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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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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7    영화 "동주"에서 나오는 노래 댓글:  조회:5635  추천:0  2016-02-27
        영화 "동주"에서 나오는 노래     오래전에 떠나 온 고향집에 가보니 미처 세월 닿지 못한 난 기억 그대로 거기 서 있어 너는 어디서 너는 멀리서 날 또 찾아 돌아왔나 나를 떠나서 날 남겨두고서 외면하고 달려갔지 나를 불러대는 네 목소리가 이제 와서 들려오네 너는 어디서 너는 멀리서 날 또 찾아 돌아왔나 이 내 모습이 그 기억 그대로 날 반겨주며 서 있는데 우우우~ 너무 그리워서 우우우~ 나를 불러본다  우우우~ 떠난 나는 다시 우우우~ 나를 돌아본다
356    영화 <<귀향>> 보다... 댓글:  조회:6993  추천:0  2016-02-26
2월 24일, 개봉. 이틑날 25일, 영화 을 보다...   "무엇이 소녀들을 지옥으로 보냈나"   "언니야 이제 집으로 가자" 20만여명의 소녀들이 끌려갔고, 238명만이 돌아왔다. 그리고 이제, 46명(며칠전 2명 사망)만이 남아있다.   력대 최고로 세계 각지 75,270명의 시민 참여한 국민의 영화. 2002년부터 시작된 "위안부" 피해자 고발, 어려운 14년의 제작기.         이 영화의 제작비 대부분이 국민 성금과 기부를 통해 마련된 영화이기에 그 의미가 더 크다. 조정래 감독은 강일출 할머니의 태워지는 처녀들이라는 그림을 통해서 이 영화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한다... 너무 가슴 아프고 치욕스러운 력사, 꼭 잊지말고 기억해야 할 일. 영화 귀향은 과거의 일제강점기 때 아픈 력사를 다시 한번 더 기억나게 해주는 것.                      처녀애들이 마을에서 천진란만히 공기돌놀이를 하는 장면.       이 영화를 통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께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영화 귀향이 미국에서 상영했을 때   미국인들이 머리가 아플 정도로   엄청나게 울었다고 조정래 감독은 밝힌다.       또한 일본 와세다 대학 학생이   조정래 감독에게   이 영화를 일본인들도 보았으면 좋겠다고 말해서   큰 감동을...             "여기가 지옥이다 야" 1943년, 천진난만한 열네 살 정민(강하나)은,ㅡㅡㅡ  영문도 모른 채 일본군 손에 이끌려 가족의 품을 떠난다. 딸을 잃은 부모들 원통 뼈에 사뭇친다... 정민은 함께 끌려온 영희(서미지), 그리고 수많은 아이들과 함께 기차에 실려 알 수 없는 곳으로 향한다. 제2차 세계대전, 차디찬 전장 한가운데 버려진 정민과 아이들... 그곳에서 그들을 맞이한 것은 일본군만 가득한 끔찍한 고통과 아픔의 현장이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실화를 바탕으로 한 우리의 아픈 이야기! 2002년, 미술심리치료과정에서 그리셨던 강일출 할머니의 그림이 바로 "태워지는 처녀들"이다. 영화 은 일본 군국주의가 활개를 치던 1940년대에 성노예로 끌려간 강일출 할머니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1928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신 강일출 할머니는 1943년 일본이 광기의 전쟁을 치르고 있을 16살의 나이에 보국대를 뽑는다고 집에 순사가 찾아와 납치되듯 끌려갔다 한다. 그렇게 중국 심양을 거쳐 장춘, 그리고 목단강 위안소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며 일본군 성노예 생활을 했다. (영화에서는 끌려간 쳐녀애들이 기차에 실려 가다가 목단강역에서 내리는 장면이 나온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장티푸스를 심하게 앓아 부대 밖으로 이송되어 다른 병든 소녀들과 함께 불구덩이에 던져 지려할 때, 조선 독립군들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탈출, 이후 중국에서 생활 하시다가 2000년 영구 귀국하셔서 지금까지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의 조정래 감독님은 2002년 경기도 퇴촌에 있는 나눔의 집에 계신 위안부피해자 할머니를 위해 봉사공연활동을 하던 차 이러한 위안부문제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한다. 그 때 무려 20만명(일본교수가 계산한 수치-최고 50만명이 끌려갔다는 추정도 있음)이 넘는 어린 여성들이 강제로 납치되거나 취업을 미끼로 끌려가서 모진 생활을 견디다 못해 대부분 죽어갔다... 초경도 안한 소녀들이 하루에 이삼십 명의 병사들을 상대하면서 병으로, 또는 구타 고문 등으로 죽어갔으며 일본군은 퇴각하기 전에 소각명령에 의해 불태워지거나 처형되었고 퇴각한 후에는 그대로 현지에서 버려져 죽음에 이르렀다고 한다.   조정래 감독은 시나리오를 제작했을 때 당시 투자사 등도 없어 어려웠다 한다. 투자 유치가 힘들었기에 크라우드 펀딩을 도입해 세계 각지의 시민들이였던 총 75,270명의 후원을 받아 12억원의 제작비가 모아졌고, 손숙, 오지혜, 정인기 등의 배우들로 재능기부가 이루어져 출연 했으며 그렇게 14년 만에 빛을 발해 완성 되어진 영화. 력사는 력사, 력사를 잊지말자...   영화 끝머리에는 생존 위안부피해자 할머니들이 그림과 함께 기부 참여자들이 명단 75,270명 이름이 일일이 거명되는데 한 10여분 걸린다. 일반적으로 영화 뒷자막이 나오면 궁둥이를 툭툭 털며 자리를 뜨지만 이번 영화 귀향은 자막이 길어도 끝까지 다 보고 영화관문을 나섰다. 여직껏 영화 뒷자막을 다 보기는 이번이 난생처음이였다... 영화관 정문을 나서니 석양노을이 붉게붉게 물드리고 있었다...    
355    "동주"에서 나오는 두 녀자의 대사와 동주의 시 댓글:  조회:6916  추천:0  2016-02-23
  - 이여진, 영화       새로운 길 - 윤동주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쿠미, 영화   사랑스런 추억 - 윤동주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나는 플랫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 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 주어   봄은 다 가고 동경교외(東京郊外)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기차는 몇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차거운 언덕에서 서성거릴게다   -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있거라. 동주와 일본 녀자 쿠미   ////////////////////////////////////////////////////// ㅡ영화 "동주"에 등장하는 시들ㅡ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 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및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의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아우의 인상화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앳된 손을 잡으며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쉽게 씌어진 시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진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사랑스런 추억 봄이 오든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차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나는 플랫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 주어 봄은 다 가고-- 동경교외 어는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차장 가차운 언덕에서 서성거릴게다. --- 아아 젊은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바람이 불어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 와 어디로 불려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길 오늘도…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읍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기타 영화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는 윤동주의 현재와 체포되기 이전까지의 윤동주의 과거를 교차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감독의 전작인 사도와 유사한 구성이다. 문성근이 연기한 정지용은 실제로도 윤동주의 정신적 스승으로서, 광복 이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발행을 돕고 시집의 서문을 쓴다. 다만 영화에서 묘사하는 윤동주와 정지용의 만남은 영화적 창작이다. 영화에서 윤동주, 송몽규와 동기이자 감초 역할로 등장하는 강처중은 실존 인물로, 윤동주의 작품 원고를 보관하고 있다가 이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출판을 주도한다. 초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발문을 쓴 사람도 강처중이다. 다만 광복 이후 좌우대립의 소용돌이 속에서 간첩 혐의를 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윤동주의 동학인 쿠미(허구 인물)와 지도교수인 타카마츠 교수의 역할에 대해, 이준익 감독은 일본인 중에도 양심있는 사람이 있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 쿠미와 달리 타카마츠 타카하루 교수는 실존 인물이다. 영화에서 소개된 시 대부분은 도일 전에 창작되었다. 따라서 영화에서 해당 시가 나오는 시점과 시가 쓰인 시점은 대부분 일치하지 않다. 분위기에 맞는 시가 선택된 것으로 생각하면 될 듯. 일본어 대사가 전체의 30~40% 정도 되는데, 자막 제작 형편상 대사의 일부분이 생략되거나 축약된 경우가 있다. 대사 전부를 자막으로 만들면 자막이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이런 방법을 선택한 듯. 자막의 수준은 무난한 편이다. 고등계 형사, 타카마츠 교수, 쿠미 등의 배역은 대사의 전체가 일본어이며, 윤동주와 송몽규 역시 일본어 대사가 꽤 있다. 이 중 고등계 형사 역을 맡은 김인우는 재일교포 3세이며, 쿠미 역의 최희서는 어린 시절 일본에 체류 경험이 있고, 타카마츠 교수는 아예 일본인 배우가 연기해서 이들의 일본어 대사는 상당히 좋은 편이다. 반면 윤동주와 송몽규를 맡은 강하늘과 박정민의 일본어는 전형적인 한국인의 일본어이지만, 애초에 윤동주와 송몽규에게 일본어는 모어가 아니었음을 고려해 보면 오히려 어설픈 편이 자연스럽고 고증에도 맞다고 할 수 있다. 윤동주-송몽규의 모교인 연세대학교(연희전문학교의 후신). 엔딩 크레딧 곡 '자화상'을 강하늘이 직접 불렀다.   ...누설 영화 속 '쿠미'는 가상의 인물이다. 따라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번역과 출판을 일본인에게 맡기는 부분은 당연히 허구. 이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도일 전인 1941년 출간 예정이었으나, 흉흉한 시대에 한국어로 된 시를 출판하는 것이 매우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에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고, 광복 이후 정지용, 정병욱, 강처중 등 스승과 동료들이 뜻을 모아 출판했다. 다만 이와 별개로 윤동주 시집의 일본어판은 존재하며, "서시"와 "별 헤는 밤"의 경우 일본 중고교의 교과서에도 등장할 정도로 유명하다. 영화 후반부에 윤동주가 독립 운동 혐의가 적힌 서류에 이런 시대에 시를 쓰겠다고 한 게 부끄럽다면서 서명하지 않는 장면이 나올 때 고등 형사의 눈을 잘 보면 눈물이 고여 있는데, 이 장면에 대한 해석이 갈리고 있다. 그 전까지 고등 형사의 대사와 행동을 보면 동주에게 '네놈같은 감상주의자 때문에 이 나라가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고 있다' 라는 말을 하는 등 일본의 군국주의를 대표하고 있어서 형사가 동주에게 감화되었다고 보기 어렵고, 그렇다고 동정의 눈물이라고 보기에도 애매하기 때문이다.  
354    "동주" 에서 삭제된 영상 보고싶다... 댓글:  조회:4987  추천:0  2016-02-23
원본보기 시인 윤동주의 삶을 최초로 스크린에 그린 영화 '동주'(감독 이준익)가 개봉을 기념해 본편에서 아쉽게 삭제된 영상을 공개해 눈길을 끈다. '동주'는 이름도, 언어도, 꿈도 허락되지 않았던 1945년 평생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시인 윤동주와 독립운동가 송몽규의 빛나던 청춘을 담은 작품. '동주' 측은 21일 가슴 아픈 진실을 알아야 한다는 이준익 감독의 의견으로 본편 삭제 영상을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된 영상은 동주와 몽규, 그리고 그들과 함께 문예지를 만들며 우정을 쌓은 친구 강처중이 묶고 있는 하숙방에 일본경찰들이 왔다간 흔적으로 가득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틀에 한번 꼴로 특고 형사들이 와서 다 뒤져갔어 니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댕기는 거니?”라며 걱정하는 강처중에게 몽규는 “짐 정리 한 번 하려 그랬어”라는 농담을 던지며 담담한 척 하지만 수심이 가득하다. 방 정리를 하던 중 동주는 급히 벽 틈 사이에서 자신의 시가 적힌 원고를 찾고 몽규는 “얼른 필사해 놔”라며 강처중에게 숨길 곳까지 알아봐달라고 한다. 이번 공개된 영상에서는 한글로는 시를 쓸 수 없었던 일제 시대의 암울한 현실과 일본경찰들의 철통 같은 감시로 뼈저린 좌절을 맛보면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동주와 몽규의 모습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평생을 함께 한 오랜 벗 윤동주와 송몽규, 두 사람이 어떻게 시대를 이겨냈고, 그 시가 어떻게 이 땅에 남았는지 그 과정을 정중하게 영화에 담고 싶었다”며 시보다 찬란했던 두 청춘의 모습을 진심을 다해 담아낸 이준익 감독의 말처럼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잊혀지지 않을 진한 여운을 선사한다.    
353    윤동주와 그를 빛내게 해준 <<흰 그림자>>들 댓글:  조회:5789  추천:0  2016-02-23
▲ 영화 포스터     영화 에서는 윤동주 역을 맡은 강하늘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독백처럼 동주의 시들을 틈틈이 읽어준다. 영화를 보는 내내 흑백의 짙은 우수 속에 주옥같은 명시들을 감상하는 맛이 제법 쏠쏠했다. 동주의 시는 천천히 읽어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영화에서 맨 처음 등장하는 시가 '흰 그림자'다.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하루 종일 시든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땅검의 옮겨지는 발자취 소리.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던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 고장으로 돌려보내면 거리 모퉁이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 내 모든 것을 돌려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황혼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 '흰 그림자' 전문 윤동주의 '흰 그림자'로 살아간 한 사람이 있다. 그는 고 백영 정병욱(白影 鄭炳昱, 1922~1982)이다. 윤동주가 세상에 '시인'으로 알려지기까지에는 '흰 그림자(白影)' 정병욱 박사의 노력이 가히 절대적이었다. 영화 에는 등장하지 않아 그 이름 석자를 여기 한 줄 크레디트로 올리려 한다. 윤동주의 흰 그림자로 살아간 사람 ▲ 광양시 진월면 망덕길 249. 정병욱의 선친이 양조장을 경영한 1920년대 점포 양식의 건축물인데다 윤동주의 시를 보관한 곳이다.     경남 하동 출신 정병욱은 서울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국어국문학자다. 한국고전문학 연구와 판소리 연구에 출중한 업적을 남겼다. 특히 발행인 고 한창기 선생과 함께 판소리 감상회를 개최, 70년대 명창들의 완창을 그대로 채록하여 LP판을 발간하기도 했다. '대접받지 못한' 판소리를 학문 연구의 대상으로 당당히 끌어올린 장본인이다. 정병욱은 하동에서 태어나 경남 남해와 전남 광양 망덕 포구에서 자란 적이 있다. 전남 광양시 진월면 망덕길 249번지에 단장된 빈 가옥 한 채. 이 집은 2007년도에 등록문화재 341호로 지정이 됐다. 일제 강점기 한글 사용이 금지된 시기에 민족시인 윤동주의 한글 유고를 보관한 공로(?)로 문화재가 된 것이다. 정병욱의 연희전문 학창시절 망덕 포구의 이 가옥은 그의 선친께서 당시 양조장을 경영했던 곳이기도 하다. 연희전문 시절 선배 윤동주와 후배 정병욱은 기숙사에서 같이 생활했고, 기숙사를 나와서 하숙할 때도 함께 살았던 적이 있다. 연전 졸업 무렵 윤동주는 졸업 기념으로 시집을 내려고 18편을 추려 시집 머리에 쓸 내용도 첨부하여 3부를 필사한다. 이때 시집의 머리말로 준비한 내용이 이른바 '서시'다. 한 부는 연희전문 교수였던 이양하에게, 또 한 부는 본인이, 그리고 마지막 한 부는 연희전문 후배 정병욱에게 맡긴다. 안타깝게도 동주 본인의 시집도, 이양하 교수에게 맡긴 시집도 사라졌다. 다만 정병욱이 보관한 시편들만 이 등록문화재 431호에서 잘 보관되어 있다가 오늘날 우리에게 시를 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정병욱은 일제 강점기 막바지에 징병으로 끌려가기 전 자신이 보관해오던 윤동주의 시 원고를 고향의 어머니께 부탁하여 보관하게 하였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성씨를 새로 만들고(創氏), 이름을 바꾸고(改名), 모국어까지 사용 못하는 암울한 시기에 우리 글로 새겨진 원고를 보관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직접 쓴 필사본 세 부 중 한 부만 살아남았다 ▲ 정병욱이 보관한 원고의 겉표지 시집 제목 라고 적고, 다른 쪽은 정병욱 형앞에 윤동주 보낸다고(증) 적혀있다. ⓒ 연세대학교 윤동주 기념사업회   책 머리에 실을 '서시' 외에 보관된 시 18편. 다시 적어 봐도 대단한 시편들이다. '자화상', '소년', '눈 오는 지도', '돌아와 보는 밤', '병원', '새로운 길', '간판 없는 거리', '태초의 아침', '또 태초의 아침', '새벽이 올 때까지', '무서운 시간', '십자가', '바람이 불어', '슬픈 족속', '눈 감고 간다', '또 다른 고향', '길', '별 헤는 밤'. 이 시들이 사라졌다면 우린 윤동주를 알고 있을까? 얼마나 중요한 시편들인지를 여러 통계들이 말해준다. 한국 현대시 100주년을 맞았던 2007년도에 문인 단체들은 시인들을 대상으로 좋아하는 우리 시 10편을 조사했다. 유일하게 윤동주만이 10위 안에 두 편의 시를 올렸는데, 바로 보관된 '서시'와 '별 헤는 밤'이었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시 설문조사에서도 늘 앞뒤를 다투는 두 편의 시다. 1920년대 점포 주택이라는 건축적 특성도 감안했지만, 그런 시들을 안전하게 보관해준 가옥이기에 등록문화재 대접도 당연하지 않은가. 지워진 원래 제목 ▲ 빨간 원 안에 '병원(病院)'의 흔적 정병욱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제목을 처음에는 윤동주가 '병원'으로 적었다가 지웠다고 증언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시집 제목이다. 영화 마지막에 동주의 일본 유학시절 영문과 교수님 친구의 딸로 등장하는 쿠미와의 대화가 아직도 귓전에 남는다. 시 제목이 뭐냐는 질문에 동주가 대답한다. "하늘과 바람과 구름과... (침묵이 흐르다 한참 후에 발음되는) ...시!" 그 대화로 영화는 끝나고 바로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그 여운 탓인지 관객은 아무도 일어서지 않고 크레디트를 쳐다본다. 드문 일이다. 모든 자막들이 다 올라갈 때까지 나도 관객들 속에 앉아 있었다. '서시'에 등장하는 시어들. '하늘', '바람', '별'이다. 우주를 형성하는 상징들이다. 자연현상의 절대성을 갖는 경외의 대상으로 형성된 시어들이다. 우주의 상징들은 시집의 머릿말이 되었고, 자신의 시 18편이 그와 동격이라는 의미로 나란히 나열돼 마지막에 '시'라고 마침을 했다. 우주현상과 같이 취급하고자 한 그 만의 시집 명명법이었으리라. 윤동주가 첫 시집 이름에 최상의 자부심을 담은 셈이다. 그 의미를 안 이준익 감독은 그 대목에서 '시' 앞에 그렇게 큰 '쉼'을 연출했을 것이다. 고 정병욱의 증언에 의하면, 원래 시집 제목이 이었다. 원고 표지에도 지웠다 쓴 흔적이 있다. 시 제목이기도 한 은 병든 우리사회를 상징하여 처음에는 그렇게 정한 듯 하다. 그러나 은 지워졌고, 당당하게 자신의 시를 우주현상들과 나란하다고 적었다. 부끄러워하며 '참회'하는 이미지로 가득한 동주가 그처럼 자부심 가득 담아 시집 제목을 다시 고쳐준 '반전'은 우리에겐 큰 행운인지 모른다. 독자로서 고급진 그의 명명이 고맙다. 또 다른 사람들 ▲ '서시' 원고 시집의 제목이 된 시어들을 빨갛게 표시했다. ⓒ 윤동주기념사업회   정병욱과 윤동주의 관계는 여동생 덕희(1931~2015)와 아우 병완(88세)에게도 연결이 된다. 연희전문을 거쳐 서울대를 졸업한 정병욱은 서울대 교수가 되기 전 잠시 부산여고에서 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마침 여동생 덕희는 그 곳 학생이었다. 정병욱은 여고생들에게 교과서에서도 접해보지 못한 영롱한 언어로 된 동주의 시를 들려주었다. 후에 그는 여동생에게 사람을 만나러 가자고 하여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1927~1985, 성균관대 건축과 교수)를 소개해서 결혼을 하게 된다.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윤인석 교수(현 성균관대)가 있다. 학생 신분으로 유명을 달리한 동주에게는 후손이 없어 윤인석은 유족을 대표하는 일에 나설 뿐 아니라, 동주를 기리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이렇게 정병욱은 윤인석의 외삼촌이 됐다. 이제 아우 병완의 사정을 보자. 정병완은 국립도서관 사서였다. 1970년 10월 국립도서관에서 '시인 윤동주 유고전'을 열었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지금은 은퇴하여 경기도 안성에 거주하는 정병완(88)씨의 얘기다. "당시 열람과장을 맡고 있을 때인데, 남산으로 옮기기 전 소공동에서 마지막 행사로 '윤동주 유고전'을 열었죠. 윤동주 서거 25주년, 국립도서관 25주년이 맞아떨어졌어요. 형님이 보관한 원고, 강처중씨가 보관하다 유족에게 맡긴 원고, 윤동주 시인의 여동생 윤혜원씨가 용정서 가져온 원고들을 모아서 함께 전시회를 했습니다. 형님 영향으로 모든 걸 내가 알고 있으니까 기획이 가능했죠. 근데 당시 어떤 일이 있었냐면, 마침 일본 국회도서관 사서인 우지고쯔요시(宇治鄕毅)씨가 무슨 일로 우리 도서관을 방문했었는데, 내가 안내하여 전시내용을 상세히 보고 갔습니다. 윤동주 시에 깊은 관심을 갖더라구요. 윤동주가 독립운동 하다 잡혀 후쿠오카에서 옥사했다고 말했고, 일본 기록이 없다는 얘기도 했죠." 일본으로 간 우지고 쯔요시는 윤동주의 기록을 찾아나섰다. 문서 공개시점에 달하자 기밀 문서들이 나왔다. 영화의 주인공들인 윤동주와 송몽규의 법원 판결문을 찾아서 한국에 전해준 이가 바로 우지고 쯔요시다. 이를 윤일주가 번역하여 1977년 12월호에 "새로 발견된 자료, 순절의 시인 윤동주에 대한 일본 '특고경찰'의 비밀기록"으로 실어, 윤동주의 억울한 죽음의 실상을 처음으로 상세히 알렸다. 우지고와 정병완의 인연의 결과다. 둘은 공교롭게도 사서에서 후에 교수가 되었고, 지금은 각자 은퇴하여 경기도 안성에서, 일본 오끼나와에서 조용히 지내며 가끔 통화를 하기도 한다고 한다. 이렇듯 정병완과 병욱, 덕희, 세 남매는 윤동주와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유족을 제외하면 영화에 등장하는 강처중이나 여기 소개한 정병욱 가족들이야말로 윤동주 시를 다시 살려낸 특별한 분들이 아닐 수 없다. 평생에 한 일 중 가장 자랑스런 일을 꼽으라면 "동주를 알린 일"이라고 말했다. 동주의 시 제목 '흰 그림자'를 의미하는 '백영(白影)'을 호로 사용한 국어국문학자. 영화 크레디트를 대신해 여기 한 줄 이름을 써둔다. 정.병.욱. ▲ 연희전문 시절의 윤동주와 정병욱 정병욱이 2년 후배였지만 둘은 절친하게 지냈다. 특히 소설가 김송씨의 집에서 함께 하숙하기도 했다. ⓒ 윤동주기념사업회      * 참고자료 - 송우혜, (2013년) 푸른역사 - 권오만, (2009년) 소명출판 - 윤동주, (2012년) 문학과 지성사 - 윤동주, (1999년) 민음사 *윤동주 원고 사진판 시집. - 정병욱, 전 9권 (1999년) 신구문화사
352    두번 다시 본 영화 "동주" 댓글:  조회:5033  추천:0  2016-02-23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진한 감동과 울림,ㅡㅡㅡ 만민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의 삶을 최초로 영화화,ㅡ 이름도 언어도 꿈도 허락되지 않았던 1945년, 평생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시인 윤동주와 송몽규의 빛나던 청춘의 이야기,ㅡ ... 영화에는 윤동주가 그렇게 만나고 싶어했고 늘 존경해온 정지용 시인과 친구들인 문익환, 강처중 등도 실제 인물로 등장하는가 하면, 그와 반면에 상상속의 허구된 인물들도 등장, 윤동주와의 녀자친구들이 소개된다. 즉, 서울 연희대를 다니 때 "이여진"이라는 녀자문학도생과의 짧은 만남, 일본으로 건너간후 도꼬에서 만난 "쿠미"라는 일본 녀자문학도생과의 인연... 윤동주의 수감번호는 "475", 송몽규의 수감번호는 "368"이였다는것, 생체실험용으로 이름모를 주사(바닷물로 만든것이라 함)를 맞으며, 수학문제풀이를 하며 관찰대상자로 되다 생을 마감한다... 영화에서 시가 열몇편이 소개되는데 편편마다 영화장면과 잘 어울려 관객들의 맘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스물여덟 청춘의 시절을 그 누구보다 뜨겁게 살아낸 그들의 령혼을 흑백의 화면으로 잘 표현되고 있다...
351    <<368>>,ㅡ 그는 누구인가... 댓글:  조회:4834  추천:0  2016-02-21
민족 시인 윤동주를 그린 영화 '동주' 관람 후기 윤동주 시인은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다. 냉전 시대에 윤동주만은 서로 화목하게 해주고 그 시대를 극복해나가려는 힘을 준다. 암흑 속에서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며 죽는 날까지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랐던 민족시인 윤동주. 시인 앞에 부끄럽지 않게 오늘을 살고 있을까? ‘윤동주’ 시인을 그리워하는 것은 영혼이 아름다운 순수함, 동결된 순수함을 간직한 채 무덤 속에서야 비로소 시인이 된 애처로움, 문학의 암흑 시기에 한글로 쓰인 시를 남기고, 비폭력 평화를 사랑한 시인을 죽어서도 잊지 못하는 이유다. 윤동주 시인을 그린 영화라기보다 송몽규 열사를 그린 영화다. 송몽규 열사의 독립운동을 ‘평등사상’과 ‘혁명’으로 그렸다. 시대적 배경은 같은 민족의 불평등 투쟁이 아니고,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을 내란 ‘혁명’의 좌익 투쟁처럼 비치게 그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은 진실을 가장한 허구인가? 윤동주 시인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아버지가 감옥을 찾았을 때 일본인 간수는 “조국아!”라는 말이 무어냐?”고 물었다. 시인은 매일 창살을 부여잡고 하늘을 보며 ‘조국아!, 조국아!“를 외치며 울었다. 마치 일본을 꾸짖는 듯 눈을 부릅뜬 채 죽어 갔는데, 그의 처절한 조국의 사랑과 외침은 어디 있는지? ”동주“는 시인을 세 번째 죽인 영화다. 한번은 일본이 생체실험으로 감옥에서 죽였고 두 번째는 일본이 70년째 ”어떻게 죽였다.“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 있다. 세 번째는 ‘동주의 나라 사랑과 독립운동을 송몽규의 그림자로 남기려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의 죽음에 70년 동안 침묵해 온 우리의 모습을 다시 보는 듯하여 그리움으로만 간직하는 것이 나을 뻔했다. ‘동주’(수감번호 475)에 대한 그리움을 ‘몽규’(수감번호 368)의 그림자로 남기려는 그들은 누구인가? 무서운 시간 윤동주 / 시인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사라져 못찾을뻔했던 두분의 묘지를 찾아내다...============= ▲ 영화 포스터 의 송몽규 캐릭터 포스터. 오늘(3월 7일)은 송몽규의 기일이다.     [기획] 71년 전 오늘, '청년문사' 송몽규가 떠났다 영화 개봉 전날이었던 2월 16일은 윤동주 사망 71주년 되는 날이었다. 또 다른 주인공 송몽규의 기일은 오늘(3월 7일)이다. 오늘로서 사망 71주년이 된다. 1945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한 사람은 259명. 이런 사망자 수치는 전쟁 막바지로 치닫는 특수한 상황을 반영한다. 일본인 고오네 에이치(鴻農映二)씨는 1980년 10월호에 "윤동주, 그 죽음의 수수께끼"라는 글을 통해 윤동주는 '생체실험'의 대상이었으며 주사를 맞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영화에서도 그렇게 그려졌다.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에 사망한다. 우리 나이 스물아홉 청년이 이국땅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사망하자 유족들이 일본까지 가서 시신을 확인한다. 여기까지가 영화에서 전해주는 이야기다. 그들의 서럽고도 애절한 이야기와 서로 맞닿은 인연들은 사망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전보 한 장으로 전해진 윤동주·송몽규의 사망통보 ▲ 윤동주의 장례식 윤동주가 어린시절 뛰놀던 마당에서 윤동주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영정 왼쪽 첫 번째 사람이 문재린 목사(문익환의 부친)다. 사진에는 장례식 날짜와 사망 날짜, 29세에 사망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사업회   사망통보는 전보 한 장이 전부였다. 윤동주 장례는 3월 6일 치러진다. 약 20일이 걸렸다. 용정서 대한해협을 건너 후쿠오카 형무소까지 찾아가 시신을 인계받고, 현지에서 화장하여 다시 돌아와야 했으니…. 문익환의 부친인 문재린 목사의 주관으로 어릴 때 뛰놀던 마당에서 장례식이 열렸음을 흑백사진 한 장이 우리에게 전해준다. 장지에서는 동주의 시 두 편이 낭독되었다고 한다. 연희전문 시절 몽규와 함께 지를 편집하는 장면이 영화에 나오는데, 그때 발간된 에 실린 동주의 시 '자화상'과 '새로운 길'을 마지막 가는 길의 윤동주에게 들려준 것이다. 낭독된 시를 지은 한 청춘을 떠나보내는 자리. 망자는 장례 참석자들의 자식이고 손자였으며, 조카였고 동생이었다. 친구였으며, 형이고 오빠였다. 그 당시를 떠올리며 '자화상'을 다시 읽어보자. 윤동주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가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이 시를 듣는 장지의 사람들. 거기 애도하는 그분들 저마다 흐느끼며 우는 소리가 다시 들리는 듯하다. 장례가 치러지는 시간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는 송몽규가 사경을 헤맨다. 송몽규의 부모는 자식이 죽어가는 것을 알 수 없으니, 조카 동주의 장례식에서 자식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며 조카를 애도하였으리라. 청년 동주를 묻고, 그 이튿날 3월 7일. 송몽규가 그해의 후쿠오카 감옥 사망자 259명의 명단에 오른다. 그 이후 절차는 동주와 똑같다. 당시 조선어 교사였던 송몽규의 부친 송창희는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조카 희규를 데리고 가서 동주와 같은 절차를 밟아야 했다. 이들은 화장터에서 유골을 수습하면서 뼛가루 일부가 땅에 떨어지자, 단 한 줌도 일본 땅에 남기지 않겠다며 흙까지 쓸어서 하얀 사기 단지에 담아서 가져 왔다고 한다. 의 저자 송우혜는 이러한 증언들을 채록하여 책에 기록한다. 청년문사 송몽규지묘와 시인 윤동주지묘 송몽규의 장례도 끝났다. 봄이 되자 송몽규 집안에서 "청년문사 송몽규지묘"를 5월 14일에, 윤동주 집안에서도 6월에 "시인 윤동주지묘"를 각각 세운다. 동주의 비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사용하려고 준비해둔 돌이었는데 손자가 먼저 묘비로 사용했다. '청년문사 송몽규', '시인 윤동주' 모두 당시 관습으로는 흔한 묘비명이 아니다. 직업이나 관직을 가져볼 여유도 없이 사라진 영혼을 달래주려는 가족들의 애도와 사랑이 이 묘비에 묻어있다. 죽은 아들에게, 죽은 손자에게 그들은 아무것도 줄 게 없었다. 시인! 청년문사! 그 칭호밖에는…. ▲ 윤동주의 묘비 '시인' 윤동주의 묘. 윤동주는 죽어서 가족들에게 맨 먼저 '시인'이 되었다. 윤동주의 묘비를 세우고 유가족들이 함께 했다. ⓒ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사업회   윤동주 묘비 뒷면엔 태어나고 자란 내력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나이 스물아홉. 그 재질 가히 당세에 쓰일 만하여 시로써 장차 울려 퍼질 만했는데, 춘풍무정하여 꽃이 피고도 열매를 맺지 못하니, 아아! 아깝도다." 송몽규의 묘비에도 비슷하게 슬퍼하는 문구와 짧은 생을 기록했다. 유족들은 후에 실종될지도 모를 묘지를 지켜달라는 소망까지도 비석에 담았는지 모른다. 윤동주의 묘지는 용정의 교회 묘지 구역이고, 송몽규는 가족 묘역이었다. 그러나 두 분의 묘지는 한때 찾아주는 사람이 없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윤동주의 동생 일주가 이북을 거쳐 19세의 나이로 홀로 월남했으며, 여동생도 나중에 들어오고, 동생 광주는 죽었다. 그리고 동주에게는 후손이 없잖은가? 송몽규의 아버지 송창희 선생은 현지에서 교장직을 마치고 1948년 나머지 가족을 이끌고 고향 함경도로 들어갔다. 묘지 둘은 이제 직접 돌봐줄 유가족이 없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상당 기간 중국 땅은 갈 수 없는 곳이었다. 윤동주 연구가들도 어렵게 입국하여 묘지를 찾아 나섰다. 역사학자이자 소설가인 송우혜도 자료를 찾아 나섰고, 증언을 채록했다. 그러나 위치를 쉽게 찾지 못했다. 연구가들은 윤동주 묘지가 '동산교회 묘지'라는 증언을 듣고서 찾아 나섰는데 혼란을 겪어야만 했다. 당시 용정에는 동산교회, 토성교회, 중앙교회가 있었고, 각각의 교회마다 교회 묘지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윤동주의 묘지는 찾고 보니 중앙교회의 묘지 구역 중에 '동산'(산 이름)에 있었다. 산 이름과 '동산교회'가 겹친 탓이었다. 간신히 찾은 묘지, 이제 평안히 쉬시기를... ▲ 윤동주 묘지 발견 일본에서 윤동주 연구를 해오던 와세다 대학의 오무라 교수는 1985년 동주의 묘지를 찾아 이를 국내 학계에 알렸다. ⓒ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사업회   한국인들의 중국 입국이 쉽지 않은 1985년도에 일본인 윤동주 연구가 오무라 교수가 이런 과정을 거쳐 동주의 묘지 위치를 찾았다. 그리고 1988년도에 송우혜는 윤동주 관련한 기념비적인 저서 을 처음 발간한다. 송우혜는 송몽규의 조카다. 거기다 송몽규의 묘지 역시 찾기가 어려웠다. 함경도로 갔으니 가족증언도 불가능했다. 다만 어디선가 묘비를 본 적이 있다는 현지 어르신들의 얘기가 있을 뿐이었다. 1990년 들어서 윤동주 기념사업회가 용정을 찾아가고, 윤동주의 유족들도 방문했다. 이 시기부터 송몽규의 묘지에 관심을 가지면서 현지 사람들의 도움으로 송몽규의 묘지를 수소문한다. 어렵게 현지 노인회를 중심으로 쓰러져 나뒹구는 송몽규 묘비를 찾았다. 따로 쓰러져있는 묘비 인근에는 여러 개의 묘지가 그룹으로 있었다. 과연 어떤 묘가 송몽규의 묘지일까? 별수 없이 묘비 근처의 묘를 하나씩 파헤쳐 매장 상태를 확인했다. 믿을 건 의 기록이었다. 다행히 '부친이 뼛가루를 담아온 하얀 사기 단지'가 들어있는 묘를 초반에 찾아냈다. 거기다 후쿠오카에서 화장터 땅바닥에 떨어진 단 한 줌까지도 '쓸어 담아온 흙모래가 섞인 뼛가루' 또한 거기 있었다. 그때가 1990년이다. ▲ 청년문사와 시인 '청년문사 송몽규지묘'와 '시인 윤동주지묘'. 떨어져 있지만 같은 묘역에 안장된 두 분의 묘지. 이제는 용정 현지인들이 들러 참배도 하고 조선족 학생들도 더러 찾아온다. 묘지석도 새롭게 단장된 모습이다. 왼쪽 송몽규의 묘지석에는 '용정중학교 동창회'가 적혀있다. ⓒ 연변윤동주연구회   그해 청명절 송몽규의 묘를 수습하여 윤동주의 묘지 구역으로 이전하고 비도 옮겼다. 그러한 일들은 모두 당시 용정중학교 교장이 나섰다. 지금은 윤동주 묘를 찾아온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송몽규의 묘지도 들르게 된다. 영화에서 송몽규 역을 맡은 박정민도 촬영 중에 일부러 이 묘지를 찾아 참배한 적이 있다고 시사회 때 밝혔다. 묘지를 찾아서인가?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광복절에 윤동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1995년도에는 송몽규에게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한다. 두 훈장 등급은 독립장 다음으로 애국장 순이다. 두 분 돌아가신 지 71년. 우린 영화 와 함께 71주년을 기린다. 그리고 내년이면 두 분 태어난 지 100주년이다! '청년문사'와 '시인'은 지하에서 그간의 과정과 모습들을 전부 지켜봤고, 또 보리라. 다시금 처음에 묘비를 세운 유가족들의 혜안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묘비가 없었다면, 우린 두 분을 기릴 수 있는 중요한 포인트 한 곳을 격랑의 현대사 소용돌이 안에 매몰시킬 뻔했다. 두 분 부디 평안하시기를…. ▲ 영화 후쿠오카 형무소 배경의 영화 포스터
350    큰 어른이 그립다... 댓글:  조회:4703  추천:0  2016-02-21
    요사이 우리 사회에 큰 어른이 없다.   어른이 있어야 잘못하는 사람에게는 바른 말도 하고, 채찍질도 해서 올 바른 길을 가도록 충고 할텐데 바른 말 하는 어른이 없으니 사회가 점점 혼탁해 지는 것이다.   바른 말을 해도 이해 관계에 얽히지 않고, 중심(中心 )에 서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말아야 하는데, 자신의 생각과 이익에 반 한다 해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말은 말이 아니고, 올바른 충고가 아니다. 가까운 사람 일수록 잘 한 것은 잘 한 것이고, 잘 못한 것은 분명히 잘 못되었다고 지적해야 한다. 지적을 해도 너무 감정에 치우쳐 충고하면 상대의 감정만 상하고 적을 만들기 쉽다. 이러한 말은 사이만 더 벌어져서 서로가 마음만 아프고 결국 상대에게 해만 줄 뿐이다.   어른은 이 사회의 거울이요. 본 보기다. 그래서 어른은 어른다워야 하는데, 어른들 스스로가 어른 대접 받기를 포기하는 것 같다. 전철을 타도 버스를 타도 손자뻘 되는 아이들은 자리를 양보 할줄 모르고, 어른들 역시 잘못 된 것을 지적하지도 않는다. 잘못 말 했다가는 망신만 당하고 젊은이 들에게 맞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어른은 어른대로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인격도 도둑맞고 양심도 도둑맞고 그래서 이제는 올바른 인격과 양심을 찾기가 어렵다. 비인격자. 비양심자 가 판을 치고 있지만, 문제는 자기가 하는 행위에 대해서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느데 더 큰 문제가 있다.   황금만능시대! 돈만 있으면 뭐든지 할수있고, 돈이 최고라는 이 천한 사고 방식을 어른들이 잘 못가르쳤기 때문에 늙어서는 자신이 자식들 한테까지 돈 때문에 설움받고, 결국에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노인들을 우리는 많이 볼수있다. 사람들은 일찍부터 우리나라를 일컬어 '동방예의지국'이라했다.   헌데 이 정신은 다 어디로 가고 세상이 이렇게 험악 해 졌단말인가? 항상 힘 있는자 가진자가 말썽인데, 지도층에 있는분 들부터 좀 겸손하고, 솔직 할 수 있도록 어른들이 올바른 충고를 해야하고, 힘 없는자 갖지 못한자에게는 힘과 용기를 줄 수 있는 참 어른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것이 인생인데, 이 세상을 하직 할때는 자신의 모든것을 사회에 환원 하겠다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고 , 평소 자식들 앞에서도 이러한 자신의 인생 철학을 심어줘야한다. " 자식들에게 낚시대 정도는 사준 다음, 낚시 하는 법만 가르쳐 주면 되지, 내가 이렇게 고생을 했으니 유산이라도 많이 물려 주어 자식들 만이는 절대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그 마음이 결국에는 자식들의 장래까지 망치게 되는 예를 우리는 수없이 보고 있는 것이다.   어디 자식들의 장래만 망치는가! 사회의 위화감을 조성하고, 빈부 격차를 심화시키며, 이렇게 사회가 혼탁해진 그 근본 원인이 되고 있는것이다. 어른부터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는것이 정말 값진 인생인지! 죽은 후에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참 훌륭한 어른 이었다고 칭송하는 소리를 들을것인가 ! 아니면, 그 영감 평소 돈만 알고, 이웃 한번 돌아보지 않더니 잘 죽었다고 비웃는 소리를 들을것인가! 참 어른은 무엇보다 잘 죽는 연습을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할것 같다.   어른들이 어른다운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다음 세대들에게 약점 잡히는 일을 절대하지 말아야 하고, 모든 면에 모범을 보이면서,그 값진 삶의 경험담을 후배들에게 잘 교육하여 돈 보다 윤리와 도덕이 우선하는 사회를 건설하는데 앞장 섰을때 어른이 제대로 대접받고, 나라도 굳건한 반석위에 똑바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요즘, ...문제, ....문제, ...사건, ...편가르기, 기타 등등을 보면서 우리 사회에 큰 어른이 없음을 실감하며 정신문화적으로 엄청난 국가적 손해가 나고 있음을 볼 수있다.   평소 나의 정신수양으로 쓰고 있는 '내탓네덕'정신 운동이 국민운동으로 필요할 때인가?... ...큰 어른들이 무척 그리운 토요일 새벽이다....   -최인식-   ///////////////////////////////////////////////////////////////////////////////////////////////////////////////////////////////////////////
349    어제, 영화 "동주" 보다... 댓글:  조회:4449  추천:0  2016-02-21
  영화 "동주" 보다...       강하늘, 박정민 두 배우와 이준익 감독이 연출한 영화'동주'.   인생작이라 할가 윤동주 시인, 송몽규 문사를 잘 연기.       ​               영화 '동주'는 여운이 많이 남는 영화, 지루함 없이 몰입해서 본 영화...         ​         영화는 흑백영화.   그렇다. 이 영화는 꼭 흑백이어야만 했고, 어두웠던 시대에 밝게 빛나던 한점의 촛불 - 시인 윤동주를 잘 그렸다.               윤동주 친구이자 사촌이었던 송몽규, 우리가 잘 모르거나 또한 잊혀가는 송몽규 문사,-                                                                      그의들이 서로 대립을 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하지만                                                                          서로를 지켜주고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더군요.             영화속 정지용시인의 대사가 참 와 닿더군요.   "부끄러움을 아는건 부끄러운게 아니야   부끄러운 걸 모르는게 진짜 부끄러운 거지..."         ​               영화'동주' 관람 추천 ★★★★★     윤동주시인의 시 한편으로 마무리하면서...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영화 뒷얘기--- 윤동주 시인을 도와준 일본 녀자 쿠미의 행방을 묻는 질문;ㅡ 이에 이준익감독은 “이 영화는 70%가 사실에 근거한 것”, "다만 쿠미는 허구 인물이다. 하지만 다카마쓰 교수는 실존 인물”이라고 밝혔다. 이어 “이 영화를 찍으면서 두 가지 입체성을 다루려고 했다”며 “군국주의를 정당화하려는 모순과 부도덕을 비판하는 것이 첫 번째, 그리고 일본의 양심 있는 사람들에 대해 다루는 것이 두 번째”라고 설명했다...  
348    말은 사라지지만 글자는 영원히 남는다... 댓글:  조회:4348  추천:0  2016-02-20
‘감독님’에서 ‘미용실 원장님’까지 줄줄이 거론하며 시간을 늘이는 배우들의 수상소감이 마뜩한 것은 우리만의 일이 아닌 듯 하다. ‘고마운 사람 명단 자막으로’ 새 규칙 28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리는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OOO에게 감사한다”며 이름만 나열하는 수상소감이 사라질 전망이다. 데일리 메일 등 외신에 따르면 아카데미협회는 수상자들이 신세진 사람들을 일일이 거명하며 감사하는 수상소감을 금지하는 새로운 시상식 규칙을 제정했다. 대신 수상자가 미리 제출한 ‘고마운 사람 명단’을 뒤편 스크린을 통해 자막으로 내보내기로 했다. “말은 사라지지만 글자는 영원히 남는다”는 게 공식적인 이유. 실제로는 길고 지루한 수상소감을 방지하며 TV 시청률을 의식한 조치라는 평이다. 수상 소감 시간 역시 45초로 제한키로 했다.  이와 함께 14일(현지시간) 런던 로열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영국영화TV예술아카데미(BAFTA)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수상 소감이 화제가 되고 있다.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로 ‘BAFTA에서 최초의 남우주연상을 차지한 디캐프리오는 “청소년 시절 환경이 그다지 좋지 않은 이스트 로스앤젤레스에서 자랐는데 어머니가 매일 세 시간씩 운전해 다른 지역 학교로 데려다주셨다. 그녀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다”며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을 드러냈다. 그는 또 “오늘이 어머니 생신이다. 사랑한다”며 입으로 ‘쪽’ 소리를 냈다.  이날 ‘잡스’로 여우조연상을 받은 케이트 윈슬렛 역시 “자신을 의심하는 모든 젊은 여성들’에게 상을 바친다”는 수상 소감으로 눈길을 끌었다. 그는 “한때 ‘뚱뚱한 여자’ 배역을 맡으라는 말을 들었다”면서 “지금의 나를 보세요”라고 외쳤다. [중앙일보] “OO감독님·OO선배님 감사합니다”…아카데미, 이런 수상소감 금지
347    <<475>>는 바닷물 주사로 생체실험 당하다... 댓글:  조회:5590  추천:0  2016-02-19
영화 개봉일의 비밀   이준익 감독 연출의 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이름을 알고 있는 시인 윤동주의 이야기를 다뤘다. 공식 개봉일은 17일이지만, 16일에는 특별시사회가 열리기도 했다.   윤동주의 기일이 바로 2월 16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 날짜의 의미가 새삼 각별하게 느껴진다.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SBS 의 추적에 따르면, 일본군이 진행한 생체실험에 따른 죽음이었다. 후쿠오카 앞바다의 바닷물을 주사로 혈관에 주입하는 등 생리식염수 연구를 실행한 결과였다.   윤동주의 이야기는 한국인이라면 중등 교육과정에서 한번쯤 교육받는다.   서울대 국문학 교수를 지낸 정병욱 박사가 쓴 는 수업시간에 반드시 배우는 단편 에세이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학생 시절부터 윤동주의 시를 배우고, 정 박사의 글을 통해 윤동주의 외모와 성격을 짐작해볼 수 있었다. 윤동주의 유고 는 전남 광양시 진월면 소재의 정 박사의 가옥에서 일제강점기 말 8년간 보관됐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윤동주는 한국인에게 매우 친숙한 시인이다. 정갈하면서도 고뇌가 그대로 묻어나오는 표현들, 그럴수록 강렬해지는 주제의식 등은 윤동주의 상징이기도 하다. 정 박사의 글을 통해서는 평소 깔끔하면서도 나이를 가리지 않고 상대방에게 예의를 다 하는 윤동주의 삶을 확인해볼 수 있었다.   이준익 감독의 는 5억 원 가량의 적은 예산을 투입한 흑백 영화이다. 흑백의 손길이기에 윤동주(강하늘 분)와 고종사촌 형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송몽규(박정민 분)의 삶은 저만치 가깝게 느껴진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고나 할까.   식민지의 청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강처중·정병욱 등 윤동주와 가까웠던 친구들의 회고에 따르면 윤동주는 옷차림과 신발도 깨끗하게 관리하는 등 깔끔한 성격이었으며, 좀처럼 말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부탁을 잘 거절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이런 성격은 술을 마셨을 때에도 유지가 돼서, 정 박사의 회고에 따르면 술에 취해도 남의 뒷얘기를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나이가 어린 후배였음에도 정 박사에게는 '정 형'이라고 정중한 존댓말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시인 특유의 고집과 자부심이 있어서 자신에 글에 대한 참견은 참지 못했다고 한다. 시를 쓰는 데에 있어서도 긴 시간 동안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완성한 뒤에야 사람들에게 알렸다고 한다.   는 윤동주와 송몽규를 전면에 등장시킨다. 태어나보니 차별받는 피식민지의 백성이었다. 어떤 꿈을 꾸더라도 시대는 청년들을 짓뭉개고 있었다. 무엇을 하든 일제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문제는 "어떻게"였던 것이다.         두 사람의 성격은 차이가 크다. 윤동주는 섬세하고 생각이 깊었다. 송몽규는 격정적이었으며 고민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성격이었다.   영화에서는 두 사람이 문학에 대한 격론을 벌인다. 여기서 송몽규가 보이는 태도는 카프(KARF) 문학의 태도와 유사하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문학은 '도구'이다. 식민지 백성으로서의 현실을 자각하고 제국주의를 타도하게끔 할 수 있도록 의지를 불어넣어야 했다.   송몽규는 그런 의미에서 윤동주의 태도를 비판한다. 하지만 문학의 가치에 충실하고도 얼마든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시대를 담을 수 있다고 여기는 윤동주도 쉽게 자신의 주장을 버리지 않는다.   이렇듯 두 사람은 서로 달랐다. 하지만 다를 수만은 없었다. 결국 같은 현실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들은 마음을 나누는 동지였기 때문이다. 방향은 다소 달랐더라도 그들은 함께였다.   담담하다, 그래서 더 슬프다   그들은 그렇게 죽음의 순간까지 같은 현실을 맞이한다. 분명히 서로 다른 삶을 택했지만, 같은 비극을 맞이한다. 는 담담한 시선으로 그 과정을 보여준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욱 슬프다.   거기에 는 윤동주가 순간순간 맞이하는 선택의 순간, 그리고 이런저런 감정을 느끼는 순간 적절하게 배우 강하늘의 목소리로 윤동주의 시를 나레이션한다. 윤동주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열어나갈 수 있는 훌륭한 선택이었다.       이준익 감독은 의 제작 과정에서 상업성을 배제했다. 당초 윤동주 역 물망에 올랐던 이도 유아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유아인의 인지도로 인해 흥행한다면, 윤동주에 대한 몰입에 오히려 방해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드라마 후반부에서 장그래를 사려깊게 배려하는 장백기 역을 훌륭하게 소화한 강하늘이 선택된 것으로 보인다.   윤동주의 상징은 바로 그 '사려깊음'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윤동주는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장백기가 그랬다. 장그래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표현한 바 없었다. 이후 장그래를 이해하면서도 많은 이야기를 하기보다 서서히 다가서는 방향을 택한다.   이준익 감독의 몰입도는 그야말로 대단하다. 꿈을 미처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채 사망한 윤동주의 넋을 위로하며 존경의 뜻을 바치는 감독의 의도는 만인에게 전해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에서 세대 간 화해를 시도했듯이, 에서는 주인공에 대한 존경의 표현과 함께 모처럼 마음의 정화를 느낄 수 있도록 시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쉽게 씌여진 시는 없다. 그렇듯 쉽게 만들어지는 영화도 없을 것이다. 는 쉽게 만들지 않기 위해 고뇌하고 고뇌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정화한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346    기억해야 할 죽음을 위하여 댓글:  조회:5909  추천:0  2016-02-19
영화 '동주'의 가제가 '시인'이었던 때, 그러니까 윤동주 시인의 생애를 스크린에 옮길 첫 프로젝트가 막 발을 떼던 당시 이 영화의 연출을 과연 누가 맡게 될지에 대해 영화계의 관심은 뜨거웠다. 영화 '러시안소설'과 '조류인간' 등을 통해 문학과 영화의 결합을 성공적으로 이뤄왔던 신연식 감독이 제작에 나선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졌지만 누가 이 영화의 메가폰을 잡을지에 대해선 윤곽이 드러나지 않던 시기였다. 영화사와 문학사에서 큰 의미를 지니게 될 작품인만큼 안팎의 관심이 큰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영화의 예산은 5억여 원이었다. 100억 원 이상 대규모 영화들이 주가 돼 온 충무로에서 이 작은 예산으로 '국민 시인' 윤동주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낼 지도 관건이었다. 영화 '왕의 남자' '소원' '사도' 등을 통해 상업 영화계 대표 흥행 감독의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준익의 합류는 그래서 더 의외로 다가왔다. 사극 명장으로 알려진 이 감독과 저예산 영화의 만남이 어떤 결과를 빚어낼지가 '동주'를 향한 다음 관심사였다. 이에 더해 톱배우보단 라이징스타의 입지에 더 가까운 강하늘, 박정민이 각각 윤동주와 그의 절친한 친구 송몽규를 연기하게 된 것도 호기심에 불을 지폈다. 영화 '동주'(감독 이준익, 제작 ㈜루스이소니도스)는 이름도, 언어도, 꿈도 허락되지 않았던 1945년, 평생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시인 윤동주(강하늘 분)와 독립운동가 송몽규(박정민 분)의 빛나던 청춘을 담았다. 애초 윤동주 시인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라는 사실이 주로 알려졌지만 공개된 영화 속 또 다른 주인공이 바로 윤동주의 친구이자 외사촌형제인 송몽규다. 깊은 신뢰와 애정을 바탕으로 서로 삶에 자극을 주고 받는 두 사람의 관계를 이준익 감독은 특유의 깊은 시선으로 포착해냈다.   영화의 개봉을 맞아 조이뉴스24와 만난 이준익 감독은 신연식 감독의 글을 바탕으로 함께 시나리오를 각색해나간 과정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그는 "문학적인 방향으로 함께 각색하며 나의 스타일로 많은 부분을 전환해가기도 했다"며 "신연식 감독이 지닌 문학 소년의 면모가 '동주'라는 영화를 만드는 데 적합했다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신연식 감독이 썼으니 이런 문학적 향기가 영화의 도처에 묻어나는 것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그의 설명대로, '동주'를 다른 전기적 영화와 구분짓게 만드는 것은 인물들의 생애와 어우러져 주요 장면들을 빛내는 윤동주의 대표 작품들이다. 이준익 감독은 생활감이 묻어나는 시인의 시어들, 일상 속에서 스스로를 가다듬었던 시인의 철학에 집중했다. "윤동주 시인의 시가 생활속에 우러나온 것을 진실되게 시어로 다듬어 표현한다는 점은 정말 최고인 것 같아요. 과도하게 관념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서 더 오래 남아있는 것 같고요. 저는 생활의 질감이 있는 영화들이 좋아요. 지나치게 픽션을 추구하면서 스펙터클이 있는 영화보단, 생활감이 좋죠. 극 중 동주가 일본 병사들에 의해 머리를 깎이고 교수의 집에서 쌀밥을 놓고 기도하는 장면 같은 순간이요." 윤동주에게 시가 세상을 향한 창이었다면, 이준익 감독에겐 그림이 비슷한 의미였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던 이 감독은 "어려서는 시를 좋아했었다"며 "이제 시의 향기를 억지로 떠올려야만 하는 인간이 됐지만, 10대 시절엔 백일장에서 글을 쓰기도 했다"고 과거를 돌이켰다. 이어 "너무나 부족한 어휘력, 현상을 포착하지 못하는 아둔함이 늘 시 앞에서 부끄러웠던 것 같다"며 "그래서 그림을 그렸다. 시 대신 그림을 그렸던 셈"이라고 고백했다. 일제강점기, 한 치 앞의 미래가 보이지 않았던 칠흑 같은 역사 속에서 윤동주는 시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봤다. 화려한 미사여구를 나열하는 대신, 겪고 느낀 이야기들을 담백하게 풀어내는 미덕이 윤동주의 시 세계를 채운다. 이준익 감독은 "윤동주의 시는 끊임없이 죽음을 준비하는, 솔직한 시인 것 같다"며 "꾸며대지 않고 자신의 죄의식을 고백하는 정직한 마음이 부끄러움이라는 단어로 대표성을 띠고 있다"고 말했다. "극 중 문성근 씨가 연기한 정지용 시인이 말하는 대사가 있어요. '윤 시인,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죠. 제가 윤동주 시인으로부터 배운 부끄러움에 대한 가치가 정지용 시인의 입에서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어요. 그 장면에선 정지용 시인을 뚫어지게 보는 동주의 정지된 얼굴, 그 말을 가슴에 새기려는 윤동주의 표정을 보여주려 했고요." 윤동주의 시 외에, '동주'를 지탱하는 또 하나의 카드는 우정이라는 단어만으론 설명하기 어려운 윤동주와 송몽규의 관계다. '천재 시인'으로만 알려졌던 윤동주지만, 영화가 그린 그의 모습은 보다 인간적이다. 극 중 동주는 욕심도 내지 않았던 신춘문예에 덜컥 당선된 몽규를 보며 가슴 깊이 열등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 열등 의식은 좋은 것이라 생각해요. 윤동주는 끊임없이 '대기만성'이라는 말을 달고 살았어요. 몽규가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이튿날 자신의 시 연표를 작성한다는 내용이 평전에 나오죠. 언젠가 내가 생각하는 시 세계를 증명할 날이 있을 것이라고 18세에 스스로 다짐한 거예요. 10년 간 쓴 시를 남기고, 알 수 없는 주사를 맞고 죽은 것이 윤동주의 생인데, 도쿄제국대학에 떨어지고, 조국을 위해 총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 비교 대상인 몽규에 대한 열등감이 오히려 그의 정신을 변질되지 않게 만든 것 아닐까 싶어요." 높은 예산의 상업 영화를 주로 연출했던 그에게 '동주' 이후 다시 저예산 작업에 나설 계획이 있는지도 물었다. 이준익 감독은 "할 수만 있다면 이런 영화를 계속 찍고 싶은데, 두 가지 문제가 있다"고 특유의 소탈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첫 번째로 내가 실력이 없을 수 있어요. 소가 뒷걸음질치다 쥐 잡듯, 어쩌다 한 번은 잘 만들었다 해도 다음에 어떤 '삑사리'를 낼지 모르니까, 이런 영화를 지속적으로 한다는 장담은 못하죠.(웃음) 두 번째로, 이번 영화의 경우 윤동주라는 사람의 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생각도 해요. 여기에 신연식의 각본, 강하늘과 박정민의 연기, 저예산 영화만 찍어온 베테랑 스태프들, 조단역까지 포진한 연기파 배우들이 있었잖아요. 그 덕분에 이번엔 욕먹지 않는 정도의 영화를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나 역시 작은 예산과 빠듯한 시간은 파이팅 넘치는 순간의 조건이라 생각하기에 이런 작업이 행복해요. (저예산 영화의) 조건을 한탄하지는 않죠." 영화의 언론 배급 시사 후 배우 박정민은 간담회 중 나온 질문에 답하다 눈물을 쏟았었다. 촬영 전 자비를 들여 북간도를 찾아갔다고도 고백한 그는 자신이 연기한 인물 송몽규를 비롯해 이름 없이 죽어가고 묻혀갔던 당시의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드러냈다. 이준익 감독은 "그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멋진 연기가 나온 것"이라고 말하며 "시인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별 헤는 밤'을 좋아할 자격이 있는가. 시인의 마지막을 기억하지 않으면서 시만 좋아한다는 것은, 단 것만 먹고 쓴 것은 뱉겠다는 이야기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한편 '동주'에는 박정민과 강하늘 외에도, 몽규의 아버지 역 김정석, 고등형사 역 김인우, 쿠미 역 최희서, 이여진 역 신윤주 등이 출연한다. 지난 17일 개봉해 상영 중이다. ------------------------ 이준익 감독은 ‘그래서 이후로 아름답게 살았습니다’가 아닌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이 얼마나 아픈 일인가’를 그린다. 이렇게 이준익 감독이 비극에 주목하고, 더 아름다운 비극을 찾고자 하는 이유는 “미안해서”다. 영화 ‘동주’(감독 이준익)는 이름도, 언어도, 꿈도 허락되지 않았던 어둠의 시대 속에서도 시인의 꿈을 품고 살다 간 윤동주(강하늘 분)와 열사 송몽규(박정민 분)의 청년 시절을 정직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2016년 올해는 윤동주 시인과 송몽규 열사가 태어난 지 99년이 되는 해다. 그리고 최근 영화부터 뮤지컬, 심지어 출판계에서도 윤동주 시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심지어 초판본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에 대해 이준익 감독은 “시대가 윤동주를 그리워하는 무의식이 있지 않았을까. 자연발생적이다”라고 말한다. 윤동주가 한국 문학사에서 가지고 있는 의미는 남다르다. 많은 시들이 문학이라는 틀 안에서 하나로 묶여버리기도 하지만, 윤동주 시인의 시는 감히 묶기 어렵다. 일제강점기에 윤동주 외에도 많은 시인이 있었고, 윤동의 시집은 그 시절 출판되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준익 감독은 윤동주에 주목했다. “식민지 후기 사람이라는 것, 더 중요한 것은 일본 본토에서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에 더 큰 의미가 있다. 조선에서 벌어진 일이었다면 또 다른 곳으로 도망갈 수 있었을 테지만 본토라 도망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 안에서 불안과 공포를 안고 신념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었을지 가슴이 아팠다. 그 어린 친구들이 얼마나 떨었을까. 그 떨림의 순간에 윤동주는 ‘쉽게 씌여진 시’를 썼을 테고, 쉽게 시를 써서 부끄럽다고 했다. 이것이 내가 영화를 만들게 한 원동력이다. 오늘날 이 시는 아름다운 시로 남아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됐지만 그 시를 썼던 그 시절은 무서운 순간들이었다.”   처음 이 영화의 제목은 ‘시인’이었다. 하지만 ‘시인 윤동주’, ‘윤동주’가 아닌 ‘동주’로 제목을 선택한 이유는 윤동주 시인이 그 시대를 대변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며, 동주라는 이름이 상징적인 의미로 써지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마치 우리 시대의 ‘동주들’에 대한 이야기처럼 말이다. “제목을 통해 지나치게 뭔가를 강조하는 것은 이 영화에 어울리지 않는다. 수식 하나 없이 그냥 ‘동주’다. 기억하고 싶지 않는 시대를 견뎌냈던, 아름다운 시를 썼던 시인의 영화를 만들면서 뭘 더 강조하고 뭘 더 강요하고 뭘 더 수식하겠나. ‘윤동주’라고 하면 너무 개인을 표상화하는 것 같아서 성도 붙이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동주는 어떤 이름보다 흔한 이름이다. 이름은 원래 고유명사지만 일반명사화 시킨 것이다.” 극중 윤동주보다 더 눈에 띄는 인물은 송몽규다. 윤동주는 아름다운 시라는 결과를 남겼기 때문에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는 반면 송몽규는 결과물이 없어서 기억되지 않는 인물이다. 이 영화의 제목에서조차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동주를 앞세우고 몽규를 표면화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동주를 통해 과정만큼은 누구보다 아름다웠던 인물 송몽규를 만나게 된다. “동주를 통해 몽규를 알아가는 것이 관객들에게 친절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잘 모르는 시대, 이제 아무도 끄집어내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과거, 거기에 모두 기억하는 이름 윤동주를 통해 과정이 아름다웠던 몽규를 소개하는 것이 옳다고 봤다.”   존재조차 낯선 열사 송몽규,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흑백영화와 만주 북간도 사투리 등 이런 생경한 것들은 투박하지만 섬세하다. “인물에 집중하고 사건은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몽규가 어떤 행동들을 했는지는 정확히 보여주지 않는데, 이게 저예산 영화의 장점이면서 한계다. 이 영화는 상업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스펙터클이 없다. 대신 이 영화에서는 윤동주의 시가 스펙터클이다. 시 안에 개인의 욕망과 질투와 시기와 반성과 바람이 모두 담겨 있다.” 붓글씨로 새겨진 농도 짙은 수감번호, 스태프의 이름을 당시 느낌으로 세로로 적어놓는 오프닝 등 영화 속 곳곳에 숨겨진 디테일함에서 감독의 애정이 묻어난다. 특히 흑백영화였기 때문에 ‘빛’을 조절하는데 신경을 많이 썼다. 동주가 작은 방 안에 앉아서 하늘에 매달린 손바닥 만한 창을 바라보는 신이 있다. 어두운 방 안에는 한 줄기 빛이 들어오고, 먼지는 뿌옇게 부유한다. 고요한 이 장면은 관객들의 마음에 오랫동안 남아있을 만한 신이다. “이 장면에 먼지를 떠다니게 하고 싶었다. 이어 ‘내 마음의 탑 / 나는 말없이 탑을 쌓고 있다’로 시작하는 ‘공상’이란 시가 나오는데, 이 장면이 극사실주의적인 화면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명감독, 촬영감독에게 먼지가 보였으면 좋겠다고 주문을 했고, 현장에선 먼지가 잘 안 잡혀서 콩가루를 날려서 의도적으로 포착했다.” 이런 애정은 작품 곳곳뿐만 아니라 배우들을 향한 눈빛에서도 느낄 수 있다. 최근 공개된 제작기 영상에서 그는 배우들을 향해 아빠 미소를 짓기도 하고 눈물을 쏟기도 했다. “몰입했던 순간에 이 젊은 배우들이 동주, 몽규로 보였다. 그 분들이 돌아가셨던 때가 겨우 29살이었다. 이 얼마나 미안한 일인가. 측은지심이 있었다.” “특히 몽규가 맞고 토하는 장면에서는 그걸 보는데 못 참겠더라. ‘컷 오케이’를 해놓고 못 참아서 울었다. 촬영하는 동안 휴지를 달고 살았다. 사실 영화를 찍을 때 내가 가장 많이 우는 편이다. 배우는 한 번만 우는데 나는 배우들이 울 때마다 운다. ‘사도’때도 송강호가 울 때 울고, 유아인이 울 때 또 울고, 전혜진이 울 때 또 울었다.”   이렇게 눈물 많은 이준익 감독은 그동안 많은 사극을 통해 비극을 그려왔다. 그들에 대한 미안함을 바탕으로 이준익 감독은 비극적인 인물에 안타까움을 더하고 그들을 따뜻하게 어루만진다. “사극이 아니라 사람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특히 비극적인 인물에 관심이 있다. 비극은 언제나 교훈을 준다. 그리스 비극, 셰익스피어의 비극 등 모두 결국에는 자신의 욕망 때문에 삶을 그르친 이야기다. 나도 인간이기 때문에 이런 비극을 통해 나를 경계하고, 삐뚤어진 욕망을 스스로 절제하려고 한다. 이런 페이소스가 카타르시스를 가져온다.” “비극은 인과응보라고, 원인 없이 결과는 없다. 그래서 ‘왜(Why)’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매뉴얼이 치밀하게 짜여있어서 ‘왜’는 없어지고 ‘어떻게(How)’만 남았다. ‘왜’를 궁금해 하지 않으니 ‘왜’를 잃어버린 시대다. 요즘 학생들도 정답을 외우기만 하고 질문을 연구할 자격이 박탈됐다. 과정이 무시되고 결과만 남는다.   이런 사회에서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나는 시대착오적이고 전근대적인 감독이다.” 시대착오적인 감독이기 때문에 이 시대에는 이준익 감독이 진정으로 필요할 것 같다. 이준익 감독의 작품을 통해 비극의 미학과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완벽하지 못했던 과거를 돌아보고, 완벽하지 못할 미래를 준비해보는 것은 어떨까.
345    바로 지금, 동주를 기억해야 하는 까닭은... 댓글:  조회:4577  추천:0  2016-02-19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서시) 윤동주는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다. 그가 영화를 통해 부활했다. ‘왕의남자’ ‘사도’ 등을 연출한 이준익 감독은 영화 ‘동주’를 통해 일제강점기에 살다 간 청년 시인 윤동주의 삶을 흑백의 영상으로 되살려냈다. 윤동주는 지식인의 순수한 마음을 부끄러움의 정서와 자아성찰의 태도로 노래한 시인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스스로에게 솔직한 시인이었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라고 했다. 윤리적 고뇌에 찬 그의 시(詩)는 그래서 더욱 아름답고 예술적이다. 이준익 감독은 시와 윤동주의 삶이 영화 속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감독은 어두운 시기에 짧게 살다 간 그의 안타까운 청춘을 부각시키기 위해 순제작비 5억원의 저예산으로 19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촬영을 마쳤다. 화려한 색채를 빼고 흑백화면을 선택했다. 영화에서 윤동주의 여린 심성과 아름답고 순결한 영혼이 잘 그려지고 있다. 그의 시만큼이나 감독의 진정성이 담겨 있다. 화려한 기교나 과장도 없다. 영화 ‘동주’ 중에서 영화의 내러티브 또한 윤동주의 시가 그의 내적 고민에 의해 반영된 결과물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동주 역을 맡은 강하늘의 담백한 목소리로 낭독되는 시는 어두운 시기에 살았던 윤동주의 삶과 작품을 더욱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다. 영화 ‘동주’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잊혀져 가는 우리의 감성을 되살리게 만든다. 간결하지만 가슴에 와 닿는 그의 시는 현실에서 각박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순수를 생각하게 한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라는 그의 시어(詩語)를 통해 우리를 그의 감성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나라의 독립과 안위를 걱정하면서 고뇌하는 그의 마음은 각자의 이익추구에 몰두해 있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는 자아성찰의 시인 윤동주를 더욱 절실하고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오게 만들었다. 바로 지금, 우리가 동주를 기억해야 하는 까닭이다. /양경미 영화평론가·한국영상콘텐츠산업연구소장
344    역시 잊지 말아야 할 청년문사 - 송몽규 댓글:  조회:5719  추천:0  2016-02-19
    1. 소개   그들은 한 집에서 석 달 간격으로 태어나서 대부분의 학창시절을 같이 보냈고, 거의 평생을 동반자로서 살아갔다. 그들은 같이 일본에 유학했고, 같은 도시에서 같은 사건, 같은 죄목으로 얽혀서 체포되고 재판을 받았으며, 같은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19일 간격을 두고 나란히 옥사했다. 두 사람은 참으로 평생을 두고 생과 사를 함께 나누었다. 그래서 윤동주 연구에서 송몽규란 인물은 도저히 빠뜨릴 수 없는 존재로 크게 자리 잡고 있다."-《윤동주 평전》 宋夢奎. 독립운동가. 윤동주의 사촌이며, 독립운동가이자 문인으로 활동했다. 윤동주의 고종사촌 형으로서 어린 시절 같이 자라고, 학업과 유학을 함께 했으며, 윤동주와 함께 잡혀가 똑같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했다. 아명은 송한범(宋韓範). 문호는 문해(문학의 바다). 필명으로 몽규(夢奎)를 우리말로 풀어쓴 "꿈별" 등이 있다. 이 본명은 그의 어머니가 꿈에서 큰 별을 보았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가명으로는 '고문해(高文海)'가 있다. 아명은 '한범'으로 어린 시절 송몽규를 알던 사람에게는 '한범이'로 불리는 일이 많다. 1917년 9월 28일 생이며, 1945년 3월 7일 해방을 몇달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본적지는 함경북도 경흥(慶興)이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출생지는 만주 간도성(間島省) 화룡현(和龍縣) 지신촌(智新村) 명동둔(明東屯). 지금의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내 길림성 룡정시 지신진 명동촌이다. 성격이 부끄럼 많고 조용한 윤동주와는 대조적으로, 소년 시절부터 활동적이고 리더쉽이 강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윤동주와 거의 모든 생애를 함께 한 형제 같은 인물. 다만 윤동주와는 달리 그리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윤동주 평전에 회고한 문익환 목사에 따르면 그 당시 어려서부터 성적을 보면 송몽규, 윤동주, 윤영선, 문익환 자신이 항상 선두 그룹이었는데, 그 중에서 운영선은 나중에 의사가 되었다고 한다. 문익환은 자신은 윤동주가 자신보다 한 발 앞선다는 것에 열등감을 느꼈고, 윤동주는 또 자신보다 송몽규가 한 발 앞선다는 것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동주는 몽규를 보고 "대기는 만성이다"라고 벼르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뒤집어보면 현재는 내가 뒤진다는걸 인정한다는 의미였을 것이라고.   편집 2. 생애     편집 2.1. 출생   송몽규의 아버지는 북간도 명동학교 조선어 교사이던 송창희(宋昌羲, 1891~1971)이다. 송몽규의 할아버지 송시억(宋始億)은 5세 때 충청도에서 연해주로 가다가 함경북도 경기군 웅기읍 우상동에 머물러 가문을 일으켰으며, 송창희는 서울에 유학을 다녀왔다. 송씨 문중은 북일학교(北一)라는 교육기관을 세웠는데, 송몽규의 삼촌 손창빈은 홍범도 부대에서 독립군으로 싸우다 1920년 전사, 송창근은 일본-미국으로 유학하여 1931년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송몽규의 어머니는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尹夏鉉, 1875-1947)의 딸로서, 윤동주의 아버지인 윤영석(永錫, 1895-1962)의 큰 누이동생인 윤신영(信永,1897-?)으로 그녀는 윤동주의 고모가 된다. 송창희는 25세 때 명동에 왔는데, 체격과 인물이 뛰어나서 윤동주의 어머니가 큰 시누이의 신랑감으로 소개하였고,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 장로가 자기 큰 딸과 선을 보게 하여 결혼시켰다고 한다. 송창희는 윤장로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하며 명동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여, 조선어와 양잠을 가르쳤다. 송몽규는 1917년 파평 윤씨 가문에서 친정집에 와있던 윤하현 장로의 큰딸 신영에게 9월 28일 태어났다. 이후 12월 30일 이 집안의 외아들 영식의 가족에서 아들이 태어나서, 석 달을 차이 두고 윤동주와 함께 태어나, 다섯 살이 될때까지 한 집에서 자랐다. 윤창식이 따로 집을 구하고 처가살이를 했기 때문이다. 송몽규의 동생으로는 여동생 한복(1923년생), 남동생 우규(1931년생)가 있다.   편집 2.2. 학업   “윤동주는 문학에 특별한 재주가 있었고, 송몽규는 연설을 잘했으며, 정치적 리더십이 두드러져 장래 희망을 일찌감치 독립군으로 정해놓고 있었다.”-문익환 평전 1925년, 8살 나이로 같은 마을의 또래였던 윤동주, 문익환, 김정우 등과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 교장이자 외숙부 김약연 선생에게 사사 받았으며, 문학에 뜻을 두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활발하고 리더쉽이 강한 인물로, 학생들을 모아서 연극 등을 공연하는데 주도했고, 5학년 때는 윤동주와 함께 《새 명동》이라는 등사판으로 찍은 문예지를 내기도 했다. 이 때, 윤동주와 함께 서울에서 수입해온 아동지 《어린이》,《아이생활》을 구독하여 읽고 친구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윤동주와는 정 반대의 성격이었다. 김신목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명동소학교가 '교회학교'에서 '인민학교'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송몽규가 큰 일을 했다고 한다. 1929년 봄, 그 아버지 송창희 선생은 교회학교를 인민학교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송몽규 역시 고작 12살 나이에 송창희 선생의 주장에 따라서 연설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워낙 다부진 성격이라 어린 나이였음에도 어른들 앞에서 당당하게 연설을 했다고 한다. 1931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으며, 윤동주와 함께 화룡현립 제1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 동안 한족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20여리의 등교길을 매일 함께 다녔다고 한다. 룡정으로 이사하면서 1932년 4월에 은진(恩眞) 중학교에 입학했으며 송몽규는 윤동주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된다. 1934년 12월, 중학교 3학년으로 18세 나이로 꽁트 《숟가락》을 써서 서울의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한다. 아명인 송한범으로 실렸다. 윤동주보다 이른 나이였으며 윤동주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고 한다. 1934년부터 문해(文海)라는 호를 썻다. 글(文)의 바다(海)라는 뜻으로 송몽규가 문학에 품고 있었던 큰 뜻을 짐작케 한다. 송몽규는 문해장서(文海藏書)라고 크게 새긴 사각도장을 마련하여, 자신의 책을 정리하고 분류하는데 사용했는데, 윤동주의 유품 가운데 이 도장이 찍힌게 몇 권 있다고 한다.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서 한학을 가르치던 명희조 선생은 민족주의자였는데, 송몽규는 이때부터 민족의식을 강하게 가졌다고 한다.   편집 2.3. 독립군 투신   돌연 송몽규는 은진중학교를 중퇴하고, 가출하여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남경으로 떠나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낙양군관학교) 한인반에 입학하였다. 한인반으로서는 2기생. 임시정부의 김구가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하여 장개석에게 지원을 받아서 운영할 수 있게 되었던 학교로서, 100여명의 조선인 학생이 군사 교육을 받는 곳이었다. 당시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장개석은 이를 극비에 부쳤기 때문에 송몽규는 '왕위지'라는 중국식 가명으로 교육을 받았다. 은진중학교에서 한학을 가르치던 명희조(明羲朝) 선생[1]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1914년 평안남도 개천에서 출생한 라사행(羅士行) 같은 시기에 송몽규와 함께 은진 중학교 선배를 통해서 점조직으로 연결하여 임시정부를 찾아갔다고 한다. 이 때 잡지를 만들었는데 김구가 《신민(新民)》이라고 지어줬다고 한다. 1년간 교육을 받다가 중국의 재정지원 중단으로 반이 해체되자 학교를 떠났다. 1935년 11월에는 중국의 제남지구(濟南地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이웅의 일파에 투신하여 활동하였는데, 1936년 3월, 산동성 성도 제남(濟南)에서 일본 영사관 경찰부에 체포되었다. 이 이래로 일제 경찰의 블랙 리스트에 오르게 된다. 송몽규는 강제귀국 조치를 당하고, 1936년 6월에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살인 등의 혐의로 본적지 함북 웅기경찰서(雄基警察署)에 구금되었으며, 고문과 취조를 받다가 8월 말 무렵 석방되었다. 이 떄부터 경찰의 요시찰인물이 된다. 이후 송몽규가 일본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특고월보』에서는 송몽규가 1936년 3월에 아버지와 큰아버지의 권유로 자수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오류가 있다. 1936년 특고경찰이 작성한 '선인군관학교사건 관계자 검거 일람표'에 따르면 송몽규가 체포된 시간과 장소는 '1936년 4월 10일, 제남'으로서, 북간도 대랍자에서 일경에 자수했다고 기록된 '1936년 3월'과는 다르다. 『사상월보』에 실린 판결문에는 송몽규가 1936년 4월 부터 본적지 옹기경찰서에 유치되어 취조를 받았다고 적시되어 있다. 이는 선인군관학교사건 관계자 검거 일람표에 명시된 체포 시기, 정황과 일치한다. 송옹규는 송몽규가 일경에 잡혀서 본적지로 압송되는 현장을 우연하게 목격하였다. 이 역시 자수설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한다. 만일 송몽규가 집안 어른들 권유에 따라서 자수를 해서 압송되었다면 본가에서 연락이 가서 압송 때부터 뒷바라지를 시작했을 것인데, 정작 옹기 본가 사람들은 송몽규의 압송 현장을 우연히 보고서야 체포되었다는걸 알게 되었고, 무슨 사건으로 체포된건지 전혀 몰라서 집안 어른들이 알아보려고 애썼다고 한다. 편집 2.4. 학업 재개   1937년 4월, 용정대성중학에 입학하여 학업을 재개했다고도 하고, 다시 만주로 건너가서 간도에 있던 국민고등학교(國民高等學校)를 졸업했다고도 한다. 조선족 신문에서는 전자, 국가보훈처 국립유공자 보훈록에서는 후자로 쓰고 있다. 본인은 은진중학교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요시찰인 딱지가 붙어서 어쩔 수 없이 다른 학교에 갈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1938년 4월에 서울로 가서 연희전문학교에 윤동주와 나란히 합격하였다. 경제적으로 유망한 학교에 들어가길 바라는 가족들의 기대와는 달리 연희전문 문과에 들어갔다. 하지만 당시 연희전문은 들어가기 어려운 학교였기 때문에 사촌 간이 나란히 합격했다는 것은 크나큰 경사였다.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1938년의 8월에 송몽규는 시 《밤》을 적어서 조선일보에 발표하였다. 또한 연희전문에서는 1932년에 창간된 문과학생회 문학동아리들의 잡지 《문우(文友)》를 이어받아 문예부장으로서 활동했다. 문우의 마지막 호인 1941년 판에서 필명 '꿈별'로 '《하늘과 더불어》'[2]를 발표했다. 윤동주는 이 때 「새로운 길」、 「우물속의 自像畵(자상화)」를 문우에서 함께 발표하였다. 편집인은 일본유학을 함께 하게 된 강처중(姜處重). 『원고에다 광고에다 검열에다 교정에다… 도저히 2-3명으로는 어림도 없음을 느꼈다.(중략) 이 잡지를 받은 사람들은 내용의 빈약함, 편집의 형편없음에 얼굴을 찌푸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고 경험이 없는 학생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과, 동분서주하며 모은 원고의 대부분을 게재할 수 없었던 점을 양해 받고 싶다. 국민총력운동에 통합하여 학원의 신 체재를 확립하기 위하여 문우회는 해산하게 된다. 그렇기에 교우회의 발행으로써는 이것이 최후의 잡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잡지 발행 사업은 연맹으로 계승되어 더욱 더 좋은 잡지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새로운 것에 합류하는 것을 기뻐하며 그것에 힘쓸 것을 맹세하며 이번 마지막 호를 보낸다(후략)』 『原稿やら、広告やら、検閲やら、校正やら・・・・・・とても、二三人の手に依るべきでないことをつくづく感じた。(中略)この雑誌を受け取る人々は、内容の貧弱、編集のまづさなどのために顔をしかめるだらう。然し、これは若い、経験のない学生達の手によって出来上ったものであると云ふことと、東奔西走して、かき集めた原稿の大部分が載せられなかったことを諒解してもらひたい。国民総力運動に統合して、学園の新体制を確立せんがために、文友会は解散するやうになる。そして国民総力学校連盟は徹底的に活動しなければならないやうになる。そこで、交友会の発行としては、これが最後の雑誌になるわけである。然し雑誌発行の事業は連盟に継承されて、もっといい雑誌が出るだらうと思ふ。我々は新しきものへの合流を喜び且つそれへの尽力を誓ひながらこの最後の号を送る(後略)』(원문)   송몽규는 자신들이 참가하게 된 문우 마지막 호에서 안타까운 심경이 가득한 후기를 남겼다. 대학에서 송몽규는 일제의 민족동화정책이 한국어를 폐지하고 일본어를 쓰게 하여 고유의 문화와 민족 정신을 말살하는데 있다고 보았고, 민족문화를 지키고 향상시키는데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1939년 2월 부터 동급생 윤동주, 백인준(白仁俊), 강처중(姜處重) 등과 함께 기숙사에서 모임을 가지고 동인잡지 간행, 문학작품 품평회를 열어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활동을 벌였다. 1942년 12월 27일 연희전문에서 2등으로 졸업하였고, 1942년 봄에 윤동주와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된다. 유학을 떠나면서 도항증명서를 얻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하게 된다. 윤동주는 후에 이 때의 감정을 '참회록'이라는 시로 드러내었다. 소무라 무게이(송촌몽규, 宋村夢奎); 1942.2.12 히라누마 도쥬(평소동주, 平沼東柱); 1942.1.29 교토제국대학 사학과 서양사학 전공에 합격했으며, 윤동주는 릿쿄대학에 들어갔다가 1942년 도시샤대학에 입학하여 송몽규와 재회했다. 42년 10월 부터 43년 7월 까지, 도지샤 대학의 윤동주와 제3고등학교 학생 고희욱(高熙旭) 등과 함께 교토 시내에서 자주 모임을 가졌고,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이 기회를 노려서 민족의 독립을 기획하는 한편, 민족정신을 부흥시킬 수 있는 학문적 연구를 하는 활동을 했다.   편집 2.5. 체포와 사망   1943년 7월 10일, "재경도(在京都) 조선인학생 민족주의그룹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윤동주는 7월 14일 체포되었다. 특별고등경찰에 체포되어, 시모가모 경찰서의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1944년 봄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았으며, 1944년 4월 13일에 윤동주와 함께 징역 2년 형을 받았다. 판결문에 따르면 송몽규는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을 비판하였으며, 일본이 머지 않아 패전할 것이므로 그 시기에 맞춰서 대세를 몰아 조선 독립을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고 한다. 형이 확정되어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윤동주와 함께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2월 16일 윤동주는 절명했으며, 3월 7일 송몽규 역시 사망하여 순국했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의문사는 생체실험으로 옥사. 송몽규의 시신은 명동 장재촌 뒷산에 묻혔으며, 윤동주의 비문을 지었던 윤동주 아버지의 친구 김석관이 《청년문사 송몽규 지묘》라는 비문을 썼다.   편집 3. 사후   송몽규와 인척지간으로 송몽규의 조카가 되는 송우혜는 《윤동주 평전》을 집필하면서 송몽규의 일생도 함께 정리하였다. 그 동안 무덤의 위치가 잘못 알려져 있어서 찾을 수 없었으나, 윤동주 평전을 집필하면서 수록된 증언 덕분에 올바른 묘지를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1990년 4월에 송몽규의 묘는 윤동주가 묻혀 있는 용정으로 이전하여 윤동주의 묘에서 10미터 정도 떨어진 가까운 곳에 함께 묻히게 되었다. 사후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편집 4. 송몽규 전집   송몽규의 작품은 거의 남지 않았는데, 동아일보 공모에 입선된 꽁트 《숟가락》, 연희전문에 문우에 발표한 《하늘과 더불어》, 조선일보 1938년 9월 20일자에 실린 《밤》이 남아 있다. 따라서 이 문단이 곧 송몽규 전집(…)이다. - 술가락 - 우리부부는 인제는 굶을 도리밖에 없엇다. 잡힐 것은 다 잡혀먹고 더잡힐 것조차 없엇다. 「아- 여보! 어디좀 나가 봐요!」 안해는 굶엇것마는 그래도 여자가 특유(特有)한 뾰루퉁한 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 나는 다만 말없이 앉어 잇엇다. 안해는 말없이 앉아 눈만 껌벅이며 한숨만 쉬는 나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말할 나위도 없다는 듯이 얼골을 돌리고 또 눈물을 짜내기 시작한다. 나는 아닌게 아니라 가슴이 아펏다. 그러나 별 수 없었다. 둘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흘럿다. 「아 여보 조흔수가 생겻소!」 얼마동안 말없이 앉아 잇다가 나는 문득 먼저 침묵을 때트렷다. 「뭐요? 조흔수? 무슨 조흔수란 말에 귀가 띠엿는지 나를 돌아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아니 저 우리 결혼할 때… 그 은술가락말이유」 「아니 여보 그래 그것마저 잡혀먹자는 말이요!」 내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안해는 다시 표독스운 소리로 말하며 또 다시 나를 흘겨본다. 사실 그 술가락을 잡히기도 어려웟다. 우리가 결혼할 때 저- 먼 외국 가잇는 내 안해[3]의 아버지로부터 선물로 온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 술가락과 함께 써보냇던 글을 나는 생각하여보앗다. 「너히들의 결혼을 축하한다. 머리가 히도록 잘 지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이 술가락을 선물로 보낸다. 이것을 보내는 뜻은 너히가 가정을 이룬뒤에 이술로 쌀죽이라도 떠먹으며 굶지말라는 것이다. 만일 이술에 쌀죽도 띠우지 안흐면 내가 이것을 보내는 뜻은 어글어 지고 만다.」 대개 이러한 뜻이엇다. 그러나 지금 쌀죽도 먹지 못하고 이 술가락마저 잡혀야만할 나의 신세를 생각할 때 하염없는 눈물이 흐를 뿐이다마는 굶은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없이 「여보 어찌 하겟소 할 수 잇소」 나는 다시 무거운 입을 열고 힘없는 말로 안해를 다시 달래보앗다. 안해의 빰으로 눈물이 굴러 떨어지고 잇다. 「굶으면 굶엇지 그것은 못해요.」 안해는 목메인 소리로 말한다. 「아니 그래 어찌겟소. 곧 찾아내오면 그만이 아니오!」 나는 다시 안해의 동정을 살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없이 풀이 죽어 앉어잇다. 이에 힘을 얻은 나는 다시 「여보 갖다 잡히기오 발리 찾어내오면 되지 안겟소」 라고 말하엿다. 「글세 맘대로 해요」 안해는 할 수 없다는 듯이 힘없이 말하나 뺨으로 눈물이 더욱더 흘러내려오고잇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전재산인 술가락을 잡히기에는 뼈가 아팟다. 그것이 운수저라 해서보다도 우리의 결혼을 심축하면서 멀리 ××로 망명한 안해의 아버지가 남긴 오직 한 예물이엇기 때문이다. 「자 이건 자네 것 이건 자네 안해 것-세상없어도 이것을 없애서 안되네」 이러케 쓰엿던 그 편지의 말이 오히려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 숟가락이건만 내것만은 잡힌지가 벌서 여러달이다. 술치 뒤에에는 축(祝)지를 좀 크게 쓰고 그 아래는 나와 안해의 이름과 결혼 이라고 해서(楷書)로 똑똑히 쓰여잇다. 나는 그것을 잡혀 쌀, 나무, 고기, 반찬거리를 사들고 집에 돌아왓다. 안해는 말없이 쌀음 받어 밥을 짓기 시작한다. 밥은 가마에서 소리를 내며 끓고잇다. 구수한 밥내음새가 코를 찌른다. 그럴때마다 나는 위가 꿈틀거림을 느끼며 춤을 삼켯다. 밥은 다되엇다. 김이 뭉게뭉게 떠오르는 밥을 가운데노코 우리 두 부부는 맞우 앉엇다. 밥을 막먹으려던 안해는 나를 똑바로 쏘아본다. 「자, 먹읍시다.」 미안해서 이러케 권해도 안해는 못들은체 하고는 나를 쏘아본다. 급기야 두 줄기 눈물이 천천이 안해의 볼을 흘러 나리엇다. 웨 저러고 잇을고? 생각하던 나는 「앗!」하고 외면하엿다. 밥 먹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안해의 술가락이 없음을 그때서야 깨달앗던 까닭이다. - 하늘과 더불어 - 하늘- 얽히여 나와 함께 슬픈 쪼각하늘 그래도 네게서 온 하늘을 알 수 있어 알 수 있어... 푸름이 깃들고 太陽이 지나고 구름이 흐르고 달이 엿보고 너하고만은 너하고만은 아득히 사라진 얘기를 되풀고싶다 오오- 하늘아- 모-든것이 흘러 흘러 갔단다. 꿈보다도 허전히 흘러갔단다. 괴로운 思念들만 뿌려 주고 미련도 없이 고요히 고요히... 이 가슴엔 意欲의 殘滓만 쓰디쓴 追憶의 反추만 남아 그 언덕을 나는 되씹으며 운단다. 그러나 戀人이 없어 孤獨스럽지 않아도 故鄕을 잃어 향수(鄕愁)스럽지 않아도 인제는 오직- 하늘속의 내맘을 잠그고 싶고 내맘속의 하늘을 간직하고 싶어 미풍(微風)이 웃는 아침을 기원(祈願)하련다. 그 아침에 너와 더불어 노래 부르기를 가만히 祈願하련다. - 밤 - 고요히 침전(沈澱)된 어둠 만지울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보다 깊구나 홀로 헤아리는 이 맘은 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 쉬파람 분다   편집 5. 대중문화   윤동주의 「이런 날」(1936. 6. 10)에서 언급되는 '형'이란 송몽규를 뜻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사이 좋은正門의 두돌긔둥끝에서 五色旗와 太陽旗가 춤을추는날, 금(線)을 은地域의 아이들이즐거워하다, 아이들에게 하로의乾燥한學課로 해ㅅ말간 倦怠가 깃들고 ‘矛盾’ 두자를 理解치 하도록 머리가 單純하였구나, 이런 날에는 잃어버린 頑固하던 兄을, 부르고 싶다. -1936년 6월 10일 ― 윤동주 이런 날 윤동주를 주제로한 59편의 시를 엮어 '윤동주의 빛'이라는 시집을 낸 이탄 시인이 해당 시집 내에 송몽규라는 시를 적어놓은 것이 있다. 송몽규 이 탄 항상 윤동주의 뒤에는 송몽규가 있었다 윤동주의 앞에는 송몽규가 있었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그림자가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을 하든 윤동주의 조용한 얼굴에는 송몽규가 있었다 송몽규는 독립군에 들어가 있을 때도 그의 그림자는 남겨놓고 떠났다 학교는 그럭저럭 윤동주와 맞먹었어도 생각하는 것, 그것을 옮기는 것은 송몽규였다 실천자, 그는 혼자 돌아다니는 윤동주를 나무라지 않았다 윤동주가 시를 쓰는 일이 얼마나 보람된 일인가를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고종사촌의 아들 송몽규도 일본에 와 있었다 송몽규의 그림자는 넓고 넓었다 그는 그 안에서 쓰러진 벼농사를 일으켜 세우고 물을 대주는 일도 해야 했다 신작로에 말없이 백힌 돌 하나 그 돌 하나만이라도 뽑아서 뾰족하게 만들어야 했다 아세아에서 누가 일본의 힘을 누를 것인가 아세아에서 누가 일본에게 덤벼들 것인가 벌은 날아다니는 곤충 개미는 애써 먹을 양식을 마련하는 곤충 이 두 곤충의 삶을 비교하여 벌은 벌대로 개미는 개미대로 살아야 할 것을 요구했다 이 요구, 만해의 부릅뜬 언어, 조선독립의 이유서 벌은 일본이고 개미는 조선일지라도 각기 살아가야 한다 벌이 어떻게 개미를 도울 수 있단 말인가 송몽규의 생각도 이러했으리라 벌은 하루 종일 꿀을 모아야 하지만 저 허리가 잘록한 개미, 기어다니는 개미는 개미대로 즐거워야 한다 송몽규의 온몸은 이런 생각으로 차 있었다 이런 투로 그의 그림자는 그림자로 가득했다 윤동주의 뒤 윤동주의 앞 항상 그림자 안에서 지냈다 윤동주는 그림자만 보아도 뜻을 알았다 그 뜻에 다치거나 그 뜻에 흠집이 생기거나 그 뜻에 동티가 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림자에 더 첨가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그림자를 잘 보관시키도록 해야 했다 마당에 서 있는 사철나무 껌껌해도 볼 수 있는 사철나무 항상 빛을 잃지 않은 사철나무의 뜻을 새삼 나무만큼 알았다 저 하늘에는 여전히 별이 떠 있다 사철나무나 저 별들은 변하지 않는 두 사람의 우정 하나가 동적이면 하나는 정적이다 윤동주는 조용한 성품이지만 마음속 깊은 곳은 두 사람이 같았다 하나는 그림자, 하나는 그림자에 싸인 사람
343    윤동주 친구들... 댓글:  조회:4485  추천:0  2016-02-19
[매일경제] 영화 ‘동주’ 속 특별한 인연이 눈길을 끈다. 17일 개봉한 ‘동주’는 이준익 감독의 “윤동주 시인의 시는 누구나 다 알지만 과연 그의 삶은 우리가 알고 있는가”라는 의문으로부터 출발해 시인이지만 시인으로 살지 못했던 아픈 청춘인 윤동주와 그의 친구이자 독립운동가 송몽규의 삶을 기교나 과장 없이 진실되게 그려낸 영화다. 영화 속에는 이들의 가슴 아픈 연대기를 다루면서 문예지를 만든 친구로 등장하는 문익환과 정지용의 일화도 짧게 다룬다. 정지용 역으로는 배우 문성근이 특별출연한다. 문성근의 부친 문익환 목사는 청년 시절 윤동주와 실제 친우로 알려져있다. 서울 동대문 메가박스에서 열린 ‘동주’ 언론시사회에서 이준익 감독은 “만주 용정 시절 윤동주, 송몽규와 함께 문예지를 만들던 친구가 문익환이다. 그분의 삶도 한편의 영화인데 잠깐만 등장시킨데 대한 죄스러움이 크다. 그 분의 삶도 따로 만들어 보고 싶다. 하지만 이건 ‘동주’다. 극중 동주 시인이 존경하고 품고 있던 정지용 시인이 나오기 때문에 문성근에게 정중하게 부탁했다”며 문성근을 아버지 역인 문익환이 아닌 정지용 시인 역에 캐스팅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문성근은 최소한의 대사를 소화하면서도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다는 후문이다... /////////////////////////////////////////////// 바람과 구름과 별과 시   강 처중 (당시 경향신문 기자)   동주(東柱)는 별로 발주변도 사귐성도 없었지만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모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있나" 하고 찾으면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히 마조 앉아주는 것이 었다. "동주있나 좀 걸어보자구"이렇게 산책을 청하면 싫다는 적이 없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산이든 들이든 강까이든 아모데를 끌어도 선듯 따라 나서는 것이었다. 그는 말없이 묵묵히 걸었고 항상 그의 얼굴은 침을 하였다. 가끔 그러다가 외마디 소리! 그것은 언제나 친구들의 마음을 알지 못할 울분을 주었다. "동주 돈 좀있나" 옹색한 친구들은 곳잘 그의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노렸다. 그는 있고서 안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외투든 시계든 내 주고야 마음을 놓였다. 그래서 그의 외투나 시계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서 전당포에 나들이를 부지런이 하였다. 이런 동주도 친구들에게 굳이 거부하는 일이 두가지 있었다. 하나는 "동주 자네 시 여기를 좀 고치면 어떤가" 하는데 대하여 그는 응하여 주는 때가 없었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달이고 두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서 한 편의 시를 탄생시킨다.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시를 보이지 않는다. 이미 보여 주었을 때는 흠이 없는 하나의 옥이다. 지나치게 그는 겸허온순하였지만 자기의 시만은 양보하지 안했다. 또 하나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안했다. 그 여성도 모르고 츤구들도 모르는 사랑을 회답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을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 체 고민도 하면서 희망도 하면서 ...., 쑥스럽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그러나 이제와 고쳐 생각하니 이것은 하나의 여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루어 지지 않을 '또 다른 고향'에 대한 꿈이 아니었던가. 어쨌던 친구들에게 이것만은 힘써 감추었다. 그는 간도에서 나고 일본 복강에서 죽었다. 이역에서 나고 갔건만 무던히 조국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좋아 하더니ㅡ 그는 나의 친구이기도 하려니와 그의 아잇적 동무 송 몽규(宋夢奎)와 함께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2년형을 받아 감옥으로 들어간체 마침내 모진 악형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것은 몽규와 동주가 연전(延專)을 마치고 경도에 가서 대학생 노릇하던 중도의 일이다. "무슨 뜻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운명했지요. 짐작컨데 그 소리가 마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 듯 느껴지더군요." 이 말은 동주의 최후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가 그의 시체를 찾으러 갔던 그 유족에게 전하여 준 말이다. 그 비통한 외마디 소리! 일본 간수야 그 뜻을 알리만두 저도 소리에 느낀 바 있었나 보다. 동주 감옥에서 외마디 소리로서 아조 가버리니 그 나이 스물아홉 바로 해방되던 해다. 몽규도 그 며칠 뒤 따라 옥사하니 그도 재사(才士)였느니라. 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 지려 한다. 불러도 대답이 없을 동주(東柱) 몽규(夢奎)었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동주(東柱) 몽규(夢奎)!   (강 처중)   출처; 윤동주 평전 (송우혜)   ======================== 영화 '동주'엔 강하늘, 박정민 뿐만 아니라 보석 같은 배우들이 많다. 배우 민진웅이 영화 ‘동주’(감독 이준익)에서 개성 넘치는 연기와 스타일로 존재감 200%를 발휘해 관객들의 깊은 인상을 남겼다. 강하늘, 박정민을 잇는 '동주'의 세 번째 보석이다. 지난 17일 개봉한 '동주'에서 민진웅은 강처중 역을 맡아 윤동주(강하늘), 송몽규(박정민) 의 친구로 함께 학교생활을 해나가고 글쓰기와 토론도 즐기며 뜨거운 청춘을 보낸다. 민진웅은 극 중 5대5 가르마와 노안 비주얼 등 심상치 않은 스타일로 등장하는 순간마다 웃음을 선사하며 진지한 영화의 흐름 속에서 관객들의 숨통을 트여주는 개성 넘치는 캐릭터로 맹활약을 펼쳐 강렬한 존재감을 발휘했다. 영화 촬영에서 강처중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 모든 스태프들이 촬영 중에서 가장 많이 웃었던 장면이라고 할 정도로 영화 ‘동주’의 명장면 중 하나로 뽑으며 민진웅의 생동감 넘치는 연기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민진웅은 한예종 출신으로 영화 ‘패션왕’, ‘성난변호사’, ‘검은 사제들’에 출연했다. 지난해에는 시청률 20%를 돌파하며 최고의 화제작으로 꼽힌 SBS 드라마 ‘용팔이’에서 김태현(주원)의 경호원으로 열연해 이름을 알렸다. 민진웅은 캐릭터에 자신만의 색을 입혀 극 중에서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탄탄한 연기 스펙트럼을 구축하고 있어 충무로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다. 한편, 영화 ‘동주’는 이름도, 언어도, 꿈도 허락되지 않았던 1945년 평생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시인 윤동주와 독립운동가 송몽규의 빛나던 청춘을 담은 작품이다.  
342    영화 <동주>를 보면서 가슴을 정화하기 댓글:  조회:4707  추천:0  2016-02-19
            윤동주, 그는 28세에 사망했다. 그의 시는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라고 끝을 맺는다.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아름다운 시구를 만들어낸 젊은 시인은 1945년 해방 6개월 전에 사망했다. 1940년대 즈음하여 수많은 문학인이 변절했지만, 그는 일본 경찰에게 잡혀서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일제의 생체실험으로 인해 사망. 만주 북간도의 유복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경성의 연희전문학교를 다니고, 일본으로 유학해 영문학을 전공한 시인, 건장하고 잘생긴 외모, 완성도 높은 고뇌하는 감수성의 시, 생체실험당한 죽음, 이 모든 것들이 그의 짧은 삶에 호기심을 가지게 할 만한 요소이건만, 놀랍게도 윤동주가 영화화된 적은 없었다. 지난해 ‘사도’로 연출의 철학적 깊이를 증명해낸 이준익 감독이 윤동주의 삶을 영화화했다. ‘조류인간’과 ‘프랑스 영화처럼’ 등의 독립영화에서 문학과 영상의 만남을 독특한 작가적 시선으로 구현했던 신연식 감독이 각본을 썼다. 제작비는 6억원. 저예산 영화다. 영화 전편이 흑백이다.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윤동주의 흑백사진을 스크린으로 옮겨 놓았는데, 그 시절이 영롱하고 가슴 아프게 되살아난다. 수묵화를 보는 듯 여백의 미가 살아있는 아름다운 영상과, 담백한 목소리로 읽어 내려가는 시가 보이스오버로 들리며 시각과 청각을 일깨운다. 아름답고 구슬픈 영화다. 배우 강하늘은 정갈하고 낭만적인 윤동주를 잘 그려낸다. 영화는 형무소에서 일본 경찰로부터 취조를 받는 윤동주가 1930년대에 문학인의 꿈을 꾸며 경성과 일본에서 활약했던 시기를 회상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영화에는 청년의 국가 상실로 인한 좌절감, 첫사랑의 설렘과 무뚝뚝한 표현, 하늘과 별을 보고 바람을 느끼며 시를 쓰던 감성, 끝내 굴복할 수 없었던 의지가 하나하나 그림처럼 펼쳐진다. 커다란 플롯 줄기는 함께 나고 자란 친구이자 사촌 사이인 윤동주와 송몽규의 짧고 굴곡진 청년기를 따라간다. 이름도, 언어도, 꿈도 허락되지 않았던 일제강점기에 동갑내기 사촌 동주(강하늘)와 몽규(박정민)는 한집에서 태어나고 자란다. 시인을 꿈꾸는 청년 동주에게 신념을 위해 거침없이 행동하는 청년 몽규는 가장 가까운 벗이면서도 넘기 힘든 산처럼 느껴진다. 두 사람은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혼란스러운 나라를 떠나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일본으로 건너간 뒤 몽규는 더욱 독립운동에 매진하게 되고, 절망적인 순간에도 시를 쓰며 시대의 비극을 아파하던 동주와의 갈등은 점점 깊어진다. 둘은 다른 성정을 가졌다. 가장 친한 친구이면서도 동주의 지적 열등감을 자극하곤 하는 몽규는 행동하는 청년이다. 이에 비해 동주는 아픔을 삭이고 내면화하며 이를 시적 언어로 창조해낸다. 행동하는 혁명가 몽규와 고뇌하는 예술가 동주는 부딪히고, 논쟁을 벌이고, 또 서로를 북돋우며 더 큰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그들의 꿈과 이상, 젊음은 파시즘 제국주의에 의해 파괴되어 버리고 만다. 그러나 이는 역사 속 한 에피소드만이 아니다. 현재에 어떤 특정 과거를 소환하는 것은, 현재가 그 과거를 다시 곱씹어봐야 하는 때이기 때문이다. 청산하지 못한 친일의 흔적은 현재에 만연한 부정의를 낳은 씨앗이다. ‘서시’의 아름다운 청년 시인으로만 남기에 윤동주는 너무도 훌륭한 인간이었다. 앞장서 독립군 투사가 되지는 않았지만, 일본의 압제에 절대 굴복하지 않았고, 조선말과 고유의 민족성을 지켜내기 위해 펜을 드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신념을 보여주었다. 이 야만의 시대에 윤동주 신드롬이 거세게 불길 바란다. 영화적으로도 ‘동주’는 뛰어나다. 한 인물의 전기를 시간순으로 평범하게 기록하지 않고, 취조와 추리, 형무소와 도시를 오가는 공간 배치, 회상 구조를 통한 시간 재구성, 일본 경찰과 주고받는 논쟁, 단서를 알리는 장면의 재배치 등 플롯 상에서 서스펜스가 생겨나며 이야기에 빠져들게 한다. 모두가 다 아는 저항시인의 삶은 영상언어로 아름답게 채색되었다. ‘사도’와 ‘동주’를 거치면서 이준익 감독은 대중적 취향의 영화감독을 넘어 예술작가적 감독 위치에 우뚝 선다. ‘쎄시봉’에서 윤동주와 육촌 간인 윤형주를 연기했던 강하늘의 동주 역할은 묘한 인연이다. 담백한 목소리, 떨리는 표정과 분노의 얼굴을 오가는 연기를 해내는 강하늘은 좋은 연기자로 성장하고 있다. 불공정 스크린 독점 현상으로 인해 이 좋은 영화가 많은 스크린 수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많은 젊은이들이 이 영화를 꼭 봤으면 한다. 오락물의 홍수 속에서, 영화를 보면서 가슴이 정화되는 느낌, 그것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민아 영화평론가·한신대학교 겸임교수
341    <동주>, 청춘은 언제나 아파왔다... 댓글:  조회:6034  추천:0  2016-02-19
동주’, 청춘은 예나 지금이나 시대 때문에 아파왔다... [엔터미디어=]  오랜만에 좋은 영화를 봤다. 사실 요즘 멀티플렉스에서 방영하는 영화들을 볼라치면 그 화려한 색감과 입체적인 연출 그리고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시간과 공간을 점핑하듯 널뛰는 편집 속에서 영화를 본 것인지 롤러코스터를 탄 것인지 알 수 없어질 때가 있다. 그런데 영화 는 정반대다. 흑백 영화이고 영화의 흐름도 유려할 정도로 천천히 움직인다. 본래 인물을 염두에 두고 그려낸 것이겠지만 동주(강하늘)의 어딘지 어눌할 정도로 느린 말투까지도 지금의 속사포로 쏟아내는 영화 속 대사와는 너무나 다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정반대로 가는 영화가 마음을 뒤흔든다. 그것은 물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윤동주 시인의 청춘과 죽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마치 윤동주 시인에게 후대로서의 예우를 보내듯 지극히 절제된 영상으로 그 얼굴에 비춰지는 정조와 생각들을 담아낸다. 영화는 그래서 지나칠 정도로 담담하지만 영화를 보는 이들의 가슴은 이내 먹먹해진다. 영화가 앞질러가며 우리의 눈과 귀를 자극으로 가리지 않으니, 그 정지된 듯한 화면 속에 동주의 눈빛 하나, 물기하나 없이 마른 입술, 흑백으로 처리되어 핏기는 알 수 없으나 투명해질 정도로 창백한 얼굴의 음영은 그대로 우리의 가슴을 서늘하게 파고든다. 강하늘의 목소리로 다시 읽혀지는 윤동주의 시는 영화를 통해 다시 생생하게 살아난다. 너무 유명해 흔해져버린 ‘서시’의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같은 구절이 영화 속에서 되살아난 동주의 시선과 겹쳐지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새삼 의미를 전해준다. 영화가 지금의 우리에게 던지는 두 가지 화두는 ‘청춘’과 ‘부끄러움’이다. 영화 속 윤동주는 그의 평생의 지기이자 경쟁자이자 사촌이었던 송몽규(박정민)와는 사뭇 다르다. 몽규가 당대 일제에 대항하던 행동파였다면 동주는 스스로 회고하듯 그의 ‘그림자’ 같은 존재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현실을 회피하기 위해 시로 숨어들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시란 본래 현실과 무관할 수 없다. 진실 된 시를 쓴다는 건 그가 ‘서시’를 통해 다짐하듯 한 점 부끄럼이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시인 동주는 어쩌면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삶을 걸어간 것뿐이다. 다만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것이 어찌 쉬운 일일까. 부끄럽지 않게 살아간다는 것은 부끄러운 현실과 마주쳤을 때 첨예한 갈등과 마찰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동주가 살았던 일제 강점기는 그래서 일본의 제국주의라는 현실이 그에게 부끄러운 삶을 용납하지 않게 했을 것이다. “어느 시대나 청춘은 있었고, 청춘은 언제나 시대 때문에 아파왔다. 지금의 세대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준익 감독의 말처럼 는 그래서 지금 우리 시대에도 작지 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 땅의 무고한 청춘들은 모두가 그저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길 바라고 있을 뿐이다. 다만 부끄러운 현실이 그들을 바람에 스치우게 하고 있을 뿐. 바람에 맞서 서 있는 나무의 그 격렬한 고통은 스스로 항변해서가 아니라 그 자리에 오롯이 서 있음으로 해서 바람의 존재를 알린다. 동주라는 존재가 그렇다. 그는 당대의 현실 앞에 오롯이 부끄럽지 않게 서 있었기 때문에 그 혹독했던 현실의 부조리를 우리 앞에 드러냈다. 그리고 동주는 그 한 세기를 건너 힘겨운 현실 앞에 괜찮다는 듯 짐짓 무표정한 얼굴로 버텨내고 있는 지금의 청춘들과 겹쳐진다. 비록 힘겨워졌지만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다. 현실이 부끄러운 것이니. 가 지금의 청춘들에게 전하는 말이다. /////////////////////////////////////////////////////// 한 청년은 시를 사랑했고, 다른 청년은 세상을 사랑했다. 시대와 불화를 겪었던 청년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자신을 사랑했다. 이준익 감독의 '동주'(18일 개봉)는 스물여덟, 청년인 채 삶을 마감한 시인 윤동주(강하늘)와 그의 사촌 송몽규(박정민) 이야기다. 소박하지만 가볍지 않고, 조용하지만 울림이 작지 않다. 이준익 감독은“저예산 영화를 또 찍을 수도 있다, 확신이 생기는 작품만 만난다면. 확신이 의심으로 변하는 영화는 망한다. 원래 인생은 확신과 의심 사이의 줄타기 같은 거니까”라고 했다. 지난 3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대뜸 "윤동주의 시 좋아해요?"라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한국인은 윤동주의 시를 좋아하지만, 그의 삶과 죽음은 잘 모른다"고 했다. 이준익 감독은 4년 전 영화제 참석차 교토에 갔다. 그는 도시샤(同志社)대학에 들러 윤동주 시비를 보고 정지용 시에 등장하는 압천(鴨川)을 걸었다. 일본에 윤동주의 시를 사랑하는 이들의 모임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이준익 감독은 이때 윤동주에 대한 영화를 만들기로 다짐했다. ▶관련기사 : 윤동주 70주기… 후쿠오카에 詩碑(시비) 추진 '러시안 소설' '프랑스 소설처럼'을 연출한 신연식 감독이 각본과 제작을 맡았다. 영화는 흑백으로 만들었다. 이준익 감독은 "사도가 250년 전 이야기, 왕의 남자는 500년 전 이야기다. 그땐 사진이 없으니까 컬러로 찍으면 그 시대 사람을 현재로 데려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72년 전 윤동주의 흑백사진을 봤다. 그걸 컬러로 살려내면 오히려 사실성이 떨어질 것 같았다"고 했다. 영화 제작비는 5억원. 그는 "이렇게 제작비가 적은 영화는 난생처음이다"고 했다. 전작(前作) 사도(2015)의 총제작비는 약 95억원이었다. "상업적 부담감이 없다는 게 어찌나 어마어마한 장점이 되던지. 자유분방했고, 본질에 몰입할 수 있었죠.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면 성공과 실패에 대한 부담이 얼마나 큰데요. 그래서 '평양성' 망했을 때 은퇴 선언까지 안 했습니까, 하하!" 이 영화는 윤동주의 전기라기보다는 비극적인 시대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 윤동주, 송몽규 두 청년을 그렸다. 3개월 차이로 만주 명동촌의 같은 집에서 태어난 두 사람은 사촌 형제이자 친구, 라이벌로 자랐다. 영화에서 윤동주에게 '그림자'란 표현을 썼듯이 그는 언제나 송몽규보다 한발 뒤처졌다. 송몽규는 19세에 신춘문예에 당선이 됐고, 10대에 이미 독립운동단체에 가입했다. 윤동주는 송몽규를 따라 연희전문학교와 교토제국대학 시험을 봤지만, 교토제국대학 입시에는 낙방했다. 윤동주가 '남의 나라 육첩방'에서 시인의 천명(天命)을 다하고 있을 때, 송몽규는 유학생들을 규합해 혁명(革命)을 도모했다. 두 사람은 한 달 차이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었다. 어두운 시대, 가볍지 않은 삶을 다루면서도 '동주'는 투명할 정도로 말갛다. 감정이나 사건이 고조될 때마다 그 상황에 어울리는 윤동주의 시가 내레이션으로 삽입된다. 시를 읊는 강하늘의 단정한 목소리가 영화 밖으로 흘러넘칠 뻔한 감정을 주워 담는다. "모든 인간에겐 열등감이 있습니다. 윤동주는 그런 감정을 과대 포장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부끄러움의 미학으로 승화시킨 거고. 그런 시인을 주인공으로 영화를 찍는 감독이 영화에 멋대로 의미 부여를 하고 감정 과잉을 하면 그건 (영화) 끝장나는 거예요. 윤동주를 영화적 도구로 사용해서 과도한 신파나 주의(主義)를 강조하지 않으려고 했죠. 그것이 그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어요." /영화 '동주' 이준익 감독은 "영화 30%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극 중에서 윤동주가 호감을 갖는 '여진'이란 여학생도 허구의 인물이다. 스물여덟에 죽은 윤동주가 연애를 했거나 여자를 만났다는 기록은 없다. "윤동주가 소풍 가서 찍은 사진을 봤어요. 두 명의 여자 사이에 윤동주가 있는 걸 보고 거기에 상상의 여지를 넣었죠. 그가 여진을 이화학당의 기숙사에 데려다 주는 길에 묘한 감정이 싹트는 정도까지만 그렸어요. 스물여덟에 세상을 떠난 그에게, 그런 삶의 순간, 청춘의 순간을 선물해 주고 싶었습니다."   이 영화로 윤동주와 송몽규의 젊음은 거기 오래 남아 있을 것이다. 윤동주 序詩(서시) 읽다가… 고개 떨군 일본인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2015년 2월 22일 오후 일본 도쿄(東京) 릿쿄(立敎)대학교 예배당. '윤동주 시인 70주기 추모 낭독회'에 참석한 일본 시민과 한국인 유학생 등 400여명은 일본어와 한국어로 번갈아 낭독되는 '쉽게 씌여진 시'를 지긋이 눈을 감고 경청했다. 이 시는 윤 시인이 릿쿄대 영문과 유학 시절 썼던 작품이다. 윤동주 70주기 추모 낭독회에서 김대원 릿쿄대성공회 주임사제가 '쉽게 씌어진 시'를 한국어로 낭독하고 있다. /양지혜 특파원 이날 낭독회에서는 초등학생부터 원로 배우에 이르기까지 국적과 세대를 초월한 이들이 '햇비' '풍경' '십자가' '참회록' '쉽게 씌여진 시' '서시' 등 윤 시인의 시 6편을 낭독했다. 섬유 예술가 가와이 미쓰코씨는 곱게 차려입은 한복에 쪽진 머리를 하고 '풍경'을 암송했다. 이 밖에도 '윤동주 장학생'으로 선정된 릿쿄대 유학생, 직장인, 배우 등이 낭독자로 나섰다. 대표작 '서시'는 참석자 전원이 한국어와 일본어로 함께 낭독했다. 박춘희(19)양은 "재일교포로 자라면서 윤동주 시인의 시는 많은 위로가 됐다"며 "오늘 낭독회에서 다시 용기를 얻었다"고 말했다. 요네무라 쇼지(米村正治·69)씨는 "종전(終戰)을 몇 달 앞두고 유명을 달리한 시인의 작품을 보며, 요즘 전쟁을 향해 치달아가고 있는 듯한 일본 사회 분위기를 반성하고 싶다"고 했다. 이 행사는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의 모임'이 주최했다. 야나기하라 야스코(楊原泰子·68)씨를 주축으로 릿쿄대를 졸업한 일본인들이 결성한 단체로 매년 2월 윤 시인의 기일에 맞춰 추모 낭독회를 열고 있다. 야나기하라씨는 "나 같은 전후 세대는 일본이 과거에 저지른 만행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윤 시인의 작품을 통해 일본의 역사 교육을 바로잡고, 생명과 평화의 메시지가 널리 알려지길 염원한다"고 말했다. 윤동주 生家 비석엔…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중국이 중국 옌볜에 있는 시인 윤동주 생가(生家)를 관광지로 개발하며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이라고 소개하고 윤동주 시를 중국어로 번역해 홍보하고 있다. 윤동주 생가 주변 곳곳에는 중국어로 번역된 윤동주의 시비(詩碑)가 놓여 있다. 중국어로 번역돼 돌에 새겨진 윤동주의 시 ‘십자가’. 윤동주가 짓고, 리융이 번역했다고 적혀 있다. 중국 옌볜 조선족자치주 룽징(龍井)시 밍둥촌(明東村)에 있는 윤동주의 생가에는 그전에 없던 시멘트 벽과 문이 생겼고, 가로 약 4m, 세로 약 2m 크기의 경계석에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 윤동주 생가'라고 적혀 있었다. 윤동주 생가는 룽징시가 우리 돈 9억여원을 들여 4개월간 공사해 정비했으며 2012년 8월 준공식을 열었다. 윤동주의 외숙인 김약연이 세운 명동교회에서부터 윤동주 생가까지의 흙길이 대리석으로 바뀌어 말끔해졌지만, 이 과정에서 명동교회 옆 십자가가 옮겨지고 곳곳에 중국어로 번역한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룽징시는 2012년 8월 준공식을 열고 윤동주 생가를 관광지로 개발했다. 시멘트로 된 담벼락과 문이 생겼고, 경계석엔‘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윤동주는 모든 작품을 한글로 썼으며, 대부분의 작품은 그가 평양 숭실중학교에 다니던 시기와 서울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던 시기, 일본 교토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시기에 썼다. 윤동주의 육촌 동생으로 매년 이곳을 찾는다는 가수 윤형주씨는 "윤동주 시인의 원적은 함경북도 회령이며, 북간도로 이주한 것..."라고 말했다. 연세대 사회학과 류석춘 교수는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라는 구절이 있는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 "한글로만 시를 쓰는 등 정체성을 확고하게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옌지(延吉) 시내에서 차로 약 1시간 거리인 룽징(龍井)시 동산교회 기독교인 묘지에 있는 윤동주 묘지, 승용차로는 쉽게 접근하기 힘들 정도로 노면의 요철이 심하던 길은 최근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길의 초입까지만 시멘트로 포장됐다. 하지만 포장 도로가 끝난 지점부터 30여분 정도 광활한 옥수수밭 사이에 난 흙길을 걸어가야 한다. 최근 내린 비로 흙길은 뻘밭이 돼 있었다. 묘지 위치를 알고 있다는 근처 마을 노인과 윤동주 묘지를 찾아 나섰다. 차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 들어가고 난 후 오른쪽 풀밭 사이에서 '시인 윤동주 묘지'라는 작은 팻말을 발견했다. 풀밭을 헤치고 5분 정도 걸어가자 윤동주 묘지가 나타났다. 윤동주 묘지는 1984년 유족과 윤동주 연구가인 일본인 오무라 마스오 와세다대 명예교수가 20여 차례 중국을 오가며 묘지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탐사해 발견했다. 1945년 사망 당시 유족들이 세워둔 '詩人 尹東柱之墓(시인 윤동주지묘)'라는 비석 덕분이었다.../
340    흑백 저비용 영화 <동주> 는 상업성 영화가 아니다... 댓글:  조회:5350  추천:0  2016-02-19
                동주는 복잡한 배경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보고 느끼는 공간을 향해 시쓰는 것을 좋아해요. 하지만 아버지는 그닥 좋아하지 않지요. 그래서 동주가 의사가 되길 바라죠.. 하지만 동주는 묵묵히 시를 한 편 한 편 써내려 갑니다. 언젠가는 나의 시가 세상에 나와 주길 하는 바람으로...       그런 동주가 세상에서 가장 의지한 사람은 몽규가 아닐까 싶어요. 몽규의 당당함과 솔직함 그리고 뭐든지 잘해내는 그가 부럽기도 해요       특히 몽규가 쓴 짧은 글이 신춘문예가 떡하니 당첨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막 대놓고 좋아해주지 못했죠,, 하지만 이내 몽규가 주는 책 한권에 어린애 처럼 마음이 쉬이 풀리는 동주입니다.       몽규 또한 동주의 여린 마음을 알고 있기에 잘 챙겨줘요!!       동주와 몽규 둘다 서울의 연희 전문대에 나란히 입학하게 됩니다. 그리고 뒤이어 일본의 창씨개명 강요에 분노를 하게 되고, 일본 유학길에 오릅니다.       일본 유학길에 오른 몽규는 일본의 유명대에 합격하고 나서 조선유학생들과 나름의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때 몽규의 나이가 고작 20대 중반정도 였다는 것!!         몽규는 동주를 너무나 잘 압니다. 잘 안다고 생가할 수도 있겠지만 동주는 시를 쓰는 것이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동주는 그게 불편하고, 그게 바로 자신을 부끄럽게 만든다고 생각해요.     동주와 몽규 이 둘은 과연 그들이 원하는 세상과 조우할 수 있을까요?? 지금부터는 흑백영화 "동주"와 마주하면서 이 젊은 청년들이 꿈꾸는 이야기에 귀기울여주세요!!           ...눈을 잠시 감고 동주가 읽어주는 시를 듣게 되면 다시 눈이 영화의 이야기로 빠지게 되요 그리고 곧 흑백의 화면이 더 이상 흑백으로 보이지 않게 되지요.... 영화의 장면 장면마다 동주가 나지막하게 읽어주는 시를 듣게되면  상당히 겸손해 집니다.   동주가 "부끄럽다"고 고백...   창씨개명을 하면 그냥 편하게 살아갈 수 있을 텐데 그 삶을 포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당시의 두 사람 동주와 몽규 물론 그 당시에 동주와 몽규 같은 셀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사람들이 있었겠지요 그리고 거부함으로써 본인들이게 겪게 될 호된 고문속에 죽어간 그 분들이 생각 났기에 영화를 보는 내내 저 스스로가 부끄럽지 않을 때가 없었어요..   특히 마지막 엔딩 장면에 강하늘이 부른 "자화상"이란 노래가 감정선을 건드립니다.             요즘 가장 기대되는 영화 인데요. "동주" 영화에 대해 이준익 감독이 최근에 자세히 한 인터뷰인데 캐스팅 비화외에도 흥미로운 내용이 많아서 포스팅합니다 :)     강하늘에 대해..   2014년 부산영화제 때 캐스팅 됐다. 당시 강하늘은 '순수의시대'를 찍고 있었는데, 황정민이 내게 강하늘을 추천했다.   강하늘이 '평양성'이 첫 영화인데 걔를 데뷔 시킨게 나다. 그래서 강하늘에 대해선 잘안다. 최근에 강하늘이 몇몇 영화의 드라마로 주목 받고 있는 중인데 연기는 사실 스무살 때부터 잘했다.   강하늘이 윤동주 시인과 외모가 닮았다.   내면도 맑다. 꾸밈이 없고 가식이 없다. 뭘 숨기거나 속이려 하는게 없다. 그래서 말실수라 여겨질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머리 굴리는 게 없어서 그런거다. 그만큼 착하다는 뜻이다. 사실 인터뷰나 이런데서 텍스트만 놓고 보면 잘난 척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수 있는데 말하는 걸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워막 맑아서 그런 거다. 그 점이 강하늘을 선택한 이유였다.     강하늘은 영화 '동주'에서 시인 윤동주 역을 맡았다. 온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중 한 명으로 항상 꼽히는 인물이다. 그 역시 윤동주를 사랑했다고 고백한다. 이준익 감독보다, 시나리오보다,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동주', 그 자체였다. 그래서 선택했고, 그 덕분에 힘들었다.   강하늘은 '서시'를 낭송하던 후시녹음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해요" 라고 말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고 시작하는 시다.   "내가 뱉으면 지울 수 없다는 마음이 계속 막는 거예요. 많은 사람이 상상하며 읽었을 시의 목소리를 제가 처음 '동주' 관객에게 들려주는 거잖아요. 너무 힘들더라고요." 대중매체로는 처음으로 윤동주를 그리는 작품이다. 윤동주를 강하늘로 접하게 될 '동주' 관객들이 두려웠다.       박정민에 대해..   '신촌좀비만화' 중 류승완 감독이 연출한 단편을 봤는데 그게 박정민인 줄 몰랐다.   나중에 확인을 해보니 박정민이라고 하더라. 우리나라에서도 20대의 저만한 배우가 있다니. 박정민 같은 배우가 대준에게 주목 받고 있정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찰나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황정민을 만났는데 '동주'에 강하늘 박정민을 쓰라고 하더라. 이미 둘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알았다'라고 했다.       이준익 감독은 ‘동주’를 원래 제작비 1억5,000만 원의 작품으로 만들려 했다. 시나리오도 제작비에 맞춰 써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시대상을 재현하기엔 턱없이 적은 금액. 때문에 3억으로 불어난 제작비는 마지막엔 5억 원이 됐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100억 원 이상의 금액이 투입된 최동훈 감독의 ‘암살’과 비교하면 극히 적은 액수임엔 틀림없다. 이준익 감독이라면 그의 이름만으로도 투자하겠다고 나설 이들이 줄을 서겠지만,   그는 ‘동주’를 상업영화로 만들지 않았다.     그것은 윤동주 시인의 진정성과 그의 동지 송몽규의 삶을 상업적으로 변질시키고 싶지 않았던 이준익 감독의 진심 때문이었다.   이과정에서 이준익 감독은 '동주'제작 중 여러가지를 포기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사도'를 함께 한 배우 유아인이다. '사도'촬영 당시 이준익 감독이 '동주'를 준비 중이란 사실을 알았던 유아인은 "감독님 '동주' 제가 하면 안돼요?" 라고 물었다. 하지만 이준익 감독은 단칼에 "안돼,임마"라고 했단다. 이유은 유아인은 대세가 될 줄 알았기 때문. 그리고 흑백 저예산 영화에 대세 배우를 넣는다니 이상한 장삿속이다. '베테랑' 촬영을 마치고 '사도'에 임했던 유아인을 두고 이준익 감독은 두 편의 영화로 대세가 될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유아인이 연기한 윤동주' 대신 '윤동주를 000이 연기했다'를 원했던 이준익 감독은 결국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았던 강하늘 박정민을 택했다.     이준익 감독은 ‘동주’ 개봉을 준비하면서 투자배급사에 제작비 이상의 돈을 홍보비로 쓰지 말 것을 요구했다. 소박했던 윤동주 시인의 정신세계를 담아낸 영화를 5억 원 제작비 이상의 과도한 광고비로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때문에 시대의 아픔과 부끄러움의 미학을 그린 ‘동주’는 버스나 옥외광고 없이 이준익 감독과 배우들의 인터뷰, GV 시사회 등으로 홍보를 대신하고 있다. 특히 이준익 감독은 ‘동주’ 흥행공약에 대해선 굳게 입을 다물었다. 이 감독은 뉴스엔과 인터뷰에서 “상업적인 목표를 세우는 건 윤동주 시인과 송몽규 열사에게 예의 없는 행동이라고 투자사에 이야기를 했다. 이 영화는 그래야만 한다”며 “광고비를 굳이 많이 쓰지 않아도 사람들 마음 속에 있는 윤동주 시인의 시가 있기 때문에 영화만 성실하게 만들면 알아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나는 윤동주의 삶을 전기영화로 만들려고 한 게 아니었다. 감성팔이를 하려고 찍은 것도 아니다. '쉽게 쓰여진 시'를 쓰고 취조받으며 부끄러워 서명을 못하겠다는 동주와 '뜻한 대로 하지 못해 한스럽고 억울하다'고 서명하는 몽규의 정체성을 만들어내려고 그 앞을 깔았다. 우리는 일제의 피해에 대해서만 억울해한다. 하지만 나는 일본 군국주의의 모순과 부도덕성을 동주, 몽규의 입으로 그려내고 싶었다. 윤동주가 그 부조리함을 증명하기 위한 가장 좋은 입구라고 생각했다.  
339    <동주>를 찍기 위해, 동주 묘소 다녀오다... 댓글:  조회:6749  추천:0  2016-02-19
일제강점기, 28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한 젊은 시인 윤동주. 그는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고민하는 시인이었다. 어두운 시대 상황에서도 아름다운 시를 남긴 윤동주 그리고 그와 삶과 죽음을 함께한 송몽규를 그린 영화 [동주],- 영화 [동주]를 연출한 이준익 감독과 강하늘, 박정민 두 배우가 그동안 하지 못한 진심을 담아 네이버 매거진에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 이준익 감독이 말하는 영화 [동주]의 시작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인 윤동주의 영화는 왜 없을까', '누구나 다 알지만, 과연 그의 삶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이 의문에서 영화 [동주]를 시작했다. 윤동주를 영화화하기에 앞서 정확하게 그의 행적을 파악하기 위해 그와 공존했던 가장 가까운 관계부터 살펴보게 되었고 같은 중국 용정에서 태어나 함께 일본 교토로 유학을 갔으며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함께 죽음을 맞이한, 매 순간 같은 행로를 걸어온 송몽규의 존재를 발견했다. 윤동주는 아름다운 시를 남기고 떠났기에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는 반면 송몽규는 윤동주처럼 결과물을 남기진 않았지만, 그 과정만큼은 아름다웠던 인물이다. 영화 [동주]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송몽규의 과정과 윤동주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우리도 살면서 죽기 전에 거창한 결과를 만들어내면 좋겠지만, 대부분은 정말 치열하게 그 순간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송몽규도 우리와 같은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려 했든 아름다운 과정들을 겪었든 것이고 그 과정을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바람 하나로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 [동주]는 결과가 아름다운, 과정이 아름다운 청년 윤동주와 송몽규의 이야기로 비롯된 것이다. ▣ 강하늘과 윤동주, 그리고 송몽규와 박정민       강하늘 : 윤동주 선생님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위대한 시인이죠. 하지만 정작 그분이 어떤 생을 살았는지는 다들 잘 모르실 것 같아요. 저부터도 그랬으니까요. 우리에게 시 작품으로만 익숙한 윤동주 선생님의 시가 어떤 시간과 아픔을 겪고 우리에게 남았는지, 또한 어둠의 시대를 산 스물여덟 청년이 어떤 마음을 품고 살았는지를 정직하고 담백하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박정민 : 또래 배우 중에서 하늘이가 가진 이미지가 윤동주 시인의 역할과 잘 맞는 것 같아요. 또 하늘이가 영화 [쎄시봉]에서 윤동주 시인의 육촌 동생인 윤형주 선생님의 역할을 하기도 했잖아요. 이 영화는 아마 하늘이가 운명적으로 해야 하는 작품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박정민 : 처음에 캐스팅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걸 왜 나한테 하자고 했지?' 라는 생각에 매니저한테 내가 한다고 하면 이 영화를 할 수 있는 거냐고 계속 물어봤어요. 너무 좋고 설렜죠. 그런데 시험공부를 열심히 하면 긴장되는 것처럼 조금은 두려움이 앞서기도 했습니다.   윤동주 묘소 안내 표지 명동촌 입구 송몽규 묘소 (이미지 출처 : 배우 박정민) 강하늘 : 정민이 형은 대본을 받고 실제로 중국에 있는 두 분의 생가와 묘소까지 다녀왔어요. 주변을 살펴보고 혼자 고사까지 지냈다고 하더라고요. 정민이 형은 이 역할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고 모든 걸 쏟아 부을 수 있는 능력도 마음도 갖춘 사람이었어요. 송몽규 선생님 역시 독립을 위해 온몸을 내던지셨는데 그런 열정이 정민이 형과 많이 닮아있지 않나 생각해요. ▣ 강하늘이 윤동주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강하늘 : 지금껏 시나리오를 보고 눈물을 흘린 건 [동주]가 처음이었어요. 그만큼 울렁이는 감정을 느꼈죠. 저는 윤동주 선생님 앞에 '흔들림'이라는 수식을 붙이고 싶어요. 선생님의 청춘은 굉장히 뜨겁고 푸르렀기 때문에 흔들린 것 같아요. 이 작품으로 잠시나마 그 당시 시대로 돌아가 많은 사람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박정민 : 저 역시도 관객분들께서 보시고 얻는 것이 있다면 고스란히 가져가 주셨으면 하는 큰바람이 있어요. 영화 속 송몽규로 돌아가 비슷한 삶을 살았지만 다른 선택을 했던 윤동주에게 "너는 나처럼 살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라. 나는 그걸로 좋다"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 박정민이 송몽규 독립운동가에게 보내는 편지       박정민 : 과정이 아름다웠던 독립운동가 송몽규 선생님을 연기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연기한 진심이 관객분들께 잘 전달되었으면 좋겠어요. 어둠의 시대에서도 별처럼 빛난 청춘 송몽규 선생님을 기억해주세요. 강하늘 : 송몽규 선생님과는 둘도 없는 벗이었지만 '나의 벗'이라는 말이 영화에선 없어요. 그래서 지금이라도 말해주고 싶어요. "나의 벗 몽규야. 그리고 나의 소중한 사람 몽규야. 고생 많았고 미안했다"  
338    동주에 다 담지 못한 장면;우리가 맞고 있는 주사가 뭡니까... 댓글:  조회:4844  추천:0  2016-02-18
영화에 담지 못한 이야기가 남아있다?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의 삶을 최초로 스크린에 그린 영화 '동주'(감독 이준익/제작 루스이소니도스) 측이 영화에 다 담지 못했던 미공개 장면을 공개했다. 이름도, 언어도, 꿈도 허락되지 않았던 1945년 평생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시인 윤동주와 독립운동가 송몽규의 빛나던 청춘을 담은 영화 '동주'가 영화에 다 담지 못했던 윤동주와 일본 고등형사와의 심문장면을 전했다. ▲ “윤동주 시인의 시는 누구나 다 알지만 과연 그의 삶은 우리가 알고 있는가”라는 이준익 감독의 의문에서 출발한 영화 '동주'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지만 시인으로 살지 못했던 아픈 청춘 윤동주와 그의 친구이자 독립운동가 송몽규의 삶을 기교나 과장 없이 진실되게 그려내 언론과 관객들에게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다. 본편에서는 삭제되었으나 가슴 아픈 진실을 알아야 한다는 이준익 감독의 의견으로 공개된 짧은 영상은 윤동주 시인이 짧은 생을 어떻게 살았는 지, 후쿠오카 감옥에서 어떻게 아픈 죽음을 맞이 했는 지를 보여준다. 감옥에서 의문의 주사를 맞으며 수감되어 있는 동주는 야윈 모습으로 “우리가 맞고 있는 주사가 뭡니까?”라며 물어보지만 그에 대한 답은 듣지 못한 채 “송몽규와 함께 꾸민 일이잖아? 싸인해” 라는 고등형사의 강압적인 취조를 받는다. 영문도 모른 채 투옥된 그에게 일본의 고등형사는 거짓자백을 강요하고 의문의 주사마저 투여한다. 또 윤동주의 시를 보고선 “너의 사상적 바탕이 여기 다 있잖아?”라며 다만 시를 쓰고 싶었던 윤동주를 사상범으로 몰아간다. '동주'는 시대에 가로막혀 이룰 수 없었던 윤동주의 꿈과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시인 윤동주가 아닌 후쿠오카 감옥에서 생체 실험의 대상이 되어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던 그의 진짜 삶을 보여주고 있다. “과정이 아름다웠던 인물이 잊혀지는 역사를 이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고, 결과가 아름다웠던 동주를 통해 과거의 가치인 송몽규를 보여주고자 했다”는 이준익 감독의 말처럼 결과가 아름다웠지만 삶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던 윤동주의 가슴 아픈 진실이 우리가 잊고 지낸 역사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어 줄 전망이다 .
337    <동주>가 개봉 되다... 댓글:  조회:4584  추천:0  2016-02-18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2월 16일,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가 옥사한 날이다. 이를 즈음하여 18일 71년 전 후쿠오카 감옥에서 29세 나이에 죽어간 그의 삶을 조명하는 영화 가 개봉했다. 이 영화는 윤동주(강하늘 분)와 그와 평생을 함께 한 또 다른 젊은이 송몽규 열사(박정민 분),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낸 각 군상의 모습을 담았다. 담담한 흑백화면 위로 순수하고 열정적이어서 아름다운 청춘이 녹아있다.   ▲ 시인 윤동주(강하늘 분)와 청년 열사 송몽규(박정민 분)의 삶과 죽음이 담긴 영화 '동주'포스터(사진=배급사 딜라이트 제공)   북간도 룡정 명동촌, 같은 집에서 이종사촌 동갑내기로 태어난 윤동주와 송몽규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서로를 아끼면서도 성격은 서로 달랐다. 몽규는 활달하고 항상 자신의 뜻을 거침없이 표현하며 신념대로 행동했다. 반면 동주는 소심한 듯 수줍고 조국의 현실을 아파하는 젊은이였다. 신춘문예 당선, 일본 교토제국대학 입학, 조선 학생모임 조직 등 항상 앞서가는 몽규의 행동력을 부러워하며 뒤를 따르는 윤동주.   ▲ 영화 '동주'에서 행동파 송몽규 "너는 시를 써라. 총은 내가 든다" (사진=배급사 딜라이트 제공)   그러나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면 글을 써서 무엇 하겠느냐”며 “시는 세상을 바꾸는 데 약하다”는 몽규의 발언에 시에 대한 신념을 쏟아내는 동주의 모습은 결코 유약하지 않았다. 동주는 앞에 나서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면서 조국의 현실을 외면하고 자신이 문학의 뒤에 숨는 것이 아닌지 끊임없이 묻는다. 그것은 숨고 싶지 않다는 젊은 열사의 절규였다. 동주의 우상이자 동주의 시를 알아본 시인 정지용(문성근)은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라며 동주를 격려한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이 영화 전반을 ‘부끄러움’이란 단어가 관통하고 있다. 최근 베스트셀러가 된 윤동주의 육필 시집에 담긴 시들에도 부끄러움이란 단어가 계속 눈에 띈다. 동주가 부끄러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영화에는 이들이 존경했던 세 명의 기성세대가 나타난다. 먼저 이름만 등장한 춘원 이광수는 한때 몽규의 우상이었다. 천재적인 문학가로 존경받았으나 일제에 편승해 한국청년의 징용을 찬양한 춘원 이광수. 몽규는 단호하게 그 이름조차 언급하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시대의 지성인으로 자신이 일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부끄러워했던 정지용. 일본인으로 태어났으나 군국주의의 망령을 비판하며 한국 젊은이의 신념을 사랑한 다카마스 교수. 부끄러움을 잊은 춘원과 부끄러움을 아닌 정지용과 다카마스 교수. 시대를 탓하지 않고, 정신을 잃거나 눈 감지 않고 뜨겁게 살아 낸 청춘, 동주와 몽규   ▲ 영화'동주'에서 수줍은 문학청년으로 나온 윤동주(강하늘 분)   마지막 취조 받는 장면에서 교차 편집된 두 젊은이의 모습은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고등계 형사는 “전체를 위해 개인이 희생해야 할 때다. 아시아의 해방을 너희가 방해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있다.”며 군국주의를 정당화하려는 괴논리를 펼친다. 그러나 고등계 형사가 정당화하려는 군국주의의 모순과 부도덕함을 꾸짖으며 절규하는 두 젊은이. 몽규는 조선학생들을 선동하고 강제징용에 맞서 독립을 꾀하려 저항조직을 만들었다는 조서에 대해 “여기 적혀 있는 죄목들을 내가 해 냈어야 했다. 그러지 못한 것이 한탄스럽다.”며 서명을 했다. 동주는 “이런 세상에 태어나서 시인이 되겠다고 그림자처럼 살았던 것이 부끄럽다. 그래서 여기 적힌 일들을 내가 했다고 할 수 없다.”며 서명을 거절했다. 행동은 달랐으나 그 가슴에 품은 신념은 같았다. 친일행위를 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시대가 그랬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시대에 태어난 것이 원망스럽다. 당신도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나와 같이 행동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이들은 시대를 원망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뜨겁게 살아냈다. 시대에 휩쓸려 정신을 잃거나 눈 감지 않았다. 정면으로 시대를 바라보며 세상을 사랑하고 마음껏 숨 쉬고 살만한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주어진 시대를 탓하지 않고 뜨거운 가슴과 날카로운 이성으로 신념을 지킨 젊은 열정이 후세에 부끄럽지 않게 전해진다.   ▲ 북간도 용정 명동촌에서 이종사촌간으로 태어난 윤동주와 송몽규가 급우들과 함께 '새명동'잡지를 등사하는 장면
336    2월 16일, 오늘, 윤동주 옥사 70번째 기일... 댓글:  조회:4936  추천:0  2016-02-16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의 윤동주 코너.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뿐 아니라 소설 등 15종을 모았다.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져가라.’ 이런 전보 한 장을 던져 주고 29년간을 시와 고국만을 그리며 고독을 견디었던 사형(舍兄) 윤동주를 일제는 빼앗아 가고 말았으니 이는 1945년 일제가 망하기 바로 6개월 전 일이었습니다.” 60년 전 판본 그대로 살려 인기 예약 판매만으로 베스트셀러에 윤동주보다 열 살 어렸던 동생 고(故) 윤일주(1927∼85)씨가 1955년 형 동주의 생애를 회고하며 쓴 글이다. 같은 해 정음사에서 출간된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증보판에 실려 있다.  문학을 사랑하고 영원을 동경했으나 한 방울 이슬처럼 안타깝게 스러져간 윤동주. 16일은 그의 70번째 기일이다. 그에 맞춰 그의 문학과 삶을 소재로 한 다양한 문화 콘텐트가 주목받고 있다.   가장 뜨거운 건 시집이다. 그의 유일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55년 옛 활자체 그대로 살린 복제 출판본이 인기를 얻고 있다. 소와다리와 한국교과서주식회사, 두 출판사에서 같은 55년 판본을 재현한 시집을 나란히 냈다. ...정식 출간 전 예약 판매 만으로도 인테넛 서점 알라딘의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출간 두 달 만에 5만 부가 팔렸다. 교과서주식회사 본은 소와다리 본과 달리 누런 색 재질의 종이를 사용해 옛 맛이 더 난다.  윤동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는 아예 윤동주 관련 코너를 마련했다. 시집 이외에 소설·평전 등 15종을 판매한다. 황원경 북마스터는 “시집의 경우 대부분 30∼40대 여성 독자가 많다”고 전했다. 윤동주 뮤지컬도 무대에 오른다. 서울예술단에서 제작한 ‘윤동주, 달을 쏘다’다. 다음달 20∼27일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에서 공연한다. [중앙일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두달 새 5만 부 ‘윤동주 열풍’
335    빛나던 미완성의 청춘 우리가 기억해야 할 별... 댓글:  조회:7305  추천:0  2016-02-16
의 유인물 표지 시인 윤동주.가 된 강하늘.과 열사 송몽규.가 되어 열연한 박정민. 박정민은 2011년 5000만원 기적 독립영화 파수꾼에 베키역을 맡아 이름이 알려졌답니다. 송몽규와 윤동주의 한 80년 전 사진을 볼까요. 송몽규 윤동주 그리고 둘 함께 또는 관련있는 사람과 함께 있는 사진을 보시죠 뒷줄 왼쪽 장준하 뒷줄 가운데 문익환 뒷줄 오른쪽 윤동주 앞줄 한명 정일권. 은진중학교 시절 장준하 문익환 윤동주 등은 친분이 두터웠다 한다. 장준하는 사회주의 운동가.로 의문의 죽임을 당합니다. 장준하 1918년 나서 1975년 포천 약사봉에서 살해당했다? 그는 일본군에 입대했다 바로 탈출 중국중앙군에 준위로 복무 1945년 2월 다시 광복군에 입대하여 활동 중 미국CIA 전신 OSS에 복무 그해 11월 임시정부 1진으로 귀국 김구 선생의 비서로 있다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에 활동하였다. 1952년 문교부 사무국장 등 공무원 생활을 하였으며 사상계 창간 동인문학상 제정 등으로 유명한데다 국회의원도 지냈다. 제 2공화국 장면 내각에서 국토기획단장 등을 맡다 5.16혁명 세력의 반대편에 섰다. 박정희의 만주군 경력,남로당 경력 등을 거들며 윤보선 대통령 편에 서다, 1975년, 장준하 의문사 하다. 궁금한 분은 인권인동가 고상만.의 를 보세요. 정일권 박정희와 그 길이 비슷한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만주군에 1940~1945년 해방 무렵까지 복무했다. 해방 후 만주군인맥으로 승승장구 국군사령관까지 하다 국민방위군,거창양민학살의 책임으로 옷을 벗는다. 그 뒤 박정희정권 때 국회의장,국무총리를 하였다. 정일권은 친일인명사전에 친일인사로 등재되어 있다. 문익환 목사.  한국인권운동가로 고단한 삶을 살다 민중과 함께 하셨던분. 문익환님이 타계한지도 어언 22년이 되었다네. 그리고 윤동주 위의 사진 속 인물. 왼쪽 윤동주 오른쪽 송몽규. 가운데는 ... 송몽규는 윤동주의 고모 아들로 약 석 달 차이의 고종사촌 형이다. 송몽규는 윤동주 생가에서 같이 살았으며 수필가 겸 독립운동가로 살다 윤동주(1945.2.16) 보다 약 20일 후인 1945.3.7.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일제에 의해 생체실험 대상이 되어 살해당했다. 송몽규는 ㅣ935년 은진중학교.를 수료한 뒤 중국 낙양군관학교에 입교 훈련을 받고 그해 11월에 산동 제남에 있는 독립운동단체에서 활동하다 그 다음해 4월 일제에게 체포되었다. 국내로 이송된 뒤 거주제한조치를 받고 풀려났다. 1937년 용정 대성중학교 4학년에 편입. 1938년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 1942년 교토제국대학 사학과 서양사 전공으로 입학. 1943년 7월 10일 재교토 조선인학생민족주의 그룹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1944년 징역2년을 받고 복역 중 1945년 3월 7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일제에 의해 옥사했다. 작품으로는 193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콩트 으로 당선. 1938년에 밤. 1941년 연희전문학교 문우.지에 가 있다.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윤동주. 가수 윤형주의 육촌형이라니 놀랍다. 30년 후의 육촌동생이 1947년 그가 죽은 후에 태어나다니. 1917년 12월 길림성 용정에서 나다. 송몽규의 외사촌 동생. 북간도 명동소학교 졸업. 북간도 은진중학교 수료 및 광명중학교 졸업.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 1939년 릿교대학 영어영문학과 중퇴 도시샤 대학 영어영문학과 재학 중 1943년 항일운동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감옥살이 중에 1945년 2월 16일 일제 생체실험대상으로 살다 옥사함. 건국공로훈장 독립장. 국민장 추서되었다. 유고시집으로 31편 시가 실린 1집이 1948년에 출간되었다. 1976년 3집에는 유족이 보관했던 시가 추가 되어 백편이 넘는 시가 실려있다. 아래는 의 홍보유인물 찍은 사진 윤동주를 연기한 김하늘. 송몽규를 열연한 박정민. 의 이준익 감독     강하늘 대 박정민 둘이 연기한 1945년 20여일 사이로 후쿠오카 감옥에서 일제에 의해 죽어간 송몽규 와 윤동주의 무엇을 대변할 것인지. 동주는 흑백영화다 이준익 감독 도전을 하다. 칼러의 시대에 흑백영화 동주 박정민 김하늘   시인이 되기 바랬던 윤동주를 왜 이준익 감독은 동주에서 윤동주를 부끄럽게 만들었을까? 서 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람에 이는 잎새에도 나는 괴뢰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너는 시를 써라. 나 송몽규 총을 들겠다. 학교 문집을 만들 때가 그립다.       어머니! 그 부름에 하늘에서 별이 떨어진다. 그들이 이 세상을 억울하게 떠난 지 벌써 70년이 넘었다. 지금 우리가 그 두 사람이 되어 본다면,ㅡㅡㅡ
334    땡- <<우표학교>> - 윤동주 우표에 오르다 댓글:  조회:6463  추천:0  2016-02-16
  ​ 윤동주는 서정적인 시어로 조국의 독립을 노래한 아름다운 청년이었습니다. 그의 집안은 증조부 대에 북간도로 이주하였습니다. 1917년 명동촌에서 태어난 윤동주는 소학교 때 급우들과 잡지를 발행하는 등 어릴 적부터 문학에 소질을 보였습니다. 평양 숭실학교 시절 신사참배가 강요되자 자퇴한 그는 일본경찰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서시』를 비롯하여 수많은 작품을 썼던 그는 연희전문학교를 거쳐 일본유학길에 올랐는데 1943년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 투옥되었습니다. 그리고 1945년 2월 그가 옥에서 사망했다는 전보 한장이 고향집에 배달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만27세였습니다. ​ ​ ​ ​ "우표에서 얻은 지식이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많다."                                                                                            - 프랭클린 루스벨트 1) 2) 3)   1976 - 영국 북해유전 채유 성공 역사속 오늘[1976년 2월 16일] 영국 북해유전 채유 성공 1976년 오늘, 영국의 북해유전 오크필드 광구에서 석유가 쏟아져 나왔다. 영국이 북해유전에서 채유하는 데 성공하기는 이번이 세 번째. 이번 유전 탐사는 세계적인 석유회사 셸과 에소사(社)의 합작으로 이뤄졌다. 이 광구에서 원유 3억5천만 갤런을 뽑아낼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됐다.   2) 1957 -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대통령 교도민주주의 제창 수카르노(Sukarno, 1901~1970)는 1928년 국민당을 결성하여 민중주의(民衆主義)를 주창하다가, 1929~1933년 투옥 후에 플로레스섬의 엔데, 수마트라섬의 펜쿠렌에서 유배생활을 보냈다. 1942년 일본군에 의하여 석방되어 일본군에 협력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네덜란드로부터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선언, 1950년 인도네시아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55년 제1회 아시아아프리카회의(반둥회의)를 주최, 비동맹중립외교의 주역으로 각광을 받았는데, 내정면에서는 다당난립 때문에 단명내각의 연속이었다. 1957년 그는 내부혼란의 원인이 서구형 의회정치에 있다고 하여 대통령중심제를 채택, 촌락민주주의의 전통에 입각한 이른바 교도(敎導)민주주의(일반 대중에 대한 엘리트의 교도적 역할을 강조한, 인도네시아에 적합한 민주주의)를 제창하였다. 그 후 국내에서 절대권력을 장악하고, 네덜란드에 대항해서 서(西)이리안해방투쟁을 전개, 1963년 목적을 달성하고 종신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1965년 9월 30일에 발생한 쿠데타에서 공산당을 감쌌다고 하여, 1966년 3월 장군 수하르토가 지휘하는 반공 육군에 실권을 넘겨주고, 이듬해 종신 대통령의 지위를 박탈당했으며, 정치활동이 금지된 가운데 보고르 교외의 바트트리스의 자택에 살다가 정계복귀도 못한 채 죽었다.   3) 1954 -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 내한 외로움에 지친 먼로(Monroe, Marilyn)에게 메이저리그 타자출신인 스포츠 스타 '조 디마지오'(Joe Dimaggio)가 손을 내밀었다. 당시 두 사람의 만남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보는 스포츠 스타와 연예인간의 만남 처럼 화려한 이벤트로 세상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1954년 1월, 두 사람은 화려한 결혼식을 올린다. 일본 토쿄로 신혼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달콤한 밀월은 먼로의 한국방문으로 삐걱거렸다. 먼로는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위문을 이유로 조 디마지오만 일본에 남겨둔 채 홀로 한국을 방문한다. 이탈리아의 엄격한 보수적 가정에서 자라 먼로에게 헌신적인 아내의 역할을 기대했던 조디마지오는 먼로의 자유로움과 영화에 대한 열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먼로의 끝없는 남성편력과 디마지오의 결벽증은 잦은 충돌을 일으키다 에서 그 유명한 뉴욕 지하철 환풍구위 노출장면을 촬영한 뒤 9개월 동안의 결혼생활을 청산한다. 디마지오는 먼로에 대한 애정만큼 온전한 남편으로 남기를 기대했지만, 먼로의 영화에 대한 열정과 대중적 사랑에 대한 갈망은 한 사람의 아내로 머물 수 없었다.먼로가 마약과 약물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도 디마지오와의 이혼 직후부터였다. 1) 2) 3)   1) 1945 - 시인 윤동주(尹東柱) 일본 형무소에서 옥사 윤동주 [尹東柱, 1917.12.30~1945.2.16] [어제의 오늘]1945년 시인 윤동주 옥사 ㆍ일제 강점기 고뇌를 사색한 젊음 스물아홉 젊은 나이, 단정한 용모, 아름답고 투명한 감성을 가진 한 청년이 일본 형무소에서 1945년 오늘 눈을 감았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로 시작하는 ‘서시’의 시인 윤동주다.윤동주는 1917년 12월30일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1925년 명동소학교에 입학해 13세 때 문예지 ‘새명동’을 펴내며 동시, 동요 등을 실었다. 18세 때에는 ‘초한대’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라는 시 3편을 쓰기도 했다.그는 문학을 반대하는 아버지에게 맞서 단식과 가출까지 감행하면서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해 본격적인 시작 활동을 하게 된다. 그는 시를 줄곧 썼지만 발표하지 않았다. 연희전문을 졸업하던 1941년에 시집 를 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다음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 도시샤대학 영문과로 전학했고 1943년 7월에 귀향하려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1944년 3월31일, ‘치안유지법 위반’이란 죄목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윤동주는 해방을 여섯 달 남겨놓고 형무소에서 ‘이름 모를 주사’를 맞고 비통하게도 세상을 떠나고 만다. 당시 전쟁 시에 부족한 혈장 대용으로 식염수를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생체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그도 이 생체실험의 희생물이라는 의혹에 싸여 있었다. 하지만 형무소 측의 사인은 뇌일혈이었다. 꿈 한번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안타깝기 그지없는 짧은 생애였다.사후 2주기를 앞둔 1947년 2월13일 ‘경향신문’에는 당시 주필이었던 시인 정지용에 의해 무명의 시인이 쓴 시 한 편이 소개됐다. 윤동주의 유작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쓴 것으로 추측되는 ‘쉽게 씌어진 시’였다. 이미 고인이 된 시인의 생애도 간략히 소개됐다. 윤동주의 시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첫걸음이었다. 이어 3주기에는 지인들에 의해 유고시집 가 만들어졌다.“일제 헌병은 동(冬) 섣달에도 꽃과 같은,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와 같은 조선청년 시인을 죽이고 제 나라를 망치었다. 뼈가 강한 죄로 죽은 윤동주의 백골은 이제 고토 간도에 누워 있다.”(정지용의 서문 중)  2) 1959 - 카스트로, 쿠바 수상에 취임 카스트로(Castro, Fidel, 1926/27~ )는 1945년 아바나대학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대학 재학 때부터 정치활동을 하였으며, 1947년 도미니카공화국에 독재자 트루히요를 타도하기 위하여 침공한 일도 있다. 1948년 콜롬비아의 보고타에서 발생한 도시폭동사건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53년 7월 동지 156명과 함께 쿠바의 산티아고데쿠바에 있는 몬카다군 병영를 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다. 1955년 특사로 풀려나 아바나로 돌아오자마자 멕시코로 망명, F.바티스타 타도계획을 세웠다. 1956년 86명의 동지들과 함께 원정에 나서 오리엔테주(州) 시에라마에스트라에 숨어들어 게릴라전을 전개, 1959년 2월 바티스타정권을 무너뜨리고 공산독재정권을 세워 총리가 되었다. 총리에 취임한 후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한편,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자본을 접수하는 등 사회개혁을 진행하였으며, 그 해 9월 제1차 아바나선언을 발표하여 라틴아메리카 해방을 제창하였다.   3) 1950 - 이승만 대통령, 맥아더 초청으로 일본 방문 한국 대통령 이승만이 주일 연합군사령관 맥아더로부터 미국의 대일정책에 대한 힌트를 얻은 것은 1948년 가을이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지 두 달 남짓 되는 10월 19일, 이승만은 맥아더의 초청을 받아 대한민국 대통령의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하게 되는데, 그때 맥아더는 이승만에게, 일본을 아시아의 반공 보루로서 중점 육성할 계획이라고 귀띔한다. 일본에게 아시아의 반공 보루 역할을 맡긴다니, 이승만에게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미국의 발상이었다. 뒷날 이승만은 한국 자유중국 필리핀 남베트남을 잇는 반공밸트를 구상하게 되거니와, 아무튼 그때 이승만은 맥아더에게, 일본은 반공 보루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항변한다. 일본이 아시아의 반공 보루가 되려면 우선 한국으로부터 그 자격을 인정받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원래 한국의 영토였던 대마도를 한국에게 돌려주고, 일제강점 35년동안 착취한 한국의 재산을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승만이 또다시 맥아더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한 것은 1950년 2월 16일이었다. 이승만과 맥아더의 우정은 소문난 것이었지만, 오랜 망명생활 중에 세계를 떠돌면서도 일본 땅에 발을 딛은 것은 고종황제의 밀사로 미국대통령을 만나러 가던 1904년, 그를 실은 미국 선박 오하이오호가 고오베항에 정박했을 때의 잠깐, 그 한번 뿐이었는데, 대통령이 되자마자 연거푸 두 번이나 가게 된 것이었고, 그렇게 두 번씩이나 맥아더가 이승만을 일본으로 초청한 것은, 하루빨리 아시아를 일본에게 맡기고 물러서자는 미국의 정책을 주지시키기 위해서였다. 1) 2) 3)   1) 2010 - 모태범,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사상 첫 금 스피드스케이팅 500m서 ‘금빛 질주’ 세계정상 이규혁·이강석 넘어 돌풍 “쇼트트랙이 아닌 롱트랙에서 일궈낸 놀랄 만한 우승이다.” 빙상대표팀 막내 모태범(21·한국체육대3)이 16일(이하 한국시각)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사상 첫 금메달을 따자 (AP)는 이렇게 보도했다. 한국은 쇼트트랙에서 세계 무대를 휩쓸어 왔다. 그러나 세계 빙상계는 한국을 빙속 강국으로 평가하진 않았다. 쇼트트랙은 변수가 많고, 때론 실력보다 운이 좌우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한국 빙속이 이제 세계 정상급으로 우뚝 올라서고 있다. 대회 첫날 이승훈이 아시아 선수로는 처음으로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0m 은메달 쾌거를 이룬 데 이어 쇼트트랙 1500m에서 이정수가 우승하고, 이날 그토록 갈구하던 ‘스피드스케이팅의 꽃’ 남자 500m에서 마침내 금빛 질주를 해냈다. 이날 자신의 생일을 맞은 모태범은 캐나다 리치먼드 올림픽오벌 빙상장에서 열린 밴쿠버 겨울올림픽 이틀째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에서 1·2차 합계 69초82로 2위 나가시마 게이이치로(일본)를 0.16초 차로 제치고 금메달을 차지했다. 왕년의 빙속 스타이자 현재 500m 세계기록(34초03) 보유자 제러미 워더스푼(캐나다)조차 이날 2차 레이스에서 모태범을 쫓아가지 못했다. 이로써 한국은 스피드스케이팅 종목에 김정연 등 3명이 일장기를 달고 처음 출전했던 1936년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대회 이후 무려 74년 만에, 광복 이후로는 48년 스위스 장크트모리츠 대회 이후 62년 만에 첫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한국 빙속의 이번 쾌거는 △지난여름 강도 높은 체력훈련 △이규혁·이강석 투톱을 앞세운 내부 경쟁구도 △쇼트트랙에 치중됐던 빙상연맹의 지원 확대 등에 힘입었다. 김종덕 태릉선수촌 훈련본부장은 “역대 어느 빙상팀에 견줘도 이번 대표팀의 훈련량과 수준은 대단했다”며 “지난여름 빙상대표팀은 적게는 120㎞, 길게는 200㎞까지 사이클 훈련을 통해 하체강화 훈련을 소화해냈다”고 말했다. 김관규 대표팀 감독은 “이규혁과 이강석의 선의의 경쟁 속에 모태범이 형들에게 지지 않아야겠다고 노력한 것이 결실을 맺었다”고 말했다. 모태범은 지난 6일 자신의 싸이월드 누리집에 “누군가는 언제나 다른 누군가가 불가능하다고 말한 어떤 일을 하고 있다”고 써놓았다. 국내 모든 언론이 이규혁과 이강석 등 쟁쟁한 선배들에게만 주목할 때 그는 남몰래 구슬땀을 흘리며 얼음을 지쳐댔다. 그러곤 꼭 열흘 뒤 역사적인 기록을 남겼다. 그는 18일 오전 9시 자신의 주종목이자 월드컵 랭킹 2위인 남자 1000m에서 두번째 메달에 도전한다.     2) 1951 - 지평리 전투가 끝나다 지평리 전투는 1951년 2월 13일부터 2월 16일까지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 일대에서 원형 방어진지를 구축한 미국 2 보병사단 23연대전투단(Regiment Combat Team,RCT)과 23RCT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가 중국 인민해방군 39군과 3일간 벌인 격전이었다. 3일 동안 완전히 포위된 미군 23RCT와 프랑스 대대는 포위 3일째인 2월 16일에 미국 1 기병사단 5 기병연대 3대대를 주축으로 편성된 크롬베즈 특별임무부대에 의해 구출되었고, 중국군은 큰 피해를 입고 철수했다.   3) 1965 - F-5 전투기 처음으로 한국에 배치 F-5 Freedom Fighter (Tiger)는 노드롭사(社)가 자주적으로 개발을 추진해 온 경량 전투기를 미공군이 해외 공여용으로 채용한 전투기이다. 유시계 전투용의 소형 기체였기 때문에 당초는 그다지 주목을 끌지 못했지만, 센튜리 시리이즈 이후의 새 기술을 도입하여 만들어진 만큼 설계의 기교성과 함께 사용하기 쉽고 우수한 전투기로서 높이 평가되고, 많은 나라에서 사용되는 동시에 라이센스 생산도 행해졌다. 그러면서도 F5A∼D 시리이즈에서는 차차 개량되어 갈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불충분하게 되었다. F-5A∼D시리이즈의 후계기를 구하여 1970년에 행해진 해외공여용 전투기 설계 콘테스트를 위해서 전면적으로 재설계된 것이 F-5E이다. F-5E는 F-16이나 F-18이 등장한 오늘에도 값싸고 쓰기 좋은, 유용한 기체로서 각국이 채용해 가고 있다.   "1833년 2월 16일에서 17일에 걸친 밤은 축복 받은 밤이었다. 그날 밤의 어둠 위에는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그것은 마리우스와 코제트가 결혼식을 올린 날 밤이었다. 그날은 실로 멋진 하루였다."   - 빅톨 위고 에서 - 가톨릭신문 (공중전화카드)   2009 - 김수환(金壽煥) 추기경 선종 김수환 [金壽煥, 1922.7.2(음력 5.8)~2009.2.16] 한국 가톨릭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온 김수환 추기경이 16일 오후 6시12분께 강남성모병원에서 선종(善終ㆍ서거를 뜻하는 천주교 용어)했다. 향년 87세. 1922년 5월 대구에서 출생한 고인은 1951년 사제품을 받았고 1966년 초대 마산교구장을 거쳐 1968년 대주교로 승품한 뒤 서울대교구장에 올랐다.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인 최초 추기경으로 서임된 고인은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위원장 등을 역임한 뒤 1998년 정년(75세)을 넘기면서 서울대교구장에서 은퇴했다. - 공중전화 카드 1998 - 태극기 원형 [고려국기] 발견 우리나라 태극기의 원형인 「고려국기」의 4卦(괘)가 청색임이 기록돼있는 국내 최초의 문헌이 발견됐다. 사단법인 대한민국국기선양회 金永煥(김영환)회장은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국기보감 발간작업을 벌이던중 고려대대학원 도서관에 소장돼있는 「通商約章類纂 (통상약장유찬)」이란 문헌에서 이같은 태극기 원형을 발견했다고 16일 밝혔다. 이 책자는 1874년 당시 청나라 정부의 조약 및 외국사신의 서한등을 모아 엮은 책으로 당시 59종의 각 나라 국기가 실려있으며, 우리나라의 국기가 「고려국기」로 수록돼있다. 이 문헌에는 고려국기의 旗面(기면)은 황색,太極(태극)은 청색과 홍색,4卦 (괘)는 청색으로 4괘와 태극이 동일색상으로 기록돼있다. 국기선양회 金회장은 『그동안 발견된 태극기의 경우 색상에 대한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면서 『이번 사료의 발굴로 태극기의 명확한 색상을 정립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소년 입상' (공중전화카드)   1992 - 한국의 조각가 김경승(金景承) 사망 김경승 [金景承, 1915.7.18~1992.2.16] 김경승 [金景承] 1937∼1944년 조선미술전람회 조각부에 인물상과 두상(頭像)이 거듭 입선하였다. 그리고 1940년부터 〈목동〉·〈어느 감정〉·〈여명〉 등이 연이어 특선함으로써 추천 작가가 되어 각광을 받았다. 특히 〈여명〉은 한복 바지저고리에 해머를 든 노동자상을 사실적 역동감으로 조형하여 민족색 짙은 작품으로 주목되었다. 그러나 광복 후 뚜렷한 특질의 창작적 작품 활동보다는 미술 대학 교수직과 역사 인물상 또는 기념 동상 제작으로 많은 실적을 남겼다.주로 소녀와 젊은 여인의 전신 또는 반신 나체상으로 시종된 작품들은 대개 1949년 이후 국전(國展)을 통하여 발표되었다. 제1회 국전 때부터 추천 작가·심사 위원으로 참가한 뒤로 마지막 제30회(1981) 때까지 초대 출품한, 엄격한 사실주의와 서정적 시각으로 포착한 여러 자세 및 움직임의 나녀상들이 순수한 창작 활동의 전모였다. 그에 비하여 기념 동상과 기념물 제작은 두드러지게 거듭되었다. 〈충무공 이순신장군상〉(1955년)·〈안중근의사상〉(1959년)·〈세종대왕상〉(1968년)·〈김구선생상〉(1968년)·〈김유신장군기마상〉(1969년)·〈정몽주선생상〉(1970년) 등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상〉(1957년) 등이 주요 동상 작품들이고, 그밖에 청동 주조의 많은 초상 작품들을 만들었다. 기념물로는 〈4·19학생혁명기념탑〉(1963년) 등이 있다. 이화여자대학교·홍익대학교 교수 및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을 역임하였으며, 1958년 서울시문화상 미술부문상, 1964년 3·1문화상 예술본상, 1969년 대한민국예술원 공로상, 1982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대표작으로는 〈소년 입상〉 (1943년)·〈춘몽〉(1961년)·〈잠자는 여인〉(1967년)·〈피리 부는 소녀〉(1980년) 등이 있다.   1981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아시아 순방 등정 교황 요한 바오로2세(Joannes Paulus II, 1920~2005)가 1981년 2월 16일 즉위후 9번째의 해외여행인 극동방문길에 올랐다. 교황은 아시아순방에 나서기 전날인 15일 성베드로광장에 모인 5만명의 군중들에게 행한 일요미사 강론을 통해 자신의 이번 아시아방문 목적은 "세계평화의 대의를 진착시키고 가톨릭 신도들의 신앙심을 돈독하게 하는데 있다"고 말했다. 12일간 총 3만3천km를 여행한 이번 극동방문에서는 파키스탄 카라치에 첫 기착해 필리핀, 괌을 거쳐 일본 등 아시아 등지를 방문했다. 이번 극동여행은 요한 바오로2세와 아시아의 첫 접촉이 됐다. 일본을 마지막으로 방문을 끝낸 교황은 알레스카 앵커러지에 기착, 27일 귀국길에 올랐다.   1964 - 빌리 브란트, 서독 사회민주당 당수에 취임 브란트(Brandt, Willy, 1913~1992)는 16세 때에 사회민주당(SPD)에 입당하여 사회주의 운동에 참가하였으며, 1933년 나치스 정권이 성립하자 노르웨이로 망명하여 W.브란트(본명 Herbert Ernst Karl Frahm)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후 나치스가 노르웨이를 점령함에 따라 다시 스웨덴으로 이주, 그곳에서 신문기자가 되어 반(反)나치스 운동가로서 활약하였다. 전후에는 노르웨이 국적으로 뉘른베르크 재판을 취재하기 위하여 귀국, 이어 주(駐)베를린 노르웨이 외교대표부에서 근무하였다.1948년 독일 국적을 회복하고, 1949년 사회민주당 소속의 서베를린 시의회의원으로서 정계에 진출하여, 1957년 서베를린 시장에 취임하였다. 1964년 사회민주당 당수가 되었으며, 1966년 기독교민주동맹(CDU)과의 연립내각에서 외무장관, 1969년 총선거 후 자유민주당(FDP)과의 연립내각 성립에 성공하여 수상이 되었다. 이후 독소조약 체결 등 소련·폴란드·동독을 중심으로 ‘동방외교’를 추진, 동서의 긴장 완화를 위해 노력한 공로로 1971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동독을 국가로 인정, 양국의 안정에 기여하였으나, 1974년 동독 스파이사건으로 사임하였다.   1937 - 듀폰사, 꿈의 인조섬유 나일론 특허 획득 미국 듀폰사가 1937년 2월 16일 `나일론`이라는 새로운 인조섬유로 특허를 획득했다. 이 인조섬유는 값이 싼 석탄, 공기, 물이 주원료여서 섬유시장에 가격혁명을 불러왔다. 미국에 비단을 수출해 오던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이를 대체할 인공섬유 개발에 박차를 가한 끝에 이같은 개가를 올렸다. 나일론 개발에는 듀폰연구소의 월리스 캐로더스(41) 박사가 결정적 공헌을 했다. 조수 줄리언 힐이 쓸모없어진 화합물질을 실험용 컵에 넣어 가열하다가 유리막대를 타고 거미줄처럼 가는 섬유가 올라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하버드대 화학과 교수였던 캐로더스 박사는 1928년 문을 연 듀폰연구소에 합류, 인공고무인 네오프렌을 개발하는 등 그간 실용화학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보였다.나일론은 종합-응축 반응을 통해 만들어진 고분자 물질로 아주 질기고 탄력성이 있으며 마모에도 강한 특성이 있다. 듀폰사는 1938년 9월 나일론의 상품화를 발표하고 이어 1940년 5월에는 나일론으로 만든 스타킹을 발매했다.   [역사 속의 인물] 비운의 천재 나일론 발명 '캐러더스' 뛰어난 과학자들이 그러했듯, 그도 괴짜였다. 쑥대머리에 뭐든 잃어버리기 일쑤였고 행동도 예측불가였다. 월리스 캐러더스(1896~1937)는 누구나 인정하는 천재였다. 20세기 최고의 발명품인 나일론(nylon)과 합성고무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늘 자신의 능력에 회의를 품고 있었고 우울해 했다. 미국 아이오와에서 태어난 그는 하버드대에서 유기화학을 가르치다 월급을 2배 더 주겠다는 설득에 못 이겨 듀폰사로 옮겼다. 실험에 목숨을 거는 다른 화학자와는 달리, 이론을 파고드는 스타일이었다. "실험의 95%는 연필과 종이로 가능하다"며 도서관에서 지냈다. 나일론과 합성고무도 그의 수많은 아이디어 중 하나였을 뿐이다. 어느 날 석탄, 물, 공기를 원료로 뿌연 액체 덩어리를 만들었는데 누구도 그 진가를 몰랐다. 조수 중 한 명이 덩어리를 가열해 녹인 후 핀셋으로 뽑아 보니 강한 실 모양이 됐다. 1937년 오늘, 나일론의 특허가 출연됐고 두 달 후 비운의 발명가는 필라델피아의 한 호텔에서 갖고 다니던 청산가리를 마셨다. 우울증이 도진 때문이다. 나일론은 여성 스타킹부터 낙하산 줄까지 최고 히트품이 됐지만, 발명가는 그 영광을 함께하지 못한 채 쓸쓸히 사라졌다. 박병선(편집부국장) 매일신문 2011년 02월 16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7183&yy=2011 - 한국방송 70주년 기념 (1997.2.15 발행 - 한국방송 60주년 기념 (1987.2.16 발행)   1927 - 우리 나라 최초의 방송국 경성방송국(호출부호 JODK) 방송 시작 사단법인 경성방송국 설립 이듬해인 1927년 (1월 20일 시험방송을 개시하고) 2월 16일 오랜 기간의 시험방송을 거쳐 마침내 본 방송이 개시되었고, 6월에는 최초로 무선 중계방송이 시행되기도 하였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방송 사업의 발전을 위해 전력이 증강되었고 한국어와 일본어가 별도의 채널을 통해 이중방송 됨에 따라 정동연주소가 증설되고, 연희방송소가 착공되었다. 1935년에는 방송망의 규모가 팽창함에 따라 경성방송국의 명칭이 경성중앙방송국으로 바뀌었고, 2년 후에는 주파수 변경과 아울러 제2방송이 출력을 증강함으로써 간이수신기로도 전국청취가 가능하게 되었다. 수신기도 고급화되어 스피커가 달린 수신기가 생산됨으로써 라디오 방송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1.20 - 경성방송국 시험방송 개시. 2.16 - 경성방송국 본방송 개시. - 방송구역:한국일대 - 호출부호:JODK 주파수:870kHz 공중선전력:1kw 방송편성:조선어3,일본어7 교차방송 KBS 방송박물관 /http://museum.kbs.co.kr/history/history01.php   [경성방송국은…]조선총독부 주도 1927년 첫 전파 1927년 2월 16일 오후 1시. 호출부호 ‘JODK’의 경성방송국이 첫 전파를 발사했다. 개국식이 끝나자 이왕직 전속 경성음악대와 중앙악우회 관현악단이 축하연주를 펼쳤다. 서울 정동 1번지에 들어선 크림색 2층 방송국 건물은 2개의 안테나 철탑과 함께, 곧 장안의 이국적인 명물로 자리잡았다.개국 당시 한 달 청취료는 2원. 당시 물가에 비해 너무 비싸다는 여론에 밀려, 곧 1원으로 내렸다. 개국 직후 등록된 라디오 대수는 1440대에 불과했으나, 1943년 말에는 28만5000대까지 늘어났다. 사단법인으로 출발한 경성방송국은 조선총독부가 설립을 주도했고, 이사장도 일본인이 맡았다. 초기에는 한 채널에서 일본어와 우리말 방송이 교대로 이뤄졌다. 주요 방송 내용은 경제 시황과 물가 시세, 일기예보 등이었고, 우리말 방송으로는 창(唱)과 민요·동화·방송극이 마련됐다. 1933년 제2방송이 설립돼 우리말 방송이 본격적으로 이뤄졌으나, 주 방송은 여전히 일본어 방송이었다. 사실상 총독부 관영방송이었던 경성방송국은 1941년 태평양전쟁과 함께 정보국 통제 아래 놓이면서 전쟁 수행 도구로 전락했다. 경성방송국은 광복 이후 서울 중앙방송국, KBS로 이어졌다.   1918 - 리투아니아 독립 선언 1918년 2월 16일 리투아니아(Lithuania)가 독립을 선언했다. 13세기 중엽에 민다우가스가 리투아니아의 여러 부족을 통일시켰다. 이후 그의 후손들이 대공작 신분으로 통일 리투아니아를 통치했으며 이들 가운데 게디미나스가 14∼16세기에 동유럽 대부분을 차지하는 제국으로 확장시켰다. 리투아니아를 지배하던 대공작은 1386년 폴란드도 지배하게 되어 이 두 국가는 400년 동안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뒤 리투아니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국가에서 실제적으로 종속적 위치에 있다가 폴란드의 제3차 분할(1795) 때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864∼1905년에 있었던 집요한 러시아화 운동에 굴복하기도 했으나 20세기초에 들어와 리투아니아 민족주의 정신이 싹트기 시작했으며, 독일이 지배하던 1918년 스스로 독립을 선포하게 되었다.   1903 - 미국의 코미디언 버건(Bergen, Edgar) 출생 1893 - 소련의 육군 원수(元帥) 투하체프스키(Tukhachevskii, Mikhail) 출생 1884 - 일본의 화가 야스다 유키히코[安田彦] 출생 1831 - 러시아 소설가 레스코프(Leskov, Nikolai Semyonovich) 출생 1823 - 프랑스의 화가 프뤼동(Prud'hon, Pierre-Paul) 사망 1821 - 독일의 지리학자, 아프리카 탐험가 바르트(Barth, Heinrich) 출생       1740 - 이탈리아 인쇄업자 보도니(Bodoni, Giambattista) 출생 1620 - 독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Friedrich Wilhelm) 출생   1543 - 일본의 화가 가노 에이토쿠[狩野永德] 출생 1519 - 프랑스의 제독, 위그노의 수령 콜리니(Coligny, Gaspard de) 출생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루스벨트     1994 -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총선 실시 342년 간의 백인통치와 흑백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에 종지부를 찍은 남아공 최초의 다인종 선거가 1994년 4월 26일부터 3일간 투표에 들어갔다. 이번 선거에는 흑인 민권지도자 넬슨 만델라(Mandela, Nelson, 1918~ )가 이끄는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와 데 클레르크(de Klerk, Frederik, 1936~ ) 대통령의 집권 국민당 등 총 27개 정당이 참여했다. 한편 투표 전날인 25일 백인극우파의 소행으로 보이는 2건의 폭탄 폭발사고로 12명이 사망하는 등 선거 방해테러 행위가 격화되기도 했다. 선거 방해테러에도 불구하고 하루 연장한 29일 투표가 끝났고 투표결과 아프리카 민족회의(ANC)가 전체 유효 투표의 62.5%를 획득하며 승리했다. 남아공의 역사적 전인종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넬슨 만델라 의장이 5월 10일 첫 흑인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조선     1989 - 미국의 성우, 영화배우 루실 볼(Ball, Lucille, 1911~1989) 사망 오랫동안 텔레비전 코미디 스타였다. 그녀가 출연한 프로그램 〈왈가닥 루시 I Love Lucy〉는 1951년 10월 15일 컬럼비아방송국(CBS)이 처음 방영한 상황희극물이었다. 그후 이 프로그램은 여러 가지 형태로 1957년까지 방영되었고, 1962~68년과 1968~74년에 재방영되었다. 젊은시절 볼은 일찍이 연극에 뜻을 두고 15세 때 맨해튼으로 가서 드라마 학교에 다니며 온갖 뜨내기 일을 했다. 몇 년 후 모델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영화에서 조역을 맡게 되었다. 1933년에 영화를 시작했고 주로 아르케이오영화사(RKO)에서 일했다. 10년 뒤 더 비중 있는 역할을 맡게 되었으며, 1947년에는 CBS 라디오 연속극에서 변덕스러운 가정주부 역을 맡아 주목을 받았다. ... /naver     1986 - 소련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 발생 1986년 4월 26일 소련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 북동쪽 100km 지점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그린피스가 20세기 역사에서 `전쟁을 제외한 가장 큰 재앙의 날`로 정한 비극이 일어났다. 누출된 방사능 물질이 1945년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의 350배. 1995년 발표된 유엔보고서에 따르면 체르노빌 사태로 인해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등 3개국에서 900만명의 주민들이 직간접으로 피해를 당했으며 최소한 80만명이 피폭우려자로 분류됐다. 사고는 이날 새벽 1시24분, 이 발전소의 4호 노에서 터빈발전기의 관성운전시험이 실시되던 중 일어났다. 시험가동 중 초고온이 된 핵연료로 인해 주위의 냉각수가 순간적으로 비등해 일어난 수증기 폭발이었다. 하늘로 치솟은 불기둥과 함께 지붕이 날아가고 원자로에 있던 핵연료가운데 3~4%가 공중으로 분산됐다. /조선     1960 - 이승만 대통령 하야 성명 발표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4.19혁명의 불길이 맹렬히 타오르던 1960년 오늘! 이승만(李承晩, 1875~1965)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이 대통령은 오전 11시 방송을 통해 직접 하야의 뜻을 밝히고 다음 날 정식으로 '대통령사임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이승만 박사는 29일 극비리에 하와이로 떠난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과 함께 초대 대통령에 오른 뒤 제4대 대통령까지 지내면서 그가 이끈 자유당의 12년 장기집권은 이로써 비극적인 종말을 맞았다. /YTN     1943 - 소설가 강경애(姜敬愛, 1906~1943) 사망 1943년 4월 26일 소설가 강경애가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필명은 가마(珂瑪)로 1907년 4월 20일 황해도 송화에서 출생했다. 6살 때 개가한 어머니를 따라 장연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23년 장연에서 문학강연을 하던 양주동을 만나 `금성`사에서 기거하며 문학을 공부하게 됐다. 1931년 `조선일보`에 단편 `파금(破琴)`을, 그리고 `혜성`에 장편 `어머니와 딸`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했다. 1931년 장하일과 결혼해 간도로 옮겨간 후에도 작품을 계속 발표했다. 1934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장편 `인간문제`는 그녀의 대표작 중의 하나이다. 1935년 `모자` `원고료 이백원` 1936년 `지하촌` `이땅의 봄` `파경` 1937년 `산남(山男)` `검둥이` 등을 발표했다. 그녀의 작품활동은 1931년에서 1939년에 이르는 짧은 기간에 집중되어 이루어졌다. 동아일보에 연재된 `인간문제`는 식민지 시대 최고의 리얼리즘 소설이자 최고의 노동소설로 평가받았다. 농민에서 노동자로, 노동자에서 각성된 노동자로, 각성된 노동자에서 조직적 활동가로 변모해 가는 식민지 시대의 투쟁적 인간상을 그린 이 작품은 공장 내부에 대한 구체적이고 생생한 묘사가 더욱 돋보였다. /조선     - 'Guernica 1937', by Imro Weiner-Kral     1937 - 독일군, 스페인 게르니카 공습 1937년 4월 26일 오후 4시30분, 독일 공군 ‘콘돌 군단’의 무차별 폭격으로 스페인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Guernica)에 재앙이 내렸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에 위치한 고도(古都)로 분리독립을 원하는 바스크족에게는 성지나 다름없던 곳. 스페인 내전 때 프랑코에 반대하고 공화파에 속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이날, 프랑코를 지지하는 독일군은 전투기의 성능도 시험할 겸 그들이 자랑하는 하인켈Ⅲ와 콩커스 52를 주력으로 43대나 되는 폭격기를 게르니카 상공에 띄워 올렸다. 4시간 동안이나 계속된 폭격은 마을의 70%를 쑥밭으로 만들었고 주민 7000여명 중 1600여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장날이라 북적거렸던 중앙광장에도 폭탄이 떨어지고 도망가는 부녀자나 노인들에게도 기총사격이 가해졌다. 사건이 국제사회의 공분을 불러 일으키자 프랑코측은 한때 공화파의 자작극이라며 발뺌했지만 곧 독일군이 조준불량과 경험부족 때문이었다고 실토함으로써 독일군이 자행한 공습으로 판명됐다. 이 사건이 지금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피카소(Picasso, Pablo, 1881~1973)가 그린 ‘게르니카’ 때문이다. 공화파 정부로부터 파리 만국박람회의 스페인관에 걸릴 대형 벽화를 의뢰받아 고민하고 있던 피카소가 ‘게르니카의 피’ 소식을 접한 것은 이틀이 지난 뒤였다. 조국 스페인을 떠나 파리에 머무르고 있던 피카소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몸을 떨었고 곧 깊은 슬픔에 잠겼다. 6월 4일, ‘게르니카’가 완성되자 ‘전쟁과 폭력을 고발한 20세기 묵시록적 작품’ ‘학정에 대한 저항과 화해의 상징’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검은 색 바탕의 대형 캔버스(7.82m ×3.51m)에는 고통과 분노, 절규와 죽음이 가득했다. 화려한 색채를 즐겨 사용했던 평소와 달리 흑·백을 주조로 한 단순배색과 기하학적 구도로 전쟁의 비극을 더욱 강하게 부각시켰다. 2차대전 중 미국으로 건너간 ‘게르니카’는 스페인에 민주주의가 찾아왔을 때 돌려주라는 피카소의 유언에 따라 1981년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조선   "살고 죽기 위한 공포와 용기 그렇게 어렵고 그렇게 쉽기도 한 죽음 보석을 노래하게 한 사람들 보석을 망쳐버린 사람들 절망 때문에 희망의 삼켜버릴 듯한 불을 피게 한 사람들 미래의 마지막 꽃봉우리를 피우자." - 폴 엘리아르의 시 에서     1933 - 미국의 천체물리학자 펜지어스(Penzias, Arno, 1933~ ) 출생 독일 뮌헨 출생. 1940년 가족과 함께 도미(渡美), 1954년 뉴욕시립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였다. 1962년 컬럼비아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961∼1976년 벨연구소 연구원, 1976∼1979년 동(同) 전파연구소 소장을 역임하였다. 1967년 프린스턴대학의 강사, 1974년 뉴욕주립대학 조교수로도 있었다. 1964년 우주의 기원에 관한 빅뱅이론을 설명할 수 있는 3K의 우주배경복사(宇宙背景輻射)를 발견하였다. 이 공로로 1978년 R.W.윌슨(Wilson, Robert W., 1936~ )과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naver       1898 - 에스파냐의 시인 알렉산드레(Aleixandre, Vincente, 1898~1984) 출생 1927년세대의 일원이었고 1977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초현실주의 시작법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철도기관사의 아들이었던 알레익산드레는 법학과 경영학을 전공했으며, 1920~22년에 상법을 가르쳤다. 1925년 심하게 앓기 시작해 요양기간중 최초의 시를 썼다. 1936~44년 자신의 시가 출판금지되었으나 스페인 내란 동안 스페인을 떠나지는 않았다. 1949년 스페인 왕립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자유시의 대가로 간주되었다. 그 자유시체는 초기 주요저서 〈파괴 또는 사랑 La destrucción o el amor〉(1935)에 나타나 있는데 이 작품으로 스페인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인간과 물질적인 우주의 동일성이라는 주제를 탐구했다. ... /브리태니커     1890 - 사학자, 문인 최남선(崔南善, 1890~1957) 출생 본관 동주(東州:鐵原), 호 육당(六堂), 자 공륙(公六), 아명 창흥(昌興), 세례명 베드로이다. 자습으로 한글을 깨쳐 1901년(광무 5)부터 《황성신문》에 투고했고 이듬해 경성학당에 입학하여 일본어를 배웠다. 1904년 황실유학생으로 소년반장(少年班長)이 되어, 도쿄[東京]부립중학에 입학했으나 3개월 만에 귀국했다. 1906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早稻田]대학 지리역사학과에 들어가 유학생회보 《대한흥학회보(大韓興學會報)》를 편집하면서 새로운 형식의 시와 시조를 발표했다. 1907년 모의국회 사건으로 퇴학, 이듬해 귀국하여 자택에 신문관(新文館)을 설립하고 인쇄와 출판을 했다. 다음해 잡지 《소년》를 창간하여 논설문과 새로운 형식의 자유시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고, 한편 이광수의 계몽적인 소설을 실어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09년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청년학우회 설립위원이 되고, 이듬해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창설하여 고전을 간행하고 20여 종의 육전소설(六錢小說)을 발간했다. 1913년 다시 《아이들 보이》를 창간했으나 이듬해 폐간되자 다시 《청춘(靑春)》을 발간하여 초창기 문학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19년 3·1운동 때는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민족대표 48인 중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2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으나 다음해 가출옥했다. 1922년 동명사(東明社)를 설립, 주간지 《동명(東明)》을 발행하면서 국사연구에 전념했다. 1924년 《시대일보(時代日報)》를 창간, 사장에 취임했으나 곧 사임, 이듬해 《동아일보(東亞日報)》의 객원이 되어 사설을 썼다. 1927년 총독부의 조선사편찬위원회 촉탁을 거쳐 위원이 되고, 1932년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가 되었다. 1938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만몽일보(滿蒙日報)》 고문으로 있다가 1939년 일본 관동군이 세운 건국대학(建國大學) 교수가 되었고, 귀국 후 1943년 재일조선인 유학생의 학병지원을 권고하는 강연을 하기 위하여 도쿄로 건너갔다. 광복 후 우이동(牛耳洞)에 은거, 역사논문 집필에 전념하다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기소되어 1949년 수감되었으나 병보석되었다. 6·25전쟁 때 해군전사편찬위원회 촉탁이 되었다가 서울시사(市史) 편찬위원회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그후 국사관계 저술을 하다가 뇌일혈로 작고했다. 신문화 수입기에서 언문일치(言文一致)의 신문학운동과 국학(國學) 관계의 개척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이원(利原)의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를 발견하였다. 저서에 창작 시조집 《백팔번뇌(百八煩惱)》, 시조집 《시조유취(時調類聚)》, 역사서 《단군론(檀君論)》 《조선역사》 《삼국유사해제》 《조선독립운동사(朝鮮獨立運動史)》 등 다수가 있다. /naver     1889 - 오스트리아 출생의 영국 철학자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Ludwig, 1889~1951) 출생 오스트리아 빈 출생. 1920년대에는 오스트리아학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무렵의 사상은 논리적 원자론(原子論)에 속하는 것이었으며, B.러셀과의 상호 영향에 따라 형성된 것이었다. 그후 점차 인공언어(人工言語)에 의한 철학적 분석방법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으며, 1939년에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일상언어(日常言語) 분석에서 철학의 의의를 발견하게 되었다. 생존 중에 출판된 저작은 1921년에 간행된 《논리철학론(論理哲學論)》뿐이지만, 구두논의(口頭論議)로 영국의 분석 철학계(分析哲學界)에 끼친 영향이 크다. 최근에 《철학적 탐구 Philosophische Untersuchungen》(1953) 등 많은 유고(遺稿)가 출판되었다. /naver     1829 - 독일의 외과의사 빌로트(Billroth, Theodor, 1829~1894) 출생 프로이센 베르겐 출생. 그라이프스발트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한 후 괴팅겐대학으로 옮겼다가 다시 베를린대학으로 옮겨 1852년에 졸업하였다. 그 후 베를린대학 외과교수 랑겐베크의 조수로 있으면서 주로 외과 병리학에 관한 연구에 전념하였다. 1860년에 취리히대학의 외과학 교수가 되었으며, 1867년부터 빈대학 외과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1863년 발간된 저서 《외과적 병리학총론과 치료 A11gemeine chirurgische Pathologie und Therapie》는 10개 국어로 번역 ·출판되었고 11판의 증판을 냈다. 1872년 최초로 식도 절제수술에 성공하였으며 1881년 최초로 위암 환자의 유문절제(幽門切除)수술에 성공하였다. /naver     1822 - 미국의 조경 건축가 옴스테드(Olmsted, Frederick Law, 1822~1903) 출생 매사추세츠주 브루클린 출생. 예일대학교에서 농업과 공학을 공부하고, 처음에는 미국 남부 여러 주(州)를 돌면서 노예제도가 각 주의 사회 ·경제에 미치는 공과(功過)를 연구하고, 그 성과를 3권의 책에 정리하였다. 1856년 유럽을 여행하고 공원시설을 연구하였다. 1857년 뉴욕시(市) 센트럴파크 조성 때 감독이 되었으며, 1861년 이것을 완성하였다. 그후 미국 공중위생위원과 뉴욕시 공원위원 등을 역임하였고, 만년에는 보스턴에 살면서 조경계획에 종사하였다. 그가 관계한 공원은 미국 각지에 80개가 넘으며, 나이아가라폭포의 자연경관 보호의 기본설계도 하였다. /naver     - 'Self-portrait' - 'The Giaour' - 'Frederic Chopin' - 'On the Barricades-Liberty Leading the People' - 'Greece in Missolonghi' - 'Jacob Wrestling with the Angel', detail - 'The Capture of Constantinople' @ - 'Moulay Abd-er-Rahman' - 'A Jaguar Attacking a Rider' -'Scene from the Massacre' - 'The Capture of Constantinople', detail @   1798 - 프랑스의 화가 들라크루아(Delacroix, Eugene, 1798~1863) 출생 1798년 4월 26일 샤랑트현(縣) 생 모리스에서 출생하였다. 명문가 외교관의 아들로 명석하며 정열적인 상상력을 타고났다. 16세에 고전파 화가인 P.N.게랭에게 그림을 배웠고, 1816년 관립미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때부터 루브르미술관에 다니면서 P.P.루벤스, P.베로네세 등의 그림을 모사하였고, T.제리코의 작품에 매료되어 현실묘사에도 노력하였다. 1819년 제리코가 발표한 《메두사호(號)의 뗏목 Raft of the Meduse》은 그에게 낭만주의를 수립하는 결정적인 감격과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1822년 최초의 낭만주의 회화인 《단테의 작은 배》를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엿볼 수 있는 극적인 표현은 다비드풍(風)의 고전주의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계속하여 1824년에는 그리스의 독립전쟁에서 취재한 《키오스섬의 학살》을 발표하여 '회화의 학살'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하였지만, 힘찬 율동과 격정적 표현은 그의 낭만주의를 더욱 확립시켰다. 더욱이 이때 살롱의 똑같은 방안에 진열된 영국의 J.컨스터블의 풍경화의 밝은 색조에서 자극을 받고, 자기의 작품을 밝게 새로 칠하여 한층 더 강렬한 효과를 나타냈다. 다음 해 런던에서 R.P.보닝턴, J.P.로런스 등과 사귀는 동안 더욱더 빛깔의 명도와 심도를 증가시켰다. 즉, 자신과 낭만주의 회화의 성숙기를 맞이한 것이다. 그 후 수년간의 작품 중에서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1827),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은 대작이다. 그 후에도 계속 진전하여 1832년 모르네 백작을 수반으로 하는 외교사절단을 수행한 모로코 여행을 통해, 근동 지방의 강한 색채와 풍속에서 깊은 감동을 받고, 그의 예술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는 동시에 그 후의 낭만주의 회화에서의 동방취미 풍속화의 기반을 닦았다. 명작 《알제의 여인들》(1834)은 이 여행에서 얻은 훌륭한 성과였다. 뿐만 아니라 이때를 중심으로, 초기에 볼 수 있었던 외면적인 격렬한 맛이 점차 내면화되었다. 작품으로는 이상에서 말한 대표작 이외에 초상화, 성서에서 제재를 택한 것, 말이나 사자 등의 동물을 그린 것도 많다. 더욱이 문학적·음악적인 정서도 풍부하여 셰익스피어, 바이런, 괴테 등의 작품을 일찍부터 가까이하였고, 음악가 F.리스트와 당시의 여성문학가이던 G.상드와도 친하였다. 이와 같은 풍부한 재능과 환경은, 그에게 회화작품 외에도 오늘날 미술사상(美術史上) 귀중한 문헌으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는 뛰어난 예술론이나 일기 등을 집필하게 하였다. 그의 예술형성에 전술(前述)한 화가 이외에도 16세기 베네치아파 화가인 미켈란젤로나 고야도 영향을 주었으며, 한편으로 그 자신의 영향은 그 후의 낭만주의 회화를 물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E.드가와 A.르누아르에게 직접 연결되는 점도 많다. 후반기에는 교회와 파리의 공공건축물을 위한 대벽화 장식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국회 하원의 《국왕의 방》(1833), 국회 하원도서관(1844), 국회 상원도서관(1845∼1847), 파리시청의 《평화의 방》(1849∼1853, 소실), 루브르궁전의 《아폴로의 방》(1849) 등을 잇달아 그렸고 만년에는 동판화와 석판화 제작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는데, 흑백의 대조가 강조되고 한층 더 환상적으로 표현하는 기교로써 《파우스트 석판화집》(1827) 《햄릿 석판화집》(1843) 등의 걸작을 남겼다. /naver     1798 - 미국의 산악인 벡워스(Beckwourth, Jim, 1798~1866?) 출생 오랫동안 인디언들과 함께 살았던 미국의 산악인. 백인 제닝스 벡워스 경과 혼혈 노예여성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법률상으로 노예였다. 1810년 그의 아버지는 그를 루이지애나 준주로 데려갔다가 다시 세인트루이스로 가서 노예신분을 벗겨주었다. 그뒤 사람들로부터 '자유 신분의 흑인'대접을 받았다. 생김새는 아메리카 인디언과 비슷했다고 전해진다. 1823년 모피 교역 원정대의 마부로 고용되었고, 다음해에는 로키 산맥으로 가는 원정대에서 말을 돌보는 일을 하게 되었다. 서부에서 지내는 동안 여러 인디언 여자들과 결혼했으며 약 6년 동안 크로족 인디언들과 함께 살기도 했다. 과장하기를 좋아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힘과 손재주로 인디언들에게 상당히 깊은 인상을 주었다고 자처하는 이야기는 여러 증거들을 볼 때 사실인 것 같다. ... /브리태니커         1787 - 독일의 시인 울란트(Uhland, Ludwig, 1787~1862) 출생 민요풍의 서정시와 발라드로 유명하다. 시작(詩作)에 종사하는 한편 법률학을 전공하여 한때 변호사와 의회의원으로도 활약하였다. 또 튀빙겐대학에서 독일의 중세문학(中世文學) 강의도 하여 이 방면의 저서도 많다. 널리 애송되고 있는 《양치기의 일요일의 노래 Schafers Sonntagslied》 《소년의 산의 노래 Des Knaben Berglied》 등은 모두 20세 이전에 쓴 작품들이다. 그의 서정시는 간소한 아름다움을 지녔으며, 자연을 소박한 감정으로 노래하였다. 《Walther von der Vogelweide》(1822)가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 꼽히고 있다. /naver         1785 - 미국의 조류 연구가, 화가 오두본(Audubon, John James, 1785~1851) 출생 도미니카의 산토도밍고 출생. 1791년 프랑스로 건너가 고전주의 화가 J.L.다비드로부터 그림을 배웠다. 20세 때 혼자 미국으로 건너갔다. 펜실베이니아의 아버지 소유지에서 생활하였으며 일찍부터 자연, 특히 새에 대한 흥미를 가지고 많은 시간을 채집 ·관찰 ·묘사에 쏟았으며, 후반의 생을 조류 화가 및 연구가로 지냈다. 489종 1,065마리에서 435매의 사실화(寫實畵)를 얻어 《미국의 새들 The Birds of America》(전4권, 1827~1838)에 수록하여 출판하였다. 그 밖에 《조류학적 전기 Ornithological Biography》와 포유류를 그린 《북아메리카의 포유류 The Viviparous Quadrupeds of North America》(전3권, 1845~1848)도 유명하다. 흔히 미국 조류학의 아버지라 부르고 있으며 미국에는 그의 이름을 붙인 유명한 자연보호 단체인 국립오두본협회(National Audubon Society)가 있고 100여 개의 지부가 있다. /naver     1564 - 영국의 시인, 극작가 셰익스피어(Shakespeare, William, 1564~1616) 출생 세계 연극사와 문학사에 길이 남을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1564년 4월 26일 영국 중부 잉글랜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국 르네상스의 최정점인 엘리자베스 여왕1세 때 출생해 유복한 가정의 장남으로 유년시절을 보냈으나 13세때 집안이 몰락해 대학에는 진학하지 못했다. 1580년대부터는 배우로서 생활하기도 했으며 1592년경에는 신인배우로서의 평판이 높았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극작가로서 초기에는 선배작가의 희곡을 부분적으로 수정하는 작업에 매달렸다. 주요작품으로는 `로미오와 줄리엣` `한여름밤의 꿈` `햄릿` `오셀로` `리어왕` 등이 있다. 그는 연극이라는 매개를 통해 인간 내면세계의 극한을 추구했다. /조선     1514 - 코페르니쿠스, 처음으로 토성관측     1412 - 경복궁 경회루 준공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景福宮)이 창건된 것은 1395년으로, 이때 경회루(慶會樓) 주위에 작은 연못이 조성되었고, 1412년(태종 12) 태종의 명에 의하여 큰 방지를 파고 경회루를 창건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서 273년간 폐허로 남아 있다가 1867년(고종 4)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재건되었다. 방지의 크기는 동서가 128m, 남북이 113m인데, 못 안에 방형의 섬을 만들고 거기에 누를 세웠다. 이 섬에 들어가는 3개의 석교(石橋)가 있는데, 모두 하엽동자(荷葉童子)에 회란석(廻欄石)을 섬 주위까지 돌렸다... 이 집은 건축기술상 너무 커서 어려움이 있었으나 이를 잘 처리하여 견고하게 지었다. 한국 목조건축기술의 우수성을 과시하는 이 누가 화려한 단청의 집 그림자를 연못 속에 드리우면 그 영상이 아름답다. 또한 연못은 뱃놀이도 했던 곳이다.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4호로 지정되었다. /naver     121 - 로마제국의 제16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 121~180) 출생 121년 로마에서 출생하였다. 5현제(賢帝)의 마지막 황제로, 후기 스토아파(派)의 철학자이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양자가 된 후 140년 로마의 콘술(집정관)이 되었고, 145년 안토니누스의 딸(사촌누이)과 결혼, 161년 안토니누스의 뒤를 이어 로마 황제로 즉위하였다. 당시의 로마제국은 경제적·군사적으로 어려운 시기여서 변방에는 외적의 침입이 잦았으며, 특히 도나우강(江) 쪽에서는 마르코만니족 및 쿠아디족이 자주 침입하여 그 방비에 힘썼다. 그동안 페스트가 유행하여 제국은 피폐하고, 게르만족과의 전쟁에 시달리면서 발칸 북방의 시리아 및 이집트 등의 진영(陣營)에서 병을 얻어 도나우 강변의 진중에서 죽었다. 유명한 《명상록(冥想錄)》은 이 진중에서 쓴 것으로 스토아적 철인의 정관(靜觀)과 황제의 격무라는 모순에 고민하는 인간의 애조(哀調)가 담겨 있다. 여기서 그의 철학은 본질적으로는 반 세기 전의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한층 내면적으로 침잠해 들어오는 철학을 이루고 있다. 이에 따르면 세계의 모든 것은 불이며, 신적(神的)인 세계 영혼으로 관통되고 살려지게 되고 지배받고 있으며, 인간의 영혼도 세계 영혼의 한 유출물에 불과하여 죽으면 자연히 세계 영혼에 귀일하게 된다. 물질적·육체적인 세계의 모든 것은 이 신적인 이성에 의하여 운명적·자연필연적으로, 그러면서도 신적·합법칙적으로 끊임없이 생멸변화(生滅變化)하고 있다. 따라서 개물(個物)·개인(個人)은 그 이름도 기억도 이 필연의 운동 속에서 소멸되고, 망각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 자연필연의 이법(理法)을 확인하여 이를 신의 섭리라 믿고, 외적인 어느 것에도 마음을 괴롭히는 일이 없이 주어진 운명을 감수하며, 내적으로 자유롭고 명랑하고 조용하고 경건하게 그의 죽음의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있어서는 철학자와 황제는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 그가 죽은 후 로마제국은 쇠퇴하였다. 로마시에는 ‘마르코만니전쟁’을 부조(浮彫)한 기념주(記念柱)와 그의 기마상(騎馬像)이 있다.     2000년 - 스리랑카의 총리 반다라나이케(Sirimavo Bandaranaike, 1916~2000) 세상 떠남 세계 최초로 여성 총리를 지낸 스리랑카의 전 총리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Sirimavo Bandaranaike)가 2000년 오늘 84살을 일기로 숨졌다. 반다라나이케는 이날 국회의원 투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다 심장마비로 숨졌다. 반다라나이케는 1959년 총리였던 남편이 암살되자 남편이 이끌던 스리랑카자유당의 총재가 돼 정계에 나섰다. 이듬해 1960년 총선거에서 승리해 세계 처음으로 여성 총리에 오른 이후 40년 동안 스리랑카 정계를 이끌다 건강이 악화돼 숨지기 두 달 전 총리직에서 물러났었다. 그녀의 딸도 1994년 스리랑카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당선됐었다.       1973년 - 해병대, 해군에 통합 한국의 해병대는 1949년 4월 15일 경상남도 진해(鎭海)의 덕산(德山)비행장에서 해군 장병 380여 명을 기간으로 창설되었다. 6·25 이전에는 진주(晉州)·제주(濟州) 등지의 좌익토벌작전에서, 전쟁중에는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한 많은 전투에서 전과를 올렸다. 1955년 자주적 상륙작전 단위부대인 제1상륙사단이 창설되었고, 베트남전쟁이 일어나자 1965년 1개 여단병력이 파병되었다. 1973년 해병대 개편계획에 따라 사령부가 해체되었으나 1987년 중간사령부로서의 해병대사령부가 다시 창설되어, 해병전투력 제고에 이바지하였다.       1964년 - 제18회 도쿄올림픽 개막 유럽에서 탄생한 올림픽이 처음으로 아시아에서 개막됐다. 제18회 올림픽이 일본 도쿄에서 1964년 10월 10일 개막된 것이다. 94개국 5586명의 선수가 출전한 도쿄올림픽 개막식에는 7만5천4백여명의 관중이 운집했다. 4년전 소련에 뒤졌던 미국은 금메달수에서 다시 소련을 제치고 스포츠강국으로 부상했다. 미국이 얻은 금메달중 가장 화제에 오른 것은 1만m에서 우승한 빌리 밀스였다. 밀스는 수우족 인디언의 혈통을 물려받은 해병대원이었다. 전통적으로 북유럽선수가 강한 1만m에서 미국선수가 금메달을 딴 것은 밀스가 처음이었다. 맨발의 마라토너 아베베도 2시간12분11초의 세계신기록으로 2연패했다. 또한 홍보용 포스터는 많은 외국인을 유치한 광고로 평가 받았다.       1962년 - 제10차 인도, 태평양지역 수산(水産)이사회 조선호텔서 개막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에 속하는 하부기구. 국제협력에 의해 인도 ·태평양 지역의 수산자원의 개발 및 적절한 이용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948년 설립되어 사무국을 방콕에 두고 있다. 가맹국은 동남 아시아 여러 나라와 미국 ·영국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등 31개국이다.     - '해(海)에게서 소년에게'   1957년 - 육당 최남선(崔南善, 1890~1957) 세상 떠남 본관 동주(東州:鐵原), 호 육당(六堂), 자 공륙(公六), 아명 창흥(昌興), 세례명 베드로이다. 자습으로 한글을 깨쳐 1901년(광무 5)부터 《황성신문》에 투고했고 이듬해 경성학당에 입학하여 일본어를 배웠다. 1904년 황실유학생으로 소년반장(少年班長)이 되어, 도쿄[東京]부립중학에 입학했으나 3개월 만에 귀국했다. 1906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早稻田]대학 지리역사학과에 들어가 유학생회보 《대한흥학회보(大韓興學會報)》를 편집하면서 새로운 형식의 시와 시조를 발표했다. 1907년 모의국회 사건으로 퇴학, 이듬해 귀국하여 자택에 신문관(新文館)을 설립하고 인쇄와 출판을 했다. 다음해 잡지 《소년》를 창간하여 논설문과 새로운 형식의 자유시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고, 한편 이광수의 계몽적인 소설을 실어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09년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청년학우회 설립위원이 되고, 이듬해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창설하여 고전을 간행하고 20여 종의 육전소설(六錢小說)을 발간했다. 1913년 다시 《아이들 보이》를 창간했으나 이듬해 폐간되자 다시 《청춘(靑春)》을 발간하여 초창기 문학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19년 3·1운동 때는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민족대표 48인 중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2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으나 다음해 가출옥했다. 1922년 동명사(東明社)를 설립, 주간지 《동명(東明)》을 발행하면서 국사연구에 전념했다. 1924년 《시대일보(時代日報)》를 창간, 사장에 취임했으나 곧 사임, 이듬해 《동아일보(東亞日報)》의 객원이 되어 사설을 썼다. 1927년 총독부의 조선사편찬위원회 촉탁을 거쳐 위원이 되고, 1932년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가 되었다. 1938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만몽일보(滿蒙日報)》 고문으로 있다가 1939년 일본 관동군이 세운 건국대학(建國大學) 교수가 되었고, 귀국 후 1943년 재일조선인 유학생의 학병지원을 권고하는 강연을 하기 위하여 도쿄로 건너갔다. 광복 후 우이동(牛耳洞)에 은거, 역사논문 집필에 전념하다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기소되어 1949년 수감되었으나 병보석되었다. 6·25전쟁 때 해군전사편찬위원회 촉탁이 되었다가 서울시사(市史) 편찬위원회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그후 국사관계 저술을 하다가 뇌일혈로 작고했다. 신문화 수입기에서 언문일치(言文一致)의 신문학운동과 국학(國學) 관계의 개척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이원(利原)의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를 발견하였다. 저서에 창작 시조집 《백팔번뇌(百八煩惱)》, 시조집 《시조유취(時調類聚)》, 역사서 《단군론(檀君論)》 《조선역사》 《삼국유사해제》 《조선독립운동사(朝鮮獨立運動史)》 등 다수가 있다.       1935년 - 거슈윈(George Gershwin) 작곡, 오페라 '포기와 베스' 초연 거슈윈은 뉴욕에서 태어났다. 대중적인 경음악을 작곡하면서 재즈기교에 의한 수준 높은 관현악곡과 오페라를 창작하여 새로운 측면을 개척하였다. 소년시절 개인교사에게 피아노와 화성학을 배우고 16세 때 고등학교를 중퇴, 음악출판사의 피아니스트로서 작곡을 시작하였다. 19세 때부터는 극장 전속 피아니스트로 근무하였으며, 21세 때에는 《스와니》를 발표하여 히트하였다. 이후 계속해서 인기를 모아 리뷰나 쇼의 일류 작곡가가 되었으며, 1924년(26세) 폴 화이트먼이 위촉한 재즈의 기법을 따른 피아노협주곡 《랩소디 인 블루》를 내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고전음악과 경음악을 조화시켜 관현악곡 《파리의 미국인》(1928) 《피아노협주곡 F장조》(1925) 및 오페라 《포기와 베스》(1935) 등의 본격적인 작품 외에도 많은 통속 희가극과 대중음악, 영화음악을 작곡하였는데 뇌종양이 발병해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포기와 베스(Porgy and Bess)' 3막 9장. 헤이워드부부의 희곡《포기》를 바탕으로 한 헤이워드(남편)와 이라 거슈윈의 대본에 의하여 작곡되고 1935년 9월 보스턴에서 초연되었다. 무대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州)의 찰스턴. 하역인부(荷役人夫) 크라운의 정부(情婦) 베스는 포기에 대한 애정을 끊지 못한다. 이에 분노한 크라운은 베스를 찾으러 갔다가 도리어 포기에게 살해된다. 그러나 체포된 포기는 얼마 가지 않아 살인혐의를 벗고 출소(出所)하나 베스는 뉴욕으로 떠나고 만다. 포기는 뉴욕이 먼 곳에 있는 도시라는 것을 알면서도 베스를 찾으러 떠난다. 한 사람의 단역을 제외하고는 등장인물이 모두 흑인이고 흑인영가와 민요가 많이 들어 있으며 유럽의 전통을 대담하게 탈피한 이색적인 미국적 오페라이다. 곡 중에서 제1막의 과 제2막의 이 유명하다.       1932년 - 독립운동가 이봉창(李奉昌, 1901~1932) 의사 순국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대강 맛보았습니다. 영원한 쾌락을 위해 독립사업에 투신하겠습니다.” 1931년 1월, 상하이 임시정부를 찾아간 이봉창(李奉昌) 의사가 김구 선생에게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이렇게 밝혔다. 일본에서 6년간 생활한 적이 있는 이 의사는 1년 전 도쿄에 있을 때 일왕이 지나간다고 길 위에 엎드리면서 “폭탄이 있었으면...” 하고 아쉬워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임시정부도 일왕 제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터라 이 의사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렸다. 1931년 12월에 도쿄에 도착한 이 의사는 때를 기다렸다. 마침 일왕이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알아낸 이 의사는 이날을 거사일로 잡았다. 1932년 1월 8일, 히로히토(裕仁) 일왕이 황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도쿄 경시청 앞을 지날 때 이 의사는 그가 탄 승용차를 향해 폭탄을 힘껏 던졌다. 폭탄은 승용차 뒤쪽에서 굉음을 내며 터졌지만 거리가 멀어 뒤를 따르던 마차만 거꾸러졌다. 현장에서 체포된 이 의사는 대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아 1932년 10월 10일,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1917년 - 미국의 재즈 피아니스트, 작곡가 멍크(Thelonious Monk, 1917~1982) 태어남 노스캐롤라이나주(州)에서 출생하였다. 독학으로 피아노를 배우고, 1940년경 당시의 재즈에 만족할 수 없었던 젊은 음악가들 속에 끼여들어 비밥(bebop) 창조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44년 레코드를 출반하여 가요계에 데뷔하고, 1950년대 중기에 실력을 인정받아 작곡가 ·연주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독창적인 스타일과 타협을 모르는 성격으로 유명하며 전위재즈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대표작에 《라운드 미드나이트》 《스트레이트 노 체이서》 등이 있으며, 그 밖에도 모던재즈의 표준이라고 할 수 있는 곡들을 많이 만들었다.       1911년 - 중국 신해혁명(辛亥革命) 20세기 들어 청조의 몰락은 거역할 수 없는 대세였다. 1911년 10월 10일, 양쯔강 중류지역에 위치한 우창(武昌)에서 혁명파 군인들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시작된 것이다. 이튿날 혁명군이 우창·한커우(漢口)·한양(漢陽)의 우한(武漢) 3진(鎭)까지 장악, 혁명의 봉화를 지피자 중국 전역은 혁명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1개월 만에 12개 성이 혁명진영에 가담하자 청조는 베이징 군벌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총리로 임명, 진압에 나섰다. 위안(袁)은 한커우와 한양을 탈환했으나 곧 혁명군과 타협을 모색했다. 임시대총통 자리를 내주겠다는 혁명군의 제의를 받은 마당에 굳이 승산도 불투명한 내전에 뛰어들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혁명군도 힘의 열세를 느끼고 있었다. 1912년 1월 1일, 난징에서 중화민국 수립이 선포되고 쑨원이 임시대총통으로 취임했지만 쑨원은 3월 11일 위안에게 대총통직을 이양했다. 이미 2월 12일에 청조 마지막 황제 푸이가 황제직을 내놓아 286년간에 걸친 청조가 무너진 뒤였다. 그러나 신해혁명은 국민의 참여가 뒷받침되지 않은 미완의 혁명이었다.       1902년 - 도량형규칙 공포 1875년에 국제미터협약이 체결되어 전세계적으로 미터법만을 사용하게 됨에 따라 1902년 도량형 규칙이 제정되고 국내에 평식원(平式院)이 설치되었으며, 1905년 조선 고종 때 대한제국 법률 제1호로 도량형 규칙을 제정 공포하여 척관법을 미터법과 서양에서 사용하는 야드-파운드법과 혼용하도록 하였다. 이 때 비로소 척관법의 기본단위가 되는 길이의 단위인 척은 0.303m로, 무게의 단위인 관은 3.75㎏으로 정의하였다. 그 후 1961년 5월 10일 구(舊)도량형 관계법이 폐지되고 새로운 형태의 계량법이 제정되었으며, 또한 미터법 통일사업이 추진됨에 따라 국제적인 추세에 맞추어 한국도 미터법만을 사용하도록 법이 제정되고, 이에 따라 1964년 1월 1일부터는 토지 건물이나 수출입, 무기·항공·선박 및 연구분야의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척관법이나 야드-파운드법은 거래상 또는 증명상의 계량에서 그 사용이 금지되었다. 1983년 1월 1일부터는 토지 건물에 사용되는 평도 사용이 금지되었다.     1901년 - 스위스의 조각가, 화가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1901~1966) 태어남         1898년 - 프랑스의 육군 장교 쾨니그(Marie-Pierre Koenig, 1898~1970) 태어남 제2차 세계대전 때 샤를 드골 장군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군에서 활약했던 주요 지휘관 중의 한 사람이다. 제1차 세계대전 때와 전후에 북아프리카에서 군 복무를 마친 뒤, 제2차 세계대전초 노르웨이와 프랑스 전선에 참가했다. 1940년 6월 영국으로 철수한 그는 드골 운동에 가담해 자유-프랑스군에서 계속 진급했으며, 1940년 가봉 점령과 1942년 북아프리카에서 독일에 맞서 비르하케임을 방어하여 유명해졌다. 그뒤 프랑스가 아이젠하워 장군 사령부에 파견한 보조 군대 참모장이 되었으며, 1944년 6월에는 점령된 프랑스의 반(反)독일 게릴라 부대인 프랑스 국내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전쟁 말기 독일에 있는 프랑스 군대를 지휘하던 쾨니그는 1949년 북아프리카 검열관이 되었으며, 1950년에는 전시비상의회의 부의장이 되었다. ...       1897년 - 미국 장로회 선교사 베어드, 평양에 숭실학교 설립 숭실대학교는 1897년 10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배위량(裵緯良:W.M.Baird)이 개설한 학당이 모체이다. 교훈은 진리와 봉사이다. 1901년 평양으로 교사를 신축 이전하면서 교명이 숭실학당으로 정하여졌다. 1905년 숭실대학으로 승격하여 한국 최초의 대학이 되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1925년 숭실전문학교로 개편되었다가 1938년 폐교되었다. 1954년 서울에서 숭실대학으로 재건하였으며, 1971년 대전대학(1956년 미국 남장로교 재단에서 대전기독학관으로 설립하여 1959년 대학으로 승격)과 통합하여 교명을 숭전대학교로 변경하였다. 1983년 대전캠퍼스는 한남대학교로 독립·분리되었다. 1986년 교명을 숭실대학교로 환원하였다.       1895년 - 중국의 소설가, 문명비평가 린위탕(林語堂, 1895~1976) 태어남 원이름은 위탕[玉堂]. 푸젠성[福建省] 룽치[龍溪]의 가난한 목사 집안 출신. 상하이[上海]의 성 요한대학[聖約翰大學] 졸업 후 베이징 칭화학교[北京淸華學校] 영어교사가 되었다. 1919년 하버드대학에 유학, 언어학을 공부하고 독일로 건너가(1921) 예나, 라이프치히 두 대학에서 수학했다. 1923년 귀국하여 국립 베이징대학 영문학 교수가 되었는데, 음운학(音韻學)을 연구하는 한편 루쉰[魯迅] 등의 어사사(語絲社)에 가담하여 평론을 썼다. 1926년 군벌정부의 탄압을 피하여 아모이[厦門]대학 문과 주임, 이듬해 우한정부[武漢政府]에 가담하여 그 외교부 비서가 되었다. 1932년 유머와 풍자를 주장하는 《논어》, 1934년 소품문지(小品文誌) 《인간세(人間世)》 등을 창간, 소품문을 유행시켰으며, 1935년 평론집 《나의 국토 나의 국민 My Country and My People(我國土我國民)》을 쓰고, 이듬해 영국으로 가서 《생활의 발견 The Importance of Living》(1938) 등으로 중국문화를 소개하였다. 소설 《Moment in Peking(北京好日)》(1937) 《폭풍 속의 나뭇잎 A Leaf in the Storm》(1941) 등에서는 근대중국의 고민을 표현하였다. 영문 저작으로는 모국문화의 옹호, 중국문으로는 모국의 속물성(俗物性)을 풍자하였으며, 뛰어난 세계문화 창조에는 상식 ·이성(理性) ·생활감정 등을 교묘하게 조화하는 중국정신이 유효하다는 주장은 미래소설 《The Unexpected Island》(1955)에도 잘 나타나 있다. 자유주의자로 불리며 세계정부를 제창하였다. 1970년 6월, 제37차 국제 펜클럽 대회 참석차 한국에 왔었다.       1892년 - 크로아티아의 소설가 안드리치(Ivo Andri?, 1892~1975) 태어남 보스니아 트라브니크에서 출생하였다. 자그레브·크라쿠프·빈 등의 각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남슬라브 독립 청년운동에 가담하여 오스트리아 정부에 체포되어 대전 동안을 거의 옥중에서 보냈으며, 석방 후에는 자그레브로 가서 잡지인 《문학의 남쪽》을 간행하였다. 1918년에 발표한 처녀작인 《에크스 폰토 Ex Ponto》는 옥중에서 쓴 서정적 산문에 의한 일기이다. 이것은 전쟁으로 인하여 초래된 고독한 세대의 절규로서 절찬을 받았다. 그 후 외교관으로 유럽 각국에 주재하며, 그 사이에 에세이와 《알리아 제르젤레즈의 여행 Put Alije Dierzeleza》(1920) 등의 뛰어난 단편을 썼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나치스 점령하의 베오그라드에 있으면서, 3부작 《드리나강의 다리 Na Drini uprija》 《보스니아 이야기(트라브니크 연대기) Travin ka hronika》 《아가씨》를 완성하여 전후에 발표되었다. 이 3부작의 처음 2편은 문명에 뒤떨어진 보스니아의 비참한 역사와 인간의 운명을 냉정한 시인의 눈을 통하여 묘사한 것이고, 《아가씨》는 젊은 처녀의 폐쇄된 일생을 묘사하여 여성심리를 깊게 관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집필을 시작한 《저주받은 안뜰》은 10년이나 지난 1955년에야 완성하였다. 이것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이스탄불의 저주받은 감옥에 있는 수도사 페탈의 이야기로서,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근대생활에 있어서의 개인의 위치를 시사하고 있는 걸작이다. 이어 1961년에 《드리나강의 다리》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861년 - 노르웨이의 북극 탐험가 난센(Fridtjof Nansen, 1861~1930) 태어남 1861년 10월 10일 오슬로 근교 프뢴에서 출생하였다. 크리스티아니아대학교(현 오슬로대학교)에서 동물학을 공부하였다. 1882년 그린란드를 탐험하고 돌아와서는 베르겐의 자연사박물관에 근무하였다. 1888년 그린란드를 횡단, 고트호프에서 월동하는 동안 에스키모의 생활을 연구하여 《그린란드의 최초의 횡단》(1890)과 《에스키모의 생활》을 썼다. 1893∼1896년 프람호(號)로 북극탐험에 나섰으며, 북위 83°59'까지 표류하다 F.H.요한센과 함께 배에서 내려 개썰매와 카약을 이용하여 북위 86°14'지점에 도달하였다. 이 지점은 당시까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북방이었다. 이 탐험기록을 《극북(極北)》(1897), 《노르웨이의 북극탐험》(1900∼1906) 등에 남겼는데 북극연구에 좋은 자료이다. 1897년 모교의 동물학 교수, 1906∼1908년 노르웨이의 영국 주재 초대대사 및 해양학(海洋學) 교수를 역임하였다. 1910∼1914년 북대서양·북극해 및 시베리아의 탐험에도 참가하였다. 1918년에는 국제연맹의 노르웨이 대표였으며, 제1차 세계대전 후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포로의 본국송환·난민구제에 힘썼으며, 1921∼1923년 러시아적십자 기근구제사업의 총관리자가 되었다. 이와 같은 평화사업에 공헌한 업적으로 192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고, 1927년에는 국제연맹군축위원회의 노르웨이 대표가 되었다. 그 밖의 주요 저서에 《북극해의 해양학》(1902) 《시베리아를 지나서》(1922), 《아르메니아와 근동(近東)》(1928) 등이 있다.       1856년 - 조선 후기의 서화가, 문인, 금석학자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세상 떠남 추사 김정희 선생이 1856년 10월 10일 나이 일흔에 한 세기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예술가로서의 생을 마쳤다. 충남 예산에서 영조의 사위인 김한신의 증손자로 태어난 김정희는 서화와 금석학에 한평생을 몰두해 성균관 대제학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24살 때 청나라 때 대학자를 만나 필담을 나누고 '해동에서 제일 뛰어난 학자'라고 극찬 받았으며 무학대사가 세웠다고 전해지던 북한산 비석이 진흥왕 순수비라는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헌종 6년인 1840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848년 풀려났고 철종 2년인 1851년 헌종의 묘천문제로 다시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대쪽같은 성품으로 귀향살이를 다녀온 그는 이후 과천 토담집에 칩거하며 그림 그리기로 여생을 보냈다. 추사는 조선 500년의 지도이념인 성리학 대신 새로운 사상과 이념이 요구되는 때에 청나라의 고증학을 깊이 체득하여 실사구시의 경학세계를 이루었고 금속학에서 명성을 떨쳤으며 고금의 필체를 수렴, 추사체란 독보적인 경지를 구현했다.         1834년 - 핀란드 문학의 아버지 키비(Aleksis Kivi, 1834~1872) 태어남 누르미야르비 출생. 가난한 시골 양복점 아들로 태어났다. 헬싱키대학에 입학했으나, 대학도 중퇴하고 일생 동안 심장병과 정신병으로 고통을 겪다가 38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겨우 10년간의 창작활동밖에 하지 않았지만, 그의 작품은 핀란드 문학사상 최초의 고전이 되었다. 작품에는 사실주의 연극을 대표하는 희곡 《마을의 구둣방 Nummisuutarit》(1865) 《레아 Lea》(1869)와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소설 《7인의 형제 Seitsem n veljest 》(1870)가 있다. 《7인의 형제》는 풍속소설 ·모험소설 ·풍자소설 ·서사시소설을 하나로 묶은 자유분방한 작품으로, 핀란드에서는 《칼레발라》 다음으로 치는 고전적인 작품이다.       1830년 - 스페인의 여왕 이사벨 2세(Isabel II, 1830~1904) 태어남 에스파냐의 여왕(재위 1833∼1868). 페르난도 7세와 마리아 크리스티나 사이의 딸. 모후(母后)인 크리스티나 왕비의 섭정하에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는데, 숙부인 돈 카를로스가 왕위를 요구하여 카를로스 전쟁이 발발하였다. 모후가 승리한 후에는 에스파르테로, 나르바에스, 오돈넬 등 군인이 정권을 잡았으나, 1858년부터는 친정(親政)을 시작하였다. 보수 반동정치를 하였기 때문에 공화파 시민층과 군대의 반발을 일으켜 토페테 등의 혁명이 성공하자 파리로 망명하였으며(1868), 1870년에 폐위되었다.       1825년 - 보어인 국가를 건설한 남아프리카의 농부, 군인, 정치가 크뤼에르(Paul Kruger, 1825~1904) 태어남 남아프리카에서 보어인 국가를 건설했다. 1883년부터 보어 전쟁 발발 후인 1900년에 유럽으로 피신할 때까지 트란스발(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을 지냈다. ...       1813년 -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 태어남 이탈리아 북부 파르마현(縣)의 레론콜레 출생. 처음 마을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로부터 초보교육을 받고, 후에 부세트와 밀라노에서 본격적으로 음악공부를 하였다. 1836년 부세트시절의 보호자 바레치의 딸 마르게리타와 결혼하고, 학업을 마친 후 잠시 부세트의 악우협회(樂友協會) 악장 노릇을 하다가 1839년 밀라노에 나와, 스칼라극장의 지배인 메렐리의 후원으로 오페라 《산 보니파치오의 백작(伯爵) 오베르토》를 상연하여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그 후 곧 두 아이와 아내를 잃고 또 희가극 《왕국의 하루》(1840)의 상연마저 실패하여 극도로 우울한 나날을 보냈는데 이때 메렐리와 가수 주세피나 스트레포니(나중에 그와 결혼) 등의 격려로 용기를 얻어 다시 활발한 작곡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때 쓴 것이 오페라 《나부코》이다. 이 작품은 1842년에 상연되었는데, 그 내용이 애국적이어서 당시 오스트리아의 압제하에 있던 이탈리아인들에게 크게 어필하였다. 그 후에도 《십자군의 롬바르디아인》(1843) 《에르나니》(1844) 《아틸라》(1846) 《레냐노의 전쟁》(1849) 등, 애국심이 넘치는 많은 작품을 썼다. 그리고 이 밖에도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따 온 《맥베스》(1817), 실러의 《간계(好計)와 사랑》을 각색한 《루이자 밀러》(1849) 등으로 새로운 극적 경지를 개척해 나갔다. 그 후 베르디는 밀라노를 비롯하여 베네치아 ·로마 ·파리 ·카이로 등지에서 잇달아 오페라 초연을 가졌으며, 오늘날까지 상연되고 있는 《리골레토》(1851) 《일 트로바토레 Il trovatore》(1853) 《라 트라비아타 La Traviata》(1853) 《시칠리아섬의 저녁 기도》(1855) 《시몬 보카네그라》(1857) 《가면무도회》(1859) 《운명의 힘》(1862) 《돈 카를로스》(1867) 《아이다》(1871) 《오셀로》(1887) 《팔스타프》(1893) 등은 모두가 19세기 이탈리아오페라의 걸작으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     1738년 - 영국에서 활약한 미국의 역사화가 웨스트(Benjamin West, 1738~1820) 태어남       1684년 - 프랑스 로코코 양식의 화가 와토(Antoine Watteau, 1684~1721) 태어남    
333    요즘 청춘들이 아무리 아프다 한들, 윤동주만 하겠나... 댓글:  조회:4883  추천:0  2016-02-16
    영화 `동주` 강하늘, 박정민. [사진=전소윤(STUDIO 706)] 이것은 부끄러움의 기록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시인(詩人)의 고백처럼. 어두운 시대를 살았던 청년의 초상이자, 그 시대의 순결한 영혼들에 바치는 진혼곡이다. ‘동주’(2월 18일 개봉, 이준익 감독)는 시인 윤동주와, 그의 벗이자 사촌이던 독립운동가 송몽규 열사의 삶을 따른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1917년 같은 해에 태어나, 스물여덟 살이 되던 45년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나란히 삶을 마감했다. 2016년, 윤동주와 송몽규 그리고 시(詩)가 우리에게 다시 말을 건다. 이준익(57) 감독과 두 젊은 배우 강하늘(26)·박정민(29)은 흑백 화면의 정제되고 담백한화면 속에 그 시절 두 청년의 치열했던 고민과 아픔을 담았다. 한 자 한 자 신중하게 눌러쓴 손글씨처럼, 그 속에는 두 인물에 바치는 제작진의 진심이 오롯이 담겼다. 이 영화는 ‘쉽게 쓰여지지’ 않았다. 영화 `동주` 강하늘. [사진=전소윤(STUDIO 706)] 강하늘은 ‘동주’ 촬영을 앞두고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윤동주 역을 맡았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흥분과 기대가 솟구쳤는데, 그것은 하루가 다르게 불안과 고민으로 바뀌었다. 시인 윤동주는 이런 사람이었다고 그려줘야 하는데, 내가 생각하는 방향이 맞는 걸까 점점 자신이 없어지더라고요. 실존 인물을 연기하는 게 이렇게 부담스러운 거구나 싶었죠.” 시인 윤동주는 이런 사람이었다고 그려줘야 하는데, 내가 생각하는 방향이 맞는 걸까 점점 자신이 없어지더라고요. 실존 인물을 연기하는 게 이렇게 부담스러운 거구나 싶었죠.” 70년 전 세상을 떠난 역사 속 인물, 아름다운 시를 남긴 천재 시인…. 윤동주를 설명하는 교과서의 거창한 말 대신, 강하늘은 그를 이 영화에서 ‘한 사람’으로 숨 쉬게 하고 싶었다. “윤동주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질투하고 미워하면서 순간순간 흔들리지 않았을까요. 시나리오가 윤동주의 그런 감정을 잘 드러내고 있어 좋았어요.” 그건 ‘동주’가 그리는 윤동주와 송몽규의 관계만 봐도 알 수 있다. 동갑내기 사촌으로 어릴 적부터 친형제처럼 붙어 지낸 두 사람. 강하늘의 표현을 빌리자면 “서로 함께해야 완벽한 동그라미가 되는” 반쪽 같은 사이다. 윤동주에게 송몽규는 애증의 존재였어요. 작가가 되고 싶은 건 윤동주였는데, 신춘 문예에 덜컥 당선된 건 송몽규였어요. 그래놓고 송몽규는 일제강점기라는 시대가 요구하는 혁명가가 되려 했어요. 윤동주에게 생애 첫 열등감과 질투를 불러일으킨 존재가 바로 송몽규인 거예요. 그 미운 정까지 쌓여 서로에 대한 애정이 더 커진 거고요. 그렇게 윤동주는 평생 송몽규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죠.” 윤동주에게 송몽규는 애증의 존재였어요. 작가가 되고 싶은 건 윤동주였는데, 신춘 문예에 덜컥 당선된 건 송몽규였어요. 그래놓고 송몽규는 일제강점기라는 시대가 요구하는 혁명가가 되려 했어요. 윤동주에게 생애 첫 열등감과 질투를 불러일으킨 존재가 바로 송몽규인 거예요. 그 미운 정까지 쌓여 서로에 대한 애정이 더 커진 거고요. 그렇게 윤동주는 평생 송몽규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죠.” 서로에게 각별했던 두 인물을 연기한 강하늘과 박정민도 그런 사이가 됐다. 정민 형과는 다른 작품에서 다시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정민 형은 내게 송몽규 그 자체예요. 다른 작품에서 다른 역할로 양복 빼입고 만나면 안 될 것 같아요. 형과는 ‘동주’라는 이 아름다운 영화 한 편만 우리 둘의 트로피로 남겨두고 싶어요. 그만큼 이 영화를, 윤동주와 송몽규라는 역할을 사랑해요.” 정민 형과는 다른 작품에서 다시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정민 형은 내게 송몽규 그 자체예요. 다른 작품에서 다른 역할로 양복 빼입고 만나면 안 될 것 같아요. 형과는 ‘동주’라는 이 아름다운 영화 한 편만 우리 둘의 트로피로 남겨두고 싶어요. 그만큼 이 영화를, 윤동주와 송몽규라는 역할을 사랑해요.” 윤동주가 송몽규에게 그러했듯, 송몽규란 인물을 온몸으로 끌어안은 채 연기하는 박정민에게서 그가 자극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그렇게까지 치열하게 연기하는 배우는 처음 봤어요. 그 우직함이 엄청 멋있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직진만 하는 게 아니라, 이 영화와 송몽규라는 인물을 너무 사랑해 앞뒤 안 가리고 빠져들더라고요. 얼마나 감정을 실었으면 송몽규가 우는 장면을 찍다 실제로 안압이 올라 눈에 핏줄이 터졌겠어요.” 누구 하나 빠짐없이 치열하게 소중한 작품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그 각별한 행복 속에서 강하늘은 윤동주라는 큰 이름을 연기한다는 불안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80쪽 남짓한 시나리오가 대체 뭐라고 돌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질” 때면 그는 윤동주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윤동주의 시 세계를 가리켜 ‘부끄러움의 미학’이라 설명하잖아요. 윤동주를 연기하면서 보니 그 특유의 부끄러움은 자신을 못난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충만한 자기애에서 비롯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자신에 대한 기준이 높기 때문에 그에 미치지 못하는 걸 부끄러워한다고 할까. 그만큼 자신을 솔직하게 돌아볼 수 있는 건, 자신을 굉장히 사랑하기 때문 아닐까요.” 윤동주의 시 세계를 가리켜 ‘부끄러움의 미학’이라 설명하잖아요. 윤동주를 연기하면서 보니 그 특유의 부끄러움은 자신을 못난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충만한 자기애에서 비롯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자신에 대한 기준이 높기 때문에 그에 미치지 못하는 걸 부끄러워한다고 할까. 그만큼 자신을 솔직하게 돌아볼 수 있는 건, 자신을 굉장히 사랑하기 때문 아닐까요.” 그건 강하늘도 마찬가지다. “나를 깎아내려야만 올라갈 힘이 생겨요. 스스로 빈틈을 느껴야 한 번이라도 더 움직이고 뭔가 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그는 열등감과 부담까지도 기꺼이 끌어안으려 한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연기하는 게 재미있어서, 연기 자체를 사랑해서 하는 건 아니에요. 나보다 훨씬 뛰어난 배우들을 만났을 때 느끼는 열등감, 주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야겠다는 부담이 지금껏 제게 가장 큰 힘이 됐던 것 같아요.” 강하늘은 이렇게 말하더니 자신이 아주 재미없는 사람처럼 느껴진다는 듯 허허 웃는다. ‘서시(序詩)’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노래했던 윤동주처럼, 강하늘에게 가치 있는 것이란 자신을 몰아쳐서 도달할 수 있는, 극기(克己)의 그 무엇은 아닐까. “한 작품 한 작품 할 때마다 한계를 느껴요. 연기가 참 어려운 게, 감정에는 정답이란 게 없잖아요. 그런데 관객이 보기에 그 인물의 정답처럼 느껴지게 뭔가를 해내야 한단 말이에요. 그게… 참(웃음).” 돌이켜보면 강하늘은 순수함으로 똘똘 뭉친 인물을 연기했을 때 가장 빛났다.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2009)의 여린 소년 에른스트, 영화 ‘스물’(2015, 이병헌 감독)의 숙맥 모범생 경재 그리고 ‘동주’의 윤동주까지. 특히 ‘동주’에서 그는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번번이 소리쳐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얼굴에 피어오르는 표정과 눈빛에서, 시를 너무 사랑해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젊은 청년의 온갖 감정이 형형하게 읽힌다. 제가 생각하는 순수함이란 자기 안에 어떤 기준이 튼튼히 서 있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 기준을 바꿀 수 없는 올곧음 같은 거예요. 반대로 요령을 부리거나 머리 굴리는 역을 맡으면 연기가 잘 안 되고 고민이 많아져요. 제가 그런 걸 잘 못하거든요. 사실 전 그렇게 다양한 면면을 지닌 사람이 아니에요(웃음).” 제가 생각하는 순수함이란 자기 안에 어떤 기준이 튼튼히 서 있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 기준을 바꿀 수 없는 올곧음 같은 거예요. 반대로 요령을 부리거나 머리 굴리는 역을 맡으면 연기가 잘 안 되고 고민이 많아져요. 제가 그런 걸 잘 못하거든요. 사실 전 그렇게 다양한 면면을 지닌 사람이 아니에요(웃음).” 맞다. 한창 방영 중인 TV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꽃보다 청춘 ICELAND’(tvN)에서 하루아침에 아이슬란드로 납치돼 정상훈·정우·조정석 등 세 선배 배우들과 여행을 즐기는 그의 모습만 봐도 착하고 밝은 스물일곱 살 청년의 얼굴 그대로다. “그게 딱 실제 저예요. 사실 자기 전에 형들한테 떼쓰고 심한 장난도 쳤는데, 그건 방송에 안 나왔어요. 여행 마지막 날에는 ‘야자 타임’도 했는데, 방송에 내보내지 못할 것 같아요. 하도 욕을 많이 해서. 하하하.” 강하늘에게 좀 더 다양한 역할을 잘 소화하기 위해서는 평소 다양한 감정이나 생각을 직접 품어 봐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가 훨씬 큰 대답을 돌려받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좋은 배우가 되고 싶었는데, 지금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어요. 좋은 사람이란 그저 착해 빠지기만 해서는 안 되고,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치사하고 속 좁은 감정까지 다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주변 사람들에게 그런 좋은 사람으로 남는 게 목표예요. 삶 전체를 봤을 때 그게 좋은 배우가 되는 것보다 더 값진 것 같아요(웃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좋은 배우가 되고 싶었는데, 지금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어요. 좋은 사람이란 그저 착해 빠지기만 해서는 안 되고,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치사하고 속 좁은 감정까지 다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주변 사람들에게 그런 좋은 사람으로 남는 게 목표예요. 삶 전체를 봤을 때 그게 좋은 배우가 되는 것보다 더 값진 것 같아요(웃음).” 영화 `동주` 박정민. [사진=전소윤(STUDIO 706)] 박정민에게 물었다. ‘동주’에서 시인 윤동주를 아우르는 테마가 ‘부끄러움’이라면, 송몽규 열사의 테마는 무엇이라 생각하냐고. 그는 “정의”라고 답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윤동주 평전』(송우혜 지음, 푸른역사)에 묘사된 송 열사의 모습은 한 치 망설임 없이 “불 속으로 달려드는 불나방” 같았다면서. 1년째 휴대전화 배경 화면에 송 열사의 사진을 담고 있는 그가 말을 이었다.   시나리오를 읽으며 윤동주에 대한 송몽규의 마음이 뭘까 생각해 봤어요. 결론은 ‘형의 마음’이더라고요. ‘너는 시를 써라. 총은 내가 들게’란 송몽규의 대사처럼, 자신을 위험으로 내몰면서도 윤동주만큼은 끝까지 보호하고 싶어하니까요.” 시나리오를 읽으며 윤동주에 대한 송몽규의 마음이 뭘까 생각해 봤어요. 결론은 ‘형의 마음’이더라고요. ‘너는 시를 써라. 총은 내가 들게’란 송몽규의 대사처럼, 자신을 위험으로 내몰면서도 윤동주만큼은 끝까지 보호하고 싶어하니까요.” 함께 연기한 강하늘에 대해 물었다. “참 부러워요. 자기가 준비한 연기가 정답이 아니란 걸 알면 ‘멘붕’이 오게 마련인데, 늘 유연하게 정답을 찾아내더라고요. 연기를 잘한다는 건 알았지만 이제 그 이유를 알게 됐어요.” 이준익 감독이 박정민을 송몽규 역에 캐스팅한 데는 소속사(샘 컴퍼니) 선배 황정민의 추천이 큰 역할을 했다. ‘전설의 주먹’(2013, 강우석 감독)에서 황정민의 아역으로 출연했던 그는 ‘태양을 쏴라’(2015, 김태식 감독)를 비롯, TV 드라마 ‘너희들은 포위됐다’(2014, SBS) ‘일리 있는 사랑’(2014~2015, tvN) 등에서 주로 반항적이거나 유머러스한 캐릭터를 맡아왔다. 하지만 캐스팅 제의를 받고도 “왜 이준익 감독님 같은 분이 나처럼 검증 안 된 신인을 원하겠나” 하는 생각에 한동안 믿지 못했단다. 그 이야기가 진짜란 걸 알게 됐을 때, 기쁨도 그만큼 컸다. 그러나 실존 독립운동가의 삶을 연기하는 건 큰 부담이었다. “잘못된 해석으로 그분들의 숭고한 삶을 훼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두 달간 치열하게 공부했다. 카페와 서점을 오가며 책과 대본에 매달렸다. 그 고민이 빼곡하게 기록된 대본과 노트는 이제 “나태해질 때 한 번씩 들춰보며 자신을 다독이는” 보물이 됐다. 그게 다가 아니다. 크랭크인을 두 달 앞둔 지난해 설 연휴, 박정민은 홀로 중국 용정에 있는 윤동주·송몽규의 생가와 묘소를 방문했다. “제가 원래 역사 의식이 투철하거나, 뛰어난 공감 능력이 있었더라면 가지 않았을 거예요. 그분들이 어떤 풍경을 보면서 자랐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해서 떠난 여행이었어요.” 윤동주와 송몽규의 묘소는 나란히 붙어 있다. 박정민은 비교적 잘 관리된 윤동주 시인의 묘소에 비해, 초라하고 풀이 바싹 마른 송 열사의 묘소에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독립을 위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던 그가, 이렇게 잊혀져 버렸다는 사실이 슬퍼서. 면세점에서 산 소주로 소박하게 인사를 드렸다. “그 앞에 선 순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속에서 훅 밀려왔어요. 제가 너무 무례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넌 기껏 연기를 잘하고 싶다고 이분들 앞에 온 거야? 그렇게 연기를 잘하고 싶었어?’ 이런 생각이 머리를 세게 쳤어요. 그래서 소리 내 말씀드렸죠. ‘송구합니다. 두 분께 무엇을 바라고 여기에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두 분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멍하니 한두 시간 앉아 있는데, 까마귀 수십 마리가 제 주위를 돌며 까악 울어대더라고요. 불길하잖아요(웃음). 한국에 돌아와 감독님께 말씀드렸더니, ‘중국에선 까마귀가 길조니 좋은 징조’라고 하셨어요.” 그날의 경험은 박정민을 촬영 마지막 날까지 붙들었다. 송몽규가 일본 형사 앞에서 자신의 죄목을 시인하는 클라이맥스 장면까지. 갑자기 머릿속에 송 열사의 묘소가 스쳐갔어요. 순간… 가슴이 사무치게 억울하더라고요(그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목이 메었다). 묘소에 다녀오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면목 없지만, 그분이 날 도와주셨다는 생각에 오케이 사인이 났는데도 울음이 멎질 않았죠. 그런데 감독님이 제 곁에 오셔서 엉엉 우시는 거예요. 고마움과 후련함이 교차했던 순간이었어요.” 갑자기 머릿속에 송 열사의 묘소가 스쳐갔어요. 순간… 가슴이 사무치게 억울하더라고요(그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목이 메었다). 묘소에 다녀오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면목 없지만, 그분이 날 도와주셨다는 생각에 오케이 사인이 났는데도 울음이 멎질 않았죠. 그런데 감독님이 제 곁에 오셔서 엉엉 우시는 거예요. 고마움과 후련함이 교차했던 순간이었어요.” 장편 데뷔작 ‘파수꾼’(2011, 윤성현 감독) 이후 4년 만에 만난 ‘동주’는 인간 박정민을 재충전시킨 작품이었다. 연기를 포기해야 하나 고민하던 시기에 찾아온 ‘동주’는 그를 “오랜만에 에너지를 끓게 만들어준” 작품이었다. “영화를 상업적인 가치로 평가할 수 없다는 강한 확신을 얻었어요. 만드는 과정 자체가 아주 아름다웠으니까요. 송 열사의 삶과도 닮았죠. 뚜렷한 ‘결실’이 없어 많은 이들이 기억해주지 않을지언정, 그 치열한 ‘과정’을 계속했던 사람들이 존재했기에 세상이 조금씩 변해온 것 같아요.” 박정민은 한때 영화감독을 꿈꿨다. 2006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에 입학했지만, 연극 무대에 이끌려 2009년 학교 최초로 연기과에 전과했다. 연기과 동기인 변요한과는 단짝으로 유명하다. 두 사람은 ‘들개’(2014, 김정훈 감독)에서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얼마 전 종영한 TV 드라마 ‘응답하라 1988’(tvN)에선 성보라(류혜영)의 나쁜 남자친구로 잠깐 얼굴을 비췄다. “한 차례 등장해 욕 먹고 퇴장할 걸 알면서도, 보다 입체적인 인물을 만들고 싶어” 류혜영에게 문자로 전후 맥락을 취재, 캐릭터의 살을 붙였다. 짧은 등장에도 매번 강한 인상을 남기는 이유는 바로 이런 노력의 산물이 아니었을까. 박정민은 트렌드 잡지 『탑클래스』에 ‘배우 박정민의 언희(言喜)’라는 제목으로 매월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솔직하게 일상 이야기를 전하는 그의 글엔 이미 고정 독자가 많다. “사실 일기 수준인데…. 사람들이 읽고 싶은 글을 쓰고 싶었어요. ‘직업만 배우지, 나도 당신들과 같아요. 내가 어떻게 사는지 볼래요? 아마 당신들보다 더 바보 같을 걸요?’ 이런 느낌이랄까(웃음).” ‘도광양회’(韜光養晦·자신의 재능이나 명성을 드러내지 않고 참고 기다린다). 얼마 전 박정민이 칼럼에서 언급한 사자성어다. ‘동주’가 그에게 그런 결실을 맺어줄 첫 작품이 아닐까. “그런 기대에 집착하기보다는 흔들리지 않고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 중이죠. (잘 안 되면) 상처가 될 수도 있겠죠. 원 밖에 있다가 순식간에 중심으로 떠오르는 배우들이 얼마나 많아요. 같은 배우로서 앞으로 달려나가는 그들의 등을 바라보는 게 참 힘들어요. 그런데 한편으론 하루아침에 유명해지는 게 무섭기도 해요. 독이 될 것 같아서요. 늘 있는 듯 없는 듯 평범하게 살아온 제 인생처럼, 원의 중심을 향해 조금씩 나갈 수 있다면 전 그걸 택하겠어요. 그 편이 제겐 더 어울려요.” 진중한 그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다 보니, “잘만 키우면 ‘한국 영화계의 더스틴 호프먼’이 될 것”이란 이준익 감독의 칭찬이 새삼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영화 `동주` 이준익. [사진=전소윤(STUDIO 706)] ‘사도’(2015)에서 사도(유아인)와 영조(송강호)의 부자 관계에 집중해 파국의 드라마를 그려냈던 이준익 감독. 그가 또다시 두 인물의 관계를 치밀하게 파고든, 비극의 서사 ‘동주’를 내놓았다. 윤동주와 송몽규, 서로에게 거울 같은 존재이자 라이벌이었던 두 사람의 뜨거웠던 미완(未完)의 청춘에 시대의 아픔을 녹여냈다. 지금껏 한 번도 영화화되지 않았던 윤동주의 삶을 흑백 화면에 담아낸 과정은 분명 의미 있는 도전이었다. 이준익 감독에게 도전의 이유를 물었다. 질의 :이 영화에 유독 애착을 보였다고 들었다. 응답 :“저예산에다, 흑백으로 찍었다. 그간 찍어 왔던 상업영화와는 전혀 다른 시도다. 각별할 수밖에 없지.” 질의 :형식적인 차별화를 시도한 이유는 뭔가. 응답 :“2011년 일본 교토국제사극영화제에 참가한 김에 도시샤 대학의 윤동주 기념비를 찾았다. 그 기념비가 남의 땅에 서 있는 뜻에 대해 영화로 풀어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교복을 입은 윤동주의 흑백 사진을 보며, 나의 중·고교생 시절 자화상을 보는 듯했다. 다들 윤동주 시(詩)에 비친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모두가 사랑하는 윤동주를 상업적 강박과 부담 속에서 소환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 생각했다. 그래서 비(非)상업적인 방식으로 의미를 부여했다.” 질의 :한 달간 19회차 촬영은 너무 무리한 일정 아니었나. 응답 :“신나고 재미있었다. 상업적 부담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데(웃음).” 질의 :시나리오를 제작자인 신연식 감독이 썼다. 응답 : “윤동주 영화를 저예산으로 찍고 싶은데 시나리오를 쓸 수 있겠냐고 물었더니, 좋다고 하더라. 그에게 윤동주와 송몽규, 둘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드라마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꽃다운 나이에 청춘을 유린당한 그들이 남긴 의미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다. 물론 ‘일본 군국주의여, 통렬히 반성하라’는 의미도 있다.” 질의 :윤동주와 송몽규의 비중이 비슷하다. 응답 :“일부러 그렇게 했다. 송몽규 없이 윤동주만으론 영화를 만들 수 없다. 드라마틱한 요소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70년간 그를 다룬 영화가 나오지 않은 거다. 송몽규가 동물적인 행동주의자라면, 윤동주는 강인한 식물 같은 관념주의자다. ‘참회록’ 같은 시도 쓸 줄 아는, 결단력 있는 상남자이기도 하다.” 질의 :‘사도’에 이어, 또다시 두 인물의 관계를 파고 들었다. 응답 :“어떤 사람의 진실은 동시대를 같이 살아왔던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송몽규의 일련의 선택과 행동에 대해 열등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윤동주의 심경이 ‘자화상’이란 시에 녹아 있다. 송몽규가 교토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는 클라이맥스 장면에 그 시를 넣은 건, 일심이체 같은 둘의 관계에 대한 영화적 해석이다. 송몽규가 없었다면 윤동주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질의 :윤동주는 알아도, 송몽규는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응답 :“윤동주는 과정은 대단하진 않지만 결과가 아름다워 누구나 기억한다. 하지만 송몽규는 과정은 아름답지만 결과가 없어서 아무도 기억 못한다. 실패한 사람들의 아름다운 과정을 소홀히 여기는 건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나 또한 송몽규를 잘 몰랐다. 그게 부끄러워 이 영화를 찍었다. 이 영화를 통해 송몽규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싶었다.” 질의 :부끄러움이야말로 윤동주 시의 미학이 아닌가. 응답 :“자신을 찾아온 윤동주에게 정지용 시인은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게 부끄러운 것이지’라고 한다. 윤동주 시엔 부끄러움의 미학이 담겨 있다. 시대적 배경과 내면의 갈등, 어찌할 수 없음에 대한 자조적 한탄이 ‘참회록’ ‘서시’ ‘쉽게 씌어진 시’에 점철돼 있다. 정약용은 ‘시대를 아파하지 않는 건 시가 아니다’라고 했다. 윤동주는 그 말에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 시를 썼다. 그의 시는 몸으로 쓴 것이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다.” 질의 :강하늘과 박정민을 캐스팅한 이유는. 응답 :“강하늘은 내가 연출한 영화 ‘평양성’(2011)으로 데뷔한 배우여서 잘 안다. 외모와 목소리, 내면이 내가 생각한 윤동주와 흡사했다. 박정민 또한 송몽규와 많이 닮았다. 그가 출연한 영화를 보고, 박정민이 행동주의자의 면모를 갖고 있다고 확신했다.” 질의 :일제시대의 거리와 공간을 만들어내는 게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응답 :“윤동주와 송몽규가 자라난 북간도 용정마을과 비슷한 곳을 찾는 게 힘들었다. 기적적으로 강원도 고성에서 북방식 한옥이 보존된 왕곡 마을을 찾아냈다. 일제시대 건물이 남아 있는 소록도에선 두 주인공의 학창 시절 정취를 담아낼 수 있었다. 남원 서도역에는 일제시대에 지은 역장 관사가 그대로 남아 있는데, 거기서 윤동주의 하숙방 장면을 찍었다. 윤동주가 부산항에서 일본 시모노세키로 가는 관부 연락선을 타는데, 그 배 이름이 ‘경복환(景福丸)’이다. 일제가 조선의 궁 이름을 격하하기 위해 그렇게 이름 붙인 거다. 일제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일부러 넣은, 숨은 코드다.” 질의 :영화적 허구는 어떤 게 있나. 응답 :“동주를 설레게 하는 여대생 이여진(신윤주), 동주의 시를 사랑하는 일본 여인 쿠미(최희서)는 허구의 인물이다. 후쿠오카 감옥에서 일본 고등 형사(김인우)가 윤동주와 송몽규를 심문해 내란 음모죄로 엮으려는 것도 허구다. 그들은 이미 심문을 거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형을 선고받고 투옥됐기 때문이다. 그런 영화적 재구성을 통해 본질을 더욱 명료하게 전달하려 했다.” 질의 :가장 좋아하는 윤동주의 시를 꼽는다면. 응답 :“시에 서열을 매기는 건 불손한 태도다. 그럼에도 하나를 꼽는다면, ‘아우의 인상화’다. ‘사람이 되지’라니, 얼마나 멋진 시인가. 요즘처럼 짐승 같은 사람이 넘쳐나는 세상에선 더욱 의미가 크다. 영화에 그 시와 관련한 장면이 나오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신이다.” 질의 :고등 형사의 심문을 받던 윤동주와 송몽규가 피 토하듯 울분을 터뜨리는 신을 찍을 때 눈물을 흘렸다고 들었다. 응답 :“내가 펑펑 우는 게 메이킹 필름에도 담겼다. 형사가 사인하라고 들이미는 조서 앞에서 둘은 슬픔이 아닌, 통한의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피눈물 나는 자기 고백의 대사를 토해낸다. 강하늘, 박정민의 혼신의 연기가 압권이었다. 두 인물의 영혼이 보이는 듯했다.” 질의 :윤동주·송몽규의 비극적인 삶에서 요즘 젊은이들은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응답 :“요즘 청춘이 아무리 아프다 한들, 윤동주와 송몽규만 하겠나. 고통스럽고 괴로운 순간에도 끝까지 자신에게 솔직하려고 노력하며 죽어갔던 둘의 삶을 온몸으로 맞이하면, 지금 나의 아픔과 고통은 이겨낼 수 있다는 위안을 받지 않을까. 사도세자의 비극도, 윤동주의 비극도 모두 아름답게 승화시켜야 한다.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중장년도 이 영화를 통해 자기 안 어딘가에 남아 있거나 숨어 있는 청춘을 끄집어냈으면 좋겠다.” 질의 :윤동주가 만약 젊은 나이에 죽지 않았다면, 어떤 일을 했을까. 응답 :“안 그래도 그런 상상을 한 적 있다. 그가 중학교 또는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 됐으면 좋았을 것 같다. 잃어버린 자신의 아름다운 청춘에 대해 학생들에게 얘기해주고, 더 아름다운 시를 쓰려고 고민하는 윤동주 선생님, 얼마나 멋있나.” 영화 `동주` 감독 이준익 배우 강하늘, 박정민. [ 중앙일보] [하늘과 바람과 세 남자와 詩] ‘동주’ 강하늘·박정민 그리고 이준익 감독
332    별을 노래한 영원한 청년 시인 윤동주 댓글:  조회:6013  추천:0  2016-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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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    신화가 된 윤동주 댓글:  조회:4702  추천:0  2016-02-16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 시인 역을 맡은 강하늘(왼쪽)과 그의 고종사촌인 독립운동가 송몽규 열사 역의 박정민. 이준익 감독은 윤동주의 소박한 삶을 존중해 저예산으로 영화를 제작했다. 박정민이 윤동주의 시가 적힌 종이를 말아 쥐고 있다. [사진 전소윤(STUDIO706)] 17일 개봉하는 영화 ‘동주’(이준익 감독)는 스크린 최초로 시인 윤동주(1917~45)의 삶을 조명한 작품이다. ‘동주’ 강하늘 영화는 윤동주와 그의 고종사촌인 독립운동가 송몽규 열사(1917~45)의 관계를 통해 어두운 일제 강점기 시대를 살아간 두 청춘의 고난과 소망을 흑백 화면 속에 잔잔하게 담았다. ‘동주’에서 각각 윤동주와 송몽규를 연기한 젊은 배우 강하늘(26)과 박정민(29)을 만났다. 강하늘은 ‘동주’ 촬영을 앞두고 잠을 이룰 수 없었다고 했다. 윤동주 역을 맡았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솟구쳤던 흥분과 기대는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과 고민으로 바뀌었다. “시인 윤동주는 이런 사람이었다고 연기로 보여줘야 하는데, 내가 생각하는 방향이 맞는 걸까 점점 자신이 없어지더라고요. 나중엔 80쪽 남짓한 시나리오가 돌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질 정도였죠.”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막상 촬영하면서 스태프와 배우들 모두 똘똘 뭉쳐 뜻 깊은 영화를 찍고 있다는 사실에 전율을 느꼈다.  -윤동주를 어떤 인물로 그리려고 했나.  “70년 전 세상을 떠난 역사 속 인물, 아름다운 시를 남긴 천재 시인…. 교과서의 거창한 말만으로는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설명할 수 없다. 그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질투하고 미워하면서 순간순간 흔들리지 않았을까. 시인 윤동주를 ‘한 사람’으로 숨 쉬게 하고 싶었다.”  -극 중 윤동주와 송몽규의 관계가 각별하다.  “송몽규는 윤동주에게 생애 첫 열등감과 질투를 불러일으킨 존재다. 작가가 되고 싶은 건 윤동주였는데, 신춘 문예에 당선된 건 송몽규였다. 그래놓고 송몽규는 시대가 요구하는 혁명가가 되려 했다. 윤동주는 평생 송몽규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미운 정까지 쌓여 서로에 대한 애정이 더 커진 것 같다.”  -윤동주의 시 세계를 가리켜 흔히 ‘부끄러움의 미학’이라 설명한다. 그 부끄러움이란 무엇일까.  “촬영장에서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면서 느낀 건데, 윤동주는 자신을 못난 존재로 여긴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애가 충만했던 것 같다. 자신에 대한 기준이 높기 때문에 그에 미치지 못하는 걸 부끄러워한다고 할까. 그 점이 나와 비슷한 것 같다. 나도 나 자신을 깎아내려야만 올라갈 힘이 생긴다(웃음).”  -윤동주 시인의 육촌동생인 가수 윤형주씨와의 인연도 각별한 것 같다. 영화 ‘쎄시봉’(2015)에선 윤형주 역할을 맡았고.  “캐스팅되고 윤형주 선생님께 전화드렸더니 윤씨로 성을 바꿔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셨다(웃음). 영화를 꼭 보고 싶다고 하셨다. 저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윤형주 선생님을 보면서 가수의 꿈을 키우셨다. 이 모든 인연이 놀랍고 감사할 뿐이다.”  -윤동주는 시를 너무 사랑해 어떻게든 시를 써야만 하는 인물이었다. 강하늘에게 연기란 .  “나보다 훨씬 뛰어난 배우들을 만났을 때 느끼는 열등감, 주변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야겠다는 부담이 지금껏 내게 가장 큰 힘이 됐다. 실제 작품 할 때마다 배우로서 한계를 느낀다. 내게 연기란 나 자신을 몰아쳐서 도달할 수 있는 극기(克己)의 과정인 것 같다.”  - 순수한 캐릭터를 연기할 때 빛나는 배우다.  “내가 생각하는 순수함이란 자기 안에 어떤 기준이 있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 기준을 바꿀 수 없는 올곧음 같은 거다. 반대로 요령을 부리거나 머리 굴리는 역을 맡으면 연기가 잘 안 되고 고민이 많아진다.(웃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좋은 배우가 되고 싶었는데, 지금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좋은 사람이란 그저 착해 빠지기만 한 게 아니라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치사하고 속 좁은 감정까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되는 게 삶 전체를 봤을 때 더 값진 것 같다.” ‘몽규’ 박정민 극중 연희전문학교 음악 수업 장면. 윤동주(왼쪽)와 송몽규(가운데). [사진 메가박스플러스엠] 신인 박정민에게 ‘동주’는 각별한 작업이었다. ‘파수꾼’(2011)으로 장편영화에 데뷔한 뒤 자신이 배우로서 소질이 있는지 고민하던 중 ‘동주’를 만났다. 소속사(샘 컴퍼니) 선배 황정민이 제작진에 그를 적극 추천한 것이다. “캐스팅 제안을 받고 ‘왜 이준익 감독 같은 분이 나처럼 검증 안 된 신인을 원하겠나’하는 생각에 한동안 믿지 못했어요. 그 이야기가 진짜라는 걸 알게 됐을 때 정말 기뻤죠.” 윤동주의 소박한 삶을 존중해 저예산으로 제작한 영화이지만, 그에게 ‘동주’는 “만드는 과정이 무척 아름다웠던 영화”였다. -송몽규라는 인물을 어떻게 이해했나. “시대에는 ‘정의’로 답하고, 윤동주에게는 ‘형의 마음’이었던 청년이다. 『윤동주 평전』(송우혜 지음)에 묘사된 송몽규 열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망설임 없이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 같았다. 한편으론 늘 형의 마음으로 윤동주를 살뜰하게 보살피는 청년이기도 하다. ‘너는 시를 써라. 총은 내가 들게’란 대사처럼, 자신을 위험으로 내몰면서도 윤동주만큼은 끝까지 보호하려 하니까.” -실존 독립운동가를 연기했다. 부담이 컸겠다. “물론이다. 잘못된 해석으로 그분들의 숭고한 삶을 훼손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두 달간 서점과 카페를 오가며 치열하게 공부했다. 그때 공부한 내용과 내 해석을 필기했던 대본과 노트를 소중한 보물로 간직하고 있다. 나태해질 때마다 한 번씩 들춰보며 스스로 다독일 수 있게.” -촬영 전 홀로 중국 용정에 있는 윤동주·송몽규의 생가와 묘소를 방문했다고 들었다. “내가 원래 역사 의식이 투철하거나, 뛰어난 공감 능력이 있었더라면 가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그분들이 어떤 풍경을 보면서 자랐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어 그곳으로 떠났다. 면세점에서 산 소주로 두 분의 묘소에 고사도 드렸다.” -직접 가서 보니 어떤 기분이 들던가. “조국의 독립을 꿈꾸며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던 두 분이 이렇게 잊어졌다는 사실이 슬펐다. 고작 연기를 잘하고 싶다고 찾아간 내 자신이 너무 무례하게 느껴지더라. 그래서 소리 내서 ‘송구합니다. 두 분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갑자기 까마귀 수십 마리가 날아와 주위를 돌며 울어대더라. 한국에 돌아와 이준익 감독님에게 말씀드렸더니, ‘중국에선 까마귀가 길조니 좋은 징조’라고 하셨다.” -송몽규가 일본 형사 앞에서 자신의 죄목을 시인하며 오열하는 연기가 무척 인상적이다. “그 장면을 연기하는데, 갑자기 머릿속에 송 열사의 묘소가 떠오르면서 가슴이 사무치게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면목 없지만, 송 열사가 날 도와주셨다는 생각에 오케이 사인이 나도 울음이 멎질 않았다. 나중엔 감독님이 내 곁에 와서 함께 엉엉 울어주셨다. 고마움과 후련함이 교차했던 순간이었다.” - ‘동주’에서의 담담하면서도 선 굵은 연기로 보다 많은 관객에게 이름을 알리게 될 것 같은데. “그런 기대로 흔들리기보다는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 중이다. 그동안 기대를 좀 했었지만 잘 안 됐으니까(웃음). 한편으론 하루 아침에 유명해지는 게 무섭기도 하다. 독이 될 것 같아서다. 평범하게 살아온 내 인생처럼, 조금씩 배우로 성장해 나갈 수 있다면 좋겠다. 그 편이 내게 더 어울린다.” [중앙일보] “신화가 된 윤동주…80쪽 대본이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330    땡땡!!- 국어시간; - 아이고 머리가 아찔... 댓글:  조회:4416  추천:0  2016-02-16
[요즘 들어 말을 갑자기 이상하게 쓰는 풍조가 있는데 좋지 않은 징조일지 모릅니다. 걱정스럽습니다... ]           "잡은 고기, 놓친 고기"라는 말이 있다. 익숙한 말로서 자연스럽다. 주어를 넣어 보면 명백하게 우리말답다. "(내가) 잡은 고기, (내가) 놓친 고기." 또 "가시로 만든 면루관"(찬송가 가사)이라는 말도 하자가 없다.   그런데 우리말을 영어식 문장으로 쓰는 일이 늘고 있다. 자연스럽지 않을뿐더러 번잡하다. "잡힌 고기, 놓쳐진 고기." "(사람들에 의해) 가시로 만들어진 면류 관." 이런 식이다.   "놓친 고기가 커 보인다"라면 되지, "놓쳐진 고기가 커 보인다"라면 어색하지 않은가. 영어를 많이 배웠을 듯싶은 사람들, 특히 언론인들이 우리말을 영어식으로 쓰는 데 앞장선다. 영어 문장을 우리말식으로 가다듬지 않은 채 곧바로 번역한 말투에 피동형이 많다. 우리말답게 능동형으로 고쳐 써야 좋겠다.     주차된 승용차를 트레일러가 들이받았다. -> (어떤 사람이) 주차한 승용차를 트레일러가 들이받았다.: '주차한'의 주어를 넣어 보면 능동형이 어울린다. '주차하다'가 국어사전에 자동사로만 올라 있다면 '주차된'이 될 수 있다. 타동사인 '주차하다'를 '주차된'으로 쓰면, 영어에 있는 과거분사 형태를 본뜬 것이 된다. 배포된 대학 신문을 대학 측이 시급히 회수했다. -> (학보사가) 배포한 대학 신문을... 위조된 신용카드를 사용하다가 -> (범인이) 위조한 신용카드를... 전국에 발령된 황사주의보가 해제됐습니다. -> (기상청이) 전국에 발령한 황사주의보를 해제했습니다. 구속된 공무원을 송치하고 -> (검찰이) 구속한 공무원을 송치하고 구입된 물건을 싣고 - > (내가) 구입한 물건을 싣고 제출된 법안은 빨리 처리될 것이다. -> (정부가) 제출한 법안은 (국회가) 빨리 처리할 것이다.: '제출한 법안은'이 목적어 구실을 하고, 주어는 생략한 '국회가'다. '-은, -는'은 주어 역할뿐 아니라 목적어 역할을 한다. ('이'와 '가'는 주격 조사다. '는'과 '도'는 주격 조사 등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보조사다.) 1900년에 작곡된 곡 -> 1900년에 (그 음악가가) 작곡한 곡 세종시 해법을 위해 만들어진 한나라당 6인 중진협의체 -> 세종시 해법을 위해 (여당이) 만든 한나라당 6인 중진협의체 펼쳐진 멍석 -> (내가) 펼친 멍석 눈앞에 펼쳐진 수평선 : 적절하게 쓴 말이다.   프로야구가 어제 개막됐습니다. -> 프로야구가 어제 개막했습니다. 이번 연주회에서는 운명교향곡이 연주됩니다. -> ...운명교향곡을 연주합니다. : 연주회에서 사회자가 "다음에는 운명교향곡이 연주되겠습니다"라고 하면 우습지 않겠는가. 이번 일정에는 오페라가 공연됩니다. -> ...오페라를 공연합니다.: 우리말은 주어를 생략할 때가 많다. 영어처럼 주어를 앞세우려고 하지 말자. "품질 좋은 제품을 갖추고 고객을 만족시키겠습니다"라는 문장은 능동형으로 쓰면서 주어를 생략하니 간결하지 않은가. 미국에서 중요한 통계가 발표됐군요. -> 미국에서 중요한 통계를 발표했군요. : 생략한 주어를 생각하면 능동형으로 쉽게 쓸 수 있다. 생략한 주어로 '통계 담당 부서가'를 넣으면 된다.   (○○일보 사설) "종편 선정 늦어질수록 불필요한 오해 부른다" 중에서 "선정 기준도 구체적으로 공개해야 한다.": 이 경우는 아주 맘에 들었다. '선정 기준도'는 주어 구실이 아니라 목적어 구실을 한다. 대개 "선정 기준도 구체적으로 공개돼야 한다"라고 쓰는데 그럴 필요 없다. '밤도 사고, 감도 사고'는 '밤과 감을 샀다'는 말이다. 이 기금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쓰여집니다. -> 이 기금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 씁니다. 이 사업은 중단돼야 합니다.-> 이 사업은 중단해야 합니다.: 주어로 '정부가'를 넣으면 구분할 수 있다. 탄호이저 서곡은 오케스트라에 의해 자주 연주된다. -> 탄호이저 서곡은 오케스트라가 자주 연주한다. 장거리 운전 시 차량은 미리 점검돼야 합니다. -> ...차량은 미리 점검해야 합니다.: '차량은'이 목적어 구실을 하고, 주어는 생략한 '차량운전자가'다. "부의금과 조화는 정중히 사절합니다"에서 '...조화는'을 목적어 역할로 썼다. 이보다 낫게 쓰려고 해 봤자 번잡해질 것 같다.   대법원의 사법정책자문위원회가 마련한 사법제도 개선안 ...(○○일보 사설) : 주어를 생략하지 않으니 '마련한'으로 제대로 썼다. 북한은 인도적 차원에서 만들어진 면회소를 ...(○○일보 사설) -> 북한은 인도적 차원에서 (우리 정부가) 만든 면회소를...: 주어를 표기했든 안 했든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대통령이 길상사에 마련된 법정 스님 분향소를 찾아 조문했다.(○○일보) -> ...길상사에 마련한 분향소를... 길상사에 모셔져 있던 법정 스님의 법구가 운구되고 있다. (○○경제) -> 길상사에 모시고 있던 법정 스님의 법구를 운구하고 있다. 다비식 후 수습된 법정 스님의 유골을 제자들이 들고(○○경제) -> ...수습한 법정 스님의 유골을...     축적된 능력 -> (우리나라가) 축적한 능력 준비된 음식 -> (내가) 준비한 음식 준비된 대통령 -> (미래의 대통령을 향해 그 자신이) 준비한 대통령 준비된 교사 -> (많은 분야를 열심히 공부하여 그 사람이) 준비한 교사: '준비하다'의 주체는 주로 사람인데, '준비한'은 적극적인 주체자라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만약 선거 운동에서 '준비한 시장'이 어색하면, 우선 '준비하고 준비한 시장'이라는 말을 만들어 쓰면 '준비된 시장'이라는 문구를 능가할 듯싶다. 성경의 '새로 번역된 사도신경' -> '새로 번역한 사도신경' '장사된 지 사흘 만에'(사도신경): '예수를 장사 지낸 지 3일 만에'라는 뜻으로 '장사한 지 사흘 만에'라는 구절은 쓸 만하다. 이것을 '장사된 지 사흘 만에'로 굳이 고친 것은 유감스럽다. "장사 지내러 가는 놈이 시체 두고 간다"는 속담도 있듯이 '장사(를) 지내다'를 많이 쓴다. '장사하다'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라 있지만, '장사되다'는 없다. 유일한 아들: 새 사도신경에서는 순우리말 '외아들'을 한자어 '유일한 아들'로 고쳤다. '외아들(또는 독생자)'은 표준국어대사전에 예수를 달리 이르는 말로 나와 있다. 일상생활에서도 '외아들' 대신 '유일한 아들'로 쓰지 않는데, '유일한 아들'이 원어에 가깝다고 생각하여 더 바람직하다고 할 것인가. '유일한 아들'은 아들이 하나뿐이라는 말로 '다른 자식이 없이 하나뿐인 아들'의 뜻인 '외아들'과 다르다. '그 학급에서 나는 유일한 남자다'라고 하면, 나를 빼고는 남자가 없다는 것이지 여자도 없다는 말이 아니다.   "열차가 도착되고 있습니다.": 모처럼 기차 여행을 떠났는데, 이 말을 듣고 씁쓸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열차가 도착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면 그만인데 말이다.       이처럼 능동형을 피동형으로, 피동형을 이중 피동형으로 많이 쓴다. 영어식 문장에 골몰하다 보니 그런 것 같다. 물론 능동형과 피동형은 미묘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의미를 확실하게 하려고 피동형으로 굳이 쓰는 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영어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능동형을 쓰면 되는데 피동형을 써야 뜻이 들어맞는다고 느끼는 실정이다. 바람직하지 않은 말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하지 않은 채 반복하여 쓰다 보니, 올바른 말이 밀리고 언어 체계가 혼란스러워지고 있다. 우리말을 소중하게 여긴다면 바로 쓰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한편으로 서글프고 답답하다. 가슴이라도 쥐어뜯고 싶다. 흔히 우리말을 우리 영혼이라고 하지 않는가. 우리 사상과 얼이 녹아 있는 결정체이기에 그렇게 말할 게다. 이런 우리말을 훼손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말을 가꾸고 지키려 애쓴 선조들, 그리고 지금도 애쓰고 있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그들에게 죄송스러운 심정이 든다. 그래서 우리말 지키기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 싶어 내 의견을 적극적으로 밝히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내가 우리말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은 아니겠지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그나저나 나는 비만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시사만화가로서 거의 모든 곳에서 나는 소리에 민감하고, 거의 안 끼는 데가 없으니 말이다. (좀 겸손하지 않은 말을 덧붙인 것 같아 죄송합니다)           < 추가 사례(보~ 너스) >       잊혀진 ->잊힌: 정지용의 향수에 있는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라는 구절처럼 '잊힌'이면 충분하다. '잊혀진'은 이중 피동으로 틀린 말이다. '좋은생각'이라는 잡지에서는 이중 피동을 탈피하여 "그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등으로 쓰고 있다. 열린 음악회: '열려진'은 어색할 뿐 아니라 틀린 말이다. 그런데도 방송 보도에서 '열려진'이라는 말을 쓴 바 있다. 잔치가 열려집니다. -> 잔치가 열립니다. 어제 열린 운동회에서 -> 어제 (학교 측이) 연 운동회에서: '열린 음악회'와 동사 활용의 차원이 다른데도 구분하지 않고 '어제 열린 음악회'처럼 쓴다면, 언어 체계가 불합리해진다. 즉, '어제 열린 열린음악회'가 아니라 '어제 연 열린음악회'라고 써야 한다.   내일 열리는 대공연 -> 내일 여는 대공연: '열리다'가 사전에 자동사로 있기는 하다. 여기서는 타동사인 '열다'를 쓴 것으로 봐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음악으로 여는 아침', '시로 여는 아침', '뉴스로 여는 세상' 따위의 말을 요즘 듣는다. '닷새마다 여는 장.' '지역을 돌아가며 여는 노래자랑.'   서울에서 펼쳐지는 음악회 -> 서울에서 펼치는 음악회:'펼치다'를 곧바로 활용한다. '펼친그림(전개도)'이라는 낱말도 국어사전에 올라 있다. 28일 치러지는 보궐선거 -> 28일 치르는 보궐선거 결혼식을 치른 그 봄과 그날 부른 목련화를 해마다 잊지 못한다.: '결혼식이 치러진' '불린 목련화' '...목련화가 잊히지 않는다'라고 굳이 피동형으로 쓸 필요가 없다. '무릎 통증도 잊은 채.'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아이.' '도둑을 잡는 개의 본성은 잊은 채.' '잔치 치른 집 같다(속담).'   잘못된 인식: 국어사전에 '잘못되다'가 자동사로만 올라 있다. '잘못된 인식'은 괜찮다. 실종된 병사: '실종하다'가 국어사전에 자동사로 올라 있으므로 괜찮다. 낙후한 지역, 낙후된 지역 : '낙후하다'가 자동사이므로 '낙후된 지역'도 된다. 그물에 잡힌 고기: '잡히다'가 국어사전에 자동사로 올라 있으므로 괜찮다. '놓치다'의 상대말인 '잡다'는 타동사다. 배에 받힌 양식장: '받다'의 피동사(자동사의 한 가지)인 '받히다'를 쓴 것이다. '받히다'는 국어사전에 올라 있다. 널리 알려진 작품: '많은 사람이 아는 작품'으로 바꿀 수 있다. '알리다'는 '알다'의 사동사인데, '알려지다'는 '알리다'의 어간에 '어지다'를 붙여 피동사로 만든 것이다. '알린 위험, 알려진 비밀'을 놓고 보면, '알린'과 '알려진'은 뜻의 미묘한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목적어를 대상으로 하면 사동사이고 주어를 대상으로 하면 피동사다. '위험을 알리다.' '위험이 알려지다.'   차가 강물로 추락하는 사고가 났습니다. 부상자는 건져졌고 헬기에 태워져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 ...부상자는 건져냈고 헬기에 태워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부상자는'이 목적어 구실을 한다. '밥은 먹고 다니느냐' '걱정은 안 해도 돼'처럼 '-은'을 목적어 역할로 유용하게 쓸 수 있다. 이 창고에는 쌀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 이 창고에는 (농부가) 쌀을 저장하고 있습니다.: "사랑해!"라고 하면, 주어와 목적어가 없는 것이 아니라 생략한 경우다. 주어를 생략하고 나서 미진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목적어가 돼야 할 객체를 주어로 삼고 보면 우리말에 잘 어울리지 않는다.   "배를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실종자가 발견됐습니다.": 이것은 방송에서나 쓰는 문장일 듯하다. 집에서 편하게 하는 대화라면, "배를 끌어올리다가 실종자를 찾았습니다(발견했습니다)."라고 할 것이다. 방송의 말과 실생활의 말이 동떨어진 것도 문제다.   (축구 중계) 애국가가 연주됩니다. -> 애국가를 연주합니다.(애국가를 연주하는 의례를 진행합니다./ 애국가를 제창합니다.) 경고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 > 경고를 주고 있습니다(경고를 받고 있습니다). 반칙이 선언됐습니다. - > 반칙을 선언했습니다. 추가 시간은 2분이 주어졌습니다. - > 추가 시간은 2분을 주었습니다. 선수 교체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 > 선수를 교체하고 있습니다.   재배된 홍삼 -> (농부가) 재배한 홍삼 압수된 증거물 -> 압수한 증거물 침몰된 초계함 -> 침몰한 초계함 천안함이 침몰됐다. -> ...침몰했다.: '침몰하다'가 좋을 것이다. 다른 소신을 갖은 사람도 있을 법하지만 말이다. 투입된 구조대원 -> 투입한 구조대원 구조된 실종자, 발견된 실종자 -> 구조한 실종자, 발견한 실종자 : '찾은 돈, 찾은 보물, 발견한 보물'처럼 써야 한다. '찾은 실종자'라고는 하면서 한자어인 '발견한 실종자'라고는 잘 하지 않으니 이상하다.   내지른 주먹, 저지른 방화: '내질러진 주먹, 저질러진 방화'는 좋지 않다. 죽인 벌레, 기른 닭, 키운 개: '죽여진 벌레, 길러진 닭, 키워진 개'는 좋지 않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키워진 개'라고 쓴 글도 많다. 직접 선거로 뽑힌 교육감 -> (우리가) 직접 선거로 뽑은 교육감:'뽑히다'가 국어사전에 자동사로 올라 있기는 하다. 먹음직스럽게 삶아진 족발 -> 먹음직스럽게 삶은 족발: 삶은 달걀(계란)을 갑자기 삶아진 달걀로 말하면 황당하지 않겠는가. "삶은 호박에 이도 안 들어갈 소리"라는 속담은 "삶아서 말랑해진 호박에 이가 들어가지 않을 리 없다는 것으로 이치에 어긋나는 엉뚱한 말"을 가르킨다. 이것에서 보듯 '삶은'으로 죽 썼다. 또 속담 '달걀로 바위 치기'처럼 계란보다는 달걀로 써야 바람직하다. 복사한 문서: 일부러 멋을 부리지 않고서야 '복사된 문서'라고 하기 어려울 듯한데, '복사된 부분'이라는 말을 쓸 정도다. 피동형 문장을 점점 더 남용하는 추세다.         #. (존댓말을 써 봐서 어색하지는 않은지 따져 볼 수도 있겠다. '복사하신 문서, 복사되신 문서, 주차하신 차량, 주차되신 차량' 중에서 '복사되신 문서, 주차되신 차량'은 영 어색하다. "구입하신 물건 좀 보여 주세요"라고 해야지, "구입되신 물건 ..."은 좋지 않겠다. 다만, '준비되신 대통령, 준비하신 대통령'처럼 사람을 수식하는 형태는 둘 다 어색하지 않으니, 존댓말을 써서 따져 보기 어렵다.)         ------------------------------------       "잔치에 쓸 쌀이야.": '쓰일 쌀'이라고 하면 좋지 않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쓰이는 물건'은 좋지 않다. 그 사람은 크게 쓸 사람이야: '쓰일 사람'은 좋지 않다. '사람은'은 주어 역할을 하는데, 이것이 주어 역할이든 목적어 역할이든 상관없다. '쓸'은 뒤의 '사람'을 수식할 뿐이다. 농사에 쓰이는 도구 -> 농사에 쓰는 도구 군대에서 쓰이던 말 -> 군대에서 쓰던 말 어제 치러진 모의고사 -> 어제 치른 모의고사 야구의 신으로 불리는 김성근 -> 야구의 신으로 부르는 김성근: '불리다'가 국어사전에 자동사로 올라 있기는 하다. 황제로 불린 마이클 잭슨 -> 황제로 부른 마이클 잭슨 늘 푸른 나무를 상록수로 부르는데, 특별히 사철나무로 부르는 이 나무는... : '불리는' '불린다'는 영어를 번역한 말투다. 상아탑이라고 부르던 대학이 지금은...: '상아탑이라고 불리던 대학'으로 쓸 필요가 없다. "부르는 게 값이다"라는 관용어처럼 능동형을 쓰면 된다. 한동안 잊고 지내던 상사화는 불쑥 나타납니다. 잎은 꽃을, 꽃은 잎을 못 보는 운명인 채 서로 그리워한다고 하여 상사화라고 부릅니다.: '잊히고', ' ...불립니다'로 쓸 필요가 없다. 노래방에서 가장 많이 불린 노래 -> 노래방에서 가장 많이 부른 노래 집에서 불리는 애칭이 있다면서 -> 집에서 부르는 애칭이 있다면서 북한에 보내질 우유 -> 북한에 보낼 우유 이번 회담에서 다뤄질 의제 -> 이번 회담에서 다룰 의제 꿈에 본 내 고향: '꿈에 보인 내 고향'은 좋지 않다.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바쳐지는 노래'라고 할 필요 없다.   인삼이 세계 곳곳에서 재배되면서 위기를 맞고 있다. -> 인삼이 세계 곳곳에서 (인삼을) 재배하면서 위기를 맞고 있다. 그 영화가 1월에 개봉될 계획을 잡았다. -> 그 영화가 1월에 개봉할 계획을 잡았다.: '영화가'에 걸리는 것은 '계획을 잡았다'다. 러브스토리는 개봉되기 무섭게 전세계 관객을 사로잡았다. -> 러브스토리는 개봉하기 무섭게...: '개봉하다'는 타동사이므로 '그 영화가 개봉했다'는 맞지 않는다. 물건은[이] 내놓기 무섭게 팔렸다.: '물건은 내놓아지기 무섭게 팔렸다'가 아니다. 일은 저질러 놓고 봐야 한다.(속담) 그 사람은 봄에 잉태되어 겨울에 태어났다. -> 그 사람은 봄에 잉태하여 겨울에 태어났다. 물건이 쓰이는 데 편하다. -> 물건이 쓰기(쓰는 데) 편하다. 항아리가 너무 커 들기 힘들다.: '들기'나 '드는 데'가 적절하다. '들어지기'나 '들어지는 데'는 좋지 않다. 시금치는 데치면 먹기에 좋다.: '데쳐지면' '먹어지기에' '먹어지는 데'로 쓰면 좋지 않다. 이 방침은 내일부터 실시되게 됩니다. -> 이 방침은 내일부터 실시하게 됩니다. -> 이 방침은 내일부터 실시합니다.: '...게 되다'는 피동형이므로 되도록 쓰지 말아야 한다. '그러한 상태에 놓이다. 그것이 가능한 상황에 이르다'를 나타낼 때는 괜찮다. "일이 까다롭게 됐다." "마침내 알게 됐다." 산에서 약초를 캐게 되면 처벌을 받게 됩니다. -> ...캐면 처벌을 받습니다. 오늘처럼 비가 오게 되면 -> 오늘처럼 비가 오면 무지개는 수많은 색의 조합으로 신비로운 빛깔인데, 일곱 빛깔만 외쳐서 '빨주노초파남보'만 뇌리에 박혀 있게 된 것처럼 -> ...뇌리에 박힌 것처럼 이곳은 무가 심어졌던 밭입니다. -> 이곳은 무를 심었던 밭입니다. 대책이 서둘러져야 하겠습니다. -> 대책을 서둘러야 하겠습니다. 선거에서 금품이 건네졌다는 혐의 -> 선거에서 금품을 건넸다는 혐의 세워 놓은(주차한) 오토바이를 누가 들이받았다. : '세워놓아진(주차된)'이라고 하면 좋지 않다. 역 앞에 대 놓은 차: '대 놓아진 차'로 할 필요 없다. 길가에 받쳐진 자전거 -> 길가에 받쳐 놓은 자전거 1960년에 설립된 재단 -> 1960년에 설립한 재단 소나무가 그려진 병풍 -> 소나무를 그린 병풍 어제까지 신고된 환자 수 -> 어제까지 신고한 환자 수 5명으로 구성된 위원회 -> 5명으로 구성한 위원회 또 확인된 커피의 질병 예방 -> 또다시 확인한 커피의 질병 예방 방사선이 이용되는 장비 -> 방사선을 이용하는 장비   제기된 의혹 -> 제기한 의혹 -> 의혹: 의혹이란 뜻에 '제기한'의 의미가 있다. '제기한'을 덧붙이지 않아도 된다. 제시된 고유어의 뜻을 푸는 문제 -> 제시한 고유어의 뜻을 푸는 문제 -> 고유어의 뜻을 푸는 문제: '제시한'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 고려 시대에 쓰인 책이 아닌 것은? -> 고려 시대에 쓴 책이 아닌 것은? 시중에서 파는 식초: '팔리는 식초'는 좋지 않다. '팔리다'가 자동사로 국어사전에 있기는 하다. 여기서는 타동사인 '팔다'를 쓴 것이다. 20만원에 팔리는 송이 -> 20만원에 파는 송이 숨진 채 발견된 병사 -> (구조대가) 숨진 모습으로 발견한 병사 구역을 침범했다가 구속된 선원 -> (일본이) 구역을 침범했다고 구속한 선원 일제에 의해 체포된 독립운동가 -> 일제가 체포한 독립운동가 '국민 MC'로 불리며 활동하던 사람이 -> '국민 MC'라는 칭호를 얻으며[소리를 들으며, 명성을 얻으며]...   변질된 우유: '변질하다'가 자동사이므로 괜찮다. 격앙된 목소리: '격앙하다'도 자동사다. 편향된 시각: '편향하다'도 자동사다. 오염된 물: '오염하다'가 자동사다. 확산한 오염, 확산된 감정: '확산하다'가 자동사다. 안정된 일자리: '안정하다'가 자동사다.   ○○건물에 마련된 흡연실 -> ○○건물에 마련한 흡연실 -> ○○건물의 흡연실: '마련한'이 없어도 된다. ○○병원에 마련된 ○○ 씨 빈소 -> ○○병원에 마련한 ○○ 씨 빈소 -> ○○병원의 ○○ 씨 빈소: '마련된'이든, '마련한'이든 굳이 붙일 필요가 없다. 운전자가 병원으로 옮겨지던 중 숨졌다. -> 운전자가 병원으로 옮기던 중 숨졌다. -> 운전자가 병원으로 (운전자를 구조대가) 옮기던 중 숨졌다. 운전자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 운전자가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 -> 운전자가 병원으로 (운전자를 구조대가) 옮겼으나 숨졌다.: "운전하던 사람이 병원에 옮겼는데 숨을 거뒀대."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 결정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고민될 거 없어. -> 고민할 거 없어. 우승 후보로 꼽히고 있는 대한민국 -> 우승 후보로 꼽고 있는 대한민국 우승 후보로 꼽힌(꼽히는) 대한민국 -> 우승 후보로 꼽은(꼽는) 대한민국: '꼽히다'가 국어사전에 자동사로 있기는 하다.   새해를 맞아 시작된 금연 -> ...시작한 금연: "봄이 시작됐다"처럼 목적어가 없으면 '시작되다'를 쓴다. 목적어가 있을 때, '-부터( -에서) 시작하다'로 목적어를 생략했을 때, '...하기 시작하다' 형태일 때에는 '시작하다'를 쓴다. "새해를 맞아 나는 금연을 시작했다"는 문장을 염두에 두고 '새해를 맞아 (내가) 시작한 금연'으로 쓰면 된다. 또 '벌써 시작된 겨울'은 목적어가 없는 경우여서 괜찮다. 이런 속담도 있다. "늦게 시작한 도둑이 새벽 다 가는 줄 모른다." "만 리 길도 한 걸음으로 시작한다."           #. (글은 되도록 입말을 옮겨야 한다. 자연스럽게 대화할 때 쓰는 말이 언어 기능의 핵심이다. 입말이 있은 후에 글로 기록하고 글로 소통한 것이다. 입으로 쓰는 말을 도외시한 글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잘못된 글이 넘치는 실정 이고, 그 글을 바탕으로 말을 하게 되니 점점 잘못되는 악순환이 일어나는 것이 다.)           ---------------------------       나에게 주어진 과제[시간, 역할]: '주어지다'가 국어사전에 자동사로 올라 있으므로 괜찮다. 하지만 '나에게 내준(안겨준,부여한,남겨준) 과제' '내가 맡은(할) 본분'처럼 쓰는 것이 더 좋겠다. 1등에게 냉장고가 주어지는 퀴즈 대회 -> 1등에게 냉장고를 드리는 퀴즈 대회 항공기에 실린 화물 -> 항공기에 실은 화물: '실린'을 쓰면 거창해 보일까? 손수레에 실린 짐 -> 손수레에 실은 짐 잡지에 실린 사진 -> 잡지에 실은 사진 14살 때 찍힌 사진 -> 14살 떄 찍은 사진 크다고 붙여진 이름 -> 크다고 붙인 이름 만들어진 신 -> 만든(조작한, 꾸민, 지어서 만든, 지어 낸) 신 서해에서 만들어진 눈구름 -> 서해에서 생긴(발달한, 생성한) 눈구름 과식과 폭식으로 만들어진 노폐물 -> 과식과 폭식으로 생긴(생성한) 노폐물 버려진 개 -> 버린(내다 버린, 내버린, 유기한) 개 노선도에 쓰여 있는 영어: '쓰여'가 피동형이므로, '노선도에 (관청이) 써 놓은 영어', '노선도에 (관청이) 쓴 영어'처럼 쓰면 좋겠다. '쓰이다'가 국어사전에 자동사로 있기는 하다.   선발된 지원자 -> 선발한 지원자 채택된 아이디어 -> 채택한 아이디어 출입이 금지된 거리 -> 출입을 금지한 거리 위염으로 진단된 사람은 -> 위염으로 진단한 사람은 폐쇄된 공원 -> 폐쇄한 공원 냄비는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냄비가 정답입니다. -> 냄비는 알루미늄으로 만들기 때문에... 예전에 사용된 플루트는 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소리가 담백했다. -> 예전에 사용한 플루트는 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에... 이것은 챌린저호 과학자들에 의해 발견됐습니다. 이 광석은... -> 이것은 챌린저호 과학자들이 발견했습니다. 이 광석은... 주목되는 성장 -> 주목받는(주목할 만한) 성장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랬다.: 우리 속담으로 '-은'을 목적어 역할로 쓴 예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이 받는다.: '-는'을 주어 역할로 한정하면 우리말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로마의 카이사르가 한 말로 관용어처럼 쓰는데, '주사위는'을 주어 역할로 번역했다. 이 말을 도입하면서, 아마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한글 학자가 아닌 그 분야 전문가나 외국어 전공자가 번역했을 것이다. "주사위는 (이미) 던졌다"로 써야 좋겠다. 이 말과 구조가 같은 사례를 들어 본다. "이제 첫 단추는 끼웠다." "첫 단추는 잘 끼웠다." "첫걸음은 잘 뗐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룬(세운, 생겨난, 된) 것이 아니다. -> 로마는 하루아침에 세우지 않았다. 숨겨진 비경, 숨겨진 위험, 숨겨진 비법, 숨겨진 약탈문화재 -> '숨은그림찾기'에 사용한 '숨은'을 쓰면 좋겠다. 숨은 비경, 숨은 위험, 숨은(숨긴) 비법, 숨긴(감춘) 약탈문화재. 정해진 일정, 정해진 규칙 -> 정한(정해 놓은) 일정, 정한(정해 놓은) 규칙 : 국어사전은 '무시로'의 풀이로 "'정한' 때가 없이 수시로"라고 해 놓았다. 또 성경에는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문장이 더러 있지만, 다행히 '정해진'이 아닌 '정한'으로 써 놓았다. 성경에 있는 옥에 티: 아무 것도 -> 아무것도, 것 같이 -> 것같이, 또 다시-> 또다시, 함께 하심 -> 함께하심, 가까이 하다-> 가까이하다, 같이 하다 -> 같이하다, 할 뿐더러 -> 할뿐더러, 아무데도 -> 아무 데도, 이같은 -> 이 같은, 오래 가지 못하다 -> 오래가지 못하다, 쓸 데 없다 -> 쓸데없다, 속히 되어질 일 -> 속히 될 일, 오래 전 -> 오래전, 물가에 심겨진 포도나무 -> 물가에 심은 포도나무, 버림 받은 자 -> 버림받은 자, 만세로부터 -> 만세에 걸쳐, 만대로부터 -> 만대에 걸쳐, 그 때 -> 그때, 이 때 -> 이때, 이 후 -> 이후, 이 전 -> 이전, 이 곳 -> 이곳, 저 곳 -> 저곳, 그 중 -> 그중, 십삼년에 -> 십삼 년에, 어리둥절 하더니 -> 어리둥절하더니, 발 붙일 -> 발붙일, 그 날 -> 그날, 이 날 -> 이날, 한 뜻 -> 한뜻, 눈 앞에 -> 눈앞에, 나라와 및 이름 -> 나라와 이름, 값 없이 -> 값없이, 많은 바리새인들 -> 많은 바리새인, 그 해 -> 그해, 저녁 때 -> 저녁때, 그 달 -> 그달, 어제 밤 -> 어젯밤, 불안해 하는가 -> 불안해하는가. ('같은'은 '그림 같은'과 '한결같은'에서 보듯 붙이고 띄는 것이 갈린다. '추상같다'처럼 '같다'가 체언과 결합하여 한 단어로 굳어진 것은 붙인다. 조사 '같이'는 '나무같이'처럼 다 붙여 써야 한다.) 그 동안 -> 그동안, 이른 바 -> 이른바. 족하리만큼 -> 족하리 만큼(족할 만큼), 속 뜻 -> 속뜻, 쉴 만한 물 가 -> 쉴 만 한 물가, 의를 힘입어 -> 의에 힘입어, 힘있는 -> 힘 있는, 길 가 -> 길가, 고통중에 -> 고통 중에.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 가느니라 : 뱃속은 마음속이라는 말이므로 '배 속'으로 해야 한다. 머리 속으로 환상을 보았다. -> 머릿속으로... 제 구 시쯤 -> 제구 시쯤, 그 전날밤에 -> 그 전날 밤에, 오래 되었사오니 -> 오래되었사오니, 우리 나라에 있는 사람들 중에 -> 내 나라(이 나라, 우리 조국)에 있는 사람들 중에, 부활시에 -> 부활 시에, 주 밖에 없나이다 -> 주밖에 없나이다,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 주의 뜻이 무엇인지...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 자기[그이] 행위는 악하고 자기[그이] 아우 행위는 의로움이라. 그의 앞에 -> 그이 앞에, 끝날까지 -> 끝 날까지. 세산이 딸을 그 종 야르하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였더니 -> ...아내로 삼게... 손으로 쳐죽이고 -> 손으로 쳐 죽이고, 쳐다 보시고 -> 쳐다보시고, 건져내고 -> 건져 내고.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영한 규례라 -> ...영원한 규례라 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 ...되돌아가라 실로 수 놓아 -> 실로 수놓아,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 네 문 안에... 명절중 -> 명절 중, 음행중에 -> 음행 중에, 없이 하소서 -> 없이하소서,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 우리가 그들과 작별하고, 고난 받는 -> 고난받는, 고난 당하는 -> 고난당하는.   일정한 규칙: '일정한'은 '어떤 기준에 따라 범위나 방향 따위를 정한 것'을 이른다. '일정한'은 많이 쓰면서, '정한'이라는 말을 어색하게 여길 까닭이 없다. 한정된 판매 -> 한정한 판매 : '한정하다'는 '수량이나 범위 따위를 제한하여 정하다'를 뜻한다. 한정된 지하자원 -> 유한한(무한하지 않은) 지하자원: '한정된'을 썼을 때,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근원적인 말격인 '한정하다'를 놓고 보면 얘기가 다르다. '한정하다'는 타동사로 인위적이거나 의도적인 행동이다. 자연적으로 생성하는(생기는) 것에는 적절하지 않다. 세계의 식량 부족을 특정 지역에 한정된(국한된) 현상으로 여겨선 안된다. -> ...특정 지역에만 해당하는 현상으로... : "대기 오염은 도시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는 "대기 오염은 도시에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다"로 써야 좋다. "대기 오염은 도시에 국한할(국한하여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는 '국한하다'의 주체가 사람이므로 적절한 말이다. 사실, '국한된'은 인위적이 아닌 상황에서도 쓰고 용인하는 실정이긴 하다. 돈은 벌어야 하는데, 일거리는 제한돼(한정돼) 있다. -> ...일거리는 적다(여유롭지 않다). 금리 정책의 효과는 제한적이다. -> ...효과는 부분적이다(한계가 있다). 예정한 청문회: '예정하다'는 '미리 정하다. 미리 내다보고 작정하다'를 이른다. 간혹 의미를 확대하여 '예상하다'는 말로 쓰기도 한다. 그렇지만 "비가 올 예정이다"보다는 "비가 올 전망이다"가 잘 어울린다.   사용료가 부과되는 통화: '돈이 들다' '비용이 들다'처럼 쓰면 좋다. '사용료가 드는 통화', ' 사용료가 붙는(있는) 통화', '사용료를 부과하는 통화', '이 통화는 사용료가 듭니다.' 세종대왕이 그려진 지폐 -> 세종대왕을 도안으로 쓴(그린) 지폐, 세종대왕을 도안한 지폐 길가에 심어진 은행나무 -> 길가에 심은 은행나무 버려지는 은행을 주워도 절도래 -> 내버려두고 있는(놔두고 있는, 챙기지 않는, 방치하고 있는) 은행을... 소록도에 다리가 놓여졌다. -> 소록도에 다리를 놓았다(다리가 놓였다). : '놓다'의 피동사는 '놓이다'다.         #. (순우리말은 능동형으로 많이 썼다. 요즘은 더러 '심은 나무'를 '심어진 나무'로, '지은 집'을 '지어진 집'으로도 쓰는데, 주로 한자어에서 피동형으로 쓰는 경향을 보인다. '꾸민 정보' '왜곡한 정보' '왜곡된 정보' '덧붙인 비용' '부가한 비용' '부가된 비용'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영어뿐 아니라 한자어 때문에 순우리말이 침식을 당하는 꼴이다.)           ----------------------------------------     강원도에 내려졌던[내렸던] 한파주의보는 해제했다. -> 강원도에 내린 한파주의보는 해제했다.: '내린'만으로도 충분하다. "내린 팔 올렸다" "내린 깃발 올리고 있다"에서, '내려진' '내렸던' '내려졌던'으로 쓰면 어색하다. 연초에 시작했던 금연 -> 연초에 시작한 금연 1년 전 보도했던 사건 -> 1년 전 보도한 사건: 시점(연초 등)을 표기했을 때, 문맥이 통하면 과거ㆍ현재ㆍ미래의 기본 시제만 쓴다. 삼국을 통일했던 나라는? -> ...통일한 나라는?: 역사상 사실은 과거형으로 써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보편적인 진리로 여겨 현재형으로 써도 된다. 근거는 뒤에 설명한다. 훈민정음 창제를 말렸던 최만리 -> 훈민정음 창제를 말린 최만리 금강산 관광을 시작했던 해 -> ...시작한 해 세종대왕은 조선의 4대 임금이었다./ 세종대왕은 조선의 4대 임금이다.: 둘 다 가능하다. 하지도 지났는데 다가올 장마철이 걱정스럽다. -> ...다가오는 장마철이 걱정스럽다. : 우리말의 시제는 명확하게 정립하기 어렵다고 한다. 문맥에 따라 시제를 판단해야 할 것이다. '다가오다'는 현재를 기준으로 해서 '어떤 일이 가깝게 닥쳐온다' '때가 가까워 온다'는 의미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소망을 이루소서." 앞으로 다가올(닥칠, 맞을, 이를) 노년은 : 미래형으로 써도 되고, 현재형 '앞으로 다가오는 노년'으로 써도 된다. 앞으로 나라를 이끌 어린 인재들: '어린 인재들'의 '앞으로' 상황이므로 현재를 기준으로 한 미래를 나타낸다. 내일 시작될 방학 -> 내일 시작되는 방학 오늘 연주될 송어는... -> 오늘 연주하는 송어는...: 미래의 일이지만, '내일'이나 '오늘'이라는 시점에서 일어나는 동작은 현재형이다. 오늘 열릴 회의, 오늘 열 회의: '오늘 (정부가) 여는 회의'가 맞는다. "시작합시다."/ "내일 합시다.": 1초 후가 됐든, 1시간 후가 됐든 미래에 동작한다. 그 시점의 동작은 현재형이다. '1초 후가 됐든'의 '됐든'은 '어찌 됐든'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들이 떠나도 내버려두겠다.: 현재형인 '떠나다'로 미래의 일을 나타내고 있다. 이 방안은 학생을 통솔할 무기다. -> 이 방안은 학생을 통솔하는 무기다.: 문맥상 미래형을 쓸 필요가 없다. '내년에 해외로 나갈 계획이다', '서해에서 근무할 예정이다', '내가 완성할 과제', '노조가 찬성할 기미', '의정서가 발효할 경우', '실력을 발휘할 기회': 미래를 표시하는 관형사형 어미인 '-ㄹ'을 붙인 사례다. 미래에 나타나는 동작인데, 현재를 기준으로 한 관점이다. 계획, 예정, 기회 등을 이른다. 나는 내년에 20살이 된다.: '나는 내년에 20살이 될 예정이다'는 적절하지 않다. 미래의 일이지만, 그 시점에서 확실하게 발생하기 때문에 예상하는 말이 필요 없다. 곧 완공할 고속도로 -> 곧 완공하는 고속도로 : 천재지변 같은 변고가 없는 한 그 사업을 완성하는 경우 예상하는 형태를 쓸 필요가 없다. "이번 주말에 결혼할 예정입니다." -> "이번 주말에 결혼합니다." 부르실[연주할] 곡은 무엇입니까? -> 부르시는[연주하는] 곡은... 기적을 이루시는 오늘 하루 보내세요.: '이루실'이 아니다. 먹을거리: '먹을'은 예정이라기보다 가능성(기회)을 나타낸다. 내일 눈이 올 것이다.: '것'은 전망, 작정, 확신, 결정을 나타낸다. 미래형과 함께 쓴다. '기쁠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다', '지금은 성숙한 자세로 임할 때', '이제 통합 노력을 시작할 때다', '끝내야 할 형편': 일반적 사실을 나타내는 관형사형 어미인 '-ㄹ'을 붙인 사례다.     이것은 원시인이 사용하였던 돌칼이다.: '사용하던'과 기본 시제인 '사용한'도 가능하다.문맥에 맞게 가장 적절한 것을 써야 하며, 가급적 기본 시제를 쓰면 좋다. '-던'은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는 것이나, 과거에 완료하지 않고 중단한 미완성을 나타낸다. 즉 미완ㆍ지속ㆍ반복의 느낌이 있다. '-었던'은 완료하여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다. 행복했던 그 시절 -> 행복하던 그 시절: '행복했던 그 시절'은 그 시절에 행복한 것이 완료한 것이다. 행복하지 않게 됐다는 말이다. 행복했던 사람도 불행해질 수 있고, 불행했던 사람도 행복해질 수 있다. -> 행복하던[행복한] 사람도 불행해질 수 있고, 불행하던[불행한] 사람도 행복해질 수 있다.: '행복했던'은 과거 행위가 완료한 후 현재에 이른다. 즉, 지금은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 '불행해질 수 있다'는 미래의 일이다. 행복했던 케네디 요즘 그 행복을 되찾았다.: '행복했던 사람'은 한때 행복했지만 그렇지 않게 된 상황이다. 오는 18일 행사를 개최한다.: '오다'는 현재를 기준으로 '일이 닥쳐 온다'는 의미다. '오는'은 '오다'의 현재형이다. 수술을 받았던 추신수가 쉬고 있다. -> 수술을 받은 추신수...: '수술을 받은'은 그 상황(수술을 받은 상태)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거나 종료한 경우다. 수술을 받았던 그 선수: 상황이 종료한 경우를 콕 집어 이른다. 미국에서 수배를 받았던 사람으로 지금도 수배 중이다. -> 미국에서 수배를 받은(받고 있는) 사람... 지난 1일, 지난번, 지난주: '지나다'의 과거로 '지났던'이 아닌 '지난'을 썼다. 달팽이는 지나간 흔적을 남긴다.: '지나갔던 흔적'은 적절하지 않다. 어제 산에 갔었는데 참 좋았었다. -> 어제 산에 갔는데 참 좋았다. 물에 잠긴 흔적: 현재 물에 잠겼거나, 과거에 잠겨서 생긴 흔적이다. 물에 잠겼던 흔적: '물이 찼다가 빠진 상황'을 확실하게 나타낸다. 장학금 지급을 부탁했던 적이 있다. -> ...부탁한 적이 있다. 자동차를 발명했던 사람은 누구일까? -> ...발명한 사람은 누구일까? 칭기즈 칸이 죽었던 지 몇 년 지났을까? -> 칭기즈 칸이 죽은 지...: '죽었던 부동산 경기가 살아났다' '죽었던 사람이 깨어났다'처럼 쓸 수 있지만, 칭기즈 칸이 죽은 것은 역사적 사실이므로 완료형은 적절하지 않다. 200여 년 전 그 과학자가 발견했던 물질 -> ...발견한 물질: 문맥상 '발견하다'를 완료의 의미로 쓰지 말아야 한다. '발견했던'은 '발견했다가 발견을 접은 상황'으로 영어에 있는 현재 완료(현재보다 먼저 발생하여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는 동작ㆍ 상태)와 다르다. 영어에 있는 대과거(과거 이전에 완료했거나 과거 시점까지 계속되는 동작ㆍ상태)와도 관련이 없다. 오늘 최후의 2인이었던 학생이 -> 오늘 최후의 2인인 학생이 지난해 콩쿠르 우승자였던 연주가를 -> ...우승자인 연주가를: '우승자였던 사람'은 우승을 박탈당한 사람이다. 휴일이었던 어제 -> 휴일인 어제: 휴일이라는 사실, 우승자라는 사실은 완료하지 않는다. 전 양자였던 사람: 파양했다가 다시 입양한 사람이다. '양자였던 사람'은 '전 양자인 사람'과 같은 말이다. 전 부인과 이혼했다. -> 부인과 이혼했다. 리스트는 작곡가였던 동시에 피아노 연주가였다. -> 리스트는 작곡가인 동시에 피아노 연주가였다[피아노 연주가다]: 과거의 사실이지만 현재 상황에서 불변의 진리이므로 현재형으로 쓸 수 있다. 반유대주의자였던 바그너 -> 반유대주의자인[이던] 바그너 메밀국수의 발원지였던 고장 -> 메밀국수의 발원지인 고장(제주) 오래 전에 읽었다.(국어사전의 문장): '-었-'은 과거의 일이나, 어떤 일이 과거부터 지금까지 미치고 있음을 나타낸다. '-었었-'은 과거의 상태가 현재는 그렇지 않거나 강하게 단절되었음을 나타낸다. "그는 선생이었었다"처럼 쓴다. 예문의 '오래 전'은 '오래전'으로 해야 한다. 어제 산에 갔었다.: 끝 음절의 모음이 'ㅏ'나 'ㅗ'가 오면, '-았-'이 붙는다. '갔다'는 '가다'의 어간에 '-았-'이 붙은 뒤 줄어든 것이다. '갔었다'에는 '-았었-'이 붙어 있다. '어제 산에 갔다'로만 써도 대개 뜻이 통한다. '-었었-'은 우리말답지 않은 경우가 많다 . 그 지휘자는 피아니스트로 출발했었다. -> ...피아니스트로 출발했다.: 출발했으면 출발한 것 자체가 없어지지 않는다. 이미 승부가 가려졌지 않습니까? -> ...가려지지 않았습니까?: 보조동사가 있으면, 과거를 나타내는 '았'이나 '었'은 보조동사에 쓴다.     (우리말 속담) 농 속에 갇혔던 새: '새롭게 자유를 찾은 사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농 속에 든 새: 갇혀 있는 새. 나갔던 며느리 효도한다.: 싫어서 나갔다가 돌아온 며느리가 효도를 한다는 뜻으로, 좋지 않게 여기고 있는 사람이 뜻밖에 좋은 일을 하는 경우. 나갔던 파리 왱왱거린다.: 밖에 나갔던 사람이 집 안에 들어와 떠든다는 뜻으로 아무 공로가 없는 사람이 공연히 참견하는 경우. 첫 서울 갔던 녀편네 지절대듯(북한어): '첫 서울 갔던'은 '첫 서울 갔다가 온'의 뜻. 전어 굽는 냄새에 나가던[나갔던] 며느리 (다시) 돌아온다. 봄이 되면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 '-었던'으로 반전을 강조할 수 있다. '나갔던 ' '강남 갔던'은 과거의 행위가 반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간 행위를 되돌려 들어오는 것'에 주안점을 둬, 과거 행위가 완료(종료)하면서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미래의 일이지만 과거와 현재 시점이 호응하고 있다. "모였던 사람들이 흩어졌다"는 가능하지만, "모였던 사람들이 흩어질 것이다"는 안 된다. 섣달그믐이면 나갔던 빗자루도 집 찾아온다.: 섣달그믐이 되면 남의 집에 빌려주었 던 사소한 물건까지 다 찾아들인다는 뜻이다. 지난 일이 완료하면서 행위가 일어나 는 것이다. 최씨 앉았던 자리는 귀신도 피해 앉는다.: '앉았던'은 종료(중지)를 나타낸다. 반복하는 행위의 대상인 자리를 강조하는 것으로 봐도 된다. 정어리 굽는 냄새에 나가던 며느리 돌아선다.: 진행의 의미다. '닭 쫓던 개.' 나간 머슴이 일은 잘했다.: '놓친 고기가 커 보인다'라는 뜻으로 과거형이다. '나갔던'으로도 쓰는 경향이 있는데 엉뚱한 말이 된다. 강물에 소 지나간 것 같다.: 흔적이 없는 것을 뜻한다. 가는 떡이 커야 오는 떡이 크다.: 미래의 일이지만 현재형. 삶은 팥이 싹 나거든.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보다. 내일은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앞으로 불리한 일이 있더라도, 지금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말.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 미래형으로 예정이나 기회를 나타낸다. '볕들다'가 자동사이므로 '볕들 날'로 쓴다. 개도 나갈 구멍을 보고 쫓아라. 호랑이 담배 먹을 적: '적'은 의존명사로 사물이 어찌 되었을 당시를 이른다. '어릴 적에 놀던 곳' '어머니가 처녀 적에 입던 옷' '화를 낸 적이 없다' '너를 잊은 적이 없다' '제주도에 간 적이 있다'에서 보듯이, '그 당시에 어떤 사실의 상황을 나타내는 형태'가 '적'을 수식한다. '제주도에 갔던 적이 있다'로 쓰지 않는다. '갔던'은 그 당시 상황이 아닌 그전 상황이 종료한 것이기에 그렇다.     ('없던'과 '없었던') 질문은 없던 걸로 하겠다.: 질문을 했거나 하려고 했을 때. 질문은 없었던 걸로 하겠다.: '질문을 취소하고 답변을 요청하지 않겠다'는 말. 사귐은 없던 일로 하자.: 사귀었거나 사귀려고 했을 때. 사귐은 없었던 일로 하자.: '사귀었지만 없던 일로 치자'는 말. 봉급 인상을 없던 일로 한다.: 인상했는데 환원하거나, 인상하려던 일을 중지하는 경우. 봉급 인상을 없었던 일로 한다.: 인상한 봉급을 그전대로 하겠다는 말이다. '없었던 일로'는 반전이 일어나는 상황이다. 이것과 대비할 수 있는 말은 '일이 있었다'이므로, 행위가 일어났음을 유추할 수 있다. '많았던 식물'이라고 하면 '지금은 없거나 많지 않은'을 이르는데, '없었던 일로 한다'는 '많았던 일'을 반대로 생각한 의미다. 산업이 발달하여 없었던 직업이 생겼다.: '없던 직업'도 된다. '없었던'은 '생겼다'와 대비된다. 조선 시대에 없었던 직업 -> 조선 시대에 없던 직업: '조선 시대에 없었던 직업'은 '조선 시대에 있던 직업'이라는 말이 된다. 조선 시대를 기준으로 완료했으므로 그렇다. 없던 직업: 새로 만들었거나, 계속 존재하지 않고 있는 경우다. 위 예문에서 조선 시대에 계속 존재하지 않은 직업이므로 '조선 시대에 없던 직업'이어야 한다. 아들이 없던 그 부부는 고심하여...: 아들이 생겼을 수도 있고 생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 보상하기로 한 약속은 없었던 일이 됐다.: '없었던'으로 쓸 수 있다. 보상을 이행하지 않았다고 하여 '없던'으로만 써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맺은 '약속'을 되돌리는 것이므로 '없던'과 '없었던'을 쓸 수 있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없었던'은 '할 수 있다'와 대비된다. '-ㄹ 수'는 '어떤 일을 할 만한 힘이나 가능성'을 이른다. '없었던 일'이 반전하여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경우다.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다.: 그 일이 발생했거나, 발생하지 않았을 경우다. 편견 때문에 문학의 주류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없었던'은 '될 수 있다'와 대비된다. 그 후 문학의 주류가 된 것이다. 편견 때문에 문학의 주류가 될 수 없던 것이다.: 그 후에도 문학의 주류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작금의 상황은 정치에 불만이 없었던 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 ...정치에 불만이 없을[없는] 적이 없는[없던] 것으로 보인다.: 복잡한 문장이다. "어느 사회이건 불만이 없는 때는 없다"처럼 귀에 익은 말을 쓰면 좋다. 현재형(없는)이나 진행형(없던)이 어울린다. 불만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없던'은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나, 완결하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없었던'은 완료하여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상태다.)     내가 미국에서 연주했던 피아노로 오늘 연주한다.: 반복하는 행위의 대상인 피아노를 강조하기 위해 '연주했던'을 썼다. 먼젓번 갔던 길로 가자.: '간 길'도 가능하다. 반복하는 행위의 대상을 강조했는데, 완료한 행위를 다시 하는 구조다. '먼젓번'이라는 과거 시점이 있지만 '가자'라는 현재 시점이 기준이다. 지금 시점에서 봤을 때, 과거 행위가 완료한 상황이어야 그 행위를 반복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미국에서 연주했던[연주한] 기량을 오늘 선보인다.: '연주한다' '가자'와 마찬가지로 '선보인다'가 미래의 일인데, 완료형인 '연주했던'은 지금 시점의 상황이다.   사태가 예상했던[예상한] 대로 흘러가고 있다.: '흘러가고 있다'에 주안점을 뒀을 때, '예상한 것'을 완료한 상황으로 쓸 수 있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덕에 승진했다. -> ...생각한 덕에 승진했다.: '생각했던'과 '승진했다'는 동작의 대상이 달라 연속적이지 않다. 기대했던 다양성을 달성할 것이다. -> 기대한[기대하던] 다양성을 달성할 것이다. : '기대했던'은 완료한 것으로 미래와 호응하지 않는다. 우리가 꿈꿨던 예술은 이게 아니다.: '우리가 꿈꿔 온 예술은 이게 아니다'로 쓸 수 있지만, '이게 아니다'와 '꿈꿨던'이 호응한다. 연극은 기대했던[기대한] 것보다 좋았다.: '기대한 행위(영어에서 말하는 기대ㆍ 사유 동사)'가 완료하면서 결과가 발생한 것이다. '좋았다'에 주안점을 두어, 이와 관련한 그전의 행위를 완료한 형태로 할 수 있다. '흘러가고 있다' '좋았다'가 현재형이거나 과거형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막에 피었던 야생화가 지고 있었다.: 위 예문과 같은 경우다. ('-었던'은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겠다. 첫째는 기대ㆍ사유 동사다. '기대하다' '상상하다' '잊다' '믿다' 등이 있다. 둘째는 자격ㆍ상태 동사[형용사, 서술어]다. '선생이다' '행복하다' '있다' '없다' 등이다. 셋째는 활동 동사인데, '이용하다' '말하다' '가다' 등이다. '-었던'은 반전ㆍ반복할 때 세 가지에 공통적으로 쓸 수 있으며, 과거나 현재 사실과 호응할 때는 완료형(종료한 상황이 지금 시점에 미친다)이다. 주로 기대ㆍ사유 동사에서 나타난다. 자격ㆍ상태 동사[형용사, 서술어]에서는 주로 상실을 의미한다. 활동 동사에서는 반전ㆍ반복과 더불어 중단에 사용한다. 이 밖의 '-었던'은 과거형이거나 영어의 현재 완료와 같은 것이어서 적절하지 않다.) 가난과 싸웠던 사람들: '(지금과는 형편이 다르게) 가난과 싸운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었던'은 '지금은 형편이 달라졌지만 과거에... 했다'로 이해하면 된다. 과거 어느 때에는 '싸웠던'이 아니고 '싸웠다'이다. 지금은 '싸우지 않고 있다'이다. 과거와 지금을 합친 것이 '싸웠던'이다.     (그 밖의 예문) 올해처럼 관심을 받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없었던'이 반전하여 올해는 있게 됐기에 맞는다. 지금 특허 전쟁은 예측하지 못했던 양상이다.: '못했던'이 '지금 전쟁 양상의 발생'과 대비된다. 예상하지 않았던 뉴스가 이어졌다.: '않았던'이 '이어졌다'와 대비된다. '예상하지 않았던'은 완료(상실)한 것이다. 뉴스가 이어지면서 동시에 발생했다. 지난주 예상하지 않았던 뉴스가 이어졌다.: '지난주 않았던'은 '지난주 이어졌다'와 대비된다. 지난주 예상하지 않았던 승리가 지금 달성됐다.-> 지난주 예상하지 않던 승리가 지금 달성됐다.: '지난주 않았던'은 '지난주 달성되지 않았다'와 대비되지 않는다. 미술에 재능이 많았던 아들을 잃었다. -> 미술에 재능이 많던 아들을 잃었다.: 재능을 상실하지는 않은 것이다. 죽은 사람이라고 하여 '그 사람은 키가 컸었고 마음이 좋았었다'라고 하면 어색하다.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던 일이다.: '그 일을 예견했다'는 말이 아니다. '있었던'은 반전이므로 '없었다'와 대비된다. 가능한데도 예견하지 못한 경우다. 노래가 그치지 않았던 이유는 -> 노래가 그치지 않은[않던] 이유는: '노래가 그치지 않았다'는 의미가 문장에 있다. '않았던'은 '그쳤다'와 대비되므로, 노래가 그친 경우에 써야 한다. 해외로 도피했는데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 ...선택의 여지가 없던 것이다. :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가 문장에 있다. '없었던'은 '여지가 있었다'와 대비돼야 한다. 횡령한 돈으로 보석을 사지는 않았던 것이다. -> ...사지는 않은 것이다.: '보석을 사지 않았다'가 문장에 있다. '않았던'은 '샀다'와 대비돼야 한다. 그때 반격을 못했던 것이다. -> ...못한 것이다.: '그때 반격을 못했다'가 문장에 있다. '못했던'은 이와 대비되지 않는다. 현장에 있었던 기자는 -> 현장에 있던 기자는: 현장이라는 말로 봐서 지금이 아닌 과거 시점이다. '그때 기자는 그곳에 있었다'와 '있었던'은 대비되지 않는다. 당시 강연을 들었던 기자는 -> 당시 강연을 들은 기자는 현장에서 가장 많이 들을 수 있었던 말은 -> 현장에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불이 계속 번지고 있습니다. 그곳에 있었던 기자는: 사건이 계속되고 있는데 지금은 현장을 떠난 기자를 가르킨다.   화제가 됐던 영화: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의미. 화제가 된 영화: 지금도 그렇거나, 그렇지 않게 된 경우.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던 사진을 화면으로 띄워 드립니다. ->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사진을... 영향력을 과시했던 사람: 지금은 영향력이 없는 경우. 영향력을 과시한 사람: 지금도 영향력이 있거나 없어진 경우. 지난 3년간 회사를 이끌었던[경영에 참여했던] 회장이...: '이끌었던' '참여했던'은 중단이다. 회장이 사임한 경우다. 회사를 이끈[경영에 참여한] 회장: 아직도 재임하고 있거나 사임한 경우. 고려와 조선을 이끌었던 주역들은 -> ...이끈 주역들: 역사상의 사실이므로 특정 시점의 일이다. 행위가 지금에 이른 상황은 고려할 필요가 없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음악가: 음악가가 죽은 경우. 파란만장한 삶을 산 음악가: 음악가가 죽었거나, 지금도 산 경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베토벤 -> 파란만장한 삶을 산 베토벤 작곡가였던 베토벤은 -> 작곡가 베토벤은 70년대에 청년 시절을 살았던 세대 -> ...산 세대 : 특정 기간에 살았으므로 완료의 의미가 아니다. 단절을 의미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유행했던 말이다.: 지금은 유행하지 않는 경우. 학교에서 유행한 말이다.: 지금도 유행하거나 지금은 유행하지 않는 경우. 어린이가 누렸던 특혜: 단절을 의미한다. 어린이가 누린 특혜: 지금도 지속할 수 있다. 그 공사를 담당했던 공무원이: 그 후 담당하지 않게 된 경우. 그 공사를 담당한 공무원이: 담당하지 않게 됐거나 지금도 담당하는 경우. 낭비라고 비판한 정치가가 (말을 정정했다.): 비판한 뒤 다른 행위로 효력을 없게 한 것이지, 비판한 행위를 되돌린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은 국회를 비판했던 정치가다'는 말로 비판한 것을 번복한 의미로 쓸 수 없다. '비판했다'라는 한 차례 행위는 중단하거나 물리지 못한다. 그것을 여러 번 비판했던 정치가가 말을 바꿨다.: 반복을 중단한 경우다. 낭비라고 비판한 정치가: 지금까지 말을 바꾸지 않은 경우다. '비판했다'라는 한 차례 행위는 중단할 수 없다. '비판한'은 현재까지 영향을 미친다. 낭비라고 비판하던 정치가: 지금까지 말을 바꾸지 않았거나, 바꾼 경우. 다부동 전투에 참여했던 군인 -> ...참여한 군인: 다부동 전투라는 시점을 명기했으므로 현재 상황은 상관없다. '전투에 참여했다'가 문장에 있다. '참여하지 않았던'이 이와 대비돼야 한다. 이 주춧돌은 조선 시대에 사용했던 것이다. -> 이 주춧돌은 조선 시대에 사용한 것이다.: 조선 시대라는 특정한 시점이 있으므로 현재의 상황은 살필 필요가 없다. '조선 시대에 돌을 사용했다'와 대비하는 것은 '사용하지 않았던'이다. 이 주춧돌로 사용했던 것과 같은 종류인 화강암을 사용했다.: '후에 사용한 화강암을 이 주춧돌로 사용하지 않았다'가 문장에 있다. '사용했던'은 이와 대비된다. 선사시대에 200여 명이 거주했던 주택을 발굴했다.: 지금은 거주하지 않고 있겠지만, 선사시대를 특정했으므로 현재 상황은 상관없다. '거주한[하던] 주택'으로 써야 한다. 당시 최대 현안이었던 포로 송환을 -> 당시 최대 현안이던 포로 송환을: 문장에서 의도하는 말은 '당시 포로 송환이 최대 현안이었다'다. 이와 대비하는 것은 '현안이 아니었던'이다. 최초의 유학생이었던 그 시람은 -> 최초의 유학생인[이던] 그 사람은 아인슈타인이 남들과 달랐던 점 -> 아인슈타인이 남들과 다른[다르던] 점: '다르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200년 전 임금만 먹었던 물고기 -> 200년 전 임금만 먹은[먹던] 물고기: 특정 시점에서 '중단'의 의미가 없다. 6.25 때 피란갔던 사람들이 그 식당을 이용했다. -> 6.25 때 피란간 사람들이... 그는 개성이 강하였던 만큼 충돌도 많았다. -> 그는 개성이 강한[강하던] 만큼...: '강하였던'은 지금은 개성이 강하지 않게 됐다는 말이므로 문맥에 맞지 않는다.   걱정했던 폭탄이 떨어졌다.: 맞게 썼다. 생각하지도 않았던 사람이 참석했다.: 맞게 썼다. 고대했던 일이 발생했다.: 맞게 썼다. 잊었던 논란이 고개를 들고 있다.: 맞게 썼다. 알지 못했던 비법을 찾았다.: 맞게 썼다. 생각이나 의식이 종료하면서 상황 (폭탄이 떨어지다, 참석하다, 발생하다, 비법을 찾다)이 일어난 것이다. 대법원장 후보에 올랐던 것만도 영광: 맞게 썼다. '지금은 대법원장 후보가 아니다'가 문장에 있다. '올랐던'과 대비된다. 그 사건을 맡았던 검사는 아쉬워하고 있다.: 맞게 썼다. 범행에 사용했던[밥을 먹었던] 도구를 감췄다.: '중단'의 의미로 맞게 썼다. '도구'는 한 번 사용하고 멈췄다가 또 사용할 수 있다. 부자가 되기까지 경험했던 이야기 -> 부자가 되기까지 경험한 이야기: '경험했다' '소재가 됐다' '홍보했다' '공들였다' '말을 했다' '재직했다' 등은 일단 행위가 발생하면, 되돌리거나 이미 한 행위를 중지하지 못한다(이미 멈췄다). '먹었다' 등은 '토했다'처럼 반전은 가능해도 이미 한 행위를 중지하지 못한다. 하던 지랄도 멍석 펴 놓으면 안 한다.(속담): '했던'은 '안 한다'와 호응하지 않는다. '행복하던 사람도 불행해질 수 있다'에서도 진행의 의미(행복하던)가 적절함을 알 수 있다. 강원도에 내려졌던 한파주의보를 전국으로 확대한다. -> 강원도에 내린 한파주의보를... 제주도에 내려졌던[발령했던] 호우주의보를 해제했다.: '내린 호우주의보'라고 해야 한다. 호우주의보는 반전하거나 반복하는 상황이 아니다. 반전이란 마라톤 경기에서 반환점을 도는 모습을 연상하거나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나는 느낌이라고 보면 된다. 평시 상태가 급변한다고 반전은 아니다. 행복한 것이 불행해졌다거나, 비상 조치가 사라져 원상태로 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행복해졌다가 이내 반전하여 불행해졌다' '호우주의보가 건조주의보로 반전하였다'로 써야 '반전'의 의미가 나타난다. '반전하다'는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반대 방향으로 구르다'인 것이다. 또 호우주의보 발령은 반복하는 행위의 대상과 다르다. 호우주위보는 소멸하고 다른 성질의 호우주의보가 생기기 때문이다. '경보를 발령했다'는 또 다른 행위로 효력이 없게 할 수 있지만, '홍보했다'처럼 되돌리거나 멈추지 못한다. 담갔던 포도주를 마셨다. -> 담근 포도주를 마셨다.: 마심으로써 '담근 포도주'를 되돌리거나 해제하지 못한다. 지난 정부에서 임명됐던 은행장 ->지난 정부에서 임명한 은행장: '임명했던'은 쓰지 말아야 한다. '임명한 은행장을 해임했다' '임명한 은행장이 임기를 마쳤다' '임명한 은행장이 지금 근무하고 있다'처럼 써야 한다.   비표준어였던 말을 많이 쓴다고 표준어로 삼는 것은 반대한다. -> 비표준어인 말을 많이 쓴다고 표준어로 삼는 것은 반대한다.: 상태인 '비표준어였던 말'은 동작인 '삼는다'와 호응하지 않는다(동작이나 상태가 연속하지 않는다). 형용사나 서술어로 된 어떤 상태에 행위를 가하는 것이므로 뒤의 동작이 1차 행위가 된다. 읽기 쉽지 않았던 것을 풀어 썼다. -> 읽기 쉽지 않은 것을 풀어 썼다. 대학 교수 일색이었던 수능 출제자에 고교 교사가 들어가자 -> 대학 교수 일색이던 수능 출제자에 고교 교사가 들어가자: '일색이었던'은 '들어갔다'와 호응하지 않는다. 당당했던 성품을 잃었다. -> 당당한 성품을 잃었다.: 상태와 상태, 동작과 동작이어야 연속한다. 상태와 동작이므로 연속하지 않는다. 잃어버렸던[빼았겼던, 감춰졌던] 권리를 찾았다.: '잃어버렸던[빼았겼던, 감춰졌던]'과 '찾았다'가 동작의 연속성이 있다. 권리를 잃고 찾은 주체가 같다. 감춰졌던(감췄던) 진리를 들춰 냈다. -> 감춰진(감춘) 진리를 들춰 냈다. 잠적했던 은행장을 체포했다. -> 잠적한 은행장을 체포했다(도망간 은행장을 붙잡았다).: 동작의 주체가 다르므로 연속성이 없다. 반군이 점령했던 지역을 탈환했다. -> 반군이 점령한 지역을 탈환했다. 구조대가 실종됐던 비행기를 찾았다. -> ...실종된 비행기를 찾았다.: '실종됐던 비행기가 발견됐다'는 맞는다. 처녀와 총각이었던 두 사람이 결혼했다. -> 처녀 총각이 결혼했다(처녀와 총각인 두 사람이 결혼했다). 가졌던 물건을 놓쳐 잃었다. : 맞게 썼다. 다른 방송국으로 갔던 사람을 다시 끌어들였다. -> 다른 방송국으로 간 사람을... 잡았던 범의 꼬리는 놓기도 어렵다(속담).: 행위와 행위가 호응하면서 반전의 의미이므로 맞는다. 지난해 중국의 국내 총생산은 2위였던 일본을 능가했다.: '2위였던'은 전에 2위였지만 지난해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므로 맞게 썼다. 지난해 18살이었던 동생이 지금 19살이다. -> 지난해 18살인 동생이... 그 대학에 1차(수시)에서 불합격하였던 동생이 2차에서 합격했다. -> ...불합격한 동생이... 한때 동지였던 사이 -> 한때 동지이던 사이: '-었던'은 특정 시점이 아니다. 특정 시점과 같이 쓰면 그전의 행위가 특정 시점에 완료한 것이 된다. 그리스 총리는 아버지였던 전 총리의 정책을 -> ...아버지인 전 총리의 정책을 4남매 중 첫째였던 은미는 엄격했던 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 4남매 중 첫째인 은미는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새 집행부는 그간 공들였던 사업을 되돌리고 있다. -> ...공들인 사업을... 후보였던 그가 사퇴했다. -> 후보인 그가 사퇴했다. 연인이었던 사람과 헤어졌다. -> 연인인 사람과 헤어졌다. 한때 청소년을 미래의 희망이라고 했던 적이 있다. -> ...희망이라고 한 적이 있다.: '한때'나 '적'은 특정한 시점의 상황을 이른다. "그 일이 있은 뒤[후,날,때,지]" '어린 시절' '계신 동안' '봉사한 경험' '말한 바 있다' 등에서도 특정 시점이다. 내년에 깎았던 봉급 오른다.: 내년이라는 시점에서 과거와 현재가 호응하므로 맞는다. 지난 3개월간 진행했던 전시회가 오늘 끝난다.: '오늘 그간 진행했던 전시회가 끝난다'는 미래의 일이지만, 과거와 현재가 호응한다. 존 밀턴은 책에 "자유롭고 공개적인 시장이라면 진리가 승리할 것이다"라고 썼었다. -> ...이라고 썼다. 지난해 전문가들은 그 기관은 필요없다고 말했었다. -> ...말했다(말한 바 있다). : 말을 뒤집지 않은 것이다. 이 문제를 계속 연구해 왔다. -> ...계속 연구했다.: '...해 왔다'는 영어에 있는 현재 완료 형태다. 좋다고 선전했던 게 사실은 달라 -> 좋다고 선전한[선전하던] 게...: '선전한 것'은 계속된다. 선전을 취소하지 않은 것이다. 행위의 영향이 현재까지 미친다. 최근은 몇 년간 그 사람이 몰두했던 일이 무엇인지 -> ...몰두한[몰두하던] 일이... : 특정 기간에 몰두는 계속됐다. 몰두하다 만 것이 아니다. 공들였던 일이 허사가 될 상황 -> 공든[공들인] 일이 허사가...: '공든 탑이 무너지랴'처럼 써야 한다. 공들인 것을 과거에 했더라도 효력이 없게 한 상황이 아니다. 지금까지 공들이고 있는 것이므로 '공들인'이다. 이하은 학생이 마셨던 그 커피, 사실은 미국산 -> 이하은 학생이 마신...: '마셨다'는 중단이 없고 지금까지 죽 내려온다. 길었던 여름이 갔다.: 여름이 끝나면서 '긴 상태'가 상실되는 형태다. 길고 길었던 여름이 갔다. -> 길었고 길었던 여름이 갔다.: '-고'는 연결 어미로 강조하기 위하여 어간을 겹쳐 쓸 때, 앞 어간에 붙는다. '쌓이고 쌓인 시름' '높고 높은 은혜' '길고 긴 세월' '넓고 넓은 바닷가'처럼 쓴다. '-고'는 대등한 말을 연결하는 경우이므로 '-고'의 앞뒤가 균형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즐겁고 정겨웠던 여행이 끝났다. / 즐거웠고 정겨웠던 여행이 끝났다.: 앞의 것을 많이 쓰는 듯하다. 중복을 피해 간결하게 써야 하므로 앞의 것이 바람직하다. 33억 기부했던 할머니가 또다시 -> 33억 기부한 할머니가... 을사늑약을 끝까지 반대했던 한규설 선생 -> ...반대한 한규설 선생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라는 말을 남겼던 해전은? -> "내가 죽었다고 얘기하지 마라"라는 말을 남긴 해전은? (노량): 이순신 장군이 해전을 펼친 때는 당연히 먼 과거다. 문맥으로 파악하여 과거 시점이면 '-었던'을 쓰지 말아야 한다. '말을 했다'는 먼 과거라 해도 중단하지 않고 현재까지 죽 내려온다. 영화의 소재가 됐던 사건 -> 영화의 소재가 된 사건 농촌에서 발생했던 사건 -> 농촌에서 발생한 사건: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은 물리거나 중단하지 못한다. 당시 회장이었던 나는 -> 당시 회장인[이던] 나는: '당시 회장이었던'은 그 당시에 회장을 그만두고 있는 상황이다. 그 회사 회장이었던 내게 지금 일은 책임이 없다.: 맞게 썼다. 1980년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던 어머니가 나를 낳았다.: 어머니가 교사를 그만두고 아이를 낳았다. 1980년 초등학교 선생이던 어머니가 나를 낳았다.: 어머니가 학교에 재직하면서 아이를 낳았다. 베르디는 활약 중인 교향악단 지휘자였던 사람에게 지도를 받았다. -> ...지휘자이던 사람에게 지도를 받았다. 한국에서 외면했던 학자가 미국으로 와 성공했다. -> 한국에서 외면한 학자가 ...: '한국에서'가 특정한 시점이 된다. 특정한 시점에서 '-었던'을 쓰면 '그 시점에서 그러하지 않게 된'의 뜻이 된다. '한국에서 외면하는 상황이 종료하고 미국으로 온'이라는 말이 되고 만다. 평범해 보였던 학생이 시험을 본 후 수재로 인정받았다.: 평범한 것이 완료하면서 수재로 인정받았다는 말이다. 상태와 상태가 호응한다. 유명 소설가를 본떠 자기 이름을 고쳤던 소설가 -> ...고친 소설가: '고쳤던'은 영어의 현재 완료다. 세계대전 당시 나치들이 좋아했던 순혈주의 -> ...좋아한 순혈주의: 당시에 좋아하지 않게 됐다는 말이 되고 만다. 믿었던 선수마저 부상: 맞게 썼다. '선수를 믿을 수 없게 됐다'가 문장에 있다. '믿었던'과 대비된다. 잊었던 주식 찾아 가세요. -> 잊은[잊고 있던] 주식...: '잊었던'과 '찾아 가세요'는 호응하지 않는다. '잊었던 주식을 책장에서 찾았다'는 된다. '잊었던'은 완료다. 과거나 현재에 어떤 일이 발생하면서 완료할 수 있다. 완료하고 난 후, 즉 '잊지 않게 된 후' 잊었는지를 확일할 수는 없다. 잊은 주식이 있는지 확인해 볼 때까지는 잊고 있는 것이므로, 그전에 '잊지 않게 되면'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 청주가 고향이었던 시인 -> 청주가 고향인 시인: '시인은 청주가 고향이다'는 '고향이었던'과 대비되지 않는다. 해병대 출신이었던 선생님 -> 해병대 출신인 선생님 모태 신앙이었던 내가 부끄럽개도 -> 모태 신앙인 내가... 이것은 예정에 없었던 일이다.: '이것이 있다'라는 의미가 문장에 있다. '없었던'과 대비된다. 평소 감정이 쌓였던 사이라 외면했다. -> ...쌓인 사이라 외면했다.: '상실'의 의미가 없다. 미국 무대에서 6승을 거뒀던 그는 -> ...6승을 거둔 그는 6.25를 겪었던 세대 -> 6.25를 겪은 세대: '거둔 실적' '겪은 경험'은 물리거나 중단하지 못한다. 그 음악가가 연주했던 곡이 생각난다.: 생각나기 전의 행위이므로 완료한 행위로 볼 수 있다. '생각이 나는 지금 그 곡은 연주하지 않고 있다'가 '연주했던'과 대비된다. 그 사람이 했던(하였던) 말이 생각났다.: 반복하는 대상을 강조하여 '했던'을 쓰는 경우와 비슷하다. 주로 '-하다'가 붙은 동사 중에 되돌리거나 중단하지 못하지만 반복하는 것이 있다. '발견했다' '연주했다' '재직했다' '했다' '좋아했다' '지원했다' '읽었다' 따위가 그것이다. 6.25 때 우리를 지원했던 나라는 -> ...지원한 나라는 재직했던[재직했었던] 대학에 편지를 썼다. -> 재직한 대학에...: '재직한' 자체가 재직을 종료한 것이므로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발견한 물질'과 같은 경우인데, '재직했던'이라고 하면 재직한 사실을 물렸다는 의미다. 재직한 대학에 다시 나가게 됐다.: 맞게 썼다. 복무했던 부대에서 훈련받는 방침은 유보했다. -> 복무한 부대에서... 전 정권 때 청와대에 근무했던 사람 -> ...근무한 사람 2000년 낙선했던 사람 -> 2000년 낙선한 사람: '낙선했던'은 '당선한'과 대비된다. 특정한 시점만 가리키므로 '낙선한'이다. 7월 19일 보내드렸던 오후의 클래식을 마칩니다. -> ...보내드린 오후의 클래식을 마칩니다.: '보내드렸던'은 완료한 것이다. 보내드리고 중단한 상태가 현재까지 이른다는 개념이다. '보내드린'은 지난 행동의 결과가 현재에 미친다. '이미 마친 것이 아닌 보내드린 상태에 있는 방송'을 마쳐야 맞는다. 이에 앞서 '방송을 내보냈다'는 되돌리거나 중단하지 못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애청자 박지선 씨께서 신청해 주셨던 곡입니다. -> ...신청해 주신 곡입니다. 책에서 봤던 얘기다. -> 책에서 본 얘기다.: '책에서 내용을 봤다'는 물리거나 중단하지 못한다. 아주 오래전에 봤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오래전 들었던 얘기다. -> 오래전 들은 얘기다. 영화가 끝난 후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 ...실제로 있은[있던,발생한,일어난] 일이다.: '그 일이 과거에 발생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맞는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과거에 발생했고 그 상황은 지금까지 죽 내려오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곳, 무엇이 있었던 자국: 맞게 썼다. 이것은 추억이 있은[있는, 있던, 서린, 담긴] 레코드다.: '추억이 있었던'이 아니다. 책에서 봤던 그림과 같은 것이다.: '봤던'은 반복하는 행위에서 그전 행위가 완료한 형태다. 지난 선거 때 나왔던 공약이 지금 또 나왔다.: '지난 선거 때'라는 특정 시점이 있지만 지금이 기준이다. 변혁을 위해 책을 읽었던 그 사람: 그만둔(반복하는 행위를 그친) 경우다. '읽었다'는 반복이 아닌 경우 중단하거나 물리지 못한다. 변혁을 위해 책을 읽은 그 사람: 그만두었거나 지금도 지속하는 경우. 발령했던 경보: 반복하는 것을 그친 경우다. 한 차례의 경보를 해제한 경우로 쓰면 안 된다. 발령한 경보: 해제했거나 지속하는 경우. 5대 0으로 이겼던 나라에게 2대 0으로 졌다. -> 5대 0으로 이긴 나라에게... 매번 이겼던 중국에게 졌다.: 한 차례 이긴 것은 물리거나 중단하지 못하지만, 반복하는 승리는 중단할 수 있다. 연주할 수 있었던 피아노: 지금은 불가능한 경우다. 즉 지금을 기준으로 한다. 예술의전당 연주회 때 연주할 수 있었던 피아노: 지금이 아니고 연주회 때가 기준이다. 그 당시 불가능했다는 말이 된다. 연주할 수 있던 피아노: 지금도 가능하거나 불가능해진 경우. 예술의전당에서 있었던 피아노 연주회 -> ...있은 피아노 연주회: '예술의전당 연주회'라는 특정 시점이 있다. 대단합니다. 연주 실력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연주 실력을 확인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연주 실력을 확인했습니다(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확인한 무대였습니다)"로 해야 한다. '할 수 있다(can, be able to)'는 영어식인 경우가 많으므로 유의해야 하며, '확신하는 상황'을 '것 같다'라고 해서는 안된다. 생산을 제고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생산을 제고하도록(제고하게) 노력한다. 그 경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원인은 -> 그 경기에서 승리한 원인은 날이 좋아 많이 볼 수 있었던 것들은 -> 날이 좋아 많이 본 것들은 위기를 극복하는 비결: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비결'로 하면 번잡하다. 오염도를 측정할 수 있는 장치 -> 오염도를 측정하는 장치 함께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가을에 볼 수 있는 꽃 -> 가을에 보는 꽃 시골길에서 느낄 수 있는 정취 -> 시골길에서 느끼는 정취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 부담을 느낄밖에 없다. 학생 모두 이용할 수 있는 시설 -> 학생이면 누구나 이용하는 시설 패배보다 실망스럽고 분했던 것은 편파적인 중계방송이었다. -> 패배보다 실망스럽고 분하던(분한) 것은...: 지난 경기 도중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분하던'이다. 치열했던 선거 운동: 지금 기준으로 중단한 경우다. 선거 운동이 끝난 것이다. 치열하던 선거 운동: 지금도 계속하거나 중단한 경우. 시정을 위해 법률 조언을 했던 것이다.: 지금은 중단한(반복하는 행위를 그친) 경우. 시정을 위해 법률 조언을 한 것이다.: 지금도 하거나 중단한 경우. 행사는 잠시 뒤 10분 있다가 진행할 예정입니다. -> ...진행합니다. 곧 출근할 직원들을 위해 일찍 나와 커피를 끓이고 있습니다. -> 곧 출근하는 직원... 나쁜 사람들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다.: '예언'이나 '예상'을 나타낸다. 헤어졌던 연인을 만나고 싶습니다. -> 헤어진 연인을... 헤어졌던 연인: 다시 만난 경우다. '갇혔던 새'의 경우처럼 '다시 만난 연인'이라는 의미로 쓸 수 있다. 경황이 없어 헤어진 연인: 아직도 헤어져 있거나 다시 만난 경우다. 사실상 다시 만난 경우는 쓰지 않고 있다. 재직한 직장, 근무한 직장: 퇴사한 경우다. 다시 재직하고 있는 경우는 해당하지 않는다. 재직하고 있었던 직장을...: 퇴사한 경우. 재직했던 직장: 쓰지 말아야 한다. 장관을 역임했던 어르신 -> 장관을 역임한 어르신 실종됐던 산악인을 찾고 있다. -> 실종된 산악인을... 소송을 철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 소송을 철회한 것으로... 페이스북 창업자 저커버그가 자퇴했던 하버드를 방문했다. -> ...자퇴한 하버드를... 6.25 때 실종됐던 미군의 유해를 발굴한다. -> 6.25 때 실종된 미군의... 금강산에 갔다 왔던 소감은 -> 금강산에 갔던(갔다 온) 소감은 싫어했던 일이지만 의무감으로 하고 있다. -> 싫어한[싫어하는] 일이지만 ... 이것은 리메이크했던 곡이다. -> ...리메이크한(원작을 재구성한) 곡이다. 내가 좋아했던 노래를 부르자. -> 내가 좋아한 노래를 부르자. 그 음악가는 유부녀였던 여자를 좋아하다가 유부녀 남편이 죽자 그 여자와 결혼했다. -> 그 음악가는 유부녀를 좋아하다가... 그 음악가는 모교였던 대학에서 가르쳤다. -> ...모교인 대학에서 가르쳤다. 돌아가신 오 선생의 마지막 제자였던 성악가가 노래합니다. -> ...마지막 제자이신 성악가가 노래합니다. 이번 사건의 피의자였던 사람의 DNA를 현장에서 발견했다. -> 이번 사건의 피의자 DNA를...   내가 겪었던 시행착오를 모은 책: '경험하다'는 중단하거나 되돌리지 못하지만, 반복할 수 있다. '겪었던'은 반복을 중단한 경우이므로 맞는다. 내가 겪은 시행착오를 모아서 나중에 책을 내겠다.: '겪은'은 반복하는 행위를 중단하였거나, 지금도 계속하는 경우다. 중학교 때 겪었던 일들 -> 중학교 때 겪은 일들: 특정한 기간의 경험은 반복이 아닌, 한 덩어리로 봐야 한다. 많은 일이 발생하더라도 그 기간에 속하며, 그 기간은 한 차례의 사실인 것이다. 잡지에 썼던 칼럼을 묶은 책: '잡지에 글을 썼다'라는 한 차례 행위는 물리거나 중단하지 못한다. 반복은 가능하므로 '썼던'은 반복이 그친 경우다. 책으로 나온 칼럼들은 반복을 중단한 것으로 봐야 한다. 마냥 쉬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책을 탈고하고 있다.: '지금까지 마냥 쉬고 있지 않았다'는 '있었던'과 대비된다. 홍역은 공포의 존재였던 것이다.: '홍역은 공포의 존재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의미이므로 '존재였던'은 맞는다. 가난했던 집안, 불우했던 어린 시절 -> 가난했던 집안, 불우한 어린 시절: 지금에 이르러, '집안이 가난했다'는 변할 수 있다. '어린 시절이 불우했다'는 변함이 없다. 배 고팠던 시절은 가고 : '(지금과는 형편이 다르게) 배 고프던 시절은 가고'라는 의미로 맞게 썼다. 여기의 '시절'은 지금도 포함하므로 특정 시점이 아니다. 일본과 싸웠던 사람: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일본과 싸운 사람'을 말한다. 일본과 싸운 사람: 문맥에서 '일제강점기'라는 의미가 있을 때, 굳이 '싸웠던'으로 할 필요가 없다. 그동안 접촉했던 사람과 결혼합니다. -> 그동안 접촉한 사람과... 학교 다닐 때 절친했던 사람과 결혼합니다.: 학교 다닐 때 접촉을 끈은 사람이라는 의미다. 학교 다닐 때 가끔 접촉했던 사람과 결혼합니다. -> ...가끔 접촉한(만난) 사람과 결혼합니다.: 학교 다닐 때 만났는데, 언젠가부터(학교 다닐 때를 포함) 만나지 않은 경우다. '접촉했다'는 반복할 수 있다. '접촉했던'은 반복을 멈춘 것인데 특정 시점과 같이 쓸 수 있다. 대개, 복잡하게 자초지종을 다 말하지 않으므로 뒤의 '접촉한'으로 쓴다. 학교 다닐 때 접촉한 사람과 결혼합니다.: '학교 다닐 때 접촉했고 이후 계속 접촉했거나, 접촉을 끈은 사람과...'라는 말이다. '접촉했다'라는 한 차례 행위는 중단하지 못하지만 반복할 수 있다. 반복의 경우 중단할 수 있다. ('비판했다'라는 한 차례 행위는 중단하지 못한다. '비판한'은 지금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유행했다'와 '반복의 접촉했다'는 중단할 수 있으므로, '유행한'과 '접촉한'은 지금까지 계속되거나 중단한 것이다.) 운동장으로 모여 주시기 바라겠습니다. -> ...바랍니다.: '겠'은 '미래의 일이나 추측' '말하는 사람의 의지' 등을 나타낸다. "축하 드리겠습니다"는 "축하 드립니다"로 해야 옳고, "부탁 드리겠습니다" "...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는 맞는다. '겠' - 1. 미래의 일이나 추측을 나타내는 어미: "지금 떠나면 새벽에 도착하겠구나." 2. 화자의 의지를 나타내는 어미 : "나는 시인이 되겠다." 3. 가능성이나 능력을 나타내는 어미 : "그건 누구나 알겠다." "날씨가 선선하면 잔치를 치르는 데 금상첨화겠다[좋겠다]." 4. 완곡하게 말하는 태도를 나타내는 어미 : "들어가도 좋겠습니까?" "일어서 주시겠어요."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 "박수를 부탁 드리겠습니다." "일어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좋겠습니다)." 5. 헤아리거나 따져 보면 그렇게 된다는 뜻을 나타내는 어미: "별사람을 다 보겠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 ...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 '것'은 전망이나 미래의 확신 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까닭'을 나타낸다. 장차 들징슴 곧 승냥이와 타조로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 ...나를 존경하는 것(까닭)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이기 때문이라. 양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 ...없던 이유: '없었던'은 '지금과는 형편이 다르게...'이다. 지금이나 과거나 사정은 같으므로 '없던'을 써야 한다. 나라 발전은 교육에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 ...교육에 원인이 있었다.(...교육에 원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의 사정이 같다. 우리 부모도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 ...사람이 필요하던 것이다[필요한 것이었다]. 국민의 열망으로 승리가 가능했던 것이다. -> ...승리가 가능했다.: 과거의 사실이나 진실이 변하지 않았다.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 국민의 지지를 받은 까닭은 그는 돈을 벌 목적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교육자로서 적격자가 아니었던 셈이다. -> 그는 돈을 벌 목적만 있었다. 교육자로서 적격자가 아니었다. 임진왜란 때 사용한 활의 종류는?: '임진왜란 때 사용했던 활의 종류는?'으로 쓰지 말아야 한다. 역사적인 사실은 변함이 없으므로 과거형이다. 임진왜란 때 사용했던 활을 사용해 보겠다.: 반복을 중단했다가 다시 하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사용하던 활이다.: 지금도 사용하거나, 사용하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사용했던 활이다. -> ...이순신 장군이 사용한 활이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어떤 활을 사용했다면, 그 사실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백제 수도인 웅진(공주)은 성왕 때 사비로...: 역사상 사실을 말한다.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에 간다.: 현재 상황에서 기술한 것이다. 이 언덕에 있었던 백제 산성은 특이한 것이었다.: 맞게 썼다. 통화 위주였던 과거의 휴대전화와 달리 스마트폰은 -> 통화 위주인 과거의 휴대전화와 달리 스마트폰은 흑산도에 유배 갔던 정약전은 물고기를 연구하다 죽었다. -> 흑산도에 유배 간 정약전은... 과거(과거 어느 때)에 있었던 풍습의 연구 -> 접할 수 있었던[사회에 존재했던, 지금은 사라진] 풍습의 연구 과거 어느 때에 있었거나 행하여졌던 동작을 나타내는 어법(국어사전). 과거의 어느 때에 이미 있었거나 행하여졌던 동작을 나타낸다(표준국어대사전).: '과거 완료'의 뜻을 풀이한 것인데, '국어사전'처럼 해야 될 것이다. 실제 영어에 있는 과거 완료는 우리말로 풀이하는 개념과는 다르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인도에서 가족 계획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족 계획이 있었다'는 '없었던'과 대비된다. 침묵할 수 밖에 없었던 시대의 암흑 -> 침묵할 수밖에 없은[없던] 시대의 암흑: 현재 상황과는 상관없는 과거의 일이므로 과거형이 좋다. '밖에'는 조사로 '그것말고는'의 뜻이다. '조금밖에 없다'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처럼 쓴다. '밖'은 명사로 '안'의 반대말이다. '예상 밖의 문제' '그 밖의 것' '집 안팎'처럼 쓴다. '뜻밖' '뜻밖에' '문밖' '창밖' '판밖' '꿈박'은 붙여 쓴다. 쉽지 않았던 시험 -> 시험이 쉽지 않았다.(쉽지 않은 시험, 쉽지 않던 시험) 졌지만 화끈했던 경기였다. -> 졌지만 화끈한 경기였다.: 지난 일이 확실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므로 현재의 상황을 나타낼 필요가 없다. 과거는 과거로 족하다. "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짜장면 시키신 분!" 과감했던 태클이었습니다.(축구 중계) -> 과감한 태클... 강력했던 슛입니다. -> 강력한 슛입니다. 행복했던 모임[시간]이었습니다. -> 행복한 모임[시간]이었습니다. 질 뻔했던 경기 -> 질 뻔한 경기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던 선수가 나옵니다. -> ...딴 선수가... 이 선수는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었습니다. -> ...땄습니다. 다사다난했던 해가 저물고 있다. -> 다사다난한 해가... 방금 들으신 곡은 황제였고, 먼저 들으셨던 곡은 사계였습니다.-> ...먼저 들으신 곡은 사계였습니다. 지금 정부 한 것이든, 과거 정부 했던 것이든 -> ...과거 정부가 한 것이든 그것은 과거 정권에서 했던 일이다.: '과거 정권에서 반복하던 일인데 지금은 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행위를 반복하는 경우, 특정한 시점을 쓸 수 있다. 과거 정권에서 했던 실수가 발생했다.: 되풀이하는 행위의 대상을 강조한다. 과거 정권에서 했던 14대 선거다. -> 과거 정권에서 한 14대 선거다.: 시제가 과거다. 과거 정권에서 추진했던 은행은...: '추진했던'은 중지한 것이다. 중지한 시점은 과거 정권이다. 과거 정권에서 추진하던[추진한] 은행이다.: 추진을 계속했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다. 노벨상을 수상한 과학자: 수상을 계속 유지한다. 고추장을 담은 용기: 고추장을 담고 있거나, 고추장을 담았던 경우. 탈락했는데 실력이 부족했던 것 같다. -> ...실력이 부족했다(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믿음이 강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 믿음이 강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90년대 사건였던가! -> 90년대 사건이었나!( 90년대 사건이던가!) 대학이 제 구실을 해왔던가. -> ...해왔는가.: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던가'와 '-는가'가 모두 가능하다. 이 둘은 용언의 어간 또는 어미 '-으시, -었-, -겠-' 등 뒤에 붙는 종결 어미인데, '-던가'는 과거 사실에 대한 물음을 나타내고 '-는가'는 현재 사실에 대한 물음을 나타낸다. 결국 '-었-' 등이 과거를 나타내므로 '-는가'를 붙여도 행동이 과거에서 지금까지 미치는 의미가 된다. 출마한다고 누가 말했던가.-> ...말했는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다. -> 처음부터 그러던 것이다. 이랬던 어느 날 -> 이러던 어느 날 왜 그랬던가 -> 왜 그랬는가 왜 그랬던지 -> 왜 그랬는지 그때 아쉬웠던 것은 -> 그때 아쉽던 것은 이재숙이 초등학교 때 꿈꿨던 일 -> ...꿈꾸던(꿈꾼) 일 즐거웠던 시절의 이야기 -> 즐겁던 시절의 이야기 그 소설에서 하고 싶었던 말은? -> ...싶던 말은? 그때는 뭐가 그리 무서웠던가. -> ...무섭던가. 어려웠던 시절 -> 어렵던(어려운) 시절 외로웠던 시절 -> 외롭던 시절 힘들었던 시절 -> 힘들던 시절 소중했던 시절 -> 소중하던 시절 아팠던 시절 -> 아프던 시절 개천에서 용 나던 시절: '났던 시절'이 아니다. 어린 시절: '어렸던 시절'이 아니다. 힘겨웠던 경험 -> 힘겹던 경험 고통스러웠던 경험 -> 고통스럽던 경험 추웠던 지난겨울 -> 춥던 지난겨울 지난해 반가웠던 손님 -> 지난해 반갑던 손님 보고 싶었던 그대 -> 보고 싶던 그대 그때는 뭐가 그리 아름다웠던가. -> ...아름답던가. 그때는 뭐가 그리 좋았던지. -> ...좋던지[좋았는지]: '는지'와 '던지'는 연결 어미로 막연한 의문이 있는 채로 그것을 뒤 절의 사실이나 판단과 관련시킨다. "무엇이 틀렸는지 답을 맞춰 보자." 그때는 왜 그런 감정을 품었던지. -> ...품었는지. 그 시절 놀라웠던 일은 -> 그 시절 놀랍던 일은 작업을 하던 중에: '-던'은 과거 어느 시점의 진행을 나타낸다. '작업을 했던 중에'는 될 수 없다. '-었던'은 과거에 완료한 것이어서 '중'과 부합하지 않는다. 영웅이 필요했던 시대에 -> 영웅이 필요하던 시대에[중에] 그때 곁에 섰던 사람이 잡아 당겼다. -> 그때 곁에 선[서 있던] 사람이 ... 지난해 또 우승했는데 감독의 영향이 컸던 것을 알 수 있다. -> ...큰[크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지 워싱턴 곁에는 '대통령보다 더 훌륭한 어머니'였던 노모가 있었다. -> ...'대통령 보다 더 휼륭한 어머니'인[이던] 노모가 있었다.: '훌륭한 어머니' 역할이 지금은 종료했지만 '있었다'라는 과거 시점에는 어떤 상태거나 진행이다. 조선 전기 정승이었던 황희는 청백리이다. -> 조선 전기 정승인 황희는...: 보편적 진리이므로 현재형으로 나타낼 수 있다. 과거형 '청백리였다'로 써도 그 당시는 정승이라는 사실이 진행이거나 상태다. 그때도 그랬었다. -> 그때도 그랬다. 그때는 그랬다.: '그때는 그랬었다'로 쓰지 않더라도, '는'으로 현재와 과거를 대비하여 말한다. 선생님도 한때 그랬었다. -> 선생님도 한때 그랬다 : '한때'만으로도 과거와 현재가 다른 상황을 나타낸다. 그때가 좋았다.: '그때가 좋았었다'로 쓸 필요가 없다. '그때'는 과거 특정한 시점이다. 터키는 한국전쟁에 참전했었다. -> ...참전했다.: 역사상의 사실로 현재 상황을 결부할 필요가 없다. 아까 환대해 주셔서 감동했었습니다. -> ...감동했습니다. 공연이 좋았던[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 공연이 좋던[재미있던] 것 같아요. -> 공연이 좋았어요[재미있었어요].       "○○이 주목받았습니다. 이 논문은 네이처 지에 실렸습니다." : 논문은 동사의 대상물(객체)이므로 " ○○ 논문은 네이처 지에 실었습니다"라고 해야 좋지만, 문맥에 맞춰 앞의 문장을 많이 쓰는 실정이다. '실리다'가 국어사전에 자동사로 올라 있는데, '실리다'의 영향력이 크다고 하겠다. 문맥에 따라서는 뒤의 문장을 쓸 수 있다.   시험 결과는 12월에 발표됩니다. -> ...발표합니다. ○○식품에서 발암 물질이 검출됐습니다. -> ...발암 물질을 검출했습니다. 전국 12개 관측소에서 방사성 물질이 검출됐다. -> ...관측소에서 방사성 물질을 검출했다. "신공항 선정 결과가 내달 발표됩니다. " -> "신공항 선정 결과를 내달 발표합니다." 모금된 돈은 수재민에게 전달될 예정입니다. -> 모금한 돈은 수재민에게 전달합니다. 서울시가 단속을 벌인 결과, 4개 업체가 적발됐습니다. -> 서울시가 단속을 벌여 4개 업체를 적발했습니다. 100번 버스 노선이 신설됩니다. -> ...노선을 신설합니다. 중부 지방에 한파주의보가 내려졌습니다. -> ...한파주의보를 내렸습니다. 내일 우리 지역에서 주민 투표가 실시됩니다. -> ...주민 투표를 실시합니다. 측정소에서 대기를 조사한 결과, 방사성 물질이 검출됐다. -> 측정소에서 대기를 조사해 방사성 물질을 검출했다.(측정소에서 조사한 결과, 대기에서 방사성 물질을 검출했다.) 소비자보호원은 결혼과 관련한 고발 100건이 접수됐다고 밝혔다. -> 소비자보호원은 결혼과 관련한 고발 100건을 접수했다고 밝혔다. 지원서를 접수받았다. -> 지원서를 접수했다. 이 문제로 도전자가 정해집니다. -> ...도전자를 정합니다(결정합니다). 우승자가 결정되었습니다. -> 우승자가 나왔습니다(탄생했습니다). 컴컴한 사립문 앞, 아버지 손에는 검은 봉지가 들려 있었다.: 문학작품에 잘 나오는 형태인데, 때로는 신선한 느낌을 주기는 한다. '아버지가 검은 봉지를 들고 있었다'라고 해야 우리말답다.     일본에서 그것만큼 많이 팔린 시집은 없었다. -> ...많이 판 시집은... : '팔리다'가 국어사전에 자동사로 있지만, 여기서는 타동사인 '팔다'를 쓴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 책 많이 팔렸어?"처럼 자동사로도 많이 쓴다. 이것에 비해 "그 책 많이 팔았어?"라는 말은 덜 쓰는 것 같다. 30년 전에는"쌀 많이 팔었어?" "책은 많이 팔었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멀쩡히 서점에서 파는 책들을..."은 최근에 신문에서 본 문장이다.   불티나게 팔린 과일: '불티나게 판 과일'보다 앞의 것을 쓰는 실정이다. '과일이 불티나게 팔렸다.' '과일을 불티나게 팔았다.' '날개 돋친 듯이 팔린다.'(속담)   100만 부가 팔린 소설 : '100만 부를 판 소설'이나 '판매 부수가 100만을 넘은(돌파한) 소설'로 썼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이 시대에 손꼽히는 학자들 : '손꼽다'의 피동사로 '손꼽히다'가 사전에 있으므로, 이렇게 써도 괜찮아 보인다. 그러나 '손꼽다'를 활용하여 '이 시대에 (우리가) 손꼽는 학자들'이라고 쓰고 싶다. 두 경우가 대등해 보이지만, 이왕이면 능동형을 고수하고 싶은 것이다.   마을에 세워진 기념비 -> 마을에 세운 기념비 쓸데없는 짓이라는 인식이 심어졌다. -> ...인식을 심었다. 서정주의 생가가 있는 고창에 국화가 심어져 있다. -> ...고창에 국화를 심어 놓았다(국화가 심겨 있다).: '심다'의 피동사는 '심기다'다. 국어사전에는 없지만 '심어지다'도 가능하다. (국어사전에 등재한 '주어지다'와 형태가 같은 말인 '심어지다' '만들어지다' '담아지다' '뽑아지다' '믿어지다' 등은 국어사전에 없다. '주어진 상금'이라는 말도 좋아 보이지 않는데, 국어사전에 없는 말을 굳이 쓸 필요는 없겠다. 즉"작품이 만들어졌다"처럼 서술어 활용은 모르지만, '만들어진 개념'과 같은 형태는 피해야 좋겠다. 단 '사동사'에 '어지다'가 붙은 말은 이들과 달리 '널리 알려진 작품'처럼 많이 쓴다.)   모아진 옷가지 ->모은 옷가지:'모으다'를 활용한 것이다. "돈을 모으면 차를 사겠다." 모아진 가입자들 -> 모인 가입자들: '모으다'의 피동사는 '모이다'다. "돈이 모이면 차를 사겠다." '모인 청중.'             #. (틀린 말이라도 대중이 많이 쓰다 보면 표준어가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어법을 허물면서 아무것이나 표준어로 삼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말 어법은 괜히 생긴 게 아니다. 우리말 어법은 과학적인 원리와 논리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우리말을 쓰는 데 편리하도록 도움을 준다.   가뜩이나 외국어, 외래문화, 여러 종교 등 외부 요인들이 끼치는 영향이 크다. 종교만 해도 특유의 사상이 언어에 녹아들고 있다. 이럴수록 우리말을 원리대로, 순리대로 써야 한다. 그래서 우리말을 잘 사용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       연수원 파견된 직원 -> 연수원에 파견한 직원 아프리카에 파송된 선교사 -> 아프리카에 파송한 선교사 반역죄로 유배된 장수 -> 반역죄로 유배한(귀양 보낸) 장수: '유배하다'는 '죄인을 귀양 보내다'는 뜻이다.       그 물건은 정부에 의해 압류된 상태다. -> ...정부에게 압류당한 상태다. -> ...정부가 압류한 상태다.   그 사람은 경찰에 의해 체포된 몸이다. -> ...경찰에게 체포당한 몸이다. -> ...경찰이 체포한 몸이다.   저 아이는 버려진 아이다. -> ...버림받은 아이다. -> ...내버린 아이다.: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에서 '주워 온'의 반대 형태는 '내버린'이어야 합당하다. "내버린 애를 주워다 키웠더니 훌륭하게 됐대." "들의 암사슴은 새끼를 낳아도 풀이 없으므로 내버리며..." "버린 자식이다."(속담) 저 사람은 국군에 의해 사살된 해적이다. -> ...국군에게 사살을 당한 해적이다. -> 저 사람은 국군이 사살한 해적이다.   리젤은 입양된 소녀다. -> 리젤은 (새 부모가) 입양한 소녀다. 미국으로 입양된 토비 -> 미국으로 입양한 토비: '입양'은 '양자를 들이거나 양자로 들어감'을 뜻한다. 원래는 양자의 관계를 맺는 행위를 말한다. 양자로 들어가거나 양자를 받아들이는 행위 모두 '입양하다'인 것이다(한글학회 우리말사전). 한편 '입양되다'는 말도 가능하다.       이스라엘 대사관이 공격됐다. 리비아의 수도 20km 외곽까지 공격됐습니다.: '공격하다' '공격받다' '공격당하다'는 가능해도 '공격되다'는 안 된다. 그 기법은 성공 사례로 강의되었다.: '강의하다' '강의를 받다'는 가능해도 '강의되다'는 안 된다. 노하우 - 특허되지 아니한 기술로서...(국어사전의 문장): 표준국어대사전에 '특허'의 파생어로 '특허하다'만 있다. '특허되다'는 안 된다.             #. (명사에 '-당하다' '-받다'를 붙여 피동의 뜻을 나타내는 동사를 만들 수 있다. '-되다'는 이들과 좀 다르다. '-되다'는 '하다'가 붙을 수 있는 명사에 붙어 '스스로 작동함'을 나타낸다.   '걱정되다' '그는 준비됐다' 따위는 적합하지만, '주차되다' '장사되다' '공연되다' '운구되다'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이 단어들은 표준국어대사전에 없다.   영어의 영향을 받아 '-된' 꼴을 많이 쓴다. '-되다'를 무분별하게 활용하여 피동형을 남발하지 말아야 한다.)         ------------------------------       그 왕자가 탄생된 날 -> 그 왕자가 탄생한 날 (탄생하다 : 자동사) 당뇨병으로 발생된 후유증 -> 당뇨병으로 발생한 후유증 (발생하다: 자동사) 9년 만에 부활된 시험 -> 9년 만에 부활한 시험 (부활하다: 자동사, 타동사) 번영되는 기업 -> 번영하는 기업 (번영하다: 자동사. '번영되다'는 없는 말) 번영된 나라 -> 번영한 나라 (번영하다: 형용사) 발전된 조국 -> 발전한 조국 : '발전하다'가 자동사이므로 '발전되다'도 가능하다. '-되다'는 피동의 뉘앙스가 있다. 자동사 중 '움직임'의 뜻이 있는 것은 '-하다'를 써야 자동사의 느낌을 유지한다.'도착한 선발대' '침몰한 선박' '증가한 소비'처럼 쓰면 된다.   이번 사건의 귀추가 주목된다. -> 이번 사건의 결말에 많은 관심이 쏠려 있다. : '귀추'는 '일이 되어 가는 형편'을 말한다. '주목되다'는 관심을 받고 주의 깊게 살펴진다는 의미다. '주목되다'는 스스로 작동하는 것으로 여길 만하므로 올바른 말이기는 하나 쉽고 자연스러운 말을 쓸 필요가 있다. 스스로 작동한다는 것은 추상적인 움직임을 포함한다.     균형된 시각: '균형하다' '균형되다'는 말은 국어사전에 없다. 명사로 '균형'만 있다. '균형이 잡히다' 등으로 쓴다. 엎질러진 물: '엎지르다'를 곧바로 활용하는 것이 좋다. 국어사전에는 '엎지른 물'을 관용구처럼 예문으로 올려 놓았다. "한번 엎지른 물은 다시 주워 담지 못한다"는 속담도 있다. ○○하면 연탄이 선물됩니다.: '선물하다'는 가능해도 '선물되다'는 안 된다. 사냥된 동물 : '사냥하다'는 가능하고, '사냥되다'는 안 된다.   폭력 교사로 대표되는 문제 교사 -> 폭력 교사가 대표하는 문제 교사: '대표하다'는 가능해도, '대표되다'는 안 된다. 아파트로 대변되는 주거지 변화 -> 아파트가 대변하는 주거지 변화: '대변하다'는 가능하고, '대변되다'는 안 된다 표적된 그 사람: '표적'만 가능하고 동사는 안 된다. 매일 숙제돼 있지만, 병헌이는 -> 매일 숙제가 있지만... 테러 온상된 예멘: '온상되다'는 없다. 어떤 일의 터전이 된다는 뜻의 '온상'은 명사만 있다. 하나된 우리: '하나로 된 우리' '하나가 된 우리' '하나 된 우리'라고 해야 한다. '하나된'으로 붙여 놓으면, '하나되다'라는 없는 단어를 활용한 것이 된다. '난장판된 국회' '도움된 손길' '죄된 일' '문제될 게 없다' '진리되신 말씀' 따위도 같은 사례다. 특별히 '문제 될 게 없다'로 쓰도록 유의해야 한다. 참된 평안, 복된 나날, 주된 식량, 거짓된 정보, 고된 훈련, 오래된 일기, 속된 말, 헛된 욕심, 보람된 일, 망령된 행동, 영광된 삶 : 올바른 말이다. '참되다(참답다)' '복되다(복스럽다)' '주되다' '거짓되다' '고되다' '오래되다' '속되다' '헛되다' '보람되다(보람차다)' '망령되다(망령스럽다)' '영광되다(영광스럽다)'가 형용사로 국어사전에 있다. 장관을 오래한 사람, 감옥살이를 오래한 사람: '오래하다'는 말은 없다. '장관을 오래 한 사람'. 진실된 태도 -> 진실한 태도: 형용사는 '진실하다'이고, 부사는 '진실히'이다. (정직하다: 정직한 사람. 진정하다 : 진정한 애국자. 노후하다: 노후한 수도관, '노후된'은 안 됨) 그것이 얼마나 허황된(한) 꿈인지: '허황하다'는 형용사다. '허황되다'도 가능하다. 충성된 종: '충성되다'는 형용사다(표준국어대사전 인터넷). '충성하다'는 자동사이고 '충성스럽다'는 형용사다. 세상과 벗된 사람: '벗하다'가 자동사로 국어사전에 있다. '벗되다'는 안 된다. 몸된 집 -> 몸 된 집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 인자 됨으로 말미암아: '인자'는 기독교에서 예수 자신을 이르는 말이다. 공연에 감동된 관객: '감동하다'는 자동사이고, '감동되다'는 없는 말이다. '감동'의 파생어는 '감동하다'와 '감동적'이다. 무조건 행복할 것 -> 무조건 행복해질(행복해할, 행복하게 살) 것: '행복하다'는 형용사지, 동사가 아니다. 형용사는 명령형으로 쓰려면 동사로 바꿔야 한다. '것'은 '들어오지 말 것' '손을 씻을 것'처럼 명령하는 말을 끝맺는 형태다. 당황한 표정, 긴장된 목소리: '당황하다'와 '긴장하다'는 자동사다. '당황되다'는 가능하지 않고, '긴장되다'는 가능하다. 발전 출발점돼야 -> 발전의 출발점이 돼야 의도된 접근: '의도'의 파생어는 '의도하다'와 '의도적'이다. 동강난 단체: 틀린 말이다. '동강'은 짤막하게 자른 토막을 이르는데 명사만 있다. '동강(을) 내다' '동강(이) 나다' 따위로 쓴다. (통큰 판매->통 큰 판매. 해질 무렵->해 질 무렵. '동틀 녘'은 맞음) 뒷북 행정 -> 뒷북치는 행정: 국어사전에 '뒷북'은 없고, '뒷북치다'만 있다. '뒷북'은 '뒤'와 '북'을 합친 말로, '시기나 장소의 뒤쪽에 있는 북'이라는 의미쯤 될 것이다. '뒷북' 자체로 '뒷북치다'라는 뜻을 나타내기 어렵다고 하겠다. "굿 지낸(지내고) 뒷장구 (친다)" "행차 뒤에 나팔 (분다)"는 속담과 비교하여 파악해도 되겠다. 아들이 강도한 물건을: '강도하다' '강도되다'라는 말은 없다. 정체성에 기반하다 -> 정체성에 기반을 두다: '기반'은 '기초가 될 만한 바탕'을 이른다. '기반하다'는 말은 없다. '바탕하다'도 안 되고, '기초하다'는 가능하다. 경험에 기초한 소설: '기초되다'는 안 된다. 도계된 닭: '도계하다' '도계되다'는 말은 표준국어대사전에 없다. 비법이 공유되면: '공유하다'는 가능하고, '공유되다'는 안 된다. 현재 시상되고 있는 상은?: '시상'의 파생어로 '시상하다'가 있고, '시상되다'는 없다. 그 학생에게 수상되었다. -> 그 학생이 수상했다.: '수상하다'는 '상을 받다'는 뜻이다. '수상되다'는 없는 말이다. 연대되지 않는 공감: '연대'의 파생어는 '연대적'과 '연대하다'이다. 다림질된 교복 -> 다림질한 교복: '다림질'의 파생어로 '다림질되다'는 없다. 선호되는 음악: '선호하다'는 가능하고, '선호되다'는 가능하지 않다. 그 벽화는 지하철역에 작업되었습니다. -> ...그렸습니다(작업해 놓았습니다).: '작업하다'는 자동사이며, '작업되다'는 가능하지 않다. "회계를 컴퓨터로 쉽게 작업할 수 있다"처럼 '...을 작업하다' 형태로 쓸 수 있다. 이 기계는 자동으로 동작되고 있습니다. -> ...작동하고 있습니다.: '동작되다'는 안 된다. '동작하다'는 '몸이나 손발 따의를 움직이다'는 뜻이다. 기계 따위를 움직이는 것은 '작동하다'다. 북한어에서는 '동작하다'를 '작동하다'는 의미로 쓴다. 모순된 정책: '모순'의 파생어는 '모순되다'(자동사)와 '모순적'이 있다. 언론에 광고된 식품: '광고하다'는 가능하고 '광고되다'는 안 된다. '홍보되다'도 안 된다. 수분된 꽃가루 -> 수분한 꽃가루: '수분하다'는 자동사이며 '수분되다'는 안 된다. 문제의식 부재가 경계되어 왔다.: '경계되다'는 안 된다. 거두절미된 말: '거두절미하다'는 가능하고 '거두절미되다'는 안 된다. 건물을 기준하여 그린다. -> 건물을 기준으로 하여 그린다.: '기준하다'는 안 된다. 도금된 시계 -> 도금한 시계: '도금되다'는 안 된다. 다른 방법이 궁리됐다. -> 다른 방법을 궁리했다.: '궁리되다'는 안 된다.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성경) -> ...자유롭게 하며: '자유하다'는 안 된다. 널리 노래됐다.: '노래되다'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없다. 독수리가 날개치며 ->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날개치다'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없다.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성경): '이름하다'는 안 된다. 그 땅이 넓고 안정 되고(성경) -> ...안정되고 자신이 끼친 피해는 염두하지 않는다면 ->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염두'는 마음속이라는 뜻인데 '염두하다'는 안 된다. 대저 도벳은 왕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라.(성경) -> ...예비한 것이라.: '예비되다'는 안 된다. 맹인되었던 자 -> 맹인이었던 자 성전된 육체를 -> 성전인 육체를 그 아들에게 정성된 마음을 주셨다. -> ...정성스러운 마음을... 나중된 사람 -> 나중 된 사람 그의 허물된 것 -> 그의 허물 된 것 종된 자 -> 종 된 자         1900년에 초연된 곡: '초연'은 첫 공연을 이르는데, '초연하다' '초연되다'는 말은 표준국어대사전에 없다. 일부 국어사전에는 '초연하다'가 올라 있다. '공연하다'가 가능하기에 올렸을 것이다. "제주도의 소득이 늘었다고 조사됐습니다." -> "제주도의 소득이 늘었다고 조사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제주도의 소득이 는 것으로 조사했습니다." "제주도를 조사했는데, 소득이 늘었습니다." "이번에 실시한 조사에서, 제주도의 소득이 늘었습니다.": '조사(調査)되다'는 말은 가능하다. "...한 결과, ...이다"는 영어를 번역한 말투로 보여 쓰기에 내키지 않는다. 조사(照査)하다: "대조하여 조사하다"를 뜻하는 이 말에서는 '조사되다'는 가능하지 않다.   반복되는 지시 -> 반복하는(되풀이하는) 지시 분단된 나라 -> 분단한(갈라놓은, 두 동강 낸, 갈라진, 두 동강 난) 나라: '반복하다'와 '분단하다'는 타동사인데, '반복되는'과 '분단된'을 많이 쓰는 실정이다. '분단한 나라'는 어색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바람직한 말이 오히려 어색하다면, 우리가 각성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느 국어사전에는 '분단하다'는 타동사로, '분단되다'는 자동사로 구분하여 올려 놓았다. 배치될 무기 -> 배치할 무기 세계로 열결된 통신망 -> 세계로 연결한 통신망 미래를 위한 계산된 양보 -> 미래를 계산한(대비한) 양보 설치된 안전망 -> 설치한 안전망 방송되지 않은 식당 -> 방송 안 한 식당[방송에서 소개하지 않은 식당] 검증된 제도: '검증한 이론' 따위로는 거의 안 쓴다. '검증한'을 찾기 어려운 실정인데, 국어사전에서 "재검증 : 검증한 것을 다시 검증하다"라는 문장을 찾을 수 있다. '검증한'을 많이 썼으면 좋겠다. 사회에서 소외된 가정 -> 사회가(에서) 소외한(외면한) 가정: 거의 다 '소외된'으로 쓴다. 언어는 모방하는 성질이 강하다. '소외하다'라는 말을 잘 쓰지 않아서 '소외된'으로 돼 가는 듯싶다. '소외하다'는 '어떤 무리에서 기피하여 따돌리거나 멀리하다'는 말로, "통합 예술 단체에서 감투라도 하나 얻었으면, 홍성숙은 멋지게 자신을 추방하고 소외한 무리에게 일격을 가하고 싶었다.(박경리, 토지)"처럼 쓴다. 어느 국어사전에는 '소외하다'는 타동사로, '소외되다'는 자동사로 구분하여 놓았다. 세련된 말씨: '세련하다'를 거의 쓰지 않고 있다. "...그것을 절제하고 세련할 지적 능력이 있다고..."(박완서, 도시의 흉년)처럼 '세련하다'를 살려 쓰면 좋겠다. 어느 국어사전에는 '세련하다'는 없고, '세련되다'만 형용사로 있다. 한글학회 우리말사전에는 '세련되다'는 형용사로, '세련하다'는 타동사로 올라 있다./표준국어대사전 인터넷에는 '세련되다'가 형용사로 올라 있다. 개정한 것이다. '세련된 말씨'로 쓰면 된다. 미국에서 생산돼 수입된 자동차 -> 미국에서 생산해 수입한 자동차 손질된 장어, 완성된 장어탕 -> 손질한 장어, 완성한 장어탕 -> ...요리한 장어탕: '손질되다'는 표준국어대사전(책자), 다음 국어사전 등에 없다. 네이버 국어사전에는 있다./ 표준국어대사전 인터넷에는 '손질되다'가 있다. 다음 국어사전도 수정했다. 바이올리니스트 김민진은 영국에서 천재로 불린다. -> ...천재로 부른다. 수제비는 지역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 흔히 '광화문 현판'이라고 부르는데 현액이 더 정확한 말이다.: '부르다'를 잘 썼다. (현판은 나무 판에 글씨를 써 건물에 내건 것 전부를 말한다. 편액은 건물에 내건 글귀 중에서 특정한 것이다. 편은 글씨를 쓴다는 뜻이고, 액은 건물의 이마를 이른다.) 명태 새끼는 노가리라고 한다(부른다). 반주 없이 부르는 합창은 아카펠라라고 한다(부른다).: '한다'가 능동형이므로 '불린다'가 아닌 '부른다'로 바꿀 수 있겠다. '하다'는 '어떤 것을 이름 지어 부르다'라는 뜻이다. 바다의 인삼이라고 하는 해삼: '하는'을 '부르는'으로 대체하여 '바다의 인삼이라고 부르는 해삼'으로 쓸 수 있다. 독도는 신라 때부터 울릉도와 더불어 우산국이라 불렸다. -> 독도는... 우산국이라 불렀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성경) -> ...불리는 모든 자 -> ...부르는 모든 자 "파리에 눈이 내려 도로가 통제됐습니다." -> "...도로를 통제했습니다." 드디어 아침 밥상이 완성되었다. -> ...밥상을 차렸다. 드디어 밥이 다 완성됐습니다. -> 드디어 밥이 다 됐습니다(다 끓었습니다).: '완전히 다 이루다'는 의미인 "온 힘을 기울여 작품을 완성했다" 등으로 쓸 수는 있다. "흙으로 완성한 예술품" "마지막으로 간장을 넣어 요리를 완성합니다" 따위는 "흙으로 만든(빚어낸) 예술품" "마지막으로 간장을 넣어 요리를 마무리합니다"로 쓰면 좋다. '완성하다'는 한자어이면서 영어 번역문에 잘 나오는 형태인데 익숙한 우리말을 침식하고 있다. "보고서를 완성했다(-> 만들었다)." "그림을 완성했다(-> 그렸다)." "자서전을 완성했다(-> 썼다)." "설렁탕을 완성했다( -> 요리했다, 끓였다, 조리했다)." "나폴레옹을 기리는 교향악을 완성했다(-> 만들었다, 작곡했다)." "마산에서 완성된[생산된] 술입니다(->마산에서 빚은 술입니다)." 그만둘 생각을 갖고 있다. -> 그만둘 생각을 하고 있다(그만두려고 마음먹었다). : '가지다'는 'have'에서 연유한 것이 많으므로 가려 써야 좋다. 만성 질환을 갖은 노인들 -> 만성 질환을 앓는 노인들(만성 질환에 걸린 노인들) 노래 부르는 시간을 갖고 있다. -> ...시간을 보내고 있다(...시간을 냈다, ...시간을 마련했다, 시간을 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지적 장애를 갖은 어린이 -> 지적 장애를 겪는(입은) 어린이 정상에 오르는 꿈을 갖고 있다. -> ...꿈을 꾸고 있다.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저 선수는 경험이 많지 않습니다. -> 저 선수는 많이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두려움[자부심]을 갖고 있다. -> ...느끼고 있다. '가지다'는 생각이나 태도를 품는 것을 나타내므로 '자부심을 가지다' '흥미를 가지다' '교류를 가지다' 따위가 틀린 말은 아니다. 1시간 전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있었다. -> ...사고가 났다.: "무슨 일이 있냐" "자주 있는 일이다"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해" "문제가 있다"에서는 '있다'가 어울린다. 여기서 '있다'는 존재ㆍ상태를 나태낸다. "큰일이 났다"는 긴박한 움직임을 나타내지만, "큰일이 있다"는 정적이다. 문맥에 맞는 것을 써야 한다. "웬 사고가 잇따라 있는지(-> 나는지)." "실제로 있었던(-> 있은 -> 일어난) 이야기." "시사회가 있었다(-> 열렸다)." "어디서 있었던(-> 연) 강연인가요?" "합창단의 찬양이 있겠습니다(-> 합창단이 찬양하겠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 구원을 확신하는 사람)." "지금 가고 있는 중이다." -> "지금 가고 있다." -> "지금 간다.": 우리말에서 움직임이나 상태는 찰나 같은 순간에 끝나지 않고 잠시라도 지속하여 그 자체로 진행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하고 있다'에서 '있다', '중이다'는 진행의 의미여서 잘못하면 진행의 의미를 겹친다. '사회에 산재해 있는 문제'는 '사회에 산재한 문제'로, '쓰러져 있는 나무'는 '쓰러진 나무'로 쓰면 간결하다.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도 '산 자와 죽은 자'로 하면, '와'의 앞뒤를 대등하게 이으며 현재 상태를 나태내기에 충분하다. 변변한 기념식도 없었다. -> 변변찮은(조촐한) 기념식도 없었다.: '변변하다'는 '그럭저럭 괜찮다' ' 제대로 갖춰 넉넉하다'는 뜻이다. '변변한 살림살이가 없다'라고 하면, '살림살이는 있지만 괜찮은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 마을에는 학원도 없다'를 의미할 때, '변변한 학원도 없다'가 아닌 '변변찮은 학원도 없다'라고 해야 한다. 속담에 "아내 자랑하는 놈치고 변변한 놈 없다"가 있다. 드라마 '어머니의 추억' 같은 경우는 가장 새롭습니다. -> 드라마 '어머니의 추억'은 가장 새롭습니다. : '같은 경우'는 특정 상황을 공유하는 집단을 뭉뚱그려 말한다. "세상이 다 욕을 해도, 굶기를 밥 먹듯 한 나 같은 경우는 그러지 않는다"에서, '나 같은 경우'는 '나' 말고도 나와 같은 상황을 겪은 여러 사람을 뭉뚱그려 이른다. 나 같은 경우는 음악으로 스트레스를 풉니다. -> 내 경우는(나는)... 오후에 요란한 소나기가 내리겠습니다(방송). -> 오후에 소나기가 세차게 내리겠습니다.: '요란하다'는 '야단스럽게 시끄럽고 어지럽다'는 말로 부정적인 의미다. 세차게 내리는 소나기는 자연 현상으로 메마른 대지를 식히고 적시기에 반가울 때가 많다. 지붕을 때리는 소나기 소리는 요란하기는커녕 음악처럼 들릴 때도 있다. 상황에 따라서는 '시원한 소나기' '반가운 소나기' '반갑지만은 않은 소나기' 따위로 쓸 수 있겠다. 키운 우리 소가 키워진 외국 소보다 낫다. -> 정성스레 기른 우리 소가 막 키운 외국 소보다 낫다.: '기르다'는 '보살펴 키우다'라는 뜻이다. '기르다'와 '키우다'는 느낌이 좀 다르다. 잡은 밍크고래인가. 잡힌 밍크고래인가. -> 일부러 잡은 밍크고래인가. 우연히 잡은 밍크고래인가[우연히 그물에 걸린(잡힌) 밍크고래인가].: '잡은'과 '잡힌'의 구분을 예문처럼 해서는 곤란하다. '잡힌 밍크고래'를 우연히 잡힌 것으로 한정할 수 없다. '우연히'는 '어떤 일이 저절로 이루어져 공교롭게'라는 뜻이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성경. Nothing is covered up that will not be uncovered, and nothing secret that will not become known.) -> 감춘(묻은) 것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고, 비밀(진실, 숨긴 것)이 알려지지(밝혀지지) 않는 것이 없나니 -> 감춘 것은 반드시 드러나고, 비밀은 다 알게 마련이니: '감추다'와 '숨기다'는 별 차이가 없다. '감추인 것'과 '숨긴 것'도 같은 말이다. '진실은 다 알게 마련이다'에서 보듯 현재형으로 진리나 습관을 나타낸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 하늘은 정진하는(힘써 나아가는) 사람을 돕는다.: 'Heaven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에서 'help themselves'는 글자 그대로는 '자신을 돕다, 스스로를 향상하다'지만 '힘써 이루다, 노력하여 발전하다'로 해석해야 한다. 시차가 달라 새벽에 축구를 봤다. -> 시차가 있어(지역 간 시간 차이 때문에)... 정치인으로서 금도를 넘지 마라. -> 정치인으로서 도를 넘지 마라.: 금도는 '다른 사람을 포용할 만한 도량'이라는 뜻이다. 400원이세요. -> 400원이에요(입니다).: '시'는 주체를 높이는 말이다. '선생님이 오신다'라고 말할 때나 쓴다. 착한 가격, 착한 기업, 착한 술 -> 순한 가격, 순한 기업, 순한 술: '착한'은 사람에게만 쓴다. 사람이 소속한 단체 같은 경우는 의인화하여 쓸 수 있겠다. 그 사람 어깨에 권한[짐]을 맸다. -> ...멨다. 고마와라, 놀라와라. -> 고마워라, 놀라워라. 생존률이 증가했다. -> 생존율이 증가했다.: '이선, 법'을 기억하면 편리하다. '이선'에는 '율'로, '법'에는 '률'로 쓴다. '이'는 앞 단어에 받침이 없는 경우로 '이율' '비율' '요율' 따위가 있다. '선'은 ㄴ 받침이 있는 경우로 '선율' '환율' '할인율' 등이다. '법'은 받침이 있는 경우로 '법률' '성장률' 등이 있다. 그 회사는 오래됐고, 본부 건물도 300년 전에 지어졌다. -> ...지었다.: '-는'과 '-도'는 모든 격에 쓴다. 부사구에도 가능하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이것을 주격 조사 등과 구분하여 보조사라고 한다. 보조사는 주격 보격 목적격 부사격 등의 역할을 한다. 8개월 전 경고된 재난: '경고하다'는 가능해도 '경고되다'는 안 된다. 이미 예고된 대로 훈련을 실시하겠다. -> 이미 예고한 대로...: '예고한 절차' '비를 예고하는 구름'처럼 써야 바람직하다. 고령화는 예견됐던 일이다. -> 고령화는 예상했던 일이다. -> 고령화는 예상한 일이다. 예고된 실패 -> 예상한 실패 예고된[예견된, 예상된] 재앙 -> 예고한[예견한, 예상한] 재앙 -> 벌써부터 경고한 재앙: '재앙'은 긴박한 느낌이 들므로, '재앙을 예고하다'보다는 '재앙을 경고하다'로 쓰는 것이 낫겠다. ('느낌이 들므로' '힘이 들므로'에서 '들므로'는 어려우니 유의해야 한다. '들다'의 명사형은 '듦'이고, '듦+으로'가 '들므로'로 된 것이다. 받침 없는 말이나 ㄹ 받침을 가진 말은 '음'이 아니라, 'ㅁ'을 붙여 명사형을 만든다. '낯설음' '거칠음'이 아니라, '낯섦' '거칢'이다. 그리고 '울음' '얼음'처럼 쓰는 경우가 있다. 이것을 파생명사라고 하는데, 서술성이 없어지고 의미가 좀 변한다. 용언의 명사형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또 '그럼+으로' '앎+으로'는 방법이나 수단의 상태이고, '그러므로' '알므로'는 원인이나 이유를 나타낸다. '힘이 들기 때문에'는 '힘이 들므로'로 쓰면 된다.)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 그대 있으매(있기에)...: '으매'나 '매'는 원인이나 근거를 나타내는 연결 어미고, '에'는 원인을 나타내는 조사다. '있기에'는 '있+기에'로 '있음에'는 '있+음+에'로 분석해, '있기에'는 되고 '있음에' '있으메'는 안 되는 걸로 나와 있다. 조사 '에'는 명사나 명사구에만 붙는다.         책에는 이렇게 써 있다. -> ...쓰여 있다(써 놓았다).: "책에는 이렇게 써 놓은 게 있다"라는 의미일 것이다. 글이 쓰여져 있다. -> 글이 쓰여 있다(글을 써 놓았다).: '쓰다'의 피동사는 '쓰이다'다. 연필로 써져 있는 글씨: 능동형인 '연필로 쓴 글씨'가 자연스럽다. '써지다'도 피동사로 맞는 말이기는 하다. '써지다'는 '쓰다+어지다' 형태로, "글씨가 잘 써지다"로 쓸 수 있다. "축하합니다"라고 쓰인[써 있는, 적힌] 플래카드 -> "축하합니다"라고 쓴[적은] 플래카드 비밀이 숨겨 있다. -> 비밀이 숨겨져 있다.: '숨기다'는 '숨다'의 사동사다. '숨기다'의 피동사는 '숨겨지다'다. 과거의 명성이 잊혔다.: '잊히다'가 피동사이므로 맞게 썼다. 잊혀질 권리 -> 잊힐 권리[기록이 사라질 권리] 교훈이 담겨져 있다. -> 교훈이 담겨 있다.: '담다'의 피동사는 '담기다'다. 책에 담겨진 교훈: 틀린 말이다. '책에 담아진 교훈'은 가능하기는 하다. 책에 담긴 교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책에 담은 교훈'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기다랗게 뽑아져 나오는 가래떡 ->기다랗게 뽑혀 나오는 가래떡(기다랗게 뽑아내고 있는 가래떡): '뽑아지다'라는 말을 만들 수는 있지만, 국어사전에 피동사 '뽑히다'가 있다. "피를 뽑아내다"처럼 능동형을 쓰면 더 쉽다. 책이 펴 있다.(성경) -> 책이 펴져 있다. 죽음의 재가 지금도 뿜어 나온다. -> 죽음의 재가 지금도 뿜어져 나온다(죽음의 재를 지금도 뿜어낸다). 무슨 단추가 잘못 꿰워져 있을까. -> 무슨 단추를 잘못 끼워 놓았을까(무슨 단추가 잘못 끼워져 있을까).: '단추를 끼우다'이지, '단추를 꿰다'가 아니다. '꼬챙이로 오징어를 꿰어 굽다' '코를 꿰다' '구슬도 꿰야 보배다'처럼 쓴다. 그의 선언이 믿겨지지 않는다. -> ...믿기지 않는다(믿어지지 않는다).: '믿다'의 피동사는 '믿기다'다. '믿어지다'도 가능하기는 하다. 치밀하게 계획된 도발 -> 치밀하게 계획한 도발 이 책은 초보자에게 이해되기 어렵다. -> 이 책은 초보자가 이해하기 어렵다. 연기가 솟았는데, 그 원인은 파악되지 않았다. -> ...그 원인은 파악하지 못했다. 그에게 지워진 짐 -> 그에게 지운 짐 썩어져 가는 -> 썩어 가는 감추인 것 -> 감춘 것: '감추이다'가 '감추다'의 피동사이기는 하다. 깊이 묻히인 보배 -> 깊이 묻힌 보배 아무도 뵈이지 않고 -> 아무도 보이지(뵈지) 않고 그 사람이 장사지낸 바 되었다. -> 그 사람을 장사 지냈다. 그에게 잡힌 바 된 그것 -> 그에게 잡힌 그것 너희는 비추이는 등불이라. -> 너희는 비추는 등불이라.: '비추다'는 '빛을 내는 대상이 다른 대상에 빛을 보내어 밝게 하다'다.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 ...앞에 비치어: '비치다'는 '빛을 내어 빛나다' 등의 뜻이다. 죄악에 얽매어 헤매던 죄인이 -> 죄악에 얽매여 헤매던 죄인이: 능동사는 '얽매다'고, 피동사는 '얽매이다'다. '사람을 얽매어 붙잡아 갔다' '그 사람은 일에 얽매여 산다'처럼 쓴다. 쓰임새 : 왜 하필 피동형에서 왔을까 의아한데, 능동형에서 온 '씀씀이'도 있다. "그 사람은 씀씀이가 크다"와 "이 방은 쓰임새가 다양하다"를 비교하면 뜻을 구분할 수 있다.   태극기가 새겨진 유니폼(틀린 말은 아니다) -> 태극기를 새긴(아로새긴) 유니폼 새긴창: (국어사전) 여러 가지 꽃무늬 따위를 새겨서 만든 창. 바위에 이름이 새겨 있다.(틀린 말) -> 바위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얼굴에 써 있다.: 틀린 말이긴 하나, 많이 쓴다. "얼굴에 속마음을 써 놓아, 나타난 표정이 있다"나, "얼굴에 써 놓은 것(빛)이 있다"를 의미한다고 보면 어떨까 한다. "얼굴에 써 있다"를 살려 쓸 수 없다면, 능동형인 "얼굴에 써 놓았다"를 쓰는 것이 가장 나을 듯싶다.           많이 틀리는 발음: 머리를 자르자[짜르자]. -> ...[자르자]. 바닥을 닦아라[따까라]. -> ...[다까라]. 과 대표[꽈 대표], 과 사[꽈 사], 과락[꽈락] -> ...[과 대표], ...[과 사]... [과락] 진짜 아닌 가짜[까짜] -> ...[가:짜] 고추장[꼬추장], 복음밥[뽀끔밥] -> ...[고추장], ...[보끔밥] 고기를 궈[꿔] 먹자. -> ...[궈] 먹자. 거꾸로[꺼꾸로] -> ...[거꾸로] 센[쎈] 불로 요리한다. -> 센[센]... 세게[쎄게] 눌러라. -> 세게[세:게]... 새[쌔] 옷이다. -> 새[새]... 바람이 세게[쎄게] 분다. -> ...[세게] 분다. 새끼[쌔끼]를 낳았다. -> ...[새끼]를 낳았다. 의혹[의횩]을 품다. -> 의혹[의혹]... 머리(눈)를 감다[깜따]. -> ...[감:따] 날짜를 당기자[땅기자, 땡기자], 입맛이 당긴다[땡긴다], 줄 끝을[끄츨] 당겨라[땡겨라] -> 날짜를 당기자[당기자], 입맛이 당긴다[당긴다], 줄 끝을[끄틀] 당겨라[당겨라] 세련된[쎄련된] -> ...[세련된] 조금[쪼끔] -> ...[조금] : '조금'의 센 말로 '조끔' '쪼끔'은 맞지만, 우리말은 되도록 된소리보다 예사소리로 적는 것을 표준어로 한다. 된소리 현상은 우리말 순화에 역행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황폐화한 농토, 습관화한 행동: '황폐화하다' '습관화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가 가능하다. '황폐화되다' '습관화된'으로 쓸 수 있지만, 굳이 쓸 필요가 없다. '-화하다' '-화한'을 쓰면 다 된다. 자동사와 타동사 중 선택하여 적용할 수 있기에 그렇다. 전문화하다, 심화하다, 약화하다, 무력화하다(표준국어대사전에는 미등재) , 다변화하다 등이 이와 같은 종류다. '가속화하다'도 같은 종류인데 '가속화되다'는 없는 말이다. '가세되다'가 가능하지 않듯이, 힘을 더하는 형국이므로 피동형이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부품 공급을 다변화시키는 방법 -> 부품 공급을 다변화하는 방법: '-시키다' 형태를 만들지 말고 '다변화하다'를 타동사로 쓰면 된다. '-시키다'는 다른 사람을 시켜 행동하게 하는 의미로 다른 말이다. 선제공격으로 적을 무력화시키다.(국어사전의 문장) -> ...적을 무력화하다. 문제의 범위를 국한시키다.(국어사전의 문장) -> ...범위를 국한하다. 사장은 그 일을 자신에게 담당시켰다. -> ...자신이 담당했다. 사장은 그 일을 부장에게 담당시켰다.: '다른 사람을 시켜 담당하게 했다'는 의미로 맞는 말이다. 특화하다, 강화하다 , 객관화하다, 완화하다: 타동사만 가능하다. 올림픽은 한반도 긴장을 완화시킨다. -> ...완화한다. 양극화하다, 진화하다, 변화하다: 자동사만 가능하다. 자동사여서 '-화시키다'라는 말을 두루 쓸 수 있다. "기술을 개발하여 사회를 변화시킨다." 사태를 악화시켰다.: '약화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이고, '악화하다'는 자동사다.   그 작품은 현대 문명의 위기를 부각시킨 노작이다.(국어사전) -> ...위기를 부각한 노작이다.: '부각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둘 다 가능하다. 어느 국어사전에는 타동사로만 돼 있다. 폐쇄적 민족주의자는 이방인을 소외시킨다. -> ...이방인을 소외한다. 엄격한 제도를 적용하여 이들을 사형시켰다. -> ...사형했다(사형에 처했다). 오해를 불식시키다. -> 오해를 불식하다. 이 제도를 부활하면: '부활하다'가 자동사와 타동사이므로 맞는 문장이다. 몇몇 국어사전에는 '부활하다'가 자동사로만 나와 있다. 이번 퀴즈 문제를 맞혀 친구들을 부활시키겠다.: '다시 살아나다'라는 뜻의 '부활하다'는 자동사다. '쇠퇴하거나 폐지한 제도 등'에 쓰는 '부활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다. 기발한 아이디어로 사람들을 놀래켰다. -> ...사람들을 놀랬다(놀라게 했다). : '놀래다'는 '놀라다'의 사동사다. 국회는 인준을 부결시켰다. -> 국회는 인준을 부결했다. 권위주의자는 위의 생각을 아래에 이해시키려 한다.: 올바른 말이다. '이해하다'는 타동사인데, 여기서 '이해하다'의 주체는 위가 아니라 아래다. 즉 아래가 이해하게 만드는 상황이다. "먼저 잘 이해하고 남을 이해시켜라." 그의 몰골은 인도의 간디를 연상시켰다. : '연상하다'가 타동사인데 맞게 쓴 사례다. '그 사람' 자신이 연상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연상하도록 만든 상황이다. 다음 보기를 보고 연상되는[연상시키는] 개념을 찾으시오. -> ...연상하는(떠오르는, 관계있는) 개념을 찾으시오. 국회가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국회가 통과한 것이 아니라, 국회가 통과하게 만든 상황으로 올바른 문장이다. '통과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가 가능하다. 총리는 원전 가동을 중지했다[중지시켰다].: '...중지했다'는 동작의 결과가 총리가 취한 조치에서 연유했다는 관점이다. '...중지시켰다'는 담당 부서를 시켜 중지하게 했다는 의미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중지하다'가 타동사이므로 '...중지했다'를 쓰면 무난하다. 그 공무원은 청탁을 하지 않도록 민원인을 인식시켰다.: 타동사 '인식하다'를 맞게 썼다. 담합에 가담한 사람이 당국에 신고하여 담합을 중단시켰다.: '중단하다'가 자동사와 타동사지만 이 예문은 맞는다. 회장은 김은미를 소개시켜 줬다. -> 회장은 김은미를 소개해 줬다. 실적이 좋다고 기관장을 무조건 연임시킬 수는 없다. -> '연임하다'가 타동사지만, 맞는 문장이다. 그 농부는 불량 농산물을 유통시켰다. -> ...농산물을 유통했다.: '유통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가 가능하다.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유통시키고 있는] 식품 -> ...유통하고 있는 식품 대통령은 그 정치인을 복권시켰다.: '복권하다'는 권리를 상실한 사람이 권리를 되찾는 것으로 타동사다. 여기 문장은 맞는다. 사장은 문화를 기업 경영에 접목시켰다. -> ...접목했다.: '접목하다'는 타동사다. 과열 선거로 갈등을 증폭시키면 -> ...갈등을 증폭하면: '증폭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다. 대머리라고 표현하면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킬 수 있다.: 자동사 '저하하다'를 맞게 썼다. 감면하면 도덕적 해이를 유발한다.: 타동사 '유발하다'를 맞게 썼다. 정부는 부실 은행을 퇴출하기로 했다. -> ...퇴출시키기로 했다.: '퇴출하다'는 자동사다. 급작스럽게 변경하면 불신을 가중시킨다. -> 불신을 가중한다.: '가중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다. 불황은 소비를 위축시킨다.: 자동사 '위축하다'를 맞게 썼다. 식구라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애완견을 포함시키지 않는다. -> ...포함하지 않는다.: '포함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다. 법에 따라 그 부동산을 국가에 귀속시켰다. -> ...귀속했다.: '귀속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다. 분노한 민심이 그 신문을 폐간시켰다[폐간했다].: 민심이 폐간하도록 만든 상황이어서 '폐간시켰다'가 된다. '분노한 민심이'이 야기한 궁극적인 결과를 생각하면, '폐간했다'도 가능하다. 그 독재 정권은 수틀리면 신문을 그냥 폐간시켰다. -> ...폐간했다. 여론이 그 사람을 사면시켰다[사면했다]. : 여론에 따라 대통령이 사면한 상황이므로 둘 다 가능하다. 경쟁적으로 군사력을 증대시켰다. -> ...증대했다.: '증대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다. 총리는 기어코 의지를 관철시켰다. -> ...관철했다. (좀 복잡하지만 '-시키다'를 남발하지 않으면 대체로 맞을 것이다. '-하다'를 썼는데 어색하면 다시 검토하는 것이 좋겠다.)   경기를 역전시켰다. -> ...역전했다.: '역전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다. 자동사만 있는 국어사전도 있다. 만남을 사랑으로 승화시켰다.: '승화하다'는 자동사. 학교에 보낸 지침을 통일시켰다. -> ...통일했다.: '통일하다'는 타동사다. '삼국을 통일했다'처럼 쓴다. 그것들을 통일되게 했다. -> ...통일했다[똑같게 했다] . 위기를 촉발했다.: '촉발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다. 자동사로만 있는 국어사전도 있다. 여론을 환기시키다. -> ...환기하다.: '환기하다'는 타동사. 성적을 반영시키다. -> ...반영하다.: '반영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그 의원은 급식 예산을 정부에 건의해 반영시켰다.: 반영하게 한 것이므로 맞는 문장이다. 위원회를 발족시켰다. -> ...발족했다.: '발족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부실 대학을 연명시키는: '연명하다'는 자동사다. '연명되다'는 가능하지 않다. 기력을 회복시키는 -> ...회복하는: '회복하다'는 타동사다. "사랑의 감정을 회복했다" "피로를 풀고 원기를 회복했다"로 쓴다. '피로 회복'이 아니라 '피로 탈출'이다. "스트레스 풀기(해소)"와 같이 "피로 풀기(해소)"도 괜찮겠다. 속된 표현으로 "피로를 한 방에 날린다"도 있다. 피로한 몸을 회복했다.: '피로한 몸'을 원 상태로 되돌렸다는 말이므로 맞는다. 기업의 피해를 회복하기 어렵다. -> ...피해를 복구하기 어렵다. 해당 기업의 자산으로 일제 강점기 징용자의 피해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 ...피해를 배상할 수 있을 것이다. 소원해진 부부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 소원해진 부부 관계를 복원해야 한다.: 둘 다 가능하다. 신라는 나락에서 회복하지 못했다. -> 신라는 나락에서 본 모습을 회복하지 못했다. 갈등과 상처를 해소해야 믿음이 회복한다. -> ...믿음을 회복한다(믿음이 회복된다). 환자를 수술하여 시력을 회복시킨 의사: 회복하도록 만든 것이므로 맞는다. 강대국은 그 종족을 예속시켰다.: '예속하다'는 자동사. 골을 성공시켰다.: '성공하다'는 자동사. 기업을 공중분해시켰다. -> 기업을 공중분해로 내몰았다.: '공중분해'만 표준국어사전에 올라 있고, '공중분해하다'는 없다. 세력을 확장하다.: '확장하다'는 타동사. 불법 유통을 부추켰다. -> ...부추겼다.: '부추기다'는 타동사. 서예를 숙달했다.: '숙달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기술을 숙련했다.: '숙련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자동사만 있는 국어사전도 있다. 적을 고립시켰다.: '고립하다'는 자동사. 민주주의를 파탄하고 -> 파탄시키고: '파탄하다'는 자동사. 독재 정권을 전복했다.: '전복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남편을 복직시켜 달라고: '복직하다'는 자동사. 목표를 달성시켜 -> ...달성하여: '달성하다'는 타동사. 일을 성사시켰다. -> ...성사했다.: '성사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다. 어느 국어사전에는 자동사로 돼 있다. 인공적으로 비를 생성시켰다. -> ...생성했다.: '생성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부대를 이동시켰다. -> ...이동했다.: '이동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입국한 일본 의원을 이동시켜: 이동하도록 하는 것이므로 맞는다. 기업 유치를 무산시켰다.: '무산하다'는 자동사. 아버지의 정성으로 아들을 당선시켰다.: '당선하다'는 자동사다. '위원장에 당선하다'처럼 쓴다. 일을 진척시켰다. -> ...진척했다.: '진척하다'는 타동사. 공감대를 형성했다.: '형성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타동사만 있는 국어사전도 있다. 반대 투쟁에 그들을 가세시켰다.: '가세하다'는 '힘을 보태다'의 뜻으로 자동사다. '가세되다'는 가능하지 않다. 변리사를 참여시켜라.: '참여하다'는 자동사이고, '참여되다'는 가능하지 않다. 고객을 만족시켰다.: '만족하다'는 자동사로 '사장은 그 일에 만족하여...'처럼 쓴다. '만족한 얼굴'처럼 형용사로도 쓰며, '만족되다'는 가능하지 않다. 알권리[기대, 조건, 의무]를 충족시키다. -> ...충족하다.: '충족하다'는 타동사와 형용사다. 다음 설명을 만족하는 숫자는? -> ...만족시키는(충족하는) 숫자는? 신의 존재를 상기시키는 사람이 있다.: '상기하다'는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여 내다'의 뜻으로 타동사다. 여기서는 다른 사람이 상기하게 만드는 상황으로 맞게 썼다. 복지 제도를 완성시켰다. -> ...완성했다. -> ...만들었다.: '완성하다'는 타동사. 꽃으로 완성시킨 작품 -> 꽃으로 완성한 작품 -> 꽃으로 만든 작품 다른 부대로 전출시킨다.: '전출하다'는 자동사. 교역량을 증가시켰다.: '증가하다'는 자동사. 세금을 증감하면 정부 지출도 변한다.: '증감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국민의 열망이 민주주의를 성장시켰다.: '성장하다'는 자동사. 개를 훈련시켰다. -> 개를 훈련했다.: '훈련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다. 어느 국어사전에는 자동사로만 돼 있고, 어느 국어사전에는 타동사로만 돼 있다. 훈련소에서 신병을 훈련했다. : 훈련병은 훈련을 받는 입장이다. '신병을 훈련하게 하다'가 아닌 것이다. 내가 너를 연단하리라.: '훈련하다'와 마찬가지로, '연단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우리말 성경은 오래된 책이라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시키다'를 남발하지 않고 잘 작성했다.) 그가 우리를 감동하사(성경) -> ...감동시키사: '감동하다'는 자동사이며, '감동되다'는 안 된다. 너희를 이간시켜(성경) -> ...이간하여: '이간하다'는 타동사이며, '이간되다'는 안 된다. 학생을 교육시켰다. -> 학생을 교육했다.: '교육하다'는 타동사다. 학생 입장에서는 교육을 받는 것이므로, '학습시키다'와 달리 '교육시키다(교육하게 하다)'가 아니다. 우리 반은 현장 학습을 했다.: '학습하다'가 타동사다. 아이들에게 현장 학습을 시켰다.: 타동사지만 학습을 하도록 시키는 행위는 '학습시키다'로 쓴다. 아이를 공부시켰다.: '공부하다'는 타동사이며, '공부되다'는 가능하지 않다. 공부하도록 시키는 행위는 '공부시키다'를 쓴다. 딸을 유치원에 입학시켰다.: '입학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타동사를 쓰더라도 입학하도록 만든 것이므로 '입학시키다'가 맞는다. 비행기를 폭파시켰다. -> ...폭파했다.: '폭파하다'는 타동사. 질서를 파괴하다.: '파괴하다'는 타동사. 배를 폭침시키고 -> ...폭침하고: '폭침하다'는 타동사. 적을 공격해 괴멸시켰다. -> ...괴멸했다.: '괴멸하다'는 타동사. 모조리 구속시켜 -> ...구속하여: '구속하다'는 타동사. 국회를 해산했다.: '해산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자동사 '해산하다'를 유발하는 행위는 '해산시키다'이다. 국민을 실망시키다.: '실망하다'는 자동사. 농촌을 탈바꿈시켰다. -> ...탈바꿈했다.: '탈바꿈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안심하다'는 자동사. 그를 방송에 출연시켰다.: '출연하다'는 자동사. 교육을 정치 도구로 전락시키는: '전락하다'는 자동사. 검찰은 장관을 투옥시켰다. -> ...투옥했다.: '투옥하다'는 타동사. 그 공무원을 좌천시키고: '좌천하다'는 자동사. 타동사로만 된 국어사전도 있다. 악습을 퇴치시켜야 -> ...퇴치해야: '퇴치하다'는 타동사. 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출범하다'는 자동사. 분위기를 고조시키다. -> ...고조하다.: '고조하다'는 타동사다. 자동사로만 된 국어사전도 있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 ...함락했다.: 예문처럼 '적을 무너뜨리는 의미'의 '함락하다'는 타동사다. '땅이 무너지는 의미'는 자동사다. 정치 논리를 개입시키면: '개입하다'는 자동사. 무수한 생명을 몰살시켰다. -> ...몰살했다.: '몰살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사장은 직원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 ...진작했다.: '진작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이고, '진작되다'는 말은 표준국어대사전에 없다. 일제 식민지에서 우리를 해방시켰다. -> ...해방했다.: '해방하다'는 타동사다. 유대인은 로마 압제에서 자기들을 해방할 구세주를 원했다. 경륜을 사장시키다. -> ...사장하다.: '사장하다'가 타동사. 비정상적인 관계를 성립시킨: '성립하다'가 자동사. 인권을 증진시킨 -> ...증진한: '증진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문화를 정착시키다.: '정착하다'가 자동사. 정복한 나라를 굴복시켰다.: '굴복하다'가 자동사. 섬 주민을 이주시키고: '이주하다'는 자동사이며, '이주되다'는 가능하지 않다. 법정 부담금을 교비 회계에서 부담시킨 대학 -> ...부담한 대학: '비용을 부담하다'처럼 '부담하다'는 타동사다. '부담되다'는 사전에 없는 말이다. 정치 투쟁의 상징으로 변모시켰다.: '변모하다'는 자동사. 우리 의원을 자제시키고: '자제하다'는 '자기의 감정을 억제하는 행위'로 타동사다. '자제되다'는 가능하지 않다. 예문은 자제하도록 시킨 것이므로 맞는다. 인기주의를 종식시켜야: '종식하다'는 자동사. 양성자를 충돌시킬 때: '충돌하다'는 자동사. 존재감을 만방에 확인시켰다. 일본인에게 역사를 확인시켜 주자.: '확인하다'는 '확실하게 알아보거나, 확실히 인정하는 행위'로 타동사다. 예문은 확인하게 하는 것이므로 맞는다. 정신을 마비시키는: '마비되다'가 자동사이며, '마비하다'는 없는 말이다. 어느 국어사전에는 '마비하다'가 있다. 호우를 지구 온난화와 결부시켜 -> 호우를 지구 온난화와 결부하여: '결부하다'는 타동사. 결합체를 분리시키다. -> ...분리하다.: '분리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조각을 결합하다.: '결합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경제 성장을 희생시키고 : ...희생하고: '희생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다. "개인 생활을 희생했다." 신경을 흥분시키는: '흥분하다'가 자동사. 그 선수를 국가 대표에 합류시키겠다.: '합류하다'가 자동사. 민족과 개인을 일체화시키다. -> ...일체화하다.: '일체화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정신을 집중시키면 -> ...집중하면: '집중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특수 부대를 침투시켜: '침투하다'는 자동사. 아이를 요기시켜라.: '요기하다'가 자동사. 민심을 동요시킨다.: '동요하다'가 자동사. 과일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 '망신하다'는 자동사이고 '망신되다'는 없는 말이다. 형량을 변경시켰다. -> ...변경했다.: '변경하다'가 타동사. 군중을 감화시켜 -> ...감화하여: '감화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민중을 교화시켜 -> ...교화하여: '교화하다'는 타동사. 독을 제지시키다. -> ...제지하다.: '제지하다'는 타동사이며, '제지되다'는 사전에 없는 말이다. 백성을 동원시켰다. -> ...동원했다.: '동원하다'는 타동사다. 어느 국어사전에는 자동사와 타동사로 돼 있다. 왜군을 궤멸시킨 -> ...궤멸한: '궤멸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다. 로스쿨 학생을 연수시켜: '연수하다'는 '학문 등을 연구하고 닦다'는 뜻으로 타동사이며, '연수되다'는 없는 말이다. 예문은 학생을 연구하도록 시키는 것이므로 맞는다. 그 정치인은 우리를 많이 생각하게 한다.: '생각하다'가 자동사와 타동사지만, 예문은 맞는다. 사장은 그 사람을 승진시켰다.: '승진하다'는 자동사다. '승진되다'는 안 된다. 삶의 질을 향상시켰다. -> ...향상했다.: '향상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자동사로만 등재한 국어사전도 있다. 그 선수는 명예를 격상시켰다. -> ...격상했다.: '격상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타동사로만 등재한 국어사전도 있다. 연구소에 연구를 시키겠다.: '연구하다'가 타동사지만 올바르게 쓴 말이다. 손실을 최소화하다.: '최소화하다'는 타동사이며, '최소화되다'는 없는 말이다. 부정적 이미지를 희석하고: '희석하다'는 타동사. 빗물을 발산시켜 -> ...발산하여: '발산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감정을 잉태시킨다. -> ...잉태한다.: '잉태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열차를 폭사시킨: '폭사하다'는 '폭탄의 파열로 죽는다'는 말로 자동사다. 시선을 고착시키다. 민심을 고착시키다.: '고착하다'는 자동사다. 타동사로 등재한 국어사전도 있다. 소리를 글자로 시각화시키는 -> ...시각화하는: '시각화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한류를 활성화시키는 -> ...활성화하는: '활성화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사용료를 인상시켜 -> ...인상하여: '인상하다'는 타동사. 현대적인 기술을 무색하게 하다(무색게 하다).: '무색하다'는 형용사로 '부끄러워 볼 낯이 없다'는 뜻이다. 그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대피하다'는 자동사다. 타동사로 등재한 국어사전도 있다. '대피되다'는 안 된다. 군대를 주둔시키다.: '주둔하다'는 자동사다. '주둔되다'는 안 된다. 민주 정치를 제도화시키는 -> ...제도화하는: '제도화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역량을 결집시켰다. -> ...결집했다.: '결집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채취를 금지시켰다. -> ...금지했다.: '금지하다'는 타동사. 얼마를 황령시켰는가. -> ...횡령했는가.: '횡령하다'는 타동사. 노동자를 독성 물질에 노출시키고 -> ...노출하고: '노출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근로자와 사용자를 대립시키는: '대립하다'는 자동사. 욕망을 내재한다.: '내재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자동사로만 등재한 국어사전도 있다. 민족을 멸절하리라.: '멸절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앗수르 왕들이 그것을 어떻게 멸절시켰는지(성경) -> ...멸절했는지 만물을 소생시키고: '소생하다'는 자동사. 그것을 재구성하여 흡수시켰다. -> ...흡수했다.: '흡수하다'는 타동사. 중국을 일본과 대비시켜 보고 -> ...대비하여 보고: '대비하다'는 타동사. 분쟁을 대비(對備)하다.: '대비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이며, '대비되다'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없는 말이다. 과거를 미화시켰다. -> ...미화했다.: '미화하다'는 타동사. 방향을 전환시킬 -> ...전환할: '전환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탈락시킬 구실: '탈락하다'는 자동사. 민주주의를 정착시켜: '정착하다'는 자동사. 관계를 유지ㆍ발전시켜 ->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유지하다'는 타동사. 농어민을 직접 연결시켜 -> ...연결하여: '연결하다'는 타동사. 패스를 받아 골로 연결시겼다. -> ...연결했다. 홈런을 작렬했다. -> ...작렬시켰다.: '작렬하다'는 자동사로 '포탄이 작렬했다'처럼 쓴다. 나는 참가 신청을 주최 측에 접수시켰다.: '접수하다'는 타동사로 받는 쪽의 행위다. 제출하는 측의 입장에서는 접수하도록 하는 것이어서 예문은 맞는다. 과열을 진정시키다. -> ...진정하다.: '진정하다'는 타동사. 공급을 감소시켜 -> ...감소하여[줄여]: '감소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어느 국어사전에는 자동사로만 돼 있다. 부담을 반감시켰다. -> ...반감했다.: '반감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군사비를 증강시키다. -> ...증강하다.: '증강하다'는 타동사. 사상을 주입시키다. -> ...주입하다.: '주입하다'는 타동사. 우리를 세상과 접속시켰다. -> ...접속했다.: '접속하다'는 타동사. 그럴려면 면허를 반납시켜라. -> ...반납하라.: '반납하다'는 타동사이며, '반납되다'는 가능하지 않다. 호칭을 일치시키다.: '일치하다'는 자동사. 노을을 반사시키는 분위기 -> ...반사하는 분위기: '반사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고려장을 시키겠다. -> 고려장을 하겠다.: '장사하다'는 타동사. 가짜를 진짜로 둔갑시켰다.: '둔갑하다'는 자동사. 중국산 소금을 국내산으로 속여 팔았다. 둔갑한 소금이... -> ...둔갑시킨 소금이... : '둔갑한 여우'처럼 '둔갑한 소금'은 스스로 둔갑했다는 말이 되고 만다. 다만, '전설이 진실로 둔갑했다' '둔갑한 이야기' '둔갑한 보석' '부활한 인기' 등은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생물로 빗대어 표현한 것이므로 괜찮다. 영업을 정지했다.: '정지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법원은 선관위에 명하여 투표를 보류시켜야 했다.: '보류하다'가 타동사지만, 문장의 주체가 스스로 하지 않고 남에게 동작을 하게 하는 형태이므로 맞게 썼다. 대중을 세뇌시키다. -> ...세뇌하다.: '세뇌하다'는 타동사. 노인을 좌절시키다. : '좌절하다'는 자동사. 일을 진전시키다.: '진전하다'는 자동사. 권리를 신장시키는 -> ...신장하는: '신장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위험을 분산시켜라. -> ...분산하라.: '분산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계급을 강등시키다. -> ...강등하다.: '강등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키는: '반전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다. 몇몇 국어사전은 자동사로만 등재했다. '반대로 구르거나 형세가 뒤바뀌다'는 뜻에서는 자동사다. '차가 반전하여' '흑자에서 적자로 반전하여' 등이 그것이다. '위치ㆍ방향ㆍ순서 따위를 반대로 하다'에서는 타동사다. '선생님은 발표 순서를 반전하여'가 한 예다. 회사를 코스피에 상장시켰다. -> ...상장했다.: '상장하다'는 타동사. 그런 인식을 일반화시켰다. -> ...일반화했다.: '일반화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문제를 단순화시켜 -> ...단순화하여: '단순화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FTA를 기사회생시키는: '기사회생하다'는 자동사이며, '기사회생되다'는 가능하지 않다. 의미를 퇴색시키는: '퇴색하다'는 자동사. 위험을 주지시켰다.: '주지하다'는 타동사다. '여러 사람이 두루 알다'의 뜻으로 "다음 사실을 주지해 주시기 바랍니다"처럼 쓴다. "안전 수칙을 주지시키다"와 같이 여러 사람이 두루 알게 하는 행위는 '주지시키다'가 맞는다. 열을 방출시켜 -> ...방출하여: '방출하다'는 타동사. 문제를 야기시키다. -> ...야기하다.: '야기하다'는 타동사. 승리를 좌초시키다.: '좌초하다'는 자동사. 노숙인을 강제로 퇴거했다. -> ...퇴거시켰다.: '퇴거하다'는 자동사이며, '퇴거되다'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없는 말이다. 오염을 정화시켰다. -> ...정화했다.: '정화하다'는 타동사. 가슴속(마음)을 정화시켰다. -> ...정화했다.: '가슴 속'으로 쓰면 '마음'이라는 뜻이 되지 않는다. '뱃속'은 마음을 속되게 이르지만, '배 속'은 배의 안이라는 뜻이 되는 이치와 마찬가지다. 대금이 스타디움을 정화시킨다. -> ...정화한다. 군대를 출동시켜: '출동하다'는 자동사. 돈을 증식시키다. -> ...증식하다.: '증식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와해시킨 자리 -> 와해한 자리: '와해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방송 체계를 안착시키는: '안착하다'는 자동사. 공사를 지체시켰다고 -> ...지체했다고: '지체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다. 어느 국어사전에는 타동사로 돼 있다. 금융 위기를 재정 위기로 치환시킨 -> ...치환한: '치환하다'는 타동사. 공연을 연장시켰다. -> ...연장했다.: '연장하다'는 타동사다. 어느 국어사전에는 자동사와 타동사로 돼 있다. 일본 교과서에 역사적 오점은 생략시켰다. -> ...생략했다.: '생략하다'는 타동사. 출종제를 폐기시킨 결과 -> ...폐기한 결과: '폐기하다'는 타동사. 등급을 하향시켜: '하향하다'는 자동사이며, '하향되다'는 가능하지 않다. 정계를 은퇴하고 전국을 유랑했다. -> 정계에서 은퇴하고 전국을 유랑했다.: '은퇴하다'는 자동사이며, '은퇴되다'는 안 된다. '유랑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이며, '유랑되다'는 안 된다. 항공 모함을 진수시켰다. -> ...진수했다.: '진수하다'는 타동사. 개혁을 지연하다.: '지연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다. 타동사로만 돼 있는 국어사전도 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일본의 지정학적 취약성을 통감시켰다.: '통감하다'는 타동사로 "약소국의 설움을 통감했다"와 같이 쓴다. 예문은 그렇게 느끼도록 한 것이므로 맞는다. 9.11테러는 실존적 위협을 예감시켰다.: '예감하다'는 타동사로 "죽음을 예감하다"처럼 쓴다. 예문은 다른 사람을 시킨 행위로 맞는다. 자리매김시킬 것이다.: '자리매김하다'뿐 아니라, '자리매김'은 표준국어대사전에 없다. '자리매김하다'는 어법에 문제가 있으므로 '자리(를) 잡다'를 쓰면 된다./ 네이버, 다음, 한글학회 우리말사전, 표준국어대사전(책자) 등에 '자리매김, 자리매김하다, 자리매김되다'가 없었다. 인터넷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올라 있다. 네이버, 다음도 수정했다. 원자로를 냉각시키다. -> ...냉각하다.: '냉각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사건을 축소시켜 -> ...축소하여: '축소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적군을 전멸시켰다.: '전멸하다'는 자동사.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성경): '진멸하다'는 '무찔러 모조리 죽여 없애다'의 뜻으로 타동사다. 제조법을 유출시켰다. -> ...유출했다.: '유출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다. 자동사로만 등재한 국어사전도 있다. 노예를 이탈시키고: '무리에서 이탈하다' '대열을 이탈하다'처럼 '이탈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로 쓴다. 예문은 다른 사람을 시킨 것이므로 맞는다. 자유를 확산하는 -> ...확산시키는: '확산하다'는 자동사. 경찰을 당장 철수시켜 -> ...철수하여: '철수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책임을 전가시키는 -> ...전가하는: '전가하다'는 타동사. 시장을 작동시키는 -> ...작동하는: '작동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다. 자동사로만 등재한 국어사전도 있는데, '기계를 작동하다'처럼 타동사로도 쓴다. 강의를 실습과 연계시키는 -> ...연계하는: '연계하다'는 타동사. 위안화를 절상시키는 -> ...절상하는: '절상하다'는 타동사이며, '절상되다'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없는 말이다. 동해와 일본해를 병기시키도록 힘쓰자. -> ...병기하도록 힘쓰자.: '병기하다'는 타동사다. 예문은 사동의 의미다. '-도록'은 '의식적으로 끌어감'을 나타낸다. '도록'과 '시키다'를 함께 썼는데, '사동의 의미'가 겹친다. '-도록'은 앞의 내용이 뒤에서 가리키는 사태의 목적이나 결과 따위가 됨을 나타내는 연결 어미로 반드시 사동의 의미는 아니다. '나무가 자라도록 거름을 주었다.'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국민들의 궁금증을 풀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되도록 일찍 오겠다.' 우리가 자신의 잘못을 깨우치지 않으면 -> ...깨치지 않으면: '깨치다'는 타동사로 '깨달아 사물의 이치를 알게 되다'를 뜻한다. "그는 겨우 한글을 깨쳤다"처럼 쓴다. 깨우치리라!: '깨우치다'는 '깨달아 알게 하다'의 뜻으로 '깨치다'의 사동사다. 그 필요성을 노동자들에게 납득시키려: '납득하다'는 타동사다. 예문은 다른 사람을 하게 하는 것이므로 맞는다. 교육 자치를 진일보시켰다.: '진일보하다'는 자동사이며, '진일보되다'는 안 된다. 재미를 배가시킨다. -> ...배가한다.: '배가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명예를 실추시켰다. -> ...실추했다.: '실추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진영을 분열시켜 : '분열하다'는 자동사. 직원을 파면ㆍ해임시킨 장본인 -> 직원을 파면ㆍ해임한 장본인: '파면하다'와 '해임하다'는 타동사. 청소년을 게임에 중독시켜: '중독되다'가 자동사이므로 '중독시키다'는 맞는다. '중독하다'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없는 말이다. 어느 국어사전은 '중독'만 실었다. '중독되다'를 등재하지 않고, '마약에 중독 된 사람'처럼 예문을 제시했다. 중국이 역사를 왜곡시켜 -> ...왜곡하여: '왜곡하다'는 타동사. 호르몬 분비를 촉진시키는 -> ...촉진하는: '촉진하다'는 타동사. 사랑 이야기가 소설 절반을 관통한다.: '관통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욕심[속마음]을 거침없이 발현시켰다. -> ...발현했다.: '발현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역사에서 침묵된 열정 -> ...침묵시킨 열정: '침묵하다'는 자동사이며, '침묵되다'는 안 된다. 사소한 일을 정치 문제로 비화시킨: '비화하다'는 자동사이며, '비화되다'는 안 된다.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각인하다'는 자동사이며, '각인되다'는 안 된다. 정신력을 이완시키는: '이완하다'는 자동사. 문화재 관리를 이관시켰다. -> ...이관했다.: '이관하다'는 타동사. 관계를 경색시키는: '경색하다'는 자동사. 그들과 어깨동무하자.: '어깨동무하다'는 자동사이며, '어깨동무되다'는 안 된다. 그 사람을 매장시키겠다. -> ...매장하겠다.: '매장하다'는 타동사로 '사회적으로 활동을 못하게 하다'를 뜻한다. 다른 사람을 부추기는 상황도 포함하므로 '매장시키다'로 쓸 필요가 없다. 주자를 진루시키다.: 야구에서 쓰는 '진루하다'는 자동사이며, '진루되다'는 안 된다. 부실 대학으로 선정했다. -> 부실 징후 대학으로 지목했다.: '선정하다'는 '가려서 뽑아 정하다'의 뜻으로 타동사다. '작품을 선정했다'처럼 쓴다. '지목하다'는 '사람 등이 어떠하다고 가리켜 정하다'의 뜻이다. 부실 은행으로 지정했다.: '지정하다'는 '분명히 그렇게 가리켜 정하다'를 뜻한다. 국제회계기준을 저축은행에는 유예시켰다. -> ...유예했다.: '유예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이며, '유예되다'는 안 된다. 어느 국어사전은 '유예하다'를 타동사로 등재했다. 바위를 원래대로 위치시켰다.: '위치하다'는 자동사이며, '위치되다'는 안 된다. 상처받은 마음을 위무했다.: '위무하다'는 타동사이며, '위무되다'는 안 된다. 사람들을 혼란시켰다.: '혼란하다'는 형용사이고, '혼란되다'는 자동사다. '사람들을 혼란하게(혼란스럽게) 하다' '사람들을 혼란시키다'로 쓸 수 있다. 유동성을 팽창시키는: '팽창하다'는 자동사. 산소를 고갈시키다.: '고갈하다'는 자동사. 우리나라는 무역 개방을 지속시킬 것이다. -> ...지속할 것이다.: '지속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우주선을 추진시키는 장치 -> ...추진하는 장치: '추진하다'는 타동사. 대출금리는 시장금리에 연동시켜야 한다.: '연동하다'가 자동사이며, '연동되다'는 안 된다. 시위를 벌인 학생들을 출교시켰다. -> ...출학했다.: '출교하다'는 '학교에 나가다'(자동사)와 '신자의 자격을 박탈하여 교인을 교적에서 내쫓다'(타동사)의 뜻이다. '출학하다'는 타동사로 '학칙을 어긴 학생을 학교에서 내쫓다'를 뜻한다. 그 사람을 출당시켜라. -> ...출당하라.: '출당하다'는 '당에서 내쫓다'는 뜻으로 타동사다. 산해진미를 대령시켰다.. -> ...대령했다.: '대령하다'는 '웟사람의 명령을 기다리다. 또는 그렇게 만들다'를 뜻한다. 자동사와 타동사로 쓰며 '대령되다'는 안 된다. "소인 여기 대령하였사옵니다" '부엌에 대령한 음식' '가마를 대령하다'처럼 쓴다. 명예를 실추시키다. -> ...실추하다.: '실추하다'는 타동사. 청소년을 매혹시키는 -> ...매혹하는: '매혹하다'는 타동사. 사람을 매료시켰다. -> ...매료했다.: '매료하다'는 타동사. 중독을 중화시키다. -> ...중화하다: '중화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세대 차이를 융화시켜: '융화하다'는 자동사. 호랑이를 말살시켰다. -> ...말살했다.: '말살하다'는 타동사. 미국인들이 한국을 전쟁과 연관시킨다. -> ...전쟁과 연관한다.: '연관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음식을 소화시키다. -> 음식을 소화하다.: '소화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편견은 합당한 이치를 전도시킨다. -> ...전도한다.: '전도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은행을 회생시키다.: '회생하다'는 '소생하다'와 비슷한 말로 자동사이며, '회생되다'는 안 된다. 공기를 순환하다. -> 공기를 순환시키다.: '순환하다'는 '되풀이하여 돌다'의 뜻일 때는 자동사이고, '돈을 운영하다'의 뜻일 때는 타동사다. 공기를 환기시켜라. -> ...환기해라.: '換氣하다'는 타동사다. '주의나 여론, 생각 따위를 불러일으키다'는 뜻인 '환기(喚起)하다'도 타동사다. 긴장을 격화시키다.: '격화하다'는 자동사다. 자동사와 타동사로 등재한 국어사전도 있다. 백성을 충동시켜 -> ...충동하여(충동거려,충동대어,충동이어): '충동하다'는 타동사이며, '충동'의 파생어는 '충동거리다' '충동대다' 충동이다' '충동하다' '충동적'이다. 왕따시키다: 인터넷 표준국어대사전에 '왕따'는 '따돌리는 일. 또는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의 뜻으로 최근에 올라 있고, '왕따하다'는 없다. 예문으로 '왕따를 시키다(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을 만들다)'를 올렸는데, '왕따를 하다(만들다)'라고 해야 타당하다. '왕따 시키다'는 '다른 사람을 부추겨 따돌리게 하다'는 뜻도 되기 때문이다. '소외하다' '집단적 으로 따돌리다'는 '왕따 하다'와 같은 의미다. '왕따'는 피해자가 잘못이라는 인식을 줄 소지가 있으므로 되도록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감부터 왠지 삭막하고 비속어 같다. 유기견을 안락사시켰다. -> 유기견을 안락사 했다.: '안락사'는 국어사전에 '편안하게 죽게 하는 일'의 뜻으로 등재했다. '안락사하다'는 없으며, '안락사하게 하다'의 뜻인 '안락사시키다' 도 안 된다. "그런 고통이라면 의사에게 안락사를 시키는 편이 낫겠다"로는 쓸 수 있다. 이사부가 우산국을 신라에 복속시켰다.: '복속하다'는 '복종하여 붙좇다'의 뜻으로 자동사이며, '복속되다'는 안 된다. 서울시가 영업정지시켰다. -> 서울시가 영업을 정지했다.: '영업정지'만 있고 '영업정지하다'는 없다. 사람을 편향시키는: '편향하다'는 자동사. 자신을 일반과 유리시키는: '유리하다'는 자동사.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전전하다'는 자동사로 맞게 썼다. 부탁을 받고 사건을 무마시켰다. -> ...무마했다.: '무마하다'는 타동사. 급변 현상을 완충시키다. -> ...완충하다.: '완충하다'는 타동사이며, '완충되다'는 안 된다. 수정란을 자궁에 착상시켜: '착상하다'는 자동사이며, '착상되다'는 안 된다. 기발한 대책을 착상하다.: '착상하다'는 타동사. 이주민을 분리했다.: '분리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삼권을 분립시켰다. -> ...분립했다.: '서로 갈라져서 서다' '따로 나누어 세우다'의 뜻으로 '분립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다. 자동사로만 등재한 국어사전도 있다. 전기를 전도시키다.: 물리 현상의 '전도하다'는 자동사. 물기를 건조시키다. -> ...건조하다.: '건조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다. 어느 국어사전은 자동사로만 등재했다. 비눗기를 탈수시키기 -> ...탈수하기: '탈수하다'는 타동사. 구태를 탈피하는: '탈피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다. 자동사로만 등재한 국어사전도 있다. 물건을 회전시키다.: '회전하다'는 자동사다. 어느 국어사전은 자동사와 타동사로 등재했다. 현실에 드라마를 대입시켜 보니 -> ...대입하여 보니: '대입하다'는 타동사. 시장[적]을 교란시켜 -> ...교란하여: '교란'은 '혼란스럽게 만듦'으로 순화할 것을 권유하고 있는데, '교란하다'는 타동사다. 입장을 변환하여: '변환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다. 자동사로만 등재한 국어사전도 있다. 군인을 매복시켜 놓았다.: '매복하다'는 자동사. 연골을 재생시키는 물질 -> ...재생하는 물질: '재생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다. 그가 사망을 소멸하셨네 -> ...소멸시키셨네: ' 消滅하다'는 '사라져 없어지다'의 뜻으로 자동사다. '적을 소멸(掃滅)했다'의 '소멸하다'는 타동사다.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라 -> ...우리를 소멸하셨음이라 적을 멸망했다. -> ...멸망시켰다.: '멸망하다'는 자동사. '엉터리'로 낙인됐다. -> '엉터리'로 낙인찍었다[낙인찍혔다, 낙인이 됐다].: '낙인하다' '낙인되다'는 없는 말이다. 부실을 누적시켜 -> ...누적하여: '누적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박수를 쳤다. -> 박수를 했다.: '박수하다'는 자동사다. '박수'가 '두 손뼉을 마주 두드림'이므로, 동사는 '박수치다'가 아니다. '축구를 차다'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표준국어대사전 예문에 '박수를 치다'가 있으므로 이것을 인정했다. 이 밖에 주의할 동사가 있는데, 그 예문은 다음과 같다. "만화가 김이환은 정지분 선생에게 건축 디자인을 사사했다('사사받았다'가 아니다)." "정부는 학계에게 경제 시책을 자문했다." "대통령은 의장대를 사열한 후 출국했다." "딱지를 치다. 농구를 하다. 골프를 하다. 당구를 하다." "박수칠 때 떠나라." -> "박수 받을(보낼) 때 떠나라." 사상을 온존시켜 -> ...온존하여: '소중히 보존하다'는 말인 '온존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약속을 중복했다[약속이 겹쳤다].: '중복하다'는 타동사다. '겹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다. 한자어는 동사의 종류를 구분하기 어려운 반면에 순우리말은 쉽다. 그의 모습이 아버지 얼굴과 겹쳐졌다. -> ...겹쳤다. 그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여 그가 광야를 진동시켰다.(성경) -> ...그가 광야를 진동했다.: '震動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다. 이것은 '물체가 울리어 흔들리다. 물체 따위를 흔들다'는 뜻이다. '振動하다'는 자동사다. 이것은 '흔들려 움직이다. 냄새가 나다'는 뜻으로 '추가 진동하다' '냄새가 진동하다'로 쓴다. 명예를 손상시켰다. -> ...손상했다.: '손상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 일을 마치면 /일이 마치면: 둘 다 맞는다. '마치다'는 자동사와 타동사다. '그치다'도 자동사와 타동사다. 건전지를 충전시켜라. -> ...충전하라.: '충전하다'는 타동사. 냉동식품은 해동시켰을 경우 다시 냉동시키지 않아야 한다. -> ...냉동하지 않아야 한다.: '해동하다'는 자동사이고, '냉동하다'는 타동사다. 김 감독은 박 선수를 제외시켰다. -> 제외했다.: '제외하다'는 타동사. 나폴레옹을 유배시켰다. -> ...유배했다.: '유배하다'는 타동사다. '장군을 유배하다' '유배한 장군'처럼 쓴다. 최영 장군을 유배 보낼까요? -> ...유배할까요(귀양 보낼까요)? 유배 가다. -> 귀양 가다[유배 당하다].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성경) ->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며: '침몰하다'는 자동사. 넘어지면서 버스 의자에 부딪혔다. -> ...부딪쳤다.: '부딪치다'는 '부딪다'를 강조하는 말로 자동사와 타동사다. '산토끼가 도망가다가 나무에 부딪쳤다' '달걀을 부딪쳐 깼다'처럼 쓴다. '부딪히다'는 '부딪다'의 피동사로 '게시판이 차에 부딪혀 깨졌다'로 쓴다. 벽에 부딪혔나. 포털 3사 실적 부진하다. -> 벽에 부딪쳤나. 포털... 버스가 비탈길로 떨어져 바닥에 부딪히며 -> ...부딪치며 암벽에 부딪혀[충돌해] 헬기 두 동강 -> 암벽에 부딪쳐[들이받아]... : '들이받다'는 '함부로 받거나 부딪다'의 뜻으로 피동사는 '들이받히다'다. '충돌하다'는 '서로 맞부딪치거나 맞서다'의 뜻으로 '화물차끼리 충돌했다'로 쓴다. 그 배우는 입장하다가 달려드는 취재진과 부딪혔다. -> ...부딪쳤다(충돌했다). 가구는 모서리에 부딪히지 않도록 배치한다. -> ...부딪치지 않도록 배치한다. 지금부터는 이해관계나 실제 문제가 부딪히는 현장이다. -> ...부딪치는(부닥치는, 부닥뜨리는, 직면하는, 맞닥치는, 맞닥뜨리는, 닥뜨리는, 닥트리는) 현장이다.: '출근하여 맨 먼저 부딪치는 일' '닥치는 일을 해치웠다' '부닥치는 장애물을 해치웠다'처럼 쓴다. '쟁반을 손으로 받치다'는 '어떤 것을 지탱하다'는 의미로 능동형이고, '목을 뒤로 젖히다' '옷을 벗어젖히다'는 사동형을 쓰는 것으로 돼 있다. 사동사는 목적어가 있고 피동사는 목적어가 없다. '그는 어깨를 부딪혔다'는 말이 안 된다. '멱살을 잡히다'는 표준국어사전에는 없지만 일부 국어사전에 관용어로 다루고 있다. "멱살을 (그가) 잡혔다" 형태의 피동사로 봐야 할 것이다. 새가 유리에 부딪혀 떨어졌다.: 맞지 않는다. '새가 유리에 머리를 부딪혀 떨어졌다'가 틀렸다는 사실에서 보듯 ' ...유리에 부딪쳐...'로 써야 한다. 옳은 일도 반대에 부딪힌다. -> ...반대에 부딪친다[반대와 충돌한다].: 추진하는 일이 장애물에 걸린 것이므로 '옳은 일'이 부딪치는(움직이는) 주체다. 쌍방이 부딪치는 주체일 때도 있다. 낙관적인 사람은 어려운 일에 부딪혀도 -> ...어려운 일에 부딪쳐도 제트 스키에 머리를 부딪히는 사고 -> ...머리를(가) 부딪치는 사고(머리가 부딪치는 주체로서 움직였을 때) / ...머리가 부딪히는 사고(머리가 제트 스키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았을 때) 아파트 정문을 지나다가 위에서 내려오는 가로 막이에 머리를 부딪힌다. -> ...머리가 부딪힌다.: '머리를 부딪힌다'는 사동사를 썼으므로 '머리를 일부러 부딪치게 한다'는 말이 되고 만다. 국민의 저항에 부딪혔다. -> ...부딪쳤다.: 추구해 나가던 일이 저항과 맞닥뜨린 것이다. 양성자 빔을 서로 부딪히게 하는 실험 -> ...부딪치게 하는 실험(부딪히는 실험) 엘리베이터 문으로 손 하나가 쑥 들어온다. 닫히던 문은 손에 부딪혀 열린다. -> ...부딪쳐 열린다. 안부를 물으며 술잔을 부딪혔다. -> ...부딪쳤다: '부딪혔다'는 남에게 시켰다는 의미가 된다.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성경) -> ...부딪치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물건을 뉘여 보관하라. -> 물건을 누여(뉘어)...: '눕다'의 사동사는 '누이다'와 '눕히다'다.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였다. -> ...뉘었다. 연필을 손에 쥐여 줬다.: '쥐다'의 사동사는 '쥐이다'이므로 맞게 썼다.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 ...은혜를 입게 할지라(입힐지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 ...네 아버지께 보게 하려 함이라(보이려 함이라, 보여 드리려 함이라). : '보다'의 사동사는 '보이다'다. 우리말을 틀리게 쓰면 주저하지 말고 알켜 주세요. 치매를 예방하려면 머리를 많이 써야 좋대요. -> ...알려[가르쳐] 주세요. 치매를...: '알리다'는 '알다'의 사동사다.           "그 사람은 친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이상한 말이다. 이 말은 두 문장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사람은 친구 이상이 아니다." "그 사람은 친구 이하가 아니다." 여기서 '친구 이상[이하]이 아니다'는 친구도 포함하므로 '친구도 아니고, 친구보다 더[덜] 관계가 있지 않다'라는 말이 된다. "그 사람은 친구에서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다"라고 해야 한다. "그 사람은 더덜없이 친구다"라고 해도 된다. '더덜없이'는 '더하거나 덜함이 없이'를 이른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한가위만 같아라'로 쓰는 일은 없어야 한다.     값을 더 이상 올릴 수 없다.: '더'는 '일정한 기준을 넘는 상황'으로, '이상'과 차이가 있다. '더'와 '이상'을 함께 써 '어떤 범위'를 규정하기 어렵다. '더 이상'은 '더 많이(더, 더는)'라고 해야 한다. 예문에서 지금의 값은 용인하는 것이므로 '이상'을 쓰면 맞지 않는다. I have nothing more to say.: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 -> 더는(더) 할 말이 없다. It is useless to continue the search any longer.: 더 이상 수색을 계속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 더 많이 수색해 봐야 소용없다(추가로 수색해도 소용없다). 벌금을 물리고 말 수는 없다. 그 이상의 조치가 필요하다. -> 벌금을 물리고 말 수는 없다. 더 강한 조치가 필요하다. 임금도 차이가 크지만, 외국인 근로자로서 인간적 차별은 그 이상이다. -> ...인간적 차별은 더 심하다. : 영어를 많이 배우면서 '이상'이라는 말이 활개를 치고 있다. 그것도 말의 뜻이 변질돼 있다. 수량, 정도 등의 상황을 나타내는 경우 에는 '이상'을 쓸 필요가 있다. 그 외에 쓰는 '변형한 이상'은 얼마든지 다른 말로 대체할 수 있다. '그것을 능가한다' '그보다 더하다' '그것을 초과한다' 등이 있다. 인간 이하(以下)의 대접 -> 사람 대접이 아닌 인간 이하의 삶 -> 사람다운 삶이 아닌 인간 이하의 막말 ->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말(해서는 안될 말) 의석이 과반수 이상이다[과반수를 넘었다]. -> 의석이 과반수이다(절반 초과). : '과반수'는 절반이 넘는 수이므로 '넘었다'나 '이상'을 덧붙이지 말아야 한다. 과반 미만 -> 과반 미달(과반이 안 된다): '과반'은 절반을 초과한 여러 가지 경우여서 일정한 기준이 되지 않는다. 미만을 쓰기에 적당하지 않다. 97년 제작한 제임스 캐머런의 '타이타닉'은 2009년의 '아바타' 이전까지 최고로 흥행했다. -> ...2009년의 '아바타' 전까지 최고로 흥행했다.: '이전' '이후'는 일정한 때(또는 기준)와 같이 쓰면 그때를 포함한다. 이전에는 농촌에 변변한 것이 없었다.: '이전'은 옛날(예전)을 이른다. '전'으로 쓰면 무난하다. '전에 없이 신속하게' '전에 없던 풍경.' 그 이후로는 -> 이후로는[그 후로는]: 지나간 지 꽤 되는 과거를 막연하게 이르는 '그전'은 붙여 쓴다. 그 시점 앞뒤를 나타내는 '그 전'과 '그 후'는 띄어 쓴다. '그 후'는 그때를 포함하지 않는다. 앞에 나온 때가 기준인 경우의 '이후'와, '그 이후'는 그때를 포함한다. '그 이후'는 번잡하므로 '이후'로 쓰면 된다. 이 이외(以外)에도 문제가 있다. -> 이 밖(그 외, 이 외)에도...: 문맥으로 '이것 밖에'라는 의미에 '이외'와 '이 이외'를 쓰면 혼동하기 쉽다. '관계자 외 출입 금지' '예상 외로'처럼 쓰면 좋다. "1등급 이외는 없다"는 특등급이 있다는 말로 봐야 한다. 이외(以外), 이내(以內), 이후(以後), 이전(以前): 일정한 기준과 같이 쓰면 그 기준을 포함한다. 단독으로 쓰면 한계를 넘거나 미달하는 것을 나타낸다. '10장 이내(10장을 포함).' '30분 이전에는 효력이 있다(30분을 포함).' "이전보다 나아졌어(지금을 포함하지 않은 과거보다)." "이후 사이가 좋아졌다(그 시점에서 시간이 지난 후에)." 입맛 이전에 보기에도 풍성한 음식 -> 입맛 보기 전에... 선생 이전에 나도 학부모다. -> 선생이기 전에 나도 학부모다. 착공 이전인 공사는 취소한다. -> 착공 전인 공사는 취소한다. 급성질환은 30일 이내 치료하는 것이고, 만성질환은 30일 이상 치료하는 것이다. -> 급성질환은 30일 내 치료하는 것이고... 산업혁명 이전에는 자연재해가 대부분이었으나, 산업혁명 이후에는 인재가 많이 늘었다. -> 산업혁명 전에는...: '이전'과 '이후'를 한 기준에 같이 쓰면 겹친다. '사건 전'과 '사건 이후'의 조합이 어울릴 떄가 많다. 이 시험 응시자는 시험 일 이전에 법으로 정한 교육을 이수해야 시험을 볼 수 있다. -> ...시험 일 전에... 요양 기간은 6개월 범위 내에서 가감할 수 있다. -> 요양 기간은 6개월 이내를 더하거나 뺄 수 있다.: 수량을 가르키지 않으면 '범위 내'와 '범위 이내'는 '범위 안'이라는 의미로 차이가 없게 된다. 국회는 19대를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 시대로 나뉠 것이다. -> ...그전과 이후 시대로 나뉠 것이다. 태어나기 이전에 이름을 지었다. -> 태어나기 전에...: 대개 '...하기 전' 꼴로 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이상'은 수량ㆍ정도ㆍ단계를 나타내는 명사 뒤에 붙어, 그것을 포함하여 더 많거나 위인 것을 말한다(국어사전). '부장급 이상' '중학생 이상은 사용할 수 있다' '평균 이상의 실력' 등이 그 사례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이상'과 '이하'를 몇몇 국어사전과 다르게 규정하고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보통 이상의 관계'나 '평균 이상의 실력'에서 '이상'은 보통[평균]을 포함하지 않는다. 기준을 수량으로 표기해야 그 자신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보통 이상의 관계'를 '보통보다 더한 관계'라는 말로 용인한 셈이다. 하지만 많이 쓰고 있고 의미상 그렇게 보여도, 그런 식으로 변형하여 쓰면 혼란스럽고 말의 모순이 생길 것이다.   단 순서ㆍ위치가 거기에서 '앞ㆍ위'이거나, '뒤ㆍ아래'를 나타내는 말은 그것을 포함하지 않는다. '이상에서 살핀 바대로' '이하 생략' '이하 여백' 같은 말인데 관습적으로 굳어진 것 같다.         (신문에 실은 글)   '청원생명잔치'는 어떨까   청원군민신문의 성격을 고려할 때 격려하고 칭찬하는 글이 더 좋겠지만, 청원군민이 같이 생각해 봤으면 하는 문제를 지적한다. 청원생명축제니 직지축제니 '축제'라는 말을 많이 쓴다. 하지만 축제는 일본식 말이다. 제(祭)는 우리나라에서는 제사라는 뜻이고, 일본에서는 잔치라는 뜻이다. 우리가 잔치라는 의미로 쓰는 축제는 일본식 제를 가져온 것이다. 우리 사상과 얼이 담긴 것이 아닌 일본 글자인 것이다.   이런 문제 제기는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고 그전부터 아는 사람은 안다. 사소한 일로 보고 바로잡으려는 의지가 없었기에 '축제'로 굳어지는 마당이다.   '축제'는 잔치나 축전으로 써야 마땅하다.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이렇게 순화하여 쓸 것을 권유하고 있다. '잔치'라는 말이 꼭 어색한 것만도 아니다. 어린이날 행사로 '0 0 어린이 잔치'로 쓰는 것을 봤다. 얼마나 정겨운지 모른다. 우리말은 우리 것이기에 많이 쓰면 우리 정서에 곧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남들은 다 축제라고 해도 우리 청원군이 앞장서 '잔치'나 '축전'을 쓰면 좋겠다. 중간이나 가면 아무 탈이 없을 텐데, 뭐하러 그러느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올바른 우리말은 우리가 당연히 써야지 눈치를 볼 일이 아니다. 아니, 이참에 한번 튀어 볼 수도 있다. '청원생명잔치'라는 말을 써 남보다 앞서는 청원군을 과시한다면 큰 수확을 얻는 것이다.       *. 신문에는 편집하여 '뭐 하러' '한 번 튀어'로 나갔다. "내일은 뭐 하지"에서는 '무엇을 하지'라는 뜻이므로 띄운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데 뭐하러 고생이냐"에서는 동사 '뭐하다'를 활용한 것이다. '한번'은 "한번 시도해 보자"처럼 시도, 기회, 강조를 의미한다. "매달 한 번 모인다"에서 '한 번'은 '여러 번이 아닌 한 차례'라는 뜻이다. 다른 매체에서도 '우리나라'를 '우리 나라'로, '사실을 확인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를 '사실을 확인하는데는 시간이 걸린다'로, '그럴 리가'를 '그럴리가'로, '구입한 지 3년'을 '구입한지 3년'으로 내 글을 틀리게 편집한 바 있다. 이럴 때는 글쓴이가 괜히 창피를 당하는 것이다. '데'는 것, 일, 곳, 경우 등 명사를 뜻하는 역할을 하면 의존명사로 띄운다. '지'는 기간을 나타내는 말이 뒤에 오면 의존명사다. '날씨가 추운데 나가지 마라' '당신 미인이신데' '얼마나 추울지 걱정이 가득하다' '얼마나 부지런한지 두 곱을 한다' 따위에서 '-ㄴ데' '-ㄹ지' '-ㄴ지'는 연결 어미 또는 종결 어미로 한 뭉치다. '우리 집', '우리 학교' 등은 띄우고 '우리말'같이 한 단어로 취급하면 붙인다.   대학에서 축전(잔치)을 대동제라고 많이 하는데, '교제' '국제'에 쓰는 제를 써 '다 함께 어울려 화합한다'는 의미인 大同際로 하면 되겠다.   결혼과 요리도 일본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혼인과 조리가 원래 우리말이다. '혼인 신고' '혼인 서약' "혼인과 물길은 끌어 대기에 달렸다(속담): 혼인은 중매하기에 달렸다" '혼인집: 혼례를 치르고 잔치를 베푸는 집' "혼인집에서 신랑 잃어버렸다(속담): 가장 중요하고 긴요한 것이 빠진 경우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 "혼인하기 전에는...(사극)" ''조리사 자격증: 식품위생법으로 발급하는 자격증 이름' '조리대'에서 보듯이 속담 같은 그전 말은 혼인과 조리로 썼다.           #. (글을 쓰면서 많이 배웠다. 자료를 들추고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실력이 자연스럽게 붙었다.   처음에는 짧게 쓰려고 했는데, 영감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생각보다 10배는 되는 결과물이 나왔다. 거창하지 않더라도 글을 일단 시작하면, 남는 게 많은 것 같다. 글을 쓰면서 우연히 만나는 자료도 값지다. 우연도 기적을 낳는다. 우연히 접한 사람, 글, 방송 같은 글쓰기에 바탕이 되는 자료들은 하나님의 뜻이거나 도움일 수 있다.   '숲 속 도서관'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아늑한 교원대 도서관에서 속담집, 사전 등 좋은 자료를 얻었기에 이렇게나마 썼다.)       윗글에 '맞다'는 '맞는다'로 수정. 내일 뵈요. 있다가 봽겠습니다. 눈치 안 봐도 돼지. 눈치 안 봐도 되.(틀림) -> 내일 봬요. 이따가 뵙겠습니다. 눈치 안 봐도 되지. 눈치 안 봐도 돼. * 내일 봬(뵈어) : '뵈(다)' + '어'. * 눈치 안 봐도 되지 : '되다' + '지'. * '봬'와 '뵈'를 '해'와 '하'로 바꾸어 말이 되면 맞는 것이다. 내일 봬(해). 내일 뵙(하)겠습니다. 내가 이래 봬도 : 보이(다) + 어도 / '얼쑤'는 흥겨울 때 쓸 수 있는 말이다. -> ...쓰는 말이다. 이 문제를 맞히면 10점을 얻을 수 있다. -> ...얻는다. 이번에 성공하면 이길 수 있다.: '이길 가능성이 있다' '확정은 아니지만 그럴 여지가 있다'는 뜻이다. 이번에 성공하면 이긴다. :'승리를 굳힌다'는 뜻이다. '써지다'는 "글씨가 잘 써진다"처럼 쓸 수 있다. -> ... 쓴다. 이것은 국을 푸는 국자다.:'국을 풀 수 있는 국자'가 아니다. '국자' 자체로 국을 푸는 가능성이 성립한다. 사발도 국을 풀 수 있다. : 적절하다. '미워요'는 미운 사람에게 쓰는 말이지만 애교부리듯이 할 때 쓸 수 있다.: 적절하다. 4월에 느끼는 봄소식을 올해는 잘 느낄 수 없었다. 4월애 느끼는 봄 소리는 땅속에서도 느낄 수 있다. : 적절하다. 이제 정부가 정상적으로 가동될 수 있게 된 만큼 -> ...가동하는(가동되는) 만큼. 포장됩니다. -> 포장(해도) 됩니다. : '포장해 드립니다' '포장해 판매합니다'도 좋겠다. 접사 '되다'는 피동이지 가능하다는 뜻이 아니다. '포장되다'는 '포장하다'와 마찬가지로 '포장해 판매한다'는 의미가 없다. 동사 '되다'는 '-어도' 뒤에 써 어떤 일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주차됩니다. -> 주차(해도) 됩니다. : '주차되다'가 표준국어대사전에 없을 뿐 아니라, 가능하다거나 허락한다는 뜻이므로 동사 '되다'를 쓴다. 식사됩니다. -> 식사(해도) 됩니다. : '식사하다'는 있고 '식사되다'는 없다. 배달됩니다. : '배달합니다' '배달 됩니다' '배달됩니다' 모두 가능하다. 누구나 가입할 수 있는 단체 -> 누구나 가입하는 단체 혈당 조절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약품 -> ...도움을 주는 약품 스스로 문제를 햬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면 충분하다. '해결하는 능력'에는 가능하다는 말이 들어 있다. / 누구에게나 인권 보장은 유예되어서는 안된다. -> 유예해서는 안된다.: '유예되다'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없다. 방문이 거부됐다.: 표준국어대사전에 '거부되다'는 없고 '거절되다'는 있다. / '-ㄹ밖에'는 '그러니 웃을밖에.'처럼 종결어미로 나와 있지만 종결어미로만 쓰는 게 아니라는 견해가 있다. '그저 웃을밖에 도리가 없다'에서 꼭 '웃을 수밖에'로 쓸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 옥에 티: 관용어로 써 '매우 좋은 것에 흠이 있다'는 뜻이다. 옥의 티: 실제로 옥에 있는 티를 말한다. 눈엣가시 : 눈에 거슬리는 사람을 비유하여 이른다. 눈의 가시 : 눈 속의 가시. '아주 드문 일'을 이르는 관용어(관용구)는 '만에 하나'다. 관용어: 그냥 관용어와 관용구를 포함한 관용어가 있다. 바른말: 이치에 맞는 말. (속담) 바른말 하는 사람 귀염 못 받는다. 바른 말: 어법에 맞는 말. '그렇지 않다'를 뜻하는 말은 '천만에' '천만의 말씀'이다. 눈에 띠게 발전했다. -> 눈에 띄게 발전했다. / 연결 어미, 종결 어미 : '연결어미'도 '종결어미'처럼 붙일 수 있다.(수정) / '손뼉을 치다' '박수하다'라고 해야 합당하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 예문으로 '박수를 치다'가 있다. '박수를 치다'를 관용어로 인정한 것인데, 잘못된 관용어는 되도록 쓰지 않아서 없어지게 해야 좋겠다. / 희귀병 : '희귀'는 드물어서 매우 귀함을 뜻하므로 '매우 드문 병' '희소 질병'이라고 해야 한다. '희귀병'은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없고 다음국어사전에는 있다. / 이제서야 -> 이제야: '에서(서)'는 장소를 나타내는 부사격 조사다. 시간을 나타내는 데는 붙일 수 없다. 여기서, 서울에서, 저기서야. 에서야「조사」(표준국어대사전 표제어 추가) ((시간을 나타내는 체언이나 부사어 뒤에 붙어)) ‘그때가 되어 비로소’의 뜻을 나타내는 보조사. 격 조사 ‘에서02’에 보조사 ‘야11’가 결합한 말. 지금에서야/ 지금에야(둘 다 맞음) 고통을 겪고서야 : "'겪(다)' + '고서' + '야'"로서 적절하다고 본다. '-고서'는 두 사태 간에 계기적인 관계가 있음을 나타내고 '-야'는 강조를 나타낸다. / 봉사 활동을 갔던 학생들이 장난을 쳐 -> 봉사 활동을 간 학생들이 ... 1978년 독일에 진출했던 차범근 -> ...진출한(진출해 있던) 차범근 / 휘발유값, 배추값 -> 휘발윳값, 배춧값 숫나방, 숫번데기 -> 수나방, 수번데기 광어는 싯가 -> ...시가 뒷쪽, 윗층, 뒷편, 건너 편, 맞은 편 -> 뒤쪽, 위층, 뒤편, 건너편, 맞은편 : 된소리(ㄲ, ㄸ, ㅃ, ㅆ, ㅉ), 거센소리(ㅊ, ㅋ, ㅌ, ㅍ) 앞에는 '사이 ㅅ'이 오지 않는다. '웃풍'의 '웃'은 접두사이므로 해당하지 않는다. /'위, 아래' 대립이 없으면 '위'가 아닌'웃'이 붙는다. 완성된 누에고치 -> 다 지은 누에고치 낸들 알아 -> 난들 알아 씨나락 -> 씻나락 : '씻나락'은 볍씨의 방언인데 일부 속담이나 관용어에서는 표준어다. 씨나락, 신나락, 씬나락은 방언이다. 과하다싶게 -> 과하다 싶게 : 이 말은 2006년 내가 기고한 만화에 있다. 네이버에서 '[만화칼럼] 버블세븐이 아니라고?'로 검색할 수 있다. 70년 대 -> 70년대 : '년대'가 한 단어이므로 '70 년대'나 '70년대'로 쓴다. 반면 나이에 쓰는 '대'는 '십 대' '10 대' '10대'로 쓴다. 그밖, 이웃나라, 그럴 듯하다, 몸둘 바를 모르다 : 그 밖, 이웃 나라, 그럴듯하다, 몸 둘 바를 모르다 : 내 만화에 덧붙인 글이 틀린 채 나갔다. 네이버 '[만화칼럼] 그래도 미안한 감정', '[만화칼럼] 반값에 홀렸나.' 문 밖, 창 밖 -> 문밖, 창밖 : 윗글 수정. '판밖(일이 벌어진 테두리의 바깥)' '꿈밖(꿈에도 생각 못한 매우 뜻밖의 일)'도 붙인다. 실종 학생, 숨진 채 발견 : '실종 학생이 숨진 채 무엇을 발견했다'는 말이 되고 만다. '실종 학생 숨진 채 발견돼'나 '실종 학생 변사체 발견' '실종 학생 숨진 채로 발견'처럼 해야 한다. 부인 죽은 채 발견한 남편 -> 부인 변사체, 발견한 남편(부인, 죽은 채로 발견한 남편) 성범죄, 고소 없어도 처벌 -> 성범죄 고소 없어도 처벌(고소 없어도 성범죄 처벌) : 여기서는 ','가 있으나 없으나 같은 말이므로 굳이 붙일 필요가 없다. 어린이 보호 구역 : '어린이를 보호하는 구역'이라는 말이다. '어린이, 보호 구역'은 '어린이가 보호하는 구역'이라는 말이다. 이동 단속 : '옮기거나 움직이는 것을 단속한다'는 말이다. '이동식 카메라로 단속한다'라는 의미는 문맥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대학생 대출 -> 대학생용(대학생 학자금) 대출 : '대학생'을 빌려주는 것은 곤란하다. 대학생이 빌려준다는 말은 더욱 아니다. 남침(남쪽 침범) : '남쪽을 침범한다'는 뜻이다. '할머니뼈해장국' -> '할머니, 뼈해장국' : 간판에 '할머니뼈'로 만든 해장국이 아니라, '할머니'가 만든 해장국이라고 나타내야 한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 표준국어대사전에 속담으로 올라 있다. 우리말에서 연유한 속담은 아니지만 우리말이나 마찬가지로 여긴 것 같다. 민중국어사전에는 관용구로 나온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온 속담의 뜻은 '예로부터 민간에 전하여 오는 쉬운 격언이나 잠언'이다. "주사위는 ..."은 그리스 작가 메난드로스가 지은 시구인데 카이사르가 빌려 써 유명하다. 하지만 시에 쓰기 오래전부터 있었고 그 당시 흔히 쓰는 말이었다고 한다. 표절한 논문과 표절된 논문을 대조하다. -> 표절한 논문과 표절 대상 논문을(표절한 대상인 논문을) ... : '표절되다'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없을 뿐 아니라, '표절한 논문'과 '표절된 논문'은 같은 것을 말한다. '대상'은 어떤 일의 상대 또는 목표나 목적이 되는 것이다. 울림 :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소리가 무엇에 부딪혀 되울려 나오는 현상'으로, 다음국어사전에는 '일정한 공간 속에서 음이 발생할 때 음파의 중첩 현상을 이르는 말'로 나온다. 표준국어대사전의 '부딪혀'는 '부딪쳐'가 맞는다. 민중국어사전에는 '부딪쳐'로 나온다. 투신자가 밑에서 구조하던 소방관에 부딪혀 살았고, 투신자와 부딪힌 소방관도 타박상만 입었다. : '~ 소방관에 부딪쳐 살았고'로 해야 한다. 투신한 사람은 어딘가(어디인가)를 반드시 부딪친다. 또 투신자와 소방관 쌍방이 부딪칠 수는 있어도 쌍방이 부딪힐 수는 없다. 그 정책은 항명[난관]에 부딪혔다. -> ...부딪쳤다[부닥쳤다]. : 표준국어대사전에 실은 예문을 따르면 '부딪혔다' '부딪쳤다' 둘 다 가능하다. 관용상 그렇게 인정한 것 같다. 추진한 정책이 전진하는 과정에서 항명이 가로막거나 부딪쳐 정책이 그것에 걸린 개념으로 볼 때 '부딪쳤다'가 타당하다. 여왕은 옥 담당관 옥인(玉人)에게 감정시켰다. : '감정을 의뢰했다'가 나아 보인다. 100% 독립된 기관 -> 100% 독립기관(또는 독립 기관) 계속된 실수 -> 연이은(잇단, 잇따른, 거듭한, 거듭된, 연달아 생긴) 실수 : '계속하다'는 끊이지 않고 잇대어 나간다는 말로 '2시간 동안 공부를 계속했다'처럼 쓴다. '연잇다'는 이어 단다는 말이다. 잉꼬부부로 불리는 내외간도 돌아누우면 남이다. -> 잉꼬부부(원앙 부부)라는 내외간도 ... : '잉꼬'는 일본어이므로 '원앙 부부'로 순화해 쓰도록 했다.(표준국어대사전) 자동차의 메카로 불리는 디트로이트가 -> 자동차 성지(중심) 디트로이트가 깍두기가 완성됐다. -> 깍두기를 담갔다. 사랑하는 감정을 갖고 있다. -> 사랑하는 감정을 느끼고 있다. '자신감을 가지다', '간담회를 가졌다' : '자신감을 느끼다' '간담회를 열었다'로 해도 되지만, '가지다'가 '생각, 태도, 사상을 마음에 품다' '모임을 치르다'를 이르므로 그러지 않아도 된다. 적조 피해는 산소량 부족으로 양식 어류가 질식함으로써[질식하므로써] 생긴다. -> ...질식해 생긴다. : '-ㅁ으로써'를 많이 쓰는 경향이 있는데 간결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으로써'는 수단이나 방법을 나타낸다. 예문에서는 원인을 나타내므로 '질식해'나 '질식하므로'로 써야 한다. 미국이 지식재산권을 뒤엎음으로써 부담을 지게 됐다. -> 미국이 지식재산권을 뒤엎어... 규제를 남용함으로써 생기는 부작용 -> 규제를 남용해 생기는 부작용 ...보장하기로 합의했다. 이로써 개성 공단은 다시 살아난다. -> ...보장하기로 합의했다. 이제(이래서, 그 결과로) 개성 공단은 다시 살아난다. : 앞 문장과 뒤 문장이 원인과 결과의 관계인 경우도 많다. '이로써'를 남용하다 보면 부적절한 경우에 쓰게 되고 접속어를 쓰지 않아도 되는 경우에 쓰는 일이 생긴다. 쓰레기 봉투 -> 쓰레기 봉지 : 표준국어대사전에 '약봉지'와 '쓰레기 봉지'가 있다. 즉 '라면 한 봉지' '쓰레기 한 봉지'로 써야 하는 것이다. '봉투'는 '편지 봉투' '서류 봉투' '돈 봉투'처럼 쓸 것이지 '쓰레기 봉투'처럼 쓰면 잘못이다. 몇 일 동안 -> 며칠 동안 : '몇 일' '몇일'은 인정하지 않는다. 오로지 '며칠'이다. '며칟날'은 '며칠(그달의 몇째 되는 날)'의 본말이다. 가슴 한켠에는 -> 가슴 한편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 그런데도 쓰레기장이 왠말이냐. -> ...웬 말이냐. : '왠지' '웬일' '웬걸' '웬만하면' '웬만큼' '엔간하다'도 틀리기 쉽다. 제 깐에는 -> 제 딴에는: '자기 나름으로 잘한다는 생각으로'의 뜻일 때는 ‘딴’이 옳다. "제 딴에는 오빠에게 응원한답시고 한 말이 '명복을 빌어요'라니." 반면에 "저희들 깐에도 이 일은 심각하다는 것을 알았다" "제 깐에는 하노라고 했다고 생각하겠지만"처럼 ‘그 나름의 생각ㆍ 짐작ㆍ어림'의 뜻일 때는 ‘깐’이 옳다. 일제 식민지에서 우리를 해방했다. -> 일제강점에서 우리가 광복했다. : '해방'은 표준국어대사전에 '구속이나 억압 따위에서 벗어나게 함', '우리나라를 일제 강점에서 벗어나게 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정인보 선생은 해방절이 아닌 광복절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해방'은 주인이 묶어 두었다가 풀어 줄 때 사용하는 말이다. 일본이 풀어 준 것이 아니므로 해방이 아니다. '독립'은 남의 힘을 입지 않고 홀로 서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개국 이래 이미 독립국가였기에 독립도 아니다. '광복'은 '빛을 되찾다'는 뜻으로 잃은 주권을 되찾았다는 의미가 돼 주체성이 있는 말이다. 한턱 쏘다. -> 한턱 쓰다(한턱내다). : '베풀거나 낸다'는 개념이다. '쏘다(shot)'라는 개념은 엉뚱하다. 기념으로 상품권 2억을 쏩니다. -> 기념으로 상품권 2억을 팡팡 씁니다(드립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 그러면 곤란합니다(좋지 않습니다).. 성장은 안 됩니다. : 성장할 수 없습니다(성장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아니하도록 : '않도록'의 원래 형태로 맞는다. 아니 하다 : '그 아이는 공부를 아니 한다(안 한다)' '사흘 굶어 도둑질 아니 할 놈 없다'(표준국어대사전에는 '아니할'로 나온다)처럼 써 동사를 부정한다. 아니하다 : 1. 동사 '않다'의 본말이다. '아무 말도 아니하고(않고) 떠났다.' 2. 연결 어미 '-지' 뒤에 써 앞말이 뜻하는 것을 부정하는 보조용언이다. '죽지 아니하리라'처럼 쓴다. 않다(아니하다)의 의문형은 두 가지다. 보조형용사는 '않은가'고, 보조동사는 '않는가'다. '기쁘지 않나 -> ...않은가.' '관심이 있지 않나 -> ...않은가.' 그 배우 정말 웃기다. -> ...웃긴다. : '웃기다'가 동사이므로 '-ㄴ다'를 붙여 현재형을 만든다. 그게 맞다. -> 그게 맞는다(맞아). : '맞다'가 동사이므로 현재형은 '-는다'로 쓴다. '맞지 않다'는 '맞지 않는다'가 맞고, '맞으냐?'는 '맞느냐?'가 맞는다. '맞다'를 '알맞다' '걸맞다'와 마찬가지로 여겨 형용사로 인식하기 쉽다. 단 사전, 제목 등은 동사 기본형으로 쓰는 문체가 있다. '앞만 보고 달리다' '시험, 코앞에 다가오다' 따위가 그것이다. 이렇게 비판하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다.(00일보) -> ...맞지 않는다. 어울리지도 않는 노래 : '어울리다'가 동사이므로 '않는'이다. -냐:'이다’의 어간, 용언의 어간 또는 어미 ‘-으시-’, ‘-었-’, ‘-겠-’ 뒤에 붙어, 해라할 자리에 쓰여, 물음을 나타내는 종결 어미. 주로 구어에서 쓰인다. 얘가 네 동생이냐?/어디 가냐?/그게 뭐냐?/그렇게 좋냐?(표준국어대사전 수정) 아픈 데는 없냐고 물었다./ ...없느냐고 물었다.(둘 다 맞음) 밥은 먹고 다니냐./ 밥은 먹고 다니느냐.(둘 다 맞음) 위 글 -> 윗글 덥냐, 춥냐, 어둡냐, 차갑냐/ 더우냐, 추우냐, 어두우냐, 차가우냐(개정해 둘 다 맞음) : 어간의 받침 ㅂ은 어미 시작의 모음을 만나면 '오/우'로 변하는 ㅂ불규칙용언이다. '덥-' + '으냐'는 '더우냐'로 된다. 발길마다 자욱이 남았다. -> ...자국이 남았다. / KBS는 "'...하고 가실게요'는 주체 높임형 선어말어미 '-시'와 약속형 종결어미 '-ㄹ게'가 함께 쓰인 잘못된 표현으로 '-할게요/ -하겠습니다'가 바른 표현입니다"라고 고지했다. "- 실게요"는 잘못된 말이라고 여러 연구자가 지적했다. 이런 문젯거리 말을 코미디 방송에서 재미 삼아 쓴다. 한글 단체가 항의하자 잘못을 고지했다. 하지만 계속 사용한단다. 일부 누리꾼은 오히려 한글 단체의 지적을 원망한다지만, 내가 만난 많은 사람은 우리말을 당연히 바르게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KBS는 국민 의식을 어떻게 보고 이러는지 갑갑하다. [국립국어원 답변] : '가실게요’의 ‘-ㄹ게요’는 ‘-ㄹ게+요’입니다. 이 ‘-ㄹ게’는 해할 자리에 쓰여 어떤 행동을 할 것을 약속하는 뜻을 나타내는 종결 어미이므로, 보통은 화자의 의지를 나타냅니다. 예를 들어 ‘다시 연락할게요.’나 ‘그 사람은 내가 맡을게.’, ‘남은 밥은 내가 먹을게.’와 같이 씁니다. 말씀하신 상황에서 ‘-ㄹ게요’를 쓰는 것은 청자의 의지에 대한 표현을 화자가 대신 이야기 하는 형태로 볼 수 있으나, 말씀하신 상황에서는 이러한 ‘-ㄹ게’의 뜻에 맞지 않으며 적절하지 않은 쓰임입니다. 격식을 갖추어 쓰고자 하시면 “하시겠습니다./하십시오./하시겠습니까?”, “가시겠습니다./가십시오./가시겠습니까?”와 같이 표현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신문 칼럼 소개 : 저작권 때문에 간추려 다시 작성함] ...“잠시만요 상품 가입하시고 100만 원 상품권 받아 가실께요.”를 읽고 피가 역류할 것처럼 화가 나서... “...하실게요”라는 말이 잘못된 거라고 수차례 글을 쓴 나는 유행어로 번지는 걸 구경만 할 수 없었다. 어법도 틀렸지만, ‘받아 가실께요’도 틀렸다. ‘실께요’가 아니라 ‘실게요’다. 그저께는 “잠시만요! 옛 충남도청사 대전 근현대사 전시관에 들렸다 가실게요...”라는 메일을 받았다. ‘가실게요’도 못마땅해 죽겠는데 ‘들렀다’를 ‘들렸다’라고 썼다. 이제는 공공기관까지 한통속이 되어 국어를 오염시키고 있으니 ... “...하실게요”라는 이 이상한 말이 부쩍 퍼진 것은 KBS 2TV ‘개그콘서트’의 ‘뿜 엔터테인먼트’에서 개그우먼 박은영이 “보라 언니 ...하고 가실게요.”라고 외쳤기 때문이다. 대학 신입생 유치 등 각종 광고, 심지어 도전 골든벨에까지 “...하실게요”가 등장했다. 그런데 9월 1일 ‘개콘’에 이런 자막이 떴다. ‘...하고 가실게요’는 주체 높임형 선어말어미 ‘시’와 약속형 종결어미 ‘~ㄹ게’가 함께 쓰인, 잘못된 표현이라는 것이다. 바른 표현은 ‘...할게요’ ‘...하겠습니다’라는 게 그 자막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시청자들이 자막을 얼마나 주의 깊게 봤을까? 선어말어미가 무슨 뜻인지 다 알까? 예로 든 바른 표현도 경우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하실게요’는 ‘...할게요’나 ‘...하겠습니다’가 아니라 ‘하세요’로 바꿔 써야 맞는 경우가 많다. “자, 이리 오실게요.”가 아니라 “자, 이리 오세요.”다. KBS가 고지한 자막은 쉽게 이해할 수 없다. "...하고 가실게요"는 두 가지 잘못이 있다. 첫째 주어와 서술어가 잘 호응하지 않는다. ‘-ㄹ게’는 어떤 행동을 약속하는 뜻인 종결어미다. “보라 언니 ...하고 가실게요.”는 자신이 아닌 보라 언니가 주어이므로 어색하다. “보라 언니 ~하고 가실 겁니다.”다. 또 한 가지는 높임법 문제다. ‘보라 언니’는 사장보다 높은 사람이 아니다. 보라 언니가 ‘가시다’가 아니라 ‘갈 겁니다’나 ‘갑니다’처럼 그냥 ‘가다’라고 해야 우리말 높임법이다. 자기보다는 윗사람이지만 그보다 더 윗사람에게 그를 말할 때는 높임말을 붙이지 않는다. 유감스럽게도 그 말이 잘못이라는 자막을 본 시청자들이 어깃장을 놓는 경우가 있다. 잘못된 표현인 줄은 알지만 ‘~하고 가실게요’가 더 차진 맛이 난다는 것이다. 블로그에 “이제 개그하려면 한글 공부도 해야겠네요.”라고 했다. “한글 단체의 지적으로 그런 자막을 내보냈다는데 유행어를 가지고 너무한 거 아냐, 개그 콘서트는 개그인데 왜 다큐로 받아들였지?”라고 쓰기도 했다. 하지만 국민 대다수는 우리말 파괴를 원치 않는다. 내가 사람들을 만난 경험에 따르면 그렇다. 공영방송이 잘못된 표현이라면서 왜 그 말을 계속 떠들게 내버려 두는지. 인기 높은 유행어가 됐으니 좋다는 걸까? 10월 6일 밤에도 KBS에서 이 말을 썼다. ‘...실게요’는 심각한 문법 파괴, 국어 파괴다! KBS, 정신 차리세요. 000 논설 고문 / 나 같은 경우 개를 좋아합니다. : "나는 개를 좋아합니다."로 충분하다. "나 같은 경우 개를 좋아합니다. 우리 집 개 같은 경우 나를 잘 따릅니다."라는 곤란한 말도 있다. 컨닝, 런닝맨 -> 커닝, 러닝맨 : '커닝'이 아니라 '치팅'이라는 주장이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커닝'이 올라 있는데, '부정행위'로 순화해 쓰도록 했다. 쭈구미, 아구찜, 꽁짜, 마춤 -> 주꾸미, 아귀찜, 공짜, 맞춤 : '아귀'는 입이라는 뜻도 있다. 야채 : '야채'는 일본식 한자말이므로 '채소'나 '남새'가 좋다. 암돼지, 숫돼지 -> 암퇘지, 수퇘지 엘리베이터 문을 강제로 열지 마세요. -> ...억지로 열지 마세요. 강제로 착색한 과일 -> 착색한 과일, 속임수로 물들인(색칠한) 과일, 사람이 물들인 과일 : '착색'은 본디 색이 아닌 다른 색을 내려고 물을 들이거나 색을 칠하는 행위다. '이 식품에는 착색료를 쓰지 않았습니다'처럼 쓴다. '착색한 과일'으로만 써도 부정적인 방법으로 억지를 썼다는 의미가 된다. '강제'는 자유를 억눌러 남에게 억지로 시키는 행위이므로 여기 예문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민낯 : '민낯' '민얼굴'이 맞고 '맨얼굴'은 안 된다. 그 배우는 되게 웃긴다. -> ...정말 웃긴다. : '되다'는 일이 벅차거나 반죽에 물기가 적어 뻑뻑하다는 뜻이므로 '되게'는 '아름답다' '부드럽다' '훌륭하다'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 사람 되게 웃겨"처럼 부정적인 의미다. 하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는 긍정적인 데도 쓰고 있다. 이따가 뵙겠습니다. : '겠'은 화자의 의지를 나태내는 것으로 적절하다. 내일은 신문 쉽니다. : 미래니까 '쉬겠습니다'를 쓸 법한데 현재형으로 충분하다. 그런 깊은 뜻이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 지나친 겸양으로 확신하지 못하는 모양새다. "그런 깊은 뜻이 있습니다"처럼 군더더기를 없애야 좋다. 안내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안내 말씀을 드립니다"로 충분하다. 완성된 밥 -> 지은 밥 : (속담) 지어 놓은 밥도 먹으라는 것 다르고 잡수라는 것 다르다. 교실 한 켠에, 맞은 켠 -> 교실 한편에(한쪽에), 맞은편(맞은쪽) 안 봐도 비디오 -> 안 봐도 천 리, 안 봐도 뻔하다 인구에 회자하는(회자되는) 명언 -> 회자하는(회자되는) 명언 : '회자하다'는 칭찬을 받으며 사람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는 뜻이다. 열쇠 복사 -> 열쇠 복제 대 놓고 비판하다. -> 대놓고 비판하다. : '차를 대 놓다'이지만, '대놓고 비판하다' '터놓고 말하다'로 쓴다. 잠실운동장으로부터 중계합니다. -> 잠심운동장에서 중계합니다. : '여기로부터 ...'가 아닌 '여기서(에서) 저기까지'처럼 써야 자연스럽다. 장 교수는 영국에서 살고 있다. -> 장 교수는 영국에 산다. 그 사람은 씩씩하고 명랑하다. 또한 건강하다. -> ...또 건강하다. : '또'는 '그리고, 그 밖에 더', '또한'은 '역시'라는 개념으로 보는 것이 요즘 추세다. '또한'은 '너 또한 행복하다'처럼 쓴다. 쓸 데 있는 (성경) -> 쓸데 있는 (이하 성경) 책망 받을 -> 책망받을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 ...아니 되었나니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 ...그러지 않아야 하나니: '상황이 그렇지 않다'가 아니라, '그러지 마라'라는 의미다. '네가 그 일을 하든 그러지 않든'처럼 어떤 행위를 하지 않는 경우는 '그러지 않다'다.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 주여 우리가 눈뜨기를 원하나이다. 표적 밖에는 없다. -> 표적밖에는 없다. 혼인 집 -> 혼인집 한 편, -> 한편(같은 편),
329    땡!- 생활상식 93 댓글:  조회:4808  추천:0  2016-02-16
  1. 지방간, 혈중지방에 겨울 굴이 아주 좋다 간기능이 파괴되어 GOT, GPT가 높으면 매우 위험한데, 겨울의 바닷굴은 아주 좋은 치료식이다. 그 원리는 조혈(造血)과 정혈(精血)인데, 굴은 양쪽 다 강하게 작용하며 특히 철분, 망간, 미네랄군, 아미노산, 글리코겐, 타우린 등이 많이 들어 있어 에너지의 寶庫로 잘 알려져 있다.   2. 구기자로 몸이 건강해진다 구기자는 예로부터 자양강장의 묘약으로 알려져 왔으며, 매일 복용하면 병약자가 건강해지고, 정력이 증진되며, 시력이 좋아지고, 위장의 활동이 좋아진다. 야산에 흔히 자생하는 구기자를 보면 지나치지 말고 어린잎과 열매를 채취하여 그늘에 말렸다가 차로 오래 복용하면 확실한 효과를 볼 수 있다.   3. 배탈설사는 오이를 많이 먹어라 배탈이 나서 설사할 때는 얇게 썬 오이를 흑설탕에 재어 양껏 먹으면 좋다.   4. 나빠진 위는 콩나물이 좋다 콩은 인체에 없어서는 안될 식품이고 영양가도 높지만 소화가 잘 안된다. 이 럴 때 콩나물을 먹은 것이 대단히 좋다. 콩나물에는 비타민C가 많고 요즈음에는 항암물질인 셀렌이라는 물질이 발견되어 붐이 일기도 했다. 먹는 방법은 재료 500g에 물은 반컵정도로 하여 약간의 소금을 넣고 뚜껑을 닫은 채 강한 불로 3분간 데쳐 식힌 후에 적당한 양념을 하여 먹으면 되는데, 날씬해 지는 미용식으로는 최고의 식품이며, 아무리 먹어도 뚱뚱해지지 않고, 변비는 1주일만에 해소되며, 피부도 한결 좋아진다.   5. 뱃살 확실히 빼는 법 뱃살을 확실히 빼려면 한가지만으로는 절대 안되며, 지방을 태우는 유산소운동과 식사 감량을 병행해야 하는데, 가장 권장할 만한 운동이 걷기와 수영이며, 세끼의 식사를 하되 저녁은 7시 이전에 먹도록 한다. 가장 효과적인 유산소 운동 - 빨리걷기 요령 1. 숨을 헉헉 내쉴 정도로 Speedy하게 걷는다 2. 15분 뒤부터 체지방이 타 들어가므로 최소한 20분 이상은 걸어야 한다 3. 보폭은 80cm 이상으로 하고 팔은 활발하게 움직여야 한다 4. 발뒤꿈치부터 착지하여 발끝으로 마무리하면서 걷는다 5. 자세를 바르게 걷고 운동 후에는 윗몸일으키기 등 복근운동을 해준다.   식이요법 - 초콩다이어트 만드는 법 검은 콩을 씻어서 병에 1/3 넣고, 식초는 콩의 2배가 되게 붓는다. 이렇게 열흘만 두면 발효가 되는데, 식후 10알씩 먹는 것이 탤런트 이재룡이 성공했다는 초콩다이어트인데, 식초는 체내의 젖산을 분해하고 변비와 숙변을 제거하며, 또한 콩은 식물성 단백질이라서 영양보충에도 아주 좋다.   6. 숙취 해소법 감을 먹으면 탄닌이라는 성분이 들어 있어 위를 보호하는 기능을 하므로 술이 빨리 깬다. 우유를 따뜻하게 데워 먹어도 좋다. 머리가 아플땐 커피 한잔과 갈근차(칡차)를 마셔도 술 해독에 큰 도움이 된다. 또한 미지근한 물에 정종 1컵을 섞어 만든 청주목욕이 음주피로를 빨리 풀어준다. 얼큰한 해장국은 약해진 위벽을 더 자극하는 것이므로 좋지 않고 담백하고 개운한 콩나물국, 조개국, 미역국, 시금치국이 숙취해소에 효과가 크다.   7. 음주한 다음날에는 이온음료를 마셔라 술을 마시면 몸과 뼈에서 칼슘이 빠져나가는데, 이럴 땐 다음날에 반드시 이온음료(포카리스웨트, 게토레이)를 마심으로 해서 보충해줄 수 있다. 이온음료는 말 그대로 이온이기 때문에 흡수가 잘되고 효과도 빠르게 나타나는데, 그러나 신장에 이상이 있는 사람(담석증)은 삼가야 한다.   8. 코피날 땐 코 안쪽으로 눌러줘야 코피가 계속 날 때는 편안한 자세로 앉아 머리를 약간 젖히고 엄지와 검지로 코를 잡고 한동안 지그시 안쪽으로 눌러주면 멎는데 차가운 물수건이나 얼음수건으로 코와 이마를 덮어주면서 하면 효과가 크다.   9. 무좀치료의 원초적 방법 물에다가 발을 담근 뒤 햇볕에 말리면 그것이 자외선 소독이 되어 자연적으로 치유가 되는 데, 의외로 효과가 크며 가장 근본적인 치료법이다.   10. 무좀으로 오랫동안 고생하시는 분 이렇게 해보세요 소주 1병에 식초 한컵, 그리고 우황청심원 1개와 솔잎가루 한컵을 잘 섞은 후에 발을 30분 동안 담그는데 1주일에 한번씩 한달만 해보세요. 예전부터 내려오는 민간요법으로 발이 시원해지면서 무좀균이 아주 잘 죽습니다. 11. 위염, 위궤양을 앓을 때 현대인들은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나 심한 음주습관 등으로 위염이나 위궤양을 앓고 있는 사람이 많은 데, 이 때에는 양배추 특히 푸른부분을 날로 썰어 먹거나 주스로 만들어 보름정도 먹으면 효과가 좋다.   12. 피부에 박힌 가시를 빼려면 피부에 가시가 깊이 박혀 쪽집게나 바늘로는 좀처럼 빠지지 않을 경우 고약을 발라주면 고약이 가시를 빨아낼 뿐 아니라 열과 통증도 없애준다. 또한 부추를 짓이겨 3~4회 발라주어도 신기하게 가시가 솟아오른다.   13. 불면증을 쫓으려면 온갖 잡념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잠을 잘 이루지 못할 때는 손으로 엄지발가락을 아래로 여러번 세게 구부려주면 머리에 모여 있던 혈액  14. 악성변비에 좋은 민간요법 갑작스런 악성변비가 있을 때는 참께100g을 뽁아 찧어서 마늘 뿌리 3개와 함께 갈아서 저녁 먹기 전 먹으면 즉시 효과를 본다.   15. 감기엔 배추뿌리와 생강을 넣은 차를 몸이 오싹거리며 열과 두통을 동반한 감기에는 배추뿌리를 깨끗이 씻어 생강과 흑설탕을 넣고 끓여 마시면 효과가 좋다.   16. 살속으로 파고 든 발톱 깎으려면 살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억센 발톱을 아프지 않게 깎으려면 탈지면에 식초를 흠뻑 적셔 발톱위에 10분정도 올려 놓는다. 이렇게 하면 발톱이 물러지면서 통증이 멎는데, 이때 손톱깍기로 깎아주면 아프지 않고 쉽게 깍인다.   17. 빈혈 예방에 좋은 식품 갑자기 나른하고 어지러울 때는 피가 부족해 발생하는 빈혈증세로 보아야 하는데, 이럴 때는 기름기 적은 생선, 두부, 콩, 유부, 멸치, 간, 계란, 탈지유 등 철분생성을 돕은 식품을 많이 먹으면 좋다. 18. 베개의 적당한 높이는 ‘베개는 높여 잔다’는 말이 있지만 베개가 너무 높으면 머리의 혈액부족으로 머리가 아프게 되고 어깨가 결리며 너무 낮으면 자고나도 피곤해진다. 적당한 배개 높이는 이불에서 6cm, 세로폭은 50cm, 가로폭은 어께넓이보다 약간 크게 하면 된다.   19. 딸꾹질을 멈추게 하려면 밥을 급하게 먹거나 코를 막고 물마시는 것, 갑자기 놀라게 하는 쇼크용법이 잘 알려진 방법이나 기대만큼 효과가 없다. 보다 효과적인 방법은 설탕을 한 술 떠서 침에 녹이지 말고 그대로 삼키는 것이다. 그래도 안될 경우 몇 번 반복해보면 분명히 효과가 있다.   20. 구내염이 심할 경우 구내염이 심하면 몸살까지 걸리는 경우가 있는데 무엇보다도 예방이 최고다. 이런 사람은 평소에 약용치약(파로돈탁스, 시린메드)을 상용하면 간단히 해결되며, 이러한 치약은 종합비타민으로서의 도움도 있다고 하니 지금 당장 챙겨보시면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21. 올바른 세수법 세수할 때 얼굴피부에는 뜨거운 물이 좋을까 차거운 물이 좋을까 모르는 사람이 있는데, 뜨거운 물은 피부의 단백질과 수분을 빼가지 때문에 잔주름이 생기기 쉽다. 제일 좋은 세수법은 먼저 미지근한 물로 모공을 열어주고 노폐물이 완전히 제거되었다고 생각되면 찬물로 마무리하여 항상 생기있고 젊은 피부를 가지도록 하자.   22. 치아를 희게 하려면 누렇게 된 치아를 희게 하려면 레몬을 거즈에 적셔 닦으면 되는데 레몬의 비타민C 작용 으로 잇몸까지 튼튼해지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23. 상한우유 확인법 우유를 냉수에 몇방울 떨어뜨렸을 때 우유가 물에 퍼지며 흩어지면 상한 것이고, 퍼지지 않고 그대로 가라 앉으면 상하지 않은 것이다.   24. 김치속의 고춧가루 빛깔 곱게 내려면 고춧가루 색깔이 좋지 못하면 김치 담그기 하루전에 고춧가루를 따뜻한 물에 개어 불려 두었다가 사용하면 빛깔이 고아 보기에도 먹기에도 좋다.   25. 맥주맛 제대로 즐기려면 맥주는 1년 이내의 햇맥주가 좋으며 시원해야만 맛이 있는 맥주의 온도는 5도이고, 마실 때 공기에 노출이 되어 산화되지 않도록 거품은 2~3Cm가 되도록 하여야 하며 맥주잔도 함께 냉장보관하여야 제 맛이 살아난다.   26. 라면 맛있게 끓여먹기 팔팔 끓는 물에 먼저 스프를 넣고 잠시 더 끓이다가 면을 넣어 끓을 때 중불로 한 다음 적당량의 파와 고춧가루, 달걀 등을 넣는다. 먹어봐서 약간 덜 익은 듯 할 때 불을 끄고 뚜껑을 덮은 뒤 30을 세고 나서 잽싸게 먹는다.   27. 곰국 맛있게 끓이기 사골을 찬물에 1시간 정도 담가 핏물을 빼낸 다음, 사골을 끓는 물에 잠시 넣고 검은 물이 우러나기를 기다린다. 다음에 물을 버리고 사골을 씻어 찬물을 부어 끓인다. 대파, 마늘, 양파 등을 넣어 끓이면 누린내가 없어진다.   28. 구수하고 개운한 된장찌개 맛내기 된장은 국물에 처음부터 넣고 끓여야 구수한 맛이 살아나며, 쌀을 한번 씻고난 뜨물에 끓이면 야채의 풋내가 없어지고 맛이 부두러워지며, 얼큰한 맛을 내려면 고추장을 쓰고 깔끔한 맛을 내려면 고추가루를 쓰되, 다진 마늘은 너무 많이 넣거나 미리 넣으면 텁텁해지니 나중에 넣어야 한다.   29. 찌개를 맛있게 끓이려면 우선 센불로 물만 팔팔 끓인 다음 재료를 넣고 재차 끓여 거품이 일기 시작하면 약하게 자글자글 끓이는데 뚜껑을 덮는 것도 중요한 요령이며 된장찌개와 김치찌개를 끓일 때는 쌀뜨물을 사용하면 맛이 더해진다. 특히 생선찌개를 끓일 때는 국물이 팔팔 끓을 때 생선을 넣어야 부서지지 않는다.   30. 영양있고 빛깔좋고 맛도 좋게 달걀 삶는 법 달걀을 삶을 때 색깔을 내기 위해서는 삶을 물에 다른 재료를 넣고 삶으면 고운 색깔이 나오는데, 홍차를 넣으면 갈색이 되고, 마른 양파껍질을 넣으면 노란색, 월계수 잎을 넣으면 녹색이 되는데 영양도 많고 빛깔도 좋다. 또한 달걀이 터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소금을 넣고 끓여야 한다. 31. 계란 후라이 맛있게 먹으려면 계란 후라이는 대개 소금을 뿌려 먹는데 간장을 붓고 그 위에 김가루를 얹어 먹으면 별미이다. 이때 김가루는 가위로 보기 좋게 잘라야 한다.   32. 색깔있는 만두 만들기 만두는 보통 흰색만을 생각하는데 가끔 색깔있는 만두를 만들어 분위기를 바꿔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고추, 당근, 시금치 등으로 빨강, 노랑, 파랑색의 만두를 만드는데, 그 요령은 이러한 야채를 곱게 갈아 밀가루와 반죽할 때 섞으면 되고 속양념은 평소와 같이 만들면 된다.   33. 빵을 맛있게 먹으려면 카레를 식빵에 발라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인데, 카레에 양파를 잘게 썰어서 섞어주면 양파의 매운 맛이 스며들어 산뜻한 맛이 더한다.   34. 우유를 잘 마시지 않는 어린이를 위하여 우유를 싫어하는 어린이는 우유에서 나는 특이한 냄새가 싫기 때문인데 이런 어린이에게는 강요하지 말고 우유에 레몬을 약간 타면 우유냄새가 없어지는 대신 구미를 돋구는 향긋한 레몬향기가 있어 누구나 잘 마시게 된다.   35. 보리차에 소금을 넣으면 향기가 일품 끓는 물에 보리를 넣고 소량의 소금을 넣어 약 10분간 끓이면 향기가 좋아질뿐만 아니라 맛도 정말 부드러워진다.   36. 마른 오징어 맛있게 먹기 마른 오징어를 구워먹을 때 마요네즈에 고추장을 섞어 먹으면 그 맛이 끝내 주는데, 마요네즈와 고추장의 섞는 비율은 취향에 따라 조절하면 된다.   37. 야외에서 도구없이 생선 구우려면 생선을 신문지에 서너번 이상 말아 포장을 한 후 물에 듬뿍 적셔 불에 구우면 아주 맛있는 증기구이가 된다.   38. 문어나 낙지를 맛있게 데치려면 무를 얇게 썰어 끓인 후 무즙이 우러났을 때 데치면 싱싱할 뿐 아니라 맛도 대단히 좋다.   39. 녹차는 나빠요 우리가 수시로 마시는 녹차는 모든 면에서 좋지만 카페인이 들어 있어서 변비에는 좋지 않으니 차라리 시중에 나오는 동규자차를 드시면 변비에 좋아요   40. 몸에 좋은 녹차 이용법 한번 마시고 난 녹차와 녹차잎을 세면대에 넣어두면 연한 물이 우러 나오는데, 이 물로 세수를 하면 유해산소를 말끔히 없애주어 피부를 매끄럽게 하고 또한 각질을 벗겨주어 미백효과를 줄 뿐 아니라 냉이 심한 분이 목욕을 하면 냉증치료에 효과가 탁월하며, 몸냄새 나는 사람이 그 부위를 씻어주어도 효과가 크다.   41. 참깨는 뇌활동을 활발하게 한다 참깨가 뇌신경을 기르고 초조함을 없앤다는 것은 옛날부터 전해오는 상식인데 참깨, 참기름을 항상 먹는다는 것은 건강상 아주 좋은 일이라 하겠다. 참깨는 지방으로 가득 차있지만 회춘에 효과가 있는 비타민E가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특히 생식능력 향상과 성장발육에 좋고 다행스럽게도 콜레스테롤을 씻어내는 등 좋은 역할만 하는 식물성 지방이므로 많이 먹어도 아무런 지장이 없다.   42. 신 김치 안시게 먹는 법 신 김치에는 김치 한 포기당 계란 2개를 파묻어 두었다가 10시간쯤 지나서 꺼내 먹거나, 깨끗이 씻은 조개껍데기를 넣었다가 먹으면 신맛이 훨씬 덜해지고 맛도 살아난다.   43. 튀김 후 기름에 남는 재료냄새 없애기 튀김 후 기름에 남는 재료 찌꺼지 냄새는 무, 감자, 양파 가운데 한가지를 넣고 튀기면 냄새가 감쪽같이 사라진다.   44. 생선 굽는 요령 생선을 구울 때 흔히 소금을 뿌리는데, 이 방법 보다는 묽게 탄 소금물에 생선을 10분쯤 담갔다가 구우면 살도 단단해지고 소금기도 골고루 배어진다. 또 생선은 뼈째 먹도록 조리하는 것이 좋은데, 이때 바닦에 나무젓가락을 깔고 생선을 그 위에 올려 놓으면 타지도 않고 바닥에 눌러 붙지도 않으며 뼈째 먹을 수 있도록 충분히 구울 수 있으며, 또한 먹을 때에도 생선에 마늘가루를 약간 뿌리면 생선구이 맛이 한결 좋아진다.   45. 다진 마늘 오래 보관하고 먹으려면 다진 마늘을 오래 보관하면 색깔이 변해서 버리기에도 아깝고 양념으로 쓰기에도 걱정이 되는데, 오래 두고 먹으려면 마늘 위에 설탕을 뿌려 냉장고에 보관하면 탈색도 안되고 맛도살아난다.   46. 감자 싹 안나게 보관하려면 우선 누런봉투를 구입해서 거기에 감자를 담아 서늘한 곳에 보관하면 싹이 나지 않는다. 특히 사과와 함께 봉투에 넣어 보관하면 싹이 나지 않고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다.   47. 고구마 삶을 때는 다시마를 이용한다 통째로 고구마를 삶을 때 다시마를 조금 넣어서 함께 삶으면 놀라울 정도로 짧은 시간에 맛있는 고구마를 삶을 수 있는데, 이는 다시마에 있는 알긴산과 요오드가 고구마를 부드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48. 식초의 여러 가지 쓰임새(주부님은 필독) - 갈증이 나거나 위에서 쓴맛이 날 때 물에 서너방울 타서 마시면 좋다 - 지나치게 짠 음식에 식초 몇방울 넣으면 짠맛이 덜해진다 - 야채나 과일을 마지막 행굴 때 식초 몇방울 넣으면 농약잔류물을 없애주며 보관도 오래 지속될수있고 뽀드득소리가 나는 깨끗한 느낌을 준다. - 밥을 오래 보존하려면 밥 넣기전에 밥통 바닥에 식초 몇방울 떨어뜨린다 - 도마에 밴 파냄새, 생선비린내는 식초물에 씻으면 감쪽같이 없어진다 - 김밥을 썰 때 식초물에 칼을 담갔다가 썰면 으깨지지 않고 잘 썰어진다 - 식초탄 물에 오이를 담가두면 오이의 쓴맛이 없어진다. - 다시마, 연근, 우엉을 삶을 때 식초 몇방을 넣으면 아린맛도 변색도 없다 - 질긴고기는 식초를 발라 2~3시간 재어두면 연해진다 - 벗긴 감자, 토란, 고구마 등을 식초물에 담가두면 맛과 색의 변화가 없다 - 민물고기를 잡아 약간의 식초물에 담가두면 물고기가 식초를 마시고 중금속과 비린내를 토해낸다 49. 국수 쫄깃쫄깃하게 삶기 국수는 면발에 찰기가 있도록 하는 것이 맛을 살리는 중요한 요령이다. 먼저 냄비에 물을 충분히 붓고 끓인 뒤 참기름이나 식용유 한 숟가락 넣은 다음 국수를 세워서 풀어넣고 5분정도 끓이다 물이 넘으려 할 때 찬물을 한컵정도 붓고 저어주고 국수가 다시 떠오를 때까지 끓인 뒤 즉시 건져내 찬물에 두어번 행구면 면발이 쫄깃쫄깃해져 맛이 좋다.   50. 감자껍질 얇게 벗기려면 감자 껍질을 얇게 벗기려면 감자를 끓는 물에 살짝 데쳐서 부드러워졌을 때 나일론 수세미같은 것으로 살살 문지르면 아주 잘 벗겨진다. 51. 양파를 썰 때 눈이 맵지 않게 하려면 파나 양파를 썰기 전에 미지근한 물에 담갔다가 썰면 감쪽같은데, 실수로 자극을 받아 눈이 아리고 눈물이 나오거든 냉장고문을 열고 얼굴을 들이 밀면 곧 아린기운이 가시게된다.   52. 갓 뽑아낸 흰떡과 부드러운 식빵 자를 때 갓 뽑아낸 흰떡과 부드러운 식빵자르기가 여간 힘든게 아닌데, 흰떡 자를 때는 토막낸 무에 칼을 문질러가면서 하고, 부드러운 식빵은 칼을 불에 달구어 자르면 깨끗하게 잘 잘라진다.   53. 양치질 외 치약의 활용방법 금속스푼이나 포오크 등의 오래된 때는 부드러운 천에 치약을 묻혀 닦으면 깨끗하게 닦이고 윤기가 살아나며, 손에 묻은 생선냄새가 잘 가시지 않을 때에도 치약을 발라 씻으면 효과가 있으며, 다리미 바닥의 때도 치약을 발라 문지르면 깨끗이 없어진다.   54. 병속을 닦을 때는 달걀껍질로 병속을 씻기 힘들 때는 병에 물을 조금 넣은 뒤 달꺌껍질을 부숴 넣어 흔들면 깨끗이 씻어진다.   55. 마요네즈가 묻은 그릇은 찬물로 씻어야 마요네즈는 물과 기름이 분리되기 쉬운 상태로 조합되었기 때문에 더운물로 씻으면 기름이 분리되어 기름투성이가 되므로 찬물을 사용해야 한다.   56. 우유팩을 도마대신 사용 고기나 생선을 나무도마위에 놓고 칼질하면 칼자국이 남고 병균이 생길 수도 있으나 우유팩 을 사용하면 칼자국도 나지 않을 뿐 아니라 생선이나 육류를 다른 그릇에 다시 옮겨 담을 필요도 없이 직접 옮길 수 있어 좋다.   57. 달걀껍데기를 깔데기 대신 사용 쓰다 남은 식용유 등을 병에 담기 위해 깔데기 대신 달걀껍질에 구멍을 내어 사용하면 깔데기씻을 부담이 없어 편리하다.   58. 목욕실 거울에 김이 서리는 것을 막으려면 목욕탕 거울에 김이 서리는 것을 막으려면 거울에 비누(퐁퐁)칠을 한 뒤 마른걸레로 닦아주면 거울 표면에 얇은 비누막이 생겨 김이 서리지 않게 된다.   59. 드라이 플라워 만들기 기념일 등에 받은 꽃을 어떻게 보관해야 할지 고민스러울 때가 많다. 거꾸로 매달아 놓고 말려도 되지만 전자레인지를 활용하는 방법이 있다. 분무기로 꽃에 물을 살짝 뿌린 뒤 전자레인지에 넣고 3분정도 열을 가하면 모양이 좋게 말려져 반 영구적으로 보관할 수 가 있다.   60. 신발의 발냄새 없애려면 무더운 여름철에는 현관에 신발을 그냥 두면 심하게 냄새가 난다. 이럴 때는 냉장고에 사용하는 탈취제나 숯을 신발마다 약간씩 넣어두면 좋다. 61. 소음 심한곳에서 전화받을 때 소음이 심한 곳에서 전화받을 때 한 쪽 귀를 막는 건 별 소용이 없다. 그보다는 자신의 송화기를 손으로 막아 소음이 들어가지 못하게 차단한 후 수화기로 듣는 것이 훨씬 쉽게 알아듣는 방법이다.   62. 구두약은 저녁에 발라두어야 구두는 저녁에 구두약을 발라두고 다음날 아침에 닦아야 가죽에 구두약이 잘 스며들어 제대로 닦이고 오래 신는다.   63. 벽에 난 못자국 제거 가구나 벽에 못자국같은 작은 구멍이 생겼을 땐 이쑤시개에 접착제를 발라 구멍에 끼워 넣고 남는 부분을 칼로 잘라내어 반반하도록 처리한다.   64. 뻑빡한 열쇠구멍엔 흑연가루를 자물쇠가 뻑뻑해서 열고 잠글 때 힘들면 열쇠구멍으로 연필가루를 넣은 후 여러차례 열고 잠그기를 반복하면 동작이 아주 부드러워진다.   65. 가죽 옷이 오돌도톨한 곳에 긁혔다면 바나나 껍질의 미끈한 부분을 가죽에다 대고 자주 문질러 주면 헤어진 가죽이 새것처럼 깨끗해지는데, 의류 뿐 아니라 핸드백, 구두 등 흑갈색으로 된 가죽이면 모두 사용할 수 있다.   66. 양복바지를 가방에 넣을 때 출장을 자주갈 때 주름이 잘가는 양복바지는 고민의 대상인데, 이럴 때는 신문지를 둥굴게 말아서 여기에 바지를 두루마리처럼 감아 가방구석에 넣어보자. 주름도 지지 않으며 장소도많이 차지하지 않아 깔끔하다.   67. 세제용기를 버리기 전에 한번 더 세탁을 세제는 보통 종이상자에 담겨 있는데 이 상자를 흔들어서 안 나오면 다 쓴 것으로 버리게 된다. 그러나 상자의 안쪽은 온기로 인한 흡수력 때문에 많은 세제가 달라붙어 있으므로 마지막(뜨거운 물로 흔들어 줌)까지 알뜰하게 사용하자.     68. 집안의 페인트 냄세를 없애려면 집안에서 페인트 칠을 하고 나면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프고 오래간다. 이럴 때에는 양파를 몇 개 쪼개어 집안 구석구석에 놓아두면 두가지 냄새가 중화되어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다.   69. 표면이 튼 구두 손질하는 법 구두의 표면이 트거나 부딪혀서 표면이 벗겨졌을 때는 양초를 이용한다. 양초토막으로 트거나 벗겨진 곳 또는 윤이 나지 않는 부분에 골고루 문지른 뒤 성냥불을 갖다대고 녹인다. 그러면 녹은 양초가 가죽에 스며들게 되는데 그 때에 곧 구두약을 칠하고 닦으면 헌 구두라도 새 것처럼 보이게 된다. 70. 맛있는 국수국물 만들기 시원한 냉국수나 칼국수를 만들어 먹을 때는 국물이 맛있어야 한다. 국물 맛을 낼 때는 멸치를 많이 사용하는데 멸치는 반드시 똥을 빼고 물에 넣어 끓인 다음 설탕과 술을 반 찻술 정도 넣고 한번 더 끓이면 맛있는 국물이 된다. 여름에는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가 냉국수를 만들어 먹어도 맛있다. 남는 국물을 좀더 오래 보관하려면 우유팩을 깨끗이 씻어 그 곳에 국물을 담아 냉동실에 보관하였다가 필요할 때 사용한다. 71. 생선을 곱게 구워내는 방법 생선을 직접 불에 구우면 불내가 날 뿐만 아니라 버너를 쓸 경우 불이 부분적으로 강하기 때문에 익기도 전에 타 버리기 쉽다. 그래서 시장에서 파는 알미늄 은박지를 준비했다가 이것으로 생선을 돌돌 말아 불 속에 넣고 구어내면 타지도 않고 또 재 같은 것도 묻지 않아 아주 좋다. 낚시터에서 잡은 생선을 즉석에서 구어 먹는데 이용 하면 아주 편리하다   72. 열무김치 풋내 안나게 담그는 방법 여름철에 담그는 열무김치는 잘못하면 풋내가 나거나 씁쓸해지기가 쉽다. 이럴 경우 옥파를 조금 썰어 넣고 담그면 전혀 쓴맛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풀을 묽게 쑤어 여기에다 파, 마늘, 생강, 고추가루 등의 양념을 다 넣고 소금으로 조금 세게 간을 맞추어 절인다. 여기에다 열무를 담갔다가 꺼내서 담그면 아주 맛있는 김치가 된다.   73. 가죽소파의 얼룰진 때 가죽소파에 얼룩진 때는 여간해서 잘 지워지지 않는데 옥시크린과 주방용 세제를 같이 따뜻한 물에 잘 풀어준 다음 솔로 묻혀 닦아주세요. 이렇게 닦아준 다음에 헹굴 때는 물에 유연제(섬유린스)를 섞어 헹구어 주면 좋습니다. 그런 다음 대형 타울로 물을 닦아낸 다음 그늘에 건조를 시켜 주셔도 되구요 좀 빨리 마르게 하려면 선풍기를 틀어 바람을 쏘여주면 됩니다.   74. 티눈 없애는 방법 티눈은 좀처럼 낫지 않는데 그럴 때에는 메밀가루 4g 정도와, 쇠귀나물 하나를 갈아서 잘 개어 섞어서 천에 펴고 환부에 바르면 하루만에 없어진다.   75. 쌀에서 냄새가 날 때 쌀에서 이상한 냄새가 날 때는 아침밥으로 사용할 쌀을 그 전날 저녁 미리 식초 1~2방울을 떨어뜨린 물에 씻어서 소쿠리에 받쳐 물기를 빼고 다음날 밥을 짓기 전에 한번 더 미지근한 물로 헹군 후 밥을 지으면 냄새가 없다.   76. 살 안찌고 맛나게 라면 끓이는 방법 어른이건 아이건 간식거리로 라면을 좋아하지만 살찐다는 이유로 참을 수 밖에 없는 우리 여성들에게 살 안찌고 맛나게 먹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1. 먼저 끓는 물에 라면을 넣고 3분간 끓입니다. 2. 끓인 라면을 건져 찬물에 행구고 라면 끓인 물은 버립니다. 3. 다시 새물을 넣고 끓으면 건조된 야채랑 수프를 넣습니다. 4. 국물이 다 끓었으면 건져 놓은 라면을 넣습니다. 5. 불을 끄고 라면을 용기에 덜어 놓은 다음에 식초를 넣는데 식초의 양은 각자의 입맛에 맞게 가미해서 먹습니다. 라면이 담백하고 느끼하지 않아 국물까지 싹 비우게 됩니다. 또 식초는 지방을 분해하는 기능이 있다고 하니 너무 번거로우시다면 일반적으로 끓인 라면에 식초만 가미해서 먹어도 효과는 있답니다. 77. 보리차에 소금을 넣어라 보리차를 끓일 때 약간의 소금을 넣으면 향기도 좋아지고 맛도 부드러워진다 소금을 넣고 10분정도 끓인 다음 주전자를 찬물에 담가 식힌다.   78. 두루마리 휴지 절약법 두루말이 휴지는 빙글빙글 돌면서 풀려나오기 때문에 필요이상으로 풀리기 쉽다. 이럴 경우에는 두루말이를 납작하게 눌러서 두면 둥글 때보다 잘 풀려나오지 않아 모르는 사이에 절약된다.   79. 묵은 간장 맛있게 하려면 묵은 집간장을 맛있게 먹으려면 집간장 1말에 검은콩 1되, 북어 3마리를 약간의 물과 함께 푹 끓인 후 검은콩과 북어는 건져내고 조청이나 물엿을 넣고 한번 더 끓여서 식혀먹는다.   80. 팔꿈치 거무스레할 때 무릎, 팔꿈치, 발뒤꿈치가 거무스레할 때는 레몬조각으로 닦아준다. 과일산이 검은것을없애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81.유리창 닦을 때 식초를 ... 분무기에 약간의 식초를 섞어서 유리창에 뿌려주면 시중에서 사는 유리 광택제보다 더 잘 닦아진다.   82 감기로 코가 막힐 때 감기 때문에 코가 막혔을 때 양파를 갈아서 면봉으로 찍어 바르면 코가 시원하게 뚫린다. 말린 쑥을 가볍게 비벼서 콧구멍에 잠깐 넣어 두어도 된다.   83. 생선과 콩을 함께 익히면 생선 조림을 할 때 생선 밑에 콩을 깔고 익히면 생선이 뼈째 익어 맛있다. 또 콩맛도 일품이고 뼈째 익었기 때문에 어린이가 칼슘섭취에 아주 좋다.   84. 설탕을 잘 녹게 하려면 설탕을 넣고 요리를 할 때 설탕이 잘 녹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는 설탕을 믹서기에 넣고 갈면 밀가루처럼 변하는데 당도도 3배로 강해진다.   85. 불린 콩인 필요할 때 불린 콩이 급히 필요할 때는 전기밥솥에 따뜻한 물을 붓고 마른 콩을 넣어 보온 상태로 약 20분간 넣어두면 바로 사용할 수 있다.   86. 옷주름 잘 되게 하려면 힘을 주고 다려도 잘 다려지지 않는 주름이 있다. 이때는 물에 식초를 1작은 술 정도를 타서 분무기에 넣고 뿌리면서 다려 준다.   87. 고기양념에 배쥬스를 갈비찜이나 불고기에 배를 갈아넣는데 제철이 아닐 때는 너무 비싸다. 이럴때는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배쥬스로 대용하면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   88. 수제비 반죽에 레몬즙을 수제비 반죽을 만들 때 레몬즙을 한 술 넣고 반죽을 하면 더욱 쫀득하고 맛있는 수제비를 만들수 있다.   89. 감자 싹 나지않게 하려면 감자속에 사과 한 개를 넣어두면 싹이 나는 것을 상당기간 억제할 수 있다. 사과의 에틸렌 가스가 감자의 발육을 방해하는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90. 녹이 슨 문 손잡이에 문의 손잡이나 장롱 손잡이 같은 것에 녹이 생겻을 때는 100% 토마도 쥬스를 부드러운 천에 묻혀서 닦아준다. 녹이 간단히 없어진다. 91. 라면에 포도주를 넣으면 라면을 끓인 후 포도주를 서너 방울을 떨어뜨려 섞어 보자. 라면의 느끼한 맛이 없어지고 향기로운 프랑스식 라면이 된다.   92. 원형 탈모증을 막으려면 원형 탈모증을 예방하려면 이쑤시게를 20개정도 고무줄에 묶어서 콕콕 두들겨 자극을 해준다. TV시청이나 자동차 운전시 자주 되풀이하면 좋다.   93. 김치의 신맛을 없애고자 할 때 신 김치, 그냥 버리기가 아깝다면 신 김치독에 조개껍질을 넣어 본다. 얼마 지나면 김치의 신맛이 조금 덜해 진것을 느낄 수 있다.
328    진정한 친구가 그립다... 댓글:  조회:5186  추천:0  2016-02-15
*  모든 언행을 칭찬하는 자보다 결점을 친절하게 말해주는 친구를 가까이하라.           *   친구는 한편이 출세하면 친구 관계는 사라진다. 친구를 칭찬할 때는 널리 알도록 하고, 친구를 책망할 때는 남이 모르게 하라! 애매한 벗이기보다는 뚜렷한 적이 되어라. 우정은 기쁨을 두 배로 하고 슬픔은 반으로 한다. 친구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랑해 주는 인간을 말한다. 가장 좋은 거울은 오랜 친구이다. 친구들에게서 기대하는 것을 친구들에게 베풀어야 한다. 연애는 사람을 강하게 하는 동시에 약하게 한다. 우정은 강하게 할 뿐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그런 친구는 똥물에 빠져 뒈질 개새끼다. 친구란 당신의 모든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말한다. 좋은 벗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공통된 그 많은 추억, 함께 겪은 그 많은 괴로운 시간, 그 많은 어긋남, 화해, 마음의 격동 …. 우정은 이런 것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 생텍쥐페리 - '친구'는 '자유'라는 의미를 가진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친구란 우리에게 쉴 만한 공간과 자유로움을 허락하는 사람입니다. - 데비 엘리슨 - '친구'란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라는 뜻이다. - 인디언 속담 - 내 친구는 완벽하지 않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나 잘 맞는다. - 포프 - 훌륭한 친구를 가진 사람은 반드시 훌륭한 아내를 만난다. 친구의 집으로 가는 길은 항상 멀지 않다. 한 친구를 얻는 데는 오래 걸리지만 잃는 데는 잠시이다. - 릴리 - 남녀간의 사랑은 아침 그림자와 같이 점점 작아지지만 우정은 저녁 나절의 그림자와 같이 인생의 태양이 가라앉을 때까지 계속된다. - 베벨 - 얼굴 아는 이는 천하에 가득한데 마음 아는 이는 과연 몇이나 될까 - 명심보감 - 한 번 약속을 어기는 것보다 백 번 거절해서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이 낫다. - 중국속담 - 불행은 진정한 친구가 아닌 자를 가려준다. - 아리스토텔레스 - 비교는 친구를 적으로 만든다. - 필레몬 - 친구에게 속는 것보다 그를 믿지 못하는 것이 더욱 창피하다. 친구한테 속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보다도 차라리 친구한테 속는 사람이 행복하다. 친구를 믿는다는 것은 설사 친구한테 속더라도 어디까지나 나 자신만은 성실했다는 표적이 된다. 친구들에게서 기대하는 것을 친구들에게 베풀어야 한다. - 아리스토텔레스 - 친구를 얻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완전한 친구가 되는 것이다. - 에머슨 - 친구를 칭찬할 때는 널리 알도록 하고 친구를 책망할 때는 남이 모르게 한다. - 독일속담 - 가치있는 적이 될 수 있는 자는 화해하면 더 가치가 있는 친구가 될 것이다. - 펠담- 맘으로는 생각해도 입 밖에 내지 말며,서로 사귐에는 친해도 분수를 넘지 말라. 그러나 일단 마음에 든 친구는 쇠사슬로 묶어서라도 놓치지 밀라. -셰익스피어- 번영은 벗을 만들고,역경은 벗을 시험한다. -페블릴리우스 시루스- 벗을 믿지 않음은 벗에게 속아 넘어가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다. 벗이야말로 제 2의 자기이기 때문이다. -라로시푸코- 우정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잠시 동안의 단절로 더욱 견실해 질 수 있을지 모르나, 오랜 부재에 의해서 파괴된다. -탈무드- 벗을 책망할 때는 남 모르게 하고 칭찬 할 때는 공공연히 하라. -쏘로우- 진정한 우정은 앞과 뒤, 어느 쪽에서 보아도 동일한 것, 앞에서 보면 장미, 뒤에서 보면 가시일 수는 없다. -리케프트- 좋은 친구가 생기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스스로가 누군가의 친구가 되었을 때 행복하다. -러셀- 인간이 육체를 가진 이상 애정은 언제나 필요하다. 그러나 영혼을 깨끗하게 하고 성장케 하는 데는 우정이 필요하다 -헤르만 헤세- 우정을 위한 최대의 노력은 벗에게 그의 결점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일이다. -라 로쉐호크- 물이 지나치게 맑으면 사는 고기가 없고, 사람이 지나치게 비판적이면 사귀는 벗이 없다. -맹자- 돈 빌려 달라는 것을 거절함으로써 친구를 잃는 일은 적지만, 반대로 돈을 빌려 줌으로써 도리어 친구를 잃기 쉽다. -쇼펜하우어- 그 사람을 모르거든 그 벗을 보라. 사람은 서로 뜻이 맞는 사람을 벗으로 삼기 때문이다. - 메난드로스(고대 그리스의 희극작가) 고독한 사람만이 친구의 완전한 기쁨을 알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는 가족이 있지만 고독한 사람이나 유랑자에게는 친구가 전부인것이다. - 윌라 캐더(미국 여류작가) 친구는 기쁨을 두 배로 하고 슬픔을 반으로 해준다. - 실러(독일의 작가) 벗을 믿지 않음은 벗에게 속아넘어가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다. 벗은 제2의 자기이기 때문이다. - 라 로시푸코(프랑스의 모랄리스트) 빈곤이 문간에서 집안으로 스며들어오면, 거짓 우정은 곧 창문으로 달아나 버린다. - 빌헬름 뮐러(독일의 시인)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 구약성서(잠언) 한사람의 진실한 벗은, 천 명의 적이 우리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그 힘 이상으로 우리들의 행복을 위해 이바지한다. - 에센바흐(독일 중세의 궁정 시인) 유익한 벗이 세 가지 있고, 해로운 벗이 세 가지 있다. 정직한 사람을 벗삼고, 진실한 사람을 벗삼고, 견문이 많은 사람을 벗으로 삼으면 유익하다. 그러나 형식만 차리는 사람, 대면할 때만 좋아하는 사람, 말재주만 있는 사람을 벗으로 삼으면 해롭다. - 공자 자기 부모를 공경할 줄 모르는 자와는 친구로 사귀지 말라. 그는 인간의 첫걸음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 소크라테스 적이 한 사람도 없는 사람을 친구로 삼지 말라. 그는 중심이 없고 믿을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 차라리 분명한 선을 갖고 반대자를 가진 사람이 마음에 뿌리가 있고 믿음직한 사람이다. - 테니슨(영국의 시인)   *친구를 갖는다는 것은 또 하나의 인생을 갖는 것이다.  ─ 그라시안 *사랑이나 지성보다도 더 귀하고 나를 행복하게 해 준 것은 우정이다.  ─ 헤르만 헤세 *한 사람의 진실한 친구는 천 명의 적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그 힘 이상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 에센 바흐 *친구는 나의 기쁨을 배로 하고 슬픔을 반으로 한다.  ─ 키케로 *친구란 두 신체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아버지는 보물이요, 형제는 위안이며, 친구는 보물도 되고 위안도 된다.  ─ 벤자민 프랭클린 *우정은 순간이 피게 하는 꽃이며 시간이 익게 하는 과실이다.  ─ 코체부 *친구가 되려는 마음을 갖는 것은 간단하지만, 우정을 이루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 아리스토텔레스 *언젠가 고독할 때에, 청춘에의 향수가 나를 엄습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학창시절의 우정 때문일 것이다.  ─ 헤르만 헤세 *참된 우정은 건강과 같다. 즉, 그것을 잃기 전까지는 우정의 참된 가치를 절대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 찰스 칼렙 콜튼 *좋은 친구가 생기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스스로가 누군가의 친구가 되었을 때 행복하다.  ─ 러셀 *속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만이 인생의 역경을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 그라시안 *나보다는 상대방을 생각하는 우정, 이러한 우정은 어떠한 어려움도 뚫고 나아간다.  ─ 무어 *친구가 없는 것만큼 적막한 것은 없다. 우정은 기쁨을 더해주고 슬픔을 감해주기 때문이다.  ─ 그라시안 *참된 우정은 앞과 뒤가 같다. 앞은 장미로 보이고, 뒤는 가시로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참다운 우정은 삶의 마지막 날까지 변하지 않는다.  ─ 류카이르 *다정한 벗을 찾기 위해서라면 천리 길도 멀지 않다.  ─ 톨스토이 *사람은 친구와 한 숟가락의 소금을 나누어 먹었을 때 비로소 그 친구를 알 수 있다.  ─ 세르반테스 *우정은 날개없는 사랑이다.  ─ 바이런 *인간이 육체를 가진 이상 애정은 언제나 필요하다. 그러나 영혼을 깨끗하게 하고 성장케 하는데는 우정이 필요하다.  ─ 헤르만 헤세 *친구를 얻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완전한 친구가 되는 것이다.  ─ 에머슨 ------------------------------------------------------------------------- 기 쁨   친구가 멀리서 와, 재미있는 이야길 하면 나는 킬킬 웃어제킨다. 그때 나는 기쁜 것이다. 기쁨이란 뭐냐? 라고요? 허나 난 웃을 뿐. 기쁨이 크면 웃을 따름. 꼬치꼬치 캐묻지 말아라. 그저 웃음으로 마음이 찬다. 아주 좋은 일이 있을 때 생색이 나고 활기가 나고 하늘마저 다정한 누님 같다. - 천상병님의 < 한낮의 별빛을 너는 보느냐 > 에서 - ----- 생각이 깊고 총명하고 성실한 어진 반려가 될 친구를 만났거든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하고 마음을 놓고 기꺼이 함께 가라.   그러나 생각이 깊고 총명하고 성실한 어진 반려가 될 친구를 못 만났거든 정복한 나라를 버린 왕처럼 숲속을 다니는 코끼리 처럼 홀로 가라.   나그네길에서 자기보다 뛰어나가거나 비슷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거든 차라리 혼자서 갈 것이지 어리석은 자와 길벗이 되지 마라 - 진리의 말씀(법구경) 법정스님의 <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 에서 - ----- 그대가 현명하고 일에 협조하고 예절 바르고 총명한 동반자를 얻는다면 어떠한 난관도 극복하리니 기쁜 마음으로 생각을 가다듬고 그와 함께 가라.   그러나 만일 그대가 현명하고 일에 협조하고 예절 바르고 총명한 동반자를 얻지 못했다면 마치 왕이 정복했던 나라를 버리고 가듯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우리는 참으로 친구를 얻는 행복을 기린다 자기보다 뛰어나거나 대등한 친구와는 가까이 친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친구를 만나지 못할 때에는 허물을 짓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 숫타니파타 강론집 " 법정스님의 <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 에서 - ---- 친 구 허물없이 지내는 좋은 사이 있는 말 없는 말 다 꺼내 비위 맞추지 않아도 되고, 약점을 날카롭게 지적해 주면 오히려 고맙게 생각되고, 힘들어할 때 항상 손닿을 수 있는 거리 안에 있어 주고, 비밀을 모조리 털어놓지 않아도 이해하고, 그에게만 말해준 건 끝까지 그만이 알고 있고, 좋은일 있으면 진심으로 웃으며 박수 보내 주고, 주저리 주저리 화풀이 해도 귀찮아하지 않고, 한밤중에도 편안하게 전화해서 얘기할 수 있고, 주저앉아 생을 포기하지 않도록 늘 격려해 주고, 가끔 사소한 일로 싸우면 그 이유 때문에 뜬 눈으로 밤새우고, 다음날 새벽,   당장 전화해서 진심으로 사과하고, 내 아픔보다도 더 크게 서로의 힘듦을 느끼고,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는 것처럼 보여도 한 쪽이 없음 허전해서 견딜 수 없는 허물없이 지내는 좋은 사이 바로 너와 나 ! - 한 소 라 -   속 마 음 아무 말도 않는다고 해서 가슴까지 침묵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분위기가 늘 잔잔하다고 하여 마음이 항상 평화로운것은 아닙니다. 주저없이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는 아주 많은 예습과 복습을 하며 끊임없이 사랑을 닮으려는 노력으로 내 밝으로 내가 나올 짬이 없는 것입니다. - 이 경아 -   친 구 친구란 당신이 괴로움속을 헤매일 때에 문득 그리워지는 얼굴이며 당신이 살아있을 때에 곁에 있어 주기만을 바라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울고 있을 때 그 눈물을 닦아줄 수 있고 당신의 환한 미소에 응답할 사람이며 당신이 어디에 있건 당신 생각을 하는 사람입니다.   친구란 받는 것을 기대하지 않으며 자기의 모든 것을 주려하는 사랑의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당신의 아픔, 당신의 슬픔을 나눠가질 수 있도록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좌절해 있을 때 당신에게 따뜻한 느낌만을 줄 수 있는 사람이며 당신이 홀로 길을 걷고 싶을 때 당신의 그 마음을 아껴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친구란 당신이 외로울 때에 전화를 걸고 싶은 사람이며 짤막한 사연을 보내고픈 사람입니다.   친구란 당신의 모든 것을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이며 뜻하지 않은 이별을 할 때에도 당신의 행복만을 빌어줄 사람이 바로 친구입니다.       사람들은 내일 아침이면 태양이 떠오를 것이라는 믿음을 의심치 않고 잠에 빠진다 내가 생각하는 우정은 이와 같다 .   아침이면 변함없이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 보는 것과 같이 친구와의 우정은 변하지 않는 믿음이다. 언제나 변함없는 믿음을 가진 친구가 있기에 우리는 기쁠때 더욱 기뻐할 수 있고 슬플때는 그 슬픔을 덜 할 수 있다.     내가 멀어지려고 마음먹지 않아도 멀어질 사람은 자연히 알아서 멀어지는 법이고   내가 곁에 두려고 마음먹지 않아도 곁에 남을 사람은 자연히 알아서 내곁에 남아줄것이다     사람들은 내일 아침이면 태양이 떠오를 것이라는 믿음을 의심치 않고 잠에 빠진다   내가 생각하는 우정은 이와 같다   아침이면 변함없이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 보는 것과 같이 친구와의 우정은 변하지 않는 믿음이다   언제나 변함없는 믿음을 가진 친구가 있기에 우리는 기쁠때 더욱 기뻐할 수 있고   슬플때는 그 슬픔을 덜 할 수 있다     모든이가 널 좋아할수는 없다 모든사람이 너를 좋아할수는 없다 너도 싫어하는 사람이 있듯이 누군가는 너를 이유없이 싫어할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네가 달라지는것은 아니다 그런 상황도 받아들일수 있어야 한다 항상 너는 너로써 당당하게 살아가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우는데 왜 내 가슴이 찢어지는지 참 이상해요 계속 내 곁에 있어줘요   좋은 하루요 ~
327    "등대'같은 친구 그립다... 댓글:  조회:4639  추천:0  2016-02-14
​ 유명 음악가를 만든 조력자의 힘 빛나는 거장 뒤에는 '등대' 같은 친구가 있었다 ​   친구 위해 관심 없던 악기 곡 만들어 모차르트, 플루트 위해 작곡하고 브람스는 클라리넷 곡 잇따라 발표 영감만으로 훌륭한 작품 탄생 못 해… 친구의 조언과 격려 있어 가능했죠   .par:after{display:block; clear:both; content:"";}   음악가들이 주로 공부하는 책은 악보가 그 려진 책인데요, 늘 보는 것이지만 신기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 멋진 음악들이 어 떻게 이렇게 일정한 기호로 쓰여 남아 있을 까? 위대한 작곡가들은 어떻게 이토록 아름 다운 소리를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었을까? 경이로움마저 느껴지는 훌륭한 음악 작품들 을 들을 때면 이른바 '영감(靈感)'이란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영감은 어느 순간 번개처럼 스쳐가는 느낌 이자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의미해요. 천재 음 악가들이라면 모두 영감이 떠오르는 순간을 경험해보았겠지만, 아무리 뛰어난 예술가라 도 주변의 도움 없이 위대한 창작품을 만들어 내기는 힘들지 않을까요? 흥미롭게도 우리가 오랫동안 사랑해온 음악 작곡가들의 곁에는 소중한‘음악동료’가 늘 함께했답니다. ◇엉뚱하거나, 같은 천재이거나… 특정 악기의 연주자와 음악동료가 되면서, 지금까지 관심 없던 분야의 작품을 작곡하는 작곡가도 있어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 트(1756-1791)는 어찌 된 일인지 플루트라 는 악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22세 때 당대 최고의 플루티스트 요한 벤틀 링과 친해지고, 천재적인 실력을 발휘해 친 구가 연주하는 플루트를 위한 두 곡의 협주 곡과 네 곡의 4중주곡을 쓰게 됐죠. 처음에는 플루트를 그다지 내켜하지 않았던 모차르트 가 결과적으로 플루트를 사랑하는 모든 이를 위한 선물 같은 수작을 남긴 셈이니, 우정의 힘은 대단하지요? ▲ /클라리넷 클래식·위키피디아   그 후 30대가 된 모차르트는 클라리넷 연 주자인 안톤 슈타들러와 굉장히 친해져요. 1789년 모차르트는 슈타들러를 위해 클라리 넷 연주곡 중 걸작으로 꼽히는 '클라리넷 협 주곡 가장조'를 작곡했어요. 장난기가 많아 평소 주변 사람들에게 성격을 반영한 별명을 붙이던 모차르트가 슈타들러에게는 '엉뚱한 짓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노치비니치비 (Natschibi-nitschibi)'라는 별명을 지어주 었다고 해요. 엉뚱한 슈타들러와 장난기가 많던 모차르트는 기발한 발상을 공유하며 우애를 쌓았다고 전해져요. 역사책에서나 볼 수 있는 거장들이 절친한 음악동료였던 경우도 있어요. 초기 낭만 시 대의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1809-1847) 은 나이가 한 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 로베르 트 슈만(1810-1856)과 친해 서로 여러 분야 에서 도움을 주고받았죠. 두 사람 사이에는 페르디난트 다비트라는 뛰어난 바이올리니 스트도 있었는데, 그는 독일 음악 문화를 이 끈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악장이었어요. 바이올리니스트였던 다비트 는 멘델스존과 슈만에게 곡을 연주하는 사람 의 입장에서 여러 가지 조언을 하고 완성된 곡을 처음으로 연주하곤 했어요. 멘델스존의 명작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슈만의 '바 이올린 소나타 2번'이 바로 다비트를 위해 헌정된 곡들이에요. 슈만의 후계자이자 신고전주의 작곡가로 불리는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 역시 음 악친구가 많았던 인물이에요. 슈만의 부인이 었던 클라라 슈만은 음악동료이자, 브람스가 진정으로 짝사랑한 사람이었어요. 클라라 슈 만은 뛰어난 피아니스트로 브람스에게 피아 노곡을 비롯한 거의 모든 곡에 조언을 아끼지 않았죠. 또 브람스는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과도 친했는데요, 요아힘은 많은 사람 이 사랑하는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 조'가 만들어지는 데 큰 공헌을 했어요. 브람스가 말년까지 뛰어난 곡을 많이 쓸 수 있었던 이유는 훌륭한 음악가들과 계속 교류 했기 때문이랍니다. 브람스가 50대 후반에 만난 클라리넷 연주자 리하르트 뮐펠트는 당 대 최고의 연주 솜씨를 지닌 인물이었는데요, 그 덕분에 브람스는 그때까지 쓰지 않았던 클 라리넷곡을 쓰기 시작해 '클라리넷 소나타' '클라리넷 3중주' '클라리넷 5중주' 등의 걸 작을 연달아 탄생시키게 됩니다. ◇거장의 우정, 나이는 중요치 않았다 작곡가와 연주자, 음악가들의 만남에서 나 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듯해요. 러시아 의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1891-1953)는 만년에 뇌진탕 부상을 입은 뒤 건강 이 악화돼 병석에 몸져누웠답니다. 그를 찾 아가 건강을 회복하고 자신을 위해 작품을 써 달라고 부탁했던 사람은 당시 20대 초반이던 젊은 첼리스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 치였어요. 그의 응원 덕에 프로코피예프는 다시금 힘을 내, 생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며 첼로 작품 창작에 몰입하지요. 비슷한 시기 활동한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도 자 신이 꿈꾸는 더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한 참 후배인 피아니스트 타티야나 니콜라예바 (1924-1993)에게 도움을 요청했답니다. 쇼 스타코비치는 니콜라예바를 찾아가 '바흐의 평균율 곡집(전설적인 바흐의 건반악기용 독주곡집)과 같은 작품을 만드는 데 도와달 라'고 했어요. 당시 니콜라예바는 제1회 국 제 바흐 콩쿠르에서 1등을 받은 피아니스트 였어요. 신인이었던 니콜라예바는 쇼스타코 비치의 부탁을 기쁘게 받아들였고, 두 사람 의 공동 작업으로 완성된 작품이 바로 쇼스 타코비치의 걸작 '스물네 개의 프렐류드와 푸가(작품 번호 87)'입니다. 니콜라예바는 훗날 바흐를 가장 잘 연주하는 피아니스트 로 평가받지요. 훌륭한 작품에는 그에 걸맞은 훌륭한 우정 이야기가 숨어 있는 것 같죠? 아름다운 클래 식 음악을 들으며,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 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주변 동료들을 생각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326    땡~ 미술시간 - 색이미지 댓글:  조회:5905  추천:0  2016-02-14
색채는 사람의 감각이나 감정을 자극하는 효과가 있으며 색마다 그에 따른 감각과 감정도 다르다.  색채와 감각 그리고 감정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는 개인차가 있지만 어느 정도의 보편성을 띄고 있다. 또한 어떠한 색에 대한 경험과 인상의 강약에 따라 색은 그와 관계하는 여러 가지 사항을 연상하게 한다. 예를 들어 적색을 봤을 때 사람마다 불, 사과, 사랑, 혈액 등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미지는 뇌 중추의 흥분에 의해 일어나는 심적 현상이며 과거의 경험이 재편성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어떤 색상이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연상작용을 일으키는 경우에 그 색상은 하나의 상징이나 기호로서의 역할까지도 하게 된다. 이 페이지에서는 색채의 심리적 연상 이미지에 대한 설명과 예를 보여준다.         [출처] [본문스크랩] 색채에 대해서..|작성자 빛남이  
325    땡! 땡! 땡!- 축구는 서민 스포츠, 축구를 돌려 달라... 댓글:  조회:4738  추천:0  2016-02-12
두배 된 도르트문트 입장권에 항의, 유럽 팬들 테니스공 수백개 던져] - "축구가 귀족 스포츠냐" 리버풀 13만원으로 인상 계획에 팬들 경기장에서 집단 퇴장도 영국인 소득 107% 증가할 동안 축구 입장권 가격 335%나 올라   10일(한국 시각) 독일 분데스리가의 도르트문트가 슈투트가르트 원정 경기에서 전반 5분 만에 첫 골을 터뜨렸다. 독일 리그컵인 DFB포칼 준결승 진출권을 놓고 싸운 중요한 일전이었다. 하지만 도르트문트 원정 팬들의 환호성은 들리지 않았다. 도르트문트 팬들이 경기 시작 후 20분간 응원을 거부한 탓이었다. 도르트문트 팬들이 뿔이 난 이유는 비싼 원정 입장권 가격 때문이었다. 분데스리가 입장권의 평균 가격이 약 4만원 수준인데 이날 도르트문트 팬들은 최대 9만원을 내야 했다. 도르트문트의 한 팬은 "극장에서 영화를 9편 볼 수 있는 가격"이라며 "축구를 즐기고 싶은 팬들에게 너무나 가혹하다"고 말했다. 팬들이 앉아야 할 경기장 좌석에는 '축구는 감당할 수 있는 가격이어야 한다'는 내용의 플래카드가 덮여 있었다.   화난 팬들이 축구장에 던진 테니스공 - 테니스장 볼보이들이 아니라 축구 선수들이다. 10일 독일 도르트문트 팬들이 비싼 입장권 가격에 항의하려고 경기가 진행 중인 축구장에 테니스공을 던졌다. 선수들이 축구공을 차는 대신 테니스공을 줍느라 경기가 잠시 중단됐다. /골닷컴 도르트문트 팬들은 항의 표시로 전반 24분쯤 경기장 안으로 수백개의 테니스공도 던졌다. 결국 경기는 잠시 중단됐고, 선수들이 공을 주워 경기장 밖으로 던지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끝을 모르고 치솟는 축구 입장권 가격에 유럽 축구 팬들이 분노하고 있다. 축구가 어느새 '중·상류층 스포츠'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 팬들의 생각이다. 팬들은 구단의 가격 인상에 조직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외신들은 "축구는 노동자들도 즐길 수 있는 서민 스포츠라는 의식이 티켓 소동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고 전하고 있다. 축구 종가 영국에서도 '축구는 럭셔리 스포츠가 아니다. 축구를 돌려 달라'며 팬들이 행동에 나서고 있다. 지난 7일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리버풀의 팬들은 선덜랜드와의 홈경기에서 후반 32분쯤 경기장을 단체로 떠나버렸다. 리버풀이 다음 시즌 메인 스탠드 입장권 최고 가격을 59파운드(약 10만2600원)에서 77파운드(약 13만3000원)로 인상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데 따른 항의였다. 팬들 사이에서 "제로(0) 성장 시대에 축구 물가만 30% 오르는 게 말이나 되느냐"는 말이 나왔다. 팬들은 리버풀이 인상가로 밝힌 77파운드를 겨냥해 경기 시작 후 77분에 집단 퇴장했다.      축구 팬들은 대를 이어 성원을 보낸 충성심을 구단이 무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 실제 프리미어리그에서 입장권 가격이 가장 비싼 것으로 정평이 난 아스널의 경우 1992년 10.5파운드였던 입장권 평균가가 지난 시즌엔 45.69파운드로 치솟았다. 같은 기간 영국인들의 평균 소득은 107% 증가했지만 입장권 값은 335% 증가한 것이다. 2000년대 들어 아스널의 입장권 가격은 100% 넘게 인상됐다. 각 구단은 "새로운 경기장도 지어야 하고 스타들을 영입하려면 입장권 가격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이번 시즌 프리미어리그 팀들은 여름과 겨울 이적 시장에서 사상 최고액인 10억파운드(1조7390억원)를 쓴 것으로 집계됐다. 유럽 축구 팬들이 구단에 집단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건 막강한 조직이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경우 축구 팬들이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축구 서포터스연맹(FSF)을 결성해 활동하고 있다. 현재 50만명이 넘는 회원을 보유한 FSF는 정기적으로 영국 정부, 정당과 회의를 갖고 팬들의 입장을 전달하고 있다. FSF는 지난해 영국 정부를 압박해 축구협회 등에 입장료 인하를 권고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최근 계속해서 문제가 되는 입장권 가격 인상(시도)에 대해 FSF는 홈페이지를 통해 "각 구단 이사회에 입장권 값을 인상하지 말라는 서한을 보냈다"며 "입장권 가격 인상에 다양한 방식의 캠페인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324    땡! 땡!- 생일축하의 노래의 어제와 오늘... 댓글:  조회:4745  추천:0  2016-02-11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생일 축하곡 ‘해피 버스데이 투 유(Happy Birthday to You)’에 채워졌던 ‘저작권 족쇄’가 마침내 풀렸다. ​ ‘해피 버스데이 투 유’ 저작권 보유업체인 워너/채펠(Warner/Chappell)이 3년 여 소송 끝에 저작권료 반환에 합의했다고 아스테크니카를 비롯한 주요 외신들이 10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워너/채펠은 미국의 대표적인 음악업체 워너뮤직 자회사다. ​ 보도에 따르면 워너/채펠은 더 이상 ‘해프 버스데이’ 노래에 대한 저작권을 주장하지 않기로 했으며 이미 받은 저작권료 1천400만 달러도 돌려주기로 했다. 워너/채펠은 이 같은 내용을 담은 합의 문건을 지난 8일 법원에 제출했다. ​ 그 동안 TV 방송이나 영화에 ‘해피 버스데이 투 유’ 음악이 나올 경우 저작권자인 워너/채펠에 사용료를 지불해야 했다. 생일 축하곡 '해피 버스데이 투 유'의 모태가 된 굿모닝 투 올 악보. ​ ■ 미국 영화감독 제니퍼 넬슨, 2013년 무효 소송 ​ 이 관행에 문제를 제기한 것은 미국 영화 감독 제니퍼 넬슨이었다. 넬슨은 지난 2013년 ‘해피 버스데이 투 유’ 저작권을 워너/채펠이란 특정 업체가 독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면서 저작권 무효 및 저작권료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 넬슨은 2013년 자신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에 ‘해피 버스데이’ 노래 부르는 장면을 포함시키자 타임/채펠 측이 저작권료 1천500달러를 요구했다. 넬슨은 어쩔 수 없이 그 돈을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 ​ 그 동안 타임/채펠은 이런 방식으로 ‘해피 버스데이 투 유’ 노래 저작권료로 연간 200만 달러 가량을 벌어들였다. ​ 하지만 제니퍼 넬슨은 저작권료를 낸 뒤 곧바로 소송을 제기했다. ‘해피 버스데이 투 유’란 노래 자체가 워너/채펠의 고유 창작물이 아니란 게 소송 이유였다. ​ 실제로 이 곡은 1893년 교사였던 밀드레드 힐과 패티 스미스 힐 자매가 작곡한 '굿모닝 투 올(Good morning to all)’의 멜로디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1900년대 초, 이 곡에 붙은 ‘해피 버스데이 투 유’란 노랫말을 누가 지었는지는 모르는 '작자 미상'으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 그 이후 ‘해피 버스데이 투 유’는 1911년, 어린이 노래책에 수록되면서 유명세를 얻게 됐다. ‘굿모닝 투 올’ 저작권은 여러 단계를 거쳐 1988년부터 워너뮤직 손에 들어갔다. 이후 자회사인 워너/채펠이 저작권을 행사해 왔다. ​ 소송을 제기한 넬슨 측은 이 곡이 인기를 끈 것은 힐 자매의 멜로디가 아니라 ‘해피 버스데이 투 유’란 가사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작곡자가 저작권을 행사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게 소송 요지였다. ​ ■ 워너/채펠, 1심 패소한 뒤 합의로 끝내 ​ 1심 소송에선 넬슨 측이 승리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중부지역법원이 ‘해피 버스데이 투 유’ 저작권이 무효란 판결을 한 것. 넬슨 측이 승기를 잡자 워너/채펠은 본격적으로 협상에 나섰다. ​ 결국 양측 변호인들은 지난 해 12월 기본적인 합의에 도달했다고 발표했다. 이후 2개월 여 기간 동안 구체적인 자세한 합의안을 조율한 뒤 공식 발표하게 됐다고 외신들이 전했다. 합의에 따라 워너/채펠은 이미 받은 저작권료 1천400만 달러를 반환하기로 했다. ​ 합의금 1천400만 달러는 2009년 이전 저작권료를 지불한 사람들과 이후에 지불한 사람들에게 나눠 지급될 예정이다. 이에 따라 2009년 이전에 저작권료를 지불한 사람들은 15% 가량을 돌려받게 된다. 반면 2009년 이후 지급한 사람들은 전액 반환을 받을 전망이라고 아스테크니카가 전했다. ​ 이번 합의는 1심이 열린 캘리포니아 중부법원 승인을 받을 경우엔 최종 확정된다.
323    땡!- 1억파운드짜리 "피의 다이아몬드" 돌려달라!!! 댓글:  조회:4867  추천:0  2016-02-11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코이누르’가 박힌 왕관을 쓴 모습. 왕관 윗부분 장식의 한가운데에 있는 보석이 코이누르다. /유튜브 캡처 1억파운드(약 1740억원)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 엘리자베스 2세(90) 영국 여왕 왕관에 박힌 초대형 다이아몬, 이 다이아몬드는 16~19세기 인도 일대를 통치한 무굴제국이 소유하던 '코이누르'라는 이름의 105캐럿(21.6g)짜리다. 코이누르는 1304년에 쓰인 역사책에 처음 등장한다. 인도에는 '코이누르를 차지하는 자는 세상을 지배하게 되지만 남성이 갖고 있으면 비극적 종말을 맞이한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여러 부족이 코이누르를 차지하려고 전투를 벌여 '피의 다이아몬드'로도 불린다. 1849년 영국 동인도회사가 코이누르를 빼앗아 이듬해 빅토리아 영국 여왕에게 바쳤고, 이후 역대 영국 왕비가 쓰는 왕관 한가운데를 장식했다. 영국이 코이누르를 훔쳤던 지역이 1947년 파키스탄이 인도에서 분리 독립될 시기. 코이누르가 인도것이냐 파키스탄것이냐 영국것이냐... 잇단, 두 나라는 코이누르 반환을 요구... 영국은 생떼질... (편집자 주; ... 훔친 물건 돌려주기... 특히, 문화재 반환운동 벌리기...)  
322    영화로 배우는 윤동주 시인 댓글:  조회:5450  추천:0  2016-02-10
윤동주 시인을 영화로 배운다...               영화 '동주'의 이준익 감독, 윤동주 역의 강하늘, 송몽규 역의 박정민.   【인터뷰365 】 윤동주 시인의 삶과 문학이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준익 감독이 연출한 영화 ‘동주’는 윤동주 시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첫 번째 영화다. 그의 시가 그리 오래 암송되고 일제강점기에 스러져 버린 그의 청춘이 그리 오래 기억되는 것에 비한다면, 그의 삶을 영화로 만드는 것이 처음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이상하다.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 시인은 강하늘,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송몽규는 박정민이 각각 연기한다. 인터뷰365에서는 촬영현장 스틸과 언론시사 후 기자간담회에서 오간 이야기를 엮어 영화 ‘동주’에 좀더 가까이 가보려 한다.     영화는 흑백으로 만들어졌다. 이준익 감독은 “처음부터 흑백으로 찍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컬러로 찍으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보지 않았다”며 그 이유를 “우리가 기억하는 윤동주 사진 속의 흑백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고 또 일제시대를 재현하는 데 대단한 비용을 들인다는 것은 윤동주 시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이준익 감독이 윤동주를 영화로 찍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몇 년 전 일본 도시샤 대학에서 교정 안에 있는 윤동주 비석을 봤을 때다. 하지만 윤동주 한 사람의 이야기로 드라마 형성이 어려웠다.(이런 이유로 지난 70년 동안 단 한 편의 드라마나 영화가 만들어지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이준익 감독은 윤동주보다 3개월 먼저 태어나고 한달 뒤에 죽은 송몽규라는 인물과의 관계 속에서 윤동주를 그렸다. 영화 속 송몽규의 선택, 행동은 80%가 실화다.     강하늘은 “내 무의식 중에 윤동주를 굉장히 거대하고 거창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동주’ 대본을 읽으며 가장 좋았던 점은 윤동주도 나와 같이 질투, 열등, 패배감, 승리감 등 여러 감정을 느끼는 젊은이였다는 것이다”라며 “그런 면에서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고 말했다.  강하늘과 박정민의 마지막 촬영 장면은 형무소 장면이었다.  박정민은 “캐스팅 된 순간부터 촬영 끝나는 날까지 오직 형무소 장면만을 위해서 달려가는 느낌이었다. 매일이 긴장과 걱정의 연속이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형무소 장면 촬영이 끝나자 대본을 학사모 던지듯 하늘 높이 던졌다. 그리고는 둘이 껴안고 울었다.     이준익 감독은 강하늘의 캐스팅에 대해 “스무 살이었던 강하늘을 내가 ‘평양성’에서 연개소문의 셋째아들 남산 역할로 데뷔시켰다”며 “어릴 적 강하늘을 봤을 때 직감적으로 느껴졌던 강하늘의 본성이 동주와 닮았다고 생각했고, 윤동주 흑백 사진 속 모습과 강하늘의 외모도 굉장히 유사하다고 느껴 캐스팅하게 됐다”고 말했다.   박정민에 대해서는 “류승완 감독의 옴니버스 단편 영화 ‘신촌좀비만화’ 중 30분짜리 영상을 보다 ‘누가 이렇게 연기를 잘하지’하고 검색해보니 박정민이었다. ‘전설의 주먹’에서 황정민씨 아역으로 본 적은 있지만 ‘신촌좀비만화’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여 그의 연기력에 굉장히 놀랐다. 마침 황정민씨가 추천해줘서 함께 하게 됐다”고 밝혔다.     단 19일 만에 촬영을 마친 영화 ‘동주’는 약 70%가 팩트이고 30%가 픽션이다. 예를 들어 판결문의 경우도 원본과 동일한 용지, 같은 서체를 사용하여 미술팀이 완벽하게 고증했다.   영화 속에는 당연히 윤동주의 시도 등장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시는 13편 정도. 연표를 벗어나는 시도 있지만 되도록 연표를 맞추려고 노력했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보고나면 적어도 윤동주 시인에 대해 70%는 공부하게 되는 셈이다. 17일 개봉하는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는 시인 윤동주와 그의 사촌 송몽규의 삶을 통해 일제강점기 당시 청년들의 고뇌를 그렸다. /사진=영화 '동주' 포스터 서거 71주기…'부끄러움'을 노래한 시인, 윤동주를 기억하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부끄러움'을 노래한 국민시인 윤동주, 그는 71년 전 오늘(2월 16일)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9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조선인 유학생을 모아놓고 민족문화를 알리며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수감된 뒤 1년 만이었다. 생은 짧지만 발자취는 길다. 서거 71주년인 올해, 윤동주의 삶과 그의 작품을 기억하는 발걸음이 영화·뮤지컬·출판 등 문화계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 이준익 감독 영화 '동주' 17일 개봉…윤동주와 사촌 송몽규의 삶 그려 17일 그의 삶을 다룬 영화 '동주'가 개봉한다. '왕의 남자', '사도' 등을 제작한 이준익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드라마 '미생'의 배우 강하늘이 윤동주 역을, 영화 '파수꾼'의 배우 박정민이 윤동주의 사촌 송몽규 역을 맡았다. 영화 '동주'는 단순히 윤동주의 삶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송몽규를 비중있게 다룬다. 독립운동에 매진하던 송몽규와 시를 통해서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은 윤동주. 영화는 두 사람의 모습을 교차하며 당시 청년들의 고뇌를 보여준다. 윤동주가 겪는 일련의 사건들은 그에게 가장 중요한 창작 배경이 된다. 영화는 '인간' 윤동주가 겪는 사건을 그리면서도 그의 작품을 놓치지 않는다. 배우 강하늘은 '별 헤는 밤', '서시', '자화상', '참회록', '바람이 불어', '아우의 인상화' 등을 담담하게 읊는다. 흑백의 스크린 속에서 벌어지는 일본 고등형사(김인우)와 윤동주·송몽규의 설전은 영화의 백미다. 서울예술단은 다음달 20일부터 1주일동안 창작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를 올린다. 윤동주의 삶과 시를 노래와 춤으로 되살려냈다. / 사진='윤동주, 달을 쏘다' 포스터 ◇ '윤동주, 달을쏘다'…서울예술단의 창작가무극 앙코르공연 윤동주의 삶은 창작가무극으로도 재탄생했다. 서울예술단은 다음달 20일부터 27일까지 1주일 간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윤동주, 달을 쏘다'(극본·작사 한아름, 작곡 오상준, 연출 권호성)를 올린다. '윤동주, 달을 쏘다'는 2012년 초연돼 90%가 넘는 높은 객석점유율을 기록하며 사랑을 받았다. 이번 공연은 앙코르 공연으로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대본, 음악, 무대 등 전반적인 수정작업을 거쳤다. 서울예술단은 윤동주의 시에 춤과 노래를 입혔다. 그가 가장 자유로웠던 시기인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부터 일제강점기에서 죽음을 맞이하기까지의 삶을 그리고 있다. 특히 윤동주와 사랑에 빠지는 가상의 여인 이선화가 등장해 극을 더욱 다채롭게 이끌어 간다. 윤동주 역은 박영수, 송몽규 역은 김도빈이 맡았다. 출판사 '소와다리'가 펴낸 1955년 증보판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출간 직후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사진=소와 다리 ◇ 1955년 증보판 시집 베스트셀러에…필사책 등 잇따라 출간 예정 출판계에도 '윤동주' 바람이 불고 있다. 이번 달 출간되는 윤동주 관련 서적만 4권이다. 출판사 '소와다리'가 윤동주 서거 10주기 기념본을 복간, 지난 9일 펴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55년 증보판)는 출간 직후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인기를 끌고 있다. 해당 시집은 '세로쓰기' 등 1955년 증보판의 디자인을 그대로 재현했다. 여기에 윤동주 육필 원고철, 판결 서류, 사진을 담아 그를 기억하고자 하는 독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그의 시를 직접 써보며 음미할 수 있는 필사책도 잇따라 출간된다. 출판사 스타북스는 15일 '동주따라 필사하기'를, 파란책은 17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필사책'을 낸다. 출판사 북오션 역시 다음달 4일 그의 시 99편을 따라 쓸 수 있는 필사책 '손으로 직접 쓰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펴낼 예정이다. 윤동주의 시 188편과 4편의 산문, 정지용 시인의 서문과 윤동주의 생애·연보 등이 모두 실린 책 '동주'(문예춘추사)도 오는 20일 독자를 만난다.
321    영화 '동주'에 시 13편 흐르다... 댓글:  조회:4813  추천:0  2016-02-10
배우 강하늘이 영화 '동주'에서 삭발 투혼을 보였다. 사진은 '동주' 스틸컷.  흑백 저예산 영화라 깔보지 말라. 일제강점기의 상징으로 딱 맞는 영화 기법이 아닌가. 자신의 속내를 숨겨야 하는 세상은 ‘흑백의 세상’이다. 화려한 칼라는 시선의 산만함을 가져온다. 흑백은 오직 인물의 표정에만 집중할 수 있게 몰입도를 높여 주는 장점도 있다. 인물들의 미세한 표정에서 그 내면까지도 들여다보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동주를 연출한 이준익 감독은 이 영화를 제작하면서 '꿩 먹고 알 먹고'로 비유한 그 우스갯소리에도 뼈가 있는 말이다. 윤동주만 내세우기엔 영화적 서사가 부족할 것 같았다. 현 시대 시인으로서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버린 송몽규와의 관계 속에서 영화를 그렸다고 한다. ‘왕의 남자’, ‘사도’ 등을 만든 그 내공으로 ‘동주’를 110분 동안 몰입도 높게 끌고 갔다.  어둔 시대에 청춘을 구겨 넣고 떠난 윤동주는 지금까지 상징적인 국민시인으로 불리고 있다. 송몽규는 상대적으로 별로 평가되지 못한 인물이라 이의 발굴과 인물을 알리는 데 힘을 보탠 거 같다.  동아일보 신춘문예 산문부분 당선자인 송몽규는 주권 잃은 현실을 절감하고 독립단체에 참여하는 ‘행동인’이 된다. 그러면서 동주에게는 '너는 시를 써라 총은 내가 든다'고 하는 몽규의 말이 가슴에 아련히 남는다. 내성적이고 수줍은 많은 동주는 '시인이 되길 원했던 내가 부끄럽다'고 응수한다.  주권을 잃은 그 암흑의 시대에 지식인인 동주가 할 수 있는 것은 시 쓰는 일 뿐이었다. 오랜 친구이자 외사촌 송몽규의 행동에 자극을 받아 부끄러움을 느끼지만 암울한 시대 조국이 사무치게 그리울 때도 그는 시를 썼다. 하지만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윤동주가 먼저 죽고 한 달 뒤 송몽규도 죽는다. 미완의 청춘 29살의 나이에 그들 둘은 광복 5개월을 남겨두고 대한 암흑기를 처절하게 살다 갔다. “20대에 청춘을 마감한 아름다운 청년 그 청년이 남긴 시가 7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마음 한구석 깊이 숨어 있으며 때로는 그 것이 나를 울렁이게 한다”고 이준익 감독은 토한다. 그 시대적 아픔과 부끄러움을 묻어둘 때도 됐는데 왜 또 들춰내느냐고 책망하고 싶은데 그는 대변한다.    “두 사람이 어떻게 어둔 시대를 이겨냈고 그 시가 어떻게 이 땅에 남았는지 그 과정을 영화로 담고 싶었다. 그리고 비명에 간 그들의 청춘과 그 시대를 위로하고 싶었다”는 게 이 감독의 의도이니 내가 어쩌랴.  영화엔 13편의 시가 나온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의 사랑과  별 하나의 쓸쓸함과…  별이란? 우리 천손민족에겐 별이란 하나의 초월 의지이며 온 곳으로 돌아갈 곳이다.  '별 헤는 밤'과 '서시' 가 인상적이다. 적진의 형무소 창에서 내다보는 밤하늘엔 초롱초롱한 별들만 가득하다. 형무소에서 알 수없는 약물주사를 맞고 객혈하면서 죽어갈 때 읊는 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서시'는 그렇게 감정선을 절정으로 밀어 올린다. 이 영화의 전편을 흐르는 기조는 '부끄러움'이다. 어느 시대이건 부끄러움을 알고 사는 이는 덜 부끄러운 것인 만큼 지금 기득권 세대들에겐 부끄러움을, 젊은 세대들에겐 전쟁이나 식민의 상황을 그저 관념적으로만 여길 뿐 구체적 감각을 인지하는지를 거듭 묻고 있는 듯하다.  영화를 본 후 내 삶의 의미가 겹쳐진다. 주권 없는 대한 암흑기를 당시 지식인들이 빠져 나가야 하는 어둠이듯이 나는 이 자본의 어두운 터널을 어떻게 빠져 나가야 하는지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좌절감만 엄습해서 나를 당혹하게 하고 아릿한 뒷맛을 만든다. 시의 정서만이 나를 후려치는 게 아니라 시대상의 아픔이 사정없이 나를 후려치는 채찍이다. 요즘 말하는 참여문학의 개념이 아닌 문학의 본질이자 시대적 아픔을 녹여낸 문학의 정수를 느끼게 한다. 그것이 문학의 역할이 아닐까? 문학은 대중들 앞에서 큰소리로 선동하는 것이 아니고 대중들의 밑가슴에서부터 공감을 갖게 해서 스스로 뒤에서 밀고가는 저력이 아닐까 한다. 소위말해서 '정서적 공감'이랄까.  당시 몽규에게는 일제라는 구체적인 싸워야 할 적이 있었다. 동주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억압하는 거대한 힘과 자기 정체성의 괴리에서 오는 인간적인 부끄러움을 대중들의 정서로 확대하고 있다.  이 시대 알수 없는 수많은 적들에게 둘러싸여 현재 나는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가? 하는 나의 정체성마저 놓쳐버린 이 시대의 정신적인 고아가 되어 버렸다는 자각이다.  무엇과 싸워야 하고 어떤 정체성을 갖고 대항해야 하는지? 현재 이 어려운 세상과 싸우는 나를 위로하고 힘을 주는 이는 진정 없는가? 한마디로 '방황'이란 대응으로 ‘땡강’을 부려볼 뿐이다.              
320    영화 '동주' 이어, 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 예막... 댓글:  조회:5436  추천:0  2016-02-10
2월18일 개봉하는 영화 '동주'(왼쪽)와 3월 개막하는 서울예술단의 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 / 가무극 '…달을 쏘다'·영화 '동주'  짧지만 찬란했던 청춘 윤동주 그려  극 중 로맨스는 상상 기반한 허구  '별 헤는 밤'·'서시' 읊는 장면 담아  화자 고뇌·시의 함의 엿볼 수 있어  문학작품 보는 듯 잔잔한 감동 전해  일제 저항과정 속 부끄러움의 뿌리  한발 앞선 송몽규에 대한 자극일까  목숨 걸고 무력시위 않았던 탓일까  공연 기자와 영화 기자가 서로의 장르·작품을 '걸쳐 보며' 자유롭고 발칙한 문화 방담을 펼친다. '컬처!걸쳐'의 첫 주제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노래하던 청년이요, 암울한 현실에서 고뇌하던 시인 윤동주다.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일 년 앞두고 28년의 짧았던, 그러나 '착한 시 한 줄 쓰고 싶다'던 치열한 그의 인생이 스크린과 무대에서 부활한다. 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이하 달을 쏘다)와 영화 '동주'는 대중에게 익숙한 이 인물의 짧은 인생을 어떻게 담아냈을까.  ■작품에 대해 (송주희) 가무극은 윤동주의 연희 전문대 재학 시절부터 1945년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 수감 중 사망하는 때까지의 이야기를 담았어. 2012·2013년 공연한 적이 있는데 올해 3월에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아서 공연 전반을 대폭 수정해서 다시 올리기로 했대. (김경미) 영화도 윤동주의 청년 시절을 그려. 특별한 점은 그의 고종사촌이자 독립운동가인 송몽규가 비중 있게 다뤄진다는 거야. 한 사람은 시를 사랑했고, 한 사람은 세상을 좀 더 사랑했지만 둘 다 틀리진 않았지. 각자의 신념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간 두 청춘을 빛나게 담아냈어. ■진실 혹은 거짓 (송) '달을 쏘다'는 밋밋한 스토리를 보완하려고 가상 인물인 '이선화'라는 여대생을 넣었어. 약간의 로맨스도 있긴 한데, 이선화는 묵묵히 시를 썼던 윤동주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이 더 큰 것 같아.  (김) '동주' 측은 상상이 30% 이하라고 말해. 평전을 통해 대부분 인물 관계나 이야기를 쌓았고 그걸 영화적으로 구성하며 약간의 변화를 둔 정도. 다만 영화도 여자관계(?)는 가상인데, 잘생기고 뛰어난 청년에게 로맨스가 없을 리 없다는 상상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어. ■시(詩)의 비중은 (김) 영화에서는 윤동주의 삶이 변곡점을 맞는 순간 '별 헤는 밤', '서시' 등의 시가 동주의 목소리로 읊어져. 일본 체류 시절을 보여주며 '육첩방(六疊房·다다미가 여섯장 깔린 일본식 방)은 남의 나라'를 읊는 식이지. 윤동주는 대체 저 시를 어떤 마음으로 썼을까, 하는 궁금증에 영화가 해답을 들려주는 셈이야.  (송) 공연을 위해 21개 노래를 만들었는데, 이 중 시를 가사로 넣은 곡은 없어. 윤동주 작품 자체에 운율이 있어서 따로 음악을 입히지는 않았대. 시는 윤동주 역을 맡은 배우가 낭송할 뿐이야. ■윤동주의 부끄러움 (김) '윤동주는 뭐가 그렇게 부끄러웠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영화는 송몽규와 윤동주의 관계 속에서 그 감정의 뿌리를 찾아. 강인하고 담대한 태도로 자신보다 언제나 한발 앞서는 송몽규를 보며 윤동주가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식인데, 덕분에 윤동주의 인간미가 잘 드러났던 것 같아.  (송) '달을 쏘다'에선 부끄러움이 미안함에 가까운 것 같아. 극 중에 이런 대사가 나와. "거친 말을 쏟아낼 용기가 없어서 아름다운 말 속에 숨어있는지도 모르지요. 이 시대에 시라니요." 친구들은 목숨 걸고 일제에 저항하는 마당에 시를 쓰는 내가 과연 옳은가 하는 고뇌인 거지. ■그 장면, 그 대사 (송) '오늘도 내일도 나는 무사의 마음으로 너를 쏜다. 시를 쓴다. 삶이 쓰다. 달을 쏘다.' 대표 넘버 '달을 쏘다'의 가사야. 달을 쏘다는 원래 윤동주가 남긴 산문 제목인데, 여기서 달은 잔혹한 일제이자 그 암울한 현실에서 시를 쓰는 자신을 의미해. 윤동주에게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함축하고 있는 가사라 여운이 컸어.  (김) 영화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윤동주가 취조를 받는 장면과 윤동주의 빛나는 청춘을 씨줄과 날줄 삼아 전개되는데 두 가닥의 실이 하나로 합치되는 후반부 취조씬은 영화의 백미야. 죽기 직전의 두 청년이 토해내는 그 모든 대사와 표정들이 꽤 오래 가슴에 남아. ■그래서 볼 만해? (송) 살아 움직이는 윤동주 시집을 감상했다는 느낌. 극적인 요소가 없어 단조롭다는 아쉬움도 있지만, 잔잔한 감동이 더 컸어.  (김) 영화 역시 한 편의 문학작품을 보는 느낌이야. 서정적이고 아름다워. 극장에서의 2시간도 기억에 남겠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줄 영화야...
319    영화 '동주'를 기다리며 댓글:  조회:6260  추천:0  2016-02-08
영화 '동주' 진짜 팬을 위한 경매 방식 판패 팬들이 기부금액 결정 전액 유니세프에 기부         ▲ 한정판 엽서 새로운 판매 방식의 팬덤 커머스 '올윈'이 영화 ‘동주’의 이색 시사회를 연다.   올윈은 무조건 싸게, 무조건 빨리가 아니라 서로 나누는 가치에 주목한 커머스 서비스다. 원하는 가격에 깃발을 꽂으면 높은 입찰가격 순으로 한정된 사람이 결정되나, 낙찰자 중 가장 낮은 금액으로 낙찰자 전원이 결제되는 것. 구매자는 자신이 원하는 상품을 원하는 가격보다 낮게 사고, 판매자는 자신의 상품을 원하는 진정한 팬과 만난다는 컨셉이다. 하지만 올윈은 이준익 감독의 새 영화 ‘동주’의 경우 기존과 다른, 소비자가 직접 기부 금액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특별 시사회를 준비했다. 영화 ‘동주’는 일제강점기, 28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한 젊은 시인 윤동주와 그의 친구인 독립투자 신몽규의 생애를 그렸다. 12일 11시까지 판매되는데, 모든 수익금은 유니세프에 전액 기부된다. 관객으로서는 특별한 시사회와 기부에 동시에 참여할 기회다. 17일 특별 시사회는 오후 7시 30분부터 메가박스 코엑스 컴포트룸에서 열리며, 영화 ‘동주’ 관람 후 씨네 21 주성철 편집장의 진행으로 이준익 감독, 배우 박정민과 함께하는 관객과의 대화가 진행될 예정이다.           80명의 관객들은 개봉 하루 전날 영화를 미리 관람하고, 제작 스토리 등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뜻깊은 시간을 갖는다. 메가박스 코엑스 컴포트룸은 가죽시트와 사이드테이블, JBL 사운드시스템 등을 갖췄다. 영화 ‘동주’의 박정민, 강하늘 씨와 이준익 감독     ▲ 한정판 엽서     동주 강하늘 배우 강하늘에게 영화 '동주'는 상당한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카메라 앞에서 시인 윤동주를 연기하는 동안, 카메라 밖에서는 잠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됐다. 강하늘은 "굉장히 많은 고민으로 밤을 지새웠다"고 말했다. 28일 서울 동대문 메가박스에서 열린 '동주' 언론시사회에서 강하늘은 "윤동주의 삶을 영화화한 건 '동주'가 처음이라고 들었다"며 "그런 작품에서 감히 윤동주 시인을 연기하는 것 자체가 중압감, 압박감, 긴장감의 연속이었다"고 무거운 마음을 털어놓았다.   강하늘은 "'동주' 시나리오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윤동주 시인도 나처럼 열등감, 질투심, 패배감을 느낀 젊은이였다는 사실이다. 내 머릿속 윤동주는 너무나 순결하고 고결한 이미지였는데, 시나리오에선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줬다"며 출연 이유를 전했다. 평소에도 윤동주의 시를 좋아했던 강하늘은 이번 영화를 준비하면서 윤동주 시인에 더 가까워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시집을 다시 읽은 것은 물론이고 관련 다큐와 책도 섭렵했다. 그는 "당시 시대를 잘 알지 못했고 감히 이해할 수도 없었다"며 "최대한 많은 상상을 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다했다. 그러면 뭔가 느낌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노력도 부족했던 것 같다"고 겸손해했다. 윤동주 시인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한 마지막 장면 촬영을 마친 뒤, 강하늘은 졸업생이 학사모를 던지듯 하늘로 시나리오를 던졌다. 19회차의 촬영 동안 누적된 모든 감정을 다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강하늘은 "그 장면이 꿈처럼 느껴진다. 촬영 끝나고 박정민과 껴안고 많이 울었다. 감독님도 고생했다면서 눈물을 보이셨다"고 뒷이야기를 전했다. 앞서 강하늘이 영화 '쎄시봉'에서 맡았던 역할은 가수 윤형주. 시인 윤동주의 6촌 동생이다. 강하늘은 '동주'에 캐스팅된 뒤 윤형주에게 전화를 걸어 소식을 전했다. 윤형주는 "너 윤씨로 바꿔야 하는 것 아니냐. 우리 집안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다"면서 격려해줬다는 후문이다. 한편, 영화 '동주'는 시인 윤동주와 그의 벗이자 라이벌이었던 독립운동가 송몽규의 청춘을 그린 작품으로, 박정민이 송몽규 역을 맡아 강하늘과 호흡을 맞췄다... /////////////// "'동주' 본 관객들이 밤하늘 올려다볼 시간 가질 수 있다면" (서울=연합뉴스)= 영화 '동주'에서 주인공인 윤동주 시인을 연기했던 강하늘은 배역이 주는 부담감이 상당히 컸다고 호소했다. 그는 4일 종로구 삼청동의 모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하루하루가 진짜 힘들었다. 잠을 푹 잔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감히 어디 가서 "윤동주 역을 맡은 강하늘입니다"라는 말을 꺼내기조차 어려울 정도라고 했다. 잠시 "숨어버릴까도 고민했다"고 했다.     그 부담감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제가 표현하는 연기 하나하나가 윤동주 시인의 모습으로 평생 남는다는 것 자체가 정말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오케이 커트가 되면 평생 지울 수 없지 않나. 그래서 잠을 못 이루고 술을 찾게 됐고, 감독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강하늘은 윤동주 시인이 되고자 하기보다는 그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 중점을 뒀다고 말했다. 그는 "영화에서 보여지는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느끼는 감정과 그 사람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라며 "윤동주 시인 자체보다는 시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느껴야 했던 감정이 무엇이었을까를 고민했다"고 설명했다. 강하늘은 촬영 전에는 윤동주 시인의 '서시'나 '별 헤는 밤'을 좋아했는데 촬영 후 '자화상'을 좋아하게 됐다고 말했다. '자화상'의 '그 사나이'가 윤동주 본인을 뜻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영화를 촬영하면서 그가 송몽규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의 말은 시나리오상 그렇게 그려졌다는 의미다. '자화상'에서 '그 사나이'는 시적 자아 본인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중론이다. 그는 '동주'를 사람들이 많이 봤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그 이유가 색다르다.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기를 바라서가 아니다. "사람들이 당장 다가올 앞날만 보지 과거를 잘 생각하지 않는다. '동주'를 보고서 그 시대를 되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과거를 생각한다면 오버하는 것이겠지만 '동주'가 현재를 사는 사람들에게 과거를 되돌아볼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 이런 의미에서 동주를 많은 관객이 봐줬으면 바란다." '동주'를 찍으면서 초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고 했다. 영화를 여러편 작업을 하다 보니 이른바 '스코어', 흥행을 점점 염두에 두게 되면서 영화를 만드는 즐거움을 잃게 됐는데 '동주'는 달랐다는 것. 강하늘은 "'동주'의 모든 스태프와 연기자들이 이 영화를 얼싸안고 있었다. 거기서 영화라는 것이 이렇게 행복하고 즐거운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고 전했다.     그는 '동주'를 본 관객들이 극장을 나와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고 했다. "배고프다, 뭐 먹지"라며 영화관을 나오자마자 곧 잊히는 영화가 안 됐으면 좋겠다는 의미다. 강하늘은 공교롭게 그가 출연한 또 다른 영화 '좋아해줘'가 '동주'와 같은 날인 다음달 18일 개봉한다. '좋아해줘'에서 그는 연애에 초짜인 이른바 '모태솔로' 작곡가 이수호 역을 맡아 '밀당'의 고수인 드라마 PD 장나연으로 분한 배우 이솜과 연기 호흡을 맞췄다. 그는 "촬영 현장에서 솜이씨를 많이 의지했다. 영화에서 솜이씨의 사랑스러운 매력이 잘 드러났다"고 평했다.       [시크뉴스 박혜란 기자] 강하늘은 우연치 않게 출연한 영화 ‘동주’와 ‘좋아해줘’가 같은 날 개봉하게 됐다. 두 작품이 동시에 개봉하지만 어떤 것의 우위를 따지기는 어려웠다. 두 작품 모두 그가 사랑한 작품이었다.  5일 강하늘은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영화 ‘동주’(이준익 감독) 그리고 ‘좋아해줘’(박현진 감독)와 관련해 시크뉴스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강하늘은 ‘동주’에서 윤동주 시인 역할을 ‘좋아해줘’에서는 천재 작곡자 수호 역할을 맡았다. ‘동주’ 촬영 이후 3~4개월 후에 이뤄진 ‘좋아해줘’ 촬영이었으나 공교롭게도 오는 17일 같은 날 개봉하게 됐다. 이에 대해 강하늘은 “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라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두 작품을 대중에게 선보이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부담감과 긴장을 완전히 떨쳐 낼 수 없었다. 강하늘은 “내가 사랑했던 작품들이다. 내 손을 떠났는데 관객들이 보시고 결정을 하셔야되는데 내 사랑이 너무 작지는 않았을까 그런 생각들이 든다. 작품들을 좋아해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다.   작품을 떠나보냈지만 처음 강하늘이 시나리오 속 동주를 만났을 때를 언급하자 그 당시의 설렘과 함께 부담감이 생생하게 전해지는 듯했다. ‘동주’는 일제강점기 시대 평생을 함께 한 친구이자 영원한 라이벌이었던 윤동주와 송몽규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영화 속에서 윤동주는 사촌 송몽규를 질투하는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자칫 낯설 수도 있는 모습이 강하늘이 이 영화를 선택하게 된 이유기도 했다.    “저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윤동주 시인을 이미지로 그렸을 때 거대하고 아름답고 찬란하고 천사 같고 그런 이미지가 있다. 저도 윤동주 선생님에게 그런 이미지들이 있었다. 정작 윤동주 시인의 삶을 들여다 볼 생각을 못 했다. 윤동주라는 사람을 우리가 허구로 만들어낸 사람이 아니다. 이 사람도 그 시대에 살았던 젊은이였다. 열등감이나 패배감 질투심, 누군가를 사랑함 이런 감정이 있었을 거다. 시만으로 만들어 버린 이미지가. 반성을 많이 하게 됐다. 신선한 충격을 줘서 선택하게 된 게 크다. 시인 윤동주가 아닌 사람 윤동주로 있게 해주는 것.” 그가 정말 좋아하는 시인 윤동주를 만나게 됐을 때는 기대와 흥분, 그리고 치기 어린 것도 존재했었다. 그렇게 이 작품에 들어가고 나서는 오히려 그가 윤동주를 표현해야한다는 걱정, 불안, 중압감 등이 존재했다. 또한 흑백 영화로 상영되는 만큼 배우들의 표정이나 호흡 등이 날것 그대로 드러났다.  강하늘은 첫 흑백 영화를 촬영하면서 신경 썼던 부분에 대해 “첫 촬영 때 보니 얼굴에 움직임이 잘 잡히더라. 이것을 역이용하면 내가 원하는 표현을 최소한의 표현으로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연구를 했던 것 같다. 어떤 장면에서 이렇게 입술을 움직인다는 지, 입을 가만히 있다가 조금만 움직여도 굉장히 크게 보이더라. 그런 점들을 사용하려고 노력했다”라고 전했다.  시인 윤동주의 삶을 다루는 영화인만큼 영화 전반에는 강하늘의 목소리로 윤동주의 시를 낭송하는 내레이션들이 들어간다. 그는 처음에는 모든 시를 한톤으로 읊었다가 지루해지는 느낌을 주는 것 같을까봐 감독과 상의했다. 이후 강하늘은 시를 밝은 듯한 느낌으로, 울분에 차있는 듯한 느낌으로 찾아가려고 녹음을 했다.    시인 윤동주는 이 영화에서 사촌 송몽규를 통해 질투도 하고 시기도 하는 사람 윤동주로 그려진다. 그 만큼 이 영화에서 윤동주만큼 주목되는 인물이 송몽규(박정민)다. 송몽규는 강하늘이 5년 전부터 알고 지낸 박정민이 연기했다. 강하늘은 박정민과 이번 작품을 통해 처음 호흡을 맞췄다. 강하늘은 박정민과 호흡에 대해 “믿음 하나로 연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잘 맞았다. 툭하면 툭이었다 동주와 몽규와의 관계처럼”이라고 말했다. 강하늘은 영화에서 송몽규가 조금 더 조명되는 것에 대해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연기를 준비하는 것은 우리 작품을 위한 거다. 내가 더 뛰어나려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송몽규가 잘 보인다는 얘기가 저에게는 더 큰 칭찬으로 들린다. 송몽규를 이 세상에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작품이다. 송몽규가 우선시 돼야 한다. 저도 거기에 백퍼센트 동의했다”라고 전했다. 동주와 몽규의 관계는 영화 속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그려진다. 강하늘은 동주와 몽규의 관계에 대해 “처음에는 대본을 잃고 ‘필요 악’의 관계라고 생각했다. 서로 필요하지만 너무 가까워지기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몽규도 몽규 나름의 뜻이 있다. 하지만 둘은 붙어있을 수밖에 없는 그런 관계들이지 않을까 싶다”라고 전했다. “개인적으로 ‘동주’는 우리 모두가 참 행복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예산이 적을지언정 그걸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이 작품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데 그런 마음만 있다면 예산이 적고 크고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그것을 ‘동주’를 통해서 아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강하늘은 이 영화를 통해 관객들이 어떠한 의도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마음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기억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다. “흥행을 떠나서 많은 분들이 봐줬으면 좋겠다. 많은 분들이 보고 기억할 수 있는 영화로 기억됐으면 좋겠다. 현실에 익숙해지다 보니 과거를 잊고 산다. 그런 점에서 영화 보면서 좋았던 부분이 있었다.”  그렇게 윤동주 시인을 떠나 4개월 후 새롭게 만난 인물은 청각장애를 가진 천재작곡가 수호였다. 그는 캐릭터를 위해 다큐멘터리도 보고 연구도 많이 했었다. 강하늘은 “다른 두 커플과 색깔이 너무 안 맞았다. 감독님과 영화적 허용 약속 안에서 편하게 하자. 안 들리는 불편함을 상황적으로 보여주자”고 설명했다.  강하늘은 ‘동주’ ‘스물’ ‘좋아해줘’ 등 연애에는 쑥맥인 역할을 주로 맡아왔다. 그는 이러한 이미지가 고착되는 것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저는 어떤 작품을 이나 연기를 할 때 이미지에 대한 전략적인 생각까지는 안 한다. 내가 재밌게 즐길 수 있는 작품들 들을 만나려고 한다. 그런 캐릭터들이 많았다. 제가 저를 봐도 연기를 하는 모습을 상상했을 때. 바람둥이 역할을 하고 있는 거 보다는 연애쑥맥을 하는 게 더 어울려 보인다.” ‘동주’와 ‘좋아해줘’ 개봉을 앞둔 강하늘은 드라마 ‘보보경심: 려’ 촬영으로 바쁜 일정을 이어갈 전망이다. 그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드라마 촬영 끝나며 공연 쪽을 하려고 한다. 공연이라는 게 연습 기간부터 공연까지 4개월이 비워져 있어야 한다. 시간적 여건이 맞으면 다 하고 싶다”라고 전했다. 
318    전라도 사투리모음 댓글:  조회:7422  추천:1  2016-02-07
 전라도 사투리 모음. 지방 사투리는 그 지방의 역사이고 정서가 스며들어 있으며 문화라고 생각허는디. 그렁께 사투리를 읎애불라고 할 것이 아니라 캐내고 찾아내어 너도 쓰고 나도 쓰다봉께 조상님들의 생각과 정서 그리고 생활을 알수 있것드라 이것이여. 알았으먼 조상님들의 거시기를 바탕으로 생활을 창조하고 문화를 창조하여 지방 분권화 시대에 그 고장만의 특색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말이여. 그런디 사투리 중에서도 쓰면 쓸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가슴 따땃하고 정이 듬뿍 넘쳐 불먼서 구수하고 맛깔스러운 것이 전라도사투리라고 생각허는디..... 서울말은 정이 읎고, 그렁께 말 허자먼 거시기해서 싫고, 경상도사투리는 멀끄뎅이 잡고 싸우는 말 뽄새에 딱딱해서 싫고, 충청도사투리는 구수하고 정이 넘실대기는 허는디 느려 터져서 맛깔스러움이 읎어 싫고 제주도사투리는 못 알아 듣고 이해허기 힘들어 싫고, 아메도 전라도 말이 최곤개비여!!!! 세계문화 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된 판소리가 전라도 말이 아니드라고? 전라도 말이 아니면 기가 멕힌 판소리 맛, 그렁께 무쇠솥 깐밥처럼 구수한 맛이 읎다 그말 아니드라고? 암암...... 그렁께 전라도 말은 유네스코에 등재되야가꼬 세계 사람들이 인정한 말이다 그 말이여...... 어째 내말이 틀렸능가? 그래서 본인이 알고 있는 사투리 몇 개, 소설 ‘태백산맥’에 나오는 전라도사투리, 글고 인터넷에 떠 댕기는 전라도사투리를 긁어 모트고 모타서 올렸 응께 필요하신 분은 알아서 쓰시요잉~~~~ (ㄱ) 가매-가마, 갈쿠나무-마른나무잎.풀, 가실-가을, 감똑-감꽃.(감또개)표준말-어린감과꽃, 가리-가루, 가새-가위, 개야찜-호주머니, 가상(가상돌이)-맨끝가장자리, 가찹다-가깝다, 간짓대-긴대나무(장대), 가실하다-가을걷이, 간나구-백여우같은, 까끔살이-소꿉놀이, 깍꾸리-갈구리(무거운짐을들때사용하는손기구), 까시락-까끌까끌한물질(가스랭이-보리까시락), 깡다구-단단하고 깐깐한힘, 개랍다-가렵다, 깐닥깐닥-천천히, 개비드만-그랬던가 보더구먼, 고상-고생, 기연치-기어히. 기영물-설겆이물, 그랬능가보드만-그랬는가보더구만, 꾸석지-귀퉁이.모서리자리, 기뚝-굴뚝, 겅개-반찬, 꼬꼽쟁이-구두쇠.욕심쟁이, 귀영치-귀퉁이, 꼰지다-넘어떠리다, 꼼치다-감추다(훔치다) , 깨금발이-한쪽발을듬.한쪽발로섬, 꾸정물-쌀뜸물.흐린물, 깔쿠막-비탈길.언덕길, 개긴다-버티다, 고삿길-골목길, 꼴-차림새, 꼬랑내-발냄새, 그럼시롱-그러면서, 끌텅-나무뿌리(뿌리), 곰부리대-구부러진나무로만든소죽풀때사용, 깨골창.깨궁창(시궁창)-더러운물이모여있는웅덩이, 꼼(꼴)마리-허리춤, 꼬랑(꼬랑창)-물이있는작은고랑, 꼬불치다-구기다.감추다, 깽판-훼방, ~깨비-~까봐, 갈쿠-갈퀴, 구구절절-말이나문장의마디마디, 갱변밭-냇가에있는밭, 꾸불텅 꾸불텅-꾸불꾸불, 공구리다-마음을단단히한다, 각단지게-단단하게, 껄쩍찌근-분명하지않을 때, 궁글어(궁글다)-흩어져 굴러다니는(뒹굴다), 구시-구유, 개리다-가리다, 갱신-몸을 가누는일, 근다고-그런다고, 근천시럽다-잘고옹색하다, 기엉코(기연시)-기여코(기어이), 꼬랑뎅이-꼬리, 깡아리-옹이, 깨베끼다-벌거벗기다. 그짓깔-거짓말, 건사하게-근사하게, 꼴마리-허리춤, 구뎅이-웅덩이, 구석-귀퉁이, 기뚝-굴뚝, 귀싸댕이-뺨을치다, 기여? 안기여?-그려? 안그려?, 그람시로-그렇게 해놓고, 금메-글세, 기경-구경, 꼬라지-보기싫은모습, 깽메기-꽹과리, 꼬랑창-물이있는 고랑, 꼴창-골짜기, 꾸정물-구정물, 가남생이-가늠해서 추측하는것 (ㄴ) 낮바닥-얼굴, 눈깔-눈알, 냉갈-연기, 넙덕지-허벅지, 나락-벼, 넘새밭-텃밭.삼밭, 느자구-싹수.버릇, 냅뺀다-도망간다.줄행랑, 남포-등, 나수-매우.많이.넉넉히, 남봉-이마나머리를찧어부풀어오른 경우, 냉택없이-아무것도없이.실없이.아무런이유없이, 냅둬-놔둬.내버려둬, 낭구-나무, 난닝구-런닝셔츠, 내동-줄곧, ~능갑다 -~는가 보다, 내싸두다-내버려두다, ☞ 나무청, ☞ 넘새밭, 나사지다-나아지다, 남치기-나머지, 냉게놓다-남겨두다, 느자구없다-싸가지없다, 놉-일꾼, 나부대다-나대다, 남사스럽다-챙피하다, 낯빤대기-얼굴, 냉갈 –연기, 내-냄새(끄으름내), 내불랑가-버릴것인가, 너물-나물, 너무새-모든나물, 널-관, (ㄷ) 다마내기-양파, 대갈몽치(대가리.대그빡)-머리. 독아지(독아리)-항아리, 도롱태(동굴태)-굴렁쇠, 뒤안-뒤뜰, 담박질(뛰엄박질,담박굴)-달리기, 도구통-절구통, 두룸박-두레박, 때알-딸기, 다짝굴-공기놀이, 대사리-다슬기, 때깔-빛깔, 띠빵-멜빵, 또랑-실개천, 다구리-남에것을빼앗음, 대롱-빨대, 또가리-머리에물건을일때받치는 것, 단박에-한번에, 두레-낮은곳물을높은곳으로 퍼올리는기구, 동댕이-팽개치다.던지다, 따구(따귀)-뺨, 뗑깡(띵깡)-떼.투정.억지, 동냥치-구걸.거지, 댕기다(댕겨)-다니다.다녀, 둠벙-작은방죽, ☞달구청, ☞두지(뒤주), ☞돌쪼구, ☞두덕(두럭), ☞덕석, 동우-동이, 동태-굴렁쇠 둠벙-연못, 등지개-작업복웃옷, 따까리-뚜껑, 딴디-다른곳, 달브다-다르다, 대야지-돼지, 단도리-단속, 당그래-고무래, 당아-아직, 대끼-듯이, 더터갖고-더듬어갖고, 뎁되-오히려, 되나케나(도나개나)-아무렇게나, 되작되작-차근차근, 느자구-되먹지못한, 뜽금없이-느닷없이, 달구가리(닭가리)-이동식 닭우리, 달롱개-달래, 덤텡이-덩어리, 데꼬-데리고, 도채비-도깨비, 도치-도끼, 동구간-가까운집안간총칭, 동테-굴렁쇠, 등지개-상의작업복, 딴디-다른곳, 달브다-다르다, 대야지괴기-돼지고기, 단박에-금방 (ㅁ) 몽니-오기.고집.곤조, 말캉(말래)-마루, 민경-거울, 무담시(매겁시)-괜히.이유없이, 매가내-색안경, 뭣땀시(뭣땜시)-무엇 때문에, 맨맛하다-만만하다, 맨사댕이-맨몸.알몸, 머시매-남자, 머슴-일꾼, 무시-무우, 문지-먼지, 몰골-얼굴, 몬당하다-쉽고가볍다, 목새-모래, 맴생이-염소, 목깐(매깐)-목욕, 미역(멱)-수영, 맴-마음, 물꼬-물이나가는곳, 막캥이-막된사람.앞뒤가꽉막힌사람.전혀배려심이없는사람, 뫼똥-묘, ☞ 매깜기, ☞ 망태기, 말캉(말래)-마루, 매롭다-마렵다, 모지락스럽다-모질다, 몬뎅이(뽕아리)-꼭대기, 몰뚝잖다-잘생기지못하다, 무신-무슨, 무작스럽게-우악스럽게, 멀끄뎅이-머리채, 명념허다-명심하다, 모시-닭모이, 모텡이-모퉁이, 몬춤-먼저, 몰캉허다-말랑말랑하다, 몸써리나게-지긋지긋하게, 무담시-괜히, 무신날-평일, 몽니-고집, (ㅂ) 방천-둑, 부석작-아궁이, 봉창-창문, 봉다리(봉지)-봉투, 바구리-바구니, 뿌사리(부사리)-숫소, 뽀짝-가까이, 빼깐(빼다지)-서랍, 뽀사불다-부수다, 베미-다랭이논, 삐딱(햇딱)-기울어짐.비틀어짐, 뽀시락-작은소리, 빤스(고쟁이)-팬티, 보새기(보시기)-접시, 빠구리-땡땡이, 뱉갓에(바깟태)-밖에, 뽕아리(몬뎅이)-꼭대기, 뺑돌이-팽이, 본새(뽀다구)-모양새.맵시, 빡구-후진, 보채다(보챈다)-졸라대다.칭얼대다, 뽀두락지-종기.부스럼, 분빠이-나누다, 빳다-몽둥이, 빨뿌리(곰방대)-담배대, ~번져-버려, ☞ 북감재, ☞ 베늘(나무베늘, 나락베늘), 삐그덕, 부지땅-부지깽이, 뻑쩍찌근-아프고힘들다, 바구리-바구니, 보초읎다.-버릇없다, 보트다-마르다, 볿다-밟다, 비문히-어련히, 바끄럭-밥그릇, 빠꿈살이-소꿉놀이, 밥테기-밥알, 버끔-거품, 벌로-함부로, 베랑빡-벽, 벨나게-유별나게, 보덱끼-보다시피, 복작거리다-북적거리다, 본시부텀-예전부터, 볼가서-밝아서, 봄시롱-보면서, 부삯-부엌, 부애-화, 불끼-온기, 붕알, 비우-비위, 빙-병, 빰때기-뺨, 뺑도리-팽이, 뻔치다-뻗어가다, 뽄-본, 뿌렁구-뿌리, 비민히-어련히, 뿌사리-숫소, 뽀사지다-부서지다, 부시럼-종기, (ㅅ) 신작로-새로난 큰길, 샛걸이-새참, 시정-정자, 시피보다(히피보다)-쉽게보다, 씸뻑씸뻑-생각없이 이리저리, 시방-지금.방금, 삭신-온몸, 쇠구(지름)-석유, 새금팔-깨진사기그릇조각, 시렁-이불따위을올려놓는곳, 시한-겨울, 실꾸리-실타래, 소지-청소, 쇠양치-송아지, 쇳때-열쇠, 씨부렁-혼자중얼거림.중얼중얼, 씨잘대기-쓸데없이, 소락대기-큰소리, 소쿠리-삼태기, 실가리(거십)-시래기, 살강-그릇올려놓은곳(부엌찬광), 시암-우물, 상지-바늘쌈지.작은바구니 , 소매통-오줌통.소변보는통, 소망-재래식 화장실 항아리, 시지부지-흐지부지. 하는둥마는둥, 싸목싸목-천천히.쉬엄쉬엄, 싱건지-동치미, 솔찬히-많이, 솔찬허다-꽤 많다, 색갱이-새끼, 시장끼(시장)-배고픔, 씨부랑(탕)-불량아.나쁜사람.개지랄, 사진끼-카메라, 쌧바닥(혓바닥.섯바닥)-혀, 쑤시-수수, 쇡-속, 새내키-새끼, 스이-셋, 솔개비-솔가지, 소쿠리-삼태기비슷한그릇 쌈박질-싸움, 숭악허다-모질고 악랄하다, 험상궂다, 살강-부엌찬장, 새복-새벽, 실덕벌덕-이랫다 저랫다, 새복-새벽, 시상-세상, 심-마음(내심-속마음) 싸게-빨리, 서끌-서까레, 색우-석유, 속케-솜, 숭-흉, 숭구고-심고, 실가리-시래기, 시암-샘, 씰개-쓸개, 새복-새벽, 소지-청소, (ㅇ) 외약손-왼손, 엥간이-어지간히, 오가리-옹기.항아리, 어멘-어뚱한, 얼추-대충, 언넝-빨리, 영판-정말.아주, 얼척없다-어이없다, 암시랑토-아무렇지도, 앙거-앉아, 인나-일어나, 인빙아리-병신같이.바보처럼, 언넝-빨리, 애편네(이핀네)-마누라.부인, 이따-나중에, 이무럽다-허물없다.친하다, 옹삭하다-불편하다, 이녘(인역)-당신.자기, 양재기-그릇, 인자사-이제사, 암시롱-알면서, 오롱대롱-오르락내리락, 앙알앙알(앙알대다)앙살앙살-종알종알 지껄이며대드는 것, 얼기미-바닥이구멍난체, 어치-짚으로엮은소옷, 아가리(아구통)-주둥이, 아정때-오전, 아따(워따)-지금.참.그냥.그러지말고, 울력-여러사람이모여하는일, 웃녘-윗동네, 아랫녘-아래동네, 아심찬-아쉽다, 야그-이야기, 요로코롬-이렇게, 아사리-혼란스러움.아수라장.난장판, 앗사리(앗싸리)-차라리.아예.시원시원하게, 욧시-좋다.알았다, 올체-좋아.잘한다.역시, 옥꼬시-박상과자, 잇빠이(밋빠이)-가득히, 올깃쌀-쪄서말린쌀, 아굿지게(개낸다)-약오르게.자랑한다.잘난체한다, 오돌개(오둘개)-오디, 옹굴지다-옹골지다.매우실속있고 꽉차다, 아심찬-아쉬움.아쉽게, 이엉(마람)-짚으로엮어서 지붕을덮는 것, 이비야-무서운사람.무서운 것, 웟따-아이구, 어쩌끄나-어쩌면 좋을거나, 우새시럽다-우스개스럽다. 창피하다, 인나버리다-일어나버리다, 인 내-이리내놔, 인디-인데, ☞ 올게심니, 오기-고집 어무이-어머니, 어메-어머니, 아부이-아버지, 아슴찮이-미안하게, 아칙-아침, 암디-아무데, 찌리-끼리, 암시랑-아무렇지, 어쩌크롬-어떻게, 영축없이-영락없이, 오갈들다-기운을못피다, 오지다-너무좋다, 왈기다-난폭하게다루다, 워메-감탄사, 을매나-얼마나, 이적지-여지껏, 앗따-그러지말고, 앵간이-어지간히, 얼렁얼렁-빨리빨리, 여러서-부끄러워서, 역부러-일부러, 연연히-매년, 오메어짜까이-어찌하면좋을까, 오지개서-오죽하면, 올시한-올겨울, 울어매-우리어머니, 이따가-나중에, 이므렁께-잘아는사이니까, 자울다-졸다, 잔생이도-조금도, ~하고잡다-~하고싶다, 장시-장사, 재잘궂다-짓궂다, 조단조단-조목조목, ~지라우-~지요(~하지요), 아까막새-방금전에 (ㅈ) 쪽박-바가지, 짚시랑-처마밑고랑, 작기장-공책, 자빠지다-넘어지다 , 장깡-장독대, 잔생이(잔챙이)-작은, 쪼물애기(잔챙이)-작은것들, 지앙(지양)-지혜롭지못함.난잡함.부잡함, 정때-오후, 정지-부엌, 잔등-산마루.산고개길,등 짓까심-김치.채소, 째깐하다-작다, 자부동-방석, 주렁막대기(주렁)-지팡이, 질통(바켓스)-물질러나르는통, 지럭시-길이, 쪼시락쪼시락-야금야금.조금씩, 조시-중심.평행,좋은기분 지둥-기둥, 잣대-자, 쪼다-어리석고모자라제구실을못하는사람, 쪽팔리다-부끄럽다, 쫌팽이(쫌생이)-소인배.좀스러움. 옹졸하고 보잘것없음, 제금나다-따로나다, 종오때기-종이, 쨈매다-묶다, 쬧기나다-쫓겨나다, 찌클다-뿌리다, 찌럭 찌럭-질퍽질퍽, 짜구-배탈, 징허게-징그러울정도로많이, 짝대기-작대기, 찌버까다-꼬집다. 주뎅이-입, 졸갱이질-모진괴로움, 종그다-벼르다, 질로-제일로, 종당에는-결국에는, 징허다-징그럽다, 쪼깨(쪼까)-조금, 찡기다-끼이다, 자우라지다-기우려지다, 저붐-젓가락, 정재(정개.정지)-부엌, 지발-제발, 집시랑-추녀, 지심-잡초, 짐치-김치, 지깽이-김치꺼리, 징상스럽게-무척, 짬매서-묶어서, 째깐-작은, 쬐까-작게.조금 쪽박-바가지, 찌갱이-찌꺼기, 찌새봉께-찔러보니까.찌르니까, (ㅊ,ㅋ,ㅌ) 칙간-화장실, 차꼬-자꾸, 찻독-쌀통.쌀담아둔항아리, 차대기-보따리. 창아리-창자, 찬합-반찬통, 촛대-깔대기, 폴세-벌써, 칼칼이-깨끗이, 크내기-다큰처녀(아가씨), 크레용-크레파스, 클씨(클매)-글세, 토방-마루로 올라서기전 처마밑둑, 티밥-뻥튀기, 타박-(탓)이러쿵저러쿵, 탁배기-막걸리, 터럭-털, 토껴(톡기다)-도망치다, 티받이-쓰레받이, 티금지-티끌, 타기다-닮다, (ㅍ,ㅎ) 폭깍질-딸국질, 패대기(패댕이)-마구두둘기다, 포개다-겹치다, 포도시-힘들게겨우, 폴새(폴시개)-진작,벌써, 푸대-자루, 핑경-작은종.소목에달아소리나는종, 피리(피레미)-작은물고기, 폴-팔, 핑-빨리, 푸근하다-따뜻하다, 포대기-작은이불(어린아기업을때씀), 포도시-간신히, 겨우, 폴새-벌써, 푸징가리-잎채소, 후타리-울타리, 허벌나게(허천나게.오살나게)-아주 많이, 허구지개-엄청많이, 허청(헛간)-행랑채, 호숩다-재밌다, 햇대-옷걸이.옷걸어두는대나무, 후제-나중에.후에, 흐미-어이없이잘못할 때, 흐매.어매. 학독-돌로만든양념가는그릇(절구통보다낮고넓다), 홀태-벼를훑는농기구(타작), 해찰-딴청(딴데보는 것), 함박-부엌에서사용한대야, 훗닥-빨리, 혹간(혹깐)-혹시.간혹, 하마-지금쯤, 홋것(홋겁대기)-얇은(겉)옷, 홍제-횡제.복터짐.좋은일이생김, 흐거다-희다.흰색.백색, 험성도(험서도.험시롱)-하면서도, 핸돌이-운전.운전대, 히가꼬-해가지고, 해싸다 –해대다, 혔다-했다, 할매-할머니, 하나씨-할아버지, 하먼이라우-그렇지요, 행투-행동거지, 허천나게-엄청많이, 홀테질-곡식훑는일, 허새비-허수아비, 허천빙-무조건먹는병, /////////////////////////////////////////////////////////// 깨구락지 오메! 깨구락지 잠 보소. 아니! 벌써 깨구락지가 나왔냐? 야. 호박 구뎅이 파다 봉께 나오요. 눈만 껌뻑껌뻑 허는 것이 아직 정신 못채렸다. 그러고 봉께 오늘이 경칩이로구나. 경칩이 뭇 허는 날이다요? 온 시상이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날이다. 기중에서도 깨구락지가 젤로 먼첨 깨지야. 농촌에서는 경칩부터 농삿일이 시작됭께 인자 눈 코 뜰 새 웂이 바뿌겄다. 경칩 날 왜 깨구락지가 먼첨 나온다요? 깨구락지는 도깨비 다음가는 영물잉께로 글제. 따땃헌 논 고랑창에 짐생 눈깔맹이로 생긴 알덜이 올챙이로 변허고 네발 나옴서 꼬랑지는 들어가고 변신술이 뛰어난 신이헌 동물임스로도 해를 끼치지 안응께 사람허고 친헌 동물이제. 그래서 깨구락지 속담도 많은갑소이~ 깨구락지 올챙이 적 생각 못헌다. 둠벙 안 깨구락지, 깨구락지도 움츠려야 뛴다. 두말 허먼 잔소리지야. 느덜도 변신술에 능통한 깨구락지 닮으면 시상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갈 수 있을팅게 환경에 적응해서 살아가는 지혜를 깨구락지 뽄따라서 배워야 쓴다. 근디 해충들만 잡아먹는 이로운 동물을 요새는 볼 수 웂는 것이 영판 섭섭쿠나. 모심글 때쯤이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이 논 저 논에서 지 짝궁 찾니라고 궁짝 맞춰 울어대는 깨구락지 합창이 영판 그립기도 허구나. ※ 깨구락지 ; 개구리, 구뎅이 ; 구덩이, 먼첨 ; 먼저, 눈 코 뜰 새 ; 눈 코 뜰 사이, 매우 짧은 순간, 짐생 ; 짐승, 눈깔맹이로 ; 눈 알 모양으로, 변허고 ; 변하고, 신이헌 ; 신기하고 이상한, 안응께 ; 않으니까, 둠벙 ; 연못, 느덜도 ; 너희들도, 뽄따라서 ; 본받아서, 근디 ; 그런데, 모심글 ; 모 심을, 궁짝 ; 박자, //////////////////////////////////////////////////////////////// - 시 : 돌샘/이길옥 - 우리끼리 잘 통하는 말 그래서 스스럼없이 쓰는 말 시도 때도 없이 끼워 넣고 써야 감칠맛 나는 말 사전에 없는 말 우리 동네에 흔한 말 아무도 꼬투리 잡지 않는 말 양념처럼 넣어야 제 맛을 내는 말 반가운 이웃이나 오랜 벗을 만났을 때 툭 튀어나오는 말 느티나무 그늘에 멍석 깔고 둘러앉아 찌그러진 양은그릇에 넘치는 막걸리에 섞어 마시는 말 오래 묵은 된장 맛이 홀딱 반한 말 기뻐 미치겠을 때 화가 독이 올라 물불에도 겁 안 날 때 사심 없이 꺼내 쓰는 말 쓰지 않으면 혀에 가시 돋는 말 툭 터놓고 쏟아내야 가슴 후련해지는 말 사전에 없어서 사투리라 하는 흙냄새 쇠똥냄새 사람냄새 범벅된 말 죽을 때까지 쓰다 갈 말   //     사투리는 지역 문화인가? 정요나 TV에 나오는 아나운서들이 “안녕하셔유, 아홉시 뉴스 시작하것슈.” 라고 말하는 것을 본적이 있으십니까? 아마 모두가 고개를 저을 것입니다. 미디어 매체에서는 일명 ‘표준어’를 사용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거의 표준어를 듣기 때문에 정겨운 사투리를 듣는 것은 참 오래 된 일입니다. 심지어 지방에서 상경한 학생에게서도 개성 있는 사투리로 하는 말은 잘 듣지 못합니다. 표준어로 통일된 말들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봄 햇살이 비추는 버스에 앉아서도 표정을 굳힌 체 말없이 스마트폰 속 세상만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시골 지역이었다면 맛 나는 사투리로 정겹게 인사하며 근황을 얘기 했을 텐데, 표준어 속에 사는 우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위태로운 정적을 유지합니다. 이런 차가운 사회에서 우울증이 만연하고 대화와 인간관계, 그리고 소통이 서툰 사람들이 점차적으로 늘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소통과 대화를 모두 스스로 단절하며 살아가는 사회에서 소통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투리를 긍정적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사투리에는 ‘시골의 감성과 지역의 개성’이 담겨있고 우리 사회인들은 이 사투리 의 장점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요즈음의 사회는 개성을 존중하자는 사회이니 사투리를 가진 지역 사람들은 지역의 개성을 당당히 하나의 문화로써 여겨도 무관할 것입니다. 다양한 모습이 당연했던 날들이 사라져가고 성형으로 비슷한 얼굴들까지 생겨나 ‘강남녀’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나고 있는 우리의 사회에서 개성 있는 사투리와 있는 그대로의 본인인체로 생활하는 투박한 사람은 매우 당당해 보일 것입니다. 그런 이를 보고 진정 개성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죠. 또 그런 사람은 정겨운 사람일 것입니다. 사투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연의 모습 그대로의 사투리는 고쳐야 할 언어가 아닌 한 지역의 개성을 나타내주고 지역의 감성을 느끼게 해주는 하나의 어여쁜 문화임이 틀림없습니다. 강릉은 사투리 보존회를 만들어 유명한 시들을 사투리로 재구성해 전시한 바 있습니다. 사투리를 진정 지역의 문화로 만든 것입니다. 이처럼 사투리를 쓰는 지역도 모두가 사투리가 지역 고유의 문화임을 인식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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