방안을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이처럼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논란이 분분한 가운데 가장 큰 문제는 예산인데 올해는 1천800만원이 지원됐다. 당초 2천200만원이던 것이 400만원이 삭감된 것이다. 시작이야 어찌됐든 19년 전 물가에 비하면 매우 열악하다. 여기에 참가하는 의원들 마다 예산을 늘려야 한다면서도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행사내용이 빈약 할 수밖에 없어 지용문학상 선정자에게 상패 하나 없이 꽃다발과 책 1천권을 발간해 주는 것이 고작이며 만찬조차 어렵다.  행사운영도 1부 시상 및 인사말, 2부 공연 등으로 이루어지지만 출연진이 반복하게 되고 시낭송 뿐만 아니라 이왕이면 옥천에서도 공연에 참가해 문화교류 차원에서도 확대가 필요하다. 그나마 4회째 열고 있는 지용백일장이 행사를 뒷받침해 주고 있지만 이 것 만으로 부족하다. 이 때문에 무용론의 배경도 일부 되고 있다.  안효익 군의원은 "회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용이 중요하다"며 "연변에서 열리는 타 행사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며 의회차원에서 예산 등 심도있게 검토할 사항"이라고 밝혔다. 여기에 예산하나 지원없이 4회째 참가해 백일장을 심사해야 하는 옥천문인협회도 말 못할 고민이 크다.  김묘순 회장은 "예산하나 없는 협회가 사비를 들여 심사에 참석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다"며 "예총차원에서 무슨 뾰족한 방법을 찾아야 할 형편"이라고 토로했다. 이에 정구건 기획감사실장은 "전에 참가할 때보다 규모 등이 줄어들었으며 19회째 열리고 있는 행사를 이제와 그만 둘 수는 없다"며 "내년이 20회째인 만큼 앞으로 관계부서, 문화원 등과 함께 다각적인 방안을 마련토록 하겠다"고 말했다. 출처:료녕신문 ///중국 연변지용제의 명암 - 긍정론·무용론 '논란'  ================================================= 옥천이 낳은 천재적 시인 정지용(鄭芝溶·1902∼1950년) 시인을 기리기 위해 열리는 중국의 연변 지용제가 옥천군의회와 옥천문화원의 예산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다. 옥천문화원과 군에 따르면 올해 20번째를 맞는 연변지용제가 격년제로 열리게 될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 군의회가 연변지역과 정 시인이 특별한 인연이 없고, 홍보 효과도 눈에 띄지 않는다는 판단에 따라 격년제를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옥천군의회의 예산삭감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 이 행사는 1997년 옥천서 열린 ‘지용제’에 연변작가협회 회원들이 참여한 것을 계기로 중국 동포에게 문학적 향수를 일깨운다는 취지로 연변 정지용 문학상이 제정되면서 열리기 시작했다.   이 행사를 위해 옥천군은 해마다 2천300만원 수준의 예산을 연변작가협회에 지원했다. 올해는 연변 지용제 예산 2천800원 중에서도 500만원을 삭감했다. 이뿐만 아니라 군의회는 정 시인의 모교인 일본 도시샤대학에서 매년 학술포럼 행사비 1천500만원을 전액 삭감했다. 군의회의 이 같은 예산 삭감은 지용제와 관련 중국과 일본에 매년 4천만원 들여 행사를 추진했지만 들어가는 돈에 비해 성과가 크지 않다는 지적이다. 유재목 옥천군의장은 “정지용 시인의 행사를 국내뿐만 아니라 매년 중국과 일본에서 추진하면서 4천만원의 예산을 들였지만 성과가 미비해 획기적인 개선방향이 요구돼 예산을 삭감했다”며 “예산의 효율성 차원에서 중국과 일본행사를 격년제로 하는 방향이 검토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승룡 옥천문화원장은 “성격이 다른 연변 지용제와 동지사대 문학포럼을 격년제로 개최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연변지용제의 경우 중국동포들 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에게도 가장 전통있는 문학행사로 자리매김한 한 상황에 격년제로 개최하게 되면 그동안의 노고가 허사가 될 지도 모를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편 옥천군은 올해 9월 2일 열리는 연변 지용제를 위해 2천300만원의 행사비를 지원하고, 군민사절단도 파견할 예정이다.   =====================   (옥천=연합뉴스) 박병기 기자 = 중국 지린(吉林)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룽징(龍井)시에 있는 윤동주(尹東柱) 생가에 그의 문학적 멘토였던 정지용(鄭芝溶) 시비 건립이 추진된다. 중국 룽징시 방문한 김영만 옥천군수(맨 왼쪽) 연변작가협회 최국철 주석(맨 오른쪽) [옥천군 제공 = 연합뉴스]   정 시인의 고향인 충북 옥천군과 옥천문화원은 올해 시비 건립을 목표로 중국 측과 협의 중이다. 사업에 필요한 군비 2천500만원도 이미 확보한 상태다. 지난 27∼29일, 
461    [록색평화문학주의자] - 태양의 분노와 지구살리기 댓글:  조회:6298  추천:0  2016-07-30
세계 각국은 지구 멸망을 부를 충돌을 막기위해 노력하고 있다. NASA는 1998년부터 크기 1Km  이상 NEO 의 90%를 찿는 프로젝트를 시작해 2010년 마쳤다. 지금은 크기 140m이상을 90% 찿는 계획이 진행중이다,...                                   조선일보 2016, 7,  30,   [출처] 11년 마다 터지는 태양의 분노 |작성자 구름 나그네    
                20대 여린 가슴이 읊조린 사랑의 향연             방송천 시집 《가슴시린 계절에 사랑을 묻는다》 출간                                                          박송천의 시집 《가슴시린 계절에 사랑을 묻는다》가 일전 상해금수문장출판   사에 의해 출간됐다.         시집은 제1부 시의 향연, 제2부 시조의 향연, 제3부 중문시 향연 등 3개 부분으   로 나뉘여 도합 124수의 시를 담아냈다.         시집의 머리말에서 시인은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은 20대인만큼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들려오는 감동 하나하나에 고운 답장을 보내주는 시   인의 삶을 살아보렵니다. 바람이 불고 계절이 흐르는 사이에 부드럽게 누워서 하   늘의 별과 이야기를 나눌수 있는 부질없는 욕심을 눈부시게 지니고 래일을 꿈꾸는   오늘의 몸부림을 흔쾌히 향수하는 시인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고 고   백했다.         시집에 실린 평론 “사랑을 향한 수줍은 고백 서너점”에서는 “사랑이 부족한 요   즘 세월에 사랑의 시집을 꺼내든 저자의 두둑한 용기와 배짱을 높이 산다”고 평가   했다.         20대 저자가 끓어넘치는 열정과 감성을 있는 그대로 시집에 녹여냈다는 점에   서 시집은 또한 소장가치를 더한다.         연변대학 예술학원 연극학부 방송사회과를 졸업한 저자는 2012년 대학시절에   동시집 《달은 레몬, 달은 바나나》를 출간, “한국월간아동문학상”, “웰빙아동문   학상”, “리륙사문학상”등 다수 수상했다. 이번 시집은 박송천시인이 로신문학원을   수료하고 펴낸 첫 성인 시집이다.         신연희 기자    =========================================                     리명호시조집《겨울밤의 꿈》 출간                                                                                                                   기자: 김태국           111수의 신작 시조를 수록한 리명호시조집 《겨울밤의 꿈》이 일전에 연변인   민출판사에 의해 출판발행되였다.         시조집은 제1부 “물과 바람과 그리고 나”, 제2부 “백년 울어 슬픈 강”, 제3부   “병상의 달밤”, 제4부 “겨울밤의 꿈”, 제5부 “그림 같은 그곳이” 등으로 나뉘였으   며 부산대학교 명예교수이며 문학박사인 임종찬의 평론 “지천명의 하늘과 바람과   토양”을 부록으로 수록하였다.         1967년 화룡에서 출생한 리명호시인은 1995년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를   졸업하고 연길시국제합작기술학교 교원, 학생처주임 등으로 근무하다가 현재 남   원인테리어회사를 경영하면서 작품창작을 하고있다. 연변작가협회 회원인 리명호   씨는 2013년 병독성신경마비증에 걸리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종양수술까지 받았으   나 놀라운 의력으로 병마를 이겨내고 시조집까지 출간하였다.         임종찬교수는 평론에서 “리명호시인의 시조들이 보여주는 상실의 이미지는   일제강점기에 ‘망국의 슬픔 안고’ 중국땅으로 이주해간 조선민족의 고향상실에 그   근원을 두고있다”고 하면서 “리명호시인은 이 시조집을 통해서 상실의 자리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려는 시심, 민족이란 이름의 고뇌까지 드러내려 한다.”고   평가하였다.
459    [력사를 잊지말자]- 복원해야 할 안중근 의사 생가(3) 댓글:  조회:4786  추천:0  2016-07-23
조선 황해남도 청계동 안중근 의사 생가터.  조선 황해남도 신천군 청계동의 안 의사 생가터는 풀이 우거진 황무지 상태...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안 의사는 7살 때인 1885년 아버지 등 일가를 따라 청계동으로 이사해 자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당시 청계동 일대에는 약 70가구가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안 의사 생가는 전쟁 때 폭격 등으로 허물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안중근렬사집터자리' 안중근 의사 생가가 있는 황해남도 청계동 마을과 당시 선교사로 안중근 일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던 니콜라 빌렘 신부의 사진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제공] =======================================================================
458    [력사를 잊지말자]- 사라져간 안중근 거사 옛집(2) 댓글:  조회:5150  추천:0  2016-07-23
안중근 의사가 1908년 3~4개월 정도 머물며 사격 연습 등 거사준비를 했던 곳. 몇년전만해도 이렇게 보존되였던 초가였었는데...    ▲   훈춘 권하촌에 있었던,  안중근의사가  거사준비를 위해 묶었다는 초가집, 지금은 가슴아프게 사라지고...   … 안중근 의사 거소 유적 초가 안 부뚜막은 무너져 내려앉았고 솥들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나뒹굴고...  ...무관심 속에… 폐허로 변한 안중근 의사 유적지… 중국 지린(吉林)성 훈춘(琿春) 취안허(圈河)촌의 안중근 의사 거소(居所) 유적은 초가가 뒤로 크게 기울어져 있고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 이 초가는 안 의사가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직전인 1907~1908년 간도와 연해주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할 당시 자주 드나들며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북·중·러 3국 국경 부근에 있는 이 초가는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하기 직전인 1907~1908년 간도와 연해주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할 당시 자주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진 유적이다. 당시 안 의사의 친척 안동렬의 소유였던 이 집은 안씨 집안에서 대대로 거주해왔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유적지는 사라지고...            
457    [력사를 잊지말자]- 사라져간 안중근 거사 옛집 댓글:  조회:5191  추천:0  2016-07-21
훈춘 경신 권하촌에서ㅡㅡㅡ 안중근 의사가 거사 前 들러 거사를 준비하며 머물렸던 옛집이 사라지다...          
“별”을 노래하다 - 제1회 윤동주 시 가영(歌咏)대회 룡정에서   7월 15일 오전, “‘별’을 노래하다- 제1회 윤동주 시 가영(歌咏)대회”가 룡정시 구주국제영화관에서 성대하게 개최되였다. “제1회 윤동주 시 가영(歌咏)대회”는 룡정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 윤동주의 시를 읊고 그의 문학정신, 민족정신을 기리기 위한 취지로 룡정.윤동주연구회가 기획, 주최하고 통화청산그룹이 후원했다. 축사를 하고 있는 통화청산그룹 리청산 리사장 통화청산그룹 리청산 리사장, 연변작가협회 최국철 주석, 룡정시 문체국 국장 라송화등 지도자, 래빈들을 비롯하여 연변각지의 문인, 룡정.윤동주연구회 임원, 룡정시 시민등 100여명이 가영대회에 참석했다. "자화상"을 읊고 있는 김계월아나운서 "참회록"을 읊고 있는 신금철아나운서 룡정시 문화관 예술단의 난타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연변인민방송국, 연변시랑송협회 등 단위와 단체들의 유명 아나운서와 랑송애호가들, 학생들이 무대에 올라 윤동주의 대표적인 시편들인 “서시”, “별헤는 밤”, “참회록”등을 랑송했다. 시에 곁들어 룡정시 문화관 예술단의 정채로운 공연도 이어졌다. 기념사를 하고 있는 룡정윤동주연구회 회장 김혁 룡정윤동주연구회 회장 김혁(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소설창작위원회 주임)은 기념사에서 “조선족문화의 발상지이자 시인의 고향인 룡정에서 겨레의 걸출한 시인을 기리고 그의 작품을 랑송하는 모임을 가지게 되였다”고 하면서 “란세속에서도 윤동주 시인이 보여준 행동은 절망의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놓지 않게 해준 아름다운 모습이였는바 그러한 그의 민족정신은 오늘날 부침속에 고심하고있는 우리 조선족공동체의 삶에도 어필한다, 이런 시의 언어를 간직한 사람들이 주변에 많을수록 힘들고 삭막한 인생을 아름답게 바꿀수 있다고 생각해 본다.”고 력설했다.    아울러 “명년이면 윤동주 탄생 100주년이 되는바, 온 겨레가 애대하는 시인이 우리의 고향에서 태여난것을 커다란 자호감으로 알고 그이의 시 한수라도 마음속에 갈무리 하며 우리 함께 우리의 시인을 목청껏 노래부를것”을 주문했다. 이어 김혁 회장이 조선족문화사업에 사심없는 후원을 아끼지않은 리청산 사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하였고 룡정.윤동주연구회 사무국에서 윤동주의 시가 새겨진 시 족자와 윤동주 연구저서를 증정했다. 축사를 하고 있는 룡정시문화방송신문출판국 국장 라송화 통화청산그룹 리사장 리청산, 연변작가협회 상무부주석 정봉숙, 룡정시문화방송신문출판국 국장 라송화, 연변청년기업가련합회 회장 김일등이 대회에서 축사를 드렸다. 한편 고향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 윤동주의 문학정신, 민족정신을 선양하고 조선족문화의 발상지 룡정의 문화와 력사를 조명하여 만방에 알리기 위한 취지로 작가, 학자, 교원, 매체인원들로 발족된 룡정.윤동주연구회는 2014년 9월에 설립된 이래 윤동주를 기리고 룡정의 력사를 조명하는 묵직한 기념행사들을 련이어 펼쳐 사회와 문단의 주목과 충분한 긍정을 받고 있다.   조글로미디어 사진 차청국 ============================ 한춘시인 타계 3주기 문학세미나 연길서 북방 조선족문단의 거목이였던 한춘선생 타계 3주기 문학세미나가 7월 17일 연변작가협회에서 있었다.  연변작가협회, 흑룡강신문, , , 잡지에서 주관하고 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 장백문화추진회에서 대행한 이번 행사에는 연변, 흑룡강, 길림, 장춘 등 지역의 문인들과 언론인 40여명이 참석하여 한춘선생이 시, 평론, 번역 등 분야에서 이룩한 성과 그리고 그의 덕목을 높이 평가했다. 연변작가협회 부주석이며 잡지 주필인 김영건시인은 개막사에서 "한춘선생 타계때에는 잡지에 '북방문학의 거목- 한춘'으로 전문 특집을 조직하기는 했지만 그에 대한 보다 깊은 학술적접근이 필요하여 그의 타계 3주기를 맞으며 이번 세미나를 조직하게 되였다."고 행사 취지를 밝혔다. 이날 김성우시인이 흑룡강창작위원회를 대표하여, 안미영이 잡지사를 대표하여, 윤운걸 길림성특파원이 흑룡강신문사(사장 한광천}를 대표하여 추모사를 읽었고 림금산시인이 잡지사 리호원시인을 대신해 추모사를 읽었다. 최룡관시인이 "하이프와 언어의 자유와 상", 김룡운평론가가 "한춘이 우리에게 남긴 발자국", 도라지잡지사 전경업사장이 "한춘의 문학인생",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한영남시인이 "하늘을 울리는 솔파도소리"란 주제를 가지고 기조발언을 했다. 이외에 김응룡시인, 김창희시인 김경희시인이 자유발언을 했다. 한춘선생은 탄탄한 실천적 리론적 체계를 구축하여 흑룡강성 조선족문단뿐아니라 전반 중국조선족문학에 많은 영양소를 공급해주었다. 특히 현대시 창작과 보급에서 주범(主帆)이 되여 흑룡강성을 중심으로 새로운 젊고 활약 넘치는 시창작 력군을 양성하는데 마멸할수 없는 기여를 했다. 한마디로 한춘선생은 창작과 덕을 겸비한 학자형 문인이였다. 조글로미미어 문인숙기자 [부록] 한춘(韩春)그는 누구? (1)략력 본명: 림국웅, 필명: 한춘, 1943년 3월 11일 흑룡강성 연수현 출생, 1966년 동북농학원(현 동북농업대학) 토지규획전업 졸업, 1968년 8월 흑룡강성 수리국 설계대 취직, 부대장 력임, 1979년 12월 흑룡강신문사 입사, 문예부 편집, 부주임, 주임 력임, 2003년 3월 정년퇴직. 고급편집. , 흑룡강작가협회 리사, 흑룡강조선족작가협회 회장 력임, 2013년 7월 17일 별세 (2)창작성과 시집 《쌍무지개> (1988년 연변인민출판사), 시집 (1990년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시집 (1992년 한국 도서 출판 혜화당), 시집 (199년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 시집 (20003년 민족출판사),시평론집 (2004년 료녕민족출판사 ), 시집< 높은 가지끝에 달린 까치둥지>, 수필집 , , ,  등. (3)수상경력 연변작가협회 문학상 3차, 흑룡강성문예 대상, 은상, 흑룡강소수민족문학상 1등상 등 다수 수상.       =============================================              =====================         박영옥 략력:   1955년 중국 길림성 안도현 출생. 아동소설, 수필, 동시, 동화, 우화, 가사 등 문학작품 백여편 발표. 저작: 현대이야기집 《밤중에 찾아온 남자》, 번역이야기집《사랑의 소용돌이》 출간. 백두아동문학상, 한국KBS방송국 우수상 등 수상 다수. 연변조선족자치주조선족아동문학학회 안도분회 회장 력임. 연변작가협회 회원.   (안도) 박영옥 동시집 출간 2급장애인이고 사형판결이나 다름없는 중병을 지니고서도  십년간 안도현아동문학회회장직을 맡고 열심히 협회를 이끌다가 지금은 고문직을 맡고 있는  박영옥씨가 일전에 동시집 를 출간했다.        217페지로 되여있는 이 동시집에는 , , 가을의 노래>>, , , , 로 170수의 동시가 실려있다.        많이는 동화와 아동소설을 써오던 박영옥씨가 이번에 동시집을 출간하게 된데는 다년간 학생들작문지도를 하면서 끊임없이 애들과 만나고 헤여지는 반복되는 삶속에서 동시를 줏게 되였다고 했다.    
455    [력사를 알아보기]- 안공근, 안정근, 또한 누구인가... 댓글:  조회:10326  추천:0  2016-07-17
  안중근 장군 국내 유족대표인 안기수 안기려 자매가 국회 안 헌정기념관 앞뜰에 전시 중인 안중근 장군 동상을 찾아 참배했다. 안기수 기려 자매는 안중근 장군 친동생인 안정근 친손녀다. 안중근 장군에게는  정근 공근 두 남동생과 여동생 안성녀가 있었다. 안정근 공근 형제는 1910년 3월 9일과 10일에 중국 대련 려순감옥에 형 안중근을 면회했다. 이 자리에서 형 안중근은 두 동생에게 몇 가지 유언을 전한다. 그 중 하나가 '내 뼈를 하얼빈 공원에 묻어라'하는 것이다. 두 동생은 형 안중근 순국 이후 가족을 데리고 연해주로 망명한 뒤 1919년 이후 중국 상해로 거쳐를 옮긴다. 그곳에서 김구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에 나선다. 막내동생 안공근은 한인애국단 단장으로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기획했다. 안공근은 1939년 전후해 의문의 죽음(행불)이 된다. 안정근은 해방후 귀국하지 않고 1949년 상해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안정근은 슬하에 아들로 원생, 진생 딸로 미생, 혜생,옥생, 은생을 두었다. 안진생은 미안마, 콜롬비아 대사를 지낸 바 있있고, 딸 미생은 상해에서 김구 선생 비서로 일하다가 김구 선생 장남 김인과 결혼한다. 그 사이에 딸 (효자)가 태어났다. 그러나 해방직전 김인이 병사한다. 해방직후 미생(김구 큰 며느리 이자 안중근 남동생 딸)은 김구선생을 수행하고 함께 귀국한다. 그러나 김구선생이 암살 당한후 남북 단독정부 꿈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남한을 떠나 미국으로 홀연히 떠나 단 한번도 귀국하지 않았다. 수 십년 후 김구의 큰 손녀 효자도 미국으로 건너갔다. 모녀의 소식을 잘 아닌 사람이 없다.   이번에 안중근 장군 동상을 만난 두 손녀는 안정근의 아들 안진생의 친딸이다. 안중근 의사는 큰 할아버지가 되는 셈이다. 이들이 안씨 성을 가진 유일한 국내 유가족이다. 안중근 장군 직계는 안중근-안준생(한국전쟁 당시 부산서 사망)-안웅호(미국거주) -안 토니주니어(45세 미국 거주)가 있다. 안 토니 주니어가 안씨 성을 가진 안중근 증손자다. 안중근 장군 증손자, 안 토니 주니어는 오는 10월 26일 안중근 장군 의거 100주년 기념식과 안중근 동상 제막식에 참석할 예정이다.   안중근 장군 직계는 미국에 있고, 동생 안공근 직계는 북한에, 동생 정근 직계는 남한에 있다. 남북통일이 되면 다 만날 수 있다. 또 다른 친인척 중에는 독일, 남미 파나마 등에 거주자도 있다. 뿔뿔이 헤어져 사는 상황이다. 1910년 3월 9일, 형 안중근을 면회하는 두 동생 정근과 공근(사진 왼쪽) 정근의 직계 후손은 남한에, 공근 직계 후손은 북한에, 안중근 직계는 미국에 산다... =========================     오른쪽 부터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 안중근의 둘째 동생 안정근, 안정근의 아들 안원생, 안중근의 딸 안현생, 안중근의 셋째 동생 안공근의 아들 안우생.   길림신문에서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안중근 의사의 친조카 안원생이 충국에서 활약한 축구 스타이자 탁월한 지도자였다고 소개한적이 있다.   신문은 “안원생 선생(이하 존칭 생략)은 1920년대로부터 1940년대 중반까지 축구선수이자 코치로 근 30년간 중국 체육계를 호령했다”고 빍혔다.   안원생은 황해남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에서 출생했다. 안원생의 아버지 안정근과 큰아버지 안중근은 그의 할아버지인 안태호(安泰镐)한테서 태어났다.   간도에서 생활하던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은 러시아 내전을 피해 중국 흑룡강성으로 옮겨 살았다.   안원생은 상해교통대학을 졸업한 축구 스타였다.   중국 《민국일보》의 민국 19년(1930년) 1월 2일자에는 “…신국권, 안원생 등 주요 선수들이 축구기술이 매우 뛰여나 상해판을 들썩해놓았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안원생은 1922년 6월 상해류학생축구단의 일원으로 첫 조선방문 축구경기에 참가하면서 조선의 축구무대를 누벼나갔다.   한국의 축구백년 사사전에는 “…안중근의사의 친조카인 안원생 선수도 교통대학의 축구팀과 함께 조선에 와 축구실력을 보였다…”고 적혀있다.   안원생은 교통대학 팀의 주장을 맡았으며 대학을 졸업하고 1934년부터 1936년까지 북경연경대학(지금의 북경대학 전신) 축구팀의 감독으로 축구무대에서 활약했다.   1934년 4월 조선 축구팀은 중국방문 세번째 경기를 천진에서 치뤘다. 천진에서의 마지막 친선경기에 안원생이 출전하자 관람석 관객들은 일제히 일어나 《안원생, 안원생》하면서 환영하였다. 그 경기에서 조선팀과 지기는 했어도 안원생의 두드러진 기량은 수많은 관중들에게깊은 인상을 남겼다.   안원생은 조선 축구사업발전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는 해방 전 일찍 축구무대를 통해 조선축구팀, 연희전문대학축구팀(지금의 연세대), 평양축구팀 등의 중국방문과 중국주재 조선유학생, 중국인 화동팀 등의 조선 방문에서 교량적인 역할을 했다.   [출처] 안중근 의사의 조카 안원생은 ‘축구 스타’ |작성자 무정     ======================= 해마다 광복절을 즈음해서 마음 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해방 후 행적이 묘연해서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국독립운동사과 중국에스페란토운동사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인 안우생이다.   그는 1909년 이등박문을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막내 동생 안공근의 장남으로 1907년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안공근은 전 가족과 함께 1922년에 상해로 이주하여 김구의 측근으로서 독립운동에 활약했다. 이에 안우생도 1939년경 중경에 가서 항일전선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을 했으며, 1942년 9월 임시정부 개편 이후 편집부의 과원으로 활동했다.   해방 이후에는 고국으로 돌아와 김구의 대회담당비서로 일했다. 그의 민족통일에 대한 신념과 노력은 김구, 김규식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의 남북연석회의 참가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 남북연석회의에 김구를 수행했던 그는 1949년 홍콩으로 간 후에 아무런 소식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던 중 40년 후인 1986년 4월 19일 북한 노동신문에 “민족대단합의 위대한 경륜 - 남북연석회의와 김구선생을 회고하면서”라는 논문이 안우생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일본 관서에스란토연맹 기관지에 이 논문의 저자가 바로 안우생이라는 기사가 실려 안우생의 생사를 몹시 궁금해 하던 많은 에스페란티스토들에게 기쁨을 주었다. 이후 한국 언론이 그가 1991년 2월 북한에서 생을 마감하였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는 한국어, 러시아어, 중국어, 영어, 불어, 에스페란토를 구사한 어학의 기재(奇才)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와 교분을 쌓은 중국 에페란티스토들은 그가 특히 문학에 남다른 관심과 재능을 가졌다고 말했다. 에서 그는 ‘엘핀’(Elpin)이라는 필명으로 중국의 대표적 애국문학가인 루쉰의 소설 ‘광인일기’, ‘고향’, ‘백광’을 에스페란토로 번역했다는 글을 읽고 그에게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한국인으로 중국 근대문학의 최초 소설인 ‘광인일기’를 번역했고, 그가 번역한 소설 세편이 책의 4분의 1을 차지한 것 등에서 그의 에스페란토 실력과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루쉰 소설을 번역한 세 작품 외에도 다른 역작이나 원작이 분명히 더 있을 확률이 높다는 판단이 섰다. 헝가리에서 에스페란토학을 공부하면서 1991년부터 헝가리, 오스트리아, 스페인, 네덜란드에서 여러 편의 그의 문학작품들을 수집했다.    당시 세계적으로 권위 있던 문학잡지 (Literatura Mondo) 1934년 11월호에 게재된 안우생의 번역작품 김동인의 ‘걸인’과 함께 두권의 책(, (Noveloj de Lusin), 네 개의 정기간행물(, , , )에서 모두 40편에 달하는 작품을 찾아낼 수 있었다. 거의가 1938-40년 중국의 홍콩, 청두, 중경에서 발간된 것들이다. 이것은 전부 에스페란토로 되어 있고, 원작시 3편, 번역시 14편, 원작소설 2편, 번역소설 12편, 번역희곡 4편 그리고 기사 5편이다.    ==========================         ▲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과 동생 정근, 공근 한국문화의 특성 가운데 하나로 가족적 유대가 남달리 강하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사실 우리 전통사회에서는 부계(父系) 혈족을 중심으로 해서 강하게 결속되어 있었다. 가족 내지는 가까운 친족들은 하나의 혈연공동체를 이루고 있었고, 그 공동체는 동일한 가치를 공유하던 과정에서 일정한 경향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은 독립운동의 과정에서도 확인된다. 일제시대 상해 임시정부에서 국무령을 지냈던 이상룡(李相龍) 가문이나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이시영(李始榮)의 집안이 이러한 사례에 속한다. 이와 함께 안중근의 집안도 자유와 독립을 위해서 투쟁한 대표적 가문으로 평가될 수 있다. 안중근의 독립의지는 그의 두 동생들과 조카들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계승되고 있었다.           안정근과 그 자녀들   “식민주의는 민족주의의 학교”라고 누군가 말했다. 제국주의의 침략과 식민주의의 형성은 민족주의에 대한 각성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안중근의 동생들에게 딱 들어 맞았다. 안중근에게는 안정근(安定根, 시릴로)과 안공근(安恭根, 요한) 두 동생이 있었다. 이들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천주교 신앙과 함께 안중근의 죽음을 통해 민족주의의 학교에 입학해서 민족 모순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그리고 직접 독립운동의 전선에 뛰어들었던 그 동생들과 그 소생들은 남북한 사회에서 각기 높이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우선, 안중근의 손아래 동생인 안정근(시릴로, 1885-1949)은 안중근의 의거 이전에 이미 한씨 부인과 결혼했었고, 그들 사이에는 안원생(安原生) ‧ 안진생(安珍生) 두 아들과 안미생(安美生) 등 네 딸이 있었다. 안중근의 순국 후 안정근은 자신의 가족 및 모친과 안중근의 유족 등과 함께 우선 러시아령 연해주 꼬르지포에 정착했다. 이들의 연해주 정착에는 그 곳의 독립운동가들을 비롯하여 도산 안창호(1878-1938) 등의 도움이 컸다. 안정근은 3‧1운동 이전부터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투쟁했다. 그는 1914년 ‘권업회’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독립운동의 효율적 추진을 위해 동생 안공근과 함께 러시아에 귀화했지만, 1915년 독립운동 단체인 ‘신민회(新民會)’의 노령(露領) 총감을 맡고 있었다. 1918년 11월 중국의 길림에서 자주독립을 위해 ‘무오독립선언문’의 발표에도 공동으로 참여했다. 3‧1운동 후 1919년 10월 경 그는 가족들과 함께 샹하이로 이주했다. 이들의 이주는 안중근의 맏아들 분도가 독살된 이후 안전한 활동근거지를 찾으려던 자신들의 소망과, 이미 샹하이에 집결해 있던 백범 김구(1876-1949)나 도산 안창호 등의 초청과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샹하이에서 그는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 참여하여 백범 김구와 함께 이사로 선출되었다. 임시정부가 조직된 이후에는 여기에 적극 참여하여 활동했다. 김구와 함께 황해도 신천군의 조사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그 후 간도와 연해주 지방을 넘나들면서 샹하이 임시정부의 기치 아래 김구와 함께 독립운동에 진력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그는 대한적십자회 부회장, 의 발행인에 선출되어 활동했다. 간도 교민단(僑民團) 설립, 청산리 전투 보고,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그는 1925년경부터 신병으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되었고, 1939년 이후에는 중국 각지를 옮겨 다니면서 은거생활을 하다가 샹하이에서 1949년에 죽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198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안정근의 자식들도 독립운동에 뛰어 들었다. 그는 2남 4녀를 두었다. 그들 가운데 두 아들 안원생(安原生)은 샹하이 교통대학에 다닐 때 중국 국가대표 축구선수로 활동한 바도 있었다. 그는 1943년 한독당 계의 청년조직인 한인청년회의 총간사가 되었고, 한국광복군 인지(印支) 파견책임자를 역임했다. 둘째 아들 안진생(安珍生)도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건국훈장 흥인장을 수여받았다. 한편, 그의 차녀 안미생(安美生)은 중국 서남연합대학(西南聯合大學) 영문과를 졸업하고 임정 주석 김구의 비서가 되어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김구의 맏아들 김인과 결혼했다. 이들의 결혼으로 백범 김구와 안중근의 가문은 사돈지간이 되었다. 안공근과 그 자녀들 안중근의 두 번째 동생은 안공근(安恭根, 요한, 1889-1940?)이다. 그는 원래 서울교육대학교의 전신인 한성사범학교를 마치고 진남포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그는 안중근 의거를 계기로 하여 교사로서의 생활을 접고, 중형 안정근 등과 함께 연해주로 이주하여 살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1912년부터 1914년까지 뻬쩨르부르크 및 모스크바에 머물며 러시아어를 연구했다. 그는 1919년 임시정부 안창호의 추천으로 모스크바 특사로 임명되어 샹하이로 오게 되었다. 샹하이에 도착한 다음 그는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에 의해 외무차장으로 임명되었고, 1921년에 임시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파견한 외교관으로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레닌 등을 상대로 하여 독립자금의 확보를 위해 활동한 바 있었다. 안공근은 샹하이로 귀임한 1925년 이후부터 모친 조마리아와 안중근의 가족들을 부양해야 할 실질적 책임을 지게 되었다. 이를 위해 그는 1928년경 정화암 등 무정부주의자들과 함께 샹하이에서 빙과점을 운영한 바도 있었지만, 그 생활의 곤궁함을 면하기 어려웠다. 그는 1925년 샹하이로 귀환한 직후 임시정부 대통령 박은식이 서거했을 때 ‘독립운동을 위한 전민족적 통일’을 강조했던 그의 유언을 필기한 바 있다. 이처럼 그는 임시정부의 핵심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1926년 여운형의 후임으로 샹하이 한인(韓人) 교민단장을 역임하게 되었다. 그는 독립운동과정에서 파생된 좌우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1927년에는 유일당 운동에 김구 이동녕 등과 함께 집행위원이 되어 활동했다. 그는 전민족 유일당 운동이 실패하자 안창호, 조소앙, 김구 등과 함께 우파계열의 통일체인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여 이사직에 취임하여 임시정부를 유지‧옹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한독당의 별동대로서 의열투쟁을 목적으로 한 ‘한인애국단’이 김구의 주도로 결성되자 안공근은 그 단장이 되었다. 한인애국단은 이봉창 및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획한 조직이었다. 이 시기 일제의 정보보고서에는 “안공근은 김구의 참모로서 그의 신임이 가장 두텁고 김구가 범한 불법행동은 안중근의 보좌에 의해서 된다”고 평한 바 있었다. 1930년대 그는 이처럼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최측근인으로 활동했다. 안공근은 6개 국어에 능통했다 한다. 그는 샹하이에서 미국 혹은 영국대사관에 통역으로 근무한 바 있었고, 소련 영사관 및 독일 영사관과도 관계를 맺었다. 그는 임시정부와 중국 국민당 정부를 연결하는 역할을 맡아서 국민정부의 정보기관인 남의사(藍衣社)와도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임정을 중국을 비롯한 외국정부기관 및 조선인 좌파 세력이나 무정부주의자들과 연결시켜주던 인물이었다. 안공근은 일제의 샹하이 침공과 유봉길의 의거로 인해 1932년 샹하이를 탈출할 때 자신의 어머니와 처자식 및 안중근의 자녀를 남겨둔 채 김구의 모친만을 모셔왔다. 이 때문에 그는 김구에게서 심한 질책을 당한 바도 있었다. 그러나 안공근은 1934년 중국 낙양에 중앙군관학교 분교에 한인군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장교를 양성했고, 남경에 설립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에도 관여하였으며, 남경에서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의 명예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안공근은 1936년 김구가 주도해서 결성한 한국국민당에 함께 참여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을 살펴보면 그는 여전히 임시정부의 핵심요인 가운데 하나였고, 김구 주석의 정보책임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937년부터 행방불명이 되던 1940년까지 의정원 의원 등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는 1930년대 말 중경(重慶) 시절 김구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안공근은 중경에서 샹하이 동제대학 출신 의사 유진동(劉振東)의 집을 내왕하면서 지내다가 갑자기 행방불명되었다. 그는 임시정부 산하에서 안공근과 경쟁관계에 있던 기호파 계열에 의해 암살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그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 해방후 경교장에서. 오른쪽부터 김구의 비서였던 安偶生, 白凡 金九, 金九의 자부(金仁의 부인) 安美生, 張佑植 안공근에게는 안우생(安偶生) 등 두 아들과 네 딸이 있었다. 안우생은 임시정부에서 운영하던 교육기관인 인성학교를 거쳐 중국 광뚱에 있던 국립 중산대학(中山大學)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 1939년 5월 30일 안공근의 실종   우리나라 독립운동가의 상징같은 존재라면 단연 안중근 의사다. 침략의 원흉으로 인식되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사건도 사건이려니와, 그 후 재판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의연한 태도와 격렬한 웅변, 그리고 일본 간수들과 변호인까지 감동시킨 고매한 인격과 뛰어난 경륜은 독립운동가의 아이콘으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 뿐이 아니라 황해도 해주 출신의 안씨 가문은 독립운동의 명가라 할 정도로 많은 이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 가운데는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도 있었다.  . ... 안중근 의사의 거사 당시 평안도 진남포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동생 공근은 안중근 의사의 최후 이후 온 가족을 대동하고 압록강을 건넜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는 각오였다. 그는 안중근 의사를 도왔던 빌렘 신부를 따라 독일에 유학함으로써 조선인 최초의 독일 유학생이 됐고, 무려 6개 국어에 통달한 임시정부의 국제통이자 정보통으로 활약하게 된다. . 그는 김구의 측근이었으며 윤봉길과 이봉창 등을 배출한 한인애국단의 핵심 간부였다. 윤봉길이 한인애국단원으로서 거사를 완수할 것을 선서한 곳이 바로 안공근의 집이었고 태극기 앞에 선 윤봉길의 마지막 사진은 안공근의 아들 안낙생이 찍은 것이었다. 또 그는 여러 무술에 능했던 바, 친일 행각을 벌이는 조선인들을 직접 처단하는 암살 조직을 지휘하기도 했다.  . 그러던 그가 1939년 5월 30일 갑자기 증발했다. 치과에 다녀오겠다고 길을 나선 후 그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시신도 찾지 못했다. 안공근의 딸은 중화민국 주석의 아내 송미령에게 진상을 밝혀 줄 것을 호소했지만 중화민국 정보기관의 수사도 헛되이 안공근은 영영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를 납치 살해한 범인들의 정체는 대개 두 방향으로 모아졌다.  . '첫째는 상하이에서 암약하던 국제 간첩 나검북의 소행이다. 일제 밀정을 추적하던 안공근이 나검북이 일제 밀정과 만나 정보를 전달하는 현장을 목격했고, 이 사실을 안 나검북이 상해에서 중경까지 추적하여 안공근과 교분이 있던 중국 관리 조웅으로 하여금 안공근을 불러내게 한 후 살해하여 폐광에 버렸다는 것이고 둘째는 백범 김구 또는 임시정부 내 기호계열의 소행이라는 설이다.  . 기실 백범 김구는 대외가 아닌 독립운동 내부의 다툼에 있어서도 암살 등의 수단을 즐겨 활용한 사람이었다. 소련에서 제공한 공금유용을 이유로 중견 독립운동가를 없앤 것이 김구였고, 그 외에도 임정 내의 반대 세력이나 좌익들과는 피차 살벌한 음모전을 펼치기 일쑤였다. 이 와중에 안공근이 공금을 유용하는 등의 행동을 보여 김구와 소원해지고, 안공근 또한 김구를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미는 상황에서 김구의 측군이 먼저 안공근을 제거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김구가 자신의 최측근으로 오래 활동했던 안공근, 개인적으로 사돈간이기까지 한 안공근이 한때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을 보였기로서니 ‘제거’까지 시켰을까 하는 의문은 남는다.  . 김구가 안공근을 크게 힐난했던 것은 중일전쟁 후 일제의 감시가 치열해지면서 안공근에게 프랑스 조계에 있던 안중근 의사의 가족들과 자신의 가족들을 피난시키라고 지시했는데 안공근은 자신의 형의 가족들은 미처 피신시키지 못하고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만 모시고 왔던 일에서 비롯된다. 김구는 안공근을 다시 들여보내 안 의사 가족을 모시고 오게 하려 했지만 안공근은 자신의 가족들만 겨우 데리고 탈출했다. 이는 이미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진 상하이에서의 여건이 좋지 않았기 때문으로 추정되지만 김구는 의외로 단호했다.  . “나는 안공근을 상해로 파견하자 자기 가솔과 안중근 의사의 부인인 큰형수를 기어이 모셔오라고 거듭 부탁하였다. 그런데 안공근은 자기의 가속들만 거느리고 왔을 뿐 큰 형수를 데려오지 않았다. 나는 크게 꾸짖었다. 양반의 집에 화재가 나면 사당에 가서 신주(神主)부터 안고 나오거늘, 혁명가가 피난하면서 국가를 위하여 살신성인한 의사의 부인을 왜구의 점령구에 버리고 오는 것은, 안군 가문의 도덕에는 물론이고 혁명가의 도덕으로도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군의 가족도 단체생활 범위내에 들어오는 것이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본의에 합당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공근은 자기 식구만 중경으로 이주케 하고 단체 편입을 원치 않으므로 본인의 뜻에 맡겼다." . 이로써 안공근은 김구와 결별하게 된다. 김구의 우려가 아주 틀리지는 않았던 것이 일본의 수중에 넘어간 안중근의 가족들은 그대로 ‘내선일체’의 표본으로 이용되어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은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에 참배를 하며 “아버지의 죄를 속죄”하는, 아버지가 구름을 치며 통곡할 일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 안준생은 이 일로 ‘호부의 견자’로 치부된 가운데 한국전쟁통에 쓸쓸히 죽었고, 일본에 투항하기를 종용했던 안중근의 사위 황일청은 해방 후 피살당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1939년 5월 30일 흔적도 없이 사라진 안공근의 자식들 가운데 3남인 안민생은 평화통일 운동을 하다가 5.16 쿠데타 후 10년의 징역형을 받았고, 장남 안우생은 김구의 북한 방문 때 함께 했다가 북한에 남았다. 남북으로 갈라지고 반역과 지조와 좌와 우에 걸쳐진 안중근 가족들의 가족사는 그대로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이 아닐는지. ... ... 안공근(安恭根)을 다시 알아보기...   안공근(安恭根, 1889년 7월 11일~1939년 5월 30일[1]?)은 일제강점기의 독립 운동가, 교육자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관이자 한인애국단의 조직에 참여하였다.[2] 황해도 신천 출생이며 호(號)는 신암(信庵)이다. 그는 1909년 형 안중근의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에 연좌되어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받다가 러시아로 망명, 러시아 교민들을 지도하였으며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주러시아 대사로 임명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22년에는 한때 이동휘, 김규식 등을 따라 모스크바에 동행, 레닌으로부터 지원금 교부를 위해 노력했다. 그 뒤 한국독립당, 한인애국단의 재정 담당으로 활동하였으며 김구의 최측근이었으나, 자금 문제와 형 안중근의 가족 이주 문제로 김구와 갈등하던 중 암살되었다. 안중근·안정근의 동생이며 안태훈의 아들이다. 본관은 순흥(順興)이고 천주교 영세명은 요한, 호는 신암(信庵)[3] 이다. 1937년부터는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의원이었으며, 중일전쟁 직후 형 안중근 부인 김아려와 가족을 데려오지 못한 일로 김구에게 심한 질책을 받은 이후 결국 결별하였다. 1939년 5월 30일 살해되었으나 암살의 배후는 미궁이다. 황해남도 출신이며 가명으로는 서이로(西利潞)·신암(信庵)·안삼재(安三才)·조한용(趙漢用)·장진구(張震球) 등을 사용하였다.   목차   [숨기기]  1친척 관계 2활동 2.1생애 초반 2.1.1출생과 가계 2.1.2수학과 망명 2.2독립운동과 임시정부 활동 2.2.1임시 정부 참여 2.2.2러시아 활동과 귀환 2.2.3한인애국단 활동 2.3김구와의 갈등과 만년 2.3.1독자적 활동 2.3.2김구와 결별 2.4실종과 암살 2.5사후 3김구와의 갈등 4평가 5학력 6기타 7가족 8같이 보기 9각주 10참고 서적   친척 관계[편집] "); color: rgb(37, 37, 37); font-family: sans-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px;"> 형: 안중근 형: 안정근 사촌 형: 안명근 사촌 동생: 안경근 조카: 안문생 조카: 안준생 조카딸: 안미생 조카사위: 김인 조카: 안진생 5촌 조카: 안봉생 5촌 조카: 안춘생 5촌 조카며느리: 조순옥 5촌 조카며느리: 김현분 활동[편집] 생애 초반[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1889년 7월 황해도 신천군에서 진사 안태훈과 조마리아의 사이에서 아들로 태어났다. 안중근(1879~1910), 안정근(1885~1949)이 그의 형이었다. 군수를 지낸 안인수는 셋째 아들 안태훈이 갑신정변의 주역 박영효와 연관된 인연 때문에 가문이 피해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깊이 우려하였고, 가산을 정리하고 7~80인의 가솔을 데리고 신천 청계동으로 이주하였다. 이러한 사연으로 안중근과 안정근은 해주읍 동문 밖에서 태어난 반면 안공근은 신천 청계동에서 출생하게 되었다.[4] 안공근은 부친 안태훈의 영향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형들과 함께 성장하였고 1892년부터 1900년까지 형 안정근을 따라 한문사숙에서 수학했을 것으로 추측된다.[5] 이후 진남포에서는 큰형 안중근이 가산을 처분하여 세운 2개의 학교 가운데 하나인 천주교 계통의 야학교인 삼흥학교(三興學敎)에 입학하여 영어를 공부하였다.[6] 수학과 망명[편집] 1899년 일어학교에 들어가 일본어를 배웠다. 안공근의 일어 실력은 만주 여순에서 안중근의 동생 자격으로서 참고인 시문을 받을 때에 통역 없이 일어로 대화를 나눴을만큼 뛰어났다.[6] 1907년 3월 서울로 올라왔다. 안공근은 서울에서 초등학교 교원을 양성하는 경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속성과로 6개월 과정을 마쳤다.[7] 그 뒤 1908년 8월 판임관 4등에 임용되어 진남포 공립보통학교 부훈도로 발령받았다.[8] 진남포 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09년 안중근 의거 직후 러시아로 망명한다.[9] 당시 진남포보통학교에서 맡던 그의 직책은 정교사가 아닌 부교사로, 당시 부훈도라고 불렀다.[10] 1909년(융희 3년) 10월 26일 안중근이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의거 직후, 공범혐의로 1개월 남짓 심문을 받았고, 뤼순 감옥에서 안중근이 유언을 남기는 최후까지 함께 했다.[3] 수시로 형 안중근을 면회다녀왔으며, 조선총독부 등의 탄압과 주변의 불편한 시선이 계속되자 그는 망명을 결심, 자금과 인력을 모아 치밀하게 준비한다.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활동[편집] 임시 정부 참여[편집]   충칭 임시정부 청사.   김구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교민단, 한국독립당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10년(융희 4년) 러시아로 망명한 그는 형 안중근의 뜻에 따라 러시아어를 배웠고,[2] 해외 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안중근 기념사진 엽서를 발행하였으며 첩자 김정국(金鼎國)을 처단하였다.[11] 1920년 12월 상하이 한인거류민단의사회 의원이 되고, 1921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황해도 지역구 의원이 되었다. 1921년 7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주러시아 대사에 임명되어 독립자금 확보를 위해 외교를 벌였다.[2][11]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하였으며, 상해 교민단, 독립운동 촉성회, 한국독립당 등 다양한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이때 형 안정근은 안중근, 안정근 등과 사적인 인연이 있던 도산 안창호와 친하게 지내며 형님, 동생이라며 호형호제 하였지만 그는 안창호를 멀리하고 김구를 가까이 하였다. 이후 그대로 김구의 측근이 되어 조소앙, 엄항섭 등과 함께 의거 자금과 무기를 마련하였다. 러시아 활동과 귀환[편집] 1922년 5월 러시아 정부에 구두보고를 보내 3.1운동 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상을 소개하고, 소비에트정부의 이동휘대한 지나친 믿음은 잘못된 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임시정부의 지도자들 중에서 이승만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설명하였다.[12][13]1922년에는 한때 이동휘, 김규식 등을 따라 모스크바에 동행, 레닌으로부터 군자금 잔액 140만 루불을 지원받기 위해 노력했으나 성과없이 되돌아왔다. 1924년 2월 가족과 함께 중국 베이징으로 이주했고 1925년 가족들을 이끌고 위해위로 요양하러 떠났다.[14] 1926년 안원생(형 안정근의 장남)과 팔인단(八人團)을 조직하였다.[15] 1926년 상하이 한인교민단장에서 물러난 여운형을 대신하여 상하이 한인 교민단장에 선출되었다. 1926년 5월 상하이에서 이유필, 최창식, 오영선 등과 함께 독립운동촉진회를 조직하는데 참여하고, "한국 민족의 해방을 촉성하고, 철저한 독립운동가의 조직적 대단결의 실현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그해 5월 임시의정원에서 국무령직을 사퇴한 양기탁의 후임으로 안창호를 국무령에 선임하자, 기호파의 중심인 안공근, 김규식, 김구, 김보윤(金甫潤) 등은 서북파인 안창호가 국무령이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16] 안창호의 측근들은 그에게 지지를 호소하였지만 그는 안창호 지지를 거부하였다. 결국 안창호는 국무령에 선출된지 13일만에 사퇴하여 사태를 수습하였다. 1926년 10월 베이징에서 대독립당조직촉성회가 구성되고 1927년 4월 상하이에서는 전민족독립당이 창당되었다. 그런데 공산주의자인 홍남표, 정백 등이 전민족독립당을 공산, 사회주의자들이 장악하려 하자, 그는 참여를 거부하고 탈퇴하였다. 그러나 그가 참석을 거부했는데도 전민족독립당에서는 계속 집행위원의 명단에 그의 이름을 두고 있었다. 한인애국단 활동[편집]   한국독립당특무대(한인애국단의 전신) 대원 이봉창의 사진(1931년경)   김구와 윤봉길  한인애국단, 사쿠라다몬 투탄 사건, 만선철도 폭파 미수 사건,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31년 김구와 함께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끌었으며 단원의 모집과 관리, 통신연락, 특무활동 등에 관한 일을 총괄하였고,[11] 일제 요인과 친일파 암살을 주관하였다.[2] 동시에 안공근은 서무와 재정, 자금 조달과중화민국 장제스, 쑹메이링, 오철성 등 국민당 관계자들과의 교류 및 후원금을 운반하는 활동을 하였다. 한인애국단의 본부는 안공근의 집에 설치되었고, 따라서 한인애국단의 중요한 일들은 안공근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윤봉길이 출정에 앞서 태극기를 들고 찍은 사진은 그의 차남 안낙생이 자기 집에서 촬영한 것이라 한다.[17] 1932년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 등을 도왔고,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의 낙양분교 내에 설치된 한인특별반 및 후신인 한국특무대독립군의 운영을 맡아서 독립군을 양성하였다.[2][9] 한국국민당 이사, 임시의정원 의원,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고,[11] 이때 공식, 비공식 활동에 분주히 돌아다니던 안공근은 일제의 검거를 피하기 위해 서이로(西利潞)·신암(信庵)·안삼재(安三才)·조한용(趙漢用)·장진구(張震球) 등 여러 개의 가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18] 이 시기 상하이 일본 영사관과 조선총독부에서 파견한 밀정들의 정보보고서에 의하면 "안공근은 김구의 참모로서 그의 신임이 가장 두텁고 김구가 범한 불법행동은 대부분 안공근의 보좌에 의해서 된다"하여 그가 김구의 의거 행위를 여러가지로 도왔음을 기록해놓았다. 그러나 중국 국민당에게서 받은 지원금을 사적인 목적으로 쓰다가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눈밖에 나게 된다. 1930년대 윤봉길의거 이전 어느 시기에 위혜림과 함께 한 중국 광동인의 술수에 말려들어 수천 달러를 사기당한 적이 있었다.[19] 또한 독립운동 자금을 도박 자금으로도 탕진하는 등의 행위가 계속되자 이는 김구의 귀에도 들어가게 된다. 1933년에는 박찬익, 엄항섭 등과 함께 계획을 세워 친일 조선인인 상해한국인친우회위원단 유인발을 제거하였고, 친일파 변절 의혹이 있는 옥관빈을 암살하였다. 1934년 6월경부터 외교술로 대외교섭과 재정조달의 임무를 맡아온 박찬익을 대신하여 중국측과의 교섭임무를 맡게 되었다.[20] 김구와의 갈등과 만년[편집] 독자적 활동[편집] 1936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에 선출되었다가 그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1937년 2월 안공근은 장남 안우생과 함께 한국청년전위단을 결성하여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 8월 한인애국단 대표로서 미국내 한인독립운동단체와 연명으로 한국당호운단체(韓國黨護運團體)의 중일전국(中日戰局)에 대한 선언을 발표하고, 같은달 8월 17일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과 함께 하와이와 미국내 한인독립운동 9개 단체를 토대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조직하였다. 그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에서 1938년까지 활동하였다.[9][21]1937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이는 그가 의문의 최후를 맞이할 때까지 그의 신분이기도 했다. 김구와 결별[편집]   1930년대 초의 김구 안공근과 김구가 갈라선 이유에 대해 중일전쟁 이후 안공근이 자신의 큰형 안중근의 가족을 상해에서 탈출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널리 퍼져 있다.[22] 백범일지에 의하면, 1937년 10월 일본군이 상하이를 공격해 오자, 안공근은 자신의 가족들을 제쳐두고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만을 모시고 난징으로 나왔다.[22] 중일전쟁 후 일제의 감시가 치열해지면서 김구는 안공근에게 프랑스 조계에 있던 안중근 의사의 가족들과 자신의 가족들을 피난시키라고 지시했는데 안공근은 자신의 형의 가족들은 물론이고 자신의 가족들 조차 미처 피신시키지 못하고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만 우선 데리고 나왔다. 당시 곽낙원은 안공근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안공근은 자신의 가족들보다 곽낙원의 안위를 중시한 셈이었다.[16][23] 이를 두고 오영섭은 이로 보아 안공근의 김구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을 익히 짐작할 수 있다.[16] 고 평가했다. 그러나 김구는 안중근의 가족을 데려오지 못했다며 안공근을 질타하고 꾸중하였다. 이후 김구는 다시 안공근에게 상해로 들어가 그의 가솔과 안중근 의사의 부인을 모셔오도록 거듭 당부했으나, 안공근은 자기 가솔만을 데리고 나왔다.[16] 당시 상하이는 일본군에 의해 함락되었으므로 전황이 좋지 않았으나 김구는 안공근이 형수를 모셔오지 못했다고 크게 질책했다. "나는 안공근을 상해로 파견하자 자기 가솔과 안중근 의사의 부인인 큰형수를 기어이 모셔오라고 거듭 부탁하였다. 그런데 안공근은 자기의 가속들만 거느리고 왔을 뿐 큰 형수를 데려오지 않았다. 나는 크게 꾸짖었다. 양반의 집에 화재가 나면 사당에 가서 신주(神主)부터 안고 나오거늘, 혁명가가 피난하면서 국가를 위하여 살신성인한 의사의 부인을 왜구의 점령구에 버리고 오는 것은, 안군 가문의 도덕에는 물론이고 혁명가의 도덕으로도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군의 가족도 단체생활 범위내에 들어오는 것이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본의에 합당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공근은 자기 식구만 중경으로 이주케 하고 단체 편입을 원치 않으므로 본인의 뜻에 맡겼다.[24][25]" 오영섭에 의하면 '안공근이 김구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듣고 김구로부터 신망을 읽었으며 그로 인해 김구의 단체에 편입되기를 원치 않았다고 하는 위의 기록을 입증할 만한 다른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26] 큰형의 가족을 데려오지 못하면 온갖 비난이 안공근 자신에게 쏟아질 것임을 누구보다 안공근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큰 형의 가족을 함께 피신시키지 못한 것은 이미 일제의 수중에 떨어진 상하이의 현지상황이 여의치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26]'라는 결론을 내렸다.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은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에 참배하고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에게 '아버지의 죄를 속죄'하며 오히려 총독의 양자를 자처했고, 사위 황일청은 전향하여 일본에 항복할 것을 독려하다가 광복 직후 피살되기도 했다. 다만 명분과 도덕과 의리를 중시하는 김구는 그러한 상황을 고려치 않고 원칙론에 입각해서 안공근의 부도덕성만을 일방적으로 꾸짖는 말을 '백범일지'에 남겼다.[26] 함락된 상하이에서 형수와 형의 유족을 구해오지 못한 일로 심한 꾸중을 들은 안공근은 김구와 결별하게 된다. 실종과 암살[편집]  안공근 암살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39년 5월 충칭에서 실종되었다고 한다.[11] 충칭에 있을 무렵 그는 상하이 동제대학 출신 의사 유진동(劉振東)의 집을 출입했는데, 유진동의 집에 출입하면서 지내다가 갑자기 행방불명되었다.[27] 유진동은 김구의 최측근으로 한때 김구의 주치의이기도 했다. 5월 30일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2] 그러나 살해범은 찾지 못했으며, 안공근의 시신 역시 찾지 못했다. 향년 51세. 안공근의 딸 안정생은 쑹메이링에게 아버지를 살해한 자를 잡아줄 것을 청원, 쑹메이링의 청으로 다시 중국 국민당 정부의 경찰이 상하이를 수색하였으나, 용의자는 끝내 잡지 못하였다. 안공근의 암살 배경에는 일본의 스파이에 의한 암살설, 중국계 마적단에 의한 암살설, 안공근과 갈등하던 김구의 다른 측근에 의한 암살설이 있다.[28] 또한 임시정부 산하에서 안공근과 경쟁관계에 있던 기호파 계열에 의한 암살설[27] 도 있다. 사후[편집] 범죄자를 찾아서 처벌해줄 것을 요청한 피해자 안공근의 딸 안정생의 부탁 편지를 받은 쑹메이링의 청으로 중국 국민당 정부의 경찰은 상하이 주변을 수색하였으나 범인은 체포하지 못했고, 미궁으로 남게 됐다. 그의 시신은 찾지 못했고 아들인 안우생은 광복 후 1948년 4월 김구를 따라 남북협상에 참여했다가 김구 사후 홍콩으로 망명하였고 이후 80년대 북한에 생존해 있었던 것이 알려졌다 정부로부터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9] 그의 사인으로는 그와 갈등관계에 있던 모 독립지사의 수하들에 의한 암살설, 국제간첩인 나검북(羅劍北)에 대한 암살설 등이 있다.[28] 참고로 한겨레에 임정의 역사를 다룬 [길을 찾아서]를 연재 중인 김자동 씨에 의하면 안공근의 시신을 한인 의사 유진동의 집에서 처리했다고 한다. 김구와의 갈등[편집] 안공근이 중국 국민당 정권에게서 지원받은 공금을 사적으로 사용하거나 도박 등에 돈을 날렸고 이 일로 김구와 소원해지게 된다. 특히 중일전쟁 직후 그는 형인 안중근의 일가족을 한국에서 데려오라는 김구의 지시를 받았으나, 일본 경찰의 추격으로 데려오지 못하고 자신의 가족만 비밀리에 선박으로 상하이로 데려왔다. 그러자 김구는 형님 의사(義士)의 가족은 데려오지 못하고 자신의 가족만 데려왔느냐며 안공근을 질책하였다. 김구의 질책에 화가 난 안공근은 임시정부의 가족 이동에서 빠지기도 했다. 1930년대에는 중국 광동인의 술수에 말려들어 수천 달러를 사기당했다.[19] 이는 한인애국단과 임시정부의 자금으로 모금했던 돈이라 김구 및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눈밖에 나게 됐다. 또한 그는 중국 국민당의 지원으로 임정 주석직에서 김구를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이는 실패로 돌아가기도 했다. 평가[편집] 백범일지에 의하면, 1937년 10월 일본군이 상하이를 공격해 오자, 안공근은 자신의 가족들을 제쳐두고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만을 모시고 난징으로 나왔다.[22] 이를 두고 오영섭은 이로 보아 안공근의 김구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을 익히 짐작할 수 있다.[16] 고 평가했다. 그의 씀씀이가 헤픈 것과 사치에 대한 비판도 있다. 당시 중국 관내에서 활동한 일반 독립군들의 생활수준은 일신을 지탱하기에도 넉넉지 못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중국 정부의 지원금을 관장하며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는 안공근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였다.[29] 학력[편집] "); color: rgb(37, 37, 37); font-family: sans-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px;"> 황해도 신천 계몽보통학교 수료 황해도 신천 삼흥보통학교 수료 황해도 해주 신진보통학교 졸업 평안남도 진남포고등보통학교 수료 경성사범학교 졸업 기타[편집] 1925년 프랑스 불조계 공무국이 작성한 보고서에 김구, 이시영, 노백린, 김규식, 김약산, 여운형, 이유필 등과 함께 중요한 한국인으로 분류되었다.[14] 2008년 7월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1][2][9] 가족[편집] "); color: rgb(37, 37, 37); font-family: sans-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px;"> 조부: 안인수(安仁壽), 진해현감 역임 조모: 제주 고씨 아버지: 안태훈(安泰勳, 1862~1905), 진사 어머니: 조마리아(趙마리아) 부인: ");"> 아들: 안우생, 묘는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있다. ");"> 손녀 : 안기애 손자 : 안기철 손자며느리 : 김씨, 남로당 제주도 유격대장 김달삼의 딸 손자 : 안기호 손자 : 안기영 손자며느리 : 김씨, 김일성의 측근 김병식의 딸 아들: 안낙생 딸 : 안씨 사위 : 한지성(韓志成), 한국전쟁 때 서울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딸 : 3명 형: 안중근(安重根, 1879~1910) 형수: 김아려 누이: 안성녀 누시아(1881~1954), 독립운동가, 부산 천주교 묘지에 안장. 형: 안정근(安定根, 1885~1949), 독립운동가, 1949년 상하이에서 사망. 조카: 안준생, 안중근의 아들 조카: 안원생(安原生), 안정근의 아들 조카: 안진생, 안정근의 아들. 미얀마 대사 역임 종손: 안웅호(安雄浩), 안준생의 아들이다. 같이 보기[편집] "); color: rgb(37, 37, 37); font-family: sans-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px;"> 안공근 암살 사건 안중근 안미생 안춘생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박찬익 한국독립당 한인애국단 김형욱 각주[편집] ↑ 이동:가 나 국가보훈처 (2008년 7월 1일). ““호국영령 영원히 기억할 것””. 나라사랑. 8면 상단면. ↑ 이동: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장일현 기자 (2008년 6월 30일). ");">“7월 독립운동가 안공근 선생”. 조선닷컴. 2008년 7월 12일에 확인함. ↑ 이동:가 나 서정훈 기자 (2008년 6월 29일). ");">“안공근 선생 7월의 독립운동가”. 뉴시스. 2008년 7월 12일에 확인함. 이동↑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265~266p 이동↑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66p ↑ 이동:가 나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67p 이동↑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67~268p 이동↑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68p ↑ 이동:가 나 다 라 마 진성훈 기자 (2008년 7월 1일). ");">“7월의 독립운동가 안공근 선생”. 한국일보. 2008년 7월 12일에 확인함. 이동↑ 교사는 훈도라고 불렀다. ↑ 이동:가 나 다 라 마 고경호 기자 (2008년 6월 30일). ");">“7월의 독립운동가, 안공근 선생 선정”. 대전일보. 14쪽면. 2008년 7월 12일에 확인함. 이동↑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283~284p 이동↑ 고정휴 《이승만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고정휴, 2006,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92~93p ↑ 이동:가 나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84p 이동↑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87p ↑ 이동:가 나 다 라 마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 (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88페이지 이동↑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290p 이동↑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96p ↑ 이동:가 나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98p 이동↑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93p 이동↑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97p ↑ 이동:가 나 다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00페이지 이동↑ 한시준, 《안공근의 생애와 독립운동》 138쪽 이동↑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00~301페이지 이동↑ 김구, 백범일지 (도진순 엮음) 361~362페이지 ↑ 이동:가 나 다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01페이지 ↑ 이동:가 나 ");">안중근의 두 동생, 안정근과 안공근 가톨릭뉴스 2008년 07월 29일자 ↑ 이동:가 나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02~303p 이동↑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02페이지 참고 서적[편집] "); color: rgb(37, 37, 37); font-family: sans-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px;">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2007. 경인문화사) 고정휴 《이승만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 2006) 한시준, 《안공근의 생애와 독립운동》 김구, 백범일지 (도진순 엮음, 돌베개)   =============================== 안정근, 알아보기... 안정근(安定根, 1885년 1월 17일 ~ 1949년 3월 17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목차   [숨기기]  1이력 2생애 2.1사후 3가족 및 친척 관계 4바깥 고리   이력[편집]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일명은 안청(安淸), 안정근(安正根)이고 황해도 신천출생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지냈다. 생애[편집] 그는 항일 독립운동가 안중근(安重根)의 친아우이고 독립운동가 안공근(安恭根)의 친형이며 안명근(安明根)의 사촌 남동생이고 독립운동가 김인(金仁, 백범 김구의 첫째아들)의 장인이다. 김구(金九)의 첫째아들 김인(金仁)의 부인이기도 한 독립운동가 안미생(安美生)은 그의 딸이며 독립운동가 겸 외교관 안진생(安珍生)은 아들이다. 1939년 병을 얻어 와병하기 시작하였고 홍콩(香港)과 중화민국 장쑤 성 상하이(中華民國 江蘇省 上海,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를 전전하였으며 1945년 일제가 패망한 8.15 광복과 1948년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중국 본토에 머물러 있다가 1949년 3월 17일 중화민국 장쑤 성 상하이에서 병사하였다. 사후[편집] 사후에는 생전의 그가 세운 독립 운동 공로를 인정받아 198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가족 및 친척 관계[편집] "); color: rgb(37, 37, 37); font-family: sans-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22.4px;"> 형: 안중근 아우: 안공근 사촌 형: 안명근 사촌 남동생: 안경근 사위: 입언 김인 외손녀: 김효자 사돈: 백범 김구 조카: 안준생 조카: 안우생 5촌 종질: 안봉생 5촌 종질: 안춘생 5촌 종질부: 조순옥 ===========================   안중근의사의 가족에 대하여...   의거 이전에 안중근은 동료에게 자신의 가족을 국외로 불러오도록 부탁한 바 있었다. 그리하여 안중근의 처와 자식들은 하얼빈 의거 전에 조선을 떠났고, 안중근의 의거가 단행된 다음날 하얼빈에 도착했다. 하얼빈에 뒤늦게 도착한 그의 처자식들은 유승렬의 도움으로 러시아령 연해주의 꼬르지포로 옮겨가 살게 되었다. 유승렬은 그 지역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재정적으로 안중근을 지원한 바도 있었다. 그의 아들 유동하는 안중근 의거 직후 함께 체포되어 재판을 받기도 했다.   안중근이 순국한 직후 연해주에서는 ‘안중근유족 구제 공동회’가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이 모임의 주선으로 1910년 10월경에 이르러 이곳에는 안중근의 어머니와 첫째 동생인 안정근 내외 및 안공근 등 안중근 일가 여덟 명이 모여 살게 되었다. 그 후 안중근 가족은 1911년 4월 경 꼬르지포에서 10여 리 떨어진 조선인 마을 목릉(穆陵) 팔면통(八面通)에 옮겨 살게 되었다. 안중근의 가족은 도산 안창호 및 이갑(李甲)의 도움으로 이곳에 이주하고 ‘열여드레 갈이’ 농장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중근 가족에 대한 일제의 추적은 이 마을에까지 이르렀다. 1911년 여름 이 마을에서 안중근의 맏아들인 분도가 일제의 밀정에 의해서 독살 당해 죽게 되었다. 분도는 안중근이 그의 부인과 어머니에게 보낸 유서에서 신부로 키워달라고 부탁했던 아이였다. 안중근 가족은 1917년 7월 니콜리스크로 다시 이주하여 벼농사를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연해주는 러시아 혁명의 큰 물결에 휩쓸리고 있었다. 이 와중에서 연해주의 동지들은 안중근 가족의 보호에 특별히 유념해야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당시 동양최대의 국제도시였던 샹하이(上海)로 이주해갔다. 안중근 가족 일행이 상해에 정착한 때는 1919년 10월이었다. 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출범한지 몇 개월이 지나서였다.   그 가족의 샹하이 생활   샹하이로 이주한 안중근 가족들은 프랑스 조계 내 남영길리(南永吉里)에서 살았다. 그들이 살던 곳은 평안도 출신 서북지방 인사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했으며 흥사단의 샹하이 지부가 있던 선종로(善鍾路)나 기호지방 인사들의 거주지였던 애인리(愛仁里)와는 약간의 거리가 있었다. 안중근 가족의 샹하이 정착에는 도산 안창호가 일정한 도움을 주었다. 또한 구한말 1894년 동학농민혁명 직후부터 안중근의 부친인 안태훈과 잘 알고 지내던 백범 김구도 그들의 생활을 도왔다. 샹하이 시절 초기 어머니 조마리아와 안중근의 아내 및 자녀들을 전적으로 돌보아준 사람은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이었다. 그는 샹하이 시절 김구의 오른팔이 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1937년 일본군이 샹하이를 공격해 오자 자신의 가족들도 내버려둔 채 김구의 모친 곽낙원만을 남경으로 모시고 나왔다. 이 때문에 안공근은 백범 김구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기도 했다. 안공근의 이러한 행동은 후일 큰 후회거리를 남겼다.   안중근의 둘째아들 안준생(安俊生, 마태오)이 생장한 데는 이곳 샹하이가 되었다. 안준생은 이곳에서 수학했고, 샹하이의 가톨릭스쿨(진단대학?)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있었다. 그는 정옥녀(鄭玉女)와 결혼하여 2남1녀를 두었다. 중일전쟁 시 안준생은 중경으로 가지 못하고 샹하이에 남아 있었다. 그는 처가의 권유에 따라 헤로인 장사를 시작하여 일약 치부했고, 조선총독부의 초청을 받아 고국을 방문했다 한다. 그런데 당시 서울의 장충단에는 친일파 인사들에 의해서 이등박문을 추모하는 박문사(博文祠)가 세워져 있었다. 이때 안준생은 총독부의 계획대로 서울 장충단에 있던 박문사를 찾았고 ‘이등박문의 아들과 눈물의 악수 일 장면’을 연출했다. 이렇게 그는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길을 향해 가고 있던 일제의 침략정책에 동원되었고, 안중근을 아끼던 모든 사람들은 그 아들의 행위에 가슴을 쳤다.     답변추천해요1안중근 의사 사후 풍비박산 난 안중근의 가족은 일제의 끊임없는 협박과 감시로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안중근은 조국을 위해 가족을 버려야 했지만, 조국은 그 가족들을 돌보지 않았다고 합나다. 일본의 감시를 피해 임시정부 사람들까지 모두 떠나버린 상해에 버려진 의 가족들의 사정이 얼마나 처참했으면 그의 어머니는 변절 후 상해로 돌아온 안준생, 아버지를 팔고 돌아온 아들을 "고생했다"며 위로했다고 합니다.   안중근의 큰아들은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를 7살 때 누군가 준 과자를 받아먹고 동생들에게도 과자를 먹이고 싶어 집으로 돌아오던 중 쓰러져 죽었다고 합니다. 안중근의 둘째 아들 안준생은 서른 살 가까운 청년이 될 때까지 변변한 밥벌이를 하지 못했는데, 안중근의 의거 후 일본이 그 가족들을 따라다니며 감시하고 일자리를 얻는 족족 훼방을 놓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안준생은 당시 조선총독부 총독인 미나미의 양아들로 입적하며 친일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합니다.   ===================================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는 16세 때인 1894년 황해도 재령군 김홍섭(金鴻燮) 선생의 딸 김아려(金亞麗·당시 17세) 여사와 결혼하여 2남1녀를 낳았습니다. 첫 딸 현생(賢生·1902년생),큰아들 분도(芬道·1905년생), 둘째아들 준생(俊生·1907년생)입니다.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 의사는 이듬해 2월 사형 언도를 받고 3월 26일 순국(殉國)합니다.     부인 김아려 여사는 남편의 순국 이후 2남1녀와 함께 연해주에서 살았습니다. 큰아들 분도는 12세 때 이국(異國)에서 세상을 떠났고, 김 여사는 이후 자녀들과 함께 상해로 옮겨 살다가 광복 후 귀국합니다.     안 의사의 둘째아들 준생은 1953년 무렵 세상을 떠났습니다. 준생은 부인 정옥녀 여사와 슬하에 1남2녀를 두었습니다. 아들 웅호(雄浩·1932년생)씨, 딸 선호(善浩)·연호(蓮浩)씨입니다.    정옥녀 여사는 남편이 타계한 뒤 아들과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납니다. 안 의사의 유일한 손자인 웅호씨는 미국에서 심장병 의학박사가 되었고, 현재 샌프란시스코 인근 도시에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김호일 안중근기념관 관장은 "웅호씨는 한국에 몇 차례 다녀간 적이 있는데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한다"며 "지금은 병환 중으로 거동이 어렵다고 들었다"고 소식을 전했습니다.    웅호씨는 아들 하나를 두었습니다. 김 관장은 "경기도 포천의 혜화동 천주교회 묘지에 있는 준생씨와 정옥녀 여사의 묘소에는 웅호씨의 아들 이름이 도용(度勇)으로 적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순흥안씨종친회 안찬영 부회장은 "족보에는 보영(寶榮·1963년생)으로 되어 있으며 미국에서 IT업계에 종사한다고 들었다"고 말합니다. 안 의사의 외손녀(현생씨의 딸) 황은주씨는 현재 경기도 용인에서 살고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딸 안현생 여사의 무덤   아무도 돌 보는이 없는 쓸쓸한 이 무덤이 서울 강북구 삼각산 자락에 있는 현생씨의 무덤이다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영웅 안중근 의사의 딸이지만 안 여사의 일생은 순탄하지 못했다. 8세 때 아버지를 잃은 안 여사는 프랑스인 신부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다 13세 때 일제의 눈을 피해 제정러시아로 망명했다.     16세 때엔 프랑스 조계지로 이주해 불문학과 미술을 공부했고, 이후 서울로 이주해 6·25을 겪고 대구로 피난해 효성여대에서 불어를 가르치다가 수복 후 서울로 옮겨 생활하던 중 북아현동에서 고혈압으로 58세의 파란 많은 삶을 마쳤다. 21살에 결혼하여 슬하에는 두 딸을 두었다.       안중근 의사의 가족   - 안의사의 부친 안태훈과 모친 조마리아 -   - 안의사의 부친과 동생들 -   - 모친 -   - 모친과 동생 안정근의 가족 -   - 안중근 의거 2년뒤 고향 가족들 - 1911년 오르베르트 베버 신부가 촬영한 '안 진사(進士) 가족' 사진. 독일 출신의 베버 신부는 안중근 의사 의거 2년 후인 1911년 5월 15~16일 안 의사의 고향인 황해도 신천 청계동을 방문해 가족과 마을 모습 등을 촬영했다. 그는 한 해 동안 촬영한 사진과 한국 여행기를 모아 1914년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라는 책을 발간했다. 이 책은 20일부터 열리는 베네딕도수도회 한국 진출 100주년 기념 전시회에 선보일 예정이라고 한다.     - 러시아 군관시절의 안 의사 동생 -     증손자 토니 안 '의거 100주년' 맞아 한국 찾아       "곳곳에 붙어 있는 증조부 초상화와 손도장 걸개그림 등을 보니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맞아 안 의사 증손자인 토니 안(한국명 안보영.46)씨가 한국을 찾았다. 국가보훈처가 26일 서울과 중국 하얼빈에서 동시에 열리는 안 의사 의거 100주년 기념식에 초청했기 때문이다.     안 의사 손자인 아버지 안응호(71)씨는 암 투병 중이라 이번 여행에 함께하지 못했다.     안씨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나 미국 국적을 갖고 있다. 현재 미국회사(AT&T)에 다니는 그는 한국말을 거의 못한다.     안씨는 "할머니와 아버지가 틈만 나면 '너는 애국지사의 후손'이라고 강조하셨다"며 "처음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몰랐지만 주위 동포들과 몇몇 미국인들이 증조부가 걸었던 삶을 자세히 얘기해줘 알게 됐다"고 했다.        그는 "그 뒤로 증조부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후손인 게 자랑스럽기도 했지만 후손으로서 별로 한 일이 없어 책임감도 느꼈다"며 "증조부의 인생은 단지 하나의 생을 뛰어넘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가끔 인터넷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Wikipedia)에 들러 안 의사에 대한 정보를 직접 올리고 잘못된 사실을 바로잡으며 안 의사의 업적을 영미권에 알리는 민간 전도사 역할도 맡고 있다. ===================================================   [출처] 안중근 의사의 후손들  
454    [력사를 잊지말자]- 백정기, 그는 누구인가... 댓글:  조회:5672  추천:0  2016-07-17
  "나는 몇 달을 더 못살겠다. 그러나 동지들은 서러워 말라. 내가 죽어도 사상은 죽지 않을 것이며 열매를 맺는 날이 올 것이다. 형들은 자중자애하며 출옥한 후 조국의 자주독립과 겨레의 영예를 위해서 지금 가진 그 의지 그 심경으로 매진하기를 바란다. 평생 죄송스럽고 한 되는 것은 노모에 대한 불효가 막심하다는 것이 잊혀지지 않을 뿐이고, 조국의 자주독립이 오거든 나의 유골을 동지들의 손으로 가져다가 해방된 조국 땅 어디라도 좋으니 묻어주고, 무궁화꽃 한 송이를 무덤 위에 놓아주기 바란다." 백정기 의사의 유언 배고픈 청년 아나키스트   1. 소개2. 생애3. 사후     1. 소개[편집] 백정기(白貞基, 1896년 1월 19일 ∼ 1934년 6월 5일) 는 전북 정읍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아나키스트 계열의 독립운동가이다. 호는 구파(鷗波)이다. 2. 생애[편집] 1896년 1월 19일 전북 부안군 동진면 하장리(현재 부안읍 신운리)에서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02년 7세때 정읍군 영원면 갈선리(현재 영원면 은선리)로 이사하여 이곳에서 성장했다. 한문을 공부, 19세 때 큰 뜻을 품고 서울로 올라왔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과 전단을 가지고 고향에 내려가 항일운동을 이끌었다. 그 후 동지들과 일본 군사시설 파괴를 공작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본적지와 행적을 속여 나올 수 있었다. 그 후 각지를 몰래 다니며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여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 일본 군사시설 파괴에 전력하였으며, 1924년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고 도쿄에 갔으나 실패하였다. 같은해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설립에 관여했다. 1924년 상하이로 가서 우당 이회영, 화암 정현섭, 우근 유자명, 회관 이을규, 우관 이정규 등과 함께 재중국 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는 데 참가하여, 조선 대표로 출석하였다고 우관문존년보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기관지인 정의공보를 비밀리에 발행하였는데, 그 잡지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매었으나 유자명 등 여러 아나키스트 동지로부터 후원을 받아 1929년부터 1930년까지 약 1년간 공동병실에서 요양생활을 하여 완치되었다. 1932년 상하이에서 자유혁명자연맹을 조직하여 흑색공포단으로 개칭하고, 조직을 강화하여 대일투쟁을 전개하였다.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 당시에 구파 의사도 동일한 시도를 준비했었으나 입장권을 구하지 못해 실패하였다. 1933년 3월 상하이 훙커우에서 정현섭, 원심창, 이강훈 등의 아나키스트 동지들과 중국 주재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를 암살하려고 모의하다가 육삼정에서 체포되었다. 당시 상해 일본 총영사 보고문에서 일본 경찰의 세밀한 사전 체포계획이 세워진 것으로 추정컨대 아마 의거가 사전에 누군가에게 누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나가사키로 이송되어 나가사키 법원에서 백정기 의사와 원심창은 무기징역을, 이강훈은 징역 15년 형을 언도받았다. 백정기 의사는 이사하야 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옥사하였다. 3. 사후[편집] 1946년 박열, 이강훈 등 아나키스트계 독립 운동가들이 3의사의 유골 수습을 촉구하여 '3의사국민장봉장위원회'를 발족하고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세 의사의 유골을 일본으로부터 회수하여 7월 6일 국민장을 실시하였고, 현재 서울시 효창공원 3의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현재 그의 고향인 전라북도 정읍에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정읍시에서 29번 도로를 따라 15km정도 북쪽으로 올라간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453    [력사를 잊지말자]- 이봉창, 그는 누구인가... 댓글:  조회:7827  추천:0  2016-07-17
[1] 역사를 바꿀 수도 있었던 사나이 "나는 赤誠[적성]으로써 祖國[조국]의 獨立[독립]과 自由[자유]를 回復[회복]하기 爲[위]하여 韓人愛國團[한인애국단]의 一員[일원]이 되야 敵國[적국]의 首魁[수괴]를 屠戮[도륙]하기로 盟誓[맹서]하나이다." 이봉창(李奉昌, 1900년 8월 10일 ~ 1932년 10월 10일).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히로히토 암살 미수 사건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1. 생애와 의거2. 언론 보도3. 모던보이4. 후일담5. 폭탄 이야기   1. 생애와 의거[편집] 용산의 문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가게 점원과 철도 운전 견습생 등으로 일하다가 일본에 건너가 오사카에서 일본인의 양자가 되었고,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일본식 이름도 얻었다. 이렇듯 본래는 당시 식민지 조선인의 좌절과 순응을 잘 보여주는 듯한 사고를 갖고 있었던 듯하나,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각종 차별을 받으면서 사고의 전환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히로히토의 즉위식 당시 그가 9일간 유치장에 갇혀있었던 것이 결정적 계기였던 듯.#, #.[2] "조선인으로 태어나 이태왕(李太王) 전하(殿下)의 옥안(玉顔)을 뵌적이 없으며 경술병합(庚戌倂合) 후 신일본인(新日本人)이 되어 천황(天皇) 폐하(陛下)의 성안(聖顔)을 뵌적도 없다. 또 조선 역사도 안 배웠고 일본 역사를 가르쳐 받은 적도 없다. 일국의 국민으로서 그 나라의 역사도 모르고 그 나라 제왕의 성안(聖顔)도 본 적이 없는 것은 참으로 스스로 부끄러운 일이다." 이봉창은 순수하게 덴노의 얼굴이 보고 싶어(…) 즉위식에 참석하려 했건만, 일본 경찰의 수색 도중 한글이 쓰인 편지가 발견되어 연행되었다. 정작 편지에는 별 내용이 없었으나 출신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 대우를 받았다는 점에서 그는 깊은 회의를 느꼈다고. "일부러 돈까지 써 가며 교토의 유치장을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다. 나는 일본 국민의 자격으로 천황(天皇) 폐하(陛下)를 뵈러 온 것이 아닌가? 한글이 섞인 편지를 갖고 있다고 해서 무엇이 나쁜가? 역시 나는 조선인이다. 조선인 주제에 일본 천황 같은 것을 볼 필요는 없다는 것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벌을 받아 유치장에 갇히게 된 것이다." "남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게 되었고, 따라서 사상도 저절로 변해... 누군가가 이끌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들어갈 기분이었다. 자신은 조선인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조선의 독립운동에 몸을 던져 우리 2천만 동포의 자주권을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마음먹었다." 이후 31세에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공근을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 알게 되고 상하이에 도착하나 처음엔 일본의 밀정으로 의심을 받았다. 워낙 일본인같은 제스쳐 그리고 능숙한 일본어 솜씨 때문에[3] 임시정부의 직원들로부터 '왜영감'이라 불릴 정도였다. 그 별명을 증명하듯이, 일본인 사회나 마찬가지인 상해의 홍구지역에 거주한지 1년도 안 되었는데도 일본인 지인이 수 없이 많았으며 심지어 일본 총영사관의 경찰까지 지인으로 두었으며 일본영사의 내정까지 무상으로 출입했을 정도. 심지어 이봉창이 의거를 하러 일본으로 갈 때 부두까지 나와서 잘 갔다오라고 마중을 나온 일본 경찰까지 있었다. 김구는 이봉창 열사와 여러 번의 질문과 대화를 통해 진심을 알게 되었다. 임시정부 직원들과 함께 여관에서 한 술자리에서 왜 "덴노를 처단할 생각을 하지 않느냐?"고 말할 정도로 대범한 모습을 보였으며, 자신에게 밀정이라고 의심을 하거나 비판적인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술과 고기를 직접 사와 대접까지 하면서 대인배스럽게 호탕한 모습을 보여줬다고 한다. 이때, 이봉창 열사는 자신이 왜 덴노를 암살할 생각을 했는지에 대해 말했다. 나는 작년에 동경에 있을 때 하루는 일본 임금이 하야마에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구경하러 가서 한참 바라보고 서있었다. 그런데 임금이 내 앞을 지나갔다. 나는 이때 가슴이 일렁이고 온몸의 피가 솟구쳐올라 내게 무기만 있다면 큰일을 한번 해볼텐데 하고 생각하던 중에 덴노가 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버려 좋은 기회를 놓쳤다. 그리고 이 취중진담이 덴노를 암살한다는 엄청난 계획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봉창 열사의 취중진담이 있었던지 며칠 후, 이봉창 열사는 김구에게 자신의 뜻을 밝혔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꿈꾸며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하이로 왔습니다. 백범일지에는 백범 김구와 이봉창 열사의 각별했던 모습이 나온다. 12월 중순 어느 날, 나는 이봉창 선생을 비일리 법조계 중흥여사로 청하여 하룻밤을 같이 자며 이 선생이 일본에 갈 일에 대하여 여러가지 의논을 하였다. 만일 자살이 실패되어 왜 관헌에게 심문을 받게 되거든 이 선생이 대답할 문구까지 일러주었다. 그 밤을 같이 자고 이튿날 아침에 나는 내 헌옷 주머니 속에 돈뭉치를 내어 이봉창 선생에게 주며 일본 갈 준비를 다하여 놓고 다시 오라 하고 서로 작별하였다.   이틀 후에 그가 찾아왔기로 중흥여사에서 마지막 한 밤을 둘이 함께 잤다. 그때에 이씨는 이런 말을 하였다.   "일전에 선생님이 내게 돈뭉치를 주실 대에 나는 눈물이 났습니다. 나를 어떤 놈을 믿으시고 이렇게 큰 돈을 내게 주시나 하고, 내가 이 돈을 떼어 먹기로, 법조계 밖에는 한 걸음도 못 나오시는 선생님이 나를 어찌할 수 있습니까. 나는 평생에 이처럼 신임을 받아 본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처음이요, 또 마지막입니다. 참으로 선생님이 하시는 일은 영웅의 도량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정식으로 한인 애국단에 가입한 시기는 1931년 12월 13일. 그리고 백범일지에는 마지막 사진을 찍을 때 슬퍼하는 김구를 향해 "자신은 영원한 쾌락을 영위하기 위해 가는 것이니 슬퍼하지 말라."며 위로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자동차 위에서 깊이 허리를 숙이고 떠난다. 일본으로 잠입했는데 얼마나 치밀했는가 하면 도쿄에서 숙박을 했다가 거사 바로 전날 도쿄를 벗어나 가와자키시에서 숙박을 했다. 일부러 숙박장소를 도쿄에서 외곽으로 변경한 이유는, 덴노의 행차전날 밤부터 각 치안기관에서 도쿄 관내의 음식점, 여관, 유곽, 절, 빈집 등 공공장소를 검문하기로 예정이 되어있기에 변경했으며 일본 경찰도 이봉창 열사의 치밀함에 놀랐을 정도.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열사는 도쿄 교외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인 히로히토를 겨냥하여 도쿄 경시청 부근에서 수류탄 1개를 던졌다. 헌데 정작 의거 장소에서 떨어진 사쿠라다몬(桜田門) 의거로 유명하다. 안타깝게도 이봉창 열사는 여러 대의 마차 중에서 어느 것이 진짜 덴노가 탄 마차인지 알지 못했다. 흔히 대통령이 이동할 때, 대통령이 탑승한 것과 똑같은 자동차가 5대씩 이동하는 걸 생각해보자. 여담이지만 장량이 진시황을 암살하려 할 때에도 비슷한 이유로 실패했다. 결국 그렇게 던진 폭탄 하나는 다른 마차를 맞췄고 그 폭탄은 마차를 끌던 말과 그 말에 탄 근위병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런데 당시 타임지 기사에 따르면 이놈 말이 몸빵을 한 덕에 상으로 당근 한상자를 받았다고 카더라. 결과적으로 히로히토 암살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폭탄 투척 이후 경찰들이 들이닥쳤을 때, 경찰들은 이봉창 열사가 던진 줄 모르고 이봉창 열사 앞에 있던 일본인을 구타했으나 이에 안타까움을 느낀 이봉창 열사는 자수를 했다. 이때 침착한 어조로 "숨지 않을테니 점잖게 다뤄라."고 말했다. 1932년 1월 8일 거사 직후 체포된 이봉창 열사. 이봉창 열사에 대한 공식 취조는 1월 8일 오후 3시 50분에 시작되었다. 경시청 형사부장 자리에서 외부와의 연락을 일체 차단된 상태에서 진행했으며 검사가 직접 취조했다. 아래의 글은 검사가 직접 작성한 본문을 그대로 번역, 옮긴 것이다. 범인은 언어가 명석하여 일본인과 다름이 없고, 태도는 태연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미소를 띄우고, 이런 중대한 범행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반성하는 관념은 털끝만큼도 없다. 1928년(소화 3년) 11월에 거행된 즉위식을 참관하기 위해 교토로 갔을 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무고하게 10일간이나 유치된 것에 분개하여 사상의 변화를 일으키고 1930년 11월에 상해로 가서 중국인 경영의 레코드회사 영창공사에서 근무하고, 백정선으로부터 300원을 받아 1931년 12월 23일에 도쿄에 왔고, 1932년 1월 4일에 백정선으로부터 은행을 통해 다시 100원의 송금을 받고, 7일 아사히여관을 떠나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의 유곽에서 묵고, 8일 오전 8시에 전차로 하라주쿠에 도착하고, 검색이 심해 거사에 불리함을 알고 전차로 요쓰야 역으로 가고, 다시 경시청 앞으로 가서 덴노에게 폭탄을 던졌다. 1932년 9월 16일 도쿄 대법원에서 첫 공판이 열리고 9월 30일 오전 9시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죄명은 대역죄(大逆罪). 당시 그의 나이 32세였다. 백범 김구는 훗날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 직전에 이봉창 의사의 의거 실패를 기억하여 제대로 터지는 폭탄을 부탁했다. 그리고 그 하나로 무시무시한 전적을 올렸다. 참고로 백범일지에 따르면 이봉창과 윤봉길이 의거 시 사용한 폭탄 모두 상해에 있는 병공창에서 제작한 것이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 당시 창장은 자기네가 빌려주었던 폭탄 화력이 미약하여 암살 미수에 그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여, 윤봉길에게는 시험을 거듭한 폭탄을 성심성의껏 제조하여 20여 개를 무료로 제공하였다. 이 때 폭탄 제조 의뢰를 한 것은 김구의 지시를 받은 김홍일 장군으로, 공장 측의 배려로 폭탄을 김 장군의 집으로 운반해주었다. 김홍일 장군이 이봉창, 윤봉길 의거 당시 폭탄을 제작했다는 설이 있는데 오해다. 정확히는 윤 열사의 폭탄은 왕바이슈가 제작을 했다고 한다. 정확히는 둘다 오류다. 독립운동의 특성상 기록을 남길 수가 없다. 기록은 후일 일제가 증거로 쓸수있기 때문이다. 괜히 미션임파서블에서 자료를 지우는게 아니다 그렇기에 대부분은 독립운동에 대한 기록이나 사실은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기억에 의존한다. 그래서 이 폭탄 제조에 대한 썰은 총 2개가 있다. 하나는 김홍일이 직접 제작했다는 썰이고, 다른 하나는 김홍일이 폭탄제조자 왕바이슈를 주선했다는 점. 그런데 김홍일 장군이 대만대사로 활동하던 중에 왕바이슈와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이때 이 왕비아슈가 이봉창 열사의 폭탄을 제조해주었다고 하였기에 일반적으로 김홍일이 중국 병기공창 주임으로 있을동안 왕바이슈를 만나게 되었고, 이후 김구의 요청에 따라 왕바이슈와 김구를 연결해주었고, 폭탄제조에 필요한 화약을 제공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광복 후 김구가 1946년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돌려받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의 삼열사묘에 안장하였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이봉창 의사에게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2. 언론 보도[편집] 1932년 1월 10일 중앙일보에서 보도된 이봉창의 의거. 매우 비난하는 어조의 기사를 실었다. 당시 신문사 사장은 노정일. 일부에서는 이 기사를 실은 신문사 사장이 여운형이라는 허위사실을 퍼뜨리고 있는데, 이 무렵 여운형은 감옥에 있었다. 여운형은 1932년 7월에 출옥하고, 지인들의 도움(대표적으로 조동호가 그를 도와주었다.)을 받아 1933년 2월에중앙일보 사장으로 취임되었고, 1933년 3월 7일부터 제호를 조선중앙일보로 고쳐서 창간되었다. 위키백과를 보더라도 1933년 2월 16일 여운형이 중앙일보의 사장에 취임하여 1933년 3월 7일부터 제호를 조선중앙일보로 고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봉창 의거는 1932년 1월에 있었으므로, 저 사건은 여운형이 조선중앙일보를 맡기 전에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여운형의 조선중앙일보 보도라는 말은 신뢰하기 어렵다. 또한 조선중앙일보에 나왔다는 표현도 당시 쓰여진 다른 기사들과의 연장선에서 파악해야지 한 대목만 인용하고 그걸 근거로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1932년 1월 10일 동아일보에서 보도된 이봉창의 의거. 동아일보 역시 이봉창의 의거에 대해 격렬히 비난하는 어조의 글을 실었다. 당시 국내(조중동 해당 5번)에서는 이봉창의 의거에 대해 매우 비난하는 어조로 썼다. #(단, 일본 사법성 발표의 인용인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에 대해 원로 언론인이신 이혜복 옹(1923년 생) 말씀에 따르면 "그 당시 신문을 그렇게 쓰지 않으면 신문이 못 나간다. 총독부로부터 검열당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되려 사건을 보도한 자체가 쾌거라는 의미. (검열시대엔 행간을 잘 읽어야한다) 이 분 말씀에 따르면 당시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총독부는 신문사들을 압박해서 독립운동가들을 '강도' 등의 표현으로 쓰라고 협박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해명하고 있다. 반면에 해외에 있어 총독부의 검열 대상이 되지 않았던 한인 신문사(대표적으로 미주에 있던 한인 신문사 신한민보)들은 '통쾌한 의거였다'는 식으로 대서특필했다. 중국의 신문사인 는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이봉창이라는 한인이 일본 천황을 저격하였으나 불행히도 맞지 않았다(不幸不中)"라고 적는 바람에 이걸보고 눈이 뒤집힌 일본제국이 군대를 동원해 상하이 사변을 일으켰다. 대표적인 예가 가와시마 요시코가 벌인 공작인 '일본인 승려' 스파이 사건. 그리고 이 기사를 실었던 그 신문사와 그 지역 일대에서 학살을 벌였다. 그걸 기념한답시고 1932년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열었는데, 그 때 참석한 참가자들 사이에는 때를 기다리던 윤봉길 의사와 폭탄 두 개가 있었고...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윤봉길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3. 모던보이[편집] 그의 '모던보이'적인 생활에 관해 다음과 같은 주장하는 책이 나온 적이 있다. # 이봉창은 여자와 마작을 좋아했다고 기록이 남아있다. 타이쇼 13년(1924년) 4월 - 계집질과 마작으로 빚을 져서 용산역의 조차(操車, 열차를 편성하거나 다른 선로에 넣거나 나누거나 하는 일)과를 퇴직금을 얻을 목적으로 퇴직함. 쇼와 5년(1930년) 3월 - 가명을 '마츠이 카즈오'로 바꾸고 상경해 도쿄도 쿄바시구 미나미오다하라마치의 채소절임 가게에 취직한다. 7월에는 도쿄도 혼고구 모리카와쵸의 모리야 가방 가게로 전직한다. 쇼와 5년(1930년) 12월 - 중화민국 상하이직할시 민행로로 망명한다. 영창공사의 축음기 외판원으로서 일한다. 이봉창이 정말로 여자와 마작을 좋아했을런지는 모르지만, 째째한 돈보다는 '모험심'을 훨씬 좋아했던 쾌남아 이었음에는 틀림없다. 4. 후일담[편집] 한편 의거 이후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친일파였다. 재일 친일파의 대표격인 박춘금은 1월 8일 궁내성을 비롯, 여러 일본 고위층을 방문해 불경범인이 조선인인 것에 대해 송구스럽다며원조 센송드립 사죄를 했으며 9일에는 친일단체 120명을 소집해 궁성 입구에서 직접 사죄를 또하는 짓거리를 저질렀고 국내의 친일 세력들은 1월 9일 서울의 요정 식도원에 모여 이봉창 의거에 대해 사죄하기로(매일신보 1932년 1월 10일자) 하는 망나니 짓거리를 저질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저 사건을 자신들이 했다고 알렸는데, 그 결과 일제의 감시 때문에 각종 지원이 끊겨서 서예에 일가견이 있던 김구는 그림을 그려 팔며 힘들게 임시정부를 운영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반전된 것은 윤봉길의 의거 이후로, 윤봉길의 의거에 감명을 받은 장제스의 지원 아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회생의 길을 얻고 남경중앙군관학교 분교에 조선인 훈련반도 보내고, 돈을 지원받아서 보내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일본 본토의 고위 관료들에게는 이 사건은 재앙이었다(...). 지금도 천황의 위치를 신성히 여기는 일본인데 과거 식민주의와 군국주의로 미쳐 돌아가던 그 당시의 일본에서 천황이 가지는 상징성이나 위치는 압도적인 것이었는데 그 천황이 암살당할 뻔했으니 발칵 뒤집힌 건 당연지사. 당시 수많은 고위 관료들이 책임을 통감한다며 자진 사퇴하거나 해임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한편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80년대 중순에 이봉창 열사 미망인이 별세한 소식이 작게 보도된 바 있다. 남편을 자랑스럽게 여겼다면서 당시 보도에선 우리나라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보통 그러듯이 매우 궁핍하게 살아가셨다고 한다. 1962년 건국훈장을 수여받으며 연금이니 여러 혜택이 주어지긴 했지만... 외모가 배우 유해진과 상당한 싱크로율을 자랑한다. 환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류준열 배우와도 좀... 유해진 주연의 열사 이봉창을 기다려보는 것도 좋을것 같다.근데 유해진이 너무 촐싹거리는 이미지가 박혀 있는지라.. 안될거야 아마 근데 열사께서 원래 유쾌한 성격이신 듯하니, 분위기 잡을 때만 제대로 잡으면 문제없을 듯 비슷한 인물로 조명하가 있다. 이쪽은 덴노의 장인을 독 묻은 칼로 찔러서 죽음에 이르게 했다. 국내가 아닌 타국 (대만)에서 의거를 일으킨 점도 비슷하다. 5. 폭탄 이야기[편집] 이봉창 의사의 의거 때 쓰인 수류탄은 김홍일(왕웅)이 만들었다고 한다. 이봉창 열사에게 수류탄 던지는 법을 가르쳐주었던 사람도 김홍일이라고 한다. 그는 1931년에는 상해 병공창의 병기창 주임으로 근무하는 등 중국군의 병기를 관리했다고 한다. 이봉창 의사는 두개의 폭탄을 준비했는데 한개는 왕웅을 통해 상하이 병공창에서 한개는 김현을 하남성 유치한테 보내서 얻어온 것이라고 한다. 한개는 의거를 위해서 다른 하나는 자결용이었다. 이봉창 의사는 마미(麻尾)라는 수류탄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는 무게가 가벼워 멀리 던질 수 있고 휴대가 간편하며,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불발탄이 없다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폭발력이 다소 약하다는 단점도 있었다. 마미(麻尾) 수류탄 국군의 병기를 관리하는 책임 장교였던 나의 상식에 의하면 아무래도 그 거리가 1백미터 이상이나 떨어져 있는 표적물을 보통 수류탄을 던져 가지고 실수없이 명중시키기란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을 거듭한 끝에 약간 구식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보통 수류탄 대신에 마미蔴尾 수류탄을 구해서 이동지한테 주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 마미수류탄은 보통 수류탄에 비해서 폭발력이 약하다는 것이 좀 단점이긴 하지만 그 대신 중량이 가벼워서 멀리까지 던질 수 있는 데다가 불발탄이 없고 또한 휴대하기가 간편한 이점이 있었다. 하지만 제 아무리 휴대하기가 간편하다 하더라도 어떻게 이 수류탄을 동경까지 안전하게 운반할 수 있겠느냐는 문제로 당시 김구 선생과 나는 보통 고심한 것이 아니었다. 김홍일,『대륙의 분노 - 노병의 회상기』, 문조사, 1972, 273쪽     [1] 맨 오른쪽 사진은 합성으로 밝혀졌다. 이봉창 열사의 얼굴 사진을 그림에 떼어 붙인 것. 의거 전 중간의 사진을 찍었는데, 그 내용이 흐릿하여 알아보기 힘들자 왼쪽 사진에서 얼굴을 따와 만든 것. 잘 보면 턱선이 굉장히 부자연스럽고 결정적으로 큰 사진으로 보면 붙여놓은 티가 살짝 난다. 합성인게 아쉽긴 하지만 조국 독립을 위한 홍보로서는 쓸만한 사진이라 할 수 있다.
452    [력사를 잊지말자]- 윤봉길, 그는 누구인가... 댓글:  조회:6845  추천:0  2016-07-16
1932년 4월 29일, 조국 광복을 위해 중국 홍커우공원(지금 로신공원)에서 폭탄을 던진 사람이 있습니다. 자랑스러운 윤봉길 의사 입니다.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고 민족을 위해 큰 결심을 했던 윤봉길 의사의 삶과 독립운동, 그 현장의 이야기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볼 까요?   ▲ 농민독본(1927)  우리말을 가르치고 농민의 나라사랑 정신을 일깨우기 위하여 윤봉길 의사가 직접 만든 책 (충의사 소장)   ▲ 부흥원 건물 전경 윤봉길 의사가 야학회, 월진회 등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던 건물    1908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난 윤봉길 의사는 오치서숙에서 한학을 배우고 책과 잡지를 읽으면서 신학문을 배웠습니다. 일제가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제로 빼앗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우리민족을 탄압하자 윤봉길 의사는 농민들을 깨우치기 위하여 1926년 야학당을 만들고 농촌의 부흥을 위해 부흥원, 월진회를 세워 농민조합 활동을 하였습니다.   ▲ 만주를 침략하는 일본군   1929년 부흥원을 세운 윤봉길 의사는 학예회를 열고 이솝우화 '토끼와 여우'를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하였습니다. 이 연극은 마을 사람들을 일깨우고 많은 박수를 받았지만 일본 경찰은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윤봉길 의사의 농촌운동을 심하게 감시 했습니다. ▲ 일본군의 공격으로 불타고 있는 상하이    그 당시 일본은 중국을 침략하고 또 한편으로는 한국과 중국 사이를 이간질 시키는 '만보산 사건'을 일으켜 중국에서 독립운동이 매우 어려워 졌습니다.   ▲ '만주국'을 인정하는 회의 모습   일본 경찰들의 감시로 농촌운동에 한계를 느낀 윤봉길 의사는 1930년 23살 되던 해에 '사내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라는 글을 남기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떠납니다.   ▲ 윤봉길 의사의 유묵 '사내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 한국애국단 입단 선서식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의 의거 소식을 들은 윤봉길 의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 선생을 직접 찾아가 거사에 참여 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한국애국단에 가입 했습니다.     4월 29일 김구 선생과 아침 식사를 마친 윤봉길 의사는 전날 새로 산 시계를 꺼내며 말했습니다. '이 시계는 이제는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대로 6원을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 제 것하고 바꾸시지요.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 밖에는 쓸 데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윤봉길 의사는 김구 선생의 낡은 시계를 차고 홍커우공원으로 향했습니다.     1932년 4월 29일 오전 9시 30분경, 일제의 승전 기념식 1부가 시작되어 군사퍼레이드가 펼쳐지고 이어 11시 30분경 기념식장 무대 위에 상하이를 침략한 일본 장군들과 대표가 올라왔습니다.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가 끝나갈 무렵 윤봉길 의사는 일본 헌병들을 제치고 무대를 향해 폭탄을 던졌습니다.   ▲ 홍커우공원 행사장의 일본군 열병식     ▲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지는 순간 상황도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은 중앙 무대에 정확히 떨어졌습니다. 시라카와 대장은 다음날 죽고, 노무라 중장과 우에다 중장등 한반도와 중국 침략에 앞장선 일본인 다수가 중상을 입었습니다. 의거는 성공했지만 윤봉길 의사는 그자리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았습니다.   ▲ 거사 후의 행사장 모습       의거 소식을 들은 중국인들은 한국과 힘을 합쳐 일제에 맞서 싸우자고 다짐했습니다. 한인 학생들이 중국의 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일제와 맞서 싸울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이 성립되었습니다.    ▲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1940.9.17)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식군대인 한국광복군을 만들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군사훈련과 전투에 참여    ▲ 한인 학생 특별반을 만들었던 중국 낙양군관학교의 현재 모습   의거 이후 일제의 감시가 심해져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게 되었지만 중국 주요 인사들과 동포들이 임시정부를 지원하여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이 더욱 활발해졌습니다.   ▲ 윤봉길 의사 의거후 중국인들의 항일운동 시위와 포스터   윤봉길 의사의 용감한 의거 소식이 전해지자 중국의 국민당 총제 장제스는 중국 땅에서 벌어진 한인 청년의 의로운 행동을 칭찬하며 감사의 말을 전했습니다. "중국군 30만 명이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 청년 혼자 해냈다." 라고 말하며 이 의거를 주도한 한인애국단과 김구선생, 나아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게 되었습니다.      일제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사기가 꺾여 욕심을 포기하고 전쟁을 멈추는 협정을 중국과 맺었습니다. 행사장에 와 있던 외국 기자들이 의거 소식을 전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윤봉길 의사 의거를 보도한 세계의 신문들   상하이에서 터진 폭탄은 세계의 관심을 불러 왔습니다. 홍커우공원에는 일제의 기념식을 취재하기 위해 외국인들이 많이 와 있었습니다. 외국 기자들은 윤봉길 의사 의거 소식을 발빠르게 알리면서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지 궁금해 했지요. 그리고 김구 선생의 편지와 윤봉길 의사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에 대해 감탄하며 기사를 써서 널리 알렸답니다. 그래서 외국에 있는 동포들이 이 소식을 듣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임시정부로 보냈습니다.      ▲ 순국 직전 윤봉길 의사의 모습    일제는 윤봉길 의사에게 서둘러 사형선고를 내리고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에서 사형을 집행했습니다. 일제는 총살형을 집행함으로써 윤봉길 의사에게 최대한의 보복과 응징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의 죽음은 우리의 독립을 앞당기고 인류의 평화와 정의를 실현하려는 거룩한 순국이었습니다.    ▲ 순국한 윤봉길 의사      사형 당일 일본인 검찰관 네모토가 사형을 집행할 것을 알리며 윤봉길 의사에게 유언을 물었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침착하고 담담하게 대답했습니다. "죽음은 이미 각오한 것이다. 할 말은 없다." 였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희생으로 국내외 동포들이 독립의지를 다지고 중국과 함께  항일운동을 펼친 끝에 1945년 8월, 마침내 빼앗긴 나라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 암매장된 유해를 찾아 고국으로 모셔옴으로써 윤봉길 의사는 그토록 그리던 광복된 조국에 묻힐 수 있게 되었습니다.    ▲ 그리던 광복을 기뻐하는 사람들   ▲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중칭 연화지청사에서 귀국하기 전날 찍은 기념사진 (1945.11)   나라를 되찾게 되자 '임시정부유해발굴단'은 윤봉길 의사의 시신을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946년 3월 윤봉길 의사를 묻을때 불경을 읽었다는 각존원의 야마모토 류도라는 여승의 고백으로 정확한 장소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윤봉길 의사 유해 발굴 장면   ▲ 1946.7.7 국민장으로 거행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세 분의 장례식   윤봉길 의사를 화장 했다고 거짓으로 알려놓고 몰래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 묻어두어 그 시신조차 찾지 못하게 한 것이지요. 하지만 양심 있는 일본인의 고백으로 늦게나마 윤의사의 유해를 찾아 고국으로 모셔올 수 있었습니다. 나라를 잃은 민족에게는 희망과 미래가 없다고 하잖아요. 다시는 이러한 일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역사속에서 배우고 되새겨 나라사랑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해요... ======================================== 윤봉길의사가 친필 작성한 민간 농촌운동단체 월진회(月進會)의 창립회원 명부가 최초로 공개. 농촌부흥운동 차원에서 설립한 월진회, 37명의 명부. 월진회는 1929년 4월23일 윤봉길 의사가 중국으로 망명하기 직전 자활적인 농촌진흥을 목표로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세운 민간 농민운동단체다. 월진회가 벌어들인 돈으로 농가를 지원해 자립시키는 활동을 펼쳤다. 부업을 희망하는 농가에 새끼돼지를 나눠주거나 양계사업과 유실수재배 산림녹화 등을 통해 농촌환경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고 전해진다. 이 명부를 소장해 온 기념사업회의 윤주 부회장은 "월진회는 이름 그대로 날로 앞으로 나아가고 달마다 전진하자는 목표 아래 실력 배양과 경제 부흥을 통해 조국독립을 이룩하고자 설립된 조직"이라며 "윤봉길 의사의 월진회 정신은 오늘날 세계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시대정신"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우리가 추구하는 국민통합과 경제도약 그리고 조국 선진화는 80여 년 전에 이미 윤봉길 의사가 전개했던 전진운동을 계승, 실천하면 이룩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만천하의 동포여! 18억의 인류가 생명 그것으로 말미암아 생존경쟁에 천촉되어 만감(萬感)이 교지(交至)하매 그 좁은 심장이 찢어질 뿐이다. 만감(萬感) 만상(萬想)이 그 과연 어떠한 감상일까? 그야 물론 천차만별이겠지마는 일언이 폐지하면 고락(苦樂) 두 자로 편성되었도다! 환언하면 즉 남과 같은 사업을 성공하려고, 남과 같은 행복을 안형(安亨)하려고 노력을 할 때에 도덕과 인륜(人倫)을 허신적(許身的) 같이 내어 버리고 자아주의 (自我主義)로 황금만능을 부르짖으며 예의도 없고 염치도 없습니다. 그런고로 관자(管자) 왈 창름(倉凜)이 실(實)이라야 지영욕(知榮辱)이라 하였고, 맹자 왈 인무항산(人無恒産)이면 구무항심(苟無恒心)이라 하였으니 신사언야(信斯言也)하여 현대를 고찰하면 우리는 자작자급(自作自給)에 힘을 써서 나의 전도를 내가 이행(履行)하며 나의 운명을 내가 개척지 아니하면 불가한 것은 삼척동자도 지실(知悉)하는 바이다. 근위무가지보(勤爲無價之寶)요 천불능궁력사가(天不能窮役事家)라 하였으니 근검하면 될 것은 자연의 이치요, 춘불경작(春不耕作)하면 추무소망(秋無所望)이라 하였으니 노후에 안락을 누리려면 유시의 근검 저축은 당연지리요 불가결자(不可缺者)이다. 태산이 불양토양(不讓土壤) 고로 능성기대(能成其大)하였고 하해(河海)가 불택세류(不擇細流) 고로 능취기심(能就其深) 하였나니, 유원(維願) 첨위(僉位)는 물이망언(勿以妄言)으로 치지도외(置之道外)하시고 묵연히 과거를 회억(回憶)하시며 미래를 연상하시와 성연분비이(成然奮臂而) 본회에 광림하시와 원조하심을 경요(敬要) 함. 송한진기자 ===================       ▲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내 윤봉길 의사 묘역  =========================   윤봉길은 파평 윤씨이고요, 1908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났습니다. 큰아버지가 가르치는 서당에 다니면서 글을 배운 윤봉길은 고향에서 글을 모르는 농민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계몽 운동을 했지요. 그는 열다섯 살에 배용순과 결혼해서 아들 두 명을 낳았습니다. 윤봉길은 좀더 큰 세상에 나가 할 일을 찾아보자고 다짐하고 식구를 고향에 둔 채 혼자 중국으로 갔습니다... 상하이에 도착한 윤봉길은 안공근을 알게 됐습니다. 안공근은 안중근의 동생인데, 임시 정부에서 일하고 있었죠. 안공근의 소개로 김구를 만난 윤봉길은 이봉창이 했던 것처럼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1932년 일본군의 상하이 이사변 전승기념식을 하는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 거류민단장과  파견군사령관 등 여러 일본군 부대장들을 살해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오사카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순국했던 겁니다. 윤봉길의 의거는 침체돼 있던 임시정부를 되살리는 밑거름이 됐습니다. 김구는 윤봉길이 참 고마웠겠죠? 김구는 윤봉길을 잊지 않고 가슴에 묻어 뒀다고 해방이 되자마자 그 유해를 찾아나섰습니다. 김구의 노력으로 윤봉길의 유해는 1946년 고국의 품에 돌아와 지금의 서울 효창 공원에 묻혔답니다. 그리고 윤봉길의사에게는 1962년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죠. ...   채택된 답변답변추천해요 윤봉길 의사 직계 후손들의 근황 윤의사는 부인 배용순(裵用順·88년 작고)여사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윤의사 의거(1932년) 당시 장남 종(淙)은 세 살이었고, 둘째 담(淡)은 배 여사 뱃속에 있었다. 둘째 담은 두살 때 영양실조로 일찍 세상을 떴다. 일제때는 일제의 방해로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장남 종(淙)씨는 해방후 성균관대 경제학과를 졸업,10여 년간 농수산부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84년 간경화로 타계했다. 윤의사의 부인 배여사는 남편없이 외아들을 키우며 어렵게 살다가 88년 82세로 작고했는데 배여사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윤의사 의거 50주년인 82년 배여사는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는데 이 해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는 ‘배용순 효부상’을 제정, 매년 윤의사 의거일인 4월29일 예산 충의사(忠義祠)에서 시상해오고 있다. 현재 윤의사 직계후손 가운데 가장 웃어른은 윤의사 며느리 김옥남(金玉南·73)씨. 김씨는 딸 여섯에 아들 하나를 두었다. 김씨는 “백범 김구 선생의 아들 김신(金信) 장군이 교통부장관 재직시절 김포공항에 스낵 가게를 주선해줘 겨우 살림을 꾸려왔다”며 “윤의사의 후예 7남매를 모두 반듯하게 키운 것이 큰 보람”이라고 말했다. 윤의사의 유일한 손자 주웅(柱雄·35)씨는 고려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였으며, 97년에 결혼해 아들 하나를 두었다. 주웅씨 위로 누나 여섯 사람도 모두 출가했다. =========================                             △ 의거에 사용되었던 도시락폭탄.            ◁ 폭탄을 던진 후 현장에서 일본 헌병들에게      연행되는 윤봉길 의사.       ◁회중시계는 1932년 4월 29일 김구주석과 최후로 작별할 때 정표로 서로 바꾸어 가진 것으로 윤의사 순국 후에 일본정부에서 인장과 함께 보내온 것이다. →(백범일지) 윤군은 자기의 시계를 나에게 꺼내어 주며 '이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대로 6원을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니 저하고 바꿉시다. 제 시계는 앞으로 한시간 밖에는 쓸 수가 없으니까요' 하기로 나도 기념으로 윤군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윤군에게 주었다. 식장을 향하여 떠나는 길에 윤군은 자동차에 앉아서 그가 가졌던 돈을 꺼내어 내게 줬다. '왜 돈은 좀 가지면 어떻소?'하고 묻는 내말에 윤군이 '자동차 값 주고도 5,6원은 남아요.' 할 즈음에 자동차가 움직였다. 나는 목이 메인 소리로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하였더니 윤군은 차창으로 고개를 내밀어 나를 향하여 머리를 숙였다. 자동차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천하영웅 윤봉길을 싣고 홍구 공원을 향하여 달렸다.     윤봉길 의사 친필 유서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의 술을 부어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유서 - 동포에게 보내는 글 "고향에 계신 부모 형제 동포여! 더 살고 싶은 것이 인정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택해야 할 오직 한 번의 가장 좋은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백 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이 기회를 택했습니다.    안녕히, 안녕히 들 계십시오."             채택된 답변답변추천  
451    [고향 문단 소식 한토리]-하늘아래 첫동네 작가촌, 작가공원 댓글:  조회:6551  추천:0  2016-07-15
내두산작가촌 및 내두산작가공원 제막식 한장면. 지난 7월 9일,  하늘 아래 첫 동네라 불리는 안도현 이도백하진 내두산촌에서 계간 온라인“백천문학”사에서 주최하는 제1회 내두산문학대축제가 성황리에 열렸다. 이번 제1회 내두산문학대축제는“백천문학”편집부의 주최와 안도현 이도백하진 내두산촌의 지지로 열렸는데 내두산작가촌 오픈, 내두산작가공원 조성, 시집“백두아리랑 내두아리랑”출간 등 주최행사와 연변소설가학회 창립 10주년 및 학회지“두만강”6호 출간식 등 축제행사가 다채롭게 펼쳐졌다. 백천문학 원로작가상을 수상 받은 림원춘(좌) 내두산작가촌은“백천문학”편집부에서 우리 민족의 성산 장백산기슭에 세운 중국조선족작가들의 민혼창작기지와 생태창작기지인데 그 설립취지에 대해“백천문학”사의 김춘택 사장은“성산 백두산기슭에 자리 잡은 하늘 아래 첫 동네 내두산촌에 생태창작기지와 민혼창작기지를 세워 우리 중국조선족작가들이 청정자연 속에서 건강한 신심을 얻고, 스스로 뜨거운 민혼을 격발시켜 민족문학의 성스런 사명을 완성하는 과정에 정품문학작품을 창작하는 문학창작공간을 마련해드리려는 것”이라고 뜻을 밝혔다. 내두산작가공원 역시“백천문학”편집부에서 성산 백두산기슭에 세운 중국조선족작가들의 문학공간으로 그 조성취지에 대해“백천문학”사의 김춘택 사장은“우리 중국조선족문학의 정품문학작품을 시비, 소설비 등 문학비의 형식으로 성산 백두산기슭에 조성하여 널리 기리려는 것”이라고 뜻을 밝히면서 우선 10년을 기준으로 50편의 중국조선족문학의 정품문학작품 및 50명의 작가를 선정하여 50점의 문학비를 세울 타산이라고 덧붙였다. 백천문학 원로시인상을 수상 받은 김응준(좌) 시집“백두아리랑 내두아리랑”은 연변작가협회 시창작위원회의 주관으로“백천문학”사의 출판으로 1년에 한 번씩 출간하는 우리 시인들이 성산 백두산을 노래하고, 우리 민족의 이민역사와 정착역사를 노래하는 시집으로 내두산문학대축제의 한 부분으로 출간식을 가졌다. 이날 내두산문학대축제의 한 부분으로 연변소설가학 창립 10주년 기념행사와 학회지“두만강”6호의 출간식도 열리면서 내두산문학대축제에 성연을 더해주었다. 이의 기념행사와 출간식을 통해 내두산문학대축제는 시인과 작가들의 어울림 한마당으로 진정한 문학축제를 보여주었다. 이번 내두산문학대축제에는 아나운서들의 사회 및 시낭송으로 축제의 분위를 다채롭게 했고, 가수들과 문인들의 모닥불만회로 축제의 뒤풀이를 멋지게 장식했다. 금후에도 내두산문학대축제는 장백산 하늘 아래 첫 동네 내두산촌에서 해마다 1회씩 개최될 예정으로 우리 중국조선족문단의 희사가 아닐수 없다. /자료제공 김춘택  
450    [몽고족 노래]- 天堂 /(력사를 알고 판단하기)자료=7월 27일 댓글:  조회:7524  추천:0  2016-07-05
天堂           ///騰格里   蓝蓝的天空          清清的湖水哎耶 绿绿的草原          这是我的家哎耶 奔驰的骏马            洁白的羊群哎耶 还有你姑娘          这是我的家哎耶 * 我爱你            我的家 我的家            我的天堂* *--* =====================   [논단]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 이면사     *글:예정웅 편집인 56년 전의 그 긴 날, 판문점 정전협정 이면사 한반도 전쟁을 일시 중단하는 휴전협정 조인 56주년을 맞는다. 그날은 1953년 7월 27일이다. 7월의 여름장마비는 오지 않았다. 날씨가 무척 더웠다. 오전 10시, 허술한 건물 안은 아주 적막했다. 한반도 전쟁사에서 휴전협정이 서명된 곳, 그 이름도 유명한 《판문점》은 작은 마을이었다.   요즘처럼 수십 명의 보도진들이 진을 치고 취재에 열을 올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전 세계는 《판문점》으로 시선이 집중되고 있었다. 조용하고 한적한 농촌마을 《판문점》 매미 울음소리만 시끄럽게 울 뿐이었다.   예정웅 편집인   사실상 북조선과 미군측이 최초로 접촉한 장소는 《판문점》이 아니었다. 1951년 7월8일 개성 북쪽에 위치한 《래봉장》에서 대령급을 대표로 하는 예비회담이 개최되었다. 예비회담에서 합의한 대로 1951년 7월10일 첫 휴전회담이 개최되고 26회까지 개성《래봉장》에서 회담을 열었었다. 그러다가 1951년 7월 20일부터 개성 서남쪽 《판문점》으로 회담장소를 이동하게 된다. 당신이 관심이 있다면 여기를 주목하라! 정전 회담장을 왜 《래봉장》에서 《판문점》으로 바꾸게 된 것인가. 거기에는 그만한 사연이 있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 뒷 얘기를 나누어 공유하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실상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개성 북쪽에 위치한 《래봉장》에서 《판문점》으로 회담장을 바꾼데는 이유가 있었다.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주석의 깊은 의도가 숨어 있었다. 김일성 주석의 천리혜안의 선견지명이 얼마나 앞서 있었는가를 우리는 뒤늦게 깨닫는다. 김일성 주석은 정전 회담장에 나가는 일꾼들에게 이렇게 이른다. 김일성 주석은 민족의 역사가 숨쉬고 있는 고려의 수도 개성지역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김일성 주석은 동부산악전선도 중요하지만 개성지역을 더 중시했다. 한반도의 역사와 지리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미측은 북조선의 요구에 동의했다. 이때부터 개성지역과 그 일대는 북조선이 별로 힘쓰지 않고 거머쥔 영원한 북조선의 땅이 되었다.    역사적 가치로 보나 군사전략거점의 가치로 보나 개성지역만큼 좋은 곳은 없었다. 현재 북조선의 국토는 남한 보다 20%나 더 넓다. 쓸모없는 척박한 산악지대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 쓸모없을 것 같은 산악지대가 알고 보니 무진장한 지하자원의 보고가 아니던가. 심중하고 자신만만한 북조선 수석대표 남일 장군과 유엔군 측 수석대표 해리슨 중장이 회의 탁자 앞에 앉았다. 양측 보좌관들이 옆에서 서명작업을 도와주었다. 그들은 정전협정에 서명한 후 사본 9본을 상호교환 했다. 서명은 10분 만에 끝냈다. 고작 10분이면 족한 협정서명을 위해 장장 2년 1개월의 피 말리는 시간을 보낸 것이다.   정전 협정체결까지 159회의 본 회담이 열렸고 179회의 분과위원회 회담, 188회의 참모장교 회담, 238회 연락장교 회담 등 총 765회의 회담을 거쳐야 했던 것이다. 결국 1953년 7월27 북조선 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미 제국주의 유엔연합군 총사령관 클라크(Mark Wayne Clark),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팽덕회(彭德懷) 3인이 서명한 휴전협정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 지고 체결 성립된 것이다. 6.25전쟁 기간은 만 3년1개월이나 치른 장기전이었다. 6.25전쟁은 미 제국주의자들이 일으킨 침략으로 시작된 전쟁이지만 민족내전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세계 전쟁사에 일찍이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참혹한 전쟁이었다. 미 제국주의 150년 건국역사에 해외침략 전쟁에서 처음으로 승리하지 못하고 휴전이라는 치욕의 전쟁역사로 기록되게 된 것이 한반도 전쟁이었다.   휴전협정을 체결했을 때 백악관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함께 있던 덜레스 미 국무장관은 이라고 말했다. 정전협상을 먼저 제기한 미국 한반도 전쟁은 적, 아간에 밀치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면서 미 백악관과 군부 상층은 당황하기 시작한다. 패전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백악관은 한반도 전쟁에서 절대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1952년까지 단 2년 만에 미군 5만 명 이상이 전사했다. 10만 명의 영구불구자와 부상자, 점점 늘어나는 인명손실도 문제였지만 전비는 더 큰 문제였다.    1950년 전쟁 전 미 국방예산은 150억 달라였다. 1951년에는 4~5배씩 증액되기 시작했다. 1953년 국방예산이 550억 달라가 되었다. 예비비는 300억 달라를 준비해야 했다. 도저히 늘어나는 전비부담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때 백악관 안보회의는 한반도 전쟁 휴전방안에 대해 내부논의가 시작된다. 백악관 안보회의는 전쟁 계속론을 주장하는 맥아더의 강경군부 상층과 마찰을 빚었다. 트루만 대통령과 애치슨 국무장관, 백악관 안보의회는 맥아더와 격한 논쟁이 벌어졌다. 맥아더는 자신의 지위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대통령의 권위에 도전까지 했다. 일반인들이 알고 있었던 순수한 군인 맥아더는 실상 잘못 알려진 것이다.   유엔군 총사령관이라는 맥아더는 남한의 전쟁터에는 두 번밖에 가본 적이 없다. 1950년 6월30일과 인천 상륙작전 때 뿐이다. 전쟁터는 찾아가지도 않고 일본에 눌러앉아 사사건건 트루만을 괴롭혔다. 트루만과 백악관은 그를 자르기로 결론내렸다. (원수)의 계급장을 단 장군을 가차 없이 잘랐다. 감히 대통령에 항명을 하다니....미국은 무관정치보다 문관정치가 자리를 잡은 국가이다.  백악관 안보회의는 행정부의 비공식 루트에 주의를 돌렸다. 한 사람을 골랐다. 국무성 전 국장이었던 조지 캐넌(G. Kennan)이었다. 그는 러시아어에 능통하고 1933년 소련 스탈린 시대에 모스크바 주재 미국대사관을 설립하는데 간여했고 소련주재 초대 미국대사까지 역임한 정통 소련전문가이자 외교관이었다.   통역 없이도 러시아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그는 1949년부터 프린스톤 대학에 객원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1951년 5월 18일 워싱턴으로 소환 되었다. 트루만과 백악관 안보회의는 조지 캐넌에게 비밀임무를 주었다. “소련에 한반도 전쟁 휴전문제를 타진하라”는 것이었다. 캐넌은 워싱턴 소련 대사관에 주유엔 소련대표로 와 있던 소련 외무상 대리 야곱 말리크(Jacob Malik)에게 비밀리에 접근했다.   모든 큰 사업이 이루어지는 과정은 사전 보이지 않는 핵이 먼저 움직인다. 1951년 6월1일 조지 캐넌과 말리크가 처음으로 접촉한 장소는 워싱턴의 한 공원이었다. 6월5일 두 번째 그들은 카페에서 만났다. 백악관 안보회의로부터 해 보라는 지시를 받은 캐넌과 말리크는 친해졌으며 자연스럽게 한반도전쟁 정전문제를 타진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 했다. 캐넌 = 어때요, 한반도 전쟁은……잘 되어갑니까. 말리크 = 뭐 우리는 잘 알지못하지요. 캐넌 = 전쟁이란 참혹하지요.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웬만하면 우리 정전협의라도 해서 전쟁을 그만 했으면 하는데……  말리크= 그럼 당신은 트루먼이나 에치슨의 심부름을……?! 캐넌 = 그렇습니다.  말리크는 외교관의 감각으로 힌트를 얻는다. 조지 캐넌 그가 전 소련주재 대사였고 소련 전문가이며 프린스톤에서 강의하지 않았던가. 그가 워싱턴으로 와 일한다는 것에 번쩍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말리크 = 나도 동감입니다. 그로부터 그들은 다섯 차례를 더 만났다. 정전문제 대화는 빠르게 진전되어 갔다. 20일이 지난 1951년 6월23일 유엔본부에서 소련 유엔주재 대사 말리크가 기자회견을 한다. 한반도 전쟁의 휴전문제를 여론화 하는데 성공한다. 3일 후(6월 27일) 모스크바 크레믈린에서 소련외상 그로미코(Gromiko)가 한반도 정전협상을 하겠다고 성명서를 발표한다.    한반도 전쟁의 휴전(정전)제의는 표면적으로는 소련이 먼저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미 백악관에서 정전회담을 먼저 제의한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New York Times, 1951..6. 27, 트루만 자서전 참고 ) 길고 긴 정전회담 북조선의 협상원칙 순수한 협상? 지구상에 정치성 없는 순수한 협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 간의 큰 규모나 작은 규모의 모든 협상과 회담은 철저하게 정치적이다. 특히 전쟁과 관련한 협상에서 정치력을 떠난 회담은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협상전략에서 최상의 기만책은 상대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상대는 자신이 통제권을 쥔 것으로 착각하겠지만... 바로 북조선 군부가 미군과 벌였던 한반도 정전협상이 그랬다. 고위급 정치군사적 협상임은 두 말 할 필요도 없다. 북조선은 휴전협상에서 정치군사 우선원칙을 갖고 협상에 임했다. 정전회담의 성격문제에 있어 유엔군사령부 미측은 의 순수한(?) 군사적 회담을 고집했다.   반면, 북조선 측은 의 정치 군사적 안전의 선결을 주장했다. 쌍방의 주장이 쉽게 합의되지 않는다. 군사분계선 설정문제에서도 북조선 측은 원상회복의 원칙에 따라 북위 38도선을 주장한 반면, 유엔군 측은 해. 공군력의 우세에 대해 보상의 원칙을 전제로 하여 38도선 북방의 어느 한 선을 주장했다.   북조선내의 비행장 복구문제에 대해 미군측은 복구건설의 금지를 주장한 반면, 북조선은 자주권의 침해, 내정간섭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전쟁포로 처리문제는 최대의 쟁점이었다. 북조선 측은 국제법상 제네바 협정 제118조에 따른 원칙을 주장한 반면, 미국 유엔군 측은 개인권리 불가침을 내세워 을 주장했다.   포로송환문제가 협상의 난제였다. 포로송환문제가 걸려 협상의제에 대한 마찰로 휴전회담이 중단, 지연, 중단 또 지연되면서 전쟁은 더욱 소모적이 되고 파괴와 살상이 극심한 장기전으로 진행되었다. 휴전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골치 아픈 문제는 남한 당국이었다. 남한 당국은 전쟁양상과 전쟁전망도 모른 채 무조건 미국에만 의존하고 매달렸다. 그리고 친일반공분자들을 전면에 내세워 시위까지 하는 등 미국은 골치를 알았다. 골치 아픈 미국은 이승만을 제거할 군사구테타 계획까지 세웠다.   1960년의 박정희 군사 쿠테타는 이미 10년전 미CIA와 군부에 의해서 비상시에 써먹을 수 있게 차분하게 준비, 계획되고 있었다. 남한 당국은 정전회의장에 끼지도 못하는 을 남겼다. 그로인해 남한 군부는 휴전협정 체결 당사자가 되지 못한 것이다. 남한은 이미 1950년 7월 15일에 이른바 '군사 작전 지휘권'(command authority)마저 유엔군사령관(미국)에게 이양하면서 철저하게 유엔군의 지휘,통제하에 움직이는 현지용병 신세로 전락했다.   남한 군부는 미국의 식민지 군대로써 정전에 관한 유엔군 사령관의 지휘에 따라 정전 협정의 효력을 '간접적으로 받게 되는 처지로 전락되었던 것이다.휴전협정문”은 영문·한글·중문으로 작성되었다. 서언과 전문 제5조 제63항, 부록 제11조 제26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언은 협정의 체결 목적, 성격, 적용범위를 언급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생략 함.국가기록원 보관 자료 참고) 북-미간 정치군사 고위급 양자회담이 돼야 북조선은 1970년대에 정전협정을 조-미 평화협정으로 대체해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정착을 위해 끊임 없이 노력해 왔다. 북조선의 평화협정체결 제의에 미국은 그때나 지금이나 무응답(무시전략)을 오랫동안 되풀이되어 왔다. 1976년 3월 28일 김일성 주석은 휴전협정의 평화협정 체결과 관련한 북조선의 원칙적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힌 적이 있다. 《...우리에게는 평화협정을 맺는 문제를 비롯하여 미국 당국자들과 끝장을 보아야 할 문제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과의 회담이나 접촉을 어디까지나 평등한 입장에서 하려고 하지 그들에게 구걸하는 형식으로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미국 당국자들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꿀데 대한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이제라도 그들과 회담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미국 당국자들은 우리 공화국의 평화협정체결 제의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있으며 그 어떤 긍정적인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조건에서 우리는 구태여 그들에게 빌면서 대화의 문을 두드리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평화협정 체결문제를 가지고 미국과 회담을 하자고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런데 미국 당국자들은 대답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답은 하지 않는데 억지로 회담을 하자고 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김일성 주석의 원칙적 입장은 오늘의 북조선 최고수뇌에 의해서 더 철저히 고수되고 있다. 1975년 11월 제30차 유엔 총회에서 주한유엔군 사령부 해체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유엔군 사령부는 그 명목상의 존립마저도 거부당했다. (유엔 총회 결의안 제3390B호)가 그것이다. 그 결의안의 일부를 인용하면 이렇다.《...현 정전 상태가 코리아에서 지속되는 한 항구적인 평화를 기대할 수 없다고 인정하면서,   그리고 코리아의 항구적 평화를 보장하고 자주적 평화통일을 촉진시키기 위해서 이 지역의 무력충돌을 미리 막고 긴장을 해소하며, 코리아의 내정에 대한 외부간섭을 끝내기 위한 새로운 결정적 조치들을 취하는 것이 시급히 필요하다. 유엔군 사령부를 해체하고, 유엔 깃발 아래 남 코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모든 외국군을 철수해야 한다고 인정한다...》 20세기에 만들어진 56년이나 지난 낡아빠진《정전협정》을 21세기에 맞게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고 주한미군을 철수하며 한반도의 영구적인 비핵화를 실현해 평화정착을 하자는 것이 북조선의 일관된 정책이다. 7월 20일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이 북조선을 "환심을 사려는 꼬마 같다"고 비유하면서 최근 북조선이 감행해온 일련의 도발행위를 우회적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인도를 방문 중인 클린턴 장관은 이날 A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우리가 지켜봐온 것은 관심을 끌기 위한 (북조선의) 줄기찬 요구였다"면서 "그것은 마치 관심을 끌려는 꼬마와 철부지 10대들에게서 내가 느꼈던 경험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클린턴 안방마님이여, 잘 들으라. 말이란 상대방의 감정이나 기분 정도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가장 설득력이 있는 말조차 믿을 수 없게 된다. 허황된 말이 남발되는 상황에서 누구를 설득시킬 수 있는가.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휠씬 더 설득력이 있다. 당신이 말한 북조선이 (10대의 틴에이저 같다)라는 말은 바로 당신 자신을 일컫는 말이 아니가.   힐러리 클린턴이여 당신이 세계 정치외교무대에 등장한 경력이란 고작 6개월도 되지 않는다. 당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킬 필요는 없다. 북조선은 결코 당신과 논쟁을 원치 않는다. 아무리 언론과 토론해도 소용이 없다. 오로지 결과만 보여주면 된다.   북조선의 고도의 정치 외교적 역량이란 당신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능숙하고 노련하며 당신의 머리위에 앉아 놀고 있음을 알라. 북조선을 두 트랙의 미끼에 현혹시켜 유혹하고 굴복시켜 회담장으로 끌어내겠다는 발상은 허황된 망상이다. 북조선을 회담장으로 나오게 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이다. 고지식한 방법에 있다. 원칙적이고 근본문제를 해결하자는 게 북조선의 의도이다.《대북적대시 정책 》폐기를 위한 북-미양자간《 군사정치고위급회담 》이라야 한다. 그럴 때가 무르익었 다면 언제든지 북조선은 회담장으로 나올 것이다.   그런 원칙하에 준비가 되고 북조선과 회담을 성공시키고 싶다면 간접적인 경로를 찾아라. 떠벌리는 것 보다 훨씬 빠를 것이다.오바마는 변화(Change)와 개혁(Reform)의 기치를 들고 출범하지 않았는가. 1953년 7월27일에 체결돼 56년간이나 지속되어온 낡아빠진 구시대적《정전협정》은 이미 휴지장이 된지 오래다. 변화와 개혁은 바로 56년이나 되는 낡은 한반도 을 으로 바꾸는 것으로 낡은 질서를 새것으로 전환할 것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끝)  [출처 : 민족통신 2009-07-21]   ============================= (자료)= [력사를 알아서 판단하기...] 1,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남침을 감행한 북한군은 오전 9시경 개성 방어선을 깨고 당일 오전에는 동두천, 오후에는 포천을 함락시켰다. 26일 오후에 의정부를, 27일 정오에는 이미 서울 도봉구의 창동 방어선을 넘었다. 창동 방어선이 뚫린 국군은 성북구 돈암동에 있는 미아리고개에 방어선을 구축하였으나 적의 전차에 의해 붕괴되었다. 결국 개전 3일 만인 28일에 서울은 함락되고 말았다. 이때 한국정부는 대전에서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피하였고, 이 과정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한강대교를 폭파하였다.   2, 한국정부는 7월 14일, 한국군의 지휘권을 미군에게 넘겨주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정부는 미국에게 파병을 요청하였다.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여 이 문제를 논의하였다. 6월 2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에 대해 한국에서의 즉각 철수를 권고하였고, 회원국들에게 군사공격을 격퇴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원조를 제공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미국을 비롯한 16개 회원국이 유엔군을 조직하여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3, 그동안 대전까지 내려온 북한군은 공격 진로를 세 방면으로 나누어 호남, 경북 왜관(낙동강),영천, 포항 등지로 진격하였다. 한국군은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지휘 하에 편입, 낙동강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고 반격을 시도하였다. 유엔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 9월 28일 서울을 되찾았다.   4, 이어 후퇴하는 북한군을 공격하면서 38도선을 돌파하여 10월 10일에는 원산을,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하였다. 그 기세를 몰아 10월 26일 서북지역은 청천강 북부와 압록강 초산에 이르렀고, 중부지역은 장진호까지, 동부는 압록강의 혜산진까지 진격하였다. 그리고 11월에는 두만강 일대까지 진격하였다.     5, 유엔군과 한국군의 북진이 시작되자 10월 8일 중국은 참전을 결정하고, 19일 압록강을 건너 들어왔다.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역전되었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12월 4일 평양에서 철수하고, 12월 9일부터는 원산에서 퇴각하였다.   6. 12월 14일부터 24일 사이에 동부 전선의 한국군 12만명과 피난민 10만명이 흥남부두에서 해상으로 철수했다.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을 다시 내주었고, 1월 7일에는 수원이 함락되었다.인민군은 계속 남진했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병력과 장비를 정비하여 반격 태세를 갖추고 원산 등 북측지역에 폭격을 가했다. 그리고 3월 2일 다시 한강을 건너 14일 서울을 되찾았다.   7. 이후 전쟁은 38도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계속되었다. 한국전쟁 중 2년 동안 이렇다 한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중국의 개입으로 전선이 고착화되자 미국은 현상유지 차원에서 휴전을 서둘렀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을 반대했지만 미국은 한국을 배제한 채 북한, 중국과의 휴전협상을 개시하였다. 그리고 정전 수락의 전제조건으로 중국군의 철수, 북한의 무장해제, 유엔 감시하 총선거를 요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전협상은 계속되어 군사분계선 문제는 1952년 1월 27일에 타결되었으며, 1952년 5월에 이르러선 포로교환 문제를 제외하곤 거의 모든 의제에 합의하였다.   8. 1953년 3월 소련 스탈린의 사망으로 휴전회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스탈린의 사망 이후 소련은 전쟁의 종결을 북한에 요구하였다. 이에 북한이 소련을 통해 유엔군에 정전을 제의하는 방식을 거치고 이를 유엔군 측이 승인, 1953년 7월 27일에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개전 3년 1개월 만에 한국전쟁은 정전으로 매듭지어졌고 현재까지 그 효력이 이어지고 있다.     ================================================ (자료)= {력사를 알고 판단하기]... ================================   전쟁 戰爭 폰트확대| 폰트축소| 공유하기|   인쇄   유형 개념용어 분야   요약 국가간에 자국의 의사를 상대국에 강요하기 위해 수행되는 조직적인 무력투쟁 혹은 폭력행위의 상태.   동국병감 [내용] (1) 개념 및 정의 최근의 국제법에서는 식민지 지배 및 외국의 점령, 인종차별체제에 반대하여 투쟁하는 이른바 ‘민족해방전쟁’과 한 국가에서 2개 이상의 정치적 권력집단간의 무력투쟁도 전쟁에 포함시키고 있다. 전쟁은 군사적 측면의 무력투쟁뿐만 아니라, 비군사적 측면인 정치·외교·경제·심리·사상 및 과학기술 등도 무력수단과 마찬가지로 전력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전쟁은 정치적 권력집단 사이에서 조직적인 정치·경제·사상 및 군사력 등을 사용하여 자기의 의사를 상대편에게 강요하는 투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의 개념과 정의는 시대와 관점에 따라 그 견해를 달리하지만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① 전쟁은 국가의 존망과 생사의 문제이다. ② 패자는 승자의 의지 앞에 굴욕적인 굴복을 당한다. ③ 전쟁은 약속이나 계약에 의해서 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하고자 하는 자의 의지에 의하여 시작된다. ④ 민족이나 국가 사이의 분쟁은 조정기관에 의해서 해결된 일은 거의 없었고, 유일한 해결수단으로 전쟁을 구사해 왔다. ⑤ 전쟁은 지금까지 인류 생존의 기본 요소가 되어 왔고, 또 인간의 천성이 변하지 않는 한 그 양상을 달리하면서 계속 존재한다. 따라서 국가와 민족의 생존권을 확보하고 독립과 번영을 누리기 위해서는 전쟁을 이해하고 연구하여 이에 대비해야 한다는 이론적 근거가 여기에서 비롯된다. (2) 원인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은 단일적인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일어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나, 조미니(Jomini,B.D.)는 정부가 전쟁을 하는 원인을 다음의 여섯 가지로 분류하였다. ① 권리의 회복 및 보호, ② 주요 국가 이익의 보호 및 유지, ③ 세력 균형의 유지, ④ 정치적 혹은 종교적 이념의 전파·말살 또는 보호, ⑤ 영토의 획득에 의한 국가의 영향력 및 세력의 증대, ⑥ 정복욕의 충족이다. 전쟁은 반드시 원인과 동기에 의해서 발발한다. 원인은 예외 없이 장기간에 걸쳐 전쟁 결의와는 별도로 교전국 쌍방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며, 동기는 많은 경우 미묘하고 교활하게 하여 개전 책임을 상대편에 전가시키기 위해 감추어서 식별하기 어렵지만, 한 편이 먼저 침공함으로써 발생하게 된다. (3) 전쟁의 유형 전쟁의 유형은 전쟁의 어떤 특성을 분류의 기초로 삼느냐에 의해서 달라지게 된다. 도덕적 기준에 의하면 정의의 전쟁과 부정의의 전쟁으로 구분되고, 전략이 공세적인가 수세적인가, 그리고 공격의 선후에 따라 침략전쟁과 자위전쟁으로 구분된다. 전쟁의 목적과 동기의 기준에 의하면, 침략전쟁·자위전쟁·제재전쟁(또는 응징전쟁)·식민지전쟁·민족해방전쟁·독립전쟁·혁명전쟁 등이 있다. 지역적 규모의 기준에서는 세계전쟁·국지전쟁으로 구분된다. 전쟁 양상의 기준에서는 무제한전쟁(또는 전면전쟁·절대전쟁)과 제한전쟁, 사용 병기의 종류에 따라 핵전쟁과 비핵전쟁(또는 재래식 전쟁), 그리고 선전포고에 의한 정규 군대간에 수행되는 정규 전쟁과 그렇지 않은 비정규 전쟁이 있다. 전쟁의 주체에 따라서는 국가 대 국가 간에 수행되는 국제전쟁과 한 국가 내의 정치권력집단간에 수행되는 내전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은 복합되어 하나의 전쟁형태를 이룬다. 예를 들면, 6·25전쟁은 북한측에서 말하면 민족해방전쟁이고, 한국측에서 본다면 침략에 대한 자위전쟁이며, 유엔에 의한 제재전쟁이고, 또한 국지·제한·재래식 전쟁이었다. (4) 현대의 전쟁 현대 전쟁의 특징은 정치와 군사가 밀접하게 융합되어 있으며, 특히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클라우제비츠(Clausewitz,K.)는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전쟁이라는 것이다. 첫째, 전면전쟁에서는 교전국간의 외교관계는 단절되고 군사적 행동만 전개되나, 제한전쟁에서는 전쟁중에도 어떤 형태로든 외교 교섭이 유지된다. 즉, 전쟁과 정치의 구별이 어려워져 정치가는 군사문제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고, 군인은 군사문제에 대한 전문가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예지도 갖추어야 한다. 둘째, 현대 전쟁은 다만 이익이나 세력의 확장이 아니다. 예컨대, 민주주의 대 공산주의처럼 체제의 투쟁, 이데올로기의 투쟁으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19세기까지의 전쟁이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이익 획득을 지향한 데 반하여, 현대 전쟁은 희생은 불문에 붙이고 상대국의 무조건 항복 혹은 그 나라를 지탱하는 체제나 이데올로기를 말살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경향이 강하다. 적대국가의 도의적·가치적·체제적 열등성을 강조하는 반면, 성전(聖戰)·자위전·해방전,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의해 자신의 전쟁의 정당성·도덕성을 강조한다. 여기에 현대 전쟁에서의 심리전쟁·선전전쟁·이데올로기전쟁이 갖는 영향은 대단히 크다. 셋째, 현대 전쟁은 물량전쟁이다. 이것은 국력을 총동원하여 전쟁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의 4대 군사노선은 이런 경향을 잘 예시해 주고 있다. 그리고 병력 수의 증가에 따르는 군비의 증가뿐 아니라 무기와 장비의 정교화와 기계화에서 오는 군사비의 증가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17일간의 전쟁에서 소비한 전쟁 비용은 4조 2750억 원이나 되었다고 하니, 전쟁을 해서 물질적 이득을 획득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다. 현재 지구상에서 자신의 힘만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국가는 미국과 중국 등이며, 그들이라 할지라도 통로·기지 및 자원의 협력 등 다른 국가의 지지 없이는 효과적인 군사행동을 수행하기가 어렵다. [우리나라의 역대 주요 대외전쟁] (1) 통일신라 이전의 전쟁 ① 고조선과 한나라의 전쟁: 서기전 194년 고조선의 준왕(準王)을 축출하고 왕검성에 도읍한 위만(衛滿)은 주위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의 손자 우거왕(右渠王) 때 이르러서는 군사력이 증강되고 국토가 넓어졌으며, 고조선 남부에 있는 변한 등의 세력이 한나라와의 직접 통교를 방해하였다. 이로 인하여 영토확장정책을 추진하던 한나라와 대립하게 되었다. 한무제는 서기전 109년 초 사자를 보내어 우거왕에게 한나라에 복속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우거왕은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한무제는 그 해 가을 성기(成己)로 하여금 육군 5만 명, 수군 7,000명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하였다. 그러나 고조선군의 선전으로 1차 공격에 실패한 무제는 위산(衛山)을 보내어 강화를 교섭하고자 하였다. 우거왕도 강화교섭에 응하여 태자를 한나라에 보내기로 하였다. 태자가 1만여 무장병의 호위하에 패수(浿水)를 건너려 할 때 한나라의 사자는 호위병의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다. 태자는 강을 건넌 뒤 자기를 살해하려는 기만책으로 의심하여 돌아와 버렸다. 이로써 양국의 협상은 결렬되고 말았다. 화의에 실패하자 한무제는 총 공세를 취하여 왕검성을 포위하였다. 한군이 왕검성을 포위하여 수 개월 공격했으나 고조선군은 그때마다 한군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전투가 장기화됨에 따라 성 안에서도 화전(和戰) 양파의 대립에 따른 동요가 일어나, 주화파가 우거왕을 살해하고 한군에 항복함으로써 마침내 서기전 108년 고조선은 멸망하였다. ② 여수·당전쟁(麗隋唐戰爭): 589년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는 요하(遼河)를 국경으로 하여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수나라의 대고구려정책은 건국 초기에 아직 정비되지 않은 통치력으로 인한 일시적인 방책이었으며, 점차 요동(遼東)을 정복할 야욕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수나라의 정책에 대응하여 고구려 영양왕은 598년(영양왕 9) 요서(遼西)를 공격하였다. 이것은 전략상의 요충지를 선점하여 수나라의 침략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 일종의 예방전쟁이었으며, 고구려의 요서 공격에 대응하여 수문제는 수륙군 30만여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육상군은 홍수로 인한 보급선 마비와 질병의 유행으로 요하에 도달하지도 못했으며, 산동반도를 출발한 수군도 풍랑으로 회군하여 실패로 끝났다. 수나라는 대규모의 군대를 다시 파견하기에는 국내 체제와 경제적 어려움이 있었고, 예방전쟁의 목적을 일단 달성한 고구려도 전쟁을 더 원하지 않아 수나라는 고구려의 사과를 명분으로 내세워 전쟁을 중지하고 양국의 우호관계는 다시 이루어졌다. 그 뒤 문제의 뒤를 이은 양제는 고구려 국왕의 내조를 요구했으나 고구려는 이를 거부하였다. 양제는 고구려 원정을 결의하고 612년(영영왕 23)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이때 육상군은 113만이었고, 군량 수송을 담당한 인원은 그 갑절이었으며, 수군은 약 7만 명에 달하였다. 수나라의 침공을 받은 고구려는 요동성을 고수하여 수나라의 군대를 수 개월 동안 그곳에서 막아냈다. 요동전투가 전개되는 동안 수나라의 수군은 황해를 건너 대동강을 거슬러 그 해 6월 평양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의 수군은 열세하여 해전을 피하고 적의 수군을 지상으로 유도해서 섬멸하기로 하고, 거짓 패한 척 후퇴하여 평양성의 외성 내에 잠복 대기중이던 정예부대가 수군을 급습하였다. 이에 수나라 수군은 불과 수천 명만이 생명을 건져 철수하였다. 요동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초조해진 수양제는 요동지방의 고구려성을 계속 포위하여 고구려군을 가두어 두고, 30만의 별동부대를 이끌고 평양을 직접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에 대항해서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은 후퇴 유도작전을 전개하여 수나라 군대를 평양성 밖 30리까지 유인한 다음, 수나라의 우중문(于仲文)에게 조롱의 시 한 수를 보내고 그에게 철군하면 고구려 왕이 수양제에게 조례하겠다고 통보하였다. 수나라 군대는 평양성 수비가 견고한 데다 강행군으로 인한 피로와 식량의 부족으로 사기가 떨어졌으므로 공격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고구려 왕의 조례 약속을 명분으로 후퇴하였다. 을지문덕은 후퇴하던 수나라 군대에게 살수(薩水: 지금의 청천강)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이 때 목숨을 건져 돌아간 자는 불과 2,7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이 우리나라 전사상 길이 빛나는 살수대첩이다. 그 뒤 수양제는 613·614년, 그리고 617년 세 차례나 침입했으나 거듭 패하고, 전쟁으로 인한 국력 탕진과 민심이 돌아선 데 따른 국내의 반란으로 수나라는 615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수나라의 뒤를 이은 당나라도 수나라와 마찬가지로 고구려 침공의 징조를 보이자 고구려는 이에 대비하여 631년(영류왕 14)부터 요하의 국경선에 1,000여 리의 장성을 쌓기 시작하여 646년(보장왕 5)에 이를 완성하였다. 당시 장성 축조공사의 책임자로 임명된 연개소문(淵蓋蘇文)은 642년에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뒤 스스로 막리지(莫離支: 수상)가 되어, 신라가 한강을 점유함으로써 적대관계에 있던 백제와 동맹하여 신라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고구려·백제의 동맹에 대응하여 신라는 적극적인 친당정책을 전개해서 두 나라의 견제를 요청하였다. 이것은 당나라의 대외정책과 일치하여 당나라는 고구려에게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라고 거듭 권고했으나, 고구려는 이를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사신을 감금하였다. 이에 당태종은 644년 10여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수륙 양면으로 고구려를 침공해 왔다. 이세적(李世勣)은 6만의 대군으로 요동성 방면으로, 장량(張亮)은 4만 3000여 수군으로 해로를 통하여 평양으로 진격하였다.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지휘하에 신성·건안성·안시성 등 요동의 요새를 굳게 지켰다. 특히, 안시성에서의 방어전은 치열하여 60여 일간의 교전 끝에 당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안시성 공격에서 대패한 당나라 군대는 추위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여 총퇴각하고 말았다. 육상군의 패보를 들은 수군도 침공을 중단하고 회군하였다. 당태종은 그 뒤에도 647·648·655년에 거듭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고구려와 수·당과의 싸움은 동아시아의 패권을 다투는 일대 결전이었으며, 고구려 정복의 어려움을 깨달은 당나라는 그 뒤 신라와의 연합을 통한 대고구려정책을 전개하였다. ③ 나당전쟁(羅唐戰爭):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660년(무열왕 7)과 668년(문무왕 8)에 백제·고구려를 차례로 정복하여 삼국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신라와 당나라의 목적은 서로 다른 것이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당나라의 힘을 일시적으로 빌린 것이었고, 당나라는 한반도를 정복할 야심에서 신라와 연합하였다. 당나라는 백제의 옛 땅에 5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여 이를 차지하고자 했으며, 더 나아가 신라에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는 한편, 신라의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임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백제 유민의 부흥운동이 진압된 뒤에는 의자왕의 아들 부여 융(扶餘隆)을 웅진도독에 임명하여 백제의 옛 땅을 관할하게 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신라의 문무왕과 화친을 맹약하게 함으로써 신라의 백제 병합을 막는 일석이조의 정복정책을 추진하였다. 당나라의 3국 지배 야욕은 고구려 멸망 후에 더욱 노골화되었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에도 9도독부를 설치했는데, 특히 평양에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 당나라의 설인귀(薛仁貴)를 도독으로 삼았다. 이 안동도호부는 실제로는 고구려는 물론 백제의 5도독부와 신라까지도 총괄했으며, 이로써 신라는 당나라로부터 패전국인 고구려나 백제와 똑같은 취급을 받았다. 신라는 이러한 당나라에 대항하여, 백제와 고구려 옛 땅 안에 있는 당나라군을 축출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신라는 먼저 고구려 멸망 후 요동지방을 비롯하여 당나라 군대가 점령하지 않은 지역의 고구려군 유민이 부흥운동을 전개할 때 이들을 지원하여 고구려 옛 땅에 있는 당나라군을 견제하는 한편, 670년 7월부터 당나라의 백제 주둔군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여 80여 성을 탈취하였다. 그리고 671년에는 사비성(泗沘城: 부여) 및 웅진성(熊津城: 공주) 방면으로 진격, 이를 점령하여 백제의 옛 땅에서 당나라군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당나라는 그들의 세력이 백제의 옛 땅에서 축출당하자, 672년에 4만 명의 병력을 평양에 진주시켜 신라의 북변 일대를 파상적으로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당나라는 674년 2월부터 신라 북변에 대하여 총공격을 가하였다. 당나라 대군이 공격해 오자 신라의 북변 성주들은 결사적으로 항전하여 당나라군과 치른 전후 18회의 전투에서 대승하였다. 677년 당나라는 신라군의 날카로운 공격을 피하기 위해 반도 내에 있는 고구려 옛 땅의 주둔군을 요동으로 철수시키는 동시에,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도 요동의 신성(新城: 무순 부근)으로 옮겼다. 이로써 신라는 실질적으로 한반도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2) 고려시대의 전쟁 ① 고려와 거란의 전쟁: 중국의 송나라는 거란이 점령하고 있는 화북(華北)지방을 탈취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985년(성종 4) 고려에 사신을 보내 원병을 요청해 왔으나 고려는 이를 거절하였다. 또 거란도 986년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친선을 제의해 왔으나 고려는 회답을 하지 않은 채 중립을 지켰다. 거란은 고려와 송나라가 연합하자 불안을 느끼고 993년 10월 소손녕(蕭遜寧)으로 하여금 80만의 대군을 보내 고려를 침공하게 하였다. 그 후 거란군은 고려군을 물리치고 청천강에 도달하여 강화조건을 제시하였다. 즉, 고구려의 옛 땅을 넘겨주고 송나라와 단교하여 거란을 상국으로 받들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고려조정에서는 의논이 많았으나 서희(徐熙)의 외교활동으로 난국을 타개할 수 있었다. 즉, 서희는 소손녕의 거란군을 스스로 물러가게 했을 뿐만 아니라 압록강 동쪽의 강동6주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고려는 여전히 친송정책을 추구했으므로 거란은 강동6주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거란의 이러한 요구를 거절하자, 1010년(현종 1) 11월 거란의 성종은 강조(康兆)의 현종 옹립을 구실로 40만 명의 대군을 지휘하여 제2차로 고려를 침공해 왔다. 고려는 강조에게 30만의 병력으로 통주에서 저항하게 했으나 패하였다. 결국 현종은 12월에 나주로 피난했으며, 1011년 1월 거란군은 개경(지금의 개성)에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았다. 이에 현종은 하공진(河拱辰)을 보내어 강화를 맺게 하였다. 거란의 성종은 국왕의 무조건 친조(親朝: 친히 조공을 바침)를 조건으로 대군을 철퇴시켰다. 거란은 고려왕의 친조와 강동6주를 넘겨줄 것을 요구해 왔으나 이에 응하지 않자, 1018년에 거란장 소배압(蕭排押)이 10만의 대군으로 고려에 제3차 침입을 해왔다. 고려에서는 강감찬(姜邯贊)을 도원수로 삼아 20만여 명의 대군을 지휘하여 안주로 나아가 대비하게 했으나, 거란군은 바로 개경을 향해 남진하여 다음해 정월에는 개경 100리 거리에 이르렀다. 이때 강감찬이 개경에 대한 병력을 증강하고 거란군을 요격하니, 소배압은 공격을 시도하다 실패하여 철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감찬은 퇴각하는 적을 귀주(구주)에서 대파하여 거의 전멸시켰다. 이것이 유명한 귀주대첩(구주대첩)이다. 그 결과 1019년에 강화를 맺어 양국은 평화적인 관계가 지속되었다. ② 고려의 여진정벌: 11세기 후반에 이르러 만주 북부 완안부(完顔部)의 여진은 세력이 강대해지자 함흥평야의 패권을 두고 고려와 정면 충돌하기 시작하였다. 1104년(숙종 9) 1월 완안부의 기병이 정평의 장성 밖에까지 미치자 고려에서는 임간(林幹)을 파견하여 대항하게 했으나 도리어 패배당하여 다시 윤관(尹瓘)을 보내어 방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여진의 기병을 물리치지 못하고 전세가 불리하여 화의를 맺고 돌아왔다. 윤관은 패전의 원인이 적의 기병에 우리의 보병이 대적하지 못한 데 있으니, 마땅히 군사를 쉬게 하고 사졸을 양성, 훈련하여 후일을 기다려야 한다고 대비책을 건의하였다. 이 건의에 따라 고려조정은 별무반을 편성하는 일에 착수하여 기병부대 양성에 역점을 두었고, 또한 군량을 비축하고 군사훈련을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1107년(예종 2) 12월 윤관을 도원수로 삼아 17만의 병력을 파견하여 여진정벌의 길에 오르게 하였다. 고려군은 먼저 점령지역의 여진군을 토벌하고, 다음은 수륙 양면에 의한 전격전을 전개하여 장성의 130여 마을을 점령하였다. 윤관은 이 수복된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전략적 요지인 함주를 비롯하여 9개 소의 요지에 성을 쌓았으니, 이것이 이른바 윤관의 9성이다. 그 뒤 여진이 계속 반격을 하는 한편, 조공할 것을 조건으로 9성을 돌려 달라고 애걸하자 고려는 멀리 떨어진 변경을 확보, 경영한다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1109년 7월 여진의 맹세를 받은 뒤 9성을 돌려 주었다. ③ 고려의 대몽항쟁: 정예 기마부대로 인접 국가를 정복하고 있던 몽골의 칭기즈칸은 1215년 금나라의 수도 연경을 함락시키고 황하 이북의 땅을 그의 판도 안에 넣었다. 금나라의 지배하에 있던 만주의 거란족은 금나라의 쇠퇴를 틈타 요동지방에서 세력을 확충하다 몽골군과 충돌하게 되었다. 몽골군과의 충돌에서 패한 거란족은 1216년(고종 3) 8월 압록강을 건너 고려에 침입하여 의주에서 평양에 이르는 서북지방에서 약탈을 감행하였다. 1218년 8월 거란은 또다시 고려에 침입하여 고려군과 싸우다가 강동성에 몰리게 되었다. 이 해 12월 거란 소탕작전의 마무리 단계에서 몽골군은 거란족 격멸을 이유로 동진의 포선만노(蒲鮮萬奴)와 연합하여 이 전투에 개입해 왔다. 고려에서는 몽골의 요청으로 군량미도 내고 병력도 합세시켰다. 몽골은 거란족을 소탕시킨 은혜를 구실로 해마다 막대한 공물을 고려에 강요했으나 고려는 이에 잘 응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두 나라의 관계가 소원해 가던 중 1225년 1월 몽골 사신이 압록강을 건너 귀국하던 도중 도적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몽골은 이를 구실로 1231년 8월 살례탑(撒禮塔)을 선봉으로 하여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였다. 몽골군은 귀주성(구주성)에서 박서(朴犀)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남하하여 개경을 포위하고, 그 일부는 멀리 충주까지 내려갔다. 최우(崔瑀)는 하는 수 없이 몽골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화의함으로써 몽골군은 1232년 1월에 철수하였다. 그러나 최우는 몽골과의 항쟁을 결의하고, 그 해 6월에 서울을 강화로 옮겼다. 이것은 수군이 없는 몽골군의 허점을 찌른 방책이었다. 왕과 귀족들이 강화로 들어감과 동시에 일반 백성들도 산성이나 섬으로 피난하게 한 고려의 태도가 몽골을 자극하여 그 해 12월 몽골군은 다시 침략을 해왔다. 그러나 몽골 장수 살례탑이 처인성(지금의 용인)에서 김윤후(金允侯)에게 피살되자 곧 철수하였다. 그 뒤 몽골은 동진과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1235년 7월 탕구[唐古]에게 제3차 침입을 하게 하여 1239년까지 5년간 전국을 유린하였다. 그러나 유럽과 아시아를 석권했던 몽골의 대군도 넓이 약 650m의 강을 건너지 못하여 강화도를 침공하지는 못하였다. 몽골의 요구는 고려왕이 육지로 나와 친조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나, 고려가 이에 응하지 않음으로써 몽골군은 그 뒤에도 제4차(1253)·제5차(1254∼1255)·제6차(1255)·제7차(1257)에 걸쳐 침략을 거듭해 왔다. 그 중에도 1254년의 침략 때는 민중을 살육하는 것은 물론이요 포로로 붙들어 간 남녀만도 20만여 명이나 되었다. 무인정치의 마지막 집권자 최의(崔竩)가 1258년 3월에 피살되자 정권은 일단 왕에게 돌아가고 몽골에 대한 강화가 결정되기에 이르렀다. 1259년 4월 태자가 몽골로 출발하여 항복의 뜻을 표하고, 1270년(원종 11)에 개경으로 환도하니 강화로 천도한 지 39년 만이며, 이로써 고려조정은 몽골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항몽세력의 핵심인 삼별초는 무인정권이 타도되고 몽골과 강화가 성립된 데 대하여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배중손(裵仲孫)의 지휘하에 강화도에서 개경정부와 대립하는 반몽정부를 수립하였다. 그 뒤 근거지를 진도로 옮겨 부근의 여러 섬과 해안 일대를 지배하는 해상왕국을 이룩하였다. 1271년 5월 여몽연합군이 진도를 함락하는 데 성공하자 삼별초는 그 중심 인물의 대부분을 잃고 전력 또한 크게 약화되었다. 그러나 삼별초의 나머지 병력은 김통정(金通精)의 지휘 하에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겨 항전을 계속하였다. 1273년 4월 연합군은 제주에 상륙하여 삼별초를 격멸하니, 삼별초의 만 3년간에 걸친 대몽항쟁도 마침내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고려는 몽골과 치른 40년간의 항쟁을 통하여 한민족의 끈질긴 저항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며, 원나라도 다른 정복국과는 달리 고려왕실과 혈연관계를 맺도록 하는 유화정책을 썼다. (3) 조선시대의 전쟁 ① 임진왜란·정유재란: 조선은 건국된 지 200년이 가까워짐에 따라 지배계급은 글에만 열중하여 나약해지고 사회의 기강은 해이해졌으며, 국방에 대한 관심도 약화되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국시대의 혼란을 수습하여 국내를 통일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장기간의 싸움에서 강력해진 제후들의 군사력을 해외에 방출시킴으로써 국내 체제에 만전을 도모하고자 대륙 침략을 구상하게 되었다. 도요토미는 대마도주를 통하여 조선과의 수교를 요청하는 한편,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군대가 조선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조선은 이를 거절하였다. 이러한 당시의 일본 실정과 도요토미의 의도를 살피기 위해 조선 조정에서는 1590년(선조 23) 황윤길(黃允吉)을 통신사, 김성일(金誠一)을 부사로 파견하였다. 이듬해 3월 통신사 편에 보내 온 도요토미의 답서에 ‘정명가도(征明假道)’가 있어 침략 의도가 명백했는데도 사신의 보고는 일치하지 않았다. 즉, 황윤길은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으나, 김성일은 그러한 사실이 없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보고 이면에는 동인·서인으로 나누어진 당시의 정치상황이 그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침략전쟁의 모든 준비를 갖춘 도요토미는 1592년 4월 15만 대군을 9진으로 편성하여 조선을 침공하였다. 4월 14일 고니시[小西行長]를 선봉으로 하는 이 부대는 부산에 상륙하여 이를 함락시키고, 뒤따라 들어온 가토[加藤淸正]·구로다[黑田長政] 등과 함께 세 길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한편, 구키[九鬼嘉薩] 등이 지휘하는 9,000여 명의 수군은 바다에서 이들을 지원, 엄호하게 하였다. 왜병이 침입했다는 급보를 접한 조정에서는 신립(申砬)을 도순변사,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임명하여 왜병의 진격을 저지하게 했으나, 이일은 상주에서 패하였고,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싸웠으나 패하여 죽었다. 신립이 패하자 선조는 평양으로 몽진(蒙塵)하였다. 왜적은 상륙한 지 불과 20일 만인 5월 2일 서울을 함락하였다. 서울을 함락한 왜병은 다시 북진하여 6월 13일에는 평양을 점령하였고, 가토는 함경도 끝까지 북상하여 두 왕자를 사로잡았다. 평양이 함락되자 선조는 다시 의주로 피난하여 명나라의 원병을 요청하였다. 일본의 수군은 700여 척의 병선으로 편성, 4월 27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조선의 서해안을 우회하여 고니시군과 수륙 합동작전으로 북상하는 것이었다. 경상도의 수군은 일본 수군의 위세에 밀려 싸워 보지도 못한 채 패주하여 경상도 일대의 해상권을 일본 수군에 넘겨주고 말았다. 그러나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은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이 구원을 청하자 평시부터 정비해 두었던 병선, 특히 거북선을 이끌고 곳곳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하였다. 더욱이 7월 8일 한산도해전에서는 적 수군의 주력 함대 73척 중 59척을 빼앗고 격파하였으며, 또한 9월 1일 부산포해전에서는 적선 100척을 격파함으로써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일본의 지상군은 그들의 수군이 패하여 제해권을 상실함에 따라 병참선이 위협을 당하자 이제는 더 북상할 기세를 잃고 후퇴를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관군이 왜적을 막지 못하자 국내 각 지방에서는 의병이 일어났다. 조헌(趙憲)은 충청도 옥천에서 군사를 일으켜 충주의 왜병을 축출하고 금산의 왜병을 공격하다 전사하였다. 곽재우(郭再祐)는 경상도 의령에서 군사를 일으켜 의령·창녕 등지에서 적을 물리치고, 진주에서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적을 격퇴하였다. 묘향산의 노승 휴정(休靜: 서산대사)은 팔도의 승려에게 격문(檄文)을 발하여 그의 제자 유정(惟政: 사명당)의 원조를 얻어 1,700명의 승병을 이끌고 평양탈환전에 공을 세웠다. 또 조선이 요청한 명나라의 원병이 도착하였다. 명나라는 처음에는 명장 조승훈(祖承訓)의 휘하에 5,000명의 군사를 보내어 7월 17일 평양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자 심유경(沈惟敬)을 파견하여 화의를 교섭하게 하는 한편, 다시 이여송(李如松)에게 4만 3000명으로 구원하게 하였다. 명군은 조선군과 함께 1593년 1월 8일 평양을 탈환하고, 이어 일본군을 추격하여 서울로 향하였다. 그러나 명군은 1월의 벽제관전투에서 패배하여 일시 개성으로 후퇴하였다. 왜군은 서울에 집결하여 마침 함경도에서 철수한 가토군과 합동하여 2월 12일 행주산성을 공격했으나 권율(權慄)이 배수의 진을 치고 끝내 왜군의 공격을 무찔렀다. 이것은 김시민의 진주싸움, 이순신의 한산섬싸움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이다. 벽제관전투 이후 이여송은 평양에 머물면서 심유경을 서울의 왜진에 보내어 화의를 교섭하게 하였다. 왜군도 조선 수군의 활동으로 병참선에 대한 위협을 받고, 또한 각지 의병의 봉기와 명군의 진주, 전염병의 유행 등으로 전의를 잃었으므로 화의에 응하였다. 그래서 1593년 4월부터 서울에서 철수하여 서생포에서 웅천에 이르는 성을 쌓고 강화조약의 조인을 기다렸다. 그러나 화의 진행중인 2월 18일 왜병은 진주성에 보복적인 공격을 가하여 성을 함락시켰다. 한편, 심유경이 왜군과 함께 도요토미의 본영에 들어간 뒤 2∼3년간 사신이 내왕했으나 도요토미가 너무나 무리한 조건을 내놓았기 때문에 화의는 결국 결렬되었다. 이에 도요토미는 1597년 1월 14만 명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조선에 다시 침공해 왔으니,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이번에는 왜군의 활동이 여의치 못했는데, 그것은 조선군이 전비를 갖추었고, 또 명나라의 원군도 즉시 출동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순신은 모함으로 옥에 갇혔으며, 7월 15일 수군은 다대포와 칠천량에서 일본 수군에 의해 섬멸당하고 말았다. 이에 기세를 올린 일본군은 7월 28일부터 행동을 시작하여 경상도를 중심으로 전라도 일대까지 점령하였다. 그러나 조선·명나라의 연합군도 총반격을 가하여 9월 6일 소사전투에서 왜군을 대파함으로써 전세를 만회하였다. 수군이 패하자 조정에서는 다시 이순신을 기용하여 남은 병선 12척으로 수군을 재편성하였다. 그리고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적선 133척과 격전을 벌여 적선 31척을 격침시키고 다수를 격파하여 제해권을 다시 잡았다. 그 동안 육상에서는 명군이 전쟁에 개입하고 명량해전에서 패배한 영향으로 일본군의 사기가 떨어져 전투는 부진상태에 놓였다. 특히, 도요토미의 유언에 따라 왜군은 철수를 서두르고 있었다. 이순신은 명나라의 수사제독 진린(陳璘)과 함께 철수하는 왜군과 노량에서 격전을 벌여 왜선 200여 척을 격파하고 승리를 얻었으나, 이 해전에서 전사하였다. 이 싸움을 끝으로 전후 7년에 걸친 왜란은 끝났으나, 이 전쟁이 조선·명나라와 일본의 삼국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조선은 팔도가 거의 전쟁터화되어 왜군의 약탈과 살육으로 인해 심한 타격을 받았다. 한편, 조정은 병제 개편과 무기 개량에 착수하여 훈련도감의 설치, 삼수병에 의한 무예의 훈련,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와 화차를 발명하였고, 조총과 불랑기(佛狼機: 포르투갈 사람이 전래한 대포) 등을 제조하였다. 명나라는 병력을 조선에 파견하여 국력의 소모와 재정의 문란으로 새로 대두하기 시작한 여진의 청나라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일본에서도 도요토미가 몰락하고 도쿠가와[德川家康]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전쟁은 처음의 목적인 도요토미의 체제 안전 및 유지에 대한 기대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무익한 전쟁으로 한일 두 민족의 원한관계를 뿌리깊게 만들었다. ② 병자호란: 1627년(인조 5) 1월의 정묘호란으로 조선과 후금은 형제지국의 맹약을 맺었다. 그러나 그 뒤 후금은 명나라를 치기 위해 조선에 군량과 병선을 강요하는 등 압력을 가하고, 또 1632년에는 형제관계를 고쳐 군신관계를 맺고 조공을 늘리라고 요구하였다. 후금의 태종은 황제의 존호를 사용하기 위해 1636년 12월 용골대(龍骨大) 등을 보내어 황제로 부를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사신을 만나지도 않고 국서도 받지 않았다. 같은 해 4월 황제의 칭호와 더불어 국호를 청으로 고친 태종은 조선의 이런 도전적인 태도에 대하여 원정군 10만을 편성, 청태종이 지휘하여 그 해 12월 조선을 침입하였다. 이 때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은 백마산성을 굳게 방비하고 있었으나 청군은 이 길을 피해 서울로 직행하여 진격하니, 출발한 지 10일 만에 서울 근교에 도달하였다. 조정에서는 바로 그 전날 비로소 청군이 침입했다는 사실을 알고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 등을 적진에 보내어 시간을 얻는 한편, 서둘러 두 왕자 등을 강화로 피난시켰다. 그러나 인조는 길이 청군에 의해 차단되어 12월 4일 밤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 청군의 선봉은 벌써 남한산성을 포위했고, 다른 부대는 아무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서울에 입성하였다. 따라서 포위된 지 45일 만에 식량 부족과 추위로 인하여 성 내의 장병들은 사기를 잃었고, 구원군은 도중에서 모두 청군에게 격파당했으므로 주화파(主和派)의 주장에 따라 마침내 항복하기로 하였다. 1월 10일 이후 교섭이 진행되었는데, 청태종의 요구는 조선의 왕이 친히 성문 밖에 나와 항복하고 양국의 관계를 악화시킨 주모자 2, 3명을 인도하면 화의에 응하겠다는 것이었다. 인조는 처음에는 이 제안에 대해 주저했으나 강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부득이 1월 30일 성문을 열고 삼전도(三田渡: 송파)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였다. 이것은 우리나라 역사상 큰 치욕이었다. 조정은 청나라의 가혹한 요구조건을 수락하여 화의가 체결되었으며,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 뒤의 효종)이 인질로 잡혀갔다. 그리고 주전파의 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홍익한(洪翼漢) 등 3학사는 잡혀가 참형을 당하였다. 그 뒤 1639년 청나라는 조선에 강요하여 청태종의 송덕비를 삼전도에 세우게 했으며, 조선은 청나라에 복종하게 되었다. 그 후 군비를 갖추어 북벌계획을 비밀리에 진행했으나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③ 병인양요·신미양요: 흥선대원군은 처음에는 천주교도를 탄압하지 않았으나, 1866년(고종 3) 1월에 탄압령을 내려 불과 몇 개월 동안에 9명의 프랑스인 신부와 신도 8,000여 명을 학살하였다. 이 때 탈출한 리델(Ridel, F. C.) 신부의 보고를 접한 프랑스 공사는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Roze, P. G.) 제독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으며, 로즈 제독은 그 해 9월 군함 3척을 보내어 지형을 정찰한 뒤 철수하였다. 그 뒤 10월에 다시 군함 7척, 육전대 600명으로 조선을 침입하였다. 이것이 병인양요이다. 프랑스는 선교사 살해에 대하여 항의하는 한편, 10월 14일 일부는 강화도 갑곶에 상륙하여, 강화부를 점령하고 무기와 양식 및 서적 등을 약탈하였다. 그러나 10월 26일 프랑스군의 다른 부대(병력 120명)는 서울로 가는 길목의 문수산성에서 조선군에 의해 2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하였다. 앞서 강화부를 점령한 부대는 11월 9일 정족산성을 점령하고자 했으나, 천총(千摠) 양헌수(梁憲洙)가 지휘하는 500명의 매복한 포수의 기습에 의해 3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격퇴당하였다. 로즈 제독은 사태의 불리함을 깨닫고 강화부의 여러 관아를 불사르고는 11월 18일 함대를 철수하였다. 이 사건으로 동양에서 프랑스 정부의 위신은 크게 실추되었고, 반면에 대원군은 쇄국양이정책을 더욱 고집하여 천주교 탄압에 박차를 가하였다. 한편, 같은 해 7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號)가 대동강에서 조선 관헌과 충돌하여 소각된 일이 있었다. 그 뒤 미국 정부는 조선을 문책하는 동시에 강제로 통상조약을 맺으려고 북경에 있는 로(Low, F.) 공사에게 훈령하여 아시아 함대를 출동하게 하였다. 1871년 로는 로저스(Rodgers, J.) 제독에게 군함 5척에 해병대 1,200명을 지휘하여 남양(南陽) 앞바다에 와서 조선 정부에 통상을 요구하도록 했으나 거절당하였다. 6월 1일 그들의 일대가 강화해협을 측량하고자 강화도 광성진 앞에 왔을 때 요새의 병사들이 포격을 가하자 미군들도 이에 대응하여 사격을 하였다. 그 뒤 외교 교섭을 했으나 조선 정부가 완강히 거절하자 6월 10일 651명의 해병대와 7문의 포를 가지고 초지진·덕진을 점령하고, 다시 북진하여 광성진을 공격하였다. 이것이 신미양요이다. 서로의 공방전이 치열하게 벌어져 중군 어재연(魚在淵) 등 243명이 전사하고 20명이 포로가 되었다. 반면에, 미군은 맥키(Mekee) 중위 이하 3명이 전사하고 10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로 공사와 로저스 제독은 조선 정부로부터 협상 소식이 올 것으로 기대하여 1주일을 기다렸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자 더 이상 전투하는 것이 무익하다고 생각하고 철수하였다. 전쟁이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한다면, 미군은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전쟁에서는 패한 결과가 되었다. 두 차례의 양요에서 외국군을 격파한 대원군은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4) 항일독립운동 일제는 청일전쟁 및 러일전쟁의 승리를 기반으로 한반도 침략 및 대륙 진출을 실현하게 되었다. 더욱이 1907년 7월 한일신협약으로 한반도의 정치 실권은 거의 일제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고, 대한제국의 군대는 8월 1일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해산된 군인들은 각지의 의병과 합류하여 일제에 무력항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1908년을 고비로 의병의 활동은 점차 약화되었으며, 인명의 희생만도 1만 7000여 명이나 되었다. 이러한 일제의 탄압정책에 따라 국내에서 무장독립항쟁을 하는 데 따른 어려움을 인식하여 동북만주 및 연해주로 이동해서 독립군 전투를 전개하게 되었다. 1919년 3·1운동 후 항일무력투쟁이 만주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 1920년까지 군사활동이 가장 활발했는데, 만포진 공격 및 두만강 연안에서의 유격전, 그리고 청산리전투는 일본군과 대항한 독립군에게 혁혁한 승리를 안겨준 전투였다. 1920년 만주의 독립단체 총 수는 22개, 무장군인은 약 2,000명이나 되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 일제의 세력이 만주에까지 미치자 독립군은 근거지를 잃게 되어 시베리아 등지로 이동하기도 하고 일부는 상해로 모여들어 상해 임시정부에 가담함으로써, 이전의 외교투쟁노선을 지양하고 무력항일투쟁으로 서서히 그 성격을 변화시켜 갔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정부는 중국 대륙에 침공한 일제를 몰아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따라서 임시정부에 대한 협조태도가 크게 향상되었다. 그리하여 1940년 9월 17일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이 정식으로 창설되었다. 광복군은 창설 초 중국 정부와의 협정으로 중국군사위원회의 지휘·감독을 받도록 되어 있었으나, 임시정부의 요청으로 1944년 8월 28일 독자적인 지위를 갖게 되었다. 광복군의 당면문제는 병력 증강을 위한 초모활동과 첩보공작이었다. 1943년 6월에는 한영군의 합작 교섭이 성립되어 영국군에 파견됨으로써 버마 전선에서 영국군을 도와 전단 작성과 포로 심문 등을 담당하였다. 또한, 광복군은 국제 정세의 변화에 대처하여 미국과의 제휴로 본국 상륙작전을 준비하고, 나아가서는 한반도에 연합 진공하기 위하여 1945년 5월 한미합작 특수훈련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예상보다 빠른 항복으로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광복군은 제2차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일원으로서의 승인을 받지 못하였고, 또한 항복한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킬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었기에 미소 양군에 의해 국토가 분단되고 말았다. [대한민국과 전쟁] ① 6·25전쟁: 1943년 11월 미국·영국·중국의 3거두(巨頭)는 카이로회담에서 공동선언을 통하여 “한국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해방시키며 독립시킬 것을 결의한다.”는 이른바 카이로선언을 하였고, 이 결의는 1945년 7월의 포츠담선언에서 재확인됨으로써 한국의 독립은 기정 사실화되었다. 일본이 항복하자 미군과 소련군은 한반도 주둔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목적으로 38도선을 경계로 남북한에 각각 진주하였다. 그 뒤 한반도문제를 두고 1945년 12월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5년간 한국신탁통치안을 결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한국민은 맹렬한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한국문제가 반탁운동으로 난국에 부딪치자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두 차례에 걸쳐 미소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그러나 소련측이 찬탁을 주장하는 단체들만으로 정부를 수립할 것을 고집하여 모든 정치단체의 참여를 주장한 미국측의 주장과 엇갈림으로써 이 회의는 결렬되었다. 미국은 1947년 9월에 한국 독립문제를 유엔에 제출하였다. 미국은 유엔 감시하에 총선거를 실시하고, 그 결과 정부가 수립되면 미·소 양군은 철퇴할 것이며, 이러한 모든 절차를 감시 및 협의하기 위해 유엔한국위원단을 설치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 안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절대 다수로 유엔총회를 통과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하였다. 이에 대하여 유엔은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선거에 의한 독립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이 국내외에 선포되었다. 이때 북한과 소련은 외군 철수·통일정부 수립 등 선전적인 구호로 미군의 철수를 주장하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방해하는 한편, 김일성(金日成)을 내세워 소련의 괴뢰정권을 만들고 각종 군사 원조를 제공하여 20여 만의 중무장한 10여 개 전투사단을 편성하였다. 그리고 대한민국 내의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적 취약점을 이용하여 제주도폭동사건과 여수·순천사건 등 교란작전을 폈으나 실패하자, 무력으로 남한 적화를 달성하겠다는 야욕으로 겉으로는 평화공세를 펴면서 남침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1949년 6월 주한 미군이 철수한 데 이어 1950년 1월 애치슨(Acheson, D. G.) 미 국무장관이 “한국은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제외된다.”는 등 미국의 일관성 없는 대한정책에 고무되어, 마침내는 소련과 중공의 지원 아래 1950년 6월 25일 새벽, 일제히 38도선 전역에 걸쳐 불법적인 남침을 시작하였다. 불의의 기습을 받은 한국군은 빈약한 무기로 맞서 싸웠으나 병력과 장비의 열세로 작전상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이러한 북한 공산군의 불법 남침에 대하여 유엔은 6월 25일 오후 2시에 안전보장이사회를 열고 공산군의 즉각 철퇴를 결의하였으며, 그 달 27일 재개된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다시 공산군의 남침은 불법이며 평화를 파괴하는 침략행위라고 규정하고 한국에 대한 지원을 결의하였다. 동시에 유엔군을 파견하여 북한 공산집단의 침공을 격퇴시키게 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필리핀 등 16개 우방국이 유엔의 이름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이러는 동안 한국군과 미국군은 북한의 남진을 막지 못하고 7월 말에는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9월 15일 새벽 유엔군 및 한국 해병대가 맥아더(MacArthur, D.) 장군의 진두 지휘로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로 진격해서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였다. 인천 상륙과 동시에 낙동강 방위선의 한국군 및 유엔군도 9월 16일을 기하여 총공세를 취한 결과 10월 1일에는 38도선을 돌파하여 북진을 계속, 10월 3일 북한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였고, 동해안 쪽의 한국군 제3사단은 10월 10일 원산을 점령했으며, 수도사단은 10월 17일 흥남, 24일에는 청진을 점령하였다. 한편, 서부 전선에서는 한국군 제6사단의 일부 병력이 10월 26일 초산을 점령했으며, 서해안으로 진격하고 있던 유엔군은 신의주 남방 16㎞까지 진출하였다. 인민군이 거의 붕괴상태에 이르자 약 30만의 중공군이 10월 중순에 한국 전선에 불법 개입하였다. 이로 인하여 전세는 또 다시 역전되어 한국군과 유엔군은 부득이 철수를 하다가 오산-제천-담양-삼척을 잇는 선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부대를 재편성하여 반격작전에 대비하였다. 1월 25일부터 유엔군의 반격작전이 시작되어 3월 18일에는 서울을 다시 탈환했으며, 3월 24일 맥아더 장군은 38도선의 재돌파를 명령하여 북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4월 11일 트루먼(Truman, H. S.)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을 그가 행한 현지 정전협상의 요청성명 등을 이유로 유엔군 총사령관과 기타 모든 직위에서 해임시키고, 후임으로 미국 제8군 사령관이던 리지웨이(Ridgway, M. B.) 장군을 임명하였다. 유엔군은 화력과 기동력의 우세를 활용하여 중공군의 공세를 좌절시키는 동시에 막대한 인적 손실을 입힘으로써 전선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사태의 변화를 주시해오던 소련은 중공군 재건을 위하여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유엔 주재 소련 대사 말리크(Malik, Y.)에게 1951년 6월 23일 휴전회담을 제의하도록 하였다. 7월 10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된 뒤에도 전투행위는 회담과는 별도로 계속되었지만 전선은 별다른 변동이 없었다. 그런데 3월 5일 소련의 스탈린(Stalin, J. V.)이 사망한 뒤, 4월 6일 장기간 휴회한 회담이 재개되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조인, 3년 1개월에 걸친 동족상잔의 참극은 일단 휴전으로 멈추게 되었다. ② 한국군의 월남(베트남)파병: 1964년 7월 15일 월남(지금의 베트남) 정부의 지원 요청에 의해 최초로 그 해 9월 1개 의무중대와 소수의 태권도교관단 파견을 시작으로 1965년에는 건설지원단을 정식으로 파견함으로써 월남공화국의 대공투쟁을 지원하게 되었다. 그 뒤 한국은 해상 수송 지원을 위한 해군 수송전대, 건설지원단 자체 경비부대, 의무증원부대 등을 계속 파월시켰다. 1965년 6월 25일 월남 정부에서 한국군의 전투부대 파월을 정식 요청하자 1개 사단 규모의 전투부대를 10월에 파월하기로 결정하였다. 파월부대가 월남의 퀴논에 도착한 것은 10월 22일로 퀴논 부근의 전략지역에 위치하여 퀴논을 확보하고 책임지역 내의 19번 도로를 확보함과 동시에 다른 부대와 협조하여 전술지역 확장 준비를 하였다. 파월된 전투부대는 수도사단과 해병 제2여단이었다. 1966년 2월 정부는 다시 월남 정부로부터 전투 병력 증파에 관한 간곡한 요청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전투 병력을 증파하는 데 대한 국내외 정세, 특히 우리의 안전보장문제를 중심으로 신중히 검토하여 국무회의 의결과 국회 의결을 거쳐 1개 연대를 포함한 1개 전투사단을 증파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들 부대는 9월과 10월 사이에 3진으로 나누어 월남에 상륙하여 작전지역에 투입되었다. 이로써 파월된 한국군 부대는 육군 맹호사단·백마사단·건설지원단, 해병 청룡부대, 해군 백구부대, 공군 은마부대 등으로 총병력은 4만 8000명이었다. 이들은 파월된 뒤 대부대 작전 1,171회, 소부대 작전 5만 7636회의 많은 작전과 대민 지원을 수행하여 월남을 평정하는 데 기여하였다. 1971년 1월 11일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 기자회견에서 월남군의 전투력이 빠른 속도로 증강되고 있기 때문에 주월 한국군의 감축문제를 검토중이며, 그 시기는 월남 정부와 미국을 비롯한 참전연합국과 충분히 협의한 후 결정하겠다고 발표하였다. 4월 23일 제5차 월남참전국 외상회담에서 주월 한국군의 1개 사단 감축을 결정하고 해병 제2여단을 포함한 1만 명의 제1단계 철수를 1971년 12월부터 1972년 4월까지 완료하였다. 1973년 1월 23일 닉슨(Nixon, R. M.) 미국 대통령과 티우 월남 대통령이 월남휴전일을 1973년 1월 28일 08:00시부로 실시한다는 발표를 하자, 주월 한국군을 철수하는 일에 박차를 가하여 3월 23일 완전히 철수함으로써 총 3만 6856명의 주월 한국군 철수작전을 성공리에 끝냈다. 만 7년 5개월간의 월남 파병에는 군사상, 국제관계에서 여러 가지 의의가 있었다. ① 정치적 관점에서는 대공투쟁과 집단 안전보장체제를 강화하고 국민의 단결과 해외 진출을 촉진할 수 있었으며, 반공의식이 높아지고 국제적 지위 향상에 기여하였다. ② 군사적 관점에서는 미군의 계속 주둔과 한국 방위 보장의 확보, 국방력 강화, 특히 연인원 32만여 명의 전투 경험자 획득은 우리의 국방력 강화에 크게 이바지하는 요인이 되었다. ③ 경제적 관점에서는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달성하는 데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월남전 참전의 성과는 4,800여 명의 인명 희생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자료 사진) 1953년 7월27일 판문점에서 유엔군 대표 윌리엄 해리슨 중장(왼쪽 테이블)과 남일 북한인민군 대표(오른쪽 테이블)가 정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다. (출처 : 세계일보) ================================================       한국전쟁의 정전협정(1953. 7. 27)   한국전쟁의 정전협정은 1953년 7월 27일 조인된 정전협정의 정식 명칭은 <유엔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이다.   영문으로는 <Agreement between the Commander-in-Chief, United Nations Command, on the one hand, and the Supreme Commander of the Korean People’s Army and the Commander of the Chinese People’s volunteers, on the other hand, concerning a military armistice in Korea>다. 이를 줄여서 정전협정이라 부른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정전협정보다는 휴전협정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쓴다.   휴전과 정전은 대체로 혼용되지만 엄밀히는 일정한 차이가 있다.   정전(停戰)은 <전투 행위를 완전히 멈추는 것>이며 교전 당사국들이 정치적 합의를 이룰 수 없어 전투 행위만 정지하는 것을 뜻한다.   교전 당사국 사이에 이견이 크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국제기관이 개입하는 경우 정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반면 휴전(休戰)은 <적대 행위는 일시적으로 정지되나 전쟁은 계속되는 상태>를 의미하며 일반적으로 전쟁의 종료를 선언하는 강화조약(혹은 평화조약)의 전 단계다. 국제법상 휴전은 여전히 전쟁상태를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한국전쟁이 중단되면서 체결된 협정은 정전협정이라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정전협정에 정치적 합의 내용이 없으며 유엔이 협정의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정전협정을 반대했기 때문에 정전협정을 <제한된 휴전>의 의미로 보면서 국제법 위반 없이 전쟁을 다시 시작할 수 있기를 바라며 <휴전협정>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분석했다. 즉, <정전협정>보다 <휴전협정>이 더 호전적인 표현이라는 것이다.   정전(停戰,truce) 또는 정화(停火,ceasefire)는 일반적으로 한정된 기간이나 한정된 장소에서 적대 행위나 폭력을 일시적으로 중단하는 것을 말한다. 정전은 휴전 협정 체결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휴전 협정은 잠정 협정(modus vivenbi)이기 때문해, 합의나 비준에 수개월 또는 수년이 걸리는 평화 조약과는 차이가 있다. 양측의 군대가 정전한 뒤, 잠정 협정인 휴전 협정이 이어져 전투의 종료가 합의되고 그 후에 서로의 지위를 정하는 평화 조약까지 연결되면 전쟁은 정식으로 종결된다.   그러나 반드시 이 순서대로 전쟁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1953년 7월 27일 한국 전쟁의 정전 협정은, 휴전 협정 체결이 평화 조약까지 이어지지 않은 대표적인 예이다.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창립 이래, 세계 각지의 분쟁 당사국에 대해서 자주 정전 결의를 부과하거나 또는 부과하려고 해 왔다. 그러나 휴전 협정은 당사자들끼리 스스로 교섭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제사회에서는 준수 의무가 없는 유엔의 정전 결의보다 휴전협정의 구속력이 더 높다고 생각되고 있다.       [출처] 남북의 엇갈린 '7월 27일' … '정전협정체결일' vs '전승절'|작성자 평화문제연구소    
449    [노래말과 악보]- 고향의 봄 댓글:  조회:7569  추천:0  2016-07-05
====================================================================== "동요 '고향의 봄' 最古 악보, 이일래 작곡" 이부근의 동요 '고향' (창원=연합뉴스) ㈔고향의 봄 기념사업회가 1일 아동문학가 이원수의 시 '고향의 봄'에 곡을 붙인 가장 오래된 악보로 소개한 작곡가 이부근의 '고향 악보. 1929년 5월 통영에서 발간된 동인지 '노래동산' 창간호에 실린 이 악보는 '산토끼'의 작사 작곡가로 알려진 이일래의 작품이라고 기념사업회는 설명했다. 2011.6.1   (창원=연합뉴스) 황봉규 기자 = 아동문학가 이원수의 동시 '고향의 봄'에 곡을 붙인 가장 오래된 악보의 작곡자가 밝혀졌다.    경남 창원에 소재한 ㈔고향의 봄 기념사업회(회장 김일태)는 1929년 5월 통영에서 발간된 동인지 '노래동산' 창간호에 실린 작곡가 이부근의 '고향' 악보는 동요 '산토끼'의 작사ㆍ작곡가로 알려진 이일래의 작품이라고 1일 밝혔다.    1929년 10월 홍난파(본명 홍영후)가 작곡해 일반에게 잘 알려진 고향의 봄 동요에 비해 5개월 이상 빠른 이 악보는 현존하는 '고향의 봄' 동요 중 가장 오래됐다. 이일래의 동요 '고향' (창원=연합뉴스) ㈔고향의 봄 기념사업회가 1일 아동문학가 이원수의 시 '고향의 봄'에 곡을 붙인 작곡가 이일래의 동요 '고향'이 1938년에 발간된 조선동요작곡집에 실렸다. 2011.6.1      기념사업회는 당초 이 악보는 제3의 인물이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일래의 본명이 최근 이부근으로 확인되면서 이 같은 사실을 밝혀냈다고 설명했다.    실제 이일래의 호적부와 그의 장녀 명주씨의 가족관계증명서에는 부친 이름이 이일래가 아닌 이부근이라 표기돼 있다고 기념사업회는 설명했다.    이로써 동요 '고향'은 이원수 작시ㆍ이일래 작곡으로 표기한 '조선동요작곡집'의 발간 연도인 1938년보다 본명인 이부근으로 표기한 악보의 창작연도가 훨씬 앞서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창녕 이방초등학교 이일래 흉상 (창원=연합뉴스) 경남 창녕군 이방초등학교에 설치된 동요 '산토끼'의 작사 작곡가 이일래 선생의 흉상. 이일래 선생은 이부근이라는 본명으로 이원수의 시 '고향의 봄'에 곡을 붙인 악보를 1929년 5월 통영에서 발간된 동인지 '노래동산' 창간호에 실었다. 2011.6.1      명주씨는 "아버지는 이원수 선생이 쓴 고향의 봄이 좋아서 곡을 붙여 당시 마산의신학교 교사로 있던 박업순에게 선물했고, 이 곡을 받고 감동해 1년의 연애끝에 1927년 12월 결혼했다. 이로써 '고향'은 1926년에 작곡된 셈"이라고 기념사업회측에 밝혀 홍난파 곡보다 3년 정도 빠르다고 주장했다.    기념사업회측은 이원수 작가가 1980년에 발표한 '소년-흘러가는 세월속에'라는 글에는 '동요 고향은 이일래라는 분의 작곡으로 마산 사립학교에서 많이 불리기 시작했다. 뒤에 '산토끼'라는 동요도 그 분이 작사 작곡했고 2, 3년 후에 홍난파 선생도 '고향의 봄'을 지어 전국적으로 퍼지게 됐다'는 내용이 있다고 전했다.    기념사업회 관계자는 "이원수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은 올해 이일래 선생의 오래된 악보가 발견돼 의미가 크다"며 "홍난파ㆍ이일래 선생의 정확한 작곡시기에 대해 추가 고증이 필요하겠지만 앞으로 고향의 봄이 민족의 노래로 더 많이 불려지길 바란다"고 밝혔다.    한편 음악연구가 김연갑 한민족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가 최근 언론을 통해 4년 전 서울 인사동 경매장에서 입수한 노래동산 창간호를 공개하자 작곡가 이부근과 이일래의 관계, 가장 오래된 고향의 봄 악보 여부 등을 놓고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 [아시아경제 성정은 기자]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글이 됐다. 그리고 얼마 뒤 이 글은 노래가 됐다. 아동문학가 이원수가 쓴 노랫말에 작곡가 홍난파가 곡을 붙여 발표한 '고향의 봄' 얘기다. 이 동요가 실린 '조선동요 100곡집'의 악보 인쇄 원판이 21일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된다. 서울 덕수궁 중명전에서 이날부터 11월4일까지 열리는 '근대의 거울, 등록문화재 전(展)'에서다. 태어난 곳은 양산이지만 1년도 채 안지나 창원으로 집을 옮긴 이원수. 그가 15살 때 창원의 성문 밖 개울, 꽃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 등을 그리며 쓴 '고향의 봄'은 그렇게 사람들에게 그리움을 전할 모양이다. 문화재청(청장 김찬)은 근ㆍ현대 시기의 유물인 등록문화재를 전시하는 '근대의 거울, 등록문화재 展'을 21일부터 서울 덕수궁 중명전에서 연다고 이날 밝혔다. 근대문화유산 가운데 보존 가치가 큰 것을 골라 지정하는 등록문화재를 이렇게 한 자리에 모아 전시회를 여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 전시회는 문화재청 50주년과 등록문화재 제도 시행 10주년을 맞아 마련됐다. '근대의 거울, 등록문화재 展'을 찾은 사람이라면 중명전 2층 전시회장 오른쪽 안쪽에 자리한 '홍난파 동요 악보 원판'만은 놓치지 말아야 할 듯 싶다. 지난 17일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뒤 첫 선을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향의 봄'과 '낮에 나온 반달', '하모니카', '퐁당퐁당' 등의 악보 인쇄 원판은 그 크기는 작지만 조용한 울림을 준다. 악보 원판이 있는 곳에서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벽에 헤드폰 하나가 걸려 있는 게 눈에 띈다. 헤드폰을 쓰면 인쇄 원판에 있는 곡이 노래가 돼 흘러나온다. 이번 전시회를 기획한 김종헌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장은 "현재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문화재는 모두 476건이며, 그 가운데 동산 문화재는 102건에 달한다"며 "이런 등록문화재를 동떨어진 과거로만 보기보다는 지금의 삶과 연결시켜 우리가 여기서 무얼 배울 수 있는 지를 고민하는 자리를 만들려고 이번 전시회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근대의 거울, 등록문화재 展'에선 '홍난파 동요 악보 원판' 외에 지난 2월 등록문화재가 된 김소월의 시집 '진달래꽃', 광복전후기 우체통, 분쉬의 외과도구, 빅타레코드 금속원판, 벽걸이형 자동식 전화기 등도 만나볼 수 있다. 진품은 아니지만 백범 김구 인장, 안익태 대한국애국가 자필 악보,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등의 복제품도 이번 전시회에서 꼭 챙겨봐야 할 문화재들이다. 성정은 기자  =============================================== 먼저 이원수 선생(1911~1981)이다. 선생은 경남 양산 출신이지만 1년도 못되어 창원으로 이사를 왔다. 마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26년 동요 ‘고향의 봄’의 작사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로 시작되는 고향의 봄은 한국인의 정서가 스며있는 대표동요다. 이 노래를 마산공립보통학교를 다니던 1925년 즉 그의 나이 15세 때 ‘어린이’라는 아동 잡지 4월호에 발표한다.   어린이라는 말은 방정환 선생이 처음 사용하셨고, 선생이 주축이 되어 발간되던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 잡지가 ‘어린이’다. 3·1운동을 주도하고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 선생이 방 선생의 장인이다. 사람이 곧 하늘이고, 어린 생명도 역시 사람이니 어린이라는 단어의 탄생에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원수 선생은 1980년 월간 소년 ‘흘러가는 세월 속에’라는 글에 고향의 봄 창작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마산은 바다와 산이 아름다운 곳이다. 그러나 마산에 비해서는 작고 초라한 창원의 성문 밖 개울이며 서당 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 그런 것들이 그립고 거기서 놀던 때가 한없이 즐거웠던 것 같았다. 그래서 쓴 동요가 고향의 봄이었다. 나는 그 동요를 그때 애독하던 방정환 선생의 잡지 ‘어린이’에 투고해서 1926년 4월호에 발표되어 은메달을 상으로 받았다. 이 동요는 이일래 선생이 작곡하여 마산의 사립학교에서 많이 부르게 되고. 2~3년 후 홍난파 선생도 고향의 봄을 지어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다.”   고향의 봄   나의 살던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화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 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의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오빠 생각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고향의 봄’ 이원수 선생과 ‘오빠생각’ 최순애 님은 부부다. ‘어린이’ 잡지에 응모되어 실린 동시로 당시 12살이었다. 이 인연으로 두 분은 편지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리고 십년의 세월이 흐른 후 두 사람은 극적으로 만나게 된다. 당시 이 선생은 옥고를 치르던 중이었다. 마침내 두 사람은 백년가약을 맺어 부부가 되고 백년해로를 한다.   ===============================   오빠생각 - 이선희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448    [노래말과 악보]- 반달 댓글:  조회:7061  추천:0  2016-07-05
========================================================================== 윤극영 작사 작곡..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요 '반달'       푸른하늘 은하수 하얀쪽배에... 너무도 익숙하게 알고 부르는 동요 '반달'의 시작부분입니다. 이 동요가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요라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에 윤극영 선생께서 작사, 작곡하신 동요라니 자세히 찾아 리포스팅 합니다.         반달   윤극영 작사, 작곡     푸른하늘 은하수 하얀쪽배엔 계수나무 한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나라로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나라로 구름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 멀리선 반짝반짝 비치이는건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윤극영의 ‘반달’ 90주년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나라로   구름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   멀리서 반짝반짝 비치이는 건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 한국 동요(童謠)의 선구자인 윤극영(1903∼1988)의 대표작 ‘반달’ 제2절 가사다. 발표 당시의 ‘푸른 하늘 은하 물’이 나중에 ‘푸른 하늘 은하수’로 바뀐 제1절 가사가 더 서정적이긴 해도, 그 의미로는 2절이 가슴에 더 큰 울림을 준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망망대해에 비유되는 세상을 쪽배처럼 떠다니는 삶이 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해주는 희망의 불빛인 등대’를 노래하기 때문이리라.   ‘까치 까치 설날은 오늘이고요’ 하고 시작하는 ‘설날’ 등과 함께 윤극영이 작사·작곡한 한국 최초의 창작 동요 ‘반달’은 소파(小波) 방정환이 발행하던 잡지 ‘어린이’를 통해 1924년 발표됐다.   일제 강점기에 조국이 처한 현실의 슬픔을 읊은 것으로도 해석하지만, 그는 1962년 잡지 ‘사상계’에 연재한 회고록에서 ‘시집간 맏누이 부고(訃告)를 접하고 처연한 마음으로 만들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윤극영을 ‘반달 할아버지’로 불리게 하며 남녀노소와 시대를 뛰어넘어 애송돼온 ‘반달’은 1979년 중국의 음악 교과서에까지 ‘하얀 쪽배’ 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반달’은 윤극영이 ‘고드름’ ‘꾀꼬리’ ‘꼬부랑 할머니’ ‘흐르는 시내’ ‘소금쟁이’ ‘귀뚜라미’ ‘가을 서곡’ 등 10곡을 담아 1926년 한국 최초로 펴낸 동요집 제목이기도 하다.   지금은 제목이 ‘따오기’로 바뀐 동요 ‘당옥이’(한정동 작사, 윤극영 작곡)도 담겼다. 이밖에도 그는 윤석중의 동시에 곡을 붙인 ‘기찻길 옆 오막살이’ ‘나란히 나란히’ 등 일일이 다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국민 동요’를 남겼다.   윤극영이 1977년부터 타계할 때까지 살았던 서울 강북구 인수봉로의 한옥을 서울시가 ‘미래유산 보전사업 대상 제1호’로 지정.복원해 ‘반달’ 발표 90주년을 맞아 지난 27일부터 시민에게 개방하고 있다.   그의 체취가 밴 다양한 유품도 전시중이다. 빼어난 동요는 나이와 상관없이 영혼이 맑아지는 느낌을 갖게 한다.   입버릇처럼 “모두 동심으로 살면 사회가 밝아진다”고 말했던 윤극영의 발자취와 동요를 통해 한때나마 티없는 동심(童心)으로 돌아가는 기회를 제공하는 문화 공간이 참으로 반갑다.   /// 김종호        윤극영의 반달 노래를 회상하면서   이제 내 내이 만 65세에 접어들고 목회의 사역을 마치게 되다 보니 지나온 세월의 무상함이 자꾸만 떠올라 하루라도 글을 안 쓰면 견딜 수가 없다.   오늘 예언의 신 100페이지를 읽고 난 뒤에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니 반달의 노래를 지은 윤극영 선생에 대하여 생각이 난다.   이 반달의 노래는 내 나이 정도가 된 사람들에게는 마음 속 깊이 새겨진 노래이다. 모를 자가 없다. 어떠한 노래이길래 우리들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을까?   나는 얼만 전에 외부 인사로부터 간곡한 요청을 들은 바가 있다. 목사님 이 나라에 사람들의 마음속에 민족혼과 나라 사랑에 대한 정신을 불어넣는 창작의 일을 계속 하여 달라는 주문이었다.   남의 요청에서가 아니라 내가 늘 하고 싶은 일이니까 나의 생애 끝날 때까지 독립운동사의 족적을 파헤쳐 후대에 사람들의 마음에 영롱히 새겨질 수많은 교훈들을 정리하여 나갈 참이다.   오늘은 추석날이고 하여 동심으로 돌아가 나의 글을 보는 몇 분과 함께 반달의 노래와 윤극영 씨에 대하여 알 수 있는 데까지 살펴보기를 바란다.   윤 씨의 출생은 1903.09.06이고 사망 일시는 1988.11.15로 되어 있다. 서울 종로구 소격동에서 출생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그의 생애에 대한 간단한 프로필로는 세칭 ‘반달 할아버지’라 되어 있다. 경성보통고등학교를 거쳐 경성법학 전문대학교를 중퇴, 도쿄음악대학, 동양음악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하였으며, 성악가 사와자키 사다유키와 후나바시 에이키치에게 사사를 받았다.   1923년 ‘색동회’ 창립 동인이며, 1924년 동요단체 ‘다알리아회’를 조직하여 어린이 문화운동과 동요 창작 작곡 운동을 전개했다 간도에서 교편 생활을 하고 하얼빈에서 예술 활동을 하다가 귀국했다.   1987년 어린이 심성의 계발 순화를 위해 동화, 동요, 그림, 연극 등의 활동을 추진한 동심문화원을 설립했다. 1924년 반달, 설날, 까치까치 설날, 할미꽃, 고기잡기, 꾀꼬리 등의 창작 동요를 발표하면서 본격적 작품활동을 하였고 고드름, 따오기 등의 동요에 곡을 붙여 동요의 보급에 힘썼다.   점층 수법 그의 작품 반달은 국권 상실의 암울한 시대에 민족의 운명과 결코 좌절하지 않는 미래지향적 희망이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1956년 제1회 소파상을 수상했고, 1970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저서로는 동요작곡집으로 1926년 다알리아회에서 『반달』, 1963년 세광출판사에서 『윤극영 111곡집』 등을 간행했다.   윤극영 씨에 대한 좀 더 상세한 내용으로는 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한 후(1917),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 학교 전신)를 졸업하였다(1920).   그 후 아버지의 권유로 경성법전에 들어갔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중퇴하고, 일본의 ‘도쿄음악학교’로 유학을 가서 작곡과 성악을 공부하였다. 도쿄 유학 시절에 홍난파, 방정환 등을 만나 교우하고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았다.   소파 방정환을 만나 우리 민족 어린이들이 일본 노래만 불러 장래가 어둡고 불쌍하다는 말을 듣고 민족 어린이들을 위해 일할 것을 다짐하였다. 1923년 5월 1일 방정환을 중심으로 를 조직하고 ‘어린이’(‘작은이’보다 어린이가 좋다고 판단)라는 용어를 정식 사용하고 어린이날을 제정하였다. (색동회 발기인 : 방정환, 윤극영, 진장섭, 조재호, 손진태, 정병기, 정순철) 1923년 9월 1일 일본 도쿄에서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당시 한국인에 대한 학살이 확산되자 귀국하였다. 부친의 도움으로 자택에 ‘일성당(一聲堂)'이라는 음악공부방을 만들어 음악 공부를 계속하면서 어린이들을 모아 음악을 가르쳤다.   이들을 모아 ‘다알리아회(합창단)'를 조직하여(1924. 8) 음악을 확산시켰다. 1924년 어린이들이 설날에 일본 음악을 듣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을 작사 작곡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동요라 할 수 있는 을 작사 작곡하여(1924. 9) 확산시킨 결과 큰 호응을 받아 빠른 속도로 국내는 물론 만주, 일본에까지 전파되었다. 한국 노래를 탄압하던 일본인도 이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윤석중이 지은 에 곡을 붙였다. 다알리아회에서 라는 아동 창가극을 공연하여(1925. 3) 크게 성공하여 여러 곳에서 초청하여 공연을 하였다. 에 의한 동요창작과 작곡으로 초창기 아동문학운동에 기여했다.     1925년 간도로 넘어가 동흥중학에서 교사 활동을 처음 시작하였다(1926). 거기에서도 작곡 활동은 계속하여 윤석중이 지은 동시 에 곡을 붙였다. 는 직접 작사 작곡하였다. 광명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 활동을 오래하였다. 1935년에 서울로 돌아와 잠시 있다가, 1936년에 다시 동경으로 건너가 생활하였다. 우연히 신문에서 노래가 일본 방송국에서 애창되고 있음을 알고 도쿄중앙방송국을 찾아가 처음으로 저작료를 받아 생활하였다. 레코드사의 도움으로 무랑루주에서 가수 겸 제작자 역할을 하여 사업으로 크게 성공하였다.   다시 만주 간도를 거쳐 하얼빈으로 가서 평소 희망하던 러시아인들을 고용하여 하얼빌 예술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되어 일본인의 강요로 오족협화회에 들어가 탄압을 받다가, 일본 패전 후 다시 공산당의 탄압을 받아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귀국하였다(1946). 1947년에 노래동무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를 작곡하였다. 동시와 동요를 계속 창작하고 희곡 등에도 관심을 가져 문학 활동도 활발히 하였다.   제1회 소파상 수상(1956), ‘고마우신 선생님’으로 추대되었다(1963). 를 부활시켜(1969) 제4대 회장을 역임하였고(1973~74),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상하였다(1976). 이상과 꿈속에서 정치적 혼란기에 유랑과 방랑의 생활을 많이 하였으면서도, 조국을 잃은 어린이들의 꿈을 위해 끊임없이 동요 동시를 창작하여 어린이 문화 활동에 평생을 바쳤다.   윤극영 씨에 대하여 년대별 그의 활동에 대한 구분으로는 교동보통학교(校洞普通學校)를 졸업한 뒤 1917년 경성 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1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음악학교(東京音樂 學校)·도요음악학교(東洋音樂學校) 등에서 성악과 바이올린을 전공하였다.1923년 색동회 창립동인이었으며, 조선가사를 붙인 찬송가곡이나 일본노래뿐인 시대에 동요창작을 시도하였다.   1923년 7월 서울에서 개최된 ‘전조선소년지도자대회’에 참가하여, 〈동요에 대한 실재론〉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1924년 서울로 돌아와 동요단체 ‘다리아회’를 조직하였다. 어린이문화운동과 동요창작·작곡 운동을 전개하였고, 1926년 1월 피아니스트 오인경과 만주 용정(龍井)에 가서 동흥중학교·광명중학교·광명 고등여학교 음악교원으로 교편생활을 하였으며, 이후 10년간 〈제비 남매〉·〈우산 셋이 나란히〉· 〈고기잡이〉·〈외나무다리〉·〈담 모퉁이〉 등을 작곡하였다.   1936년 가을 서울로 돌아와 음악활동을 하였으며, 그해 일본으로 가서 1937년 극장가수로 취직하며 예술단 창립을 연구하였다. 1940년 서울·간도를 거쳐 중국 하얼빈예술단을 창립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41년 용정에서 역마차업을 하다가 간도성협화회(間島省協和會) 회장(1941∼1945.8.)으로 활동하면서 친일로 기울어져 괴뢰만주국에 적극 협력하기도 하였다. 하얼빈에서 예술활동을 하다가 1946년 용정에서 경비대에 붙잡혀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보석되어, 1947년 톈진(天津)에서 손수레를 끌다가 남한으로 탈출하였다.   윤 씨는 1924년 〈반달〉을 비롯하여 〈설날〉·〈까치까치 설날〉·〈할미꽃〉·〈고기잡이〉·〈꾀꼬리〉· 〈옥토끼노래〉 등의 창작동요를 발표하고,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하면서 〈고드름〉·〈따오기〉 등의 동요에 곡을 붙여 동요보급운동을 전개하였다. 점층수법에 의한 동요창작과 작곡을 통하여 초창기 아동문학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1950년대 초 북경(北京)에서 조선족 김정평과 그의 아버지 김철남이〈반달〉을 중국어로 번역 편곡, 레코드로 취입하여 30년간 애송되다가 1979년 〈하얀쪽배〉(小白船)라는 제목으로 중국전국통용 음악교과서에 수록 되었다. 1956년 제1회 소파상을 수상하였고, 1963년 서울교육대학 제정 ‘고마우신 선생님’에 추대되었으며, 1970년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1987년 어린이의 심성계발과 순화를 목적으로 동화·동요·그림·연극 등의 활동을 조직적으로 추진하는 단체인 동심문화원(童心文化院)을 설립, 운영하였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로 시작되는 그의 대표적인 동요 〈반달〉은 맏누님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쪽배’는 우리 민족의 운명을, ‘토끼’는 우리나라를, ‘샛별’과 ‘등대’는 희망을 빗대어 상징한 미래지향 적인 민족동요로 해석되었으나, 근래에 이르러서는 당시 그의 친일활동을 감안한 결과 창작동기가 애국애족 정신에 있다기보다는 개인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우리는 이상의 기록들을 대하면서 윤극영 씨가 어떠한 생활을 살아왔는지를 보게 한다. 친일이란 단어와 괴뢰만주를 도왔다는 말도 언급되어 있다. 나라 잃은 조국을 위하여 평생을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하여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친 분이 엉뚱하게 취급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후세의 사람들이 인물들을 마구 난도질를 하여 악평을 한 인상을 갖게 한다. 친일이나 괴뢰정부 동조라는 표현들은 문학하는 이들이 비교적 강인함이 없는 육체를 지닌 고로 몇 번 죽음에 대한 공갈과 협박과 회유에는 감당할 자신들이 없이 저들의 술책에 잠시 이용을 당할 수밖에 없던 상황에서 생겨난 것들이다. 윤 씨의 삶 자체가 비단 방석에서 안락한 생활을 누린 것이 아니다. 형도 받으면서 고초를 겪은 분이셨다.   그가 지은 반달 노래가 우리 마음에 어떠한 정서로 다가오는지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우리들 마음에 나라를 잃은 외로움을 민족적 경지에서 읊은 것으로 마음에 다가온다. 나의 생애 끝날 때까지 앞으로도 이 노래를 얼마나 더 많이 부를지 모르겠다.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나 일제의 압박과 신음 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애환의 의미를 담고 있는 노래들로는 울밑에 선 봉선화, 성불사의 밤, 고향생각, 옛 동산에 올라, 사공의 노래와 함께 반달 노래는 민족과 독립군들의 가슴을 울렁이게 하였으며, 동요들을 통한 민족 감정과 민족정신과 정서를 배양 고취하였던 고로 일제는 이에 당황하여 동요 금지령을 내려 우리의 음악을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반달 노래의 가사는 울적할 때에 늘 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노래이다. 윤극영 씨가 작곡한 어린이의 동심 속에 오래 동안 각인된 노래 두 곡의 가사를 적으니 각자 음미하여 보기를 바란다.           누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서쪽하늘을 바라보며 '반달'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1절과 달리 2절은 당시 암울했던 우리민족 사람들에게 채근을 하는 듯 하다.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나라로 구름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 멀리선 반짝반짝 비치이는건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小白船(원곡 = 반달)    하얀 쪽배   作詞:尹克榮    作曲:尹克榮    번역:迎春       蓝蓝的天空银河里     푸르디 푸른 하늘 은하 속에는   有只小白船   오로지 하얀 쪽배가 있구나   船上有棵 桂花树   배에는 한 그루의 계수 꽃나무가 있고   白兔在游玩   흰 토끼가 뛰놀고 있구나   桨儿桨儿看不见   노가 노가 보이니 않고   船上也没帆   배에는 돛이 없는데도   飘呀飘呀飘向云天    구름 낀 하늘로 흘러가고 흘러가네   ~~~~~~~~~~~~~~~~~~~~~~~~~~~~~~~~~~~ 渡过那条银河水   저 한 줄기의 은하수를 건너가   走向云彩国    아름다운 구름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는구나   走过那个云彩国   저 아름다운 구름나라를 거쳐서   再向哪儿去?   다시 어디를 향하여 갈 것인가?   在那遥远的地方   저 먼 곳에서   闪着金光   금빛으로 반짝거리고 있는     晨星是灯塔   새벽별이 등대로구나   照呀照得亮   비추고 비추어서 길을 밝혀라    ~~~~~~~~~~~~~~~~~~~~~~~~~~~~~~~~~~~~~~~~~   중국에서 부르는 우리동요 반달, 小白船     중국에서 불리우는 한국의 동요! 그 곡은 다름아닌 샤오바이촨(小白船)으로 우리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반달'이다.  아래에 소개한 영상에서 제목은 원곡과 달라도 누구나 들어보면 곧 바로 알 수 있다.       반달은 윤극영 선생(1893-1988)이 이 곡을 [동아일보]에 발표한 것이 1924년으로  윤극영의 맏 누님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쪽 하늘을 보며 지었다고 한다(1923년 9월9일). 노래의 가사 중 '쪽배'는 우리민족의 운명을, '토끼'는 우리나라를, '샛별'과 '등대'는 희망을 빗대어 상징한 미래지향적인 민족동요로 해석되어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는 애창곡으로 남북이 함께 부르는 몇 안되는 곡중 한 곡이다.                                        윤극영, 그의 동요집 "반달" 그런데 이 곡은 1950년 초 북경에 사는 조선족 김철남이 그의 아들 김정평과 같이 중국어로 번역, 편곡해서 레코드로 취입해 보급해서 30년간 애송되다가   1979년 하얀쪽배 - 小白船 샤오바이촨 이란 제목으로 음악교과서에 수록됐다 한다.    중국의 초등학교 음악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는 관계로  이 곡은 현재 중국에서 가장 보편적인 동요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으며, 소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는 것은 물론이고,  웬만한 동요 디스크에 우리나라의 아리랑같은 [모리화]와 함께 감초처럼 끼는 스테디셀러 곡이다. 이 곡의 가사와 멜로디가 가진 본원적인 서정이 중국인의 심성에 깊은 공감을 산 것으로 보인다   
447    [전통을 지킵시다] - 문상에 관련하여 댓글:  조회:6305  추천:0  2016-06-26
상가 문상절차.문상시기.조문시 옷차림:조문시 인사말       ★문상절차 ① 상가 (빈소)에 도착하면 문밖에서 외투나 모자 등을 미리 벗어 둔다. ② 상주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영정 앞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③ 분향 및 헌화 방법은 향나무를 깎은 나무향일 경우는 오른손으로 향을 집어 향로 위에 놓는데 이 때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바친다. ④ 영좌 앞에 일어서서 잠깐 묵념 또는 두 번 절한다. ⑤ 영좌에서 물러나 상주와 맞절을 한다. 종교에 따라 절을 하지 않는 경우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해도 된다. ⑥ 평소 안면이 있는 경우라면 상주에게 문상 인사말을 건네는데 이때는 낮은 목소리로 짧게 위로의 말을 하되 고인과 관련 된 질문을 많이 하는 것은 좋지 않다. ⑦ 문상이 끝나고 물러나올 때에는 두세 걸음 뒤로 물러난 뒤, 몸을 돌려 나오는 것이 예의이다 ★문상시기 .가까운 친척 친지 가운데서 상을 당했다는 연락이 오면, 가급적 빨리 상가에 가서 상제를 도와 장례준비를 함께 하는 것이 좋다. · 상가에 가면 우선 상제들을 위로하고 장의 절차, 예산 관계 등을 의논한다. · 할 일을 서로 분담하여 책임 있게 수행해 줘야한다. · 내용을 잘 모르면서 여러 가지로 참견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복장을 바르게 하고 영위에 문상 한다. · 상주에게 정중한 태도로 예절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 · 상을 당한 직후에는 문상객을 맞을 준비가 안 되어 있기 때문에 즉시 달려가서 도와주어야 하는 경우가 아닌 사람은 상가에서 성복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 스스럼없는 사이라면 염습이나 입관을 마친 뒤에도 괜찮다. · 현대에는 별로 괘념치 않고 돌아가신 직후 문상 하여도 무방하다 ★색깔이나 모양이 튀지않는 단정한 복장이면 됩니다. 학생이면 교복도 괜찮습니다. (가능하면 청바지는 피하는 것이 좋음) ★조문시 옷차림: ◎ 남자 검정색 양복이 원칙이다. 미처 준비를 하지 못한 경우 감색이나 회색 양복도 무방하다. 와이셔츠는 반드시 흰색으로 하고 넥타이, 양말, 구두는 검정색으로 한다. 사정상 정장을 하지 못하고 평상복일 경우 단정한 복장을 하되 화려한 무늬의 원색 옷차림을 피하고 치장을 삼간다. ◎ 여자 검정색 상의에 검정색 스커트 차림이 가장 무난하다. 구두, 양말(스타킹)도 검정색이 좋다. 평상복일 경우 단색 계통이 무난하며 화려한 의상이나 몸에 꼭 맞는 옷은 삼간다. 화장도 연하게 하고 특히 핑크나 레드 색상의 짙은 입술화장은 좋지 않다. 귀걸이, 목걸이, 반지 등 액세서리도 가능하면 피하거나 눈에 띄지 않도록 한다. ★조문절차: 조문을 가서는 풍습이나 종교가 다르더라도 가급적 해당 상가의 상례에 따르는 것이 예의이며 간혹 망인이 장수하시고 돌아가셨을 때 호상(好喪)이라하여 웃고 떠드는 일이 있으나 이는 옳지 않다. ① 상가(빈소)에 도착하면 문밖에서 외투나 모자 등을 미리 벗어 든다. ② 상제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영정 앞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③ 분향 방법은 ▶향나무를 깎은 나무향일 경우는 오른손으로 향을 집어 향로불 위에 놓는데(넣는데) 이 때 왼손 으로 오른손목을 바친다.(조금씩 세 번 집어서 넣는다) ▶선향(線香.막대향)일 경우 하나나 둘(예전의 깍은 향일 경우 삼상향이었으므로 3개를 피워야한다는 주장도 있음)을 집어 촛불에 불을 붙인 다음 손가락으로 가만히 잡아서 끄던가 왼손으로 가볍게 흔들어 끄고 절대 입으로 불면 안된다. 다음으로 두손으로 공손히 향로에 꽃는데 선향은 하나로 충분하나 여러 개일 경우 반 드시 하나씩 꽂아야 한다. ④ 영좌 앞에 일어서서 잠깐 묵념 후 두 번 절한다. ⑤ 영좌에서 물러나 상제에게 절한다. 이 때 상제도 같이 절한다. 종교에 따라 절을 하지 않는 경우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해도 된다. ⑥ 평소 안면이 있는 경우라면 상제에게 조문 인사말을 건네는데 이 때에는 낮은 목소리로 짧게 위로의 말을 하되 고인과 관련 이것 저것 질문을 하는 것은 좋지 않다. ⑦ 조문이 끝나고 물러나올 때에는 두세 걸음 뒤로 물러난 뒤, 몸을 돌려 나오는 것이 예의 이다. ★ 조문시 인사말: 많은 사람들이 문상을 가서 어떤 인사말을 해야 할 지 머뭇거린다. 문상(問喪)이란 말은 상가에 가서 죽은 이에게 예를 올리고 유족을 위로하는 것으로 요즘에는 조상 (弔喪:죽은 이에게 예를 표함), 조문(弔問:상주에게 인사를 함) 등과 구분없이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문상시에는 고인에게 재배하고 상주에게 절한 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러나와도 된다. 상을 당한 사람을 가장 극진히 위로해야 할 자리이지만 그 어떤 말도 상을 당한 사람에게는 위로가 될 수 없다는 뜻이며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더 깊은 조의를 표하는 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문상을 받는 상주 역시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모범으로 여기며, 더욱이 상주는 죄인이므로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전통적인 관습이다. 그러나 실제 문상의 말은 문상객과 상주의 나이, 평소의 친소 관계등,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건네는 것이 합리적이다. 격식이나 형식을 차린 표현보다 따뜻하고 진지한 위로 한마디를 미리 문상전에 준비하는 것이 좋다. 상주도 ''고맙습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등으로 문상에 대한 감사를 표한다. ★문상 예절  절하는 법 절하기 전 바른자세 - 여자(평절·큰절), 남자(큰절) ※ 남자는 오른손을 위로, 여자는 왼손을 위로 하고 두 번 절한다. 문상할 때 인사말 문상 할 때에는 고인에게 재배하고 상주에게 절한 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러나오는 것이 일반적이며 전통적인 예의이다. 상을 당한 사람을 가장 극진히 위로해야 할 자리이지만 그 어떤 말도 상을 당한 사람에게는 위로가 될 수 없다는 뜻이며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더 깊은 조의를 표하는 것이다.  문상시 삼가야 할 일 · 유가족을 붙잡고 계속해서 말을 시키는 것은 실례가 된다. (장의 진행에 불편을 주고 유족에게 정신적 피로감을 주기 때문이다.) ·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하고 조문이 끝난 뒤 밖에서 따로 이야기 하도록 한다. (반가운 친구나 친지를 만나더라도 큰소리로 이름을 부르지 말아야 한다.) · 고인의 사망 원인, 경위 등을 유족에게 상세하게 묻는 것 또한 실례가 된다. 국내 최고의 상조회사가 아니라 고객 최고의 상조회사를 목표로 하는 국민상조 입니다. 오늘은 대부분은 머리로만 알고 구체적으로는 잘 모르시는 문상예절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기본적인 문상예절을 제대로 알지 못하여 망신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대부분 문상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는 분들이 많다보니 특히 젊은 분들은 문상예절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곧 문상을 갈 일이 많으니 기본적인 문상예절을 숙지하셔야 합니다. 문상이란 원래 고인에게 예를 표하는 弔喪(조상)과 상주에게 예를 표하는 弔問(조문)의 두가지 뜻이 있으나 최근에는 죽은 사람에게 예를 올리고 유족을 위로하는 뜻으로 둘을 구분하지 않고 問喪(문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 옷차림 - 검정이나 흰색 등 화려하지 않은 색의 정장으로 착용하고 번쩍거리는 액세서리는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 여자의 경우 절을 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넓고 긴 치마가 적합하며 들고 있는 물건이나 가방이 있는 경우에는 구석의 한 곳에 두고 문상을 끝낸 후에 들고 빈소를 나가도록 합니다. ◎ 문상요령 - 외투는 바깥에서 벗어 들며, 빈소에 도착하면 먼저 상주에게 목례를 한 다음 분향을 하거나 헌화를 하고 재배(두 번 큰절) 후 반 배를 합니다. - 일행이 여럿인 경우 대표 한 사람이 분향이나 헌화를 하고 함께 재배(두 번 큰절)후 반배를 합니다. - 향은 촛불이나 성냥 등으로 붙이고 왼손으로 가볍게 흔들어 끄거나 손가락으로 가만히 잡아서 끕니다. - 상주에게 평절로 맞절을 하고 반배를 한 다음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아무말도 하지 않는 것이 옳으나 간단한 위로의 말을 전하는 것이 좋습니다) - 맞절을 대신해 선 자세의 반배로 대처하는 것도 많은 문상을 받는 상주를 도와주는 작은 배려이기도 합니다 - 고인의 병세나 상세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는 것은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 다음으로 부의금이나 부의물품을 전달하고 방명록을 작성합니다(봉투에는 賻儀(부의), 謹弔(근조), 弔儀(조의), 奠儀(전의)등으로 씁니다. - 접대장소에서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음식을 먹거나 유족들을 도와주는 것도 좋습니다. - 접대장소에서는 큰소리로 떠들거나 지나친 음주는 삼가는 것이 좋으며 호상이라며 웃거나 노래하는 일은 삼가야 합니다. - 종교가 같은 경우나 상주가 양해를 할 경우 종교적인 의례를 행하기도 하나, 타인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행하고 다른 사람에게 권하거나 강요하지 않도록 주의합니다. ◎ 인사말 - 상제의 부모상일 경우 [상사에 얼마나 애통하십니까],  [근자에 환중 이시라는 소식을 듣고도 찾아뵙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그토록 효성을 다하셨는데 춘추가 높으셔서 회춘을 못하시고 일을 당하셔서 더욱 애통합니다] 등 짧게 말합니다. - 상제의 아내상일 경우 [위로의 말씀이 없습니다], [옛말에 고분지통이라 했는데 얼마나 섭섭하십니까] - 상제의 남편인 경우 [상사에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옛말에 천붕지통이라 했는데 슬픔이 크시겠습니다]  叩盆之痛(고분지통) - 아내의 죽음을 물동이를 두드리며 슬퍼했다는 장자의 고사 天崩之痛(천붕지통) -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아픔, 남편이 죽은 슬픔을 이르는 말 割半之痛(할반지통) -몸의 절반을 베어내는 아픔, 형제자매가 죽은 슬픔을 이르는 말  - 상제의 형제상일 경우 [伯氏(백씨)상을 당하셔서 얼마나 비감하십니까], [할반지통이 오죽하시겠습니까] 伯氏(백씨) - 남의 맏형을 높이는 말 仲氏(중씨) - 남의 둘째형을 높이는 말 季氏(계씨) - 남의 사내 아우에 대한 높임말 - 상제의 자녀가 죽었을 때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 불가피한 사정으로 문상을 가지 못할 경우 片志(편지)나 弔電(조전)을 보냅니다.  - 부고를 냈는데도 오지 않거나 조전조차 보내오지 않은 사람과는 평생 동안 말도 않고 대면도 하지 않는 것이 예전의 풍습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민상조와 함께 알아본 상례정보 오늘은 문상예절 편이었습니다. 올바른 문상예절을 알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성복      절차가 끝나면 상주는 부모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게 된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상주 구실을 해야 하므로 좌단 우단의 소복도 벗고 정식으로 상복을 갖추어 입는다. 이처럼 상주를 포함한 산 자들이 망자와의 가족 관계에 따라 정식으로 상복을 입는 것을 '성복'이라 한다.   즉 운명한지 나흘째 되는 날에 한다. 상례 절차 중 성복 절차는 특히 복잡하고 까다롭다. '망자와의 혈연 관계에 따라 누가 어떠한 상복을 얼마 동안 입는가(복제도)' 하는 것이 자세하게 정해져 있는데 그 내용이 여간 복잡하지 않아서, 한때는 당쟁 거리가 될 정도로 상례의 중요 문제로 인식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문헌에 오복 제도가 처음 나타난 것은 이지만 널리 알려지고 일반이 시행하기는 성종 16년 이후부터이다.   효건과 상관을 쓰고 그 위에 수질을 매고, 깃겹바지 저고리에 깃두루마기를 입고, 중단과 제복을 입은 위에 요질을 매고, 짚신을 신고 행전을 친다. 여자는 최상을 입고 질을 하고 관을 쓰며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게 된다. 성복을 하고 나서야 처음 제사를 올리는데 이를 '성복제'라 한다. 성복제는 상주 이하 상인이 각자 복제에 따라 상복을 입는 의식을 말한다. 또한, 성복이 끝나면 아침 저녁으로 전을 차린다. 이는 고인을 생전 때와 같이 모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상복의 종류     상복제도는 '오복제도'라 하여 참최, 재최, 대공, 소공, 시마의 5등급으로 나누어 상복기간을 정했다. 이러한 근거는 계절의 순환에 따른 자연법칙에서 찾을 수 있다. 즉, 3개월만에 한 계절이 변화해 이것이 시마이고, 6개월만에 다시 한 계절이 변화하니 양수를 취해서 5월이 소공이고, 9개월만에 다시 계절이 변화되어 대공이고, 4계가 한번 변하는 것이 재최 1년이고, 다시 변화한 것이 3년복 참최(벨듯 거친 상옷)인 것이다.   오복 중 첫째는 참최 3년이니,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입는 복인데 적손이 그 아버지가 안 계실 때 조부나 증조 고조를 위해서 승중하는 자와 또 아버지가 적자를 위해 입는 복도 마찬가지이다. 둘째는 재최 3년으로 아들이 어머니를 위해서 입는 복이다. 셋째, 대공 9월은 종형제와 종자매를 위한 복이다. 이미 시집간 손녀와 적자가 있을 때 장손을 위해서도 같다. 넷째, 소공 5월은 종조부와 종조모, 형제의 손자, 종형제의 아들, 재종형제를 위해서 입는 복이다. 외조부모와 외숙, 생질에게도 같다. 다섯째, 시마 3월은 종증조부, 종증조모, 증조의 형제나 자매, 형제의 증손과 증조부, 증조모를 위해서 입는다.   * 상복 = 소복 = 흰색? 상복을 흔히 소복이라고도 하는데 이 소복이 흔히 흰옷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래서 소복 하면 곧 흰옷으로 통할 정도이다. 그러나 실제 상복에는 주로 삼베가 쓰인다. 삼베의 색깔은 황색 계통이다. 따라서 상복은 소복, 소복은 흰옷 곧 상복은 흰옷이라고 단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소복은 상복의 색깔 및 꾸밈 상태를 두고 일컫는 말이다. 곧 옷감에 물감을 별도로 들이지 않은 소색(素色)의 옷 또는 장식이나 무늬를 넣어서 모양을 내지 않은 상태의 소박한 옷을 뜻한다. 상복은 옷감에 별도로 색을 내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색을 취한다. 자연히 거친 삼베를 상복의 감으로 쓰는 경우 상복은 으레 어두운 황색의 옷이 되기 마련이다. 무명을 감으로 하여 만든 상복의 경우에만 흰옷이 상복이 되는 것이다.   * 상주가 짚는 지팡이(상장) 상주가 지팡이를 짚는 것은 부모상을 당하여 슬픔으로 쇠잔한 몸을 부축하기 위한 것이고, 또한 상주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아버지를 잃은 경우에는 대나무 지팡이(죽장)를, 어머니를 잃은 경우에는 오동나무 지팡이(삭장:깎아 만든 지팡이)를 짚는데, 이는 상주와 죽은 이의 관계를 쉽게 알리는 구실을 한다.   오동(梧桐)...! 이 말뜻을 풀이하기에 앞서 우리는 집안에 초상이났을 때, 상주가 짚는 지팡이가 경우에 따라 다른 유래를 먼저 알아보아야 한다. 상(喪)을 당해본 장년의 세대나 대개의 남자들은, 상주가 짚는 지팡이가 어떻게 달리 쓰여지는지를 구분할줄 알지만 여자들이나 젊은 세대의 경우 그렇지 못한 바도 더러 있다. 답을 먼저 말하자면ㅡ 대나무 지팡이와 오동나무 지팡이를 쓰는 두가지의 경우가 있다. 할아버지나 아버지처럼 망자(亡者)가 남자인 때에 (이를 외간상:外艱喪이라한다)는 대나무를 쓰고, 망자가 여자인 경우(內艱喪)에는 오동나무를 쓴다. (흔히들 버드나무를 쓰는것으로 알고 있지만 틀리다) 그렇다면 왜 喪에따라 짚는 지팡이가 다르며 그것은 어떤 연유에서일까 ? 禮記 問喪篇 16 에 보면'아버지를 위해서는 죽장(竹杖)을 쓰는데, 그것의 둥근것은 하늘에서 본 받은 것이다'라고 적혀있다. 건(乾)은 하늘이요 아버지며, 萬古에 푸른빛의 이미지로서 청정한 기백으로서의 의미부합이 대나무가 맞다면, 어머니의 삶으로서 오동나무를 지칭한 까닭은 무엇일까? 왜 하필 오동나무를 여인네의 삶에 비유했을까? 그 애절한 사연을 알아보자. 감·밤·사과·복숭아등 여느 다른 유실수의 열매는 꽃이 피었다가 진 꽃받침에 열매가 맺음으로서 탐스럽고 올차며 보기에도 좋다. 그런데 오동나무의 열매는 입술 모양으로 핀 꽃잎에 ㅡ그것을 식물용어로서 순형화판(脣型花瓣)이라 한다ㅡ 사마귀가 열러붙듯 대여섯개가 연다. 열매는 곧 자식이요, 나무의 자식인 열매가 어디에 붙었느냐? 오동의 자식[열매]이 입술끝에 열렸다는것은, 궁핍한 살림살이에 엄마가 먹을 끼니마저 자식들에게 빼앗겨 먹이는 희생과 인고의 삶을 유감(類感)시킨 것으로서 하필이면 오동나무인 것이다. 그리하여 장차 커서 어미가 될 딸자식이 태어났을때, 그 딸자식의 삶이 어쩔수 없는 오동나무처럼의 숙명적 운명을 안고 태어났으므로 딸 둔 아비는, 집안의 뜰에 벽오동나무 한 그루를 심는다. 훗날 딸자식이 장성하여 시집보낼때, 뜰에 심은 벽오동나무를 켜서 장롱을 만들어 보냈던 것이다. 그 벽오동은 살림밑천으로서의 재목이요, 참고 살아가는 부덕(婦德)을 교시(敎示)한 나무요, 이를 거역하지 않고 따라 배워 산 ㅡ 무언의 웅변으로서의 벽오동이었으니 그 엄마, 그 할머니가 돌아가셨으매 어찌 오동나무 지팡이를 짚지 않았으리. 초상때 지팡이를 짚는것은, 그 지팡이가 단순한 물건으로서 지팡이가 아니다. 망자의 시신(屍身)으로서의 지팡이이다. 우리아버지가, 우리엄마가.... 날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 그 얼마나 땅 딩굴며 울고 싶지 않으리....? 그럼에도 차마 시신을 붙안고 울지는 못하고... 대쪽같던 아버지이셨기, 오동나무처럼 살다가신 엄마이셨기... 대나무로 지팡이 만들어 "아부지!"....하고 울고, 오동나무 장롱을 부숴서 그 각목 하나를 우리엄마로 생각하고 붙안고 몸부림치며 슬픔을 달래는 도구이다. 오동나무에서도 굳이 벽오동인것은 푸를벽(碧)이라는 글자에서 클라이막스를 이룬다. 푸를碧자의 푸른것은 《흰빛이 스르르 감도는 푸른빛》을 말한다. 옥돌에서 그와같은 색감을 맛볼 수 있다. - 그래서 벽옥(碧玉)이라 하지 않던가. 흰 빛이 스르르 감도는 푸름 ...! 아버지가 대쪽같은 짙은 푸름이라면, 엄마는 맑고 청초하고 고결한 푸름이니, 색상의 은근한 차이에서 마저 조화롭다. 유별난 영감밑에서 조용히 살아가셨기 푸름에서 조차도 우리 엄마들께서는.... 오동나무 지팡이 ㅡ 그것은 가련하고 슬프다 못해 가슴 찢어질, 애절한 여인네의 살아온 역사로서의 벽오동이니, 이제 『 벽오동 심은 뜻 』을 헤아려서 우리 엄마의... 그 엄마의 엄마의, 한(恨)과 희생으로 점철된 숭고한 삶의 역정(歷程)에 진정으로 고개숙여 묵도를 보내야 한다. 지금, 우리 모두 엄마를 생각하자...!
446    [꼭 알아야 합니다]- 조문(弔問)할때 인사말 모음 댓글:  조회:4769  추천:0  2016-06-26
조문(弔問)시 인사말      ① 상제의 부모인 경우 :  "상사에 얼마나 애통하십니까", "친환(親患)으로 그토록 초민(焦悶)하시더니, 이렇게 상을 당하시어 얼마나 망극하십니까" "환중(患中)이시라는 소식을 듣고도 찾아 뵈옵지 못하여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토록 효성을 다하셨는데도 춘추가 높으셔서 인지 회춘을 못하시고 일을 당하셔서 더욱 애통하시겠습니다." "망극한 일을 당하셔서 어떻게 말씀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 망극(罔極)이란 말은 부모상(父母喪)에만 쓰입니다. 조객; 상사 말씀 무어라 드릴 말씀 없습니다.      상사를 당하시어 얼마나 망극하십니까.      상주께 인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상주; 인사말을 받지 않고 그냥 고개를 숙여도 된다.      망극합니다.      망극하기 한이 없습니다. 조객; 대고를 당하시어 얼마나 망극하시옵니까. 상주; 망극하기 한이 없습니다. 조객; 병환이 침중(沈重)하시더니 상사까지 당하시어 얼마나 망극하십니까. 상주; 망극하기 한이 없습니다. 조객; 돌연히 상사를 당하시어 얼마나 망극하옵니까. 상주; 시탕(侍湯) 한 번 제대로 효성있게 해 드리지 못해 불효한 죄 크옵니다.      또는, 시탕 한 번 못드려 더욱 망극합니다. 조객; 항상 객지에서 나가 있다가 상사를 당하시어 더욱 망극하시겠습니다. 상주; 일에 쪼들려 모시지 못한 게 한이더니 또, 이런 불효를 저질렀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② 상제의 아내인 경우 :  "위로할 말씀이 없습니다", "옛말에 고분지통(叩盆之痛)이라 했는데 얼마나 섭섭하십니까" *고분지통(叩盆之痛; 鼓盆之痛) : 아내가 죽었을 때 물동이를 두드리며 슬퍼했다는 장자(莊子)의 고사에서 나온 말입니다. 조객; 상주께 인사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상주; 상봉하솔(上奉下率)에 앞이 캄캄합니다.       또는 상봉하솔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조객; 상후(喪后) 무엇이라 여쭐 말씀 없습니다.      영부인(令夫人) 상을 당하시어 얼마나 비도(悲悼)하십니까. 상주; 무엇이라 여쭐 수 없습니다.      장차 앞 일을 생각함에 오직 한탄만 나올 뿐입니다. 조객; 얼마나 섭섭하십니까. 상주; 신세가 한탄스럽습니다. 또는 신세 한탄 간절합니다. ③ 상제의 남편인 경우 :  "상사에 어떻게 말씀 여쭐지 모르겠습니다"  "천붕지통(天崩之痛)에 슬픔이 오죽하십니까."  "하늘이 무너진다는 말씀이 있는데, 얼마나 애통하십니까." *천붕지통(天崩之痛) :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아픔이라는 뜻으로 "남편이 죽은 슬픔"을 이르는 말. 조객; 상사에 여쭐(드릴) 말이 없습니다. 상주; 꿈결만 같고 살아 나갈 일이 걱정입니다. 조객; 천붕지통(天崩之痛)이 오죽 하겠습니까. 상주; 제가 박복하여 아까운 장부가 요수(夭壽)한 것이 한이 되옵니다. ④ 상제의 형제인 경우 :  "백씨(伯氏) 상을 당하셔서 얼마나 비감하십니까"  "할반지통(割半之痛)이 오죽하시겠습니까" *할반지통(割半之痛) : 몸의 절반을 베어내는 아픔이란 뜻으로 그 "형제자매가 죽은 슬픔"을 이르는 말입니다.  *백씨(伯氏) : 남의 맏형의 높임말.  *중씨(仲氏) : 남의 둘째 형의 높임말.  *계씨(季氏) : 남의 사내 아우에 대한 높임말. 조객; 참척을 보시니 얼마나 비감하십니까. 상주; 가운이 불길하여 이런 꼴을 당하니 비참할 따름이옵니다. 조객;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상주; 잊으려 해도 자꾸 기억이 되살아 납니다. 조객; 중씨의 상을 당하여 얼마나 애통(또는 비통)하십니까. 상주; 부모님께 득죄(得罪)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조객; 복제(服制) 말씀 무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상주; 올릴 말씀 없습니다. 상주; 참으로 비통한 말씀 어떻다고 드릴 말씀 없습니다(형의 상에 대답시)       참으로 이런 일이 어디있습니까(동생의 상에 대답시)       이렇게 될 줄을 꿈엔들 생각했겠습니까(동생의 상에 대답시) ⑤ 자녀가 죽었을 때 그 부모에게 :  "얼마나 상심하십니까"  "참척(慘慽)을 보셔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십니까"  "참경(慘景)을 당하시어 얼마나 비통하십니까" *참척(慘慽) : 자손이 부모나 조부모에 앞서 죽은 일을 뜻함.  *참경(慘景) : 끔찍하고 참혹한 광경을 뜻하는 말. 조객; 얼마나 상심이 되십니까. 상주; 인사 받기가 부끄럽습니다. 조객; 얼마나 마음 아프시겠습니까. 상주; 잊자 해도 자꾸 머리에 떠오르는군요.  조객; 참척(慘戚)을 보시니 오죽이나 비감하십니까. 상주; 가문이 불길하여 이런 일을 당하니 비참할 따름입니다. 조객; 천만 꿈 밖에 참척을 당하시어 얼마나 비통하십니까.       이런 참변이 어디 있습니까. 얼마나 비통하십니까. 상주; 모두 죄가 많아 그렇습니다.       가운이 불행한 탓입니다.   ◈ 기타 인사말 (예시) 조객이 먼저 빈소에 곡 재배(哭再拜) 한다.  상주에게 절을 하고 꿇어 앉아 정중한 말씨로 예를 표한다. 조객 : 상사 말씀 무슨 말씀 여쭈오리까.  상주 : 모두 저의 죄가 많은 탓인가 봅니다. 조객 : 대고를 당하시니 얼마나 애통하십니까.  상주 : 원로에 이토록 수고하여 주시니 송구하옵니다. 조객 : 병환이 침중하시더니 상사까지 당하시니 오죽 망극하오리까.  상주 : 망극하기 그지 없습니다. 조객: 소상 혹은 대상을 당하시어 얼마나 망극하옵니까. 상주: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조문 시 주의점  ◎ 유족을 붙잡고 계속해서 말을 시키는 것은 실례가 된다.       이유는 장의 진행에 불편을 주고 유족에게 정신적 피로감을 주기 때문이다. ◎ 반가운 친구나 친지를 만나더라도 큰소리로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하도록 하고 조문이 끝난 뒤 밖에서 따로 이야기 하도록 한다. ◎ 고인의 사망 원인, 경위 등을 유족에게 상세하게 묻는 것은 실례가 되니 주의한다. ◎ 자기가 집안 풍습이나 신봉하는 종교가 다르더라도 조상을 갔을 경우 해당 상가의 가풍에 따라 주는 것이 좋다. ◎ 망인이 연만(年晩)하여 돌아가셨을 때 일반에서는 호상(好喪)이라 하여 웃고 떠드는 일이 있지만, 호상이란 있을 수 없기에, 웃고 떠드는 일은 삼가 하도록 한다.  
445    중국 4대 추녀, 4대 재녀 댓글:  조회:4619  추천:0  2016-06-21
4대 추녀(醜女) 1. 모무(嫫母) : 원고시대 황제(黃帝)의 아내로서 외모가 아주 추한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모무는 덕행과 지혜로써 당시 여성들의 모범으로 꼽혔으며 최종 황제를 도와 염제를 격파했다고 한다. 2. 종이춘(鐘離春): 전국시기 제나라 무염현의 제1추녀, "무염녀"로 불린다. 종이춘은 사리가 밝고 대의를 깊이 알아 제선왕을 직접 만나 그의 부패성을 지적한 것으로 제선왕의 왕후로 되었다. 3. 맹광(孟光): 동한시기 현사 양홍의 아내로서 중국 고대 "賢婦"의 대명사로 불린다. 맹광은 피부가 검고 얼굴이 추하게 생겼지만 남편을 깍듯이 모셨으며 가정의 힘든 일을 맡아 했다. "거안제미(擧案齊眉, 부부가 서로 존경하다, 즉 맹광이 남편에게 밥상을 올릴때 눈높이까지 받쳐 들었다)"라는 이야기도 여기에서 전해진 것이다. 4. 완녀(阮女): 삼국시기 위나라 허윤의 아내이다. 못생긴 외모때문에 결혼 첫날밤 신랑을 놀래워 도망가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완녀는 예쁜 품행과 높은 견식으로 남편을 정복했으며 두 사람은 행복하게 평생을 보냈다고 한다. 4대 재녀(才女) 1. 탁문군(卓文君): 한조시기의 재녀이며 외모가 아름답고 거문고를 잘 다뤘다. 남편이 죽은후 수많은 재벌들이 그에게 청혼했지만 탁문군은 결국 빈곤한 선비 사마상여와 재혼했다. 사마상여는 탁문군 뒤로 천하에 이름을 널리 날렸다. 2. 채문희(蔡文姬): 문학가, 서법가인 채읍의 딸이었기에 어릴적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기억력으로 400여편의 문장을 정확하게 외워 쓸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3. 이청조(李淸照): 남송시기 걸출한 여문학가이며 시문을 잘 지어 유명하다. 태학생 조명성과 결혼해 함께 금석서화를 연구했으며 남편이 세상뜬 후 이청조는 홀로 항주일대에서 외롭게 만년을 보냈다. 4. 반초(班昭): 박식하고 품덕이 고상한 중국 고대여성으로서 사학가, 문학가, 정치가이다. 일찍 오라버니 반고와 함께 "한서"를 수정한적이 있다.  
444    중국 고대 4대 미녀 댓글:  조회:7228  추천:0  2016-06-21
중국고대 4대 미녀    1. 춘추전국시대 월나라 서시. 2. 한나라 시대 서원 원제 궁녀 왕소군. 3 삼국시대의 초선. 4. 당나라 양귀비.   1 춘추 전국시대 월나라 서시. 침어     나무장수 딸로 태어난 서시는 복숭아꽃처럼 아름다워서 강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으면 강물에 비친 그녀의 자태에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도 잊고 강바닥에 가라않았다고 해서 '침어'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그녀를 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그걸 이용 돈을 내고 볼 수 있도록 입장료까지 만들었답니다.    서시는 심장병 있어 가슴 통증으로 얼굴 찡그리는 버릇이 있는데 그마저 너무 아름다워 여자들이 그것조차 따라 했답니다.  서시는 중국 역사 최초 스파이 미인계의 원조  월나라의 왕 구천이 오나라의 왕 부차에게 패하자 충신 범려가 보복하기 위해 서시에게 3년간 예능을 가르쳐 부차에게 바쳤는데   부차는 서시의 미모에 사로잡혀 정사를 돌보지 않는 틈을 이용 월나라 구천은 오나라 침략에 성공했습니다. 서시는 구천의 후궁이 되어 총애를 받지만 훗날 구천의 정실에게 제거 당하는 불운을 맞게 됩니다.   2. 한나라의 왕소군 - 낙안 집을 떠나는 도중 왕소군은 멀리서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고 고향생각에 수금을 연주했는데 그 소리를 들은 기러기 왕소군의 미모에 날개 움직이는 것을 잊고 땅으로 떨어져서   왕소군에게 낙안이라는 칭호가 생기게 되었답니다.      당시 황제는 수천명 후궁을 직접 볼수 없어 초상화를 보고 간택했는데 궁중의 화공은 가난한 왕소군에게 뇌물을 못받아서 실물을 추하게 그렸습니다 그댓가로 5년동안 황제에게 관심을 못 받고 오랑캐인 흉노족 첩으로 가게 되고 정략결혼 희생자가 되어 왕소군은 흉노족 호한야 사이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왕소군은 흉노에 한나라의 다양한 문화를 전하고 전쟁도발을 막아 태평성대를 이루며  50년동안 정국을 지헤롭게 통치한 중국역사에 남는 여성으로 평가합니다.   또한 황제는 훗날 왕소군의 미모를 뒤늦게 알고 화공을 처형하고 왕소군에 대한 아쉬움에 몹시 후회하고 괴로워 했답니다.   3. 삼국시대의 초선 - 폐월   초선은 중국 역사 기록에 없는 가상 인물 삼국지 등 고전작품에 많이 등장하는 미녀   초선은 한나라의 대신 왕윤의 수양딸로 용모가 빼어나고 노래와 춤에  능통 화원에서 달을 보고 있는데 구름 한조각이 달을 가리자 왕윤이 말하기를 '너의 미모에 부끄러워 달이 구름 뒤로 숨었다' 하여 폐월이라 불렸답니다.    간신 동탁의 양아들이자 용맹한 장수 여포 사이를 이간 둘은 서로에 대한 의심을 키워 원수가 되게 만들고 미인계를 이용   여포는 양부 동탁을 죽이고 스스로 군주가 되었습니다. 그후 나라를 망하게 할 정도로 대단한 미녀 '경성지모' '경국지색'이란 고사가 생겼답니다.           양귀비 묘에 전시된 중국 4대 미녀상. 서시·왕소군·초선·양귀비     4. 당나라의 양귀비 - 수화     양귀비가 살았던 중국황제 별장 당화청궁에 걸린 그림 4대 미녀 양귀비의 이름은 양옥환 당현종에게 간택 입궁 당현종은 꽃 마저 부끄럽게 하는 아름다운 미모라며 그녀를 '절세가인'이라 칭했답니다.   양귀비는 가무에 능하고 17세에 당현종 18번째 아들 수왕 비로 간택 되었는데 아들의 여자를 빼앗아 태진궁에 들이고 후궁으로 맞았습니다.    풍만하고 요염한 양귀비는 현종의 사랑을 독점하려고  매일 새로운 화장법을 개발했으며 현종은 양귀비를  자신의 말을 이해하는 꽃 해어화라고 불렀답니다.    당 현종은 양귀비에게 푹 빠져 사치를 일삼고 그녀 친인척을 고관에 발탁 권력을 주고 안녹산의 난이 터지면서 양귀비는 피난도중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아름다워서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중국 고대의 4대 미녀들입니다.  ================================================ ◆ 1) 춘추전국시대의 서시 (西施) 침어(浸魚) -서시(西施)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잊어먹다 " 서시는 춘추말기의 월나라의 여인이다. 어느 날 그녀는 강변에 있었는데 맑고 투명한 강물이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 을 비추었다. 수중의 물고기가 수영하는 것을 잊고 천천히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래서 서시는 침어(浸魚)라는 칭호 를 얻게 되었다. 서시는 오(吳)나라 부차(夫差)에게 패한 월왕 구천(勾踐)의 충신 범려(範려)가 보복을 위해 그녀에게 예능을 가르쳐서 호색가인 오왕 부차(夫差)에게 바쳤다. 부차는 서시의 미모에 사로잡혀 정치를 돌보지 않게 되어 마침내 월나라에 패망하였다   ◆ 2) 한나라의 왕소군 (王昭君) 낙안(落雁) -왕소군(王昭君) "기러기가 날개움직이는 것을 잃고 땅으로 떨어지다 " 한(漢)나라 왕소군은 재주와 용모를 갖춘 미인이다. 한나라 원제는 북쪽의 흉노과 화친을 위해 왕소군을 선발하여 선우와 결혼을 하게 하였다. 집을 떠나가는 도중 그녀는 멀리서 날아가고 있는 기러기를 보고 고향생각이나 금(琴)을 연주하자 한 무리의 기러기가 그 소리를 듣고 날개 움직이는 것을 잊고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에 왕소군은 낙안(落雁)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 3) 삼국시대의 초선(貂蟬) 폐월(閉月) -초선(貂蟬) "달이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다 " 초선은 삼국지의 초기에 나오는 인물로 한나라 대신 왕윤(王允) 의 양녀인데, 용모가 명월 같았을 뿐 아니라 노래와 춤에 능했다. 어느 날 저녁에 화원에서 달을 보고 있을 때에 구름 한 조각이 달을 가리웠다. 왕윤이 말하기를 : "달도 내 딸에 게는 비할 수가 없구나. 달이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었다." 고 하였다. 이 때 부터 초선은 폐월(閉月)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초선은 왕윤의 뜻을 따라 간신 동탁과 여포를 이간질 시키며 동탁을 죽게 만든후 의로운 목숨을 거둔다   ◆ 4) 당나라의 양귀비(楊貴妃) 수화(羞花) -양귀비(楊貴妃) "꽃이 부끄러워 잎을 말아올림" 당대(唐代)의 미녀 양옥환(楊玉環)은 당명황(唐明皇)에게 간택되어져 입궁한 후로 하루 종일 우울했다. 어느 날 그녀가 화원에 가서 꽃을 감상하며 우울함을 달래는데 무의식중에 함수화(含羞花)를 건드렸다. 함수화는 바로 잎을 말아 올렸다. 당명황이 그녀의 ' 꽃을 부끄럽게 하는 아름다움' 에 찬탄하고는 그녀를 '절대가인(絶對佳人)'이라고 칭했다 원본보기 원본보기 원본보기 원본보기  
창작기지인 '시인의 집' 현판식 한장면 조선족시인들은 시를 담론하고 시를 쓰고 소재를 얻기 위해 봄나들이로 두만강을 찾았고 여름나들이로 진달래촌을 찾았다. 6월 15일, 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주임 김영건)에서는 화룡시 서성진 진달래촌에서 '시인의 집' 현판식과 함께 제29회 '두만강여울소리' 시탐구회를 개최했다.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겸 시가창작위원회 김영건주임은  "우리도 당당하게 창작기자를 가지고 창작에 몰두할수 있게 되였다. 창작기지가 없어 글을 쓰지 못하는것은 아니지만 시인들에게 보다 낳은 환경, 시를 론하고 시를 쓸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어 시다운 시들, 탐구적인 시들, 세상의 속세인간들을 정신적으로 이끌어줄수 있는 시들을 창작해낼뿐만아니라 톡톡 튀는 아이디어에 시적인언어를 가미하여 가사도 쓰고 촬영작품에 배시도 달고 광고문을 시적으로 쓰는 등 여러면으로 끼를 발산해야 한다 "고 말했다.   창작기지인 '시인의 집' 설립 목적과 의의에 대해 설명하고있는 김영건주임 제29회 '두만강여울소리'시탐구회에서 20여수의 시를 선보였다. 시인들은 저마다 시를 읊조리면서 나름대로 시에 대해, 시단에 대해, 시인의 자세에 대해 담론했다. 연변대학 우상렬교수(대독)는 20여수의 시에 대해 장단점을 렬거하고나서  "시는 너무 투명하면 재미가 슬하며 복합문으로 되면 리해하기 어렵고 호흡이 아름차다."며 "시의 상징성과 서정성, 그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거나 홀시해서도 안된다. 그것이 아무리 현대시, 전통시라 할지라도 상징성과 서정성의 균형을 잃으면 좋은 시라 할수 없다."고 말했다.   이날 시인들은 류연산문학비, 김치공장, 진달래민속공연식당, 민속박물관 등 우리의 문화와 전통이 살아숨쉬는 진달래촌 구석구석을 둘러보았으며 오후에는 연길시 조선족구연단의 공연을 관람했다.  이번 행사는 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 연변장백문화발전추진회에서 주최하고 연변화상항균업유한회사(사장 라동도)의 후원으로 펼쳐졌다. 조글로미디어 문야기자     ///////////////////////////////////////////////////////////////////////// 김영택동시집  《겨울동화》가 최근 연변대학출판사에 의해 출판되였다. 일흔 하고도 다섯에 책을 펴냈고 그것도 동심으로 돌아가 동시집을 펴낸다는게 말처럼 쉬운 일만은 아니다. 그는 머리말에서 "동시쓰기에 재미를 느껴 매일이다싶이 동시습작을 했는데 이때면 저도 모르게 동심으로 되돌아가 마음이 맑아지는것 같다"면서 손자와 손녀를 슬하에 두고 그 애들을 생각하며 동시를 써내려갈 때면 할아버지라는 생각에 앞서 이 세상의 어린이들과 친구가 된 느낌이여서 너무 행복하다고 말한다. 《겨울동화》는 7개 장절로 나뉘였고 총 100여편의 동시가 수록되였다. 제1부 "유모차", 제2부 "책가방", 제3부 "모아산 샘물", 제4부 "개똥벌레",제5부 "할머니 장터", 제6부 "우리 말 우리 글", 제 7부는 "꽃다리"이다. 연변작가협회 최동일부주석은 시인 김영택과 그의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김영택시인은 가장 소박한 언어로 가장 간단하게 가장 하고싶은 말을 할줄 아는 시인이다. 그의 동시는 미사려구가 아닌, 큰 도리가 아닌, 눈 오는 날 할아버지의 무릎을 베고누워 듣는 귀맛 당기는 이야기와 같아서 겨울날의 차거움을 녹여주는 마음이 따스해지는 동화로 된는것이다.  저자 김영택은 연변대학 중문학부를 졸업, 연변일보사 편집기자, 연변주당위 선전부 처장, 연변tv방송국 부국장, 연변화술연구회 회장 등을 력임한바있으며 저서로는 론문집《TV예술탐구》, 가사전집《신토불이 우리 가락》, 산문집《미래를 안은 사람들》, 시집《석양노을》, 부부문집《책의 향기》 등이 있다. 조글로미디어 문야기자 ///////////////////////////////////// 도옥 김영건의 4번째 시집인  《물결이 구겨지고 펴지는 리유》가 최근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출간되였다.  시집 《물결이 구겨지고 펴지는 리유》에는 총 130여편의 시가 수록되였고 4개 장절로 나뉘었다. 제1부는  "구색아리랑", 제2부 "나무와 물의 대화", 제3부 "몽접의 호수", 제4부 "바다와 륙지의 잠언", 제5부 "세상은 안개숲이다"이다. 우상렬평론가는 그의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김영건의 시는 이미지로 말한다. 군더더기가 없이 깔끔하다. 어쩌면 랭철하기도 하다. 때론 민족적인 형태로, 때론 몽환의 세계로, 때론 거창한 바다와 육지의 잠언으로 우주의 메아리를 듣게 하고 심연 깊이 각인된 기억의 산발들로 우리 령혼 가둬들이며 세상은 안개숲이라는 명제에 도달한다. 엄청난 몸부림을 잠재운 깨달음의 역설적경지에서 마주하는 영혼의 불꽃, 그속에서 만나는 생명의 아우성과 거대한 우주의 힘은 존재의 본질을 파고들어 우주속 우리의 존재를 재확인토록 한다. 시인은 사유공간의 획을 넓혀 과감히 전통과 현대를 초월하되 잘 갈무리하여 그만의 유수한 개성적인 충돌의 미학, 칼과 옥이 어울리듯 양강(陽剛)의 미와 음유(陰柔)의 조화롭고도 아름다운 우주적 시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한영남시인은 저자 김경건과 그의 시에 대해 "백두산정에 올라 인간세태를 굽어보며 우주애적인 세계관으로 민족정서를 녹여내고있다. 김시인에게 있어 민족정서는 기석이요 인간세태는 대들보이며 우주애는 지붕 격으로 되고있다. 저자는 사나이적(호탕)이고 거창(호협)하며 인간적(호인)이다."고 평가하고나서 "김시인은 시들에서 우리 민족상을 그려보이면서 오늘날 날로 색바래지는 우리 민족의 모습들을 안타까워하고 그것을 전승하고 발전시켜가야 한다고 호소하고있다."고 전했다. 저자 김영건에 대해 알아보자. 연변대학 졸업하고 한국 연세대학, 중앙대영상대학원을 수료한 저자는 선후로 연변TV드라마부 편집, 문예부 프로듀서, 감독, 주임으로 있었고 현재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시가창작위원회 주임. 중국작가협회 회원, 국가1급감독, 중국방송인협회 회원. 연변시학회 회장.《문화시대》잡지 주필로 활약하고있다.  그는 소품원지 “주말극장” 총연출, 제작인. 연변TV음력설야회 등 각종 문예야회 총연출을 수십차 맡아오면서 감독으로서의 인기도 상당하다. 중국100대방송인, 길림성 10대방송인. 전국소수민족 준마상, 중국조선족신문출판문화대상 우수편집인상, 길림성 두루미상, 연변조선족자치주 진달래문예상, 연변작가협회 유스트문학상, 윤동주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해란강문학상, 도라지문학상, 제1회 단군문학상 등 굵직한 상을 다수 수상한바 있다. 그의 저서로는 시집 《사랑은 전개가 없다》, 《빈자리로 남은 리유》,《아침산이 나에게로 와서 안부를 묻다》,《물결이 구겨지고 펴지는 리유》 와 시화집 《중국조선족시화선집》(주필),, 《숨쉬는 두만강》(기획), 《연변조선족비물질문화유산》(부주필) 등이 있다.   조글로미디어 문야기자 부록: 도옥의 시 2수 감상 뿌리 깊은 나무   얼기설기 꼬아온 세월 굵은 할아버지 손가락마디가 보인다 푸름을 한보 앞서서 흑백으로 쌓아온 세월 말이 없다   수레에 실려온 눈물 갈퀴 굵은 뿌리가 전설을 전하고 밭고랑에 쌓아올린 땀방울 하나의 력사로 깊이 박혀있다   희멀건 아버지 푸석한 얼굴에 뿌리 깊은 나무는 오렌지 시큼한 눈물이다   얼기설기 뻗어가는 뿌리 이 땅의 기슭 다 덮고도 남아 산해관 넘어 대륙으로 태평양 넘어 방방곡곡으로 바다보다 큰 눈물의 감격 우주의 그늘속으로 건실히 뻗어나간다   뿌리 깊은 나무는 말이 없다   백년부락   백년을 보습으로 쓰고 천년을 청기와에 새긴 조상 구름 석가래 얼기설기 응어리를 재워넣고 백년 순금의 언약 지켜 깊은 수심 우물 박아 아리랑 대들보에 매달린 맛 황금메주덩어리 줄레줄레 구성진 퉁소의 알알이 구멍마다 두만강 휘파람 백년을 대쪽같이 푸른 절개 천년을 떠올린 팔간집 오손도손 모여앉은 한마당 우리 얼 백년부락
442    술아 오늘,- 놀아보자... 댓글:  조회:5241  추천:0  2016-06-17
[ 2016년 06월 21일 08시 25분 ]     길림성 룡정시 해란강극장에서의 중국조선족원작대형무용극 “아리랑꽃”... 술- 상쾌기 상쾌한 기분,약간의 감각마비 상태 혈중 알코올 농도 0.05% 술- 취기초기 말이 많아지고 불안감과 긴장감 해소 혈중 알코올 농도 0.05-0.1% 술- 취기후기 자기억제 및 이성적 행동조절 완전 해제 혈중 알코올 농도 0.1-0.15& 술- 블랙아웃Blackout 측두엽 해마 부위의 기억 저장과정 중 입력과정에서 문제 발생 ‘필름’이 끊기는 현상   “사람이 술을 마시고 술이 술을 마시고 술이 사람을 마신다”                                   -법화경 술을 마시되 덕이 없으면 난亂하고 주흥을 즐기되 예를 지키지 않으면 잡雜되어   술을 마실 때에는 덕과 예를 갖춘 바른 태도를 지녀야 한다.                                                -윤선도  
441    詩는 상업예술이 결코 아니다... 댓글:  조회:4679  추천:0  2016-06-16
[6강] 시의 주제 강사/ 나 호열 새벽, 흰 눈이 조금 오다가 그쳤습니다. '눈' 하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떠올리십니까? 뭐라고 딱 잘라서 이야기할 수는 없어도 느낌이 가슴 언저리로부터 스며오는 것을 느끼지는 않습니까? 조금 구체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어떤 사람은 눈이 내린 것을 보고 '오늘 길이 미끄럽겠군' 하면서 출,퇴근 걱정을 하게 될 것이며, 또 어느 사람은 지난 겨울 '첫 눈이 내리는 날 만나자'고 약속했던 사람을 기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눈이 오니 길이 미끄럽다'라는 생각은 아주 현실적이면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게 되는 사고의 형태입니다. 사물이나 사건은 우리에게 다양한 행동을 요구하게 되고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판단을 하게 됩니다. 전 번 시간에 논의되었듯이 시를 쓰는 가장 원초적인 발단은 '서정'입니다. 서정은 어떤 사태로 인하여 발생하는 미묘한 심리상태로 효용의 문제와는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즉 '첫 눈이 내리는 날 만나자'는 것은 첫 눈에 의미를 두는 것이지만 그 의미는 일상적인 효용을 따지는 것과는 다릅니다. 첫 눈이라는 의미는 아주 복합적이고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상징'에 대해서 배우지는 않았지만 첫 눈 내리는 날 만나자고 했을 때의 첫 눈은 ( )에 대한 상징입니다, ( )안에는 우리는 많은 의미를 넣어볼 수 있습니다. 이제 당신은 첫 눈은 이러이러한 것이다 라고 마음 속에 정의를 내렸습니다. 당신의 정의 내용을 타인에게 전달하고 싶어 당신은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무엇을 전하고 싶습니까? 당신은 언제 글을 쓰고 싶은 생각이 드십니까? 기쁠 때보다는 슬플 때, 외롭다고 느낄 때, 무엇인가를 새롭게 발견해 내었을 때...... 우리는 자주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돌아온 후에 그 아름다운 경치를 시로 써 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막상 글로 옮기려 하면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왜 그럴까요? 설악산은 아름답습니다. 그것은 객관적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설악산은 아름답다라고 느낍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설악산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설악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라고 생각하는 데에서 시쓰기의 어려움이 발생합니다.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설악산이 아름답다 라고 표현하면 할수록 내용은 진부해 집니다. 설악산이 아름답다라고 느끼는 것은 1차적인 감정의 단계입니다. 2차적인 단계는 글 쓰는 내가 설악산 그 자체와 마주치는 것입니다. 설악산이 내게 주는 의미가 무엇가를 생각하는 단계입니다. 3차적인 단계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표현(장식)해 내는 것입니다. 주어져 있는 설악산(소재)을 설악산의 아름다움이 내게 (우리에게) 주는 의미 (주제) 로 변환해 나가는 것이 시쓰기의 어려움이며 즐거움입니다. 글을 처음 쓰기 시작 할 때에는 시의 소재와 주제에 대해서 생각을 정리해 보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소재는 나에게 서정을 주었던 것 (시를 쓰게 만들었던) 그 대상이요, 주제는 그 대상으로부터 얻어들여지는 타인에게 전달하고 싶은 의미이다.! 시쓰기의 실제를 하나 들어 봅시다. 우선 세 편의 시를 감상해 보기로 합시다. < 예문 1> 겨울 파계사 너무 빨리 그리고 너무 쉽게 지나쳐버린 삶 또는 죽음 헝크러진 바람 한 꾸러미 대숲에 놓아주려 흔적없이 푸르른 웃음으로 전생을 걸어가려 하네 아픔을 잊고 아픈 다리까지 잊어버릴 때 나무들이 뿜어내는 침묵이 더욱 짙은 향기로 퍼져가고 새들이 날아가네 수신될 수 없는 전파처럼 다시 만나야 할 곳으로 너무 빨리 그리고 너무 쉽게 낙엽 대신 반야심경 독경 소리가 우수수 발 밑에 떨어졌네 팔공산 파계사 파계사 진입로는 울창한 숲길, 좌우편 아홉 개의 물줄기를 하나로 모아서일까. 계곡엔 맑고 차가운 물이 철철 흐르매, 그냥 발 담그고 쉬고 싶구나. 진동루 앞의 넓은 마당에는 느티나무, 전나무, 은행나무 거목들이. 이곳 저곳 눈에 띄는 돌축대가 아름답다. 이 유서깊은 고찰이 영조 때엔 왕실의 원찰로도. 법당인 원통전의 관음보살 뵙고 나서 다시 사찰의 규모를 살피니,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것이 정말 알뜰 살뜰 잘도 가꾸어진 절임에 틀림없다. 주변의 울창한 산림과 어울려서 그윽하고 한적한 맛이 좋구나 마음. 47 마음에 근심 없으면 날마다 좋은 날 마음에 번뇌 없으면 날마다 기쁜 날 사랑도 미움도 마음에서 비롯되고 시기도 질투도 마음에서 비롯된다 한 마음 놓아 버리면 새 마음 살아나서 사는게 즐거운 사바가 정토러니 세 편의 시를 읽고 나니 어떤 시가 가장 마음에 와 닿는가요? 아마도 이 가장 구체적인 심상으로 다가오지 않을까요? 는 원로시인이신 박희진 님의 시이고 첫번 째 는 강의자의 시입니다. 박희진 시인의 시는 자신의 주관적 인식을 배제하고 가급적 객관적인 풍경묘사로 사실감을 전해 주려고 함으로서 오히려 더욱 큰 진실감, 산사의 고적함을 표현해 내려고 한 것 이겠지요. 그에 비해서 는 작가의 주관적인 생각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것 같습니다. 파계사의 분위기는 배경으로 자리잡아 있고 작가의 삶에 대한 인식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굳이 시의 주제를 이야기 한다면 삶은 너무 빨리 그리고 너무 쉽게 지나쳐 버리는 것이고 우리의 삶은 후생(미래)을 향하여 가는 것 같지만 삶의 반복성으로 인하여 오히려 되돌려 지는 것, 전생을 향하여 가는 반성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시의 소재는 겨울 파계사의 정경이 되겠습니다. 박희진 시인의 시의 주제는? 도시세계의 번잡함을 떨친 적요의 세계, 다툼이 없는 세계, 그런 것이겠지요. 있는 그대로 보여 줍니다. 다른 번듯한 주제를 찾으려 하면 더 허망해지지요. 나무와 절의 역사 그런 것들이 이 시의 소재가 되는 것이지요. < 마음. 47>은 파계사 원통전 벽면에 붙어 있던 글입니다. 작자는 누구인지 잘 모르겠고.... 일단 읽으면 마음에 와 닿는 것 같습니다. 다 옳은 이야기이고 좋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엄밀히 따져 보면 이 글은 시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글 쓴 이의 체취, 생활, 구체적인 사색의 땀방울, 이런 것들이 보여지지 않습니다. 강의 요점 정리에 보시면 '시는 무용이다' 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걸음은 어느 한 점에서 다른 어느 한 점으로 이동하여가는 동작입니다. 춤은 어디로 향하는 목적이 있는 것 아니지요? 몸을 구부리고 펴면서 드러나는 근육의 움직임, 표정, 공간과 육체의 배합으로 춤은 어디에 닿는다는 목적에는 전혀 맞지않는 행위입니다. 결론이 없는 사색의 과정, 어떤 분위기의 전달만으로도 시의 역할은 충분히 수행되는 것입니다. 요즈음 한참 김장들을 하느라고 집집마다 난리들이지요. 맛있는 김장김치를 먹으려면 무슨 재료가 필요할까요, 배추, 무, 갓, 마늘, 고추가루, 소금 등등 그런 것들을 어떻게 하나요? 소금으로 배추를 절이고 속을 버무리고 섞는 일! 그렇습니다. 섞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섞는 것이 아니라 김치를 만든다는 목표가 있어야 하겠지요. 나의 생활의 체험, 반성 이런 것들이 시의 소재를 만나서 함께 버무려져 맛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는 멋있는 단어를 골라서 나열하는 것이 아니고 그럴싸한 결론을 내는 것도 아닙니다. 보통 사람들이 무심하게 지나치는 사건과 사물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에다 자신의 입김을 불어넣는 것이지요. 은유, 상징, 아이러니 등의 기법이 자연스레 녹아드는 것이 좋은 시의 요건 입니다. 시적 소재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주제라는 것은 내가 전달하고 싶은 그 무엇이다! 同價紅裳이라고 이왕이면 전달하고 싶은 그 무엇을 예쁘게 포장하는 것!(표현하는 것) 아! 저 꽃은 너무 아름다워요 하는 것 보다 달덩이 하나 매달린 저 꽃 ! 하는 것이 훨씬 낫지요? < 강의 요점 정리> 1. 시 속에 함유된 여러 의미중 가장 중심적인 내용이 주제이다. 2. 시의 話者를 통하여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시인의 중심 생각이다. 3. 시의 주제는 매우 다양하나 주제를 위하여 시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 주제를 배제하고 언어 자체가 가지는 감각적 요소를 바탕으로 아름다움 그 자체를 강조하는 시들도 많다. 4. 시의 주제는 시인의 인생관이나 세계관이다. 5. 시의 주제는 미로 속을 헤매는 보물찾기처럼 그 과정 탐색을 통하여 예술적 희열을 맛보게 하는 그 속에 있다. (은페성과 암시성) 6. 시인의 생각은 시 속에, 마치 과일 속에 숨어있는 영양소처럼 숨어 있어야 한다. - 발레리 7. 독창적 사고에 의한 낯설게 하기, 그리고 응축! 8. 어떤 경험을 정서화하고 형상화한다는 것은 시의 독창적 예술성을 만드는 것이다. 9. 시는 자아의 세계를 1)정서적으로 2)주관적으로 통일하는 양식이다. 10. 시는 舞踊의 언어이다. 11. 소재를 추상화 한 것이 주제이다. 12. 시는 시인의 상상이나 직관에 의해 형성되기는 하지만 그 내용은 인류의 보편적 사고 체제나 정서에 합치되어야 생명력이 있다. (보편성의 문제) 13. 시는 주제를 드러내기 위하여 쓰여졌다기 보다는 의미요소를 다른 요소와 융합하여 미적 구조를 실현하는 장르이다. 14. 주제가 명시적으로 드러날수록 시의 품격이 떨어질 위험이 크며, 그것이 독자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실현한다는 말은 성립되기 힘들다. 15. 나의 상상력이나 환상은 현실을 뛰어넘으려는 꿈꾸기에 고리를 달고 있으며, 그 꿈꾸기는 시의 뼈대, 또는 몸짓을 만들어준다. 나의 시는 그러므로 꿈꾸기에 다름 아니다. 꿈은 메마른 삶을 적셔준다. 보다 나은 삶을 올려다보게 한다. 그곳에 이르는 사닥다리를 놓아주고, 오르게 한다. 좌절감이나 절망감을 흔들어 가라앉히고,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 그 길을 걸어가도록 밀어주고 이끌어준다. 지금, 여기에서는 이루기 어려운 세계, 어쩌면 이룰 수 없는 세계도 꿈의 공간에서는 반짝인다. 꿈의 공간 만들기, 그 공간에서 살기는 뒤틀리고 추한 몰골을 하고 있는 현실을 뛰어넘게 한다. - 이태수 16. 오늘의 시가 상업예술이 아니고 비상업적 예술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입장에서 우리는 모든 상업주의를 거부한다. 지나친 테크닉 위주의 장인적인 상업성과 지난친 독선의 정치적인 또 다른 상업성도 우리는 거부한다. 시인은 가수도, 정치가도 아니다. 시인은 다만 운율있는 언어로 자신의 성을 구축하는 언어의 주인일 뿐이다. 주제가 없이 도도히 범람하는 현란한 의상과 공허한 핏대를 똑같이 우리는 배격한다. 그러나 시는 시인의 성실한 삶을 반추하는 그 시대의 사회적 산물이며 무엇보다도 시정신을 내포해야 한다는 점을 우리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올바른 주제와 올바른 아름다움이 있는 참다운 시를 지향하며 우리는 첫걸음을 내딛는다. -강인한   ==================================================================================   382. 객석에 앉은 여자 / 김승희                        객석에 앉은 여자                                      김 승 희   그녀는 늘 어딘가가 아프다네. 이런데가 저런데가 늘 어느 곳인가가.   아프기 때문에 삶을 열렬히 살 수가 없노라고 그녀는 늘상 자신에게 중얼거리고 있지.   지연된 꿈, 지연된 사랑 유보된 인생 이 모든 것은 아프다는 이름으로 용서되고 그녀는 아픔의 최면술을 항상 자기에게 걸고 있네.   난 아파, 난 아프기 때문에 난 너무도 아파서   그러나 그녀는 아마도 병을 기르고 있는 것만 같애.   삶을 피하기 위해서 삶을 피하는 자신을 용서해 주기 위해서 살지 못했던 삶에 대한 하나의 변명을 마련하기 위해서 꿈의 상실에 대한 알리바이를 주장하기 위해서!   그녀는 늘 어딘가가 아프다네. 이런데가 저런데가 늘 그저 그런 어떤 곳이.     김승희 시집 중에서             김승희(金勝熙) 연보     1952년 3월1일 광주광역시에서 김인곤과 정경미의 5남매 중 첫째로 출생.        숙명여고 졸업        서강대학교 영문과 및 동 대학원 국문과 졸업(문학박사).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1976년 산문집 출간.   1979년 제1시집 출간.   1980년 70년대 작가와의 대화집 출간.   1982년 이상 평전 출간.   1983년 제2시집 출간.   1984년 산문집 출간.   1985년 산문집 출간.   1987년 제3시집 출간.   1988년 산문집 출간.   1989년 제4시집 출간.   1991년 제5시집 출간. 제5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1993년 산문집 출간.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1995년 제6시집 출간.   1997년 소설 출간.   1999년 소설 출간.   2000년 제7시집 , 산문집 출간.   2001년 산문집 출간.   2003년 제2회 고정희상 수상.   2006년 제8시집 출간.   2007년 산문집 출간.   현재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부교수.        
440    [쉼터]- 피눈물의 대가 ㅡ "친환경" 올림픽 메달 댓글:  조회:4845  추천:0  2016-06-16
  4년간 흘린 땀과 눈물을 닦아줄 최고의 선물은 역시 메달이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 나설 선수들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단 하나의 목표물, 메달이 세상에 공개됐다.     리우올림픽 조직위원회는 15일(한국시각) 브라질 바하의 올림픽 파크에서 메달 공개 행사를 열었다. 이날 행사에 참가한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은 "오늘 이 행사로 남미 대륙 최초의 올림픽은 사실상 파이널 카운트다운에 돌입했다"고 선언했다. 리우올림픽 메달의 가장 큰 특징은 친환경 방식으로 제작됐다는 점이다. 리우올림픽에는 2488개의 메달이 제작됐다. 금, 은메달이 각각 812개, 동메달은 864개다. 금메달은 채광부터 제작 단계까지 수은을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 은메달과 동메달에는 약 30%씩 재활용 소재를 활용했다. 선수 목에 걸리는 메달 리본은 재활용 플라스틱병을 소재로 제작했다. 메달 무게는 금, 은, 동메달 모두 500g이다. 2012년 런던올림픽 369~397g보다 무겁지만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의 531g보다는 가벼워졌다. 런던올림픽이 역대 하계대회 사상 가장 무거운 메달이었던만큼 이번 메달은 하계 대회 중 가장 무거운 메달 기록을 남기게 됐다. 또한 사상 최초로 가운데 부분이 가장자리보다 더 두껍게 제작됐다. 메달 앞면에는 전통에 따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승리의 여신 니케와 초대 올림픽이 열린 그리스의 파나티나이코 경기장, 아크로폴리스 광장 등이 새겨졌다. 뒷면에는 리우올림픽 로고와 오륜기 모양으로 단순하게 디자인됐다. 런던올림픽 당시 대회로고 외에 템스강 등 런던을 상징하는 요소들이 새겨진 것과 비교해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평이다. 미국 폭스스포츠는 "실망스러울 정도로 지루한 디자인"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리우올림픽 조직위는 올림픽 메달과 함께 대회 공식 슬로건과 패럴림픽 메달, 대회 시상대, 시상식 자원봉사자 유니폼 등도 함께 공개했다. 대회 공식 슬로건으로는 '새로운 세상'을 뜻하는 '뉴 월드(New World)'가 선정됐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열정'을 의미한다. 런던올림픽 슬로건은 '세대에게 영감을(Inspire a Generation)', 2008년 베이징올림픽은 '하나의 세상, 하나의 꿈(One world, One dream)'이었다. 박찬준 기자 ==========================================          
439    력사의 아픔을 안고... 댓글:  조회:4473  추천:0  2016-06-14
1970년대 윤동주 평가절하돼 "공부만 했지 무슨 독립운동" 오해 윤동주 옥사 통고받은 부친, 주위 만류에도 뿌리치고 일본행… 해부 대상 될 뻔한 시신 가져와 오늘도 그의 시를 대하면 절로 숙연   송우혜 소설가·'윤동주 평전' 저자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국민시인 윤동주를 다룬 영화 '동주'를 본 내 주위 분들 소감은 다양했다. 그중엔 "영화 제목을 '동주'가 아니라 '몽규'로 해도 되겠던데요"라는 반응도 있었다. 내가 '윤동주평전'을 쓰면서 송몽규(1917~1945)란 인물의 실체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렸는데, 영화가 그 책을 토대로 제작됐기 때문에 송몽규가 크게 부각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돌아보면 윤동주 시인은 '사람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1970년대 중반 한국 문화계에서 돌연 국민시인 윤동주를 폄훼하고 평가절하하는 움직임이 크게 일어났다. "윤동주는 평생 공부만 한 학생이었는데 무슨 독립운동을 했다는 건가", "그는 일제의 과잉단속에 재수 없게 걸려 불운하게 옥사한 것이다" 등등의 주장이 대뜸 대세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그건 모두 송몽규를 몰랐기 때문에 나온 이야기들이었다. 송몽규는 윤동주와 고종사촌 사이다. 윤동주의 고모부가 처가살이하던 때 윤동주보다 석 달 먼저 그 집에서 태어났다. 두 사람은 늘 같은 교실에서 공부했다. 그러다가 송몽규는 만 18세 때 무장독립운동에 투신하려고 집을 떠나 중국에 갔다. 그는 임시정부 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다가 일제의 항의로 학교가 폐쇄된 뒤 중국 산둥성 지난(濟南)에서 일경에 체포돼 모진 고통을 겪고 풀려났다. 그 후 윤동주와 함께 체포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할 때까지 그는 일경의 '요시찰인(要視察人)'으로 고초를 겪었다. 요시찰인은 일제 공안당국이 특별히 집중 감시한 인물을 가리키는 용어다. 지난에서 북간도로 돌아간 송몽규는 다시 학업에 몰두했고 윤동주와 함께 서울 연희전문(현 연세대)을 거쳐 일본에 유학했다. 윤동주는 일본 교토에서 송몽규와 자주 어울리면서 조선독립운동에 관련된 행동을 하다가 요시찰인 송몽규를 밀착 감시하던 일경 감시망에 걸려서 함께 체포됐고 교토재판소에서 징역형을 선고받고 함께 복역하다가 나란히 옥사했다.   /이철원 기자 따라서 윤동주 시인에 대한 부당한 폄훼를 바로잡으려면 송몽규의 존재와 활약상을 제대로 알리는 일이 필수였다. 나는 '윤동주의 동반자, 송몽규'라는 글을 써서 한 시사잡지에 실었다. 그가 우리 집안 어른이어서 가능했다. 그 기사를 계기로 윤동주 폄훼 현상은 가라앉았다. 그런데 바로 그 일이 나를 뜻하지 않은 임무로 이끌었다. 그 기사를 크게 평가한 최하림(1933~2010) 시인이 내게 "윤동주 평전을 쓰시오!"라고 강요에 가까운 요청을 했다. 본래 누구건 간에 시인의 평전을 쓸 생각이 전혀 없었던 나는 처음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일어난 어떤 특별한 일이 계기가 되어 고집을 버렸다. 내가 평전 쓰기에 착수했을 때만 해도 관계자들이 다수 살아계셔서 큰 다행이었다. 그들의 증언을 통해서 그간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을 밝혀내 책에 담은 것은 매우 큰 보람이다. 그중에서 특히 기억나는 것은 윤동주의 죽음을 맞은 가족들에 관한 증언이다. 윤동주의 옥사를 유족에게 통고한 후쿠오카 형무소는 '유족이 시신을 가져가지 않으면 규슈제국대학에 해부용으로 제공'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맏손자 동주를 끔찍이 사랑했던 할아버지 윤하현 장로가 뜻밖에도 "동주의 시신 가져오는 것을 포기하자. 시신을 가지러 가다가 산 사람도 죽을까 걱정이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태평양전쟁 막판 미군의 일본 본토 폭격이 매우 심한 상황을 두려워한 것이다. 그런데 평소 온화하고 내성적이던 윤동주의 부친이 완강하게 거부하고 아들의 시신을 가지러 갔다. 부친의 결단이 아니었으면 윤동주는 규슈제대 의학부 해부실에서 갈기갈기 찢겨 세상에서 사라질 뻔했다. 그의 어머니 이야기도 처절하다. 부모보다 먼저 간 자식의 죽음에는 곡(哭)을 하지 않는 조선 법도를 지키느라 어머니는 일절 소리 없이 엄정하게 동주의 장례를 치러냈다. 그러나 장례 후 어느 날 빨래거리를 챙기다가 동주의 흰 와이셔츠가 나오자 더 이상 견디지 못했다. 목을 놓아 통곡하고 또 통곡하면서 마냥 그치지를 못했다. 나는 울면서 그런 증언들을 받아 적었다. 우리 역사는 이런 아픔들을 품에 안고 전진하여 오늘의 번영에 이르렀다. 그걸 생각하면 그의 시를 대하는 마음이 절로 숙연해진다...
438    윤동주와 순이라는 녀인 댓글:  조회:5953  추천:0  2016-06-14
  윤동주의 시 가운데 남녀의 사랑을 다룬 시 몇수가 있다.      “사랑의 전당”(1938), “소년”(1939), “눈 오는 지도”(1941)등 세수의 시이다.  그런데 이루어지지 않는 아픈 사랑을 노래한 시, 그렇기에 더욱 애절하고 시리고 아름다운 이 시 세 편에는 한결같이 “순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이쯤 되면 윤동주의 애독자들은 “순이”가 누구인가 궁금해 질것이다. 혹여 실제 인물이 아닐가 하는… 이를 두고 "윤동주 연구자들은 한번쯤 연구해볼만한 사안"이라고 말한다.   순이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나려, 슬픈 것처럼 창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힌다. (중략)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처럼 홀홀이 가는것이냐, 떠나기전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밑, 너는 내 마음속에만 남아 있는것이냐, 네 쪼고만 발자욱을 눈이 자꾸 나려 덮혀 따라갈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욱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아 나서면 일년 열두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나리리라.                                                                                                                                                 - 눈 오는 지도(地圖     순아 너는 내 전(殿)에 언제 들어왔던 것이냐?  내사 언제 네 전에 들어갔던 것이냐? (중략)     순아 암사슴처럼 수정눈을 나려감어라. 난 사자처럼 엉크린 머리를 고루련다. 우리들은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 성스런 초대에 열한 불이 꺼지기 전   순아 너는 앞문으로 내달려라. (하략) - “사랑의 전당”   … 강물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린다. - “소년”   수줍음의 대명사인, 그야말로 바른생활의 사나이 윤동주의 녀성관계는 과연 어떠했을가? 연희전문 시절 윤동주의 절친한 후배였던 정병욱씨의 회고에서 한 녀인과 윤동주의 일화가 나온다. 윤동주가 연희전문을 졸업할 무렵, 서울 신촌에서 북아현동으로 하숙을 옮겼는데, 그곳에는 윤동주 아버지의 친구인 지사(志士) 한 분이 있었다. 윤동주는 그분을 매우 존경했고 가끔 그 분 댁을 찾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의 딸이 이화여전 문과의 같은 졸업반이엿고 교회와 바이블 클래스에도 윤동주와 같이 다녔다고한다. 매일 같은 기차역에서 기차를 기다렸고 같은 차로 통학했으니“그 녀자에 대한 감정이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는것만은 피부로 느낄수 있었다.”고 정병욱은 회고했다.  그러나 정병욱씨의 이 회고는 그저 추측의 범주에 머물수밖에 없는것 같다. 이화여전 문과 졸업반이였던 이 녀학생과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으며 그가“눈 오는 지도”나 “사랑의 전당”의 “순이”인지 아닌지 전혀 알 길이 없는것이다. 윤동주의 녀동생 윤혜원의 증언에서도 한 녀인이 나온다. 일본 류학중에 만난 박춘애 (혹은 박춘혜)라는 이름의 녀학생의 사진을 가져와서 할아버지께 보여드린 적이 있었고 할아버지께서 좋다고 하셨다고한다. 목사의 딸이고 성악을 전공하는중이라고했다.  윤혜원의 남편 오형범은 윤동주의 사후에 박춘애를 만난 적이 있었다고한다. 연변에서 서울로 가던중에 청진에서 잠시 머문적이 있는데 거기서 성가대원으로 활동하는 박춘애를 만났다고한다. 그런데 알아보니 “윤동주가 마음속으로만 좋아했을 뿐이고 프러포즈도 못했다고 하더라”는것이였다.”   사실 윤동주가 순이라는 이름을 맨 처음 접한것은 아마 명동학교 졸업시기가 아니였나고 생각된다.  1931년 3월20일 명동학교에서는 졸업식을 치르면서 학교교지도 만들고 서울에서 아동잡지를 주문해 보며 문학에 심취되였던 윤동주와 송몽규, 김정우등 졸업생 14명에게 김동환의 서사시 “국경(國境)의 밤”을 한권씩 선물했다.     이 서사시에서 순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재가승(在家僧)의 딸인 순이는 마을의 선비청년과 래일을 기약한다. 허나 순이는 재가승의 정칙대로 재가승에게 출가를 해야만 하는 비극적인 운명을 지닌다. 이러한 숙명적인 비련의 현실 앞에서 청년은 고통과 번민을 안고 마을을 떠나게 된다.  두만강지역 서민들의 생활상으로부터 민족의 설음과 슬픈 사랑을 보여준 서사시이다. 한글 최초의 장편서사시는 문학에 심취된 윤동주에게 영향을 끼쳤을것이고 서사시에 나오는 비정한 현실의 주인공 순이에게서 윤동주는 처음으로 하나의 녀인상을 읽었을는지 모른다.    막연히 “순이”라는 이름에 호기심이 동해 추적해 보지만 결국 윤동주의 “한낱 벙어리같은” 피지 못한 사랑이 참으로 안타까웁게 한다.   미남형에 천부적으로 여린 감성과 다감한 성격에 서울에서 공부를 하고있는 윤동주라 이성의 눈길을 끌기에는 족했다. 하지만 우리들의 바램과는 달리 앞서 읽은 “사랑의 전당”에서는 “우리들은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고 나오며 윤동주의 다른 한 시 “바람이 불어”에서는 "단 한 녀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는 구절이 나온다. 윤동주의 사랑시는 그저 그리움의 대상에 대한 읊조림과 그로 인한 상흔으로만 남았다.  순이하면 어쩐지 순진하고 순정 많은, 새까만 눈동자를 가진 녀인상을 떠올리게 된다. 고향의 이웃 녀동생의 이름 같은 첫사랑 그녀자의 이름같은, 그 이름- 순이다.  하지만 여기서 “순이”는 특정한 어느 녀인의 이름이기보다 그가 아름다움의 표상으로 설정한 하나의 보통명사인지도 모른다. 윤동주가 다녔던 연희전문(지금의 연세대)에서 “윤동주 연구”로 박사학위를 따냈던 마광수교수는 윤동주는 “’순이’라는 심상을 통해서 모든 우리 민족의 녀성, 또는 그가 마음속에 그리고있는 리상적인 ‘님’, 모든 이웃과 동포를 함축적으로 상징하려했던것 같다”고 폭 넓은 해석을 가하고 있다.   사랑에 눈 뜰 나이에 윤동주는 자신의 앞길과 문학, 그리고 시대적인 상황의 흉흉함에 휩싸이게 된다. 풋풋하고 신선한 사랑의 분위기에 쌓일만큼 동주를 안온한 분위기로 이끌기에는 모든 상황이 너무 절박했다. 일제의 철쇄에 수족이 동여 자유롭지못한 시대적인 상황에서 캄캄한 민족의 현실을 눈으로 직접 목도하면서 윤동주는 자신의 리상 실현이 쉽지 않음을 알고 고민한다. 이런 마당에 태평한 시절처럼 아름다운 사랑을 할수 없음을 알고 더욱 락심해 한다. 그래서 그런지 윤동주의 사랑시들은 모두가 슬픔의 색갈로 점철되여 있다.  민족시인의 길을 걸었던 윤동주는 개인의 안일만을 위한 에로스적인 사랑을 할수 없게 된다. 이것은 그후에 민족을 위한 우환의식을 그 기저에 수납한 더 지고한 사랑으로 확산되여 그의 시편들에 나타난다.    그러고보면 윤동주의 사랑은 한낱 남녀의 치정이 아닌 종교적인 사랑, 범민족적인 사랑의 차원의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봐야 무방할것이다.   "문화시대" 에서                                   ///김 혁 //////////////////////////////////////////////////////////////////////////////////   윤동주의 시에는 순이 이야기가 몇 번 나온다.   *   순이야 너는 내 전당에 언제 들어왔던 것이냐? 내사 언제 네 전에 들어갔던 것이냐?   순이야, 암사슴처럼 수정눈을 나려 감아라. 난 사자처럼 엉크린 머리를 고루련다.    우리들의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  성스런 초대에 열한 불이 꺼지기 전 순이야 너는 앞문으로 내달려라, -윤동주, 사랑의 전당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을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흘러 사랑처럼 슬픈-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윤동주, 소년   그 순이야 누구였느냐 하고 사람들이 궁금해 했다. 한 연희 전문 후배에 의하면 연희전문을 졸업할 무렵 윤동주가 아현동으로 하숙을 옮겼는데, 그 동네에 아버지의 친구이자 지사였던 분이 한 분 계셨다고 한다. 윤동주는 아버지와 같이 혹은 혼자서도 가끔 그 집을 찾았다. 마침 그 집의 딸도 이화여전 졸업반이었다고 한다. 그가 순이였을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윤동주의 동생 윤혜원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 유학 중에 만난 한 여학생의 사진을 가지고 와서 집안 어른들께 보여 주었다고 한다.  그 여학생이 순이였을 가능성도 높다는 것이다.    다른 주장에 의하면윤동주의 순이는 특정 인물이 아니라 김동환의 서사시, 국경의 밤에 나오는 순이라고도 한다. 그 서사시에 나오는 순이를 막연히 이상의 여인으로 흠모했을 거라는 주장이다.   어느경우가 정답인지는 모르나,  윤동주가 에서  우리의 사랑은 한낱 병아리였다는 것을 보면 상대가 누구였든 고백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끝난 사랑인 듯 하다.   ...윤동주가 일본 감옥에서 스물 여덟살의 나이로 눈을 감은 날로 70주기.  그래서 이렇게 궂은 비가 내리는 걸까... 암울했던 민족의 앞날을 생각하면서  외롭게 일본 감옥에서 눈을 감았을 시인의 모습이 사슴의 눈망을을 보는 듯 슬프다.   시인의 대표작 라도 꺼내 천천히, 낮은 소리로 읊조려 볼 일이다.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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