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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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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7    <<락서문화>>을 반대한다?!... 찬성한다?!... 댓글:  조회:3975  추천:0  2016-11-10
수필 아름다운 락서 /김인덕   락서란 글자, 그림 따위를 장난으로 아무데나 함부로 쓰는것 혹은 그 글자나 그림이라고 사전은 해석한다. 바꾸어말해서 락서는 “장난글씨”인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도시는 락서와의 전쟁을 치르고있다. 자고 깨나면 날마다 늘어나는 건물벽의 증건위조광고는 그야말로 몸에 돋은 소버짐처럼 두통거리이다. 좀처럼 지줘지지 않는 물감으로 씌여져서 그것을 지우려면 오히려 덧칠을 해야 하므로 도시의 악성종양은 점점 퍼져나간다.     이렇듯 락서는 아름다울수가 없는것이 통념이다. 대부분 사람들의 머리속에는 락서라면 공중화장실의 지저분한 3행시쯤으로 알고있다.     재작년말에 모아산등산로가 목책을 두른 나무계단으로 바뀌면서 안전을 위해 설치한 가드레일 즉 목책에 락서가 생기기 시작했다. 일찍 새긴 락서들은 비바람에 바래지고 그 위에 또 새로운 락서들이 어김없이 새겨지고있으니 락서의 생명력은 끈질긴것 같다.     글이라면 광고지의 구석구석까지 빠뜨리지 않고 보는 습관이 있는 나는 매번 모아산에 등산할 때면 가드레일에 새겨진 락서를 빼놓지 않고 읽는다. 물론 보는이의 눈을 찌프리게 하고 마음까지 구겨지게 하는 락서가 적지 않다. 곳곳에 씌여진 “○○○만세!” 혹은 “×년 ×월 일에 ○○○가 왔다갔음.”라는 따위의 락서들은 일푼의 가치조차 없는, 락서를 한자의 오만함과 방자함까지 엿보여 기분이 씁쓸해난다.     하지만 다닥다닥 나붙은 그런 락서중에는 북데기속의 낟알처럼 “알맹이”가 없는것은 아니다. 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고있는 락서가 그러하다. 이러한 락서들은 90년대초의 화장실락서와 큰 차이점을 보인다. 나는 그런 “알맹이”를 접할 때면 “락서문화”에 쏠쏠한 재미를 느낀다. 락서에 웬 “문화”라는 수식어를 붙이는가 하고 이의를 제기하는분들도 많을것이다. 사람들의 머리속에는 문화라는 단어는 품위 있는 학문이나 우아한 예술 정도로 각인되여있기때문이다. 짚고넘어갈것은 이런 락서행위가 옳은가 그른가를 떠나서 하나의 문화현상인것은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목책에 씌여진 락서의 내용을 미루어보아 락서를 한 임자들 대부분이 20대 좌우의 젊은이들이다. 락서는 남모르게 몰래하는 은밀한 행위이다. 자기과시욕이 강한 젊은이들은 락서에 버젓이 자신의 이름을 적어넣는것으로 보아 락서를 자신의 감정을 적라라하게 분출하는 공간으로 여기면서 락서에 대한 부끄러움이나 죄의식 같은것을 느끼지 않는것 같다. 나는 그러한 락서들이 그들만의 정서와 생각을 표현한 독특한 문화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의 락서에서 요즘 젊은이들의 자화상을 읽는다.      모아산 등산길의 목책에 써놓은 락서들중에서 락서에 그친 락서는 차치하고 “알맹이” 락서가운데서 제일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내용들은 어떤것일가? 달라진 삶의 세태에 걸맞게 지금 젊은이들에게 최고의 화두는 사랑이고 행복이다.    제스처가 돋보이게 하트모양을 이름사이에 넣은 “○○○♡○○○”나 “나 하루 빨리 내 반쪽 만나고싶어… ㅠㅠ 나 벌써 21살인데…”, “멋있는 남자친구가 생기게 해주세요.”라는 락서를 보고는 허파에 바람이 찬것처럼 크드득크드득 웃음이 절로 나온다. 방금 21살인데 벌써 21살이라니! 갓 20살을 넘기고서도 지천명의 나이를 산듯한 표현이 우스꽝스럽다. 소박한 문구에 담긴 아름다운 소망에는 유머까지 묻어나 모처럼 중년나그네의 마음까지 흥그럽게 한다. 자유롭게 련애할수 있고 사랑도 기침처럼 거침없이 뱉어내는 세태에 뭘 하느라 자기 반쪽을 찾지 못했을가? 홀연 그들의 신상이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학업에 열중하느라 자기의 반쪽을 찾지 못한 젊은이라면 앞날이 촉망된다. 신체조건이나 가정형편으로 자기의 반쪽을 찾지 못했다면 젊은이의 처지가 안쓰러워진다. 세월이 흘렀다고 해서 사랑에 대한 아픔이 잊히랴. 나 또한 젊은 시절, 짝사랑하는 처녀의 환심을 사지 못해 전전긍긍하면서 보내던 불면의 밤은 얼마였던가.     세월이 흘러 세속이 많이 변한탓일가? “련애”라는 “련”자도 입에 뻥긋하지 못하던 지난 세기 60년대와 70년대를 지나온 사람들이라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수 없다.      락서에 대한 기억이 새롭다. 1970년대 말, 내가 초중2학년을 다니던 시절에 생긴 일이다. 내가 공부하던 시골학교에 초특급뉴스가 생겼다. 누군가 학교담벽에 만철이와 영숙이가 과수원에서 “뽀뽀”하는것을 보았다고 락서했다.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만철이와 영숙이는 아이들의 손가락질과 눈총에 서리 맞은 배추잎이 되여 목이 꺾였다. 그들은 결국 초중도 졸업하지 못한채 학교문을 나서야만 했다. “련애”는 벌겋게 달아오른 교실의 난로처럼 근접하기 어려웠거니와 길가에 나뒹구는 분변처럼 불결한것으로 알고있던 시절이였다.     작년 초여름의 어느날, 나는 모아산 등산길에 올랐다가 계단밑에 “지영아, 사랑해, 결혼해줘!”라는 문구가 적힌 색종이 포스터가 3백여장 나붙은것을 발견했다. 장엄한 행사 같은 젊은 남자의 프러포즈에 마음까지 숙연해지는 느낌이였다. 인적이 뜸한 밤에 허리를 한껏 굽히고 그 많은 포스터를 한장한장 계단밑에 붙여가며 행복의 밑그림을 그리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가! 해돋이가 시작될 무렵, 사랑하는 처녀를 이곳까지 데리고 와 포스터가 붙은 계단을 밟으며 깜짝 프러포즈를 할 때 처녀의 느낌은 어떠했을가! 그 장면을 외간나그네가 상상해보아도 프러포즈를 받은 처녀는 발뒤꿈치에서부터 찡한 감각이 솟구치며 당장 하늘에 날아갈듯한 기분이였으리라. 젊은이의 용기가 부럽고 랑만적인 무드를 연출한 젊은이의 아이디어에 높은 점수를 주고싶다.     내 젊은 시절의 무드는 지나가는 동네강아지가 핥아먹었는지 싱겁기 그지없었다. 대학시절, 컴컴한 밤, 짝사랑하는 처녀를 숙소옆 담벽에 불러내다 시작과 끝이 한데 맞붙은 번개같은 프러포즈. “우리 련애하자.” “난 네가 마음에 안든다.” 짝사랑하던 녀자의 퇴박을 맞고 돌아서던 내 젊은 날의 초라한 초상이 지금도 선연하다. 땅이 꺼질듯한 한숨과 초라한 모습을 감춰준 컴컴한 밤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꿈과 행복은 마음가짐에서 싹트고 열매를 맺는다. 꿈을 꿀수 있는것만으로도 행복한 젊은 시절, 젊음은 넘쳐나는 꿈의 번열을 작은 가슴에 다 담을수 없어, 또는 더는 주체할수 없어 꿈과 행복에 대한 열망을 목책의 이리저리에 락서하게 되는가부다.     “시험지 다 잘 맞게 해주세요.”     얼마나 기특한 소원인가! 이 세상에 믿을것은 자기밖에 없는줄 잘 알면서도 평소에 갈고 닦은 학업에서 좋은 성적이 있기를 기원하는 젊은 학도의 바람에는 어찌 자기욕심만 얽혔다고 하랴. 가족과 고마운 주위사람들에 보답하고싶은 갸륵한 마음의 향기가 솔솔 풍겨오지 않는가.     “날 사랑하는 사람 모두 사랑합니다.”     “한 사람의 쾌락은 쾌락에 그치지만 두사람의 쾌락은 행복이다.”     이 세상에 제일 행복한 사람은 자기 주위의 사람들을 사랑할줄 아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마음은 지심의 샘물을 길어올리는 펌프이며 청량한 산소를 뿜어내는 엽록소이다. 남을 배려하고 사랑할줄 아는 사람은 아침산소처럼 싱그럽고 가을산소처럼 청신한 존재이다. 마음을 비우고 자기 재산을 툭툭 털어 바닥에 웅크려있는자를 보살펴주는 위인도 우러러보이지만 자기힘으로 가족을 행복하게 하는 범부에게도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형님, 오빠 있으면 참 좋겠네.”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주는 재산가운데서 가장 값진 재산이 형제라는 속설이 있다. 핵가족화시대에 가장 모자라는것이 형제인듯싶다. 머나먼 인생의 뒤안길에 뒤처진 생각을 추스러주는 가위가 되고 미끄러지는 내리막길에 붙잡을수 있는 가지가 되여주는 형제가 있다면 인생은 결코 고독만은 아닐것이다.     등산로목책에는 젊은이들의 고뇌, 좌절을 담은 락서들도 적지 않다.     “난 뭐이래!”     지팽이라고 짚은 나무가 중하를 이기지 못하고 비틀리여 끊어질 때의 허무함, 하는 일마다 고배를 마셔온 젊은이의 고뇌가 엿보인다. 젊은 시절은 여린 심성만큼 실패에 민감한 시절이다. 고뇌는 엉킨 실타래처럼 풀기 어려운듯 보이고 앞길은 맑은 물에 먹물을 풀어놓은듯 캄캄하여 망막에는 그늘이 비끼기가 일쑤다. 하지만 청춘의 가슴에는 언제나 맑은 물이 요동치며 흘러오고있다는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실패앞에서 세월이 약이라고 하기엔 우리의 청춘은 너무나 값진것이다.     “내가 받은 그 마음의 상처 그대로 돌려줄거야! 사람 넘 쉽게 보지마!”     깊은 마음의 상처를 안고있는 이 젊은이는 글을 쓸 때 마음의 분노를 문자에 담았는지 획이 비뚤비뚤하고 거칠다. 복수의 진원지인 마음속에서 찬바람이 쌩― 불고있으니 손인들 떨리지 않을수 있겠는가. 배반당하면서 입은 깊은 상처를 자기가 직접 조제한 마음의 용서로 치유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추한 상처에서는 계속하여 진물이 흐를것이다. 용서라는 비타민으로 행복을 가꾸는것만큼 아름다운 보복은 없을것이다.     조선어표기법을 완전히 무시한 락서도 간과하지 못할 현상이다. 인터넷시대가 도래하면서 요즘 젊은이들은 문자표기법에 준하지 않는것을 류행처럼 따르고있다.     “미서니랑 엄마랑 오끅미 마다매랑 오끄미 마다바이랑 와따가씀.”     이 락서에서는 “엄마”란 단어와 “랑”이란 토를 빼고는 전부 다 틀린 문자표기로 되여있다. 젊은 세대들의 조선어문자사용이 점점 황페화되여가고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도 하다.     요즘 시대는 아이디어 하나에 의해 승부의 세계가 엇갈린다. 락서문화는 락서만으로의 가치에 한정되지 않으면서 락서에 대한 시각도 바뀌고있다. 락서문화는 주류문화가 아닌 하위문화로서 변화, 창조 등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는데 사람들이 열광하고있는것이다. 아무렇게나 갈겨쓴 글, 아무렇게나 그린 그림들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락서의 무한한 잠재력을 발굴하고있는것이다.     락서그림이나 락서문자의 다양한 이미지를 평범한 청바지와 셔츠, 운동화에 넣어 더 의미 있고 가치가 높은 제품을 만들어 내고있는가 하면 류동인구가 많은 곳의 카페나 음식점에서 “락서문화의 장”을 직접 조성해 고객들의 눈길을 사로잡고있다.     포털사이트 구글에서는 사내 벽면을 모두 화이트보드로 꾸며놓아 직원들이 언제든지 자유롭게 락서할수 있도록 했다. “락서속에 세상을 바꿀만한 아이디어가 있다.”는 구글 창업자의 말대로 포털사이트 미국 본사에서는 10년째 락서경영을 하고있다.     최근에는 락서를 합법적으로 받아들여 관광명소로 발전시킨 곳도 있다. 한국 경북 포항시의 “락서 등대”라 불리우는 포항항동방파제 등대는 3년전까지 락서로 골머리를 앓던 곳이였지만 “산발적인 락서를 한곳에 몰아넣어 보자”는 취지로 최근 2m짜리 락서판을 설치해 년평균 35만명이 들르는 관광명소로 거듭났으며 욕설이 란무했던 락서들이 락서판을 만든 후부터 소원, 사랑고백 등의 내용으로 바뀌였다고 한다.     디지털시대, 락서는 무궁한 창의력을 가진 존재로 평가받으며 새로운 문화 코드로 떠오르고있다. 따라서 락서문화를 무작정 반대하고 밀어내기보다는 옳바른 락서문화를 정착시키고 발전시켜나가는것이 바람직한 자세일것이다.  
596    기계가 詩를 못쓴다?... 쓴다!... 시를 훼멸시킨다!!! 댓글:  조회:4106  추천:0  2016-11-10
“시만들기프로그램”과 현대시 곤혹 2013년 12월 13일 10시 15분  작성자: 김인덕 문학적인 천부가 전혀 없이 한글자 한구절을 신중히 다듬을 필요도 없이 사람마다 “시인”이 될수 있다. 만약 당신이 자판기에 몇개의 관건적인 단어를 입력하면 1분 안에 자동적으로 한수의 시가 생성된다. 이것은 천방야담이 아니라 인터넷에서 류행하고있는 “시만들기프로그램”(“写诗软件”)이 제공하는 “편리”에 의해서이다. 바이두(百度)에 “시만들기프로그램”(“写诗软件”)을 검색하면 몇십개에 달하는 “시만들기프로그램”이 화면에 뜬다. 사용자가 “시만들기프로그램”에 내키는대로 생각한 명사나 형용사 및 단락수(段数), 행수(行数) 등 지시어를 입력하면 프로그램은 자동적으로 1분내에 한수의 “현대파풍격”의 시를 생성한다.  필자가 이 프로그램에 한어로 몇개 낱말들을 입력하니 “10월”이라는 그럴듯한 현대시가 탄생되였다. “중신(众神)이 사망한 사막을 바라보니/ 멀고도 먼 곳의 바람은 먼 곳보다 더 멀어라/ 나의 북소리엔 흐느낌과 눈물은 전혀 없구나/ 먼 곳은 다만 사막에서 한쪼각으로 응결되고/ 거울 같은 보름달은 높이 떠서 천년세월 비추네/ 나의 북소리엔 흐느낌과 눈물 전혀 없구나/ 홀몸으로 말을 채찍질하며 사막을 지나가네.” 현대시의 일부 류파는 현대시란 바로 현실세계의 상식을 초과하는 정신적, 언어적 운동으로 초월세계, 련속세계를 추구하며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기 위해 이질적인 강압조합(폭력조합), 파편문체를 사용하여 낯설게 하는것이 그 처방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필자가 “시만들기프로그램”의 힘을 빌어 만들어낸 시 “10월”도 성공작이라고 할수도 있겠다. “사냥군”이라는 익명을 가진 “시만들기프로그램”의 개발자는 최초에는 호기심에 의해 이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현대파풍격의 시가 전통시에 비해 모방하기 쉽다는것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는 “현대시의 창작사유가 기계적사유에 더 가까우며 현대파풍격의 시의 내재론리가 더욱 도약하는것이 특징이다. 현대파풍격의 시는 바로 어문(语文) 상식중의 명사, 형용사, 부사의 결합을 엉망으로 만들고 주어와 술어의 관계를 제멋대로 헝클어놓는것이다”라는 사람을 놀래우는 메가톤급의 언론을 던졌다. 한 유명한 “시만들기사이트”의 홈페이지에는 “무슨 말인지 모를 현대시를 많이 읽고서야 우리는 보고도 모르는것이 현대시의 본질이고 제멋대로 결합시키는것이 현대시의 보배임을 알게 되였다. 대사(大师)가 없는 년대에 시인들은 썩 물러가라, 지금은 우리도 시를 쓸수 있다”라는 선언문을 버젓이 내걸었다. “시만들기프로그램”의 출현은 시단에 진동을 가져왔다. 문학계에서는 “허튼 소리로 매우 황당하다. 이는 문학창작의 패스트푸드화이며 경박한 문화의 표현이다”라고 질타했다. 중국의 저명한 시인이며 북경사범대학 문학원 담오창교수는 “현재 시문학은 전면적으로 쇠퇴하는 국면에 접어들었다. 각종 문학쟝르중 문자와 의경에 대한 요구에서 제일 높은것이 시이다. 시는 인류의 정감을 표달하는 제일 훌륭한 담체이다. 시인은 높은 문학수양을 가져야 할뿐만아니라 내심의 체험과 감수 및 진실한 감정으로 창작해야 한다. 이것은 기계가 할수 없는것이다. ‘시만들기프로그램’으로 만들어낸 작품은 예술에 상처를 줄것이며 시를 훼멸시킬것이다”는 문장을 발표하였다. “시만들기프로그램”의 성행은 시인들에게 시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엄숙한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있다. 자연이나 인생에 대하여 일어나는 감흥과 사상따위를 함축적이고 운률적인 언어로 표현한 글이 바로 시이다. 우리의 시인들은 시는 만드는것이 아니라 쓰는것임을 명기해야 할것이다. 연변일보  
595    詩人은 갔어도 노래는 오늘도 가슴 설레이게 한다... 댓글:  조회:3685  추천:0  2016-11-10
흥개호어부의 노래, 추억의 향기여!                               김은철    고희를 넘어선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여든이 눈앞이다. 나이를 먹으니 자연히 뼈마디들이 쑤셔나고 피곤히 몰려들면서 손가락하나 까딱하고 싶지않을 때가 많다. 그래도 움직여야 건강에 좋다하여 나는 오전마다 사교무추러 다니군 한다. 사교무장에서 부르는 노래들은 모두 명곡들로서 춤추는 이들의 구미에 맞아 흥을 자아내고있다. 특히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노래를 들을 때면 그 시절을 머리에 떠올리며 취하군 하는데 그 노래가 바로 “흥개호어부의 노래”이다. 춤을 추다가도 가수들이 이 노래를 부르면 내 머리에는 언제나 인자한 모습의 리삼월선생님이 떠오르군 한다. 리삼월은 필명이고 본명은 리경희이다. 리경희선생님은 문학잡지 ”송화강’을 창건한 분이며 총편으로 수십년 분망히 보내왔으며 중국조선족시단의 대표적시인의 한분이시다. 흑룡강의 많은 시인 소설가들이 이 선생님의 배양과 지도를 받으면서 성장되였다. 필자 역시 중학시절부터 이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면서 작품들을 발표하게 되였다. 이노래는 1977년 겨울 흑룡강성 해림현 북라고에서 고고성을 울렸다. 그때는 흑룡강조선문일보, 흘룡강조선민족출판사, 흑룡강조선말방송국등 세 단위가 륜번으로 작품창작모임을 자주 소집하였는바 그 시기가 흑룡강조선민족작품창작흥성기였다고 생각된다. 그번 모임에 성내의 이름있는 작곡가 리주일, 김양준, 리득송, 심상문등분들과 리삼월,리명재,박철준,강효삼,김동진,한병국등 시인들이 모두 모이였다. “흥개호어부의 노래”의 작곡자 림종원은 그때 20대의 음악애호가였는데 손풍금을 멋지게 다루었다. 시인들은 작사를 하느라, 작곡가들은 작곡을 하느라 모두들 바삐 보내고있었다. 그런데 남들은 몇수씩 써내는데 리삼월선생님은 오로지 한수의 가사만 손에 들고 속을 썩이고있었다. “이봐, 난 아무래도 가사는 될것같지 않소. 시보담 무척 어렵단 말이요.” 리삼월선생이 가사도 잘쓰고 작곡도 잘하는 리명재선생을 보고하는 소리였다. 그러면서 “흥개호어부의 노래”초고를 리명재선생한테 보이면서 이렇게 쓰면 되겠느냐 하면서 의견을 청취하는것이였다. 리명재역시 중학시절부터 “송화강”에 시를 발표하면서 리삼월선생의 지도를 받아온 학생였던것이다. 그런데 그토록 겸손하게 리명재선생한테 가르침을 청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선생님의 인품에 탄복하게 되였다. 아래사람이여도 허심하게 배우려는 선생님의 그 모습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흥개호어부의 노래”소리만 흘러나오면 머리에 선히 떠오른다. 선생님은 며칠동안 이 가사 한수만 붙들고 보고보고 또 보면서 반복적으로 다른 시인들의 의견을 청취하면서 이 가사를 완성하였다. 바로 이 가사에다 20대의 음악애호가 림종원이 곡을 붙혔는데 작사하신 리삼월선생님은 세상을 떠났어도 노래시는 남아 나의 가슴에 추억의 향기를 풍기고있다. 흥개호 파도소리 출렁출렁 들려오고 고기배 흰돛은 보기도 좋아라 노을이 물우에 붉게 비친다 그물을 늘여라 어서 늘여라 어야듸야 허기영차 고기배도 흥겨워서 파도에 실려 춤을 추누나 춤을 추누나.   갈매기 파도스쳐 춤을 추며 날아예고 어부들 힘내여 노를 저어라 파도를 헤치며 배는 달린다 그물을 당겨라 어서 당겨라 어야듸야 허기영차 만선의 기쁨싣고 고기배가 돌아오누나 돌아오누나.   이 가사의 내용을 보거나 형식을 보면 여느 가사와 별반 독특하다고 느껴지는것이 없다. 1절에서는 흥개호의 자연경물을 노래하면서 어부들의 흥겨운 심정을 표현하고있다.  2절에서도 여전히 흥개호의 자연경물과 어부들의 보람찬 로동장면, 로동의 희열을 표현하고있다. 형식을보면 직설적자연경물묘사로서 어부들의 보람찬 로동장면을 집접 혹은 간접으로 표현했을뿐이다. 언어도 아주 리해하기 쉬운 대중적언어이다. 그렇다면 선생은 무엇때문에 련며칠 이 가사 하나만 붙들고 보고보고 또 보면서 반복적으로 수개를 했을가? 그것도 중국조선족대표적시인의 호칭을 가지고있는 분이 말이다. 필자는 여기에 바로 진정한 시인으로서 예술작품을 보는 남다른 심중한 견해를 가지고있음을 알수있었다. 짤막한 한수의 가사라해도 그건 예술작품인것이다. 선생은 예술작품이라할진대 작품에 티끌하나 있어도 예술작품으로서는 손상이 가는 일이고 알고서는 그대로 넘길수 없는 문제로 본것이다. 하여 선생은 이 가사 한수를 쓰는데 넓은 범위에서부터 깊이 고려를 한것같다. 필자도 그번 회의에 참석하여 “대채식현을 건설하자”는 노래를 내놓았다. 처음에는 성방송에서 합창으로 방송되였는데 대채란 말이 사라지자 노래의 수명도 끊기고 말았다. 지금 그노래를 보면 정치에 얽매인 한시기의 선전품이라는것이 너무나 확연히 알린다.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정치투쟁과 계급투쟁의 수요로부터 창작된 노래가 불리우고있는 실례가있다. 정치적수요와 개인숭배의 수요에 창작된 그런 노래들이 한시기 연변을 전국, 나아가 세계에 널리 선전하고 알리는데 혁혁한 공적을 쌓긴해도 그런 노래들을 우리 민족의 전통적음악과 대조해보면 그 운률이 우리 민족의 언어억양과 음악의 운률에 부합되지 않고 순 정치적구호의 운률임을 어렵지않게 가려낼수있다. 그런 노래들은 순 구호로서 지금 들으면 그런 노래속에서 고깔을 쓰고 투쟁을 받던 친인들의 처참한 모습들이 고스란히 눈앞에 나타난다. 하여 그런 노래를 들을 때면 그런 노래들이 한시기 계급의 적들로 몰리운 친인들의 가슴을 찌르는 비수가 되였다는 격분에 듣기만 해도 칼날에 묻은 피를 보는듯 선뜻한 느낌이다. 그러니 문화운동기간에 남을 투쟁하는데 우쭐렁거리던 사람들이나 지금 그당시를 모르고있는 애숭이들이나 그런 구호식노래를 부르고있지 않느냐하는 느낌이다. 이런 각도에서 리삼월선생의 “흥개호어부의 노래” 이 가사를 보면 정치선전과 관련된 말마디는 한마디도 없다. 그때까지만 해도 문화운동이 끝난지 몇해 안되는 때여서 문학작품에서 정치의 통치적지위는 여전히 굳건했다고 볼수있었다. 그리고 의연히 생산대집체로동이여서 혁명을 틀어쥐고 생산을 촉진하자는 구호가 드높던 시기였다. 흥개호어부들 역시 여기에 례외가 아니였다. 나같이 문학은 정치를 떠날수 없다는 관점에 푹 젖은 작자들은 여전히 한수의 가사를 쓰는데도 정치의 통치적지위를 고려하지 않을수 없었다. 하여 “대채식현을 건설하자”는 당시의 정치적형세를 고려하여 노래를 창작했는데 아닌게아니라 형세가 변하자 노래도 즉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리삼월선생은 벌써 정치와 문학간의 관계에 대하여 명철한 관점을 가지고있은것이 분명하다. 하기에 이 가사에서 정치적말마디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것다. 하여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이 노래는 명곡으로서 사람들에게 애창되고있는것이다. 가사 한편을 써도 심중하게 대하는 선생님의 자세와 요새 하루저녁에 몇수의 시나 가사를 써내는 다산시인들이나 다산작곡가들에 비기면 필자는 실로 깊이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연변은 그 어느 문학잔르의 작품보다 노래가 대량 생산되는 고장이다. “생활안내신문”, ”해란강여울소리”, ”연변음악”, “연변방송국”등 정식간행물과 방송들, 그리고 그외에 비간행물들인 “민들레”,”아리랑”,”미인송”등 허다한 잡지에서 모두 창작되는 노래들을 싣고있다. 이렇게 놓고보면 연변을 노래공장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 많은 노래들이 대중속에 불리우는것은 극히 적다. 작품이란 작자의 피와 살로된 자식인데 많은 작자들이 자식이 태여나자 울음한번 터뜨리지 못한자식을  매장해버리는격과 다름없다. 비록 대중들에게 불리우지 못하더라도 읽어보면 독서의 향기라도 느낄수 있는 가요라면 그런대로 음미를 할수있겠는데 지금 창작품중에는 독서의 향기마저 풍기지 못하는 가사 곡들이 너무 많다는 견해다. 한편의 가사라도 시간의 촉박을 받지말고 오래오래 두고 음미하면서 완결된 예술품으로 만드는것 그것이 리삼월선생의 예술작품을 대하는 자세라고 필자는 보고있다. “흥개호어부의 노래” 이 가사는 알기쉬운 우리 말로 어부들의 순수한 로동환경과 로동정서 그리고 로동의 희열을 정치선전의 구애를 조금도 받지 않고 깨끗하게 쓰고있다. 그리고 가사의 운률도 아주 자연스럽다. 하여 나어린 작곡자 림종원은 가사를 접하자 마자 가사에 어울리는 선률이 어렵지 않게 머리에 떠올라 이 노래를 창작했던것이다. 해림현 북라고에서 가곡창작모임이 있은지도 어언 38년이나 흘렀다. 그번 모임에서 “룡강노래집” 첫기가 출생했고 련이어 5~6집이나 되는 “룡강노래집”이 출판되였어도 지금 사람들의 입에 불리워지는 노래는 몇수가 아니다. “흥개호어부의 노래”는 흠잡을수 없는 명곡으로 되여 연변의 어느 무도장에서나 자주 불리운다. 하여 오늘도 나는 춤추러 무도장으로 간다. 시인은 갔지만 시인이 남긴 노래는 생기발랄한 기백과 즐거움으로 듣는이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한다. 그럴때면 나는 선생님의 인자한 인품과 한수의 가사에도 그토록 심혈을 기울려 쓰시는 창작자세에 감격하군한다. 그리고 진정한 예술작품의 향기에 취해 즐거웠던 그 시절 창작생활을 추억해본다.
594    "로신론"을 알아보다... 댓글:  조회:4407  추천:0  2016-11-10
  20세기 20년대 조선의 로신연구와 량백화의 로신론(鲁迅论) --광복전 조선의 로신연구개황(1)   위대한 사상가이며 문학가인 로신은 20세기 20년대부터 조선에 알려지기 시작하여 한 시기 연구고조를일으켰고 그 맥이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광복전 조선에서의 로신연구는 시기와 연구자에 따라 서로 다른 측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본문은 광복전 조선에서의 로신연구를 중심으로 하면서 조선에서의 로신연구의 일단을 짚어보는데 목적을 둔다.    1.       량백화(梁白华)의 로신론과 《두발의 이야기》    광복전 조선에서 처음으로 로신을 알게 된 것은 20년대 초기에 중국의 문학혁명이 조선에 소개되면서부터이다. 고대한문에는 익숙하나 현대한문에는 아직 숙련치 못한 당시 조선문인들은 처음에 일본을 통해중국의 신문화운동과 문학혁명에 접하게 되였다.   조선에서 최초로 로신을 소개한 문장은 량백화의 번역으로 된 《호적(胡适)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문학혁명》이였다. 이것은 일본의 중국문학연구학자 아오끼 마사루(青木正儿)의 문장인데 1920년 11월부터 《개벽》지에 4기로 나누어 련재되였다.   로신을 소개할 때 이 문장은 《소설로 로신은 미래가 유(有)한 작가이니 그 와 여(如)한 것은일(一)박해광의 경포적 환각을 묘사하야 지어금(至于今) 중국소설가의 미도(未到)한 경지에 족(足)을 입(入)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은 로신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조선에 전해진 것으로 된다. 그뒤로 중국문학에 관계되는 문장이 속출되였는데 그런 문장들에서 로신이 간간 론의되고 있다.   20년대에 조선에서 가장 열심히 로신을 소개한 사람은 량백화(梁白华)이다. 량백화는 조선의 한학자(汉学者)로서 중국고전문학명작들을 연구, 번역한 동시에 중국신문학(新文学)에도 깊은 관심을 돌리였다. 1924년에 그는 《개벽》지 제 44호에 《반(反) 신문학의 출판물이 류행하는 중국문단의 기(奇)현상》이라는문장을 발표하였다. 이 문장에서 그는 신문학의 허울을 빌어 신문학을 반대하는 《사이비(似而非) 신문학자》들과 《속(俗) 신문학》의 작품들을 비난하고 있다. 뒤이어 그는 중국문단에서 존경을 받아야 할사람들은 《주수인(周树人-로신) 형제 몇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시류(时流)》에 좇지 않는다고 평가하고 있다.   량백화는 1929년에 《중국단편소설집》(개벽사)을 펴냈는데 자기가 번역한 로신의 소설 《두발의 이야기(头发的故事)》를 거기에 수록하였다. 이 소설에 대한 국내외 연구가들의 평가는 일치하지 않은데 중국의 리장지(李长之), 일본의 다께우찌 요시미(竹内好) 등 학자들은 실패작으로 보고 있다. (《竹内好全集》제1권 제88-89페지) 그러나 당시 조선문인들은 이 소설이 조선에 힘을 주었다고 인정하였다.  중국 신문학작품에 대한 이런 태도는 마치 로신이 일찍 일본 도꾜에서 문예지를 창간하기 위해 외국의 피압박민족의작품을 수집하면서 이런 작품들에는 《웨침과 반항》이 있다고 한 것과 같다. (로신:《남강북조집 ㆍ 나는 어떻게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가》)  봉건시대에 조선인 남자들은 거개가 긴 머리태를 드리우거나 머리를 얹고 다녔다. 그러나 문호를 개방하고 서방문명을 받아들이게 되자 애국문화운동의 선구자들은 상투와 머리태를 잘라버릴 것을 적극 제창하였다. 이런 시대적 움직임 속에서 조선왕조 26대 고종황제는 하는 수 없이 1895년에 전국에 단발령(断发令)을 내리였다. 이는 복고세력에 대한 한차례의 큰 충격이였다.   그러나 복고세력의 영향은 매우 커 20년대에 이르러서도 남자들의 상투와 머리태는 상당한 정도로 존속되여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로신의 《두발의 이야기》가 조선문인들의 공명을 불러일으켰다.  30년대에 정래동은 《두발의 이야기》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단발부단발(断发不断发) 문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일진회》 당시부터 최근까지 혹은 향촌에 있어서는 현금(现今)까지 가정 급(及) 일반사회에서 문제되였던만큼 중국의 그것과 공동한 정형을 볼 수 있어서 우리로서는 펵 흥미있는 작품들이다.》(《중국단편소설가 로신과 그의 작품》) 리륙사도 로신의 중요한 소설이라고 인정되는 소설을 9편만 렬거하였는데 그속에도 《두발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리륙사전집》 제11페지) 이로부터 《두발의 이야기》는 당시 조선문인들의 심목 중에 특수한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년대에 조선의 로신연구는 그다지 계통적인 것이 아니였고 신문, 잡지에서 간간 소개나 하는 정도였다. 작품 번역도 많았다고 할 수 없지만 그 사이 번역된 로신소설로는 《광인일기》, 《두발의 이야기》,《아Q정전》, 《그녀의 죽음을 슬퍼한다(伤逝)》 등으로 헤아려 볼 수 있다. (정래동:《중국단편소설가 로신과 그의 작품》) 그러나 많은 문인들은 중국 원작과 일본문 번역본을 통해 로신의 작품에 접할 수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으며 그들이 로신문학의 가치를 피상적이나마 리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김병활. 1997. 광복전 조선의 로신연구 개황. . 연변대학 조문학부 편. 심양. 료녕민족출판사.  PP.249] (후일 계속) 정래동(丁来东)의 로신론(1) -- 광복전 조선의 로신연구 개황(2)    20세기 30년대 초반에 조선에서의 로신연구는 상대적인 고조기를 맞이한다. 이는 일본의 사정과 비슷하다.(刘柏青:. 제183페지, 제188페지)  30년대에 비교적 계통적으로 로신을 소개한 연구가들은 정래동, 신언준, 리륙사를 들 수 있다.   정래동(丁来东)은 일찍 일본 도꾜대성중학을 거쳐 중국 북경민국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에는사 학예부장 등 직을 담임한 사람이다. 그는 장기간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중국현대문학을 연구하였고 만년에는 서울대학교 중국문학과 주임교수를 담임하기도 했다.   정래동은 조선에서 처음으로 로신 작품을 계통적으로 소개한 학자이다. 1931년에 그는 장편론문 을 에 20기로 나누어 련재하였는데 여기에서 로신의 생애와 함께, ,  등 작품집, 그리고 로신 작품의 예술적 특점이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어져 있어 로신관계 연구의 새로운 업적이라고 할만한 글로 인정되고 있다.   이 문장의 서두에서 저자는 라고 높이평가하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받게 된 것은 를 주었기 때문이다. 로신의 공적은   그러나 정래동은 이 문장에서 로신의 문학관을 전면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허점도 드러내고 있을뿐만아니라 문학과 혁명의 관계에 대한 로신의 견해도 오해하고 있었다. 정래동은 이 문장의 결론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정래동의 이런 관점을 이 문장의 부제 와 련관시켜 보면 그 사정이 더 분명해지는데 이는 중국혁명문학 론쟁에서 로신의공적을 부정하려는 경향에 대한 불만이였다고 추측해 볼 수도 있다.   이 문장은 또 소설과 산문시에 대한 분석 연구에만 치중하고 잡문은 별로 론하지 않고 있다. 이로부터 정래동이 당시에 로신의 잡문에 대한 대한 이해가 깊지 못하지 않았는가 하는 추측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로신의 사상발전에 대해서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따라서 일부 관점에서 편차를 가져왔다는 론리가 성립된다. 사실 로신잡문에 대한 홀시는 20-30년대 조선의 로신연구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한 결함이였는데 정래동의 경우에도 그러했다.   정래동의 이 론문은 매우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상해에 체류하고 있던 리경손(李庆孙)은 1931년 2월 말에 라는 문장을 에 2기로 나누어 발표하였다. 리경손은 정래동의 로신론을 읽은 후의 감수와 곁들어 당시 항간에서 떠들던 로신의 일상 생활에 대한에피소트들을 두루 쓰면서 로신에게는 새로운 창작이 없다는 것을 거듭 지적하고 있으며 로신이 에 참가한 것을 시답지 않다는 투로 가볍게 다루고 있다. 그리고는 결말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장)자평, (욱)달부, (곽)말약, 로신 등은 옛사람들이요, 그중 (곽)말약, 로신만이 재생하였으나 그보다도신인으로 문단을 움직이고 있는 이가 더 많음을 일반 중국문학연구인께 일러둔다.>  리경손은 장자평 숭배자이다. 그는 장자평의 장편소설 을 번역한 후 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바 리경손은 장자평을 로신보다 더 월등한 것으로 보았고 정래동의로신론에 대해서도 관점상 다소 별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정래동은 그 뒤에도 중국현대문학연구에 전력하면서 로신관계 론문을 거듭 펴냈다. 1932년에 그는 중국평론가 화간(华侃)의 문장 을 번역하였다. 이 문장은 소설창작에서 로신이 첫째, 소품문 창작에서는 주작인이 첫째, 로신이 버금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정래동은 에서 이론문은 지나간 중국문단을 총화함에 있어서 루락이 없고 편견이 없는 귀중한 문헌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조선  제2권 제4호)    [김병활. 1997. 광복전 조선의 로신연구개황.  연변대학 조문학부 편. 심양. 료녕민족출판사.  PP.249] (후일 계속)   정래동의 로신론(2) -- 광복전 조선의 로신연구 개황(3)    1934년 정래동은 《중국문학과 조선문학》이라는 문장을 발표하여 비교문학적 시각에서 중조 두 나라신문학(新文学)의 특점을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중국과 조선의 현대소설 개척자로는 각각로신과 리광수(李光洙)이다. 그들은 모두 일본에 류학갔고 일본문단을 통해 로씨야문학을 수용하였다.그런데 로신은 주로 체홉을 배웠고 리광수는 주로 똘스또이를 배웠으며 로신은 자연주의작품을, 리광수는 리상주의작품을 창작하게 되였다.   정래동은 조선의 개별적인 문인들이 일본의 로신연구 문장을 번역, 소개할 때 맹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데 대해서도 불만을 표하였다. 그는 일본의 《개조》지의 문예시평이 일본문판 《로신전집》을 소개할 때 로신작품을 《프로작품》이라고 한 것을 비난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로신은 3,4년전부터 맑스주의화한 것이 사실이다. …… 그전 작품 ‘납함’, ‘방황’ 등은 조금도 현재 맑스주의작품에 맞출조건이 없다. …… 로신의 ‘납함’, ‘방황’은 맑스주의에 들어맞을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 맑스주의자로전변하기 이전의 작품들이다.》 (《조선문학》 제2권 제1호) 이로부터 정래동은 로신을 중국 신문학의 개척자로 긍정하였지만 로신의 문학성과를 맑스주의와 련관시키는 데 대해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34년 3월에 정래동은 《중국 문예작품 중에 나타난 농촌의 변천》이라는 문장을 발표하였는데 거기에서 비교연구방법으로 로신의 《고향》과 파금(巴金)의 《환향(还乡)》(중국 《현대》지, 1933년)을비교, 분석하고 있다. 이 글에서 정래동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고향》과 《환향》은 모두 지식인이 자기의 고향에 돌아가 목격한 바를 묘사한 작품인데 《고향》은 소극적인 회억으로 농촌을 묘사했고 《환향》은 적극적으로 혁명에 가담한 농민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서 두 작가가 부동한 태도로 변해가는 농촌의 시재적 풍모를 관찰하고 있다고 정래동은 파악하고 있다. 《고향》 창작 시 로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였고 그에게는 아직도 허무주의경향이 있었으며 문학표현방식은 자연주의적 방법이였다. 반면에 파금은 원체 무정부주의자였으므로 창작상 흔히는 《격동적 사실주의》 방법을 사용하였다, (조선《중앙》 1934년 3월호)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정래동이 로신의 전기 창작방법을 자연주의라고 거듭 강조한 것인데 이는 20-30년대 조선의 로신연구에서 보여지는 독특한 견해의 하나이다. 20년대 조선의 문학가들에게 있어서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뚜렷한 것이 아니였다. 그들이 리해한 자연주의문학이란 《진실》을 추구하는 것, 다시 말하면 《현실을 폭로》하는 것이였다. 자연주의문학이 보여주는 현실은 대체로 일상생활의 암흑면과 인간성의 리면에 매장되여 있는 야수와 같은 성격들이였다. 주인공은 위대한 인물이거나 영웅인 것이 아니라 평범한 개인이거나 무지한 군중이였다. 묘사에 있어서는 과학적이며 순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으로 로신의 소설을 평가한 결과 그들은 로신의 창작방법은 자연주의라는 결론을 얻어냈다. 정래동은 로신소설의 창작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아Q정전’에 나타난 로신의 공로는 과학적 태도로써 중국 신해혁명 당시의 사회를 관찰하고 해부하였으며……당시 중국 국민성의 일면을 잘 표현하였다. 곧 문예상 술어를 쓴다면 중국문단에 자연주의를 수입한것이였다. 이것은 성방오(成仿吾) 씨가 《납함의 평론》에서 말한 것과 같이 로신이 일본에 류학할 당시에 일본문단에 성행하는 자연주의의 영향을 받았을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로신은 혁명 당시의 위인(伟人)들을 그리지 않고 농촌의 평범한 사람 즉 아Q 같은 사람을 그리고 또한 자기 리상한 사회나 사실을 그리지 않고 중국 어디나 있는 농촌 즉 미장(未庄)같은 곳을 배경으로 하며 인간대사를 쓰지 않고 인간사사(些事)인 아Q의 전승, 단발부단발(断发不断发) 등 일상 사실을 쓰는 것이 다른 자연주의자들이 범한 것과같이 병적 심리, 병적 인물을 그리게 된다.》(《중국단편소설가 로신과 그의 작품》) 그런데 사실상 로신은 일본 류학 시에 벌써 자연주의문학을 그닥 찬성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연주의를 배격한 작가 나쯔메 소우세끼(夏目漱石)의 작품을 즐겨 읽었다. (刘柏青《鲁迅与日本文学》 제 76페지)  여하튼 정래동은 조선에서 처음으로 전문적인 테마로 로신을 연구했고 그후 몇편의 론문에서도 로신이중국신문학에서 으뜸가는 우수한 작가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이는 그후 시기 조선에서의 로신연구에상당한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김병활. 1997. 광복전 조선의 로신연구개황. 《조선언어문학 론문집》 연변대학 조문학부 편. 심양. 료녕민족출판사.  PP.249] (후일 계속)   신언준(申彦俊)의 로신론 -- 광복전 조선의 로신연구 개황(4)   1934년 조선 《신동아》지 제4기에 신언준의 《중국의 대문호 로신 방문기》가 발표되였다. 이것은 20-30년대 조선의 로신연구에서 매우 돋보이는 문장이다. 신언준은 30년대 초기 조선 《동아일보》사 중국 주재 특파기자였다. 그는 일찍부터 로신을 숭배하면서 로신과 만나볼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가 상해에 있을때 로신은 국민당 당국의 체포령으로 하여 처지가 매우 위험하였다. 그러나 채원배(蔡元培)의 소개로 그는 1933년 5월 22일에 로신과 대면할 기회를 가지였다.   신언준은 로신이 자기와의 면회를 약속하는 친서를 공개하였는데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언준 선생, 편지를 받았습니다. 월요일(22일) 오후 2시에 우찌야마(内山) 서점에서 기다리오니 광림하시길 바랍니다. 문장에 관해서는 평소에 조선문단의 상황을 잘 모르기에 망설이고 있는데 아마 쓸 것 같지 못합니다.그러나 이 일을 그날에 면담할 수 있습니다. 이에 회답을 하옵니다. 로신 드림. 5월 19일》 신언준은 로신과 면담한 후 《중국의 대문호 로신 방문기》라는 글을 썼다. 《로신—중국이 낳은 ‘동양의 대문호!’ 그의 이름은 들은 지 오래다. 그러나 면회해 볼 기회는 없었다.》 《(그는) 마치 메스를 들고…… 환부를 해부하는 괴의생(怪医生) 같이 보이였다. …… 그의 해부는 랭혹무정하지만 그의 메스의예첨(锐尖)이 찌르는 곳은 아프면서도 통쾌를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알었다.》  신언준은 로신의 피신처에서 그의 검소한 살림살이를 보고 감탄해 마지 않았다. 로신의 옷차림은 《순전한 향촌 로농인(老农人)》이였고 침대, 이불, 그릇까지도 《중국 하층민의 생활 그대로이고 돈길 갈만한 값있는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의 생활은 전부가 프로레타리아의 모형이다.》 《(로신은) 중국유일의 최고봉의 수입을 가진 작가로서 그의 일신 생활이나 호화롭게 살기는 어렵지 않을 터인데 그의 생활은 향농(乡农)의 생활이다. 그의 수입은 문화운동 단체에 전부 기부한다고 한다.》 신언준은 이렇게 로신의 일생생활에 대해 쓰면서 그의 대공무사한 정신을 찬양하고 있다.   신언준은 《중국의 대문호 로신 방문기》에서 일문입답의 형식으로 로신이 문예사업에 종사한 동기, 《아Q정전》의 창작과정과 당시 중국문단의 현상태에 대한 담화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문: 선생은 문학이 위대한 힘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답: 그렇습니다. 대중을 깨우침(唤醒함)에 대한 가장 필요한 기술이오이다.  문: 남들이 선생을 인도주의라 하니 그럽니까?  답: 그러나 나는 톨스토이나 깐디같은 인도주의는 절대 반대합니다. 나는 전투를 주장합니다.      문: 중국문단의 대표적 프로작가는 누구인지요?  답: 정령(丁玲)녀사가 유일한 프로레타리아 작가지요. 나는 소자산계급의 출신이므로 프로레타리아작품을 짓지 못합니다. 나는 다만 좌익편의 한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로신이 여기에서 정령에 대해 이처럼 높은 평가를 하게 된 것은 당시 정령이 국민당 당국에 의해 피살되였다는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이 아닌가고 필자는 추측한다.  신언준과의 담화에서 로신은 중국 지식인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장개석(蒋介石)이 중국혁명을 령도하지 못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자산계급의 문인의 의식은 무용의 몽환이 되였다. 》 이에 신언준은 로신이 《자산계급의 문인의 몰락을 설파하고 프로문학의 발흥을 력설하여 좌익문호의 본색을 폭로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신언준은 조선에서 로신을 좌익작가로 점찍고 그 생활의 무산계급화 및 문화운동에서의 공적을 높이 평가한 문화인이다. 30년대 초반기의 조선에서 이처럼 로신을 높이 평가할 수 있은 것은 실로 경하할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병활. 1997. 광복전 조선의 로신연구개황.  연변대학 조문학부 편. 심양. 료녕민족출판사.  PP.249] (후일 계속) 리륙사(李陆史)의 로신론(1) --광복전 조선의 로신연구 개황(5)    20세기 30년대 조선의 로신연구에서 다른 하나의 중요한 론문은 리륙사(李陆史)의 (에서는 으로 고쳤음)이다. 이 문장은 로신이 서거된 4일 후인 1936년 10월 23일부터 에 5기로 나누어 련재되였다. 이 문장의 집필속도의 빠름과 내용의 광범성은 당시 조선의 로신연구에서 보기 드문 것이다.   리륙사(1904- 1944)의 본명은 리원록(李源禄)이며 리활(李活)이라고도 불렀다. 그는 1926년 이후 중국 북경에서 여러 해 공부하였다. 그는 조선 민족주의 혁명단체인 의렬단에서 반일투쟁에 종사하면서 중국사회 정치국세와 중국현대문학에 대한 연구에 집념하기도 했다. 그리고 시창작에 종사하여 시집 를 펴냈다.   리륙사의 자술에 의하면 1933년 6월 양행불(杨杏佛) 추도식에서 다른 사람의 소개로 로신을 만나보았다한다. 후에 그는 반일운동에 참가했다는 리유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여 투옥되였다가 1944년에 북경감옥에서 병으로 옥사하였다. 이런 사정으로 조선(한국)에서는 리륙사를 죽어도 굴하지 않은 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리륙사는 중국현대문학연구에서 주로 로신, 서지마(徐志摩)에 치중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특히 로신을숭배하였다. 때문에 그의 조카 리동영 교수는 70년대에 리륙사의 사상은 어느 정도로 사회주의 계통에 속하며 아마 그 자신이 한국의 로신이 되려고 한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 제 290페지)  에서 리륙사는 로신과 만났을 때의 정경과 그의 부고를 접했을 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쓰고 있다. 여기에서 로신에 대한 리륙사의 경모의 감정은 신언준보다 더 강렬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리륙사가 로신에 대해 이런 경모의 감정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로신연구는 경향성이 선명하다. 그는 로신을 , , 라고 찬양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그의선명한 경향성이 보여진다.   리륙사는 에서 을 중점적으로 분석하였는데 그 분석은 대체로 정래동, 신언준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리륙사는 를 분석하는 데 각별한 주의를 돌리면서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로신의 백화소설 가 발표된 후  는 말은 ,    을 분석하면서 리륙사는 또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였기 때문이였다. 리륙사는 아Q성격을 분석한 후 그 성격의 보편성을지적하면서 공을기와 같은 지식인들도 류랑농민 아Q와 일맥상통한다고 인정하고 있다. 뒤이어 그는 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해 1월에 리광수(李光洙)는 똘스또이의 와 같은 빛나는 사시적 작품을 창작하라고 호소하였다. 그러면서 반면적인 례로 로신을 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1936년 1월 6일)이러한 견해는 조선에서 보기 드문 것이다. 여기에서 리광수는 본의가 여하하든지간에 로신의 창작동기와 그 효과를 과소평가하고 있다. 그 반면에 리륙사는 의 현실적 의의를 적극적으로 평가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김병활. 1997. 광복전 조선의 로신연구개황.  연변대학 조문학부 편. 심양. 료녕민족출판사.  PP.249] (후일 계속)  리륙사의 로신론(2) -- 광복전 조선의 로신연구 개황(6)    리륙사는 남달리 로신 잡문을 중시했고 로신의 사상발전에 대한 연구에 중시를 돌렸다. 정래동은 로신의문학이 혁명과 별로 관계가 없다고 설명하려 했지만 리륙사는 로신이 국민성을 개조하고 봉건제도를 개변하려는 목적에서 문학활동을 시작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 조선문단에서 일으킨 예술과 정치에 관한 론쟁에 비추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로신에게 있어서는 예술은 정치의 노예가 아닐 뿐만 아니라 적어도 예술이 정치의 선구자인 동시에 혼동도 분립도 아닌 즉 우수한 작품, 진보적인 작품을 산출하는 데서 문호 로신의 위치가 높아갔고 아Q도 여기서 비로소 탄생하였으며 일세의 비평가들도 감히 그에게는 함부로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뿐더러 리륙사는 《이이집(而已集)》의 잡문을 리용하여 로신이진화론을 포기하고 《새로운 성장의 일단계》에 들어섰다고 찬양하고 있다.   중국 태양사의 비평가 전행촌(钱杏邨)이 로신을 공격한 데 반해 리륙사는 로신의 《상해문예일별》, 병신(茅盾의 필명- 필자 주)의 《’5.4’운동의 검토》 등 문장의 내용을 인용하여 로신을 부정하려는 견해를반박하고 있다.  동시에 리륙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국민당의 구테타로 하여 상해에 모여 온 《원기왕성한》 《젊은프로문학자》들이 극좌적인 테도로 로신을 공격할 때 로신은 《프로문학이란 어떤 것인가? 또는 어찌해야 될 것인가를 알리기 위하여 아버지 같은 애무로써 푸레하노프, 루나차르스키들의 문학론과 소비에트의 문예정책을 번역, 소개하여 중국 프로문학을 건설》하였다.   리륙사는 북양군벌 정부와 국민당 당국이 로신을 박해한 데 대해서도 통분해 마지않았다. 그는 로신의창작 생애가 너무 짧은 것을 한탄하면서 로신이 후기에 《작가로서의 화려한 생애는 종언을 고하지 않으면 안된》 원인은 반동정권이 악렬한 환경을 조성하여 로신으로 하여금 《손으로 쓰기보다는 발로 달아나기에 더 바쁘게》 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런 관점은 로신에 대해 편견을 가진 일부 사람들이 로신의 후기에 창작원천이 고갈되였다고 하는 의론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리륙사는 반일 투사였기에 전공자들처럼 로신연구에 종사할 수 없었다. 《로신 추도문》은 로신을 추모하기 위해 총망히 집필한 것이다. 그러므로 작자는 이 문장의 결말에서 《문호, 로신의 륜곽을 뚜렷이 그리지 못함을 참괴히 알며 붓을 놓기로 한다.》고 쓰고 있다. 그러고 보면 이 문장의 내용과 구성은 완전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어려운 상황하에서도 리륙사는 정확하게 로신의 작품을 해석하려 하였고 로신 생애와 사상에서 나타난 중요한 발전단계를 비교적 전면적으로 제시하려 하였는데 이것은 인정받아야 할 바이다.          [김병활. 1997. 광복전 조선의 로신연구개황.  연변대학 조문학부 편. 심양. 료녕민족출판사.  PP.249] (후일 계속) 카프 등 좌익작가들의 로신론 -- 광복전 조선의 로신연구 개황(7)    조선의 프로레타리아문학운동은 비교적 일찍 전개된 편인데 1925년 8월에 이미 《조선프로레타리아문학운동》(《카프》)이 창립되였다. 그러나 20-30년대에 조선의 좌익 문예비평가나 좌익작가들은 로신연구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이는 일본문단의 상황과 대체로 비슷하다.(刘柏青:《鲁迅与日本文学》) 단조선의 저명한 좌익작가 한설야(韩雪野)만은 1936년 8월에 쓴 《고향에 돌아와서》라는 문장에서 자기가 3부작 《탁류》, 중편소설 《귀향》, 장편소설 《황혼》을 쓸 때 로신의 《고향》에서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현대조선문학평론집》 제137페지)  로신의 명망이 조선 인민들의 마음 속에서 날로 높아지자 많은 진보적인 조선청년들이 로신과 만나볼 것을 갈망하였다. 신언준, 리륙사를 제외하고도 또 리유관, 김구경, 류수인 등 몇 사람들이 로신을 만나보았다. (李政文: 《鲁迅在朝鲜》 ) 이밖에 중국 《좌련》 회원인 조선사람 김담연도 왕지지 등 사람들을 통하여 로신과 련락을 맺었다. (두원명:《외국에서 본 장천익 작품》, 《新文学史料》 1982년 제3기) 이런 사람들은 부동한 정도로 조선인민들에게 로신을 소개하였다.  30년대 말부터 일본이 패전하고 투항하기까지 조선은 가장 암흑한 시기였다. 당시 일곱 가지 로신문집이금서로 인정되였다.(《일제 금서 33권》 신동아사) 그리고 리륙사와 같은 로신연구자들이 체포, 투옥되였기에 한 시기 고조에 이르렀던 로신연구도 정지되고 말았다. 광복 후에야 로신연구는 새로운 모습으로 맥이 이어지고 있는데 이에 대한 론의는 본문의 범위가 아니므로 략하기로 한다.    요컨대 광복전 조선의 로신연구는 비교적 일찍 시작되였지만 20년대에는 단편적인 평론에 그쳤고 계통성이 결여한 사정이다. 30년대 초반기에 이르러 로신연구는 상대적으로 열을 올리고 있는데 그 주요 연구자들로는 학문적 립장에서 다각적으로 로신을 다룬 정래동이 있는가 하면 경모의 정으로 로신의 위대한공적과 빛나는 인격을 열정적으로 소개한 신언준, 리륙사 등도 있다. 그들에 의해 20-30년대 조선의 로신연구는 학문연구의 차원에 진입하였고 그후 각 시기의 로신연구의 기반과 터전이 마련되였다.    [김병활. 1997. 광복전 조선의 로신연구개황. 《조선언어문학 론문집》 연변대학 조문학부 편. 심양. 료녕민족출판사.  PP.249]
593    로신을 욕한 시인이 "로신문학상" 못수상한다?... 수상했다!... 댓글:  조회:4012  추천:0  2016-11-10
  로신을 욕한 ‘음란시인’이 ‘로신문학상’ 수상했다는 론쟁(2)   김병활     최근 (이미 몇년전) 중국에서 권위성을 띤 ‘로신문학상’과 ‘모순문학상’ 수상자와 수상 작품들을 놓고 많은 의론이 생기였다. 이에 선전부의 책임자는 문학상 수상자에 대한 의론이 많은데 이에 습관되여야 한다고 지시했다 한다.   본문에서는 먼저 금년 상반년에 있은 ‘로신문학상’ 수상자 우견(于坚)에 대해 견해가 대립되는 글 두 편을 번역, 소개하기로 한다.  1. 진료(陈辽) (생략)  2. 송세안(宋世安)     ‘대자보’처럼 우견이를 포격하는 글들을 두루 읽어 보았다. 글쓴이들은 ‘로신문학상’ 수호자의 자태로 나서서 우견이가 로신문학상을 수상할 자격이 없다는 리유를 주로 세가지로 들고 있다. 첫째, 우견이는 로신을 ‘악독하게 욕하였기에’ 인격적으로 자격이 없다는 것; 둘째, 우견의 수상 시집 ‘오직 바다만이 막처럼 드넓어라’는 ‘더러운 시집(脏本)’이기에 텍스트만 보더라도 자격이 없다는 것; 셋째, 우견이 평심 과정에 약은 수를 썼기에 방법상 자격이 없다는 것. 만약 많은 호사자들이 이처럼 겉으로는 립장이 바르고 견해가 확고한 글들을 대충 읽어보면  아주 쉽게 오도될수 있다. 심지어 급급히 분노를 표시할것이다. 나는 이런 편협적인 글들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첫째, 우견이 일찍 로신을 ‘악독하게 욕하였기에’ 로신문학상을 수상할수 없다는 견해는 아주 가소롭고 반박할 여지도 없다. ‘중국에서 최고 영예를 자랑하는 문학대상’으로 표방하는 문학상을 텍스트로 우렬을 론하지 않고 작자와 피 명명자와 외부 관계에서 출발할수 있는가? 물론 이는 본말이 전도되고 억지로 감투를 씌우는 웃음거리에 불과하다. 그럼 우견이 어떻게 로신을 ‘악독하게 욕하였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자료에 의하면 이 말은 (‘북경문학’1998년 제10기)에서 나온 말인데 질문자는 작가 주문이다. 질문은 ‘당신은 로신을 자신의 창작 본보기로 생각합니까? 당신은 사상적 권위인 로신이 당대(현시대) 중국문학에 지도적 의의가 있다고 봅니까?’이다. 이에 우견의 답장 전문은 다음과 같다. “나는 젊었을 때 그의 책을 읽어보았고 인간적으로 그의 영향을 받았었다. 그러나 후에 이 도사가 ‘오직 외국의 책만 일고 중국 책은 읽지 말라’든지, ‘5천년에 사람 잡아 먹는것만 보아왔다’든지 하는 따위의 말들을 생각하고 나는 그가 바로 ‘악취풍기는 좃같은 도사’이고 ‘후대를 망친다!’고 느꼈다.” 이른바 ‘악독하게 욕하였다’는것은 사실 진실한 말이다. 이 말은 기실 로신이 에서 한 말을 원래대로 차용한 것이다. (중략) 바로 우견의 이 말이 신격화된 로신의 발뒤축에 서있는 딴 심보를 품은 자들에게 일부 구절만 선택되여 우견이 로신을 악독하게 욕하였다고 한 것이다. 사실을 따지고 보면 이것은 서로 다른 차원의 견해이다. 기실 우견이 이 ‘악독한 욕설’를 발표한것은 로신에 대한 불경이 아니라 반대로 로신선생의 정신을 따른것이다.   둘째, 우견이 수상한 시집 ‘오직 바다만이 막처럼 드넓어라’에 어떤 시들이 수록되였는지 나는 읽어보지 못했기에 이 점에서는 발언권이 없다. 그러나 포격 문장들에서는 ‘세퍼드’,‘성욕’,‘누른것과 흰것’등 시에서 성욕, 오나니를 쓰고 있다고 한 뒤에 로신문학상 평심위원인 사면(谢冕)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고 있다: “우견이가 많은 시를 썼는데 어떤 것들은 사람들의 호감을 사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신청한 시집은 그래도 ‘깨끗한 시집(洁本)’이라고 할수 있다.” 론자는 이 말을 인용하면서 다시 우견의 시집 ‘오직 바다만이 막처럼 드넓어라’는 확실히 ‘더러운 시집’이라고 결론내리고 있다. 이런 론증 방식은 아주 재미있다고 본다. 만약 이런 론쟁이 시가는 무엇을 써야하고 어떻게 써야하는가에 대해 정확히 인도한다면 아마도 괜찮은 명제로 될것이지만 가석하게도 론쟁의 목적은 한 사람을 타도하고 줄곧 시가를 열심히 창작해온 사람을 타도하려는 동기와 수단이 아닌가를 의심케 한다. (중략)  소설에서 성애를 많은 지면을 할애해 묘사하고 산문, 수필에서 섬세하게 이성을 련모하는 쓰고 잡문에서 색정과 성애에 대해 자유롭게 쓸수 있는데 왜 시가는 쓸수 없는가? (중략) 한걸음 물러서서 보면 한 우수한 시인이 평생 시가를 쓰다보면 어쨌든 그중 일부분이 , 심지어 대부분이 저렬한 시, 혹은 실패한 시, 탐색 과정중의 중절(流产)된 시로 될수 있다. 그러나 오직 한수의 시가 후세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후세에 류전된다면 그는 곧 시인이고 우수한 시인이다. 이런 시인들은 평생 평온하게 글을 쓰고 아무런 흠집도 없는 글을 쓰는 사람보다 훨씬 낫다.   마지막으로, 론자들은 인신공격을 하는 수단으로 우견이 평심 과정에 약은 수를 썼다고 한다. 나는 이 견해가 어떻게 나왔는지, 관련 증거가 있는지 모르겠다. 만약 골목 소식을 얻어듣고 크게 떠들거나 심지어 남을 타도하려는 개인 목적을 위해 제마음대로 날조를 하는것이라면 아주 책임지지 못할 행위이다.(중략) 만약 우견이 확실히 관계를 리용하여 수상하였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 ‘중국에서 최고 영예를 자랑하는 문학대상’을 힘겹게 입씨름을 하면서 수호할 가치가 있겠는지?   우견이가 로신문학상을 수상한 것이 왜 안 되느냐? 로신문학상은 1986년에 설립되여 1997년에 처음 평심을 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모두 네차례 진행했다. 매차에 모두 시가상이 있었는데 내가 통계를 해보니 모두 23명이 수상하였다. 그중에는 평범하고 무능한 사람이 적지 않다. 이번에 우견과 함께 수상한 네사람 중에서 우견은 가장 수상 자격이 있는 사람 중의 한사람이다. 물론 이런 견해는 내가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시가 감상 심도와 심미관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는 모든 문학상이 평심위원들의 심미관의 막대한 영향을 받는것과 같다. 수상했다해서 꼭 우수한 사람이 아닐것이다. 따라서 수상하지 못한 사람들이 반대로 우수할수 있다. 그저 그렇고 그런것뿐이다.  2008.3.20                          
592    로신과 녀인들 댓글:  조회:4209  추천:0  2016-11-10
                   로신 주변의 녀인들        --문화급변시기에 로신의 애정생활에서 나타난 문화충돌                                              김병활   1. 로신은 신이 아니라 속세의 인간이였다.     1936년 10월, 로신이 세상을 떴을 때 령구 우에는 이라는 만자를 쓴 천이 덮여 있었다. 모택동은 로신을 매우 높이 평가하면서 그를 라고 지적하였다. 모택동은 만년에도 로신의 잡문을 읽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사실 지난날 여러 가지 원인으로 로신을 너무 신격화하여 경모하고 숭배하였기에 보통사람들은 로신에게 접근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림표, 강청 일당은 시기에 로신을 신격화하고 로신의 을 자기들의 정치적 야심에 리용하여 자기들의 를 박해하고 제거해 버렸다. 이리하여 로신과 론쟁이 있었거나 그에게서 비판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 례를 들면 강청이 되려하는데 주양이 시답지 않아하자 로신이 1930년대에 쓴 잡문에서 라고 풍자한 말을 빌어 주양과 그의 동료들을 타격하였다. 그 결과 로신은 아무런 인정미도 없는 신과 같은 무서운 존재로 외곡되였다. 기실 로신은 보통인간들이 갖고 있는 희노애락을 다 갖고 있는데 이것을 알게되면 우리는 로신에게 접근하기 쉬울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우상을 신격화하기 좋아한다. 하지만 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우상화, 신격화에 따른 부작용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로신을 대함에 있어서도 그가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을 충분히 긍정하는 동시에 그도 일상생활에서는 우리와 별다를 바 없는 보통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런 인식 방법 중의 하나가 로신의 애정생활을 리해하는 것이다.   우상화, 신격화 시기에 로신에게서 허물이 될수 있는 부분은 모두 감춰버리려고 애썼다. 례컨대 지난 시기 우리는 허광평이 로신의 본처인 줄로만 알았을 뿐, 사실 법률상에서는 주안이 본처이고 허광평은 여론의 시비가 생길 소지가 있는 라는 것은 누구도 말하지 못했다. 물론 우리는 그 시대에 로신이 그런 길을 택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대해 충분히 리해해야 한다. 본문에서는 로신의 곡절적인 애정과 혼인 생활을 통해 봉건사회로부터 근대사회, 현대사회에로 과도하는 시기에 로신에게서 표출된 문화충돌과 인간성을 고찰해보려고 한다.   2. 로신의 위대한 업적     로신의 본명는 주장수인데 후에 남경수사학당에 입학할때 주수인으로 고쳤다. 그는 1881년에 절강성 소흥의 한 명문대가에서 태여났다. 그의 조부 주복청(주개부)은 북경에서 관리로 있다가 고향에 돌아왔을 때 과거시험 회뢰사건에 걸려들었다.   이 일로 로신의 아버지는 과거를 보아 출세하려는 희망이 끊어졌고 또 화병으로 페병에 걸려 앓게되였다. 가산을 탕진한 로신의 집에서는 하는수 없이 골동품을 팔고 옷견지들을 전당잡히면서 아버지의 병치료를 하였다. 그때 장남인 로신이 전당포로 드나들었는데 명문가족의 큰 도련님이였던 그는 일락천장하여 전당포주인의 랭대와 멸시를 받으면서 세상의 랭혹함을 뼈에 사무치게 느끼였다. 로신의 아버지의 병은 당시에 불치의 병으로 인정되였던 페결핵인데 명의로 자처한 중의(中醫)들은 자기들의 도끼의사와 같은 무능함을 인정하기 싫어 언제나 괴상한 약방문을 내놓았고 그것을 구하지 못하면 가족의 성의가 없다고 나무라기 일수였다. 례를 들면 약방문에는 3년 서리맞은 사탕수수그루, 겨울날에 호수바닥에서 채집한 갈대뿌리, 제일 처음 교배했던 귀뚜라미 한 쌍... 등인데 마치 봉건사회에서 녀자가 정조를 잃으면 죽을 죄를 진것처럼 귀뚜라미도 정조를 잃으면 약재에 들어갈 자격도 없는 듯 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뜬후 로신은 자신의 전도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는 과거시험을 보아 관리가 되는 길을 포기하였고 지방 토호렬신의 막료가 되거나 장사를 하여 돈을 버는 일도 하기 싫었다. 그는 별다른 세상과 접촉하면서 남들이 걸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길을 탐색해보려 하였다. 가정경제가 파산된 상황에서 그는 어머니가 준 단돈 8원을 가지고 등록금을 면제하는 남경수사학당(해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훌륭한 남자는 병사로 되지 않는다는 당시의 관습도 아랑곳하지 않고 로신은 등록금을 내지 않는 이 사관학교에 적을 두고 서방에서 들어온 새로운 학문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해군을 양성하는 이 학교는 매우 보수적이였는데 수영장에서 학생 둘이 익사하자 귀신을 노엽혔다고 야단치며 수영장을 메우고 그 우에 절당을 짓고 향을 피우며 신명에게 빌었다. 이에 실망한 로신은 남경륙사학당(륙군 사관학교)에 적을 옮겼고 졸업시에는 우수한 성적으로 일본 출국류학 시험에 합격하여 일본류학을 떠나게 되었다.    일본에서 로신은 만청왕조를 반대하는 광복회 등 혁명파와 접촉하였고 만청왕조신민(臣民)의 상징인 긴 머리태를 잘라버렸다. 그후 그는 중국 류학생들이 많은 도쿄의 학교를 피해 센따이 의학전문학교(지금의 동북대학)에 입학하였다. 그 학교에서 로신은 후지노선생과 같은 훌륭한 교수를 만나 학업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으나 중국인을 기시하는 일본인 학생들의 도전도 받았다. 로신의 시험성적이 중간층에 속하자 일부 일본인학생들은 한 중국학생이 어떻게 급제를 할수 있느냐고 의심하면서 후지노선생이 시험문제를 알려주었기 때문이라고 억측하였다.   또 한번은 수업이 끌날 무렵 남은 시간에 국가정세를 홍보하는 환등영화를 돌렸는데 일본군이 대련에서 로씨야군을 전승한후 로씨야 정탐이라고 하는 중국인을 사형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때 일본인 학생들은 만세를 부르며 야단법석을 떨었지만 로신은 환등에서 자기의 동포를 죽이는 장면을 아무런 표정도 없이 구경하는 건장한 중국인 간객(看客)들을 보고 쇼크를 받았다. 로신은 중국 사람들에게 결핍한 것은 몸에 생긴 병이 아니라 령혼 속에 생긴 병이라고 인정하고 무지한 군중들을 계몽시키기 위해 의학을 버리고 문학에 종사하기로 하였다.   1909년에 로신은 역시 일본에서 류학하면서 일본인 안해까지 얻은 둘째동생 주작인의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약 7년간의 일본 류학생활을 마치고 절강에 돌아와 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후 남경 국민정부의 교육부에서 첨사로 있었고 남경정부가 북경으로 옮겨가자 따라서 북경에 갔다. 북경에서 로신은 교육부의 일을 보는 한편 고전문학을 정리하여 중국에서 처음으로 계통적인 현대판 를 써냈다. 그리고 북경대학, 북경녀자사범대학 등 대학교에서 중국소설사와 문예리론을 강의하였다. 운동전야에 잡지 편집부의 성원이며 북경대학 교수인 전현동이 찾아와 안에서 혼곤히 잠들면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깨우쳐야한다는 도리를 력설하자 신해혁명의 실패로 인해 방황하고 고민하고 있던 로신은 거기에 동조해 중국현대문학의 첫 작품으로 인정되는 를 창작하고 발표하였다.    는 한 미치광이의 입을 빌어 중국 력사책에 씌여있는 이른바 이란 바로 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자기를 포함한 기성세대는 모두 를 먹은 사람들인데 아직 를 먹지 않은 고 웨쳤다.   그후부터 로신은 한번 들었던 필을 놓을수 없어 륙속 소설을 창작하였는데 그중에서 은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명작으로 되었다. 이리하여 서방의 , 동방의 는 이미 세계문학에서 손꼽는 두 전형형상으로 되었다. 로신은 일생동안 소설집 세권을 출판하였는데 , , 등이다. 그리고 산문집, 산문시집 , 잡문집 16권, 서신집 , 번역작품 등 수많은 문학유산을 남겼다. 그중 는 상징주의수법으로 자신의 심령 심처의 고민을 표현한 작품들로서 예술성이 가장 높다고 평가받고 있다. 잡문은 로신의 문학에서 홀시할수 없는 분야인데 중국현대문화의 백과전서라고 일컸는다. 로신의 잡문은 리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지만 만약 로신의 잡문을 모르면 로신을 모른다고들 말한다. 로신이 이런 업적을 이룰수 있은 것은 많은 요소가 작용했겠지만 연구가들의 일반적인 견해를 떠나 그 자신이 체험한 굴곡적이고 복잡한 애정과 혼인 생활이 불합리한 사회를 파헤치려는 동기로 되었을 가능성도 어느 정도 있다고 본다.      3. 로신 주변의 녀인들, 그리고 곡절 많은 애정, 혼인 생활     로신은 어렸을때부터 외삼촌의 딸 금고(琴姑)와 죽마고우였다. 사춘기에 들어선 후에도 둘은 아주 친한 사이로 되었다. 로신이 남경으로 공부하러갈 때 금고가 바래주었는데 그때 금고는 로신에게 당시 문인들에게는 귀중한 소지품이였던 만년필을 선물로 주면서 애모의 정을 암시하였다. 지난 날 중국에서는 고종사촌과 이종사촌 사이에 결혼할수 있었는데 로신의 어머니도 자기의 외조카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고 두집 사이에는 언약이 있었다. 그런데 사주팔자를 보니 금고가 였는데 남자가 양띠이면 당당한 사회인으로 될수 있지만 녀자가 양띠이면 남편을 먼저 죽이는 살이라고 인정되였다. 이리하여 금고의 고모인 로신의 어머니는 아들의 장래가 근심되여 오래동안 정식으로 청혼을 하지 않았다. 이에 외삼촌은 화가 나서 딸 금고를 다른 남자한테 시집보냈다. 금고는 영문을 모른채 마음없는 남자한테 시집가서 얼마 후 우울증으로 앓다가 죽고 말았다. 림종전에 금고는 왜서 고모가 다 대답한 혼사를 파기했는지 몰라 원통하다고 했다 한다. 사후에야 이 일을 알게 된 로신은 매우 애통해했다 한다.   로신이 일본에 류학간후 로신의 어머니는 주안(朱安)이라는 처녀를 며느리감으로 물색하였다. 그런데 22세나는 주안은 로신보다 3살 이상이였고 체형이나 용모가 채 성숙되지 못한 감(발육이 미숙한 감)을 주었고 일자무식인데다가 전족까지 한 보수적인 녀성이였다. 이에 효자인 로신도 어머니의 의사를 거역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너무 재촉하면 주안이 전족을 풀고 글공부를 해야한다는 조건부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주안이 로신의 요구를 들어줄리 없었다. 하지만 로신의 동의 없이 약혼까지 다 해놓은 로신의 어머니는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이 혼약을 물릴수 없었다. 그러던 중 로신이 일본에서 일본 녀자와 결혼하여 아이까지 몇을 낳았다는 헛소문이 고향에 전지해지자 로신의 어머니는 더는 참을수 없어 모친의 병이 위독하니 급히 돌아오라는 급전을 보냈다.   맏아들이고 효자인 로신은 백사불구하고 고향집에 돌아와보니 집에서는 결혼준비를 다해놓고 신랑인 로신이 오기만 기다렸다. 그때 친척들은 신파인물인 로신이 절때 이 혼인을 받아들이지 않을것이며 혹시 받아들인다해도 구식혼례를 극구 반대할것이라고 추측하였다.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비양거리던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로신은 뜻밖에 일언반구도 없이 꼭두각시연극을 노는 듯이 가족에서 시키는대로 구식혼례를 치렀다. 로신은 가짜 머리태를 달고 신랑이 되였고 주안은 붉은 비단천으로 머리를 덮고 신부가 되었다.   로신 연구가들은 그때 로신의 심리상태를 분석하면서 왜 일본에서 류학하고 긴 머리태까지 자른 신파인물 로신이 그토록 순순히 어머니가 마련한 강제혼인에 순종하였는가를 파고들었다. 그 원인의 하나는 중국 전통문화의 영향이 어려서부터 유가적 교육을 받은 로신에게 여전히 작용하였기에 사회적으로 국가정치와 낡은 문화를 비판할때는 용맹한 투사였지만 가정에서는 여전히 유가전통을 버리지 못하고 효자가 되여 어머니의 령을 거절 못하였다는 것이다. 로신의 말대로 하면 그 자신은 여전히 과도적인물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것이말로 로신 식의 복수방법이라는 것이다. 소설 에서 일찍 일본에 류학하고 돌아와 신파 인물로 되였던 위련수가 할머니의 장례를 전통적인 구식으로 치르는것으로 말썽을 일으켜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삼자는 일가친척들에게 복수한것과 같은 것이다. 중 산문시 에서는 두 남녀가 알몸으로 결투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결투중에 구경군들이 몰려오자 두 남녀는 구경군들에게 구경거리를 제공하지 않는 방식으로 복수하기 위해 그냥 선채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하면 로신이 으로부터 시작해서 평생 가장 미워한 사람들이 바로 남의 불행을 재미있는 구경거리로 삼는 간객(看客)들이였다. 때문에 이런 간객들에게 구경거리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전통적 방식으로 혼례식을 치렀다는 것이다.    혼례식 날 저녁 신방에 들어간 로신은 장밤 울었다한다. 그에게 조카벌이 되는 한 녀인의 회억에 의하면 이틑날 아침 신방에서 나온 로신의 얼굴은 온통 시퍼렇게 물들었다고 한다. 그것은 너무 울어 눈물이 베개를 적시여 베개물감이 얼굴을 시퍼렇게 물들였다는것이다. 그후 로신은 다시는 신방에 들어가지 않았고 나흘후에는 동생 주작인을 데리고 일본에 가버리고 말았다.   로신은 에서 자신의 고통스러운 심정을 한 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썼다. 로신의 이 피타는 절규를 그의 혼인과 련계시켜보면 그럴만한 리유가 있다고 할수 있겠다.         일본에서 귀국하고 사범학교와 교육부에 취직한후 20여년 동안 로신은 한번도 주안과 한방에서 자지않았다. 장손을 안아보고 싶은 로신의 어머니는 주안을 보고 며느리가 아기를 낳을줄 모른다고 푸념질하였는데 여태껏 순종하기만 하던 주안은 크게 반발하여 라고 말하였다 한다. 로신은 자기집에 찾아온 손님들에게 주안을 소개할때면 이 사람은 어머니의 며느리이며 어머니가 자기에게 준 선물일 뿐이라고 롱조로 말하군 하였다.   후일에 주작인도 북경에 돌아와 로신의 알선으로 북경대학 교수로 되었는데 맏형인 로신은 아버지역할을 대신하느라고 자기 돈으로 북경 골목에 집을 짓고 3형제가 한 울안에서 살았다. 그런데 가계는 일자무식인 주안이 맡아볼수 없어 둘째며느리인 주작인의 일본인 안해 하다노부꼬(羽田信子)가 맡아하였다. 주작인의 안해는 원래 일본에서 로신 형제가 투숙한 하숙집의 비천한 시녀였으나 중국에 온후 마치 귀부인인양 돈을 물쓰듯하였다. 로신은 라고 근심되여 주작인에게 충고를 주었다. 이에 앙심을 먹은 하다노부꼬는 로신을 모해할 궤계를 꾸미였다. 즉 남편 주작인이 없는 사이에 로신이 자기가 집에서 목욕할 때 희롱했다고 남편한테 고자질하였다. 사리에 아둔한 주작인은 시비곡직을 가리지 않고 아버지처럼 자기를 돌봐준 로신을 때리고 집에서 내쫓아버렸다. 자기가 번 돈으로 지은 집에서 일본인 제수의 음모에 걸려 동생에게 매를 맞고 쫓겨난 로신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후일 그는 에 수록한 소설 에서 연지오자(宴之敖者)라고 부르는 협객이 정의를 위해 목숨 바쳐 복수하는 이야기를 다루었는데 이 라는 이름자를 해체해서 풀이하면 바로 이라는 뜻이다.   주작인보다 체소하고 힘이 약한 로신은 할수 없이 집을 떠나 세집에 이사갔는데 이 기회에 주안더러 친정집에 가라고 요구하였다. 이는 사실상 리혼을 의미하는것이였다. 리혼은 자본주의사회 이후의 개념으로서 주안으로서는 오로지 구중국에서 전해 온 휴(休), 출(出), 즉 남편이 일방적으로 안해를 내쫓는다는 뜻으로 리해할수 밖에 없었다. 아무튼 눈치를 알아차린 주안은 고 를 하고 로신의 집에서 죽어도 나가려 하지 않았다. 로신은 주안을 강박적으로 친정집에 돌려보내면 구식 녀자인 주안이 자살할런지도 모른다고 근심되였고 또 주안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으며 그는 단지 이 사회의 희생품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한창 정력적인 나이에 홀몸으로 산다는 것은 로신에게 있어서 실로 참기 어려운 일이였다. 이런 성고민에서 해탈하기 위해 로신은 자신에게 성압박(자신에 대한 성학대)을 실시하였다. 추위로 성욕을 억제하기 위해 그는 북방의 추운 겨울에도 홑바지를 입고 다녔고 잘 때에도 엷은 이불을 덮었고 난로를 적게 피워 집안 온도는 늘 령하 3-4도였다 한다. 20여년의 이런 고행승같은 생활로 하여 로신의 심리는 어느 정도 괴벽해졌는바 늘 고독하고 우울하였고 남을 잘 의심하고 때로는 성격이 과격하였다. 이는 부유한 가정에서 걱정없이 자란 곽말약의 호방한 성격과는 완전히 달랐다.   로신이 북경에 있을 때 녀 제자 몇이 로신의 생활 속에 뛰여들었다. 먼저 주작인의 친구의 녀동생 허선소(許羨蘇)가 북경에서 공부할 때 주씨네 집에서 하숙하면서 로신을 알게 되였다. 이때 허흠소는 마음속으로 로신을 사모했는데 로신의 겨울옷이 엷은 것을 보고 털내의를 떠주기도 했다. 로신도 허선소의 이런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였으나 유가적 륜리에 속박되여 서로 진심을 표달하지 못하였다. 로신에게 미련을 둔 허흠소는 줄곧 결혼을 하지 않고 있다가 로신과 허광평이 결합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단념하였다.   허광평(許廣平)은 북경녀자사범대학 학생인데 아주 대담하고 활약적인 학생회 간부였다. 그는 로신의 강의를 들은 후부터 로신의 집으로 자주 놀러다녔다. 허광평은 원래 북경대학 남학생인 리소휘와 련애하였는데 허광평이 성홍렬로 입원하였을 때 간호를 하다가 전염되여 병사하고 말았다. 이에 심리적 타격을 받은 허광평은 련애문제를 별로 념두에 두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로신의 가정생활이 그토록 비정상적인 것을 알고 로신을 동정하기 시작하였다. 1924년 북경녀자사범대학에서는 교장 양음유(전종서의 부인 양강의 고모)를 축출하는 학생운동이 일어났다. 양음유가 허광평을 포함한 학생회 간부들을 퇴학주자 로신은 교수들을 조직하여 교육부에 항의서를 제출하는 한편 작은 골목에 세집을 내고 수업을 견지하였다. 후에 이 학생운동이 승리하였는데 그 과정에 허광평은 로신과 더 감정이 깊어졌고 둘 사이에는 편지가 오갔다. 이런 편지들은 후에 에 수록되였다.   이때 고장홍(高长虹, 광표사의 책임자)이라는 로신의 제자도 로신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는 로신의 집에서 허광평과 만난후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어느 한번 허광평이 그가 쓴 책을 읽어 보자고 하였고 이로 인해 둘 사이에 편지가 오갔다. 이에 고장홍은 허광평이 자기를 사모한다고 오해하고 짝사랑을 하였다. 그런데 허광평이 로신과 련애한다는 소문이 돌자 고장홍은 미칠 듯이 로신을 미워하면서 신문에 시를 발표하여 자신과 허광평은 해와 달처럼 사이좋게 련애하는데 로신이라는 검은 하늘이 해와 달을 덮어버렸다고 야단쳤다. 로신의 중의 에서는 스승을 배반한 예(羿)의 제자 봉몽이 스승인 예가 자기를 방해한다고 암전을 쏘아 죽이려 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기실 고장홍이 스승인 로신을 공격한 것을 메타포 기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허광평이 주동적으로 로신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을 쏘면서 사랑의 신호를 보냈지만 로신은 주저하였다. 우선 자기는 주안과 형식적이나마 결혼한 사람이고 또 허광평과는 나이 차이가 많기에 자칫하면 허광평의 전도를 망칠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허광평의 끈질긴 추구에 승복하고만 로신은 허광평이 로신의 손을 잡자 라고 감격하여 말하였다. 이리하여 자신은 평생 사랑을 할수 없는 사람이라고 비관했던 로신은 허광평의 진공 앞에서 가 되었고 노예생활과 같은 주안과의 관계에서 해탈되여 참된 인간다운 생활을 할수 있게 되였다.   로신은 허광평과 새 가정을 이루기 위해 북경을 떠나 남방으로 이동하여 경제적 기초를 마련하려고 하였다. 둘은 2년간 갈라져 있다가 다시 만나기를 약속하였는데 로신은 하문대학에 가서 교편을 잡고 허광평은 광주 중산대학에 갔다. 로신의 애정관에서 특기할 것은 리상적인 애정은 경제적기초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로신은 잡문 에서 노라가 용감하게 가출하였지만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없기에 백기를 들고 남편한테 돌아오거나 기생으로 전락하는 길 밖에 없다고 단언하였다. 로신의 유일한 애정소설 에서도 자유련애로 새 가정을 이룬 자군과 연생은 경제적 궁핍으로 결국 애정비극을 초래하고 말았다. 보다싶이 이미 중년에 들어 선 로신은 애정과 혼인에 대해 현실을 무시한 랑만적인 것으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소설에 대해 로신을 비방하기 좋아하던 문인들은 이 소설은 자전체 소설인바 소설의 소재는 바로 로신이 직접 체험한 일이고 남자 주인공은 바로 로신이라고 억측하고 조소하였다. 그리고는 녀자 주인공 즉 로신의 의 정체를 추궁하느라고 떠들었다. 이에 로신은 너무 어이없어 라고 개탄하였다.      하문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로신은 교수들의 편협적인 종파 싸움이 싫어 하문대학을 떠나 광주중산대학에 전근하였는데 이때부터 허광평은 로신의 조교로 되었다. 1927년 4월 12일 상해에서 장개석이 군사정변을 일으켰고 광주에서는 사변이 일어나 로신이 평소에 사랑했던 공산당원 제자들이 피살되였다. 당시 교무처장으로 있었던 로신은 제자들을 구하려고 동분서주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격분하여 그는 교수직을 사퇴하고 허광평과 함께 상해로 왔다.   상해에서 로신은 10년간 허광평과 동거하였고 아들 주해영을 보았다. 원래 허광평은 애기를 낳지 않으려 했고 필요시엔 언제든지 로신과 갈라질 각오를 했다. 그런데 피임에 실패하여 애기를 낳고 말았다. 하지만 주해영의 탄생은 두 사람에게 무한한 행복을 안겨주었다. 로신은 또 허광평으로 인해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훌륭한 내조가 있었기에 허약한 체질이면서도 주야로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일부 천박한 문인들이 로신이 자신의 학생을 첩으로 삼았다고 야유하였지만 허광평은 이런 여론에 당당하게 맞섰고 이른바 본처인 주안도 이에 대해 별로 불평이 없었다. 주안은 자신이 어쨌든 본처이고 허광평은 첩에 불과한데 그가 낳은 아들이면 곧 자신의 아들과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죽으면 주해영이 나서서 제사를 지내 줄 수 있으니 저승에서 아귀신(餓鬼神) 신세를 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때문에 주안은 주해영이 태여났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로신은 생전에 주안의 생활비를 보장해주었고 주안의 친척의 어려움도 해결해 주었다. 로신 서거후 허광평도 주안의 생활비를 대주고 여러 모로 돌봐주었다.    허광평은 원래 학문과 재능이 뛰여난 녀성으로서 사회적으로 큰일을 할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로신을 위해 가정주부로 있으면서 자신을 하였다. 그는 로신으로 하여금 후반생에서 두 번째 생명을 얻게 하였다. 로신 서거후 허광평의 노력으로 일찍 1938년에 로신전집을 출판할 수 있었고 일제가 상해를 침입했을 때 허광평은 감옥에 같히면서도 로신의 유고를 보존하였다. 시기에 강청이 그 유고를 강탈하자 로신의 유고를 생명처럼 간주했던 허광평은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만약 로신의 신변에 허광평이 없었다면 상해에서 이룩한 로신의 업적은 상상할 수도 없다. 또 허광평과 같은 녀인이 있으므로 하여 로신은 비인간적인 고통에서 해탈될수 있었고 인간본연의 생활을 누릴수 있게 되었다. 보다싶이 로신은 신이 아니라 보통 인간들이 갖고 있는 희노애락과 칠정륙욕(七情六欲)을 다 갖고 있으면서 속세에서 살아 숨 쉬였던 사람이였다.                                                                  2001.5   ==========================  로신이여 돌아 오시라 2014년 03월 09일  작성자: 백진숙      도서관이 새 청사에로의 이사준비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던 작년4월 중순의 어느날이였다. 직장 후배들에게서 낡은 청사를 곧 허문다는 소식을 얻어들은 나는 아침밥을 먹기 바쁘게 사진기를 들고 부랴부랴 도서관으로 향했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이미 다 낡아버린 도서관은 마치 지팽이를 짚고 서있는 등굽은 로인네와 같았는데 자기의 사명을 다 했음에도 눈물을 흘리면서 “제발 허물지 마소, 난 아직 할일이 있다우.”하며 서 있는것만 같았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듯 마음이 아파났다.      배움의 전당이였고 늘 푸른꿈을 심어주었던 신성한 곳, 내 젊음이 머물었던 자리, 책 읽기가 좋아서 여러차례 승진의 기회도 포기하고 도서관 사서 노릇만 고집했던 나, 자기 집처럼 늘 아끼고 사랑했던 도서관, 눈물이 금방 떨어지려고 하였다. 얼른 두눈을 감아 버렸다.      나는 사진기를 여러 각도로 바꾸면서 련신 사진들을 찍어댔다. 그러다가 도서관 동쪽켠에 있는 로신동상도 한장 찍으려고 다가가다가 그만 멈춰서고 말았다. 문득 한 독자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여 나타났다.      “아Q”같고 “공을기”같고 상림 아주머니” 같고 “광인일기”의 주인공같은 사람 J이다. 왜서인지 그만보면 나는 로신의 글에서 나오는 이 몇몇 인물들이 늘 머리에 떠오르군 한다.      질질 끓는 여름에도 그는 늘 두꺼운 커피색 골덴옷을 입고 겨울에는 때가 낀 자주색 털실 모자에 지난세기 60-70년대 류행되였던 국방색 겨울외투를 입고 다닌다. 해와 달이 바뀌여도 그의 이런 옷들은 바뀔줄 모른다. 글을 쓰는 이 시각에도 로신 동상을 산 로신으로 간주하고 그와만 이야기 하던 얼굴이 안쓰럽게 안겨온다. 이제 이것을 허물어 버린다면 그는 누구와 말하며 또 어떻게 살아갈것인가? 다시 도서관에 발길을 돌릴수 있을것인가?      도서관의 사서들이나 독자들은 그를 “공을기”나 “아Q”나 “상림아주머니”처럼 놀려 주지는 않지만 누구도 말을 걸지 않는다. 이 점이 그를 얼마나 힘들게 했으랴! 그러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하루가 멀다하게 책 보러 다니군 하였다.      10여년전의 일이라고 생각된다. 설날 아침에 맨 먼저 도서관에 온 10명 독자들에게 관장님은 친히 두툼한 목책을 선사하여 설날에도 책을 읽는 그들을 격려해 주셨다. 기타 아홉명 독자들은 모두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로 그쳤으나 그날 그가 받은 감동은 그야말로 컸다. 첫사람으로 열람실에 들어서는 그에게 설 인사를 건넸더니 여직까지 도서관에서 자기와 말을 한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며 그렇게 기뻐할줄이야! 목책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내앞에 선 그는 새해 축복을 뜨겁게 해주었다.      “누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기분이 좋아진 그는 말이 많아졌다. 자기는 도서관에 와서 많은 자료를 베끼는데 이 목책을 유용하게 잘 쓰겠다며 몇번이나 거듭 말하였다. 이러는 그가 측은하여 후에는 인사도 스스럼없이 하고 말도 몇마디씩 걸군 하였다.      집에서 도서관으로 또 도서관에서 집으로 가는것이 그의 생활의 전부였다. 베낄것이 뭐가 그리 많는지 온 종일 베끼고 또 베껴서는 그것들을 호주머니 여기저기에 잔뜩 집어 넣는다. 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문장이 있으면 점심도 거른채 계속 보군 했는데 어떤때는 퇴근 종소리도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다가도 할말이 있으면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로신동상앞에 가서 울분을 토로하거나 격정높이 연설을 하군했다.       한번은 살그머니 동상곁에 다가가서 그의 연설을 들은적이 있다. 세상에! 그보다 더 훌륭한 정치가가 어디 있으며 그보다 더 말 잘하는 연설가가 또 어디 있으랴! 사회의 페단들과 부정부패를 얼음에 표주박 밀듯 얘기하는데 틀린말이 하나도 없었다. 책을 많이 보아서일가 그는 아는것도 많았는데 로신 동상과 말하는것을 빼면  모든것이 정상이였다.      “로신은 하늘나라에 갔기에 아무리 말해도 알아듣지 못한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마치 낯선사람 쳐다보듯 한참 뜯어 보더니 로신의 간력을 줄줄이 외우고 나서 자기는 오직 로신만 숭배하는데 그는 신선과 같기에 하늘나라에 갔어도 자기말을 다 알아 듣는다며 모든 인민이 잘살고 부강에로 나가자면 그래도 그와 말해야만 된다고 하였다.      문뜩 로신의 “광인일기”에서 형이 자기를 잡아 먹으려 한다고 벌벌 떨면서 갖은 이상한 생각과 말들을 하던 동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그만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그러던 몇년전의 어느날, 로신동상 앞에서 또 연설하던 그가 끝내 쓰러지고 말았다. 한 독자의 급한 웨침소리에 달려 나가보니 터진 머리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우리둘은 함께 피를 깨끗히 닦아 주고 정신을 차리자 좋은 말로 집으로 돌려보냈다.      만약 로신의 넋이 살아 있다면 이러는 그가 가여워 아마 많은 눈물을 흘렸으리라. 인사 한마디에도 그렇게 기뻐하는 그에게 나는 왜 빵 한쪼각, 물 한병이라도 사주지 못했을가? 후회되는 마음 금할수 없다.      그런데 그후부터 도서관에 오는 차수가 점점 줄어들더니 얼마후엔 아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또 물어보면 다들 모른다고 한다. 그럼 그도 “공을기”처럼 누구도 모르는 가운데 이미 죽어 버렸단 말인가?      로신은 아니 로신동상은 힘든 이 세상을 외로이 살아가는 j에게 유일한 삶의 끈이였고 정신적 지주였던것이다. 이 정신적지주가 없어지니 불쌍한 그가 그만 삶의 끈을 놓아 버렸단 말인가?      작년 9월, 도서관의 락성식에 참가하였다가 새로 일떠선 멋진 청사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그때의 그 희열을 무엇으로 말하랴. 마치 모진 세집살이를 하다가 새 아빠트에 든 그런 기분이였다.      그런데 옥에 티라고 할가 도서관의 이런 선진적이고 우아한 환경임에도 마음 한구석이 허전함해남을 어쩔수 없었다. 그것은 책과 붓을 들고 서있던 예전의 로신동상이 없는것이다. 원래 낡은 청사는 없어졌지만 그곳의 로신 동상만은 그대로 가져와야 한다고 아니 그것보다 더 크고 멋진것을 새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도서관의 지적인 분위기를 더 한층 높이고 j와같은 독자들도 모여들수 있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우리의 이 세상은 똑똑한 사람이나 정상적인 사람들만 모여사는 곳이 아니다. “아Q”나 “공을기”나 상림 아주머니” 같은 사람 또 J와 같은 사람들과 함께 사는 세상이기도 하다.      도서관은, 도서관의 사서는 자신의 사회적직능과 함께 이런 사람들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을 키워야 하며 부족한 그들도 도서관이라는 이 지식의 바다에서 마음껏 헤염칠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너와 나의 이런 작은 사랑이 모여서 아름다운 세상은 만들어 지는것이다.       로신동상만 세우면 그가 다시 도서관으로 달려 올것같은 생각을 때때로 하군한다. 지금 장애인 열람실도 따로 나왔으니 여기에 높은 인격과 책임감을 겸비한 사서를 안배한다면 그도 도서관에 와서 기쁘게 독서하며 자기의 인생을 즐기것이다.      지난날 참으로 그들을 사랑했던가? 많이 부족했던 어제날을 깊이 반성해본다. "도서관 정문앞에 로신동상을 세웠으면." 이 아이디어가 참신한지 새관장님께 말씀드리려고 도서관으로 발길을 돌리며 나는 진정 높이 웨친다.      로신이여, 돌아 오시라!
591    이륙사는 로신을 만나 보았을까?... 댓글:  조회:4241  추천:0  2016-11-10
이륙사는 노신을 만나 보았을까?    - 이륙사(李陸史) 의 공과(功過)문제                                            김병활(金秉活)   목차 1. 魯迅연구-동아시아 문학 비교연구의 접점 2. 이륙사의 의 비교문학적 가치 3. 이륙사가 노신을 만났다는 문제 1)  노신과 동행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2) 노신의 反滿사상과 ‘마괘아(馬褂兒)’문제 3) R씨의 신분과 노신을 만난 장소의 분위기가 석연치 않다. 4) 노신이 양행불의 ‘관을 붙잡고 통곡했다’는 문제 5) 고쳐 써야 할 이륙사 연보(年譜) 4. 주석을 달고 시정해야할 일부 문제 5. 맺음말 참고문헌     1. 魯迅연구--동아시아 문학 비교연구의 접점     21세기 동아시아 문학의 방향을 탐구함에 있어서 中國, 韓國, 日本 등 여러 나라가 공동으로 공명을 일으키고 상호 이해하고 대화와 담론을 할 수 있으며 공동연구도 할 수 있는 접점을 찾아야 한다. 그 접점중의 하나가 바로 3국 문단에 모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魯迅연구이다. 중국과 일본이 현대문학 연구 분야에서 한국보다 한발 앞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진 것은 일부 정치적인 요소도 작용하였겠지만 공동으로 담론할 수 있는 하나의 접점-노신연구를 돌출이 내세운 데 있다고 본다. 근년에 한국에서도 노신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며 비교문학의 시각으로 중한현대문학을 연구하려는 활발한 움직임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추세로 발전한다면 중한문화교류는 증일 교류보다 못지않은 수준과 태세를 갖출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취지에서 본 논문은 노신에 대한 한국에서의 수용을 연구대상으로 하면서 중점적으로 이륙사의 을 텍스트로 이륙사의 노신관(魯迅觀)을 분석하고 일부 문제점도 제기하려 한다.    2. 이륙사의 의 비교문학적 가치     20세기 20-30년대에 한국에서 노신(魯迅)을 소개한 중요한 논문 중에는 이륙사(李陸史)의 이 있다. 이 문장은 노신이 서거된 지 4일후인 1936년 10월 23일부터 에 5기로 나누어 연재되었다. 이 문장의 집필속도의 빠름과 내용의 광범성은 당시 한국의 노신연구 분야에서 보기 드문 것이었다.   비교문학의 수용이론에 따르면 똑 같은 작품일지라도 독자들의 이해와 반응은 다종다양하다. 한국에서의 노신수용도 마찬가지로 부동한 문인들과 독자들은 부동한 수용입장에 따라 부동한 평가를 내리게 된다. 이륙사의 이 발표되기 전에 한국에는 이미 양백화(梁白華)가 번역한 일본학자 아오키 마사루(靑木正兒)의 논문 에서 처음으로 노신을 거론하였고 1931년 1월에는 정래동(丁來東)이 장편논문 을 에 20기로 나누어 연재하였다. 1934년에는 신언준(申彦俊)의 가 한국 지 제4기에 발표되었다. 이밖에 노신의 소설작품이 한국에서 널리 번역된 상황을 감안하면 이 시기에 노신은 한국문단에 광범히 알려진 중국작가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시기에 노신을 부정적 시각으로 본 문인들도 있었다. 이경손(李慶孫)은 1931년 2월에 라는 문장을 에 2기로 나누어 발표하였는데 당시 항간에서 떠돌던 노신의 일상생활에 대한 에피소드들을 두로 쓰면서 노신에게는 새로운 창작이 없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였고 노신이 (중국좌익작가연맹)에 가담한 것을 시답지 않게 다루고 있다. 그러면서 이경손은 후일에 한간(漢奸, 매국적)으로 전락한 장자평(張資平)을 노신보다 더 월등한 것으로 보고 정래동의 노신론에 대해서도 관점 상 다소 별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륙사의 은 일반적인 추도문의 수준을 초월하였고 학술적 연구 성격을 띠고 있었기에 정음사의 출판으로 된 에서는 제목을 으로 고치기까지 하였다. 이륙사는 중국현대문학연구에서 주로 노신, 호적, 서지마(徐志摩)에 치중하였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노신을 숭배하였다. 그가 30년대 초반에 이미 좌익 켠에 선 노신을 숭앙하였기 때문인지 그의 조카 이동영(李東英)교수는 지난 세기 70년대에 이륙사의 사상은 어느 정도로 사회주의계통에 속하며 아마 그 자신은 ‘한국의 노신’이 되려고 한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1) 이륙사가 노신에 대해 경모의 감정을 지니고 있기에 그의 노신연구는 경향성이 선명하다. 때문에 그는 노신을 ‘현대중국문학의 아버지’, ‘중국문단의 막심 고리키’, ‘문화의 전사’라고 높이 찬양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노신의 부보를 듣고 더없이 비통해하였다. “아! 그가 벌써 56세를 일기로 상해 시고탑 9호에서 영서하였다는 부보를 받을 때에 암연 한줄기 눈물을 지우노니, 어찌 조선의 한사람 후배로서 이 붓을 잡는 나뿐이랴.”2) 노신에 대한 이런 심후한 감정은 그 앞서 노신을 소개하고 평론한 정래동, 신언준 등 문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이륙사는 에서 를 분석하는데 각별한 주의를 돌리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노신의 백화소설 가 발표된 후 “문학혁명운동은 실천의 거대보무를 옮기게 되고 벌써 고문가들은 그 추악한 꼬리를 감추지 않으면 안 되였다.”“이 주인공들은 실로 대담하게 또 명확하게 봉건적인 중국 구사회의 악폐를 통매하였다.”“어린이를 구하자”는 말은 “당시 ‘어린이’인 중국청년들에게는 사상적으로는 ‘폭탄선언’ 이상으로 충격을 주었으며”“순결한 청년들에 의하여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자는 그(노신을 가리킴--필자 주)의 이상을 단적으로 고백한 것이였다.” 이런 평가는 그 경향성이 아주 선명하며 노신에 대한 숭배와 노신의 반대편에 섰던 복고(復古)파들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완연히 드러내고 있다.     이륙사는 에서 을 분석하였는데 그 관점은 대체로 정래동, 신언준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노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유명한 이 연재되면서부터는 노신은 자타가 공인하는 문단 제일인적 작가”였기 때문이었다. 뒤이어 그는 “당시 중국은 시대적으로 아Q시대였으며 노신의 이 발표될 때 비평계를 비롯하여 일반 지식군들은 라거나 라는 말을 평상 대화에 사용하기를 항다반으로 하게 된 것은 중국문학사에 남겨놓은 노신의 위치를 짐작하기에 좋은 한 개의 재료”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해 1월에 이광수는 작가들에게 톨스토이의 와 같은 빛나는 사시적 작품을 창작하라고 호소하였다. 그러면서 부정적 예로 노신을 거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노신의 나 는 노신의 소설가적 재분의 표현으로는 영광일지는 모르나 그 꽃을 피게한 흙인 중국을 위하여서는 수치요 모욕이다. ... 관우, 장비는 아Q와 공을기로 퇴화해버린 것이다.”3) 여기에서 이광수는 본의가 여하하든지간에 노신의 작품세계에 대해 ‘오독(誤讀)’하고 있는바 노신의 창작동기와 작품의 사회적 영향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이에 반해 이륙사는 9개월 후에 쓴 에서 의 현실적 의의를 적극적으로 평가하면서 이광수와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실로 수많은 아Q들은 벌써 자신들의 운명을 열어갈 길을 노신에게서 배웠다. 그래서 중국의 모든 노동 층들은 남경로의 아스팔트가 자신들의 발밑에서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시고탑로 9호로 그들이 가졌던 위대한 문호의 최후를 애도하는 마음들은 황포탄의 붉은 파도와 같이 밀려가고 있는 것이다.”4)   정래동, 신언준 등 문인들이 노신의 잡문을 거의 거론하지 않은데 반해 이륙사는 노신잡문의 가치를 인정하고 노신잡문에 대한 해독을 통해 노신의 사상발전을 연구하려고 시도하였다. 노신의 문학관에서 홀시할 수 없는 문학과 혁명의 관계에 대해 이륙사는 정래동과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정래동은 소설작품에 대한 연구에 치우면서 잡문연구를 멀리하였기에 노신 문학관에 대해 일부 편차가 생기기도 하였다. 그는 “노신은 철두철미 문예는 혁명에 인연이 가장 먼 것임으로 암만 문학자가 혁명, 혁명하고 떠들어도 제3선의 전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여 왔었다.”   이런 주장과는 달리 이륙사는 노신이 국민성을 개조하고 봉건제도를 개변하려는 목적에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노신에게 있어서는 예술은 정치의 노예가 아닐 뿐 아니라 적어도 예술이 정치의 선구자인 동시에 혼동도 분립이 아닌 즉 우수한 작품, 진보적 작품이 산출하는데서 문호 노신의 위치는 높아갔고 아Q도 여기서 비로소 탄생하였으며 일세의 비평가들도 감히 그에게는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5) 뿐더러 이륙사는 노신의 잡문집 에 수록된 잡문들을 인용하면서 노신이 진화론을 포기하고 ‘새로운 성장의 일 단계’에 들어섰다고 찬양하였다.   이 대목은 이륙사가 노신이 중국좌익문단에 합세한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는 이륙사가 한 아래의 말에서 진일보 입증할 수 있다. 국민당의 쿠테타로 하여 상해에 모여온 ‘원기 왕성한’ ‘젊은 프로학자’들이 극좌적인 태도로 노신을 공격할 때 노신은 “프로문학이란 어떤 것인가? 또는 어찌해야 될 것인가를 알리기 위하여 아버지 같은 애무로서 푸레하노프, 루나차르스키들의 문학론과 소비에트의 문예정책을 번역 소개하여 중국프로문학을 건설”하였다.6) 당시에 ‘카프’계통의 작가, 비평가들이 노신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은 점을 감안할 때 이륙사의 이런 견해는 특별히 주목되는 점이다.   이륙사는 북양군벌정부와 국민당 당국이 노신을 박해한데 대해서도 통분해마지 않았다. 그는 노신의 창작생애가 너무 짧은 것을 애석해하면서 노신이 후기에 “작가로서의 화려한 생애는 종언을 고하지 않으면 안 된”원인은 국민당정권의 박해로 하여 “손으로 쓰기보다는 발로 달아나기에 더 바쁘게”한데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런 관점은 이경손처럼 노신에 대해 편견을 가진 일부 사람들이 노신의 후기에 창작원천이 고갈되었다고 폄하하는 의론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3. 이륙사가 노신을 만났다는 문제      이륙사의 생평에는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일부 남아있다. 이것을 구명하는 일은 비교적 어려운 작업이지만 진실을 밝히기 위해 여러 면에서 자술과 가설을 고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륙사가 노신을 만났다는 자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심중히 고증할 필요가 있다. 본 논문은 이륙사의 자술에 나타난 문제점을 제기하고 논의하려 하는데 우려심도 없지 않아 있다. 광복 전 많은 한국문인들이 친일경향을 나타낸데 반하여 이륙사는 독립투사, 저항시인으로 추대되어 한국현대문학사에서는 더없이 귀중한 존재로 나서고 있다. 이런 이륙사에게서 흠집을 찾아내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어쩐지 위구심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진실을 탐구하는 것이 학문의 사명이라고 자처해 온 이상 아는 대로 연구 선색을 제공하고 사실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된다.   이륙사가 노신을 만났다는 것은 한국에서 이미 정설로 된 듯싶고 무릇 이륙사의 생평을 거론하면 반드시 그와 노신과의 만남이 빠지지 않고 소개된다. 예컨대 김학동(金㶅東) 편저로 된 에서는 이륙사와 노신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은 그 표제와는 달리, 노신문학을 본격적으로 다룬 이라 할 수 있다. 육사는 중국에 있을 당시 노신을 직접 만났을 뿐만 아니라, 노신의 소설 을 번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이때 육사는 호적, 서지마, 노신 등을 포함한 중국근대문학에 경도되고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런 소개는 완전히 이륙사의 자술에 근거한 것이다. 양행불의 추도식에서 노신과 만난 경과에 대해 이륙사는 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리고 그 뒤 3일이 지난 후 R씨와 내가 탄 자동차는 만국 빈의사 앞에 닿았다. 간단한 소향의 예가 끝나고 돌아설 때, 젊은 두 여자의 수원과 함께 들어오는 송경령 여사의 일행과 같이 연회색 두루마기에 검은 ‘마괘아’를 입은 중년 늙은이가, 생화에 쌓인 관을 붙잡고 통곡을 하던 그를 나는 문득 노신인 것을 알았으며, 옆에 섰던 R씨도 그가 노신이란 것을 말하고 난 10분 뒤에 R씨는 나를 노신에게 소개하여 주었다.   그때 노신은 R씨로부터 내가 조선청년이란 것과 늘 한번 대면의 기회를 가지려고 했더란 말을 듣고, 외국의 선배 앞이며 처소가 처소인 만큼 다만 근신과 공손할 뿐인 나의 손을 다시 한 번 잡아줄 때는 그는 매우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였다.     이상의 서술에서 우리는 이륙사가 노신을 더없이 존경했다는 것, 노신도 생면부지의 조선청년을 아주 따뜻이 대해주고 초면에도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가 될 수 있는 훌륭한 분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아래에 이 기술을 권위인사와 학자들의 서술과 대조해 보자.    양행불의 장례식 상황에 대해 중국국민당 혁명위원회 권위인사인 정사원(程思遠) 주필로 된 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6월 20일 오후 2시, 폭우가 쏟아졌다. 양행불 장례식은 만국 빈의관 영당(靈堂)에서 거행되었다. 국민당 특무들은 또 동맹의 기타 지도자들을 암살한다는 소문을 퍼뜨리었다. 송경령, 채원배는 조금도 두려움 없이 만국 빈의관에 가서 의연히 조문을 하였다. 노신도 조문하러갈 때 집을 나서면서 열쇠를 두고 나갔는데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각오를 보여주었다. 장례식이 끝난 후 노신은 비를 무릅쓰고 귀로에 올랐는데 그 비속에 충만된 피비린내를 감수한 것 같았다.7)    중국의 노신연구 학계에서 권위학자들인 임비(林非), 유재복(劉再復)이 쓴 에는 이 일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6월 20일, 양전(楊銓,양행불-필자 주)의 장례식이 만국 빈의관에서 거행되였다. 국민당특무들은 채원배와 노신을 암살하련다는 요언을 사처에 퍼뜨리었다. 이 날 오후 노신은 이미 희생될 사상적 준비를 충분히 하고 아주 침착하게 옷을 갈아입고 대문 열쇠를 조용히 허광평에게 넘겨주었다. ... 그리고는 정오에 온 허수상과 함께 대문을 나섰다.   만국 빈의관의 장엄하고 엄숙한 회장에는 심심한 애증의 정서가 흐르고 있었다. 몇 십 명의 조객들은 문어귀에 서서 감시하는 특무들을 멸시하면서 가슴을 뻗치고 회장에 들어섰다. 송경령과 채원배는 이미 양전의 영구 앞에 서있었다.8)          이 몇 가지 서술을 대조해 보면 일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1)  노신과 동행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이륙사는 노신이 송경령과 동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의 기술에 의하면 양행불의 장례식에 송경령(宋慶齡)과 채원배(蔡元培)가 동행한 것으로 되어 있고 노신에 대해서는 별도로 기술하고 있다. 노신의 이 날 일기에도 “점심에 계시(季市, 許壽裳--필자 주)가 왔는데 오후에 둘이 함께 만국 빈의관에 가서 양행불의 장례식에 참가하였다.” 라고 적혀있다.9) 임비, 유재복의 기술에는 송경령과 채원배가 노신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빈의관의 양행불 영구 앞에 서있었고 노신과 동행한 사람은 허수상이라고 하였다. 보다싶이 과 임비, 유재복의 의 기술은 이륙사가 에서 한 기술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다시 말하면 노신과 동행하여 만국 빈의관에 들어온 사람은 송경령이 아니라 허수상이며 송경령은 노신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채원배와 함께 양행불의 영구 앞에 서있었다는 것이다.      2) 노신의 反滿사상과 ‘마괘아(馬褂兒)’문제     노신의 반만 사상에 대해 중국에서는 여러 민족의 상호 단합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고려한 모양인지 별로 거론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젊은 시절의 노신은 당시 시대적분위기의 영향을 받아 분명히 반만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노신이 1933년에 만족(滿洲族)의 대표적 의상인‘마괘아’를 양행불의 장례식에서 그냥 입고 있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마괘아’는 중국어로 ‘馬褂’, ‘馬褂兒’라고 하는데 기마민족인 만주족들이 말 타고 싸우는데 편리하도록 허리까지 짧게 만든 웃옷이다. 명 왕조 이전에 중국의 한족들은 무릎 아래까지 길게 내리 드리운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는데 만족이 중국을 통치하면서 ‘마괘아’와 같은 만족의상을 입기 시작하였다. 청조말기에 조정이 부패해 지고 나라가 식민지로 전락될 위기에 처했을 때 한족들에게는 반만 사상이 머리를 들기 시작하였고 구국, 애국을  ‘만청(滿淸)’정부를 반대하는 것과 직결시키기도 하였다. 손중산이 조직한 동맹회의 誓約盟書에도 라고 쓰여 있고10) 노신이 일본에 있을 때 가담한 광복회의 서약서에도 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고 한다.11)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젊은 시절의 노신도 반만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일본에 유학 간 후 제일 먼저 청 왕조가 한족들에게 강요한 치욕적인 머리태를 베여버리고 “나는 나의 피를 조국에 바치련다(我以我血薦軒轅)”고 선언하였고 또 한족들의 강산을 광복하려는 에 가담하였다. 이런 경향은 그의 문학작품에서도 간간이 노출되고 있는데 에서 丁擧人의 금은보화를 실어간 신해혁명시기의 ‘혁명당’도 바로 명왕조의 말대황제인 숭정(崇禎)황제를 기리고 명 왕조를 ‘광복’하려는 사람들로 묘사되어 있다. 노신의 수필 에서도 노신은 한 고향사람인 범애농이 일본에서 무턱대고 자신을 반대할 때의 감수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처음에는 세상에서 제일 미운 것이 만주족이라고 생각했댔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 버금이고 제일 미운 것은 범애농이였다.” 여기에서 노신은 젊은 시절부터 청조의 만족통치에 대단한 적개심을 가지였고 한족으로서의 민족적 자존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일본에서 귀국한 후 처음에는 주변사람들의 풍습에 따라 간혹 ‘마괘아’를 입기는 하였으나 1927년 1월 후부터는 ‘마괘아’와 ‘서양 마괘아’라고 칭하는 양복을 한 번도 입지 않았고 서거할 때까지 줄곧 한족들의 대표적의상인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필자가 노신이 1902년부터 1936년까지 남긴 사진 114점을 조사해 보았는데 1926년까지의 사진 40점 중에 ‘마괘아’를 입은 경우가 간혹 있었는데 그것도 대체로 敎師직과 교육부 공무원으로 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모두 ‘마괘아’를 입은 장소였다. 1927년 1월부터 서거할 때까지의 74점 사진 중에는 ‘마괘아’를 입은 사진이 한 점도 없다.12) 아마 청조 시기 근 300년 입고 있던 ‘마괘아’를 관습의 힘에 의해 하루아침에 벗어버리지 못하다가 점차 반만 사상이 의상에까지 신경 쓰게 된 것이 아닌가고 추정된다. 혹자는 이륙사가 중국 의상문화를 잘 알지 못해 두루마기를 ‘마괘아’로 잘못 인식하지 않았는가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륙사가 노신이 두루마기 위에 ‘마괘아’를 입었다고 서술한 것을 보면 이 견해는 성립될 수 없다. 1991년 7월에 북경 노신박물관에서 일보던 張연구원한테도 이 일을 자문해보았는데 그도 단마디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3) R씨의 신분과 노신을 만난 장소의 분위기가 석연치 않다.     에 따르면 R씨는 상해 불란서 조계지 여반로(侶伴路)의 서국(書局) 편집원이다. 그는 노신과 사전에 아무런 약속이 없는 상황 하에 양행불의 장례식에서 한 무명의 조선청년을 노신에게 스스럼없이 소개할 수 있는 미스터리 식 인물이다. 사실 이날 노신은 국민당 특무들에게 피살될 각오를 하고 집 열쇠마저 두고 나왔으며 추도식은 특무들의 삼엄한 감시 밑에 있었고 일기도 좋지 않아 폭우가 억수로 퍼부었다. 이처럼 열악한 천기와 수시로 총알이 날아올 수 있는 살벌한 분위기속에서 노신이 이륙사와 같은 무명의 조선청년을 만나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눌 겨를이 있었겠느냐가 의문스럽다.   4) 노신이 양행불의 ‘관을 붙잡고 통곡했다’는 문제     노신은 언제나 근엄한 표정을 하고 있으며 공적인 장소에서는 냉혹할 정도로 감정표현을 절제하는 중국문인이다. 필자가 지금까지 찾아볼 수 있는 자료에는 노신이 양행불의 추도식에서 관을 붙잡고 통곡하였다는 서술을 보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륙사의 기술과  임비, 유재복의 다음과 같은 기술을 대조해 볼 필요가 있다.     만국 빈의관의 장엄하고 엄숙한 회장에는 심후한 애증의 정서가 흐르고 있었다. ... 처량한 애도곡이 울리는 가운데, 비애에 찬 흐느낌 소리 속에서 사람들은 묵묵히 선서하는 듯하였다. 영별이외다! 하지만 당신이 채 걷지 못한 길을 우리 모두가 걸어갈 것입니다.                                                                                       -- 임비, 유재복     이와 달리 이륙사의 기술처럼 관을 붙잡고 통곡하였다는 것은 노신의 종래의 성격, 이미지 그리고 장소의 분위기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서 역시 중국인들에게 잘 접수되지 않는 점이다. 낭만주의 시인인 곽말약(郭沫若)이라면 이런 모습을 보일런지 모르지만 노신의 경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이륙사의 에 왜 이런 묘사가 나왔겠는가는 한번 생각해볼만한 일이다. 노신은 양행불 추도식이 있은 이틑날에 일본 벗(樋口良平)에게 시 한수를 써서 증송하였는데 이 시는 후에 라는 제목으로 많은 저서에서 수록되고 있다. 시 원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豈有豪情似舊時,        花開花落兩由之,        何期淚灑江南雨,        又爲斯民哭健兒。13) (대의: 그 옛날 호기와 격정 어디로 갔나        꽃이 피고 지여도 할 말이 없구나        어느새 눈물이 강남의 비 되어 쏟아지는데        여기 백성들 또 건아를 위해 통곡하누나 )      이 시에서 ‘눈물이 강남의 비’로 되었다거나 ‘건아를 위해 통곡’한다는 것은 단지 문학적 표현으로서 이 시를 근거로 노신이 추도식 현장에서 통곡했다고는 할수 없다. 아마도 이 시가 항간에서 노신이 추도식 현장에서 통곡했다는 것으로 와전되지 않았는가고 추정된다.   5) 고쳐써야 할 이륙사 연보(年譜)     지금까지 한국에서 출판된 이륙사 관련저서에는 이륙사가 노신을 만난 시일이 모두 ‘1932년 6월 초’로 되어있다. 김학동 편저로 된 (새문사, 1986)에서 이륙사가 노신을 만난 시일을 1932년 6월 초라고 쓰고 있고 심원섭 편주로 된 (집문당, 1986)의 작가연보에도 “1932년 (29세) 6월 초 만국 빈의사에서 노신을 만나다.”라고 쓰여 있다. 이동영 편으로 된 (문학세계사,1981)의 에는 “1932년 6월 초 어느 날 중국과학원의 부주석이요 국민혁명의 원로이던 양행불의 호상소인 만국 빈의사에서 노신을 만났으며...”라고 적혀있다.   이륙사가 노신을 만났다는 자술의 진실성 여하를 잠시 제쳐놓더라도 이 연보는 틀린 것이다. 양행불의 장례식은 1933년 6월 20일이다. 여기에서 우선 연도가 틀리며 일자도 틀리게 적혀있다. 양행불이 암살된 날은 6월 18일 (일요일)이고 장례식은 6월 20일 (화요일)인데 이륙사는 ‘6월 초’의 어느 ‘토요일’ 아침에 조간신문에서 양행불 피살 기사를 읽었고 그 뒤 3일후에 장례식에 참가했다고 쓰고 있다. 이는 기억의 오차라고 추정할 수도 있는데 주석을 달아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본다. 문제는 이왕의 연보에서 이륙사의 1932년 행적이 잘못 되였으면 1933년의 행적도 따라서 의문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이것을 자그마한 기억오차로만 간주하지 말고 보다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심중한 검토를 필요로 하고 있다.      4. 주석을 달고 시정해야할 일부 문제     이 아주 빠른 시일 내에 집필되었기에 오차가 나타난 것은 피면할 수 없다고 인정된다. 그런데 지금 을 출판할 때마다 이런 오차에 대해 주해를 달지 않고 그대로 답습한다면 독자들에게 그냥 ‘오독’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필자는 여러 개 판본으로 된 을 두루 살펴보았는데 모두 똑 같은 문제가 존재하고 있다.   문장의 순서에 따라 몇 가지만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노신이 1917년에 귀국하여 절강성의 사범학교와 소흥 중학교 등에서 리화학 교사로 있으면서 작가로서의 명성이 높아졌다는 문제 - 노신은 1902년에 일본 유학을 갔고 1909년에 귀국하여 교편을 잡았고 1912년에 교육부에 취직하였다. 그가 작가적 명성을 날리게 된 것은 1918년에 를 발표하면서부터였다.     2) 노신이 북경에서 주작인, 경제지, 심안빙 등과 함께 ‘문학연구회’를 조직하였다는 문제 - 노신은 문학연구회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지 않았고 회원으로 된 적도 없다. 다만 문학연구회의 결성을 지지, 성원하였을 따름이다.   3) 1928년에 중산대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상해에서 지를 주재하였다는 문제 -  노신은 1927년 4월에 중산대학 교수직을 사직하였고 동년 9월에 광주를 떠나 10월에 상해에 이주하였다. 당시 상해에는 지가 간행되지 않았고 그 후 1930년 1월에 지가 창간되었는데 노신이 이 간행물의 주필로 되었다.      4) 노신이 1931년에 상해에서 체포되었다는 문제 - 1931년에 ‘좌련 5烈士’중의 유석(柔石)이 체포될 때 노신의 도서출판 계약서를 몸에 지니고 있었다. 이것을 발견한 특무들은 노신의 집 주소를 대라고 핍박하였으나 유석은 시종 불복하였다. 이런 정세에서 노신은 친우들의 서신들을 불살라버리고 일본인 우치야마(內山完造)씨의 도움을 받아 온 가족이 황륙로 화원의 한 일본 여관에 피신하였다. 사람을 질식케하는 작은 방에서 노신 일가는 하나의 침대를 사용하면서 한 달 동안이나 피신생활에 시달리었다. 아마 이 일이 외부에는 노신이 체포되었다고 와전된 듯싶고 이륙사도 그 소문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5) 국민정부의 어용단체인 를 반대하던 중 지난 10월 19일에 서거하였다는 문제 - 현존 자료를 살펴보면 이 시기에 국민당 어용단체인 라는 조직이 없었다. 노신은 임종 전에 트로츠키 파 진중산(陳仲山)과 논쟁을 벌린 일은 있다.   6) “유명한 오사(五四)운동이나 오주(五州)운동”- ‘오주’운동은 ‘오삼십’(五卅)운동의 오기(誤記)이다. ‘5.30’운동은 1925년 상해에서 일본제국주의와 북양군벌정부가 파업에 나선 상해의 방직노동자들을 참살하여 발생한 혁명적운동이다.   7) 1926년 4월 15일 장개석의 쿠데타- 장개석의 쿠데타는 ‘1927년’의 오기이다.                  5. 맺음말     이륙사의 은 학술적으로 노신의 문학세계를 평론하려한 정래동이나 신문기자 신분으로 노신의 생활을 살펴보려 한 신언준과는 달리  노신 숭배자이며 저항시인으로서의 이륙사의 숭배의 정서가 잘 드러나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상황에서 비교적 전면적으로 노신의 문학세계에 접근하고 높은 평가를 하고 있어 학술적 가치도 갖고 있다. 때문에 일부 에서 을 으로 고친 것은 무리가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이 문장은 노신서거 후 4일 만에 발표된 장편추도문이기에 일부 문제점도 안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필자는 이 논문을 집필하면서 착잡한 마음을 금치 못하고 있다. 독립투사이고 저항시인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숭배를 받고 있는 이륙사의 자술에서 흠집을 찾아내고 문제점을 제기한다는 것은 그 누구도 여간한 용기가 아니고서는 할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필자는 10여 년 전부터 이 문제를 제기하려고 했는데 동료들의 권고로 포기하였었다. 필자는 종래로 이륙사를 숭배하는 사람으로서 이륙사의 독립투사로서의 공적과 저항시인으로서의 위상을 부정하려는 시도는 조금도 없다. 하지만 진실을 구명하여야한다는 학자의 사명도 포기할 수 없는 입장이다.     비근한 예로 일본 학자 와타나베 죠우(渡邊 襄)씨는 노신을 숭배하는 입장이면서도 노신의 자술에서 ‘환등(幻燈)사건’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많은 정력을 투입하여 조사, 연구하였다. 그리고 논문 를 발표하였다.14) 이처럼 자신이 숭배하는 문인일지라도 진실은 구명되어야 한다는 태도는 아마 모든 학자들의 공동한 인식일 것이다. 거기에 또 돋보이는 것은 중국학자들이 이 논문을 중요시하고 학술논문집에 실어준 것이다.   이륙사의 자술에 나타난 문제점을 해외의 한 俗人이 거론한다는 것이 실로 외람되고 죄송스러운 줄은 알고 있는 바이지만 순전히 학술적 입장에서 출발한 본문의 취지를 넓은 아량으로 대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04. 6     참고문헌   김학동 편저: , 새문사, 1986 심원섭 편주: , 집문당, 1986 이동영 편: , 문학세계사, 1981 《魯迅日記》:《魯迅全集》15捲, 人民文學齣版社,1981 林非、劉在復:《魯迅傳》, 中國社會科學齣版社,1981 程思遠 主編:《中國國民黨百秊風雲》,延邊大學齣版社,1998 《魯迅》(影集):北京魯迅博物館 編輯,文物齣版社,1976  주: 1) , 제290페이지  2) , 정음사, 1980, 제76페이지  3) , 1936년 1월 6일 4) , 정음사, 1980, 제77페이지  5) 동상서, 제83페이지  6) 동상서, 제88-89페이지  7)  《中国国民党百年风云》, 程思远主编,延边大学出版社, 1998, 第424-425页  8) 《魯迅傳》: 林非、劉再復,中國社會科學出版社,1981年,第312-313頁  9) 《魯迅日記》:《魯迅全集》第十五卷,第85頁,人民文學出版社,1981  10) 《中国国民党百年风云》,程思远主编,延边大学出版社,1998, 第44页  11) 동상서,第37页  12) 《魯迅》:北京魯迅博物館編輯,文物出版社,1976  13) 《魯迅全集》15卷, ,第85頁, 人民文學出版社, 1981  14) 《日本學者中國文學硏究譯叢》(第三輯),吉林敎育出版社, 1990, 第154頁 [이 글은《朝鲜-韩国学语言文学研究(3)》(民族出版社‘北京’2006.2)에 수록되었음]     이륙사는 노신을 만나 보았을까?    - 이륙사(李陸史) 의 공과(功過)문제                                            김병활(金秉活)   목차 1. 魯迅연구-동아시아 문학 비교연구의 접점 2. 이륙사의 의 비교문학적 가치 3. 이륙사가 노신을 만났다는 문제 1)  노신과 동행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2) 노신의 反滿사상과 ‘마괘아(馬褂兒)’문제 3) R씨의 신분과 노신을 만난 장소의 분위기가 석연치 않다. 4) 노신이 양행불의 ‘관을 붙잡고 통곡했다’는 문제 5) 고쳐 써야 할 이륙사 연보(年譜) 4. 주석을 달고 시정해야할 일부 문제 5. 맺음말 참고문헌     1. 魯迅연구--동아시아 문학 비교연구의 접점     21세기 동아시아 문학의 방향을 탐구함에 있어서 中國, 韓國, 日本 등 여러 나라가 공동으로 공명을 일으키고 상호 이해하고 대화와 담론을 할 수 있으며 공동연구도 할 수 있는 접점을 찾아야 한다. 그 접점중의 하나가 바로 3국 문단에 모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魯迅연구이다. 중국과 일본이 현대문학 연구 분야에서 한국보다 한발 앞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진 것은 일부 정치적인 요소도 작용하였겠지만 공동으로 담론할 수 있는 하나의 접점-노신연구를 돌출이 내세운 데 있다고 본다. 근년에 한국에서도 노신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며 비교문학의 시각으로 중한현대문학을 연구하려는 활발한 움직임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추세로 발전한다면 중한문화교류는 증일 교류보다 못지않은 수준과 태세를 갖출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취지에서 본 논문은 노신에 대한 한국에서의 수용을 연구대상으로 하면서 중점적으로 이륙사의 을 텍스트로 이륙사의 노신관(魯迅觀)을 분석하고 일부 문제점도 제기하려 한다.    2. 이륙사의 의 비교문학적 가치     20세기 20-30년대에 한국에서 노신(魯迅)을 소개한 중요한 논문 중에는 이륙사(李陸史)의 이 있다. 이 문장은 노신이 서거된 지 4일후인 1936년 10월 23일부터 에 5기로 나누어 연재되었다. 이 문장의 집필속도의 빠름과 내용의 광범성은 당시 한국의 노신연구 분야에서 보기 드문 것이었다.   비교문학의 수용이론에 따르면 똑 같은 작품일지라도 독자들의 이해와 반응은 다종다양하다. 한국에서의 노신수용도 마찬가지로 부동한 문인들과 독자들은 부동한 수용입장에 따라 부동한 평가를 내리게 된다. 이륙사의 이 발표되기 전에 한국에는 이미 양백화(梁白華)가 번역한 일본학자 아오키 마사루(靑木正兒)의 논문 에서 처음으로 노신을 거론하였고 1931년 1월에는 정래동(丁來東)이 장편논문 을 에 20기로 나누어 연재하였다. 1934년에는 신언준(申彦俊)의 가 한국 지 제4기에 발표되었다. 이밖에 노신의 소설작품이 한국에서 널리 번역된 상황을 감안하면 이 시기에 노신은 한국문단에 광범히 알려진 중국작가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시기에 노신을 부정적 시각으로 본 문인들도 있었다. 이경손(李慶孫)은 1931년 2월에 라는 문장을 에 2기로 나누어 발표하였는데 당시 항간에서 떠돌던 노신의 일상생활에 대한 에피소드들을 두로 쓰면서 노신에게는 새로운 창작이 없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였고 노신이 (중국좌익작가연맹)에 가담한 것을 시답지 않게 다루고 있다. 그러면서 이경손은 후일에 한간(漢奸, 매국적)으로 전락한 장자평(張資平)을 노신보다 더 월등한 것으로 보고 정래동의 노신론에 대해서도 관점 상 다소 별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륙사의 은 일반적인 추도문의 수준을 초월하였고 학술적 연구 성격을 띠고 있었기에 정음사의 출판으로 된 에서는 제목을 으로 고치기까지 하였다. 이륙사는 중국현대문학연구에서 주로 노신, 호적, 서지마(徐志摩)에 치중하였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노신을 숭배하였다. 그가 30년대 초반에 이미 좌익 켠에 선 노신을 숭앙하였기 때문인지 그의 조카 이동영(李東英)교수는 지난 세기 70년대에 이륙사의 사상은 어느 정도로 사회주의계통에 속하며 아마 그 자신은 ‘한국의 노신’이 되려고 한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1) 이륙사가 노신에 대해 경모의 감정을 지니고 있기에 그의 노신연구는 경향성이 선명하다. 때문에 그는 노신을 ‘현대중국문학의 아버지’, ‘중국문단의 막심 고리키’, ‘문화의 전사’라고 높이 찬양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노신의 부보를 듣고 더없이 비통해하였다. “아! 그가 벌써 56세를 일기로 상해 시고탑 9호에서 영서하였다는 부보를 받을 때에 암연 한줄기 눈물을 지우노니, 어찌 조선의 한사람 후배로서 이 붓을 잡는 나뿐이랴.”2) 노신에 대한 이런 심후한 감정은 그 앞서 노신을 소개하고 평론한 정래동, 신언준 등 문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이륙사는 에서 를 분석하는데 각별한 주의를 돌리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노신의 백화소설 가 발표된 후 “문학혁명운동은 실천의 거대보무를 옮기게 되고 벌써 고문가들은 그 추악한 꼬리를 감추지 않으면 안 되였다.”“이 주인공들은 실로 대담하게 또 명확하게 봉건적인 중국 구사회의 악폐를 통매하였다.”“어린이를 구하자”는 말은 “당시 ‘어린이’인 중국청년들에게는 사상적으로는 ‘폭탄선언’ 이상으로 충격을 주었으며”“순결한 청년들에 의하여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자는 그(노신을 가리킴--필자 주)의 이상을 단적으로 고백한 것이였다.” 이런 평가는 그 경향성이 아주 선명하며 노신에 대한 숭배와 노신의 반대편에 섰던 복고(復古)파들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완연히 드러내고 있다.     이륙사는 에서 을 분석하였는데 그 관점은 대체로 정래동, 신언준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노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유명한 이 연재되면서부터는 노신은 자타가 공인하는 문단 제일인적 작가”였기 때문이었다. 뒤이어 그는 “당시 중국은 시대적으로 아Q시대였으며 노신의 이 발표될 때 비평계를 비롯하여 일반 지식군들은 라거나 라는 말을 평상 대화에 사용하기를 항다반으로 하게 된 것은 중국문학사에 남겨놓은 노신의 위치를 짐작하기에 좋은 한 개의 재료”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해 1월에 이광수는 작가들에게 톨스토이의 와 같은 빛나는 사시적 작품을 창작하라고 호소하였다. 그러면서 부정적 예로 노신을 거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노신의 나 는 노신의 소설가적 재분의 표현으로는 영광일지는 모르나 그 꽃을 피게한 흙인 중국을 위하여서는 수치요 모욕이다. ... 관우, 장비는 아Q와 공을기로 퇴화해버린 것이다.”3) 여기에서 이광수는 본의가 여하하든지간에 노신의 작품세계에 대해 ‘오독(誤讀)’하고 있는바 노신의 창작동기와 작품의 사회적 영향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이에 반해 이륙사는 9개월 후에 쓴 에서 의 현실적 의의를 적극적으로 평가하면서 이광수와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실로 수많은 아Q들은 벌써 자신들의 운명을 열어갈 길을 노신에게서 배웠다. 그래서 중국의 모든 노동 층들은 남경로의 아스팔트가 자신들의 발밑에서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시고탑로 9호로 그들이 가졌던 위대한 문호의 최후를 애도하는 마음들은 황포탄의 붉은 파도와 같이 밀려가고 있는 것이다.”4)   정래동, 신언준 등 문인들이 노신의 잡문을 거의 거론하지 않은데 반해 이륙사는 노신잡문의 가치를 인정하고 노신잡문에 대한 해독을 통해 노신의 사상발전을 연구하려고 시도하였다. 노신의 문학관에서 홀시할 수 없는 문학과 혁명의 관계에 대해 이륙사는 정래동과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정래동은 소설작품에 대한 연구에 치우면서 잡문연구를 멀리하였기에 노신 문학관에 대해 일부 편차가 생기기도 하였다. 그는 “노신은 철두철미 문예는 혁명에 인연이 가장 먼 것임으로 암만 문학자가 혁명, 혁명하고 떠들어도 제3선의 전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여 왔었다.”   이런 주장과는 달리 이륙사는 노신이 국민성을 개조하고 봉건제도를 개변하려는 목적에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노신에게 있어서는 예술은 정치의 노예가 아닐 뿐 아니라 적어도 예술이 정치의 선구자인 동시에 혼동도 분립이 아닌 즉 우수한 작품, 진보적 작품이 산출하는데서 문호 노신의 위치는 높아갔고 아Q도 여기서 비로소 탄생하였으며 일세의 비평가들도 감히 그에게는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5) 뿐더러 이륙사는 노신의 잡문집 에 수록된 잡문들을 인용하면서 노신이 진화론을 포기하고 ‘새로운 성장의 일 단계’에 들어섰다고 찬양하였다.   이 대목은 이륙사가 노신이 중국좌익문단에 합세한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는 이륙사가 한 아래의 말에서 진일보 입증할 수 있다. 국민당의 쿠테타로 하여 상해에 모여온 ‘원기 왕성한’ ‘젊은 프로학자’들이 극좌적인 태도로 노신을 공격할 때 노신은 “프로문학이란 어떤 것인가? 또는 어찌해야 될 것인가를 알리기 위하여 아버지 같은 애무로서 푸레하노프, 루나차르스키들의 문학론과 소비에트의 문예정책을 번역 소개하여 중국프로문학을 건설”하였다.6) 당시에 ‘카프’계통의 작가, 비평가들이 노신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은 점을 감안할 때 이륙사의 이런 견해는 특별히 주목되는 점이다.   이륙사는 북양군벌정부와 국민당 당국이 노신을 박해한데 대해서도 통분해마지 않았다. 그는 노신의 창작생애가 너무 짧은 것을 애석해하면서 노신이 후기에 “작가로서의 화려한 생애는 종언을 고하지 않으면 안 된”원인은 국민당정권의 박해로 하여 “손으로 쓰기보다는 발로 달아나기에 더 바쁘게”한데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런 관점은 이경손처럼 노신에 대해 편견을 가진 일부 사람들이 노신의 후기에 창작원천이 고갈되었다고 폄하하는 의론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3. 이륙사가 노신을 만났다는 문제      이륙사의 생평에는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일부 남아있다. 이것을 구명하는 일은 비교적 어려운 작업이지만 진실을 밝히기 위해 여러 면에서 자술과 가설을 고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륙사가 노신을 만났다는 자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심중히 고증할 필요가 있다. 본 논문은 이륙사의 자술에 나타난 문제점을 제기하고 논의하려 하는데 우려심도 없지 않아 있다. 광복 전 많은 한국문인들이 친일경향을 나타낸데 반하여 이륙사는 독립투사, 저항시인으로 추대되어 한국현대문학사에서는 더없이 귀중한 존재로 나서고 있다. 이런 이륙사에게서 흠집을 찾아내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어쩐지 위구심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진실을 탐구하는 것이 학문의 사명이라고 자처해 온 이상 아는 대로 연구 선색을 제공하고 사실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된다.   이륙사가 노신을 만났다는 것은 한국에서 이미 정설로 된 듯싶고 무릇 이륙사의 생평을 거론하면 반드시 그와 노신과의 만남이 빠지지 않고 소개된다. 예컨대 김학동(金㶅東) 편저로 된 에서는 이륙사와 노신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은 그 표제와는 달리, 노신문학을 본격적으로 다룬 이라 할 수 있다. 육사는 중국에 있을 당시 노신을 직접 만났을 뿐만 아니라, 노신의 소설 을 번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이때 육사는 호적, 서지마, 노신 등을 포함한 중국근대문학에 경도되고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런 소개는 완전히 이륙사의 자술에 근거한 것이다. 양행불의 추도식에서 노신과 만난 경과에 대해 이륙사는 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리고 그 뒤 3일이 지난 후 R씨와 내가 탄 자동차는 만국 빈의사 앞에 닿았다. 간단한 소향의 예가 끝나고 돌아설 때, 젊은 두 여자의 수원과 함께 들어오는 송경령 여사의 일행과 같이 연회색 두루마기에 검은 ‘마괘아’를 입은 중년 늙은이가, 생화에 쌓인 관을 붙잡고 통곡을 하던 그를 나는 문득 노신인 것을 알았으며, 옆에 섰던 R씨도 그가 노신이란 것을 말하고 난 10분 뒤에 R씨는 나를 노신에게 소개하여 주었다.   그때 노신은 R씨로부터 내가 조선청년이란 것과 늘 한번 대면의 기회를 가지려고 했더란 말을 듣고, 외국의 선배 앞이며 처소가 처소인 만큼 다만 근신과 공손할 뿐인 나의 손을 다시 한 번 잡아줄 때는 그는 매우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였다.     이상의 서술에서 우리는 이륙사가 노신을 더없이 존경했다는 것, 노신도 생면부지의 조선청년을 아주 따뜻이 대해주고 초면에도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가 될 수 있는 훌륭한 분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아래에 이 기술을 권위인사와 학자들의 서술과 대조해 보자.    양행불의 장례식 상황에 대해 중국국민당 혁명위원회 권위인사인 정사원(程思遠) 주필로 된 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6월 20일 오후 2시, 폭우가 쏟아졌다. 양행불 장례식은 만국 빈의관 영당(靈堂)에서 거행되었다. 국민당 특무들은 또 동맹의 기타 지도자들을 암살한다는 소문을 퍼뜨리었다. 송경령, 채원배는 조금도 두려움 없이 만국 빈의관에 가서 의연히 조문을 하였다. 노신도 조문하러갈 때 집을 나서면서 열쇠를 두고 나갔는데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각오를 보여주었다. 장례식이 끝난 후 노신은 비를 무릅쓰고 귀로에 올랐는데 그 비속에 충만된 피비린내를 감수한 것 같았다.7)    중국의 노신연구 학계에서 권위학자들인 임비(林非), 유재복(劉再復)이 쓴 에는 이 일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6월 20일, 양전(楊銓,양행불-필자 주)의 장례식이 만국 빈의관에서 거행되였다. 국민당특무들은 채원배와 노신을 암살하련다는 요언을 사처에 퍼뜨리었다. 이 날 오후 노신은 이미 희생될 사상적 준비를 충분히 하고 아주 침착하게 옷을 갈아입고 대문 열쇠를 조용히 허광평에게 넘겨주었다. ... 그리고는 정오에 온 허수상과 함께 대문을 나섰다.   만국 빈의관의 장엄하고 엄숙한 회장에는 심심한 애증의 정서가 흐르고 있었다. 몇 십 명의 조객들은 문어귀에 서서 감시하는 특무들을 멸시하면서 가슴을 뻗치고 회장에 들어섰다. 송경령과 채원배는 이미 양전의 영구 앞에 서있었다.8)          이 몇 가지 서술을 대조해 보면 일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1)  노신과 동행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이륙사는 노신이 송경령과 동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의 기술에 의하면 양행불의 장례식에 송경령(宋慶齡)과 채원배(蔡元培)가 동행한 것으로 되어 있고 노신에 대해서는 별도로 기술하고 있다. 노신의 이 날 일기에도 “점심에 계시(季市, 許壽裳--필자 주)가 왔는데 오후에 둘이 함께 만국 빈의관에 가서 양행불의 장례식에 참가하였다.” 라고 적혀있다.9) 임비, 유재복의 기술에는 송경령과 채원배가 노신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빈의관의 양행불 영구 앞에 서있었고 노신과 동행한 사람은 허수상이라고 하였다. 보다싶이 과 임비, 유재복의 의 기술은 이륙사가 에서 한 기술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다시 말하면 노신과 동행하여 만국 빈의관에 들어온 사람은 송경령이 아니라 허수상이며 송경령은 노신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채원배와 함께 양행불의 영구 앞에 서있었다는 것이다.      2) 노신의 反滿사상과 ‘마괘아(馬褂兒)’문제     노신의 반만 사상에 대해 중국에서는 여러 민족의 상호 단합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고려한 모양인지 별로 거론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젊은 시절의 노신은 당시 시대적분위기의 영향을 받아 분명히 반만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노신이 1933년에 만족(滿洲族)의 대표적 의상인‘마괘아’를 양행불의 장례식에서 그냥 입고 있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마괘아’는 중국어로 ‘馬褂’, ‘馬褂兒’라고 하는데 기마민족인 만주족들이 말 타고 싸우는데 편리하도록 허리까지 짧게 만든 웃옷이다. 명 왕조 이전에 중국의 한족들은 무릎 아래까지 길게 내리 드리운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는데 만족이 중국을 통치하면서 ‘마괘아’와 같은 만족의상을 입기 시작하였다. 청조말기에 조정이 부패해 지고 나라가 식민지로 전락될 위기에 처했을 때 한족들에게는 반만 사상이 머리를 들기 시작하였고 구국, 애국을  ‘만청(滿淸)’정부를 반대하는 것과 직결시키기도 하였다. 손중산이 조직한 동맹회의 誓約盟書에도 라고 쓰여 있고10) 노신이 일본에 있을 때 가담한 광복회의 서약서에도 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고 한다.11)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젊은 시절의 노신도 반만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일본에 유학 간 후 제일 먼저 청 왕조가 한족들에게 강요한 치욕적인 머리태를 베여버리고 “나는 나의 피를 조국에 바치련다(我以我血薦軒轅)”고 선언하였고 또 한족들의 강산을 광복하려는 에 가담하였다. 이런 경향은 그의 문학작품에서도 간간이 노출되고 있는데 에서 丁擧人의 금은보화를 실어간 신해혁명시기의 ‘혁명당’도 바로 명왕조의 말대황제인 숭정(崇禎)황제를 기리고 명 왕조를 ‘광복’하려는 사람들로 묘사되어 있다. 노신의 수필 에서도 노신은 한 고향사람인 범애농이 일본에서 무턱대고 자신을 반대할 때의 감수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처음에는 세상에서 제일 미운 것이 만주족이라고 생각했댔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 버금이고 제일 미운 것은 범애농이였다.” 여기에서 노신은 젊은 시절부터 청조의 만족통치에 대단한 적개심을 가지였고 한족으로서의 민족적 자존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일본에서 귀국한 후 처음에는 주변사람들의 풍습에 따라 간혹 ‘마괘아’를 입기는 하였으나 1927년 1월 후부터는 ‘마괘아’와 ‘서양 마괘아’라고 칭하는 양복을 한 번도 입지 않았고 서거할 때까지 줄곧 한족들의 대표적의상인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필자가 노신이 1902년부터 1936년까지 남긴 사진 114점을 조사해 보았는데 1926년까지의 사진 40점 중에 ‘마괘아’를 입은 경우가 간혹 있었는데 그것도 대체로 敎師직과 교육부 공무원으로 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모두 ‘마괘아’를 입은 장소였다. 1927년 1월부터 서거할 때까지의 74점 사진 중에는 ‘마괘아’를 입은 사진이 한 점도 없다.12) 아마 청조 시기 근 300년 입고 있던 ‘마괘아’를 관습의 힘에 의해 하루아침에 벗어버리지 못하다가 점차 반만 사상이 의상에까지 신경 쓰게 된 것이 아닌가고 추정된다. 혹자는 이륙사가 중국 의상문화를 잘 알지 못해 두루마기를 ‘마괘아’로 잘못 인식하지 않았는가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륙사가 노신이 두루마기 위에 ‘마괘아’를 입었다고 서술한 것을 보면 이 견해는 성립될 수 없다. 1991년 7월에 북경 노신박물관에서 일보던 張연구원한테도 이 일을 자문해보았는데 그도 단마디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3) R씨의 신분과 노신을 만난 장소의 분위기가 석연치 않다.     에 따르면 R씨는 상해 불란서 조계지 여반로(侶伴路)의 서국(書局) 편집원이다. 그는 노신과 사전에 아무런 약속이 없는 상황 하에 양행불의 장례식에서 한 무명의 조선청년을 노신에게 스스럼없이 소개할 수 있는 미스터리 식 인물이다. 사실 이날 노신은 국민당 특무들에게 피살될 각오를 하고 집 열쇠마저 두고 나왔으며 추도식은 특무들의 삼엄한 감시 밑에 있었고 일기도 좋지 않아 폭우가 억수로 퍼부었다. 이처럼 열악한 천기와 수시로 총알이 날아올 수 있는 살벌한 분위기속에서 노신이 이륙사와 같은 무명의 조선청년을 만나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눌 겨를이 있었겠느냐가 의문스럽다.   4) 노신이 양행불의 ‘관을 붙잡고 통곡했다’는 문제     노신은 언제나 근엄한 표정을 하고 있으며 공적인 장소에서는 냉혹할 정도로 감정표현을 절제하는 중국문인이다. 필자가 지금까지 찾아볼 수 있는 자료에는 노신이 양행불의 추도식에서 관을 붙잡고 통곡하였다는 서술을 보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륙사의 기술과  임비, 유재복의 다음과 같은 기술을 대조해 볼 필요가 있다.     만국 빈의관의 장엄하고 엄숙한 회장에는 심후한 애증의 정서가 흐르고 있었다. ... 처량한 애도곡이 울리는 가운데, 비애에 찬 흐느낌 소리 속에서 사람들은 묵묵히 선서하는 듯하였다. 영별이외다! 하지만 당신이 채 걷지 못한 길을 우리 모두가 걸어갈 것입니다.                                                                                       -- 임비, 유재복     이와 달리 이륙사의 기술처럼 관을 붙잡고 통곡하였다는 것은 노신의 종래의 성격, 이미지 그리고 장소의 분위기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서 역시 중국인들에게 잘 접수되지 않는 점이다. 낭만주의 시인인 곽말약(郭沫若)이라면 이런 모습을 보일런지 모르지만 노신의 경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이륙사의 에 왜 이런 묘사가 나왔겠는가는 한번 생각해볼만한 일이다. 노신은 양행불 추도식이 있은 이틑날에 일본 벗(樋口良平)에게 시 한수를 써서 증송하였는데 이 시는 후에 라는 제목으로 많은 저서에서 수록되고 있다. 시 원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豈有豪情似舊時,        花開花落兩由之,        何期淚灑江南雨,        又爲斯民哭健兒。13) (대의: 그 옛날 호기와 격정 어디로 갔나        꽃이 피고 지여도 할 말이 없구나        어느새 눈물이 강남의 비 되어 쏟아지는데        여기 백성들 또 건아를 위해 통곡하누나 )      이 시에서 ‘눈물이 강남의 비’로 되었다거나 ‘건아를 위해 통곡’한다는 것은 단지 문학적 표현으로서 이 시를 근거로 노신이 추도식 현장에서 통곡했다고는 할수 없다. 아마도 이 시가 항간에서 노신이 추도식 현장에서 통곡했다는 것으로 와전되지 않았는가고 추정된다.   5) 고쳐써야 할 이륙사 연보(年譜)     지금까지 한국에서 출판된 이륙사 관련저서에는 이륙사가 노신을 만난 시일이 모두 ‘1932년 6월 초’로 되어있다. 김학동 편저로 된 (새문사, 1986)에서 이륙사가 노신을 만난 시일을 1932년 6월 초라고 쓰고 있고 심원섭 편주로 된 (집문당, 1986)의 작가연보에도 “1932년 (29세) 6월 초 만국 빈의사에서 노신을 만나다.”라고 쓰여 있다. 이동영 편으로 된 (문학세계사,1981)의 에는 “1932년 6월 초 어느 날 중국과학원의 부주석이요 국민혁명의 원로이던 양행불의 호상소인 만국 빈의사에서 노신을 만났으며...”라고 적혀있다.   이륙사가 노신을 만났다는 자술의 진실성 여하를 잠시 제쳐놓더라도 이 연보는 틀린 것이다. 양행불의 장례식은 1933년 6월 20일이다. 여기에서 우선 연도가 틀리며 일자도 틀리게 적혀있다. 양행불이 암살된 날은 6월 18일 (일요일)이고 장례식은 6월 20일 (화요일)인데 이륙사는 ‘6월 초’의 어느 ‘토요일’ 아침에 조간신문에서 양행불 피살 기사를 읽었고 그 뒤 3일후에 장례식에 참가했다고 쓰고 있다. 이는 기억의 오차라고 추정할 수도 있는데 주석을 달아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본다. 문제는 이왕의 연보에서 이륙사의 1932년 행적이 잘못 되였으면 1933년의 행적도 따라서 의문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이것을 자그마한 기억오차로만 간주하지 말고 보다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심중한 검토를 필요로 하고 있다.      4. 주석을 달고 시정해야할 일부 문제     이 아주 빠른 시일 내에 집필되었기에 오차가 나타난 것은 피면할 수 없다고 인정된다. 그런데 지금 을 출판할 때마다 이런 오차에 대해 주해를 달지 않고 그대로 답습한다면 독자들에게 그냥 ‘오독’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필자는 여러 개 판본으로 된 을 두루 살펴보았는데 모두 똑 같은 문제가 존재하고 있다.   문장의 순서에 따라 몇 가지만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노신이 1917년에 귀국하여 절강성의 사범학교와 소흥 중학교 등에서 리화학 교사로 있으면서 작가로서의 명성이 높아졌다는 문제 - 노신은 1902년에 일본 유학을 갔고 1909년에 귀국하여 교편을 잡았고 1912년에 교육부에 취직하였다. 그가 작가적 명성을 날리게 된 것은 1918년에 를 발표하면서부터였다.     2) 노신이 북경에서 주작인, 경제지, 심안빙 등과 함께 ‘문학연구회’를 조직하였다는 문제 - 노신은 문학연구회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지 않았고 회원으로 된 적도 없다. 다만 문학연구회의 결성을 지지, 성원하였을 따름이다.   3) 1928년에 중산대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상해에서 지를 주재하였다는 문제 -  노신은 1927년 4월에 중산대학 교수직을 사직하였고 동년 9월에 광주를 떠나 10월에 상해에 이주하였다. 당시 상해에는 지가 간행되지 않았고 그 후 1930년 1월에 지가 창간되었는데 노신이 이 간행물의 주필로 되었다.      4) 노신이 1931년에 상해에서 체포되었다는 문제 - 1931년에 ‘좌련 5烈士’중의 유석(柔石)이 체포될 때 노신의 도서출판 계약서를 몸에 지니고 있었다. 이것을 발견한 특무들은 노신의 집 주소를 대라고 핍박하였으나 유석은 시종 불복하였다. 이런 정세에서 노신은 친우들의 서신들을 불살라버리고 일본인 우치야마(內山完造)씨의 도움을 받아 온 가족이 황륙로 화원의 한 일본 여관에 피신하였다. 사람을 질식케하는 작은 방에서 노신 일가는 하나의 침대를 사용하면서 한 달 동안이나 피신생활에 시달리었다. 아마 이 일이 외부에는 노신이 체포되었다고 와전된 듯싶고 이륙사도 그 소문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5) 국민정부의 어용단체인 를 반대하던 중 지난 10월 19일에 서거하였다는 문제 - 현존 자료를 살펴보면 이 시기에 국민당 어용단체인 라는 조직이 없었다. 노신은 임종 전에 트로츠키 파 진중산(陳仲山)과 논쟁을 벌린 일은 있다.   6) “유명한 오사(五四)운동이나 오주(五州)운동”- ‘오주’운동은 ‘오삼십’(五卅)운동의 오기(誤記)이다. ‘5.30’운동은 1925년 상해에서 일본제국주의와 북양군벌정부가 파업에 나선 상해의 방직노동자들을 참살하여 발생한 혁명적운동이다.   7) 1926년 4월 15일 장개석의 쿠데타- 장개석의 쿠데타는 ‘1927년’의 오기이다.                  5. 맺음말     이륙사의 은 학술적으로 노신의 문학세계를 평론하려한 정래동이나 신문기자 신분으로 노신의 생활을 살펴보려 한 신언준과는 달리  노신 숭배자이며 저항시인으로서의 이륙사의 숭배의 정서가 잘 드러나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상황에서 비교적 전면적으로 노신의 문학세계에 접근하고 높은 평가를 하고 있어 학술적 가치도 갖고 있다. 때문에 일부 에서 을 으로 고친 것은 무리가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이 문장은 노신서거 후 4일 만에 발표된 장편추도문이기에 일부 문제점도 안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필자는 이 논문을 집필하면서 착잡한 마음을 금치 못하고 있다. 독립투사이고 저항시인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숭배를 받고 있는 이륙사의 자술에서 흠집을 찾아내고 문제점을 제기한다는 것은 그 누구도 여간한 용기가 아니고서는 할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필자는 10여 년 전부터 이 문제를 제기하려고 했는데 동료들의 권고로 포기하였었다. 필자는 종래로 이륙사를 숭배하는 사람으로서 이륙사의 독립투사로서의 공적과 저항시인으로서의 위상을 부정하려는 시도는 조금도 없다. 하지만 진실을 구명하여야한다는 학자의 사명도 포기할 수 없는 입장이다.     비근한 예로 일본 학자 와타나베 죠우(渡邊 襄)씨는 노신을 숭배하는 입장이면서도 노신의 자술에서 ‘환등(幻燈)사건’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많은 정력을 투입하여 조사, 연구하였다. 그리고 논문 를 발표하였다.14) 이처럼 자신이 숭배하는 문인일지라도 진실은 구명되어야 한다는 태도는 아마 모든 학자들의 공동한 인식일 것이다. 거기에 또 돋보이는 것은 중국학자들이 이 논문을 중요시하고 학술논문집에 실어준 것이다.   이륙사의 자술에 나타난 문제점을 해외의 한 俗人이 거론한다는 것이 실로 외람되고 죄송스러운 줄은 알고 있는 바이지만 순전히 학술적 입장에서 출발한 본문의 취지를 넓은 아량으로 대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04. 6     참고문헌   김학동 편저: , 새문사, 1986 심원섭 편주: , 집문당, 1986 이동영 편: , 문학세계사, 1981 《魯迅日記》:《魯迅全集》15捲, 人民文學齣版社,1981 林非、劉在復:《魯迅傳》, 中國社會科學齣版社,1981 程思遠 主編:《中國國民黨百秊風雲》,延邊大學齣版社,1998 《魯迅》(影集):北京魯迅博物館 編輯,文物齣版社,1976  주: 1) , 제290페이지  2) , 정음사, 1980, 제76페이지  3) , 1936년 1월 6일 4) , 정음사, 1980, 제77페이지  5) 동상서, 제83페이지  6) 동상서, 제88-89페이지  7)  《中国国民党百年风云》, 程思远主编,延边大学出版社, 1998, 第424-425页  8) 《魯迅傳》: 林非、劉再復,中國社會科學出版社,1981年,第312-313頁  9) 《魯迅日記》:《魯迅全集》第十五卷,第85頁,人民文學出版社,1981  10) 《中国国民党百年风云》,程思远主编,延边大学出版社,1998, 第44页  11) 동상서,第37页  12) 《魯迅》:北京魯迅博物館編輯,文物出版社,1976  13) 《魯迅全集》15卷, ,第85頁, 人民文學出版社, 1981  14) 《日本學者中國文學硏究譯叢》(第三輯),吉林敎育出版社, 1990, 第154頁 [이 글은《朝鲜-韩国学语言文学研究(3)》(民族出版社‘北京’2006.2)에 수록되었음]              
                  로신의 학력은?              - 위인은 학력을 무시했다                           김병활     로신은 현대적인 중소학교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그는 동년시절과 소년시절을 서당(私塾)에서 보냈다. 처음엔 숙부벌 되는 옥전 선생에게서 ‘감략’을 배웠고 후에 삼미서옥의 수경오 선생에게서 사서오경과 ‘이아’,‘주례’와 ‘의례’ 등을 배웠다. 그후 가세가 기울어지자 1898년에 할 수 없이 등록금을 면제하는 남경수사학당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유신파가 세운 사관학교인데 그 목적은 해군 군관을 양성하는 것이였다. 학제는 9년인데 세 개 단계로 나누었다. 제1단계는 3반이라고 하는데 매 3년마다 1개 반급씩 진급한다. 학과목은 한문과 영문 두가지였다. 한문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상식적인 것들이였고 영문은 ABCD부터 시작하였다. 로신은 ‘납함’ 서문에서 “이 학당에 와서야 나는 이 세상에 또 물리(格致), 수학, 지리, 력사, 도화와 체조 등 학문이 있는 줄 알았다.” 라고 썼다. 졸업 전에는 천문, 항해, 기계 등 전업과목을 증설하였다. 만약 억지로 지금의 학교와 비교해 본다면 이 초창기의 신식 학당은 대체로 지금의 중등전문학교와 비슷했을 것이다. 이 학당의 3반은 초중과 비슷했고 2반은 고중과 비슷한 것인데 1반을 졸업해야 지금의 중등직업기술학교와 같은 학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로신은 이 수사학당에서 7개월만 공부하고 퇴학하였다. 그 이유는 이 학당의 분위기가 너무 문란했기 때문이였다.   그해 년말에 로신은 강남 륙사학당(륙군 사관학교)에서 부설한 광로학당에 학적을 두었다. 이 학당도 역시 사관학교였는데 광로학당은 석탄 채굴을 위해 림시로 설립한 학교였다. 창시자의 말대로 “후일 전문 학당에 필요한 인재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였다. 때문에 전쟁에 대해 공부하지 않았고 채탄업 관련 학과목을 주로 공부하고 철로 부설을 보충과목으로 배웠다. 이 시절 여러 학과목을 제외하고 로신에게 제일 큰 영향을 준 것은 과외로 읽은 ‘천연론’(생물진화론)이였다. 3년 후인 1901년 말에 로신은 이 학당을 졸업하였다. 이는 로신 평생에 가장 완정한 최고 학력인데 그 졸업증서(文凭)도 수사학당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중등직업기술학교 졸업증서와 맞먹는다. 로신은 ‘아침 꽃을 저녁에 줏다’ 중의 한 문장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아마 광로학당인 것 같은데 잘 기억나지 않는다. 졸업증서도 지금 내 손으로 보관하지 않아 조사하고 고증할 수 없다.” 이 말에서 우리는 로신이 확실히 그런 졸업증서를 받은 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중국의 최고 학부이며 중국의 첫 국립 종합성 대학인 북경대학은 창립된지 겨우 4년이 되며 청화대학은 그후 1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설립되였다.        그 이듬해 로신은 강남 독련공소의 파견으로 일본류학을 하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아마 그더러 광산업, 채탄업을 배우라고 한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관료기구는 여느 때나 다름없이 일 처리가 전후 연결이 잘 되지 않아 일본에 보낸 류학생들이 뭘 하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로신은 처음에 동경의 홍문학원에 적을 두었다. 이 학교는 사립으로서 기한 2년인데 전문적으로 중국 류학생들에게 일본어와 기타 중학교 수준의 기초과목을 가르치는 예비 학교였다. 이 학교의 학생들은 대부분 대청국의 문동과 수재들이여서 평소에 중국 성인들의 경서만 읽다보니 상식적인 과학지식마저 몰라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이는 이미 륙사학당의 졸업증서를 받은 로신에게는 시간 랑비였다.   그러면 이 홍문학원은 어느 급별(級別)에 속할까? 아마 보통 중학교거나 단기 강습반과 비슷했을 것이다. 주작인의 회억에 의하면 홍문학원 졸업증서를 가진 학생은 전문고등학교에 진학할수밖에 없다고 한다. 만약 국립대학에 진학하려면 따로 3년제 고등학교에 가야하는데 이것이 바로 대학 예과이다. 의학 공부를 하려면 요구 조건이 더 엄격한바 대학의 의학부는 국립고등학교를 졸업해야 들어갈 수 있었다. 보통 중학교를 졸업하면 전문학교밖에 들어갈수 없고 수료 년한은 4년이였다. 졸업한 후에는 의사로 될수 있지만 의학사 학위는 가질수 없었다. 로신이 홍문학원을 졸업하고 센따이 의학전문학교에 진학했는데 당시 그 학교는 고등전문학교(大專)에 불과하였고 졸업해도 학력은 인정하지만 학위는 수여받을 수 없는 것이였다. 그런데 로신은 이 학교에서 2년만 공부하고 퇴학하였기에 이 학교의 성격과 급별이 로신의 학력에는 별로 큰 영향이 없었다.    동경에 돌아온후 로신은 더는 정식 학교에 편입되지 않았다. 한 시기 그는 독일어학협회에서 부설한 독일어학교에 다닌적이 있었는데 매일 열심히 수업에 참가하지 않았고 거의 모든 시간을 하숙집에서 독일어를 자습하거나 독일어 서적과 잡지를 읽곤 하였다. 이 시기 그는 허수상 등 친구들과 같이 장태염에게서 문자에 관한 학문을 배웠다. 그리고 주작인과 함께 ‘역외소설집’을 편찬했는데 그 발행부수는 아주 적었다.   이처럼 중등전문학교 졸업증서를 받고 고등전문학교에서 중퇴한 로신이 귀국한후 북경대학, 북경고등사범학교, 북경녀자고등사범학교 등 여러 대학의 강사로 되었는데 이에 대해 지금 일부 학자, 교수들은 리해할수 없다고 말한다. 심지어 어떤 교수들은 “로신의 학문수준은 별거 아니야. 그의 동생이 교수로 될 때까지 그는 그냥 강사였어.”라고 말한다. 기실 당시 북경대학의 규정에 따르면 학교 밖에서 겸직으로 초빙된 사람은 최고로 강사인데 이런 초빙강사가 아무리 학문수준이 높아도 교수라고 부르지 않았다. 당시 로신의 정식 직업은 교육부 첨사였다. 후일에 북경을 떠나 하문대학, 중산대학에 가서 취직할 때에는 자연스럽게 교수로 된 것이다. 물론 로신은 그때에도 직함에만 집착하는 후일의 ‘고루한  선생’들과는 달리 강사, 교수 등 허울뿐인 직함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일부 사람들은 로신은 실력, 즉 작품으로 교수가 된것이지 학력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 말은 학력만으로가 아니라 작품으로도 교수가 될수 있다는 말이 되겠다. 그렇다면 로신의 작품을 가지고 오늘날 직함평의에 참가할 수 있느냐가 문제이다. 조기 론문인 ‘파악성(破惡聲)론’,‘인간의 력사’,‘과학사 교편’,‘문화편지(偏至)론’,‘마라시 력설’ 등은 ‘순 학술적’이라고 할수 있겠다. 그러나 문장 앞에 내용요지와 일련의 키워드(关键词)가 없고 문장 뒤에는 기다란 주석(注释)이 없는데 론문으로 취급할수 있느냐가 문제이고 ‘학술적 규범’에 맞느냐가 문제이다. 그래도 만약 학술논문으로 인정해 준다면 그런 문장들이 발표된 재일 하남적 류학생들이 창간한 지가 어떤 성질의 간행물인가가 문제로 된다. 그 기간간행물이 ‘핵심 간행물’이냐 아니면 ‘권위성 간행물’,‘중요 간행물’이냐? 국가급(国家级)이냐 아니면 성급(省级), 지구급(地级), 구현급(区县级)이냐? 그리고 지금 간행물 책임기관(主办单位)의 행정 급별로 해당 간행물의 급별을 결정하는 관행으로 본다면 재일 하남 류학생회(留日学生会)는 어떤 급별의 ‘행정기관’인가가 문제이다. 성부급(省部级)이냐 아니면 사국급(司局级), 현처급(县处级)이냐?   또 잡문을 가지고 직함평의에 참가할수 있느냐도 문제이다. 만약 할수 있다고 하면 ‘수염을 론함’, ‘제길할것을 론함’, ‘과부주의’ 등 잡문 명작은 점수를 몇점 딸수 있는지? 만약 이런 잡문을 가지고는 직함평의에 참가할수 없다고 하면 왜 후일에 이런 문장들이 되려 ‘로신 연구가’들이 대거 승진하는 자본으로는 될수 있는지?    아무튼 오늘의 현실에서 로신 작품 중 번역 작품과 외의 소설, 산문 등 작품들은 문학사 교수로 놓고 말하면 애초부터 직함평의에 제출할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로신이 북경대학 강사로 되기 전에 로신의 번역 작품과 는 아직 출판되지 않은 상황이였다. 는 로신이 북경대학에서 수업을 하기 위한 강의고였다. 그리고 은 지금의 말대로 하면 개체 도서상인들의 해외 불법 출판물과 같은 것이였다. 지금 법대로 하면 직함평의에 참가할수 없을 뿐만아니라 몰수, 벌금 등 출판법 위반으로 인한 처분을 당할지도 모른다.           일부 사람들은 한 작품과 저작의 가치는 어떤 매체에 발표되였는가에 의해 결정되는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가치에 따라 결정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가치’를 결정하는 권한이 누구에게 있으며 어떻게 그 가치를 가늠하느냐가 문제이다. 자신의 ‘계승자’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체제하에서 그런 ‘가치’의 공정성과 진리성을 담보할수 있겠는가? 다행히 수십년 이 지나가면 ‘영원(永恒)’이라는 시간 철칙에 따라 부지기수의 문자 쓰레기들이 씻겨나가고 없어질 것이다. 그 대신 로신의 문학만은 찬사를 얻든, 욕을 먹든 누구도 에둘러 갈수 없는 존재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전란이 련속된 시대거나 혁명이 최우선시 되던 시대거나를 막론하고 로신은 슬로건과 리론만으로가 아니라 실적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실적을 이룰수 있은것은 물론 인사제도의 유연성과 출판, 언론의 상대적 자유와 일정한 관련이 있다. 그리고 로신이 자각적으로 이른바 ‘주류’와 멀리하고 ‘정통’과 거리를 두면서 달갑게 ‘소졸(小卒)’이 되려 한 인생선택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인생 선택은 그의 일생에 관통되였다. 일찍 로신은 소흥을 떠나 남경수사학당에 가서 학문을 닦으려 할 때 “마치 남다른 길을 선택하고 다른 지역에 가서 다른 사람들과 사귀는 것을 추구하려 했다.” 그러나 “그 시기 글공부를 하여 과거시험을 보는 것이 정도(正路)이고 이른바 양무(洋務)를 배우는 것은 사회적으로 길이 막힌 사람들이 령혼을 서양놈들에게 팔아버리는것과 같아서 가배로 무시당하고 배척받았다.” 일본에서 로신은 중국 류학생들이 진취심이 없이 주색에 빠져버린것을 보고 염오감을 가졌다. 본래 동경 부근에 있는 찌바와 가나자와에도 의학전문학교가 있었으나 로신은 동경 일대에서 무리를 지어 다니는 대청국의 ‘머리태 군대(辮子軍)’과 ‘후지산(富士山)’(주: 중국 류학생들이 머리태가 부끄러웠지만 베여버릴수는 없어 머리 우에 틀어 얹은 다음 학생모를 눌러써서 마치 일본 후지산처럼 되었다는 비유)들을 피해 보다 먼 지역에 있는 센따이를 선택하였다. 귀국 후 그는 오래동안 소흥에 칩거하였고 북경에 간 후에도 출근 외에는 홀로 소흥회관의 큰 홰나무 밑에 앉아 고대 비문들을 베끼는 일에 몰두하였다. 1927년에 광주를 떠날 때 그에게는 두갈래 길이 놓여있었다. 하나는 북경에 돌아가 계속 교수로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상해에 가서 직업 작가가 되는 것이였다. 나중에 로신은 후자를 선택하였다.     로신은 일관적인 혁명자가 아니였다. 그는 이전의 교과서에서 말한것처럼 시종여일 전사로 되어 세계를 놀랠만한 전투를 지휘한 것도 아니였다. 로신도 신선이 아니라 사람이니 먹고살아야 하고 가족을 부양할 의무도 행해야 했다. 생활 여건이 마련되면 로신은 늘 자각적으로 아카데미식 대학과 관방 문단에 거리를 두려 했는데 이는 별로 이상할것 없고 더구나 질책할수도 없다. 이는 오늘날 우리 학자, 교수들더러 짐을 싸고 집에 돌아가 장보러 다니고 자유 기고인이 되라고 강박할수 없는것과 마찬가지 도리이다. 하지만 오늘날 ‘지식인’이라고 당당히 자처할수 있는 사람들은 자각적으로 주변(邊緣)의 립장에 서서 독립적인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여야 한다. 최소한 주동적으로 권력에 아부하고 금전리익의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된다. 오늘날 좌우를 두루 살펴보면 빈 허울에만 집착하고 대단한 학자, 교수로 자처하면서 형이상학적 ‘고담준론’을 펴는 사람들이 있는것 같은데 그들에게 이 정도의 요구를 제출하는 것은 그처럼 과분한 것은 아닐것이다.              [본문은 중국 야후 ‘지식당’에서 취재하여 적당히 번역, 편집하였음. 문장 중의 일부 견해는 역자, 편집자의 견해와 다를수 있음.] \\\\\\\\\\\\\\\\\\\\\\\\\\\\\\\\\\\\\\\\\\\\\\\\\\\\\\\\\\\\\\\\\\\\\\\\\\\\\\\\ 2013년 09월 06일 작성자: 金赫 로신의 문장이 의무교육교과서에서  삭제당한 건에 대한 단상   글/김혁           로신의 문장이 의무교육교과서의 필수必修문장에서 삭제당하였는데 그 공식적인 이유인즉 로신의 문장이 “내용이 심오하여 중학생으로서 이해가 어렵고 문장의 사상이 시대에 부합되지 않는다”는것이다. 교과서에 수록되였던 로신의 대표적인 문장인 “아Q정전”,”공을기”,”잊기 위한 기념”,”고향”등을 생각하면 솔직히 짜증만 나던 중학시절이 생각날것이다.항상 중점분석문장이였던 로신의 문장,매단락마다 길고 긴 분석필기를 했어야 했고 또 그것을 하나하나 외우느라 골머리를 앓던 기억이 누구나 있을것이다. 하지만 지금쯤 돌이켜보면 중학시절에 배웠던 그 많은 문장중에서 머리속에 남는것이 로신의 문장뿐이다. 노신의 문장들은 하나하나의 비수와 같이,당시 암흑했던 사회에 드러났던 민족의 렬근성에 대해 적라라하게 찔러 주었었다.이런 국민련근성과 사회암흑성에 대한 비판정신은 세월이 흘러서 결코 버려져야 하는것이 아니라 더더욱 중요시해야 하는 일종 사회관과 가치관이라고 생각한다. 근 30년간 중국사회는 놀라운 크나큰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다.하지만 이런 변화와 발전속에서도 변화되지 않는것이 있다면 바로 국민과 민족의 렬근성이 아닐가 생각한다.권력에 대한 무조건 충성,인간의 생명가치에 대한 불존중,금전으로 얽매인 인간관계 등등.한마디로 귀납한다면-”권력을 하늘같이 떠받들고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것,또한 이에 대한 무관심과 무인식”이라고 할까?정부의 부패가 끊어지지 않고 사법체제가 권력만을 위해 돌아가고 정부의 재산이 나날로 팽창되지만 오히려 국민의 제일 기본적인 교육문제,의료문제,거주문제,인권문제 등에 대한 해결은 나날로 늦어지고 있다는 점. 또한 이에 대해 느끼지 못하고 있는 많은 불쌍한 국민들. 신시대의 우월성을 노래하고 영웅모범,도덕모범만 노래해는것만이 이 시대에 부합되는 주요사상이라고 해야 하는가?아니다.더 중요한것이 바로 로신과 같은 사회의 암흑성과 인성의 추악함을 비판하는 시대적비판정신이라고 생각한다.사회의 번지르르한 발전결과에만 집착하고 그 뒤에 숨어 있는 악성종양과 같은 사회의 문제점들을 비판하고 해결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희망이 없는 사회로 되고 말것이다. 찬송만 허락하고 비판은 금지? 이런 아Q적인 자아도취정신이 바로 이 시대에 있어서 무서운것이다. 의무교육교과서에서 로신의 문장을 삭제하는것은 바로 학생들의 정확한 비판정신을 그대로 말살하고 개같은 충성심을 키우려는데 있지 않나 생각도 해본다.분서갱유와 같은 일이라고 이해하고 싶다. 微博WEIBO.COM에서 #教材删除鲁迅文章#을 쳐보면 아래와 같은 결과가 나온다. 무엇을 설명하는가?   로신의 문장들이 어려워진것은 문장에 대한 평론가들의 고집적인 “중국특색의 사회주의”적인 분석과 평론이라고 생각한다.다문화적이고 더욱 오픈된 사상환경속에서 로신의 문장은 혹은 새롭게 혹은 가볍게 객관적이면서도 생명력이 있는 분석 및 평론이 되여야 하겠지만 아쉽게도 지금까지 시종 변화되지 않은 너무 통일적이고 너무 버거운 분석으로 인해 오히려 로신문장의 진정한 가치와 의의가 잃어간것이 아닐가고 생각도 해본다. 한 작품은 가볍게 이해하면 가벼워지는것이고 무겁게 이해하면 무거워지는 법이다.중학생들의 이해능력수준에 포인트를 두고 중학생들이 로신의 문장에서 우러러나오는 비판정신을 진정히 이해될수 있도록 가볍게 분석할수도 있는것이 아닐가 생각해본다. 로신의 사회비판정신은 진정 필요한것이다.비판이 없는 사회는 희망이 없는 사회이고 이런 비판마저 허용하지 않는 사회는 암흑한 사회이다.  
589    "동양평화론"은 오늘도 빛난다... 댓글:  조회:3849  추천:0  2016-11-10
«동양평화론»의 선구자 ㅡ 안중근 2014년 04월 14일 13시 31분  작성자: 김룡운 금년(2014년)은 안중근(安重根)의사 순국 104주년이 되는 해이다. 안중근의사는 비단 불굴의  반침략투사일뿐만아니라 동방의 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국제주의전사이기도 하다. 그가 순국한후 한국인뿐만아니라 수많은 중국인들도 그의 장거를 칭송하고 그의 죽음을 두고 슬퍼하였다. 중국인들은 안중근의사를 자기들의 친밀한 벗으로 생각하였다. 당시 손중산과 주은래 , 우우임(宇佑任) 등이 안중근의사의 영웅적거사를 높이 칭송하였고 심지어 원세개마저도 안중근의사가 순국하자 《동방의 영웅호걸》이라는 제사를 써서 안중근을  추모하였다.   오늘까지도 중국인민들은 인중근의사를 잊지 않고있다. 중국정부는 안중근의사 순국 104주년을 맞으면서 할빈에다 안중근의사기념비를 세웠다. 자기의 유골을 할빈에 묻어달라는것이 안중근의 유언인데 그 유언을 다름아닌 중국정부가 풀어준것이다. 비록 유골을 찾지 못해 안치하지 못했지만 기념관이 섰으니 구천에 있는 안중근의사도 만족의 미소를 띄울것이며 중국정부에 감사를 드릴것이다. 지난 3월 2일, 네델란드(荷兰)의 국제회의때 박근혜대통령은 습근평주석에게 중국에서 안중근의사기념관을 세워준데 대해 심심한 감사를 표시하였다. 안중근의사기념관의 설립은 중한 두 나라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발전시키는데서 하나의 디딤돌로 될것이다.   헌데 최근 일본의 외부장관이라는 자가 중국에서 안중근의사기념관을 세운데 대해 유감을 표시하고 안중근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모독하여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침략자에겐 진실이나 정의나 원칙이라는것이 근본상 없다. 그들에게는 오직 어불성설인 궤변밖에 없다. 104년전 안중근의사를 사형에 언도할 때도 일본법원은 안중근을 “테러분자”라고 판결을 내렸었는데 오늘 일본정부가 자기네들의 침략조상이 한 말을 곱씹으면서 또다시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라고 모독하고있는것이다.   갑오중일전쟁이 일어난지 12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동아시아는 동란과 불안이 사라지지 않고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보다 우선시되고 필요한것이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이다. 이렇다고 보면 104년전에 처음으로 내놓은 안중근의사의 《동양평화론》 구상은  금후 동아시아의 평화를 도모하고 동아시아지역의 공동체를 구성하는데서 중요한 참고가치를 갖고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1909년 10월 26일, 한국의 의병참모중장 안중근이 할빈역에서 일본 총리 겸 조선총독부 총감인 이또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격살하였다. 이또 히로부미는 조선을 강점하고 중국침략을 획책한 악명높은 침략자로서 중국인민과 조선인민의 공동의 원쑤였다.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의사는 려순의 일본관동도독부감옥에서 3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안중근은 심문을 당할 때마다 자신은 테러분자가 아니라 의병중장의 신분으로 정정당당하게 동양의 평화를 위해 정의로운 일을 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일본법원은 테러죄로 판결을 내리고 교수형을 내렸다. 안중근의사는  자기가 평생 생각해왔던《동양평화론》을 집필하려고 사형집행연기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고말았다. 안중근의사는 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원래의 구상은 선언, 전감( 前鍳),현상(现状),복선(伏线),문답(问答) 등 5개 부분이였지만 애석하게도 선언과 전감의 일부분밖에 쓰지 못하고 교수형을 당하고말았다. 가령 《동양평화론》이 제대로 완성되였더라면 력사는 안중근에 대해 더욱 무게 있고 찬란한 평가를 했을는지도 모른다.   《동양평화론》이 비록 미완성이긴 하지만 상당히 완정한 동양평화구상을 담고있다. 내용을 귀납하면 아래와 같다.   1. 일본은 이웃 나라에 대한 침략을 정지하여야 한다. 2. 일본은 일로전쟁에서 불합리하게 차지한 대련과 려순을 중국에 돌려주어야 한다. 3. 중국 려순에서 회의를 열고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위한 방책을 토론하여야 한다. 4. 려순에 큰 은행을 세우고 중.일.한이 공동으로 사용할수 있는 화페를 발행하여야 한다. 5. 중.일,한 청년들로 구성된  군단(军团)을 조직하고 려순항을 동양의 평화근거지로 되게 하여야 한다.   사형을 앞두고 쓴 《동양평화론》, 지금 읽어봐도 가슴이 뭉클하게 한다. 얼마나 동양을 사랑했으면, 얼마나 평화를 사랑했으면 사형을 눈앞에 둔 사람이 《동양평화론》을 썼겠는가. 실로 고금에 보기 드믄 평화의 수호신이라고 할만하다.   안중근의사의 《동양평화론》은  21세기 동아시아의 평화유지와 동아시아공동체를 도모하는데 중요한 참고가치를 제공하기에  더더욱 소중하다. 《동양평화론》을 보면서 우리는 서유럽의 《슈만계획》을 떠올리게 된다. 2차세계대전이 끝난 5년후인 1950년에 프랑스의 외교부장 라벨 슈만은 적대국이였던 독일과 손잡고 다음과 같은 계획을 내놓았다. 프랑스와 독일의 중요한 석탄, 강철기지를 바탕으로 서유럽 각국의 석탄, 강철 공업부문과 련합하여 초국가적인 련합경영기구를 건립하고 각국이  공동으로 관리한다. 이것이 세계적으로  소문난 《슈만계획》이다. 이 계획은 당시 막강한 세력을 갖고있던 미국과 쏘련에 대응하여 안정하고 강대한 유럽을 세우려는 의도에서 출발한것이였다. 이 계획은 서유럽 각국의 호응을 받아 1951년 4월 18일 《유럽석탄강철련합경영》이라는 이름으로 기초되였다가 다시 《슈만계획》으로 작성되였다. 그것이 후에 유럽련맹으로 발전, 장대해졌고 오늘까지 이어지고있다. 지금 유럽련맹은 전지구화(地球化) 정도와 구역화(区域化) 정도에서 세계의 앞장에 서고있다. 련맹국가지간에 아무런 규제가 없이 제집처럼 마음대로 들락거리며 같은 화페를 사용하고있다. 유럽련맹은 이렇게 하면서 화목하고 함께 발전하고 함께 번영하는 리상적인 사회를 구축해가고있다.   이에 반해 동아시아는 지구와와 구역화 정도에서 상당히 뒤떨어지고있다. 인원, 물자, 화페의 교류에서 오히려 동아시아구역 외의 국가들의 관계가 동아시아국가들의 관계를 초월하고있다. 비자만 보더라도 일본과 한국은 동아시아 외의 허다한 국가들에게는 무비자 입국을 허락하지만 유독 이웃인 중국에 대해서만은 까다롭고 엄격한 비자심사제도를 실시하고있다.   더욱 근년에 들어와서 일본과 한국, 중국과 일본지간에 령토분쟁으로 모순과 갈등이 나날이 불거지고있다.   이런 악화된 상황에서 절실히 필요한것이 《슈만계획》과 같은 조치이다. 최근에 료녕대학 력사학원 교수이며 료녕대학 동아시아관계연구센터 주임인 권혁수( 权赫秀)가 아래와 같은 구상을 내놓았다. 요약하면 이러하다.   104년전에 내놓은 안중근의사의 《동양평화론》은 오늘에도 커다란 의의를 갖고있는바 그의 정신을 이어 보다 건강하고 평화롭고 발전된 동아시아를 구축하여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중, 로, 한, 일은 력사연원(历史缘源)을 갖고있다. 동아시아론단과 동아시아평화기금을 설립하고 동아시아 평화와 합작에 관계되는 각종 연구사업을 지원하며 노벨평화상과 류사한 의의를 갖는 동아시아평화상을 건립한다. 또한 초국가적인 성격의 동아시아평화발전은행을 세우며 이로써 동아시아 각국의 인원, 물자, 화페교류 등 각항 사업과 공정을 지지하고 추진한다.   훌륭하고 리상적인 구상이라고 할만하다. 이렇게만 된다면 동아시아는 평화와 번영의 시대, 강대한 동아시아시대를 안아오게 될것이다. 물론 동아시아공동체의 구축에서 가장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야 할 나라가 일본이다. 왜냐하면 력사적으로 보면 일본이 동아시아의 혼란과 불안과 위협을 초래한 주요한  장본인이였기때문이다.   104년전에 안중근의사가 바랐던 《동양평화론》 구상이 21세기의 동아시아식의 《슈만계획》으로 되고 그것이 현실로 된다면 동아시아는 모든 갈등과 모순을 해소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고 강한 동아시아로 탈바꿈할것이다. 그리고 진정 이렇게만 된다면 하늘에 계신 안중근의사께서도 행복의 미소를 지을것이다. 해란강닷컴
588    [록색문학평화주의자]= 구두쇠의 "감방"에서 해방된 그림 댓글:  조회:4848  추천:0  2016-11-09
미술품 6백점 기증 美노부부 '프랑스 것은 프랑스에'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10월29일 23시04분      헤이스 "10년 고민…미국에는 죄책감"…"한점도 팔지 말아달라"  (뉴욕=연합뉴스) 김화영 특파원 = 프랑스가 제2차 세계대전 후 외국인으로부터 기증받은 미술품으로는 최대 규모인 미국 텍사스 주(州) 헤이스 부부의 컬렉션은 왜 미국이 아닌 프랑스의 오르세 미술관으로 갔을까.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27일(현지시간) 600점의 작품을 한 점도 팔지 않고 온전하게 지키고 싶은 노부부의 열망, 여기에 컬렉션을 유치하기 위해 문화장관까지 나서 프랑스 정부가 막후에서 뛴 결과라고 보도했다. 텍사스 출신으로 맞춤옷 사업으로 돈을 모은 스펜서 헤이스(80) 씨와 그의 부인인 메릴린은 1970년대 파리에 여행하면서 미술을 사랑하게 된 것을 계기로 작품 수집을 시작했다.  지난 22일(현지시간) 40년간 모든 미술품 컬렉션을 프랑스 오르세미술관에 기증하기로 하고 기증서에 서명하는 미국의 스펜서·메릴린 헤이스 부부.뒤는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EPA=연합뉴스] 40여 년 동안 수집한 에드가 드가, 피에르 보나르, 에두아르 뷔야르 등 19세기후반∼20세기 초반 미술가의 작품은 총 3억8천만 달러(4천300억 원)의 가치로 평가되고 있다. 작품 기증이 발표된 지난주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엘리제 궁에서 헤이스 부부에게 직접 프랑스 최고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수여했다. 테네시 주 내슈빌에 사는 헤이스 씨는 프랑스 파리에서 NYT와 한 인터뷰에서 컬렉션을 미국에 남길까, 팔아서 수익금을 자선재단에 기부할까 등을 놓고 지난 10년간 고민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결국, 컬렉션이 가장 가치 있게 평가받는다고 생각되는 곳에 기증하기로 마음을 굳혔다"고 말했다. 헤이스 씨는 "미국에도 컬렉션을 잘 보존할 수 있는 미술관들이 있지만, 저와 아내는 컬렉션이 이곳 프랑스 것이라는 느낌이었다"면서 "여러 이유에서 그랬다. 프랑스 미술가들의 작품이라는 것도 그중 하나"라고 말했다.  그는 컬렉션을 미국에 남기지 않은 결정을 한데 대해 "오랫동안 죄책감을 느꼈다"면서 "그러나 오르세 미술관은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니까, (컬렉션이 이곳에 있으면) 더 많은 미국인이 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가 지난 4월 오드레 아줄래 프랑스 문화장관을 만나 기증 결심을 전달했을 때 요구한 것은 단 한 가지였다. 그는 아줄래 장관에게 "나와 아내는 우리의 예술품 전부를 프랑스 국민에게 주기로 했다"는 뜻을 전하면서 "우리는 작품들이 한 장소에 함께 모여 있으며, 어떤 한 점도 팔리지 않기를 원한다. 또 창고가 아닌 미술관 벽에 걸려 있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2개월 뒤 아줄래 장관은 "프랑스는 정부는 최상의 정치적 의지를 갖고 이 특별한 기증을 안전하게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기 코즈발 오르세 미술관장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으나 우리는 해냈다"라며 컬렉션 유치가 순탄치는 않았음을 시사했다.  코즈발 관장은 캐나다 몬트리올미술관장으로 있던 2001년 헤이스 부부를 알게돼 친분을 쌓았다. 기증품 가운데 한 점인 프랑스 화가 피에르 보나르(1867∼1947)의 1906년작 '베트가(家)의 점심식사'. '헤이스 컬렉션'은 노부부가 사망한 뒤부터 프랑스로 옮겨진다.  소유권은 프랑스 정부로 넘어갔지만, 컬렉션 이용 방법은 부부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들의 권한이다. 한 장소에 600점을 한꺼번에 전시할 수 없어 오르세미술관은 작품을 바꿔가며 순회 전시할 계획이다.  미국에서와 달리 프랑스에서는 국립박물관이 소장품을 매각하는 게 법으로 금지돼 있다.  헤이스 씨는 "우리 부부는 (미술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다. 그냥 우리 둘이 함께 좋아하고,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작품을 사모았고, 한 점도 팔지 않았다"고 말했다. 
587    [알아둡시다] - 엇허, " 술권장"해도 죄를 범한다?! ...주의보! 댓글:  조회:4525  추천:0  2016-11-09
'술 때문에 망칠라'…문명한 술문화 권장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11월9일 09시48분      살아가면서 우리는 해마다  각종 행사, 축하연, 친구나 지인과의 모임을 가지게 되는데 모처럼 모인 자리에서 빠질수 없는게 바로 술이다. 그만큼 술은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드는 매개물이고 접대측의 “성의”와 “환대”를 표현할수 있다고 많은 사람들은 간주한다. 이로 인해 술자리에서 “술권유”는 하나의 “의례적환절”로 자리매김되였고 처음에는 한두잔쯤을 가볍게 권하다가 후에는 “도”를 넘는 권유로 과음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지난친 “환대”에 술 기운을 이기지 못한 일부 사람들이 쇼크하고 지어 사망에 이르는 사고까지 벌어지는데 “술권유”도 법적책임이 뒤따른다는것을 명심하고 이에 대한 주의가 요청된다.   7일, 길림아리랑변호사 사무소 설휘변호사는 근년래 술권유로 타인을 “상하게 하거나 사망에 이르게” 해 법정재판까지 이어지는 사례가 많이 늘었다며 사회상의 그릇된 “술문화”의 반영이라고 했다. 전국 26개 성, 자치주, 직할시에서 이러한 사건으로 인한 법정재판사례 가운데서 70% 사건은 도를 넘친 술권유로 사망을 초래했고  30% 사건은 신체가 정도부동하게 부상을 입고 심지어 불구까지 초래됐다. 각 지역의 법원에서는 술을 권유한 당사자에 “민법통치”, “중화인민공화국권리침해책임법”에 근거해 타인의 생명권, 건강권 침해로 법적책임을 묻고 민사배상책임을 안겼는데 2010년에 있는 중경 개현(开县)법원에서 여직껏 제일 높은 33만원의 손해배상처벌을 안겼다.    료해에 의하면 지난 2010년 중경 개현의 초모모(69세)의 생일날에 많은 친척들이 모였는데 그중에는 그의 동생인 초모(64)도 있었다. 생일연에서 초모모는 자신이 직접 담근 약술을 꺼내여 손님들을 대접했고 건강상의 문제로 술을 권하지말것을 부탁하는 조카의 당부도 무시한채 동생에게 술을 권해  6~7냥의 약술을 마시게 했다. 술에 푹 취한 초모모의 동생은  화장실로 가는 도중 넘어져 쇼크했고 식구들은 그를 병원으로 호송했다. 응급치료를 거쳐 초모의 동생은 생명에는 위험은 벗어났지만 종신장애라는 진단을 받았다. 이에 그의 딸은 초모모를 법원에 기소했고 법원에서는 초모모는 주최자로서 응당 해야할 관리, 보호의무를 다하지 않고 술을 권하지 말라는 당부도 무시했기에 손해후과책임을 져야한다며 병원치료비를 비롯해 33만원을 배상할것을 판결했다.    뿐만아니라   술을 마시고 돌아가는 과정에 빚어진 후과에도 술을 권유한 당사자는 해당 법적책임을 져야 한다. 최근 강서성 심오현인민법원에서는 한건의 술권유 당사자 배상사건을 심리했는데 사건당사자 리모는  집장식을 도와준 길모와 고모가 고마워 두사람에게 식사자리를 마련했다. 음식상에서 길모는 술을 못마신다며 거절했지만 리모의 “열정넘친” 술권유에 마지못해 마셨다. 술자리가 끝난뒤 고모는 오토바이를 타고 혼자 집으로 갔고 길모는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취중운전으로 교통사고가 났으며 현장에서 사망했다. 이에 법원에서는 리모는 강제로 길모에게 술을 권했고 간호, 호송, 통지 등 의무를 리행하지 않았기에 과실책임이 있으므로 길모의 가족에 6만원을 배상할것을 판결했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 혹은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술권유자(조직자)가 법적책임을 져야 하는가? 이에 길림아리랑변사사무소 설휘변호사는 술자리에서 적절하지 않는 방법으로 술을 권하거나 강권하여 인신손해가 초래되였을 경우에는 법률책임이 발생하는데 대체로 4가지로 나뉜다고 소개했다.  첫째는 “강박”적으로 술을 권유하는 행위는 민사배상책임을 져야 한다. 술 마시는 과정에 언어로 대방을 자극해 억지로 술을 권유했을 경우에는 술권유자에게 강제라는 과실책임이 있기에 초래된 후과에 대해 과실배상책임을 져야 한다.  둘째는 상대방이 신체질병이 있어 술 마실술 없다는것을 명백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삼 권유해 나쁜 후과가 발생했을경우에는 과실책임을 묻는다.  셋째, 술자리에서 함께 음주한 사람들은 “제지의무(劝阻义务)”가 있으므로 음주후에 운전 혹은 격렬한 운동을 하는것에 대해 제지해야 한다.  넷째, 음주후에는 간호, 호송 의무를 다해야 하며 위험이 발생할것을 알고있음에도 방치했을 경우에는 과실배상책임을 져야 한다.”    설휘변호사는 “한해가 마무리 되면서 많은 모임이 있을것이 예상되는 가운데  ‘도’에 지나치는 술권유는 삼가해야 한다”면서 문명한 술문화를 가지고 자신 및 타인의 권익을 보장해 주는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연변일보 허동준 기자 
586    [쉼터] - 당근아,- 참 고맙다 고마워... 댓글:  조회:3932  추천:0  2016-11-09
이것이 진정한 '캐럿 골드'… 당근에 끼여 3년 만에 나타난 금반지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11월9일 12시29분      ‘carrot(당근)’이 ‘karat(금의 순도 단위)’을 돌려주러 나타났다. 밭일 도중 잃어버렸던 결혼반지가 3년 만에 당근에 끼인 채로 주인 앞에 나타난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고 독일 빌트지 등 외신들이 지난 11월 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바트 뮌스터라이펠에 사는 82세 노인은 얼마 전 밭에서 당근을 뽑다 3년 전 잃어버린 결혼반지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반지 틈으로 자란 것으로 추정되는 당근은 가운데 부분이 오목했다. 반지에 끼인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커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금으로 된 반지는 노인이 지난 2013년 어느날, 밭일 중 잃어버린 것이었다. 이들 가족은 금속탐지기 등을 동원해 반지를 찾으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씨를 뿌리는 봄이 오고 거두는 가을이 밭을 스쳐 갔다. 그렇게 두 번이 지나 올해가 밝았다. 노인의 아내는 “언젠가는 반지가 다시 당신에게 돌아오겠죠”라며 남편을 다독였다. 하지만 할머니는 안타깝게도 6개월 전 사망해 결혼반지가 다시 나타났다는 사실은 알지 못하게 됐다. 노인의 딸은 “우리는 늘 반지를 두고 여러 가지 농담을 주고받았다”고 과거를 떠올렸다. 그러면서 “엄마가 우리에게 반지를 다시 돌려주신 것 같다”고 옅게 미소 지었다. 세계일보
  사진은 지난 2014년 12월 헤이룽장성 쑤이양에서 포착된 호랑이 모습. 백두산호랑이 국가공원은 지린(吉林)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왕칭(汪淸)·훈춘(琿春)과 헤이룽장(黑龍江)성 둥닝(東寧) 일대 1만5천㎢에 건립. 미국 서부 옐로스톤 국립공원(8천983㎢ 면적)과 비교해 60% 이상 넓은 면적. 백두산호랑이 체중 300㎏에 이르는 최대 고양잇과 동물...
584    [쉼터] - 뿌리, 싹, 꽃, 열매... 댓글:  조회:6171  추천:0  2016-11-08
추명가(推命歌) 1. 천인지(天人地)가 삼재(三才)되어 우주구성(宇宙構成) 되어있고     년월일시(年月日時) 사주(四柱)되어 길흉화복(吉凶禍福) 이루었네. ​ ⇒ 하늘과 사람과 땅이 되니 삼재가 되어 우주가 구성된다. 태어난 년과 월과 일과 시간이 사주를 구성하여 길흉화복을 이루었다. ​ 2. 근묘화실(根苗花實) 이원리(原理)로 세상만사(世上萬事) 진행(進行)되며    오행제화(五行制化) 생극(生剋)으로 천태만상(千態萬象) 변화(變化)한다. ​ ⇒ 년은 근으로 뿌리고, 월은 묘로 싹이며, 일은 화로 꽃이며, 시는 실로써 열매로 연결된다. 또한 모든 이치는 오행의 생극제화이다.(사주의 가장 궁극적 원리아다.) ​ 3. 생년궁(生年宮)은 근기선조(根基先祖) 생월궁(生月宮)은 부모묘(父母苗)요     생일궁(生日宮)은 기신화(己身花)요 생시실(生時實)은 처자(妻子)로다. ​ ⇒ 년(年) : 선조, 월(월) : 부모, 형제 일(日) : 본인 시(時): 자손(子孫)인데 여기서 생시(生時)에 처(妻)를 넣은 것은 잘못이며 조선시대때에 처를 한 단계 밑으로 놓고 본 관습 때문이고 요즘은 남녀가 동등하므로 배우자 관계는 일지로 들어가야 한다. ​ 4. 생년생월(生年生月) 형충(刑冲)하면 부모간(父母間)에 각거(各居)했고     생일궁(生日宮)서 생월형충(生月刑冲) 포리고기(抛離故基) 하게된다. ​ ⇒ 년과 월이 형충(刑冲), 원진(怨嗔), 육해(六害), 귀문관살(鬼門關殺), 탕화(湯火)가 되면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각시 흩어져서 살고 사이가 좋지 못했고. ​ 일지(日支)하고 월지(月支)하고 형충(刑冲) 원진(怨嗔) 육해(六害) 귀문관살(鬼門關殺) 탕화(湯火) 가 되면 포리고기 (抛離故基) (포리고기 : 버리고 떠나서 객지에서 사는 것) 하게 되어서 고향(故鄕)과 인연 없고 부모형제(父母兄弟)와 같이 못산다. 장남(長男)이라도 여기에 걸리면 부모(父母) 못 모신다. ​ 단, 월과 일이 형충일 때 일지에 인수 있으면 부모 모실 수 있다.  부모 모시는 것은 일지에 인수 (효신살) 가 있으면 중년 (40대)에 모시고 시지에 인수가 일지와 합해서 들어오면 중, 말년에 부모 모신다. 상담하러 오면 참으로 '효자 한면 나셨네요." 여자는 인수가 친정인데 사주에서 부궁 나쁘고 잘못 연결되고 일지 인수면 시집가서 살다가 친정 앞으로 돌아온다. ​ 5. 년입지살(年入地殺) 놓은 자(者)는 동분서주(東奔西朱) 타향(他香)이요     생일지살(生日地殺) 만난자(者)도 역시고향(亦是故鄕) 떠나산다. ​ ⇒ 지살(地殺) : 삼합(三合)의 첫째자로서 인신사해(寅申巳亥)원행(遠行), 분주(奔朱)하게 돌아다닌다는 살(殺)이다. 년입지살(年入地殺)이란 역마지살(驛馬地殺)이니까 인신사해생(寅申巳亥生)을 말하고 타향(他鄕)에서 나쁘게 활동(活動)하는 것으로 역마지살(驛馬地殺)이며, 월과일이 형충(刑冲)될 때, 수(水) ​일주도 같은 특성(特性)이다. 역마지살(驛馬地殺)이 의미하는것 : 신살(神殺)로 지살은 인신사해(寅申巳亥) , 육친(六親)으로 식상(食傷), 오행으로 수(水), 띠로는 오(午), 당 사주는 미(未)이다. ​ ​ /// 그냥... 그냥... 심심풀이로 뒷 그릇에 담아 보고지고.../// 명성 떨친 北출신 족집게들    한국의 명리학 대가들의 출신지를 분석하면 흥미로운 점이 하나 발견된다. 이북 출신이 유난히 많다는 점이다. 왜정 때 개성 일대에서 자자한 명성을 얻었던 구월산인(九月山人) 신승만(申承萬). 그는 평양에 살던 김씨의 사주를 보고 다음과 같은 예언을 하였다. '임진이북 재작호지 이토남방'(壬辰以北 再作胡地 移土南方.임진강 이북은 다시 오랑캐의 땅이 되니 흙을 남쪽으로 옮겨라). 역술가들 사이에 회자되는 이 문구는 1945년에서 48년 사이에 해당하는 운세였다. 이북이 공산화되니까 땅을 팔아서 이남으로 옮기라는 뜻이었다('역문관야화' 59쪽). 구월산에서 공부를 하였다고 해서 구월산인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던 신승만은 황해도 사람이었다. 계룡산.모악산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민초들의 산이었던 황해도 구월산은 역대로 뛰어난 술사들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신승만은 그 구월산파의 마지막 계승자였던 것 같다. 50~60년대 부산에서 유명했던 사주쟁이가 이남원(李南園)이라는 사람이다. 중국음식점에서 사용하는 시커먼 주판을 가지고 생년월일시를 숫자로 환산하여 평생사주를 보아주었던 그는 함경도 출신이었다. 6.25 때 피란 내려와 그대로 부산에 눌러 앉은 경우다. 지금도 부산의 60~70대 연배 사람들은 그가 써주었던 간명지(看命紙)를 장롱에서 꺼내 한번씩 들춰본다고 한다. " "결혼하고 신혼시절인데 집사람이 하혈을 했어요. 피가 멎지 않았어요. 병원에 가니까 원인규명이 어려워요. 국제시장 근처의 이남원이 용하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죠. 만나자마자 첫마디가 '누가 이 결혼을 하라고 했느냐 ? 여자의 자궁에서 지금 피가 난다! 해서는 안될 결혼을 했으니 이혼해야 한다'고 대뜸 단언을 합디다. 남의 결혼에 고춧가루 뿌리는 말을 듣고 화가 안 나겠어요 ? 복채도 안주고 그대로 뛰쳐나와 버렸죠. 얼마 있다가 다시 찾아가니 '방법이 하나 있긴 있다'고 그래요. 그게 뭐냐고 하니까 '자식이 나오면 인연이 이어져서 헤어지지는 않겠다'고 해요. 그때 자궁에서 피가 나온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궁금합니다." 이남원의 내공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하는 이 사례는 부산.경남 일대 역술가들의 역사를 훤하게 꿰고 있는 이동기(61)씨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4.19 이후 서울에서 명성을 날렸던 술사가 전백인(全白人)이다. 그도 함경도 출신이었다. 온몸의 피부가 특별하게 희다 해서 붙은 별명이 백사(白蛇).     구한말에는 피부가 흰 사람을 잡아먹는 풍습이 비밀리에 내려왔다고 한다. 피까지 하얗다고 여기고, 그 피를 먹으면 불치병이 낫는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피부가 하얀 전백인은 10대 초반 무렵에 서울의 왕가에 잡혀 왔다.     왕가에 불치병 환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검사를 해봤더니 붉은색이어서 죽음을 모면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간신히 살아난 그는 삼각산에 들어가 사주 공부를 하게 된다.     공부가 어느 정도 된 다음에는 중국대륙을 방랑하였다. 사주를 잘 보니까 어느 곳을 가든지 먹고 자는 비용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장제스(蔣介石)와 장쭤린(張作霖)의 사주도 보아주었다고 한다. 장쭤린은 서안사변(西安事變.1936년)을 일으켜 제2차 국공합작을 이루어낸 장쉐량(張學良)의 아버지이자 만주최대의 군벌이었다.     그런가 하면 서울에 와 있던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도 풀 수 없는 번뇌가 있어 전백인을 불렀다.     미나미는 전쟁터에 나간 사위가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하는데, 사위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를 알고싶어 하였다고 한다. 그래야만 딸을 재혼시킬 것인지, 아니면 기다려야만 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나미는 총독이라는 신분을 숨긴 채 조선호텔로 전백인을 불러들였다. 첫 대면에서 백사는 "딸 문제 때문에 온 것 아니냐. 사위는 총 맞아 죽었다"고 단칼에 찔러 버렸다. 통역으로부터 이 말을 들은 미나미는 혀를 내둘렀다.     조선에 기인 이사가 많구나! 감동한 미나미는 그 자리에서 직접 사인하여 전백인에게 '사주 면허증'을 만들어주었다고 회자된다. 우리나라에서 사주면허증 받은 사람은 아마 전백인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백사는 해방 이후 서울에 머물면서 이름을 날렸다. 4.19 이후 과도정부의 수반이었던 허정(許政)이 그를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부산 사람들은 전통문화에 관심이 많다. 불교와 작설차, 그리고 사주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데, 허정도 부산 사람이었다. ///그냥... 그냥... 뒷 그릇에ㅡ...///    구전(口傳)되는 바로는 전백인(全白人)은 백동(온 몸이 흰색) 이었다고 한다. 한말, 왕가에서 난치병을 치료하기 위해 전국에서 백동이들을 불러 들였을 때 함경도에서 잡혀온 백인(白人)이 전백인이라고 한다. 백인은 피까지도 흰색이어야 약에 쓸 수가 있다고 하는데 전백인(全白人)은 피가 붉은 색이 되어 쓸모가 없어 그냥 내보냈다. 그러나 고향 함경도까지 다시 돌아갈 수가 없어서 삼각산에 들어가 도를 닦으면서 사주공부를 하여 통달했다고 한다.   그가 장안에서 한창 명성을 떨치고 있을 때 하루는 뚝섬에 산다는 한 젊은 사람이 찾아왔다. 을축년(1925년) 대홍수로 인해 전 가족을 다 잃은 그에게 남은 친척이라고는 전라도 장성(長城) 군수로 가 있는 삼촌 뿐 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장성까지 수백리 길을 내려가서 허탕이라도 치면 여비만 축낼 것 같아서 전백인 선생에게 물으러 찾아온 것이다. 이때 전백인 선생이 그 젊은이에게 적어준 글귀가 바로 “장성귀로(長城歸路)에 암상유상(岩上有裳)하니 좌이물탈(座而勿奪)하라”다. 장성 땅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시냇가 바위 위에 여자치마가 널려 있을 터이니 무조건 그 치마를 깔고 앉아서 빼앗기지 말라는 뜻이다.   장성까지 찾아갔으나 삼촌은 이미 다른 지방으로 전근을 갔기 때문에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여름철 냇가를 거닐다보니 전백인 선생이 적어준 그대로 바위 위에 여자 치마가 널려 있어서 불문곡직하고 그 위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누구의 전갈을 받았는지 잠시 후 안마을에서 청년 한 사람 달려 나와서 저의 부친이 모시라고 한다면서 자기 집으로 정중히 안내했다. 점잖게 생긴 노인 부부가 한자리에서 그대는 누군데 규수 치마 위에 앉아 있었느냐고 물었다. 젊은이는 사실 그대로 물난리에 홀홀 단신이 되었고 장성까지 오기 위해 점을 쳤더니 이와 같은 점괘가 나와 그대로 해본 것이라고 했다.   마침 그 집은 그 지방에서는 명문(名門)으로 꼽히는 집안이었다. 그런데 1년 전 청상과부가 된 딸 때문에 고민 중에 있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그 전날 친정어머니가 하늘에서 청룡이 내려와 청상과부가 된 딸 치마폭으로 안기는 꿈을 꾸어 이상하게 여기던 차에 꿈의 계시 그대로 이 같은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청상과부가 된 딸에게 사고무친(四顧無親)한 홀아비가 생겼으니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드리고 흔쾌히 부부인연을 맺어주었다는 것이다.                                                                             자강 이석영 선생이 '동양 제일권위가'라고 칭했던 명리학자 전백인 선생의 일화. 인연이 얼마나 묘한 것인지 알 수 있네요. [출처] 추명가, 출산택일, 궁합, 사주, 개명, 상호작명, 수험생상담, 작명소, 철학원, 산본작명, 안양작명, 안산작명, 의왕작명, 군포작명, 수원   4.19 이후 서울에서 명성을 날렸던 술사가 전백인(全白人)이다. 그도 함경도 출신이었다. 온몸의 피부가 특별하게 희다 해서 붙은 별명이 백사(白蛇).     구한말에는 피부가 흰 사람을 잡아먹는 풍습이 비밀리에 내려왔다고 한다. 피까지 하얗다고 여기고, 그 피를 먹으면 불치병이 낫는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피부가 하얀 전백인은 10대 초반 무렵에 서울의 왕가에 잡혀 왔다.     왕가에 불치병 환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검사를 해봤더니 붉은색이어서 죽음을 모면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간신히 살아난 그는 삼각산에 들어가 사주 공부를 하게 된다.     공부가 어느 정도 된 다음에는 중국대륙을 방랑하였다. 사주를 잘 보니까 어느 곳을 가든지 먹고 자는 비용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장제스(蔣介石)와 장쭤린(張作霖)의 사주도 보아주었다고 한다. 장쭤린은 서안사변(西安事變.1936년)을 일으켜 제2차 국공합작을 이루어낸 장쉐량(張學良)의 아버지이자 만주최대의 군벌이었다.     그런가 하면 서울에 와 있던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도 풀 수 없는 번뇌가 있어 전백인을 불렀다.     미나미는 전쟁터에 나간 사위가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하는데, 사위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를 알고싶어 하였다고 한다. 그래야만 딸을 재혼시킬 것인지, 아니면 기다려야만 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나미는 총독이라는 신분을 숨긴 채 조선호텔로 전백인을 불러들였다. 첫 대면에서 백사는 "딸 문제 때문에 온 것 아니냐. 사위는 총 맞아 죽었다"고 단칼에 찔러 버렸다. 통역으로부터 이 말을 들은 미나미는 혀를 내둘렀다.     조선에 기인 이사가 많구나! 감동한 미나미는 그 자리에서 직접 사인하여 전백인에게 '사주 면허증'을 만들어주었다고 회자된다. 우리나라에서 사주면허증 받은 사람은 아마 전백인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백사는 해방 이후 서울에 머물면서 이름을 날렸다. 4.19 이후 과도정부의 수반이었던 허정(許政)이 그를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부산 사람들은 전통문화에 관심이 많다. 불교와 작설차, 그리고 사주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데, 허정도 부산 사람이었다.작명, 고천작명, 금정작명|작성자 혜암    
583    [쉼터] - 책을 보고 시집 간 처녀 댓글:  조회:4401  추천:0  2016-11-07
책을 보고 시집간 처녀                                       -상해 텐이각(天一閣)에서-      중국 상해(上海)에 텐이각(天一閣)이란 우리나라의 국립도서관 격인 장서각(도서관)이 있다. 내가 언젠가 그곳 상해를 여행 했을 때 계획적으로 찾아 갔던 곳인데 그곳을 들렸던 이후의 감상이 지금 까지도 나와의 대칭의식을 갖게 한다.  나도 책을 가까이하고 책을 많이 읽는 스스로이기 때문에 대학시절 내가 하숙하는 집이나 자취했던 방엔 온통 책으로 방 구석구석에 책이 쌓여 있어 밤에 겨우 공간을 조금 비집어 잠자리를 만들 정도였고, 대학도서관에 출입하는 학생 중 내가 대본을 제일 많이 해간 학생으로 기록되기도 했으며, 돈이 생기면 제일먼저 책방부터 찾던 나였다. 그런 연유로 같은 급우들이 나를 보고 도서관이란 별호를 지어줬고 경제학 전공의 대학생인 나는 오히려 철학 쪽의 서적을 더 많이 읽고 전공이 아닌 옆길로의 학문에 심취한 나였다. 그 당시 마음으로 다짐하기를, 나는 늙어서 책이 모이면 사설도서관이라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던 내 마음의 빚이 아직도 쌓여있었기 때문에 그곳 상해에 들린 기회에 이 텐이각(天一閣)이란 도서관을 찾아 그 유명세의 진상을 내 눈으로 확인해 보려 했던 것이다. 그런 내 마음과의 약속과 동기로 그곳을 찾았던 것이다. 이 상해의 도서관인 텐이각에 들려보고 싶던 마음은 다름 아닌 중국의 모든 발행문서와 자료, 발행도서 등을 오래전부터 아니 중국의 역사와 함께해 온 글들을 전부 모아 놓은 중국의 서책과 자료를 확인 해 보고 싶어서였다.    어제 토요일은 언제나 버릇처럼 두 권의 책을 사들고 왔다. 두 권의 책 값 이라야 일주일의 모든 생활비용중 책에 투자하는 비용이 제일 적고 양식을 채워주는 수단이요 생활의 지혜가 되고 지식을 넓히며 선지자(先知者)와 선현(先賢)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짐은 말할 것 없고, 귀중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기도 해서다. 그러면서 오늘 책상 곁에 쌓여 있던 몇 권의 책을 서재로 옮겼다. 내가 보관중인 장서를 또 한 번 정리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몇 년 전 내가 참여해 설립한 녹색대학에 내 장서 중 용달차로 한 트럭 가득 실어 대학도서관에 보낸 후로 또 책이 쌓여 정리할 때가 되지 않았나? 느끼면서 책들을 살펴보곤 한다.    그리고 이렇게 책들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할 때마다 텐이각의 책을 떠 올린다. 내가 상해에 있는 중국인이 자랑하는 도서관인 텐이각(天一閣)에 들린 여행의 한 모퉁이를 생각는다. 즉 내가 중국 상해의 여행에서 느끼고 보고 접했던 텐이각이란 그 도서관의 역사와 위용이 부러워 마음의 한 구석을 짓눌려 짐은 어쩔 수 없는 넋두리이기는 하지만. 그런 그곳 도서관에 비하면 이따금 내 초라한 서가를 뒤질 때마다 더 없이 간난(艱難)하고, 더 없이 슬프고, 마음 아픈 문화의 기적을 갖는 텐이각(루)의 실화인 전설들이 자꾸만 뇌리를 스쳐간다. 그렇다면 왜 이 장서각인 텐이각(우리말로 천일각天一閣)을 내 기억으로부터 털어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이다. 그 내력의 첫째는 바로 상해의 이 장서각이 그 이름부터가 주술적 철학적 의식을 담고 있었다. 天一閣 (텐이각)이라 이름을 달게 된 장서각은 장서각 창시자가 역경(易經)중의 ‘천일에서 물이 생기다’(天一生水)라는 심오한 뜻을 갖는 뜻에서 빌어, 역대 중국 장서각들의 가장 큰 우환인 화재를 물로 방비(防備)하자는 데서였다한다. 이름부터 진정 주술적 철학을 갖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의미를 띄고 있어 중국인의 생활철학이 엿보인다.    중국도 여느 나라 정황과 같이 내란이나 부족국가들 간의 싸움이 일거나, 왕권이 바뀌고 침략을 받을 때 가장 피해가 심했던 것 중의 하나이고 그 액운(厄運)을 면할 수 없었던 물건이 책이었다. 그런 의식 속에서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고 원형 그대로 모든 서책과 자료를 고스란히 보존할 수 있었다는 지혜와 그 노력들이 오롯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돌아 봐도 학식이 출중한 선비가 역적으로 몰리거나 귀양 보내는 선비의 집이나 글들은 전부 모아 불태우거나 소멸시킨 역사가 그 얼마나 많았던가 생각게 하고 반성해 볼 우리 역사적 사실이 아니더냐. 그래서 일까, 그 텐이각이란 장서각의 이름을 붙이는 데도 철학적 슬기가 숨어 있어 수백 년 동안 역사의 무게를 않은 채 중국 유일의 대형 개인 장서각으로 살아남아 있다. 그 규모도 우리의 규장각의 몇 배의 크기란 점에 또 한편 놀랐다. 지금은 당당히 중국 국가 도서관으로 변했기는 하지만.    두 번째로는 일개 개인의 의지와 힘, 그리고 자료의 경중을 가리지 않은 치밀한 수집의 열의를 높이 볼 수 있다. 이 엄청난 크기의 장서각 창건자는 명(明)나라 때의 환 친(范 欽)이란 사람으로서 전국 방방곡곡을 옮겨 다니면서 벼슬을 하고 봉사하며 온갖 서책들과 자료 등 글이 담긴 모든 종류를 가리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모았고, 그 전통이 후손들에게 계승되어 중국정부의 중앙도서관에는 몇 백 년 전의 자료와 서책이 보관되어 잊지 않아도 이곳 텐이각에는 있다는 데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셋째로는 이 장서각에 얽힌 기막힌 일화와 역사다. 환씨의 텐이각(天一閣)에는 명대(明代)로부터 청대(淸代)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 동안, 광범위한 중국문화의 흔적과 서적들이 수집 보관되어 있는데 중국문화와 역사에 공헌하는 서적문화의 꽃으로 중국 사람들에게 자긍심을 갖게 위용을 내뿜고 있다. 이 텐이각이란 장서루가 오늘날 까지 잘 보전되어 역사의 맥을 이어온 데에는 참으로 기막힌 내력과 일화가 많이 숨어 있었다. 이 텐이각에 얽힌 일화 중 기막힌 이야기 하나를 소개해 보자.  청나라 때 닝버 지사요 세력가였던 츄우테칭(丘鐵卿)의 조카 딸 첸슈윈(錢綉芸)이란 처녀가 있었는데 텐이각의 내력을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 처녀는 그 당시의 시(詩)를 읽고 쓰기를 즐기고 책 읽기를 너무 좋아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텐이각에 올라가 책을 읽어보려고 마음에 작정하고 있었다. 시집을 가야 할 나이에 든 이 처녀는 삼촌인 지사를 졸라 중매형식을 빌어 환씨 가문에 시집을 가게 되었다. 헌데 이 첸슈윈의 결혼이 알려지고 주위에서 뿐만 아니라 널리 소문이 나기를 ‘너는 대체 책에 시집을 간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 시집을 간 것이냐’고 물을 정도로 그 나라의 화젯거리가 될 정도로 전국에 소문이 퍼질 정도이었다. 그 시절의 중국 상황을 보면 중국은 봉건왕권시대였고 상위 귀족가문의 출생으로 그 처녀는 평생을 호의호식할 수 있는 모든 여건이 갖추어 져 있는 그런 집안의 그가 혼인상대나 돈, 명예, 가문과 세력을 모두 마다하고 오로지 혼인관계를 이용하여 책을 읽겠다는 욕심만으로 시집을 갔으니 그 시대의 식자나 현대의 사회학자들 까지도 그로부터 감동을 받았다고 한 결 같이 평가하고 있는 사실들이다.    네 번째로 그 장서각을 보전하고 책을 지키려는 기막힌 역사와 실질이다. 그 장서각을 보전하려는 내력은 아연실색 할 정도이었다. 첸슈윈(錢綉芸)이란 처녀는 이와 같은 숨은 내력을 전혀 몰랐었고 시집만 가면 책을 마음껏 골라 읽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만 가지고 그 집 식구가 됐던 것이다. 그런데 이럴 수가 있나. 그녀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환씨 가문에 시집을 가서도 텐이각에 접근하지도 올라가지도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이유인즉 가규(家規)에 부녀자들이 누각에 오르지 못한다는 조목이 있기 때문이라 하기도하고, 시집간 환씨 가문이 이미 갈래를 친 가문이라는 등 추론이 구구하였다. 하여튼 첸슈윈 그녀는 애석하게도 텐이각의 책을 한 권도 읽어보지 못한 채 속만 태우다 우울증으로 몸이 겅더리되어 시름시름 병이 깊어져 종국엔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마음이 찡할 정도로 애잔한 실화이었다. 그렇다면 왜 첸슈윈 그녀는 끝내 비극의 여인이 되었어야 만 했을까? 그런 의문은 곧 다음과 같은 여러 규정이나 관리수칙 등에서 풀릴 수 있었다. 이 장서각엔 이런 규례까지 있었다. 즉, 다섯 번 째로서 이 장서각을 지키려는 기막힌 가문의 규례이었다. 이 장서루가 언젠가는 허물어지거나 멸실될 것을 미리 염려하여 예방대책을 세워놓았다. 그 예방대책 중의 하나가 처벌인데 그 처벌규칙은, 「만일 자손들이 무고하게 문을 열고 들어가는 자는 제사에 3차례 참여치 못한다. 자기 마음대로 친구를 데리고 들어가거나 책궤를 여는 자는 1년 동안 제사에 참여시키지 않는다. 마음대로 책을 다른 집이나 다른 성씨 가문에 빌려주는 자는 3년 동안 제사에 참여시키지 않는다. 이런 일로 일을 저질렀을 때는 책임을 추궁하는 외에, 영원히 쫓아내거나 제사에 참여시키지 않는다.」였다. 그들은 가족들에게 까지 이렇게 엄격한 처벌 규칙을 만들어 놓고 지키고 있었는데, 그 처벌 내용은 그 당시의 사회상이 지배했던 사상과 가문의 내침의 법칙이 있었는데 그 중 제일 큰 치욕으로 여기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조상의 제사에 참여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런 처벌은 가족 혈통 관계에서 엄중한 경고를 받았음을 의미하였는데, 이는 장형(杖刑)이나 채찍 또는 곤장으로 얻어맞는 것보다 더 중한 상징적 처벌이었기 때문이다. 역사의 전통을 지극히 중시하고, 가통의 계승과 혈연 및 가족구성원간의 유대와 귀속이 인간사회의 명운을 결정 짖는 중국 사람들의 인습상 그러한 처벌이 내려짐과 결정은 수궁이 가기도 한다.    그리고 여섯 번째로 장서와 장서각의 보존 방법이었다. 텐이각과 책을 지키기 위한 환씨 후손들의 피나는 노력은 계속되었다. 그중에서 텐이각의 문을 열고 책을 반출하거나 열람하고자 할 때 지켰던 규정이 또 한 가지 있었다. 즉 아무리 후손들 가족이 번성했다 해도 문을 열려면 반드시 각자의 집에서 100% 동의해야 문을 열도록 해 두었다. 장서루의 문마다, 각 층이나 방의 각각의 책꽂이 열쇠는 집집마다 나누어 보관해 두어 관리하는 제도를 마련하여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한 집이라도 빠지거나 문 여는 것을 반대하거나 회의에서 부결되면 문을 열 수 없고 책에 접근 할 수 없게 되어있다.  이와 같은 비결의 유지가 지속되었기에 오늘에 까지 전해오는 중국의 유일무이한 장서각의 원형그대로의 위용이요, 역사요, 궁지이며 오롯이 모든 서책을 수집해 모은 모든 자료를 보존할 수 있었던 힘이었으며 이곳은 그와 같은 노력의 산물로 오늘 날 귀중히 여기는 중국문화의 산물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더욱 그 텐이각 문을 외부 사람들에게 절대 접근을 허용치 않고 닫은 채 지켜오다 외부 사람에게 문을 연 적이 있었다고 전하는 대목이다. 무려 장서루 문을 잠근 지 200여 년이 지난 1673년 그 장서각 문을 환씨가문의 만장일치 동의에 의해 열었으니 그 문을 열게 한 사람이 곧 그 시대의 유명한 대학자 황중시(黃宗義)였다 한다. 그러니 장서각의 며느리라 할지라도 어떻게 그 장서각의 문을 열어 책을 읽어 볼 수 있었겠는가? 책을 보고, 책을 읽고 싶은 욕망만으로 그 집안으로 시집간 처녀인 첸슈윈은 이와 같은 사연으로 결국 비련의 역사적 여인이 되고 만 것이다.  지금도 엄격한 관리를 함은 말할 나이도 없거니와 요즘엔 널리 별도의 도서관까지 부설시켜 도서관의 소임을 다하게 하고 있고, 중국의 모든 역사기록과 문화의 기록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 천일각의 위용은 가히 중국인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자랑할 만한 문화의식 전수의 한 단면을 내가 보고 내 스스로 감탄사를 크게 토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더듬어보면 사화(史禍)가 있었거나 역적(逆賊)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거나 정변이 일 때마다 선비나 유명 인사들의 지적자료나 서책이나 학문 등을 말살시키기 위해 저서들을 불사르거나 폐기시켰던 역사를 돌이켜보면서 이 중국의 천일각과 우리나라의 그런 통한(痛恨)의 역사를 생각하게하고 나로 하여금 대칭의식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내가 그곳 텐이각에 들려 들은 이야기와 그 역사 등 텐이각에 얽힌 사연들을 음미하면서 인본주의 기백이라곤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던 중국이 옛날의 봉건사회에서, 한 처녀의 생명이 얼마나 강인하고 취약하게 자기의 문화적 갈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는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 많은 책을 곁에 두고서도 한권의 책도 읽지 못하고 죽고 만 그녀의 영혼이 아직까지 구천을 떠돌아다닌다고 생각하면서 그 혼령에 책을 전할 수 있다면 전하고 싶은 심정이 들 정도로 애잔한 마음이 든다. 내가 오랫동안 실천해 오고 있는 책읽기 운동의 일환으로 펼치고 있는 “철부지들의 길 떠나는 책“을 가지고 서라도.      
582    [쉼터] - 48가지 별자리로 보는 당신의 성격은?... 댓글:  조회:4435  추천:0  2016-11-07
48가지 별자리 생일별 당신의 성격  ▶ 당신의 양력 생일을 찾아서 보십시오. ★염소자리Ⅰ 통치자의 주간 12월 26일-1월 2일 염소자리Ⅰ의 중심이미지는 ‘통치자’이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는 직업적으로 은퇴를 준비하는 나이에 비유된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자신의 생활을 장악할 수 있으며, 일상의 활동을 선택하는데 있어 더 이상 경력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은퇴하지 않고 계속 일하는 사람도 통제력과 자율성이 더욱 커진 상태로 일하게 된다. 이제 연장자가 된 그는 남자이든 여자이든 집안의 어른 역할을 맡으면서, 가족의 사안에 있어 일종의 지배권을 발휘한다.  염소자리Ⅰ을 구성하는 날들은 생존을 위한 강인함을 보여주는 노인에 비유된다. 그는 지휘권을 갖고, 새로운 봉사 영역을 발견하며, 심미적이고 영적인 관심사를 심화시키는 등의 활동을 한다.  염소자리Ⅰ은 아주 듬직한 사람이다. 일상생활에서 짊어지게 되는 많은 의무들을 아무 불평없이 받아들인다. 그는 날 때부터 통치자의 위치를 타고 나며, 아니면 스스로의 노력으로 통치권을 넘겨받는다. 다른 사람의 운영방식을 그냥 지켜보기만 해서는 성이 안풀리기 때문이다. 가족, 사업, 부서, 또는 사회조직을 지배하는 것이 그의 특기인데, 특히 권한을 위임하고 상황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걸 지켜보는 지혜를 갖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지배자에게도, 피지배자에게도 상호이익이 된다.  그는 자신이 말할 때 다른 사람들이 귀기울여 듣기를 기대한다. 염소자리Ⅰ은 대개 권위주의적인 타입이다. 자기자신과 자신의 생각에 대해 교만한 확신을 갖고 있으며, 심한 경우 스스로를 완전무결하다고 믿기까지 한다. 가정문제에 있어 운좋게 너그럽고 순종적인 배우자를 만난다해도 자녀나 다른 가족들과는 문제를 겪게 된다. 그들은 염소자리Ⅰ의 독단적인 주장과 엄격함을 견뎌내지 못한다. 염소자리Ⅰ이 철의 규칙을 만들고, 최후통첩을 하고, 위협을 가함으로서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자녀나 가족의 삶을 힘들게 만들 때 당연히 반항과 갈등이 불거져 나올 것이다. 염소자리Ⅰ은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위협의 무기로 삼는다.  염소자리Ⅰ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데올로기나 윤리에 집착한다. 그 때문에 때로는 주위사람과의 교류가 끊기는 일도 생긴다. 아무리 오래된 우정이라도 그 친구의 도덕성이 바래거나, 돈문제에 무책임하거나, 공정하지 못하게 행동한다고 생각되면 하룻밤 사이에 무너뜨려버린다. 연인관계라 해도 마찬가지여서, 신의와 정직에 대해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다.  염소자리Ⅰ는 무엇이든 쉽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편협하거나 편견이 많은 사람이라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정의롭지 못한 일에 두려움 없이 맞선다는 점에서는 칭찬할만하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염소자리Ⅰ은 가까운 사람에게 마음을 여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엄격한 감독관인 그는 배우자나 아이들에게 올바른 길은 하나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길은 어디까지나 염소자리Ⅰ만의 길일 뿐이다.  그는 쉽게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은 아니다. 감정을 누에고치 속에 깊이 묻어두고 완전히 덮어버린다.  염소1의 강점: 능력있는, 열심히 일하는, 염려해주는  염소1의 약점: 독단적인, 감정을 억누르는, 전제군주적인  염소자리1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다른 사람에게 리드할 기회를 더 많이 줘라. 물론 당신은 현명한 사람이다. 하지만 때로는 바보가 현자에게 배우는 것보다 현자가 바보에게 배우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명심하라. 실수를 저질렀을 때 그 사실을 인정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라. 이미 낡은 사고방식이나 주의에 집착해봐야 아무 도움도 안된다.  염소자리Ⅰ 유명인들  마를린 디트리히, 헨리 마티스, 루이 파스퇴르, 덴젤 워싱톤, 안소니 홉킨스, 데드 덴슨, 마담 드 퐁파두르, 트레이시 울먼, 이작 아시모프, 패티 스미스, 파블로 카잘스, 매리 테일러 무어, 제라르 드 파르디유, 도나 섬머, 존 덴버, 헨리 밀러, 모택동, 안성기 ★염소자리Ⅱ 결단의 주간 1월 3일- 9일  염소자리Ⅱ는 결단을 그 중심이미지로 갖는다. 인간생에서는 새로운 관심사를 발견하고 자유롭게 그것을 탐구하는 노인에 비유될 수 있다. 그는 좀더 넓은 보편성과 좀더 깊어진 시야를 얻게 된다. 병을 극복해야할 경우도 많아진다. 녹슬어가는 육체를 되돌리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정신의 회복력을 높여줄 긍정적인 가치관 또한 아주 소중해진다.  이 시기에 노인은 새로운 탐험에 열중한다. 이제 여유있게 여행을 즐기고, 철학적 혹은 종교적 가치관을 정립하며, 그동안 만들어낸 이익을 자기 것으로 챙기고, 욕망(더 큰 부와 권력을 향한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사적이고 정신적인 목표일 수도 있다)을 드러낸다. 이 기간 동안 인간은 자신을 위한 최선의 것들을 찾아헤맨다.  직업적으로 최고가 되기 위해서 욕망과 추진력이 필수적인데, 염소자리Ⅱ는 두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다. 그렇다고 성공을 장담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가 열심히 노력했다는 것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그는 타고난 노력가로, 일부러 더 험한 바위산을 찾아 오르는 야생염소와 같다. 일단 행동에 돌입하고 나면 아무도 그를 말릴 수 없다. 재능이 많든 적든 그것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며, 심지어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기까지 한다.  원래 염소자리가 빈틈없는 현실주의자이지만, 염소자리Ⅱ는 좀 다르다. 그는 학문적이거나, 심지어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이며 영적인 주제에 관심을 갖는다. 이런 분야에서 그가 가진 생각은 전혀 보수적이지 않으며, 사실 오히려 급진적인 편이다. 염소자리Ⅱ는 이상한 방식으로 현실과 환상을 장악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대단한 설득력을 발휘해 환상을 현실이라고 믿게 만든다. 하지만 정작 본인이 자신의 환상을 현실이라 믿기 시작한다면 주위 사람들에 대한 영향력이 감소하면서 신뢰를 잃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바른 말을 해줄 친구가 절실히 필요하다. 그의 말에 속아넘어가지 않으며, 자신이 본 것을 정직하고 객관적으로 말해줄 용기를 지닌 친구가 있다면 가장 소중한 재산이다.  사적으로 염소자리Ⅱ를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동반자이다. 일상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인생의 동반자. 혼자 살 수도 있지만, 웬만하면 그런 선택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일과 사생활은 철저히 분리하며, 신성불가침의 영역인 일은 배우자가 간섭할 수 없는 것이다. 그에게는 일이 첫 번째요, 사랑하는 사람은 두 번째이다. 상대방은 이 점이 늘 섭섭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염소자리Ⅱ는 의존적인 파트너, 즉 늘 관심을 필요로 하며 자신의 일에 참견하려 드는 사람과는 지내기 힘들다. 염소자리Ⅱ가 주로 자신의 직업과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을 배우자로 선택하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원래 상황대처력이 뛰어난 염소자리Ⅱ는 어려운 상황을 잘 견뎌내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래서 힘들고, 바람직하지도 않은 관계를 개선시키기 위해 노력하며 몇 년씩 버티기도 한다. 상대방에 대한 공감이나 이해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인정하기 싫어서 그러는 것이다. 염소자리Ⅱ는 사람보다는 관계 그 자체, 그리고 결혼이라는 개념에 더 몰두해있다.  그는 현실적인 만큼이나 이상주의적이며, 가끔은 순진해 보일 때도 있다. 사실 순진함은 그의 아킬레스 건이면서, 한편으로 사람들이 그에게 호감을 느끼고 공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약점을 드러내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을 나누는데 있어 핵심이다. 그런 점에서 늘 강해보이려 노력하는 염소자리Ⅱ야말로 오히려 자신을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넣는 셈이다.  염소자리2의 강점 : 금방 기운차리는, 잘 대처하는, 사색적인  염소자리2의 약점 순진한, 잔뜩 무장한, 일중독인  염소자리2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라. 한계는 분명 존재한다. 포기할 줄도 알고, 때로는 실패를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약점을 보여준다고 해서 위협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의 이상이 현실에 뿌리내리도록 노력하고, 당신의 ‘현실’이 혹시 환상은 아닌지 항상 확인하라.  염소자리Ⅱ 유명인들  엘비스 프레슬리, 아이작 뉴튼, 스티븐 호킹, 아이안 키튼, 멜 깁슨, 다이안 캐논, 움베르토 에코, 크리스탈 게일, 제니 처칠, 빅토리아 프린시플(여배우), 캐더린 워커, 파라마한사 요가난다(인도의 20세기 최고의 요가 수행자), 라이사 고르바초프, 지미 페이지, 칼릴 지브란, 리처드 닉슨, 시몬느 드 보봐르, 김대중 ★염소자리Ⅲ 지배의 주간 1월 10일- 16일  염소자리Ⅲ의 중심이미지는 ‘지배’이다. 인간생으로 보면 60대 후반에 비유되는데 이때가 되면 지배적인 위치에 서고 싶은 바람이 강하게 드러난다. 어떤 영역에서 일가를 이루기 위한 지배욕이라면 긍정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다. 하지만 사생활에서는 모든 걸 쥐고 흔들려는 욕구 때문에, 배우자와 싸움을 벌이게 된다. 염소자리Ⅲ의 배우자는 대개 그와 비슷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대개 그러한 갈등은 두 사람이 한 집에서 너무 많은 시간 붙어지내면서 생기는 문제이다. 그가 성공적인 노인이라면 자신의 에너지를 안으로 향하게 할 것이다. 특히 제멋대로인 감정, 소모적인 충동, 한없이 뻗어나가는 환상을 잘 통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염소자리Ⅲ을 구성하는 날들은 삶의 질서를 잡고자 노력하는 노인을 상징한다. 그는 현실적인 판단을 내리고 어려운 선택을 하면서도, 반면 편안함과 행복과 충족감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  지배의 주간에 태어났다고 해서 꼭 자기 영역에서 최고가 되거나 앞장서는 위치에 서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가족, 사회, 일을 둘러싼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지배력을 표현하는 것으로 대만족이다. 물론 염소자리Ⅲ 중에는 야심만만한 타입이 많다. 하지만 자기 영역에서 일정한 위치를 점하고 나며, 남은 삶 동안은 거기에 머무르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의 부지런함과 헌신성은 놀라울 정도인데, 덕분에 곁길로 빠지지 않고 자신이 정해놓은 길을 묵묵히 따라 간다.  어린시절의 염소자리Ⅲ은 같은 성별의 어른을 우상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어른이 되면 스스로 영웅의 역할을 떠맡는다. 이러한 영웅화는 염소자리Ⅲ에 대한 기대를 비현실적일 정도로 높여놓는데, 결국 추락하고 실망하는 건 필연적인 수순이 된다. 도덕적인 태도, 그리고 세상을 선과 악으로 나누려는 경향은 염소자리Ⅲ의 특징이다. 남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극단적인 가치관을 갖는 경우가 많으니 조심해야 한다. 사람들을 거부하지 않고 죄를 비난하지 않으며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염소자리Ⅲ는 행복해진다.  그는 꽤 육체적이지만 그렇다고 감각적이거나 쾌락만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일부 염소자리Ⅲ은 육체적 욕구를 극복하는 것을 자신의 도전과제로 삼으며, 실제로도 자신의 감정이나 육체에 대해 장악력을 갖춘다.  염소자리Ⅲ은 사려가 깊으며, 또한 아주 재미있는 사람이다. 농담을 좋아하며 위트도 뛰어난데, 그만큼 균형있는 시각과 스스로를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를 갖추고 있다. 그는 또한 괴짜인 편이다. 과도할 정도로 사교적이지는 않지만, 친구들과 함께 하는 저녁식사보다 더 즐거운 일도 없다. 모임의 분위기가 조용할지 시끌벅적할지는 그날의 기분에 따라 다르다. 그는 그룹의 일원으로서 여러사람과 대화하며 경험을 나누는 걸 즐긴다. 대신 단 한명의 친구와 깊은 우정을 나누는 경우는 별로 없다. 사람들과 함께 스포츠나 취미를 즐기는 걸 아주 좋아하며, 그러한 클럽을 만들고 유지하는데 온갖 정성을 다한다.  그는 책임감이 강하지만, 그렇다고 따분한 사람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카리스마가 굉장하며, 주위 사람들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뜰만한 흥미진진하고 자극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일부러 난폭해지지는 않지만, 거의 그 수준까지 도달한다.  염소자리3의 강점: 프로다운, 역경을 극복하는, 잘 유지하는  염소자리3의 약점: 부주의한, 난폭한, 자기 희생적인  염소3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기회가 다가올 때 두려워하지 마라. 실패를 각오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욕망을 이룰 수 있겠는가. 안정에 대한 당신의 집착은 가끔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타인의 감정과 관련해서는 융통성을 가지려 노력하라. 당신의 가치관만이 절대적이며 보편적인 규칙이라고 단정하지 마라.  염소자리Ⅲ 유명인들  페이 더너웨이, 아리스토틀 오나시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알버트 슈바이처, 쟌 다르크, 잭 런던, 마하리쉬 마헤쉬 요기, 줄리아 루이-드레퓌스, 잭 런던, 다이안 포시, 미시마 유키오(일본의 소설가), 윤석화, 박진영 ★염소-물병자리 미스테리와 상상의 주간 1월 17일-22일  염소-물병자리는 인간생에서 70세의 나이에 비유된다. 그리고 계절적으로는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지만 아직은 추운 한겨울을 의미한다. 정말이지 밤은 너무나 추워서 피난처를 찾아야만 한다. 염소-물병자리는 미스테리와 상상을 대표한다. 70세가 되면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엄연한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남은 생애를 편안하고 보람차며 만족스럽게 보내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 외부적인 활동은 현저히 줄어들지만, 그에 상응하여 정신, 감정, 영혼과 관계된 내적인 삶에는 가속도가 붙는다. 이제 상상력과 환상과 꿈의 세계가 활발해지며, 어떤 이들은 어린아이처럼 느끼고 행동하게 된다. 염소-물병자리는 실용적이고 보수적인 염소자리 성향과 예측불가능하고 인습타파적인 물병자리의 성격이 충돌하는 지점에 서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미스테리와 상상이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화려하고 표현력이 풍부한 염소-물병자리는 가는 곳마다 흥분을 불러 일으킨다. 설치지 않고 조용히 있는 게 불가능하며, 일단 방에 들어오면 곧바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의 가치관은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그것이 보수적이든 혁명적이든 상관없이 자극적이다. 왜냐하면 가치관을 전달하는 방식이 드라마틱하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생각에만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겨진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 돕기 위해서라면 시간이나 돈을 아낌없이 바친다. 하지만 남에게 기생해서 사는 무임승차족에게는 일말의 동정심도 느끼지 않으며, 절대 도와주지 않는다.  염소-물병자리는 토성(염소자리)의 영향을 받아 체계적이고 책임감도 높지만, 천왕성(물병자리)의 예측할 수 없는 에너지는 언제라도 이러한 질서를 망가뜨린다. 당연히 감정의 기복도 심한 편이다. 어떤 때는 분별력 있고 합리적으로 보이다가도, 다음 순간 자제력을 잃고 만다. 확실히 염소-물병자리에겐 어두운 면이 있다. 화를 오래 삭이지 못하는 편이기에 갑작스럽게 분노를 폭발시켜 주위 사람들을 쩔쩔 매게 만든다. 응징에 열중할 때의 분노한 얼굴을 보면 완전 딴 사람인 것 같다. 무엇보다 그는 자기 속의 악마성에 어쩔 수 없이 휘둘리는데, 그런 점에서 분노의 폭발 또한 무의식적인 것이다. 계산적으로 하는 행동이 아니므로 그가 부리는 변덕을 쉽게 욕할 수는 없다. 그래서 상대방은 결국 그를 용서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쉽게 잊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농담을 하거나 누군가를 놀리는 것을 즐겨한다. 그의 배우자, 친구, 가족은 이런 행동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감사하게 여겨야 한다. 그것이 바로 염소-물병자리가 행복을 유지하는 비결이기 때문이다. 물론 진지한 문제를 고민하다 어느 순간 갑자기 떠들썩한 웃음을 터트리는 사람과 보조를 맞춘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한편 그는 고지식한 면이 있어서 지나칠 정도로 엄격해지기도 한다. 염소-물병자리는 가족 모두가 자신의 의무를 끝까지 완수할 것을 기대한다.  그는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과 의무를 공평하게 나눠갖는 사람이어야 존경심을 갖는다. 그러므로 배우자를 구할 때 아름답거나 지적인 사람보다는 열심히 일하고 신뢰할만한 사람을 찾는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배우자에 국한한 얘기이다. 짧은 연애나 외도를 즐길 때는 쾌활하고 흥미진진한 사람에게 끌리며, 겉보기엔 조용하더라도 열정적인 스타일에 반한다. 섹스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높으며, 정력도 강한 편이다. 탈선을 저지를 때 보면 염소-물병자리는 상당히 철이 없는데, 마치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피터 팬과 같다.  염소-물병자리의 강점 흥미진진한, 즐겁게 해주는, 명랑한  염소-물병자리의 약점 무질서한, 까다로운, 감정이 폭발하는  염소-물병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창조적인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는 출구를 찾아야 한다. 경험한 것을 남과 나눠라.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거나 무시하거나 비판한다고 해서 의기소침해져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괜히 오버할 필요는 없으며, 그저 자신을 이해해주고 높이 평가해줄 사람을 찾아라.  염소-물병자리 유명인들  무하마드 알리, 재니스 조플린, 페데리코 펠리니, 벤자민 프랭클린, 에드가 알렌 포, 험프리 보가트, 지나 데이비스, 장 모로, 짐 캐리, 돌리 파튼, 프란시스 베이컨 경, 플라시도 도밍고, 잭 니클라우스, 정명훈 ★물병자리Ⅰ 천재의 주간 1월 23일-30일  물병자리Ⅰ의 중심이미지는‘천재’이다. 인간생으로 보면 70대 초반에 해당되는데, 이 때가 되면 자연과 시간과 인간을 좀더 우주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게 된다. 남에게 인정받거나, 돈을 벌려고 안달하거나, 성공하려고 노력하거나, 가족의 짐을 혼자 짊어지는 생활은 이제 모두 옛날 일이 된다. 지금부터 시간은 독서와 사유, 그리고 철학적, 사회적, 국제적인 문제들을 고민하는데 투자된다. 그리고 비로소 지혜가 완성되는데, 왜냐하면 이 나이가 되면 세계관이 어느 정도 정리되기 때문이다. 물병자리Ⅰ은 앞으로 남은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쓰라린 깨달음에 다다른 노인을 상징한다. 그는 자신의 성격, 세상으로부터 은거, 인간의 운명에 대한 생각들, 그리고 또한 한창 때에 대한 추억, 특히 비범한 과학적, 철학적, 육제적 성취를 이뤘을 때의 기억 등을 머리 속으로 곱씹게 된다.  물병자리Ⅰ이 모든 별자리 중 가장 지적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배움의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 태도 또한 민첩하다 못해 신경질적이다. 그는 순종의 말처럼 혈기왕성하며, 원하는 것을 이루고 싶어 손이 근질거린다. 인내심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데, 특히 굼떠서 의사표현이나 결정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사람을 보면 참아넘기지 못한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 빠르고 쉽게 적응해서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하며,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어렸을 때는 이런 능력 덕분에 조숙하다는 평을 듣지만, 부모나 선생님은 그가 피상적이며 주어진 일을 끝까지 해내는 지구력이 부족하다고 비판한다. 물병자리Ⅰ이 쉽게 싫증을 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일단 정당하다고 생각되는 일에는 꽤 인내심을 발휘한다. 물론 모든 물병자리Ⅰ이 다 그렇게 빨리 배우는 능력을 타고나지는 않았지만 대부분 지적능력에 높은 가치를 둔다. 그래서 선천적으로 타고났든 아니든간에 자신의 지적능력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한다. 또한 교육을 소중히 여기는데, 그게 꼭 학교에서의 교육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경험이야말로 최고의 교사라고 생각하기에 독학을 많이 한다. 오히려 세상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교실 밖으로 나가는 경우가 더 많다. 특히 외국을 여행하는 것은 그가 늘 꿈꾸는 일이다.  물병자리Ⅰ이 자신의 독특함을 인정하고, 자신의 사회적 욕망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강하지 않음을 깨닫는다면 경력에 있어 한단계 큰 진전이 이루어진다. 좀더 현명한 물병자리Ⅰ이라면 사회적 교류가 많지 않은 직업을 택할 때 자기 장점을 살릴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과학, 음악, 미술, 출판, 경제학 등 그가 빛을 발할 수 있는 분야는 수없이 많다. 사실 사람들과 공동작업을 하는 것은 별로 좋지않다. 자신의 재능과 에너지를 주위 사람에게 지나치게 쏟아붓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조직의 일원이며 조직과 잘맞는 사람임을 증명하려는 욕심이 그런 태도를 낳는데, 그래봤자 좌절만 느낄 뿐이다.  물병자리Ⅰ에게는 자기파괴적인 면이 있다. 타인보다는 스스로에게 더 큰 상처를 준다. 그는 정서적으로 상당히 불안정하다. 때로는 산만하고 강박적이고 자기도취적인 모습을 보이며, 쉽게 화를 내는 편이다. 외부의 자극에 대한 예민함이 그런 식으로 표현되는 것인데, 그럴 때면 혼란스러운 속세를 피해 조용한 장소에 숨고 싶은 욕구가 격렬해진다. 그는 쉽게 스트레스를 받으며, 간헐적으로 신경쇠약 증세까지 보인다. 그러므로 자신을 강하게 단련시키는 것이 우선이다. 일상생활에서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 잘 대처하려면 무엇보다 쉽게 흥분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애정문제에서 물병자리Ⅰ은 상대가 자신의 자유분방함을 이해해줬으면 하고 바란다. 고정된 일과나 스케줄에 묶이는 것은 질색인 것이다. 그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던 친구나 연인은 상당히 놀랄 수밖에 없다. 물병자리Ⅰ은 구속에 강하게 저항하면서, 좀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을 찾아헤매게 된다.  물병자리1의 강점- 조숙한, 개성이 강한, 스스로 깨우치는  물병자리1의 약점- 무모한, 산만한, 스트레스를 잘 받는  물병1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마음의 눈을 통해 당신의 진짜 모습을 직시하라. 내키지 않겠지만 어느 정도의 대인관계는 필요하다. 좀더 둔감해지려 노력하라. 필요하다면 완전히 무감각해질 수도 있어야 한다. 자기 마음대로 하지말고 차분함, 인내심, 끈기를 길러라. 좌절을 극복하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에게 최고가 될 것을 조용히 요구할 정도로 강해져라.  물병자리Ⅰ 유명인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오프라 윈프리,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루이스 캐롤, 폴 뉴먼,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나스타샤 킨스키, 아드리안, 존 벨루치, 워렌 케본, 샤론 타이트, 마리아 탈치프, 버지니아 울프, 서머셋 모옴, 데타 제임스,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진 해크만, 바바라 투크만, 안정환 ★물병자리Ⅱ 젊음과 편안함의 주간 1월 31일- 2월 7일  물병자리Ⅱ는 중심이미지는 ‘젊음과 편안함’이다. 인간의 생으로 보면 70대 중반에 가깝다는 점에서 참 역설적이다. 사실 이 시기에 노인의 삶에는 아이들이 나타나게 된다. 이제 손자를 얻게 되면서, 노인의 원숙함과 지혜는 경이로 가득찬 아이의 세계와 맞물리게 된다. 게다가 이 나이의 노인은 젊은이처럼 충동적이다. 그래서 이 시기를 ‘제 2의 어린시절’이라고 이름붙일 정도이다. 휴식을 취하고, 느긋하게 생각하며, 시간여유도 많으니 이제 즐겨볼 만하다. 그러므로 물병자리Ⅱ를 구성하는 날들은 이제 남은 여생을 의미있게 보낼만한 방법을 찾아나가는 노인을 상징한다. 약간의 괴팍함과 완고함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또래의 친구를 새로 사귀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며, 보편적인 생각을 가지려하고, 편안함과 행복을 극대화하는 등의 행동이 모두 이 시기에 나타난다.  “아둥바둥하지 말 것”. 이것이 물병자리Ⅱ의 모토이다. 물병자리Ⅱ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가 어떤 형태의 트러블도 원치 않으며 그걸 피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행복에 최고의 가치를 두며, 멀리볼 때의 행복 뿐 아니라 가까이 있는 행복도 중요시 여긴다. 가능하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자기만의 갈 수 있도록 내버려두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남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내버려둔다. 애초에 그는 남을 지배하거나 간섭하는데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이다.  그는 거장이 될만한 자질이 다분하다. 사무실에서든 연구실에서든, 빌딩에서든 부엌에서든 금방 모든 것에 숙달한다. 장인의 자질은 선천적인 것으로 별다른 노력없이도 쉽게 이루어낸다. 거기에 더하여 몇 년 동안 열심히 노력한다면 그의 기술은 완벽의 경지에 오른다. 사실 많은 물병자리Ⅱ에게 테크닉은 목표가 아니며, 단지 고도의 창의성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일 뿐이다.  모든 종류의 젊음, 즉 육체적, 정신적, 감성적인 젊음은 물병자리Ⅱ의 특징이다. 자기 나이보다 훨씬 젊어보이는 게 특징이다. 그는 채 스무살도 되기 전에 자신의 능력을 모두 개발해버리며, 그러므로 나이를 먹으면서 발전하는게 아니라 젊은 시절의 능력을 평생 써먹으며 산다. 게다가 ‘어린이’와 ‘어린시절’은 그가 평생동안 몰두하는 주제인데, 그건 물병자리Ⅱ이 부모가 되지 않았다 해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아이만의 독특한 자질, 즉 자연스럽고 충동적이며 직관적이고 개방적인 태도를 죽을 때까지 간직하고 싶어한다. 물병자리Ⅱ가 때로 정신적으로 철이 없으며 피상적이라는 얘기는 듣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일면 철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피상적인 것은 전혀 아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물병자리Ⅱ에게 호감을 느끼며 그를 칭찬한다. 과연 그에게도 단점이 있을까 궁금해질 지경이다. 하지만 그의 장점인 이러한 인기는 또한 파멸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존경받는 데 집착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시간을 남을 즐겁게 하는데 바치며, 친구나 팬을 잃을까봐 자기의견을 강하게 주장하지도 못한다.  결국 물병자리Ⅱ는 좀더 현실적인 자기인식을 가지려 노력해야할 듯하다. 스스로를 잘 파악하고 자신이 가진 악마성을 제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밝은 면과 어두운 면 사이에 균형을 찾는 것도 가능해진다. 우리의 내면 깊숙이 악마가 숨어있을 때 꼭 맞서싸워 죽일 필요는 없다. 때로는 그 존재를 제대로 파악하고 자신의 친구로 만드는 것이 더 낫다. 사실 그것은 생명력의 원천이다. 그것을 깨닫고 항복함으로써 진정한 힘을 얻을 수 있다.  물병자리Ⅱ는 진지하고 심각한 관계를 싫어하며 가벼운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한다. 그렇다고 그가 가정을 꾸리거나,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거나, 결혼을 하거나, 변함없는 우정을 키우는 걸 꺼려한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사람들과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은 단지 자율성을 보장받고 싶어서일 뿐이다. 그는 자신의 성격을 다른 사람의 성격에 동화시킬 생각이 전혀 없다.  물병자리Ⅱ는 나름대로 이상형을 갖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형과 정반대의 사람에게 매혹된다. 참으로 모순되게도, 그는 깊이있고 심오하며 불안해 보이는 사람에게 자석처럼 이끌린다. 이런 성향은 그가 자신의 숨겨진 어두운 면을 사랑의 대상에 투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실 이렇게 정서적으로 복잡한 성격은 물병자리Ⅱ에게 유혹적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당혹스러운 것이다. 이런 관계 때문에 고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물병자리Ⅱ를 지켜보면서, 사람들은 그가 보여줘왔던 낙천적인 이미지가 사실이었는지 의심스러워진다.  물병자리2의 강점 ; 기예가 뛰어난, 숭배받는, 세련된  물병자리2의 약점 ; 철없는, 번뇌하는, 관계를 끊어버리는  물병2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자신의 내면 깊숙한 감정들을 무시하지 마라. 때로는 문제와 정면으로 부딪치는 게 더 나을 때도 있다. 지금 당장의 조그만 고통으로 미래의 더 큰 고통을 막을 수 있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너무 방어적일 필요는 없다. 본래의 자기모습에 자신감을 가져라. 굳이 남을 즐겁게 해줘야한다는 생각은 버려라.  물병자리Ⅱ 유명인들  놀란 라이언, 클라크 게이블, 프란츠 슈베르트, 밥 말리(레게음악 가수), 찰스 디킨슨, 제임스 조이스, 필 콜린스, 베이브 루스 (세계적인 홈런왕 야구선수), 안 왕(중국계 미국인으로 유명한 컴퓨터 제조회사를 설립했다), 나타리 콜, 초크얌 트룽파(티벳 불교의 명상가), 로널드 레이건, 윤도현 ★물병자리Ⅲ 관대함의 주간 2월 8일- 15일  물병자리Ⅲ의 중심이미지는 ‘관대함’이다. 이 시기는 좀더 관대한 시각을 갖게 되는 노년의 나이에 비유된다. 그에 따라 많은 편견, 선입견, 함부로 재단하는 태도가 줄어들며 결국은 완전히 사라진다. 물론 인생의 말년에 성급함과 부정적인 생각이 고개를 쳐들지만, 한편으로는 자신과 자신이 했던 선택들, 친구,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세상 자체에 대해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게 된다. 특히 종교적인 사람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생각과 더욱 깊어진 책임감으로 인해 자비롭게 행동한다. 영적인 힘, 단순한 즐거움, 유머, 생각이나 말로 표현되는 지혜 등이 이 시기의 특징이다. 그는 노인이지만, 육체적인 영역에서 겨룰 때조차도 젊은이들이 감탄할만한 위엄과 완전함을 보여준다.  관대함이라는 주제는 물병자리Ⅲ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떤 물병자리Ⅲ은 상당히 완고해서 비범한 생각이나 특이한 사람에 대해 마음을 열지 않지만, 그럼에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더 참을성이 생긴다. 한편 어떤 물병자리Ⅲ은 어린시절부터 지나칠 정도로 관대하다. 그래서 좀더 강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의 조작에 놀아나거나 좌지우지 된다. 그러므로 그에게 주어진 숙제는 세상에 대해 열린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은 거부할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이다.  자신이 가진 선입견을 고쳐나가는 과정에서 물병자리Ⅲ은 패배한 인간들의 옹호자가 된다. 그는 모든 형태의 옹졸함과 불공정함을 경멸한다. 또한 으스대거나 가식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낀다.  물병자리Ⅲ은 상황대처 능력이 뛰어나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접해도 당황하는 법이 없다. 스스로를 너무나 자주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넣기 때문에, 일찍부터 궁지에서 탈출하는 법을 알게 된다. 스스로 문제를 만들고 또 해결한다는 점에서 그는 신화 속의 두 인물을 하나로 합쳐놓은 듯하다. 미로를 만든 아테네의 다이달로스, 그리고 테세우스에게 미로를 빠져나오는 법을 가르쳐준 아리아드네가 그의 내면에 혼재되어 있다. 근본적으로 물병자리Ⅲ의 최대의 적은 바로 자신이다.  그는 남의 말이나 행동에 쉽게 흔들린다. 혹평이나 좋지않은 시선을 받았을 때 그 후 몇시간 동안 엉망진창이 되며, 심지어 하루가 망가지기도 한다. 특히 개인적인 공격에는 아주 취약한 편이다. 자신의 특이한 생각을 비판하는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고 또 잘 방어해내지만, 감정적인 문제를 건드리는 사람을 만나면 어쩔 줄 모른다. 인신공격적인 논쟁을 잘 받아넘기고, 고의로 하는 비판이든 아니든 그냥 웃어넘길 수 있어야 정신적인 안정도 가능하다.  물병자리Ⅲ은 주위 사람들에게 아주 다정하며, 본인도 사랑을 갈망한다. 하지만 사랑은 쉽게 얻을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가 끊임없이 사랑을 찾아헤매기 때문이다. 물병자리Ⅲ은 서른이 되기 전까지는 자기 짝을 만나기 어렵다. 사실 그는 다양한 종류의 파트너, 동료, 배우자, 친구를 필요로 한다. 쉽게 만족하지 못하며 자주 싫증을 내기 때문이다. 관심의 대상이 되려는 욕구 또한 강한데, 잘못하면 이 꽃 저 꽃을 찾아헤매는 나비가 되어버릴 위험도 있다. 초연함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가 꼭 배워야할 교훈이다. 하지만 물병자리Ⅲ이 배워야할 교훈은 따로 있다. 지조, 일관성, 열중과 헌신 같은 것은 덕목이다.  물병자리3의 강점; 활기찬, 독창적인, 다정다감한  물병자리3의 약점; 화를 내는, 공격에 약한, 곤궁한  물병3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자신의 삶에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의미있는 관계들을 만들어나가라. 개방적이고 관대한 태도를 유지하되, 상대방에게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달라고 요구하라. 당신의 영적인 능력은 소중한 것이다. 건설적인 방향으로 사용하라. 거절당했다고 해서 스스로를 비하하는 일은 금물이다.  물병자리Ⅲ 유명인들  제임스 딘, 미아 패로우, 에브라함 링컨, 갈릴레오, 찰스 다아윈, 토마스 에디슨, 베르톨트 브레히트, 로버타 플랙, 잭 레몬, 그레그 노만, 피터 가브리엘, 칼 번스타인, 조지 시갈, 이병철 ★물병-물고기자리 예민함의 주간 2월 16일- 22일  물병-물고기자리는 인간으로 치면 77세의 나이에 비유되며, 또한 계절적으로는 춥고 매서운 날씨가 한창인 늦은 겨울에 해당된다. 하지만 이미 낮이 길어지고 있으니 곧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올 것이다.  인간이 77세의 나이가 되면 이제 삶의 끝에 가까워진다. 이제 그는 자신의 인생과 화해해야 하며, 사랑하는 사람이나 친구와 평화로운 관계를 이뤄야 한다. 남아있는 갑옷이 있다면 전부 벗어버리고 진실한 감정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을 수야 없겠지만, 삶을 마무리하는 것과 관련된 탐구는 아주 철학적이며 궁극적인 경험이 될 것이다. 물병-물고기자리를 구성하는 날들은 뚜렷한 감성을 드러낸다. 활동적이고, 창의적이고, 다재다능한 물병자리의 성격과 눈물많고, 감성적이고, 꿈많은 물고기자리의 특성이 하나로 합쳐진다.  그는 자신의 커리어를 최우선시하는 성공지향적인 사람이다. 대부분이 싸움꾼인데, 그것은 잠재된 불안감과 자신을 증명해내려는 욕구에 기인한 것이다. 그는 늘 시비조이다. 타인에 대해 공격적이며, 공격을 받았을 때는 곧바로 싸움을 벌인다. 그러므로 물병-물고기자리에게 주어진 숙제는 자기 내면의 성정을 재발견하고, 쌓아놓은 장벽을 부수는 것이다. 거칠고 공격적인 외면 뒤에는 예민한 감수성이 숨어있다. 어린시절 상처받기 쉬운 아이였던 그는 남들이 자신을 비판하거나 학대할수록 마음속에 높은 벽을 쌓았다. 어른이 된 후에도 그 벽은 여전히 남아있어서 그를 실제의 내면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비춰지게 만든다.  물병자리는 가장 보편적인 성격의 별자리이고, 물고기자리는 가장 개인적인 별자리이다. 그러므로 물병-물고기자리는 두 가지 극단 중 하나로 치닫는다. 아주 파격적이고 이상적인 것을 추구하든지, 아니면 아주 내면적이고 심오한 영역에 몰두하든지. 이처럼 본질적으로 판이한 태도가 하나로 합쳐진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저 두 태도 사이를 왔다갔다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양극단 사이에 화해를 시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편 그 중도를 찾으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여기서 중도란 사람들과의 교류를 가리킨다.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양극단을 오간다는 것은 그만큼 물병-물고기자리가 사람들과의 교제를 소홀히 한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물병-물고기자리에게 가족은 아주 가까운 존재이다. 어린시절 부모의 비난과 꾸짖음에 상처를 받았음에도 그는 부모와 감정적으로 강하게 결속되어 있다. 특히 남자아이라면 어머니에게, 여자아이라면 아버지에게 큰 영향을 받는다. 어른이 되어 독립된 존재로 서고 싶다면 우선 이러한 애착에서 해방되어야할 것이다. 누구에게나 사춘기는 반항적이고 파란만장하지만, 물병-물고기자리는 그 정도가 심하다. 이 시기를 잘 헤쳐나가지 못한다면 어른이 되어서도, 심지어는 부모나 윗사람이 다 죽은 후에도 계속 반항적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거나 가족과 함께 사는 것은 물병-물고기에게 좋은 경험이 된다. 비록 혼자있고 싶은 욕구와 일상적인 만남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힘이 들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보살펴주고 싶다는 강한 욕구는 생활 속에서 어떻게든 해소되어야 한다., 만약 가족이 안된다면 애완동물이나 프로젝트로라도 대신해야 한다. 물병-물고기자리에게는 사랑과 열정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보살핌과 배려와 동정심을 표현하는 것이다.  물병-물고기 자리의 강점 : 성공지향적인, 걱쟁해주는, 보살펴주는  물병-물고기 자리의 약점 : 위태로운, 비관적인, 고립된  물병-물고기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거나 울타리 뒤에 숨지 마라. 자신의 감성적인 자아를 되찾기 위해 필요하다면 울타리를 없애버려라. 신뢰를 배운다는 건 두려움을 버린다는 걸 의미한다. 가장 낮은 곳부터 가장 높은 곳까지 샅샅이 탐험하고 싶다는 욕구 자체를 부인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대개는 중도를 걷는 것이 좋다.  물병-물고기자리 유명인들  프레데릭 쇼팽, 마이클 조던, 오노 요코, 에이미 탄, 시드니 포이티에, 찰스 바클리, 존 트라볼타, 이바나 트럼프(도널드 트럼프의 전부인), 맷 딜런, 밀로스 포먼(영화감독,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 아마데우스), 시빌 셰퍼드, 존 매켄로, 길리에따 마시나(여배우), 아나이스 닌, 샘 페킨파(미국의 영화감독), 하리수, 서태지 ★물고기자리Ⅰ 영혼의 주간 2월 23일 - 3월 2일  물고기자리Ⅰ의 중심이미지는 ‘영혼’이다. 인간생에서는 70대 후반의 나이에 비유된다. 인생의 황혼에 다다른 이 시기에 사람들은 좀 더 높은 가치와 영적인 목표를 생각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종교가 중요한 의미로 다가오며, 또 어떤 사람은 종교 대신 높은 이상에 몰두한다. 이미 평균수명 이상을 살았다는 걸 알기에 예전에 몰랐던 인생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매년, 매달, 매주, 매일이 특별한 선물로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삶을 하나의 짐으로 여기면서, 육신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소망한다.  물고기자리Ⅰ을 구성하는 날들은 기쁘든 슬프든 지금 이순간을 온전히 껴안지만 또한 과거와 미래를 좀 더 의미심장한 눈으로 응시하는 노인을 상징한다. 이 시기가 되면 인생의 의미에 대한 자각이 높아지고, 숭고한 가치를 위해 희생하게 되며, 사후의 생이나 윤회를 믿게 되고, 때로는 삶에 대한 변하지 않는 열정으로 영원한 젊음을 갈망한다.  영혼의 주간에 태어난 사람답게 그는 인생의 영적인 면에 큰 가치를 둔다. 그렇다고 돈 버는 일이나 사업을 등한시한다거나 그런 쪽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예술, 금융, 종교, 행정 등 어떤 분야에서도 일할 수 있다. 다만 어떤 일을 하든 헌신적이며 이상주의적이다. 육체적인 힘이 부족한 것도 아니며, 맛있는 식사나 황홀한 섹스에 무관심한 것도 전혀 아니다. 사실 영적인 가치와 세속적인 태도의 결합이야말로 물고기자리Ⅰ 성격의 핵심이다. 물고기자리Ⅰ이 볼 때 영성이라는 것은 일상과의 인연을 끊는 금욕적인 태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영혼은 주변의 일상에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므로, 세속적인 관심을 버릴 필요가 전혀 없다.  물고기자리Ⅰ의 또다른 특징은 생동감이다. 그는 기운이 넘치며 사람들을 즐겁게 해준다. 실제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젊은 마인드를 갖고 있다. 또한 그는 자신의 건강에 신경을 많이 쓰며, 건강제일주의자를 자청한다. 그에겐 건강한 신체가 아주 중요한데, 오래 살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또한 사는 동안만이라도 삶의 질을 높이고 싶기 때문이다. 그는 선한 일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다. 나중에 좀 더 좋은 환경이나 세상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환경을 망가뜨리거나 재난을 초래하는 행동은 그냥 참고 보아넘기지 못한다.  인간적이고 감정이입을 많이 하는 물고기자리Ⅰ이지만 의외의 면도 있다. 본인도 잘 의식하지 못하지만 사실 그는 자신이 주위 사람들보다 한수 위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잠재의식 때문에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며 피상적인 차원에만 머무른다. 더 나쁜 경우엔 세상에 대해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태도까지 갖게 된다. 모든걸 다 안다는 식의 태도는 사람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며, 결국은 분노를 산다. 어쩌면 관계를 거부당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실수를 인정하고 제안이나 비판에 대해 마음의 문을 열어야만 인생의 숭고한 의미를 찾는 것도 가능해진다. 가족이나 친구와 깊은 교감을 나누는 것. 이것은 물고기자리Ⅰ에게 핵심적인 욕구이다. 혼자 사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은 물고기자리Ⅰ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  부부관계에서 가장 큰 문제는 감정이 자꾸만 무뎌진다는 점이다. 물론 여전히 성실하고 헌신적이겠지만 감정은 다른 문제다. 게다가 그의 계속되는 요구는 주위 사람들을 숨막히게 한다. 정말 물고기자리Ⅰ은 보조를 맞추기 힘든 사람이다. 상호독립이나 ‘개방적인’ 결혼에 대한 신념을 피력하기도 하는데, 착각도 유분수다. 사실 물고기자리Ⅰ이야말로 소유욕과 질투심이 강한 타입인 것이다.  물고기자리Ⅰ은 기대, 개념, 관념의 세계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매일매일의 단순한 책임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 여기에 뿌리내리게 된다.  물고기 자리1의 강점: 영적인, 감각적인, 투명한  물고기 자리1의 약점: 감정적인, 무책임한, 파멸적인  물고기1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때로는 공격적일 필요가 있다. 일상적인 일들을 계속하며 자신 뿐아니라 남들이 필요로 하는 것에도 주의를 기울여라. 스스로를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고립을 자초하는 태도이다. 높은 자각을 이루고 싶다고 해서 일상의 책임들을 등한시해서는 안된다.  물고기자리Ⅰ유명인들  엘리자베스 테일러, 미하일 고르바초프,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핸델, 피터 폰다, 엔리코 카루소(이탈리아의 테너가수), 조리 해리슨, 존 어빙, 조안 우드워드, 랄프 네이더, 존 스타인벡, 해리 벨라폰테, 다이나 쇼어(미국의 여성가수), 안철수 ★물고기자리Ⅱ 고독한 사람의 주간 3월 3일-10일  물고기자리Ⅱ의 중심이미지는 ‘고독한 사람’이다. 인간생으로 보면 80세라는 장엄한 나이에 도달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인간은 자연과 하나됨을 느끼지만 또한 인간세계로부터 점점 고립된다. 많은 친구들, 그리고 인생의 반려자가 그를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아주 괴로운 시기이다. 삶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갖기 힘들다. 어떤 이들은 이제 편안하게 삶을 마무리하기를 소망하지만, 또 어떤 이들은 이 세상의 구속으로부터 놓여나 새로운 자유를 얻은 기분이다.  물고기자리Ⅱ는 자기만의 고립된 세계에서 살려는 경향이 있다. 마음 뿐 아니라 실제생활에서도 그러하다. 예를 들어 그의 집은 세상으로부터의 은신처 역할을 하며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다. 좀 더 건강한 물고기자리Ⅱ라면 자신의 직업과 사생활에 똑같은 무게를 둘 것이다. 한편 물고기자리Ⅱ 중에서도 균형감각이 부족한 사람들은 필요 이상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키게 된다.  그는 천박한 것을 본능적으로 혐오한다. 목소리 크고, 공격적이며,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으며 또한 감성이 결여된 동료와는 함께 일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추진력이나 야망이 부족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에게는 ‘지금 어떤 일이 벌어졌나’보다는 ‘어떤 방식으로 그렇게 되었나’가 더 중요하며, 그러므로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의 행동에는 일종의 고상함과 우아함이 깃들어있다. 그리고 스포츠, 춤 같은 육체활동에 익숙하다. 그는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대단히 숭배하는데, 특히 미인과 아름다운 그림에 약하다.  그는 살아가는 동안 적어도 한가지 이상의 심각한 상처를 경험하는데, 육체적인 부상이나 병일 수도 있고, 불시에 찾아온 부모나 친구의 죽음일 수도 있다. 때로는 아무런 경고도 받지 못한 채 그러한 재난을 당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일을 겪어도 곧 훌훌 털고 일어나는 성격이다. 흔히 쉽게 죽지 않는 고양이를 가리켜 ‘아홉개의 목숨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데, 물고기자리Ⅱ가 바로 고양이다. 그리고 아마 그 중 몇 개의 목숨은 이미 써버렸을 것이다.  물고기자리Ⅱ는 외로운 것과 혼자 있는 것의 차이를 잘 안다. 그는 자주 혼자이지만 그렇다고 외롭지는 않다. 그의 가장 좋은 친구는 바로 자신이다. 좋은 책이나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몇시간, 며칠을 혼자 지내도 외롭지 않으며 대화를 나눌 친구도 필요치 않다.  가장 큰 위험은 약물, 술, 섹스에 습관적으로 의지하거나 심하게 중독되는 것이다. 한편 황홀한 경험, 영적인 통찰력, 감정의 희열은 놀라울 정도로 강렬하며 보람이 있다. 물고기자리Ⅱ은 종종 지고의 체험을 갈망하는데, 너무 집착하지만 않는다면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물고기자리Ⅱ에겐 친구가 별로 없지만, 만약 있다면 아주 친밀하고 충실하다. 그는 대규모 가족모임이나 이벤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친밀함은 그의 적성이다. 배우자, 친구, 연인, 혹은 소중한 가족과 친밀함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가장 소중하다. 지극히 사적인 교류가 그의 강점이며, 슬픔도 기쁨도 함께 나누는 것이 행복의 결정적인 요소이다.  사랑을 할 때 즐기거나 감상하는 능력이 남들보다 뛰어나기 때문일까? 혹은 육체의 즐거움에 대한 유혹에 별다른 거부감이 없기 때문일까? 아무튼 그는 아름다운 얼굴, 육감적인 목소리, 매혹적인 몸매에 남들보다 더 쉽게 걸려든다. 일단 누군가에게 빠져들면 그 중독성은 알코올이나 약물보다 더 심각하다. 그는 질투에서 증오까지 온갖 종류의 고통을 경험하는데, 그러나 일단 거기서 놓여나고자 결심했다면 이별에 대한 불안감으로 더 괴로울 것이다.  물고기자리2의 강점: 숭고한, 친밀감을 주는, 우아한  물고기자리2의 약점; 은둔하는, 실망하는, 고통받는  물고기2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가치관에 있어 현실성을 잃지않도록 노력하라. 여러 가지 형태로 도피의 유혹을 느끼겠지만 잘 극복하라. 한편 세상으로 향하는 창을 열어두어라. 신뢰받고 인정받기 위해 계속 노력하라. 하지만 또한 자신을 보호할 사람은 자기자신임을 기억하라.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면 어떤 일은 좀 더 쉬워질 것이다. 당신의 고통은 누구나 다 겪는 것이며,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이다.  물고기자리Ⅱ 유명인들  알렉산더 그래함 벨, 재키 조이너-커시(미국의 육상선수) , 가브리엘 가르시아-마르께스, 미켈란젤로, 아이단 퀸(미국의 영화배우), 피에트 몬드리안, 로자 룩셈부르크, 시라노 드 벨쥬락, 윤복희 ★물고기자리Ⅲ 댄서와 몽상가의 주간 3월 11일-18일 물고기자리Ⅲ의 중심이미지는 ‘댄서와 몽상가’이다. 이 시기는 인간의 생을 마감하는 때로서 이제 지구에서의 삶은 종말을 고한다. 거대한 바퀴는 결국 하나의 원으로 완성된다. 지금 막 지구를 떠나는 그는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어느 때보다 깊이 느끼지만, 또한 피안의 세계에 강하게 이끌린다.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여러가지 감정들이 잇달아 밀려든다. 관대함부터 기대감, 즐거운 흥분까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을 넘어서는 경험이 찾아오며, 거기에 대해 어렴풋이 인식하게 된다. 결국 현재와 과거를 육체에 남겨둔 채, 정신 혼자서 꿈의 세계로 진입하며, 영혼은 계속해서 춤을 춘다.  물고기자리Ⅲ을 구성하는 날들은 내세로의 존재이전을 시작하는 한 인간을 상징한다. 직관력과 영감을 개발하고,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맞서며, 영적으로 깨달음을 얻고, 부활을 기다리며 이생을 마감하는 것이 거쳐야할 과정들이다.  원래 철학적인 물고기자리Ⅲ은 복잡한 인간의 사상과 우주의 경이를 명상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의 정신은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했던 신비의 영역을 자유롭게 배회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생의 의미가 궁금해지기 시작하며, 때로는 일생동안 답을 찾으려 노력한다. 그의 직업이나 생활방식도 바로 이러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생각은 몽상적이지만, 한편으로 아주 실제적이며 전문기술이나 과학적 지식 또한 뛰어나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곧바로 개입하고 문제를 해결하는데 일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는 타인의 삶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며, 실제로도 그렇게 한다. 때로는 너무 깊이 개입하는 바람에 물러서야할 때를 놓치기도 한다.  그는 아주 현실적이고 실용적이어서 심지어는 평범하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이뤄내는 것들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기적을 믿지 않지만, 실제로는 기적을 만들어내고 경험한다. 댄서와 몽상가의 주간에 태어난 사람에겐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나타난다. 어린시절에는 천리안이나 텔레파시 같은 능력를 보여주기도 한다. 만약 주위 사람들이 그의 초능력을 경시하거나, 비웃거나, 억누르려 한다면 그는 위험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 자신의 능력을 부인하고 감춘다.  물고기자리Ⅲ의 주위 사람들은 그가 이상하고 특이하다는 걸 금방 알아챈다. 그건 좋은 점일 수도 나쁜 점일 수도 있는데, 만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물고기자리Ⅲ은 자기중심적 이며, 어떤 물고기자리Ⅲ은 무기력한 분위기를 풍긴다. 하지만 두 타입 모두 자신이 어디에 있든, 직장에 있든 집에 있든, 거기가 가장 안전한 장소라는 사실을 깨닫고 만족스러워한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운명에 지배된다. 아마도 28세에서 42세 사이의 어느 시점에서 커다란 도전에 직면할텐데, 그것이 바로 운명의 부름이다. 원하지도 않았던 운명의 초대에 응할 것인가, 응하지 않을 것인가. 이 결정이 그의 남은 생애를 결정하게 된다. 만약 높이 올라가고자 한다면 평균이상의 성공가능성을 보장할 수 있다. 아무리 힘들어보이는 일도 성공시켜낸다.  편안한 걸 좋아하는 그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인생을 즐겁게 만들 수 있는지 잘 안다. 예를 들어 집을 꾸미는데 있어서도 취향이 훌륭하고 상상력이 풍부하다. 그는 방랑벽과 인생무상의 느낌 덕분에 자주 이사를 하는데, 그 때마다 기껏 잘 꾸며놓은 집을 포기해야 한다.  물고기자리Ⅲ 자신은 아주 독립적이지만, 정작 남들에게는 의존을 조장한다. 그는 중요한 존재로 인정받고 싶어한다. 필요한 사람이 되려는 필요는 그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기도 하다. 만약 아이나 부모, 동료, 연인이 그에게서 독립을 선언한다면 안절부절 못할 것이다. 물고기자리Ⅲ에게 가족은 없어서는 안될 존재이다. 피가 섞인 가족일 수도 있지만, 안되면 가족같은 사람들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가족에 대해서는 많은 책임들을 기꺼이 떠맡는다.  사랑을 할 때 물고기자리Ⅲ은 불안정하고 비현실적이어서 잘못된 파트너를 선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본인은 긍정적이고 자상한 사랑을 베품으로써, 성실하고 헌신적인 배우자가 될 수 있다.  물고기자리3의 강점 철학적인, 도움을 주는 , 기적을 행하는  약점 무력한, 덧없는, 의존을 조장하는  어드바이스  개인의 발전을 위해 좀더 자신을 채찍질하라.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삶에 활발하게 뛰어들어라. 강력한 기반을 세우는 걸 무시하는 경향이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당신이 극복할 수 있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좀더 쉬운 길을 가라. 필요하다면 기꺼이 타협하라.  물고기자리Ⅲ 유명인들  넷 킹 콜, 알버트 아이슈타인, 제리 루이스, 니진스키, 퀸시 존스, 루돌프 누레예프,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빌리 크리스탈,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러시아의 작곡가), 김남일 ★물고기-양자리 부활의 주간 3월 19일-24일  이 커스프는 천궁도의 마지막 별자리인 양자리와 첫 번째 별자리인 물고기자리가 만나는 지점이다. 점성학에서 볼 때 한해의 시작은 1월 1일이 아니라 바로 이 기간이며, 또한 상징적으로는 한 인간의 생명이 시작되는 시기를 의미한다. 그래서 물고기-양자리의 테마는 ‘부활’이다.  실제로 많은 문명권에서 한해의 시작을 봄이 시작되는 3월 ( 북반구에서는 대략 3월 21일)로 보아왔다. 이런 사실은 봄을 가리키는 다양한 단어로도 알 수 있다. 이탈리아어로는 primavera, 프랑스어로는 printemps, 네덜란드어로는 voorjaar. 한해의 사이클을 보는 옛방식에는 지혜가 엿보인다. 점성학자와 다른 전통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들은 멋대로 붙여진 1월 1일 보다는 춘분인 3월 21일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이 커스프는 단순하고 불같으며 거침없는 양자리의 특징과 몽상적이고 조용하며 예민한 물고기자리의 특징을 함께 가지고 있다.  물고기-양자리 사람들은 삶에 대한 태도가 특이할 정도로 단도직입적이다. 이러한 솔직함 때문에 존경을 받기도 하지만 오해도 많이 받는다. 모든 별자리 중 가장 최초의 별자리 답게 그들은 본질적이며 숨김이 없다. 이게 바로 물고기-양자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이 단순하고 밝은 눈으로 세상을 본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주위사람들은 그들을 비현실적인 몽상가로 여기며 험난한 세상과 맞서 싸울 능력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오해는 너무나 자주 발생한다. 예를 들어 물고기-양자리가 아주 순수한 동기에서 주위 사람에게 돈이나 시간을 베풀겠다는 제안을 했다 치자. 그러나 어느샌가 보면 그는 잘난체 했다거나, 받는 쪽이 자존심이 상해 화를 냈을 때 미안한 척 하면서 더 거만하게 굴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럴 때 물고기-양자리는 몹시 당황하고 상처받는다. 이런 식의 상황은 이 별자리 사람들에게는 흔한 일이다. 사실 그들이 단순하고 솔직하게 행동하면 할수록 주위 사람들은 그들의 본심을 오해하게 된다.  물고기-양자리는 주위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뭔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변하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에서 어떠한 문제점도 찾아낼 수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가 보기에는 아주 순수한 의도에서 나온 행동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중단없이 밀어붙이거나 자기 입장을 고집함으로써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한다. 주위 사람들이 양보하는 수밖에 없다.  이 별자리는 실패에 대처하는 능력이 특히 약하다. 그들은 ‘완전한 실패’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이어서 어쩔 수 없이 실패에 직면했을 때 당황하며 좌절하게 된다.  사실 물고기-양자리를 다루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가장 중요한 규칙은 그들의 진의를 너무 깊이 파헤치지 않으며 자신에 대해 설명하라고 다그치지 않는 것이다. 또 다른 규칙은 그들의 성격을 분석하려 하거나 그들 스스로가 자기를 분석하도록 강요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물고기-양자리가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도록 도와주고 싶다면 훈계를 하기 보다 손수 모범을 보이는 것이 좋다.  물고기-양자리는 상당히 신뢰할 만한 파트너이지만 이때의 신뢰란 원래의 뜻과는 조금 다르다. 다분히 감정적이고 일시적인 신뢰다. 그들은 아주 깊고 열정적으로 사랑하며 상대방에게 엄청난 관심을 쏟아붓지만 사실은 한 사람에게만 충실한 타입이 못된다. 알다시피 그들은 직관적이고 격렬한 성격의 소유자인데 그러다보니 갑작스럽게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면 그 짜릿함에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물고기-양자리의 강점: 직선적이다. 직관적이다. 높은 열정을 지닌다  물고기-양자리의 단점: 오해받기 쉽다, 참을성이 없다, 비현실적이다  물고기-양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당신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는 참을성을 배우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머리를 맞대고 일하면서 사회성을 길러라. 충동적인 면을 억제하려고 노력하라. 말을 하거나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다른 대안은 없는지,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를 심사숙고하라. 자신을 제대로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물고기-양자리 유명인  요한 제바스티안 바하, 스파이크 리, 매튜 브로데릭, 게리 올드만, 글렌 클로스, 앤드류 로이드 웨버 , 부르스 윌리스, 구로자와 아키라, 존 크로포드, 스티브 맥퀸, 조지 벤슨, 조용필 ★양자리Ⅰ 어린이의 주간 3월 25일 - 4월 2일  양자리Ⅰ의 중심이미지는 '어린이'다. 이제 막 삶을 시작하는 시기이므로 놀라움, 경외감, 단순함, 호기심, 신선한 에너지가 전형적인 특징이다.  이 시기는 갓 태어난 아이가 자기를 둘러싼 신선하고 흥미로운 세계와 처음으로 접촉하며 탐험을 시작하는 때이다. 양자리Ⅰ는 나날이 다양한 면을 보여준다. 아이는 여러 가지 감각을 경험하면서 당황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지만, 그것을 충분히 견뎌낼 정도로 튼튼하고 강인하다. 환경을 흡수하고 그 환경의 일부가 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자아를 지켜나가는 양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양자리Ⅰ은 어린아이 같이 솔직하고 개방적인 태도를 지녔는데, 그 때문에 세상물정 모르는 얄팍한 인생관을 가졌다는 오해도 받는다. 그러나 이때의 순진함이란 세상과 교류하면서 느낀 경이로움의 또 다른 표현일 뿐으로, 끊임없는 재발견의 와중에 있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것을 타인과 공유하고 싶어할 뿐이다. 양자리Ⅰ은 다른 사람이 자신과 비슷하게 천진난만할 때 몹시 반가워한다. 양자리Ⅰ의 솔직함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양자리Ⅰ은 나름대로 성실하기는 하나, 그리 착실한 편은 아니다. 특히 부모가 자신의 꿈과 소망을 양자리Ⅰ에게 투사하려고 할 때 오히려 엇나갈 가능성이 있다. 어린이의 주간에 태어났음에도, 어린 양자리Ⅰ은 상당히 독립적으로 보인다. 마치 부모가 전혀 필요없다는 듯한 태도다. 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의존성을 숨기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다소 내성적인 양자리Ⅰ이라면 사려깊고 진지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며, 사교적이고 수다장이인 양자리Ⅰ조차도 사생활을 중요시 여긴다. 그들은 자주 은거에 들어가며, 그 장소에는 아무도 침범할 수 없다. 이런 버릇은 어린 시절에 생겼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혼자 지내는 걸 좋아하는 양자리Ⅰ이지만, 직업적으로는 공동작업이나 팀 단위의 일을 많이 한다. 조직을 꾸려나가는 실력이 뛰어나다보니 주위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의지해 온다. 하지만 권력욕은 없는 편이다. 조직의 공식적인 리더가 되는 것조차 꺼려하며, 그저 상황의 중심에 서서 중요한 역할을 해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편이다.  양자리Ⅰ은 상당히 도덕적인 인물이어서 정도에서 벗어난 행동은 절대 하지 않는다. 이런 식의 고지식함은 때때로 문제를 야기한다. 만약 자신이 하는 일이 윤리적으로 옳다는 신념만 있다면 기존의 질서에 대한 저항도 서슴지 않을 것이며, 심지어는 사회적으로 볼 때 불법적인 행동도 저지르게 된다.  양자리Ⅰ의 행동은 어떨 때는 성급하며, 어떨 때는 신중하다. 그들은 상황에 따라 충동적인 태도와 사려깊은 태도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주위 사람들은 양자리Ⅰ의 기분을 항상 예민하게 관찰해야 한다. 상대방이 자신의 감정을 엉뚱하게 해석한다고 느꼈을 때 양자리Ⅰ은 발끈하게 된다.  양자리Ⅰ은 배우자나 친구에게 많은 이해심을 요구한다. 어떤 형식으로든 상대방을 구속하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하고 살도록 내버려 두는 그런 사람이 가장 잘 맞는다. 또한 현실적이고, 유머감각이 뛰어나며,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줄 알고, 자기만의 세계를 가진 사람이어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청년기에 들어선 양자리Ⅰ은 아이를 낳고 안정된 가정을 꾸리는 데 별로 관심이 없다. 이런 식의 삶은 좀 더 나이가 들고, 젊음의 혈기가 다 소진된 후에나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양자리Ⅰ의 연애는 특이하다. 아니, 그것도 너무 점잖은 표현이다. 연애상대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도 지극히 비현실적이며, 연애 자체도 동화처럼 허무맹랑하다. 그들은 사랑한다면 주위 사람들에게 공인받아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을 완전히 무시한다. 배우자, 연인, 약혼자 같은 형식적인 관계를 맺느니 차라리 수도승처럼 지내고 만다.  양자리1의 강점 : 솔직한, 생각없이 행동하는, 역동적인  양자리1의 약점 : 세상물정 모르는, 관습을 거스르는, 과도한 이상주의  양자리1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좀 더 차분해지되, 그렇다고 적극적인 충동을 무시하거나 안으로만 억누르지 마라. 당신이 좌절감을 느낄 때, 먼저 문제가 뭔지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 다음 주도적으로 해결하라. 사랑받고, 격려받고 싶은 욕구가 있음을 부정하지 마라. 필요할 때는 주저하지 말고 도움을 청하라.  양자리Ⅰ 유명인  레오나르드 니모이, 다이아나 로스, 에릭 클랩튼, 빈센트 반 고흐, 산드라 데이 오코너, 테네시 윌리암스, 사라 본, 존 메이저(영국의 전 총리), 워렌 비티, 머라이어 캐리, 퀜틴 타란티노, 프란시스코 고야, 카사노바, 에밀 졸라, 시몬느 시뇨레, 아스트리드 질베르토,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알렉 기네스, 조셉 캠벨, 차태현, 이미숙 ★양자리Ⅱ 스타의 주간 4월 3일-10일  양자리Ⅱ의 중심이미지는 스타, 즉 별이다. 이 시기가 되면 아이는 보호받고 양육받던 환경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며 그 결과 자신을 둘러싼 삶에 대해 알게 될 뿐 아니라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느끼게 된다.  양자리Ⅱ를 구성하는 나날들은 실험적이고 초보적이고 사회적인 관심사들로 가득차 있다. 인간생을 놓고 볼 때 이 어린시절의 ‘스타’는 분주하게 자아를 정립하고 있는, 빛나도록 열정적인 존재이다. 주위 사람들은 이 아이를 중심으로 움직이게 된다. 아이는 자아라는 개념을 발전시키며 처음에는 자신의 이름으로, 나중에는 ‘나’라는 단어와 개념을 사용해서 자신을 표현한다. 주위 환경을 규명하고 이해하려면 끊임없는 실험이 필요하다. 이 과정은 대담성을 요구하며 때로는 너무 멀리, 너무 빨리 간다 싶을 필요도 있다. 즉, 제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린아이 다운 고집스러움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  양자리Ⅱ는 모든 것의 중심에 서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그들은 외로움을 많이 타며, 군중에 둘러싸여 있을 때조차 고독을 느끼는데. 그렇기 때문에 혼자 있는 걸 싫어한다. 스타의 주간에 태어난 사람답게 양자리Ⅱ는 자기 주위를 맴도는 위성(숭배자, 지지자, 혹은 동료들)을 필요로 한다. 상당히 자기 중심적이며, 자신의 위치가 위협받는 걸 몹시 불쾌해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프로젝트나 대의명분, 사회운동, 혹은 종교에 자신을 내던지며 헌신하는 의외의 면이 있다. 한편 양자리Ⅱ는 허영이 심한데 그것이 주위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든다. 자신의 아이디어나 프로젝트, 그리고 심한 경우 자기 자신과도 사랑에 빠지는 것. 그것이 바로 그들을 노리는 함정이다.  양자리Ⅱ는 목표지향적인 사람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원하는 곳에 오르기 위해서라면 부도덕한 짓도 서슴지 않으며, 타인의 감정 따위는 쉽게 무시한다. 게다가 이런 행동은 양자리Ⅱ로서는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원래 그들은 다른 사람의 감정에 워낙 둔감해, 공감하는 건 둘째치고 알아채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경쟁력으로 말하자면, 지고는 못사는 성격의 양자리Ⅱ에게는 적수가 없다. 이러한 추진력의 좋은 점은 그들의 꿈과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쁜 점도 있다. 느리고 둔한 사람에 대해서는 인내심이 부족하기 때문에 쉽게 화를 내버린다  양자리Ⅱ는 자신이 꼭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에게는 사람들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실 이것은 상당히 모순적이다. 정작 본인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결정하기를 원하며, 가족과 사회의 의무 때문에 방해받는 걸 싫어하는 것이다. 하지만 양자리Ⅱ의 인생에도 언젠가 한 번 좌절의 순간이 올 것이다. 추종자들에게 거절당하고 무시당하며, 결국 홀로 남겨지는 순간. 이런 고통을 경험하고 나서야 그들은 ‘필요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필요’를 극복하게 된다. 그리고 진정한 자기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양자리Ⅱ가 진정으로 독립된 삶을 사는 것은 말년에 이르러, 아마도 60대나 70대가 되어서야 가능할 것이다. 이때가 되어서야 여행하고 운동하고 취미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개척하게 된다.  양자리Ⅱ와 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되려고 한다면, 분명 퇴짜를 맞을 것이다. 양자리Ⅱ는 마음 깊숙한 곳까지 열어 보이기에는 너무 폐쇄적인 사람이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조차 감정의 빗장을 걸어두고 있다. 이런 식의 냉담하고 무관심한 태도 때문에 감수성이 예민한 타입들은 양 거절당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양자리2의 장점-성공지향적인, 용기있는, 에너지가 넘치는  양자리2의 단점-냉담한, 과민한, 과도한  양2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불가항력적인 사람일수록 전력을 다해 물리쳐라. 책임감있게 행동하라. 다른 사람의 관심에 너무 연연하지 말며,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심을 경계하라. 당신 속에 숨어있는 내면의 가치를 확인하고 감춰진 재능을 계발하라.  양자리Ⅱ 유명인  마론 브란도, 에디 머피, 헬무트 콜, 마그리트 뒤라스, 프랑시스 포드 코폴라, 베티 데이비스, 제임스 왓슨, 스펜서 트레이시, 그레고리 펙, 베티 포드, 오마 샤리프, 안드레 프레빈, 재크 브렐, 도리스 데이, 스티븐 시걸, 명세빈 ★양자리Ⅲ 선구자의 주간 4월 11일-18일  양자리Ⅲ의 중심이미지는 '선구자'이다. 이 기간에 아이는 조금 더 사회화 되면서 인간애를 느끼게 되고, 단체 활동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다. 슬슬 영구치가 나기 시작하면서, ‘선구자’는 읽기와 쓰기를 배우고 여러 매체를 접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인류가 이루어놓은 문명의 보고에 몰두하게 된다.  양자리Ⅲ의 인생은 사회적 쟁점들과 그 활동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인생대운에서 이 시기는 한 인간이 배움에 흥미를 갖고, 정식교육과정을 시작하는 시기에 비유된다. 탐구 정신이 아주 강해지며, 자기 이름을 널리 알리고 싶어하는 욕구 또한 커진다. 양자리Ⅲ은 일반적인 양자리보다 집단의식이 더 높은 편이다. 곧이어 올 황소자리의 강력한 사회성으로부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양자리Ⅲ은 전형적인 양자리 타입과는 사뭇 다르다. 그들은 자기중심적이거나 이기적이지 않으며 훨씬 더 사교적이다. 그는 차근차근 적극적으로 사람들과 교류하는데, 주된 관심사는 사람들의 삶의 환경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영광보다는 아랫사람의 행복에 더 관심이 많아야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있는 법이다. 또한 두려움 없이 자신의 비전을 실천한다는 면에서 선구자가 되기에 가장 이상적인 타입이다.  양자리Ⅲ은 언제나 누군가를 도와주려 하는데, 그 때문에 희생자가 되기도 한다. 선한 일을 하고 싶어하고 자기가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눠주는 사람은 쉽게 이용당할 수도 있다. 그 뿐만 아니다. 그는 가족이나 친구들도 자기희생의 길에 함께 동참하기를 바란다. 예를 들어 그가 가진 사상 때문에 건강식을 먹거나 소식을 해야한다면, 주위 사람들도 따를 수밖에 없다.양자리Ⅲ는 자식이나 아랫사람에게 끊임없는 희생을 요구함으로써 반발심을 사게 된다.  양자리Ⅲ은 인습타파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전통주의자이다. 그는 주어진 일에 따라, 자기 인생의 전환점에 따라 우상타파주의자가 되기도 하고 전통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원래 그런 것이다. 규칙을 잘 아는 사람이어야 규칙을 잘 깨뜨릴 수 있다. 이런 특성 때문에 그들은 유용한 물건을 발명하고, 개발하고, 파는 데서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며 특히 과거의 낡은 방법을 개선하는 데 관심이 많다.  양자리Ⅲ은 사회에 진출해 일을 해야 하며, 혼자서는 못산다. 그렇다고 단조로운 일 대 일의 혼인관계에 온전히 성실하지도 못하다. 그는 매일 아이들, 가족, 공동체, 친구들에 둘러싸여야 직성이 풀린다. 그리고 그들에게 항상 자신의 이상주의를 주입시키고자 한다.  양자리Ⅲ은 본인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열정적이다. 성적 에너지가 매우 높기 때문에, 부부나 연인으로서 그를 만족시켜 주려면 상당히 분주할 것이다. 만약 가정에서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그는 주저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릴 것이다. 양자리Ⅲ는 자식을 낳는 것을 ‘추종자’를 하나 얻는 것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런 식의 교육관에 동참해줄 이해심 많고 능력있는 배우자를 필요로 한다. 그의 배우자는 큰 책임을 나눠지면서도 아무 불평을 하지 않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양자리Ⅲ가 갖는 근본적인 문제는 타인에게 자신의 철학을 강요하는 버릇이다. 개인의 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개념만을 강조한다. 그러니 특히 자녀들과 문제가 많을 수 밖에 없다.  양자리Ⅲ의 주변 사람들이 겪게 되는 문제가 또 하나 있다. 양자리Ⅲ은 언제나 남의 말에 귀기울이며 잘못된 것을 고치려 하지만, 진정으로 남을 이해하거나 동정하는 건 아니다. 그는 너무나 긍정적인 사람이어서 하소연이나 불평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욕도 하고 불평도 털어놓아야 감정의 앙금이 해소되며, 그렇지 못할 때 좌절을 느끼게 된다는 걸 양자리Ⅲ은 이해하지 못한다. 불평을 무시함으로써 문제를 잠시 뒤로 미룰 수는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언제가 상대방은 우울해지거나, 분노를 폭발시키거나, 심지어 이별을 선언하게 될 것이다.  한편, 양자리Ⅲ과의 관계에서 유익한 점도 많다. 그들은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데, 스스로도 본보기가 되어주므로 누구도 그 가르침의 진실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솔직하다. 그는 또한 숭고하며, 아주 감탄스러울 정도로 양심적이고 헌신적이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자면 양자리Ⅲ이 엄격한 도덕주의자는 아니다. 야외에서 바비큐요리를 즐기거나 여름휴가, 파티 같은 걸 마음껏 향유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기도 하다.  양자리3의 강점 보호해주는, 관대한, 두려워하지 않는  양자리3의 약점 비현실적인, 굽힐 줄 모르는, 자기 희생적인  양3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사람들이 진짜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주파수를 맞춰보라. 당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독점하려는 사람을 조심하라. 이상과 사상은 헌신할만한 가치가 있지만, 때로 파괴적일 수 있다. 뭔가 베풀기 전에 먼저 상대방이 당신의 도움을 원하는지 확인하라. 현재의 상황에 대해 정확히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혼자 열광하고, 혼자 흥분하는 경향을 조심하라.  양자리Ⅲ 유명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 데이비드 레터맨, 토마스 제퍼슨, 부다, 헨리 제임스, 사무엘 베케트, 줄리 크리스티, 카림 압둘 자바(NBA 농구선수), J.P.모건, 마광수 ★양-황소자리 권력의 커스프 4월 19일-24일  양-황소자리 커스프는 황도대의 첫번째 양자리와 두번째 황소자리가 만나서 만들어졌다. 이 커스프는 인간의 삶에서 7세 정도에 비유되며, 계절로 치면 초봄을 지나 본격적인 봄에 들어서는 시기이다. 이때 쯤이면 벌써 자신과 같은 성별의 부모를 보면서 성정체성을 갖게 되며, 점점 더 많은 독립과 자율성을 주장하게 된다.  양-황소자리의 주간은 이렇게 생겨난 권력에 대해 당당히 선언하는 시기이다. 이때의 권력은 불을 원소로 하는 양자리의 급한 성격과 고집스러움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또한 흙을 원소로 하는 황소자리의 실용성, 참을성, 자상함에서 나오기도 한다.  양-황소자리에 태어난 사람은 일상생활에서 항상 권력을 얻기 위해 투쟁한다. 하지만 그가 가진 양자리의 불같은 역동성은 황소자리의 견실함 덕분에 많이 순화된 모습이다. 어쨌든 이 별자리의 트레이드 마크는 ‘권력에 대한 집착’이다. 만약 그가 상속권을 가졌다면 그것은 인생이 그에게 제공해줄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타인에게 반감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목적을 달성하는 법을 안다. 그는 대단한 설득력의 소유자다. 그에게 반대하느니 차라리 동의하는 게 더 쉽고, 더 이익이 되도록 상황을 만들어 버린다. 목표만 달성할 수 있다면 그 기간이 아무리 오래 걸려도 상관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타이밍과 적절한 때에 대해 타고난 감각을 갖고 있다. 즉, 언제 행동하고, 언제 행동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잘 안다.  이런 능력 덕분에, 처음 만난 사람은 그가 꽤 조용하고 자신감에 찬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지켜보고 기다리는 법을 잘 아는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 양-황소자리는 누구에게나, 무엇이든 증명해 보이려고 애쓰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뒤로 한발짝 물러나서, 중요한 순간이 올 때까지 에너지를 비축해둔다. 이런 점에서 그는 적수라면 만만치 않고, 동료라면 상당히 유능하다. 일을 할 때는 프로정신이 대단하다. 그와 친해지고 싶다면 그가 사람들과의 관계보다 일을 더 중요시한다는 걸 먼저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양-황소자리에게도 한가지 비밀이 있다. 너무 권력에 집착하며 살기 때문일까? 그들이 은밀하게 바라는 것은 세상과의 전쟁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냥 환상, 기쁨, 어떤 사람, 혹은 완벽한 게으름에 자신을 내맡기고 싶어한다. 물론 실제로 이런 식의 삶을 사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환상이나 생각은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며 매일의 힘든 일상을 헤쳐나갈 힘을 준다. 확실히, 양-황소자리가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려면 주기적으로 스스로를 비워내고 재충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잠을 자거나, 레저를 즐기거나, 마사지를 하거나, 명상을 하거나 휴가를 가야만 한다.  양-황소자리와 관계를 맺는 사람은 그의 존재감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그건 양-황소자리가 얼마나 높은 자리에 있는가와는 상관이 없다. 한마디로 그는 거인이다. 성공을 하더라도 번쩍번쩍 빛이 나게 하며, 실수를 하더라도 크게 한다. 그가 어디에 있든 사람들은 그를 주시할 수밖에 없다. 그는 선택되기 보다는 선택하려고 한다. 그가 일단 누군가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면 그것으로 선택은 끝난 것이다.  이 주간에 태어난 사람은 아주 후한 편이지만, 어디까지나 자기방식대로 후하다. 자신과 잘 맞을 때는 베풀지만, 또한 자신이 준 선물이나 애정을 도로 뺏어오기도 한다. 변덕을 부리거나 악의가 있기 때문은 아니다. 단지 자신의 선물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거나, 혹은 분수에 넘치는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양-황소자리가 인생을 살면서 꼭 배워야할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권력을 어느 정도 포기하고 그 대신 나눔, 협력, 관용을 추구하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많은 힘을 갖는 방법이라는 것을 그는 나이가 들면서 깨닫게 된다. 두번째 교훈은 첫번째와 관련된 것인데 가장 위대한 힘은 사랑이라는 것이다. 다정함이든 낭만이든, 육체적인 사랑이든 플라토닉한 사랑이든 종교적인 사랑이든, 어쨌든 사랑은 양-황소자리를 부드럽게 만들어준다. 비록 그들이 수많은 연인을 취하고 또 버리지만, 사실 정말 그에게 필요한 것은 특별한 한 사람으로부터 꾸준히 공급되는 사랑이다. 만약 그가 조건없이 베푸는 사랑을 할 수 있다면 최고의 행복을 느끼며, 무념무사의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양-황소자리의 장점 견실한, 권력을 손에 쥔, 후한  양-황소자리의 단점 둔감한, 돈 때문에 행동하는, 나태한  양-황소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다른 사람을 압도하려고 하지 마라. 뒤로 한발짝 물러서서, 그들이 하고자 하는 대로 내버려 둬라. 아마도 그 일을 하고 싶어 손이 근질거릴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자기 방식대로 해볼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라. 그래서 실수가 생긴다해도 어쩌겠는가. 무엇보다 당신을 둘러싼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는지를 잘 알아챌 수 있도록 노력하라.  양-황소자리 유명인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엘리자베스 여왕, 캐서린 여왕(러시아), 윌리암 세익스피어, 셜리 맥클레인, 셜리 템플 블랙, 잭 니콜슨, 아돌프 히틀러, 다니엘 데이 루이스, 팔로마 피카소, 더들리 무어, 라이언 오닐 ★황소자리Ⅰ 표현의 주간 4월 25일-5월 2일  황소자리Ⅰ은 ‘표현’를 중심 이미지로 갖는다. 이 기간은 드디어 실제적인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어린이에 비유될 수 있다. 아이는 머리 속에만 있던 생각을 구체화시키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실행에 옮기게 된다. 물리적인 구조를 세우고, 효율적인 체계를 만드는 법을 배우는 것도 바로 이런 표현의 한 과정이다.  황소자리Ⅰ은 초등학교 나이의 아이에 비유된다. 아이는 기존의 제도나 사회라는 큰 틀 안에서 자신의 개성을 계속 발전시켜 나간다. 그는 매일의 일상에서 권력투쟁, 외교적인 기술, 자율성, 타협, 생존, 방어 등과 관계된 문제들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시련 속에서 아이는 자신의 성격을 하나 둘 형성하게 된다.  황소자리Ⅰ은 냉정한 현실주의자이다. 그리고 48개의 별자리 중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는 별자리이다. 일단 아이디어나 계획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으면, 그것이 완수될 때까지는 절대 쉬지 않는다. 그 아이디어는 이미 검증이 끝난 것이며, 그러므로 결과가 이미 약속된 것이다. 대개의 경우 황소자리Ⅰ은 사업을 시작할 때 이미 성공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다.  황소자리Ⅰ의 리더십은 대단하지만, 그건 다른 사람들 선두에서 이끌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집단의 노력을 통해 실행에 옮기겠다는 생각이 강하다. 그는 누군가와 권력싸움을 벌이거나 새로운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나서기 보다는, 그냥 자리에 앉아 세상을 좌지우지 하는 걸 선호한다. 황소자리Ⅰ은 황소자리 중에서도 가장 완고한 편이다. 황소자리Ⅰ은 외교력이 뛰어나며, 동료들의 요구를 잘 이해한다. 그런 점에서 보스로서든, 직장동료로서든 훌륭하다.  황소자리Ⅰ은 아주 육체적인 사람이다. 정신과 육체의 안녕을 위해서는 섹스, 음식, 오락, 스포츠 그리고 모든 종류의 레크리에이션이 필요하다. 하지만 비디오게임처럼 가만히 앉아서 즐기는일에 대해서는 절제력이 부족한 편이다. 게다가 음식에 대한 관심도 많으니 그 결과는 뻔하다. 비만, 알코올, 높은 콜레스테롤 그리고 그와 관련된 여러 가지 병에 시달리게 될 수 있다.  황소자리Ⅰ은 현실에 맞춰 자기이미지를 바꿈으로써 여러 문제들을 피하려 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은 실제 모습과는 아주 다르다. 스스로는 강하고 상식적이며 안정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의 그는 예민하고 감정적이며 과장을 많이 하는 사람이다. 그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냉정하고 퉁명스런 겉모습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사실은 굉장히 상처를 잘 받는다는 걸 알기에 항상 보호해주려고 한다.  황소자리Ⅰ과의 정면대결은 피하는 것이 좋다. 훨씬 더 현명한 방법은 애정과 조화를 중요시하는 황소자리Ⅰ의 본능에 호소하는 것이다. 특히 그가 당신의 부모나 배우자일 때는 이 방법이 잘 먹혀든다. 날카롭고 지치게 만드는 말싸움보다는 이런 식의 감정적인 호소가 훨씬 더 효과적이다. 사실 하루종일 사람들을 지휘해가며 일한다는 것은 등에 커다란 짐을 지고 일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일과 후 집에서의 평화로운 휴식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켜내야 한다고 느낀다.  물론 이런 평화에는 어두운 면도 있다. 그들은 자신의 생활환경에 너무 만족한 나머지, 경고를 듣지 못한다. 무슨 일이든 미루는 버릇이 있는 황소자리Ⅰ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문제들을 무시해버린다. 예를 들면 삐걱거리는 문이나 바람이 새는 창문, 혹은 다른 가족들의 요구 같은 것이다. 평화를 좋아하는데다 변화를 싫어하니, 황소자리Ⅰ과 함께 사는 사람은 늘 답답하고 숨이 막힌다.  일반적으로 황소자리Ⅰ은 이미 얻은 것을 꼭 쥐고 놓지 않으려는 성향이 있다.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여서, 깨진다면 본드로 붙여서라도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한발짝 물러서서 볼 필요가 있다. 하나가 깨어지고 나면 더 좋은 것이 생겨날지 누가 아는가.  황소자리1의 장점: 생산적인, 육체적인, 끈기있는  황소자리1의 단점; 고집 센, 잘난체하는, 과장하는  황소1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너무 많은 책임을 떠맡지 않도록 주의하라. 때때로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의식적으로라도 노력해야 한다. 신중함이나 교양을 핑계로 할일을 뒤로 미루는 버릇을 고쳐라. 다양한 규율이나 가치관을 많이 접함으로써 시야를 넓혀나가라.  황소자리Ⅰ 유명인들  오스카 쉰들러, 미셀 파이퍼, 알 파치노, 엘라 핏제랄드, 안드레 아가시, 사담 후세인, 제리 션필드, 웰링턴 공작, 매리 여왕 2세, 윌리 넬슨, 리타 쿨리지, 피에르 떼이야르 드 샤르뎅(프랑스 사상가이자 신부), 히로히토 국왕, 앤 마그렛, 설경구 ★황소자리Ⅱ 가르침의 주간 5월 3일~10일  황소자리Ⅱ의 중심 이미지는 ‘교사’이다. 이 시기가 되면 아이는 공식적인 교육을 받기 시작하며, 배움이 중요한 요소로 부상하게 된다.  이 시기 동안에는 이러한 공식 교육이 계속해서 이루어지며, 역할모델로서 교사의 중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한다. 이때 중요한 요소는 헌신, 자각, 도덕성, 독립적인 행동 등이다. 궁극적으로 학생이 된다는 것은 교사가 되는 걸 의미한다. 무언가를 배우게 되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거나 전달하는 능력 또한 얻게 된다.  교사의 주간에 태어난 당신은 사상이나 기술을 개발하는 데 관심이 많다. 직업이나 취미와 상관없이 당신은 항상 주위 사람들과 공유할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자신의 생각이나 견해를 말하고, 토론을 벌이고, 스스로 본보기가 되는 것은 황소자리Ⅱ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활동이다  황소자리Ⅱ 당신은 어떤 사람과 사귀든지 교사와 학생의 관계를 맺고 싶어한다. 당신은 교사와 학생이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걸 직관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이 동전이야말로 미래를 위한 가장 가치 있는 투자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학교에서도 훌륭한 학생이거나 교사이다. 교사로서 당신은 공부란 스스로 해야 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학생에게 강요하기보다는 스스로 배우도록 격려해준다.  황소자리Ⅱ 당신은 어떤 집단에서든 거물로 통한다. 가볍거나 피상적인 이야기는 여간해서 하지 않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 또한 크다. 그리고 그것은 그만큼 당신의 삶에서 사상이나 이데올로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말도 된다. 황소자리Ⅱ 당신은 기업가로서도 훌륭하다. 사업을 하거나 가정을 꾸릴 때, 당신은 함께하는 사람을 지배하려 하거나 융통성 없는 구조 속에 묶어두려는 식의 행동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절대 넘어서는 안 될 선은 반드시 그어놓는다.  당신은 도덕적으로 상당히 완고한 편이다. 옳고 그름에 대한 생각이 확고한데다가, 그것을 겉으로 표현하는 데도 주저함이 없다. 엄격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점잖게 행동하며 청교도적인 경향도 보인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나이가 어릴수록 더 심하게 나타난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순화되기는 하지만, 곤경에 처하게 되면 본래의 모습이 드러나곤 한다. 이렇게 되면 당신을 자유로운 사고방식의 소유자로 알았던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다.  황소자리Ⅱ 당신은 상사나 부모, 선생님으로서 아주 훌륭한 사람이다. 그러나 배우자나 연인, 친구로서 함께 지내기에는 그다지 편한 상대가 아니다. 당신은 요구가 많고 비판적이다. 싫은 걸 표현할 때 거리낌이 없고 날카로우며, 상대가 부드럽고 예민한 사람일수록 더욱 무자비하게 대한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엄격하고 강해져야 하며, 입에 쓰더라도 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니 누가 당신을 편안하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런 당신도 나이를 먹어 편안해지면서 이런 성격들이 많이 수그러진다.  당신은 아름다움에 대한 취향이 빼어나며 매력 또한 넘치는 사람이다. 그래서 당신을 숭배하는 사람도 꽤 된다. 그러나 정작 당신은 이러한 과도한 관심을 탐탁치 않게 여기며, 숭배자들 속에 갇혀버리는 것을 질색한다. 이때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홀로 칩거하며 고립되는 것말고 별로 없다. 따라서 당신이 사회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매력을 잘 제어하여 골칫거리를 만들지 않는 법을 익혀야 할 것이다.  당신과 개인적으로 친해지고 싶다면, 방법은 간단하다. 야단법석을 떨며 떠받드는 것은 금물이다. 오히려 무관심한 듯 혼자 남겨두는 것이 좋다. 당신은 감사를 표시하고 애정공세를 펼치는 사람보다는 묵묵히 자신의 몫을 해내는 사람을 더 좋아한다.  가장 좋아하는 것은 사랑이나 섹스에 대한 현실적이고 솔직한 태도다. 또 당신은 다른 사람이 관심이나 애정을 요구할 때 잘 부응해 주지 못한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그렇다. 이때 변명하거나 애원하는 태도로 접근한다면 당신의 마음은 완전히 식어버릴 것이다. 황소자리Ⅱ 당신은 자신의 파트너가 누구보다도 강인하며 위엄을 갖추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황소자리2의 장점 : 진취적인, 공명정대한, 매력적인  황소자리2의 단점 : 요구가 많은, 비판적인, 융통성 없는  황소2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좀더 자상하고 명랑해지도록 노력하라.  불쾌감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태도, 독단적이고 융통성 없는 태도를 조심하라.  다른 사람도 당신만큼 가르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라. 그리고 훌륭한 교사는 항상 학생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걸 기억하라.  황소자리Ⅱ 유명인들  오손 웰스, 지그문트 프로이드, 칼 마르크스, 골다 메이어, 오드리 헵번, 로베르토 로셀리니, 루돌프 발렌티노, 캔디스 버겐, 페테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 게리 쿠퍼, 신해철, 김훈, 이효리 ★황소자리Ⅲ 자연스러움의 주간 5월 11일- 18일  황소자리Ⅲ은 ‘자연스러움’을 중심 이미지로 갖는다. 이 시기는 급속히 성숙해가는 아이가 사회와의 접촉을 시작하면서, 한편으로 사회의 부당한 요구로부터 자신을 지켜나가는 시기에 비유된다. 사춘기가 시작되면 아이는 신체의 변화를 받아들여야 하며, 부끄러움을 극복하고 좀더 성숙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어린 시절의 막바지에 이르면서, 아이는 거대한 에너지를 분출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들은 실제로도 일어나지만, 환상이나 무의식의 세계에서도 일어난다. 그의 행동에는 매혹, 억제 혹은 발산, 반항심, 장난기, 아무 생각없이 원하는 대로 해버리기 등이 뒤죽박죽으로 엉켜 있다. 어린시절에 안녕을 고하는 것은 정말 가슴아픈 과정이다. 황소자리Ⅲ은 다른 황소자리에 비해 좀더 역동적이고 충동적이다. 뒤에 올 쌍둥이자리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황소자리Ⅲ은 아주 예민한 사람이다. 그에게는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필요하다. 다른 사람이 억지로 그의 습관을 바꾸려고 한다면 몹시 거북해할 것이다.  황소자리Ⅲ은 원래 거침이 없고, 즐길 줄 알며, 익살스러운 사람인데다가 그런 자기 자신을 좋아한다. 사실 그들에게는 다른 선택이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원래 사회라는 것이 한 개인에게 적응을 강요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황소자리Ⅲ은 커가면서 끊임없이 심각한 좌절과 장애물에 맞닥뜨리게 된다. 어린시절에 부모나 형제, 선생님은 그가 너무 고집이 세다고 생각하고, 뜯어고치려 한다. 이건 문제를 발생시킨다. 아이는 겉보기와 달리 비판에 잘 대처할 만큼 강인하지가 못하다.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을 때 깊은 상처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길게 보았을 때는 이러한 비판이 도움이 될 수 있다. 덕분에 조금씩 강인해지면, 자신에게 적대적인 상황에도 잘 대처할 수 있게 된다.  황소자리Ⅲ는 저자세를 유지하기가 힘든 사람이다. 행동파에다 흥분 잘하고, 게다가 주변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거침없이 내뱉다보니 스스로 곤란한 상황에 빠지곤 한다. 그는 감정적으로 불안정하며 쉽게 싫증을 낸다. 그러다보니 친구나 연인, 전반적인 삶의 모습이 자주 바뀌게 된다.  이렇게 황소자리Ⅲ는 충동에 따라 행동하면서 한편으로 안정을 필요로 하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그들은 성격적으로 불안정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인생에서 성공하고, 직장에서 인정받고, 사회의 장벽을 뚫고 나아갈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불안은 바로 안정을 가져다 주는 힘이다. 또한 그들의 야망은 의지할 수 있는 바위이자 길을 알려주는 콤파스이다. 그러므로 황소자리Ⅲ 중에서도 즐겁고 편안한 삶에 만족하는 사람들은 안정을 찾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수직상승하게 된다. 특히 재정적으로 독립을 이룰 수 있다. 무엇보다도 황소자리Ⅲ은 스스로 도전하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황소자리Ⅲ이 모험, 섹스, 약물, 그밖의 거친 행동들에 휘말리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생동안 뭔가에 사로잡히거나 중독되는 일 같은 것은 별로 없다. 이건 그들이 양식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러한 중독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황소자리Ⅲ은 험난한 해협을 항해하면서도 암초에 부딪히지 않고 무사할 수 있다.  그는 일생동안 권위에 저항하며 살아간다. 황소자리Ⅲ와 관계를 맺는 사람, 특히 배우자나 연인은 어쩌면 바로 이런 권위의 상징처럼 되어 저항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황소자리Ⅲ의 화풀이 대상이나 샌드백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 경우 먼저 필요한 것은 황소자리Ⅲ의 머리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문제는 황소자리Ⅲ 스스로가 다른 사람에게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를 원한다는 데 있다. 멋진 생각과 돌출적인 행동으로는 신뢰를 얻기가 그리 쉽지 않다보니 자신의 생각이 인정받을 때까지 길고 험난한 싸움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황소자리3의 장점: 장난을 좋아하는, 모험을 즐기는, 풍부한 상상력  황소자리3의 단점: 강박적인, 반항하는, 좌절하는  황소3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당신이 어떤 성격의 사람인지를 깊이 파고들어가 연구해라. 다른 사람이 당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주기를 원한다면, 먼저 당신이 자신의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여라. 하지만 자연스럽고 본능에 충실한 태도는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스스로에 대해 엄격한 기준을 만들고, 기대수준도 높여라. 당신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  황소자리Ⅲ 유명인들  데니스 호퍼, 조지 루카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캐나다의 영화감독), 교황 바오로 2세,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핸리 폰다, 캐서린 햅번, 하비 키텔, 마고트 폰테인(영국의 전설적인 발레리나), 스티비 원더, 데브라 윙거, 프랭크 카프라, 요기 베라, 에밀리오 에스테베즈, 다프네 듀 모리아(영국의 추리소설 작가, 레베카의 원작자), 에릭 사티, 버트란트 러셀, 이문열 ★황소-쌍둥이자리 에너지의 주간 5월 19일- 24일  황소-쌍둥이자리는 황도대의 두 번째 황소자리와 세번째 쌍둥이 자리가 만나서 만들어졌다. 인간의 일생으로 보면 14세 정도의 나이에 해당하며, 계절로 보면 늦은 봄의 시작에 해당된다. 이 별자리의 대표 이미지는 ‘에너지’이다. 인간의 삶에서 14세라는 나이는 청소년기의 시작을 알린다. 이제 어린 시절과는 이별을 고해야할 때가 왔다. 이 시기에는 에너지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에너지가 많이 솟아난다는 점에서 뿐 아니라,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성장이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식욕이 엄청나게 증가한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는 편안하고 잘 정돈된 시기는 아니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달라지는 시기이다. 때로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재탄생하기도 한다.  황소-쌍둥이자리에 태어난 사람들은 스스로를 인간이라기보다 하나의 힘으로 본다. 자기 인식이 부족한 편인 이들은 어릴 때부터 수동적이기보다는 적극적인 역할을, 안정적이기보다는 역동적인 역할을 맡아왔다. 어린 아이다운 호기심에 가득 차서는, 자극을 따라 여기저기 날아다닌다. 황소-쌍둥이자리의 부모는 아이가 너무 얄팍하며 한가지에 몰두하지 못한다는 점을 몹시 걱정한다. 하지만 이런 부모의 걱정에 아랑곳없이 아이는 온갖 것에 관여하려 하며, 세상과 전면적으로 부딪히고 싶어한다.  황소-쌍둥이는 활기찬 에너지, 강렬한 호기심, 매력 덕분에 친구나 연인이 많은 편이다. 하지만 그와 관계를 맺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잃어버리게 될까봐 전전긍긍하게 된다. 몇몇 사람들에게는 이런 상황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대부분은 황소-쌍둥이자리에 대한 불신감 때문에 관계를 끝내버리게 된다. 그러니 황소-쌍둥이자리에 대한 평판이 좋을 리가 없다. 특히 사업을 하거나 직장을 다닐 때는 치명적이다.  황소-쌍둥이자리는 명석하기는 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성과를 이뤄내지는 못한다. 불행하게도 욕망이나 충동이 강하나, 인내심은 그에 상응하지 못한다. 그의 모습은 마치 침착하고 사려깊은 거북이에게 결국 추월당하고 마는 토끼를 연상시킨다. 차라리 느리더라도 목적의식이 뚜렷한 사람은 어려움을 잘 견뎌내는 법인데 황소-쌍둥이자리는 정반대이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황소-쌍둥이자리는 너무 강하게 행동한다. 친구들은 그가 왜 그렇게 매순간 관심의 중심에 있고 싶어하는지 의아해할 뿐이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매혹적이라 생각하며, 그 매력을 발산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만약 황소-쌍둥이자리가 관계를 발전시키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스스로에 대해 무관심해져야 한다. 생각이 떠오르더라도 남에게 떠벌리지 말며, 먼저 다른 사람을 포용하고 공감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 별자리는 흙을 원소로 가진 황소자리의 감각적인 특성과 공기를 원소로 하는 쌍둥이자리의 지적인 특성이 결합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육체적 문제에 강박적인 관심을 가지면서 동시에 무엇이든 면밀히 조사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다른 말로 하면 주위 사람의 신체 상태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자신의 몸에 대해서도 걱정이 많으며, 기계나 장비가 잘 작동하는가도 흥밋거리다. 그에게 가장 좋은 파트너는 강인한 사람이다. 자신의 개성을 지키고 넘지 말아야 한 선을 정확히 그으면서도, 한편으로 황소-쌍둥이자리의 대화 욕구를 만족시켜줄 수 있어야 한다. 사실 그는 진짜 원하는 건 대화 상대가 아니라 자신을 존경하고 높이 평가해줄 사람이지만 말이다.  사실 황소-쌍둥이자리가 스스로를 반성하고 계획을 세운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관계 모든 이들을 고통과 곤경에서 구하기 위해 꼭 해결해야할 숙제이다.  황소-쌍둥이 자리의 장점 : 다재다능한, 활동적인, 총명한  황소-쌍둥이 자리의 단점 : 수다스러운,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서두르는  황소-쌍둥이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항상 자신의 페이스를 주의깊게 점검하라. 사람이나 생각을 내버릴 때는 우발적인 충동은 자제하고, 일관성 있게 행동하라. 너무 강하게 다가서면 부작용만 일으킬 뿐이다.  황소-쌍둥이자리 유명인들  그레이스 존스, 말콤-X, 밥 딜런, 아서 코난 도일, 빅토리아 여황, 로렌스 오릴비에, 안드레이 사하로프, 리차드 와그너, 헨리 루소, 프리실라 프레슬리, 소크라테스, 호치민, 존 콜린스, 피터 타운젠드, 알브레히트 뒤러(15세기 독일의 화가), 조지 워싱턴 카버(미국 흑인 교육자), 차범근 ★쌍둥이자리Ⅰ 자유의 주간 5월 25일- 6월 2일  쌍둥이자리Ⅰ의 중심이미지는 ‘자유’이다. 인간으로 치자면 독립에의 욕망과 생각의 자유가 아주 중요해지는 청소년기에 비유된다. 그러다 보니 반항심도 커진다. 정의롭지 못한 일에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고, 모든 종류에 독재를 경멸하게 된다. 그러나 항상 기존의 태도에 반대하는 방식으로만 행동하는 것은 시야를 넓히기 보다 오히려 좁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쌍둥이자리Ⅰ은 구속당하는 걸 싫어하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유를 빼앗기지 않으려 한다. 개인주의가 강한 그는 억압과 착취를 증오하며, 머리로도 실천으로도 거세게 저항한다. 쌍둥이자리Ⅰ은 싸움에서 물러서는 법이 없다. 원래 본성이 투쟁적인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으면 절대적으로 지지하며, 잘못된 것이 있다면 주저없이 공격한다. 그는 옳은 것과 그른 것 두 가지 밖에 없으며, 옳은 길로 가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철썩같이 믿는다.  밝고, 자신감에 차 있고, 기민하며, 약간은 말썽도 일으키는 쌍둥이자리Ⅰ. 그는 가장 못견디는 것이 반응이 느린 사람이다. 스스로 워낙 민첩한데다가, 참을성도 별로 없는 편이다. 그는 기술력이 뛰어난데, 그래서인지 어떤 업무를 함께 하는 동료가 실력이 없어 보이면 화부터 난다. 그는 조그만 자극에도 짜증을 내며, 일단 폭발하면 조롱과 빈정거림으로 상대방을 가차없이 후려친다. 쌍둥이자리Ⅰ의 공격성은 주로 무능이나 우둔함에 맞춰져 있는데, 그러므로 그와 함께 살거나 일한다는 건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이 별자리 사람들은 충동의 속도가 엄청나며 상상력도 풍부한데, 때로는 도가 넘을 정도다. 끊임없이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꿈꾸겠지만 정작 해결해야할 일, 예를 들면 청구서 처리 같은 것은 팽개쳐둘 공산이 크다. 원래 쌍둥이자리Ⅰ은 수성의 영향으로 많이 들떠 있는 편인데, 가정생활을 하다보면 조금 안정적이 된다. 만약 배우자나 친구가 지혜롭다면 쌍둥이자리Ⅰ에게 지속적인 관심과 관리가 필요한 일을 맡김으로써 그의 재능을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다. 본인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오히려 꽉 짜여진 체계 속에서 많은 책임을 질 때 더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특히 자신이 맡은 일이 뭔가를 개혁하는 일이라면, 똑같은 일을 몇 년씩 계속하더라도 아무 불만이 없을 것이다.  쌍둥이자리Ⅰ의 가족, 친구, 연인은 그의 속마음을 알아내려고 애쓸 필요가 전혀 없다. 그는 감정적으로 불안정한데다, 불만이 있으면 있는 그대로 표현해버린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실제로 그는 못말리는 불평분자일 수 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는 불만이 많다기보다, 불만이 있을 때 속시원히 털어놓지 않고는 못배긴다고 보면 된다. 일단 쌍둥이자리Ⅰ에게 익숙해진 사람이라면 불평의 핵심만 파악한 후 나머지는 한귀로 듣고 한귀를 흘려버린다. 쌍둥이자리Ⅰ에게 감정적으로 대응해봐아 싸움만 커질 뿐이다.  이렇게 변덕도 심하고 불안정한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자신의 파트너에 대해서는 충실한 편이다. 하지만 판에 박힌 일에 쉽게 싫증을 내는 버릇은 여전하다. 그러므로 친밀함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끔씩 관계의 구조를 바꿔주는 게 필요하다. 쌍둥이자리Ⅰ과 가장 잘 어울리는 짝은 자극이나 다양성이 필요하다는데 동의하고 가끔 한번씩 변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이다.  이 별자리는 감정을 꾸며대는 걸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할 때 자신의 매력을 주저없이 활용한다. 그는 아주 매혹적이서, 그의 섹스 어필에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서로를 신뢰할 수 있을만한 공감대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신선미를 잃게 될 것이다. 배우자나 연인이 이미 증언한 바와 같이, 쌍둥이자리Ⅰ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지곤 한다. 성공하려면 우선 자신의 신경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약물이나 흥분제, 특히 술은 반드시 멀리해야 한다. 그런 것들은 쌍둥이자리Ⅰ의 의식을 몽롱하고 멍하게 만들어버린다.  쌍둥이1의 강점 재치있는, 카리스마 넘치는, 전문기술이 뛰어난  쌍둥이1의 단점 전제적인, 교묘하게 조종하는, 불평하는  쌍둥이1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시작한 것은 끝을 내라. 타인과 제대로 관계를 맺으려면 우선 인내심을 길러야 한다. 주위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상을 희생할 줄도 알아야 한다. 당신 내면의 감정을 무시하지는 마라.  쌍둥이자리Ⅰ 유명인들  마릴린 몬로, 존 F 케네디, 이사도라 던컨, 클린트 이스트우드, 헨리 키신저, 베니 굿맨, 존 웨인, 마르키스 드 사드(새디즘의 어원이 된 19세기 프랑스의 후작), 티토(유고슬라비아의 독재자), 마일스 데이비스, 모간 프리만, 매리 여왕, 랄프 왈도 에머슨(미국의 초절주의 시인), 브룩 실즈, 이회창 ★쌍둥이자리Ⅱ 새로운 언어의 주간 6월 3일-10일  쌍둥이자리Ⅱ의 중심이미지는 ‘새로운 언어’이다. 쌍둥이자리Ⅱ의 시기에는 많은 영역들이 활동을 개시한다. 우선은 비판적인 사고와 그것을 글이나 말로 표현하는 능력이 발휘되기 시작한다. 정확성과 일관성이 중요해지며, 또한 상상력이나 비전도 그 못지 않게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자기만의 개성을 키워나가야 하며, 한편으로 인생의 희극과 비극을 동시에 알아차리는 균형감각도 요구된다.  쌍둥이자리Ⅱ는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말로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 상대방이 동의하는가는 아닌가는 중요치 않지만, 적어도 자신의 메시지와 관점을 이해한다는 점만은 확실해 해두고 싶어한다. 쌍둥이자리Ⅱ의 표현 수단은 아주 사적이어서, 자신만의 독특한 언어를 발전시키는 경우가 있다. 이런 성격은 많은 갈등과 좌절을 야기한다. 사적인 언어를 사용하니 오해가 생길 수밖에. 게다가 어떤 쌍둥이자리Ⅱ는 자신을 이해시키려고 할 때 질보다는 양으로 밀어붙이며 속사포로 말을 쏟아낸다.  쌍둥이자리Ⅱ는 남을 즐겁게 할 줄 알며, 재치 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관심을 붙잡아둘 수 있는지를 잘 안다. 이해받고 싶다는 쌍둥이자리Ⅱ의 요구는 너무나 절실하다는 걸 알기에, 사람들은 임시방편으로라도 이해하는 척 해준다. 하지만 결국 그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게 들통나게 되며 이때 쌍둥이자리Ⅱ는 몹시 치욕스러워 한다.  쌍둥이자리Ⅱ의 의사소통 수단에는 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바디 랭귀지 또한 아주 강력하다. 그는 육체를 단련하고, 그 육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강한데, 특히 젊었을 때 그러하지만 나이가 들어도 그런 성향은 지속된다.  쌍둥이자리Ⅱ는 경쟁심이 강한데, 때로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해진다. 경쟁은 그를 예리하게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또한 호전적으로 만든다. 너무 날카로워서 깊은 상처를 남길 정도가 된다. 스스로가 비판충동을 잠재우지 못한다면, 가장 가까운 친구조차도 멀어지게 될 것이다. 쌍둥이자리Ⅱ는 스스로에게도 똑같이 가혹한 편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그가 어린 시절 자주 부모로부터 무책임하다거나 유별나다거나 무능력하다는 비난을 받게 되면서 스스로를 비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그의 행동은 두려움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바보나 부적응자로 보일지 모른다는 두려움, 오해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지난 일은 잊고, 스스로에게 관대해지고, 자신의 그늘진 면과 화해하게 된다면, 비로서 생산적이고 충만한 관계를 맺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는 자기와 정반대의 사람에게 매력을 느낄 뿐 아니라, 인생의 어두운 부분에 매혹되곤 한다. 겉보기에는 외향적이고 행복해보이지만, 사실 그 웃음과 흥겨움은 억지로 쥐어짠 것이다. 거절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이런 어두움을 억누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연인이나 친구를 고를 때 우울하고 그늘져 보이는 사람을 찾는다.  파트너를 고르는 데 있어 좀더 현실적인 태도를 갖는다면 그 자신에게도 큰 도움이 된다. 완전히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을 고르고 싶겠지만 실제로는 같은 도시나 마을에서 자란 사람, 같은 인종이고 경제적으로도 비슷한 사람과 사귈 때 훨씬 성공적이다. 교제범위도 같고 말투도 비슷하게 되면 그만큼 잡음도 줄어들고 의사소통도 쉽다. 공통점에 바탕한 이러한 결속력은 어두움에 대한 열정보다는 더 오래 지속될 가치이다.  쌍둥이자리2의 장점 : 의사소통에 능한, 경쟁심이 강한, 개혁적인  쌍둥이자리2의 단점 : 오해를 많이 받는, 유별난, 질서가 없는  쌍둥이2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너무 서두르지 마라.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히 하되, 외교적일 필요도 있다. 당신이 만들어내는 인상이나, 타인이 당신에게 갖는 이미지를 등한시하지 마라. 침묵은 금이다. 속깊은 우정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공을 들여야 한다.  쌍둥이자리Ⅱ 유명인들  쥬디 갈런드, 바바라 부시, 조니 뎁, 필립 왕자(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남편) , 프린스, 토마스 만, 알렉산드르 푸쉬킨,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스페인의 시인), 조세핀 베이커(미국의 흑인 무용수), 차승원 ★쌍둥이자리Ⅲ 탐구자의 주간 6월 11일-18일  쌍둥이자리Ⅲ의 중심이미지는 ‘탐구자’이다. 이 시기는 한 젊은이가 청소년기에 작별을 고하고 어른의 세계을 발을 내딛기 위해 적극적으로 준비하는 때에 비유될 수 있다. 쌍둥이자리Ⅲ에게 떠오르는 이슈는 다음과 같다. 누군가와 맞서고 그를 설득해낼 만큼 강해지는 것,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는 것, 그리고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것. 탐구자라면 필요하다면 어디라도 갈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또한 스스로가 설정해놓은 한계의 고리와 스스로를 머뭇거리게 만드는 회의의 고리를 끊어버려야만 한다. 지금은 두려움없는 탐험의 시기이며, 인생의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는 시기이다.  쌍둥이자리Ⅲ의 기본 동력은 사회나 자연이 그어놓은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성공에 대한 야심으로 표현될 수도 있고, 육체적 한계에 대한 도전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이들은 기회가 오면 머뭇거리지 않는다. 위험한 일일수록 더욱 매력을 느낀다. 그는 어느모로 보나 모험가이며, 잠시도 쉬지 않는 타입이다. 그는 무엇에든 구속되지 않으며 그러므로 자유롭게, 가능한 한 멀리 전진해나갈 수 있다. 당신의 옆에 쌍둥이자리Ⅲ가 있다면 인생은 지루할 틈이 없을 것이다. 탐험하고 도전한다고 해서 꼭 아득히 먼 곳으로 떠나야만 하는 건 아니다. 사실 그에게는 인생의 모든 것이 모험이자 도전이다. 사람들은 늘 쌍둥이자리Ⅲ의 다음 행동을 예측해보며, 기대감에 가득차곤 한다.  쌍둥이자리Ⅲ의 자아상은 상당히 모호하다. 그는 자신의 진짜 모습이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한다. 이것은 그가 어린시절에 부모나 가족 중 한명, 특히 성별이 다른 사람을 우상화하면서 이미 시작된 현상이다.  쌍둥이자리Ⅲ은 자신의 매력으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주고자 하는 본능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사실대로 말해서 거절당하기보다는 진실을 약간 왜곡하는 쪽을 택한다. 주위 사람들이 뭘 원하는지에 대한 통찰력이 뛰어난 그는 미묘한 방식으로 조종하고 설득한다. 그는 사람들에게서 원하는 바를 얻어내는 방법을 잘 안다. 또한 어떻게 하면 배우자나 친구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지도 잘 안다. 하지만 이런 성향이 극단으로 치달으면 허풍쟁이가 될 수 있으며, 심하면 사기꾼이나 아첨꾼 혹은 거짓말쟁이라는 의심을 받을 수도 있다.  이 주간에 태어난 사람들은 매우 육체적인 사람이지만, 그걸 애써 무시하려고 한다. 인생의 세속적인 즐거움을 초월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건 다른 말로 하면 이기적이거나 뻔뻔하게 쾌락을 즐기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현실성이 결여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쌍둥이자리Ⅲ은 문자 그대로 형이상학적이다. 그는 현실에 정통한 것을 좀더 높은 성취를 이루기 위한 첫걸음 정도로 폄하한다. 이런 식이라면 쌍둥이자리Ⅲ은 아무런 성취도 없이 그저 앞으로만 나아가며 노력만 되풀이하는 데서 자족할 가능성이 많다.  사랑과 애정은 중요하지만, 그러나 최우선적인 것은 아니다. 쌍둥이자리Ⅲ과 사귀는 사람은 그가 따뜻하고 아낌없이 베푸는 성격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꽤 냉담하고 쌀쌀맞다는 걸 알게 된다. 사실 그는 변덕스럽다는 비판을 자주 받으며, 그럼에도 스스로는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상처를 입히려는 의도로 그러는 것은 아니며, 단지 감정적인 예민함 때문에 생긴 일일 뿐이다.  관계에 있어서도 그들은 변화를 강하게 요구한다. 덕분에 그는 한 파트너에서 다른 파트너로 옮겨 다니는 일에 자신의 인생을 다 소진해버린다. 처음부터 아주 굳건한 관계를 세웠다 해도 새로운 일, 새로운 취미, 새로운 사람에게 매혹되어 관계를 등한시하기 십상이다.  쌍둥이자리Ⅲ은 남을 유혹하는 자질을 타고 났지만, 바로 그 때문에 곤경에 빠지기도 한다. 그는 파트너를 선택하는 안목이 아주 뛰어나지만, 한편으로 성가시거나 해를 끼치는 친구나 연인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한다. 하지만 꼭 관계를 끝내야 할 때, 실제로 거절하거나 적어도 상대방이 그렇게 하도록 조종하는 쪽은 바로 쌍둥이자리Ⅲ이다. 스스로 끝맺음을 하는 것은 그로서는 중요한 일이다. 쌍둥이자리Ⅲ은 가능하면 즐겁고 기쁘게 관계를 끝맺고 싶어한다.  쌍둥이자리3의 장점: 탐험을 좋아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금전감각이 뛰어난  쌍둥이자리3의 단점: 감정적으로 불안정한, 환멸을 느끼는, 참을성이 없는  쌍둥이3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당신 앞에 서 있는 것은 흥미로워 보이는가? 혹시 위험하고 특이해 보이기 때문에 그런 건 아닌지 생각해보라. 모든 상황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당신에게 주어진 의무가 절대 아니다. 요구를 받았을 때 ‘아니오’라고 말할 줄도 알아야 한다. 당신 자신에게도 보상을 줘라.  쌍둥이자리Ⅲ 유명인들  마가렛 버크-화이트(사진작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안네 프랑크, 폴 매카트니, 스테피 그라프,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이사벨라 로셀리니, 뉴트 깅그리치(미국의 전 하원의장), 코트니 콕스, 도날드 크럼프, 조지 부시, 체 게바라, 에드바드 그리그(노르웨이의 작곡가), 아담 스미스, 김용옥 ★쌍둥이-게자리 마법의 주간 6월 19일 - 24일  쌍둥이-게자리 커스프는 황도대의 세 번째 별자리인 쌍둥이자리와 네번째인 게자리가 만나 이루어졌다. 인간생으로 따지면 스물 한 살 정도의 나이에 해당되며, 계절적으로는 여름의 시작을 의미한다. 이 별자리는 마법을 상징한다. 이 때가 되면 식물들이 무성해지며 꽃을 활짝 피운다. 일 년 중 그 어느 때보다도 낮이 길고, 밤은 짧다. 인간 생에서 21세의 나이는 사춘기가 끝나고 어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시기이다. 또한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고 열정을 불태우게 된다는 점에서 마법은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별자리의 사람은 마법의 주문에 쉽게 걸려든다. 낭만적이고 영감이 넘쳐 흘러넘치는 그는 숭고한 목표를 위해서 자신의 재능과 에너지를 남김없이 바친다. 이때의 목표는 가족일 수도 있고 종교, 철학, 예술, 정치 같은 거창한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쌍둥이-게자리들은 한편으로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을 유혹한다. 그들에겐 사람을 끌만한 감미롭고 순수한 매력이 있다. 그만큼 이용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데 사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에게는 훌륭한 방어본능이 있으며, 아무리 온순한 타입의 쌍둥이-게자리 조차도 넘어서서는 안되는 선을 명확히 그을 줄 안다. 그는 유혹이나 매력에 쉽게 흔들리는 편이지만, 한편으로는 상당히 냉정한 면도 있다. 객관적인 시각을 지킬 줄 안다. 이렇게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능력과 감정적인 면이 서로 보완관계를 이루게 되는데, 그건 쌍둥이자리와 게자리 양쪽의 영향 때문이다.  쌍둥이-게자리는 누군가가 자신의 내면에 접근하는 걸 쉽게 허용하지 않는, 상당히 비밀스러운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재택근무를 할 때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며, 자신의 집을 은신처나 성역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의 생활공간에 들어갈 기회를 허락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대단한 신뢰와 존중을 얻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가 가장 경계해야할 것은 사회로부터 고립이다. 사회에서 등을 돌려 현실성 없는 꿈의 세계에 갇혀 살 위험이 다분하다. 이 때문에 정신적으로 잘 성장하지 못하며, 결국 삶의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자신의 인생이 실패했다고까지 여기게 된다. 그러므로 쌍둥이-게자리는 현실감을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쌍둥이-게자리에게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사랑은 그가 살아가는 근본적인 이유이자, 고난의 시기를 헤쳐나갈 힘이 되어준다. 만약 사랑을 택하겠느냐, 부나 권력을 택하겠느냐 물어본다면 대개 사랑을 택한다. 게다가 그 사랑의 형태도 다소 특이하다. 주로 멀리서만 바라보는 사랑을 많이 하며, 플라토닉한 사랑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사랑의 감정을 억제하는 능력 또한 뛰어나다. 아무리 깊은 사랑에 빠졌더라도 자신의 감정에 대한 장악력을 놓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그와 사랑에 빠진다는 건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당신은 그의 얘기를 주의깊게 들을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그가 당신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당신을 사랑한다고 보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쌍둥이-게자리가 맺는 관계의 스펙트럼은 상당히 다양하다. 그저 알고 지내는 사이부터 우정, 아주 열정적인 관계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관계는 자기만의 구조를 갖고 있는데, 거기에는 육체적 접촉에 있어 어디까지가 허용되는지까지가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각 관계마다 일정한 규칙을 정하는 것은 관계의 미래를 위한 필수전제가 된다.  쌍둥이-게자리의 장점 : 애정 깊은, 매혹적인, 객관적인  쌍둥이-게자리의 단점 : 고립된, 이기적인, 요구가 많은  쌍둥이-게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당신이 가진 마법의 힘을 세심하게 연마하라. 스스로에게 좀 더 모질어질 필요가 있다. 눈을 목표에 고정시켜라, 그리고 아무렇게나 살려는 경향을 거부하라. 감정을 억지로 누르거나 파괴적인 감정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하라.  쌍둥이-게자리 유명인들  아웅산 수지, 메릴 스트립, 베나지르 부토(파키스탄의 전 총리), 장-폴 사르트르, 니콜 키드만, 빌리 와일더, 줄리엣 루이스, 조세핀 드 보아르네(나폴레옹의 아내), 윌리암 왕자, 캐슬린 터너, 프랑소와 사강,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린지 와그너 ★게자리Ⅰ 공감의 주간 6월 25일 - 7월 2일  게자리Ⅰ의 중심 이미지는 ‘공감’ 이다. 이 시기는 청년기로서 타인을 이해하고, 느끼고, 어느 정도까지는 자신과 동일시하고자 하는 욕구가 전면에 나타나게 된다. 이때의 이해는 좀더 폭넓은 것으로 타인의 인생역정, 감정, 성격까지를 모두 이해하는 것이다. 또 타인의 생각과 사고방식에 대해 공감하고자 한다.  청년기가 되면 분별력이 생긴다. 따라서 자신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것이라면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지만, 해로운 에너지라면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게 된다. 또 감정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무의식이 어떻게 흘러 다니는지,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동기는 무엇인지 등을 배우게 된다.  게자리Ⅰ 당신은 파악이 잘 안 되는 사람이다. 감정적으로 매우 복잡하고 여러 가지 기질들이 마구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기분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돌변하곤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당신을 보고 사교적이라는 인상을 받지만, 또 어떤 다른 사람은 오히려 사교성이 없다는 인상을 받기도 한다. 감정의 스펙트럼이 다양한 것은 당신의 예민함 때문이다. 감정이입 경향이 강한 게자리Ⅰ 당신은 상대방의 감정을 재빨리 알아채며 그것을 자신의 감정으로 착각한다. 그러다가 도가 심해지면 인생이라는 드라마에서 타인의 대본을 들고는 자기 것이 아닌 역할을 연기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당신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자기 인식이다.  게자리Ⅰ 당신이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유약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사실 당신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데 있어 아주 영악하다. 이 주간에 태어난 사람들은 돈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며, 돈을 다루는데 있어서도 빈틈이 없다. 또 투자 감각도 훌륭해 주식이나 부동산 같은 것에서 큰 이익을 남기곤 한다. 기술 분야에서 일할 경우 당신은 당신이 다루는 것들을 확실하게 장악함은 물론 계획을 실행하는 능력도 아주 뛰어나다.  당신은 때때로 자신의 문제와 씨름하느라 몇 달, 혹은 몇 년씩 세상으로부터 숨어버린다. 겨우 얼굴만 물 밖으로 내놓은 채 감정의 바다에 표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급변하는 파도 속을 자신 있게 헤엄쳐 나갈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야말로 당신이 해결해야 할 가장 큰 숙제이다.  가장 성공적인 게자리Ⅰ은 자신의 환상을 건설적으로 일에 적용하고, 자신의 독특한 시각을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기 위해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내면의 두려움을 정복하고 본인이나 부모가 주입해 놓은 스테레오타입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 다음엔 당신의 고지식함과 열등감을 극복해야 한다.  게자리Ⅰ 당신과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당신이 감정의 문을 닫아걸고 고립 상태로 들어갈 때 그냥 옆에 서서 지켜만 봐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어쩌면 고문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신의 곤경에 함께 빠져드는 것은 불가능함은 물론 사실 현명한 처사도 아니다. 차라리 당신이 다시 회복되어 세상 밖으로 나올 때까지 그냥 물러서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이 훨씬 현명한 행동이다. 그러므로 인내심이야말로 당신과 좋은 관계를 맺고자 하는 사람이 꼭 갖춰야 할 미덕이다.  게자리Ⅰ 당신은 삶이 던져준 숙제를 하는데 큰 자부심을 느끼며, 또 이것은 거의 항상 좋은 결과를 낳는다. 그런데 당신의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먼저 감정의 긴장이 당신의 사고를 흐리게 하여 제 궤도를 벗어나게 만들 수 있다는 것, 그럼에도 혼란스러운 판단이나 충고를 마치 대단한 확신이나 권위가 있는 양 내놓은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아둬야 한다.  게자리1의 장점: 금전적으로 정확하다, 예민하다, 기술력이 뛰어나다  게자리1의 단점: 공격적이다, 두려워한다, 궁핍하다  게자리1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지나치게 무장하지 마라 - 물론 분별력은 유지해야 하지만.  타인이 위험에 뛰어들 때 그냥 내버려둬라. 그에겐 그럴 자유가 있다.  당신의 영업력은 뛰어날지 모르나 실제로 인정받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두려움은 무조건 거부만 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자기 해방과 과감한 실천을 통해 극복해야 한다.  게자리Ⅰ 유명인  헬렌 켈러, 다이에너 왕세자비, 마이크 타이슨, 로스 페로, 조지 오웰, 칼 루이스, 장 자크 루소, 제리 홀, 오리아나 팔라치, 존 쿠색, 파멜라 앤더슨, 패티 스미스, 조지 마이클, 펄 벅, 케시 베이츠, 데이브 그루신, 조재현, 신성우 ★게자리Ⅱ 인습타파의 주간 7월 3일 - 10일  게자리Ⅱ 당신은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고를 지향한다. 이 시기는 특이한 행동과 특이한 인물에 대한 호기심을 잘 억제하지 못하는 청년기에 비유할 수 있다. 게다가 본인도 독특한 존재가 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하는데, 이것은 사춘기적 발상과는 다른 것으로 오히려 개성을 확립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게자리Ⅱ 당신의 삶은 공동의 가치를 검토하고, 숨겨진 비밀을 밝혀내고, 화려함을 드러내며, 특이한 생각과 환상들을 불러내어 탐험하는데 바쳐진다. 또 한편으로는 불안정하고 자기 파괴적인 힘이 생겨나기도 한다. 이 시기는 풍부한 환상으로 가득 차 있으며, 따라서 가장 싫어하고 눈살을 찌푸리는 것은 바로 둔감함과 상상력 부족이다.  겉보기에 게자리Ⅱ 당신은 지극히 정상인 듯하며, 실제로 직장에서도 평범한 위치에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기괴한 것과 특이한 것에 불가항력적으로 이끌리곤 하는 면이 있다. 동료나 친구들은 좀처럼 당신의 비밀스러운 세계에 들어가지 못한다. 아주 친한 몇 사람만이, 그것도 몇 년씩 관계가 쌓인 후에야 알아차릴 수 있다. 당신의 기이한 취향이 사실은 당신의 내면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정상적인 직업이야말로 게자리Ⅱ 당신이 안전하게 숨을 수 있는 피난처이다. 회사라는 거대 조직의 익명성에 자신을 묻어버림으로써,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피하고 발각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달래는 것이다.  하지만 혼자만의 자유시간이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자신의 엉뚱하고 어릿광대 같은 면을 발산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과 궁합이 맞는 친구를 사귀게 되면 이런 증상은 더 심해진다. 더욱 야성적으로 변하여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던 환상을 밖으로 표출한다.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오지로 휴가를 떠나고, 그곳에 아예 눌러 살까 생각하기도 하며, 또 때로는 실제로 그렇게 하기도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당신은 평범한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 전혀 엉뚱한 곳에서 엄청난 부를 쌓기도 한다. 이런 일은 다 뛰어난 창의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게자리Ⅱ 당신은 수집이나 독서, 영화 관람 등으로 여가시간을 보내는데, 어떤 것이든 다양한 환상의 요소가 있어야 한다. 특히 당신은 삶의 어두운 면에 많이 이끌리는 편으로, 범죄 등의 불법 행위에 매혹되는 경우도 많다. 또 사람을 사귈 때에도 극단적인 타입의 사람에게 흥미를 느끼는데, 호기심이 지나쳐 아예 결혼을 감행하기도 한다.  당신의 삶을 지배하는 또 다른 코드는 ‘집착’이다. 당신은 자신의 욕망을 잘 억제하지 못한다. 특히 짝사랑의 대상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을 때 그 정도가 더 심해진다.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사랑이야말로 당신이 인생에서 가장 집착하는 부분이다.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은 궁극적으로 자기 파괴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당신은 먼저 집착을 버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게자리Ⅱ 당신은 당신과 마찬가지로 사생활을 중요시하는 사람과 사귀는 것이 좋다. 당신에게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는 관계의 사람들, 예를 들어 부모나 자식들의 경우 그들은 당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보수적일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그들은 당신과 얼굴을 맞대고 살아야 한다. 그리고 당연히 당신에게 사회적으로 용인받을 수 있는 행동을 하도록 강요하는데, 그래봤자 그들만 힘들 뿐이다. 당신이 무대 중심을 차지하는 시간이 되면 그냥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게 상책이다. 그들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당신이 그들에게 어떤 행동을 유도하려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한편 정반대로 당신이 혼자 방에 틀어박혀 아무 상관도 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도 가족들을 불편하게 만들기는 마찬가지다.  당신은 타인에게 별다른 요구를 하지 않는 얌전한 사람이다. 하지만 아주 절친한 친구에게는 의외로 재미있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본 친구라면 당신이 아주 섬세하고 사려 깊으며, 자상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신은 또 평범한 사람의 이면에 감춰진 비범함을 간파해 내는 능력과, 타인의 심리에 대한 통찰력과 이해력도 뛰어난 편이다.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여의었거나, 부모나 배우자와 좋지 않은 일이 생긴 사람의 옆에 당신이 있어준다면 큰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 때문에 사람들에게 당신이 중요한 존재로 부각된다. 상상력만 잘 포착한다면 친구들에게는 물론 회사생활을 하면서도 당신은 존경받을 수 있다. 그러나 생각을 함께 나눌 관객을 찾지 못하게 되면, 당신은 몹시 고통스러워한다.  게자리2의 강점; 재미있다, 심리를 잘 파악한다, 상상력이 풍부하다  게자리2의 약점; 자기 파괴적이다, 강박적이다, 쩔쩔매게 만든다  게자리2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세상 밖으로 나가기 위해 성심껏 노력하라.  좀더 강인해지고, 너무 예민해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당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끈을 놓지 마라.  상상력과 창의력을 생산적인 일에 쏟아 부어라.  게자리Ⅱ 유명인  톰 행크스, 프란츠 카프카, 구스타프 말러, 마크 샤갈, 엘리어스 호 (재봉틀의 발명자), 장 콕토, 톰 크루즈, 안젤리카 휴스턴, 케빈 베이컨, 에비게일 반 뷰른, 앤 랜더스, O. J. 심슨, 제랄도 리베라, 존 D. 로크펠러, 필립 존슨, 톰 스타파드, 셜리 나잇, 달라이 라마, 실버스타 스텔론, 피에르 가르뎅, 주세페 가리발디(19세기 이탈리아 통일에 헌신한 장군), 링고 스타, 쟈넷 리 ★게자리Ⅲ 설득자의 주간 7월 11일 - 18일  게자리Ⅲ의 중심 이미지는 ‘설득’이다. 사람의 나이로 봤을 때 이 시기는 20대 중 ? 후반에 비유될 수 있다. 이때가 되면 대인관계나 일에서 설득하는 능력이 발휘되기 시작한다. 모든 방법을 다 시도하고, 모든 기회를 다 활용해 보는 그런 시기인 것이다.  게자리Ⅲ 당신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낼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자신의 명령에 따르도록 만들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주위 사람들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당신은 대단한 추진력과 단호함의 소유자이다. 가장 수줍음 많고 은둔자 기질이 있는 게자리Ⅲ조차도 마음속으로는 은밀한 욕망을 품고 있다. 물론 좀더 공격적인 타입이라면 자신의 일에서 최고의 위치에 오르고자 하는 욕망을 조금도 숨기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기다리고, 지켜보고, 귀 기울여 들을 줄 아는 사람이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에 민감한 당신은 현실의 징후를 잘 읽으며 언제 행동할지 잘 안다. 당신이 남을 설득하는데 뛰어난 것은 당신의 견해가 정확한 근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사실에 정통하며, 그 결말을 훤히 꿰뚫고 있다. 당신은 인생의 냉혹한 현실을 다루는데 능숙하다. 사실 당신은 사람을 말로 설득하기보다는 존재 그 자체로 설득한다. 강한 개성을 가진 당신은 조용하고 능숙하게 가해져 오는 압력에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당신은 열정적인 사람이며, 인간의 깊은 감정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불안정함이 당신의 욕망을 추진시키는 동력이라면, 무엇인가에 대한 당신의 열정은 그 연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때 열정의 대상은 보통 당신 자신의 신념이다. 당신은 보통 비슷한 마인드를 가진 사람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더욱 강화시킨다. 특히 당신 자신이 조직이나 공동체의 최고 행복을 위해 일한다고 확신하고 있을 때에는 아무도 당신을 반대할 수 없다. 또 실제로 당신은 관계된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준다.  게자리Ⅲ 당신은 사적인 감정이나 애정이 얽혀 있는 관계에는 소질이 없는 편이다. 함께 일하는 동료 관계가 가장 원만하다. 사적인 관계에서는 당신의 단도직입적인 성격이 상대방에게 너무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므로 강렬함은 일을 통해 해소하는 것이 가장 좋다. 사적인 생활에서는 에너지의 직접적 표현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며, 그래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배우자나 연인으로서 당신은 어쩔 수 없이 무대 중앙을 차지하게 된다. 모든 활동이 당신을 중심으로 전개될 뿐만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 윤곽을 잡고 구성하는데 적극적으로 관여한다. 이렇게 지배욕이 강한 게자리Ⅲ 당신과 그 권위에 의구심을 표하는 사람이 만난다면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이때 당신의 공격적인 본색이 드러난다. 그러나 아무런 방해 없이 일을 진행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또 그 일이 이기적인 게 아니라 공동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 판단될 때면 당신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면서 평화롭고 조용하게 있게 된다.  게자리Ⅲ 당신이 오래 지속되고 생산적이며 만족스러운 사랑을 하는 것이 가능할까? 아니 그것이 바람직하기나 할까? 물론 그렇다. 하지만 방해 요소가 있다. 좋은 선택을 할 수 있고, 건전한 판단력을 지녔을 때 사랑이 이루어질 가능성도 더 높아지는 법이다. 그런데 지나치게 뜨거운 열정이 그것을 방해한다. 결혼생활의 성공 여부는 당신의 배우자에게 달려 있다. 그 배우자가 둘 관계의 체계를 만들고, 정서적인 안정을 가져다줄 만큼 굳건하고 현실적인가가 관건이다.  게자리3의 강점: 진취적이다, 설득력이 뛰어나다, 주의 깊다  게자리3의 약점; 과도하다, 조종하려 한다, 불안정하다  게자리3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사람들에게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다 알고 있다고 함부로 자신하지 마라.  누구든 스스로를 자유롭게 표현하도록 내버려둬라.  아무도 당신의 좋은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일부러 정당화하려고 노력할 필요 없다.  자신의 능력에 대해 자신감을 가져도 좋다.  게자리Ⅲ 유명인  빌 코스비, 넬슨 만델라, 줄리어스 시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아니타 브루크너, 조 토레, 해리슨 포드, 피비 케이츠, 제임스 캐그니, 리차드 브랜슨, 램브란트, 조지오 아르마니, 스티브 워즈니액, 매리 베이커 에디, 훌리오 세자르 챠베스(멕시코의 복싱 영웅) 도날드 서덜랜드, 진저 로저스, 우디 거스리, 린다 론스타트, 헌터 톰슨, 리온 스핑크스, 율 브린너, 크리스티 맥비, 존 디 ★게-사자자리 진동의 주간 7월 19일 - 25일  게-사자자리는 황도대의 네 번째 게자리와 다섯 번째 사자자리가 만나서 만들어졌다. 이 커스프는 ‘동요하는 에너지’를 그 특징으로 하며, 인간생으로 보면 대략 28세의 나이에 비유될 수 있다. 점성학적으로 볼 때 28년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토성이 한차례의 공전을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기간이 28년에서 29년 정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에서도 30세가 가까워지면 삶의 전환기를 맞는다. 지나온 어린시절, 사춘기, 청년기를 전체 인생의 맥락에서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게-사자자리의 한차례 공전은 이 별자리의 동요하는 에너지를 이미 예고하고 있으며, 또한 불확실함과 우유부단함을 보여준다.  게-사자자리에 태어난 사람에게는 해와 달의 특성이 함께 존재한다. 물의 성질을 지닌 달처럼 넓은 포용력을 가졌으면서도, 한편으로 불의 성질을 지닌 해처럼 공격적이다. 12개의 커스프는 모두 인접한 두개의 별자리가 만나 이루어지는데, 그 중에서도 게-사자자리처럼 완전히 정반대의 성향이 만난 경우는 드물다. 전형적인 여성성(달)과 전형적인 남성성(태양)이 한 사람 속에, 그것도 똑같은 비중으로 결합되어 있다. 게-사자자리 남자라면 여성적 감수성이 강할 것이며, 또한 여자라면 남성적 힘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대조적인 두가지 성향이 한 사람 안에 녹아들면서 자아는 균형있고 건강하게 발전해간다. 하지만 어느 한쪽이 더 우세해지면 감정의 기복이 심해지는데, 이 경우 커다란 정신적 스트레스가 생겨나게 된다.  동요의 커스프에 태어난 사람은 극단적인 감정 변화를 자주 보여준다. 주위 사람들도 어떤 태도로 대해야할지 종잡기가 힘들다. 그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기분이 명확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대화를 시도할 것이다.  게-사자자리는 상당히 역동적이어서 가끔 스스로를 위험한 상황에 몰아넣기도 한다. 그는 자극적인 경험을 갈구한다. 사업을 하든, 연애를 하든, 혹은 여가를 즐기든 항상 대담하게 무엇인가에 도전한다. 그가 가진 도덕적 용기, 내면의 고요한 불길, 결단력 또한 위기나 긴박한 상황에서 큰 역할을 해낸다. 하지만 이러한 도전에 대한 욕구는 가끔 통제불가능 상태로까지 번진다. 그래서 일을 할 때 과대망상증세를 보이거나 세상 일을 모두 다 떠맡으려 한다. 여가시간에도 당연히 모험을 즐긴다. 죽음에 가까운 체험을 하고싶어하는 충동 때문에 행글라이딩, 래프팅, 암벽등반 등에 도전한다. 혹은 이러한 충동을 엄청난 양의 액션영화, 모험소설, 비디오 게임 같은 공상의 세계를 통해 해결하기도 한다.  친구를 사귈 때 게-사자자리는 동성친구 못지 않게 이성친구에게도 정성을 쏟는다. 사랑을 할 때는 다양한 타입의 상대에게 욕망을 느낀다. 그렇다고 난잡하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며 단지 감정적, 성적 표현의 팔레트가 다양할 뿐이다. 대부분의 게-사자자리는 자신의 배우자에게 대단히 충실한데, 하지만 이 관계가 성공적이려면 그 배우자가 관대하고 이해심이 깊은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의 흥미를 계속 붙잡아둘 수 있어야 한다. 어떤 게-사자자리는 까다롭고 요구많은 사람과의 거의 실패에 다다른 관계를 그냥 지속하며, 그 와중에 다른 곳에서 즐거움과 짜릿함을 추구한다. 결국 가장 좋은 해결책은 가까운 친구나 이해심많은 배우자이다. 그들은 심리적인 통찰력이 있고 위안을 주는 사람이어서, 시련이 닥쳤을 때 게-사자자리가 어려움을 헤쳐나가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게-사자자리의 장점 도덕적으로 용감한, 흥미진진한, 담대한  게-사자자리의 단점 조울증적인, 중독되는, 감정적으로 벽을 쌓는  게-사자자리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기분이 최고조일 때와 최하일 때 사이의 편차를 줄여라. 안정은 아주 소중한 것이다. 자기 절제력을 키워라. 그것은 당신의 자신감을 북돋우고, 당신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과거의 문제나 미래의 기대로부터 벗어나 매 순간 순간을 사는데 집중하라.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자신을 잘 조절하라.  게-사자자리 유명인들  아멜리아 이어하트, 어네스트 헤밍웨이, 시몬 볼리바르(라틴 아메리카의 혁명가) , 로빈 윌리암스, 나탈리 우드, 에드가 드가, 밥 돌, 젤다 피츠제랄드, 카를로스 산타나, 마샬 맥루한, 아이작 스턴, 알렉산더 뒤마 경, 레이몬드 챈들러, 김용옥, 박준형 ★사자자리Ⅰ 권위의 주간 7월 26일 - 8월 2일  사자자리Ⅰ은 '권위'를 상징한다. 인간의 삶으로 치면 30세가 되면서 더욱 성숙한 어른이 되는 시기에 비유될 수 있다. 의심스럽고 불확실했던 토성의 첫번째 회귀(28년에서 29년 정도의 기간)가 일단락되면서 새롭게 자신감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여기서 가장 중요하고 흥미로운 도전은 어떤 한 분야에서 권위자로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사자자리Ⅰ은 성숙한 어른이다. 그는 자기만의 스타일을 발전시키고, 본인이나 가족, 동료를 위해 중요한 결정을 내리며,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아 성공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사자자리Ⅰ은 48개의 별자리 중에서도 가장 권위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그는 강렬하고 정력적인 사람인데 주로 자기 개인의 활동이나 성장, 발전을 우선시한다. 자기의견을 확실히 주장하고, 그 의견이 중요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에서 큰 만족감을 얻기도 한다. 또한 에너지는 주로 밖보다는 안을 향해 있어, 자신의 장점과 능력을 개발하는데 투입된다. 그렇다고 그가 자신밖에 안중에 없는 독불장군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자자리Ⅰ은 경쟁심이 강하며, 최고가 되기 위해 앞만 보고 달린다. 어떤 이들은 세속적인 성공에 개의치 않으며, 그보다는 스스로 좀 더 발전하는 걸 중요시 여긴다. 사자자리Ⅰ은 윗사람을 모시고 일하기 힘든 타입이며, 특히 자신이 존경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직접 회사를 운영한다면 그 또한 문제가 많다. 왜냐하면 그는 ‘지휘’가 아닌 ‘지배’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자자리Ⅰ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그를 숭배하든지, 학생이나 제자처럼 배우는 입장이든지.  이런 타입의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에 대한 기준이 높다보니, 주위 사람들에게도 비슷한 강도의 전념과 헌신을 요구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는 타인보다는 자신에게 더 많이 기대하며, 동료나 친구들의 한계에 대해서는 이해심을 발휘한다. 좀 더 현실적인 사자자리Ⅰ은 상대방에게 지나치게 높은 기대를 하지 않으며, 단지 최선을 다하기를 원할 뿐이다. 하지만 상대방에게는 그 자체가 견디기 힘든 짐이 된다.  사자자리Ⅰ은 충실하고 믿을만한 친구를 잘 사귄다. 그는 이렇게 친밀한 사람이 주는 충고가 아니면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는다. 특히 사적인 내용의 충고라면 더욱 그렇다. 그는 대개 동료나 상담전문가, 낯선 사람으로부터의 도움을 거절한다. 하지만 그러나 일생에 한번쯤은 그도 모험을 감행한다. 자신이 신처럼 받드는 스승 혹은 구루(정신적 지도자)에게 자신을 통째로 맡겨버리는 것이다. 이 정도의 신뢰란 평생에 한번 있을까말까하며, 그러므로 그것이 무너졌을 때는 엄청난 환멸이 뒤따른다.  어떤 사자자리Ⅰ은 가정을 잘 꾸려나간다. 또 어떤 사자자리Ⅰ에겐 가정생활이 실수투성이이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진심으로 가정을 원하는 경우는 드물다. 물론 일단 부모가 되기로 결정하면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많다. 가르쳐줄 것도, 보호본능도 강하며, 자신감도 불어넣어준다. 하지만 사자자리Ⅰ의 아이나 배우자는 집을 떠나 혼자있고 싶어하는 그의 욕구를 존중해줘야 한다. 그가 자기만 쳐다봐주기를 기대한다면 좌절할 수밖에 없다. 사자자리Ⅰ에게 있어 보살핌과 관심이란 이해와 동감의 표현이라기보다는, 가끔씩 일어나는 강렬한 충동일 뿐이다.  연인으로서 사자자리Ⅰ은 세심하기보다는 열정적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초연해보이기도 하고, 뭔가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긴 듯도 하다. 그는 진부하고 틀에 박힌 상황에서는 성적 희열을 느끼지 못한다. 당연히 배우자와의 섹스는 신통치 않다. 아마 가장 즐거운 섹스는 우연히 마주친 사람과의 하룻밤, 혹은 비밀리에 지속되는 관계에서 올 것이다. 만약 사자자리Ⅰ과 결혼한 사람이라면 창의력, 다양함, 교묘함을 총동원해 로맨틱한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노력해야할 것이다.  사자자리Ⅰ은 긴장을 풀고, 재미있게 즐기거나, 자신을 불태우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만약 사자자리Ⅰ을 일에서 떼어놓는데 성공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이런 일을 해줄 편안한 친구를 만난다면 사자자리Ⅰ은 그에게 최고의 보답을 할 것이다.  사자자리1의 장점: 진실을 사랑하는, 충실한, 열정적인  사자자리1의 단점: 좌절하는, 요구가 많은, 이기적인  사자1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라. 좋은 점이든 나쁜 점이든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결점을 눈가림하는 건 쓸데없는 짓이지만, 좀 더 외교적이고 민감해지려고 노력하는 건 중요하다. 타인을 위해 결단을 내릴 때는 현명한데, 자신과 관련된 일에서는 부주의한 경향이 있다. 좀 더 느긋해진다고 얕볼 사람은 없다.  사자자리Ⅰ 유명인들  칼 G. 융,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스탠리 큐브릭, 에밀리 브론테, 프리모 레비(이탈리아의 작가) 헨리 포드, 믹 재거, 엘리자베스 핸드포드 돌( 미국 밥돌의 부인, 공화당), 패티 쉬알파(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부인) 조지 버나드 쇼, 아놀드 스와제네거, 베아트릭스 포터, 마이클 스핑크스, 허먼 멜빌, 알렉산더 뒤마 2세, 베니토 무솔리니 ★사자자리Ⅱ 균형의 주간 8월 3일 - 10일  사자자리Ⅱ의 중심이미지는 ‘균형잡힌 힘’이다. 이 시기에는 영웅적이고, 보호해주며, 보살펴주는 태도가 전면으로 드러나게 된다.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고 한번 세운 이상은 절대 저버리지 않는 용기야말로 이 시기의 특징이다.  사자자리Ⅱ를 구성하는 날들은 성숙한 어른을 상징한다. 균형감각과 평정을 유지하고, 효율성은 최대화하며, 다양한 사회적 역할에서 능력과 영향력 두가지를 다 발휘하며, 그래서 존경을 한몸에 받는 사람이다. 여기서 강조되는 덕목은 단호함, 명예, 존엄성, 신의 같은 것들이다.  그는 건실하고 강인하며, 일단 도전을 하면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사실 그는 도전을 보람으로 삼으며,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최고의 능력을 발휘한다. 위험한 것에 매력을 느끼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걸 시도할 만큼 무모하지는 않다. 그는 현실주의자이며,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다. 필요하다면 한계의 끝까지 뻗어나가겠지만.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사자자리Ⅱ는 고지식한 면이 있어서 그의 마음을 한번 바꾸려면 엄청난 인내심과 끈기가 요구된다.  사자자리Ⅱ는 참을성과 집요함을 타고 났기에, 굉장히 오랫동안 고난을 버텨낸다. 강한 충성심과 헌신을 보여준다는 건 좋은 점이다. 하지만 나쁜 점도 있다. 잘못하면 힘겨운 연애, 결혼, 사업 등을 지속시키며 고통을 자초하는 매저키즘의 경향을 보이게 된다. 전혀 행복하지 않고 스트레스만 가득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불평도 없이 인내심을 갖고 해결책을 모색하려 노력한다. 차라리 그만두는 게 잘하는 일인데도 말이다. 그는 쉬운 길을 택하기를 거부하며, 책임감에 있어서 그의 기준에 못미치는 사람이 있다면 속으로 무시해버린다.  확실히 그에게 가장 큰 적은 바로 자기자신이다. 그는 거대한 에너지를 갖고 있어서 대단한 힘과 자신감을 보여준다. 하지만 에너지를 잘 통제하지 못하면 그것이 자신을 망가뜨리는 무기가 될 수도 있다.  사자자리Ⅱ는 이례적일 정도로 신뢰할만한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를 압박받는 이들의 옹호자이자 약자의 보호자라고 여긴다. 그는 배타적인 태도나 거만함을 경멸하며, 그러므로 당연히 특권계층보다는 서민들의 편에 선다. 그렇다고 다양한 사회계층과 잘 섞여 지낸다는 얘기는 아니며, 그보다는 불성실함과 잘난 체를 혐오한다는 표현이 맞겠다.  그는 강인하며, 그러므로 어떠한 실망이 닥쳐와도 견뎌낸다. 그는 늘 폭풍의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가는데, “숨을 한번 크게 쉬고” 기다리는 법을 알기에 폭풍을 이겨낸다. 독립적으로 사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럼에도 싸움은 최소화하고 힘은 최대화시켜줄 잘 정돈된 삶을 추구한다.  동료이든 부하직원이든, 가족이든 연인 혹은 친구이든 사자자리Ⅱ와 가까운 사람들이 명심해야할 것이 있다. 그가 부정적인 생각에 빠져있을 때는 압박하거나 자극하기보다는 혼자서 해결하도록 내버려둬야 한다. 한편 사자자리Ⅱ는 종종 둔감하다는 평을 듣는다. 이건 타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라기보다는 한가지에 지나치게 몰두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남의 심리에 대해 상당히 눈치가 빠른 편이다. 하지만 이렇게 타인의 감정을 잘 이해하기는 하지만, 공감을 할 필요까지는 못 느낀다. 사자자리Ⅱ는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감정이입을 하지 않으며, 자신과 상대방을 차갑게 분리해낸다. 그는 감정적 문제에 얽혀들면 혼란스러워질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어린시절의 어두운 경험에 기인한다. 만약 사자자리Ⅱ의 부모, 자식, 연인이 감성적인 타입이라면, 이 때문에 자주 충돌을 빚을 것이다.  그는 직선적이며 절대 잘난 척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으스대는 사람을 가장 싫어한다. 위선, 거짓말, 부정직 만큼 성질을 건드리는 것도 없다. 이때 폭발하는 분노와 성마름은 원래 그의 장점이었던 정신적 균형을 약화시킬 수 있다. 사자자리Ⅱ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바로 이런 단점을 보완해주는 사람이다. 감각적인 생각들과 즐거운 가치관을 잘 활용함으로써 그를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이다.  사자자리2의 강점; 헌신적인, 신뢰할만한, 육체적인  사자자리2의 단점; 자기학대적인, 의기소침한, 죄를 저지르는  사자2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성질을 조심하라. 타협과 절충은 길러져야할 덕목이며 경멸할 약점이 아니다. 사랑에 마음을 열고 취약해져라. 자신에게 너무 엄격하지 말고 너무 요구하지 마라. 다른 사람에게 거는 기대도 조금 완화시켜라.  사자자리Ⅱ 유명인들  휘트니 휴스턴, 앤디 워홀, 멜라니 그리피스, 더스틴 호프만, 마타 하리, 앤 클라인, 마틴 쉰, 마사 스튜어트, 코트니 러브, 이사벨 아엔데, 닐 암스트로, 루실 볼, 장 피아제(아동발달심리학자), 노무현 ★사자자리Ⅲ 리더십의 주간 8월 11일 - 18일  사자자리Ⅲ의 중심이미지는 리더십이다. 인간생으로 보면 최고의 전성기로서, 그동안의 경험과 열정과 에너지와 지식이 결합하면서 책임감있는 자리를 맡을 자격을 갖추게 된다. 아마도 생애 처음으로, 사업이나 친구모임이나 가정 등에서 지배권을 갖고 좌지우지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적절해 보이기 시작한다.  사자자리Ⅲ은 가정에서든 직장, 사회에서든 주로 지휘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는 리더십에 관한 한 고도로 발달된 본능을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꼭 지배하거나 권력을 휘두른다는 얘기는 아니다. 역동적인 사람이다보니 자연히 행동에 옮기는 것일 뿐이다. 그는 또한 훌륭한 기획자이다. 효과적인 공격의 전술들을 체계화하며, 그것을 책임지고 실행에 옮긴다.  이 주에 태어난 사람은 남자든 여자든 스스로를 영웅시하는 경향이 있다. 사자자리Ⅲ은 공격적이어서 자신이 뭘 원하는지, 어떻게 하면 그걸 얻을 수 있는지 잘 안다. 하지만 남들이 바라는 바에 대해서는 배려가 부족하다보니,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고 곤경을 자초한다. 게다가 타인의 감정에 둔감해서가 아니라, 잘 알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좇기 위해 일부러 무시하는 것이기에 적대감은 더욱 크다.  워낙 지혜로운 사자자리Ⅲ은 위기에 처한 사업, 모임, 가정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는다. 엄청난 에너지와 한가지에 몰두하는 능력이야말로 상황을 제자리에 돌려놓기 위해 꼭 필요한 자질인 것이다. 그는 자신의 노력이 열매 맺는 것을 봐야 직성이 풀린다. 자신이 세운 구조정 계획이 제대로 실행되는 걸 보는 것은 커다란 만족감을 안겨준다. 반대로 실패는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원래 사자자리Ⅲ은 감정의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며, 그런 점에서 이러한 일을 함께 하는 것이야말로 그와 친해질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일을 통해 만난 관계는 깊은 감정적 유대로 발전하며, 때로 일생동안 지속된다.  사자자리Ⅲ의 창의성은 대단히 높다. 비록 사적인 관계에서는 이기적이고 속좁은 면이 있지만 직업적으로는 상상력, 철학적 안목, 다양한 표현력으로 매우 수준높은 예술적, 경제적, 사회적 창조물을 만들어낸다. 사실 많은 친구, 지인, 동료들은 사자자리Ⅲ 본인에게 보다는 그를 둘러싼 분위기와 그가 해낸 작업에 더 매력을 느낀다.  강한 성격의 소유자라면 사자자리Ⅲ과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사자자리Ⅲ의 파트너가 타협하거나 양보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관계는 폭풍과 같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사자자리Ⅲ의 짝이나 배우자는 그보다 더 영리하고 전략적이어서 사나운 사자를 달래는 방법을 정확히 알고 있다. 사자자리Ⅲ은 자신의 카리스마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그렇기에 더더욱 특별한 한 사람의 변함없는 사랑과 인정에 큰 가치를 두게 된다. 사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공격적이지 않다. 예우받고 존경받는 한 그 역시 상대방에게 관대하고 친절하며, 심지어 명백한 잘못을 보더라도 용서해준다. 심지어는 사랑하는 가족이 잘못을 저질렀어도 인정하려들지 않는데, 그래서 비현실적으로도 보인다. 덕분에 버릇없는 배우자나 자녀를 갖는 것이 사자자리Ⅲ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기도 한다. 사랑을 할 때 그는 감정표현에 있어 갑작스럽고, 폭발적이며, 난폭하고, 열정적이다. 그는 오랜기간 동안 감정을 속으로만 쌓아두는데, 결국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화산처럼 격렬하게 터져버린다.  사자자리Ⅲ과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그의 열정과 전면적인 관심을 고마워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거만하고 호전적이며 용서를 모르는 태도 때문에 어려움도 많이 겪는다. 사적인 관계에서 그는 어느 정도까지는 신의를 지키지만 그다지 인내심이 강하지는 못하다. 상처를 받았거나 앞날에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냥 도망가버릴 것이다. 이러한 이중적 행동에 화가 난 상대방은 거칠게 절교를 선언해버린다. 상황파악을 느린 사자자리Ⅲ이라면 아마 꽤 놀랄 것이다. 아무런 문제도 없었는데 이 무슨 날벼락인가! 하고 말이다. 정말이지 사자자리Ⅲ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사자자리3의 강점: 지휘하는, 용맹스러운, 창의적인  사자자리3의 약점: 독재적인, 이기적인, 둔감한  사자3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지나치게 요구하고 명령하는 태도를 삼가라. 마음 속에 숨은 동기를 관찰하라. 당신 안의 싸움꾼을 좀 더 온건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라. 스스로에게 어느 정도 거리를 둬라. 자신이 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강인함의 증거가 될 수 있다.  사자자리Ⅲ 유명인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마돈나,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영국의 군인이자 고고학자), 줄리아 차일드, 안젤라 바셋, 숀 펜, 알렉스 헤일리, 스티브 마틴, 게리 라슨, 로버트 드 니로, 에드나 퍼버, 로만 폴란스키, 데이비드 헨리 황, 알프레드 히치코크, 윌리암 골드만, 짐 쿠리어, 피트 샘프라스, 피델 카스트로, 필리페 페티, 캐서린 배틀, 로버트 레드포드, 로잘린 카터 ★사자-처녀자리 드러냄의 주간 8월 19일 - 25일  사자-처녀자리는 황도대의 다섯 번째 사자자리와 여섯 번째 처녀자리가 만나 이루어진다. 이 커스프는 인간의 생에서는 35세 즈음에 해당하며, 일년 중에서는 여름이 서서히 끝나가는 시기이다. 이때가 되면 겨울에 대비하기 위해 풀을 베서 건초더미를 만들게 되며, 몇가지 채소는 벌써 수확이 시작되고, 다른 작물들도 추수를 기다리게 된다. 낮은 짧아지고 밤은 길어지며, 가을이 성큼 다가오고 여름 휴가는 거의 끝나간다. 인간의 생에 있어 35세라는 나이는 한창 때의 청년기이다. 이 시기에 노출라는 주제가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개인의 성장이나 직업, 가정생활에서 특히 그러하다. 그는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면이나 비밀을 찾아내고 그것을 사람들 앞에 드러낸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힘의 원천이 발견되며, 한편으로 자기정체성이 강화된다. 이 시기가 되면 남자든 여자이든 현재의 결혼생활이나 연인관계를 재검토하게 된다. 그동안 숨겨져있던 문제가 있다면 밖으로 드러내 토론할 것이다. 아직 독신인 사람은 보다 의미있는 삶을 추구하게 된다.  사자-처녀자리에 태어난 사람에게는 내향성과 외향성이 흥미롭게 결합되어 있다. 처녀자리의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특성과 사자자리의 좀더 직관적이고 불같은 성격이 혼재한다. 그 결과 마음 속에 불꽃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차분하다. 심지어 어떤 사자-처녀자리의 첫인상은 조용하고 아무런 특징도 없어보이는데, 사실 그는 화려한 성향을 속으로 감추고 있다.  사자-처녀자리는 주목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그리 강하지 않다. 그러므로 남의 칭찬도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겉보기에 절제되고 조용한 사람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자기가치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하다. 다만 사회적, 직업적으로 원하는 목표를 얻기 전까지는 자신과 관련된 사실이나 내면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그러므로 언제가 자신을 드러내고 보여주겠다는 욕망이야말로 그가 목표를 향해 돌진하도록 만들어주는 연료 역할을 한다. 최고의 위치에 올랐고 그동안의 삶이 베일에 가려졌다면 당연히 그 정체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사자-처녀자리의 경우는 스스로의 말과 행동을 통해 자발적으로 정체를 밝힌다. 이건 나르시시즘과 매저키즘의 묘한 결합이며, 또한 자기방종과 자기학대가 혼재된 상태이다.  사자-처녀자리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무기 혹은 술책으로서 은폐와 노출을 번갈아 사용한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게임이 유치하고 비생산적임을 깨달아야 한다. 해결방법은 간단하다.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사람을 단 한명만 만나도 해결된다. 관용, 사랑, 믿음을 경험하다보면 숨바꼭질 장난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 완전히 성숙하기 전까지는 철없는 감정들이 그를 괴롭힐 것이다.  미스테리나 추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사자-처녀자리를 좋아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그를 이해하기 위해 인내하는 사람이라면 응분의 보상을 받을 것이다. 사실 사자-처녀자리가 남의 인정이나 명예, 아첨을 필요로 하는 건 아니지만, 이해받고 싶다는 욕구는 강하다. 이 침묵의 요구는 아주 예민한 사람만이 들을 수 있다.  사자-처녀자리는 자신을 둘러싼 비밀의 갑옷을 뚫고 들어온 첫 사람에게 끌리며, 그와 오래 지속되는 관계를 맺는 것이 특징이다. 완전히 발가벗겨진 사자-처녀자리를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변함없이 사랑해주는 사람이라면 인생의 동반자로 발전한다. 사자-처녀자리는 좋은 부모도 못되고, 좋은 자식도 못된다. 사람이 워낙 비밀스럽다보니 세대를 뛰어넘어 교류한다는게 힘들거나 거의 불가능하다. 대신 가족 중에 마음을 터놓고 함께 비밀을 공유하는 형제나 사촌이 한명 쯤 있다. 그 형제는 사자-처녀자리의 미래 배우자의 역할모델이 된다. 실제로 사자-처녀자리는 자신의 반려자에게 형제 역할을 맡기는 경우가 많다. 그는 대체로 자기중심적이고, 비밀이 많으며, 가정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데 무관심한 편이다. 하지만 매일의 일상에서 책임을 이행하는 점에서는 믿을만하다. 자신에게 주어진 요구가 과도하지만 않다면 말이다.  사자-처녀자리의 강점; 절제하는, 관찰력이 뛰어난, 화려한  사자-처녀자리의 약점; 비밀이 많은, 마음을 털어놓지 않는, 자아도취  사자-처녀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그렇게 자꾸만 자신을 감출거라면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불평도 그만둬라. 좀 더 투명한 사람이 되라. 당신이 정말 무엇을 좋아하는지 사람들에게 알려줘라. 자기 스스로에게조차 비밀을 갖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  사자-처녀자리 유명인들  빌 클린턴, 가브리엘 코코 샤넬, 덩 샤오핑, 칼 립킨 Jr. , 레너드 번스틴, 롤라 몬테즈, 윌트 챔벌레인, 엘비스 코스텔로, 셀리 롱, 마담 뒤바리, 코니 정 ★처녀자리Ⅰ 시스템 건설자의 주간 8월 26일-9월 2일  처녀자리Ⅰ은 시스템 건설자를 그 중심이미지로 갖는다. 인간생으로 봤을 때도 결혼이나 사업 같이 이미 존재하는 구조를 더욱 굳건히하려는 본능이 두드러지는 그런 시기이다. 또한 이 시기가 되면 가정에서든, 일터에서든, 사회에서든 봉사하려는 마음이 생겨난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일의 진행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기여하고 싶은 욕망이 표현되는 것이다.  시스템은 처녀자리Ⅰ의 삶에서 중요한 주제로서, 말하자면 어려움이 닥쳤을 때 의지하게 되는 일종의 보험증권 같은 것이다. 이런 식의 태도는 세상을 대하는 그의 행동의 근간을 이룬다. 지적인 고집과 집중력이 가장 큰 강점인데, 그렇기에 감정의 중압감 때문에 정확하게 사고하지 못하거나 업무를 잘 수행하지 못했을 때 몹시 괴로워한다. 특히 혼돈스러움은 그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든다. 정신건강을 위해서는 효율적인 일상의 규칙, 안정된 가정, 능률적인 사무공간을 만드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하지만 이렇게 모든 것이 체계화되다보면 융통성이 없고 완고해지므로 조심해야 한다.  처녀자리Ⅰ의 직업은 주로 봉사와 관련이 있다. 가정에서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족을 돌봐주거나, 기댈 수 있는 언덕이 되어준다. 그러나 모든 처녀자리Ⅰ이 다 이 역할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남을 돕고 싶어하며 또 그럴만한 재능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등에 무거운 책임이 지워지는 것에는 분노한다. 만약 서로 협력하고 일상의 짐을 나눠질 줄 아는 사람을 만난다면 잘 지낼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공동작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혼자 보내는 시간을 좋아한다. 물론 사회나 가족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렇게 한다.  이 주에 태어난 여자는 수줍고 얌전한 것이 매력이다. 처녀자리Ⅰ 남자는 대개 강하면서도 조용한 타입으로 여겨진다. 그는 스스로 적극적으로 나서기보다는 남들이 자신을 발견해주기를 바란다. 이런 행동은 대단히 깊이 배어있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그가 거절을 피하고 자신의 선택권을 강화시키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사실 선택권이야말로 처녀자리Ⅰ이 자신의 권력을 실감하는데 있어 가장 핵심이다. 하지만 연인이나 친구와 관련해서는 불행한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다. 사적인 문제에서는 때로 재난에 가까운 결정을 하는 것이다. 그는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만,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실망스러운 일을 당했을 때면 아주 신경질적이고 의기소침해진다. 부적응이나 실패의 감정이 많이 나타나는데, 그건 처녀자리Ⅰ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것이다.  긴장푸는 법을 배우는 것이 처녀자리Ⅰ에게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함께 지내면 마음이 편하고 즐거운 그런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이 가장 좋다. 이러한 관계는 양쪽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 처녀자리Ⅰ은 봉사정신이 뛰어나고 꽤 유능한데, 그 때문인지 의존적이고 궁색한 사람이 주위에 많이 몰려드는 바람에 곤란해지곤 한다. 사람들은 처녀자리Ⅰ의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그의 능력의 마지막 한방울까지 쥐어짜낸다. 이런 식으로 의존성을 조장하는 것은 사실 미묘한 형태의 자기파괴행위다. 물론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초기에 긍정적인 결속을 가져다주지만, 불안하고 궁색한 사람과의 관계는 결국 부정적 결과를 가져다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처녀자리Ⅰ은 타인을 통해 대리만족을 얻으려는 유혹을 많이 느끼는데, 그럴수록 자신을 먼저 챙겨야하며 자기희생적인 태도를 버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부모나 고객, 친구나 연인의 요구나 소망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진정으로 독립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야말로 그에게 주어진 중요한 숙제이다. 긴 안목으로 보면 아주 독립적인 사람, 관계에 있어 선을 명확히 그을 수 있는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가장 생산적이고 보람이 있다. 처음엔 그런 성격이 이기적이고 자기본위적으로 느껴질 수 있겠지만, 사실은 처녀자리Ⅰ에게 훌륭한 역할 모델이 되어준다. 이 주간에 태어난 사람은 무엇보다 타인의 끊임없는 요구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켜야 한다. 그래야 자신을 표현하고, 창의력을 발휘하며, 경제적으로도 성공을 거둘 수 있다.  처녀자리1의 장점 체계적인, 신뢰할만한, 봉사정신이 강한  처녀자리1의 약점 완고한, 감정을 잘 눈치채지 못하는, 자기 파괴적인  처녀1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좀더 유연한 태도를 가져라. 다가오는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 가고자 하는 대로 가도록 내버려둬라. 일과 가정을 분리하려고 노력하라. 당신도 조금 옆으로 물러나서 남에게 도와달라고 요구하라. 때때로 이기적이 되라. 자신의 이익을 당당하게 요구할 줄 알아야 한다.  처녀자리Ⅰ 유명인들  잉그리드 버그만, 마이클 잭슨, 찰리 파커, 린든 존슨, 안토니아 프레이저, 티모시 보텀스, 클로리아 에스테판, 야시르 아라파트, 페기 구겐하임, 게오르그 헤겔, 마리아 몬테소리, 제랄딘 페라로, 리차드 기어, 제임스 코번 ★처녀자리Ⅱ 수수께끼의 주간 9월 3일-10일  처녀자리Ⅱ는 수수께끼를 그 중심이미지로 갖는다. 인간생으로 보면 30대가 거의 끝나가는 시기이다. 이 때가 되면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젊지 않으며, 이쯤에서 자신의 인생을 다시 재평가해볼 필요가 있음을 진지하게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존재의 까다롭고 당혹스러운 면들이 비로소 부각되게 된다. 젊음이 쏜살같이 지나갔다는 느낌은 마음 속에 심각한 고민을 가져다주는데, 주로 사적인 고민이다. 또한 정신적인 문제를 해결하거나 생활방식을 바꾸겠다는 욕구가 생겨나게 된다.  처녀자리Ⅱ는 늘 사람을 당황시킨다.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도 그를 정확히 파악하기가 힘들다. 표정만 봐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정말 그로서는 감정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매력적이고 인상이 강한 겉모습 뒤에는 의외로 신중한 면이 숨겨져 있다. 그는 스핑크스와 같다. 방어벽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속임수를 쓰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자신과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미스테리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자신을 분석하려는 시도가 있다면 단호히 거부한다. .  처녀자리Ⅱ는 의사소통을 아주 중요시 여기며, 특히 직장에서 일할 때 그러하다. 그에게 대화는 자신의 생각을 명료하게 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적인 영역으로 넘어오면 얘기가 다르다. 사적인 경험을 털어놓고 나누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물론 말솜씨가 부족해서는 아니며, 내면의 투쟁과 시련을 혼자서 겪어내려는 욕구 때문이다. 처녀자리Ⅱ는 친절하고, 사려깊으며, 신중한 사람이어서 자신이 겪는 어려움 때문에 주변사람까지 괴롭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도움을 청하는데 아주 서투르다.  처녀자리Ⅱ의 섹스가 반드시 깊은 감정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과 연인 사이에 보이지 않는 장벽을 세우는 나름의 독특한 방식을 갖고 있으며, 상대가 눈치채지 않도록 하면서 성행위를 피할 수도 있다. 처녀자리Ⅱ는 사적인 관계에서 특이한 것을 좋아한다. 그는 연인에게 이에 대해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는데, 상대방이 거기에 주목해준다면 대단한 만족감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오랫동안 이 메시지가 무시된다면 관계는 끝나버릴 것이다. 뜨거워졌다 식었다 하면서, 금방 지나가버릴 갑작스럽고 불가해한 열정에 휘둘리는 것이 처녀자리Ⅱ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대부분의 처녀자리Ⅱ는 누군가와 함께 살고 싶다는 욕구가 별로 없다. 하지만 가정생활이 즐겁다면 잘 적응할 수도 있다. 물론 혼자 있는 시간과 공간이 충분하다는 게 전제가 되어야하지만 말이다. 부모로서 그는 지나치게 꼼꼼하다. 또한 부부관계에서는 상대방의 결점을 관대하게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가정에서든 일터에서든 타인과의 일상적 관계를 통해서 그는 나름대로의 인간애를 키워나간다.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인과 함께 노력하다보면 용서, 관용, 동정심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처녀자리2의 강점; 멋을 아는, 실제적인, 사려 깊은  처녀자리2의 약점; 방어적인, 지나치게 꼼꼼한, 무관심한  처녀2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까다로운 기준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융통성과 관대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라.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마음을 여는 게 우선이다. 관대함, 친절함, 외교력은 꼭 키워나가야할 자질들이다. 자신을 초법적인 존재나 사회 바깥의 아웃사이더로 만들지 않도록 조심하라.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처녀자리Ⅱ 유명인들  그랜드마 모시스, 톨스토이, 조셉 P. 케네디, 엘리자베스 1세, 루이스 H. 설리반(건축가), 루이 14세, 존 케이지, 장루이 바로(배우), 라퀠 웰치, 드위질 자파, 에이미 어빙, 찰리 신, 프레디 머큐리, 리차드 1세, 시드 시저(코미디언), 칼 라거펠트, 앤튼 드보락(작곡가) ★처녀자리Ⅲ 원칙의 주간 9월 11일-18일  처녀자리Ⅲ의 중심이미지는 사실주의자이다. 그는 명백히 보이는 것만을 믿으며 거기에 집착한다. 인간생으로 보면 40대가 되면서 중년기로 접어드는 시기에 비유된다. 이 시기에 그는 훨씬 더 현실적이 되어야 하며, 또한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처녀자리Ⅲ을 구성하고 있는 날들은 완전히 성숙한 성인을 상징한다.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용감한 태도를 발전시키며, 진정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비판력과 실용주의는 이 시기에 최고조에 달하지만 한편으로 개인적인 포부나 욕구 또한 무시되서는 안된다. 자신이 맞다고 생각한대로 상황을 조정하며, 한결 나은 환경을 만들어내겠다는 욕구 또한 강해진다.  처녀자리Ⅲ은 상당히 고집에 세서, 바라는 것을 얻을 때까지 물러서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자기고집만 피우다보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긴 시간이 지나가게 된다. 목표가 너무나 명백하고 너무나 현실적이기에, 그는 일부러 늑장을 부림으로써 결과에 대한 넘치는 자신감을 표현한다. 그는 하나의 강력한 정신적 성향이 주위에 벌어지는 사건들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원칙의 주간에 태어난 사람답게 그는 비합리적인 일에 당혹해하고 심지어 분노한다. 하지만 감정을 잘 절제하는 편이기에 노여움이나 혐오감을 즉각적으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특별히 분노를 일으킬만한 자극이 없는 한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처녀자리Ⅲ 중에서도 화를 잘내는 타입이 있지만, 그 역시 나이를 먹으면서 원만해진다. 그가 느끼는 감정들은 강렬하지만, 모두 연인이나 배우자와의 아주 사적인 관계에서만 표현된다. 그는 감정의 표현, 특히 공공연한 표현을 싫어하며, 그것을 자기과시이자 절제력의 결여로 여긴다.  그는 또한 가짜나 위선을 싫어한다. 사실주의자인 그는 자기답게 행동하고 스스로에게 진실된 사람을 좋아한다.  그는 무엇이든 예리하게 평가해내는데, 이러한 날카로움이 정도를 넘어서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직업적으로도 경영진의 자리에서 매일 매일 직원들을 평가해야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일을 할수록 상대방의 감정에 관심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잘못하면 상대방에게 거절이나 실망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서 처녀자리Ⅲ은 요구가 많으며, 스스로에게도 똑같이 최고를 요구한다. 그의 연인이나 배우자는 거기에 부응하기 위해 강해져야 한다. 하지만 그도 가끔은 애정넘치고 잘 보살펴주는 면모를 보이는데, 특히 곤경에 빠졌을 때 그렇다. 그의 강한 모성과 보호본능은 사랑하는 대상이 공격받거나 고통받을 때 뚜렷이 드러난다. 워낙 유능한 처녀자리Ⅲ이기에 말썽많고 문제투성이인 관계라도 참을성과 헌신을 발휘해 몇 년씩 지속시킨다.  처녀자리Ⅲ는 이기적이며 속임수를 쓰려는 욕구도 강하므로 그걸 극복하려면 상당히 노력해야 한다. 그는 사적인 관계든 일과 관련된 관계든 더 이상 자신하고 안맞는다고 생각하면 무례하게 끊이버린다. 친구, 동료, 고용주로서는 황당한 일이다. 본인은 그런 행동이 현실적이며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만큼 남의 입장을 헤아리는데 있어서는 눈 뜬 장님이다. 좀더 좋은 사람이 되고싶다면 씁쓸한 뒷맛을 남기지 않으면서 우아하게 관계를 끝내는 법을 배워야할 것이다.  처녀자리Ⅲ의 인간적 면모는 가정생활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부모로서도 훌륭하며, 자식으로서도 사랑스럽고 책임감이 있다. 독립적이고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처녀자리Ⅲ이지만 가정 생활에서는 상당히 구식이다. 특히 명절을 함께 보내거나 가족모임을 하는데 있어서 그러하다. 사실 그는 어떠한 권위이든 정직하고 사려깊고 정의롭기만 하다면 존중해준다. 자식을 대하든 부모를 대하든 간에 처녀자리Ⅲ에게는 어떤 형태의 차별, 편애, 불공정도 용납되지 않는다.  처녀자리3의 강점: 침착한, 잘 돌봐주는, 유능한  처녀자리3의 단점: 선정적인, 함부로 판단하는, 무례한  처녀3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타인의 감정에 대해서 좀 더 공감하려고 노력하라. 모두가 당신처럼 의지가 강하고 직설적인 것은 아니다. 당신의 활동을 두뇌에만 국한시키지 마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잠을 자는 등의 오감과 관련된 활동은 에너지를 안정시키는 데 필수적이다. 당신에게 봉사하는 사람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그의 뒤로 숨는 일은 삼가라.  처녀자리Ⅲ 유명인들  그레타 가르보, D.H. 로렌스, 아가사 크리스티, 장 르노, 로렌 바콜, 오 헨리, 클라라 슈만, 올리버 스톤, 타미 리 존스, 제시 오웬, 재클린 비셋, 헨리 5세, 비비 킹, 행크 윌리암스. ★처녀-천칭자리 9월 19일-24일 아름다움의 주간  처녀-천칭자리는 황도대의 6번째 처녀자리와 7번째 천칭자리이 만나서 만들어졌다. 인간으로 치면 마흔 둘 전후한 나이에 해당되며, 계절적으로는 밤과 낮의 길이가 다시 같아지는 추분이다. 점성학적으로는 토성이 한바퀴 반을 돈 시기인데, 다시 말하면 토성이 출발점과 마주보는 지점에 와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는 중년을 맞아 삶의 갈림길과 맞닥뜨리며, 이상을 추구하는데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처녀-천칭자리는 숙명적으로 이상을 추구하는데 몰두한다. 예술작품이든, 자연이든, 사람이든 그 감각적 아름다움에 매혹된다. 색, 모양, 형태, 감촉 그리고 호기심을 자아내는 음악이나 목소리. 이러한 유혹들은 그의 감성을 일깨우며 창조적인 영감을 가져다 준다. 처녀-천칭자리는 최신의 유행감각을 자랑하며 패션이나 디자인, 미술, 테크놀로지의 최신경향을 잘 알고 있다는데 자부심을 느낀다. 어떤 이들은 처녀-천칭자리의 이러한 관심사를 일시적인 것으로 보지만, 어쨌든 그가 가진 정보와 취향이 그가 속한 그룹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때때로 그는 아주 훌륭한 경영, 마케팅, 관리능력을 보여주는데, 이때 큰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현재 벌어지고 있는 흐름과 유행에 대한 육감이다.  겉모습에 대한 관심이 많다보니 피상적이고 화려하다는 평가를 많이 받는다. 하지만 조만간 정신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할 때가 온다. 왜냐하면 그도 언젠가는 질병, 사고, 고통, 죽음 등 달갑지 않지만 필연적인 인생의 여러 문제들에 부딪히게 되며, 겉모습에 대한 집착만으로는 이 문제들을 준비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되기 떄문이다. 처녀-천칭자리는 대개 아무런 준비없이 이런 문제들과 맞닥뜨리게 되고, 그럴 때 무력감을 느끼며 당황해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존재의 겉모습에 가리워졌던 깊은 곳과 억지로 대면하게 된다.  처녀-천칭자리는 친구로서는 아주 재미있다. 풍부한 상상력과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그는 어떤 모임에든 활력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정서적인 그늘 또한 갖고 있는데, 그의 친구나 배우자는 이를 잘 극복해내야 한다. 처녀-천칭자리에서 나타나는 추분은 가을이 다가왔음을 선포하며 추수를 상징한다. 이 커스프에 태어난 사람의 에너지는 정말 “무르익어” 있다. 그는 가능하다면 논쟁과 대립, 불쾌함을 피한다.  처녀-천칭자리의 연인, 동료, 가족들은 그가 주변의 짜증나게 만들거나 신경 거슬리는 요소들에 대해 얼마나 예민한지를 잘 안다. 비슷한 맥락에서 그는 자신이 선택한 친구나 연인이 외모적으로도 훌륭하기를 요구한다. 유일하게 예외가 있다면 본인이 아주 매력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을 때인데, 그 경우 상대방은 오히려 특이한 외모일 수 있다. 연인이나 친구를 고를 때는 안정적이고 강력한 사람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그에게는 믿고 의지할만한 사람과의 파트너십이 절실히 요구된다. 사적인 영역에서가 아니라면 함꼐 일하는 동료나 사업파트너로서라도 꼭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관계는 그의 부모나 가족의 심리적 투사 때문에 영향을 받는다.  처녀-천칭자리는 주기적으로 촉감에 탐닉하지만, 정작 본인들은 아무도 자신을 손대지 못하게 하며,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육제적 접촉을 허락한다.  처녀-천칭자리의 장점; 심미적인, 감각적인, 주위와 조화를 이루는  처녀-천징자리의 단점; 속물인, 잘 중독되는, 불안정한  처녀-천칭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너무 외모에만 집착하지 마라. 아름다움을 추구하되 항상 깨어있어라. 정신적인 목표를 무시하거나 지나친 물질만능주의의 희생양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당신의 신경체계를 잘 다스려라.  처녀-천칭자리 유명인들  레이 찰스, 소피아 로렌, 존 콜트레인, 빌 머레이, 레오나르드 코헨, 스코트 핏제랄드, 브루스 스프링스틴, 린다 매카트니, 로미 슈나이더, 훌리오 이글레이사스, 트위기, 심은하, 이미연 ★천칭자리Ⅰ 완벽주의자의 주간 9월 25일~10월 2일  천칭자리Ⅰ인 당신은 완벽주의자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인간의 삶으로 볼 때, 당신이 태어난 시기는 자신만의 온전한 영역을 구축하기로 결심한 중년의 시기에 비유된다. 당신은 자아개선을 꾀하며, 라이프 스타일과 사교활동의 품격을 높이려고 노력한다.  천칭자리Ⅰ인 당신은 상당히 매력적인 성격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사귐성이 아주 좋은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는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고 싶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혼자서 보내고 싶은 욕구가 강하기 때문에 많은 심리적 문제를 떠 안고 산다. 당신은 남과 어울리는 공적인 삶에 그다지 잘 어울리지 않는다. 아마 혼자서 개인적으로, 혹은 익명으로 일하기 위해 사회생활을 아예 포기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실제로, 이 주간에 태어난 사람이 낮에는 상당히 평범한 일을 하면서, 주말이나 밤에는 취미 활동이나 파트 타임 일에 진정한 흥미와 열정을 쏟아 붓는 경우는 드문 일이 아니다.  당신에게는 완벽주의자의 성향이 있어서, 삶의 모든 부분에서 실수를 찾아내고 그것을 바로 잡으려는 욕구가 강하다. 이처럼 모든 것을 똑바로 놓으려는 욕구는 그만큼 지식과 기술적 노하우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만이 최선의 해결책을 알고 있다는 독선을 뜻하기도 한다.  완벽에 대한 당신의 갈망이 때때로 강박적이고 충동적인 행동으로 나타난다고 해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겉으로는 근사하게 성공한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당신의 내면이 얼마나 불안정한지 주변 사람들은 잘 인식하지 못한다. 자신에 대한 엄격한 원칙, 이상을 타협하지 않는 고집 등으로 스스로 엄청난 압박감을 느낀다. 이러한 압박감은 당신을 성공과 동시에 절망으로 몰고 간다.  천칭자리Ⅰ인 당신은 열정적인 사람으로, 굉장한 목표를 성취해낼 수 있다. 하지만 우유부단한 면이 있어서, 어느 길을 선택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오랜 시간을 허비한다. 가끔씩 엉뚱한 취미나 관계 등 비생산적인 대상에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부어서, 정작 생산적인 일에 필요한 시간과 에너지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경우도 있다.  당신은 자신의 감정을 깊은 차원에서 솔직하게 토로하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관계에서도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당신과 개인적으로 연루된 사람들은 처음부터 감정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아야 한다. 솔직해질 수 없다면 차라리 폭발이라도 시켜야 한다.  지나친 관심과 무관심 사이를 오락가락 하는 것 역시 당신의 대인 관계에 불안한 영향을 준다. 연인이나 배우자는 당신의 섹슈얼한 열정을 즐기겠지만, 궁극적으로 그들만의 사적인 공간을 구축하기 위해 조금 물러설 필요를 느끼게 된다. 반면에 정작 당신 자신은 함께 사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성향이 짙다. 특히 일에 빠져있을 때면 더 심해져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킨다.  당신은 가혹한 비판으로 가까운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면서도, 자기 자신은 자기가 한 말의 영향력에 대해 정확히 깨닫지 못한다. 당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들과 조화롭게 지내고 싶다면, 불만을 표현해내는 좀더 재치 있고 부드러운 기술을 익혀야 한다.  천징자리1의 장점 : 매력적인, 엄격한, 침착한  천칭자리1의 단점 : 우유부단한, 가혹한, 감정을 억제하는  천칭1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자신감을 길러라. 타인에 대한 너무 공격적인 비판은 좋지 않다. 일관된 태도를 가져라. 꾸물거리는 행동을 고쳐라. 이미 잘 되고 있는 일에 참견하지 말라. 당신의 기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니다. 실수 역시 게임의 일부다.  천칭자리Ⅰ 유명인들  브리짓 바르도, 조지 거슈윈, 스팅, 히더 락클리어, 기네스 팰트로우, 스코티 피펜(NBA 농구스타), 지미 카터,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소련 작곡가), 마이클 더글러스, 마하트마 간디,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 크리스토퍼 리브, 사뮤엘 에이덤스(미국 독립운동가), 미트 로프(록가수), 박세리 ★천칭자리Ⅱ 사회의 주간 10월 3~10일  천칭자리Ⅱ인 당신의 중심 이미지는 사회다. 사람의 인생에 비유해볼 때, 천칭자리Ⅱ는 사회와 좀더 의미 있는 관계를 맺거나, 정치적 대의, 단체, 종교, 학계 학파, 이웃과의 만남, 공동체 모임 등의 여러 사회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게 되는 중년의 시기에 비유된다. 하지만 당신의 모순은 사교적 기술이 아무리 발전하여도, 본질적으로 당신 자신은 고독하다는 것이다. 당신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사건, 패션 경향, 라이프 스타일 등의 최신 정보에 누구보다도 밝다. 당신은 대체적으로 사람들에게 호감을 준다. 또한 본의 아니게 비밀을 털어놓을 친구나 조언을 구하는 카운슬러로 선택을 받곤 한다. 당신은 첫인상에서부터 믿음을 준다. 편안한 태도로 사람들의 두려움과 경계심을 허물며, 순식간에 마음을 열고 비밀을 털어놓게 만든다. 당신은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절대로 상처를 주지 않으며, 심술궂게 굴지 않는다.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은 위험으로부터 안전함을 느낄 것이다.  당신은 대부분의 경우 공평하고 공정하며 상냥하지만, 동시에 극도로 날카롭고 비판적일 수 있다. 사안을 간파해내는 능력이 너무나 정확하기 때문에, 가시 돋친 말로 남을 아프게 할 수 있다. 직장동료들이나 사장은 당신의 말에서 분명히 뭔가를 배우겠지만, 당신의 맹렬한 공격은 공격당한 대상에게 너무나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들은 당신의 말을 올바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결국 당신이 던진 비판의 진실은 사라져버리고 만다.  당신이 맞서야 할 가장 큰 문제는 정서적 불안함이다. 당신이 질투, 짜증, 소유욕 등등, 모든 종류의 부정적 감정에 빠지는 것도 바로 이러한 불안한 정서 때문이며, 바로 이것이 당신의 모든 대인관계를 망치고 있다. 건강의 문제, 심지어 평생 계속되는 육체적 장애가 생기기 쉽다. 저울의 추를 수평으로 맞추려면, 영적, 종교적 활동이나 육체적 트레이닝이 필수다.  상상력이 풍부한 당신에게 늘 따라붙는 위험은, 환상의 세계에 너무 빠져 살게 된다는 것이다. 자만과 자아도취의 즐거움 속에서, 당신은 행동을 취할 의욕을 상실한다. 이러한 도전정신의 부족은 일에도 영향을 준다. 세속적인 야심을 갖는 것이 당신에게는 상당히 건강하다. 야심을 통해 당신은 훨씬 의욕적으로 원하는 바를 주장할 수 있게 된다. 문제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항상 확신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당신은 현재의 자신의 모습에 쉽게 만족하기 때문에, 현실적인 계획을 세우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당신은 친구들 사이에서 크게 사랑 받는다. 밝고 재미있는 매너 때문만이 아니라 훌륭한 대화상대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당신이 아주 부끄러움이 많은 천칭자리Ⅱ라 해도, 작은 규모의 파티, 만찬, 야유회 등에서는 스스로 밝게 빛난다. 당신은 주변 사람들을 재미있게 해줘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며, 그 분위기에 일조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타인에게는 이처럼 눈치가 빠르고 현실적이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자기 자신의 눈을 속이는 것이야말로 당신의 가장 불행한 버릇이다. 이러한 자기기만은 최악의 연인, 배우자, 친구 등을 선택한다거나, 혹은 일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는 것으로 이어지게 된다. 당신은 스스로에게 설득력 있는 선택을 하지 못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곤경에 빠뜨린다. 다행히도 탄력성이 뛰어나서 쉽게 회복한다. 하지만 재빨리 회복하는 능력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선 안 된다. 혹은 이 능력에 지나치게 의존해서도 안 된다. 사적인 관계에서 불안한 일을 겪을 때, 당신은 남들에게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더 많은 고통을 준다.  천칭자리2의 장점 : 최신 정보에 밝은, 공정한, 깊은 통찰력  천칭자리2의 약점 : 자기만족, 엄한, 자기기만  천칭2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마음이 외치는 진정한 욕망을 찾아라. 찾게 된다면, 정말로 그렇게 되길 바라고 있음을 행동으로 보여주어라. 항상 양보하려고만 하지 말라.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지켜라. 냉정한 결정을 내리되, 꿈과 비전은 그대로 간직하라.  천칭자리Ⅱ 유명인들  제시 잭슨 목사, 수전 서랜던, 존 레논, 순이 프레빈(우디 앨런 감독의 한국계 아내), 엘리자베스 슈, 데스몬드 투투(남아프리카의 대주교로 인종차별정책과 정면으로 맞서 싸웠다), 주세페 베르디, 시고니 위버, 후안 페론(아르헨티나 역대 대통령), 요요 마(첼리스트), 밥 겔도프(팝뮤지션), 정태춘 ★천칭자리Ⅲ 무대의 주간 10월 11~18일  천칭자리Ⅲ인 당신의 중심 이미지는 연극이다. 당신이 태어난 시기는 개인의 사회적 통합이 완성되거나 이미 시도된 시기인 40대 후반에 해당된다. 이때쯤이면 주어진 사회적 역할은 이미 다 정해지게 된다. 이제 중요한 것은 삶의 무대에서 그 역할을 완전하게 연기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글처럼 '세상이 모두 무대'라고 한다면, 천칭자리Ⅲ인 당신이야말로 그 위에서 연기하는 가장 훌륭한 배우다. 일상적 삶의 드라마를 연기하는 것이 당신의 특기다. 당신은 직업적 삶에서 자기이미지의 가치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세상에 어떻게 보여주어야 할지 많은 시간을 연구한다. 당신의 초연함, 심지어 냉정함은 주변 사람들을 짜증나게 하거나 격노하게 만들지만, 사실 이러한 당신의 이미지는 오해다. 당신이 냉정해 보이는 것은 혹독한 연구와 훈련의 결과다. 당신은 사실 굉장히 감정적인 자다.  당신에게선 리더의 자질이 잘 계발되기 때문에 곧잘 사교 그룹이나 사업의 우두머리가 된다. 하지만 가족을 이끌거나 경영자의 직책을 수행하면서, 당신은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오만에 빠져서 동료, 부하직원, 가족 및 친척들에게 끼치는 자신의 영향력을 무시하곤 한다. 만약 당신이 마침내 실패에 직면하게 된다면, 이것은 지금까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믿어왔던 무언가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과 같다. 당신은 그 충격을 감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을 존중하면서 진정한 겸손을 체득한다면, 훨씬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엄청난 실망을 경험하고 나면, 당신의 성격은 아마도 냉소적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세상사에 지쳐버린 당신을 소생시키는 방법은 사랑과 애정뿐이다. 하지만 사랑과 애정이야말로 당신이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이다. 믿음이 가는 친구나 가족들에게 마음을 여는 것이 자신의 심리적 건강을 위해 필수적이다. 전문적인 심리치료가 가장 확실한 해결책이겠지만, 천칭자리Ⅲ인 당신은 대부분 여기에 심한 거부반응을 보인다. 곤경의 시기에, 당신의 연인은 오직 자신만이 당신을 위로할 수 있다는 점을 알기 때문에, 엄청난 짐을 혼자 감당해야 할 것이다.  천칭자리Ⅲ인 당신이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어하는 때는 연인이나 배우자가 무시당했다고 문제를 제기할 때다. 사실 당신은 타인에게 큰 관심이 없다. 물론 그들의 감정에도 관심이 없다. 남들에게 오해받게 되면 엄청나게 고민하지만, 그렇다고 남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니다. 연극의 주간에 태어난 당신은 자신에게 무거운 감정이 부과될 때면 어쩔 줄을 모른다. 당신은 소극적으로 물러서거나, 혹은 도망친다. 스스로 자신이 진지하고 책임감이 있으며 도덕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사람들의 진정한 본질과 사귀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아이디어와 가치, 그 표현 등에 더 관심이 많다.  당신에겐 남성과 여성의 면이 동시에 강하게 나타난다. 당신은 무제한의 감정 표현이 허락된 침실에서는 극히 열정적이다. 하지만 일단 감정을 배출해내기 시작하면 통제를 잃어버려서, 결국 분노와 불안을 쏟아내게 된다. 주로 비난과 반격으로 가득 찬 논쟁의 형태로 상대방에게 쏟아낸다. 당신의 분노는 폭력적이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오래 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주간에 태어난 당신은 본질적으로 삶에 다툼을 끌어들이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아마도 당신에게 감정적으로 가장 유쾌하고 즐거운 일은 스스로 가족의 적극적인 일원이 되어 애정, 격려, 이해 등을 아낌없이 베푸는 일일 것이다. 이것은 정력적인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부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중독의 성향 때문에, 함께 살겠다고 선택한 어떤 사람들과도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다. 결국 자신의 진정한 성향, 즉 혼자 살고 싶은 성향을 드러내게 될 뿐이다.  천칭자리3의 장점 : 이해타산에 밝은, 정력적인, 아는 것이 많은  천칭자리3의 약점 : 부주의한, 남을 비난하는, 지나친 자신감  천칭3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지킬 수 있는 것만 약속하라. 때로는 자신을 가장해야 할 때가 있겠지만, 그렇다고 스스로를 속이지는 말라. 타인의 감정에 배려하라. 감정 문제에 인내심을 갖고 충분한 시간을 투자하라.  천칭자리Ⅲ 유명인들  루치아노 파바로티, 마가렛 대처, 엘리너 루스벨트(전 퍼스트레이디), 아서 밀러(극작가), 리 하비 오스왈드(케네디 대통령 저격범), 오스카 와일드(영국 작가), 마리오 푸조(의 원작자),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테니스선수), 사라 퍼거슨(영국 앤드류 왕자의 전 아내), 리타 헤이워스, 로저 무어, 낸시 케리건(피겨 스케이팅 선수), 몽고메리 클리프트, 차인표 ★천칭-전갈자리 드라마와 비평의 주간 10월 19~25일  천칭-전갈자리인 당신은 황도대의 7번째 별자리인 천칭자리와 8번째 별자리인 전갈자리가 혼합된 시기에 태어났다. 당신은 천칭자리의 사회적 연극적 특성이 전갈자리의 깊은 감성 및 비판적 특성과 부딪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드라마와 비평의 주제가 강해지는 시기다. 철학적 인식이나 개인적 지각 면에서 삶의 드라마에 대한 분별력이 훨씬 강해지며, 현재는 물론 과거 자신의 존재의 에너지를 훨씬 강하게 인식하게 된다. 상당히 비판적인 태도가 자라나서, 무분별한 일반화나 얄팍한 생각 등을 가차없이 비판한다. 당신이 찾아 헤매는 것은 진실의 본질이다.  천칭-전갈자리에 태어난 당신은 굉장히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라서 누구든 감당하기 힘들어한다. 당신의 에너지는 주변의 모든 사람을 즉각적으로 압도할 뿐만 아니라, 그 보다도 훨씬 더 멀리 나아간다. 카리스마가 넘칠 뿐만 아니라 지적인 매력까지 갖고 있어서, 정확하고 치밀한 아이디어로 상대방의 마음까지 빼앗는다.  이 주간에 태어난 당신에겐 천칭자리의 공기(지성)의 자질과 전갈자리의 물(감성)의 자질이 혼합돼 있다. 하지만 공기와 물을 혼합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머리는 끌고 가려하고 마음은 거부하거나 혹은 그 반대의 상황이 항상 일어난다.  드라마와 비평의 커스프에 태어난 당신의 지적인 성향은 예민한 지각력과 예리한 통찰력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남에게는 지나치게 비판적인 이중 위험이 나타날 수 있다  당신은 여러 분야에서 책임감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 거칠고 예측할 수 없는 의외의 면이 많다. 드라마틱하고 충동적이기 때문에, 자신의 가치관을 주장하고 스스로를 표현하기 위해서라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사회의 도덕적 코드에 삿대질을 한다. 방법은 상당히 논리적이고 설득적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요란하고 화려할 수도 있다. 당신이 아무리 온순한 성격을 가졌다고 해도, 자신을 노출하고 싶은 마음만큼은 숨길 수 없을 것이다. 또한 타인이 이 점을 눈치 채주길 은근히 바란다. 당신의 삶에는 여러 번의 사랑이 등장한다. 그래서 당신과 관계를 맺고 실연을 당한 사람들의 상처가 삶의 기억 곳곳에 가득하다. 특별한 카리스마, 충동적 성격, 부인할 수 없는 지성 등으로 볼 때, 당신은 한 번 빠지면 헤어날 수 없는 거대하고 위험한 존재임이 분명하다.  드라마와 비평의 커스프에 태어난 당신에게는 감각과 열정이 인생의 주요 주제다. 당신과 사랑에 빠진 사람은 관계의 중독적 성향을 경계해야 한다. 평범을 벗어난, 심지어 건강한 인간관계의 한계를 벗어난 깊은 집착은 파멸적 의존이나 끔찍한 이별, 불화 등으로 귀결된다.  당신은 아이 앞에서는 누구의 아이이든 간에 스스로 책임감 있는 어른의 역할을 맡으려 한다. 하지만 종종 객관성을 잃어버리고 아이에게 감정적으로 지나치게 얽매이게 된다. 당신은 아이는 물론 학생과 젊은이들을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신의 비현실적인 기대와 소망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불러오는지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천칭-전갈자리의 장점 : 감각적인, 카리스마가 넘치는, 예술적인  천칭-전갈자리의 약점 : 지나치게 비판적인, 중독의 성향, 혹독한  천칭-전갈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편안하게 즐겨라. 너무 까다롭게 굴지 말라. 특이한 경험을 거부하지 말되, 평형과 균형을 유지하라. 삶과의 투쟁을 계속하라. 탈출의 유혹에 저항하며, 자기연민에 빠지지 말라. 과거를 흘려 보내고 미래를 껴안아라. 냉소와 조롱은 당신에게 독약이 될 것이다.  천칭-전갈자리 유명인들  사라 베른하르츠, 파블로 피카소, 피터 토시(레게 뮤지션), 카트린느 드네브, 펠레(브라질 축구선수), 쟈니 카슨(코미디언), 미도리(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캐리 피셔(배우), 베냐민 네타냐후(이스라엘 전총리), 아르튀르 랭보(프랑스 시인), 홍석현(중앙일보 사장), 이찬진(전 한글과 컴퓨터 사장) ★전갈자리Ⅰ 강렬함의 주간 10월 26일- 11월 2일  전갈자리Ⅰ의 중심이미지는 강렬함이다. 인간생에서 이 기간은 중년의 시작을 의미하는데 이 때가 되면 한 개인의 파워가 온전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파워는 50대나 60대 초반의 어느 시점에서 절정을 이루게 된다. 이 시기에는 주위에 통제력을 발휘하고, 권력을 잘 관리해 행사하며, 멋대로 하고 싶은 욕구를 자제하는 등의 능력이 생겨난다.  전갈자리Ⅰ은 요구가 많은 성격이다. 사소한 것까지 챙기고 주어진 일에 집중력을 발휘하는 면에 있어서는 따를 자가 없다. 그는 날카로운 안목을 가졌는데, 그 정도가 심하다보니 함부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공명정대함과 윤리의 문제에 있어 그는 숨은 동기를 헤아리기보다는 겉으로 드러난 행동으로 판단해버린다. 그리고 도덕적이지 못하다고 판단되는 사람에게는 가차없이 유죄를 선고한다. 물론 자신에게도 똑같이 엄격하며, 제멋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최악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아무리 약한 전갈자리Ⅰ이라도 거장의 솜씨 그 이상을 보여준다. 사실 이러한 에너지는 그가 궁핍한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족과 친구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기를 갈구하는 것이다.  전갈자리Ⅰ은 웬만한 사람들보다 훨씬 강하게 양극단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뚜렷이 대조를 이룬다. 밝은 면은 그에게 광채와 매력을 가져다 주어 어떤 딱딱한 가슴이라도 녹여낼 수 있게 만든다. 한편 어두운 면은 파괴적이며, 통제력을 잃었을 때 주위사람 뿐 아니라 자신에게조차 심각한 타격을 주게 된다.  누군가 그에게 적대적인 행동을 했을 때 당연히 알면서 일부러 그랬다고 단정한다. 깊게 생각지 않고 행동할 수도 있다는 걸 믿지 않으니 갈등의 골은 더 깊어진다. 그는 특히 변명을 싫어한다. 약속을 해놓고 늦거나 깜빡 잊고 아예 나타나지 않는 일 같은 건 전혀 이해할 수 없다. 깜빡 잊었다는 주장은 상처를 주려는 의도를 감추려는 위장술로 느껴질 뿐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사과를 하더라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잘못된 행동은 용서해도 순수하지 못한 동기는 절대 용서하지 못한다.  용서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라면, 경멸이나 잘난 체 같은 모욕을 잊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비판에 대해서는 아주 민감하므로 전갈자리Ⅰ과 가까운 사람들은 되도록 논쟁을 피하는 것이 좋다. 그런 식의 갈등은 궁극적으로 관계에 파괴적인 영향을 끼치며 결별에 이르게 만든다. 하지만 전갈자리Ⅰ의 판단의 예봉은 본질적으로 그리 파괴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는 운명을 개선시키는 것을 도울만큼 걱정되는 상대가 아니라면 굳이 고생을 자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전갈자리Ⅰ은 비판의 긍정적인 면을 믿으며, 나쁜 상황이 저절로 좋아질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양보다는 질에 가치를 두기에, 전갈자리Ⅰ은 지나치게 다재다능하거나 온갖 영역에서 자신의 공로를 주장하는 사람에 대해 의심을 눈초리를 보낸다. 그는 여러 가지 일을 제법 잘하기 보다는 한가지 일을 확실히 잘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전갈자리Ⅰ의 연인은 그와의 사랑이 주는 황홀경에 대해 얘기하며, 친구들은 그가 만들어내는 따뜻함과 호감들은 느낀다. 특히 유머감각은 주목할 만하다. 사람들이 배를 움켜쥐고 마룻바닥을 구르도록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는 또한 액센트나 제스처, 동작을 똑같이 흉내내는 ‘개인기’ 전문가들이다. 짐짓 심각한 척하면서 상대를 궁지를 몰아넣다가 마지막 순간에 웃음을 터트리며 농담이었다고 말하는 경우도 많다. 일단 전갈자리Ⅰ이 상대방의 웃음의 취약지구를 발견한다면 절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간지럽힐 것이다. 심지어 처음에 즐거워했던 상대방이 점점 고통을 호소해도 멈추지 않는다.  전갈자리1의 강점: 진실된, 통찰력있는, 한가지에 전념하는  전갈자리1의 약점: 고통을 주는, 엄격한, 자기 파괴적인  전갈1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남에게 한결같기를 기대한다면 스스로도 똑같이 지조를 지켜라. 가능하면 용서하고 잊으려 노력하라. 감당 못할 짐은 내려놓고 오라. 과거의 상처는 누구에게나 너무 힘겨운 것이며, 그건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다.  전갈자리Ⅰ 유명인들  딜런 토마스, 힐러리 클린턴, 빌 게이츠, 에라스무스, 니콜로 파가니니, 프랑코 미테랑, 줄리아 로버츠, 테디 루즈벨트, 크리스토퍼 콜롬부스, 프랜시스 베이컨, 제인 알랙산더, 마리 앙트와네트, 버트 랭커스터 ★전갈자리Ⅱ 깊이의 주간 11월 3~11일  전갈자리Ⅱ인 당신의 중심 이미지는 깊음이다. 사람의 인생으로 볼 때, 당신이 태어난 주간은 보다 깊은 면이 강해지고 새롭고 심오한 힘의 원천이 발견되는 중년의 시기를 상징한다. 마치 석유를 발견했을 때 송유관으로 석유가 치솟아 오르는 것처럼, 무의식의 깊은 겹을 뚫고 엄청난 에너지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물론 당신은 이 에너지를 잘 이끌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쉽게 파괴란 결말에 이르게 될 것이다. 힘이 넘치는 새로운 통찰력이 나타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당신에게는 모든 형태의 깊이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온다. 깊이의 주간에 태어난 당신은 피상적인 사람이나 현상에는 몸사래를 친다. 일에서든 가정에서든 당신은 생에 대해 정확하고 신중한 견해를 가진다. 그렇다고 당신이 재미를 즐기는 걸 싫어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하지만 취미나 기분 전환용 오락 등의 가벼운 일을 하면서도, 당신은 다른 중대한 일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진한 에너지와 집중력을 보여준다.  깊이의 주간에 태어난 당신은 일과 여가 활동에서 굉장히 경쟁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쟁적 충동을 사생활에까지 가져오는 법은 거의 없다. 질투, 시기 등은 당신의 열정적 속마음에 근접해있지만, 이러한 감정이 소동이나 소란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잘 다스리고 이해한다.  당신은 고통스럽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기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마음에 쉽게 동화된다. 깊이의 주간에 태어난 당신은 일반적으로 고통스러운 상황을 스스로 자초하지 않지만, 역경과 투쟁이 없는 삶이란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당신은 부모, 친구, 아이, 배우자 등 가까운 사람의 죽음에 깊게 상심한다. 너무 깊게 상심해서 슬픔에 질식해버리거나 폐인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완전히 회복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누군가가 당신의 마음의 문을 열기란 쉽지 않으며 고민을 털어놓게 만들기도 쉽지 않다. 심지어 신뢰를 받고 있는 인생의 동반자나 친한 친구들조차도 당신의 깊은 감정에 접근하려면 모든 종류의 장애물을 통과해야만 한다. 마침내 당신이 속마음을 털어놓을 준비가 되었을 때, 상대방에게는 그 말을 묵묵히 들어주는 인내심, 이해심, 그리고 소유하지 않으려는 사랑이 필요하다. 당신은 자신의 어두운 면을 잘 억제하기 때문에 스스로 주동자가 되지는 않는다. 대신에 배우자나 연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억압된 부정성을 연기하도록 강요한다. 결국 이것은 당신 자신에게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 당신 자신이 그들의 희생양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은 희생양으로서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당신은 천성적으로 역습을 날리는 사람이며,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엄청나게 사나워진다. 당신의 분노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두 번 다시 당신을 화나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실제로 이따금씩 화산처럼 감정을 폭발적으로 쏟아 내는 것이 전갈자리Ⅱ의 주 특징이다. 당신이 화를 내는 모습은, 흔하게 볼 수는 없지만, 한 번 보면 쉽게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대체적으로 주관이 강한 친구를 사귀고 성실한 연인이나 배우자를 얻는다. 연인과 친구들은 당신을 부드러운 사람이라고 얘기한다. 당신은 살벌한 존재감을 갖고 있지만, 대체적으로 친절하고 베풀 줄 알며 상당히 센티멘탈하다. 이 주간에 태어난 당신은 대개 동물과 어린이에게 친절하다. 동물이 당신의 보호와 양육의 본능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은 좋은 부모가 된다.  당신은 전갈자리의 전형적인 특징답게 비밀스럽고 지배적이다. 성적인 욕구와 본능 역시 강하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당신은 식탁과 침대의 쾌락을 즐기는 매우 육체적인 사람이다. 상대방의 생각을 예민하게 느끼고 스스로를 절제할 수만 있다면, 당신의 욕망과 식욕은 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전갈자리2의 강점 : 진지한, 확고한, 성적인  전갈자리2의 약점 : 우울한 근심걱정, 도피주의자  전갈2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안으로 밝은 빛을 받아들이고, 밖으로 밝은 빛을 내보내라. 너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노력하며, 자신이 스스로에게는 물론 타인에게도 얼마나 많은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인지 깨달아라. 남다른 통찰력을 건설적으로 사용하라. 세상 사람들의 환상에 더 많이 웃어주어라. 그리고 당신 자신을 향해서도 더 많이 웃어라.  전갈자리Ⅱ 유명인들  마리 퀴리,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엔니오 모리코네(영화음악가), 야니(뉴에이지 음악가), 케이트 캡쇼(배우), 샐리 필드(배우), 테이텀 오닐(배우), 이반 투르게네프(러시아 소설가), 리처드 버튼, 윌 로저스(배우), 오렌지 공 윌리엄3세(영국 왕),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을 쓴 미국 작가), 존 필립 소우사(작곡가), 천경자(화가), 이소라(모델) ★전갈자리Ⅲ 매력의 주간 11월 12일~11월 18일  전갈자리Ⅲ인 당신의 중심 이미지는 매력이다. 당신이 태어난 시기는 인간의 삶으로 볼 때 자석 같은 매력과 카리스마로 타인에 대한 영향력이 최고조에 이르는 중년의 시기에 비유된다. 당신은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 주로 강한 감정을 사용하며, 한편으로는 이기심과 자아도취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누구보다도 강한 현실주의자인 당신은, 좀처럼 무리를 하거나 실패하는 법이 없다. 당신은 자기 자신의 능력은 물론 타인의 능력까지도 현실적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믿을만한 판단을 내리며 예리한 결론에 이른다. 이 주간에 태어난 당신은 경영자의 위치에서 좋은 능력을 발휘한다. 사회 단체나 팀의 리더가 되면 당신의 평가능력과 조직력, 현실성 등이 훌륭한 역할을 해낸다.  당신은 자신감이 강하기 때문에 자칫 자만이나 독선에 빠질 수 있다. 특히 직업에 있어서, 당신은 이를 수 있는 지점까지 도달하고 나면 더 높이 올라가려는 노력을 멈추곤 한다.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이 당신이 기회를 잡도록 수시로 격려해주지 않는다면, 쉽게 정체되며, 결과적으로 놓쳐버린 기회에 대해 후회하게 된다.  당신은 무언가를, 혹은 어떤 사람을 소유할 수 있기를 아무리 갈망한다 해도, 스스로 불리한 입장을 선택하는 일에는 능숙하지 않다. 체면은 당신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이기에, 좀처럼 절충하는 법이 없다. 유혹이 너무 강해서 이성을 잃어버리는 시점에 이르게 되면, 당신은 엄청난 내면의 갈등을 겪은 후에야 그 유혹에 굴복한다. 마약, 약물, 사람, 행동패턴 등 모든 종류에 대한 중독은 끊기가 아주 어렵겠지만, 일단 완전히 끊고 나면 좀처럼 다시 시작하는 법이 없다.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이라면 공짜를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당신의 혐오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당신은 특별한 능력을 갖춘 사람들에게 끌린다. 한편으로 전갈자리Ⅲ 중에서도 좀더 유혹적인 전갈자리Ⅲ은 때때로 타인의 유혹하는 기술에 아주 쉽게 넘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수상쩍고 비도덕적인 길을 따르는 전갈자리Ⅲ일수록 자신보다 고단수의 속임수를 가진 자에게 쉽게 당한다.  외로움, 특히 노년기의 고독을 피하고 싶다면, 상처를 받더라도 마음을 열어두려는 노력이 최선이다. 전갈자리Ⅲ인 당신은 자신의 로맨틱한 삶에 대해서 좀처럼 농담을 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굉장한 사랑에 빠진 것처럼 보일지라도, 당신은 비생산적이거나 해로운 관계는 절대로 매달리지 않는다. 수완이 뛰어나고 냉정한 성격을 가진 당신은 기회란 언제든지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당신은 관계에 충실하며 진지하다. 어떤 관계이든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만약 당신이 혼자 살기로 결심했다거나, 가족과의 접촉이 부족하다면, 친한 친구의 역할은 매우 중요해진다. 매력의 주간에 태어난 당신은 좋은 친구들로 가득한 완벽한 세계를 구축한다. 어느 순간이 되면 당신의 친구들은 형제, 부모, 아이, 배우자, 연인 등의 역할을 대신해줄 것이다. 당신은 자신과 매우 다른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 서로 모자라는 부분을 나누고 보충하는 우정을 이룬다. 친구들과의 교제를 통해 자신의 결핍된 부분을 완전히, 혹은 완전에 가깝게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전갈자리3의 장점 : 침착한, 매력적인, 수완이 좋은  전갈자리3의 단점 : 방어적인, 자만하는, 지배하려는  전갈3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자신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라. 불가능한 도전에 응하라. 의미 있는 일이라면, 때로는 위험을 택할 줄 알라. 언제나 높은 곳을 겨냥하라.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전갈자리Ⅲ 유명인들  그레이스 켈리, 우피 골드버그, 찰스 왕세자, 클로드 모네(화가), 자와할랄 네루, 쑨원(중국 혁명가), 나디아 코마네치(루마니아 체조선수), 토냐 하딩(피겨스케이팅 선수), 오귀스트 로댕(프랑스 조각가), 드미 무어(배우), 데니 드 비토(배우 겸 감독), 마틴 스콜세지(감독) ★전갈-사수자리 혁명의 커스프 11월 19일~11월 24일  전갈-사수자리인 당신은 황도대의 여덟 번째 별자리인 전갈자리와 아홉 번째 별자리인 사수자리가 결합된 시기에 태어났다. 전갈자리의 깊은 감성, 진지하고 은밀한 에너지와, 사수자리의 직관, 외향성, 자유에 대한 사랑이 결합되어, 우선은 자신을 이해하고, 그 다음에 변화를 시도하려는 욕망을 보여준다.  모든 혁명가들이 막무가내로 폭탄을 던질 정도로 순진한 이상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인권을 위해 싸웠던 많은 투쟁자들의 영혼 속에는 은밀한 독재자의 성향이 숨어있다. 일단 이 독재자가 권력을 잡으면, 당신 스스로 또 다른 혁명에 의해 쫓겨날 수밖에 없다. 당신은 주로 나약함, 감상주의, 형편없는 취향, 무기력함, 어리석음, 낡고 오래된 사고방식에 대한 반항에 뛰어든다. 당신은 낡은 신화를 깨뜨릴 수 있지만, 동시에 스스로 유용하다고 믿는다면 신화를 소생시키고 보존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커스프에 태어난 당신은 실제로는 은밀한 전통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신은 이도 저도 아닌 중간입장의 정책을 경멸하고 중산층의 윤리를 혐오한다. 그래서 당신은 아주 부자가 아니라면 아주 가난하고, 굉장한 귀족이 아니라면 노동계급의 영웅이 된다. 이렇게 극과 극만이 가능할 뿐, 그 중간은 용납되지 않는다.  당신의 웃음은 정신의 건강상태를 알려주는 직접적인 징후다. 이야기를 시작하고 처음 몇 분 안에 당신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혁명의 커스프에 태어난 당신은 적을 웃음거리로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친한 친구들을 재미있게 웃기기 위해서 날카로운 조롱과 비웃음을 자주 사용한다.  당신에게는 도덕적인 질문이 중요하다. 당신은 정직해지려고 노력하지만, 항상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진실하게 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종종 이 기준에 부응할 수가 없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완전히 열고 정직해지기가 힘들어서, 그저 진실의 일부분만을 말해줄 뿐이다. 후에 진실이 완전히 밝혀지게 되면, 당신은 크게 당황하여 후회하게 된다. 하지만 당신의 부인할 수 없는 매력, 선의, 성실하고 의리 있는 태도 덕분에,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결국 당신을 용서해줄 것이다. 당신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조차도 당신이 진정한 용기의 소유자란 사실만큼은 인정한다.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 당신의 특징이다.  혁명의 주간에 태어난 당신은 가벼운 우정이든 진실한 우정이든 절대로 잊지 않는다. 당신은 돈의 힘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스스로 존경할 수 없는 사람과 일해야 한다면 아무리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 해도 그 기회를 박차고 나온다. 당신은 로맨틱한 관계에서는 그다지 안정된 성격을 지녔다고 말할 수 없다. 젊은 시절에는 야생성과 모험의식 때문에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사랑의 대상을 옮겨다니곤 한다. 물론 매 순간마다 단 하나의 사랑에 헌신한다. 일부 전갈-사수자리는 중년에 이르러서 영속적인 배우자의 중요성을 깨달아 결혼을 하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새로운 생활에 초조해하며, 예전에 누리던 자유를 되찾고 싶어한다. 이 외에도 일찍 결혼해서 현대적이고 세련된 결혼생활을 추구하는 경우도 있다. 즉, 결혼을 하긴 하되 두 배우자가 서로 별도의 독립된 삶을 꾸려 가는 것이다. 전갈-사수자리인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과 많은 시간을 떨어져서 지내야만 질투와 다툼을 최소화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자유를 지킬 수 있다.  당신의 연인과 배우자는 당신이 높은 성적 성향의 소유자임을 증언해준다. 당신의 성적 에너지는 열정적일 뿐만 아니라 넓게는 경쟁적이고 전투적이기도 하다. 혁명의 주간에 태어난 당신은 놀 때에도 일할 때에도 싸우려는 태세를 갖추고 있다. 물론 이러한 성향은 침실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된다. 물론 당신에게는 달콤하고 다정한 면도 있지만, 성적 접촉에 한해서는 육욕과 엑스터시의 강한 에너지가 부드럽고 감성적인 면을 무색하게 한다.  전갈-사수자리의 장점 : 성적 엑스터시, 의리를 지키는, 용감한  전갈-사수자리의 약점 : 독재적인, 조롱하는, 거친  전갈-사수자리에게주는 어드바이스  자신의 비전을 따르되, 타인과의 접촉을 잃지 말라. 의도를 정직하게, 동기를 순수하게 하라.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볼 수 있는 객관성을 길러라.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라. 더욱 용서하라. 소유하려는 마음을 다스려라.  전갈-사수자리 유명인들  로버트 케네디(케네디 대통령의 동생), 조디 포스터, 제미 리 커티스, 보리스 벡커(독일 테니스 선수), 조지 엘리엇(영국 소설가), 찰스 드골(프랑스 역대 대통령), 볼테르(프랑스 계몽사상가), 골디 혼, 앙드레 지드(프랑스 작가), 스피노자(네덜란드 철학자), 테드 터너(CNN 창립자) ★사수자리Ⅰ 독립의 주간 11월 25일~12월 2일  사수자리Ⅰ인 당신의 중심 이미지는 독립이다. 당신이 태어난 시기는 인간의 인생에 비유하자면 56세가 막 지난 후로, 새로운 독립에 대한 갈망이 일어나는 중년의 시기를 상징한다. 즉, 가족과 직업에는 관심을 줄이고, 자기 자신에게 더 많은 에너지를 투자하면서 자신의 길을 헤치고 나아가는 시기를 뜻한다. 새로운 길에 즐겁게 발을 딛되, 과거를 통해 진정한 자신의 영역을 쌓는 것이 이 시기에 태어난 당신의 특징이다.  사수자리Ⅰ인 당신은 좀처럼 제어할 수 없는 사람이다. 여러 면에서 당신은 가장 독립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의 충동과 직관을 따르는 데에 거리낌이 없다. 사적인 관계에서 당신에게 권한을 행사하려는 사람들은 사나운 야생마의 등에 올라탄 것이나 다름이 없다. 배우자나 함께 사는 사람을 존중할 수 있을 때면, 당신은 그들과 감정을 나누고 집안 일을 함께 하는 등 적극적으로 협조한다. 하지만 존중할 수 없을 때면, 혹은 존중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게 되면, 끊임없는 갈등과 다툼이 생기게 된다.  독립의 주간에 태어난 당신은 확신과 자신감의 이미지를 구축하려고 노력하지만, 이러한 면 뒤에는 예민하고 불안정한 자아가 꿈틀거리고 있다. 특히 스트레스 상태일 때, 혹은 부정적인 비판에 직면하거나 성격에 대해 직접적인 공격을 받게 되면 이러한 점이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당신은 쉽게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어버려서 주변 사람들에게 분노를 퍼붓는다. 폭풍우가 몰려오는 장면을 지켜본 자들은 앞으로 당신의 감정을 두 번 다시 자극하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행동할 것이다. 당신의 의지력은 엄청나다. 당신에게 의리란 원칙이나 감정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고집의 문제이기도 하다. 절대로 자신의 입장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당신의 특별한 성격이다.  독립의 주간에 태어난 많은 사람들이 받기보다는 주려는 욕구를 갖고 있다. 당신의 관대함은 자기가치 및 자존심과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즉, 당신은 스스로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기보다는 남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물론 사수자리Ⅰ 중에는 자신의 요구를 말하기를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들도 있고, 남의 도움을 받는 것에 전혀 어색해하지 않는 자들도 있다. 두 경우 모두 가족 안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자신이 바라는 조건하에서 중요한 책임을 짊어지는 것이 당신에겐 무척 중요하다.  친구, 배우자, 동료 혹은 가족 등, 가슴 밑바닥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절친한 사람은 당신에게 겨우 한두 명뿐이다. 부모나 아이와의 유대는 매우 깊다. 어쩌면 진정한 우정에 가까운 유대일 수도 있다. 영혼의 동반자라면 그는 당신이 다른 무엇보다도 성실과 고결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매우 도덕적인 사람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단, 자유에 대한 사랑은 그 이상이다. 당신에게 잘 맞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가정에 충실하고 일에 성실한 사람이다. 이 주간에 태어난 당신은 안정을 갈망한다. 항상 그곳에 있어서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당신의 삶의 닻이다. 대부분의 사수자리Ⅰ이 혼자 살 수 있고 실질적으로도 독신생활에 잘 맞지만, 일반적으로 당신은 누군가의 배우자가 되기로 결정하게 되면 강한 결단력으로 그 역할을 계속한다. 심적으로 성장하여 누군가와 함께 살아야 할 필요로부터 벗어난다 해도, 한 번 선택한 사람과 끝까지 같이 간다. 당신은 감정표현에 있어서 열렬하고 거리낌이 없다. 특히 섹스에 있어서 거침이 없다. 당신은 자신의 육체의 강렬한 에너지를 상대방에게 분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연인이나 배우자는 헤어진 후에도 당신과의 짙은 만남을 생생하게 기억할 것이다.  사수자리1의 장점 : 존경할만한, 직관적인, 책임감  사수자리1의 단점 : 지나치게 경쟁적인, 충동적인, 신경질적인  사수1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감정을 고르게 다스리려고 노력하라. 교만하고 오만한 행동을 조심하라.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며, 좀 더 많이 용서하라. 과장하려는 경향을 단속하라.  사수자리Ⅰ 유명인들  베트 미들러, 우디 앨런, 티나 터너, 윈스턴 처칠(영국 수상), 마리아 칼라스(그리스 소프라노 가수), 마크 트웨인(미국 소설가), 모니카 셀레스(테니스 선수), 조 디마지오(야구 선수), 쟈크 시라크(프랑스 대통령), 캐롤린 케네디, 존 F. 케네디 2세, 강제규(영화감독), 육영수(영부인) ★사수자리Ⅱ 창시자의 주간 12월 3~10일  당신이 태어난 사수자리Ⅱ의 시기는 창시자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삼는다. 이 시기는 인간의 삶에 비유하자면 주체적인 충동을 통해 드디어 자신만의 고유한 표현의 방식을 구축해낸 중년의 시기에 비유된다. 이와 같은 전환의 시기에, 인간은 새롭게 발견한 자유에 대한 전혀 새로운 감정들을 정말로 독창적이면서도 노련한 시야로서 창조적인 계획과 독특한 행동으로 쏟아내게 된다.  사수자리Ⅱ인 당신은 남과 다르며, 그 다름을 표현하는 데에 두려움이 없다. 48개의 별자리 중에 가장 특이한 사람으로, 겉보기에 아무리 평범하다해도 좀더 자세히 알게 된 사람들의 눈에는 특이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당신은 무엇을 하든 자신의 방식 이외에는 관심조차 주지 않는다. 당신은 자신의 특이함에 만족스러워하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당신을 이해해주기 바라는 것은 무리다.  창시자의 주간에 태어난 당신이 가장 크게 성공을 거두는 때는 사물을 바라보고 행동하는 자신의 괴팍스러운 방식을 청산할 때다. 일부 사수자리Ⅱ는 좌절과 자기연민에 빠져버리는 것이 사실이다. 이 경우 친구들은 당신의 괴상함에 대해 농담을 하며 놀려댈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수자리Ⅱ인 당신은 자신의 정체성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자랑스러워한다. 또한 당신에게는 도피주의자의 성향이 있어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숨어버리거나 일상 생활의 고민이나 위급한 문제를 피해 도망치고 싶어한다. 수상쩍은 행동이나 마약 등에 빠질 위험이 상당하다. 육체적 정신적 건강에 대한 위협도 늘 존재한다.  이 주간에 태어난 당신은 영리하다. 손재주가 뛰어나고 머리 회전이 빠르며, 목표에 접근하는 기술적 능력이 뛰어나다. 성격적으로 괴상한 면이 있긴 하지만, 성공은 결국 당신의 것이다. 하지만 재주가 너무 많아서 자기과신으로 흐를 수 있다. 또한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여 실수를 하고 주저앉을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사수자리Ⅱ인 당신은 자신의 독특함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과 사귀기 때문에, 깊은 인상을 남기려고 노력할 필요도, 자신을 인정하지 않을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젊은 시절에는 보통 로맨스에서 사람들이 겪는 실망감보다 훨씬 깊은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누군가를 우상처럼 숭배하지만 절대로 사랑을 되돌려 받지 못하는 것이 당신의 흔한 러브스토리다. 여러 사람으로부터 거부를 당하면서, 당신은 좀더 스스로의 감정에 대해, 그리고 선택에 대해 현실적으로 발돋움한다. 그런 면에서 이러한 고통은 당신에게 필요한 일이다. 마침내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났을 때, 아마도 당신은 믿을 수 없어하며 이 사람을 밀어내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일단 믿음의 유대가 쌓여지면, 특히 그 과정이 길고도 고통스러웠다면, 당신의 마음은 그 사람에게 고정되어 떠나지 못하게 된다. 당신이 쏟아내는 사랑에 깊이에 따라서, 상대방은 초조해할 수도 있고, 두려워하며 뒷걸음질칠 수도 있다. 따라서 당신은 친구나 연인에게 너무 무거운 감정을 싣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 외모로도 성격으로도 매우 매력적이기 때문에, 당신은 사람들의 마음을 애태운다. 하지만 무책임하고 파괴적으로 행동하는 면도 강하기 때문에, 가장 인내심이 강했던 연인마저도 결국 당신과 헤어지기로 결심하기에 이른다.  사수자리2의 장점 : 특이한, 열정적인, 재능이 많은  사수자리2의 단점 : 괴상한, 무책임한, 거부당하는  사수2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좀더 많이 움직이며 때로는 남이 하는 대로 행동하라. 아무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한다는 믿음으로 자기 스스로를 궁지에 몰지 말라. 세상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라. 무엇이든 새롭게 생각하라.  사수자리Ⅱ 유명인들  월트 디즈니, 케네스 브래너(영국 배우), 장 뤽 고다르(프랑스 영화감독), 조셉 콘라드, 시니어드 오코너(아일랜드 가수), 커크 더글라스, 존 말코비치, 짐 모리슨, 래리 버드(농구선수), 제임스 골웨이(플룻 연주가), 킴 베이싱어, 노태우, 이종환 ★사수자리Ⅲ 거인의 주간 12월 11~18일  당신이 태어난 사수자리Ⅲ의 시기는 거인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삼는다. 인간의 일생에 비유하자면 60대 초반으로, 은퇴의 시기가 임박하거나 혹은 이미 은퇴한 시기에 해당하며, 새로운 자유를 주장해오다가, 이제 그 자유의 범위를 더욱 넓히는 시기에 해당한다. 이제 다가오는 시기를 위해 계획을 해야 한다. 경제적 문제를 재정리하고, 더 넓어진 여가 시간의 공백을 메워야 하는 문제에 직면한다. 더불어 이제 풍부한 상상력이 필요한 더욱 창조적인 목표를 따를 수 있게 된다.  거인의 주간에 태어난 당신은 큰 규모로 생각한다. 가족 모임을 계획하든, 사업 전략을 짜든, 당신의 사고 체계 자체가 큰 프로젝트에 맞다. 당신은 모든 종류의 좁고 시시한 사고방식을 싫어한다. 우선은 전체 그림을 먼저 보며 세부적인 일에 얽매이는 것을 피한다. 사수자리Ⅲ인 당신은 마음이 넓으며 아낌없이 베푼다. 하지만 그 대가를 바랄 정도로 현실적이기도 하다.  당신은 일단 마음을 결정하면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에, 당신의 목표에 개입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친구와 가족들은 곧 분위기를 파악하는 방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당신과 가장 좋은 관계를 맺는 사람들은 하루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당신의 마음의 일기예보를 읽으려고 노력한다. 바로 그것이 하루를 마감할 때의 프로젝트의 결과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주위를 불안하게 만드는 당신의 성격적 측면은 조직의 조화와 효율성을 위해서 너그럽게 못 본 체 하거나 무시되어야만 한다.  당신의 감정은 매우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감정이 폭발한다면 화산과 같은 뜨거움을 보여주게 된다. 당신에겐 아픔을 함께 느껴주는 사람들의 존재가 매우 중요하다. 바로 그런 사람들과 주기적으로 만나야만 자신의 마음 속 이야기를 털어놓고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다.  이 주간에 태어난 당신은 사생활은 물론 일에서도 마법과 엑스터시의 경험에 마음을 빼앗긴다. 기본적으로 당신을 매료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도전이다. 당신은 크고 작은 기적을 행하여 동료들을 놀라게 만드는 것을 즐긴다. 하지만 당신을 경쟁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진정한 경쟁이 불가능한 아주 막강한 요새 안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요새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당신의 눈은 다소 자기중심적이긴 하지만, 사수자리Ⅲ의 자신감과 확신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거인의 주간에 태어난 당신을 가장 멋지게 사랑해줄 연인이나 배우자는 일단 당신의 방어벽을 허문 후, 마법의 주문으로 당신을 매료시키는 사람이다. 당신은 자신의 육중한 업무와 무거운 책임감을 가볍게 덜어줄 아주 특별한 사람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한다. 배우자는 당신의 보호적이고 서슴없는 행동에 도움을 받을 테지만, 감옥에 갇힌 듯한 답답함을 느낄 수 있으며, 자기 스스로의 재능과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없음에 화가 난다.  당신은 천성적으로 하나의 목표에 충실하게 전념하기에 욕망과 필요를 구분하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때때로 욕망과 필요는 일치하기도 한다. 당신과 깊게 연루된 사람들은 당신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잘 알게 된다. 그들은 따르느냐, 거부하느냐의 단 하나의 선택에 직면해야 한다. 협상이나 절충의 여지는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동화 속의 거인처럼, 당신도 가끔은 속을 수 있다. 하지만 속아도 속은 줄 모르며 한참이 지나서야 그 사실을 깨닫는다.  사수3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삶의 작은 즐거움을 사랑하라. 타인을 더욱 이해하라. 자신의 도덕적 기준을 자신에게 적용하라. 사적 성장에 더 많은 에너지를 기울여라. 필요하다면 남들과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찾아라. 깃털을 곤두세우지 말라.  사수자리Ⅲ 유명인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스티븐 스필버그, 베토벤, 프랭크 시나트라, 구스타브 플로베르(프랑스 소설가), 마가렛 미드(고고학자), 윌리엄 사파이어(플리처상 수상자인 미국의 컬럼니스트), 마이클 오비츠(월트디즈니사의 전 사장), 디온 워릭(가수) ★사수-염소자리 예언의 커스프 12월 19일-25일  사수-염소자리는 인간생에서 63세 즈음에 비유된다. 또한 계절적으로는 겨울의 시작을 의미한다. 이 시기에 많은 땅들이 휴지기에 들어가며, 어떤 동물은 동면을 준비하고, 불어오는 바람은 차갑다. 또 동지날은 1년 중 어느 때보다 밤이 길고 낮은 짧다. 스톤헨지의 제사장이 하늘의 별을 관찰하고 예언을 하는 것도 바로 이 때이며, 운을 점쳐보는 것도 이 즈음이다. 그런 점에서 사수-염소자리는 예언을 그 중심이미지로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사수-염소자리는 불과 목성의 사수자리와 흙과 토성의 염소자리로부터 동시에 영향을 받는다. 이 두 행성의 에너지는 정반대이다. 목성은 팽창과 즐거움과 낙관주의를 대표하는 반면, 토성은 수축과 진지함과 현실주의를 대표한다. 두가지 요소의 밀고 당기는 효과가 작용하면서 그는 상당히 특이한 성격을 갖게 된다. 예를 들어 그는 목성의 영향으로 재미를 추구하지만, 토성의 영향 때문인지 그렇기 하기에는 너무 진지하다. 어떤 경우에는 토성의 영향으로 주어진 일에 전력을 다하기 시작하지만, 목성의 영향 때문인지 새로운 영역에 한눈을 팔게 된다. 그가 성공적인 삶을 살려면 이 두 가지 요소를 자기 속에서 잘 통합해야 한다.  사수-염소자리가 지닌 불과 흙의 요소는 각각 고도로 발달한 직관력과 지각 능력을 보여주는데, 그러므로 정신적 성향이 강하다거나 혹은 감정적 성향이 강하다고 꼭집어 말하기는 힘들다. 그는 오감, 특히 시각과 청각을 믿으며 그와 동시에 육감까지 신뢰할 때 최고의 능력을 발휘한다. 그는 자신의 힘에 대해 확신할 때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지만, 한편으로 친절하며 이해심도 많다. 가장 최악인 경우는 자기연민을 느끼는 때인데, 대개 자기연민은 사회생활에서 실패하거나 누군가에게 거절당하는데서 비롯된다. 어떤 사수-염소자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서 오는 상처와 좌절에서 오히려 심리적인 안도감을 얻는다. 긍정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해야한다는 책임감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수-염소자리는 억압되었던 감정이 터져나오면서 충격을 받아 호전적인 태도를 갖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에너지 역시 긍정적으로 사용된다면 뛰어난 창의성으로 승화될 수도 있다.  카산드라(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예언자로 주로 나쁜 일만 예언한다-역주)처럼, 사수-염소자리는 남이 자신을 좋아해줄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물론 그를 좋아해주는 사람도 꽤 있다. 어떻든 타인에게 인정받는데 얽매이지 않음으로써, 대개의 사람에게 부족한 힘과 자유를 갖게 된다. 비슷한 얘기로 그는 또한 자신이 만난 사람 대부분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꽤 비사교적으로 보인다. 그의 절친한 친구가 되고 싶다면, 그를 좋아하는 것 외에 한가지 요건만 더 충족시키면 된다. 그를 있는 그대로,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는 아첨하는 사람이나 단지 예의로 하는 행동을 간파하기 위해 안테나를 세우고 있는데, 그러므로 아첨은 씨도 먹히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겨우 몇 명만이 그와 가까워질 수 있다.  그는 부모와의 갈등 때문에 힘든 어린시절을 보내는데, 대개 같은 성별의 부모와 충돌한다. 본인은 세심하고 관대한 부모가 될 수 있는데, 하지만 몇몇 사수-염소자리는 부모가 했던 것과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위험이 있다.  깊고 열정적인 기질과 섹시함은 주위 사람들을 자석처럼 끌어당긴다. 대개 사수-염소자리의 친구나 연인은 혼자 있고 싶어하는 그의 욕구를 이해하며, 그와 은밀하고 은둔적인 생활을 공유하는데서 대단한 만족감을 느낀다. 한편 사수-염소자리의 파트너가 좀더 외향적이라면, 그는 세상과 사수-염소자리를 잇는 가교가 되어주며 껍질 밖으로 나오도록 도와준다. 사수-염소자리가 사회적으로 활짝 피는 것을 지켜보면서 얻는 기쁨은 상당하다. 한가지만 경고하겠다. 사수-염소자리는 피그말리온처럼 행동할 위험이 있다. 즉, 파트너의 이러한 노력 덕분에 새 생명을 얻게 되었으면서, 막상 상황이 바뀌면 파트너를 거부하며 안녕을 고할 가능성이 높다.  사수-염소자리의 강점: 영적인, 불가해한, 강렬한  사수-염소자리의 약점: 좌절하는, 비사교적인, 폭군같은  사수-염소에게 주는 어드바이스  강렬함을 가라앉히는 법을 좀 배워라. 스스로에 대해 더 잘 이해할수록, 기분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경향이 있으니 주의하라. 따뜻하고 애정넘치는 면을 마음껏 발휘하고, 항상 가슴을 열어두어라.  사수-염소자리 유명인들  플로렌스 그리피스 조이너, 유리 겔라, 조셉 스탈린, 코지마 리스트(피아니스트 리스트의 딸), 노스트라다무스, 시시 스페이식, 다이언 소이어, 이스마엘 머천트, 시슬리 타이슨(영화배우), 키퍼 서덜랜드, 프랭크 자파, 제인 폰다, 레이드 버드 존슨, 조셉 스미스, 애바 가드너, 애니 레녹스, 헬레나 루빈스타인, 안와르 사다트(전 이집트 대통령)
581    중국에서 시를 가장 많이 쓴 시인은 누구?... 댓글:  조회:4589  추천:0  2016-11-06
중국에서 시를 가장  많이 쓴 시인은 누구?                 중국은 시국(詩國)이다.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 혹은 가장 위대한 시인이 누구냐는 물음에는 아마도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은 중국인이라면 몇명의 대표적인 시인을 말 할수 있다. 하지만 중국 시인들중에서 시를 가장 많이 쓴 시인이 누구냐 하면 대답이 쉽게 나오지 못할 것이다. 사실 매 시대마다 기준이 있고 매개 사회계층에는 논리와 미학기준이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이 누군가 하는 문제에 대해 자고로 논쟁은 그칠새 없었다. 하지만 중국 고대 저명시인 중에서 시를 가장 많이 쓴 사람이 누군가 하는 문제는 쉽게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시 수량이 "굳은 기준"으로 될 수있기 때문이다. 기재에 의하면 이태백이 평생 남긴 시가는 약 990수, 두보는 1,400수, 백거이는 2,800수, 소식(소동파)은 약 4,000수라고 한다. 애국시인 굴원은 비록 시 편폭이 길지만 수량을 놓고 볼때 겨우 25편에 불과하다. 자료에 의하면 륙유는 시를 가장 많이 남긴 시인으로 알려졌다. 그는 평생 2만여수의 시를 썼으며 오늘날 보존된 시만 해도 9,329수에 달한다. 물론 수량도 중요하지만 질을 홀시할 수 없다. 청조황제 건륭은 평생 지은 시가 42,250수에 달하지만 세인들에 널리 전해지지 못했으므로 일류 시인이라고 말 할수 없는 것이다. 륙유는 인구에 회자한 명언과 명구를 민간에 많이 남겼다. 하지만 그가 중화역사에서 사람들의 찬양을 받아온 것은 시짓기뿐만 아니라 그의 위대한 애국주의 정신때문이다. 륙유가 생활한 시대는 중화민족이 역사상 가장 굴욕받은 시대라 할 수 있다. 수백년간의 송왕조는 부패와 쇠락의 길로 나아갔고, 북방의 여진족이 송왕조를 점차 침범했으며 황제는 겁먹은 쥐처럼 비겁하게 현실을 회피할때 륙유 등 소수의 애국주의자들은 용감하게 맞서 싸웠던 것이다. 평생 풍상고초를 겪어온 륙유의 노년시대는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나라가 망하고 동배들이 흩어져 그의 시도 더이상 독자가 없어 본인한테 쓰는 "외로운 시"가 된 것이다. 륙유의 시는 그야말로 완벽한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특히 그가 세상뜨기전에 지은 "시아(示兒)"시는 중화 천추 시역사의 위대한 편장으로서 전체 세계문학사에서도 보기드문 명작이다. 륙유가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는 여부에 대해서는 물론 단도직입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없지만 그의 빛나는 재능과 위대한 애국심은 우리가 지극히 탄복하는 바이다. 중국 당나라(唐朝)시기는 중국 고대시가발전의 전성기였습니다. 중국의 문학사에서 사람들은 흔히 이씨와 두씨로 당나라시가의 최고성과의 대표자로 됩니다. 이는 바로 세계적으로 이름난 이백(李白)이고 두는 시성
580    [시문학소사전] - 모더니즘시란? 댓글:  조회:4585  추천:0  2016-11-06
먼저 경향시란 경향시란 사회주의 사상에 많이 기울어진 시란 뜻입니다. 6.25전쟁으로 인하여 우리 민족에게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는 우리에게 악마의 사상으로 깊이 각인 되어 있지요. 그러나 그 당시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적 지배와 지주와 소작인과의 갈등 등을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사상으로서 지식인들에게 크게 어필했던 사상이었습니다. 억압된 지배구조와 부의 불평등 등을 투쟁에 의하여 해결하려는 사상인 만큼 좀 거칠었지요. 그러나 민족 문학의 큰 시각에서 보면 계급 문학의 시들도 일정한 의미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즉, 경향파 시들의 언어는 매우 거칠지만 시의 형상화 영역을 넓힌 점만은 인정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시가 개인의 정서와 함께 사회 사상을 반영하고 계급적 성격도 그려낼 수 있다는 새로운 영역을 발견한 것이죠.  경향시(목적시) : 특정한 이념이나 목적을 뚜렷이 나타낸 시. 우리나라 경향파,프로문학파의 시들이 이에 속한다. 카프파, 동반자 계통의 시인들의 시로, 사회주의적 경향을 뜻함 경향시 - 계급문학, 프로문학, 신경향파문학(KAPF) 두번째 순수시란 순수시(純粹詩, pure poetry)...  맨 처음의 사용은 프랑스의 상징주의자들이 했습니다. '순수한 소리의 음악적 암시적 효과만이 있는 시' 이자 ' 산문성을 배제하는 시' 입니다. 하지만 시도 언어의 일종이기 때문에 그들이 정의내리는 진정한 '순수시'는 이상에 불구하지요. 더 크게 표현한다면 '오직 서정만을 추구하는 시' 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30년대에 시문학파가 등장하면서 순수시가 시작되었는데요. 대표적인 인물으로는 박용철, 김영랑, 정지용 등이 있습니다. 또한 도 시가 목적적이 되가는것에 반하여 예술성과 형식미를 중시했습니다. 그리고 1950년대에는 서정주, 박재삼, 이성교, 정완영 등의 시인이 전통적 순수시를 계승, 발전 시켰습니다. 순수시는 언어미가 있어야하며 세련된 기교가 사용되구요, 언어의 선택이 매우 엄격하였습니다. 언어의 선택은 특히 김영랑 시인의 시에서 두드러지게 보여지고 있습니다. 또한 공감각적 기법을 사용하여 시의 미적 가치를 높이고 있습니다. 세번째 모더니즘시 원래 '모더니즘'이란 철학, 미술, 문학 등에서 과거의 모든 전통주의에 대립하여 급진적인 변화를 추구했던, 주로 현대의 도시 문명을 비판한 주관적인 예술 경향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말입니다. 넓은 의미의 '모더니즘'은 다다이즘,초현실주의,입체파, 미래파와 영,미를 중심으로 한 주지주의와 이미지즘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그 가운데 우리 나라의 모더니즘과 관련해서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주지주의'와 '이미지즘'이므로, 우리 시문단에서 '모더니즘'이라고 하면 '주지주의 시'와 '이미지즘 시'를 가리킨다고 보면 됩니다. 여기에 '이상'의 시에서 보여지는 '초현실주의'의 시도 포함할 수 있지요. 시에 있어서 감정적인 것을 강조하는 시를 '주정시'라고 하는데, 이에 대립하여 감정보다 지성을 중시하는 시의 경향을 '주지주의'라고 합니다. '이미지즘'은 1차 대전 말기 영, 미의 시인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시 운동을 일컫는 말로써, 사물을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명확한 심상을 제시하고자 했던 문학 운동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들은 시에 있어서 특히 회화성(명확한 시각적 이미지)과, 정확한 일상 언어 사용 등을 강조했습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 이들 이미지즘 시인들이 보여 준 독보적인 경지는 문학사적으로 의의가 크지만, 이들은 너무 기교적인 측면에만 치우쳐 내용의 깊이를 보여 주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합니다. '초현실주의'란 정신 분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이성의 속박에서 벗어나 비합리적인 것이나 의식 속에 숨어 있는 비현실의 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던 문예사조를 말합니다. 우리나라 시 문학의 경우 '이상'이 그 대표적인 작가입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우리나라 시문학에서 '모더니즘'이라고 하면 '이미지즘'과 '주지주의','초현실주의'를 함께 가리킨다고 보면 됩니다. 1930년대의 시에서 이러한 '모더니즘'계열의 시를 많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처음 이 이론을 소개한 사람은 '최재서'로 알려져 있고, 그 후에 '김기림,김광균,장만영,장서언'등의 시인들에 의해서, 이러한 지성과 이미지를 강조하는 시가 많이 쓰여졌습니다.  '이상'의 경우는 다다이즘이나 초현실주의적인 경향의 새로운 시를 선보이기도 했는데, 넓은 의미로는 이도 '모더니즘'에 포함됩니다. 한 마디로 '모더니즘'은 과거의 전통적인 사상,형식, 문체를 벗어나 지성과 이미지를 중시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회화적이고 감각적이며 말 그대로 현대적인 것을 강조했던 급진적인 시의 유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작가로는 '김광균'을 들 수 있고, 그 외에 '김기림,장만영,장서언,정지용(초기),이상'과 같은 시인들을 거론할 수 있습니다. 작품으로는 김광균의 '와사등,추일서정, 데생,외인촌....' 정지용의 초기시 '향수,카페 프랑스,유리창',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 '태양의 풍속', 이상의 '거울,오감도, 장만영의 '달 포도 잎사귀'같은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네번째 저항시 저항시는 배경 일제말 까지 소위 암흑기에 일제에 대한 저항의지를 승화한 시를 지칭함 현실에 대한 철저한 내면적 인식과 미래에 대한 전망을 구도자 내지 예언자적인  자세로 표현하여 정신적이 시의 영역을 구축함  1920연대의 한용운, 김소월, 이상화의 시적 전통을 이어받음  다섯번째 참여시 현실참여시는 부조리한 현실을 비판하고 고발하는 시로, 많이 창작되었으며 대표 시인에는 김수영, 신동엽, 고은, 김지하 등이 있다. 1970년에 들어 현실참여시는 더욱 암담해진 정치 상황에 더 적극적으로 저항하면서 민중시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여섯번째 민중시 민중시는 참여시가 더 적극적으로 바뀌면서 생겼다고 보면 된다.  
579    [시문학소사전] - 모더니즘이란? 댓글:  조회:5080  추천:0  2016-11-06
상징주의·초현실주의·입체파·소용돌이파 등의 총칭이다. 모더니즘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초에 융성했던 사실주의·자연주의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영미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작가들로는 에즈라 파운드, W. 루이스, D.H. 로렌스, T.S. 엘리엇 등이 있다. 1908~14년에는 소설가와 시인들이 바로 이전 시대뿐 아니라 낭만주의 이후 전체 시기의 문학전통에 도전하는 혁신과 실험의 주목할 만한 생산적인 시기였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모더니즘 운동은 첫 번째 시기의 종말을 고한다. 과격하고 유토피아적인 충동이 소멸되지는 않았으나 영미의 모더니스트들은 그들의 이상과 현시대의 혼돈 사이의 간극을 자각하게 되었다. 로렌스와 엘리엇의 엘리트주의·온정주의와는 달리 파운드와 루이스는 극단적인 정치적 입장을 나타냈다.   이를테면 상징주의·초현실주의·입체파·소용돌이파 등을 총칭하여 이르는 말이다. 모더니즘은 더 직접적으로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초에 융성했던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다. 사실주의와 자연주의는 19세기의 유물론적 경향과 관련이 깊은데 모더니즘은 그러한 세계관은 물론, 일체의 물질주의와 산업주의를 개인정신의 부자유로 해석하고 배격했다. 모더니즘이란 용어는 서양 어디에서나 널리 쓰이는 명칭이라기보다는 무엇보다도 영미 비평계에 치우친 명칭이다. 유사한 문예사조가 독일에서는 흔히 '전위주의'(Avantgardismus)로 칭해지는데, 이것이 영어로 '모더니즘'이라 번역되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20세기초 모더니즘 운동의 기원에 해당하는 상징주의 예술이 일찍이 19세기부터 자리잡았기 때문에 모더니즘이라는 애매한 명칭이 잘 사용되지 않았다. 영미계통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작가들로는 에즈라 파운드, W. 루이스, D.H. 로렌스, T.S. 엘리엇 등을 들 수 있다. 1908~14년에는 소설가와 시인들이 바로 이전 시대뿐 아니라 낭만주의 이후 전체 시기의 문학전통에 도전하는 혁신과 실험의 주목할 만한 생산적인 시기였다. 그 중심무대의 하나가 런던이었고 그 주도적인 인물이 에즈라 파운드였다. 인류학·심리학·철학·정치이론과 정신분석의 새로운 사상들에 자극을 받은 과격하고 유토피아적인 모더니즘 운동은 무엇보다도 영국과 미국의 '이미지스트'들이 주도했다. 낡은 시적 전통에 대항하여 이미지스트들은 목가적인 정감이나 제국주의적인 수사법이 아니라 정확한 기술(description)과 심상(心像)의 환기를 가능하게 하는 시적 언어를 정련하려고 했다. 이러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그들은 자유시와 비정형시를 사용했으며, 이미지를 가장 중요한 도구로 삼았다. 화가이자 작가인 W. 루이스의 '소용돌이'라는 기치 아래 모인 화가들과 조각가들은 입체파의 추상기법과 그들의 그림·조각·문학에 자동차와 비행기 같은 현대적 산물들의 새로운 감각을 담고 있는 이탈리아 미래파들의 기법을 결합시켰다. 그 잡지명부터 눈길을 끄는 〈돌풍 : 위대한 영국의 소용돌이 평론 Blast : Review of the Great English Vortex〉은 소용돌이파의 대변지였으며 그 편집자인 루이스가 가장 적극적인 선전자이자 대표자였다. 1914년 〈돌풍〉에 게재된 그의 실험희곡 〈별들의 적 Enemy of the Stars〉과 실험소설 〈타 Tarr〉는 넘쳐 흐르는 충일감으로 현재까지도 그 여파가 생생히 남아 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모더니즘 운동의 첫번째 시기는 종말을 고한다. 과격하고 유토피아적인 충동이 소멸되지는 않았으나 영미의 모더니스트들은 그들의 이상과 현시대의 혼돈 사이의 간극을 너무도 명백히 자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소설가와 시인들은 그들이 볼 때 전쟁의 엄청난 참화와 공포로 인해 무용지물이 된 전래의 형식과 문체를 패러디화하게 되었는데, D.H. 로렌스와 T.S. 엘리엇이 그 대표자들이다. 혁신적인 소설 〈무지개 The Rainbow〉(1915)와 〈사랑하는 여인들 Women in Love〉(1920)에서 D.H. 로렌스는 대량학살에만 골몰하고 있는 현대문명의 질병의 원인을 산업화가 인간정신에 미친 영향에서 찾고 있다. 전래의 소설전통을 배격하고 노동자계급의 생활을 그린 자전적인 소설 〈아들과 연인 Sons and Lovers〉(1913)에서 그는 신화와 상징에 주목하면서 개인과 집단의 재탄생이 인간적 노력과 정열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유지한다. 시인이자 극작가인 T.S. 엘리엇은 그의 매우 혁명적인 시 〈프루프록과 그밖의 묘사 Prufrock and Other Observations〉(1917)·〈황무지 The Waste Land〉 등에서 현대문명의 질곡을 정신적 공허함과 현대적 삶의 소외에서 추적했다. D.H. 로렌스와 마찬가지로 T.S. 엘리엇은 종래의 시 전통을 배격하고 신화와 상징에 주목했다. 그러나 자기포기와 자기극기에 의해서만 개인과 집단의 재탄생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점에서 로렌스와 판이한 견해를 표명했다. 로렌스와 엘리엇의 엘리트주의 및 온정주의와는 달리 E. 파운드(1920년 영국을 떠나 1925년 이탈리아에 영구적으로 정착함)와 루이스는 극단적인 정치적 입장을 나타냈다. 두 사람은 민주주의를 위선적인 것으로 격하시키면서 경제적·이념적 조작이 현대사회의 결정적 요소라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해 일부 학자들은 영미 모더니스트들의 이러한 반민주적 관점이 모더니즘 운동의 초기부터 내재해 있었던 반동적 성향들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간주했다. 또다른 견해에 의하면 그러한 관점은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해 야기된 비극적인 균형상실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므로 E. 파운드의 야심적이긴 하지만 엄청나게 난해한 심상서사시 〈칸토스 The Cantos〉(1917~70)와 루이스의 정치·신학 소설 〈인간의 시대 The Human Age〉의 문학적 공로에 대한 평가와 그 정치적 위상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밖에 없다. 한국의 모더니즘 전통적인 권위와 도덕을 반대하고 현대 기계문명과 도시감각을 중시하는 사상적·예술적 사조로서, 한국에서는 모더니즘을 주지주의라는 개념으로 한정시키기도 한다(→ 한국문학). 그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1930년대초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쇠퇴하고 일제의 군국주의가 노골적으로 등장하면서 김기림·이양하·최재서 등이 영미 모더니즘 이론을 도입했다. 먼저 김기림은 시의 낭만주의적 성격을 배제하고 시의 음률과 의식성을 강조했다. 그는 평론 〈시의 기술·인식·현실 등 제문제〉(조선일보, 1931. 2. 11~14)·〈시작에 있어서의 주지주의적 태도〉(신동아, 1933. 4)·〈오전의 시론〉(조선일보, 1935. 4. 20~5. 2) 등을 발표해 영미 주지주의 이론을 바탕으로 과거의 한국시를 자연발생적인 센티멘털리즘이라고 비판하고 시에 있어서 현대문명의 비판과 시각적 회화성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또한 이양하는 〈조선현대시 연구〉(조선일보, 1935. 10. 4~17)에서 리처즈의 주지주의 이론을 소개했고, 리처즈의 저서 〈시와 과학〉(1946)을 번역해 단행본으로 펴냈다. 김기림과 이양하가 시론을 전개한 반면, 최재서는 산문 분야에서 모더니즘 이론을 펼쳤다. 그는 〈현대 주지주의 문학이론의 건설〉(조선일보, 1934. 8. 7~12)·〈비평과 과학〉(조선일보, 1934. 8. 31~9. 5)에서 T.E. 흄의 불연속적 실재관을 바탕으로 낭만주의의 극복과 신고전주의 이론을 내세웠다. 이와 같은 이론을 바탕으로 시인 김기림·정지용·김광균·장만영 등과 소설가 이상(李箱) 등이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이어 1949년을 전후해 모더니즘 운동이 다시 일어났는데, 김경린·김수영·박인환 등의 '후반기 동인'들이 모더니즘 시이론에 입각한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1949)을 펴냈다. 이들은 당시 한국문단에 유행하던 주정적인 시풍을 반대하고 제재를 현대도시와 기계문명에서 택했으며 이미지와 관념의 조화를 중시했다. 1950년대 후반에 와서는 1920년대의 영미 모더니즘 이론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모더니즘이 새롭게 발전하게 되었다. 송욱의 비순수와 문명의 표정, 김춘수의 현실의식과 존재론적 이미지, 전봉건의 초현실적 발상과 전쟁 이미지, 김종삼의 음악적 이미지, 김광림의 주지적 서정 등으로 나타났다. =====================================   개설 근대 미술가들의 방법, 양식 또는 태도, 특히 미술가들이 의식적으로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표현방식과 결별한 회화 양식을 가리킨다. 대체로 1860년대 프랑스 회화에서 시작하여 한 세기 후의 미국 추상표현주의에서 정점에 달한 미술양식을 가리킨다. 모던 아트의 이념적 토대이지만 모던 아트와 모더니즘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연원 및 변천 모더니즘에 대해 가장 활발한 논의를 전개한 영국 오픈 대학교(Open University)의 미술사 교수 찰스 해리슨(Charles Harrison)은 서양미술사에서 사용되는 모더니즘의 의미를 3가지로 구분한다. 첫 번째 의미의 모더니즘은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중엽까지 서구 문화, 즉 산업화와 도시화의 과정이 인간 경험의 주요 메커니즘으로 간주된 문화의 두드러진 특징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의 모더니즘은 일정한 정치, 경제, 기술적 변화로 나타난 환경과 그러한 환경에 대한 일련의 태도로 간주된다. 따라서 이 모더니즘은 형용사 ‘모던’의 명사형이며 그것이 나타내는 조건은 모더니티(modernity)에 대한 경험과 동일시된다. 모더니티를 문학과 예술과 관련해 처음 사용한 보들레르는 1863년 『르 피가로 Le Figaro』에 발표한 「근대적 삶의 화가 The Painter of Modern Life」에서 과거와의 차이의 감각을 기술하기 위해 모더니티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그것을 “일시적인 것, 덧없는 것, 순간적인 것으로서 예술의 반을 차지하고 나머지 반은 영원한 것과 불변적인 것이다.”라고 정의한 바 있다. 두 번째 의미의 모더니즘은 근대 문화 중에서 지배적인 경향을 구분해내려는 의도로 사용된다. 이는 동시대 문화의 살아있는 중요한 측면에 대한 가치판단을 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의 모더니즘은 특히 고급미술에서의 근대의 전통을, 그리고 진정한 근대미술이 고전적, 보수적 유형의 미술뿐만 아니라 대중문화와 구분되는 토대를 가리킨다. 이러한 모더니즘의 대표적 옹호자가 미국의 비평가인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이다. 1939년에 출판된 그의 글 「아방가르드와 키치 Avant-Garde and Kitsch」에서 아방가르드의 진정하고 가장 중요한 역할은 문화를 진전시키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모더니즘의 동력을 아방가르드 실천과 연계시켰다. 그리고 키치와 대립되는 “아방가르드가 절대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추상 내지 비대상 미술에 도달했다”고 함으로써 모더니즘과 추상미술의 관계를 정당화하였다. 이 모더니즘이 의미하는 바는 만연한 모더니티라는 조건에 직면하여 주어진 매체 내에서 비판적으로 성취된 미적 기준이다. 이때의 모더니즘의 형용사는 ‘모던’이 아니라 ‘모더니스트(modernist)’이다. 따라서 어떤 회화작품을 '모더니스트'하다고 하는 것은 회화 매체의 요구, 즉 평면성에 대한 자기 비판적 관심을 드러냈다는 의미가 된다. 그린버그에 따르면, 평면성, 이차원성은 다른 어떤 예술도 갖지 못한 회화만의 유일한 조건이며, 평면성이 회화의 유일한 성취의 영역으로 확인된 이상 캔버스 표면에 대한 솔직한 인정은 자기비판적인 모더니스트 회화가 유념해야 할 조건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세 번째 의미의 모더니즘은 두 번째 용법의 모더니즘이 나타내는 예술적 경향이 아니라 용법 그 자체, 즉 그 용법이 대표한다고 생각되는 비평의 경향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모더니스트는 미술가가 아니라 미술과 그 발전에 대한 일련의 특수한 생각과 신념을 갖고 판단을 내리는 그린버그와 같은 비평가이다. 이런 의미로 사용되는 모더니즘은 흔히 대문자(Modernism)로 표기된다. 모더니스트 비평의 전통은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나타나 모리스 드니(Maurice Denis)의 저서에서 처음으로 구체화되었고 20세기 초 영국에서 클라이브 벨(Clive Bell), 로저 프라이(Roger Fry) 등에 의해 발전되어 1930년대 말과 1960년대의 그린버그와 마이클 프리드(Michael Fried)의 저서에서 그 전형적 모습을 선보였다. 내용 한국 미술계에서 서구 모더니즘의 이론적 토대로 언급되는 보들레르의 미학에 대한 관심은 이미 1910년대부터 나타난 것으로 보이고 1920년대에는 다양한 잡지나 일본의 화집을 통해 서양의 모더니즘 미술에 대한 소개가 이루어져 후기인상주의, 야수주의, 표현주의, 미래주의 등과 같은 서양의 모더니즘 미술이 어느 정도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모더니즘이라는 용어의 구체적 사용은 1931년부터 나타났다. 구체적으로 식민지 현실에 대한 인식과 그 예술적 대응방식으로 나온 다양한 미술이론, 즉 예술과 정치의 관계를 강조한 프롤레타리아 미술론과 기교미만을 추구한 과거의 미술을 지양하고 새로운 형식과 내용의 결합을 필요성 강조한 무정부주의 미술이론 그리고 관념적 동양의 이상향을 노래한 ‘아세아주의’ 미술론 등이 대립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모더니즘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였다. 특히 식민지 현실에 대한 고민과 민족의식을 담아내고 정체성의 문제를 탐구할 계기를 제공하여 동시대 많은 미술가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던 향토색론은 1930년대 한국미술의 근대성을 이루는 한 요소이자 동시에 민족적 성격을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서구와는 다른 한국 모더니즘의 한 특색을 이루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미술에 있어서 모더니즘 개념 형성에 영향을 미친 것은 일본 미술계의 동향에 대한 정보만이 아니라 30년대 문인들과의 교류도 적지 않은 역할을 담당했다. 그 이유는 구인회 중심의 모더니즘 문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에 미술계에서도 모더니즘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고, 구인회 소속 문인들이 현대미술을 통해 예술적 영감을 얻고 근대성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기교주의에 치우친 경향을 문명비판으로 균형을 잡으려 했던 김기림의 모더니즘론이 예술의 존재의의를 예술적 감흥과 윤택하고 새로운 생활의 결합, 즉 예술과 윤리의 결합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 김복진의 미술이론과 유사한 점이 문학과 미술의 활발한 교류를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둘 사이의 유사성을 영향관계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하더라도 이념적 대립과 견제가 서로를 영향권 내에 잡아두고 긴장된 균형관계를 유지하게 하는 역할을 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러나 1930년대 말에 이르러 모더니즘이라는 개념에는 30년대 전반의 긴장된 균형 감각이 사라지고 단지 양식의 하나라는 의미만이 남는다. 결국 1930년대에 한국 미술계에 등장한 ‘모더니즘’ 개념은 초기 그 문명비판의 가능성이 싹을 피우기도 전에 일본 식민지 권력의 개입으로 지극히 협소한 의미만 남긴 채 위축되어 버렸다고 하겠다. 한국 미술계에서 ‘모더니즘’ 미술이 예술성 일변도로 전개된 연유를 바로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김환기(金煥基), 구본웅(具本雄), 주경(朱慶), 한묵(韓默), 이중섭(李仲燮), 정규(鄭圭), 이규상(李揆祥), 남관(南寬), 유영국(劉永國), 이준(李俊), 박고석(朴古石), 이봉상(李鳳商), 문신(文信) 등 한국 근대미술을 이끈 미술가들은 새로운 조형어법의 확립에 치우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해방 이후 한국 모더니즘 이론을 확립한 이일은 그린버그의 모더니즘 이론에 큰 영향을 받고 있었지만, 동시에 한국 추상미술을 동양의 전통과 연계시켜 서구의 모더니즘과의 차별화를 시도하였다. 이일은 자신의 이러한 모노크롬 회화론을 권영우(權寧禹), 김구림(金丘林), 김용익(金容翼), 박서보(朴栖甫), 심문섭(沈文燮), 윤형근(尹亨根), 이동엽(李東燁) 등의 작품분석에 적용하며 70년대 한국 미술비평계를 풍미하였다. 특히 그는 한국 모노크롬 회화를 서구 미니멀리즘과 차별화하기 위해 독자적인 우리의 자연관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 환원적 요소를 부각시켰다. 첫 번째 요소는 그린버그가 제시한 평면성이라는 회화의 전제조건인데, 이일은 “‘평면으로서의 회화’, 다시 말해서 회화가 스스로에로 환원된 평면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평면의 회화적 텍스츄어화가 전제되어야” 하며, ‘평면의 회화적 텍스츄어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색채 또는 형상(선, 형태)이 화면 전체를 메우든 아니든 그것들이 어떤 ‘추가물’이 아니라 그 색채와 형상이 캔버스와 꼭 같은 차원에서의 그리고 그 속에 통합된 실재성”을 누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두 번째 요소는 그러한 ‘회화적 텍스츄어화’를 위한 예술행위의 환원인데, 그는 그것을 “자연을 닮은 원천적인, 다시 말해서 자연무위의 행위”로 풀이하였다. 이일은 이 자연무위의 행위가 곧 원천적인 것에로의 회귀와 본연적인 것에로의 회귀를 의미하며 이것은 시대를 관통하는 우리나라 미술의 기본명제라고 함으로써 모더니즘 개념에 전통을 접목시켰다. 여기서 전통과의 결별내지 저항을 기치로 내걸은 서구의 모더니즘과는 다른 한국 모더니즘의 또 다른 특수성이 나타났다. 의의와 평가 한국미술의 근대가 서양미술의 도입과 수용에서 시작되었고 그 과정도 단편적이고 즉흥적으로 이루어졌으나 다양한 그룹과 개인의 창작 활동을 통해 한국미술계는 서구 모더니즘과 한국의 전통을 접목시킨 독자적 모더니즘 미술을 잉태했다.    
578    [시문학소사전] -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댓글:  조회:5256  추천:0  2016-11-06
포스트모더니즘(영어: postmodernism, post- 뒤의 또는 반대의, modernism 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이성보다 감성을 중시하는 하나의 사상이다. 2차 세계대전 및 여성운동, 학생운동, 흑인민권운동과 구조주의 이후에 일어난 해체현상의 영향을 받았다. 탈중심 사고, 탈이성적 사고가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큰 특징으로 1960년대 미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리오타르, 푸코 등이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용어 자체가 역사학적 구분에서의 근현대에 스쳐간 수많은 것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학자, 지식인, 역사가 사이에서 그 정의를 두고 극한 논쟁이 일고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포스트모던적 생각이 철학, 예술, 비판 이론, 문학, 건축, 디자인, 마케팅/비지니스, 역사해석,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에는 대부분 동의한다. 포스트모더니티(Postmodernity)는 포스트모더니즘과는 구분되는 용어로 사용되며, 포스트모더니즘이 발생한 시기의 사회·문화의 접변 현상만을 가리킨다. =========================================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은 현재 두 가지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 하나는 20세기 후반 다양한 분야에서 등장한 새로운 예술 사조를 지칭하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합리성에 기반한 근대적 사유를 비판하면서 그에 대한 대립항으로 등장한 사상적 흐름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둘은 모두 근대성에 대한 반성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지만, 구체적인 맥락에서는 매우 다른 양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래서 이 둘을 구분하기 위해, 예술적 경향에 대해서는 주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사상적 경향에 대해서는 이 용어를 피하여 탈근대적(혹은 탈현대적) 사유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포스트’라는 접두어는 ‘후기’나 ‘탈’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후기’라는 말에서는 연속성이 강조되고 ‘탈’이라는 접두어에서는 단절이 강조되는데, 포스트라는 접두어는 이 두 가지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단절이라 하더라도 전혀 상관없는 단절이 아니라, 단절하고자 하는 대상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예를 들어, 포스트구조주의보다는 후기구조주의라는 번역어가 좀더 우세했고, 포스트식민주의보다는 탈식민주의라는 번역어가 널리 쓰이고 있다. 어느 쪽이건 포스트라는 접두어는 연속과 단절의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셈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다.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은 건축과 미술, 문학 등에서 매우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고 있어 한마디로 개념화하기는 어렵다. 이런 어려움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단절의 모델로 삼고 있는 모더니즘의 정신 자체가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구현되고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하지만 미적 감각으로서의 모더니즘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정리될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현재 한국의 가구 시장은 가구를 두 가지 장르로 구분한다. 앤티크와 모던. 앤티크는 조각이나 장식이 많고 풍성한 느낌을 주는 가구를, 모던은 단순하고 기능성이 강조된 현대적인 느낌을 주는 가구를 지칭한다. 앤티크 가구는 부잣집의 넓은 거실에 어울리고, 모던 가구는 지적이고 세련된 지식인의 작업실에 적당하다. 범박하게 보아, 모더니즘 예술에서 강조되는 것도 이처럼 지적이고 세련된 느낌이다. 하지만 같은 모더니즘이라고 해도, 문학과 회화 같은 비기능적인 예술과 건축 같은 기능적인 예술에서는 조금 상이한 형태로 드러난다. 문학의 경우 모더니즘은 19세기에 절정을 이룬 리얼리즘에 대한 대립항으로 출현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세계에 대한 객관적 재현 가능성에 대한 회의이다. 리얼리즘 문학에서 중요한 것은 작품을 통해 세계의 모습을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되살려내는 것임에 비해, 모더니즘에서는 세계에 대한 주관적인 느낌을 표현하는 것이 관건이 된다. 예를 들어 카프카의 소설에서 펼쳐지는 세계는 객관적으로 보아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하지만 주관적인 측면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카프카의 소설에서처럼 사람이 벌레가 되는 일이란 리얼리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있을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는 종종 자신이 벌레가 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또 리얼리즘의 세계에서 작가는 세계를 재현하는 투명한 존재로서 작품의 배후에 숨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모더니즘의 세계에서는 작품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 그것 또한 만들어진 세계라는 것을 감추지 않는다. 작가는 재현하는 사람이 아니라 표현하는 사람이므로 숨어 있을 이유가 없다. 이러한 점은 회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진의 등장 이후로 캔버스 위에 대상을 정밀하게 재현해내는 것은 훨씬 덜 중요한 것이 되었고, 19세기 말의 인상주의자들처럼 대상으로부터 받은 느낌을 되살려내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자연스럽게 샤갈 등의 초현실주의 회화나 피카소의 큐비즘,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비구상회화로 이어진다. 눈과 입이 따로 놀고 있고, 얼굴과 몸이 서로 다른 각도에서 포착된 피카소의 그림을 떠올려보자. 미술사가 곰브리치의 생각은 이렇다. 우리 시각은 두 눈이 하나의 초점을 만드는 것에 의해 형성된다. 그 초점이 이동하면서 대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그 결과로 사진으로 찍은 것 같은 대상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진과 같은 형태의 그림이란 일종의 환상이고, 대상들의 세부가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피카소풍의 그림이야말로 우리 시각의 진실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더니즘 예술이 강조하는 것은 단순한 객관성을 넘어선 주관성의 강렬함이다. 그래서 균형 잡힌 아름다움 같은 고전적인 미적 기준은 여기에서 추방되고, 그것을 대신하여 미적 경험의 강렬함과 독창성, 정신성, 충격 경험 같은 것들이 새로운 기준으로 들어선다. 20세기 전반기에 등장했던 다양한 전위예술과 실험예술이 추구하고자 했던 것도 그와 같은 것들이었다. 남성용 소변기를 뒤집어놓고 〈샘〉이라고 이름 붙였던 1917년의 마르셀 뒤샹이 대표적인 예이다. 아름다움이라는 전통적 미의 기준은 그들에 의해 독창성과 새로움이라는 새로운 기준으로 대체된다. 하지만 건축과 같은 실용적 예술에서는 모더니즘의 정신이 이와는 다른 양상과 형태로 드러난다. 모더니즘 건축은 장식성을 배제하고 기능성을 강조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건물이 지니고 있는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건축비를 아낄 수 있는 이런 양식의 건축은 20세기 초반 이후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국제주의 건축이라 불린다. 서울에서도 도심 한복판에서 볼 수 있는 대형 콘크리트 건물의 태반이 이와 같은 양식들이고, 1970년대 이후 한국에서 대량으로 지어진 주거용 아파트 건물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단순성을 강조하여 장식성을 배제하고 기능성을 극대화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지는 모더니즘 건축은, 건조하고 메마른 합리주의적 정신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문학과 회화에서 나타나는 모더니즘의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모두가 금욕주의적 정신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은 모더니즘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정신성에 대한 대립항으로서 20세기 후반에 등장했다. 건축 양식에서 모더니즘 양식이 배제해버렸던 장식적인 요소를 대폭 수용하여, 철골 구조물을 외부로 노출시키거나 우람한 아치와 기둥을 건물 내부로 삽입하는 식으로 건물에 비유와 수사를 도입했다. 비기능적인 예술에서도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정신은 모더니즘이 지니고 있던 정신성에 대한 과도한 강조와 고답성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모더니즘 회화와 문학은 예술성에 대한 과도한 강조로 인해 너무 어려워져 대중으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했다. 전문적인 비평가의 도움 없이는 접근하기 어려운 난해한 것이 되어버렸다는 점이 문제였다. 독창성에 대한 과도한 추구가 예술을 닫힌 공간으로 끌고 가버린 셈이다. 모더니즘 예술이 지닌 이러한 한계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정신이다. 앤디 워홀과 로이 리히텐슈타인 같은 예술가들에 의해 창안된 팝아트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은 대중영화 스타들의 얼굴이나 만화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차용하여 새로운 시각예술의 영역을 개척했다. 독창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들을 변형하고 그 배치를 바꿈으로써 새로움을 획득하고자 했던 것이다. ///////////////////////////////////////     한국 현대시의 흐름 흐름 유파 잡지 주요작가 특징 낭만시 백조파 백조ㆍ폐허(1922) 이상화, 홍사용 감상적 낭만주의, 주관적 정열과 격정 경향시 신경향파 개벽(1923) 박영희, 김기진, 임화 정치적 목적성 강조 순수시 시문학파 시문학(1930) 김영랑, 박용철 순수성 강조, 세련된 언어와 기교 주지시 모더니즘 삼사문학(1935) 김광균, 장만영 이미지와 지성 중시 생명파시 생명파 시인부락(1936) 서정주, 유치환 생명의식과 앙양과 인간탐구 청록파시 청록파 문장(1939)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 자연과의 교감, 자연귀의      
577    [려행] - 중국 內 대불 모음 댓글:  조회:6250  추천:0  2016-11-06
  연운강 윤산대불- 강소성 연운강시 절강성 봉화시구- 미러대불 하남성 노산대불 안휘성 구화산 띠장보살 대동상 사천성 어메산- 푸현금상 하남성 삼야 해상 관음상 연태 남산대불 홍콩 운탐대불 사천성 운강대불 락산대불- 사천성 락산 링산대불-강소성 링산 멍산대불- 사천성 태원 [출처] 중국 12개 명소의 부천님 대불상|작성자 정선아중리랑   중국 연변 돈화(敦化) 정각사와 금정대불       "뛰어 봤자 내 손바닦 안이다???..."          중국 최대 비구니 사찰 ㅡ"정각사" 사찰앞에 약 5m정도의 좌불상  
576    山이 佛, 佛아 山 = 발등에 100여명이 올라설수 없다?... 있다!... 댓글:  조회:3983  추천:0  2016-11-06
낙산대불: 세계 최대의 불상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6월21일 08시48분   (사진설명: 아름다운 낙산대불) 개관: 세계 최대의 불상 낙산대불(樂山大佛)은 암벽을 통채로 잘라내서 새긴 마애석불로 균형적인 몸매에 숙연한 표정을 한 거대한 석상이다. 강가의 산에 조성된 대불은 그야말로 "산이 불이고 불이 산이다"라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낙산대불은 높이가 71m, 머리 너비 10m, 귀 길이 7m, 코 길이 5,6m, 눈썹 길이 6.6m, 너깨 너비 28m, 손가락 길이 8.3m에 달하고 너비 8.5m에 달하는 발등에는 백여명이 올라설수 있는 규모를 자랑한다. (사진설명: 강물과 대불) 역사: 릉운산(凌雲山) 기슭에서 민강(岷江)으로 합류되는 청의강(靑衣江)과 대도하(大渡河)강은 과거에 항상 홍수가 범람해 많은 배들이 이 곳에 이르면 침몰되어 피해가 심했다고 한다. 서기 713년의 당(唐)나라때 릉운사(凌雲寺) 스님 해통선사(海通禪師)가 세 갈래 강물의 홍수를 막기 위해 인력과 재력을 모아 물가의 산에 불상을 조각하기로 했다. 대불의 어깨까지 조각했을때 해통스님이 별세하게 되어 공사가 중단상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 해통스님의 제자가 공사를 계속했고 엄청난 공사비로 인해 현지 정부의 자금지원을 받았다. (사진설명: 가까이에서 본 대불) 대불이 무릎까지 조각되었을 때 자금지원을 하던 정부의 관리가 승진하는 바람에 공사는 다시 중단되었다가 새로운 지방관리가 취임하면서 다시 자금을 지원해 대불은 공사를 계속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90년이 지난 803년에 끝끝내 대불이 축조되어 산이 거대한 불상으로 탈바꿈된 낙산대불은 현재까지 1200여년동안 강가에 솟아 평안을 지키고 있다. 세계 최대의 대불이라는 월계관을 쓴 낙산대불은 1996년 12월 6일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으로 선정되어 에 등재되었다. (사진설명: 산과 대불) 주요명소: 뒤에 릉운산을 업고 민강과 대도하, 청의강을 밟고 선 대불은 미륵상이라 이름한다. 대불은 몸매가 고르고 비례가 균형적일뿐만 아니라 배수시설을 교묘하게 두어서 천여년의 오랜 세월동안 변함없이 한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산과 키를 나란히 하는 대불은 강물을 밟고 앉아서 두 손을 무릎위에 단정하게 올려 놓고 있다. 대불의 양쪽 절벽에는 16m 높이의 호법천왕이 조각되어 1불 2천왕의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구곡잔도) 절벽에는 수백여개의 불단이 조성되고 천여기의 불상이 조각되어 방대한 규모의 불교예술의 군락을 형성하고 있다. 대불의 왼쪽에는 500m 길이의 릉운잔도가 있고 오른쪽에는 당(唐)나라때 대불과 함께 조성한 예불의 통로 구곡(九曲)잔도가 있다. 암벽을 따라 꼬불꼬불 위로 올라가면서 조성된 구곡잔도는 대불과 같은 시기에 축조되었다. 잔도의 상단에는 회랑을 거느린 정자가 지어지고 잔도의 암벽에는 석각물이 즐비해 잔도는 석각예술의 보고이기도 하다. 가장 넓은 곳이 1.5m미만이고 가장 좁은 곳은 0.6m인 구곡잔도는 도합 217개 계단으로 조성되어 정상에서 구곡잔도를 따라 물가로 내려가면 대불의 발등에 이르게 된다. (사진설명: 릉운잔도의 일각) 1984년에 축조된 릉운잔도는 길이가 500m에 달하고 북쪽으로 대불과 연결되며 남쪽으로 벽진루(碧津樓)와 연결되어 있다. 대불의 오른쪽에 위치한 릉운잔도는 대불의 왼쪽에 조성된 구곡잔도와 함께 대불을 가까이할수 있는 좋은 통로이기도 하다. 대불이 조각된 후 당나라때 일명 대불각(大佛閣)이라는 이름의 누각을 지어 대불을 건물안에 공양하기도 했으며 송(宋)나라때에는 "릉운각(陵雲閣)"이라는 이름으로 건물을 개축하고 원(元)나라와 명(明)에도 대불 보호용 건물을 지었으나 세월속으로 사라져 오늘날은 건물의 모습을 찾아 볼수 없다. 위에서 내려다 보면 대불의 머리에 1051개에 달하는 소라모양의 상투가 줄지어 장관이다. 이런 상투는 바위를 조각해서 새긴 것이나 대불의 귀와 코는 나무로 조각한 것이다. (사진설명: 대불의 상투머리) 낙산대불은 교묘한 배수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대불의 두 귀와 뒷머리 부분에 쉽게 보이지 않는 배수시설을 만들어 오랜 세월동안의 비바람으로부터 대불을 효과적으로 보호하고 있다. 대불의 4층 상투와 9층 상투, 18층 상투에도 가로 배수구를 조성했고 옷 깃사이에도 다양하게 배수구를 두었으며 여러 갈래의 배수구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완벽한 배수효과를 보인다. 당나라때에는 미래불 미륵불(彌勒佛)이 성행해 낙산대불도 미륵불이다. 불교 경전에 의하면 미륵불이 나타나면 세상이 태평해진다고 한다. 무측천(武則天)은 자신이 미륵불이 태어난 것이라고 증명하고 남존여비의 고대 중국에서 최초의 여성황제로 등극했다. (사진설명: 옆에서 본 대불) 그로부터 당왕조시기 사람들은 더더욱 미륵불을 숭상하게 되었다. 또한 미륵불은 빛과 행복을 가져다 주는 미래불이기 때문에 홍수의 범람을 예방하기 위한 취지와도 일치되어 낙산대불을 미륵불로 정했다고 한다. 강 건너에서 대불이 위치한 산을 바라보면 마치 거대한 불이 누워있는 듯 오우산(烏尤山)과 릉운산, 동쪽의 절벽이 하나로 연결되어 불의 머리와 몸, 발모양으로 보인다. 1300m의 수불은 강물을 베개삼아 누워 있는데 오우산위에 지어진 정자와 나무들이 불의 눈썹과 이마, 코, 입술을 형상적으로 보여주고 릉운산은 가슴, 영보봉(靈寶峰)은 다리, 취일봉(就日峰)은 종아리와 흡사하다. (사진설명: 릉운사 일각) 대불의 뒷쪽, 릉운산 정상에는 릉운사가 자리한다. 천왕전과 대웅전, 장경루로 구성된 릉운사는 세 겹으로 된 사합원식 건물에 빨간 담과 푸른 기와를 자랑한다. 키 높은 고목이 둘러선 천왕전의 마당에는 명청(明淸) 두 조대에 걸쳐 사원을 개축한 과정을 적은 비석이 세워져 있고 건물 내부에는 미륵불 좌상이 공양되어 있다. 천왕전 뒤의 대웅전은 스님들이 법사를 진행하는 장소로 석가모니불이 공양되어 있는데 모양이 우아하고 표정이 장엄하다. 대웅전 뒤의 장경루는 1930년에 신축한 건물로써 구도와 외관으로부터 현대 건물의 흔적이 엿보인다. (사진설명: 산위의 절) 릉운탑이라고도 하는 영보탑은 릉운사 뒤의 영보봉 정상에 우뚝 솟아 있다. 당나라때 축조한 릉운탑은 사각형으로 된 벽돌탑으로 높이가 38m, 도합 13층으로 되어 있다. 탑의 내부에는 정상까지 등반이 가능한 계단이 꼬불꼬불하게 조성되고 층마다 창을 두어 채광도 하고 전망대로도 사용하게 했다. 영보탑 정상에 올라서면 남쪽으로는 장경루가 보이고 서쪽으로는 푸른 강물이 펼쳐져 장관이며 북쪽으로는 낙산시 전경이 한 눈에 안겨온다. 대불이 해상안전을 위한 축조물이라면 영보탑은 세 갈래의 강물이 합류하는 장소를 보여주는 등대역할을 하면서 이 곳이 물살이 급한 지역임으로 주의를 기한다는 메시지를 뱃사공들에게 전한다. (사진설명: 대불의 발가락) 키워드: 역사문화, 종교 위치와 교통: 낙산대불은 사천성 낙산(樂山, Leshan)시, 성도(成都, Chengdu)에서 북쪽으로 160km 거리에 위치, 성도 신남문(新南門) 터미널, 북문(北門), 서문(西門) 버스 터미널에서 낙산행 버스를 이용한다. 낙산에서 강가에 위치한 낙산대불을 보는데는 수로를 이용해야 된다. 낙산항에 하루에도 수십편씩 낙산대불을 오가는 선박이 있음으로 편리하게 낙산시와 대불을 오갈수 있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천불애) 계절: 봄과 가을 설명: 낙산대불과 가까운 청의강 왼쪽 기슭의 암벽에는 200여기의 석굴에 2,400여기의 불상이 조성되어 이름한 "천불애(千佛崖)"가 장관이다. 우아한 모양과 정교한 석각이 즐비해 낙산대불을 본 다음 천불애까지 보면 불교예술을 더 깊이 있게 볼수 있다. 번역/편집: 이선옥  중국국제방송  
575    [려행] - 러시아인 술 가장 많이 마신다? 아니다!... 댓글:  조회:5096  추천:0  2016-11-06
우리가 러시아에 관해 잘못 알고 있는 사실 7가지    1. 러시아인은 세계에서 술을 가장 많이 마신다.  러시아인은 술을 가장 많이 마시는 민족이라는 명성을 얻었죠. 그러나 널리 퍼진 이 같은 믿음과는 달리 알코올 소비 1위 국가는 리투아니아와 에스토니아, 프랑스, 체코 등 다른 많은 나라가 러시아를 앞서고 있어요.     2. 러시아에서는 공공장소에서 흡연할 수 있다.  자자, 거짓 자유에 현혹되지 마시길. 러시아는 공공장소에서 흡연을 금하는 반 흡연법을 2013년 6월 1일 발효했어요.     3. 러시아는 세계에서 휘발유 가격이 가장 낮은 국가다.  전혀 그렇지 않아요. 휘발유 가격이 가장 저렴한 국가 선두 순위에는 베네수엘라와 리비아, 사우디아라비아가 포진해 있어요. 러시아는 9위!    4. 러시아에서는 집회에 나가 “푸틴은 물러나라!” 라고 외치면 안 된다.  러시아에서 표현의 자유는 헌법으로 보장돼요. 나가서 원하는 만큼 소리치세요. 그런데 중요한 사항이 하나 있어요. 참여하는 운동이 대규모일 경우 집회나 피켓 시위를 조직할 때 의무적으로 해당 지자체에 공공 집회 주최 신고서를 제출해야 한데요.     5. 러시아는 사망률이 출생률보다 높은 나라다.  이러한 오해는 괜히 생긴 게 아닌데요. 1990년대 러시아에서는 인구가 현저히 줄고 90년대 내내 인구 감소를 기록했어요. 하지만 2014년 기준인구 자연증가율이 0.20%였다고 해요. 두 번째 아이부터 다자녀 가정 지원금을 지급하는 국가프로그램이 새로운 아이의 부모가 되기로 하는데 일조했겠죠?    6. 러시아 법에서 맥주는 무알코올 음료와 똑같이 취급한다.  아니에요. 러시아 법률은 운전자가 취기를 돌게 하는 모든 것의 섭취를 금지하고 있어요.     7. 러시아인들은 러시아의 유일한 토착 민족이다.     러시아는 영토 내 190개 이상의 민족이 거주하는 다민족국가에요. 다양한 민족들은 독립적인 사회를 구성하고 살고 자민족의 고유성과 전통을 소중히 간직해요. 러시아인 자신도 러시아 변방 지역에 가면 외국보다도 낯설고 이국적인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고 말할 정도라고 해요.     
574    [려행] - 중국 "유리 공중 화장실" 처음 눈을 뜨다... 댓글:  조회:4415  추천:0  2016-11-06
중국 유리 화장실 파란 지붕이 스옌호 유리 화장실[AFP=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김정은 기자 = 최근 유리로 된 관광명소 만들기에 공을 들이고 있는 중국에서 이번에는 '유리 화장실'이 등장했다. 유리 화장실 내부 [AFP=연합뉴스] 2일 영국 BBC 방송 등 외신에 따르면 중국 후난(湖南)성 창사(長沙) 스옌호 인근에 속이 일부 들여다보이는 유리 화장실이 문을 열었다. 유리 화장실 찾은 관광객들 [AFP=연합뉴스] 이 화장실에서는 건물 밖의 아름다운 숲은 물론 다른 사람들이 화장실을 이용하는 '전경'도 볼 수 있다고 BBC는 전했다. 유리 화장실 내부 [AFP=연합뉴스] 화장실 각 칸은 반투명 유리로 돼 있어 '일'을 보는 사람의 형체가 밖에서도 옆 칸에서도 보인다. 심지어 남녀 화장실을 가르는 벽도 반투명 유리로 돼 있다. 유리 화장실 내부 [AFP=연합뉴스] BBC는 전부 유리로 된 공중 화장실은 중국에서도 이곳이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유리 화장실 내부 [AFP=연합뉴스] 현지 언론은 개장일에 이곳을 찾은 사람들 가운데서는 감히 이 화장실을 이용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고 전했다.
573    조선어 새 규범; - 띄여쓰기 규범에 가장 큰 변동 있다... 댓글:  조회:4478  추천:0  2016-11-06
조선어 새 규범, 올해 12월 출범 실시 전망, 띄여쓰기 단어 단위로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11월2일 15시32분       조선어 새 규범이 올해 12월 출범, 실시될 예정이라고 규범집 집필을 맡은 김철준 연변대학 교수가  일전 본계에서 있은 료녕성소수민족언어문자양성반에서 토로하였다.  김철준교수는 조선어 새 규범집 출간은 중국조선어학회가 주관하고 연변대학 김영수, 김광수, 김철준 교수로 집필진을 구성했다고 소개했다. 김교수에 따르면 2015년 2월 15일 수정방안(초고)를 제정, 전국 조선어관련 전문인사들의 의견을 수렴했고 언론, 출판 업계를 통한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올해 6월 1일 규범원칙 수정 및 출판 안을 통과했다. 세 규범은 한국과 조선에서 공동 편찬중인 "겨례말큰사전"중 통과된 규범을 주체로 해 중국 조선어만의 색갈을 입혔다.  가장 큰 변동은 우리 말 띄여쓰기 규범이다. 기존 붙여쓰기에서 중국 조선어 띄여쓰기 규범을 단어를 단위로 띄여쓰기를 하는 원칙으로 바꾸었다. 례문: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 하고있다 - 하고 있다 부호 표기법과 발음법도 일정한 변화를 주었다. 학계에서 논란이 많은 외래어 표기법(토이기 - 터키 등), 중국 지명, 인명(심양 - 선양, 습근평 - 시진핑 등)은 일부 불합리한 부분만 수정한 외 큰 변화를 주지 않았다. 김철준 교수는 "남북의 공동 규범을 존중하는 원칙과 편의성, 중국 조선어 고유의 원칙성을 새 규범집 집필에 적용했다"며 11월말, 12월초에 첫 출간식을 할것임을 밝혔다. 료녕신문 김탁기자
572    [시문학소사전] - 트루베르 = 궁정 짝사랑 노래가수 댓글:  조회:4892  추천:0  2016-11-05
요약 11세기에서 14세기에 걸쳐 북부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서정시인이나 음악가들. trouveur라고도 씀. 목차 북프랑스 지방의 언어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프로방스 지방에서 활동했던 트루바두르와 대응된다. 이들은 트루바두르로부터 고도로 양식화된 주제와 운율을 차용했다. 이들이 사용한 수사법의 본질은 전통적인 주제와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이미 만들어져 있던 형식을 결합하는 데 있었다. 사람들은 시인의 독창성보다는 이러한 상투적인 문구에 대한 친숙함에서 더 즐거움을 얻었다. 이런 이유로 최후이자 가장 위대한 트루베르인 뤼트뵈프(1250~80 활동)는 가장 트루베르답지 않으면서 오늘날 매우 높은 평가를 받는 시인이 되었다. 십자군전쟁으로 인해 북부와 남부 프랑스 간의 교류가 촉진되고 장려되자 샤틀렌 드 쿠시나 코농 드 베튄과 같은 수많은 트루베르가 십자군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들은 트루바두르의 작품과는 명확히 구별되는 서정시를 발전시켰으며, 은유를 위한 은유의 난삽함을 높이 사지 않았다. 그들의 시는 때로는 풍자적이고 때로는(콜랭 무제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안락한 삶에서 얻는 기쁨을 노래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인 주제는 궁정 연애로, 다가갈 수 없는 귀부인에 대한 짝사랑의 감정을 읊고 있다. 그들의 서정시는 시인 혼자서나 종글뢰르 음악가의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들은 원래 봉건 궁정과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후원자를 찾아 여러 궁정을 돌아다녔지만, 그들이 지은 시가 귀족사회에서만 인기 있었던 것은 아니며 점차 중산층에서도 후원자를 찾게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트루베르 서정시 가운데 절반가량은 아라스에서 길드를 조직해 활동했던 시민 출신의 시인들이 남긴 것들이다. 트루베르의 상당수는 가스 브륄레(12세기말 활동)처럼 귀족 출신이었으며 티보 드 샹파뉴(1201~53)는 나바라 왕국의 왕이었지만, 뤼트뵈프를 위시한 다른 시인들은 비천한 계급 출신이었다(→ 종글뢰르). 이들의 노래는 단선율로 되어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노래를 불렀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고용된 악사나 민스트럴(음유시인)의 반주에 맞춰 노래했거나 민스트럴이 노래와 반주를 모두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반주의 형식도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전주곡과 후주곡, 간주곡의 형식을 취했음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그들이 사용한 음악형식은 아주 다양했다. 여러 가지 다양한 시적 범주들에 모두 맞는 것도 있었고 운문 형식과 관련된 것도 있었다. 이 형식은 다음과 같이 크게 4가지로 분류된다. 즉 교회의 연도처럼 짧은 문구를 여러 번 반복하는 형식, 후렴이 딸린 춤곡, 여러 쌍의 반복되는 행으로 된 노래, 반복하지 않고 시의 각 절에 각각 새로운 선율을 붙이는 노래 등이다. 한 연 안에 반복구가 들어가지 않는 노래로는 베르와 샹송이 있다. 그러나 샹송에서는 짧은 도입 부분을 반복하고 또 끝에 가서 서두부 일부를 다시 반복한다. 현재 남아 있는 트루베르의 음악에는 대부분 음조의 높이를 지시하는 표기는 되어 있으나 그 음조를 얼마나 지속해야 하는지, 어떻게 강약을 조절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시가 없다. 따라서 오늘날 이들의 음악을 연주할 때 곡조의 해석을 놓고 상당한 논쟁이 야기된다.
571    [시문학소사전] - "트루바두르" =새로운 시를 짓는 사람 댓글:  조회:5496  추천:0  2016-11-05
요약 11세기말에서 13세기말 사이에 번성힌 트루바두르는 새로운 시를 짓는 사람, 즉 새로운 운문을 찾아내 정교한 사랑의 서정시를 써내는 사람을 뜻한다. 이들의 노래에 붙여진 곡은 화성을 쓰지 않는 단선율로 되어 있었으며, 현재 남아 있는 중세 세속 음악의 주요한 부분을 이룬다. 이들은 여러 궁정에서 총애를 받았으므로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었고, 때로는 정치적인 문제에 관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은 그때까지 나온 어떤 작품보다도 뛰어나게 궁정의 귀부인들을 고상하고 예의바른 존재로 묘사한 데 있다. 이들의 시는 일찍이 번성했던 가장 훌륭한 문학 유파의 하나를 형성했으며, 그뒤에 나온 유럽의 모든 서정시에 영향을 주었다. 목차 트루바두르는 11세기말에서 13세기말 사이에 번성했다. 이들의 사회적 영향력은 중세 시의 역사에서 볼 때 유례 없는 것이었다. 여러 궁정에서 총애를 받았으므로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었고 때로는 정치적인 문제에 관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은 그때까지 나온 어떤 작품보다도 뛰어나게 궁정의 귀부인들을 고상하고 예의바른 존재로 묘사한 데 있다. 이들의 시는 일찍이 번성했던 가장 훌륭한 문학 유파의 하나를 형성했으며, 그뒤에 나온 유럽의 모든 서정시에 영향을 주었다. 트루바두르란 새로운 시를 짓는 사람, 즉 새로운 운문을 찾아내어 정교한 사랑의 서정시를 써내는 사람을 뜻한다. 이들의 작품은 상당수가 남아 있으며 '샹소니에'(노래책)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필사본으로 보존되어 있다. 이들이 작품을 쓸 때 지켰던 규칙은 〈사랑의 노래 Leys d'amors〉라는 책에 실려 있다. 이들이 자주 사용한 운문형식은 '칸소'로 결구가 붙은 5~6개의 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밖에도 후렴구가 있는 춤노래인 '당사' 또는 '발라다', 기사가 양치는 시골처녀에게 구애하는 이야기인 '파스토렐라', 사랑에 대해 2명의 시인이 토론을 벌이는 '죄 파르티' 또는 '데바', 야경꾼이 두 연인에게 해가 뜨고 있으며 언제 어느 때 질투심에 찬 남편이 들이닥칠지 모른다고 경고하는 내용인 '알바', 즉 '아침의 노래'가 있다. 그밖의 다른 형식들은 대개 연애 규칙이나 종교적·형이상학적·풍자적인 성격의 일을 놓고 2명 이상의 사람들 간에 오가는 서정적인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의 노래에 곡이 붙여졌는데 화성을 쓰지 않는 단선율로 되어 있었으며, 현재 남아 있는 중세 세속 음악의 주요한 부분을 이룬다. 300곡 미만의 선율들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 선율들은 매우 다양한 시에 붙여졌지만 일관된 양식을 보여주며 한때 생각되었던 것보다는 훨씬 다채롭다. 시의 곡조는 시인 자신이 직접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트루바두르였던 조프레 뤼델의 프로방스어로 된 〈생애 Vida〉에 의하면 '곡조는 좋았으나 가사는 보잘것없었던' 많은 노래들을 지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작가는 그 곡조들을 조프레가 만들었고 거기에 그의 탁월함이 있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많은 선율들을 시인들이 직접 만든 것은 아니었다. 최근에 밝혀진 기록에 따르면 랭보 드 바케라는 자신의 유명한 시 〈5월 초하루 Kalends maya〉를 몽페라(지금의 이탈리아 몬페라토)에서 비엘(12~13세기에 쓰인 5현으로 된 악기로 바이올린과 비슷함) 주자들이 연주했던 춤곡에 맞추어 지었다고 한다. 또한 트루바두르 노래 중 적어도 4곡은 라틴어 성가에서 직접 따온 것이다. 그밖에 몇 가지 선율도 그 선율이 붙여진 시와 형식적으로 약간 차이가 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다른 언어로 씌어진 시에 붙이려고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트루바두르의 많은 선율들은 프랑스와 독일의 노래들에서 그대로 따온 것들이었다. 또한 시에 붙일 목적으로 일부러 새로운 곡조를 만들었다 해도 시인이 자기보다 숙련된 악사들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대부분의 시에서는 그것을 쓴 시인들이 자신의 독창성을 자랑하기 위해 이름을 밝히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곡조에 관해서는 익명이 원칙이었으며, 누가 그것을 만들었느냐는 부차적인 문제였다.트루바두르(Troubadour)는 11-12세기에 흥성한 남프랑스의 오크어 음유시인이다. 좀더 늦게 흥성하는 북프랑스의 트루베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역사[편집] 최초의 트루바두르는 푸아티에 백작 기욤 다키텐(기욤 9세)이다. 12세기 이후에는 쇠퇴했으며, 14세기 최후의 트루바두르라 불리는 기욤 드 마쇼로 끝을 맺었다. 형식[편집] 트루바두르들은 갖은 형식의 세속가곡으로 궁정연애를 노래했는데, 개중에는 planh (탄식) sirventès (풍자시) pastourelle (전원시) tenson (논쟁시) canso (칸소) 등이 있다  
570    [시문학소사전] - 음유시인이란? 댓글:  조회:4650  추천:0  2016-11-05
음유시인(吟遊詩人)은 중세 유럽에서 여러 지방을 떠돌아다니면서 시를 읊었던 시인을 의미합니다. 각 지역마다 부르는 말이 달랐는데, 남프랑스의 트루바두르, 북프랑스의 트루베르, 독일의 미네젱거 등이 유명합니다. 아울러 다음의 설명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13~14세기에 걸쳐 서양의 오락을 제공한 예능인, 또는 각국을 순유(巡遊)한 시인. 또한 음유시인은 하프나 작은북 연주에 뛰어나고, 노래를 부르며 로맨스를 낭송하고 연극을 공연하면서 한 고장에서 다른 고장으로, 한 성(城)에서 다음 성으로 뉴스를 전하는 일도 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왕후(王侯) 전용의 악사(樂事)도 등장하게 되었다. 그들은 배우이고 음악가이며 시인인 동시에 저널리스트이기도 하였다. 15세기에 들어 구텐베르크에 의해 발명된 인쇄술이 보급됨에 따라 문자를 읽는 사람이 증가하여 이와 함께 음유시인도 사라져 갔다.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한국사전연구사)
태국의 관광지 파타야에서 벌어지는 외국인 대상 관광 매춘의 실태를 느낄 기회가 있었다. 그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한때 매춘업에 종사했던 여성들과 면담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그들은 가난한 농촌 가정에서 태어나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그곳에까지 오게 된 사연, 거기에서 겪었던 고생과 수모에 대해 담담하게 술회했다. 이야기가 끝난 뒤 그 자리를 주관했던 어느 수녀님은 참석자들에게 질문할 시간을 주었다. 그러나 아무도 말문을 열지 않았다. 그 처절한 인생역정의 사연을 듣고 차마 말을 잇지 못했던 것이다. 몇 분 동안 그렇게 침묵이 이어졌다.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누구도 그 분위기를 바꾸지는 못했다. 그때 수녀님이 입을 열었다. 거기에서 흘러나온 한마디는 잔잔한 충격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저는 여러분의 그 침묵에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보니 우리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침묵의 언어가 그토록 육중할 수 있음을 새삼 확인했다.우리의 일상은 너무 소란하고 난삽하다. 어디에 가든 미디어에 노출돼 뉴스.음악.광고 등에 시달린다. 휴대전화는 끊임없이 울려 대고, 소음 속에서 사람들의 목소리는 자꾸만 커진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자기를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에 허겁지겁 정보를 발신한다. 그러나 그러한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아니 불필요한 소음의 증가로 인해 커뮤니케이션은 더욱 어려워진다. 단절과 고립이 두려워 우리는 맹목적으로 타인에게 접속하고 판에 박힌 교신에 더욱 골몰하는 악순환에 빠진다. 그 결과 도발적이거나 공허한 언어의 파편들을 붙들고 표류하기 일쑤다. 그러는 동안 언표(言表)되지 않은 것을 듣는 귀가 점점 멀어져 간다. 말을 하지 않고 말하는 방법을 잊어버린다. 침묵이란 단순히 언어의 부재가 아니다. 그것은 언어화되기 이전의 의미 원천, 또는 언어 너머의 세계로 다가가는 마음의 운동이다. 이따금 입을 닫고 침묵의 심오한 힘을 클릭해보자. 장황한 설교보다 조용한 경청이 훨씬 설득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확인한다. 시험 보고 귀가한 아이에게 '시험 어떻게 보았니'라고 다그치는 대신 말없이 껴안아 주는 부모가 실제로는 더 '무섭다'.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고백보다 연인이 탄 버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물끄러미 바라보아주는 눈길이 훨씬 감동적이다. 지난번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대회에서 일본의 이치로 선수는 '30년' 발언으로 공연한 빈축을 샀다. 하지만 김인식 감독은 그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고, 한국 선수들은 말이 아닌 경기의 결과로 멋지게 답을 해주었다. 다시금 정치의 계절이 다가온다. 지방 선거 출마자들은 저마다 수많은 공약의 보따리들을 풀어놓을 것이다. 후보들이 쏟아내는 담론의 성찬에 현혹되지 않고 참 일꾼을 어떻게 분간할 것인가. 빈 수레들의 요란한 소음 속에서 묵묵히 자치의 터전을 일궈갈 인재를 무엇으로 식별할 것인가. 말해지지 않은 것, 말과 말 사이의 행간(行間)으로 전달되는 메시지를 읽어내야 한다. 선거철에 잠시 언어의 홍수를 이루다가 금방 대화의 불모지가 되어버리는 지역사회, 장황한 수사(修辭) 속에 만성적 소통 부전(不全)을 앓는 정치 영역에서 의미를 재생하는 말길이 열려야 한다. 행정과 시민, 그리고 주민과 주민 사이에 이심전심의 통로가 돼 공공의 선을 도모하면서 지역의 미래상을 그려가는 언어, 그것은 침묵보다 무겁고 빛난다. 현란하게 요동치는 정보의 바다보다 넓고 깊다. 김찬호 한양대 교수·문화인류
568    [쉼터] - 말 한마디가 금값이 아니다?... 옳다!... 댓글:  조회:3688  추천:0  2016-11-05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침묵은 금이다’ 등 말에 대한 속담은 참 많다. 그만큼 말 한마디의 중요성이 크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당신이 자녀에게 매일매일 하는 말은 과연 어떤 힘을 가지고 있을까. /글 최주현 매사에 “할 수 있다”는 말을 하라 아이들은 무한한 능력의 소유자다. 일본의 교육학자 시치다 마코토는 “인간의 아기는 예외 없이 모두 인간 가운데 가장 훌륭한 천재다. 인간의 아기라는 사실만으로도 예외없이 모두 천재다”라고 말했다. 아기가 아직 말을 못할지라도 말을 잘 알아 듣는다고 생각하면서 아이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줄 것. 특히 “넌 무엇이든 할 수 있어”라거나 “넌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라고 말하면서 아이의 잠재의식 속에 그 말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말은 숨은 잠재 능력에 불을 지펴 그 능력을 끌어낼 수 있는 말이다. 긍정적인 평가를 자주 하라 아이에 대한 생각을 바꾸면 약점도 강점이 된다. 따라서 약점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난삽하다’라는 말 대신 ‘생각이 다양하다’로, ‘엉뚱한 이야기를 잘한다’는 ‘상상력이 좋고 언어 구사력이 뛰어 나다’로, ‘산만하다’는 ‘활동 반경이 넓고 운동량이 크다’라고 말하는 식이다. 이처럼 시각을 조금만 바꿔 말하면 아이에 대한 평가는 사뭇 달라진다. 그리고 평가가 긍정적으로 바뀌면 아이 또한 그 평가에 따른 성취를 이루게 된다. 스스로 답을 찾게 하는 말··· “왜?” 초등학생이나 유치원생들에게 엄마가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옳지 않다. 아이들이 좁은 지식에 갇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지식을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데서 끝내지 말고 “일반적으로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지만 아래에서 위로도 흐를 수 있어. 왜 그럴까?” 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 비슷한 예로 “왜 나팔꽃 줄기는 다른 것을 감아서 올라갈까?”, “왜 해는 동쪽에서 뜰까?”, “왜 지렁이가 땅 속에 있지 않고 나왔을까?” 등 아이가 스스로 생각할 만한 질문을 던지며 아이의 뇌를 자극해보자. 수학을 좋아하게 하는 말 수학을 싫어하는 아이에게 수학을 좋아하게 하는 방법이 있다. 말로 뇌에 에너지를 전하는 것이다. 자기 암시를 활용하는 방법인데, 반복하면 할수록 효과도 높아진다. 수학책을 가슴에 안고 눈을 감는다. 그리고 이렇게 외쳐보자. “나는 수학을 좋아한다!”, “수학아, 너를 사랑해!”, “수학아, 너도 날 사랑하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무의식은 “그래, 당연하지. 넌 수학을 좋아하고 말고. 수학책도 너를 좋아할 거야”라고 응답한다. 무의식 속에 저장된 에너지가 수학을 좋아하게 만드는 것이다. 머리를 좋게 하는 말, 나쁘게 하는 말은 따로 있다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은 모두 에너지의 형태로 바뀌어 뇌에 전달된다. 따라서 “우리 아이는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라고 말하거나 그런 믿음을 가지면 엄마 자신은 물론 아이에게도 좋은 에너지가 전달된다. 그래서 정말로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반대로 “별 볼일 없는 아이야”라고 단정하면 아이는 정말로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자란다. ㅡ  9월호
567    [쉼터] - 동물들의 줄무늬 어떻게 생길가?... 댓글:  조회:3672  추천:0  2016-11-05
    여러 동물이 몸에 규칙적인 줄무늬가 생긴다. 이런 줄무늬가 어떤 과정을 거쳐 생겨나는지는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미국 연구진이 아프리카줄무늬쥐의 등의 생기는 줄무늬의 비밀이 유전자에 따른 색소변화 때문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냈다.   미국 하버드대 진화생물학과 호피 호엑스트라 교수 연구팀이 아프리카줄무늬쥐의 ‘Alx3’라는 유전자가 멜라닌 분비를 억제해 줄무늬를 만든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학술지 ‘네이처’ 2일자에 발표했다. 멜라닌은 사람에게도 있는 색소로, 멜라닌 양에 의해 피부색이 결정된다.    호엑스트라 교수팀은 줄무늬가 없는 실험용 쥐와 아프리카줄무늬쥐의 피부 세포에서 어떤 유전자가 발현되는지를 확인했다. 이 결과 실험용 쥐는 몸 전체에서 Alx3가 활성화돼 있었고, 아프리카줄무늬쥐는 줄무늬의 밝은 부분에서만 Alx3가 발현되고 있었다.   연구진은 Alx3가 멜라닌을 만드는 ‘멜라닌 세포’의 발생을 억제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Alx3는 멜라닌 세포를 분화시키는 DNA에 결합해 멜라닌 세포가 만들어지는 것을 방해했다. Alx3가 많이 발현된 부위는 멜라닌 색소가 적게 분비돼 하얀색을 띠었다.   호엑스트라 교수는 “약 7000만 년 전에 아프리카줄무늬쥐와 갈라진 북미얼룩다람쥐도 Alx3 유전자에 의해 줄무늬가 조절된다”며 “두 종이 완전히 독립된 상태에서 같은 방식으로 줄무늬를 만들도록 진화한 것 같다”고 말했다.   송준섭 기자
566    [쉼터] - 민족의 뿌리를 알아보다... 댓글:  조회:4541  추천:0  2016-11-03
우리민족 족보, 친척, 호칭, 성씨     우리민족 족보, 친척, 호칭, 성씨   1, 족보란 무엇인가?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가문에서 문재가 비교적 좋은 사람들이 나서서,혈연관계로 맺어져 내려가는 자기 가문의 계보를 도표식으로 작성하여기를 나누어 기록하여 두었다. 이것이 바로 족보이다. 지금말로 하면 한 가문의 기본적인 력사당안자료인 셈이다.  우리는 족보에서 자기 가문의 시조를 알수있고, 자기 가문의 전통을 알수 있으며, 그 시조로부터 어떻게 발전하여 오늘까지 오게 되였는가? 하는 전반과정을 알수 있으며, 자기 친척의 범위와 갈래, 그리고 그 관계를 쉽게 알아볼수 있다. 중국조선족은 력사적 원인으로 하여 족보에 대한 개념이나 관심이 조선반도에 있는 우리 민족보다는 강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족보를 중시하는사람들이 아직도 적지 않다.  가문 구성원들의 변화를 총체적으로 적어둔 대종보가 아니더라도, 자기친척 구성원들의 정황과 변화발전 과정을 기록해 두고, 그 관계를 명시하여 후대들에게 물려주는것, 또한 선대로서 마땅한 의무와 책임이 아닐가 생각한다.  특히 오래전부터 시작된 핵가족 시대에서, 자기 친척 구성원들의 정황마저 후대들에게 남겨주지 못한다면, 더불어 살아야 하는 사회에서 우리 후대들은 자기 혈친도 못 알아보고, 고립무원의 환경에서 살게 되며, 그때 가선 우리민족의 응집력도 크게 영향받을수 있다.  이것은 선대로서 후대들에게 너무나 미안한 일이 아닌가?   2, 족보의 기원 일찍 삼국시기 신라에 벌써 족보 비슷한것이 생겨나 왕공귀족들이 리용하였다고 하였다. 족보란 계급사회의 등급제도의 산물로서 그 의의는 주요하게 자기가문의 정통성과 고귀함을 증명하기 위한것이였다. 그후 고려에서는 양반제도를 실시하였는데, 양반이란 주로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있는 문무관원들을 일컬으는 말이다. 지금말로 하면 국가공무원인 셈이다.  고려에서는 文宗(기원1047년)때부터 과거제도를 개혁하면서 상놈도 제한적으로 자기성을 가질수 있었다고 하는데, 상놈가문에서 그누가 과거에 합격되여 조정에서 벼슬을 하게되면 그 가문은 곧 출세하여 량반가문이 되므로, 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거나 또는 선조명이나 출신지역의 지명으로부터 성을 결정한후, 그사람을 시조로 하고, 그사람에게 봉해진 식지 혹은 출신지역을 본관으로 하여 계보를 작성하여 기록하여 내려 오는데, 그것이 후에 와서 족보가 되는 것이다. 식지란 봉지라고도 하는데, 봉건사회에서 벼슬을 하게되면 벼슬의 급별에 따라 봉해주는 토지와 그 관리구역으로서, 양반가문 경제수입의 주요 래원이였으며 세습할수 있었다.    3, 족보의 가치 과거에는 족보가 지배층, 즉 귀족이나 왕실에서 신분을 가려보고, 피줄의 갈래를 잊지 않으려고 기록한 비망록의 기능을 하였다. 하지만 인권평등을 강조하는 오늘날에 와서 족보의 가치는 신분증명보다는 가족의 뿌리를 알고, 가족의 우량한 전통을 계승하고, 가족과 친척의 관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가족관념을 가강하고, 가문의 뉴대를 형성시키며, 가문의 매개 성원들의 사명을 강조하기 위한것이라고 본다.  연변 조선족 가정의 대부분의 족보는 문화혁명때에 훼멸성적인 재난을 당하여 이미 기본상 근절되였다. 개혁개방을 하고, 한국과의 국교가 맺어지고, 한국의 종친회와의 련계를 다시 회복하게 되면서 적지않은 가문에서는 다시 자기의 족보를 가지게 되였으며, 선조와의 련계점을성공적으로 찾고, 자기가정 성원들을 족보에 보충 기입해 넣은 가정도 적지 않다.     4, 족보의 형식 족보의 형식은 가문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기본적인 형식은 비슷하다. 맨 앞에 가문을 자랑하는 서문이 있고, 시조를 포함해 주요한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을 밝혔으며, 시조와 조상들 가운데서 력사에 이름난 인물들의 사적을 적어 놓았다.  그다음부터는 시조 아무개로 시작하여 가문성원들의 이름을 세대를 나누어 항렬의 순서에 따라 적고, 매 사람의 이름에 곁붙여 자, 호, 생졸년월일, 그리고 생전에 지낸 대표적인 벼슬, 간단한 략력, 안해의 본과 성씨, 무덤의 위치등을 적어 넣었다.  딸은 출가외인이라 하여 보통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어떤 가문에서는 사위의 성과 이름을 밝히기도 한다. 남자들은 성이 모두 같으므로 이름만 적었으며, 그것도 적서의 구별을 두어 본처의 자식은 《적》으로, 첩의 자식은 《서》로 갈라 적었으며, 외손자인 경우 보통 밝히지 않지만, 또 일부 밝힌 가문도 있다.  보통 족보는 해당 문중에서 스스로 자기 문중의것을 작성하였고, 이밖에족보와 성질은 같지만 형식과 내용이 약간씩 다른 가첩과 가승이란것도 있었다. 가첩이란 직계친족만 적어둔 것이며, 가승은 가문의 직계친족과 그 가문의 사적을 적어놓은 것이다. 족보를 중요시함에 따라 해당 가문의 종친을 체계적으로 종합한 종보와 그중 어느 한갈래의 종친만을 밝힌 지보란것도 생겨났다.    5, 친척이란 무엇인가? 친척이란 피줄과 결혼관계로 련결된 사람들을 말한다. 친척은 크게 친족, 인척 두가지 부류로 나눈다. 친족은 피줄관계로 련결된 것인데, 흔히 집안이라고 한다. 인척은 결혼관계로 련결된 것을 말한다.  친족안에는 직계와 방계로 구분되는데, 직계는 할아버지(할머니)-아버지(어머니)-아들(딸)-손자(손녀)-증손자(증손녀) 등과 같이 피줄이 직접 잇달아 물린 사람들이다. 이것을 가족이라고 부르며, 이것을 방계와 구별하기 위하여 《친할아버지》, 《친손자》 등 《친》자를 붙여 부르기도 한다.  방계는 큰(작은)할아버지-큰(작은)아버지-조카 등과 같이 몇 대우에서갈라져 나간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인척가운데서 어머니켠을 외켠(외척), 안해켠을 처켠(처척)이라고 하며, 시집간 딸은 친족성원에서 빼버렸으나, 사실상 고모, 고모부, 고모사촌 등은 실제생활에서 아주 가까운 친척으로 되여 있다.    6, 친척의 촌수를 어떻게 밝히는가? 우리 민족은 친척관계의 멀고 가까움을 촌수로 밝힌다. 우리 민족이 촌수를 밝히기 시작한것은 대체로 고려시기부터였다고 한다. 14세기 문인 리색이 《4촌회》라는 말을 쓴것도 있고, 또 《고려사》에 외사촌이란 말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쯤으로 추증하는것이 옳을것 같다.  촌수는 부부관계에서부터 시작하여 한세대를 한촌으로 센다. 때문에 부부사이는 촌수가 없이 동체로 치고, 대수가 점차 벌어짐에 따라 촌수는 많아진다. 따라서 촌수가 적을수록 가까운 친척이고, 촌수가 많을수록 먼 친척으로 된다. 직계에 속하는 친척은 대수가 곧 촌수인데, 부모와 자녀사이는 1촌이고,할아버지와 손자사이는 2촌이다. 그러나 부를 때에는 절대로 촌수로 부르지 않으며, 증조할아버지와 증손, 고조할아버지와 현손사이도 촌수는 각각 3촌, 4촌이지만 부를때에는 절대로 촌수로 부르지 않는다.  방계(곁갈림)에 속하는 친척의 촌수는 먼저 어느 조상에서 갈라졌는가를 따져보고, 그 조상과 자신과의 촌수에다 알려고 하는 대상과 그 조상과의 촌수를 합하면 된다. 례를 들면 조카와 자기와의 촌수는 자기와 아버지의 촌수에다 조카와 아버지와의 촌수를 합하면 된다. 즉 자기와 아버지와는 1촌이고, 조카와 자기 아버지(조카에게는 할아버지)는 2촌이므로 자신과 조카는 3촌이 된다.    7, 인척의 촌수는 어떻게 밝히는가? 외켠의 친척은 어머니와 그 친척과의 촌수에다 자기와 어머니와의 촌수(1촌)를 합한 수와 같은 촌수이다. 례를 들면 어머니의 남동생은 어머니와 2촌이므로 자기와는 3촌, 즉 외삼촌이 된다.  처켠에 대해서는 알아보려는 사람과 자기 안해와의 촌수를 그대로 따르면 된다. 례를 들어 안해의 작은 아버지는 안해의 3촌이므로 처삼촌이라고 부른다.  촌수로 친척의 멀고 가까운것을 나타내는데, 형제벌의 친척은 4촌, 6촌, 8촌과 같이 짝수(우수)로 나가고, 큰(작은)아버지, 조카 등 아잡조카벌의 모든 친척은 3촌, 5촌, 7촌과 같이 홑수(기수)로 나간다. 이것은 촌수의 련결마디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세대와 세대사이에는 그를 낳은 부모가 끼여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5촌형, 칠촌아우, 6촌조카, 8촌조카라는 것은 있을수 없다.    8, 몇촌까지 친척으로 보는가? 고려와 리조에서는 서로 범위에서 얼마간 차이가 있었으나, 대체로 친족은 7~10촌까지, 인척은 5~6촌까지를 친척으로 보았으며, 리조시기 법에는 친족이 10촌까지로 되어 있으나, 실제생활에서는 대체로 8촌까지 친척으로 보았다.    9, 사돈도 친척의 범주에 속하는가? 우리말에 사돈이 한호적이란 말도 있다. 《아언각비》란 책에 《친척》이란 《척》에는 외척, 처척, 인척을 들고 있는데, 여기의 이 인척이 곧 당시 사돈집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였다. 그런데 사돈은 친척가운데서 제일 먼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사돈의 팔촌》이라 하게되면 친척이라고 할수 없을 정도로 관계가 먼것을 말한다. 하지만 실제생활에서 사돈과 가깝게 지내는 경우가 많다. 특히 매부와 처남 사이는 일반적으로 매우 가깝다.    10, 직계친족을 부르는 호칭에는 어떤것이 있는가? 3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증조》를 붙여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라고 부르며, 3대의 손자와 손녀는 《증손》을 붙여 증손자, 증손녀라고 부른다. 4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고조》를 붙여 고조할아버지, 고조할머니로 부르고, 4대의 손자와 손녀는 《현손》을 붙여 현손자, 현손녀로 부른다. 5대이상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손자, 손녀는 대수를 그대로 붙여 5대할아버지, 6대손자 등으로 부른다. 직계친족가운데서 형의 안해를 흔히 형수, 아우의 안해를 제수라고 부르며, 누이의 남편을 매형, 혹은 매부라고 부른다.    11, 방계친족은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 방계친족을 부를때에는 같은 항렬에 속하는 4촌, 6촌, 8촌형제를 친형제와 구별하기 위하여 각각 《종》, 《재종》, 《삼종》을 붙여, 종형제, 재종형제, 삼종형제 등으로 부른다.  아버지항렬에 속하는 큰아버지를 백부, 작은아버지를 숙부라고 부르며, 흔히 숙부를 삼촌이라고도 하는데, 직접 촌수로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런 친삼촌과 구별하기 위하여 오촌, 칠촌, 구촌백부와 숙부는 각각 《종》, 《재종》, 《삼종》을 붙여 부른다.  할아버지 항렬을 부를때에도 친할아버지와 구분하여 할아버지의 형제를 종조부로 부르며, 따라서 증조할아버지 형제를 재종증조부, 고조할아버지의 형제를 삼종고조부로 부른다.  아들, 손자항렬에서도 친조카와 오촌, 칠촌, 구촌조카, 그리고 친손자와형제의 손자를 구별하기 위하여, 《당》, 또는 《종》, 《재종》, 《삼종》등을 붙였다. 이를테면 사촌의 아들은 5촌으로서 당질(오촌조카)이며, 륙촌동생의 아들은 7촌으로서 재종질(칠촌조카)이며, 팔촌의 아들은 9촌으로서 삼종질(구촌조카)이라고 부른다.   이런 추리로써 형제의 손자는 6촌으로서 재종손, 륙촌의 손자는 8촌으로서 삼종손이라고 부른다. 누이의 딸은 생질, 고모사촌은 고종형제라고한다.  이밖에도 친족을 부르는 말에는 넛할아버지(아버지의 외삼촌), 넛손자(누이의 손자), 올케(오빠와 남동생의 안해) 등이 있다.    12, 인척을 부를때에는 어떻게 부르는가? 인척을 부를때에도 촌수를 캐는 법은 같으나, 부를때 외켠에는 《외》, 어머니의 자매는 《이모》, 처켠에는 《처》를 붙여 부르며, 안해의 부모를 장인, 장모로 혹은 가시아버지, 가시어머니로 부른다. 이모의 아들딸은 이모사촌이 되고, 처남과 처형제의 아들딸들은 처조카로 되며, 안해의 삼촌은 처삼촌으로 부른다.  우리 민족은 친척교제에 있어서 비록 구분은 우에서 말한것처럼 촌수가밝혀져 있으나, 직접 상대하여 말할때에는 될수록 가깝게 부르는 풍속이있다. 즉 례를 들면 구촌조카를 당면해서 부를때《구촌조카 왔는가?》하지 않고 《조카 왔나?》라고 하는 식이다. 웃사람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연변 등지에서는 《아바이》, 《클아배》, 《아매》, 《맏아매》등 함경도 방언이 많이 쓰이고 있는데, 친척, 가족내에서 친근감을 줄수 있으나, 많은 장소에서는 소개가 잘못될 수도 있다. 그러니 좋기는 소개는 구체적으로 촌수에 따라 하고, 부를때는 장소를 고려하여 해당된 표준어를 쓰는것이 좋겠다.    13, 아주머니, 아재, 아저씨는 누구? 우리 연변에서는 형의 안해 즉 《형수》를 직접 대면하여 부를때  보통《아주머니》라고 불렀고, 고모, 이모 등과 같이 자기 어머니와 나이 비슷한 녀인들을 부를때에는 보통 《아재》라고 불렀다. 그런데 지금 《아주머니》란 말은 주로 형수, 자기와 나이가 비슷한 여자, 또는 젊은 남의안해를 부를때 자주 쓰이고, 《아재》라는 말은 보통 자기보다 젊은 녀인을 대칭하여 많이 쓰인다. 그러니 자기 형의 안해를 공식적인 장소에서는 타인의 안해와 구분하기 위해서라도 《형수》라고 부르는것이 바람직 하고, 고모, 이모도 그대로 《고모》, 《이모》로 부르는 것이 바람직 하다.  그리고 《아저씨》라는 말도 그전에는 외삼촌과 고모부, 이모부 등과 같이 자기 아버지와 나이가 비슷한 남자들을 부를때 쓰였으나, 지금은 주로 여자들이 언니의 남편, 혹은 친척관계가 없는 젊은 남자들을 부를때 쓴다. 때문에 자기 언니의 남편을 공식적인 장소에서는 타인의 남편들과 구분하기 위해서라도 《형부》라고 부르는것이 바람직 하다.  동서끼리 혹은 시누이와 올케가 서로 부를때 《형님》, 《언니》, 《동생》등으로 부르며, 특히는 여자들이 시형과 시아우를 자기 자식들이 부르는 대로 《큰아버지》, 《삼촌》 등으로 부르는데, 친근감을 돋구는 친척호칭이기는 하지만 일련의 오해의 여지가 있으니, 제대로 촌수에 따라서 정확히 부르는것이 바람직 하다.    14, 항렬이란 무엇인가? 항렬이란 친족가운데서 세대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인데, 어떤 사람의 자손가운데서 세대수가 같아서 형제벌 되는 사람들을 같은 항렬이라고 하며, 그들의 아버지벌 되는 사람들을 아버지항렬, 아들벌 되는 사람들을 아들항렬이라고 한다. 우리 민족은 재래로 이름을 지을때 《항렬자》, 즉 《돌림자》를 썼다. 이 《항렬자》에 근거하여 성과 본이 같은 사람끼리 이름만 보고도 대체로 항렬을 가릴수가 있었다. 지금은 이름 짛을때 《항렬자》, 즉 《돌림자》를 쓰지 않고 각각 제맘대로 짓는다. 하지만 년세 많은 분이 집안에 계시는 경우, 아직도 항렬자를 따져서 이름을 짓기도 한다.    15, 성씨란 무엇인가? 옛날에는 평민들을 가리켜 한자말로 《백성》이라고 하였는데, 그뜻인즉《백가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란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이 나오기썩 오래전인 원시사회나 노예사회, 봉건사회 초기때만 해도 성씨가 많지 않았고, 그 성씨는 왕족이나 귀족과 같은 지배계급에서만 사용되였었다. 그리하여 성이 없는 평민들은 《천민》 혹은 《상놈》이라고 불리였으며, 이름은 《돌쇠》나 《똥애》처럼 아무렇게나 지어 부르는 것이 고작이였다. 하지만 사회가 발전하면서 인권평등의식이 강조되고, 인격존중이 하나의 사회적 원칙으로 됨에 따라 호적등록을 하면서 점차 누구나 성씨를 갖게 되었다. 우리 민족의 경우, 이름앞에 붙이는 성씨는 일반적으로 같은 족속을 나타내는 칭호인데, 한문투를 따서 보통 무슨 《씨》, 무슨 《가》라고 한다. 이를테면 《허》란 성을 부를때면 《허씨》, 혹은 《허가》라고 한다.    16, 우리민족 성씨는 몇가지 되는가? 《백성》이라고 하지만 실지 우리민족의 성씨는 100가지를 훨씬 초과해 수백가지에 달한다. 옛날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265성이 기록되여 있고, 그후에 나온 《증보문헌비고》에는 496성으로 근 5백가지를 헤아리고 있다.  1975년 한국 국세조사에서는 249가지 성으로 되어 있으며, 김씨가 전체 인구의 21.9%, 리씨가 14.9%, 박씨가 8.5%, 최씨가 4.8%로 한국 총인구의 근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한자가 들어오기 이전에 고대사회에서 조선 고유말로 된 성이 있었을수도 있지만 아직 고증할 문헌기록이 없다.  우리민족 력사문헌으로서 가치가 가장 큰 문헌중의 하나인 《삼국사기》에서는 사람 이름 앞에 출신지방의 이름을 붙여서 혈연관계 혹은 지방소속관계를 밝혔다. 이를테면 옛날 백제왕실의 성인 《부여》같은것이다. 백제왕실은 고구려왕실에서 갈라져 나왔는데, 자연 이 두 왕실의 출신지방이 같은 《부여》였기 때문이다. 백제왕실에는 《부여》란 성외에도 사, 연개, 협, 해, 진, 국, 목, 백 등 큰 성이 있었다고 한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성은 《고》씨인데, 고구려에는 이밖에도 장, 양,리, 오, 두, 왕, 등 큰 성이 있었으며, 이런 큰 성을 가리켜 우성이라고 불렀다.  신라왕실의 성은 박, 석, 김이 위주였고, 그외에 최, 안, 설, 남, 손, 정, 배,리, 등성이 있었다.    17, 우리민족 성씨는 어째서 한자성씨인가? 력사문헌에 나오는 성씨들은 대부분이 왕실귀족의 성씨였지 백성들의 성씨는 아니였다. 《삼국사기》에 고위계층 즉 왕실이나 귀족들 가운데서는 성씨가 점차로 보급되여 가고 있었으나, 평민들은 성이 없었다. 때문에 《삼국사기》에 나오는 숱한 평민들은 이름만 나오고, 성이 적혀 있지 않다. 고구려의 온달, 신라의 계백과 관창, 고구려의 창조리, 백제의 도미, 신라의 솔거, 지은 등 평민들에게는 그것이 성씨인지 이름만인지 알기 어렵다. 특히 고구려의 성씨에 대해서 살펴보면 우에서 례를 든 왕실의 성씨들을 내놓고도, 을지문덕, 연개소문, 명림담부 등의 을지, 연개, 명림 등 성씨가 나오는데, 그 뜻이 아마 당시 고구려의 고유어로 되어 있는것 같고, 한자를 그대로 쓴 성이 아닌듯 싶다.  조선에서 한자성을 널리 쓰기 시작한것은 아마도 후신라때부터라고 보는것이 타당할것 같다. 왜냐하면 그때가 바로 중국과의 군사, 정치, 외교래왕이 전의 다른 어느 시기보다 잦았을 뿐만 아니라, 후기신라 귀족들의 한자말이 열도가 올랐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은 당시 신라의 지명을 모두한자식 이름으로 고치였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신라의 귀족들은 모두한자성을 붙였다. 이로부터 고려, 리조에 이르기까지 한자성이 위주로널리 퍼졌고, 왕실이나 귀족들내에서 한자성씨를 숭상하고, 그 유래를신비화 했거나, 또는 한자성씨를 국가의 공로자에게 상으로 주는 이른바《사성》이라는 제도가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다.    18, 평민들은 언제부터 성을 가지게 되였나? 일반 평민들이 성씨가 없이 이름만 붙여 불리운것이 조선력사 반만년에 깔리운 하나의 상황이였다. 고려文宗(기원1047년)때부터 비양반가정에서도 자기성을 가질수 있었다고 하지만 극히 제한적이였으며, 지어 리조말기에 이르러서도 성이 없는 평민들이 상당수준으로 존재하였다. 근대에 들어와서 전국적 범위내에서 통일적으로 호적등기를 하게 되자, 성이 없던 평민들은 여러가지 경로를 통하여 성씨를 가지게 되였으며, 조선반도 전 국민이 비로서 성씨를 다 쓰게 되었다.    19, 본이란 무엇인가?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성씨를 귀중하게 여긴것은 성씨가 봉건사회에서혈연관계 즉 피줄을 상징하는 외에도 계급적 차원에서 신분의 귀천을 상징하는 표징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리조시기에 들어와서 유교가 국교로 됨에 따라, 남존녀비와 《3강5륜》사상이 풍조로 되었다. 따라서 혈통관념이 보다 강하게 성씨에 깃들게 되었으며, 정통이냐? 아니면 갈래이냐? 하는것을 무섭게 따지게 되였다. 그에 앞서 한 성씨안에서도 시조가 누구냐? 그리고 그 시조가 발상한 고을이름이 어떠냐에 따라 《본》이란 개념이 생기게 되였고, 엄격이 그것을 준수하여 벌써 리조초기에 귀족들은 한자성 앞에다가 발상지명을 덧붙여 《전주리씨》,《밀양박씨》하고 불렀다.  시조의 발상지는  출신지역이 될수도 있고, 또 벼슬하여 받은 봉지일수도있다. 사실 고대에 있어서는 성씨 자체가 발상지 이름으로 된것이 적지 않다. 그리하여 이름앞에 선조의 발상지(원래의 성)을 붙이는것이 거의 통례로 되었는데, 한자성씨가 보급됨에 따라 발상지 이름이 따로 《본》이란 명칭으로 성씨앞에 붙게 되였다.  그후 한 종족에서도 그누가 벼슬하게 되면 따로 가보를 창설하고, 성은 원래의 성을 그대로 쓰고, 본은 자기의 봉지명으로 고쳐서 따로 기록하기 시작하였는데, 주요하게 자기의 공덕, 혹은 근친의 공덕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되여 같은 성씨에 여러가지 본이 생겨나게 된것이다.  그때로 부터 본이란 기실 한 가족의 발상지만 대표하게 되였으며, 지금은 같은 성씨의 다른 종친을 구분하는 의거로 많이 리용된다. 이것을 《본관》, 혹은 《관향》, 《향관》이라고도 한다.  사회, 력사적 변천으로 하여 본관의 이름이 지금은 없어졌거나, 또는 다른 이름으로 바뀌여 진것도 허다하다. 이를테면 연주 현씨, 문화 류씨, 가주 한씨, 반남 박씨, 무송 윤씨 등이다. 《연주》는 평안북도 녕변의 옛지명이였고, 《문화》는 신천군안의 옛고을이였으며, 《가주》는 정주군 가산고을의 별칭이고, 《무송》은 고창군 무장고을의 별칭이며, 《반남》은 라주군 소속에 있던 별칭이다. 하지만 이런 변천은 성씨의 본관에 큰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상기 본관의 개념이 바로 혈연갈래를 가르는데 두고 있기 때문에, 그냥 옛날지명을 그대로 부르면서 련속되여 왔던것이다.     20, 본 안에 또 파가 있다던데. 기록에 의하면 리조시기에 본이 가장 많은것은 김씨였는데, 499본에 달하였고, 리씨는 451본에 달하였으며, 최씨는 326본에 달하였고, 박씨는 309본에 달하였다. 장씨는 245본, 림씨 216본, 조씨 200본 등의 차례로 선보인다. 본이 많다는것은 그만큼 력사적으로 벼슬을 한사람이 많다는 방증이 된다. 리조후기부터 시작하여 같은 본끼리도 서로 멀고 가까운 현상이 많아졌는데, 족보를 캐여 같은 본안에서 그 문벌이 누구의 자손인가? 그리고 자기 혹은 타인과 어떤 관계인가를 밝혔다. 하여 본안에 또 파가 생겼다.    21, 성씨유래를 캐여보는 의의 우리 민족이 성씨를 쓴지도 이미 천년도 넘는 유구한 력사를 자랑하고있다. 민속학적인 의미에서 볼때, 대대로 성을 물려 주면서 피줄의 흐름을 이어온 그 자체가 하나의 력사이며, 조상들의 지혜로운 유산이다. 때문에 일제가 《동조동근》을 강요하면서 창씨개명까지 협박했던 그 살벌한 민족수난의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자기의 성씨를 잊지 않고, 따라서 자기가 조선민족임을 잊지 않고 줄기차게 살아왔던 것이다. 글로벌화된 오늘날에 와서 종친이요, 한 성씨요 하는 혈연개념이 희박해질수도 있고, 또 그 어떤 다른 목적에 리용될 수도 있다. 하지만 민속학적인 각도에서, 성씨의 유래를 캐여보는것은 력사지식방면에서 도움이 될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 우량한 전통을 계승하고, 민족의 응집력을 가강하는 방면에서도 도움이 될수있다. 세계가 날로 좁아져서 마침내 지구촌이라는 개념으로 이 세계를 평가하는 오늘날, 우리가 자기의 민족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자기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새겨보며, 자기의 사명을 다시 한번 생각하는 방면에서도, 모두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    연변인민방송국  김동선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용수 공동작성 2016-10-04
565    [고향문화소식] - 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 고고성을... 댓글:  조회:4168  추천:0  2016-11-03
희소식! 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 정식 설립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10월30일 12시26분       2016년 10월 28일, 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가 정식 성립,제1차 회원대표대회를 연길 대주호텔에서 개최했다.   회의 첫 순서로 연변주 문화라지오텔레비죤신문출판국 영화관리 처장 상금평이 “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 설립을 비준하는데 동의”하는 문서, 연변주 민정국 국장 엄창덕이 “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 단체조직 설립을 비준”하는 문서를 공포했다.   다음 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 준비위원회 회장 손룡호의 준비공작보고를 시작으로 회의는 협회 관련 여러가지 사항을 협회 회원들의 거수표결로 결정한 가운데 손룡호가 제1임 회장으로 당선됐다.   손룡호 회장은 "앞으로 협회의 발전을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고 촬영애호가들에게 더 좋은 자리를 마련해주며 연변주 영화미디어 문화산업 발전에 공헌하겠다"고 표시했다.   회의는 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에서 제작한 미니영화 “그녀의 부탁”을 시청하는것으로 끝냈다.   현재 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는 모두 66명의 회원수를 보유하고 있으며 조기작업으로 여러편의 미니영화르 제작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고있다.     조글로미디어 배미나    
564    [려행] - 건축물에 매료되다... 댓글:  조회:5365  추천:0  2016-11-03
世界에서 아름다운 聖堂 베스트 20  (맨끝에...)               브라질 상파울루. 고딕양식으로 건립되었으며 1954년 1월 25일 미완성 형태로 공개하였으나 2년 후에 모타교구(Archbishop Motta)에 의해 완공되었다. 브라질 대부분의 주민은 로마카톨 릭교이다. 이탈리아 피렌체. 피렌체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성당은 유럽에서 네번째로 큰 교회. 4세기 경 지어진 청동으로 된 문을 가지고 있으며 종탑은 1334년에 조토가 설계했으며 1359년에 완공되었다. 이탈리아 밀라노. 성당 높이 157m 너비 92m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고딕양식의 교회. 14세기 갈레아초 비스콘티의 지휘에 착공되었고 19세기 나폴레옹 왕자에 의해 완성되었다. 135개의 첨탑과 성모마리아와 성 암브로조의 일화를 기록한 청동문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프랑스 바스노르망디주(州) 칼바도스현(縣)에 있는 도시. '리지외의 작은 꽃'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성 테레즈 성당이 있는 성지. 레닌그라드 북부. 표트르 대제의 명에 의해 건설 되었다. 이 곳은 1240년 노브고로트 대고 알렉산드르 야로슬라비치가 네바강 전투에서 스웨덴과 교전했던 장소이다. 성당의 남동쪽 정문 건물로 꼭대기의 첨탑은 슈테플 이라고 한다. 높이가 137m에 달하는 이 고딕 양식의 첨탑은  빈의 유명한 상징이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시 5월 광장 북쪽에 있는 네오클래식 양식의 대성당으로 내부에 산마르틴 장군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 파리의 시테섬의 왕궁안에 있는 성당. 레요낭식(式) 고딕의 대표적인 성당이다. 프랑스의 샤르트르에 있는 대성당. 종합적 공간예 술로서의 고딕 성당의 특징을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영국 잉글랜드 남부 윌트셔주 솔즈베리. 12~16세기 초까지에 걸친 고딕(Gothic) 건축은 로마네스크 건축양식에서 발전하여 독자적인 완성의 단계에 이르렀다. 에스파냐의 세계적인 건축가 가우디의 미완성 성당. - Catedral Metropolitana da Arquidiocese de Sao   Sebastian de Rio de Janeiro>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로에 있다. 1964년 1월 20일 건립되어 돈하이메데바로 신부가 축성하였다.1997년 10월4일 교황 바오로가 방문해 성체대회를 가졌다. 에스파냐 갈리시아주의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에 위치하는 대성당으로 10세기에 사도 야곱(산티아고)의 유해가 발견된 후 세계의 3대 성지의 하나가 되었다. 러시아 모스크바 붉은 광장 남쪽 끝.16세기의 러시아 집중식 성당 건축의 귀결을 보여주는 예로서 중요하다. 계단 위의 청동문에는 성경의 여러 장면들이 조각되어 있으며 파리에서는 에펠 탑 다음으로 높은 곳이다.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에 나오는 피렌체의 두오모 대성당 ---------------------   < 그 외 : 아래를 클릭하시면...>   1. 안토니오 가우디- 성가족성당    2. 프랑스 성심 성당-몽마르트    3. 롱샹성당 (Chapelle Notre-Dame-du-Haut )    4. 헝가리 마차시 성당(Matyas Templom)   5. 프랑스 노트르담 성당 - 두번째    6. 노트르담성당 - 프랑스    7. 이탈리아 성베드로성당과 광장,바티칸박물관    8. 이탈리아 바티칸성당(Basilica di San Pietro)    9. 니카라과 - 마나과 대성당(Managua Cathedral) / Ricardo Legorretta           
563    파랑, 연두, 초록과 빨강, 주홍, 노랑과 함께 하는 2026 댓글:  조회:6178  추천:0  2016-11-03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최근 수정 시각 :  2016-10-22 02:29:30+0900 2009년 모습[1]   언젠가 완공되었을 때의 모습 갈 길이 멀다   기본 정보 위치 스페인 카탈루냐 바르셀로나 종교 가톨릭 홈페이지 공식 홈페이지 지위 준대성전(Minor Basilica) 건축 정보 축성 2010년 11월 7일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 양식 모더니즘 착공 1882년 3월 19일[2] 완공 진행중 (2026년 예정) 건축 내역 전체 길이 90m 전체 너비 60m 신랑 너비 45m 첨탑 총 18개(현재 8개 완성) 첨탑 높이 170m(예정) 유네스코 세계유산 이름 한글 안토니오 가우디의 건축 영어 Works of Antoni Gaudí 프랑스어 Œuvres d’Antoni Gaudí 국가·위치 스페인 카탈루냐 바르셀로나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84년(2005년 확장) 지정번호 320bis 등재사유 (i)[3], (ii)[4], (iv)[5]   1. 개요2. 건축 2.1. 착공의 이유2.2. 짓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이유2.3.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축성2.4. 형태와 배치 3. 평가4. 기타5. 대중 매체 5.1. 기어와라! 냐루코 양5.2. 트리니티 블러드   1. 개요[편집] 언어별 명칭 스페인어 Templo Expiatorio de la Sagrada Familia 카탈루냐어 Temple Expiatori de la Sagrada Família 라틴어 Basilica Sanctae Familiae 영어 Basilica and Expiatory Temple of the Holy Family 프랑스어 Temple Expiatoire de la Sainte Famille 독일어 Basílica i Temple Expiatori de la Sagrada Família 포르투갈어 Templo Expiatório da Sagrada Família 이탈리아어 Tempio Espiatorio della Sacra Famiglia 에스페란토 Pentofera Templo de la Sankta Familio 중국어 聖家堂/ 聖家宗座聖殿暨贖罪殿 일본어 サグラダ・ファミリア/ 聖家族贖罪教会 세계 최초, 최대 규모의 폐건물이라 카더라 그래도 류경호텔 보다는 빨리 짓겠지.. 설마.. 멀리서 보면 테마파크, 가까이서 보면 거대한 이야기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위치한 성당. 천재 건축가로 알려진 안토니오 가우디가 설계한 건축물로, 기존 성당 건축의 특징을 잘 계승하면서도 가우디 특유의 개성이 잘 융합된 건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882년부터 착공에 들어간 이래 13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 건축되고 있다. 가우디 사망 100주기인 2026년으로 완공이 예정되어 있다. 근데 과연 가능할까? 그런데 유럽의 건축물들을 보면 건설기간이 200년을 훌쩍 넘어가는 건축물이 많다. 다시 말해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경우 지금까지의 공사기간이 다른 건축물에 비해 그렇게 길지는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래도 수백 년씩 걸려 짓는 근대 이전의 건축 방식을 21세기인 현재까지 지속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건물이라는 점이 눈여겨 볼 부분인듯 하다. 가우디가 사고로 사망한 후 다른 건축가들이 일을 이어받아 대신 건설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바르셀로나 내에서도 2026년에 완공시키겠다는 스페인 정부의 입장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6] 건축 내역에 보면 첨탑의 높이가 170m로 되어 있다. 후에 예수를 상징하는 첨탑이 성당의 가운데에 가장 높게 위치하게 된다. 이는 몬주익 언덕이 171m라는 점을 감안한 것인데, 하느님이 만든 것을 넘봐서는 안된다는 가우디의 의도이다. 2. 건축[편집] 2.1. 착공의 이유[편집] 여러 가지 측면이 있겠지만 당시 카탈루냐의 시대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의 카탈루냐 지방은 산업혁명의 여파로 굉장히 변화가 많았던 시대였다. 그래서 사회주의적인 사상도 팽배했는데, 마르크스가 했던 "정신은 물질의 생물학적 부산물이다."라는 말처럼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교회들을 파괴하였다. 그래서 가톨릭 신자였던 가우디는 카탈루냐 지방이 하느님께 죄를 지었다는 생각에 성당을 계획하게 된다. [7] 그래서 건설 초반에는 신자들의 기부로만 지어졌다. 현재도 이 건축물의 공사를 이어가는 건축가들은 카탈루냐 지방의 건축가들로만 구성이 되어있고, 그들의 모습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지하에서 유리벽을 통하여 볼 수 있다. 2.2. 짓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이유[편집] 내부 전경 대성당 지하에 있는 가우디의 무덤 가우디가 죽은 1926년 당시의 진행 상태 사실 이렇게 오래 걸리는 이유로 "동시대에 비견될 다른 건물 이상으로 복잡해서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일단 1936년 시작된 스페인 내전기간 동안 건축이 중단되어 1950년대에 와서야 건축이 다시 진행되기 시작했다. 또한 건축가가 사망한 상태에서 남아있는 불완전한 설계도를 해석[8]하여 건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성당 건축의 완성도를 위해 꼼꼼한 과정을 거치는 것[9]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적은 인원으로 공사를 진행하기 때문에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대량의 자본조달과 인력조달만 된다면 현대의 기술로는 성당 건축에 이렇게까지 오래 걸릴 이유는 없다. 또한 바로 그 점이 역설적으로 관광 세일즈 포인트가 되기도 한다. 성당 건축비는 상당부분 관람비에 의존하기 때문에 관광객의 유치는 건축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다. [10] 다만 스페인 정부에서는 최근에 가우디 사망 100주년이 되는 2026년까지는 완공하도록 노력하고 있다는 발표를 했으며, 장비와 인원을 늘려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완공까지 22세기는 커녕 200년이 더 걸린다는 말이 나오는 시점에서 참 다행스러운 일이라 할것이다. 살아서는 볼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이런 움직임에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도 많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이 치밀한 완성도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소수 인원과[11] 충분한 시간을 통해 작은 부분을 조각하는 것에 있어서도 충분한 검토 후에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자금과 건설 인력은 충분하지만, 상대적으로 시간과 디자인 인력이 부족[12]하기 때문에 세세한 부분까지 손대지 못하지 못하고 계속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우려가 있다. 그러므로 200년 걸려서 지어요  롯데월드몰원통형 첨탑 8개[13]는 마치 거대한 옥수수들이 하늘로 치솟은 듯 보인다. 주변에 높은 건물들이 없어서 원래 높이보다도 더 높게 보이는 느낌. 2.3.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축성[편집] AD GLORIAM ET LAUDEM DEI BENEDICTUS PP. XVI, PONTIFEX MAXIMUS, HANC BASILICAM RITE DEO DICAVIT ECCLESIAM BARCINONENSEM PASCENTE CARDINALE DOMINO ALOISIO MARTINEZ SISTACH BARCINONE, VII, XI, ANNO DOMINI MMX (하느님의 영광과 찬양으로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하느님께 성전을 봉헌하는 의식을 거행해 바르셀로나에 교회를 지었다. 알로이시오 마르티네즈 시스타치 추기경 천주 강생 2010년 11월 7일, 바르셀로나) 2010년 11월 7일에는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바르셀로나를 방문해 이 성당에 대한 준대성전(Minor Basilica) 승격 겸 축성 미사를 봉헌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축성 미사 전문(영어) 건물이 완공되거나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을 때 축성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언제 완공될지 아직 장담할 수도 없는 성당이 준대성전으로 승격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사례라, 일반인들 뿐 아니라 교계에서도 이 성당에 대한 관심이 각별하다는 것을 보여준 셈. 여담으로, 그 전까지는 내부공사가 덜 된 상태였는데, 교황이 격려차 방문해 직접 미사를 집전하겠다는 말이 나오자 마자 부랴부랴 미사를 집전할 수 있을 만큼 내부공사를 진행했다는 설이 있다. 실제로 내부를 보면 스테인드 글라스도 일부만 되어있고 조각상이 배치되어야 할 자리만 있고 비어있는 곳도 다수. 정문도 아직 공사 중이다. 포스타가 직접 행차하신다는 말 듣고 바삐 신막사를 증축하는 것과 비슷하다 보면 된다. 2.4. 형태와 배치[편집] 완공 상상도 사실 사진에 보이는 부분은 동쪽에 있는 첨탑이며, 성당의 정면이 아니다. 이 성당이 완공되고 나면 주된 이미지로 쓰이는 부분이 바뀔지도 모르는 일. 현재 완성된 것은 지하 성당과 중앙 지하실 정도이다. 완성된 도면에 따르면 높이 100m 정도의 탑이 12개가 들어서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12사도를 상징한다.[14] 이외에 중앙에 세워지는 170m의 가장 큰 탑은 예수를 상징하고 탑과 탑을 이어주는 돔은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고 있다. 또 별도의 돔 4개는 4명의 복음 성인(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을 나타낸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성가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부분까지는 전체 건축 시리즈에서 일부분에 불과하다.  동쪽 전면의 '나시미엔토(예수의 탄생)'라는 건축 주제는 완성된 상태이고, 서쪽의 '파시온(예수의 수난)' 도 대략적으로 완성된 상태이다. 가장 중요한 남측 정면의 '글로리아(영광)'는 2002년부터 건축이 시작되고 있으며, 이 성당 건축의 정점을 장식하는 170m 높이의 예수 그리스도 탑이 그 뒤에 지어질 예정이다. 성당 지하에는 가우디의 스케치와 사진 등이 있다. 현재는 공사중이기 때문에 성당 내부에는 시멘트 포대와 공구가 여전히 흩어져 있다. 성당 내부는 가우디가 숲속을 걷는 듣한 느낌을 주도록 설계되어 있어서 상당히 이색적이다. 특히나 내부의 색은 흰색인데, 이는 스테인드 글라스가 햇빛에 비치면 그 색을 그대로 벽면에 새겨지도록 설계한 것이다.[15] 동쪽면의 나시미엔토 면의 조각들은 가우디가 조각했는데, 여기에 인물상들은 모두 가우디가 살던 동네 사람들을 일일이 석고로 본을 뜬후 그대로 돌로 조각해서 만든 것들이라고 한다. 가우디가 제작한 파트가 바로 나시미엔토 면이며, 이 부분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반대쪽에는 가우디가 죽고 30년후인 호세 마리다 수비라츠라는 모더니즘 조각가가 조각을 시행했다. 그래서 가우디가 설계한 파트와는 조금 다른 느낌을 준다. (수비라츠의 인물상들은 가우디와 완전 반대 성향으로 각진 정형화 및 일부 추상화가 가미되며 얼굴부분이 음각되어 있어서 어떤 방향에서 바라봐도 감상자를 쳐다보는 듯한 착시를 안긴다) 가우디가 실제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본 따 묘사했다면 수비라츠는 간결하고 직선을 주로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다. 이 때문에 널리 알려진 면의 반대쪽을 보고 실망한 사람도 있다. 그런데 실망하는게 당연할 수도 있는 것이, 아직 미완성이다. 위의 발코니 부분이 완성되고 나면 또 어떨지?   "직선은 인간이 만든 선이고, 곡선은 하느님이 만든 선이다." - 안토니오 가우디 이 성당을 구성하는 외벽 선은 거의 모두가 곡선 형태이다. 이는 그 당시의 서구 건축역사에서 보기 드문 개념이었다. 고딕 양식 특유의 부벽에 대해 '보기 딱한 목발'이라고 불렀던 가우디는 부벽을 덧붙이지 않으면서도 건물의 안전성을 높이기 위해 곡선 형상에 적합한 구조 역학까지 배려해 건축을 진행했다. 그는 성당의 모형을 만들기 전 실을 천장에 매달고 모래주머니 또는 납추를 중간중간에 매달아 휘어지는 강도를 측정했는데, 이 작업을 통해 그가 원하는 곡선이 도출되면 설계에 반영했다.사진 설계 상의 높이가 170m, 현재 높이 120m(동쪽 첨탑 기준)의 이 거대한 건물은 바르셀로나의 '스카이라인(산이나 건물이 하늘에 그리는 윤곽)'을 바꿨다는 평을 받고 있다. 가우디 건축의 특징은 '건축물이 기본적으로 지녀야 할 기능은 반드시 유지하되 그 외형과 내부공간을 어떻게 구성하여 인간의 상상력을 최대한 자극시킬까'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흔히 건축물이라고 하면 고정되고 딱딱하고 위치가 바뀌지 않을 듯한 느낌을 주지만,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마치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움직일 듯한 모양새다. 3. 평가[편집] 특히 해가 질 무렵 붉은 노을을 받았을 때 성당의 모습은 황홀경 그 자체다. 가우디는 40년 동안 이 성당 건축에 혼신의 힘을 다했으며 1926년 전차에 치여 사망할 당시에도 성당 앞에서 상념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사후 그가 안장된 곳 역시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지하. 유네스코는 가우디의 또 다른 작품인 구엘 공원과 카사밀라 등을 세계유산으로 지정하면서 "인간의 창조적 천재성이 과연 어디까지 뻗칠 수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라며 극찬했다.   반면 1984, 동물농장 등으로 유명한 언론인 조지 오웰은 스페인 내전 때 바르셀로나에서 의용군으로 복무하면서 공화군 민병대들이 "다른 건물은 잘만 폭파하는데도 흉측하게 커다란 성당은 또 예술 작품이라면서 내버려뒀다"라면서 수기집인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깠다(…) 오웰의 이념 성향을 생각해 보면 당시 프랑코의 쿠데타 세력과 결탁한 가톨릭 교회에 대해 적개심을 표출하는게 당연하지만, 당시 카탈루냐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던 전국노동연맹 소속의 아나키스트 민병대원들은 다른 성당들은 잘만 부수면서도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의 경우 모더니즘의 특유한 매력에 감화되어 일부로 건드리지 않기로 카탈루냐 자치 정부인 제네랄리타트와 합의하여 그대로 둔 것이다.   또한 역설적인 건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가치관을 가졌던 가우디가 이 건물을 계획한 이유 자체가 상술한 아나키스트 같은 급진 좌파 세력들을 보고 "쯧쯧, 바르셀로나가 이런 빨갱이 천지가 되면 하느님한테 밉보이겠다. 멋진 성당을 새로 지어 도시 전체 스케일로 참회해야지."라는 발상, 즉 아나키스트 본인들 입장에서는 자기들을 죄인 취급했던 별로 달갑지 않았을 법한 동기에서 착수했다는 것이다.   이 건축물의 외관이 대단해보이지만 몬세라트의 검은 성녀를 포함한 많은 외부 장식, 구조적 요소는 카탈루냐 전통적인 고딕 건축 양식에서 따온 것이다. 성가정 성당에서 지하철타고 조금 가면 나오는 바르셀로나 구 시가지에 가면 바다의 성모 성당 (Santa María del Mar), 바르셀로나 주교좌 대성당 등에 가보면 특유의 격자형 기둥 장식을 비롯한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에서 보이는 많은 전통적 건축 요소를 관람할 수 있으며, 얼핏 보면 추상적이고 난해하면서도 돈과 시간은 더럽게 잡아 먹는 이 건물이 아직도 시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상술한 사례처럼 심지어 이념을 넘어선 예술 작품으로 대접 받을 수 있는 건 이러한 전통적 요소와 현대적 기술의 환상적인 조화를 추구한 가우디의 미학적 감각 덕분이라 할 수 있다.   가우디는 같이 일하는 노동자들을 많이 배려했다. 성당 뒷편에 작은 집이 있는데, 바로 노동자들의 자녀들이 다닐 수 있는 학교다. 성당을 짓는데 신경을 쓰느라 아이들에게 소홀해질 수 있는 부분을 섬세하게 잡아낸 부분이다. 그 배려심으로 후배 건축가들도 배려해줬다면 좋았을텐데...   4. 기타[편집] 흔히 성당이라고 하면 당연히 석조라고 생각하겠지만,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석조 성당이 아니다. 처음에는 돌로 짓기 시작했지만, 1950년 경에 근처 채석장의 돌이 바닥난 뒤로는 철거된 석조 건축물의 자재를 재이용하다가 지금은 인조석과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고 있다. 분명 누군가는 실망할 소리겠지만, 애초에 가우디는 이 성당의 재료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지정한 적이 없으며, 콘크리트를 사용한다고 해서 건축물의 격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20세기의 걸작 건축물들은 거의 콘크리트를 가지고 만들어졌다. 그리고 하기아 소피아도 포졸라나 시멘트로 지은 성당이다. 고딕 양식이 대개 그렇긴 하지만 이 성당은 워낙 높이나 경사, 모양 때문에 밤에 조명이 거의 꺼진 상태로 보면 은근 코즈믹호러공포가 느껴진다.[16] 5. 대중 매체[편집] 5.1. 기어와라! 냐루코 양[편집] 독특한 외양과 미완성된 부분같은게 웅장하면서도 기괴한 느낌을 주는 탓인지 기어와라! 냐루코 양의 애니메이션에서는 르뤼에의 구조물로 등장했다.  5.2. 트리니티 블러드[편집] 멀리서 바라보았을 때에는 종유동굴의 바위 표면을 연상시켰던 장식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무수한 성인과 천사의 조각이었다. 그리고 그 위쪽의 88개나 되는 종이 달려 있는 18개의 종탑은 이제 곧 어둠에 잠길 황혼의 하늘을 뚫고 날카롭게 솟아 있었다. 그리고 그 종탑들이 특대 개밋둑처럼 모여 있는 중심에는 어딘가 다른 별에서 날아온 우주선 같은 형태의 중앙탑-통칭 '황자의 탑'이 높이 170미터의 위용을 자랑하며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성가정 성당 속죄의 사원. 너무나도 이교도적인 외관과 장대한 규모 탓에 교황청조차 포기해버린 '대재앙' 이전의 거대한 건축물이다. 방치된 후에는 이곳을 관광 명소로 삼으려던 바르셀로나 시와 민간 기업 사이를 전전한 끝에 지금은 까마귀와 박쥐의 둥지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트리니티 블러드 4 - 사일런트 노이즈, p.99 요시다 스나오의 라이트 노벨 트리니티 블러드에서는 대재앙 전에 다행히 완공은 되었지만 폐허로 방치된 것으로 나온다. 로젠크로이츠 올덴이 이곳 종탑에 저주파 병기 사일런트 노이즈의 시험제작기를 설치했고, 이자크 페르난도 폰 캠퍼가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하자 사일런트 노이즈가 작동하면서 바르셀로나가 파괴되었다. 이 여파에 휘말려 노엘 보도 사망했다.   [1] 해당 사이트로 들어가서 확인한 결과 위 사진이 포함된 게시물이 2009년에 올라왔다.[2] 2016년까지도 134년 동안 이 성당을 계속 짓고 있다는 소리다. 이 회사보다 더 오래됐다.[3]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4]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5]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6] 2026년에 완공을 안 시킬 거 같다는 예측도 많다. 이 성당은 100년이 넘게 건축 중이라는 것이 가장 큰 메리트고, 완공되면 그냥 유럽에 흔히 있는 성당의 하나처럼 여겨질 것 같다는 이유 때문. 애초에 완공도 안 됐는데 관광객들을 성당에 들이는 걸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7] 얼마나 독실하냐면, 건축학교 시절 과제로 요한묵시록을 하던가, 설계하던 도중 수도원으로 은둔을 한다던지, 40일 동안 금식을 하거나…[8] 원래 가우디의 집안은 주물 장인이라, 그가 만든 건축물 중 대부분은 주물로 모형을 만든 후 내부를 채우는 형식이라 후배 건축가들이 난감해한 건 당연하다. 가우디가 그리 후배들에게 따스한 선배는 아니었나보다[9] 세부 장식물을 디자인하여 모형제작 후 검토하여 실제 시공[10] 사실 현재 필요한 건설비용은 다 모았고, 공사만 남았을 뿐이다.[11] 앞서 말했듯이 건축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카탈루냐인들로만 구성한다. 게다가 가우디가 내건 제약도 적어서 개인의 개성을 드러내면서도 건축을 진행할 수 있다.[12] 그나마도 설계에 없는 부분은 상상력으로 메꾸어야 하니 골 때리는 일이다.[13] 이 첨탑에는 종이 들어가게 되며, 옥수수 모양의 구조는 종소리를 잘 울리게 하는 스피커의 기능을 하도록 설계되어 있다.[14] 요한과 마태오가 다른 기둥으로 가면서 대신 바르나바와 바오로가 들어와서 12개다.[15] 동쪽에서 동이 트면 파랑과 연두, 초록 등의 색상으로 구성된 스테인드글라스에 빛이 비추어 탄생을 비유하고, 서쪽으로 해가 지면 빨강, 주홍, 노랑으로 사망을 나타낸다. 특이하게도 스테인드글라스에 그림이나 인물 모양 없이 검은색으로 인명만이 적혀 있는데, 모두 성인이나 성녀의 이름들이다. 태양의 위치에 따라 다른 색이 성당 안을 가득 메운다.[16] 그런데 이는 가우디의 의도된 설계라는 이야기가 있다카더라.     분류   성당   스페인   랜드마크   세계유산
562    건축성자의 大서사시, 감동은 오늘도 솟아 오른다... 댓글:  조회:3970  추천:0  2016-11-02
가우디 사망 100주기인 2026년 완공을 목표로 공사가 진행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여행객에게 바르셀로나는 가우디의 도시다. 바르셀로나=최흥수기자  습관적으로‘스페인 바르셀로나’라고 썼는데 왠지 어색하다. 노란색 바탕에 4개의 붉은 줄, 파란 삼각형에 하얀 별, 바르셀로나 시내 곳곳에 내걸린 카탈루냐 깃발을 보고 나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2014년 독립을 묻는 주민투표에선 81%가 찬성표를 던졌다. 공식 표지판도 카탈루냐어-스페인어-영어 순이고, 국가 인터넷 도메인도 스페인(.es)이 아닌 카탈루냐(.cat)다. 이 정도면‘카탈루냐 바르셀로나’라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그 자부심의 중심에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 1852~1926)가 있다. 7개의 작품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올린 이 위대한 건축가가 아니라면, 바르셀로나가 이렇게 익숙한 이름이 됐을 리 없다. 바르셀로나 여행은 기본적으로 가우디의 자취를 따라가는 여정이다. 바르셀로나 곳곳에 흩어진 가우디의 건축물을 개인적으로 찾아간다 해도 미술과 건축, 가우디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다면 감동은 반감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현지가이드가 운영하는 하루짜리 투어 프로그램을 이용했다. 가우디가 설계한 3개의 개인주택과 구엘공원,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둘러보는 코스다. 가우디의 처녀작인 카사비센스. 흔히 알고 있는 가우디 작품의 특징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출발은 가우디의 처녀작 카사비센스(Casa Vicens). 카사는 스페인어로 집 혹은 주택이라는 뜻이니 카사비센스는 비센스가 의뢰한 집이라는 의미다. 지하철 폰타나역에서 가깝다. 흔히 알고 있는 가우디 작품의 특징-이를 테면 부드러운 곡선과 특이한 장식-이 없어 다소 의아하다. 녹색과 하얀 타일장식 외관이 언뜻 아랍 건축물을 보는 듯하다. 왕관처럼 보이는 지붕이 가장 눈에 띄지만, 주변환경과 조화를 중시한 가우디의 특징도 녹아 있다. 노란 꽃 장식 타일과 종려나무 잎 모양의 철제담장은 그곳에 자생하던 꽃과 나무를 형상화한 것이란다. 지금은 은행소유로 내부는 들어갈 수 없다. 카사바트요 창문 기둥. 뼈마디를 세워놓은 것처럼 괴기스럽다. 화려한 타일 장식이 한눈에도 '튀어'보인다. 다음은 카사바트요(Casa Batllo), 시내 중심부 그라시아 거리에 있다. 한눈에 봐도 ‘튀는’ 외관이다. 바다를 연상시키는 녹색과 청색 모자이크가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1906년 개축한 건물인데 스테인드글라스는 크고 작은 컴팩트디스크로 장식한 듯 파격적이다. 해골과 뼈를 연상시키는 발코니와 창문 틀, 머리와 꼬리가 없는 용 형상의 지붕은 가우디의 개성이 한껏 드러난다. 그라시아 거리는 당시 부호들이 경쟁적으로 최고 건축물을 건설해 부를 과시하던 곳이다. 카사바트요와 잇닿은 건물들도 호화롭기 그지없지만 가우디의 작품에 비하면 평범하다. 입장료는 22.5유로로 비싼 편이지만 가우디가 설계한 실내장식과 가구까지 볼 수 있어 성수기에는 미리 예매해야 할 정도로 인기다. 카사밀라 외벽은 특별한 장식 없이 유려한 곡선으로 파여 있어 채석장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특이한 외형으로 공사과정에서 집주인과 많은 갈등을 겪었다. 카사바트요에서 약 500m 거리의 카사밀라(Casa Mila)는 물결치는 듯한 외관 곡선 덕분에 채석장(La Pedrera)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카탈루냐인들이 신성시하는 몬세라트 산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옥상의 굴뚝장식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다음으로 가우디의 색깔이 잘 드러난다고 평가된다. 하지만 미역줄기를 연상시키는 괴기스런 발코니 등 특이한 디자인으로 공사과정에서는 집 주인과 불화를 겪었고, 나중에는 공사대금을 받기 위해 소송까지 해 가우디에게 꽤나 맘 고생을 안긴 건물이기도 하다. 주간 입장권은 20.5유로, 아름다운 조명에 동화 같은 풍경을 연출하는 야간 관람권은 37.5유로다. 구엘공원의 육교 산책로. 아기자기한 외형과 달리 위로는 차가 다닐 수 있을 만큼 튼튼하다. 정교하게 짜맞춘 돌기둥에 동화적인 디자인을 가미한 테라스 기둥. 물결모양 타일의자는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인체공학적 설계로 편안함까지 갖췄다. 규모만으로 치면 여기까지는 맛보기에 불과하다. 카르멜 언덕에 자리잡은 구엘공원은 가우디의 자연친화적인 건축 스타일이 돋보이는 명물이다. 곡선의 부드러움을 살리면서도 조각난 타일로 색채의 향연을 펼치는 트렌카디스 기법이 가장 잘 구현된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애초에 전원주택단지로 구상됐다. 사업가이자 가우디의 열렬한 후원자인 구엘(1846~1918)은 도심과 떨어져 있어 쾌적한 삶을 누릴 수 있고,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이곳에 고급주택을 분양할 계획이었다.   여기에 가우디의 영감을 입힌다면 최고의 작품이 탄생할 터였다. 그러나 요즘에야 유행하는 ‘웰빙’ 개념을 1900년에 도입했으니 너무 앞서갔다. 교통도 불편하고 기본 인프라도 없는 민둥산 산꼭대기에 거금을 들여서 저택을 분양 받을 부자는 아무도 없었다. 60채 건설계획은 대 실패로 끝나고, 나중에 시에 매각된 부지는 공원으로 개방되었다. 결과적으로 구엘에게는 불행, 바르셀로나에게는 다행이었다. 전체 공원 중 유료 입장 구간은 일부다. 입장료(7유로)를 내기 전 먼저 봐야 할 것은 공원 윗부분의 육교, 차가 다닐 만큼 넓고 튼튼한 다리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비스듬한 아치 모양의 돌기둥이다. 공사도중 나온 석재를 하나하나 모자이크처럼 쌓고 붙인 돌기둥은 아이스크림 장식처럼 빙빙 돌기도하고 흘러내리기도 한다. 육교 위로 솟은 부분은 새의 둥지 모양으로 장식했다. 경사진 언덕을 산책로로 활용한, 자연친화적이면서도 기교가 넘치는 작품이다. 구엘 공원에는 4곳의 매표소가 있다. 육교 방향에서 들어서면 바로 유명한 물결모양 테라스다. 수 십 명이 앉아 쉴 수 있는 타일 의자는 엉덩이를 끌어당기면 등 받침에 꼭 들어맞아 허리가 펴지는 인체공학적 설계까지 고려했다. 편안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갖춘 세계 최대 의자인 셈이다. 덕분에 공원의 가장 상징적인 장소로 여겨지지만, 테라스 아래도 가우디의 완벽주의로 꽉 차 있다. 테라스를 떠받치는 사선의 돌기둥을 일렬로 배치해 산책로를 만들었는데, 역시 돌 하나하나를 정교하게 꿰어 맞췄다. 우유 빛 초콜릿이 흘러내리는 듯한 과자 집 모양의 정문을 나와서도 자꾸만 되돌아보게 된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첨탑. 18개 중 현재 8개를 완공한 상태다. 일명 옥수수 첨탑 타워로 올라가면 좀 더 가까이서 외벽 장식물을 볼 수 있다. 야간조명이 들어오는 밤에 동편 공원에 가면 작은 연못에 비친 모습을 찍을 수 있다.   가우디 투어의 대미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성당은 기본적으로 성경의 정신을 건축물로 완벽하게 구현하는 것이다. 언뜻 앞과 뒤의 파사드(외벽)가 대칭인 듯 보이지만, 예수의 탄생을 표현한 동편은 1935년 완공돼 가우디의 영향이 그대로 반영됐고, 수난을 표현한 서편은 조셉 마리아 수비라치가 1989년 완공한 작품이다. 탄생의 조각들이 사실적인데 비해 수난은 추상적이고 심플하다. 영광을 표현할 남측 파사드는 2002년에 공사에 들어갔다. 1882년부터 130년 넘게 이어지는 대공사는 2010년에야 전체 공정의 절반을 넘겼고, 가우디 사망 100주년이 되는 2026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공사자금을 전적으로 기부금과 입장료에만 의존하기 때문이다. 성당의 상징인 옥수수 모양 첨탑은 18개 중 현재 8개가 완공된 상태, 예수를 상징하는 가장 높은 첨탑은 170m에 이를 예정이다. 가우디가 사망시까지 겨우 4분의 1도 완성하지 못했는데도 이 성당을 그의 대표작으로 여기는 것은 착공 이듬해부터 43년간 2대 건축가로서 그의 정신이 기본 설계에 반영됐기 때문이다. 성당내부는 입장료(15유로, 타워까지는 오디오가이드를 포함해 29유로)를 내야 들어갈 수 있다. 목이 젖혀질 만큼 긴 수많은 기둥을 따라 시선을 끌어올리면 거대한 우주선을 연상시키는 천장 장식이 신비감을 자아낸다. 스테인드글라스로 스며드는 자연조명도 웅장함과 화려함을 더한다. 타워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첨탑 사이 좁은 통로를 이동해 나선형 계단을 돌아 내려온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원형 계단은 (그럴 리 없겠지만) 자칫 가운데 구멍으로 빠지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다. 고소공포증이 있다면 타워관람은 포기해도 크게 아쉽지 않다. 동편 입구 작은 연못이 있는 공원에선 수면에 비친 성당을 함께 볼 수 있다. 밤이면 야간조명으로 더욱 신비한 성당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으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바르셀로나=최흥수기자  =================================   벙커전망대에서 본 바르셀로나 도심. 노을이 붉게 물드는 저녁 무렵에 많이 찾는다.바르셀로나=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이곳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건물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도시를 한눈에 파악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위에서 내려다 보는 것이다. 구엘 공원에서 멀지 않은 곳, 걸어서 약 30분 거리의 산꼭대기 벙커전망대는 바르셀로나 시내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대공포대가 있었고 그 이전에는 성벽이었던 곳이었다. 서울의 남산처럼 특별한 전망시설을 갖춘 것도 아니지만 지중해에서부터 산 아래까지 펼쳐지는 도심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어 관광객뿐 아니라 시민들에게도 사랑 받는 곳이다. 특히 저녁 무렵이면 시가지 오른편에서 비스듬히 비추는 노을이 하늘과 바다, 도심을 붉게 물들이는 모습이 장관이다. 흰색 건물이 많은 바르셀로나의 오래된 도심은 카멜레온처럼 주변 빛에 반응한다. 파스텔 톤으로 발갛게 번지는 노을의 8할은 흡수하는 듯하다. 해안가로 현대적인 고층빌딩이 몇 채 눈에 들어올 뿐, 기본적으로 높은 건물이 없이 바둑판처럼 가지런한 블록도 평온함을 더한다. 그래서 정면으로 보이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바로 앞에서 보다 이곳에서 더 크고 웅장하게 보인다.     에스파냐 광장에서 본 카탈루냐 미술관. 미술관 뒤편이 몬주익 언덕이다. 카탈루냐 미술관에서 본 바르셀로나 시내 모습. 반대편에서 도심을 조망할 수 있는 곳도 있다. 시내 서남부 에스파냐 광장에서 카탈루냐 미술관을 따라 올라가면 몬주익 언덕이다. 벙커전망대에서 보면 해안 끝자락 낮은 구릉이다. 정상에는 올림픽 주경기장과 원형고리로 창이 통과하는 듯한 형상의 커뮤니케이션 타워는 여전히 인상적이다. 별도의 절차 없이 주경기장 관중석까지 들어가 볼 수 있고, 도로 건너편엔 한국 마라톤에 새 역사를 쓴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 선수의 부조와 발자국 프린트도 볼 수 있다. 경기도에서 세운 기념비의 한글도 반갑다. 바르셀로나는 도시 규모에 비해 대중교통이 잘 발달해 있다. 도심만 치면 160만 정도이니 대전과 비슷한데 11개의 지하철과 국철이 그물망처럼 촘촘하게 도심과 외곽을 연결하고 있다. 10회를 사용할 수 있는 ‘T10 교통카드’(9,95유로)를 사면 1회용(2.15유로)보다 경제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개찰구를 통과하기 전에 카드가 나오기 때문에 여러 명이 동시에 사용하기에도 편리하다. 카탈루냐 광장, 에스파냐 광장을 중심으로 한 도심은 시간과 체력이 뒷받침된다면 도보여행도 무난하다. 인도도 넓고 도로 사이에 공원형 산책로도 많아 도심을 걷는데 크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사실 이국의 정취를 제대로 느끼기에는 도보여행이 제격이다. 메시, 네이마르, 수아레즈 등 세계적 축구 스타들이 뛰고 있는 FC바르셀로나 경기를 보기 위해 바르셀로나를 찾는 관광객도 많다. 경기를 관람하려고 캄프노우 스타디움에 가는 축구 팬이라면 꼭 알아야 할 한 가지, 가방과 배낭은 절대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 보관함도 맡길 곳도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쓰레기통에 버려진 가방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대규모 관중이동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고, 테러의 위험도 없애는 이중효과를 노린 것으로 보인다. FC바르셀로나 경기장은 대형 기념품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기념품을 살 계획이라면 여권은 꼭 챙겨가도록 하자. 여권이 있어야 면세혜택에 필요한 서류를 받을 수 있다. 바르셀로나=최흥수기자   
561    최대, 최고, 최소, 최하... 댓글:  조회:5389  추천:0  2016-11-02
    현대의 세계 도시들은 최대 최고의 건축을 세우기에 여념이 없다. 세계 최대 최고 건축물이 완성이 되고나면           곧바로 새로운 최대 최고 건축이 탄생한다. 현대 과학 기술문명은 최대 최고라는 이름 수명을 점점 짧게 하고 있다.                                              최대 최고, 최소 최하                                                                                   인류 문명의 발달은 최대 최고 최상을 지향하고자 하는 원초적인 욕망으로 인하여 진보하여 왔고 지금 이 순간에도 최대를 향하여 나아가고 최상의 목표를 이루어 가고 있다. 기계문명, 기업경제, 국가발전도 잠깐 주춤하면 쓰러지는 듯, 끊임없이 다음 그 다음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하늘에 가까이 높이 오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으로 바벨탑을 쌓고 교회 성당의 첨탑을 올려왔고 초고층빌딩을 세우고 있다. 현대의 세계 도시들은 최대 최고의 건축을 세우기에 여념이 없다. 세계 최대 최고 건축물이 완성이 되고나면 곧바로 새로운 최대 최고 건축이 탄생한다.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새 스마트 폰이 출시되듯. 현대 과학 기술문명은 최대 최고라는 이름 수명을 점점 짧게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세계 최대 최고 건축은 UAE 두바이의 ‘부르즈 칼리파 빌딩’ (163층, 830미터)이다. 곧 완공될 중국 창사시의 ‘스카이시티‘(202층, 838미터)는 두바이 보다는 불과 8미터 더 높은 건축으로 최고건축에 등극할 것이다. 그러나 몇 년 후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서는 구름을 뚫고 올라서는 1km를 돌파하는 높이의 초고층 건물이 세워질 것이다.   최고높이 경쟁의 시대에 장인의 손끝으로 탄생되는 최상의 건축도 있다. 스페인 바로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건축가‘안토니 가우디’가 1883년 설계하여 40년간 직접 공사를 감독하다가 1926년 죽었다. 사후 설계 원형 그대로 완성시키기 위해 130여 년 동안 건축공사가 진행되고 있고 완성시기를 알 수도 없는 최상의 아르누보 예술작품이다. ‘프라도 미술관’ ‘알람브라 궁전’보다 인기가 높아서 매년 300여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미완성 건축물이다.     최대 최고의 화려한 명성 그 이면에는 최악 최하의 불행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땅을 벗어난 건축은 천재지변과 안전에 대해서는 블록버스터 재난영화처럼 또 다른 바벨탑이 될지 예측을 불허하기 때문이다.   사회의 규범과 법은 인간의 생명을 위한 최소 최하의 규칙이다. 방재 재난 시 대피와 인명의 보호를 위해 정해지는 규칙에 대해서는 문명이 발달하고 과학이 진보할수록 오히려 최대한 법망을 이용하고 벗어나려고만 한다. 따라서 인간이 만든 이기(利器)는 인간의 이기심(利己心)으로 인하여 여객기의 추락, 여객선의 침몰, 대형건물의 붕괴 화재, 열차 충돌 지하철의 탈선 등이 이어지고 있다.   최대와 최고 최상의 물질문명 홍수 속에서도 국민들의 행복은 최소 최하로 치닫고 있다.   우리나라가 차지하고 있는 세계 1위라 부르는 성적표를 살펴보자. 스마트폰 사용자 보유율, 인터넷속도, 낙태율, 성범죄율, 교통사고 사망률, 이혼 증가율, 알코올 중독자, 고아수출, 학교폭력, 청소년 가출, 노동시간, 성형수술, 제왕절개, 저 출산, 학교폭력, 자살률은 10년 연속 1위를 지키고 있다.   자랑스러운 최고 1위 보다는 부끄러운 최하 순위가 훨씬 많아서 최대 최고 최상 1위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행복만을 주는 것이 아닌 것이다.         ----------------------------------------------------------------------------------------------------   1. 콘수에그라 풍차마을 돈키호테의 배경이 되는 풍차 마을이에요 정보보기 풍차 중 하나는 작은 박물관인데 현지 예술가들의 작품, 사프란으로 만든 비누 등을 살 수 있고 돈키호테 관련 소품도 있더라구요! 관련기사 : 노컷뉴스 · 돈키호테의 기행을 자극한 '라만차의 풍차들' 대형 풍차가 곳곳에 있는데 그만큼 바람이 많이 부는 곳!! (정상적인 사진 불가..ㅎㅎ 머리카락 먹는 장면만 찍고왔네요ㅜㅋ) 2. 론다, 누에보 다리 협곡의 어마어마한 높이에 있는 다리에 경외심은 물론 압도되는 느낌이 들어요 절벽위에 마을이 있는데 약간의 고소공포증이 있는 저에게는 살짝 두려움이 있었답니다 정보보기 그러나 꽃보다 할배 스페인편에 나와 더욱 친숙한 느낌이었고 이런 절경을 볼 수 있다는 것에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관련기사 : MBN · '꽃할배' 이서진, 론다 누에보 다리 보고 감흥 無..할배들 감탄 3. 에스파냐 광장 1992년 스페인 아메리카 박람회장으로 쓰인 멋진 광장이죠 정보보기 마드리드에 위치해 있는데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의 말탄 동상이 인상적이구요 관련기사 : 한국일보 · [임종진의 삶이 있는 풍경] 로시난테 사모곡 마차도 있어서 시간 여유가 있다면 마차타고 한 바퀴 돌아보는 것도 좋아요 4. 몬세라트 절벽 산악열차를 타고 올라가는 곳! 절벽이 마치 고구마를 닮았죠ㅋㅋ 정보보기 건축가 가우디가 평소 즐겨 찾고, 건축물에 영감을 받은 곳인데 관련기사 : 노컷뉴스 · 가우디에게 '영감' 준 몬세라트, 스페인 성지순례지로도 '인기' '톱으로 자른 산'이라는 별명답게 선과 웅장한 산세에 와~하는 감탄사는 절로 나오더라구요. 5. 알함브라 궁전 한 바퀴 돌려면 하루 종일 걸리는 엄청나게 큰 궁전~! 정보보기 조그만 산 전체를 궁전으로 만들고 공간과 빛, 물, 그리고 장식 등을 신비롭게 나타낸 이슬람 예술의 정수라 불리고 있어요. 관련기사 : 오마이뉴스 · 궁전 천장 세밀한 조각들에 왕실 문양이.. 궁전에서 내려다 본 마을의 모습! 궁전 안밖으로 구경거리가 가득합니다 6.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바르셀로나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명소죠. 성당 자체가 풍경이자 작품인 것! 정보보기 앞서 소개한 몬세라트산의 기괴한 모습에서 영감을 얻어 설계한 성당이라고 하는데 2026년 완공을 목표로 공사 중입니다 관련기사 : 이코노미조선 · 가우디를 만나는 스페인 여행_사그라다 파밀리아·구엘 공원·카사 밀라.. 자연을 사랑했던 천재 건축가가 남긴 걸작들 가우디 특유의 분위기가 묻어나는 내부..! 완공 전이지만 지금도 충분히 매력적인 곳입니다 7. 세비야 대성당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성당으로 동화 속에 나오는 성같은 비주얼! 박물관보다 더 박물관 같은 성당내부가 인상적이에요. 모든 벽이 그림과 조각으로 덮여있고 정보보기 중세 왕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데 콜럼버스의 묘가 유명하지요 정보보기 이처럼 스페인은 농도 짙은 예술성과 풍경에 눈 호강을 흠뻑 할 수 있는데요 ==============================       ▲ '사그라다 파밀리에 성당' 일명 '가우디 성당. 144년에 걸쳐 지어지는 이유는 ? “내(가우디) 뒤를 이어 완성시킬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고, 그러한 과정에서 교회(성당)는 장엄한 건축물로 탄생할 것이다. 처음 시작한 사람이 마지막 완성까지 보았다면 그 만큼의 웅장함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가우디가 말했다고 한다. ⓒ뉴스타운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사그라다 파밀리아'라는 성당이 있다. 그 성당을 ‘가우디 성당’이라고 흔히 부른다. 스페인의 세계적인 건축가 ‘가우디’가 설계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우디 성당’은 ‘별명’에 지나지 않는다. ‘사그라다 파밀리에(Templo Expiatorio de la Sagrada Familia)’라는 뜻은 ‘성가족(聖家族)’이라는 의미로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 마리아(Mary)와 요셉(Josep)을 뜻한다. 원래 이 성당의 설계는 가우디가 아니다. 사실은 이렇다. 안토니 가우디이코르네트(Antonio Gaudi y Cornet, 1852∼1926)의 스승인 비야르(Francisco de Paula del Villar y Lozano)가 설계와 건축을 담당했고, 성 요셉 축일인 1882년 3월 19일에 착공을 했다. 가우디의 나이 30세 때의 일이다. 그러나 당초 설계자였던 비야르가 건축 의뢰인과 의견 충돌이 발생, 중도 하차하게 되었고, 1883년 가우디의 나이 31세 때 드디어 가우디가 맡게 됐다. 이 후 줄곧 공사를 담당해오다 1926년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고로 숨을 거뒀으나 그 이 후에도 공사는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 가우디가 세상을 등진 뒤 100년이 되는 오는 2026년 드디어 완공될 것이라는 소식이다.  2016년 5월 현재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라는 아랍에미레이트연합(UAE)의 두바이(Dubai)에 있는 ‘버즈칼리파’라는 건물은 짓기 시작한지 6년 만에 162층, 828m의 높이로 완공됐다. 그런데 이른바 ‘가우디 성당’은 왜 144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걸려야만 할까? 가우디는 성당의 웅장함을 가장 중시했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서 144년이라는 엽기적인(?) 기간이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우디) 뒤를 이어 완성시킬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고, 그러한 과정에서 교회(성당)는 장엄한 건축물로 탄생할 것이다. 처음 시작한 사람이 마지막 완성까지 보았다면 그 만큼의 웅장함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가우디가 말했다고 한다.  한편, 2016년 현재 공정률은 70%를 약간 웃도는 수준이며, 겉에 보이는 맨 꼭대기의 첨탑까지 세웠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완공된 건물처럼 보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또 3D영상으로 완공될 모습을 최근 미리 제작 공개했다. 마치 최근 완공이 된 것처럼 인터넷상에서 이러 저러한 말들이 나돌고 있다. 자유, 그 비워두기에 대하여 스페인에는 안토니오 가우디의 건축물인 라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가족 성당이 있다. 이 건물은 아직도 완공되지 못한 가우디의 건축물로, 사후 100주년인 2026년에서야 완공될 예정이라고 한다. 가우디가 죽은 이후 많은 예술가와 건축가들이 공사에 참여하고 있으며 건설에 필요한 자금은 모두 기부 또는 입장료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134년의 세월을 느낄 수 있는 건축물은 미완성이라 부르기 어렵고 시대와 함께 살아내는 중이라 감히 말할 수 있다. 현존하는 건축물 자체가, 가우디가 표현하고자 한 전부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시간이 덧칠해진 그의 건축물이 완성되는 최종 모습은 아마, 그가 생각했던 모습보다 더 아름다울 수도 있을 것이다. 가우디 역시 “슬프게도 내 손으로 라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완성시키지 못할 것이다. 내 뒤를 이어서 완성시킬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교회는 장엄한 건축물로 탄생하리라.”라고 예견했다.   농부들 또한 한해 농사에 대한 수확량에 확신을 가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봄에는 씨를 뿌리고, 여름에는 성장을 돋우며, 가을에서야 비로소 곡식을 거둔다. 그리고 겨울에는 한 해 쉼 없이 애썼던 땅을 쉬게 하며, 다음 해의 농사를 기약한다. 우리는 이렇듯 어느 정도의 책무를 이행하고, 후일을 기다리는 것에 조바심을 내지 않아야 하며 더욱더 관대해야 한다.   가우디는 말했다. 시대와 함께 유능한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남기고 사라졌으나, 그렇게 해서 아름다움은 빛을 발하는 것이라고, 이처럼 각자가 배당 받은 유한함 속에서 자신이 할당 받은 몫을 마땅히 해내는 것만이 최선의 일일 것이다. 우리는 인생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듯 보이지만 유한한 시간 속에서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하나의 강박관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으며, 그것이 스스로를 멍에지는 일이 될 수도, 굴레를 만드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세상을 살아내기 위한 가장 최선의 방법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에 전념하며, 그 다음 시간과 다음 순번자에게 내어맡기는 일, 그것이 가장 중요한 관건일 수 있다. 출발선을 끊은 주자가 자신이 달려야하는 지점까지 숨차게 달려왔다면, 다음 바톤 터치를 해야 하는 주자에 대한 믿음으로, 순순한 마음으로 바톤을 건네야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사람을 만나는 일 또한 그러하다. 그 시작과 끝이 한 점에서 시작되어 끝날지, 쉼표가 되어 지속될지는 쉽게 단정지을 수 없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거리처럼,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자리를 비워내는 일이다. 이렇듯 세상을 살아내는 일, 집을 짓는 일, 정책을 설계하고 운영하는 일, 그리고 사람을 만나는 일, 그 모든 것은 커다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커다란 그림이 끝내 어떤 모습으로 남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우선 그 나머지 부분을 비워두는 일은 바탕을 그리는 일과 다름없다. 그 스케치 위의 그림이 수채화로 채색될지, 유화로 덧칠하게 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수묵화의 여백처럼 누군가 채울 곳을 비워두는 것이 곧 여백의 미학이자 공존이며, 자신만의 자유가 담겨있는 공간이 될 것이다.  이신후 / 전라북도문화콘텐츠산업진흥원장
                 어머니 품을 설계한 건축가 가우디     르네상스 이후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건축가들은 고전적 건축기하학을 설계의 전제로 삼았다. 안토니 가우디(1852~1926)는 이러한 통념을 과감하게 배제하고 반(反) 기하학적 곡선으로 대표되는 독특한 형태의 건축물들을 남긴 스페인의 천재 건축가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카사 밀라’라는 아파트에서는 직선이나 직각을 발견하기 힘들다. 대신 외벽 면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요철을, 지붕에는 꽈배기 모양의 흰 굴뚝을 놓아 도시 경관 속에 조화를 이루게 했다.   영국의 건축사학자 하이스 반 헨스베르헌의 ‘어머니 품을 설계한 건축가 가우디’는 자연친화적이고 과학적인 건축으로 요약되는 가우디의 작품세계와 생애를 조명한 평전이다. 마침 올해는 가우디 탄생 150주년으로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지정한 ‘국제 가우디의 해’를 기념해 이 책을 출간했다.   가우디는 평생 괴짜로 통했다. 건축물에서 느껴지는 관능미는 건축가들 사이에서 저속한 키치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과도한 신앙심에 푹 절은 괴팍한 성격은 당대 문화계와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같은 바르셀로나 출신인 거장 피카소는 청년 시절 반(反) 가우디 편에 섰는다. 비평가들은 가우디를 ‘건축의 광인’이라 불렀고 그의 건축을 ‘술 취한 예술’로 취급했다.   책은 문화적으로는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가 잇달아 꽃피고, 정치ㆍ사회적으로는 스페인 제국의 패망(1898), 무정부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켜 가톨릭 교회를 공격했던 ‘비극의 주’사건(1909) 등으로 어지러웠던 스페인의 19세와 20세기 사이를 관통하면서 가우디가 어떻게 그만의 독특한 건축예술을 완성시켜 나가는지 보여준다.              가우디는 건축을 땅 위에 고립된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키워온 자연에 대한 애정과 젊은 시절 심취한 철학과 미학, 노년에 얻은 종교적 깨달음을 건축에 구현하기 위해 애썼고 그 결과 그만의 미학적이고 생태주의적인 건축물들을 탄생시켰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전원주택단지 구엘 공원은 해발 150~210㎙의 고지대에 세워졌다. 가우디는 공원 부지의 풍부한 자연미를 보존하기 위해 초목을 잘라내지 않았고 공원의 꼭대기까지 이어진 구불구불한 길은 등고선을 따라 만들었다. 아름다운 소나무 한 그루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성당 설계 자체를 수정하기도 했다. 또 타일 조각, 질그릇 조각, 침대 용수철 등을 모아 재활용했다.   저자는 가우디의 작품 세계의 기조는 ‘정직한 노동과 예술’이라고 정의 내리고 그 기저에는 스페인 동북부의 카탈루냐 지역문화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자리잡고 있다고 말한다.   또 ‘비극의 주’ 사건 이후 가우디는 무정부주의와 무신론에 맞서기 위해 가톨릭 진영이 단결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종교건축물 중 하나로 꼽히는 성가족 대성당(사그라다 파밀리아)의 건축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한다.   가우디가 친구나 동료와 나눈 대화와 메모, 건축과정의 뒷이야기는 물론 당대 문화계 인사들이 그의 건축이나 인품과 관련해 언급한 저작 등을 총동원해 전차 사고 후유증으로 사망하기까지 그의 행로를 추적한다. 스페인 문화와 역사에 대한 자세한 설명, 100여 컷의 화보도 충실하다.   (하이스 반 헨스베르헌 지음ㆍ양성혜 옮김/현암사 발행ㆍ1만5,000원) 김영화 기자       =============================   1882년부터 건설되고 있는 스페인의 세계적인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1852∼1926)가 설계하고 31세때부터 74세로 사망하기 진전까지인 1926년까지 직접 감독을 맡았던 '사그다라 파밀리아'성당이 가우디 사망 100주기인 오는 2026년에 완공될 예정인 가운데 17일(현지시간) '수난의 파사드(Passion Facade)'에서쪽에서 바라본 파밀리아 성당의 모습. 바르셀로나=AFP 연합뉴스 1882년부터 건설되고 있는 스페인의 세계적인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1852∼1926)가 설계하고 31세때부터 74세로 사망하기 진전까지인 1926년까지 직접 감독을 맡았던 '사그다라 파밀리아'성당이 가우디 사망 100주기인 오는 2026년에 완공될 예정인 가운데 17일(현지시간) '수난의 파사드(Passion Facade)'쪽에서 바라본 파밀리아 성당의 모습.   예수의 삶 마지막 이틀을 그려낸 '수난의 파사드'는 최후의 만찬, 십자가의 죽음, 승천 등이 조각되어 있다. 한편, 지난해 10월 성당의 12개 첨탑 가운데 가장 높은 ‘예수 그리스도의 탑’(높이 172.5m) 공사가 마무리되어 완공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정리=박주영 '수난의 파사드(Passion Facade)'쪽에서 바라본 파밀리아 성당의 모습. 바르셀로나=AFP 연합뉴스    '수난의 파사드(Passion Facade)'쪽에서 바라본 파밀리아 성당의 모습. 바르셀로나=AFP 연합뉴스   '수난의 파사드(Passion Facade)'쪽에서 바라본 파밀리아 성당의 모습. 바르셀로나=AFP 연합뉴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사그다라 파밀리아 성당의 '수난의 파사드(Passion Facade)'쪽 앞에 관광객들이 투어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바르셀로나=AFP 연합뉴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사그다라 파밀리아 성당의 '수난의 파사드(Passion Facade)'의 조각품. '수난의 파사드'는 최후의 만찬, 십자가의 죽음, 승천 등이 조각되어 있다. 바르셀로나=AFP 연합뉴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사그다라 파밀리아 성당의 '수난의 파사드(Passion Facade)'의 조각품. '수난의 파사드'는 최후의 만찬, 십자가의 죽음, 승천 등이 조각되어 있다. 바르셀로나=AFP 연합뉴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사그다라 파밀리아 성당의 '수난의 파사드(Passion Facade)'의 조각품. '수난의 파사드'는 최후의 만찬, 십자가의 죽음, 승천 등이 조각되어 있다. 바르셀로나=AFP 연합뉴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사그다라 파밀리아 성당의 '수난의 파사드(Passion Facade)'의 조각품. '수난의 파사드'는 최후의 만찬, 십자가의 죽음, 승천 등이 조각되어 있다. 바르셀로나=AFP 연합뉴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사그다라 파밀리아 성당의 '수난의 파사드(Passion Facade)'의 조각품. '수난의 파사드'는 최후의 만찬, 십자가의 죽음, 승천 등이 조각되어 있다. 바르셀로나=AFP 연합뉴스      
559    미친 놈과 천재와의 경계선에서 망치를 들다... 댓글:  조회:5548  추천:0  2016-11-02
1926.6.10 평생 독신으로 살다 초라한 행색으로                                전차에 치여 세상을 떠나다   "가우디는 바그너와 세잔 및 그 외의 예술가과는 반대로, 바르셀로나에서 혼자 혁명을 시작했다. 이리하여 우리는 지도 위에 카탈루냐의 위치를 표시하듯 미술사에서도 카탈루냐 지방의 위치를 표시함으로서, 다른 국가와 다른 분야의 천재들이 했던 모든 것, 앞서간 예술가들이 했던 모든 노력을 단 혼자의 재능으로 일궈낸 가우디를 발견하게 된다."      건축의 성자, 자신이 지은 최후의 역작에 묻히다 인용한 글은 1927년 푸란스시코 푸욜이 카탈루냐 출신인 가우디를 추모하면서 쓴 에세이의 마지막 문단이다. 약 일 년전인 1926년 6월 7일 가우디는 전차에 치어 3일 후인 10일 7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가우디는 너무 초라한 행색 탓에 아무도 이 거장을 알아보지 못해 너무 늦게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말년에 건축 작업에만 몰두한 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가우디는 로마 교황청의 특별한 배려로 성자들만 묻힐 수 있다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지하에 묻혔다. 가우디는 건축의 성자이면서, 실내 디자인과 장식 조각, 심지어 의자와 화장대에 이르기까지 제작한 20세기의 독창적인 예술가이다. 그의 전 작품에 드러나는 우아하고 기괴한 곡선과 다양한 자연의 이미지를 건축에 사용한 그의 '집'들은 피카소의 그림과 견줄 수 있는 건축 작품이기도 하다. 그의 거대한 영혼과 작품은 당대보다도 세월이 지날수록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교수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확실하게 갈리는 독창적인 학생 비록 실물을 보지 못했지만 그의 위대한 '작품'들은 도판으로 보아도 들어가고 싶고, 거닐고 싶고, 심지어 만지고 싶다. 건축물들이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린다. 그의 대표작인 ‘카사 바트요’, ‘카사 밀라’, ‘구엘 공원’, ‘구엘 별장’, ‘사그라다 파밀리아’ 는 미켈란젤로나 피카소, 바그너처럼 작품으로 남아있다. 건축은 인간이 살아가는 실용적인 공간이다. 벽에 걸어두고 보는 그림이 아니고, 음반으로 연주되는 음악이 아니지만, 가우디는 건축물을 보는 이에게 영감을 주는 작품으로 만들었다.       1895년 바르셀로나 신도시계획 당시 세워진 연립주택으로 1910년 완성된 카사밀라(Casa Milà)의 1920년 모습과 현재 모습   스페인의 제 2도시로서 가장 부유한 바르셀로나는 또한 가장 스페인답지 않은 도시이다. 스페인어를 쓰지 않고 카탈루냐어를 사용한다. 1975년 프랑코 독재가 끝나고 스페인 각지에서 지방분리 운동이 일어났다. 그 중 바르셀로나가 주도인 카탈루냐는 가장 앞장서 자치권을 획득하고 자신들의 고유 언어인 카탈루냐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였다. 느긋하고 여유를 즐기는 남부지방과는 달리 바르셀로나는 활기가 넘치는 현대적 산업도시이다.   스페인에서 가장 유명한 거리로 손꼽히는 람블라스 거리의 끝 포르탈 데 라 파우광장에는 높이 50m 컬럼브스의 탑이 지중해를 바라보며 우뚝 솟아 있어 해양 제국 스페인을 상징한다.       바르셀로나는 ‘가우디의 도시’라고 불린다. 바르셀로나가 자랑하는 안토니 가우디(1852-1926)를 만나러 간다. 금세공사의 아들 가우디가 바르셀로나 건축학교를 졸업하던 해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사용할 진열장을 디자인함으로써 가우디라는 이름을 세상에 처음 알리게 되었다. 에우세비 구엘(Eusebi Guell,1898-1916 )은 자신의 집과 공원을 만들어 줄 것을 의뢰하면서 인연이 되어 가우디의 든든한 스폰서가 되었다.   성가족성당 La Sagrada FAMILLIA       성그라나다 파밀리아 성당은 1883년 가우디가 시작하여 무려 43년동안 평생을 바쳐 심혈을 기울였던 예술적 창조물이다. 1926년 어느날 항상 그래왔듯이 평소처럼 성당의 건축 설계를 머릿속에 그리며 걷고 있던 가우디는 트램에 치여 안타깝게도 죽고 말았다. 가우디 사후 10여년 성당 공사가 잠시 중단되었다가 1940년에 재개한 공사는 착공한지 무려 130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건축이 현재 진행형이다.   가우디가 성가족성당을 지금과 같은 친환경적인 건축물로 설계하는데 영감을 준 바위들이 여러 곳에 있다고 한다. 바르셀로나 인근의 몬 세라트 바위산, 터키의 카파도키아 바위산,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론다 바위계곡 등이다.    * 몬 세라트산   *터키의 카파도키아 바위산       *안달루시아의 론다 계곡        가우디의 성당은 예수의 탄생, 수난, 영광을 나타내는 3개의 정면 장식과 각 정면마다 4개의 탑을 세워 총 12개의 탑(12제자를 상징)을 세우고, 한가운데에 예수에게 바치는 중앙탑을 세울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지하 성당과 성당 동문인 탄생의 파사드만 완성하였는데, 탄생의 정면 양식은 소망, 자비, 믿음을 표현하고 있다. 마리아와 요셉의 약혼에서부터 예수 탄생과 관련한 복음서 내용을 자연주의적인 조각들로 장식하였다. 그리고 옥수수 모양을 본뜬 거대한 종탑 중간 부분에는 거룩하시다-Sanctus- 글자 모자이크가 새겨져 있다.   또한 성당 뒷쪽에 있는 서문에는 예수 수난의 조각, 십자가의 고난의 형상이 조각되어져 있다. 그리고 성당 지하에는 성가족 성당의 연혁과 디자인, 기술적 건축 과정 130년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박물관이 있고, 이 성당의 완성(2026년 예정)을 기다리는 가우디가 다른 성인들과 함께 조용히 잠들어 있다.            저녁식사는 스페인의 전통음식 빠에야를 먹으러 간다. 홍합, 조개, 새우, 오징어 등 각종 해산물로 만든 해물 볶음밥이다. 더불어스페인의 전통 술인 샹그리아를 곁들이면 입안이 훨씬 개운해진다.               부벽 없이 곡선형태의 현수선 아치 적용 장식 뛰어넘어 자연의 합리적 본성 담아내 가우디 사후 100년 되는 2026년 완공 예정 반듯한 도시계획으로 밋밋했던 바르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카사 바트요 등 개성 강한 작품으로 매력적인 도시 탈바꿈 지난 10월 중순 3년 6개월 만에 다시 찾은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바르셀로나. 카탈루냐가 낳은 천재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가 마지막까지 애정과 헌신을 다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성가족 대성당)' 앞은 언제나 그렇듯이 전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직접 본 것은 두 번째지만 마치 처음 본 것과 같은 낯선 기분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럽 대부분의 성당과 마찬가지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100년이 넘도록 공사가 아직 끝나지 않아 매번 다른 모습으로 방문객들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실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완공 예정일은 가우디 사후 100년이 되는 오는 2026년이다.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수많은 방문자를 맞으면서도 한편에서는 공사가 한창이다. 스페인 카탈루냐에 위치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가 마지막 생의 불꽃이 꺼질 때까지 애정과 헌신을 다한 이 성당은 100년이 넘는 긴 공사 기간을 거쳐 오는 2026년 완공을 앞두고 있다. /사진제공=건축사진가 윤준환 성당 내부 모습.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전망대에서 바라본 바르셀로나 전경. 가우디의 고향 레우스에 위치한 몬세라트산과 몬세라트 수도원. 가우디는 몬세라트산의 기괴한 모습을 보고 영감을 얻어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설계했다. /사진=고병기기자 생의 마지막 열정 쏟아부은 가우디 건축의 정점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가우디 건축의 정점에 있는 건축물이다. 가우디는 1926년 전차에 치여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마지막 12년간을 오로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만 매달렸다. 특히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또 다른 성당인 '바르셀로나 대성당'과 달리 직선이 아닌 곡선 형태의 '현수선' 아치를 적용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 적용된 곡선인 현수선 아치의 시작은 미완성으로 남은 콜로니아 구엘 성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우디는 구엘 성당 설계를 위해 무려 10년이라는 연구기간을 거쳐 현수선 모형작업에 성공했으며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설계에 더욱 큰 규모로 이를 적용한다. 최근 국내 최초로 가우디 자서전 '가우디 1928'을 옮겨 펴낸 건축가 이병기씨는 "가우디가 현수선 아치를 사용한 것은 수직으로 세운 돌기둥에 아치를 올리는 기존 대성당의 구조가 부벽이라는 목발을 짚을 수밖에 없는 불구의 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가우디의 동료 건축가들 역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 이런 부벽들이 있었다면 이 시대의 위대한 건축물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할 정도로 그 성취를 자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길게 늘어뜨린 아치를 사용하면서 성당에 사용된 기둥들이 기울어졌으며 가우디 본인은 이를 자체로는 강하지 않지만 서로 협력해 더욱 강해지는 성당이라고 평했다"고 덧붙였다. 실제 기울어진 기둥과 현수선 아치를 사용하면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구조는 대단히 합리적으로 만들어졌다. 현수선 아치 덕분에 모든 기둥들의 지름이 얇아졌으며 성당의 사방을 둘러싸고 있던 부벽들이 사라지면서 가볍고 경쾌한 느낌을 주게 됐다. 이 건축가는 최근 한 기고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돌과 타일·철물로 만들어낸 기괴한 형태에만 관심을 둘 뿐 가우디의 건축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자연을 닮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며 "가우디는 자연의 장식을 흉내 내는 데 그치지 않고 자연의 합리적인 본성을 건물에 담았다"고 강조했다. 실제 가우디는 자연을 단순히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존중과 경외감을 드러내고 있다. 일례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완공 시 최고 높이는 170m로 알려져 있다. 이는 인간의 작품은 신의 그것을 넘어설 수 없다는 이유로 최고 높이를 바르셀로나 몬주익 언덕(173m)보다 낮게 설계했기 때문이다. 괴짜 천재를 품어 행복한 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라는 도시가 주는 인상은 유럽의 여느 도시와 다르다. 유럽을 꿈꾸는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흔히 포르투갈 리스본의 좁고 울퉁불퉁한 골목길을 상상하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예측할 수 없는 골목길에서 묘한 매력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바르셀로나는 다르다. 대성당을 중심으로 옛 거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고딕지구·보른지구 등을 제외하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계획된 반듯하고 넓은 도로가 뚫려 있는 도시가 바로 바르셀로나다. 이 같은 도시계획의 기초는 지금으로부터 15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0세기 전 유럽에 전염병이 창궐한 것이 바르셀로나 돕챨宛뮌?계기가 됐다. 1853년 인구밀도가 높았던 바르셀로나는 기존 성벽을 허무는 '에이샴플라(L'Eixample)'라고 이름 붙인 도시계획 공모전을 연다. 이때 채택된 것이 일데폰소 세르다라는 토목기사의 계획안이었다. 그의 계획은 바르셀로나 도시 전체를 20m 폭의 도로로 둘러싼 정사각형 모양의 주거 블록으로 채우는 것이었는데 당시에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현대적인 도시계획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그쳤다면 바르셀로나가 지금과 같이 전 세계인들에게 사랑 받는 도시가 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계획도시 바르셀로나가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도시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가우디라는 천재 건축가를 포용했기 때문이다. 가우디가 바르셀로나 건축학교를 졸업할 당시 교장은 졸업장을 건네주며 "우리가 천재를 보게 될지, 미치광이를 보게 될지는 시간이 말해줄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 정도로 가우디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우디는 후원자 구엘을 비롯한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바르셀로나에 그의 발자취를 뚜렷하게 남길 수 있었다. 가우디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포함해 카사 밀라, 카사 바트요 등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바르셀로나에 남기며 그를 포용한 도시의 은혜에 보답한다. 특히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멋진 건축물이 즐비한 바르셀로나에서도 개성 강한 외관과 독보적인 높이로 확실히 튀는 건물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계획된 도시 바르셀로나와 개성 강한 가우디의 만남은 행복한 결말을 남겼다. 구자훈 한양대 도시대학원 교수는 "전 세계적으로 보면 매력적인 도시는 지역적으로 동질성을 지니고 있다"며 "유럽 대부분의 도시가 그러하듯이 바르셀로나는 도시 전체가 하나의 공통된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가운데 가우디의 예술작품 같은 건축물로 인해 개별 건물의 개성도 부각되면서 도시 전체가 살아나는 느낌을 준다"고 설명했다. 카탈루냐의 두가지 보물 '가우디와 FC바르셀로나' 스페인은 지역색이 강하다. 한국의 지역감정은 저리 가라 할 정도다. 특히 카탈루냐와 마드리드 지방의 갈등은 현재진행형이다. 최근에도 독립 찬반을 묻는 투표가 실시됐고 시내 곳곳에 카탈루냐 독립을 지지하는 깃발이 걸려 있을 정도다. 이 같은 논쟁은 축구장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실제 최근 조르디 산체스 카탈루냐 국민회의 대표는 "카탈루냐인의 정체성을 어디서 보여줘야 하는지 지시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챔피언스리그 예선전에서 카탈루냐 깃발을 나눠주겠다고 밝혀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또 FC바르셀로나의 수비수 헤라르드 피케는 공개적으로 카탈루냐의 독립을 지지해 스페인 국가대표팀 경기에서 홈팬들로부터 야유를 받기도 했다. 특히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하는 카탈루냐 지방과 마드리드 지방은 대중에게도 잘 알려진 FC바르셀로나와 레알마드리드의 유명한 축구 경기 '클래식 더비'를 통해 직접 대결(?)을 벌이기도 한다. 이처럼 자기 고장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이 강한 카탈루냐인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것 두 가지가 있다면 아마도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와 프로축구팀 'FC바르셀로나'일 것이다. 이는 단순히 가우디와 FC바르셀로나가 각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만은 아니다. 가우디와 FC바르셀로나 모두 그 무엇보다 카탈루냐인들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FC바르셀로나의 주축 선수로 활동하거나 현재도 뛰고 있는 카를로스 푸욜, 피케 등이 모두 카탈루냐 출신이다. 가우디 역시 카탈루냐 지방의 레우스가 고향이다. 그리고 가우디는 자신의 고향 레우스에서 본 몬세라트산의 기괴한 바위들을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설계에 응용하기도 했다. 가우디의 작품 세계에서 카탈루냐 지방의 자연은 가우디 건축물을 낳은 영감의 원천과도 같은 것이다. 자신들의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카탈루냐인들이 가우디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바르셀로나=고병기기자
스페인 건축대가 안토니 가우디 Antoni  Gaudi 건축포토 첫번째로 포토이미지 모음입니다. 스페인의 아름다운 항구도시 바르셀로나에 위치합니다     현대건축의 아버지라 불릴만한 는 자연곡선을 살린 색체미학의 건축으로 현대사의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구엘공원은 가우디의 후원자인 구엘이 영국의 전원도시를 바르셀로나에 구현하기 위해 가우디에게 의뢰하여 단독주택단지로 건설된 건축입니다. 최초 60여채를 지었으나 자금,세금문제로 중단되고 후손이 바르셀로나시에 기증하여 오늘날의 공원이 되었습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카사 바트요, 카사 밀라, 구엘공원, 사그라다 파밀리아 가 있으며 1926년 74세로 사망하기 까지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자연미를 살린 건축 곡선과 세라믹타일의 아름다운 색체 가우디는 건축의 성자로 사그라다 파밀리아(성가족성당) 지하에 묻히는 영광의 삶이었습니다.     사진을 자세히 보시면 저 멀리 바다가 보이지요 바르셀로나는 아름다운 항구도시로 스페인의 카탈루냐지방에 속하며 현재, 카탈루냐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위 사진은 구엘공원의 마스코트인 도마뱀 조각입니다 세라믹 타일에 아름다운 색체의 조합으로 참 이뻐요 ^.^             가우디 건축양식의 특징인데요 돌을 깍고 쌓아 만든 돌기둥이에요 기이한 모습들이 많습니다                         돌과 아름다운 타일로 꾸며 놓은 돌 벤치라 할까요 앉아 있으면 꿈나라에 온 듯해요                      아래의 사진을 보시면 기둥위에 마당(정원) 같은데가 보이시죠 저기가 인데요 밑에 86개의 기둥이 떠 받이고 있다고 합니다. 단독주택단지의 메인광장이라 보시면 될 듯해요 설명이 많이 들어가 마치, 여행포스팅처럼 되었네요 여행 전, 후 주어진 상황에 맞게 공부한다면 감동이 배가 되겠지요   배경음악은 스페인의 영광의 출발점이 되었던 콜럼버스를 그린 영화 콜럼버스OST Conquest Of Paradise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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