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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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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    재밋는 건배사 모음 댓글:  조회:8360  추천:0  2015-11-22
[ 2015년 11월 26일 08시 43분 ]     독일 克里斯蒂安·彼得森-克劳森(Christian Petersen-Clausen)사진작가 사진.       최근 유행하고 있는 특이하고 재미있는 건배사 모음     1. 직원회식 ♥ 남행열차  -남 다른 행동과 열정으로 차 세대 리더가 되자. ♥ 어머나 -어디든 머문곳에는 나 만의 발자취를 남기자.  ♥ 소녀시대  -소중한 여러분 시방 잔대 봅시다.  ♥ 앗싸! 가오리 -가슴속에 오래 기억되는 리더가 되자.  ♥ 개나리  -계급장 떼고 나이는 잊고 릴렉스(Relax or Refresh)하자.  ♥ 주전자  -주인답게 살고, 전문성을 갖추고 살고, 자신감을 가지고 살자.  ♥ 통통통  - 의사소통, 운수대통, 만사형통 ♥ 위하여  -위기를 기회로! 하면된다. 여러분 힘내십시오!  ♥ 마스터  -마음껏 스스럼없이 터놓고 마시자.  ♥ 마무리  -마음먹은 대로 무슨 일이든 이루자.  ♥ 오바마  -오늘은 바래다 줄께 마시자. -오직 바라는 대로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길  ♥ 당신멋져  -당당하고, 신나고 멋지게 살되 가끔은 져주자.  ♥ 자전거 -자신감과 전문성을 갖고 거리로 나서자!(발로 뛰는 마케팅을 위해)  ♥ 오늘도 새신발 -새롭게 신바람나게 발로 뛰자(업적, 마케팅을 위해)  ♥ 이제는 때가 왔다 술로뛰는 마케팅 - 마케팅의 필요성을 술로 재미있게 표현  ♥ 사화/만사성 - 회사가 잘 되어야 모든 일이 잘 풀린다.  ♥ 우리는/하나다. ♥ 함께 가면 멀리 간다.  ♥ 술잔은/비우고, 마음은/채우고, 전통은/세우자.  ♥ 스트레스여/가라, (행복)이여/오라.  ♥ 선배는/끌어주고, 후배는/밀어주고, 스트레스는/날리고 2. 송별모임  ♥ 고사리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이해합니다.  ♥ 껄껄껄 - 좀 더 사랑할껄, 좀 더 즐길껄, 좀 더 베풀껄  ♥ 변사또 - 변함없는 사랑으로 또 만납시다.  ♥ 무화과 - 무척이나 화려했던 과거를 위하여 3. 마케팅 ♥ 우리는 개고생 언제나 개고생 -개인고객을 생명처럼 항상 소중히 여기고 항상 고객을 생각하겠습니다. ♥ 고진감래 -고객을 진심으로 대하면 감동으로 돌아온다.  ♥ 최고다 - 최상의 서비스와 고객감동으로 정성을 다하여 모시겠습니다. ♥ 따스함 -따뜻한 가슴과 스마일 표정으로 고객과 함께 하겠습니다.  ♥ 고객의 마음을/훔치자(3창) 4.성공·행복 기원 ♥ 나가자 -나라를 위하여, 가정을 위하여, 자신을 위하여!  ♥ 단무지 - 단순하고 무식해도 무지 행복하게 살자.  ♥ 성행위 -성공과 행복을 위하여!  ♥ 소나무 - 소중한 나눔의 무한 행복을 위하여!  ♥ 대나무 ♥ 진달래 - 진하고 달콤한 내일을 위하여!  ♥ 우행시 -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위하여! ♥ 오행시 -오늘도 행복한 시 간되세요.  ♥ 일취월장/승승장구 ♥ 언제나 통통통 -항상 의사소통, 운수대통, 만사형통을 기원 5. 사랑·우정 기원 ♥ 사우나 -사랑과 우정을 나누자 ♥ 오징어 -오래도록 징그럽게 어울리자.  ♥ 앗싸 -아낌없이 사랑하자.('아낌없이 사랑하자'라고 선창하면 모두 잔을 들고 앗싸~’ 하고 외침) ♥ 아리랑 -아름다운 이순간 서로 사랑합시다. ♥ 사이다 -사랑을 이술잔에 담아 다함께 원샷! ♥ 가감승제 건배사 -기쁨은 더하고, 슬픔은 빼고, 희망은 곱하고, 사랑은 나누자!  ♥ 이상은/높게 - (잔을 높게 들면서) 우정(사랑은/깊게)(잔을 내리면서) 잔은 평등하게(잔을 모으면서) 6.건강 기원 ♥ 건~배 -건강은 배려하는 마음에서 온다. ♥ 나이야/가라 -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나이야 가라!  ♥ 재건축 -재미나고 건>강하게 축복 받으며 삽시다.  ♥ 9988 / 234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3일 앓고 떠나자. ♥ 9988 / 231 99세까지 팔팔 하게 살다가 2,3일 앓고 벌떡 일어나자. ♥ 원더걸스 -원하는 만큼 더도 말고 걸러서 스 스로 마시자.  ♥ 일십백천만 -하루에 1번이상 좋은 일을 하고, 10번이상 큰소리로 웃고, 100자이상을 쓰고, 1000자이상을 읽으며, 10000보이상 걷자. 7.일상 생활 ♥ 남존여비/여필종부 -남자의 존재의미는 여자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며 여자는 필히 종부세를 내는 남자와 결혼해라.  ♥ 우아미 -우아하고 아름다운 미래를 위하여 ♥ 우거지 -우아하고 거룩하고 지성있게  ♥ 여보 / 당신 -여유롭게 살면서, 보람차고, 당당하고, 신나게 놀자!  ♥ 해당화 -해가 갈수록 당당하고, 화려하게 8.골프·등산모임 ♥ 드라이버는/멀리 퍼터는/정확하게, 아이언은/부드럽게  ♥ 올보기 -올해에도 보람있고 기분좋게 지냅시다.  ♥ 올파 -올해에도 파이팅 합시다!  ♥ 올파파 -올해에도 파이팅하고 파이팅합시다.  ♥ 올버디 -올해에는 마음속에 욕심을 버리고 비워서 부디~이기 오래 건강하게 삽시다. ♥ 일파 만파 -한사람이 파이팅! 하면 모든 사람이 파이팅! 한다.  ♥ O~B -Oh! Beautiful ♥ 원샷 -원하는 방향과 거리만큼 샷은 정확하게 산은/정상까지(잔을 높게 들면서) 하산은 안전하게(잔을 내리면서) 등산은/수준대로(잔을 모으면서)    
276    인민페 구권에 도입된 인물도안 보기 댓글:  조회:5084  추천:0  2015-11-13
[ 2015년 11월 13일 08시 58분 ]   [ 2015년 11월 13일 08시 58분 ]     [ 2015년 11월 13일 08시 58분 ]     [ 2015년 11월 13일 08시 58분 ]   [ 2015년 11월 13일 08시 58분 ]     [ 2015년 11월 13일 08시 58분 ]         구권(老版) 인민페에 도입된 인물도안 중 국가령도자들외에 허다한 보통사람,특히는 적지않은 소수민족의 남녀들이 그려져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그들은 모두 누구일가? 이들의 초상은 어떻게 인민페의 인물도안으로 선택됐을가? 인민페의 젊은 남녀인물들을 찾아가보도록 하자. /CCTV뉴스
275    문화 뉴스 됏토리 그리고... 댓글:  조회:7288  추천:0  2015-11-11
버려진 휴대전화 2만개로 만든 자동차 [ 2015년 11월 12일 08시 33분 ]     대만 타이페이에서 예술인 '린 시 파오'가 휴대 전화로 제작한 모형 자동차 한 대가 전시. 이번 작품 제작에는 2만여 대의 휴대전화가 사용, 린 시 파오는 전자제품에 대한 재활용을 촉진시키기 위해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밝혔다.(EPA=연합) ============================================================ 세계적으로 국민 평균독서량이 가장 많은 두개 나라는 이스라엘과 웽그리아이다.  이스라엘사람들은 매년 평균 64권의 책을 읽는데 전국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유태인의 년평균독서량은 무려 68권에 달한다고 한다. 유태인들이 아이가 태여나면 성경에 꿀을 묻혀 아이더러 핥게 하는 습속이 있는데 이는 아이들에게 책은 달다는 첫인상을 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아이들이 조금 셈이 든후 거의 모든 어머니들은 아이에게 만약 집에 불이 났다면 맨먼저 어느 물건을 들고 나가겠냐는 질문을 한다. 아이들이 돈 혹은 보석을 선택하면 어머니들은 이렇게 엄숙하게 교육한다.  “이런것들은 모두 중요한게 아니야. 너는 우선 책을 선택해야 돼. 책에는 무한한 지혜가 숨겨져있으며 이런 지혜는 돈이나 보석보다 더 중요해. 왜냐하면 지혜는 누구도 빼앗아갈수 없기때문이야!” 유태인은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문맹이 없는 민족이며 지어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들마저도 책을 들고 다닌다고 한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도서가격은 결코 만만치 않다. 일반적인 도서는 20딸라 이상, 보통 신문도 6딸라로 우리 나라의 도서, 신문 가격보다 몇배씩 비싼셈이지만 그래도 이스라엘사람들은 책과 신문잡지를 사는데 돈을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인구가 500만밖에 안되는 이 나라는 도서열람증을 소지하고있는 사람만 해도 100만명을 초과하며 현재 세계적으로 인당도서소 량이 가장 큰 국가로 되고있다.  “안식일”, 다시 말해 일요일은 이스라엘 유태인들이 가장 중시하는 종교활동일이다. 이날이면 거의 모든 유태인들은 상업, 오락 활동을 중지하는바 상점, 식당을 비롯한 모든 오락장소들이 모두 영업을 정지하며 지어 공공뻐스나 항공운수마저 정지한다. 하지만 이날에도 전국의 모든 서점은 여전히 영업을 허락하는바 그로 인해 안식일에 서점을 찾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고 한다.  독서를 즐기는 다른 한 나라인 웽그리아는 국토면적이나 인구가 모두 중국의 100분의 1도 되지 않지만 도서관이 2만여개에 달해 평균 500명이 도서관 하나를 가지고있는셈, 반면에 우리 나라는 46만명당 하나의 도서관을 소유하고있다. 또 웽그리아사람들은 매년 평균 20권의 책을 구매하지만 중국인은 1990년대의 통계에 의하면 매년 평균 도서구입수가 고작 5권밖에 안되는데다 지속적인 하락세를 보이고있다. 독서와 학습을 숭상하는 나라는 그 종합국력이 신속한 제고를 가져온다. 이스라엘은 인구가 적지만 인재는 아주 많은바 노벨상수상자만도 8명이나 된다. 이스라엘국이 위치한 지역은 대부분이 사막이다. 하여 그와 린접한 팔레스티나 등 아랍국가들은 늘 량식이 부족하여 석유로 식품을 바꾸어들이고있지만 이스라엘은 짧디짧은 수십년의 시간을 들여 국토를 오아시스로 개변하여 량곡생산량을 부단히 높였는데 이제는 식량을 자급자족할수 있을뿐만아니라 부단히 기타 나라에 수출하고있다. 자기들의 총명과 지혜로 이스라엘사람들은 세계를 놀래우는 하나 또 하나의 물질, 정신 재부들을 창조해내고있다.  웽그리아의 노벨상 수상자는 더욱 많아 무려 14명에 달하는데 인구비례로 계산하면 명실공한 “노벨상대국”인셈이다. 웽그리아사람들의 발명창조도 아주 많은바 성냥이나 원주필 같은 작은 물품도 있고 전화교환기, 변압기, 텔레비죤현상관 등 첨단제품도 있다. 통계에 의하면 1980년대는 웽그리아사람들의 발명의 황금시대로 그때 매년 평균 400여건에 달하는 발명전매특허를 취득하였다고 한다. 작고 약한 나라지만 독서를 통해 얻은 지혜와 힘으로 남들이 우러러보는 “강국”으로 변하였던것이다.  인간사상의 발전력사는 결국 그의 열독력사라는 말이 있다. 나아가 한개 민족의 정신경지 역시 그 민족의 열독수준에 의해 결정되며 한개 나라에서 어떤 사람들이 책을 보고 또 어떤 책을 보는가는 그 나라의 미래를 결정한다. “독서는 인생을 개변하고 지식은 운명을 바꾼다.” 또한 독서는 개인에게 영향을 줄뿐만아니라 그 민족, 그 사회에도 큰 작용을 일으킨다. 하지만 요즘은 글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반면에 독서를 하는 사람은 갈수록 적어지고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 소중한 시간을 술자리나 마작상에서 혹은 노래하고 춤추며 노는데 허비할지언정 열심히 좋은 책 몇권을 읽으려고는 하지 않는다. 이는 현시대의 가장 비참한 일이 아닐수 없다. 독서를 즐기지 않는 민족은 무서운 민족이며 희망이 없는 민족이라는것을 우리는 시시각각 명기해야 할것이다. ================================================   10월 24일 오전, 대나무 우거진 아름다운 항주 서호의 모가부에서 리광인 작 《시인 윤동주 인생려정 연구》(민족출판사 출판) 출간기념식과 세미나가 펼쳐졌다. 이는 연변작가협회 남방창작위원회와 절강한글협회에서 우리 시인 윤동주 타계 70주기를 기념하면서 마련한것이다. 저자 리광인은 절강월수외국어대 한국어과 교수 겸 남방창작위원회 주임으로서 지금까지 《겨레 항일지사들》(전 4권), 《양림평전》, 《서일평전》 등 20여부의 책을 출판했으며 그중 올해 2015년에만도 《광복전 겨레작가론》, 《항일련군의 조선족 녀전사들》 등 6부의 저서를 출판하였다. 《시인 윤동주 인생려정 연구》는 올해 6부 가운데의 한 저서로서 윤동주 발자취 현지답사 글과 관련 수필 10여편, 윤동주 연구론문 8편, 지난 30년간 중국조선족사회 윤동주 기념행사와 추모활동, 연구현황 등이 고스란히 담겨져있다. 이날의 출간기념식과 세미나에는 상해, 남경, 소주, 소흥, 항주 등지에서 온 20여명이 참가했다. 이들은 절강공상대학, 절강공업대학, 절강월수외국어대학, 남경사범대학, 상해외국어대학 그리고 여러 려행사와 기업들에서 활동하는 연변작가협회 회원 그리고 남방아리랑 구성원 등 인사들이였다. 제1부 출간기념식에서 절강월수외국어대 류은종교수와 방룡남교수, 절강공업대학 권승문박사, 항주려행사 남연대표 등이 축사를 하고 남경사범대학 유성운박사가 서평을 했다. 제2부 세미나에서는 상해외국어대학 김영규박사가 시인 윤동주소개를 하고 절강월수외국어대 류은종교수와 리광인교수가 윤동주의 대표적인 시《서시》와 인생려정을 전문 분석하면서 윤동주는 우리 겨레의 시인일뿐만아니라 항일운동가라며 새로운 연구시각을 보여주었다. 《시인 윤동주 인생려정 연구》 출간기념식과 세미나에 참가한 여러 교수와 박사, 회원들은 《시인 윤동주 인생려정 연구》는 중국조선족사회와 문단에서 처음으로 되는 우리 시인 윤동주 인생려정 연구문집이라고 지적하면서 연구문집의 허다한 연구론문과 남들이 잘 모르는 생생한 연구자료, 윤동주추적 현지답사글들은 윤동주연구의 참신한 성과라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동시에 참석자들은 윤동주 사망 70주기를 기념하는 해에 연변밖에서, 더구나 연변과 6000리 떨어져있는 남방 항주 서호에서 우리 시인 윤동주 기념활동을 조직한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며 전체가 윤동주의《서시》를 랑송하는것으로 윤동주에 대한 깊은 사랑과 관심을 표달했다.  길림신문 최화기자 ============================================================ 올해, 중국인민항일전쟁승리 및 세계반파쑈전쟁승리 70돐을 맞으면서 조선말방송매체, 각종 문예공연에서 제일 많이 불린 노래중의 하나가 “그대들은 생각해보았는가”(리선근 작사, 방룡철 작곡)이다고 해도 대과는 없을것이다. “그대들은 생각해보았는가”는 1980년에 전파를 타서부터 장장 35년간 대중들로부터 꾸준히 사랑을 받을수 있었던것은 가요가 내재한 심미적가치, 교양적가치가 세월의 난파를 이겨냈기때문일것이다. 1979년 겨울, 주에서는 김태갑, 박창묵 등 부분적 작가, 시인들로 항일렬사사적취재단을 조직하였다. 당시 연변인민방송국 문예부에서 문학담당으로 있던 리선근선생도 이 취재단에 합류, 1941년 2월 왜놈들에게 체포된후 극악무도한 혹형을 받다가 장렬하게 희생된 조선족녀항일투사 최희숙의 사적을 취재하게 되였다. 리선근선생은 최희숙이 당년에 남겼던 발자취를 따라 답사하는 한편 려영준 등 항일로전사들과 최희숙의 원 남편 박원춘을 찾아 최희숙의 정황을 까근하게 료해했다. 리선근선생은 몇달간의 조사와 취재를 거쳐 최희숙렬사의 사적을 비교적 완정하게 정리하였다. “저는 최희숙렬사를 모티브로 북받치는 감정을 필 끝에 찍어 회상기방송극 ‘승리가 보인다’를 집필하고 머리시 ‘그대들은 생각해보았는가’를 창작하였습니다. 이 머리시를 강훈연출의 제의로 주제가로 만들기로 하고 방룡철작곡가에게 작곡을 부탁하였습니다. 노래가 창작된후 연변가무단의 무명가수였던 김은희에게 연창을 맡겼는데 발표되자마자 사회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가사 앞부분에서 등장하는 “텔레비죤”은 창작 당시 시대적상황을 암시한다. 1980년대초, 우리 나라는 시장경제를 실시하면서 전국적으로 리기주의,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하고 많은 사회적문제를 야기하였다. 주지하다싶이 연변은 렬사가 많고 기념비가 많기로 전국적으로도 유명한 고장이다. 하지만 당시 연변의 대부분 혁명렬사기념비는 다년간 보수되지 않아 심각하게 파손되고 주변의 위생환경도 말이 아니였다. 바로 이런 시대적상황에서 작자는 최희숙렬사의 사적을 접하게 되고 현실상황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나머지 내적인 감수에 충실한 “그대들은 생각해보았는가”라는 노래를 창작하게 된것이다. “봄빛도 정다운 강반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련인들이여/ 텔레비죤앞에 모여앉아/ 이 밤을 즐기는 사람들이여/ 그대들은 생각해보았는가/ 이 강산을 찾아준 은인들을/ 아직도 어느 한 심산속에/ 이름 없이 누워있는 렬사들을(1절)” 이렇듯 가사는 행복한 생활에 대한 가송과 생명을 바친 렬사들에 대한 추모의 감정으로 아름다운 선률을 직조하고 불후의 “기념비” 비문을 조탁하였다. 가사는 무거운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강요식이 아닌 대화체형식으로 홀가분하게 풀어나간다. 가사에서 화자와 청자의 거리는 그다지 가까운 거리는 아니다. 하지만 화자는 입안말을 하듯 조용조용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런 상황에서 청자는 화자의 말에 귀를 기울일수밖에 없다. 다음 가사는 들머리에서 “봄빛”, “강반”, “련인”, “텔레비죤” 등 이미지로 평화적이면서도 풍요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로써 청자의 궁금증을 증폭시키고 뒤부분의 “이름 없이 누워있는 렬사”들과 대조시킴으로써 축적하고있던, 화자가 전달하려는 의미의 “저수지”를 한꺼번에 터치워 청자에게 충격을 주고 오늘의 행복의 의미를 극대화시킨다. 가사에서 핵심키워드는 “렬사”이다. 작자는 최희숙이라는 전형인물을 일반화하여 “렬사”로 승화시키고 외포를 확장시켰다. 렬사들이 무주고혼으로 “어느 한 심산속에 이름 없이 누워”있는것은 그들이 자기가 선택한 “자유, 평등”이라는 생명보다 귀중한 불멸의 가치를 위해 봉헌하고 자신을 서슴없이 불살랐기때문이다. 렬사들이 추구했던 가치와 현대사회에서 표방하는 “부강, 민주, 문명, 조화, 자유, 평등…” 사회주의핵심가치관과 일맥상통한것으로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는 불멸한다. 력사를 잊는것은 배반을 의미하며 력사를 잊는 민족은 다시금 력사의 전철을 밟게 된다. 가요 “그대들은 생각해보았는가”는 중국혁명에 이바지한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의 축소판으로 대대손손으로 중국조선족의 령혼에 불멸의 가치를 심어줄것이다. 연변일보 김인덕 기자 =============================================================         (흑룡강신문=하얼빈)윤운걸 길림성 특파원= 중국에서 사상 처음으로 조선글로 된 조선족 스포츠 실화 “챔피언 1965”가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간되였는데 이 장편실화문학에는 1965년에 길림성축구팀이 전국축구 갑급팀련맹경기에서 우승을 한 실록을 담아 세인들이 주목할 것이다.   “이 실화를 세상에 내놓기 위해 음양으로 10여년간 엿들고 또 취재하면서 자료를 정리했다”고 신철국 필자는 밝혔다.   이 책의 머리말에 임종현 연변조선족자치주체육국 국장은 “1965년에 전국축구 갑급팀련맹경기에서 우승을 따냈다.전국이 경악했다”라고 밝히고 나서 “1960년대 중반 길림성축구팀의 수준이 당시 아시아의 강팀이였던 조선국가팀에 필적해 있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밝혔다.그러면서 그는 “그때 길림성축구팀이 구경 무슨 ‘보약’을,어떤 ‘비방’을 썼기에 그렇듯 뭇 강호들을 제치고 전국 우승이라는 신화를 이룩할 수가 있었던 것일까?다년간 많은 축구인들과 팬들의 머리속에 의문으로 남아있던 그 답안을 오늘 다행히도 그리고 기쁘게도 신철국 선생이 쓴 장편스포츠실화 ‘챈피언 1965’에서 찾을 수 있었다”고 했다.   한영남 씨가 이 책의 부록에 “ ‘챔피언의 꿈’을 채집하는 남자”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겼는데 그는 “어쩌면 력사의 뒤안길로 영영 사라질뻔했던 조선족축구사의 한 장절을 복구시켜 세상에 내놓았다는데서,그런 인물들과 사건들이 결코 사료적인 수치나 딱딱하고 메마른 언어들이 아닌,피와 살이 살아 숨 쉬는 산 인간들과 생생한 현장으로 부활시켰다는데서 이 장편실화는 그 가치가 우선 돋보인다”라고 한단락을 피력했다.   일찌기 중국국가 하룡원수는 “국가팀은 길림성축구팀의 풍격을 따라배워야 한다”라고 지적한바 있다.   총 246쪽으로 된 이 장편스포츠실화는 제1장 시련의 계단,제2장 재기의 언덕,제3장 승자는 말한다,부록 등 부제로 대량의 력사적인 사진들로 엮었다.   저자는 이 실화에 당시 길림성축구팀의 지도들이였던 박만복,박상복,리광수를 비롯해 지청룡,지운봉,정지승,허경수,동경춘,박장수,류진석,정동권,김석주,정종섭 등 선수들을 대거 등장시켜 길림성축구팀의 불멸의 우승신화를 때낸 과정을 생동하게 피력했다.   현재 “중국조선족백년실록”집필위원회 위원(스포츠 부분)으로 활략하고 있는 신철국 씨는 “현대가정신문”, “스포츠신문”, “연변TV”, “흑룡강신문”, “길림신문”등에서 편집,기자,PD로 사업한바 있다.   ======================================================================================= 채선애기자가 집필한 조선족문화예술인 탐방기 (도편제작 김성걸기자) 정년퇴직후에도 기자직업에 대한 뜨거운 열망과 끈질긴 애착으로 손에서 붓을 놓지않던 채선애기자가 16번째 기자절에 즈음해 《조선족문화예술인 탐방기》(상해세기출판집단 출판)를 단행본으로 묶어냈다. 1980년 4월에 연변일보사에 입사해서 신문사업에 몸을 담은 채선애기자는 2010년 연변라지오텔레비죤신문사에서 퇴직한후에도 《연변로인의 벗》 신문에 재취직하면서 장장 36년 세월을 신문이라는 한우물만 파온 녀기자이다. 다년간 신문매체에 종사하면서 교정, 번역, 편집, 취재 등 여러가지 사업에 종사했지만 가장 보람차고 자랑스러운것은 2008년도부터 거의 100명에 가까운 조선족문화예술인들을 취재해서 그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실화를 《연변라지오텔레비죤신문》에 발표한했던 일이라고 채선애기자는 말했다. 이번에 출판된《조선족문화예술인 탐방기》에는 채선애기자가 취재하고 품들여 집필한 59명의 조선족문화예술인들이 수록되였다. 이들 문화예술인들은 우리 민족의 문화예술사업을 위해 부동한 기여를 한 인물들로서 탐방기는 중국조선족문화인물 사료적 가치도 크다. 채선애씨는 지나간 언론인생활을 돌이켜보면 수십년을 자기가 좋아하고 또 하고싶은 일을 실컷하면서 후회없이 살아왔으니 참 복이 많은 녀자인것같다고 말했다. 책의 서평을 달아준 원 연변주문화국 김희관국장은 《문화예술인들의 탐방기를 읽으면서 채선애기자가 문화예술인들의 인생 모멘트를 정확히 포착함으로써 그들이 어떻게 훌륭한 문화예술인이 되였는가 하는 답을 확실히 줄수있었다는것을 확인했다》고 평가했다. 특히 채기자의《조선족문화예술인 탐방기》출판은 조선족문화예술인들에게 좋은 선물일뿐만아니라 뉴스마니아들에게 좋은 본보기라고 지적, 앞으로 광범한 기자, 편집들이 인간중심의 취재활동을 심도있게 벌리여 좋은 뉴스를 발표함과 아울러 한개 분야를 아우르는 다큐멘터리를 집필하거나 더 나아가서는 다큐소설 등 작품들도 창작해내여 우리의 민족사를 더욱 풍성하게 하고 우리의 문단을 더욱 황홀하게 장식하는데 이바지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길림신문 ================================== 아동문학가 채택룡선생을 다시 읽는 세미나 연길서 열려 [ 2015년 12월 18일 02시 41분 ]     '다시 읽는 우리 문학' 그 6번째 이야기ㅡ"고 채택룡선생의 아동문학 세계"를 연구하는 세미나가 2015년 12월 18일 오전 9시부터 연변 주 도서관 회의실에서 진행되였다. 해란강닷컴에서 주최하고 연변대학 조선어학부에서 협조, 연길시 고려원, 연길시 한규닷컴유한회사에서 협찬한 계렬세미나 "다시 읽는 우리 문학"은 여섯번째 주인공으로 아동문학가 채택룡 선생을 모셨다.  채택룡선생은 1913년 2월 6일 조선 함경북도 회령군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출생하여 어린시절을 보냈고 여덟살에 보통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였다. 학생시절 동요 "제비"를 창작하였는데 이 동요는 "개미"와 함께 곡이 붙어 건국후 중국조선족어린이들에게 널리 불렸다. 1928년에 "별나라" 잡지에 동요 "어린 동생","개미"등을 발표함으로써 16세 어린 나이에 문단에 데뷔한 작가이다. 채택룡선생은 1929년에 회령공립공업학교를 졸업한후 송평사립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동요, 동시 창작에 전념했다. 1936년에는 박영하, 한죽송 등과 합작하여 "3인 동요집" 을 묶어냈다. 1938년 채택룡은 중국에 들어와 연길현 명륜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문학창작활동을 하였는데 이 시기에 "아가아가", "선물', "나팔꽃", "아우에게", "사랑하는 누나여!" 등 여러편의 동요, 동시와 동화 "딱따구리일가"를 발표하였다. 필명으로 몽소, 금성, 정해, 광파, 구명, 일심, 춘심, 서영, 채홍, 아기별, 새벽놀 등이 있다. 채택룡선생은 1945년 10월부터 1950년까지 "한민일보", "길림일보", "인민일보", "동북조선인민보", "연변일보" 등에서 편집, 기자로 활약하였고 1951년에는 "연변문예"가 창간되자 초창기 편집으로 사업하였다. 이 시기 동북작가협회에 가입하였고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창작위원회 부주임, "아리랑" 잡지 편집 등 직무를 력임하고 연변조선족자치주 제 1,2,3 기 인민대표대회 대표로 당선되였다, 선생은 1998년 10월 26일, 연길에서 별세하였다.  세미나에서 김은자 박사생은  "상호텍스트성으로 본 '채택룡문집'의 '고향' 풍경"이란 제목으로, 림철은 "채택룡의 프로아동문학 수용상황 연구"란 제목으로, 전성호는 "채택룡선생과 그의 아동문학"이란 제목으로 론문발표를 하였다. 이외 자유발언에서 아동문학 자료수집에 적극 동참할것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였다.  제4,5대에서 아동문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지 못한 현상황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아동문학에 더 많은 작가들이 적극 동참할것을 간절히 바란다는 최홍일 작가의 자유발언이 참가자들에게 깊은 사색을 불러일으켰다. 조글로미디어 리현수기자
274    옛 시인의 노래 댓글:  조회:5801  추천:0  2015-11-06
[ 2015년 11월 07일 10시 15분 ]     =============================================================        
273    중로변경선에 새로운 경계비, 지명비 생겨... 댓글:  조회:5608  추천:0  2015-11-06
 사진: 연변TV.     2016년 11월 4일, 중-로변경 지명비 설립의식이 훈춘시 춘화진 중로변경선에서 거행, 도합 5곳에 새로운 경계비와 지명비가 정식 세워졌다. 훈춘시는 중로조 3개국 접경지대에 위치해있으며 중국이 동북아 각국과의 개발합작"창구"이기도 하다. 훈춘시 정부측의 소개에 따르면 지난 1993년에 로씨야에서는 훈춘시 춘화진 동북부에 위치한 후부투강(瑚布图河) 연안의 4.7평방킬로메터 되는 토지를 중국측에 반환하였었다. 2014년, 중국 국무원의 비준을 거쳐 반환된 토지 5곳에 "계패령(界牌岭), 탁륜강(托伦岗), 길룡구(吉龙沟), 홍칠장(红漆桩), 남향평(蓝香坪)"이란 지명이 확정되였다. 료해한데 따르면 지명비가 정식 락성됨에 따라 훈춘경내에는 유일하게 북쪽으로 흐르는 후부투강이 새로 생겨나게 되였다. 이로써 후부투강 맞은편은 로씨야와 접경하게 되였으며 극동지역의 중국상품 최대 집산도시인 우쑤리스크시와 불과 60킬로메터 상거하게 되였다. 연변일보넷/중국길림넷  
272    재미있는 순 우리말 사전 댓글:  조회:7272  추천:0  2015-10-21
[ 2015년 10월 28일 08시 47분 ]   [ 2015년 10월 28일 08시 47분 ]   @@ 산동 연대(烟台) 바다가 고속도로변에서... ================================== ●●●● 재미있고 유익한 순 우리말 사전 ●●●●  ㄱ  ●가납사니 : ①쓸데없는 말을 잘하는  사람. ②말다툼을 잘하는 사람.  ●가년스럽다 : 몹시 궁상스러워 보이  다. cf)가린스럽다 : 몹시 인색하다.  ●가늠 : ①목표나 기준에 맞고 안 맞  음을 헤아리는 기준. ②일이 되어 가  는 형편.  ●가루다 : 자리를 나란히 함께 하다.  맞서 견주다.  ●가래다 : 맞서서 옳고 그름을 따지다.  ●가래톳 : 허벅다리의 임파선이 부어  아프게 된 멍울.  ●가라사니 : 사물을 판단할 수 있는  지각이나 실마리.  ●가말다 : 일을 잘 헤아려 처리하다.  ●가멸다 : 재산이 많고 살림이 넉넉하다.  ●가무리다 : 몰래 훔쳐서 혼자 차지하다.  ●가분하다·가붓하다 : 들기에 알맞다.  (센)가뿐하다.  ●가살 : 간사하고 얄미운 태도.  ●가시버시 : '부부(夫婦)'를 속되게 이  르는말  ●가위춤 : 빈 가위를 폈다 닫쳤다 함.  ●가장이 : 나뭇가지의 몸.  ●가재기 : 튼튼하지 못하게 만든 물건.  ●가직하다 : 거리가 조금 가깝다.  ●가축 : 알뜰히 매만져서 잘 간직하거  나 거둠.  ●가탈 : ①억지 트집을 잡아 까다롭게  구는 일. ②일이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일.  ●각다분하다 : 일을 해 나가기가 몹시  힘들고 고되다.  ●간동하다 : 잘 정돈되어 단출하다.  ●간정되다 : 앓던 병이나 소란하던 일  이 가라앉다.  ●갈개꾼 : 남의 일을 훼방하는 사람.  ●갈래다 : ①정신 또는 길이 섞갈려  종잡을 수가 없다. ②짐승이 갈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다.  ●갈마보다 : 이것저것을 번갈아 보다.  cf)갈마들다 : 번갈아 들다  ●갈무리 : ①물건을 잘 정돈하여 간수  함. ②일을 끝맺음  ●감잡히다 : 남과 시비(是非)가 붙었을  때, 조리가 닿지 않아 약점을 잡히  다.  ●강짜를 부리다 : 샘이 나서 심술을  부리다.  ●강파르다 : ①몸이 야위고 파리하다.  ②성질이 깔깔하고 괴팍하다.  ●갖바치 : 가죽신 만드는 일을 직업으  로 삼는 사람.  ●개골창 : 수챗물이 흐르는 작은 도랑.  ●개구멍받이 : 남이 밖에 버리고 간  것을 거두어 기른 아이.=업둥이.  ●개맹이 : 똘똘한 기운이나 정신.  ●개사망 : 남이 뜻밖에 이득을 보거나  재수가 생겼을 때 욕하여 이르는 말.  ●개어귀 : 강물이나 냇물이 바다로 들  어가는 어귀.  ●개차반 : 똥이란 뜻으로, 행세를 더럽  게 하는 사람을 욕하는 말.  ●개평 : 남의 몫에서 조금씩 얻어 가  지는 공것.  ●객쩍다 : 언행이 쓸데없이 실없고 싱  겁다.  ●거니채다 : 기미를 알아채다.  ●거레 : 괜히 어정거리면서 느리게 움  직이는 일.  ●거우다 : 건드리어 성나게 하다.  ●건목 : 정성들여 다듬지 않고 거칠게  대강 만드는 일, 또는 그렇게 만든  물건  ●걸싸다 : 일하는 동작이 매우 날쌔다.  ●걸쩍거리다 : 성질이 쾌활하여 무슨  일에나 시원스럽게 덤벼들다.  ●걸태질 : 탐욕스럽게 마구 제물을 긁  어모으는 것.  ●게정 : 불평을 품고 떠드는 말과 행동.  ●게염 : 부러워하고 탐내는 욕심.  ●겨끔내기 : 서로 번갈아 하기.  ●겨리 : 소 두 마리가 끄는 큰 쟁기.  cf)호리한 소 한 마리가 끄는 작은 쟁기.  ●결곡하다 : 얼굴의 생김새나 마음씨  가 깨끗하고 야무져서 빈틈이 없다.  ●겯고틀다 : (시비나 승부를 다툴 때지  지 않으려고)서로 버티어 겨루고 뒤  틀다.  ●결딴 : 아주 망그러져 도무지 손을  쓸수 업게 된 상태.  ●결두리 : 농사꾼이 힘드는 일을 할  때 끼니밖에 간식으로 먹는 음식.새참.  ●고갱이 : 사물의 핵심.  ●고거리 : 소의 앞다리에 붙은 살.  cf)사태  ●고빗사위 : 고비 중에서도 가장 아슬  아슬한 순간.  ●고삿 : ①마을의 좁은 골목길. ②좁은  골짜기의 사이.  ●고수련 : 병자에게 불편이 없도록 시  중을 들어줌.  ●고뿔 : 감기  ●곧추다 : 굽은 것을 곧게 하다. cf)곧  추뜨다 : 눈을 부릅뜨다.  ●골갱이 : ①물질 속에 있는 단단한  부분. ②일의 골자.  ●골막하다 : 그릇에 다 차지 않고 좀  모자라는 듯하다.  ●곰살궂다 : 성질이 부드럽고 다정하다.  ●곰상스럽다 : 성질이나 하는 짓이 잘  고 꼼꼼하다.  ●곰비임비 : 물건이 거듭 쌓이거나 일  이 겹치는 모양.  ●곰파다 : 사물을 자세히 보고 따지다.  ●곱살끼다 : 몹시 보채거나 짓궂게 굴다.  ●공성이 나다 : 이력이 나다. 길이 들다.  ●공중제비 : 두 손을 땅에 짚고 두 다  리를 공중으로 쳐들어서 반대 방향  으로 넘어가는 재주.  ●공치하다 : 공교롭게 잘못되다.  ●괴덕 : 수선스럽고 실없는 말이나 행동.  ●구듭 : 귀찮고 괴로운 남의 뒤치닥꺼리.  ●구메 농사 : ①규모가 작은 농사. ②  곳에 따라 풍흉(豊凶)이 다르게 되는  농사.  ●구쁘다 : 먹고 싶어 입맛이 당기다.  ●구성없다 : 격에 맞지 않다.  ●구성지다 : 천연덕스럽고 구수하다.  ●구순하다 : 말썽 없이 의좋게 잘 지  내다.  ●구실 : ①공공이나 관가의 직무(職  務). ②세금(稅金). ③마땅히 자기가  해야 할 책임.  ●구어박다 : 사람이 변동이나 활동을  자유로이 못하게 한 군데나 한 상태  로 있게 하다.  ●구완 : 아픈 사람이나 해산한 사람의  시중을 드는 일.  ●구유 : 마소의 먹이를 담아 주는 큰  그릇.  ●국으로 : 제 생긴 그대로. 잠자코.  ●굴레 : 마소(말과 소)의 목에서 고삐  에 걸쳐 얽어 매는 줄.  ●굴침스럽다 : 억지로 하려는 빛이 보  이다.  ●굴타리먹다 : 오이·호박·수박따위  를 벌레가 파먹다.  ●굴통이 : 겉모양은 그럴듯하나 속은  보잘것없는 물건이나 사람.  ●굼닐다 : 몸을 구부렸다 일으켰다 하다.  ●굽도리 : (방안의)벽의 아래 가장자리.  ●굽바자 : 작은 나뭇가지로 엮어 만든  얕은 울타리.  ●궁따다 : 시치미떼고 딴소리를 하다.  ●커나다 : ①모가 반드하지 않고 비뚤  어지다. ②의견이 서로 틀어지다.  ●귀살쩍다 : ①물건이 흩어져 뒤숭숭  하다. ②일이 복잡하게 뒤얽혀 마음  이 산란하다.  ●그느다 : 젖먹이가 대소변을 분간하  여 누다.  ●그느르다 : 보호하여 보살펴 주다.  ●그루잠 : 깨었다가 다시 든 잠.  ●그루터기 : 나무나 풀 따위를 베어  낸 뒤의 남은 뿌리 쪽의 부분.  ●그악하다 : ①장난이 지나치게 심하  다. ②사납고 모질다. ③몹시 부지런  하다.  ●금새 : 물건의 시세나 값.  ●기이다 : 드러나지 않도록 숨기다.  ●기를 : 일의 가장 중요한 고비.  ●길라잡이 : 앞에서 길을 인도하는 사람.  ●길마 : 짐을 싣기 위하여 소의 등에  안장처럼 얹은 도구.  ●길미 : 빚돈에 대하여 덧붙여 주는  돈. 이자(利子).  ●길섶 : 길의 가장자리.  ●길제 :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구석진  자리. 한모퉁이.  ●길품 : 남이 갈 길을 대신 가 주고  삯을 받는 일.  ●김바리 : 이익을 보고 남보다 앞질러  서 차지하는 약은 꾀가 있는사람.  ●까대기 : 건물이나 담 따위에 임시로  붙여서 만든 허술한 건조물.  ●까막과부 : 청혼한 남자가 죽어서 시  집도 가 보지 못한 과부. 망문과부  (望門寡婦)  ●까막까치 : 까마귀와 까치. 오작(烏鵲)  ●깔죽없다 : 조금도 축내거나 버릴 것  이 없다.  ●깜냥 : 얼음 가늠보아 해낼 만한 능력.  ●깜부기 : 깜부기병에 걸려서 까맣게  된 밀이나 보리의 이삭.  ●깨단하다 : 오래 생각나지 않다가 어  떤 실마리로 말미암아 환하게 깨닫다.  ●꺼병이 : ①꿩의 어린 새끼. ②외양이  거칠게 생긴사람. cf)꺼펑이 : 덧씌워  덮거나 가린 물건.  ●꺽지다 : 억세고 용감하고 과단성이  있다.  ●꼲다 : 잘잘못이나 좋고 나쁨을 살피  어 정하다.  ●꾀꾀로 : 가끔가끔 틈을 타서 살그머니.  ●꽃샘 : 봄철 꽃이 필 무렵의 추위.  ●꿰미 : 구멍 뚫린 물건을 꿰어 묶는  노끈.  ●끄나풀 : ①끈의 길지 않은 토막. ②  남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사람.  ●끄느름하다 : 날씨가 흐리어 어둠침  침하다.  ●끌끌하다 : 마음이 맑고 바르며 깨끗  하다.  ㄴ  ●나래 : ①배를 젓는 도구. ②논밭을  고르는데 쓰는 농기구.  ●나부대다 : 조심히 있지 못하고 철없  이 납신거리다.  ●난든집 : 손에 익은 재주.  ●남새 : 무·배추 따위와 같이 심어서  가꾸는 채소.  ●남우세 : 남에게서 비웃음이나 조롱  을 받게 됨.  ●남진계집 : 내외를 갖춘 남의 집 하인.  ●낫잡다 : (수량·금액·나이 따위를)  좀 넉넉하게 치다.  ●낳이 : 피륙을 짜는 일.  ●내남없이 : 나나 다른 사람이나 다  마찬가지로.  ●내숭 : 겉으로는 부드러워 보이나 속  은 엉큼함.  ●너널 : 추울 때에 신는 커다란 솜 덧  버선.  ●넉가래 : 곡식·눈 따위를 한곳에 밀  어 모으는 데 쓰는 기구.  ●넉장거리 : 네 활개를 벌리고 뒤로  벌렁 나자빠지는 짓.  ●넌더리 : 소름이 끼치도록 싫은 생각.  ●널출지다 : 식물의 줄기가 처렁처렁  길게 늘어지다.  ●노가리 : 씨를 흩어 뿌리어 심은 일.  ●노드매기 : 물건을 여러 몫으로 나누  는 일.  ●노닥이다 : 잔재미있고 수다스럽게  말을 늘어놓다.  ●노량으로 : 어정어정 놀아가면서 천  천히.  ●노루잠 : 깊이 들지 못하고 자주 깨  는 잠.  ●노적가리 : 한데에 쌓아 둔 곡식 더미.  ●노총 : 기일(期日)을 남에게 알리지  말아야될 일.  ●놀금 : (물건을 살 때)팔지 않으면 그  만둘 셈으로 크게 깎아서 부른 값.  ●높새 : 뱃사람들이 북동풍(北東風)을  이르는 말.  ●눈거칠다 : 하는 짓이 보기에 싫고  마음에 들지 아니하다.  ●눈비음 : 남의 눈에 들도록 겉으로만  꾸미는 일.  ●눈썰미 : 한두 번 보고도 곧 그것을  해낼수 있는 재주.  ●눈엣가시 : ①몹시 미워 항상 눈에  거슬리는 사람. ②남편의 첩을 이르  는 말.  ●느껍다 : 어떤 느낌이 생긴다.  ●느루 : 한꺼번에 몰아치지 않고 오래  도록.  ●느루먹다 : 양식의 소비를 조절하여  예정보다 더 오래 먹다.  ●는개 : 안개처럼 부옇게 내리는 가는  비. 연우(煉雨)  ●늘비하다 : 죽 늘어서 있다.  ●늠그다 : 곡식의 껍질을 벗기다.  ●능 : 넉넉하게 잠은 여유.  ●능갈치다 : 능창스럽게 잘 둘러대는  재주가 있다.  ●늦사리 : 철 늦게 농작물을 거두는  일. 또는 그 농작물.  ●늦 : 미리 보이는 조짐.  ㄷ  ●다따가 : 갑자기. 별안간.  ●다락같다 : ①물건값이 매우 비싸다.  ②덩치가 매우 크다.  ●다랑귀 : 두 손으로 붙잡고 매달리는 짓.  ●다직해야 : 기껏해야.  ●닦아세우다 : 남을 꼼짝 못하게 몹시  호되게 나무라다.  ●단물나다 : 옷 같은 것이 오래 되어  서 바탕이 헤지게 되다.  ●달구치다 : 꼼짝못하게 마구 몰아치  다 cf)달구질 : 달구로 땅을 단단히  다지는 일.  ●달랑쇠 : 침착하지 못하고 몹시 까부  는 사람.  ●달포 : 한 달 남짓.=달소수, 삭여(朔餘)  ●답치기 : 되는 대로 함부로 덤벼드는  짓. 생각 없이 덮어놓고 하는 짓.  ●당나발붙다 :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다.  ●당도리 : 바다로 다니는 큰 나무배.  ●대갚음 : 남에게 받은 은혜나 원한을  그대로 갚는 일.  ●대두리 : ①큰 다툼. ②일이 크게 벌  어진 말.  ●댓바람 : 단번에. 지체하지 않고 곧.  ●댕기다 : 불을 옮겨 붙이다.  ●더껑이 : 길쭉한 액체의 엉겨 붙은막.  ●더께 : 찌든 물건에 앉은 거친 때.  ●더치다 : 병세가 도로 더해지다.  ●더펄이 : 성미가 활발한 사람.  ●덖다 : ①때가 올라서 몹시 찌들다.  ②음식에 물을 붓지 않고 볶아서 익  히다.  ●던적스럽다 : (하는 짓이) 보기에 매  우 치사스럽고 더럽다.  ●덜퍽지다 : 푸지고 탐스럽다.  ●덤받이 : 여자가 전남편에게서 낳아  데리고 들어온 자식.  ●덤터기 : 남에게 넘겨 씌우거나 남에  게서 넘겨 맡은 걱정거리.  ●덧거칠다 : 일이 순조롭지 못하고 가  탈이 많다.  ●덧게비 : 다른 것 위에 필요 없이 더  덧엎어 대는 일.  ●덧두리 : ①정해 놓은 액수 외에 더  보태는 돈(웃돈). ②헐값으로 사서  비싼 금액으로 팔 때의 그 차액.  ●덩둘하다 : 매우 둔하고 어리석다.  ●덩저리 : 물건의 부피.  ●도거리 : 몫으로 나누지 않고 한데  합쳐서 몰아치는 일.  ●도두보다 : 실제보다 더 크게 또는  좋게 보다. cf)도두치다 : 시세보다  더 많게 셈치다.  ●도드미 ; 구멍이 널찍한 체.  ●도린결 : 사람이 별로 가지 않는 외  진곳.  ●도사리 : ①감·대추 등이 다 익지  못하고 도중에 떨어진 열매. ②못자  리에 난 작은 잡풀.  ●도섭 : 능청스럽고 수선스럽게 변덕  을 부리는 것.  ●도스르다 : 무슨 일을 하려고 벌려서  마음을 가다듬다.  ●도파니 : 죄다 몰아서. 통틀어.  ●돈바르다 : 성미가 너그럽지 못하고  까다롭다.  ●돈사다 : 무엇을 팔아서 돈으로 바꾸다.  ●동곳빼다 : 잘못을 인정하고 굴복하다.  ●동그마니 : ①홀가분하게. ②외따로  떨어져 있는 모양.  ●동뜨다 : ①시간적·공간적 간격이  생기다. ②다른 것보다 훨씬 뛰어나다.  ●동아리 : (목적이 같은 사람들이)한패  를 이룬 무리.  ●동이 닿다 : ①차례가 잘 이어지다.  ②조리(條理)가 서다.  ●동자아치 : 부엌일을 맡아 하는 여자  하인.  ●동티 : ①흙을 잘못 다루어 지신(地  神)을 노하게하여 받는 재앙. ②공연  히 건드려서 스스로 걱정이나 해를  입음을 비유하는 말.  ●되모시 : 결혼한 일이 있는 여자로서  처녀 행세를 하는 여자.  ●되술래잡히다 : 나무라야 할 사람이  도리어 나무람을 당하다.  ●되지기 : ①찬 밥을 더운 밥 위에 얹  어 다시 찌거나 데운 밥. ②(논밭을  헤아리는 단위인)마지기의 10분의 1.  ●되퉁스럽다 : 하는 짓이 찬찬하지 못  하고 실수를 자주 하다.  ●된바람 : 북풍(北風)을 이르는 말.  ●될성부르다 : 잘될 가망이 있다.  ●두남두다 : ①편들다. ②가엾게 여겨  도와주다.  ●두동지다 : 앞뒤가 서로 맞지 않다.  모순되다.  ●두례 : ①농사꾼들이 모내기와 김매  기를 공동으로 하기 위해 이룬 조직.  ②웅덩이나 도랑에서 지대가 높은  논으로 물을 퍼올리는 기구. cf) 두레  먹다 : ①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먹  다. ②음식을 장만하고 농군들이 모  여놀다.  ●두멍 : 물을 길어 담아 두고 쓰는 큰  가마솥이나 큰 독.  ●둥개다 :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쩔쩔  매다.  ●뒤란 : 집 뒤에 울타리 안.  ●뒤스르다 : (일어나 물건을 가다듬느  라고)이리저리 바꾸거나 변통하다.  ●뒤웅박 : 쪼개지 않고 속을 긁어 낸  바가지.  ●뒤통수(를)치다 : 뜻을 이루지 못하여  매우 낙심하다.  ●뒨장질 : 이것저것 뒤져내는 짓.  ●뒷갈망 : 일이 벌어진 뒤에 그 뒤끝  을 처리하는 일. 뒷감당.  ●뒷귀 : 사리나 말귀를 알아채는 힘.  ●드난 : (흔히 여자가)남의 짐에 매이  지 않고 임시로 붙어 살며 일을 도  와주는 고용살이.  ●드레 : 사람의 됨됨이로서의 점잖음  과 무게.  ●드림흥정 : 값을 여러 차례에 나눠  주기로 하고 하는 흥정.  ●드티다 : 자리가 옮겨져 틈이 생기거  나 날짜·기한 등이 조금씩 연기되다.  ●들마 : (가게나 상점의)문을 닫을 무렵.  ●들메 : (벗어나지 않도록)신을 발에  동여매는 일.  ●들썽하다 : 마음이 어수선하여 들떠  있다.  ●들입다 : 마구 무리하게.  ●들피 : 굶주려서 몸이 여위고 쇠약해  지는 일.  ●듬쑥하다 : 사람의 됨됨이가 가볍지  않고 속이 깊고 차 있다.  ●따리꾼 : 아첨을 잘하는 사람.  ●딸각발이 : 신이 없어 마른 날에도  나막신을 신는다는 뜻으로, 가난한  선비를 이르는 말.  ●떠세 : 돈이나 세력을 믿고 젠 체하  고 억지를 쓰는 것.  ●떡심이 풀리다 : 맥이 풀리다. 몹시  낙망하다.  ●떨거지 : 일가 친척에 속하는 무리나  한통속으로 지내는 사람들.  ●뚝벌씨 : 걸핏하면 불뚝불뚝 성을 내  는 성질. 또는 그런 사람.  ●뚱기다 : ①악기의 줄 따위를 튀기어  진동하게 하다. ②슬쩍 귀띔해 주다.  ●뚜쟁이 : 남녀의 결합을 중간에서 주  선하는 사람.  ●뜨께질 : 남의 마음속을 떠보는 것.  ●뜨악하다 :마음에 선뜻 내키지 않다.  ●뜯게 : 헤지고 낡아서 입지 못하게  된옷.  ㅁ  ●마고자 : 저고리 위에 덧입는 옷.  ●마디다 : 쓰는 물건이 잘 닮거나 없  어지지 아니하다. (반:헤프다.)  ●마뜩하다 : 제법 마음에 들다.  ●마름 : ①지주의 땅을 대신 관리하는  사람. ②이엉을 엮어서 말아 놓은단.  ●마름질 : 옷감이나 재목(材木) 등을  치수에 맞추어 자르는 일.  ●마수걸다 : 장사를 시작해서 처음으  로 물건을 팔다.  ●마장스럽다 : 무슨 일이 막 되려는  때에 헤살(방해)이 들다.  ●마전 : (피륙을 삶거나 빨아서)바래는  일. 표백(漂白).  ●마파람 :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남  풍(南風)  ●말결 : 무슨 말을 하는 김.  ●말림갓 : 나무를 함부로 메지 못하게  금한 산림.  ●말재기 : 쓸데없는 말을 꾸며내는 사람.  ●말코지 : 물건을 걸기 위하여 벽에  달아 놓은 나무 갈고리.  ●매개 : 일이 되어 가는 형편.  ●매골 : (볼품없이 된)사람의 꼴.=몰골  ●매나니 : ①일을 하는 데 아무 도구  도 없이 맨손뿐임. ②반찬이 없는 맨  밥.  ●매지구름 : 비를 머금은 검은 조각  구름.  ●매캐하다 : 연기나 곰팡내가 나서 목  이 조금 칼칼하다.  ●맨드리 : ①옷을 입고 매만진 맵시.  ②물건의 만들어진 모양새.  ●맨망 : 요망스럽게 까부는 짓.  ●맵자하다 : 모양이 꼭 체격에 어울려  서 맞다.  ●맷가마리 : 매맞아 마땅한 사람.  ●맹문 : 일의 시비나 경위(經緯)  ●머드러기 : 많이 있는 과일이나 생선  가운데서 크고 굵은 것.  ●머줍다 : 몸놀림이 느리다. 굼뜨다.  ●메꿎다 : 고집이 세고 심술궂다.  ●메지 : 일의 한 가지 한 가지나 끝나  는 단락.  ●멧부리 : 산동성이나 산봉우리의 가  장 높은 꼭대기.  ●멱차다 : ①더 이상 할 수 없는 한도  에 이르다. ②일이 끝나다.  ●모가비 : 인부나 광대 등의 우두머리.  낮은 패의 우두머리=꼭두쇠  ●모래톱 : 강가나 바닷가에 있는 모래  벌판. 모래사장.  ●모르쇠 : 덮어놓고 모른다고 잡아떼  는 일.  ●모주망태 : 술을 늘 대중없이 많이  먹는 사람.  ●모집다 : 허물이나 과실을 명백하게  지적하다.  ●모춤하다 : (길이나 분량이)어떤 한도  에 차고 좀 남다.  ●목매기 : 아직 코를 뚫지 않고 목에  고삐를 맨 송아지.  ●물강스럽다 : 보기에 억세고 모질며  악착스럽다.  ●몽구리 : 바싹 깎은 머리.  ●몽니 : 심술궂게 욕심부리는 성질.  ●몽따다 :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모르  는 체하다.  ●몽종하다 : ①새침하고 냉정하다. ②  부피나 길이가 좀 모자라다.  ●몽짜 : 음흉하게 몽니부르는 짓. 또는  그렇게 하는 사람. cf)몽짜(를)치다 :  겉으로는 어리석은 체하면서 속은  딴생각을 지니다.  ●몽태치다 : 남의 물건을 슬그머니 훔  치다.  ●무꾸리 : 무당이나 판수에게 길흉(吉  凶)을 점치는 일.  ●무녀리 : ①태로 낳은 짐승의 맨 먼저  나온 새끼. ②언행이 좀 모자란 사람.  ●무드럭지다 : 두두룩하게 많이 쌓여  있다. (준:무덕지다.)  ●무람없다 : (어른에게나 친한 사이에)  스스럼없고 버릇이 없다. 예의가 없  다.  ●무릎마춤 : 대질(對質)  ●무서리 : 처음 오는 묽은 서리 (반:된  서리)  ●무수다 : 닥치는 대로 때리거나 부수다.  ●무싯날 : 장이 서지 않는 날.  ●무텅이 : 거칠 땅에 논밭을 일구어서  곡식을 심는 일.  ●묵새기다 : 별로 하는 일 없이 한 곳  에 오래 묵으며 세월을 보내다.  ●물꼬 : 논에 물이 넘나들도록 만든  어귀.  ●물보낌 : 여러 사람을 모조리 매질함.  ●물부리 : 궐련을 끼워 입에 물고 빠  는 물건. 빨부리.  ●물수제비뜨다 : 얇고 둥근 돌로 물위  를 담방담방 뛰어가게 팔매치다.  ●물초 : 온통 물에 젖은 상태, 또는 그  모양.  ●뭉근하다 : 불이 느긋이 타거나, 불기  운이 세지 않다.  ●미대다 : 하기 싫어서 잘못된 일을  남에게 밀어 넘기다.  ●미립 : 경험을 통하여 얻은 묘한 이  치나 요령.  ●미쁘다 : ①믿음성이 있다. ②진실하다.  ●미투리 : 삼·모시 따위로 삼은 신.  ●민낯 : 여자의 화장 하지 않은 얼굴.  ●민둥산 : 나무가 없어 황토가 드러난 산.  ●민패 : 아무 꾸밈새 없는 소박한 물건.  ●민충하다 : 미련하고 덜되다.  ●민틋하다 : 울퉁불퉁하지 않고 평평  하고 미끈하다.  ●밀막다 : 핑계를 대고 거절하다.  ●밀절미 : 기초가 되는 본바탕.  ㅂ  ●바자위다 : 성질이 너무 깐깐하여 너  그러운 맛이 없다.  ●바장이다 : 부질없이 짧은 거리를 오  락가락 거닐다.  ●바투 : ①두 물체의 사이가 썩 가깝  게. ②시간이 매우 짧게.  ●반거들충이 : 무엇을 배우다가 중간  에 그만두어 다 이루지 못한 사람.  ●반기 : 잔치·제사때에 동네 사람들  에게 나누어 주려고 작은 목판에 담  은 음식.  ●반살미 : 갓 혼인한 신랑이나 신부를  친척집에서 처음으로 초대하는 일.  ●반색 : 몹시 반가워함.  ●반자받다 : 몹시 노하여 펄펄뛰다.  ●반지빠르다 : 교만스러워 얄밉다.  ●받내다 :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  의)대소변을 받아내다.  ●발림 : 판소리에서 노래하는 사람이  행하는 몸짓.  ●발발다 : 기회를 제빠르게 붙잡아 잘  이용하는 소질이 있다.  ●발쇠 : 남의 비밀을 알아내어 다른  사람에게 일러 주는 짓.  ●방물 : 여자에게 소용된는 화장품·  바느질 기구·패물따위.  ●방자 : 남이 못되기를, 또는 남에게  제앙이 내리도록 귀신에게 비는 것.  ●방자고기 : 양념도 하지 않고 소금만  뿌려서 구운 짐승의 고기.  ●방짜 : 품질이 좋은 놋쇠를 부어 내  어 다시 두드려 만든 놋그릇.(좋은  물건을 비유.)  ●방패막이 : 어떤 것을 내세워 자기에  게 닥쳐 오는 공격이나 영향 따위  를 막아내는 일.  ●배내 : 남의 가축을 길러서 다 자라  거나 새끼를 친 뒤에 주인과 나누어  가지는 일.  ●배냇짓 : 갓난아이가 자면서 웃거나  눈·코·입 등을 쫑긋거리는 짓. cf)  배내버릇 :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버릇. 즉 오래 되어 고치기 힘든 버  릇.  ●배때벗다 : 언행이 매우 거만하고 반  지빠르다.  ●배메기 : 지주와 소작인이 수화한 것  을 똑같이 나누는 제도.=반타작. 병  작(竝作)  ●버겁다 : 힘에 겨워 다루기가 벅차다.  ●버금 : (서열 등의 차례에서)'으뜸'또  는 '첫째'의 다음.  ●벋대다 : 순종하지 않고 힘껏 버티다.  ●버덩 : 나무는 없이 잡풀만 난 거친들.  ●버력 : 하늘이나 신령이 사람의 죄악  을 징계하느라고 내리는 벌.  ●버르집다 : ①숨은 일을 들춰내다. ②  작은 일을 크게 떠벌리다.  ●버름하다 : ①틈이 좀 벌어져 있다.  ②마음이 서로 맞지 않다.  ●비커리 : 늙고 병들거나 또는 고생살  이로 살이 빠지고 쭈그러진 여자.  ●벌충 : 모자라는 것을 다른 것으로  대신 채움.  ●배갯잇 : 베개에 덧씌우는 헝겊 cf)베  갯밑 공사(公事) : 잠자리에서 아내  가 남편에게 바라는 바를 속삭이며  청하는 일.  ●베돌다 : 한데 어울리지 않고 따로  떨어져 밖으로만 돌다.  ●벼리 : ①그물의 위쪽 코를 꿰어 오  므렸다 폈다 하는 줄. ②일이나 글의  가장 중심되는 줄거리.  ●벼리다 : 날이 무딘 연장을 불에 달  구어서 두드려 날카롭게 만들다.  ●변죽 : 그릇·세간 등의 가장자리. c  f)변죽(을)울리다 : 바로 집어 말을  하지 않고 둘러서 말을하여 상대가  눈치를 채서 깨닫게 하다.  ●볏가리 : 차곡차곡 쌓은 볏단이다.  ●보꾹 : 지붕의 안쪽.  ●보깨다 : 먹은 것이 잘 삭지 아니하  여 뱃속이 거북하고 괴롭다.  ●보드기 : 크게 자라지 못한 나무.  ●보쟁이다 : 부부가 아닌 남녀가 남몰  래 서로 친밀한 관계를 계속 맺다.  ●보짱 : 꿋꿋하게 가지는 속마음.  ●본치 : 남의 눈에 뜨이는 태도나 모습.  ●볼멘소리 : 성이 나서 퉁명스럽게 하  는 말.  ●볼모 : 약속을 이행하겠다는 담보로  상대편에 잡혀 두는 물건. 또는 사람.  ●부넘기 : 솥을 건 아궁이의 뒷벽(불길  이 방고래로 넘어가게 된 곳).  ●부닐다 : 가까이 따르며 붙임성이 있  게 굴다.  ●부르터나다 : 감추어져 있던 일이 드  러나다.  ●부대끼다 : 무엇에 시달려 괴로움을  당하다.  ●부아나다 : 분한 마음이 일어나다.  ●부지깽이 : 아궁이의 불을 헤치는 막  대기.  ●북새 : 많은 사람들이 아주 야단스럽  게 부산을 떨며 법석이는 일.  ●붓날다 : 말이나 행동이 경솔하고 들  뜨다.  ●붓방아 : 글을 쓸 때 생각이 잘 떠오  르지 않아 붓대만 놀리고 있는 것.  ●붙박이 : 한 곳에 고정되어 이동할  수 없게 된 사물.  ●비나리치다 : 아첨을 하면서 남의 비  위를 맞추다.  ●비를 긋다 : 잠시 비를 피하여 그치  기를 기다리다.  ●비말 : 비용(費用)  ●비설거지 : (비가 오려고 할 때)물건  들이 비에 맞지 않게 거두거나 덮거  나 하는 일.  ●빌붙다 : 남의 환심을 사려고 들러붙  어서 알랑거리다.  ●빗물이 : 남이 진 빛을 대신 갚는 일.  ●빚지시 : 빚을 주고 쓰는 일을 중간  에서 소개하는 일.  {{  }}●  빌미 : 재앙이나 병 등이 불행이 생기는 원인.  ●빙충맞다 : 똘똘하지 못하고 어리석다.  ●뻑뻑이 : 틀림없이.  ●뿌다구니 : 물건의 삐죽하게 내민 부분.  ㅅ  ●사금파리 : 사기 그릇의 깨진 작은  조각.  ●사람멀미 : 사람이 많은 데서 느끼는  어지러운 증세.  ●사로자다 : 불안한 마음으로 자는  둥마는 둥하게 자다.  ●사시랑이 : 가냘픈 사람이나 물건.  ●사위다 : 불이 다 타서 제가 되다.  ●사재기 : 필요 이상으로 사서 쟁여둠.  ●사태 : 소의 무릎 뒤쪽 오금에 붙은  고기.  ●사품 : 어떤 일이나 동작이 진행되는  '마침 그 때(기회)'를 뜻함.  ●삭신 : 몸의 근육과 뼈마디.  ●삭정이 : 산 매꾸에 붙은 채 말라  죽은 가지.  ●삯메기 : 농촌에서 식사는 없이  품삯만 받고 하는 일.  ●산돌림 :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한  줄기씩 쏟아지는 소나기.  ●신망스럽다 : 말이나 하는 것이  경망스럽다. cf)실망스럽다 : 몹시  짓궂다.  ●살갑다 : ①(집에나 세간  따위가)겉으로 보기 보다 속이  너르다. ②마음씨가 부드럽고  다정스럽다.  ●살강 : 그릇을 얹기 위하여 부엌벽에  가로지른 선반. cf)시령 : 물건을 얹  기 위해 방이나 마루에 건너질러 놓  은 나무.  ●살거리 : 몸에 붙은 살의 정도와 모양.  ●살붙이 : 혈육적으로 가까운 사람.  ●살소매 : 팔과 소매 사이의 빈틈.  ●살손(을)붙이다 : 일을 다그쳐 정성을  다하다.  ●살피 : ①두 곳의 경계선을 표시한  표. ②물건과 물건과의 사이를 구별  지은 표.  ●심사미 : 세 갈래로 갈라진 곳.  ●삼짇날 : 음력 삼월 초사흘날.  ●삼태기 : 대나 헝겊으로 엮어 거름·  흙·쓰레기 따위를 담아 나르는 물건.  ●삼하다 : 어린아이의 성질이 순하지  않고 사납다.  ●상고대 : 나무나 풀에 눈같이 내린  서리.  ●새경 : 농가에 일년 동안 일해 준 대  가로 주인이 머슴에게 주는 곡물이  나 돈.=사경(私耕).  ●새물내 : 빨래하여 갓 입은 옷에서  나는 냄새.  ●새룽이 : 말이나 행동을 밉살스럽고  경망스럽게 하는 짓. 또는 그러한 사  람.  ●샛바람 :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동  풍(東風).  ●생무지 : 일에 익숙하지 못하여 서투  른 사람.  ●생인손 : 손가락 끝에 나는 종기.  ●생채기 : 손톱 따위로 할퀴어 생긴  작은 상처.  ●생청 : 시치미를 떼고 하는 모순된 말.  ●생화 : 먹고 살아 나가기 위하여 벌  이 하는 일.  ●서름하다 : ①남과 가깝지 못하다. ②  사물에 익숙하지 못하다.  ●서릊다 : 좋지 못한 것을 쓸어 치우다.  ●섟 : 순간적으로 불끈 일어나는 격한  감정.  ●섟삭다 : ①불끈 일어난 노여움이 풀  리다. ②의심하는 마음이 풀리다.  ●선겁다 : ①놀랍다. ②재미롭지 못하다.  ●선바람 : 차리고 나선 그대로의 차림새.  ●선불걸다 : ①섣불리 건드리다. ②관  계없는 일에 참견하여 해를 입는다.  ●선술집 : 술청 앞에 선 채로 술을 마  실 수 있도록 된 집.=목로주점.  ●선웃음 : (우습지도 않은데)꾸미어 웃  는 거짓웃음.  ●섣부르다 : 솜씨가 설고 어설프다.  ●설멍하다 : 옷이 몸에 짧아 어울리지  않다.  ●설면하다 :①자주 만나지 못하여 좀  설다. ②정답지 아니하다.  ●설피다 : 짜거나 엮은 것이 성기고  거칠다.  ●섬돌 : 오르내리기 위하여 만든 돌층계.  ●성금 : 말한 것이나 일한 것의 보람.  ●성기다 : 사이가 배지 않고 뜨다. (반:  배다)  ●성마르다 : 성질이 급하고 도량이 좁다.  ●세나다 : ①물건이 잘 팔려 나가다.  ②부스럼 따위가 덧나다.  ●소담하다 : ①음식이 넉넉하여 먹음  직하다. ②생김새가 탐스럽다.  ●소댕 : 솥을 덮는 뚜껑.  ●소두 : 혼인 관계를 맺은지 얼마 안  되는 사돈끼리 생일 같은 때 서로  주고받는 선물.  ●소드락질 : 남의 재물을 마구 빼앗는 짓.  ●소래기 : 독 뚜껑이나 그릇으로 쓰는  굽이 없는 짐그릇.  ●소롱하다 : 재산을 되는 아무렇게나  써서 없애다.  ●소소리바람 : 이른봄의 맵고 스산한  바람.  ●소수나다 : 그 땅의 소출이 늘다. (준:  솟나다)  ●소양배양하다 : 나이가 아직 어려 철  이 없이 함부로 날뛰다.  ●소태같다 : 맛이 몹시 쓰다.  ●속종 : 마음속에 품고 있느 소견.  ●솎다 : 군데군데 골라서 뽑아내다.  ●손대기 : 잔심부름을 할 만한 아이.  ●손떠퀴 : 무슨 일이나 손을 대기만  하면 나타나는 길흉화복.  ●손 맑다 : ①재수가 없어 생기는 것  이 없다. ②후하지 아니하고 다랍다.  ●손바람 : 일을 치러나가는 솜씨나 기새.  ●손방 : 할 줄 모르는 솜씨.  ●손사래 : 남의 말을 부인할 때 손을  펴서 내젓는 짓.  ●손타다 : 물건의 일부가 없어지다. 도  둑맞다.  ●손포 : 실제 일하는 사람의 수. 또는  일한 양.  ●수발 : 시중들며 보살피는 일.  ●수지니 : 사람의 손으로 길들인 매.  ●수채 : 집 안에서 버림 허드랫물이나  빗물 따위가 흘러 나가도록 만든 시설.  ●숙수그레하다 : 어떤 물건들의 크기  가 별로 차이가 나지 않고 거의 고  르다.  ●숙지다 : 어떤 현상이나 기세 따위가  차차 줄어 들다.  ●숱 : 물건의 부피나 분양.  ●스스럼 : 조심하거나 어려워하는 마  음이나 태도.  ●숨베 : (칼·호미·괭이 등의)날의 한  끝이 자루 속에 들어간 부분.  ●습습하다 : 사내답게 활발하고 너그  럽다.  ●승겁들다 : 그리 힘들이지 않고 저절  로 이루다.  ●시게 : 시장에서 거래되는 곡식, 또는  그 시세.  ●시나브로 :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  금씩.  ●시뜻하다 : 어떤 일에 물려서 싫증이  나다.  ●시래기 : 말린 무잎이나 배춧잎.  ●시르죽다 : 기운을 못차리다. 풀이 죽  다.  ●시름없다 : ①근심·걱정으로 맥이  없다. ②아무 생각이 없다.  ●시먹다 : 나이 어린 사람이 주제넘고  건방지다.  ●시쁘다 : 마음이 흡족하지 아니하다.  ●시세 : 가는 모래.=모세, 세사(細沙)  ●시설궂다 : 싱글싱글 웃으면서 수다  스럽게 자꾸 지껄이다.  ●시앗 : 남편의 첩.  ●시역 : 힘이 드는 일.  ●시위 : ①홍수(洪水), ②'활시위'의 준  말.  ●시적거리다 :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  을 억지로 하다.  ●시치다 : 바느질할 때 임시로 듬성듬  성 꿔매다.  ●실랑이 : ①남을 못견디게 굴어 시달  리게 하는 짓. ②서로 옥신각신하는  짓(승강이).  ●실큼하다 : 마음에 싫은 생각이 생기다.  ●실터 : 집과 집 사이의 길고 좁은 빈터.  ●실팍하다 : 사람이나 물건이 보기에  매우 튼튼하다.  ●심드렁하다 : ①마음에 탐탁하지 아  니하여 관심이 거의 없다. ②병이 더  중해지지도 않고 오래 끌다.  ●심마니 : 산삼을 캐려고 돌아 다니는  사람.  ●싸개통 : ①여러 사람이 둘러싸고 승  강이를 하는 일. ②여러 사람에게 둘  러싸여 욕을 먹는 일.  ●싹수 : 앞으로 잘 트일 만한 낌새나  징조.  ●쌩이질 : 한창 바쁠 때 쓸데없는 일  로 남을 귀찮게 구는 것.  ●쓰레질 : 갈아 놓은 논밭의 바닥을  써레로 고르는 일.  ●쏘개질 : 있는 일 없는 일을 얽어서  몰래 고자질 하는 짓.  ●쓸까스르다 : 남을 추켰다 낮췄다하  여 비위를 거스르다.  ●쓿다 : 곡식의 껍질을 벗기어 깨끗이  하다.  ●싸도둑 : 조상의 성질과 모습을 닮지  않고 남을 닮는 것을 비유하는 말.  ㅇ  ●아귀차다 : 뜻이 굳고 하는 일이 야  무지다.  ●아기똥하다 : 남달리 교만한 태도가  있다.  ●아가씨 : ①시집갈 만한 또래거나 갓  시집은 이에 대하여 아랫사람이 이  르는 말. ②올케가 손아래 시누이를  높여 이르는 말.  ●아니리 : 판소리에서 창(唱)을 하는  중간에 장면의 변화나 정경 묘사를  설명하는 말.  ●아람치 : 자기의 차지.  ●아름드리 : 한아름이 넘는 큰 나무나  물건.  ●아리잠작하다 : 키가 작고 얌전하며  어린티가 있다.  ●아우르다 : 여럿이 합쳐서 하나로 되  게 하다.  ●아주버니 : 여자가 남편의 형제가 되  는 남자를 일컫는 말.  ●아퀴짓다 : 일을 끝마무리하다.  ●악도리 : 모질게 덤비기 잘하는 사람  이나 짐승.  ●안날 : 바로 전날.  ●안다미 : 남이 져야 할 책임을 맡아짐.  ●안차다 : 겁없고 당돌하다.  ●안를다 : (수량이나 값 따위가)어떤  한도를 넘지 아니하다.  ●안팎장사 : 이 곳에서 물건을 사서  다른 곳에 가져다가 팔고, 그 돈으로  그 곳의 싼 물건을 사서 이 곳에 가  져다가 파는 장사.  ●알섬 : 사람이 살지 않는 작은 섬.  ●알심 : ①은근히 동정하는 마음. ②보  기보다 야무진 힘.  ●알짬 : 여럿 중 가장 중요한 내용.  ●알천 : ①재물 가운데 가장 값나가는  물건. ②음식 가운데 가장 맛있는 음  식.  ●암상 : 남을 미워하고 샘을 잘 내는  심술.=양심.  ●암팡지다 : 몸은 작아도 힘차고 다부  지다.  ●앙금 : 액체의 바닥에 가라앉은 가루  모양의 물질.  ●앙달머리 : 어른스러운 체하면서 야  심을 부리는 짓.  ●앙세다 : 몸은 약해 보여도 다부지다.  ●앙증하다 : 모양이 제격에 어울리지  않게 작다.  ●애면글면 : 약한 힘으로 무엇을 이루  느라고 온갖 힘을 다하는 모양.  ●애물 : 몹시 속을 태우는 물건이나  사람.  ●애벌갈이 : 논이나 밭을 첫 번째 가  는 일.(준:애갈이).  ●애성이 : 분하고 성나는 감정.  ●애오라지 : 좀 부족하나마 겨우, 오직.  ●애옥살이 : 가난에 쪼들리는 고생스  러운 살림살이.  ●앤생이 : 잔약한 사람이나 보잘것없  는 물건을 얕잡아 이르는 말.  ●앵돌아지다 : 마음이 토라지다.  ●야바위 : ①그럴 듯한 방법으로 남을  속여 따먹는 노름. ②협잡의 수단으  로 그럴 듯한 광경을 꾸미는 일.  ●야발 : 야살스럽고 되바라진 태도.  ●야비다리 : 대단찮은 사람이 제멋에  겨워서 부리는 거드름.  ●야수다 : 기회를 노리다.  ●야지랑스럽다 : 얄밉도록 능청맞고  천연스럽다.  ●야짓 : 건너뛰꺼나 빼놓지 않고 모조리.  ●약비나다 : 정도가 너무 지나쳐 몹시  싫증이 나다.  ●얌생이 : 남의 물건을 조금씩 훔쳐  내는 짓.  ●양지머리 : 소의 가슴에 붙은 뼈와 살.  ●어거리풍년 : 드물게 보는 큰 풍년(豊  年).  ●어니눅다 : 짐짓 못생긴 체하다.  ●어엿하다 : 행동이 당당하고 떳떳하다.  ●어줍다 : ①말이나 동작이 부자연하  고 시원스럽지 않다. ②손에 익지 않  아 서투르다.  ●언걸 : 남 때문에 당하는 괴로움이나 해.  ●언구럭 : 말을 교묘하게 떠벌리며 남  을 농락하는 일.  ●언막이 : 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막  은 둑.  ●얼렁장사 : 여러 사람이 밑천을 어울  러서 하는 장사.  ●얼레 : 실을 감은 나무 틀.  ●얼레살풀다 : 난봉이 나서 재물을 없  애기 시작하다.  ●업시름 : 업신여겨서 하는 구박.  ●엇부루기 : 아직 큰 소가 되지 못한  수송아지.  ●엉거능축하다 : 보기에는 얼뜬 듯하  면서 능청스럽게 남을 속이는 수단  과 태도가 있다.  ●엉겁 : 끈끈한 물건이 마구 달라붙은  상태.  ●엉구다 : 여러 가지를 모아 일이 되  도록 하다.  ●엉너리 : 남의 환심을 사려고 능청스  러운 수단을 쓰는 짓.  ●엉세판 : 몹시 가난하고 궁한 형세.  ●에끼다 : 서로 주고받을 물건이나 돈  을 서로 비겨 없애다. 상쇄하다.  ●에다 : ①예리한 연장으로 도려 내다.  ②마음을 몹시 아프게 하다.  ●여낙낙하다 : 성미가 곱고 상냥하다.  ●여남은 : 열 가량으로부터 열 좀 더  되는 수.  ●여리꾼 : 상점 앞에 섰다가 지나는  손님을 끌여들여 물건을 사게 하는  사람.  ●여우비 : 볕이 나 있는데 잠깐 오다  가 그치는 비.  ●여정하다 : 별로 틀릴 것이 없다.  ●여줄가리 : 중요한 일에 딸린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  ●여루다 : 물건이나 돈 따위를 아껴쓰  고 나머지를 모아 두다.  ●역성 :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덮어놓  고 한쪽만 편들어 주는 일.  ●열고나다 : ①몹시 급하게 서두르다.  ②몹시 급한 일이 생기다.  ●열없다 : ①조금 부끄럽다. ②겁이 많  다.  ●영절스럽다 : 말로는 그렇듯하다.  ●영바람 : 자랑하고 뽐내는 태도나 기세.  ●영판 : 앞날의 길흉(吉凶)을 맞추어  내는 일. 또는 그 사람.  ●예제없이 : 여기나 저기나 구별없이.  ●오금 : 무릎의 구부러지는 쪽의 관절  부분.  ●오달지다 : 야무지고 실속이 있다.  ●오례쌀 : 올벼의 쌀.  ●오릇하다 : 모자람이 없이 완전하다.  ●오쟁이지다 : 자기 아내가 다른 남자  와 간통하다.  ●오지랖넓다 : 주제넘게 자기와 상관  없는 남의 일에 참견함을 비웃는 말.  ●옥셈 : 생각을 잘못하여 자기에게 불  리하게 하는 셈.  ●올되다 : ①나이보다 일찍 철이 들다.  ②곡식 따위가 제철보다 일찍 익다.  (준:오되다)  ●올무 : 새나 짐승을 잡는 데 쓰는 올  가미.  ●올케 : 누이가 '오빠나 남동생의 아  내'를 일컫는 말. cf)시누이 : 남편의  누이.  ●옷깃차례 : 처음 시작한 사람으로부  터 오른쪽으로 돌아가며 하게 되는  차례.  ●옹골지다 : 실속 있게 속이 꽉 차다.  ●옹아리 : 생후 백일쯤 되는 아기가  사람을 알아 보고 옹알거리는 짓.  ●옹추 : 자기가 늘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  ●옹춘마니 : 마음이 좁고 오그라진 사람.  ●왕청되다 : 차이가 엄청나게 크다.  ●왜골 : 허위대가 크고 언행이 얌전하  지 못한 사람.  ●왜자하다 : 소문이 퍼져 자자하다.  ●왜장치다 : 일이 지난 뒤에 헛되이  큰소리를 치다.  ●욕지기 : 토할 것 같은 메슥메슥한  느낌.  ●용수 : ①술이나 장 따위를 거르는데  쓰는 기구. ②죄수를 밖으로 데리고  다닌 때 얼굴을 보지 못하게 머리에  씌우던 물건.  ●용심 :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심술.  ●용지 : 헝검이나 헌 솜을 나무 막대  기에 감고 기름을 묻혀서 불을 켜는  물건.  ●용천하다 : 썩 좋지 않다. 꺼림칙한  느낌이 있다.  ●용춤 : 남이 추어 울리는 바람에 좋  아서 하라는 대로 행동을 하는 짓.  ●용트림 : 거드름을 피우며 크게 힘을  들여 하는 트림.  ●우금 : 가파르고 좁은 산골짜기.  ●우꾼하다 : ①어떤 기운이 한꺼번에  세게 일어나다. ②여러 사람이 한꺼  번에 소리치며 기세를 올리다.  ●우두망찰하다 : 갑자기 닥친 일에 어  쩌할 바를 몰라 정신이 얼떨떨하다.  ●우듬지 : 나무의 꼭데기 줄기.  ●우렁잇속 : 내용이 복잡하여 헤아리  기 어려운 일을 비유.  ●우멍하다 : 뭉체의 면(面)이 쑥 들어  가서 우묵하다.  ●우선하다 : ①앓던 병이 조금 나은듯  하다. ②몰리거나 급박하던 형세가  다소 풀리다.  ●우세 : 남에게 놀림이나 비웃음을 받음.  ●우수리 : ①물건 값을 제하고 거슬러  받는 잔돈. ②일정한 수효를 다 채우  고 남은 수.  ●우접다 : ①남보다 빼어나게 되다. ②  선배를 이겨 내다.  ●울대 : 울타리에 세운 기둥같은 대.  ●울력 :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여 일  을 함. 또는 그 힘.  ●움딸 : 시집간 딸이 죽은 뒤에 다시  장가든 사위의 아내를 일컫는 말.  ●웁쌀 : 잡곡으로 밥을 지을 때 위에  조금 얹어 안치는 쌀.  ●웃날들다 : 날이 개다.  ●웃비 : 한창 내리다가 잠시 그친 비.  ●워낭 : 마소의 귀에서 턱밑으로 늘여  단 방울.  ●윗바람 : 겨울에 문틈이나 벽틈으로  방안에 새어 들어오는 차 바람.=외풍  (外風).  ●으르다 : ①물에 불린 곡식 따위를  방망이 같은 것으로 으깨다. ②말이  나 행동으로써 위험하다.  ●은결들다 : ①내부에 상처가 나다. ②  원통한 일로 남몰래 속을 썩이다.  ●은사죽음 : 마땅히 보람이 나타나야  할 일이 나타나지 않고 마는 일.  ●의초 : 동기간(同氣間)의 우애.  ●이르집다 : ①껍질을 뜯어 벗기다. ②  없는 일을 만들어 말썽을 일으키다.  ●이물 : 배의 머리 쪽. 뱃머리. (반:고  물).  ●이악하다 : 자기 이익에만 마음이 있다.  ●이울다 : ①꽃이나 잎이 시들다. ②점  점 쇠약해지다.  ●이지다 : 짐승이 살쪄서 지름지다.  ●입찬말 : 자기의 지위와 능력을 믿고  장담하는 말.  ●잇바디 : '치열'의 우리말.  ㅈ  ●자닝하다 : 모습이나 처지 따위가 참  혹하여 차마 볼 수 없다.  ●자리끼 : 밤에 마시려고 잘 자리의  머리맡에 준비해 두는 물.  ●자리보전 : 병이 들어 자리를 깔고  누워서 지냄.  ●자맥질 : 물 속에 들어가서 떳다 잠  겼다 하며 팔다리를 놀리는 짓.  ●자발없다 : 참을성이 없고 경솔하다.  ●자부지 : 쟁기의 손잡이.  ●자빡대다 : 딱 잘라 거절하다.  ●자투리 : (팔거나 쓰다가 남은)피륙의  조각.  ●잔다리밟다 : (출세하기까지)지위가  낮은 데서부터 차차 오르다.  ●잔달음 : 걸음의 폭을 좁게 잇달아  떼어 놓으면서 바뼈 뛰는 걸음.  ●잔질다 : ①마음이 굳세지 못하고 약  하다. ②하는 짓이 잘고 다랍다.  ●잡도리 : (잘못되지 않도록)엄중하게  단속함.  ●잡을손 : 일을 다잡아 하는 솜씨.  ●장맞이 : 길목에 지켜서서 사람을 만  나려고 기다리는 일.  ●장족박 : 간장을 뜰 때 쓰는 조그만  바가지.  ●갖추다 : 동작을 재게하여 잇달아 재  촉하다.  ●장돌림 : 각 처의 장으로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장수. 장돌뱅이.  ●잦히다 : 밥이 끓은 뒤에 불을 잠깐  물렸다가 다시 불을 조금 때어 물이  잦아지게 하다.  ●재강 : 술을 걸러 내고 남은 찌꺼기.  ●재우치다 : 빨리 하도록 재촉하다.  ●저어하다 : 두려워하다.  ●적바르다 : 어떤 기준이나 한도에 겨  루 미치다.  ●적바람(뒤에 들추어 보려고) : 글을  간단히 적어 두는 일.  ●점지 : 신불(神佛)이 사람에게 자식을  갖게 해 주는 일.  ●정수리 : 머리 위에 숨구멍이 있는  자리.  ●제키다 : 살갗이 조금 다쳐서 벗겨지다.  ●조라떨다 : 일을 망치게 방정을 떨다.  ●조리차하다 : 물건을 알뜰하게 아껴  서 쓰다.  ●조치개 : 어떤 것에 응당히 딸려 있  어야 할 물건.(밥에 대하여 반찬 따  위)  ●족대기다 : ①함부로 우겨대다. ②남  을 견디기 어렵도록 볶아치다.  ●졸가리 : ①잎이 다 떨어진 나뭇가지.  ②사물의 군더더기를 다 없애 버린  나무지의 골자.  ●졸들다 : 발육이 잘 되지 않고 주접  이 들다.  ●좁쌀여우 : 됨됨이가 좀스럽고 요변  을 잘 부리는 아이를 이르는 말.  ●종요롭다 : 없으면 안 된 말큼 요긴  하다.  ●좆다 : 틀어서 죄어 매다.  ●주니 : 몹시 지루하여 느끼는 싫증.  ●주럽 : 피곤하여 고단한 증세.  ●주릅 : 구전을 받고 흥정을 붙여 주  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  ●주저롭다 : 넉넉하지 못하여 퍽 곤란  하다.  ●주저리 : 너저분한 물건이 어지럽게  매달리거나 또는 한데 묶여진 것.  ●주전부리 : 때를 가리지 않고 군음식  을 자주 먹는 입버릇.  ●주접 : 사람이나 생물이 탈이 생기거  나하여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일.  ●줏대잡이 : 중심이 되는 사람.  ●중절거리다 : 수다스럽게 중얼거리다.  ●쥐락펴락 : 자기 손아귀에 넣고 마음  대로 휘두르는 모양.  ●쥘손 : 물건을 들 때 손으로 쥐는 부분.  ●지다위 : ①남에게 의지하고 떼를 씀.  ②제 허물을 남에게 덮어씌움.  ●지돌이 : 등을 대고 가까스로 돌아가  게 된 험한 산길.  ●지실 : 재앙이나 해가 미치는 일.  ●지위 : '목수(木手)'를 높여 부르는 말.  ●지청구 : 까닭없이 남을 탓하고 원망  하는 짓.  ●직수굿하다 : 풀기가 꺾여 대들지 않  고 다소곳이 있다.  ●진솔 : 한 번도 빨지 않은 새 옷.  ●진번질하다 : 물자나 돈이 여유가 있  고 살림살이가 넉넉하다.  ●질통 : 짐을 넣어 지고 나르게 만든통.  ●짐짓 : 마음은 그렇지 않으나 일부러  그렇게. 고의로.  ●짜개 : (콩, 팥 따위의)둘로 쪼갠 한쪽.  ●짜발량이 : 찌그려져서 못 쓰게 된  물건.  ●짜장 : 과연. 정말로.  ●짝자꿍이 : ①남몰래 세우는 일이나  계획. ②서로 다투는 일.  ●째다 : ①옷이나 신발 따위가 몸이나  발보다 작아서 바짝 죄게 되다. ②일  손이 모자라서 일에 쫓기다. ③베어  가르거나 찢다.  ●째마리 : 사람이나 물건 가운데서 가  장 못된 찌꺼기.  ●쭉정이 : 껍질만 있고 알멩이가 들지  않은 곡식이나 과실의 열매.  ●찌그렁이 : 남에게 무리하게 떼를 쓰  는 짓.  ●찜부럭 : 몸이나 마음이 괴로움 때에  결핏하면 내는 짜증.  ㅊ  ●차돌박이 : 양지머리뼈 한복판의 기  름진 고기.  ●차반 : ①맛있게 잘 차린 음식. ②예  물로 가져가는 맛있는 음식.  ●척(隻)을 짓다 : 서로 원한을 품을 만  한 일을 만들다.  ●천둥 벌거숭이 : 두려운 줄 모르고  함부로 날뛰기만 하는 사람.  ●천둥지기 : 비가 와야만 모를 심을  수 있는 논. 천수담(天水畓).  ●천세나다 : (어떤 물건이)사용되는 데  가 많아서 퍽 귀하여지다.  ●첫밗 : (행동이나 일을 시작해서)맨  처음의 국면.  ●초들다 : 어떤 사물을 입에 올려서  말하다.  ●초라떼다 : 격에 맞지 않는 짓이나  차림세로 말미암아 창피를 당하다.  ●추레하다 : ①겉모양이 허술하여 보  잘 것 없다. ②생생한 기운이 없다.  ●추지다 : 물기가 배어서 몹시 눅눅하다.  ●치사람 : 손윗사람에 대한 사랑.  ●치신없다 : 몸가짐이 경망스러워 위  신이 없다.  ㅋ  ●켕기다 : ①팽팽하게 되다. ②불안하  고 두려워지다.  ●코뚜레 : 소의 코를 뚫어서 꿰는 고  리 모양의 나무.  ●코숭이 : 산줄기의 끝.  ●콩케팥케 : 사물이 마구 뒤섞여 뒤죽  박죽된 것을 가리키는 말.  ●큰상물림 : 혼인 잔치 때 큰상을 받  았다가 물린 뒤, 받았던 이의 본집으  로 싸서 보내는 음식.  ●킷값 : 키가 큰 만큼 부끄럽지 않게  행동함을 일컫는 말.  ㅌ  ●타끈하다 : 인색하고 욕심이 많다.  ●타래버선 : 들 전후의 어린아이들이  신는 누비버선의 한 가지.  ●타울거리다 : 뜻한 바를 이루려고 애  를 쓰다.  ●터럭 : 사람이나 짐승의 몸에 난 길  고 굵은 털.  ●터알 : 집의 울 안에 있는 작은 밭.  ●톡탁치다 : 옳고 그름을 가릴 것 없  이 다 없애 버리다.  ●틋 : 김 40장씩을 한 묶음으로 묶은  덩이.  ●투미하다 : 어리석고 둔하다.  ●튀하다 : (세나 짐승 따위를)털을 뽑  기 위해 끓는 물에 잠깐 넣었다가  꺼내다.  ●트레바리 : 이유 없이 남의 말에 반  대하기를 좋아하는 성격.  ●들거지 : 듬직하고 위엄이 있는 겉모양.  ㅍ  ●파임내다 : 일치된 의논에 대해 나중  에 딴소리를하여 그르치다.  ●판들다 : 가진 재산을 함부로 써서  죄다 없애다.  ●판수 : 점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소  경. cf)판수 익다 : 전체의 사정에 아  주 익숙하다.  ●푸네기 : 가까운 제살붙이.  ●푸닥거리 : 무당이 하는 굿.  ●푸접없다 : 남에게 대하는 태도가 쌀  쌀하다.  ●푹하다 : 겨울 날씨가 춥지 아니하고  따뜻하다.  ●푼더분하다 : ①얼굴이 두툼하여 탐  스럽다. ②여유가 있고 넉넉하다.  ●푼푼하다 : 모자람이 없이 넉넉하다.  ●풀무 : 불을 피울 때 바람을 일으키  는 기구.  ●품앗이 : 힘드는 일을 서로 거들어  주면서 품을 지고 갚고 하는 일.  ●풍년(豊年) 거지 : 여러 사람이 다 이  익을 보는 데 자기 혼자만 빠진 것  을 비유하는 말.  ●피새 : 조급하고 날카로워 걸핏하면  화를 내는 성질.  ●피천 : 아주 적은 액수의 돈.  ㅎ  ●하냥다짐 : 일이 잘 안되는 경우에는  목을 베는 형벌이라도 받겠다는 다짐.  ●하늬 : 농가나 어촌에서 '서풍(西風)'  을 이르는 말.  ●하릅 : 소·말·개 등의 한 살 된 것.  ●하리놀다 : 윗사람에게 남을 헐뜯어  일러바치다.  ●하리다 : ①마음껏 사치를 하다. ②  매우 아둔하다.  ●하리들다 : 일이 되어 가는 중간에  방해가 생기다.  ●하릴없다 : ①어찌 할 도리가 없다.  ②조금도 틀림이 없다.  ●하비다 : ①손톱이나 날카로운 물건  으로 긁어 파다. ②남의 결점을 들추  어 내서 헐뜯다.  ●한겻 : 하루의 4분지 1인 시간.  ●한둔 : 한데서 밤을 지냄. 노숙(露宿).  ●한사리 : 음력 매달 보름과 그믐날,  조수가 가장 높이 들어오는 때. cf)한  무날 : 조수 간만의 차가 같은 음력  열흘과 스무닷새를 아울러 이르는  말.  ●한풀 : 어느 정도의 끈기나 기세.  ●할경 : ①말로 업신여기는 뜻을 나타  냄. ②남의 떳떳하지 못한 근본을 폭  로하는 말.  ●함진아비 : 혼인 전에 신랑측에서 신  부측에 보내는 함을 지고 가는 사람.  ●함초롬하다 : 가지런하고 곱다.  ●함함하다 : 털이 부드럽고 윤기가 있다.  ●핫아비 : 아내가 있는 남자. (반:홀아  비).  ●핫옷 : 솜을 넣어서 지은 옷.  ●해거름 : 해가 거의 넘어갈 무렵.  ●해껏 : 해가 넘어갈 때까지.  ●해소수 : 한 해가 좀 지나는 동안.  ●해찰 : 물건을 이것저것 집적이어 해  치는 짓.  ●해찰하다 : 일에는 정신을 두지 않고  쓸데없는 짓만 하다.  ●행짜 : 심술을 부려 남을 해치는 행위.  ●허구리 : 허리의 좌우쪽 갈비 아래의  잘룩한 부분.  ●허닥하다 : (모아 둔 것을)덜어서 쓰  기 시작하다.  ●허드레 : 함부로 쓸 수 있는 허름한 것.  ●허룩하다 : 줄어들거나 없어지다.  ●허룽거리다 : 언행이 경망스럽다.  ●허릅숭이 : 언행이 착실하지 못하여  미덥지 못한 사람.  ●허물하다 : 허물을 들어 나무라다.  ●허발 : 몹시 주리거나 궁하여 함부로  먹거나 덤비는 일.  ●허방 : 움푹 팬 땅. cf)허방(을)치다 :  바라던 일이 실패로 돌아가다.  ●허섭쓰레기 : 좋은 것을 고르고 난  뒤의 찌꺼기 물건.  ●허수하다 : (모르는 사이에 없어져 빈  자리가 난 것을 깨닫고)허전하고 서  운하다.  ●허출하다 : 허기가 져서 출출하다.  ●헛물켜다 : 이루어지지 않을 일을 두  고, 꼭 되려니 하고 헛되이 애를 쓰다.  ●헛장 : 풍을 치며 떠벌리는 큰소리.  ●허대다 : 공연히 바쁘게 왔다갔다 하다.  ●헤먹다 : 들어 있는 것보다 구멍이  헐거워서 어울리지 않다.  ●헤살 : 짓궂게 훼방하는 짓.  ●헤식다 : ①단단하지 못하여 헤지기  쉽다. ②탐탁하지 못하다.  ●호다 : 바느질할 때 헝겊을 여러 겹  겹쳐서 성기게 꿰매다.  ●호드기 : 물오른 버들가지나 짤막한  밀짙 토막으로 만든 피리.  ●호락질 :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 가  족끼리 짓는 농사.  ●홀앗이 : 살림살이를 혼자 맡아 처리  하는 처지.  ●홀지다 :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다.  ●화수분 : 재물이 자꾸 생겨서 아무리  써도 줄지 않음을 이르는 말.  ●홰 : ①새장·닭장 속에 새나 닭이  앉도록 가로지른 나무 막대. ②옷을  걸도록 방안 따위에 매달아 둔 막대  (횃대).  ●확 : ①돌이나 쇠로 만든 절구. ②절  구의 아가리로부터 밑바닥까지 팬곳.  ●회두리 : 여럿 중에서 맨 끝, 맨 나중  에 돌아오는 차례.  ●훈감하다 : ①맛과 냄새가 진하고 좋  다. ②푸짐하고 호화스럽다.  ●흥글방망이놀다 : 남의 일이 잘 되지  못하게 훼방하다.  ●흐드러지다 : ①썩 탐스럽다. ②아주  잘 익어서 무르녹다(흐무러지다).  ●허벅지다 : 탐스럽게 두툼하고 부드  럽다.  ●희나리 : 덜 마른 장작.  ●희떱다 : ①속은 비었어도 겉으로는  호화롭다. ②한푼 없어도 손이 크게  마음이 넓다.   채택된 답변답변추천해요7추천자 목록 1. 예그리나 : '사랑하는 우리사이 2. 온새미로 : 자연 그대로, 언제나 변함없이 3. 라온제나 : 즐거운 나온 4. 시나브로 : [부사]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5. 가랑비 : 조금씩 내리는 비 6. 가온길 : 정직하고 바른 가운데(가온대: 옛말) 길로 살아가라고 지은 이름. 7. 가온누리 : 무슨 일이든 세상(누리: 옛말)의 중심(가온대: 옛말)이 되어라. 8. 그루터기 : 나무나 풀 따위를 베어 낸 뒤의 남은 뿌리 쪽의 부분 9. 그린나래 : 그린 듯이 아름다운 날개 10. 길가온 : 길 가운데 11. 꽃가람 : 꽃이 있는 강 12. 꽃내음 : 꽃의 냄새 13. 늘솔길 : 언제나 솔바람이 부는 길 14. 도란도란 : 나직한 목소리로 정답게 서로 이야기하는 소리 15. 도래솔 : 무덤가에 죽 늘어선 소나무 16. 도리도리 : 어린아이가 머리를 좌우로 흔드는 동작 17. 마중물 : 펌프에서 물이 안 나올 때에 물을 이끌어 내기 위하여 위로부터 붓는 물 18. 멱부리 : 턱밑에 털이 많은 닭 19. 미리내 : 은하수 20. 미쁘다 : 믿음성이 있다 21. 미투리 : 삼이나 노 따위로 짚신처럼 삼은 신 22. 비마중 : 비를 나가 맞이하는 일 23. 살랑살랑 : 조금 사늘한 바람이 가볍게 자꾸 부는 모양. 24. 서리서리 : 국수나 새끼 등을 헝클어지지 않게 빙빙 둘러서 포개 감는다는 것  25. 송아리 : 열매나 꽃 등이 잘게 한데 모이어 달린 덩어리 26. 아지랑이 : 봄날 햇빛이 강하게 쬘 때 공기가 공중에서 아른아른 움직이는 현상 27. 안다미로 : [부사]담은 것이 그릇에 넘치도록 많이 28. 여우비 : 해가 난 날 잠깐 내리는 비 29. 우수리 : 물건 값을 치르고 거슬러 받는 잔돈 30. 이슬비 : 조금씩 내리는 비 31. 재넘이 : 산으로부터 내리 부는 바람 32. 죄암죄암 : 젖먹이가 두 손을 쥐었다 폈다 하는 동작 33. 해찬솔 : 햇빛이 가득 차 더욱 푸른 소나무 34. 희나리 : 채 마르지 않은 장작 35. 흰여울 : 물이 맑고 깨끗한 36. 여울가녘(순우리말) : 가장자리. 여가리. 37. 개미 : 맛에 있어서 보통 음식맛과는 다른 특별한 맛으로 남도 음식에만 사용되고 있는 말. 38. 가론(순우리말): 말하기를, 이른 바(所謂). 39. 가시 (순우리말) : ① 안해, 아내(妻는 가시라) ② 계집 40. 개랑 : 매우 좁고 얕은 개울. 41. 개힘: 본래 있는 힘이 아니고, 분위기나 기분에 휩쓸려서 일시적으로 나는 힘. 42. 걸 때 : 사람의 몸피의 크기. 43. 한무릎 : 한동안 착실히 하는 공부. 44. 한지잠 : 한데에서 자는 잠. 45. 한추렴 : 여럿이 추렴할 때의 그 한 몫. -한추렴 들다-는, - 추렴하는 데에 한 몫 끼거나                   이득을 본다 - 는 뜻이다. 46. 간조롱(순우리말) : 가지런. 47. 해지개 : 해가 서쪽 지평선이나 산너머로 넘어가는 곳. 48. 가욋길(순우리말) : 기준이나 필요 밖의 길. 즉, 안 가도 되는 길. 49. 가을귀(순우리말) : 가을의 예민한 소리를 들어내는 섬세한 귀를 비유한 말. 50. 해까닥 : 갑자기 얼이 빠지거나 정신이 나간 모양. 51. 해뜰참: 해가 돋을 무렵. 52. 가지등(순우리말) : 가로등. 기둥이 갈래를 이루어 두 개 이상의 전등이 달린 것을 말함. 53. 해대기 : 적을 쳐부수기 위하여 앞으로 나아감. 공격. 54. 허리달 : 연의 가운데에 가로 붙인 대. 55. 매미꽃 : 애기똥풀과의 다년초. 56. 갈매빛(순우리말) : 검은 빛깔이 돌 정도로 짙은 초록 빛. 흔히 멀리 보이는 아득한 산빛이 이런 빛을 띰. 진갈매는 매우 짙은 검푸른색. 57. 맥적다 : 심심하고 무름하다. 58. 맨마루 : 일의 진행에서 가장 고비가 되는 곳. 절정. 59. 맞손질 : 서로 맞서 때리는 일. 즉, 마주 싸우는 짓. 60. 맞빨이 : 딴 옷이 없어서 옷을 빨아 말려서 바로 입도록 하는 빨래. 61. 맛조이 : 마중하는 사람. 영접하는 사람. 62. 맛깔손 : 맛깔을 내는 손. 즉 좋은 요리솜씨. 63. 한말글 : 우리 나라 말과 글. 64. 맺음새 : 일 따위를 마무르는 모양새. 65. 머슴밥: 수북하게 많이 담은 밥. 머슴이 밥을 많이 먹는 데서 나온 말. 66. 머즌일 : ①궂은 일 ② 재화(災禍). 67. 갈기슭(순우리말) : 갈대가 우거진 비탈. 68. 먹딸기 : 아주 새빨간 딸기. 붉은 색이 지나쳐 먹빛으로 보인다. 69. 멈짓체: 잠깐 멈추는 체. 또는, 짐짓 멈추는 듯함. 70. 한뎃집 : 한데에 허술하게 지어 놓은 집. 71. 맨삶이 : (고기나 생선 따위를) 간을 하지 않고 삶거나 찌는 일. 또는 그렇게 만든 음식. 72. 가림새(순우리말) : 숨기거나 감추는 바 73. 흙이랑 : 물가에 생긴 흙의 주름. 물결의 출렁임에 따라 저절로 생긴다. 74. 휑하니: 주저하거나 거침 없이. 75. 훌림목: 애교 띤 목소리. 76. 훌걸이 : 싸잡아 걸어서. 77. 휘들램 : 이리저리 마구 휘두르는 짓. 78. 흡뜨다 : 눈알을 굴려 눈시울을 위로 치켜뜨다. 79. 흰두루 : [백두산]의 다른 이름. [흰+두루(다)]의 결합. 항상 흰구름을 이마에 두르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80. 흰여울 : 물이 맑고 깨끗한 여울. 81. 흰추위 : 온누리가 눈과 얼음으로 얼어붙은 한겨울의 추위. 추위를 빛깔로 형상화한 말이다. 82. 가리매(순우리말) : 실내에서 편히 입을 수 있게 만든 옷. 위아래가 통으로 되어있고, 단추가 없이 그냥 둘러걸쳐 허리띠를 메게 되어 있다. 83. 찬바리 : 짐을 가득 실은 바리. 84. 허리품 : 허리를 쓰는 일. 즉 요분질. 85. 횃대비: 굵게 좍좍 쏟아지는 빗줄기. 86. 횃눈썹 : 가장자리가 치켜 올려 붙은 눈썹. 87. 황소숨 : 식식대며 크게 몰아쉬는 숨. 88. 황소눈 : 크고 굼뜨게 끔뻑거리는 눈. 89. 화가마 : 불을 지펴 놓은 가마. 90. 홀림길 : 어지럽게 갈래가 져서 섞갈리기 쉬운 길. 91. 호습다 : 무엇을 타거나 할 때 즐겁고 짜릿한 느낌이 있다. 92. 헤벌심: 입 따위가 헤벌어져 벌쭉한 모양. 93. 헛장사 : 이윤을 남기지 못하고 하는 장사. 94. 헛소동 : 공연히 일으키는 헛된 소동 95. 헛매질 : 때릴 듯이 위협하는 짓. 또는, 빗나간 매질. 96. 헛나발 : [헛소리]의 속된말. 97. 가시내(순우리말) : 계집아이. 가시내 라는 말은 계집애 라는 뜻으로서, 전라도 지방에서 많이 쓰이는 말이다. 98. 허우룩 : 마음이 매우 서운하고 허전한 모양. 99. 가막새(순우리말) : 까마귀, 까치 등 검은 빛의 새. 100. 참없다 : 그치거나 멈춤이 없다.   답변추천해요4추천자 목록   **************************순우리말******************************* 1.온누리:온세상 2.마루:하늘 3.그린내:연인 4.가시버시:부부 5.미리내:은하수 6.비나리:축복 7.힌여울:물이맑고 깨끗한 8.이슬비:조금씩내리는비 9.난이:공주     답변추천해요2추천자 목     답변추천해요1추천자 목록 두레박이 춤을춘다   답변추천해요    
271    야구를 하는 방법을 알아야 재미있는데... 댓글:  조회:7657  추천:0  2015-10-13
[ 2015년 10월 14일 08시 54분 ]       야구하는 방법 포수, 투수, 1루수, 2루수, 3루수, 유격수 가 있는곳이 '내야' 이며 좌익수, 중견수, 우익수가 있는곳이 '외야' 입니다. 사진에서 보시면 '1루수' 밑에 있는 하얀색이 1루, '3루수' 밑에 있는 하얀색이 3루 '유격수' '2루수' 중간에 있는 하얀색이 2루, 포수 위에있는 5각형 하얀색이 홈(본루) 입니다. 또 본루에서 1루로 이어지는 선을 보면 튀어 나와있는 선을 보실수 있을겁니다. 이것을 스리피트라인 이라고 불리웁니다. 이 선은 타자가 공을 치고 1루로 달려나가는데, 투수나 1루수의 테그를 피하기 위하여 피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 이 선을 넘으면 자동적으로 아웃으로 처리됩니다. (태그에 대한 설명은 밑에 나와있습니다.) 야구는 선수 한명이 1루->2루->3루 를 차레로 밟고 마지막으로 홈을 밟아야 1점이 주어지는 스포츠이며 구기 스포츠중 유일하게 사람이 득점 하는 경기 입니다. 야구선수 수비위치 이름 ------------------------------------------ 번호 :: 약자-수비이름 (영어약자 - 영어표기) ------------------------------------------ 1 :: 포-포수 (C - CATCHER) 2 :: 투-투수 (P - PITCHER) 3 :: 1-1루수 (1B - FIRST BASEMAN) 4 :: 2-2루수 (2B - SECOND BASEBAM) 5 :: 3-3루수 (3B - THIRD BASEMAN) 6 :: 유-유격수 (SS - SHORT STOP) 7 :: 좌-좌익수 (LF - LEFT FIELDER) 8 :: 중-중견수 (CF - CENTER FIELDER) 9 :: 우-우익수 (RF - RIGHT FIELDER) ------------------------------------------ * 수비를 하지않는 지명타자도 있습니다. 지명타자는 수비는 안하고 타격만하는 타자 입니다.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위에 나열된 포지션의 수는 9명입니다. 한국프로야구에서는 위9명중 투수를 제외한 나머지 8명이 타격을 하고, 투수 대신 타격을 하는 선수를 지명타자라고 합니다. 야구장 규격 투수 마운드(투수가 공을 던지는 곳) 와 홈(타자) 까지 거리는 18.44미터 입니다. 그러나 투수가 공을 던져 실재 공이 날아가는 거리는 약 16.5미터입니다. 물론 투수의 체격(팔길이)에 따라 약간 다릅니다. 그리고 각 루, 홈과 1루, 1루와 2루, 2루와 3루, 3루와 홈 의 거리는 각각 27.32미터입니다. 27.32*4 = 109.28 수비 하는법 (아웃 잡는법) ====================================================== 야구에서 공격하는 팀은 3아웃 되기전에 점수를 내야하며, 수비하는 팀은 점수를 주기전에 먼저 3아웃을 잡아야 합니다. 3아웃이 되면 공수 교대. ======================================================= 1.플라이 아웃 (인필드 플라이 아웃) 2.땅볼 아웃 (병살타.삼중살) 3.라인드라이브 아웃 4.삼진 아웃 5.희생타 6.인필드플라이 아웃 7.터치아웃 테그아웃 차이점 ====================================================== 1. 플라이 아웃. 플라이 아웃은. 타자가 친공이 바운드 안된상태에서 높이 뜬공을 야수가 그 공을 잡는 것 입니다. 그러나 글러브 외 다른것(모자)으로 잡으면 3루타로 처리된다. * 인필드플라이아웃 은 주자가 나가 있는 상황에서 타자가 내야 플라이볼을 쳤는데 야수가 병살타나 삼중살을 유도 할려고 고의로 떨어트리는 걸 막기 위하여 생겨난 규칙입니다. 그래서 주자가 나가있을떼 타자가 내야 플라이 볼을 치면 (야수가 놓쳐도) 자동으로 아웃 처리됩니다. 2. 땅볼아웃 (병살타.삼중살) 땅볼아웃은 바운드가 된 타구이며, 이 공을 타자가 1루에 도달하기전에 내야수가 공을 잡아. 1루에 던져서 아웃 시키는것 입니다. 그러나 타자가 공보다 빨리 1루에 도달하면 안타(내야안타)로 처리 됩니다. * 병살타 는 한번에 2아웃을 잡는걸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주자 1루 상황에서 타자가 2루수 땅볼을 치면 2루수는 1루주자가 2루에 오기전에 2루를 밟아 터치 아웃후 1루주자가 1루에 도달하기 전에 1루수에 공을 던지면 병살타가 됩니다. * 삼중살 도 비슷하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주자 1.2루에서 타자가 3루 땅볼을 치면, 3루수가 공을 잡자 마자 3루 터치아웃 ->2루수 송구 아웃 ->1루수 송구 아웃. 이런식으로 삼중살이 되는 겁니다. * 하지만 병살타와 삼중살을 시키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위에는 그중 일부를 인용하여 설명한것 입니다. 3. 라인드라이브 아웃. 라인드라이브 아웃은 직선타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것도 역시 공이 바운드 한번도 안된 상태를 말하며 내야에서 자주 일어 납니다. (간간히 외야에서도 발생함). 라인드라이브로도 병살.삼중살 플레이를 보실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 하자면, 주자가 1루에 나가 있습니다. 그때 타자가 투수공을 받아칩니다. '딱!" 소리와 함께 공은 일직선으로 내야수의 글러브에 쏙 들어갑니다. (그럼 타자 아웃), 그리고 안타가 될줄알고 스타트를 끊었던 1루주자는 1루로 다시 돌아가기전에 야수의 송구나 태그로 아웃이 됩니다. (만약 그 직선타구를 1루수가 잡았으면 1루수는 베이스를 터치하면되며, 다른 야수가 잡았다면 그 야수는 1루에 송구하여야 합니다.) 대부분 라인드라이브 아웃은 잘맞은 타구가 아웃 되는것이기에 주자가 안타일줄 알고 스타트를 미리 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겁니다. 운이 나쁘면 주자가 2명 나까있을떼 걸리면 3중살이 되는 겁니다. 4. 삼진아웃 삼진아웃은 투수가 스트라이크 3게를 던지는 것입니다. 스트라이크에는 스트라이크존을 통과한공, 헛스윙 파울이 스트라이크로 기록됩니다. 그러나 2스트라이크이후의 파울은 스트라이크로 인정 하지 않습니다. 5.터치아웃 테그아웃 차이점 위에 설명된 아웃잡는 방법중에 보통 테그아웃과 터치아웃으로 마무리 됩니다. 테그 아웃은 공이 있는 글러브를 주자를 터치 하는 경우 - 테그아웃 터치 아웃은 공이 있는 글러브를 들고 루(베이스)을 터치하면 - 터치아웃 입니다. * 태그 아웃 은 이럴때 사용됩니다. 예을 들어서 무사 2루에서 타자가 3루 땅볼을 쳤습니다. 이때 2루주자 는 3루로 달려갑니다. 이때 공을 잡은 3루수는 2루주자를 태그 아웃시킵니다. 그이유는 만약 3루베이스를 밟아 터치아웃을 한다면 2루주자는 아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아웃이 아니냐면 그이유는 2루주자는 다시 2루로 돌아갈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2루가 비어있으니깐 말이죠. * 터치아웃 은 대게 위상황과 반대로 이용됩니다. 예을 들면, 무사 1.2루에서 타자가 3루 땅볼을 쳤습니다. 이때 2루주자는 3루, 1루주자느 2루로 달려 갑니다. 이때 공을 잡은 3루수는 3루를 터치하여 2루주자를 아웃시킵니다. 왜 여기선 태그아웃을 안헤도 되냐면, 2루주자는 이미 뒤로 돌아갈수 없기 때문입니다. 1루주자가 2루로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죠, 1루에는 타자가 달려나가고. 위에 설명된 어느 방법으로든 3아웃만 잡으면 수비하는 팀은 수비를 끝내고 공격에 들어갈수 있습니다. 공격하는 법 (점수 얻는 법) ======================================================= 야구에서 공격하는 팀의 선수가 3아웃이 되기전에 1루->2루->3루 를 차레로 밟고 마지막으로 홈을 밟아 최대한 많은 점수를 뽑아야 한다. ======================================================= 안타 (2루타.3루타) 그라운드 홈런 홈런 실책 4구 도루 ======================================================= 1. 안타 안타는 타자가 공을 쳐서 1루에 갓을떼를 말합니다.(수비가 공을 잡기전에 땅에 닿아야합니다. 그리고 수비가 1루에 송구하기전에 1루에 도달헤야합니다) * 2루타 타자가 공을 쳐서 한번에 2루까지 가는걸 말합니다. (공이 1바운드로 튕겨서 담장을 넘어가는 경우도 있는데 이경우에는 모조건 2루타로 처리됩니다.) * 3루타 타자가 공을 쳐서 한번에 3루까지 가는걸 말합니다. 야구에서 가장 나오기 어렵다는 기록입니다.   2. 홈런 홈런은 타자가 친공이 외야담장을 넘어가면. 타자는 수비의 방해받지안고. 1-2-3루를 돌아 여유있게 홈에 들어올수있습니다. 홈런을 칠떼 주자가 있으면 그 주자도 득점을 올릴수있습니다. 그런대 반드시 1.2.3.홈 을 밟아야 득점 인정됩니다. 만약 1루만 밟고 2.3홈을 안 밟았다면, 즉시 아웃으로 처리되고 기록에는 안타(1루타)로 처리됩니다. 루상에 주자에 따라 1점 2점 3점 만루(4점) 홈런이 있습니다. * 그라운드 홈런 타자가 공을 쳐서 한번에 본루까지 들어오는 경우를 말합니다. 단 일반 홈런과는 다르게 수비가 있으며, 전력질주를 헤야 합니다. 야구에서 가장 나오기 어렵다는 기록중 하나   3. 실책 실책은 수비수 의 실수로(아웃잡을수있는 타구를 실수로 놓쳐 아웃을 못잡는것) 1루에 타자가 진출하는겁니다.   4. 4구(死구) 사구는 투수가 스트라이크가 아닌 볼을 4번 던지면 자동으로 걸어서 1루에 가는겁니다. 또, 투수가 던진공 이 타자에 맞으면 사구(死구)이며 이것도 역시 자동으로 1루에 진출할수있습니다. 그러나 타자가 고의로 공에 몸을 데면 수비방헤로 아웃이됩니다. 그리고 또 강타자를 피하기 위하여 고의로 볼을 연속 4번 던지 는 경우는 '고의사구'라고 합니다. 5. 도루 도루는 주자가 다음 루를 훔치는 것을 말합니다. 보통 1루에 진루했을데 다음 루인 2루를 훔칩니다. 2루에서 3루를 훔치는 경우도 있지만 드뭅니다. 그 이유는 포수가 송구할수 있는거리가 2루가 가장 멀기 때문입니다. 도루를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면 타자가 (위에 설명한 어떠한 공격 상황, 홈런 제외) 1루에 나가면 그때 1루주자는 투수가 와인드업(공을 던질려는 자세)를 하면 2루로 달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면 상대팀 포수는 투수가 던지 공을 잡아서 바로 2루에 송구, 주자가 2루에서 세이프되면 도루성공이고 실패하면 도루실패가 되는겁니다. 6. 희생타 희생타는 1아웃이나 무사에만 가능합니다. 자기가 아웃되는 대신 다른 주자 1루더 진루하게 하는것을 말 합니다. 희생타 종류에는 '외야플라이' '번트' '스퀴즈 번트' 가 있습니다. * 외야플라이 는 주자가 나가있을떼 타석에 들어선 타자가 외야쪽으로 플라이 타구를 쳤을떼 야수가 그 플라이 타구 공을 잡으면 루상에 주자는 다음 루로 갈수있다. 단 주자는 반드시 베이스(루)에 발을 밟고 있어야 하고. 플라이 타구가 야수에게 잡히기전에는 뛸수가 없다 잡히기전에 발을 베이스에서 뗀다면 무효처리 된다. [예] 지금은 뉴욕양키스 와 클리블랜드와의 경기. 클리블랜드의 공격. 주자는 3루. 1아웃. 타석에는 추신수. 이때 추신수 선수는 공을 외야 밖으로 멀리 날려보냈으나 공은 외야수에게 잡히고 만다. 하지만 그공이 외야수 글러브 속에 들어가는 동시에 3루자는 베이스에서 발을 떼며 바로 홈으로 들어와 1점을 얻었다. (만약 주자가 2루에 있었다면 3루로, 1루에있었다면 2루로 갈수있다. 그러나 주자들은 상황을 판단하고 달리기 떼문에 대부분 1루에서 2루까지 가기는 힘들다. 그리고 만약 외야수가 어께가 좋아 바로 홈에다 송구할수있으면 3루주자는 자신의 판단으로 홈으로 안뛴다. 그래서 희생타는 외야 멀리 날라가는게 가장 좋다) * 번트 도 자신이 아웃이 되면서 주자를 다음 배이스(루)로 진루하게 만드는 타격이다. 번트는 주자가 1루, 혹은 1,2루에 있을때 하는 작전이다. 번트는 일반 타격과 다르게 공을 최대한 약하게 타격을 하여 포수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공을 떨어트리는 타격을 말한다. [예] 지금은 롯데랑 삼성의 경기 주자는 무사. 1루 타석에는 조동찬. 조동찬은 초구에 투수앞에 번트를 하자1루주자는 2루까지 성공적으로 갔으며 투수는 공을 잡아 1루에 던져 조동찬 선수를 아웃 시켰습니다. (만약 실패를 하면 조동찬은 사는 대신에 2루로 뛰던 1루주자는 아웃이될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두선수다 아웃이 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운이 좋으면 두선수다 살수있습니다. 이경우는 휘생번트라고 할수없습니다.) * 스퀴즈 번트 스퀴즈 번트는 주자가 3루에있을떼 3루주자를 홈으로 불려드리는 번트다. 미국에서는 '쑤어싸이드 스퀴즈' 라고 불리운다. 쑤어싸이드(Suicide)는 자살이라는 뜻이다. [예] 지금은 삼성과 KIA의 경기. 삼성의 공격 1사 3루, 3루 주자는 박한이 타석에는 김상수. 김상수는 초구 1루수 앞으로 스퀴즈 번트를 헸다. 그러자 박한이 선수는 곧바로 달려 3루에 들어와 1점을 얻었다. 그러나 1루수는 공을잡아 1루를 밟아 김상수를 아웃이 시켰다다. (스퀴즈 작전이 나오면 3루주자는 투수가 공을 던지자 마자 바로 3루에서 홈으로 뛴다. 그때 타자는 번트를 데면 3루주자는 홈인을 할수가 있다. 그러나 타자는 아웃이 되고만다. 그러나 실패하면 3루주자는 홈에서 태그아웃될수도 있으며, 운이 좋으면 타자 주자 역시 살수가 있다.)   총 획득 메   답변추천해요0 야구의 기원과 규칙에 대하여 답변 드립니다.  - 야구의 기원  야구의 기원은 확실하게 찾아내기가 힘든데 1344년에 출간된 프랑스의 한 책에 성직자들이 야구와 흡사한 라 술(La soule)이라는 게임을 즐기는 모습을 담은 삽화가 실려있습니다.  원래 야구는 미국의 애브너 더블데이라는 군인 출신의 인물이 1839년에 쿠퍼스타운에서 창안했다고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그가 직접 야구를 창안했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으며, 광산 기술자 출신의 애브너 그레이브스의 증언이 있었으나 별로 신뢰하기 어렵기 때문에 야구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전해진 것으로 추측만 되고 있습니다.  - 야구의 발전  1860년대 이미 미국에서는 야구가 대중적인 스포츠로 자리 잡았습니다.  아마추어 시대는 1871년 3월 17일, 전미프로야구선수협회가 창설됨으로써 그 막을 내렸습니다.  1869년, 최초의 프로 야구 팀 신시내티 레드 스타킹스가 창단 되었으며 1875년에는 내셔널 리그가 창설되었습니다.  1882년에는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이 창설되었고 1901년에는 이를 전신으로 하는 아메리칸 리그가 창설되어 양대 리그체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1903년에는 양 리그의 우승 팀간의 승자를 겨루는 월드 시리즈는 "월드신문사"의 이름으로써 신문사에서 스폰서를 해주기 때문에 월드시리즈라는 이름으로 처음으로 치러졌으며, 1933년에는 올스타전이 처음으로 치러졌습니다.  - 세계의 야구  야구는 미국의 대표적인 스포츠 중 하나며,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팬들의 지지에 기반한 야구 체계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캐나다 야구의 역사는 미국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데, 1877년 프로리그와 국제 협회에서 두 나라로 이루어진 특색있는 팀을 만들기도 했었습니다.  세계적으로 미국과 캐나다가 아닌 다른 공식적 첫 야구 리그는 쿠바의 야구 리그입니다.  쿠바는 오랜 전통을 유지하며 1930년대 후반부터 국제 경기에서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는 팀이라는 명예를 얻게 됩니다.  - 한국 야구  한국에 야구가 처음 들어온 것은 1905년으로, 당시 선교사로 온 미국인 질레트가 황성기독교청년회 회원들에게 야구를 가르친 것이 그 시초입니다.  1906년 2월 11일 훈련원 터에서 YMCA팀 대 독일어학교팀 사이에 최초의 야구경기가 열렸습니다.  - 2015년 프로야구 변경된 경기규칙  타자는 타석에 들어서면 고의로 타석을 이탈할 수 없으며 공수 교대시간 후 타자의 타석 입장시간은 2분으로 엄격히 적용하며. 사구와 볼넷 시 뛰어서 출루해야 하며, 이닝 중 투수 교체 시간은 2분 45초에서 2분 30초로 단축되었습니다.  - 야구장 관람 매너규칙  야구장 내 주류 및 캔, 병, 1l 초과의 페트병 음료 반입 금지.  1인당 가방 가로 45cm X 세로 45cm X 폭 20cm로 제한.  쇼핑백은 가로 30cm X 세로 50cm X 폭 12cm로 1개까지 허용.  상자, 아이스박스, 칼, 가위 반입금지. 카메라 가방, 쇼핑백에 담긴 간단한 음식물은 허용. - 경기 진행 방식  프로야구는 한 팀당 9명(경기출장기준)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경기는 총 9회에 걸쳐서 진행됩니다.  각 회마다 초와 말로 나뉘어 진행되고 각 팀의 공격과 수비를 번갈아가며 진행하게 됩니다.  초에는 홈팀이 수비를 하고 말에는 상대팀이 수비를 하게 됩니다.  - 점수 획득 방식  공격시 타자가 공을 친 후 1,2,3루 베이스를 지나서 홈으로 들어오게 되면 1점을 획득하게 됩니다.  홈으로 들어오는 사람의 수가 많으면, 그 만큼의 점수를 획득하는 방식입니다.  - 포지션  투수 : 수비팀에서 공격팀 타자에게 공을 던지는 포지션의 선수  포수 : 투수가 던진 공을 받는 포지션의 선수  타자 : 수비팀의 투수가 던진 공을 배트로 치는 포지션의 선수  루수 : 1루, 2루, 3루 포지션에서 수비를 하는 선수  외야 : 좌익수, 중견수, 우익수, 유격수는 외야 포지션의 선수  - 파울  파울은 공이 내야와 외야가 아닌 파울존으로 떨어졌을 경우를 말합니다.  파울은 1스트라이크 처리가되며, 2스트라이크 상황에서 이어지는 파울은 스트라이크 처리되지 않습니다.  즉, 10번의 파울을 쳐도 스트라이크로 처리되지 않습니다.  - 스트라이크  타자가 공을 치지않고 헛스윙한 경우  투수가 던진 공이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한 경우  타자가 파울존으로 공을 친 경우 (스트라이크 1번)  스트라이크가 3번이되면 1아웃이되며 다음 타순의 타자가 공격을 하게 됩니다.  - 볼  투수가 20초 이상 공을 던지지 않았을 때  투수가 공을 던지려고 하다가 갑자기 멈췄을 때  투수가 던진 공이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났을때  볼이 4개가 될 경우 타자는 자동으로 1루로 진루하게 됩니다. (밀어내기 가능)  - 아웃  투수가 던진 공 3개가 스트라이트 되었을 경우 타자는 아웃되고 다음 타순으로 넘어갑니다.  플라이볼(뜬공) : 타자가 친 공이 지면에 닿지 않은 상태에서 수비수가 잡았을 때  그라운드볼(땅볼) : 타자가 친 공이 지면에 1회 이상 닿고 수비수가 받아서 주자가 있는 1루, 2루, 3루에 던져 포스아웃 하거나 태그 아웃 할 수 있습니다.  타자가 친 공이 추루하고 있던 주자가 맞았을 때 전문    답변추천해요0 야구(野球, baseball)는 9명 또는 10명으로 구성된 두 팀이 방망이와 공을 사용하여 겨루는 구기 종목의 하나이다. 야구의 목표는 공을 방망이로 맞추어, 한 변이 27.432 미터(90 피트)인 다이아몬드의 각 꼭지점에 놓여 있는 루(壘, Base)를 밟은 뒤 마지막으로 본루(本壘, Home Base)를 밟아서 득점하는 것이다.[1] 공격 팀은 9명의 타자들이 순서대로 나와서 수비 팀의 투수가 던지는 공을 쳐서 다이아몬드의 각 루를 밟은 뒤 홈에 들어와야 하며, 동시에 수비 팀은 공격 팀의 타자들을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아웃시켜서 공격 팀이 득점을 못 하도록 막아야 한다. 공격 팀의 타자들은 동료가 안타 (간혹 2루타, 3루타를 치는 경우가 있으며 외야 펜스를 넘기면 홈런이 된다.)를 쳤을 경우 원하는 루에 멈춰서거나 홈으로 들어와 득점할 수 있다. 공격 팀이 아웃 세 번을 기록할 경우 수비 팀은 공격 팀으로, 공격 팀은 수비 팀으로 바뀐다. 이 세 번의 아웃을 이닝(Inning, 회)이라고 부르며, 프로 게임에서 한 경기는 아홉 개의 이닝으로 구성된다. 마지막 이닝이 끝날 때 더 많은 득점을 한 팀이 이기게 된다. 프로 야구, 아마추어 야구, 청소년 야구는 북아메리카,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서인도 제도의 여러 국가들, 동아시아, 동남 아시아 국가들에서 인기가 있다. 야구의 근대적인 틀은 18세기 북아메리카에서 만들어졌다. 역사학자들은 야구의 원형은 북미 대륙에 건너 온 영국,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가지고 들어 온, 크리켓이나 라운더스와 같이 공과 방망이를 사용하는 구기 경기에서 시작되었다는 데 의견을 함께한다. 19세기 후반 야구는 미국의 국기(國技)로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야구의 명칭 야구(野球)라는 명칭의 유래는 1894년 일본 제일고등중학교(현 도쿄 대학 교양학부)에서 재학중이던 추만 카나에가 'baseball'을 '야구(野球)'로 번역한 것이 대한민국으로 들어와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일본의 문학가 마사오카 시키가 '배터(batter)', '러너(runner)', '베이스 온 볼스(base on balls)', '스트레이트(straight)', '쇼트스톱(shortstop)' 등의 미국식 야구용어를 '타자(打者)', '주자(走者)', '사구(四求, 대한민국에선 사구 대신 볼넷으로 사용)', '직구(直球)', '유격수(遊擊手)'로 번역한 것이 대한민국에 들어와 쓰이고 있다.[2] 때때로 야구를 비슷한 경기인 소프트볼(Softball)에 대비하여 하드볼(Hardball)로 부르기도 한다. 야구의 기원 원래 야구는 미국의 애브너 더블데이라는 군인 출신의 인물이 1839년에 쿠퍼스타운에서 창안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그가 직접 야구를 창안했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으며, 광산 기술자 출신의 애브너 그레이브스의 증언이 있었으나 별로 신뢰하기 어렵기 때문에 야구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전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방망이와 공을 이용한 경기는 이미 오래 전부터 리디아인, 페르시아인, 인도인, 이집트인, 그리스인, 로마인 등에 의해 의식이나 오락으로 행해졌다. 이런 경기들은 정해진 규칙없이 여러 지역에서 행해졌다. 이런 여러가지 배트와 공을 이용하는 경기를 통해서 야구는 두드러진 발전을 할 수 있었다. 이런 발전을 통해서 1774년에 독일에서 프리드리히 구츠무츠가 존 뉴베리에서 출간한 《작고 귀여운 포켓북》(A Little Pretty Pocket-book)이라는 시집에서는 최초로 'Base-ball'이라는 단어가 들어가기도 했다. 방망이와 공을 이용해 하는 경기는 영국에서 여러 가지 종류로 발전하는데, 영국 동남부에서는 크리켓으로, 남서부에서는 원홀 캣(또는 원 오캣)의 이름으로 발전했으며, 야구와 흡사한 경기인 라운더스도 있었다. 이런 종류의 경기들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옮겨와 두가지 형태로 진화했는데, 뉴욕 시 주변에서 행해진 타운볼은 각각 9명의 선수로 이루어진 두 팀이 하는 경기로 정비되었다. 알렉산더 카트라이트  루셔스 애덤스등은 야구의 기본적인 규칙을 확립했다. 특히 1845년에는, 미국 뉴욕 시의 알렉산더 카트라이트가 니커보커 규칙을 만들었으며, 이 규칙은 오늘날 현대 야구의 규칙으로 진화하게 된다. 그는 또한 라운더스에서 사용되었던 말랑말랑한 공을 더 작지만 딱딱한 공으로 교체했다.[6] 1953년 6월 3일, 미국 의회는 공식적으로 카트라이트가 근대 야구의 발명가임을 인정했다. 카트라이트가 소속된 구단인 뉴욕 니커보커스 팀이 1845년에 경기를 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미국의 역사상 공식적인 첫 경기로 현재 알려지고 있는 것은 1846년 6월 19일 뉴저지 주의 '호보켄'에서, '뉴욕 나인'[8]이 '니커보커스' 팀을 4이닝 동안 23 대 1로 이긴 경기이다. 미국에서의 발전 1860년대 이미 미국에서는 야구가 대중적인 스포츠로 자리 잡았으며 선수들은 연봉을 받고 생활하는 프로 선수였으나 아마추어 선수처럼 생활해야 했다. 아마추어 시대는 1871년 3월 17일, 전미프로야구선수협회가 창설됨으로써 그 막을 내렸다. 1869년, 최초의 프로 야구 팀 신시내티 레드 스타킹스(Cincinnati Red Stockings)가 창단 되었으며 1875년에는 내셔널 리그가 창설되었다. 1882년에는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American Association)이 창설되었고 1901년에는 이를 전신으로 하는 아메리칸 리그가 창설되어 양대 리그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1903년에는 양 리그의 우승 팀간의 승자를 겨루는 월드 시리즈가 처음으로 치러졌으며, 1933년에는 올스타전이 처음으로 치러졌다. 이후 많은 제도의 발전이 있었다. 브랜치 리키는 1920년에 대규모의 팜 시스템(Farm System)을 도입했다. 1975년에는 커드 플러드 등 여러 선수들의 희생으로 자유 계약 제도가 도입 되었다. 1980년에는 선수협 위원들이 구단주를 상대로 고소를 함으로써 연봉 상한선이 폐지되는 등 선수들의 권익이 향상되었다.   재키 로빈슨  메이저 리그 야구에서는 1947년 이전까지 흑인이 선수로 활동하지 못했다. 그 대신 흑인들은 1920년에 설립된 니그로 리그에서 선수로 뛰었고, 1924년에는 최초의 니그로 월드 시리즈가 치러졌다. 메이저 리그 야구에서 흑인이 최초로 선수로 뛴 것은 1947년으로, 재키 로빈슨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 입단해 10년간 팀에 몸담았으며, 1962년에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최초의 흑인이 되었다.[13] 투수는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 경기에서 타석에 섰다. 1970년대 초반, 지명타자(designated hitter, DH) 규칙이 제안되었으며,[14] 아메리칸 리그에서는 1973년 이 규칙이 적용되기 시작해 투수가 타석에 서지 않게 되었고 지명타자는 타석에만 서면서 수비는 하지 않았다. 내셔널 리그에서는 지금까지 투수가 타석에 선다. 메이저 리그 야구는 1980년대 초반까지 불법이었던 약물 복용이 흔했고, 이 시기가 되어서야 알려졌다. 또한 여러 선수들이 약물로 인해 사망했다. 1990년대 초반부터는 선수들이 근육강화제를 사용했으며, 이 때문에 2005년 3월 17일, 미국 의회는 스테로이드 사용에 관한 청문회가 열렸다. 이 때문에 메이저 리그 야구는 2006년부터 약물 복용이 처음 발각 되었을 때에는 50경기, 두번째에는 100경기, 세번째로 발각이 되면 영구 제명이 된다는 '삼진 아웃' 제도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메이저 리그 야구는 점점 미국 전역으로 확대 되었는데, 팀이 미국 서부에서 동부로 많이 옮겨갔으며, 캐나다에서도 1969년 몬트리올 엑스포스(현 워싱턴 내셔널스)가, 1977년 토론토 블루제이스가 리그에 참가했다.[16] 현재는 내셔널 리그 16팀, 아메리칸 리그 14팀으로 팀 수가 유지가 되고 있으며, 경기 수는 한 시즌 당 162경기로 치러진다 세계의 야구 야구는 미국의 대표적인 스포츠 중 하나며,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팬들의 지지에 기반한 야구 체계가 갖추어져 있다. 캐나다 야구의 역사는 미국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데, 1877년 프로리그와 국제 협회에서 두 나라로 이루어진 특색있는 팀을 만들기도 했었다. 세계적으로 미국과 캐나다가 아닌 다른 공식적 첫 야구 리그는 쿠바의 야구 리그이다. 쿠바는 오랜 전통을 유지하며 1930년대 후반부터 국제 경기에서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는 팀이라는 명예를 얻게 된다. 쿠바의 야구 리그가 만들어진 후 프로 리그가 생긴 국가는 다음과 같다. 제 1차 세계 대전 후에 프로 리그가 만들어진 국가는 1922년 네덜란드, 1934년 호주, 1936년 일본, 1938년 푸에르토 리코이며,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프로 리그가 만들어진 국가는 1948년 이탈리아, 많은 라틴 아메리카의 나라들 중 가장 두드러진 나라, 1945년 베네수엘라, 1945년 멕시코, 1951년 도미니카 공화국과 1982년 대한민국, 1990년 대만, 2003년 중국 순으로 만들어졌다. 2009년 현재, 국제 야구 연맹에는 현재 117개국이 가입했다. 한편 2005년 7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2012년 하계 올림픽에 관한 117번째 회의에서 야구, 소프트볼 종목 삭제에 관한 투표가 진행되어 2012년 하계 올림픽에서 야구, 소프트볼 종목을 제외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는 메이저 리거들이 출전하지 않고, 야구 경기 시간이 길고, 올림픽 야구에 많은 팀이 참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IOC가 유럽 중심의 단체로 2012년 하계 올림픽이 야구에 호의적이지 않은 영국에서 열린다는 점도 고려되었기 때문이다 야구의 규칙과 경기진행 야구 경기는 두 팀이 서로 겨루는데,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에 두 팀은 공격과 수비를 번갈아 가면서 진행한다. 그리고 공격 팀이 공격을 진행하면서 세 번의 아웃을 기록하면 공격 팀은 수비 팀으로, 수비 팀은 공격 팀으로 바뀐다. 그리고 이 세 번의 아웃을 이닝 (inning, 회)라고 하며, 일반적인 경기는 9이닝으로 구성되어 진행된다. 그리고 한 이닝은 초(初)와 말(末)로 구성된다. 그리고 한 이닝에 두 팀은 공격과 수비를 번갈아 가면서 경기를 진행하는데, 홈팀이 말 공격, 원정팀이 초 공격을 한다. 시즌(season)은 팀에 속한 선수들이 정해진 기간 동안 경기를 통해서 승부를 가리는 것으로, 팀은 리그(league)에 속해 있다. 그리고 시즌의 1위는 정규 시즌 1위를 차지하며, 시즌 상위 팀은 플레이오프와 시리즈를 통해서 시리즈 우승을 위해 경쟁한다. 야구 경기의 목표는 경기를 치르면서 더 많은 점수를 얻어 승리하는 것으로, 한 팀은 9명 또는 10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선수들은 상대 팀으로부터 득점을 하려고 하는데, 득점을 하기 위해서는 야구장의 각 루를 밟고 마지막으로 홈플레이트를 밟아야 한다. 그리고 이 사각형 형태를 다이아몬드라고 부른다. 경기장 야구 규칙에 따르면 경기장에 대한 규정은 다음과 같다. 본루에서 1루, 1루에서 2루, 2루에서 3루, 3루에서 본루까지의 거리는 각각 27.432m(90피트)이다. 내야의 중앙 부근에 본루로부터 25.4cm(10인치)의 높이가 되도록 흙을 쌓아 올려 그곳에 투수판을 놓고 투수판 앞 15.2cm(6인치)되는 지점으로부터 본루를 향해 182.8cm(6피트)되는 지점까지, 경사도는 12:1이여야한다. 본루로부터 백 스톱까지의 거리 및 루선으로부터 파울지역에 있는 펜스, 스탠드 또는 플레이에 방해가 되는 시설까지의 거리는 18.288m(60피트) 이상이 되어야 한다. 내야는 한 변이 27.432m(90피트)인 정사각형이고 외야는 1루선과 3루선을 연장한 파울 라인 사이의 지역이다. 본루부터 페어지역에 있는 펜스, 스탠드 또는 플레이에 방해가 되는 시설까지의 거리는 76.199m(250피트) 이상이어야 한다. 경계선을 포함한 내야 및 외야는 페어지역이고 다른 지역은 파울지역이다.  1958년 6월 1일 이후 프로야구를 위해 건설하는 경기장은 본부로부터 좌우의 펜스, 스탠드 또는 좌우의 페어지역 위에 있는 플레이에 방해가 되는 시설까지의 거리는 99.058m(325피트) 이상, 중견의 펜스까지의 거리는 121.918m(400피트) 이상이여야한다.  본루는 오각형의 흰색 고무판으로 표시한다. 이 오각형을 만들 때에는 먼저 한 변이 43.2cm(17인치)인 정사각형을 그려, 이 중 한 변을 골라 이에 이웃한 양쪽의 변을 21.6cm(8½인치)로 줄인다. 이 변에서 밑변의 중심으로 각 30.5cm(12인치)의 변을 2개 만든다. 30.5cm(12인치)의 두 변이 만나는 곳을 1루선과 3루선의 교차점에 두고, 43.2cm(17인치)의 변을 투수판 쪽으로 해서 그 표면이 지면과 수평이 되도록 고정시킨다.  1루, 2루, 3루는 흰색 캔버스 백으로 표시하고 땅에 올바르게 고정시킨다. 1루와 3루의 캔버스 백은 완전히 내야 안쪽으로 들어가게 설치하고, 2루의 캔버스 백은 2루지점에 그 중심이 놓이도록 설치한다. 캔버스 백은 그 속에 부드러운 재료를 넣어서 만들고 그 크기는 38.1cm(15인치) 평방, 두께는 7.6cm(3인치)에서 12.7cm(5인치)까지 허용된다.  투수판은 가로 61cm(24인치), 세로 15.2cm(6인치)의 직사각형 흰색 고무 평판으로 만든다. 투수판은 그 앞쪽면 중앙으로부터 본루까지의 거리가 18.44m(60피트 6인치)가 되게 한다.  본거지 구단은 1루선과 3루선으로부터 적어도 7.62m(25피트) 떨어진 곳에 본거지 구단 및 방문 구단용으로 각 1개씩의 선수용 벤치를 설치하여야 하며, 이 벤치는 양 옆과 뒷 쪽을 둘러싸고 지붕을 씌워야 한다. 
270    한국에서 번역된 중국 8대 기서 댓글:  조회:9671  추천:0  2015-10-13
수호지  원말 명초(元末明初)의 시내암(施耐庵)이 쓰고, 나관중(羅貫中)이 손질한 것으로 4대 기서(奇書) 중의 하나이다. 수령인 송강(宋江)을 중심으로 108명의 유협(遊俠)들이 양산(梁山:山東省 壽張縣 남동) 산록 호숫가에 산채를 만들어 양산박(梁山泊)이라 일컬었으며, 조정의 부패를 통탄하고 관료의 비행에 반항하여 민중의 갈채를 받는 이야기이다. 창조된 인물들의 이미지와 묘사된 성격이 매우 다채로우며, 《서유기(西遊記)》가 신마(神魔)를, 《유림외사(儒林外史)》가 지식계층을, 《홍루몽(紅樓夢)》이 명문의 자녀를 묘사한 것과는 달리 《수호지》에서는 노지심(魯智深) ·이규(李逵) ·무송(武松) 등과 같은 신분이 낮은 정의한이나, 임충(林?) ·양지(楊志) ·송강 등과 같은 지주 출신자 또는 봉건정권을 섬긴 적이 있는 활발하고 용감한 사나이들이 중심인물이다.  필치는 거칠지만, 풍부한 색채와 어휘, 발랄한 표현으로 계급과 유형이 상이한 인물들을 그려내고, 이들 인물의 생활발전을 통하여 봉건통치 집단의 암흑성과 서민의 비참한 생활, 용감한 투쟁 사상 ·감정 등을 나타내었다. 《수호지》의 탁월한 인물묘사의 기교와 표현예술은 중국소설 중에서도 굴지의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수호지》의 줄거리는, 송(宋) ·원(元) 무렵에 많은 민중 ·예능인 ·문인 등의 손으로 창조되었던 것을 시내암이 편집한 것인데, 송대의 《선화유사(宣和遺事)》에는 수호의 36명의 영웅 이야기가 있고, 《계신잡지(癸辛雜識)》에 의하면 송말의 공성여(?聖與)가 36명의 화찬(畵讚)을 만들었다 하며, 《곡해총목제요(曲海總目提要)》에 의하면 송나라의 화가 이숭(李嵩)이 화상을 그렸다 한다.  또 《취옹담록(醉翁談錄)》이나 원나라의 잡극(雜劇)에도 수호의 인물들이 나오며, 명나라 가정(嘉靖) 연간 고유(高儒)의 《백천서지(百川書誌)》에는 시내암이 쓰고 나관중이 편찬한 《충의(忠義) 수호지》 100권이 기록되어 있다. 그 일부를 삭제하고 편수한 것이 곽훈(郭勳)의 100회본이며, 이것이 조본(祖本)이 되어 여러 종류의 《수호지》가 출판되었는데, 그 중에서 천계 숭정(天啓崇禎) 연간의 양정견(楊定見)의 120회본 《충의수호지전(全)》을 명말 청초(明末淸初)에 김성탄(金聖嘆)이 다시 손질한 《제5재자서(第五才子書) 수호지》 70회본이 유행하게 되었다. 《수호지》가 후일의 문학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명(明) ·청(淸)의 희곡 중에는 《수호지》에서 취재한 것이 많고, 《금병매(金甁梅)》는 부분적으로 확대하여 창조를 더했으며, 《설악전전(說岳全傳)》 안의 일부 인물은 수호의 영웅들의 후계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진침(陳?)은 《수호후전(後傳)》을 썼으며, 유만춘(兪萬春)은 《결(結)수호지》라고도 하는 《탕구지(蕩寇志)》를 지었다.  먼저 판본에 따라 구성이 다른데 1640년대 김성탄이 엮은 70회 판본이 있으며 100회본이 있고 후에 뒷얘기를 첨가한 양정견의 120회 판본이 있는데 120회 판본을 "충의 수호전"이라고 불리기도 한다.김성탄 본의 특징은 70회본까지가 108명의 영웅이 모일때까지의 이야기인데 그 뒷애기는 김성탄이 위서라고 생각하여 걍 짤라버렸다. 120회 판본은 양산박 패밀리의뒷 얘기까지 담겨 있다.  현재 시중에 구할 수 있는 완역본은 안타깝게도 "없다."    청년사 수호지  1990년 청년사에서 나온 "신역 수호지"는 120회 충의 수호전을 7권으로 완역하였다. 연변대학수호전 번역팀에서  원문 하나하나 꼼꼼하게 번역하며 감칠맛나게 표현하였다는게 특징이다. 근데 절판이며 구하기도 졸라 어렵다.    박태원 수호지  1990년 깊은 샘에서 출간되었다. 역시 절판이며 진짜 완역인지 아닌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이문열 수호지  그나마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수호지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불행중 다행으로 이문열 삼국지에 비한다면  작가의 개입이 거의 많지 않은편이라 읽기에는 무난한 편이다. 초반 6권까지인가가 김성탄의 70회본을 저본으로 삼았으며  뒷 부분은 이문열이 후에 충의 수호지 120회본으로 나머지 권수를 떼웠다는게 특징이다;; 이문열 수호지도  삼국지 만큼이나 번역오류가 있다고는 한다.    김홍신 수호지  대산출판사에 나온 수호지로 100회본을 저본으로 삼았다고 한다. 별로 특출난 것은 없는 것으로 보이는 수호지로  현재는 절판되었다.    박정일 외 조선족 3명이 공역한 것으로  수호지 완역판이다. 1993년인가 1994년 삼성출판사에서 나왔으며 120회 번역본이다.  김구용 충의수호전(???) - 미출간  솔 출판사에서 김구용 역으로 "충의수호전"을 내놓는다고 했는데 6년전 이야기. 김구용 삼국지의 처참한 판매량이 한몫한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솔 출판사에서는 출간계획이 없다고 하지만 혹시 모른다.  요재지이  저자는 포송령(蒲松齡:1640~1715)이다. 요재(聊齋)는 저자인 포송령의 서재 이름으로 책 제목은 요재가 기록한 기이한 이야기라는 뜻이다. 저자가 죽은 지 51년 만인 1766년 간행되었다. 그 후로 여러 가지 간본(刊本)이 나왔으나, 445편이 수록된 청가정각본(靑柯亭刻本) 계통의 16권본이 가장 널리 유포되어 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집필한 것이며, 자서(自序)를 쓴 1679년 이후의 작품도 있다. 이 해에는 주요작품이 거의 완성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모든 작품이 신선·여우·유령·귀신·도깨비나 이상한 인간 등에 관한 이야기이며, 민간 이야기에서 취재한 것들이다. 특히 요괴와 인간과의 교정(交情)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정화(情話)가 많다. 가령, 모란과 인동(忍冬)의 아름다운 꽃의 정(精)에 무한한 애정을 갖는 청년의 이야기인 〈향옥(香玉)〉이나, 어떠한 경우에도 웃음을 잃지 않고 인간에게 위안을 주는 호녀(狐女)의 이야기 〈영녕(拏寗)〉등은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이는 당대(唐代)의 전기(傳奇)나 《전등신화(剪燈新話)》 계통의 이야기이지만, 민간의 이야기를 그대로 수록하지 않고, 특이한 이야기를 그려내려는 명확한 의식을 가지고 집필하였다. 그 결과, 교묘한 구성과 전거(典據)가 있는 용어를 효과적으로 구사한 간결하고 세밀한 묘사가 전개되어 있으며, 순서도 정연하다. 거기에는 괴이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교착한 새로운 세계가 아름답게 전개되어, 현실을 그린 소설에서는 맛볼 수 없는 인간의 참다움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며, 중국의 괴이문학 중에서 예술적 향기가 가장 높은 걸작으로 되어 있다.  주요작품 이외에 청 초의 지괴(志怪) 소설 비슷한 간단한 이문(異聞) 기록도 많은데, 이들 역시 다른 책에서는 맛볼 수 없는 특색이 있다. 중국 괴이문학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으며, 유럽 각국어로도 초역(抄譯)된 바 있다.    민음사 요재지이  국내에 여러 번역본이 있지만 완역이라고 걸 수 있는 것은 2002년 김혜경 역본의 "요재지이"가 유일무이하다. 497편의 이야기를 10년동안  번역하였다. 분량이 상당한 편에다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출간이 지연되었다고 한다. 판본의 경우에는  1963년에 상해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출간된 『회교회주회평본요재지이(會校會注會評本聊齋志異)』  1989년에 북경 인민문학출판사에서 출간된 『전본신주요재지이(全本新注聊齋志異)』  1991년 광서 인민출판사에서 펴낸 『요재지이대조주역석(聊齋志異對照注譯析)』이 세 가지를 저본으로 삼고 순서는 포송령이 정해놓은  순서대로 따라 번역하였다.    최인욱 요재지이  1966년 상,중,하 세권으로 간행. 최인욱 역 (1920~1972) 현재 절판.  서유기  오승은(吳承恩)의 작품이라고 한다. 대당(大唐) 황제의 칙명으로 불전을 구하러 인도에 가는 현장삼장(玄?三藏)의 종자(從者) 손오공(孫悟空)이 주인공이다. 원숭이 손오공은 돌에서 태어났으며, 도술을 써서 천제의 궁전이 발칵 뒤집히는 소동을 벌인 죄로 500년 동안 오행산(五行山)에 갇혀 있었는데, 삼장법사가 지나가는 길에 구출해 주었다. 그 밖에 돼지의 괴물이며 머리가 단순한 낙천가 저팔계(猪八戒), 하천의 괴물이며 충직한 비관주의자 사오정(沙悟淨) 등을 포함한 일행은 요괴의 방해를 비롯한 기상천외의 고난을 수없이 당하지만 하늘을 날고 물 속에 잠기는 갖가지 비술로 이를 극복하여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하고 그 공적으로 부처가 된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는 7세기에 당나라의 현장법사가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 북인도에서 대승(大乘)불전을 구하고 돌아온 고난의 사실(史實)에 입각한다. 이미 당나라 말에 이를 전설화한 설화가 발생하였으나, 송나라 때에 허구를 가하고 신괴의 요소를 넣는 동시에 상당한 로멘티시즘과 환상적 분위기를 담고, 문무 양도에 신통력을 가진 백의의 수재 후행자(?行者), 즉 삼장법사의 종자로 둔 《대당삼장법사취경기》라고도 하는 《대당삼장취경시화(大唐三藏取經詩話)》(3권, 전17장, 현재는 제1장이 없음)가 나왔으며, 이것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책이다. 원나라 때에는 이 작품에서 취재하여 극화한 레퍼터리가 있는데, 이 무렵에 이미 《서유기》(서유기 平話)라는 것이 완성된 것 같으며, 그 단편(斷片)이 명나라 때의 《영락대전(永樂大典)》과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에 실려 있다.  그러나 그 원전은 서로 별개의 것이었다고 하며, 내용은 상당히 복잡하다. 오승은은 이러한 작품들을 집대성하고 확충 재생산하여, 오늘날 볼 수 있는 일대 걸작을 만들어 낸 것으로 추측된다. 현행본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① 손오공의 내력(1∼7회), ② 현장법사가 불전을 구하러 가는 일(8∼12회), ③ 81난(難)을 만나는 과정(13∼100회). 특히 ①과 ②는 변화가 많고 파란만장하여 구름을 타고 안개를 몰며, 모래를 날리고 바위를 던지는 허허실실의 신마(神魔)의 싸움, 거기에 환상과 공포가 겹쳐 독자를 사로잡는다. 이 작품은 현실세계의 추악함과 통치계급의 타락상을 천계에 반영시킨 해학·풍자의 문학이며, 천제의 자리를 윤번제로 하자는 주장 등, 통쾌한 유머도 섞여 있다.  특히 72반(般) 변화의 술을 자유자재로 부리고, 근두운(?斗雲)을 타서 10만 8000리를 단숨에 나는 손오공으로 하여금 약자를 돕고 강한 자를 무찌르며, 악을 몰아내고 선이 이기도록 함으로써, 독자들에게 갈채를 받게 하였다. 물론 이 시대의 작품이므로 윤회의 인과응보 사상이나 불로장생의 신선사상의 요소가 스며 있다.    현암사 서유기  명나라 금릉 세닥당 판본을 바탕으로 명나라 양민재 판본과 명나라 이탁오, 청나라 건륭제 시대 판본등을 참고로 하여 번역하였다.  연변인민출판사 번역팀이 번역을 맡았는데 1993년인가 나온 6권짜리 진본서유기와 동일한 번역팀인지는모른다.  문학과 지성사나 솔 출판사에 비해 그닥 주목받지 못한 안습의 서유기가 되었다.    임홍빈 서유기  무협소설 번역으로 유명한 임홍빈님이 1999년 대산문화재단의 외국문학 번역 공모에서 당선되고 난후 3년간 번역하여 출간되었다.  현재까지 나온 서유기중에서는 가장 신뢰할 만한 추천번역본으로 꼽고 있다. 10권으로 나와있으며 5만권의 판매고를 올리는 등  상업적으로도 나름 성공했다. 불교용어에 대한 오역이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솔 출판사 서유기  서울대학교 서유기 번역 연구회에서 5명의 고전소설 연구자들이 3년여에 걸친 꼼꼼한 번역을 통해 번역되었다. 10권으로  출간되었으며 이인서국의 "이탁오 비평본 "서유기 교주" 및 다른 세 종류의 판본을 대조,검토하는 등 판본에 신뢰성을  높였다. 헌데 구어체로 번역해버리는 바람에 문장 끝에가 "~했어요"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구어체 번역으로 문학과 지성사에 비해 묻혀버린 것으로 보인다. 한시 번역은 솔 출판사가 더 괜찮다는 평도 있었다.    김광주 서유기  1965년 정음사 간행. 당근 절판. 3권으로 완결되었으며 93년 나온 연변인민출판사의 진본 서유기와 더불어 거의 드문 완역  서유기로 이름을 날렸다.  안의운 서유기  삼성출판사에서 번역출간한 것으로 안의운이 번역하였다. 조선족 출신의 번역이다.  6권이 완결이다.  유림외사  55회, 56회로 된 유포본은 우수를 횟수로 하는 통례에 맞추기 위하여, 후세 사람이 1회를 추가한 것이다. 작자의 만년인 1745∼1749년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사본으로 유포되었는데, 1768∼1779년에 친구인 김조연(金兆燕)이 양저우[揚州]에서 출판한 것이 초판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것으로는 1803년의 와한초당본(臥閑草堂本)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전체를 일관하는 줄거리는 없고, 독립된 이야기를 사제(師弟)간·친구간 등의 관계를 가진 주인공의 교체로 ‘열전(列傳)’식으로 구성한 것이다. 여기에는 학자·관료·상인 등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명예와 출세를 얼마나 갈망하고, 이를 위해서 얼마나 과거(科擧)에 골몰했는가를 냉정한 필치로 묘사하고 있다. 가령 범진(范進)의 이야기에서는, 54세의 늙은 수험생에 동정한 시험관의 선심으로 과거에 합격한 범진은 하루살이 인생에서 일약 큰 저택에 사는 팔자가 되며, 어머니는 기쁜 나머지 죽고 만다. 범진은 상중인 데도 지사(知事)를 방문하고, 지사는 요리가 마련되지 않아 당황하지만, 범진이 새우단자를 먹는 것을 보고 안심한다.  이러한 이야기로도 알 수 있듯이, 허위와 출세욕밖에 없는 청나라의 유림세계가 이 작품의 구석구석에 그려져 있다. 등장인물에는 실재 모델이 있었던 듯하며, 작자 자신도 두소경(杜少卿)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34회). 《홍루몽(紅樓夢)》과 더불어 청나라 구어소설의 대표작이며 기수 횟수로 한 점에서도 작자의 반골을 엿볼 수 있다. 애독자도 많았으며, 천목산초(天目山樵) 장문호(張文虎)의 상세한 비평은 이를 숙독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을유문화사 유림외사  용자출판사 을유문화사가 세계문학전집 27,28번째로 완역화여 내놓았다. 총 56회분을 번역하였으며 번역에는 홍상훈, 신주리, 이소영, 이영섭,  홍주연등 5명의 번역자들이 참가하였다.    북피아 유림외사  최승일, 최봉춘, 장의원 공역이다. 호남인민출판사에 나온 대중화문학 중한대역 "유림외사"는 3권으로 나와있는데 완역인지는 확실히 모르겠다.  금고기관  편자는 쑤저우[蘇州]의 포옹노인(抱甕老人)이라는 것 외에는 분명치 않다. 이 책에 앞서 편찬된 단편소설의 총집 《삼언이박(三言二拍)》 속에서 비교적 우수한 것 40편을 골라 편찬하였다. 따라서 명나라 때 서민들로부터 사랑을 받던 단편소설의 실상을 어느 정도 대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내용은 삼언(三言)에서 뽑은 것이 29편으로 압도적으로 많다. 소재는 세상 이야기가 태반을 차지하는데, 읽을거리로서의 홍미 외에 당시 서민의 처세철학이나 윤리·생활감정 등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삼언이박》이 청조(淸朝)의 문화탄압 정책에 의해 자주 금서(禁書)로 지목을 받아 점차 시장에서 모습을 감춘 데 비해, 이 책은 읽을거리로서도 알맞은 탓인지 《사대기서(四大奇書)》나 《홍루몽(紅樓夢)》 등의 장편소설과 함께 청조 일대를 통해 유행하였다    조영암역 금고기관  정음사에서 60년대 나온바 있다. 완역으로 추정되는데 절판.    김용식역 금고기관  미래문화사에서 출간되었다. 완역본은 아니며 일부 것을 선별해서 뽑은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시중에 나온 유일한 번역본이다;  금병매  전편(全篇) 100회로 되어 있다. 《수호전(水滸傳)》의 서문 경(西門慶)과 반금련(潘金蓮)의 정사(情事)에 이야기를 보태어 명대 사회의 상인(上人)과 관료, 그리고 무뢰한의 어둡고 추악한 작태를 폭로한 것이다. 책 이름은 주인공 서문 경의 첩 반금련·이병아(李甁兒), 그리고 반금련의 시녀 춘매(春梅)에서 한 글자씩 땄다.  현존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된 판본(版本)인 《금병매사화(金甁梅詞話)》의 흔흔자(欣欣子)의 서문(序文)에는 작자를 란링[蘭陵:山東省]의 소소생(笑笑生)이라 하고 있는데, 흔흔자는 소소생의 변명(變名)이고 이개선(李開先:1501∼1568)일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문장 속에서 산둥[山東] 방언을 구사한 점으로 보아 산둥 사람인 것은 분명하며, 가정(嘉靖) 말년으로부터 만력(萬曆) 중기의 창작으로 추정된다. 《금병매사화》에는 1617년의 서문이 있으며, 따로 천계(天啓)연간(1605~1627) 간행의 《원본금병매(原本金甁梅)》가 있는데, 이것은 산둥 지방의 토착어가 삭제되어 있다. 또, 에로틱한 장면을 삭제한 《진본금병매(眞本金甁梅)》도 있다.  칭허현[淸河縣] 현청의 문앞에서 생약상(生藥商)을 경영하는 서문 경은 악질적인 방법으로 재산을 모아 관리와 결탁, 실력자로 올라선다. 많은 첩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추남인 만두장수 무대(武大)의 처 반금련과 밀통하고 남편을 독살하게 하고 그녀를 첩으로 삼는다. 무대의 아우 무송(武松)은 형의 원수를 갚는다는 것이 다른 사람을 살해하여 유죄(流罪)에 처해진다. 서문 경은 다시 친구의 처 이병아를 첩으로 만들고 그 재산을 빼앗는다. 이윽고, 이병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금련에게 구박을 받다가 어려서 죽고, 이병아도 죽는다. 서문 경은 음탕한 생활 끝에 급사한다. 금련은 쫓겨나고 무송에게 살해된다. 서문 경의 처 오월랑(吳月娘)은 금(金)나라 군대의 침입을 피해 절로 들어가는데 그곳에서 인과응보의 이치를 깨닫고, 유복자 효가(孝哥)는 출가(出家)한다.  전편에서 가정 말∼만력 중기의 부패한 사회상과 어린 여자아이를 매매하는 밑바닥 서민생활을 폭로하여, 명대의 도시상업자본의 발전 양상과 시민계급의 의식형태가 반영되어 있다. 정밀한 묘사와 감칠맛 나는 문장으로 많은 등장인물의 성격을 명확하게 묘파한 수법은, 뒤에 나온 장편소설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냉혹함과 절망이 전편에 넘쳐 흐르고 봉건사회의 죄악상이 대담하게 폭로되고 있으나, 비판정신은 희박하며 노골적인 에로티시즘의 묘사가 많다.    강태권 금병매  2002년 강태권역으로 솔 출판사에서 10권으로 완역되었다. 현재까지 구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완역으로 100회분을 번역하였다.  비록 한시 번역에 있어서는 오역이 상당하다는 지적이 있으나 그렇다고 금병매를 완역한 공로에 빛을 가리지는 못한다.    박수진 금병매  1991년 청년사에서 100회분으로 완역하였다. 6권으로 내놓았는데 절판.    조성출 금병매  조선족 출신 조성출 번역으로 삼성출판사에서 번역하였다. 6권 완결이다.  홍루몽  《석두기(石頭記)》 《금옥연(金玉緣)》 《금릉십이차(金陵十二釵)》 《정승록(情僧錄)》 《풍월보감(風月寶鑑) 》라고도 한다. 이 소설의 판본(版本)은 80회본과 120회본이 있는데, 80회본은 필사본(筆寫本)이다. 120회본은 고악(高?)이 쓴 40회본을 덧붙여서 1791년경 정위원(程偉元)에 의해 간행되어 ‘정갑본(程甲本)’이라 하고, 이 ‘정갑본’을 개정한 것이 1792년에 간행하였다는 ‘정을본’이다.  무대는 주로 금릉(金陵:南京)에 있는 가씨(賈氏)의 저택 안이다. 등장인물은 500명을 넘으며, 주인공은 옥을 입에 물고 태어난, 여성의 몸은 물로 되어 있고 남자의 몸은 진흙으로 되었다는 말을 할 정도의 페미니스트인 가보옥(賈寶玉)과, 총명하지만 병약한 그의 사촌 누이동생 임대옥(林黛玉), 그리고 가정적이며 건강한 설보채(薛寶釵)이다. 많은 사람들의 사치와 대관원(大觀園) 등의 건축으로 차차 기울기 시작하는 가씨 집안에서, 보옥은 보채에 대해서도 호감을 가지지만 대옥과의 결혼을 더 원한다. 그러나 집안의 실권을 쥔 할머니 사태군(史太君)은 대옥의 몸이 허약하여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할머니의 계략에 속은 보옥이 보채와 결혼하던 날, 대옥은 쓸쓸히 숨을 거둔다. 인생무상을 느낀 보옥은 과거장에서 그대로 실종된다. 후일 아버지 가정(賈政)과 비릉(毘陵)의 나루터에서 만나지만, 보옥은 목례만 보내고 승려와 도사 사이에 끼여 눈길 속으로 사라진다.  원작(原作) 부분의 등장인물에 대한 세밀한 성격묘사와 속작(續作) 부분의 기복이 넘치는 구성 등 청대(淸代)의 으뜸가는 소설로 꼽히는 이 작품은 1792년에 ‘정을본’이 초간(初刊)된 이래, 100종 이상의 간본(刊本)과 30종 이상의 속작이 나왔다. 또, 작자와 모델에 관한 평론도 속출하여 ‘홍학(紅學)’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근대 이후, 후스[胡適]·위핑보[兪平伯] 등은 이 작품에 대하여 조설근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고민희, 최용철 홍루몽  나남출판에서 최용철, 고민희 두 번역가가 9년에 걸쳐 공을 들여 완역하였다. 6권 120회분으로 완역하였는데 워낙  방대한 작품이다보니 등장인물,주제를 요약한 "홍루몽 바로보기"라는 것을 별책으로 내놓기도 하였다. 현재까지  나온 완역중에서는 가장 신뢰할 만한 번역본이다.    김광렬 , 안의운 홍루몽  청계에서 현재 나오고 있다. 12권으로 출간되었으며 역시 120회 완역본이다. 김광렬, 안의운 번역본의 경우에는  1990년 청년사를 거쳐 1993년 삼성출판사를 거쳤으며 2007년 다시 청계에서 나오게 되었다. 세번이나 중복  출판되었는데 김광렬, 안의운의 번역본은 청계에서 나온 번역본이 최근에 나온 것이니 만큼 가장 잘 된 편이다.  원문의 뜻은 잘 번역하였으나 우리말 구사능력이 떨어진다는 평이다.    예하판 홍루몽  1990년 연변대학 번역소조에서 7권으로 완역한 책으로 절판. 우리말 구사능력이 괜찮다는 평인데 예하판의 홍루몽의  경우에는 나머지 1권이 바로 "홍학"책으로 읽을거리가 풍부하다. 홍루몽의 경우에는 워낙 유명해서 홍루몽만을 전문  적으로 연구하는 "홍학"이 있었다고 한다.  삼국지  《삼국지연의》는 진수(陳壽, 233~297)의 《삼국지(三國志)》에 서술된 위(魏), 촉(蜀), 오(吳) 3국의 역사를 바탕으로 전승되어 온 이야기들을 중국 원(元)과 명(明)의 교체기 때의 사람인 나관중(羅貫中, 1330?~1400)이 장회소설(章回小說) 형식으로 재구성한 장편 소설이다. 원래 이름은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이며, 《수호전(水滸傳)》, 《서유기(西遊記)》, 《금병매(金甁梅)》와 함께 중국 4대기서(四大奇書)의 하나로 꼽힌다.  진수(陳壽)의 《삼국지》에 서술된 위(魏)·촉(蜀)·오(吳) 3국의 역사는 천하의 패권(覇權)을 둘러싸고 3국이 벌이는 힘과 지혜의 다툼이 워낙 치열하게 펼쳐졌기에 일찍부터 중국인들에게 흥미 있는 이야기로 전해져 왔다. 당(唐, 618~907) 시대에 이미 3국의 이야기가 야담(野談)으로 전해진 기록이 있으며, 송(宋, 960∼1279) 시대에는 전문적인 이야기꾼인 설화인(說話人)들의 이야기 대본인 화본(話本)으로 정리되고, 연극으로 공연되기도 하였다. 당시 곽사구(禱四究)의 ‘설삼분(說三分)’은 매우 유명했으며, 인종(仁宗, 1010~1063) 때에는 3국의 이야기를 공연하는 ‘피영희(皮影戱)’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원(元, 1271∼1368)의 영종(英宗, 재위 1320~1323) 때, 전래되던 화본(話本)들을 바탕으로 푸젠성(福建省) 젠양(建陽)의 출판업자 우(虞)씨가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를 간행하였다. 이 책은 3권으로 되어 있으며 위에 그림, 아래에 글을 넣은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元) 시대에는 이를 바탕으로 많은 희곡이 만들어져 공연되었는데, 종사성(鍾嗣成)의 《녹귀부(錄鬼簿)》에 따르면 그 수가 30~40종에 이르렀다고 한다.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는 명(明, 1368∼1644) 시대에도 출판되었지만, 야담(野談)과 화본(話本)에 기초해 있었기에 허황된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고 역사적 사실과도 차이가 많았다. 그래서 나관중(羅貫中, 1330?~1400)은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의 줄거리를 근간으로 하되,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와 429년 배송지(裵松之, 372-451)가 이를 보완한 《삼국지주(三國志註)》,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의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을 바탕으로 역사적 사실에 어긋난 부분을 바로잡아 장회소설(章回小說) 형식으로 재구성하여 《삼국지연의》를 편찬하였다.  《삼국지연의》는 후한(後漢) 말부터 위(魏)· 촉(蜀)·오(吳) 삼국의 정립시대(鼎立時代)를 거쳐서 진(晉)이 천하를 통일하기까지의 역사를 유비(劉備), 관우(關羽), 장비(張飛) 등 세 인물의 무용(武勇)과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지모(智謀)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원본(原本)은 전해지지 않으며 명(明)의 가정제(嘉靖帝, 1507~1566) 때인 1522년에 간행된 ‘가정본(嘉靖本)’이 가장 오래된 판본(版本)으로 전해진다.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란 제목으로 간행된 이 판본은 홍치제(弘治帝, 1470~1505) 때인 1494년의 서문(序文)이 실려 있어 ‘홍치본(弘治本)’, 혹은 나관중(羅貫中)의 성을 따서 ‘나본(羅本)’으로도 불린다. 모두 24권(卷) 240절[節, 혹은 칙(則)]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장 나관중의 원본(原本)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지연의》는 그 뒤 가정본(嘉靖本)을 근간으로 하면서 문체나 내용이 보완되어 왔으며, 수많은 속본(俗本)들을 낳았다. 명(明) 말기에 이지(李贄, 1527~1602)는 《삼국지연의》에 평을 붙이면서 2개의 절(節)을 하나로 합하여 240절(節)을 120절(節)로 줄였는데, 이를 ‘이탁오평본(李卓吾評本)’이라고 한다. 그리고 청(淸)의 강희제(康熙帝, 1654~1722) 때인 1679년(강희18년)에 모성산(毛聲山)과 모종강(毛宗岡) 부자(父子)는 촉한정통론(蜀漢正統論)에 기초해 작품 전체의 통일성을 높이고 문체(文體)를 간결하게 다듬어 19권(卷) 120절(節)로 구성된 새로운 판본을 간행하였다. 이를 ‘모본(毛本)’이라고 하는데, 모종강(毛宗崗)의 개정본은 다른 판본을 압도하고 정본(定本)이 되었다. 오늘날 번역되는 《삼국지연의》의 내용도 대부분 이 ‘모본(毛本)’에 기초하고 있다. 《삼국지연의》는 중국인에게 오랫동안 애독되었고, 그 내용은 연극(演劇)이나 강담(講談) 등으로 글자를 모르는 사람에게도 전달되었다. 관우(關羽)는 민간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어 관제묘(關帝廟)가 곳곳에 세워지기도 하였으며, 《삼국지연의》에서 비롯된 ‘삼고초려(三顧草廬)’나 ‘계륵(鷄肋)’, ‘읍참마속(泣斬馬謖)’ 등의 표현이 고사(故事)와 함께 널리 쓰였다.  《삼국지연의》는 한국에서도 조선(朝鮮) 시대부터 매우 폭넓게 읽혔다. 《삼국지연의》는 이미 16세기 초에 조선(朝鮮)에 전해져 1569년에는 국내에서 원문(原文)으로 간행되었다. 인조(仁祖, 1595~1649) 때인 1627년(인조 5년)과 숙종(肅宗, 1661~1720) 때에도 출간(出刊)되었다. 《삼국지연의》를 번역(飜譯)하거나 번안(飜案)한 작품들도 상당수 전해지는데, 이는 사대부(士大夫)만이 아니라 부녀자(婦女子)나 민간(民間)에서도 폭넓게 읽혔음을 나타낸다. 그래서 시조(時調)나 소설(小說), 속담(俗談) 등에서도 《삼국지연의》의 영향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렇듯 《삼국지연의》가 널리 읽히고 확산된 것은 이 작품이 충효(忠孝)와 의(義)를 강조하는 조선(朝鮮)의 유교적(儒敎的) 지배이념과 일치되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근대 이후에도 《삼국지연의》는 수많은 번역본을 낳으며 폭넓게 읽혔는데, 1904년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최초로 근대적 활자본이 간행되었고, 1929년에는 양백화(梁白華, 1889~1938)가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每日新報)에 연재하였다. 그리고 1945년에 박태원(朴泰遠, 1909~1987)이 ‘모본(毛本)’을 기초로 현대적 번역본을 출간(出刊)한 뒤, 박종화(朴鐘和, 1901~1981), 김구용(金丘庸, 1922~2001) 등 수많은 작가들이 각기 다양한 번역본을 출간하였다.  한편 현대에 와서 《삼국지연의》는 영화나 컴퓨터게임, 애니메이션 등으로도 활발히 만들어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고우영(高羽榮, 1938~2005)이 만화로 신문에 연재한 작품이 1979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고, 일본에서는 요코야마 미츠테루(橫山光輝, 1935∼2004)가 만화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코에이(KOEI)는 1985년 ‘삼국지(三國志, samgugji)’라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개발하였다. 그 밖에도 《삼국지연의》의 내용에 바탕을 두고 경영학이나 처세학 등을 논하는 책들도 폭넓게 출간되고 있다.      이문열 삼국지  민음사를 먹여살린 책. 1700만부의 판매고를 올린 불후의 베스트셀러 작. 그 명성은 가히 이루말할데 없어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이 팔린  삼국지다. 하지만 많이 팔리니만큼 문제도 상당한데 정역본이 아닌 "평역"이다보니 작가의 주관이 많이 개입되어 글의 흐름이 끊긴다는  점, 일부 작가의 창작이 있다는 점은 문제로 지적된다. 말 그대로 오리지널 삼국지하고 멀어져버렸다는 것이다.  게다가 오역문제도 상당한데 워낙에 많은 오역이 있다보니 리동혁이라는 사람이 "삼국지가 울고있네"라는 저서를 펴기도 했다.  삼국지 매니아의 입문서로는 상당히 "별로"인 책이지만 술술 읽힌다는 장점이 있다. 이문열 삼국지를 까고 그의 필력만큼은  대체로 인정하는 편이다.    황석영 삼국지  창비에서 나온 삼국지로 꽤나 유명한 작가인 황석영의 필력이 가미된 것으로 많은 기대를 모았고 판매량도 나름  괘찮았다고 한다. 1999년 샹하이 강소고적출판사에서 나온 를 원전으로 삼아 번역했으며  교수신문 최고의 추천번역에서도 가장 많은 표를 얻었기도 하였다.  하지만 정원기 교수가 옌벤본과의 판본 유사성과 기존 번역본들에 대한 표절 논란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나  황석영은 이에 대해 부정하였다. 이문열 삼국지와 더불어 가장 네임벨류가 높지만 그저그런 삼국지가 되었다는 평도  많다.    황병국 삼국지  범우사에서 1984년 간행되었다. 정역 삼국지들이 넘쳐나기 전 시절에는 그나마 쉽게 구할 수 있던 정본삼국지로 인정받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편으로 다른 번역본들에 비해 그냥저냥 평이한 편이다. 어려운 문장의 경우 두루뭉술하게 번역했다는  지적이 있다.    김구용 삼국지연의  한학자로 유명한 김구용 선생님이 직접 번역하신 것으로 1974년 초판이 나왔으며 몇번의 개정을 거쳐 2003년 솔 출판사에서  마지막 개정판이 나왔다. 모종강본을 저본으로 삼아 120회를 번역하였다. 김구용 번역본의 특징은 더하지도 빼지도 않은  순수한 정역으로 고풍스런 어휘와 유려한 시번역이 단연 돋보인다. 하지만 삼국지로서의 재미면에서는 상당히 떨어진다.  판매량에서도 처참하게 발렸고 E북으로 공짜로 볼 수 있도 있다!  http://ebook21.co.kr/ebook/ebook_detail.asp?id=JO081347F399 여기에서 로그인만 하면 무려 공짜로 볼 수 있다;    장정일 삼국지  기존의 삼국지하고는 다르게 정역이 아닌 작가의 재창작 수준에 가까운 삼국지다. 애초에 저자가 출간할때부터  번역이 아닌 삼국지의 새로운 판본이며 본인 스스로가 한문번역 능력이 어렵다고 밝힌바 있다. 어떤 면에서는  신선한 발상이지만 정본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비추인 삼국지이다. "이것은 삼국지가 아니다"라는 지적도 있다.  또한 후반부로 갈수록 신선함이 떨어져 조루가 되어버렸다는 평도 있다.  김영사에서 10권으로 간행되었다.    리동혁 본삼국지  금토에서 출간된 삼국지로 "삼국지가 울고있네"의 저자 리동혁이 아예 삼국지를 펴냈다. 인민문학출판사의 "삼국연의"를  저본으로 번역의 신뢰도를 높였으며 12가지 판본을 통합,소개함으로 아무도 하지 않는 놀라운 작업을 해냈다는  평이다. 번역의 정확성이라던가 풍부한 주석은 삼국지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삼국지 매니아라면  꼭 권장하는 책이다.  하지만 재중동포다보니 우리말 구사능력이 떨어진다는 안타까운 단점이 있다. 12판본에 대한 패치워크를 하다보니  난잡하다는 단점도 지적된바가 있다.    박태원 삼국지  깊은샘에서 2008년 출간되었다. 1941년 신시대에서 연재하다가 연재중단. 해방이후 다시 연재되다가 작가의 월북크리로  미완으로 남아버린 비운의 삼국지이다. 이후 정음사 사장이었던 최영해의 이름을 빌려 뒷부분을 번역하여 출간되었다.  그러기에 3분의 2가 박태원이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이 손을 댔다는 얘기가 있다.  박종화 삼국지 이전 최고의 삼국지라는 평을 받는다. 재간본은 1964년 박태원이 북한에서 완결시킨 "삼국연의"를  바탕으로 유족과 출판사측이 10권으로 복간시킨 것이라고 하나 사실인지 확인하기는 어렵다. 박태원의 필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지만 어려운 말을 사용한게 단점으로 꼽는다.    정비석 삼국지  요시카와 에이지 판을 저본으로 했다는게 특징이다. 고려원에서 나왔다가 고려원의 부도크리로 절판되었지만  다행히 2004년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6권으로 복간하였다.  "자유부인"등의 대중소설가의 명성답게 정비석의 필력이 과감없이 발휘되어 재미만큼은 타삼국지와 비교가  안될만큼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한다. 초기 판본의 경우 제갈량죽음 이후를 허접하게 처리했으나 향후  보강되었다. 후반부가 좀 부실하다는게 단점.    고우영의 필력이 유감없이 드러난 대작으로 비록 소설은 아닌 "만화"지만 삼국지 매니아들에게는 권장할 만한 만화다.  군사정권 시절에 폭력과 선정성으로 엄청나게 짤렸다가 2001년 딴지일보에서 CD롬으로 복간되고 애니북스에서 새롭게  복간되었다. 무삭제 완전판이기 때문에 안심하고 읽을 수 있다.  삼국지의 흐름을 따라가지만 작가의 취사선택에 따라 달라진 부분도 상당하지만 맛깔나는 솜씨덕에 재밌게 읽을 수 있다.  캐릭터에 애정이라던가 관우와 제갈량의 라이벌 설정 또한 흥미롭다. 문제는 제갈량 사후가 부실하다는 것 정도.  초반부분은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를 따라가고 있다.    박종화 삼국지  64~68년 한국일보에서 1603회로 연재되면서 당대 큰 인기를 끌었던 삼국지다. 월탄 박종화 선생님이 역사소설가로  유명한 만큼 그의 필력은 상당하는 평이다. 글솜씨가 훌륭한데다가 한문에도 어느 정도 능통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재미는 보장하며 실제로도 박종화 삼국지를 기억하는 사람도 많다.  흥미를 위한 장면들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윤색,첨가한게 특징이지만 원문에 충실한 지에 대해서는 엇갈릴 수 있다.  2009년 달궁출판사에서 복간하였다.    정소문 삼국지  2000년 원경출판사에서 나온 삼국지로 옛날에 나왔던 삼국지중에서는 가장 원문에 충실하며 풍부한 주석을  보여주는 삼국지라는 평이다. 오역도 있지만 정원기 삼국지라던가 본 삼국지 이전에는 가장 괜찮은  삼국지라는 평을 받았으나 어찌된일지 관심도 못 받고 시장에서 잊혀진 작품이 되었다. 안습.    정원기 삼국지  국내에서도 삼국지 전문연구자로 유명한 정원기님이 친히 "정역"을 표방하며 내놓은  삼국지다. 2008년 현암사에서 출간되었다. 그런데 별 소리 없는걸 보니 그닥 안 팔린것으로 추정된다.    조성기 삼국지  2001년 열림원에서 출간하였다. 정역타이틀을 내걸고 모종강 본을 저본으로 삼았다.  깊이가 부족하다는 평이다.    김동리 삼국지  한결 미디어에서 나온 삼국지다. 5권으로 출간되었다.    김홍신 삼국지  대산출판사에서 나오고 이후 5권으로 아리샘에서 나왔다. 평역이다.    청년사 정본삼국지  1990년 인민문학출판사본을 저본으로낸 삼국지다. 괜찮은 번역을 보여주지만 절판.    김광주 삼국지  1968년 3권짜리로 서문당에서 간행되었으며 나중에 서문당문고로 6권으로 소개되었다.  요시카와 에이지를 저본으로 번역하였다. 상당히 우수한 편에 속한 번역이지만 오역도 상당하다고 한다.    김동리,황순원,허윤석 삼국지  1958년 박영사에서 전 5권으로 간행한 삼국지다. 요시카와 에이지 판본을 저본으로 번역하였다.  김동성 삼국지  을유문화사에서 전 5권 간행. 역시 요시카와 에이지 번역본이다. 1960년 간행되었다.  이용호 삼국지  1965년 백조출판사에서 10권으로 나왔으며 요시카와 에이지 판본을 완역한 것이다.    양주동 삼국지  1977년 7권으로 명문당에서 출간되었다. 요시카와 에이지 저본이다.  우현민 삼국지  박영사에서 간행했다고 한다.    신태삼 원본국문삼국지  1960년대 세창서관에서 간행되었다. 전 5권으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성원규 연의원본직역 삼국지  1992년 10권으로 출간되었다. 복옹헌사에서 나왔다고 한다. 
269    전통혼례에서 나무기러기 쓰는 리유? 댓글:  조회:5897  추천:0  2015-10-13
[ 2015년 10월 14일 08시 54분 ]       전통혼례는 서로 혼인 의사를 의논하는 의혼(議婚), 사주를 보내어 청혼하는 납채(納采), 신랑 집에서 신부집으로 예물을 보내는 납폐(納幣), 혼례식을 치르는 친영(親迎:대례)의 순서로 진 행 됩니다. 신랑 신부가 처음으로 만나 백년해로를 서약하는 초례는 친영의 한 과정으로서,  기러기를 드리는 전안례(奠雁禮) 후에 이어지는 교배례(交拜禮)와 합근례를 합쳐서 부르는  말입니다. 보통 "혼례를 치른다"는 것은 이 초례 과정을 말하며, 식을 치르는 장소를 초례청이 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아들을 둔 집에서는 기러기를 집안에서 기르다가 아들이 장가 가는 날 기럭아범 [雁夫]이 등에 지고 신랑 앞에 서서 갔다고 합니다. 이처럼 원래는 산 기러기를 썼으나 지금 은 대개 나무로 채색 조각 해 만든 나무기러기(木雁)로 대용 하지요. 전안례를 치르는 절차는 지방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경기 지방의 예를 들면, 신부집에서는 대청이나 안마당에 천막을 치고 그 아래 멍석을 깐 다음 다시 돗자리를 펴고 전안례나 대례를 치를 준비를 하고 기다립니다. 신랑이 문에 들어서면 안내자(처남이 될 사람)가 읍(揖)하고 신랑을 대례청으로 인도 하게되지요. 신랑은 가지고 온 나무기러기를 상위에 놓고 2번 절합니다. 이때 여자 하님이 기러기를 치마폭에 싸가지고 방에 들어가 아랫목에 시루로 덮어 놓습니다. 치마폭에 감싸는 것은 기러기가 알을 잘 낳으라는 뜻이며, 시루로 덮는 것은 숨쉬기 좋고 날 아 가지 않게 함이라 합니다. 기러기는 절개를 굳게 지키는 사람을 상징하는 것으로, 신랑이 신부의 양친 또는 친척 앞에서 신부와 백년해로의 서약을 할 때 전달 하는 의식을 전안례(典雁禮)이라 합니다. 신부의 어머니 또는 하녀가 나와서 기러기를 치마에 싸가지고 들어가는데, 일부 의 지방에서는 기러기를 방 안에 있는 신부 앞에 슬쩍 밀어 넣어 기러기가 그대로 서있으면 첫아들을 낳는다 하고, 넘어지면 딸을 낳는다고 믿었습니다.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 의하면 기러기를 하늘과 지상을 왕래하는 하늘의 사자로 인식 하기도 했구요. 《규합총서》에는 기러기에 신(信) ·예(禮) ·절(節) ·지(智)의 덕(德)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기러기는 암컷과 수컷이 의가 좋은 동물로 표상하여 전통혼례에서 산기러기나 목안(木雁)을 전하는 의식이 전래되고있는 것입니다. 다정한 형제처럼 열을 지어 이동할 때는 경험이 많은 기러기를 선두로 하여 V자형으로 높이 날아가는 데서 서열과 질서를 상징하기 도 하고요. 다시말하면, 기러기의 덕목을 사람이 본 받아 훌륭한 삶을 살아 가라는 뜻에서, 전통혼례시 전안례를 올리는 관습이 내려 오고있습니다. 기러기의 세가지 덕목은 첫째, 기러기는 보통 수명이 150년-200년 정도인데, 중간에 짝을 잃더라도 결코 다른 짝을 찾지 않고 영원히 사랑의 약속을 지키며 홀로 지낸다는 것이고. 둘째, 날아갈 때도 행렬을 맞추며 앞서가는 놈이 울면 뒤따라 가는 놈도 화답을 해주는 질서 바른 새입니다. 즉 상하의 질서를 철저히 지키는 예의 바른 습성을 갖고있다고 하지요. 셋째, 기러기는 한번 인연을 맺게되면 반드시 흔적을 남기는 습성이 있다고 합니다.    
268    틀리기 쉽은 맞춤법 댓글:  조회:5451  추천:0  2015-10-09
1. 설레임이 아니라 설렘 -> 설렘^   2. '예기'가 아니라 '얘기' (예- 우리 얘기 좀 해)   3. '몇일'이라는 말은 없음 ->무조건 며칠   4. '데'와 '대'는 어떻게 구분? -> '데'는 직접 경험한 것, '대'는 남의 말을 전달할 때 (예: 이건 나는 아는 비밀인데..../ 둘이 사귄대!)   5. '왠'은 '왠지'에서 밖에 쓰이지 않는다. -> '왠만하면' 따위의 단어는 없음! '왜인지'를 줄인 '왠지'말고 다른 단어는 모두 '웬'   6. 어떻게 -> 맞는 말이지만 '어떡해'라고 써야 할 자리에 '어떻게'를 쓰는 오류를 범하고 있음   7. '께'가 아니라 '게' => 된소리 너무들 좋아하심 '제가 할께요'가 아니라 '제가 할게요'  
267    력대 노벨문학상 목록 댓글:  조회:4957  추천:0  2015-10-09
1960∼2015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및 주요작품. ▲ 2015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벨라루스·저널리스트/작가) = ‘체르노빌의 목소리’ ‘전쟁은 여자의 얼굴이 아니다’ ▲ 2014년: 파트리크 모디아노(프랑스·소설가) =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도라 브루더’ ‘슬픈 빌라’ 등 ▲ 2013년: 앨리스 먼로(캐나다·소설가)  = 단편소설집 ‘행복한 그림자의 춤’ ‘소녀와 여인들의 삶’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 2012년: 모옌(중국·소설가)  = ‘붉은 수수밭’ ‘봄밤에 내리는 소나기’ ▲ 2011년: 토머스 트란스트뢰메르(스웨덴·시인) = ‘창문들 그리고 돌들’ ‘발트해’ ‘기억이 나를 본다’ ▲ 2010년: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페루·소설가) =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녹색의 집’ ▲ 2009년: 헤르타 뮐러(독일·소설가) = ‘저지대’ ‘우울한 탱고’  ▲ 2008년: 르 클레지오(프랑스·소설가) = ‘조서’ ‘사막’ ‘대홍수’  ▲ 2007년: 도리스 레싱(영국·소설가) = ‘마사 퀘스트’ ‘다섯’ ▲ 2006년: 오르한 파무크(터키·소설가) = ‘내 이름은 빨강’ ‘하얀성’ ▲ 2005년: 해럴드 핀터(영국·극작가)  = ‘축하’ ‘과거 일들의 회상’ ▲ 2004년: 엘프레데 옐리네크(오스트리아·소설가) = ‘피아노 치는 여자’ ‘욕망’ ▲ 2003년: J M 쿳시(남아공·소설가) = ‘불명예’ ▲ 2002년: 임레 케르테스(헝가리·소설가) = ‘운명’ ▲ 2001년: V. S. 네이폴(영국·소설가) = ‘도착의 수수께끼’ ▲ 2000년: 가오싱젠(중국·극작가) = ‘영산(靈山)’ ▲ 1999년: 귄터 그라스(독일·소설가) = ‘양철북’ ▲ 1998년: 주제 사라마구(포르투갈·소설가) = ‘눈먼 자들의 도시’ ‘수도원의 비망록’  ▲ 1997년: 다리오 포(이탈리아·극작가) =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우연한 죽음’ ▲ 1996년: 비슬라바 쉼보르스카(폴란드·시인) = ‘끝과 시작’ ▲ 1995년: 셰이머스 히니(아일랜드·시인) = ‘어느 자연주의자의 죽음’ ▲ 1994년: 오에 겐자부로(大江建三郞·일본·소설가) = ‘개인적 체험’ ▲ 1993년: 토니 모리슨(미국·소설가) = ‘재즈’ ‘빌러브드’ ▲ 1992년: 데렉 월코트(세인트루시아·시인) = ‘또 다른 삶’ ▲ 1991년: 나딘 고디머(남아공·소설가) = ‘보호주의자’ ▲ 1990년: 옥타비오 파스(멕시코·시인)  = ‘태양의 돌’ ▲ 1989년: 카밀로 호세 세라(스페인·소설가) = ‘파스쿠알 두아르테 일갗 ▲ 1988년: 나기브 마푸즈(이집트·소설가) = ‘도적과 개들’ ▲ 1987년: 요세프 브로드스키(미국·시인) = ‘연설 한 토막’ ‘하나도 채 못 되는’ ▲ 1986년: 월레 소잉카(나이지리아·극작가) = ‘사자와 보석’ ‘해설자들’ ▲ 1985년: 클로드 시몽(프랑스·소설가) = ‘사기꾼’ ▲ 1984년: 야로슬라프 세이페르트(체코슬로바키아·시인) = ‘프라하의 봄’ ▲ 1983년: 윌리엄 골딩(영국·소설가) = ‘파리 대왕’ ▲ 1982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콜롬비아·소설가) = ‘백년동안의 고독’ ▲ 1981년: 엘리아스 카네티(영국·소설가) = ‘현혹’ ▲ 1980년: 체슬라브 밀로즈(폴란드/미국·시인) = ‘대낮의 등불’ ‘이시의 계곡’  ▲ 1979년: 오디세우스 엘리티스(그리스·시인)  = ‘방향’ ‘제1의 태양’ ▲ 1978년: 아이작 싱어(미국·소설가) = ‘고레이의 사탄’ ▲ 1977년: 비센테 알레익산드레(스페인·시인) = ‘파괴, 또는 사랑’ ▲ 1976년: 솔 벨로(미국·소설가) = ‘허조그’ ‘새믈러씨의 혹성’  ▲ 1975년: 에우제니오 몬탈레(이탈리아·시인) = ‘오징어의 뼈’ ‘기회’ ▲ 1974년: H.마르틴손(스웨덴·시인)  = ‘아니 아라 ’ E.욘손(스웨덴·소설가)  = ‘해변의 파도’ ▲ 1973년: 패트릭 화이트(호주·소설가) = ‘폭풍의 눈’ ▲ 1972년: 하인리히 뵐(독일·소설가) = ‘기차는 늦지 않았다’ ▲ 1971년: 파블로 네루다(칠레·시인) = ‘지상의 주소’  ▲ 1970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구 소련·소설가) = ‘수용소 군도’ ▲ 1969년: 새뮤얼 베케트(아일랜드·소설/극작가) = ‘고도를 기다리며’ ▲ 1968년: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일본·소설가) = ‘설국’ ▲ 1967년: 미겔 아스투리아스(과테말라·소설가) = ‘과테말라의 전설집’  ▲ 1966년: S.요세프 아그논(이스라엘·소설가) = ‘출갗 넬리 작스(스웨덴·시인) = ‘엘리’ ▲ 1965년: 미하일 솔로호프(구 소련·소설가) = ‘고요한 돈강’ ▲ 1964년: 장 폴 사르트르(프랑스·철학가/작가) = ‘구토’ ▲ 1963년: 게오르게 세페리스(그리스·시인) = ‘연습장’ ▲ 1962년: 존 스타인벡(미국·소설가) = ‘불만의 겨울’ ▲ 1961년: 이보 안드리치(유고슬라비아·시인) = ‘드리나강의 다리’ ▲ 1960년: 생-종 페르스(프랑스·시인) = ‘원정’ ‘연대기’  
266    吟遊(음유)시인 댓글:  조회:5317  추천:0  2015-10-07
음유시인(吟遊詩人)은 원래 중세 유럽에서 여러 지방을 떠돌아다니면서 시를 읊었던 시인을 말합니다 클로팽 (Clopin).  프랑스 음유시인 그가 집필하고 상연했던《Desputaison de la Sainte Eglise et de la synagogue》은 탈무드에 담긴 내용들을 둘러싸고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사회적인 논란을 다룬 작품으로 당시 큰 인기를 끌었다. 이 논란은 1240년 파리의 공개적 탈무드 소각으로 이어졌다. 클로팽은 이 작품에서 잘 조직된 유대인들을 인간의 육신과 영혼을 병들게 하는 살인자들로 묘사하고 있다. 클로팽의 작품 외에도 유대인을 부정적으로 다룬 중세 예수 수난극(Medieval Passion Play)들은 많았다. 유대인들이 악마의 하수인들로 등장하는 프랑스의 《The Chaumont Christmas Play》, 유대인을 철저한 이중인격자들로 묘사한 《Le Mystere de la Passion》, 독일의 《The Frankfurt Passion Play》, 유대인들의 유아 제식살해와 기타 신성모독 행위들을 다룬 작품으로 중세유럽 전역에서 자주 상연되었던 《The Play of the Sacrament》와 유대인을 사악한 천재로 묘사한 《The Theophilus Legend》 등이 대표적이다 쟝 프루아사르 (Jean Froissart).  프랑스 역사가 중세시대 프랑스의 각종 일화와 모험담을 수록한 프로사르의《Chronicles》은 후세의 문인과 극작가들에게 많은 소재를 제공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문헌에는 또한 당시 유대인들의 비행과 이들이 프랑스에 거주함으로 발생하는 사회악들에 대해 개탄하는 대목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는 기독교도 유아 제식살해는 실질적인 증거들이 뒷받침해주는 엄연한 사실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죠프레이 초서 (Geoffrey Chaucer).  잉글랜드 시인 “우리의 가장 큰 적인 용, 사탄... 유대인들의 마음속에 둥지를 트고 있네... 고리대금과 갖은 악행으로 빼앗은 재물로 군주의 마음을 빼앗고... 기독교도를 증오하는 저주받은 민족이여!... 도대체 그 마음속에서 그 어떤 불의를 꾸미고 있는가?... 피는 저주받은 너희들의 악행에 울부짖는다... 저주받은 유대인들이 링컨셔의 휴를 죽인 것처럼... 나약한 우리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성모 마리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The Prioresses Tayle, The Canturbury Tayles)   초서는 《The Canterbury Tales》에서 1255년에 일어났던 링컨셔의 휴 살해사건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당시 기록들은 당국이 찾아낸 증거들에 근거하여 흑마술을 신봉하는 일부 유대인들이 이와같은 일을 실제로 저질렀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링컨셔 지방의 고적으로 손꼽히는 링컨성당에서 휴의 사당이 제거된 것은 1930년대의 일이다.   지오반지 피오렌티노 (Giovanni Fiorentino).  이탈리아 시인 그의 작품 《Il Pecorone》에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와 1파운드의 살점을 베어내는 잔혹스런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 작품에 영감을 받은 셰익스피어에 의해 이 인물은 《Merchant of Venice》에서 샤일록으로 부활한다. (The First Novel, Fourth Day)   라파엘 홀린쉐드 (Raphael Holinshead).  잉글랜드 역사가 그가 저술한 《Chronicles of England, Scotland and Ireland》는 동시대의 셰익스피어를 비롯하여 후세의 많은 문인들이 애용하고 즐겨 참고했던 16세기 말엽의 역사서였다. 이 책에서 홀린쉐드는 이렇게 쓰고 있다, “노르만왕의 정복이 앵글로색슨의 수난이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정복군을 따라 들어온 유대인들 때문이었다.”   미구엘 세르반테스 (Miguel Cervantes).  스페인 문호 “오, 파괴적인 족속이여! 오, 극악무도한 자들이여! 오, 더러운 민족이여! 너희들의 허황된 꿈과 정신나간 우행(愚行)과 그 유례가 없는 억지와 가슴속의 걍팍함과 모든 진리와 이성에 대한 무지가 이 세상에 가져온 불운을 보라.” (La gran sultana dona Catalina de Oviedo)   크리스토퍼 말로우 (Christopher Marlowe).  잉글랜드 극작가 “내 얘기를 하자면 이렇다네, 난 밤거리를 휘젖고 다니며 담벼락 아래서 신음하는 병자들을 죽였다네. 때에 따라서는 우물에 독약을 풀기도 했지. 기독교도 도둑놈들을 키워내는데는 돈 몇푼 쓰는 것도 아깝지 않았어. 저들이 나의 본을 따르는 것을 보고 낙으로 삼았다네. 소시적 나는 독약을 만드는 법을 배워서 이탈리아 놈들에게 제일 먼저 시험해 보았지. 그곳에서 나는 수많은 시체들로 신부와 장의사들을 부자로 만들어 주었고 장례식의 종소리를 울리는 일과 무덤파는 일로 묘지기의 손을 바쁘게 했다네. 그 다음에 나는 책략가였어.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 동안 나는 찰스 5세를 돕는다는 명분아래 나의 묘수를 써서 동지나 적을 가리지 않고 죽였다네. 그 다음에 나는 고리대금업자였어. 속임수와 중개업의 비의를 동원하여 갈취하고 압류했지. 얼마지나지 않아 난 파산자들로 감옥을 채웠고 부모잃은 아이들로 고아원을 채웠고 보름달이 뜰 때마다 몇놈을 미치게 만들었지. 가끔가다 어떤이는 불운을 이기지 못해 목을 매달기도 했어. 그들의 가슴에 나의 저주를 파묻고는, ‘아 놈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했지. 하지만 내가 저들을 괴롭히고 얻은 축복을 보게나. 내겐 마을 하나는 통체로 살 수 있는 돈이 있다네. 자, 이보게, 자네는 자네의 인생을 어떻게 써먹었는가?” (The Jew of Malta)   토마스 데커 (Thomas Dekker).  잉글랜드 희곡작가 희곡《Newes From Hell》의 주인공은 죽은 뒤에도 고리대금업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한 유대인이다. 《The Honest Whore》에는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 옮기기 힘들 정도의 극렬한 반유대적 표현들이 포함되어 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  잉글랜드 문호 “나는 그 이가 기독교도이기 때문에 증오하오. 하지만 그 얘긴 나중에 하고. 그는 돈을 빌려주면서 낮은 이자를 받아 여기 베니스의 이자율을 끌어내리죠. 나 한테 한번 걸리기만하면 난 나의 그 태고적 원한을 놈에게 배로 갚아 줄것이오.” (Shylock in Merchant of Venice)   “분명 유대인은 악마의 화신이지.” (Launcelot, Ibid.)   희곡의 역사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캐릭터 중에 하나로 꼽히는 샤일록에 대해 유대인들은 마땅히 강한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일부 유대계 작가들은 희곡《베니스의 상인》에 내포된 잠재적 반유대주의를 신약성경과 《시온의정서》의 그것에 비교하기도 한다. 1936년 미국의 저명한 유대인단체 반-비방연맹(Anti-Defamation League)은 〈B'nai B'rith Sounds Call to Arms〉란 제목의 공식성명을 발표하여 “250여개 도시의 각급 학교에서 《베니스의 상인》의 상연을 근절시키도록 총력을 다할 것”임을 밝히기도 했다. 이 작품 외에도 유대인에 대한 부정적인 표현이 등장하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은《Two Gentlemen of Verona》, 《Much Ado About Nothing》, 《Love's Labour Lost》, 《A Midsummer Night's Dream》, 《Henry IV》, 그리고 《Macbeth》이다.  에밀 졸라 .  프랑스 작가 그는 유명한《J'accuse(나는 고발한다)》를 발표해 드레퓌스를 옹호했다. 그러나 이 글을 통해  그가 제기한 몇가지 주장이 문제가 되어 그는 1898년 2월 명예훼손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친(親)유대적 작가로 알려졌으나 실제로 그의 작품들에는 유대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할 만한 대목들이 적지않게 등장한다. 예를 들어 1882년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며 도산한 카톨릭 계열의 금융회사 Union Generale 사태에 기초한 1891년작《L'Argent》에는 유대계 국제금융의 막후 책략과 술수들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샤를 모라스   프랑스 우익지도자 “루소는 그 누구도 길들일 수 없는 짐승이었고 그 어떤 힘도 억제할 수 없는 악마였다. 그는 200년 동안 붕괴와 해체의 요기(妖氣)가 그득했던 음습한 세상이 잉태한 마귀였다. 세상에 그 꼴을 드러낼 때까지 시집도 못간 추녀의 레옹 도데 프랑스 작가, 우익지도자 알퐁소 도데의 아들인 그는 에두아르 드루몽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부패와 정쟁으로 찌든 제3공화국과 허구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 유명한 그는《Au Temps de Judas》를 통해 유대인의 금권(金權)정치가 프랑스 사회에 끼치는 파괴적인 영향을 강조했다. 드루몽의 사후, 그는 모라스와 함께〈악시옹 프랑세즈〉운동을 이끌었다.
265    알아보는 만주어 댓글:  조회:5266  추천:0  2015-09-29
                      타언어에 유입된 만주어[편집] 한국어(함경북도 방언)에 차용된 만주어[편집]  ##순대 - 성이두하(senggi duha)  ##사돈 - 사둔(sadun)  ##쌔씨개(욕) - 사스헤이(sashei, 돼지)  ##부스깨(아궁이) - 푸스쿠(fusku)  ##어시(어버이) - 어시(exi)  ##배재(울타리) - 바산(basan)  ##야래(송어) - yaru 중국어(북경어, 동북어)에 차용된 만주어[편집] 청나라 통치기를 거치면서 북경어와 동북 방언에도 만주어 단어가 차용됐다.  ##러러(勒勒) - 공허한 이야기, "러오럼비leolembi"(담론) 유래.  ##모청(磨蹭) - 느려터지다, "모초moco"(느리다) 유래.  ##좡커(撞克) - 귀신, 악령을 만남,"장쿠럼비jangkulembi" 유래.  ##거지(胳肢) - 가려운 곳을 긁다, "거지허섬비gejihesembi" 유래.  ##사오다오(哨叨) - 침착하지 않음,"소돔비sodombi" 유래.  ##가이러우(該漏) - 중간에서 가로채다, "가임비gaimbi"(원하다) 유래.  ##케이(剋) - 비판, "코이카삼비koikasambi"(싸우다) 유래  ##마사(抹擦) - 구겨진 것을 펴다. "마침비macimbi"(몸을 쭉 펴다) 유래.  ##텽(挺) - 아주 훨씬 "턴ten" 유래  ##하라(哈喇) - 기름기 있는 것이 상하다, "하르har"(검은색) 유래. 만주어에서 유래한 지명[편집] 한국 지명[편집]  ##아오지(경흥군) - 불타는 돌  ##나단산(경원군에 있는 살바우산의 별칭) - nadan(일곱), 나단산은 봉우리가 일곱개이다.  ##이판령(마천령의 옛 지명) - 소  ##주을(경성군) - 뜨거운 물  ##보을천(회령군) - 버드나무  ##백안(종성군) - 수소 중국 지명[편집]  ##연길시(延吉市) - '연기가 피어오르다' 만주어의 의역  ##연집(烟集, 연길시의 옛 지명) - durgatu의 의역  ##훈춘시(珲春市) - huncun(눈썰매)  ##목단강(牡丹江) - 구불구불한 강  ##장백산(長白山, 백두산의 중국식 표기) - golmin šanggyian alin(길고 하얀 뫼)  ##길림(吉林) - "jilin ula"(강가)  ##해란강(海蘭江) - hailan ula(느릅나무 강)  ##송화강(松花江) - sunggari ula (흰 강)  ##하얼빈(哈爾濱) - 어망을 햇볕에 널어 말리는 곳  ##아성(阿城, 금나라의 발상지) - arecuka(상서롭다)의 약칭  ##두만강(豆滿江) - "tumen secin"(만(萬)개의 수원(水原)) 러시아 지명[편집]  ##사할린 섬 - "sahaliyan ula angga hada"(검은 강 어귀 봉우리) 유래  
264    中國內 유일한 조선족대학생 李陸史문학제 댓글:  조회:7747  추천:0  2015-09-22
9월 18일 오후, 한국 경상북도 안동시가 주최하고 중국 연변작가협회와 이육사문학관이 주관한 《제5회 중국조선족대학생 이육사문학제》가 안동병원과 안동간고등어회사의 후원으로 연변대학 예술학원 음악홀에서 개최되였다. 연변작가협회 당조성원 정봉숙은 개막사에서 문학후비군 양성을 주목표로 하는 유일한 문학제로서의 《중국조선족대학생 이륙사문학제》는 대학생들의 참여의 장으로 조선족대학생들과 조선어(한국어)를 배우고있는 타민족대학생들이 참여하는 대형문학행사의 하나로, 명실상부한 대학생문학제로 거듭나고있다고 지적, 기성문인들과 바야흐로 문단에 등단하는 대학생들과의 상호 련대와 협동을 적극 추진하고 상호 교류와 우의를 증진하는 중요한 무대로 되였다고 하면서 이같은 의의있는 행사를 조직하고 후원해준 경상북도 안동시와 이륙사문학관 그리고 후원단체들에 감사를 드렸다. 문학제 제1부로 진행된 이륙사문학세미나에서는 한국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유성호교수가 《저항으로서의 이륙사시와 그 서지적 사항》, 연변대학 조선-한국학학원 우상렬교수가 《이륙사와 중국 현대문학》이라는 제목으로 론문을 발표하였다. 웃줄 좌로부터 정봉숙, 리봉우, 군부옥, 이옥비, 유성호, 우상렬, 김경훈, 조영일. 제2부로 진행된 이륙사문학상 시상식에서 연변대학 조선-한국학학원 교수이며 연변작가협회 겸직부주석인 김경훈이 수상작선정보고와 수상자명단을 발표하였다. 한국어를 배우는 타민족대학생들을 상대로 설치한 한국어문학상 시상식에서 길림화교대학 장성양, 치치할대학 왕정정 등 5명이 우수상을, 대련민족대학 리로, 정주경공업대학 초근근 등 8명이 동상을, 남경대학 리연, 산동대학 온애륜 등 7명이 은상을, 연변대학 양문연, 손효 등 4명이 금상을, 산동대학 록미교학생이 대상을 수상하였다. 조선족대학생문학상 시상식에서는 북경화공대학 김지이, 중앙민족대학 최의단 등 15명이 우수상을, 회해공학원 류연정, 연변대학 정희정 등 13명이 동상을, 천진외국어대학 최려영, 화동사범대학 차경나 등 10명이 은상을, 연변대학 김소연, 김은령 등 5명이 금상을, 연변대학 강미홍학생이 대상을 수상하였다. 조선족대학생 이륙사문학상 대상 수상자 연변대학 강미홍(가운데). 시상식에 이어 김경숙, 김희선 등 한국의 시인들과 연변랑송협회 송미자, 박송천 등 랑송인들이 이륙사의 《광야》, 《청포도》, 《노정기》, 《절정》 등 시들을 랑송하였다. 문학제에서 연변대학조선-한국학학원 당위서기 리봉우와 이륙사추모사업위원회 리사장 권부옥이 축사를 하고 이륙사선생의 딸 이옥비녀사가 답사를 하였으며 한국 안동시 이륙사문학관 관장 조영일이 페막사를 하였다. 부분적인 수상자들과 함께. 이번 문학제에는 연변대학과 타지역 20여개 대학들에서 온 수상자 및 연변작가협회, 한국 경상북도 안동시, 이륙사문학관, 안동병원, 안동간고등어회사 등 주최측과 후원측의 대표 250여명이 참가하였다. 문학제가 진행되는 동안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중한시인들의 시화전이 있었다.   ///길림신문 김태국 기자 ===================================================== 기획ㆍ특집 목놓아 부르던 광복의 노래, 중국 광야에 울려퍼지다 권광순기자  |  gskwon@kbmaeil.com   2015.09.24                 ▲ 중국연변 이육사문학제에 참가한 (사)이육사추모사업회 일행들이 문학강연 등 다채로운 진행을 마친 후 기념사진을 촬영을 하고 있다. 중국 연변대학서 제5회 `이육사 문학제`  시낭송·세미나 등 항일·문학정신 기려  조선족·한족 학생 한글작품 시상식도  상해 임시정부청사 찾아 독립투사 재조명  육사의 딸 이옥비씨·손자 이승엽씨   윤봉길 의사 기념관서 추모제도 지내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山脈)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이육사의 대표작 `청포도`, `절정`, `광야`가 중국 연변에서 조선족 청년들에게 울려 퍼졌다.  일제강점기 끊임없는 독립투쟁과 함께 문학 활동을 벌이면서 주옥같은 시를 남긴 안동출신 항일 저항시인 이육사. 그의 문학 정신을 기리기 위해 중국 이육사문학제가 지난 18일 오후 연변대학에서 열렸다. 경북도와 안동시가 주최하고 (사)이육사추모사업회와 중국연변작가협회(회장 최국철)가 주관한 중국연변 이육사문학제는 2011년 9월 첫 번째 개최한 이후 이번이 다섯 번째다.         ▲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에서 육사선생의 딸 이옥비(왼쪽) 여사가 육사의 손자 이승엽씨의 손을 잡고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이날 문학제는 학술대회, 문학강연, 시낭송 등 다채로운 구성으로 진행됐으며 현지 중·고등학생과 대학생, 작가협회 회원 등 300여명이 참가했다.   먼저 이육사의 시 세계를 탐구, 분석하고 시인의 문학정신에 대해 토론하는 학술세미나가 마련됐다. 이날 한양대 국문학과 유성호 교수는 `저항으로서의 이육사 시와 그 서지적 사항`을 발표한데 이어 `이육사와 중국 현대문학` 의 내용으로 연변대학 조문학부장 우상렬 교수가 각각 발표했다.  우 교수는 주제발표에서 “이육사는 한국문학 가운데에서도 시적 영역의 높은 우월성을 간직하고 있다” 며 “그는 중국 문학계까지 목가적이면서도 웅혼한 필치로 민족의 독립 의지를 기탄없이 표현했다”고 평가했다.          ▲ 육사의 손자인 이승엽씨가 상해의 윤봉길 의사의 기념관 입구에서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또 `현대시조 어떻게 쓸 것인가`를 주제로 강인순 시인의 강연에 이어 한국과 중국의 문인 27명의 시화전작품 전시회도 열렸다.  중국 조선족과 한족 학생들을 대상으로 공모한 한글작품 시상식에는 수상자와 가족들이 참여해 성황을 이뤘으며 연변일보, 연변방송 등 현지 언론의 취재열기도 뜨거웠다. 시상식에서 강미홍(22·연변대) 씨가 육사문학상 대상을 받는 등 조선족, 비조선족 학생 53명에게 상과 1천200여만원의 장학금도 지급됐다.   (사)이육사 추모사업회 권부옥 이사장은 “시인이며 독립투사인 이육사선생은 여러분의 나라 중국에서 공부하고, 항일 투쟁으로 극악한 일제에 의해 북경 감옥에서 순국한 분이다” 며 “이 행사를 계기로 이육사의 문학을 이해함으로써 한국과 중국의 젊은이들이 좀 더 따뜻한 마음으로 상호 이해와 우호의 마음을 가졌으면 한다” 고 말했다.          ▲ 이육사,윤봉길,윤동주 광복 70돌 맞아 찾은 용정·상해…  항일 시인·독립투사 자취 곳곳  (사)이육사추모사업회는 올해가 광복 70주년 기념해인 만큼 윤동주 시인 등 당대 일제에 저항한 문인들과 항일투쟁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재조명하기로 했다.  이육사추모사업회 일행들은 지난 20~22일까지 길림성 조선족 자치구역인 용정시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를 찾았다.   용정시의 경우 이곳 간판마다 글씨를 쓸 때에도 한글은 위에다 쓰고 그 아래쪽에 한문으로 써져 있다. 낯선 중국 땅이 아니라 강원도 오지 어느 곳쯤 될 것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중국 속의 한국`이다.  용정시 외곽 윤동주 시인이 다녔던 대성중학교는 80년대 말 이 곳 옛터를 대한민국에서 다시 복원한 것이다. 이 학교에는 윤동주 시인이 당시 식민지 지식인들의 불안과 절망, 광복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작품들이 고스란히 보관돼 있다. 윤동주 시인의 대표작 가운데 `서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이날 추모사업단 일행들은 각종 자료를 통해 그의 부드러운 내면에 투철한 항일 민족정신을 차분하게 시로 승화시킨 점을 확인했다.   이육사추모사업회 일행들은 21일 상해 도심 가운데 위치한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를 방문한데 이어 윤봉길 의사의 기념관 입구에서 추모제를 지냈다.   중국 내에서 남아 있는 가장 대표적이며 중요한 역사성을 간직한 상해임시정부청사는 1926년부터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1932년까지 사용됐다. 이후 일본의 감시와 탄압때문에 독립투사들은 중국의 여러 지역으로 청사를 이전하는 곡절을 겪게 된다. 1989년에는 상해가 도시개발계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었지만 우리나라 정부의 요청에 의해 1993년에 마침내 복원됐다.        ▲ (사)이육사 추모사업회 권부옥 이사장이 연변대 조선족 학생에게 이육사 문학상을 주고 있다. 이곳은 일제 강점기 3.1운동이 일어난 직후에 조직적 항거를 목적으로 건너간 독립투사들이 활동하던 본거지인 만큼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된 곳이다. 1919년 4월 11일 29명의 민족 지도자 대표들이 모여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회의를 열었고, 이 때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처음으로 정해짐에 따라 독립투사들의 애환과 비장한 애국정신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때마침 이곳에서 육사의 따님 이옥비(75) 여사는 특별한 만남이 있었다. 육사의 손자, 퇴계 이황선생의 16세손인 이승엽(41)씨가 고모인 옥비 여사가 상해 임시정부청사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마중 나온 것이다.   이육사추모사업단 일행들은 일정 내내 옥비 여사와 승협씨가 윤봉길 의사 기념관을 방문해 추모제를 지내는 등 다정다감한 모습에 수시로 박수갈채를 보냈다.   앞서 LG그룹 비서실에 근무했던 승협씨는 현재 상해시 경영자 교육과정(MBA)을 밟고 있다. 그는 육사의 기일이면 어김없이 제사를 지내는 등 종손으로서 소임을 다하고 있다. LG구릅 측이 경영자 교육과정 대상 나라를 미국, 중국 가운데 선택할 것을 권유할 당시 승협씨가 중국을 선택한 것은 바로 할아버지 육사의 흔적을 제대로 찾기 위해서였다. 한국 측 참가단을 이끈 조영일 이육사문학관장은 “옥비 여사와 이육사 선생 손자의 만남은 이번 행사의 의미를 한층 더 높이는 계기가 됐다“ 며 “앞으로 문학인, 독립 투사할 것 없이 우리 민족이 중국 곳곳에서 일제에 항거한 흔적을 더욱 고양하고자 활동영역을 넓혀가겠다” 고 말했다.   중국 길림성 연길시·상해에서   한국 /권광순기자 gskwon@kbmaeil.com   
263    윤동주 시의 이민문학적 성격 댓글:  조회:6540  추천:0  2015-09-17
  윤동주시의 이민문학적 성격 장춘식     1. 들어가면서     1948년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가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후 현재까지 윤동주와 그의 문학에 대한 연구는 참으로 다각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300편을 넘는 윤동주 관련 론저1)들중에서도 이민문학적 시각에서 그의 문학을 조명한 론문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 조선족의 현대문학이 이민문학에서 출발했다는 관점에서 볼 때 이민문학의 시각에서 윤동주의 문학을 재조명하는것은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하겠다.   서사문학과는 달리 시문학은 이민문학 여부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윤동주의 경우는 물론 이민지인 룡정의 명동 출생으로 이민 2세가 되기때문에 어떤 측면에서는 그다지 어렵지는 않다고 할수도 있다. 그의 작가적립장이 이민자인것은 물론이려니와 대부분의 인생체험 역시 이민지에서의 삶이 되기때문이다. 따라서 본고는 그의 다수 작품은 이민체험에서 비롯되였고 이민자의 정서를 담고있거나 인류 공동의 정서를 담고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1917년 12월 30일 명동출생, 1931년 명동소학을 졸업, 달라자의 현립1교에서 6학년 공부를 1년 수학, 1932년 은진중학 입학, 1935년 3학년을 마칠즈음 평양 숭실중학 1년 재학, 1938-1942년 연희전문 4년, 1942-1943년 일본 닛교대학, 동지사대 영문과, 1943-1945년 후꼬오까 형무소, 옥사. 이런 리력을 년도순에 따라 계산해보면 이민지에서 출생했으나 평양과 서울에서 5년, 일본에서 3년 하여 고국과 일본에서의 체류시간이 모두 8년간2)이나 된다. 그것도 윤동주의 짧은 생애에서 사춘기와 성숙기의 대부분 시간을 한국이나 외국에서 보낸셈이다. 게다가 그의 다수 시들은 이 시기에 씌여졌다. 원래 이민자의 정체성은 이중성을 가지기 마련인데다 이처럼 고국과 일본에서의 체류시간이 길기때문에 아무리 이민지 출생자라 해도 작품의 이민문학여부를 가리지 않으면 안될것이다.   본고는 윤동주의 개별적 시작품의 이민문학여부를 확인하기 위한데 목적을 둔것이 아니라 이민작가로서 윤동주가 자신의 정체성인식을 어떻게 표현하였느냐를 밝히려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본고에서는 최문식, 김동훈 편, 《윤동주유고집》(연변대학출판사, 1996)을 기본 텍스트로 하고 다른 판본들도 참고하였다.     2. 이민자로서의 정체성 확인     필자가 골라낸 관련 시작품들을 창작년대순으로 읽다보니 가장 만저 눈에 뜨인것이 《고향집-만주에서 부른》이라는 작품이다.     헌 짚신짝 끄을고       나 여기 왜 왔노   두만강을 건너서       쓸쓸한 이 땅에     남쪽 하늘 저 밑에       따뜻한 내 고향   내 어머니 계신 곳       그리운 고향집   (1936.1.6)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윤동주는 중국 룡정 명동에서 출생하였다. 이민 2세가 될것인데, 따라서 그의 고향은 룡정 명동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화자는 고향이 《남쪽 하늘 저 밑》에 있는 따뜻한 곳이다. 내 어머니가 계신 곳이다. 그리고 《나》는 《헌 짚신짝 끄을고》 여기에 왔다. 그러니까 여기서 《나》라고 하는 화자는 시인 윤동주 자신은 아니며 어머니가 계신 남쪽 하늘 저 따뜻한 고향집을 떠나 두만강을 건너서 《쓸쓸한 이 땅》에 온 이주민이다. 두만강을 건넜다고 하는것은 현재 살고있는 곳이 북간도쯤이 된다는 말이다. 즉 시인은 이주민이라는 공동체의 립장에서 향수를 토로하고있다. 그것도 《왜 여기 왔노》라는 넋두리를 섞으면서 말이다.   윤동주의 시에서는 보기 드물게 시인 자신의 립장이 아닌 화자를 등장시키고있다. 이는 객관적 혹은 공동체적화자를 리용한 공동체적정서의 표출을 념두에 둔 시작행위라 하겠다. 즉 이주민의 한 성원으로서 화자는 불특정개인이다.   그러니까 윤동주는 이 시를 쓸즈음 개인적인 감수성을 이주민이라는 자신이 속해있는 공동체의 립장에까지 확장시켜 우리의 력사와 불행한 운명을 하소연하고 드러내고있는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주민 2세로서 일제강점기의 상황을 보면서 민족의 운명을 걱정하고있는것으로 사회적사명감을 드러낸것이 되기때문이다.   이는 결국 이민자의 정체성확인이 시적으로 표현된 형태이다. 두개의 차원에서 설명할수 있는데, 먼저 화자의 차원에서 보면 이민은 고통스러운 경력이다. 그래서 화자는 고향인 모국땅의 고향집을 그리워한다. 모국땅과 고향집을 그리워한다는것 자체가 이민의 고통을 그대로 드러내는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온전한 정체성을 보전하지 못하고 생존을 위한 이주를 단행하였고 현재는 이민지에서 또다른 정체성을 형성하면서 살려니 과거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고국땅의 고향집이 그리운것이다. 다음, 시인 윤동주는 룡정 명동이 고향이다. 그럼에도 남쪽 따뜻한 곳이 고향인 작중의 화자를 등장시켜 고향을 그리게 하고 그의 그리움을 동정한것은 무엇때문일까? 두말할것도 없이 동류의식때문일것이다. 여기에는 이민 1세인 부모와 친지들, 이웃들에게서 전수받은 고향의 기억들도 당연히 작용하였을것이나 그보다도 시인 자신이 이민자의 삶을 살아오면서 키워온 이민자의 동류의식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려는 욕구를 자극했을것이다.   동심이 짙게 드러난 《오줌싸개지도》 역시 그러한 정체성 확인의 욕구를 잘 보여준다.     빨래줄에 걸어논       요에다 그린 지도   지난밤에 내 동생       오줌싸 그린 지도     꿈에 가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 벌러 간 아빠 계신       만주땅 지돈가?   (1936. 초)     이 작품 역시 앞의 《고향집》과 비슷한 정서를 드러내고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적화자가 그 반대편인 고국의 고향땅에서 이민지인 만주땅을 떠올린다. 첫련은 동요나 동시의 립장에서 볼 때 참으로 기발한 착상이 될만한 소재를 다루고있다. 동생이 지난밤에 오줌을 싸놓은 요가 빨래줄에 걸려있는데 그것이 지도와도 같다고 했다. 그런다음 2련에 가서는 그에서 비롯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있다. 즉 그것이 엄마 계신 별나라의 지도일지도 모르며 아빠가 계신 만주땅 지도일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러니까 엄마는 하늘나라에 가계시고 아빠는 돈을 벌어 자식 먹여살리기 위해 만주땅이라는 곳에 이민을 간것이다.   여기서 윤동주의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첫 상상은 쉽게 리해할수가 있다. 그러나 윤동주가 만주땅 출생인데 화자는 고국땅에서 만주땅에 돈벌러 간 아빠를 그리워한다. 화자의 공간적위치만 바뀌였을뿐 《고향집》과 같은 맥락이다. 민족공동체의 립장에서 만주이민의 문제를 인식하고있다 하겠다. 《고향집》의 정서와 맞물려 만주이민의 문제에 대한 시적상상력과 작가적 사명감 혹은 책임감이 동시에 발동한것이다.     3. 이민자의 현재 삶에 대한 관조     앞의 두 작품에서 정체성의 확인 욕구는 일종의 의식적인 행위로서 거기에는 력사적인 상상력이 많이 개입되여있다. 그에 비해 아래의 두 작품은 이민자의 현실적 삶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먼저 《슬픈 족속》이라는 작품을 보도록 하자.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1938.9)     《흰 수건》, 《흰 고무신》, 《흰 저고리》, 《흰 띠》는 모두가 조선민족을 상징하는 복식들이다. 특히 《흰 수건》과 《흰 고무신》은 남성들도 사용했던것이나 그것들을 포함하여 《흰 저고리》와 《흰 띠》는 대체로 여성들이 많이 사용했었다. 조선족으로서 자기 민족의 특징을 시에 담은것은 당연히 정체성의 확인차원에서 리해할수 있다. 이국땅에서 사는 립장에서 민족동질성의 상실을 항상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므로 그것은 시인의 정서로 볼 때는 지극히 당연하다.   그런데 왜 이런 차림의 사람을 시인은 《슬픈 족속》이라 했을까? 첫행은 그냥 현상의 진술이라 하겠지만 제2행에서 《흰 고무신》은 《거친 발에 걸리》웠다고 했다. 《거친 발》은 일차적으로 항상 맨발바람에 전야작업을 해야 하는 농민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것이라 할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이 시어로 정제되였을 때 우리는 거기에서 우리 농민의 고단한 삶을 느낄수가 있다. 다음은 《슬픈 몸집》이다. 인간의 몸 자체가 슬플수는 없다. 그러니 그 몸집, 즉 《흰 저고리 치마》를 입은 인간의 몸집이 시인에게 슬픈 모습으로 보였다는 말이 된다. 다시 《가는 허리》 역시 슬픔의 한 이미지가 되겠고 동시에 동정을 유발하는 불쌍한 모습의 이미지라 하겠다. 그러니까 《거친 발》과 《슬픈 몸집》, 그리고 《가는 허리》는 제목에 나타난 《슬픈 족속》의 재해석 혹은 심화가 되겠다. 다시 말하면 이국땅에 사는 우리 민족은 슬픈 족속이라는 뜻이 되겠는데, 그러한 슬픔이 쌓이게 된것은 더 말할것도 없이 이주민으로서의 고난과 일제강점기라는 현실의 암흑에 의해 비롯된것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시인은 그냥 우리 민족의 모습, 삶의 현실을 슬프게만 보고 손을 놓고있은것은 아니다. 마지막 행에서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고있다고 했다. 허리를 질끈 동인다는것은 상식적으로 일종의 자각이나 행동의 의지를 보여준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아무리 세상이 험악하고 삶이 고달프다고 해도 악착스레 생존해가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준것일수도 있고 한걸음 더 나아가 현실과 투쟁하며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여준것일수도 있다.   《양지쪽》은 《슬픈 족속》보다는 2년 먼저 씌여진 작품으로 어쩌면 아직도 동심이 짙게 묻어나고있다 할수도 있다. 그러나 그 리면의 사상이나 정서는 오히려 섬찍할 정도로 강하고 깊다.     저쪽으로 황토 실은 이 땅 봄바람이   호인의 물레바퀴처럼 돌아 지나고     아롱진 사월 태양의 손길이   벽을 등진 설운 가슴마다 올올이 만진다.     지도째기 놀음에 뉘 땅인 줄 모르는 애 둘이   한 뼘 손가락이 짧음을 한함이여     아서라! 가뜩이나 엷은 평화가   깨어질까 근심스럽다.   (1936.6.26)     첫련 두행은 중국땅 북방의 봄풍경을 그리고있다. 한시에서의 《비흥(比興)》이라는 표현기교중 《비》에 해당하는것으로 여기서 《황토 실은 이 땅 봄바람》과 《호인의 물레바퀴》는 화자가 체험하고있는 지역, 즉 간도땅 봄의 이미지가 될것이다. 다음 두번째련의 두행도 봄의 풍경묘사에 속하지만 《벽을 등진 설운 가슴마다 올올이 만진다.》는 표현은 《흥(興)》에 해당되는것으로 이른바 《7.7사변》이라 불리는 중일전쟁 1년전 식민지 백성, 그것도 이주민 백성의 어두운 심리적상황을 은근히 내비친것이라 하겠다.   세번째련과 네번째련 역시 《비흥》의 관계로 해석할수 있지만 앞의 상징적 혹은 암시적표현을 보다 강하게 그리고 현실적으로 표현하고있다. 즉 지도째기놀음이라고 하는 애들의 일상적유희의 특징, 즉 땅따먹기의 확장지향적성향과 일본의 령토야심과 그에 저항하고있는 중국의 대결을 은유적으로 련관시키고있는것이다. 마지막련의 《가뜩이나 엷은 평화》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이점을 확인할수가 있다. 표면적으로 《아서라!》라는 표현은 지도째기놀음을 하고있는 두 아이의 《령토야심》을 저지하는 말이지만 사실상 그 표현의 대상은 평화를 깨뜨리려는 제국주의자들이 된다 하겠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어떤 측면에서는 윤동주의 그 어떤 작품보다도 강한 저항성을 보여준다고 볼수도 있다. 다만 당시 시대적상황과 시적인 표현을 련관시켰을뿐 윤동주가 당시의 시대적상황에 대해, 특히 중국 전국토를 삼키고자 호시탐탐 노리며 준비하고있던 일제의 야심에 대해 어떻게 리해하고있었는지를 확인할수 있는 자료가 없으므로 그러한 작품의 성향을 자신있게 말할수 없을뿐이다.   《슬픈 족속》에서는 민족의 슬픈 현실을 개탄하면서 그러한 렬악하고 슬픈 현실에서도 악착스레 생존하려는 이주민의 의지를 보여주고있다. 이것도 정체성 확인의 한 방식이라 할수 있다. 그런데 그에 비에 《양지쪽》에서는 스스로가 중국땅에서 사는 조선인 이민자임을 전제하여 위기의식을 표출하고있다. 이민 2세의 정체성인식을 드러낸 경우다. 그러니까 이 두 작품은 조선인 이주민의 이중적정체성을 드러내고있다 하겠다.     상기 네 작품중 세편은 1936년의 작품이고 한편은 1938년의 작품이다. 그러니까 각각 19세때와 21세때에 쓴것이 된다. 약관의 나이에 개인적인 관심을 넘어 민족공동체, 이민자의 공동체적 문제에 주목하였다는것은 시적인 감성을 말하기전에 우선 시인의 의식이 얼마나 조숙하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그리고 이주민의 정체성인식을 보여준 시작품이 지극히 적은 상황에서 이 네 작품은 매우 가치있는것이라 생각된다.     4. 향수와 그 승화     향수는 시작품에서 흔히 볼수 있는 소재이다. 고향이 인간에게 있어 그만큼 중요하며 따라서 고향을 떠났을 때의 감수가 그만큼 절실하고 강렬하다는 말이 되겠다. 그러나 이주민 시인에게 있어, 특히 윤동주에게 있어 향수는 일반적인 향수의 의미를 초월하여 이주민의 신분확인을 드러내는 소재이고 감수가 된다. 먼저 윤동주가 처음 평양 숭실중학에 류학을 갔을 때 쓴 작품 《황혼》을 보자. 1936년 3월말에 귀국했다고 하니 아마 이제 막 귀국하게 될즈음 쓴것으로 보인다.     해살은 미닫이 틈으로   길쭉한 일자를 쓰고…  지우고…     까마귀떼 지붕 우으로   둘, 둘, 셋, 넷, 자꾸 날아 지난다.   쑥쑥, 꿈틀꿈틀 북쪽 하늘로,     내사…   북쪽 하늘에 나래를 펴고싶다.   (1936.3.25. 평양에서)     첫련 《해살은 미닫이 틈으로/길쭉한 일자를 쓰고… 지우고…》는 그냥 방안에 비쳐들어온 저녁해살의 모습을 그린것처럼 보이지만 꼼꼼히 따지고보면 이제 하루해가 서산에 기우는 시각 어떤 마음의 움직임을 암시한것이라 할수 있다. 그리고 다음련에서 까마귀떼가 지붕우으로 날아지나간다고 했다. 왜 이런 그림이 화자의 관심을 끌었을까? 두말할것도 없이 까마귀가 날아간 북쪽에 고향이 있기때문이다. 여기서 이미지의 핵심은 《둘, 둘, 셋, 네, 자꾸 날아 지난다》라는 구절이다. 까마귀 하나쯤 날아지나가는 모습을 보면서는 그냥 덤덤히 지나치고말았을지도 모른다. 여럿이 자꾸 날아지나가기때문에 도무지 마음을 걷잡을수가 없다. 그래서 다음행의 《쑥쑥, 꿈틀꿈틀》이라는 강조된 표현이 튀여나온것이다. 향수의 마음을 끊임없이 자극하고있음을 화자는 이런 방식으로 표현하고있다 하겠다. 그리고 마지막련 《내사…/북쪽 하늘에 나래를 펴고싶다》는 표현으로 참을길 없는 향수의 심정을 폭발시키고만다. 간절한 고향생각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인간은 고향에서 향수를 느끼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타향이나, 특히 이국땅에 몸담고있을 때면 고향의 모든것이 아름다워보이고 그리워진다. 그래서 윤동주는 룡정의 아들임을 확인하게 되는것이다. 이 시의 가치는 타향에서 느끼는 간절한 향수를 해저물녘의 자연이미지에 기탁하여 점층적으로 드러내고있다는데 있을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까마귀의 이미지는 까마귀가 상징하는 흉조로 제시된것 같지는 않으나 그러한 까마귀의 이미지때문에 좀더 암울해지고 간절해짐은 부정할수 없을것 같다.   이 시는 그냥 순수한 향수시일뿐이다. 그러나 《별세는 밤》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전문 인용하고싶지만 너무 길어서 인용은 피한다.   이 시는 윤동주가 연희전문 졸업을 몇달 앞둔 시기에 쓴것이다. 《어머님/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라는 표현에서 볼 때 이 시의 화자는 북간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타향에 있다는 말이 된다. 년표를 살펴보면 이때 윤동주는 서울에 있었던것으로 되여있다. 그리고 가을이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가을로 가득차 있습니다.》가 이 작품의 첫련이다. 그리고 별 하나하나에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동경》과 《시》와 그리고 《어머니》를 그리며 헤인다. 여기서 《사랑》과 《동경》 그리고 《시》는 화자의 미래에 대한 기대나 동경을 표현한 이미지들이 되겠지만 《추억》과 《쓸쓸함》 그리고 《어머니》는 향수를 드러낸것임에 분명하다. 시인의 고향은 서울이 아니라 룡정이기때문에 류학을 위해 서울에 체류중인 시인에게 있어서 서울은 타향이다. 이것을 향수의 정서라 표현할수 있겠다.   《나는 별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 불러봅니다.》라고 한다음 화자가 불러본 말들은 《프랑시스 쟘, 라이너 마리아 릴케》 등 시인들을 빼고는 전부가 고향의 이미지들이다. 《소학교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 《패, 경, 옥 이런 이국소녀들의 이름》, 《벌써 애기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등이 이에 속한다. 이는 앞의 《추억》이라는 표현과도 관련되는 이미지들로서 고향의 경험에서 비롯된것들이다. 비둘기 등 동물의 이름도 여기서는 고향에서 보았던, 혹은 경험했던 동물들로 보아야 할것이다. 그리고 《별이 아슬히 멀듯이》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고 북받치는 향수를 털어놓는다.   이주민에게 있어서 고향의 의미는 일반인들이 인식하는 고향처럼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이제 이민 3세, 4세가 사회의 주류를 이루고있는 현재까지도 우리가 고향을 말할 때 항상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의 고향이 어디냐를 따지고있는것도 그러한 복잡한 고향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것이다. 고향에 대한 인식이 복잡한만큼 향수의 정서나 감정도 복잡하지 않을수 없다. 이 작품의 경우 비록 향수의 정서는 여느 향수시와 별 다름이 없어보이지만 중국땅 자신이 태여난 곳을 고향이라 인식하고 짙은 향수의 정서를 드러낸것 자체가 이민시인의 이중적정체성을 보여준것이 된다. 현재 몸담고있는 서울은 모국이고 부조의 고향이지만 그것을 고향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이국땅을 고향으로 인식할수밖에 없는것이 이주민의 처지이기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국땅 일본에서 느낀 향수는 어떤것일까?   《흐르는 거리》, 《사랑스런 추억》, 《쉽게 씌여진 시》 등 세 작품은 모두 윤동주가 일본 동경에서 류학을 시작한 첫해의 작품이다. 1942년 5월 12일, 13일과 6월 3일에 각각 쓴것으로, 윤동주가 그해 봄(날자미상)에 일본에 건너가 4월 2일 동경 립교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고 하니 이제 막 일본땅에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류학공부를 시작한후에 씌여진 시라 하겠다.   세 작품은 기본적으로 비슷한 정서를 드러내고있다. 고향을 떠나 타향이나 타국에서 사는 외로움, 울적함, 향수가 기본적인 정서이다.   먼저 《사랑스런 추억》에서는 일본에 체류중인 화자가 《서울 어느 조그만 정거장》의 추억을 되살려낸다. 고향을 떠나 오랜 시간 타향을 전전하는 류학생의 허전한 마음과 외로움이 잘 그려지고있다. 특히 담배연기라는 이미지가 그러한 정서를 절실하게 다가오게 한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되는 점은, 담배연기처럼 표류하는 마음을 달래야 했던 서울의 삶이였으나 《동경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생각할 때는 오히려 그것이 《희망과 사랑처럼 기리워한다》는 점이다. 서울류학도 타향살이이지만 동경은 더구나 이국땅이여서 화자가 느끼는 외로움이나 허전함의 정도가 훨씬 강함을 알수 있게 해준다. 즉, 오늘 화자가 처한 이국땅에서의 삶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차운 언덕에서/서성거릴 게다.》라는 지난 서울류학때 겪었던 타향의 설움이 희망과 사랑처럼 기리워진다고 표현함으로써 오늘 삶의 허전함과 외로움, 서러움을 보다 절실하게 드러낸것이다.   《흐르는 거리》는 그러한 이국땅에서 겪는 향수를 옛날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표현한다. 보다 직설적인 표현이 되겠으나 《괴롭다, 슬프다, 외롭다》 라는 표현을 《그리움》이라는 표현 뒤에 숨겨두고있다. 시적인 절제의 미학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시인은 그러한 타향살이의 슬픔을 《정박할 아무 항구도 없이》, 《안개 속에 잠긴 거리는》, 《이 밤을 하염없이 안개가 흐른다.》 등의 이미지를 통하여 암시하고있을뿐이다.   이제 그러한 이국땅에서의 감정을 시인은 《쉽게 씌어진 시》에서 터쳐낸다.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륙첩방은 남의 나라,》 이 련을 시인은 행을 뒤바꾸어 다시 반복한다. 그만큼 강조하고있다는 얘기가 될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의 중심이미지는 《밤비》와 《눈물》이다. 그만큼 외로움의 정도가 강하다는 말이 되겠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허전함이나 외로움을 사탕처럼 입속에서 녹이며 《침전》해버리지는 않는다. 《나는 무얼 바라/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는 외로움에, 슬픔에 빠져버리는 자신에 대한 발견이다. 발견만 하고 그만둔다면 그것은 역시 《침전》이 될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륙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작품 후반부의 4련이다. 여기서 시인은 그렇게 《침전》하려는 자신을 반성한다. 부끄러움은 윤동주 특유의 자성방식이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자성만이 능사는 아닐것이다. 뭔가 앞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이나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겠단다. 여기서 《시대처럼 올 아침》이라는 표현은 여느 비유와는 조금 다르다. 《아침》이라는 시간개념을 《시대》라는 좀더 큰 시간개념 즉 사회적시간개념에 등치시키고있다. 새로운 시대를 기다린다는 말이 되겠다. 윤동주의 시에서 자신의 신념과 리상을 가장 명징히 밝혀놓은 시구라 여겨진다. 그러니까 이 3편의 시를 통하여 우리는 윤동주가 허전하고 외롭고 슬픈 타향살이, 이국살이를 하는것은 위기에 처한 민족을 위해, 암흑의 시대에 《등불을 밝》히기 위한데 목적이 있음을 고백하고있는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윤동주를 저항시인이라 부르는것이다. 직설적으로 현실을 비판한것도 아니고 현실에 대한 불만을 력설한것도 아니지만 그를 저항시인이라고 하는것은 바로 이처럼 지극히 시적인 방법으로 흙탕물로 범벅이 된 현실사회에서 항상 부끄럼을 느끼며 자성할뿐만아니라 그 어두운 시대에 등불을 밝혀 어둠을 내몰면서 아침처럼 올 시대를 기다린것이다.   그러니까 윤동주의 향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그 자체에 한정된것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자신이 이주민이라는 점, 즉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향수를 달래면서 참고 견뎌여야만 한것은 한 개인을 위한것만이 아닌, 사회에 《등불을 밝》히려는데 목적이 있음을 향수라는 애절한 표현속에 드러내고있는것이다.     5. 결 론     윤동주는 우리 시인이지만 한국에서 먼저 발견되여 각광을 받아왔다. 범민족적인 문학의 차원에서 이는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때문에 윤동주시의 이민문학적 성격은 여태까지 론의되지 않았다는 점은 조금 아쉬운 일이다.   상기 분석을 통하여 우리는 윤동주가 간도이주민의 후예라는 신분인식, 즉 정체성인식을 분명히 드러내고있음을 확인할수 있었다. 이점은 이민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관심을 보여준 시에서도 드러나지만 룡정 명동을 자신의 고향으로 인식하고 그 고향에 대한 향수를 애절하게 표현한 점에서도 확인된다. 더구나 그는 그러한 향수의 정서에다가 《등불을 밝》혀 시대의 어둠을 내몰려는 의지와 리상을 담음으로써 단순한 자연인의 립장에서만이 아니라 시대의 사명을 지닌 지성인으로서 소명을 다하고자 했다. 윤동주가 우리 조선족시인임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한다.     주 석 ------------------------------ 1) 金毅洙, 尹東柱 詩의 解體論的 硏究,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1, 1쪽. 2) 물론 연희전문 4년동안 여름과 겨울 두 방학에는 고향에 돌아왔다고 하고, 일본류학기간에도 고향에 다녀갔다고 하니 이 8년중 시간적으로 대략 1년반 정도는 고향에서 보냈다고 해야 할것이다. [출처] 윤동주시의 이민문학적 성격|작성자 반벽거사  
262    <천개의 고원>의 잡담 댓글:  조회:5600  추천:0  2015-09-09
에 대한 잡담을 위하여      예전에 있었던 얘기하나를 해드리죠. 그러니까 독서에 대한 입장을 얘기하던 자리였습니다. 저랑 대화하던 친구는 굉장히 분석적인 친구였는데, 그는 책을 쓴 저자의 의도에 초점을 맞춰 책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독서스타일을 가지고 있던 친구였습니다. 사실 이게 지극히 정상적인 독서방법이긴 하죠. 물론, 저도 이 독서법 자체에 대해서 반대하거나 반감을 가지는 입장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저는 그것보다는 자신의 시각에 따라 책을 해체해서 재구성하는 독서법을 더욱 강조했죠.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중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른 차이였습니다. 친구는 중점을 저자의 이해에 두려고 했고, 저는 중점을 저 자신에게 두려고 했죠. 또 이건 책에 대한 근본적인 입장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차이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작가가 책을 써서 발표하는 순간, 그 책은 작가의 품을 떠나 독자들의 것이 된다고 봤거든요. 그리고 이렇게 말해버리면 친구는 질서를 원했고, 저는 혼란을 원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저자의 뜻은 하나이기 때문에 코스모스적인 질서를 만들 수 있지만, 책의 뜻을 독자로 잡아버리면 독자마다 다 생각이 달라지기 때문에 하나의 책을 두고 수많은 의견들이 치고 박는 거대한 카오스가 생겨나죠. 뭐……어쩌면 이것은 책에 대한 입장을 떠나서 저와 그 친구가 서로 다른 인간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기질적인 차이인지도 모릅니다. 창조와 파괴에 대한 얘기죠.    아무튼, 둘 다 딱히 정답이 없는 논쟁이란 건 잘 알았지만, 그래도 어떤 책읽기 방식이 중요한가에 대한 얘기들이 오고갔습니다. 저는 친구에게 니 방식은 지루하다고 말했던 것 같고, 친구는 저에게 그 방식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했죠. 끝에는 제가 책에 대한 오독을 예찬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오독이야말로 유쾌하고 창조적이며, 동시에 정답 없는 세상에 정답을 얘기하려고 하는 시도 자체가 희극이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뭐, 이런 느낌의 논쟁이 다 그러하듯 종국에는 아무런 합의 없이 서로의 입장만 확인한 채로 논쟁이 끝났고, 중국집에서 볶음밥이나 시켜먹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멋진 마무리였죠.    이 사건 이후 퍽이나 시간이 지난 후에 저는 질 들뢰즈와 펠리스 가타리가 합세하여 지은 책인 을 만나게 됩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서 이렇게 길게ㅡ무려 1,000페이지ㅡ책을 썼을까하고 책장에서 책을 뽑아다가 몇 장 휙휙 넘기면서 내용을 읽는데, 직감적으로 이 책의 저자들이 나랑 생각이 비슷하다는 느낌을ㅡ얘도 난잡하구나ㅡ받았습니다. 제가 가볍게 책장 몇 장 넘겼다고 이 책을 다 이해할리는 없으니, 정말 딱히 근거랄 게 없는 막연한 느낌에 불과했죠. 근데, 처음에는 이 책을 읽진 않았습니다. 느낌이 오긴 했는데, 너무 굵었어요. 굵은 건 들고 다니기 무겁거든요.    뭐, 이 지식의 무거움을 감수하고 이 책을 읽기로 결심한 것은 책장에서의 운명적인 만남 이후 또 꽤 시간이 흐른 뒤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번년도 1월 즘에 김진석이라는 분의 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거기서 이 분이 들뢰즈의 철학에 대해서 글을 풀어놓으셨더군요. 여기서 김진석씨는 리좀, 유목민, 전쟁기계 등등 여러 가지 흥미로운 얘기들을 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우리나라 철학계가 들뢰즈의 철학을 너무 편중되게 해석하고 있다는 비판을 달아놓으셨더군요. 저야 뭐, 들뢰즈라는 인물도 모르고, 그의 철학은 더더욱 더 모르는 관계로 ‘들뢰즈에 대해서 이런 입장도 있다’하는 정도로만 이해하고 넘어갔습니다. 아무튼, 이 책을 덮으면서 든 생각은 ‘들뢰즈를 한번 읽어보자’였습니다.    그래서 을 이래저래 읽어보기 시작했는데, 역시나 제가 처음에 받았던 느낌처럼 저랑 비슷한 책이더군요. 굉장히 혼란합니다. 아, 여기서 확실해야 할 게 있는데, 위에서 제가 혼란함을 선호한다고 해서 제가 혼란함만을 좋아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위에서 말했듯 이건 어디까지나 강세를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입니다. 저는 굉장히 모순적인 놈인지라, 혼란하면서도 질서 있고 또 질서 있으면서도 혼란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꽤나 난잡한 편이죠. 뭐, 모순적인 게 인간이라고 한다면, 저는 지극히 인간적임에 충실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표현이야 어찌하듯.    아, 음. 다시 에 대해서 말해봅시다. 이 책은 혼란합니다. 부제로 ‘자본주의와 분열증2’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데, 이말 인즉 이 책이 ‘자본주의 분열증1’편의 속편이라는 의미이지만, 정작 1편인 와 은 딱히 이어지진 않습니다. 물론 큰 주제들은 공유하는데, 그렇다고 1편을 읽어야만 2편을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느낌은 아닙니다. 이 책이 말하는 고원들의 독자성에 충실한 설정인 셈이죠.    머리말을 보면 이 책은 장(章)이 아니라 “고원”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밝힙니다. 그래서 책 제목이 “천개의 고원”이죠. ‘천개’는 다양성에 대한 수사어입니다. 목차를 보면 대략 15가지의 주제에 대한 글들을 묶어놨는데, 고원이 각기 독자적으로 존재하듯, 이 15가지의 다양한 주제들은 각자 독자적인 주제를 형성하면서 묶여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하나의 완결된 책이라기보다는 에세이집에 가까운 형식을 취한다라고도 말할 수 있지요. 그래서 순서대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가는대로, 끌리는 고원에 올라가면 되지요. 책의 형식 자체부터가 이 책의 유일한 통일적인 주제인 해체적인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끌끌, 참 골 때리는 구성이죠. 이 친구들은 유쾌합니다.    기분도 좋은 김에, 오늘부터 시작해서ㅡ딱히 언제 끝날지 모르는ㅡ이 책 의 모든 장에 대한 분석 아닌 분석들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분석이라는 말은 좀 그렇고, 그냥 여기에 대한 ‘잡담’을 떠들어보겠습니다. 혹시 압니까? 제 잡다한 목소리도 소규모 영토에서 울려나오는 가곡이나 새의 노래, 사납게 울부짖고 미친 듯이 노여워하는 대지의 거대한 노래 혹은 대기의 강력한 화음과 우주의 목소리들로 구성된 거대한 리토르넬로의 한 부분을 담당해줄 수 있을지.      이만 마칩니다. 총총.      
261    ...계속 댓글:  조회:9899  추천:0  2015-09-09
    백두산 천지 괴물의 실체, 괴생명체 20마리, 세계 4대괴물, 수장공룡 플레시오 사우루스       백두산 천지에 과연 괴물이 살고 있을까? 여러 나라마다 호수에 괴물이 산다고 하는 전설같은 이야기들이 전해져내려오는 데 백두산의 천지에서도 괴물이나 괴생명체가 산다고 해서 큰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중국의 신화통신에 따르면 백두산 관리사무소 직원이 백두산 천지에서 괴물이 수면위로 나타났다고 다시 사라지는 모습을 확인했다고 하며 백두산 괴물이 나타났다고 사라질 때마다 엄청나게 큰 굉음소리를 낸다고 한다.   중국 길림망 매체에 따르면 백두산 화산관측소 직원 우씨가 백두산 천지 수면위를 빠르게 이동하는 괴물을 포착해서 카메라로 촬영했다고 하며 그 괴물이 다시 물속으로 사라지는 순간 엄청난 굉음소리가 울려퍼졌다고 한다. 백두산 천지 괴물은 한번 나타났다가 사라질 때마다 커다란 굉음소리를 낸다고 하는데 마치 천둥소리 같은 굉음소리로 인해서 백두산 천지의 절벽일부가 허물어질 정도라고 한다.     백두산의 화산활동을 측정하기 위해 천지 부근에 파견나와 온천의 수온을 측정하고 있는 직원 우씨는 그순간 백두산 천지 수면위로 헤엄치는 괴생명체를 발견했다고 한다.  직원 우씨가 목격한 괴생명체의 모습은 머리부분만 수면위로 드러낸 채, 빠르게 헤엄쳐갔다고 하며 머리부분이 연한 녹색의 빛깔을 띠고 있었다고 한다. 우씨가 찍은 사진을 얼핏 보면 마치 뿔을 단 사슴의 모습과 비슷한 것 같다. 그렇지만 너무 멀리고 찍은 사진이고 화질이 선명하지 못해 정확히 어떤 모습인지 확인하기가 곤란하다.   백두산 천지의 괴생명체 출현 목격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며 백두산을 관광나온 관광객들에 의해서 수없이 많은 목격담이 나오고 있는 중이다.   2000년도부터 2013년도까지 계속해서 백두산 천지괴물 목격담이 흘러나오고 있는데 중국의 신화통신, 길림망 매체 등 중국의 여러매체들은 여름만 되면 어김없이 백두산 천지의 괴물출현이라는 기사와 목격담을 계속해서 보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가장 유명한 것은 2003년도의 백두산 천지괴물 20마리 목격담이다. 2003년 7월 11일에 백두산 천지의 수면위에서 20마리의 괴물이 나타나서 수면위로 빠르게 가로질러 갔다고 신화통신이 보도하면서 백두산 천지괴물에 대한 이야기가 불이 붙기 시작했으며  그당시 천지에 20여마리의 괴생명체가 무려 50분동안 수면위를 유유히 헤엄쳐갔다고 하며 백두산에 관광하러온 관광객 10명이 동시에 목격했다고 한다.     중국 길림성의 임업성부청장 장우펑씨도 그당시 20마리의 괴물을 함께 목격했는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괴생명체들이 5번이나 수면위로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며 짧게는 2분에서 길게는 30분 이상 계속해서 수면위에 떠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괴생명체들이 나타난 곳은 2~3㎞나 멀리 떨어진 지점으로 50배 망원경으로 봐도 정확하게 그 실체를 파악하기가 곤란하다는 데에 문제점이 있다. 그렇지만 백두산 천지에 이처럼 20마리의 괴물이 동시에 나타난 것은 목격담으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1960년도에 길림성 시상국 직원이 백두산 천지에서 7마리의 괴생명체를 보았다는 목격담이 나온 이래에 2003년, 2007년, 2009년, 2013년까지 끊임없이 해마다 되풀이되고 있는 백두산 천지괴물 목격담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백두산은 우리 한민족의 혼과 얼이 새겨진 우리 민족의 정기가 서린 곳으로 한민족의 상징과도 같은 명산이다. 백두산의 천지는 둘레가 14km나 되고 20억톤이나 되는 물을 저장하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깊은 칼라라호라고 한다. 백두산 천지의 깊이는 평균 210m이고 최대 깊이는 384m로 왠만한 강보다도 더 깊다.   백두산 산허리에 있는 바위골짜기에서는 곰이나 호랑이, 표범같은 야생 포유류들이 서식하고 있으며 2,700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는 자연생태계의 보고 같은 곳이다. 백두산이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곳이고 동북아에서는 각종 시조신화가 탄생한 명산이어서 그런지 이곳을 관광나온 사람들에 의해서 미스터리하고 신비로운 목격담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으며 한번 목격담이 나오고나면 계속해서 다른 목격담들이 줄을 잇는 도미노현상까지 발생하고 있다.   백두산 천지에서 괴물을 보았다고 하는 목격담과 함께 목격자들이 찍은 사진들도 여러 장 존재하고 있는데, 그 촬영된 사진들이 대부분 형체를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해상도가 낮아 정확한 분석이 어렵다는 점이 문제다.     백두산 천지괴물은 50년에 걸쳐서 목격자들과 소문만 무성하게 나왔지만, 그 명확한 실체는 전혀 감을 잡지못하고 항상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상황이다.   가장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2013년도 화산관측소 직원 우씨가 촬영한 사진을 보면 명확하지는 않지만, 마치 사슴의 뿔같은 것을 머리에 달고 빠르게 백두산 천지를 헤엄치는 듯한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만주나 연해주에 서식하는 순록이 혹시 백두산천지에 와서 헤엄치고 다니는 것은 아닐까 하고 판단된다. 만주에 사슴이나 순록이 많이 서식하고 있으므로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아니면 거대한 파충류과 동물들이 백두산 천지에서 번식해서 새끼들을 거느리고 수면위를 헤엄쳐다니는 것은 아닐까? 혹자는 새같은 조류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는데, 사진으로 보기에는 분명 새는 아니다.   그리고 천지 수면위로 돌출된 부분은 분명 뿔같은 딱딱한 물체를 머리에 달고있는 모습이다. 어쩌면 우리 인류가 모르고 있던 제3의 생명체가 백두산 천지 속에서 서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같은 호수괴물의 목격담은 배단 백두산 뿐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지역에서도 종종 전해지고 있다. 중국 호수괴물, 미국의 호수괴물, 아이슬란드의 호수괴물, 영국 스코틀랜드 네스호의 호수괴물 네시 등 세계의 여러지역에서 호수에 미확인 괴물이 산다고 하는 이야기들이 전래되고 있다.   물을 마시기 위해 호수로 찾아온 낙타나 말을 한입에 꿀꺽 집어삼킨다고 하는 중국의 카나스호수 괴물 이야기도 횡행하고 있고, 20m가 넘는 거대한 뱀처럼 생긴 괴물이 호수의 꽁꽁 언 얼음위에 자주 출현한다는 아이슬란드의 호수괴물 이야기도 회자되고 있다.   백두산 천지 괴물목격담은 목격자들에 의해서 구체적인 몽타즈까지 제작되기도 했는데,목격자들은 20m가 넘는 거대한 수장 공룡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가하면 네스호의 네시와도 흡사한 형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만약 이같은 목격자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백두산 천지의 괴물은 중생대에 살았던 수장공룡 플레시오 사우루스를 의미하는데, 플레시오 사우루스는 긴목과 긴꼬리를 가지고 네 개의 지느러미로 헤엄쳐다니는 파충류과 속하는 수장공룡이다.  그런데 6천5백만 년전에 이미 멸종한 수장공룡이 아직까지 백두산천지에 살고있다는 것인데, 도무지 말이되지 않는다. 이렇게 오랫동안 백두산일대에 살아왔던 수장공룡 플레시오 사우루스가 왜 이제야 그실체를 나타내는가?     거대한 몸집의 수장공륭 플레시오 사우루스는 물에만 사는 것이 아니라 육지에도 왔다갔다 하는데, 발견되어도 벌써 진작 발견되었어야 하며, 그 기록이 사서에도 여러번 나왔어야 한다. 그리고 목격자들이 촬영한 사진을 보면 몸체의 극히 일부분만이 촬영되거나, 매우 멀리서 희미하게 촬영한 것들이 대부분인데, 정확한 실체를 보여준 사진은 하나도 없는데 이것은 무슨 다른 음모가 있는 것은 아닐까?   중국과 길림성측에서 관광객들을 유치하기 위해서 홍보의 수단으로 이같은 목격담을 고의적으로 퍼트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특히 많은 목격담들이 중국측 관리들이 직접 목격했다는 내용들이 특히 많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백두산 천지괴물 출현설을 퍼트림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켜서 백두산관광객특수를 누려볼 의도가 아닌가 판단된다.     더욱이 백두산 주변에 있는 ‘장백산 박물관’에는 ‘천지괴물관’이 따로 마련되어 있으며, 천지괴물 인형까지 판매하고 있다는 점을 보더라도 중국과 길림성당국에서 백두산관광 마케팅의 일환으로 백두산 천지괴물설을 활용한다는 의심을 받고있는 것이다.       백두산 천지괴물 동영상                                    
260    백두산 천지괴물??? 댓글:  조회:5244  추천:0  2015-09-09
추천자 목록 네시가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는 동안 해발 2,744미터인 백두산 천지에도 길이가 2미터에서 5미터에 이르는 괴물이 살고 있다는 풍문이 꾸준히 나돌았다. 백두산은 함경북도와 함경남도, 중국 지린 성 조선족 자치주가 맞닿은 곳에 있는데 정상에 있는 천지에 괴물이 산다는 것이다. 천지의 물은 60퍼센트 이상이 지하수며 나머지는 비나 눈이다. 천지의 평균 수심은 213.3미터, 최대 수심은 384미터며 수온은 0.7도에서 11도 사이다. 정상에 있기 때문에 비교적 차다. 겨울에는 수면이 언다. 1994년 9월 10일 중국 신화통신은 백두산 천지에서 누런 황소 머리를 한 거대한 괴물이 파도를 일으키며 솟구치는 모습이 잇달아 목격됐다고 보도했다. 이에 앞서 1994년 8월 20일에는 호수에서 유유히 유영하던 괴물이 2미터 높이 물보라를 남기고 사라지는 모습을 한국 관광객이 찍었다고 한다. 게다가 9월 2일에는 천지를 관광하던 중국 지린 성 조선족 자치주 관리들이 황색 머리를 한 괴물을 발견하고 비디오로 찍었는데 괴물 모양이 선명했다고 한다. 천지 북쪽에서 남서쪽으로 헤엄치다가 약 10분 뒤에 사라졌다는 것이다. 백두산에 괴물이 출현했다는 소식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다. 백두산에는 괴물이 세 마리 있다는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왔다. 하나는 당나라 황제가 가죽을 갖기 원했다는 ‘화서(火鼠)’다. 화산인 백두산에는 불구덩이에 사는 쥐처럼 생긴 괴물이 있는데 그 모피로 옷을 만들면 불 속에서 타지 않고 데지도 않는다는 전설이 있다. 다른 괴물은 온몸에 털이 난 사람으로, 짐승처럼 네 발로 나무를 타고 토굴에서 사는 ‘모인(毛人)’이다. 흉년에 함경도에서 산에 들어갔다가 눈에 갇혀 야생화된 모녀(毛女)에 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뤄 백두산에 야생 인간이 살아 있다는 전설은 매우 오래전부터 있었다. 셋째가 바로 네시와 같은 괴물로, 중국 문헌에 자주 등장한다. 청나라 강희제 연간에 사냥꾼 넷이 천지에서 괴물이 목을 내미는 것을 봤는데 황금색으로 물동이만 한 모난 머리에 뿔이 돋아 있고 긴 목에 돌기가 나 있었다고 한다. 사냥꾼들은 겁이 나 도망쳤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괴성이 울려 돌아봤더니 괴물은 사라지고 없었다는 것이다. 괴성은 천지 백 리 밖에서도 자주 들렸으므로 천지 아래 있는 용궁의 북소리로 구전돼왔다. 청나라 때인 1879년에도 유복 등 여섯 명이 수면에서 물소만 한 괴물이 머리를 들고 포효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기록이 있고 천지 북쪽 끝에 있는 천활봉 중턱 벼랑에 동굴이 있는데 커다란 이무기처럼 생긴 괴물이 이곳을 드나드는 장면이 목격됐다는 기록도 있다. 이 지방 지현(知縣)을 지낸 유건봉이 편찬한 『장백산강지략(長白山崗志略)』을 보면 길 안내인인 서영순이 중국인 여섯 명과 함께 백두산에서 사슴을 사냥하다가 천지에서 어떤 동물을 만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물소처럼 크고 우는 소리가 귀를 울리며 사람들에게 쳐들어오려는 것 같아 여러 사람이 모두 겁을 먹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일행 중 한 명이 총을 꺼내 쏘려 하니까 발사되지 않았다. 겨우 정신을 차려 육 연발 권총을 꺼내 발사해 괴물의 배에 맞추자 괴물은 크게 울부짖으며 호수 안으로 엎어져 사라졌다.  백두산 괴물이 본격적으로 세인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1962년부터다. 지린 성 기상 기자재 공장에 근무하는 한 중국인이 천지를 망원경으로 살펴보다 천지 동북쪽 귀퉁이에서 동물 두 마리가 물 위로 머리를 내밀고 다투는 장면을 봤다. 동물 머리는 개보다 훨씬 크고 흑갈색이었는데 1시간 뒤에 물속으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괴물에 대한 목격담은 더욱 구체적으로 변한다. 1980년 8월 목격자가 10여 명으로 늘어나면서 백두산 괴물 이야기는 점점 더 큰 파문을 일으킨다. 저명한 작가인 뢰가는 『천지 괴수 목격기』에서 백두산의 괴물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8월 21일 새벽 4시 나는 기상대 문 앞에서 일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8시에서 8시 반쯤 되는 시간에 천지에서 거대한 나팔 모양 물갈래를 봤다. 꼭지 부분에서 꺼먼 흑점을 봤는데 머리 같았다. 때로는 북 같은 것이 길게 끌리는 것을 봤는데 아마도 척추 부분일 것이다. 그것은 물속에 비친 장군봉에서부터 나 있는 쪽으로 헤엄쳐 왔다.  이틀 뒤인 8월 23일 새벽, 이번에는 지린 성 기상국에 근무하는 세 사람이 가까운 거리에서 괴물 다섯 마리를 봤다. 30미터 앞에서 괴물의 머리와 가슴이 4미터나 물 위로 나와 있는 것을 봤는데 머리는 소와 비슷하고 몸은 개, 입은 오리, 등은 검은색으로 기름을 바른 것처럼 미끄러워 보였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종려나무 잎 같은 긴 털이 있었으며 배 부분은 희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놀라 소리 지르며 총을 쐈지만 괴물을 맞히지는 못했다. 괴수는 민첩하게 물속으로 숨어들어 갔다. 같은 날 다른 사람이 다시 괴물을 봤다. 괴물의 위치는 천지 북쪽 기슭에서 40여 미터로, 두 마리가 앞뒤로 서서 빠르게 헤엄치고 있었다. 그중 한 마리는 물 위에 나온 부분이 좀 많았고 머리는 뱀 모양, 지름은 약 15센티미터, 눈동자는 밤알만 했고 주둥이가 앞으로 뾰족 튀어나와 있었다. 목 굵기는 10센티미터, 피부는 백색이고 마치 바다표범처럼 몸이 매끄러워 보였지만 무늬는 없었다. 몸을 틀 때 물 자취가 상당히 둥글고 컸다. 1995년 8월 31일에는 한국인 관광객이 백두산 괴물을 목격해 큰 파문이 일었다. 중국령 백두산의 관광 명소인 천문봉에 올라간 장남철은 천지 한가운데에서 검은 점 하나가 빠른 속도로 천문봉 밑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고 고성능 베타 카메라로 촬영했다. 당시 천문봉에는 한국인 관광객 수십 명이 있었는데 일제히 “괴물이다!”라고 소리쳤다. 테이프를 분석한 UFO 연구회 조사부장 서종한은 수장룡과 형태가 매우 유사하다고 말했다. 입을 크게 벌린 머리와 거북이 앞 지느러미, 불룩하게 튀어나온 등과 허리 등을 근거로 들었다. 경북대학교 교수 양승영은 “꼬리가 물고기 꼬리지느러미와 흡사하고 수중 생활을 하는 수장룡이나 어룡의 일종이라면 가능할 것”이라고 견해를 밝혔다. 다만 꼬리 부분이 뱀처럼 길쭉하면 뒤로 흰 거품이 일 정도로 빠르게 헤엄치기는 어렵다는 견해가 있었다. 2010년 9월에는 좌우 날개가 달린 백두산 괴물 사진이, 2011년 7월 22일에는 뿔이 두 개 달린 머리를 물 위로 드러낸 백두산 괴물 사진이 공개됐다. 백두산 천지 괴물 목격담 중에는 괴물 머리에 뿔이 달려 있다는 증언도 있는데 뿔이 있는 괴물이 사진으로 찍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2012년 7월 7일에도 백두산 천지에서 물 위를 이동하는 괴생명체가 포착됐다. 괴생명체는 백두산 천지 화산관측소 직원인 우 아무개가 백두산 남쪽 정상 전망대에서 화산을 관찰하던 중 촬영한 것인데 천지 수면에 크고 긴 물체가 마치 물고기처럼 헤엄치다 물속으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가 공개한 사진은 모두 석 장이었다.   
259    백두산 신비한 동굴 두개 발견!!! 댓글:  조회:7301  추천:0  2015-09-09
장백산에 신비한 두 동굴, 고대인 유적 아니면《야인》동? 편집/기자: [ 김영자 ] 원고래원: [ 신화넷 ] 발표시간: [ 2015-08-28 19:24:10 ]    1호동굴 입구.   1호동굴속.   장백산원시산림속에서 최근 두 신비한 동굴을 발견했다. 장백산 《샤만부락(萨满部落)》풍경구에 초빙된 40세 배회춘이란 종업원이 표류하곡을 탐사하다 장백산아래 《신단산(神坛山)》하곡기슭에서 동굴을 발견했다고 한다.     두 동굴을 스쳐 흐르는 신수하(神水河)   일전 배회춘의 향도하에 길림성장백산문화연구회부회장, 만족문화전문가 왕송림이 촬영팀과 함께 일행 7명이 처음으로 동굴속에 진입해 고찰, 촬영했다. 왕송림의 소개에 따르면 1호동굴의 깊이는 30메터정도 되고 동굴안에서 보면 통풍구가 있었다. 그리고 샘물이 동굴속에서 밖으로 흘러나오고있는데 동굴내의 부석석회가 보온역할이 좋아 인류가 거주하거나 동물이 서식하기 적합해보였다고 한다. 동굴내에서 목탄을 태운 인위적인 흔적이 보였고 강변에서 원시적 석기 - 돌도끼 한자루를 발견했다고 한다.   2호동굴입구.   2호 동굴은 1호동굴과 약 600여메터 상거했는데  깊이가 40메터정도, 동굴속에는 역시 동굴밖으로 흐르는 샘물줄기가 있었고 동쪽으로 향한 다른 한 통구가 있었다. 이들은 동굴속에서 대량적인 목탄과 석기를 발견했다고 한다. 어떤 석기는 사용 흔적이 보였고 동굴속 웃벽체에서 흰 모발도 발견했다고 한다.  1호동굴은 사람 10명~20명 정도를 용납할수 있고 2호 동굴은 20명~ 30명 정도 용납할수 있을것으로 보인다.두 동굴의 입구 직경은 2메터 되나마나 해 발견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두 동굴은 동물의 서식처였는가 아니면 고대인 혹은 《야인》이 살았던 곳인가 하는것에 대해  해당 구역 책임자로서 왕송림은 아직 더 많은 전문가들의 고증, 탐색이 필요하다고 했다.
      1. 50분 작업 10분 휴식   1시간정도 모니터를 봤다면 반드시 10분은 눈의 휴식을 취해줘야합니다. 또한 조명도 적당히 조절해서 너무 밝지도 너무 어둡지도 않게해야 눈의 피로를 줄여줄 수 있습니다.   2. 먼 곳 보기    가능하면 자주 먼 곳 보기, 항상 가까운 곳만 보면 눈이 쉽게 피로해집니다. 먼 곳과 가까운곳을 주기적으로 봐주면 눈이 자동으로 초첨을 맞추려고 눈 근육 운동을하게되죠    3. 목이 편한 옷입기    안구의 압력이 높아지지 않게 목이 조이는 옷보다는 가급적이면 편한옷을 입어주면 좋습니다. 넥타이의경우 너무 강하게 매지말고 가능하면 틈틈히 풀어주는게 좋습니다. 4. 스트레스 안받기   만병의 근원이 스트레스죠  우리몸이 견딜 수 없는 정도의 스트레스를 지속적으로 받는다면 안압이 알라갈 수 있습니다.  이는 눈의 건강에 치명적일 수 있죠,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5. 눈 스트레칭 눈을 감고 상하좌우, x자, 8자 등으로 시선을 돌려가며 눈을 스트레칭 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6. 주기적인 안과 방문   주기적으로 안과를 방문해서 검사를 해보는게 좋습니다.  모든 병은 조기발견이 중요하죠    7. 눈에 좋은 음식   브로콜리, 시금치, 당근, 샐러리와 같은 비타민 A가 풍부한 식품 결명자를 차로 끓여서 물대신 마시면 좋습니다. 블루베리, 연어, 고등어, 참치, 장어도 눈에 상당히 좋다고하네요   
257    詩란 눔은... 댓글:  조회:7853  추천:0  2015-09-05
詩 시 시  1. 시 2. 시경(詩經) 3. (시를)읊다, 짓다 4. 기록하다(記錄--) 5. 받들다   [부수]言(말씀언) [총획]13획   [난이도]중학용, 읽기 4급II, 쓰기 3급II   詩經 시경 중국(中國) 최고(最高)의 시집(詩集)으로, 주(周)나라 초부터 춘추시대(春秋時代) 초기(初期)까지의 시 305편 모은 유가(儒家)의 경전(經典)의 하나 詩人 시인 시(詩)를 짓는 사람. 시(詩)를 잘 짓는 사람. 詩文 시문 시가(詩歌)와 산문(散文)  사(詞). 漢詩外傳 한시외전 전한(前漢)의 경학자(經學者) 한영(韓孀)이 지은 『 시경(詩經)』의 해설서(解說書)   詩禮之訓 시례지훈 시(詩)와 예(禮)의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자식(子息)이 아버지에게서 받는 교훈(敎訓) 刻燭爲詩 각촉위시 촛불이 한 치 타는 동안에 詩(시)를 지음 七步成詩 칠보성시 일곱 걸음에 한 편의 시를 완성한다는 뜻으로, 시를 빨리 잘 짓는 재주를 이르는 말. 萬卷詩書 만권시서 아주 많은 책,  썩 많은 책(冊). =====================================   ... ... 늙은 사람 한 가지 즐거운 것은  붓가는 대로 마음껏 써 버리는 일.  어려운 韻字에 신경 안 쓰고  고치고 다듬느라 늙지도 않네.  흥이 나면 당장에 글로 옮긴다.  나는 본래 조선사람  즐겨 조선의 詩를 지으리.  그대들은 그대들 법 따르면 되지  이러쿵저러쿵 말 많은 자 누구인가.  까다롭고 번거로운 그대들의 格과 律을  먼 곳의 우리들이 어떻게 알 수 있나.  ―정약용 「老人一快事」 붓놓자 풍우가 놀라고  시편이 완성되자 귀신이 우는구나  筆落驚風雨 詩成泣鬼神 ―杜甫 시 3백수에는, 한마디로 말한다면 사악함이 없다.  ―공자 『논어』 爲政篇 그대들은 왜 시를 공부하지 않느냐? 시는 사람에게 감흥을 돋우게 하고 모든 사물을 보게 하며, 대중과 더불어 어울리고 화락하게 하며, 또 은근한 정치를 비판하게 하는 것이다. 가깝게는 어버이를 섬기고, 나아가서는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시에서 배울 수 있으며, 또한 시로써 새나 짐승, 풀, 나무들의 이름도 많이 배우게 될 것이다. ―공자 시란 뜻(志)이 향해 가는 바라, 마음 안에 있으면 뜻이 되고 말로 나타내면 시가 된다. ―공자 고시(古詩)는 충후(忠厚)를 주로 했다. 시라는 것은 언어만 가지고 구하여 얻어지는 것이다. 언제나 깊이 그 의도를 관찰해야 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기평(譏評)할 때에는 그 소위(所爲)의 악을 얘기하지 아니하고 그 벼슬의 존비와 차안의 미려를 들어 백성의 반응을 주시하여야 하는 것이다. ―소식 시란 정(情)을 뿌리로 하고 말을 싹으로 하며, 소리를 꽃으로 하고 의미를 열매로 한다. ―白居易 시란 말의 뜻을 나타내고 노래란 말을 가락에 맞춘 것이다. 소리는 길게 억양을 붙이는 것이고 가락은 소리가 고르게 된 것이다.―유협 『문심조룡』 시는 의(意)가 주가 되므로 의를 잡는 것이 가장 어렵고 말을 맞추는 것은 그 음이다. 의도 또한 기(氣)를 위주로 한다. 기의 우열에 따라 의의 깊고 옅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기란 천성(天性)에 딸린 것이어서 배워서 이룰 수는 없다. 그러므로 기가 떨어지는 사람은 글 다듬는 것을 능사로 여기고 의를 앞세우지 않는다. 대체로 글을 깎고 다듬어 구(句)를 아롱지게 하면 아름다움에는 틀림 없다. 하나 거기에 심후한 의가 함축되어 있지 아니하면 처음에는 볼 만하나 다시 씹어보면 맛이 없어져 버린다. ―이규보 시에는 마땅치 못한 아홉 가지 체가 있다. 이것은 내가 깊이 생각하여 체득한 것이다. 시 한 편 속에 옛사람의 이름을 많이 사용한 것은 수레에 귀신을 가득 실은 것, 옛사람의 뜻을 몰래 취해 쓰는 것은 도둑질을 잘한다고 해도 옳지 않은데 도둑질이 서투르면 이것은 서툰 도둑질이 잘 잡히는 것, 강운으로 압운하여 근거가 없으며 이것은 쇠를 당기나 이기지 못하는 것, 재주는 헤아리지 않고 지나치게 압운하면 이것은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것, 험벽한 글자를 쓰기 좋아하며 사람으로 하여금 미혹하게 하는 것은 구덩이를 파놓고 장님을 인도하는 것, 말이 순편하지 않으면서도 같은 사람에게 쓰기를 강요하는 것은 억지로 자기를 따르게 하는 것, 일상용어를 많이 쓰는 것은 촌사람이 이야기하는 것, 공자나 맹자를 범하기 좋아하는 것은 존귀함을 함부로 범하는 것, 글이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것은 잡초가 밭에 가득한 것이다. 이 마땅하지 못한 체격을 면할 수 있게 되면 함께 시를 이야기 할 수 있다. ―이규보 시문은 기를 위주로 삼는다. 기는 성(性)에서 발하고 의(意)는 기에 의지하며,말은 정(情)에서 나오므로 정이 곧 의이다. 그러나 신기한 뜻은 말을 만들기 어려우므로, 서두르면 더욱 생소하고 조잡해지는 것이다. ―최자 시는 마음에서 우러난다고 한 것이 믿을 만하다.―이인로 『破閑集』 시는 함축되어 드러나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그러나 희미한 글,  숨은 말로서 명백하고 통쾌하지 않은 것은 또한 시의 큰 병통이다.  ―서거정 『東人詩話』 시가 교화를 위한 것이라는 뜻은 본래 온유 돈후한 시정신으로써  성정을 다스려서 풍화(風化)를 이루게 하며, 사람의 마음을 감화하여  세상의 도리를 평정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남구만 시는 성정의 허령(虛靈)한 곳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유몽인 시는 성정을 나타내는 것이다.―이의현 시는 원리와는 관계 없는 별종의 취향을 갖고 있다. 오직 천기(天機)를 농(弄)하여서 심원한 조화 속을 파악하여 정신이 빼어나고 음향이 밝으며 격이 높고 생각함이 깊으면 가장 좋은 시가 된다. ―허균 시란 사람의 천성과 정서를 조정하고 인간관계를 향상시킬 수 있어야  한다. ―심덕잠 지금 우리 나라의 시와 문장은 고유의 언어를 버리고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워서 쓴 것이다. 가령 아주 흡사해진다 해도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을 뿐이다.―김만중 무릇 시에 있어서는 자득(自得)이 귀하다.―이수광 시란 마음이 흘러가는 바를 적은 것이다. 마음 속에 있으면 지(志)라  하고 말로 표현하면 시가 된다. 정(情)이 마음 속에 움직일 때,  시인은 그것을 말로써 표현한다. ―신위 시는 교화(敎化)하는 것이니 힘써 그 뜻을 전달해야 한다. ―이익 임금을 사랑하지 않고 나라를 걱정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며, 어지러운 시국을 아파하지 않고 퇴폐적 습속을 통분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다. 단 진실을 찬미하고 거짓을 풍자하거나 선을 전하고 악을 징계하는 사상이 없으면 시가 아니다.―정약용 『목민심서』 시는 대개 정신과 기백이 있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정약용 시에는 신비한 정신의 경지가 있는데 이것은 무형 중에 우거(寓居)하면서 갑자기 나타났다 갑자기 사라지기 때문에, 우연히 만나면 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고는 찾아보려고 해도 얻을 수 없다. ―신광수 보기 좋은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모아놓고 시라고 하는 것이야 비천한  잡배의 장난에 불과하다. 시는 선언이다. 만천하의 현재 뿐 아니라  진미래제(盡未來際)까지의 중생에게 보내는 편지요, 선언이요,  유언이다. ―李光洙 시는 그 시인의 고백이다. 신의 앞에서 하는 속임 없는 고백이다. 구약에 시편만이 아니라 무릇 시는 시인의 심정 토로다. 시인은 시에서 거짓말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신을 기만하는 것이다. ―李光洙 시인이 창작한 제2의 자연이 시다.―조지훈 시는 신(神)의 말이다. 그러나, 시는 반드시 운문(韻文)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는 곳곳에 충일(充溢)한다. 미와 생명이 있는 곳에  시가 있다. ―I.S.투르게네프 『루진』 시는 아름답기만 해서는 모자란다.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필요가 있고, 듣는 이의 영혼을 뜻대로 이끌어 나가야 한다. ―F.Q.호라티우스  『詩法』 시의 목적은 진리나 도덕을 노래하는 것은 아니다. ―보들레르 기쁨이든 슬픔이든 시는 항상 그 자체 속에 이상을 쫓는 신과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보들레르 시는 진리가 그 목적이 아니다. 시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보들레르 시를 쓰는 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말게, 그건 낚시질하고 똑 같네. 아무 소용이 없는 것같이 보이지. 허지만 그래도 그것이 좋은 수확이 되는 법이거든. ―E.크라이더 『지붕밑의 무리들』 시는 넘쳐 흐르는 정감의 힘찬 발로이다.―워즈워드 시는 체험이다.―R.M.릴케 시는 악마의 술이다.―A.아우구스티누스 시란 것은 걸작이든가, 아니면 전연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J.W.괴에테 위대한 시는 가장 귀중한 국가의 보석이다.―L.베에토벤 시는 거짓말하는 특권을 가진다.―프리뉴스2世 시는 의미할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한다. ―머클리쉬 시는 단지 그 자체를 위해 쓰여진다.―E.A.포우 시는 예술 속의 여왕이다. ―스프랏트 시는 마치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나가는 모래와 같은 것이다. ―R.M.릴케 시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감정은 아니다. 시가 만일 감정이라면  나이 젊어서 이미 남아 돌아갈 만큼 가지고 있지 않아서는 안된다.  시는 정말로 경험인 것이다. ―R.M.릴케 『말테의 手記』 시는 단 하나의 진리이다.……명백한 사실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상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건전한 마음의 표현이다. ―에머슨 시는 최상의 마음의 가장 훌륭하고 행복한 순간의 기록이다. 하나의  시란 그것이 영원한 진리로 표현된 인생의 의미이다. ―P.B.셸리』 감옥에서는 시는 폭동이 된다. 병원의 창가에서는 쾌유에의 불타는 희망이다. 시는 단순히 확인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재건하는 것이다. 어디에서나 시는 부정(不正)의 부정(否定)이 된다. ―보들레르 『로만파 藝術』 시란 냉랭한 지식의 영역을 통과해선 안된다.……시란 심중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곧바로 마음에로 통해야 한다. ―F.실러 시란 가장 간단히 말해 가장 아름답고 인상적이고 다양하게 효과적으로 사물을 진술하는 방법이다. ―M.아놀드 시적(詩的)이 아닌 한, 나에게 있어서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A.지이드 『私錢쟁이』 시는 모든 예술의 장녀(長女)며 대부분의 사람들의 양친이다.  ―콩그레브 만약 사람이 마력적인 시의 의미를 알게 된다면 그때부터 그대는  아름다운 생(生)을 알게 된다.―J.아이헨돌프 도덕적인 시라든가 부도덕적인 시라든가에 대해서 말할 것은 아니다.  시는 잘 씌어져 있는가 아니면 시원찮게 씌어져 있는가, 그것만이  중요하다. ―O.와일드 『英國의 르네상스』 시는 힘찬 감정의, 위세 좋은 충일(充溢)이다. 그 원천은 조용히  회상된 감동이다. ―O.와일드 『英國의 르네상스』 나이 어려서 시(詩)를 쓴다는 것처럼 무의미한 것은 없다. 시는 언제까지나 끈기 있게 기다리지 않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사람은 일생을 두고 그것도 될 수만 있으면 70년, 혹은 80년을 두고 별처럼 꿀과 의미(意味)를 모아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최후에 가서 서너 줄의 훌륭한 시가 써질 것이다. ―R.M.릴케 『말테의 手記』 시는 근본적인 언어 방법이다. 그것에 의해 시인은 그의 사상과 정서는 물론 그의 직각적 매카니즘을 포착하고 기록할 수 있다. ―M.무어 시는 오직 인간의 능력을 발양(發揚)하기 위해서 우주를 비감성화시킨  것이다. ―T.S.엘리어트 『超現實主義 簡略事典』 시란 감정의 해방이 아니고 감정으로부터의 탈출이며, 인격의 표현이  아니고 인격으로부터의 탈출이다.  ―T.S.엘리어트 『傳統과 個人의 才能』 시의 세계로 들어 온 철학 이론은 붕괴되는 법이 없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 볼 때 그것이 진리이건 우리가 오류를 범했건 그런  것은 이미 문제가 되지 않으며 의미하는 그 진리가 영속성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T.S.엘리어트 『評論選集』 시의 의미의 주된 효용은 독자의 습성을 만족시키고 시가 그의  마음에 작용하는 동안 정신에 대해서 위안과 안정감을 주는 데 있다.  ―T.S.엘리어트 『詩의 효용과 批評의 효용』 시란 무엇은 사실이다 하고 단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좀더 리얼하게 느끼도록해 주는 것이다. ―T.S.엘리어트 시는 미에 있어서의 참된 집이다. ―킬피란 우리의 일상 생활의 정서 생활과 시의 소재 사이엔 차이가 없다.  이러한 생활의 언어적 표현은 시의 기교를 사용하게끔 되어 있다.  이것만이 단지 근본적인 차이일 뿐이다. ―I.A.리차아드 시는 우리들이 익숙해서 믿어버리고 있고 손쉽게 가깝고 명백한  현실에 비해서 무엇인가 비현실적인 꿈 같은 느낌을 일으킨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뒤바뀌어진 것으로서 시인이 말하고 시인이  이렇다고 긍정한 것 그것이야말로 현실인 것이다.  ―M.하인거 『횔더린과 詩의 本質』 시는 법칙이나 교훈에 의해 완성될 수 없으며 본질적으로 감각과  신중함에 의해 완성될 수 있다. ―J.키이츠 아무리 시시한 시인이 쓴 글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정말로 그를 이해한다면 좋은 시를 얼핏 읽어버림으로써 받은 인상보다야 훨씬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나. 내가 시를 읽고 싶지 않을 때, 시에 지쳤을 때, 나는 항상 자신에게다 그 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타이르는 바일세. 또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대단히 아름다운 감정이 내 마음 속에서 진행 중일 것이라고 타이르기도 하네. 그래서 언젠가 어느 순간에 내가 내 마음 속을 들여다 볼 수가 있어 그 훌륭한 감정을 꺼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네. ―J.러셀 『사랑이 있는 기나긴 對話』 시는 보통의 이성의 한계를 지닌 신성한 본능이며 비범한 영감이다.  ―스펜서 시는 시인의 노고와 연구의 결과이며 열매이다.―B.존슨 시의 으뜸가는 목적은 즐거움이다. ―J.드라이든 한 편의 시는 그 자체의 전제(前提)를 훌륭하게 증명해 놓은 것이다. ―S.H.스펜더 『시를 위한 시』 18살 때 나는 시라는 것은 단순히 남에게 환희를 전달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0살 때, 시는 연극이라는 걸 깨달았지요.  나는 가끔 시를 갱도(坑道)속 함정에 빠져서 미칠 것 같은 불안  속에서 자기를 구출해 줄 다른 갱부들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는  사람에게 생기를 주는 희망과 비교해 보았습니다.  시인은 성자여야 합니다. ―P.토인비 『J.콕토와의 인터뷰』 시란 삶을 육성시키고 그리고 나서 매장시키는 지상의 역설이다.  ―K.샌드버그 시의 본질은 동작이다. 이 동작은 내적 완전을 나타내고 이 내적  완전이 참으로 인간적이고 또 진실이기 때문에 참으로 시적인  성격은 위대한 격정의 자유로운 움직임 가운데 나타난다. ―네싱 시적 형식은 본질이 무엇이든 시가 문학의 특수한 형식으로서  쾌락을 주는 근원은 변화에 의한 반복성에 있다. ―R.E.앨링턴 한 줄의 글자와 공백으로 구성되는 싯귀는 인간이 삶을 흡수하고  명확한 말을 되찾아 내는 이중의 작용을 한다. ―클로델 시에는 그림이 있고, 그림에는 시가 있다.  ―스카르보로 『중국격언집』 만약 시가, 위대한 그 무엇이 아니면 안된다면, 어느 의미에서  그것은 현대와 관계를 가진 것이 아니면 안된다. 그 제재가  무엇이든간에, 작자의 정신의 내부에 있는 산 그 무엇과, 그것이  전달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시로써 표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신체는 어디 있든간에, 그 혼은, 이곳에, 그리고 현재 있어야  하는 것이다. ―A.C.브래드레 시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과 같이 단순히 감정이 아니다  .(감정이라면 우리들은 간단히 가질 수가 있다) 시는 경험이다.  한 편의 시를 쓰려면, 많은 도시를, 많은 사람들을, 많은 사물들을  보지 않으면 안된다. 동물, 새의 날으는 모습, 아침에 피는  꽃의 상태 등을, 알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 미지의 토지에 있는 도로,  우연히 만난 사람들, 애당초부터 이미 알고 있었던 이별, 기억도 확실치 않은 먼 어린 시절, 자기도 알지 못하였던 즐거움이며, 마음먹고  아버지 어머니가 주는 것을 반항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들에 공상의  힘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사람 각자가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서로 사랑하던 밤의 일, 분만하는 부인의 애끊는 절규. 어린애 침대에서 잠도 자질 못하고 창백하게, 그리고 잠들어버리는 부인들의 추억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땐, 들창을 열어 놓은 채, 계속적인 시끄러움이 들리는 방에서, 죽은 사람 곁에 앉아 있었던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만으로도 충분치 않다. 기억이 많이 있을 땐 잊어버리는  것도 필요하다. 그리하여 기억이 또 한번 떠 오를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억이 우리들의 내부에서 피가 되어 명확히 이름지울 수도 없게끔 되어버리든가, 이미 우리들 자신과 구별할 수도 없게끔  되어버릴 때 ―그야말로 어느 순간 시의 최초의 한마디가, 기억의  한가운데 나타나 빠져나가게 되는 것이다.  ―R.M.릴케 「말테의 수기」에서 시의 기능은 세계의 슬픔과 조화시키는 것이다. ―A.E.하우스만 시적 진실 ―‘개인적, 국부적인 것이 아니고, 보편적이며, 기능적인 것’ ―워즈워드 시는, ……인간의 마음의 제일 먼저의 활동이다. 인간은 일반적인  개념을 만드는 단계에 이르기 전에 상상상의 관념을 만든다. 명증한  마음으로 생각하기 전에 혼란한 머리로 파악한다. 명확하게 발음하기  전에 노래부른다. 산문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운문으로 이야기한다.  전문어를 쓰기 전에 은유를 쓴다. 말을 은유풍으로 쓴다는 것은  우리들이 ‘자연발생적’이라 부르는 것과 같이, 그에 있어서  자연인 것이다. ―G.B.비코 시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T.E.흄 시의 중요한 목적은 정밀하고 명확한 표현에 있다. ―T.E.흄 사랑받지 못한 해바라기가 아름답게 빛나고  씨를 가진 꽃만이 불꽃으로 반사한다. ―A.L.테니슨 시는 상징주의이기 때문에 우리들을 감동시킨다는 이론을 만약  사람들이 승인하지 않으면 안된다면 현대시의 양식 속에 어떠한  변화를 찾지 않으면 안되는가? 그것은 우리들의 선조들의 방법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즉, 자연을 위하여 자연묘사를, 도덕을  위하여 도덕율을, 그리고 테니슨의 경우 시의 중심이 되는 불꽃을  거의 다 깨버린 일화나, 과학적 의견에의 고려 등을 버리는 것이다.  ―오든 시란 현존시에 붙어다니는 한낱 장식물에 그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일시적인 감격이나 감동에 그치는 바도 아니다. 더구나  한낱 열중에 빠지는 바도 아니며 오락물로 떨어져버리는 것도 아니다.  시는 역사를 지탱해주는 밑바탕이다. ―하이데거 산문시란 리듬과 각운이 없으면서도 음악적이고 영혼의 서정적 동요,  환상의 파동, 의식의 경련에 응답하기 위해 충분히 유연하고 충분히  거칠은 시적 산문이다.  ―C.보들레르 ―『파리의 우울』(Spleen de Paris) ‘시―인스피레이션’의 공식을 믿는 시적 사고는 허망한 하나의  옛이야기가 되어도 좋다. 지적(知的)으로 확신되는 사상에만  정적(情的) 신앙을 주려는 폐습이 일부 사람들에게 굳게 뿌리  박혀 있다. 과학이 증대하여 힘과 그것은 장차 일반화하여 갈 것이다.  ―L.A.리처즈 시는 최상의 행복, 최선의 정신, 최량이고 최고의 행복한 순간의 기록이다. ―P.B.셀리 『詩歌擁護論』 시란 진리며 단순성이다. 그것은 대상에 덮여 있던 상징과 암유(暗喩)  의 때를 벗겨서 대상이 눈에 보이지 않고 비정하고 순수하게 될  정도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J.콕토 『暗殺로서의 美術』 시란 그 시를 가장 강력하고 유쾌하게 자극하는 방법으로 사상의  심볼들을 선택하고 배열하는 예술이다. ―W.C.브라이언트』 즉흥시는 진정 재지(才知)의 시금석(試金石)이다. ―J.B.P.몰리에르 서정시는 감정이 흘러 넘치는 청춘의 생명의 표현. 억제하려고  해도 억제할 수 없는 힘이며 열렬한 신앙의 발로다. 그 대상으로  하는 것은 자연과 사랑과 신 등으로 작자의 모양이 십분 나타나는  것으로 봐서 제1인칭의 시라고 해도 좋다. ―에론네스트보배 서사시의 흥미는 작자가 아니고 그 시 속의 사건이다. 예를 들면  그리스의 위대한 서사시인 호메르스는 개인적으로는 실제인물인지  아닌지 분명치 않을 만큼 아무래도 좋은 인물이다. 다만 호메르스의  시 속 영웅들에 흥미를 느낄 따름이다. 이에 비하여 같은 그리스의  위대한 서정시인 만나의 시를 읽을 때는 시 속의 영웅들은 무엇이던가  관계할 바 없고 다만 시인 그 자신에 일체의 흥미를 느끼게 되는데  서정시의 주관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단테 시는 음악과 맞추어 만든 수사적인 작품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단테 뮤직과 포에지의 길은 서로 교차한다. ―뽈 발레리 포에지는 말의 전능으로 베일을 벗긴다. 포에지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문제는 날마다 그의 마음과 눈에 부딪치는 것을 그가 보고  느끼는 것처럼 그가 생각하도록 각도와 속도를 맞추어 그에게 보여주는 데 있다. ―쟝.꼭또 시는 우주에 담긴 비밀의 광선을 찾아내어 우리에게 잊어버린 천국을  소생케 한다. ―D.E.시트웰 시는 애련 속에서만 존재한다. ―W.H.오든 진실로 시라고 할만한 것은 서정시를 제쳐놓고는 없다.  ―E.A.포우 의식의 사고와 시적 표현의 기초는 구체적 직관 그 자체이다.  ―S.길버트 시의 안에 사상은 과실의 영양가와 같이 숨어 있지 않으면 안된다.  ―뽈 발레리  시는 운문에 의한 모방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는 가르치고 즐거움을 주려는 의도를 가진, 말하는 그림이다.  ―필립 시드니 현대시는 하나의 신앙 위에 서 있다. 곧 숨은 진실이 존재한다는  신앙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되려면 믿어야 한다. 미지의 세계를  믿어야 한다. ―R.M.알베레스 산문;말을 최상의 순서로 놓은 것. 시;최상의 말을 최상의 순서로  놓은 것. ―워즈워드 시는 본질적으로 무슨 악마적인 것이 있다. ―괴테 시는 시 이외의 무슨 목적을 가질 수 없다. 도덕이라든지 과학과  결부시킬 수 없다. 시는 두 가지 기본적인 문학적 특질, 즉 초자연과  아이러니 속에 있다. ―보들레르 시는 말의 의미를 이마쥬들의 분위기로 둘러싸이게 하면서 그 의미의  가지를 치게 한다. ―바슐라르 시는 진정한 의지의 범미주의적(汎美主義的) 활동이다. 그것은  아름다움의 의지를 표현한다. ―바슐라르 서정적인 시는 돌진한다. 그러나 유연하고 물결치는 움직임으로이다.  모든 갑작스럽거나 끊어지는 것은 시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시는 그런 움직임을 비극이나 관습적인 성격의 소설 쪽으로 돌린다.  ―보들레르 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다. 시가 감정이라면  젊은 나이에도 벌써 흐를 정도로 시를 갖게 될 게 아닌가. 시는  정말로는 체험인 것이다. ―R.M릴케 시란 꿈과 같은 것이기는 하나 현실은 아니다. 말장난이기는 하나  진지한 행위는 아니다. 시란 해로운 까닭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힘이 있다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말보다 해롭지 않은 것이 어디  또 있으랴. ―하이데거 온갖 예술은 감각적 매개물에 의한 관념의 표현이라고 말하나  시의 매개물인 말은 사실 관념이다. ―R.S.브리제스 다정한 시여! 예술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여! 우리 안에  창조의 힘을 불러일으키고 우리를 신성(神性)으로 접근시키는  그대여! 어릴때 내가 그대에게 바치던 사랑은 수많은 환멸도 꺾질  못했다! 전쟁까지도 시가 내게 미치는 영향력을 더욱 커지게 하였으니, 이제부터 별 박힌 내 머리와 하늘이 서로 혼동되기에 이른 것은 전쟁과 시의 덕분이다. ―아뽈리네르 우리는 남들과 논쟁할 때는 수사학으로써 논쟁하지만 스스로 논쟁할  때는 시로써 한다. 자기를 지지한 혹은 지지할 거라는 군중을  의식하는 데서 오는 자신만만한 음성을 지닌 웅변가들과는 달리  우리는 불확실성 가운데서 노래한다. 따라서 가장 고상한 아름다움의  존재 가운데서도 우리가 고독하다는 인식때문에 우리의 리듬은 떨린다. ―에이츠 시의 의미란 그 텐션, 즉 시에서 발견되는 모든 외연(外延)extension)  과 내포(內包)intension를 완전히 조직한 총체이다. ―알렌 테이트 시가란 마치 화가가 색채로 하는 것을 언어로 하는 예술로서 상상력에  의하여 환상을 분출하는 방법에 의하여 산출하는 예술이다.  ―토마스 머코올리 시란 이성의 조력에 상상력을 동원하여 진리와 즐거움을 결합시키는  예술이다. 시의 본질을 발견이다. 예기치 않는 것을 산출함으로써 경이와 환희 같은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S.존슨 시인은 그의 예민한 흥분된 눈망울을 하늘에서 땅으로! 땅에서  하늘로 굴리며 상상은 모르는 사물의 형체를 구체화시켜 시인의  펜은 그것들에 형태를 부여해 주며 형상 없는 것에 장소와 명칭을  부여해 준다. ―W.세익스피어 시는 생의 진술이며 표출이다. 그것은 체험을 표시하고 생의 내면적  진실을 묘사하는 것이다. 제2의 세계, 꿈은 최고의 시인이다.  ―워즈워드 한 편의 시는 하나의 의식(儀式)이다. 따라서, 형식적이고 의식적 성격을 갖춘다. 시가 가지는 언어의 용법은 회화의 용어와는 달리 의식적이며 화려한 꾸밈새가 있다. 시가 회화의 용어나 리듬을 이용하는 경우에도 그러한 것과 대조를 이루게 마련인 규범을 미리 전제하고 의식적으로 형식을 피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다. ―W.A.오오든 시는 몸을 언어의 세계에 두고, 언어를 소재로 하여 창조된다.  ―M.하이데거 『詩論』 시의 용어는 필연적인 것같이 보이는 것이어야 한다.―W.B.예이츠 시는 언어를 향한 일제사격이다.―앙리 미쇼 시는 언어의 건축물이다.―M.하이데거 시는 언어의 모자이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행위와 시는 언제나  인간보다 크다. ―T.E.흄 시는 극점에 달한 언어다. ―말라르메 시는 절조 있는 언어로서 절규․눈물․애무․입맞춤․탄식 등을 암암리에 표현하려는 것이다. ―뽈 발레리 시인에게 있어서 낱낱의 단어가 그 원료다. 단어는 극히 여러가지  모양의 뜻을 가진 것으로 이것들의 뜻은 시의 구성에 따라 처음으로  똑똑해진다. 이와같이 단어가 콤포지션의 가능성에 따라서 변모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형성된 예술 형태의 한 부분이 될 때까지는 어세(語勢)도 그 효과도 다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프도프킨 시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의 생활은 사막의 생활이다. ―메르디트 시란 우리에게 다소 정서적 반응을 통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해주는 언어이다. ―E.A.로빈슨 시에선 해조(諧調)가 미리 공허한 형식을 결정하고 말이 위로 와서  위치를 잡는다. 말과 경험 사이의 응화(應和)와 불응화 그리고 결국에  응화가 해조를 확보하여 주의력을 거기에 모은다. 물러섬이 없는  움직임이 듣는 사람과 시인을 함께 끌고 간다. ―알랭 시는 미의 음악적 창조다.―E.A.포우 시란 영혼의 음악이다. 보다 더욱 위대하고 다감한 영혼들의 음악이다. ―볼테에르 정서가 있고 운율이 있는 언어로 인간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또 예술적  으로 표현하는 것이 시이다. ―오든 시는 어떤 리듬을 선택하여 그것들을 체계화시켜 반복한다. 이것이  운율이다. ―r.브리지스 시는 역설과 아이러니의 구성체다.―브룩스 시는 우연을 기피한다. 시에 나타나는 클라스․성격․직분 등의 개성은 반드시 어떠한 클라스를 대표한다. ―코울리지 시를 구성하는 두 개의 주요한 원리는 격조와 은유이다.―웰렉․워렌 시는 정서의 표출이 아니라 정서로부터의 도피요,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의 도피이다. ―T.S.엘리어트 시는 상상과 감정을 통한 인생의 해석이다. ―W.H.허드슨 예술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작게 되는 것처럼 느끼게 하며, 그러면서도  우리들을 확대 시킨다. ―E.M.포스터 아직 탄생하지 않은  어느 특별한 일절 또는 일련의 배후에서, 하나의 힘과 같이 집중되어,  넓게 전개되는 의식의 총체. ―보트킨 열정적인 시란 것은, 우리들의 본성의 도덕적 지적 부분과 동시에  감각적 부분―지식에의 욕망, 행위의 의지, 감각의 힘을 방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가 완전한 것이 되려면, 우리들의 신체의 다른 여러 부분에 자극을 주어야 한다. ―하즈리트 시는 조잡한 요소로(물을 타고 섞어서) 연하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엑기스(精)이며, 그것을 키울 수 있는 것, 쓸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순수한 이미지의 시는 수정 조각과 같은 것이어서―우리들의 동물감각엔 너무나도 차고 투명한 것이다. ―허버트 리드 가장 위험한 것은, 순수한 물의 성분에 대하여 설명할 수 없는 거와  같이, 정말로의 순수한 시라는 것은 그 무엇에 대하여서도 강연을  할 수 없는 것이다.―불순하며, 메칠알콜이 들어간 거칠은 시에 대해선,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월터 로리 시적 논리가 시의 결말을 맺는 것은, 일반적으론, 기분의 변화라든가,  위상의 전환을 통하여 행해지는 경우가 많다.……그것이 시적 논리이다. 즉 논술이나 명증에 의하여 위상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단계가 듣는 사람의 마음에 만족을 주는 그러한 위상의 변화이며,  이해할 수 있는 추이인 동시에 그 진행은 앞의 단계를 무효로 하는  그러한 것이어서는 안된다. ―W.P.카 오로지 이미지는 시의 극치이며 생명이다. ―드라이든 방대한 저작을 남기는 것보다 한평생에 한번이라도 훌륭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낫다. ―에즈라 파운드 믿을 수 있는 모든 것이란 진실한 이미지 뿐이다. ―W.블레이크 만약 지각(知覺)의 문을 맑게 한다면 모든 것은 그대로 즉 무한감(無限感)을 가진 것같이 보일 것이다. ―W.블레이크 이미지는 우리들에게 사랑과 희생의 능력을 각성시킨다. 그것은 어느 경험을 생각케 하며 그 문체에 의하여 그러한 경험에의 어느 종류의 능력을 각성시킨다. 우리들은 어느 하나를 배우게 된다. 즉 그것이 우리들에게 가능한 것같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희열이든가 절망이든가 어떠한 감정이든간에 그것을 아는 것이 강한 만족으로서 느껴지는 것이다. ―챨스 윌리암즈 이미지의 생산은 무의식의 어두침침한 속에서의 정신의 일반적 행위에  속한다. ―E.S.달라스 나에게 있어서 지각은 처음에 명료한 일정한 목적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중에 형성되는 것이다, 나의 어느 음악적인 무우드(기분)가 우선한 다음에 시적 사상이 나에게 다가온다. ―쉴러 이미지의 발생, 진전, 설정은, 예를 들면 태양의 광선이 자연히  그에게 도달하여 ―그의 위에 빛나고 다음엔 냉정히 더구나 장려하게  기울어 가라앉아가며 그를 호화스러운 황혼 속에 혼자 남기는  현상에 흡사하다. ―J.키츠 우리들은 정신의 영역을 3중의 층으로 생각할 수가 있을 것 같다.  더구나 그러한 경우 지질학의 ‘단층’에 비교할 수 있는 어느  현상이 일어난다. 그 결과……지층은 비연속적이며 서로 불규칙한  단층을 나타나게 된다. 그와 매한가지로 자아의 감각적 의식은 본능적  충동과 직접 교섭을 갖게 되며, 그 ‘끓는 가마솥’에서 어떠한  원형적 형태 즉 예술작업의 기초가 되는 말, 이미지, 음 등의 본능적  짜임을 끄집어내게 되는 것이다. ―H.리드 나의 경우 시에 있어서는 많은 이미지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시의 중심이 많은 이미지이기 때문에 나는 하나의 이미지를 만든다. ―‘만든다’라는 말은 적당치 않은 말이지만, 나는 나의 이미지에  내 내부에서 정서의 여러 가지 배색을 물들여 놓고 그것에 내가 가지고 있는 지적 비평적인 힘을 적용하여 그것이 또 다른 이미지를 낳게 한다. 그리곤 그 제2의 이미지를 제1의 그것과 모순시켜, 그 둘에서 난  제3의 이미지에서 제4의 모순하는 이미지를 만들어 그것들 모든 것을  나에게 주어진 형식적인 제한의 범위 내에서 서로 모순시킨다. 각각의  이미지는 그 속에 스스로를 파괴하는 종자를 가지고 있다. 즉 나의 변증적 방법(나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은 중심의 종자에서 성장하는 많은 이미지의 끊임없는 건설과 파괴며, 그 중심의 종자도 그 자신으로 파괴적인 동시에 건설적인 것이다.……나의 시의 생명은 중심에서 나오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 속에서 나와, 그리고  죽지 않으면 안된다. 나의 이미지의 건설은 창조와 재창조와 파괴와  모순이 아니면 안되는 것이다. ……이미지의 어쩔 수 없는 충돌에서  (아무리 해도 피할 수 없는 충돌에서)―아무리 해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자극을 주는 중심 즉, 충돌의 모태가 창조와, 재창조와, 파괴와,  모순의 성질을 갖기 때문에―나는 시라는 순간적 평화를 만들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딜런 토마스 이미지는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 자신으론 시인의 특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지가 독자적인 본능의 증거가 되는 것은 훌륭한 정열,  또는 그 정열로 잠깨워진 일련의 사상 혹은 이미지 여하에 따라 시  그 자체가 변할 만큼 그 중요성을 가지고 있을 때 뿐이다.  ―코울리지 추상적 관념에 대립하는 감각적 이미지를 너무나 주장하는 나머지……  결과는 회화에 의한 시로 되어버렸다. 다시 말하면, 때로는 그림이  전부가 되어버려, 일반적 경험에 아무런 관계가 없어져 버렸다.  이것은 존재와 의미와를 분리시키는 잘못의 제일보였던 것이다.  ―로버트 히리아 상상된 이미지를 통해 우리는 시적 몽상이라는 몽상의 절대를 인식한다. ―바슐라르 실제로 물질적 상상력은 문화적 이미지와 실체를 합체시키는 유일한  매개체이다. 우리는 물질적으로 자신을 표현함으로써 모든 삶을 시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바슐라르 상상력 그 자신은 기억의 작용이므로 기억이 시의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 진실한 것이다. 내가 모르는 것을 상상한다는 것은 없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상상력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전에 경험한 것을 기억하며, 그것을 어느 다른 환경에 적용하는 능력이다. ―스펜서 추상적인 것의 구체화를 추구하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내 방법은  아니다. 나는 내 자신 속에 감동 ―감각적으로 생생한, 사랑스러운,  다채로운 여러가지의 감동 ―을 기민한 상상력의 에너지로서  받았던 것이다. ―괴테 이성이라는 것은, 기지(旣知)의 사물을 질서있게 정리하는 작용이며  상상력이라는 것은 사물의 개개, 혹은 전체로서의 가치를 지각하는  작용이다. ―C.V코노리 상상력이야말로 도덕적 선(善)의 훌륭한 방편이다. ―셸리 상상력이라는 것은 죽어 가는 정열을 되살리기 위하여 살(肉)을  잡아 두는 불사의 신을 말하는 것이다. ―J.키츠 모든 것에 앞서서 훨씬 중요한 것은 은유를 자기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만은 다른 사람에게서 얻을 수 없는 천부의  은총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정밀하게 만들도록 하라. 그러면 자연 은유가 될 것이다. ―J.M.머리 은유는 현실을 살피며 경험을 질서짓게 하는 정신의 본질적이며 또한  필요한 행위와 같이 생각된다. ―J.M.머리 어떠한 번역이나, 은유나, 우의라도 극단적인 비유와는 전연 다른  방향으로 흘러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면 은유를 바다나 파도에서  시작하여 불꽃이나 재로 끝내서는 안된다. 그것은 대단히 나쁜  모순이기 때문에. ―벤 존슨 은유를 깊이 추구하려면 건전한 의식의 세계에 들어갈 필요가 있다. ―J.M.머리 상징파의 상징은 언제나 자기만이 아는, 특별한 관념을 표현하기  위하여 시인이 독단적으로 쓰고 있는 ―즉, 그러한 관념의 일종의  투영인 것이다. ―에드문드 윌슨 상징주의의 상징의 실체는 제재에서 분리한 은유였었다.―왜냐하면  시에 있어서 어느 한 점을 넘으면 색채와 음은 그 자신을 위하여  즐거워할 수가 없을 뿐더러 이미지의 내용을 억측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에드몬드 윌슨 시는 감촉할 수 있고 묵묵해야 한다.  구형의 사과처럼  무언(無言)이어야 한다. 엄지손가락에 닿는 오랜 대형 메달처럼  조용해야 한다 이끼 자란 창턱의 소매자락에 닳은 돌처럼  시는 말이 없어야 한다. 새들의 비상처럼  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마치 달이 떠 오를 때처럼  마치 달이 어둠에 얽힌 나뭇가지를  하나씩 하나씩 놓아주듯이  겨울 잎사귀에 가린 달처럼 기억을 하나하나 일깨우며 마음에서 떠나야 한다. 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마치 달이 떠오를 때처럼  ―A.맥클리쉬 『詩法』 나의 시의 장부(帳簿)는 어디에 있는가 이 나의…  종이도 없고 펜도 없고  시도 없이 나는 무(無)앞에 있다. ―R.끄노오 『詩法을 위하여』 샤프란 |2005.05.01 수정됨|의견 쓰기|신고   답변추천해요0 영혼의 노래입니다  시는 우리들 영혼의 울림,스치듯 살아가는 삶의  파편 안타까운..... =======================     현대시어록               최룡관 편저   서언     현대시어록은 현대시를 리해하는 열쇠이며, 그 주옥같은 언어들은 시인이나 학자들이 일생을 분투하면서 건져올린 영원한 야광주이다. 그것은 시인들이나 평론가들의 교침이며, 자대이며, 지남침이다.       시인에 대하여   시인은 공포나 사랑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들을 보여준다. 옥타비오 빠스 [시와 력사] 동상 113페지 관습이나 , 복종이나, 법률의 평평한 바닥에서 썩는것이 무엇이든 그는 결코 썩지 않게 한다. 복종이 그를 지배하지 않고 그가 복종을 지배한다. 월트 휘트먼 [풀잎]서문 동상 120페지 가장 위대한 시인은 하찮음을 좀처럼 알지 못한다. 전에는 조그맣다고 생각되던였던것이 그가 입김을 불어넣어주면 그것은 우주의 웅장함과 활력을 가지고 팽창한다. 그는 예언자요 개인이요 완전자다. 동상동명 121페지 가장 위대한 시인은 미래의것의 일관성을 과거의것과 현재의것으로 형성한다. 그는 죽은자들을 관에서 끌어내여 다시 세워놓는다. 그는 과거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를 표현할수 있도록 일어서서 걸어가라. 그는 교훈을 배운다. 미래가 현재가 되는 곳에 자리를 잡는다. 가장 위대한 시인은 인격과 장면들과 정열에 눈부시게 빛을 던질뿐만 아니라 마침내 올라가 모든것을 끝마친다. 아무도 그것이 무엇을 위한것인지 그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말할수도 없는 철탑들을 보여준다. 제일 끝에서 잠시 빛을 발한다... 가장 위대한 시인은 도덕의 의의를 덧붙이거나 도의를 직용하지 않는다. 그는 령혼을 알고있다. 령혼은 그자체의 교훈이외에는 어떤 교훈도 인정하지 않는데에 있는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고있다. 동명동상 124페지 작가, 학자, 음악가, 발명가, 미술가들의 특성중에서 새로운 자유형식으로부터 발전해 나오는 말 없는 도전보다 더 멋진것은 없다. 동명동상 125페지 시인들은 자유의 목소리이며 해설자이다. 시대를 초월하여 그들은 웅대한 생각을 가질만 하다. 도명동상 127페지 위대한 작가, 특히 위대한 시인을 내고있지 않는한 그들의 언어는 퇴화할것이며 그들의 문화도 퇴화하고, 그리고 보다 강대한 문화에 흡수당하는 일도 있을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있는것이다. 토마스 스턴즈 엘이어트 [시의 사회적기능] [시의 리해] 150페지 가장 위대한 시인들은 즉시는 빛을 발하지 않는 경향을 가지고있다. 수세기뒤의 시인들에게 직접 영향을 끼침으로써 그들은 계속해서 산언어에 영향을 끼치고있는것이다... 그자신이 처해있던 시기에 있어서 그 언어를 새롭게 만든 시인들을 잘 연구하여야 할것이다. 동상동명 151페지 시인은 매우 정당하게 추측의 매혹적인 미로에 자신의 사고를 방황하게 한다. 샤를르 보들레르 [빅토르 위고] [시의 리해] 221페지 있는것을 그대로 묘사하는 시인은 스스로를 타락하여 교사의 수준으로 내려간다. 동상동명 223페지 한편의 좋은 쏘네트를 완성하고 난후 작가는 10년의 휴식을 취할 권리가 있다. 폴 발레리 [시에 대한 담화록] [시의 리해] 245페지 시인에게는 특별한 자질, 일종의 고유한 개인적에너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무한한 가치의 순간에 그에게 나타나 자신의 존재를 일깨워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순간에 불과할뿐, 이 상위의 (다시 말해서 인간, 인간의 다른 모든 에너지를 합해도 그것을 구성할수 없고 대체할수도 없을 정도의) 에너지는 짧고 우발적인 발현에 의해서만 존재하거나 작용할수도 있습니다. 그것(에너지)이 우리의 령혼의 눈에 조명시켜주는 보물들, 그것이 우리 내부에서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개념이나 형태들을 외부적시선에 대해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합니다-을 덧붙혀야 하겠습니다. 무한한 가치를 지니는 이 순간들, 자신이 만들어내는 관계들과 직관에 보편적품위를 부여해주는 이 순간들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거나 전달할수 없는 가치를 역시 풍부하게 지니고있습니다. 우리에게만 가치가 있는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이것이 문학의 법칙입니다. 최고의 상태들은 진짜 부재상태들로서 , 그런 상태에서만 존재하는 자연 그대로의 경의들이 그안에서 서로 해후하는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의들은 여전히 순수하지 못한것들입니다. 천박하거나 쓸데 없는것들, 무의미하거나 외부의 빛에 저항할 힘이 없는것들, 열광의 섬광속에서 번쩍이는것이 모두 금은 아닙니다. 결국, 어떤 순간들은 우리가 최상의 상태로 존재하는 심원함으로서가 아니라 형상 없는 질료와 뒤죽박죽이 된 파편들, 이상하고 조야한 단편적인 형상으로 우리앞에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쓰레기더미에서 귀금속 성분을 분리해내고 , 그것들을 함께 용해시켜 어떤 보석을 만들어 내는데 신경을 써야 합니다. 폴 발레리 [시에 대한 담론] [시의 리해] 246-247페지 [시인이란 아는자, 즉 초월하는자, 그리고 그가 아는것을 증명하는자이다] 그리고 마침내... [절대적인 창조가 없다면 시가 없는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몽상의 시학]선언 [시의 리해] 293-294페지 시는 다양화될 때에야만 통합된다. 가스통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 선언 [시의 리해] 312페지 우리 시대의 어떤 위대한 서정시인도 6편에서 8편이상의 완성된 시작품을 남긴 사람은 없습니다... 이 여섯편의 시를 위해서 30년내지 50년을 고행과 고통, 싸움을 벌이는것입니다. 고트프리트 벤 [서정시의 제문제] [시의 리해] 334페지 시인은 미지의것에 도달한다. 비록 자기자신의 환영들을 끝내 리해하지 못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시인은 그것들을 지관하였다. 시인은 전대미문의 그리고 이름을 붙일수 없는 사물들을 통한 거대한 비약의 과정에서 파멸해도 좋다. 왜냐하면 다른 무시무시한 일군들이 나타나서 그자신이 좌초해 버린 저 지평선에서 다시 시작하기 때문이다. -랭보 후고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87-88페지 전언되는바에 의하면 랭보는 ‘나의 우월성은 어떠한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데 있다’ 라고 말한다. 랑만주의시의 느끼는 감정들은 그에게 역겨움을 준다. 후고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96페지 현대시인의 탈 형상화의지는 추를 무연관의 세계로 내려보낸다. 동상108 페지 만질수 없는것을 포착할줄 모르는 사람은 시인이 아니라고 그(애드거 앨런포)는 단언하곤 했다. 자기 또한 기억의 주인이며 언어의 지배자인 사람만이, 그리고 언제나 훑어볼수 있는 자신의 감정들이 기록된 등록대장을 가진 사람만이 시인이라고 단언하곤 했다. 보들레를 [알바트로스] 98페지 하찮은 것으로 치장할줄 아는 이 경의로운 특권을, 파리와 스페인의 녀인에게 주어진 이 특권을, 시인은 누구보다도 많이 갖고있다. 동상 99페지 전에도 그랫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렇겠지만, 참된 시인이란 기이하게 치장을 한 진실이며 겉보기에는 모순되게 보이는 존재이다... 석양의 불꽃놀이가 끝날무렵에는 아주 먼 동방의 나라로 달려가는 자이다. 동상 100페지 시인이 도덕목적을 추구했다면, 그는 자기의 시적력량을 감소시켰다고 나는 단언한다. 그의 작품이 형편 없을것이라고 내기를 걸어도 경솔한 짓이 아니다. 동상 102페지 비규범적인 언어로써 진술하기 위해 미지를 추구하는 시인은, 그러나 비웃음을 사거나 아니면 배척을 받아 고독속에 떨어지게 된다. 후고프리드리히 [현대시 구조] 196페지 모든 작가는 그 이름에 값하는자라면, 여태까지 씌여졌던 모든것을 대항해서 써야 한다. -fr 퐁주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 구조] 220페지 시적 엄밀성이란 다름 아닌 새로운 언어관용, 새로운 낱말들, 비정상적인 은유들을 추구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몽롱하게 되는것이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 구조] 235페지 시인이란 ㆍ뚜렷하게 심미지향적인 발화를 창조하는 사람이다. 얀 무카로브스키 [시인이란 무엇인가] [현대시리론] 21페지 만일 시인이 감동효과의 범위를 거부한다면 배타적인 시(상징주의 시와 같은) 시를 초래하게 된다. 시인의 영속성을 거부한다면 , 의도적으로 시사성이 강한 작품 (예컨대 정치적인 시)을 낳게 된다. 동상동명 29페지 우리가 개괄해온 시인에 대한 개념은 ,,, 모든 방면에서 압력을 가하면서 서로 대립되여가는 힘들의 변화가능한 교차점으로 다루고있는것이다. 따라서 문학적 주도권은 이들 수많은 대립들을 독자적인 배렬(이는 조화롭다는것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로 조직한다는 사실에 있다. 얀 무카로브스키 [시인이란 무엇인가] [현대시 시론] 40페지 시인은 의미상으로 분명하게 경계를 정하는 단어들을 피하고 이미지면에서 정서적으로 련상작용이 풍부한 표현을 택한다. 동상도명 55페지 시인은 불가시물의 설교자이다. w. 스티븐즈 [후기 작품집] [세계명언대사전] 752페지 시인의 과제는 참으로 막중하고 위대하다! 모든 것을 파괴로부터 구해내며, 죽어야만 하는 인생들에게 영생을 부여한다. 루카누스 [시민전쟁] [세계명언대사전] 753페지 위대한 시인들의 작품은 이제까지 읽혀지지 아니하였다. 위대한 시인들만 그것들을 읽을수 있기 때문이다. H.D 도로우 [국가론] [세계명언 대사전] 753페지 시인들은 자신도 리해하지 못하는 위대하고 현명한것들을 지껄인다. 플라톤 [국가론] [세계명언대사전] 753페지 시인들은 모든 감각을 막대히, 오래, 신중하게 대폭교란시킴으로써 자신을 환상가로 만든다. A. 랭보 [P. 데메니에게 보낸 편지] [세계명언대사전] 754페지 아무도, 정신에 어떤 이상이 없으면 시인이 될수도 , 시를 즐길수도 없을것이다. T.B 머콜리 [수필집] [세계명언대사전] 754페지 그(시인)가 한번 붓을 대면 그가 하는 말은 움직인다. 자기가 데리고 가는 사람을 꽉 붙잡고 전에 가보지 못한 생생한 지역으로 데리고 간다. 거기서부터 휴식이 없다. 옛지점과 빛을 죽은 진공상태로 변화시키는 공간과 말로 표현할수 없는 광채가 보인다. 그와 동행하는 자는 별들의 탄생과 전진을 바라보고 하나의 의미를 배운다. 월트 휘트먼 [풀잎서언] [시의 리해] 131페지 ============================   시에 대하여   모든 시는 잔치이며 순수한 시간의 응결이다. 옥타비오 빠스 [시와 력사] [시의 리해] 112페지 시는 또 하나의 이미지이며, 또는 분활할수 없는 이미지의 성좌이다. 동명동상 114페지 시는 모르는 곳으로 뛰여들며,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시가 만약 잔치라면 그것은 시기에 맞지 않는 때에, 사람이 발길이 드문 곳에서 행해진 잔치 - 지하축제이다. 동명동상 115 아름다움의 결실은 우연히 되는것이 아니다. 생명처럼 필연적인것이다. 중력처럼 정확하고 똑 바르다. 시각에서 또 하나의 시각이 생기고 청각에서 또 하나의 청각이 생기며 목소리에서 사물과 인간의 조화를 영원히 알고싶어하는 또 하나의 목소리가 태여난다... 시의 즐거움이 멋진 운률과 직유와 소리를 지니고있는 시들에 있는것은 아니다. 월트 휘트먼 [풀잎서문] [시의 리해] 123페지 위대한 시는 아주 오래동안 공동의것이고, 모든 계급과 얼굴색을, 모든 부문과 종파를, 남자만큼이나 여자를, 여자만큼이나 남자를 위한것이다. 동상동명 131페지   시적창조는 해득할수 없는 신비지요. 사람이 태여나는 신비와 마찬가지입니다. 말하자면 어디서 오는지 모를 소리를 듣습니다. 그소리가 어디서 오는지 숙고하는건 쓸데 없는 일이지요. 내가 태여난것에 대해서 근심하지 않듯이, 죽는것에 대하여서도 근심하지 않아요. 옥타비오빠스 [바가리아와의 대화] [시의 리해]108-109 페지 시는 어둠속으로 들어가야 하며 인간의 심장을 만나야 하고, 여자의 눈, 거리의 나그네들, 황혼녘이나 별이 빛나는 한밤에 적어도 한수의 시의 필요를 느끼는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이렇게 예기치 않는 사람들을 방문하는 일은 가본일이 있는 먼곳, 잃은 모든것, 배운 모든것 전부에 값한다. 파블로 네루다 [시에서] 동상111페지 시는 이 주요목적 -즉, 해방-에 있어서 다른 예술들과 같다. 에즈라 파운드 [시의 지혜] [시의 리해] 133페지 교훈시는 점차 도덕적인 훈계시, 그렇지 않으면 독자에게 어떠한것에 대해 시인의 견해에 설복시키기 위한 시로 국한되여 버렸다. 토마스 스턴즈 엘리어트 [시의 사회적기능] [시의 리해] 145페지 그것은 맑게 개인 하늘을 날고있는 새나 비행기의 모습을 따라가면서 바라보는것과 같은것이다. 만일 그것이 아주 가까이에 나타났을 때 보기 시작해서 그것이 점점 멀리 가는대로 계속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본다면, 우리들은 굉장히 멀리 갈 때까지 그것을 볼수가 있는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우리가 그 위치를 가르쳐 주려고 해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는것이다. 동명동상 152페지 시는 다만 한 언어로써만 표현할수 있고 다른 언어로는 번역할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언제나 상기시키는것이다. 동명동상 153페지 참다운 시는 개개 예술가의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자체이고 우주는 영원히 완성을 지향하는 하나의 예술이다 월리스 스티븐스 [가치로서의 상상력] [시의 리해] 156페지 시는 신앙을 그 내용으로 하지 않는다. 동상동명 163페지 시는 그러나 그러한 문맥속에서의 느낌과 태도에 특히 초점을 모으는것이지 있는 그대로의 행동이나 관념에 초점을 모으지 않는다. 그리고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하다. 클리언스 부르크스 [말하는 한 방법으로서의 시] [시의 리해] 177페지   시는 다양화될 때에야만 통합된다. 가스통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 선언 [시의 리해] 312페지 시란 실존의 모습뒤에 숨겨진 신비한 뜻을 자신의 본질된 음률을 되찾은 언어로써 표현한것이다. 시는 그래서 현세의 우리 머뭄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하나뿐인 령적업무의 근본을 이룬다. 스테판 말라르메 [서한] [시의 리해] 223페지 시는 자신의 형식속에서의 재생을 지향한다. 시는 우리의 령혼에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재구성하라고 부추긴다. 폴 발레리 [시에 대한 담화론] [시의 리해] 243페지 시가 금전의 종말을 포고하고, 혼자서 하늘의 빵을 이 지상을 위하여 쪼개여 나누어주는 때가 오리라. 앙드레 브르통 [초현실주의 제1선언] [시의 리해] 253페지 화가는 의미를 그리는것이 아니다. 작곡가는 음악에 의미를 붙혀주는것도 아니다... [의미]를 가지는 기호가 지배적인 힘을 누리는 령역-그것이 산문이다. 그러나 시는 차라리 회화나 조각이나 음악편이다. 장 폴 싸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시의 리해] 266페지 시라는것은 인간의 [신화]를 창조한다. 그런데 산문은 인간의 초상을 그린다. [시의 리해] 272페지 주해에서 시란 하나의 형태를 락서하는 령혼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시적이미지의 현상학] [시의 리해] 284페지 시는 끊임없이 그의 원천을 넘어서며 기쁨과 슬픔속에서 더 멀리 나아가 작품들을 빚어냄으로써 더 자유롭게 되는것이다... 시는 자유롭게 있는 법이다. 그의 운명을 우리는 결코 우리자신의 운명속에 가두어두지 못할것이다... 자기의 창조적인 령감이 자기의 욕망보다 더 멀리 자기를 이끌고 가리라. 피에르 장 주브 [대지와 시] [시의 리해] 293페지 시는 몽상가와 그의 세계를 동시에 구축한다. 가스통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 서문 [시의 리해] 303페지 한편의 시는 시를 꾸며진 대상과 시를 쓰고있는 자아와의 맞섬이며, 말하자면 외면의 풍경과 내면의 련관성인것입니다. 시의 모호함이 독자를 혼란시킴만큼이나 매혹시키며, 갈피를 못잡긴 하지만 그 말의 마법과 신비스러움에 강제적으로 끌려든다. 그러므로 엘리엇이 한 평론에서 [시는 리해되지 않고도 전달될수 있다] 라고 말한것은 그와 같은 의미에서이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28페지 시의 본질이 리해시키는데 있다면 그 누구도 시를 쓸수 없으니라. 동상 현대시는 그것들을 익숙하지 않는곳으로 데리고 가서 낯설게 만들며 변형시켜버린다... 시창작의 세가지 방식- 느낌, 관찰, 변형-중에서 현대에는 마지막것이 지배적이며, 그것은 객관세계에서뿐 아니라 언어와의 련관에서도 그러하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 구조] 29페지 현대시는 종래의 의미를 인간성, 체험감상, 그리고 심지어 개인적자아마저도 도외시해 버린다 동상 30페지 사물적인 소재 정신적인 소재 할것 없이 시는 이질적인 요소들을 혼합시키며, 변의의 인광을 발하도록 한다. 동상 43페지   시는 일상적 삶에 대한 방벽이며, 그 상상력은 모든 현상을 뒤섞어놓는 자유를 누린다. 시는 예감과 마술을 본질로 하는 시적인간들이 견디기 어려운 관습의 세계에 맞서는 노래하는 저항이다. 공허한 리상속에 토대를 둔 시는 불가사이한 신비성을 창조함으로써 현실로부터 리탈하게 되며, 그런만큼 언어마술에 의해 보상될수 있다. 동상 73-74 문제는 력사속에서 지닐수 있는 시적인것을 빼내는 일이다. 즉 일시적인것에서 영원한것을 끌어내는 일이다. 보들레를 [알바트로스] 49페지 모든 건강한 인간은 이틀동안 먹지 않고 지낼수 있지만 시 없이는 결코 지낼수 없다. 동상 97페지 시는 가장 큰 수확을 가져다주는 예술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시는 나중에야 리익금을 만지는 그런 종류의 투자다. 하지만 그 리익금은 두두룩하다. 동상 동쪽 서정시는 도약한다. 하지만 늘 탄력적인 움직임으로 , 물결의 너울과 같은 움직임으로 도약한다. 동상 102페지 시는 사장(死葬)되거나 몰락하는 한이 있더라도 과학이나 도덕과 하나가 될수 없다. 시의 대상은 진리가 아니다. 시는 자기자신밖에 가지지 않는다. 보들레를 [알바트로스] 101페지   현대시의 근본특성의 하나는 그것이 자연적인 삶과 점점 더 분리된다는데 있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 구조] 147페지 시는 은자의 예술이다. 코트 프리트 벤 [현대시구조] 195페지 파편문체는 현대시의 특징이 되었다. 동상 259페지 참된 시란 그세계가 독창적이고 생동할수록, 은밀한 류사관계가 이루어지고있는 대립이 더욱더 상반적으로 된다. 체코의 랑만주의자 마챠 [현대시리론] 5페지 시전체는 하나의 큰 거짓말이여서, 처음부터 넉살좋게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시인은 가치가 없다. 로만 야콥슨 [현대시 리론] 8페지 어떻게 시성이 시를 표현하는가? 시성은 언어가 언어로 느껴지고 이름 불리여진 대상이나 분출되는 정서의 단순한 표현이 아닌 경우에 존재하게 되며, 또한 언어들과 그 구성법, 언어의 의미, 언어의 외적형식과 내적형식등이 무심하게 현실을 가리키는 대신에 그것들 나름의 무게와 가치를 획득할 경우에는 존재한다. 로만 야콥슨 [시란 무엇인가] [현대시 리론] 18페지 세계의 수많은 시에서 가장 뛰여난것은 대부분 자유률로 창조된것이다. 현대시에서 가장 흥미로운 일련의 운동은 엄격한 률격 없이는 최악의것이였거나 최상의것이였다. 벤야민 흐루쇼브스키 [현대시의 자유률] [현대시 리론 ] 117페지 화려한 행위는 고도의 황홀경을 불어넣고, 모든 정복자는 시신을 창조한다. E.월터 [나의 보호자에게 보내는 송시] [세계명언 대사전] 743페지 시는 인류의 모국어이다. J.G.하만[투케이 아네스테티카] [세계명언사전] 746페지 시는 인간이 자기자신의 경의를 탐구하는 언어이다. C. 프라이 [타임]지에서 [세계명언대사전 ] 746페지 시는 그 주제가 진실이 아니라 진실과 같은 사물들의 시 G.채프맨 [부쉬당부와의 복수] [세계명언대사전] 746페지   시는 정서의 느슨한 변환이 아니라 , 정서로부터의 도피이며,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의 도피이다. T.S. 엘리어트 [전통과 개인의 재능]                                                                                                                                                                                         [세계명언 대사전 ] 747페지 시는 인정받지 못한 세계의 립법자이다. M.W. 셀리 [시의 번호] 동상 시는 단순히 사물을 말하는 가장 아름답고 인상깊고, 광범한 효력을 가진 양식이요, 여기 그 중요성이 있다. M. 아롤드 [비평론] [세계명언대사전] 747페지 소네트(14행시)란 무엇인가? 그것은 소곤거리는 먼 바다를 말해주는 진주조개요, 신비롭고 갈고 닦은 보석이며, 또한 잘 그린 예쁜 그림이다. R.W.길더 [소네트] [세계명언대사전] 747페지 참된 시는 리해하기전에 통할수 있다. T.S. 엘리어트[단테론] [세계명언사전] 750페지 시는 의미해서도 안되며, 있어야 한다. A. 머쿨리시 [달나라의 거리] [세계명언 대사전] 751페지 왜 이 모든 것이 필요한가? 왜 기호가 대상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특별한 관심을 두는것이 필요한가?왜냐하면 기호와 대상의 일치(A는 A1이라는)를 직접적으로 인식하는것 말고도, 그러한 일체의 불직설성(A는 A1이 아니다)에 대해서도 직접적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로만 야콥슨 [시란 무엇인가] [현대시리론] 18페지 ====================   기능(목적)에 대하여   시인이 그 시기의 한 대중적인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고 해서 나쁜 시가 일시적으로 유행하는 수도 있는것이다. 그러나 참다운 시는 대중적인 생각이 변화할 뿐만 아니라 그 시인이 열정적으로 관여했던 문제에 대한 흥미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잔존하게 되는것이다. 호마스 스턴즈 엘리어트 [시의 사회적기능] [시의 리해] 146페지 첫째 우리들이 확언할수 있는것은 시는 즐거움을 주는것이여야 한다는것이다. 동상동명 147페지 우리는 시를 대중적인 시에만 국한해서는 안될것이다... 시인의 직접적인 임무는 그의 국어에 대한것이다. 즉 첫째로는 그의 국어를 보존하고 , 둘째로는그것을 혹대, 향상시키는 일이다. 동상동명 149페지 시인이 매우 급속히 많은 독자를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의심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들에게 그 시인이 진정으로 새로운 일을 하고있지 않고, 또 대중들이 벌써 알고있는것, 따라서 그들이 벌써 전시대의 시인들에게서 받은것을 다만 주고있는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만드는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올바른 소수의 독자를 가져야 한다는것은 중요한 일이다. 동상동명 151페지 문학은 철학이나 신학이나 종교의 애용물이 아니다. 문학은 자신의 고유한 임무를 가진다. 그러나 이 임무는 사변적인것이 아니고 감정적인것이기 때문에 문학은 사변적으로 결정될수는 없다. 엘리어트 [1927년 한 론문에서] [시의 리해] 376페지 문학의 기능의 하나는 바로 그 과학적언어를 정복시키는것이다. 그러므로 문학이 공격하는 바로 그 언어의 도움으로 문학을 완전히 읽어낼수 있다고 주장하는것은 지극히 모험스러운 일이다. 그런 주장을 한다는것은 문학의 실패를 전제하는것과도 같다. 츠베탕 토도로브 [어떻게 읽을것인가] [현대문학 비평론] 247페지 작품제작에 재주 없는것을 , 이목을 끌게 마련인 정치적암시로 벌충하는것이 특히 열등한 문인들이 버릇으로 점점 굳어졌다. 시, 소설, 평론, 희곡, 모든 문학생산품이 이른바 [경향]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엥겔스 1851년 10월 MEL.P.119) ...재주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확신을 드러내려 극단적으로 경향성 쓰레기를 보여주는 하찮은 친구가 있는데 사실은 독자를 얻기위해 그러는것이다. (엥겔스 1881년 8월 MEL 123) 레이몬드 월리엄즈 [제휴와 참여] [현대문학 비평론] 569페지 경향문학은 ... 정치적제휴로서의 참여였다. 인간을 위해서로부터 인민을 위해서로, 다시 혁명을 위해서로, 당을 위해서, 그리고 (변화하는) 당로선을 위해 서로 협소해져간것이다. 동상동명 571페지 참여는 이데올로기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것이다. 동상 573페지 시의 리해는 소수의 대가에게만 속하는 령역이다... 시는 아름다운 소리만 내며, 어떤 의미도 련관도 갖지 않는다. 기껏해야 각양각색의 사물들의 순전한 파편들인양 몇구절 정도 리해나 될뿐이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44페지 보들레르는 [악의 꽃]을 저항에의 열정적인 욕구, 그리고 증오의 산물로 칭하면서 시가 [신경쇼크]를 유발시키도록 권장하고 독자를 자극시켜 더 이상 리해하지 못한것을 자랑한다. 한때 기쁨의 무한한 샘이였던 시적인 의식을 이제 무진장한 고문도구들의 병기창이 되었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 구조] 64페지 [일루미네이션]은 독자를 고려하지 않는 시이다. 이 시는 리해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것은 환각적인 자기방출의 뢰우이며, 기껏해야 위험에 대한 사랑의 전원적인 위험에 대한 저 두려움을 일깨운것으로 만족한다... 어느 문장이 말하듯 [다른 모든 선구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업적을 남긴 창시자]임을 확인시켜준다. 이 시는 절대화한 현대적상상력의 최초의 위대한 기념비이다. 동상 113페지 나는 언제나 문학과 예술은 도덕과는 무관한 목표를 추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자신은 사상과 문체가 아름다운 것으로 충분하니다. 보들레르 [알바트로스] 51페지 그리고 끝으로 몽상을 예술품으로 만드는 작업을 전혀 리해하지 못하는 이 무능력을 나는 결코 참아낼수 없었습니다. 동상 58페지 (1857년) 많은 사람들이 시의 목적은 어떤 교육적인것에 있고, 시는 때로는 의식을 강화시켜야 하고, 때로는 풍습을 향상시켜야 하고, 또 때로는 어떤 유용성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는 자기자신 밖에는 다른 어떤 목적도 가지지 않는다. 시는 다른 목적을 가질수가 없다. 단지 한편의 시를 쓰는 즐거움을 위해 씌여진 시보다 더 위대하고 고귀하며 진실로 시라는 이름에 값하는 시는 없을것이다 동상 102페지 언어행위의 시성은 의사소통이 제일 중요한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백히 하기 때문에 여기 ‘검열’은 느슨해지고 부드러워질수 있다. 로만 야콥슨 [시란 무엇인가?] [현대시리론] 13페지 시적표현의 목적은 미적효과에 있다. 그러나 시적언어를 지배하고 있는 (다른 기능언어에서는 부수적현상에 불과할뿐) 미적기능은 언어기호자체에 주의를 집중시킨다. 따라서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이라는 목표를 지향하는 실제의 방향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게 된다. 얀 무카로부스키 [시적언어란 무엇인가?] [현대시리론] 46페지 한작가의 작품이 갖는 진정한 가치를 정확하게 리해하는 지음을 만날 수 있다는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음은 확실하게 리해하기 어렵고 또 그런 지음을 만나기는 더욱 어려운것이다. 작품에 대한 진정한 리해력을 갖춘 사람인 지음을 만난다는것은 천년에 한번 있을가말가한 일이다. 류협 [문심조룡] 685페지 지나치게 심오하다고 탓을 하랴! 문제는 식견과 감별력이 차한데 있다... 마음의 눈으로 작품의 사상과 감정을 관찰하는 일은 육안으로 사물의 형체를 관찰하는것에 비유될수 있다. 아주 밝은 눈으로 보면 분간할수 없는 사물이 존재하지 않을것이다... 오직 심원한 인식능력과 감별능력을 지닌 사람만이 작품의 심오함을 포착해 낼수 있고 그로인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희열을 느낄수 있을것이다. 동상 695페지 작품의 예술성여부는 , 훨씬 높은 차원의 진동도에 기인하는것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107페지 그가 사용했던 유사한 테마 주제들이 빅토르유고가 아닌 다른 시인의 손에 들어가면 너무 쉽게 교육적인 형태를 취하게 되는데 이는 진정한 시의 가장 큰 적이다. 샤를르 보들레르 [빅토르 위고] [시의 리해] 222페지 사람들은 공리 뻔한 사실의 방아를 찧고 또 찧는다. 그속에 들어갔던것밖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발생적사상을 위해 그 전통을 벗어나는 순간, 시, 지혜, 희망, 미덕, 학식, 일화 그 모든 것이 몰려와서 도와준다. R.W.에머슨 [문학적윤리학] [세계명인 대사전] 743페지    
256    캐나다 의사 - 노먼 베쭌 (베순) 白求恩 댓글:  조회:7413  추천:0  2015-09-02
  중국은 1949년 10월1일 첫 열병식 뒤 지금까지 모두 14번의 열병식을 거행했다. 마오쩌둥은 집권 이후 1959년까지 매년 국경절(10월1일)을 맞아 열병식을 성대하게 거행했다. 첫 열병식에서는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 군에서 노획한 무기가 대거 등장하면서 내전 승리를 과시했다. 1950년의 열병식에는 사상 최대인 2만4000여명의 병력이 참가했다. 열병식은 한국전쟁 중에도 멈추지 않았고, 1954년엔 김일성 당시 북한 수상이 참관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의 혼란기였던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전후로는 열병식이 열리지 않았다.   열병식은 1984년 덩샤오핑이 “열병식을 군 사기 고취와 군민 유대 강화의 장으로 치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25년 만에 부활했다. 이후 장쩌민, 후진타오 주석 때는 건국 50주년과 60주년 등 10년 주기로 거행됐다. 이번 열병식은 국경절이 아닌 전승기념일에 맞춰 열리는 첫번째 열병식이다. 중국은 열병식 당일 베이징 공항을 일시 폐쇄하고, 행사장인 천안문 광장 주변은 사실상 계엄 상태에 들어간다. 베이징 주변 수도권 지역 공장 1만2255개는 28일부터 가동 중지에 들어가 이미 베이징 하늘은 오염물질이 사라지고 파랗게 변했다. 이른바 ‘열병식 블루(Blue)’다.   중국은 이번 기념행사가 중국만의 전승행사가 아닌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기념행사라는 점을 부각시키려 몇몇 눈에 띄는 외국 인사들도 초청했다. 중국의 항일, 반파시스트 전쟁이 스페인 내전 당시처럼 세계 양심세력이 함께 싸운 항쟁이었다는 것을 부각하려는 포석이다. 대표적인 초청 인사가 캐나다인 의사로서 항일 전쟁에서 부상한 중국 홍군들을 치료한 노먼 베순의 유가족들이다. 전도유망한 흉부외과 의사의 일상을 던지고 중국 전장에 뛰어든 베순은 열악한 상황 속에서 홍군을 치료하다 수술 도중 베인 상처로 인한 패혈증 탓에 1939년 49살의 나이로 숨졌다. 중국은 그를 ‘중국 인민의 동지’라고 칭한다.   중국은 2차대전 당시 중국에서 일본군과 싸운 퇴역 미군 공군 부대인 ‘비호대’(플라잉 타이거스) 노병들도 초청했다. 1941년 8월 중국 서남부 윈난성 쿤밍시에서 미군 비행 교관 클레어 리 셔놀트가 주도해 창설한 비호대는 폭격기 68대와 조종사 110명, 정비사 등 지상근무요원 150명으로 구성돼 일본기 300여대를 격추했다.   1984년 열병식에서 덩샤오핑이 군대를 사열하고 있다. =========================================================== 노먼 베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노먼 베순 박사, 1922년 헨리 노먼 베순(Dr. Henry Norman Bethune, 중국어: 亨利·诺尔曼·白求恩, 1890년 3월 3일 ~ 1939년 11월 19일)은 캐나다 출신의 외과 의사이자 의료개혁가이다. 스페인 및 중국의 전장을 누비며 인도주의적인 의료활동을 펼쳤다. 그의 중국식 이름은 "바이츄언"(白求恩)(흰 머리의 은혜로운 사람)이었으며, 중국에서는 그를 "바이츄언 의사"(白求恩大夫)로 칭송하여 "중국 인민의 영원한 친구"로 기념한다.     목차    1 초기의 생애 2 흉부외과의·의료개혁가로의 활동 3 스페인 내전 4 중국에서의 활동과 죽음 5 기념   초기의 생애 노먼 베순은 1890년 캐나다 온타리오 주 그레이븐허스트에서 장로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말콤 베순, 어머니는 엘리자베스 앤 굿윈이다. 할아버지의 이름도 노먼 베순인데 할아버지 또한 유명한 외과 의사로, 나중에 토론토 대학 의대로 흡수되는 어퍼 캐나다 의학 학교를 세운 인물이다. 어린 시절 베순은 호기심 많고 모험심이 강한 아이였고 아버지의 근무지 변경으로 여기저기 자주 이사를 했다. 1909년 그는 토론토 대학에 입학했고 가정형편이 넉넉치 않았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하여 학비를 벌어 공부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1915년 캐나다가 참전을 선언한 바로 그날, 베순도 캐나다 육군에 입대하여 제1사단 야전병원에서 복무하였고 바로 프랑스의 전장으로 파병되었다. 그는 부상병 운반병으로 복무하다가 이프레스에서 독일군의 포탄에 부상당하고 영국군 병원에서 치료받고 부상병으로 본국 캐나다로 송환되었다. 캐나다로 돌아온 그는 다시 토론토 대학에 복학하였고 학업에 몰두하여 1916년 12월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취득한 후, 영국 해군에 입대하였고 함정 군의관으로, 나중에는 캐나다 비행단의 의무장교로 복무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런던의 병원에서 일했고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겼다. 1923년 가을 에딘버러 명문가의 딸인 프란시스 캠벨 패니를 만났고 사랑에 빠져 이듬해 런던에서 결혼했다. 두 사람은 미국과 캐나다를 전전하다가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최초의 개인병원을 개업했다. 디트로이트에서 그는 뛰어난 수술실력으로 큰돈을 벌었고 그 돈을 가지고 가난한 환자들을 돌보는 데 썼다. 그는 열정적으로 가난한 환자들을 돌보았는데 그만 폐결핵에 걸리고 말았다. 당시 폐결핵 치료수준은 형편없었다. 베순도 그 자신이 의사이면서 그저 요양소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우연히 요양소에서 새로 고안된 급진적인 폐결핵 치료법인 '기흉치료법'을 알게 되었고 그 치료법에 의한 시술을 요구하여 다시 건강이 회복되었다. 흉부외과의·의료개혁가로의 활동 건강을 회복한 후 그는 일반 외과 일을 그만두고 흉부외과, 특히 폐결핵에 집중하게 되었다. 뉴욕 주의 레이 브룩의 결핵병원에서 2년동안 수술의로 있다가 몬트리올 맥길 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왕립 빅토리아 병원으로 옮겨 이 대학병원의 교수가 되었다. 몬트리올에서 그는 수술용 도구를 개량하고 새로운 폐결핵 수술 치료법을 개발하는 일에 몰두 하였고 캐나다에서 가장 뛰어난 흉부외과 의사중의 한사람이 되었다. 그는 몬트리올의 성심병원 흉부외과 과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그 곳에서 폐결핵 치료에 몰두하던 중 그는 점차 가난이 바로 폐결핵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점차 사회적인 문제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는 사회주의적인 의료보건활동을 지지하였고 가난한 노동자와 빈곤층의 치료에 앞장섰다. 1935년 그는 처음으로 소비에트 연방을 방문했는데 소련의 의료보장에 감명을 받고 캐나다에 돌아와 비밀리에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는 캐나다 의료체계에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도입하려는 운동에 앞장섰으며 특히 아동의 보건상태 개선활동 및 미술치료에 관심을 가지고 일했다. 당시 대공황의 여파로 거리에는 실업자들이 많았으며 극빈층이 늘어났는데 베순은 이 가난한 환자도 마다하지 않고 받았고 그로 인해 가난한 환자들의 영웅이 되었다. 스페인 내전   스페인 내전 당시 닥터 노먼 베순이 운영한 이동수혈부대 (1936년경) 1936년 11월 3일 노먼 베순은 스페인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전 세계에서 자유주의자, 진보주의자들이 프랑코의 파쇼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몰려들었는데 베순도 그 대열에 합류하였던 것이다 . 그는 공화군 제5연대의 의무대에서 복무했는데 이동야전병원을 개설하고 전장에서 부상병을 치료하였다. 특히 그는 전장에서 직접 수혈하는 방식을 개발하여 자동차에 이동수혈대를 장착하고 전장을 누볐다. 당시는 아직 수혈의 시술이 활성화되지 않았는데 베순의 이동수혈부대는 전쟁터에서 부상병의 사망률을 75%까지 낮추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1937년 6월 그는 스페인의 경험을 고국에 알리기 위해 몬트리올로 돌아왔고 이후 북미 여러 곳을 다니면서 스페인 내전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호소하는 연설을 하고 다녔다. 이때 그는 자신이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떳떳이 밝혔다. 중국에서의 활동과 죽음   네룽전장군과 대담하는 노먼 베순 (1938년) 1938년 1월 노먼 베순은 홍콩에 도착했다. 베순은 쑹칭링이 대표로 있는 중국원조협의회의 요청으로 일본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을 지원하기 위해 중국행을 결심한 것이다. 그는 중국 공산당이항일전의 근거지를 삼고 있는 옌안으로 들어가 마오쩌둥을 만나 부상병 치료를 위한 지원을 약속받고 의무대를 꾸려 전선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간 곳은 일본군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어 있던 진찰기 지구였다. 그 곳에서 그는 네룽전의 팔로군 부대에 배속되어 부상병 치료에 나섰다. 중국에서 부상병 치료중 수혈할 혈액이 모자라면 그는 'O형'인 자신의 혈액형은 아무에게나 수혈이 가능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피를 뽑았다. 그는 부상병 치료 뿐만 아니라 중국의 공중 보건과 의료시설 개선에도 힘썼고 자신의 의술을 많은 중국인에게 가르치고 베풀었다. 또한 그는 중국의 실상을 미국에 알리고 외국에 의약품등 원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장제스 정부는 공산당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지원금과 의약품원조를 차단하고 공산군은 점점 의약품과 물자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1939년 가을 그는 수술중 실수로 손가락을 베었는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간단한 의약품(설파제)으로 치료할 수 있는 감염이었는데 그것이 패혈증으로 발전하였고, 결국 노먼 베순은 패혈증으로 1939년 11월 13일 49세를 일기로 죽음을 맞이했다. 기념   중국 허베이성에 세워진 베순의 기념상. 노먼 베순은 그의 생전 본국 캐나다에서보다 중국에서 더 유명하였다. 1939년 12월 그가 사망한 직후 마오쩌둥은 〈베순을 기념하며...(紀念白求恩)〉라는 에세이를 발표하여 그를 기렸고 그의 유해는 허베이 성 스좌장 혁명열사능에 묻혔다. 吉林省에는 그의 이름을 딴 白求恩의과대학이 세워졌고 스좌장에는 그의 이름을 딴 3개의 병원이 있다. 캐나다에서도 요크 대학에 그의 이름을 딴 의과대학이 있고 그레이븐허스트의 그의 생가는 캐나다 정부에서 매입하여 노먼 베순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몬트리올에도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1990년 그의 탄생을 기념하여 중국과 캐나다에서 공동으로 그를 기념하는 같은 디자인의 우표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노먼 베순  
255    숫자로 보는 열병식 댓글:  조회:5379  추천:0  2015-09-02
[ 2015년 09월 04일 10시 40분 ]   ====== 숫자로 보는 중국 열병식 첫번째 숫자 보겠습니다. 바로 1인데요. 어떤 의미가 있나 살펴보니까 시진핑 정부 첫 열병식이고, 중국 최초로 여군 의장대와 여군 군악대가 등장하고요. 외국군대도 처음으로 참가한다고 합니다. 이번 열병식에 처음으로 시도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지금까지 중국 열병식에는 중국과 관계가 밀집했던 국가의 외빈들을 초대한 경우는 있었지만 국제 행사로 치르는 것도 처음인데요... ... 최초로 중국 여군 의장대도 참가합니다. 뛰어난 미모와 스펙으로 중국 내에서도 화제 만발인데요. 열병식에 여군 의장대 참석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선채로 3시간 움직이지 않기 40초 이상 눈 깜빡이지 않기 등의 훈련도 받는다고 하던데요? ... ...중국 지도자 옆자리에 서는 첫 여성지도자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총 49나라 국가원수 또는 정부대표가 참여하는데요. 관전포인트의 하나로 예상되는 것이 자리인데요... ... 중국은 열병식에 총 51나라를 초대했는데 두 나라 일본과 필리핀이 거절했습니다... ... 중국 열병식 관련한 다음 숫자 보여주시죠. 121입니다. 도통 감이 오지 않는 숫자인데요. 보니까 국기 게양식 과정에서의 호위부대 걸음수와 중국 인민이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며 난관을 극복해온 해의 수를 뜻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121걸음이 일본과의 첫 전쟁인 1894년 청일전쟁 이후 121년이 흘렀다는 것을 상징한다는 것인데요. 호위부대의 121걸음 수 어떤 메시지 담고 있나요? 일본을 넘어서겠다는 강력한 의지로 봐야할까요? 다음 숫자 보겠습니다. 500인데요. 열병식에 동원되는 무기수를 뜻한다고 해요. 무기장비가 40여종 500개가 동원이 되는데 열병식 공개 미사일 수량은 100, 참가 군용기 수는 200개라고 합니다... ... 열병식 참가 병력이 12000명 이게 외국군 병력을 제외한 중국군 병력 수 라고 하는데 1만 2000명의 병력 이 가지는 의미도 남다를 것 같아요? 이번 열병식을 앞두고 특수부대원으로 원숭이 부대가 편성이 됐다고 합니다. 매도 동원됐다고 하는데 어떤 이유가 있는 것입니까? 마지막 숫자 볼까요? 2400입니다. 어떤 숫자인가 보니 군악대 병사 수만 2400명이군요. 열병식에서 군악대의 등장과 숫자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군악대가 연주하는 곡들도 다 의미가 담겨져 있죠?
254    재미로 보기 - 열병식 최초, 최대... 댓글:  조회:4937  추천:0  2015-09-02
전승절 행사의 절정이 될 국기게양식. 톈안먼 광장 인민영웅기념비에서 게양대까지 국기 호위부대의 걸음 수가 큰 관심사였습니다. 이번 행사에선 121걸음을 걷는데, 청일전쟁이 발발한 1894년부터 올해까지의 햇수를 의미합니다. 2009년 건국 60주년 국경절의 169걸음은 1840년 아편전쟁을 기점으로 했습니다. 이번 열병식이 국경절이 아닌 항일전쟁 승리 기념일에 최초로 열린다는 점에서, 청일전쟁으로 일본에 뺏겼던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되찾았다는 자신감을 보여준다는 분석입니다. 최대 최초 기록도 많은데, 열병식 사상 최대 규모인 200대 정도의 군용기가 선보입니다. 또 현역 장성으로 구성된 장군부대와 여군 의장대도 최초로 참가합니다.  외국 군대와 군 대표단 그리고 참관단이 대거 참가하는 것도 처음입니다. 특히, 미국 미사일방어체계를 무력화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진 최신 다탄두 핵미사일 '둥펑-41'이 처음으로 공개될지에도 시선이 쏠리고 있습니다.
253    재미로 보기 - <<원숭이, 독수리 특수부대>> 댓글:  조회:4970  추천:0  2015-09-02
중국 공군 소속 조련사가 ‘원숭이 특수부대’를 훈련시키고 있다. 호루라기를 불면 원숭이들이 나무에 올라 새 둥지를 땅으로 떨어뜨린다. 새떼를 내쫓기 위해 독수리를 활용하기도 한다. [사진 중국 인민해방군] 중국의 주력 전투기 200여 대가 동원되는 ‘초호화 에어쇼’는 이틀 앞으로 다가온 중국 열병식의 하이라이트로 꼽힌다. 중국은 ‘젠(殲)-10’과 전략폭격기인 ‘훙(轟)-6K’ 등 주력 전투기 200여 대를 동원해 하늘을 휘젓는 에어쇼를 선보일 계획이다. 전 세계가 열병식을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중국은 인공위성을 이용해 오와 열을 조정하는 등 만전을 기하고 있다.  최근엔 에어쇼 도중 전투기와 새가 충돌하는 ‘버드 스트라이크(bird strike)’를 방지하기 위해 원숭이와 독수리까지 동원했다. 시속 700㎞로 날고 있는 전투기에 비둘기 한 마리가 부닥칠 경우 방탄 처리된 앞 유리가 깨질 정도의 충격이 가해지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그 충격으로 인해 전투기가 추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새를 내쫓기 위한 고심 끝에 생각해낸 방법은 원숭이를 활용한 새 둥지 철거다. 원숭이를 활용하면 물을 뿌려 둥지를 땅으로 떨어뜨리거나 둥지가 지어진 나무 자체를 불태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중국 공군이 새 둥지 철거를 위해 투입한 원숭이는 모두 5마리로, 하루 평균 60개 이상의 새 둥지를 없애고 있다. 원숭이 특수부대는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는 훈련과 한 손으로 둥지를 밀어내는 훈련을 거친 뒤 지난달부터 새 둥지 철거 작업에 본격 투입됐다.  원숭이 특수부대는 지난해 한 공군기지 관계자에 의해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새떼가 전투기와 충돌하며 이착륙 사고가 잇따르자 대책 마련에 나선 것이다. 부대 내에서 기르 던 원숭이를 장난 삼아 나무에 오르게 했는데, 새 둥지를 떨어뜨리는 모습을 보고 본격적으로 훈련을 시켜 ‘원숭이 특수부대’를 만들었다. 조련사가 호루라기를 불면 원숭이가 나무를 타고 올라가 새를 쫓아낸 뒤 둥지를 땅으로 밀어낸다. 그렇게 둥지 하나를 없앨 때마다 조련사는 원숭이에게 사과 한 알과 땅콩을 주며 임무 수행을 독려한다.  ‘버드 스트라이크’를 막기 위해 중국 공군은 원숭이뿐 아니라 독수리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에어쇼가 열리는 구역 곳곳에서 원을 그리는 형태로 비행하며 다른 새의 접근을 막는 것이 ‘독수리 특수부대’의 임무다.
252    력사자료 - 정률성 댓글:  조회:10550  추천:0  2015-09-01
즐겨찾기 정률성(郑律成,1914년 7월 7일 - 1976년 12월 7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작곡가, 본명은 정부은(郑富恩)이다. 그는 위대한 작곡가인가 아니면 한명의 공산주의 음악가인가?   정율성 음악가(1914~1976)는 62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약 5년 정도를 북한에서 생활했다. 북한에 있을 동안 정율성은 ‘인민군행진곡’ 등 북한 군가와 한민족의 가락을 담은 서정적인 노래들을 많이 창작했다. 정율성은 해방뒤 역사의 격동기에서 고향인 전라남도 광주로 갈 수 없었다. 당시 중국공산당 팔로군 소속이었던 정율성은 당의 명령에 따라 북쪽의 조선땅을 밟게 된다. 정율성 음악가의 중국에서의 활동은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의 생활은 많이 소개되어 있지 않다. 이에 따라 정율성 음악가의 북한에서의 활동을 정리한다. 이것이 정율성 음악가의 음악 인생속에서 그를 폭넓게 이해하고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정율성은 당시의 복잡한 정치 상황속에서도 매순간 작곡가로서 열정을 다해 선율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자료는 (부인 딩쉐쑹 등 지음), (왕허핑 지음)등을 참고했다.   정율성은 해방 후 1945년에 북한 김일성에게 보내져 그곳에서 조선노동국가보안대 구락부, 조선노동당황해도선전부 부장, 조선인민군협주단 단장, 조선국립음악대학작곡부 부장 등을 역임한다. 이 시기에 정율성은 지금도 북한에서 불러지고 있는 “조선인민군행진곡”을 작곡하여 김일성에게 바쳤으며 그 노래는 지난 2000년 6월15일 김대중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공항에서 웅장하게 연주됐다고 한다. 그는 음악으로 공산당을 선전하는 鬼才였다. 정율성 그는 북한 김일성에게 이용만 당하고 다시 모택동에게 몸을 의지한다. 그는 중국에서도 모택동의 문화대혁명 혼란기인 1966년부터 1976년까지에는 모든 공식적 음악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에 따른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비교적 젊은 52살의 나이에 고혈압으로 중국에서 사망하게 된다. 그를 “인민해방군의 가슴을 음악으로 격동시켜 일본을 물리친 혁명가”라고 떠드는 KBS는 정율성을 공산당 혁명가로 극구 칭송하고 있다. 북한에서도 그런 정율성을 기리는 영화 “음악가 정율성”을 1992년에 제작하였고, 지난 노무현 정부에서는 2005년에 공산주의 혁명열사로 39년을 중국과 북한에서 살다간 정율성을 음악가라는 이름으로 “정율성 국제음악회”를 개최하였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광주 MBC측에서는 홍콩의 칸 인터내셔날과 합작으로 정율성을 영화화하겠다고 한다. 광주 저곳에서는 정율성을 마치 항일운동에 몸 바친 영웅으로 떠받들기에 한창이다.                 정율성과 부인 딩쉐쑹 부부 정율성 음악가의 모친 최영온(崔泳溫)씨와 친손녀 정샤오티(鄭小提)의 청소년기때 모습.     정율성은 효자였다. 북한에서 그의 생활이 약간 안정이 된 1948년 여름 모친 최영온(崔泳溫, 당시 75세)씨를 서울에서 평양으로 모셔왔다. 모친이 도착한 날 정율성은 감격해서 어머니를 피아노 옆에 앉히고 “어머니, 어릴 때 어머니께서 저에게 가르쳐준 노래를 부를게요”라며 피아노를 치면서 소리높여 노래를 불렀다.   어머니는 이후 정율성을 떠난 적이 없다. 평양에서 베이징에 와서 줄곧 정율성 부부와 함께 했다. 어머니는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을 좋아하고 근면성실했다. 1963년 낙상을 당해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는데 골절은 피했지만 외출이 힘들 정도가 되었다. 정율성은 중의병원에서 진료를 받기를 원했는데 항상 어머니를 부축해 모시고 다녔다. 회의가 있을 때도 어머니의 녹창을 막기위해 몸을 돌려 눕혀드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머니는 1964년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나중에 정율성의 조카 정상훈(鄭祥勛)이 유골을 전라남도 광주에 안장했다.   1950년 10월 평양을 떠날 때 정율성은 당시 성냥, 소금과 마른 식량을 준비해서 77살 고령의 어머니를 모시고 평양을 떠나게 된다. 이때 중국대사관의 정무참사관인 차이청원은 특별히 지프차를 보내 정율성의 철수를 도왔다. 중국정부는 당시 정율성 모자외에 다른 한명과 함께 지프차로 신의주까지 모시도록 특별 지시를 내려보냈다칠흑같이 깜깜한 밤에 운전기사석 바로 옆 앞자리에 앉아서 운전기사에게 길을 알려주며 철수를 도왔다. 당시 저공비행하는 전투기 소리와 멀리 번쩍이는 조명탄의 불빛을 볼 수 있었다고 운전기사는 회고했다. 낮에는 전투기 공격 때문에 차를 위장한 채 세워두고 저녁에 출발해 한밤중을 달려서 갔는데 길가에 민가들이 불타고 있는 곳도 있었다. 이렇게 이틀밤을 꼬박 달려서 신의주에 도착했다. 정율성은 베이징으로 돌아온 뒤 베이징인민예술극원(藝術劇園)에 배치를 받게된다. 이때부터 정율성은 국적이 조선인이 아니라 중국인이 된다.   초등학교 시절 신현 중학교 시절 팔로군 행진곡 실제 작사자인 궁무       1946년 2월에 정율성과 딩쉐쑹은 처음으로 김일성 주석(당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만났다. 당시 30대 중반의 김일성 위원장(1912~1994)은 각 방면의 역량을 모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초를 다지고 있었다.   김일성 위원장은 딩쉐쑹이 중국공산당의 많은 고위층 지도자들과 친하다는 사실을 알고 중요한 임무를 부여한다. 그것은 바로 중국 북만주에서 식량을 빌려오는 일이었다. 북한은 공업이 발달한 지역이고 남한은 식량 기지였는데 당시 남북이 막힌 상태에서 북한의 식량 사정은 매우 어려웠다.   딩쉐쑹은 하얼빈(哈爾賓)으로 가서 서북지역의 지도자들을 만났는데 당시 임시로 동북국(東北局) 부서기를 맡은 가오강(高崗)과 서만분국(西滿分局) 서기 리부춘(李富春)을 만나 식량지원을 약속받게 된다. 동북국 평양사무실의 책임자인 주리즈(朱理治)가 1947년 6월 27일에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중국은 당시 3만톤의 양식을 북한에 지원한 것으로 돼 있다. 딩쉐쑹이 식량특사로 일을 할 때 김일성 위원장은 딩쉐쑹을 극진히 대접하는데 딩쉐쑹은 출국할 때나 귀국할 때 김 위원장의 집에서 묵게 된다. 김일성 위원장은 딩쉐쑹이 임무를 완수하자 큰 만족감을 표시하면서 일본군에게서 거둔 흰색 비단낙하산을 기념선물로 선사한다. 이 낙하산은 비단실로 정교하고 튼튼하게 만들어졌는데 딩쉐쑹은 이 낙하산으로 정율성에게 한벌의 와이셔츠를 만들고 자신과 딸용으로 치마를 만들어 기념으로 간직한다.   정율성은 부인이 임무를 훌륭히 완수하자 김일성 위원장을 접견한 뒤 옌안시절 지도자였던 김두봉(金枓奉)과 대동강변에서 샴페인으로 경축파티를 열었다. 당시 동북지역의 전쟁 상황은 소련과 국민당이 을 맺어 일본에게서 뺏은 철도와 성시(城市)를 국민당에게 넘겨주기로 한 상황이었고 이에 따라 국민당은 동북지역으로 대병력을 집결시키고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쓰핑(四平)전쟁뒤 국민당에 창춘(長春), 지린(吉林) 등을 내주고 쑹화장(松花江) 북쪽까지 전세가 밀리고 있었으며 북한을 은폐된 후방으로 삼아 남만작전(南滿作戰)을 펼 때 지원을 받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동북국은 1946년 6월 북만분국(北滿分局) 비서장인 주리즈(朱理治)를 동북국 주평양 전권대사로 부임시켰으며 소련과 미국의 이목을 피해서 대동강 서안 채관리(釵貫里) 104번지에 “평양이민회사’(平壤利民公司)란 이름으로 간판을 걸었다.   주리즈는 옌안의 오랜 혁명동지로 정율성의 곡을 아주 좋아할 정도로 친한 관계였다. 주리즈가 책임자로 있을 때 딩쉐쑹은 평양이민회사에 소속돼 2년동안 물자와 부상병 운반 등 업무에서 많은 일을 했다. 당시 딩쉐쑹과 동북국 평양사무소가 돌본 부상병과 가족 등을 합한 수가 1만8천여명에 이를 정도였다.   당시 북한의 도로를 이용해서 북만주의 곡물, 면화, 석탄 등 물자를 다롄(大連)으로 옮겨갔으며 동북지역의 부대가 긴급히 요구해 보낸 식염(食鹽), 포목과 약품, 의료기계, 공업연료 등은 1947년 21만톤, 1948년에 30만톤에 달했다.   북한은 항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병참기지 역할을 했으며 일본군이 남긴 전략물자중 2000여 차량분을 중국에 무상 혹은 교환방식을 통해 지원했다.   북한은 당시 남북만(南北滿)과 해상을 통해 베이징으로 가는 인력들의 중간 통과지였으며 통과인원은 1946년 3천명, 1947년과 1948년은 각각 1만명에 가까웠다. 딩쉐쑹의 탁월한 업무성과에 따라 조선노동당중앙은 1946년 가을 딩쉐쑹을 조선노동당중앙교무(僑務, 화교업무)위원회 비서장으로 임명한다.   당시 한반도에는 5~6만명의 중국 화교가 있었고 북쪽에만 2만여명이 있었다. 딩쉐쑹은 1949년초 화교업무가 중국상업대표단으로 넘어갈 때까지 이 일을 맡는다. 딩쉐쑹은 1949년 신화사(新華社)주평양분사 사장에 임명된다. 연안에서 중국 공산당 간부와 함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한 후 옌안(延安) 팔로군본부는 무정(武亭) 사령관의 인솔하에 조선의용군 전체 인원에 대해 조선으로 들어갈 것을 명령한다. 이에 따라 정율성 음악가와 부인 딩쉐쑹과 2살난 딸 샤오티(小提) 등 가족들도 같이 조선으로 향한다.   부인 딩쉐쑹은 당시 중국 공산당내에서 여전사로 이름을 떨쳐 발전가능성이 높았지만 남편 정율성의 뜻에 따라 조선행을 흔쾌히 승락한다.   일본이 항복하자 중국공산당의 본거지였던 옌안(延安)은 기쁨에 겨워 사흘동안 대축제 분위기였다. 폭죽과 함께 나팔소리와 노랫소리가 그치지 않고 남은 음식을 서로 나누는 축제가 계속됐다. 정율성을 포함해 수백명의 조선인 혁명가들도 “조선독립만세!” “조선민족해방만세!” “위대한 항일전쟁만세!”라는 구호를 연이어 외치면서 서로 얼싸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중국은 8년동안의 항일전쟁이 마감되었고 조선은 36년간의 일제치하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당시 조선의용군은 약 400명이었는데 떠나는 날 모두 정율성이 작곡한 ‘연안송’(延安頌)을 부르고 옌안에 우뚝 솟은 바오타산(寶塔山)을 바라보면서 서운해했다. 남은 사람들은 떠나는 사람의 주머니에 대추와 사과를 넣어주며 이별을 고했다. 정율성은 당시 귀국소식을 듣자마자 서둘러 ‘조국을 향하여 전진’(向祖國前進)이란 노래를 작곡했는데 의용군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옌안을 떠났다.   “건장하고 용감한 조선의 용사들이여, 오늘 화북지역을 넘어서 내일은 만주를 지나서 길위의 장애물을 뚫고, 조국을 향해 전진한다. 우리는 용감하게 투쟁해갈 것이다.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인민의 자유를 위하여.”   조선으로 돌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대열은 며칠 걸려 황허(黃河)에 도착해서 거친 물살의 위험속에 강을 건넌뒤 산시(山西)지역의 눈바람이 휘몰아치는 추운 날씨속에 높은 산을 넘었다. 일행중 나이 어린 아이가 추위에 얼어 숨지기도 했다.   정율성과 딩쉐쑹은 모든 옷을 딸 샤오티에게 입히고 당나귀의 등에 얹은 나무상자에 샤오티를 담아서 어렵게 전진을 했다. 갑자기 앞에 깎아지른 절벽이 나타났고 폭 50㎝ 정도의 꼬불꼬불한 길 밖에 없었다. 이 길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였는데 나무상자를 얹은 당나귀가 지나가기는 더욱 힘든 길이었다.   한번 실족을 하게 되면 샤오티는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되어 있었다. 정율성은 신체 건장한 젊은이들이 앞에서 당나귀의 고삐를 잡도록하고 뒤쪽에는 전우(戰友)이자 시인인 곽소천(郭小川)에게 나무 상자와 당나귀의 꼬리를 잡게 해 간신히 이 길을 벗어났다.   일행은 장자커우(張家口), 화이더(懷德), 청더(承德), 진저우(錦州) 등을 거쳐 당시 동북공업중심지인 선양(審陽)에 도착했다. 3개월여 걸린 고난의 행군끝에 1945년 12월 안둥(安東, 현재의 단둥으로 신의주와 마주보고 있음)을 거쳐 평양에 도착했다. 이 기간동안에도 정율성은 ‘3.1행진곡’(3.1독립운동을 기리는 노래), ‘조선해방진행곡’ 등 2곡을 지었다   옌안에서 북한으로 복귀한 공산당원들은 초기에는 김일성 주석의 신임을 얻어 중요한 직무에 편성이 되었다. 정율성과 딩쉐쑹의 당적도 조선노동당으로 옮겨졌다. 정율성은 조선노동당 황해도위 선전부장에 임명되었으나 딩쉐쑹은 조선말을 몰라서 아무런 일이 주어지지 않았으며 남편을 도와 문서를 정리하는 일을 했다.   정율성이 해주(海州)에서 토지개혁후 선거업무를 할 때 딩쉐쑹은 옌안에서의 경험을 살려 연설문을 작성해 내용이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딩쉐쑹은 당시 김밥, 된장찌개, 김치 등 한국음식에 익숙해지며 한명의 일본인 보모를 둘 정도로 모처럼 단란한 시간을 보냈다. 휴일에는 정율성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족을 데리고 해변으로 가서 놀기도 했으며 사냥감을 모닥불에 구워먹기도 했다.   샤오티는 당시 3살이었는데 보모에게서 일본어, 러시아에서 항일운동한 이웃에게서 러시아어와 딩쉐쑹의 중국어와 정율성의 조선어 등 간단한 4개 국어를 한 두마디씩 하는 모습이 귀여워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정율성은 황해도위 선전부장뒤 1946년 평양의 조선보안대(조선인민군의 전신) 클럽 부장(중국군의 문화 부장에 해당)으로 명령이 내려져 바쁘게 활동을 하게 된다. 정율성은 당시 본인이 원하던 일을 맡았기 때문에 인민군협주단의 업무에 적극적으로 종사한다.   그래서 단원들을 선택하고 악곡을 창작하고 지휘업무를 하게되며 평양이민회사를 통해 다롄에 가서 교향악기를 구입했다. 협주단을 만든 뒤에는 전국각지의 순회연주를 해서 김일성 주석의 깊은 관심을 받았다 김일성 주석은 100여명의 전문협주단과 같이 기념촬영을 하기도 할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 정율성은 음악창작의 두번째 수확기에 접어들었다. 정율성은 1947년과 1948년에는 집에 별로 없을 정도로 바빴는데 1950년까지 30여곡을 만들었다.   당시의 음악은 북조선의 군민(軍民)을 위한 곡으로 ‘조선인민군행진곡’ ‘조선해방행진곡’ ‘두만강’ 대합창과 ‘동해어부’ 대합창 등 10여편의 작품을 지었다. 또 옌안시절 연출하지 못한 ‘항일기병대’ 대합창을 다시 작곡하고 평양과 각지에서 200여 차례 공연과 방송을 했다. ‘조선인민군행진곡’은 이후 북한의 군가가 된다. 중국음악평론가와 작곡가들이 “두 국가의 군가를 작곡한 예는 세계음악사상 유례가 없다”고 평가하게 된 이유다.   이 당시의 곡들은 옌안 당시의 창작 기풍을 답습했고 한민족 음악의 새로운 품격을 표현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로 인해 정율성은 조선인민회의, 인민위원회, 문예학술총동맹 등으로부터 4차례 상장과 상금을받게 된다. 1948년에는 조선인민공화국의 ‘모범노동자’의  칭호를 얻는다.   정율성은 그뒤 평양국립음악대학 작곡부장에 임명되었다. 정율성은 총성과 포성중에 미군기가 공습하는 위험한 시각에도 창작활동을 계속했고 음악에만 매달렸다. 그는 당시 ‘공화국 깃발이 바람에 흩날리네’(共和國旗幟迎風飄揚), ‘조선인민유격대전가’(朝鮮人民遊擊隊戰歌), ‘우리는 탱크부대’(我們是坦克部隊), ‘전사의 맹세’(戰士的誓言) 등 다수의 가곡을 남겼다.   중국이 1949년 10월 1일 신중국 탄생을 선포한 지 1주일뒤 중조 양국은 외교관계를 선포했다. 이에 따라 정율성은 ‘조중우의’(朝中友誼)라는 곡을 만든데 이어 ‘신중국을 찬양하는 노래’(歌頌新中國)를 작곡했다 맨오른쪽이 연안파의 사령관 무정(武亭)이고 맨 왼쪽이 정율성. 연안파는 해방뒤 북한으로 들어간뒤 정치적인 숙청을 당하게 된다 당시 연안파인 무정(武亭, 1905~1952년) 장군도 힘을 잃은 상황에서 연안파 출신들에 대한 정치적인 탄압이 시작됐다. 부인 딩쉐쑹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약 내가 신화사분사 사장을 계속하고 중국 대사관의 외교관으로 평양에 계속 남았다면 정율성에게 더욱 곤란했을 것으로 본다. 정율성은 북한의 주류사회에 융합되기가 매우 어려웠다. 비록 내가 조선사람이 될 것을 결심하고 조선 국적을 가지고 노동당원으로서 모든 일을 새로 시작했더라도 그 뒤에 전개된 상황을 볼 때 반드시 좋은 결과를 맺었다고 볼 수가 없다. 그리고 남편과 각자가 갈라서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우리 부부사이는 관계가 너무 깊었다.”   정율성이 마지막으로 택한 길은 중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당시까지 정율성은 중국 생활을 10여년 동안 했고 중국어로 대화가 가능했으며 쓰는 것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는 중국에서 공산당에 참가했고 많은 친구들이 있으며 중국의 음악계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즉 해방전쟁 시기에 ‘연안송’,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을 썼으며 중국으로 가더라도 조선에 있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딩쉐쑹은 당시 자신들의 생각이 매우 천진했다고 회고한다.   정율성은 당시 “나는 한명의 공산당원이며 국제주의자이다. 조선이든 중국이든 모두 같은 사회주의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북한내 현실은 정치적인 집권을 놓고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딩쉐쑹은 주평양 중국대사관이 설치된 뒤 대사관을 통해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에게 부부의 중국귀국과 정율성 음악가의 중국국적 취득을 요구하게 된다. 저우언라이는 즉시 붓으로 쓴 친필 서신을 김일성 주석에게 보내며 김일성의 허락하에 딩쉐쑹은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김 주석은 “중국에서 그렇게 많은 간부들을 배양해 줬는데 정율성 한명을 데려간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라며 호방하게 승낙했다   1945년 8월 항일전쟁승리후 조선의용군 전체인원이 조선으로 돌아가기 전에 기념촬영한 모습. 맨앞줄 가운데에 정율성과 딸 샤오티의  모습이 보인다 1950년 12월 중국인민지원군창작팀으로 다시 북한에 도착한 정율성과 작사자들 모습   정율성은 그러나 2개월뒤인 1950년 12월 19일 중국인민지원군에 소속돼 조선땅을 다시 밟게 된다.   정율성은 중국인민지원군창작조의 성원으로 류바이위(劉白羽) 등 작가 4명과 함께 조선으로 들어가 1951년 4월 중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당시 이들은 중국에서 온 손님으로 조선노동당 중앙의 열렬한 접대를 받았다. 비록 바깥은 연일 포성이 울리고 평양은 이미 포화로 폐허가 되었지만 지하실은 안전했고 창에 커튼이 처져있었으며 작은 원탁테이블에는 꽃다발이 놓여있었다. 정율성 일행은 이곳에서 며칠 머물렀는데 점심과 저녁때마다 조선노동당 중앙영도들이 오찬과 만찬을 제공했고 김일성 주석과 정율성은 조선어로 이야기를 주고 받기도 했다.   1951년 1월 초순에 중국지원군은 제3차 작전에 들어갔는데 9일동안의 연속작전에 의해 37도선 이남으로 내려갔고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을 건너 인천항까지 들어갔다. 이때 정율성은 지원군을 따라서 서울까지 내려와 기와조각과 벽돌조각을 헤집고 조선궁정음악의 악보중에서 모두 2부 18집의 고전악보를 찾아냈다. 부인 딩쉐쑹은 1996년 방한해서 이 악보를 기증해 한국음악사상 진귀한 문헌으로 보존되고 있다.   정율성은 한강 남단의 백운산에서 류바이위와 함께 ‘백운산을 노래한다’(唱歌白雲山), 웨이웨이(魏巍)와는 당시 ‘사랑하는 군대, 사랑하는 사람’(親愛的軍隊親愛的人)을 지었다. 또 어우양산쭌(歐陽山尊)과 ‘중국인민지원군행진곡’과 ‘지원군 십대 찬가(志願軍十贊)를 썼고, 링쯔펑(凌子風)과는 빠른 선율의 ‘한강소창’(漢江小唱) 등을 작곡했다. 이 곡들은 모두 정율성이 중국 국적의 인민지원군 신분으로 창작한 곡들이다. 이 곡들은 현재 단둥(丹東)에 있는 항미원조기념관(抗美援朝記念館)에 전시되어 있다.                               병환으로 사망하기 직전     정율성의 딸 정샤오티는 아버지에게서 피아노를 직접 배웠으며 현재 베이징 실내합창단 단장을 맡고 있다     그가 생전에 살았던 생가를 남창시장이 방문하는 장면     광주에서 매년 열리는 정률성음악회 ===============================       중국의 간거했던 항일전쟁 승리의 의미를 되새기는 동시에 첨단 무기를 통해 중국의 군사굴기를 과시하면서 주요 2개국(G-2)으로 올라선 중국의 “글로벌 파워”를 대내외적으로 천명하는 자리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한국 박근혜 대통령,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 최룡해 북한 노동당 비서 등 정상급 외빈 50여명과 각국 외교사절, 중국의 전현직 지도부 등이 톈안먼 성루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조선인 음악가가 작곡한 음악이 톈안먼 광장의 상공에 울려퍼졌다. 작곡자는 바로 중국의 군가 “태양따라 앞으로”의 작곡가 정율성이다. 정율성은 1914년 7월 7일, 한국 전라남도 광주남구 양림정에서 태여났다. 1933년,  3.1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가 일제의 탄압에 중국으로 망명한 형들을 따라 부산, 일본, 상하이를 거쳐 중국 난징에 이르렀다. 난징에서 “의열단”이 꾸린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학과를 배우고 이어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였다. 반일활동을 하는 한편 시간을 짜내 러시아인 크리노와교수에게서 성악을 배웠다. 크리노와교수는 그의 음악천부를 높이 평가하여 그를 “동방의 카루소”라고 격찬하였다. 1937년 정율성은 상하이 부녀구국회 지도자이며 조선혁명가 김성숙의 안해인 두군혜의 도움으로 “중국혁명의 성지” 옌안으로 떠나게 된다. 열아홉 살의 정율성은 바이올린과 만돌린 그리고 “세계명곡집”을 지니고 간난신고를 겪으며 옌안에 도착하였다. 옌안에서 루쉰예술학원을 나왔고 “팔로군 행진곡”, “연수요”, “항전돌격운동가”등 50여 수의 악곡을 창작하였다. 팔로군(八路軍)은 1937년 제2차 국공합작 후에 설립 된 공산당의 주력부대로서 신사군과 함께 화베이 지방에서 항일전의 최전선을 담당했다. 당시 팔로군과 손잡고 조선의용대도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팔로군의 통일전선 파트너였던 조선의용대는 대일 전선에서 스파이와 배후교란 등 매우 위험한 임무를 기꺼이 맡았다. 정율성은 연안에서 탁월한 작사자 두 명을 만나는데 “팔로군 행진곡”의 작사자인 궁무(公木)와 “연안송(延安頌)”의 작사자인 여전사 모예(莫耶)이다.     ↑옌안시절의 정율성 1939년 정율성은 시인 궁무에게 자신이 구상하고 있던“팔로군 행진곡”의 노랫말을 써줄 것을 부탁한다. 전선에서 풍부한 전투경험을 쌓았던 공무는 자신의 생생한 경험을 녹인 노랫말을 정율성에게 건네주었고 정율성은 같은해 8월에 곡을 완성한다.     “전진 전진 전진!/ 태양을 향한 우리의 대오/ 조국의 대지 위에 섰다/ 민족의 희망을 안은/ 우리의 힘 막을자 누구냐/ 우리는 싸움의 전위/ 우리는 민중의 무장/ 두려움없이 굴함 없이 용감하게 싸워/ 왜놈들을 국경밖으로 몰아내자/아,나팔소리 울린다/ 아 항전의 노래 우렁차다......!”   1939년 겨울, “팔로군 행진곡”은 루쉰예술학원 음악부에서 등사판 소책자로 책으로 엮어져 연안 전체와 전군, 전후방(前後方) 할 것 없이 배포되었다. 이듬해 정율성의 지휘 아래 “팔로군 행진곡”의 첫 공연이 옌안에서 열렸다. “팔로군 행진곡”은 건조한 황토고원에서 불붙듯 삽시간에 퍼지면서 모든 항일전사들의 가슴에 깊이 아로 새겨졌다. 격정과 기백이 차넘치는 “팔로군 행진곡”은 군민의 항일의지를 북돋우어주면서 재빨리 널리 유전되었다. 그후 이 노래는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으로, 1988년에 이르러서는 “중국인민해방군군가”로 채택되였다. 1990년 9월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개막식 역시 정율성 작곡의 이 노래의 연주로 시작됐다.    연안 시절 정율성은 그 훗날 중국 최초의 여성대사로 주 덴마크, 주 네덜란드대사가 된 정설송과 결혼하여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열아홉 살 나는 중국 쓰촨의 처녀 정설송은 뛰어난 사업 능력과 미모로 연안에서 소문높은 인기 인물이었다. 그녀는 “연안송”의 작곡자인 정율성을 몹시 숭배하였다. 하지만 정율성의 외국인 신분에 걸려 둘의 사랑은 곤경에 처하였다. 이때 마침 팔로군 포병퇀 퇀장 조선인 무정장군이 마침 연안에 도착하여 정율성에 대해 담보하고 나섰다.   이국적 청춘남녀는 시련을 거쳐 드디어 1941년 말 혁명성지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이듬해 딸 정소제(郑小提)가 태어났다.   결혼 후 정율성은 무정장군을 따라 조선의용군 소재지인 태항산에서 조선혁명군사학교 교육장을 담임하였다. 그는 학생들을 이끌고 탄우가 비발치는 전쟁터에서 선전을 벌리기도 하고 대중가요창작활동도 펼쳐 나갔다. 그가 창작한 “조선의용군행진곡”과 ”혁명가”등은 중국의 하북과 동북의 항일근거지의 조선의용군들 속에서 널리 불려졌다.   1945년 8.15해방을 맞은 뒤 정율성은 조선의용군과 함께 조선으로 나갔다. 황해도 선전부장을 지냈으며, 해주음악전문학교를 세웠고 보안간부훈련대대부협주단(조선인민군협주단의 전신)을 창건하여 초대 단장을 역임했으며 조선국립음악대학 작곡학부장에도 부임했다. 그 몇 년사이 ”두만강”, “동해어부” 등 30수의 가곡 그리고 “조선인민군군가”를 작곡했다. 김일성 주석은 1948년 그 공로를 인정해 정율성 선생에게 표창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조선인민군군가”는 지난 2006년과 2007년 방북한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을 맞이해 인민군 군악대가 연주하기도 했다.   중국의 저명한 음악평론가 겸 작곡가 탕허(唐河)는 “전 세계에서 한 사람이 두 나라의 군가를 동시에 작곡한 것은 극히 드문 일일 것”이라고 극찬했다. 이로서 정율성은 두 나라 군가 작곡자로 세계에 유례없는 기록을 남겼다.   1952년 정율성은 중국에 돌아와 베이징인민예술극원, 중앙악단에서 전업작곡가로 있었다. 이 시기 그는 중국의 윈남, 따리등 오지를 찾아다니며 민요수집에 전력하였고 아이들을 위하여 ”평화의 비둘기”등 명동요를 창작하였으며 또 중국국가주석 모택동의 시사 34수에 곡을 붙이기도 했다. 10년의 “문화대혁명”이 결속되자 창작의 봄을 맞이했던 정율성은1976년 12월 7일 베이징 교외의 강에서 물고기를 낚다가 뇌익혈로 쓰러졌다. 향년 62세였다. 사후 정율성은 중국의 공신들만을 대우하는 “팔보산 혁명열사릉”에 묻혔다. 비문엔 이런 구절이 새겨져 있다. “인민은 영원하며, 율성동지의 노래도 영원하다. 중국인민은 그의 노래를 부르면서 일제 침략자들을 몰아냈고, 낡은 중국을 뒤엎었으며, 새 중국을 건립했다.” 1978년 베이징 음악출판사에서 “정율성가곡선”이 출판되었고 2009년에는 “신중국 창건영웅 100인”중의 한 사람으로 당선되었다. 40여년의 음악생애에서 각종 쟝르의 음악작품 360여수를 창작한 정율성은 중국현대음악사의 한 획을 그으면서 영원한 “인민음악가”로 추앙받고 있다. ​ ↑정율성의 음악에 맞추어 진행 된 중국 전승절 열병식 지난해 7월 방한한 시진핑 주석이 서울대 강연에서 중·한 우의의 상징으로 정율성을 언급하다시피 중국에서의 정율성의 위상은 높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정율성이라는 이름은 오랫동안 금기시 되어왔다. 그가 중국과 북한, 그리고 한국전쟁과 깊은 관계를 맺은 탓이다. 지난 세월 이념과 냉전(冷戰)의 장벽 속에 갇혀서 정율성 선생의 실체(實體)는 한국인들에게는 오랫동안 베일 속에 가려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다 최근 정율성 탄생 100주년을 계기로 중한 양국에서는 기념음악회, 일대기 영화화 등 관련 행사들이 잇달아 열리면서 그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활발히 일고 있다.   정율성의 일대기는 일찍 중국의 조선족 영화인들에 의해 영화로 제작되여 스크린에 오른바 있다. 2002년 연변 조선족 자치주 성립 50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영화에는 중국영화계의 쟁쟁한 일군들이 대거 투입되었다. 감독으로는 중국드라마부분 최고의 상인 “금독수리”상과 “비천”상을 석권한 중국인 감독과 조선족 감독인 박준희가 메가폰을 잡았고 중국영화계 최고의 상인 “금계상”과 “백화상” 수상자들이 정율성과 부인 부인 정설송역을 맡았다. 영화는 옌안에서 뿐만 아니라 베이징, 톈진, 창춘 그리고 연변지역을 폭넓게 전전하면서 외경을 찍었다.           ↑정율성의 음악에 맞추어 진행 된 중국 전승절 열병식     영화는 만들어진 후 평양국제영화제에서 특별상을 받았고 한국광주영화제에도 초청, 상영되었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정율성에 대해 이념의 색안경을 건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심한 이데올로기의 질곡이 여전히 한 천재음악가의 명성과 자유를 옥죄고 있다. 때문에 정율성과 그의 가족들에 대한 항일독립투쟁 포상은 물론 공적조차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제의 살벌하고 등등한 치하 당시 수많은 독립운동가, 애국투사들이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했는데 이는 독립운동의 한 방편이었음은 엄연한 사실이고 그들의 치열한 반일의식에 대해서도 세상이 다 아는 일임에도 말이다.   정율성선생이 한국 광주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반일에 투신했고 음악을 무기로 우리 민족의 혼을 전해 세계인을 감동 시킨 민족의 대음악가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두 나라의 군가를 작곡한 진귀한 기록을 세워 놓은 인물로서 선생은 일제치하 중국대륙을 무대로 항일독립운동에 투신 하면서 국가의 자존과 민족의 얼을 잊지않았고 몸과 혼을 불살랐다. 음악가로서나 혁명가로서나 그이는 온 민족의 추앙을 받을 만한 선각자임이 분명하다.   총 100분 가량 진행된 전승절 열병식 전 과정은 관영 중국중앙 CCTV를 통해 생중계되고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로 전송됐다.  따라서 정율성이 남긴 장쾌한 선율은 온 누리에 메아리쳤다. 이를 계기로 그이의 생애 그리고 음악이 하루 빨리 이념의 구름장을 넘어 만방에 알려지고 더 높이 울려 퍼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본다.  
251    재미가 있는 한국 방언세계 댓글:  조회:6964  추천:1  2015-08-27
[ 2015년 08월 27일 10시 23분 ]   한국에서 크게는 중부방언과 남부방언, 제주방언으로 나뉘고요, 각각의 방언이 억양은 다르지만 방언권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이 매우 비슷합니다. 중부방언에는 경기도 방언, 강원도 방언, 충청도 방언이 있습니다.  경기도 방언은 서울을 기준으로 위와 아래로 나뉩니다. 하지만 억양은 거의 비슷하고요, 쓰이는 말도 비슷합니다. 그렇지만 서울 위쪽은 많아(표준어와 같습니다) 라고 말하는데 반해 서울 아래는 많어라고 하죠. 표준어는 서울말이라기보다는 서울 위쪽 말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할 겁니다. 눈에 띄는 변화는 ~이니까를 ~이니깐으로 발음하는 거죠. 강원도 방언은 크게 영서 방언과 영동 방언이 있습니다. 북한말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요, 영서 방언은 경기와 충청 방언의 영향이 매우 강합니다. 그래서 모음조화도 비교적 잘 지켜지고요, 댕기다(다니다) 안직(아직) 이런 어휘 이외에는 억양이 표준어에 비해 훨씬 빠르고 청명하다는 것 말고는 없네요. 영동 방언은 강릉을 중심으로 강릉 북부와 강릉 남부가 있습니다. 강릉 북부는 함경도의 영향을 받아 ~해서를 ~하야로 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표준어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죠. ex>질가 댕기는데 갈구쳐서마엥이 미안하우야 길가 다니는데 공사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강릉 남부는 경상도 방언의 영향을 받아 ~했나 로 끝나는 경우가 강합니다. 그리고 충청도... 충청도 방언은 크게 경기 방언과 비슷한 충북 지방과 전라 방언과 비슷한 충남 지방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물론 천안 같은 곳은 경기방언, 옥천같은 곳은 전라 방언에 더 가깝겠지만요. 아,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생긴 영동군 황간면과 단양군(어디인지는 잘 모릅니다만) 은 경상도 방언의 구획입니다. 충청 이남 지방은 모두 떼다, 펴다, 베다를 띠다, 피다, 비다로 발음합니다.  ex>(전라, 충청, 경기 일부) 띠기(달고나 아시죠, 떼기로 하다가 내려와서 띠기가 됐습니다) 그리고 비게... 전라도 방언입니다만 베게입니다. 또한 인나(일어나) 둔너(드러누워) 데꼬(데리고) 같은 축약 현상도 나타납니다. 충북 지방은 크게 ~겨, ~랴로 나눌 수 잇습니다. 요즘도 표준어를 쓰는 곳은 경기도 말고는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청주 다모임에 가봤는데,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ex(청주)> 생일 추카햐(다모임에서 퍼옴) 생일 축하해 입니다. 끝의 ㅐ를 ㅑ로 바꾸는 경향이 있습니다. ex>(충주) 너 밥 먹구 뭐할꺼? 충주는 경기도 방언(특히 남부)의 영향으로 충청도 방언의 보편적인 어미린 ~껴를 쓰지 않고 ~꺼를 사용합니다. 아 그리고 충청도와 전라도는 ~여(~야)를 공유합니다. 뭐여?(뭐야) 그리고 충남 지방... 충남 지방은 조금 더 사투리와 억양이 심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보통 충청도가 말이 느리다고 하는데 충북은 그렇지 않고요, 충남이 느립니다-_-;;; ~것다(~겠다) 기여(맞아) 봉다리(봉지) 근디(그런데) 등등이 있습니다. 또한 동물의 방언 뒤에 ~락지를 붙이는 것도 하나의 현상입니다.(개고락지) 아참, ~이니까를 ~이니께로 발음합니다. 그리고 충북지방과 다른 것은 ㅐ가 ㅑ로 변하지 않고 ㅕ로 변한다는 점입니다. 전라도 방언(특히 전북) 과 비슷하죠. 그려(그래) 같은 거요. 아, 하다는 충청도와 전라북도 지방에서 "허다" 라고 소리납니다. ex(옥천)> 김치부침개 먹으루 갈려 그려, 잘가라 이정도로 중부는 끝난 것 같고요, 남부로 가겠습니다. 남부는 중부와 달리 매우 복잡한 방언권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바로 옆동네만 가도 말이 다르죠. 먼저 전라도를 보겠습니다. 충청도가 청주방언권, 충주방언권, 충남방언권, 서해안방언권으로 크게 나뉘는 것과 달리 전라도는 군산,익산방언, 전주방언, 진안,무주방언, 정읍방언, 남원방언으로 나뉩니다(북도만 먼저 할게요) 군산, 익산은 충청도 방언과 매우 비슷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아, 그리고 전라북도에서 나타나는 변화는 너그 입니다. 너희들, 너네죠. 이와 같이 저그(제네) 이렇게 쓸 수 있습니다. ~버리다는 ~블다 이렇게 하고요,  또한 발음상의 변화로, ㅢ를 ㅡ로 발음합니다. 으식주(의식주) 으사(의사) 그리고 흙이[흙이]=>흙이[흑이] 시작했다[시자캐따]=>시작했다[시자갰다] 처럼 연음 현상이 없습니다. 또한 받침의 ㅊ,ㅈ을 ㅅ으로 발음합니다(연음시)(빛이[비시]) 직접 전라도 가서 들어 보시면 됩니다. 애들이든 어른이든 한결같습니다. 전주방언 볼게요. 전주방언은 ~것지(충남)을 ~것제 까지 나갑니다.  ex>(전주) 내가 안한다글믄 안해야제 니가 뭔상관이여. 내가 하지 않는다고 하면 말아야지 너가 무슨 상관이니. 그리고 정읍으로 내려오면 ~면서가 ~ㅁ서로 변화합니다.  ex>(정읍) 니 어제 피자 먹으러 갔담서 왜 나는 안델꼬갔냐 너 어제 피자 먹으러 갔다면서 왜 나는 데리고 가지 않았니? 그리고 또 하나. 전라북도 방언은 충청도에서 ~이니께로 발음했던 ~이니까를  ~잉게로 발음합니다 ex>(전주) 내가 그랬응게 니는 상관 말어. 내가 그랬으니까 너는 상관 말아라. 북도도 사투리가 많지만 대략적인 것은 이정도고요. 다음으로 전라남도를 보겠습니다. 전라남도는 북도보다 더욱 화려한(?) 문체를 자랑합니다.  광주 방언, 영광 방언, 목포 방언, 순천및 여수 방언, 구례 방언정도로 나누고 섬은 더 독특합니다. 먼저 씻어를 씿어로 발음합니다. 해남쪽으로 내려가면 씨꺼로 발음하고요. ~잉게인 전북 방언이 여기서는 ~인께가 됩니다. ex>(광주) 나는 안그랬당께!!! ~그려나 ~혀, 이런 것은 옛날에는 많이 썼습니다만 요즘 세대(10대)에 와서 흔히 나타난 새로운 전남 방언으로 ~그랬시야, ~그래야, ~해야 등등 끝에 ~야를 붙입니다. 특히 광주 지방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나주 목포쪽으로 가면 배워를 배와라고 합니다. 고어의 현상이 두드러지죠. 가을은 원래 세모모양 반시옷이 을의 이응자리에 있었습니다만 전라도에서는 이게 이응이 아니라 시옷으로 변해 가슬이라고 합니다. 영광에서는 새우도 옛날같이 새비라고 합니다. 다만 이 현상은 요즘은 많이 사라져서 할머니분들께서만 쓰십니다. 그리고 북도나 충청도에서 허다라는 말을 ㅓ=>ㅡ나 ㅜ의 변화에 따라 흐다 라고 합니다.  아, ~뜨리다, ~트리다를 ~치다로 발음합니다. 떨어트리다=> 떨치다 흐트리다=> 흐치다 이게 대표적인 예죠. 아까는 아까침에 라고 하고요, 그외에 애들이 잘쓰는 사투리로 찌클다(뿌리다, 액체의 경우만 찌클다라 하고 가루는 뿌리다라고 합니다) 쨈매다(묶다) 끌르다(풀다) 등등이 있습니다. 단어도 다른게 매우 많습니다만 찾아보시고요(여기서는 너무 많아서...) ~담서가 ~함씨롱, ~함시로,정도로 더 변화합니다. 광주지방에서는 ~함씨롱, 그 밑은 ~함시로로 하더군요. 그리고 느그(너네) 가 남도에서는 니기가 됩니다. 니기 엄니 저그 계신다(너희 어머님 저기 계신다) 더 자세한 예를 드리기는 힘들 것 같네요. 또한 구례 쪽은 경상도와 가깝기 때문에 경상도 방언과 전라도 방언이 섞여 있습니다 ex>(구례) 내는 그리안혔다 니기덜이 한 거 아니가? 하나 둘 셋 넷은 한나 줄 싯 닛이라고 하고요(전라도) 요즘은 싯이나 닛은 쓰지 않고 한나는 여전히 많이 씁니다. 그리고 말끝에 ~ㄴ가 가 많이 붙습니다. ~한당가, ~인가 등등이 대표적입니다.     채택된 답변답변추천해요10추천자 목록 크게는 중부방언과 남부방언, 제주방언으로 나뉘고요, 각각의 방언이 억양은 다르지만 방언권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이 매우 비슷합니다. 중부방언에는 경기도 방언, 강원도 방언, 충청도 방언이 있습니다.  경기도 방언은 서울을 기준으로 위와 아래로 나뉩니다. 하지만 억양은 거의 비슷하고요, 쓰이는 말도 비슷합니다. 그렇지만 서울 위쪽은 많아(표준어와 같습니다) 라고 말하는데 반해 서울 아래는 많어라고 하죠. 표준어는 서울말이라기보다는 서울 위쪽 말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할 겁니다. 눈에 띄는 변화는 ~이니까를 ~이니깐으로 발음하는 거죠. 강원도 방언은 크게 영서 방언과 영동 방언이 있습니다. 북한말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요, 영서 방언은 경기와 충청 방언의 영향이 매우 강합니다. 그래서 모음조화도 비교적 잘 지켜지고요, 댕기다(다니다) 안직(아직) 이런 어휘 이외에는 억양이 표준어에 비해 훨씬 빠르고 청명하다는 것 말고는 없네요. 영동 방언은 강릉을 중심으로 강릉 북부와 강릉 남부가 있습니다. 강릉 북부는 함경도의 영향을 받아 ~해서를 ~하야로 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표준어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죠. ex>질가 댕기는데 갈구쳐서마엥이 미안하우야 길가 다니는데 공사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강릉 남부는 경상도 방언의 영향을 받아 ~했나 로 끝나는 경우가 강합니다. 그리고 충청도... 충청도 방언은 크게 경기 방언과 비슷한 충북 지방과 전라 방언과 비슷한 충남 지방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물론 천안 같은 곳은 경기방언, 옥천같은 곳은 전라 방언에 더 가깝겠지만요. 아,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생긴 영동군 황간면과 단양군(어디인지는 잘 모릅니다만) 은 경상도 방언의 구획입니다. 충청 이남 지방은 모두 떼다, 펴다, 베다를 띠다, 피다, 비다로 발음합니다.  ex>(전라, 충청, 경기 일부) 띠기(달고나 아시죠, 떼기로 하다가 내려와서 띠기가 됐습니다) 그리고 비게... 전라도 방언입니다만 베게입니다. 또한 인나(일어나) 둔너(드러누워) 데꼬(데리고) 같은 축약 현상도 나타납니다. 충북 지방은 크게 ~겨, ~랴로 나눌 수 잇습니다. 요즘도 표준어를 쓰는 곳은 경기도 말고는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청주 다모임에 가봤는데,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ex(청주)> 생일 추카햐(다모임에서 퍼옴) 생일 축하해 입니다. 끝의 ㅐ를 ㅑ로 바꾸는 경향이 있습니다. ex>(충주) 너 밥 먹구 뭐할꺼? 충주는 경기도 방언(특히 남부)의 영향으로 충청도 방언의 보편적인 어미린 ~껴를 쓰지 않고 ~꺼를 사용합니다. 아 그리고 충청도와 전라도는 ~여(~야)를 공유합니다. 뭐여?(뭐야) 그리고 충남 지방... 충남 지방은 조금 더 사투리와 억양이 심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보통 충청도가 말이 느리다고 하는데 충북은 그렇지 않고요, 충남이 느립니다-_-;;; ~것다(~겠다) 기여(맞아) 봉다리(봉지) 근디(그런데) 등등이 있습니다. 또한 동물의 방언 뒤에 ~락지를 붙이는 것도 하나의 현상입니다.(개고락지) 아참, ~이니까를 ~이니께로 발음합니다. 그리고 충북지방과 다른 것은 ㅐ가 ㅑ로 변하지 않고 ㅕ로 변한다는 점입니다. 전라도 방언(특히 전북) 과 비슷하죠. 그려(그래) 같은 거요. 아, 하다는 충청도와 전라북도 지방에서 "허다" 라고 소리납니다. ex(옥천)> 김치부침개 먹으루 갈려 그려, 잘가라 이정도로 중부는 끝난 것 같고요, 남부로 가겠습니다. 남부는 중부와 달리 매우 복잡한 방언권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바로 옆동네만 가도 말이 다르죠. 먼저 전라도를 보겠습니다. 충청도가 청주방언권, 충주방언권, 충남방언권, 서해안방언권으로 크게 나뉘는 것과 달리 전라도는 군산,익산방언, 전주방언, 진안,무주방언, 정읍방언, 남원방언으로 나뉩니다(북도만 먼저 할게요) 군산, 익산은 충청도 방언과 매우 비슷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아, 그리고 전라북도에서 나타나는 변화는 너그 입니다. 너희들, 너네죠. 이와 같이 저그(제네) 이렇게 쓸 수 있습니다. ~버리다는 ~블다 이렇게 하고요,  또한 발음상의 변화로, ㅢ를 ㅡ로 발음합니다. 으식주(의식주) 으사(의사) 그리고 흙이[흙이]=>흙이[흑이] 시작했다[시자캐따]=>시작했다[시자갰다] 처럼 연음 현상이 없습니다. 또한 받침의 ㅊ,ㅈ을 ㅅ으로 발음합니다(연음시)(빛이[비시]) 직접 전라도 가서 들어 보시면 됩니다. 애들이든 어른이든 한결같습니다. 전주방언 볼게요. 전주방언은 ~것지(충남)을 ~것제 까지 나갑니다.  ex>(전주) 내가 안한다글믄 안해야제 니가 뭔상관이여. 내가 하지 않는다고 하면 말아야지 너가 무슨 상관이니. 그리고 정읍으로 내려오면 ~면서가 ~ㅁ서로 변화합니다.  ex>(정읍) 니 어제 피자 먹으러 갔담서 왜 나는 안델꼬갔냐 너 어제 피자 먹으러 갔다면서 왜 나는 데리고 가지 않았니? 그리고 또 하나. 전라북도 방언은 충청도에서 ~이니께로 발음했던 ~이니까를  ~잉게로 발음합니다 ex>(전주) 내가 그랬응게 니는 상관 말어. 내가 그랬으니까 너는 상관 말아라. 북도도 사투리가 많지만 대략적인 것은 이정도고요. 다음으로 전라남도를 보겠습니다. 전라남도는 북도보다 더욱 화려한(?) 문체를 자랑합니다.  광주 방언, 영광 방언, 목포 방언, 순천및 여수 방언, 구례 방언정도로 나누고 섬은 더 독특합니다. 먼저 씻어를 씿어로 발음합니다. 해남쪽으로 내려가면 씨꺼로 발음하고요. ~잉게인 전북 방언이 여기서는 ~인께가 됩니다. ex>(광주) 나는 안그랬당께!!! ~그려나 ~혀, 이런 것은 옛날에는 많이 썼습니다만 요즘 세대(10대)에 와서 흔히 나타난 새로운 전남 방언으로 ~그랬시야, ~그래야, ~해야 등등 끝에 ~야를 붙입니다. 특히 광주 지방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나주 목포쪽으로 가면 배워를 배와라고 합니다. 고어의 현상이 두드러지죠. 가을은 원래 세모모양 반시옷이 을의 이응자리에 있었습니다만 전라도에서는 이게 이응이 아니라 시옷으로 변해 가슬이라고 합니다. 영광에서는 새우도 옛날같이 새비라고 합니다. 다만 이 현상은 요즘은 많이 사라져서 할머니분들께서만 쓰십니다. 그리고 북도나 충청도에서 허다라는 말을 ㅓ=>ㅡ나 ㅜ의 변화에 따라 흐다 라고 합니다.  아, ~뜨리다, ~트리다를 ~치다로 발음합니다. 떨어트리다=> 떨치다 흐트리다=> 흐치다 이게 대표적인 예죠. 아까는 아까침에 라고 하고요, 그외에 애들이 잘쓰는 사투리로 찌클다(뿌리다, 액체의 경우만 찌클다라 하고 가루는 뿌리다라고 합니다) 쨈매다(묶다) 끌르다(풀다) 등등이 있습니다. 단어도 다른게 매우 많습니다만 찾아보시고요(여기서는 너무 많아서...) ~담서가 ~함씨롱, ~함시로,정도로 더 변화합니다. 광주지방에서는 ~함씨롱, 그 밑은 ~함시로로 하더군요. 그리고 느그(너네) 가 남도에서는 니기가 됩니다. 니기 엄니 저그 계신다(너희 어머님 저기 계신다) 더 자세한 예를 드리기는 힘들 것 같네요. 또한 구례 쪽은 경상도와 가깝기 때문에 경상도 방언과 전라도 방언이 섞여 있습니다 ex>(구례) 내는 그리안혔다 니기덜이 한 거 아니가? 하나 둘 셋 넷은 한나 줄 싯 닛이라고 하고요(전라도) 요즘은 싯이나 닛은 쓰지 않고 한나는 여전히 많이 씁니다. 그리고 말끝에 ~ㄴ가 가 많이 붙습니다. ~한당가, ~인가 등등이 대표적입니다. 경상도로 가볼게요. 경상도도 충청 방언의 영향이 있고, 북도와 남도로 나뉘지만 전라도보다 넓기 때문에 더 다양합니다.  강릉 방언(영동) 지방과 함께 중세 지방의 특징인 억양(성조라고 하죠.) 가 남아 있고요, 그마저도 북도와 남도, 작게는 안동, 울진, 대구, 포항, 울산, 부산, 마산, 진주가 다 다릅니다. 여기서는 설명하기 힘드네요... 북도부터 살필게요. 북도는 안동 방언,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영주 방언, 안동 방언과 비슷하지만 충청도 방언(특히 제천)과 비슷한 상주,예천 방언, 구미,대구 방언(특수하죠. 대구만 다른 사투리가 많아요.) 포항 방언(남도와 비슷하죠.) 로 나뉩니다. ex>(안동) 내 그런다 안캅니껴.(제가 그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니까를 ~니껴로 발음합니다. 안녕하세요를 가세 평안하시껴라고 하는 것도 그 일종입니다. 영주 방언은 안동과 비슷하니까 생략할게요. 다만 높임법이 더 구체적이라고 들었어요. 상주 방언은 ~교(~겨형 어미를 가진 충청도와 비슷하죠) 를 씁니다.  ex>(상주) 느 아까 뭔 행동을 그리 한교? 대충 알아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할머니들의 사투리는 아니거든요. 대구는 다른 경상 지방의 아(애) 라는 말을 얼라라고 합니다.  ex>(대구) 내가 그리 하믄 늬는 뭐라칼낀데? ~건데는 ~긴데라고 합니다.   이정도면...?    답변추천해요5추천자 목록 .제주도 사투리의 특징  제주도 방언의 공시적 음운 구획선 설정은 현 재로 보아 어려운 일로 보겠고 어휘나 어법의 분포 양상에 있어서도 제주도 방언의 방언 구획을 몇 개로 잡느냐 하는 문제도 현단계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공통어계 어휘의 음운이 제주시:한림, 한림:서귀포, 서귀포:제주시, 한림:성산포 사이에서 어떤 특수한 언어지리학적 이질 음운을 찾아 보기 힘들고 가령 /A/ 계에 속하는 공통어계 어휘의 음운이 제주시 - 한림 - 서귀포 - 성산포 - 제주시에 공존하는 실정이고 제주도 중심부로 들어가도 색다른 음운 변동이 일어남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러한 실정을 참작하여 필자는 본고에서 앞으로 설정하여야 할 음운 구획선의 한계를 잡는 하나의 예비적 시도로서 우선 공통어계 어휘의 음운이 제주도 방언 내에서 어떠한 공식적 음운 양상을 보여 주는가를 세별하여 보려 한 것으로 이러한 세별은 필자가 현지에서 입수한 약 1,350 어휘에 의거하였다.  방언 어휘의 음운 표기는 별계 표기법에 의거하며, 모음 자음의 각각에 따른 방법으로 방언 어휘의 음운 양상을 설정하였다.  제주도 방언의 명령법 어미 체계는 표준어와 매우 다르다.  표준어에 쓰이는 대표적 어미 형태인 `-아라~어라`가 사용되지만 의의와 기능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제주도 방언의 명령법 어미는 하대,평대, 존대의 세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구체적인 형태는 `-라`와 `-아~-어`, `-밑서`,`-십서`이다.  `-라`는 하대의 어말어미이다. 어간에 직접 연결되기도 하고 `-어시라/아시라`,`엄시라/암시라`처럼 선어말 어미와 결합된 형으로도 쓰인다.  `-어시-~/-아시-`와 `-엄시-~/-암시-`는 동작상을 표현한다.  이들은 상호 대립되는 의미 자질을 갖는다.  앞 것은 `완료 종속상`이고 뒷 것은 `미완료 존속상`이다.  동작상이 체계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제주도 방언에서만 보이는 어미활용의 특징이다.  이건지ㅠ... ========================== 나도궁금답변하 기 글꼴조정 공유하기 친구에게 배달     답변 골라보기선택됨선택옵션 답변 정렬순서선택됨선택옵션 답변 목 채택된 답변답변추천해요1추천자  총 획득메달 전문 분   채택된 답변답변추    
250    세계에서 가장 멋진 서점 17곳. 댓글:  조회:5659  추천:0  2015-08-26
언젠가는 소설 속에서만 등장하는 서점을 생각하는 세대가 나올지도 모른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아름다운 서점 다수가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부 문을 닫은 것은 아니다. 아마존 서점이 판치는 시대에 24시간 운영하면서 또는 디자인 혁신을 통해 경쟁력을 확보한 오프라인 서점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미국 CNN방송은 여행 시 역사 유적으로 또는 문화공간으로 꼭 방문해야 할 곳으로 남아 있는, 세계에서 가장 멋진 서점 17곳을 보도했다.   존 K 킹 중고 희귀책 서점 (미국 디트로이트)   ◆존 K 킹 중고 희귀책 서점 (미국 디트로이트) 1965년 문을 연 이 곳은 디트로이트에서는 곡 한 번 방문해봐야 하는 대형 서점이다. 4층짜리 공장 건물을 서점으로 바꾼 내부는 알파벳순으로 900여개 카테고리로 분류된 서적 100만여권이 가득하다. ‘가장 주목할 만한 책 몇 권을 꼽아달라’는 질문에 서점 주인은 10만 달러(1억원)에 달하는 모르몬교경전 초판 진본과 1482년 베니스에서 인쇄된 이탈리아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글 인쇄본 등을 꼽았다.   엘 아테네오(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엘 아테네오(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1929년 공연장으로 운영됐던 건물을 2000년대 초 서점으로 바꾸었다. 지어진 지 100년이 다 됐지만, 아직까지도 깜짝 놀랄 정도로 웅장하고 장엄한 규모에다가 화려하게 장식된 건축양식이 잘 보존돼 있다. 무대와 티켓 판매 박스는 책 읽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뵈칸델 도밍카넨(네덜란드 마스트리히트)   ◆뵈칸델 도밍카넨(네덜란드 마스트리히트) 1294년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1,100㎡ 규모의 도밍카넨 교회를 2006년 서점으로 탈바꿈시킨 곳이다. 돈 하메스 서점 대표는 “디자인을 다시하기 전에는 마스트리히트시 오케스트라 숙소, 어린이 축제 장소, 양도축장 등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했었다”며 “지금도 연간 140여개 이벤트를 개최해 항상 무슨 행사가 열린다”고 말했다.   에슬리트 더난 서점(대만 타이베이) ◆에슬리트 더난 서점(대만 타이베이) 이 서점은 1999년 처음으로 24시간 내내 운영하기 시작해 유명해졌다. 그 보다 여러 가지 언어로 진열된 책과 잡지가 1만7,000㎡를 가득 채워 더욱 이름을 알렸다. 타이베이에만 2개 분점을 더 냈고, 그 중 하나는 대만에서 가장 큰 서점이다.   이 밖에도 한때 방공호로 사용됐다 300명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의자와 책상을 설치한 4,000㎡의 대형 지하서점으로 바뀐 중국 난징의 ‘아방가르드’ 서점, 1951년 문을 연 프랑스 파리 ‘셰익스피어 앤 컴패니’ 서점, 4만여 요리책을 보유한 호주의 요리전문서점 ‘북스 포 쿡스’ 서점, 패션 사진 배경으로 사용될 정도로 멋지다는 평가를 받은 미국 로스앤젤레스 '라스트' 서점, 1906년 신고딕양식으로 지어져 건축솜씨를 뽐낸 포르투갈 포르투의 '리브라리아 렐로' 서점, 명품 서점으로 꼽히는 이탈리아 베니스의 '아슐린 베네치아', 세계에서 가장 큰 중고책 및 신책 서점 미국 포틀랜드의 '포웰스 시티 오브 북스', 베스트셀러 를 쓴 소설가 앤 패쳇이 우연히 대변인을 맡은 서점 미국 내슈빌 '파르나소스 북스', 라이브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식사도 할 수 있는 멕시코의 '카페브레리아 엘 펜둘로', 영국 런던 중심지 코번트 가든에 자리잡은 '스탠포드' 서점, 24시간 개방에다 사전 이메일 예약시 배낭여행객이 무료로 머물 수 있는 중국 광저우의 '1200' 서점, 세인트 마틴스 예술대학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영국 런던 '포일레스 플래그쉽' 서점,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서점거리에서 아직 살아남은 서점 '스트랜드'도 포함됐다.
249    트로트 100곡 제목 댓글:  조회:6976  추천:1  2015-08-25
  트로트 100곡       01. 이승아 / 뜸북이 사랑  02. 싸 이 / 강남 스타일  03. 오운하 / 간데요 글쎄  04. 장 민 / 스쳐간 이별  05. 똑순이 / 너무 합니다    06. 박진석 / 왜가요 왜가  07. 민 희 / 10 분내로  08. 김인수 / 아미새  09. 홍인숙 / 조약돌 사랑  10. 한지운 / 이슬같은 여인    11. 정선화 / 잠자는 공주  12. 박영구 / 나를 사랑한 여자  13. 고속녀 / 이별의 고속도로  14. 한상훈 / 산까치  15. 주현미 / 추억속에서    16. 오승근 / 여자하나 남자둘  17. 고혜진 / 열두줄  18. 진 성 / 정때문에 울긴 싫어요  19. 최유나 / 단한번 만난 얼굴  20. 이찬이 / 눈물도 없는 여자    21. 배창자 / 수 심  22. 최정표 / 유리벽 사랑  23. 오설화 / 사랑합니다  24. 박영구 / 시계바늘  25. 염수연 / 좋았다 싫어지면    26. 나일강 / 사랑의 철새  27. 똑순이 / 당신쯤이야  28. 김 운 / 질긴 정  29. 권선아 / 눈물로 고하는 이별  30. 진 필 / 내사랑 삼순이    31. 홍인숙 / 천년을 빌려준다면  32. 신 웅 / 어북쟁반  33. 이민숙 / 나를 묶지 말아요  34. 양지원 / 사랑의 도둑  35. 최영애 / 그사람 찾으러 간다    36. 장 민 / 일장춘몽  37. 김미진 / 어쩌나  38. 한동엽 / 검정고무신  39. 홍인숙 / 남자라는 이유로  40. 해태남 / 신비한 사랑    41. 민 희 / 당신 뿐이고  42. 김규학 / 동동구르므  43. 고혜진 / 화려한 싱글  44. 원 준 / 사나이눈물  45. 솔 라 / 너는 내남자    46. 송지호 / 내 청춘의 한페이지  47. 유갑순 / 여인우정  48. 박진석 / 눈을 감고 사랑하리  49. 오설화 / 보고싶은 여인  50. 허풍수 / 꽃잎사랑    51. 민 희 / 빙빙빙  52. 김인수 / 고장난 벽시계  53. 주현미 / 영동은 지금 두시 삼십분  54. 신 웅 / 다시 태어난 남자  55. 이민숙 / 어 이    56. 이희래 / 혼자사는 여자  57. 최유나 / 당신의 눈물  58. 김정명 / 당신은 나의 운명  59. 금희각설이 / 나도 한땐 날린여자  60. 장 민 / 저하늘 별을 찾아    61. 설 화 / 삼백리 한려수도  62. 이철민 / 물새야 왜우느냐  63. 똑순이 / 옛시인의 노래  64. 해태남 / 황진이  65. 차미미 / 단골손님    66. 이호진 / 두견화 사랑  67. 배창자 / 대구 머스마  68. 이철민 / 향수에 젖어  69. 고혜진 / 사랑해  70. 라영수 / 바보같은 사나이  71. 오설화 / 보고싶은 여인    72. 김홍조 / 사랑과 인생  73. 한송이 / 내가 왜 웁니까  74. 김 홍 / 마지막 본 당신  75. 김성숙 / 우지마라    76. 원 준 / 그사람이 그사람  77. 신 웅 / 남남으로 가는 당신  78. 이화정 / 정에울고 님에울고  79. 신 유 / 나좀봐  80. 주현미 / 천호동의 밤    81. 오희라 / 내인생 마지막 여인  82. 양지원 / 당신의 트로트  83. 이민숙 / 빗속의 포장마차  84. 양부길 / 추억의 포장마차  85. 현수연 / 첫 정    86. 김경민 / 인생은 새옹지마  87. 김현분 / 독수공방  88. 이창휘 / 거짓말  89. 권미라 / 한줄기 바람처럼  90. 원 민 / 두여인    91. 영란이 / 유정천리  92. 유성일 / 사랑이 뭐길래  93. 오희라 / 사랑의 굴레  94. 나진아 / 짐이된 사랑  95. 주현미 / 산처녀    96. 장안평 / 옥분이  97. 황은자 / 연변에서  98. 이찬이 / 추풍령  99. 김동아 / 몇미터 앞에두고  100. 남미랑 / 옥이엄마  금메달   답변추천해요0   트로트 100곡 제목     장윤정 40곡 벚꽃길 오! 마이 러브 (Original Ver.) 반창고 초혼II (송인) 사랑해요 바람길 오! 마이 러브 (Acoustic Ver.) 초혼 (2015 Ver.) 사랑아 (2015 Ver.) 반창고 (Inst.) 사랑해요 블란서 영화처럼 목마른 사슴 블란서 영화처럼 (Inst.) 당신이 좋아 안동역에서 왔구나 왔어 내사랑 로미오 제발 부탁이야 케 세라 세라 필연 아모레 미오 준비됐나요 꿈속의 사랑 곡예사의 첫사랑 과거를 묻지 마세요 잊으리 카츄샤의 노래 왔구나 왔어 (Rock Ver.) 네버엔딩 스토리 (부활) 얼쑤 (윙크) 사랑이여 영원히 (김종환) 애월랑 (愛月浪) 올래 불나비 아차차 스타킹 단념 초혼 송인   태진아 50곡 사모곡 전통시장 전통시장 (방송용 MR) 전통시장 (Inst.) 사랑타령 하얀눈 자기야 좋아 옥경이 사모곡 사랑은 아무나 하나 동반자 사랑은 장난이 아니야 잘 살꺼야 바보 사랑은 돈보다 좋다 그저 그렇게 아줌마 미안 미안해 거울도 안보는 여자 노란 손수건 잘났어 정말 애인 가버린 사랑 사랑은 눈물이라 말하지 사랑타령 (Inst.) 아름다운 구속 자기야 좋아! LA SONG 이름모를 소녀 하얀눈이 내리네요 (Feat. 김동규) 비켜간 사랑 혼자 눈뜨는 아침 남남 물레타는 여인 아랫마을 이쁜이 포기하지마 자기야 좋아! (Inst.) 하얀눈이 내리네요 (Inst.) 하얀눈 (Feat. 김동규) 당신의 눈물 홀로 된다는것 정 빗속의 여인 돌아보지마라 찻집의 고독 미련 당신은 몰라 사랑은 돈보다 좋다 (Feat. 마야) 내사랑 마리아 후회   송대관 46곡 고향이 남쪽이랬지 아내의 생일 딱 좋아 오빠가왔다 안동역에서 내 나이가 어때서 니 부초같은인생 고장난 벽시계 시계바늘 삼각관계 무슨사랑 사랑찾아 인생찾아 나쁜사람이야 여백 유리벽사랑 미운사랑 이력서 남자의 눈물 정답 꽃물 십분내로 남자의 인생 우지마라 내장산 목계나루 고향가는길 눈에삼삼 귀에맴맴 뽀뽀 천년쯤 오라버니 사랑아 내사랑아 아이좋아라 신미아리고개 춘향아 사랑아 가자 나의 이상형 일편단심 검정고무신 아슬아슬 입술위에 꼭꼭 천년지기 정주고 내가우네 오빠가 왔다 그대만 있으면 초원의 연인들  
248    전위예술 = 아방가르드 댓글:  조회:6574  추천:0  2015-08-22
두산백과 전위예술 [ 前衛藝術 ]   20세기 초 프랑스와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미국 등에서 일어난 예술운동으로 기존의 예술에 대한 인식과 가치를 부정하고 새로운 예술의 개념을 추구하였다. 전위라는 용어는 프랑스어 아방가르드:avant-garde를 번역한 것이다. 아방가르드는 군사용어로, 전쟁에서 본대에 앞서 적진의 선두나가 적의 움직임과 위치를 파악하는 척후병을 뜻한다. 아방가르드라는 용어가 예술에 전용(轉用)되어 앞으로 전개될 새로운 예술을 탐색하고 이제까지의 예술개념을 일변시킬 수 있는 혁명적인 예술경향 또는 그 운동을 뜻한다.  예술이 종교적인 후원과 그에 예속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종교적 관점에서 예술이 성립되는 기준에 따라 발전하였다. 종교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예술은 부르조아의 전유물이 되었고 장식적이고 충실한 현상의 재현과 묘사적인 테크닉에 따라 예술의 가치를 평가했다. 하지만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사진이 등장하고, 녹음이라는 획기적인 기술이 당시 예술가에게는 충격적인 변화로 받아들여졌으며 예술에 대한 인식에도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아카데믹한 예술에 저항하는 새로운 경향의 예술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종교나 부르조아의 후원을 거부하거나 부정하는 예술가 개인의 개성이 독특하게 표현된 예술품들이 새롭게 인지되기 시작했다. 기존의 예술적 기준을 부정하고 속박으로 부터 벗어나는 예술적 경향을 아방가르드 예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이탈리아에서 미래파운동(futurism)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시인 마리네티(Filippo TomasoMarinetti)가 중심적인 인물이었다. 이들은 《피가로(Figaro)》라는 잡지를 발행하여 미래파를 선언하였고 '새로운 시대에는 그에 맞는 생활양식과 표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기술의 등장을 예술에 긍정적인 영향으로 받아들였으며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관념이 철처히 붕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립국인 스위스 취리히에서 일어난 다다이즘(dadaism)은 기존의 관습적인 예술을 부정하고 이를 타파하는 예술을 추구하였다. 후고 발(HugoBall)이 카바레 볼테르를 열어 이곳을 중심으로 '다다(dada)'라는 의미없는 용어를 사용하여 기존의 예술적 기준과 상반된 예술행위와 표현을 보여주었는데 이들은 기존의 예술과 비슷한 것이라면 모두 부정했다. 스위스에는 1차 세계대전을 피해 모여들었던 유럽 각국의 예술가들이 활동했으며 전쟁으로 인해 기존의 합리적인 이성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이들은 독일과 프랑스, 미국 등에서 활동하며 '다다'라는 전위적 예술운동이 다양하게 전개되어 나갔다.  전위예술은 기성예술에의 반항이나 혁명정신 그 자체가 대중사회의 다양한 풍속 속에 확산하여 전위예술은 특정 유파나 운동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경향의 예술을 총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247    포스트모더니즘 - 문학비평용어 댓글:  조회:7115  추천:0  2015-08-22
    권택영   포스트모더니즘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더니즘의 반발인가, 연장인가, 모더니즘과의 공통점은 무엇이고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 외래용어는 우리 문화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한 세기의 마감을 앞에 두고 요즈음 이런 질문들이 오가는 것은 아마도 20세기의 후반부를 지배한 다른 나라의 문화현상을 진단하고 그것이 우리 문화와 갖는 관련성을 되돌아보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한 시대의 문화현상은 늘 당대의 역사적 현실과 손을 잡고 있으면서도 앞서간 시대와 어떤 식으로든지 관련을 맺는다. 그것은 기존의 사고체계나, 미학의 방식이 더 이상 새로운 시대에 맞지 않은 경우 실험의 성격을 띠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아방가드는 일어나는 당시에는 아무리 새롭다 할지라도 시간이 흐르면 전통의 일부로 수렴되고 마는 운명이어서 그것이 반발인가 연장인가의 문제는 그리 단순히 어느 쪽만을 택할 수 없게 한다. 또한 이 문제에 대한 어느 비평가의 이론도 그것이 발표되던 시기, 그 사람이 처한 환경, 의도 등을 고려하여 평가해야 할 문제이지 그 이론 자체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론만큼 매력적이면서도 자의적이고 손안에 든 미꾸라지처럼 틈새만 있으면 빠져나가려 드는 게 어디 있는가. 가장 명확하게 어떤 현상을 가늠하면서도 제 스스로 무너질 수 있는 맹점을 지닌 것이 이론의 운명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반발인가, 연장인가를 따지기 전에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20세기 후반부 미국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고 용어도 미국의 것이지만 그 현상은 영국, 불란서, 남미 등 모더니즘보다 오히려 더 주변국가들과 관계를 맺고 있고 제3세계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파악된다. 분야에 있어서도 가장 두드러지게 모습을 드러낸 건축양식으로부터 문학, 미술, 음악, 연극, 영화, 무용 등 문화 전반에 골고루 퍼진 문화양식이다. 그리고 이런 양식의 저변에 흐르는 철학이나 비평이론들은 당대의 정치와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주변적인 것의 귀환, 절대이념의 와해, 개성의 중시, 논리의 다원화, 다국적 기업, 소수민족운동, 여성운동, 소유로부터의 탈출 등, 애초에는 소설양식에서의 새로움을 표현했던 용어는 이제 반세기의 문화 전반을 상징하는 것으로 확대된 느낌이다. 그러나 커다란 흐름에서는 공통점이 있는듯하면서도 분야마다 차이를 갖기 때문에 이 새로움에 대한 접근은 조심스러워야 한다. 80년대 논의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을 하나의 큰 덩어리처럼 놓고 너무 쉽사리 이렇쿵 저렇쿵 요리를 해댄다. 예를 들어 최근의 맑시스트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을 후기자본사회의 문화논리로 보고 상품사회에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지 못하고 순응함으로써 정치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들의 논의에도 일리는 있으나 이것은 분야별로 시대별로 좀 더 세분되어 따져야 할 문제이다. 인간성의 해방과 열린 공간, 상상력의 확대, 안락과 미의 추구, 원시적인 환경으로의 복귀를 위해 60년대 중반부터 분산화를 시도한 건축운동이 본이 아니게 상업주의를 부추겨 결국 인간을 더욱 소외시키는 방향으로 나간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또한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경계선을 무너뜨리려는 문화의 대중화가 자본시장의 구매충동과 영합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대중적인 팝아트와 난해함으로 읽히지 않던 메타픽션은 구별되어야 하고 반세기의 흐름 안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도 살펴야 한다. 개별영역과 시간의 흐름에 따른 차이가 무시된 채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학형식의 구체적인 얘기 무시된 채 포스트모더니즘이 옳다 그르다는 이론적인 논쟁은 이해보다는 오해를 낳기 쉽다. 이 글은 문학의 분야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일어난 시기, 변해 오는 과정, 형식상의 특징 들을 구체적인 작품을 통해 살펴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는 가운데 모더니즘과의 차이점 및 공통점이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최근의 논쟁들을 요약하고 그 의미를 간추려 본다. 한 시대의 미학이론은 나름대로 의미를 갖고 세워진다. 그것은 이미 정설이 되어 인간의 자유로운 사고를 억누르는 기존의 사유체계에 대한 반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기존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것에서 출발하기에 마감의 시점에서 보면 기존의 연장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반발인가 연장인가는 경계선을 어디로 잡을 것이냐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이렇듯 얼핏 쉬워 보이는 가름이면서도 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경우에 유독 논쟁이 야기되는지 둘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드러내 보고 싶은 게 이 글의 목적이기도 하다.   1. 흐름   약 한 세기 전, 그러니까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 오면서 있는 사실을 그대로 그리자던 사실주의 문학은 점점 자연주의적 색채를 띠고 세기의 문지방을 넘는다. 다원의 진화론, 부흥하는 상업주의, 게다가 실험대에 올려놓은 듯 인간을 냉정히 관찰하려던 실증주의적 태도는 어느덧 인간을 환경과 유전의 산물로 보게 된다. 인간을 자세히 관찰해 보니 그렇게 내재된 자유의지도 고상한 상상력도 없다. 바람 속의 지푸라기나 햇빛을 맞는 향일성 식물처럼 본능과 환경을 좇아 움직인다. 이처럼 자연주의 문학은 어두운 인간의 속성을 냉정히 파고들어 설득력 있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한계를 맞게 된다. 인간이 언제까지나 동물과 같은 차원에 머무를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아니 더 이상 내려설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객체에 대한 냉혹한 시선을 거두고 주체의 진실로 접근해 보자. 진실을 보는 각도를 바꾸는 것이다. 비평가 노드롭 프라이는 19세기 사실주의와 20세기 모더니즘을 객체의 진실과 주체의 진실에 접근하는 두 가지 다른 방향의 미학이론으로 본다(『비평의 해부』). 어떻게 하면 대상을 더 정확히 그리느냐는 객체의 진실이고 그 진실이 얼마나 주관적인가를 그리는 것은 주체의 진실이다. 인간을 객관대상으로 본 자연주의가 한계에 이르렀을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향전환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역사의 흐름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주는 한층 더 혼동을 향해 나갔기 때문에 그것은 반발이면서도 동시에 연장이었다.   모더니즘 : 그 혁명성과 보수성 20세기초에 일어난 철학, 미학, 언어학의 공통점은 인간을 객관대상이 아닌 구조하는 주체로 보는 거이었다. 이런 현상은 이미 상징주의, 후기 인상파, 표현주의 등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대략 1910년대의 흐름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910년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상징주의에 반발하고 작품의 내용보다 형식을 우선시킴으로써 낯익은 것이 내리는 명령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말의 의미, 혹은 내용이라는 이념이 내리는 명령을 벗어나 한 단계씩 형식을 감상하면서 나름대로 의미를 엮는 것이다. 그러므로 낯설게 하기는 객체의 진실보다 인식주체의 경험을 우선시키는 미학이론이다. 191년대 중반 언어학의 소쉬르는 일반 언어코스의 강의노트에서 언어연구를 빠롤과 랑그로 구분한다. 지금까지는 언어의 역사적 측면, 혹은 의미의 측면을 연구해 왔으니 이제 그 언어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가, 의미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들추어 보자는 거다. 이것은 언어를 의미 그자체로 본 것에서 자의적인 구조체계로 보는 방향전환이었다. 말하자면 매끄럽게 보이는 온갖 진리와 정설의 겉자락을 들추고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봄으로써 진실의 자의성, 혹은 주관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언어는 한 언어조직내에서 다름(차이)에 의해의미를 갖는 자의적 구조라는 정의는 온갖 매끄러운 개념이나 논리 속에 내재된 상대적 구조를 암시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절대저인 것처럼 보이는 문화현상 뒤의 숨은 보편구조를 밝혔고 토도로프는 개별작품 속에 숨은 보편구조를 찾았다. 이처럼 빠롤이 아닌 랑그 찾기는 진리의 절대성으로부터 주관성으로, 진리의 닫힌 체계로부터 열린 체계로의 전환이었다. 본질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하는 실존주의, 주관에 비친 진실을 그리던 입체파, 로고스, 즉 신은 죽었다는 니체, 개관적인 기준이 아니라 인식 주체의 주관적인 경험에 가치를 둔 현상학 등, 20세기는 인간이 된다는 것은 구조주의자가 된다는 것을 실천이라도 하는 듯 시작된다. 여기에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분야가 물리학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인간 인식의 망에 포착되는 진리란 객관적이거나 절대적이지 못하다는 회의론의 출발이었다. 비평가 맬컴 브래드버리 Malcolm Bradbury는 모더니즘을 앞 시대와의 결벌 같은 것으로 본다.1) 파편성, 당혹성, 해석의 주관성, 다양화, 예술지상주의, 구조찾기, 기교중심주의, 회의주의, 불확실성의 논리, 무질서, 절망, 무정부적, 중심와해 등등. 그가 열거하는 모더니즘의 특징들은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반 서구 전지역을 휩쓸던 거의 혁명적이다시피 하게 일어난 새로움들이다. 그런데 그의 이론을 따라가다 보면 다양성, 주관성, 허구성, 중심와해 등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과 다를 바 없는 어휘들이 튀어나온다. 말이 갖는 추상성 탓이다. 이제 포스트모더니즘과의 구별을 위해 실제 작품의 예를 들어 모더니즘의 특징을 살펴보자. 비평가들은 흔히 모더니즘의 최고 절정기간을 191년에서 30년 사이로 꼽는다. 미국에서는 시에서의 이미지즘운동과 파운드, 엘리어트, 그리고 거투르 스타인에게서 기법을 배운 헤밍웨이의  초기소설들로부터 시작되어 스티븐즈와 포크너에 이르러 절정을 맞는다. 영국에서는 조이스와 울프, 불란서에서는 프루스트와  지드가 전통적인 사실주의의 매끄러움을 와해시킨다. 흔히 모더니즘을 전통에 반기를 든 혁신운동으로 보는 비평가들 가운데는 브래드버리나 제랄드 그라프 Gerald Graff처럼 이를 낭만주의와 쉽사리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미지즘운동이나 엘리어트의 객관상관물이론은 앞시대의 낭만주의를 거부함으로써 일어났다. 파운드나 엘리어트가 실어한 것은 무엇보다도 감정이 축축한 직설적 표현, 그리고 개성을 알알이 드러내는 것이었다. 감정의 몰입(롱기네스의 낭만주의 전통인 엑스타시)을 싫어하고 감정의 거리두기(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주의 전통인 카타르시스)를 원했던 것이 모더니즘이고 보면 그것은 묘하게도 진리의 절대성을 거부하는 혁명성 속에 고전적인 질서찾기를 담고 있는 이중적인 것이다. 엘리어트는 전통 속에 시인의 개성을 용해시켜 보편질서를 찾았고 헤밍웨이는 자신에게 보이는 용기에서 출발하여 사회정의로 나갈 것을 원했으며 스티븐즈는 우주의 무질서 속에서 상상력, 오직 예술만이 지서를 내린다고 믿었다. 이들은 모두 혼돈의 우주, 신의 죽음, 객관진리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하여 논리와 이념 대신 개인이 도덕과 단련을 중시했다. 그들의 역사의식은 직접 사회를 향하지 않고 개인을 통해 나가려는 우회적인 것이었다. 감정몰입이 아닌 거리두기요, 브레히트의 소격효과이다. 개인이 사회를 떠나고 개인의 상상력이 중시되고 예술의 세계로 도피하고 기법에 탐닉하고 게다가 진리의 주관성을 강조하는 게 얼핏 낭만주의의 한 갈래인 것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은 단련과 질서찾기를 바탕에 깔고 있었다. 마치 구조주의가 모든 정설이나 매끄러운 논리가 어떻게 구조된 것인가를 들춘 것은 혁명적인 것이었으나 그 속에서 끊임없이 라는 보편구조를 탐색한 것과 비슷하다. 객관진리가 허구이고 진실이 자의적임을 인식했을 때 모더니스트들은 혼동과 무질서의 우주 앞에 직면한다. 그들이 돌아서고 기댈 곳은 개인의 용기, 도덕, 단련, 그리고 상상력의 연습이었다. 이런 혁신과 보수라는 모더니즘의 이중성이 포스트모더니즘과의 관계를 밝히는데 혼란을 야기시키곤 한다. 예를 들어 독일의 하버마스Jurgen habermas는 모더니즘만이 진정한 혁명이라고 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을 거부한다. 그런데 그 이유는 바로 그가 혁신과 보수 둘 다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혁신을 계몽주의와 하비주의 속에서 찾는 그에게 이성을 거부하는 듯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계획을 무산시키려는 음모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이제 포크너의 소설을 예로 들어 모더니즘의 양면성을 논해 본다. 한 사람의 서술자가 소설 전체를 책임지던 사실주의와 달리 포크너의 실험 소설은 여러 명의 등장인물들에 의해 엮어진다. 등장인문들이 자신의 의식을 오가는 생각들을 서술하는데 이때 형식은 그의 개성이요, 내용은 자의적이다. 예를 들어 조야한 언어가 유난히 많은 서술은 그 인물의 거친 성격을 드러낸다. 일인칭 주어를 소문자로 쓰는 경우는 도피적 성격을 드러낸다. 돈을 좋아하는 인물은 유난히 (현금)란 단어를 들먹인다 등, 저자가 등장인물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성격을 가늠해야 한다. 내용에서도 서술자를 그대로 믿던 사실주의와 달리 등장인물들의 서술을 읽고 우선 한걸음 물러난다. 이 친구가 왜 이런 얘기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다른 인물들의 얘기와 비교하여 객관성이 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같은 사건을 어떻게 달리 보는 가를 살펴 그 인물의 성격을 추측하고 그 속에 묻힌 사건의 윤곽도 밝혀야 한다. 입체파 그림을 연상시키는 이 혁신적인 기법의 보수성은 무엇인가. 우선 서술에 직접 몰이하지 않고 거리를 두고 판단을 유보하는 데 독자의 상상력과 자율성이 요구된다. 어떤 진술에 대해 일차적인 의문을 던지고 그 겉자락을 들추어 그 말이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가를 따지기에 힘들게 얻어지는 과정이 단련을 요구한다. 그리고 독자는 여러 사람들의 말을 종합하여 의미를 합성해 내는 과정을 통해 진실의 상대성, 혹은 자의성을 경험케 된다. 그런데 사실주의에서처럼 매끄러운 서술을 통해 의미가 전달되지는 않아도 모더니즘에서는 여전히 작가가 흩어진 서술을 통해 어떤 내용을 전달한다. 예를 들어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를 읽으면서 독자는 네 사람의 서술을 통해 콤슨가의 몰락과정과 그 원인을 감지하게 된다. 여전히 그의 전통적인 도덕률이 반영되어 있고 그리고 사실과 허구의 경계선이 존재하는 것, 이런 점들이 포스트모더니즘과 비교하여 모더니즘이 갖는 보수성이다.   포스트모더니즘 : 반동과 연장의 이중성 진리의 주관성이라는 회의주의에서 출발한 모더니즘은 그 자체가 지닌 보수적 성향 때문에 예술의 고급화를 초래한다. 의식의 흐름수법, 복수시점, 자동기술, 객관상관물이론 등 기법은 점차 난해지고 개인은 사회로부터 유리되어 예술지상주의에 몰입하는 인상을 낳게 된다. 게다가 모든 아방가드의 운명이 그렇듯 태어날 때의 혁신적인 요소는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현실로 흡수되어 또 하나의 전통으로 굳어지는 경향을 띠게 된다. 위대한 모더니스트들이 죽고 세계대전으로 사회의식이 고조되면서 1930년대 이후 사실주의가 미국과 영국에서 부활되기도 하지만 역사의 흐름이 똑같은 양상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법이어서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은 1950년대에 가서야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50년대 미국에서는 노먼 메일러, 멜라무드, 솔 벨롤우, 랄프 엘리슨 등 유태계와 흑인작가들이 서서히 인간과 사회를 연계시키는 듯한 작품을 쓴다. 이들의 작품에는 모더니스트들과 무언가 다른 게 있었다. 우선 예술의 세계로 몰두하는 듯한 기법의 난해성, 복수시점 등이 없어진다. 그리고 진지함이 우스꽝스레 회화되고 작가의 도덕적 메시지가 흐려진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흐려져서 사회가 작품 속에 들어오긴 하는데 사실주의와 달리 견고한 조직이 아니고 비현실적이다. 흔들리는 도덕적 모호성, 블랙 유머, 주인공 아닌 주인공 등 이제 소설은 부조리에 관한 게 아니라 부조리 그 자체가 되는 듯 했다. 비평가 어빙 호우 lrving Howe는 이런 현상을 모더니즘으로부터의 이탈현상으로 보아 이라 이름붙인다.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50년대는 전환기였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흐려지기는 하지만 아직도 픽션은 리얼리티를 반영했기 때문이다. 전화기는 시에서도 나타난다. 모더니즘의 도덕적 진지함과 난해한 기법으로부터 벗어나 자서전이나 개인의 감흥이 시 속에 그대로 표출되기 시작한다. 로웰, 로드크를 지나 알렌 긴즈버그에 이르면 엘리어트의 시와는 엄청난 거리를 지니며 시의 대중화가 이루어진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고급화된 예술양식, 개인 감흥의 절제와 달련, 그리고 아직도 소실이 무언가 진지한 도덕을 전달하려 한다는 것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것은 모더니즘의 현학적이고 위엄 있는 예술양식에 대한 반발이었고 급변하는 현실에 그 양식이 더 이상 맞지 않는다는 당대 상황과의 대응책이었다. 과학의 발달로 인한 우주시대의 열림, 캘리포니아 문화의 다원화현상, 뉴욕을 중심으로 한 불란서 실험문화의 영향, 그리고 민권운동,  여성운동, 반전운동, 케네디와 킹 목사의 암살 등 작자가 현실(혹은 실체)를 파악할 수 없을 때 정치와 초연한 채 기법에 탐닉해 있는 모더니즘은 맞지 않는 이념이요, 양식이 되고 만다. 고백시, 투사시, 즉흥시, 여성시가 쏟아지고 개인의 열정과 욕망을 막는 어떤 기준도 거부된다. 마치 자살하기 위해 태어난 듯싶은 실비아 프랱의 시에서 자신의 욕망을 막는 기준이나 지서는 아버지, 나치 등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인간의 저속하고 추한 모습을 더 이상 감추지 말고 드러내자는 것은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메일러는 단련과 고상함 뒤에 숨은 미국의 억눌린 광기를 암으로 상징했다. 긴즈버그와 친구였던 윌리엄 버로우는 『발가벗은 점심 The Naked Lunch』1959에서 섹스와 마약 등 환상적이고 에로틱한 세계를 저속한 어휘로 적나라하게 표출했다. 마치 둘이서 약속이나 한 듯 긴즈버그는 엘리어트에 도전하는 『신음소리 howl』를 쓰고 버로우는 헤밍웨이와 포크너의 도덕적 진지함을 회화시키는 벗은 작품을 쓴 것이다. 보네겉의 주인공들을 보면 한결같이 어린애 같고 우매하고 교활하다. 저지 코진스키의 주인공들은 의지도 생각하는 힘도 느낌도 없는 無 그 자체이다. 주위 사람들에 의해 성격이 주어지는 완전한 수동형이다. 인간과 사회의 어두운 측면을 드러내고 그 속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몸부림, 어떤 기준도 단련도 거부하는 윈시에의 향수, 본능의 향휴 등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이 다져온 기준 밑에 숨은 광기를 드러내 사회와 인간을 정화시키려는 듯 격렬한 벗어던지기 운동이었다. 혼돈을 직시하고 감정의 거리두기를 통해 질서를 찾으려던 모더니즘이 다분히 고전적이라면 개성을 강좌고 기준을 무너뜨리고 혼돈 그 자체를 인수하려는 포스트모더니즘 다분히 낭만적이다. 이것이 둘 사이의 가장 뚜렷한 차이요,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반발로 볼 수 있는 측면이다. 그런데 반발로 시작된 포스트모더니즘은 후일 연장으로 해석될 수 있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 진리의 절대성에 대한 회의로 출발한 모더니즘은 진리가 주관적이라고 하면서 여러 인물들의 서술을 통해 그것의 상대성을 보여주었다.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은 그것조차 거부한다. 현실과 환상이 혼합된 소설을 통해 온갖 진리가 허구임을 드러낸다. 언어는 실체를 지칭하지 못하고 소설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 소설이 제 꼴을 돌아다보는 자아반사적 픽션이 나타난다. 데리다가 구조주의의 상대성을 뒤엎고 진리의 허구성을 드러내듯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상대성이라는 열린 체계를 한층 더 밀고 나가 다원성에 이른다. 담론의 자의성 드러내기가 아니라 담론 그 자체를 와해시킨다. 맥혜일 Brian mchale 은 최근에 펴낸 『포스트모더니스트 픽션』(1987)에서 이런 변화를 인식론 epistemology에서 존재론 ontology으로의 전환이라고 말한다. 이제 질문은 현실로부터 무엇을 얻어내느냐가 아니라 그 현실 자체가 실재냐 아니냐로 바뀐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연장으로 보는 이유는 이렇듯 진리에 대한 회의적 태도가 한 걸음 더 나아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장인가 반발인가의 문제는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또 달라진다. 기준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이에 두 대는 물론 반발이요, 차이다. 그러나 기준을 19세기 리얼리즘과 20세기 모더니즘이라는 한 세기의 변화로 잡을 때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연장이라는 속성을 지닌다. 19세기가 객체의 진실에 접근하던 시대라면 20세기는 모더니즘이건 포스트모더니즘이건 둘 다 주체의 진실에 접근하는 쪽이기 때문이다. 맬컴 브래드리가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을 연속으로 보고 둘 사이의 공통점이 차이점보다 더 많다고 하는 이유는 예술형식의 변화를 한 세기별로 보기 때문이다. 그는 예술을 시대정신의 반영이요, 형식은 이념과 손잡고 나타나는 긴 시간의 거대한 변화로 본다. 린다 허천 Linda Hutcheon은 안드레아스 후이센 Andreas Huyssen이 언급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반발적 요소에 연속적인 요소를 첨가함으로써 어떤 면이 반발이고 어떤 면이 연장인지를 보여준다. 예술의 자율성과 삶에서의 유리, 개인적 주관성의 표현, 대중문화와의 유리 등에 반발했지만 자의식적 실험, 아이러닉한 모호성, 리얼리즘의 모방이론에 대한 반발 등은 모더니즘 전략의 연장이라는 것이다. 연장이며 동시에 반발로 보는 견해 가운데 가장 간단한 표현으로 정수를 포착한 경우는 한스 베르텐스 Hans Bertens 의 다음과 같은 표현일 것이다.2)   포스트모던 예술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고 경험되는 것이다. 모더니즘 예술은 표층 너머에 숨은 어떤 의미를 자칭하고 이해되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예술은 그 자체를 표층으로 제시하고 모던 예술은 그 표층 뒤에 숨은 깊이를 요구한다․․․․․․․․.   포스트모던 예술은 모더니즘보다 이라는 베르텐스의 덧붙인 말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과 다르면서도 한층 더 회의론 쪽으로 나간 것을 잘 요약해준다.   2. 포스트모던 기법3)   패로디 모더니즘이 상황으로부터 기법으로 도피해 버렸다고 생각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소설 속에 다시 상황을 끌어들인다. 그러나 이제 그 상황이 허구임을 보여주어 아예 현실에 대해 아무말도 하지 않는 셈이 된다. 아니 현실이 허구라는 식으로 현실에 대해 얘기한다. 그래서 소설은 어떻게 현실이 허구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메타픽션이 된다, 허구가 현실이요, 현실이 허구이니 어찌 현실을 반영하는 허구(픽션)를 쓸 수 있으냐는 것이다. 자의식적인 소설 혹은 반사실주의는 여러 가지 기법으로 현실 그 자체가 이미 허구임을 보여주는데 그 가운데 두드러진 자이가 패로디이다, 바셀미 Donald Bathelme는 『백설공주』(1967)에서 전통적인 동화를 패로디한다. 배경은 뉴욕이고 등장인물들은 현대 도시인들인데 왕자 역할을 맡을 사람이 없어 소설의 끝을 못 맺는다고 엄살을 떤다. 주인공, 시작과 끝, 성격발전이 없는 소설이다. 나보코프의 『세바스천 나일의 참인생』은 전기의 패로디이고 『창백한 불꽃 Pale Fire』(1962)은 비평의 패로디이다. 실제 인생이 어떻게 굴절되어 전기가 되는지, 비평이 어떤 식으로 자의적인지를 통해 실체가 허구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영국의 존 파울즈John Fowles는 『불란서 중위의 여자』(1969)에서 사실주의 소설을 패로디한다. 한동안 진지하게 빅토리아 시대의 인물들이 스토리를 엮어 가다가 갑자기 뉴보로망 시대에 살고 있는 작가의 고민이 튀어나온다. 이 소설의 결말을 어찌 낼 것인가, 이 인물들에 관해 내가 아는게 무엇인가. 옛날에는 작가가 진지한 신이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못하니 고민스럽다는 것이다. 결말을 열어놓은 채 끝나는 이 소설은 사실주의를 패로디하는 반사실주의 소설이다. 투르먼 카포티의 『냉혈인간 In Cold Blood』처럼 실제 일어난 사건의 보도가 그대로 픽션이 되는 뉴저널리즘 픽션은 보도의 패로디이다.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더듬어 새롭게 다시 쓰는 고어 비달의 『링컨』은 역사의 패로디요, 자신이 2차대전 때 겪은 경험을 그대로 쓴 코진스키의 『색칠해진 새 The Painted Bird』는 자서전의 패로디이다. 패로디란 기존의 개념이나 형식과 같은 꼴을 취하고는 전혀 반대의 얘기를 하는 문학적 장치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패로디가 이토록 압도적인 이유는 그것이 지금까지 세워진 진리가 허구임을 보여주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경험은 아무리 정확히 기록되어도 기록되는 순간의 산물이고, 보도나 역사는 아무리 정확히 자료를 수집해도 제공자와 기록자의 자의적 산물이며, 전기에서 실체는 몇 겹으로 굴절된다. 그러니 소설이 어떻게 실체를 반영하는가. 실체가 이미 허구인 것을. 그래서 소설가의 임무는 구태여 허구의 세계를 꾸밀 필요없이 기존의 형식이나 장르는 취하면서 전혀 딴소리를 하는 것이다. 물론 성공한 메타픽션의 경우 이런 패로디 기법은 작의성이 잘 드러나지 않게 묻혀 있기 마련이다.   환상적 리얼리즘과 미니멀리즘 패로디는 초기 약 10년 동안의 메타픽션에서 두드러진 양식이었다. 1975년 이후에는 또  한번의 조그만 변화가 일어난다. 소위 혹은 의 출현이다. 소설이 언제까지나 현실과 허구의 관계를 조명하고 제 모습을 되돌아보는 소설에 관한 소설일 수만은 없다. 미로 속을 맴돌던 언어가 탈출하여 무언가를 지칭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은 옛 사실주의와는 다르다. 메타픽션에서 한걸음 더 나가 이제는 환상이 이미 현실의 일부가 된 환상적 리얼리즘(혹은 매직 리얼리즘)과 플롯을 거부하는 미니멀리즘이다. 환상적 리얼리즘은 마르께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처럼 매끄럽고 풍요한 서사가 계속된 후 마지막에 그것이 지워져 왔음을 암시적으로 밝히는 자의식이 강한 경우도 있지만 75년 이후의 것들은 이와 조금 다르다. 토니 모리슨의 『소중한 사람들』이나 마가렛트 에트우드의 작품들에서 유령이나 환상은 작가가 현실을 그리는 데 어떤 문학적 장치인 듯 쓰인다. 말하자면 환상이 사실주의 소설에 고용되는 셈이다. 애초에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게 상황 혹은 역사의식을 문학 속에 끌어들이려 했던 것이고 보면 후반에 와서 사실주의가 환상을 누르고 부각되는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는지 모른다. 허구가 현실을 누르던 초기의 메타픽션에서 현실이 허구를 종속시키는 후기의 새 사실주의는 환상과 허구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에서는 공통이다. 그러나 전자가 베케트의 침묵의 언어 이후 왜 소설이 아무말도 할 수 없는가를 보여주는 쪽이라면 후자는 그렇다면 못할 말이 뭐가 있느냐는 쪽이다. 표층 너머의 의미를 묻던 모더니즘과 달리 그저 표층에 머무는 것에서는 공통이지만 전자가 표층에 머무는 과정을 보여준다면 후자는 이제 그 표층의 흘러넘침을 축복하는 쪽이다. 미니멀리즘 역시 대략 75년 이후에 나타난 새 사실주의의 한 갈래이다. 저자가 독자에게 권위를 양보해 가던 모더니즘 시대에 윌터 벤야민은 짧은 스토리의 중요성을 통해 저자의 사라짐을 얘기했다. 사실주의 소설은 권위적인 작가가 설명하고, 꽉 짜인 플롯으로 시작과 끝을 내린다. 그것은 닫힌 형식이며 소유이다. 그러나 설명이 없고 압축된 스토리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의 대화이다. 듣는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그 사람은 다시 타인에게 전달한다. 이 과정에서 의미가 풍요해진다. 그러므로 스토리는 소유가 아닌 경험의 교환이다. 이 벤야민의 스토리 텔러가 한 세기가 끝날 무렵 미니멀리스트로 부활한다. 미국 픽션의 최근의 동향을 실은 『믿을 이유들 Reasons to Believe』(1988)은 지난 십 년을 라고 언급하고 지난 (1990년) 겨울호는 미니멀리즘을 세기말의 문학으로 꼽는다. 미니멀리즘의 특징은 우선 길이가 짧고 작가의 친절한 설명이 없고 등장인물의 심리를 묘사하지 않는다. 외적인 행동에 초점을 맞추면서 주로 평범한 일상 속에서 드러내는 단절과 고립, 인간의 한계를 지극히 암시적인 수법으로 섬뜩하게 묘사한다. 그러나 작가의 묘사보다는 독자의 파악하는 힘에 의해 이런 의미가 합성된다. 묘사나 설명을 하지 않고 마치 영화의 장면들처럼 외적인 행위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얼핏 압축된 기법이 헤밍웨이를 연상시키고 실제로 토바이아스 울프나 레이몬드 카버는 그의 영향을 언급하기도 하지만 차이는 있다. 헤밍웨이가 자기단련의 입장에서 그런 기법을 쓴다면 미니멀리스트들은 독자에게 권한을 넘겨준 열린 소설의 입장이다. 벤야민의 말처럼 틈새가 독자의 상상력에 의해 메꾸어져서 소유가 아닌 경험의 교환이 되기 때문이다. 단절된 문장, 피상적이고 겉도는 대화를 통해 70년대 도시 중산층의 고립을 그리는 앤 비티, 플롯을 거부하는 열린 소설을 통해 마지막 순간의 거대한 변화를 기대하는 그레이스 페일리, 작가와 독자가 함께 삶의 방식을 그리는 가장 우수한 미니멀리스트, 레이몬드 카버······ 플롯이 없는 것, 작가가 설명을 하지 않는 것, 독자의 참여가 중시되는 것에서 미니멀리즘은 메타픽션과 공통이다. 그러나 언어가 사물을 지칭하고 일상이 묘사된다. 현대 도시인의 대화단절, 자아몰입, 마약과 술로 도피하는 사랑의 부재가 암시적으로 드러난다. 60년대의 자유화 물결이 낳은 고립과 단절을 진단하는 80년대의 미니멀리즘은 이처럼 경험의 교환과 타자의식을 강조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평가 안드레아스 후이센은 75년 이후의 변화를 언급하면서도 자세히 논의하지 않고 맥헤일이나 린다 허천도 이 부분을 간과한다. 패로디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진단할 경우 미니멀리즘은 예외로 취급되어야 한다.   저자의 죽음과 인식주체의 해체 사실주의에서 저자는 작품 위에 있고 모더니즘에서는 작품 뒤에 숨어 있고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작품 속으로 뛰어든다. 현실이 복잡해짐에 따라 저자는 전능한 신의 위치에서 독자와 동등한 위치로, 그리고는 이제 작품 속으로 들어가 전통적인 저자의 죽음을 알린다. 메타픽션에서 저자의 죽음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나보코프의 경우를 보자. 저자는 등장인물을 고용하고 등장인물은 또 다른 인물을 고용한다. 그런데 그게 전부 저자 자신에 관한 얘기가 된다. 픽션이 현실을 반영하는 대신 자기 얘기만 하니 진리의 자의성이요, 결국 현실이란 저자의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롤리타』에서 등장인물을 조정하던 작가 퀼티가 등장인물(훔볼트)에 의해 죽고 남은 작가 훔볼트는 더 이상 견고한 사실주의를 쓸 수 없다고 말놀음으로 돌아서는데 그게 바로 나보코프 자신의 예술관이다. 롤리타라는 실체를 아무리 추적해도 잡을 수 없고 포착할 수 없는데 어떻게 사실주의(현실을 반영하는 소설이란 의미에서 모더니즘도 포함되는 넓은 의미) 소설을 쓸 수 있느냐는 거다. 마치 『세바스천 나잍의 참인생』에서 화자인 브이는 세바스천을 고용하고 나보코프는 브이를 고용하여 자기이야기를 하는 것과 같다. 19세기 사실주의에서는 저자가 완벽하게 허구의 세계를 창조하여 독자는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는 일인 것처럼 믿는다. 모더니즘에서는 등장인물에게 서술을 맡기고 저자는 음성을 숨기지만 그래도 그 허구의 세계는 현실의 반영이다.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저자가 작품 안으로 뛰어 들어와 픽션이 현실을 반영한다는 가정을 무너뜨린다. 작품 위, 혹은 뒤에서 등장인물을 조정하더니 이제 작품 속으로 들어와 내가 조정자요 하면서 자기모습을 드러내어 개연성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커트 보네겉은 『참피온들의 아침식사』(1973)에서 등장인물을 조정하다 풀어 주는 자기모습을 담는다. 존 파울즈는 『불란서 중위의 여자』에서 내가 지금 얘기하는 이 스토리와 등장인물들은 모두 내 머릿속에서 고안된 것이라고 불쑥 나와 말한다. 사실주의에서는 서술자가 제시하는 세계에 독자가 그대로 몰입되어 저자의 의미를 받아들인다. 모더니즘에서는 등장인물들의 서술을 들으며 믿음을 일단 정지하고 이 말 저 말을 종합한 뒤 판단을 내린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믿음과 안 믿음, 둘 다를 유보한다. 저자가 소설의 틀을 와해시키고 그 속으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저자이고 이 인물들의 창조자요 하면서 작품 속으로 들어오거나 등장인물들이 모두 저자 얘기를 하게 만들어 전통적인 작가의 죽음을 알리는 것은 더 이상 현실을 반영할 수 없다는 반영론의 포기이다. 현실이 환상적이고 진리가 허구적이므로 어떤 견고한 논리로 설 수 없다는 미결정성이 픽션을 열어놓는다. 과정이요 현재진행형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을 리오따르 Jean-Francois Lyotard는 이라는 단어로 표시하며 에 이즘(-ism)을 붙이기 싫어한다. 그런데 이런 과정,  혹은 의미의 잠정성은 인식주체의 해체를 뜻한다, 코진스키는 『그냥 있기 Being There』(1971)의 주인공에 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 정원사라는 직업 외에 과거도 현재도 없는 텅 빈 존재 nonentity 이다. 그런데 일단 그가 사람들 속에 던져지자 그에게는 갖가지 의미들이 달라붙는다. 의미는 그 자체가 고유하게 소유한 게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다. 고유의미가 없는 그는 일 따름이다. 이것은 바셀미가 목적지가 있는 배 한 척보다 바위조각 하나가 더 흥미롭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시간이 흐르면 바위조각에는 갖가지 동식물이 달라붙어 서식한다. 어느 틈엔가 바위조각에는 풍성한 의미가 흘러넘친다. 의미란 이미 존재하는 게 아니고 달라붙어 의미를 만든다. 그래서 꼴라쥬 등 온갖 파편화된 예술형식을 가지고 유희를 벌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반영론이 아닌 창조론이다.   3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논쟁들   50년대의 부조리소설, 60대의 파편화된 메타픽션, 그리고는 점차 사실주의의 옷을 입은 메타픽션과 미니멀리즘 등, 픽션이 변모를 겪는 동안 이를 지켜보는 이론도 변모한다. 이론의 변모가 소설형식의 변모를 반영할 정도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미국의 용어이고 미국 픽션들이 가장 요란스러웠지만 이런 현상을 불란서, 영국, 독일, 남미에까지 퍼졌고 물처럼 새어들어 각 나라의 건축이 미술, 그리고 철학과 정치이념에까지도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늘 보수성을 지키는 영국의 60년대 문학에 대한 글이 현실의 허구성을 강조하는 품은 마치 같은 시대 미국의 현상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4) 같은 맥락에서 논쟁들도 처음에는 미국적이더니 점차 국제적인 것으로 확산된다. 이들 가운데 주목을 받는 몇 개의 쟁점들을 살펴보자. 60년대에 나온 레슬리 피들러의 「경계를 넘어서고 간극을 매우며」나수잔 손탁, 이합 핫산의 글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반발과 혁신으로 본다. 모더니즘의 귀족성과 계급성에 대한 반발로서 온갖 경계의 무너짐과 원시적인 생명력의 찬양, 그리고 거의 무정부적인 낭만성과 다양성을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견해는 모든 아방가드의 논리가 그렇듯 새로움은 늘 일어나던 당시에는 기존의 전복이었음이 고려되고 읽혀야 한다. 예를 들어 핫산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차이를 전통과 급진으로 비교한 것은 분명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모더니즘에도 분명히 급진적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핫산의 견해가 60년대의 것이고 상대적인 개념밖에 담을 수 없는 언어를 절대용어로 사용한 가 갖는 위험성도 고려되고 비판되어야 한다. 제랄드 그라프의 『그 자체에 반항하는 문학 Literature Against Itself』 역시 논란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이 기존을 극복하는 척했지만 결국은 낭만적 무정부주의와 모더니즘의 인식론적 회의주의를 더 밀고 나감으로써 전통 속의 일부가 됐다고 비난한다. 그런데 이 글이 나온 것은73년, 즉 메타픽션의 방자함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다. 75년경부터 새로운 사실주의가 시도된 것을 보면 그라프의 글은 시기를 잘 탄 셈이다. 그러나 그는 모더니즘의 혁신 뒤에 숨은 고전적 질서찾기와 포스트모더니즘이 낭만적 개성표출이었다는 차이를 간과해 버린다. 일어나던 당시의 차이를 무시해 버린다면 연속의 범주로 휩쓸리지 않을 아방가드가 어디 있겠는가. 이번에는 독일의 하버마스와 블란서의 리오따르의 논쟁을 본다. 1981년 하버마스는 「모더니티 對  포스트모더니티」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을 무산시키려 든다고 비난한다. 판단의 유보와 자기부정적 혁신, 그러면서도 계몽주의적인 합리성을 가진 모더니즘은 문화와 사회를 접목 시킬 안정된 근거를 가진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은 지나친 회의주의와 무정부적인 분열성으로 이 기반을 위협한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혁신을 막는 신보수주의자들이라는 것이다. 하버마스가 데리다를 비롯한 후기구조주의자들이 보수적이라고 비난한 것도 같은 논리에 근거한다. 물론 데리다는 당신이 더 보수적이라고 했고 안드레아스 후이센은 이들의 싸움을 가르켜 라고 빗대어 논의한 적이 있다. 하버마스의 비난에 대해 리오따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1982) 로 답한다. 사실주의는 비판적 거리를 지키지 못하고 모더니즘은 거리는 있는데 사회를 외면하고 예술로 도피했다.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은 이 둘의 결함을 보충하여 모더니즘이 못다한 혁신을 이루려 한다. 포스트모더니즘 미학은 쾌감과 고통을 동시에 지닌 장엄하고 모호한 정서이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유일한 기능이다. 그것은 모든 논리를 열어놓아 끊임없이 흐르게 하는 진짜 혁신이다․․․․․. 하버마스는 모더니즘의 장점을, 리오따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장점을 잘 본다. 자신의 것을 잘 보기에 상대방의 것을 간과하는 모든 논쟁의 묘미이다. 1960년대 이후 독일에서는 아도르노나 브레히트 등 흘러간 모더니스트들의 복구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진다. 하버마스는 그런 분위기에서 모더니즘 미학과 사회를 연결시키려 한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방해처럼 여겨진다. 리오따르는 니체적 입장에서 불란서의 해체적인 안목으로 모더니즘을 본다. 그래서 그것이 보수적이고 진짜 혁신이 아닌것 같다. 어쨌든 이 논쟁이 주는 공통된 인상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성에 대해서는 둘 다 잘 모르거나 명쾌한 설명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리챠드 로티 Richard Rorty 는 를 가지고 이 논쟁에 뛰어든다. 어떤 논리로 세울 수 없는 미결정성으로 해체론이 비난을 받자 로티는 미결정성에 윌리엄 제임스의 실용주의를 접목시켜 사회성을 부여한다. 어떤 이론에도 회의적이고 어떤 위치도 갖기 않음으로써 그것이 진리냐 아니냐를 묻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해체론적 입장이다. 어떻게 이 아포리아로부터 벗어나는가. 다만 그것이 필요하냐 아니냐라는 만을 묻자. 그러나 로티의 이런 인식론적 행동주의는 그보다 더 정치성을 요구하는 여성운동가들이나 사회개혁자들에게 그리 안정된 근거를 주지 못한다. 그래서 하버마스의 편에 선 사람들은 로티를 비난한다. 언어의 유희와 침묵으로부터 탈출하자던 핫산이 1987년에 발표한 글 “the Postmodern Turn”도 제임스의 실용주의적 입장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보는 것이다. 핫산은 이보다 조금 먼저(1983) 포스트모더니즘을 반발과 연장의 이중성으로 보는 글을 발표하기도 한다. 그의 글을 시대순으로 읽으면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시각의 변모를 볼 수 있어 흥미롭다.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논쟁은 최근에 한층 더 사회와 역사의식 쪽으로 기울고 있다. 제임슨, 이글턴, 뉴먼 등 맑시스트들의 비난을 살펴보고 이런 공격에 대한 린다 허천의 방어를 들어보자. 맑시스트들의 비난은 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후기자본사회에 순응하면서 애초에 의도했던 극복의 의지를 실현시키지 못했다는 데 있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깊이가 없고 역사성의 희박하고 고통이 없고 비판적 거리가 없다고 말한다. 테리 이글턴 역시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에 저항했으나 사회의식이 약하고 문화를 탈정치화시켰다고 말한다. 챨스 뉴먼 Charles Newman 은 성역으로서의 예술이 모더니즘의 마지막 환상이었듯이 자율성으로서의 예술은 자본사회 개인주의의 마지막 숨소리라고 비난한다(the post-modern Aura, 1985). 이 둘은 모두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연장으로 본다. 체제에 순응한 모더니즘의 결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한층 더 비정치적 이론으로 그 체제를 연장시켰을 뿐이라는 것이다. 맑시스트들의 비난에 대한 최근의 방어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반정치적 정치성)을 갖는다는 쪽이다. 현실이 허구라고 말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거리두기로서 어떤 논리에도 몰입하지 않는 비판의식을 기른다. 독자의 상상력을 통해 자율성을 기르는 틈새의 축복이다. 폴 드 만은 언어의 유희와 오독의 찬양이 언어에 대한 성찰과 동시에 역사에 대한 성찰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 린다 허천이 역사편찬적 메타픽션 historiographic metafiction이란 용어로 포스트모더니즘 시학을 보는 의도도 여기에 있다. 주로 사실주의를 패로디한 작품들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녀는 , 이념의 허구성이 갖는 이념성을 강조한다.(180,194-196면). 비록 특정 작품들에만 초점을 맞춘 결함은 있지만 후기구조주의를 배경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설명하는 그녀의 경우가 구조주의와 억지로 연결시키려든 후이센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 이론상의 타당성 때문만이 아니라 한 시대의 이념은 미학형식과 손을 잡는다는 아방가드의 논리 때문이기도 하다. 한때는 도전과 반발이었던 실험정신이 시간이 흘러 또 하나의 정설이 되고 체제의 순응이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는 아방가드의 운명. 역사로부터 뒷걸음친다고 모더니즘을 나무라며 상황과 역사의식을 불어넣었지만 차마 19세기 사실주의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단순한 반영이론에도 반기를 들다 보니 반역사적 역사성이라는 역설을 낳는다. 포스트모더니즘. 혹시 이 역설의 시대는 한 세기의 변화를 가늠할 때 모더니즘에서 다시 리얼리즘으로 넘어가는 전환기는 아닐까 생각해본다.  
246    자동기술법 - 문학비평용어 댓글:  조회:6024  추천:0  2015-08-21
자동기술법은 초현실주의의 중요한 기법으로서  어떤 의식이나 의도 없이 무의식의 세계를 무의식적 상태로 대할 때 거기서 솟구쳐 오르는 이미지의 흐름을 그대로 기록하는 방법 원래 의사였던 브레똥이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원용하여 임상심리학에서 정신병자가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내면의 소리를 시에 응용하여,  가능한 빠른 속도로 지껄이는 독백이나 사고를 비판이나 수정 없이 그대로 기록한 수법  이러한 수법을 사용한 한국 시인으로는 1930년대 이상이 대표적  "나의아버지가나의아버지의나의아버지가되고…"식의 음송은  어떠한 논리적 질서나 인과관계를 살필 수 없다.  서로 무관한 이미지들과 단상들이 무의식적으로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자동기술법은 무의식의 자유로운 분출을 통해 의식과 일상의 미망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  참된 자아의식에 도달코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현실은 일상의조작된 사실이나 과거의 낡은 관념 체계에 의해서 왜곡도어 있고 논리와 합리,  이성 등 인위적인 요소로 구속되어 있다.  이것을 초월하여 무의식과 꿈의 세계에서 리얼리티를 찾고자 하는 것이 초현실주의 이념이었고,  이를 구현한 실천방안이 바로 자동기술법이었던 것이다. 자동기술법은 현대시의 흐름에 큰 줄기를 이루고 있는데,  한국의 경우 1930년대 의 이시우, 신백수, 이상,  그리고 해방 후의 조향, 김구용 등의 시에서 그 편린을 엿볼 수 있다. 예> 벌판한복판에 꽃나무하나가있소. 近處에는 꽃나무가하나도없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를 熱心으로생각하는것처럼熱心으로꽃을피워가지고섰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소. 나는막달아났소. 한꽃나무를爲하여 그러는것처럼 나는참그런이상스러운흉내를내었소. (이상 '꽃나무' : 일부러 띄어쓰기도 하지 않고 연과 행의 구분이 없으며 내용의 일관성을 찾기 참 힘들다) '발췌: 해우소
245    아방가르드 - 문학비평용어 댓글:  조회:8765  추천:0  2015-08-21
문학비평용어사전 아방가르드 [ Avant-Garde ]   아방가르드란 20세기 초 프랑스와 독일을 중심으로 자연주의(自然主義)와 의고전주의(擬古典主義)에 맞서 일어난 예술 운동으로써, 기성의 예술 형식과 관념, 유파(流波)를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이룩하려 했던 입체파(立體派), 표현주의(表現主義), 다다이즘(dadaism), 초현실주의(超現實主義) 등의 혁신 예술을 통틀어서 일컫는 말이다. 아방가르드의 원뜻은 먼저 앞에 나서서 호위한다는 의미를 지닌 전위(前衛)로 본래 전투 당시 선두에 서서 적진으로 돌진하는 부대라는 뜻을 가진 군대 용어이다. 이것은 이후 러시아 혁명 당시 계급투쟁의 선봉에 서서 목적의식적(目的意識的)으로 뭉친 정당과 그에 속해 있는 당원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게 되고, 이것이 19세기 프랑스에서 혁신과 실험을 중시하는 새로운 기류를 반영하여 예술 운동에 적용되면서부터 예술 용어로 사용되게 되었다. 아방가르드의 이념은 자체가 지지하고 있는 예술적이거나 문화적인 선언들의 반사회적인, 혹은 비사회적인 특징에 의존하는 사회적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종래의 관념과 가치를 부정하고 새로운 실험을 시도하려는 예술 경향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아방가르드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랭보(J. Rimbaud), 위스망스(J. Huysmans), 말라르메(S. Mallarme) 등을 꼽아볼 수 있는데, 이들의 작품에서는 공통적으로 현실에서의 소외감을 확산시킨 절대적인 자유에 대한 동경과 환상의 세계에 대한 열망을 실험적인 방식으로 표현해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후 아폴리네르(G. Apollinaire)는 기계 문명의 발달 위에 찾아온 허무 의식을 발견하고 입체파의 이론적 지도자가 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중 스위스 취리히에서 일어난 다다이즘은 전쟁의 잔인성에 대한 증오와 합리적인 기술 문명의 부정, 일체의 억압과 제약을 거부하는 경향을 띠면서 예술에 존재하고 있는 전통과 가치 기준의 파괴를 지향하여 문학사에서 새로운 갈래를 이룩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아방가르드의 경향은 1930년대 이상(李箱)에게서 발견된다. 이상은 프랑스의 초현실주의의 전위적(前衛的)인 이론을 자신의 작품에 도입하여 「오감도」를 발표하였다. 이후로는 신백수(申白秀)나 이시우(李時雨) 등의 작품에서 초현실주의의 경향인 '의식의 흐름' 기법을 도입한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작품들을 찾아볼 수 있다.(강진호)   참고문헌 신희천, 조성준 편저, 『문학용어 사전』, 청어, 2001년 조셉 칠더즈·게리 헨치 편저, 『현대문학·문화 비평용어사전』, 황종연 역, 문학동네, 1999년 레나토포지올리, 『아방가르드예술론』, 박상진 역, 문예출판사, 1996년 ============================================= 지식백과를 알차게 쓰고 싶다면 지식리스트!  자동완성 켜기   담기수정문의보내기인쇄하기 글꼴설말 라틴 아메리카 문화의 이해 아방가르드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전세계적 위기상황에서 비롯된 20세기 초의 혁신적인 예술경향을 일컫는 용어가 바로 아방가르드 혹은 전위주의이다. 이러한 경향은 근대성에 대한 환멸에서 비롯되어 비이성주의에 근거하고 있으며 회화, 음악, 문학 분야에서 다양한 예술운동으로 나타났다. 유럽의 아방가르드 운동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 표현주의, 입체주의, 미래주의, 다다이즘 그리고 초현실주의였다. 공통적인 미적 특징은 시적 언어의 혁신, 전통적 형식의 거부, 기술과 과학의 발전에 부합하는 새로운 감각의 옹호 등이다. 한편 유럽의 아방가르드 운동은 중남미에도 전파되었고 많은 중남미 시인들이 직접 유럽을 왕래하며 독자적인 아방가르드 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중남미에서 일어난 전위주의 시운동으로서 대표적인 것은 칠레의 비센떼 우이도브로(Vicente Huidobro)의 창조주의(creacionismo), 호르헤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울트라이즘(ultraísmo), 푸에르토리코 출신인 루이스 요렌스 또레스(Luis Lloréns Torres)의 빵깔리스모(pancalismo), 도미니카의 도밍고 모레노 히메네스(Domingo MorenoJiménez)의 뽀스뚜미스모(postumismo), 콜롬비아의 레온 데 그레이프(León de Greiff)가 주도한 '로스 누에보스(LosNuevos)' 그룹, 쿠바 시인인 마리아노 브룰(Mariano Brull)의 순수시, 페루의 알베르또 이달고(Alberto Hidalgo)의 단순주의(simplismo), 멕시코 시인 마누엘 마쁠레스 아르쎄(Manuel Maples Arce)의 에스뜨리 덴띠스모(estridentismo) 등이 있다. 중요한 아방가르드 시인들은 다음과 같다. (1) 비센떼 우이도브로(1893.-1948.) 칠레의 유복한 가정 출신으로서 1916년에 파리로 가서 아폴리네르, 피에르 르베르디, 트리스탄 차라, 막스 야콥 등 유럽의 아방가르드 시인들과 교유하였고 프랑스어로 시를 썼다. 1918년에는 마드리드로 가서 스페인어권 최초의 아방가르드 시운동이라 할 수 있는 창조주의를 주창하였고 많은 스페인 시인들의 호응을 받았다. 대표작은 1931년에 쓰여진 『알따소르(Altazor)』이다. 창조주의는 자유로운 형식의 측면에서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언어의 일관성을 무시한다는 면에서는 다다이즘의 영향을 받았다. 순수한 은유로써 경이롭고 환상적인 그의 시 세계를 창조했다. 내가 한 개의 명멸하는 별 또는 반딧불이라면. 가슴엔 나비들이 머물고 상승하는 노래를 타고 한 줄기의 빛은 사막을 식민지로 삼고 이 눈 빛 종달새는 나로부터 사라져만 간다.1) 우이도브로는 특히 "장미를 노래하지 말고 시 속에서 꽃피게 하라. 시인은 작은 신이다" 라고 외치며, 현실의 모방이 아니라 또 하나의 현실을 창조케 하는 자족적인 시를 주장했다. 우이도브로의 원고 (2) 세사르 바예호(César Vallejo, 1892.-1938.) 20세기 중남미 시의 가장 중요한 선구자로 간주된다. 젊은 시절에 혁명적 사상가들과 교류를 통해 시적 안목을 다졌다. 1918년 모데르니스모의 영향이 엿보이는 『검은 전령들(Los heraldos negros)』이란 시집을 내며 1922년에는 『뜨릴세(Trilce)』를 발표한다. 『뜨릴세』는 표현법, 이미지, 구어체 언어, 연금술적 언어기법 등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이밖에도 고어, 교양어, 속어, 기교, 토착어 등을 사용하면서 시적 가치률 창조했다. 그러나 그의 시는 단순한 언어의 기교에 그치질 않고 현실을 조각 내어 조망함으로써 각 시행마다 끊임없이 사상이 파편화되어 새로운 형태로 나타난다. 세사르 바예호 초상 나 지금에야 점심을 먹었고 가진 게 없네 어머니도, 소원도, 음식을 권하는 말도, 물도 혼혈인이 달변으로 봉헌 기도할 때, 심상의 늦음과 소리의 커다란 이음매 단추들에 관해 질문하실 아버지조차도 없네.2) 『뜨릴세』는 전통과 결별한 아방가르드 시의 전형을 보여준다. 시인이 세상을 떠난 후 유작들이 『인간적인 시(Poemas humanos)』와 『스페인, 이 잔을 내게서 치워다오(España, aparta de mi este cáliz)』에 편집되었다. 마지막 시집은 스페인 내전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시들이다. 바예호는 창조주의를 주창했던 비센떼 우이도브로와는 반대로 현실참여적인 문학을 지향하였다. 실제 삶에서도 그는 적극적으로 정치에 관여하여 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소련 여행을 하기도 했으며 투옥된 경험도 있다. (3)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 보르헤스는 소설가로 유명하지만 작품활동은 시를 통해 시작하였다. 1918년 제네바에서 마드리드로 온 뒤 울트라이즘 시인들과 접촉하였고 1921년 아르헨티나로 귀국하여 이 아방가르드 시운동을 전파하였다. 하지만 곧 아방가르드 운동과 결별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지와 메타포의 중시, 간결한 표현 등 아방가르드적인 요소들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정(Fervor de Buenos Aires)』(1923.)에 남아 있다. 이후 소설만큼 주목받지 못하지만 작가는 『정면의 달(Luna deenfrente)』, 『산 마르띤 노트(Cuaderno San Martín)』, 『그늘 예찬(Elogio de la sombra)』, 『심오한 종족(La razaprofunda)』, 『기호(La cifra)』 등 적지않은 시를 썼다. 「은총의 시(Poema de los dones)」라는 작품에서 알 수 있듯이 대체로 그의 시는,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간결함과 힘 그리고 관념성을 본질적인 요소로 가지고 있다. 아무도 값싼 감상주의로 호도하거나 질책하지 마시라 이렇게 찬양하여도, 신이 주신 그 솜씨를, 기막힌 아이러니로 내게 책과 어둔 밤을 함께 주신 솜씨라. 그 분은 거대한 이 책의 도시를 빛 잃은 두 눈동자에게 주셨다. 이들은 단지 꿈속의 도서관에서만 읽을 수 있으니 내게 베풀어진 무심한 문장들을.3) 빠블로 네루다 (4) 빠블로 네루다(Pable Neruda, 1904.-73.) 15세 때 『셀바 오스뜨랄』이란 잡지에 한 묶음의 시를 투고하였고 1921년 봄에는 산띠아고에서 매년 열리는 백일장에 「황혼일기」로 당선되었다. 1923년의 「황혼일기」와 그 이듬해의 『스무편의 사랑의 시와 하나의 절망의 노래(Veinte poemasde amor y una canción desesperada)』를 시작으로 그의 시집이 선보이기 시작한다. 이 두 권의 시집은 작가의 청년기적 작품으로 후기 모데르니스모 단계에 속한다. 특히 1924년 발표된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하나의 절망의 노래』는 진부한 사랑의 테마를 참신하고 독창적인 기법으로 다루어 새로운 시풍으로서 네루다주의의 시작을 예고했다. 네루다이즘은 한마디로 19세기말 모데르니스모 시인인 니카라과의 루벤 다리오의 달콤한 멜로디 경향에서 탈피하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 시집은 오늘날까지도 스페인어로 쓰여진 가장 아름다운 시집으로 인정되고 있다. 네루다 스스로가 자신의 작품은 바로 전통과의 투쟁의 산물이며, 각각의 시집은 바로 새로운 표현체계를 발견하고자 하는 끝없는 탐색의 과정을 반영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시는 인간과 역사를 떠나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추상적인 대상이 아니라 바로 개개인의 삶에서 볼 수 있는 견디기 힘든 아픔과 함께 납득할 수 없는 동시대의 구체적인 사회 모순 현상들의 원인까지도 깊이 있게 파악하고자 노력하였다. 한편 『지상의 거처(Residencia en la tierra)』는 초현실주의 영향을 받은 시집으로서 이성을 배제하고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을 도입했다. 세계를 해체해 보는 시각을 견지했으며 외부적인 현실을 답습하는 전통적인 규범을 파괴했다. 자유시는 연금술의 언어속으로 숨어버렸지만 비교법, 이미지, 수사법, 그림자와 공간 사이에 위치한 '하나의 심장'의 시각에서 사물을 투영하는 몽상적인 상징법이 특징이다. 스페인내전은 네루다를 신비주의적 시인에서 정치적 시인으로 변모시켰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꼽히는 『대찬가(Canto General)』(1950.)는 열다섯 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아득한 신세계의 신화적 기원으로부터 최근의 각 나라의 역사적 정치적 변천사에 이르기까지 다루는 대서사시이다. 이 시는 후반부의 「마추삐추의 정상(Altus de Machu-Picchu)」에서 절정에 이르는데, 칠레에 대한 찬양,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칭송, 그리고 무력과 돈으로 억압하고 군림하는 자들에 대한 거부를 읽을 수 있다. 아메리카에 대한 네루다의 사랑은 『일상의 것들에 바치는 송가(Odas elementales)』(1954.)와 『일상의 것들에 바치는 새로운 송가(Nuevas odas elementales)』(1956.)에도 잘 나타나 있다. 다음시는 『대찬가』중에서 「아메리카, 나는 네 이름을 그냥 불러보는 것이 아니다(América, no invoco tu nombre en vano)」의 일부분이다. 아메리카, 나는 네 이름을 그냥 불러보는 것이 아니다. 내 심장에 칼을 붙잡아 맬 때, 내 영혼에 비가 새는 것을 참고 견딜 때, 창문을 통해 너의 새로운 하루가 나를 투과할 때, 나는 나를 만들어낸 빛이면서 그 안에 있고, 내 운명을 정하는 그늘에 살고 있고, 너의 본질적인 여명 안에서 잠들고 깨어난다.4) 네루다는 또한 직접 정치에 뛰어들어 상원의원을 지냈고 1970년 공산당 대표로서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했으나 살바도르 아옌데에게 사회주의 연합세력의 단일 후보직을 양보했다. 이후 프랑스 주재 대사를 지내던중 197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는데 한림원에서는 "근원적인 기운의 약동으로 대륙의 운명과 꿈에 생기를 주는 시"라고 수상동기를 밝혔다. 네루다는 1973년 삐노체 장군의 쿠데타에 의해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합법적 사회주의 정권이었던 아옌데 대통령이 실각한 후 곧 암으로 타계한다. 유고집으로는 『회고록 : 나의 삶을 고백한다(Memorias : Confieso que he vivido)』 있다. (5) 호세 후안 따불라다(José Juan Tablada, 1871.-1945.) 모데르니스모의 영향을 받아 시를 쓰기 시작했으나 곧 그것을 유치하다고 간주하고 결별하였다. 정련된 기법으로 울트라이즘 시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뭐니뭐니해도 그의 가장 큰 공적은 일본의 시형식인 하이쿠를 중남미 문학에 도입한 것이다. 그는 하이쿠를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그 형식의 시를 쓰기도 했다. 「수박(Sandía)」이라는 다음 시는 유연한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는 그의 대표적인 시이다. 빨갛고 시원한 여름의 너털웃음, 수박의 길쭉한 한 조각.5) (6) 검은 시 20세기 예술의 새로운 경향은 원초적인 문화의 재평가였다. 유럽의 예술가들은 아프리카 예술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아폴리네르는 그들의 시를 '검은 시(poesía negra)'라고 명명했다. 중남미에서 검은 시는 스페인 문화와 아프리카 문화가 결합되어 독특한 형태의 시를 낳았다. 1930년경 쿠바, 푸에르토리코 그리고 도미니카는 흑인들의 검은 혼을 그들의 리듬, 춤, 음악, 역사, 미신을 통해 표출하는 중심무대가 되었다.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그들의 검은 시가 출현하였다. 대표적인 시인과 작품으로는 루이스 빨레스 마또스(Luis Palés Matos)의 『검은 춤(La danza negra)』, 쿠바의 민속적인 요소들을 시에 담은 니꼴라스 기옌(Nicolás Guillén)의 『군인들을 위한 노래와 관광객을 위한 소리(Cantos para soldados y sones para turistas)』, 『송고로 꼬숭고와 다른 시들(Sóngoro cosongo y otros poemas)』, 『완벽한 소리(El son entero)』, 흑인적인 요소와 정치적 요소 그리고 사회적 요소가 혼재되어 있는 『맵시있게 나는 비둘기(La paloma de vuelo popular)』가 있다.  
244    七月七夕 /중국 조선말세계 댓글:  조회:6476  추천:0  2015-08-20
  칠월칠석이란? 칠월칠석일이란? 七月七夕. 전설 속의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이죠~   우리나라 한국, 중국, 일본 등에서  음력 7월7일(일본은 양력 7월 7일)에 각 나라의 전통적인 행사를 지내는 날입니다.   칠석의 유래하면 역시 칠월 칠석 견우와 직녀 이야기, 오작교를~  칠석날 저녁에 은하수의 양쪽 둑에 있는  견우성(牽牛星)과 직녀성(織女星)이 1년에 1번 만난다는 전설에 의해 별에게 제사를 지내는 행사도.. 옛날에 견우와 직녀의 두 별이 사랑을 속삭이다가  옥황상제(玉皇上帝)의 노여움을 사서 일년에 한번씩  칠석 전날 밤에 은하수를 건너 만났다는 전설이 내려오죠~ 이때 까치와 까마귀가 날개를 펴서 다리를 놓아  견우와 직녀가 건너는데요. 이 다리를 오작교(烏鵲橋)라고 부르고요~~     칠석 관련 속담?   까마귀도 칠월 칠석은 안 잊어버린다! 중요한 사실이나 날짜는 명심하여 잊지 말자는 뜻의 속담이랍니다~     칠석날 까치 대가리 같다! 칠석날 까치 대머리 같다! 칠석날 까치의 머리가 벗겨진 것과 같이  머리털이 빠져 성긴 모양을 의미하는 속담이랍니다~ 까치들이 견우와 직녀의 만남을 위하여 오작교를 놓기 위해 돌을 머리에 이고 하늘나라로 올라가기 때문에  머리의 털이 다 빠진다는 것^^       ​ 칠석 때는 더위도 약간 줄어들고  장마도 대부분 거친 시기이지만, 이때 내리는 비를 '칠석물'이라고 한답니다!   오늘 소나기..  비소식이 들리는데 이 칠석물을 보는 건가요? ㅎㅎ   칠월 칠석에 장마로 인한 습기 찬 장롱과 서적들을 햇볕에 쪼이며 바람을 쐬어 말리는 것을  포쇄(曝曬)라고 한답니다. 특히 이때 말려 두면 옷과 책이  좀 먹지 않고 습한 겨울을 잘 보낼 수 있다고 합니다~   칠석날 음식? 칠석기도? 칠월칠석축제?   이 시기엔 호박이 탐스럽고~ 오이와 참외가 많이 나오는 시기이므로  민간에서는 호박부침을 만들어 칠성님께 칠월칠석기도를 올렸답니다~ 글을 쓰다 보니 왜 백주부의 백선생의 호박전이 생각이 나는 걸까요.. ㅎㅎ 최근엔 칠월칠석떡 나누기 행사도 종종 보이네요.,   칠월칠석날엔 여타의 다른 세시풍속과는 달리  줄다리기와 같은 놀이를 하지는 않았답니다.   대신 별이 뜨는 쪽을 향하여 칠성제를 지냈는데요.   칠석날 처녀들은 직녀성에게 바느질 솜씨가 늘길 빌기도 했다는 군요~~ 목욕재계를 하고 제사를 올리는데,  칠성제를 지내면 아들을 낳는다는 이야기도 전해내려온답니다~~~ 남자 아이들은 견우와 직녀를 주제로 글짓기도 했다고 하네요.   또한 칠석날의 날씨를 보고 견우와 직녀의 만남을 점쳐 보기도 하였답니다~ 칠석일 저녁에 비가 내리면 만나서 흘리는 기쁨의 눈물이라 하였고요. 칠석 다음날 비가 오면 이제 헤어지면 1년 후에나 보게 될 두 별이 헤어짐을 슬퍼하여 흘리는 눈물이라고 점쳤다는 군요..   그리고.. 칠석날엔 까마귀와 까치를 볼 수가 없다는? 이는 까치와 까마귀들이 은하수에 다리를 놓아 주러 갔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외 까치밥주기 풍속. 풍습도 있었는데요.. 칠석날과 까치에 그치지 않고, 굶주린 새들을 위해 과실나무에 마지막 결실을 서너 개쯤 남겨두는 까치밥의 정신으로 이어졌답니다~~ ㅎㅎ   ​ ​ 칠월칠석은사랑의날~   칠석을 언제부터 사람들이 기렸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아주 오래 전부터 견우와 직녀는  동양적인 사랑의 상징으로 표상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견우와 직녀의 사랑이 널리 회자되고 있는 이 날을 기리고 있고요.   칠월칠석일 아침에 비가 내리면  견우와 직녀가 상봉하는 기쁨에 흘리는 눈물이라고 했으니.. 오늘은 사랑고백하기에 최적인 날입니다~!   오늘은 칠월칠석 별자리, 여름철의 별자리에 대한 관심도 모아지고 있네요?! =======================================================   답변 골라보기 선택됨선택옵션 답변 정렬순서선택됨선택옵션 답변 목록 채택된 답변답변추천해요1추천자 목록 중국조선말(中國朝鮮—)은 중화인민공화국에 거주하는 재중동포 사이에서 사용되는 한국어를 가리킵니다. 지린 성, 헤이룽장 성, 랴오닝 성의 이른바 ‘동북 3성’에서 주로 사용됩니다. 다음의 내용을 참조하세요. 개요 - 언어 규범  중국조선말에 관한 망라적인 언어 규범은 동북3성조선어문사업협의소조(중국어 간체: 东北三省朝鲜语文工作协作小组)가 1977년에 작성한 ‘조선말규범집’이 처음이다. 이 규범집에는 표준발음법, 맞춤법, 띄어쓰기, 문장부호에 관한 규범이 수록되었다. ‘조선말규범집’은 어휘에 관한 규범을 덧붙이고, 일부를 가필 수정한 개정판이 1984년에 만들어졌다. 중국조선말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북한’)의 언어에 규범의 토대를 두어 왔다. 그러한 경위가 있어 중국조선말의 언어 규범은 모두 북한의 규범(조선말규범집 등)과 거의 동일하다. 따라서 만약에 이 규범을 가지고 중국조선말의 ‘표준어’를 규정할 수 있다면 그 ‘표준어’는 북한의 문화어에 한없이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한중수교 이후에는 대한민국으로부터 진출한 기업이나 한국어 교육 기관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남한식 한국어의 사용이 확대되고 있다. - 지역 차이  현실적으로 조선족 사이에서 사용되는 조선어는 균질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다양하다. 조선족은 조선 시대부터 일제 강점기 시대에 걸쳐 조선반도북부를 중심으로 조선반도각지에서 만주지역으로 이주했다. 일반적으로 함경도 출신자들은 두만강 건너편인 길림성으로 가고, 평안도 출신자들은 압록강 건너편인 료녕성으로 가는 경우 많았기 때문에 길림성에서는 함경도의 방언적 특징이 강하게 남아 있고 료녕성에서는 평안도의 방언적 특징이 강하게 남아 있다. 한국어의 방언과 각 지역의 관계는 대략 아래와 같다. 동북(함경도) 방언 :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흑룡강성 목단강 시 등. 연변의 두만강 연안 동부 지역은 육진 방언이다.  서북(평안도) 방언 : 료녕성 중부,동부;길림성 남부.  동남(경상도) 방언 :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제외한 길림성 기타 지방, 흑룡강성 서북부와 서남부,료녕성 일부.  중부 방언과 서남(전라도) 방언은 큰 사용 지역이 없고 동북 각성에 산재하고 있다. 중부 방언 지역으로서 길림성 유하현 강가점향 경기둔(吉林省 柳河県 姜家店郷 京畿屯)을 들며, 서남 방언 지역으로서 길림성 교하현 천북향 영진촌(吉林省 蛟河県 天北郷 永進村)을 들 수 있다.[2]제주방언등 다른 방언의지역은 형성되지 않았으나 중국이주1세중에서 가끔 포함되여 있다. 특징  음운, 문법, 어휘 각 분야에 있어서 바탕에 깔린 한국어방언에 따라 지역마다 방언적특징을 가진다. 음운  서남 방언 지역에서는 단모음 [ø](ㅚ)와 [y](ㅟ)를 가지며 동남 방언 지역에서는 [ɛ](ㅐ)와 [e](ㅔ)가 구별되지 않는다. 중국조선말은 일반적으로 한반도북부 방언의 영향력이 강하여 일부의 /ㅈ/, /ㅊ/, /ㅉ/이 /ㄷ/, /ㅌ/, /ㄸ/으로 나타나거나 모음 /i/, 반모음 /j/에 앞선 /ㄴ/이 어두에 올 수 있는 등 북부 방언의 특징들을 잘 간직한다. 또 동북 방언, 동남 방언 지역에서는 변별적인 고저 악센트(이른바 ‘성조’)를 가지며 소리의 높낮이로 단어의 뜻을 구별한다. 문법  표준어의 ‘-ㅂ니까/-습니까’가 길림성 화룡시, 훈춘시(둘다 동북 방언 지역)에서 ‘-ㅁ둥/-슴둥’으로 나타나고 흑룡강성 태래현(동남 방언 지역)에서는 ‘-ㅁ니꺼/-심니꺼’로 나타나는 등 지역적특징이 있다. 또 통사론 차원에서 중국어의 영향을 받는 경우가 있다. 전화를 치다 (전화를 걸다) < 중국어 간체: 打电话   어휘  어휘는 중국어의 영향이 아주 크며 적지 않은 어휘가 현대 중국어로부터 차용된다. 중국어 어휘를 한국 한자음으로 읽는 차용 어휘. 판공실 < 중국어 간체: 办公室 (사무실)  그외의 차음현상: 중국어 발음을 따른 차용어. 성조의 탈락 등 조선어의 음운 체계에 맞춰 중국어 원음이 약간 변형된다. 땐노 < 중국어 간체: 电脑, 병음: diànnăo (컴퓨터)   토픽전문가총 획득메달 전문|   채택된 답변답변추천해요1추천자 목록 한국어의 방언인 중국조선말에 대한 모든 것 -중국에 살고 있는 재중동포들이 사용하는 말입니다.  -한국어 방언의 일종으로, 만주 연변지역과 흑룡강성 남부에서 가장 가까운 방언은 동북 방언이다. 이유는 이 지역 연변 조선족동포 대부분이 함경도에서 이주한 사람들이기 때문. 다른 길림성이나 랴오닝성에서는 서북 방언계의 언어를 쓴다. 그리고 원래 조선에서 이주할 때 마을이나 친족 단위로 만주의 시골로 한꺼번에 이주하는 사례가 많았다. 그래서 마을중엔 동네 전체가 서남 방언, 경기 방언, 동남 방언 등 특정지역 사투리를 쓰는 마을이 꽤 많다. 역사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연변에 조선족 자치구가 설치 되었고, 주은래가 총리로 재직 당시 "중국의 조선어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문화어를 표준어로 한다"는 조치로 북한의 문화어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그렇지만 문화대혁명 당시에 중국 전역에서 수많은 문헌자료들과 문화유산들이 사라졌는데 연변지역이라고해서 예외는 아니라서 많은 조선어 서적과 사진, 문화자료들이 대거 소실되거나 사라졌다. 당시 조선어로 된 책들 중 마오주의에 관련이 없거나, 한복 사진이 나오거나, 한글로 적은 편지가 나오기만 해도 조선 특무(간첩), 남조선 특무, 지방민족주의자로 몰려서 처벌받거나 조리돌림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출처: 연변 문화대혁명, 10년의 약속.) 문화대혁명이 끝난 이후에는 이전에 사라졌던 책들이 다시 발간되는 등 조선어 서적의 발행량이 크게 늘기도 했다. 한 편으로 북한의 경제가 막장화되어가고, 남한과의 교류가 잦아지면서 남한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문법  어휘에선 북한의 문화어에 영향을 받아서 두음법칙을 인정하고 있지 않고, 문법적인 면에선 중국어의 영향을 받기도 하다. 예를 들면, '전화를 걸다'를 중국어 打电话에서 유래된 '전화를 치다'하는 형태로 쓴다 하지만 90년대부터 남한과의 교류가 잦아지면서 남한 표준어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특히 연변쪽 조선어 티비와 라디어 방송의 아나운서의 발음과 표현이 상당히 한국화 되었다. 사실 그럴수밖에 없는게 90년대 이후 한국문화를 접할수있게 되면서 어휘면에서 영향이 많이 받고, 한국에 많이 취업을 하게되면서 자연스레 많은 조선족동포들이 표준어를 접하게 되었고, 조선문책의 발행량도 수익성문제로 적어지는 바람에 한국서적에 많이 의존 할수밖에 없었다. ... ...    
243    연변작가협회 그 발자취 댓글:  조회:5897  추천:1  2015-08-16
      건국후 중국에 조성된 새로운 사회력사적환경과 조건, 그리고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생활의 제반 분야에서 거대한 변혁이 이룩된 거창한 현실은 조선족작가들로 하여금 감격과 새로운 지향으로 흥분되게 하였으며 또 그들에게 문학활동의 사회적기반 확립을 위한 문단의 새로운 정비작업과 새 시대의 조명을 받는 새로운 민족문학건설에 떨쳐나설것을 절박하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이런 시대적요청에 부응한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해방후  해방전 이민문단의 중견작가들이 거의 다가 조선반도에로 대이동함에 따라 이민문단은 해체의 운명을 맞게 되었다. 중국에 남은 해방전 작가로는 리욱과 김창걸뿐이였으므로 조선족문단은 백지상턔와 다름없게 되였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족문인과 관계인사들이 해방과 함께 문학단체의 결성을 위해 몸부림쳤다. 그 단체들로는 간도문예협회(연길), 동라문인동맹(연길), 동북신흥예술협회(목단강), 중쏘한문화협회(연길), 로농예술동맹(도문) 등을 들수 있다. 그러나 이런 단체들은 단명(短命)이였다.  작가들은 자기의 조직적인 문학단체도 없이 분산적으로 창작활동을 벌려야 했음으로 이런 상황은 조선족문학발전을 엄중히 위협하고있었다.    변화된 이런 상황에 대비하여 치열한 민족의식과 조선족문학건설의 사명감을 가진, 전국 각 지역에 산재해 있던 적지 않은 작가들 이를테면 흑룡강성 목단강, 할빈지역에서 문학활동에 종사하고있던 김례삼, 김태희, 최수봉, 김동구, 리홍규, 임효원 황봉룡, 최현숙, 길림성 통화, 매화구지역에서 문학적기량을 과시하고있던 최정연, 주선우, 백남표 그리고 관내의 중국 항일 근거지 태항산에서 문학활동에 종사하였던 최채, 김학철, 정길운, 고철 등 작가들이 조선족문단의 새로운 정비작업과 새로운 조선족문학건설을 위해 건국 전야와 직후 당시 조선족 정치, 경제, 문화 중심지인 연변의 연길에 이주함과 아울러 연길시와 연변의 기타 지역에서 문학창작에 정진하고있던 작가들 이를테면 리욱, 김창걸, 현남극, 채택룡, 마상욱, 설인, 김순기, 홍성도, 김창석, 서헌 등과 대회합하여 새로운 “문화부대”를 이루게 되였다.   조선족문단의 새로운 정비작업과 문학활동에는 곤난이 첩첩하였고 단체결성, 잡지창간, 인사배치 등에서 미처 예측할 수 없는 변화가 무시로 나타나서 당시의 작가들로 하여금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게 하였다. 하지만 “새로운 문화부대”의 문인들은  만난을 박차고 문단의 사회적기반 구축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50년 1월 15일, 제1차중화전국문학예술일군대표대회(1949년 7월 2일-1949년 7월 19일)의 정신을 받들고 최채, 현남극, 김동구, 임효원 등의 발기하에 연변문예연구회를 성립하였다. 성립대회는 연변일보 전신인 동북조선인민보 대회당에서 열렸다. 주임에 최채, 부주임에 리욱, 김동구, 상무위원에 전춘봉, 김태희, 고철, 채택룡, 백남표 등 9명으로 상무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그 산하에 문학,연극, 음악, 무용, 미술 등 5개 부를 두고 문예창작활동을 여러모로 조직하였다. 당시 회원은 26명이였다. 이 연구회는 건국후 조선족문단의 기반을 닦기 위한 첫 조직적거동이였다.     하지만 이 연구회는 조선족문예사업의 급속한 발전 요구에 만족을 주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 비추어 1951년 4월 23일에 연변문예연구회를 해소하고 연변문학예술계련합회주비위원회를 결성(주임 김동구)하여 그 산하에 문학, 연극, 무용, 미술, 음악 등 5개부를 두었다. 기관지로 《연변문예》를 6호까지 발간하고 페간되였다. 이 시기의 주필은 김동구, 편집위원은 김동구, 김순기, 리홍규, 채택룡이였다.   그 해 8월, “3반5반(三反五反)”운동중에서 정치형세의 변화에 따라 연변문학예술계련합회 주비위원회 지도부를 다시 정돈하였는데 주임에 최채, 김학철, 부주임에 서령, 비서장에 임효원이였다. 그해 12월에 이르러 중공연변지위에서는 또 이른바 “인사변동”을 단행하여 김학철을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복잡다단한 주비작업을 거쳐 1953년 7월 10일, 드디여 연변문학예술계련합회 제1차대표대회! (대표 56명, 회원 75명)를 열고 연변조선족자치주문학예술일군련합회(략칭 연변문련)를 정식으로 성립하였다.     연변문련은 1954년 1월 《연변문예》지를 복간(1956년 12월까지 총35호를 내고 페간)발행함으로써 조선족작가 예술인들에게 활무대를 마련해 주었고 그들의 창작활동을 추진하였다. 연변문련 창립 당시의 주임에 배극, 리홍규, 부주임에 정길운, 김학철,, 위원들로는 리홍규, 주선우, 임효원, 김태희, 조득현, 조무, 김순기, 김창걸, 배극, 정길운, 김학철, 정명석, 조창선, 정진옥 등 13명이였고 《연변문예》주필은 리홍규, 부주필로는 정길운, 김순기였다. 1956년 3월, 중공연변주위선전부에서는 《연변문예》편집위원회를 개선하였는데 주필로는 리홍규, 부주필로는 정길운, 편집위원들로 김순기, 최현숙, 홍성도, 임효원, 주선우, 리근전, 김학철, 황봉룡 등이였다.    제1차연변조선족자치주문예일군대표대회와 연변문련의 성립은 조선족문예사업이 조직적인 궤도에 들어섰다는것을 표징하는바  이것은 조선족의 당대문학발전사에 있어 일대전환을 표시하는 리정표적인 의의를 띠고있다.     연변문련의 성립 및 활동은 연변문학발전에 추진적역할을 하였지만 날로 확대되여가고있는 작가군체의 요구를 만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였다. 따라서  그 당시 작가들은 자기들을 대변할수 있는 독립된 작가협회의 탄생을 갈구하였다.   바로 이런 시각에 리홍규와 황봉룡이 연변지역의 문인들을 대표하여 1956년 1월 중국작가협회 주최로 된 소수민족작자좌담회에 참석하게 되였는데 그 좌담회에서 그들은 연변문단 상황회보와 더불어 연변에 작가 자체 조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당시 중국작가협회 지도부를 감동시켰다. 중국작가협회는 북경에서 열린 제2기 제2차리사회(1956.2.27)에서 신강위글자치구, 내몽골자치구 및 연변조선족자치주 등에 중국작가협회 분회를 성립할것을 결정하였다. 중국작가협회 동북분회는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의 성립을 위해 리욱 등 연변작가 10여명을 회원으로 발전시켰다. 연변에서는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설립준비위원회(주임:배극, 위원:리홍규, 김순기, 주선우, 비서장:임효원)를 구성하고 복잡다단한 준비작업을 거쳐 1956년 8월 15일 연변조선족자치주 초대소에서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연변작가협회 전신) 제1차회원대표대회를 개최하였다.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의 탄생을 선언하는 이 대회는 중국작가협회 지도부와 연변주위 지도부의 각별한 배려를 받아 성황리에 진행되였다. 당시 중국작가협회 서기처 강탁서기, 동북작가협회(심양분회)사전수부주석, 길림성문련 마염부주임, 당시 중공연변주위 서기 주덕해, 연변조선족자치주 인민정부 부주장 교수기, 리호원 등이 대회에 참석하여 대회를 빛내주었다.  대회에서 강탁서기가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설립에 관한 중국작가협회의 결의를 선포하였다.   결의문은  이 단체가 연변 각 민족 작가들 및 기타 지구 조선족작가들이 자원적으로 결성한 인민단체로서 중국작가협회 분회에 속하며 당지 당위의 령도를 받는다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준비위원회 주임 배극이 《연변문학의 몇년래 창작상황과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임무》라는 제목으로 사업보고를 하였고 강탁서기, 사전수부주석, 마염부주임이 축사를 드렸다. 강탁서기는 축사에서 “소수민족지구에서 작가의 조직 즉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를 성립한것은 우리 나라 력사상 종래로 없었던 일이며 천지개벽이래 첫 일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우리의 축하가 얼마나 충분한 리유가 있는가를 설명한다”라고 했다.   8월 15일 대회에서는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초대 회원39명(그중 한족회원 2명, 회족회원 1명) 명단을 공포하였다. 초대 회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리욱, 임호(임효원), 김철, 리행복, 최정연, 황봉룡, 김례삼, 란수봉(한족), 조룡남, 정국초(한족), 리근희, 윤정석, 최수봉, 서헌, 최형동, 김인준, 홍성도, 황옥금, 김순기, 차창준, 김창석, 주홍성, 채택룡, 배극, 리홍규, 최현숙, 주선우, 정명석, 마상욱, 김동구, 리근전, 김창걸, 리희일, 정길운 왕유(회족), 마상욱, 최채, 홍춘식, 김태희(총 39명).   8월 16일에는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제1기 제1차 리사회의를 개최하여 주석단을 선거하고 리사회를 구성하고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규약(수정초안)》을 채택하였다.   초대 주석에 최채, 부주석에 배극, 김순기, 정길운, 최정연, 리사(12명)에 최채, 배극, 최정연, 정길운, 김순기, 주선우, 임효원, 최현숙, 리홍규, 김창걸, 황봉룡, 리근전 등이였다.   이 대회에서는 건국후 조선족의 문학건설과 창작실천의 경험을 총화하고 분회의 중심과업을 다음과 같이 확정하였다. . “작가들로 하여금 우리 문학의 주인공들의 생활실제에 깊이 침투하도록 조직하고 도와주며 작가들을 사상상과 예술상에서 성숙하도록 하는 방면에서 가능한 일체의 방조를 아끼지 않으며 문학방면에서의 일체의 잠재력량을 발견하고 조직하여 작품을 쓰도록 하며 적극적으로 청년작자를 배양하며 창작경쟁과 자유토론을 전개하면서 당의 의 방침을 잘 관철시켜야 한다.”(배극의《몇년래 연변의 문학창작정황과 중국작가협회연변분회의 임무》에서. 《연변문예》1956년9호)   이 대회에서는 작가들이 거창한 사회주의현실속에 들어가며 문학신인들을 배양하며 “백화만발 백가쟁명”의 방침을 관철하여 제재, 쟝르, 형식, 풍격의 다양화를 제창하고 예술상에서 부동한 류파의 자유로운 경쟁을 제창하며 “시대의 영웅적인민의 찬란한 사시로 되는 작품을 창작”하며 조선족의 문학유산을 발굴, 정리하고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문제 등을 보다 똑똑히 밝히였다.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가 성립된 후 그 산하에 창작위원회, 민간문학위원회, 번역위원회, 간행물위원회를 설치하고 그를 통해 자기의 활동을 힘있게 추진시켰으며 또한 1957년 1월에 문학월간지 《아리랑》 (그의 전신은 《연변문예》.1958년 12월까지 발간하고 1959년 1월부터《연변문학》으로 개칭)을 발간함으로써 작가들에게 문학광장을 마련해주었다. 《아리랑》의 발간으로 하여 조선족문단의 문학창작이 더욱 생기를 띠게 되였고 사회주의적내용과 민족형식을 갖춘 새로운 민족문학을 건설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도가 한결 더 똑똑하게 되였다. 《아리랑》창간사가 그 좋은 실례로 되는데 그 몇대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아리랑》은 중국공산당의 정확한 민족정책과 ‘로농병을 위해 복무’하며 ‘백화만발, 백가쟁명’의 위대한 문예방침아래 탄생하였으며 독자 여러 동무들의 뜨거운 관심과 적극적인 협조 지지에 의하여 자기의 첫걸음을 떼였다.”   “《아리랑》은 창작상 가장 좋은 방법의 일종인 사회주의사실주의창작원칙에 립각하여 연변 및 국내 각지의 조선족인민들이 전국 각 형제민족인민들과 함께 진행하는 조국 사회주의건설의 줄기찬 로력적생활모습들을 반영하며 그들을 교육하여 사회주의건설의 더 큰 위훈에로 불러일으킨다.”   “《아리랑》은 당의 ‘백화만발, 백가쟁명’의 방침을 관철집행하기 위하여 제재와 쟝르 범위를 확대하면서 각종 류파, 각종 형식, 각종 풍격의 예술작품을 대담히 선택 게재하며 간행물의 독특한 풍격과 특색을 수립하기 위해 정상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아리랑》은 적극적으로 고전작품을 정리소개하며 민간문예를 발굴, 정리, 소개하는 사업을 집행하며 한족을 비롯한 국내 각 형제민족의 문학성취 및 세계문학의 정화들을 적극 소개함으로써 연변문학으로 하여금 민족문학의 우량한 전통을 계승 발양하며 민족풍격이 농후한 우수한 사회주의문학으로 되게 하며 조국의 사회주의문학건설의 위대한 사업에 이바지한다.”   이상에서 볼수 있는바와 같이 중국작가협회연변분회의 성립과 월간지 의 탄생은 조선족당대문학사상의 획기적인 사변이라고 말할수 있는것이다. 실로 조선족작가들은 이때로부터 자기의 전문적인 문학단체와 문학지에 기대어  자기의 창작활동을 폭넓게 벌릴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좋은 형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반우파투쟁” 및 그 후의 지속적인 비판운동과 문예계의 계급투쟁확대화와 절대화 등은 조선족작가로 하여금 “좌”경적로선과 사조의 속박속에서 모대기게 하였고 문단을 위축시키고 작가협회의 기능을 약화시켰다. “문화대혁명”시기에 이르러서는 중국작가협회연변분회 등 문학예술단체에 “뻬떼피구락부”라는 죄목을 들씌워 강박적으로 해산시켰다. “문화대혁명”이 끝난후 1978년 10월 연변조선족자치주문학예술계련합회 제2기 제3차전체위원(확대)회의를 거쳐 연변문련의 회복과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도 회복되였다. 이 회의에서 연변분회지도부를 새로 선거하고 연변분회산하에 소설문학, 시문학, 평론문학, 아동문학, 번역문학 등 창작위원회를 설치하고 할빈, 길림, 통화, 장춘, 심양, 북경 등 지역에 작가소조를 건립하였다. 하지만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는 이때로부터 1985년 4월까지 연변문련산하의 한개 협회로 있었다. 1985년 4월에 연변문련에서 정식으로 분립한 독립한 작가들의 전문단체로 된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는 1996년 8월에 다른 기타 성, 직할시 분회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새로운 사단법인등록법에 의해 지방작가협회로 즉 연변작가협회로 개칭하고 중국작가협회 단체회원의 일원으로 되였다.   문학지의 운명도 기구하였다. 지방민족주의를 반대하는 투쟁가운데서 “아리랑”이란 제목은 협애한 민족주의 색채가 짙다고 하여 1959년 1월 《아리랑》을 《연변문학》으로 개칭하였다. 《연변문학》은 1961년2월호까지 발간하고 페간되였다가 1974년 4월에 복간되였다. 《송화강》지는 할빈에서 1960년에 창간되여 총권 36호를 발간하고 페간되였다.   그런데 여기서 꼭 짚고넘어가야 할 점은 지난날 우리 문학지들은 “구사일생(九死一生)”, “비명횡사(非命橫死)”의 운명이란 멍에를 지고 숨가쁘게 걸어왔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좌”경적로선의 충격, 경제적곤궁, 문학시장의 한계 등으로 하여 어떤 문학지는 “비명횡사”하였고 어떤 문학지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지어 지난날에 우리 문학지들은 자기 이름도 타의나 자의에 따라 수시로 바꾸지 않으면 안되였다. 조선족의 문학단체와 문학지의 생존과정은 처절했으며 지어 한때는 죽음의 심연속에 추락되기도 하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연변작가협회 제9차 회원대표대회 성과적으로 페막 최국철 주석으로, 우요동 상무부주석으로, 김영건, 채운산, 전화민, 김경훈, 김혁, 황령향, 정호원, 최동일 부주석에 당선. 좌로부터 황령향, 김영건, 정호원, 우요동, 최국철, 채운산, 김혁, 최동일, 전화민. 2015년 8월 11일에 소집된 연변작가협회 제9차 회원대표대회가 각항 의정을 원만히 완수하고 이날 오후 연길 백사호텔 국제회의청에서 성과적으로 페막. 이번 대회에서는 《연변작가협회 제8기 리사회 사업보고에 대한 연변작가협회 제9차 회원대표대회 결의》, 《〈연변작가협회 장정〉에 수개에 대한 연변작가협회 제9차 회원대표대회 결의》, 《연변작가협회 제9기 리사회 리사 선거방법》을 심의 통과하고 제9기 리사회 리사를 선거하였으며 제9기 제1차 리사회를 소집하여 새로운 리사회 주석, 부주석을 선거하였다. 리사들이 주석, 부주석 선거를 하고있다. 연변주당위 선전부 부부장 리호남의 사회하에 진행된 연변작가협회 제9기 1차리사회에는 113명의 리사가운데서 사유로 17명이 결석, 96명 리사가 선거에 참가하였는데 제9기 리사회 주석에 최국철이, 상무부주석에 우요동(만족)이, 겸직 부주석에 김영건, 채운산, 전화민, 김경훈, 김혁, 황령향, 정호원, 최동일이 당선.    이번 대회 제9기 리사회 중 시가창작위원회 리사들로는 김영건, 리순옥, 윤청남, 주룡, 김영춘, 김현순, 리임원, 림금산, 박장길, 김승종, 박문파, 김일량, 석문주, 김창희, 허옥진, 김경희, 심예란, 석화 등이 선거되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242    혼상제례용어해설 댓글:  조회:7020  추천:0  2015-08-15
가가례(家家禮) : 집집마다 달리 하는 예법  가례(家禮) : 한 집안에서 쓰는 예(禮). 대부(大夫)의 집에서 쓰는 예절  가매장(假埋葬) : 임시로 시체를 묻는 것  가모(嫁母) : 시집간 어머니  가신(家神) : 집을 지킨다는 신  가토(加土) : 무덤에 흙을 더 끼얹거나 잔디를 더 입히는 것  갈(碣) : 가첨석(加檐石)을 얹지 앓고 머리를 둥그스름하게 만든 작은 비석  갈장(渴葬) : 예월을 기다리지 않고 급히 지내는 장례  감실(龕室) : 祖上(조상)의 位牌(위패)를 넣어 祠堂(사당)에 두는 상자 를 감실이라 하는데 이것은 여덟 짝의 문으로 4代(대)를 따 로 모시도록 만들어졌다.  강복(降服) : 부재모상(父在母喪)에 복을 강쇄(등급을 낮춤) 하는 것  강선(剛先) : 혼인 때 남자가 먼저 여자 쪽에 사성을 드리는 것  강신(降神) : 제사 지낼 때에 신이 내리게 하는 뜻으로 향을 피우고 술 을 잔에 따라 모사(茅沙)에 붓는 것을 말한다. 향을 피우는 것은 위에 계신 신을 모시고자 함이고, 술을 따르는 것은 아 래에 계신 신을 모시고자 함이다.  강유(剛柔) : 음과 양. 낮과 밤  강일(剛日) : 10간(干)의 홀수 날로 굳센 날의 뜻. 일진(日辰)의 천간(天干) 이 양(陽)에 해당하는 날  개문(開門) : 닫았던 문을 여는 것  개자(介子) : 맏아들(宗子) 이외의 모든 아들  개장(改葬) : 장례한 묘지에서 시신을 발굴하여 다른 장소로 옮겨 안장 하는 것  개제(改題) : 신주에 봉사자 중심으로 글자를 새로 고쳐 쓴 것. 주면의 글씨를 모두 지우고, 새로 분(粉) 칠을 하여 씀  개좌(開座) : 어떤 일을 논의하여 처리하려고 벌인 자리  갱(羹) : 국  견전(遣奠) : 영구가 집을 떠날 때 지내는 의식  경상(輕喪) : 상복을 석 달 동안 입는 상  계문(啓門) : 합문 뒤에 문을 여는 제사의 의식이다. 이 때 문을 열기 전에 제주는 기침을 세 번 한다.  계반개(啓飯蓋) : 밥뚜껑을 여는 것  계반갱개(啓飯羹開) : 밥그릇 뚜껑인 반개와 국그릇 뚜껑인 갱개를 여 는 것  계부(繼父) : 의붓아버지  계빈(啓殯) : 빈소를 열다.  계상(稽喪) : 거상(居喪) 중에 조객(弔客)에게 절하는 예. 이마를 땅에 대고 머리를 조아릴 뿐 예의를 갖추는 모양이 없는 것  계절(階節) : 묘소의 마당. 곧 무덤 앞에 평정하게 만들어 놓은 땅  고리성(告利成) : 제사를 마쳤다고 고하는 말  고복(皐復) : 초혼하고 발상하는 의식  고부(告訃) : 사람의 죽음을 알리는 것  고비(考妣) : 돌아가는 아버지와 어머니  고손(孤孫) :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신 다음에 할머니는 살아계시고 할아 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주상인 손자 즉 장손  고애손(孤哀孫) :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다음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모 두 돌아가셨을 때의 주상인 손자  고애자(孤哀子) : 외롭고 애달픈 아들이란 뜻으로 양친이 작고하였을 때 씀  고위(考位) : 돌아가신 아버지로부터 그 이상 각 대(代)의 할아버지 위 (位)를 말한다.  고자(孤子) : 외로운 자식이란 뜻으로 아버지를 여의었을 때의 자칭  고종명(考終命) : 제 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음  곡(哭) : 상례에서는 상제들이 소리 내어 우는 일. 읍(泣)은 소리 없이 우는 것  곡비(哭婢) : 예전에는 장례 때 곡성이 끊이지 않도록 상복한 계집종을 애곡하게 하였는데 이 계집종을 곡비라 함  공포(公布) : 관(棺)을 묻을 때 관을 닦는 삼베 헝겊. 발인할 때 명정과 함께 세워서 들고 감  과채탕적(果菜湯炙) : 맨앞줄부터 과채탕적 순으로 진설한다.  관(棺) : 시신을 담은 궤로 천판(天板) 하나, 지판(地板) 하나, 사방판(四 方板) 넷으로 이루어 짐  관건(冠巾) : 굴건과 두건  관세(盥洗) : 손을 물로 씻고 수건으로 닦음  관수(盥手) : 세수 대야 물로 손을 씻음  관수세수(盥水洗水) : 대야 물에 손을 씻는것  괄발(括髮) : 풀었던 머리를 다시 묶는 것  광중(壙中) : 시체를 묻는 구덩이  교배(交拜) : 서로 절하는 것. 혼인 때 신랑신부가 서로 절하는 것  교배례(交拜禮) : 혼인할 때 신랑신부가 맞절하는 일  교의(交椅) : 신주나 혼백상자를 놓아두는 긴 의자  교자상(交子床) : 네모로 된 큰 음식상  구반경(九飯頃) : 밥을 아홉 숟가락 뜨는 시간. =구식경(九食頃)  구천(九泉) : 저승  국궁(鞠躬) : 읍하는 자세로 허리를 굽히는 것  굴건(屈巾) : 상주가 두건 위에 덧쓰는 건  궐명(厥明) : 아직 날이 밝지 않은 때. 미명(未明). 그 다음 날  궤(簋) : 종묘, 문묘 등 나라 제사에 쓰는 기장이나 피를 담는 제기  궤연(几筵) : 영궤(靈几)나 혼백(魂魄), 신주(神主)를 모셔 두는 곳  궤전(饋奠) : 빈소에 제수를 차려 놓은 것  궤좌(几坐) : 무릎 꿇고 앉음  금(衾) : 소렴금으로 명주로 만든 속 이불  금정기(金井機) : 묏 구덩이를 팔 때 구덩이의 길이와 넓이를 정하는 정 (井)자 모양의 기구  기년(期年) : 만 1년  기신제(忌神祭) : 사람이 죽은 날 지내는 제사  기일(忌日) 사람이 죽은 날. 제삿날  기제사(忌祭祀) : 해마다 죽은 날에 지내는 제사  길례(吉禮) : 제사. 길사(吉祀)  길복(吉服) : 평상시의 정복  길제(吉祭) : 삼년상이 끝난 뒤에 주사자가 바뀐다는 것을 아뢰고, 5 대조는 체천(遞遷)을 다음번에 하거나 이제부터 제사를 지내지 않으며, 주사자 위주로 신주에 제사 대상과 봉사자를 고쳐 쓰는 등에 관한 제사  납골(納骨) : 죽은 사람의 유골을 절에 가져다 두거나 무덤에 묻음  납길(納吉) : 혼인절차 중 육례의 하나로 여자 집에 알려 혼인을 결정 하는 일  납주(納主) : 신주 들여 모시기  납징(納徵) : 납길한 후 정혼한 표시로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예물 을 보내는 일  납채(納采) : 신랑 집에서 신부집 으로 혼인을 청하여 보내는 예물(禮物)  내간(內艱) : 모친상. 승중의 할아버지의 상사  노제(路祭) : 발인할 때 밖에서 지내는 제사  뇌주(酹酒) : 술을 조금 따라 삼제주(三祭酒) 하  단자(單子) : 부조나 선사 등 남에게 보내는 물품의 이름과 수량 또는 보내 는 사람의 이름을 적어 받을 사람에게 알리는 종이  단헌(單獻) : 제사에 삼헌하는 술을 단 한 번만 올리는 술  담제(禫祭) : 대상을 지낸 그 다음, 다음달에 지내는 제사. 상복을 벗 는 제사  답소(答疏) : 답장  당내(堂內) : 8촌 이내  대곡(大哭) : 큰소리로 슬프게 우는 것  대공(大功) : 대공친의 상사에 9개월 간 입는 굵은 베로 지은 상복  대기(大期) : 대상의 기간  대기(大忌) : 부모 기일  대대(大帶) : 도포의 끈  대렴(大殮) : 소렴한 다음 날 시신에게 옷을 거듭 입히고 이불로 싸서 베로 묶는 일  대렴금(大殮衾) : 시신을 싸는 큰 이불  대상(大祥) : 사망 후 만 2년 만에 지내는 제사로서 소상을 지낸 지 1 년이 되는 날에 지내는 제사로 상례의 마지막에 해당함  대여(大輿) : 나라에서 쓰던 큰 상여  대제(大祭) : 종묘와 사직에 지내는 제사  대축(大祝) : 제향(祭享)에 축문을 읽는 자  도복(道服) : 도포(道袍). 도사가 입는 옷. 선비의 통상예복인 겉옷. 고대 에 집안에서 입던 평상복  도유사(都有司) : 향교, 서원, 중중, 계중 등에서 필요한 사무를 맡는 우두 머리  독개(櫝蓋) : 위패함 덮개  독축(讀祝) : 축을 읽는 것  독흘(讀訖) : 독축이 끝나는 것  돈장(敦匠) : 관곽(棺槨)에 대한 직책을 담당하는 사람  동심결(同心結) : 두 고를 내고 맞 죄어서 매는 매듭으로 염습의 띠를 매는 매듭  두(豆) : 김치 젖갈을 담는 제기. 뚜껑이 달린 제기(祭器), 나무로 만들 며 굽이 높고 받침대와 뚜껑이 있다.  두건(頭巾) : 머리에 쓰는 관  두동미서(頭東尾西) :생선을 제사상에 놓을 때에도 격식이 있는데, 머 리는 동쪽, 꼬리는 서쪽을 향하도록 하여 놓는 것을 말한다.  둔석(窀穸) : 무덤구덩이  만가(輓歌) : 상여를 메고 묘지로 가기까지 상여꾼이 부르는 가사  만사(輓詞) :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글  만장(輓章) : 죽은 사람을 애도하며 지은 글을 비단이나 종이에 써서 만든 것으로 부조(扶助) 중 만장 부조를 으뜸으로 쳤으며 만장이란 영 구를 끌고 간다는 뜻  망극(罔極) : 다 함이 없음  망료위(望燎位) : 축문을 불사르는 곳  망실(亡室) : 죽은 아내  망요예(望燎禮) : 축문지방을 불 사르는것  매안(埋安) : 신주를 무덤 앞에 파묻음  매혼(埋魂) : 종상(終喪) 후 혼백을 묘 옆에 묻는 것  멱목(幎目) : 염습할 때 얼굴을 가리는 것  명기(明器) : 사자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무덤 속에 시신과 함께 묻는 식기, 악기, 집기, 무기 따위로 실물보다 작게 만드는 상징물  명정(銘旌) : 죽은 사람의 품계, 관직, 성씨를 기록한 기  모사기(茅沙器) : 강신할 때 쓰는 띠의 묶음과 모래를 담는 그릇  모상삼경지진(茅上三傾至盡) : 강신술을 묘 앞에 세 번 기울여 따름  모선망(母先亡) : 어머니 먼저 죽음  묘갈(墓碣) : 무덤 앞에 세우는 둥그스름하고 작은 돌비석  묘도수갈(墓道豎碣) : 묘 근처에 비석을 세우는 것  묘지(墓誌) : 묘지는 죽은 이의 성명.경력(經歷).공덕(功德).생사장(生死 葬)의 연월일등을 기록한 글로 사기판(砂器板)이나 돌 등에 새 겨 무덤 옆에 묻는 것을 말한다. 뒷날 무덤이 유실(流失)되었 을 경우 자손들이 정확한 위치를 알기 위해서이다.  묘표(墓表) : 무덤 앞에 세우는 돌을 표석 또는 묘표라고 한다.  무시곡(無時哭) : 정한 때가 없이 아무 때나 곡을 하는 것  무축단잔(無祝單盞) : 제사를 지낼 때 축문을 읽지 않고 술잔도 한번만 올리는 것  미망인(未亡人) : 아직 죽지 않은 사람  미명(未明) : 날이 채 밝기 전. 날이 셀 무렵.  반(飯) : 메, 밥  반함(飯含) : 염습할 때 시선의 입에 쌀과 구슬을 물리는 일  반혼(返魂) : 장사 지낸 뒤에 신주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 반우(返 虞)  발상(發喪) : 상제가 머리를 풀고 곡을 하여 초상난 것을 알림  발인(發靷) : 상여가 상가에서 떠남  방상씨(方相氏) : 상여 앞에 가면서 잡귀를 물리치고 광중의 악귀를 쫓 는 탈을 쓴 사람  방손(傍孫) : 자차손. 방계(傍系) 혈족의 자손  방조(傍祖) : 오대조 이상의 직계가 아닌 방계의 조상  배흥배흥(拜興拜興) : 절을 두 번함  백(魄) : 넋  벽감(壁龕) : 사당을 따로 두지 못하는 집에서는 대청 뒷벽이나 마루 끝에 감실(龕室)을 달아 위패(位牌)를 모시기도 한다.  변(籩) : 실과와 건육을 담는 제기  변두(籩豆) : 변(籩)은 대나무 제기, 두(豆)는 나무 제기.  변복(變服) : 소복에서 제복으로 갈아입음  별묘(別廟) : 가묘(家廟)에서 받들 수 없는 신주를 따로 모시던 사당  별세(別世) : 이 세상을 떠남. 곧 죽음  병대(餠臺) : 떡을 담는 제기  보(簠) : 제향(祭享)에 기장과 피를 담는 그릇  보공(補空) : 빈곳을 메꾸어 채움  복(服) 치마 : 거상(居喪)하는 여자가 복으로 입는 치마  복위(復位) : 있던 곳에 가져다 놓음  복위궤(復位跪) : 다시 끓어 앉음  복인(服人) : 기년(朞年) 이하의 상복(喪服)을 입는 사람  본생(本生) : 생가  봉로(奉爐) : 향로를 받드는 사람  봉분(封墳) : 흙을 쌓아 올려서 무덤을 만드는 것  봉분제(封墳祭) : 장사지낼 때 무덤을 만든 뒤 지내는 제사. 평토제(平 土祭)  봉사(奉祀) :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것  봉사손(奉祀孫) : 조상의 제사를 모시는 자손  봉영(封塋) : 무덤  봉작(奉爵) : 봉작은 사준이 준소에서 술을 따라준 술잔을 헌관에게 가 져다주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봉작수잔반헌관(奉爵授盞盤獻官) : 봉작이 술잔을 헌관에게 줌  봉제사(奉祭祀) : 제사를 받들어 모심  봉향(奉香) : 향을 받드는 제관  부고(訃告) : 사람이 사망한 직후 그 사실을 친척이나 지우(知友) 들에 게 알리는 서신  부당(夫黨) : 시집 가족  부복(俯伏) : 고개를 숙이고 엎드리는 것  부복곡(俯伏哭) : 엎드려 곡하는 것  부복궤(腑伏跪) : 끓어 앉음  부상(父喪) : 아버지의 상사(喪事)  부음(訃音) : 부고(訃告)  부의(賻儀) : 초상난 집에 부조로 보내는 돈이나 물건  부장(附葬) : 합장(合葬)  부장기(不杖朞) : 재최만 입고 상장을 집지 않는 1년 동안 입는 복  부장품(副葬品) : 예전에 장사 지낼 때 시신과 함께 묻던, 죽은 이가 생전에 쓰던 소지품  부제(祔祭) : 망인의 신주를 사당에 입적시키는 제사  부조기(扶助記) : 답지한 부의와 물품 등을 기록하는 대장. 부의록(賻 儀錄)  부좌(祔左) : 부부(夫婦)를 합장(合葬)하는데 아내를 남편의 왼편에 묻 는 것  부판(負版) : 등에 붙이는 베  북망산천(北邙山川) : 무덤이 많은 곳  북수(北首) : 머리를 북쪽으로 둠. 사자(死者)의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게 한데서 죽은 사람의 상  분묘(墳墓) : 시체를 묻은 곳  분상(奔喪) : 객지에 나가 있는 자손들이 부모 사망 소식을 접하고 곡 을 하고 환가(還家)하는 것  분지위 및 분축(焚紙位, 焚祝) : 지위 축을 불사르는것  분축(焚祝) : 축(祝)을 불사르는 일  분향(焚香) : 향을 피우는 것  불삽(黻霎) : 불( )자 모양을 그린 널조각에 자루를 달아서 발인 때 상 여 앞뒤에 세우고 가는 제구  불천위(不遷位) : 집안에 큰 공훈이 있는 사람으로서 신주를 묻지 않고 사당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이 신위를 불천 위.  비위(妣位) : 돌아가신 어머니로부터 그 이상의 각 대 할머니의 위(位)를 말함  비자(卑者) : 항렬이나 나이가 낮은 사람  비조(鼻祖) : 사람이 배속에서 생길 때 코가 가장 먼저 형상(形狀)을 이 룬다 하여 시조(始祖) 이전의 조상  빈관(殯棺) : 염습(殮襲)만 하고 아직 장사 지내지 않는 영구(靈柩)  빈소(殯所) : 상중에 영위(靈位)를 모셔 두는 곳  사갑제(死甲祭) : 죽은 이의 회갑을 제사하는 것  사고(四孤) : 홀아비 환(鰥), 과부 과(寡), 부모가 없는 고(孤), 자식이 없는 독(獨)  사당(祠堂) : 조상의 혼백을 모셔 두는 곳으로 신주, 향로, 제상 등이 마련되어 있으며 사람이 죽으면 혼백(魂魄) 신주를 상청에 모시고 제사를 올리다가 상기(喪) 끝난 후 신위를 모신 곳  사서(司書) : 상례의 전 과정에서 소요되는 문서를 작성하고 필사하는 소임  사신(辭神) : 신주를 사당으로 모시고 지방일 경우에는 축문과 함께 불 사르는 것을 말한다.  사십구제(四十九祭) : 사람이 죽어 49일 되는 날. 칠칠일(七七日)  사자(嗣子) : 맏아들  사준(司樽=罇) : 술을 따르는 직책  사초(莎草) : 산소에 띠를 입히고 손질을 새로 하는 것  사화(司貨) : 부의 접수 등 상가의 제반 경리의 출납을 담당하는 직책  삭망(朔望) : 초하루와 보름  삭일(朔日) : 음력의 매달 초하룻날  삭전(朔奠) : 상가(喪家)에서 음력 초하룻날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  산신제(山神祭) : 산신에게 지내는 제사  산재(散齋) : 제사전에 목욕재계하는 일  삼년상(三年喪) : 세 해 동안의 거상(居喪)을 말하는 것으로 자식이 태어 난 지 3년(만2년)이 된 뒤에라야 부모의 품을 떠나기 때문에 적어도 젖을 먹이며 키워 주셨던 3년 동안 입는 상  삼상(三殤) : 미성년자가 죽었을 때 분류하는 것으로 하상, 중상, 장상 을 통틀어 이르는 말. 하상은 8세에서 11세 사이에 사망한 것, 중 상은 12세에서 15세 사이에 사망한 것, 장상은 16세에서 19세에 사망한 것.  삼상향(三上香) : 분향(焚香)할 때 향을 세 번 집어 불에 사르는 일  삼시점수(三匙点水) : 밥을 갱물에 세 번 떠서 마름  삼우(三虞) : 초우(初虞), 재우(再虞), 삼우(三虞)  삼일장(三日葬) : 죽 은지 3일 만에 지내는 장사  삼제반(三除飯) : 밥을 세 번 떠서 숙냉 하는 것  삼헌(三獻) : 제사지낼 때 술잔을 세 번 올리는데 가정의 기제사의 경 우에 처음 올리는 잔을 초헌(初獻)이라 하며 제자가 함.  두 번째 올리는 것을 아헌이라 하며 반드시 주부가 함.  세 번째 올리는 것을 종헌이라 하며 참사한 사람 중에서 항렬 이 높거나 나이가 많은 사람이 함.  종헌은 빈이 있으면 빈이 함  삼헌관(三獻官) :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의 세 헌관  삼희흠(三噫歆) : 기침을 세 번함  삽(翣) : 발인 때 들고 가는 구름 형상을 그린 제구  삽시(揷匙=扱匙) : 제사 때 숟가락을 밥그릇에 꽂는 일  삽시반중(揷匙飯中) : 숟갈을 밥에 꽂음  상(殤) : 20세 전에 죽음(未滿二十而死). 일찍 죽을 상  상(喪) : 부모, 승중의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와 맏아 들에 대한 의례  상(祥) : 조상과 대상의 총칭  상가(喪家) : 초상난 집  상관(喪冠) : 상주의 관  상구(喪具) : 장사 지낼 때 쓰는 기구  상기(喪期) : 상복을 입는 기간  상례(喪禮) : 상제(喪制)로 있는 동안에 행하는 모든 예절  상례(相禮) : 집례를 도와 진행을 알리는 제원  상배(喪配) : 홀아비가 됨. =상처(喪妻)  상복(喪服) : 상주의 옷. 성긴 베로 지으며 바느질을 곱게 하지 않는다.  상부(喪夫) : 남편의 상고(喪故)를 말함  상석(床石) : 무덤 앞에 제물을 차려 놓는 돌상(石床)  상식(上食) : 상가(喪家)에서 아침저녁으로 궤연 앞에 올리는 음식  상여(喪輿) : 시체를 묘지까지 나르는 제구  상장(喪章) : 거상이나 조상(弔喪)의 뜻으로 웃옷의 가슴부분에 나타내는 표시  상장(喪杖) : 상제가 짚는 지팡이. 부상(父喪)에는 대나무, 모상에는 오 동나무를 씀  상제(喪制) : 부모 또는 승중 조부모의 거상 중에 있는 이. 극인(棘人). 상인(喪人).  상제(喪祭) : 장사 뒤에 지내는 제사  상좌(尙左) : 왼쪽을 위로 숭상함  상주(喪主) : 상사의 중심이 되는 상인(喪人). 망자의 장자가 되는 것이 원칙  상포(喪布) : 초상(初喪) 때 쓰는 포목  상행(喪行) : 장사지내려고 묘지로 가는 행렬  상향곡(相向哭) : 서로 마주보고 곡하는 일  생단(牲壇) : 초헌관이 제사에 쓸 소, 양, 돼지를 성찰하는 곳  생동숙서(生東熟西) : 제사상에 생채(生菜)는 동쪽, 나물은 서쪽에 놓는 것을 말한다.  석전(釋典) : 공자를 제사 지내는 큰 제사. 2월과 8월의 상정일 (上丁日)에 짐승의 희생과 여러 가지 음식을 차려 놓고 제사함  선부군(先父君) : 돌아가신 아버지  설단(設壇) : 시신이 없는 묘소를 만드는 일  섭사(攝祀) : 남의 제사를 대신하여 지냄  성복(成服) : 초상이 났을 때 상복을 처음 입는 일  성분(成墳) : 봉분  세찬(歲饌) : 설에 차리는 음식. 또는 연말에 보내는 물품으로 세의(歲 儀)라고도 함  소공(小功) : 소공친의 상사에 다섯 달 동안 입는 상복  소렴(小殮) : 시신의 옷과 이불로 싸는 일  소렴금(小殮衾) : 시신을 싸는 이불  소렴포(小殮布) : 시신을 싸는 베  소퇴립(小退立) : 일어나서 뒤로 조금 물러섬  속광(屬纊) : 사람이 숨을 거둘 때가 되었다고 판단되면 사람의 입 위에 고 운 솜을 올려놓고 완전히 숨을 거두었는지 지켜보는 것  수시(收屍) : 고복(皐復)이 끝난 뒤 시신이 굳기 전에 시신의 손발을 펴 서 시신을 끈으로 묶는 것  수의(壽衣=襚衣) : 죽은 사람에게 입히는 옷  수작(酬酌) : 서로 응대하고 보답함  수조(受胙) : 예전에, 나라의 제사를 마치고 나서 제사상에 올린 고기 를 제관(祭官)들이 나누어 받는 일을 이르던 말.  수질(首絰) : 상제가 상복을 입을 때 머리에 두르는 짚과 삼으로 만든 테  숙사소경(肅사小頃) : 잠시 기다림  숙수(熟水) : 끓인 물. 숭늉  순장(殉葬) : 죽은 사람 매장시 산 사람을 함께 매장하던 일  승중(承重) : 장자가 없을 때 장손(長孫)이 아버지를 대신 하여 상주가 되는 것  시마(緦麻) : 종증조, 삼종형제, 종증손, 종현손의 상사에 석 달 입는 상복  시저(匙箸) : 숟가락과 젓가락  시제(時祭) : 4대 봉사가 끝나면 시제로 모시는데 다른 말로 묘사, 시향 이라고도 하며 5대조 이상은 대개 10월 상달에 시제 지냄  시조(始祖) : 한 족속의 맨 위의 조상  신주(神主) : 죽은 조상들의 위를 베푼 나무 패이다. 대게 밥나무를 쓰 며 길이는 8치, 폭은 2치 정도이고 위는 둥글고 아래는 모지게 만든다.  심상(心喪) : 복(服)을 입지 않고 마음으로 근신하는 것  아헌(亞獻) : 아헌이란 둘째 번 잔을 올리는 것으로 주부(主婦)는 이때 4번 절한다.  아헌관(亞獻官) : 제사를 지낼 때 두 번째로 술잔을 올리는 제관  악수(幄手) : 소렴할 때 시신의 손을 가리는 헝겊  알묘(謁廟) : 사당을 배알하는 것  알자(謁者) : 큰 제사시 행사자인 초헌관을 인도하는 사람  앙장(仰帳) : 천장이나 상여 위에 치는 휘장  앙재(盎齋) : 제사에 쓰는 흰 술(백주)  애곡(哀哭) : 슬퍼하여 흐느껴 울다. 부모의 상(喪)에 우는 울음  애자(哀子) : 애달픈 아들이란 뜻으로 어머니가 돌아갔으면 애자라 지 칭함  어동육서(魚東肉西) : 제사상에 생선은 동쪽, 육은 서쪽, 적(炙)은 어와 육의 중간에 놓는 것을 말한다.  여묘(廬墓) : 상제가 무덤 가까이에 여막을 짓고 살며 무덤을 지키는 일  역복(易服) : 거상 동안이나 탈상 때 옷을 바꿔 입는 일  연길(涓吉) : 길일을 택하는 것  영구(靈柩) : 시체를 넣는 관  영역(塋域) : 무덤 구역  영위(靈位) : 신위(神位)  영정(影幀) : 족자에 그린 화상. 현대는 사진  영좌(靈座) : 빈소 영위를 모셔 놓은 자리  예관세위(詣盥洗位) : 대야 앞으로 나아감  예제(醴齊) : 제사에 쓰는 술의 일종  오낭(五囊) : 염습할 때 죽은 이의 머리털과 좌우의 손톱, 발톱을 깎 아서 각각 담는 다섯 개의 작은 주머니  오적(五炙) : 삼적( 三炙) 육적(肉炙) 소적(素炙두부적) 어적(魚) 닭, 채 소적을 추가한다.  외간(外艱) : 아버지의 상사. 아버지가 없을 때 할아버지 상사  외생(外甥) : 사위  요대(腰帶) : 허리띠  요여(腰輿) : 장사 지낸 뒤에 혼백과 신주를 모시고 돌아오는 소여  요질(腰絰) : 상복을 입을 때 허리에 두르는 띠. 띠에 삼을 섞어 동아 줄 같이 만듦  우제(虞祭) : 우(虞)는 염려한다는 뜻으로 혼신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의미 의 제례. 우제는 초우, 재우, 삼우를 총칭하며 초우는 장사를 치른 당일, 재우는 초우제를 지낸 다음 첫 유일(柔日)에 지내는 제사, 삼우제는 재우제를 지낸 다음 날에 지내는 제사  우집사(右執事) : 제상 우측에 술잔을 얼리고 내리는 사람  운구(運柩) : 관을 옮기는 것  운명(殞命) : 죽음. 명이 끊어지는 것  운삽(雲翣) : 발인 때 상여 앞뒤에 들고 가는 구름 형상을 그린 부채 모양의 제구  원삼(圓衫) : 부녀자의 예복의 한가지로 비단이나 명주를 사용하여 연 두 빛 깃에 자줏빛 깃과 색동소매를 달아 지은 옷  위패(位牌) : 죽은 사람의 계명(戒命) 기신(忌辰)을 써서 적은 나무 패  유(侑) : 배식하다. 존장을 모시고 음식을 먹는 것  유건(儒巾) : 조선시대 유생들이 쓰던 검은 베로 만든 예관(禮冠)  유식(侑食) : 종헌이 끝난 후 신위에게 음식을 권하는 절차  유언(遺言) : 임종 때 자손들에게 부탁하는 말  유인(孺人) : 벼슬 없는 사람의 아내의 총칭. 구품 문무관의 아내의 품계  유일(柔日) : 부드러운 날의 뜻이므로 음수(陰數)의 날. 10간(干)의 갑, 을, 병, 정, 무, 기, 경, 신, 임, 계에서 순서로 홀수 날 즉 갑, 병, 무, 경, 임이 들어간 날이 강일(剛日)이고 음인 짝수에 해당하 는 을, 정, 기, 신, 계가 들어가는 날은 유일  유학(儒學) : 유교의 경전을 통하여 수신과 경세의 도를 학습 연구하는 생도  육례(六禮) : 혼례의 납채(納采), 문명(問名), 납길(納吉), 납징(納徵),  청기(請期), 친영(親迎)  윤(閏)달 : 윤년에 드는 달. 태양력에서는 2월이 평년보다 하루 더 많 은 29일로 하고 태음력에서는 평년보다 한 달을 하여 윤달을 만 들었다. 태음력에는 19년에 7번의 윤달을 두었음.  은전(恩典) : 나라에서 내리는 혜택에 관한 특전  은전(殷奠) : 큰 제사. 제수를 다 갖춘 제사. 넉넉한 제물(祭物)  음복(飮福) : 조상께서 내려 주신 복된 음식이란 뜻으로 제사가 끝나면 제관이 제사에 쓴 술이나 다른 제물을 먹는 것을 말한다.  이성(利成) : 제사를 마쳤다고 고하는 말  익사(溺死) : 물에 빠져 죽음  인원물제(人原物際) : 사람 이름을 쓸 때는 끝에 원(原), 물품일 때는 제(際) 라고 씀  인제(姻弟) : 처남과 매부간에 자기를 낮추어 쓰는 편지 말  인형(姻兄) : 처남과 매부사이에 서로 높여 부르는 말  임종(臨終) : 숨을 거두는 순간. 부모가 돌아갈 때 모시고 있는 것  입관(入棺) : 시체를 관(棺) 속에 넣는 일  작(爵) : 제사에 쓰이는 잔  장(杖) : 지팡이  장군석(將軍石) : 무덤 앞에 세우는 돌 사람  장기(杖朞) : 지팡이를 짚고 재최로 1년 동안 입는 상복  장례(葬禮) : 장사지내는 예절  장례식(葬禮式) : 장사지내는 의식  장사(葬事) : 시체를 묻거나 화장하는 일  장상(長殤) : 16세에서 19세 사이에 미성년의 죽음  재계(齋戒) : 제를 행하는 사람이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하고 음식과 행 동을 삼가며 부정을 피하는 것  적(炙) : 제상에 올리는 대 꼬챙이에 꿰어서 불에 구운 어육  적대(炙臺) : 적을 올리는 제기  적모(嫡母) : 서자의 본실 어머니. 본부인  적손(嫡孫) : 서출이 아닌 적출의 손자  전(奠) : 영상(靈床)에 조석으로 주과포(酒果脯)를 올리는 것. (발상 뒤부 터 발인 전(前)까지 전을 올림). 생자에게 행하는 것과 같은 예  전안(奠雁) : 혼인의 친영 때 신랑이 나무로 만든 기러기를 안고 전안 청으로 가서 북쪽을 향하여 상위에 놓고 두 번 절한 다음 기 러기를 신부에게 건네는 일  전인부고(專人訃告) : 부고를 사람이 직접 전하는 것  전작(奠爵) : 헌관으로부터 술잔을 받아 신위 앞에 올리는 사람.  전폐(奠幣) : 나라에 큰제사 때 폐백을 드리는 일  절관(節棺) : 관을 백지로 감은 새끼로 한 가닥을 만들어 세로로 한 번 묶고 가로로 일곱 개를 묶는 것을 말함  점다(點茶) : 제사 때 밥을 조금씩 떠서 물에 세 번 말고 숟가락을 숙 수에 담그는 것  점시흘(点視訖) : 제물을 진설 한것을 살펴 봄  정저(正箸) : 젓가락을 바르게 고르는 일  정침(正寢) : 제사나 일을 잡아 하는 몸체의 방으로 집 안체의 큰방(제사를 지내는 몸체의 방)  제관(祭官) : 제사를 맡는 소임  제구(祭具) : 제사에 쓰는 모든 기구  제기(祭器) : 제사 때 쓰는 그릇  제단(祭壇) : 제사를 지내는 단  제례(祭禮) : 제사의 예절  제명정(題銘旌) : 제사 때 쓰는 명정  제사(祭祀) : 신령에게 음식을 바쳐 정성을 표하는 의식  제석(祭席) : 제사 때 까는 돗자리  제수(祭需) : 제사에 쓰는 여러 가지 물건이나 음식  제주(題主) : 신주(神主)에 글씨를 쓰는 직임  제향(祭享) : 제사  조(胙) : 고기를 담는 제기 조  조객록(弔客錄) : 부상(父喪) 시 조문 온 빈객들의 이름을 적은 대장  조계(阼階) : 동쪽 계단. =東階  조곡(弔哭) : 상제가 소상까지 날마다 아침에 하는 곡  조도(祖道) : 먼 길을 떠날 때 도중의 무사함을 노신(路神)에게 비는 것  조문록 (弔問錄) : 부고를 받으면, 조문하기 위해 날짜를 적어서 방문 밖에 걸어 두던 책  조상(弔喪) : 죽음에 대하여 애도의 뜻을 표함  조석곡(朝夕哭) : 소상 전에 조석으로 궤연(几筵) 앞에 하는 곡  조위록(弔慰錄) : 모상(母喪) 시 조문 온 빈객들의 이름을 적은 대장  조장(弔狀) : 간찰의 일종으로 부고를 받은 사람이 사정이 있어 직접 조문하지 못할 경우 보내는 조상하는 글  조전(祖奠) : 발인 전에 영결을 고하는 전(奠)  조전(朝奠) : 장사 지내기 전에 아침마다 영위 앞에 간단히 음식을 올 리는 것  존항(尊行) : 항렬이 높음  졸(卒) : 마침  졸곡(卒哭) : 삼우제를 지낸 뒤에 지내는 제사로 사람이 죽은 지 석달만에 지내는 제사로 고하고 우는 것을 마친다는 뜻  졸작(卒酌) : 술을 마시는 것  종상(終喪) : 어버이의 삼년상을 마침  종손(宗孫) : 일문(一門) 또는 동족(同族)의 최고 조상의 직계 손. 불천위(不 遷位)를 모신 직계 장손. 대종(大宗)의 적장자 손  종중산(宗中山) : 한 문중의 조상을 모신 산  종헌(終獻) : 제사 지낼 때에 초헌과 아헌 다음, 셋째 번으로 잔을 올 리는 것을 말한다.  종헌관(終獻官) : 제사를 지낼 때 세 번째로 술잔을 올리는 제관  좌곡(坐哭) : 약간 엎드린 자세로 꿇어앉아 곡함  좌집사(左執事) : 제상 좌측에 술잔을 얼리고 내리는 사람  좌포우혜(左脯右醯) :포는 왼쪽에 놓고 식혜는 오른쪽에 놓는 것을 말 한다.  주과포혜(酒果脯醯) : 술, 과실, 포, 식혜로 간단하게 차린 제물  주손(冑孫) : 대(代)를 잇는 직계 장손  주자(注子) : 목이 작은 술병  준소(罇所) : 술잔에 술을 따르는 자리.  증직(贈職) : 사후에 추증 한 벼슬  지곡(止哭) : 곡을 그침  지석(誌石) : 죽은 사람의 인적사항이나 무덤의 소재지를 기록하여 땅에 묻는 것을 말하며 재료로 돌, 백지를 사용하는데 지석에 기록되는 내용은 망자의 본관, 이름, 무덤의 소재와 좌향, 가족관계, 출생 일과 사망일을 적음  지요(地-, 地褥) : 시신을 관에 넣을 때 밑에 까는 겹이불  지자(支子) : 장자가 아닌 아들  지천(祗薦) : 정성껏 올림  직일(直日) : 묘제 제반적 일을 관장하는 제원  진다(進茶) : 숭늉 올리기  진설(陳設) : 제기들을 설치한 후 제수를 제상에 진설 하는 것  진숙수(進熟水) : 숭늉을 올려놓음  진찬(進饌) : 제사 지낼 때 어(魚), 육(肉) 등 주식을 제상에 진설  진홀(搢笏) : 홀(笏)을 꽂음  질명(質明) : 동이 틀 무렵. 날이 샐 무렵  짐작(斟爵) : 술을 따르는 제원  집례(執禮) : 제향 때 예식을 집행하던 임시 소임  집사(執事) : 집안 일을 맡아보는 사람  집사분정기(執事分定記) : 상장례의 일을 담당할 사람들의 임무를 분장 하는 명단  찬인(贊引) : 헌관을 도와 인도하는 사람  찬자(贊者) : 제향 때 홀기를 맡아보는 사람  참신(參神) : 신주에게 절하여 뵙는 것을 뜻하는데 제주 이하 모든 참 사자가 두 번 절한다.  참신례(參神禮) : 신에게 두 번 절하는 것  참제원(參祭員) : 제사에 참여 하는 사람  참최(斬衰) : 외간상에 입는 오복의 하나. 거친 베로 직소 아랫단을 꿰 매지 않음  창홀(唱笏) : 홀기를 외치는 사람  척기(滌器) : 그릇을 씻는 것  천광(穿壙) : 구덩이를 파는 일  천구(遷柩) : 장례 전일 영구를 빈소에서 청사로, 또는 상여로 옮기는 일  천금(天衾) : 시신을 덮는 이불  천신(薦新) : 새로운 음식을 만들거나 사왔을 때 빈소에 올려놓았다가 물리는 것  철상(撤床) : 모든 제수를 물리는 것을 철상이라 하는데 철상할 때는 제수를 뒤에서 물린다.  철시복반(撤匙復飯) : 숭늉 그릇에 놓인 수저를 匙?에 거두고 메 그릇 에 뚜껑을 덮고 「이성」을 고하는 것을 철시 복반이라고 한 다.  철주타기(撤酒他器) : 술을 퇴주그릇에 따름  철찬(撤饌) : 제수를 물림  첨소(瞻掃) : 우러러 쓸어내리는 것  첨작(添酌) : 종헌관(終獻官)이 올린 잔에 다시 술을 가득 채우는 것  첨친(忝親) : 상대를 지극히 높이고 자기를 낮추는 말로 비천한 자기와 혼 인관계를 가짐으로써 욕되게 하였다는 뜻  청장(淸醬) : 간장  청주(淸酒) : 맑은 술  체백(體魄) : 땅속에 묻는 송장  초례(醮禮) : 관례 및 혼례 때 성신(星辰)에게 지내는 제사  초상(初喪) : 사람이 죽어서 장사지낼 때까지의 기간  초종(初終) : 초상이 난 뒤부터 졸곡(卒哭)까지의 과정을 일컬음  초헌(初獻) : 제사 지낼 때에 첫 번으로 술을 신위(神位)에 드리는 것 을 말한다.  초헌관(初獻官) : 제사 때 첫 번째로 술을 신위에게 올리는 제관  초혼(招魂) : 죽은 사람의 흐트러진 혼을 부르는 것  추모(追慕) : 죽은 사람을 사모함  추원(追遠) : 지나간 먼일을 그리워함  축관(祝官) : 축(祝)을 쓰고 읽는 직책  축문(祝文) : 제사 때 신명에게 고하는 글  출계(出系) : 양자로 들어간 것  출관(出棺) : 출상하기 위하여 관을 집밖으로 내감  출주(出主) : 사당이나 궤연에서 신주를 모셔냄  충이(充耳) : 솜으로 만든 귀막이로 시신의 귀에 솜을 메움  취토(取土) : 장사지낼 때 광중(壙中)의 네 귀에 놓은 길방(吉方)에서 떠온 흙  치관(治棺) : 관을 만드는 일  치사(致仕) : 관직을 내 놓고 물러남  치산(治山) : 산소를 매만져서 다듬음  치장(治葬) : 장지로 가서 매장하는 절차  치전(致奠) : 죽은 이에게 제물과 제문을 가지고 조의를 표하는 일  치제(致祭) : 윗사람이 제물과 제문을 보내어 아랫사람을 조상(弔喪)하 는 일  친기(親忌) : 부모의 제사  친상(親喪) : 어버이의 상사  칠성판(七星板) : 염습할 때 시신 밑에 까는 널빤지로 북두칠성 모양을 본 따 서 일곱 구멍을 뚫음  침주(斟酒) : 구기로 술을 떠서 술잔에 붓는 것  침채(沈菜) : 동치미  탈복(脫服) : 복을 벗다  탈상(脫喪) : 어버이의 삼년상을 마치다. 종상(終喪)  택일(擇日) : 날을 잡다  택조(宅兆) : 묘지(墓地)  택호(宅號) : 주부의 친정 고장 이름을 가정이름으로 지어 부름  파록(爬錄) : 소임이나 직책을 나누어 맡은 사람 등의 이름을 벌려 적은 기록  팔고조(八高祖) : 조(祖)의 조(祖), 조의 외조(外祖), 조모의 조, 조모의 외조, 외조(外祖)의 조(祖). 외조의 외조(外祖), 외조 모의 조, 외조모의 외조  포해(脯醢) : 말린 고기와 젓갈  피발(被髮) : 머리를 풀다  하관(下棺) : 관을 광(壙) 안에 내리다.  하시저(下匙箸) : 수저를 제자리에 내려놓는 것  합문(闔門) : 유식하는 차례에서 문을 닫거나 병풍으로 가리는 것을 말 하는데 참사자 모두가 방을 나와 바깥에서 삼사 분 정도 기다 린다.  합반개(闔飯蓋) : 밥뚜껑을 덮는 것  합사(合祀) : 둘 이상의 죽은 사람의 넋을 한 곳에 모아 제사함  합장(合葬) : 부부(혹은 여러 사람) 주검을 한 무덤 속에 묻음  합제(合祭) : 선조 대대의 신위를 한데 모시어 제사 지냄  합폄(合窆) : 함께 묻는 것  항려(伉儷) : 배필  행전(行纏) : 다리를 싸매는 베  향로(香爐) : 향을 피우는 조그만 그릇  향사(享祀) : 제사  향상(香床) : 향로나 향합을 올려놓는 상  향촉(香燭) : 제사에 쓰이는 향과 촉  향축(香祝) : 제사에 쓰이는 향과 축(祝)  향탕수(香湯水) : 염습할 때 시신을 씻기 위해 향을 넣어 달인 물  향함(香函) : 향을 담는데 쓰는 함. 향합  헌관(獻官) : 제사 때 임시로 임명하는 제관  헌다(獻茶) : 갱을 내리고 대신 숭늉을 바꾸어 올리는 것을 말한다.  헌작(獻爵) : 제사(祭祀) 때 술잔을 올리는 것  현주(玄酒) : 제사에 쓰는 맑은 물 또는 明水라고도 함.  현훈(玄纁) : 검은색과 분홍색의 비단  협사(祫事) : 처음 제사로서 조상께 올리는 것과 같은 제사  호곡(號哭) : 소리내어 곡하는 것  호상(護喪) : 상(喪)의 전반을 진행하는 사람  혼백(魂魄) : 사람의 넋. 정신과 육체를 주관하는 것을 각각‘혼’,‘백’이라 함  혼백(魂帛) : 신주를 만들기 전에 모시는 생명주조각을 접어서 만드는 임시 의 신위. 혼백(魂魄)  혼백함(魂魄函) : 혼백을 담아두는 함  혼유석(魂遊石) : 상석의 뒤와 무덤의 앞에 놓는 장방형의 돌  혼천백지(魂天魄地) : 혼은 승천하고 넋은 땅속으로 스미는 것  홀기(笏記) : 혼례나 제례의 의식(儀式) 때 순서를 적은 판(板)  홍동백서(紅東白西) : 제수 진설 때에 생과(生果)나 숙과(熟果)의 붉은 것은 동쪽, 흰 것 은 서쪽에 놓는 것을 말한다.  회춘(回春) : 중한 병에서 건강을 회복함  효건(孝巾) : 상중에 쓰는 건(巾)  후토(后土) : 토지 신  휘일(諱日) : 제삿날  흔작(炘爵) : 술잔을 들어 향의 연기를 쐬다.  흠향(歆饗) : 음식을 잡수시는 것  희준(犧罇) : 제사에 쓸 술항아리.
241    시간 차이 알기 댓글:  조회:5168  추천:0  2015-08-14
조선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오는 15일부터 표준시간을 30분 늦춘다고 조선중앙통신이 7일 보도. 이는 지난 5일 조선 최고인민회 상임위원회의 정령. 통신은 "동경 127°30’을 기준으로 하는 시간(현재의 시간보다 30분 늦은 시간)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표준시간으로 정하고 평양시간으로 명명한다"며 "평양시간은 주체104(2015년) 8월 15일부터 적용한다"고 밝혔다.
240    잡지는 잡지다워야 잡지 댓글:  조회:5123  추천:0  2015-08-11
-《장백산》잡지 창간 35돐에 즈음하여 《장백산》잡지사 리여천 사장 겸 주필 우리 말 대형문학지《장백산》잡지는 1980년 5월 1일에 유서 깊은 황성옛터 통화시에서 창간하여 지금까지 장장 35년이란 긴 세월을 걸어왔습니다. 첫 창간호가 고고성을 울리면서 올해 2호까지면 총 200호가 됩니다. 초창기에는 사무실도 없고 전문편집도 없고 재정보장도 없는 상황이였기에 장백산은 《들가방편집부》로 첫 걸음마를 떼고 모든 간난고초를 겪으면서 오랜 세월을 걸어왔습니다. 지금도 걸어온 35년을 돌이키면 가슴이 벅차납니다. 장백산의 35년은 창업의 35년이였고 고난의 35년이였으며 또한 성과가 빛나는 휘황찬란한 35년이였습니다. 처음에는 통화시문련의 한어잡지인 《장백산》의 이름을 빌어서 내부 계도간행물로부터 1983년에는 정식공개간행물로, 지금은 길림성 10대 우수간행물, 북방지역우수간행물, 국가출판총서에서 인정한 쌍효간행물로 성장했으며  2005년에는 전국 3만개 간행물가운데서 평심한 백종중점간행물의 하나로 되였으며 우리 말 간행물뿐만아니라 소수민족문자로 출판하는 간행물중 제일 인기 있는 잡지로 평가받으면서 국가 핵심간행물로 되였습니다. 처음에는 통화시문련 소속의 내부간행물로부터 1990년 4월에 장춘으로 들어오면서 선후로 성작가협회, 성민족사무위원회에 소속이 되였다가 2004년에는 길림일보그룹에 소속이 되였습니다. 류하현의 선전부 간부과장으로 있던 남영전선생은 한어로 시를 창작하는분이였지만 조선족문인들의 고초를 헤아리고 조선족문학을 발전시키고저 선뜻 발벗고 나서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장백산》을 창간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면서 로심초사하셨습니다. 그이는 여러번 승진할 기회가 있었고 북경으로 전근할수 있는 기회가 차례졌지만 한번도 동요가 없이 김택원선생님과 같이 《장백산》을 창간하고 예순이 넘어서도 2년이나 더 현직에 있으면서 장장 30년 동안 《장백산》의 발전을 위하여 혼신을 다하셨습니다. 창시자중의 한분인 김택원선생은 남사장의 든든한 조수가 되여서 밤낮이 없이 일하시다가 아쉽게도 1995년 어느날 오전까지 출근을 하셨다가 피로로 하여 오후 다섯시즈음에 저세상 사람이 되였습니다. 그이는 잡지사에서 장장 20여년 동안 심혈을 몰부은분입니다. 초창기에 우리는 통화시 민족사무위원회에서 주는 보조금 2000원을 가지고 잡지를 만들어야 했기에 김택원선생은 자기의 장끼를 발휘하여 번역을 해서 탄 원고료를 잡지사에 들여놓고 행정비용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1984년 정식으로 편제를 가지면서 리여천선생과 김수영선생이 선후로 잡지사로 전근이 되였고 김수영선생은 퇴직한 후에도 칠순이 되도록 10년이나 더 출근을 하셨으며 역시 일생을 다 잡지사사업에 바친 분입니다. 리여천선생은 28 세 호시절에 잡지사에 들어와서 인생의 제일 좋은 황금시기를 잡지사사업에 이바지하였으며 지금까지 여전히 32년이란 긴 세월을 잡지를 위해 분투하고있습니다. 초창기에 잡지사는 사무실이 없었기에 항상 애로가 많았습니다. 남의 사무실을 빌려쓰든가 아니면 코구멍만한 세집을 잡고 넷이 들어앉아서 편집을 해야 했으며 2000년에야 116평방으로 된 주택을 하나 사서 사무실로 사용할수가 있었습니다. 창간호 발행이 2000여부로부터 번영시에는  3만부까지 달했으며 현재 조선족인구가 점점 줄어드는 상황에서도 3000여부를 오르내리면서 문학지로서는 상당한 발행부수를 보존하고있습니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사무실이 없는 서러운 나날을 돌이키면 가슴이 설레입니다. 남의 눈치를 보가면서 사는 그 고통은 당사자 아니고서는 리해할수가 없습니다. 특히 발행 때마다 그 애로가 더 컸습니다. 한때는 발행료의 40프로를 우전국에 줘야 하기에 우리는 자체발행을 시도하였는데 3만부 되는 잡지를 뜨락에 부려놓으면 산더미가 되였습니다. 그러면 그걸 뜨락에 늘여놓고 잡지사의 가족들마저 모두 동원하여 며칠씩 잡지를 봉투에 넣고 주소를 적으면서 발행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 잡지사에게 《광장편집부》란 미칭을 수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비오는 날이면 잡지를 6층 사무실까지 메올려야 하는데 지쳐 쓰러지는 직원이 한둘이가 아니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누구 하나 불만없이 수걱수걱 일을 하군 하였습니다. 잡지사는 그냥 차량이 없었기에 발행시에는 자전거로 운반을 해야 하는데 남직원들은 열몇번씩 봉투에 담은 잡지를 실어날라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또 우리 잡지사를 《자전거잡지사》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잡지사직원들은 더 좋은 작품을 모집하기 위하여 넓은 통화벌을 누비며 다녔고 발행부수를 늘이기 위하여 집집마다 찾아다니군 하였습니다. 재정상황이 어려웠기에 항상 출장보조도 받지 못하면서 되려 월급을 탈탈 털어서 발행에 보태쓰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월급이 마이나스가 될 때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잡지사의 간거한 력사를 아는 사람은 이를 두고 《장백산정신》이라고 합니다. 장백산은 문학지로서 초창기부터 그 종지가 명확했습니다. 문학의 쟝르라면 다 취급대상이 되였습니다. 소설문학을 위주로 하면서 시, 수필, 실화문학, 평론, 잡문, 등 란을 설치했고 대형문학지란 그 우세로 장편을 많이 취급해왔습니다. 지금까지 장편만 해도 거의 50여편이나 되며 취급한 원고가 거의 6천만자에 달합니다. 와중에 박선석의 대하소설 《쓴웃음》은 장장 7년 반 동안 우리 잡지에 련재하면서 국내외 독자들의 감탄을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장백산은 항상 《최선》이 우리의 표준이였습니다. 그래서 이미 고인이 되신 항일투사 김학철선생의 만년의 많은 주옥같은 작품이 거의 우리 잡지에 실렸으며 김학철선생 본인도 우리 잡지에 글을 내는것을 원했습니다. 역시 이미 고인이 되신 연변대학 부학장 정판룡교수는 생전에 《고향 떠나 50년》이란 력작을 쓰셔서 우리 잡지에 련재를 했으며 이 작품은 지금 봐도 우리 조선족문학에 있어서 길이 남길 력작이 아닐수가 없으며 나아가서는 우리 민족의 재부가 아닐수가 없습니다. 《몽당치마》를 쓰셔서 1983년 전국우수단편소설상을 탄 원로작가 림원춘선생님은 《우산은 비에 운다》란 장편을 우리 잡지에 련재해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장편소설 《산귀신》을 련재하고있습니다. 연변대학 교장으로 계시던 김병민교수는 연변대학 60돐을 맞으면서 《와룡산일지》를 우리 잡지에 련재했으며 이 글은 연변대학의 빛나는 력사가 담겨있을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창업사가 그려졌기에 많은 국내외 교육자, 학자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연변과기대 김진경총장님의 사적을 다룬 허련순선생의 장편다큐 《사랑주의》, 김혁의 장편인물전기 《윤동주평전》이 지금 련재되고있습니다. 그외에도 많은 작가들이 우리 《장백산》의 이 진지에서 자기 문학의 꿈을 키워가고있습니다. 우리 조선족문학은 중국 문학의 일부분으로서 우리 《장백산》은 우수한 중국문학을 조선족독자들에게 소개하기 위하여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저명한 시인 하경지, 애청 등의 주옥같은 시를 소개했을뿐아니라 중국문단흐름을 알리고저 《형제》, 《청자기》 같은 당년 판매량이 앞자리를 차지하는 작품들을 련재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시종 중국문학란을 설치하여 좋은 작품들을 실으면서 조선족문학이 중국문학과 더 빨리 더 가깝게 접근하기 위해여 정성을 다해왔습니다. 《장백산》은 초학자를 키우는데 힘을 기울였습니다. 십여년동안 줄곧 대학생코너를 설치하여 대학생들의 작품특집을 꾸리는것으로 조선족문학의 대를 잇는데도 홀시하지 않았습니다. 장백산은 줄곧 세계적인 범위에서 우리 민족문학의 만남의 장, 교류의 장을 만드는데 힘써왔습니다. 중국의 개혁개방의 좋은 정세를 세계에 알리고 장길도 건설에 의바지하고저 우리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1986년부터 우리는 한국, 조선, 일본, 미국, 카나다, 브라질, 독일 등 각 나라의 우리 글 작가들의 글을 실어왔습니다. 《장백산》은 중국생활체험기와 한국생활체험기란을 설치하여 한국에서의 중국인들의 어려움과 중국에서의 한국인들의 성장과정을 글로 담아 중한문화교류와 경제발전에 가교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본분들은 한국에서 살고있는 우리 조선족들의 어려움을 페부로 느끼면서 한국문화를 리해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중국시장으로 진출하려는 한국 기업인들에게는 반드시 장백산의 중국생활체험기를 읽으면 그만큼 도움이 컸기에 우리 나라 대외개방의 좋은 창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1987년에는 조선의 《조선문학》잡지사와 《천리마》잡지사의 초청으로 성 해당 부문의 책임자들로 조성된 《장백산》잡지사 대표단이 조선을 방문하여 당시 장철부총리의 접견을 받는 그런 영예를 지니기도 했으며 한국의 많은 문학지와 자매지를 맺고 교류를 활발히 진행해왔습니다. 장백산은 한국을 비롯한 국외 많은 나라로 잡지가 나가고있으며 2002년에는 한국 번역원에서 《장백산》잡지 200부를 구매하여 한국의 각 대학도서관에 발행하여 연구, 저장하도록 하였습니다. 지금도 한국의 제일 큰 책시장인 교보문고에 가면 장백산잡지가 판매되고있습니다. 한국의 서울출판사에서는 무료로 장백산의 초창기부터 2004년까지의 모든 작품을 종합본 68개로 출판하여 한국의 각 도서관으로 발행하고있습니다. 《장백산》은 많은 작가들을 키워왔습니다. 통화시 매하구시 농민작가 박선석은 대하소설 《쓴웃음》을 제외하고도 《재해》, 《압록강》등 많은 장, 중, 단편소설을 장백산에서 독점련재하는 식이였으며 지금은 당당한 작가로 성장하여 박선석팬이 이루어질 정도로 많은 독자들의 애대를 받고있습니다. 문학의 황무지였던 통화시 조선족문학은 장백산이 있음으로 하여 마송학, 리승호, 김남현 등 많은 작가들이 배출하였습니다. 남영전사장은 창작도 잡지사건설에 도움이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잡지사를 운영하면서도 시창작에 게을리 하지를 않았습니다. 근간에 그이가 쓴 토템시는 새로운 쟝르로서 중국문단에서 당당하게 한자리를 매김하게 되였습니다. 그이의 토템시는 북경을 비롯한 많은 대학교 연구생들의 론문테마로 되였으며 북경, 무한, 장춘 등지의 일부 대학교에서는 남영전토템시세미나를 갖고 본격적으로 연구에 들어갔으며 올해는 중국작가협회에서 조직한 당대 중국소수민족시인 10대 《걸출시인》의 한 사람으로 평선되여 커다란 영예를 안게 되였습니다. 사장의 이런 시재와 그의 인격매력은 잡지사를 꾸려나가는데 더없는 재부가 되였으며 《장백산》은 길림성에서뿐아니라 중국작가협회, 국가출판총서의 중시를 받고 많은 지지를 받아오기도 했습니다. 《장백산》은 30년 동안 많은 작가들을 키웠고 많은 글들을 실었을뿐 아니라 많은 문학상을 설치하여 조선족문학을 발전시키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기도 했습니다. 2001년에는 한국 한 지명인사의 후원으로 전국정치협상회의 회의실에서 《장백산》문학상 시상식을 가졌으며 당시 조남기부주석께서 친히 시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수상자로서는 덕고망중한 김학철선생님과 정판룡교수님이였으며 상금도 2만원의 거액으로서 국내외 커다란 반향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장백산모드모아문학상은 광주 모드모아그룹의 리성일리사장의 후원하에 1999년부터 2006년까지 장장 8년 동안 진행해왔습니다. 모드모아문학상은 다른 문학상과 달리 수상자에게 수장작가작품집을 출판해주기에 많은 작가들의 인기를 가져왔습니다. 지금까지 50여명이 수상을 했으며 단행본만 해도 52개를 출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잡지사를 작은 출판사라고도 합니다. 또한 모드모아문학상은 세계문학상을 설치하였기에 많은 국외작가들이 참여하여 명실한 문학상브랜드로 자리매김을 하였습니다 《중국조선족문학비평상》은 한국의 한림대학 정덕준교수가 발기하고 후원해온 상입니다. 《장백산》잡지에만 그친것이 아니라 조선족문학의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 평선을 하기에 어느모로 보면 우리 조선족문단을 리드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한 상이기도 합니다. 올해까지 5회에 달하는 이 상은 상금이 많을뿐 아니라 비평계에서는 권위적이기에 론문지가 아닌 문학지 《장백산》에서 주최한다는것은 우리 문단에서의 커다란 기여가 아닐수가 없습니다. 《장백산》은 항상 진선미를 추구하면서 민족적이면서도 원고의 《최고》를 만들기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장백산》에서 나간 작품들이 많은 국내외 문학상을 수여받기도 했습니다. 우리 조선족문단에서 제일 큰 상이라고 할수 있는 김학철문학상이 첫 2회의 수상작품이 다 우리 잡지에 련재한 글입니다. 1회에서는 허련순의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가 대상을 수여받고 2회에서는 박선석의 《쓴웃음》이 대상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어느해 연변주에서 가진 《진달래문학상》에서 문학부분 7개 상가운데 4개가 우리 잡지의 작품입니다. 《장백산》은 잡지를 잘 꾸리는데서 그친것이 아니라 조선족문학을 발전시키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습니다. 몇년전만 해도 중앙민족대학과 같이 《박선석작품연구 및 조선족문학의 현황과 전망》이란 세미나를 가졌으며 연변대학과 같이 《불멸의 영령-최채》출간기념식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불멸의 영령-최채》는 민족의 력사가 담겨있을뿐 아니라 항일투쟁사와 민족정책의 우월성이 담겨있는 력작이기에 우리 잡지에 련재했을뿐 아니라 한어로 번역하여 출판하였으며 중국의 각 명문대학 도서관에 책을 증증하여 저장하도록 했으며 출간기념식을 성황리에 치르기도 했습니다. 출간기념식에 주정부의 지도간부들의 참여와 지지를 받았을뿐아니라 전국정치협상회의 조남기전임부주석께서 축사를 보내오기도 했습니다. 중국의 명문대학과 손잡고 학술세미나를 가지는것은 문학지로서는 아름찬 일이지만 그 사회효과는 적극적입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조선족문학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이런 노력을 계속 도모해나갈것입니다. 《장백산》은 중한문화교류를 위하여 노력해왔습니다. 2004년에는 한국 10대 시인의 시집을 한어로 번역하여 북경의 문예출판사에서 출판하였으며 이 계기로 중한문화교류의 장을 펼쳤습니다. 중국 작가협회에서는 중한문화교류에서 우리 잡지사의 가교역할을 바랐습니다. 우리 잡지사에서는 중, 한 시의 번역으로부터 출판에 이르기까지 책임을 지고 고품위가 있는 《중한시집》, 《한중시집》을 두개 언어로 출판하였을뿐 아니라 두나라 작가, 시인들이 한자리에 만나 《중한문화연구세미나》를 가지게끔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중국작가협회 소수민족문학학회에서는 장백산의 공적을 기리고저 우리에게 《원정상》을 수여하기도 했습니다. 2011년부터 장백산은 작가들의 시야를 높이고 소수민족간의 문화교류를 위하여 해마다 20여명의 작가들을 조직하여 문학답사에 나섰으며 지금까지 거의 60여명의 작가들이 선후로 운남, 내몽골, 서장, 연안 등지를 다녀오기도 하였을 뿐 아니라 기행문을 잡지에 싣기도 했습니다. 《장백산》잡지사의 휘황찬란한 35년을 돌이켜보면 우리는 감개무량합니다. 당의 좋은 민족정책이 없었다면 장백산의 오늘이 있을수 없으며 개혁개방이 없었다면 이렇게 많은 성과를 거둘수가 없었을것입니다. 우리가 애로에 빠질 때마다 당의 따뜻한 손길이 우리를 고무해주고 밀어주군 하였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성정치협상회의 전임주석이였던 류희림동지는 장백산 초창기에 통화시 서기로 있으면서 줄곧 장백산을 관심해오신 분입니다. 성인민대표대회 리정문전임부주임은 항상 장백산의 행사에 꼭꼭 오셔서 격려의 말씀을 해주신 분입니다. 성민족사무위원회 전임 주임이였던 김영준동지는 지금까지도 고령이심에도 불구하고 이따금 장백산에 와보시지 않으면 마음이 안 놓인다고 찾아주시는 잡지사발전에 공로가 큰 분입니다. 현직에 있는 성민족사무위원회 강광자주임은 장백산을 밀어주는것은 소수민족정책의 락착이라고 떳떳이 말합니다. 항상 재정난으로 시련을 겪을 때마다 성재정청의 지도자들과 성신문출판국의 지도자들은 소수민족문화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당의 민족정책에 대한 옳바른 인식으로 많은 관심을 가져다주군 하였습니다.그리고 많은 경제인, 지성인들한테도 고마움을 표하고싶습니다. 장백산은 물론 35년 동안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지만 아직도 걸어가야 할 길이 멉니다. 당의 요구에 아직 먼 거리가 있으며 많은 분들의 베풀어준것보다는 거둔 성과가 작으며 아직 해결해야 할 애로가 많습니다. 아직까지 작은 116평방의 주택을 사무실로 사용하고있습니다. 국가 핵심간행물로서는 너무 격에 맞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의 옳바른 민족정책이 있고 든든한 길림일보그룹의 지도자들의 관심이 있고 많은 기업인, 지성인들의 지지가 있고 많은 작가 시인들의 참여가 있는 이상 장백산의 래일은 더욱 찬란할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당의 문예방침에 따라 《인민을 위하고 사회주의를 위하는》 방향과 《백가쟁명 백화제방》의 방침아래 력사의 사명감을 안고 어떤 곤난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뚫고 나가는 《장백산정신》을 이어받아 당이 믿어주고 길림일보그룹에서 믿어줄수 있고 독자들이 즐기는 좋은 잡지로 꾸려나갈것입니다.
239    음악분수 댓글:  조회:5683  추천:0  2015-08-11
분수속에 융합된 예술적 감화력, 경관설계 및 과학기술의 독특한 매력으로 연길 부르하통하 분수는 일전에 2015 10개 곳《가장 아름다운 음악분수》에 들었다. 부르하통하 음악분수군의 길이는 158메터, 분수 주심 높이는 108메터, 분수구가 2000여개, 채색조명등이 8000여개가 장치되였다고 한다. 소리, 빛, 전기기술을 종합적으로 리용하고 시각과 청각을 유기적으로 융합해 《경천옥기둥》,《천녀 꽃보라 날리기》,《향심비무》등 다양한 분수조형을 시사하고있으며 음악의 동감을 결부하여 물의 매력을 잘 보여주고있다.    2015 10개 곳《가장 아름다운 음악분수》에는 상해인민광장의 분수, 서안 기러기탑 음악분수, 청도 세계원예박람회 음악분수, 심수 해상세계 음악분수, 소주 김계호 음악분수, 광동성 갈양 용강 대형음악분수, 락양 호심 대형음악분수, 광동 하원 신풍강 음악분수, 절강 악청줌심공원 대형음악분수가 들었다.     광동성 갈양시정부 사무청사앞 용강(揭阳榕江)북하강심에 있는 용강 대형음악분수는 당면 에서 중국가장 높고 긴 강심음악분수이다. 분수 주심 높이는 188메터, 아시아에서도 가장 높은 분수로 꼽히고있다. 분수대 길이는 290메터, 너비는 45메로 목하 세계적으로 가장 큰 면적의 부체분수대(浮体平台)로 꼽히고있다.  길림신문
238    우리도 자연재해 대비에... 댓글:  조회:6013  추천:0  2015-07-26
 [ 2015년 07월 27일 08시 54분 ]     타이위안(太原) 무용단 대형 무용극 "천수관음(千手觀音)" 태풍 대비요령        ● 가정의 하수구나 집 주변 배수구를 점검하고 막힌 곳을 뚫어 주세요.  ● 하천 근처 주차된 자동차는 안전한 곳으로 옮깁니다.  ● 응급 약품, 손전등, 식수, 비상식량 등의 생필품을 미리 준비합니다.  ● 지붕, 간판, 창문 또는 마당이나 외부에 있는 기구, 자전거 등을 단단히 고정합니다.  ● 전신주, 가로등, 신호등은 손으로 만지거나 가까이 가지 않습니다.  ● 고층 아파트 주민은 유리창에 젖은 신문지, 테이프 등을 창문에 붙입니다.  ● 대피할 때에는 수도와 가스 밸브를 잠그고 전기차단기를 내립니다.  ● 천둥·번개가 칠 경우 건물 안이나 낮은 곳으로 대피합니다.  ● 태풍주의보가 발령되면 경작지 용·배수로를 점검하지 않습니다.  ● 산간 계곡 야영객은 안전한 곳으로 대피합니다.  ● 비닐하우스 등의 농업 시설물을 점검해 응급 대처합니다.  ● 해안지역 저지대·상습 침수지역 거주민은 대피를 준비합니다.  ● 어업 활동은 하지 말고 선박을 단단히 묶어둡니다.  ● 어로 시설을 철거하거나 고정하는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 해수욕장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 태풍 경보가 발령되면, 모래주머니 등을 이용해 물이 넘쳐흐르는 것을 막아 주세요.  ● 바람에 날아갈 물건이 집 주변에 있으면 미리 제거합니다.  ● 도로에 있는 차량은 속도를 줄여서 운전합니다.  ● 아파트 등 고층건물 옥상, 지하실과 하수도 맨홀에 접근하지 않습니다. ● 정전 때 사용 가능한 손전등을 준비하고 가족 간 비상연락방법과 대피방법을 미리 의논합니다.  ● 농촌지역에서는 모래주머니 등으로 농경지 침수를 예방합니다.  ● 농기계나 가축 등을 안전한 장소로 옮기세요.  ● 비닐하우스, 인삼재배시설 등을 단단히 묶어둡니다.  ● 태풍이 지나간 후에는 비상 식수가 떨어졌더라도 아무 물이나 마시지 말고 물은 꼭 끓여 마십니다.  ● 사유시설 등에 대한 보수·복구 시에는 반드시 사진을 찍어 둡니다.      폭우(산사태) 대비요령       ● 침수 등 피해가 예상되는 지역 주민은 대피를 준비합니다.  ● 물이 집 안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기 위한 모래주머니나 튜브 등을 준비합니다.  ● 어린이나 노약자는 집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 홍수 때 피난 가능한 장소와 길을 사전에 숙지합니다.  ● 비탈면이나 산사태가 일어날 수 있는 지역에 가까이 가지 않습니다.  ● 잘 알지 못하는 지역이나 무릎 위로 물이 흐르는 지역으로 다니거나 운전하지 않습니다.  ● 바위나 자갈 등이 흘러내리기 쉬운 비탈면 지역의 도로 통행은 하지 않습니다.  ● 연못, 구덩이 등에 관한 안전표지판을 잘 살펴봅니다.  ● 우물은 오염될 수 있으니 마실 물을 미리 준비합니다. ● 해안가 위험한 비탈면에 접근하지 않습니다. ● 집 근처에 위험한 물건이 있다면 미리 치웁니다. ● 교량은 안전한지 확인 후에 이용합니다.  ● 물이 밀려들 때는 높은 곳으로 빨리 대피하세요.  ●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마당에 있는 물건들을 집 안으로 옮기고 집 주변을 정비합니다.  ● 전기차단기를 내리고 가스 밸브를 잠가 주세요.  ● 상수도의 오염에 대비해 욕조에 물을 받아둡니다.  ● 홍수로 밀려온 물에 가까이 가지 않도록 주의합니다.  ● 흐르는 물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 침수된 지역에서 자동차를 운전하지 않습니다.  ● 지정된 대피소에 도착하면 반드시 도착사실을 알리고, 통제에 따라 행동합니다.  ● 물이 빠진 후에는 물에 휩쓸리지 않도록 물에서 멀리 떨어집니다.  ● 홍수가 지나간 지역은 도로가 약해 무너질 수 있으니 재난발생지역에 가까이 가지 않습니다.  ● 홍수로 밀려온 물에 몸이 젖었을 때 비누를 이용해 깨끗이 씻습니다. ● 집에 도착하면 들어가지 말고 붕괴 가능성을 반드시 점검합니다.  ==============================================================    자연 재해의 조사 방법  (1) 기상청, 중앙 119 구조대, 중앙 재해 대책 본부, 국립 방재 연구소 등의 홈 페이지를  통해 자연 재해에 관한 자료를 찾아 본다.    답변(1) 기상청, 중앙 119 구조대, 중앙 재해 대책 본부, 국립 방재 연구소 등의 홈 페이지1 통해 자연 재해에 관한 자료를 찾아 본다.  (2) 신문, 텔레비전 등을 통해 세계 곳곳에 일어 나는 자연 재해를 조사한다.  2 여러 가지 자연 재해와 피해  (1) 가뭄 :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 농작물이 말라 주고 식수가 부족해지는 현상이다.  (2) 홍수 : 한꺼번에 많은 비가 내려 강물이 넘치거나 제방이 붕괴되어 논과 밭, 집 등이 물에 잠긴다.  (3) 태풍 : 많은 비와 바람으로 인명과 재산, 농작물의 피해를 가져온다.  (4) 지진 : 화산 활동이나 지각 밑의 맨틀의 대류, 진동에 의한 땅의 떨림 현상으로 심한 경우에는  집이 무너지고 다리가 붕괴된다.  (5) 해일 : 지진이나 태풍 등에 의해 바닷물이 비정상적으로 높아져 육지로 넘쳐 들어오는 현상이다.  (6) 폭설 : 많은 양의 눈이 한꺼번에 내리는 것으로 교통이 끊기는 등의 피해를 준다.  (7) 산사태 : 빗물이나 지진 등에 의해 산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현상이다.  3 조상들의 자연 재해 극복을 위한 노력  (1) 설피 : 눈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칡, 노, 새끼를 얽어서 만든 것으로, 신발 바닥에 대었다.  (2) 투막집 : 눈과 바람 등의 피해를 막을 수 있도록 집을 지었다.  (3) 저수지 : 홍수와 가뭄에 대비하여 많은 양의 물을 저장하는 시설인 저수지를 만들었다.  4 오늘날의 자연 재해 극복을 위한 노력  (1) 제방 쌓기 : 수해를 예방하기 위해 흙과 돌을 이용해 둑을 쌓는다.  (2) 방파제 설치 : 큰 파도로부터 배를 보호하고 해일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방파제를 만든다.  (3) 댐 건설 : 홍수와 가뭄을 예방하기 위해 댐을 만든다.  5. 자연 재해의 요인  재해는 발생 원인에 따라 자연재해(천재)와 인위재해(인재)로 나눌 수 있다.  자연재해는 자연현상에 기인한 것을 말하는데 그 원인과 결과의 다양성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으며 자연재해를 크게 분류하면 기상 요인에 의해 발생하는 기상재해와 지반의 운동으로 발생하는 지진 및 화산 활동으로 인한 지질 재해로 나눌 수 있다. 지질재해는 직접적인 피해를 발생시키기도 하면서, 간접적으로 기상이변을 초래하면서 기상재해도 발생시킨다. 자연재해는 인위적으로 완전히 근절시킬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자연재해를 초래하는 어느 정도의 크기의 외력을 고려한 시설물의 설계 및 시공, 방어 시설물의 구축, 재해발생의 사전예측에 따른 예방조치, 재해발생시의 신속한 복구대책 수립 등으로 재해를 막거나 최소화할 수 있다.  인위재해는 인간의 부주의로 발생하는 사고성 재해와 고의적으로 자행되는 범죄성 재해 그리고 산업의 발달에 따라 부수되는 공해 피해 등을 비롯한 여러 가지의 재난을 총칭한다. 인간의 부주의, 기술상의 하자로 인하여 발생하는 재해는 인간의 고의나 과실이 개입되어 야기되는 것으로 교통사고, 위험물 폭발, 원자력 발전소의 방사능 누출사고 등이 있다. 또한 산업발달에 수반되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재해들은 기술과 산업의 발달을 추구하고 이로 인한 부작용을 감내해야 하는 불가피한 것으로 핵발전소, 화학공장의 가동, 농약의 개발과정에서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오염과 자연파괴, 생태계 파괴 등을 말한다.  6 자연 재해의 대비와 복구  (1) 옛날 : 첨성대, 측우기, 수표 등을 이용하여 기후의 변화를 예측하려고 노력하였다.  (2) 오늘날  - 기상청의 일기 예보를 통해 자연 재해를 줄이려고 노력한다.  - 재해 대책 본부에서는 자연 재해에 대비하여 비상 근무를 실시한다.  - 119 구조대, 군인 아저씨, 적십자 회원들은 재해의 피해 복구에 힘쓴다.    자연=...   답변추천해요3추천자 목록 가뭄의 해결방안 에는 많은 것들이 있지만 1. 댐 건설하기.. 2.물 절약   등이 있답니다. 댐을 건설하면 물을 가두고 내보낼 수 있어 가뭄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답니다. 그러나 댐 주위 자연환경이 파괴되게 됩니다. 주위에 안개가 자주 끼게 되죠... 가뭄의 해결방안에는 저수지 등의 관개 시설을 설치하고, 물을 아껴쓰며, 다목적 댐을 거설하는 것 등이 있습니다. 가뭄을 해결하기 위해선 다목적 댐을 지어야 합니다. 다목점 댐은 어마어마한 물을 저장 해놨다가  가뭄이 일어났을때 물을 공급합니다. 가정에서 사용하는 생활용수나, 공장에서 사용하는 공업용수를 공급함으로써, 가뭄이 일어났을때에 사람들이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할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다목적댐은 홍수가 왔을때도 사용되어 유용하지만, 건설하려면 여러 조건과 여건들이 많이 있기에 곤란을 많이 겪고 있습니다.. 피해 심각한 피해는 농업에 미치는 재해라고 할 수 있다. 벼농사기간 중(6·7·8월)에 내리는 평균 강수량은 연평균 강수량의 약 55% 정도, 즉 600∼700㎜ 정도이나 그 양이 1/2 이하가 되면 벼농사는 한발에(가뭄) 의한 한해를 받는다. 최근 댐이나 저수지 등 관개시설이 많이 정비되어 피해면적은 감수되고 있으나, 기상재해중에서는 풍수해 다음으로 피해액이 크다고 볼 수 있다. 한발은 벼뿐만 아니라 전 작물과 과수 등에도 피해를 입히며, 또한 여름철뿐만 아니라 동해안 남부 지방에서는 겨울철에도 한발이(가뭄) 발생한다. 한발은(가뭄) 비가 내리지 않는 날이 약 20일 이상 계속되면 발생되기 시작하나 10∼20일 마다 20∼30㎜정도의 비가 내리면, 가령 그 총량이 월평균 강수량의 1/2 이하일지라도 한발이 되지 않는다. 벼농사의 경우 한발이 되느냐 안 되느냐는 5∼6월의 강수량에 의해서 대체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즉 5∼6월의 강수량이 충분하면 7∼8월의 강수량이 다소적어도 한발의 염려는 없으나 적으면 한발의 위험성이 있다. 가뭄의 피해는 일반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농작물의 피해를 가리키지만, 상수도나 공업용수의 부족, 발전능력의 저하 등에 의한 생활상·상수도나 공업용수의 부족, 발전능력의 저하 등에 의한 생활상·상업상의 불이익도 넓은 뜻의 한해에 포함된다. drouth라고도 씀.  장기간에 걸친 강우(降雨)의 부족상태. 이는 물의 분포에 심한 불균형을 초래해 결과적으로 물의 부족, 농작물 피해, 하천수의 감소가 일어나며, 나아가 지하수 및 토양 내의 습기마저 고갈시킨다. 가뭄은 증발이나 증산작용(蒸散作用:토양 내의 물이 식물을 통해 공기 중으로 나가는 작용)의 결과 대기 중으로 빠져나가는 물의 양이 강수량보다 많을 때 일어난다. 이러한 가뭄현상은 전세계에서 농업에 가장 큰 피해를 입히는 자연재해이다. 가뭄을 조절하기 위해 구름 속에 드라이아이스 같은 응결핵을 뿌려 인공적으로 비를 내리게 하는 노력도 행해지고 있지만, 이러한 실험이 성공을 거둔 예는 매우 드물다. 가뭄에는 4가지 기본형태가 있다. ① 건조기후에 나타나는 영구적인 가뭄:이 경우에는 건조한 기후에 적응한 몇몇 종류의 식물만 자라며, 인위적으로 계속해서 토지에 물을 공급하지 않는 한 농사를 지을 수 없다. ② 건기와 우기가 뚜렷한 기후에서 나타나는 계절적인 가뭄:이러한 지역에서 농사를 제대로 짓기 위해서는 심는 시기를 조절하여 농작물이 우기에 발육하도록 해야 한다. ③ 비정상적으로 강우가 부족하여 생기는 예측불허의 가뭄:이러한 종류의 가뭄은 어떠한 기후에서도 나타날 수 있으나, 특히 습윤(濕潤)·아습윤(亞濕潤) 기후에서 가장 흔하다. 대개 이러한 가뭄은 짧은 기간 불규칙하게 나타나며, 영향을 미치는 범위도 좁다. ④ 비가시적(非可視的)인 가뭄:이러한 가뭄은 여름에 기온이 높을 때 증발과 증산작용이 활발히 일어남으로써 생긴다. 이 가뭄에서는 소나기가 자주 내려도 증발과 증산작용으로 뺏긴 물의 양을 회복하지는 못한다. 결과적으로 활용할 물의 여유가 없는 현상을 일으켜 농작물의 수확량이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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