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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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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7    천재적인 건축가 비참하게 죽다... 댓글:  조회:3987  추천:0  2016-11-02
  천재적인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Antoni Placid Gaudí, 1852년~1926년)                           안토니 가우디 이코르네트(카탈루냐어: Antoni Placid Gaudí i Cornet, 1852년 6월 25일 - 1926년 6월 10일)은 스페인 카탈루냐 지역의 건축가이다.   기록된 그의 정식 이름은‘안토니 플라시드 기옘 가우디 이 코르넷이다. Antoni Plàcid Guillem Gaudí i Cornet’이다. 아버지쪽 가문은 프랑스계의 가우디 집안이고, 어머니쪽이 코르넷 가문이다. 안토니라는 이름은 그의 어머니의 것을 물려받은 것이다. 74세를 살았으니 당시로서는 단명한 것은 아니나, 젊어서 가족의 대부분을 잃고 쓸쓸한 인생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밀라 주택, 바트요 주택, 구엘 저택, 구엘 공원,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등을 설계했다. 19세기말 카탈루냐 지역에는 사회적, 문화적으로 대단한 변화가 있었다. 가우디는 당시 카탈루냐 건축을 주도했던 고전주의 건축을 벗어나, 건조한 기하학 만이 강조된 건축이 아닌 나무, 하늘, 구름, 바람,식물, 곤충 등 자연의 사물들을 관찰했고, 그런 형태들의 가능성에 관하여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 결과 그의 건축물은 기하학적인 형태들 외에도 곡선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내부 장식과 색, 빛이 조화를 이룬 건물들을 건축했다.     건축 작품   그의 건물 중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은 현재까지 모두 7 작품이다.   1.비센스 주택 1878-1880 2.구엘 저택 1885-1889 3.구엘 공장단지 내 지하경당 1898-1914 4.구엘 공원 1900-1914 5.바트요 주택 1904-1906 6.밀라 주택 1905-1910 7.성가족성당 탄생 입면 및 지하경당 1884-1926   그중 구엘저택과 밀라주택, 성가족성당은 각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을 수 있으며, 바르셀로나에 있는 성가족 성당은 아직도 건축 중에 있다.   이야기   1918년 부터는 자신이 평생동안 건축해온 성가정 (성가족) 대성당 건설에 매진했지만 재정 문제로 인해 끝을 보지 못하고 1926년 6월 7일 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집으로 가던 길에 지나가던 제38호 전차에 부딪혀 치명상을 당했다. 그러나 운전수는 지저분한 노숙인으로 생각하고 그를 길 옆에 팽개치고 전차를 몰고 가버렸다. 사람들이 병원으로 데려가고자 택시를 찾았지만 역시 노숙인으로 생각한 기사들은 그냥 지나쳐 3번의 승차 거부 끝에 4번째로 잡은 택시 운전수가 겨우 운전했지만 병원도 2곳이나 진료 거부를 당해 빈민들을 구제하기 위한 무상 병원에 놔두고 가버렸다고 한다. 문제는 신분을 증명하는 것인데 병원에서 방치된 채로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가우디는 병원 간호사에게 이름을 말하자 병원 관계자들은 경악을 하며 가우디의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급히 연락했다고 한다. 서둘러 달려온 그들이 다른 병원으로 옮기자고 말했지만 가우디는 "옷차림을 보고 판단하는 이들에게 이 거지같은 가우디가 이런 곳에서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게 하라. 그리고 난 가난한 사람들 곁에 있다가 죽는 게 낫다"라며 그대로 빈민 병원에 남았고 결국 1926년 6월 10일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를 죽게 만든 제38호 전차 운전수는 파직과 동시에 구속되었으며, 승차 거부한 택시 운전수 3명도 불구속 입건되었다. 결국 택시 운전수 3명과 그의 치료를 거부했던 병원은 막대한 배상금을 가우디 유족에게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장례식은 1926년 6월 13일 많은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고, 유해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지하 묘지에 안장되었다.   저서   가우디는 남긴 글은 거의 없다. 그가 기록물로는 20대에 그가 직접 7년간 사용했던 노트 한 권과, 장식예술 박람회의 관람하고 나서 잡지에 기고한 비평의 기사글, 개인적인 서신들이 고작이다. 건축적 내용을 담은 기록물로는 20대 가우디의 노트가 유일하다. 건축가 가우디의 건축적 고민들을 엿볼 수 있는 그의 노트는 이라는 이름으로 2014년 처음 우리말로 정식 번역되었고, 2015년에는 가우디의 애석한 죽음을 기리며 그의 동료들이 쓴 최초의 가우디 전기가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556    100여년간 오로지 입장료와 모금으로만 짓고 있다니... 댓글:  조회:4949  추천:0  2016-11-02
  1852년 태어나 1926년에 사망한 안토니 가우디 이코르네트(Antoni Placid Gaudí i Cornet)는 단순히 ‘천재 건축가’라고 표현하기엔 무척이나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는 불우한 가정형편으로 인해 학업과 알바를 병행해야 하는 고학생이였으나, 그 덕분에 (훗날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실제로 구현할 수 있는) 풍부한 현장 경험을 얻었다. 비록 부모님을 일찍 여위었으나, 대장장이였던 아버지 덕분에 기발하고 독창적인 철제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졸업시험에 탈락한 후 재시험을 간신히 통과한 낙제생이였으나, 사후에 자신의 주요 작품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영예를 누렸다.(유네스코의 입장에서 보건데 18세기의 인물인 가우디의 작품이 창덕궁이나 조선왕릉급인 셈) 형제자매조차 없었을뿐더러, 평생 그 어떤 여인의 사랑도 받지 못한 불행한 인생이였으나, 구엘이란 후원자를 얻어 살아 생전에 건축가로써 최고의 명성을 쌓았다. 73세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으나, 그가 자신의 생애를 바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한해 200만명 이상이 방문해 그의 이름을 기린다. 안토니 가우디, 그는 대체 어떤 인물인가?    여행작가 조명화의 1분여행   www.badventure.kr           첫 번째 키워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인정한 단 한명의 건축가   일반적으로 세계문화유산은 특정한 건축물 혹은 특정한 구역(역사 지구)를 기준으로 심사와 등재가 이루어진다. 2005년에 등재된 마카오 역사 지구(Historic Centre of Macao)를 예로 들어보자. 중국과 포르투칼이란 동서양의 복합문화구역으로써 20여개의 건축물과 광장이 함께 등록되어 있다. 멀리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의 조선왕릉(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만 보더라도 40기의 왕릉이 무려 18개 지역에 흩어져 있다. 비록 마카오란 지역과 조선왕릉이란 주제의 가치는 인정받았으나, 정작 이를 설계한 ‘건축가’는 찾아볼 수 없는 셈인데, 마추픽추나 앙코르와트는 수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문화유산 중에는 건축가는커녕 건축연대도 확실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러나, 가우디는 건축가 가우디 본인이 세계문화유산의 주체다. 스페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가우디 건축물의 공식 명칭은 ‘바르셀로나의 건축물’도 ‘사그라다 파밀리아’도 아닌 ‘안토니 가우디의 건축’(Works of Antoni Gaudí).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등재 대상이 특정한 건축물이기 이전에 가우디란 ‘인물’인 셈이다. 세상에 유네스코가 인증한 건축가, 또 있을까.   Editor’s tip. 가우디가 평생 주도적으로, 공동으로, 조역으로 참가한 크고 작은 건축 프로젝트는 약 60여개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은 그 중 7곳. 시대 순으로 나열하면, 카사 비센스(1878-1880), 구엘 저택(1885-1889), 구엘 공장단지 내 지하경당(1898-1914),구엘 공원(1900-1914), 카사 바트요(1904-1906), 카사 밀라(1905-1910), 그리고 성가족성당 탄생의 문 및 지하경당(1884-1926).         두 번째 키워드, 죽는 순간까지 삐딱했던 반항아   여러분, 제가 이 졸업장을 천재에게 주는 것인지, 미치광이에게 주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답은 시간이 말해 줄 것입니다.   가우디의 졸업식날 로젠 교장(Elies Rogent)이 남긴 한마디는 오늘날 그의 천재성을 신화적으로 표현한 일화처럼 전해져 내려오나,사실 그를 지지하는 일부 교수의 설득으로 재심 끝에 간신히 졸업한 그에게 격려와 축하를 전했을 뿐이다. 가우디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업과 알바를 병행하하느라 공부에 전념하기 어려웠던 고학생인데다가, 교수진의 지시를 잘 따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문제아였다. 심지어 동기들의 책을 빌려서(당시 건축교재가 원체 고가라 가우디의 형편으론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제멋데로 낙서를 일삼아 친구들의 비난을 사기 일쑤였다고.         옷차림을 보고 판단하는 이들에게 이 거지같은 가우디가 이런 곳에서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게 하라. 그리고 난 가난한 사람들 곁에 있다가 죽는 게 낫다.   그의 삐딱한 성격은 심지어 죽을 당시에도 변치 않았다. 그는 73세의 나이에 전차에 치어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망한 곳은 현장이 아니라 그가 3번째로 옮겨진 병원이다. 그런데 얼마나 심한 상태였길래 병원을 3곳이나 옮긴 것일까? 가우디의 상태도 상태지만, 실제로는 병원측에서 사고 당시 그의 초라하다못해 남루한 행색을 보고 진료를 거부해 3번이나 병원을 옮겼다고 한다. 가우디는 가까스로 정신이 든 이후에도 빈민병원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기를 거부했고, 결국 사망했다. 만약 그가 자신의 신분을 활용했다면, 자신의 목숨을 위해 좀더 유연하게 대처했다면 최소한 조금은 더 오래 살았으리라. (이를 계기로 가우디를 친 전차 운전수는 물론 그를 태우지 않은 택시 기사 3명과 두 곳의 병원은 시민들의 항의를 받았을 뿐 아니라, 막대한 배상금을 치러야 했다.)         세 번째 키워드, 가우디를 사랑한 단 한명의 친구, 구엘   가우디를 낳은 것은 대장장이인 아버지였으나, 건축가 가우디를 알아준 것은 구엘이다. 언급했다시피 가우디는 학교에서는 교수의 말을 듣지 않는 문제아요, 직장에서는 선임의 설계안을 제멋데로 바꾸는 후임인데다가 결혼은 커녕 평생 변변한 연애조차 하지 못한 쑥맥이였다. 아무리 능력이 있다하더라도 주변에 적이 너무 많으면, 큰 성공을 거두기 어려운 법인데 건축가 가우디의 재능을 이해하고, 신뢰한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구엘이다.         가우디를 이야기하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 구엘. 구엘은 벽돌 제조업으로 쌓은 막강한 부를 기반으로 가문의 주요 건축물을 가우디에게 독점적으로 의뢰했다. 오늘날 가우디가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릴 수 있게된 구엘 가문의 건축물은 그의 역량 이전에 건축주 구엘의 전폭적인 지지 덕분에 탄생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 숨진 가우디에게 구엘이 없었다면? 글쎄, 아마도 가우디 없는 바르셀로나는 평범한 스페인의 소도시로 남았으리라.         네 번째 키워드, 화려한 건축의 이면에 숨겨진 ‘창조의 고통’   그가 창조한 건축물을 보노라면 시각적인 기발함으로 인해 ‘가우디는 천재 혹은 미치광이구나’라고 여길 뿐 서태지조차 은퇴시킨‘창조의 고통’은 간과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색색의 타일 조각을 붙여 마치 새로운 생명체로 탄생시킨 도마뱀(구엘 공원), 로마 병정을 본딴 환풍구(카사 밀라), 해골의 집(카사 바트요), 시시각각 변하는 태양빛이 건물 내부에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스테인드글라스(사그라다 파밀리아) 등은 최신기술로 지어진 현대 건축물과 비교해 보더라도 경이롭기만 하다. 그의 창조성을 단순히 미학적인 측면과 장인정신으로만 접근하기엔 아쉬운 이유다.         트렌카디스(Trencadis) : 마치 어린아이가 색종이를 붙이듯 타일, 유리 등의 소재를 이용해 건축물을 장식하는 트렌카디스 기법은‘가우디하면 떠오르는 상징’과도 같다. 타일아트나 모자이크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이해가 쉽겠다. 구엘공원의 도마뱀으로 잘 알려진 트렌카디스는 최소한 건축 분야에서는 가우디가 최초로 시도한 기법 중에 하나이며, 그의 명성에 가려져 있기는 하지만 또 다른 건축가 주졸(Josep Maria Jujol)이나 마니(Carles Mani) 등과의 합작품이기도 하다.         지금이야 개성있는 가우디 특유의 기법이라고 여겨지지만, 생각해 보라. 트렌카디스를 시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가의 자기를 부쉈을 것이며, 동시대의 건축가와 인부들에게 얼마나 비난과 오해를 샀을 것인가. 아무리 자신의 이름을 딴 건축물을 짓는다고 하지만, 구엘이 가우디의 진정한 후원가인 이유다.         제철 기술 : “직선은 인간의 선이고 곡선은 신의 선이다.” 가우디의 말마따나 그는 종려나무의 입사귀, 박쥐, 도마뱀 등의 동식물은 물론 해외의 건축물에서 모티브를 딴 실험적인 건축을 시도했다. 새로운 장식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이를 구현할 수 있는 적절한 ‘기술’ 또한 필요하다. 어렸을 때부터 철을 다루는 아버지 밑에서 수련 아닌 수련을 쌓은 가우디가 아니었다면, 철을 종잇장처럼 다루는 화려한 곡선과 형상의 장식은 결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으리라.   오늘날 그의 건축물을 놓고 기존의 권위에서 탈피한 ‘아르누보 예술’이니 자유로움을 추구한 ‘아방가르드 스타일’ 따위의 ‘뒤늦은’해석이 붙여지기도 한다. 그런 측면에서 반항은 예술가의 필연이 아닐 수 없다. 설사 그것이 반항을 위한 반항일지라도.         다중 현수선 모형(Multiplex Catenary) : 첨단 컴퓨터와 건축설계프로그램이 없던 시대, 하늘로 치솟은 고딕 건축물은 건축가에게 현존하는 기술과 이상적인 디자인 사이에 위치한 결과물이였으리라. 3세기 동안 유럽 곳곳을 장식한 고딕 건축은 외형적으로 압도적인 장관을 연출하는 반면 구조적으로 버팀도리(Flying Buttress, 버팀벽, 비량)의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완공시 170미터에 달하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내부에서 우리는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한 빛의 환상적인 색채를 고스란히 만날 수 있다. 대체 어떻게?         가우디는 버팀도리를 해결하기 위해 건축물을 뒤집었다. 뒤집은 형상의 건축물을 밧줄로 만들고, 무게가 실리는 지점마다 추를 연결해 가장 이상적인 무게 분산과 건축의 형상을 끊임없이 연구했다. 성당 지하의 전시실에는 그가 십수년간 성당에서 숙식하며 건축부터 조각까지 수많은 작품을 직접 실험하고, 연습하고 연구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자, 이래도 가우디가 과연 ‘타고난 천재’인가?         다섯 번째 키워드, 가우디 최후의 작품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체 언제 완공되는 거야? 딱 100년! :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의 마지막 작품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아직도 건축 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그가 1883년부터 40년간, 특히 사망하기 직전 15년간은 매진한 최후의 프로젝트로 가우디 사후 100년을 기념해 2016년 완공 예정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의 지원을 일체 받지 않고, 오직 입장료 수익으로만 진행하고 있어 이 또한 미지수.         완공도 되지도 않은 성당이 어떻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을까? : 세부 내역을 보면 사그라다 파밀리아 전체가 아니라,그 중 가우디가 건축에 참가한 ‘탄생의 문 및 지하경당’만 등재되어 있다. 완공된 이후라 할지라도 세계문화유산의 까다로운 등재요건에 비추어 보건데 가우디 사후에 건축된 성당 전체가 추가 등재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독실한 신자 : 가우디의 생애 후반기를 딱히 돈도 되지 않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에 바친 이유는 그의 신앙심이 깊어졌기 때문이리라.성당을 통해 신의 목소리를 인간에게 전달하고자 고심한 흔적을 세 개의 파사드를 가득 채운 수많은 조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첨언하자면 가족도, 아내도, 자식도 없는 그가 매진할 곳은 종교와 일 뿐이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부모가 모두 사망하고,형제자매조차 없었다.)        
555    자기가 설계한 건축물 안에 묻히기까지... 댓글:  조회:5054  추천:0  2016-11-02
    안토니 가우디 〈사그라다 파밀리아〉   주소 : Carrer de Mallorca 401, Barcelona 대중교통 : 지하철 마요르카(Mallorca), 사르데냐(Sardenya) 역 개관 시간 : 10월-3월 오전 9시-오후 6시, 4월-9월 오전 9시-오후 8시 휴관일 : 1월 1 · 6일, 12월 25일 오후 · 26일 입장료 : 13.5유로(학생, 18세 미만 11.5유로, 10세 이하 무료) 홈페이지 : www.sagradafamilia.cat 아마도 가우디의 명성을 국제적으로 널리 알린 건축물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즉 성가족 성당일 것이다. 바르셀로나의 대표적인 이미지에는 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모습이 포함되기 마련인데, 그 규모가 워낙 크고 계획도 현대 건축물답지 않게 오랜 세월을 필요로 하는 것이어서 1-2년이면 건물을 ‘뚝딱’ 짓고 삼십 년 된 아파트는 당연히 헐어 버려야 마땅한 퇴물 취급을 하는 우리의 풍토와는 너무 다르다. 그래서 더욱 인상적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유럽의 성당 중에는 짓는 데 몇 백 년이 걸린 곳이 허다한데, 역사 속의 사건이 아니고 현재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우리에게 강렬하게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1883년, 한 독실한 가톨릭 단체가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신자들의 모금으로 가우디에게 성당 건축을 맡겼다. 한 해 전에 다른 건축가가 처음 설계를 시작했던 것을 이어받았는데, 이 작업은 가우디가 1926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고 그 이후에는 다른 건축가들이 넘겨받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처음에는 의뢰 받은 다른 일과 함께 진행해 오다가 1914년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축에만 매달렸으며, 심지어 성당 옆에 숙소를 만들고 그곳에서 일하며 살기까지 했다. 가우디는 본인이 살아 있을 때 성당 건축이 마무리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내가 성당을 완성하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 않다. 난 늙을 테지만 내 뒤를 다른 사람들이 이어갈 것이다. 작품의 정신은 항상 지켜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작품과 함께 살아가는 세대의 것이다.” 1926년, 그는 전차에 치여 심각한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고, 3일 후에 사망했다. 그가 눈을 감은 병원은 루이스 도메넥 이 몬타네르라는 또 다른 모데르니스모 건축가가 설계한 산타 크레우 이 산트 파우 병원(Hospital de la Santa Creu i Sant Pau)이었다. 이곳은 가우디가 그토록 열과 성을 다하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있다. 그의 유해는 성당 안에 묻혔으며 병원에서 성당까지 이어지는 길에는 그의 이름이 붙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앞에 도착하면 누구나 높이 솟은 탑에 눈길을 빼앗기게 된다. 직육면체도 원통형도 아니고, 꼭짓점이 뾰족하지도 않은, 타원형을 아주 길게 늘여 놓은 것 같은 탑이다. 예수의 열두 사도들에게 봉헌되는 열두 개, 복음서 저자들을 위한 네 개,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씩 해서 모두 열여덟 개의 탑이 지어질 예정이라고 한다. 건물의 동쪽, 그러니까 연못이 있는 공원 쪽에 가까운 곳이 가장 먼저 지어 올리기 시작한 ‘예수 탄생’ 파사드다. 성당으로 들어가는 문에는 가브리엘 대천사가 마리아를 찾아오는 수태고지 장면, 예수 탄생 장면, 동방박사와 목동이 경배하러 오는 장면 등이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이 파사드 위의 탑 네 개 중 우리가 보기에 가장 왼쪽에 있는 탑이 성 베르나베(사도행전의 바르나바)에게 봉헌된 탑인데, 가우디가 살아 있을 때 유일하게 완성된 탑이라고 하며 높이는 100미터에 이른다. ‘예수 탄생’ 파사드의 모습   ‘예수 탄생’ 파사드에는 예수가 태어난 장면의 조각도 있다.   성당의 서쪽은 ‘예수 수난’ 파사드다. 예수의 수난 장면을 재현해 낸 사람은 조세프 마리아 수비락스(Josep Maria Subirachs)라는 바르셀로나 출신의 조각가로, 1987년부터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작업을 맡았다. 예수의 수난, 고통, 죽음, 희생이라는 주제를 다룬 조각은 서쪽 하늘에서 해가 질 때 점점 어두워지는 풍경과 드라마틱하게 어울린다. ‘예수 수난’ 파사드의 모습   ‘예수 수난’ 파사드에 있는 조각들   가우디는 고딕 양식의 라틴 십자가형 플랜(한쪽이 나머지 셋보다 긴 십자가 모양의 도면)에서 시작하여 기하학적인 형태와 자연의 모티프를 사용해서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성당을 설계했다. 가우디가 1926년에 사망한 뒤, 1930년에 ‘예수 탄생’ 파사드와 종탑이 완성되었다. 스페인 내전 중에 가우디의 작업실에 화재가 일어나 설계도와 각종 사진, 자료 등이 불탔으나 그의 아이디어는 계속 이어졌고, 내전이 끝난 1939년 이후에는 속도는 느리지만 공사가 재개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공사에 사용된 기술도 현대의 기술로 바뀌었다. 시멘트도 활용하지만 가우디 특유의 모자이크(트렌카디스(trencadÍs) 기법이라고 한다. 색유리나 도자기 등을 깨뜨린 후 붙이는 방식으로, 곡면에 모자이크를 제작하기가 좋다) 제작 방식은 계속 이어진다. 2010년에는 성당의 내부가 완성되어 교황 베네딕토 16세(Benedictus XVI)가 집전하는 봉헌 미사가 거행되었다. 성당 내부의 기둥은 마치 키가 큰 야자수가 줄지어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가우디가 사망한 지 백 년 되는 해인 2026년에 완공될 예정이라고 한다. 1990년대에 이곳을 처음 봤을 때는 과연 그때가 오기는 하는 것일까 싶었는데 십 년 조금 넘게 기다리면 완성된 성당을 볼 수 있다니 묘한 기분이 든다. 성당 내부 공사 중인 모습   성당 안 가우디의 무덤
554    인간이 만든 최고의 조형물 - 작품은 긴 시간의 결과물 댓글:  조회:4363  추천:0  2016-11-02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1926년 6월 10일 저녁 5시 30분.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코르테스 거리에서 남루한 차림의 한 노인이 길을 건너던 중 전차에 치었다. 환자는 응급처치 후 가까스로 인근 병원에 옮겨졌으나 상태가 심각하여 사흘 후 사망했다. 죽기 직전에야 이 환자가 세계적인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자신의 최대 걸작인 ‘성 가족 성당’(사그라다 파밀리아)을 짓던 중 잠시 짬을 내어 저녁 기도를 하러 가던 중 변을 당한 것이다. 그가 사망한 병원은 자신이 모든 정열을 기울여 건축하던 ‘성 가족 성당’이 한 눈에 들어오는 산타 크레우 이 산트 파우 병원(Hospital de la Santa Creu i Sant Pau)이었다. 그의 유해는 성 가족 성당 안에 묻혔다. 한 평생을 기인(奇人)처럼 살다 간 스페인의 천재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의 정식 이름은 안토니 플라시드 기옘 가우디 이 코르넷(Antoni Plàcid Guillem Gaudí i Cornet)이다. ▲ 가우디의 역작으로 평가받는 건축물 사그라다 파밀리아(바르셀로나 성 가족 성당) 가우디는 1852년 스페인의 지중해 연안 카탈루냐의 작은 마을에서 구리 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마을은 주위에 돌과 벽돌로 만들어진 로마식 아치와 다리, 수로, 그리고 초기 고딕 양식의 성당 등이 있었다. 말하자면 그의 건축의 스승은 1600~1800년 전 로마인들이었던 셈이다. 그의 집안은 주물 제조, 구리 세공업자였는데, 어릴 때부터 가우디는 아버지가 일하는 대장간에서 쇠망치를 두드리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건축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 가우디는 건축을 공부하기 위해 바르셀로나 건축학교에 입학했다. 건축에 대한 재능은 번득였지만, 그는 학창 시절 디자인 경연대회에서 번번이 낙선했다. 후원자 구엘과의 만남 그가 1878년 바르셀로나 건축학교를 졸업할 때 이 대학 학장은 가우디에게 “우리가 지금 건축사 칭호를 천재에게 주는 것인지 아니면 미친놈에게 주는 것인지 모르겠다”라는 말을 남기고는 최하위 점수로 건축사 학위를 주었다. 가우디를 비롯하여 아인슈타인 등 인류를 대표하는 천재들의 사례를 보면 천재성과 학창 시절 학교 성적과는 인연이 없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가우디는 건축사 자격을 취득하고 바르셀로나에서 개업을 했지만 이름도 없는 신참내기 건축사에게 에게 일감을 주는 고객은 없었다. 사무실에서 파리를 날리며 시간을 죽이기에는 그의 정렬이 너무 뜨거웠던 것 같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 어깨너머로 배운 솜씨로 독창적인 진열대를 만들어 만국박람회에 출품했는데, 이것이 센세이션을 일으킬 정도로 호평을 받았다. 그런데 만국박람회에 출품한 이 진열대가 질긴 인연을 만드는 계기가 된다. 가우디가 출품한 기발한 작품을 본 스페인의 유명 섬유회사 회장이자 백작이며 바르셀로나 시의원과 에스파냐 국회의원을 지낸 재력가 에우세비오 구엘(1846~1918)이 가우디를 주목한 것이다. 가우디가 자신의 재능을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후원자 에우세비오 구엘을 만났기 때문이다. 구엘은 말하자면 스페인의 메디치 가문이나 다름없었다. 가우디는 자신의 후원자 구엘을 위해 구엘 저택을 설계했고, 이 저택은 1886년에 착공하여 1889년에 완공되었다. 가우디가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건축가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구엘 공원의 설계를 통해서다. 환상적이면서도 정확한 구조, 기이한 듯 하면서도 약간은 그로테스크한 그의 특성이 이 작품에서 적나라하게 표출되어 구엘 공원은 198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채식주의자였으며, 연로한 아버지와 조카딸과 함께 살았던 가우디는 괴짜로 통했다. 건축물에서 관능미가 느껴지기도 했고, 과도한 신앙심에 푹 절은 괴퍅한 성격 등은 당대의 문화계 코드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미친 사람의 정신 착란’, ‘술 취한 사람의 작품’, ‘건축계의 이단아’ 혹은 ‘건축의 광인(狂人)’이라는 혹평이 난무하는 한편에선 ‘건축 분야의 시인’, 혹은 ‘금세기 최고의 건축가’, ‘20세기의 가장 빛나는 천재’라는 극찬을 들었다. 그만큼 그의 작품세계는 평범하지 않았다. 그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는 성당을 지었고, 부자들을 위해서는 대저택을 설계했다. 그는 건축가로서 이런 말을 남겼다.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독창적이다”   인류사의 걸작, 사그라다 파밀리아 가우디의 나라 스페인은 오랜 역사가 켜켜이 쌓인 박물관 같은 곳이다. 초기에는 로마가 문명의 금자탑을 쌓았고, 로마 쇠망 후에는 게르만족의 일파인 서고트족의 활동무대가 되었다. 8세기 초에는 이슬람교도들이 반도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500년을 이슬람 문명을 구가했다. 그후 그리스도교 세력인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이 재정복을 시도해 13세기말에는 이슬람교도들이 통치했던 대부분의 지역을 탈환했다. 이러한 문명의 궤적들이 쌓아올렸던 문화의 양태들이 가우디의 설계를 통해 위대한 작품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그가 활동하던 19세기 말~20세기 초는 세기말 사상, 혹은 새로운 세기의 사상으로 충만한 시대였다. 문화적으로는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가 질풍노도처럼 내달았고, 정치으로는 스페인 제국의 패망(1898), 무정부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의 폭동 등 혼란했던 스페인의 역사 한복판을 살면서 그는 자신의 생각을 건물에 담았다. 그는 19세기 말 유행했던 모데르니스모(아르누보) 양식, 즉 예술 부흥운동 양식의 대표 건축가다. 그의 작품은 주로 바르셀로나 지역에 많이 남아 있는데 밀라 주택, 바트요 주택, 구엘 저택, 구엘 공원,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등이 그가 설계한 작품들이다. 그 중 7개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건물 내부로 들어가면, 빛에 따라 내부의 유리 무늬가 달라 보이는 까사 바뜨요 주택, 바다와 미역을 모티브로 디자인한 까사밀라 아파트, 달팽이 모양을 한 계단 등을 보면 자유분방한 형태, 풍부한 색채와 질감, 유기적 통일성이 특징인 독특한 양식을 만들어냈다.  그의 작품은 외벽면을 포함한 전체가 자연의 법칙과 완전히 일치한 자연물의 형상을 하고 있다. 정신 착란의 건축가에서부터 20세기의 천재에 이르기까지 극과 극의 평을 받은 가우디였고, 작품 세계도 당시 입장에선 파격과 혁신의 대표였다. 스페인 출신의 피카소는 청년 시절 가우디를 비판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가우디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계기가 찾아온다.  1883년 독실한 가톨릭 단체가 성당 건축을 시작하게 된다. 처음 설계는 교구 건축가가 맡았는데, 그가 1년 만에 사임하고 가우디에게 그 일이 맡겨진 것이다. 당시 가우디의 나이 31세였다. 이것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르셀로나의 걸작 ‘성가족 대성당’(사그라다 파밀리아)이다. 가우디는 성당의 설계를 바꾸고 자신의 독창적 아이디어를 접목시키기 시작했다. 옥수수 모양의 첨탑, 직선을 배제하고 곡선만 사용한 독특한 조형 등 난해한 설계로 인해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생각했다. “작품은 긴 시간의 결과여야 한다. 따라서 건축하는 기간이 길수록 좋다” 가우디는 성당 옆에 숙소를 만들고, 그곳에서 살면서 성당 건축에 전력투구했다. 1920년대에 120m 높이의 탑이 완성되었을 때 이 탑은 바르셀로나의 마천루가 되었다. 가우디는 74세에 사망할 때까지 40여 년 간 성당 건축 작업에 올인했다. 그가 사망할 때까지 성당 건축은 완성되지 못했고, 그의 사후(死後) 다른 건축가들에 의해 작업이 진행되다가 1936년 스페인 내란으로 중단되었다. 1952년 건축이 재개되어 지금도 공사가 진행 중이다. 앞으로도 얼마나 더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희대의 건축물에 대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종교 건축물 중 하나’ 혹은 ‘인간이 만든 최고의 조형물’, ‘신이 머물 지상의 유일한 공간’이라는 평을 남겼다. 
553    가수는 청중이 들은것을 믿게 만들어야... 댓글:  조회:4518  추천:1  2016-11-01
"나는 세상에 대해 느낀 것을 정의하기 위해 노래하고 있었다." (밥 딜런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 중에서) '포크록의 거장'이자 음유시인인 밥 딜런(75)이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관련 신간을 출간하고 발표만을 기다리던 출판사들도 예상치 못한 결과에 시쳇말로 '멘붕'에 빠졌다.  이번 노벨문학상 발표를 앞두고 수많은 유력 후보들의 저서가 번역 출간됐지만, 그 가운데 밥 딜런과 관련된 책은 단 한 권도 없었다. 지금까지 출간된 밥 딜런 관련 국내 서적은 단 세 권. 서점에서 만나볼 수 있는 책은 두 권뿐이다.  밥 딜런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원제 크로니클스)' 많은 사람들의 반응과 달리, 밥 딜런은 수년 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돼온 인물이다. 삶을 통찰하는 그의 가사는 그 자체만으로도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05년 국내 출간된 밥 딜런의 자서전은 연대기라는 뜻의 원제 '크로니클스(Chronicles)'와는 달리 그의 대표곡인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 In The Wind)'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나왔다.  이 책에는 어릴 적부터 뉴욕에 입성해 클럽을 전전하며 노래를 부르고, 성공한 포크 가수로 승승장구하다 돌연 '포크 락'으로 장르를 변환하는 등 밥 딜런이라는 인간의 인생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음악에 영향을 미친 사건들과 예술을 소개한다. 가사를 쓰기 위해 뉴욕 공공도서관에 드나들며 신문기사를 읽었던 사연, 프랑스 상징파 시인 아르튀르 랭보의 시를 소개받고 머릿속에 '종이 울리던' 일 등 에피소드가 펼쳐진다.  "가수가 모두 설득력있게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수는 청중이 들은 것을 믿게 만들어야 한다. 포크뮤직은 다름 아닌 바로 당신을 납득시키는 음악이다." (273쪽) "우리는 삶보다 위대한 노래를 만들고 싶어한다. 자신에게 일어났고 자신이 보았던 이상한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이해해야 하고 고유의 언어로 나타내야 한다. 옛 사람들이 노래를 부를 때 그 안에는 대단한 절실함이 들어 있었다. 가끔 노래를 들을 때 마음이 앞서서 뛴다." (61쪽) 밥 딜런의 삶 객관적으로 보기 '밥 딜런 자서전' 안타깝게도 절판돼 지금은 서점에서 만나볼 수 없는 '밥 딜런 자서전'은 정치학과 대중문화에 관한 선구적인 책을 여러 권 펴낸 저술가인 마이크 마퀴쓰가 쓴 책이다. 밥 딜런을 '1960년대 미국 민주화운동의 한가운데 서 있던 저항의 아이콘'이라고 평가하는 저자는 밥 딜런의 삶과 그에게 영향을 주고, 또 받았던 이들을 책을 통해 조명한다. 1963년 '프리윌링(The Freewheelin')' 앨범으로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으나 돌연 포크 페스티벌에서 포크를 배신하고 일렉기타를 들고 나온 그의 사연이 펼쳐진다.  그는 멈추지 않는 밥 딜런의 변신을 소개한다. 유대인 출신인 그가 포크에서 락으로 전향한 것으로 모자라, 1969년에는 백인들의 전유물인 컨트리를 들고 나왔으며, 이후 포크와 블루스 근본주의자로 자신의 역할을 바꾸며 최근까지 끊임없이 왕성하게 활동해 올 수 있었던 이유를 찾는다.  "'바람만이 아는 대답'은 시간을 초월한, 추상적이고 소박한 노래였다. 그러나 청중은 딜런이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포탄'이 영원히 금지되고, '어떤 사람들이 자유를 허락하게' 될 때가 오는지 묻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치 않았다." (74쪽) "아마도 딜런은 자신이 저항가수의 상징으로 정형화되는 것을 두려워했는지 모른다. 바로, 그의 내부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예술에 대한 야심이 그를 변화시켰을 것이다. (중략) 딜런의 운동 거부는 그래서 자기 해방을 위한 행동으로 비치기도 했다." (112쪽) 국내 밥 딜런 연구자가 쓴 '음유시인 밥 딜런' 국어국문학과 영어영문학을 함께 전공한 한 국내 문학 연구자가 쓴 '음유시인 밥 딜런'은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 가능성을 내다보며 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책 속에는 밥 딜런이 노벨 문학상 후보로 처음 추천된 시점이 1997년이었으며, 그 추천서에 "그의 언어와 음악은 시와 음악 간의 핵심적이며 오랜 기간 존중되어 온 관계가 회복되도록 도왔고, 세계 역사를 변화시킬 만큼 세계로 스며들었다"는 글이 쓰여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 책은 밥 딜런의 가사가 왜 시적이며, 많은 팬들이 왜 그를 '시인'이라고 명명하는지 그 이유를 찾는다. "노래는 그를 정치로 이끌었고 정치는 그가 노래 창작 재능을 펼치게 해 주었다"(마이크 마퀴스), "딜런은 반복해서 자신을 탈바꿈해왔으며 이 때문에 항상 새로운 딜런이 진정한 하나의 딜런이라는 인상을 준다"(데이비드 셤웨이) 등 해외 연구자들을 인용한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밥 딜런의 음악과 삶이 지니는 정치적 저항성 면모를 다룬다. 사람들이 흔히 1960년대 밥 딜런을 두고 그가 포크에서 일렉트릭으로 전향한 사건을 두고 마치 변절처럼 이야기하지만, 이는 대중음악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만 이를 이해한 것일 뿐이라는 설명이다. "초현실주의적이고 일관된 서사가 없으며,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파편적 언어들이 흩뿌려진다. 그런데 이 난해한 가사는 열정적이고 활기찬 로큰롤 사운드와 뒤섞인다. 이 때문에 이 노래들은 팝음악을 듣는 주류 대중에게도 의식있는 포크 음악 애호가층에게도 매우 낯설고 이질적인 결과물이었다. 난해한 시와 격렬한 로큰롤 사운드의 결합 말이다." (243쪽) ◇바람만이 아는 대답(원제 크로니클스)= 밥 딜런 지음. 양은모 번역. 문학세계사 펴냄. 320쪽/  ◇밥 딜런 평전= 마이크 마퀴스 지음. 김백리 번역. 실천문학사 펴냄. 334쪽/  ◇음유시인 밥 딜런= 손광수, 백선아 지음. 한걸음더 펴냄. 380쪽/   
552    프랑스 문학계에서 가장 유명한 권총 댓글:  조회:5368  추천:0  2016-11-01
      프랑스 상징파 시인 폴 베를렌(1844~1896)이 자신의 동성 연인이던 천재 시인 아르튀르 랭보(1854~1891)를 쐈던 리볼버식 권총이 오는 11월 경매에 나온다고 세계적 경매업체 크리스티가 19일(현지시간) 밝혔다. 프랑스 문학계에서 가장 유명한 이 총은 베를렌이 랭보와 2년 간의 연인 관계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1873년에 구매한 것.      ▲ 폴 베를렌(왼쪽)과 아르튀르 랭보  베를렌은 29세였던 1872년, 아내 마틸드와 아들 조르주를 버리고 랭보와 방랑 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아편과 독한 술의 일종인 압생트에 빠져 살았다. 랭보는 당시 생활로 대표 시집 ‘지옥에서 보낸 한 철’(A Season in Hell)의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때 베를렌은 다시 아내 곁으로 돌아갈 결심하고 우선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로 건너갔다. 그런데 랭보는 포기하지 않고 그를 따라갔다. 이후 랭보가 밝힌 바에 따르면, 두 사람은 호텔 방에서 격렬한 논쟁을 벌였고 술에 취한 베를렌이 소지하고 있던 권총을 꺼내 발포했다는 것이다. 그중 한 발이 랭보의 왼쪽 손목에 맞고 말았다.  그런데도 랭보는 베를렌에게 관계를 계속하기를 강요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베를렌이 야외에서도 권총을 꺼내 랭보를 위협했고 때마침 지나가던 경찰에게 구속돼 징역 2년의 실형 판결을 받았다.  베를렌은 복역 중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감옥에서 32편의 시를 지었다. 이 작품들은 이후 베를렌의 대표 시집인 ‘예지’(Sagesse)와 ‘예와 지금’(Jadis et naguere)에 수록됐다.  크리스티에 따르면, 베를렌의 총은 경찰에 압수된 뒤 한 개인 수집가의 손에 넘어갔다.    경매는 11월 30일 파리에서 열리며 낙찰가는 6만 유로(약 7418만 원)로 예상되고 있다.  윤태희 기자 [출처: 서울신문]
551    [시문학소사전] - 상징주의란? 댓글:  조회:5122  추천:0  2016-11-01
  [ 2016년 11월 02일 07시 30분 ]     유명 사진작가 Jordan Matter의 모델로 된 반라체의 모습...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상징파(象徵派)의 예술운동과 그 경향. 일반적으로 상징파는 고답파의 객관주의에 대한 반동(反動)으로 일어났고, 분석에 의하여 포착할 수 없는 주관적 정서(主觀的情緖)의 시적 정착(詩的定着)을 목표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A.티보데는 고답파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롱사르로부터 위고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시 전반에 대해서 상징파는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고 풀이하였다. 티보데가 말하는 상징파의 새로운 바람이란 다음의 세 가지 점이다.  ① 자유시: 그 시작은 민중적인 노래의 형태를 필요에 따라 채용한 랭보의 《지옥의 계절》이다. 이에 대해 의식적 ·계통적으로 자유시를 발전시킨 것은 G.캉이었다. 이후 프랑스의 시인은 정형(定型)을 채용하는 자와 자유시 형태를 쓰는 자의 두 갈래로 나누어졌다. ② 순수시(純粹詩): “음악에서 그 부(富)를 빼앗는다”라는 말라르메의 말로 요약되는 순수시의 개념은 상징파에서 비롯된다(이 경우의 음악은 주로 바그너의 음악이다). 시 속에서 산문적 요소를 배제하고 순수하게 시적인 것을 찾으려는 의식적 노력은 바그너의 영향 아래 말라르메에서 시작되어 발레리에서 완성되었다. ③ 문학적 혁신과 발전의 개념: 상징파는 처음으로 젊은 세대에게 전세대(前世代)의 문학개념을 부정하는 권리와 의무를 인정했다. 전위(前衛: 아방가르드)의 개념이 탄생한 이후 문학은 ‘전통적 문학’과 ‘전위문학’으로 나누어졌고 유파(流派)의 수도 늘었으며, 선언(宣言)이 유행하게 되었다. 이상이 티보데가 말하는 상징파의 특징인데 이 경우, 순수한 문학사적 의미에서 상징파는 1890년에 전성기에 달했고 1902년에 종지부를 찍은, 대략 15년간에 걸친 일군(一群)의 시인들의 활동을 지칭한다. 즉,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시인들이다. G.캉, J.라포르그, A.사맹, F.잠, E.뒤자르댕 등을 들 수 있다. 외국인으로서 여기에 호응한 사람은 벨기에의 조르지 로당바크, E.베르아렝 등이다. 앙리 드 레니에, 장 모레아스는 일시적인 상징파 동지였으며, 그런 의미에서의 상징파 비평가는 레미 드 구르몽이었다. 티보데는 말라르메, 베를렌, 랭보, 코르 비에르, 로트레아몽을 상징파의 선구자로 보았으며 발레리를 그 후계자로 보았다. 만일 이 해석이 옳다면 상징파는 선구자와 후계자에 필적할 만한 대시인(大詩人)이 없다는 결과가 된다. 그러므로 말라르메를 비롯하여 티보데가 말하는, 선구자를 포함한 상징주의적 시인들이 활약한 15년간이라는 운동기간을 떠나, 좀더 넓게 상징주의를 문제삼을 필요가 있다. 즉, 보들레르를 선구자로 말라르메, 베를렌, 랭보에 의하여 전개되었으며 발레리, 잠, 클로델에게 계승되어 마침내 완성된 시적(詩的) 세계와 그 이론을 생각하게 된다. 보들레르는 하나의 시적 혁명(詩的革命)을 일으켰다 하겠다. 첫째로 그 의식적 방법에서, 이윽고 이것은 말라르메를 탄생시켜야 했다.  둘째로 원죄의식(原罪意識)에서 베를렌을 탄생시켰다.  셋째로 그 감수성(感受性)과 대응(對應)의 이론에서, 이것은 마침내 랭보를 탄생시켰다. 또한 말라르메와 발레리, 베를렌과 잠, 랭보와 클로델의 밀접한 관계를 증명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렇게 하여 결정되는 상징주의적 세계의 분석에 샤를 뒤보스, 자크리비엘, 에른스트 로베르트 쿠르티우스 등의 비평가가 따랐다. A.지드도 여기에 넣을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상징파 시인들의 세계와 밀접하게 교류한 M.프루스트도 이 세계에 속한다 할 수 있다.  프랑스 이외의 나라에서는 독일의 S.게오르게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또 M.릴케도 다소간 상징파의 영향을 받아들인 것은 분명하다. 영어(英語)를 사용하는 시인에게서는 독일의 시인처럼 확실한 영향은 찾아볼 수 없으나 A.시몬즈는 프랑스 상징주의의 뛰어난 이해자였다. 서양미술에서의 상징주의는 19세기 후반 인상주의의 실증적 표현에 대한 대립 및 저항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즉 형상화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세계, 내면(內面), 관념 등을 상징 ·우의(寓意) ·표징 등의 수법으로 이미지를 통해 전달하려 하였다. 1891년 비평가 A.오리에는 회화에 대해 처음 상징주의라는 말을 썼고 P.고갱 등을 상징파로 보았다. 나비파(派)의 M.드니도 상징파로 자처했으며 그들은 생(生) ·사(死) ·불안 ·사랑 ·성(性) ·꿈 ·환상 등을 주제로 삼았다. 그러나 고갱은 자신의 그림이 상징주의적인 것은 주제 때문이 아니며 화면의 형태와 색체의 음악적인 배치 때문이라고 하였다. 19세기 상징주의는 주제적 ·문학적 측면과 서로 대립된 순수조형적 구성이라는 관념에서 이해해야 하며, 이것이 ‘세기말(世紀末)’ ‘아르 누보’와 복합되면서 널리 파급되었다.  상징주의의 명작으로는 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1897), G.클림트의 《물뱀》, F.호들러의 《밤》, E.뭉크의 《절규》 등이 있다. 이 밖에 P.퓌비 드 샤반, O.르동, 벨기에의 장미십자그룹, 러시아의 파란장미그룹, 영국의 라파엘전파(前派)의 후기 작품들이 이에 속한다. 이런 경향은 1910년대까지 계속되다가 20세기 초 포비슴과 큐비즘의 출현으로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한국에서의 상징주의 문학은 김억(金億) ·백대진(白大鎭)이 《태서문예신보(泰西文藝新報)》 제6호와 제7호에 베를렌의 《거리에 내리는 비》, 예이츠의 《꿈》 등 상징파 시인의 작품을 게재하면서 처음으로 이 이론이 소개되었으며 잇따라 베를렌의 《작시론》 등을 비롯하여 일본 작가들의 작품이 《창조》 《백조》 《폐허》를 통해 번역, 게재되었다. 김억 ·황석우(黃錫禹) ·박종화(朴鍾和) ·박영희(朴英熙) 등의 작품에서는 비록 내면적 깊이는 얕지만 상징주의적 작풍이 짙게 풍기고 있다.
550    [시문학소사전] - 산문시란? 댓글:  조회:5373  추천:0  2016-11-01
산문시 형식은 자크 베르트랑(알로이시우스)의 〈밤의 가스파르 Gaspard de la nuit〉(1842)를 통해 프랑스 문학에 소개되었다. 베르트랑의 시는 그당시에는 별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그가 19세기말 상징파 시인들에게 미친 영향력은 보들레르의 〈소산문시 Petits Poèmes en prose〉(1869, 뒤에 〈파리의 우울 Le Spleen de Paris〉이라는 제목이 붙음)로 입증되었다. 산문시라는 명칭은 이 작품에서 유래한 것이며, 스테판 말라르메의 〈여담 Divagations〉(1897)과 아르튀르 랭보의 〈일뤼미나시옹 Illuminations〉(1886)은 프랑스에서 산문시를 확고하게 정착시켰다. 이밖에도 20세기로 넘어갈 무렵 산문시를 쓴 시인들로는 폴 발레리, 폴 포르, 폴 클로델 등이 있다. 독일에서는 19세기초에 횔덜린과 노발리스가, 19세기말에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산문시를 썼다. 20세기에는 프랑스의 시인 피에르 르베르디의 〈산문시 Poèmes en prose〉(1915)와 생종 페르스의 작품들에서 산문시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49    [려행] - "새 7대 불가사의" 댓글:  조회:4615  추천:0  2016-11-01
1억명 투표로 선정 중국 만리장성, 이탈리아 로마의 콜로세움, 인도 타지마할 등이 전 세계 1억여명이 뽑은 ‘새 7대 불가사의’로 선정됐다. 스위스 출신 영화제작자 베르나르 베버(Bernard Weber)가 세운 민간단체 ‘뉴 7 원더스 재단은 1999년부터 전 세계인이 인터넷과 전화 투표로 ‘새 7대 불가사의’를 뽑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 결과 200여개 문화유산 중 21개를 1차로 작년초 발표했고, 이 중 가장 많은 표를 얻은 7개를,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축하행사와 함께 공개했다. ‘새 7대 불가사의’로는 ▲중국 만리장성 ▲이탈리아 로마의 콜로세움 ▲인도 타지마할 ▲페루의 잉카 유적지 마추픽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그리스도상 ▲멕시코 치첸 이차의 마야 유적지 ▲요르단의 고대도시 페트라가 선정됐다.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영국의 스톤헨지, 터키의 하기아 소피아 사원 등은 탈락했다. ‘고대 7대 불가사의’란 이집트의 기자 피라미드를 비롯, B.C 2세기에 비잔티움의 수학자 필론이 꼽은 지중해 일대의 7대 문화유산을 말한다. 21세기에 지구촌이 인터넷으로 ‘7대 불가사의’를 새로 뽑는다는 아이디어는 이색적이지만, 정작 세계 문화 유산을 선정하는 유네스코는 “상업적이고 객관성을 결여했다”며 비판적이다. 또 인터넷상의 중복 투표를 막을 방도가 없었다. ▲ 중국 만리장성   ▲ 이탈리아 콜로세움   ▲ 인도 타지마할   ▲ 페루 잉카 유적지 마추픽추   ▲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그리스도상   ▲ 멕시코 치첸 이차의 마야 유적지   ▲ 요르단 고대도시 페트라 출처:조선일보
548    [려행] - 석유를 팔아 세계 최고를 만들다... 댓글:  조회:5490  추천:0  2016-11-01
1. 버즈 두바이 : 세계최고의 빌딩 버즈두바이는 자랑스럽게 한국의 삼성물산이 건설중인데요. 2009년 완공예정입니다. 2천미터의 높이에 Adrian Smith란 사람이 디자인한 빌딩입니다.   2 팜 아일랜드 : 세계 최고의 인공섬 팜 아일랜드는 3개의 커다란 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야자수모양으로 만들어진 이 인공섬에는 휴양시절이 들어설 예정입니다. 아랍에미레이트 해변고  페르시아 바다 사이에 놓인 이섬은 520킬로 해변을 인공적으로 만들었습니다. 구글어스에서 본 사진입니다.  첨에 딱 보고 욕이 나오네요. 하나 인줄 알았는데 두개입니다. 인공섬 하나 만드는데도 돈 많이 들어갈텐데 정말 돈이 넘치나봅니다. 두바이가 이렇게 관광지로 만드는 이유는  석유가 고갈되면 그 후세에 이런 휴향지를  만들어 놓아 후세들이 편하게 살수 있게 만들고자 하는 아랍에미레이트 왕자의 선견지명 에 있다고 할수 있죠.   3. 두바이랜드 :  세계최고의 놀이동산   얼마전에 즐겨보는 걸어서 세계속으로란  여행 프로그램에서 두바이에 대해 나왔는데 이 놀이동산을 보여주더군요.  우리나라에서 얼마전에 실내스키장 열었다고 선전하던데 거기에 비교자체가 안됩니다.  에버랜드요?  그 이상입니다. 디즈니랜드의 2배크기입니다. 6개의 테마파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외에도 자동차로 사막에서 운전하는  체험도 시켜주고  트래킹도 하더군요. 밤에는 시원한 바람밑에서 저녁식사도 하구요. 그 걸어서 세계속으로 프로그램 보다가.  그 PD가 너무 부럽더군요. 매력 & 체험 월드 13 km2 (5.2 mile2) Universal Studios Dubai(유니버셜 스튜디오) Tiger Woods Dubai(타이거우즈 테마파크) Bawadi Global Village(세계 민속촌) Kids City(아이들의 도시) Giants World Water Parks(워터 파크) Aquadunya(수족관) Dubai Snowdome, an indoor ski resort.(실내 스키장) 오락 월드 4 km2 (1.6 mile2) Flea Market(벼룩시장) World Trade Park(세계 무역 공원) Auction World(경매) Factory Outlets(아울렛매장) 스포츠월드 19 km2 (7.4 mile2) Dubai Sports City(두바이스포츠센터) Emerat Sports World(에미레이트 스포츠센터) Plantation Equestrian and Polo Club(승마교실과 폴로클럽) Dubai Autodrome(자동차 경주장) Dubai Golf City(골프장) 테마레져및 휴향지 29 km2 (11.2 mile2) Women's World Destination Dubai Desert Kingdom Andalusian Resort and Spa 경제적인 휴향코스 75 km2 (28.9 mile2) Al Sahra Desert Resort (알 사하라 사막리조트) Sand Dune Hotel Al Kaheel 다운타운 1.8 km2 (0.7 mile2) Mall of Arabia, which will be the world's largest shopping mall(쇼필몰) City Walk(산책로) The Great Dubai Wheel, which will be the world's 2nd largest observation wheel after Shanghai Kiss(상하이키스 다음으로 가장큰 페리스휠(대관람차)) Virtual Game World (아케이드 오락실) 4. 하이드로폴리스 : 세계 최고의 언더워터파크 세계 최고의 수중 럭셔리 리조트입니다. 수심에서 66피트 지하에서 바다를 볼수있는 방이 220개나 있습니다. 콘크리트와 철로 만들 이 수상구조물은 플랙스유리로 외부를 치장한 다고 합니다. 2009년에 완공후 개장할 예정입니다. 5. 월드 아일랜드 : 세계 최고의 세계지도 모양의 인공섬 세계지도 모양의 섬입니다. 가짜냐구요? 아닙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인공 섬입니다. 300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이 인공섬은  가로세로 9킬로와 6킬로 크기의  이섬은 달걀형의 방파제들이 둘러 쌓고 있습니다. 접근하기 위해서는 헬기나 보트만  가능하구  준공하는데 $15-45 million (USD)가 들었습니다.  섬 한개당 25백만달러(약 200억) 가 들었습니다 2004년에 공사를 시작해서 2007년 3월에 90퍼센트까지 준공했습니다. //")//]]>  위에 팜아일랜드 바로 옆에 있습니다. 위 사진은 구글어스에서 본 사진입니다. 6. 두바이 몰 : 세계최고의 쇼핑몰 세계 최고의 쇼핑몰로 준공중인 두바이 몰입니다.  1천개의 점포들이 들어설 예정입니다 7. 스키 두바이 : 세계 최고의 실내스키장 위에서 언급한 세계최고의 실내 스키장 스키두바이입니다. 22,500평방미터의 그 크기를 자랑하는데요. 스키장뿐 아니라  놀이용 봅슬레이 눈썰매장도 있습니다. 
547    [려행] - 한번 건너 보고싶은 대교 댓글:  조회:4403  추천:0  2016-11-01
다리 높이가 200층 건물과 맞먹어, 중국 세계 최고의 다리 완공     중국(中國) '구이저우 성(貴州省)과 윈난 성(雲南省)'을 연결(連結)하는 세계 최고 높이의 베이판장(北盤江)대교의 상판이 연결...   이로써 기존(旣存)에는 5시간 걸리던 항저우~쿤밍 고속도로(高速道路) 소요시간(所要時間)이 1시간으로 줄었다.   베이판장(北盤江) 강(江)은 주장(珠江) 강(江) 상류 훙쉐이허(紅水河)의 지류(支流)로 길이 449㎞, 낙차(落差) 1,985m의 강이다.   베이판장(北盤江) 강 대교(大橋)는 강(江) 수면(水面)에서 565m 높이인 200층 건물 고도에 세워졌다.   동탑(東塔)은 구이저우성(貴州省) 쉐이청(水城)현(縣)에 서탑(西塔)은 윈난성(雲南省) 이청(宣威)시(市)에 위치한다.   총 길이 1341.4m로 공사비 10억3,000만 위안(1,700억원)가 소요됐다.                     베이판장(北盤江)대교(大橋) 건설로 현존(現存) 세계(世界) 최고 높이의 다리 1~5위를 모두 중국(中國)이 차지하게 됐다.   2위는 496m의 후베이성(湖北省) 쑤두허(四渡河)대교, 3위는 485m의 윈난성(雲南省) 푸리(普立)대교, 4위는 440m의 구이저우성(貴州省) 야츠허(鴨池河)대교, 5위는 406m의 칭쉐이허(淸水河) 특대교가 차지했다.                
546    [쉼터] - 불교경전을 알아보다... 댓글:  조회:5997  추천:0  2016-11-01
  경전의 종류     불교 경전의 분류       내용의 구분 경 전 의 종 류 초기 경전 숫타니파타, 법구경, 자설경, 여시어경, 장로(니)게경 선생경, 기세인본경, 대반열반경 인연 ․ 설화 경전 본생경, 불본행집경, 출요경, 인과경, 비유경, 현우경, 백유경, 육도집경 삼매 ․ 수행 경전 안반수의경, 수행도지경, 반주삼매경, 관불삼매경, 금강삼매경, 능가경, 해심밀경 반야 경전 반야심경, 금강경, 팔천송반야경, 문수반야경, 대품반야경, 대승이취육바라밀다경 방등 경전 대집경, 대보적경, 대방등여래장경, 유마경, 승만경, 원각경, 능엄경 법화 ․ 화엄 경전 법화경, 대승열반경, 십지경, 화엄경 밀교 경전 대일경, 금강정경, 유희야경, 천수경 계율 경전 우바새계경, 범망경, 보살영락본업경, 보살지지경 신앙 ․ 찬탄 경전 정토삼부경, 미륵삼부경, 지장보살본원경, 약사여래본원경, 비화경, 금광명경, 인왕반야경 교계(敎誡) 경전 유교경, 사십이장경, 부모은중경     한글팔만대장경 목록 01. 장아함경  02. 중아함경 1 - 3  05. 잡아함경 1 - 3  08. 별역잡아함경  09. 증일아함경 1 - 2  11. 대루탄경 (외)  12. 불반니원경 (외)  13. 아라한구덕경  14. 비화경(외)  15. 불본행집경 1 - 2  17. 찬집백연경  18. 현우경(외)  19. 출요경(외)  20. 법구경(외)  21. 대반야경 1 - 20  41. 법화경  42. 화엄경(60권본) 1 - 3  45. 화엄경(80권본) 1 - 3  48. 화엄경(40권본)  49. 열반경 1 - 2  51. 대방등대집경 1 - 2  53. 대애경(외)  54. 아차말보살경(외)  55. 대집회정법경(외)  56. 현겁경(외)  57. 유마경(외)  58. 입능가경(외)  59. 정법염처경 1 - 3  62. 사분율 1 - 3  65. 선견율비바사  66. 구사론 1 - 2  68. 중론백론  69. 현양성교론(외)  70. 대승기신론소별기  71. 부휴당집(외)  72. 선문염송 1 - 5  77. 조당집 1 - 2  79. 전등록 1 - 3  82. 무용당집(외)  83. 백곡집, 월저당집  84. 법원주림 1 - 5  89. 경율이상 1 - 2  91. 본생경(쟈아타카) 1 - 5  96. 대보적경 1 - 5  101. 대지도론 1 - 5  106. 종경렵비담팔건도론  176. 아비달마발지론  177. 아비담심론  178. 아비달마순정이론 1 - 4  182. 아비담비바사론 1 - 3  185. 사리불아비담론 1 - 2  187.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파승사  189. 근본설일체유부니타야목득가  190. 근본설바답율섭  191. 마하승지율 1 - 2  193. 성유식론  194. 대방광십륜경  197. 해탈도론                 제목   │    불교경전의 종류      목차 1) 대장경의 결집 2) 대승경전의 결집 3) 대장경의 조직 4) 참경과 거짓경 5) 입문적인 경전 6) 한국의 불경 7) 율전부 8) 범종파적 소의경전 9) 정토삼부경 10) 호국삼부경 11) 미륵경전 12) 선의 소의경전 13) 한국통불교의 소의경전 14) 일반적인 신앙경전 15) 대장경해설 전반 16) 한글팔만대장경 목록 17) 경전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대장경이란 말은 불교성전 일체의 총칭이란 뜻으로 일체경이라고도하고, 부처님의 말씀을 모은 경과 불제자들이 지켜야할 수향덕목을 모은 율(律)과 마명, 용수, 천친 같은 보살 논사들이 논리적으로 체계화한 교리를 모은 논의 3장이란 뜻으로 3장경. 장경이라고도 한다.  대장경의 원본은 sanskrit로 기록된 범어본과 파리어로 기록된 파리어본이 두 가지로 구분된다. 산스크리트어는 인도 고대의 표준문장어였다. 이것을 번역하여 범어라고 하는데 그 뜻을 하늘 나라말, "하나님의 말"이란 뜻이며 완성이란 의미를 지닌다. BC. 6C경부터 문자가 있었다고 하고 B.C 3C경에 문법학자 에 의해 범어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범어는 인도 고대 사회에 있어서 지식계급, 지도계급에서 사용하던 어문이었다.  이에 대한 일반 서민계급, 노예계급, 교육, 지식부재의 사회에서 사용하던 속어를 prikrt(르라크리트)라 했는데 그 말은 자연생이란 뜻으로 소승불전의 원어인 파리어를 가리킨다.  산스크리트어 장경은 원본으로 하여 번역한 대장경에는 한역장경, 서장장경이고 또 한역과 서역장을 원본으로 하여 번역한 대장경에는 몽고장경, 만국장경, 일본장경과 우리나라의 팔만대장경등이 있다. 그 가운데 산스크리트어의 범본장경은 그 대부분이 한역된 한자경전으로 전해오고 있을뿐 많은 양의 원본 반 이상이 망실되어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 범본불전에 의지하는 불교국은 대승권으로서 중국, 서장, 몽고, 한국, 일본 등의 인도 북방지대에 속하므로 북방불교라고도 한다. 파리어계의 장경은 주로 스리랑카, 버어마, 태국 등의 남방으로 전해졌으므로 이것을 남방불교라고 한다. 남방불교는 불멸후 300년 경에 인도천하는 처음으로 통일한 아쇼카왕(B.C 2C)이 8만 4천탑을 세우고 제3차 결집등 많은 불사를 이룩하고 희랍의 국가에 까지 전도승을 파견할 때 세일론(스리랑카), 버마등지에는 수나가, 율다라, 마혜다, 스마나 등이 맡아서 포교하도록 했는바, 그 뒤 이 지역에는 파리어계의 장경이 전해졌던 것이다.  1. 대장경의 결집(아함, 남방) 세존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는 모든 것을 부처님에 의해 직접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부처님 멸도후에는 불제자들이 각각 기억하고 있는 부처님의 설법을 정리해서 성문화 할 필요를 느꼈다. 부처님의 유교가 흩어지지 않게 해야하고 그 유법에 따라 교전을 확립해야 되겠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제자들이 모여서 부처님께 들은 법문을 외워내어 교법을 완성하고 성전을 편찬하는 결집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모여서 불법을 결집하는 큰 일을 한 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무려 4회 내지 5,6회 네 차례 걸쳐서야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제1결집](5백결집, 왕사성 결집)  부처님의 상수제자이신 마하가섭존자가 회의를 소집하여 5백인의 대아라한(유능한 비구)들이 왕사성의 교외에 있는 칠엽굴에서 아난존자는 경을 외워내고 우팔리존자는 율을 외워내어 대중이 검토결정해서 교단의 이름으로 편집결정했다. 이것을 혹은 5백결집, 왕사성결집, 상좌부결집이라고도한다. 여기에 굴내결집, 굴외결집 두가지 결집설이 있는데 이것은 뒤에 상좌부가 된다.  [제2결집](7백결집)  석존멸후 100년경에 계율에 대한 이견이 생겨서 비사리성에 모여 장로야사를 중심으로 율장을 보완 편찬하였는바 이때 열가지 그릇된 법을 주장했다. 이로인해 두 부파로 갈라지게 되었다(대중부와 상좌부).  [제3결집](천인결집)  블멸후 200년(혹은 300년)경에 아육왕이 호법하여 목건련제수존자를 상좌로 파탈리푸트라에 일천비구가 모여서 삼장을 확정하다. 이때는 아육왕이 불교의 신자이므로 외도들이 의식이 궁핍해지자 불제자의 차림을 하고 혼란을 일으키는 등의 사건이 일어나므로 이런일에 대처하려는 것이 직접적인 동기가 되기도 하였다.  [제4결집]  불멸후 400년경(혹은 불멸 600년경, AD.2C) 카니시카왕의 호법아래 협존자와 세우보살을 법주로 하여 가습미라성에 500비구가 모여 삼장의 주석을 붇이는 제4결집을 했다. 그것이 바로 대비바사론 이라고 하는데 남방불교에서는 이것을 의문시 한다.  2. 대승경전의 결집 대승불교의 출현은 곧 대승경전의 출현과 때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대승경전 가운데 제일먼저 출현한 것이 반야경계의 경전으로 밝혀졌으며 대체로 불멸후 삼백년이후 4,5백년경에 출현한 것으로 추정되고 그 뒤에 이어서 방등부의 경전들, 그리고 불멸후 6백년경에 법화부가 화엄부의 경전은 불멸후 7백년경에 차례로 출현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경들이 출현내지 유행되기 시작한 곳은 간다라, 카슈미르 지방 곧 대월지국이었다.  3. 대장경의 조직 부처님일대를 다섯시기로 나누어 분석하는 법을 오시교라한다. 여기에 천태의 5시교, 화엄의 5시교, 열반종의 5시교 등의 구별이 있다.  천태오시교 - 화엄시, 녹원시(아함), 방등시, 반야시, 법화.열반시  열반오시교 - 삼승별교, 삼승통교, 억양교, 동귀교, 상주교  화엄오시교 - 인천교(아함), 반야유마, 법화경, 열반경, 화엄경  4. 참경과 거짓경 경에는 부처님이 실제로 말씀하신 직경과 뒷사람이 거짓으로 조작해서 만들어진 위경(僞經)과 그것 저것이 확실치 않아서 부처님의 진설로 볼수 없지만 교리적 내용으로 보아 어긋나는 정도가 심하지 않은 의경(疑經)이 있다.  5. 입문적인 경전 1) 천수경(관음신앙)  불교의 진리에 입문하는 첫걸음은 대개 신앙의 문을 통과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데 그 때에 필요한 경전이 바로 이 천수경이다.  천수경은 약칭으로 부르는 경명(經名)이고 갖춘 이름으로는 천수천안 관세음보살 광대원만 무애대비심다라니경이라고 한다. 이 경은 본래 당나라 가범달마에 의해 번역된 역본이 유통되고 있으며 생략하여 천수경 또는 천수 다라니경 이라고도 하며 송나라 사명존자에 의해 널리 유포되어 그 효험이 많은 것으로 전한다.  현재의 천수경은 7가지 경전이 합쳐진 것이다.  2) 반야심경(공사상)  반야심경은 교리적 철학적 입문서이지만 이 경속에 실려있는 교리적 내용으로 봐서는 반드시 입문서적이라 할 수 없다.  260자밖에 되지 않은 가장 짧은 경문 가운데 대소승.제경의 취지로 간결하게 담뿍담고 있을뿐 아니라 조석예불을 비롯한 대소의식에는 물론 식사시에까지 이 심경은 지송되고 있어서 초 종파적으로 소의하는 경중의 경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유포되고 있는 것은 당나라 현장삼장의 번역이며 일본이나 중국등지에서도 이 현장본을 지송한다.  6. 한국의 불경 ● 사미의 교과  1) 초발심자경문  불문에 출가했어도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한 어린이는 마음과 몸이 연약하므로 고된 비구의 수행을 다 따라 할 수 없다. 그래서 계율도 아주 기초적인 10계만을 지키게 하고 하기 힘든 난행과 고행은 하지 않아도 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예습적인 수도기간의 납자들을 불교에서는 남자는 사미, 여자는 사미니라 이름한다. 성년이 되었더라도 늦게 출가하여 아직 구족계를 받지 못했으면 역시 사미다. 사미는 주로 출가수행 생활에 심신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계율을 익히는 일에만 전념해야 한다. 따라서 사미가 처음 배우는 교과들도 모두 간단한 계와 언행, 어른 앞에서 하는 몸가짐. 식사하고 잠자는 일 등에 관한 교육 그리고 발심, 경책 등을 돈독히 하는 글들인데 우리나라에서느 그 첫째번 교과가 바로 이 초발심 자경문이다.  초발심자경문은 고려 보조국사의 계초심학입문과 신라 원효대사의 발심수행장, 그리고 고려말(혹은 신라말) 야운비구의 자경문을 한권의 책으로 엮어 이름한 것이다.  2) 치문경훈  이란 검은 옷을 입은 승려의 세계란 뜻이니, 치자의 본래의 뜻은 이 있는데, 변하여 승려를 뜻하는 자의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불문의 대명사로 이란 말을 쓰게 된 것은 불교의 도입과 거의 같은 시기가 아닌가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치문하면 불문을 가르키는 것으로 쓰이며 이란 책명은 [불문에 들어온 사람들을 경계하고 훈계한다] {승려가 삼가고 지켜야할 길]이란 뜻이 된다.  이 치문경훈은 본래 고승대덕이 제자나 후대인을 훈계하고 동료와 자신의 수행을 독려 경책한 훈계. 좌우명. 서장 등을 집대성하여 초학사미로 하여금 익히게 했던 것이다.  조선초에 사미과 교재로 채용된 것이라 전해진다.  3) 사미율의  사미율의라 함은 가 지켜야 할 10계와 의식 크고 작은 행동거지를 일컫는다. 사미는 범어 srama nneraka의 음역을 줄인 말이니 번역하면 악을 쉬고 자비를 실천한다. 장차 비구가 되기 위해 부지런히 닦고 책려한다는 내용이다. 사미가 지켜야 할 열가지 계목에 대한 해설과 의식. 예불. 위의 등에 대한 규범을 실고 있는바 세수하고 잠자는 일, 밥 먹고 대소변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일거일동에 대한 자세한 규범들로 짜여져 있다.  ● 사집과 교과  4) 서장(서장)  서장은 대혜서장이라고도 하며 대혜종고(1088 - 1163, 송나라)선사의 편지를 모은 책을 이름한다. 는 42인의 편지글 62통으로 엮어져 있으며, 그 주된 취지는 삿된 지견을 깨트리고 정법의 눈을 열어 주려는 것이다. 이 서장이 어느때에 우리나라에서 판각되었느냐 하면 고려말기 부터이다.  5) 도서  선원제전집도서를 줄여서 도서라고 부르는데 중국 화엄종 제5조이며 초기에 크게 융성했던 하택종의 제5조이기도 한 규봉종밀선사(780 - 841)의 저술이다.  1500년 전후에 우리나라에 전래된 듯하다.  도서의 핵심은 선과 교의 본 뜻은 둘이 아니라는데 있다.  6) 선요  선에 대한 요의를 설명했다는 뜻이며 고봉원묘(1238 - 1295)화상의 저서이니 고봉은 달마로부터 제 18대, 임제종의 개조인 임제의 17대법사이다. 간화선법이 한참 유행할때의 대선장이다.  7) 절요  절요한 법집별행록 절요병입사기의 약칭이니, 지눌 보조국사의 저술이다. 그 내용은 법에는 변하지 않는 불변이 본체계와 인연에 따라 나타나는 가변적인 작용의 두가지 뜻이 있고 사람에게는 두가지 문이 있으니 본체계의 진리를 단번에 증득하여 깨닫는 돈오와 그 뒤에 점차 닦아서 보임이 수행을 더함으로 단계를 거쳐 깨달음을 얻는 점오의 문이있다.  ● 사교과 교과  8) 능엄경  능엄경은 약칭이고 구체적인 경명은 대불정여래밀인 수증요의 제보살 만행수능엄경 또는 대불정수능엄경이라고도한다. 경의 뜻을 간추리면 무한하게 크고 무상최극의 절대한 깨달음을 성휘하신 부처님이 되기 위해 닦는 보살들의 완전무결하고 견고무비한 6도만행의 수행법을 말씀하심 경이란 뜻이 된다.  9) 대승기신론  대승기신론이란 여러 대승경전의 진리를 통론적으로 체계적으로 논리를 세워 밝힌 글이란 뜻이다. 저자는 중인도 마가다국 출신의 마명보살(100년경)이다. 대승불교사상을 체계화하고 최초로 크게 선양하였다.  10) 원각경  원각경은 줄인 이름이며 자세히는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 이라 한다. 대승의 최후구경인 원돈(圓頓=원만하고 단번에 최후의 진리를 깨닫는 것)의 진리를 말씀하고 그 깨달는 법과 수행하는 법을 기록한 경이다.  어느때 여래가 이란 삼매에 드시어 모든 것이 하나인 不二의 경지에서 10만의 대보살과 함께 계시었는데, 문수.보현.보안.미륵 등 12보살과 더불어 문답하신 내용으로 되어 있다.  11) 금강경  금강경의 구체적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경이고 금강반야경이라고도 한다. 금강과 같이 단단하고 밝은 완전한 반야의 空智로 열반을 성취하고 보살행을 하여 불타가 된다는 뜻의 이름이다.  ● 대교과 교과  12) 화엄경  화엄경은 약칭이며 원래 명칭은 대방광불화엄경이다. 번역된 화엄경중 현존하는 것은 80권(당, 실차난타, 신역), 60권(진, 불타발타라) , 40권(반야삼장)이 있다.  이 경의 요지는 대승보살도 사상을 구체적으로 보인것인데 불타가 처음 성도한 것으로 부터 부사의한 불타의 과덕과 그 경계를 가장 장엄하게 문학적으로 찬술했고 그것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52위의 보살계통이 있음을 교리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을 만나 대승보리심을 일으킨뒤 52명의 선지식(부처님의 지혜와 덕을 갖춘이)을 찾아 무궁무진한 불법을 묻고 보살도를 닦아 마침내 부사의 해탈경계를 성취하는 입법계품으로 끝맺는다.  ● 수의과 교과  13) 법화경  현재 유행하는 경본은 구마라습(407)삼장이 번역한 7권 28품으로 된 묘법연화경이다. 은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뜻을 밝히는데 그 요지가 있다. 일체중생이 다 갖추고 있는 불지견을 열어 주어서 해탈케하는 일대사인연이 바로 그것이다.  14) 경덕전등록  경덕전등록은 생략하여 전등록이라고도 하는바, 부처님의 법을 이어 받아서 불법을 길이 후세에 빛낸 법통을 기록한 저서라 하겠다. 전등이란 바로 이란 뜻이고 경덕은 중국 송나라 연호이다.  15) 선문염송  선문염송이란 선문에서 들어보이고 게송을 읊어서 현묘한 진리를 일깨워 준다는 뜻이다. 저자는 진감국사 혜심(고려, 1178 -1234)이다. 화두에 대한 설명과 주석으로 되어있다. 7. 율전부 1) 범망경  범망경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줄인 이름이고 갖춘 이름은 범망경 노사나불설 보살심지계품제십이라한다.  보살이 지녀야 할 마음의 자세, 실천덕목 곧 대승계율을 담고 있어 대승의 모든 종파에서 소의 율전으로 되어 왔다. 이 범망경의 대승계는 재가, 출가를 막론하고 두루 통용되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2) 사분율  사분율이란 출가한 비구가 불법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계율에 관해 자세히 기록한 60권의 율전을 일컫는다. 곧 비구의 250계와 비구니 348계를 말하는데 이를 소승율장이라하고 보살계는 대승율장이라 하며 또 대승율장은 중생의 마음이나 불보살의 마음의 근본핵심인 心地자리를 동일한 것이며 이 심지를 계발하여 잘 지키면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는 근원적인 원리에 의해 베풀어진 것이므로 이 계라하고 성도즉시 한꺼번에 말씀하셨다하여 돈계라 하지만 소승계는 허물을 범하는 자가 생기면 그때 그때 마련된 계이므로 점계라하고 낱낱의 행위를 구체적으로 말했다하여 구족계라 한다.  8. 범종파적 소의 경전 1) 유마경  유마경의 갖춘이름은 유마힐소설경이나 13권으로 구마라습삼장이 번역했다(405).  정명경, 불가사의해탈경이라고도 하는데 유마힐 거사가 설한 경이란 뜻이고 불가사의하여 가희 생각이나 언설로는 헤아려 볼수 없는 해탈경계의 진리를 설한 경이란 뜻이다.  2) 대반열반경  대반열반경은 부처님의 돌아가심에 대한 경이란 뜻인데 그러나 단순한 부처님의 돌아가심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생사왕래가 끊어진 절대무위 경지에 돌아감을 뜻하는 열반이다. 여기에 대승의 열반경과 소승의 열반경이 있다.  9. 정토삼부경  1) 아미타경  아미타경. 불설아미타경이라고도 하고 줄여서 미타경. 호렴경. 소경이라고도 한다.  구마라습삼장이 번역한 아미타경1권이 널리 유통되고 있다.  상권에서는 아미타불의 인과와 그 48대원을, 하권에는 중생이 아미타불 정토에 태어나려면 염불. 제행의 두가지 방법이 있음을 설하고, 받게 되는 과보에 대해 설했습니다.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면 극락에 태어난다는 타력신앙을 설하고 있다.  2) 무량수경  대경, 쌍권경, 관무량수경이라고도 한다. 무량의경이란 무량수불의 과거보살 일때의 인행을 기록한 경이란 뜻이니 무량수불은 곧 수명이 한량없다는 아미타불을 가르킨다. 아미타불과 그 화신인 관음.세지의 두 보살, 극락정토의 장엄을 구체적인 마음의 대상으로 관하는 법을 설한, 타력신앙의 진실성을 밝힌 경입니다.  3) 관무량수경  관무량수불경, 무량수불경, 십육관경, 관경 등의 이름으로 불리운다.  열여섯가지 관법에 의하여 아미타불을 관하고 극락세계는 관념불이라 할 수 있는 관법이 있으므로 또는 이라고 한 것이다.  10. 호국삼부경  1) 법화경  묘법연화경의 천태종의 주된 소의 경전일 뿐만 아니라 삼부경의 하나로써 나라의 안위와 번영을 위해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 공덕이 무량하다고 했다.  2) 인왕경  인왕경은 약칭이고 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 또는 인왕호국반야바라밀경이라고 한다. 이 경은 부처님께서 16국왕으로 하여금 그 나라를 보호하고 편안히 잘 다스리게 하기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수지하라고 말씀하신 경전이다.  3) 금광명경  부처님께서 기사굴산에서 신상보살을 위해 부처님 수명이 한량없음을 말씀하셨고 그리고 견로지신을 위한 찬탄하시는 게송과 4천왕, 대변천신, 공덕천 등을 위해 이경이 위대한 뜻을 가지고 있어서 여러 경의 왕이 될만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11. 미륵경전 1) 미륵상생경  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이라하며 미륵보살반열반경. 관미륵경. 하생경이라고도 한다. 미륵보살이 도솔천에 왕생한다는 내용.  2) 미륵하생경  이 다음세상에 미륵보살이 성불할 때에 도솔천에서 인간세상에 태아나시어 석가세존과 출가, 성도하시고 설법하시는 일을 기록한 경이란 뜻이며 관미륵보살하생경, 미륵성불경, 미륵당래하생경이라고도 한다.  12. 선종의 소의 경전  1) 능가경  능가경의 갖춘이름은 입능가경이며 7권또는 10권에 이르는 방등부의 경전이다.  이 경은 五法 三性 八識 二無我에 대한 진리를 갈파한 경으로 선종의 초조인 달마대사도 이 경이 선의 종지와 계합하는 것으로 보고 2조 혜가에게 이 경과 함께 법을 전했다고 하며 금강경과 함께 선종의 소의 경전으로 되기도 했다.  2) 신심명  신심명은 3조 승찬대사께서 중생이 본래 부처인 뜻을 전한 불조의 대도를 널리 유통시키기 위해 전술했다고 한다. 이란 마음이 결정되어 의심치 않음을 말하며 마음 전체가 믿음뿐이어서 믿는 주체와 믿는내용의 대상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 또 명이라 함은 마음에 새기어 두는 좌우명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이라 함은 믿음과 마음이 둘이아닌 신심불이의 절대의 지도를 뜻한다.  3) 육조단경  육조단경은 육조대사법보단경의 약칭이니 선종의 제6조 혜능대사의 설법, 어록을 그의 제자 전해 1권으로 편집한 것이 전해온다. 약하여 법보단경, 단경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는 10문이 있다.  4) 증도가  증도가는 당나라 6조 혜능대사의 5대제자중의 한 사람으로 영가현각대사의 저술이다. 그래서 영가증도가 라고도 하는데 자기가 닦아서 증득한 마음 자리의 경지를 노래로 읊었다는 뜻이다. 이 책은 많은 선문학서 가운데 그 내용과 더불어 문장력이 절묘한 것으로 인정되어 고래로 많이 수지독송되었다.   13. 한국통불교의 소의경전  1) 십문화쟁론  신라의 원효대사가 저술한 2권으로 된것.  2) 금강삼매경론  신라의 원효대사가 저술한 것.  3) 법성게  법성게는 진리의 요체를 간단한 게송으로 읊어서 표시했다는 뜻이니 신라의 화엄종 초조 의상대사(625 - 702)가 화엄의 요의를 210자의 글에 뽑아엮은 명문이다. 칠언절구로된 이 글은 우리나라 불교각종 의식에 빠짐없이 수지되어 왔으며 특히 제례의식에는 반야심경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겨진다.  4) 보조법어  정혜결사문, 수심결, 진심직설, 법집별행록절요, 화엄론절요, 원돈성불론, 간화결의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의 문집.  5) 선가구감  조선조 서산대사(1500 - 1604)의 저술이다. 이조 불교의 교과서가 되다시피하였고 중국, 일본에까지 알려진 명저로 평가되었다.  14. 일반적인 신앙경전 ● 계율에 관한 경전  1) 영락본업경  요진의 축불렴삼장이 번역했으며 이라고도 하며 약하며 이라고도 한다. 42현성의 보살이 닦아나가야 할 단계적이고 필수적인 수행, 현재의 성현으로서 과위를 성취하는데는 아득한 과거세로부터 청정한 계율을 닦고 중생을 위해 6도만행을 닦는 원인적인 업행이 있다고 하여 이라 한 것이다.  2) 우바색계경  북량의 담무참삼장이 번역했으며 일명 성생경이라고도 하는데, 전편 7권 28장으로 되어있다.  대승율에 속하며 삼귀오계에 대해 말씀한 내용으로 세속에 있으면서 불법을 받드는 재가 남자가 지켜야 할 계율적인 교법을 말한다.  ● 효도에 관한 경  1) 목련경  대목견련경이라고도 하며 불설목련경이라고도 한다. 송나라때 법천삼장의 번역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아마도 우란분경을 원본으로 하여 다른 불제자의 효행을 대목련의 그것에 얹어서 엮은 경으로 보인다.  2) 우란분경  이 경은 목련존자의 소청에 의해 하안거 정진이 끝난 7월15일, 자자일에 대중승려에게 공양하여 일곱세상과 금세의 돌아가신 부모를 구제하는 내용이다. 백미의 음식과 과일을 갖추어 시방의 불보살과 대중승들에게 공양하므로 지옥에 떨어진 부모의 망령을 건저 낸다는 이 경의 뜻이 오늘날 행하는 우란분재, 우란분회의 뜻이되었다.  3) 부모은중경  부모의 은혜가 무겁고 깊은 뜻과 그 은혜를 갚고 죄를 소멸하는 법을 간곡히 말씀한 효도의 극치를 말씀한 경이라 하겠다.  ● 타력 신앙적인 경  1) 약사여래 본원경  수나라 달마굽다 삼장이 번역한 경전으로 줄여서 이라고 한다. 약사여래가 동방에 불극정토를 건설하였는데 그 나라이름이 정유리국이라하며 12가지 대원을 성취하여 일체중생을 제도하는데 온갖병을 고쳐주고 마지막에는 생사의 근원이 되는 무명 그 마음의 근본병을 고쳐주어서 모두 다 성불하게 한다는 약사정토신앙의 경전이기도 하다.  2) 지장경  지장보살본원경이라고도 한다. 당나라 실차난타삼장 번역으로 2권이 있다. 부처님이 도리천에서 어머니를 위해 설법하신 내용인데 지장보살을 부르시어 지장보살이 백천방편으로 6도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죄를 짓고 온갖 지옥고통받는 중생들을 평등하게 제도하게 제도하여 해탈케하려는 지장보살의 큰 서원을 말씀하신 내용이다.  3) 팔상록  팔상록이란 부처님의 8상을 기록했다는 뜻이다.  ● 일반적인 신앙경전  1) 승만경  승만경은 승만사자후 일승대방 편방광경의 줄인 이름이다. 송나라 구나빌타라삼장이 번역,  부처님이 대승의 진리를 승만이라는 부인으로 하여금 설명하도록 한 경이다.  2) 선생경  선생동자가 바라문의 법을 따라 매일 아침 세수 목욕하고 6방을 향해 예경하는 것을 보시고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설법하신 것이 이 경의 줄거리다. [조부모를 위해 동방을 보고 다섯가지로 예경하고, 스승을 위해 남방에 다섯가지로 예경하고, 아내와 가족을 위해 서방을 보고 예경하고, 부하를 위해 북방을 보고 예경하며 스님이나 도닦는 이를 위해 사방을 보고 다섯가지로 예경하면 죽어서 천상에 나게 되리라]고.  3) 나선비구경  나선비구경은 B.C 2세기경의 나선비구가 북인도로 정복한 희랍의 왕자 미란타를 불교에 귀의시키고 진여연기의 깊은 뜻을 담은 귀중한 경전이다.  4) 법구경  법구경의 법은 모든 경전을 의미하고 구는 경전에 있는 진리의 말씀을 의미한다.  불교의 진리를 간단명료하고 평이하게 엮었고 금구명언으로 되어서 실제의 생활과 비교하여 쉽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 특징이다.  5) 사십이장경  인도에서 중국으로 불전이 들어올 때 맨 처음 전해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후한의 가섭마등, 축법란 삼장이 함께 번역한 한권으로 된 단일본이다. 수행하여 증득하는 과위와 선악의 업보, 인명의 무상등 불교의 요지를 42장으로 나누어 편집한 출가자를 위한 교훈집이다.  6) 현우경  현우인연경이라고도 하며 범부와 성인의 인연비유의 행적을 재미있게 엮은 내용이다.  7) 옥야경  옥야는 기원정사를 세운 수달다 장자의 자부이름이다. 그 자부는 친정이 큰 부호로 권세가 높음만 믿고 시부모와 남편을 공경할 줄 몰랐다. 부처님은 장자의 청을 받고 신통과 설법으로 그를 교화하여 마침내 부처님께 귀의해서 계를 받았으며 그 뒤로 부덕을 잘 준수하여 모범적인 현모양처가 되었다는 설화가 실린 경이다.  8) 대비경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즈음에 대범천왕과 제석천왕과 가섭,아난등에게 바른 신심, 바른 법을 전하도록 부촉하신 경이다.  9) 숫타니파아타  길고 짧은 시로 된 경전이며 중간에 산문도 더러 섞여 있습니다. 총 5장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법구경]과 더불어 주옥 같은 말들이 담겨 있습니다.  10) 자타카  22권 547편의 본생담으로 된 경입니다. 자타카란 본래 특별한 형식과 내용을 갖춘 불교문학의 한 장르를 일컫는 말입니다. 석존이 탄생하기전의 전생이야기, 부처가 되기 전 보살로서 수행하던 모습 등 과거세에 쌓은 공덕의 인과로 부처가 된 이야기들이 실린 경입니다.  11) 백유경  총 98가지의 비유, 우화를 모은 경입니다. 비유나 우스운 이야기를 통해 바르게 살고, 불교의 기본적 교리를 이해하게 한 경입니다.  12) 유교경  석존께서 입멸에 즈음하여 제자들에게 마지막 설법을 하는 광경을 적은 경입니다.  13) 관음경  본래 독립된 경이었으나 후에 [법화경] 제 25품으로 흡수되었습니다. 관음 신앙의 가장 대표적인 경전으로서 관세음보살이 32신을 나타내어 중생의 재난을 구하고 소원을 이루게 한다는 내용입니다.  14) 무량의경  법화삼부경(무량의경, 법화경, 관보현경)중의 하나이며 법화경을 설하기 위한 서설이라고 할수 있는 경입니다. 따라서 내용도 법화경의 요점에 바탕을 두고 구성괴어 있습니다.  15. 대장경 해설전반 1) 아함부  아함경이라 함은 소승경의 모든 경을 총칭하는 말이다. 아함이란 팔리어 Agama로 표기하며 뜻은 전해내려온 부처님 말씀을 모아서 완성했다는 의미의 성전입니다.  내용은 주로 사성제, 팔정도, 12연기 등 불교의 기본사상에 관한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아함경종류는 4종류가 있습니다.  장아함 - 비교적 긴내용만을 추려서 엮은 경  중아함 - 중간정도의 길이 경을 모아 엮은 경  증일아함 - 법수에 따라 설한 경.  잡아함 - 짧은 내용을 모아 엮은 경  2) 본연부  부처님이 아득한 과거세의 영겁다생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자아의 완성을 위한 보살행을 한 일종의 고사, 전생설화 등을 말한다. 이에 관계되는 경들을 모아서 본연부라 이름하여 모은 경 분류법이다.  3) 반야부  대승불교 초기의 경전으로 공사사을 설한 경전으로 반야경과 금강경등이다.  4) 법화, 열반부  5) 화엄부 6) 보적부  대보적경을 말한다. 보살이 수행하는 법과 장차 미래세에 부처가 되어 중생을 어떻게 제도하게 되리라는 예언을 받는 수기성불 등에 관한 경전을 말한다. 7) 대집부  방등대집경이라 한다. 그 뜻을 대집부에 해당하는 모든 경을 다 모아서 한데 엮었다는 뜻이다.  8) 밀교부  대일경 - 당 선무외삼장이 번역했으며 구체적인 경명은 대비로자나성불신변가지경이라 한다. 전경이 7권으로 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경의 본문은 6권이고 공양하는 순서와 방법에 대한 의식1권으로 나눌수 있다. 대일여래가 부사의한 위신력으로 스스로 증득한 법신 자체의 경지를 말씀하신 경전이다.  금강정경 - 불공삼장의 역본이 유통되고 이음.  금강정일체여래진실섭대승대교왕경이 있다.  9) 율부  계율에 대한 불전을 모았다는 뜻이다.  10) 논부  논은 범어 아비달마의 번역이며, 경과 율의 대의를 편찬한 것으로 교리연구에 있어서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이해의 관문으로 일컬어 진다.          [edit] 1 개요 ¶ 불경(佛經)이란 불교의 경전을 말한다. 어마어마하게 많으며 한가지 경전의 의미만 깨우치는 것도 참 오래 걸린다.   [edit] 2 역사 ¶ 석가모니는 자신의 가르침을 글로 남기지 않았고[1], 제자들에게는 직접 말로서 가르침을 전했다[2]. 석가모니의 불멸 이후, 제자들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훼손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생전의 가르침과 언행을 모으기로 결심하고 석가모니의 직전제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언행을 '결집'한다. 이때 십대제자인 아난다와 우파리가 서로 기억한 것을 암송해 정리했다[3]. 그 이후로도 여러번 결집을 해 현재의 불경이 완성되었다. 불경들 중에서도 석가모니의 직접적인 언행을 기록한 경전을 아함경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후로도 오랜 시간동안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문자화 되지 않고 스승에서 제자로 말로서 암송하는 형식으로 전달된 것으로 추측된다. 석가모니의 유훈으로 자신의 가르침을 글로 옮기지 말 것, 팔리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번역하지 말 것 등을 제자에게 일렀다. 최초의 경전으로 인정받는(글자로 옮겨 적힌) 패엽경의 경우 그것이 만들어지게 된 이유를 생각하면 불제자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얼마나 잘 지키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edit] 3 분류 ¶     [edit] 3.1팔리어 경전¶ 스리랑카에 전해지는 경전. 성립시기가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추측된다. 석가모니는 이 팔리어로 설법을 했다고 한다.   [edit] 3.2산스크리트어 경전¶ 대승불교의 경전은 산스크리트어로 써진 것이 많다. 금강경, 법화경, 아함경 등 한국에서 널리 쓰이는 경전은 대부분 본래 산스크리트어 경전이다. 범어(梵語)라고도 한다.   [edit] 3.3한문 경전¶ 한문으로 번역된 경전이다. 불경의 한문 번역은 동한대부터 개시되었는데, 초기의 번역가들은 주로 안세고와 같은 서역승들로서, 구술로 번역한 것을 제자들이 베껴적는 형태로 번역이 이루어졌다. 또한, 산스크리트어를 그대로 번역했다기 보단, 산스크리트어가 속화된 프라크리트나 팔리어, 심하게는 토하라어에 기초해 번역된 경우도 있어 번역의 질은 중구난방이다. 따라서, 초기의 번역에는 후대의 번역에 비해 내용이 대폭 생략되어 있거나, 음역이 다른 점이 상당히 많다. 불경 번역은 그 이후에도 꾸준히 이루어지다가, 북조의 서역승 구마라습이 엄격한 기준을 두고 불경을 번역하기 시작, 불경 번역의 수준이 상당히 높아졌다. 당대에 들어서면 현장이 인도에 다녀와 불경을 당시의 언어상황에 맞게 재번역함으로서 그 이후에는 현장역 불경이 많이 사용되게 되었다(대표적으로 반야심경은 현장역이다). 이를 기준으로 현장역을 신역, 그 이전의 번역을 구역이라고 칭한다. 주로 중국, 대한민국, 일본, 대만 등에서 쓰고 있으며, 각 지역마다 불경에 대한 대규모 편찬사업을 벌여 대규모의 불교경전 집성이 발간되었다. 가령 중국에서는 송대부터 대장경 발간이 몇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고, 한국에서는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이 유명하며, 일본에서는다이쇼 연간에 식민지 것이니 마음대로 쓸 수 있으므로 이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삼아 당시까지 존재하였던 한중일의 불교 문헌을 집대성하여 다이쇼신수대장경을 발간하여, 현재까지 존재하는 불경 총집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것으로 남아있다.   [edit] 3.4티베트어 경전¶ 티베트어로 번역된 경전이다. 티베트 불교는 인도와 직접적인 교류를 거치면서 발전했고, 티베트어는 오로지 불경을 번역하기 위해 재정비하는 과정[4]까지 거쳤으므로 티베트어 경전은 사료가치가 매우 높게 평가되고 있다. 거기에 티베트 불교는 8세기 불교가 인도에서 소멸되기 직전의 불교가 유입되었기에 현재 한문/산스크리트 본에는 남아있지 않은 경전이 남아있다. 그 덕에 우리는신라 출신의 승려 원측의 논서 를 볼 수 있게되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티베트에서 주로 썼으며, 그외에 티베트 문화권과 가까원던 몽골이나 청, 인도북부의 히말라야 인근의 나라에서도 티베트어 경전을 썼다.    
545    언어라도 "통일" 되였으면... 댓글:  조회:4567  추천:0  2016-11-01
한글의 위력    One example of unique Korean culture is Hangul, the Korean alphabet. There are no records in history of a king made a writing system for the benefit of the common people except in Korea. The Korean alphabet has an exact purpose and objective So its use cannot be compared with other languages. 한국 문화의 독자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바로 한글이다. 세계 역사상 전제주의 사회에서 국왕이 일반백성을 위해 문자를 창안한 유래는 찾아볼 수 없다. 그만큼 한글은 문자발명의 목적과 대상이 분명했다. 그러므로 그 효용성은 다른 문자와 비교할 수 없다.  has a For example, each Chinese character meaning, so people have to memorize all of them, but the Korean alphabet is made of phonetic letters just like English. Anyone can learn Hangul in a day, that is why it is called 'morning letter'. pIt is easy to learn because it can be ut together with 10 vowels and 14 consonants. Hangul has 8,000 different kinds of sound and it is possible to write each sound. 예를 들면 한자는 표의문자이므로  모든 글자를 다 외워야 하지만 한글은 영어와 마찬가지로 표음문자이므로 배우기가 쉽다. 그래서 한글은 아침글자라고도 불린다.  모든 사람이 단 하루면 배울 수 있다는 뜻이다. 10개의 모음과 14개의 자음을 조합할 수 있기 때문에 배우기 쉽고, 24개의 문자로 약 8,000음의 소리를 낼 수 있다. 즉, 소리 나는 것은 다 쓸 수 있다. Because Japanese letters imitate Chinese characters, they cannot be used without Chinese characters. The Chinese government secretly sent scholars to the United States to alphabetize its language. Chinese is too difficult to learn, therefore the illiteracy rate is very high. Chinese thought it would weaken national competitive power.. 일본어는 한자를 모방한 문자이기 때문에  한자 없이 독자적인 문자 수행이 어렵고 또, 한자는 너무나 배우기 어렵다. 한때 중국정부는 은밀히 학자들을 미국에 파견해 한자의  알파벳화를 연구한 적이 있다. 그것은 한자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문맹률이 높고  그것이 국가 경쟁력 약화를 초래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Hangul has an independent reading and writing system. It can be used on its own, but some old generations like to use Hangul along with Chinese characters education.. 한국인들은 한국어로만 말하고 쓰는 완벽한 언어를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 기성세대는 한자를 섞어 사용하고 심지어 일부 교수들은 한자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This is an anachronism and absolutely against the globalization of Hangul. Even the Chinese government recognized the weak points of its writing system for the coming 21st century.. 중국 정부조차 21세기의 미래 언어로서 약점을 인정한 한자에 대해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은 한마디로 시대 착오이며 한글의 세계화에 역행하는 자세가 아닐 수 없다. Latin was used as an official language of the Roman Catholic church. It has been used as a custom or religious authority for people who in Western societies, Latin is disappearing.. 라틴어는 카톨릭의 공식언어로 사용되었다. 관습상 또는 종교적 권위를 위해 그 의미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지금 서구에서 라틴어는 사라져 가는 언어일 뿐이다. Hangul was invented 500 years ago. but it has only been used for 100 years by all Koreans. Now it is standing in the world proudly with its value. Korean has been chosen as a foreign language in some universities in the United States and Australia. Now large Korean companies are building Factories in some Asian and Eastern European countries. These companies have invested a lot of money. The managers of those companies are also learning Hangul.. 한글은 창제된 지 500년이 되었지만 실제 발전의 역사는 100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그 한글이 세계 속에 자부심을 가지고 우뚝 서 있는 것이다. 미국이나 호주의 대학에서는 한국어를 제2외국어로 지정해 놓았다. 그리고 많은 한국의 기업들이 아시아나 동부 유럽 국가에 대규모 공장을 짓고 투자를 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그 회사 간부들은 한글을 배우고 있다. It is time to invest money and to make an effort to develop Hangul for the 21st century like the French government has done. The language of the future has a strong economic value. Hangul is seven times faster in computer operation ability than Chinese or Japanese.. 프랑스 정부가 했던 것처럼 이제 한국 정부도 프랑스처럼 한글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과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21세기의 언어는 강한 경제적 가치를 갖는다. 컴퓨터에서 한글의 업무능력은 한자나 일본어에 비해 7배 이상 경제적 효과가 있다고 한다. When Windows 95 appears on your screen, Hangul is breathing on the tips of your fingers beyond the time barrier.. 윈도우 95 화면을 보고 더블클릭을 하는 순간  한글의 위력은 500년이란 시간의 벽을 넘어 손끝에서 살아 숨쉰다. The 21st century will be the age of information. National competitive power depends on the quantity and quality of information. Therefore the national goal for the Clinton administration is to end illiteracy. The American literacy rate is only 79%. The Korean illiteracy rate is near the zero percent mark, because Hangul is easy.. 21세기는 정보화 사회다. 즉 정확한 정보의 양과 질이 국가 경쟁력을 좌우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전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국가적 목표로 내세우는 것도 문맹의 퇴치이다. 현재 읽고 쓸 줄 아는 미국인은 고작 79%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은 쉽고 간결한 한글 덕분에 문맹률 0% 라는 경이적인 기록에 육박한다.   6.25 전쟁 이후, 남한과 북한으로 분단되어 언어적으로 많은 차이를 가지게 되었다. 남한에서는 서울말을 공통어로 정하고 ‘표준어’라고 칭하며 북한에서는 평양말을 공통어로 하며 ‘문화어’라고 한다. 표준어는 ‘ㄹ’과‘녀 뇨 뉴 니’가 낱말의 첫소리에 나타나는 두음법칙이 존재하나 문화어에서는 ‘노동’을 ‘로동’으로, ‘여자’를 ‘녀자’로 발음하여 두음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표준어는 주로 낮은 억양으로 말하나 문화어는 억양에 장단고저가 있어 강하고 센 느낌을 준다. 어휘에서도 많은 차이를 보이는데 먼저 ‘건망증’이 ‘잊음증’으로, ‘볶음밥’이 ‘기름밥’으로 불리는 등 의미는 같지만 말이 틀린 경우가 있으며, ‘동무’라는 뜻이 북한에서는 ‘이념이나 사상을 같이 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여 같은 말이 다른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외래어의 수용도 남한은 허용하나 북한은 고유의 문화어로 바꾸어 사용한다. =================================== 남북한 언어비교 南  北 1. 아이스크림 ---------- 얼음보숭이  2. 도시락 ---------------- 곽밥 3. 쥬스 --------------------과일단물 4. 운동화 -----------------천신 5. 화장실------------------위생실 6. 노크 --------------------손기척 7. 보조개 -----------------오목샘 8. 김매기 -----------------풀잡이 9 오두막 -----------------마가리 10.뮤지컬 ----------------가무이야기   11. 뒷걸음질 ------------물레걸음 12. 간섭 ------------------간참 13. 거짓말 -------------- 꽝포 14. 꽃다발 -------------- 꽃묶음 15. 장모 -----------------가시어머니 16. 날씨 ------------------날거리 17. 계란말이 ------------색쌈 18. 소시지 ---------------칼파스 19. 볼펜 ------------------원주필 20. 방청소 ---------------방거두매 21. 미소 ------------------볼웃음 22. 드레스 ---------------나리옷 23. 단발머리 ------------중발머리 24. 들창코 ---------------발딱코 25. 우울증 ---------------슬픔증 26. 오전 ------------------낮전 27. 위기 -----------------고스락 28. 운행표 --------------다님표 29. 눈썰미 --------------눈정신 30. 합병증 --------------따라난병     31.도넛 ------------------가락지빵  32.주차장 ---------------차마당 33.라면 ------------------꼬부랑국수 34.개고기 ---------------단고기 35.만화영화 ------------그림영화 36.야간경기 ------------등불게임 37.꿈나라 ---------------잠나라 38.기성복 ---------------지은옷 39.꼭지점 ---------------꼭두점 40.꾀병 ------------------건성      41.록영화 ---------------시보영화 42.김매기 ---------------풀잡이 43.꽃다발 - -------------꽃묶음    44.교대 ------------------대거리 45.과거 ------------------어제날 46.관광버스 ------------유람뻐스 47.공염불말 ------------공부 48.공휴일 - -------------휴식일 49.골키퍼 ------------- -문지기 50.공무원 - -------------정무원 51.고함지르다 - -------고아대다. 52.곧바로(즉시) - -----대미쳐 53.계모 - ----------------후어머니 54.교대 - ----------------대거리 55.과거 - ----------------어제날 56.가르치다 ------------배워주다 57.고함치다 - ----------고아대다 58.궁금하다 - ----------궁겁다 59.기가 막히다 --------억이 막히다 60.괜찮다 - -------------일 없다 61.근지럽다 - ----------그니럽다 62.가깝다 - -------------가찹다 63.곧,금방 - ------------인차 64.기필코 - -------------불필코 65.눈총을 주다 - ------눈딱총을 주다 66.나이가 어리다 -----나어리다 67.높임말을 쓰다 -----옙하다 68.냉대하다 - ----------미우다 69.노려보다 - ----------지르보다 70.덜렁거리다 - -------건숭맞다 71.도와주다 - ----------방조하다 72.드문드문 - ----------도간도간 73.도착하다 - ----------가닿다 74.떠맡기다 - ----------밀맡기다 75.마련하다 - ----------내오다 76.모질고 사납다 -----그악하다 77.자리없음 - ----------만원 78.되는대로 - ----------마구 망탕 79.모락모락 - ----------몰몰 80.매우 가깝다 --------살밭다 81.미끄러지다 ---------미츠러지다 82.큰 걱정 - ------------된 걱정 83.북적북적 - ----------욱닥욱닥 84.배웅하다 - ----------냄내다 85.부서지다 - ----------마사지다 86.바쁘다 - ------------어렵다 87.빈정거리는 - ------투비양청 88.보태주다 - ---------덧주다 89.살금살금 - ---------발면발면 90.시원시원하다 -----우선우선하다 91.싸돌아다니다 -----바라다니다 92.알쏭달쏭하다 -----새리새리하다 93.서명하다 -----------수표하다 94오손도손 - ----------도순도순 95.유일무이하다 -----단벌하다 96.지난 번 -------------간번 97.주저않다 -----------퍼더앉다 98.창피하다 -----------열스럽다 99.우람하게 -----------거연히 100.틀림없이 ---------거의 없이 101.터무니없다 -------탁없다 102.기름지다 - -------노랑지다  103.푹 수그리다 - ---직수리다 104.혈안이 되다 -----피눈이 되다 105.전근하다 - ------조동하다 106.횡재하다 - ------호박을 잡다 107.효과를 얻다 - --은을 내다 108.피나는 노력 --- 피타는 노력 109.색다르다 맛 - --다르다 110.자기 스스로 - --자기절로 111.저마다 - ---------------저마끔  112.정신을 잃다 - ---------얼이 치다 113.토라지다 - -------------시뚝하다 114.얼떨결에 - -------------어망결에 115.의젓하다 - -------------의사스럽다  116.가게 - -------------------가가 117.가끔 - -------------------가담 가담 118.가난에 찌든 삶 -------애옥살이 119.가는 귀가 먹다 -------잔귀가 먹다 120.가두리 양식 ----------우리식 양어 121.가랑비 ------------------안개비 122.가로수 - ----------------거리나무 123.가르치다 - --------- ----배워주다 124.가발 - ------------------덧머리 125.가사(집안 살림 살이)------집안 거두매 126.가속페달(액셀러레이터)----가속답판 127.가연성 ----------------- -불탈성 128.가위바위보 - -------------가위주먹 129.가정주부 - --------가두녀성, 가정부녀 130.가족 수당 --------------- 가족금 131.각선미 ------------------ 다리매 132.간섭 - -------------------간참 133.간통 - -------------------부화 134.개간지 - -----------------일군땅 135.개 고기 ----------------- 단 고기 136.개기 일식 --------------- 옹근 일식 137.거슬름돈 - --------------각전 138.거위 - -----------------게사니 139.건달 - -----------------날총각 140.건널목 ---------------- 건늠길 141.건망증 - ---------------잊음증 142.검문소 ---------------- 차단소 143.검산 - -----------------뒤셈 144.겉치마 ---------------- 웃치마 145.겨우살이 ------------- 겨울나이 146.견인차 --------------- 끌차 147.결과  ---------------- 후과 148.경사도 -------------- 빈탈도 149.계단 ---------------- 디대 150.계단논 -------------- 다락논 151.계집아이 ------------ 에미 나이 152.고가철도 ----------- 가공철도 153.고급담배 ----------- 특급담배 154.고급 숙박 시설 ----- 초대소 155.도넛 - -------------가락지빵 156.라면 -------------- 꼬부랑국수 157.볼펜 ------------- 원주필 158.초등학교 --------- 인민학교 159.음료수 - ----------과일단물 160.계란 ------------- 닭알     161.겨울 - -----------동살   162.전등 -------------불알 163.화장실-----------위생실- 164.리본------------ 빙수댕기- 165.필통단얼음-------필갑  166.학용품--------- -문방구 - 167.볼펜------------원주필 -  168.의식주----------식의주  169.가찹다---------그니럽다 170.가깝다---------가찹다 北   南 171.인차 -곧, 금방 172.불필코 - 기필코 173.눈딱총을 주다 - 눈총을 주다 174.나어리다 -나이가 어리다 175.옙하다 -높임말을 쓰다 176.미우다 -냉대하다 177.밀맡기다 - 떠맡기다 178.가닿다 -도착하다 179.건숭맞다 - 덜렁거리다 180.방조하다 - 도와주다 181.도간도간 - 드문드문 182.내오다 -마련하다 183.그악하다 -모질고 사납다 184.만원 -자리없음 185.마구망탕 - 되는 대로 186.몰몰 -모락모락 187.살밭다 - 매우가깝다. 188.미츠러지다 - 미끄러지다 189.된 걱정 - 큰 걱정 190.욱닥욱닥 - 북적북적 191.냄내다 - 배웅하다 192.마사지다 - 부서지다 193.어렵다 - 바쁘다 194.투비양청 - 빈정거리는 195.덧주다 - 보태주다 196.발면발면 - 살금살금 197.수표하다 - 서명하다 198.우선우선하다 - 시원시원하다 199.바라다니다 - 싸돌아다니다 200.새리새리하다 - 알쏭달쏭하다 201.도순도순 -오순도순 202.단벌하다 - 유일무이하다 203.간번 - 지난번 204.퍼더앉다 -주저앉다 205.열스럽다 - 창피하다 206.거연히 -우람차게 207.거의없이 - 틀림없이 208.탁없다 - 터무니 없다 209.노랑지다 - 기름지다 210.직수리다 - 푹 수그리다 211.피눈이 되다 - 혈안이 되다 212.조동하다 -전근하다 213.호박을 잡다 - 횡재하다 214.은을 내다 -     효과를 얻다 215.피타는 노력 -피나는 노력 216.다르다 - 색다른맛 217.자기절러 - 자기스스로 218.저마끔 - 저마다 219.얼이치다 - 정신을 잃다 220.시뚝하다 -토라지다 221.어망결에 - 어떨결에 222.의사스럽다 - 의젓하다 223.가가 - 가게 224.가담가담 -가끔 225.애옥살이 -가난에 찌는 삶 226.잔귀가 먹다 - 가는 귀가 먹다 227.우리식 양어 - 가두리 양식 228.안개비 - 가랑비 229.거리나무 -가로수 230.덧머리 -가발 231.가위주먹 -     가위바위보 232.가두녀성 - 가정주부 233.가족금 - 가족수당 234.다리매 - 각선미 235.간참 - 간섭 236.부화 - 간통 237일꾼땅 -개간지 238.단고기 - 개고기 239.옹근일식 - 개기일심 240.각전 - 거스름돈 241.개사니 - 거위 242.날총각 - 건달 243.건늠길 -건널목 244.잊음증 -건망증 245.차단소 -검문소 246.뒤셈 - 검삼 247.웃치마 - 겉치마 248.겨울나이 - 겨우살이 249.끌차 - 견인차 250.후과 - 결과 251.빈탈도 - 경사도 252.디대 - 계단 253.몸깐다 - 살빼다 254.문지기 - 골기퍼 255.과일단즙 - 쥬스 256.통과암호 - 패스워드 257.알림판 - 계시판 258.나들문 - 출입문 259.직승비행기 - 헬리콥터 260.손가락말 - 수화 261.차마당 - 주차장 262.휴식일 - 공휴일 263.지르보다 - 노려보다 264.배워주다 - 가르치다 265.고아대다 - 고함치다 266.궁겁다 - 궁금하다 267.억이막히다 - 기가 막히다 268.일없다 - 괜찮다 269.둥글파 - 양파 270.아침모임 - 조회 271.마가리 -      오두막 272.설기과자 -  카스테라 273.기름밥 -볶음밥 274.글토막 -문장 275.261.단묵 -젤리 276.창발성 -창의성 287.냉동동기 -냉장고 278.샘물터 - 약수터 279.상급생 - 선배 280.소라판 - 레코트 281.가루젓 -분유 282.고예 -곡예 283.땅속물 -지하수 284.코신 -고무신 285.털빠짐증 -탈모증 286.에미나이 -여자아이 287.가마치 - 누룽지 288.기다림 칸 -대기실 289.색떼레비 -컬러텔레비전 290.고모사촌 -고종사촌 남한 사용어                        북한사용어 가디간                           반터짐세타 가봉                              시침질 기성복                           지은 옷 글러브                           가죽장갑 런닌셔츠                         런닝샤쯔 모포                               담요 모피                               털가죽 미니스커트                      동강치마 베레모                            둥글모자 브레지어                         가슴띠 색동저고리                      색동달이 샌들                               편리화 세탁                               빨래 셔츠                               샤쯔 손가락 장갑                     가락장갑 수영복                            헤염옷 스카프                            목수건 실래화                            끌신, 방안신, 실내화 악세서리                         치레걸이 안전밸트                         박띠 야구글러브                      가죽장갑 원피스                            달린옷 장식품                            치레거리 재봉틀                            재봉기 침대시트                         침대깔개 커튼                               창가림 콜셋                               몸매띠 탈의실                            옷벗는칸 탈의장                            옷벗는 곳 평상복                            가정옷 포플라                            뽀뿌라 하복                               여름옷 한복                               조선옷 핸드백                            손가방 북한 사용어                    남한 사용어                          교원                              교사 피복공장노동자               봉제공, 재봉사 편의봉사원                     식당, 여관, 목욕탕 종업원 전화수                           전화교환원 접대원                           음식점이나 숙박서비스 근로자  은행경제사                     은행원 어로공                           어부, 선원 방송화술배우                  성우 양생원                           양호원 기술원                           엔지니어 무잠이,잠수공                 잠수부 교학, 시학                      장학관 적위군                           예비군 세소업                           영세업 성원, 일군                      요원 우편통신원                     우편배달부 계호원                           교도관 안전원                           경찰 직장세대                        맞벌이부부 전화수                           전화교환원 근로인테리                     정신노동자 교화인                           죄수 근로여성                        직업여성 총참모장                        참모총장 구강과의사                     치과의사 직업선수                        프로선수 부기원                           경리원, 회계원 동의사                           한의사 교양원                           유치원교사 참심원                           배심원 하전사                           병사 영예군인                        상이군인 수원                              수행원 강사                              시설및 견학안내원 , 관관안내원 남한 사용어      북한 사용어 가는소금          가루소금 간식                새참 갈치                칼치 갈비탕             갈비국 강낭콩             당콩 계란                닭알 꽁보리밥          강보리밥 닭도리탕          닭탕 당근                홍당무 도시락             곽밥 두유                콩우유 드롭스             알사탕 멜론                향참외 쭈꾸미             호둑이 야채                남새 호프                맥주 분말                가루 아이스크림      까까오 사과쥬스         사과단물 산채               산나물 삶은닭걀         삶은닭알 상추               부루 설탕               사탕가루 손칼국수         제비국 쇠고기            소고기 미원               맛내기 야채빵            남새빵 야채볶음         남새볶음 양배추            가두배추 정제소금         깨끗한소금 주먹밥            쮀기밥 쥬스               과일단물 증편               기지떡,상화떡 찰옥수수         찰강냉이 캬라멜            기름사탕 부치개            지짐이 누룽지            가마치 흑설탕            누렁사탕(황탕)
544    [쉼터] - 알아두면 좋은 말 78 댓글:  조회:5731  추천:0  2016-11-01
  알아두면 좋은 78가지 말     1. 따져서 이길 수는 없다  2. 사랑이라는 이름으로도 잔소리는 용서가 안 된다  3.좋은 말만 한다고 해서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받는 것은 아니다  4.말에는 자기 최면 효과가 있다  5. '툭'한다고 다 호박 떨어지는 소리는 아니다  6. 유머에 목숨을 걸지 말라  7. 반드시 답변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화를 자초한다  8. 상대편은 내가 아니므로 나처럼 되라고 말하지 말라  9. 설명이 부족한 것 같을 때쯤 해서 말을 멈춰라  10. 앞에서 할 수 없는 말은 뒤에서도 하지 말라  11. 농담이라고 해서 다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12. 표정의 파워를 놓치지 말라  13. 적당할 때 말을 끊으면 다 잃지는 않는다  14. 사소한 변화에 찬사를 보내면 큰 것을 얻는다  15. 말은 하기 쉽게 하지 말고 알아듣기 쉽게 해라  16. 립 서비스의 가치는 대단히 크다  17. 내가 이 말을 듣는다고 미리 생각해 보고 말해라  18. 지루함을 참고 들어주면 감동을 얻는다  19. 당당하게 말해야 믿는다  20. 흥분한 목소리보다 낮은 목소리가 위력 있다  21. 한쪽 말만 듣고 말을 옮기면 바보 되기 쉽다  22. 눈으로 말하면 사랑을 얻는다  23. 덕담은 많이 할수록 좋다  24. 자존심을 내세워 말하면 자존심을 상하게 된다  25. 공치사하면 누구나 역겨워한다  26. 남의 명예를 깎아내리면 내 명예는 땅으로 곤두박질 처진다  27.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면 진실성을 인정받는다  28. 잘난 척하면 적만 많이 생긴다  29.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해야 인정받는다  30. 말의 내용과 행동을 통일시켜라  31. 두고두고 괘씸한 느낌이 드는 말은 위험하다  32. 상대에 따라 다른 언어를 구사해라  33. 과거를 묻지 말라  34. 일과 사람을 분리해라  35. 애교는 여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36. 자기 자신을 제물로 사용해야 웃길 수 있다  37. 대화의 시작은 호칭부터다  38. 대화의 질서는 새치기 때문에 깨진다  39. 말을 독점하면 적이 많아진다  40. 무시당하는 말은 바보도 알아듣는다  41. 작은 실수는 덮어 주고 큰 실수는 단호하게 꾸짖어라  42. 지나친 아첨은 누구에게나 역겨움을 준다  43. 무덤까지 가져가기로 한 비밀을 털어놓는 것은 무덤을 파는 일이다  44. 악수는 또 하나의 언어다  45. 쓴 소리는 단맛으로 포장해라  46. 말은 입을 떠나면 책임이라는 추가 달린다  47. 침묵이 대화보다 강한 메시지를 전한다  48. 첫 한 마디에 정성이 실려야 한다  49. 다양한 문화를 인정하면 대화는 저절로 잘 된다  50. 낯선 사람도 내가 먼저 말을 걸면 십년지기가 된다  51. 목적부터 드러내면 대화가 막힌다  52.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해서 말하면 큰 낭패를 당하기 쉽다  53. 말을 잘한다고 대화가 유쾌한 것은 아니다  54. 내 마음이 고약하면 남의 말이 고약하게 들린다  55. 타협이란 완승, 완패가 아니라 승&승이다  56. 험담에는 발이 달렸다  57. 단어 하나 차이가 남극과 북극 차이가 된다  58. 진짜 비밀은 차라리 개에거 털어놓아라  59. 지적은 간단하게 칭찬은 길게 해라  60. 가르치려고 하면 피하려고 한다  61. 정성껏 들으면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62. 비난하기 전에 원인부터 알아내라  63. 내 말 한 마디에 누군가의 인생이 바뀌기도 한다  64. 눈치가 빨라야 대화가 쉽다  65. 불평하는 것보다 부탁하는 것이 실용적이다  66. 말도 연습을 해야 나온다  67. 허세에는 한 번 속지 두 번은 속지 않는다  68. 내가 먼저 털어놓아야 남도 털어놓는다  69. 그런 시시한 것조차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70.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어서는 안 된다  71. 지나친 겸손과 사양은 부담만 준다  72. 도덕 선생님은 선생님 자리에서 내려올 수 없다  73. 말은 가슴에 대고 해라  74. 넘겨짚으면 듣는 사람 마음의 빗장이 잠긴다  75. 말투는 내용을 담는 그릇이다  76. 때로는 알면서도 속아 주어라  77.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말라  78. 정성껏 들어주면 돌부처도 돌아보신다  [출처] [펌] 알아두면 좋은 78가지 말|작성자 까마귀
543    민족의 성산 ㅡ 백두산 댓글:  조회:5783  추천:0  2016-11-01
 백두산 (白頭山)     백두산   고려시대 이전의 백두산 기행문은 찾아볼 수 없고, 1764년(영조 40)에 함경도의 실학파 선비인 박종(朴琮)이 직접 백두산을 탐승하여 순한문 기행으로 남긴 이 처음이 될 것이다. 이 유록은 그의 유저(遺著)인 《당주집(鐺洲集)》속에 실려 있다. 그 내용이 사실적으로 매우 소상하게 기록되어, 200여년 전의 백두산의 실황을 살피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 1764년(영조 40) 여름, 5월 14일 경성군(鏡城郡)에 살던 박종이 자기 집을 떠나, 부령(富寧) · 무산(茂山) · 임강대(臨江臺) · 풍파(豊坡) · 천평(天坪) · 천동(泉洞)을 거쳐 23일에 최고봉에 오른 뒤 하산하여 6월 2일에 집에 돌아왔다.   18일이 걸렸고 비록 말을 이용하였으나, 왕복 1,322리를 다녀서 백두산을 탐승하였으니, 그 당시로서는 대단한 모험이었다. 의 내용에 의하면, 박종에 앞서 2년 전인 1762년 조영순(趙榮順)이라는 사람이 백두산을 등정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여행기를 찾아볼 수 없음은 애석한 일이다. 또한 이 유록 중에, 홍계희(洪啓禧)가 이미 1742년에 어명을 받들어 갑산 · 무산으로 들어오면서 백두산을 편람한 기록이 있다고 하였다. 이밖에 영조 때 서명응(徐命膺)의 《보만재집(保晩齋集)》속에도 가 있다.   근래의 자료로는1927년에 간행된 최남선의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가 있고, 1931년에 간행된 안재홍(安在鴻)의
542    력대 노벨상을 거부한 사람은 무슨 리유?... 댓글:  조회:4058  추천:0  2016-10-31
[시선뉴스 문선아]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상인 ‘노벨상’의 수상자가 모두 발표됐다. 오는 12월 10일이면 지명된 수상자가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상을 받게 된다. 하지만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던 의외의 수상자 노벨 문학상의 ‘밥 딜런’이 스웨덴 한림원의 연락을 받지 않아 시상식 참석 여부가 불확실해졌다. 이에 세간에서는 노벨상을 거부하는 사람이 또 등장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시선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역대 노벨상을 거부한 사람은 무슨 이유로 거부한 것일까? 첫 번째 인물,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 (출처/hoover.com) 195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였던 소설 닥터 지바고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수상을 거부한 첫 사례다. 전쟁과 혁명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은 소설은 18개국의 번역 됐고 노벨 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하지만 파스테르나크가 살던 소련에서는 혁명의 잔혹함과 자국의 사회상을 담은 이 소설을 거부했으며 그를 소련작가동맹에서의 제명은 물론 추방하겠다고 까지 선언했다. 조국을 떠날 수 없었던 파스테르나크는 탄언서를 쓰고 추방을 면하기 위해 노벨상도 포기했다. 이후 추방은 면한 파스테르나크는 작가로서는 활동하지 못하고 번역작업을 주로하다 1960년 5월 30일 암으로 숨지게 된다. 조국에서 그의 작품이 출판된 것은 27년이 지난 1987년이었으며 그 후 2년 뒤 1989년 그의 아들이 노벨상을 대신 받았다. 두 번째 인물, 장 폴 사르트르     ▲ (출처/플리커) 1964년 노벨문학상 수상였던 장 폴 사르트르는 자유의지로 상을 거부한 최초의 인물이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현대 실존주의 철학의 거장이었던 장 폴 사르트르는 자신의 철학이 평가 받는 것과 서구 1세계 위주로 돌아가는 노벨상 풍토를 비난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는 혁명적 좌파였지만 소련의 헝가리, 체코 침공에 단호히 반대하고 미국의 베트남 참전도 강력하게 비난을 한 인물이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독립에도 적극적인 지지는 물론 알제리의 독립을 위해 실천적으로 행동한 인물이다. 그는 문학상 후보에 오를 때부터 거부 의사를 표현했으며 수상자 발표 후에도 “노벨위원회의 평가를 인정할 수 없으며 문학적 우수성을 놓고 등급을 매기는 것은 부르주아 사회의 습성”이라고 이유를 밝히며 단호하게 거부했다. 세 번째 인물, 레둑토     ▲ (출처/플리커) 1973년 아시아 최초로 노벨평화상 수상자였던 베트남 총리 레둑토는 당시 정치사회적으로 혼란했던 베트남의 상황을 이유로 상을 거부했다. “아직 베트남에 평화가 오지 않았다”는 그의 말은 지금도 여러 방면에서 회자 되고 있다. 그가 노벨평화상으로 결정된 이유는 베트남 전쟁 종결과 함께 파리 평화협정을 이끈 공로을 인정됐기 때문이다. 레둑토는 1968년 베트남 화평교섭을 위한 파리회담의 월맹 측 대표단 특별고문이 되어 1969년 8월부터 미국 측의 대통령보좌관 헨리 키신저와 비밀교섭을 해 교섭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갔다. 베트남 전쟁은 끝이나고 공로를 인정받아 키신저와 공동으로 1973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지명되었으나 거절하였다.  노벨상은 개인의 영광이기도 하지만 국가의 영광이기도 한 상이다. 그동안의 세계의 발전을 위해 노력한 개인과 국가의 공을 치하하는 상이지만 정치사회적인 상황에 따라 거부를 하기도 했던 것이다. 밥 딜런의 수상이 지금까지도 명확하게 나오지 않아 아쉬운 대목이지만 국제적인 잔치인 만큼 12월 10일 수상식에서 그의 얼굴을 보기를 바란다. 문선아 선임 에디터  
541    [쉼터] - 대만으로 가보고싶다... 댓글:  조회:6844  추천:0  2016-10-30
대만 수도 : 타이베이(台北) 면적 : 36,000km2 인구 : 약 2천 3백만 명 종족 : 한인, 신주민, 원주민 언어 : 중국어, 타이완어(민난어), 하카어(객가어), 기타 원주민 언어 종교 : 불교, 도교, 기독교, 천주교, 이슬람교 별칭 : 포모사(Formosa), 보물섬(寶島) 아시아 대륙의 남동쪽, 태평양의 서쪽 가장자리에 위치한 타이완의 총 면적은 36,000km2이며 남북으로 길죽한 고구마 모양을 하고 있다. 중국 본토와는 타이완 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일본 오키나와 섬, 남쪽으로는 필리핀이 위치해 있다. 행정 구역상으로는 타이베이(台北), 신베이(新北), 타이중(台中), 타이난(台南), 가오슝(高雄), 타오위안(桃園) 6개의 직할시와 지룽(基隆), 신주(新竹), 자이(嘉義) 3개의 시, 그리고 13개의 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타이완은 먼 옛날부터 지속되어 온 지각 운동으로 인해서 웅대한 산봉우리와 언덕, 평평한 분지, 구불구불 이어지는 해안선 등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갖게 되었다. 또한 타이완에는 열대, 난대, 온대 등 여러 유형의 기후가 공존하고 있어서 여러 계절의 풍경을 한꺼번에 만나 볼 수 있다. 이러한 자연 환경 덕분에 타이완에는 약 18,400개의 야생종이 번식하고 있으며, 그중에는 멸종 위기종인 희귀 동식물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에 타이완 정부는 6곳의 국립 공원과 11곳의 국립 경관 지역을 지정하고 타이완의 자연 생태 환경과 문화 유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천혜의 자연 환경은 그대로 타이완의 관광 자원이 되고 있다. 관광객들은 타이루거(太魯閣) 협곡에서 순수한 대자연의 모습을 만끽할 수 있으며, 세계 3대 산악 열차 중 하나인 아리산(阿里山) 기차를 타고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간직한 일출과 운해를 감상할 수 있고,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위산(玉山)을 등반할 수도 있다. 또한 아시아의 하와이로 불리는 컨딩(墾丁)에서 해양 스포츠를 즐길 수 있으며, 신비로운 안개에 싸인 르웨탄(日月潭)과 푸른 물결 넘실대는 화둥(花東) 해안을 둘러볼 수 있다. 본섬을 떠나 펑후(澎湖), 진먼(金門), 마쭈(馬祖) 등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근해의 섬들을 찾아갈 수도 있다. 타이완 문화는 중국 본토에서 넘어온 한족 문화가 중심을 이루고 있으나, 타이완 섬 자체의 문화가 결합되어 자신만의 고유한 문화적 색깔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50년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 문화의 영향도 많이 남아 있고, 최근에는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갖는 타이완 젊은이들도 늘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면서, 종교, 건축, 언어, 생활, 음식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다채롭고 풍성한 문화 스펙트럼을 보여 주고 있는 점이 또 하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타이완 지도 기후 연평균 기온 : 1월(16.1도), 2월(17.8도), 3월(21.1도), 4월(23.8도), 5월(26.6 도), 6월(28.6도), 7월(29.6 도), 8월(30.1도), 9월(27.1도), 10월(25.1도), 11월(20.8 도), 12월(18.9도) 연평균 강수량 : 2,515mm 연평균 습도 : 77% 타이완은 아열대 기후로 연중 따뜻한 기온 분포를 보인다. 연중 평균 기온은 약 22℃이며 최저 기온은 약 12~17℃이다. 하지만 햇빛은 밝기에 비해 뜨겁지 않은 편이니, 이글거리는 태양에 화상을 입을 것이라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타이완은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선선한 해풍이 자주 불고 습도가 높기 때문이다. 봄과 겨울에는 날씨 변화가 심한 편이지만 여름과 가을은 비교적 고른 날씨를 보인다. 겨울에도 몇몇 산악 지역을 제외하면 타이완 어디서든 눈을 보는 것은 매우 힘들며, 봄이 지나고 여름이 들어설 무렵인 3~5월에는 비가 자주 내린다. 따라서 이 시기에 타이완을 방문하는 여행객들은 반드시 우산을 가방에 넣고 다니는 것이 좋다. 여름 시즌인 6~8월에는 가끔씩 태풍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특히 이 기간에는 태풍의 영향으로 파도가 높게 일기 때문에 항상 일기 예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가을인 9~10월은 천고마비의 계절로 시원하고 쾌적한 날씨가 계속되어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라고 할 수 있다. 겨울인 11~2월도 우리나라에 비하면 아주 따뜻한 기온이지만, 타이베이 쪽은 의외로 체감 온도가 낮아 두툼하게 챙겨 입은 타이완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언어 타이완은 중국 본토와 마찬가지로 중국어 보통화(普通話)를 표준어로 사용하고 있으며, 일부는 민남어(閩南語)라는 방언을 사용하기도 한다. 글자는 한자를 사용하는데, 중국 본토와 타이완의 글자 표기는 약간 차이가 있다. 중국 본토에서는 한자를 배우기 쉽게 간단한 형태로 바꾼 약자인 간체자(簡體字)를 사용하는 데 비해, 타이완에서는 원래의 한자인 번체자(繁體字)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시차 타이완의 표준 시각은 홍콩, 싱가포르, 베이징과 같으며 한국보다 1시간이 늦다. 예를 들어 한국이 오후 3시라면 타이완은 오후 2시가 된다. 물 타이완의 수돗물은 마시기에 적당하지 않다. 반드시 끓여 마시거나 편의점에서 사서 마시는 것이 좋다. 마실 물을 끓일 때에는 꼭 5분 이상 끓여 먹어야 한다. 전압 타이완에서 전자 제품을 사용할 때는 반드시 전압과 주파수를 확인해야 한다. 타이완은 보통 60Hz, 110V를 사용하기 때문에, 대부분 220V인 우리나라의 전자 제품과 맞지 않다. 따라서 우리나라 전자 제품을 사용하려면 어댑터나 변압기가 필요하다. 노트북을 사용하거나 카메라, 휴대전화를 충전하려면 간단한 변압기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 화폐 타이완의 통화 단위는 ‘New Taiwan dollar(NT$)’이다. 중국어로는 ‘위안(元)’이라고 부른다. 지폐는 NT$2000, NT$1000, NT$500, NT$200, NT$100이 있고, 주화는 NT$50, NT$20, NT$10, NT$5, NT$1가 있다. 환전은 타이완 정부 지정 은행이나 호텔에서 할 수 있으며, 환전할 때 받은 영수증을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남은 타이완 화폐를 다시 환전할 때 제시하면 수수료 손실을 줄일 수 있다. 호텔이나 공항 등에서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마스터 카드, 비자 카드 같은 신용 카드도 사용할 수 있지만, 일반 상점이나 식당은 카드를 받지 않는 곳이 많아 현금이 필요하다. 타이완 화폐 팁 타이완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팁 문화가 없다. 다만 호텔과 레스토랑에서는 10%에 해당하는 봉사료가 요금에 포함되어 있다. 그 이외에는 특별히 팁에 대한 규정이 없지만, 양호한 서비스를 받았을 경우 자신의 판단에 따라 팁을 줄 수도 있다. 공휴일 · 영업 시간 공휴일 1월 1일 : 중화민국 개국 기념일 / 원단(신년) 음력 12월 30일~1월 3일 : 춘절(설날) 2월 28일 : 2·28 화평 기념일 4월 4일 : 부녀절(여성의 날) / 아동절(어린이날) 4월 5일 : 청명절 음력 5월 5일 : 단오절 음력 8월 15일 : 중추절 10월 10일 : 쌍십절(국경일) 영업 시간 은행 : 월~금 09:00~15:30 정부 기관 : 월~금 08:30~17:30 백화점 : 11:00~21:30(휴일은 22:00) 일반 상점 : 10:00 / 11:00~21:00 / 22:00 여행 시즌 타이완은 연중 여행하기 좋은 관광지이지만, 가장 좋은 시즌은 10월과 11월경이다. 이 기간에는 아주 맑고 화창한 날씨가 지속되기 때문에 여행하기에 최적기라고 할 수 있다. 2월경의 춘절(설)과 9월경의 중추절(추석) 같은 명절 연휴 기간에는 거의 모든 상점과 음식점이 영업을 하지 않으며 주요 도로가 귀향길에 오른 차들로 심한 정체 현상을 빚는다. 어떤 경우에는 숙박비가 2배 이상 오를 수도 있으므로 이 기간에는 가능하면 타이완 여행을 피하는 것이 좋다. 음력 7월은 타이완에서는 ‘유령의 달(鬼月, Ghost Month)’이라고 칭하는데, 현지인들은 이 기간에 여행하는 것을 금기시하기 때문에 타이완 내에서는 이 시기가 여행 비수기이다. 그래서 이 기간에는 여행 경비가 상대적으로 적게 드는 편이라서, 외국인에게는 오히려 타이완을 저렴하게 관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우편 여행 준비를 잘못해서 불필요한 짐이 있거나(예를 들면, 더운 날씨에 맞지 않는 긴 옷) 현지에서 산 물건들이 제법 많다면 여행 중 이동하기 불편하다. 이럴 때는 가까운 우체국에 들러 불필요한 짐들을 한국의 집으로 보내고 가볍게 여행을 다녀 보자. 타이완에는 전국 곳곳에 우체국이 있어 이용이 편리하며, 야간 우편 서비스를 제공하는 우체국도 있다. 일반 편지는 우체통을 이용해도 되고, 우표는 편의점이나 우체국에서 구입할 수 있다. 국내 우편 요금은 속달일 경우 NT$5~12이고, 가장 비싼 국내 우편으로 슈퍼 익스프레스(super-express)도 있는데, 불과 몇 시간 만에 배달이 완료된다. 한국으로 보낼 때는 국제 속달 우편 서비스를 이용하면 되며, EMS 서비스 전화로 요금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24시간 국제 우편 EMS 서비스 03-383-3788, 03-383-3776, 팩스 03-383-3379 타이완 우체통 전화 타이완에서 휴대전화 이용하기 타오위안 국제 공항이나 쑹산 국제 공항에 도착하여 입국 수속을 마치고 입국장으로 나오면, 중화전신(中華電信) 부스로 가서 3G 무제한 데이터 신청을 한다. 1일, 3일, 5일, 일주일 등 원하는 기간만큼 신청하면 유심(USIM) 칩을 주는데, 이 칩을 본인의 휴대전화에 끼우면 된다. 이때 원래 본인의 휴대전화에 있던 칩은 잘 보관했다가 한국으로 돌아갈 때 다시 바꾸어 끼우면 된다. 요금은 24시간 NT$100, 72시간 NT$250이다. 이 방식은 한국에서 신청하는 1일 해외 무제한 데이터 로밍(9,000원)보다 싸지만, 2일 이상 데이터를 이용해야 한다면 한국에서 해외 데이터 로밍을 신청하고 오는 편이 더 경제적이다. 짧은 일정 중에 공항에서 데이터 신청을 하느라 줄서서 기다리는 시간도 만만치 않아서, 시간을 절약하려면 한국에서 해외 데이터 로밍을 신청하는 것을 권한다. 또한 타이완 유심 칩으로 교체하면 한국에서 사용하던 번호는 통화 정지가 되기 때문에 자신의 한국 번호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그 밖에도 공항에서 무료 와이파이를 신청할 수 있는데, 타이베이 곳곳에서 된다고 홍보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안 되는 곳이 많다. 제약 없이 타이완에서 인터넷을 사용하려면 입국장에 있는 중화전신에서 신청하는 것이 좋다. 중화전신(中華電信) 부스 공중전화 공중전화를 사용할 일이 많지는 않지만, 혹시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알아 두자. 타이완의 공중전화는 주로 주화와 카드를 이용한다. 동전 투입식 공중전화는 NT$1, NT$5 및 NT$10 동전을 사용한다. 지방 통화는 분당 NT$1다. 전화 카드는 마그네틱형과 IC형이 있는데 타이완 전역에서 사용할 수 있다. 마그네틱 카드 요금은 NT$100이고 IC 카드는 NT$200과 NT$300의 두 종류가 있다. 전화 카드는 기차역, 버스 정류장, 관광지 및 편의점에서 살 수 있다. 타이완 공중전화 타이완 전화 카드 국제 전화 걸기 핸드폰, 공중전화 IDD폰, 호텔 IDD폰으로 국제전화를 할 수 있다. 국제 전화 요금은 6초 단위로 계산된다. 타이완에서 한국으로 국제 전화할 때 ① 국제 전화 식별 번호를 누른다.(001, 002 등) ② 한국 국가 번호 82를 누른다. ③ 앞자리 ‘0’을 뺀 지역 번호를 누른다. ④ 해당 전화번호를 누른다. 예를 들어, 서울 02-123-4567로 전화할 경우에는002(국제 전화 식별 번호)-82(국가 번호)-2(지역 번호)-123-4567 순서로 걸면 된다. 인터넷 타이완의 호텔은 대부분 인터넷 시설이 잘 되어 있어 호텔 룸이나 로비 등에서 무료로 무제한 인터넷 이용이 가능하다.(인터넷 사용료를 받는 호텔도 있다.) 그 밖에 왕카(網咖)라고 하는 PC방에서 인터넷을 이용할 수도 있고, 스타벅스 등의 커피 숍에서도 와이파이를 이용해서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다.  
540    고향시단소식 한토리 - 시가 물결과 함께 구겨지고 펴진다... 댓글:  조회:5753  추천:0  2016-10-30
답례사를 하는 도옥 김영건시인 시가 있는 곳에는 희망이 있고 꿈이 있다. 시가 행복한 사회, 시가 여울치는 사회를 꿈꾸는 작은 만남의 장-김영건시집 《물결이 구겨지고 펴지는 리유》출판기념식이 10월 29일, 연길 고려원식당에서 있었다.   《물결이 구겨지고 펴지는 리유》는 연변작가협회 부주석이며 잡지 주필이며 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 주임임 도옥 김영건시인의 4번째 시집이다.   시가창작위원회 림금산부주임의 사회로 열린 이날 출판기념식에서 잡지사 전경업사장과 잡지사 리호원주필, '고려원식당'의 림룡춘사장이 축사를 했고 연변교육출판사 총편판공실 김선화주임이 '아리랑꽃'가족을 대표하여 축사를 했다.   단체사진 축사에 이어 기조발언이 있었다. 최룡관시인은 "돌의 시"라는 김영건의 한수의 시로 시구성, 시언어,시적현실에 대해 하나하나 분석하면서 김영건의 시집은 '시지평을 새롭게 연 새사유의 결정'이라고 평했다. 김룡운평론가는 "는 시인의 오랜 명상끝에 찾아낸 삶의 법칙이거나 삶의 법칙이다.필자는 "구겨짐"과 '펴짐"을 고난과 행복을 반목하면서 전진하는 생명의 련속이며 생명의 영원성"이라며 김경건의 시언어는 '푹 익은 생신한 언어'이다"라고 평했다. 한영남시인은 저자 김영건과 그의 시에 대해 "백두산정에 올라 인간세태를 굽어보며 우주애적인 세계관으로 민족정서를 녹여내고있다. 김시인에게 있어 민족정서는 기석이요 인간세태는 대들보이며 우주애는 지붕 격으로 되고있다. 저자는 사나이적(호탕)이고 거창(호협)하며 인간적(호인)이다."라고 전했다.   김영건시인은 아리랑가족에 시집을 증정하고 기념사진을 남겼다.   김응룡시인, 김창희시인, 박장길시인, 허두남시인이 자유발언을 했고 아나운서 리혜자, 서태문 등이 김영건의 시를 읊었다. 또한 김송원이 아리랑가족을 대표하여 김영건시인한테 족자를 증정했고 김경건시인은 아리랑가족에 시집을 증정했다.   김영건시인은 답례사에서 "시집은 자연과 인간과 세월에 대한 저의 진실한 고백이다. 민족과 생명과 령혼의 울림에서 건져올린 저 어둠의 기억속에 아직은 묻히지 말아야할것들,또는 아름다운 어둠의 저변에서 새롭게 태여나야만 할 존재의 시작이 되고자 한편한편의 서정을 장엄의 호수에서 건져내기에 노력해왔다."며 "시가 있는 곳에는 희망이 있고 꿈이 있다. 그러한만큼 우리는 시로 말하고 시로 대화하고 시로 세상을 조금이나마 바꿀수 있는 작은 초불이 되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행사는 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에서 주최하고 ,잡지사에서 주관, 연변화하상황균업유한회사(사장 라동도)와 고려원식당(사장 림룡춘)의 협찬으로 펼쳐졌다. 조글로미디어 문야   [부록]    연변대학 졸업하고 한국 연세대학, 중앙대영상대학원을 수료한 저자는 선후로 연변TV드라마부 편집, 문예부 프로듀서, 감독, 주임으로 있었고 현재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시가창작위원회 주임. 중국작가협회 회원, 국가1급감독, 중국방송인협회 회원. 연변시학회 회장.《문화시대》잡지 주필로 활약하고있다.  그는 소품원지 “주말극장” 총연출, 제작인. 연변TV음력설야회 등 각종 문예야회 총연출을 수십차 맡아오면서 감독으로서의 인기도 상당하다. 중국100대방송인, 길림성 10대방송인. 전국소수민족 준마상, 중국조선족신문출판문화대상 우수편집인상, 길림성 두루미상, 연변조선족자치주 진달래문예상, 연변작가협회 유스트문학상, 윤동주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해란강문학상, 도라지문학상, 제1회 단군문학상 등 굵직한 상을 다수 수상한바 있다.   그의 저서로는 시집 《사랑은 전개가 없다》, 《빈자리로 남은 리유》,《아침산이 나에게로 와서 안부를 묻다》,《물결이 구겨지고 펴지는 리유》 와 시화집 《중국조선족시화선집》(주필),, 《숨쉬는 두만강》(기획), 《연변조선족비물질문화유산》(부주필) 등이 있다.   {자료} 리경희(필명 리삼월)선생님을 추모하여 구용기     고 리경희선생님은 1933년 5월 15일 중국 길림성 장춘시 조선족가정에서 출생하였습니다. 1940년 3월부터 선후하여 서란현 평안조선족소학교, 오상현 민락소학교, 오상현조선족중학교 등 여러 학교를 거쳐 소학과 중학 공부를 하였습니다. 1951년 2월 항미원조 지원군에 참군하였었고 귀국후 하남성정부간부학교에서 학습하였습니다. 1956년 이후로 오상현 공농공사농기참, 민락성광소학, 오상현문화관 등에서 임직하다가 1959년 6월 할빈시조선민족문화관에 왔습니다. 문화대혁명기간 농촌으로 내려간적이 있으며 1972년 9월부터 문화관에 돌아와 “송화강”잡지 편집을 계속했습니다.    리경희선생님은 1959년도에 창간된 우리 민족 문학잡지 “송화강”의 창시자의 한사람으로, 후에 “송화강”잡지의 주필을 맡고 우리 민족의 문학사업을 힘있게 진척시킨 공헌자입니다. 그의 주도하에 “송화강”잡지는 중국조선족문학창작의 풍요한 터전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송화강”과 리경희선생이 있음으로 해서 북방 조선족문단은 한결 튼튼할수 있었습니다. 그는 흑룡강의 조선족신문사 조선말방송국 조선민족출판사의 문학일군들과 연대하여 북방조선족문학의 뜨거운 문학분위기를 형성시켰습니다. 그는 중국 조선족문단의 중견작가이자 원로들인 림국웅, 김동진, 강효삼 등 수많은 작가들을 양성하여 흑룡강성 조선족문인대오를 묶어세웠습니다. 저명한 조선족문학가 김학철선생의 말을 빌면, 리경희선생님은 북방문단의 “위수사령관”이였습니다.    리경희선생님을 많은 사람들이 그의 필명인 리삼월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시가 리삼월이란 필명으로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색적이고 철리적인 시와 함께 리삼월이란 이름은 우리 조선족 동포들의 기억에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문학의 경지에서 생생하게 표현한 우리의 시인 리삼월선생님, 리삼월이란 세글자는 밤하늘의 별처럼 우리들의 기억세계에서 찬란히 빛나고 있습니다.  리경희선생님은 한생동안 천수를 넘는 시를 발표하였습니다. 1981년 10월 시집 “황금가을”을 출간했고 1993년 6월 시집 “두 사람의 풍경”을 펴냈으며 2003년에는 시집 “봄날의 증명”을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2002년 자작시선 “리삼월시선”을 인쇄했습니다. 선생님의 시는 그 독특한 풍격과 높은 수준으로 독자와 문학계, 그리고 나라의 긍정을 받았으며 수많은 수상작이 나왔습니다. 그중 주요한 것들로, 1981년 시 “목에 열쇠를 건 아이”란 시로 흑룡강성제1회소수민족문학상 1등상을 수상하였습니다. 1984년 시 “농민들 땅을 떠난다”로 흑룡강성정부 문예대상 3등상을 수상하였습니다. 2003년 “리삼월 근작시”로 “장백산”잡지 “모드모아”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2004년 한국문인협회 해외심포지엄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밖에 1990년 8월 서울에서 열린 제8회세계시인대회에 참석하였고 1992년 8월 북경 한국문인협회 해외심포지엄에 초대되였으며 같은해 겨울 한국 대전에서 열린 한국 문인협회 년례회에 초대되였습니다.    리경희선생은 풍성한 문학성과와 높은 덕망으로 문학계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선생님의 서정시 “접목”이 2007년부터 중국조선족고중1학년 교재에 편입되였습니다. 그는 흑룡강성조선족작가창작위원회 고문으로, 연변작가협회 리사로,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상무이사로 활약했었습니다. 리경희선생님의 문학창작은 중국조선족문학사에 단독장절로 소개된바 있습니다.   리경희선생님은 불시로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단 한마디 예언도 없이 떠나가셨습니다. 사랑하시는 가족들과 제자들과 독자들에게 한없는 슬픔을 남기고 떠나가셨습니다. 선생님이 가시고난 지금에야 우리는 아직 못다한 말이 이렇게도 많고 다 하지 못한 일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선생님, 너무 총망히 떠나가셨습니다!      우리 같이 고인의 명복을 빕시다. ////////////////////////////////////   수 필․ 저 하늘의 별을 보면서 (할빈) 김두필 오늘도 나는 저 하늘의 별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친구를 보낸 슬픔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린다. 혹독한 동장군추위을 이기지 못해서 서둘러 갔는지 새해를 앞두고 너무도 일찍 떠나간 친구가 이시각 무척이나 그립다. 매번 가까운 친지나 친구들을 보내고나면 한시기 슬픔에 잠겨 저도모르게 밤하늘을 쳐다보면서 명상에 잠기는 습관이 생겼다. 마치 그 별무리속에서 친지나 친구들을 지꾿게 찾아내려는듯이 고개를 들어 별무리들을 한없이 바라보면서 착잡한 심정을 달래여본다. (어느 별이 내 친구별일가? 오늘밤 저하늘에서 제일 반짝이는 별이 꼭 내 친구의 별일거야…) 마음으로 찾아야만 찾을수 있는 내 친구별, 그 별을 찾지 않고서는 도저히 친구한테 미안함을 스스로 용서할수가 없는 심정이다. 남들처럼 감정이 풍부해서 추도식에서 눈물이라도 펑펑 쏟았었더라도 미안함이 적었으련만 속으로 흘린 나의 눈물로는 도저히 변명거리가 못된다. 추도식날 친구를 보내면서 새삼스럽게 느껴지는바가 있었다 추모행렬 맨앞줄에 선 대학의 총장님은 사랑하는 제자를 보내는 일이 몹시 가슴아파 여러번 눈물을 닦는것이였다. 사제간의 정이 얼마나 애틋했으면 장춘으로 회의하러 가는 일도 하루 미루고 추도식에 친히 참석했을가 하고 다시 생각해보면서 그 두터운 우정이 은근히 부러웠다. 총장님이 먼길을 오느라고 수고를 했다며 나의 손을 잡아주는 순간, 우리는 좋은 친구를 보내는 애닯은 마음을 손힘에 담아 오래동안 잡고잡았다. 나이가 너무 아깝다고, 글재주가 너무 아깝다고, 좋은 글을 많이 쓸수 있는 사람인데, 할 일이 태산같은데 뭐가 급해서 빨리빨리 가느냐고…2백여명을 헤아리는 조객들의 한결같은 말이요, 다함없는 추모의 마음들이였다. 눈물이 많고 애석함이 짙은 배웅길이였다. 그는 열심히 뛰는 친구이자 부지런히 글을 쓰는 작가였다. 그는 성인잡지를 꾸리고 나는 아동잡지를 꾸리면서 서로 면목을 익히고 가끔 만나게 되였는데 사귀다보니 그는 화룡 서성에서 북대촌, 나는 명암촌으로 이웃하여 살았다는 인연으로 고향친구로 무랍없이 지내게 됐고 나이를 몇살 더 먹었다고 내가 “형님”대접을 받았으나 문학에서는 그는 진작부터 나의 스승이였고 배울바가 많았다. 늘 새물새물 웃는 모습이요 부접성이 좋아 인상이 깊었다. 남들처럼 화끈하지는 않았어도 우리는 늘 마음속에 서로를 소중히 담고있는 친근한 사이였다. “사회와 조선족에 도움이 되는 일에 게을리 하지 말자…” 너무나 수수하면서도 진심이 담긴 그의 삶의 신조라 하겠다. 그의 불같은 열성에 감동되여 1999년 그가 《서울신문》의 김기자와 같이 목단강으로 찾아왔을 때 휴식일을 리용해서 동녕과 수분하를 하루동안 동행했던 일이 있었으나 가목사까지 같이 가자는 청을 직장일에 발목을 잡힌 나로서는 받아들일수 없어 난감했었다. 하는수없이 미리 다른 친구한테 안내를 부탁하고 저녁식사를 대접하고 취재길을 바래주었을뿐이다. 아무튼 우리 사이는 믿음이 조용히 흐르는 끈끈한 인연이였다고 할수 있다. 그뒤로 2002년 “제3회 중국조선족출판문화특별상” 을 수상할 때 그와 나란히 서서 상을 타면서 서로에게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던 아름다운 추억이 오늘도 생생하다… 그는 뛰여난 의지력으로 수천리 현지답사를 다니였고 자기 삶의 궤적에 노력을 자욱자욱 깔아준 부지런한 사람이였기에 수필집《서울바람》, 소설집《황야에 묻힌 사랑》, 장편기행《혈연의 강들》, 그리고 《심여추평전》, 《류자명평전》, 《최채평전》등 많은 작품들을 남길수 있었다. 우리 민족의 빛나는 발자취와 우리 민족 영령들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다룬 그의 훌륭한 작품들은 우리 조선족문화사의 금자탑을 쌓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수십년간 발로 뛰는 조사와 연구를 해서 하나의 문화탑을 쌓은 그의 패기와 정열,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서 근본을 잊지 않고 불의와 비정에는 칼날같이 맞서는 배짱이 돋보인다. 어느 한번 위협이나 공갈에 가까운 그 힘든 고통을 혼자 감내할만 한가고 전화로 격려를 했더니 껄껄 웃으면서 힘들긴해도 꼭 이겨낼수 있다고 신심에 찬 목소리를 보내준 사나이였다. 스승을 존경하고 제자를 사랑하고 약한 자를 껴안은 그의 따듯한 인간성과 헌신성… 병근원이 뭔지를 알바 없으나 몹시 힘들었고 지쳤던것 같았다. 우리에게 훌륭한 문화유산과 더불어 돋보이는 분투정신을 남긴 사람, 사랑하는 친구 류연산씨. 친구를 그리면서 오늘도 조용히 울고 운다. 친구가 남긴 금쪽같은 업적은 계속 빛나겠지만 남겨둔 그 자리를 누가 대신할가 싶어 몹시 애달프다. 친구가 보고싶을적마다 저 하늘에서 별자리를 찾을테니 제발 주소나 알려달라구… 사랑해, 보고파, 나의 훌륭한 친구여! 당당한 중국조선족문학의 빛나는 샛별이 되기에 손색없는 친구의 명복을 고이 빈다. 2011년 2월  
539    자기 자신만의 별을 따라가야 한다... 댓글:  조회:4147  추천:0  2016-10-29
GERMANY-FRANKFURT-BOOK-FAIR밥 딜런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이후 불티나게 팔리는 밥 딜런 가사집[AFP=연합뉴스]   딜런은 이날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 인터뷰에서 노벨상 시상식에 참석하는지를 묻자 "물론이다. 가능하다면"이라고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 그는 또 노벨문학상 수상이 "놀랍고 믿기지 않는다"며 "노벨상을 받는 일을 그 누가 꿈이라도 꿨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왜 한림원의 전화를 받지 않았느냐는 질문에는 "글쎄, 난 여기 있다"며 농담조로 둘러대며 즉답을 피했다. 가수가 노벨문학상의 영예를 누리는 게 처음이었던 것만큼 딜런의 수상은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다니우스 사무총장은 이달 초 노벨상 수상자를 발표하면서 딜런의 노래를 "귀를 위한 시"라고 표현하며 다소 의외였던 선정 이유를 밝혔다. 그는 "지난 5천 년을 돌아보면 호머와 사포를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연주를 위한 시적 텍스트를 썼고, 밥 딜런도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딜런은 '블라인드 윌리'(Blind Willie), '조이'(Joey), '허리케인'(Hurricane) 등 자신의 일부 노래가 "확실히 호머시풍의 가치를 담고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가 쓴 가사에 대해 설명한 적이 없는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것들(가사의 의미)이 무엇인지 결정하도록 둘 것"이라며 자신은 가사 해석에 있어 적임자가 아니라고도 했다. 화가로서 작품 활동을 하는 딜런은 노랫말과 그림의 차이점을 설명하기도 했다. 딜런은 "그림과 영화는 선전 목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지만, 노랫말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가사를 쓰는 일은 확실히 강렬한 작업"이라며 "왜,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쓰는지를 염두에 둬야 한다"고도 했다. 딜런은 좋은 가사 하나를 쓰기 위해 수많은 실패를 거쳐야 한다며 "준비되지 않았을 많은 것을 희생하는 일도 따른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러면서 "원하든 그렇지 않든, 홀로 이것을 겪어야 하고, 자기 자신만의 별을 따라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538    "록" 댓글:  조회:3865  추천:0  2016-10-29
록음악(영어: Rock music)은 1950년대 초 미국에서 생겨난 대중음악의 한 형식이다. 록은 일반적으로 보컬, 리드 전기 기타, 베이스 기타, 드럼의 넷으로 구성되며, 강렬한 기타 혹은 드럼 소리가 특징이다.[1] 대개 보컬, 전기 기타, 그리고 강한 백비트(록음악 특유의 강한비트)로 구성되며, 백비트는 색소폰과 같은 여러 종류의 악기들에 의한 스타일이 일반적이다. 록 음악은 젊음의 기쁨을 찬양하거나 때로는 젊은층이 가진 욕구 불만을 표현하기도 한다.   명칭 및 정의[편집]   록은 1950년대 로큰롤(Rock and Roll)에서 비롯되었다. 록이라는 용어는 정의하기 모호하다. 이 단어는 때때로 여러 장르들이 모호하게 섞여있는 것, 이를테면 소울, 헤비메탈 심지어는 힙합을 포함하는 것까지,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넓게 보자면 로큰롤과 같은 의미를 지니며 좁게 보면 로큰롤과 다른 의미를 지닌다.)   특징[편집]   록 음악의 사운드는 전통적으로 전기 기타를 중심으로 하며, 베이스 기타 그리고 드럼과 심벌이 포함된 드럼 킷을 사용한다. 피아노나 해몬드 오르간, 신시사이저와 같은 건반악기도 역시 자주 사용한다. 록 밴드는 일반적으로 보컬리스트, 리드 기타리스트, 리듬 기타리스트, 베이시스트, 드러머 등의 역할을 나누어 맡는 둘에서 다섯 정도의 멤버로 구성된다. 이 일반적인 형태는 버디 홀리가 고안해냈고 비틀즈가 확립했다. 록 음악은 전통적으로는 백비트가 있는 4/4 박자의 반복적인 리듬을 자주 사용한다. 록 음악은 스타일적으로 매우 다양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으며, 복잡한 역사와 다른 장르의 요소의 잦은 유입 등의 이유로 록이란 무엇인가를 음악적으로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힘들다.   역사[편집]   록음악은 처음 시작된 후 급속도로 퍼져나가 전 세계 젊은 세대의 문화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자리잡았다. 록음악이 1950년대 초 미국에서 처음 생겼을 때는 로큰롤이라고 불렀는데, 기성 세대들은 로큰롤을 한 때의 유행으로 받아들여 무시하거나 사회에 대한 도전이라고 비난했다. (기성 세대는 이전에는 스탠다드 팝을 즐겼다.) 그렇지만 1960년대 중반, 로큰롤이 음악 형식의 하나로 자리잡으면서 폭넓은 관심을 끌었고, 1960년대 후반에는 록음악의 뿌리였던 블루스와 컨트리 음악에서 벗어나 간단히 록음악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후 록음악은 음반사업뿐만 아니라 영화, 패션, 정치 풍조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음악의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음악과 결합하면서 오늘날까지 계속 발전해오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히피 무브먼트, 모드 사조, 비트 사조 등이 있다.   장르의 변천사[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록 음악 장르입니다.   1940년대 재즈가 점점 어려워짐에 따라 대중에 멀어졌다. 재즈의 쇠퇴와 록의 도래 사이의 과도기 시절인 1950년 대 초반에는 스탠다드 팝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대표적인 가수로서는 빙 크로스비, 프랭크 시나트라, 팻 분, 냇 킹 콜 등이 있었다. 미국 사회의 주류였던 백인 기성 세대들이 스탠다드 팝을 즐겼다면 비주류 계층인 흑인들은 블루스 음악을 즐겼으며 농촌의 백인들은 컨트리 송을 즐겼다. 블루스 음악은 스윙 재즈의 영향을 받아 곧 리듬 앤 블루스로 진화했다. 그리고 컨트리 송은 여러가지 형태로 발전을 하고 있었다. 한국의 리듬 앤 블루스 음악과는 달리 보통의 리듬 앤 블루스는 초기 로큰롤의 형태이다. 로큰롤은 점점 인기를 백인 청소년에게 많은 인기를 끌게 되었는데 가수는 주로 흑인이었다. 대표적으로 척 베리와 리틀 리차드가 있었다. 이에 음반 제작자들은 틈새 시장을 노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흑인의 음색을 낼 수 있는 백인 가수를 찾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숨겨진 리듬 앤 블루스 명곡을 백인이 커버를 하면 무조건 성공한다는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인들이 가수로 등장하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엘비스 프레슬리와 제리 리 루이스, 빌 헤일리, 버디 홀리 등이 있었다. 이들의 장르를 로커빌리 라고 하는데 이것은 로큰롤과 컨트리 송의 진화 형태인 힐빌리를 합친 말이다. 이런 음악들은 미국 주류 사회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영국으로 건너가 리버풀 등 항구 도시에서 유행을 하게 되었다. 로큰롤은 재즈와 결합하여 스키플 사운드를 만들어냈는데 대표적으로 비틀즈가 있었다. 주류가 로큰롤을 하였다면 언더그라운드 비주류는 블루스와 재즈 음악을 하였다. 기존의 블루스 음악은 미국에서 탄생했는데 처음에는 통기타와 하모니카 등으로 이뤄진 컨트리 블루스와 델타 블루스 등이 있었다. 곧 미국이 발전을 하게 되고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블루스에도 전기 악기가 접목되어 일렉트릭 블루스가 되었는데 특히 시카고에서 인기를 끌어 시카고 블루스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런 음악은 로큰롤이 도래하기 이전 영국으로 전해져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백인)들은 브리티시 블루스를 만들어냈다. 대표적인 아티스트로는 알렉시스 코너와 존 메이올이 있었다. 로큰롤을 하지 않았던 영국 가수 중 클리프 리차드는 미국 공연을 시도했으나 실패를 하고 말았다. 비틀즈가 그 다음 공격을 하여 성공을 했는데 이를 브리티시 인베이전이라고 한다. 뒤이어 애니멀스, 데이브 클락 5, 무디 블루스 등이 진출을 하였다. 이런 가수들은 모드 사조를 이끌었는데 이것은 프랑스의 누벨바그 사조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이런 음악 이외에도 브리티시 블루스를 하던 사람들도 미국 진출을 하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가수가 롤링스톤즈였다. 당시 미국 사회는 베트남 전쟁으로 혼란스러웠는데 기성 세대에 반발한 젊은이들이 비트 사조에 빠져들었고 곧 히피 무브먼트로 진화하였다. 이들은 마약을 하였는데 음악적으로도 영향을 받아 사이키델릭 록이 등장하였다. 사이키델릭 록과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정치적인 언급을 하는 포크 송도 등장하였다. 대표적으로 피트 시거와 밥 딜런, 조안 바에즈 등이 있었다. 한편 이런 식으로 미국식 사이키델릭 록이 마냥 외쳐대는 밴드였다면 영국식 사이키델릭 록은 예술적, 음악적인 실험을 많이 하게 되었다. 비틀즈의 영향을 받은 밥 딜런이 포크 송과 로큰롤 사운드를 절묘하게 결합시킨 포크 록을 만들어냈다. 영국식 사이키델릭 록의 발전으로 곧 프로그레시브 록이 등장하게 되었고 브리티시 블루스의 영향으로 블루스 록이 등장하게 되었다. 블루스 록을 하던 밴드였던 크림은 하드 록을 만들어내게 되었고 지미 헨드릭스는 사이키델릭 사운드와 결합시켜 하드 록을 더욱 발전시켰다. 록 음악은 그 자체로도 중요하지만 흑인 음악의 영향도 중요하다.   비화[편집]   관습적으로 락이 악마의 음악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다. 락의 시초는 블루스이며 1930년대 로버트존슨이 개발한 리듬이 시초가 된다.하지만 로버트 존슨이 약혼녀에게 독살 당하고 그가 개발한 리듬은 묻혀 있다가 그에게 영향을 받은 50년대 척베리 같은 블루스 뮤지션들이 그의 리듬을 발전시켜 락앤롤의 선구적인 역할을 한다.동시대의 엘비스 프레슬리, 제리 리 루이스 같은 락앤롤 뮤지션들의 노래는 젊은 이들을 크게 열광시킨다.이것은 당시의 기성 세대들에겐 큰 충격이었다. 이것이 락음악의 태동기의 모습이며 여기에 락이 '악마의 음악' 이라는 오명을 얻게된 이유가 숨어 있다.   원래 락 이전에 블루스가 악마의 음악으로 불리었다.그 이유는 흑인들의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대에 흑인들에 대한 차별은 상상을 불허하여 그들이 하는 모든것은 매도되기 일수였다.음악도 그 굴레에서 벗어날수 없어 블루스는 '악마의 음악'이라고 매도되었다.재즈는 그래도 어느정도 즐기는 백인들이 적잖게 있었지만 흑인들의 한이 담긴 블루스를 즐기고 연주하는 백인들은 찾기 힘들었다.여담으로 위에 소개한 로버트 존슨의 일화중 미시시피 십자로에서 악마를 만나 음악을 배웠다는 전설이 있다.이렇게 와전된 전설 역시 블루스가 악마의 음악으로 불리는데 짭잘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이런 블루스에서 발전한 락앤롤을 백인들이 공연장에서 엉덩이를 흔들어 대면 부르자 젊은이들은 지금까지 볼수 없었던 열광을 한다. 클래식,재즈,스탠다드 팝등 기존의 음악에서 젊은이들의 이런 열광은 없었으며 애초에 음악을 듣는데 이렇게 미친듯이 소리지르는 것은 금기였다. 당연히 기성세대들에겐 젊은이들이 미친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젠 공격 대상이 바뀌었다. 락앤롤은 젊은이들을 악마의 유혹에 빠뜨리는 주적이 된것이다. 그 중심엔 기독교가 있었다.1950년대 락앤롤 뮤지션인 제리 리 루이스의 실화를 다룬 영화 Great Balls of Fire을 보면 기독교가 락앤롤을 얼마나 매도하였는지 어느정도 감을 잡을수 있다. 제리는 마지막에 이런 말을 했다. "락앤롤이 악마의 음악이라면 나는 지옥에서도 피아노를 치겠다."   이것이 초기 락앤롤이 매도당하던 이유이다. 또한 관습적으로 락은 악마의 음악이라고 불리던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흑인에 대한 차별도 많이 줄고 젊은이들의 열광도 이젠 익숙해져가는데 락에 대한 매도가 끊이지 않았던것은 갈수록 퇴폐적인 성향이 짙어졌기 때문이다.   1960년대 락앤롤 밴드 비틀즈는 발라드 명곡 Yesterday 를 발표해서 기성세대에게도 락앤롤을 한다고 다 천덕꾸러기는 아니라는 인상을 심어준다. 하지만 악동으로 유명한 롤링스톤즈는 온갖 성적인 발언과 추악한 행동으로 기성세대들에게 '역시, 그럼 그렇지'라는 인상도 심어준다.1960년대 후반 샤이키델릭이 성행한다. 샤이키델릭의 음악 성향상 마약의 복용은 흔하게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락은 매우 퇴폐적인 모습을 보인다. 잘 알고 있던 지미 헨드릭스, 제니스 조플린등이 이런 약물에 의해 사망한다. 또한 저항을 상징하는 포크 뮤지션들은 사람들을 이끌고 다닌다. 그리고 사회에 대한 저항만 뿐만 아니라 폭력적이고 성적인 문제도 자주 일으켰다.   당시에 유행하던 샤이키델릭, 포크등에 의해 히피문화가 발전하고 약물 ,퇴폐성 ,폭령성등의 어두운 부분이 극에 다다른다. 이것은 굳히기 였다. 그래도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락에 대한 인식이 조금 나아질까 하다가 완전히 한방 먹은것이다.   어쨌든 락은 대중음악중 가장 많은 사람이 즐기는 음악이다. 사람이 많은 만큼 이런 저런 사람들이 다양하기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사고도 자주 발생한다. 그래서 아직도 락에 대한 인식을 안좋게 갖는 사람이 많다.   대략적인 이유는 락 뮤지션들중에 기독교 욕하는 사람도 많고 존 레논은 비틀즈가 예수보다 위대하다고도 하는 등 자잘한 이유도 많다.   하지만 큰 맥락은 락의 태동기에 흑인들에 대한 차별과,그에 따라 락에 대한 동반 차별,젊은 세대들의 이례적인 열광이 락에 대한 오명의 시초가 되었고 히피문화의 발달로 퇴폐성이 짙어진 것이 오명의 굳히기이다.
웹진 ‘시인광장’홈페이지. 23일 잠정 폐쇄를 발표한 이후 모든 게시물을 삭제한 상태다. 국내 시인들의 시를 허락 없이 인터넷에 게재해온 웹진 ‘시인광장’이 시인들의 항의로 잠정 폐쇄됐다. 우원호 시인광장 발행인은 23일 새벽 홈페이지에 “두 달 정도 문을 닫기로 결정했고 (이후)새로운 시인광장을 열 계획”이라며 “저작권과 관련된 윤리는 당연히 지켜져야 할 예의(이고) 시인광장은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겸허히 경청”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사태는 시인 박진성, 이준규, 권혁웅씨 등이 이달 초 SNS를 통해 이 웹진의 문제점을 폭로하면서 시작됐다.   이들에 따르면 시인광장은 매해 1,000여 편에 이르는 시를 웹에 게재하면서 시인들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거나 형식적인 메일을 보내는 데 그쳤다. 또 1,000여 편의 시 중 100편을 추려 매년 단행본으로 발간하는데 이때도 동의를 구하지 않았으며 출간에 따른 인세나 고료도 지급하지 없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시인들의 프로필 사진과 주소, 연락처 등 개인정보를 무단으로 게재하기도 했다. 박진성 시인은 “시인광장이 발간하는 책에 자기 시가 들어가 있는 사실조차 모르는 시인들이 수두룩하다”며 “더 나쁜 것은 유명 시인들을 내세워 무명의 시인들에게 돈을 요구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삭제되고 없지만 한때 홈페이지에는 ‘발전기금’이라는 명목으로 5만~10만원을 후원하면 시인광장에 신작시를 소개할 기회를 주겠다는 문구가 있었다. 박 시인은 “사실상 돈을 내라는 얘기가 아니겠느냐”며 “잘 나가는 시인들한텐 상을 주고 그 사람들의 얼굴을 상단에 게재해 무명 시인들에게 돈을 받는 이중적 행태”라고 꼬집었다. SNS를 통해 촉발된 문제제기에 많은 시인이 동의하면서 시인들은 ‘시인광장에 시 게재를 거부한다’는 내용의 집단 성명서를 낼 계획이었다. 그러나 시인광장이 폐쇄하면서 성명서는 재발 방지를 요구하는 내용으로 수정했다. 권혁웅, 김경주, 나희덕, 송재학, 오은, 이윤학, 조재룡, 채상우 등 시인ㆍ평론가 39명은 이날 발표한 성명서에서 ▦시인들의 시가 상업적인 목적으로 저자의 동의 없이 무단 게재되는 어떠한 형태의 매체도 반대한다 ▦비영리적 목적으로 시를 공유하는 SNS나 블로그의 활동은 반대하지 않는다 ▦이번 일을 계기로 시의 저작권이 지켜지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시인광장이 개설된 2006년 이후 시인 개인이 자신의 시를 내려달라고 요구한 적은 있었지만, 시인들이 단체로 성명을 내 항의한 것은 처음이다. 박 시인은 “이번 사태는 10년 간이나 이를 방치한 시인들에게도 책임이 있다”며 “지금이라도 시의 저작권 문제를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아래는 성명서 전문. 1. 우리는 시인들의 최소한의 '저작권'이 무시되는 행태에 반대하며 뜻을 모았습니다. 1. 우리는 저자들의 동의 없는 시 무단 전재, 저자들의 동의 없이 인터넷 상에 떠도는 프로필 사진을 무단으로 편집하여 게재해 온 웹진 ‘시인광장’의 임시 폐간 조치를 엄중하게 받아들입니다. 1. 우리는 이러한 일련의 문제에 대한 웹진 의 재발 방지 약속을 요구합니다. 1. 우리는 시인들의 시가 상업적인 목적으로 저자의 동의 없이 무단 게재되는 어떠한 형태의 매체도 반대합니다. 1. 우리는 비영리적인 목적으로 시를 공유하는 SNS 및 블로그, 카페 등의 활동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1. 우리는 시인들의 최소한의 권리가 지켜지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이번 일을 계기로 '시의 저작권'이 지켜지기를 희망합니다. 2016년 8월 23일 권혁웅 김경주 김근 김민정 김선재 김승일 김안 김언 김요일 김태형 나희덕 박연준 박성준 박지혜 박진성 서효인 성윤석 송재학 신미나 오은 유계영 이병일 이성미 이용임 이윤학 이이체 이재훈 이준규 이현승 이현호 장석주 정영효 조동범 조용미 조재룡 채상우 최규승 최정례 최정진 황수현 기자 
536    [쉼터] - 화투 48 댓글:  조회:4449  추천:0  2016-10-28
몇 년 전, 국내의 한 여론조사 전문기관이 성인남자들에게 “여가시간 때 가장 많이 즐기는 게임이 무엇이냐?”라는 설문조사를 했던 적이 있다. 그 때 압도적인 표 차이로 1위를 차지한 것이 ‘고스톱’이라는 화투花鬪놀이였다. ‘꽃들의 싸움(어떤 분들은 화투를 ‘화토’라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표현이다.)’으로 해석되는 화투를 고안해낸 사람은 일본인이다. 그들은 화투를 화찰花札, 일명 하나후다(はなふだ)라고 불렀는데, 19세기말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가는 뱃사람들에 의해 한국에 유입되면서 화투로 불리게 되었다. 일본 화투가 수입되기 전까지, 조선에서는 숫자가 적힌 패를 뽑아 우열을 겨루는 ‘수투數鬪’가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 화투가 들어오면서부터 수투가 화투에 밀려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것을 보면, 단순한 숫자보다 세련된 이미지(꽃그림)를 좋아하는 것은 1세기 전의 사람이나 요즘 사람이나 비슷한 것 같다.     화투는 일본 문화의 축소판이다! 한국인들은 으레 세 사람 이상만 모이면, 어디서든지 고스톱 판을 벌인다. 심지어 신성한 국회의사당 내에서 고스톱 판을 벌인 국회의원들까지 있을 정도다. 정치현장까지 노름판으로 격하格下시킬 만큼의 위력을 지닌 화투이고 보니, 어쩌면 우리나라 전체가 ‘고스톱 공화국’이라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정작 화투 48장의 실체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화투에 숨겨진 일본 문화의 비밀코드에 대해서는 하등의 지식을 갖지 못한 채, 그들이 전해준 고스톱에 목숨을 걸고 있으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월月별로 각각 4매씩 총 48장으로 구성된 화투는 일본 문화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화투의 낱장 하나하나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다. 거기에는 일본 고유의 세시풍속, 월별 축제와 갖가지 행사, 풍습, 선호, 기원의식 심지어는 교육적인 교훈까지 담겨져 있다. 우선 1월의 화투는 아래의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20점짜리 삥 광光, 5점짜리 홍단, 그리고 2장의 피로 구성되어 있다. 세칭世稱 삥 광의 화투 문양을 보면 1/4쪽 짜리 태양, 1마리의 학鶴, 소나무, 홍단 띠가 나온다. 여기서 태양은 신년 새해의 일출을, 학은 장수長壽와 가족의 건강에 대한 염원을 나타내는 그들 나름대로의 문화적 코드다. 또 1월의 화투에 소나무가 등장하는 이유는 가도마쯔(門松; かどまつ) 행사에 소나무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1월에 맞이하는 일본의 대표적 세시풍속인 가도마쓰는, 일본인들이 1월 1일부터 1주일 동안 소나무를 현관 옆에다 장식해 두고, 조상신과 복을 맞아들이기 위한 일련의 행사를 의미한다. 또 학을 의미하는 츠루(鶴; つる)가 소나무를 뜻하는 마쯔(松; まつ)의 말운末韻을 이어 받는 것도 일본식 풍류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월 화투의 그림] 또 1년 열두 달 중에서 8월 달과 11월 달을 의미하는 화투 팔八과 오동(세인들은 오동을 똥이라고 얘기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표현이다.)을 제외한 나머지 10개 달의 5점짜리 화투에 등장하는 청?홍색 띠는, 일명 ‘단책丹冊’이라고 하는 종이다. 일본에서는 하이쿠(俳句; はいく)라는 일본의 전통 시구詩句를 적을 때, 그 종이를 사용하며 크기는 대략 가로(6cm)×세로(36cm) 정도가 된다. 이것 또한 일본인들이 시를 짓는 풍류의식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청색과 적색에 관한 한?일 양국간의 시각 차이다. 한국에서는 빨간색이 사망, 공산당, 화재 등과 같이 부정적인 의미를 갖지만, 일본에서의 빨간색은 쾌청한 날씨, 경사慶事스러움, 상서로움을 나타낸다. 그런 점에서 화투 일, 이, 삼의 5점짜리가 홍단의 구성요소라는 것은, 그마만큼 일본인들에게 1, 2, 3월이 매우 상서로운 달임을 시사해 준다고 할 수 있다.     [2월 화투의 그림] 2월을 나타내는 화투의 문양에는 꾀꼬리와 매화가 나온다. 2월의 화투에 매화가 등장하는 이유는, 일본의 매화 축제는 2월에 시작되기 때문이다. 매화 축제는 이바라키현 미토의 가이라크 매화 공원을 비롯한 전국의 매화 공원에서 동시에 개최된다. 또 꾀꼬리는 ‘우구이스다니’라는 도쿄의 지명地名에도 남아 있을 만큼 일본인들에게는 매우 친숙한 새다. 한 가지 의아한 것은, 꾀꼬리가 봄철이 아닌 2월에 등장한다는 점이다. 조류학자들에 따르면, 철새인 꾀꼬리가 일본으로 되돌아오는 시점은 대체로 4월 이후라고 한다. 그런데도 2월의 화투에 꾀꼬리가 그려져 있는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일까? 아직까지 그 의문을 시원스럽게 풀어줄 수 있는 단서를 찾아내지 못했다. 다만, 꾀꼬리와 매화가 봄의 전령사임을 노래하는 대표적 시어詩語인 동시에 꾀꼬리의 일본어 표기인 우구이스(うぐいす)와 매화를 뜻하는 우메(うめ)간에 두운頭韻을 일치시키려는 일본인들의 풍류의식을 반영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3월 화투의 그림] 일본의 벚꽃 축제는 3월 달에 최고 절정에 이르기 때문에, 3월의 화투문양은 온통 벚꽃(일본인들은 벚꽃을 사꾸라 꽃이라고 명명한다.)으로 가득 차 있다. 삼광光의 벚꽃 밑에 그려진 것은 만막(慢幕; まんまく)이라는 휘장인데, 그것은 지금도 일본인들의 경조사 때에 천막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 휘장 속에는 벚꽃을 감상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상춘객들이 놀고 있을 테지만, 삼광의 화투에서는 그 모습이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상춘객들이 화투 하단의 숨겨진 1인치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국내의 모 TV회사가 광고 멘트로 사용했던 ‘숨어있던 1인치를 찾았다!’고 외치면, 그 만막 안에서 낮술에 취한 채 봄날의 정취를 만끽하고 있는 상춘객이 그대로 튀어나올 법도 하다. 4월의 화투 문양은 흑싸리가 아니라 등나무 꽃이다! 4월은 일본에서 등나무 꽃 축제가 열리는 계절이다. 그래서 4월의 화투 문양은 등나무 꽃(보라색을 띤 등나무 꽃은 마치 포도송이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따라서 아래 그림과 같이 화투를 배열해야 옳은 배열이 된다.)이 주류를 이룬다. 등나무는 일본 전통시의 시어詩語로 쓰이는 여름의 상징이며, 4월의 화투 10점짜리에 그려져 있는 두견새 역시 일본에서 시제詩題로 자주 등장할 만큼 일본인들에게 사랑 받고 있는 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 등나무 꽃을 한국 사람들이 ‘흑싸리’로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흑싸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골에서 자란 40?50대 사람들은 빗자루를 만드는 재료로 활용되는 싸리나무의 색깔은 녹색이며, 가을철에 그것을 베어 햇볕에다 말리면 갈색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4월 화투의 그림] 한편,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5월의 화투에 등장하는 것이 ‘난蘭’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난이 아니라 붓꽃이다. 5월의 붓꽃은 보라색 꽃이 피는 습지의 관상식물(습지와 난은 상극관계에 있다.)로서 여름을 상징하는 시어詩語다. 또 한국 사람들은 5월의 10점짜리 화투에 나오는 3개의 작은 막대기는 애연가들이 좋아하는 딱성냥으로, T자 모양의 막대는 건축사들이 즐겨 사용하는 ‘제도용 막대 자’정도로 알고 있는데, 그 또한 잘못된 생각이다.     [5월 화투의 그림] 여기서 T자 모양의 막대는 붓꽃을 구경하기 위해 정원 내 습지에다 만들어 놓은 산책용 목재 다리이며, 3개의 작은 막대기는 목재 다리를 지지하는 버팀목이다. 일본인들은 그런 목재 다리를 ‘야츠하시(八橋; やつはし)’라고 부른다. 또 다리 끝에는 붓꽃을 감상하는 사람이 있는데, 삼광光에서와 마찬가지로 화투 하단의 보이지 않는 1인치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사람을 볼 수 없다.     [6월 화투의 그림] 6월의 화투 문양은 모란꽃이다. 모란꽃은 여름의 시어詩語일 뿐만 아니라 고귀한 이미지마저 갖는 꽃으로서 일본인들의 가문家門을 나타내는 문양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꽃과 나비하면, 바로 모란꽃을 떠올릴 정도로 동양 사회에서는 모란꽃을 꽃의 제왕으로 쳐준다. 그러나 한국화韓國畵에서는 모란과 나비를 함께 그리지 않는 것이 오래된 관례慣例라고 한다. 그것은 당 태종이 신라의 선덕여왕에게 보낸 모란꽃의 그림에 나비가 없었다는 점에서 연유한다고 한다. 그러나 6월을 의미하는 화투를 보면 일본화日本畵의 관례대로 모란과 나비가 함께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한국과 다른 일본 고유의 문화적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참고적으로 6, 9, 10월의 화투 5점짜리에는 청단이 있는데, 일본에서 청색은 우울하거나 좋지 않은 일을 암시하는 색상이라고 한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6, 9, 10월 달에 태풍이나 집중호우로 인한 수재민들이 발생할 뿐만 아니라 평균적으로도 1년 중 이 기간에 각종 사건?사고가 비교적 많이 발생한다고 한다.   [7월 화투의 그림] 7월의 화투 문양은 싸리나무다. 7월의 화투 중에서 10점짜리에만 싸리나무 숲에서 멧돼지가 노니는 모습이 등장하고 나머지 화투에는 싸리나무만 등장한다. 7월의 화투에 멧돼지가 나오는 이유는 근대 일본에서 성행했던 멧돼지 사냥철이 7월이었기 때문이다.     [8월 화투의 그림] 8월의 화투 문양을 보면 산山, 보름달, 기러기 3마리가 등장한다. 이는 일본에서도 8월이 오츠키미(달구경; おつきみ)의 계절인 동시에 철새인 기러기가 대이동을 시작하는 시기임을 알려주는 일종의 문화적 암호다. 또 한국에서 제작되는 8월의 화투에서 검은색으로 처리된 것이 산이다. 10점짜리와 피에서 흰색으로 처리된 부분은 하늘을 의미한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8월의 한국 화투에는 산에 억세 풀이 없는데 반해, 일본의 화투에는 억세 풀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8월의 화투에는 5점짜리 화투도 없고 홍색이나 청색 띠도 없다. 그것은 일본에서도 8월 달이 1년 중에서 제일 바쁜 추수철이기 때문에 한가롭게 시詩를 쓰고 낭송할 만큼의 시간적 여유가 없음을 시사해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고스톱꾼들이 9월의 화투를 유난히 좋아하는 이유는? 9월은 일본에서 국화 축제가 열리는 대표적인 계절이다. 따라서 9월의 화투문양으로 국화가 등장하는 것이다. 또 9월의 화투에서 10점짜리를 보면 ‘목숨 수壽’자가 새겨진 술잔이 등장한다. 이는 9세기경인 헤이안 시대부터 ‘9월 9일에 국화주를 마시고, 국화꽃을 덮은 비단옷으로 몸을 씻으면 무병장수를 한다.’는 일본의 전통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특히 국화가 일본의 왕가王家를 상징하는 문양임을 고려할 때, 그것은 일왕을 비롯한 권력자들이 흐르는 물에다 술잔을 띄워놓고 국화주를 마시면서 자신들의 권세와 부귀가 영원하기를 기원했던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9월의 화투 가운데 10점짜리 화투만이 자기 맘대로 쌍 피(2장의 피)가 될 수도 있고, 10점짜리 화투로 남을 수 있는 특권을 갖는 것도 바로 9월의 10점짜리 화투가 일왕을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왕만 되면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은가?     [9월 화투의 그림]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필자는 9월의 화투문양 중에서 10점짜리 화투만 보면, 신라시대의 고관대작들이 포석정에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임금과 자신들의 태평泰平과 안녕安寧을 기원했던 풍류가 연상된다. 술잔을 의미하는 사카즈키(さかずき)와 국화를 뜻하는 키쿠(きく)간에 말운末韻과 두운頭韻이 연속성을 갖는 점도 흥미 있는 일이다.     [10월 화투의 그림] 일본에서 10월은 전통적으로 단풍놀이의 계절인 동시에 본격적인 사슴 사냥철이다. 10월의 화투를 보면, 10점짜리 화투에 수(♂)사슴과 단풍들이 등장하는 것도 그러한 계절의 특성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사슴을 의미하는 시카(鹿; しか)와 단풍을 뜻하는 카에데(丹楓; かえで)간에도 말운末韻과 두운頭韻이 일치하는데, 이것 역시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화투 ‘오동’과 ‘비’에 대한 한?일 양국의 차이 11월과 12월을 의미하는 화투는 한?일 양국간에 큰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 ‘오동’은 11월의 화투이고 ‘비’는 12월의 화투인데 반해, 일본은 그 반대이다. 즉 일본에서는 ‘비’가 11월의 화투이고 ‘오동’은 12월의 화투이다. 일본에서 ‘오동’이 12월의 화투가 된 것은, ‘오동’을 뜻하는 기리(きり)가 에도江戶시대의 카드였던 ‘카르타’에서 맨 끝인 12를 의미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한 점들을 사전적으로 이해하고 화투 ‘오동’과 ‘비’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11월 화투의 그림] 고스톱을 즐기는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오동이다. 속칭 ‘똥광’으로 불리는 오동의 광光은 광으로도 쓸만하고 피皮 역시 오동만이 유일하게 3장이다. 물론 일왕을 상징하는 9월의 화투 중에서 10점짜리가 쌍 피가 되겠다고 하면, 9월의 화투도 피가 3장이 될 수 있다. 한국인들에게 더러움, 지저분함, 고약한 냄새의 이미지를 주는 오동이, 왜 고스톱꾼들에게는 제일로 각광받는 화투패가 되었을까? 그 비밀은 오동의 화투 문양에 있다. 오동의 20점짜리 광에는 닭 모가지 모양의 이상야릇한(?) 조류鳥類와 고구마 싹 같은 것이 등장한다. 한국인들은 그 대상이 무엇이고, 또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나타내 주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런데 11월의 화투문양 중에서 검정 색깔의 문양은 고구마 싹이 아니라 오동잎이다. 일본 화투를 보면, 오동잎이 매우 선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또 오동잎은 일왕보다도 더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던 막부幕府의 쇼군을 상징하는 문양이며, 지금도 일본 정부나 국?공립학교를 상징하는 문양으로 사용되고 있다. 심지어는 일본 화폐 500엔(¥)짜리 주화에도 오동잎이 도안으로 들어가 있을 정도다. 그리고 닭 모가지와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는 조류 또한 평범한 새鳥가 아니다. 그것은 막부의 최고 권력자인 쇼군의 품격과 지위를 상징하는 봉황새의 머리이다. 이쯤 되면 일본인들이 왜 그렇게 오동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감이 잡힐 것이다. 한국인들은 오동에 숨겨진 엄청난 비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채, 단지 점수를 나는데 유리한 화투 오동의 광光과 3장의 피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9월의 화투문양인 국화와 11월의 화투문양인 오동 중에서 누가 더 끗발이 세다고 할 수 있을까? 당연히 화투 ‘오동’이 더 세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국화만 가지고 있게 되면 광 박을 뒤집어쓰지만, 오동의 광을 갖고 있으면 광 박을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12월 화투의 그림] 12월의 화투문양을 보면 20점짜리 ‘비’광에는 양산을 쓴 선비, 청색의 구불구불한 시냇가, 개구리가 등장한다. 또 10점짜리 화투에는 색동옷을 걸친 제비가 나오고, 쌍 피로 각광을 받는 ‘비’피를 보면 정체불명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고스톱에 사족을 못 쓰는 노름꾼들에게 광 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화투 패가 엉망일 때, 제일 먼저 집어내 버려야할 대상으로 지목되는 ‘비’광을 보노라면, ‘광 팔자가 따라지 팔자’라는 말이 불현듯 떠오른다. 그렇지만 고스톱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필자의 경우, 5개의 광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광이 다름 아닌 ‘비’광이다. 그 이유는 ‘비’광의 그림이 에도시대에 성행했던 일본의 풍속화 ‘우키요에(浮世繪; うきよえ)’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화투 ‘비’에 숨겨져 있는 엄청난 비밀과 교훈 절기節氣상으로 12월은 추운 겨울에 해당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비’광을 살펴보면 웬 낯선 선비 한 분이 양산을 받쳐 들고 ‘떠나가는 김삿갓’처럼 어디론가 가고 있다. 그리고 축 늘어진 수양버들(실제로는 녹색인데, 검은색으로 처리되어 있다.) 사이로 실개천이 흐르고 있고, 그 옆에는 개구리 한 마리가 앞다리를 들며 일어서려는 모습을 하고 있다. 여름 양산과 땅 속에서 겨울잠을 자고 있어야 할 개구리가 혹한酷寒의 계절인 12월에 등장하는 것 자체가 매우 신기하다. 그러나 ‘비’광 속에 나오는 그림은 과거 일본 교과서에서도 소개된 적이 있는 유명한 ‘오노의 전설’을 묘사한 것이다. 즉 ‘비’광 속의 갓 쓴 선비는 오노노도후小野道風라는 일본의 귀족으로서 약 10세기경에 활약했던 당대 최고의 서예가다. 한국 화투에서는 일본 화투에 나오는 그 선비의 갓 모양만 일부 변형시켰을 뿐, 나머지는 일본 화투와 동일하다. 또 개구리를 뜻하는 카에루(かえる)와 양산을 의미하는 카사(かさ)의 두운頭韻이 일치하는 것도 일본인들의 풍류의식에 따른 것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오노의 전설’에 대한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일본의 서예가였던 오노가 붓글씨에 몰두하다 싫증이 나자 잠시 방랑길에 올랐다. ‘비’광에 등장하는 선비의 모습이, 머나먼 방랑길을 떠나는 오노의 모습이다. 그런데 오노가 수양버들이 우거진 어느 길목에 다다랐을 때, 아주 이상한 광경을 발견했다. 그것은 개구리 한 마리가 수양버들에 기어오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것이었다. 개구리는 오르다가 미끄러지고 또 오르려다 미끄러지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지만, 그 실패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오르기를 시도하는 것이었다. 오노는 연속적인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수양버들에 기어오르기 위해 노력하는 개구리의 모습을 한참동안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미물微物인 저 개구리도 저렇게 피나는 노력을 하는데, 하물며 인간인 내가 여기서 포기해서 되겠는가?”라는 깨달음을 얻은 뒤, 곧장 왔던 길을 되돌아가 붓글씨 공부에 정진하였고 결국 일본 최고의 서예가가 되었다고 한다. 또 쌍 피로 대접받는 ‘비’피의 문양을 보면,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 방안의 커튼, 문짝 등 여러 가지가 연상된다. 그런데 ‘비’피의 문양은 ‘죽은 사람을 내보내는 일종의 쪽문’으로서, 라쇼몬羅生門이라고도 일컬어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미 1950년에 다이에이大映 영화사가 라쇼몬이라는 영화를 제작(감독: 구로사와 아키라, 주연: 미후네 도시로, 교마치 코) 하여 큰 관심을 거두기도 하였다. 한편, ‘비’피가 쌍 피로 대접받는 것은 라쇼몬이 죽은 시신을 내보내는 문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귀신이 붙어있을 것이고 따라서 귀신을 잘 대접해야만 해코지를 면할 수 있다는 일본인의 우환의식憂患意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와 비슷한 예는 우리 주변에서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흔한 얘기로 ‘손’이라 함은 귀신을 의미한다. 어른들이 가족의 중대사(예: 결혼, 이사 등)를 결정할 때, 가장 먼저 체크하는 것이 ‘손’없는 날인가의 여부다. 그때의 ‘손’이 바로 귀신이다. 전통적으로 한국인들은 ‘손’이라는 단어보다는 ‘손님’이라는 용어를 더 많이 쓴다. ‘님’자를 붙여주는 이유 또한 ‘손’에다 ‘님’자를 붙여줌으로써 귀신에게 해코지를 당하지 않으려는 심리 때문이 아닐까? 고스톱꾼들이여, 이제 우리도 반성 좀 하며 살자! 이처럼 일본인의 세시풍속과 문화의식을 잘 대변해 주고 있는 화투가 지난 100여 년 동안 한국인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는 것은 정말로 부끄럽고 수치스런 일이다. 그러고도 우리가 5,000년의 찬란한 문화와 전통을 가졌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후손들에게 어떠한 정신적 유산을 물려줄 것인가 ?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반성할 필요가 있다. 옛날 우리 민속놀이의 대부분은 향토방위를 위해서 공동으로 무예武藝를 연마하는 연무유희鍊武遊戱였다. 정월 대보름날 이웃 마을의 젊은이들끼리 편을 가른 뒤 돌을 던지며 놀았던 편쌈이나 대보름날 부녀자들의 유희였던 놋다리밟기도 전시戰時에 다리를 건너는 도강무술渡江武術에서 비롯된 것으로 고증되고 있다. 그에 반해 화투는 내 고향이나 조국을 지키기 위한 놀이가 아니라 패가망신을 부추기는 저질의 놀이에 불과하다. 더구나 화투는 화해의 놀이가 아니다. 일단 3명 이상이 있어야 고스톱을 할 수 있고, 또 거액의 판돈이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언제나 금전적인 피해를 본 사람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돈을 떼인 사람이 돈을 딴 사람과 화해할 수 있는가? 판돈을 챙긴 사람이 돈을 잃은 사람들에게 딴 돈을 고스란히 되돌려 주지 않는 한, 노름꾼들간의 화해는 불가능하다. 이것으로 보면 화투는 민족을 이간시키고 동질성을 분열시키는 반화합적反和合的인 오락에 불과할 뿐이다. 실제로 화투를 만든 일본인들은 화투를 즐겨하지 않는다. 그들이 주로 즐기는 놀이는 마작과 빠찡코이며, 약 5%미만의 일본인들이 그것도 어쩌다가 한번 정도 즐기는 놀이로 전락해 버렸다. 그런 화투를 한국인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즐기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일본과 일본인들을 경멸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화투에 미친 한국인들이 많다는 점에서 필자는 한국인의 이중적 사고와 성격을 재발견하게 된다. 한국인들이여 ! 이제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고 심사숙고 해보자. 앞으로도 화투를 즐기고 싶다면, 일본식 화투를 우리 한국식 화투로 완전히 개량시켜 보는 것이 어떨까? 우리의 세시풍속과 수준 높은 문화의식을 적절하게 반영한 국산 화투를 개발한 다음, 화투의 종주국인 일본에다 역수출해서 일본 화투의 콧대를 보기 좋게 꺾어볼 의향은 없는지... 마치 일본에서 야구를 수입한 한국 야구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일본 야구를 격파시켜 버린 것처럼. 사실 국산 화투만 개발된다면, 일본 화투를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 화투의 제조 및 인쇄기술이 일본보다 월등하게 좋다. 게다가 가격도 국산 화투가 일본 화투의 약 1/5수준이기에 가격경쟁력도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고스톱을 치는 방식도 우리나라만큼 다양하지 못하다. 단, 한 가지 문제는 일본인들이 고스톱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을 고스톱으로 유인하기 위해서는 마작이나 빠찡코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신종 고스톱의 규칙을 새롭게 개발하여 그들의 혼을 뺏는 작업을 시도해야 한다. 그러면 국산 화투도 충분한 승산이 있다고 생각한다. 화투에 대한 문화적 비밀코드도 잘 모르면서 노름꾼의 길로 달려가는 한국인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 “너무 지나치게 일본 화투만 즐기지 마라. 정 고스톱을 치고 싶다면, 고스톱을 치면서도 일본 화투를 능가할 수 있는 국산 화투의 밑그림을 그려 보라. 만약 그럴 능력이 없다면, 오늘부터 당장 고스톱을 때려치우라.”고 말이다. 끝으로 화투 48장에 숨겨진 비밀에 대하여 글을 쓸 수 있도록 관련 자료와 조언을 아끼지 않은 동덕여대의 이덕봉 교수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김덕수의 파워칼럼]화투는 일본문화의 축소판        
535    로마 신화 전쟁의 신 - 마르스 댓글:  조회:6039  추천:0  2016-10-28
 마르스는 주피터 다음으로 중요한 신이다. 역사시대에 이미 전쟁의 신으로 발전했던 것으로 보이며, 로마 문학에서는 전쟁의 승리를 기원했던 로마인들의 수호신이었다.  로마에서 마르스 축제는 농업과 전쟁이 시작되고 끝나는 계절인 봄과 가을에 열렸다. 특히 3월은 마르스만을 기리거나 다른 신과 같이 기리는 축제들로 가득했다. 로마에는 원래 왕궁이었던 레기아에 마르스의 사당이 있어서 그 안에 마르스의 거룩한 창을 보관했는데, 전쟁이 터지면 집정관은 그 창을 흔들면서 "마르스여, 일어나소서!"라고 말해야 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기에는 황제 개인의 수호신으로 삼았다. 마르스를 숭배하는 것과 카피톨 신전의 주피터를 숭배하는 일은 때때로 경쟁관계에 있기도 했다. 문학과 예술에서는 그리스의 아레스와 동일시된다.   마르스(mars)와 미네르바(Minerva)의 전투 전쟁의 신 마르스와 미네르바의 전투를 표현한 그림. 주피터 다음으로 중요하다. 본래의 성격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고, 주로 로마에서 숭배되었는데 그에게 붙여진 성격은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역사시대에는 이미 전쟁의 신으로 발전했던 것이 분명하며, 로마 문학에서는 전쟁에 자신있는 민족이었던 로마인들의 수호신이었다. 로마에서 마르스 축제는 농업과 전쟁이 시작되고 끝나는 계절인 봄과 가을에 열렸다. 특히 3월은 마르스만을 기리거나 다른 신과 같이 기리는 축제들로 가득찼다. 그중에서도 주피터·마르스·퀴리누스와 관계 있는 살리이의 옛 사제들은 3월중에 여러 차례 밖으로 나와 고풍스런 갑옷과 투구를 입고 이 신들을 기리는 군무(軍舞)를 추며 신들에게 찬미의 노래를 불렀다. 10월 또한 마르스에게 중요한 달이었다. 10월 15일의 '10월의 말' 축제에는 2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 경주가 캄푸스 마르티우스에서 열렸고, 10월 19일의 '병기정화절'(Armilustrium)에는 무기를 깨끗이 손질해 겨울 동안 저장했다. 고대로부터 전해지는 아르발 형제의 옛 찬미가는 마르스에게 간절히 비는 노래인데, 아르발 형제는 온갖 종류의 적들로부터 수확물과 가축을 지켜야 할 종교적 의무가 있었다. 마르스 사원은 아우구스투스 시대까지 로마에 2개밖에 없었는데, 1개는 군대의 훈련장인 캄푸스 마르티우스에 있었고 다른 1개는 카페나 문 밖에 있었다. 로마에는 원래 왕궁이었던 레기아에 마르스의 사당(사크라리움)이 있어서 그 안에 마르스의 거룩한 창(槍)을 보관했는데, 전쟁이 터지면 집정관은 그 창을 흔들면서 "마르스여, 일어나소서!"라고 말해야 했다. 아우구스투스 치하에서 마르스 숭배의 열기는 한층 더 뜨거워졌다. 그는 로마 정부의 군사문제를 지켜주는 전통적 수호신일 뿐 아니라, 복수자 마르스(Mars Ultor)로서 황제를 위해 복수하는 역할을 맡는 황제 개인의 수호신이 되었다. 마르스를 숭배하는 것과 카피톨 신전의 주피터를 숭배하는 일은 때때로 경쟁관계에 있기도 했지만, 250년경 마르스는 로마 군단들이 숭배하는 군신 가운데 가장 탁월한 존재가 되었다. 문학과 예술에서는 그리스의 아레스와 동일시된다.
534    그리스 신화 전쟁의 신 - 아레스 댓글:  조회:6548  추천:0  2016-10-28
아레스         아레스 아레스(그리스어: Άρης)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전쟁의 신이다. 로마 신화의 마르스와 동일시된다. 제우스와 헤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며 헤파이스토스와는 형제지간이다. 올림포스의 12신의 두 번째 세대에 속한다. 창, 칼, 방패, 놋쇠 갑옷, 전차, 독수리가 대표적 상징물이다. 같은 전쟁신이자 여동생인 아테나가 전략과 방어를 중시하는 것과는 반대로 전쟁의 광란과 학살, 파괴적인 측면을 상징하였는데, 호전적인 성격과 사나운 성미를 가지고 있어서 다른 신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전투가 벌어지는 곳마다 네 마리의 군마가 끄는 전차를 타며 나타나 무시무시한 소리를 질러 적군을 두려움에 떨게 하였다. 아레스는 체구가 크고 전쟁을 좋아하지만 힘은 그다지 강하지 않아 대부분의 전쟁에서 패배하였다. 트로이 전쟁에서 헥토르의 편에 서서 그리스군과 싸울 때 디오메데스에게 상처를 입고 쓰러지기도 하였고, 알로아다이에 의해 13개월 동안 항아리에 갇히기도 하였는데, 이처럼 그와 관련한 신화와 활약이 많지 않은 이유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아테나와 달리 호전적인 그의 성격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레스의 패배는 전투의 승패는 본능적인 파괴와 호전성보다는 지략과 전술이 좌우함을 상징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아레스도 신들과 기간테스간의 전쟁에서는 활약하여 이긴 적이 있다. 아레스는 거대한 산을 번쩍 들어 기간테스를 깔아뭉개 죽였다. 아레스는 본래 트라키아 지방에서 숭배되었던 신으로 전해지며, 그리스의 일부 북부 지역에서만 숭배되었다. 스파르타에서는 중요한 주신으로 숭배되어 초기에는 전쟁 포로를 아레스에게 제물로 바치기도 하였으며, 라코니아의 게론트라이에서 열린 그의 축제 기간에는 여자들이 신성한 숲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와 반면에 테게아의 여자들은 그를 기나이코토이나스(Gynaikothoinas)라 칭하여 제물을 바치고 찬양하였다. 아테네에서는 아레오파고스 기슭에 아레스에게 봉헌된 신전이 있었다.   목차   [숨기기]  1특징 및 애정 1.1신화 1.1.1아프로디테 1.1.2전쟁의 동행 1.1.3아레스의 언덕 1.1.4일리아스   특징 및 애정[편집] 모든 신들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부모인 제우스와 헤라, 영웅 헤라클레스(헤베의 남편) 역시 그를 싫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애인이었던 아프로디테와 불화의 여신인 에리스, 그의 숙부이자 지하세계의 황제 하데스만이 그를 좋아했다고 한다. 신화[편집] 아프로디테[편집]   비너스와 마르스, 보티첼리 호전적인 성격임에도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아레스는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사랑을 받았다. 아레스는 아프로디테와 함께 그녀의 남편인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를 피해 자주 밀회를 즐겼다. 한번은 사랑을 나누던 중 헤파이스토스가 미리 설치한 그물에 걸려 다른 신들로부터 망신을 당하였는데, 이런 일이 있은 후에도 계속 교제를 하였다. 서로에 대한 관리도 철저하였는데, 아프로디테가 아도니스에게 반하자 아레스는 멧돼지로 변하여 그를 받아 죽이고, 아프로디테는 에오스가 아레스를 사랑하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가 사랑하게 되는 인간은 모두 죽는 저주를 내린다. 아레스는 아프로디테와의 사이에서 공포를 뜻하는 포보스와 두려움을 뜻하는 데이모스, 에로스, 하르모니아를 낳았다. 에로스는 아프로디테와 에로스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후에 추가된 것이라고도 한다. 전쟁의 동행[편집] 아레스는 아프로디테와의 사이에서 낳은 쌍둥이 형제인 포보스와 데이모스를 전쟁터로 데리고 다니며 살육을 할 때마다 적군에게 공포심을 심어 주었다. 불화의 여신 에리스와 그녀의 자식들, 그라이아이 중의 한 명인 싸움의 여신 에니오도 이들과 함께 전쟁터를 돌아 다녔다. 아레스의 언덕[편집] 아레스는 케크로프스의 딸 아글라우로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알키페를 포세이돈의 아들 할리로티오스가 겁탈하자 그를 때려 죽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포세이돈이 아레스를 고발하여 재판이 열리게 되었고, 포세이돈과 아레스를 제외한 올림포스의 12신들은 배심원이 되어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아레스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그 뒤 재판이 열린 장소는 아레스의 언덕이라는 뜻의 아레오파고스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재판은 아레오파고스회의의 유래가 되었다. 일리아스[편집]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는 동료 신들과 심지어 부모조차도 아레스를 좋아하지 않았다 전하며 그를 미치광이, 악의 화신, 파괴자, 피투성이의 살인마로 묘사한다. 서사시에서 수록된 트로이 전쟁에서 신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개별적으로 전투에 개입하였는데, 아레스는 정의와 명분, 특별히 정해진 진영이 없이 잔인한 전투를 즐기며 많은 살육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던 중 트로이의 편에 서게 된 아레스에게 그리스군이 고전하자, 그리스의 편에 서있던 아테나는 역시 같은 편인 헤라의 명령으로 디오메데스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어 그가 창으로 아레스의 복부에 상처를 입히도록 한다. 제우스는 아레스가 부상을 당한 채 큰 소리로 울며 돌아오자 이렇게 호통을 친다. "이 변절자야, 나는 올림포스의 신 중 네가 가장 밉다. 너는 전쟁과 싸움 밖에는 모르는구나." 더구나 아테나 역시 이복오빠인 아레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라버니께서는 포악하고 사나워서 가까이 하기 어렵습니다. 오라버니의의 아우님이신 헤파이스토스 오라버니께서 모든 면에서 차라리 낫습니다."   [숨기기] 그리스 신화의 신들 태초신 카오스 아난케 크로노스 에로스/파네스 가이아 우라노스 폰토스/탈라사 타르타로스 아이테르 헤메라 에레보스 닉스 오피온 모이라이 클로토 라케시스 아트로포스 티탄 티타네스 (남신) 오케아노스 히페리온 코이오스 크로노스 크리오스 이아페토스 티타니데스 (여신) 테티스 테이아 포이베 레아 므네모시네 테미스 디오네 히페리오니데스 헬리오스 셀레네 에오스 코이오니데스 레토 아스테리아 크리오니데스 아스트라이오스 팔라스 페르세스 이아페티오니데스 아틀라스 프로메테우스 에피메테우스 메노이티오스 오케아니데스 메티스 올림포스 신 도데카테온 (올림포스 12신) 제우스 헤라 포세이돈 데메테르 디오니소스 아프로디테 아폴론 아레스 아르테미스 아테나 헤파이스토스 헤르메스 테오이 올림피오이 헤스티아 헤라클레스 아스클레피오스 에로스 이리스 헤베 에일레이티이아 에뉘오 포보스 데이모스 판 하르모니아 가니메데스 파이안 무사 칼리오페 클리오 에라토 에우테르페 멜포메네 폴리힘니아 테르프시코레 탈리아 우라니아 카리테스 아글라에아 에우프로시네 탈리아 호라이 디케 에우노미아 에이레네 스틱티데스 니케 크라토스 비아 젤로스 바다의 신 테오이 할리오이 포세이돈 암피트리테 트리톤 오케아노스 테티스 폰토스/탈라사 네레우스 글라우코스 프로테우스 포르키스 케토 테티스 오케아니데스 아시아 디오네 도리스 에우리노메 메티스 네메시스 플레이오네 티케 네레이데스 암피트리테 테티스 아키스와 갈라테아 포타모이 아켈로오스 아소포스 에니페오스 스카만데르 땅의 신 테오이 크토니오이 하데스 페르세포네 가이아 데메테르 헤카테 에리니에스 알렉토 티시포네 메가에라 땅에서 출생 헤카톤케이레스 키클롭스 기간테스 쿠레테스 멜리아스 텔키네스 티폰 아포테오테나이 이아코스 크로포니오스 트리프톨레모스 오르페우스 미노스 아이아코스 라다만티스
533    고향문화소식 ㅡ 꽃상여 나간다... 상사듸여, 상사듸여... 댓글:  조회:3909  추천:0  2016-10-26
                                        상여가 마을을 벗어나 묘역을 향해 움직이고있다.           제1회 중국조선족상여문화축제 내두산촌서                                          편집/기자: [ 김태국 ]  [ 길림신문 ]  [ 2016-10-24 ]             중국조선족상여문화협회(사이버두레모임)가 주최하고 연변주 안도현 이도백하   진 내두산촌에서 후원한 “제1회 중국조선족상여문화축제”가 10월 22일과 23일 이틀   간 장백산아래 첫동네로 불리우는 내두산촌에서 개최되였다.             전통장례문화는 전통결혼문화와 함께 중국조선족전통문화의 량대산맥을 이룬   다. 지난세기 70~80년대까지 연변의 부분적 조선족촌들에서는 토장문화를 중심으   로 한 전통장례문화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개혁개방의 심화와 토장관련 국가정책의   실시로 점차 페쇄되나 다름없이 되였고 오늘날에 와서는 그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게 되였다.             중국조선족상여문화협회 회장 김춘택씨는 상여문화제를 개최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 중국경내에서는 소실되다싶이 하였지만 장백산원시림속에 자리잡은 내두산   촌에는 아직도 토장문화가 시행되고 상두막(곳집)은 물론 촌에 상여계가 존재하기   에 조선족전통상여문화를 보여줄수 있는 이곳에서 개최하게 되였으며 이주민으로   서의 중국조선족 전통장례문화를 발굴, 보존하고 그에서 발산하는 효문화와 민족전   통례의를 널리 알리고 세세대대 전해가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90세에 나는 전주 김씨 김달천로인이 천수를 누리다가 운명을 앞두고 자식과 안   해를 불러놓고 유언을 남기는 장면으로 시작된 행사는 고인의 운명의식, 고인의 혼   부르기, 칠성판에 모시기, 사자밥 올리기, 정지와 가마목 차단하기, 명정과 만장 쓰   기, 매시, 묘지정하기, 발상, 관짜기, 입관, 조문 등으로 이어지고 자정제사를 마감으   로 첫날 행사는 끝난다.                   상여제 이모저모: 운명의식, 혼부르기, 칠성판 만들기, 상여조립, 발인제, 묘역.               이튿날 동네의 상여군들이 곳집(상두막)에서 가져온 상여의 기반들을 가져와   상여를 조립하고 작은 발인제를 지내고 출관하여 상여에 모셔지면 큰 발인제를 지   낸다.             큰 발인제를 앞두고 상여문화제 개막식을 가졌는데 김춘택씨가 문화제의 배경   과 준비과정을 소개하고 내두산촌 로인협회 김종국회장이 내두산촌의 토장정황과   촌상여계에 대해 소개하였으며 연변박물관 민속연구원 한광운, 연변조선족례의연   구회 회장 현룡수 등이 축사를 하였다.                                                  좌로부터 김춘택, 김종국, 한광운, 현룡수.         개막식에 이어 출상하는데 상주의 잔병 떼가기, 로자돈 챙기기, 상여가 부르기   등으로 과거 조선족마을들의 상여모습을 재현하였다.“간다, 간다, 나는 간다고 하거   늘/ 이승이 싫어 저승이 좋아 나는 가는가?// 이승이 좋아도 저승이 부르니 나는 간   다! 상사듸여, 상사듸여!” 메김소리와 받음소리로 이어지는 상여가속에 마을에서   500여메터 떨어진 묘역에 이르면 상여를 내린다. 상여에서 관을 꺼내여 광중에 넣으   면 명정이 관우에 덮여지고 상주가 옷섶에 흙을 담아 명정의 네 모퉁이에 쏟는다.   굴신들이 무덤의 봉분을 만들고 간소한 제를 올려 고인의 명복을 빌면 전반 장례행   사가 막을 내리는데 장례를 마친다. 하산하면 상가집에서는 상여군들에게 고마움의   인사로 술상을 차리고 상여군들은 상주를 위로하며 술잔을 기울인다…                                                       상여대오가 묘역을 향해 나가고있다.         상여문화제에 참가한 연변과기대 곽승지교수는 사라져가는 전통문화를 발굴하   고 보존하는것은 자못 중요한 일이며 이런 행사를 통해 조선족고유의 상여문화력사   를 만들어가는것 또한 자못 뜻깊은 일이라고 말하였다. 지난 9월에 이곳에서 진행된   한석윤동시비제막식에 참가한후 두번째로 내두산촌을 찾은 곽교수는 내두산촌의   력사와 내두산촌의 독특한 위치, 연변 유일의 작가공원, 특산품으로 유명한 감자 등   을 실례로 들면서 문화와 력사와 관광이 잘 어울려 지역경제를 위해 복무하는 좋은   실례라고 평가했다.             한편, 이날 김달춘역을 한 현청룡(80세)할아버지는 “내가 죽은후 이렇게 많은 사   람들이 와서 토장해주면 얼마나 좋겠수~”하면서 마을에 젊은이들이 넘쳐나고 꽃상   여에 고인을 모셨던 그 시절을 회억하기도 하였다.  
532    프랑스 철학자 해체주의자 - 데리다 댓글:  조회:6107  추천:0  2016-10-25
자크 데리다     자크 데리다 출생 1930년 7월 15일 프랑스, 알제리 사망 2004년 10월 9일 프랑스, 파리 사인 췌장암 국적  프랑스 직업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년 7월 15일 엘 비아르~2004년 10월 9일 파리)는 알제리 태생의 프랑스 철학자이다. 철학뿐 아니라 문학, 회화, 정신분석학 등 문화 전반에 관한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특히 현대철학에 해체 개념을 도입한 것으로 유명하다.   목차   [숨기기]  1생애 2주요 개념 3저작 4바깥 고리   생애[편집] 자크 데리다는 1930년 알제리의 엘 비아르에서 유대계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 시절에는 운동을 좋아해 한때는 축구선수를 꿈꾸기도 했으나, 학문에 대한 관심과 열정 또한 남달라 이른 나이에 장 자크 루소, 프리드리히 니체, 앙드레 지드,알베르 카뮈 등의 작품들을 섭렵했다. 이후 대학 진학을 위해 파리로 옮겨 루이 르 그랑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1952년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해 쇠렌 키르케고르와 마르틴 하이데거를 비롯한 본격적인 철학 공부에 들어갔다. 졸업 후에는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에서 조교 생활을 하기도 했다. 데리다는 1964년 에드문트 후설의 을 번역한 공로를 인정받아 장 카바이예스 상을 수상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으며, 1965년 고등사범학교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다음 해에는 존스 홉킨스 대학교의 볼티모어 콜로키움에 참가했는데, 이는 이후 데리다가 미국을 자주 방문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67년에는 , , 등 첫 저작 3권을 출간했다. 1979년 소르본의 철학 강의를 맡으면서부터 데리다의 정치적 참여는 점차 활발해졌다. 1981년에는 체코의 지식인들을 돕기 위한 얀 후스재단을 설립했는데, 이와 관련하여 프라하에서 불법적인 세미나를 조직했다는 이유로 감금되었다가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의 도움으로 풀려나기도 했다. 1983년 국제 철학 대학을 창립한 뒤 1984년부터 2004년 10월 9일 췌장암으로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사회과학고등연구원의 철학 교수직을 맡았다. 주요 개념[편집] ");"> 그라마톨로지 산종 음성중심주의 차연 해체 흔적과 유령 현존의 형이상학 저작[편집] ");"> 기하학의 기원 (배의용 역, 2008) Introduction (et traduction) à L'origine de la géométrie de E. Husserl, PUF, 1962.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김응권 역, 2004) De la grammatologie, 1967, Les Éditions de Minuit. ISBN 978-2-7073-0012-6 글쓰기와 차이(남수인 역, 2001) L'Écriture et la différence, 1967, Seuil. ISBN 978-2-02-005182-8 입장들 (박성창 편역, 1992) Positions, 1972, Les Éditions de Minuit. ISBN 978-2-7073-0251-9 해체 (김보현 역, 1996) La dissémination, 1972, Seuil. ISBN 978-2-02-001958-3 에쁘롱 - 니체의 문체들 (김다은, 황순희 역, 1998) Éperons. Les styles de Nietzsche, 1972, Champs Flammarion (VoirFriedrich Nietzsche). 시선의 권리(신방흔 역, 2004) Droit de regards, éditions de Minuit, 1985 ; nouvelle édition : Les Impressions Nouvelles, 2010. 시네퐁주(허정아 역, 1998) Signéponge, 1988, Seuil. 정신에 대하여(박찬국 역, 2005) De l'esprit, 1990, Galilée. ISBN 978-2-7186-0323-0 다른 곶(김다흔, 이혜지 역, 1997) L'autre cap, 1991 마르크스의 유령들(양운덕 역, 1996) Spectres de Marx, 1993, Galilée. ISBN 978-2-7186-0429-9. (Voir Karl Marx). 법의 힘(진태원 역, 2004) Force de loi, Galilée, 1994. 에코그라피 (김재희 외 역, 2002) Échographies – de la télévision, Galilée, 1996. 마르크스주의와 해체 (진태원, 한형식 역, 2009) Marx en jeu (avec Marc Guillaume), 1997, Descartes & Cie. ISBN 978-2-910301-84-2 환대에 대하여(남수인 역, 2004) De l'hospitalité (avec Anne Dufourmantelle), 1997, Calmann-Lévy. ISBN 978-2-7021-2795-7 불량배들 - 이성에 관한 두 편의 에세이 (이경신 역, 2003) Voyous, Galilée, 2003. 이론 이후 삶(강우성 역, 2007) / Life.after.theory: Jacques Derrida, Frank Kermode, Toril Moi and Christopher Norris ============================= 요약 해체주의를 기반으로 한 서양철학에 대한 그의 비판은 문학·언어학·정신분석학을 망라하고 있다.  파리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1960~64년 소르본대학교에서 강의했으며, 1965년부터는 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사를 가르쳤다. 데리다의 사상은 서양철학이 대부분 궁극적인 형이상학적 확실성이나 의미의 근원을 모색해온 것에 대한 비판을 토대로 삼고 있다. 그는 여러 저작에서 철학서적을 읽는 방법을 제시한다. '해체'라고 부르는 이 방법을 통해 그는 형이상학을 가장 많이 비판하는 철학자들까지도 형이상학적 가설과 선험적 가정을 사용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데리다는 어떤 확립된 철학이론을 갖는 것을 피하고, 그대신 언어를 분석함으로써 어떤 철학적 테제의 기본개념을 문제로 만드는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하려고 했다.   서양철학에 대한 그의 비판은 문학·언어학·정신분석학을 망라하고 있다. 파리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1960~64년 소르본대학교에서 강의했으며, 1965년부터는 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사를 가르쳤다. 1962년 기하학에 대한 에트문트 후설의 저서 일부를 번역하고 머리말을 덧붙인 첫 저작을 출판했다. 1967년에는 3권의 영향력있는 저서, 즉 후설 연구서 〈언어와 현상 La Voix et le phénomène〉, 평론집 〈문체와 차이 L'Écriture et la différence〉·〈문자학에 대하여 De la grammatologie〉를 발표했고, 1972년에도 〈철학의 가장자리 Marges de la philosophie〉·〈관점 Positions〉(대담집)·〈산종 La Dissémi-nation〉을 출간했다. 데리다의 사상은 서양철학이 대부분 궁극적인 형이상학적 확실성이나 의미의 근원을 모색해온 것에 대한 비판을 토대로 삼고 있다. 그는 여러 저작에서 철학서적을 읽는 방법을 제시한다. '해체'라고 부르는 이 방법을 통해 그는 형이상학을 가장 많이 비판하는 철학자들까지도 형이상학적 가설과 선험적 가정을 사용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데리다는 어떤 확립된 철학이론을 갖는 것을 피하고, 그대신 언어를 분석함으로써 어떤 철학적 테제의 기본개념을 문제로 만드는 근본적인 대안 시각을 제시하려고 했다. 후기에 발표한 저서로는 〈조종 Glas〉(1974)·〈회화의 진실 La Vérité en peinture〉(1978)·〈우편엽서 La Carte Postale〉(1980) 등이 있다. ===========================   해체한다고 해서 기존의 것 일체를 소멸시켜 버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각질화된 전통을 해체하여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작업을 말하는 것입니다.     서구 철학의 근저에는 본질/현상의 이항대립이 자리잡고 있다. 본질은 현상에 비해 우선적이며 우월한 것이고, 현상은 그 본질에서 파생된 부차적인 것이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형이상학은 항상 자기동일적이고 자기현전적인 순수한 기원을 욕구하고, 그러는 가운데 차이를 배제하고 억압한다. 그래서 데리다는 이성, 동일성, 본질, 현전에 대비되는 비이성, 차이, 현상, 부재라는 타자(他者)를 해방시키고자 한다.   그런데, 그런 해방의 과정으로서의 해체는 기존의 억압적인 텍스트 내부에 이미 가능성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가 말하는 '텍스트'란 글씨가 쓰여져 있는 종이나 책이라는 좁은 의미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현상과 경험현실을 두루 포괄하는 개념이다.   데리다는 (해체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기보다는 무엇인가가 일어나고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다고 말한다. '차연'(차이+연기)이라는 데리다의 신조어가 의미를 지니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차연이란 형이상학적 텍스트 내부에서 본질 또는 자기동일성이 끝끝내 자기 자신과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 획득이 영원히 연기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모든 텍스트는 자기 자신을 배반한다. =============================  
531    [쉼터] - 커피라는 눔은 어떠한 놈팽이라구라... 댓글:  조회:4303  추천:0  2016-10-23
    커피 종류, 카페 커피메뉴 종류 우리나라 사람들은 커피를 무척 좋아합니다.  대한민국은 커피 열풍, 카페 열풍이 불고 있다고 말을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언제부터인가 하루에 한 잔 이상씩 커피를 마시게 되었고, 사람과의 만남은 대부분 커피 전문점에서 만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커피를 좋아하고 즐겨 마신다면 커피의 종류와 맛을 알고 드시는 것이 어떨까요?         커피 종류 커피는 크게 분류하여 3종류로 나뉠 수 있는데, 최근에는 여러나라에서 교배를 하여 교배종을 만들거나 해서 다양한 잡종 커피들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지역마다 생산되는 커피도 다르고, 각기 다른 맛과 특징을 가지고 있지요. 그러나 잡종보다는 크게 3종류만 알아두셔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1. 아라비카종 아라비카종은 전세계 약 70%를 점하고 있습니다. 브라질,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티오피아, 엘셀바도르, 과테말라, 자메이카, 코스타리카, 멕시코 등에서 생산되고 있습니다. 2. 로부스타종 로부스타종은 전세계 약 20~30% 정도를 점하고 있으며,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등의 나라에서 많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아라비카종은 남미에서 대부분 생산되고, 남동아시아 지역에서는 로부스타가 주로 생산이 된다고 생각하시면 되지요. 3. 리베리카종 리베리카종은 전 세계 약 2~3% 정도 밖에 생산이 되지 않는 커피 종이라고 합니다. 각 나라의 기후나 특징에 따라서 맛과 향이 다르고, 커피 문화도 다르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네요.   카페 커피 종류 1. 에스프레소 커피의 기본 베이스가 되는 에스프레소, 조그만 컵에 담긴 커피의 진액이라고 생각하시면 되는데요. 쓴 맛이 그대로 느껴지지만, 커피의 진정한 맛을 느껴보고 싶다면 에스프레소를 마셔봐야 한답니다.   2. 아메리카노 우리 사람들이 가장 즐겨마시는 커피로, 에스프레소에 물을 1:2 비율로 섞은 메뉴입니다. 기호에 따라서 시럽(설탕)을 넣어서 마시는 커피로 가장 즐겨 마시는 커피 메뉴 중에 하나입니다. 요즘과 같은 날씨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 최고인 것 같습니다. 3. 카페라떼 카페라떼는 카페와 우유를 의미하는 라떼의 합성어입니다. 에스프레소 커피에 여러 가지 시럽 즉, 모카, 녹차 등 첨가한 시럽에 따라서 메뉴의 이름도 조금 달라지지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커피인데, 쓴 맛의 커피를 싫어하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만한 메뉴입니다. 4. 카페모카 카페모카는 모카의 초콜릿을 의미하는데, 초콜릿을 카페라떼 위에 올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생크림이 올려져 있는 경우가 많이 있지요. 은은한 커피 향이 일품이며, 누구나 쉽게 먹을 수 있는 커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커피 메뉴입니다. 5. 카라멜 마키야또 에스프레소에 카라멜 시럽과 우유거품을 함께 마실 수 있도록 만들어진 메뉴로 카라멜의 은은한 향기와 달콤한 맛이 일품인 메뉴입니다. 커피를 즐겨 마시지 않는 분들도 좋아하는 메뉴 중에 하나이지요. 그러나 너무 달 수 있기 때문에 단 것을 싫어하는 분들에게는 추천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6. 카푸치노 커피와 우유. 카페라떼와 비슷한 방식으로 만드는 커피로, 우유의 양을 줄여서 밀도가 낮은 거품 즉 촘촘한 거품을 가득 넣은 커피입니다.  커피와 우유가 기본이며, 카페라떼보다는 더 진한 것이 특징입니다. 7. 비엔나 비엔나 커피는 특히 여자들이 좋아하는 메뉴인데요. 아메리카노 커피 위에 휘핑 크림을 가득 올린 커피로 부드러운 아메리카노의 뜨거움과 생크림의 차가움이 조화를 이룬 커피입니다. 달콤한 맛으로 휘핑크림을 좋아하는 분들에게 적극 추천드리고 싶네요.   카페 커피는 위에서 소개해드린 종류만 기본적으로 알아두시면, 자신의 기호에 맞는 커피를 잘 선택하여 마시면 될 것 같습니다. 커피에 우유가 들어가서 만들어지는 메뉴가 많이 있는데, 우유를 먹으면 속이 안좋거나 알러지가 있는 분들은 꼭 주의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커피 전문점에 따라서 우유 대신에 두유를 넣어달라고 부탁하면 그렇게 만들어주니 참고하시길 바라겠습니다.  
530    [록색문학평화주의자]= 아무르 호랑이 = 백두산호랑이 댓글:  조회:4167  추천:0  2016-10-21
(모스크바=연합뉴스) 유철종 특파원 = 러시아 극동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 출현해 당국을 긴장시켰던 야생 아무르 호랑이(일명 '백두산 호랑이')가 생포됐다고 연해주 주정부가 20일(현지시간) 밝혔다. 인터넷 뉴스통신 '뉴스루'에 따르면 이틀 전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서 목격됐던 호랑이가 시 외곽 샤모라만(灣) 인근에서 생포됐다고 주정부 사냥감독국이 전했다. 호랑이는 포획 과정에서 상처를 입지 않았으며 현재 재활센터로 옮겨져 안정을 되찾고 있다고 당국은 덧붙였다.     관계자는 "생후 1년 6개월 정도 된 아무르 호랑이 수컷으로 몸무게가 120kg 정도"라면서 "건강 상태가 좋다"고 설명했다. 야생 호랑이가 시내로 내려온 이유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경찰은 지난 19일 시 외곽 지역 두 곳에서 호랑이를 목격했다는 주민들의 신고를 받고 대응팀을 급파해 포획에 나서는한편 주민들에게 주의를 촉구했다. 러시아 시베리아와 극동 연해주, 중국 북동부 및 한반도 북부 지역에 분포하는 아무르 호랑이는 '백두산 호랑이'로도 알려져 있으며,연해주와 하바롭스크주 등에 약 450마리가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아무르 호랑이. [타스=연합뉴스]   cjyou@yna.co.kr
529    [쉼터] - 올림픽과 년금 및 포상금 댓글:  조회:4014  추천:0  2016-10-20
올림픽 연금 지급하는 국가 순위ㅡ(2014년 기준) 러시아 400만 루블 ( 한화 약 1억 5000만원 ) 독일 (한화)2400만원 ,  캐나다 2200만원 ,  중국 3200만원 , 베트남 500만원 , 그리스 3억 , 필리핀 1억 , 아랍에미리트 2억 8000만원 정도... =================================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는 각 나라에서 포상금을 받는다. 그러나 포상 규모는 나라별로 천차만별이다. 2016년 기준으로,ㅡ  싱가포르가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에게 지급하기로 한 포상금은 74만6000달러(한화 약 8억3000만원)다. 2012년 런던 올림픽까지 금메달이 없었던 싱가포르는 이번 리우올림픽에서 수영선수 조셉 스쿨링(21)이 첫 금메달을 획득했다.   대만이 금메달리스트에게 내건 포상금은 64만달러(한화 약 7억1000만원)다. 이번 올림픽에서 현재까지 금메달 포상금을 받는 대만 선수는 여자 역도 53㎏급에서 우승을 차지한 쉬스칭 한 명 뿐이다. 인도네시아 38만2000달러(4억2000만원), 태국 29만달러(3억2000만원), 말레이시아 25만1000달러(2억8000만원), 필리핀 21만6000달러(2억4000만원) 등이다. 브라질 금메달 딴 선수에게 25만달러(2억80000원), 미국의 금메달 포상금은 2만5000달러(2800만원)다. 중국의 금메달 포상금은 3만6000달러(4천만원), 러시아는 6만1000달러(7000만원)으로 타 국가에 비해 적은 편이다. . 한국은 이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에게 6000만원을 지급한다. 영국 정부 및 올림픽위원회는 나라를 대표한다는 자부심과 스포츠를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선수들의 동기 부여가 충분히 된다고 믿기 때문에 금메달리스트에게 포상을 주지 않는다.
528    [쉼터] - 어원이 무서운 "도무지" 댓글:  조회:4351  추천:0  2016-10-20
'도무지'의 무서운 어원   생성시기 조선, 1860년(철종 11년) 유래 도모지(塗貌紙)는 옛날 조선시대에 사사로이 행해졌던 형벌이었다. 물을 묻힌 한지를 얼굴에 몇 겹으로 착착 발라놓으면 종이의 물기가 말라감에 따라 서서히 숨을 못 쉬어 죽게 되는 형벌이다. 1860년 경신박해 때 체포된 오치문이란 사람이 울산 장대로 압송된 뒤 도모지 형으로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천주교 기록에 “순교 당시 그는 얼굴을 한지로 덮은 채 물을 뿌림으로써 숨이 막혀 죽게 하는 백지사(白紙死, 일명 도모지) 형벌을 받았는데, 무의식 중에 혀를 내밀어 물 묻은 한지를 뚫자 군사들이 그 구멍을 막아 질식시켰다고 전한다”고 되어 있다. 이보다 늦은 기록으로는 1866년 12월 8일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천주교인들에게 당시 남한산성의 광주 유수가 일명 도배형 또는 도모지라고 부르던 백지사 형을 집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대원군 시대에 포도청의 형졸들이 살인하기에 염증을 느껴 백지 한 장을 죄수의 얼굴에 붙이고 물을 뿌리면 죄수의 숨이 막혀 죽곤 했는데 이를 ‘도모지(塗貌紙)’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는 『매천야록(梅泉野錄)』은 황현(黃玹)이 고종 원년(1864년)부터 융희 4년(1910년)까지 47년간의 한말의 역사를 적은 책인데, 대략 이 시기에 사사로이 행해진 형벌인 듯하다. 다만 형벌의 성격상 가문에서 사형(私刑)으로 집행될 수 있는 것이어서 이 말의 발생이 꼭 1860년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끔찍한 형벌인 ‘도모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도무지’는 그 형벌만큼이나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527    [취미] - 술, 술, 그리고 술 댓글:  조회:4878  추천:0  2016-10-20
술의 문화   술은 고래(古來)로 인류가 공통적으로 즐기는 음식이다. 음식문화 중에서 특히 음주문화에는 그 나라의 풍토와 민속이라는 문화적 배경이 담겨 있다. .서로 다른 문화권에 속하는 세계인류는 그 술 마시는 방법과 절차가 각기 달라 다양한 문화를 대변하고 있다. 술을 즐기는 방법으로 문화군을 나누어 보자면 보통 독작 문화와 대작문화로 분류할 수 있다.  독작(獨酌)은 서양인들 중 구 미인들의 문화로서 술의 분량이나 마시는 속도를 자의대로 할 수 있는 주체적 음주법이다. 그들은 상대방이 좋아하는 종류의 술을 선택하여 그가 원하는 양을 잔을 채워 대접하고 술을 받는 사람은 자신의 양과 시간을 조절하여 마신다. 술잔은 서로 교환하지 않는다.  대작(對酌)은 각자 술을 따라 건배를 하거나 같이 마시는 절차를 거치지만 양은 스스로 조절한다. 대작은 마시는 시간에 의해 지배받기는 하지만 마시는 분량은 자의대로 할 수 있는 자의반 타의반의 음주문화인 것이다. 마시기 전에 건배하는 음주 대작은 중국 사람들이 즐겨온 문화이다. 중국 사람들은 잔을 들고 수의(隨意)하면서 자기 양대로 조금씩 마시고 건배할 경우는 잔을 같이 비우기도 한다.  다음이 수작(酬酌)인데 이는 마시는 사람끼리 술잔을 주고받거나 술잔을 돌려 마시는 순배(巡杯)도 수작문화의 한 양식이다. 수작문화는 술 마시는 양이나 시간을 자의대로 조절할 수 없는 타의성의 음주문화이다. 한국이 그 대표적 문화권이다. 
526    [취미] - 바둑 단수 댓글:  조회:3902  추천:0  2016-10-20
바둑 단수의 의미   9단  (入神(입신)-승부를 초월한 신의 경지에 이름) 8단  (坐照(좌조)-앉아서 삼라만상의 변화를 다 내다본다) 7단  (具體(구체)-모든 조건을 두루 갖춤) 6단  (通幽(통유)-바둑이 그윽한 경지에 이른다) 5단  (用智(용지)-지혜를 쓸 줄 알게 된다) 4단  (小巧(소교)-소박하게나마 기교를 부리는 단계) 3단  (鬪力(투력)-어느덧 싸울 힘이 붙었다) 2단  (若愚(약우)-어리석어 보이지만 나름대로의 지모가 있다) 초단 (守拙(수졸)-졸렬하게나마 자신을 지킬 줄 안다)
525    날개 달린 "혀의 시인" - 책이여! 빠이빠이~... 댓글:  조회:4749  추천:0  2016-10-20
  SNS 공유 및 댓글 SNS 클릭 수   1963년 8월 워싱턴DC 민권 운동 당시 존 바에즈(오른쪽)와 함께한 밥 딜런. [중앙포토] 구르는 돌 (rolling stone)이 노벨상을 받았다. 길고양이가 왕관을 쓴 것이다. 스웨덴 한림원은 펜이 아니라 혀에, 책이 아니라 발성기관에 노벨문학상을 바쳤다. 뮤지션 성기완이 본 밥 딜런 거칠고 해학적인 민중의 언어 사용 근엄한 근대 문학 이제 무덤 속으로 반전의 상징, 날개 달린 혀의 시인 그러나 당신, 이 상 어울리지 않아 갑자기 6년 전의 감격이 떠오른다. 2010년 3월31일,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그를 직접 보았다. 정규 레파토리를 마친 후, 그는 첫 번째 앵콜곡으로 ‘구르는 돌처럼 (Like a Rolling Stone)’을 불렀다. 울 뻔 했다. “기분이 어떠냐구! / 완전 혼자 집도 절도 없이 / 구르는 돌처럼.” 그는 그렇게 살아왔다. 집도 절도 없이. 밥 딜런의 투어를 ‘네버 엔딩 투어(Never Ending Tour)’라 부른다. 1988년 6월에 시작해서 계속되고 있다. 1963년 발매 된 2집 앨범 ‘Freewheelin’ Bob Dylan’ 표지. [중앙포토] 일찍이 100년 전 프랑스 시인 랭보가 ‘나의 방랑(Ma Boheme)’에서 가르친 대로, 그와 수많은 길 위의 음유시인들은 길에서 운율을 읊조렸다. 그들은 랭보의 후배들이다. 랭보는 길 위에 시와 웃음과 눈물을 뿌리고 다녔던 수많은 중세 음유시인들의 후예다. 밥 딜런의 읊조림은 아메리카로 이주한 유럽의 최하층 노동자들의 목소리였다. 그들의 혀는 노동현장에서, 에팔레치아 산맥의 거친 숲 속에서 시를 읊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프리카에서 팔자에도 없이 팔려와 노예 생활을 한 흑인들의 블루스가 없었다면 밥 딜런은 존재하지 않는다. 블루스 뮤지션들의 서러움과 아픔 없이는 록큰롤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스웨덴 한림원은 수상의 이유를 “미국의 위대한 음악 전통 안에서 새로운 시적인 표현을 창조했다”고 밝혔다. 길에서 시를 읊은 위대한 무명의 음유시인들 모두가 이 상을 공동수상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맥 더 핑거가 루이 더 킹에게 말했네 / 나는 마흔 개의 붉고 희고 푸른 신발끈이 있어 / 울리지 않는 천 개의 전화통도.” 1964년 미국 풀뿌리 저항운동을 상징하는 포스터 앞에 선 밥 딜런. [중앙포토] 밥 딜런의 명곡 ‘다시 가본 61번 고속도로(Highway 61 revisited)’에 나오는 가사다. 아마 지금쯤 ‘울리지 않던 천 개의 전화통’에서는 불이 나고 있겠지. 이 가사에는 대중가요의 상투형과 초현실주의가 뒤섞여 있다. 맥 더 핑거와 루이 더 킹은 이처럼 멋진 운율을 아무리 읊어도 노벨상을 받을 수는 없었다. 이것을 문학으로 볼 것인가? 그동안 스웨덴 한림원은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왜? 저작권이 있는 책을 문학의 개념과 동일시해온 서양 근대문학제도의 암묵적인 검열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근대의 문학은 이제 무덤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도박사들이여 안녕. 책이여 안녕. 이제 당신들에게는 작별인사를 나눌 때가 됐네. “떠나기 전에 커피나 한 잔 더 하시지” (One More Cup of Coffee).   2004년 발매 된 밥딜런 자서전 표시. 그가 직접 타이프를 치며 쓴 책이다. [중앙포토] 밥 딜런은 바람과 길의 정치학을 독설 섞인 민중의 언어로 풀어낸 사람이다. 이 예언자는 사람들에게 바람의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설파한다. “얼마나 더 먼 길을 가야만 사람들은 사람다워질까? 얼마나 더 멀리 바다를 날아가야만 비둘기는 쉴 수 있을까?” (‘바람이 불러주는 노래 Blowin’ in the Wind’). 그러나 모든 선지자들이 그렇듯, 그 답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오직 바람의 소리를 들으라고 전할 뿐이다. 1941년, 미네소타의 시골 마을에서 로버트 알렌 짐머맨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밥 딜런. 잘 알려진 대로 시인 딜런 토마스를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자신의 예명을 밥 딜런으로 바꾸고 시인의 혀를 달고자 했던 사람이다. 시의 영혼은 하나의 매체에 머무르지 않는다. 시는 여기 저기 떠돈다. 밥 딜런은 ‘영속되는 순간적 이미지’라는 표현을 쓴 바 있다. 시의 혀가 풀리는 순간, 노래의 날개가 푸득거리는 순간, 사람의 무의식 깊이 들어 있는 신화 이전의 보편성이 떠오른다. 그 보편성은 숨김없는 열망을 담고 있으므로 미래의 시간에 대한 진보적인 전망이 된다. 밥 딜런은 거칠고 해학적인 민중의 언어로 바로 그 순간을 붙들어 우리 앞에 펼쳐 보인 20세기 최고의 음유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끝없는 길 위의 삶, 시의 혼은 혀에서 혀로 방랑한다. 청산별곡을 쓴 고려 음유시인의 혀가 19세기 랭보의 혀다. 그리고 그의 혀가 우리 시대 딜런의 혀다.   성기완 계원예술대 융합예술과 교수 영원한 반전의 상징, 날개달린 혀의 시인, 대중적 정서의 뿌리를 캐내는 땅꾼 밥 딜런! 노래와 시의 양 날개로 퍼드덕거리며 완고한 한국의 문화계에서 겨우 버텨온 나로서는 가슴 한 켠에 뭉클한 설움이 몰려오는 것도 사실이다. 왠지 그에게 뜨거운 축하의 박수를 보내면서도, 이 한 마디를 덧붙이고 싶다. DA 300   밥. 축하해. 그러나 당신도 알지? 당신에게 이 상은 어울리지 않아. 성기완 계원예술대 융합예술과 교수 [출처: 중앙일보] 그는 랭보의 후예…길 위에서 눈물·웃음 뿌린 음유시인
524    ~&~&~ 댓글:  조회:4705  추천:0  2016-10-19
One More Cup Of Coffee 당신의 달콤한 숨결 하늘에 빛나는 보석 같은 당신의 두 눈 당신의 부드러운 머릿결 베개에 머리를 대고 반듯이 누워  하지만 나는 그 어떤 것도 느낄 수 없어 어떤 사랑이나 당신의 헌신은 내가 아닌 하늘의 별을 향하고 있지 떠나기 전에 커피 한 잔만 더    저 계곡 아래로 무법자인 당신 아버지는 방랑을 일삼는 사람 그가 당신에게 어떻게 선택을 하는지 어떻게 칼을 던지는지 가르쳐 줄 거야 그가 지배하는 그의 왕국에 이방인이 들어올 수 없어 떨리는 그의 목소리 음식 한 그릇을 더 달라고 말할 때 길을 나서기 전에 커피 한 잔만 더 저 계곡 아래로 당신의 자매가 그 미래를 봐 당신의 엄마와 너처럼 당신은 읽고 쓰는 걸 배우지 못했어    선반에는 책이 없지 그리고 당신은 만족할 줄 몰라 당신의 목소리는 종달새 같아 하지만 너의 마음은 바다와 같아 알 수 없고 어둡지 길을 나서기 전에 커피 한 잔만 더 계곡 아래로.    [출처] 노벨문학상 수상자 ‘밥 딜런’ 노래 가사 모음|작성자 종로공무원   밥 딜런의 노래를 “귀를 위한 시”라고 합니다. Mr Tambourine Man 이 봐 미스터 탬버린이 맨, 나에게 음악을 연주해줘 난 졸리지 않고, 내가 가야 할 곳도 없다네 이 봐 미스터 탬버린이 맨, 나에게 음악을 연주해줘 쟁글쟁글 아침에 나는 너를 따라갈 거야. 하나 나는 알지. 저녁의 제국이 모래로 돌아가버렸음을, 내 손에서 사라져 버렸음을. 나를 이곳에서 눈이 멀도록 내버려 두었지만 여전히 졸리진 않지. 피로함이라는 것은 늘 나를 놀라게 만들지, 나는 발등에 낙인이 찍혀버렸어. 나는 만날 이가 없다네. 그리고 고대의 빈 거리들은 꿈꾸기에는 이미 죽어버렸지    이 봐 미스터 탬버린이 맨, 나에게 음악을 연주해줘 난 졸리지 않고, 내가 가야 할 곳도 없다네 이 봐 미스터 탬버린 맨, 나에게 음악을 연주해줘 징글쟁글 아침에 나는 너를 따라갈 거야. 나를 여행에 데려가 줘. 너의 마술처럼 소용돌이치는 배로. 나의 감각들은 발가벗겨졌고, 나의 손은 더 이상 쥔 느낌이 없다네. 나의 발들은 걷기에는 감각이 무뎌져 버렸고, 오로지 부츠 힐만을 기다린다네 정처 없이 방황하기 위하여 나는 어디든 갈 준비가 되어있다네, 나는 사라질 준비가 되어있다네 나만의 퍼레이드 속으로 나는 그 안으로 가라앉겠노라.    이 봐 미스터 탬버린맨, 나에게 음악을 연주해줘 난 졸리지 않고, 내가 가야 할 곳도 없다네 이 봐 미스터 탬버린맨, 나에게 음악을 연주해줘 징글쟁글 아침에 나는 너를 따라갈 거야.    네가 태양을 미친 듯 돌리고 흔들면서 웃는 소리를 듣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누구도 노리지 않았어, 난 그저 도망치고 있어. 그러나 하늘에게는 벽이 없지. 그리고 네가 음운의 실패(reel)를 지나쳐가는 희미한 흔적을 듣는다면 그 순간 너의 탬버린한테는, 이건 그저 뒤처진 넝마 같은 광대일 뿐이야. 나는 그 마음의 값을 치르지 않을 거야, 이건 그저 그림자일 뿐이야. 너는 그가 쫓는 것을 지켜보고 있지.    이 봐 미스터 탬버린맨, 나에게 음악을 연주해줘 난 졸리지 않고, 내가 가야 할 곳도 없다네 이 봐 미스터 탬버린맨, 나에게 음악을 연주해줘 징글쟁글 아침에 나는 너를 따라갈 거야.    내 마음속 연기로 만든 링으로, 나를 사라지게 해줘. 안개로 찬 시간의 파멸 아래로, 지나간 얼어붙은 나뭇잎들 귀신들린, 두려움에 떠는 나무들, 바람 부는 해변 가를 향해 미친 슬픔을 향한 뒤틀린 접근으로부터 멀리 그래, 다이아몬드 스카이 밑에서 춤추기 위해서 동그라미를 그리는 서커스 모래의 바다 위로 어른거리는, 넘실대는 자유의 손을 잡고 모든 기억들과 파도 아래로 깊게 몰아치는 운명들과 함께 (춤을 추기 위해)    이 봐 미스터 탬버린맨, 나에게 음악을 연주해줘 난 졸리지 않고, 내가 가야 할 곳도 없다네 이 봐 미스터 탬버린맨, 나에게 음악을 연주해줘 징글쟁글 아침에 나는 너를 따라갈 거야.   Don't Think Twice, It's Alright    자. 앉아서 왜 그럴까 고민해봤자 소용없어요 어차피 중요한 일도 아니니까요 앉아서 걱정해 봐도 부질없는 일이에요 이제 곧 수탉이 울고 동이 틀 것을 모르시나요 창밖을 내다봐요, 나는 이미 사라져버렸을 테니 그대는 내가 계속 떠돌고 있는 이유랍니다 자꾸 생각하지 말아요. 다 괜찮아질 테니까    그대 방에 불을 켜봤자 소용없어요 그 불빛을 나는 보지 못할 테니 그대여, 불을 켜봤자 소용이 없답니다 나는 길의 어두운 쪽을 걷고 있으니까요 내 마음을 바꾸어 머무르게 할 그 무언가를 그대가 말해주길 여전히 바라면서 하지만, 어차피 우리는 그다지 많은 얘길 나누지 못했죠 그냥 잊어버려요, 모두 끝난 일이니까   [출처] 노벨문학상 수상자 ‘밥 딜런’ 노래 가사 모음|작성자 종로공무원 내 이름을 외쳐 불러도 헛일이랍니다, 내 사랑 그대는 결코 그렇게 한 적이 없었지요 내 이름을 불러봐도 소용없어요 나는 더 이상 당신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답니다 나는 생각에 잠겨 떠돌고 있어요, 길을 따라 걸으면서 한때 한 여인을 사랑했었지요-나를 어린애라고 부르던 여자를 그녀에게 내 마음을 주었지요, 그러나 그녀는 내 영혼을 원했답니다 자꾸 생각하지 말아요, 다 괜찮아질 테니    그럼 잘 있어요, 내 귀여운 사람 어디로 가는지는 말할 수 없답니다 ‘안녕’이라는 말은 너무 절실한 말 나는 단지 말하겠어요, ‘잘 있어요’라고 그대가 내게 냉정했다고는 하지 않겠어요 물론 더 잘해줄 수도 있었겠지만, 뭐 다 그런 거죠. 그대는 내 소중한 시간을 흘려보내 버렸을 뿐 하지만 더는 생각하지 말아요, 다 끝났으니까.                 [출처] 노벨문학상 수상자 ‘밥 딜런’ 노래 가사 모음|작성자 종로공무원       [출처] 노벨문학상 수상자 ‘밥 딜런’ 노래 가사 모음|작성자 종로공무원     [출처] 노 나의 발들은 걷기에는 감각이 무뎌져 버렸고, 오로지 부츠 힐만을 기다린다네 정처 없이 방황하기 위하여 나는 어디든 갈 준비가 되어있다네, 나는 사라질 준비가 되어있다네 나만의 퍼레이드 속으로 나는 그 안으로 가라앉겠노라.    이 봐 미스터 탬버린맨, 나에게 음악을 연주해줘 난 졸리지 않고, 내가 가야 할 곳도 없다네 이 봐 미스터 탬버린맨, 나에게 음악을 연주해줘 징글쟁글 아침에 나는 너를 따라갈 거야.    네가 태양을 미친 듯 돌리고 흔들면서 웃는 소리를 듣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누구도 노리지 않았어, 난 그저 도망치고 있어. 그러나 하늘에게는 벽이 없지. 그리고 네가 음운의 실패(reel)를 지나쳐가는 희미한 흔적을 듣는다면 그 순간 너의 탬버린한테는, 이건 그저 뒤처진 넝마 같은 광대일 뿐이야. 나는 그 마음의 값을 치르지 않을 거야, 이건 그저 그림자일 뿐이야. 너는 그가 쫓는 것을 지켜보고 있지.    이 봐 미스터 탬버린맨, 나에게 음악을 연주해줘 난 졸리지 않고, 내가 가야 할 곳도 없다네 이 봐 미스터 탬버린맨, 나에게 음악을 연주해줘 징글쟁글 아침에 나는 너를 따라갈 거야.    내 마음속 연기로 만든 링으로, 나를 사라지게 해줘. 안개로 찬 시간의 파멸 아래로, 지나간 얼어붙은 나뭇잎들 귀신들린, 두려움에 떠는 나무들, 바람 부는 해변 가를 향해 미친 슬픔을 향한 뒤틀린 접근으로부터 멀리 그래, 다이아몬드 스카이 밑에서 춤추기 위해서 동그라미를 그리는 서커스 모래의 바다 위로 어른거리는, 넘실대는 자유의 손을 잡고 모든 기억들과 파도 아래로 깊게 몰아치는 운명들과 함께 (춤을 추기 위해)    이 봐 미스터 탬버린맨, 나에게 음악을 연주해줘 난 졸리지 않고, 내가 가야 할 곳도 없다네 이 봐 미스터 탬버린맨, 나에게 음악을 연주해줘 징글쟁글 아침에 나는 너를 따라갈 거야.     [출처] 노벨문학상 수상자 ‘밥 딜런’ 노래 가사 모음|작성자 종로공무원 나의 발들은 걷기에는 감각이 무뎌져 버렸고, 오로지 부츠 힐만을 기다린다네 정처 없이 방황하기 위하여 나는 어디든 갈 준비가 되어있다네, 나는 사라질 준비가 되어있다네 나만의 퍼레이드 속으로 나는 그 안으로 가라앉겠노라.    이 봐 미스터 탬버린맨, 나에게 음악을 연주해줘 난 졸리지 않고, 내가 가야 할 곳도 없다네 이 봐 미스터 탬버린맨, 나에게 음악을 연주해줘 징글쟁글 아침에 나는 너를 따라갈 거야.    네가 태양을 미친 듯 돌리고 흔들면서 웃는 소리를 듣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누구도 노리지 않았어, 난 그저 도망치고 있어. 그러나 하늘에게는 벽이 없지. 그리고 네가 음운의 실패(reel)를 지나쳐가는 희미한 흔적을 듣는다면 그 순간 너의 탬버린한테는, 이건 그저 뒤처진 넝마 같은 광대일 뿐이야. 나는 그 마음의 값을 치르지 않을 거야, 이건 그저 그림자일 뿐이야. 너는 그가 쫓는 것을 지켜보고 있지.    이 봐 미스터 탬버린맨, 나에게 음악을 연주해줘 난 졸리지 않고, 내가 가야 할 곳도 없다네 이 봐 미스터 탬버린맨, 나에게 음악을 연주해줘 징글쟁글 아침에 나는 너를 따라갈 거야.    내 마음속 연기로 만든 링으로, 나를 사라지게 해줘. 안개로 찬 시간의 파멸 아래로, 지나간 얼어붙은 나뭇잎들 귀신들린, 두려움에 떠는 나무들, 바람 부는 해변 가를 향해 미친 슬픔을 향한 뒤틀린 접근으로부터 멀리 그래, 다이아몬드 스카이 밑에서 춤추기 위해서 동그라미를 그리는 서커스 모래의 바다 위로 어른거리는, 넘실대는 자유의 손을 잡고 모든 기억들과 파도 아래로 깊게 몰아치는 운명들과 함께 (춤을 추기 위해)    이 봐 미스터 탬버린맨, 나에게 음악을 연주해줘 난 졸리지 않고, 내가 가야 할 곳도 없다네 이 봐 미스터 탬버린맨, 나에게 음악을 연주해줘 징글쟁글 아침에 나는 너를 따라갈 거야.     [출처] 노벨문학상 수상자 ‘밥 딜런’ 노래 가사 모음|작성자 종로공무원벨문학상 수상자 ‘밥 딜런’ 노래 가사 모음|작성자 종로공무원  
523    ~@~@~ 댓글:  조회:7647  추천:0  2016-10-19
밥 딜런 가사.     밥 딜런 악보.       밥 딜런 노래 가사 Mama,take this badge off of me. 엄마, 이 뱃지를 떼어주세요. I can't use it anymore. 난 더이상 이걸 사용할수 없어요. It's gettin' dark, too dark to see. 점점 너무 어두워져서 볼 수가 없어요. I feel I'm knockin' on Heaven's door. 마치, 천국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두드려요. 천국의 문을...천국의 문을 두드려요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두드려요. 천국의 문을...천국의 문을 두드려요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두드려요. 천국의 문을...천국의 문을 두드려요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두드려요. 천국의 문을...천국의 문을 두드려요 Mama, put my guns in the ground. 엄마, 내 총들을 땅에 내려주세요 I can't shoot them anymore. 난 더이상 그 총들을 쓸 수 없어요. That long black cloud is comin' down. 길고 어두운 구름이 다가오고 있어요. I feel I'm knockin' on Heaven's door. 마치 천국의 문을 두드리는 것 같이..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두드려요. 천국의 문을...천국의 문을 두드려요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두드려요. 천국의 문을...천국의 문을 두드려요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두드려요. 천국의 문을...천국의 문을 두드려요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두드려요. 천국의 문을...천국의 문을 두드려요 [*]=  밥 딜런은   10분 만에 이 노래를 썼다고 합니다.      [출처] 노벨문학상 수상자 ‘밥 딜런’ 노래 가사 모음|작성자 종로공무원============================================== === 반전과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며  마치 음유시인처럼 포크송을 노래하는 가수 ㅡ 밥 딜런 가장 인기 있는  대표적인 노래 가사를 감상해보시죠~~^^   불어오는 바람 속에( “Blowin’ in the wind”)     밥 딜런 노벨문학상 수상!  "Blowin’ in the Wind" 불어오는 바람 속에  노래: Bob Dylan(밥 딜런)    1절 가사 How many roads must a man walk down   사람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Before you call him a man?   사람이라고 불어오는 바람 속에( 수 있을까?      Yes, 'n' how many seas must a white dove sail   흰 비둘기는 얼마나 많은 바다를 건너야    Before she sleeps in the sand?   모래밭에서 편안히 잠들 수 있을까?    Yes, 'n' how many times must the cannon balls fly   얼마나 많은 포탄이 날아가야    Before they're forever banned?   영원히 불릴 금지될 수 있을까?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 in the wind,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결에 흩날리고 있다네    The answer is blowin' in the wind.   그 답은 불어오는 바람 속에 있다네   2절 가사 Yes, ‘n’ how many years can a mountain exist   산은 얼마나 오랜 세월을 서있어야    Before it's washed to the sea?   바다로 씻겨갈 수 있을까?      Yes, 'n' how many years can some people exist   도대체 얼마나 많은 세월을 살아야     Before they're allowed to be free?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Yes, 'n' how many times can a man turn his head,   도대체 얼마나 여러 번 고개를 돌려야    And pretend that he just doesn't see?   보이지 않는 척할 수 있을까?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 in the wind,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결에 흩날리고 있다네    The answer is blowin' in the wind.   그 답은 불어오는 바람 속에 있다네.            3절 가사 Yes, ‘n'’ how many times must a man look up   사람은 얼마나 여러 번 올려다봐야    Before he can see the sky?   하늘을 볼 수 있을까?    Yes, 'n' how many ears must one man have   도대체 얼마나 많은 귀가 있어야    Before he can hear people cry?   사람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Yes, 'n' how many deaths will it take till he knows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That too many people have died?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까?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 in the wind,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결에 흩날리고 있다네    The answer is blowin' in the wind.   그 답은 불어오는 바람 속에 있다네.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음반 판매량이 고공행진한답니다.          forever young    하느님이 널 축복하고 항상 지켜주리다 네 모든 소망들은 이루어 지리다 항상 다른 이들을 위해 행하고 다른 이들이 너를 위해 행하도록 하리다 별까지 닫는 사다리를 만들어 단마다 딛고 올라가리다 너 영원히 젊게 있으리다, 영원한 젊음, 영원한 젊음 너 영원히 젊게 있으라 올바르게 자라나리다 진실되게 자라나리다 언제나 진실을 알며 네 주의의 빛들을 보리다 언제나 용기를 갖고 당당하게 서서 강해지리다 너 영원히 젊게 있으리다 영원한 젊음, 영원한 젊음 너 영원히 젊게 있으리다.            [출처] 노벨문학상 수상자 ‘밥 딜런’ 노래 가사 모음|작성자 종로공무원  
522    "록", ㅡ미치광이가 머리속에 들어 있다... 댓글:  조회:4953  추천:0  2016-10-19
록 음악의 탄생   쉽게 설명하자면 록 음악은 음악이 풍요롭지 못하던 1950년대 초에 탄생되었다. 그 당시 미국과 영국의 음악은 블루스가 재즈로 발전되어 있었으며 목소리 위주의 스탠다드 음악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또 민속적인 음악을 바탕으로 한 포크와 컨트리도 기본적으로 시대와 같이 융합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 당시에는 시끄러운 록음악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젊은 음악인들 사이에는 보다 힘있고 강력하면서도 무언가 다른 음악을 시도하고자 노력하였다. 바로 이러한 움직임이 록운동(Rock Movement)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그동안 즐겨 연주했던 만돌린이나 벤조, 어쿠스틱 기타 대신에 전기 기타를 이용한 증폭장치에서 표출되는 고출력 사운드를 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움직임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그의 출연으로 조용하고 점잖던 음악계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음악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좋던 싫던 간에 록 음악은 젊은이들을 사로잡아 나아갔으며 그것을 모티브로 각기 다양한 록음악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부모와 자식간에는 음악으로 인한 세대차이가 생겨 났는데 그것은 프랭크 시나트라를 즐겨 듣던 부모세대와 하체를 유난히 흔들어대며 '불타는 사랑'(Buring Love)을 외쳐대던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을 좋아하는 젊은 펜들의 대립이었다. 부모는 TV에 비쳐지는 앨비스의 모습을 제지했지만 록음악의 물결은 더욱더 거세게 퍼져나갔다.   그러나 그당시의 록음악은 시대상과 어울려 극단적이지는 못했다. 다시말해서 파격적인 시도였지만 그이상의 광적임과 추앙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1954년부터 시작된 록음악은 젊은이들에게 움직임과 호흡하는 하나의 방법을 가르쳐 주었으며 더 나아가서 부모의 보호에서 자신의 노력으로 인하여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심어주었다. 이러한 가능성을 가지고 여러 젊은이들이 제2의 엘비스 프레슬리를 꿈꾸며 새로운 형태의 록음악을 만들어 나갔다. 1955년 부터 1960년대 까지 엘비스의 전성기 시절을 거쳐 1960년대 중반 부터 새로운 형태의 록음악이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어쿠스틱 기타위주의 포크음악에서 전기기타를 이용한 포크록이 밥딜런을 비롯하여 탄생되었고 컨트리도 컨트리록 스타일로 변형되었다. 기존 블루스 스케일에 록을 접목시킨 블루스 록, 환각적이고 충동적인 사운드를 주로 표출한 사이키델릭 록도 출연하였다. 또 다양한 음의 표현에 중점을 둔 프로그레시브 록도 생겨났다. 이러한 각 분야에 록의 개념이 융합되자 대중적인 지지도에서 세분화되는 인기도가 형성되계 되었다. 다시 말해 엘비스가 록이었을 때는 그만 좋아하면 되었지만 음악 장르와 뮤지션을 선택할 수 있게 되자 전체적인 통일감을 형성하지는 못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록은 대중적인 지지력을 어느정도 상실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1955년부터 1969년까지) 미국의 주간 음악 전문지 빌보드 집계로 살펴볼때 재미있는 것은 그룹들이 대중의 인기를 받았다는 점인데 그것은 바로 엘비스가 솔로였던것에 반에 음악성이 융합된 다시 말해 목소리에서 사운드로 변모된 스타일을 대중들이 원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1964년 비틀즈의 미국 상륙으로 인하여 불을 당긴 그룹 열기는 록 음악의 개념을 사운드 위주로 감상하도록 종용하였으며 그후 각기 각양의 사운드로 채색된 다양한 록음악이 공존하게 되었다.  솔로 위주의 록음악에서 그룹으로 변모된 록음악은 다양한 장르로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비틀즈 이후 그룹들은 앞서 언급한 포크록, 컨트리록, 사이키델릭록, 프로그레시브록등으로 각기 특색있는 사운드를 표출하면서 록음악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후 다시 획기적인 충격을 가한 록음악이 등장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하드록의 출현이었다. 미국의 젊은이들을 40만명이상이나 끌어들인 대규모의 공연 우드스탁의 '평화의 제전'이 치루어진 1969년에 하드록은 탄생되었다. 그 음악은 엘비스가 출현하여 전기 기타를 이용한 폭발적인 모습에 더욱더 위력이 가세한 사운드로 형태를 갖추어 젊은이들을 열광시켰다. 하드록 사운드의 주역은 레드 제플린, 딥 퍼플, 지미 헨드릭스등이었고 그들은 엘비스 못지않은 지지도와 인기 그리고 시대상을 반영한 음악성으로 확고한 명성을 획득하여 나아갔다. 1954녀 탄생된 록음악이 15년만에 더욱더 파위풀하게 된것이다. 그들의 앨범은 빌보드 차트의 정상을 차지 했으나 다른점이 있다면 싱글힛트는 하지못했다. 그것은 엘비스의 록음악에서 이제 스타를 원하는것이 아닌 사운드에 중점을 두는 그룹을 원할 뿐 스타는 크게 원하지 않는다는 모습을 입증해 주었다. 더욱더 가사, 사운드, 테크닉 등에 귀를 기울인 록음악 팬들은 1970년대로 접어들어 보컬, 기타, 베이스, 드럼, 키보드등의 기본 라인업에서 더욱더 다양하고 신비로운 음의 세계를 원했고 그같은 영향으로 재즈록, 글램록, 모던록, 아트록, 일렉트릭록, 헤비메틀 등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발전과정은 미국과 영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비록 소규모 였지만 이태리, 프랑스, 독일등 유럽에도 영향을 미쳤다. 각국은 그들의 개성적인 음악 분위기를 록에 결합시켜 프랑스에서는 아방가르드적인 요소를, 독일에서는 무그의 영향을 받은 전자음악이, 그리고 이탈리아에서는 록이 클래식과 결합된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TV쇼와 FM라디오등 매스미디어의 발달은 록을 미국과 영국뿐만이 아니라 제 3세계에까지 광범위하게 퍼뜨리게 하는 것이었고 지금은 지구상의 전국가에서 록이 미치는 영향은 지대한것이다. 1985년 7월에 있었던 아프리카의 기아 남민을 돕기 위한 '라이브 에이드 콘서트'를 계기로 소련에도 록그룹이 있다는 새로운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으며 록음악이 이미 전세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문화 장르임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게 되었다.    록음악의 세계적 공시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록음악은 그 중심국가 뿐만 아니라 공산국가에도 그 사회체제에 관계없이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60년대 이후 록음악은 청소년들사이에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현재 10여개가 넘는 공식화된 소련의 록그룹이 활동 중에 있고 동독에서는 현재 5000여 아마추어와 120여개의 전문 록그룹이 국영 레코드회사를 통해 연간 50 만장이 넘는 레코드를 찍어내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공산국가에서 뿐만아니라 제3세계 국가들에도 마찬가지여서 우리나라에는 이미 1970년대초 신중현을 탄생시킨 바 있다. 다시말해 록은 오래전부터(적어도 70년대이후) 전세계적인 음악이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문화적 공시화'란 개념으로 설명한 햄린크의 견해는 이렇다. 그가 언급한 '문화적 공시화'란 개념은 모든 인간 사회의 문화 체계는 환경에 대한 기술적, 상징적, 사회적 적응을 통한 생존투쟁의 결과이며 문화적 자율성은 모든 사회의 독립과 발전에 필수적인 것이다. 인간의 문화는 역사상 꾸준히 서로 영향을 끼쳐왔고 '고급'문화와 '저급'문화사이에 상호작용이 있었지만 상대문화의 특정양상을 받아들여 자국의 총체성을 유지한채 다양하게 발전해 왔다. 그런데 20세기의 후반부에 들어오면서 전례없이 세계적 차원에서 특정 문화형태의 공시화 현상이 일어났다. 문화 제국주의는 문화적 공시화가 발생하는 가장 빈번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며 소련의 대중매체가 수많은 서구의 상징들과 문화물 형식들을 채택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떤 명백한 자본주의적 관계가 없을지라도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문화적 공시화 과정은 중심국가내의 특정한 문화적 발전 형태가 설득적으로 수신국가들에게 전달되는 것, 문화적 산물이 한 방향으로 유통하면서 근본적으로 공시적 양태를 갖게 됨을 의미한다. 그 과정에서 그 지역의 사회적 창의성과 문화적 창조성은 혼동되거나 결정적으로 파괴된다. 또한 수세기 동안 발전해 온 인간적 가치들의 고유한 차원은 급속히 사라져간다. 그러므로 문화적 공시화란 어떤 국가의 문화적 발전에 대한 의사결정들이 강력한 중신국가의 이익과 필요에 적합하도록 되고 수신국가가 그것을 필요로 하는지를 고려하지 않은 채 교묘하면서도 파괴적인 효과를 행사하는 것이라 정의될 수 있다. 록음악과 그것에 기반한 대규모 콘서트등 미디어 이벤트들이 구현하는 '우리주의'의 효과는 앞서 설명한 문화적 공시화의 효과를 잘 설명해 주는 것이다. 이미 록 음악이 전세계 젊은이들에게 공통된 부분이라고 할때 이들 록의 중심국가들이 중심이 된 대규모 미디어 이벤트들이 외쳐대는 이른바 우리주의(We-ism)는 제3세계 국가뿐만이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에까지도 효과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록음악은 발생기에서부터 청소년층의 자기확인, 사회적 정체성의 구현수단이었으며 록음악을 잘 아는 청소년이 소그룹의 지도자 역할을 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다시 말해 록음악은 지금까지 청소년들의 개인성을 실현시키는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해 왔다는 뜻이다. 이런 록음악의 청년 문화적 특성과 함께 록음악이 스스로 간직 한 포크 이데올로기 - 록음악이 자신과 팝음악의 구분을 위해 공동체가 자발적으로 음악을 생산하고 생산자와 청중의 삶의 양식이 동일한 음악 형태인 포크음악의 성질을 진취해서 록음악은 상업적일지라도 어떤 공동체를 상징한다고 표상하는 것을 말한다 - 에 기초한 '록 공동체'의 발생은 록이 중심국인 미국과 영국내에서 뿐만이 아니라 제3세계에 더욱더 그 영향력을 높여갔고 록음악의 미국 내적 변화와 전세계적인 확산은 두개의 커다란 록이벤트인 1969년의 히피 운동과 반문화 운동의 상징이었던 '우드스탁 '콘서트, 1985년에 아프리카의 기아를 돕기위해 열렸던 '라이브 에이드'콘서트의를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우드스탁 '이 3일 동안 50여만명의 히피 추종자들이 모여서 반전, 반권위, 진보를 외쳤던 반면에 '라이브 에이드'는 17시간동안 9만여 관람객과 15억에 달하는 세계의 시청자를 겨냥해서 인도주의를 외쳤던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한 언론의 담론을 통해 가장 빈번히 등장했던 단어들은 '세계는 하나', '우리는 세계', '전세계에 록을'등 세계를 '우리'란 통합체로 묶으려는 것들이었고 사회주의 국가들도 이에 마지못한 듯이 동조했다. 분명히 록음악은 록음악과 록운동은 이것이 시작되었던 그때부터 젊은이들이 주체가 된 형태로 나타났고 일견 그러한 모습을 보여왔다. 그리고 또 이것이 발현된 시기에는 확실히 이것들은 심각하고 진지하게 젊은이들에게 다가오는 그 무엇이었다. 어떤 평론가는 록음악을 가리켜 하나의 도전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음악적으로는 기존 양식에 대한 불만이며 정신적으로는 구차한 인습에 대한 거부이다. 그것은 언제나 한 시대의 가장 극단에 서서 사물을 보며 모든 도덕적, 관념적 권위에 대해 정공법적으로 대항해 왔다. 때문에 록은 대내적으로는 선배들의 낡은 연주방식에 대한 성토의 역사이며, 대외적으로는 모든 도덕적 권위주의자들과의 투쟁이다.'라고 역설하고 있다. 이글이 바로 록을 가장 적절히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젊은이들에게 록은 언제나 그렇게 비쳐져 왔다. 그렇기에 록음악의 정체성은 그 음악적인 특질보다는 록음악이 구현하는 록이데올로기의 관철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록이데올로기의 이상적 구현을 우리는 '우드스탁 '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69년 8월 15일에서부터 19일까지 사흘에 걸쳐 개최된 역사적인 사랑과 평화의 제전인 우드스탁 록 페스티발은 그야말로 록의 역사상 전 대미문의 경이를 선사한 이벤트이다. Woodstock Art & Music Festival이라 명명된 이 행사는 67년의 몬트레이 팝으로부터 시작된 록 페스티발의 결정으로서 자리하며 록 문화의 전설로서 각인되었다. 그 당시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50여만명의 플라워 칠드런들이 사랑과 평화의 숭고한 이념을 실현한 우드스탁 페스티발은 실제 우드스탁 (뉴욕근교의 조그만 마을)과는 55마일이나 떨어진 낙농업자 맥스 야스거의 농장에서 Woodstock Nation이라 불리는 형이상학적 정신국가를 건설하려는 의지와 함께 탄생하였다. 출연진 역시 당시로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것으로서 우드스탁 아트 & 뮤직 페스티발의 기획자는 마이클 랭이라는 청년이었다. 전문 프로모터가 아닌 그가 이런 초대형 이벤트를 성공시킨 사실은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우드스탁은 TV나 신문 라디오등의 대중 커뮤니케이션 매체를 이용하지도 않았으며 대대적인 홍보활동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 우드스탁의 성공 속에는 당시의 플라워 칠드런들이 구현하려 했던 '사랑과 평화'의 정신적인 모토가 깔려 있었다. 그것은 위선적이며 모순된 도덕관을 박차며 달리는 젊은이의 자화상 '이지 라이더'에서 보여진것과도 같은 행복으로 가는 길로의 도정이었으며 50만의 젊은이들에게 공통으로 작용한 공감된 연대감 - 음악과 결부된 휴머니즘의 발로로서 - 과 사랑이 존재하고 있었다. 사실 페스티발의 성사에는 최악의 조건들이 내재해 있었다. 지방관리들에게서 행사의 승인을 얻지못한 이유로 개인 소유농장에서 공연은 벌어져야 했고, 첫날 공연이 끝나가면서  모든 음식 공급은 고갈되어 버렸고 교통두절로 인해 식량의 재보급 또한 불가능하게 되었다. 페스티발의 기간중의 우천으로 관객들은 진흙탕에 앉아 공연을 관람해야 했으며 우드스탁 사방 20마일 내의 모든 도로는 통제 당했다. 후생시설 역시 최악으로써 간이 화장실은 미처 비울 틈도 없이 차 넘쳤으며 지방 행정 관리들은 이 지역을 재난 구역으로 공표해줄 것을 상부에 요청했다. 그러나 우드스탁에 모인 플라워 칠드런들은 산재한 열악함 속에서도 사랑과 평화를 느꼈으며 실천해 보였다. 고의나 악의적인 사고없이 펼쳐진 사흘간의 우드스탁은 일종의 정신국가인 우드스탁 네이션에 근접해 있었고 기존의 사호가가 현상과는 별개의 군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TIME지는 이 행사를 가르켜 '역사적으로 가장 큰 해프닝이며 새세대가 벌이는 정치적, 사회작 사건'으로 NEWS WEEK지는 '각 세대들이 갖고 있는 의식 세계를 살피는 대 전황점'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록문화의 잠재적인 상품적 가치가 하나둘씩 개발되어진 록의 산업화와 록문화의 구심체로 역할을 했던 라이브 콘서트를 스폰서한 미디어 이벤트에 의해 변질되는데에는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여기서 헤게모니의 구축을 목적으로하는 권력에 의해 록 음악은 명백히 극도로 발달된 미디어 기술에 이용당해 맥루하니즘을 구현함으로써 토대에 결여되어 있는 신뢰감과 공동체성을 위로부터 재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산되는 1985년의 '라이브 에이드'콘서트에 경우에 그 공동체는 문화산업이 닦아놓은 취향과 감수성에 기초한 것일 뿐, 거기에서 정치나 이데올로기는 산화되거나 심각하게 왜곡되어져 있다. '라이브 에이드'와 같은 미디어 이벤트 현상은 미국 중심의 대중문화가 자신의 감수성으로 세계를 묶을 수 있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며, 록음악이 이미 세계로 향한 권력의 통로가 되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록 이데올로기를 통한 권력의 효과적인 지배인 셈이다.    록음악을 통한 권력의 효과   이와 같이 록문화가 권력의 통로로서 사용되고 있는 실상을 확인하면서 록문화의 사회적 위상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이런 의문들이 등장할 것이다. 록음악은 계급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이 지배와 피지배를 발생시키는 어떤 특별한 힘을 행사하고 있는가? 록문화의 논리는 어떤것이며 그 문화는 궁극적으로 어떤것에 봉사하는가? 일반적으로 지금까지의 힘과 권력에 대한 연구들은 그것의 억압적 성격, 금지와 검열, 단일한 기제로 움직이는 입법적 권력리 테두리 내에서 수행되어 왔고, 나름대로 대상 영역에 있어 권력의 메카니즘을 분석해 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현재 일상 생활에서 피부로 느끼고 있는 여러가지 힘의 말초적 신경들이 억압적 성질만을 띈 것인가를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현재의 문화는 세계 어느곳에서나 사람들에게 지난 세기의 문화보다 많은 양의 자유와 선택권을 부여하고 있다. 금기시 되어 왔던 많은것들이 -  서양에서의 기독교 윤리관의 해체, 동성연애, 마약들의 일상화, 동양에서는 전통적 가족관의 붕괴, 혼전 성교 등등 - 일상적인 것이 되어가고 매스 미디어는 그것들을 광범위하게 전파시킨다. 이런 상황들이 우리는 더 이상 일상생활의 영역에 있어서는 어떤 힘의 영향하에, 권력의 지배하에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증거가 되는가? 아니면 다른 형태의 권력 이전보다 더욱 교묘한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후기 구조주의 학자 미셸 푸꼬는 권력의 역학과 그 효과에 대한 일련의 작업을 통해 억압이 아닌 상태로 작용하는 권력의 매카니즘을 매우 예리하게 분석해 내고 있다. 그의 권력의 매카니즘에 대한 논의는 텍스트 분석을 통한 담론 연구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론의 추상성의 한계를 넘어서서 구체적인 권력의 근원지와 그것의 다양한 전략에 관한 열린 시각을 제공한다. 그는 기존의 연구에 있어서 우익에서는 사법적인 맥락에서만, 좌익에서는 국가기구의 맥락에서만 권력을 논했을 뿐 권력의 그 특유의 속성과 전술적 기술을 발휘하며 구체적으로 그리고 세부적으로 어떻게 핼사되는가의 문제는 아무도 확인하려 들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권력에 접근하는 푸꼬의 이러한 입장은 서구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의 산물이라는 개별성을 지니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미 선진 자본주의에 의해 발전의 방향이 강요된 채 근대화를 겪어왔으며 그 결과 자본주의의 일반법칙이 중추적인 사회논리로 작용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도 단순한 '새로운 설명'의 제공을 넘어서서 더욱 개관적이고 현실적인 분석의 영역을 드러내 준다고 생각된다. 그가 권력이라고 부르는 것은 제도도 구조도 아니며 특정인에게 주어지는 권한도 아니다. '그것은 한 사회의 복잡한 전략적 상황에 붙인 이름이다.' 푸꼬는 시민들은 예속시키는 정치와 제도들, 합법적인 폭력을 사용하는 예속화의 양식들,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 지배의 일반 체계 등은 오히려 이와 같은 권력의 효과이며 결론적인 형태일 뿐이라고 한다. 우리가 권력을 이해하기 위해서 권력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은 권력의 행사와 그 조직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역학관계가 다양하다는 사실이며 그것이 끊임없는 대결과 투쟁을 통해 권력을 변형시키거나 강화시키거나 혹은 역류시키는 작용, 그것들이 일련의 고리와 체계 속에서 서로 의존하는 현상, 또는 어긋남과 반목을 통해 이합집산하는 현상, 마지막으로 권력의 효과가 집약되어 나타나는 전략인 것이다. 그렇다면 젊은이들의 문화, 세계적인 문화가 되어버린 록문화는 어떤 권력의 전략을 실천하고 있으며 어떤 효과를 발생시키고 있는가? 구체적으로 권력의 효과와 발생하는 전략을 분석해 나가려면 관련된 모든 영역에 대한 입체적인 논의가 필요한데 록문화 영역에서의 권력의 효과와 효율적인 분석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문화산업의 논리와 자본주의적인 성장치가 위에서 설명한 중심국의 정체성을 유지시키는 록 이데올로기의 영역과는 별도로, 집중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록문화를 통한 권력의 효과는 이런 각각의 매카니즘 사이의 상호관계 속에서 실천되는 것이며 사회적 조건에 따라 부분적이고 불안정한 상태에 있을 수도 있지만 현단계에서는 지배의 총체적인 효과를 발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록문화의 자본주의적 모습   50년대를 전후해 시작되어 60-70년대 그 절정에 들어선 '아메리칸 드림'과 '팍스 아메리카'로 대변되는 미국의 경제는 사상 유래없는 대 경제 호황 속에서 어느때보다도 활발한 대외 원조 활동과 경제적 여유를 누리며 전개된다. 전후의 베이비 붐을 타고 태어난 아이들은 이 시기에 청소년층을 형성하고 이들은 이러한 초호황의 경기 속에서 과거 그 어느때 보다 풍성한 젊은 시절을 보내게 된다. 또 문화 산업도 그 어느때보다도 많아진 청소년층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발전해 나가기 시작했다. 50년대를 걸쳐 60년대 중반까지의 활발했던 실황 공연이나, 그밖에 새로 등장한 TV와 이를 이용한 많은 청소년 대상의 프로그램들, 또 음반등, 특히 이당시 등장한 카세트 테이프는 음반의 가격을 대폭 낮추는 혁신적인 발명품으로 기존의 레코드 판뿐이었던 음반업계에 대단한 파문을 불러 일으켰고, 이것은 소비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의 결과를 불러 일으켰다. 이것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왔던 당시의 상황과 적절히 맞물리는 것이었는데, 이로써 음악은 더욱 그 소비자들 가까이에 다가설 수 있었다. 그러나 레코드가 미국에서 대중 상품으로 빠르게 성장한 것이 단지 앞서 말한 유효적절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할 수는 없으며 음악에 대한 소비자의 욕구때문은 더더욱 아니다.특히 60 년대 말에 이르러서 왜 레코드가 젊은이들에게 실황공연을 대체하는 강력한 상품이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어떤 아프리오리한 이유도 없었다. 이런 록음악의 경우와 유사한 예를 19세기와 20세기 초에 걸쳐 계속되어 온 영국의 뮤직홀 전통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시기 뮤직홀은 대단한 인기를 누리면서 그 수가 점점 증가해 갔는데, 영국의 노동자 계급에 가장 보편적인 대중문화의 향유와 보급은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뮤직홀은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돌아와 동료들과 함께 어울리는 장소로 그들은 25세 전후의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가벼운 술로 하루의 피로를 잊고 휴식을 취하며, 그들 나름대로의 계급적 동질성을 재확인했으며 지배층에 대한 비판을 주저하지 않았고, 그들의 문제점을 함께 생각하며 정치적 의식을 키워 나갔다. 이곳에는 예외 없이 이들이 즐길만한 음악 들이 연주되었는데 음악들도 정치적 상황에 따라 비판적이고 풍자적인 것으로 바뀌어 불려지곤 했던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임의 성격상 이곳에서는 거친 행동이나 사건들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이런 이유들로 급기야 의회는 뮤직홀 허가에 관한 법령을 제정해서 뮤직홀 설립의 시설과 설비요건을 규제했기 때문에  이들 하위문화의 주도적 중심체인 뮤직홀은 많은 경우 전업을 하거나 문을 닫아버렸고, 남게 된 홀도 기존의 이동식 좌석이 고정식 좌석으로 바뀌고 입장료의 요금도 인상되었는데 이로서 이른바 '뮤직홀 문화' 라고 불리던 하위문화의 구심체는 사그라들어 버렸다. 대중상품으로서의 레코드의 등장도 직접적인 노동계급의 의사소통 통로를 제거하려는 뮤직홀의 경우와 유사한 정치적 이유를 지녔다고 볼 수 있으며 또한 레코드가 대중 음악 전반에 걸쳐 특별한 사회적 가치를 갖게 된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즉 다시 말하면 이 시기를 전후해 청소년층의 자기확인, 사회적 정체성의 구현수단으로의 록음악이 그 소비의 형태에 있어서 콘서트 중심에서 대중 음반 산업 중심으로 변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록음악을 잘 아는 청소년이 소그룹의 지도자 역할을 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듯이 그들에게 록 아티스트의 레코드 소장 정도는 그가 얼마나 리더의 자격이 있는지를 가늠하는 일종의 척도로써 작용했고 이것은 음반의 소장가치를 높이는 것이었다. 자본 주의적 대중 음반 사업에서는 내용과 질에 있어서 대동소이한 수천 종의 음반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자유 경쟁을 하기 때문에 소비자는 수적으로 매우 광범위한 상품 선택권을 가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음반 산업은 소비자의 특별한 기호와 선택을 창출해야만 자유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고 이런 이유로 인해 대중음악에 대한 담론 내에서 낭만주의적 이데올로기가 극도로 발달하게 되었다. 낭만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대해 설명하자면 우선 낭만주의는 18-19세기의 문예조류로서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일련의 태도를 말한는데 그것은 자아표현에의 이상과 자유, 천재성의 강조, 일반적이고 이상적인 인과관계의 거부, 문예인의 사회로부터의 소외, 재능과 감수성을 지닌 자에 대한 근대 사회의 적의와 일상생활에의 혐오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대중 음악의 음반 산업의 영역에서 음악인들의 위치는 위와같은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와 같은 위치를 점유하도록 구성되며 이런 현상은 자작곡 가수와 그룹의 연주가 발달해 있는 록음악에 있어서 더욱 두드러진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유난히 록음악의 담론에 있어서 가수, 작곡자, 연주자들이 아티스트란 말로 불리우며 대중매체가 대대적으로 그들의 독특한 개성을 부각시키고 있음에서 잘 드러난다. 이런 낭만주의 시스템에속에서 각 음반회사및 대중 메체는 소비자의 특별한 기호와 선택을 창출할 목적으로 음악을 생산하는 생산자 즉 아티스트들에게 보증받을 수 있는 안전장치를 걸 필요가 있다. 이들 록스타들은 소속된 회사의 재산으로 명목화하여 회사의 고정자본으로 창출되어지고, 음반의 확실한 성공을 위해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이미 검증들로부터 록스타들은 '제조'되는 것이며  이것들은 낭만주의 이데올로기와 결합하여 다시 록스타들을 유일무이한 신으로 우상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금세기 최고의 엔터테이너로 불리는 마이클 잭슨경우 그가 이렇게 전세계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록스타가 된 이유가 단지 그의 음악이 전세계 팬들을 열광적으로 매료시킬만큼 충분히 훌륭한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록문화 산업은 회사에 고용되어 활동하는 록스타들뿐 아니라 과거의 이미 사라져버린 아티스트들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기도 한다.70년대 지미 핸드릭스, 제니스 조플린, 짐 모리슨의 3J의 요절은 지금까지도 록매니아 들에게 많은 잡담거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최근 올리버 스톤 감독의 'THE DOOR'란 영화로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화제거리가 되기도 했던 짐 모리슨은 그 의문에 싸인 죽음때문에 더욱 세인의 관심을 끌었었고 시내 중심가의 록 전문 상점을 통해 도어스의 많은 수입음반들이 판매되었다. 이에 앞서 미국에서는 지미 핸드릭스의 사망 32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전 앨범들이 발매되기도 했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즈의 앨범들은 기간을 두고 그 전 앨범들이 발매되고 있다는 사실은 기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최근에 한국에 대대적으로 프로그레시브 록, 특히 이탈리아의 프로그레시브 록이 심야 FM방송과 음반 업계를 통해 소비자들에게 소개되고 있는데, 이는 최근에 유럽을 통해 일어나고 있는 네오 프로그레시브 운동의 영향을 받은것으로 생각되어지는데 지금까지 비교적 생소한 영역이었던 유럽의 음악들을 소비자들에게 보급함으로써 소비자의 음악에 대한 다양성과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면이 없지 않을 것이지만 이것이 단지 소비자의 음악에 대한 욕구때문에 일어난 형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시장에 나온 상당한 부분의 유럽 프로그레시브 음반들은 모두 프로그레시브 음악이 저물어가던 70년대 이전의 작품들로 이들은 록 칼럼니스트에 의해 하나같이 모두 뛰어난 음악성을 가진 명반들로 공인되어 발매되고 있고 특히 특정 음반들은 높은 가치를 지닌 명반으로 취급되어 시내의 수입 음반 판매상에 의해 높은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어 - 특히 이탈리아의 록 그룹 '알파타우르스'의 앨범은 126만원의 고가로 거래된다고 한다. - 유럽에서 소비된 음반들이 우리나라에 고가에 수입되어 재활용(?)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의 소리도 있다. 록음악의 강력한 실황적 성격은 음악의 소비자와 생산자가 일견 같이 숨쉬고 호흡하는, 소비자와 생산자가 동일한, 수용자의 생각을 가장 잘 대병하는 음악으로 그려지게 하고 또 일견 그런 모습을 버리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 대중음악들은 그것의 생산자와 분리되어져 음반 산업의 게이트 키핑 과정을 겪으면서 음반으로 만들어지며 소비자는 거기에 수록된 음악, 가수, 문화의 상징적 성격때문에 그 음반을 구입할 뿐이다. 이러한 음반산업의 매카니즘에서의 개인에의 강조는 자본주의적인 생산의 '표준화'의 요구와는 모순되는 것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자본주의 구조가 지속되도록 하는 동인이라 할 수 있다. 레코드가 상업적으로 성공하려면 많은 개인들이 그것을 선호하고 구입하는 해위를 통해서 자신의 개인성이 실 된다고 여김으로서 가능한 것인데 이러한 소비자 상황의 모순, 즉 대량소비에 의한 개인성의 확인은 단지 음반산업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데서 그 심각성을 찾을 수 있다. 자본주의 문화산업의 근본적인 자기모순의 자기반영이라 하겠다. 한편 이와같은 음반산업의 전략은 거시적으로는, 끊임없이 소비자의 증가를 필요로 하는 자본주의의 요구에 부흥하는 것이다. 지본제적 대량생산의 가속화에 맞추어 소 자는 매번 새롭게 창출되어야 하므로 시장은 수평적으로 (다른 국가로) 그리고 수직적으로(노동 계급에게로) 사용 가치를 고양시킴으로써 이데올로기적으로 성장해야만 했고 이 과정에서 소비주의는 근본적 사회관계가 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생산력뿐만이 아니라 그와 동시에 바람직하고 판매가능한 상품이 되어야 했고 전통적 가족형태와 유대감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을 가장 진보된 존재 형태로 제시할 필요가 생겨났다. 여기에 작용하는 소비원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사, 판사, 공장 지배인 따위의 기존의 노동법칙과는 상이한 법칙을 가지는 노동자들이 수행하는 억압적인 노동원칙과는 상반되는 것인데, 그것은 개인적인 상품선택의 자유가 부르조아 시장 민주주의의 주요 원칙중의 하나이고 그것이 갖는 '노동 원칙으로부터의 해방' 이란 이데올로기는 결코 억압적으 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시화와 대량생산에 의한 전통적인 사회관계의 붕괴는 개인의 정체성을 공허한 것으로 만들었고 이 자리는 사회적 구별을 구현하는 상품들의 모자이크로서의 개인에 의해 채워졌다. 그래서 이제는 개인이 아니라 어떤 생활양식들 만이 존재하게 되었고 이런 생활양식들은 대중스타들에 의해 통합된 형태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이들 사 의 변동은 광범위한 문화영역의 소비창출을 가져오는 요인이 된다. 이와 같은 문화 산업의 '해방'이란 가치의 전유와 확대 재생산의 매카니즘은 반문화의 성쇠에서 드러난다. 록음악은 겉으로는 반문화와 대기업 사이의 투쟁의 장으로 존재하는듯이 보이지만 그 안에서는 항상 대기업이 반문화를 자신의 목적에 알맞도록 이용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이디어 생산 자체에 대한 자본주의의 통제라기보다는 오히려 1970년대의 록음악의 산업화 전략, 전문가 주의, 장르 분화, 대스타들, 다매체 촉진 운동 등등 자본제적 향락산업의 '질서 정연한 소비'를 통한 문화적 실천에의 자본주의적 통제라 하겠다. 이런 질서 잡힌 소비의 과정 속에서, 록음악 주변에 기반을 둔 반항적 젊은이의 하부문화는 디자인과 패션의 개혁에 창의적 원천을 제공함으로써 고양된 사용가치의 창출에 전위적 역할을 해왔으며 이것은 항상적으로 기존의 상품을 진부화시켜서 문화상품 전반에 걸쳐 생상과 소비의 주기를 가속화 시켜왔다. 50-60년대 히피들에 의해 사용되었던 오토바이는 영화'이지 라이더'와 그밖의 다중 매체를 통해서 미국에서 일반적인 청년 상품으로 자리잡게 되었는데 이런 따위가 앞선 글을 가장 잘 설명하는 적절한 예일 것이다. 오토바이가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특별한 상징성을 가지게 된 까닭은 그것이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오토바이가 특별하게 유용한 물품이었던 때문이 아니라,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행위가 일종의 해방이라고 여겨지게 된 까닭이고 그럼으로서 자신이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인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때문이었고 이것은 매스 미디어를 통해 효과적으로 소비자에게 보여졌다. 즉 상품의 사용가치가 단순히 인간의 자연적 필요에 의해서 창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초점을 맞추고 주의깊게 살펴야 할 부분인 것이다. 결국, 소비를 통한 '자아'와 '해방'의 획득, '해방' 영역의 끊임없는 확대와 재생산 - 여기서 60년대 이후의 록 문화는 핵심적인 장치로 기능했던 것이다.       성장치로의 록문화 미셸 푸꼬는 그의 저서 [성의 역사 Histoire de la sexualite]에서 노동계급의 성이 노동 에너지의 충전을 위해 부르조아에 의해 억압되었다는 기존의 이론을 반박하며, 오히려 억압되고 끊임없이 감시되었던 것은 부르조아의 성이었으며 일반적으로 17세기 이후 성은 억압된 것이 아니라 확장 일로를 달렸다고 주장한다. 푸꼬에게 있어서 섹스는 성장치에 의해 생산되는 무었이지 남성과 여성에게 작용하는 법칙이나 억압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에 대한 담론이 작용되는 것은 섹스가 아니라 신체, 성기관들, 쾌락, 혈족관계, 대인관계 등이며 역사적으로 특수한 적용해 의해 특정한 섹스가 생상된다. 19세기부터 서구에서는 성관계의 결합장치 - 결혼, 인척 관계의 고착과 확대, 성과 재산의 이동등의 제도 - 에 새로운 장치인 성의 장치가 포개어지면서 결합장치의 중요성을 축소시켜 나갔다. 결합장치가 허용과 금지, 합법과 불법, 법의 유지와 그것에 따른 쌍방간의 연대관계와 관련된 반면, 성의 장치는 유동적이며 미세하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육체의 감각, 쾌락의 질감, 일상의 성질을 통해서 통제의 형태와 영역을 끊임없이 확장한다. 성 그것은 하나의 역사적 장치에 붙인 이름이며 그것이 뒤덮고 있는 망상의 표면에서 육체의 자극, 쾌락의 강화, 언어의 유발, 지식의 형성, 통제와 저항의 증감등이 권력과 지식의 어떤 전략에 따라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다. 한마디로 결합장치가 현상유지를 그 기능으로 하는 정온적 사회질서를 형성하는 반면 성장치는 육체에 대한 다양한 방법의 침투를 통해 민중에 대한 좀더 총체적인 통제를 그 존재 이유로 삼는다.  푸꼬에 의하면 육체에 대한 가치부여는 부르조아 헤게모니의 정착 및 확대과정과 직결되는 것이며 귀족 계급이 혈통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공고히 했듯이 부르조아의 주된 관심사는 자신들에게 육체와 성을 줌으로서 정체성을 획득하고 성장치를 통래 힘과 번영과 영속성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성은 강한 도구성을 지녀서 수많은 조작에 사용될 수 있고 여러가지 다양한 전략들의 접합점과 받침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성장치는 성의 영역을 확장시키면서 그 안에서의 실천을 통해 부르조아 계급의 육체와 성을 화보하믓로서 다른 계그비로부터 자신을 구별하고 그것을 통해 타계급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권력의 통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푸꼬가 역설한 '권력의 통로로서 성정치' 란 개념을 우리의 현실로 옮겨와서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그가 성장치를 논의한 맥락은 계보학적인 것이지만 앞서 기술한 권력의 개념과 그 권력으로서의 성, 성장치의 현대적 기구로서의 록문화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성장치로서의 록문화는 '성;이란 허구적인 요소를 창조해서 성을 욕방의 기제로 만드는 기제, 그것을 폭발적이고 효과적으로 삶의 구석구석에까지 확대시키는데 있어 특별한 위력을 보이고 있다. 록수타들의 발생기에서부터의 탈청교도 주의는 성 자체가 자유, 해바으 자아구현, 반문화의 상징으로 보여지게 했고, 앞서 기술한 문화산업 영역의 매카니즘 속에 흡수되어져 대중의 생활 영역의 가장 말초적인 곳까지 배포되어 있다. 최근에 미국에서는 록음악의 저속성과 청소년에의 악영향에 대한 논란이 일어 기독교 단체와 PMRC(미국 상하의원의 부인들이 만든 단체로 건전 음악 보존을 위한 학부모 모임)와 같은 압력단체에서는 이 문제를 법정으로까지 끌고 갈 정도로 심각하게 논의되었는데  - 사타닉을 추구하는 블랙 메틀 그룹인 킹다이아몬드의 앨범 의 발매를 둘러싸고 각종 기독교 단체와 PMRC 등에서는 '사악한 악마 숭배자의 한심한 작품', '이단에 물든 반기독교 앨범', '저주받은 작품'이라고 혹평과 비난을 퍼부은 예가 있다. 이에 대한 킹의 반응은 '사탄 숭배는 또다른 종교적 신앙이며 결코 기독교만이 유일한 종교는 아니다. 당신들이 기독교를 믿는 만큼 나는 사탄을 믿으며 남의 믿음에 간섭하는 것은 위선과 오만이다'였다.                                록음악에 대한 이러한 사회적인 압력은 록의 도덕적 해이성을 주춤거리게 할 어떤 영향을 끼칠 수도 있겠으나  한편으로는 지배적 도덕률과는 상이한 도덕률울 가진 가수 - 또는 그들로 대변되는 같은 도덕의 추종자들 - 들의 발언권을 높여주고 그들로 하여금 법정이라는 공식적 영역에서의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끔 함으로서 록문화와 그것에 대한 담론의 영역을 공식부문에까지 확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라디오, TV, 신문의 가십란, 수많은 록음악에 관계된 잡지들은 록스타들의 해방된 사생활을 끊임없이 보도함으로써 록과 성에 대한 담론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게 만들며 마돈나 스타일의 스타킹을 통해 그녀가 구현하고 있는 '자유로운 성'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이 록 문화의 확장은 문화산업이 조직하는 매우 질서잡힌 소비를 통해 특정장소 - 댄스홀, 대중음악회, 쇼핑장소, 영화관, TV, 침실 - 와 특정 통로로 소비의 장소가 한정되게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통제 영역의 확대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 계급의 반란의 에너지는 부르조아의 정체성을 인정하면서 허상의 해방경험으로 소진되어 거는 것이다.      한국의 외래음악사   한국의 록음악을 살펴보는데 있어서 그 정확한 고찰을 위해 필요한 것은 록음악뿐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 전래된 외래 음악의 전반적인 실태를 살펴봄으로써 우리 음악의 위치와 전망을 적절히 조망해 보는 것인데 우리나라의 외래음악사는 그러한 의미에서 크게 두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겠다. 첫번째는 개화기 이후에 강대국들의 침락욕구와 함께 들어온 찬송가를 비롯한 양악, 그리고 나머지는 6.25이후 미군이 우리나라에 주둔하면서 받아들인 영미권의 팝음악이 바로 그것이다. 1882년 10월 청국에 의하여 우리나라에 서양식 군악대가 설치되었다. 그후로는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일본, 러시아등의 국가들이 이 땅에서의 정치적 우위권을 가질때마다 서양식의 군제 개편과 훈련, 서양식 군악대 등의 양성을 각기 달리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1883년 5월부터 이은돌 등의 우리나라사람들에 의해 서양식의 군악대가 조직되었다. 이 서양식 군악대를 시작으로 이 땅에는 강대국들의 강렬한 침략욕구와 맞물린 외래음악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게 된다. 1880년대에 아펜젤러를 비롯한 서양의 많은 선교사들이 그들의 종교를 전하기위해 한국에 상륙하였다. 그리고 이때 선교사들은 배재학당이나 이화학당과 같은 서양식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교리를 기성세대보다는 학교를 통해서 자라나는 세대에게 설파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항 예측은 그대로 적중되었다. 그들의 생각대로 서양식 학교를 통해서 서양의 종교는 이땅에 뿌리내릴 수 있었고 서양문화 또한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되었다. 이때 서양의 음악 또한 음악 수업시간에 혹은 예배시간에 찬송가로 불리워지기 시작했다. 그 후 서양식 학교들에 의해 서양식 노래가 많이 불리워지기 시작했는데 , 등 주로 독립, 자주 애국의 의지를 담은 노래등이었다. 이런 노래들은 당시 세계 강대국들의 표적이 되고 있는 이 땅에서 주로 신식 교육을 받은 의식있는 젊은이들이 사람들을 계몽하는 뜻에서 자주 불렀던 노래였다. 배재학당 학생들이 지은 그러한 노래들의 일부가 1896년, 1897년 '독립신문'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이 노래들은 민요식 창법과 서양식 창법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즉 기존의 전래민요에 익숙한 이들은 민요식 창법을 서양식 음악교육을 받은 이들은 서양식 창법을 쓴 것이다. 한편 전통 음악인들은 1894년 동학혁명 이후 기존의 음악 형태를 변모시켜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대처하였다. 즉 김창조가 기존의 민속음악을 융합하여 '산조'라는 새로운 음악 양식을 선보였고 소리꾼들도 판소리를 '창극'이라는 새로움 공연 예술로 바꾸고 새로운 사설과 곡조를 창작해서 불렀다. 이러한 노력은 원각사와 같은 신식 극장의 출현으로 큰 성과를 거두게 된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같은해 8월 제1 차 한일협약과 함께 고문정치를 시작한다. 이때부터 일본은 이땅의 기존음악들을 강압으로 약체화시키고 공립학교를 통해 그들의 쇼오카(唱歌)를 교육시켜 이땅의 민족정서를 해체시켜 나갔다. 1906년 공립학교 창가가 교과목으로 개설됐고 1910년에는 일본 전래의 노래들을 그대로 번역하여 실은 '普通 敎育 唱歌集'이라는 교과서를 제작하고 이것을 이당의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주입시켜 이땅에 일본의 정서가 깊이 뿌리내리게 하였다. 이 교과서에는 , , , 와 같은 곡이 실려 학생들에게 애창되었는데 특히 와 는 1913년에 기독교 청년 회원이 日畜朝鮮 소리에 녹음했을 정도로 상업적인 면에서도 성공을 거둔 대중적인 노래가 되었다. 이렇게 일본식 창가가 학생들의 음악 정서가 되었고 이 학생들은 커서도 일본 은막 정서속에서 살게 되었다. 이러한 한국 은막정서의 변천과정이 음반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났다. 한국음반사 초기에는 거의가 전통음악 음반으로 제작되었으나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대부분 왜색가요 음반이 제작되었다. 즉 음반 구입층이 전통음악에 익숙한 세대에서 일본 음악에 익숙한 세대로 바뀌면서 자연 음반에 담겨지는 음악도 전통음악에서 왜색가요로 변하게 된것이다. 1907년 3월 미국의 Columbia 음반회사가 최초의 한국음악 음반을 발매하였는데 전통음악을 담아 팔았다. 이 미국 음반 회사들은 한국과 거리상으로 멀어 제작, 판매가 번거러웠고 한일합방이후 일본이 한국에서의 정치적 우위에 서게 되자 한국음악 음반 회사들이 한국에 진출하여 이땅을 황금의 음반시장으로 바꿔나간다. 1911년 9월부터 일본 축음기 상회는 한국음악 음반을 발매하기 시작했다. 이 회사는 1928년 부터는 Columbia로 개칭하고 광복때까지 이땅의 음반산업을 주도했다. 1926년 윤심덕의 '사의 찬미' 음반을 앞세운 기계식 녹음의 일동 축음기주식회사(제비표조선 레코드, Nitto)는 전기식 녹음을 쓰는 Columbia의 출현으로 얼마가지 못해 이땅을 떠났다. 그리고 Columbia와 함께 Victor, Polydor, Okeh, Chieron이 1920년대 말부터 광복때까지 한국내에 있던 대표적인 음반회사였다. 당시에 제작된 음반에는 한국인의 음악정서가 바뀌어가는 상황이 생생히 남아있고 전통음악과 양악, 왜색가요가 적절히 유합되지 못한채 물과 기름처럼 분리되었다. 또 일제 말기 음반에는 일본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음악도 상당수 담겨있다. 이 가운데 옛 전통 음악인들의 음반을 비롯해서 안기영이 구전 민요를 편곡, 악보화하여 합창곡으로 만들어낸 작품을 담은 음반들은 전통음악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는데 있어서나 외래음악이 앞으로 우리나라의 현실에 알맞게 자리매김을 하는데 있어 그 방법론을 모색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있다. 광복후에도 왜색가요의 인기는 여전했다. 그리고 민족음악이 나가야 할 방향조차 하지 않은 산태에서 전통음악은 급속히 쇠퇴하였고 전통음악과 양악, 왜색가요 사이의 장벽은 더욱 높나만 갔다. 또 광복 후에도 학교에서 양악 중심의 교육이 이루어져 전통음악은 우리음악이면서도 외국음악으로 느껴질 정도로 낯선 음악이 되었고 오히려 양악이 우리음악인 것처럼 친근감을 느께게 되었다. 옛부터 예술인을 천대하는 풍조와 선진국의 음악은 선진 음악일 것이라는 생각이 맞물려 전통음악은 소외되고 일부 전통 음악인들은 평생동안 공들인 예술을 등지고 자신의 신분을 감춘채 숨어살아야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서양의 고전 음악은 상류충의 고급음악으로 인식되면서 이땅에서 그 세력을 넓혀갔고 우리나라의 전통음악은 소멸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1962년 재정 법률 제 961호 '문화재 보호법'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이에 따라 전통음악은 소멸의 위기에서 벗어났으나 박자하나, 가사하나 바꿀 수 없이 박제화 되어 그 생명력을 잃어갔다. 즉 대중 속에서 사랑받고 비판받으며 자라는 전통음악이 아닌, 문화재보호법이라는 구멍난 비닐하우스 속에서 보호받는 전통음악이 되자 다양성을 잃고 획일화되고 말았다. 한편 국내에서 1956년 경부터 10인치 장시간 음반(LP)이 1962년부터는 12인치 음반이 1963년부터는 스테레오 음반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부터 국내의 음반산업이 활기를 띄기 시작한다. 6.25이후 이땅에 또다른 양악이 들어오게 되는데 미8군을 중심으로 유입된 영미권의 팝음악이 바로 그것이다. 이 영미권의 팝음악은 미군을 대상으로한 AFKN방송을 통해 급겨히 확산했는데 AFKN은 그 특성상 문화수준아디 낮은 미군을 대상으로 했던 것이어서 미국내의 상업벙송보다 더 오락적으로 편성되었고 결과적으로 한국의 대중 음악뿐만이 아니라 매스미디어가 주도하는 대중문화 전반의 방향설정에 광범위하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당시 영미의 팝음악은 유행에 민감한 젊은 세대에게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당시 소통된 영미권의 음악은 주로 록음악과 재즈였는데 그부렵 국내 음반산업과 방송이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었고 오디오의 보급이 확산되면서 영미권의 음악은 음반과 방송에 힘입어 빠른 속도로 유행되었다. 라이센스 음반이 없었던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말까지 10여년 동안은 외국에서 제작된 음반을 복제해서 만든 일명 '백판'이 정부의 허가를 받아 공식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1970년대 들어서 팝송도 라이센스 음반이 제작되기 시작했는데 라이센스가 나온뒤 복제음반은 불법으로 규정되었으나 지금도 복제음반은 제작되고 있다. 이렇게 지금까지 약 25년간 제작되어온 복제 음반을 통해서도 팝송은 널리 퍼져나갔다. 그러면 국내 음악인들은 록음악을 어떻게 소화하고 이해하였는가? 미군이 우리나라에 주둔하면서 연예인에게는 새로움 일터가 생겨났다. 미군부대내의 쇼뮤대가 바로 그것이었는데 이 쇼무대는 당시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었고 전쟁이 끝난후 경제사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있는 국내의 연예인들에게는 가장 좋은 일터였다. 미8군 쇼무대에 한국인 가수들이 출연한 것은 연예인 용역 회사들이 이태원을 비롯한 평택, 문산, 의정부, 동두천등지의 주한 미군을 위한 클럽에 연예인을 공급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처음에는 컨트리 패키지 쇼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1960년경 신중현의 등장으로 국내 록음악이 본격화 된다. 그는 초기에 미8군 쇼무대를 주무대로 해서 활약했었다. 신중현은 1960년대초 4인조 그룹 '에드 훠'를 결성한 뒤로는 , 등을 창작, 한국적 록 음악을 선보이면서 '키보이스'등의 그룹들이 영미의 록음악을 모방하던 당시의 음악적 분위기를 바꾸어 놓았다. 이들 '키보이스'나 '키보이스가 양분하여 생긴 '히식스','키브라더스'등은 60년대 초반 부터 미국의 '서핀록'을 받아들여 '해변으로 가요'풍의 가벼운 록음악을 히트시켰고 이들은 주로 외국곡 연주나 젊은이의 사랑 노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노래로 일관했다. 밤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이들이 대중문화로 정착되는 데느 방송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1964년 여름부터 라디오 방송국들은 다투어 팝뮤직 프로그램을 신설해 미국의 최신 유행 음악을 배포하기 시작했으며 같은 해 TBC-TV에는 '쇼쇼쇼'란 본격적 쇼 프로그램이 생겨서, 무대 체질인 이들 록그룹들은 더욱 광범위한 시청자를 향해 대중문화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오늘날 30-40대의 젊은 시절 음악이었던 이 시대 그룹들을 편의상 록그룹 1세대로 부르기로 한다. 1976년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가요정화운동으로 기존의 록그룹들이 해산되고 록음악은 쇠퇴하는듯 했으나 대학가요제가 생겨나면서 '샌드 페플즈', '라이너즈', '오슨80'등과같은 신선한 록그룹들이 탄생하여 록음악은 다시 활기를 띄게 된다. '나 어떡해'로 시작된 그룹사운드의 붐은 신선한 매력으로 많은 젊은이들을 들끓게 했다. 히식스나 키보이스 같은 그룹의 사운드와 '나 어떡해'를 비교하면 금방 그 음악성의 차이가 드러난다. 밤무대와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던 밴드들이 팝을 그대로 도용했다면 대학 그룹사운드는 그것을 한국적인 사운드로 만들려는 시도를 했고 그 결과는 지금도 많은 젊은이가 애창하는 명곡을 만들어 냈다. 이 당시의 음악들은 젊은이들이 대학 가요제를 통해 그들 나름의 분위기 속에서 생산한 록음악이 제도 방송권 내에서 방송된것으로 이당시 등장한 '송골매', '산울림', '벗님들', '사랑과 평화'등이 록그룹 2세대를 이루는데 이들의 등장에는70년대 들어와 널리 보급된 FM음악 방송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들의 등장은 국내 록음악의 흐름에 커다란 전환점을 마련한 것으로 이 그룹들은 더 이상 외국곡을 앵무새처럼 불러대지 않았으며 신선한 감각의 노랫말과 음악내용을 지닌 창작곡을 통해 한국대중음악계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이 당시 등장한 대학가요제 출신 팀중 구창모가 주축이 된 '블랙 테트라'와 배철수가 주축이 된 '활주로'가 합세하여 만든 '송골매'가 80년대 록음악의 새로운 가는성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송골매보다 앞서 1977년에 등장한 김창완, 김창훈, 김창익의 3형제그룹 '산울림'은 이전에 들을 수 없었던 독창적인 음악들은 선보이면서 한국 록음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산울림'의 출현으로 1960년대 초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약 15년간 계속되었던 송창식, 양희은, 윤형주, 김민기, 한대수, 양병집, 이장희, 이정선 등의 포크음악 일변도였던 당시의 음악분위기가 급전환되는 계기가 됐다. 한편 사랑과 평화는 등을 앞세운 높은 수준의 기량으로 1970년대 후반 록음악계를 석권했다. 1979년에 로 화제가 된 '작은 거인'의 김수철은 놀라운 작곡능력과 참신한 기타연주로 이후 국내 음악계의 선봉장이 되었다. 1985년 MBC-FM '이종환의 디스크쇼'의 공개 무대에 처음 모습을 들어낸 '들국화'는 뛰어난 음악성을 과시하며 , 등을 발표해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하였다. 그리고 '들국화'와 함께 '다섯 손가락'과 '벗님들'의 인기또한 대단했다. 록 음악의 제3세대라고 명명할 이 그룹들은 실황 공연과 매체로 급성장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여러가지 점에서 전세대의 록그룹과는 판이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70년대 초반에 기성화된 서구의 록 음악의 영향하에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서구적인 감수성을 체질화시킨 아들은 록음악2세대의 서정성의 범위를 넘어서서 음악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더욱 '헤비'해졌다는 것인데 전기기타와 신서사이저, 드럼연주의 지배정도가 극도로 강화되고, 보컬이 노래로서 보다는 소리로써 일종의 악기와 같은 구실을 하며 연주에 가세되는 것, 가사의 반복성과 무의미성, 음악에서의 강력한 리프, 사랑노래의 후퇴들이 그러한 요소들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요소들에 힘입어 1986년 '시나위'에 의해 국내에도 헤비메틀 시대가 시작되었고 이후 수많은 헤비메틀그룹들이 생겨나 현재 국내에는 헤비메틀의 전성시대라 할만큼 대중에게 큰 지지를 얻고 있다.       록 문화 ; 중산층의 문화산업   1987년 8월 18,19 양일간 잠실 체육관에서 열린 '제1회 한국 록그룹 페스티발'은 7시간 동안 록그룹 1, 2, 3세대에 속하는 17개 그룹이 출연하고 수천의 청소년들이 열광했던 대규모 집회였다. 이런 규모의 음악회가 공공장소의 상징과도 같은 잠실체육관에서 그럴듯한 스폰서(동아 일보와 음악 세계 주최)를 얻어 열릴 수 있었던 것 자체가 록음악이 하나의 하위문화로서 공식화된 영역에서 스스로의 문화공간을 확보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었보다도 록음악의 수용층을 닦아놓은 것은 한국적 입시제도의 특수성을 기반으로 한 리디오의 심야방송 음악 프로그램들이라 하겠다. 라디오 FM의 음악방송은 록음악에 심취한 청소년들 뿐만이 아니라 입시의 중압감을 느끼는 수험생들이 밤을 밝힐 때 배경음악으로서 공간을 채워주는 무형의 동반자로 기능하기 때문에 청소년층의 심리적 불안정과 예민한 감수성의 균열을 통해 막강한 전파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수험생을 위주로 한 청소년의 '라디오 공동체'는 그들이 공동체를 느끼는 채널을 통해 함께 소비하는 음악에 대해서도 그것을 '자신들의 문화'로 구별하여 향수하게 만드는 조건이 된다.   '들국화'이후의 젊은 록그룹들이 보여주는 TV출연 안하기, 또는 TV 출연에 대한 무감각 이라든지 공연장에서 보여지는 공연자와 관람자 사이의 상징의 공유, 공연자에 대한 열렬한 공감 표현들은 일종의 반문화적 요소를 지닌 '문화적 동일성'에 대한 록음악의 향유자와 공연자 사이의 확인 행위라 하겠다. 그러나 이런 록음악의 반항적 요소들은 지극히 표면적 수준에서 작용하는 것이어서 기존의 문화에 대한 반항이라기 보다는 동질적 취향을 가진 그룹의 자기 정체성 구현의 성격을 지닌 '수동적 반항'의 테두리에 머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입시 또는 기성세대의 형식주의적 도덕률과 허세의 무게에 대한 도피의 성격을 띈 반작용이며 그것은 가수와 관객, 관객과 관객사이의 동질적 느낌을 확인할 수 있는 실화공연이라는 공개장소에서 수렴되어서 표면화될 수 있다고 보여진다. 이런 음악을 향수하는 청소년 그룹은 적어도 자신의 문화를 다른 가족성원과 구별지을 수 있는 '자기만의 공간'인 방을 가져야 하고 실화공연의 주된 스폰서가 말해주듯이 음악을 귓속으로 직접흘려 넣을 수 있는 자신의 카세트와 월간 음악 잡지를 소유해야 하고 백화점의 공연장이나 호텔, 6.3빌딩 등에서 열리는 록음악회에 평균 5000-10000원을 지불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와 시간적 여가를 지닌 그룹이다. 또한 영어로 대변되는 미국문화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으며 알파벼으로 뒤덮힌 티셔츠와 스노우 진 청바지, 때바지 정도는 유행에 따라 마련할 수 있는, 그리고 공연장에서 일제 카메라를 들고 캔콜라나 그밖의 청량 음료를 마시면서 친구들과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부류의 청소년들이다. 록음악은 서구에서 발생 초기에 가졌던 반문화적 성격이 완전히 거세된 채 반규율적 성격, 새 세대의 자기표현의 형식으로 수입되어 구매력을 갖은 '중산층' 청소년들의 개성 추구의 욕구 기존 문화와의 차이를 통한 자기 정체성의 획득의 욕구에 부흥하려는 문화산업 전반에 기능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서구의 록음악이 노동자, 청년 문화로 발생하여 문화 산업화 도중에 그 내부에서 패권적 과정을 거쳤던 것에 비해 국내의 록음악이 우리사회에 있어서 청소년들에게 영향을 주는 만큼, 노동자 문화로서의 성격을 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우선 외국과 우리나라의 문화적 차이를 생각할 수 있다. 부르스 스트링스틴이 미국의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미국인의 보스로 군림해도, 우리나라에서는 한갓 남의 나라 얘기일 수밖에 없다. 또 그들은 강한 사회의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핑크 플로이드는 이렇게 말한다.         '미치광이가 내머리 속에 있다.          '칼을 들고 나를 찌르며          '그가 지금 내 머리속에 들어 있다          '넌 내가 제정신을 찾을때까지               날 여기저기 손보려 하겠지.' 또 엑소더스는 에서는 이렇게 노래하며 현대 사회에서 소외된 인간을 보여주고 있다. '내 머리 속에 있는 소리가 나를 미치게 한다. 이제 나는 악몽으로 잠자는 게 두렵다. 안절부절 못하므로 치료도 받아야 한다. 방금 나는 밖으로 나가 어떤 사람을 죽였다. 난 지금 정신 착란을 겪고 있는 것이다... 정싱과 의사는 내가 이상이 없다고 했다. 사람들은 나를 길들였다고 샐각한다. 그러나 나는 진짜 미쳤다. 살인죄로 체포되어 공판에 회부된 나는 죄를 시안하고 몇몇 정신과 의사의 도움과 뇌엽 절제 수술을 받고 석방되어 다시 사회로 내보내진다. 그들의 게임에서 내가 놀아났다는 것도 알았다. 그 때문에 난 전보다 더 싸이코가 되었고 심지언 내 이름조차 잊어버리게 되었다.' 또한 크리에이터는 현대인들 특유의 무관심을 를 통해 이렇게 그리고 있다. '어떤 사내가 유혈이 낭자한 채로 길 모퉁이에 누워 있으나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왜 우리가 그런 일에 상관해야만 한단 말인가?' 라고 말하며 그냥 지나간다.' 메틀리카는 에서 마약에 지배되는 사람들을 꼭둑각시에 비유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나라의 대중들에게 얼마만큼 호소력있게 다가설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팝을 듣는 대부분의 경우를 생각하면, 비록 청소년들이 영어문화권에 대한 이질감을 느끼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그뜻이 효과적으로 전달되지는 않을것이다.  메탈리카는 을 통해 '이제 전쟁도 끝이 났다.        그러나 나는 깨어 있어도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내몸이 얼마 나 남아 있는지....  지금난 펌프에 의존하며 살고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숨을 멈추고 죽움을 기다릴 뿐이다.  신이여 나를 인도하소서 라고 말하며 전쟁의 비인간성과 도덕성을 폭로하지만 메탈리카의 가사는 종주국인 미국에서조차 대중들이 알아들을 수 없을만큼 빠르다. 가사에 나타난 문제 의식들이 전혀 소비자에게 전달될 수 없는 현실이며 우리에게는 록의 형식만이 관심거리가 될 뿐이다. 노동자들에게 이러한 현상이 더욱 심하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는 문제이다. 또한 국내 노동자들에게 록을 소비할만한 여유가 없다는 것이 또하나의 그것이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 비해 그 급여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열악한 작업환경과 노동시간의 장시간등은 라이브 무대를 주로 펼치는 신세대의 록그룹들과의 갭을 더욱 크게 하는 것이고 록은 그들에게는 멀고 먼 나라의 얘기이거나 '잘 사는 놈'의 얘기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들이 전혀 록을 소비하고있지 않는 것은 아니다. 후에 언급되겠지만 그들은 새로운 하부 문화로서 정착된 록을 대중 문화 산업에 의해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소비자로서의 역할을 하게된다. 마지막으로 록이 말되어지는 것과는 다르게 노동자들의 문화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록이 처음 생겨난 그 시대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결과론적 해명일지는 모르지만 록은 자본에 의해 창출된 음악일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전기 기타의 상업화로 부터 록의 시작을 잡는것이 지배적인데, 그것이 비록 전세대의 음악양식에 대한 비판의 소리이고 구차한 인습에 대한 반기를 들고서 시작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 모든 제반 여건이 바로 전기 기타의 상업화를 통해 나타났다는 것은 상당한 모순점을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록이 사회문제 전반에 걸쳐 심각한 문제의식을 제기하기 시작한때는 밥딜런 이후의 포크록부터로, 포크 음악을 통해 록이 새로운 비판적 의식을 갖게 된 때문이 아니라 미국의 전통음악인 포크 음악이 가진 원래부터의 노동자 문화로서의 의식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국내의 록음악은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하여 그 안에 갈등적 요소를 전혀 포함시키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문화산업 전반에  걸쳐 새로운  사용가치를 광범위하게  창출하는데 매우 능동적인  요인이 되고 있다. 요즈음의  텔레비젼 광고와 청소년 잡지의 현란항 광고를 보면  이 사실이 잘 드러나는데 광고주들은 특정한  취향의 청소년들에게 호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화 산업의 또다른 문제 ; 표절 문화 산업에 의한 효율적인 이용은 또다른 록음악의 또 다른 영역에서 문제를 불러 일으키고 있는데, 한국의 록뿐만 아니라 한국의 전반작인 음악문화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중의 하나가 바로 표절에 관한 문제이다. 음악 형식의 서양화 이후 한국적 록음악뿐 아니라, 아직도 우리의 얼을 담아낼 우리 음악다운 우리 음악조차 자리잡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서양음악의 표절을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유사이래 표절에 대한 기록은 브라암스의 교향곡 1번 피날레 테마가 52년전 작곡된 베에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의 제4악장의 주제와 흡사하다는 논란을 일으킨 것과 슈베르트의 교향곡 9번의 주제와 형태가 베에토벤의 교향곡 9번과 같다는 판결을 법정에서 받은 것에서 부터 시작된다. 법적인 의미에서의 표절은 첫째 노래의 동기가 2개 소절 이상 기성곡과 같거나 유사할 때, 둘째 노래의 중간 부분이 4개 소절 이상 기성곡과 같거나 유사할때, 세째 노래의 전주부분도 위의 경우처럼 기성곡과 같거나 유사할 때와 같이 명기하고 있는데 표절을 그 성격에 따라 두 부분으로 구분하여 보면, 하나는 전에 들은 노래의 기억이 나중에 떠올라 무의식 중에 쓴 후 자신의 곡으로 착각을 하는 류이고 다른 하나는 고의적인 표절, 바로 우리가 가장 문제 삼아야 할 것이다. 전자의 경우, 본인에게는 상당히 아깝고 속상한 일이겠지만 모두를 위해 포기해야 할 부분의 것이다.  의식적인 표절, 고의적 표절 역시 몇가지 성격의 차이가 있다. 첫째는 원작자를 감추려고 하는 경우이다. 현재까지 일본의 노래, 작가의 곡은 금지되어 있지만 일본과 우리나라의 가요계 인사들이 교류하고 그 친분으로 일본 작곡가의 곡을 심의의 통과를 위해 이름만을 빌려주는 행위로 표절의 멍에를 받는 경우이다. 이를테면 혼다 미나꼬의 곡을 일본에 진출했던 M이라는 여가수가 L이라는 작곡가의 이름을 통해 받았다가 들통이 난 경우가 있다. 둘째는 의뢰인의 외압에 의한 경우이다. 요즘 방여되고 있는 TV의 드라마, 퀴즈 프로그램등을 보면 일본의 것을 그대로 베끼는 경우가 눈에 많이 띈다. 그런데 이런 프로그램에 쓰이는 음악까지 시청률을 지나치게 의식해 일 풍의 것으로 요구, 결국 표절이 생산되는 것이다. 이야기가 다른쪽이지만 얼마전 '열전, 달리는 일요일'이 일본의 민방 프로그램 '풍운의 젠다성'의 표절이라며 로얄티를 요구해 왔고 일부 이를 긍정하는 망신스러운 일이 있었다.    또 '토요 대행진'의 '개그 클럽'의 경우 Shizuka Kudo'의 의 도입부가 4초 정도 나왔고 '뽀뽀뽀'의 소개 멘트에 테마 사용 등 보이지 않는 부분의 일본 음악은 방송이 일본 문화 유입과 표절을 부추김 하고 있다는 지적을 반론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광고의 경우에도 그에 못지 않아 모 화장품의 경우에는 'Nineteen'주제가의 영어가사 부분 'Blue'를 그대로 내보냈고, 손지창이 부른 컵스컵스의 CM송은 안전지대의 노래 중 가사만을 바꾸어 사용했었다. 이러한 형태는 과당경쟁 중에 쉽게 시선을 끌어 보려는 무책임한 이기주의의 한 형태로 표절과 함께 사라져야 할 것이다.   셋째는 불로소득을 노리고 남의 노래를 적당히 베끼는 경우이다. 특히 일본 노래의 경우는 국내에 들어올 수 없다는 점을 악용하여 많은 표절의 대상이 되고는 하는데 국내 가요의 상당수가 랩이 유행하기 전까지는 이런 일본 노래의 부분부분을 따 썹고 결국 최근에는 김민종의 와 같이 대담한 표절까기도 자행되고 있다. 그리고 일부 리믹스에서 남용되는 해머의 여성보컬 목소리와 원본을 밝히지 않은 많은 부분은 대부분 라이센스하지 않고 사용되어지는데 결국 이것은 표절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 최근에 국내 음악시장에 심화되고 있는 이런 노골적 현상에 대하여 누군가가 지적해 주어야 하지않는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일고 있다. 우선 최근의 선두로는 아무래도 MBC 창사 특집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최경식 곡)가 아니었나 하는 것이다. 드라마의 인기와 더불어 엄청난 음반 판매량을 보인 이곡은 이후 드라마 삽입곡의 음반발매를 본격적으로 하게 한 앨범이다. 이 음반은 모스크바 국립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재녹음을 했지만 영화 'Dress To Kill'의 주제가를 표절한 것이 밝혀져 발매가 포기되었다. 이후 같은 MBC에 같은 작곡가 음악을 담당한 드라마 '질투'의 주제가 (김지환 곡)가 방송 초기에 일본의 록그룹 HOUND DOG의 의 표절임이 드러나자 급히 곡의 일부를 화음을 바꾸어 매우 이상한 형태의 곡으로 방송을 한 적이 있다. 홍수철이 부른 는 일본의 나카부치 치요시가 부른 의 표절임이 판명났고 일본에서 통용되는 8cm CD를 국내 최초로 내면서 왜색 분위기의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앨범 The Blue의 (서영진곡)가 일본 그룹 X의 을 표절했다는 것이 어느 고등학생의 제기로 6소절 표절 판정을 받았다. 또한 현재 가장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승철의 은 Bobby Brown의 와 Hammer의 를 현진영의 는 Color Me Bad의를 김건모의 는 Shanice의 ,  그리고 최근 록장르에서 최고의 인기를 두렸던 두곡 신성우의 과 드라마 주 제가로 삽입되었던 는 각각 Van Halen의 , 노리꼬 사까이의 와 Yngwie Malmsteen 의 을 표절한것이 아니냐는 논란속에 빠져있다.
521    먼 길을 왔고 가야 할 먼 길을 막 출발하다... 댓글:  조회:4195  추천:0  2016-10-19
밥 딜런 - Bob Dylan -   How many roads must a man walk down 사람이 얼마나 먼 길을 걸어봐야 Before they call him a man 진정한 삶을 깨닫게 될까. How many seas must a white dove sail 흰 비둘기는 얼마나 많은 바다를 날아봐야 Before she sleeps in the sand 백사장에 편히 잠들 수 있을까. How many time must the cannon balls fly 얼마나 많은 전쟁의 포화가 휩쓸고 지나가야 Before they are forever banned 영원한 평화가 찾아오게 될까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g in the wind 친구여, 그 건 바람만이 알고 있어 The answer is blowing in the wind 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다네.   How many years must a mountain exist  산은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러야 Before it is washed to the see 씻겨 바다로 흘러 들어갈까 How many years can some people exist 사람은 얼마나 긴 세월이 흘러야 Before they`re allowed to be free 진정한 자유를 얻을까 How many times can a man turn his head 사람은 언제까지 고개를 돌리고 And pretend that he just don`t see 모르는 척 할 수 있을까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g in the wind 친구여, 그 건 바람만이 알고 있어 The answer is blowing in the wind 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다네.   /////////////////////////////////////////////////////////////////////   How many times must a man look up 사람이 하늘을 얼마나 올려다봐야 Before he can see the sky 진정한 하늘을 볼 수 있을까 How many ears must one man have 얼마나 많은 귀를 기울여야 Before he can hear people cry 타인의 비명을 들을 수 있을까 How many deaths will take till he knows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희생되어야 That too many people have died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걸 알게 될까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g in the wind 친구여, 그 건 바람만이 알고 있어 The answer is blowing in the wind 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지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g in the wind 친구여, 그 건 바람만이 알고 있어 The answer is blowing in the wind 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다네.                   자유롭게 구르는 돌… 밥 딜런은 늘 과거를 버리고 떠났다 김동식 문학평론가·인하대 교수,  2016.10.15. 밥 딜런이 직접 쓴 유일한 책 포크 음악·반전평화운동 등 늘 자신과 결별하고 새 길 찾아 엘리엇·안톤 체호프·멜빌 등 독서와 감수성에 기댄 노랫말   칠팔 년 전의 일이었을 것이다. 알고 지내던 출판 편집자 사무실에서 사진과 가사가 포함된 밥 딜런 책을 발견했다. 평화를 노래한 음유시인이자 포크록의 전설적인 뮤지션인 밥 딜런 책인 만큼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출판 편집자가 들려준 말이 인상적이었다. 그림도 그리고 시도 쓰는데, 미국 교과서에 그의 노랫말이 수록되었고, 꾸준하게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고. '구르는 돌처럼'(like a rolling stone) 등 그의 노랫말에 담긴 문학성을 고려할 때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음악인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노벨상을 둘러싼 유머라고 여기며 가볍게 넘겼다. 그 후로 매년 가을 노벨상 시절이 다가오면, 혹시 올해 노벨 문학상을 밥 딜런이 받는 것은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공상을 하며 혼자 재미있어 하곤 했다. 그런데 설마 하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2016년 가을 스웨덴 한림원은 밥 딜런을 수상자로 선정했다. 신선하면서도 즐거운 충격이었다. 밥 딜런이 과연 시인인가 하는 문제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문학자라는 지위를 인정받고 나서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래로 불리었고 음반으로 발매되었다는 이유로 문학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밥 딜런과 스웨덴 한림원이 문학을 둘러싼 관습적 인식들을 되짚어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가 구석에 꽂혀 있던 밥 딜런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을 꺼내들었다. 1965년 뉴욕, 밥 딜런은 스물다섯의 겨울을 관통 중이었다. 미네소타의 촌스럽던 유태인 청년은 이제 예술을 욕망하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먼 길을 왔고 가야 할 먼 길을 막 출발했다.” /     "사람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봐야 진정한 인생을 알게 될까 흰 비둘기는 얼마나 많은 바다 위를 날아야 백사장에 편히 쉴 수 있을까 전쟁의 포화가 얼마나 많이 휩쓸고 나서야 영원한 평화가 찾아오게 될까 친구여, 그건 바람만이 알고 있어 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다네" 밥 딜런 노래와 가사는 길을 걷는 사람의 읊조림이다. 그는 언제나 길 위에 있고 그 길을 따라 끊임없이 옮겨다니며 조용한 목소리로 세상에 말을 건넨다. 그의 노랫말에서 단어를 가져온다면, 구르는 돌이 만드는 길과 소리와 자유로움을 저절로 떠올리게 된다. 구르는 돌이 나뭇잎을 스칠 때, 도시의 페이브먼트를 지날 때, 전쟁의 폐허 더미와 부딪칠 때의 소리들. 평범한 듯 보이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그의 노랫말은, 세계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과 문학 작품에 대한 광범한 독서에 기반하고 있다. 스코틀랜드 시인 딜런 토머스를 좋아해서 로버트 지머먼에서 밥 딜런으로 개명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터이고, 자서전에서는 에즈라 파운드, T. S. 엘리엇, 허먼 멜빌 등 그가 접했던 작가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안톤 체호프의 단편소설에 근거해서 앨범 작업을 진행하기도 했으며, 가장 적합한 가사를 얻기 위해서 뉴욕 공공도서관에 틀어박혀 신문을 미친 듯이 읽어가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은 밥 딜런과 관련된 두 가지의 장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하나는 1965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전기기타를 메고 나왔던 밥 딜런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반전과 평화를 노래하는 가수였던 밥 딜런이 사회 참여 대열에서 이탈했을 때의 모습이다. 전기기타는 포크 순수주의를 배반하는 상징이었고, 존 바에즈는 대중의 대변인이 되라며 밥 딜런을 비판하는 노래를 발표한 바 있다. 포크 음악에 대한 애정이 거짓이었고 반전평화운동은 진정성이 결여된 행동이었던 것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자서전에서 그는 세상의 오해에 대해 별다른 변명을 내놓지 않는다. "포크 뮤직 무대는 아담이 에덴동산을 떠나야 했던 것처럼 내가 떠나야 하는 파라다이스"였으며, "나는 어떤 주의나 누구의 대변인이 아니고 음악가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포크 음악과 반전평화운동 모두 그가 걸어왔던 길이고, 애정을 가지고 스스로 만든 자신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러한 자신의 모습이 구속이나 억압이 되어 돌아오게 된다면, 어쿠스틱 기타만 써야 한다는 암묵적인 규정이 구속이 되고 자유를 노래해야 한다는 요구가 역설적이게도 억압이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밥 딜런의 선택은 바람과 같은 자유로움이었다. 그는 과거의 자신과 결별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 움직여 나갔다. "길 바깥은 위험했고 그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 몰랐지만 아무튼 나는 그 길을 따라갔다. (…)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세계는 신이 주관하지도 않았지만 악마가 주관하는 것도 아니었다." 밥 딜런은 자유롭게 굴러다니는 돌이었고, 언제나 길 위에 있었고, 길을 따라 끊임없이 움직였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지금도 그는 구두끈을 고쳐 매고 있지 않을까. 오늘 밤에는 '구르는 돌처럼'(like a rolling stone)을 크게 틀고 가사를 훔쳐보며 나지막하게 따라 불러도 좋을 것 같다.     김동식 문학평론가·인하대 교수    
520    마음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실험은 그치지 않았다... 댓글:  조회:5575  추천:1  2016-10-19
1960년대에 생겨난 많은 그룹들과 매우 다른 길을 걸은 2명의 음악가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격변의 시기에 팝과 록 음악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들은 바로 밥 딜런과 지미 헨드릭스였다. 밥 딜런의 음악세계는 포크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노래는 상당히 사회 참여적인 저항 가요풍이었다. 그 음악은 상상력이 풍부하여, 반항적이고 실천적인 1960년대 젊은 청소년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딜런은 핵전쟁의 위협과 시민권, 인종주의에 대해, 나아가서는 군산복합체의 파워에 대해서 노래하였다. “사랑과 섹스 말고도 이 세상에는 중요한 다른 것들이 존재한다.”라고 그는 말했다. 젊은 시절의 밥 딜런 밥 딜런의 저항가요는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노예들은 저항의 노래를 발라드와 자장가로 가장해서 부르곤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저항가요의 전통은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 1912~1967), 피터 시거(Peter Seeger, 1919년생)로 계속 이어졌는데, 그들은 기타 하나 둘러메고 작곡하고 노래하고 반주했다. 거스리와 시거는 미국 전통에서 가장 잘 알려진 몇몇 노래들을 만들었고 노동 조건과 시민권을 향한 투쟁과 평화와 반전 운동을 둘러싼 투쟁에서 선봉에 섰다. 우디 거스리는 〈그랜드 쿨리 댐(Grand Coulee Dam)〉, 〈로벤 제임스(Reuben James)〉, 〈이 땅은 너의 땅(This Land is Your Land)〉의 작곡가였다. 피터 시거는 〈그 많던 꽃들은 어디로(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 〈나에게 해머가 있다면(If I Had a Hammer)〉, [민중가수 리 헤이즈(Lee Hays)와 함께] 〈턴, 턴, 턴(Turn, Turn, Turn)〉을 작곡했다. 인용문 나는 우디 거스리를 들었다. 내가 우디 거스리를 들었을 때, 정말 끝내줬다. 우디는 나의 신이다. 밥 딜런 1960년대에 밥 딜런은 그 집중력과 사회참여로 대중 음악계를 사로잡았다. 그는 새롭고도 심오한 문제들에 대한 답변을 추구하면서 개성 있는 목소리로 한 세대를 노래했다. 특별히 〈마스터스 오브 워(Masters of War)〉나 〈블로잉 인 더 윈드(Blowin’ in the Wind)〉 같이 반전적인 메시지를 담은 저항가요는 고통과 소외로 가득한 1960년대의 분위기를 아주 잘 포착해 냈다. 딜런의 으르렁거리는 듯한 비음 섞인 창법과 거친 기타와 하모니 연주는 음악에 힘과 추진력을 더해 주었다. 초기 흑인 로커들의 음악처럼, 딜런의 음악은 대다수 청중들이 듣기에 너무 생경해서 오히려 피터, 폴 앤 메리[Peter, Paul, and Mary, 〈블로잉 인 더 윈드〉, 〈더 타임즈 데이 아 어 체인징(The Times They Are a-Changing)〉], 조안 바에즈[Joan Baez, 〈돈 씽크 투와이스, 잇츠 올 라이트(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 〈잇츠 올 오버 나우, 베이비 블루(It’s All Over Now, Baby Blue)〉]와 버즈[Byrds, 〈미스터 탬버린 맨(Mr. Tambourine Man)〉]가 커버 버전으로 발표했을 때, 제일 많이 팔렸다. 딜런은 지치지 않는 창조적 정신의 소유자였다. 하나의 스타일이 히트를 치면 그는 곧 다른 새로운 뭔가를 찾아 나섰다. 항상 팬들보다 앞서 나갔다. 그는 록 발라드에서 저항가요로, 전기적 록으로, 컨트리로 나아갔다. 밥 딜런은 초기 시절부터 여러 번 관심사를 바꿔나갔는데, 그때마다 그의 추종자들은 불평했다. 1960년대 그는 크리스마스 축가, 유대식 발라드, 선정적인 록과 발라드를 노래했다. 1960년대 이래 그의 노래들은 너무나도 독창적이어서 분류가 힘들 정도이다. 이 중에서 좋은 예는 화려하면서도 슬프고 씁쓰레한 〈새드 아이드 레이디 오브 더 로랜즈(Sad Eyed Lady of the Lowlands)〉(1966)이다. 다른 예로는 자신의 아내에게 보내는 유언장인 〈사라(Sara)〉(1975)와 강렬한 인상을 주는 〈러브 삭(Love Sock)〉(1997)이다. 밥 딜런은 계속해서 작곡하고 연주하고 저항하고 음반을 발표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마음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실험을 그치지 않는다. 1997년 음반 〈타임 아웃 오브 마인드(Time Out of Mind)〉는 인간의 조건에 대한 성숙한 반성을 담은 것으로 그의 최고의 음반이다. 반면 〈모던 타임즈(Modern Times)〉(2006)에서는 미국 대중 음악의 컨트리적 전통과 주제를 탐구한다. 2010년 〈오피셜 부트렉(Official Bootleg)〉 앨범 시리즈를 발매했는데, 그것은 매우 희귀한 곡들이나 미발표 곡들을 포함하고 있다.
519    와인 한병, 재떨이, 그리고 물만 요청한 음유시인 댓글:  조회:6255  추천:0  2016-10-19
    ▲ 2016년 노벨문학상의 영예는 미국의 유명 싱어송라이터 겸 시인 밥 딜런에게 돌아갔다. 올해 노벨문학상의 영예는 '블로잉 인 더 윈드'(Blowin' in the wind)라는 노래로 유명한 미국의 유명 싱어송라이터 겸 시인 밥 딜런(75)에게 돌아갔다. 스웨덴 한림원은 13일(현지시간) "위대한 미국 노래 전통 내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냈다"라며 밥 딜런을 올해 수상자로 선정한다고 밝혔다. 작가보다 음악가로 더 유명한 인물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는 1901년 노벨 문학상 첫 시상 이래 처음이다. 미국 작가의 수상은 1993년 토니 모리슨 이후 23년 만이다. 사라 다니우스 한림원 사무총장은 딜런의 노래를 "귀를 위한 시"라고 표현하며, "지난 5000년을 돌아보면 호머와 사포를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연주를 위한 시적 텍스트를 썼고, 밥 딜런도 마찬가지다"라며 다소 의외였던 선정 이유를 설명했다. 한림원 회원인 페르 베스트베리는 "딜런은 가장 위대한 생존 시인이다"라며, 통상 연말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리는 노벨문학상 수상자 강연이 '콘서트'가 될 것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러길 바라보자"고 말하기도 했다. ♦ 60년대 반전운동 기수에서 20세기 대중음악 상징으로     ▲ 1984년 독일 공연에서의 밥 딜런 본명이 로버트 앨런 지머맨인 딜런은 1941년 미국 미네소타 덜루스의 유대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밥 딜런이라는 예명은 그가 시적 영감을 받은 영국 시인 딜런 토머스에서 따서 직접 지었다. 하모니카, 기타, 피아노 등을 독학으로 터득한 그는 미네소타대를 중퇴한 후 뉴욕으로 건너가 연주를 시작했고 자신의 음악적 우상이던 포크가수 우디 거스리를 만나 큰 영향을 받는다. 1962년 콜럼비아 레코드를 통해 첫 앨범 '밥 딜런'으로 데뷔했으며 이듬해 두 번째 앨범 '더 프리휠링 밥 딜런'(The Freewheelin' Bob Dylan)을 성공시키며 저항가수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블로잉 인 더 윈드' '더 타임스 데이 아 어 체인징'(The Times They Are a-Changin') 등 반전의 메시지를 담은 노래들은 1960년대 미국 반전과 시민운동의 상징곡처럼 불리며 딜런을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만들었다. '원 모어 컵 오브 커피'(One more cup of a coffee) '노킹 온 헤븐스 도어'(Knockin' on Heaven's Door) '라이크 어 롤링 스톤'(Like a Rolling Stone) 등의 곡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다. 전통적인 어쿠스틱 포크송으로 출발했다가 1965년부터 일렉트릭 사운드를 선보여 포크 팬들 사이에서 상당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해 앨범 '하이웨이 61 리비지티드'(Highway 61 Revisited)를 크게 히트시키는 등 어쿠스틱 포크와 이후 포크 록에서 모두 확고한 성공을 거뒀으며, 전체적으로 1억만장 이상의 앨범이 팔렸다. 모두 11차례의 그래미상을 수상했고, 영화 '원더보이즈'의 주제곡 '싱즈 해브 체인지드'(Things have changed)로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상도 거머쥐었다. 70대의 고령에도 최근까지도 음반 발표와 공연 등 왕성한 음악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발표 당일인 이날 저녁에도 라스베이거스에서 공연이 예정돼 있었다. 미술에도 조예가 깊어 1994년 이후 6권의 드로잉 관련 책을 펴냈으며, 유명 갤러리에서 여러 차례 전시회를 열었다. 정치와 사회, 철학, 문학 등 여러 분야를 망라한 깊이 있는 시적인 가사로 '음유시인'으로 불린 그는 대중음악 가수의 수준을 한층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 대학 영문과에는 딜런의 가사를 분석하는 강의가 개설되기도 했다. 딜런은 지난 2004년 자서전 '크로니클스'(Chronicles·한국 번역본 '바람만이 아는 대답')를 펴냈다. 이 책은 2004년 미국 뉴욕타임스가 뽑은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고, 내셔널북어워드를 수상했다. 이후 2008년에는 '특별한 시적 힘을 가진 작사로 팝 음악과 미국 문화에 깊은 영향을 끼친' 공로로 퓰리처상을 받기도 했다. 딜런은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로도 수년 전부터 빠짐없이 점쳐져 왔다. 노벨상 후보로 거론될 때마다 딜런의 가사를 과연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한 논란도 일었다. 그러나 올해는 케냐 소설가 응우기 와 티옹오,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시리아 시인 아도니스 등 유력 후보들에 밀려 크게 주목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수상 결과는 의외로 받아들여진다. 노벨상 상금은 800만 크로나(약 11억원)이며, 시상식은 창시자 알프레드 노벨의 기일인 12월10일 스웨덴 스톡홀름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다. 지난 3일 생리의학상을 시작으로 물리학상, 화학상, 평화상, 경제학상에 이어 이날 문학상까지 발표되면서 올해 노벨상의 주인이 모두 가려졌다. ♦ 노벨문학상 순간 유쾌한 환호·휘파람…"오랜 농담이 현실로" 한편 이날 한림원 본부에 모여 있던 기자들과 청중들 사이에서는 올해 문학상 수상자로 딜런의 이름이 호명되자 커다란 함성이 터져나왔고 박수와 휘파람이 이어졌다. 사람들이 의외의 결과라는 듯 마주보며 웃거나 웅성거림이 한동안 이어지면서, 사라 다니우스 사무총장은 잠시 발표를 멈추고 기다려야 했다. 일반인에게 낯설 수밖에 없는 수상자들의 사진과 이름, 소속 등을 큰 화면에 비춰주고 바로 수상자들의 학문적 성과들을 설명하는 과학 분야 발표 모습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딜런은 몇 년 전부터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됐지만, 한림원이 대중 음악으로까지 장르를 확대할 것이라고 예상한 전문가는 많지 않았다고 AP 통신은 전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딜런이 작사가로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며, 그가 종종 후보로 거론되는 것은 "노벨상과 관련한 가장 오래된 농담 중 하나로 여겨졌다"고 전했다. 딜런의 노벨상 수상에 대해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미국의 출판업자이자 작가인 제이슨 핀터는 "밥 딜런이 노벨상을 받을 수 있다면 스티븐 킹은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올라가야 한다"고 적었다. 영국 언론인이자 작가인 조앤 베이크웰은 "딜런! 와! 훌륭한 선택이다"라며 환영했다. ♦ 2010년 딱 한번 한국 방문...공연 직전 대기실에서 원한건 와인 한 병·재떨이·물 딜런이 한국을 찾은 것은 딱 한 번뿐이었다. 2010년 3월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콘서트를 열고 '라이크 어 롤링 스톤' '블로잉 인 더 윈드' 등 히트곡을 선보여 6000여명의 관객을 감동으로 몰아넣었다. 한국에서 기자회견, 인터뷰 요청에 일절 응하지 않아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지만, 허례허식 없는 소탈한 모습으로 화제가 됐다. 경호, 통역 인원을 최소화하고 환영 행사도 정중하게 거절했다. 당시 그가 대기실에 요청한 것은 화이트 와인 한 병, 재떨이 그리고 물뿐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중음악평론가 임진모는 "로큰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두 뮤지션이 밥 딜런과 비틀스다"라며 "비틀스의 노래가 시적인 가사로 바뀐 것은 밥 딜런 영향이 컸다"고 설명했다. 이어 "밥 딜런은 20세기 대중음악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2000년대에도 꾸준히 앨범을 내며 여전히 젊은 사람들 못지않은 실험적인 음악을 선보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또 밥 딜런의 시적인 노랫말에 대해 "밥 딜런 이전의 대중음악은 '보이 미츠 걸'(Boy meets girl) 수준의 사랑과 이별 노래가 주를 이뤘다. 그런데 밥 딜런의 노래는 반전과 평화, 시대 의식과 자유의 메시지가 있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러면서 "미국인들에게도 밥 딜런의 노랫말을 해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밥 딜런 노래를 풀이하는 전문 강좌가 미국 대학가에 생기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대중음악평론가 김작가(예명)는 "밥 딜런은 음악을 하나의 개인의 감정에서 사회적 맥락으로 승화시킨 첫 번째 인물이다"라며 "사회 참여적이되 기존 저항음악가들과 다르게 문학적으로 완곡한 표현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1950년대 비트 문화를 음악으로 녹여내고 대중음악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제시했던 주인공이다"라고 설명했다.     송금종 기자   밥 딜런 밥 딜런(2010년) 기본 정보 본명 Robert Allen Zimmerman 출생 1941년 5월 24일 (75세)  미국 미네소타 주 덜루스 국적  미국 직업 싱어송라이터, 작가, 화가, 시인, 극작가, 디스크자키 장르 록, 포크, 포크 록, 블루스, 컨트리, 가스펠 악기 보컬, 기타, 베이스 기타, 하모니카, 건반 악기 활동 시기 1959년~현재 레이블 콜롬비아 레코드 관련 활동 존 바에즈, 더 클랜시 브라더스 웹사이트 "); cursor: pointer; padding-right: 13px;">BobDylan.com 밥 딜런(Bob Dylan, 1941년 5월 24일~)은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시인, 화가이다.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고, 본명은 로버트 앨런 지머먼(Robert Allen Zimmerman)이다. 그의 작품은 1960년대부터 비공식 작자와 저항음악의 대표로서 사랑을 받았다. 한국의 학생운동에도 영향을 준[1]"Blowin' in the Wind"그리고 "The Times They Are a-Changin'"과 같은 노래들은 사회상을 잘 보여주는 저항적 노랫말로 시민권을 대표하는 곡이 되었으며, 베트남 전쟁에 대한 저항의 표상이 되었다. 대중음악역사상 가장 영향력있는 음악가 중 한명으로 꼽힌다. 음악가로는 처음으로 201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목차   [숨기기]  1발자취 2노벨 문학상 수상 3영향 4예명 5음반 목록 6각주 7바깥 고리   발자취[편집] 딜런은 10살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고, 1959년 미네소타 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61년에 중퇴하였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우상인 포크 가수 우디 거스리를 만나기 위해 뉴욕으로 간다. 뉴욕에 도착해 우디 거스리를 만나고 그리니치 빌리지 주변의 클럽들을 전전하며 연주하던 그는 유명 음반 제작가 존 하몬드의 눈에 띄어 콜롬비아 레코드를 통해 데뷔하게 된다. 그 후 앨범 The Freewheelin' Bob Dylan(1963) 의 성공을 통해 당시 활발했던 사회적 저항 운동의 상징적인 음악가가 되었으며, 특히 잭 케루악,앨런 긴즈버그 등 비트닉 작가들의 영향을 받은 그의 시적인 가사는 대중음악에서의 가사의 수준을 끌어 올렸다. 하지만 자신이 의도치도 않았던 저항 가수로서의 굴레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는 언론과 자주 마찰을 일으키게 되며, 당시 비틀즈를 위시로 한브리티시 인베이전 밴드들의 일렉트릭 사운드에 자극을 받아 정통 어쿠스틱 포크에서 일렉트릭 사운드로의 전환을 시도한다. 1965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The Newport Folk Festival)에서 록 밴드 폴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와 키보디스트 알 쿠퍼를 대동하고 일렉트릭 사운드를 선보인 사건은 수많은 대중과 포크 팬들의 야유와 반발을 불러 일으키지만, 딜런은 자신의 음악적 전환을 확고하게 이어갔으며 이를 통해 포크 록이라는 새로운 음악적 영역을 창조하고 발전시켰다. 이 시기의 음반으로는 Bringing It All Back Home(1965), Highway 61 Revisited(1965), Blonde On Blonde(1966)가 있다. 1966년 7월, 오토바이를 타다가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한 딜런은 록 밴드 더 밴드와 함께 잠적하여 주로 루츠록(Roots Rock) 장르의 음악을 만드는데, 이때 만들어진 곡들은 부틀렉 형식으로 떠돌아다니다가 1975년 The Basement Tapes라는 이름으로 음반화된다. 또한 1967년 즈음에는 컨트리로 전향하여 컨트리의 본고장인 내슈빌에서 컨트리록 음반 John Wesley Harding(1967), Nashville Skyline(1969)을 녹음해 발매하며 이후의 컨트리록 유행을 선도한다. 1970년대 초반에는 주로 더 밴드와 함께 작업했고, 친구이자 비틀즈의 전 멤버인 조지 해리슨이 1971년에 주최한 콘서트 포 방글라데시(Concert For Bangladesh) 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이후 아내와의 불화와 이혼을 겪으며 Blood On The Tracks(1975), Desire(1976) 등의 음반을 발매하며 활발한 공연 투어를 벌였다. 1980년대 초반에는 기독교로 개종하기도 했는데, 당시의 음악은 대부분 종교적 주제와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미국 연방법원이 판결문에 그의 가사를 인용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82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1988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으며 2000년에 폴라음악상을 수상하였다.[2] 1985년, 마이클 잭슨 등 유명 아티스트들이 다수 참가한 자선 프로젝트 'USA for Africa'에 참가하였으며, 1988년, 조지 해리슨, 로이 오비슨, 제프 린, 톰 페티와 '트래블링 윌버리스'를 결성하였다. 1999년 타임지는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밥 딜런을 선정했다.[3] 2000년에 영화 《원더 보이스》에 나온 그의 노래 "Things Have Changed"와 함께 아카데미 상을 수상하였고, 2008년에는 "팝 음악과 미국 문화에 깊은 영향"으로 퓰리처상의 표창장을 받았다. 2004년 10월에 출판된 회고록「Chronicles: Volume One」(바람만이 아는 대답: 밥 딜런 자서전)은 뉴욕 타임스의 논픽션 부문 베스트셀러 목록에 19주간 머물렀다.[4] 2009년 4월 28일 딜런은 그의 33번째 스튜디오 앨범 Together Through Life을 발매하였다. 이 앨범은 빌보드 차트와 '가장 많이 팔린 200개의 앨범' 차트에서 모두 1위에 올랐으며, UK앨범 차트에서는 발매된 지 1주 만에 1위에 올랐다. 2010년 3월 31일, 데뷔한지 48년 만에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첫 내한 공연을 가졌다. 2016년 10월 13일, 대중 가수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노벨 문학상 수상[편집] 스웨덴 한림원의 사라 다니우스 사무 총장은 수상 발표 직후 한 인터뷰에서, "밥 딜런은 귀를 위한 시를 쓴다"고 표현하였다. "밀턴과 블레이크에서 이어지는 영어권 전통 속에서 위대한 시인이며, 항상 자신을 쇄신하고 새로운 신원을 창조하고 있다. 2천5백 년 전에 써진 호메로스와 사포의 시를 지금까지 읽고 우리가 그것을 즐긴다면 밥 딜런 또한 읽을 수 있고 읽지 않으면 안 된다."고 수상 배경을 밝혔다.[5][6] 영향[편집] 미국 포크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가수이다. 더 클랜시 브라더스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존 바에즈와 피터, 폴 앤 메리에게 영향을 주었다. 밥 딜런이 지은 곡들 가운데 "Restless Farewell"은 더 클랜시 브라더스가 부른 아일랜드 고전 포크송 파팅 글래스를, "Ramblin' Gamblin' Willie"는 브레넌 온 더 모어를, "Farewell"은 잉글랜드 고전 포크송 리빙 어브 리버풀을, "Pretty Paggy-O"는 메이드 어브 파이프-이-오를 패러디한 곡이다. 밥 딜런이 지은 반전평화 가요인 "Blowing in the Wind"는 존 바에즈나 주디 콜린스(Judy Collins), 킹스턴 트리오(The Kingston Trio), 피터, 폴 앤 메리 등등도 불렀다. 한편 대한민국의 1970년대 통기타 포크 음악은 미국 포크 음악의 영향을 받았다. 이를테면 김민기, 양희은등의 가수들은 모두 통기타를 사용하는데, 미국 포크 음악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호너사의 하모니카 시그네춰가 있는 뮤지션이다. 예명[편집] 웨일스 시인 '딜런 토마스'에서 스스로 개명하였다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서부극 《건스모크》의 등장인물 '마샬 맷 딜런'의 어간에서 차용하였다는 설도 있다.[7] 음반 목록[편집] (1962) Bob Dylan (1963) The Freewheelin' Bob Dylan (1964) Times They're A-Changin' (1964) Another Side of Bob Dylan (1965) Bringin' All Back Home (1965) Highway 61 Revisited (1966) Blonde on Blonde (더블앨범) (1967) John Wesley Harding (1969) Nashville Skyline (1970) Self Portrait (더블앨범) (1970) New Morning (1973) Dylan (1973) Pat Garret & Billy the Kid Soundtrack (1974) Planet Waves (1975) Blood on the Tracks (1976) Desire (1978) Street Legal (1979) Slow Train Coming (1980) Saved (1981) Shot of Love (1983) Infidels (1985) Empire Burlesque (1986) Knocked Out Loaded (1988) Down in the Groove (1989) Oh, Mercy (1990) Under the Red Sky (1993) Good as I Been to You (1997) Time out of Mind (2001) Love and Theft (2006) Modern Times (2009) Together Through Life (2009) Christmas in the Heart (2012) Tempest (2015) Shadows in the Night (2016) FALLEN ANGELS (비정규 앨범, 컴필레이션, 라이브 앨범 등은 제외)   이동
518    "문학에 대한 경고!!!" ㅡ 노래가 곧 詩, 詩가 곧 노래 댓글:  조회:5238  추천:0  2016-10-19
10월 13일,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스웨덴 한림원은 “위대한 미국의 노래 전통 안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냈다.”는 선정 이유를 들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이 소식은 우리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사실 그럴 만도 하다. 역사학자, 정치인, 철학자, 논픽션 작가 등이 노벨문학상을 탄 적은 있었지만, 가수가 이 상을 탄 것은 처음이니 말이다. '문장'이 아닌 '노래'가 문학의 범주에서 평가 받은 사건이라고 할까? 그런데 이 일이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잠시 '문학'이란 따옴표를 걷어내고 과거의 사례들을 살펴보자. 어쩌면 우리는 돌고 돌아 다시 문학의 처음으로 되돌아왔을 뿐일지도 모른다.     1. 고대 그리스 "...5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책, 즉 파피루스를 재료로 한 두루마리 책이 문학 소통의 주요한 매체가 되었다. 이보다 기껏해야 300년 전에 글자가 단지 생산 활동에 도입되긴 했지만 아직 문학의 소통을 위해 쓰이지는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으며 다만 '공연되는 현장'에서 숨을 쉬며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구전문학이 문자 기록으로 전환되면서-기원전 5세기부터 뚜렷이 드러나는데-상고기 전체를 통틀어 문학이 지속적으로 생산되었다. 그제야 문학은 서책에 담겨 늘 눈앞에 펼쳐 볼 수 있는 실물로서 활발히 연구되었다. 문화사의 관점에서 이러한 전환 과정의 의미는 자못 심대하여 아마도 오늘날 불기 시작한 컴퓨터 시대로의 변화만이 거기에 견줄만할 것이다." (책 '희랍문학사', 마틴 호제 저) 고대 그리스에서 글자로 '문학'이란 것을 따로 기록했던 시기는 기원전 5세기부터다. 책에선 고대 그리스 문학의 시작을 기원전 8세기부터로 보니, 적어도 처음 300년 동안 '문학'이라는 것은 모두 '노래로 불려지는 것'들을 의미했다. 숱한 축제에서 영웅이나 신을 찬양하기 위한, 혹은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노래들이 바로 '시'였고, 이 노래들을 악기 연주와 함께 부르고 연기하는 자들은 곧 '시인'이었던 셈이다. '서정시'를 뜻하는 말 ‘뤼릭(Lyrik)’ 또한 '칠현금과 어울려'라는 뜻을 가진 형용사 ‘뤼리코스(Lyrikos’)에서 왔을 정도다. 우리에게도 유명한 영웅서사시의 대가 호메로스, 서정시의 대가 사포, 신들을 찬양했던 헤시오도스 등도 알고 보면 당대를 주름잡던 '콘서트 스타'에 더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촛불의 밤'이 아닌 열광의 '락 콘서트장' 무대에 더 어울리는 사람들 말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밥 딜런이야말로 시인의 원초적 모습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2. 고대 중국 "'시경(詩經)'은 기원전 12세기경부터 시작되는 중국 서주(西周)에서부터 춘추 초기까지 불렸던 노래 가사의 모음집이다. 내용은 궁중의 향연이나 제례에서 불리던 노래 가사나 민간에서 불리던 민요의 가사로...각국의 민요...조정의 음악...종묘 제사 때 연주하던 음악의 가사다."(책 '시경 강설', 이기동 역) 노래가 곧 '시(詩)'와 마찬가지였던 역사는 서양에만 있는 특이한 사례는 아니다. 공자님이 편찬한 ‘시경(詩經)’은 처음엔 그저 ‘시(詩)’라고만 불렸는데, 이 안에 실린 작품들은 모두 애초에 노래였다. 동양 최초 시집은 곧 '가사집'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운율과 후렴구까지 맞춰 놓아 분명 입으로 불려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었을 내용의 '시(詩)'들이 가득하다. 입에서 입으로 불려져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들이 최초의 '시(詩)'라면, 연주와 목소리가 있어야 마침내 온전해지는 밥 딜런의 노래들 또한 '시(詩)'로 불리는 게 크게 무리는 아닐지도 모른다 3. 조선 "판소리는 직업적인 소리꾼이 관중들 앞에서 고수의 북장단에 맞추어 긴 이야기를 말과 창을 번갈아가며 구연하는 한국의 전통 구비서사시다...판소리 사설은 서사문학으로서 주인공의 처지나 상황이 변하는 과정을 기술한 것이며, 이에 따라 청중들의 정서적 반응도 변화한다...그래서 명창이 되려면 작품의 문학적 이해와 이에 바탕을 둔 음악적 표현은 물론 연행자로서의 자질이 동시에 요구되었다...판소리는...문학과 음악과 연극이 합쳐진 종합예술이다."(책 '한국문학강의', 조동일 외 저) 고대 그리스와 중국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조선에선 문학에 공연적 요소까지 더한 '종합예술'이 유행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판소리이다. 문학이 음악, 연극과 따로 분리되지 않고 합쳐진 경우가 고대 그리스에만 있던 것은 아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판소리는 장르 구분 상 '구비서사시'와 '공연서사시'로 분류된다는 점이다(* 유력한 견해가 그렇다. 이 내용은 책 '판소리 문학의 비평과 감상'(정충권 저)에 있다.). 서사시로 불리니 분명 문학적 요소를 띠고 있긴 한데, 언어적 표현만 뛰어나다고 완성되진 않는 문학, 음악적 표현력에 더해서 공연자로서의 '쇼맨십'까지 요구되는 문학. 이 묘한 중첩을 문학상을 탄 밥 딜런의 노래들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목소리와 악기가 필요하면 문학이 아닌 것일까? 혹 가사와 연주를 따로 떼어내면 밥 딜런의 '문학성'과 '음악성'은 분리되는 것일까? 밥 딜런의 노벨 문학상이 놀랄 일은 아니지만 당혹감을 주는 건, 돌고 돌아 다시 처음의 자리에 선 문학이 우리에게 잊혀졌던 문학의 정의를 다시 요구하고 있어서다. ======================================== 지난해 언론인이자 르포작가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수상에 이어, 스웨덴 한림원이 가수 밥 딜런을 올해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한 것은 신선한 파격이 아닐 수 없다. 문학의 지평을 넓혔다는 찬사에서부터 대중음악의 가사는 시가 아니라고 하는 고루한 반론에 이르기까지, 세간의 예상을 뒤집은 한림원의 이번 결정이 분분한 이견들을 불러올 만큼 충격적이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짐 모리슨의 노랫말을 살부(殺父)의 염으로 가득한 장정일의 시편들에 견주어 읽었던 나에게는, 그 결정이 그렇게 의외의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인식의 문이 닦여지면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짐 모리슨이 월리엄 블레이크의 이 시구에서 그룹의 이름인 '도어스(The Doors)'를 가져왔던 것처럼, 밥 딜런의 이름에는 그가 사랑했던 웨일스의 시인 '딜런 토마스'가 아로새겨져 있다. 불문학자 월리스 파울리는 랭보와 짐 모리슨의 관계를 다룬 그의 저서 한 곳에 이렇게 적었다. "밥 딜런은 자신을 알리고 강렬한 이미지를 심기 위해 자신의 노래에서 랭보를 이야기한 최초의 록 가수 중의 한 사람이다." 짧은 생을 살다 간 반역의 시인 랭보는 어떤 도취와 반항의 감수성으로 1960, 70년대 앵그리 영맨의 마음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러니까 '모든 권력을 상상력에로' 돌려야 한다고 외쳤던 세대의 정신은, 시적인 것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시적인 열정을 모르고, 문학을 읽지도 않는 나라에서 노벨문학상을 염원하는 것은 민망한 일이다. 노벨상에 대한 우리 국민의 열망이 유별나다는 것은 이미 오래된 이야기지만, 세계적인 인정을 갈구하는 그 강렬한 선망이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우리 근대성의 공허한 결핍에 대한 하나의 증상이다. 그러니까 노벨상에 대한 그 이상한 열기는, 우리들의 미숙한 근대화가 낳은 집단적 내상의 쓰라린 증후이다. 노벨상에 대한 이런 이상한 욕망과는 별개로, 이번 선정은 오랫동안 우리를 지배해왔던 어떤 통념들을 뒤흔든다. 그리고 그것은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대적인 물음을, '무엇이 문학인가'라는 또 다른 물음으로 대체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민요 판소리 무가 가사 등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문학의 갈래론을 정립한 조동일은, 민요의 장르적 성격을 서양의 발라드(ballad)에 견주어 논의하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시와 노래가 본디 하나로서 시가(詩歌)라는 이름으로 불려왔던 것을 생각할 때, 밥 딜런의 노랫말을 문학의 범주에서 제외하려는 의욕은 가소롭다. 그럼에도 그것이 논란으로 비등할 만큼 대중가요에 대한 문학 쪽의 견제는 심오하다. 노랫말이 문학인가 아닌가의 사실 여부와는 별도로, 그것을 문학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이들의 그 단호함을 떠받치는 그 무엇이 서서히 붕괴되고 있다는 것, 그런 사정이 몰락을 안타까워하는 이들의 보수적 심사를 더욱 자극해 격렬한 반론을 불러일으키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문학'이라는 관념이 근대라는 특정한 시기에 정치적 목적을 위해 고안된 일종의 제도이자 이념이라는 것을 폭로함으로써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근대에 유효했던 문학의 정치적 기능이 퇴색하고 있는 지금, 그의 진단이 대체로 옳았다는 것은 부정하기는 어려운 사실이 되었다. 문학이 권력화되었다는 시비가 가능한 것은, 시비를 걸어도 될 만큼 그 권력이 쇠락했음을 방증한다. 작가들을 결속시켰던 문인 단체의 기능이 예전만 못하고, 따라서 문단이라는 길드적인 체제가 무너진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정전화된 문예지들의 권위가 도전받으면서 각종 대안 매체가 등장했고, 기존 문예지들도 그 운영진과 잡지의 형식을 완전히 쇄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대학의 국어국문학과나 문예창작학과가 통폐합되거나 융합적인 학제로 해소되어가는 것도, 문학이라는 근대적 통념의 해체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 바야흐로 우리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그 근대적 질문이 무망해져가는 전환기의 도정에 있다. 춘원 이광수가 '문학이란 하(何)오?'를 발표한 지가 올해로 정확히 100년이 되었다. 이 글은 문학을 'Literature'의 번역으로 수용하면서, 시 소설 희곡처럼 감정의 상상적 형식을 그 나라의 국어로 표현한 것이 근대적인 의미의 문학이라고 정의한 획기적 문건이다. 한림원의 결정을 춘원이 정의했던 바로 그 문학이라는 통념의 해체는 물론, 근대적인 것에 대한 발본적인 의문의 제기로써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밥 딜런이 즐겨 했던 말 'I'm Not There'를 속으로 깊이 음미해 본다. / 전성욱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   (연규해 칼럼)= '밥 딜런'이 안겨준 노벨문학상의 색다른 의미   “밥 딜런의 노래는 ‘귀를 위한 시’다. 그는 놀라운 방법으로 리듬을 만들었고 인내를 승화시켰으며 획기적인 사고를 보여줬다.” 스웨덴 한림원이 밝힌 2016년 노벨 문학상을 선정한 이유다. 지난 13일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되자 세상은 발칵 뒤집혔다. 미국에서는 1993년 소설가 토니 모리슨 이후 23년 만인 데다 그것도 작품 활동을 하는 문학인이 아닌 대중가수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는 것은 사상 처음있는 것이어서 충격파는 더 강했다. 해석의 차이는 있겠지만 올해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강한 충격파만큼의 달라진 세상에 대한 영향력이 컸다는 방증으로도 보인다. 한 분야의 전통을 무너뜨리고 더구나 고고한 문학의 틀을 바꾼다는 것은 금방 이해하기는 힘든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이번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더욱 값지고 빛나 보인다. 그의 노래 중 우리에게 친숙한 ‘노킹 온 헤븐스 도어(Knockin’ On Heaven’s Door)’는 지금껏 여러 가수가 인기리에 리메이크해 부르기도 했다. 엄마, 내 옷에 달린 이 배지를 떼어 줘요(Mama, take this badge off of me) 난 더이상 이걸 쓸 수 없어요(I can't use it anymore ) 보이지 않을 만큼 세상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어요(It's getting dark, too dark to see) 내가 천국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을 느껴봐요(Feel I'm knocking on heaven's door) 두드리고 두드리고 천국의 문을 두드리고(Knockknockknocking on heaven's door). 젊디 젊은 두청년이 뇌종양과 골수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며 서로를 위로하며 나누는 이야기를 거침없이 시적으로 표현한 대중가요는 1970년대 우리나라 포크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미국 생활을 오래하며 한때 한국의 밥 딜런으로 불렸던 한대수는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해 딜런 이전에는 이런 시적 표현의 노래가사가 없었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1970년대 한국 포크계를 이끌었던 가수 윤형주, 송창식, 김세환 등도 딜런의 저항정신 노랫말이 당시 젊은이들의 가슴을 울렸다고 전한다. 사실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데 대한 낯선 반응들은 곳곳에서 새나오고 있지만 그가 글쓰기에 재능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래미상, 아카데미상, 퓰리처상에 이르는 다방면의 상을 차지할 만큼 다재다능한 그는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으로 2004년 뉴욕타임스가 뽑은 올해 최고의 책에 선정됐을 정도로 문학에도 뛰어나 음악이면 음악, 영화면 영화, 사진이면 사진, 문학이면 문학, 말그대로 천재성을 타고난 팔방미인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처음부터 이런 딜런은 아니었다. 러시아계 유대인 촌뜨기에 불과했던 딜런의 운명은 엘비스프레슬리의 영향을 받아 가수가 되지만 대중적 인기는 얻지 못했다. 초창기에는 그랬던 그가 영국의 비틀즈도 미국의 열광적이었던 팝가수 마이클잭슨도 넘지 못했던 것을 해낸 이유가 따로 있다.  그들처럼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거나 화려하진 않았지만 대중가수가 의외일 정도로 꾸준하게 사회저항 운동에 나서며 바른길을 인도하고 그런 일부를 가사에 담고 가슴으로 노래한 음유시인였기에 그들과 달랐고 이에 노벨문학상이라는 최고의 영광까지 누렸다. 스웨덴 한림원의 선정 배경도 어쩌면 이런 점에서 내다본 문학과 사회변화의 관점과 일치하는 점이 아닐런가한다. 시나 소설도 세상이 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랫말을 통해서도 삶과의 소통을 하고 공감을 할 수 있다고 평가하지 않았나 싶고 이점에도 찬사를 보내고 싶다.  물론 문학의 가치성을 논하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가사 내용이 시어(詩語)처럼 신비롭고 삶의 일부나 사회적 반향의 꿈틀대는 그대로를 적시하고 이야기한 용기와 자유로운 표현은 멋지고 세상의 화두가 될 만하다. “나는 먼 길을 왔고 가야 할 먼 길을 출발했다. 그런데 지금 운명이 그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운명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느꼈다.”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에서처럼 딜런이 먼길을 찾아서 최고의 명예로운 노벨문학상을 거머쥐었음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아무튼 올해 노벨문학상 선정은 문학의 영역이나 편견에서 몸체까지 탈바꿈한 사건이라는 게 공통분모다. 특히 순수문학을 추구하는 문학계의 충격은 그야말로 멘붕 상태로 빠지게 한 것도 현재까지 진행형이다. 우리나라 문학계에서도 밥 딜런의 노래가사가 노벨문학상을 탈만큼 문학성이 있느냐에 대한 반문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스웨덴 한림원이 심사숙고해서 115년 만에 대중가수 밥 딜런에게 노벨 문학상을 선정, 수여한 것에는 그만한 깊숙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기에 그것을 인정을 하고 축하를 해줘야하는 게 중요하다. 노벨상은 한 개인의 명예이기도 하지만 한 국가의 염원이 담겨있다. /연규해 논설실장 ================================   밥 딜런의 젊은 시절. 그는 미네소타 대학을 중퇴한 뒤 자신의 우상이던 포크가수 우디 거스리를 찾아간다. 그는 1960~1970년대 '비트세대'와 긴밀하게 교류하며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창조해낸다. /사진=밥 딜런 공식 페이스북 ‘노래가 문학인가’라고 물으며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반기를 드는 이들을 설득시키는 명확한 해답은 역설적으로 노래 가사다. 딜런 음반 중 최고의 평가와 높은 인지도를 얻는 ‘블론드 온 블론드’(Blonde On Blonde, 1966)만 거론하면, ‘사랑 타령에 무슨 노벨?’이라는 의문에 공감을 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한 장의 음반(가사는 사적인 사랑 노래를 하지만, 음악 전체는 실험적인 시도로 평단의 호평을 받음)을 제외하고 그의 노래는 대부분 ‘문학적 테두리’에 머물러 있다. 대표작 ‘바람에 실려서’(Blowin’ in the wind, ‘바람만이 아는 대답’으로 의역, 1963)에서 그의 가사는 이렇게 얘기한다. ‘얼마나 많은 길을 헤매야 어른이라고 불릴까/하얀 비둘기는 얼마나 많은 바다를 건너야 모래사장에서 잠들 수 있나/몇번의 대포알을 쏘아야 탄환이 멈출까/친구여, 답은 바람속에 있다네/그 답은 바람 속에 있다네’ ◇ 짧은 가사에도 폭넓은 해석력 갖춰…‘문학의 결’ 놓지 않아 아주 짧은 가사지만, 운율의 묘가 시처럼 들어맞고 주제 의식을 향한 깊은 사례의 연결이 표현 이상의 상상력을 부추긴다는 점에서 문학적 결을 지니고 있다. 마지막 문장 ‘답은 바람속에 있다’에서 보여주는 미묘하면서도 은유적 상상력은 읽는 이의 해석을 열어놓음으로써 가장 시적인 완결성을 보여준다. 전쟁 반대와 인권, 평등의 메시지를 전파한 이 노래의 사회 참여적 정신은 그러나 ‘질문만 하고 답을 주지 않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직접적 현실참여보다 문학적 은유에 더 기댔다. 딜런 곡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알려진 ‘구르는 돌처럼’(Like a rolling stone, 1965)은 한 여인을 계속 조롱하는 불편한 가사로 점철됐다. ‘~느낌이 어때/느낌이 어때/홀로 그렇게 되는게/집으로 가는 방향조차 없이/완전한 무명처럼/구르는 돌처럼 있는게’ 선뜻 보면 ‘그 외교관이랑 같이 크롬마에 타는게 더 익숙했지’하는 가사처럼 허영에 대한 조롱으로 비칠 수 있지만, 자본과 길들여진 가치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읽힐 법하다. 딜런의 문학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노래는 ‘괜찮아요, 엄마’(It’s alright, Ma, 1965)다. 딜런의 전기작가 하워드 사운즈가 ‘냉혹한 명작’이라고 평가할 만큼 그의 시퍼런 문학성이 오롯이 새겨져 있다. 구절구절이 모두 ‘명언’으로 기억돼 옥스퍼드 사전과 대통령 수락 연설에서 쓰일 정도였다. ‘돈은 말하지 않는다, 선언할 뿐이지’, ‘광고는 그대가 대단히 특별하다고 생각하도록 속이지’, ‘설령 주인이 현명한 자와 어리석은 자와 같은 규칙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같은 구절은 지금도 계속 회자된다. 밥 딜런을 스타로 만들어 준 두번째 앨범 '프리윌링 밥 딜런'(왼쪽)과 히트곡 '라이크 어 롤링스톤'이 담긴 앨범 '하이웨이 61 리비지티드' ◇ 구절구절이 모두 ‘명언’…‘아웃사이더의 미학’이 펼치는 ‘냉혹한 명작’ 이 노래 가사는 위선과 상업주의 등 미국 사회 전반에 걸친 냉혹한 비판을 문학적 언어로 이용하고 있다. ‘바삐 태어나지 않은 자는 바삐 죽는다’ 같은 구절은 지미 카터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 수락연설에서, 작가이자 언론인인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식도암으로 죽기 전 쓴 마지막 기사에서 각각 인용했다. ‘음유시인 밥 딜런’의 저자인 손광수 동국대 영문과 강사는 딜런의 작품 세계에 대해 “난해하다”는 말로 압축했다. 손 강사는 “딜런의 문학 세계는 연구하면 할수록 어렵다”며 “쉽고 상투적인 가사와 난해한 가사 두 측면이 공존하는 데다, 스스로 답을 주지 않아 권위적인 해석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탄 이유로 노벨상위원회가 적시한 “호머와 사포가 연주를 위한 시적 텍스트를 썼고, 밥 딜런도 마찬가지”라는 설명에 손 강사도 동의했다. 그는 “딜런의 가사는 지면으로 읽었을 때 혹평을 받을 가능성이 높을 정도로 구조적 결함이 엿보인다는 의견도 있다”며 “그의 가사는 가창과 사운드로 연결될 때 시로 온전히 발현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시인 로버트 로웰이 “밥 딜런은 기타라는 목발을 짚고 있어야 하는 시인이다. 음악이 없으면 그의 시는 불구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손 강사는 딜런의 가사를 ‘공연되는 시’로 명명했다. 시처럼 ‘연’ 구조가 아닌 ‘절’ 구조를 갖춘 노래는 악보에 맞추는 형식의 한계 때문에 다른 음악적 재료와 결합할 때 문학적 상징성이 도드라진다는 것이다.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밥 딜런이 13일 (현지시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가사는 음악과 결합할 때 비로소 완전한 의미를 갖는 '공연되는 시'라는 평을 받는다. /사진=머니투데이DB ◇ 리얼리즘부터 내면의 자아까지…“문학과 대중문화의 경계 사라져” ‘포크’에 집중한 딜런의 초기 작품은 저항과 반전, 사회 비판 등 리얼리즘을 중시한 가사로 채워졌지만 ‘록’으로 방향을 튼 후기 작품은 실험적인 예술적 시도와 내면의 자아로 모인다. 프랑스 시인 랭보를 새로운 자아의 모델로 삼은 딜런의 후기 가사가 철학적인 모호함으로 채워진 것도 이 같은 배경이 작용했다. 손 강사는 “‘블로잉 인더 윈드’의 포크부터 ‘잇츠 올라잇, 마’의 록까지 관통하는 가사의 일관적 태도는 ‘아웃사이더의 미학’이라고 볼 수 있다”며 “사회비판에서 내면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도 기성 사회가 규정하는 질서에 반기를 들고 정체성에서 벗어나려는 일련의 시도를 통해 일관된 주제에 몰입했다”고 설명했다. 딜런의 수상에 대해 ‘문학에 대한 경고’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이택광(문화평론가) 경희대 영문과 교수는 “지금의 문학이 대중성을 잃었기 때문에 농담이 현실이 된 사례로 봐야 한다”며 “농담처럼 밥 딜런의 수상 얘기가 자주 나왔는데, 실제로 일어났으니 결국 위원회가 문학에 대해 경고를 보낸 결과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한편으로는 문학과 대중문화의 경계가 없어진 상황을 반영했다”며 “무엇보다 세계대전이 만들어 놓은 전후 체제에 사는 우리는 그가 던진 메시지 안에서 의미를 찾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여러 면에서 이번 수상이 상징적”이라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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