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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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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7    [록색평화주의자]- 곤충식용 시대가 오다... 우리는 언제?... 댓글:  조회:6350  추천:0  2016-04-05
CJ제일제당이 곤충을 먹거리로 활용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 본격적인 연구개발에 나선다. CJ제일제당은 한국식용곤충연구소와 식용곤충 공동 연구에 대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고 24일 밝혔다. 국내 최초로 식용곤충식과 조리법에 대한 특허를 출원한 식용곤충연구소는 서울 신당동에 식용곤충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CJ제일제당은 연구개발 노하우를 쌓아 향후 식용곤충을 원료로 한 상품을 내놓을 계획이다. 단백질이 풍부한 식용곤충은 미래 식량 자원으로 떠오르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약 20억 명이 1,900여 종의 곤충을 식용으로 섭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밀웜(갈색저거리의 애벌레)과 메뚜기, 귀뚜라미, 꿀개미가 대표적인 식용곤충이다. 2014년 농촌진흥청이 같은 양의 소고기와 말린 벼메뚜기의 영양소를 비교한 결과 벼메뚜기의 저탄소 단백질 함량이 소고기보다 3배 이상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기존 단백질원인 소나 돼지에 비해 사육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 오염이 적은 것도 장점이다. 국내 식용곤충 시장 규모는 아직 90억여원에 불과하지만 향후 성장 가능성이 크다는 게 CJ제일제당의 판단이다. 문병석 CJ제일제당 식품연구소장은 “식용곤충에 대한 연구는 아직 걸음마 단계지만 식량자원 확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제”라며 “소비자가 거부감 없이 즐길 수 있는 식용곤충 상품을 선보이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권영은기자 ============================   곤충산업, 新산업으로 키운다  2020년까지 5천억원 규모    갈색거저리유충(고소애)으로 만든 쿠키. 곤충산업 시장은 2011년 1,680억원에서 2015년 3,039억원 규모로 성장했고, 이 기간 곤충 사육 농가는 265호에서 724호로 늘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곤충이 애완동물용 고급 사료의 원료로 사용된다. 곤충으로 만든 화장품이 공영홈쇼핑에서 판매되고, 곤충 가루가 뿌려진 파스타도 음식점 메뉴로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또 곤충 분야 자격전문인증제도가 도입돼 가칭 ‘곤충해설사’도 선을 보일 예정이다. 농림축산식품부는 국내 곤충산업을 신산업으로 적극 육성하는 이런 내용의 ‘제2차 곤충산업 육성 5개년 계획’을 4일 발표했다. 농식품부는 곤충 산업 규모를 작년 말 3,000억원 수준에서 2020년까지 5,000억원으로 키우고, 곤충사육농가도 지난해 724호에서 2020년에는 1,200호로 대폭 확대 육성할 계획이다. 우선 곤충 생산농가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생산자 단체를 중심으로 ‘곤충 유통사업단’이 구성된다. 사업단은 각 지역 농가에서 식용 및 사료용으로 납품한 곤충을 판매업체에 안정된 품질로 제공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또 곤충종자 보급센터를 설치해 곤충자원 종자화 사업을 보급하고, 곤충 질병관리 등에 나설 예정이다. 곤충요리경연대화, 예천세계곤충엑스포(7~8월) 등을 통해 일반 소비자들에게 곤충산업 홍보도 강화할 계획이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곤충산업이 농업인에게는 새로운 소득원으로, 소비자에게는 가치소비의 기회로 도약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세종=김진주 기자    
396    [록색평화주의자]- 한반도에서 소나무가 사라진다면?... 댓글:  조회:4996  추천:0  2016-04-05
기후변화의 한반도 공습 침엽수가 죽어가고 있다...   지리산 돼지령 부근의 구상나무가 집단 고사해 하얗게 변한 모습. 녹색연합 제공 한라산뿐 아니라 지리산, 설악산 등 내륙에 서식하는 침엽수들도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집단 고사(枯死)하고 있다는 환경단체의 조사 결과가 나왔다. 녹색연합은 최근 1년 간 지리산, 설악산, 울진ㆍ삼척산림보호구역 등 국내 주요 침엽수 서식지를 조사한 결과, 침엽수 고사 현상이 확인됐다고 4일 밝혔다. 한라산 구상나무의 집단 고사는 2013년 확인 돼 정부가 복원에 나섰지만, 한반도 내륙에서 침엽수 집단 고사가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고사가 진행 중인 지리산 구상나무, 설악산 분비나무, 울진 삼척산림보호구역의 소나무는 한국을 대표하는 나무들이다. 녹색연합에 따르면 구상나무 집단서식지인 지리산국립공원은 돼지령, 반야봉, 토끼봉, 연하봉 등에서 고사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 해발 1,400~1,900m 지점에서 집단고사가 두드러지며, 나무 상태로 미루어 보아 2,3년 전부터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사가 처음 시작될 때는 줄기의 겉껍질이 벗겨지면서 주로 검은 색깔을 띠고, 가지 끝 부분이 어느 정도 남아 있다. 하지만 1년 정도 고사가 진행되면 잔가지가 완전히 사라지고, 줄기와 굵은 가지는 하얀색으로 변한다. 특히 돼지령은 남사면과 북사면 곳곳에서 구상나무가 수십 그루씩 하얗게 죽어있다고 녹색연합은 전했다. 한라산 성판악등산로 해발 1,800m 일대에 구상나무들이 하얗게 말라 죽어 있다. 한라산연구소 제공 구상나무 고사 원인은 겨울 가뭄으로 추정된다. 서재철 녹색연합 전문위원은 “겨울철 적설량과 강수량이 줄어들면서 고산 서식지에 건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며 “이 때문에 구상나무, 분비나무, 가문비 나무 등이 고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구상나무는 해외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로 널리 알려져 있는 우리나라 토종식물로, 지리산 한라산에만 집단 서식하고 있으며 덕유산 오대산 가야산 등에서 일부 관찰되고 있다. 기후변화로 분포면적이 급격히 감소하자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은 2013년 구상나무를 멸종위기종으로 지정했다. 국내의 대표적인 분비나무 집단 서식지인 설악산에서는 분비나무 집단고사가 확인됐다. 녹색연합은 “설악산국립공원의 주봉인 대청 ㆍ중청ㆍ소청 등을 비롯해 백두대간 줄기를 따라 서북주능 전체에서 고사가 진행 중”이라며 “10년 안에 주요 집단 서식지 대부분이 사리질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울진삼척 산림보호구역에 있는 금강소나무도 50그루 이상 고사한 것으로 관찰됐다. 서재철 전문위원은 “정부가 정밀한 조사로 고사된 침엽수들의 위치를 파악해 지리정보체계(GIS)를 구축하고, 이 침엽수들의 기초적인 특성과 고사 원인을 분석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환경부 관계자는 “한라산 구상나무 고사에 대해서는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지만, 그 외 지역의 고사에 대해서는 아직 보고받은 바 없다”고 말했다. 남보라 기자 ◆침엽수 고사 현황(녹색연합 제공)◆ 지리산 반야봉에 구상나무들이 고사한 모습. 지리산 노고단~돼지령 일대의 남사면에서 집단고사한 구상나무. 설악산 소청대피소 일대의 분비나무 집단 고사. 설악산 대청봉 북사면의 분비나무 집단고사. 울진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의 금강소나무 고사
395    가난한 詩人들이여 술로 詩를 쓰라... 댓글:  조회:5753  추천:0  2016-04-04
술이란 것이 참 묘한 것 같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풀어 주기도 하고 맺히게도 하고, 긴장을 풀고 혈액 순환을 도와 건강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 아니면 무리한 음주로 인하여 역으로 건강을 해치기도 하고 그 한계가 사람마다 다르고 술 먹는 환경에 따라 다르고 그 날 몸 상태에 따라 다르고 다른 것 같습니다.   예부터도 술 주량은 대장부의 자격을 검증하는 척도로도 사용되기도 하고 술 못하면 졸장부 취급을 당한 사례들도 적지 않죠. 물론 예외적 상황도 존재하여 반증을 하기도 했지만, 술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과 가장 가까운 친구였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듯싶습니다.   먼저 술 하면 중국 당나라 시선인 이백(자:태백,호:청련거사)을 빼놓을 수 없는데요. 술 한잔에 시 한 수를 짓는다 하여 유명해진 시인이지요. 이백이 쓴 유명한 월하독작...         이태백의 술사랑 당대최고의 시성으로 불리였던 이백과 두보   신비로운 달을 바라보며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태백의 시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성찰을 아름답게 노래한다. 달을 손으로 잡으려 물속에 빠져 죽었다는 낭만적인 전설은 진위 여부를 떠나 그가 얼마나 술을 멋있게 즐겼는가를 말해준다. 이태백보다 11세 연하인 당대의 시인 두보 역시 술의 시인으로 후에 시성, 주성으로 불리었다. 두보는 조정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달아갈 때마다 곡강의 주막에 들러 옷을 맡기고 취하도록 마셨다.  외상 술값은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가고 가는 곳마다 빚투성이였다. 그러나 그는 70세까지 사는 사람은 예로부터 드물기 때문이 이 짧은 인생의 한때나마 술을 마시고 세상의 번뇌를 잊는다는 것 또한 즐겁다고 노래했다. 이러한 인생관이 표현된 구절이 바로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말이다. 후에 사람들은 이 구절에 있는 ‘옛 고(古)’자와 ‘드물 희(稀)’자만 빼서 칠순 나이를 고희라 하고 칠순 잔치를 고희연이라 불렀다.     ※月下獨酌1(월하독작)-이태백   하늘이 술을 좋아하지 않으면 하늘에 酒星(술별)이 없을 것이며 땅이 술을 좋아하지 않으면 땅에 응당 酒泉(술샘)이 없어야 하리 하늘도 땅도 원래 술을 좋아하거니 술 좋아함이 하늘에 부끄럽지 않노라 이미 듣기로 청주는 성인에 비할만하고 거듭 말하거니와 탁주는 현인과 같아라 성인도 현인도 이미 다 마셨거늘 꼭 신선을 구해야 할 이유 무엇인가 석 잔이면 대도에 통하고 한 말이면 자연과 하나 될지니 애오라지 취중의 뜻 알았거든 술 안 마시는 자에겐 전하지도 말게나      ※月下獨酌2-이태백   꽃 새에 놓인 술 한 동이 따라주는 친구도 없이 홀로 마시노라 잔 들어 밝은 달을 맞이하고 그림자 대하니 세 사람 되었고녀 달이야 본래 술 마실 줄 모르거늘 그림자만 부질없이 날 따라 마셔대누나 잠시 달과 그림자 벗되어 노니나니 모름지기 행락이 봄과 함께한 듯 흥겹고야 내 노래 소리에 밝은 달 머뭇거리고 내 춤 그림자 어지러운듯 흔들리매라 취하기 전 우리 함께 즐거움 나눴지만 취한 연후엔 각기 흩어져 헤어질지니 주고받은 정 없어도 맺은 인연 영원하여 아스라한 미리내에서 상봉 기약할거나.         ※月下獨酌3-이태백   3월이라 함양성에 온갖 꽃 백주의 비단 같은데 무엇이 봄날 홀로 슬프게 하는가 이럴 때 대하기 쉬운게 그저 술이라 수양이 부족하면 궁통이 허락되니 조화로움이 예로부터의 천품일세 한 통의 술이 생사를 가르거늘 세상만사 참으로 알기 어렵네라 술에 취해 천지 분간 못하고 널부러진듯 쓰러져 홀로 자노라면 내 몸 있는 것도 모를지나 이 즐거움이 진실로 으뜸이로고.         ※月下獨酌4-이태백   근심 걱정은 천 갈래 만 갈래 빛 고운 술은 삼백 잔뿐이로다 근심은 많고 술은 비록 적지만 술잔 기울이면 근심 오지 않으니 술 좋아하는 이유 짐작 하리라 술 좋아하면 마음이 절로 열릴진대 녹봉도 마다하고 수양산에 은거하며 처지 곤궁하면서도 굶주린 안회여 살아생전 술 마시기 좋아하지 않고 헛된 이름 남긴들 무슨 소용 있던가 게의 집게발이 바로 금액이요 술지게미 더미 무릇 봉래산이어라 모름지기 빛 고운 술까지 마셨거늘 높은 대에서 달을 타며 취해 보리라  [출처] 이백 - 월하독작(月下獨酌)|작성자 술취한곰   이백과 달과 그림자가 어우러지는 한판 향연...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는 봄날 저녁 달 밝은 밤에 혼자 술을 마십니다.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봄날 저녁 한잔의 술이란 보약과 같죠. 삼라만상이 다 내 것이고 자연 속의 나는 자연이 되고 내속의 자연은 내가 되는 풍물 그 자체보다 행복할 수 있을까요?   혼자 술 마실 수 있어야 진정한 주당이라 했는데 이백은 그 경지를 넘어선 것이 틀림 없는 것 같습니다. 달과 자신의 그림자와 술을 마시다니 그리고 같이 놀기도 하니 그 붓놀림이 놀랍기만 합니다. 또한 천지인이 하나됨을 느끼니 술의 기운이 놀랍기만 합니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 사이로 비추는 달빛을 바라보며, 한잔 하는 술! 아름답지 않나요? /      ’사귐 길이 맺어 아득한 은하에서 다시 만나기를’ 이란 표현에서 이것도 인연인데 언제 어디선가 다시 만나기를 기원하는 모습에서 법정스님의 ‘一基一會(일기일회)’가 생각납니다.   한번의 소중한 만남과 단 한번의 주어진 기회라는 말인데 한번의 만남이 되는 이 인연이 너무나 소중하고 뜻 깊은 기회이기 때문에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그 순간 순간을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 한다는 잠언이기도 합니다.   시인들이 노래하는 술 시(詩);ㅡ   너무나 유명하고 잘 알려져 있는 조선 중기 문신이며 시인인 정철(호: 송강)의 최초의 사설시조인 ...      장진주사(將進酒辭)> (송강 정철) 한 잔 먹새 그려 또 한 잔 먹새 그려  곳 것거 算(산) 노코 無盡無盡(무진무진) 먹새 그려 이몸 주근 후면 지게 우해 거적 더퍼  주리혀 매여가나 流蘇寶帳(유소보장)의 만인이 우러네나  어욱새 속새 덥가나무 白楊(백양)수페 가기곳 가면  누른 해 흰 달 가난비 굴근 눈 쇼쇼리 바람 불 제 뉘 한잔 먹쟈 할고  아믈며 무덤 우해 잰 나비 파람불 제 뉘우찬달 엇더리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을 꺾어 술잔 수를 꽃닢으로 셈하면서 한없이 먹세 그려 이 몸이 죽은 뒤면 지게위에 거적을 덮어 꽁꽁 졸라매 가지고 (무덤으로) 메고 가거나  아름답게 꾸민 상여를 많은 사람들이 울며 따라 가거나 억새, 속새, 떡갈나무, 은백양이 우거진 숲을 가기만 하면  누런 해, 밝은 달, 가랑비, 함박눈, 회오리 바람이 불 적에 그 누가 한 잔 먹자고 하리오? 하물며 무덤 위에서 원숭이가 휘파람 불며 뛰놀 적에는 (아무리 지난 날을)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옛날에 유명한 의학자이신 '九仙子'라는 분이 계셨다. 하루는 나이 40 정도의 환자가 찾아 왔다. 증상이 이러했다. "온몸에 기운이 다 빠져 나가고 일할 의욕이 없어지며, 온몸 이 갑갑하며 목이 꽉 막히는 것 같고, 가슴이 답답하고, 기가 부대껴 헛배가 부르고 팔다리가 뒤틀리며 마비가 온다. 또 이렇게 몸과 마음이 괴로우니 입술을 깨물고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뜨며 고통을참으려 해도 참을수 없어주먹을 불끈 쥐고 빨갛게 달아오르며 귀까지 빨개진다. 그래서 온몸이 불 같이 뜨거워집니다. 그래서 많은 의사들을 찾아다니며 무수 한 약을 써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九仙子께서 처방을 하나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이 병은 세상의 어떤 의술로도 고치기 어렵습니다.오직 이 처방만이 당신의 병을 치유할 수 있으니잘 복용하면 원기를 보전하고 굳건해져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 원기가 보전되고 굳건해지므로 나쁜 기운이 침범치 못하여만병이 생기지 않 고 걱정 근심 없이편안하게 오래도록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명약이 있을까요? 구선자의 처방은 '保和湯'이란 것인데, 30가지 재료로 되어 있습니다.그 30 가지의 약재료의 처방은 아래와 같다. 01. 思無邪(사무사) : 나쁜 생각을 하지 말라. 02. 行好事(행호사) : 착한 일을 행하라. 03. 莫其心(막기심) : 속이는 마음을 갖지 말라. 04. 行方便(행방편) : 사람을 좋은 길로 이끌라. 05. 守本分(수본분) : 자기의 분수를 지켜라. 06. 莫嫉妬(막질투) : 샘내거나 시기하지 말라. 07. 除狡詐(제교사) : 간사하고 교활한 마음을 버리라. 08. 無誠實(무성실) : 모든 일에 성실하게 힘쓰라. 09. 順天道(순천도) : 항상 옳은 길을 따르라. 10. 知命限(지명한) : 수명의 한도를 알라. 11. 淸心(청심) : 마음을 깨끗이 하라. 12. 寡慾(과욕) : 욕심을 부리지 말라. 13. 忍耐(인내) : 참고 견디라. 14. 柔順(유순) : 성질을 부드럽고 순하게 하라. 15. 謙和(겸화) : 행동은 겸손하고 화목하게 하라. 16. 知足(지족) : 스스로 만족할 줄 알라. 17. 廉勤(염근) : 청렴하고 근검하라. 18. 存仁(존인) : 어진 마음이 늘 있어야 한다. 19. 節儉(절검) : 절약하고 겸손하라. 20. 處中(처중) : 중용을 지켜 치우치지 말라. 21. 戒殺(계살) : 생명체를 죽이지 말라. 22. 戒怒(계노) : 성내지 말라. 23. 戒暴(계폭) : 행동이 거칠지 말라. 24. 戒貪(계탐) : 탐욕을 내지 말라. 25. 愼獨(신독) : 행동을 신중히 하라. 26. 知機(지기) : 순리를 잘 인식하라. 27. 保愛(보애) : 연약자를 사랑으로 보호하라. 28. 廉退(염퇴) : 물러날 줄 알아라. 29. 守靜(수정) : 고요함을 지켜라. 30. 陰櫛(음즐) : 은연중에 안정하라.     이 재료를 잘 썰고 섞어서 가루를 만들고, 거기에 '마음의 물' 두 대접을 잘 저어서 느긋하게 달여때를 가리지 말고 수시로 따뜻하게 복용한다. 참으로 훌륭한 처방인 것이다. 병원에 가 보면 정말 어떤 약으로도 치료가 될 수 없는 병이 많이 있다. 그것은 곧 마음의 병인 것이다.     병은 마음에서 시작된다. 사람이 시기하고 질투하면 파괴적이며 건강에 해롭다. 사람에게서 만족을 앗아가고 분노, 미움, 살인을 일으킨다. 그것은 대단히 해로운 감정이며, 불면증, 위장병을 일으킨다. 분노는 혈압에 영향을 미치며, 심장질환, 두통, 출혈, 현기증 및 발성 능력을 상실한다. 반면에 평온한 마음과 정신의 평화 는 건강한 신체를 갖게 해 준다.   어차피 한번 가면 다시 못 오는 인생인데 좋은 술 먹고 즐기기에도 짧은 인생이 아닌가 싶네요. 인간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듯이 부귀영화가 다 무엇이며, 죽고 한줌의 흙으로 가면 다 마찬가지인데 거적 덮고 가는 장사길이나 상여 타고 가는 장사길이나 다 흙 속에 묻히면 그만일 것을, 욕심과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우리네 인간들에 대한 절묘한 풍자가 숨어 있지 않은가요.   인간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갑니다. /     이런 숨가쁜 세상에 술 한잔의 여유도 없이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요. 술은 이렇게 우리네 삶의 희로애락과 다를 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현대에서 술을 노래한 시인들이 많은데 그 중 빼놓을 수 없는 시인이 존재의 실존적 고뇌를 서정적·철학적으로 노래하는 중견시인인 오세영시인...         술보다 더 깊은 망각을 위해 마신다라는 의미는 뭘까요? 우리는 한번은 완전히 기억에서 자유롭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을까요?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 것인지 이런 것에서 벗어나서 무지의 세계로의 회귀를 생각한다면 술은 그 처음부터 끝까지 같이 있다고 생각하며 술 그 자체의 의미 보다 깊은 뜻이 있다는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막걸리를 정말 좋아 했던, ‘귀천’으로 유명한 천상병 시인... 천상병 시인의 ‘막걸리’...     막걸리라면 시골에서 밭을 메고 논물을 대고 새참을 먹을 때 곁들이는 술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아니면 허기진 배에 음식처럼 먹고 꺽~ 하며 트림하는 서민의 주식이라는 생각도 들고, 가난한 대학생 때 낭만이라도 부리려면 투박한 사발에 그득그득 부어 김치전 한 조각에 삼켰던 그때도 생각이 납니다.   비 오는 날, 김치전에 막걸리 먹으며 읊는 시 한 수라면 마음까지 따뜻해 질 것 같습니다.    가난한 시인이 막걸리를 밥으로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 할 때가 가장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라 하죠. 하물며 가장 좋아하는 음식 먹을 때는 오죽하겠습니까. 술을 즐기는 사람이 술을 마실 때와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마실 때를 비교한다면, 전자가 다음날 훨씬 속이 편한 것은 애주가들은 다 아는 사실이 아닐까요?           ㅡㅡㅡ...
394    땡!~ 꽃말 모음 댓글:  조회:7152  추천:0  2016-04-04
  가을 샤프란-절도의 미 가지-진실 갈대-친절,순정,지혜,신의 은총 감나무-경의,자애,소박 강아지풀-동심 개나리-희망 개암나무-화해 개옻나무-현명 갯개미취-추억 겨우살이-강한 인내심 겹벚꽃-정숙,단아함 고비-몽상 고사리-유혹 꽃창포-우아한 심성 과꽃-믿음직한 사랑,추억, (흰색-믿는마음)  괭이밥-빛나는 마음 국화-성실,청초,고상함,(빨강,자홍-사랑),(흰색-순결), (황색-질투) 군자란-고귀,우아,고결 귤나무-친애,깨끗한 사랑 글라디올러스-견고한 마음, 견고한 사랑 금사철-지혜, 변함없다 금잔화-이별의 슬픔 기린초-기다림 꽃아카시아나무-품위 꽈리-자연미 나팔꽃-그리움, (흰색-넘치는 기쁨) 나팔수선화-짝사랑 나초-청초한 아름다움 노랑 수선화-사랑에 답하여 노란 히야신스-승부 노랑붓꽃-믿는 자의 행복 노루귀-인내 노송나무-불멸 논냉이-불타는 애정 느릅나무-믿음 느티나무-운명 능소화-명예 다래덩쿨-깊은 사랑 다알리아-화려함 단양쑥부쟁이-공훈,애국심,태마 단풍나무-사양,은둔 담쟁이 덩굴-우정 당아욱-은혜 대나무-지조, 인내, 절개, 절정 대추나무-처음만남 데이지-명랑,순수한 마음 도라지-상냥하고 따뜻함 독일창포-멋진 결혼 동백(빨강)-누구보다 그대를 사랑한다 동백(흰색)-비밀스러운 사랑 동백나무-매력 들국화-장애물, 상쾌 들장미-시 딸기-행복한 가정 떡갈나무-붙임성이 좋다,사랑은 영원히 라벤더-기대,침묵,풍부한 향기,나에게 대답하세요, 불신 라일락-사랑의 싹 라일락(보라)-사랑의 싹이 트다 라일락(흰색)-아름다운 맹세 레몬-진심으로 사모함 로즈마리-나를 생각해요,당신의 존재로 나를 소생시키다,행복한 추억,기억,가정의 행복 루드베키아-영원한 행복 마거리트-마음속에 감춘 사랑 매발톱꽃-승리의 맹세 매발톱꽃(빨강)-솔직, 아마, 감사 매화-고결한 마음,맑은 마음 머위-공평 메리골드-가엾은 애정,이별의 슬픔,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 모과-평범 모란-부귀,영화,왕자의 품격,행복한 결혼 목화-우수 무궁화-일편단심,영원,미묘한 아름다움,섬세한 아름다움 무릇-강한 자제력 무화과-풍부 물망초-나를 잊지 마세요,진실한 사랑 미나리아재비-아름다운 인격, 천진난만 미모사-예민한 마음 민들레-행복(노랑색) 바위취-절실한 사랑 박하-덕,미덕 밤꽃-진심 배나무-온화한 애정 백리향-요기 백일홍-행복,인연,떠나간(죽은) 친구를 그리워하다 버드나무-솔직 범의귀-비밀,절실한 사랑 벚꽃-미인,순결,정신적 사랑, 청렴,거짓말 보리-일치 단결 보리수-부부애 복숭아꽃-사랑의 노예,천하무적 봉선화(빨강)-날 건드리지 마세요 부들-순종 부용-섬세한 아름다움 부처꽃-사랑의 슬픔 붓꽃-좋은 소식 비단향꽃무-영원한 아름다움 베고니아-짝사랑,당신을 짝사랑합니다 복수초-영원한 행복,슬픈 추억 사과-명성,유혹 사프란-후회없는청춘,(노랑-청춘의 즐거움) 산나리-순결 산옥잠화-사랑의 망각 살구-아가씨의 수줍음 삼색제비꽃-순애, 나를 생각해 주세요. 사색 상사화-이룰 수 없는 사랑,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 석류-원숙미 소나무-불로장수,용감 수레국화-행복 수련-청순한 마음 수선화-신비,자존, (노랑-사랑에 답하여) 수양버들-내 가슴의 슬픔,사랑의 슬픔 수영-애정, 친근한 정 시클라멘-내성적 성격 쑥국화-평화 씀바귀-순박함 아네모네-기대, (빨강-그대를 사랑해) 아도니스-영원한 행복, 추억 아스파라거스-무변화 아이비제라늄-진실한 애정 아잘레아-사랑의 기쁨 안스륨-사랑에 번민하는 마음 알로에-꽃도 잎새도 애초-젊은 시절과 고뇌, (빨강-돌보지 않은 아름다움), (흰색-첫사랑) 양귀비-(빨강-위로),(흰색-망각) 엉겅퀴-독립,엄격 에델바이스-용기,소중한추억 오렌지-새색시의 기쁨 올리브나무-평화 용담-슬픈 그대가 좋아 우엉-괴롭히지 말아요 월계수-명예 은매화-사랑의 속삭임 은방울꽃-섬세함,틀림없이 행복해집니다 인동-사랑의 인연 알리움-무단한 슬픔 자목련-자연애 자운영-감화, 나의 행복 장미-사랑,(노랑-아름다움, 흰색-존경) 자스민-사랑스러움 접시꽃-열렬한 연애 제라늄-결심,그대가 있기에 행복이 있네, 신실한 애정 제비꽃-겸양,(노랑-수줍은사랑,보라-사랑,하얀색-순진 무구한 사랑) 조팝나무-선언,노력,단정한 사랑 종려나무-승리 주목-고상함 진달래-사랑의 기쁨 찔레꽃꽃-고독,신중한 사랑,가족에 대한 그리움 초롱꽃-감사,성실 측백나무-견고한 우정 치자나무-한없는 즐거움 카네이션-성열 카모밀레-역경에 굴하지 않는 아름다움 칸나-행복한 종말,존경 칼라-열혈 크리스마스로즈-추억 클레마티스-마음의 아름다움 카틀레야-당신은 아름답습니다 토끼풀-약속, 쾌활 튤립(빨강)-사랑의 고백 튤립(노랑)-헛된 사랑 튤립(보라)-영원한 사랑 튤립(흰색)-실연 파슬리-승리 파인애플-완전무결 패랭이-사모, 언제나 사랑해 포도-신뢰 프리지아-시작, 순결, 천진난만 플라타너스-천재 해당화-이끄시는대로 해바라기-숭배,기다림 협죽도-위험 호박-광대함 회양목-참고 견뎌냄 히야신스-차분한 사랑 호접란-당신을 사랑합니다   [출처] 꽃말 모음|작성자 자연인    
393    잠시 쉬염쉬염ㅡ 꿈얘기... 댓글:  조회:6057  추천:0  2016-04-03
가구의 위치를 바꾸거나 돌려놓는 꿈은  유산할 우려가 있으므로 산모는 매사에 몸조심을 해야 한다.  갓난 아이가 책을 가지고 놀며 말하는 꿈은  장차 아이가 자라 강단에 서거나 연구직에 종사하고 유명해진다.  강가에서 게를 잡는 꿈은  장차 아이가 커서 교수직이나 연구, 학문하는 일에 종사하여 정진하게 된다.  강변에서 빛나는 수석을 줍는 꿈은  아이가 높은 관리나 관직에 오르고 학자로 크게 성공한다.  강에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는 꿈은  아들을 얻을 수이나 일찍 잃을 수가 있다.  개뻘에서 용의 머리를 캐내는 태몽은  아이가 커서 단체의 우두머리가 되거나 권세를 얻게 된다.  거북을 타거나 만지는 꿈은  장차 회사나 단체, 그룹의 지도자, 우두머리가 될 아들을 얻게 된다.  거울을 얻는 꿈은  자신을 평생 받들어 모실 자식을 얻는다.  고구마가 산같이 쌓여 있는 것을 보는 꿈은  군중이나 대가족의 집안을 다스리게 된다.  고구마를 먹는 꿈은  건강한 아이를 얻으며, 그아이가 장차 집안의 기둥이 된다.  고구마를 안고 있는 꿈은  장차 아이가 예능이나 학구적인 방면에서 크게 될 수 있다.  고구마 밭을 걸어 다니는 꿈은  작품이나 공예에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인물이 나온다.  고목에 꽃이 피는 태몽은  많은 사람을 계몽하고 깨우칠 선구자적인 아들을 얻게 된다.  고추를 보는 꿈은  아들을 낳을 징조이다.  곤충의 표본을 보는 태몽은  장차 아이가 크게 출세를 하거나 혹은 염세주의자가 될 수 있다.  곤충이 나는 것을 보는 태몽은  장차 연예인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공작새를 소유한 꿈은  태어날 아이가 부귀영화를 누리고 지위가 높은 사람이 된다.  과일을 따는 태몽은  아들을 낳을 징조이다.  관음보살상을 얻는 태몽은  훌륭한 자녀를 얻거나 훌륭한 작품, 명예 학위 등을 얻게 된다.  광에 밤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는 태몽은  여자 아이가 태어날 수 있으며 많은 재물로서 가문을 빛내게 된다.  구렁이가 쥐구멍으로 들어가는 태몽은  태아가 유산되거나 유아기에 사망한다.  구렁이가 즐비하게 늘어져 있는 꿈은  정치인 혹은 기업인이 될 자손이 태어난다.  금불상을 얻게 되는 꿈은  위대한 정신적인 지도자로 진리를 탐구할 인재가 태어난다.  금반지를 얻는 태몽은  여아가 태어나며 그 아이가 원만한 성품으로 장차 사회적인 지위를 얻게 된다.  금붕어가 서로 뒤엉켜 있는 것을 보는 꿈은  사회에 많은 공헌을 하고 큰 기업가가 될 아이를 잉태하게 된다.  금붕어가 땅에 떨어져 어항에 집어 넣는 태몽은  예술적 능력이 뛰어난 아이를 출산하게 된다.  금비녀를 보게 되는 태몽은  공무원이 되거나 집안을 부흥시킬 귀한 자식을 얻는다.  금빛 태양이 자신을 향해 이글거리는 꿈은  문제아인 자식을 낳지만, 후에 부모의 이름을 크게 빛나게 할 귀한 자식을 낳는다.  까치가 우는 태몽은  수까치는 남자, 암까치는 여자를 상징하며 좋은 일이 생길 징조이다.  꼭지가 있는 사과나 배를 따면  틀림없는 아들이다.  꽃을 보고 꺾어 들면  장차 사회적으로 크게 이름을 떨칠 아들을 출산한다.  꽃이 활짝 피었는데 그 꽃을 타인이 꺾는 꿈은  유산이 되거나 아이가 일찍 사망할 징조이다.  꾀꼬리가 방안으로 날아드는 꿈은  장차 군인으로 성공하거나 인기 있는 사람으로 출세할 아들을 출산한다.  나무 아래에 커다란 동물이 앉아 있는 태몽은  높은 신분이나 지위를 가진 사람 밑에서 일을 배우게 되거나 사업가로 대성할 자식을 출산하게 된다.  난초나 죽순을 보는 꿈은  자손이 귀한 집에서 어렵게 자손을 얻게 된다.  노란색 국화꽃을 한 다발 꺾어 드는 꿈은  아들, 딸 상관없이 명예로운 자식을 얻게 된다.  누런 암소가 얼룩무늬 송아지를 낳는 것을 보는 꿈은  장차 아이가 문제아가 될 수 있으나 후에는 집안을 빛내게 된다.  달을 보고 잉태하면  대체로 계몽적인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 또는 유명인이 된다.  달리는 말을 보는 태몽은  정치인 또는 그룹이나 회사의 총수가 될 아들을 출산하게 된다.  대추를 따서 먹는 꿈은  건강하고 머리가 좋은 자식을 출산하게 된다.  더러운 장소에서 용의 실체를 보는 태몽은  장차 사람들을 앞에서 이끄는 지도자적인 인물이 될 아이를 출산하게 된다.  동자가 학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본 태몽은  장차 이름난 학자 또는 그룹의 지도자가 될 아이를 출생하게 된다.  동자가 학을 타고 내려오거나 학이 자신의 몸에 앉는 꿈은  태몽이라면 연구에 몰두하여 학문적인 업적을 남길 자식을 얻게 된다.  돼지 새끼를 어루만지는 태몽은  장차 아이가 풍족한 생활을 영위하게 되지만 부모나 배우자에게는 근심거리가 생긴다.  돼지 우리에 돼지가 가득 차 있고 돼지 새끼가 우글거리는 태몽은  작가나 교육자, 사업가가 되어 이름을 날리게 된다.  돼지가 떼를 지어 부엌으로 들어오는 태몽은  높은 직위에 오르거나 학문에 종사할 아이를 출생한다.  떡시루에 있던 떡을 다 먹어치우는 태몽은  장차 아이가 정신적인 지도자로서 이름을 떨치게 된다.  떨어지는 별을 치마에 받거나 삼키거나.별이 뱃속에 들어가거나 지붕 마루에 구르면  태몽이라면 태아가 작품,업적,사업 등으로 성공할 징조이다.  떨어지는 포도송이를 받아 먹지 않고 쳐다만 보는 꿈은  장차 교육자나 정신적인 지도자로 크게 이름을 떨칠 아이를 출산한다.  무지개를 타고 선녀가 내려오면  그 사람 또는 일거리의 영광됨을 과시하는 표현이다. 이런 광경을 보고 아기를 낳으면 부귀영화를 누릴 사람으로 출세한다.  무지개를 향하여 달려가는 꿈은  장차 아이가 인기인이나 유명인사가 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  물건을 안고서 산에 오르는 태몽은  어렵게 아들을 얻게 된다.  양이나 염소가 풀밭에 있는 것을 보면  장차 임심 할 태몽입니다.  물 속에서 잉어나 용, 뱀이 안개를 헤치며 나타나는 태몽은  위대한 작품이 나오거나 세상에 감동을 줄 일이 생기며 학자나 군인으로서 명성을 떨칠 아들을 출산한다.  밑에서 열매를 따는 꿈은  평범한 서민으로 살아갈 자녀를 출산한다.  방안이나 마루에서 물고기가 노는 것을 보는 태몽은  장차 작가나 지도자가 될 인물을 출산하게 된다.  뱀이 우글거리는 것을 보면서 미소를 짓는 꿈은  교육 분야에 종사하면서 많은 사람을 계몽 선도할 훌륭한 인물을 출산한다.  뱀과 성교하는 태몽은  장차 지혜,명예,권세를 가질 아이가 태어나게 된다.  번개불을 보는 태몽은  자손이 귀한 집에 자식이 생긴다.  법당 안에 있는 사천왕이 눈을 부릅뜨는 태몽은  태어날 아이가 커서 경찰관이나 군인으로 성공할 징조이다.  법회에 들어가 경을 읽는 태몽은  나라에 크게 공헌할 귀한 아들을 출산하게 된다.  벗꽃이 만발하여 화창한 태몽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미인인 여아를 출산하게 된다.  별이 떨어진 자리에 나비가 날아드는 태몽은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인기인 혹은 유명인을 출산하나 여자 관계가 복잡해질 수 있다.  별이 품 속으로 떨어지는 꿈은  선구자석인 인물이나 성직자가 될 인물을 출산하게 된다.  봉황새 한쌍을 보는 꿈은  두뇌가 명석한 자식을 출산하게 되며 널리 이름을 떨치게 된다.  비둘기가 날아가는 것을 보는 꿈은  박애적 정신을 가진 여자 아이를 출산하게 된다.  빨간 실뱀이 치마폭으로 들어 오는 꿈은  친절하고 상냥한 아름다운 여자 아이를 출산하게 된다.  빨간 나비가 푸른 산 계곡을 날아다니는 꿈은  장차 태아가 높은 관직에 오르고 권세를 누리게 된다.  산신령이 동자를 데리고 나타난 꿈은  장차 학자로 명성을 떨칠 아이를 출산한다.  살고 있는 집의 우물물이 넘쳐 흐르는 꿈은  돈과 재물을 많이 모으게 아들을 출산한다.  상어를 그물로 잡아 배에 싣는 꿈은  공직에 나아가 권세를 모으게 될 아들을 출산한다.  상여 앞에 수많은 만장이 휘날리고 조문객이 많이 따르는 태몽은  태어날 아이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 장차 명예로운 일을 성취하고 죽은 후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  새가 많이 날아가거나 앉아 있는 것을 보는 꿈은  많은 집단을 뜻하며, 장차 커서 많은 사람을 거느릴 지도자적 인물을 출산하게 된다.  새 떼가 날아오는데 그 중 가장 큰 한 마리가 방으로 날아드는 꿈은  적극적이고 호탕한 지도자가 될 인물을 출산하게 된다.  직장에서 새롭게 승진하거나 인정을 받는 꿈은  이름을 떨쳐 그 명예로써 가문을 빛낼 자녀를 출산하게 된다.  새집에 문패를 다는 꿈은  훌륭한 인물이 될 자녀를 낳게 된다.  샘물을 마시는 꿈은  섬세함을 지녀 장래에 작가나 예술가로써 크게 성공할 자녀를 출산한다.  서산으로 해가 지는 것을 보며 안타까워 하는 꿈은  여자 아이를 출산하게 된다.  선녀가 아이를 안아다 주는 꿈은  정부 기관, 공직에서 중요한 일을 맡아 수행하게 될 아이를 잉태하게 된다.  성화를 들고 계속 달리면  태몽이라면 진리 탐구를 하는 학자나 종교적 지도자가 될 자손을 얻을 징조이다.  세계 지도를 얻는 꿈은  태몽일 경우에는 태아가 장차 사장이나 관리인, 혹은 세계적인 인물이나 지도자가 된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속이 빈 짚이나 나무가 물에 떠다니는 꿈은  여자 아이를 출산한다.  스님이 집 앞에서 염불을 하고 있으면  태아가 앞으로 학문에 정진하여 큰 학자가 되고 꽹과리를 두드리게 되면 무관으로 명성을 날린다.  솥이나 냄비를 얻은 태몽을 꾸면  태아가 장차 어떤 사업체를 운영하게 됨을 예시한다.  아내가 남편의 의복을 걸치는 꿈은  아들을 출산하게 된다.  아카시아 꽃이 활짝 핀 오솔길을 걸어가면  아이가 집안의 명예를 빛내게 될 것이다.  가지가 앙상한 나무가지를 흔들어서 과일을 따는 꿈은  산모가 출산할 때 건강이 걱정됨을 나타낸다.  앵두나무 꽃을 벽장 안에 넣어두는 꿈은  직계 자손에게 아들이 생길 징조의 꿈이다.  열심히 공부하는 꿈은  아이의 장래 직업이 학자나 연구 방면이 된다.  오색 찬란한 빛이 나오는 사슴을 보는 꿈은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서 명예를 얻을 아들을 얻게 된다.  오색 찬란한 물고기를 앞치마에 받쳐 드는 꿈은  장래에 유명한 작가 혹은 예술가가 될 아이를 출산한다.  오이를 먹는 꿈은  뛰어난 미인이 될 아이를 출산하게 된다.  왕궁에서 도포 자락을 잡고 매달리는 꿈은  정치적으로 명성을 떨칠 남자 아이를 출산하게 된다.  용이 손가락을 무는 꿈은  아들을 낳으나 교육이 잘 못되면 문제아가 될 수 있다.  용이 죽어 있는 것을 보면  다른 사람의 아기가 유산될 수 있다.  우물가에서 뱀과 지네가 어울려서 노니는 꿈은  장래에 태아가 사회 사업가나 정치가로서 놀라운 재능을 나타내어 명성을 떨치게 된다.  우물가에서 용과 구렁이가 함께 어울려 하늘로 날아 오르는 꿈은  정치적으로 정치권에서 막강한 권력을 가질 아들을 출산하게 된다.  우박이 갑자기 지붕을 온통 뒤덮는 꿈은  아들을 출산하게 된다.  월척 붕어를 두 팔로 안고 있는 꿈은  장래에 작가가 되거나 명예와 재물을 크게 얻을 아들을 출산하게 된다.  은수저를 얻게 되는 꿈은  인격이 높고 잘생긴 아들을 낳는다.  임신중에 구렁이에게 물리는 꿈은  나라일에 크게 이바지할 훌륭한 아이를 낳게 된다.  임산부가 무덤 위에 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면  자수 성가하여 크게 명성을 얻을 아이를 출산하게 된다.  임산부가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하는 꿈은  장래에 자식이 부모를 배격하게 될 것을 상징한다.  자기의 몸에서 빛이 나오는 꿈은  대성하여 높은 관직에 오를 아이를 출산하게 된다.  작은 실뱀이 우글거리는 꿈은  생각하지 못했던 재산이 생기고, 장래에 교수나 군인이 되어 많은 사람을 거느릴 인재를 출산하게 된다.  잔디밭에서 풀을 뜯고 있는 말을 보는 꿈은  교육자로서 사회에 공헌할 아들을 출산하게 된다.  적룡과 흑룡이 몸을 뒤틀며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본 태몽은  태아가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임을 암시한다.  절에서 어떤 물건을 얻어 소유하면  태몽이면 그 물건의 상징 의미와 함께 어떤 기관이나단체에서 귀한 신분이 된다.  제비가 날아가다 가슴으로 안겨드는 꿈은  똑똑하고 재주가 비상한 아이를 출산하게 된다.  제비를 가까이 한 꿈을 꾸면  태어날 아이 는 장차 재주가 뛰어나고 아름다운 얼굴을 지니게 될 것이다. 조상과 함께 소가 보이는 꿈은  주위의 도움을 많이 받아 사업가로 크게 성공할 아이를 출산한다.  조약돌을 손에 쥐고 주물럭거리는 꿈은  여럿의 형제를 출산하게 된다.  집안에 호랑이가 앉아 있거나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본 태몽은  인기인이나 권위 있는 정치가 혹은 사업가가 될 아들을 출산한다.  참기름 한 병을 다 먹는 태몽은  장차 태아가 큰 진리를 깨우치고 진리를 베푸는 것을 암시한다.  참새 한 마리가 방으로 날아오는 꿈은  평범하게 성장한 여아를 출산하게 된다.  창문에서 집안을 들여다보는 꿈은  아이를 출산할 때 산모의 건강이 우려된다.  청색 구렁이가 산꼭대기에서 산 아래를 향해 긴 몸을 늘어뜨리고 있는 꿈은  장래에 군중의 지도자가 될 아이를 출산한다.  침실에 빛이 스며드는 꿈은  귀여운 아들을 출산하게 된다.  큰 뱀을 보면  효심이 지극한 여아를 출산한다.  큰 짐승이 집안으로 들어오는 꿈은  많은 부와 명예를 얻게 될 자손을 출산하게 된다.  파도가 거세게 몰아치는 태몽은  매우 용감하고 진취적인 아들을 출산하게 된다.  파, 마늘을 구입하는 태몽은  장차 태아가 성장하여 성직자나 교육자가 될 것임을 암시한다.  푸른 빛을 내는 열매를 보는 꿈은  아들을 출산하게 된다.  학이 가슴에 안기는 태몽은  장래에 학자나 성직자가 될 딸을 출산하게 된다.  한 쌍의 봉황을 얻은 태몽을 꾸면  태어날 아이가 장차천재적 인 인물이 되거나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되거나 文과 武를 겸한 사람 이 되거나 또는 그 남매가 모두 위대한 업적을 남길 인물이 됨을 예 시합니다.  해가 강에서 떠오르는 꿈은  아들을 출산하게 되나 헤어질 우려가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해를 손으로 만지거나 따는 꿈은  많은 권세와 재물을 얻게 될 아들을 출산한다.  해를 치마폭에 받는 꿈은  장차 아이가 사업이나 학문적, 종교적인 일에서 성과를 거두어 국가와 사회에 이름을 떨치게 된다.  해 두 개가 붙어 보이는 꿈은  쌍둥이를 낳게 되거나 두 개의 사업을 동시에 이룩할 뛰어난 자식을 출산하게 된다.  호랑이와 관련된 태몽은  만약 딸을 낳게 되면 장차 아이가 여성사업가로서 크게 이름이 나거나 거물을 배우자로 맞이하게 될 것이다.  호랑이의 눈이 안개속에서도 번뜩여 보이는 태몽은  인기인, 유명인이 되거나 사업체를 경영하게 될 아들을 출산한다.  화려한 공작새가 날개를 펴는 태몽은  인기인으로서 상당한 재력을 갖게 될 아이를 출산하게 된다.  임산부가 나무에 황새떼가 무수히 앉아 한가롭게 보이는 꿈을 꾸면  태몽으로 이후에 태어날 아이가 장차 관공서나 기업체의 고급직원들을 감독 할 사람이 되는 높은 지위의 사람이 되어 권세와 재물이 생기게 된다.
392    [록색평화주의 者]- 땡!~달,화성에서 농사짓는다면... 댓글:  조회:5147  추천:0  2016-03-25
네덜란드 연구진, 토양 재현… 10種 재배 성공… 열매도 맺어 ▲ 영화 ‘마션’에서 주인공이 화성에서 감자를 돌보는 장면(위 사진). 아래 사진은 네덜란드 바헤닝언대 연구진이 화성과 같은 토양 조건에서 키운 토마토. /이십세기폭스코리아·바헤닝언대 제공 지난해 개봉한 영화 '마션'에서 화성(火星)에 홀로 남겨진 우주인 마크 와트니는 숙소 안에 감자를 심었다. 하지만 실제로 인류의 화성 식민지에서 자랄 첫 번째 작물은 감자보다는 토마토와 완두가 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확인됐다. 네덜란드 바헤닝언대 연구진은 지난 9일 "화성·달과 비슷한 조건의 토양에서 토마토·완두·호밀 등 작물 10종(種)을 재배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바헤닝언대 연구팀은 미항공우주국(NASA)의 탐사 기록을 바탕으로 온실에 화성과 달의 토양을 재현했다. 화성의 흙은 성분이 비슷한 하와이의 화산흙을, 달의 흙은 미국 애리조나 사막의 모래를 사용했다. 이어 잔디와 풀을 흙에 섞어 토양에 미생물과 영양분을 공급한 뒤 토마토·완두·호밀·무·시금치·부추·냉이·퀴노아·파·부지깽이를 심었다. 그 결과 10종의 작물 모두 뿌리를 내리고 자라기 시작했다. 특히 토마토·완두 등은 열매까지 맺었다. 연구 책임자인 비거 바메린크 박사는 "척박한 화성과 달의 토양이라도 온도를 맞추고 거름과 물만 충분히 공급해주면 작물이 충분히 자랄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됐다"면서 "수확량 역시 지구의 텃밭과 비슷한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지난 2013년에도 화성 토양으로 같은 실험을 진행했지만, 일부 작물에 떡잎이 나는 정도에 그쳤다. 달 토양 실험은 완전히 실패했다. 바메린크 박사는 "거름과 토양미생물을 보충하면서 작물 재배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재배에는 성공했지만, 아직 이 작물을 사람이 먹을 수는 없다. 화성과 달 토양에는 지구와 달리 납 등의 중금속이 다량 포함돼 있다. 이 흙에서 자란 작물에도 인체에 유해한 중금속이 들어 있다는 뜻이다. 연구팀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금속을 토양에서 제거하는 새로운 실험을 다음 달 시작할 계획이다. NASA와 전기차업체 테슬라 창업자 일론 머스크가 세운 우주개발업체 스페이스X 등은 2030년 이후 화성에 유인 탐사선을 보내 식민지를 개척하겠다는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 화성에서 작물이 자라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느냐는 화성 식민지 건설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탐사선에 싣고 갈 수 있는 식량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먹을거리를 자급자족할 방법이 필요하다. 소나 돼지 같은 가축을 키우기 위해서도 식물이 있어야 한다. NASA도 우주에서 작물 재배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인공조명과 수경재배 장치를 이용해 다양한 작물을 시험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재배한 상추를 우주인들이 시식하기도 했다. 우주상추를 분석했더니 지구에서 자란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NASA는 우주인들에게 신선한 채소를 공급하기 위해 토마토와 블루베리 등도 재배할 계획이다.
391    [록색평화주의 者] 땡!~논이 사라지면 매가 멸종한다 댓글:  조회:6089  추천:0  2016-03-25
日 인구 줄어 계단식 논 방치 잡초 제거하는 손길 끊기자 특정 식물이 점령, 다양성 깨져 나비·개구리 등 줄어들면서 상위 포식자 왕새매 멸종 위기 고양·성남시는 계단식 논 복원… 생물種 다양한 생태계 되살려 논에서 더 이상 농사를 짓지 않으면 자연에 득이 될까, 해가 될까. 벼만 자라던 땅이 나무와 풀로 덮이니 당연히 자연에 좋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바로 계단식 논이다. 고지대 습지를 논으로 개간한 계단식 논은 수천 년의 세월을 거쳐 다양한 동식물이 깃들여 사는 작은 생태계가 됐다. 이곳이 사라지면 오히려 생태계에 위기가 오는 것. 인간과 자연은 어떻게 논에서 공생(共生)할 수 있을까. ◇계단식 논 줄면서 생태계 위기 국제학술지 '사이언스'는 최근 일본의 계단식 묵논(버려진 논)이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집중 분석한 글을 실었다. 계기는 묵논의 증가다. 일본은 인구가 2008년 1억2800만명을 기점으로 점점 감소하는 추세다. 일본 정부는 2060년이면 8600만명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예측했다. 쌀 소비도 1960년대 초 성인 1인당 연간 118㎏에서 2013년 58㎏으로 급감했다. 이로 인해 1961년 이래 2760㎢ 면적의 논이 버려졌다. 일본 농림수산성은 향후 10년간 묵논이 1200㎢ 더 늘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우리나라와 중국도 같은 길을 가고 있다. ▲ 우리나라와 일본의 산촌에서 볼 수 있는 계단식 논(왼쪽 사진)은 동식물의 보고(寶庫)로 인정받고 있다. 계단식 논의 감소는 동식물의 위기로 이어진다. 일본에서는 계단식 논이 줄면서 그곳에 살던 산개구리(오른쪽 가운데)의 수가 줄고, 이어 개구리를 먹고 사는 왕새매(오른쪽 위)마저 멸종위기에 몰렸다. 오른쪽 아래 사진은 국내 계단식 논에서는 처음 발견된 물이끼. /사이언스·위키미디어 제공 논이 자연으로 돌아가면 그만큼 생태계에 이득이 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일본 나비보호협회 연구진은 2011년 지난 40년간 나비 개체 수 급감의 주원인이 계단식 논과 저수지, 숲이 한데 어우러진 산촌(山村), 즉 일본어로 '사토야마(里山)'가 크게 줄어든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 개방대 연구진은 2009년 '생물 보전'지에 계단식 논이 줄어들면서 그 속에 사는 개구리를 먹고 사는 왕새매가 멸종 위기에 내몰렸다고 발표했다. 고베대의 우시마루 아투시 교수는 계단식 논이 자연에 이득이 되는 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농민들은 계단식 논의 가장자리, 즉 논두렁에는 일부러 풀이 자라게 한다. 풀뿌리가 둑을 단단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논두렁의 잡초를 일 년에 두세 번 잘라내 특정 종이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게 관리한다. 덕분에 다양한 식물이 논두렁에 자랄 수 있다. 여기에 나비와 잠자리 같은 곤충들이 모여들고 개구리, 왕새매로 이어지는 건강한 먹이사슬이 형성된다. 버려진 논이나 토지 정비를 한 대규모 논에서는 이런 생태 다양성을 찾을 수 없었다고 우시마루 교수는 밝혔다. 계단식 논은 희귀 식물의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김재근 서울대 생물교육과 교수는 2013년 계단식 논에서 처음으로 물이끼를 발견했다. 이전까지 물이끼는 고지대 습지에서만 발견됐다. 계단식 논은 저지대의 대규모 논과 달리 항상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 비료가 오래 남지 않는다. 영양분이 부족한 고지대 습지와 흡사한 서식 조건이다. 계단식 논에 사는 식물들을 다른 곳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국립환경과학원 국립습지센터는 2014년 1년간 조사 끝에 전국에서 247곳의 습지를 새로 확인했다. 이 중 산지형이 107곳으로 가장 많았는데, 대부분 계단식 묵논이었다. 김태규 국립습지센터 연구사는 "계단식 논은 원래 고지대 습지를 개간한 곳이 많다"며 "덕분에 습지에 살던 고유종이 그대로 논에도 사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당시 조사에서도 계단식 묵논에서 독미나리·가시연꽃·통발 등 희귀 습지식물들이 다수 발견됐다. ◇논 복원으로 인간·자연 공생 모색 계단식 묵논은 원래 습지 생태계로 돌아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소수의 식물에 점령당한다. 일본에서는 칡이나 북미에서 유입된 기생식물인 메역취가 다른 식물을 몰아내고 묵논을 차지한 예가 많았다. 식물의 종 다양성이 사라지면 동물도 살기 힘들어진다. 다행히 최근 국내에서는 계단식 묵논의 생태적 가치를 인식하고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경기도 고양시는 안곡습지에서 갈대를 잘라내고 원형인 계단식 논을 복원했다. 논에는 흰뺨검둥오리가 늘었고 곤충들도 다양해졌다. 벼농사 수확물은 불우이웃을 돕기 위해 주민센터에 기증했다. 성남시는 토사로 메워졌던 판교의 계단식 묵논을 복원해 습지생태공원으로 만들고 있다. 논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공생을 복원하는 것이다. ///////////////////////////////////////////////////////////////// [ 2016년 03월 23일 08시 30분  ]         [인민망 한국어판 3월 23일] 심양(沈陽)시 조페 회사는 중국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조페 인쇄 기업이다. 이 회사는 1896년 설립되었고 중국에서 규모가 가장 큰 동전 생산 회사이기도 하다. 1953년 중화인민공화국 설립되고 처음으로 발행한 1전(分) 짜리 동전이 바로 이 회사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2전, 5전 짜리 동전 역시 이곳에서 제작되었다.
390    땡!~ 인공지능이 쓴 단편소설 문학상 예심까지 가다... 댓글:  조회:5953  추천:0  2016-03-24
  인공지능이 그린 추상화 ================================ [인공지능이 쓴 단편소설 두편, 일본 SF 문학상 예심 통과] 인간이 줄거리·인물 정해주고 인공지능이 단어조합, 문장완성 '컴퓨터가 소설 쓰는 날' 등 2편, 1인칭 소설… "100점 만점에 60점" 2년 내 인간 도움 없이 집필 목표   일본에서 인공지능이 쓴 소설 두 편이 니혼게이자이신문사가 주최하는 공상과학(SF) 소설 공모전에서 1심을 통과했다. 본심에선 떨어졌지만, 일본 과학자들이 2012년 9월 '변덕쟁이 인공지능 프로젝트'라는 모임을 만들어 3년 반의 노력 끝에 거둔 성과다. 프로젝트를 이끈 마쓰바라 진(松原仁) 공립하코다테미래대 교수는 21일 "1심을 통과한 건 쾌거"라면서 "앞으로 더 연구가 필요하다"고 했다. 연구팀이 도전한 공모전은 일본 소설가 호시 신이치(星新一·1926~1997)의 이름을 딴 '호시 신이치 문학상'이다. 호시는 '미래의 이솝'을 자처하면서 SF·미스터리·괴담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200자 원고지 20매 안팎의 초미니 단편소설을 1000편 넘게 남겼다. 연구팀은 호시의 작품과 호시 문학상 수상작을 샘플로 입력한 뒤, 이를 토대로 장차 인공지능이 호시와 같은 수준의 작품을 쓰게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일본SF작가협회장 세나 히데아키도 고문으로 동참했다. 지금까지 제일 잘 쓴 작품 네 편을 골라 작년 가을 공모전에 제출했고, 그중 두 편이 본심까지 살아남았다. 나머지 두 편은 줄거리가 갈팡질팡해 떨어졌다.   그래픽=김충민 기자 문학상 사무국 관계자는 "어느 작품이 인공지능의 작품인지 심사위원들이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심사가 이뤄졌다"고 말했다. 본심에 올라간 두 편의 제목은 각각 '나의 일은'과 '컴퓨터가 소설 쓰는 날'이고, 화자(話者)가 "나는…" 하고 자기 얘기를 풀어나가는 일인칭 소설이다. 대단한 사건이 아니라, 소소한 일상과 섬세한 감정을 다루고 있다. 가령 '나의 일은'은 로봇이 주인공인데, 첫 문장이 이렇게 시작된다. "나의 일은 공장 라인에 들어가 정해진 루틴대로 일하는 것.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작업을 한다. 요즘은 경기도 안 좋고 출근해도 무료하다." 이 로봇은 자기보다 성능이 좋은 신형 로봇이 나왔다는 인간의 말에 충격을 받기도 하고, 인간이 자리를 비웠을 때 옆자리 로봇과 상전인 인간에 대해 '뒷공론'을 하기도 한다. 또 다른 한 편인 '컴퓨터가 소설 쓰는 날'은 컴퓨터 속 인공지능이 주인공으로 나와 자기가 얼마나 고독한지를 털어놓는 내용이다. 인간 청년이 요구하는 대로 성심성의껏 연애 노하우를 알려줬더니, 막상 연애가 잘 풀리자 청년은 여자 만나느라 맨날 늦게 들어온다. 외로워진 인공지능은 "(이대로 계속 방치당하면) 조만간 내가 정지될 것 같다"고 생각한다. 인공지능이 인터넷에 접속해 같은 모델로 나온 자매 프로그램과 상담했더니 '큰언니'는 "소설 쓰기에 몰두해보라"고 충고한다. 연구팀이 호시의 작품을 샘플로 삼은 이유는 그의 작품이 짧으면서도 수준이 높고, 기승전결과 반전이 확실하면서 구성 요소도 알기 쉽다는 점에 있다. 인간의 감정을 다루는 소설 중에서 가장 도전하기 쉬운 작가로 판단한 것이다. 두 작품을 읽은 SF 작가 하세 사토시(長谷敏司)는 니혼게이자이신문에 "100점 만점에 60점 정도로 놀라운 수준"이라고 했다. 마쓰바라 교수는 일본 언론에 "아직은 인간의 손이 가는 부분이 80% 정도"라고 했다. 인간이 줄거리와 등장인물을 정해주고 인공지능이 그에 맞춰 나머지를 풀어나가는 단계라는 것이다. 앞으로 2년 뒤에는 줄거리까지 인공지능 스스로 지어내게 하는 게 연구팀의 목표다. ======================================== 인공지능의 소설창작 프로젝트를 진행한 마쓰바라 진(松原仁) 공립하코다테미래대 교수가 21일 도쿄 도내에서 열린 보고회에서 성과를 설명하고 있다. 도쿄 교도=연합뉴스 “그 날은 구름이 드리운 잔뜩 흐린 날이었다. 방안은 언제나처럼 최적의 온도와 습도. 요코씨는 어수선한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시시한 게임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한가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일본 연구자들이 자신들이 개발한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쓴 ‘컴퓨터가 소설을 쓰는 날’의 도입부다. 인공지능으로 소설을 쓰는 프로젝트를 진행해온 일본 연구자들이 지난 21일 도쿄 도내에서 보고회를 열었다고 요미우리(讀賣)신문이 22일 보도했다. 이날 행사는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 직후 열려 특히 관심을 불러모았다. 프로젝트를 주도한 마쓰바라 진(松原仁) 공립하코다테미래대 교수는 인공지능을 이용해 쓴 4편의 단편소설을 SF작가 호시 신이치(星新一)씨의 이름을 붙인 ‘호시 신이치 문학상’에 응모했다. 작품은 상을 받는데 실패했지만 일부가 1차 심사를 통과한 경우도 있었다. 기초작업은 물론 인간이 했다. 연구진은 대략의 플롯(구성)을 부여하고 인공지능이 주어진 단어와 형용사 등을 조합해 문장을 만드는 형식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사람이 ‘언제’ ‘어떤 날씨에’ ‘무엇을 하고 있다’는 등의 요소를 문장에 포함시키도록 지시하면 인공지능이 관련 있는 단어를 자동으로 골라 문장을 만드는 식이었다. 도입부의 경우 날씨나 주변상황 등에 대한 변수를 제시했다고 한다. 마쓰바라 교수는 “1차 전형을 통과한 것은 쾌거다, 다만 현재의 인공지능은 미리 스토리를 결정해야 해 인간의 손길이 필요한 부분이 많다”며 “향후 인간의 창의력도 대상으로 확대할 계획이라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응모작에 사용된 인공지능을 개발한 나고야(名古屋)대 사토 사토시(佐藤理史) 교수는 “몇 천자에 달하는 의미있는 문장을 쓸 수 있었던 것은 큰 성과”라면서 “인공지능이 사용한 언어가 이상하지 않도록 하는 게 우선이었다”고 덧붙였다. 연구진은 앞으로 스토리를 자동으로 생성하는 인공지능도 연구해 2년후 인간의 개입 없이 소설을 쓸 수 있도록 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요미우리신문은 “향후 의료나 금융투자 분야에 인공지능 활용이 늘어나 인간생활을 크게 변화시킬 것”이라고 전망했다.  
389    땡!~ 버렸다, 비웠다 그리고 삶이 밟아졌다... 댓글:  조회:5567  추천:0  2016-03-24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고 있는 주부 남상미(36)씨의 거실. 이틀에 걸쳐 거실을 어지럽혔던 물건들을 정리했다. 책과 여러 소품으로 가득한 옛 거실(왼쪽)을 깔끔하게 비우고 꼭 필요한 책상과 의자만 남겼다(오른쪽). “혹시 필요할지도 모르잖아.” “급할 때 없으면 정말 불편할거야.” 이런 생각으로 준비물을 눌러 담은 여행가방. 도통 잠기질 않아 있는 힘을 다해 가방을 고문 혹사 학대한 경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웬걸. 출발과 동시에 애물단지가 된 짐. 여행일정 내내 허리 휘게 이고 지고 끌고 메고 다녀야 했을 테다. 구석구석 눌러 담은 탓에 유용하게 쓴 건 일부. 집으로 돌아온 뒤, 풀어헤치는 가방에서 우수수 쏟아지는 미개봉 짐짝들. 우리의 인생 여정도 꼭 이런 여행을 닮은 건 아닐까. 올해는 꼭 읽을 계획인 소설을 포함해 책장을 가득 메운 책들. 화려한 무늬에 끌려 “이건 사야 해”를 외쳤지만 찬장에 고이 모셔둔 접시세트. 의무감을 불태우며 집요하게 모았지만 선반에서 잠자는 DVD 컬렉션. 이 짐을 이고 멜 공간을 마련하느라 꼬박꼬박 빠져나가는 월세 혹은 대출이자. 이대로 좋은 걸까. 물건에 포위된 채, 인생이란 여행의 짐 가방만 불리며 살아가는 삶에 회의를 느끼는 이들이 늘고 있다. 꼭 필요한 만큼만 남기고 홀가분하게 살아 보자는 것. 이런 희열을 맛본 이들에게, 이제 고가구로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찬 대저택은 감탄이 아닌 지탄의 대상이다. 더 적게 가짐으로써 더 풍요롭게 누리는 삶의 시대. 바야흐로 미니멀 라이프의 시대다.   무비판적 소유에 대한 회의가 열풍 불러     영미권에서 미니멀 라이프 열풍이 촉발된 것은 2010년 무렵이다. 웹사이트 ‘미니멀리스트(TheMinimalists.com)’의 등장이 주효했다. 운영자는 잘 나가던 회사에 돌연 사표를 던지고, 편안한 소파와 책 몇 권만을 가진 20대 후반의 청년들이다. 조슈아 필즈 밀번과 라이언 니커디머스는 “좋은 차, 큰 집, 넘쳐나는 물건을 가졌지만 주 70~80시간을 일하고 더 많은 물건을 사들이는 일로는 공허함을 채울 수 없다”며 물건을 줄이고 더 목적이 분명한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이 여정을 소개한 사이트는 1년 만에 방문자수가 월 10만 명에 달했고,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같은 시기 일본에서는 ‘단샤리(斷捨離)’가 최고 유행어로 떠올랐다. 요가의 행법(行法)인 단행(斷行), 사행(捨行), 이행(離行)에서 착안한 말로, 일상에서 불필요한 것을 끊고 버리고 떠난 심플한 삶, 처세 등을 일컫는다. 단샤리 열풍을 타고 스타덤에 오른 정리 전문가 곤도 마리에의 정리법 등은 영미권에서도 화제를 모았고, 그는 2015년 타임 100인에 선정됐다. 일본에서는 특히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소유에 대한 회의에 기름을 부었다. 일본 미니멀 라이프 연구회가 지은 ‘아무것도 없는 방에 살고 싶다’(샘터)는 물건을 적극적으로 버린 10인의 도전기를 소개하는데, 적잖은 이들이 “동일본 대지진”을 그 계기로 지목한다. 다급한 상황에서 수납장에서 마구 잡혀 나오는 쓸모 없는 물건들을 보며 그들은 외쳤다. 대체 이 많은 물건들은 다 뭐였을까! “그렇지 않아도 짐이 많은 본가는 지진으로 엉망이 됐어요. 그 많던 가구들이며 물건이 쓰러지거나 바닥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할머니가 정말 위험했거든요.”(‘아무것도 없는 방에 살고 싶다’) 국내에서는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이들 저서가 번역 출간돼 서점가를 강타하며 미니멀 라이프 열풍이 상륙했다. 회원 7,300여명의 네이버 카페 ‘미니멀 라이프’의 성장세도 눈에 띈다. ‘버리는 삶’에 대한 의견과 노하우를 나누는 이 카페는 2014년 12월 개설됐다. 최근엔 하루 회원수가 100명씩 급증해 두 달새 회원수가 30배 이상 늘었다. 운영자인 황윤정(48)씨 부부는 “완벽함이란 더 이상 보탤 것이 없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때 이루어진다”란 슬로건을 대문에 내걸었다. 회원들은 미니멀리즘 실천 전후 사진을 공유하고, 찬의 가짓수를 줄인 ‘미니멀 식단’도 소개한다. 최근에는 ‘미니멀리즘 게임’을 진행 중이다. 밀번과 니커디머스의 사이트에서 시작된 게임이다. 매일 버린 물건의 사진을 찍어 올리려 확인하고, 매달 1일에는 1개의 물건, 10일에는 10개를 버리는 게 규칙이다. 필요 없는 물건을 기부할 기부처 정보도 나눈다. 일본 미니멀 라이프 연구회가 소개한 주부 아즈키씨의 거실. 동일본 대지진을 계기로 단샤리(斷捨離)를 실천하고 있다. 거실에는 텔레비전, 탁자, 화분만 있다.   버린 뒤 비로소 소중한 것만 남았다     미니멀리즘에 관한 책에 반해 이 카페를 시작했다는 황씨는 미니멀리즘을 “단순한 정리정돈이 아니라, 내 주변에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과 인생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만 남기는 삶의 태도”라고 설명했다. ‘버리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란 얘기다. “맞벌이라 직장에서 퇴근하고 집에 오면 늘 또 다른 일터로 출근하는 기분이었어요. 집에도 일이 많으니 쉬지 못하고 짜증나고 피곤했는데, 결국은 잡동사니를 버리지 못해 그랬던 거죠. 물건을 줄이고 난 뒤론 특별히 청소를 하지 않아도 모든 게 수월해졌어요. 이걸 기록으로 남기자는 생각에 카페를 시작했는데, 공감하는 분들이 폭발적으로 늘었죠.” 주부 남상미(36)씨는 최근 “뭘 사야 하지”란 집착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며 불면증까지 덜어냈다. 과거엔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아 SNS, 블로그 등의 사진을 유심히 챙겨봤고, “갖고는 싶지만 비싼 물건의 가격”에 쓴맛을 다셨다. “중저가 브랜드에서 물건을 사며 스트레스를 풀기도 하고, 수납 소품을 사들였는데 갈수록 점점 정리는 안되고 쌓이기만 하더라고요. 뭔가 잘못됐다 싶었죠.” 이틀에 걸쳐 온 집안에서 꼭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선별해 내다버리며 거실을 가뿐히 비웠다. 막상 7년 된 컴퓨터를 처분하면서는 고심이 깊었지만 눈을 질끈 감고 추억에의 집착도 덜어냈다. “소중한 추억은 사진으로 남기고, 꼭 필요한 것 외에는 무료 나눔, 기부 등을 통해 처분했어요. 한참 안 쓴 아이 장난감은 필요한 친구들에게 나눠줬죠. 불면증이 심했는데, 이렇게 버리고 나서 오랜만에 잠을 제대로 잤어요. 어디 가서 뭘 사야겠단 걱정, 물건에 대한 집착을 버리니 생각도 삶도 단순해지는 것 같아요.” 일본 미니멀 라이프 연구회는 “이래도 될까” 싶을 정도로 버린 이들의 사연을 소개한다. 500~600권이 넘는 책과 산더미 같은 옷을 모두 처분한 회사원, 거실에 소파 겸 침대로 사용하는 에어 매트리스 한 장만 남긴 증권 딜러, 10년간 보관한 웨딩드레스를 비롯한 추억의 물건을 모두 버리고 비소로 후련함을 맛본 주부 등.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버림의 미학은 “자신이 소중히 다룰 수 있는 적당량만 갖는 것의 기쁨”이다. 일본 미니멀 라이프 연구회가 소개한 주부 아키씨의 거실. 16.2㎡(5평)의 작은 거실을 간소하게 꾸몄다. “신중하게 고른 물건들로 작은 집을 최대한 즐기며 산다”는 것이 그의 신조다. “자주 ‘미니멀리스트란 수도승처럼 사는 거라고 보면 되나요?’란 질문을 받는데 절대 그렇지 않죠. 현재 생활은 소유한 물건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지 필요하지 않은지를 명확히 한 결과일 뿐이에요.”(‘아무것도 없는 방에 살고 싶다’) 이들에겐 집이 더 이상 ‘언젠가 쓸’ 물건들의 창고가 아닌, 치유 휴식 영감의 공간이다. 이런 환호에도 아직 ‘비움의 미학’에 동의할 수 없다면, 이 얘길 들어보자. ‘국내 1호 정리컨설턴트’ 윤선현씨의 기회비용 계산법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2015년 서울 아파트 가격 평(3.3㎡)당 약 2,000만원. 집에서 자리만 차지하는 애물단지 러닝머신이 차지하는 자리는 대략 1㎡, 딱 613만원 어치다. 창고 방이나 옷으로 가득한 드레스 룸이 있다면 어떨까. 작은 방이 2.5평이라면, 이 물건을 보관하는 데만 5,000만원을 쓰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를 홀가분하고 산뜻하게 하는, 심지어 부자로 만드는 새 슬로건은 다음과 같다. “어머 이건 버려야 해!”   설레지 않는 물건은 모두 다 버려라     그러나 결심만 했다고 누구나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감정의 브레이크가 자주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 내 정리의 여신으로 통하는 곤도 마리에는 저서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더난출판)에서 “정리에도 원칙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한창 버리기 축제를 벌이다 옛 사진을 발견하고 아련한 청춘 회상에 빠지는 등의 대표적 불상사들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대원칙은 ▦머릿속에 이상적인 생활상을 그려라 ▦장소 별이 아니라 물건 별로 정리한다 ▦의류, 책, 서류, 소품, 추억의 물건 순으로 정리하자 ▦만졌을 때 설레는지에 따라 버릴지 남길지 판단하라 등이다. 버릴 물건을 방 별로 정리하다 보면, 결국 짐이 이 방 저 방 옮겨 다니기만 할 뿐 진전이 없는데다, 정리의 순서가 틀리면 정리 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이다. 책과 서류는 버리기 작업 중에서도 고난도.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이 쓸데 없는 책과 서류만 정리해도 머리 속이 맑아진다.” 네이버 카페 미니멀 라이프 운영자 황윤정씨는 “아까운 물건을 정리하다 죄책감이 들 땐 기부하는 방법도 적극 찾아보라”고 조언한다. 어딘가에서 쓸모를 되찾을 물건의 제자리를 찾아준다는 생각만으로도 고민이 훨씬 수월해진다. 이런 버리고, 비우기의 최고 경지는 ‘욕심과 집착 내려놓기’다. 비우고 덜어내다 보면, 정말 우리 삶에서 간절히 덜어내야 할 것이 물건뿐이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인간관계, 상념, 걱정, 식욕 등 비워야 할 대상은 마음먹기에 따라 무한히 확장된다. 이런 군더더기 없는 삶은 하나의 진리만을 오롯이 남긴다. 우리가 진정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지금 앞에 주어진 매 순간뿐이라는 것. 김혜영기자 한소범 인턴기자
388    땡!~ 우리는 언제면 이렇게 될는지???... 댓글:  조회:5451  추천:0  2016-03-23
  신효령 기자 = 한국이 주빈국으로 참가한 '2016 파리도서전'이 나흘간의 일정을 마치고 20일(현지시간) 막을 내렸다. 도서전 기간 전시장 곳곳에서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을 통해 한국 문학과 문화를 생소해 했던 현지인과 출판 관계자들에게 한국을 알렸다. 주빈국 한국은 506㎡ 규모의 전시 부스를 세웠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을 받은 대한출판문화협회는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한국문학번역원, 한국콘텐츠진흥원 등과 협력해 한국 특별전시관을 운영했다. 파리도서전은 유럽에서 개최되는 대규모 도서전 중 유일하게 B2C 형태를 지향한다. 저작권 거래를 위한 비즈니스 중심의 도서전이 아니라 독자와 저자·출판사·도서관·서점 등 책과 연계된 모든 인적·물적 기능을 동원해 펼치는 문화축전의 장이다. 한국 역시 달라진 위상과 현 상황을 세계 출판인들에게 인식시킨 자리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슬로건을 '새로운 지평'으로 내건 주빈국관은 한국출판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보여주며 외국인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프랑스 파리 베르사유 전시장에서 마련된 한국 특별전시관에는 연일 외국인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들은 우리나라 문학을 비롯한 서적을 읽고, 작가들과 출판 관계자들을 만나며 한국의 출판 문화를 체험했다. 개막 공연으로 가야금과 재즈의 협연, 아리랑 등을 선보여 깊은 감동과 여운을 남겼다. 니콜라 조르주 프랑스 문화부 도서독서국장은 한국의 주빈국 행사가 "성공적"이라며 "유럽의 각국 언어로 번역된 한국책들이 많이 소개되면서 한국이 프랑스는 물론, 유럽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고 말했다.   베라 미샬스키 호프만 프랑스국제출판사무국 회장 역시 "성공적"이라고 평했다. "한국 출판인 대표단이 세미나 준비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며 "한국 도서에 대한 관심으로 말미암아 프랑스어로 번역된 한국 도서들이 프랑스 대중들을 통해 매우 사랑받고 향유되고 있다"고 전했다. 고영수 대한출판문화협회장은 "한국의 우수 스토리텔링 생산자인 작가와 이로 인해 재생산된 출판 콘텐츠의 확장을 확인할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이 됐다"며 "특히 그라폴리오(일러스트레이션 전문플랫폼) 홍보관은 30명에 이르는 한국 작가와의 만남과 웹툰·일러스트 플랫폼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고 밝혔다. "한국의 초청작가와 프랑스작가가 만나는 문학 행사와 양국의 출판 현황을 살필 출판 전문가 세미나는 책을 바탕으로 문화선진국이 된 프랑스에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소중한 기회가 됐다. 130여년을 이어온 양국의 우호 관계가 한 단계 성장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출협이 총괄한 주빈국관은 비즈니스관, 만화·웹툰관, 전자출판관, 그라폴리오관, 아동도서관, 작가관, 서점운영 공간 등 총 7개 섹션으로 구성됐다. 한국의 전시 도서를 현장에서 판매하는 '서점 공간' 부스는 프랑스의 대표서점인 지베르 조제프의 위탁 판매로 가동됐다. 출협은 이 부스에 불어로 번역된 한국도서와 한국어 발행도서 1만여 책(약 2000종)을 진열했다. 한국작가들을 향한 관심도 높았다. 소설가 황석영(73)·이승우(57)·문정희(69)·오정희(69)·마종기(77), 만화가 김정기(41) 등 30명은 작가 대담과 사인회, 낭송회 등에서 인터뷰에 응하느라 분주했다. 이구용 케이엘매니지먼트 대표는 "한국 문학을 포함해서 한국 출판 저작물을 소개하는 일을 하고 있다"며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은 서유럽뿐만 아니라 북유럽까지도 확대되고 있다. 근래 들어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등으로 확산 중"이라고 귀띔했다.   파리도서전에서 가장 주목 받은 작가로는 김영하(48)와 한강(46)을 꼽았다. 이 대표는 "김영하 작가는 오래 전부터 꾸준히 여러 작품들이 번역, 출간됐고 꾸준하게 소통하고 있다"고 했다. "한강 작가가 한국인 최초로 맨부커상 후보에 오르면서 주목을 받고 있다. '채식주의자' '바람이 분다. '가라' '소년이 온다' 등이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맨부커상은 노벨문학상, 프랑스 공쿠르상과 더불어 세계 3대 문학상으로 불린다. 한강은 2004년 한국에서 발표한 소설 '채식주의자'(The Vegetarian)로 맨부커 상 후보에 올랐다. '채식주의자'는 지난해 1월과 올해 2월 영국과 미국에서 영어로 번역 출간됐다. 한씨는 이 작품이 해외에서 주목을 받은 이유에 대해 "누구나 공감하고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를 썼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고 답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 안에 있는데, 이는 국경을 넘어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문제다. '채식주의자'를 통해 인간의 폭력성과 인간이 과연 완전히 결백한 존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봤다." 맨부커상 후보가 된 것에 대해서는 "진짜 담담하다. 앞으로도 계속 조용히 진지하게 글을 쓰겠다"고 했다. '고양이학교'의 김진경(63)도 주목받았다. '고양이 학교' 파리 편은 이달 한국과 프랑스에서 동시 출간됐다. 대만·중국·일본·프랑스에서도 번역·출간된 상황이다. 그림책을 쓰는 한성옥(58)은 직접 선별한 대표적인 그림책 일부를 영상에 담아 상영한 뒤 관객과 소통했다. 일부 작품이 현지에서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성과를 보이면서 한국 문학에 대한 대접이 달라졌지만, 세계 문학에서 한국 문학의 위상은 아직 미미한 상황이다. 이번 도서전에서 한국 작가들은 문학 낭독회 등 문학 이벤트를 열었다. 보여주기 식의 행사로는 한계가 있는만큼, 내실을 다지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한국 작가와 작품에 대한 관심이 지속되게 하기 위해서는 작가들의 책이 해외에 번역·출간돼, 해외 독자들이 읽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번역·출판에 대한 투자가 선행되어야 한다. 파리도서전에 초청된 작가들도 한국 작품이 프랑스를 비롯한 해외에 더 많이 알려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노벨상을 언제 받아오느냐'는 이런 이야기는 제발 그만 해야 한다. 이제 겨우 '세계문학'이라는 문턱을 디디고 한국문학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번역자들도 키우고 우리도 좋은 작품 쓰려고 노력해야 한다."(소설가 황석영) "영미권 국가들이 한국문학에 제일 관심이 없다. 기타 다른 나라들도 관심이 강한 편이 아니다. 프랑스가 어떤 연유와 배경 하에서 한국 문학을 좋아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이런 프랑스적인 경험을 세계에 확산해야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문학평론가 정과리) "미국이나 유럽 쪽은 스릴러물이 대중화되어있고 인기가 높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스릴러물이 약간 천대받는 풍토가 있다. 한국 문학이 세계에 알려짐으로써 좀 좋아졌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소설가 정유정) 한 번의 이벤트에 그치지 않고 세계인과 계속 소통하기 위해서는 한국인의 독서 행태도 바뀌어야 한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성인 독서율은 연간 9.1권이다. 한 달에 한 권의 책도 읽지 못하는 셈이다. 한국 출판과 문화가 더 크게 뻗어나가려면 장기 계획을 통해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익순 한국출판저작권연구소장은 "프랑스는 역시 문화강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개막 전날 저녁때 아마도 회사 일을 마치고 온 것으로 보이는 수많은 출판 관계자들이 모여드는 것을 보고 놀랍고 부러웠다"고 말했다. "개막 첫날, 끊임없이 들어오는 일반 시민들을 보면서 부러움 반 걱정 반, 서울도서전을 생각해 보았다"며 "숙소와 전시회장을 오가면서 붐비는 전철 안에서도 서서 책을 읽는 파리 시민들을 보고 존경스러웠다. 처음 와 본 파리 도서전에 대한 인상은, 올랑드 대통령부터 정부 기관, 지자체(파리시), 출판 관련 기관과 단체들, 언론, 무엇보다도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도서전과 책 생태계를 살아 움직이게 한다는 인상이 강했다. 한 도시 전체가 책을 통해 소통하고 축제를 벌이는 광경을 연출하는 듯하다"고 밝혔다. 고영수 회장은 "바야흐로 21세기는 문화가 곧 경쟁력인 시대"라며 "그 문화를 일구는 기본 텍스트가 바로 출판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윤태용 문체부 문화콘텐츠산업실장은 "지난 130년간 지속되어 온 한불 우호 협력을 다지는 동시에 양국 간 출판교류를 확대하고 발전적 관계를 모색할 계획이다"고 밝혔다. ////////////////////////////////////// 오드레 아줄래 프랑스 문화부 장관(가운데)이 18일 오후(현지시간) 파리 베르사유 전시장에서 열리고 있는 파리도서전을 두 번째 방문, 고영수 한국출판문화협회장(오른쪽)의 안내를 받으며 주빈국관인 한국 전시장을 둘러보고 있다. 한국출판문화협회 제공 오드레 아줄래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 지난 18일 오후(현지시간) 파리 베르사유 전시장에서 열리고 있는 ‘2016 파리도서전’을 찾았다. 아줄래 장관이 파리도서전에 나타난 것은 두 번째다. 16일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을 수행해 개막식에 참석했었다. 이날 아줄래 장관은 전시장에서 거의 3시간을 보내며 출판사 부스를 방문하고 찾아온 관람객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도서전의 주빈국관인 한국 전시장에도 들러 30분이나 머물면서 전시된 책을 구경하고 한국 출판인들과 환담했다. 개막식 날 올랑드 대통령이 도서전에서 머문 시간도 3시간가량 된다. 올랑드 대통령은 취재진과 관객에 둘러싸인 채 3시간 내내 도서전 구석구석을 돌아봤다. 대통령 참가는 파리도서전의 관행이라고 한다. 파리도서전을 찾아온 정치인은 대통령과 문화부 장관만이 아니다. 첫날인 17일에는 경제부 장관, 18일에는 해외영토부 장관이 다녀갔다. 19일에는 총리가 방문했다. 파리시장은 개막식 전 프랑스 출판인들과 한국 참석자들을 시청으로 초청해 오찬을 베풀었고, 파리시 부시장도 17일 도서전을 찾았다. 파리도서전에 참석한 한국 출판인들은 프랑스 정부와 파리시의 핵심 인사들이 줄줄이 도서전을 찾아오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서울도서전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서울도서전에 참석한 정부 최고위직은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이었다. 대통령이 서울도서전을 찾는 경우도 드물다. ...대통령은 2013년 한 차례 서울도서전에 참석했다. 서울시장이 서울도서전에 참석한 예는 지금까지 한 차례도 없다. 현장을 지켜본 한 국내 출판사 대표는 “프랑스를 문화의 나라라고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이번에 실감했다”면서 “대통령이 도서전에서 3시간이나 머물고, 문화부 장관이 두 번씩이나 찾아온다는 것은 한국에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라고 18일 말했다. 파리도서전은 프랑크푸르트도서전이나 런던도서전과 달리 유럽에서도 유명한 도서전이 아니다. 출판사와 시민들이 만나는 B2C 방식의 도서전으로 프랑스 출판계의 국내 잔치에 가깝다. 규모도 서울도서전에 비하면 2배 정도일 뿐이다. 파리도서전의 규모나 성격을 생각하면 프랑스 정부가 보여주는 관심은 분명히 인상적이다. 아줄래 장관은 17일 한국 전시장 방문에서 “프랑스에서 문화는 심장과 같다. 그 문화의 한가운데에 책이 있다. 프랑스의 모든 정치인은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책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역사적으로 프랑스는 책을 사랑하고 책에 대한 열정이 있어서 여러 가지 정부 지원을 해 왔다”면서 “1980년대 초부터 도서정가제 같은 서점에 대한 지원과 도서관에 대한 지원을 통해서 어린이는 물론 남녀노소 누구나, 또 대도시와 지방 구분 없이 모두 쉽게 책에 접근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파리도서전에 초청작가로 참석한 소설가 황석영씨는 지난 16일 개막식 직후 “프랑스에서는 대통령도 오고 총리도 오는데, 한국에서는 장관도 안 오고 대사도 없다”면서 “이런 식으로 문화를 홀대하고 소홀히 해선 안 된다”고 비판했다. 파리=김남중 기자
387    땡!~ 무거운 엉덩이를 훔쳐라... 댓글:  조회:4597  추천:0  2016-03-23
지난 일요일 폐막한 파리 국제도서전의 주빈국은 대한민국이었다. 올해로 130주년을 맞는 한국-프랑스 수교를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서구 열강과 우리나라의 수교는 슬픈 역사의 산물이다. 우리의 주체적인 의지와 역량이 아니라 서구 열강의 침략의 결과인 것이다. 묘하게도 한국과 프랑스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책과 깊은 인연이 있었다. 1866년 조선이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하자, 프랑스 극동함대는 하필 조선 왕실의 국가기록물 보관소인 ‘외규장각’이 있던 강화도를 침략했다. 프랑스 사람들은 문화라면 둘째 간다고 하면 서러워할 사람들 아닌가. 침략자들은 외규장각에 보관된 책들의 높은 가치를 한눈에 파악했다. 그들은 색상이 화려한 책들을 중심으로 340권을 챙김으로써 자신들의 문화적 소양을 과시하는 한편, 나머지 5,000여 권의 책을 불태움으로써 자신들이 ‘침략자’임을 분명히 드러냈다. 그나마 다행히도 340권의 외규장각 도서가 2011년 ‘영구임대’ 방식으로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역사는 다양한 방식으로 반복한다. 그리고 프랑스 극동함대가 침략한 지 150년이 지난 2016년에는 한국-프랑스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이 자발적으로 주요 서적들을 싣고 파리로 날아왔다. 프랑스는 비용을 들여 한국 작가 30명을 초대하여 한국 작가들의 책과 사상을 프랑스 시민들에게 자유롭게 소개하게 했다. 프랑스 사람들은 조선을 침략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작가들을 초대했을 때도 문화에 대한 열정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수요일 저녁 개막식에는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부스를 직접 찾아왔다. 이날 여러가지 면에서 놀랐다. 우선 대통령에 대한 경호는 완전히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기자들과 개막식에 참석한 출판인과 작가들이 카메라와 핸드폰을 들고 올랑드 대통령의 동선을 방해했지만 경호원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올랑드 대통령은 자신이 특별히 부탁해서 모여 있던 한국의 작가들 몇 미터 앞까지 왔지만 결국 카메라의 장벽에 막혀 한국 작가들의 손도 잡아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더 놀라운 일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올랑드 대통령은 성내지 않았다. 대통령이 성을 내지 않다니! 참으로 낯선 풍경이었다. 원래 대통령은 자신의 맘대로 되지 않으면 찌릿찌릿한 눈빛으로 겁을 주어야 하는 자리가 아니었던가. 대신 올랑드 대통령은 한국관 방명록에 “문화를 향해 같은 열정을 나누는 프랑스와 한국의 독자들에게”라고 글을 남겼고, 오드리 아줄레 프랑스 문화부 장관은 “프랑스에서 문화는 심장과 같다, 그 문화의 한가운데에 책이 있다.”고 말했다.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대통령과 전시장을 찾은 다양한 분야의 장관들이 ‘경제’를 거론하는 대신 한결 같이 ‘문화’와 ‘책’이라는 한가한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프랑스의 문화 역량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아차리는 데는 충분했다. 올랑드 대통령은 책이라고 했지만 더 근원적인 것이 따로 있었다. 파리도서전의 특징은 유달리 많은 강연이 열린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물론 인기 작가의 흥미로운 강연도 있겠지만 청중들의 표정을 보건대 대부분은 평범한 작가들의 지루한 강연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프랑스 사람들은 거의 모든 강연장을 가득 채웠다. 더 놀라운 것은 이들이 중간에 일어서지 않고 끝까지 경청한다는 사실이다. 누가 강제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아도 볼거리가 많은 도서전에서 시간낭비 하고 싶지 않을 텐데도, 마치 자력이나 중력으로 꼼짝하지 못하는 것처럼 프랑스 사람들은 끝까지 앉아 있었다. 그 이유는 분명했다. 프랑스 사람들은 엉덩이가 무겁다. 프랑스 사람들의 체형을 상상하려 들지는 마시라. 그들의 체구는 오히려 우리와 비슷하다. 하지만 엉덩이는 정말 무거워서 한번 앉으면 좀처럼 일어서지 못한다. 책이 좋아서 도서전에 오는 사람들만 엉덩이가 무거운 것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이번에 파리에 체류하면서 라빌레트 과학관과 파리 자연사박물관도 틈을 내어 다녀왔다. 우리와는 분명히 다른 점이 눈에 보였다. 우선 전시물의 설명 패널의 글자가 작고 길었다. 그리고 동영상도 길이가 보통 5분이 넘었고 심지어 7분, 11분짜리도 있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작은 글씨로 길게 쓰여진 패널을 읽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동영상도 3분이 넘으면 보지 말라는 것과 같다. 그런데 프랑스 사람들은 그 긴 설명을 찬찬히 읽는다. 상영 중인 동영상 앞에 온 사람은 우선 중간부터 본 후 동영상을 다시 틀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본다. 중간에 일어설 것 같은데 끝까지 본다. 왜? 엉덩이가 무겁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람들의 무거운 엉덩이는 부모로부터 유전자로 물려받은 것(nature)이 아니다. 양육된 것(nurture)이다. 도서전과 마찬가지로 과학관과 박물관에 아이들을 데려 온 부모와 조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차분함을 몸소 보여줌으로써 가르쳤다. 때로는 강제적으로 아이들을 주저앉히곤 했다. 이렇게 프랑스 아이들은 엉덩이에 자력과 중력이 더해져서 무거워지나 보다. 한국의 과학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에 관한 내 강의가 자신의 관심사였을 리가 없는 고등학생이 슬그머니 일어서려 하자 힘으로 주저 앉힌 엄마, 기껏해야 초등학교 1, 2학년밖에 안 된 두 아이에게 찰스 다윈의 따개비 연구에 관한 지루한 이야기를 힘들여 읽어주며 설명하던 백발의 할아버지가 프랑스 문화 융성의 근원인 것 같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단 3년 만에 구글의 인공지능을 뛰어넘겠다는 호기로운 순발력보다는 지루한 이야기도 한 시간쯤은 끈덕지게 들어줄 수 있는 무거운 엉덩이를 만드는 게 먼저 아닐까. 150년 전 프랑스는 우리에게서 책을 훔쳐갔다. 이제는 우리가 그들의 무거운 엉덩이를 훔쳐올 차례다. / 이정모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  
386    [록색평화이야기]- 자그마한 새, 천리 날아가다... 댓글:  조회:4652  추천:0  2016-03-23
지난해 6월 국립공원관리공단 철새연구센터가 경남 통영시 홍도에서 가락지를 끼워 날려보낸 괭이갈매기가 4개월 뒤인 10월19일에 550㎞ 떨어진 일본 시코쿠 도쿠시마현의 어부에 의해 발견됐다. 일본 생태활동가 카츠토 요시다가 촬영한 사진이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제공 철새 이동경로 새로 발견 홍도서 가락지 부착해 풀어준 뒤 550㎞ 떨어진 도쿠시마현서 발견 일본까지 이동 사실 처음 밝혀져 흑산도서 발견 동남아 철새 개개비 일본서 날려보낸 것으로 확인 중간기착지로 삼는 것으로 보여 우리나라 텃새인 괭이갈매기가 550㎞ 떨어진 일본에서 발견됐다. 또 일본에서 출발한 철새 개개비는 1300㎞ 떨어진 흑산도에서 발견됐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20일 “경남 통영시 앞바다 홍도에서 괭이갈매기 이동 경로를 파악하기 위해 가락지를 부착해 놓아준 괭이갈매기 한 마리가 550㎞ 떨어진 일본 시코쿠 도쿠시마현에서 발견됐다”고 밝혔다. 국내 텃새인 괭이갈매기가 일본에까지 이동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는 처음이다.   이번에 발견된 괭이갈매기는 지난해 6월 홍도에서 태어난 새끼로 국립공원관리공단 산하 국립공원연구원의 철새연구센터가 지난해 바닷새의 이동경로와 기후변화 연구를 위해 가락지를 채워 놓아준 24마리 중 하나다. 이 괭이갈매기는 4개월 뒤인 지난해 10월19일 날개가 부러진 채 낚시줄에 엉켜 있다 일본 도쿠시마현 어부한테 구조된 사실이 일본 야마시나 조류연구소에 의해 우리나라 국립공원관리공단 철새연구센터에 전달됐다.   괭이갈매기는 한국·중국·일본 등 극동아시아 지역에만 분포하는 바닷새로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무인도에서 집단 번식하는 텃새이다. 태어난 지 2~3개월 뒤면 태어난 곳을 떠나 흩어져 살다 3년쯤 뒤에 성체(어른 새)가 돼 번식을 시작한다.   김미란 철새연구센터 연구원은 “갈매기는 어린 새가 어른 새보다 번식지에서 멀리 이동하는데 어린 새가 어른 새와의 먹이 경쟁을 피하고 근친 교배를 피해 유전자다양성을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동안 섬을 떠나 육지 해안에서 발견되는 경우는 있어도 이번처럼 먼 거리를 이동한 사례가 보고된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한편 철새연구센터는 지난해 8월 전남 신안군 흑산도에서 가락지를 부착한 동남아 철새 개개비를 발견해 야마시나 조류연구소에 확인한 결과 2012년 7월 연구소의 혼슈 니카타현 출장소가 부착한 가락지가 맞다는 통보를 받았다. 일본 연구소가 가락지를 부착한 개개비가 흑산도에서 발견되기는 2012년 4월에 이어 두번째이다.   권영수 철새연구센터장은 “일본을 떠나 중국이나 동남아시아로 이동하는 개개비가 흑산도를 중간기착지로 이용한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가락지를 채운 텃새·철새들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면 기후변화에 따라 새들의 이동 경로나 시기, 번식지·서식지 등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철새연구센터는 지난 10년 동안 전남 흑산도와 충남 태안해안 학암포, 경남 홍도 등에서 조류 244종 6만954마리에 가락지를 부착해 날려보냈다.   가락지는 두 다리에 모두 부착하는데, 플라스틱 가락지는 하얀색 바탕에 검은 글씨를 써 식별이 가능하도록 하고, 금속 가락지에는 한국 우체국 사서함 번호와 가락지 고유번호가 표기돼 있다.   김미란 연구원은 “지난 2010년 4월 신안군 홍도 주민이 가락지를 단 제비를 발견해 제보한 덕에 제비의 한국과 일본 간 이동경로가 밝혀졌다. 현재 1% 정도밖에 안 되는 가락지 확인율을 높이려면 지역 주민의 관심과 제보가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근영 선임기자
385    [록색평화이야기]- 바닷물를 담수로... 댓글:  조회:5112  추천:0  2016-03-23
인천시 옹진군 연평도는 섬마을이지만 지난해 43년만에 찾아온 극심한 가뭄에도 비교적 물 걱정 없이 보낼 수 있었다. 소청도, 자월도 등 인근 섬에선 지하수가 모두 말라 뭍에서 온 페트병 수돗물에 의존해야만 했다. 연평도가 이들 섬과 다른 점은 2013년부터 가동을 한 해수 담수화 시설이 있다는 점이다. 수심 60m 취수구에서 민물과 바닷물을 끌어와 정수작업을 해 하루 최대 200㎥의 수돗물을 생산해낸다. 신중근 이장은 “시설이 없었을 땐 다른 섬처럼 농사는커녕 먹는 물이 언제 떨어질지 걱정 해야만 했다”고 말했다. 전 세계적인 물 부족시대에 해수담수화 사업이 주목받고 있다. 기후변화와 상관없이 고갈 우려가 없는 바닷물을 식수로 활용하는 게 물 부족을 극복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해수담수화는 바닷물에서 염분을 제거한 후 먹을 수 있는 물(담수)로 전환하는 기술. 21일 영국의 물 전문조사기관인 글로벌워터인텔리전스(GWI)에 따르면 현재 150개국에 약 1만7,000개 시설이 운영되며 하루 7,500만㎥ 담수를 생산해내고 있다. 약 4조원의 시장은 2018년까지 13조원 규모로 팽창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국내도 식수를 구하기 힘든 도서지역을 중심으로 해수담수화가 적극 활용되는 추세다. 한국수자원공사(K-water)가 위탁운영중인 시설만 전국에 39개로, 하루에 생산하는 물이 1,970㎥에 달한다. 지난해 금강에서 물을 끌어다 쓰기 위해 도수로 공사까지 한 충청남도에선 시설 마련을 정부에 건의하고 나섰을 정도다. K-water 관계자는 “머리카락의 100만분의 1만큼 작은 이온까지 제거할 수 있을 정도로 국내 기술이 최고조에 올라와 있는 만큼 가뭄 해결을 위해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인식 부족은 넘어야 할 산이다. 부산시 기장군 시설의 경우 하루 최대 4만5,000㎥의 수돗물 생산이 가능한데도, 주민들이 “고리원전에서 11㎞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며 방사능 오염 가능성을 2년째 제기하고 있다. 부산시가 미국 국가위생재단(NSF) 등에 의뢰해 “문제가 되질 않는다”는 의견을 내놨지만 진척이 없는 상태다. 김형수 성균관대 수자원학과 교수는 “생소한 물을 사용해야 한다고 여기다 보니 주민들이 확신을 갖는 데까지 시간이 걸리는 것”이라며 “물 부족이 극심해지고 있는 만큼 과거처럼 취수 등에 의존하는 것보다는 직접 생산ㆍ공급하는 적극적인 자세로 대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관규기자
384    {쉼터}- 우표에서 공부하기 댓글:  조회:7134  추천:0  2016-03-22
우표로 본 인물과 력사 1) 2) 3)   1) 1775 - 프랑스의 장군, 화가 르죈(Lejeune, Louis-Francois) 출생 르죈 [Lejeune, Louis-Francois, 1775.2.3~1848.2.29] 프랑스의 장군·화가. 미술매체로서 석판화를 프랑스에 소개한 석판화가이다. 나폴레옹의 전투에 많이 참가했으며 주로 현장 스케치나 습작을 기초로 완성한 박력있는 전쟁화를 크게 유행시켰다.1806년에 뮌헨에 종군하며 그곳에서 석판인쇄술의 발명가 알로이스 세네펠더의 공방을 방문하고 감동하여, 유명한 작품 〈코사크 Cosaque〉를 석판에 그린 후 즉시 100판을 찍었는데, 그중 1장을 후에 나폴레옹에게 선사했다. 르죈은 풍경화와 초상화도 많이 그렸다. 1837년 국립 미술학교의 교장이자 툴루즈 박물관의 관장이 되었다.   2) 1807 - 미국의 남북전쟁 때 남군의 장군 존스턴(Johnston, Joseph E.) 출생 존스턴 [Johnston, Joseph E(ggleston), 1807.2.3~1891.3.21] 조지프 E. 존스턴(Joseph Eggleston Johnston, 1807년 2월 3일 ~1891년 3월 21일)는 미국 남북 전쟁 당시, 남군의 장군이다.1829년 미국 뉴욕 주의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남북 전쟁이 발발하자 고향 버지니아 주로 내려갔다. 1861년 5월 셰넌도어 강 남군 여단장 직을 받아 1861년 7월 제1차 불런 전투에서 최초의 승리를 거두었다.그러나, 남부 연합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와도 잦은 갈등을 빚었고 1862년 4월에는 반도 회전 당시 수도 리치먼드를 지키기 위해 후퇴했다. 그러나 세븐파인스 전투 에서 중상을 입어 로버트 E. 리 장군이 그를 대신했다. 1863년에는 빅스버그 전투에서 존 C. 펨버턴 장군을 구출하지 못해 1863년 7월 4일 빅스버그가 북군에게 함락되면서 패배했고 북군이 조지아 주 애틀란타로 진격하자 12월에 테네시 강 지구 군대를 맡았다. 1865년 2월 복직되어 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서 군대를 지휘해 3월에 벤턴빌 전투에서 윌리엄 T. 셔먼을 격퇴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피터즈버그 회전에서 로버트 E. 리 장군과 만나는데 실패해 마침내 1865년 4월 26일 노스캐롤라이나 주 더럼 역에서 셔먼에게 항복했다. 그 뒤 회고록을 저술하며 생활하다 1879년 ~ 1891년에는 하원 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1885년에는 미국 철도청장으로 임명되었다.   3) 1842- 미국의 시인 러니어(Lanier, Sidney) 출생 러니어 [Lanier, Sidney, 1842.2.3~1881.9.7] 미국 시인. 조지아주(州) 출생. 19세기 후반기 남부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1860년 굴소프대학교를 졸업하고, 곧 남군에 입대하여 남북전쟁에 참가하였다. 1864년 북군에 잡혀 포로생활을 한 것이 원인이 되어 평생 동안 폐결핵에 시달렸다. 남북전쟁을 다룬 소설 《참나리 Tiger-Lilies》(1867)를 발표했으나 주목을 끌지 못하였다. 볼티모어의 피보리 관현악단에서 플루트 연주자 등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면서 시와 음악에 힘써 《시집 Poems》(1887)을 비롯한 작품이 인정받아, 1879년 존스홉킨스대학교의 영문학 강사가 되었다. 그의 시는 E.A.포와 흡사한 기교의 정수(精粹)를 보였고, 음악미(音樂美)의 추구와 더불어 종교적 심정을 노래하였다. 그의 평론도 포의 ?되袖? 받아 과학적인 분석을 발휘하였다. 대학 강의를 토대로 한 《영시(英詩)의 과학 The Science of English Verse》(1880), 그가 죽은 후에 나온 《영국 소설 The English Novel》(1883) 《셰익스피어와 그 선구자 Shakespeare and His Forerunners》(1902) 등이 1945년에 전10권의 전집으로 출판되었다. 1) 2) 3)   1) 1887 - 오스트리아 시인 트라클(Trakl, Georg) 출생 트라클 [Trakl, Georg, 1887.2.3~1914.11.3]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 시인. 개인적으로 겪은 고통과 전쟁의 경험을 작품에 표현해, 퇴락과 죽음을 노래한 오스트리아 최고의 애가(哀歌) 작가가 되었다. 그의 시는 제1·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의 시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소극적이고 침울한 성격의 트라클은 철물상의 아들로 태어나 1908~10년에 빈대학교에서 약학을 공부했다. 1913년경 상습적인 약물중독자였던 것으로 보아 약학을 공부한 이유는 마취제를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를 사로잡고 있던 다른 강박관념은 누이동생 그레테에 대한 비정상적인 애정과 방랑벽이었다. 한 잡지사 발행인과, 유산 가운데 일부를 몰래 그에게 준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후원에 힘입어 트라클은 시를 쓰는 데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1913년에 첫번째 시집을 내놓았고, 이듬해 군 의무대의 중위가 되어 갈리시아에서 중상을 입은 90여 명의 병사들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단순히 약만 조제해주는 약제사에 불과한 그로서는 이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없었다. 그는 한 환자가 자살하는 것을 무기력하게 바라보았고, 또 탈영병들이 교수형을 당하는 것도 보았다. 이러한 공포를 경험한 뒤 그 여파로 자살을 기도해 크라쿠프에 있는 군병원으로 이송되어 감시를 받다가, 거기서 코카인 과다복용으로 죽었다. 그는 부주의하게 코카인을 복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렬한 힘을 지닌 그의 서정시는 현재에 대한 한탄 속에서도 목가적인 과거의 훌륭했던 정신에 대한 동경과 거듭나고자 하는 열망이 전편에 넘쳐 흐르고 있다. 그는 또 반복해서 나타나는 이미지를 통해 '외로운 하늘을 맞대는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 루시아 겟시가 영역한 그의 시선집이 1973년에 출판되었다.   2) 1884 - 미국의 공군장교 앤드루스(Andrews, Frank M.) 출생 앤드루스 [Andrews, Frank M(axwell), 1884.2.3~1943.5.3] 미국의 공군 장교. 미국 최초의 독자적 공습부대인 공군 총사령부를 지휘하는 동안(1935~39) 미국 폭격기를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06년에 뉴욕 주 웨스트포인트에 있는 미국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기병대 장교로 임관하여 필리핀과 하와이에서 복무하다가 1917년에 창설된 공군으로 전속하여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중령까지 진급했다. 그는 여러 부서에서 일상적인 업무를 맡고 있다가, 1935년에 창설된 공군 총사령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전략적 공군력을 단호하면서도 온건하게 주장한 앤드루스는 보잉 B-17 폭격기를 개발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의 통솔력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위력을 떨친 육군 항공대의 본보기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앤드루스는 카리브 해 지역 공군 사령관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카리브 해 방위 사령부 사령관으로서 공군으로는 처음으로 전역(戰域) 전체를 지휘하게 되었다. 1941년에 중장으로 진급했으며, 1943년 2월에 북아프리카 지역 연합군 사령관으로 전임된 드와이트 D.아이젠하워 장군의 후임으로 유럽 지역 주둔 미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는데, 3개월 뒤에 공중충돌사고로 죽었다.   3) 1889 - 덴마크의 영화감독 드라이어(Dreyer, Carl Theodor) 출생 드라이어 [Dreyer, Carl Theodor, 1889.2.3∼1968.3.20] 덴마크의 영화감독. 코펜하겐 출생. 저널리스트를 거쳐 1913년 각본가로서 노르디스크사(社)에 입사, 1918년 《재판장》에서 감독을 맡았다. D.W. 그리피스 감독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배신행위를 묘사한 《사탄의 일기 몇 쪽(1919)》을 촬영하였다. 그 후 《목사의 미망인(1920)》을 스웨덴에서 촬영하였고, 《미하엘(1924)》은 독일에서, 《주인(1925)》은 덴마크로 돌아와서, 《재판받는 잔(1928)》은 프랑스에서, 첫 토키 작품인 《흡혈귀(1932)》는 독일과 프랑스에서 촬영하는 등 국제적으로 활동하였다. 잔 다르크의 고뇌와 순교의 의의를 클로즈업하여 그녀의 내면을 파헤치듯이 묘사한 《재판받는 잔》은 <무성영화 최후의 걸작>으로 일컬어진다. 또한 마녀사냥에 희생되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17세기의 사회를 정신사적으로 재현한 《분노의 날(1944)》, 미치광이로 여긴 남자의 기도로 한 여성이 죽음에서 소생하는 《기적》 등, 인간정신의 영위, 특히 신앙에 대해 탐구한 작품을 많이 만들었다. 그는 독일의 <실내극>, 프랑스의 <아방가르드 영화> 등의 영향을 흡수하면서 스타일을 모색하였지만, 시종일관 <정확한 세트>와 단역에 이르기까지의 출연자의 <얼굴>을 중시하고, 관객에게 영상의 세부적인 뉘앙스까지 느낄 수 있도록 긴장된 화면을 구성하였다. 《흡혈귀》 다음 12년만에 감독한 장편 《분노의 날》부터는 1신=1커트의 느린 촬영, 카메라와 배우의 극단적인 완만한 움직임에 의해 <신비성>이 감돌게 하는 독특한 스타일을 구축하였다. 10여 편의 단편도 제작하였는데, 그 중 교통안전 캠페인을 내용으로 한 《그들은 페리를 탈 수 있었다(1948)》가 유명하다. 그리스도를 소재로 한 영화를 준비하던 중 죽었다. 1) 2) 3)   1) 1736 - 오스트리아 작곡가, 오르간연주자 알브레히츠베르거(Albrechtsberger, Johann Georg) 출생 알브레히츠베르거 [Albrechtsberger, Johann Georg, 1736.2.3~1809.3.7]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오르간 연주자, 음악이론가. 대위법에 관한 한 그 시대의 가장 박식하고 숙련된 작곡가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명성 때문에 베토벤을 포함한 많은 제자들이 그에게로 몰려들었다.레오폴트 피트너에게 오르간과 계속저음을 배웠으며 1755~66년 오르간 연주자로 여러 직책을 거쳤다. 1772년 빈에서 보조 궁정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으며 1792년부터는 장크트 스테파누스 대성당의 음악감독으로 일했다. 250여 곡 되는 대부분의 작품들은 원본이 남아 있다. 작품으로는 26곡의 미사곡, 12곡의 현악 4중주, 하프 협주곡과 다수의 종교음악, 실내음악이 있으며 이론서로는 〈작곡의 기초 Gründliche Anweisung zur Composition〉(1790)가 있다. 그의 이론적 저술들은 제자인 이그나츠 리터 쿠사버 폰 자이프리트에 의해 1826년 3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그의 작품들에서 선정한 발췌곡들은 〈오스트리아 음악 예술의 기념작들 Denkmäler der Tonkunst in Österreich〉(16권 2호, 1909)에 실려 있다.   2) 1821 - 영국 태생 미국의 의사 블랙웰(Blackwell, Elizabeth) 출생 블랙웰 [Blackwell, Elizabeth, 1821.2.3~1910.5.31] 영국 태생 미국의 의사. 현대 의학계 최초의 여의사로 간주된다. 그녀는 미국 의과대학에서 최초로 의사자격을 받은 여성으로, 1849년 뉴욕의 제네바의과대학(호바트대학의 전신)을 졸업했다. 그녀의 가족은 1832년에 뉴욕으로 이민했다. 1838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녀와 여동생은 여학교를 세워 가족을 부양했다. 그녀는 의학서적을 읽으면서 의학공부를 시작했고, 나중에는 찰스턴의과대학의 새뮤얼 H. 딕슨에게 개인적으로 지도를 받았다. 뉴욕과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의과대학에서는 정식 수업을 받고자 하는 그녀의 지원서를 수락하지 않았고, 1847년에야 제네바의과대학에서 그녀의 지원서를 받아들였다. 그녀는 동료들의 따돌림과 사회적 냉대로 고통당했으나 1849년에 학과 수석으로 졸업했다. 런던의 성바르솔로뮤 병원에서 수련을 받은 뒤에 뉴욕 시에서 개업했고, 1857년에는 그곳에서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여자 직원만을 고용해 뉴욕 진료소라는 병원을 건립했다. 나중에 그곳에 여성들을 위한 의학교육의 전과정을 개설했다. 1869년 그녀는 영국으로 가서 런던여자의과대학을 설립했다.   3) 1811 - 미국의 언론인 그릴리(Greeley, Horace) 출생 그릴리 [Greeley, Horace, 1811.2.3~1872.11.29] 미국의 언론인. 뉴햄프셔주(州) 에머스트 출생. 빈농 집안에서 태어나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25세 때 뉴욕에 와서 인쇄공을 거쳐 인쇄공장 경영자가 되었다. 1834년에 문학잡지인 《뉴요커 New Yorker》의 편집주간이 되었고, 열렬한 애국심에 불타 공화당 창당에 가담하여 정치적인 캠페인을 벌이기 위하여 별도로 2종류의 주간지를 발간하였다. 1841년 4월에는 정치·교육 등의 개혁, 경제발전 및 대중의 지식 향상을 목표로 한 일간지 《뉴욕 트리뷴 New York Tribune》을 창간했고, 그의 논설은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정치적으로는 F.M.푸리에와 같은 공상적 사회주의자였으나, 급진적인 개혁을 배제하는 온건파이기도 하였다. 또한 노예제도의 폐지를 강력히 호소하여 1860년에는 링컨의 대통령 출마를 지지하였다. 1872년에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부채만 남기고 낙선하여 실의 속에 죽었다. 그의 명확한 언동과 강인한 신념은 미국 언론사상 최고의 논설기자라는 평을 들었다.   1898 - 핀란드의 건축가 알토(Aalto, Alvar) 출생 알토 [Aalto, (Hugo) Alvar (Henrik), 1898.2.3~1976.5.11] 핀란드의 건축가, 디자이너. 헬싱키 공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30세의 젊은 나이로 설계대회에서 수석을 차지하게 한 파이미오의 사나토리움(1929∼1933)은, 기능주의의 보기 드문 결실로서 유럽 건축계의 주목을 받았다.핀란드에 단순히 합리주의를 옮겼을 뿐만 아니라, 그의 조형에는 자기 나라의 풍토와 전통이 스며 있었다. 이를테면, 1928∼1929년의 작품인 마이레아장(莊)에는 핀란드 특산의 목재가 교묘하게 쓰였으며, 인간적인 정감이 우러나 있고, 특히 목재 커브의 아름다움은 신선하다. 이 밖에 파리 만국박람회의 핀란드관(1937) 등이 유명하다. 합판의 사용과 표준가구의 설계 등 가구 공예에도 새로운 면을 열어놓았다.   1873 - 영국의 공군장교, 원수 트렌차드(Trenchard, Hugh Montague) 출생 트렌차드 [Trenchard, Hugh Montague, 1873.2.3~1956.2.10] 영국군 장교·공군원수. 영국 공군의 기초를 다지는 데 이바지했다. 1893년 군에 입대해 남아프리카 전쟁에 참전했으며, 나중에는 나이지리아에서 복무했다. 1912년 부상당해 송환된 후 비행술을 배워 1913년 윌트셔 어퍼번에 있는 중앙비행학교의 부교장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중인 1915년 당시 영국 육군의 한 부문이었던 영국 비행대의 프랑스 주둔 부대 지휘관을 맡았다.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끊임없는 공격을 감행한 그의 작전은 영국 공군의 표준원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918년 1월 영국 공군 제1참모장이 되었으나 그해 4월 사임했다. 뒤이어 같은 해에 독일의 목표물을 공습하기 위해 영국 공군의 중폭격기로 구성된 부대인 연합국 독립폭격대를 조직했다. 1919년 국방장관 윈스턴 처칠에 의해 영국 공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재임시에 공군 장교 후보생과 참모장교를 위한 대학을 설립하고, 단기복무제도를 도입해 훈련된 예비역 장교를 양성하는 등 영국 공군력을 강화시켰다. 1927년 영국 공군의 초대 원수가 될 때까지 공군 참모총장으로 있다가 1929년 전역했다. 1931~35년 런던 시 경찰국장, 1936~53년 유나이티드아프리카컴퍼니 사장을 지냈다. 1919년 준남작훈위를 받고 1930년 남작이 되었으며, 1936년 자작이 되었다. 1918년 바스 훈장을 받았다.   1859 - 독일의 항공학자, 항공기제작자 융커스(Junkers, Hugo) 출생 융커스 [Junkers, Hugo, 1859.2.3~1935.2.3] 독일 항공학자·비행기제작자. 프로이센 출생. 1889년부터 데사우에서 열기관과 목욕용 가스가열기 등을 제작했다. 1897년 아헨공과대학 교수가 되어 낮은날개식과 전금속제(全金屬製)비행기를 착상했다. 제1차세계대전중 1915년에 그 구상에 따라 전투기를 시험제작했으나, 목제골격날개에 천을 씌운 기체에 익숙한 조종사들이 조종성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장갑지상공격기(裝甲地上攻擊機)로서 별로 많지 않은 대수가 생산되었을 뿐이었다. 전후에는 같은 방식의 민간수송기를 생산했는데, 두랄루민을 사용한 튼튼한 구조로 인해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융커스의 이념이 살려진 근대식 비행기가 만들어진 것은 1930년대의 미국에서였다. 융커스의 물결모양의 외피판을 평활하게 개량하고 가느다란 골격을 부착하여 부하를 감소시킨 세미모노코크(semimonocoque)구조가 발달되어 전금속제 비행기가 일반화되었고 형태도 구조적으로 유리한 낮은날개식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809 - 독일의 작곡가, 지휘자, 피아니스트 멘델스존(Mendelssohn, Felix) 출생 멘델스존 [Mendelssohn-Bartholdy, (Jacob Ludwig) Felix, 1809.2.3~1847.11.4] 독일의 작곡가 ·지휘자 ·피아니스트. 함부르크주 출생. 아버지는 유대계 은행가, 조부는 유명한 계몽주의 철학자 M.멘델스존이다. 교양 있는 어머니와 일생 동안 두터운 애정으로 지낸 누이 파니 등에 둘러싸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11년 가족과 함께 베를린으로 이사, 일찍부터 음악교육을 받아 여러 악기를 다루게 되었고 그림 ·어학에도 재능을 발휘하였다. 괴테와 절친한 보수적 음악가 F.첼터의 지도도 받았다. 9세 때 피아니스트로 데뷔하고, 10세 때 작곡을 시작, 17세 때 관현악곡 《한 여름밤의 꿈》의 서곡을 쓰는 등 매우 조숙한 천재였다. 18세 무렵 베를린대학 청강생으로 헤겔의 미학 강의도 듣고 또 멘델스존가(家) 음악회에 모이는 베를린의 지식인들과도 교제하게 되었다. 1829년 베를린의 징 아카데미에서 J.S.바흐가 죽은 후 처음으로 그의 《마태오 수난곡》을 재연하였는데, 이것은 바흐 르네상스의 개막을 위한 19세기의 기념비적 연주로 높이 평가된다. 그 후 영국과 유럽 각지를 연주여행하였으며, 스코틀랜드에서의 경험이 명작 《핑갈의 동굴》(1830) 《이탈리아교향곡》(1833) 《스코틀랜드교향곡》(1842) 등을 낳게 한 계기가 되었다. 이 여행 중에 쇼팽, 리스트, 로시니, 베를리오즈 등 여러 작곡가들과 알게 되고 많은 악상(樂想)도 얻었다. 1833년 남(南)라인음악제를 지휘하고 뒤셀도르프시의 악단장, 1835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 지휘자가 되어 고금의 명곡과 신작을 소개하는 데 진력, 유럽 제1급의 악단으로 키웠다. 1841년 프로이센왕(王)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명으로 베를린의 음악활동 향상을 위해 힘쓰고, 1843년 슈만과 함께 라이프치히음악학교를 설립하였다. 그의 일생은 짧았으나, 고전주의 낭만파 음악의 대작곡가라는 명성과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주요작품으로 관현악곡 《이탈리아교향곡》(1833) 《스코틀랜드교향곡》(1842), 서곡 《핑갈의 동굴》(1830), 협주곡 《바이올린협주곡》(1844) 《카프리초 브릴란드》, 피아노곡집 《무언가(無言歌)》(48곡, 1829~1845) 《엄숙한 변주곡》(1841), 오르간곡 소나타 6곡, 전주곡과 푸카 3곡, 오라토리오 《성파울로》(1836) 《찬미의 노래》(1840) 《에리야》(1846) 등, 극음악(劇音樂) 《한 여름밤의 꿈》(서곡 1824, 기타 부분 1842) 《안티고네》(1840) 외에 합창곡 ·독창곡 등이 있다.   1795 -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운동 지도자 수크레(Sucre, Antonio José de) 출생 수크레 [Sucre, Antonio José de, 1795.2.3~1830.6.4] 에콰도르의 해방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벌인 라틴 아메리카 독립전쟁에서 가장 존경받던 지도자였다. 15세 때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군사전술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으며, 26세 때는 스페인에 대한 라틴아메리카의 항전에서 베네수엘라 지도자가 되었다. 시몬 볼리바르는 수크레를 장군으로 임명해 그란콜롬비아 남부(지금의 에콰도르)를 스페인으로부터 해방시키려 했다. 수크레는 콜롬비아를 떠나 해안을 따라 과야킬로 진군하면서 그 지역을 콜롬비아 보호지역으로 선포했다. 이어 해발 3,000m나 되는 키토로 계속 진군해 1822년 5월 21일 그곳에서 스페인 왕실군을 격파했다. 그뒤 남동쪽으로 진군하면서 볼리바르의 지원과 5,800여 명의 병력으로 콜롬비아의 후닌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했으며(1824. 8), 페루의 아야쿠초에서 9,000여 명의 왕실군을 무찌름으로써 스페인 부왕(副王)이 페루에서 군대를 철수하도록 만들었다. 1825년초 볼리바르로부터 상(上)페루(지금의 볼리비아)의 차르카스에 남아 있던 일부 저항세력을 내쫓으라는 지시를 받고 이 임무를 완수했다. 수크레는 볼리바르가 작성한 복잡한 헌법에 따라 볼리비아 정부를 세우고 자신은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은 종신직으로 규정되었으나 에콰도르로 돌아갈 것을 열망했던 그는 단 2년 간 만 그 자리를 맡기도 했다. 그는 볼리비아에 안정된 정부를 세우고자 노력했지만 곧 여러 정파의 공격목표가 되었다. 1828년 추키사카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페루 군대가 볼리비아를 침공하자 그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에콰도르로 돌아갔다. 그러나 수크레는 다시 요청을 받아 1829년 페루 군대를 물리치고 그란콜롬비아를 지켜냈다. 그는 또 이듬해 보고타에서 열린 '존경받는 의회'를 주재(主宰)했다. 이는 에콰도르·콜롬비아·베네수엘라의 통일·단결을 유지하기 위한 마지막 노력이었으나 결국 실패했다. 수크레는 이 회의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암살되었다. 암살자들은 콜롬비아의 군인이자 볼리바르의 정적(政敵)인 호세 마리아 오반도의 앞잡이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 공룡 학자 맨텔, 주문형 엽서 (공룡우표마니아 엄원용 님 자료 제공)   1790 - 영국의 지질학자, 고생물학자 맨텔(Mantell, Gideon A.) 출생 맨텔 [Mantell, Gideon Algernon, 1790.2.3~1852.11.10] 영국의 의사·지질학자·고생물학자. 그의 생존중에 알려져 있던 총 5속(屬)의 공룡 중 4속의 공룡을 발견했다. 맨텔은 특히 서식스의 중생대(약 6,500만~2억 2,500만 년 전)의 고생물을 연구했는데, 이 지역은 그의 지질학적인 발견으로 유명해졌다. 그는 백악기(6,500만~1억 3,600만 년 전)의 윌드통(統)이 담수(淡水) 기원임을 규명했으며, 윌드통에서 이구아노돈(Iguanodon)·힐라에오사우루스(Hylaeosaurus)·펠로로사우루스(Pelorosaurus)·레그노사우루스(Regnosaurus)로 알려진 놀랄 만한 공룡 파충류를 발견했다. 또한 그는 트라이아스기(1억 9,000만~2억 2,500만 년 전)에 암석으로부터 파충류의 한 종인 텔레르페톤 엘기넨세(Telerpeton elginense)를 기재했다. 맨텔의 주요저서로는 〈남부 다운스 지방의 화석들 또는 서식스 지방의 지질학적 현상들 The Fossils of the South Downs, or Illustrations of the Geology of Sussex〉(1822)·〈창조의 신성함 Medals of Creation〉(1844) 등이 있다.   1468 - 독일의 활판인쇄술 발명자 구텐베르크(Gutenberg, Johannes) 사망 구텐베르크 [Gutenberg, Johannes, c.1397(1400)~1468.2.3] 1468년 2월 3일 활판인쇄술을 발명한 구텐베르크가 사망했다. 구텐베르크는 독일 마인츠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금속세공기술을 익히다가 1438년부터 인쇄술 발명에 몰두했다. 그는 돈 많은 재정가 요한 푸스트로부터 돈을 빌려 발명품을 완성하려고 했다. 그러나 푸스트와의 불화, 동업 실패, 소송에서의 패배 등으로 42행 성서인 활자와 활자, 그리고 모든 인쇄설비의 관리권을 빼앗겼다. 푸스트는 재판에서 구텐베르크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던 페터 쇠퍼의 도움으로 인쇄를 계속했으며, 1457년 8월 14일 이 완성되어 마인츠에서 발행되었다. 크게 파산한 구텐베르크는 말년에 거의 실명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전한다. 그가 발명한 활판인쇄술은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다.  
383    땡!~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아주 적절히... 댓글:  조회:5773  추천:0  2016-03-22
피타고라스 컵     피타고라스 컵이라 불리는 특이한 컵이 있다. 이 컵의 외관은 보통의 컵과 다르지 않다. 컵용기와 그 아래의 하부 기둥이 존재하고, 특히 컵의 중양에 바닥으로부터 돌출한 내부 기둥이 하나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 중앙 기둥은 하부 기둥과 축선이 일치되게 배치되어 있다.   파타고라스 컵의 사용방법도 특별한 것이 없다. 물이나 술을 적당히 채우면 통상의 컵을 사용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채운 상태로 유지되고, 일부 마시고 나면 잔량이 그대로 남아있는다. 그런데, 정해진 수위를 조금이라도 넘어가도록 채우게 되면, 놀랍게도 컵용기 내에 담겨 있던 물이나 술이 모두 빠져나가 버리고 만다. 일시적인 과욕으로 전부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어떤 원리에서 그런 현상이 일어날까? 원리를 이해하고 보면 그리 어렵지 않다. 초등학교에서도 배우는 파스칼의 원리 혹은 사이펀(siphon) 작용에 따른 것이다. 하부 기둥의 바닥에는 작은 구멍이 있고, 이 구멍으로부터 연장된 가는 관로는 하부 기둥을 따라 올라가 내부 기둥의 거의 정점까지 연장되어 있다. 이 관로는 내부기둥의 정점 부근에서 방향을 바꾸어 컵용기의 바닥에까지 연장된 다음, 내부 기둥의 하단 영역에서 작은 구멍을 통해 컵용기 바닥과 연통된다. 이런 구조에 의해, 물이 내부 기둥의 정점 가까이까지 찰 때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일단 내부 기둥의 정점을 넘어서려 하면, 관로를 따른 사이펀이 완성되어 물은 사이펀 관로를 통해 모두 내부 기둥 및 하부 기둥을 통해 밑으로 배출되어 버린다.     이 희안한 컵은 기원전 6세기 피타고라스학파를 창시한 피타고라스가 창안하였다고 해서 피타고라스 컵이라 불린다. 알렉산드리아의 헤론이 이 컵의 원리를 이용하여 그 당시 마술처럼 보였을 일종의 로봇시스템을 만들기도 했다.   피타고라스 컵은 계영배(戒盈杯 )라는 이름으로 고대 중국에서도 사용되어 왔다. 계영(戒盈)은 넘침을 경계하라는 뜻이다. 그래서 과음을 경계하는 절주배라 불리기도 한다. 우리 선조들은 이 계영배를 가까이 두고 과욕을 경계하였다고 한다.     이 피타고스 컵 혹은 계영배보다 더 교육적인 컵이 고대 중국에는 있었다.     기기[攲器]라는 그릇이 그것이다. 기(攲)는 기운다는 뜻이니 기기 [攲器]는 기울어지는 그릇이라는 의미이다. 공자가 노(魯)나라 환공의 사당을 방문하였을 때 이 그릇을 보았다. 그 그릇은 환공의 유좌지기(宥坐之器) 즉 자리 오른편에 두던 그릇으로서, 비어 있으면 기울고, 절반쯤 차면 바르게 놓이며, 가득 차면 엎어진다(虛則攲, 中則正, 滿則覆).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적절히 처신'하도록 스스로 경계하는 데 사용한 중용을 가르치는 그릇인 것이다.       공자가 "가득 채우고도 기울지 않는 것은 없다"라고 말하자 제자인 자로(子路)가 "가득 채우고도 그것을 지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물었다. 이에 공자는 "총명하고 지혜로우면서도 어리석음으로 지키고, 천하에 공을 세우고도 겸양으로 지키고, 천하를 누를 정도로 용맹하면서도 검약으로 지키고, 천하를 가질 정도로 부유하면서도 겸손으로 지켜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리더가 되고자 하는 자는 유좌지기(宥坐之器)를 마음에 담아두고 항상 과하거나 부족함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382    문학과 의학 댓글:  조회:4584  추천:0  2016-03-19
보들레르,시인이었던 그, 왜 말 잃고 욕만 했을까   보들레르, 45세때 언어 장애 와 반신 마비·실어증 앓다 생 마감 언어 기능하는 왼쪽 뇌 이상 오면 적절한 단어 못쓰고 마비까지 뇌경색, 가벼운 증상 때 치료 중요 19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시인 보들레르의 초상화와 그가 쓴 시집‘악의 꽃’(가운데). 언어장애를 유발하는 좌측 중뇌동맥 뇌경색이 발생했을 때의 뇌 MRI 사진(오른쪽). 흰 부분이 뇌경색으로 손상된 부위다. /조선일보 DB   김상윤 분당서울대병원 신경과 교수   '악의 꽃'으로 유명한 샤를 보들레르(1821~1867)는 19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그는 시인뿐만 아니라, 수필가·비평가 등 다양한 문필 활동을 했다. 그는 명석한 분석력과 상상력을 동원해 인간 심리 심층을 탐구했다. 문학적 유산은 다음 세대인 베를렌·랭보 등 시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보들레르는 기이한 생활과 독특한 성격으로도 이름이 나 있다. 훗날 그러한 행태는 매독에 의한 뇌병증과 관련지어 설명되곤 했다. 하지만 그는 뇌경색으로 생을 마감한다. 뇌동맥이 막혀 뇌조직에 혈액이 공급되지 않아 뇌손상이 오는 질환이다. 보들레르가 문학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하던 45세에, 그는 벨기에 여행을 갔다. 여정 중에 가벼운 마비 증상이 있었고 곧 회복됐다. 하지만 며칠 후에 다시 증상이 발생했고 점차 심해졌다. 결국 오른쪽 팔·다리의 반마비를 동반한 언어장애가 생겼다. 2주 후에는 전혀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프랑스 파리로 돌아와서 치료를 계속했으나, 5개월여 만에 죽음을 맞았다. 보들레르의 병세는 현재의 신경과학으로 봤을 때, 좌측 중(中)뇌동맥 폐쇄에 의한 좌측 뇌경색이다. 당시 보들레르는 아편 흡연과 폭음, 과로가 계속되는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이런 것들이 뇌경색 발생 위험인자로 작용했을 것이다. 우리의 뇌신경 시스템은 복잡한 연결 구조를 갖고 있다. 왼쪽 뇌가 몸의 오른쪽 운동과 감각 등을 총괄하고, 오른쪽 뇌는 왼쪽 반 기능을 주로 담당한다. 이외 많은 기능도 오른쪽과 왼쪽 뇌가 나누어 담당하는데, 언어 기능은 왼쪽 뇌가 담당한다. 따라서 좌측 중뇌동맥 이상으로 뇌경색이 발생하면 오른쪽 반신 마비와 언어 기능 상실이 동시에 나온다. 오른손잡이라면, 언어와 주요 신체 기능을 한꺼번에 잃는 셈이다. 보들레르에게서 나타났던 언어장애를 의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처음 뇌경색 초기에 나타난 언어장애는 '의미성 언어장애'로 생각된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긴 하는데, 적절한 단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증상이다. 이후 점차 심해지면서 '운동성 언어장애' 상태가 된다. 남들이 하는 이야기는 어느 정도 알아듣고 이해하나,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이 입으로 나오지 않는 상태다. 보들레르는 이 상태에서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시설에 입원했고, 하고자 하는 말을 전혀 하지 못했다. 시인이었던 그가 반복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은 역설적으로 특정한 욕이었다. 간혹 하고자 하는 말은 못 해도 버릇처럼 나오는 욕이나 잘 아는 노래는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현상을 보인다. 이후에는 이런 욕도 나오지 않는 완전 실어증이 됐다. 만약 보들레르가 현대인이라면, 그래서 첫 번째 뇌경색 증상이 나타났을 때 바로 병원을 방문해 치료를 받았더라면, 추가적인 뇌경색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면 언어장애로 그렇게 고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381    시쓰는 "알파고", 소설쓰는 "알파고" 등장할수도 있다?... 댓글:  조회:4537  추천:0  2016-03-19
서영인의 책탐책틈 러브 레플리카 윤이형 지음/문학동네 펴냄(2016)   알파고와 바둑기사 이세돌의 대결은 알파고의 4 대 1 승리로 끝났다. 인공지능 기술이 인간을 이기는 단계에 왔다는 자찬, 기술 지배의 미래에 대한 우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 의지와 정신은 인간의 것이라는 자족 등 반응이 엇갈렸다. 문학인들은 농담처럼 이제 시 쓰는 알파고, 소설 쓰는 알파고가 등장할 것이라고 으스스해하고 있다. 정말 그런 시대가 올지도 모르고, 전혀 불가능한 상상만은 아니다.   어릴 적 기억이지만, 그때 거의 모든 집에 바둑판이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 바둑판이 흔했는지 모르겠다. 주로 남자 어른들이 마주 앉아 바둑을 두는 풍경도 흔했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꼼짝 않고 앉아 바둑을 두고, 이제 끝났나 싶으면 각자의 돌을 집어내고 다시 판을 시작했다. 어린 내가 보기에는 무료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었다. 바둑을 전혀 모르지만 그것은 무료와 지루에 집중하는 시간이기도 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리고 일상에서 바둑은 점점 사라져갔다. 바둑판 위에 그 터무니없이 긴 시간을 얹어 두기에는 우리는 너무 바빴고, 바둑은 너무 비생산적이었으니까. 승부와 경쟁의 이벤트로 되살아난 바둑의 풍경에는 그러나 무료와 지루의 시간, 비생산의 시간은 없다. 구글은 세기적 흥행의 주인공이 되었고, 그것으로 인류의 미래를 주도하는 기업 이미지를 굳히고 있다.   문학이 인공지능 로봇을 통해 하는 일은 전혀 다른 일이다. 산업기술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더 빨리, 더 잘하기 위해 로봇을 만든다면, 문학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 혹은 간절히 하고자 하는 일을 로봇을 통해 말한다. 윤이형의 에는 청년의 얼굴을 한 베이비시터 로봇 데니(‘데니’), 신체를 냉동시키고 신체의 정보를 로봇에 이식시킨 스파이디(‘굿바이’)가 등장한다.   데니는 아이를 잘 돌보기 위해 인간의 감정과 욕구를 정확히 읽어내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기능을 통해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읽는다. 올드타운에서 늙은 몸으로 손자를 돌보는 노인이 “울 만큼 힘들다는 것”을 데니만이 안다. 그리고 데니만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 말을 건다. 화성의 개발기지를 건설하는 스파이디들은 태양열 충전을 통해 다른 생명을 착취하지 않고 삶을 영위하며, 디지털신호로 전환된 전자뇌를 통해 타인과 교신한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서로 교신하여 마침내 “개별적인 인격을 잃지 않으면서 동시에 하나의 공동체로 존재하는 데 성공”한다. 가난과 노동에 지친 삶이, 그로 인해 마모된 감정들로 희구하는 인간의 꿈이 거기에 있다.   서영인 문학평론가 데니의 교신은, 스파이디의 공동체는 결국 실패한다. 그 실패에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 불가능한 교신과 파열된 공동체의 삶을 견뎌야 하는 시간들에 대하여, 꿈꾸는 일이 살아가는 일과 결코 분리되지 않는 우리의 나날들에 대하여, 문학이 해야 할 말이 아직 많다. 속도와 경쟁의 기술개발이 자본의 꿈이라면 착취 없는 공감과 교유의 삶은 문학의 꿈이다. 돈이 많이 드는 과학기술은 아무래도 자본의 편일 것 같다. 그러나 자본과 기술의 언더그라운드에서 문학은 여전히 저기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한 로봇들을 개발 중이다.   서영인 문학평론가
380    땡!~ 셰익스피어 원작자가 따로 있다?... 댓글:  조회:5182  추천:0  2016-03-19
  셰익스피어를 둘러싼 모험 제임스 샤피로 지음, 신예경 옮김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 1616)가 유명을 달리한 지 400년이 됐다. 국내에서도 그를 기리는 연극이 잇달아 무대에 올려지고 있는 가운데 ‘셰익스피어 원작자설 논쟁’을 정면으로 다룬 책이 나왔다. 그의 모든 작품은 원작자가 따로 있다는 주장으로, 우리한테는 낯설지만 서양에선 200년도 넘은 해묵은 쟁점이다.   셰익스피어 원작자가 따로 있다는 주장은 1785년에 공식적으로 처음 제기됐다고 한다. 당시엔 주목을 끌지 못했지만, 반세기쯤 지난 1850년대엔 여러 지식인이 잇달아 논쟁에 뛰어들었다. 나중에는 에드워드 드비어(옥스퍼드 백작)와 프랜시스 베이컨이 유력한 원작자 후보로 거명됐다.   지은이는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25년 동안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연구하고 가르쳐온 전문가로서 이 쟁점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기존의 방대한 주장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솜씨가 좋다. 마크 트웨인과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원작자가 따로 있다고 굳게 믿었다는 대목은 서양 지성사의 한 장면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지은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사람들이 원작자가 따로 있을 수 있다고 의심하는 이유를 파고들면서 논쟁의 수준을 끌어올리려 노력한 것이다. 이를테면 지은이는 원작자 논쟁의 뿌리를 셰익스피어 관련 자료의 조작 사건에서 찾고 있다. 한 소년이 솜씨있게 회고록 등을 위조해 세상에 내놓았는데, 당시 셰익스피어 신격화 분위기와 맞아떨어지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요컨대 셰익스피어에 대한 지나친 신성화가 원작자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큰 힘이라는 진단이다.   여기에 지은이는 작품이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반영한다는 ‘상식적 접근’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실제 셰익스피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회 구조나 가족 형태는 당대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 아니다. 셰익스피어 작품의 일부는 공저로 쓰였다는 최근 학계의 연구 결과를 소개하는 대목도 시선을 끈다.   안창현 기자
379    [록색평화이야기]- 명소관광지 락서 력사의 일부가 되다 댓글:  조회:4791  추천:0  2016-03-18
두오모 성당에 설치된 태블릿PC에 쓰여진 낙서.     ‘○○○ & ○○○ ♥’ ‘○○○가 다녀가다 16/03/2016’ 명소에서 흔히 발견되는 낙서다. 세계적인 관광지인 이탈리아 피렌체의 산타 마리에 델 피오레(일명 두오모) 성당도 마찬가지다. 특히 414계단을 따라 오르는 조토 종탑의 벽엔 낙서가 심했다. 1436년 축성됐으니 수백 년 된 고민이었다. ‘낙서 금지’를 써 붙인들 효험이 없었다. 두오모 당국은 결국 묘책을 냈다. ‘낙서엔 낙서’로 대응하기로 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버추얼 그래피티’ 즉 가상현실 속에 남기도록 했다는 게다. 종탑으로 향하는 1·3·4층에 한 대씩 모두 석 대의 태블릿PC를 설치했다. 거기엔 ‘오토그래피(자필서명)’란 앱이 깔려 있다. 화면엔 ‘흔적을 남기고 역사의 일부가 되십시오’란 글귀가 담겼다. 사용자들이 펜이나 붓·스프레이 중 하나를 선택해 원하는 바탕화면에 글이나 이미지를 남기면 그게 영구 저장되도록 했다. 이를 인터넷에서 볼 수 있도록 했다. 1296년부터 있던 두오모 기록물의 일부로 보관되는 셈이다. 두오모 당국은 “기념물에 흔적을 남기는 건 반사회적이고 유치한 행동이지만 또 뭔가 기념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다는 건 인간 본성의 일부기도 하다”며 “그래서 흔적을 남길 수 있도록 하되, 기념물이나 예술작품이 아닌 디지털 화면에 남기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기념물엔 손상이 없으면서 가상현실 속에선 불멸이 되는 셈”이라고 했다. 당국은 입구에 이런 취지의 안내문을 붙였다. 또 “벽면의 낙서들은 곧바로 제거될 것”이란 경고도 했다. 앞서 9명의 복구 전문가들이 석 달에 걸쳐 종탑으로 오르는 길에 있는 낙서를 제거했다. 낙서 제거 작업을 맡은 건축가 베아트리스 아고스티니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낙서가 눈에 거슬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기념물에 진정으로 해가 된다는 점을 알았으면 좋겠다. 낙서를 레이저와 용제로 제거하는 건 까다로운 일이다. 더욱이 대리석에 한 낙서는 제거가 거의 불가능하다. 링 모양의 얼룩은 영원히 남는다”고 했다. 런던=고정애 특파원 /////////////////////////////////////////////////////////// 프란츠 카프카 - 오규원 -       - MENU -   샤를르 보들레르 800원 칼 샌드버그 800원 프란츠 카프카 800원   이브 본느프와 1,000원 에리카 종 1,000원   가스통 바슐라르 1,200원 이하브 핫산 1,200원 제레미 리프킨 1,200원 위르겐 하버마스 1,200원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   - (1987)- 빙그레 우유 200ml 패키지                                          - 오규원   .bbs_contents p{margin:0px;} 1. '양쪽 모서리를 함께 눌러주세요'   나는 극좌와 극우의 양쪽 모서리를 함께 꾸욱 누른다   2. 따르는 곳 ↓ 극좌와 극우의 흰 고름이 쭈르르 쏟아진다   3. 빙그레!   ----나는 지금 빙그레 우유 200ml 패키지를 들고 있다 빙그레 속으로 오월의 라일락이 서툴게 떨어진다   4. →   5. →를 따라 한 모서리를 돌면   빙그레-----가 없다   다른 세계이다   6. ↑따르는 곳을 따르지 않고 거부한다   다른 모서리로 내 다리를 내가 놓은 오월의 음지를 내가 앉는 의자의 모형을 조금씩 더 옮긴다 ...... 이 지상 이 지상 오월의 라일락이 서툴게 떨어진다  
378    [록색평화이야기]- 흥미로운 독수리 려행 댓글:  조회:5546  추천:0  2016-03-18
전익진 기자 2014년 4월 1일 위치추적기를 단 독수리가 월동지인 경남 고성에서 번식지인 몽골로 가기 위해 장거리 비행을 시작했다. 독수리는 나흘 후인 5일 경기도 연천을 거쳐 휴전선을 통과해 북한 지역으로 진입했다. 이후 평양·신의주, 중국 랴오닝(遼寧)성을 지나 출발 9일 만인 10일 몽골로 들어갔다. 이동거리 1700㎞. 여기서 다시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와 주변 일대를 거쳐 고성 출발 후 59일 만인 5월 20일 번식지인 몽골 오브스에 도착했다. 몽골로 들어간 뒤 오브스까지의 거리는 1700 ㎞로 고성부터는 총 3400㎞였다.   50마리에 위치추적기 부착 환경생태연, 5년간 정밀 조사 하루 최대 340㎞ 육지로만 이동 파주·고성 등 정해진 곳으로 와 오브스에서 번식을 마친 독수리는 같은 해 11월 5일 몽골에서 중국으로 접어들어 8일 만인 13일 단둥(丹東) 방면을 지나 북한 신의주로 들어왔다. 이어 하루 만에 북한을 통과해 강원도 화천에 당도한 뒤 이틀 만인 16일 고성 월동지에 도착했다. 이 독수리의 움직임은 한국환경생태연구소의 홈페이지와 스마트폰을 통해 실시간으로 확인됐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독수리의 생태와 번식지·월동지 간 이동경로가 국내 연구진의 5년간 정밀 위치추적으로 풀렸다. 사진 크게보기 한국환경생태연구소 이한수(조류학 박사) 대표는 17일 “위치추적 결과 겨울철 파주 장단반도와 경남 고성 등지에서 월동하는 독수리들은 월동기간 내내 먹이터를 중심으로 지내며 반경 30㎞ 거리 정도에서만 서식하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그는 “독수리 무리가 야생에서 동물의 사체를 구하기 어려워지자 먹이터를 중심으로 겨울을 나는 것으로 분석된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한갑수 한국조류보호협회 파주시회장은 “매년 먹이 부족과 독극물 중독 등으로 탈진하거나 폐사하는 독수리가 잇따르고 있는 상황에서 월동지에서의 정기적인 독수리 먹이 주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 주는 연구”라고 말했다. 연구 결과 독수리의 흥미로운 생태도 속속 밝혀졌다. 우선 몽골에서 한국으로 이동해 겨울을 나는 동안 매년 같은 장소로 오간다는 점이다. 몽골~한국 간 1700㎞를 이동하면서 하루 최대 340㎞를 날아가는 독수리는 육지로만 이동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한수 대표는 “대형 조류인 독수리는 날갯짓을 하지 않고 활강을 통해 먼 거리를 이동하는 특성상 상승기류가 발생하지 않는 바다를 피 하는 것으로 분석된다”고 설명했다. 밤에는 자고 낮에만 비행하는 사실도 포착됐다. 독수리는 월동지와 번식지를 오가는 도중 배가 고프면 중국 랴오닝성 주변 평야 지대에서 1∼2주 머물다 이동한다는 점도 확인됐다. 북한 지역의 경우 청천강 방면 등을 거쳐 올라가지만 며칠씩 머무는 경우는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독수리들은 특히 파주 장단반도가 북한과 접한 민통선 지역인데도 북한으로는 거의 넘어가지 않는 것으로 확인됐다. 연구소 측은 “북한 지역에는 먹잇감인 동물 사체 등이 부족해 월동을 하지 않고 이동 중에도 머물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현상은 번식지인 몽골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먹잇감이 부족한 고비사막을 피해 유목민들이 가축을 대량으로 키우는 몽골 이크나트 등 초원 지역에서만 서식하는 것으로 관찰됐다. 백인환 국립중앙과학관 선임연구원은 “이번 연구 결과는 천연기념물이자 국제적인 희귀 조류인 독수리의 체계적인 보호방안 마련에 중요한 기초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위치추적기(위쪽 원), 번호 표식(아래 원). 연구소가 독수리 생태 연구에 나선 것은 2011년 12월부터다. 문화재청과 함께 탈진 후 구조된 독수리 4마리 에 위치추적기를 부착, 돌려보내면서 시작됐다. 이후 미국 덴버동물원 등과 현재까지 5년간 독수리 50마리 에 위치추적기를 부착한 뒤 방사해 관찰 중이다. 이 장비는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의 신호를 이동통신망으로 수신해 위치를 인터넷 등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추적기는 가로 8㎝, 세로 6㎝에 무게 90g의 초소형이다. 오차범위는 10m 이내로 정밀하다.  
377    일본인 학자 - 오무라 마스오 교수 윤동주 묘 찾기까지... 댓글:  조회:5763  추천:0  2016-03-17
일본의 한국문학 연구자 오무라 마스오 와세다대 명예교수가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소명출판사에서 윤동주 시집 초판본을 보고 있다. 김명진 기자 한국학자 갈 수 없던 수교 전 육필원고도 최초로 조사·검토 일본인 이유로 성취 폄훼되기도 저작집 한국 출간 협의차 내한 “영화 ‘동주’ 보고 싶다” 연변과 백두산을 여행하는 이들 중 상당수는 용정을 거쳐 명동촌을 다녀온다. 용정에는 ‘선구자’ 노래에 나오는 일송정과 해란강 그리고 동주의 사촌 송몽규가 다녔고 동주 기념관과 시비가 있는 대성중학(현 용정중학)이 있다. 윤동주의 고향인 명동촌에는 동주가 다녔던 옛 명동교회가 남아 있으며 동주의 생가가 복원돼 있고 인근 산자락에는 동주의 묘도 있다.   해방을 불과 반년 앞둔 1945년 2월16일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숨진 윤동주는 화장 뒤 뼛가루 형태로 돌아와 이곳에 묻혔다. 그러나 해방과 분단,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등 현대사의 격변 속에 묘지는 잊혔다. 1948년 시집 가 처음 출판된 뒤 한반도 남쪽에서 동주가 가히 ‘민족 시인’의 반열에 오르는 동안, 특히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중국 안에서는 윤동주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기가 되었다. 무덤은 돌보는 이 없이 방치되었다. 마침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게 되었다.   1985년 5월 한 일본인 학자가 망실되었던 윤동주의 묘를 ‘발견’했다. 와세다대 재외연구원으로 그해 4월부터 1년 동안 연변대학교에 연구 유학했던 오무라 마스오(83) 현 와세다대 명예교수가 그다. 오무라 교수는 그 전해 여름 일본 도쿄에 와 있던 동주의 동생 윤일주 교수(성균관대 건축공학과)한테서 형의 묘를 찾아 달라는 간곡한 부탁과 함께 묘지의 대략적인 위치를 담은 약도를 건네받은 터였다. 당시는 한국과 중국 사이에 국교가 수립되기 전이라 한국인의 현지 방문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동주의 묘가 있는 용정은 당시 외국인이 마음대로 갈 수 있는 데가 아니었습니다. 공안의 허가증을 받아 5월14일 연변대학 교수 등 몇분과 같이 동주의 묘가 있다는 옛 동산교회 묘지를 뒤졌습니다. 묘지는 그동안 관리가 안 되어 묘지라기보다는 숲과 밭이 드문드문 널려 있는 산자락이었어요. 동주의 묘도 다른 묘들처럼 문화혁명 때 파괴되어 버린 게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었지요. 일행이 위와 아래로 나누어 네댓시간쯤 헤맨 끝에 마침내 당시 연변대학 조선문학 교연실 강사였던 이해산 선생이 ‘시인(詩人)’이라는 글자가 적힌 묘비를 발견했습니다. 그렇게 동주의 묘를 확인한 순간, ‘여기로구나!’ 싶은 마음에 감격에 겨워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지요.”   ‘오무라 마스오 저작집’ 출간 협의차 방한한 오무라 교수는 30년 넘은 옛일을 어제 일처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11일 오후 서울 서초동 소명출판 회의실에서 그를 만났다. 오무라 교수는 동주 묘를 확인한 닷새 뒤 다시 묘를 찾았다. 두만강 송어와 조선산 명태 등을 진설하고 유기 제기를 사용한 순 조선식 제사를 올렸다. 오무라 교수는 동주의 묘를 확인한 사실을 중심으로 동주 생가터와 동주가 다녔던 광명중학 학적부, 송몽규 생가와 광명교회 등을 확인한 결과를 담은 논문 ‘윤동주의 사적(事跡)에 대하여’를 (1986년 10월)에 발표했다. 그러나 동주의 동생 윤일주 교수는 그가 연변에 있는 동안 타계했고, 중국과 한국 사이에 전화는 물론 편지 연락도 불가능했던 터라 오무라 교수는 이듬해 귀국 뒤 한국을 방문해 윤일주 교수의 묘에 참배하면서 비로소 형의 묘를 찾았다는 사실을 ‘보고’할 수 있었다.   ‘민족 시인’ 윤동주의 묘를 처음 발견한 이가 일본 학자라는 사실에 한국의 일부 언론은 “역사의 아이러니” 운운하며 미묘한 반응을 보였다. 한국 학자의 접근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일본인이라는 특권적 지위 덕을 본 것이라며 발견의 의의를 애써 깎아 내리는 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오무라 교수가 윤동주의 육필 원고를 최초로 조사하고 검토한 학자라는 사실 앞에 그런 폄훼는 설 자리를 잃는다.   “동주의 묘를 확인한 사실을 사진과 함께 보고한 뒤 저는 어느 정도 유족들의 신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1986년 여름 동주의 육필 원고를 눈으로 접할 수 있었어요. 동주의 친우인 정병욱 일가가 일본 관헌의 눈을 피해 마루 밑 독에 묻어 두었던 자선시고집, 역시 친구인 강처증이 보관해 온 유품과 작품, 누이동생 윤혜원 부부가 해방 뒤 용정에서 가지고 내려온 창작 노트 등이었지요. 그때까지 윤동주 문학과 관련해서 숱한 연구서가 나오고 많은 논문이 발표되었는데도 정작 육필 원고를 보겠다며 찾아온 학자는 없었다고 했습니다. 동주의 육필 원고를 처음 본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역시 일본인이 처음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던지 유족은 원고를 본 사실을 공개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오무라 교수가 동주의 육필 원고를 최초로 확인한 때로부터 무려 10년 뒤에야 왕신영 단국대 교수가 육필 원고를 보고 싶다며 유족에게 요청했다. 유족의 말을 빌리면 ‘윤동주의 제1차 자료를 상세하게 보고 싶다고 밝힌 지구상 두번째 인물’이었다. 오무라 교수와 왕 교수, 심원섭 연세대 강사와 유족인 윤인석 성균관대 교수가 함께 엮은 (1999)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윤동주 연구의 텍스트 비평을 위한 일차 자료가 비로소 갖추어진 것이다.   오무라 교수는 이밖에도 동주의 릿쿄대와 도시샤대 학적부와 성적표, 도쿄 거처, 독서 이력 등 일본 유학 시절 행적과 자취를 탐구한 논문, 그리고 도시샤대 교정에 세워진 ‘서시’ 시비 중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의 일본어역 적합성 문제를 제기하는 등 윤동주와 관련한 연구를 꾸준히 진행했다. 그 결과를 담은 논문집 이 2001년 소명출판에서 출간되었으며 역시 소명출판이 전체 6권으로 기획한 ‘오무라 마스오 저작집’의 제1권으로 이달 중에 다시 나온다.   윤동주 시의 매력을 묻는 질문에 오무라 교수는 “성실하고 내면적인, 모든 것을 내면으로 내면으로 추구해서 표현하는 젊은이가 쓸 수 있는 시라고 생각한다. 시대가 달랐다면 동주는 동시를 쓰는 시인이 되었을 텐데 시대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최근 한국에서 이는 윤동주 바람과 관련해서는 “유명해지든 그렇지 않든 윤동주의 가치는 그대로일 것”이라면서도 “영화 를 보고 싶다”고 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 [한겨레] ‘윤동주 친우’ 문동환 목사, ‘동주’ 각본가 만나 그를 추억하다 ‘명동촌과 윤동주’를 기억하는 마지막 증인 문동환 목사(사진 오른쪽)와 영화 를 각본·제작한 신연식(왼쪽) 감독이 23일 낮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문 목사 자택에서 를 관람한 뒤 대담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시인 윤동주를 기억하는 이와 윤동주의 흔적을 좇아온 이가 한 자리에 앉았다. 영화 를 제작하고 시나리오를 쓴 신연식 감독은 23일 서울 영등포구 문동환(95) 목사 자택에서 작은 상영회를 열었다. 문동환 목사는 윤동주, 송몽규와 친한 벗이었던 고 문익환 목사의 3살 터울 동생으로 이들 가족은 명동촌에서 용정으로 옮겨가며 북간도의 땅을 함께 일구었다. 문동환 목사와 가족들이 둘러앉아 영화를 보며 윤동주에 대한 기억을 나눴다, 조카 문영금씨와 딸 문영미씨가 문동환 목사에게 평소 들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의 기억을 거들었다. 북간도의 소년 시절 신연식 감독(신) 를 준비하며 여러 연구서들을 뒤지고 윤동주 시인의 조카인 성균관대 건축학과 윤인석 교수, 송몽규의 조카이며 을 쓴 송우혜 선생 등을 만났다. 윤동주의 이야기를 전해받은 사람들을 만난 셈인데 문 목사님은 북간도 시절 윤동주와 송몽규를 직접 기억하는 분이다. 문동환 목사(문) (북간도) 명동을 떠오르게 하는 기억은 높은 나뭇가지위에 걸린 종탑(윤동주 시 에 나온 첨탑)이야. 우리 집에서 학교쪽으로 가자면 먼저 윤동주네 집이 나왔는데 그 집은 과수나무가 그렇게 많았어. 아직도 생생한 것이 살구에 복숭아가 열린 것을 보면서 그걸 먹고 싶었던 생각. 2001년에 그곳을 다시 한번 가봤는데 집은 모조리 없어졌고 학교 운동장은 연초(담배)밭이 됐어. 신 영화의 북간도 장면은 강원도 고성 왕곡마을에서 찍었는데 북방식 가옥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어서였다. 영화에선 사회주의 때문에 가족들이 용정으로 옮겨간 것으로 했다. 문 송몽규 아버지 송창희 선생은 명동학교 교사였는데 새 문명을 많이 접해서 도시에서 책을 받아보는 덕에 몽규·동주 형은 소년 잡지도 함께 돌려보곤 했는데 우리 형님(문익환 목사)이 그걸 몹시 부러워했지. 그들이 잡지도 만들고 몽규가 어른들에게 연설을 한 일은 초등학교 때였을 거야. 1929년 사회주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명동학교가 인민학교로 바뀌고 곧 문을 닫았어. 용정 은진중학교는 일본어 교재를 갖다 놓고 한국어로 가르치던 곳이었어. 3·1절에 태극기를 올리고. 나중에 어른들께 들으니 몽규는 공부를 그리 잘 하다가도 탈출하곤 했다던데 결국 은진학교 2~3학년때 탈출해서 중국에 다녀왔대. 몽규와 동주 아버지는 사회주의로 넘어갔다가 나중에 다시 기독교 신앙인으로 돌아왔는데 몽규 형은 집안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아. 동주, 익환 형님 둘이 평양 숭실학교로 편입했는데 형님은 윤동주와 모자를 바꿔 쓰고 다녔대. 윤동주도 잘 생겼지만 우리 형님도 잘생겼거든. 윤동주에겐 형님이 모자덕에 잘생겨보였나봐. 계속 바꿔쓰자고 했대. 동주 형이 연희전문학교에서 시를 썼던 이야기도 후에 들었지. 라는 시도 있지만 실은 동주 형은 입에서 시가 줄줄 나오는 사람이 아니었어. 고민하면서 몇번이고 고쳐가는 아주 섬세한 시인이었어.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장준하 선생, 문익환 목사, 윤동주 시인, 정일권 전 국회의장. 자료사진 문동환 목사가 말하길… “윤동주네집 과수나무가 많았어 익환 형님 모자를 부러워했었지 동주는 아주 섬세한 시인이었어 짧은 삶에 큰 의미 남겨 부활한 셈” 신연식 감독이 말하길… “영화 준비하며 많은 이들 만났는데 문 목사님은 그를 직접 기억하는 분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한 태도 등 영화가 청년들에게 질문 남겼으면” 탈출한 자-못한 자 신 윤동주를 연구해온 일본 교수들을 만나기 위해 일본에 여러번 취재를 갔다. 송몽규가 다니던 교토 제국대와 윤동주가 편입한 교토 도시샤 대학 정확히 중간에 둘이 만나던 와이엠시에이 회관이 있었다. 영화 속에서 일본 경찰이 한국학생 모임을 급습하고 체포되기 전 몽규가 동주를 찾아간 것은 물론 만들어낸 이야기다. 소문으론 체포된 뒤 일본인 하숙집 주인 아주머니가 “조선 학생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던데 어딜 가나 감시가 살벌했던 것 같다. 문 나는 형과 함께 도쿄에 있는 일본 신학교에 다녔어. 1943년 장하구 선생(종로서적 대표)이 정세가 심상찮게 돌아간다고 판단해서 용정에 있는 우리집에 가서 학병으로 불려가기 전에 형제들을 얼른 집으로 데려오라고 했어. 집에서 ‘할머니가 위독하니 급히 귀국하라’고 전보를 보내고 우리는 만주에 있는 봉천신학교로 전학을 가겠다고 했지. 그런데 나를 못나가게 하려고 후쿠다 목사가 신학생회의를 소집했어. “기독교인이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며 귀국을 말리길래 내가 이렇게 말해버렸어. “나는 일본을 위해 죽을 수도 없고 아무래도 일본을 사랑할 수가 없다.” 그때 일본을 탈출하지 못했던 동주·몽규 형이 죽어서 돌아온 것을 생각하면 기가 막히지. 용정에서 목회하던 아버지(문재린 목사)가 동주 형의 장례식을 집전했어. 동주를 복기하는 이유 신 고인이 생전에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 유족들이 아는지 모르는지에 따라 고인의 유산이 보존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 동주의 시가 세상에 전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시인이 되고 싶었던 동주의 열망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덕분이다. 연희전문 동기인 정병욱은 학도병으로 끌려가기 전에 윤동주 시집 초고를 어머니께 부탁했고, 동생 윤혜원은 피난을 오면서 동주가 남긴 원고를 지니고 왔다. 나는 시인이 되고 싶은 동주의 심정에 감정이입했다. 나도 20살때 연출부에 들어가면서 영화가 되지 못한 시나리오를 쌓아놓고 입봉 한번 못하고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이십대를 살았다. 동주는 시집 전체를 수도 없이 고쳐쓴 듯 하다. 끝내 등단을 하지 못했던 그 심정이 내게도 절실했다. 문 동주 형은 시에 대한 끓는 정열을 지니고 한편으론 어떻게 생존의 위기에 대처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일본 경찰에게) 걸려들고 말았어. 애달파. 그러나 중요한 건 죽음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죽느냐 하는 거라고 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것을 알면서도 채찍을 들고 성전으로 향한 것은 죽으러 간 것이지. 그 사실이 예수의 짧은 삶에 의미를 남겼어. 그런 사람의 삶은 부활을 초래하는 거야. 동주 또한 그렇게 살았으니 오늘 우리가 둘러앉아 그를 이야기 하는 거지. 신 지금은 청년들이 보다 나은 세상을 기대하며 시대 정신을 갖고 살아가긴 힘든 시절이지만 동주의 시대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변혁기였다. 이 영화가 청년들에게 사적인 목표 외에 다른 것,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어떤 태도로 살 것인가 하는 질문을 남겼으면 좋겠다. 정리 남은주 기자  
376    땡!~ 한글 + 한자 = 고유 漢子 댓글:  조회:4933  추천:0  2016-03-17
이세돌(李世乭)은 이름부터 범상치 않다. ‘세상의 돌’이라는 뜻이니 바둑으로 세상을 평정할 조건을 벌써부터 갖추어 놓은 것이다. 돌(乭) 자는 우리가 만든 한자(漢字)다. 돌 석(石)이 의미를 담고 있는 요소라면, 새 을(乙)은 리을(ㄹ) 받침의 음가를 이룬다. 중국 언론은 돌의 의미를 취해 ‘이세석’(李世石), 일본 언론은 음을 취해 ‘이세도루’라 표기하고 있다. 이두, 향찰, 구결에서 보듯 우리는 일찍부터 한자를 주체적으로 받아들여 썼다. 돌(乭) 같은 고유 한자도 이미 ‘삼국유사’에서부터 나타난다. 한자가 유입된 초기에는 순우리말 사람 이름이나 땅 이름을 표기하기가 더욱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다산 정약용(1762∼1836)과 오주 이규경(1788∼1863)이 각각 ‘아언각비‘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적지 않게 다루었다. 학계에 따르면 이렇게 만들어진 고유 한자는 10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중국에는 없는 사람 이름과 땅, 동물, 식물, 관직, 생활도구 등의 이름이 많다. 지금도 사람 이름으로 심심치 않게 쓰는 글자가 이세돌의 ‘돌’ 자다. 과거 돌은 역시 고유한자인 쇠(釗) 자와 짝을 이루어 돌쇠라는 우리말 이름을 표기하는 데 쓰였다. 돌과 같은 원리로 만들어진 고유 한자가 갈(乫), 걸(乬), 둘(乧), 톨(㐋), 할(乤) 등이다. 한자와 한글을 혼합해 새로운 글자를 만든 것도 있다. 임꺽정을 표기할 때 쓰는 걱(巪) 자가 그렇고, 놈(㖈), 둑(㪲), 둔(䜳), 둥(㪳), 억(㫇) 자가 그렇다. 한자에 쌀 미(米) 자가 있지만, 쌀(㐘)이라는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쓴 것도 흥미롭다.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이 보위에 오르기 전 잘산군(乽山君)이었는지, 자을산군(者乙山君)이었는지 종종 논란이 일기도 한다. ‘조선왕조실록’은 일관되게 자을산군이라고 표기했지만,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잘산군에 봉해졌다’는 표현이 있다. 잘산군이라고 부르되 공식 표기는 자을산군이라고 했는지 모를 일이다. 돌고래 국(䱡), 족제비 광(㹰), 망둥어 망(䰶), 가자미 첩(鯜), 민어 회(鮰), 대구 화(夻) 자 등 동물과 어류를 이르는 글자도 적지 않게 만들어 썼다. 중국에는 없거나 흔치 않아 글자가 없거나 있어도 용례를 찾기 어려운 글자였을 것이다.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이 보위에 오르기 전 잘산군(乽山君)이었는지, 자을산군(者乙山君)이었는지 종종 논란이 일기도 한다. ‘조선왕조실록’은 일관되게 자을산군이라고 표기했지만,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잘산군에 봉해졌다’는 표현이 있다. 잘산군이라고 부르되 공식 표기는 자을산군이라고 했는지 모를 일이다. 돌고래 국(䱡), 족제비 광(㹰), 망둥어 망(䰶), 가자미 첩(鯜), 민어 회(鮰), 대구 화(夻) 자 등 동물과 어류를 이르는 글자도 적지 않게 만들어 썼다. 중국에는 없거나 흔치 않아 글자가 없거나 있어도 용례를 찾기 어려운 글자였을 것이다. ...바둑 열풍이 일본말 ‘고’(碁·기)가 국제어로 완전히 자리를 굳히는 역할을 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부수가 돌 석(石)인 이 글자는 돌을 사용하는 이 게임의 특성을 직관적으로 보여 준다. 게다가 일본은 현대적인 바둑의 룰을 정착시킨 것도 사실이다. 반면 한자의 바둑을 가리키는 나무 목(木) 변의 기(棋)자는 상대적으로 변화를 담아내지 못한 낡은 글자다. 한국에는 순우리말 ‘바둑’이 있다. ...바둑이라는 우리 말을 세계에 각인시키는 노력이 아주 적시적으로 필요한 때이다.... 서동철 논설위원
375    땡!~ 포기란 있다? 없다!... 댓글:  조회:5906  추천:0  2016-03-17
안녕? 나는 무지개의 여신 ‘이리스’(Iris)야.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아들 ‘타우마스’가 아버지이고, 바다의 님프 ‘엘렉트라’가 어머니지. 난 서풍의 신 ‘제피로스’와 결혼해 아들 ‘에로스’를 낳았지.  ">  "> ▲ 피에르 나르시스 게렝의 ´모르페우스와 이리스´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것이 내 일이야. 원래는 ‘제우스’의 사자(使者)였는데, ‘헤르메스’가 나타나면서 업무를 나눴어. 신화의 시대가 아닌 과학의 시대에 내가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는 재미있는 소식을 들었어. 미국 하버드대 의대 브루스 스피겔만 교수란 사람이 쥐에게 운동을 시키니까 근육에서 새로운 호르몬이 나와 지방을 연소시킨다는 연구를 2012년 과학저널 ‘네이처’에 발표했더군. 새로운 호르몬이 근육 신호를 지방조직에 전하는 역할을 한다고 해서 내 이름을 따 ‘이리신’이라고 지었다지 뭐야. 어쨌든 이리신은 혈액을 타고 흐르면서 비만을 유발시키는 백색지방을 칼로리를 소모하는 갈색지방으로 바꿔준대. 실제로 10주 동안 운동을 한 사람 몸의 혈중 이리신 농도가 운동을 하지 않는 사람에 비해 2배 이상 높다는 결과도 있더라고.     과학에서 연구는 다른 사람이 하더라도 똑같은 결과가 나와야 ‘재현 가능성’이 보장된다고 하잖아. 그런데 다른 연구팀들이 똑같은 실험을 했는데 결과가 들쭉날쭉이고, 심지어 이리신을 발견하지 못한 연구자들도 많았대. 그러다 보니 스피겔만 교수가 연구 성과를 조작했다는 소문까지 돌더군. 현대사회의 질병이라고까지 불리는 비만을 부작용 없이 해결할 수 있는 생체물질을 찾아냈다고 어린애처럼 좋아하다가 거짓말쟁이라는 비난까지 쏟아지니까 어찌나 좌절하던지. 그렇게 끝나나 싶었는데, 얼마 전 스피겔만 교수가 질량분석이라는 정밀한 분석법으로 사람에게서 이리신을 찾아냈대. 연구팀은 이번에 운동을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의 혈액 속 단백질 조각인 ‘펩타이드’를 대상으로 질량분석을 했는데 운동을 한 사람에게서 이리신이 발견됐대. 질량분석은 미량의 물질까지 찾아낼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에 이리신의 존재를 의심했던 연구자들도 이번 연구 결과를 환영하는 분위기야. 생물학 분야의 세계적인 저널인 ‘셀’ 온라인판 논문으로 실렸지. 동양을 여행하고 온 헤르메스한테 들었는데 그쪽에는 ‘와신상담’이란 말이 있다며. 스피겔만 교수의 경우가 딱 그게 아닌가 싶어. 하늘에서 보고 있노라면 요즘은 예전 사람들보다 뭐든지 쉽게 싫증 내고 포기하는 것 같아. 자기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포기하지 말고 스피겔만 교수처럼 끝까지 가보라고. 그럼 내가 신에게서 좋은 소식을 전해 줄지도 모르잖아. 호호호. 유용하 기자
374    땡!~ 커피를 알아보기 댓글:  조회:5340  추천:0  2016-03-17
안녕, 반가워. 나는 커피야. 설마 나를 몰라보는 사람은 없겠지? 내가 처음 알려진 것은 기원전 3세기쯤이었지. 칼디라는 에티오피아 목동이 날 처음 발견했어. 칼디는 자기가 돌보던 염소들이 낮에 처음 본 붉은 열매를 뜯어먹고 나서 밤새 잠을 못 자고 흥분해서 뛰어다니는 것을 보게 됐지. 이상하게 생각한 칼디는 그 열매를 몇 알 먹어 봤는데, 자기도 밤새 뒤척거리는 걸 알게 됐어. 지금은 커피를 음료로 마시잖아. 그런데 15세기 이전까지는 커피콩을 볶은 뒤 빻아서 잼처럼 빵에 발라 먹었어. 이슬람 사람들이 우연히 음료로 커피를 마신 뒤부터는 알코올 대용으로 유행하게 됐지. 유럽 사람들도 이슬람 세계에서 그 유행을 받아들인 뒤 나의 매력에 완전히 빠져 버렸지. 그런데 처음 가톨릭 교회에서는 ‘악마의 음료’라고 부르며 날 못 마시게 했어. 그러다가 교황 클레멘트8세가 커피를 맛본 뒤 “이 좋은 걸 이슬람 사람들만 마시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선언하면서 유럽에서도 공식적으로 마실 수 있게 됐지. 어쨌든 난 전 세계인이 가장 좋아하는 기호식품 중 하나가 됐지. 한국 사람들도 지난해 아메리카노 기준으로 1인당 평균 338잔의 커피를 마셨다고 들었어. 한국 전통음식 김치는 일주일에 11.8회 먹었지만 커피는 12.3회를 마셨다니 내가 얼마나 인기인 줄 알겠지? 처음에 난 사람들의 잠을 쫓아 주고 정신을 말짱하게 만들어 주는 능력만 있는 줄 알았어. 그런데 과학자들 덕분에 심혈관 기능을 개선해 주고, 간 기능도 활성화시키며 당뇨의 위험을 낮춰 주는 능력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중개의학’에는 내 각성 능력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려 주는 연구 결과가 나왔더군. 미국 콜로라도주립대 연구진이 발표한 것인데 내가 사람들의 ‘일(日)주기 생체리듬’을 40분 정도 늦춘다는 거야. 일주기 생체리듬은 세포를 갖고 있는 생물이라면 누구나 있는 하루 24시간 주기의 일정한 생체 신호야. 이 생체리듬은 평소에는 못 느끼겠지만 시차가 전혀 다른 나라를 여행하고 오면 느끼게 되지. 연구팀은 건강한 성인 남녀 5명을 대상으로 잠들기 3시간 전에 에스프레소 두 잔 분량의 카페인이 담긴 알약을 49일 동안 복용시키고 그에 따른 반응을 관찰했대. 그 결과 잠들기 시작하는 시간이 40분이나 늦춰졌다지 뭐야. 결국 시차가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떠날 때나 돌아올 때 커피를 마시는 것이 적응에 도움이 된다는 말 아니겠어? 과학자들이 날 연구할 때마다 새로운 능력이 밝혀지고 있어서 나도 내 자신이 궁금할 정도야. 어쨌든 깨어 있어야 하는데 졸립다면 언제든지 날 불러 줘. 또 보자구. 유용하 기자        
373    땡!~ 세상에서 꿀벌이 사라지면 인류도 사라진다?!... 댓글:  조회:6312  추천:0  2016-03-17
    저는 호기심이 엄청 많은 꿀벌 ‘마야’입니다. 발데마르 본젤스라는 독일 동화작가가 제 이야기를 ‘꿀벌 마야의 모험’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낸 적이 있답니다. 어린 친구들은 만화영화로도 저를 만난 적이 있을 거예요. 저는 좁은 벌집에서 사는 것보다 여기저기 여행하는 걸 좋아해요. 낯선 곳을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다 보니 천적인 말벌한테 잡혀간 적도 있답니다. 예전엔 여행을 하다 보면 다른 동네에 사는 꿀벌 친구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는데 요즘은 그게 ‘하늘의 별 따기’가 됐어요. 과학자 아저씨들 말로는 지구의 온도가 점점 올라가는 지구온난화 때문이라더군요. 미국과 영국, 뉴질랜드, 독일의 과학자 아저씨들이  ‘사이언스’에 공동으로 발표한 논문을 보면 지금 지구온난화가 너무 진행돼 사람들이 온난화 억제 목표를 달성하더라도 몇백년 후에는 해수면이 지금보다 6m나 높아진대요. 그러면 섬나라나 방글라데시 같은 바닷가 근처 도시들은 물속에 가라앉을 수도 있다네요.   우리 꿀벌들한테 날벼락 같은 소식도 같은 날 ‘사이언스’에 실렸더군요. 캐나다 오타와대·캘거리대, 영국 리딩대, 독일 헬름홀츠 환경연구센터, 미국 버몬트대 등의 과학자들이 모여서 연구한 건데, 우리 꿀벌들이 지구온난화 때문에 멸종될 수 있다는 내용이었어요. 요즘 들어 우리 친척들이 많이 사라져서 궁금했는데 그런 이유가 있는 줄은 몰랐어요. 그저 사람들이 농약을 많이 사용하고, ‘꿀벌의 흑사병’이라 불리는 낭충봉아부패병이 유행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었거든요. 과학자 아저씨들은 1901년부터 나온 북미와 유럽 지역 꿀벌 67종에 관한 기록 42만 3000건을 조사해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 범위를 장기간 추적해 조사했다고 하네요. 그 결과 북미와 유럽 지역의 꿀벌 서식지 남방한계선이 300㎞나 북쪽으로 올라갔다네요. 남쪽에서 살 수 있는 곳이 줄어들면 북쪽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새로운 지역으로 이사해 적응하는 속도보다 지구온난화 속도가 더 빨라서 죽는 거래요. 캐나다 야생생물보호국 알라나 핀더 박사님은 “현재 꿀벌 서식지 축소 경향은 농약 사용이나 개발로 인한 서식지 감소와는 다른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결국 꿀벌이란 종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걱정하더군요. 유엔식량농업기구(FAO) 과학자 아저씨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는데 전 세계 식량작물의 63%가 우리가 하는 꽃가루받이(수분·受粉)로 열매를 맺는대요. 우리 숫자가 줄면 수분 활동도 줄어 일부 농작물은 재배할 수가 없겠죠? 그럼 식량가격은 오를 수밖에 없지요.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상대성이론을 만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박사님이 “꿀벌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4년 뒤 인류도 사라질 것”이라고 하셨대요. 꿀벌과 사람이 영원히 살 수 있는 지구가 되도록 함께 노력했으면 좋겠어요. 유용하 기자
372    땡!~ 재미가 쏠라당- 언제면 수수께끼 풀리나... 댓글:  조회:6206  추천:0  2016-03-17
안녕? 난 ‘네디’라고 해. 사람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종족인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야. 아마 학교에서는 줄여서 ‘네안데르탈인’으로 배웠을 거야. ▲ 네안데르탈인 복원도.   우리 종족은 35만년 전에 처음 나타나 유럽,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북부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에서 살았어. 그러다 아시아에서는 5만년 전에, 유럽에서는 2만 4000년 전에 완전히 사라지게 됐지. 거의 30만년 가까이 유라시아 대륙에서 번성하던 우리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은 미스터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 과학자들은 갑작스럽게 추워진 지구 환경의 변화, 낮은 지능, 현생 인류인 크로마뇽인과의 전쟁 등을 원인으로 꼽고 있더군. 나도 사냥을 나갔다가 너희 인류의 직접적인 조상인 크로마뇽인들을 잠깐 보기는 했지만, 우리와 생김새가 약간 다를 뿐 나쁜 사람들 같아 보이지는 않았어. 그리고 우리 종족과 크로마뇽인들이 대규모 전쟁을 벌였다는 소식도 들은 적 없고 말이야. 더군다나 8만~5만년 전 중동에서 현생 인류와 우리 종족 간에 교배가 이뤄졌을 것이라는 유전학자들의 연구 결과들도 많잖아.     내 생각에는 너희 조상들과 교배가 잦아지면서 우리의 고유한 유전적 특성이 줄어들면서 서서히 사라지게 된 것이 아닐까 싶어. 실제로 현대인의 유전자 중 1.5~4%는 우리에게서 전해졌다는 연구도 있잖아. 그런데 미국 밴더빌트대 유전학연구소 존 카프라 교수를 중심으로 한 워싱턴대, 노스웨스턴대, 국립보건원(NIH), 펜실베이니아주립대, 메이요 클리닉 공동연구팀이 우리 유전자가 현대인의 건강과 복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연구한 결과를 발표했더라고. 연구자들은 의료 데이터베이스에서 유럽계 조상을 가진 미국인 2만 8416명의 유전자 데이터를 수집해 우리에게서 물려받은 DNA 조각들을 찾아낸 뒤 유전자 변이체와 특정 질병 간의 상관관계를 계산했대. 그 결과 우리에게서 유래한 12개의 유전자들이 우울증 같은 신경질환, 광선각화증 같은 피부질환, 혈전, 요실금, 방광통, 요로장애 등에 관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더군. 니코틴 중독 가능성을 높이기도 한대. 담배를 쉽게 끊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우리의 유전자가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 아닐까. 현대인들의 몸속에 남아 있는 고인류의 유전자들 중 일부가 질병의 원인이 된 것은 현대인의 생활습관과 환경이 그 당시와는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 그렇지만 우리 유전자가 나쁜 영향만 주는 것은 아냐. 우리가 전해 준 유전자가 선천성 면역반응을 강화시켜 세균이나 진균, 기생충 등에 대한 저항력을 높여준다는 연구결과도 있거든. 우리의 멸종 원인이나 현대인과의 유전적 관계 등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부분이 많아. 현대인과 우리 종족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나도 궁금해. 빨리 밝혀졌으면 좋겠어. 유용하 기자
371    땡!~ 재미가 쏠쏠... 불이냐? 석기이냐? 댓글:  조회:5753  추천:0  2016-03-17
안녕, 나는 영국의 인류학자 루이스 리키(1903~1972)라고 해. 아버지께서 아프리카 케냐에 파견된 기독교 선교사이셨기 때문에 나는 평생을 케냐와 탄자니아에서 살았어. 내가 원시인류 화석 발굴에 몸 바치기로 결심한 건 학창 시절 우연히 읽게 됐던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때문이지. 1959년에는 가장 오래된 원인(猿人)의 화석을 발견했지. 20대 남성으로 추정되는 해골이었는데 단단해 보이는 아래턱 때문에 ‘호두까기 인간’, 일명 ‘진잔트로푸스 보이세이’라고 이름을 붙였지. 요즘은 ‘파란트로푸스 보이세이’라고 부르더라구. 1963년에는 탄자니아 세렝게티 국립공원의 올두바이 협곡에서 ‘손재주 좋은 사람’,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이란 뜻의 ‘호모 하빌리스’ 화석을 처음 발견하기도 했지. 호모 하빌리스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와 비슷한 시기에 살면서 석기는 더 발전된 수준의 것들을 사용했던 듯해. 나의 발견 전까지 학계에서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가 처음으로 석기를 사용한 인류라고 보고 있었거든.    이렇게 장황하게 내 소개를 한 이유는 최근 세계적인 과학저널 ‘네이처’에서 재미있는 논문을 하나 냈기 때문이야. 미국 하버드대 인류진화생물학과 대니얼 리버먼 교수와 캐서린 진크 박사는 논문에서 “인류가 지금처럼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은 불의 사용 때문이 아니라 석기를 이용해 고기나 채소 등을 잘게 다져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통설을 뒤집는 주장을 했더라구. 사람과 가장 가까운 영장류이자 잡식성 동물인 침팬지가 가장 힘들어하는 게 뭔지 알아? 하루의 4분의1인 6시간 이상을 채소나 고기를 씹는 데 쓰는 거야. 생고기, 생야채를 소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씹기 위해서는 커다란 이빨과 턱이 필요한데 이런 구조로는 사람처럼 언어를 발달시키기 쉽지 않아. 리버먼 교수는 인류의 진화가 불을 사용해 요리를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석기라는 도구를 이용해 음식을 씹기 좋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주장한 거야. 실제로 인류의 초기 조상들이 고기를 먹기 시작한 것은 250만년 전부터지만, 불을 이용해 요리를 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50만년 전의 일이거든. 연구팀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원시 인류가 고기를 얇게 썰고 채소를 다져 먹으면서 씹는 횟수를 이전보다 17% 이상 감소시킬 수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어. 1년에 250만번을 덜 씹게 되는 거지. 이렇게 음식을 쉽게 씹을 수 있게 되면서 인간은 다른 영장류보다 작은 이빨과 턱을 갖고 주둥이가 작아지면서 말을 하기에 좋은 구강 구조로 변하게 된 거지. 인류 문명이 발달할수록 사람들은 미래에 나올 새로운 기술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 경향이 있는데 과거를 통해 인류와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도 역시 중요하지 않을까. 유용하 기자
370    [록색평화한마디]- 물고기들도 길을 찾아야 하는데... 댓글:  조회:4820  추천:0  2016-03-15
[록색평화한마디] 하천 魚道, 증설하고 개선하라 이건원 하천사랑모임 회원   인간의 젖줄인 하천 생태계가 점점 파괴되어 간다. 하천 대부분에 설치된 보(洑)에 어류 이동을 위한 어도(魚道·고깃길)가 없는 것이 큰 문제다. 고속도로 등을 건설할 때, 산짐승이 도로에서 차에 치여 죽는 것을 막고 기존 서식 환경 파괴도 최소화하기 위해 '생태 통로'를 만드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정부와 지자체는 강이나 냇물에 설치된 보 주변의 어류 실태부터 파악해 이른 시일 안에 입출로를 늘리고, 상태가 나쁜 기존 어도는 철거한 뒤 재설치해 소중한 토종 물고기의 멸종을 막아야 한다. 예산이 많이 든다며 겉치레로 계획을 세우면 소용없다. 어도를 계단식으로 대충 설치하면 물이 잘 흐르지 않는 데다 턱이 너무 높아 작은 물고기는 오를 수가 없다. 몸집이 큰 연어도 상류로 올라가지 못한 채 떼죽음 당해 당국에 서도 시설 개선이 시급하다고 늘 말하지 않는가. 하천을 친환경 생태형으로 만들려면 농사 등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보는 과감히 철거해야 한다. 어도를 설치할 때도 주먹구구식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설계하자. 즉 계단 폭은 넓게, 턱은 낮게 만들어야 치어도 상류까지 올라갈 수 있다. 물고기도 인간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살아 있는 하천이 되도록 복원하고 보호하자.
369    땡!~우리 모두 다 함께 살아봅시다ㅠ... 댓글:  조회:4510  추천:0  2016-03-15
여러분, 안녕? 나는 훔볼트 펭귄이야. 나는 남미 페루 남부에서 칠레 북부에 이르는 해안 지역에 살고 있지. 이쪽은 남극의 차가운 바닷물이 적도로 올라가는 길이야. 지리학자들은 그런 해류의 움직임을 ‘페루 해류’ 또는 ‘훔볼트 해류’라고 부르지. 우리가 훔볼트 펭귄이라고 불리게 된 것도 그 때문이야. 전 세계적으로 우리 펭귄들은 17~18종이 있어. 갈라파고스 펭귄을 비롯해 3종 정도는 적도 부근의 열대지방에서 살고 있지만, 대부분 남극처럼 추운 데서 살고 있지.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추운 지방에서 살 수 있는지, 얼음장처럼 차가운 바닷물에 거리낌 없이 뛰어들 수 있는지 매우 궁금해하더군. 최근 중국 베이징의 베이항대와 중국항공우주연구소, 물리화학기술연구소 공동 연구진이 전자주사현미경을 이용해 방수와 보온 효과를 내는 우리 깃털의 물리적·화학적 비밀을 밝혀 냈다지 뭐야. 이번 연구 결과는 화학 분야 국제학술지 ‘물리화학 C 저널’ 최신호에 실렸고, 세계적인 과학저널 ‘사이언스’ 26일자에도 보도됐어. 연구팀은 전자주사현미경으로 우리 깃털을 관찰한 결과 깃털의 큰 줄기 옆에 마이크로미터(㎛·100만분의1m)급의 미세한 가지 형태의 털들이 나 있는 걸 발견했대. 깃털들이 촘촘히 박혀 있기 때문에 이런 작은 가지 형태의 털들이 옆의 털들과 서로 맞물리면서 차가운 바닷물이 피부에 도달할 수 없게 만든다는 거야. 뿐만 아니라 공기층까지 만들어 외부의 차가운 공기가 닿지 못하게 하는 방한 효과까지 내는 거래. 과학자들은 우리 깃털의 원리를 이용해 방한·방수 효과를 가진 나노섬유를 개발하는 데 착수했대. 그 연구가 성공한다면 겨울용 외투를 만들기 위해 우리 먼 친척들(오리, 거위 등)의 털을 뽑을 필요가 없을 거야. 차가운 바닷물에서 작업할 때 입는 잠수복을 만들 때도 도움이 될 거고. 이렇게 자연현상이나 생명체의 기본 구조 등에서 영감을 얻어 공학적으로 응용하는 기술을 ‘생체모방공학’이라고 한다는군. 나일론도 비단을 모방한 섬유고, ‘찍찍이’라고 부르는 벨크로 테이프도 엉겅퀴 씨앗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제품이야.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는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는 방향으로 진화돼 왔어. 이런 생명체들의 모습을 공학적으로 응용한다면 새로운 기능의 소재나 시스템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생물이 지구에 남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를 동물원에서 흔하게 볼 수 있지만 사실 우리는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에서 규정한 멸종위기종이야. 내 작은 소망은 사람들이 다른 생물들과 함께 오래 살 수 있는 지구를 만드는 데 조금만 더 노력해 줬으면 좋겠다는 거야. 유용하 기자
368    땡!~ 나는 누구일까ㅠ?... 댓글:  조회:4702  추천:0  2016-03-15
나는 누구일까요? 나이는 140세. 별명은 ‘악마의 발명품’. 이렇게 불리는 친구들은 나 말고도 많이 있지만 원조는 바로 나야. 눈치 빠른 사람은 벌써 알아차렸겠지? 난 바로 ‘전화’야. 공식적으로 등록된 내 생일은 1876년 3월 7일이지. 나처럼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은 특허라는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정확히 태어난 날짜는 몰라.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1847~1922)과 엘리샤 그레이(1835~1901)가 서로 자신이 내 아버지라고 주장했지만 미국 특허청은 벨이 내 아버지라고 손을 들어 줬지. 특허청에 등록된 내 이름은 전화가 아닌 ‘개선된 전신기술’이야. 최초 전화기 광고. 진짜 황당한 일이 벌어진 건 내가 태어난 지 126년이 지난 뒤였어. 2002년 6월 미국 의회가 내 진짜 아버지는 벨이 아니라 이탈리아 발명가인 안토니오 메우치(1808~1889)라고 인정했다는 거야. 막장 드라마 같은 이야기지만 나를 지금처럼 성장시켜 준 게 ‘특허 도둑’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 벨 아저씨라는 사실. 그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벨이 나를 세상에 처음 소개했을 때 사람들은 쓸모없는 것을 만들었다고 뒷얘기들을 했지. 그 당시에는 전신이 이미 널리 쓰이고 있었기 때문에 전화는 그저 값비싼 장난감 정도로만 생각했던 거지. 그렇지만 내가 특허청에 등록된 지 불과 10년 지난 1886년에는 미국 내 15만 가구가 전화를 소유하게 됐어. 최첨단 전화기라고 할 수 있는 스마트폰을 보더라도 지난해 기준 전 세계인의 36%가 갖고 있다고 하잖아. 저개발 국가와 영유아들을 제외한다면 전 세계 성인 모두 스마트폰을 갖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 내가 사람의 목소리를 멀리까지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음성을 전류나 전파로 바꿔서 전달하고 전파를 다시 음성으로 바꿔 주는 변환 기술 덕분이야. 벨이 특허를 받은 전화는 전자석에 전류를 흘려 주면 자석의 성질을 갖게 된다는 원리를 이용한 자석식 전화야. 송화기에는 전자석과 얇은 철로 된 진동판이 있어서 여기에 대고 말을 하면 소리가 진동판을 흔들면서 유도전류를 만들지. 이 유도전류가 전선이나 전파를 타고 가서 수화기의 진동판을 움직여 소리로 재생시키는 거야. 스마트폰은 ‘손 안의 작은 컴퓨터’라고도 불리잖아. 스마트폰은 음성 전달이라는 고유한 기능보다는 메시지 전송, 음악 감상, 인터넷 검색 등 다른 기능으로 더 많이 쓰인다는 통계를 봤어. 심지어 나한테 중독된 사람들도 많아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지. 아무리 내가 좋다고 해도 하루에 한 시간만이라도 나보다는 사람을 만나고 책을 가까이하는 습관을 가지려고 노력해 보는 건 어떨까. 유용하 기자
367    소설 "시인 동주" 로 청년 윤동주의 삶과 문학 재조명 댓글:  조회:6500  추천:0  2016-03-14
시인 윤동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는 윤동주 관련 코너를 마련, 시집 이외에 소설·평전 등 15종을 판매, 한 출판사가 내놓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복각본에는 윤동주의 육필 원고철과 사진, 판결 관련 서류까지 들어 있다. ==================================================================================   최인수 소설. 작가는 실제 윤동주의 측근들을 인터뷰한 내용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해 소설을 완성했다. 젊은 동주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이상과 고뇌를 담은 이야기 속에 적절하게 삽입된 윤동주의 시는 작품의 효과를 높이고 흥미를 유발한다. -알라딘 책소개        초판본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 윤동주 ‘병원’   이 시는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0년에 쓴 시라고 합니다. 스물 서넛 무렵… 이 글을 읽고 계실 많은 연세인들과 비슷한 나이의 그는 우리가 머물고 있는 이 연세 울타리 안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생각했을까요? 암울하기만 했던 일제 강점기에 씌어진 윤동주 시인의 시들은 당시의 시대적인 아픔에 대한 이야기로 읽힐 수도 있지만, 그 서정성으로 인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로도 충분히 읽힐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시는 그래서 좋은 거잖아요, 읽는 사람에 따라 읽히는 상황에 따라 매번 다르게 다가오니까요… 시대의 아픔을 노래한 민족시인 윤동주, 중앙도서관 4층 인문사회 참고자료실에는 그의 시들과 그에 대한 비평을 모은 윤동주 시문학 컬렉션 코너가 신설되었습니다. 그의 시 안에서, 그리고 그 시를 읽는 내 안에서, 같은 공간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두 젊은이와 마주해 보기,ㅡ ===================================================================== 일제 식민 치하에서 시로 희망을 노래했던 윤동주 시인. 올해는 시인 윤동주 서거 70주년이다. 이런 시기에 마침 뜻깊은 책이 나왔으니, 『시인 동주』이다. 장편소설이라는 형식이긴 하지만, 소설에 담긴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뒀다. 글 | 손민규     정약용, 이덕무, 김옥균 등 조선의 인물을 써왔던 안소영 작가가 이번에는 국민 시인 윤동주를 선택했다. 장편소설 『시인 동주』는 윤동주 시인의 삶과 작품을 다룬 작품이다. 아무도 우리말로 시를 쓰려 하지 않았던 어두운 시대, 왜 그는 우리말을 고집했을까. 소설은 연희 전문학교에 입학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안소영 작가가 풀어내는 이야기를 따르다 보면 그 답을 찾아낼 수 있다.     그간 정약용, 박지원, 김옥균 등 조선 시대의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써 오셨는데요. 많은 인물 중에서 윤동주에 주목한 이유는 무엇인지요?     역사적 인물의 삶을 그리는 책을 쓰다 보니, 다루고 있는 시대가 점점 아래로 이어져 내려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첫 책 『책만 보는 바보』의 이덕무와 벗들은 18세기 후반의 사람들이고, 유배지의 다산 정약용과 그 가족이 보낸 삶은 19세기 전반의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과 벗들이 살다 간 시대는 19세기 후반이지요. 특히 세 번째 책 『갑신년의 세 친구』를 쓸 때 무척 힘들고 안타까웠습니다. 조선의 변화와 개혁을 열렬히 소망하던 젊은이들의 이상과 노력은 실패로 돌아가고, 끝내 조선은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목숨까지 걸고 헌신했던 젊은이들은 살아남은 뒤에 변절하여 일본의 주권 침탈에 적극 협력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리 낯설지 않은 모습이긴 하지만, 마음을 기울였던 주인공들의 변모에 당황스럽고 허탈하기도 했습니다. 젊은 시절의 열정과 헌신은 결국 ‘한때’에 불과한 것인지. 그다음 시대의 젊은이들의 모습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일제 강점기, 그 엄혹한 식민 통치 아래 어떻게 살아갔을까. 시인 윤동주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올랐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던 그 무렵, 여학생 시절의 어머니가 노트에 옮겨 놓은 시인의 시에 가슴 뭉클했던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 있어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라도 빼앗기고 우리말도 빼앗긴 그 시절에, 맑고 고운 인상의 청년 윤동주는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심정으로 살아갔을지,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이 작품은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고증도 꼼꼼히 하셨습니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그 경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집필하셨는지요?     역사 속에서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들을 그려보고자 할 때는, 사실에 철저히 근거해 있어야만 하는 책임감이 따릅니다. 일반적인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상상으로 창조해 낼 수는 없는 것이지요. 역사 속의 그들도 지금의 우리처럼, 당시의 사회 제도와 당대의 사건에 관심을 표하고 영향을 받기도 하며, 한 가족의 구성원이자 독립된 개인으로서 물질상의 풍요와 결핍 등에 따른 반응을 하고, 저마다 고유한 기질과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인물을 둘러싼 이러한 ‘사실’들을 가능한 샅샅이 살펴야 합니다. 살다 간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공부뿐 아니라, 그가 남긴 글과 편지, 그에 대한 주변 사람의 평가나 전해오는 기록 등을 보며 어떠한 성격과 기질을 지닌 사람이었을지 그려 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어느 정도 제가 그 인물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판단이 들 때, 비로소 상상을 덧붙여 생동감을 입히게 되지요. 이 책에서 한 예를 들자면, 동주가 교토 도시샤 대학으로 옮겨 영문학 수업을 듣는 장면이 있습니다. 분지라는 특성상 일교차가 큰 교토는 가을 단풍이 유달리 아름답습니다. 함께 영문학 수업을 듣던 여학생 급우 사와다 하루(澤田ハル)와 무라카미 마리코(村上萬里子)는 실존 인물로, 영어와 불어에 능숙하던 늙수그레한 동급생 윤동주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하고 함께 찍은 사진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영작문을 담당한 다키야마(?山) 교수는 도시샤 대학 시절의 학적부에도 나오고, 『로빈슨 크루소』를 쓴 대니얼 디포 전공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주변의 여러 ‘사실’들에 근거하여, 1942년 10월의 새 학기가 막 시작된 도시샤 대학 영문학 전공 강의실의 풍경을 그려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수많은 자료를 읽고 검토해 ‘사실’의 얼개를 세우는 것은 힘들기도 하지만, 그러한 과정을 거쳐 인물과 장면이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것은 정교한 퍼즐 조각을 맞추어 가는 것처럼 흥미롭기도 합니다. ‘사실’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때는 ‘상상’도 망설여지고 흔들리지만, 사실의 뼈대가 탄탄히 서고 나면 상상과 표현이 더욱 자유로워짐을 글을 쓰면서 느낄 때가 많습니다.     작가님께서 생각하시기에 윤동주 시인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누구나 느끼는 것이기도 하지만 ‘말하듯 쉬운 시’에 있지 않을까요? 윤동주의 시에는 어려운 개념어가 별로 없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리듬감이나 운율이 특별한 것도 아닌데, 눈으로 대하건 소리 내어 읽건 가만가만 뛰는 맥박처럼 마음을 두드리고 이내 편히 스며드는 시입니다. 윤동주의 시가 처음 다가오는 것은 대부분 사춘기 무렵일 것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갑자기 달라진 집안 형편에 몹시 어리둥절하고 근심스럽기도 한 때였습니다. 무언가 어지럽고 불안정한 마음에 실망스럽기도 한 사람들과 세상이지만, 그의 시를 읽다 보면 그래도 소중히 여기고 추구해 나갈 맑고 고운 세계가 있는 듯했습니다. 상한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위로해 주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시인과 동년배인 청년 시절에 볼 때는, 자신의 마음 어느 곳에서인가 들려오는 목소리처럼 더욱 공감이 됩니다. 더 나이가 들어 대할 때는 세상과 사물을 보는 시인의 깊은 눈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젊은 시절에 생을 마감한 시인이지만, 사색의 깊이와 깨달음이 삶의 긴 시간을 보낸 사람 못지않게 풍부하고 치열했기에 얻을 수 있는 눈길일 것입니다. 이처럼 윤동주의 시에는 그야말로 전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매력이 있습니다.     작품은 시인이 연희 전문학교에 입학하는 시점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건너뛰고, 대학생 시절을 시작점으로 하신 이유는 무엇인지요?     조선의 봄, 북간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청년 윤동주가 고국 땅에 와 처음 맞는 봄 햇살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의 가족을 비롯한 북간도의 수많은 동포들이 그리던 고국의 봄이기도 합니다. 1938년 3월 말, 윤동주와 송몽규가 전문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 경성역에 내렸을 때는, 바야흐로 봄기운이 조선 땅에 한창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3월이면 북간도는 아직도 한겨울일 테지만, 위도가 높고 낮은 것에서 오는 차이만은 아닐 것입니다. 총독부와 일본 경찰의 주재소가 들어서 있기는 해도, 흰옷 입은 동포들이 오가는 삶의 터전이며 아직은 조선말이 자유롭게 오가는 고국 땅인 것입니다. 그곳에서 새로운 배움을 일구어 가려 하는 청년 학생 동주의 벅찬 마음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윤동주는 저항 시인, 순수 시인 등의 이미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설에서는 시인의 어떤 면모를 부각하고 싶으셨는지요? 미리 염두에 둔 이미지가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윤동주라는 인물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그려 보고 싶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윤동주는, 시에서도 느껴지듯 맑고 여린 심성의 청년으로 알려져 있지요. 그런 평가에 대해 의문이 들긴 했어요. 윤동주가 전문학생으로서, 그리고 일본 유학생으로 보낸 시기는, 조선 민족의 완전한 해소와 강제 징용과 징병 등 일본의 식민통치의 횡포가 극에 달해 있던 때였습니다. 그러한 때 청소년기도 아닌 한창의 청년기를 보낸 젊은이가, 그것도 당시로서는 최고의 지성인이라 불리던 전문 학생이, 과연 맑고 여리기만 한 심성을 지니고 살아갈 수 있었을까?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가 보낸 시간들은 어떠했을까……. 시인의 삶에 다가가기 위해, 그가 남긴 시와 산문, 그에 관한 벗들의 회고와 기록을 꼼꼼히 살펴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진정으로 맑고 여린, 고운 사람이구나!’ 그런데 그 맑음은 흔히 생각하는 대로 어린 시절이나 소년기의 무구한 맑음이 아니었습니다. 거짓과 변절을 변명하고 옹호하는 말들이 어지러이 오가던 탁한 시대에, 지켜야 할 것을 꿋꿋이 지키고 간직해 나가는 지조의 ‘맑음’이었습니다. 그의 여린 마음은 상처받기 쉬운 나약함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는 가운데 일어나는 공감의 파동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심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현실과 동포들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문학의 본성과 사회의 현실, 순수와 저항 등 자칫 대립하기 쉬운 개념들이, 윤동주의 시와 삶에서는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작품 속에는 주인공인 윤동주 외에도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동갑내기 고종사촌 송몽규의 이야기가 인상적입니다. 윤동주의 벗들 중 가장 인상 깊은 인물이 있다면 누구일까요.     윤동주의 짧은 삶에서 송몽규와 함께한 시간은 뗄 수 없습니다. 송몽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해방 뒤에 가족이 모두 북쪽 고향으로 돌아가 그에 관한 기록들을 더 찾아볼 수 없어 안타깝기도 합니다. 윤동주에 관한 추모의 글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인데, 그를 회고하는 가족이나 벗, 후배들이 장년기를 넘어 노년으로 접어들던 무렵이었지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처럼 절절하고 그리운 심정을 담아 따뜻하고 세밀한 기억들을 펼쳐 놓는 것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의 가슴에 그러한 기억을 심어 놓은 윤동주의 성품과, 떠난 사람을 살뜰하게 그리워하는 남은 사람의 인품이 함께 돋보이는 회고들이었습니다. 특히 후배 정병욱 교수가 마음에 크게 와 닿았습니다. 고전문학을 전공하여 국문학 연구에 탁월한 업적을 남기고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지만, 스스로 한 일 중 가장 보람 있고 자랑스러운 일이 동주 형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린 것이라 했습니다. 전쟁과 분단으로 북간도의 가족과 헤어져 생소한 남쪽 땅에 홀로 남게 된 시인의 동생 윤일주와 누이동생의 결혼을 주선하여 한 가족이 된 사연은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그처럼 자상하고 세심한 마음은 생전의 윤동주도 인정하였고, 제자들이 펴낸 추모 문집에서도 그와 같은 인품이 느껴집니다. 흥이 오르면 고요히 날아오르는 학처럼 춤을 추고, 긴 시조 창을 읊던 멋진 스승이었다고 합니다. 70년대에 시국 관련 사건으로 제자들이 구속되었을 때는 눈물을 흘리고 구명을 위해 애쓰던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시인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한결같은 후배 정병욱 교수의 마음을 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정한 사귐은 죽음과 삶의 제약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 같습니다.     작품을 쓰기 위해 많은 자료를 검토하셨는데 그중 집필에 많은 도움이 되었거나 혹은 의외의 발견이라고 꼽을 만한 자료로는 무엇이 있었는지요.     1969년에 발행한 『연세대학교사』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1400페이지가 넘는 책인데, 방대한 자료를 정리해 학교사를 펴낸 것도 그러했지만, 1960년대에 나온 책인데도 인용 자료를 제외한 본문이 모두 가로쓰기에 한글 전용이라는 점에 놀랐습니다. 국학과 한글 연구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 온 학교의 역사가 그대로 담겨져 있는 듯했습니다. 『협력과 저항』을 비롯한 김재용 교수의 책들을 보며, 일제 말 지식인과 문인들의 의식 변화에 대해 새롭고 깊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 협력한 친일 행위는 드러난 결과로 평가할 것만이 아니라, 어떠한 의식상의 흐름으로 그렇게 귀결되어 갔는가에 대해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다시는 역사 속에서 같은 모습이 되풀이되지 않을 테니까요. 일본 문학을 전공한 왕신영 교수의 학위 논문 「윤동주와 일본의 지적 풍토」도 기억에 남습니다. 왕신영 교수는 학문 연구 과정에서 『(사진판) 윤동주 자필시고 전집』의 발간을 제안하고 참여한 분이기도 합니다. 1940년대의 지식 청년 윤동주의 독서와 지적인 탐구에 대해 사실적으로 생동감 있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억압받는 사람들과 연대하려는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사상의 흐름은 서양과 동양을 넘어, 식민과 피식민을 넘어, 윤동주와 같은 조선 지식 청년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윤동주와 연희전문의 벗들은 파시스트 전쟁에 반대하는 당시 세계 지성계의 흐름과, 스페인의 프랑코 독재 정권에 반대하여 국경을 초월한 국제여단을 조직해 달려갔던 세계 청년들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제국주의 국가의 통치에 맞서 일어난, 인도를 비롯한 식민지의 민중들의 저항 운동에 대한 소식도 일본의 진보적 잡지를 통해 접하고 있었습니다. 윤동주의 삶과 시를 아끼고 지금도 그의 흔적을 쫓고 있는 많은 일본인들이 있습니다. 고노에 에이치는 「윤동주, 그 죽음의 수수께끼」(『현대문학』 1980. 10)에서, 윤동주의 죽음의 원인이 잔혹한 생체실험에 있다고 근거를 대어가며 양심적으로 추론하였습니다. 이부키 고는, 일본 유학에서 옥사까지 시인의 흔적을 따라가며 「시대의 아침을 기다리며」(『문학사상』1985, 3-4월)라는 글을 기고했습니다. 이부키 고의 끈질긴 노력은 무척 놀라웠습니다. 윤동주의 재판 기록과 판결문을 발굴하였을 뿐 아니라, 그 기록에 나오는 시모가모 경찰서의 특고 형사와 기소 검사, 판결을 내린 판사들 중 생존자들을 찾아가, 수십 년 전의 조선 청년 윤동주 사건에 대해 다시 물었습니다. 일본의 치안유지법으로 수감된 조선 청년들은 한둘이 아니었기에, 대부분 윤동주와 송몽규를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 시절의 일을 다시 묻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고, 자신은 조선인에게 온정적이었다며 행적을 미화하는 사람도 있었고, 전시체제라 자신도 어쩔 수 없었지만 ‘치안유지법’은 잘못된 것이라며 인정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어쨌건 그처럼 끈질긴 추적을 하고,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라 할지라도 물어야 할 것을 다시 묻는 모습에 숙연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식민지 시절의 조선 지도층과 지식인들의 부끄러운 모습들, 뒤이은 전쟁과 분단으로 인한 수많은 희생, 그 후로도 계속되어 온 여러 부당한 일들에 대해 다시 질문하기는커녕 회피하고 덮어두기만 했던 여러 가슴 아픈 일들이 떠오르며, 부끄럽고 참담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시인의 시 중 작가님께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무엇인지요?     “누나의 얼굴은 해바라기 얼굴……”로 시작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가수 김민기의 낮은 목소리가 함께 떠오르는데, 윤동주가 연희전문에 입학할 무렵에 쓴 「해바라기 얼굴」이라는 시에 작곡가 김영동이 가락을 붙여 만든 노래입니다. 가락을 붙여 불러도, 가만 읊조려 보아도, 왠지 가슴이 아려오는 짧은 시입니다. 1930년대 말에 쳐진 어깨로 일터에서 돌아오는 조선 소녀들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시인의 마음과, 1970년대에 공장에 나가는 어린 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음악인의 마음이 긴 세월의 흐름과 관계없이 서로 소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윤동주의 시가 지닌, 시대와 세대를 아우르는 보편성이기도 합니다. 윤동주의 후배 정병욱의 호는 ‘백영(白影)’인데, 그가 따르던 동주 형의 시 「흰 그림자」에서 따온 것입니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그해에 도쿄에서 쓴 시이지요. “흰 그림자들 /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이라 되풀이하는 구절을 보면 마음이 아프기도 합니다. 고국에서 그려보던 것과 막상 일본으로 떠나와 부딪히는 현실은 다르고, 그 가운데 여러 가지 생각도 들었을 테지요. 그래도 한탄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고 마무리하는 시구가 윤동주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이 놓이기도 하고 안쓰러워 먹먹해지기도 합니다.     작가의 말에서, 시인이 죽은 지 7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다른 사람의 아픔을 돌아보지 않는 잔혹한 말들은 여전하다’고 쓰셨습니다. 윤동주의 삶이 현재의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윤동주의 삶을 그려 보겠다는 구상을 하던 초기에는, 이 책을 쓰는 과정이 사진 속 시인의 표정처럼, 그리고 그가 남긴 시처럼 맑고 고요하고 잔잔하리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무덤덤하게만 대했던 여러 가지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와 놀라기도 했고, 그간의 둔감함이 부끄러워 새삼 앓기도 했습니다. 몹시 고통스럽고 힘이 들었습니다. 이제까지의 역사 인식에 격렬한 소용돌이가 이는 듯했습니다. 망각과 외면은 가슴 아픈 식민지 시절을 겪어왔던 윗세대만의 일이 아니라 그다음 세대인 우리 삶에도 깊숙이 배어 있는 것 같습니다. ‘국민학교’에 다니던 70년대, 대통령의 사진과 국기가 걸려 있는 교실에서 국민교육헌장과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워야만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국기 게양과 하강의 사이렌 소리가 들리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부동자세로 지켜보아야 했고, 어머니는 매달 빠지지 않고 반상회에 참석해야만 했습니다. 그러한 일들이 군사 정부의 획일적인 통치 방식이라고만 여겼는데, 윤동주가 살아간 식민지 시절과 다르지 않았다는 것에 깜짝 놀랐습니다. 일장기에서 태극기로, 천황의 사진에서 대통령의 사진으로 바뀌었을 따름입니다. 윤동주의 시대를 함께 보낸 저명한 인물과 문인들에 대한 정보를 찾다가, 변절과 친일 협력으로 시인을 실망시켰던 이들이 해방된 뒤에도 학계와 언론과 문화계에서 여전한 명성과 지위를 누리며 살아갔다는 사실에 씁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지난날 자신의 부끄러운 행적에 대해 고백하고 참회한 자취는 어디에도 없는데 말입니다. 윤동주의 삶과 시를 다시 돌아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을 부끄러워 할 줄도 모르는 채 덤덤히 보내 온 우리의 역사와 일그러진 양심을 다시 돌아보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윤동주의 시와 삶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양심과 진실을 바로잡아 찾아가는 과정에서 바로미터와 같다고나 할까요? 비단 과거의 일만이 아닙니다. 지난봄에 꽃 같은 아이들의 목숨을 그렇게 잃은 것도 참담한데, 그 뒤에 오간, 그리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말들은 더욱 참혹하기만 합니다. ‘참 파렴치하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돌아가신 박완서 선생이 쓰신, 『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알건만』이라는 제목의 소설이 있지요. 지금 내뱉고 있는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해관계에 따라, 자신이 속한 집단이 논리에 따라, 혹은 귀찮아 회피하고 싶은 마음에서, 거짓을 묵인하고 그에 편승합니다. 그러한 파렴치함의 근원은, 윤동주가 살다 간 그 시대에 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선일체’는 일본 천황이 베푼 시혜적 조치가 아님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천황의 은혜에 감읍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조선 청년들의 목숨을 바칠 어떠한 이유도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죽음의 전쟁터로 나갈 것을 독려하였습니다. 식민 통치를 하던 일본은 물러났으나, 그에 협력하던 이들은 지난날의 잘못에 대해 한마디의 사죄도 하지 않았습니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변명을 넘어, ‘그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는 파렴치한 말까지 버젓이 고개를 들게 되었습니다. 민족을 모욕하고 진실을 호도하던 그 시절이, 상처 입은 이들을 모욕하고 선한 마음과 진실을 조롱하는 지금의 시간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윤동주는 다른 사람의 아픔에 유달리 민감한 심성을 지녔던 청년이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것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는 감성에서 비롯됩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돌아보며 함께 아파하는, 그리고 그 해결에 동참하려는 연민과 공감의 마음인 것입니다.     조금 이른 질문이지만 다음 작품에 대한 계획을 여쭙겠습니다.   『시인 동주』에서 시인의 삶과 시대에 너무 깊게 이입해서인지 아직은 뚜렷이 작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해 오던 것처럼 시대를 이어내려 가기에는 전쟁과 분단이라는 거대한 산맥이 놓여 있기도 합니다. 그간 다양한 시대를 살다 간 여러 인물을 그려보면서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어느 시대이건 어느 곳에서건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비슷하고, 여러 가지 주어진 상황에서 느끼고 생각하며 반응하는 사람들의 사유는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질문하신 것처럼 낡은 통념이나 질서에 타협하지 않고 선하고 열정적인 청년들은 늘 존재하는 법이지요. 앞으로의 시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어느 시대이건 그러한 인물을 또 만나고 싶습니다. ========================================================== '희망'이라는 두 글자는 정녕 절망의 밑바닥에 닿고서야 비로소 떠오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지금은 더 깊이, 더 정직하게, 더 깨끗하게 절망해야 할 때인가.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70년 전, 무명의 젊은 시인도 그랬나 보다. 전쟁의 광기에 휩싸인 야만의 시대, 시인은 절망의 폐허 위에서 담담하게 '십자가'의 길을 노래했다. 그는 "고통 받는 사람들의 눈물이 마를 줄 모르는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마주 대하게 되는 그 길이 자신 앞에 높인다 해도, 저물어가는 노을 따라 조용히 걸어갈 수 있을 것"(본문 173쪽 중에서)이라고 생각했다. 십자가 쫓아오던 햇빛인데 / 지금 교회당 꼭대기 /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 처럼 /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축소 ▲ 표지(안소영 지음 / 창비 펴냄 / 2015.03 / 1만3800원) ⓒ 창비 작가 안소영은 소설 에서 청년 윤동주의 삶과 문학을 재조명한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한국 사람이라면 의 한 구절 정도는 쉽게 외울 정도로 친숙한 시인이지만, '저항시인'으로 일제 감옥에서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 말고는 별로 알려진 게 없다. 작가는 치밀한 고증을 통해 윤동주의 삶을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그려낸다. 식민지 청년으로서 시인의 내적갈등과 고뇌가 시에 어떻게 투영되었는가를 읽다 보면, 결국 '글이란 글쓴이의 삶으로 평가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윤동주가 청년 문학도로 살아가던 시기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일제의 패망이 점점 다가오던 시기였다. 전쟁이 극에 달할수록 식민지 조선에 대한 폭압과 수탈, 전시 강제 동원은 더 악랄해져갔다. 이광수·최남선 같은 이름 있는 문인들이 전쟁을 찬양하고, 총독부의 시책을 선전하며, '내선일체'를 부르짖는 일제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윤동주와 벗들은 '문학의 사명이란 무엇인가', '시는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해 고뇌했다. 시인은 "잘못된 전쟁을 지지하고 동포들의 고달픈 삶을 외면하는 것이 문학의 길이라면 가지 않겠다"며 "감투와 명성을 탐하고 궤변으로 자신의 행동을 미화하는 자들이 문인이라면 되지 않으리라"고(본문 127쪽 중에서) 다짐한다. 그는 라는 작품에서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줄 시를 적어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맑고 고운 시를 노래한다. 문학마저 야만과 반역의 나팔수가 되어 버린 때, 일본어가 아닌 우리말로 시를 쓴다는 것은 "목숨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윤동주는 그저 담담하게 쓰고 또 썼다. "동주의 사색과 감성, 마르지 않고 우러나오는 시상을 표현하는 데 우리말만한 도구가 없었다. 마음속에 담아 놓은 생각과 입에서 맴돌기만 하는 표현이 하나의 시어를 만나 떠오를 때는, 가슴이 찌르르해지고 눈물이 핑 돌 만큼 좋았다. 전쟁과 죽음과 파괴로만 달려가는 이 삭막하고도 불안한 시대에, 무언가 움터 오는 게 있다는 사실이 벅차기도 했다. 돌담이나 아스팔트 바닥을 비집고 솟아나온, 연둣빛 고운 생명 같은 시였다." - 본문 245쪽 중에서 1943년 7월, 일본 유학 도중 '내선계 요시찰인'으로 감시를 받아오던 윤동주는 절친한 벗이자 친척이기도 한 송몽규와 함께 일본 경찰에 연행된다. 이른바 '재(在) 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이다. 모진 매질과 고문은 견딜 만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우리말로 쓰인 윤동주의 시작 노트와 일기장을 강제로 일본어로 번역하게 했다. 고문 경찰이 지켜보는 앞에서 우리말로 쓰인 시를 일본어로 바꾸는 작업은 창자를 다 끄집어내는 것처럼 견디기 힘들었다. 시인은 시를 빼앗겼다. 1944년 2월, 윤동주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됐다. 이곳에서 윤동주는 전쟁포로나 죄수들을 상대로 한 '생체실험' 대상이 되어 참혹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1945년 3월,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지 만 27년 2개월. 시인의 생명은 차가운 일본의 감옥에서 그렇게 꺼졌다. 윤동주 이후 70년, 무엇이 달라졌을까? 축 ▲ 독립운동가 시인 윤동주 마침내 해방이 왔다. 일제 식민지에서는 벗어났지만 세상은 그다지 바뀌지 않았다. 그럴수록 안타까운 생을 마감한 시인에 대한 그리움은 커져 갔다. 1948년 1월, 윤동주의 벗들은 시인의 유고 시집 를 출간했다. 생애 첫 번째 시집이 유고 시집이 된 셈이다. 윤동주는 생전에 등단하지 못한 '문학도'에 불과했지만, 사후에 알려진 그의 시는 많은 이들의 가슴에 커다란 울림을 남았다. 암흑의 시대, 묵묵히 우리말로 우리의 시를 써 온 청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자부심과 위안이 되었다. 시인 정지용은 유고 시집 서문에 이렇게 썼다. "일제 헌병들은 동(冬) 섣달에도 꽃과 같은, 얼음 아래 한 마리 잉어와 같은 조선 청년을 죽이고 제 나라를 망치었다. 일제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뱉을 것뿐이나, 무명의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 시인 정지용, , 314쪽 중에서 시인이 떠난 지 70년, 우리 시대는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일제로부터의 독립이 곧 완전한 해방은 아니었다. 21세기가 된 지금도 여전히 악은 거대하고, 고통 받는 이들의 힘은 약하다. 거짓이 진실을 호도하고 야만이 인간의 탈을 쓴 채 우리를 기만할 때, 다시 윤동주를 읽는다. 끝없이 빠져드는 절망의 웅덩이 속에서도 순정한 시 한편 길어 올리던 그의 담담하지만 강한 정신세계에 대해 생각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행복이란 무엇이가, 더불어 행복한 삶을 어떻게 누릴 것인가. 자신의 삶에서 다 풀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 혹은 다음 세대에게 넘겨준다. 이 세상에 사유하는 인간이 스러지지 않고 남아있는 한,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시대를 이어가며, 좀 더 많은 사람들을 거쳐 가며, 더욱 깊어지고 풍부해질 것이다. 남의 것을 빼앗고, 남의 나라도 빼앗고, 사람이 사람을 차별하고 모욕하는, 심지어 다른 사람의 자유와 생명마저 빼앗아버리는 야만의 시대라 해도." - 본문 253쪽 중에서
366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삶의 자세가 바르다 댓글:  조회:5141  추천:0  2016-03-12
한국인의 호(號) 와 멋                                    남 홍 진 생명보다 소중한 이름 우리 한국 사람은 예로부터 이름 석자를 생명처럼 소중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姓을 갈 놈'이란 욕이 가장 치욕적인 욕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도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속성에서 비롯된 격언이다. 한때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우리의 이름을 총칼로 바꾸려다 민족감정을 크게 자극시켰다. 그때 창씨 개명을 시도한 후유증이 아직도 배일 감정의 한 원인으로 남아 있다. 물론 일본 사람들은 이름을 지을 때 조상의 뿌리를 중시하지 않는 그들 나름의 풍속을 기준으로 우리 한국 사람의 성과 이름을 뜯어고칠 수 있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금강산에 가보았더니 거기에도 이름을 중시하는 우리 겨레의 속성을 볼 수 있었다. 금강산의 자연은 그런데로 잘 보존(보호) 되어 있었다. 그런데 특정인의 이름을 새기느냐고 자연을 훼손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김일성의 이름을 영구히 돋보이기 위해 명산의 절경을 훼손했는가 하면 그의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과 아내 김성애와 아들 김정일의 이름을 길리 이현(以顯)하기 위해 바위를 마구 훼손한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외에도 '한글'을 사용하지 못하던 왜정시대에 우리 선배들이 남긴 낙서도 많이 볼 수 있었다. 구룡폭포를 향해 올라가는 계곡의 손닿는 바위마다 한문(漢文)으로 새겨 놓은 수많은 이름을 볼 수 있었다. 역시 어느 시대에나 자기 이름을 세상에 길이 드러내고 싶어하는 우리 감정의 단면을 실감할 수 있었다. 대체로 우리 한국인의 이름은 족보에서 비롯된다. 어느 집안이나 이름을 지울 때는 학렬에 따라 金 水 木 土의 순서로 짖는 것이 통례이다. 그래서 성과 이름 석자만 대면 금세 뉘집 자손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때로는 이름 석자로 그 집안의 오랜 내력까지도 집어 볼 수 있는 것이 우리 이름의 유래이다.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것만큼 이름을 지을 때는 인생의 哲學 敎訓 座右銘 人生觀등 자기 도야(陶冶)의 뜻이 내포 되어있다. 그래서 한국인의 이름에는 나름의 철학이 담겨 있는 것이 특색이다. 그러나 사람의 이름뿐만 아니라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반드시 이름과 유래가 따른다. 가령 임금님이 나들이 나갔다가 칼(刀)을 씻었다 해서 '세검정(洗劍亭)'이란 지명이 생겼는가 하면, 홍수가 낫을 때 범람하는 물결에 밀린 배가 닿았다 해서 '배다리' 또는 화살이 꽂혔다 해서 '살 꽃이 다리' 또는 폭포에서 광대가 제주를 부렸다해서 '才人瀑布'라는 이름이 생긴 것처럼 존재하는 것에는 이름이 있고 그 이름 뒤에는 유래와 동시에 이름에 걸맞은 실상이 있다. (이) 명성(名聲) 과 호(號) 그런데 우리 한국사람은 예로부터 이름 석자를 함자(銜字)라고 했다. 웃어른의 이름을 물을 때는 반드시 '함자(銜字)가 무엇이냐? 또는 존함(尊啣)이 무엇이냐? 고 해야지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실례이다. 그러나 함자도 함부로 부르는 것이 경망스럽다하여 호(號)를 만들어 이름을 대신 했다. 명성을 떨치는 사람일수록 여러 개의 다양한 호를 사용했다. 함자와 호 외에도 아호(雅號)와 관명(冠名)이 따로 있었고, 그것도 부족해서 자(字)를 만들어 사용했는가 하면 죽은 후에는 시호(諡號)를 사용했다. 그 중에 사용하기 편리한 호는 한 사람이 여러 개를 동시에 사용했다. 그래서 학자들의 경우 같은 시기에 만든 작품에도 때와 장소에 따라 서로 다른 호로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우리 겨레가 이름을 얼마나 숭상했는가는 옛 날 분들의 號를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고려의 문신이었던 이제현(李齊賢)은 익제(益齊) 약옹(藥翁)이란 두 가지 호 외에 아명(雅名)이 따로 있었다. 그리고 조선조의 거유(巨儒) 이황(李滉)도 퇴계(退溪) 도산(陶山)이란 호를 사용했고, 이이(李珥)도 율곡(栗谷) 석담(石潭) 등 여러 개의 호를 사용했다. 선조 시대의 대 정치인이었던 이항복(李恒福)은 백사(白沙) 필운(弼雲) 동강(東崗) 등 여러 개의 호를 사용했다. 순조(純祖)때의 명필이었던 김정희(金正喜)는 완당(阮堂) 추사(秋史) 과노(果老) 등 수십 개의 호를 동시에 사용했다. 그러면 우리 조상들은 왜 이렇게 여러 가지 이름을 덧붙여 번거롭게 했을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로서는 쉽게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사람은 누구나 입신양명을 통해 자기의 이름이 길이 기억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되도록 이면 이름을 멋지게 지으려 했다. 깊은 뜻이 담긴 철학과 운이 따르는 이름을 즐겨 사용했다. 물론 서양사람들에게도 애칭이나 별명이 있었다. 특히 존경하는 조상의 이름을 본따 1세 2세 3세라고 짖은 것은 우리와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사실 이름을 생명보다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얻어지는 장점도 많다. 우리 사회에서 물질을 도둑을 맞았을 때 마음의 상처를 입고 자살하는 경우는 없지만 이름을 더럽혔을 때는 자살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이름의 가치를 높이 생각한다. 가령 로마 제국의 총독이었던 빌라도가 자기의 이름을 생명처럼 생각했다면 예수에 대한 재판을 그렇게 무책임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오늘날 그의 이름이 기독교 신도들의 입에 매일 오르내리지는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완용(李完用)이도 자기 이름을 생명처럼 여겼다면 영원히 매국노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호는 고사하고 이름 석자를 활자화시켜 보지 못한 채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 이름에 대한 회의를 한 번쯤 느껴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때로는 자기의 이름과 운명을 결부시켜 '왜 하필 내 이름은 이렇게 지었을까' 한 번쯤 자기 이름을 바꾸어 보고 싶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사실 현행 법률이 이름을 함부로 바꿀 수 없도록 되어 있으니까 망정이지 만일 쉽게 바꿀 수만 있었다면 일생 동안 자기 이름을 한 번쯤 바꾸려 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러나 조상이 지어준 이름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그런데로 살아가노라면 좋건 싫건 자기 이름에 정이 들고 주변에서 그렇게 알아주기 때문에 바꾸고 싶었던 감정을 덮어 버리게 되는 것이 또한 인개상정(人皆常情)이다. (삼) 그러나 아직도 이름 석자에 마치 자기의 운명, 즉 사주팔자가 좌우된다고 생각하는 풍조야말로 생명보다 소중한 이름에 대한 경멸이다. 이름이 좋아야 입신 양명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자기 능력을 포기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좋은 이름을 짖기 위해 작명소를 드나드는 사람들이 있는 한 이름과 운명론은 쉽게 가시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런 생각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에게 만일 이름을 쉽게 바꿀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면 우리의 이름은 계절 따라 바뀔지도 모른다. 사실 작명소를 찾아가 이름을 짖는 것은 자기 이름을 짖는 것이 아니라 작명인의 이름을 사는 것이다. 왜냐 하면 그 이름은 작명자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이름이 인생의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삶의 자세가 인생의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아무튼 우리의 이름은 집안 유래(학렬)에도 따라야 하지만 우선 부르기 쉽고 쓰기 쉽고 의미도 우리 감정에 젖어야 한다. 가능한 시대적 감정에도 어울려야 한다. 예를 들면 배신자(裵信子)라는 이름은 아무리 의미가 좋아도 부를 때의 어감이 좋지 않다. 그러나 한국인(韓國人)이란 이름은 동양 권에서 그만큼 책임이 따를 것이다. 우리의 이름이 족보에 따라 명명되던 시대에도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편리하게 드러낸 것이 바로 號이다. 우리 조상들이 즐겨 사용한 號야 말로 경색된 삶을 순화 시켜주는 양념이다. 스스럼없이 號를 사용함으로서 삶을 한결 부드럽고 윤기 있게 구현하게 된다. 때로는 똑같은 작품에도 號를 사용함으로서 작품의 분위기를 살려주는 경우도 많다. 특히 나이가 들어 슬하에 자손이 많다거나 사회적 책임이 따르는 사람일수록 이름보다 호를 사용하는 것이 더 운치가 있고 친근감을 주고, 때로는 품격과 풍류 적인 여유도 느낄 수 있다. 돌이켜 보면 우리 겨레의 선이 굵은 족적(足炙)을 남긴 분들 치고 호를 사용하지 않은 분들이 없다. 그 중에도 김구 선생의 白凡이란 호는 음미할수록 감명이 깊다. 물론 그분이었기에 백범이란 호가 돋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호는 부를수록 정겹지만 별명은 부를수록 실례라는 사실이다.
365    "20세기의 신화"는 신화에 신화를 낳다... 댓글:  조회:5020  추천:0  2016-03-12
    한 지성인의 책임감과 용기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를 평함 최 삼 룡 1. 들어가는 말 김학철의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아래에서 「신화」라고 약칭함)처럼 난산이고 말썽이 많고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또 작자에게 거의 치명적인 화를 가져다준 작품은 고금중에 극히 희소한 것으로 안다. 지난 세기의 60년대 초에 탈고된 작품이 '문화대혁명' 중에 원고채로 반란파들에게 납치되고 사법부분에 기소되어 작자더러 10년 도형을 언도받게 하고, 또 만기 석방되었으나 3년간 여야 낙착이 돼서 '원 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한다'는 결론을 받게 하였으나 계속법원 캐비닛속에 갇혀있다가 7년후인 1987년 8월에야 비로소 '발표불허'라는 조건부로 작자에게 돌려진 원고, 그러다가 또 10년 세월에 거의 홀로 1996년 탈고되어 31년만에 출판된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 그러나 「신화」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다. 첫째, 「신화」는 작자에게 10년 징역살이라는 화를 가져다주었다. 둘째, 작자에게 10년 징역살이를 가져다준 「신화」는 31년만에야 출판되었다. 셋째, 탈고되어 31년만에 겨우 출간된 「신화」는 외국에서 출판되었다. 이 몇 가지 사실에 내포되어 있는 문제들은 똑똑히 해명하기 아주 어려운 것으로 필자로서는 명확히 해결할 자신이 없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김학철의 머리속에서 구상하기 시작하여서부터 정식으로 출판하기까지 「신화」의 운명에 결정적인 작용을 논 변수는 여러가지인데 여기서 우리는 창조주체로서 작가 김학철의 체질, 인격, 가치관 및 문학이념을 보아야 하며, 또 이 작품이 온양되어서부터 출판되기까지 30여 년의 사회적, 정치적, 여건의 변화와 인간의 생존환경, 인문환경의 변화를 보아야 하며 그리고 주관적 객관적 제요인에 의하여 형성되고 변화된 김학철과 김학철이 포함되어 있는 민족공동체의 정신실존 내지 문화심태에 대하여 보아야 한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명이 없이는 앞에서 제기한 「신화」에 대한 세 가지 사실을 옳게 분석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다. 게다가, 중국조선족중에 아직까지 「신화」를 읽어본 독자가 몇 안된다는 사정까지 고려한다면 「신화」에 대한 평론이나 연구는 아직 시기상조라는 느낌도 없지않다. 그렇지만 「신화」가 원고상태로가 아니라 책으로 세상에 태어난지도 어언 4년이란 세월이 흘러가는 시점에서 나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구에 의하여서라도 이 작업은 꼭 해야 하는 작업이라는 생각으로부터 출발하여 이 평론글의 집필과 발표를 작심했다. 2. '당나귀 귀만큼 큰 임금님의 귀'로부터 말해본다. 조선 구전설화중에는 '당나귀 귀만큼 큰 임금의 귀'라는 민담이 있는데 그 줄거리는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옛날 어느 나라에서 당나귀 귀만큼 큰 귀를 가진 임금이 있었는데 이를 부끄럽게 여겨 언제나 건을 쓰고 있어서 신하나 궁녀는 물론 왕비까지도 이 비밀을 몰랐다. 그러나 임금의 상투를 짜는 이발사는 속일 수 없었다. 임금은 자기의 비밀을 세상에 퍼뜨릴까봐 염려하여 하나 또 하나의 이발사를 죽여버렸다. 한 이발사가 또 죽게 되었는데 죽기전에 홀로 계시는 어머니를 보고 와서 죽게해달라 간청하여 임금이 허락하였다. 집으로 가는 길에서 그 이발사는 너무도 크고 신기하고 야릇한 임금의 귀를 생각하고 가만있자니 좀이 쑤셔서 길가의 참대숲에 들어가서 '임금의 귀는 당나귀 귀만 하더라' 라고 소리쳤더니 그 소리가 산울림이 되어 온 세상에 퍼졌다고 한다. 김학철의 문제작 「신화」를 읽는 나의 머리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이 민담, 그 중에서도 죽기 전에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그 이발사의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비장하기도 한 모습이였다. 임금의 한 진실을 알게 된 이발사는 진실을 말할 수 없기에 양심의 가책을 받았고 죽음보다는 더 무거운 오뇌와 번민을 겪었으며 죽더라도 진실을 말하고 죽어야 한다는 강렬한 욕구와 책임감을 느꼈으며 나중에는 세상에 향하여 하나의 진실을 증언하고야 만다. 이미 운명적으로 죽게 된 그 이발사의 거동은 그 어떤 조건부가 없고 남에게서 돈을 받거나 상을 타기 위한 것이 아니였다. 오히려 아주 자연스럽게 생명을 내걸고 모험적으로 하였다. 이제 금방 죽어야 할 처지가 아니라고 해도 그 이발사는 그렇게 하였을 것이며 가능하다면 돈을 내거나 생명을 바쳐서라도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작가 김학철이가 바로 20세기의 중국조선족 '이발사'다. 세상에 하나의 진실을 증언하기 위하여 어떤 방법이나 수단이든지 가리지않으며 배설하지 않고서는 좀이 쑤시고 중병에 걸릴 지경이어서 모험적으로 「신화」의 창작에 달라붙었던 것이다. ꡒ당나귀 귀만큼 큰 임금의 귀ꡓ의 그 이발사의 책임감과 용기는 곧 김학철의 책임감과 용기이다. 물론 작가 김학철은 ꡐ이발사ꡑ가 아니며 「신화」의 창작은 ꡐ이발사ꡑ가 참대숲에 들어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듯 그렇게 쉬울수 없다. 하기에 「신화」에 대한 연구는 창조주체로서 작자 김학철의 거의 전부의 인생기억과 경력 그리고 김학철이 산 사회의 제 여건과 시대특점의 방방면면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특히 김학철의 생존과 정신존재에 결정적인 작용을 일으킨 중국의 정치문화의 흐름에 대하여 외면해서는 안된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지난 세기 중국의 정치생활에서 제일 큰 사변은 1949년의 승리 즉 새 중국의 탄생이다. 1949년의 승리는 모택동 사상 즉 맑스-레닌주의론과 중국혁명실천의 통일체로서의 모택동사상이 만민이 믿고 온 세상이 우르러보는 사회 통치의식으로 되고 국가의 지도사상으로 되게 히였다. 이로부터 모택동 사상을 선전하고 해석하고 학습하는 것은 중국대륙의 6억 5천만(50년대 중기) 인민들의 사상주제로 되었다. 이에 대하여 어떤 석학들은 모택동 사상만 있으면 수억의 사람들은 사상이 필요없게 되었다고 풍자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 「신화」에서 김학철이가 말한 것처럼 ꡒ정치적 아편인 개인숭배체제가 인민을 우롱해 코뚜레를 잡고 마구 끌고다니기에는 아주 십상이었다. 6억 창생이 혁명을 위하여 자신들의 두뇌의 사용권을 전부 위대하신 키잡이 모택동 폐하께 위탁한 까닭에 그리고 자신들의 팔다리만 부지런히 놀리기를 계약을 체결한 까닭에 모택동시대의 중국은 흡사 대가리가 하나뿐인데 발이 수십억 개나 달린 무슨 거대한 그리마 같은 괴물이 되어버렸다.ꡓ1) 장기적인 혁명투쟁속에서 단련된 투사로서의 경험과 지성인으로서의 량지로부터 출발하여 김학철은 사실 반우파투쟁이 전개되기 전에 이미 당의 문학예술시책, 아니 우리의 정치생활의 어느 구석이 잘못되여간다는 것을 보아냈었다. 우리는 「괴상한 휴가」 등 작품을 통하여 이것을 증명할 수 있다. 당의 정치, 경제, 문화 등 제반 시책에서 좌적인 경향은 끝내 1957년의 반우파투쟁의 확대화를 초래하였으며 마침내 김학철이도 전국의 55만 2천 8백 77명 ꡐ반당반사회주의 악당ꡑ들과 함께 ꡐ우파분자ꡑ로 되고 작가대오에서 쫓겨나고 강제로동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장장 24년이라는 김학철의 동굴인생이 시작되는 것이다. 김학철은 처음에는 생활비 50원씩 받으면서 ꡒ날마다 시내에서 10여리 떨어진 구일본군 비행장으로 철광석을 깨러다녔다.ꡓ2) 후에는 ꡒ여느 ꡐ우파분자ꡑ들은 다 세린하강제수용소로 끌려갔으나 신체적인 결함 때문에 작가협회에 떨어져서 도서실을 맡아보게 됐다.ꡓ3) 이런 엄연한 현실앞에서 ꡒ공산당의 지시라면 뭐나 다 천지신명의 계시로 알고 무조건적으로 받들어모시는데 습관이 됐던ꡓ ꡒ당이 시키는데로만 하면 틀림없다-이 구호가 몸에 죽 베버린ꡓ 김학철이였지만 ꡒ드디여 우상숭배의 미몽에서 깨여나기 시작하였다. 개인숭배와 결혈을 하게 된 것이다… 양심이 공포심을 이겨낸 것이다.ꡓ4) 여덟살 먹은 외아들마저 ꡐ반동분자의 자식ꡑ이라고 붉은 넥타이를 회수당하였을 때 그의 ꡒ가슴속에는 그 무엇이 마치 구들장이라도 꺼지듯이 꺼져 내려 앉았다. 이게 그래 계급투쟁이란 말인가? 이게 바로 프로레타리아 독재라는 건가?ꡓ 김학철의 무성의 부르짖음은 마침내 분출구를 찾게 되었는데 그것이 곧 장편소설 「신화」이다.5) ꡒ사람잡이 운동의 발광적인 회오리바람이 온 나라를 휘몰아칠 때ꡓ 그는 ꡒ도저히 침묵을 지키고 명철보신을 할 수가 없었다. 참을 줄이 끊어졌던 것이다. 양심이 허락하지를 않았던 것이다ꡓ6) ꡒ이것이야말로 100만대 1이라는 절대적인 열세에 처하여가지고도 감히 자기의 옮음을 주장할 수 있는 무비의 용기가 수요되는 일이였다.ꡓ7) 알 수 있는 바 「신화」는 바로 김학철의 전부의 생명과 정신실존, 신념과 예지, 독립인격과 비판이성의 결정으로 세상에 창출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신화」의 작자로서 김학철은 그 이발사일 뿐만 아니라 실천하는 현대 지성인이였다. 3. ꡐ벌거벗은 임금ꡑ을 ꡐ벗었다ꡑ고 말하기 힘들기 35년전에 탈고된 「신화」를 지금 읽어보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우리의 생활과 문학도 엄청 변하였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한마디로 개괄하면 우리는 지금 「신화」가 비밀리에 창작되던 시대에 비하여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고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화」에서 계시하고 묘술한 많은 정치문제, 사회문제, 문학문제들이 해결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성인에 대한 시책이 변화되었고 문학예술에 대한 지도사상이 변화되었고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도 변화되였고 지난 세기 50년대 중기로부터 우리의 생활을 지배해오던 좌적인 시책이 규정되였으며 ꡐ반우파투쟁의 확대화ꡑ, ꡐ반우경주의운동ꡑ, ꡐ무산계급문화대혁명ꡑ 중에서 생긴 수많은 억울한 안건들이 해결되었다. 이 와중에서 김학철도 무죄를 선고받게 되고 「신화」의 원고도 찾게 되고 당적도 회복하게 되고 노혁명가로서의 정치우대와 물질대우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신화」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도 께끗하게 끝이 나고 인제는 한편의 문학작품으로서의 「신화」, 한 개의 문학현상으로서의 「신화」의 운명에 대한 연구가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진지하게 전개될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바로 세상일인 것 같다. 1996년 11월에 집필한 졸문 ꡐ김학철의 전신발전궤적이 주는 계시ꡑ8)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신화」는 김학철로 하여금 10년 도형을 받게하고 옥고가 끝난 다음 몇년 뒤에 다시 무죄를 판결받게 한 작품이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것이지만 구경 어떤 작품인가는 전문을 읽어보지 못한 필자로서는 알 길이 없다. 이렇게 쓰고서 「최후의 분대장」의 360쪽의 김학철의 자아소개를 인용하고 또 다음과 같이 썼다. 「신화」는 24년의 정치박해가 김학철의 신념을 꺽지 못했으며 의지를 쇠퇴시키지 못했으며 천성적인 성실성으로 구축된 정신세계를 허물어놓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하여 도리어 그의 신념을 더 건강하게 하고 비판이성을 성숙시키고 홀로서기를 더 완성시키고 자기의 문학풍격을 되찾게 하였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 후 1998년 필자의 평론집 『격변기의 문학선택』을 묶을 때 이 졸문도 수록하였는데 출판사측에서 바로 내가 인용한 김학철의 「신화」를 읽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대목을 삭제해버렸다. 이 한가지 사실을 통하여 나는 피부로써 「신화」에 대한 이야기는 금방 시작에 불과하고 앞으로 오랜 세월 지속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또 다음과 같은 사실이 있다. 1997년 봄 영국에 있는 한 음악가의 성의에 의하여 나는 「신화」란책을 얻을 수 있었다. 한번 읽어본 나는 아주 흥분되어 졸문 「김학철의 문학을 본보기로 민족정신의 횃불을 추겨들자」9)에 다음과 같이 쓴바 있다. 요즈음 나는 큰 흥분속에서 김학철로 하여금 10년 옥고를 치르게 하 문제의 소설 「20세기의 신화」를 읽고 있다. 중국에서 아직 판권을 가지지 못한 책을 구경 어떻게 읽겠는가는 사람마다 견해가 제나름이겠지만 나로서는 이 책을 통하여 김학철의 문학과 인격과 량지에 대하여 전에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문제들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되었으며 전에 한번 생각해봤던 것일지라도 다시 새롭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60년대 초라는 시대적 여건에서 중국의 다른 누가 감히 좌경노선과 좌경노선에서 파생된 제시책에 대하여 김학철처럼 비판이성의 횃불을 추겨들 수 있었던가? 곽말약? 파금? 모순? 모두 하지 못한 것을 김학철이 해낸 것이다. 이것은 사실 「신화」를 읽고 하고싶은 나의 말의 10분의 1도 안되는것이였지만 여러 방면에서 오는 여러 가지 압력을 받았었다. 여기서 나는 또 한번 「신화」에 대한 이야기는 지속되고 있으며 「신화」에 대한 평론이나 연구는 아직 시기상조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렇다면 「신화」를 놓고 지속되는 이야기의 핵심적인 화제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ꡐ벌거벗은 임금ꡑ을 ꡐ벌거벗었다ꡑ고 말한 것을 어떻게 보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ꡒ철조망으로 들리지 않는 강제노동수용소에 또 봄이 왔다ꡓ 이렇게 시작해가지고 ꡒ철조망으로 들리지 않은 세계 최대의 강제노동수용소에 또 다시 겨울이 닥쳐왔다ꡓ 이렇게 끝을 맺는 이 소설에서 나는 6억 5천만 인민의 하늘같이 우러르는 ꡐ태양ꡑ을 천안문성루 위에 올라서있는 벌거벗은 황제라고 규정지었다. 그리고 밤낮없이 다들 위대하다, 위대하다고 웨쳐대는데 도대체 어디가 그렇게 위대한가? 안데르센의 동화에 나오는 그 알몸둥이 국왕하고 다를 게 뭔가? 그 놈이 그 놈이지!… 중국은 지금 대가리 하나뿐인데 발이 수십억 개나 달린 무슨 거대한 그리마(절족동물)같은 괴물로 변해버렸다. 사고는 내가 혼자 도맡아할테니 저희들은 그저 부지런히 손발만 놀리면 되느리라. 이와같이 비양하는 것으로써 ꡐ태양ꡑ의 절대권위에 나는 도전하였다.10) 이것이 바로 내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졸고 ꡒ김학철의 정신발전궤적이 주는 제시ꡓ에 인용하였으나 후에 평론집을 출판할 때 삭제당한 인용문인데 우리가 「신화」를 읽는데 가장 필수적인 대목이며 역시 이것이 바로 「신화」의 이야기를 지속시키는 핵심문제로서 누구나 「신화」의 평론이나 연구에서 회피할 수 없는 문제이다. 여기에서 또 많은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다. 우리 나라 임금이 정말 벌거벗었는가? 벗지 않았는가? 벌거벗은 임금을 벌거벗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없는가? 어째서 어떠 사람들은 임금이 벌거벗은 것을 보아낼 수 있고 어떤 사람들은 보아낼 수 없는가? 벌거벗은 임금을 벌거벗었다고 말하는 것이 죄로 되는가? 되지 않는가? 어째서 벌거벗은 것을 알고서도 많은 사람들이 벌거벗었다고 말을 하지 못하는가? 등등. 이런 문제들에 대한 완벽한 해답은 거의 전부의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을 죄다 동원하여야 가능할 것인데 이 글에서 반드시 해답해야 할 것은 김학철이 ꡐ벌거벗은 임금ꡑ을 ꡐ벌거벗었다ꡑ고 말하는 것이 잘못인가? 죄로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ꡐ문학대혁명ꡑ이 결속된지도 25년이 되는 오늘 모택동이 범한 착오는 이니 당의 문건으로 명확히 결정지었으므로 여기에서 다른 시비가 있을 수 없다.11) 오히려 우리가 놀랍게 생각되는 것은 김학철 선생은 모택동이 6억5천만 인민들의 대 구원의 별로 칭송되고 신이자 태양으로 노래되던 시기에 신(神)의 아들로서 절대적인 신성불가침범의 권위에 도전하였다는 점이다. 안드르센의 그 ꡐ벌거벗은 임금ꡑ을 벌거벗었다고 소리칠 수 있는 그 천진성과 용기는 오래 오래 세상사람들이 특히 현대지성인으로 자처하는 철학가, 작가, 시인, 기자 등등 사람들의 본보기로 되고 칭송의 대상으로 되지 비난의 대상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김학철의 「신화」가 탈고된지 30여 년이 지나서야 중국의 당대 철학가 리택후(李澤厚), 문학가 류재복(劉在福), 소설가 량효성(粱曉聲) 등 사람들이 ꡐ벌거벗은 임금ꡑ을 ꡐ벌거벗었다ꡑ는 글들이 나오기 시작했다.12) 여기서 우리는 김학철의 실천하는 현대지성인의 량지와 책임감과 인격에 대하여 재삼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현대지성이란 무엇인가? 이것도 중국에서는 리론이 많고 여론이 구구한 제목인데 숫한 정의중에 최근 어느 프랑스 사회학자의 정의가 사람들에게 주는 계시가 크다. 그에 의하면 지성인이란 자기가 장악한 지식으로써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해서 그 권력을 비판하는 사람, 즉 지식으로 사회에 유리한 일을 하는 사람이 지성인인데 권력이 인간에게 주는 육체적 폭력과 상징적 폭력중에서 주로 상징적 폭력의 현상을 벗기여 사람들에게 알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학철이야말로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 가장 우러러보이는 실천하는 지성인임을 새삼스럽게 생각해 보게 된다. 물론 「신화」의 주제사상은 극히 풍부한 바 ꡐ벌거벗은 임금ꡑ을 벌거벗었다고 말한것외에 또 많은 내용이 있다. 심조광, 임일평, 바이얼린스트 채 등 ꡐ우파분자ꡑ들이 운명적으로 겪는 인생의 좌절과 생명의 고뇌, 천성적인 량만과 강철의 신념은 지난 세기 후반엽 20여년간 중국사회의 제일 밑바닥 인생을 영위한 ꡐ우파분자ꡑ라고 일컫는 한무리 사람들의 정신실존, 생존상황일 뿐만 아니라 한 세대 중국 지식인들의 정신실존, 생존상황이기도 하며, 어찌보면 인류가 숙명적으로 안고있는 문제와 고민이기도 한 것이다. 또 황너구리, 마미이라, 박 복수주의자의 언어와 행실이 우리에게 주는 계시가 크다. 이들은 중국의ㅈ 정치문화 혹은, 전쟁문화가 낳은 기형아들인데 김학철이 말하는 ꡐ프로레타리아투사ꡑ의 전형들이다. 이들은 한 방면으로는 계급투쟁의 선봉대이며 다른 방면에서는 도덕주의자들이다. 이에 대하여 리택후 선생은 다음과 같이 개괄한 바 있다. 그들은 각종 형태의 양면파들로서 혹은 여우처럼 간사하기도 하고 호랑이같이 날쌔기도 하며 혹은 얼굴에 웃음을 바르고 허리에 굽신거리기도 하며 혹은 뒤에서 활을 쏘아 사람을 죽이기도 하며 혹은 코뚜레를 꿴 송아지처럼 순종하기도 한다. 그들은 밀고신을 쓰고 아첨을 하며 혁명적 구호를 부르면서 극히 비열한 짓도 거리낌없이 해낸다. 그들은 겁이 나서 벌벌 떨면서도 흉악하고 잔인한 짓을 하며 내내 좌우를 잘 둘러맞추고 뜻을 이루어 위로 곧추 승진을 한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시대가 낳은 명물은 우리의 문예작품에 아직 씌여지지 못하고 있다.13) 「신화」에서 황너구리나 마미이라는 예술상에서 아주 풍만하게 창조되지는 못했지만 중국의 정치문화, 전쟁문화가 만들어 놓은 ꡐ프로레타리아투사ꡑ의 기본 성격과 기질을 기본상 갖추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여기서도 우리는 김학철의 비수처럼 날카로운 붓끝을 새삼스럽게 감촉할 수 있다. 여기서 특히 힘주어 말하고 싶은 것은 김학철의 「신화」는 결코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정치소설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ꡐ우파분자ꡑ들의 생활수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의 고뇌어린 삶을 재현한 것은 사실이고, 또 일인독재에 대한 울분에 넘친 격문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비판이성이 번쩍이는 것도 사실이고, 또 황너구리, 마미이라 등 ꡐ푸로레타리아투사ꡑ들에 대한 풍자와 조소로 충만되였지만 「신화」의 밑바닥에 도도히 굽이치는 것은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며 인간의 존엄에 대한 드높은 옹호정신이다. 김학철은 이점에 대하여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프로레타리아 독재의 이름으로 국민경제를 파탄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은 죄보다도 억 몇 사람의 인간성을 가장 추하게 가장 야비하게 망가뜨린 죄가 훨씬 더 컸다. 선량하던 사람들이 다 승냥이가 돼버렸기에 말이다.14) 여기서 우리는 김학철의 가슴에 충만된 인도주의 정신을 보아낼 수 있으며 또 여기로부터 「신화」는 단순 정치소설 뿐만이 아니라 문학의 본체에 접근한 예술문학작품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4. 언어, 문체 그리고 수사학 어느 작품이 예술문학작품이 옳으냐 아니냐는 물론 사상성에 의하여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문학본체의 가치를 결정하는 언어 등 여러 가지 요소에 의하여 결정된다. 「신화」의 언어에 대하여서는 고은선생이 일찍 '우리 말의 보고라고 일컬어질 만큼 구수하고 생생한 모국어 구사에다 절묘한 비유로 이루어진 그의 문학은 별초 홍명희 이래 우리 민족어를 진정으로 계승했고 가장 신명나는 문학을 이뤘다'15)고 평가했는데 완전히 동의하면서 여기서 편폭의 제한으로 더 전개하지 않기로 한다. 문체상에서 보면 「신화」는 김학철의 다른 장편소설과 마찬가지로 소설문체, 잡문문체, 설화문체가 묘한 화합을 이룬 것으로 독특한 김학철의 문학의 문체를 이루고 있다. 또 숱한 에피소드로써 작품의 주요 내용을 이루고 있는 것도 김학철의 여느 작품에서와 같은 독특한 풍격을 과시하고 있다. 콩 볶은이 장수가 한알씩 한알씩 낱개로 콩알을 세어서 판 이야기, 바이얼린스트 채가 자기의 바이얼린 소리를 들어줄 사람이 없어서 공동묘지에 찾아가서 「찌고이너바이젠」을 켠 이야기 등등은 그야말로 김학철의 문학에서밖에 찾아볼 수 없는 절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이며 의미심장하다. 이밖에도 전편 「신화」에는 수많은 반어와 해학적인 언어로 100만대 1이라는 열세에 처하여서도 전투정신을 잊지 않고 유모어 감각을 잊지 않는 김학철의 여유적적한 심태와 역설적인 정신상태를 재치있게 보여주고 있다. 5. 맺는 말 펜을 놓으면서 생각해 보니 이 글은 평론글이라기보다 한 편의 독후감에 불과하다는 것을 심심히 느끼게 되며, 「신화」와 같이 이렇게 만민이 우르러보고 천세만세 길이 빛날 작품과 나의 이 글이 정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된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그저 이 글의 작자는 김학철의 그 인격과 신념을 배우는 한 개 환걸로 이런 글을 썼다는 것만 이해해주면 나로서는 만족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역시 '우파분자'로 20여년 고뇌의 삶을 영위했던 한 작가의 말로 자신을 격려하면서 이 글을 끝마치련다. '넘어지면 일어서고 흩어지면 다시 모이고 부상을 당하면 아픔을 참고 죽어도 혼은 흩어지지 않고 사나 죽으나 모두 인민을 위하여 작은 일이라도 한다. 이것이 바로 작가의 신념이다.'16) 역시 김학철의 신념이며 「신화」의 최심층 주제이다.  
364    땡!!- "다나까체"...?와 "해요체"...? 댓글:  조회:5321  추천:0  2016-03-11
'나 오늘 야근이지 말입니다.' '헉. 그러면 오늘 밤에 유시진 대위님 못 만나시는 겁니까?' KBS 수목 드라마 '태양의 후예' 5회 방영을 앞두고 9일 오후 한 카톡방에서 여성들끼리 나눈 대화다. 드라마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여성들 사이 '다나까체'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극 중 특수부대 장교 유시진 역을 맡은 송중기는 동료 군인들과 대화할 때는 물론 의사 강모연(송혜교)과 연애를 하면서도 '다나까체'를 쓴다. "이 남자, 저 남자 너무 걱정하는 남자가 많은 거 아닙니까? 이 시간 이후 내 걱정만 합니다" 같은 식이다. '다나까체'는 군대에서 모든 말을 '다'나 '까'로만 끝내는 말투를 의미한다. 국부는 병영 문화 혁신을 위해 장병들이 일과 시간 이후 일상 대화에서 '해요체'를 사용할 수(필자;- "...요"를 쓰는것이 문화 혁신을 위함이라고???) 있도록 교육하기로 하고 지난달 언어 순화 지침서를 배포했다. 어법에 맞지 않는 '~말입니다'는 아예 금지시켰다. 하지만 지침서 배포 직후인 지난달 24일 '태양의 후예' 방영이 시작되면서 오히려 다나까체 붐이 일어났다. 여성들이 일제히 '신선하다' '멋지다'는 반응을 보인 것이다. 정석희 TV 평론가는 "유아적인 말투를 쓰는 남자 아이돌, 겉으론 까칠하지만 내면은 미성숙한 '실장님' 캐릭터만 보아오던 여성 시청자들이 '다나까체'를 쓰는 터프한 남성 캐릭터를 보며 매력을 느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국부 관계자는 "'다나까체'가 경직된 군 문화의 상징처럼 여겨져 상황에 적합하지 않은 언어문화를 개선하고자 했다"며(필자; - "...다. ....까"를 쓰면 경직된 군 문화의 상징이라고???) "드라마의 극적 효과를 위해 필요하다면 다나까체를 쓸 수있지만, 군대 언어문화 개선의 취지도 고려해 극 중에 녹여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363    땡!- 모두가 피할 때 아빠는 막아줬다... 댓글:  조회:6282  추천:0  2016-03-11
美 관중석에 날아든 야구배트… 모두가 피할 때 아빠가 막아줬다   지난 8일(한국 시각) 트위터에 올라온 사진 한 장이 미국을 감동시켰다. 사진이 찍힌 시각과 장소는 6일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의 챔피언 스타디움. 이곳에선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메이저리그 시범경기가 열리고 있었다. 당시 현장을 취재한 피츠버그 트리뷴 리뷰의 사진기자 크리스토퍼 호너가 포착해 트위터에 게재한 장면은 그라운드가 아닌 관중석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럼에도 미국 언론들은 앞다퉈 이 순간을 '이날 최고의 플레이'로 꼽았다.   이미지 크게보기무서운 속도로 배트가 날아들자 모든 사람이 몸을 피하며 손으로 자기 몸을 가렸다. 인간의 본능이었다. 단 한 명의 예외가 있었다. 그는 자기 몸 대신 옆자리 아이를 위해 손을 뻗어 배트를 막아냈다. 소년의 아빠(왼쪽 흰모자)였다. 아빠의 손이 아니었다면 아이(가운데 흰 티셔츠)는 배트에 얼굴을 정통으로 맞을 위기였다. 인간의 본능보다 강한 아빠의 본능이었다. /피츠버그 트리뷴 리뷰 홈페이지 사건은 파이리츠의 외야수 대니 오티스의 타석 때 일어났다. 오티스가 휘두른 배트가 손을 빠져나와 3루쪽 관중석으로 날아갔다. 배트는 한 소년 팬의 얼굴 쪽을 정확히 향하고 있었다. 그대로 두면 안면에 맞을 상황이었다. 이 순간, 옆에 있던 남성이 왼팔을 쭉 뻗어 이를 막아냈다. 아슬아슬한 순간에 손을 뻗은 인물은 소년의 아버지인 숀 커닝햄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아빠와 프로야구장을 찾았던 8세 아들 랜던은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아버지 커닝햄씨는 피츠버그 지역 언론을 통해 "너무 빠르게 일어난 일이라 생각할 시간조차 없었다"며 "팔을 내민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다"고 말했다. 아버지에 따르면 당시 아들 랜던은 휴대전화로 오티스의 사진을 찍어 어머니에게 전송하느라 경기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팔에 타박상을 입었지만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사진을 찍은 호너는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C}그 순간 배트와 소년 사이엔 아버지의 팔밖에 없었다"며 "그것은 아버지의 본능이었다"고 말했다. 메이저리그는 올 시즌부터 팬들의 안전을 위해 관중석 그물망 확대를 권고했다. 작년 6월 보스턴 레드삭스의 홈구장 펜웨이 파크에선 한 여성 팬이 부러진 배트에 맞아 머리에 중상을 입기도 했다. 이날 시범경기가 열린 챔피언 스타디움 3루쪽 관중석에는 그물망이 없었다.    
362    <<@이메일>> 고안한 톰린슨 별세 댓글:  조회:4678  추천:0  2016-03-08
'@' 표시의 그림 위 누워 있는 래이몬드 톰린슨. 현재 사용되는 이메일 체계를 발명한 프로그래머 래이몬드 톰린슨이 5일(현지시간) 별세했다.향년 75세. AP 등 외신은 톰린슨이 수석 과학자로 일해 온 군수업체 레이시언이 그의 사망 사실을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고인은 1971년 우리나라에서 흔히 ‘골뱅이’로 통하는 ‘@’기호를 사용한 이메일 직발송 체계를 처음으로 고안했다. 당시 보스톤의 기술회사 볼트 버라넥 앤드 뉴맨(BBN)에서 일하던 그는 기존의 메일 체계가 지나치게 복잡하다는 문제의식에서 간단한 메일 발송법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톰린슨의 발명 이전까지 온라인에서 메일은 제한된 네트워크에서 공유하는 것만 가능했다. 인터넷의 전신인 아르파넷(ARPANET)에서 사용되던 톰린슨의 ‘@ 이메일’은 이후 개인용 컴퓨터(PC)와 인터넷망이 보급된 1980년대 후반부터 빠르게 보편화됐다. 2012년 국제인터넷협회(ISOC)는 고인의 공로를 인정해 인터넷 개발에 기여한 이에게 수여하는 ‘인터넷 명예의 전당’의 첫 수상자로 그를 선정했다. 수상 연설에서 그는 “나는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다만 이메일이 이렇게까지 큰 파급력을 가질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톰린슨은 ‘@’ 를 선택한 이유가 단순히 키보드에서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을 기호를 찾으려 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이에 대해 레이시언의 대변인인 조이스 쿠즈만은 “이메일이 아니었다면 이 기호는 벌써 키보드에서 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지메일은 트위터를 통해 “이메일을 개발해 ‘@’을 남겨준 래이 톰린슨에게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는 헌사를 전했다.
361    [록색평화를 말하다]- 지구를 아낀다면 절전하라... 댓글:  조회:5372  추천:0  2016-03-08
데이터센터가 쓰는 전기의 90% 이상은 컴퓨터(서버)가 직접 소모하는 것이다. 이를 줄이려면 누리꾼들이 집에서 전기요금을 아끼려고 안 쓰는 전등을 끄는 것처럼 인터넷을 이용할 때도 절전 습관을 실천해야 한다.   세계적인 환경운동단체 그린피스의 설명을 들어보면, 누리꾼이 인터넷 검색을 한 번 할 때마다 데이터센터의 이산화탄소 발생량이 2g씩 늘어난다. 데이터센터 컴퓨터가 누리꾼의 검색 요구를 처리하면서 소모하고 발생시키는 전기와 열을 이산화탄소 발생량으로 환산하면 그만큼 된다는 뜻이다. 거꾸로 말하면, 검색을 한 번 덜 할 때마다 그만큼의 이산화탄소 발생을 줄인다는 얘기가 된다.   인터넷을 이용할 때 가능한 한 기록을 덜 남기는 것도 환경보호에 이바지하는 길이다. 환경보호 관점에서 보면 ‘쓸데없는’ 인터넷 이용은 자제하는 게 옳다. 가능하면 ‘메신저 수다’를 줄이고, 댓글 달기를 자제하며, 용도가 끝난 이메일·영상·사진 등도 바로 지울 것을 권한다. 실제 데이터센터에 기록을 쌓아두는 누리꾼이 많아졌다. 모바일 인터넷과 클라우드 서비스가 대중화하고, 사업자 간에 무료 데이터 저장공간 경쟁이 벌어진 탓이다. 문제는 누리꾼이 데이터센터에 쌓아둔 이런 기록들이 전기를 엄청나게 소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데이터센터 운영자들은 가상현실(VR) 대중화 흐름에 크게 긴장하고 있다. 유튜브 등이 동영상 이용을 활성화하면서 데이터센터의 컴퓨터 수요와 전기 소모량을 빠르게 늘렸는데, 가상현실 콘텐츠는 데이터양이 동영상보다 많다. 박원기 네이버비즈니스플랫폼 대표는 “각을 설계할 때 9년 정도는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동영상 바람으로 4년도 안 돼 3분의 2가 찼다”고 말했다.
360    침묵할 때는 침묵하라... 댓글:  조회:4729  추천:0  2016-03-07
              침묵의 기술/ 조제프 앙투안 투생 디누아르 지음/ 말 참 많이 하는 시대다. TV를 틀어보자. 예능프로그램만 봐도 그렇다. 연애 예능, 육아 예능, 먹방 예능 등 예능 종류가 참 다양한 시대가 됐지만, 그 공통된 바탕은 ‘썰’(말씀을 뜻하는 한자어 說(설)에서 변화한 단어로 ‘이야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니까 말의 유희다. 청춘 남녀는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말해야 하고, 부모가 아이에게 밥을 먹이고 놀아주고 목욕을 시켜줄 때 역시 끊임없이 말해야 하며, 음식을 먹으며 입 속 음식물을 부지런히 씹어 목구멍으로 넘기는 중에도 끊임없이 말해야 한다. 아예 가만히 앉아 말로만 채우는 토크쇼 형식 예능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뉴스에서도 전문가 여러 명을 앉혀 놓고 말로 논쟁을 붙이는 코너를 시도 때도 없이 내보내고 있다. 그 바탕에는 ‘말 권하는 사회’가 된 시대 분위기가 있지 않을까. 언제부터인가 ‘소통’은 진리인양 맹목적으로 떠받들려지고 있다. 무슨 일이든 일단 말을 걸고 또 말을 시켜야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말 잘하는 사람이, 그래서 말을 잘 이끌어내는 사람이 곧 소통 잘하는 사람으로 각광 받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에 있다. 소통 유행처럼 불고 있는 ‘공유’ 유행도 비슷한 현상을 만들고 있다. 내가 지닌 말과 글을 남에게 끊임없이 드러내 보여줘야 사회에 이익이 된다는 믿음이 우리를 떠버리, 설명충으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분명 어떤 이들은 소통해야 한다는 강박에 괴로워한다. 주고받는 말이 넘치다 보니 온갖 설화(舌禍)와 필화(筆禍)도 터져 나온다. 그러면서 말은 오고 갔는데 결국 소통은 안 되는 ‘불통’이 소통 만능 시대의 그림자로 번지고 있다. 18세기 프랑스에 살았던 조제프 앙투안 투생 디누아르 신부는 이럴 줄 알았나 보다. 200여 년 전인 1771년 이 책 ‘침묵의 기술’을 펴내며 침묵을 강조하는 목소리를 냈다. 침묵을 실용주의적으로 해석하고 침묵을 하나의 수사학으로 끌어올려 평가한다. 다음은 저자가 제시하는 14가지 침묵의 원칙이다. 1. 침묵보다 나은 할 말이 있을 때에만 입을 연다. 2. 말을 해야 할 때가 있듯이 입을 다물어야 할 때가 따로 있다. 3. 입을 닫는 법을 먼저 배우지 않고서는 결코 말을 잘할 수 없다. 4. 말을 해야 할 때 입을 닫는 것은 나약하기 때문이다. 입을 닫아야 할 때 말을 하는 것은 경솔하고도 무례하기 때문이다. 5. 말을 하는 것보다 입을 닫는 것이 덜 위험하다. 6. 사람은 침묵 속에 거함으로써 스스로를 가장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 침묵을 벗어나는 순간 자기 자신보다 남에게 의존하는 존재가 되고 만다. 7. 중요한 말일수록 후회할 가능성은 없는지 다시 한 번 되뇌어 보아야 한다. 8. 지켜야 할 비밀이 있을 때에는 아무리 입을 닫고 있어도 지나치지 않다. 9. 아는 것을 말하기보다는 모르는 것에 대해 입을 닫을 줄 아는 것이 더 큰 장점이다. 10. 침묵은 편협한 사람에게는 지혜를, 무지한 사람에게는 능력을 대신하기도 한다. 11. 말을 많이 하고픈 욕구에 휘둘려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받느니, 침묵 속에 머물러 별 재주 없는 사람으로 보이는 편이 낫다. 12. 용감한 사람의 본성은 과묵함과 행동에 있다. 양식 있는 사람은 항상 말을 적게 하되 상식을 갖춘 발언을 한다. 13. 무언가를 말하고픈 욕구에 걷잡을 수 없이 시달리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결코 입을 열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14. 침묵이 필요하다고 해서 진솔함을 포기하라는 뜻은 아니다. 어떤 생각들을 표출하지 않을지언정 그 무엇도 가장해서는 안 된다. 첫 번째 원칙 ‘침묵보다 나은 할 말이 있을 때에만 입을 연다’ 는 모든 원칙의 기본이다. 입을 열었다면 무조건 본전 이상은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손해 볼 말을 왜 한단 말인가. 꽤 상식적이다. 세 번째 원칙 ‘입을 닫는 법을 먼저 배우지 않고서는 결코 말을 잘할 수 없다’ 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중요하다’ 의 실천적 지침으로 삼을 만하다. 열한 번째 원칙 ‘말을 많이 하고픈 욕구에 휘둘려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받느니, 침묵 속에 머물러 별 재주 없는 사람으로 보이는 편이 낫다’ 의 앞 문장은 정신병리학적 탐구 대상이 된 요즘 SNS의 글 도배 현상을 떠올리게 만들며 시대를 앞선 예견으로 읽힌다. 열네 번째 원칙 '침묵이 필요하다고 해서 진솔함을 포기하라는 뜻은 아니다. 어떤 생각들을 표출하지 않을지언정 그 무엇도 가장해서는 안 된다'는 그럼에도 할 말은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소통이 만능은 아니듯이, 침묵도 만능은 아니다. 지혜가 필요한 부분이다. 저자는 침묵을 절제의 언어로 본다. 비어있는 숫자 '0'의 발견과 비슷한 맥락에서 저자는 침묵도 하나의 말로 인정했다고 봐도 되겠다. 숫자에 합류한 0은 수 계산을 대단히 실용적으로 만들었다. 침묵도 그런 도구라고 보면 되겠다. 저자는 “침묵은 방종과 타락이 만연한 정신에 추천할 만한 처세술”이라고 강조한다. 저자는 아무래도 신부인 만큼 책 곳곳에서 종교적 말하기의 방법을 취한다. 그런데 당시 사회는 정치와 종교가 긴밀히 얽혀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저자는 종교 자체에 대해 얘기하는 게 아니라 예제로 삼거나 비유할 소재로 종교를 언급하는 것이다. 그래서 책 속 종교의 개념은 전통적 가치와 사회질서를 가리키는 것으로 치환해 이해하는 고전 읽기의 묘가 살짝 필요하다. 240쪽,   [ 2016년 03월 08일 08시 17분 ]         [ 2016년 03월 08일 08시 17분 ]   5       [ 2016년 03월 04일 08시 14분 ]     9 /        
359    땡!!!,- 이건 정말 아니다... 야생동물 "고막" 터질라... 댓글:  조회:5374  추천:0  2016-03-04
기사 이미지 보기 록색이야기(주;- 참다 참다가 올리는 글임. - 필자) 남북한 사이 비무장지대(DMZ)는 백두대간, 도서 연안과 함께 우리나라의 핵심 생태 축으로 꼽히는 지역이다. 비무장지대와 그 주변 민간인 출입통제구역 안에서 살아가는 생물종은 산양, 사향노루, 수달, 두루미 등 멸종위기종만 106종이나 된다는 게 환경부가 2008년부터 진행한 생태계 조사 결과다. 남한 전체에서 2%도 안 되는 좁은 땅이 멸종위기종 종수의 43%를 품고 있다는 얘기다. 누가 뭐래도 생태계의 보고다.   이처럼 우리나라 생태계의 핵심 지역인 비무장지대에 서식하는 많은 야생동물은 요즘 어느 때보다 괴로운 겨울을 보내고 있을 듯하다. 이동로 곳곳을 가로막는 철조망, 먹잇감을 찾기 어렵게 만드는 폭설 등과 같은 익숙한 위협 외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새로운 위협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바로 소음이다.   정부는 북한의 4차 핵실험을 이유로 지난 1월8일부터 최전방 10여곳에서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했다. 북한도 이에 질세라 대남 확성기 방송으로 대응하고 나섰다. 지난달 7일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와 개성공단 폐쇄 등으로 상황이 급속히 악화되면서 양쪽의 확성기 공방은 더욱 가열되고 있다.   동물은 소음에 특히 민감하다. 먹잇감을 사냥하고, 포식자에게 잡아먹히지 않고 달아나는 것 등 생존을 위한 많은 행동을 청각에 의존하는 야생동물은 더욱 그렇다. 소음은 야생동물의 번식과 새끼 기르기 등에 영향을 미치고 때론 생명까지도 위협할 수 있다.   지리산에서 멸종위기종 반달가슴곰 복원 사업을 진행하는 국립공원관리공단은 겨울철 지리산을 찾는 등반객에게 산행 중 ‘야호’ 소리는 물론 크게 떠드는 것조차 자제해달라고 당부하고 있다. 가수면 상태에서 겨울잠을 자는 반달곰이 소음에 놀라 동면 장소를 옮기다 탈진할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환경부 중앙환경분쟁조정위원회의 분쟁조정 사례를 보면 소음이나 진동에 의한 가축 피해가 인정된 사례가 적지 않다. 가축이 5분 평균 60㏈(데시벨) 이상의 소음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데 따른 스트레스와 성장 지연, 수태율 저하 등의 인과관계는 분쟁조정위뿐 아니라 법정에서까지 인정되고 있다고 한다. 최대 70㏈ 이상 소음에 노출될 경우 유산이나 사산 등의 피해까지 나타날 수 있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남북한이 확성기 공방을 펼칠 때의 비무장지대 안 소음도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 없다. 휴전선에서 4㎞가량 떨어진 곳에서 측정되는 소음도도 60~80㏈에 이른다는 일부 언론 보도로 그 엄청난 강도를 짐작할 뿐이다. 멀리 북한 쪽에서 웅웅대는 소음만으로도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소음 전쟁’ 상황에서 양쪽 확성기 사이에 낀 수많은 야생동물은 얼마나 위험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까.   김정수 선임기자 ///////////여기는 또 다른 국경풍경//////////////...... 기사 이미지 보기 아랍에미리트(UAE) 국경 인근 움 아즈 자물의 아라비아오릭스보호지역에서 가젤 무리가 사막을 거닐고 있다. 약 8900㎢의 조수보호지역은 멸종 위기에 처한 다양한 동물을 위해 지정됐다. 아부다비에서 남쪽으로 290㎞ 떨어진 이곳은 오만과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국경이 만나는 곳이다. 드넓은 사막, 끝없이 이어지는 모래언덕 위에서 가젤은 자유롭다. 국경이라는 울타리에 스스로를 가둔 건 사람뿐이다.     
358    영화 "귀향"에서 나오는 노래 댓글:  조회:7276  추천:0  2016-02-27
                     원 고려가사 을 로 노래함. 영화 "귀향"에서 나오는 노래        가시리 가시리잇고 버리고 가시리잇고 날더러 어찌 살라하고 버리고 가시리잇고 나는 (가실겁니까? 나를 버리고 가실겁니까? 나는 어찌 살라고 나를 버리고 가실겁니까?) 가시리 가시리잇고 버리고 가시리잇고 잡사와 두어리마는 선하면 아니 올세라 나는 (가실겁니까? 나를 버리고 가실겁니까? 잡아두고 싶지만 서운하면 다시 내게 돌아오지 않을까 두려워) 설온 임 보내옵나니 설온 임 보내옵나니 가시는 듯 돌아오소서 설온 임 보내옵나니 (서러워 하는 임을 보내겠으니 날 서럽게 만드는 임을 보내겠으니 가시는 듯하다 다시 제게로 돌아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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