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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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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    "노벨문학상 수상자" 밥 딜런 저서전 불티나다... 댓글:  조회:4936  추천:0  2016-10-19
밥 딜런 자서전 -  밥 딜런 지음, 양은모 옮김/문학세계사   1. 2004년 뉴욕 타임스가 뽑은 올해 최고의 책!    2005년 8월, 영국의 잡지 이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세상을 바꾼 가장 뛰어난 대중문화 작품’은 밥 딜런의 노래였다. 최근 100년간의 음악, 영화, 책, TV프로그램을 망라한 모든 대중문화 작품 중에 밥 딜런의 노래 ‘Like a Rolling Stone’이 1위를 차지한 것이다. 그 이유로는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지친 삶을 다독여주는 시적인 열정 등 밥 딜런의 인간적인 매력이 많은 부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밥 딜런이 직접 쓴 최초의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에는 그간 알려지지 않은,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한 인간의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과 솔직한 내면 고백이 커다란 울림이 되어 흐르고 있다.  노래하는 음유시인 밥 딜런의 노래가사는 미국 고교와 대학의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그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깊은 울림을 갖고 있는 그의 가사 때문에 몇 해째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글쓰기에 남다른 재능을 지닌 밥 딜런이기에 그가 직접 쓴 자서전은 2004년 뉴욕타임스가 뽑은 올해 최고의 책에 선정되고 내셔널 북 어워드(National Book Critics Circle Award)를 수상하였다.   2. 20세기의 전설에 의해 씌어진 가장 특별한 자서전 "나는 먼 길을 왔고 가야 할 먼 길을 출발했다. 그런데 지금 운명이 그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운명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느꼈다."   밥 딜런이 직접 쓴 그의 자서전『바람만이 아는 대답』에서 한 말이다. 딜런의 눈과 열린 마음을 통해 우리는 그가 처음 맨해튼에 도착했던 1961년의 그리니치 빌리지를 본다. 딜런에게 뉴욕은 밤을 새는 파티와 문학적인 각성과 덧없는 사랑과 진실한 우정의 가능성을 지닌 마법의 도시였다. 슬픔이 섞여 있는 회상은 꿰뚫는 듯 아픈 추억으로 중단된다. 이 책에서 잠시 뉴올리언스, 우드스톡, 미네소타를 들르는 여행은 특별한 시기에 대한 은밀하고도 개인적인 회상이다. 밥 딜런은 이번 자서전에서 가수 겸 작곡가의 꿈을 안고 뉴욕에 진출, 맨해튼에서 무명가수로 고생하던 시절의 일화와 느낌을 비교적 담담하게 소개한다. 특히 당시 대부분의 다른 무명 가수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딜런은 자신의 노래를 이해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술회한다. 딜런이 ‘꿈의 도시’ 뉴욕 땅을 밟았을 때는 매서운 추위가 몰아닥친 겨울철. 그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맨해튼에 도착, “내가 원하는 것은 돈도, 사랑도 아니다”라며 가수로서의 길을 밟아 나간다.  『바람만이 아는 대답』은 밥 딜런의 사상과 영향력을 시적이고 열정적이고 재치 있게 드러내는 매력적인 창이다. 관대한 정신과, 매력적이고 공상적이며 리드미컬한 딜런의 목소리는 시인과 같다. 딜런은 이 책에서 그의 음악을 검증하는 마크인 뛰어난 이야기 솜씨와 아름다운 표현력을 활용하면서 자신과 예술을 지금의 자리에까지 이끌어 준 사람들과 장소들에 대해 차분히 회고한다.  『바람만이 아는 대답』은 진정한 창작과 영감에 대한 이야기지만, 또한 퇴폐에 대한 이야기이고, 절반의 노력, 심지어 실패도 나름대로 쓸모가 있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밥 딜런은 본질적으로 유리한 입장에서,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그는 중요한 순간들을 밝히고 평가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헨리 밀러의 개인적인 글쓰기처럼 놀라운 성취이다. 이 책은 시대를 여는 이야기이고 인간 정신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결국 삶에 대한 이야기지만 전에는 결코 이런 식으로 씌어진 자서전이 없었다. 이 책에서 우리는 뜻밖에 매우 솔직한 딜런을 만나게 되며, 그간 베일에 가려진 여러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  그리고 이름을 로버트 짐머만에서 밥 딜런으로 바꾼 이야기며 뉴욕에서 만난 애인 수즈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냉대, 시대의 부름을 외면하지 말라며 몰려드는 반전 시위대와 히피들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해 총까지 준비했었다는 얘기를 털어놓는다. 그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독자들은 저 멀리 있는 스타보다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하는 평범한 가장으로서의 밥 딜런을 만날 수 있다.  또한 당시 최고의 가수였던 해리 벨라폰테와 첫 녹음을 가졌던 추억도 소개되고 있다. 밥 딜런은 「미드나이트 스페셜(Midnight Special)」이라는 해리의 앨범 중의 한 곡의 녹음에 하모니카를 연주했고, 그 녹음날짜는 오랫동안 그의 마음에 또렷이 남아 있게 되었다. 자신의 세션도 잊기 잘하는 그로서는 신기한 일이었는데, 그것은 벨라폰테와 함께 있으면 특별히 고양되었기 때문이었다고 회상한다.      3. 셰익스피어의 잃어버린 일기장에 비교되는 가장 특별한 자서전! 밥 딜런은 선데이 텔레그래프와 가진 인터뷰에서 “처음 회고록을 쓰겠다고 마음먹고 수동식 타자기 앞에 앉았을 때만 해도 오래된 일을 떠올릴 자신이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그는 “일단 써 내려가기 시작하자 ‘기억의 창고’가 열리는 것 같았다”며 “내가 만난 사람들의 생김새나 그들이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 등이 너무나 생생히 떠올라 나 자신도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그는 “나에 관한 책들이 여러 권 나온 것으로 알고 있고, 그 중 몇 권은 직접 읽어 봤다”며 “내가 쓴 회고록을 보면 나에 대해 잘못 알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자서전에는 밥 딜런이 음악 인생을 시작하기 위해 고향인 미네소타를 떠나 뉴욕으로 오는 과정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1960년대 초부터 선풍적 인기를 끌기 시작한 딜런은 흑인 사이에서 불리던 민요 성격의 노래인 포크 블루스에서부터, 로큰롤, 컨트리 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섭렵했다. 지금도 자신의 록 밴드를 이끌고 세계 순회공연을 하고 있는 딜런은 1991년 레코드 대상인 그레미상 중 ‘평생업적상’을 수상했고, 1988년 ‘로큰롤 명예전당’에 들어갔다. 한편, 밥 딜런(64)의 노래 ‘구르는 돌처럼(Like a Rolling Stone)’은 세상을 바꾼 가장 뛰어난 대중문화 작품으로 선정되었다. 영국잡지 〈언컷〉이 100호 발간을 기념해 최근(2005년 8월) 유명 가수와 영화배우 등 대중문화 스타들을 대상으로 ‘최근 100년간 세상을 바꾼 음악, 영화, 책, TV프로그램’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밥 딜런이 1965년 발표한 ‘구르는 돌처럼’이 1위에 오른 것이다. ‘Like a Rolling Stone’은 지난해 말 연예잡지 〈롤링스톤〉이 뽑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로큰롤’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참고로 세계를 바꾼 대중문화 순위는 1.구르는 돌처럼(밥 딜런) 2.하트브레이크호텔(엘비스프레슬리) 3.시 러브즈 유(비틀스) 4.새티스팩션(롤링 스톤스) 5.시계태엽 오렌지(스탠리 큐브릭) 6.대부 1, 2편(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7.지기 스타더스트의 흥망성쇠(데이비드 보위) 8.택시 드라이버(마틴 스콜세즈) 9.네버 마인드 더 볼록스(섹스 피스톨스) 10.죄수들 등이다.           
516    우리도 작문학(作文學) 문제로 고심할 때이다... 댓글:  조회:4794  추천:0  2016-10-19
[ 2016년 10월 20일 08시 45분 ]     ‘체육운동 발전을 통한 인민체질 향상’ 구호하에서... 글쓰기 연구[作文學]의 두 가지 방향  ---------------------------------------------------------------------------  작문학(作文學 composition studies), 또는 글쓰기 연구가 정확히 무엇을 연구하는 분야인지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주된 이유는 작문학이란 분야가 이미 많은 연구 영역을 포괄하고 있으며 계속 더 많은 연구 영역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작문학의 최근 연구는 정보 기술이 작문 과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를 포함한다.  작문학이란 연구 분야를 바라보는 두가지 다른 관점이 있다. 두가지 관점의 차이는 작문학이 다루는 지식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첫 번째 관점에 따르면, 작문학은 ꡒ담화ꡓ(discourse)에 관한 이론적 연구이다. 여기서 담화란 개념은 모든 형태의 의사소통을 포함한다. 이 개념은 인문학 일반에 도입되기 이전에 작문학자들의 전유물이었다.  두 번째 관점에 따르면, 작문학의 연구 결과는 강의 중에 이루어지는 학습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작문학은 글쓰기 교육의 방법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연구의 본질은 이론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은 두 번째 관점과 같은 실용주의가 작문을 정식 인문학 교과과정이 아닌 단지 일개 학습 보조영역으로 격하시킨다고 주장한다.  작문학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의 대립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작문학의 형성 과정을 살펴보자.  1. 작문학의 초기 형성 과정  작문학의 발생은 1880년대 미국의 대학에서 처음 개설된 1학년 작문 수업으로부터 시작된다. 당시에는 고등학교가 잘 준비된 학생들을 배출하면 대학의 작문 수업이 단계적으로 폐지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리고 당시에 영문학과 교수들은 ꡒ문학ꡓ이 아닌 ꡒ작문ꡓ을 가르치는 것을 헛된 고생으로 간주하였다.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구 소련의 인공위성)의 발사 성공은 작문학이 전문 학문분야로 성립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스푸트니크의 발사 성공에 충격을 받은 미국 정부는 대학 교육을 위한 연방 자금을 조성하였다. 1960년대 초반 연방 자금의 일부가 영문학과에 주어졌고 학과 내에서 최초의 수혜자는 작문 분과였다. 의회 청문회에서 한 하원의원은 소설과 시를 가르치는데 연방 자금이 한 푼도 사용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에 안심하였다. 영문학과 교수들에게 일종의 잡역으로 간주되던 분야가 갑자기 하나의 전문적 지식 분야로 떠올랐다. 작문학이 하나의 학문 분야로 자리 잡으면서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당시에 대부분의 작문학자들은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몇몇 영문학과에서는 ꡒ수사학 작문ꡓ 대학원 과정을 개설하기 시작했다. 대학 작문 센터에 직원을 두고 작문 프로그램을 운영할 필요가 생기자 그 분야의 철학 박사들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다. 따라서 일군의 학자들이 형성되었고 그들은 작문학을 전문적이고 지성적으로 정의하기 시작했다. 또한 작문학자들은 다른 연구 분야의 내용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언어학과 발생심리학의 연구는 ꡒ인지주의ꡓ(cognitivism) 작문 이론을 발생시켰다. (말을 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공포증을 극복할 수 있도록 글쓰기를 하는) ꡒ자유로운 글쓰기ꡓ 테크닉을 강조하는 ꡒ표현주의ꡓ(expression‎ism) 이론도 제시되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대학에 입학하면서 작문 교수들은 학생들의 다양한 문화 및 계층의 차이에서 비롯된 문제들을 극복하는 노력을 하였다. 따라서 다양한 인문, 사회적 내용을 작문학에 도입하기 시작하였고 작문학 학술지에 사회학적, 인류학 분야에서 인용된 내용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와 키케로의 저작에서 정교한 의사소통 이론의 원형을 찾아내어 수사학을 부활시켰다. 작문이 인기 있는 교과목이 되고 종신 교수직을 얻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작문학계에서 실제로 좋은 직책을 가지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대우 조건이 더 이상 나아지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조사에 따르면 거의 모든 대학은 작문 교육 강좌를 개설하고 있다. 대학의 85퍼센트 정도는 초빙 교수들이 최소한 작문 교육의 일부를, 가끔 교육 대부분을 담당한다. 교육은 수업에서 뿐만 아니라 종종 대학생들과 보조원들이 직원으로 근무하는 작문 센터에서도 이루어진다. 이런 열악한 조건에서 작문 교육자들은 학문을 위해 연구할 수 있는 여력을 갖지 못한다.  따라서 작문 교육자들은 1980년대 초반까지 공유했던 정체성 또는 연대성에 대한 회의를 갖게 되었고 교육을 구심점으로 정체성과 연대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작문학에 일어난 여러 변화들은 작문학의 정체성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2. 작문학의 정체성에 대한 논쟁  작문학의 정체성에 일어난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들 중의 한 명은 사우스 플로리다의 올슨(Olson)이다. 최근 저작인 『신념의 정당화: 스탠리 피쉬와 수사학 연구(Justifying Belief: Stanley Fish and the Work of Rhetoric)』(뉴욕 주립대학 출판부)를 비롯하여 수많은 작문학 서적들을 집필하거나 편집했다.  올슨은 작문 및 수사학의 경계를 확장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런 시도를 통해 작문학을 언어가 어떻게 기능하는지 연구하는 분야로 파악했다. 이런 파악은 작문 교육 영역을 넘어서서 작문학을 바라본 것이다. 올슨은 노암 촘스키, 리처드 로티, 가야트리 스피박, 슬라보예 지젝 같은 석학들과 인터뷰나 대담을 통해 작문의 경계를 재설정하고자 노력했다. 그런 석학과의 교류들은 일찍이 「고급 작문 저널(Journal of Advanced Composition)」로 알려진 그리고 올슨이 한때 편집장이었던 JAC에 실렸다.  올슨의 생각은 작문학자들이 자신들의 연구에 다른 사상들을 보강한다면 작문 교과과정이 학생들로 하여금 ꡐ스스로를 표현하도록ꡑ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학생들이 자신들의 삶에 진정한 변화를 주기 위해 이데올로기 비평에 참여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 간 작문학계에서 이론적 학문에 대한 반발이 다시 나타났다. 엘리자베스 H. 보케(페어필드 대학의 영문학과 교수)는 작문학계의 최근 변화를 작문학자들이 한때 피하려고 했던 영문학이란 전문화된 학문 체계로의 회귀로 간주한다.  다른 분야의 이론적 연구를 도입하는 것은 작문학 분야 내부에 상당한 불만을 일으켰다. 하워드 틴버그는 (매사추세츠 주의 폴 리버에 있는 브리스틀 전문대학의 작문연구소 소장) ‘2년제 칼리지의 영문학 교육(Teaching English in the Two-Year College)’ 잡지에 기고한 논문에서 작문학이 학생 교육이란 본래의 목적을 등한시한다고 비판적으로 지적한다.  틴버그에 따르면, 작문을 가르치는 다수의 사람들이 학생들이 쓴 글에 대해 고심하기보다는 오히려 문화 연구나 비평 이론에 대해 논하기를 원했다. 당시 영문학계 사람들은 취업을 위해 다수의 학생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자신들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대학 작문과 커뮤니케이션’(College Composition and Communication) 같은 잡지나 전미 영어교사 협의회의 연구서에서 대학 작문 센터를 ꡒ지식 산출의 도장ꡓ으로 즉, 냉소적으로 묘사하는 기사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작문학자들은 다른 이론의 개념들을 도입하여 작문 교육 방법을 세우기 시작했다.  3. 작문학의 새로운 방향(작문 교육 방법론)  작문학의 내용은 새로운 전문 분야, 즉 작문-프로그램 행정(관리) 분야의 출현과 함께 더욱 복잡해졌다. 퍼듀 대학, 시라큐스 대학, 애리조나 대학을 비롯한 다수의 대학원 프로그램이 작문학 내에 행정(관리) 능력 개발을 위한 과정을 만들었다. 행정 업무가 이론적 토대를 가지고 있는지, 그것이 지적(이론적) 작업으로 간주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예를 들어서, 작문-수사학 프로그램을 이수한 사람들은 바로 작문 센터 행정에 투입된다. 그러나 문학 전공자는 몇 년 동안 일정한 과정을 거친 후에 비로소 하나의 직책을 맡을 수 있다. 이블린 야페 쉬라이버(조지 워싱턴 작문 센터의 소장)의 최근 논문 ꡒ직장의 팀과 작문 그룹: 팀 매니지먼트 이론과 공동 작문 과정(Workplace Teams and Writing Groups: Team Management Theory and the Collaborative Writing Process)ꡓ을 보면, 행정과 인문(문학) 사이의 차이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작문학의 최근 몇몇 연구를 보면, 담론에 관한 개념들이 기업에서 유래한 개념들과 함께 쓰이고 있다. 사우스 플로리다의 영문학과 교수이자 「JAC」의 편집자인 린 워샘은 이런 작문학의 최근 경향에 부정적이다. 그는 행정 업무를 단순히 이론적 연구로 끌어내리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최근에 작문학 분야가 작문-프로그램 행정이란 주제에 많은 투자를 한다는 사실을 껄끄럽게 생각한다. (워샘은 올슨과 함께 작문과 문화 연구 간의 차이를 좁히는데 기여한 가장 활동적인 학자들 중의 한 명이다.)  지난 30년 간 작문 분야의 사람들은 작문학을 대학 서비스의 일부가 아니라 하나의 지적인 교과 과정으로 정의하고자 노력해 왔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작문을 서비스의 일환으로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올슨처럼 작문학을 순수 이론적 영역으로 정의하려는 사람들은 최근 경향을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4. 작문학의 전망  위스콘신 대학 (매디슨 소재) 영문학과 조교수 데이비드 플레밍이 제시하는 작문학의 정체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작문학은 본질적으로 교육을 위한 교과과정이다. 그러나 그것이 고등학교와 대학을 연결하는 중간 역할로 기능하는 15주 간의 단기 강좌가 되는 것에 반대한다. 작문학은 학부에서 이루어지는 일반적 학습능력과 대학원에서 이루어지는 전문적 학습 능력을 연계할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문이 하나의 학부 전공 과목이 될 때 작문 교육을 위한 올바른 방향이 시작된다고 본다. 작문학은 말하기, 사고력, 작문, 논리학 및 문화적 텍스트의 해석 같은 여러 학과에 걸쳐 흩어져 있는 과정들을 통합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런 교과과정은 21세기가 시작되는 현 시점에서 일반 교육이 갖는 현재 위치에 대한 평가와 관련된다. 플레밍이 강조하는 것처럼, 위 교과과정을 본래 궤도로 돌려놓기 위해서는 수사학 및 작문 프로그램들이 중심이 되어야 하며 충분한 재정적 지원이 확보되어야 할 것이다.  * 본 글은 Scott Mclemee, "Deconstructing Composition" in The Chronicle of Higher Education (March 21, 2003)을 참고 하였다.  아이비리그 대학의 글쓰기 교육  1. 문제 제기  대학 작문 교육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 예전에는 작문 교육이 부차적인 커리큘럼의 하나로 간주되었지만 이제는 작문 교육의 중요성이 끊임없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인식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현재 각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작문 교육의 실상은 예전과 비교하여 크게 다르지 않다.  작문 수업을 담당하는 교수들은 여전히 부차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아직도 작문 강좌를 전문 연구진이 아닌 대학원생들에게 맡기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학생들은 필수 작문 강좌란 여전히 졸업을 위해 요구되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작문 교육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현실적으로 반영되지 못하는 실정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존의 대학 작문 교육에 문제가 많다는 사실에 공감한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을 개선하기 위한 논의와 실천은 아직 미흡하다. 미국 듀크 대학의 교양학부 담당 교수 로버트 J. 톰슨은 이처럼 작문 교육의 개선이 더디게 진행되는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 작문 커리큘럼의 개선이 쉽지 않다.  둘째, 하나의 개선안이 제시되면 수많은 논쟁들이 뒤따르기 때문에 많은 대학들이 섣불리 작문 교육의 개선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2. 문제 해결 방안  최근 미국의 몇몇 명문 사립대학은 기존의 작문 교육을 개선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프린스턴 대학, 듀크 대학은 기존의 작문 교육을 전면적으로 개선하기 시작했고 컬럼비아 대학은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신중하게 보완하기 시작했다. 브라운 대학, 보드완 칼리지 대학들 역시 기존 작문 교육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개선 방안을 모색 중이다.  2-1. 프린스턴 대학  프린스턴 대학의 경우 1960년대 이래 학생들에게 여러 개의 작문이 강조되는 강좌들 중 최소한 하나를 반드시 수강하도록 요구했다. 작문이 강조되는 강좌들은 처음에 영문학과에만 개설되었다. 하지만 여러 학과 내에서 작문 교육을 장려하기 위해 1980년대 후반부터는 다른 학과에도 개설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정책에도 불구하고 작문이 강조된 강좌는 학생들 사이에서 ꡒ쓸모없는 수업ꡓ이라는 악평을 받기에 이르렀다. 작문 강좌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이 커지자 프린스턴 대학은 외부 평가단에게 작문 교육에 대한 진단을 의뢰했다. 그리고 평가단은 작문 집중강좌가 적절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부정적 평가를 내렸다.  이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프린스턴에서는 작년부터 글쓰기를 가르친 경험이 있는 20명의 강사들을 계약, 채용했다. 그리고 하나의 주제를 갖고 글을 쓰는 주제 중심(topic-based)의 작문 강좌 http://web.princeton.edu/sites/writing/Writing_  Seminar/WSAbout.htm를 필수 강좌로 채택하고 ꡒ신화 및 역사 속의 악당ꡓ이나 ꡒ드라큘라ꡓ 같은 주제를 중심으로 글을 쓰는 강좌들을 대폭 개설했다. 이런 강좌들의 주요 목적은 읽을 자료에 관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글쓰기를 배우는 것이다.  2-2. 듀크 대학  듀크 대학 역시 1999년 프린스턴 대학과 유사한 방식으로 작문 강좌의 개편을 단행했다. 1학년 작문 교육을 대학원생이 아니라 이미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작문을 가르친 경험이 있는 계약직 외래 교수들에게 맡기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사실상 대부분의 대학들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비용을 요구한다.  듀크 대학은 코넬 대학의 작문 프로그램을 응용하여 전공 학과별로 작문이 중심된 2개의 강좌를 필수 강좌로 개설하도록 했다. 코넬 대학에서는 영문학과만이 아니라 모든 학과가 작문 교육의 책임을 부담해야 한다는 취지 아래 각 학과 내에서 작문 수업을 강조하고 있다. 코넬 대학은 대학원생을 위한 기금의 과별 할당량을 각 학과에서 진행되는 1학년 작문 세미나 회수에 비례해서 지급하여 교수들의 참여를 이끌어낸다.  그러나 듀크와 프린스턴 대학에서 신설된 프로그램들의 성공 여부는 아직 판단하기 어렵다. 프린스턴 대학생들의 반응은 복합적이다. 예를 들어, ꡒ이제까지 수강했던 강좌들 중 최상의 강좌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시간 낭비도 아니었다ꡓ는 것이 개정된 작문 강좌를 수강했던 한 학생의 평이다.  2-3. 컬럼비아 대학  컬럼비아 대학의 경우 작문 프로그램의 개선은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지난 1990년대 초반, 컬럼비아 대학은 작문 프로그램의 평가를 외부 평가단에 의뢰했고, 평가단은 프로그램이 매우 미흡하다는 결과를 보고했다. 그러나 컬럼비아 대학 내에서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결국 2년 전 다시 내부 평가단이 구성되었다. 평가단은 거의 모든 학생들이 1학년 필수 작문 강좌를 매우 싫어하고 있으며 아울러 필수 작문강좌에 관한 지침들 중 상당수가 불합리한 항목이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예를 하나 들면 읽을 자료의 배부를 금지하는 방침이다. 이 방침은 글쓰기를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정해진 것이지만 오히려 학생들로부터 글의 소재를 박탈하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평가단은 읽을 자료 배부 금지조처를 해제할 것, 새로운 책임자를 채용할 것, 그리고 수업을 대학원생들에게 맡기지 말고 교수들에게 맡길 것을 권고했다. 컬럼비아 대학은 권고 사항들 중 일부를 실행에 옮기는 중이다. 올해 여름에는 작문 강좌 관련 전문가를 채용했다. 또한 대부분의 학생들이 여전히 이전의 1학년 작문 강좌에 참여하고 있긴 하지만, 약 20퍼센트 정도는 주제 중심의 글쓰기 강좌를 수강하고 있다. 이 강좌에서는 읽을 자료가 배부되고 있고 학생들의 반응은 좋은 편이다.  2-4. 브라운 대학  브라운 대학 역시 작문 교육 문제로 고심하고 있다. 컬럼비아 대학과 다르게 브라운 대학은 학생들에게 강좌를 직접 선택하는 자율권을 준다. 그런 자유는 브라운 대학 고유의 특징이다. 하지만 그런 자유가 필수 작문 강좌의 개설을 불가능하게 한다. 최근까지 브라운 대학에서는 예비 신입생의 입학지원서를 토대로 학생의 작문 실력을 판단했다. 그러나 많은 학생들이 지원서를 작성할 때 주위의 도움을 받는다. 따라서 지원서의 검토만으로 작문 실력을 판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브라운 대학에서는 올해 그러한 관례를 없앴다. 브라운 대학에서는 여전히 교수들에게 성적을 채점할 때 학생의 글쓰기 능력에 대한 평가도 함께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글쓰기 능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은 학생들은 강제는 아니지만 내용 정리 글쓰기(expository writing: 읽을 내용을 읽고 이해한 후 그 내용을 다시 서술하는 연습)를 교육 시키는 작문 강좌를 신청하도록 권유받는다. 그러나 브라운 대학의 작문 교육 책임자인 로다 L. 플랙스먼과 학부 학장 암스트롱 씨에 따르면 이런 방법은 이론적으로는 그럴 듯해 보이지만 사실상 실패한 전략이라고 한다. 따라서 실제로 이런 방법을 활용하는 교수들은 거의 없다.  3. 전망  지금까지 제시된 작문 교육 개선의 움직임이 성공할지 또는 다른 개선이 요구될지 아직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위에 언급된 명문 대학들이 장기적인 계획을 갖고 차근차근 문제를 해결하는 태도는 고무적이며 따라서 위 대학들이 현재 진행 시키는 작문 교육의 개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이 글은 Thomas Bartlett의 "Why Johnny Can't Write, Even Though He Went to Princeton" (The Chronicle of Higher Education, Jan.3, 2003)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515    [쉼터] - 세상에 없는 세가지??? 댓글:  조회:4655  추천:0  2016-10-19
    ▲ 김남미    서강대 교수·글쓰기연구센터   맞춤법 강의에서 항상 등장하는 항목이 `다르다/틀리다`이다. `다르다`를 써야할 맥락에 `틀리다`를 자주 사용하기에 생기는 일이다. `머리색이 다르잖아.(O)`를 `머리색이 틀리잖아.(X)`로 말하는 방식은 일상에서 흔히 발견된다. 이런 사용법을 보면서 가끔은 잘못된 우리 현실이 언어에 그대로 반영된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을 느끼기도 한다. 평가에 민감한 사회적 경향이 언어에 반영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다르다`는 것을 `맞다`, `틀리다` 또는 `옳다, 그르다`로 바꿔 생각하는 우리 세계가 반영된 일일지도 모른다고.     누군가가 자신의 의견에 말했다고 생각해 보자. `나는 이렇게 생각해`라는 말에 대해 `그건 좀 달라`가 아니라 `그건 좀 틀려`라고 대응하는 상황은 사람마다 다양한 의견을 가질 수 있다는 가치를 약화시킨다. `다르다, 비슷하다, 같다`라는 다층적인 판단이 `맞다, 틀리다`라는 양분 속에서 단순화되고 있지는 않은가에 대한 경계다. 이런 불안 속에서 모든 문제에서 정답을 발견하려는 사람들의 허기를 본다.  사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언어학적으로는 경계해야 할 방식이다. 언어 외적 경향이 직접적으로 언어에 반영되는 일은 드물다. 사회는 언어에 간접적 영향을 줄 뿐이다. 예를 들어 우리말에 `된소리(ㄲ, ㄸ, ㅃ, ㅆ, ㅉ)`와 `거센소리(ㅋ, ㅌ, ㅍ, ㅊ)`가 많아진 원인을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시대적 각박함에 두는 해석은 언어학에서 금기다. 양란으로 삶이 각박해진 것이 언어에 직접적 영향을 끼쳐 이런 소리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는 없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사고는 가능하다. `다르다`와 `틀리다`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이와 관련된 다른 언어 관계에서도 나타난다면 앞서 보인 우리의 우려의 개연성이 더 확대될 수도 있다. 즉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다르다`를 `틀리다`로 잘못 쓰는 일이 많다면 이들의 반대말에도 비슷한 현상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앞서 보인 정답 찾기의 허기가 거기에도 반영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틀리다`의 반대말인 `맞다`에서 비슷한 경향이 발견하는 일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 이 경우에는 `틀리다`라는 단어보다 `다르다`라는 단어가 더 적절하지 않을까? ㉡ 단락에서는 강조점이 어디인지를 늘 생각하면서 접근하는 것이 좋은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되거든. ㉢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위의 예문들은 면담 과정에서 학습자들이 `맞아요.`로 대답한 것들이다. 그 일부만을 보인 것으로 이런 방식으로 `맞다`가 등장하는 일은 비교적 흔한 일이다. 학생들이 위의 예문들에 `맞다`라고 답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필요하다. 이 안에는 `다르다` 대신 `틀리다`를 사용하는 현황에서 발생하는 것과 유사한 불안이 존재한다. 그 불안은 학생들이 정답을 찾고 있음을 발견한 데서 온다. 친한 소설가 한 명이 강의 서두에 세상에 없는 세 가지를 언급한 적이 있다. 그 세 가지는 `공짜, 영원한 것, 정답`이었다. 나도 그 친구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이 세상 속의 문제들에 `정답`이 없다는 것을 일상에서 익히기를 바란다. 그래야 없는 정답을 찾아다니느라 더 절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맞다`를 `틀리다`를 `가능성의 백분율`로 전환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위의 교수의 말들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전제하고 그 중 하나를 제시한 것이다. 그 가능성을 `맞다, 틀리다`로 대응하는 학생들에게서 `정답`을 갈망하는 허기를 본다. `맞다`든 `틀리다`든 언어 사용 방식에 언뜻언뜻 보이는 학생들의 정답 찾기가 계속될수록 학생들의 허기는 더 깊어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514    [쉼터] - 같은 문학상을 두번 받고 권총으로 자살하다... 댓글:  조회:5861  추천:0  2016-10-19
    매해 10월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뉴스가 있다. 바로 노벨문학상에 관한 한국 언론의 열띤 보도들이다. 1901년 르네 프랑수아 아르망 프뤼돔의 초대 수상 이래로 쭉 이어져 온 오래된 역사만큼 문학계에 있어서는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상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느 시점부터 항상 시인 ‘고은’과 함께 언급되는 이름이기도 하다. 문학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거나 잘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노벨문학상은 낯설지 않은 상이고, 역대 수상자들 중에서는 누구나 살면서 한 두 번쯤은 접해볼 수 있는 명성을 지닌 자들이 많기에 이 상이 문학계에 끼치는 영향력과 그 권위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 노벨문학상         노벨문학상은 노벨상의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문학, 평화, 경제 등의 분야 중 하나이다. 스웨덴의 과학자이자 고체 폭탄인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것으로 잘 알려진 알프레드 베른하드르 노벨의 유언에 따라 만들어졌다.   “이상(理想)적인 방향으로 문학 분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기여를 한 자에게 수여하라”     위 유언에서 알 수 있듯이 노벨문학상은 작품이 아닌 ‘작가’에게 수여되는 상이다. 그러나 ‘이상’, ‘눈에 띄는 기여’와 같은 굉장히 모호한 기준으로 시상이 이루어진다는 지점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이상이라는 의미가 그저 관념적이고 낭만적인 것에 국한되었다면 노벨문학상이 오늘날과 같은 명성을 얻기는 힘들었을 테지만 어쨌든 꾸준히 최고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주최/심사 측(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와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스웨덴·프랑스·에스파냐의 세 아카데미)이 나름대로 고수하고 있는 원칙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수상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생존하고 있는 작가인 점. 작품에 수상을 하는 체제가 아니기 때문에 살아서 오랜 기간 동안 꾸준하게 작품 활동을 한 저명한 작가일수록 유리하다.    둘째, 여러 개 국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적인 인정을 받는 작가일 것. 특히, 노벨상의 고장인 스웨덴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으면 더 좋다. (유럽 권일수록 좋다는 뜻이기도 하다.)   셋째, 순문학(?)일 것. 수상자들의 작품을 보면 장르문학, 포스트모던한 경향의 문학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상금     노벨상 수상자에겐 노벨의 초상이 새겨진 영예의 금메달과 함께 엄청난 액수의 상금이 전달된다. 상금은 노벨재단이 한 해 동안 운영한 기금 이자 수입의 67.5%를 부분 별로 나눠 나오기 때문에 액수는 해마다 변동이 있는 편. 공동 수상자가 있으면 그것을 각각 또 나눈다.        * 한국 문학과 노벨문학상     노벨문학상 시상 시즌이 되면 한국 언론에서 빠짐없이 등장시키는 인물이 있다. 시인 고은. 사실 수상자에서 탈락하는 것이 죄가 되는 것도 아닌데 그가 기자들에 의해서 의도하지 않은 책임감과 중압감을 매번 너무 크게 떠맡은 것 같아 그 시즌이 되면 마음이 괜히 불편해지는 때가 많다. (사실 한국 언론이 정말 시인 고은을 유력한 수상 후보로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그가 원로 시인인 만큼 작가의 최신 작품이나 대표작에 대한 리뷰를 하는 것이 더 의미 있다고 본다. 그가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탈 수 있을 것인가 아닌가로 대중의 기대감만 고조시키는 것이 아니라.)   한국 현대 문학 작품이 노벨상 수상을 하지 못하는 이유에 관해 여러 주장들이 있지만 우리 작품이 해외에 많이 알려지지 않는 점이나 한글의 특수성으로 인한 번역의 문제 등은 꾸준히 제기되던 것들이다. 그러나 사실 이에 대한 반론도 정말 많다. 우리 문단 유명 작가들의 대표 작품만큼은 영미판으로 다수 번역되고 있기도 하고 한글이 갖는 정서와 관습이 특이하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이 문제를 해명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언어 이전에 인간의 마음을 동하게 하는 보편적인 정서가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며, 영어권 국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만의 고유함으로 상을 수상하는 작가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위 문제들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한 바 있듯 수상자들의 주요 작품들을 보면, 이 상이 장르문학이나 포스트모던 계열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이다. 노벨문학상은 주로 인문학적인 사회 문제, 인간 문제에 관해 더 주목하는 편이라 작품 속에서 작가들이 다루는 주요한 화두가 얼마나 세계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수상 작가들의 인생이나 이력을 살펴봐도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폐쇄적이라는 오해를 살만큼 지극히 개인적이고 해체적인 이야기들이 주류를 이루는 한국 현대 문단의 특성을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독서나 문학에 관한 국가적이고 국민적인 기반이 현저하게 약하다는 것도 큰 이유를 차지하기도 하고.     * 역대 수상자와 에피소드     1. 노벨문학상 수상 리스트를 살펴보면 아시아 최초 수상자인 타고르를 제외하고 1945년 칠레의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이 수상할 때까지 모든 수상자가 유럽에서 배출되었다. (동아시아 최초 수상자는 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다.) 노벨문학상이 대륙별, 성별, 장르별 균분에 보다 더 신경을 쓰게 된 것은 2000년대에 들어서라고 보면 된다.   2. 수상자 가운데 비문학 부분의 작가에는 독일 역사가 테오도어 몸젠, 독일 철학자 루돌프 오이켄,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 영국 철학자 버트런트 러셀, 영국 역사가 윈스턴 처칠 그리고 2015년 여성 수상자 벨라루스의 신문기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등이 있다. 하지만 가장 유명한 이는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 그는 노벨상 수상을 거부했다. 그가 수상을 거부했던 상황적 맥락을 살펴보면 일단 첫째로, 노벨위원회의 평가 기준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인간은 하나의 실존적 존재인데 문학적인 우수성을 갖고 왈가왈부하며 어떤 등급으로 매겨지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가졌다. 작가로서의 행보에 있어서, ‘노벨문학상 수상자’ 장 폴 사르트르, 라는 규정된 이름을 갖고 싶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는 그러한 영예를 안게 됨으로써 자신이 감당해야하는 노벨상 협회와의 이해관계 및 제도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 아주 그다운 이유다.   3. 문학 부문 여성 최초의 수상자는 스웨덴 작가 셀마 라겔뢰프이다.        *(참고 지식)ㅡ   - 일단 노벨상 수여 기관에서 행해지는 심사 및 표결 과정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다. 11월 15일까지 최종 수상자가 결정되어야 하는데 상은 단체에도 수여할 수 있는 평화상을 제외하고는 개인에게 주도록 되어 있다. 또한, 상을 수여하는 사람들은 시상 과정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외교적 혹은 정치적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    - ‘문학상’이라는 번역으로 인해 따라 나오는 오해인데, 역사가나 철학자 등에게 이 상이 수여된다 해도 문제될 것은 없다. ‘Literature’는 문학에만 국한된 단어가 아닌 쓰는 행위가 담긴 모든 것에 관하기 때문에, 철학자나 기자, 역사가 등이 그들의 유려한 문체로 사상을 표현하는 것도 이 상을 수여받는 것이 가능하다.     문학상이 무엇일까. 사전상 ‘훌륭한 문학 작품을 썼거나 문학 부문에 공적을 쌓은 사람에게 주는 상’이라고 단순하게 정의되지만, 우리가 이름을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존재하는 많은 문학상들은 저마다 다른 목적과 취급 대상과 운영 방식을 가지고 있다. 즉, 각 주최마다 수상 작품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훌륭한’의 기준과 ‘문학 부문 공적’에 대한 기준에 있어 세세한 입장 차이를 갖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입장 차이는 문학상들이 갖는 이미지와 위상에 개별적인 특색을 입혀주어 세계 3대 문학상과 같은 타이틀이 붙을 정도의 저명한 상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   *맨부커상   //////////////////////////////////////////////////////////////////////////////////////////////////////////////       오늘 살펴볼 문학상은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이자 영국 최대 권위의 상 맨부커상(Man Booker Prize)이다. 한강이 지난 5월 16일에 소설 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하면서 한국에 더 알려지게 되었는데 맨부커상은 매년 영국, 아일랜드 등 영국 연방국가 내 작품들 중에서 선정되며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은 비영연방국 작가와 번역자에게 수여되는 부문이다. (인터내셔널 부문 시상은 2005년부터 있었다.) 터키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르한 파묵이 이라는 책으로 한강과 함께 6명의 최종 후보명단으로 이름이 올라 크게 주목을 받았는데 끝내 한강이 인터내셔널 부문에서 최초의 아시아 작가로, 그리고 최연소로 수상의 영예를 껴안았다. 5만 파운드(약 8천 100만원)에 달하는 상금은 번역가 데버라 스미스와 나눠 갖는다.        “다양하면서도 탁월한 작품들 사이에서 우리는 6개의 작품을 골랐습니다. 그리고 초벌 번역본으로 본 진정으로 탁월한 6개의 작품들 가운데에서 심사위원들은 만장일치로 를 수상작으로 결정했습니다. 3명의 목소리로 서사되고, 3명의 다른 관점에서 쓰여진 이 소설은 간결하면서도 불안정하고, 아름답게 쓰여진 이야기입니다. 소설은 평범한 한 여성이 그녀를 가정에, 그리고 가족과 사회에 옭아매는 모든 관습과 추측을 거부하는 궤적을 따라갑니다. 서정적이면서도 동시에 날카로운 문체로 소설은 여주인공의 거부가 여주인공 스스로와 그녀를 둘러싼 주변인들에게 미치는 충격을 그려냅니다. 짧으면서도, 격렬하고, 충격적인 이 책은 독자들의 마음 속에 오랫동안 각인돼, 아마도 꿈에까지 남을 겁니다. 번역자인 데보라 스미스 씨는 완벽한 번역을 통해 소설 매 순간 순간의 아름다우면서도 공포스러운 기묘한 혼합을 전달했습니다.”                                                     에 대한 심사위원장의 심사평       맨부커상은 매년 10월에 시상이 이루어진다. (인터내셔널상은 매년 5월에 시상한다.) 7월에 1차 후보작을 선정하고, 9월에 몇 작품을 선별해 2차 후보작을 결정한다. 2차 후보작들은 맨부커상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독자 의견을 반영해 그 중에서 10월에 최종 수상작을 발표한다. 이 부분이야 말로 가장 두드러지는 맨부커상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베일에 가려진 채로 최종 수상작이 선정되는 보통의 다른 문학상들과 달리 맨부커상은 선정 과정에서부터 대중의 관심과 참여를 얻는다. 저명한 상들 가운데서도 맨부커상은 점잔 떨지 않고 대중적이다.    *주최     맨부커상은 출판과 독서증진을 위한 독립기금인 북 트러스트(Book Trust)의 후원을 받아 부커 그룹(Booker Group)의 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부커 그룹은 1835년 설립된 영국의 종합물류유통회사로 설탕 사업, 슈퍼마켓 사업 등을 하는데, 1964년 문학관련 사업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68년부터 부커상을 제정, 시행해 오고 있다. 이 상은 영어권 출판업자들의 추천을 받은 소설작품을 후보작으로 하여 평론가와 작가, 학자들로 구성된 전문 심사위원회에서 수상작을 선정한다. 2002년부터 금융기업 맨 그룹(Man group)이 후원하면서 명칭이 부커상에서 맨부커상으로 바뀌었다.      * (참고 지식)ㅡ   - 피플스 부커: 일반인들의 관심을 넓히고 직접적인 참여의 기회를 주기 위해 심사위원들에 의한 부커상 선정과는 별개로 일반 독자들이 뽑는 피플스 부커(People's Booker)를 1999년에 제정하였다. 인터넷 투표를 통해 선정하게 된다.    - 맨아시아문학상: 맨그룹이 아시아 작가들을 대상으로 2007년에 제정한 상. 우리나라에선 신경숙 작가가 2012년 3월 장편소설 로 맨아시아문학상(Man Asian Literary Prize)을 수상했다.      *역대 유명 수상작     1969년 영국의 소설가 퍼시 뉴비가 처음으로 맨부커상을 수상하면서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맨부커 역사에 있어 가장 큰 화제를 낳은 것은 아니, 세계 문학상 역사에 있어서도 유일무이한 기록을 지닌 작품은 살만 루시디의 (1981)이다. 이 작품은 맨부커에서 3회에 달하는 수상을 하여 최고의 영예를 안았다. 1981년, 출간된 그 해에 부커상을 수상했고, 1993년 부커상 25주년 기념 때에 수상작 중 최고의 작품으로 뽑혀 ‘부커 오브 부커스’를 받았으며, 2008년엔 맨부커상 40주년을 기념해 일반 독자들이 고르는 ‘베스트 오브 더 부커’를 수상하여 거머쥔 놀라운 사건이었다. 한국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던 얀 마텔의 도 맨부커의 유명 수상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이안 감독의 영화 의 원작이 되면서 더 큰 주목을 끌기도 했는데, 2002년 부커상 수상작이다. 아룬다티 로이의 (1997) 역시 큰 화제를 낳았는데, 데뷔와 동시에 단 한 편의 소설만으로 부커상을 수상하고 세계적으로 번역 출간되었으며 수많은 일간지에서 주목할 만한 책으로 선정되는 등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이 외에도 200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남아프리카 공화국 작가, 존 멕스웰 쿠체가 두 차례 맨부커 상을 수상하기도 하는 등 세계적인 권위의 상인만큼 문학계를 뒤흔들 만한 많은 에피소드들이 존재한다.  //////////////////////////////////////////////////////////////////////////// 세계 3대 문학상이라 일컬어지며, 동시에 프랑스에서 최고의 권위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문학상, ‘공쿠르 문학상’. 공쿠르의 첫 시상은 1903년으로, 많은 이들이 그때 처음 제정되었다고 알고 있지만 실제로 공쿠르상은 1896년 노벨상과 같은 해에 제정되었다. 제정 시기로만 보면, 공쿠르가 ‘최초의 문학상’이 되는 것이다.      매년 12월 초가 되면, 수상작이 발표되길 기다리며 파리 2구 드루앙(Drouant)이라는 레스토랑 앞으로 수많은 취재진들이 몰린다. 예술을 사랑하기로 유명한 프랑스 지성인들의 뜨거운 관심과 함께. 1년 동안 발표된 무수한 산문 작품들 가운데서 우수한 작품을 쓴 작가에게 상을 수여한다.   * 공쿠르상           공쿠르상은 공쿠르 형제의 이름(에드몽 드 공쿠르, 쥘 드 공쿠르)에서 유래된 상이다. 그들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작가로 동생 쥘은 문장을, 형 에드몽은 작품 창작을 담당하면서 공동으로 활동했던 이들이다. 그리고 1896년 에드몽이 남긴 유언에 따라 전재산이 아카데미에 기탁되고 가난한 예술가를 돕기 위한 아카데미 공쿠르가 생기게 되었다. 이들은 10명의 회원으로 구성되는데 1903년부터 그들 심사가 중심이 되어 공쿠르상을 시상하고 있다. 심사의 과정은 철저하게 비밀리에 진행된다.     카페 문화가 발달한 프랑스답게 매월 첫째 주 화요일, 공쿠르상과 르노도상의 심사위원들이 드루앙 레스토랑에서 프랑스 문단 현안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매년 9월, 10월에 세 차례에 걸쳐 공쿠르상 후보들을 예비 심사하여 12월 초 최종 당선자를 발표한다.     바로 그 자리에서 “그 해 최고의 그리고 가장 상상력이 풍부한 산문 작품 (공쿠르상의 모토)” 이 선정되는 것.      시상 부분은 ① 공쿠르 첫 소설 상, ② 공쿠르 단편소설 상, ③ 공쿠르 시 상, ④ 공쿠르 전기 상 등 4분야로 구성된다.   * 상금     공쿠르 시상식에서는 수상자에게 상금으로 50프랑이 수여된다. 유로화로 바뀌면서 10유로로 결정되었는데 영예롭고 권위 있는 문학상 치고는 상당히 적은 액수라 생각될 수 있기에 의아할 수 있겠으나 이러한 문학상 시상에 있어 상금은 사실 상징적인 액수에 지나지 않다. 수상자는 이를 계기로 엄청난 명성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역대 수상작은 평균적으로 60만 부 이상이 팔리고 30여 개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역대 수상자 및 관련 에피소드     1. 공쿠르상을 수상한 역대 수상자들의 작품 중에서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생택쥐베리의 , 앙드레말로 , 마그리트 뒤라스 , 로맹가리 , 에밀아자르 등이 있다.      2. 공쿠르상은 원칙 상, 한번 상을 수상한 작가에게 다시 상을 수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다. 1956년 로 공쿠르상을 수상한 로맹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자기 앞의 생’을 발표해 그 이름으로 상을 또 한 번 더 받게 된 것. 그는 로맹가리로 문단의 스타로 활동하다 점차 그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지자 에밀 아자르라는 다른 이름으로 작품을 내놓고 신예 천재작가라는 환호를 다시 받게 된다. 그러나 그는 ‘에밀 아자르와 로맹 가리는 같은 사람’이라 유서에 밝히며 66세에 권총으로 자살을 선택한다. ‘나는 마침내 나 자신을 완전히 표현했다.’라는 마지막 대목을 남기고.  [출처] [칼럼] 세계 3대 문학상 (3) - 공쿠르상|작성자 해서ly   [출처] [칼럼] 세계 3대 문학상 (1) - 맨부커상|작성자 해서ly   [출처] [칼럼] 세계 3대 문학상 (2) - 노벨문학상|작성자 해서ly
513    [쉼터] - 문학상 받고 13년간이나 전전긍긍 살다... 댓글:  조회:5583  추천:0  2016-10-19
여기,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책 한권이 있다. 그래, 문학계, 예술계를 넘어 정말 ‘세상’이 떠들썩했다. 살만 루슈디의 < 악마의 시 >. < 한밤의 아이들 >이라는 작품으로 맨부커상을 3번이나 수상해 그 이름만으로 이 시대 최고의 영예를 자랑하는 작가이지만 당시에 써낸 < 악마의 시 >로 인해 종교계가 야단나고 여러 나라가 얽힌 정치, 외교적 대치 상황까지 발생했으니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얘기해보자면, 영화 한편은 거뜬히 찍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 언론 매체에서도 당시 < 악마의 시 >가 일으킨 분란을 보도하기도 했는데,ㅡ             < 악마의 시 >는 1988년 9월 26일 영국에서 출판된 소설이다. 이슬람의 예언자이자 성사인 무함마드의 생애를 다룬 것으로, 이것이 극렬한 논란을 야기했던 것은 이슬람교에 대한 야유로 해석될 소지가 있는 장면들로 작품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문제가 되었던 내용은 아마 소설 속에서 나오는 두 명의 창녀 이름이 무함마드의 열두 명의 부인 중 두 명과 이름이 같다는 점으로 보인다. (신의 외형을 희화화한 부분도 있고.) 때문에 당시 원리주의 이슬람계로부터 < 악마의 시 >는 그저 불경스러운 것 이상의 종교에 대한 반란이자 모독이었고, 결국 당시 이슬람 시아파 지도자였던 호메이니가 살만 루슈디를 처형하라는 ‘파트와(fatwa)’를 내걸게 되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파트와’란, 이슬람의 종교적 의견인 것으로 법적인 판결이 아니지만 법 이상의 권위를 갖는 경우가 있다.) 그 시를 번역한 자들에게도 불똥은 튀었다. 일본 번역자는 살해당하고 이탈리아와 노르웨이의 출판인들이 중상을 입었다. 그렇게 루슈디는 십여 년간의 긴 세월을 영국의 보호 아래 숨어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재밌는 부분은 13년을 자신의 이름으로 살지도 못하고 가명(조지프 콘래드와 안톤 체호프의 이름을 조합하여 만든 ‘조지프 앤턴’)을 쓰며 전전긍긍 살면서도 루슈디는 어떻게든 기어이 이어지곤 하는 부단한 일상과 살만 루슈디, 즉, ‘자기 자신으로서의 삶’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자서전으로 말이다. 그 자서전의 제목은 < 조지프 앤턴 >.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각박한 시기를 보내며 자기 자신을 마주하고 쓰는 자서전이라, 그의 삶을 처연하고 가련하게 묘사할 수도 있고 그렇게 겨우겨우 살면서도 자신은 기어코 어떤 문학적 가치를 지켜내고 있음을 보여주는 식의 영웅성을 부각해 전기를 쓸 법도 한데, 이 작가는 전혀 그렇지 않다. 숨 막히는 살해 위협 속에서도 연쇄적으로 불륜을 일삼고 그 결과로 네 번이나 이혼을 하게 되는 전력, 돈과 명성, 자유를 향한 욕망, 쾌락에 매번 속수무책 지고 마는 철없음 등 자기 자신을 조롱과 희화화까지 동원해 극구 펼쳐보인다. 영국 경찰의 철통 경호와 빈번한 이사로 그 소동을 벌이며 지내는 기간 동안 어쩔 수 없이 자기 자신의 이름이 아닌 가명으로 지내면서도 그는 이 책을 통해 살만 루슈디라는 인간이 지닌 그 자체로서의 존엄성과 미악(美惡)을 거침없이 까발린다. 이런 작가의 태도가 우스꽝스럽고 대책 없이 여겨지다가도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하니, 바로 그 지점이 보는 이로 하여금 ‘인간이란 대체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물음으로 귀결시킨다고 본다. 어쨌든 그 문학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흥미로운 지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내용에서 문화예술계, 학계, 정계 유명 인사들을 실명 그대로 등장시켜, < 악마의 시 > 사태를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왈가왈부를 활짝 펼쳐 보이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에 관한 찬반논란부터, 문단의 저명한 이들이 비판과 옹호로 갈려 서로 맞서게 되기까지의, 인간사의 여러 군상들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이에 못지않게 훈훈하고 감동적인 일들도 적지 않다. 미국출판협회와 미국서점협회, 미국도서관협회는 파트와 선고 일주일여 뒤 < 악마의 시 > 미국판 출간에 맞추어 < 뉴욕 타임스 >에 전면광고를 실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유인은 책을 씁니다. 자유인은 책을 펴냅니다. 자유인은 책을 팝니다. 자유인은 책을 삽니다. 자유인은 책을 읽습니다. 우리는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는 국민정신에 입각하여 독자 여러분이 전국 방방곡곡의 서점과 도서관에서 언제든지 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수전 손택, 노먼 메일러, 존 어빙, 크리스토퍼 히친스 같은 저명 작가들은 물론 록밴드 유투(U2)의 보노 같은 연예계 스타들이 루슈디에 대한 위협에 발 벗고 나서는 모습도 인상적으로 그려진다.       영국 경찰이 루슈디에 대한 경호를 완전히 해체한 것은 2002년이 되어서다. 그제야 그는 마음껏(?) 살만 루슈디로 지낼 수 있게 되었다. 13년이나 지속된 위협 속에서 그가 증명해 보인 것은 무엇일까. 그가 지켜낸 가치가 ‘자기 자신’이었을 수도 있고 ‘문학’ 그 자체였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이렇다 하고 확실히 할 수 있는 것은 사상의 자유, 낭만, 사랑을 꿈꾸는 예술가들은 모두, 그들의 본능으로부터 발산되는 지긋한 예술적 추구로 인간 세계의 한정적 시야와 경직된 사고를 건드리고, 긴장시키고, 끝내 확장시키는 일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것이 때로 세상에 대한 ‘저항’이자 다분히 ‘정치적’인 모습을 띄고 있어 비난받는다 해도, 루슈디처럼 평안한 삶을 훼손당하고 목숨을 위협받는 순간을 맞이한다 해도, 그들은 그저 자신의 역할을, 욕망을 수행함으로써 인간의 다양성과 가능성을 더 열어보인다.    [출처] [칼럼] 맨부커상 스타, '살만 루슈디'의 파란만장한 13년 생존기 (문학상 에피소드 1)|작성자 해서ly  
512    "노벨문학상 수상자"라는 타이틀 안에 가두지 않은 사르트르 댓글:  조회:5931  추천:0  2016-10-19
 ▲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와 작품 < 닥터 지바고 >       알려진 바에 의하면, 역사상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한 작가는 3명이 있다. 첫 번째로는 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그의 경우는 타의에 의해 수상을 거부해야 했던 사례다. 당시 작품이 혁명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소련 정부는 작가에게 여러 제약과 구속을 가했는데, 가 해외로 밀반출되어 끝내 출간이 되자 급기야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는 일이 발생한다. 당연히 작가는 그 영광을 제대로 누릴 새도 없었다. 이 사태에 분노한 소련작가동맹에서 기어이 그의 이름을 제명하기에 이르고 정부에서도 그를 추방하겠다고 전한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조국에서 살기를 원했던 작가는 그런 맥락에서 수상을 거부하게 된다.     다음으로는 스웨덴의 에리크 악셀 카를펜트가 있다. 생소한 이름일 수 있겠으나 사실 이 인물은 수상자가 없었던 1918년, 그 해에 상을 받기로 내정된 작가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 이름이 발표가 되기도 전에 상을 거부할 수 있었을까? 에리크 악셀 카를펜트는 1931년에 사망하고 그해 11월에 기어코 수상자로 추서 받을 정도로 저명하고 뛰어난 작가였다. 그러나 그는 1912년도부터 죽기 전까지 노벨상을 주관하는 노벨 아카데미의 상임 서기로 활동하고 있던 터라 그 상을 받기에는 상황적 조건이 영 찜찜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화는 노벨문학상 역사에 있어서 생존 작가가 아닌 자에게 상을 수여한 처음이자 마지막 사건으로 기록된다.           세 번째 인물은 우리에게 이미 너무나도 친숙한 이름인 ‘장 폴 사르트르’다. 이번 글에서 주요하게 다루긴 하겠지만 실제로 그의 수상 거부 사례는 ‘스캔들’이라고 명명될 정도로 큰 화제였다. 노벨문학상을 소개한 칼럼 본편에도 설명한 바 있듯이, 상을 거부한 것은 스스로 ‘제도화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사실 그 발언은 지금 곱씹어도 봐도 대단히 파격적이고 신선하게 다가온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라는 타이틀로 작가로서의 행보를 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은 수상의 영예를 안게 됨으로써 짊어질 노벨 아카데미와의 이해관계를 거절한다는 것이고 그 정도의 완고한 태도는 제도에 얽히는 것을 거의 체제에 ‘복속(服屬)되는 것’으로 해석을 했다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현대 철학이 그 행로를 개척하는 데 있어 중대한 기여를 했던 철학자의 쿨한 대답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처음 이 에피소드를 접했을 때는 ‘멋있긴 한데 굳이 그렇게까지? 노벨문학상이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상이긴 하지만 개인에게 그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의 상인가?’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던 것 같다.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 싶었다. 당시 인터뷰 자료를 찾아봤지만 그는 단지 ‘제도권에 의해 규정되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할 뿐, 그러한 결정이 하나의 스캔들로 비춰지는 것에 대해 유감을 표명할 뿐이었다. 잠시, 그의 라이벌이었던 카뮈가 노벨문학상을 먼저 수상한 것이 자존심이 상해 그렇다는 떠도는 소문이 일정 정도는 사실일까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이번 기회에 그가 살았던 인생을 다시 찬찬히 되짚어 보면서 굳이 그의 발언에 대해 일말의 의심을 할 것도, 더 큰 의미를 부여할 것도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모든 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가 ‘실존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실존주의. 한 줄로 설명하자면 인간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가장 기본적인 생각을 기틀로 세워진 사상이다. 정해진 본질이 없이 우선적으로 실존하기에 인간은 삶을 그때그때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채워나간다. 때문에 그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그는 권력이든 종교든 문화든 간에 모든 종류의 권위를 부정하고자 했다. (노벨상의 권위마저도 그에겐 그런 의미였다고 본다.) 인간은 의식과 행동에 있어 참된 자유를 갖췄을 때에 그 선택에 대해 주체적 책임을 질 수 있고, 그것이야 말로 세계에 대한 진정한 참여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신을 ‘노벨문학상 수상자’라는 타이틀 안에 가두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외부의 가치판단에 의해 만들어진 ‘나’가 아닌 진정한 사르트르, 자기 자신으로서 자신만의 주체성과 창조성을 고민하는 작가로 끝까지 남는 쪽을 택했다.       오늘날, 문학을 포함한 여러 예술 장르 그리고 여타 다른 다양한 학계 내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주창하며 해체주의에 탐닉하고 있다. 유기적인 질서와 의미가 붕괴된 ‘현대’라는 시대적 특성상, 파편화된 주체와 기호들을 마주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그러는 와중에도 한편으로는 ‘나’라는 존재로 회귀하는 실존주의의 ‘실체 있는 목소리’가 그립기도 한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사르트르가 추구하고 끝까지 고집했던 인간 존재에 대한 신념은 결국 나도 고민할 수밖에 없는, 세계와 생에 속해 있는 자라면 절대로 놓을 수 없는 종교와도 같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것이 본래 허무와 무의미 속에서도 끊임없이 자신만의 어떤 믿음과 가치를 발견하려하고 생산해 내고자하는 동물이지 않은가.        사르트르의 수상 거부가 하나의 ‘스캔들’로 비춰진 것을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말 그의 말대로 스캔들이랄 것도 없다. 그의 말은 정말 한 인간의 발화일 뿐이다. 문학가이고 철학가이고 사상가라는 지식인이기 이전에 자유로운 선택과 상상력을 지닐 권리가 있는 자의 소신이다. 그럼에도 어쨌든 그의 에피소드가 노벨 문학상을 거절한 작가들의 이야기 가운데서도 유독 유명해진 것은, 아마도 짧은 인터뷰에서 남긴 단발적인 말 한 마디의 의미가 사람들로 하여 각자의 ‘실존적 행방’을 되돌아보도록 의식의 수면에 돌을 던진 것이 아닐까 한다.          [출처] [칼럼] 사르트르가 노벨문학상을 거절한 이유는 무엇일까? (문학상 에피소드 2)|작성자 해서ly  
511    [쉼터] - 115년만에 "노벨문학상" 큰 사고를 치다... 댓글:  조회:6066  추천:0  2016-10-19
  [노벨문학상의 파격]- '美포크록 황제' 밥 딜런 수상 -115년 역사상 처음 가수에게… "음악으로 새 詩的표현 창조" -팝 음악의 스티브 잡스 … 하루키 "밥 딜런이 세상을 바꿨다" 사랑 타령에 머물던 대중음악에 예술성 결합 ...인권·반전운동의 음악적 상징   노벨 문학상이 밥 딜런의 문을 두드렸다. 1960년대 인권·평화 운동의 상징으로 이름난 미국 포크 가수 밥 딜런(75)이 13일 201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1901년 노벨 문학상이 첫 수상자를 낸 이후 대중음악 가수가 이 상을 받은 것은 115년 만에 처음이다. 밥 딜런은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은 명곡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Knocking' on Heaven's Door)'와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 in the Wind)'을 발표하며 작사와 작곡은 물론, 노래까지 도맡아서 20세기 미국 대중음악의 대표적 '음유시인'으로 꼽혔다. 어릴 적에는 랭보의 시(詩)를 즐겨 읊던 문학 소년이었다. 기타로 詩를 쓴 밥 딜런 - 통기타를 잡은 음유시인 밥 딜런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13일 스웨덴 한림원은 “밥 딜런이 위대한 미국의 노래 전통 속에서 새로운 시적(詩的) 표현을 창조해왔다”면서 그를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했다. 밥 딜런은 1960년대 저항적 가사를 담은 노래들로 미국 인권·반전(反戰) 운동의 음악적 상징으로 꼽혔다. 사진은 2001년 덴마크 공연 당시 모습. " 미국인이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은 1993년 흑인 여성 작가 토니 모리슨의 수상 이후 23년 만이다. 밥 딜런은 미국인으로서는 아홉 번째 수상자다. 시상식은 12월 10일 열린다. 수상자에게는 상금 800만크로나(10억원)가 수여된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1927년)과 버트런드 러셀(1950년), 정치인 윈스턴 처칠(1953년), 탐사 보도 언론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2015년) 등이 순수 문학 창작이 아닌 저술 활동으로 상을 받은 적 있다. 밥 딜런은 미국 대중음악은 물론, 1960~ 1970년대 한국 포크 음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대수·김민기·양희은·송창식·윤형주·이장희 같은 한국의 통기타 가수와 작곡가들도 당시 밥 딜런에게 직접적 영향을 받았다. 가수 윤형주씨는 13일 본지 통화에서 "1968년 '트윈 폴리오' 활동을 시작했을 당시, 우리가 가장 즐겨 불렀던 노래 가운데 하나가 밥 딜런의 '바람만이 아는 대답'이었다"고 말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수년 전부터 밥 딜런을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하면서 "그가 노벨상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고 표현했다. 그의 대표곡인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Knocking on Heaven's Door)'에 빗댄 말이다. 2008년에는 "특별한 시적 힘을 가진 작사"라며 퓰리처상 특별상을 받았다. 기타로 詩를 쓴 밥 딜런 - 통기타를 잡은 음유시인 밥 딜런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13일 스웨덴 한림원은 “밥 딜런이 위대한 미국의 노래 전통 속에서 새로운 시적(詩的) 표현을 창조해왔다”면서 그를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했다. 밥 딜런은 1960년대 저항적 가사를 담은 노래들로 미국 인권·반전(反戰) 운동의 음악적 상징으로 꼽혔다. 사진은 2001년 덴마크 공연 당시 모습. /EPA 연합뉴스 노벨 문학상을 시상하는 스웨덴 한림원은 "밥 딜런이 위대한 미국의 노래 전통 속에서 새로운 시적(詩的) 표현을 창조해왔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사라 다니우스 한림원 사무총장은 밥 딜런의 노래를 "귀를 위한 시"라고 표현하며 "5000년 전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머와 사포는 노래로 불릴 것을 의도하고 시적인 텍스트를 썼는데, 밥 딜런도 똑같은 길을 걸었다"고 말했다. 음악 동료이자 연인이었던 밥 딜런과 조앤 바에즈 - 201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미국의 포크 가수 밥 딜런(왼쪽)과 그의 음악적 동료이자 한때 연인이었던 조앤 바에즈의 모습. 이들은 1960년대 저항적 가사를 담은 노래들로 미국 인권·반전 운동의 음악적 기수로 불렸다. 사진은 1965년 영국 런던에서 촬영. /AFP 연합뉴스   [출처] 조선닷컴 밥 딜런은 1960년대 미국 인권운동의 음악적 상징이기도 했다. 1960년대 초반 그가 불렀던 '바람만이 아는 대답' 같은 포크 노래들은 미국 반전운동과 인권운동 현장에서 송가(頌歌)로 불렸다. 하지만 그의 음악적 위대함은 포크 가수라는 사실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1965년 그는 포크 음악에서 벗어나 록 음악을 과감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밥 딜런을 포크 음악 가수로만 여겼던 팬들은 그의 음악적 변신에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록 음악을 포크 음악에 결부시킨 밥 딜런의 혁신은 '포크 록'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1960년대 후반부터 밥 딜런은 컨트리 음악을 수용하는가 하면 그 뒤에는 블루스 음악으로 경도되기도 했다. 대중음악 평론가 김작가씨는 "밥 딜런은 사랑 타령에만 머물렀던 대중음악에 저항 정신을 가미해서 예술성과 사회성을 결합시킨 창조적 혁신가"라면서 "평생 음악적 혁신을 멈추지 않았던 그의 모습은 팝 음악의 '스티브 잡스'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 미국 포크 록의 대부 밥 딜런이 201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해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중 한 명으로 시대를 관통하는 거장이라 불리는 그가 세계의 역사를 바꾼 노래를 작사한 공로로 2016 노벨 문학상 수상의 영예를 거머쥔 것. 밥 딜런은 누구이고 무슨 노래를 만들었고 어떤 일을 했을까.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에서 미래는 다양한 형태의 지식이 빠르게 변화되는 사회에 어떻게 적응하는가의 경쟁이라 하였다. 그렇다! 21세기의 문학의 장르는 다양함을 따랐고 그중 시간에 초점을 맞추었다. 즉, 눈으로만 읽고 느끼던 지적한계를 귀로 들으면서 입체적 감동을 부가시켰고, 또 책 한 권을 장시간 읽어야 느끼던 감동을 단 3~5분에 느끼는 것도 문학이라 인정한 것이다!     이런 부정적인 기사도 있네요. “오바마에게 그저 ‘부시와 다르다’는 이유로 노벨평화상을 준 이래 가장 믿기 힘든 결정이다” 마약과 반전의 대명사인 밥딜런이 우리나라 가수였으면 벌써 풍속사범이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고 음반판매 불허나 방송출연 영구 금지당했을 것이다. 그의 반전운동은 관점에 따라 찬반이 갈릴 수 있으나 마약쟁이였다는 것은 누구도 옹호할 수 없을 것이다.         밥 딜런(Bob Dylan, 1941년 5월 24일~)은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시인, 화가이다.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고, 본명은 로버트 앨런 지머먼(Robert Allen Zimmerman)이다. 그의 작품은 1960년대부터 비공식 작자와 저항음악의 대표로서 사랑을 받았다. 한국의 학생운동에도 영향을 준 "Blowin' in the Wind" 그리고 "The Times They Are a-Changin'"과 같은 노래들은 사회상을 잘 보여주는 저항적 노랫말로 시민권을 대표하는 곡이 되었으며, 베트남 전쟁에 대한 저항의 표상이 되었다.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영향력있는 음악가 중 한명으로 꼽힌다. 음악가로는 처음으로, 미국 노래의 전통에서 시적인 표현을 새롭게 만들어낸 공로를 인정받아 201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딜런은 10살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고, 1959년 미네소타 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61년에 중퇴하였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우상인 포크 가수 우디 거스리를 만나기 위해 뉴욕으로 간다. 뉴욕에 도착해 우디 거스리를 만나고 그리니치 빌리지 주변의 클럽들을 전전하며 연주하던 그는 유명 음반 제작가 존 하몬드의 눈에 띄어 콜롬비아 레코드를 통해 데뷔하게 된다. 그 후 앨범 The Freewheelin' Bob Dylan(1963) 의 성공을 통해 당시 활발했던 사회적 저항 운동의 상징적인 음악가가 되었으며, 특히 잭 케루악, 앨런 긴즈버그 등 비트닉 작가들의 영향을 받은 그의 시적인 가사는 대중음악에서의 가사의 수준을 끌어 올렸다.         스웨덴 한림원의 사라 다니우스 사무 총장은, "밥 딜런은 귀를 위한 시를 쓴다"고 표현하면서 "밀턴과 블레이크에서 이어지는 영어권 전통 속에서 위대한 시인이며, 항상 자신을 쇄신하고 새로운 신원을 창조하고 있다."고 하였고, "2천5백 년 전에 써진 호메로스와 사포의 시를 지금까지 읽고 우리가 그것을 즐긴다면 밥 딜런 또한 읽을 수 있고 읽지 않으면 안 된다."고 수상 배경을 밝혔다.       “사람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봐야 깨닫게 될까. 흰 비둘기는 얼마나 많이 바다 위를 날아야 백사장에서 편히 쉴 수 있을까. 전쟁의 포화가 얼마나 많이 휩쓸고 나서야 영원한 평화가 찾아올까. 친구여, 그 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네.” - Blowin' in The Wind 중에서   스웨덴 한림원의 노벨위원회가 반전과 평화, 저항과 자유를 노래한 미국의 싱어송 라이터, 밥 딜런(Bob  Dylan)을 201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했다. 노벨위원회는 음유시인이자 대중가수인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유에 대해 “미국의 노래 전통 속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했다.”(“for having created new poetic expressions within the great American song tradition”)고 밝혔다.     실로 파격적이고 의외의 일이었다. 노벨문학상 116년 역사상 시나 소설 등 순수 문학 장르를 벗어나 대중 가수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사례가 없었기에 밥 딜런의 수상은 그래서 국내외적으로 파장을 불러일으키면서 심지어 논란이 일고 있기까지 하다. 노벨문학상 사상 116년 만에 최초로 문학 작가들을 제치고 노벨문학상을 거머쥐었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인 연세대 국문학과 정과리 교수조차도 10여 년 전부터 이미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지만 정말 노벨 문학상을 받을 줄은 몰랐다며 놀라움을 표했다. 정 교수는 아무래도 일단 순수 문학이 아니니까 무의식적으로 제외하고 있었던 셈이라며  노벨상 위원회가 문학의 영역을 단순히 문학작품에서가 아니라, 문학이 들어나는 모든 문화적인 생산물들에서 그 문학을 찾겠다고 그 영역을 확대했다고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대략 12세기 전후로 해서 유럽에서는 투르바두르 투르베르라고 해서 음유시인들이 굉장히 많이 쏟아져 나왔고 결국 그 음유시인들이 사실상 오늘날 문학의 기본 토대를 만들어줬다는 점에서 본다면, 사실 밥 딜런은 음유시인의 전통을 충실히 이어받고 그걸 발전시킨 사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을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의 어느 시인이 ‘시적인 것은 어디에나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문학적이라고 하는 것은 문학작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표현할 때 그걸 감동적으로나 우리의 정신을 일깨우는 방식으로 표현하면 그게 다 문학적인 것일 수 있고, 그런 점에서 노래도 역시 그런 문학적인 정신을 담고 있다. 한마디로 이번 노벨문학상의 결정은 이제까지의 문학서적을 잣대로 평가하던 전통적 방식을 탈피, 다른 장르인 대중음악과 가사를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평가함으로써 노벨문학상 심사의 외연을 넓힌 것으로 보인다.    밥 딜런의 음악과 시 세계   ‘Blowin' in The Wind’, ‘Knockin' On Heavens Door’, ‘Like A Rolling Stone’, ‘Visions Of Johanna’ 등에서 드러나는 그의 곡들은 밥 딜런의 시적인 은유와 상징으로 그의 가장 큰 문학적 무기다.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는 이미 밥 딜런의 노랫말을 연구하는 강좌가 있을 정도로 그에 대한 관심이 높으며, 다의적이고 문학적 향기와 철학적 메시지가 강한 그의 시와 음악에 대한 관심은  국내외를 불문코 진행 중이다. 대중음악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스타일은 이미 오래전부터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되고 있던 관계로 이번 노벨상 수상은 결코 새삼스런 일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분위기이다.     밥 딜런은 뮤지션으로 태생적인 오만함과 굴곡 많은 결혼생활이 말해주듯 고정적인 틀에서 벗어나 자유분방의 전형이었다. 그의 이러한 캐릭터는 1960년대 반전운동과 청년문화, 기성세대의 낡은 질서에 저항했던 청년 문화를 대표했다. 그런 점에서 노벨문학상의 후보에 오른 고은 시인도 일면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고은 시인은 사회적인 메시지가 강한 시를 써왔고 그래서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 케냐의 응구기와 시응오, 시리아의 아도니스 등과 함께 강력한 후보 중의 한 사람이었다.    밥 딜런은 그의 가사에 대한 정치적 해석을 거부하지만, 그의 두 번째 앨범 ‘프리윌링 밥 딜런’의 수록곡 ‘블로잉 인 더 윈드’에서 알 수 있듯이 전쟁에 대한 그의 분명한 반대의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1960년대 민권운동과 반전운동에서 저항정신을 대변했다. 씁쓸한 일이지만, 시중에서는 이번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들 두고1만여 명의 ‘문화계 블랙리스트’ 자료가 공개되어 충격을 주고 있는 이 땅의 이데올로기적 경직성과 사회적 폐쇄성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분위기가 역력하게 읽혀지고 있다.    밥 딜런의 앨범은 현재까지 약 1억 3천여 만 장이 팔렸고 11개의 그래미상,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상을 수상했으며, 2008년엔 “팝 음악과 미국 문화에 깊은 영향”을 인정받아 퓰리처상도 수상했다. 2012년에는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최고의 영예인 자유의 메달을 수여받기도 했다.         특히 그의 함축적이고 시적인 가사는 포크음악의 예술성을 한층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5년 ‘구르는 돌처럼"(Like A Rolling Stone)의 가사 ‘아무것도 없으면 잃을 것도 없다"(When You Got Nothing, You Got Nothing to Lose)가 미국 연방대법원 판결문에 인용되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미국 고교와 대학에서 교과서로 널리 쓰는 "노턴 인트로덕션 투 리터러처"에는 그의 가사가 실릴 정도로 미국 내에서는 단순한 가수가 아닌 저항시인으로 대우를 받았다.  한림원은 “미국의 위대한 음악 전통 내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냈다”며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이유를 밝혔다.   사진설명: 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팝가수 밥 딜런이 2012년 5월 29일 워싱톤 백악관에서 버락 오바마대통령으로부터 자유의 메달을 받고있다.     ////////////////////////////////////////////////////////////////////////////////////////////         1960년대의 반전 가수 밥 딜런이 노벨상을 수상했다. 음유시인, 포크록의 대부, 저항가수로 통칭되는 그에게 노벨문학상이 주어짐으로서 문학계는 물론 문화계 전반에 놀라운 충격을 주고 있다. 수상근거는 ‘위대한 노래의 전통 속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했다는 것이다. 그의 노래를 ‘귀로 듣는 시’라고 하듯이 밥딜런은 음유시인이다. 싱어 송 라이터이자, 화가이고, 시인인 밥딜런, 그는 다면적인 마스크의 소유자이다.  음악계에서는 그를 포크록(folk rock)의 대부라고 부르지만, 정통음악계에서는 배신자라 부른다.  포크(folk) 인 ‘blowing in the wind'(바람만이 알고 있지요)에서, 락(rock)인 'knocking on heaven's door'(천국의 문을 노크하다)로 변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흑인들의 민요인 포크 불르스, 로큰 롤, 컨트리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고 있다. 음악인으로서도 다면적 마스크의 소유자다.   1960-70년대 음악을 사랑하는 대중들은 이원화 되었다. 군사정권의 통치와 산업화의 그늘에서 음울한 시대를 살던 젊은 지성인들은 저항의 아이돌 밥딜런, 그리고 그의 에피고넨이던 한국의 밥딜런, 김민기에 매달렸다.  김민기가 맨발로 올라 을 열창하던 무대에 젊은 지성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 당대 대학생들은 모두 김민기 키드(kid)가 돼어 시대고를 카타르시스했던 것이다. 반면 공장에서, 농촌에서 일하던 일반 대중들은 나훈아, 남진의 트롯에 열광하며 노동의 피로를 풀고, 삶의 고난에 위로받았던 것이다.    기본적으로 그의 음악은 보헤미안 템퍼(bohemian temper, 낭만기질)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또 하나의 히트곡 ‘like a rolling stone'이 대표적이다.  이 곡은 ‘세상을 바꾼 예술 1위’(영국잡지 ‘언컷’ 선정),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로큰롤‘(잡지 ‘로큰롤’)로 선정되기도 했다.   세계의 대중가요 'Big 4'는 보통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 롤링스톤즈, 밥딜런으로 불린다. 비록 밥딜런의 top 10 곡이 4편에 불과하지만 그의 음악은 멜로디와 가사가 접목되어 ‘가사화된 멜로디’라는 신경지를 개척한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비틀즈의 음악이 멜로디 중심이고 가사는 뒷전에 밀린 ‘멜로디화 된 가사’와 비교된다.  이러한 가요계의 추세에서 노래의 내용을 중시하는 즉 ‘컨텐츠의 음악’으로 격상시켰던 것이다. 비틀즈의 음악은 '리듬'으로 듣고, 밥 딜런의 음악은 '가사'로 듣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밥딜런은 세계 음악사에서 하나의 변혁을 가져온 인물이다. 밥 딜런의 영향 아래 비틀즈도 노랫말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을 정도다.    그의 음악사상은 기본적으로 비트이즘(beatism)에 기초하고 있다. 가치의 상대성을 신뢰하고, 제도화된 모든 기성가치와 사회제도에 대한 거부와 부정(anti-establishment)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음악사상은 1950년대 앵그리 영맨(angry youngman) 운동과도 연결된다. 비트이즘 차원에서 반전,반핵 사상도 분비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음유시인의 영역을 넘어 저항가수, 앙가쥬망 싱어로서의 위상을 굳혔다.     그는 일찌감치 문학의 길을 걸었다. 비록 중퇴했지만 미네소타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시도 창작하였다. 하지만 곧 음악에 심취하여 가수로의 길을 걷는다. 문학 전공자답게 가사말에  신경을 써서 시와 노래, 즉 문학과 음악의 접합을 시도한다.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한 사람의 인간이 될 수 있을까요 얼마나 많은 귀를 가져야 사람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 그건 바람만이 알고 있지요   대표곡 는 가사말만 따로 떼어 놓으면 훌륭한 시다. 이점을 인정 받아 이 노래말은 미국 교과서에도 실렸다. 그야말로 노래말을 시의 경지로 끌어 올린 것이다. 말 그대로 그는 음유시인이 된 것이다.    어쩌면 노벨문학상 수상의 배경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수상의 중요한 배경은 대중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힘의 이동에 있다. 현대의 대중은 지루하고 난삽한 문학보다 감각에 직접 호소하는 대중문화, 곧 대중음악에 길들여져 있다. 그 대중을 움직이는 힘, 즉 대중문화의 힘이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노벨상 위원회가 이러한 문화현상에 주목하고, 그러한 새로운 트렌드에 비중을 둔 결과라 할 수 있다. 대중과의 소통과 교류, 그것이 시대적 조류로 자리잡고 있다.  팝페라처럼 다양한 장르를 융합하는 크로스오버(cross-over)음악이 있듯이, 문학도 이제 크로스오버 리터러처(literature)를 인정해야 하는 시대를 맞은 느낌이다.    하지만 문제는 있다. 바로 노벨문학상의 정체성, 정통성에 관한 문제이다. 아무리 노벨문학상이 문학의 외연을 넓힌다 한들 문학은 '문학'이다.  노벨 문학상이 ‘문학상’이라는 타이틀 갖고 있는 한 '음악성'이 아니라 ‘문학성’이 평가의 중심이  돼야 한다. 물론 기존의 수상자 중에 문학외적인 인물들도 문학상을 받았다. 하지만 문학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 난 것은 아니었다. 영국의 Russell은 수학자, 철학자이지만 , 같은 글을 남긴 수필가였다. Sartre도 철학자이기 이전에 소설 , , 희곡 < 파리>, , 평론를 쓴 실존주의 문학가였다. 그의 작품은 문학의 현실참여 소위 앙가쥬망 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정치가 처칠도 그의 유명한 (수필)을 인정 받아 문학상을 받았던 것이다.    이처럼 기존의 문학상은 결코 문학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밥 딜런은 다르다. 비록 시적인 가사를 쓰긴 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음악을 전제한 노래가사이지 정통 문학은 아닌 것이다.  멜로디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시적 상상력에 제한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곡에 맞춘 가사, 곧 음악과 시의 주종(主從)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결국 밥 딜런의 가사는 독립된 예술장르로의 시가 아니라 음악화된 노랫말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번 수상에 대하여 ‘노벨문학상’이 아니라 ‘노벨문화상’이었다는 혹평도 나오는 것이다. 를 쓴 파스테르나크도, 를 쓴 싸르트르도 수상을 거부했다.  상도 하나의 구속이기 때문에 수상을 거부한 싸르트르는 진정한 자유인이다. 결혼조차 구속이라 생각하고 보봐르와 계약결혼의 상태로 자유로운 사랑을 구가한 인물이 아니던가.   밥 딜런도 수상을 거부했다면 역사적 인물로 남았을 것이다. 그의 길은 문학이 아니라 음악의 길이었고, 음악인의 길이었음으로 음악인에게 주여지는 최고의 상, ‘그래미상’ 수상으로 만족해야 하지 않았을까. 세계적 권위의 퓰리처상도 수상하기도 했고.   노벨문학상 수상 거부 이유는  많다. 그가 주창하던 반전, 반핵의 메시지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의 음악에 흐르는 보헤미안 템퍼의 구속없는 보헴( bohem, 자유)정신을 실천하기 위하여. 까만 잉크병의 밤을 밝히며 언어와 치열하게 투쟁하는 진정한 문학인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 ...아는 대로, 생각한 대로...               데뷔 초기인 1960년대 초 영국 런던의 한 클럽에서 공연 중인 밥 딜런 / 조선일보 DB "I'm ready to go anywhere/ I'm ready for to fade(난 어디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고/ 사라질 준비가 되어 있다네)" -밥 딜런 'Mr. Tambourine Man' 중에서 시인 장석남은 "나는 가수거나 아니면 유능한 세션맨이 되었어야 옳았다"며 "어떤 충만함으로 타오르는 저편의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시보다 음악이 훨씬 용이하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음악은 그런 것이다. 인간이 실존의 속박에서 벗어나 시간의 물리성을 거역하고 순간 속으로 확장되는 것, 그것을 일러 '순간의 영원'이라 할 것이다. 음악은 이곳의 언어이자 피안(彼岸)의 언어다. 그래서 그 오랜 옛날부터 음악은 샤먼의 언어였다. 노래 역시 마찬가지다. 노래는 완벽한 몰아(沒我)의 시간을 선물한다. 노래하는 동안엔 자아와 세계의 경계가 사라지고 황홀하게 타오른다. 관념이 아니라 실재로서의 자유가 드러나는 시간이다. 반면 글은 나와 세계 사이의 아득한 거리를 확인하고, 그 사이에서 난파(難破)하는 운명이다. 글은 세계를 설명할 뿐이다. 글로는 결코 피안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니 시 열 줄이 노래 한 줄에 못 미친다. 많은 시인들의 꿈은 자신의 시가 노래로 불리는 것이다. 그러나 시와 노래가 근친이라고 해서 썩 잘 어울리는 것은 아니다. 시가 노래로 성공적으로 안착한 예는 드물며, 많은 시도들이 어색한 실패로 끝났다. 시와 노래가 원래 한 몸이었을지 모르나, 둘은 이미 너무 오래전에 헤어졌기 때문이다. 시는 오랫동안 운문이 지녀야 할 엄밀성과 완결성을 위한 독자적 세계를 구축해 왔다. 가사가 시적이라고 그 자체를 시라고 할 수는 없다. 가사는 멜로디와 리듬, 그리고 가수의 가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언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시간에 갇혀있다. 가사가 깃드는 곳은 지면이 아니라 허공이다. 가사는 노래의 시작과 끝에 이르는 짧은 시간의 흐름에 맡겨져 찰나 속으로 명멸한다. 그 시간을 벗어나면 가사는 앙상한 텍스트로 남을 뿐이다. 문학적 가사로 꼽히는 가요의 명곡들을 글로 적고 다시 읽어보라. 언어의 밀도가 꽤 성기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것들을 묶어 시집이라고 부르면 좀 안쓰러울 것이다.   가사에서 멜로디의 결에 맞지 않는 생경한 관념어나, 리듬을 방해하는 음운적 결함이 있는 언어, 가수의 음색과 따로 노는 언어들은 추방된다. 가사의 메시지에 집착하다 보면 멜로디나 음악적 구조가 허약해진다. 멜로디가 엉뚱하게 도약하기도, 심심할 정도로 평이해지기도 한다. 밥 딜런이 만우절 거짓말처럼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의 문학적 비범함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는 한 시대 팝 음악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싱어송라이터다. 그가 없었다면 팝이 엘리티즘을 얻기까지 무척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가사를 따로 떼놓는다면, 그것이 위대한 시가 될지는 의문이다. 멋진 가사라 해서 모두 시의 완결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인 로버트 로웰이 "음악이 없으면 밥 딜런의 시는 불구다"라고 말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음악과 노래는 에덴으로 가는 유일한 사다리다. 스웨덴 한림원이 이 점에 주목해 문학의 확장을 꾀한 것인지, 그들의 뜻이 궁금하다. 음악과 노래에 대한 헌사로 들리는 밥 딜런의 노래 'Mr. Tambourine Man' 중에 이런 가사가 있다. "I'm ready to go anywhere/ I'm ready for to fade(난 어디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고/ 사라질 준비가 되어 있다네)." 그의 가사는 종이가 아니라 허공 속을 떠돌 때 주술성(呪術性)을 얻을 수 있다. 노래의 운명은 그런 것이다. '순간의 영원' 속에서 어디론가 떠나거나 사라지거나. /조선일보     
510    [쉼터] - "노벨상"때문에 남들이 더 입방아 찧어대다... 댓글:  조회:5124  추천:0  2016-10-19
  영국의 극작가이고,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란 묘비명을 스스로 지어놓고 간 버나드 쇼와 정치가 윈스턴 처칠은 사이가 나빴다. 처칠은 쇼를 보고 “그런 재미 없는 연극을 누가 보나” 했고, 쇼는 처칠을 보고 “저렇게 인정머리가 없어서는 친구도 없을 것”이라 했다. 그런데 어느날 쇼가 처칠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내 연극 입장권 두 장을 보내니 친구와 같이 오시오. 만약 친구가 있다면”이란 메시지와 함께... 처칠은 바로 엽서를 보냈다. “첫날 공연에는 못 가겠고 다음날 갈게요. 만약 다음날까지 막이 열린다면”...  둘은 다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쇼는 수상자로 결정된 후 한 번 사양하다가 1920년에 받았다. 처칠은 문학인이 아니면서 1953년 상을 받았다. `제2차세계대전 회고록`이 수상작인데, 회고록으로 노벨상을 받은 유일한 사람이다. 그해에는 마땅히 줄만한 문인을 찾을 수 없었고, 또 처칠은 당시 총리여서 상당한 권력자였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서 사회주의 국가들을 납작하게 해준 공로도 있었다. 처칠은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말도 안 돼” 했지만 사양하지는 않았다.   문학전문가들이 추천한 200명의 후보군 중에서 위원회가 1차로 20명을 추리고 2차로 5명을 뽑은 다음 투표로 수상자를 결정하는데, 뜻밖의 수상자가 심심찮게 나온다.  역사학자·철학자·철학소설가 등이 뽑히기도 하고, 지난해에는 `전쟁에 참전했던 여성들을 찾아다니며 취재한 실록기자`가 문학상을 받았다. 올해는 미국 운동권 가수 밥 딜런(75)이 수상자로 결정됐다. 그는 수상 소식에 쓰다 달다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남의 일 보듯 소감 한 마디 입 밖에 내는 법이 없는데, 남들이 더 입방아를 찧어댄다. “문학의 외연을 넓혔다” “이건 노벨코미디상 감이다”  밥 딜런은 작사 작곡 노래 혼자 다 하는데, 가사는 훌륭한 반전·평화의 詩다. 우리나라도 서광이 보인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가객(歌客)이 많았고, 한대수·김광석·양희은·김민기·세시봉 등이 다 음유시인들이다.   /서동훈(칼럼니스트)   ‘포크록 밥 딜런’ 노벨 문학상의 신선한 파격  : 2016-10-15        올해 노벨 문학상은 미국 포크록 가수 겸 시인 밥 딜런(75)에게 돌아갔다.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노벨 문학상이 116년 역사상 처음으로 대중가수의 품에 안기자 지구촌이 찬반론으로 떠들썩하다. 스웨덴 한림원은 13일 “위대한 미국 노래의 전통 안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 냈다”고 선정 이유를 밝히며 딜런의 노래를 ‘귀를 위한 시(詩)’라고 했다.   딜런이 문학상 후보로 간간이 거론되긴 했어도 이번 수상은 문학계에 ‘혁명’으로 평가된다. 반전(反戰)과 평화의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사유의 깊이로 표현한 그의 음악은 베트남전 반대 운동이 펼쳐졌던 1960년대와 1970년대 청년세대의 정신세계를 바람처럼 파고들었다. 대표곡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 in the wind)’은 인권과 저항운동의 상징적 노래로 한국의 학생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평생 음악계에 몸담은 가수에게 최고 권위 문학상을 주는 것이 노벨상의 진화인지, 변질인지는 보는 이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일각에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부시와 다르다고 2009년 노벨 평화상을 준 이래로 가장 믿기 힘든 노벨상 수상”이라고 개탄한다. 반면 영국 소설가 살만 루슈디는 “음유시인의 전통을 잇는 위대한 계승자”라며 노벨상의 ‘탁월한 선택’이라고 평가했다.   한림원은 지난해 논픽션에 이어 2년 연속 이례적 장르에서 수상자를 선정했다. 문학의 범주를 관습화된 소설과 시로 한정짓기보다 더 확장하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순수문학과 대중음악, 문학과 문학 아닌 것, 둘의 경계를 가르던 견고한 벽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밥 딜런은 21세기 문학 패러다임에 밀어닥친 거대한 변화의 상징이다.   △ 밥 딜런의 시대정신이 저항운동이면 동아일보 시대정신은 바로 이것     작사가나 철학자도 노벨상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준 것.   밥 딜런에게 문학적 가치와 심오한 뜻이 담겨 있다면 내노라 하는 文人과 철학자들은 그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서 활동하는 게 맞을 듯‥   - 賞을 받았다고 해서 억지 스토리를 만들 필요는 없질 아니 한가 -   =========================================================== 노벨문학상이 '책'을 버렸다. 116년 동안 지켜온 불문율을 깬 것이다.  기자가 보기에 이번 노벨문학상의 가장 큰 파격은 싱어송라이터가 수상자가 됐다는 데 있지 않다. 더 놀라운 파격은 '책'이 아닌 다른 텍스트에 상이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노벨문학상 역사에서 종이에 인쇄된 책이 아닌 다른 형태의 텍스트에 상이 주어졌던 경우는 없었다.  문학은 언제나 '책'이라는 도구를 통해 대중과 소통했고, 그 책은 증거물로 남아 인류의 정신적 환희와 상처를 기록해왔다. 활판 인쇄술이 본격적으로 발명된 15세기 이후 인류의 모든 지식과 문학은 책을 통해 세상과 만났다. 책에 담긴 새롭고 위험한 사상과 이야기들은 때로는 폭정을 무너뜨렸고, 노예해방에 기여했으며, 사람들에게 꿈과 낭만을 심어줬다.  지난 116년 동안 노벨문학상은 인류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한 '책'에 수상자의 자격을 부여해왔다. 하지만 이제 그 불문율은 깨졌다. 스코틀랜드 작가 어빈 웰시는 트위터를 통해 "음악 팬이라면 사전을 펴서 '음악'과 '문학'을 차례로 찾아서 대조해보라"고 비꼬았다. 책을 신봉한 본격문학 작가의 한탄 정도로 치부하기에는 큰 파장이 담긴 말이다.  불문율을 깬 것이 잘 된 일인지 잘못 된 일인지 속단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번 밥 딜런의 수상으로 향후 노벨상이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이 생긴 것만은 분명하다. '문학의 영역 확대'라는 효과와 문학상의 전통적 가치를 모두 지키려면 앞으로 문학상은 매우 많은 논란과 맞서야 할 것이 분명하다.  당장 내년부터 악보에 쓰여진 노래가사를 비롯한 '책'이 아닌 다른 모든 텍스트들에도 노벨문학상 후보 자격이 주어져야 할지 모른다. 그렇지 않을 경우 2016년 노벨상은 밥 딜런 한 명을 수상자로 만들기 위해 '특혜'를 준 것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전 세계 수많은 다른 싱어송라이터들에게도 기회를 주어야 할것이다. 평화에 기여한 아프리카나 남미의 음유시인과 호주 원주민 출신 가수에게도 노벨문학상은 문호를 열어야 할지 모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쩌다 한 번 미국 싱어송라이터에게만 기회가 주어졌다는 따가운 시선을 피하기 힘들지 않을까.  수상이 부담스러워서인지 밥 딜런은 노벨위원회와의 접촉을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노벨위원회는 딜런의 문을 두드리길 포기했다(Nobel panel gives up knockin' on Dylan's door)"는 자극적인 표현을 써가면서 밥 딜런의 두문불출을 보도하고 있다.    만약 호사가들의 말처럼 그가 수상을 거부하기라도 한다면, 노벨문학상은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말이다.  어쨌든 노벨문학상은 큰 사고를 쳤다. 내년부터 노벨문학상이 어디로 갈지 그 향방이 무척이나 궁금하다.  [허연 문화전문기자] ============================================================== 올해 노벨 문학상은 미국 포크록 가수 겸 시인 밥 딜런(75)에게 돌아갔다.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노벨 문학상이 116년 역사상 처음으로 대중가수의 품에 안기자 지구촌이 찬반론으로 떠들썩하다. 스웨덴 한림원은 13일 “위대한 미국 노래의 전통 안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 냈다”고 선정 이유를 밝히며 딜런의 노래를 ‘귀를 위한 시(詩)’라고 했다.       딜런이 문학상 후보로 간간이 거론되긴 했어도 이번 수상은 문학계에 ‘혁명’으로 평가된다. 반전(反戰)과 평화의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사유의 깊이로 표현한 그의 음악은 베트남전 반대 운동이 펼쳐졌던 1960년대와 1970년대 청년세대의 정신세계를 바람처럼 파고들었다. 대표곡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 in the wind)’은 인권과 저항운동의 상징적 노래로 한국의 학생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평생 음악계에 몸담은 가수에게 최고 권위 문학상을 주는 것이 노벨상의 진화인지, 변질인지는 보는 이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일각에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부시와 다르다고 2009년 노벨 평화상을 준 이래로 가장 믿기 힘든 노벨상 수상”이라고 개탄한다. 반면 영국 소설가 살만 루슈디는 “음유시인의 전통을 잇는 위대한 계승자”라며 노벨상의 ‘탁월한 선택’이라고 평가했다.  한림원은 지난해 논픽션에 이어 2년 연속 이례적 장르에서 수상자를 선정했다. 문학의 범주를 관습화된 소설과 시로 한정짓기보다 더 확장하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순수문학과 대중음악, 문학과 문학 아닌 것, 둘의 경계를 가르던 견고한 벽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밥 딜런은 21세기 문학 패러다임에 밀어닥친 거대한 변화의 상징이다. ========================= 미국 대중음악 가수이자 시인인 75세 밥 딜런의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은 전 세계 문학계뿐만 아니라 예술계에도 신선한 충격일 수밖에 없다. 1901년 노벨 문학상이 첫 수상자를 낸 이후 시인이기보다는 대중 가수로 더 알려진 인물이 받기는 115년 만에 처음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파격이라 할 수 있다. 스웨덴 한림원은 그제 밥 딜런을 수상자로 발표하면서 “위대한 미국 노래 전통 속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 왔다”고 선정 이유를 설명했다. 또 음유시인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대중음악의 가사를 시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밥 딜런의 노래를 고대 그리스 시인에 견주며 “귀를 위한 시”라고도 극찬했다.  밥 딜런은 자유와 평화, 반전(反戰), 인권 메시지를 직접 작사·작곡하고 노래한 대중음악 뮤지션이다. 20여년 전부터 노벨 문학상 후보에 지속적으로 이름이 올랐지만 대중음악 가수로서의 한계에 부딪혀 논란만 낳았다. 기존의 문학적 기준에서는 공연되는 시(詩)인 밥 딜런의 시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한림원은 밥 딜런을 수상자로 선정했다. ‘이상적인 방향으로 문학 분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기여를 한 이에게 수여하라’는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을 실천했다.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문학의 지평을 넓힌 것이다. 까닭에 한림원의 선택은 의미가 크다. 밥 딜런의 수상을 놓고 “혁명적”, “가슴 벅찬 일대 사건”, “순수문학의 위기”라는 등의 갑론을박도 없지 않다. 그러나 밥 딜런은 문학과 음악의 전통적인 경계를 허무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보여 줬고 한림원은 이를 평가했다. 한림원은 지금껏 논란과 상관없이 문학상의 영역을 넓혀 왔다. 지난해에는 인터뷰를 논픽션 형식으로 써 ‘목소리 소설’이라는 독특한 장르를 만들어 낸 벨라루스 출신 언론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에게 돌아가기도 했다. 비(非)문인인 철학자, 역사학자, 정치가가 수상한 적도 있다. 문학과 음악의 융합인 ‘선율을 입힌 시’에 대한 밥 딜런의 문학적 평가가 전혀 놀라울 게 없는 이유다.    밥 딜런은 예술성과 사회성을 결합해 대중음악의 가사 수준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린 창조적 혁신가다. 실제 많은 영감을 준 데다 큰 변화를 이끌었다. 밥 딜런의 노벨상 수상을 통해 우리 스스로 한국 문학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한국 문학의 원로 시인들도 우리 시단에 대해 성찰의 계기로 삼을 것을 주문하고 나섰다. 대중과 문학의 소통과 함께 진화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되짚어 봐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 지평은 새로운 흐름에 직면해 있다.   [출처: 서울신문]     [출처] [사설] ‘포크록 밥 딜런’ 노벨 문학상의 신선한 파격|작성자 갤러    
노벨문학상을 마지막으로 2016년 노벨상 발표도 끝났다. 감탄과 탄식, 기대와 실망, 그리고 상찬과 비판이 뒤섞였던 노벨상 시즌도 끝났다. 서구인의 관점에서 만들어지는, 그들만의 축제라는 비판이 없지 않지만, 노벨상은 여전히 가장 공신력 높은 국제상임에 틀림없다.  가을은 노벨상의 계절이다. 언론과 학계는 몸살을 앓는다. 세계인의 관심은 노벨상의 산실, 북유럽으로 향한다. 노벨상을 주관하는 스웨덴의 노벨재단, 그리고 노벨평화상을 선정하는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의 작은 움직임도 모두 큰 뉴스다. 9월부터 유력 수상후보에 대한 추측 기사가 나오기 시작해, 수상자 발표가 집중되는 10월 초에 절정을 이룬다.    노벨상 선정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리고 심사과정의 철저한 보안 유지 전통을 생각하면, 그 예측이라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언론은 포기하지 않고, 이른바 전문가들도 단념하지 않는다. 저마다 유력후보가 누구누구라고 전망하고, 자신들이 예상과 빗나가면 의외의 결과라며 또 그럴듯한 분석을 내놓는다. 통념에 어긋났다고 섣부른 비판을 쏟아내는 자칭 전문가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우리 관심사는 아무래도 한국인 수상자가 나오는가 여부였다. 혹시나에서 역시나로 이어지는 과정은 해마다 비슷하다. 그렇게 많은 돈을 쏟아붓는데 왜 결과는 이처럼 초라할까? 라는 자조가 이어지고, 정부를 향해서, 학계를 향해서, 또는 연구자들의 태도나 사회적 관행에 대해서, 아니면 또 다른 그 누군가를 향해 비난과 비판이 쏟아졌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 노벨상 수상자는 어차피 극소수다. 일 년 동안 단지 여섯 개 분야에서 수상자가 나온다. 평화상처럼 단체 수상이 드물지 않은 분야를 빼면, 많아야 10여 명이 보통이다. 노벨상을 수상하지 않았다고 과학 수준을 한탄하거나, 지성 수준을 낮춰볼 일이 아니다.   자가포식 현상 현미경 사진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되면, 언론은 으레 특정 부문을 지칭해 '이례적' 또는 '깜짝'이란 수식어를 붙인다. 올해는 문학상 수상자에 대해서 이런저런 뒷말이 나왔다. 비전업 작가, 그것도 미국 대중가요 가수라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던 듯싶다. 정작 당사자는 덤덤한데 말이다. 기능적 '최고수'를 뽑는 '콘테스트'가 아니라는 차원에서 노벨상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해마다 파격이었고 해마다 도전이었다. 그것은 인류의 정신적 가치에 대한 외연 확장의 역사이기도 하다. 마찬가지의 관점에서, 일본 과학계의 노벨상 강세 현상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정작 중요한 가치를 간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순수과학 분야는 정부가 정책적 의지를 갖고 돈을 쏟아붓는다고 해서 단기간에 성과를 내는 것이 아니다. 기초과학 분야의 연구는 어쩌면 실패할 가능성이 훨씬 높고, 연구 결과가 나와도 당장 경제적 효용성이 거의 없는 분야가 대다수이다. 몇 년 동안 얼마의 돈을 들여서 몇 명의 수상자를 내겠다는 발상은 그래서 더욱 비현실적이다.    일본은 올해도 기초학문 분야에서 수상자를 냈다. 노벨 생리의학상의 영예는 오토퍼지(자가포식)현상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노학자 오스미 요시노리 도쿄공업대 영예 교수(71세)에게 돌아갔다. 2015년(지난해) 생리의학상과 물리학상 수상에 이은 2년 연속 수상이다. 2014년 물리학상에 이어 3년 연속 수상이다.  일본의 역대 수상자는 25명으로 늘었다. 이 가운데 22명은 과학분야에서 나왔다. 나머지는 문학상 2명, 평화상 1명이다. 특히 2001년 이후 수상자가 16명에 이르는데, 모두 과학분야이다. 미국 다음으로 많다.  일본은 2001년부터 50년 동안 노벨상 수상자 30명을 배출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현재 추세는 예상을 훨씬 앞지르고 있다. 일본이 1995년부터 정책적 의지를 갖고 막대한 예산을 지원한 결과라는 시각이 있다. 과연 그런 이유가 전부일까?   노벨상은 기본적으로 한순간의 돌발적 성과를 평가해 수상자를 선정하지 않는다. 2000년 이후 수상자들 대부분이 1990년대 이전의 성과를 기초로 하고 있다. 오랜 시간을 거쳐 검증된 연구, 그리고 한 분야에서 매진해온 연구자의 헌신을 종합적으로 평가한다. 올해 생리의학상 수상자의 '오토퍼지'현상에 대한 연구는 1980년대 처음 발견된 이후 끊임없이 심화되고 또 외연을 넓히는 과정을 걸어왔다. 난치병 치료를 위한 임상 적용 단계까지 진행되고 있지만, 설혹 임상 적용이 어려운 분야라고 해도, 연구의 가치가 낮게 평가될 수는 없다. 일본은 축제 분위기다. 오토퍼지가 뭔지, 자가포식이 뭔지 몰라도, 하여튼 국민이 모두 기분 좋은 일이다. 신문들은 거리에서 호외를 뿌렸고, 특집 기사로 지면을 꾸렸다. 방송은 인터뷰와 기획 프로그램을 내기 바빴다. 앞으로 일본의 강세가 지속되지 못할 수 있다는 '과장된 엄살'의 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정부 지원은 실용성에 치중돼 있고, 연구자들의 몰입과 헌신은 과거보다 부족하다는 지적도 관행처럼 덧붙여졌다.    도쿄공업대학 그러나 어느 나라건 과학자들의 연구 환경은 지금보다 나빴으면 나빴지 좋았다고 할 수는 없다. 기초 토양도 중요하지만, 개개인의 초인적 의지와 노력이 결국에는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다. 정부 탓, 시스템 탓만 하고 있을 일이 아니다. 시스템을 갑자기 바꾼다고 노벨상이 양산될까?  노벨상은 국가에 주는 상이 아니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 정신문명이 위대함을 진보시키는데 기여한 개인에게 주는 상이다. '어느 나라의 노벨상은 몇 개', '어느 나라의 노벨상 수위는 몇 등' 이런 식의 수치 놀음은 그래서 노벨상의 정신과 맞지 않는다. 개개인의 노력 자체를 높이 평가하고, 한 분야의 장인을 존중하고 예우하는(경제적 대우가 아니다) 사회 분위기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일본 사회는 적어도 장인을 존중하는 문화 전통이 남아 있다. 그 전통을 만든 것도 사람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에 대한 예우, 사람에 대한 존중이다. 막대한 예산을 쏟아붓는 것만으로는 노벨상이 나올 수 없는 이유다. 문화적인 기초 토양이 부족한 상태에서 집착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나신하기자 ////////////////////////////////////////////////////////////////////////////////// [부록]=   2004 엘프리데 옐리네크(Elfriede Jelinek , 오스트리아) 작품을 통해 사회의 진부한 사상과 행동, 권력의 불합리성을 잘 보여주었다는 공로로 노벨문학상 수상. 주요작품- 《피아노 치는 여자》 2003 존 M. 쿠체(John Maxwell Coetzee , 남아프리카공화국)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소설가.흑백 차별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사회적 모순과 인종주의를 비판해 온 작가로 인정받아 2003년 노벨문학상 수상 2002 임레 케르테스(Imre Kertesz , 헝가리) 헝가리의 소설가, 주로 유대인 학살 문제를 비롯해 20세기 유럽에서 벌어진 비인간적인 대학살의 만행을 주제로 다룸. 2001 비디아다르 S. 네이폴(Vidiadhar Surajprasad Naipaul , 영국) 《신비한 안마사》를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데뷔, 중미 카리브해 문학계를 대표하는 문인으로 성장.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음 2000 가오 싱젠(高行健, Gao Xingjian , 프랑스) 작품 《영혼의 산(靈山)》이 ‘문학적 보편성과 언어적 독창성으로 중국 소설의 새로운 길을 연 공로로 2000년 노벨문학상 수상 1999 귄터 그라스(Gunter Grass , 독일) 독일의 작가. 익살과 직설적인 현실폭로로 속세와 시대를 비평하는 것이 작품의 특징. 1965년에 뷔히너상 수상, 1999년에 《양철북》으로 노벨문학상 수상 1998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 , 포르투갈) 포르투갈의 작가. 환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상상력과 인간애, 풍자에 근거한 새로운 소설의 영역을 개척. 1997 다리오 포(Dario Fo , 이탈리아) 이탈리아의 극작가·배우. 하층민의 삶을 위엄있게 그려내고, 권위주의를 재치있게 그려내는 등 재미와 통찰력을 갖춘 작품을 창조한 공로로 1997년 노벨문학상 수상 1996 비수아바 심보르스카(Wislawa Szymborska , 폴란드) 폴란드의 시인·번역가. 꾸밈없는 섬세한 언어로 작품 구사. 사회주의 리얼리즘 수법을 반영. 1996년도 노벨문학상 수상 1995 시머스 히니(Seamus Heaney , 아일랜드) 아일랜드의 시인. 조국의 비극적 역사를 직시한 작품을 다수 발표, 이후 시의 서정성을 노래하면서 문학성을 인정받음 1994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 Kenzaburo Oe , 일본) 일본의 소설가. 1994년《만연원년의 풋볼》로 노벨문학상 수상 1993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 , 미국) 미국의 여류 소설가·편집자. 랜덤 하우스 출판사 편집자. 흑인공동체의 민속과 신앙, 생활 등을 이용한 신화의 재구성에 관심 1992 데렉 월컷 (Derek Walcott , 세인트루시아) 트리니다드토바고의 시인·극작가. 카리브해 민족의 소외감과 문화적 갈등을 정통영어를 사용하여 강렬한 이미지와 은유로 표현 1991 나딘 고디머 (Nadine Gordimer , 남아프리카공화국)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여류소설가. 심리묘사에 뛰어난 서정적 사실주의 문학. 1990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 , 멕시코) 멕시코의 시인·비평가. 그의 작품에는 표현하기 힘든 인류문화들이 잘 융해되어 있음. 인간성 회복을 주장한 문학으로 노벨문학상 수상하였다 1989 카밀로 J. 셀라 (Camilo Jose Cela , 스페인) 에스파냐의 소설가.처음에는 시를 썼으나 후에 소설로 전향.《파스쿠알 두아르테의 가족》으로 노벨문학상 수상 1988 나기브 마푸즈(Naguib Mahfouz , 이집트) 아랍어권 작가로서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집트의 작가. 1987 조지프 브로드스키 (Joseph Brodsky , 미국) 러시아 출신의 유대계 미국 시인. 1987년 노벨문학상 수상. 1986 올레 소잉카(Wole Soyinka , 나이지리아) 나이지리아의 극작가·소설가·교육자. 노벨문학상을 받은 아프리카 최초의 흑인. 현대 서양연극에 요루바족의 전통적 기법을 절충 1985 클로드 시몽(Claude Simon , 프랑스) 프랑스의 소설가. 누보 로망(신소설)의 대표적 작가. 1984 야로슬라프 사이페르트(Jaroslav Seifert ,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슬로바키아의 시인. 1954년과 1968년에 국가상(國家賞)을 수상, 1984년 노벨문학상 수상 1983 윌리엄 골딩(Sir William Golding , 영국) 영국의 소설가. 1983년고도(孤島)에 상륙한 소년들이 원시적 생활을 전개하는 우화풍의 소설《파리 대왕》으로 노벨 문학상 수상. 1982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Gabriel Garcia Marquez , 콜롬비아) 콜롬비아의 작가. 1982년 라틴아메리카 현대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된 《백년 동안의 고독》으로 노벨문학상 수상 1981 엘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 , 불가리아) 나치스의 박해를 피해 런던에 정착, 독일어로 작품 활동. 환상적 사실주의 주도. 1980 체슬라브 밀로즈(Czeslaw Milosz , 미국) 폴란드의 시인·수필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반나치 활동을 한 저항시인 1979 오디세우스 엘리티스 (Odysseus Elytis , 그리스) 필명은 Odysseus Alepoudhelis, 그리스의 시인. 그리스의 풍광을 이미지에 의해 전달하여 '에게해(海)의 시인'으로 불림. 1978 아이작 B. 싱어(Isaac Bashevis Singer , 미국) 미국의 소설가.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 이디시어(語)로 작품을 쓰는 작가이며, 주로 폴란드의 역사와 서민생활을 씀. 1977 빈센테 알레익산드레 (Vicente Aleixandre , 스페인) 에스파냐의 시인. 에스파냐의 전통적 서정시와 초현실주의와의 결합을 시도 1976 솔 벨로 (Saul Bellow , 미국) 미국의 소설가. 현대 미국문학의 지적(知的) 경향을 대표하는 소설가. 1976년 노벨문학상 수상. 1975 에우제니오 몬탈레 (Eugenio Montale , 이탈리아) 이탈리아의 시인. 전통적 시형(詩型)을 깨뜨리고 현대세계에 어울리는 새기법 창조. 20세기 이탈리아 시단의 ‘순수시’로 군림하여 1975년 노벨 문학상 수상 1974 에이빈 욘손(Eyvind Johnson , 스웨덴 ) 스웨덴의 소설가. 진보성향을 띤 노동계급 소설가. 1974년 노벨문학상 수상   하리 마르틴손 (Harry Martinson , 스웨덴) 스웨덴의 시인 ·비평가. 1930년대를 대표하는 모더니스트 5인조(五人組) 시인. 1974년에 노벨 문학상 수상 1973 패트릭 화이트 (Patrick White ,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레일리아의 소설가. 20세기 오스트레일리아의 가장 뛰어난 작가로 평가. 1973년 《폭풍의 눈》으로 노벨 문학상 수상 1972 하인리히 뵐 (Heinrich Boll , 독일) 독일의 소설가. 주로 일상적이면서 박력 있고 폭로적인 대화를 통하여 전쟁 전후의 혼란한 사회와 인간을 그림 1971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 칠레) 칠레의 시인. 2차대전 전후의 독일인을 소재로 작품활동. 197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 1970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Aleksandr Isaevich Solzhenitsyn , 소련) 러시아의 소설가. 소련사회의 스탈린 시대부터의 탈피를 그려냄. 197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 1969 새뮤얼 베케트 (Samuel Beckett , 아일랜드) 아일랜드 출생의 프랑스의 소설가·극작가. 전작품을 통해 세계의 부조리와 절망적인 인간의 조건을 일상적 언어로 허무하게 묘사 1968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Yasunari Kawabata , 일본) 일본의 소설가. 전통적인 일본의 아름다움 속에서 자기의 감성을 닦아 독자적인 문학의 세계를 창조 1967 미겔 A. 아스투리아스 (Miguel Angel Asturias , 과테말라) 과테말라의 시인·소설·외교관. 마야의 문화 및 종교를 연구,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음. 1966 슈무엘 Y. 아그논(Shmuel Yosef Agnon , 이스라엘) 현대 이스라엘이 낳은 가장 위대한 헤브라이어의 문학자. 1966년에 노벨문학상 수상   넬리 작스 (Nelly Sachs , 스웨덴) 독일의 유대계 여류시인.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스톡홀름으로 망명. 애처로운 예언자적·묵시록적인 시 다수 1965 미하일 숄로호프(Michail Aleksandrovich Sholokhov , 소련) 러시아의 작가. 소련의 혁명과정을 정직하게 묘사. 1965년 노벨문학상 수상 1964 장 폴 사르트르 (Jean-Paul Sartre , 프랑스) 프랑스의 작가·사상가. 실존주의적 휴머니즘 작품활동. 1964년 노벨문학상 수상거부 1963 게오르기오스 세페리스 (Giorgos Seferis , 그리스) 필명은 Giorgos Seferiadis, 그리스의 시인.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새로운 시운동에 참여한 초현실주의 시인 1962 존 스타인벡 (John Steinbeck , 미국) 미국의 소설가. 로스트 제너레이션(Lost Generation)을 이은 30년대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작가 1961 이보 안드리치 (Ivo Andric , 유고슬라비아) 크로아티아의 소설가. 1961년에 《드리나강의 다리》로 노벨문학상 수상 1960 생 종 페르스 (Saint-John Perse , 프랑스) 필명은 Alexis Leger, P.클로델풍(風)의 파격적 운율로 웅대한 규모의 서사시를 풍부한 환상과 구상적으로 묘사 1959 살바토레 콰시모도(Salvatore Quasimodo , 이탈리아) 이탈리아의 시인. 제2차 세계대전과 파시즘에 대항하는 저항, 1959년 노벨 문학상 수상 1958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Boris Leonidovich Pasternak , 러시아) 러시아의 시인·소설가. 장편소설《닥터 지바고》로 1958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이 결정되었으나 정치적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수상거부 1957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 프랑스) 프랑스의 소설가 ·극작가. 실존주의 작가. 1957년 노벨문학상 수상 1956 후안 R. 히메네스 (Juan Ramon Jimenez , 이탈리아) 에스파냐의 시인. 뛰어난 음악성과 풍부한 색채감으로 에스파냐 근대파 최초의 중요 시인으로서의 위치를 굳힘. 1955 할도르 락스네스 (Halldor Kiljan Laxness , 아이슬란드) 아이슬란드의 소설가. 아이슬란드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 1954 어니스트 헤밍웨이 (Ernest Miller Hemingway , 미국) 미국의 소설가. 패배하는 인간의 비극적인 모습을, 간결한 문체로 힘차게 묘사한 20세기의 대표 작가 1953 윈스턴 처칠 (Sir 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 , 영국) 영국의 정치가. 《제2차 세계대전》으로 문학상 수상. 1952 프랑수아 모리아크 (Francois Mauriac , 프랑스) 프랑스의 소설가.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 1952년 노벨문학상 수상 1951 페르 라게르크비스트 (Par Fabian Lagerkvist , 스웨덴) 스웨덴의 시인·소설가·극작가. 제1차 세계대전 후 인생의 공허와 혼돈에 대한 ‘고민의 문학’으로 스웨덴 문학을 이끔 1950 버트런드 러셀 (Earl 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 영국) 영국의 논리학자·철학자·수학자·사회사상가. 여러 가지 사회운동 참여. 195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 1949 윌리엄 포크너 (William Faulkner , 미국) 미국의 작가. 1949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며, 두 차례 퓰리처상 수상 1948 토마스 S. 엘리엇 (Thomas Stearns Eliot , 영국) 영국의 시인·평론가·극작가. 영국의 형이상학시와 프랑스 상징시의 영향을 받았으며 현대문명의 퇴폐상 그림 1947 앙드레 지드(Andre Paul Guillaume Gide , 프랑스) 프랑스의 소설가. 프랑스 문단에 새로운 기풍을 불어넣어 20세기 문학의 진전에 지대한 공헌 1946 헤르만 헤세 (Hermann Hesse , 스위스) 독일의 소설가·시인. 20세기의 문명비판서라 할 수 있는 미래소설 《유리알유희》로 노벨문학상 수상 1945 가브리엘라 미스트랄(Gabriela Mistral , 칠레) 필명은 Lucila Godoy Y Alca-Yaga, 칠레의 시인. 1945년 남아메리카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 1944 요한네스 V. 옌센 (Johannes Vilhelm Jensen , 덴마크) 덴마크의 소설가. 약학전공, 작가가 된 후에도 과학에 흥미를 가짐. 향토작가로 향리의 풍토와 인정을 발랄하게 묘사 1943 수상자 없음 1939 프란스 에밀 실란페(Frans Eemil Sillanpaa , 핀란드) 핀란드의 소설가. 자연과 심리를 목가적으로 융합. 독자적인 낭만적 사실주의. 1938 펄 벅 (Pearl Buck , 미국) 필명은 Pearl Walsh Nee Sydenstricker 1938년에는 미국의 여류작가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 수상 1937 로제 마르탱 뒤 가르(Roger Martin Du Gard , 프랑스) 프랑스의 소설가·극작가. 《1914년 여름》으로 노벨문학상 수상 1936 유진 G. 오닐 (Eugene Gladstone O'neill , 미국) 미국의 극작가. 퓰리처상을 수상하였으며 1936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여 미국 문학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림. 1935 수상자 없음 1934 루이지 피란델로 (Luigi Pirandello , 이탈리아) 이탈리아의 극작가·소설가. 인간관계를 환상으로 파악. 자타의 모순이 가져오는 비극성을 사회적·심리적으로 추구. 1933 이반 A. 부닌 (Ivan Alekseyevich Bunin , 소련) 서정주의와 사실주의로 일관된 작품들은 투르게네프, 체호프와 견줄 만하며,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최후를 장식 1932 존 골즈워디(John Galsworthy , 영국) 영국의 소설가·극작가. 변호사였으나 개업하지 않고 세계각지를 여행한 후 인도주의적인 작품을 발표. 1931 에리크 A. 칼펠트(Erik Axel Karlfeldt , 스웨덴) 스웨덴의 시인. 향토중심주의 신낭만파 시인. 다라나 지방의 사람과 평생 동안 자연을 노래. 노벨문학상을 사양하였으나 그가 죽은 직후에 추증. 1930 싱클레어 루이스(Sinclair Lewis , 미국) 미국의 소설가. 미국의 이모저모를 풍자적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동시에 미국인의 형태를 희화적(戱畵的)으로 그려냄 1929 토마스 만 (Thomas Mann , 독일) 독일의 소설가, 평론가.소설가로서뿐만 아니라 평론가로서도 문학·예술·철학·정치 등 많은 영역에 걸쳐 평론과 수필을 다수 남김 1928 시그리 운세트 (Sigrid Undset , 노르웨이) 노르웨이의 여류 소설가. 1940년 독일군이 조국에 침입하자 미국으로 망명, 강연·라디오를 통하여 저항운동에 힘씀 1927 앙리 베르그송 (Henri Bergson , 프랑스) 프랑스의 철학자. 1927년 노벨문학상 수상 1926 그라치아 델레다 (Grazia Deledda , 이탈리아) 필명은 Grazia Madesani Nee Deledda , 이탈리아의 소설가. 베리스모(verismo:진실주의)의 수법으로 자연과 소박한 농민상을 즐겨 묘사 1925 조지 버나드 쇼 (George Bernard Shaw , 아일랜드) 영국의 극작가·소설가· 문학비평가. 1925년 노벨 문학상 수상 1924 부아디수아프 레이몬트 (Wladyslaw Stanislaw Reymont , 폴란드) 필명은 Reyment, 1년 4계절의 농민생활을 연대기적으로 기록한 소설 《농민》으로 1924년 노벨문학상 수상 1923 윌리엄 B. 예이츠 (William Butler Yeats , 아일랜드) 아일랜드의 시인·극작가. 아일랜드 문예협회를 창립,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에 참가. 주요작품-《환상 A Vision》 1922 쟈싱토 B. 마르티네스 (Jacinto Benavente , 스페인) 에스파냐의 극작가. 지성적으로 세련된 풍자와 생생한 회화, 무대를 빛나게 하는 다양한 기교가 높이 평가되어 1922년 노벨 문학상 수상 1921 아나톨 프랑스 (Anatole France , 프랑스) 필명은 Jacques Anatole Thibault , 인간 전체를 경멸하고, 신랄한 풍자를 중심으로한 지적회의주의 작품 다수. 1921년 노벨문학상 수상 1920 크누트 함순 (Knut Pedersen Hamsun , 노르웨이) 노르웨이의 소설가. 20세기 노르웨이의 국보적 작가. 신낭만주의의 반항의 기수. 1919 카를 슈피텔러 (Carl Friedrich Georg Spitteler , 스위스) 스위스의 시인·소설가.서사시와 신화문학의 부활을 꾀함. 1919년 노벨문학상 수상 1918 수상자 없음 1917 카를 기엘레루프(Karl Adolph Gjellerup , 덴마크) 덴마크의 작가. 유물론 및 자연주의의 영향을 받아 G.M.C.브란데스에 열중, 자유사상가 ·자연주의 작가가 되어 교회에 반항   헨릭 폰토피단 (Henrik Pontoppidan , 덴마크) 덴마크의 자연주의 소설가. 허위나 권력의 남용에 대해 비판적. 1917년 카를 겔레루프와 공동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 1916 칼 G. V. V. 헤이덴스탐 (Carl Gustaf Verner Von Heidenstam , 스웨덴) 스웨덴의 시인·소설가. 음울한 자연주의의 지배하에 있던 북유럽 문단에 신(新)낭만주의의 새 바람을 불어 넣었던 인물 1915 로맹 롤랑 (Romain Rolland , 프랑스) 프랑스의 소설가·극작가·평론가. 천재 음악가 장 크리스토프의 파란 많은 생애를 표현한《장 크리스토프》라는 작품으로 1915년 노벨문학상 수상. 1914 수상자 없음 1913 라빈드라나드 타고르 (Rabindranath Tagore , 인도) 인도의 시인 ·철학자 ·극작가 ·작곡가. 세계 각국을 순방하면서 동서문화의 융합에 힘씀. 주요저서-《기탄잘리》(1909) 1912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Gerhart Johann Robert Hauptmann Primarily , 독일) 독일의 극작가, 소설가. 자연주의의 완성자인 동시에 초극자. 1912년 노벨 문학상 수상 1911 모리스 메테를링크 (Count Maurice (Mooris) Polidore Marie Bernhard Maeterlinck , , 벨기에) 벨기에의 시인·극작가·수필가. 주로 프랑스어로 작품을 썼으며 주로 운명이나 죽음의 불가항력에 조종되는 영혼의 전율을 표현 1910 파울 폰 하이제 (Paul Johann Ludwig Heyse , 독일) 정확하고 유려한 언어의 구사와 더불어 독일의 근대소설에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인물. 특히 단편소설에서 재능을 발휘 1909 셀마 라게를뢰프 (Selma Ottilia Lovisa Lagerlof , 스웨덴) 스웨덴의 여류 소설가. 여성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14년에는 여성으로서 최초의 스웨덴 아카데미 회원이 됨. 1908 루돌프 C. 오이켄 (Rudolf Christoph Eucken , 독일) H.베르그송, W.딜타이 등과 더불어 ‘생의 철학’의 대표자. 이상주의적인 생의 철학을 옹호·발전. 1908년 노벨문학상 수상 1907 러디어드 키플링 ((Joseph) Rudyard Kipling , 영국) 대영제국주의에 호응, 애국시인으로 평가받음, 낭만주의를 버리고 고전양식으로 되돌아가려고 시도. 주요작품-《정글 북 The Jungle Book》 1906 조수에 카르두치 (Giosue Carducci , 이탈리아) 이탈리아의 시인·고전문학자. 헬레니즘과 휴머니즘 정신에 입각, 장중하면서도 명랑하고 전아한 고전적 이상주의 시풍 창조 1905 헨릭 시엔키에비치 (Henryk Sienkiewicz , 폴란드) 다수의 역사 장편소설을 남김. 제1차 세계대전 중 폴란드의 독립운동 지원.《쿠오 바디스 Quo vadis》로 190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 1904 프레데리크 미스트랄(Frederic Mistral , 프랑스) 프로방스 문화 보존과 부흥을 위한 ‘펠리브리지’ 운동에 헌신,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한 연애 서사시 다수. 주요저서-《미레유》   호세 E. Y 에이자기레 (Jose Echegaray Y Eizaguirre , 스페인) 양심의 갈등, 삼각관계, 사회문제를 테마로 한 기교적이고 대중성이 짙은 작품 남김. 주요저서-《광인인가 성인(聖人)인가》 1903 비욘스제른 비외른손 (Bjørnson Martinius Bjørnstjerne , 노르웨이) 1903년 유럽문학에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 주요저서- 《행운아》《파산 En fallit》 1902 테오도어 몸젠 (Christian Matthias Theodor Mommsen , 독일) 라틴 비문집성, 테오도시우스 법전 등의 편찬·교정으로 명성을 얻어 1902년 노벨문학상 수상. 주요저서- 《로마 연대학(年代學)》 1901 쉴리 프뤼돔(Sully Prudhomme , 프랑스) 필명은 Rene Francois Armand 고답파 시인, 정신의 고뇌, 자기 희생에 이르는 모랄과 근대세계에서의 양심 문제 추구. 주요저서-《정의》《행복》   도움이 되었기를...^^  
508    노벨문학상 수상자 밥 딜런 거장기록 14 댓글:  조회:4433  추천:0  2016-10-17
세계의 역사를 바꾼 노래를 작사한 공로로 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 포크음악 대부 밥 딜런(75).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상위원회는 13일(현지시간) "훌륭한 미국 음악 전통 안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낸 딜런에게 노벨 문학상을 수여한다"고 밝혔다. 시대를 관통하는 거장이 세운 기록 14개를 정리했다. 1. 상업 음악가로 유명한 인물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     2. 1993년 토니 모리슨 이후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인이 됐다. 3. 미국 롤링스톤지는 밥 딜런을 비틀즈에 이어 ‘현존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2위로 선정했다. 하지만 1위 비틀즈마저 밥 딜런으로부터 음악, 정신적으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4. 11개의 그래미 어워드를 비롯해 ‘Things Have Changed’(원더 보이즈)로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수상했으며, 2008년에는 팝 음악과 미국 문화에 깊은 영향을 준 공로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5. 2012년 오바마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최고의 영예인 ‘자유의 메달’을 수여받았다. 최근에는 IT 혁명가 스티브 잡스가 가장 사랑한 아티스트로 재조명받았다. 6. 50여 장의 음반을 발매했으며 500여 곡의 자작곡을 보유하고 있다. 그의 앨범은 전 세계적으로 1억3,000만장 이상의 세일즈를 기록하고 있으며, 현재도 진행형이다. 올해 미국에서 사랑받아온 명곡 12곡을 재해석한 37번째 스튜디오 앨범 ‘Fallen Angel’을 발매했으며 오는 11월 1966년의 모든 라이브 실황을 담은 36 CD 박스세트 ‘Bob Dylan: The 1966 Live Recordings’이 출시된다. 7. 버즈, 터틀스, 피터 폴 앤 매리, 롤링 스톤스, 스티비 원더, RATM 등 무려 2,000명(팀)이 넘는 아티스트가 그의 음악을 리메이크했다. 8. 그와 관련한 500여 권의 서적이 출간됐다. 9. Q매거진 선정 ‘음악 역사를 바꾼 21인’, 타임지 선정 ‘20세기 가장 위대한 인물 100인’에 올랐다. 10. 1982년 송라이터 명예의 전당과 88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으며 91년 그래미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다. 11. 2006년 65세에 발표한 새 앨범 ‘Modern Times’가 정상을 차지하며 빌보드 앨범차트 1위에 오른 현존하는 최고령 아티스트가 됐다. 12. 1965년 전자기타로 포크를 연주. 전 세계적 파문을 일으키며 포크록을 탄생시켰다. 13. ‘Subterranean Homesick Blues’는 밥 딜런 최초의 일렉트릭 트랙으로 글씨가 적힌 종이를 넘기는 영상은 오늘날 뮤직비디오의 원조로 불린다. 이 뮤직비디오는 훗날 수많은 광고와 영화, 뮤직비디오에서 패러디됐다. 14. 2004년 ‘자서전 vol.1’을 발간해 19주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올랐다. ■ Who’s He? 1941년 미국 미네소타주 덜루스에서 출생했으며 1962년 뉴욕에서 1집 ‘밥 딜런’을 발매하며 데뷔했다. 영국 시인 딜런 토머스에서 ‘딜런’이라는 이름을 따 예명으로 삼을 만큼 시적인 가사로 유명하다. 그의 노랫말은 1960년대부터 저항음악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한대수, 김민기, 양희은, 서유석 등 70년대 한국 포크가수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김광석과 같은 후대에 등장한 가수들 역시 밥 딜런의 곡을 번안해 불렀다. 대표곡 ‘Knocking On Heaven’s Door‘는 지금도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한국 학생운동에 영향을 준 'Blowin' in the Wind’ ‘The Times They Are a-Changin’은 저항적 노랫말로 시민권을 대표하는 곡이 됐다. 이런 노랫말로 밥 딜런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저항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사진=소니뮤직  제공) /뉴스엔 객원 에디터 용원중 
507    살아있는 포크의 전설- 밥 딜런 노벨문학상 받기까지... 댓글:  조회:6500  추천:0  2016-10-17
201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미국의 유명 가수 밥 딜런이 깜짝 선정되면서, ‘살아있는 포크의 전설’은 화제의 중심으로 재소환됐습니다. 그의 수상 소식은 10월14일치 한국의 주요 신문의 1면 톱 뉴스를 장식했지요. 그러나 10~20대는 물론 30~40대 중에는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도대체 밥 딜런이 누구죠?”   올해 일흔다섯살인 밥 딜런은 끊임없이 앨범을 내고 공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만, 대중에게 잘 알려진 대표곡 대부분은 반세기 전인 1960년대에 탄생했습니다. 밥 딜런에겐 ‘저항의 아이콘’ ‘음유시인’ ‘포크록의 대부’ 등 다양한 수식어가 따라붙는데요. 그는 언론이 자신을 ‘특정한 무엇’ 이라고 규정하는 것을 반기지 않았습니다. 밥 딜런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도 그를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라고들 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하지만 낯선 인물인 밥 딜런을 이해하기 위해 알아두어야 할 키워드를 정리해보았습니다.   2012년 로스앤젤레스 공연에서의 밥 딜런. 로스앤젤레스/AP 연합뉴스   1. ‘새로운 세대의 부상’ 1960년대 : 밥 딜런이 20대를 보낸 시절   밥 딜런은 1941년 미국 중서부 미네소타주 덜루스에 거주하던 러시아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납니다. 원래 이름은 로버트 알렌 짐머맨입니다. 인류 역사상 최대 전쟁인 제2차 세계대전으로 몸살을 앓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밥 딜런이 태어난 그해, 일본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미국은 전쟁 참여를 선언합니다. 4년 뒤, 1945년 8월 미국이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핵 폭탄을 투하하고서야 전쟁은 끝이 납니다. 그리고 동서 ‘냉전' 이라는 또다른 전쟁이 시작됐지요. 1950년대 미국에선 ‘빨갱이(공산주의자)’를 색출해 추방시키자는 매카시즘 광풍이 불어닥치기도 했습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 사회에선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전쟁을 반대하는 새로운 물결이 시작됩니다. 전쟁 이후 미국은 강대국으로 부상했고 경제적으론 풍요로워졌습니다. 교육 수준도 높아졌는데요. 이러한 환경에서 자란 세대들은 1960년대 급진적 운동의 구심점이 됩니다. 부모 세대가 강조하던 물질주의를 거부하고 기존 권위에 대항하는 ‘반문화(反文化)’도 운동이 확산됩니다. 주류 정치권에서는 존 에프 케네디(1917~1963)가 미국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에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이러한 미국 사회의 변화는 한국의 1960년대와는 사뭇 대비됩니다. 1960년 시민들과 학생들이 독재에 맞선 4·19 혁명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듯 했지만, 이듬해 육군 소장 박정희가 새 정부를 쿠데타로 무너뜨리면서 기나긴 군사정권 시대에 접어들었지요. 만약 밥 딜런이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자신을 재능을 마음껏 표현하긴 어려웠을 겁니다.   1961년 막 10대를 벗어난 로버트 알렌 짐머맨은 미네소타 주립대를 그만두고 뉴욕 맨해튼의 그리니치빌리지로 향합니다.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예술가들의 성지인 그리니치빌리지 카페와 클럽에서 노래하던 그는 1962년 첫 앨범 (Bob Dylan)을 발매했습니다. 밥 딜런이라는 이름은 영국 웨일스 출신 방랑시인 딜런 토마스(1914~1953)의 이름에서 따 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딜런(Dylan)이란, 웨일스어로 ‘물결의 아들’을 뜻합니다.     2. 포크음악 : 밥 딜런을 유명하게 만든 장르   자료사진" src="http://img.hani.co.kr/imgdb/resize/2016/1017/00503700_20161017.JPG" style="border: 0px; margin: 0px; padding: 0px; width: 578px;" title="1960년대 밥 딜런의 공연 모습. 자료사진" /> 1960년대 밥 딜런의 공연 모습. 자료사진 포크가수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청바지를 입고 부시시한 머리를 한 채 어쿠스틱 기타와 하모니카를 연주하는 모습이죠. 미국 포크음악의 뿌리는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한 백인들이 원래 살던 곳, 그러니까 영국 각 지역에서 부르던 민요입니다. 1930년대 미국엔 경제 대공황이 닥쳤는데요. 시민들은 경제난과 실업으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 시기 포크음악의 양대 전설 우디 거스리(1912~1967)와 피트 시거(1919~2014)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민요들에서 비상업적이고 공동체적인 가치를 재발견하고, 현대적인 음악으로 만들어냈습니다. 밥 딜런은 우디 거스리를 우상으로 꼽기도 했습니다.     ▶[나들] 노래의 힘, 미국을 바꾸다-‘포크송의 대부’ 피트 시거   ▶포크, 소박하고 진실한 음악의 감동(대중음악평론가 서정민갑)     이렇게 뿌리 내린 미국 포크음악은 1960년대 사회 변화와 맞물려 꽃을 피웁니다. 포크가수들은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도록 노랫말에 진지한 메시지를 담았고, 민권·반전 운동에도 참여했죠. 그렇게 포크음악을 청년들의 상징으로 만든 대표주자가 밥 딜런입니다. 그는 1963년 5월 두 번째 앨범 (The Free Wheelin’ Bob Dylan)을 발표하는데요. 국내에서 ‘바람만이 아는 대답’이라고 번안돼 불렸던 ‘블로잉 인 더 윈드'(Blowin’ in the Wind)나 ‘마스터스 오브 워’(Masters of War) 등이 수록된 앨범이었습니다.       ‘블로잉 인 더 윈드’ 노랫말 ?(가사 출처: 네이버 뮤직)     사람이라고 불리기까지, 그 사람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만 하나?   How many roads must a man walk down Before you call him a man?   하얀 비둘기는 모래에서 잠들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바다를 건너야 하나?   Yes, 'n' how many seas must a white dove sail Before she sleeps on the sand?   포탄 사용이 영원히 금지되기 전에 얼마나 많이 포탄을 쏘아야 하나?   Yes, 'n' how many times must the cannon balls fly Before they're forever banned?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에 흩날리고 있네   The answer, my friends, is blowin' in the wind         1963년 8월 워싱턴으로 2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집결합니다. 흑인들에게도 동등한 권리를 줄 것을 요구하는 평화행진을 하기 위해서였죠. 당시 흑인민권운동을 이끌었던 마틴 루터 킹(1929~1968) 목사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란 구절이 들어간 명연설을 남깁니다. 밥 딜런, ‘포크의 여왕’이자 밥 딜런과 한때 연인이었던 존 바에즈, 포크트리오인 피터, 폴 & 메리도 평화행진에 참여해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1월 인종차별·빈곤 등 사회적 이슈를 노래한 곡들이 담긴 밥 딜런의 세 번째 앨범 (The Times They Are A-Changin’·시대는 변하고 있지)이 공개됩니다. 그해, 미국 의회에서 흑백인종 차별을 철폐한 민권법(Civil Rights Act·1964)이 통과됩니다.   밥 딜런의 ‘더 타임스 데이 아 어 체인징’ 은 20년이 흐른 뒤 전혀 결이 다른 역사적 현장에 재등장합니다. 1984년 1월24일 애플은 주주총회에서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개인용 컴퓨터 ‘매킨토시’를 발표하는데요. 주총 무대에 오른 스티브 잡스(1955~2011)는 ‘더 타임스 데이 아 어 체인징’ 노랫말을 읊으며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그 노랫말의 마지막은 이랬습니다.       “지금의 패자가 훗날 승자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 시대는 변하기 마련이니.”       ▶1963년 워싱턴 평화행진에서 노래를 부르는 밥 딜런       3. 전자기타 : 1965년 변화의 상징   전자기타를 연주하는 밥 딜런. 1965년 밥 딜런은 포크록이라는 실험적인 장르를 시도한다. 소니뮤직 제공 1965년은 밥 딜런에게 여러가지 변화가 있었던 해입니다. 다섯 번째 앨범이자 전자사운드를 도입한 (Bringing It All Back Home)을 발표했는데요. 포크를 유지하면서도 전자기타 사운드가 들어간 ‘포크록’ 을 시도한 것이죠. 포크록 실험작이자 또 다른 대표곡 ‘라이크 어 롤링스톤’ (Like a Rolling Stone·구르는 돌처럼)이 그해 7월 발표됐습니다. 기존 팬들에게 전자기타를 연주하는 밥 딜런은 포크음악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1965년 7월25일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전자기타를 메고 록 밴드를 대동한 그에겐 야유가 쏟아졌습니다. 이듬해 영국 맨체스터 프리트레이드홀에서 공연하던 밥 딜런은 어느 관객으로부터 “(예수를 팔아먹은) 유다!”라는 비난까지 듣습니다.     ▶[한겨레] 순혈포크에서 포크록으로   ▶[한겨레] 연인 밥 딜런과 존 바에즈의 서로 다른 길     그해, 밥 딜런은 존 바에즈와 헤어지고 사라 라운즈 클레어와 결혼해 가정을 꾸립니다. 1964년부턴 더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뜻을 지인이나 기자들에게 밝히기도 합니다. 저자이자 로스앤젤레스 옥시덴털 대학 교수인 피터 드레이어는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당시 밥 딜런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1963년 11월)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하고 몇 주 뒤 딜런은 전미긴급시민자유위원회(NECEC)가 수여하는 토머스 페인상을 수락하는 데 망설였다. (상을 받는 자리에서) 긴장한 딜런은 취했고, 논리가 없는 연설을 했다. 그는 ‘우리’를 노래하는 대신 ‘나’에 대해 노랫말을 쓰고 싶다고 밝힌다.”       1966년 7월29일 밥 딜런은 불의의 오토바이 사고로 크게 다치는데요. 돌연 종적을 감춘 뒤 칩거하며 음악 작업을 이어나갑니다. 그러나 1974년 다시 무대에 서기까지 8년 간은 공연을 하지 않았습니다. 헐리우드 거장 마틴 스코세지의 2005년 다큐멘터리 영화 (No Direction Home, Bob Dylan)에는 밥 딜런이 뉴욕으로 향한 시기부터 오토바이 사고를 당하기까지의 이야기가 그려집니다. ▶[씨네21] 한 예술가적 선택의 처참한 기록,   밥 딜런이 대중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1970년대의 미국은 60년대와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하고, 경제 사정이 악화하면서 대항문화도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4. 아임 낫 데어(I'm Not There) : 밥 딜런의 7가지 자아가 투영된 영화   영화 ‘캐롤’ 을 연출한 토드 헤인즈 감독은 2007년 밥 딜런의 노래 제목과 같은 ‘아임 낫 데어’(나는 거기에 없다)라는 영화를 만듭니다. 이 영화에는 음악적 변신으로 비난 받는 가수, 저항음악으로 사랑 받는 포크가수, 신앙에 눈을 뜬 가스펠 가수 등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데요. 모두 밥 딜런의 삶에서 영감을 얻은 상상의 캐릭터들이죠.     ▶[씨네21] 그 배경을 알고 봐야 할 7인의 ‘밥 딜런’들   ▶[씨네21] 토드 헤인즈가 만든 밥 딜런의 특별한 초상화     밥 딜런은 1973년 미국 서부를 배경으로 한 영화 ‘관계의 종말’(Pat Garrett and Billy the Kid)에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는데요. 이 영화음악으로 사용된 곡 중 하나가 그 유명한 ‘노킹 온 헤븐스 도어’(knocking on heaven's door·천국의 문을 두드리며)입니다. 1970년대 말 그는 기독교에 심취했고, 가스펠 음반을 출시하기도 합니다. 1997년 발표한 (Time Out Of Mind·내 마음을 벗어난 시간) 앨범은 밥 딜런에게 그래미 ‘올해의 앨범상’을 안겨줍니다. ▶[문화웹진 웨이브] 밥 딜런의 ‘모던 타임스’의 다섯 가지 수수께끼(신현준)   2006년 앨범은 발매 첫 주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는데요. 거의 모든 밥 딜런의 정규 앨범을 소장하고 있는 김경진 스트라디움 부관장은 1990년대 밥 딜런에 대해 과거와 견줘 기복이 없는 안정적인 음악을 한다고 표현했습니다.       “1990년대 이후 밥 딜런은 하고 싶은 걸 그대로 표출하는 것 같다. 음악 장르는 미국식 록음악인 루츠록(컨트리·블루스·포크 등 토속스러운 색채가 강한 록)이 두드러진다. 1980년대 중후반부터 원래 텁텁하던 목소리가 더 걸걸하게 변해 그런 장르의 음악이 잘 어울리는 것으로 들린다. ‘듣는 이에게 감흥을 준다’는 정도의 평가라면 모르겠지만, 사운드나 음악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하기엔 어렵다.”       5. 노벨문학상 : 대중가수로선 밥 딜런이 처음 받게 된 상   스웨덴 한림원에 전시된 밥 딜런 노랫말과 관련된 책들. 스톡홀름/아에프페(AFP)연합뉴스 노벨문학상은 전 세계 문학상 가운데 가장 역사가 길고, 상금 또한 800만 크로나(약 10억3000만원)에 달합니다.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한 건 1996년부터였습니다. 미국 을 보면, 버지니아 워싱턴앤리대학의 고든 볼 교수(영문학)가 그를 노벨문학상 후보로 처음 추천했습니다. 밥 딜런 연구로 동국대 영어영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손광수씨의 2010년 논문 ‘“구르는 돌멩이처럼”-1960년대 밥 딜런 노래에 대한 시학적 접근’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시와 노래는 하나였습니다. 공연되는 노래의 일부였던 시는 인쇄 매체가 등장하면서 고급문화에 속하게 된 반면, 노랫말은 대중문화 영역 속에 자리잡게 됐다는 겁니다. 손광수씨가 생각하는 밥 딜런 노래의 문학적 가치는 무엇일까요?       “노래와 시의 오래된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과 동시에 고급 예술(시)과 대중 예술(노래) 사이 구분을 뒤흔들었다. 더욱이 상업성이 강요하는 획일성을 피하는 가운데 대중적인 것과 문학적인 것 사이의 구분을 없애는 흔치 않은 성취를 이루어왔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된 이후, 미국 소설가 조이스 캐럴 오츠는“1960년대 밥 딜런 음악은 나를 거의 문학적으로 사로잡았다. 밥 딜런 이번 기회를 무엇인가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 발언하는 기회로 활용하길 바란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반면, 미국에서 작가로 활동하는 애나 노스는 에 게재한 글을 통해 “밥 딜런이 훌륭한 것은 그가 훌륭한 뮤지션이기 때문이다.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위원회는 문학상을 뮤지션에게 수여함으로써, 작가에게 영예를 안겨 줄 기회를 잃었다”고 비판했습니다. 소설 을 쓴 스코틀랜드 작가 어반 웰시는 트위터를 통해 “나는 딜런의 팬이지만, 노망 난 히피들의 썩은 전립선이 향수에 젖어 주는 상”이라고 힐난했습니다. 앞서 2008년 미국 퓰리처상위원회는 대중음악과 미국 문화에 큰 영향을 준 공로로 밥 딜런에게 특별감사상(special citation)을 수여합니다. 재즈 음악 이외의 대중음악 가수가 이 상을 받은 건 처음이었습니다.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한 반응은 세계 곳곳에서 엇갈린다   ▶[한겨레] 밥 딜런, 노벨문학상에 ‘바람만이 아는 대답’ 노래만     노벨문학상 시상식은 노벨이 숨진 날인 12월10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립니다. 밥 딜런은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해 아직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미국의 대표적인 영화 시상식인 아카데미상(2000년 음악상)부터 미국인들이 최고의 영예인로 여기는 ‘자유의 메달’(2012년)까지 수많은 상을 받았는데요. 수상을 거부한 적은 없었습니다. 예측하기 어려운, 밥 딜런의 다음 행보는 무엇일까요?   박현정 기자 
506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가사가 과학자들의 론문에 쓰이다... 댓글:  조회:5025  추천:0  2016-10-17
  ▲ 밥 딜런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위원회에서 발표한 수상자의 이름을 듣는 순간 약간 당황스러웠습니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아닌 가수라니요. 그는 역대 노벨상 수상자 중 가장 파격적이고 예측불가했던 인물인 것은 확실합니다. 세계적인 과학저널 ‘사이언스’도 ‘과학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싱어송라이터가 노벨상을 받았다’는 제목으로 톱뉴스를 내보냈으니까요.  스웨덴 명문 의대이자 연구기관인 카롤린스카연구소의 에디 바이츠버그 교수는 “딜런의 작품은 정말 멋있다. 노벨문학상을 받고도 남는다. 오늘 바람 대신 노벨상이 그에게 답했다”며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남겼습니다. ‘바람’을 언급한 건 딜런의 대표곡 ‘블로잉 인 더 윈드’(Blowin’ in the Wind) 때문일 겁니다. 바이츠버그 교수는 1997년 동료인 욘 룬드버그 카롤린스카연구소 교수와 함께 의학분야 국제학술지 ‘네이처 메디신’에 이 노래를 인용해 ‘일산화질소와 염증: 바람만이 아는 대답’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213편은 노래·단어 변형 없이 사용  실제로 1970년대부터 많은 생물학과 의학 분야 연구자들은 딜런의 노래가사를 논문이나 보고서에 인용하거나 각색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의학저널인 ‘브리티시 메디컬 저널’(BMJ)은 지난해 ‘자유분방한(Freewheelin) 과학자들: 생체의학 문헌에 밥 딜런 인용하기’라는 논문을 실었습니다. 미국 국립의학도서관의 온라인 데이터베이스인 ‘메들라인’(MEDLINE)을 검색한 결과 딜런 노래의 일부나 단어가 포함된 문헌은 727편이었고, 이 중 213편은 딜런의 노래와 단어를 변형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세상이 변하니까’ 135편에 쓰여  1970년 ‘임상간호학회지’에 실린 논문 ‘더 타임스 데이 아 어 체인징’(The Times They Are a-Changin)이 그의 노래를 처음 사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이 변하고 있다’고 말하는 동명 노래는 무려 135편의 의학논문에 그대로 쓰였습니다. ‘블로잉 인 더 윈드’는 36개 논문에 사용되면서 두 번째로 많이 쓰였다고 하네요. 미국 학자들이 딜런의 노래를 주로 썼고, 스웨덴 과학자들이 뒤를 잇는다고 합니다. 과학자들이 딜런의 노래를 자주 이용한 이유에는 여러가지 설(說)들이 있습니다. 우선 과학자들 중에서도 딜런의 팬이 많았고 ‘시대를 말하는 음유시인’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철학적 가사들이 과학논문을 설명하는 데 적합했다는 겁니다. 1990년대부터 딜런의 노래 인용이 급증했다는 것을 두고는, 그 노래를 즐겨 듣던 급진적이고 자유분방한 대학생들이 이때부터 의사나 과학자, 학술지 편집인이 됐기 때문이라는 추정도 덧붙입니다.  어쨌든 일흔다섯의 음악가가 자신이 노래하기 시작한 한참 뒤에 태어난 과학자들에게까지 영감을 불어넣었다면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또 하나, 우리나라에서 연구자들이 자신의 논문에 가요 제목이나 가사를 포함시켰다면 과연 그대로 실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문득 스칩니다. [출처: 서울신문]
505    아이들 가슴에 천만년의 보배로 가득 찰 때까지... 댓글:  조회:4719  추천:0  2016-10-17
삼일 수심 천재보요, 백년 탐물 일조진이라 (三日 修心 千載寶, 百年 貪物 一朝塵) 요즘 법조계를 뒤 흔든 스폰서 검사 보도를 보며 떠올린 불가의 초발심자경문의 한 구절이다. 이는 '출가한 사미가 지켜야 할 덕목을 적은 기본 규율서'라고 한다. 삼일 동안 닦은 마음 천년의 보배요, 백 년 동안 탐한 재물 하루아침의 티끌이라 옮길 수 있겠다. 어디 출가한 사미승에게만 해당되는 구절일까? 옳지 못한 탐욕은 한 순간에 한 아버지(어머니)의 자랑스럽던 아들(딸)을, 한 아내(남편)의 믿음직했던 남편(아내)을, 한 아들(딸)의 존경스럽던 아버지(어머니)를 만인의 손가락질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았는가? '나만은 괜찮다. 나는 그래도 된다'라는 오만과 착각이 그 지경까지 이르게 하는 것 아니겠는가? 내가 알고 상대방이 아는 사실을 오직 하늘은 모를 거라는 착각과 내가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들인 공이 얼마인데 이 정도쯤이야 하는 오만이 낳은 결과치곤 그 나락이 너무 깊을 수밖에 없다. 누구나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최소한의 재물은 필요하다. 더구나 재물은 생활을 편리하고 풍요롭게 할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을 여유롭게 하는 마법도 지녔다. 우리 속담에도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는 자신의 피와 땀으로 일군 재물일 때, 또 모은 재물을 나와 이웃의 풍요를 위해 기꺼이 쓸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어디 옳지 못한 구린 방법으로 축재하고 이를 지키고, 불리기 위해 온갖 술수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런 마음의 여유까지 기대할 수 있겠는가? 초발심자경문의 탐물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라 생각한다. 재물을 모으는 과정이 부정하니 마음이 편할 리 없고, 마음이 불편하니 어디 매사 형통하겠는가? 옳지 못함이 영원히 감춰질 리 없고, 천하에 드러나는 순간 지금까지의 영화는 하루아침의 티끌보다 더 허무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바로 백년 탐물 일조진(百年 貪物 一朝塵)이다. 그 예가 우리 사회에 어디 스폰서 검사뿐 이겠는가? 더 충격적인 것은 고등학생 56%가 '10억원이 생긴다면 죄를 짓고 1년 정도 감옥에 가도 괜찮다'고 응답한 사실이다. 물론 별 생각없이 즉흥적인 답이리라 위안도 해보지만, 10억원이 아무리 큰돈이라도 어찌 자신의 인생과 바꿀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단상을 보는 것 같아 심히 우울하다. 모두의 그릇된 마음을 경계해야 할 일이다. 율곡 선생이 자경문까지 지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린 것처럼. 율곡 선생은 '오래도록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던 마음을 하루아침에 거두어들이는 일은 어렵기 때문에 분잡한 생각들이 일어날 때에는 마땅히 정신을 수렴해 집착 없이 그것을 살필 일이다'라고 흐트러지는 마음을 다 잡으셨다. 넘쳐나는 물질과 피폐해진 정신세계를 사는 오늘, 우리도 각자의 자경문 하나씩을 마련해야 할 때인가 보다. 마음이 편안하면 초가집도 아늑하고(心安茅屋穩, 심안모옥온), 성품이 안정되면 나물국도 향기롭다. (性定菜羹香, 성정채갱향) 명심보감의 한 구절이다. 오늘날의 수심(修心)이란 편안한 마음과 안정된 성품을 바탕으로 바른 삶의 길을 찾고,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힘을 기르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 바로 충남교육청이 지향하는 '참학력'이다. 자기를 성찰하고, 이해하여 앞날을 개척하는 자주적인 삶, 남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상대방의 인권까지도 지켜주는 더불어 사는 삶, 인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자연을 이해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거기에 심미적 감수성까지 갖춘 문화적인 삶을 자주적으로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를 어찌 아이들에게만 맡길 수 있겠는가? 가정과 학교, 교육청 그리고 사회가 나서야 할 때이다. 우리 모든 아이들의 가슴이 천년의 보배로 가득 찰 때까지.
504    [쉼터] - 재밌는 "악마의 수자" 댓글:  조회:5119  추천:1  2016-10-16
[OSEN=이슈팀] 142857의 비밀 =  불과 여섯자리의 숫자 속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있을까. 최근 한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 ‘142857의 비밀’이란 글이 올라오면서 새로운 신비주의 환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일부 네티즌은 그 오묘한 숫자의 비밀 안에 지구 멸망의 날이 악마의 부활 계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추측까지 더하느 중이다.  그렇다면 142857에는 과연 어떤 비밀이 담겨 있는 것일까. 일단 댄 브라운의 베스트셀러 '다빈치 코드'에 나와서 유명해진 파보나치 수열 등과는 다른 조합이다. 파보나치 수열이란 인접한 두 숫자를 더한 게 바로 그 다음 수가 되는 수열을 말한다.  142857의 비밀에서는 더하기가 아니고 곱하기가 핵심 포인트다. 142857에 1부터 6까지의 숫자를 차례로 곱해보면 그 결과를 알수 있다.   ‘142857×1=142857’, ‘142857×2=285714’, ‘142857×3=428571’, ‘142857×4=571428’, ‘142857×5=714285’, ‘142857×6=857142’로 모든 결과가 142857과 배열만 다른 숫자가 된다.  142857을 둘로 나눠 142+857을 해보면 숫자 999가 나온다. 14+28+57의 결과는 99다. 또 142857에 7을 곱하면 999999가 된다.   네티즌들은 “정말 신기하다”, “수학이라면 머리가 아픈데 재밌다”, “악마의 숫자가 아니냐”며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503    [쉼터] - 재미있는 자연속의 피보나치 수렬 댓글:  조회:15293  추천:0  2016-10-16
피보나치 수열이 뭔가요? 자연에도 피보나치 수열은 존재한다 음악도 피보나치 수열을 따른다 ┗ 피보나치 수열은 황금비와 어떤 관계가 있나요? 피보나치 수열은 자연을 닮았다고 합니다. 자연을 닮은 수가 있다니 신기하군요. 피보나치 수열이 무엇인가요? 그리고 어떻게 자연을 닮았는가요?   피보나치 수열이 뭔가요? 이탈리아의 수학자 피보나치(1170~1250)는1202년 토끼의 번식과 관련된 재미있는 문제를 소개했습니다. “갓 태어난 토끼 한 쌍은 2개월 후부터 매달 한 쌍의 새끼 토끼를 낳습니다. 새로 태어난 토끼도 마찬가지입니다. 암수 토끼 한 쌍이 죽지 않고 계속 번식한다고 하면, 1년 뒤에는 모두 몇 쌍의 토끼가 있을까요?” 이 문제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월 태어난 쌍 전체 쌍 지금 0 1 1개월 후 0 1 2개월 후 1 2 3개월 후 1 3 4개월 후 2 5 5개월 후 3 8 6개월 후 5 13 7개월 후 8 21 ···       매달 전체 토끼 암수 쌍의 수를 수열로 나타내면 1, 1, 2, 3, 5, 8, 13, 21, ··· 과 같이 되는데, 이것이 바로 피보나치 수열입니다. 물론 12개월 후에는 233쌍이 됩니다. 자연에도 피보나치 수열은 존재한다 자연에는 흥미로운 수가 많습니다. 그냥 평범해 보이는 식물에도 놀라운 수학이 숨어 있을 때가 있지요. 솔방울과 해바라기가 한 예입니다. 솔방울을 뒤에서 자세히 보면, 시계 방향과 반시계 방향으로 나선이 나 있습니다. 이 나선의 개수를 세어 보면 8과 13입니다. 무엇이 신기하냐고요? 그럼 해바라기 씨를 한 번 보기로 해요. 해바라기 씨에도 솔방울처럼 시계 방향과 반시계 방향으로 나선이 있습니다. 해바라기 씨는 좀 복잡하니 꼼꼼히 세어 보아야 합니다. 나선이 시계 방향으로 34개, 반시계 방향으로 55개가 있습니다. 솔방울 해바라기 씨 그렇다면 꽃잎은 어떨까요? 붓꽃은 3장, 채송화는 5장, 코스모스는 8장, 금잔화는 13장, 치커리는 21장, 질경이는 34장, ··· 의 꽃잎이 달려 있습니다. 1 2 3 1자란(꽃잎 3장) 2괭이밥(꽃잎 5장) 3코스모스(꽃잎 8장) 그렇다면 왜 식물의 열매나 꽃잎, 잎차례와 같은 것들은 피보나치 수열을 따르고 있는 것일까요? 그건 피보나치 수열이 자연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식물은 다양한 형태로 씨앗을 보호하거나 번식을 하려 합니다. 그럴 때 가장 편리한 것이 바로 피보나치 수열의 수입니다. 해바라기의 씨앗도 가장 좁은 공간에 최대한 많은 양의 씨를 품으르면 피보나치 수열의 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음악도 피보나치 수열을 따른다 피아노에는 흰색과 검은색 건반이 있습니다. 검은 건반은 2개 또는 3개씩 놓여 있어요. 또 한 옥타브(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에는 흰 건반이 8개, 검은 건반이 5개이고, 건반은 모두 13개입니다. 이 수들을 작은 수부터 차례로 늘어놓으면 2, 3, 5, 8, 13입니다.   2+3=5, 2+5=8, 5+8=13이므로 앞의 두 수를 더하면 그 다음 수가 되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이러한 수의 배열을 피보나치 수열이라고 하는데, 피아노 건반에는 피보나치 수열이 숨어 있었네요. 벨라 바르톡(1881~1945)은 피보나치 수열을 음악에 충분히 활용한 작곡가입니다. 바르톡은 피보나치 수열에 따라 음악의 마디를 나누고 황금분할점2) 에 클라이맥스3) 를 두는 새로운 기법의 음악을 만들어 냈습니다. 수학과 음악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것이지요. 피보나치 수열은 황금비와 어떤 관계가 있나요? 피보나치 수열은 1, 1, 2, 3, 5, 8, 13, 21, ···이다. 피보나치 수열을 이용하여 분수를 계속 만들어 가면 황금비()에 가까워진다.   가장 아름답고 균형 있게 느껴진다는 황금비! 피보나치 수열이 황금비를 이루고, 자연은 피보나치 수열을 닮았다. 이처럼 피보나치 수열이 자연과 닮은 것은 우연히 아니라 수학이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은 아닐까? =================================================== 자연의 구조 속에서 자주 발견되는 흥미로운 수열이 1202년 이탈리아의 수학자 피사의 레오나르드(Leonardo of Pisa, Fibonaci라고도 알려진)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는 태어나서 한 달 후에 새끼를 낳을 수 있는 토끼 한 쌍이 매달 새끼 한 쌍을 낳는다면 1년에 몇 마리가 되는지를 알아보는 문제에 도전했다. 레오나르도는 한 쌍이 한 달 후에 한 쌍의 토끼를 낳으면 토끼 쌍의 수는 (1, 1)이 되고 두 번째 달에는 두 쌍을 더 낳게 되어 토끼 쌍의 수는 (1, 1, 2)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계산을 계속 해나가면 이전 수의 합이 다음 수가 되는 1, 1, 2, 3, 5, 8, 13, 21, 34, 55 등으로 이루어진 수열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피보나치 수열이다. 놀랍게도 피보나치 수열은 꽃잎의 배열, 솔방울의 구조(아래 그림 참조)와 같이 자연계에서 흔하게 발견된다. 그중에서도 8개의 열이 좌측으로 돌고 13개의 열이 우측으로 도는 구조로 되어 있는 파인애플은 살아 있는 피보나치의 기념비이다. ======================================================= '피보나치 수열' 자연신비 푼다 신록의 계절이 왔다. 꽃과 꽃잎 그리고 식물의 잎에서 피보나치 수열을 찾아보자. 이 수열은 식물뿐 아니라 고둥이나 소라의 나선구조에도 나타난다. 그리고 이 수열은 운명적으로 ‘신의 비율’인 황금비를 만들어낸다. 황금비는 피라미드 파르테논신전이나 다빈치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시작해 오늘날에는 신용카드와 담배갑의 가로 세로 비율까지 광범위하게 쓰인다. 그러나 인간만 황금비를 아름답게 느끼는 것은 아니다. 황금비는 태풍과 은하수의 형태, 초식동물의 뿔, 바다의 파도에도 있다. 배꼽을 기준으로 한 사람의 상체와 하체, 목을 기준으로 머리와 상체의 비율도 황금비이다. 이런 사례를 찾다보면 우주가 피보나치 수열의 장난으로 만들어졌는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든다. 이 수열은 12세기 말 이탈리아 천재 수학자 레오나르도 피보나치가 제안했다. 한 쌍의 토끼가 계속 새끼를 낳을 경우 몇 마리로 불어나는가를 숫자로 나타낸 것이 이 수열이다. 이 숫자는 1123581321345589144233…가 된다. 모든 숫자가 앞선 두 숫자의 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변의 꽃잎을 세어보면 거의 모든 꽃잎이 3장 5장 8장 13장…으로 되어 있다. 백합과 붓꽃은 꽃잎이 3장, 채송화 패랭이 동백 야생장미는 5장, 모란 코스모스는 8장, 금불초와 금잔화는 13장이다. 애스터와 치코리는 21장, 질경이와 데이지는 34장, 쑥부쟁이는 종류에 따라 55장과 89장이다. 고둥도 한 변의 길이가 피보나치 수열인 정사각형들이 만들어낸 나선 모양을 하고 있다. 피보나치(1170~1250)는 중세 이탈리아의 수학자로, 피보나치 수열은 1202년 에서 처음 제기되었습니다.   1, 1, 1+1=2, 1+2=3, 2+3=5, 3+5= 8...   이처럼 자신 앞의 두 수를 더하면 자신이 되는 수의 나열을 말합니다. 이런 피보나치 수열로 꽃잎의 수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장미의 꽃잎의 개수는 21개 입니다.  1, 1, 1+1=2, 1+2=3, 2+3=5, 3+5=8, 5+8=13, 8+13=21   데이지의 꽃잎의 개수는 34개 1, 1, 1+1=2, 1+2=3, 2+3=5, 3+5=8, 5+8=13, 8+13=21, 13+21=34   철쭉:1, 백합:1+2=3, 델피늄:2+3=5, 아네모네:3+5=8, 해바라기:5+8=13, 장미:8+13=21, 데이지:13+21=34, 키베라:21+34=55, 다알리아:34+55=89   꽃잎의 수와 피보나치 수열이 왜 일치하는 것일까요? 피보나치 수열에 따라서 꽃잎이 나게 되면 햇빛을 가장 장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소공간 속에 최대의 잎이나 꽃잎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피보나치 수열을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피보나치 수열에 어긋나는 꽃도 있습니다.  그 꽃은 바로 백합인데요, 백합의 꽃잎의 수를 확인해 보면 6개로 피보나치 수열과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 꽃잎이 6장으로 되어있는 식물의 경우, 3장은 꽃받침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백합의 꽃잎도 6장이 아닌 3장이며, 꽃잎처럼 보였던 나머지 3장은 꽃받침이었던 것입니다. 피보나치 수열은 해바라기나 데이지 꽃머리의 씨앗 배치에도 존재한다. 최소 공간에 최대의 씨앗을 촘촘하게 배치하는 ‘최적의 수학적 해법’으로 꽃은 피보나치 수열을 선택한다. 씨앗은 꽃머리에서 왼쪽과 오른쪽 두 개의 방향으로 엇갈리게 나선 모양으로 자리잡는다.데이지 꽃 머리에는 서로 다른 34개와 55개의 나선이 있고, 해바라기 꽃머리에는 55개와 89개의 나선이 있다. 피보나치 수열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것은 식물의 잎차례이다. 잎차례는 줄기에서 잎이 나와 배열하는 방식이다. 잎차례는 t/n으로 표시한다. t번 회전하는 동안 잎이 n개 나오는 비율이 참나무는 벚꽃 사과는 2/5이고, 포플러 장미 배 버드나무는 3/8, 갯버들과 아몬드는 5/13이다. 모두 피보나치 숫자다. 전체 식물의 90%가 피보나치 수열의 잎차례를 따르고 있다. 이처럼 잎차례가 피보나치 수열을 따르는 것은 이것이 잎이 바로 위의 잎에 가리지 않고 햇빛을 최대한 받을 수 있는 수학적 해법이기 때문이다. 피보나치 수열은 신비롭게도 황금비를 만들어낸다. 2/1 3/2 5/3 8/5…를 계속 계산하면 1.618…이란 황금비에 수렴한다. 음악의 거장 바르톡은 피보나치 수열에 따라 음악의 마디를 나누고 황금분할점에 클라이막스를 두는 새로운 음악을 제창하기도 했다. 서울대 김홍종 교수(수학)는 “전에는 식물의 DNA가 피보나치 수열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했으나, 요즘에는 식물의 씨앗이나 잎이 먼저 나온 씨나 잎을 비집고 새로 자라면서 환경에 적응해 최적의 성장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피보나치 수열에 이르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특히 최근에는 생물뿐 아니라 전하를 입힌 기름방울을 순서대로 떨어뜨려도 해바라기 씨앗처럼 퍼진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피보나치 수열과 황금비가 생물은 물론 자연과 우주 어디에나 숨어있다고 믿는 수학자가 더욱 늘고 있다”고 말했다.   솔방울의 구조 ============================================ 1170-1240 이탈리아 수학자 레오나르도 피보나치는 이탈리아 수학자로서 고대와 아라비아, 인도 문화에서의 수학적 지식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보충해 놓았던 사람이다. 그는 대수학과 정수론이라는 수학 분야에 많은 공헌을 했다. 그는 1170년 상업 도시였던 이탈리아의 피사에서 태어났다. 그는 그 곳에서 상업에 필요한 계산의 기초들을 배웠다. 그가 20살쯤 되었을 때 알제리아에 가서 인도 기수법과 아라비아의 계산 방법, 지식을 배우기 시작했고 좀 더 광범위한 여행을 통해서 그의 지식은 나날이 늘어갔다. 피보나치는 이러한 경험을 살려 그가 알고 있던 상업 계산 기술을 향상시키고 그리스 수학자인 디오판토스와 유클리드와 같은 고대의 수학자들의 업적을 확장시켰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피보나치의 업적, 그는 정수론, 상업 수학의 실용 문제와 개관, 대수학에서의 응용 문제, 재창조(recreational) 수학에 대해 저술했다. 재창조 수학에 대해 쓴 그의 논문들은 주로 이야기 문제로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논문들은 일찍이 13세기에 보여준 고대의 정신적 귀감이 되었다. 이러한 문제는 그가 발명한 피보나치 수열(1, 2, 3, 5, 8, 13,...)과 같은 회귀 수열의 합과 연관되어 있다. 이 수열의 각 항은 '피보나치 수' - 이 수열에서 두 수의 합은 다음 항의 수가 된다 - 라고 불려진다. 그는 어떤 entry에 대한 값을 계산하는 문제를 풀었다. 그는 1240년 시 행정에 대한 공적 공로와 그의 업적의 중요성을 인정받아 피사 공화국에서 연봉을 받았다. 사람들은 1240년에 피보나치가 죽었다고 믿고 있다.   피보나치 수열은 12세기말 이탈리아의 수학자 레오나르도 피보나치가 ‘한쌍의 토끼가 계속 새끼를 낳으면 몇마리로 불어날까?’를 연구하면서 처음 제안한 이후 파르테논 신전, 꽃잎의 수, 성장하는 나뭇가지의 수, 소라나 고동의 나선 등 건축과 자연의 신비를 푸는 열쇠로도 알려져 있고, 영화 ‘다빈치 코드’에서 자크 소니에르가 죽어가면서 남긴 첫 번째 암호이기도 합니다. 한 숫자가 앞의 두 숫자를 더한 합과 같게 나열되는 피보나치 수열은 가장 잘 알려진 암호 전달 방법중의 하나입니다. 사실, 이 피보나치 수가 처음 언급된 문헌은 기원전 5세기 인도의 수학자 핑갈라가 쓴 책입니다. 유럽에서 피보나치 수가 처음 연구된 것은 앞에서 말한대로 토끼 수의 증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부터입니다. 문제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한쌍의 토끼가 계속 새끼를 낳으면 몇 마리로 불어날까?”  -> n 번째 달의 토끼 수는 ? 이때의 전제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1)첫 달에는 새로 태어난 토끼 한 쌍만이 존재한다.  2)두 달 이상이 된 토끼는 번식 가능하다.  3)번식 가능한 토끼 한 쌍은 매달 새끼 한 쌍을 낳는다.  4)토끼는 절대 죽지 않는다. 이때 n번째 달에 a 쌍의 토끼가 있었고, 다음 n+1 번째 달에는 새로 태어난 토끼를 포함해 b 쌍이 있었다고 하면, 그러면 그다음 n+2 번째 달에는 a+b 쌍의 토끼가 있게 됩니다. 이것은 n번째 달에 살아있던 토끼는 충분한 나이가 되어 새끼를 낳을 수 있지만, 바로 전달인 n+1번째에 막 태어난 토끼는 아직 새끼를 낳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재미있지요? 사실 피보나치 수열 자체는 그리 의미가 있는 수열은 아닙니다. 다만 재미있는 여러 내용 때문에 지능 테스트 문제에서 자주 다루는 주제입니다. 피보나치 수열의 의미는 바로 황금비(golden ratio)라고하는 의미있는 숫자를 가지고 있기때문입니다. 잠깐 ‘다빈치코드’라고하는 소설을 생각해봅시다. 도입부에서 시작되는 살인사건부터 이 소설을 즐기기 위해서는 암호를 풀어야 하며 암호를 풀기위해서는 약간의 기초 지식이 필요합니다.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1) 피보나치 수열(Fibonacci Series) : 수학자 피보나치가 꽃잎의 개수, 토끼가 새끼를 낳는 숫자, 나뭇가지의 개수 등 자연현상에서 발견한 수열로 1, 1, 2. 3, 5, 8, 13, 21, 34…이다. 처음과 두번째가 1인 이유는 연속된 두 숫자의 합이 다음 숫자와 같아야 한다는 규칙에 맞추기 위해서입니다. 2) PHI : 그리스 알파벳의 21번째 글자인 φ로 1.618을 뜻한다. PHI는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숫자로 간주됩니다. 이 숫자는 피보나치 수열에서 나온 것인데, 연속된 두 숫자를 서로 나누어보면 그 몫이 거의 1.618이 나오기 때문. 일부 수학자들은 식물, 동물, 인체에 ‘PHI:1’이라는 비율이 적용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소설 에도 이런 설명이 나오는데 랭던이 PHI에 대해 강의하는 장면에서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도 인체와 PHI가 얼마나 큰 연관이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라고 설명합니다. 3)애너그램(Anagram) : 알파벳 철자의 순서를 바꿔 새로운 단어를 만드는 놀이. 자크가 남긴 ‘오 드라코 같은 악마여!’(O, Draconian Devil!) 오, 불구의 성인이여!’(Oh Lame Saint!) 중 앞 문장을 애너그램으로 바꾸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가 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link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황금비와 피보나치 수열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피보나치 수열(Fibonacci數列)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자연 속에는 기가 막힌 수학적 사실이 숨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피보나치 수열을 예로 들 수 있다. 피보나치 수열이란 12세기 이탈리아 수학자 '레오나르도 피보나치'가 발견했다 해서 그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의미는 의외로 간단하다. 즉 전 수와 그 수를 합하면 다음 수가 나오는 수열을 의미한다. 1, 2, 3, 5, 8, 13, 21, 34, 55, 89, …와 같은 수열을 예를 들 수 있다. 이 수열을 보면 1+2=3, 2+3=5, 3+5=8, 5+8=13과 같이 전 수와 그 수를 합하면 다음 수가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피보나치 수열이라고 말한다. 이 수열이 뭐 그렇게도 대단하단 말인가? 하지만 대단하다. 왜냐하면 이 수열은 단순한 규칙의 발견을 넘어선 것이기 때문이다.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이 수열에서 황금비가 등장하고 자연계의 많은 사물이 이 수열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한 예로 꽃잎의 개수도 피보나치 수열로 이루어져 있다. 극히 예외적인 꽃잎만 제외하고는 피보나치 수열로 이루어졌다. 백합과 붓꽃은 3장이고, 채송화와 벚꽃과 목련은 5장, 모란과 코스모스는 8장이다. 꽃잎이 많은 꽃들도 예외가 아니다. 금잔화는 13장, 치커리는 21장, 질경이와 데이지는 34장, 쑥부쟁이는 55장 혹은 89장의 꽃잎이 달려 있다. 놀랍지 않은가? 이 사실이 의심스럽다면 지금 당장 마당으로 나가 꽃잎의 수를 헤아려 보라. 놀랍게도 피보나치 수열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더욱 놀라운 사실들이 발견되었다. 꽃잎이 이렇게 정말 기가 막히게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지만 왜 그런지 이유까지는 잘 몰랐는데 그 이유가 과학이 발전하면서 밝혀진 것이다. 식물들이 이렇게 피보나치 수열을 이루고 있는 까닭은 먼저 햇빛을 받기에 가장 유리하다는 것이다. 이뿐이 아니라 피보나치 수열을 이룰 때 암술과 수술을 가장 잘 보호할 수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꽃이 활짝 피기 전까지 꽃잎의 역할은 봉오리를 이루어 암술과 수술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이 때 꽃잎들이 이리저리 겹치며 가장 효율적인 모양으로 암술과 수술을 감싸려면 피보나치 수만큼의 꽃잎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또한 나비나 벌들과 같은 곤충들을 끌어 모으는 데도 피보나치 수열을 이루어야 더 잘 유인할 수 있다는 사실 등이 밝혀지고 있다. 해바라기 씨에도 피보나치 수열이 숨어 있다. 해바라기 씨가 박힌 모양을 잘 보면, 오른쪽과 왼쪽으로 도는 두 가지 나선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때, 좌우 나선의 수를 보면 하나가 21이고 다른 것은 34, 하나가 34이면 다른 것은 55 하는 식으로 두 개의 연이은 피보나치 수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예들은 흔히 창조론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 이 세상을 만들 때 완벽하게 계획하지 않았다면 이런 법칙으로 구성되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수학적인 근거로 볼 때 분명 일리가 있는 이야기이다. 인간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또 다른 피보나치 수열이 아직도 자연에는 많이 숨어 있을 것이다.. ================================   자연 속에 감추인 -황금비율 법칙(피보나치 법칙) 자연이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면 우리의 마음이  편안해지고 안정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연은 어떤 규칙(피보나치수열)을  따르고 있고 그런 규칙적인 질서_규칙과 질서- 속에 조화와  아름다움의 상징인 황금비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꽃잎의 수에, 잎차례의 규칙 속에, 씨앗의 배열 모습 속에,  나무의 가지치기 형식 속에, 등각 나선구조를 하고 있는 여러 자연물 속에 피보나치수열을 따르는 질서와 아름다움의  황금비가 숨겨있는지 마음의 눈을 떠 찾아보자!   피보나치수열이란 12세기말 이탈리아의 수학자  레오나르도 피보나치가 처음 제안한 규칙적인 수의 배열을 말하는데 배열된 수를 살펴보면 인접한 두 수의 합이 다음에  나올 수가 된다는 수학적인 원리가 있다. 1 1 2 3 5 8 13 21 34 55 89......   피보나치 수열에서 뒤의 수를 앞의 수로 나누어 보면  재미있는 결과가 나오는데 그 수가 증가할수록 어느  일정 수치 즉 조화와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비로 알려진 황금비 1.618이란 숫자에 접근한다는 것이다.  2/1=2 3/2=1.5 5/3=1.666 .... 피보나치수열이 단순한 수의 배열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시각에 아름답고 조화속의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황금비의 비밀이 숨겨있다는 것은 대단한 자연의 신비가 아닐 수 없다.   우리 주위에 피어있는 꽃잎의 수를 세어보면 나팔꽃 1장, 2장, 백합과 붓꽃은 3장, 벚꽃. 사과꽃. 채송화. 패랭이는 5장,  코스모스 8장, 금불초. 금잔화는 13개, 루드베키아 21장,  질경이와 데이지는 34장, 쑥부쟁이는 종류에 따라 55장과 89장으로  꽃잎 수가 피보나치수열인 1, 2, 3, 5, 8, 13, 21, 34, 55, 89... 중 하나임을 알 수 있다.  꽃잎이 4장인 십자화과와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꽃잎의 수가 피보나치수열에 해당하는 수를 따른다.   잎차례란 식물의 줄기에서 잎이 나와 배열하는 방식을 말하며 전체 식물의 90%가 피보나치수열을 따라 규칙적이고 질서 있게 잎이 난다. 잎차례는 기호로 t번 회전하는 동안 n개의 잎이 나오는 비율인 t/n으로 표시하는데  여기서 t와 n의 수는 피보나치수열(1 2 3 5 8 9 13 21...)을 따르는 수로 구성되어 진다.  벚꽃, 사과는 2/5, 포플러. 장미. 배. 버드나무는 3/8, 갯버들. 아몬드는 5/13 의 잎차례를 갖는다.  잎차례가 피보나치수열을 따름으로 잎들이 질서 있게 배열됨으로 잎이 바로 위의 잎에 가리지 않고  최대한 많은 햇빛을 받을 수 있게 된다.  또한 잎차례의 t와 n의 숫자가 커갈수록 t/n 이  조화와 아름다움의 상징인 황금비 0.618..에  근접함을 통해 모든 잎들이 최적의 상태로 햇빛을  고르게 받을 수 있는 잎차례는 황금비임을 알 수 있다. 해바라기 꽃 머리 안에서 씨앗이 배열된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오른쪽과 왼쪽 두 개의 엇갈린 나선형 곡선을 따라 씨앗이 배열된 것을 알 수 있다.  각각의 나선 개수를 세어보면 나선의 개수가 피보나치수열을 따르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해바라기 - 오른쪽 나선 개수 : 55개 왼쪽 나선 개수 : 89개 데이지 - 오른쪽 나선 개수 : 34개 왼쪽 나선 개수 : 55개 솔방울 - 오른쪽 나선 개수 : 8개 왼쪽 나선 개수 :13개 꽃 머리 안의 씨앗이 피보나치수열을 따라 배열됨으로  식물은 최소공간에 최대한 많은 씨앗을  촘촘하게 배치할 수 있게 됨을 알 수 있다.   나무는 성장하면서 원 둥치에서 가지들을 내게 된다. 이렇게 나무가 자라면서 처 나가는 가지의 숫자도 피보나치수열을 따라 늘어남을 관찰할 수 있다.   피보나치수열을 이용하여 황금 직사각형들을 연속적으로 그린 후 반지름이 1, 2, 3, 5, 8인 호들을  연결하면 점점 커지는 하나의 아름다운 나선이 그려지는데 자연계의 앵무조개, 초식동물의 뿔 뿐만 아니라 태양계의 행성들의 배열과 은하계의 형태 등도 이 황금 등각나선 구조를 따른다.     황금비란 인간에게 호감과 안정감 그리고 아름다움을 주는 가장 조화가 잡힌 비율로 자연계에서 쉽게 관찰되고  아름답고 균형 잡힌 인간의 신체 각 마디마디 구조에도 잘 나타나 있다. 신기하게도 황금비율을 응용해 만든 물건이나  건축물 등은 다른 비율을 사용해 만든 것에 비해 인간의 눈으로 볼 때 가장 편안함과 안정감을 준다. 역사적으로 고대 이집트의 불가사의한 피라미드는 황금비를 이용해 만들어져 가장 튼튼하고 안정된 건축물로 찬사를 받고 있으며,  고대 그리스에서 아름다움과 안정감, 균형을 모두 중시해 만든 걸작품인 파르테논 신전과 비너스상이 아름답고 안정감 있게 보이는 것도 황금비의 공식을 이용하여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과거 뿐 아니라 현대에도 황금비는 건축, 조각, 회화, 공예 등 조형예술분야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신용카드나 명함, 창문, 책 등 우리 생활 주변에서도 황금비를 이용해 만들어진 상품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실험에 의하면 사람들에게 무작위로 여러 가지의 사각형 모형을 제시하고  그중에서 그들의 눈에 가장 안정적으로 느껴지거나  또는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오는 사각형을 고르라면 문화권,  인종, 성별, 연령에 관계없이 대개의 사람들은 황금비율을 내재한 직사각형을 고른다.   또한 두 개의 막대기를 주고 십자가를 만들어 보라 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은 황금분할의 점에 근사한 곳을 교차해 십자가를 만든다.   다양한 황금비 (황금분할) 도형   황금분할의 구도가 내재된 직사각형   
502    [알아두기] - 음유시인(吟遊詩人)이란? 댓글:  조회:4906  추천:0  2016-10-16
본래 음유시인(troubadour, 吟遊詩人)은 중세 유럽에서 봉건제후의 궁정을 찾아다니며 스스로 지은 시를 낭송하던 시인을 가리켰습니다. 다음의 내용을 참조하세요. 12세기 초엽부터 남프랑스에서는 봉건 대제후(大諸侯)들 사이에서 궁정의 귀녀(貴女)를 중심으로 하는 좁지만 화려한 사회가 이루어져, 귀녀숭배와 궁정풍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연애의 이념이 생겨났다. 기사(騎士)인 시인은 그러한 환경과 이념 속에서 사랑하는 마음속의 귀녀에게 영원한 사모를 바쳐 그것을 때로는 난삽할 만큼 정교한 시형으로 다듬어 작곡하여 그것을 성(城)에서 성으로, 궁정·귀녀를 찾아다니면서 노래불렀다. 이러한 시인·기사가 트루바두르, 즉 음유시인이다. 400여 명의 이름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만 봐도 그 수가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단 그 내용은 일정하며, 결코 보답을 받을 수 없는 귀녀에의 사랑의 탄원과 봉사의 맹세이다. 또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 해도, 이마에 키스를 받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콩솔라멘테'라는 키스의 영예를 간직하기 위해 더한층 정성을 바친다. 그리스도교의 마리아 숭배를 세속적인 사랑에 대체한 것이며, 또한 봉건제의 주종(主從) 관계를 연애 관계로 꾸며낸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또 보는 견지에 따라서는 여성 이외의 전쟁과 종교가 그들의 영감의 원천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남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의 음유시인들의 이 서정시야말로 근세 유럽의 시의 원조가 되었다. 푸아티에 백작 기욤 9세가 그 원조이지만, 브라유의 성주(城主) 조프레 뤼델, 베르나르 드 방타두르 등이 잘 알려진 음유시인이다. 이 새로운 시의 경향은 북으로 옮아가서 북프랑스에도 퍼지게 되어, 이른바 '트루베르(trouvère)'라고 일컬어지며 음유시인들을 낳게 했으며, 그것들은 더욱 북으로 퍼져, 독일에도 파급되어 많은 미네(Minne:사랑)의 시인을 배출하는 기연(機緣)이 되었다. 독일의 음유시인은 미네젱거(Minnesänger)라고 했다. 또한 남방의 이탈리아에서는 '트로바토레(trovatore)'의 활약이 매우 컸으며, 기타 영국·에스파냐 등의 근대 서정시의 발생에 끼친 영향도 적지 않다. (자료 출처 : 두산백과)
501    [쉼터] - 철학자들 모습 엿보다... 댓글:  조회:4166  추천:0  2016-10-16
      석가모니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그로 인해서 생기는 고통에 대해서 진지하게 탐구한 인류의 위대한 스승 욕망이란 절대 충족될 수 없는 것이다. 욕망은 다른 욕망을 불러오며 인간은 이로 인해서 고통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물질만능주의, 우울증, 스트레스가 점점 심해지는 오늘날 어쩌면 우리는 석가모니의 말씀에 다시 돌아봐야 하는지도 모른다.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정치학, 물리학, 화학, 사회학, 철학 등 오늘날 학문 체계의 기반을 완성하신 분 비록 과학이 발전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몇몇 이론의 잘못된 점이 드러나기는 했지만 2천5년전 아리스토텔레스가 창시한 과학적 방법론은 오늘 우리가 발전된 과학문명을 가지게 된 것에 대해 지대한 공헌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은 잊혀졌다가 중세시기 말기에 아랍에 의해서 서양으로 다시 역수입 되었는데 만약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유럽에 역수입되지 못했다면 오늘날 서양은 동양보다 앞선 문명을 결코 갖지 못했을 것이다.              루소   홉스는 사회계약설에서 자연 상태 즉 국가와 법이 존재하지 않았던 태초 시절을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상태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사회 계약을 했고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을 양도하고 왕으로 추대했다는 것, 홉스의 이러한 주장은 왕권신수설을 뒷받침하게 된다. 하지만 루소는 홉스의 주장에 과감히 반기를 들게 된다. 자연상태는 오히려 갈등이 없고 평화로운 곳 그러나 가진자들이 재산 불평등을 영구화 시키기고 다른 우민들을 지배하기 위해서 강제로 사회계약을 맺었다는 것! 그러므로 국가의 권력은 왕 한 사람이 아닌 국민전부에게 돌아가야 한다. 루소의 이러한 사상은 훗날 시민혁명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칸트   역대 가장 위대한 철학자. 칸트의 철학은 그 전 철학자들은 생각도 못했던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철학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집어 버렸다. 방대한 데이터와 치밀한 논리체계로 인식론, 윤리학, 미학, 종교철학, 정치철학을 완성하게 된다. 칸트로 인해 비로소 철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완성되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든다.                  니체   철학의 이단아, 철학의 혁명가, 철학의 호불호 끝판왕 플라톤 이후로 이어진 관념적 철학, 보편적 철학에 칼을 뽑고 난도질을 해버린 철학자다. 신은 죽었다 한마디로 플라톤에서 시작되어서 기독교까지 이어진 서구 철학의 관념론을 간지나게 까버린다. 한마디로 있지도 않은 이데아, 천국에 매달리지 말고 현실에 살고 있는 니 삶 자체에 집중하라는 것.              마르크스   자본주의의 모순을 이미 19세기 중반에 깨닫고 자본주의의 붕괴를 예언한 철학자, 20세기 전세계는 마르크스의 실험장이었다. 만약 케인즈가 없었다면 자본주의는 마르크스의 예언대로 진짜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자본주의의 체계 자체란 돈이 돈을 낳고 돈이 없는 사람은 더 가난해 지게 되어있다. 결국 사회의 빈부 격차는 필연적으로 벌어지게 되어 있다는 것. 하지만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세계가 어떻게 운영될지 구체적으로 진술한 적 없고 이에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 등이 독자적으로 마르크스 철학을 해석하였는데 아시다시피 모두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자본주의 국가에서 복지정책, 사민주의 등 마르크스의 영향력 역시 무시하지 못할 수준                  하이데거   철학의 주된 핵심을 칸트의 인식론에서 존재론으로 바꿔버린 현대 철학의 양대 거두중 한명 사과가 있다, 강아지가 있다. 여기서 있다 즉 존재한다가 정확히 어떤 뜻인가? 우리는 ‘있다’라는 표현을 자주 쓰지만 ‘있다’가 정확히 어떤 뜻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평생에 걸쳐서 탐구하게 된다. 특히 하이데거가 주목했던 것은 인간의 존재 즉 ‘나는 왜 존재 하는가 이다’ 나의 존재에 대한 하이데거의 철학은 현상학과 실존주의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   현대 유럽 철학의 선구자가 하이데거라면 현대 영미 철학의 선구자는 바로 비트겐슈타인이라고 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전기철학에서 언어의 한계가 곧 세계의 한계라고 주장한다. 언어는 세계의 그림과 같다 즉 우리는 논리검증이 가능한 것만 논할 수 가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모든 철학적 논쟁들은 언어의 문제에서 발생한다. 이런 비트겐슈타인의 초기사상은 훗날 논리실증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후기철학에서는 다시 일상언어로 사상의 주제를 전환 시키게 된다. 언어는 게임과 같이 일정한 룰을 가지고 있는 것 비트겐슈타인은 일상언어로 초점을 바꿔서 전기철학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하였고 이것은 일상언어학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고전 논리학의 아버지라면 비트겐슈타인은 현대 논리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푸코   근대 이후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표준적인 인간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주장하는 프랑스 철학자 우리는 사회, 학교, 미디어로부터 표준적인 인간다움을 강요받는다. 이 표준적인 인간다움에 들지 못한다면 사회는 그 사람에게 비정상이라는 낙인을 찍게 된다. 지식인들과 권력기관들은 인간다움의 정의를 만들고 이를 통해 사람들을 구속하고 제한한다. 푸코는 이성이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고 규제하며 계몽주의는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플라톤   서구를 더 나아가서 전 세계를 망쳐놓았던 장본인. 있지도 않은 이데아를 만들어서 2천 년간 많은 사람들이 현실을 등한시하게 만들었다.                헤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80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으로 쓴 헛소리꾼.    
500    [쉼터] - 조선왕조 실록 알아보기 댓글:  조회:4581  추천:0  2016-10-16
깜짝 놀랄  조선왕조 실록          조선왕조 실록은 보물창고랍니다. 너무나 생생한 역사의 기록물들이 가득합니다. 그저 연속극 드라마 작가나 들추어 보면서 실컷 재미 보는 왕조실록에서_ "깜짝 놀랄 자료"들을 건졌습니다_      7개 국어에 능통했던  신숙주    보통 4-5개의 국어에 능통한 사람을 보고도 천재라고 극찬을 한다.    그런데 한사람이 7개국를 할 수 있다면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바로 조선조에 영의정을 지낸 범옹 신숙주가  주인공이다.      정치적인 얘기는 접어두고  학자적으로만 평가한다면  그는 뛰어난 언어학자였으며  한국최초의  일본관련책 해동제국기를 저술하는등 어문학에 많은 족적을 남겼다.    그는 특히 설총의 이두문자는 물론 중국어, 몽고어, 여진어, 일본어, 등에 능통했으며  인도어,  아라비아어,  까지도 터득했다고 한다.    명문가답게,  일제하 독립투쟁의 주역들인  단재 신채호, 신규식 선생 등이 그의 후손들이다. ------------------------------------------------------------  76세에 처음 장가들고 99세까지 장수한  홍유손    조선시대 하면 사내아이는 보통 10세를 넘으면 장가를 가게 되는데,  무려 76세의 죽을 나이에  첫장가를 가고 아이를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장본인은 홍유손.그는 소위 죽림칠현으로 속세를 떠난 청담파를 자처하는 인물이다.    76세에 장가를 들어  아들 지성을 낳고  99세까지 살다간 조선시대 기인중의  한명이다.    같은 죽림칠현이자  생육신 이었던 남효온은  그를 평해 [글은 칠원같고 시는 산곡을 누빈다]고 하였다.    그는 거의 기인에 가까웠으며 특히 세조가 정권을 잡은후 김시습, 남효온, 등과 어울리면서  세상을 비관하고 냉소로 일관하면서 풍자적인 인생을 살았다.    99세의 천수를 누린 그는 역사 인물사전에 나오는  최장수 인물이 되고있다.  ------------------------------------------------------------  왕의 얼굴한번 보지도 않고 정승에 오른  윤 증   그는 과거에 급제하지 않았다.    우암 송시열의 제자로 당쟁의 한축이었으며  재야의 막후실력자 소론의 영수 였다.    윤증은 왕의 얼굴한번 보지 않고  우의정 까지 올랐던  우리나라 역사상 단한명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그가 과거에도 응시하지 않았는데  그가 받았던 관직을 보면  36세때 내시교관부터    공조정랑, 사헌부 지평, 호조참의, 대사헌, 우찬성, 좌찬성,   83세때 판돈녕부사까지 계속 관작이  승진되면서 제수 받았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어쨌든 그는 출사하지도 않은채  재야에서 일정한 세력을 등에 업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한번도 조정에 나가지 않고 왕의 얼굴도 보지 않으며  정승이되는 진기록을 남겼다    ------------------------------------------------------------      조선왕조 역대 왕들의 기록    1] 32년간 세자로 있었던 임금은 순종        조선 마지막 왕인 순종 임금은 2세때에 세자로 책봉되어 32년간을 세자신분으로 지냈다.     2] 죽어서 왕이 된 인물은        조선조에는 죽은후에 왕으로 추존된 인물이 다섯명인데 * 덕종은 세조[수양대군]의 아들로서 세조1년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즉위전에 죽었다 인수대비의 남편이며 슬하에는 월산대군과 성종, 명숙공주 등 3명을 두었다.     * 원종은 선조의 5남으로 1627년에 왕으로 추존됨. 인조 등 4남을 둠.   * 진종은 영조의 아들로 사도세자와 4촌. 6세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즉위전에 죽었다. 양자인 정조가 즉위하자 진종으로 추존.     * 장조는 유명한 사도세자로서 영조의 둘째아들이며 정조의 아버지. 부인은 홍봉한의 딸인 혜경궁 홍씨. 당파싸움의 희생양이 되어 아버지 영조에 의해 죽음. 1899년 장조로 추존됨.    * 익종은 순조의 아들이며 헌종의 아버지. 4세에 세자로 책봉되고 19세때[순조27년] 대리청정으로 참정하였으나 4년만뒤에 익종으로 추존됨.     3] 가장 많은 아들을 둔 왕은?   세종대왕이 18명으로 가장많고, 다음이 성종 16명, 2대정종이 15명 순이다. 딸은 태종[이방원]이 17명이며, 성종이 12명, 중종과 선조가 11명 이었다.      세종대왕     4] 왕비를 가장많이 배출한 가문은?   *청주한씨가 1위[태조비:신의왕후],[덕종비:소혜왕후], [예종비:장순왕후],[성종비:공혜왕후] [예종비:안순왕후], [인조비:인열왕후]로 가장많고 * 파평윤씨와 여흥민씨가 4명, 청송심씨와 안동김씨가 3명이다.      5] 왕비중 가장 자식을 많이 낳은 왕비는?   * 세종대왕비 소헌왕후 심씨는 8남2녀를 낳았다. 성종의 제9비 숙의홍씨도 7남3녀로 공동1위이다.     6] 가장 짧은기간 재위한 임금은   12대 인종이며 재임기간 9개월이었다.     7]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임금은        21대 영조로서 51년 7개월로서 반세기동안 왕좌를 지켰다.      8] 가장 단명한 임금은    [단종애사의 주인공 6대 단종으로서 17세에 사약을받고 죽음]      9] 가장 장수한 임금은    [21대 영조로서 83세까지 장수했다]     10] 가장 많은 부인을 둔 임금은          3대태종과  9대성종으로서 12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세종대왕은 6명이었다    -------------------------------------------------------------  아홉번 과거시험에 모두 장원급제한  천재 이율곡    한국의 역사상 현인의 경지에  근접한 인물을 꼽으라면 관점의 차이는 있겠지만 율곡 이이 선생을  꼽는데 누구도 주저하지는 않을것이다.    잘 알려진바와 같이 율곡 선생은 9번 과거시험에 모두 장원급제 한 인물이다.  우리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며  또한 예언자적 능력도 뛰어나   임진왜란을 미리 예견하고    10만 양병설을 주장했으며 정치, 경제, 국방 등 모든 분야에 식견이 탁월한 정치가요,사상가이며  교육자였으며, 철학자였다.    그의 가문은 또 유명한 신사임당을 어머니로 둔 뿌리깊은 천재가문의 집안이었으며    한국판 제갈공명, 한국정신사의 큰 산맥, 성리학의 대가, 등 여러 가지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그러나 천재는 단명이라고 했던가  그는 타고난 건강이 좋지 않아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감했다.         이율곡  ------------------------------------------------------------   각종 최장기 기록들    1] 가장 오랫동안 벼슬에 있었던 인물은 ?   조선말엽의 정원용 으로서 20세에 급제하여 마지막 영의정을 지낼 때까지 72년간을 관직에 있었으며  그는 지극히 검소하여 청백리에 올라있기도 하다.     2] 호조판서를 최장기간 지냈던 인물은?   영의정 정태화의 후손인 정홍순으로 무려 11년간을 호조판서로 재임한 유일무이한 인물. 그는 재정문제에 대한 당대 제일인자의 명성을 날렸다.     3] 벼슬의 꽃인 홍문관 대제학을 최장기간 역임한 인물은?   당대의 대문장가 서거정[달성서씨]로 23년간을 재임했다.       4] 가장 여러대의 임금을 보좌한  사람은?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까지 7대의 임금을 보좌한 김세민[경주김씨]으로 70년동안 봉직하면서 7대의 임금을 보좌하는 대기록을 남겼다.     5] 조선시대 역사 인물중 가장 장수한 인물은?   여중추부사 권황[안동]과  죽림칠현의 한사람인 홍유손으로 모두 99세까지 살았다.     6] 가장 귀양살이를 오래한 사람은 누구일까?   다산 정약용으로 28세때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종교문제로 19년간 강진에 유배됨.     7] 예조판서에 최장기간 봉직한 사람은?        범옹 신숙주로 무려 15년간 예조판서에 재임하는 기록을 남겼다. 그는 뛰어난 어문학자로서 7개국어에 능통했으며 외교문서는  거의 신숙주의 손을 거쳤다.     8]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영의정에 가장 오래 재임한 인물은?   유명한 재상 황희정승으로 지속적으로 18년간을 재임하는 대기록을 남겼다 그는 조선 제일의 청백리 관료이자  가장 대표적인 신하이다.   ------------------------------------------------------------- 조선왕조 최다수의 기록들    1] 영의정을 가장 여러번 지낸 인물은?   최석정[전주최씨]으로 서 56세에 영의정이 된후 8번을 지냈다.  그는 소론의 영수이었다.     2] 이조판서를 가장 많이 역임한 사람은?   42세에  이조판서가 된 박종덕[반남박씨]으로서 무려 18번이나  이조판서에 올랐다.   관료들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관직으로서 임금의 절대적인  신임이 있어야 하는만큼 그는 공평한 인사에  최선을 다한 인물이다.     3] 당시 수도의 총책임자인 한성판윤[서울시장]을 최다 역임한 인물은?   이가우[연안이씨]로서 34세에 급제한후 열번을  한성판윤에 올랐다.     4] 판서[장관]직을 통털어 가장 많이 지낸 인물은?   박종래로서 이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등 5조판서를 돌아가며 총 15회 지냈다.    5] 사법기관의 장이었던 사헌부 수장을 최다 지냈던 인물은?   13년간 해마다 대사헌에 임명된 권상하[안동권씨]이며 송시열의 수제자이다.    6] 책을 가장 많이 저술한 인물은 누구일까?   지봉유설의 저자 이민구[전주이씨] 24세에 장원급제한 사람으로서 문장이 뛰어나고 저술을 좋아해서 무려 4000여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7] 선비의 표상이자 관리들의 자존심인 호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인물은?   유명한 추사체의 창시자  김정희.   그는 약 200개의 호를 지어썼다.  완당,추사,노과,등등...     8] 임금에게 벼슬을 그만두겠다고하는 사직상소를 가장많이 올린 사람은?   영의정이었던 정태화는 37번이나 사직상소[사직서]를 올려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 조선시대의 금속활자_ 이 자랑스러운 역사적 유품은_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세계최초의 금속활자.   조선왕조  최연소 기록들   1] 조선시대 통털어 최연소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은?   15세의 이건창으로  1866년[고종3] 강화도 별시문과에 합격했다. [김종서는 16세에 합격]     2] 최연소 장원급제자는 ?   17세의 박호[밀양박씨]는 1584년[선조17] 친시문과에  장원급제했다  [임진왜란때 전사]    3] 무과출신 급제자중 최연소 인물은?   17세의 남이[의령남씨]1457년[세조3] 무과에 장원급제. [유자광의 모함으로 주살됨]     4] 최연소로 세자에 책봉된 인물은?    영조의아들 사도세자는 2세에 세자책봉 되었으나 그만 뒤주속에 갖혀죽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사도세자는 10세에 결혼하여 최연소 결혼기록도 가지고 있다.    5] 최연소로 영의정이 된 인물은?   세종대왕의 손자인 이준[임영대군의아들]으로서 28세때 영의정에 특서됨.    6] 병조판서를 최연소로 역임한 인물은? 권람의 사위인 남이가 27세에 병조판서가 됨.     7] 홍문관의 수장인 대제학을 최연소로 역임한 인물은?   만인의 존경의 대상이었던 벼슬의꽃 홍문관 대제학에 한음 이덕형이 31세에 올랐다 ------------------------------------------------------------- 조선왕조 최초의 기록들   1] 성리학 중심의 사회에서 과감하게 탈피하여 최초로 기독교 신자가 된 사람은?   평북 의주 출신인 이성하로서 고종11년에 영국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한국최초의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2] 조선 최초의 천주교 세례교인은 누구인가?   정약용의 매부인 이승훈이 북경에서 그라몽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3] 조선조  최초로  정승이 된 사람은?   조선개국 일등공신 배극렴이다.   그는 이성계보다 10살이 많았는데 개국후 처음으로 좌정승[문하 좌시중]이 되었다.     4] 조선왕조 도읍지 한성의 최초 한성판윤 [서울시장]이 된 사람은?   성석린이 1395년에  초대 한성판윤부사로 임명되는 기록의 보유자가 됐다.     5] 과거급제를 하지 않고 영의정까지 오른 인물은?   황희정승의 아들 황수신이다. 그는 조상의 음덕으로 벼슬길에 오른 대표적인 인물이다.     6] 조선시대 최초로 일본에 대하여 상세하게 저술된 책은?        신숙주가  일본방문을 한후 저술한 [해동제국기]이다.  일본내막을 상세하게 적은 책으로 최초의 일본안내서가 되었다.     7] 족보는 고려시대에 이미 등장했으나,  현존하는 족보는    조선시대에 처음 만들어졌다는데.. 세종5년에 간행된  문화유씨의 영락보라고 하는데 불행이도 전하지 않으며 현존하는 최초의 족보는 1476년의 안동권씨 세보로 알려져 있다     - 옮겨온
499    가장 읽기 어려운 문학작품 20 댓글:  조회:4789  추천:0  2016-10-16
1위 율리시스 – 제임스 조이스  2위 음향과 분노 – 윌리엄 포크너 3위 피네간의 경야 – 제임스 조이스 4위 모비딕 – 허먼 멜빌 ㅡ(잘 알려진 번역가 김석희씨가 번역 하다가 그만 포기할까 생각했다는...) 5위 전쟁과 평화 – 레프 톨스토이  6위 백년 동안의 고독 – 가브리엘 마르케스  7위 죄와 벌 – 표도르 도스또예프스키 ㅡ(작가가 뭘로 글쓰는지 알아...근성이야 근성!) 8위 암흑의 핵심 – 조셉 콘라드  9위 중력의 무지개 – 토마스 핀천 10위 안나 카레니나 – 레프 톨스토이  11위 아틀라스 – 아인 랜드 12위 무한한 흥미 – 데이빗 포스터 월러스 13위 레미제라블 – 빅토르 위고  14위 카마라조프가의 형제들 – 표도르 도스또예프스키  15위 네이키드 런치 – 윌리엄 버로우 16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마르셀 프로스트 ㅡ(이 책 읽는다고 잃어버린 돈과 시간은 누가 찾아주는가?) 17위 압살롬, 압살롬! – 윌리엄 포크너  18위 장미의 이름 – 움베르토 에코  19위 롤리타 – 블라드미르 나바코프  20위 젊은 예술가의 초상 – 제임스 조이스   
498    20세기를 기록한 명저서 100 댓글:  조회:4182  추천:0  2016-10-16
[20세기를 기록한 책 100권]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성의 정치학'까지 20세기가 저물었다. 지난 세기는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격랑의 연속이었다. 과학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은 컴퓨터 혁명을 낳았고, 이 혁명의 적자인 인터넷은 지구촌을 촘촘한 그물로 뒤덮었다. 과학기술의 어두운 면도 남김없이 드러났다. 대량살상무기 앞에서 인류는 종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파시즘의 발호는 `이성의 인간'을 잔인한 살륙의 짐승으로 떨어뜨리기도 했다. 사회주의 실험은 한때 인류의 희망이었으나, 한 세기를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그러는 중에도 인간은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반성하고 모색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 모든 기억은 책으로 남았다. 책은 인류의 희망과 절망, 열정과 좌절을 고스란히 문자로 담았다. 문화부는 지난 한 세기를 특징짓는 책 100권을 골라 소략하게 한 시대를 스케치한다. 책 선정은 영국의 서평지 , 일간지 , 국내 서평지 등의 도움을 받아 자체 기준을 더해 이루어졌음을 밝힌다. ▶편집자 주    세기의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영화와 컴퓨터 등에 밀리는 느낌은 있었지만, 20세기 전체를 놓고 볼 때 문학은 역시 주도적인 장르였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와 독일, 러시아 등 풍부한 문화적 전통을 지닌 나라에서도 역작이 나왔지만, 특히 영국과 미국 등 영어권 국가에서 주요한 작품이 출현했다. 조이스의 와 엘리어트의 , 그리고 울프의 와 함께 프루스트의 는 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창작 방법을 시대의 주류로 만들었다.  로렌스의 과 나보코프의 는 성이라는 주제를 세기의 화두로 부각시켰으며, 스타인벡의 와 브레히트의 , 라이트의 , 아체베의 는 저항문학의 전통을 이어 갔다. 카프카의 과 베케트의 , 카뮈의 등이 삶의 부조리에 눈을 돌렸다면, 헉슬리의 와 오웰의 은 미래에 대한 어두운 전망을 내놓았다.  말로의 , 헤밍웨이의 , 레마르크의 , 조셉 헬러의 는 20세기가 무엇보다도 전쟁의 세기였으며, 20세기 인간의 조건은 전쟁과 죽음이라는 실존적 문제였음을 웅변했다.  오닐의 는 테네시 윌리엄스나 아서 밀러의 작품들과 함께 영어 희곡의 르네상스를 일구었으며, 만의 과 그라스의 , 파스테르나크의 와 솔제니친의 는 각각 독일과 러시아 문학의 전통을 계승했다.  케루악의 가 히피로 대표되는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알렸다면, 루쉰의 과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 루시디의 는 `변방'의 목소리를 `중심'을 향해 타전했다. 에코의 과 쿤데라의 은 이념과 독점적 진리의 해체라는 세기말 시대정신의 소설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 인류의 정신은 프로이트와 함께 열렸다. 1900년 태어난 은 인간이 의식의 존재임과 동시에 무의식의 존재임을 `폭로'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의식이란 기껏해야 무의식의 바다에 떠 있는 섬에 지나지 않았다. 자기 안에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또다른 자기가 있다는 깨달음은 인류를 혼란에 빠뜨렸다. 지성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프로이트는 생략할 수 없는 존재가 됐다. 소쉬르의 는 거대한 폭약을 내장한 지적 폭발물이었다. 언어가 기표와 기의의 임의적인 결합일 뿐이라는 지적, 기표들의 자율적인 체계야말로 언어의 본질이라는 지적은 언어학을 넘어 인문학 전반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구조주의는 소쉬르를 태반으로 삼아 자라난 20세기적 사유의 한 정점이었다. 레비-스트로스의 는 인류학의 영역에서 `구조'를 드러낸 본격 저작이었다. 구조주의적 사유의 물결은 푸코의 로, 푸코가 “20세기는 들뢰즈의 세기로 기록될 것”이라고 토로하게 만든 들뢰즈와 가타리의 로 이어졌다.  프랑스에서 `구조주의'가 잉태될 무렵 독일에서 후설은 `현상학'을 탄생시켰다. 현상학은 하이데거의 , 사르트르의 를 통해 실존주의라는 또다른 20세기적 풍경을 착색했다. 마르크스주의는 독일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으로 이어졌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 마르쿠제의 , 프롬의 , 아렌트의 , 하버마스의 은 비판이론의 토양에서 자란 다채로운 꽃이었다. 그 한편에서 루카치는 사회주의혁명의 열정으로 을 썼고, 포퍼는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에 대항해 을 썼으며, 보부아르는 으로 여성해방의 횃불을 올렸다. 서양이 이렇게 격동할 때 동양에선 펑유란이 를, 라다크리슈난이 를 각각 지성의 전당에 들였다.    사회주의 체제의 성립은 20세기 사건의 맨 윗자리에 놓일 격변이다. 그 선두에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이 있었다. 그가 32살에 내놓은 는 혁명가라면 놓아선 안 될 필독서였다. 그람시는 감옥 안에서 쓴 로 자본주의 국가체제가 안정된 상황에서 혁명의 가능성과 방략을 제시했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에서 자본축적의 정신적 동력을 발견한() 자본주의는 위기를 겪었으나 수정주의라는 형태로 살아남아 번창했다. 케인스의 은 그 계기가 된 저작이었다. 그보다 먼저 테일러의 은 자본주의적 노동통제방법을 과학의 이름으로 제출했다. 자본주의는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내부의 모순을 완화시키려 했다(베버리지의 ). 밀레트의 에 이르러 여성해방의 목소리는 한층 날카로워졌고, 킨지의 는 음지의 성을 양지로 끌어냈다.    20세기만큼 과학기술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아인슈타인은 과학혁명의 중심이자 극점이었다. 는 250년간 부동의 진리였던 뉴튼의 역학적 세계관을 뒤엎었다. 시간과 공간은 더이상 불변의 좌표가 되지 못했다. 쿤은 에서 과학적 세계관의 단절적 변화를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에 담아냈다. 러브록의 는 환경과 생태에 대한 관심의 힘을 받아 과학의 영역으로 입장했다. 호킹은 에서 천체물리학의 최신이론을 소개했다.  20세기는 간간이 위인을 낳기도 했다. 현대의 성자 간디는 에서 비폭력과 관용의 정신을, 말콤 엑스는 이슬람교에 기반한 흑인해방의 이념을, 남아공의 흑인 영웅 만델라는 피부색이 차별의 근거가 될 수 없음을 설파했다. 히틀러는 에서 장차 유럽을 피로 물들일 광기의 집념을 피력했다. 하우저의 , 곰브리치의 는 서양의 예술 역사를 알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고전으로 자리잡았다. ●20세기의 명저 100선  Ⅰ.문학  1.로렌스/아들과 연인/1913  2.루쉰/아큐정전/1921  3.엘리어트/황무지/1922  4.제임스 조이스/율리시즈/1922  5.토마스 만/마의 산/1924  6.카프카/심판/1925(?)  7.프루스트/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927  8.버지니아 울프/등대로/1927  9.헤밍웨이/무기여 잘 있거라/1929  10.레마르크/서부전선 이상 없다/1929  11.올더스 헉슬리/멋진 신세계/1932  12.앙드레 말로/인간의 조건/1933  13.스타인벡/분노의 포도/1939  14.리처드 라이트/토박이/1940  15.브레히트/억척어멈과 그 자식들/1941  16.카뮈/이방인/1942  17.조지 오웰/1984/1948  18.사뮈엘 베케트/고도를 기다리며/1952  19.나보코프/롤리타/1955  20.유진 오닐/밤으로의 긴 여로/1956  21.잭 케루악/길 위에서/1957  22.파스테르나크/의사 지바고/1957  23.치누아 아체베/무너져 내린다/1958  24.귄터 그라스/양철북/1959  25.조지프 헬러/캐치 22/1961  26.솔제니친/수용소 군도/1962  27.가르시아 마르케스/백년 동안의 고독/1967  28.움베르토 에코/장미의 이름/1980  29.밀란 쿤데라/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  30.샐먼 루시디/악마의 시/1989  Ⅱ.인문  1.지그문트 프로이트/꿈의 해석/1900  2.페르디낭 드 소쉬르/일반언어학강의/1916  3.막스 베버/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1920  4.라다크리슈난/인도철학사/1923~27  5.게오르그 루카치/역사와 계급의식/1923  6.마르틴 하이데거/존재와 시간/1927  7.펑유란/중국철학사/1930  8.아놀드 토인비/역사의 연구/1931~64  9.마오쩌둥/모순론/1937  10.허버트 마르쿠제/이성과 혁명/1941  11.장 폴 사르트르/존재와 무/1943  12.칼 포퍼/열린 사회와 그 적들/1945  13.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계몽의 변증법/1947  14.시몬 드 보부아르/제2의 성/1949  15.한나 아렌트/전체주의의 기원/1951  16.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철학적 탐구/1953  17.미르치아 엘리아데/성과 속/1957  18.에드워드 헬렛 카/역사란 무엇인가/1961  19.클로드 레비-스트로스/야생의 사고/1962  20.에릭 홉스봄/혁명의 시대/1962  21.에드문트 후설/현상학의 이념/1964  22.미셸 푸코/말과 사물/1966  23.노엄 촘스키/언어와 정신/1968  24.베르터 하이젠베르크/부분과 전체/1969  25.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안티오이디푸스/1972  26.에리히 프롬/소유냐 삶이냐/1976  27.에드워드 사이드/오리엔탈리즘/1978  28.페르낭 브로델/물질문명과 자본주의/1979  29.피에르 부르디외/구별짓기/1979  30.위르겐 하버마스/소통행위이론/1981  Ⅲ.사회  1.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무엇을 할 것인가/1902  2.프레드릭 윈슬로 테일러/과학적 관리법/1911  3.안토니오 그람시/옥중수고/1926~37  4.라인홀트 니버/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1932  5.존 메이너드 케인스/고용·이자·화폐 일반이론/1936  6.윌리엄 베버리지/사회보험과 관련 사업/1942  7.앙리 조르주 르페브르/현대세계의 일상성/1947  8.앨프리드 킨지/남성의 성행위/1948  9.데이비드 리스먼/고독한 군중/1950  10.조지프 슘페터/자본주의·사회주의·민주주의/1950  11.존 갤브레이스/미국의 자본주의/1951  12.다니엘 벨/이데올로기의 종언/1960  13.에드워드 톰슨/영국노동계급의 형성/1964  14.마루야마 마사오/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1964  15.마샬 맥루언/미디어의 이해/1964  16.케이트 밀레트/성의 정치학/1970  17.존 롤스/정의론/1971  18.이매뉴얼 월러스틴/세계체제론/1976  19.앨빈 토플러/제3의 물결/1980  20.폴 케네디/강대국의 흥망/1987  Ⅳ.과학  1.앨버트 아인슈타인/상대성원리/1918  2.노버트 비너/사이버네틱스/1948  3.조지프 니덤/중국의 과학과 문명/1954  4.토머스 쿤/과학혁명의 구조/1962  5.제임스 워트슨/유전자의 분자생물학/1965  6.제임스 러브록/가이아/1978  7.에드워드 윌슨/사회생물학/1980  8.칼 세이건/코스모스/1980  9.일리야 프리고진/혼돈으로부터의 질서/1984  10.스티븐 호킹/시간의 역사/1988  Ⅴ.예술·기타  1.헬렌 켈러/헬렌 켈러 자서전/1903  2.아돌프 히틀러/나의 투쟁/1926  3.마하트마 간디/자서전/1927~29  4.에드가 스노/중국의 붉은 별/1937  5.아놀트 하우저/문학과 예술의 사회사/1940~50  6.안네 프랑크/안네의 일기/1947  7.에른스트 한스 곰브리치/서양미술사/1948  8.말콤 엑스/말콤 엑스의 자서전/1966  9.에른스트 슈마허/작은 것이 아름답다/1975  10.넬슨 만델라/자유를 향한 긴 여정/1994     
497    립체파 화가 ㅡ 파블로 피카소 댓글:  조회:4604  추천:0  2016-10-16
피카소 일생---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y Picasso) -스페인 태생이며 프랑스에서 활동한 입체파 화가.  -1881년 10월 25일 에스파냐 말라가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의 아버지는 미술교사였다.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초급학교에서는 읽기와 쓰기를 어려워했고 졸업이 어려울 정도로 학습능력이 저조했지만 그림을 그리는 데에는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14세 때 바르셀로나로 이주하였는데, 이때부터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미술공부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출석을 거의 하지 않았고 학교 규칙과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학교를 그만두었다. 다시 마드리드에 있는 왕립미술학교에 다녔지만 결과는 같았다. 17세 때 다시 바르셀로나로 돌아왔으며 이 무렵부터 프랑스와 북유럽의 미술운동에서 많은 자극을 받고 특히 A.르누아르, H.툴루즈 로트레크, E.뭉크 등의 화법에 매료되어 이를 습득하려고 노력하였다. 1900년 그가 19세 때 처음으로 파리를 방문하였고, 다음 해 재차 방문하여 몽마르트르를 중심으로 자유로운 제작활동을 하고 있던 젊은 보헤미안의 무리에 합류하였다. 피카소는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등 인상파들의 작품을 접했으며 고갱의 원시주의, 고흐의 열정적 표현주의 등의 영향도 받았다. 당시 피카소는 프랑스어를 구사할 줄 몰랐고 세계적인 도시 파리의 모습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화려함의 이면에 가려진 빈곤과 비참함을 목격하였으며 질병과 성병이 가득한 도시의 가난을 두려워하였다. 자살을 결심하기도 하였으며 파리의 구석진 다락방에서 추위와 가난을 인내하며 지냈다. 하지만 당시의 요절한 화가들에 비하면 피카소는 단기간에 명성을 얻게 되었다. 20세에 첫 전시회를 열었고 그의 상황은 나아지기 시작하였다. 피카소는 파리의 비참한 생활상에 주목하여 거지와 가난한 가족 등을 그렸다. 청색이 주조를 이루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때를 피카소의 ‘청색시대(靑色時代)’라고 부른다. 이때 제작된 작품들은 하층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의 생활 참상과 고독감이 두드러졌다. 또한 파리에서 동고동락하면서 지낸 절친한 친구였던 카를로스 카사헤마스가 비극적인 자살을 함으로써 그의 충격은 더했다. 1903년에 제작된 《인생》은 당시 피카소의 혼란스러웠던 감정을 잘 표현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1904년 몽마르트르에 정주하면서부터는 연애를 하였고 그림의 색조가 청색에서 장밋빛 시대로 바뀌면서 색상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과거의 에스파냐예술, 카탈루냐지방의 중세조각, E.그레코, L.F.J.고야 등이 지닌 독특한 단순화와 엄격성이 가미되어 갔다. 테마는 작품 《공 위에서 묘기를 부리는 소녀》 《광대》 《곡예사가족》 등에서처럼 곡예사들을 묘사하는 일이 많아졌는데, 어릿광대나 곡예사는 무대 위의 모습이 아니고 그 생활의 이면을 파헤친 것이었다. 1905년 피카소는 파리에서 인정받는 화가가 되었다. 기욤 아폴리네르를 만났고 다음 해에는 H.마티스와 교유하였다. 그러나 작풍은 P.세잔의 형태관을 살려나가 점점 단순화되고, 1907년의 그의 대표작인《아비뇽의 처녀들》에 이르러서는 아프리카 흑인 조각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는 동시에 형태분석(形態分析)이 비로소 구체화하기 시작하였다. 조르쥬 브라크와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으로, 그와 함께 공동작업으로 입체주의 미술 양식을 창안하였다. 1909년에는 분석적 입체파, 1912년부터는 종합적 입체파시대에 들어갔다. 이 무렵 그는 이미 20세기 회화의 최대 거장이 되었고, 종합적 입체파수법을 1923년경까지 계속하면서 여러 가지 수법을 차례대로 전개하였는데, 활동범위도 J.콕토와 알게 되면서 무대장치를 담당하는 등 점점 확대되어 갔다. 1915년 《볼라르상(像)》과 같은 사실적인 초상을 그리고, 1920년부터는 《세 악사》 등 신고전주의를, 다시 1925년에는 제1회 쉬르레알리슴전(展)에 참가하였다. 또 1934년에는 에스파냐를 여행하여 투우를 소재로 그렸으며 1936년의 에스파냐내란 때는 인민전선을 지지하고, 다음 해 프랑코장군에 대한 적의와 증오를 시와 판화로 나타낸 연작 《프랑코의 꿈과 허언(虛言)》 및 전쟁의 비극과 잔학상을 초인적인 예리한 시각과 독자적 스타일로 그려낸 세기의 대벽화 《게르니카》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통곡하는 여인》도 이 무렵의 작품이며 이때부터 피카소 특유의 표현주의로 불리는 괴기한 표현법이 나타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해는 에스파냐에서 지냈으나 다음 해 독일군의 파리 침입 직후 파리로 돌아와 레지스탕스 지하운동 투사들과 교유하고, 1944년 종전 후는 프랑스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주로 남프랑스의 바닷가에서 생활하면서 그리스신화 등에서 모티프를 취하여 밝고 목가적 분위기마저 자아내는 독특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도기(陶器) 제작과 조각에도 정열을 쏟고 석판화의 제작도 많아 이 영역에서도 새로운 수법을 창조하였다. 그 후 6·25전쟁을 주제로 한 《한국에서의 학살》(1951), 《전쟁과 평화》(1952) 등의 대작을 제작하여, 현대미술의 리더로서 거장다운 활약을 하였다. 출처(파블로 피카소:두산백과) ===================================                                          - 파블로 피카소 그림 모음 -  죽음을 뚤어지게 들여다 보고 싶다.  -피카소의 臨終言-    First Communion, 1895-96, oil on canvas, Museo  Picasso, Barcelona. 103KB    Self Portrait, 1899-1900, charcoal on paper, Museo  Picasso, Barcelona. 181KB    Self Portrait: Yo Picasso, 1901,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117KB    La Vie (Life), 1903, oil on canvas, Cleveland Museum of  Art. 119KB    The Tragedy, 1903, oil on wood,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99KB    Woman with a Crow, 1904, charcoal, pastel, and  watercolor on paper, Toledo Museum of Art. 126KB    Tumblers (Mother and Son), 1905, gouache on canvas,  Staatsgalerie, Stuttgart. 155KB    Family of Saltimbanques, 1905,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158KB    La Toilette, 1906, oil on canvas, Albright Knox Art  Gallery, Buffalo, NY. 109KB    Self Portrait, 1907, oil on canvas, National Gallery,  Prague. 158KB    Les Demoiselles d'Avignon, 1907, Giraudon, Paris.  161KB    Guitar, 1913, charcoal, pencil, ink, and pasted paper.  126KB    The Lovers, 1923,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131KB    The Pipes of Pan, 1923, oil on canvas, Musee Picasso,  Paris. 118KB    Paul as Harlequin, 1924, oil on canvas, Musee Picasso,  Paris. 139KB    Studio with Plaster Head, 1925, oil on  canvas. 165KB    Woman with a Flower, 1932, oil on canvas,  Galerie Beyeler, Basle. 98KB    Nude Woman in a Red Armchair, 1932, Tate  Gallery, London. 78KB>    The Dream, 1932,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New York. 88KB    Interior with a Girl Drawing, 1935, oil on  canvas. 151KB    Portrait of Dora Maar, 1937, oil on canvas,  Musee Picasso, Paris. 139KB    Weeping Woman, 1937, Tate Gallery, London.  150KB    Gernica, detail, 1937, oil on canvas, Museo Nacional Reina Sofia, Madrid  149KB    Girl with a Boat (Maya Picasso), 1938, oil on  canvas, Rosengart Collection, Lucerne. 143KB    Jacqueline in the Studio, 1956, oil on  canvas, City of Lucerne. 125KB    Bust of a Woman with a Hat, 1962, colored linocut, private collection. 123KB       
496    세계인의 헛소리, 빗나간 예측들 모음 댓글:  조회:5501  추천:0  2016-10-16
오늘은 유명한 발명가들이 미래를 예상치 못하고 엉뚱한 예측을 한 것들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       "구멍을 파서 기름을 발굴한다고요? 진정 땅을 파서 기름을 발굴하겠다는 말이오? 당신은 미쳤고   - 1859년 에드윈 엘 드레이크가 기름을 발굴하겠다고 하자 사람들이 보인 반응     "복부, 가슴, 뇌는 현명하고 인도적인 외과 의사의 침입을 영원히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 1873년 빅토리아 여왕의 외과 주치의 존 에릭 에릭슨 경이 한말 "전화는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간주하기에는 결함이 너무 많다. 전화기는 아무 쓸모 없다.   -1876년 웨스턴 유니언사(1851년 처음 설립된 미국의 전기통신 회사)의 직원 책상 메모지에 적혀있던 내용     " 발명될 수 있는 것은 모두 발명 되었다."   - 1899년 미국 특허청 관리 찰스 H 듀얼이 한말     "비행기가 뉴욕에서 파리를 비행할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1909년 비행기의 공통 발명자 윌버 라이트가 한 말   "사람들은 종종 오늘날의 증기선과 같이 많은 승객을 싣고 대서양을 횡단할 거대한 비행물체를 꿈꾼다. 장장담하건대 그런 생각은 헛된 망상에 불과하다."   -1910년 천문학자 윌리엄 H 피커링이 한말       "비행기는 흥미로운 발명품이지만 군사용으로는 쓸모가 없다."   -프랑스 육군 원수 페르디낭 포슈가 한 말.     "주식은 앞으로도 영원히 최고 지수를 유지할 것이다."   -1929 예일 대학교 경제학 교수 어빙 피셔가 한 말(그 이듬해 월 스트리트의 주가가 폭락하는 사태 발생)         "텔레비전은 이론적으로나 기술적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경제적으로나 재정적으로는 불가능하다.   -발명가 리 디 포리스트가 한 말       "핵 에너지를 얻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러려면 원지를 우리 마음대로 분쇄할 수 있어야 한다."   -1932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한 말     " 컴퓨터를 세계 시장에 내 놓으면 많아야 다섯 대쯤 팔리지 않을까 싶다."   -1943년 IBM 선인 회장 토머스 J. 윗슨이 한 말   "사람들은 매일 밤 텔레비전을 보는데 식상하게 될 것이다."   -1946년 20세기 폭스사 대표 대릴 재넉이 한 말     "사람들은 기타 소리를 싫어 한다. 기타 음악은 점차 사라지는 중이다."   -1962년 음반회사 데카가 비틀즈의 데뷔 음반 발매 제안을 거절하며 한 말     "개인용 PC는 640KB 메모리면 충분하다."   -1981년 빌 게이츠가 한 말.   [출처] 세계인의 헛소리들, 빗나간 예측|작성자 어부  
495    가장 영향력 있는 현존 령적지도자 100 댓글:  조회:5724  추천:0  2016-10-16
Watkins Review, 가장 영향력 있는 현존 영적 지도자 100 명 발표                                                   (2011년기준) Watkins Review, 가장 영향력 있는 현존 영적 지도자 100 명 발표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심오한(Esoteric) 기관에서  현존하는 인물 중 영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있는 100인의 인물 발표   (런던=뉴스와이어) 2011년 03월 30일    -- Watkins Review는 영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있는 100인의 현존인물을 선정 발표하였다.  영적 지도자 100인 중에는 Dalai Lama (2위), Deepak Chopra (5위), Nelson Mandela (19위), 교황 (34위)이 포함되었으며 1위는 베스트 셀러 작가 Eckhart Tolle가 차지했다. 이번 봄 발행본에는11페이지에 걸쳐 이들 100명의 약력이 소개된다.  Watkins Review는 설립된 지118년이 된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영적 서점인 Watkins Book이 판매, 발행하는 잡지이다. 이 잡지는 달라이 라마를 칭송하였다는 이유로 판매 금지 처분된 중국을 제외한 세계 Apple App 스토어에서 구매할 수 있다.  타임지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을 매년 발표하고 있고, 포브스지는 부자 리스트와 유명인 리스트를 포함하여 여러 리스트를 발표한다. Watkins Review는 이 중요한 영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있는 100인의 생존인물 리스트의 발표가 너무나 늦었다고 생각한다.  Watkins Review는 영적 지도자 100명의 목록를 처음 소개하면서 자부심을 느끼며 이 기회에 현대 영성에 대한 토론이 활성화 되길 바란다.  선정 시 여러 요소를 고려하였으며 이중 주요 요소는 아래 3가지이다.  1) 현존 인물  2) 세계적으로 특별하면서도 영적으로 공헌을 한 인물  3) 구글에서 자주 검색되었으며 Nielsen Data에 자주 등장하며 블로그 공간에서 두루 조명 받은 인물  사람들이 구글에 투자하는 시간을 보면 매우 흥미롭다. 구글 상에서 인물 검색은 마치 일종의 디지털 투표를 하는 것과 같으며 얼마나 사람들이 그 인물을 찾았는지를 보여준다.     영적 100인 리스트의 요약  남성: 76% 여성: 24%  평균연령: 67 세  최고령: 104 세(Kyozan Joshu Sasaki)  최연소: 30 세(Jeff Foster)        1. Eckhart Tolle 에크 하르트 톨레, 2. Dalai Lama 달라이 라마 3. Dr Wayne W. Dyer 웨인 다이어 박사  4. Thich Nhat Hanh 틱낫한 5. Deepak Chopra 다픽 초프라  6. Louise L. Hay 루이즈 L. 헤이, 7. Paulo Coelho 파울로 코엘료 8. Oprah Winfrey 오프라 윈프리 9. Ken Wilber 켄 윌버, 10. Rhonda Byrne 론다 번, 11. James Redfield 제임스 레드필드 12. Neale Donald Walsch 닐 도날드 윌쉬 13. Doreen Virtue 도린 버츄 ~ 엔젤 테라피스트라고 하네요.. 특이하네요. 천사무당???? 14. Alejandro Jodorowsky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15. Richard Bach 리처드 바크, , , , 16. Alex Grey 알렉스 그레이, 영적 그림을 그립니다. 검색하면 별의 별 그림을 다 볼 수 있습니다. 17. Byron Katie 바이런 케이티, , , 18. Masaru Emoto 마사루 에모토, 19. Nelson Mandela 넬슨 만델라, 20. Bernie Siegel 버니 시겔,  21. Caroline Myss 캐롤린 미스, 22. Brian Weiss 브라이언 와이스, , , 23. Mantak Chia 만탁 치아,   24. John Gray 존 그레이, 25. Gregg Braden 그렉 브레이든, ,   26. Stephen R. Covey 스티븐 코비, , 27. Marianne Williamson 메리엔 윌리엄스, 전도사이자 선교사 28. Desmond Tutu 데스몬드 투투, 주교 29. Mata Amritanandamayi 마타 암리타난다마이, 인도의 안아주는 성녀 30. Philip Berg , 31. Ervin Laszlo 어빈 라즐로, , 32. Andrew Harvey 앤드류 하비, 33. Don Miguel Ruiz 돈 미겔 루이스, ,                                              , 34. Joseph Alois Ratzinger 요제프 알로이그 라칭거 교황, 베네딕토 16세 35. Krishna Das 크리슈나 다스, 명상음악가 36. Drunvalo Melchizedek 드룬발로 멜기세덱,  지축이동설 37. Sai Baba 사스야 사이 바바, 38. Jack Kornfield 잭 콘필드, , 39. Pema Chodron 페마 초드론, 승려 40. T.K.V. Desikachar 요기 41. Esther & Jerry Hicks  에스더 힉스와 제리 힉스, 42. Dan Brown 댄 브라운, ,, ,, 43. Z'ev Ben Shimon Halevi 카발리스트, 위키(영문) 44. Diana Cooper 다이아나 쿠퍼, 힐러, 명상음악가 45. Ram Dass 람 다스 (님 까롤리 바바의 제자), , 46. Andrew Weil 엔드류 와일 아기젖병이 나온다?? 통합의학을 실천한다고 한다. 네이버백과사전 47. Satya Narayan Goenka 샤트야 나라얀 고엔카, 위빠사나 명상의 대가. 담마를 전파하고 있다. 담마코리아에서 고엔카의 위빠사나 열흘수행을 할 수 있다. 48. Jon Kabat-Zinn 존 카밧 진 MBSR의 창시자. Mindfulness Meditaion for Pain Relief 49. Alan Moore 앨런 무어 만화가, , , 50. Dan Millman 댄 밀먼 이 저서는 영화로도 출시되었다. 51. Bruce Lipton 브루스 립톤, 과학자, 과학과 영성 52. Peter Kingsley  피터 킹슬리 53. Karen Armstrong 카렌 암스트롱, 영화인 54. Judy Hall 주디 홀 55. Colin Wilson 콜린 윌슨 , 56. Joscelyn Godwin 대학교수, 카발리스트, 이름이 신의 승리라니.. 아이러니다. 57. James Lovelock 제임스 러브록, 가이아 이론의 창시자, , 58. Satish Kumar 사타쉬 쿠마르, 59. Shakti Gawain 샥티 거웨인, 60. Elaine Pagels 일레인 페이절스, , 61. Kyozan Joshu Sasaki 사사키 일본 승려 62. Gary Zukav 게리 주커브 , , 63. Erich Von Daniken 에리히 폰 다니켄, 스위스의 저자 64. David Deida  65. Oberto Airaudi ‘Falcon’  66. Stuart Wilde  스튜어트 와일드 67. John Bradshaw  존 브래드 쇼 68. Jeff Foster 제프 포스터 69. Patrick Holford  패트릭 홀도프  최적 영양 연구소, 런던의 최적조건 영양회 의 창시자  70. Andrew Cohen 엔드류 코헨 71. Vladimir Megre 블라디미르 72. Thomas Cleary 토마스 클레어 73. Daniel Pinchbeck  다니엘 핀치백 74. Jonathan Goldman 조나단 골드만 홈페이지 치유의소리 75. Sonia Choquette 소니아  76. Seyyed Hossein Nasr 호세인 77. Mother Meera 마더 미라 홈페이지 78. Barefoot Doctor 맨발의의사 79. Richard Bandler 리처드밴더 80. Robert Bly 로버트 Bly  (시인) 81. Adyashanti  아댜 산티 홈페이지 82. Sogyal Rinpoche 송갈 린포체 83. Li Hongzhi  리홍지 파륜궁창시자 84. Sri Bhagavan 스리 바가반 85. Rupert Sheldrake 루퍼트 혹부리 오리 86. John & Caitlin Matthews 케이틀린 & 존 매튜스 87. Chogyal Namkhai Norbu Chogyal Namkhai Norbu 88. Kenneth Grant 케네스 그렌트, 기사 89. Stanislav Grof 스타니슬라프 90. James Hillman 제임스힐맨 91. Clarissa Pinkola Estes Clarissa Pinkola Estes  92. Stephen Levine 스티븐 레빈 (작가) 93. Candace Pert Candace Pert 94. Barbara Ann Brennan 바바라 앤 브랜넌  95. Coleman Barks 콜맨박카스 (시인) 96. Robert Thurman 로버트 트루만 97. B.K.S Iyengar   B.K.S Iyengar 98. William Bloom 윌리엄 블룸 99. Lynne McTaggart  린 막타거트 100. Marion Woodman 마리온 우드맨   Watkins Books 는 1893년 런던에서 설립되었으며, 현존하는 영국의 비밀스런 서점 중 가장 오래된 대형 서점이다.  www.watkinsbooks.com. 19-21 Cecil Court, London, UK, WC2N 4EZ 출처: Watkins Books 홈페이지: http://www.watkinsbooks.com Watkins Books 소개 Watkins Books는 1893년 런던에서 설립된 대형 서점이다.  
494    100원짜리 동전보다 좀 큰 남생이 새 가족 늘다... 댓글:  조회:4445  추천:0  2016-10-16
국립공원관리공단, 월출산 일대서 남생이 복원 남획·서식지 파괴, 개체수 급감…증식 복원 필요 암컷 1마리 지난 5월 새끼 11마리 자연부화 【세종=뉴시스】백영미 기자 = 환경부 산하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월출산국립공원 일대에서 멸종위기 야생생물2급인 남생이 자연부화에 성공했다고 16일 밝혔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2011년부터 남생이 증식 복원을 위한 기초연구를 진행했다. 남생이가 생활하는데 필요한 최적의 환경조건을 갖춘 친환경 대체 서식지를 월출산 일대에 조성했다. 【세종=뉴시스】백영미 기자 = 환경부 산하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월출산국립공원 일대에서 멸종위기 야생생물2급인 남생이 자연부화에 성공했다고 16일 밝혔다. (사진=국립공원관리공단 제공)  【세종=뉴시스】백영미 기자 = 환경부 산하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월출산국립공원 일대에서 멸종위기 야생생물2급인 남생이 자연부화에 성공했다고 16일 밝혔다. (사진=국립공원관리공단 제공)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유전자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국내산 남생이 9마리를 확보했다. 이중 지난해 확보한 암컷 2마리를 월출산 내 대체 서식지에서 동면과 출산을 유도한 결과 올해 5월 남생이 암컷 1마리가 새끼 11마리를 낳았다. 2012년부터 올해까지 국립공원연구원에서 인공부화한 남생이 13마리까지 합치면 현재까지 총 24마리를 증식한 셈이다. 자연부화에 성공한 남생이 11마리는 평균 크기가 100원짜리 동전보다 조금 큰 약 3.4cm 정도로 몸무게는 약 10~14g이다. 남생이는 자라와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내륙 거북류다. 등갑 길이는 25~45㎝ 정도이며, 등갑은 흑색, 흑갈색, 암갈색, 황갈색 등 다양한 색깔을 띠고 있다. 잡식성으로 수초를 비롯해 곤충류, 다슬기와 같은 복족류, 어류의 사체 등을 먹는다. 4월부터 활동을 시작하고 11월에 동면한다. 남생이 주요 서식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의 저수지, 연못 등으로 중국, 일본, 대만에도 분포한다. 그릇된 보신주의로 인한 남획과 서식지 파괴, 외래종인 붉은귀거북과의 경쟁 등으로 개체수가 급격히 줄었다. 최종관 국립공원관리공단 자원보전처장은 "남생이 복원기술 개발을 지속할 것"이라며 "증식한 남생이 방사, 어미개체 관리, 서식지 보전 등 체계적인 증식 복원사업을 꾸준히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493    고향문화소식 ㅡ "미니영화" 눈을 뜨다... 댓글:  조회:6149  추천:0  2016-10-14
연변에 미니영화 제작붐이 부나? 편집/기자: [ 김태국 ]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6-10-13 12:43:22 ]  손룡호회장이 미니영화 “우리의 아리랑꽃” 제작과정을 설명하고있다. 미니영화가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발달한 요즘 각별히 인기를 끈다. 편폭이 길지 않으면서도 사회의 이모저모를 예술적으로 다룬 미니영화는 갈수록 많은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 개혁개방의 전초지로 불리우는 연변에서도 살며시 잉태되여 그 존재를 나타내고 있다. 10월 12일 오후, 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에서 주최한 “영화와 기업인의 만남” 좌담회가 대주호텔 7층에서 개최되여 영화애호가들과 동영상제작으로 창업을 꿈꾸는 젊은이들 그리고 미니영화를 통한 기업(제품)홍보에 흥취를 가진 기업인들의 관심을 모았다. 영화제작과 감상을 주제로 하고 주변의 인물과 사건을 미니영화로 제작하여 인터넷에 올리거나 위챗에 공유하여 연변을 알리고 연변의 기업을 홍보한다는 취지하에 진행된 이번 좌담회에서는 이 협회에서 최근에 제작한 미니영화 “우리의 아리랑꽃”과 제작 마무리단계에 있는 미니영화 “그녀의 부탁”을 관람하고 제작진과 배우, 참가자들이 좌담을 진행하였다. 미니영화 “아리랑꽃”은 6분가량의 분량으로 제작되였다. 최근에 진행된 제5회 전국소수민족문예공연에 길림성을 대표하여 무대에 오른 연변가무단의 무극 “아리랑꽃”을 응원하는 84세 할머니의 이야기를 주선으로 주변사람들의 동참과 최정상의 자리에 오른 희열, 그리고 금상을 수상한 기쁨을 함께 하는 장면으로 제작되였는데 참가자들의 보편적인 긍정을 받았다. 미니영화 “그녀의 부탁”은 25분가량의 분량으로 제작 마무리단계에 있는 작품이다. 어려서 소꿉친구였던 수남이, 순희와 창석이의 이야기를 주선으로 제작된 영화는 의리가 있으나 하는 일마다 배배 탈려 10만원의 고리대에 눌려 마작판에 숨어 살던 수남이가 고리대금업자들에게 쫓기우다가 우연히 순희를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창석이의 아이를 임신했으나 창석이 부모의 반대로 홀로 아이를 키우며 살던 순희는 한국에서 십여년간 힘들게 일하고 불치의 병에 걸린다. 비극적인 만남을 계기로 수남이는 기꺼이 순희가 남겨두고 간 아들의 아버지로 된다. 좌담회 한 장면. 이 협회 회장 손룡호씨는 좌담회에서 지난 5개월간 이 협회에서는 10여부의 미니영화를 제작하여 텅쒼과 위챗계정을 통해 관중들에게 선보였는데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소개하였다. 그는 그러나 단순한 열정만으로 제작진과 배우진 유치는 물론 좋은 작품 제작에 곤난이 첩첩하다고 하면서 많은 기업인들의 동참과 미니영화에 대한 관심과 홍보활동이 매우 수요된다고 표시하였다. 손회장에 따르면 이 협회에는 현재 70여명의 회원이 있으며 오는 28일에 성립의식을 가지고 정식으로 협회활동을 개시하게 된다.
492    [록색문학평화주의자]= 明太여 돌아오라... 댓글:  조회:4569  추천:0  2016-10-12
  국민생선 명태여 돌아오라     김병곤            ‘검푸른 바다, 바다 밑에서/줄지어 떼 지어 찬물을 호흡하고/길이나 대구리가 클 대로 컸을 때/…/어떤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살기 좋다는 원산 구경이나 한 후/에지프트의 왕자처럼 미이라가 됐을 때/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밤늦게 시를 쓰다가 쇠주를 마실 때/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짝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내 이름만 남아 있으리라/헛 명~태, 명태라고/헛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양명문 시인이 쓰고 변훈이 곡을 붙인 가곡 ‘명태’는 어류를 찬양한 대표 노래다. 명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으뜸으로 꼽는 국민생선이다. 그래서 가곡까지 만들어졌는지 모른다. 더구나 명태처럼 이름이 많은 생선도 없다.  잡히는 계절과 잡는 방법, 장소, 크기에 따라 다르다. 봄에는 춘태(春太), 가을에는 추태(秋太), 겨울에는 동태(冬太), 유자망으로 잡는 그물태, 낚시로 잡는 낚시태, 원양어선에서 잡힌 원양태, 근해에서 잡힌 지방태, 함경도 연안에서 잡힌 왜태(倭太), 강원도에서 나는 강태(江太), 강원도 고성 간성에서 잡은 것은 간태(桿太)다.     갓 잡은 것은 생태, 얼린 것은 동태(凍太), 건조하면 북어, 반쯤 말리면 코다리, 얼리고 녹였다를 반복해서 말린 것은 황태다. 눈보라를 맞으며 덕장에서 3~4개월 건조한 황태도 이름이 제각각이다.  건조장에서 황태의 품격이 결정된다. 하얗게 말라버린 백태(白苔), 마르지 못하고 검어지면 먹태, 날씨가 따뜻해 물러지면 찐태, 흠집이 나면 흠태, 머리는 없고 몸만 있으면 무두태, 눈밭으로 떨어지면 낙태, 알맹이가 없는 통태 등등 다양한 이름을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명태새끼다 아니다”로 분분한 2~3년생 명태는 노가리란 이름이 붙어 있다. 또한 초겨울 도루묵을 뒤쫓아 오다 잡히면 은어받이, 동지 전후에 잡히면 동지받이, 봄철 마지막 어기에 잡힌 막물태, 산란 뒤 살은 없고 뼈만 남은 것을 꺾태라 부른다. 이밖에 잡는 달에 따라 일태, 이태, 삼태 등등이 있다. 명태는 머리부터 꼬리까지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생선이다. 내장은 창란 젓갈로 머리는 귀세미 젓갈로 알은 명란 젓갈로 담가 먹는다. 그래서 명태는 우리 식단에서 가장 친근한 생선이다. 이처럼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명태에 또 하나의 이름이 붙여졌다.  요즘은 바로 금태, 또는 황금태로 불리어진다. 해양수산부가 명태를 살려오면 50만원을 주겠다며 최근 어획량이 급격히 줄어든 동해산 국산 명태 되살리기에 나선 것이다. 최근 해양수산부 업무보고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동해안에서 왜 명태가 사라졌는지, 또 되살릴 방법은 없는지’를 물으면서 중요 의제로 부상한 것이다.  따라서 해양수산부는 과도한 어획과 수온이 변한 탓에 지금은 거의 보이지 않는 명태를 되살리기 위한 ‘명태 살리기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이에 앞서 지난달 국립수산과학원과 동해수산연구소, 강원도 해양심층수 수산자원센터와 어업인이 협력체계를 구축하기로 하고 오호츠크해 명태수정란 확보 방안을 논의했다.  명태 되살리기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국민들의 식탁에서 동해안 명태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어종 중 하나인 명태가 하루 빨리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491    우리 말을 풍성하게 하는 생선 = 明太 댓글:  조회:5247  추천:0  2016-10-12
명태는 한류성(寒流性) 생선으로 등은 푸른 갈색, 배는 은빛의 흰색을 띤다. 지금 우리 바다에서는 잡히지 않는 어종(魚種)이 되었다. 엘니뇨 등 여러 이유가 따른다. 예전 겨울 동해안 고성의 거진항 등에서는 개도 명태를 물고 다녔다고 한다. 이 아름다운 물고기에 대한 추억은 북쪽 먼 바다에서 잡혀온 명태가 있어 아직은 사위지 않았다.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노래 되고 시(詩)가 되고/ 이야기 되고 안주 되고/ 내가 되고 니가 되고/ 그대 너무 아름다워요/ 그대 너무 부드러워요/ 그대 너무 맛이 있어요….”  가수 강산에도 왕년에 일세(一世)를 풍미(風靡)했던 ‘그 노래’를 좋아했나 보다. 이런 노랫말의 강산에의 ‘명태’(2002년)는 오현명 ‘명태’(양명문 작사, 변훈 작곡)의 한 대목을 살짝 들려준 다음 경쾌하게 시작한다. 그리고는 “명태 명태라고/ 흠흐흐흐 쯔쯔쯔/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하고 그 노래 말미를 아예 빌려 끝을 맺는다. 다음은 그 노래 가사 일부다.  “…내 사랑하는 짝들과/ 노상 꼬리치며 춤추며 밀려다니다가/ 어떤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살기 좋다는 원산 구경이나 한 후/ 에집프트(이집트)의 왕처럼 미라가 됐을 때/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쇠주를 마실 때/ 카∼/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짝짝 찢어지어 내 이 몸은 없어질지라도…”  명태덕장(건조장)의 풍경. 명태가 잘 마르면 홍삼처럼 귀한 황태가 되고 나머지는 먹태, 백태, 깡태가 된다.  강원도 고성군 제공   오현명(1924∼2009)의 낙낙한 음색이 전쟁 통인 1950년대 초부터 밤낮없이 쇠주병 많이 자빠뜨렸다. 먹을 것 부족하던 그때, 북어는 인간 심성(心性)이 만드는 가장 아름다운 산물인 시의 재료도 됐던가 보다. 노가리나 코다리는 지금도 주안상(酒案床)의 주역(主役) 또는 중요한 조연(助演)이다. 첫 추위로 어깨 움츠리는 때면 으레 생태탕 그리워진다. 강원도 고성군은 해마다 이 무렵이면 명태잔치를 연다. 1999년에 처음 시작했다 한다. 명태가 이 바다에서 덜 잡히기 시작해 걱정이 커질 무렵부터 열린, 명태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을 담은 이벤트였다. ‘다시 돌아오라’는 염원은 수산업계의 여러 노력으로 뒷받침되고 있다. 명태는 이름이 유달리 많다. 우리가 명태를 좋아했다는 증거다. 또 흔하도록 많이 잡혀 싸게 먹을 수 있었다. 먹는 방법이나 가공법이 다양했고, 너나없이 좋아했던 까닭이기도 하다. 팔도의 제사상에도 안 빠졌다. 그 외에도 많다. 김희태 전라남도 문화재전문위원은 손가락 여러 번 꼽으며 연신 그 이유를 설명한다. 가히 국민생선이라 할만하다.  사물 즉 일(事)과 물건(物)의 이름에는 이유가 있다. 이유나 유래(由來)를 찾기 힘든 사물도 있지만, 실은 우리가 그 대목을 잊었기 때문이다. 이 낱낱의 이름은 역사의 흔적을 지닌다. 인간은 살아봐야 기껏 백년이나, 역사는 길다. 그 이름들은 마을 어귀 수백년 느티나무처럼 오래 인간세상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천년 넘은 이름도 흔하다.  조선 말 문신 이유원(1814∼1888)은 ‘임하필기’(林下筆記)에서 ‘명천(明川)의 태(太)씨가 잡았다고 땅이름과 어부의 성을 따 명태라고 했다’고 적었다. 허나 이를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길 것만은 아니다. 명태 간(肝)을 먹어 눈이 밝아진다고 해서, 또는 간의 기름으로 등불 밝혀 밝을 명(明)자 든 이름을 갖게 됐다는 얘기도 많다. 생것을 명태, 말린 것을 북어라 한다는 기록과 함께 ‘무태어(無泰魚)’나 ‘명태어’라는 이름도 나온다. 영어 이름은 ‘폴럭’(pollack)이다. 많이 잡히는 곳 이름을 넣어 ‘알래스카 폴럭’이라고도 부르는데 요즘 우리가 먹는 명태는 알래스카 바다에서 온 녀석들이 많단다.  고성명태축제의 명태잡이소리 공연(위 사진)과 축제 행사장 모습. 매년 10월 중하순에 열리는 행사다.  강원도 고성군 제공 모양이나 성질에 따라 생태(生太), 동태(凍太), 북어(北魚), 황태(黃太), 코다리 등으로 불린다. 싱싱한 녀석은 생태, 동태는 얼린 것, 북어(건태)는 말린 것이다. 황태는 한 겨울 큰 덕장(건조장)에서 얼고 녹기를 반복해 노랗게 변한 북어다. 더덕 같다고 더덕북어라고도 한다. 코다리는 내장과 아가미를 빼고 네다섯 마리를 한 코에 꿰어 꾸덕꾸덕 반쯤 말린 것이다. 어린 명태 즉 애기태가 주당들에게 친근한 이름 노가리다. 그물로 잡아 망태(網太), 낚시에 걸린 조태(釣太)라는 이름도 있다. 인삼으로 치면 홍삼 격인 귀한 황태로의 변신 과정에서 ‘낙오자’가 된 명태들에게도 이름이 있다. 푹한 날씨로 풀려버리면 먹태(흑태), 얼어서 하얗게 마르면 백태, 너무 딱딱하게 말라버리면 깡태다. 이밖에도 여러 이름들이 줄섰다. 우리말을 풍성하게 하는 생선이기도 한 것이다.   머리 꼬리 살 내장 다 기찬 먹거리다. 살코기와 곤이(鯤鮞·물고기 배 속의 알)는 국이나 찌개, 알과 창자는 명란젓 창난젓이 된다. 생태찌개 생태매운탕 황태구이 황태찜 북엇국 북어무침 등이 모두 명태요리의 한 가족이다. 명태와 함께 넙치 돔 다랑어 상어 고래 대구 등의 간에서 얻은 간유(肝油)는 ‘눈의 보약’이다. 버리는 게 없어 인간에 널리 이롭다. 우리 마음인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실천하는 물고기여서 우리 겨레와 더 기쁜 인연인가보다. 명태 복원 프로젝트의 좋은 성과를 기대한다. 강상헌 언론인·우리글진흥원 원장  ■사족(蛇足)    밝을 명(明)자의 옛 (그림)글자 중 날 日자와 달 月의 합체인 글자(왼쪽)과 밝을 명(明)자의 옛 (그림)글자 중 창문 모양 경(冏)자와 달 月자의 합체인 글자. 밝을 명(明)자는 한자의 구성 원리 중 회의(會意)의 사례로 제시되는 글자다. 뜻(意)이 모인(會) 것이 회의다. 빛을 내는 해(日)와 달(月)이 모여 ‘밝다’는 뜻을 만들었다. 지금 글자도 그렇지만, 3000년 전의 갑골문을 봐도 해와 달이 모인 것임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일부 옛 문자 중에는 창문(窓門) 모양인 경(冏)자의 옛날 글자(그림)와 달 월(月)자의 합체로 보이는 그림(글자)도 많다. 지금 冏자는 明자처럼 ‘밝다’는 뜻으로 쓰인다. 창을 통해 바라보이는 달의 이미지에서 ‘밝다’는 뜻이 빚어졌을 것으로도 보는 것이다.    日 月 冏 등 명(明)자의 바탕(뜻)을 이룬 글자들은 그림이다. 물체의 모양을 그린 상형(象形)인 것이다. 한자 구성의 다음 개념인 지사(指事)는 일(상태나 동작·事)을 가리키는(손가락 지·指) 그림이다. 태(太)처럼 큰 대(大) 자로 선 사람의 모습에다 점을 찍어 만든 ‘크다’는 뜻의 글자가 지사의 사례다. 이런 그림들이 모이거나 뜻이 확대되어 한자의 체계를 이룬다. [ⓒ 세계일보  명태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수산물로 가공방법,  포획방법 등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고 합니다.  얼리지 않은 것을 생태,  말려서 수분이 말끔히 빠진 것을 북어,  반쯤 말린 것을 코다리,  겨울철에 잡아 얼린 것을 동태라고 부르며,  산란기 중에 잡은 명태를 얼리고 말리는 과정을 반복해 가공한 것을 황태라고 부른답니다.  또한 명태의 새끼를 노가리라고 하며,  명란젓을 만들 때 명태의 알을 사용한답니다. 명태에 대해서 좀더 알아보면... 우리나라에는 대구과 어류에 모두 4종이 알려져 있는데 대구와 명태가 여기에 속한다고 합니다. 대구는 명태와 달리 아래턱에 한 개의 긴 수염이 있으며, 가슴지느러미가 제1등지느러미 기저의 뒤끝에 달하지 못하며, 위턱이 머리의 앞쪽으로 튀어나와 있는 점에서 잘 구별된다고 합니다. 생김새는 대구와 비슷하지만 보다 홀쭉하고 길쭉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명태입니다. 몸 전체에 특이한 무늬가 덮여있고 머리가 큰 편입니다. 눈이 크고 아래턱은 위턱에 비해 앞으로 튀어나와 있습니다. 암컷과 수컷은 형태상으로 거의 차이가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보통 수온이 10~12℃ 정도가 되는 북태평양 지역의 대륙사면 근처에서 살고 있으며 어린 명태는 보다 차가운 수온에도 견딜 수 있어서 온도가 1~6℃ 정도인 더 깊은 바다에서 살기 때문에 연령에 따라 서식 장소에도 다소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3~5살 사이에 무리를 지어 짝짓기를 시작하며 암컷이 알을 낳은 뒤에 수컷이 정자를 뿌려 수정시키는 체외수정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이러한 산란과정은 90~200m 깊이의 바다에서 1년 중 한 달간 벌어진다고 합니다. 암컷은 약 10~100만 개의 알을 낳고, 이 알은 바닷물에 떠다니다 9~28일이 지난 뒤에 부화한다고 합니다. 치어기에는 주로 밤에 수면 위로 떠올라 플랑크톤을 먹고, 성체가 되면 작은 갑각류나 물고기를 잡아먹고 산답니다. 무리를 지어서 이동하고 생활하며, 집단이 커진 경우에는 종종 서로를 잡아먹기도 한다고 합니다. 수명은 약 12~16년 정도로, 가장 오래 산 경우 31년까지 살았다는 보고가 있다고 합니다.  러시아를 비롯한 일본, 우리나라에서 주요 수산물로 다양하게 이용되고 있습니다.  생태찌개, 생태매운탕, 황태구이, 황태찜, 북어국, 북어무침, 술안주로 좋은 마른 노가리 등으로 다양하게 조리되는 생선입니다.  단백질이 풍부하며, 알과 창자는 각각 명란젓, 창란젓으로 이용됩니다. (백과사전 자료)        
1980년대 초 15만톤에서 2008년 `0'…남획에 기후변화 겹쳐 원양에서도 자원보호 이유로 조업중단 잇따라…어획량 늘어난 대구 연구 필요    » 강원도 고성의 한 어민이 몇년 만에 잡힌 명태를 들어보이며 기뻐하고 있다. 사진=김봉규 기자   ■ 서민의 밥상을 풍성하게 해주었던 명태   손발이 꽁꽁 얼 것 같은 찬바람이 부는 겨울, 직장 동료들과 퇴근길에 소주 한잔하러 주점가를 기웃거리다 보면 우후죽순 생겨난 동태 전문점을 볼 수 있다. 어린 시절 겨우내 질리도록 밥상 위에 오르던 동태, 그 생선을 사러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가 보면 꽁꽁 얼어붙은 동태 상자를 바닥에 내리쳐 떼어내던 풍경이 아련하게 떠올라 주저없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게 된다.    표층에 사는 고등어는 떠 있기 위하여 근육에 지방을 축적하여 비린내도 나고 기름기가 많아 찌개로는 적합하지 않지만, 명태는 바닥 가까이에 살기 때문에 근육에 지방이 적어 찌개를 끓이면 비린내도 나지 않고 시원하여 ‘동태 찌개’나 ‘생태 찌개’로 인기가 있다.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생태 찌개를 끓이면 아버지께는 내장을 따로 덜어 주셨다. 그땐 맛있는 살을 우리 어린 것들에게 먹이려나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커서 내장을 먹어 보고는 어머니의 속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게 그렇게 맛있다는 것을.   » 생태찌개 사진=김순경 그런가 하면, 밤늦게 만취되어 들어와 횡설수설 떠들다 그냥 자버린 남편을 위해 아침에 해장국을 끓이려고 온갖 독설을 퍼부으며 방망이로 북어를 작신 두들겨 패는 어머니의 모습도 한편의 기억에 있다. 그 시대에 술을 마신 다음날 숙취에는 ‘북엇국’이 최고였다.   얼리지 않고 말리거나, 얼렸더라도 빨리 말리면 물이 빠지며 근육 사이가 오그라들어 돌처럼 딱딱한 북어가 된다. 이 북어로 해장국을 끓이려면 방망이로 두드려 살을 부드럽게 만들어야 한다. 아침부터 해장국을 끓여야 하는 아내의 심사가 좋을 리 없으니 남편 대신 북어를 패는 것도 좋은 스트레스 해소법임에 틀림없다.   술 마신 다음날 북엇국을 끓이는 아내는 남편에 대한 원망도 풀리고, 남편은 아내의 사랑을 느낄 수 있어 북엇국은 세대간 이어져야 할 좋은 전통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요즘은 술먹은 다음날 아침 식탁에도 아내는 커피 한 잔과 빵 한 조각을 내놓는다.    명태포는 우리나라에선 제사상에 빠져서는 안되는 음식이다. 명태를 예로부터 가장 많이 먹어왔거나, 말려두고 연중 먹을 수 있는 보편성 때문만은 아니다. 신명에게 바치는 희생음식은 어느 한 군데 버려서는 안된다는 것이 동서고금의 불문율이요, 이 조건에 가장 잘 부합되는 것이 명태이기 때문이다.   명태는 어느 것 하나 버리지 않고 다 먹을 수 있는 생선이다. 동강낸 살집과 말랑말랑한 간은 찌개를 끓이고 내장은 창란젓갈, 알은 명란젓갈, 아가미는 귀세미젓갈을 담가 먹으며, 눈알은 구워 술안주로 한다. 여름에 입 맛없을 때는 찬밥에 물 말아 고추에 이 젓갈을 올려 한입 베어 물면 그 맛이 일품이다.   이외에도 육질이 담백하여 맛살이나 어묵의 재료로 이용된다. 지금도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모 수산회사의 ‘게맛살’은 게 살이 아니고 명태 살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비밀이다.   » 명란젓 사진=이정용 기자   ■ 북태, 더덕북, 코다리, 찐태, 깡태, 파태, 금태, 먹태, 무두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애용하는 생선중 하나가 아마 명태일 것이다. 그래서 명태는 생활 곳곳에서 만나게 된다. 굿판과 제삿상은 물론이고, 대문 문설주 위에 복 달라고 매달아 놓는 게 명태이고, 새 차 사서 사고 나지 말라고 자동차 보닛 안에 넣는 게 명태이다.   그런가 하면 노랫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매혹적인 저음의 성악가 바리톤 오현명이 양명문의 시를 노래로 부른 ‘명태’가 그것이다. 그런가하면 요즘 가수 강산에는 특유의 자기 풍으로 노래를 불렀으니 그것이 또한 ‘명태’이다.   그는 노랫말에 필자가 할 얘기를 다 해놨다. 명태의 여러 이름, 명태 이름의 유래, 명태로 만든 음식들…. 이쯤해서 누구에게나 불려지는 대중가의 내용을 전문가의 눈으로 하나씩 되집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 황태 사진=박종식 기자   명태만큼 한 종이 이름을 여럿 가지고 있는 물고기도 드물다. 상태에 따른 다양한 이름이 있는데, 일단, 생태(生太)는 얼리지 않은 싱싱한 생물로 생태찌개 재료로 쓰인다. 얼린 명태는 동태(凍太)이고, 북어(北魚)는 말린 명태로 북쪽에서 잡히는 물고기라서 붙여진 이름이며, 건태(乾太)라고도 불린다.   마른 명태이기는 하나 건조 방법이 조금은 독특한 황태(黃太)가 있는데, 그 제조방법은 우리 민족이 세계적으로 자랑할 수 있을 정도로 과학적이다. 한 겨울에 대관령 고지대 산간에 있는 명태 건조장인 덕장에서 얼음물에 얼리고 찬바람에 말리기를 수차례 반복한다.   밤에 냉기로 살 속에 있는 수분이 얼면서 근육 간격이 넓어지고, 낮에는 영하의 기온에서 햇빛에 말리면 얼음이 녹지 않고 증발하여 빈 자리가 생기면서 육질이 스펀지처럼 부들부들해져 누르스름한 황태가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명태는 마치 말린 더덕 같다하여 더덕북이라고도 부른다.   또 내장과 아가미를 빼낸 명태 4~5마리를 한 코에 꿰어 살이 꾸덕꾸덕하게 말린 코다리, 덕장의 날씨가 따뜻하여 물러진 찐태. 하얗게 마른 백태, 딱딱하게 마른 깡태, 손상된 파태, 검게 마른 먹태, 대가리를 떼고 말린 무두태, 잘 잡히지 않아 값이 금값이 된 금태 등, 그 이름이 헤아릴 수가 없이 많다.   뿐만 아니라 잡힌 지역이나 시기에 따라 별칭이 있는데, 강원도 연안에서 잡힌 강태(江太), 강원도 간성군 연안에서 잡힌 간태(桿太), 함경도 연안에서 잡힌 작은 놈은 왜태(倭太), 함경남도에서 봄철의 어기 막바지에 잡힌 막물태, 정월에 잡힌 놈은 일태(一太) (2월에 잡힌 놈은 이태, 삼태, 사태, 오태 등), 동지 전후로 잡힌 명태는 동지받이, 그리고 음력 시월 보름께 함경도에서 은어라고도 부르는 도루묵 떼가 연안으로 회유해 올 때 반드시 명태 떼가 따라오는데 이때 잡힌 명태는 은어받이라 부른다.   그리고 잡는 방법에 따라 자망, 거망 등으로 잡은 것은 망태(網太), 주낙으로 잡은 조태(釣太)라 한다. 호프집에서 술안주로 등장하는 ‘노가리’는 1년 정도 자란 작은 명태로 애기태, 애태라고도 부른다. 노가리는 농담(弄談)의 농자에 우리말의 접미사 ‘가리’가 붙어 노가리가 되었다고 한다. ‘노가리를 푼다’는 말은 악의 없는 농 짓거리를 할 때 쓰이는 말로 호프집에서 노가리 씹으며 노가리 푼다는 말장난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노가리가 어린 고기여서 맛은 있을지 몰라도 명태 자원이 감소한 요즘, 이는 절대로 잡아서는 안 된다. 수산자원회복의 측면에서 볼 때, 아직 미성숙한 노가리가 알을 낳을 수 있는 생물학적 최소 체장까지 더 자라서 다음 세대를 생산하게끔 해줘야하기 때문이다. 근래에는 동해에서 명태 자원량이 감소하여 멀리 북태평양에서 잡아 냉동한 외국산 명태가 시장을 대부분 차지하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 강원도 인제군 용대리의 황태덕장. 사진=윤운식 기자    `명태' 이름의 유래   “조선시대에 초도순시차 명천군(明川郡)을 방문한 함경도 관찰사가 시장했던지 밥상에 오른 명태 요리를 맛있게 먹고, 그 이름을 물었으되 이름이 없다고 하자 즉석에서 명천군의 명(明)자와 물고기를 잡아온 어부의 성 ‘태(太)’ 자를 따서 ‘명태(明太)’라고 명명하였다”고 하는 유래는 이제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다.   다른 유래로는 함경도 오지 삼수갑산의 농민들 중에는 영양부족으로 멀쩡한 눈이 보이지 않게 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바닷가에 나와 명태 간을 먹고 거짓말같이 눈이 밝아졌다고 하여 밝을 명(明)자가 붙여졌다고도 한다.   또한, 함경도 지방에서 명태 간에서 기름을 짜 등기름을 삼았으니, 밤을 밝게 해주는 고기라 해서 명태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필자는 어떤 것이 시세말로 ‘원조’ 이고 ‘오리지널’인지는 확인 할 수 없으니, 이는 독자의 숙제로 남겨 놓겠다. ■ 그 많던 명태는 다 어디로 갔을까?   명태는 단일 어종으로는 세계에서 어획량이 가장 많은 어류이다. 1980년대 중반 전 세계 명태 어획량은 600만 톤을 넘었으나, 근래에는 400만 톤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한국의 명태는 동해에서 가장 생산량이 많았던 어종으로 1970년대 중반에 5만 톤 정도 잡혔던 것이 1980년대 초반에는 15만 톤까지 어획하여 최고치를 기록하였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에 1만여 톤으로 급감하였고, 2000년대에는 1000 톤을 넘지 못하다가 급기야 2008년에는 공식적으로 어획량이 '0'로 보고되었다.   오죽했으면 필자가 다녔던 연구소에서 인공종묘를 생산해서라도 명태 자원을 회복시켜보려고 하였는데, 알을 받아낼 친어(어미 명태)를 확보하지 못해 마리당 시가의 10배를 내걸고 '현상수배'를 내린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 연안에서 명태 자원이 줄어드는 요인으로 무분별한 남획과 기후 온난화에 따른 전 지구적 생태계 변동을 꼽을 수 있는데, 어떤 것이 주요 원인인지 아직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1970년대 다소 정치적인 이유로 '노가리'잡이를 허용했던 수산당국, 노가리가 명태 새끼냐, 아니냐의 논쟁거리를 석사학위논문으로 깔끔하게 종식시켰던 어느 대학 교수, 미국에 유학가서 명태의 산란생태로 박사학위를 받은 다른 한 대학 교수, 기후변화가 수산자원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고 있는 다른 교수의 활약을 기대할 뿐이다.    » 명태 사진=국립수산과학원 명태(학명: Theragra chalcogramma, 영명: Walleye pollock, 일본명: スケトウダラ, 중국명: 明太魚)는 대구목 대구과에 속하며, 북미 서해안에서 베링해, 오호츠크해, 북해도 및 우리나라 동해까지 분포하는 북태평양의 주요 수산생물이다.   동해는 북태평양에서 명태가 서식하는 한계선으로, 우리나라 남해와 서해에는 살지 않는다. 주 분포해역인 베링해의 명태는 크지만 맛이 떨어지는 반면, 분포해역의 가장자리인 동해 명태는 크기가 작지만 맛이 좋다. 명태는 2~10도의 찬물을 좋아하는 냉수성 물고기로, 우리나라 명태는 동해에서 수심 200m보다 깊은 바다 밑에 살며 갑각류, 오징어 새끼, 작은 어류들을 잡아먹는데, 때론 자기 새끼들까지도 잡아먹는 탐식성 어류이다.   동해 주 산란장은 원산만 근해로 겨울에 강원도 연안을 따라 내려오는 북한 한류가 강할 때 강원도 연안에 명태 어장이 형성된다. 그러나 겨울에 수온이 높아 북한 한류가 약하면 명태가 잘 잡히지 않는다.   명태는 한 겨울 춥고 깊은 바다에 산란하며 알이 수정한 후 비중 변화가 생겨 수심 300~100m 사이를 포물선 모양으로 수직이동을 하면서 10여일이 지나면 부화한다. 한 마리의 어미 명태가 25만~40만 개의 알을 낳는데, 명란젓 한 숟갈이면 수만 마리의 명태를 먹는 셈이다. 부화한 명태는 자라면서 점점 깊은 곳으로 이동하여 생활사에 따라 사는 수심을 달리하는 생태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 미국 수산당국의 명태 시험조업 모습. 사진=알렌 쉬마다, 미국해양대기국(NOAA)   ■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명태는 어디서 잡은 걸까?   우리나라 연근해에서 잡히는 명태 어획량은 점점 감소하여 급기야 2008∼2009년에 공식적으로 어획량이 보고되지 않았을 정도이었다. 2009년 이후 1톤 내외로 여전히 극히 저조하며, 시장에 유통되는 대부분의 명태는 북태평양인 러시아 수역에서 입어료를 주고 조업하는 국적선(6척)과 러시아와 합작하여 조업하는 합작선(20척)에서 잡아와 조달하고 있다.   이러한 형편이라 러시아 수역 명태 어장의 상황에 따라 우리나라 명태 가격이 변동을 하는데, 어황이 부진했던 2008년과 2009년에는 국내 소비량을 수급하는 일이 어려워 명태 가격이 폭등하였다. 2010년에는 12만 톤 이상을 수급하여 명태 가격이 마리당 3000원 정도였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북부 대지진으로 인한 후쿠시마 원전사태 이후, 방사성 물질에 의한 수산물의 안전성 논란이 일어나면서 원양산 수산물 소비가 위축되어 반대로 가격이 떨어지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 연근해 명태 자원이 감소하여 수입에 의존하게 되면 수산시장의 안정성이 역시 흔들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수산자원 회복이 절실한 이유이다.   » 가장 흔하던 생선에서 이제는 '현상 수배'를 해야 하는 처지로 바뀐 명태. 사진=김봉규 기자   명태는 우리나라 원양어업 총규모의 3분의 1을 차지하였던 주요 어종으로, 원양명태어업은 우리나라 원양어업 역사의 생생한 기록이다. 1966년부터 시작된 원양어업은 베링해와 캄차카 근해에서 트롤 어구로 잡는 북양(北洋, 북태평양의 준말) 명태가 가장 중요한 대상 어종이었으며, 1970년대 중반 30만 톤 이상을 어획하여 국민 식생활의 단백질 공급원으로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그러나 1977년 3월 미국과 러시아가 200해리 배타적경제수역(EEZ)을 선포함에 따라 캄차카 어장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철수한 어선들은 미국 수역에서 쿼터(할당) 조업을 하게 되었다. 1982년 유엔해양법이 채택된 이후 경제수역 내의 조업 어장도 축소되었고, 1988년에는 이곳에서도 완전 철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명태의 주어장인 베링해에는 인접 연안국인 미국과 러시아가 200해리 경제수역을 정하여도 가운데에 도너츠 모양으로 생긴 공해인 ‘도너츠홀(donut hall)’이 남게 되어 이곳에서 조업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들 연안국들은 명태와 같은 회유성 어류가 경제수역 내에서 자라면서 공해상으로 이동하므로 공해상에서 어미를 잡게 되면 경제수역 내 수산자원이 보호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도너츠홀에서의 어업도 중단시켜 1993년부터는 베링해 공해 어업조차 중단되었다. 힘 있는 국가의 횡포일 수 있다.   » 최대 명태 어장인 베링해. 사진=황선도 박사   러시아 오호츠크 공해상에서 우리나라 원양어선의 명태 생산량은 1992년 20만톤 이상이었으나, 회유성 어류의 보호에 따라 1994년부터 어획이 중단되었다. 북해도 근해에서는 1976년부터 5만~10만톤의 꾸준한 어획고 올렸으나, 1999년 1월 한·일 어업협정이 발효되면서 현재 조업이 중단된 상태이다.   인접국 해안선으로부터 200해리까지의 경제수역 내 수산자원은 인접국이 권한을 가지며, 200해리 밖은 공해로 어느 국가든지 국제법만 준수하면 조업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과 러시아는 베링해 및 오호츠크 공해상에서 외국 어선의 어업을 공해상 어획이 경제수역 내 회유성 어류에 영향을 미치므로 자원보호를 이유로 조업을 금지시켰다.   유엔해양법에는 경제수역을 공해상까지 확대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앞으로 공해상의 수산자원관리를 위한 국제기구를 설립하여 이와 같은 조치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   명태는 냉동 명태, 냉동 연육, 냉동 필렛 등으로 국내 수요량이 연간 50만~60만 톤이 필요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동해에서는 명태의 자원 감소로 어획되지 않고 원양어선의 어획량도 3만~4만톤 정도이므로 매년 수십만 톤 정도를 수입하지 않으면 안되는 실정이다.   이미 명태의 수입은 자유화되어 명태 생산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미국과 러시아로부터 수입이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앞으로 국내에서 필요한 명태의 원활한 공급을 위해서 북태평양 명태의 해양생물학적 연구와 자원조사, 그리고 다각적인 외교 노력이 요구되는 이유이다. 점점 과학이 국익에 직·간접적으로 연결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 미국의 명태 자원조사에 참가한 필자(왼쪽)   1993년부터 베링공해 명태 트롤어업의 자율적 조업중단 조처가 실시된 이래 1996년 11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중부 베링해 명태 자원 보존 및 관리 협약 당사국 회의 과학기술위원회’에서 베링해 명태자원이 회복되지 않고 있음을 확인하고, 알래스카의 알류산 해분의 명태 자원량이 167만 톤 이상이 될 때 조업을 재개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잠정적으로 조업이 중단되고 있다.   이와 같은 결정 이후 매년 베링해 명태 산란시기인 3월에 명태 자원조사를 실시하고 자원상태를 평가하여 조업재개 여부를 결정해 왔다. 필자도 2007년 3월에 베링해 보고슬로프 해역에서 미국 해양대기국(NOAA) 소속의 알래스카수산연구소 시험조사선 밀러프리만 호에 승선하여 한·․미·중 3개국이 공동으로 수행하는 명태 자원조사에 참여한 적이 있다.   한국에서 앵커리지를 거쳐 더치하버에 도착해, 1주일 동안 베링해 보고슬로프 해역에서 추위와 거친 파도 속에서 명태 승선 자원조사를 하였다. 정말 몸도 마음도 죽을 만큼 고생한 기억 밖에 없다. 그러나 조사결과는 역시, 명태 자원량이 조업재개 수준에 못 미치는 것으로 나타나 당분간 베링공해 명태 트롤조업 재개는 어려울 전망이다. ■ 명태 사촌, 대구   » 우리나라에서 어획된 대구. 사진=황선도 박사   우리나라에는 대구과 어류가 대표적으로 2종이 있는데, 하나가 명태라면 다른 하나는 ‘대구(大口, Cod)’이다. 대구(Gadus macrocephalus)는 같은 과에 속해 있는 명태를 닮은 물고기로 언뜻 보고도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입 주위에 양반님네들처럼 수염이 의젓하게 나있다.    일반적으로 대구가 명태와 함께 동해에서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대구는 명태가 사는 곳보다는 좀 따뜻한 진해만, 여수 등지의 남해안에서도 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해 태안반도 부근 해역에서도 최근에 대구가 많이 잡히고 있어 대구에 대한 체계적인 생태학적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먼저 동해 대구와 남해 대구 그리고 서해 대구가 자원 평가와 관리를 위해서 과연 동일한 계군인지 아닌지를 밝히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지금 한 연구소에서 이들 계군의 동질 여부를 위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데, 우리들 스스로도 머릿속에서 상상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싶다.   본래 대구는 냉수성 어종으로 동해에 서식하는데, 남해 연안까지는 그들이 살 수 있는 남방 한계선으로 볼 수 있다. 지질시대 언제가 대구가 남해와 서해를 왕래하는 해류를 타고 서해로 넘어갔다. 그런데 그들이 되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 되어 결국 이민을 간 셈이 된 것이다.   » 바닷속에서 대구를 촬영하는 모습. 사진=J마린 최종인 사장   그리고 서해 중앙부의 깊은 바다에는 황해 저층 냉수라는 차가운 물덩어리가 연중 존재하는데, 이들 이민 1세대 대구들이 그곳을 만나 정착하게 된 것이라는 시나리오이다. 동해산 대구의 성숙체장(58㎝)이 서해산의 그것(38㎝)보다 큰 것을 보면, 같은 대구 종이 세월이 지나면서 다른 서식 계군으로 나뉘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대구는 동해의 영일만과 남해 진해만, 서해 남부 외해 쪽에서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겨울철에 산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구는 수명이 6세 이상까지 사는 우리나라에서 비교적 장수 어종에 속하는데, 최대 크기가 1 m가 넘는 대형 어종으로 가격 또한 만만치 않다.   대구 어가가 높은 것은 고급어종이기도 하지만 어획량이 적은 것도 한 몫하고 있다. 70~80년대에 기선저인망 어업으로 많이 어획되었던 대구는 90년대에 그 양이 급감하였다가 2000년대에 들면서 유자망 어업에서 어획량이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대구 어획량의 변동이 어획에 의한 요인인지 자연현상의 변화에 의한 요인인지는 아직 구체적으로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최근 어획량이 늘어난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대구와 명태는 어떻게 다른가 대구탕은 빨간 매운탕보다는 고춧가루를 넣지 않은 맑은 ‘지리(싱건탕)’으로 먹는데, 그 맛이 시원한지라 술꾼들에게는 고급 해장국으로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다.   해운대 해수욕장 끝에 있는 모 대구탕집은 아직도 그 맛을 유지하고 있는 식당 중의 하나이다. 해운대역 앞 개발로 지금은 없어졌지만, 필자가 20년 전 부산에 있는 연구소에서 근무할 때 막 결혼한 아내와 자주 찾았던 '대구뽈찜집'이 생각난다. 대구 머리는 다른 어종보다 크기가 커서 볼에 살이 많이 붙어있다. 원래 입 주위 볼 살은 근육이 발달되어서 쫄깃쫄깃한데 아귀찜처럼 고춧가루를 잔뜩 버무린 대구뽈찜은 값도 싸고 맛 또한 일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과거 어획량이 많았을 때 부잣집 제상에는 명태포 대신 대구포가 올랐다던 그 명성을 다시금 누릴 수 있게 되길 기대한다. 황선도/ 물바람숲 필진, 한국수산자원관리공단 연구위원
489    [록색문학평화주의자]= 시가 되고 노래가 된 "명태" 댓글:  조회:5042  추천:0  2016-10-12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내장은 창난젓 알은 명란젓 아가리로 만든 아가리젓 / 눈알은 굽어서 술안주하고 괴기는 국을 끓여 먹고 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명태 그 기름으로도 약용으로도 쓰인데제이니 /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노래 되고 시가 되고 약이 되고 안주 되고 내가 되고 니가 되고….”  위 노래는 2002년 발표한 강산에의 7집 앨범에 있는 함경도 사투리로 맛깔나게 부르는 ‘명태’다. 그런가 하면 1952년에 발표됐던 굵직한 오현명의 바리톤 목소리로 듣는 양명문 작사, 변훈 작곡의 가곡‘명태’도 있다.  “검푸른 바다 바다 밑에서 줄지어 떼 지어 찬물을 호흡하고 길이나 대구리가 클 대로 컸을 때 / 내사랑하는 짝들과 노랑 꼬리치며 춤추며 밀려다니다가 어떤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  살기 좋다는 원산구경이나 한 후 이집트의 왕처럼 미이라가 됐을 때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소주를 마실 때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짝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 남아 있으리라 명태 헛 명태라고 음 허쯧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 국민생선 명태는 모든 이의 안주가 된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명태는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하나도 버릴 게 없음은 물론 명태로 36가지 이상의 음식을 만들 수 있다는데 얼큰한 생태찌개에 북엇국으로 주취를 풀어주고, 코다리찜과 구운 노가리는 쇠주 안주로 기가 막히다. 거기에 명태회냉면, 명태식해는 별미고 명태 껍질마저도 반찬거리다. 심지어 이리와 애(간), 암컷 알집인 곤이(鯤鮞)를 즐기는 사람도 있다.   대구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 “명태”는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 “명천(明川)에 태(太)가라는 성을 지닌 어부가 있었는데 어떤 물고기를 낚아 주방 일을 맡아보는 관리로 하여금 도백(道伯)에게 바치게 하였던바, 도백이 이를 아주 맛있게 먹고 그 이름을 물으니 모두 알지 못하였다.다만 이 물고기는 태가라는 어부가 잡은 것이니 도백이 이를 명태(明太)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라고 말밑을 밝힌다.  방금 잡아 올린 명태는 생태(生太), 잡아서 꽁꽁 얼리면 동태(凍太), 따뜻한 바닷가에서 완전히 말리면 북어가 되고, 명태 새끼를 내장을 빼고 꾸덕꾸덕 말려 너덧 마리씩 코를 꿰면 노가리가 된다. 알을 막 낳고 잡힌 명태는 꺽태, 알을 뱄을 때 잡힌 명태는 난태다. 눈과 바람을 맞으며 낮에 녹았다가 밤에 얼기를 너덧 달 반복하면 해장국의 으뜸 재료인 황태가 된다.   재미난 것은 황태를 만들 땐 바람이 너무 불면 육질이 흐물흐물해진 찐태가 되고, 너무 추우면 꽁꽁 얼어붙은 백태가 되며, 너무 따뜻해지면 검게 변해서 먹태가 돼 황태보다 못한 서자 취급을 받는다. 그뿐이랴. 얼지 않고 말라버리는 바람에 딱딱해진 황태는 깡태, 속살이 부드럽지 않고 딱딱한 황태는 골태,내장을 빼지 않고 통째로 만든 황태는 봉태, 잘못하여 땅에 떨어지면 낙태, 몸통에 흠집이 생기면 파태가 되기도 하여 명태와 관련된 이름은 무려 수십 가지에 이른다.        이렇게 많은 이름이 붙은 것과 함께 제사상에도 올라 명태는 가히 국민생선임이 증명되고 있다. 그것은 또 온갖 우여곡절 끝에 밥상에 오르는 명태의 일생이 우리네 인생역정과 닮은 데가 있어 더욱 사랑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등어와 갈치, 꽁치 등도 한국인의 밥상에서 빼놓을 수 없지만 어디 명태만 하랴?    명태는 그 간으로 등잔불을 밝히기도 했고, 심지어 신행 온 새신랑 발바닥을 자지러지게 만들기도 했는데 우리는 그 명태를 복덩이라 생각해왔다. 복 많이 들어오라며 대문 문설주에 매달았던 것은 물론 요즘 도심의 음식점에서도 매달아 놓은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문명이 발달한 현대에 음식점에 매다는 것은 미신이라고 손가락질 받을법한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달아두는 것을 보면 역시 명태는 국민생선이다.   자 출출한데 얼큰한 동태찌개, 코다리찜에 쐬주나 한 잔 하러 갈까?     ‘명태’ 생태, 동태, 코다리, 황태, 노가리, 동지태, … 이 세상에 명태처럼 이름 많은 생선이 또 있을까. 명태의 갖가지 이름을 알고 나면 옛 사람들이 명태를 가공하고 먹는 일에 얼마나 지극정성을 쏟았는지 놀라울 정도다. 명태는 가공 방법, 잡는 방법, 잡히는 시기, 크기 등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니까 잡히는 시기에 따라서는 봄에 잡은 춘태, 가을에 잡은 추태, 동짓달에 잡은 동지태, 마지막으로 잡은 막물태 등이다. 갓 잡은 건 생태, 가공 방법에 따라서는 생태를 얼린 동태, 바람에 바싹 마른 북어 혹은 건태, 딱딱하게 마른 깡태, 꾸덕꾸덕 반쯤 마른 코다리, 겨울에 눈과 바람을 맞아가며 얼었다 녹았다 마른 황태, 황태 중에서도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 육질이 흐물흐물해진 건 찐태, 너무 추워 꽁꽁 얼어붙은 건 백태, 날이 따뜻해 검게 변한 건 먹태라고 한다. 잡는 방법에 따라서는 낚시로 잡은 낚시태(조태), 그물로 잡은 그물태(망태), 원양어선으로 잡은 원양태, 동해 어민들이 가까운 바다에서 잡은 바닥태라고 한다. 크기에 따라 명태 새끼는 노가리 혹은 앵치, 애기태, 애태, 좀 더 큰 건 소태, 중태, 대태, 왜태, 그밖에 알을 밴 난태, 알을 낳고 살이 별로 없어 뼈만 남다시피 한 꺽태, 배를 가른 피태… 그리고 값이 비쌀 때는 금태라고도 불렸다.  귀한 몸값, 알래스카 명태가 인기 우리나라 수산물 중 소비량이 가장 많은 생선인 명태. 우리가 먹는 명태의 90퍼센트 이상은 북태평양 오호츠크해나 베링해에서 원양어선으로 잡아 올린 러시아산이다. 2011년 봄 일본 원전 사고 이후 방사능 오염에 대한 걱정이 커지면서 명태 값이 쑥쑥 오르고 있고, 명태잡이 배는 점점 더 위로 올라가고 있는 중이다. 명태의 귀한 몸값을 가장 확실하게 실감할 수 있는 건 어묵이다. 이제 어묵의 원료가 되는 건 찬물을 자유로이 호흡하며 자라 살이 탄탄하고 담백한 명태가 아니라 따뜻한 동남아시아 바다에 사는 값싼 실꼬리돔이다. 얼마 전 풀무원이 선보인 어묵 ‘알래스칸특급’이 큰 관심을 받고 있는 건 명태의 형편을 아는 이들이 늘어서이지 않을까. ‘알래스칸특급’은 베링해에서도 청정해역으로 알려진 알래스카에서 잡은 신선한 명태의 순살만으로 만들어진단다. 알래스카 해역에서는 잡을 수 있는 생선별 크기와 어획량이 제한되어 있으며 알래스카수산물협회로부터 원료와 원산지에 대한 인증을 받는다니 그 맛은 물론이거니와 명태 볼 낯도 좀 서겠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이름으로 불리던 우리 친구 명태는 어느새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어버렸다. 언젠가 명태 가문에서 달랑 ‘명태’라는 이름 하나만 남는 날이 오면 어떡하나. 명태를 알고 나니 비로소 명태가 사는 바다가 보이기 시작한다. 지금은 알래스카에 살고 있지만 어서 빨리 우리 바다로 돌아 와주길 바라며 담백하고 탄탄한 명태 살로 만든 어묵으로 아쉬운 마음을 달래본다.  글을 쓴 한정혜는 음식과 문화, 환경 속에 깃든 이야기를 찾아 글을 짓고 알리는 일을 한다. 바람은 자연스럽게, 맛있게, 일하기.   검푸른 바다, 바다 밑에서 줄지어 떼 지어 찬물을 호흡하고 길이나 대구리가 클 대로 컸을 때 … 어떤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살기 좋다는 원산 구경이나 한 후 에지프트의 왕자처럼 미이라가 됐을 때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쇠주를 마실 때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짝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 남아 있으리라 헛 명~태, 명태라고 헛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양명문 시인이 쓰고 변훈이 곡을 붙인 가곡 ‘명태’는 어류를 찬양한 대표 노래입니다. 명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으뜸으로 꼽는 국민생선이빈다. 그래서 가곡까지 만들어졌는지 모릅니다. 더구나 명태처럼 이름이 많은 생선도 없습니다.  잡히는 계절과 잡는 방법, 장소, 크기에 따라 다릅니다. 봄에는 춘태(春太), 가을에는 추태(秋太), 겨울에는 동태(冬太), 유자망으로 잡는 그물태, 낚시로 잡는 낚시태, 원양어선에서 잡힌 원양태, 근해에서 잡힌 지방태, 함경도 연안에서 잡힌 왜태(倭太), 강원도에서 나는 강태(江太), 강원도 고성 간성에서 잡은 것은 간태(桿太)입니.     갓 잡은 것은 생태, 얼린 것은 동태(凍太), 건조하면 북어, 반쯤 말리면 코다리, 얼리고 녹였다를 반복해서 말린 것은 황태입니다. 눈보라를 맞으며 덕장에서 3~4개월 건조한 황태도 이름이 제각각입니다.  건조장에서 황태의 품격이 결정됩니다. 하얗게 말라버린 백태(白苔), 마르지 못하고 검어지면 먹태, 날씨가 따뜻해 물러지면 찐태, 흠집이 나면 흠태, 머리는 없고 몸만 있으면 무두태, 눈밭으로 떨어지면 낙태, 알맹이가 없는 통태 등등 다양한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명태새끼다 아니다”로 분분한 2~3년생 명태는 노가리란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또한 초겨울 도루묵 뒤쫓아 오다 잡히면 은어받이, 동지 전후에 잡히면 동지받이, 봄철 마지막 어기에 잡힌 막물태, 산란 뒤 살은 없고 뼈만 남은 것을 꺾태라 부릅니다. 이밖에 잡는 달에 따라 일태, 이태, 삼태 등등이 있습니다. 명태는 머리부터 꼬리까지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생선입니다. 내장은 창란 젓갈로 머리는 귀세미 젓갈로 알은 명란 젓갈로 담가 먹습니다. 그래서 명태는 우리 식단에서 가장 친근한 생선입니다. 이처럼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명태에 또 하나의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요즘은 바로 금태, 또는 황금태로 불리어집니다. 해양수산부가 명태를 살려오면 50만원을 주겠다며 최근 어획량이 급격히 줄어든 동해산 국산 명태 되살리기에 나선 것입니다. 최근 해양수산부 업무보고서 박근혜 대통령이 ‘동해안에서 왜 명태가 사라졌는지, 또 되살릴 방법은 없는지’를 물으며 중요 의제로 부상한 것입니다.  해양수산부는 과도한 어획과 수온이 변한 탓에 지금은 거의 보이지 않는 명태를 되살리기 위한 ‘명태 살리기 프로젝트’ 추진합니다. 국립수산과학원과 동해수산연구소, 강원도 해양심층수 수산자원센터와 어업인 협력체계 구축하기로 하고 오호츠크해 명태수정란 확보 방안을 논의했습니다.  명태 되살리기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국민들의 식탁에서 동해안 명태를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어종 중 하나인 명태가 하루 빨리 돌아오기를 기대합니다.   명태(Theragra chalcogramma, 明太)란?   지역이나 상태, 잡는 방법 등에 따라 여러 이름 가지고 있어 강원도, 경기도 이남에서는 북어(北魚), 동해 연안에서는 동태(凍太) 라고도 하며, 신선한 명태를 선태(鮮太), 그물로 잡은 명태를 망태(網太), 낚시로 잡은 명태를 조태(釣太)라고도 부릅니다. 또 그 새끼는 노가리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습니다. 명태는 몸이 가늘고 길며 측편하고, 주둥이는 뾰족하며 아래턱이 위턱보다 돌출해 있습니다. 아래턱에 수염이 없거나 있어도 매우 짧습니다. 양 턱니는 융털 모양의 이빨띠를 형성하고 위턱의 외열치는 약간 큽니다. 제1·2뒷지느러미는 각각 제2·3등지느러미와 마주보고 있습니다. 몸빛깔은 등쪽이 갈색이고, 옆구리에 가운데가 끊긴 약 2줄의 흑갈색 세로띠가 있고 세로띠의 가장자리는 불규칙합니다. 옆구리의 위쪽이 청갈색인 것과 황갈색인 것이 있는데, 이것은 수온과 생태적인 차이에 따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등지느러미는 첫번째가 10~13개, 2번째가 14~18개, 3번째는 15~20개 여린줄이 있으며 뒷지느러미는 첫번째가 17~22개, 2번째는 16~21개의 여린줄로 되어 있습니다. 배지느러미에는 6개의 여린줄이 있고, 척추골은 49~51개입니다. 몸길이는 40~60㎝ 내외입니다. 명태는 버릴 것이 없이 모두 이용되는 중요어류로서 알은 명란젓에, 창자는 창난젓에, 간장은 어유(魚油)에 쓰입니다. 우리나라 명태잡이는 조선 후기에 본격적 발달했고, 1960년대에 들어 북태평양으로 진출하면서 어획량이 급증하게 되었습니다. 그뒤 1988년 이후 미국의 대외국 쿼터가 소멸되는 등 여건 변화에 따라 어획량이 줄게 되었으나 1991년 9월 한·소어업협정이 체결 되면서 다시 어획은 호전되고 있습니다(1990년의 명태 어획량은 26,534M/T였음). 우리나라의 함경남북도·강원도·경상북도 연해와 오호츠크 해, 베링 해, 북아메리카 서해안, 일본 야마구치 현(山口縣)서 이바라키 현(茨城縣) 이북의 북태평양 연해에 분포합니다.  
488    [록색문학평화주의자]= 세계 최초 명태 완전양식 해빛보다... 댓글:  조회:4269  추천:0  2016-10-12
해양수산부는 수정란을 생산·부화시켜 키운 어린 명태가 어미로 자라 다시 수정란을 생산하는 명태 완전 양식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고 11일 밝혔다. 인공수정란에서 부화한 후 2년이 지난 명태. (사진= 강원도해양심층수수산자원센터 제공) 명태는 과거에 한국인의 밥상을 지배한 ‘국민 생선’이었다. 명태를 얼리지 않은 생태, 얼린 동태, 반건조한 코다리, 새끼인 노가리 등이 반찬과 안주로 사랑받았다. 애주가들은 북엇국을 즐겼다.   이렇게 흔하게 먹던 명태는 10여 년 전부터 우리 바다에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1970년대 우리 연근해에서 한 해 7만 t씩 잡히던 명태는 2008년에는 어획량 ‘제로’를 기록했다. 이듬해부터는 한 해에 겨우 1∼3t가량만 잡혔다. 사실상 명태가 우리 바다에서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국내 수요는 여전해 매년 22만 t가량이 수입되고 있다. 요즘 밥상에 오르는 명태는 러시아산이 90% 이상이며 명란젓 대부분도 수입한다.  명태가 사라진 원인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무분별한 남획은 유력한 원인으로 꼽힌다. 명태와 노가리를 다른 어종으로 착각하고 마구 잡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노가리를 일찍 잡아버려 어미 고기로 성장하지 못한 것이다.  지구 온난화도 원인으로 꼽힌다. 한반도 주변 바다의 수온이 상승하자 한류성 어종인 명태가 북쪽 바다로 갔다는 분석이다. 명태는 10도가량의 찬물을 좋아한다. 국립수산과학원에 따르면 1968년 16.1도였던 한반도 연근해 평균 해수면 온도는 2014년 17.3도로 1.2도나 올랐다.   바다에서 사라진 명태를 되찾기 위한 정부의 ‘명태 살리기 프로젝트’가 2014년 2월 시작된 이후 2년 8개월 만에 최근 결실을 맺었다. 해양수산부는 강원 강릉시의 국립수산과학원 동해수산연구소의 인공수조에서 수정란 10만여 개 중 10일 현재 5만여 마리가 부화해 0.7cm 크기로 자랐다고 11일 밝혔다. 세계 최초로 명태의 완전양식에 성공한 것이다.   완전양식은 인공적으로 만든 수정란에서 부화한 새끼 고기가 어미가 돼 다시 수정란을 생산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2012년 일본에서는 인공 수정란에서 명태를 부화시켜 1세대 인공종자 생산에 성공한 사례가 있지만 2세대까지 이어지는 완전양식에 성공한 것은 우리나라가 처음이다.   명태 살리기 프로젝트는 자연산이면서 알을 밴 명태를 구하는 것부터 난관에 부닥쳤다. 명태를 구하기도 힘든데 알을 밴 명태를 구하기는 더 어려웠다. 고민 끝에 해수부는 2014년 2월 “동해의 살아있는 명태를 찾습니다”라는 수배전단을 배포하고 명태 현상금을 걸었다. 살아있는 명태는 50만 원, 죽은 명태는 5만 원의 사례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이었다.   다른 물고기를 잡으려다 함께 잡힌 명태가 있다는 제보가 이어졌지만 살아있는 명태를 구하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결국 죽은 명태에서 얻은 알로 인공수정을 해 새끼를 부화시켰지만 두 달도 안 돼 이유도 모른 채 모두 폐사하는 일을 겪었다. 1년 가까이 실패를 거듭한 끝에 지난해 1월 한 어민이 알을 가득 밴 살아있는 명태를 제보했다. 강원 고성군의 강원도해양심층수수산자원센터에 옮겨진 이 명태에서 수정란을 확보해 1세대 인공종자가 만들어졌다.   1세대 인공종자 중 일부는 다시 동해수산연구소로 옮겨졌다. 이 중 20cm가량 자란 명태 200여 마리를 선별해 산란이 가능한 35cm 이상 크기로 키웠다. 이 중 7마리가 9월부터 산란에 성공했고 수정란 10만여 개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들 수정란이 부화하면서 비로소 2세대 인공종자가 만들어진 것이다.   명태를 빨리 키우기 위해 동해수산연구소는 해수 온도를 10도로 유지하는 한편 명태 전용 배합사료를 개발했다. 10도에서도 살아남는 저온성 먹이생물과 불포화지방산인 EPA, DHA를 강화해 고(高)에너지 사료를 만들었다. 자연 상태에서 자라는 명태는 만 3년이 지나야 산란이 가능하지만 연구소에서는 약 1년 8개월 만에 산란할 수 있도록 성장시켰다.  해수부는 내년 예산에 15억 원을 편성해 명태 종자를 전문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 계획이다. 해수면보다 상대적으로 수온이 낮은 깊은 수심에서 물고기를 키우는 중층가두리 양식시설을 이용하면 경제성을 확보하고 해수온도 상승에도 대비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이후 양식업자들에게 인공 종자를 분양해 2018년부터는 대량생산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윤학배 해수부 차관은 “명태의 국내 양식이 이뤄지면 수입대체 효과가 크며 수산자원을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최혜령 기자
487    [록색문학평화주의자]= 명태가 금(金)태가 되기까지... 댓글:  조회:4281  추천:0  2016-10-12
    LiveRe Widzet kakao facebook twitter l 【서울=뉴시스】이인준 기자 = 그 많던 ‘명태’는 과연 어디로 갔을까. 몇 해 전만 해도 우리나라 국민이 가장 즐겨먹던 ‘국민 생선’ 명태가 과거의 명성(?)을 뒤로 한 채 사라졌다. 지난 10년 새 명태가 동해에서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다. 이제 명태를 국내 어종이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가 됐다. 가격도 많이 올라 명태보다 ‘금(金)태’가 더 어울릴 지경이다. 이런 명태에 대해 20여년 전 우리나라와 러시아(구 소련)간 맺은 어업협정이 새삼 관심사로 떠올랐다. 흥미로운 사실은 지난 1991년 러시아와 극적으로 맺은 어협협정으로 그나마 우리가 명태를 구경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러시아와 숨 막히는 어협협정을 진행했다. 당시 수산분야에서는 “러시안의 말을 믿지 말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한-러간 어업협정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우여곡절 끝에 러시아와 최종 협정 단계를 거쳐 협정문에 서명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해 9월, 소련이 전격 해체됐다. 당시 농림수산부 담당 공무원들의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급박한 상황이 오히려 우리에게 득이 됐다.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황에서 한-러간 어협협정문에 양국이 서명하기 까지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칫 구경조차 못하게 될 수 있었던 명태를 그나마 볼 수 있는 것은 이 때 맺은 어업협정 덕분일지도 모른다는 게 당시 협상 관계자들의 회상이다.  우리 식탁에서 지난 10년간 동해산 명태의 빈자리를 메워오던 것들의 국적은 러시아와 일본. 그마저도 지난 3월 일본 동북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일본산 명태는 우리 수산물 시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전적으로 러시아산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명태가 우리 어장에서 사라진 것은 기후변화의 영향 탓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우리 바다 인근에서 살고 있는 명태의 어군은 2종류로 알려졌다. 우선 가을철 러시아 인근 오호츠크해에서 한류를 따라 남하,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함경도 연안에서 산란한 후 3월께 다시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무리가 있다. 또 하나는 여름철 동해 북쪽 깊은 수심에서 머물러 있다 11~12월에 바닷물의 온도가 내려가면 동해의 연안으로 들어와 알을 낳고 2월에 다시 동해 깊은 바다로 이동하는 어군이다. 문제는 동해가 계속 따뜻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동해 표층수의 수온은 1968년부터 2007년까지 40년 동안 1.3도 올랐다. 찬 바다에서 알을 낳는 습성이 있는 명태에게 따뜻한 동해바다는 이제 매력적인 산란장이 아니다. 명태는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명태는 주무진, 거진 등 강원도 연근해에서 잡히긴 했다. 하지만 원래 우리 연안에는 원래 명태어장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 명태는 주로 북녘쪽에서나 많이 잡히던 생선이었는데 이마저 분단이 되고, 동해에 북방한계선(NLL)이 생기면서 명태어장의 규모가 줄어들었다. 원래 동해가 명태가 풍성한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명태가 국민적인 생선이 된 것은 1960년대에 들어 국내 어선들이 북태평양으로 진출하면서부터다.  그럼에도 명태는 워낙 전래되는 이야기가 많아서인지 대중적인 인기를 누려왔다. 명태를 부르는 말만 해도 수십여가지. 선어(鮮魚) 상태로 치면 얼리지 않은 생태와 냉동 상태인 동태가 있고, 크기별로 보면 대태, 중태, 소태로 나뉜다. 새끼명태는 앵치라고 하고 산란을 하고 난 명태가 잡히면 살이 별로 없고 뼈만 남아 꺽태라고 따로 부르기도 한다. 잡는 방법에 따라서는 그물로 잡으면 망태(網太), 낚시로 잡으면 조태(釣太)라고도 부른다.   건조된 정도만 놓고도 황태 외에 10개 이상 다른 이름이 있다. 4~5개월 정도 말리면 영태, 짧게는 5일에서 길게는 한 달정도 말린 명태는 흑태라 한다. 다시 흑태를 코를 끼워서 엮은 것은 코달이, 몸통을 엮은 것은 엮걸이라 부른다.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은 덕분인지 명태는 버릴 것 하나 없이 모두 먹는다. 알은 명란젓, 창자는 창난젓, 간장은 어유(魚油)를 만드는 데 쓴다. 심지어 명태 새끼를 말린 노가리는 과거 흔하디 흔한 술안주였다.  그렇다보니 명태는 남획될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 명태가 한창 잘 잡히던 시절에는 명태를 잡아도 명란젓, 창난젓감으로 두고 명태만 버리던 시절도 있었다"고 한 수산 관계자는 전했다. 명란젓, 노가리가 술안주로 사랑을 받은 만큼 동해에서 명태가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농림수산식품부 산하기관인 국립수산과학원은 그동안 동해안 명태 자원회복을 위해 장기적으로 명태의 종묘를 배양해서 동해안에 방류하기 위한 사업을 추진해왔다. 살아있는 어미 명태에 대해 현상금까지 걸었다. 하지만 명태가 심해에 사는 어종인 탓에 수면 위로 잡아 올리는 도중에 죽고 만다는 게 문제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명태를 다시 보기 위해서는 어미 명태를 확보하는 게 핵심"이라면서도 "아직까지 산 채로 잡아왔다는 것은 보고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조선 시대 말기의 문신인 이유원은 자신의 저서 '임하필기(林下筆記)'에서 '명천(明川)에 태(太)가라는 성을 지닌 어부가 낚은 물고기'라 해서 명태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적고 있다. 이어 같은 책에서 이유원은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이라는 사람의 말을 빌려 "명태가 300년 뒤에는 이 고기가 귀해질 것"이라고 했다고 전했다. 최근 명태는 가장 많이 밀수입된 먹을거리 1위라는 오명까지 얻었다. 올해 초 관세청에서 발표한 '2011년 농축수산물 불법수입 현황'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명태 780억원어치가 세관의 눈을 피해 몰래 들여오다가 적발됐다. 2010년에 13억원에 비해 60배 이상이다. 명태는 갈수록 더 귀한 생선이 될지 모른다.
     
485    [취미려행]= 중국 5A급 려행지 모음 댓글:  조회:4864  추천:0  2016-10-10
    중국 5A급 려행지 리스트 북경(7곳):의화원,천단공원,고궁박물관,공왕부 풍경구,명 13릉 유적지,팔달령-모전욕장성,올림픽 공원. 천진(2곳):판산 풍경명성구,고문화거리. 하북(6곳):한단시 와황궁 풍경구,당산시 청동릉,석가장시 서백파 관광지,보정시 야삼파 관광지,승덕 피서산장과 주변 사원명승지,보정시 안신백양정 려행구. 산서(6곳):진중시 평요고성 려행구,진중시 교가대원 문화원,진중시 체휴금산 려행구,진성 황성상부 생태문화여유구,진주시 오대산 명성고지,대동시 운강석굴. 내몽골(2곳):어얼둬스 칭키스킨 릉묘 유적지,어얼둬스 향사만관광지. 료녕(4곳):본시시 본시,대련 금석모래밭 려행지,대련 노호탄 해양공원-해양극지관,심양시 식물원. 길림(5곳):돈화시 륙정산 관광문화구,장춘시 장영세기성,장춘 경월담 풍경구,장백산 풍경구,장춘시 위만주황궁박물. 흑룡강(5곳):막하 북극촌 려행구,의춘시 탕왕하 림해 풍경구,목단강 경박호 풍경구,흑하 오대련지 풍경구,할빈시 태양도 풍경구. 상해(3곳):상해 과학기술관,상해 야생동물원,상해 동방명주탑. 강소(22개):련운항 화과산,서주시 운룡호,대풍시 중화 엘크원,주은래 고향 관광지,진강시 구용시 무산관광지,소주시 사가빈-우산상호 관광지,상주시 천목호,소지주 오중 태호,무석시 원두저 광광지,남통시 호하,소주시 금계호,강저시 진호풍경명승지,상주시 공룡성 레저,진강시 삼산풍경명승지,남경시 종산풍경명승지-중산릉원,양주시 수서호광광지,남경시 부자묘 진회하 풍광대유람지,무석시 령산관광지,소지주 주장고진 관광지,소주원림,중앙텔레비죤 무석영화기지-삼국연의관광구,소주시 동리고진 관광지. 절강(14곳):태주시 신선거 풍경구,태주시 천대산,호주시 남순고진풍경구,구주시 개화근궁불국 문화관광구,소흥시 로신고향 심원관광지,가흥시 남호,금화시 동양횡점 영화성,녕파시 봉화계구-등두 관광지,가흥시 동향오진,항주시 천도호,단산시 보타산,온주시 연탕산,항주시 서호. 안휘(10곳):무호시 방특관광지,황산시 고휘주문화관광지,부양시 영상팔리하풍경구,선성시 적계룡천관광구,륙안시 천당채관광지,안경시 춘주산,지주시 구화산,황산시 환남부락-서지굉촌,황산시 황산,합비시 삼하고진. 복건(9곳):룡암시 고전관광구,복주시 삼방칠항관광지,녕덕시 복정태로산,천주시 청원산,녕덕시 백수양-원앙계 관광지,복건성 영정-남경 관광구,삼명시 태녕풍경구,남평시 무이산,하문시 고랑서풍경명승지. 강서(8곳):서금시 공화국요람관광지,의춘시 명월산,경덕진 민속박물구,상요시 무원강만구,응담시 룡호산,상요시 삼청산,길안시 금강산,노산 관광지. 산동(9곳):기몽산,태안시 태산,조장시 태아장 고성관광지,위해 류공도,연태 룡구남산,청도 로산,제녕시 곡부삼공,연태시 봉래각,제남시 천하제일천. 하남(11곳):주마점시 차야산,남양시 남협복우산로계령-공룡유적원,락양시 룡담대협곡,평정산시 요산-중원대불관광지,안양시 은허,락양 백운산,개봉 청명상하원,교작시 원대산 풍경명성구,락양시 룡문석굴,락양 난천로군산-계관동,등봉시 숭산소림관광지. 호북(10곳):은시주은시대협곡,무한시 황파목란문화생태관광지,무한시 동호,의창시 장양청강화랑,의창시 삼협-굴원 고향관광지,십언시 무당산풍경구,은시주 신룡계 배끌문화관광지,무한시 황학루공원,신농각 생태관광지,의창시 삼협인가풍경구. 호남(8곳):소양시 낭산,침주시 동강호,장사시 화명루,장사시 악휘산,상담시 악양루-군산도,장가계 무릉원-천문산,형양시 남악형산. 광동(11곳):양강시 해릉도대각만 비단의길 관광지,혜주시 라부산,불산시 사슴관관원,불산시 남초산관광지,소관시 단하산,청원시 련주지하하,광주시 백운산,매주시 연남비차전,심천시 호수관람 레저,심천 화교성 관광지,광주시 장룽관광지. 광서(4곳):남녕시 청수산,계림시 독수봉,계림시 락만지,계림시 이강. 해남(5곳):해남 빙랑골리묘문화광광지,분계주섬관광지,해남야노달우림문화관광지,삼아시 남산대소동천,삼아시 남산문화관광지. 중경(7곳):강진사면산,남천금불산,만성경제개발구 흑산골,유양 도화원,무룽 카스트지역,무산 소삼협,중경대족석각예술관 사천(10곳):광원시 검문서도검문관,아바주 문천특별관광지,면양시 북천강성관광지,남충시 고성관광지,광안시 등소평 고향관광지,아바주 황룡관광지,성도시 청성산-도강언,아바장족강족자치주 구채구,락산시 아미산,락산시 락산대불상. 귀주(4곳):검남주 려파장강 관광지,필절시 백리두견관광지,안순시 룡궁,안산시 화과수 대폭포. 운남(8곳):보산 화산열해 관광지,곤명 세계박물원,디칭주 샹글리라 보달조 관광지,대리시 숭성사 삼탑문화 관광지,려강고성,중국과학원 열대식물원,려강시 옥룡설산 관광지,곤명시 석림풍경구. 서장(2곳):라싸시 대조사,라싸 뿌다라궁 관광지. 섬서(7곳):상락 카나리아협,보계시 법문사 불교관광지,서안 대연탑.부용원,화산풍경구,연안시 황제릉,서안시 화청지,서안시 진시황병마용 감숙(4곳):돈황 명사산 월아천 관광지,천수 밀적산 관광지,평량시 공동산 풍경명승지,가욕관 문물관광지. 청해(2곳):서녕시 타얼절 관광지,청해호. 녕하(4곳):은천시 령무수동구,은천 진북외성 서부영화성,중위시 사파두 관광지,석취산시 사목호수 관광지. 신강(9곳):카스지역 카스카얼 고성 관광지,우룸치 천산 대협곡,파음곽릉몽고자치주 박호현 보스텅호수,카스지역 택보현 포플러 풍경구,아러타이 지 부온현 코코타 풍경구,이리 나라 풍경구,아러타이 카나스 풍경구,투루판 포도골,천산천지 관광지. 중앙인민방송
484    노벨문학상 거부한 작가도 없다?... 있다!... 댓글:  조회:4348  추천:0  2016-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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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3    대표도서로 보는 세계의 문학상 댓글:  조회:6542  추천:0  2016-10-10
스웨덴에 노벨문학상이 있다면 문학강국인 영국와 프랑스 그리고 일본과 미국에서 역시 그들의 리그가 있다. 바로 영국의 맨부커상, 프랑스의 공쿠르상, 일본의 나오키상 그리고 미국의 퓰리처상이다. 받았다 하면 노벨문학상 못지 않게 큰 이슈가 되며 그 파급 효과는 세계적으로 어마 어마 하다. 문학적 가치와 재미를 동시에 잡는 이들 문학상 수상작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소설도 있고 생소한 소설도 있다. 모두 문학사적으로 큰 획을 그었거나 세계의 독자들에게 불멸의 고전으로 평가 받을 책들이다. 문학 애호가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책들이지만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한 눈에 보기 어려웠던 독자들을 위해 이번 섹션을 준비했다. 이번 북인사이드 세계의 대표문학상 편에서는 네 가지로 엄선된 세계 대표문학상의 특징과 그간 국내에 출간된 목록을 20종씩 추려 정리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반드시 읽어봐야 할 주목도서 다섯 가지씩 소개한다.   맨 부커상 (Man Booker Prize) 영국의, 영국에 의한, 영국을 위한 문학상! 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말을 살짝 바꿔보자. 영국의, 영국에 의한, 그리고 영문학 발전을 위한 문학상이다. 영국과 영연방의 국가에서 영어로 쓰여진 소설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을 가리는 상이며, 노벨문학상, 프랑스의 공쿠르상과 더불어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로 손꼽힌다. 셰익스피어와 J.R.R. 톨킨을 배출한 나라인 만큼 문학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국민들이 매우 관심 있게 지켜보는 상이기도 하다. 영국에서는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며 이 상의 수상작들은 대중적인 것이 특징이다. 1964년 영국의 종합물류유통회사였던 부커사는 문학사업에 뛰어든 것이 계기가 되어, 출판과 독서를 위한 기금인 북 트러스트(Book Trust)의 후원을 받아 1968년 부커상을 제정한다. 1969년 로 첫 수상의 영예를 안은 영국의 소설가 퍼시 하워드 뉴비(Percy Howard Newby)를 필두로 매년 영연방 최고의 소설가들에게 상을 수상하고 있다. 2008년부터는 영국의 금융기업인 맨 그룹(Man Group)이 스폰서로 나서며 ’맨 부커상’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시상은 매년 10월에 행해진다. 영어권 출판업자들이 추천하는 작품들을 대상으로 작가와 평론가, 학자 등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이 심사해 1차 후보작들을 가려내며 2차에서는 온라인투표점수도 반영되어 독자들도 심사에 참여할 수 있다. 심사과정이 베일에 가려진 스웨덴의 노벨문학상이나, 프랑스의 공쿠르상과는 크게 차별되는 점이다. 이렇게 오픈된 심사와 독자들의 참여로 결정된 최종수상작의 행보는 안 봐도 뻔한 일. 수상자에게는 5만 파운드의 상금이 수여되며 영연방 최고의 소설가라는 명성과 더불어 세계 전역에서 수직 상승하는 판매량 역시 보장 받는다. [국내에 소개된 맨부커상 대표도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_ 줄리언 반스 (2011년 맨부커상 수상) 영국의 대표작가 줄리언 반스가 세 번 연속으로 맨부커상 후보에 그친 끝에 드디어 네 번째에 맨부커상을 수상했다. ’식스센스’ 이후 최고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는 이 책은 본심이 시작된 지 31분만에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로 수상작이 되었다는 후문이다. 육 십대가 된 주인공 토니 앞에 대학 시절 사귀었던 여자친구 어머니의 유언장이 날아든다. 당시 자살했던 친구 에이드리언의 일기장과 오백파운드를 남긴다는 유언이 적혀있다. 일기장을 찾기 위해 예전 여자친구를 만나러 나선 토니는 그간 자기가 모르고 살았던 믿지 못할 비극과 마주하게 된다. 인간의 나이 듦과 기억 그리고 회한에 대한 이야기로 마음을 찡하게 만드는 수작이다.  영국 남자의 문제 _ 하워드 제이콥슨 (2010년 맨부커상 수상) 영국의 부커상 역사상 가장 웃긴 소설이다. 세상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겠지만 생의 후반에 들어선 남자들이 겪는 근본적인 고독과 혼란을 세 명의 영국남자들을 내세워 유머러스하게 풀어나간다. 고독과 상실의 아픔 속에서 펼쳐지는 웃음과 짠함은 이 책을 읽은 모든 이들을 사로 잡았고 이 책으로 부커상을 수상한 68세의 하워드 제이콥슨을 스타로 만들었다. 사랑과 상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는 중년 ’경계인’들의 인간적인 매력이 넘치는 소설이다. 파이 이야기 _ 얀 마텔 (2002년 부커상 수상작) 더 이상 무슨 수식어가 필요하랴. 이 책을 원작으로 한 이안 감독의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가 대중 앞에 섰을 때 많은 이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소설에서 느꼈던 그 독특한 색채와 철학이 상상 그 이상으로 구현되었기 때문이었다. 에 등장하는 파이와 호랑이 그리고 이들이 227일 동안 태평양을 표류하는 이야기 자체가 거대한 은유와 상징 덩어리였고 책을 본 수많은 독자들과 영화를 본 관객들은 퍼즐을 맞추는 듯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른 이야기가 되는 매우 독특한 소설 는 이미 현대의 고전이다. 남아 있는 나날 _ 가즈오 이시구로 (1989년 부커상 수상작) 영국와 영연방에서 영어로 쓰여진 작품에만 수여한다는 부커상. 그런데 가즈오 이시구로라는 일본이름이 눈에 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1954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6세때 영국으로 이주했으며 인간과 문명에 대한 독특한 시각과 문체로 세계 문단에서 현대 영미권 문학의 거장 중 한 사람으로 평가 받고 있다. 1989년 로 부커상을 받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가 되었으며 안소니 홉킨스와 엠마 톰슨 주연의 영화로도 각색된 바 있다. 인생의 황혼기에서 지난 날을 회상하며 이미 지나가 버린 삶의 가치들을 깨닫는 늙은 집사의 이야기다. 복제 인간의 안쓰러운 삶을 그린 수작 에서 보여준 인간 삶의 허망함과 애잔함이 이 책에서도 두드러져 저자 특유의 색채를 드러낸다. 한밤의 아이들 _ 살만 루슈디 (1981년 부커상 수상작) 신생 독립국 인도가 탄생하던 날, 1001명의 아이들이 태어난다. 그리고 열 번째 생일까지 살아남은 581명의 아이들은 저마다 특별한 재능이 있다. 인도의 탄생과 함께 한 탓에 역사에 운명처럼 묶여버린 이들 인생이 천일야화로 펼쳐진다. 환상문학이자 역사인 이 소설은 부커상을 세 번이나 수상해버린 유일무이한 작품이기도 하다. 1981년 출간과 함께 부커상 수상, 부커상 25주년을 기념하는 ’부커 오브 부커스’상 수상, 그리고 부커상 40주년을 기념해 독자들이 가장 사랑한 부커상을 뽑는 ’베스트 오브 더 부커’상까지! 인도문단은 20세기 이후 문학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살만 루슈디의 괴물 같은 소설 로 지표를 두고 루슈디 이후 영어로 작품을 쓰는 인도 작가들을 ’루슈디의 아이들’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유수의 세계 언론지들은 100대 영문학과 세계의 명작으로 를 뽑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공쿠르상 (Le Prix de Goncourt) 프랑스 지구촌 단위의 대표적 문학상에 노벨문학상과 맨부커상, 그리고 공쿠르상이 있다면, 프랑스에는 또 다른 대표 문학상 4개가 있다. 바로 월드 대표이기도 한 공쿠르상과 르노도상, 페미나상, 앵테랄리에상이다. 어쩐지 좀 생경하지만 그래도 귀에 익은 공쿠르상에 대해 알아보자. 공쿠르상은 19세기를 살았던 에드몽 드 공쿠르와 쥘 드 공쿠르의 형제가 살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스 사실주의를 대표했던 이 형제소설가는 죽으면서 전 재산을 자신들의 성을 딴 아카데미에 기부한다. 가난한 예술가를 돕고 싶다는 유지를 받들어 1902년 아카데미 공쿠르가 설립되었으며 이듬해인 1903년부터 공쿠르상을 수여하기 시작했다.  역사와 수상자들의 수준에 있어서 프랑스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문학상이며 매해 12월 첫 번째 일요일에 파리의 한 레스토랑에서 수상식을 거행한다. 10명으로 구성된 아카데미의 심사위원들이 한 해 동안 가장 우수했던 문학작품을 선별해 상을 수여하며 그 과정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1903년 첫 수상작 John Antoine Nau의 를 시작으로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며 내려오고 있다.   [국내에 소개된 공쿠르상 대표도서]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_ 프랑수아 가르드 (2012년 공쿠르상 수상작) 현대판 로빈슨 크루소가 보여주는 문명과 야만. 소설 는 서구문학에서 불멸의 명저로 꼽히는 작품 중 하나지만 문명으로 대표되는 ’로빈슨’과 야만으로 대표되는 ’프라이데이’를 내세워 서구의 우월함을 역설하는 ’치명적’ 문제를 지녔다고 평가 받은 바 있다. 나르시스 펠티에라는 실존인물의 이야기를 소설화한 은 이 두 가지의 대립이 한 인간의 영혼 속에서 소용돌이 친다. 호주의 한 원시 섬에 표류한 백인 선원 나르시스는 그 곳 원주민들에게 발견되어 17년동안 원주민으로서 살아간다. 이 후 우연히 타의에 의해 문명권으로 돌아온 나르시스는 이제 모국어뿐만 아니라 이름조차 잊어버린 야만인이지만 지리학자 옥타브에 의해 재사회화 되어 세상에 편입된다. 17년 간의 과거에 대한 집요한 추적이자 인류학적 관찰인 이 책은 공쿠르상을 비롯해 프랑스의 거의 모든 문학상을 휩쓸었으며 문명과 야만 그리고 이성과 광기의 이분법적 사고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던진다.   지도와 영토 _ 미셸 우엘벡 (2011년 공쿠르상 수상작) ’모든 사회는 저항의 목소리와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며, 그 상처를 손가락으로 세게 짓누르며 끊임없이 병과 종말, 추함에 대해 그리고 죽음과 망각, 질투, 무관심, 욕구불만, 사랑의 부재 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_ 미셸 우엘벡 미셸 우엘벡이 말하는 진정한 예술의 정의다. 작품 속 노골적 성행위 묘사, 특정 종교나 여성비하 발언으로 작품외적인 것으로 논란에 시달렸던 그지만 그 어떤 작가보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시대 의 거품과 가치를 동시에 포착해내는 작가이기도 하다.  작가는 속에서 작가의 자화상 ’미셸 우엘벡’과 중심인물인 예술가 ’제드’를 등장시켜 비합리적인 현실과 고독한 관계, 그리고 덧없는 인생을 말한다. 냉소적이고 아이러니한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불구, 예고 없이 찾아오는 뭉클함이 매우 인상적이다. 그간 공쿠르 수상자로 여러 번 후보에 올라 고배를 마셨으나 2012년 로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성으로 2012년 공쿠르상을 수상했다. 착한 여신들 1, 2 _ 조나탕 리텔 (2006년 공쿠르상 수상작) ,  등 홀로코스트 문학은 대부분 피해자의 흔적이나 생존자의 증언을 토대로 탄생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다르다. 가해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최초의 홀로코스트 문학이다. 나치 친위대 장교의 고백으로 인간이 만든 지옥에서 무엇이 평범한 사람을 고문자로 만드는 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저자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적부터 프랑스를 오가며 불어에 능통했고 이 책은 그가 불어로 쓴 첫 번째 소설이다. 출간 뒤 공쿠르상과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대상을 동시에 받았으나 ’문학과 문학상은 관련이 없다’며 수상 거부를 선언한 것으로 유명하다. 연인 _ 마르그리트 뒤라스 (1984년 공쿠르상 수상작) 철학자 강신주는 한 인터뷰에서 사랑과 끌림의 차이를 마르그리트 뒤라스 속 소녀의 감정을 들어 이야기 한바 있다. 대부분은 사람들은 사랑과 끌림을 구분하지 못하지만 소녀는 자신의 감정이 사랑이 아님을, 그래서 잠시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 끌림은 더욱 강렬했고 찬란하다. 진짜 사랑과 자신의 불행을 위로하는 감정은 다른 것임을 이해하게 만들어주는 수작. 은 1920년대 베트남, 가난한 프랑스 백인 소녀와 중국인 남자의 욕망과 사랑을 이야기한다. 저자의 자전적 소설이기도 한 이 소설은 프랑스를 비롯한 35개 국어로 번역돼 세계 각국에서 수백만 부가 팔렸고, 장 자크 아노 감독의 영화로도 제작되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자기 앞의 생 _ 에밀 아자르 (1975년 공쿠르상 수상작) 같은 작가에게 두 번 수여하지 않는 공쿠르상. 이례적으로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이기도한)는 그 룰을 깨고 첫 번째 공쿠르상을 받았을 때 쏟아졌던 프랑스문단의 혹평가들에게 대해 큰 한방을 날린다. 그 책이 바로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낸 . 에밀 아자르라는 신인의  등장으로 프랑스 문단은 열광했고 사람들은 로맹 가리를 신인이나 질투하는 한물간 작가로 폄하했다. 그러나 로맹 가리가 죽고 그가 남긴 유서에 의해 두 사람이 동일인물이었음이 밝혀져 세계문학사에 두고두고 회자될 큰 에피소드로 남았다. 로맹 가리는 1956년 로 첫 공쿠르상을 받았고, 19년이 지난 1975년, 에밀 아자르로 세상에 나와 14살 소년의 눈으로 바라 본 세상을 그린 으로 두 번째 공쿠르상을 받았다.     나오키상 (直木賞) 일본 책 표지에 ’나오키상 수상작’이라는 문구만 붙었다 하면 판매량이 보장된다. 나오키상 수상작이라면 믿고 보는 만큼 이 상이 의미하는 바는 꽤 의미심장 하다. 즉 나오키상을 받았다는 것은 그 해의 가장 재미있는 소설로 등극했다는 것.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일본의 대중 소설가들은 이미 이 상을 받았으며 나오키상을 받는 다는 것은 많은 독자들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검증 받은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일본에는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으로 아쿠타가와상과 나오키상이 있다. 아쿠타가와상이 주로 작품성을 위주로 순수문학을 대상으로 한다면 나오키상은 한참 주가가 오르는 대중소설가의 작품에 수여된다. 대표적인 작가들로 히가시노 게이고, 에쿠니 가오리, 미야베 미유키, 아사다 지로가 있으며 이름만 들어도 쟁쟁하다. 이 상은 소설가 나오키 산주고가 일본문학계에 남긴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35년 친구였던 기쿠치 칸의 발의로 제정됐다. 제1회로 가와구치 마쓰타로가 수상했으며 제2차세계대전 시기였던 1945~1948년과 적합한 책이 없던 경우를 제외하고 지금까지 매년 2회씩 수상해오고 있다.  [국내에 소개된 나오키상 대표도서]   누구 _ 아사이 료 (2013년 148회 나오키상 수상작) 만 23살. 역대 나오키상 최연소 수상자다. 대학을 졸업하고 막 사회생활을 시작할 나이의 수상자에게 일본문학계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대개의 나이 어린 소설가에게 기대할 수 있는 일반적인 청춘 소설과는 달리 이 책은 솔직해도 너무 솔직하기 때문이다. SNS가 삶의 일부가 되어 버린 젊은 세대들의 세태와 함께 취업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현실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자신 또는 주변 친구들을 통해 느꼈을 법한 요즘의 현실과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행동심리는 읽는 이의 정곡을 찌른다. 작가의 삶, 그리고 또래의 이야기를 썼으니 이보다 더 적나라하고 솔직할 수 없다. 이에 많은 독자들과 비평가들은 절대적인 공감과 지지를 보냈다. 취업활동을 소재로 SNS시대 젊은이들의 자화상을 그린 현대의 걸작이다. 애도하는 사람 _ 텐도 아라타 (2008년 140회 나오키상 수상작) 인간의 3대 난제,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에 대해 도전한 소설이다. ’애도’라는 키워드로 선과 악, 생과 사가 교차하는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넘쳐나는 사건 사고로 세상 구석구석에선 오늘도 누군가가 우연이건 필연이건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자신과 아무 관계없는 이런 죽음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삶을 산다. 하지만 여기, 타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전국을 떠도는 청년 시즈토가 있다. 시즈토로 인해 마음이, 그리고 삶이 변하는 사람들을 보여주며 죽음이 넘실거리는 삶의 한복판에서 용서와 구원, 화해와 사랑의 메시지를 전한다. 일본문학 전문번역가권남희가 가장 손에 꼽는 책으로 일본 열도를 감동으로 적신 대작이다. 용의자 X의 헌신 _ 히가시노 게이고 (2006년 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한국과 일본을 동시에 강타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 . 양국 모두에서 각각 영화화 되며 인기 컨텐츠로써의 저력을 보여준바 있다. 인기작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올라도 한참 전에 올랐던 2006년, 이 책으로 데뷔 21년만에 드디어 나오키상을 받으며 완전한 일본의 대표작가가 되었다. 과학과 미스터리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고품격 미스터리 소설을 주로 쓰는 작가는 이 책에서 사랑과 헌신이라는, 다소 낭만적인 소재로 살인사건의 내막을 전개해 참신하면서도 매력적인 이야기로 독자들을 끌어당기고 있다. 고 GO _ 가네시로 가즈키 (2000년 123회 나오키상 수상작) 일본의 대표적인 제일교포 작가 가네시로 가즈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엔 그의 정체성이 조금씩 배어있다. 2000년 나오키상을 받은 이 소설은 그 정점에 있는 소설로 재일교포3세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젊은 세대에게 조차 깊숙이 자리한 민족차별과 순혈주의적 편견에 대해 이야기한다. 구세대와의 대립, 학생들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갈등 및 자칫 어두워 질 수 있는 소재가 가득하지만 이 책은 오히려 경쾌하고 즐겁기까지 하다. 특유의 감성적 문체와 유머감각이 재치있게 포진해 있기 때문. 국내에도 많은 고정 팬이 있는 가네시로 가즈키의 대표작으로, 인기배우 쿠보츠카 요스케 주연의 동명 영화로도 제작되어 양국에서 많 은 사랑을 받았다. 철도원 _ 아사다 지로 (1997년 117회 나오키상 수상작) 외동딸의 죽음에도, 위독한 아내의 부름에도 묵묵히 철도원이라는 사명감을 새긴 채 역을 지키며 평생을 살았다. 눈의 도시 홋카이도의 어느 시골 역 호로마이의 오토마츠 역장이다. 1997년 출간이래로 일본인의 가슴 속에 눈물과 감동으로 자리하며 국민문학이 되었다. 영화로도 제작된 은 눈 날리는 역사의 이미지와 함께 많은 관객들의 마음을 울렸다. 본격문학으로는 이례적으로 140만 부의 밀리언셀러를 기록했으며 정밀한 묘사와 탄탄한 서사가 인상적인 소설이다.     퓰리처상 (Pulitzer Prize) 미국 사진으로 남기는 시대의 생생한 증언, 바로 퓰리처상 하면 떠오는 언론분야 보도사진이다. 미국의 신문왕 조셉 퓰리처의 유언에 따라 1917년 제정됐으며 문학과 언론 그리고 드라마와 음악 부문 총 21개 영역에서 그 해의 가장 탁월한 인물을 뽑아 수여한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언론분야 수상자는 국적은 상관없으나 미국 언론사에서 활동해야 하며 문학과 드라마, 영화 부문은 반드시 미국시민이어야 한다. 현대 저널리즘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그는 ’재미없는 신문은 죄악’이라는 신념으로 언론인의 삶을 살았으며, 대중들을 시선을 사로잡는 옐로 저널리즘을 탄생시키기도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신문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돈으로 컬럼비아대에 저널리즘 스쿨을 설립했고 이것을 계기로 그의 사후, 컬럼비아대 언론대학원에서 매년 4월 수상자를 선정한다. 수상자에게는 1만 달러의 상금이 주어진다. 문학분야의 퓰리처상은 1918년부터 수여됐으며 당시 뉴욕 시민생활을 그린 이라는 책으로 어니스트 풀(Ernest Poole)이 첫 수상자가 되었다. 퓰리처상 문학부문은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저널리즘에서 시작된 상인 만큼 시대와 사회를 반영해 묵직하면서도 울림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국내에 소개된 퓰리처상 대표도서] 고아원 원장의 아들 _ 애덤 존슨 (2013년 퓰리처상 수상작) 퓰리쳐 역사상 북한을 다룬 첫 소설로서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전세계적으로 뜨거운 감자인 북한문제를 문학 속으로 끌어들여 악몽 같은 현실을 생동감있게 그려냈다. 탈북자 인터뷰와 노동신문 정독 그리고 실제 북한을 방문하며 얻은 정보들을 조합해 얻은 가장 생생한 북한을 배경으로 주인공 ’준도’의 성장담을 이야기한다. 고아원 원장인 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군인, 납치범, 스파이로 살며 자아에 눈을 뜬 한 인간의 사투에 낯설면서도 묘한 동질감이 느껴진다. 출간과 함께 세계 29개국에도 번역 출간될 정도로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는 북한의 이야기다. 저자는 스탠퍼드대 영문과 교수이며 사회에 변방에서 소외된 개인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써왔다.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_ 주노 디아스 (2008년 퓰리처상 수상작) 미국의 유명 희극인,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을 남겼다. 오스카 와오의 삶이 바로 그것이었다. 미국의 도미니카계 젊은 작가 주노 디아스는 독재자 트루히요 치하의 도미니카를 배경으로 뚱뚱하고 못생긴 SF 오타쿠 소년 ’오스카’를 메인으로 등장시켜 개인의 슬프면서도 웃긴 삶을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오스카의 누나, 오스카의 어머니, 그리고 또 다른 화자에 이르기까지 시점을 번갈아 가며 보여주는 서술 방식은 굴곡 많은 개인들의 역사를 다각도에서 보여준다. 저자는 거대한 역사 속에서 개인이 인생이 얼마나 비틀리고 변주되는지, 역사와 개인은 절대 동떨어져서 이해될 수 없음을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을 통해 이야기 한다. 로드 _ 코맥 맥카시 (2007년 퓰리처상 수상작) 대재앙 이후의 지구를 배경으로 길을 떠나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다. 문명은 파괴되었 고 거의 모든 생명이 멸종했다. 어둡고 끔찍하다. 원초적 서바이벌의 세계에서 살아남은 것은 차라리 형벌이다. 이 작품으로 정점에 선 거장으로 거듭난 저자는 에서 어설픈 구원이나 기쁨 따위는 넣지 않는다. 세상 끝 지옥으로 가는 마지막 열차 같은 아버지와 아들의 여정을 두고 많은 비평가와 독자들은 다양한 해석을 내놓았다. 하지만 코맥 맥카시는 이 책이 아들에 대한 사랑고백임을 밝히며 자신의 어린 막내아들에게 헌정한다. 묵시록 같은 이야기에서 한줄기 희망이 비치는 것은 이런 이유일 수 도 있겠다. 반지의 제왕에서 ’아라곤’역으로 열연했던 비고 모텐슨과 소설 의 열렬한 팬이었던 샤를리즈 테론 주연의 동명영화로 제작되어 세계인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미국의 목가 _ 필립 로스 (1997년 퓰리처상 수상작) 를 시작으로 , 으로 완결되는 필립 로스의 ’미국 3부작’. 이 책은 그 출발점으로, 광기와 폭력으로 얼룩진 1960년대의 혼란스러운 미국을 배경으로, 몰락해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미국 3부작’이라는 별칭만큼이나 이 책은 미국적이다. 3부작이 끝날 즈음 작가는 유대계 미국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뛰어넘어 가장 미국적인 이야기를 보여주는 작가로 세계에 우뚝 섰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던 옛 미국이 지나가고 새로운 시대가 출현하던 그 과도기, 허물어지고 부서지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미국을 이야기하는 작가의 솜씨는 이제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이다. 뿌리 _ 알렉스 헤일리 (1977년 퓰리처상 수상작) 저자는 강조한다. 소설 속에 담긴 흑인들의 이야기는 허구가 아닌 현실의 재구성이라고.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저자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한 이 소설은 그의 잊혀진 ’뿌리찾기’이며, 어린 시절 아프리카 조상에 대해 할머니가 들려준 서너 가지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몇 가지 단서에 의존해 정부 공문서 보관국에서부터 아프리카 대륙에 이르는 긴 추적의 시간 끝에 저자는 결국 서아프리카 감비아에서 200년 전 헤어진 고향사람들과 재회한다. 이 뿌리찾기 여정은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마치 우리나라의 ’모래시계’ 열풍처럼 미대륙을 강타했고 드라마 방영시간에는 식당과 가게의 매상이 떨어질 정도로 시청률이 높았다고 한다. 솔로몬 노섭의 과 함께 미국의 가장 대표적인 흑인문학으로 손꼽히는 이 책은 출간 이듬해 퓰리처상과 전미도서상을 수상했고 현재는 학생들의 교재로 채택되어 있을 만큼 미국에서 그 가치가 높은 책이다.  
482    력대 노벨 문학상 수상자와 국가별 및 수상작품 댓글:  조회:8281  추천:0  2016-10-07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자'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노벨문학상의 탄생부터 최근년도 수상작가     노벨문학상 후보는 비공개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제정된 노벨상. 이 상에는 노벨 화학상, 노벨 물리학상, 노벨 평화상, 노벨 의학상, 노벨 경제학상 그리고 노벨상의 꽃으로 불리는 ‘노벨 문학상’(Nobel Prize in Literature)이 있다. 노벨은 노벨상들이 그 전해에 인류에게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들에게 주어져야 하며, 그 중 한 분야는 문학 분야에서 이상적인 방향으로 가장 뛰어난 작품을 창조한 사람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진술했다. 전통과 권위를 인정받은 노벨 문학상(스웨덴)은 맨 부커상(영국), 공쿠르상(프랑스)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이다. 그중에서도 노벨 문학상은 국제적으로 가장 명성이 높은 상이다. 상금 또한 800만 크로나(약 13억 원)로 맨 부커상의 5만 파운드(약 8,500만원), 공쿠르상의 10유로(약 1만 5000원) 보다 가장 크다. 1901년부터 해마다 전 세계의 작가 중 한사람에게 준다. 작가의 특정한 작품 때문에 주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작가의 작품 전체를 평가한다. 노벨 문학상의 후보는 비공개가 원칙이다. 세계 곳곳의 관련 단체로부터 1월까지 후보를 추천받아 후보자 수를 줄여나가는 과정을 거쳐 5인을 최종심에 올린다. 스웨덴 아카데미가 10월 초에 수상자를 선정하여 발표하며, 시상식은 노벨이 사망한 날인 12월 10일에 열린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노벨의 초상이 새겨진 금메달과 노벨재단에서 운영하는 상금을 받는다. 한편 노벨문학상은 문학적 성취 외에도 장르와 지역, 정치적 상황 등을 안배해 주어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노벨의 초상이 새겨진 금메달 노벨 문학상 수상자 대부분이 소설가이거나 시인, 극작가이다. 그런데 작가가 아닌 수상자로는 테오도로 몸젠(1902), 루돌프 오이겐(1908), 앙리 베르그송(1927), 버트런드 러셀(1950), 윈스턴 처칠(1953) 등이 있다. ‘문학’상을 생각한다면 역사가나 철학자에게 수여한 경우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된다. 그러나 Literature가 문학에만 국한된 단어가 아닌, ‘쓰는 행위’(Literacy) 일반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베르그송과 처칠 같은 철학가, 정치가들이 그들의 유려한 문체와 사상으로써 이 상을 수여받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첫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프랑스 시인 ‘쉴리 프뤼돔’ 역대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1901년 쉴리 프뤼돔 시인을 시작으로 토마스 만(1929), 헤르만 헤세(1946), 오엔 겐자부로(1994), 존 멕스웰 쿳시(2003), 그리고 파트릭 모디아노(2014)까지 총 111명이 수상했다. 국가별 노벨 문학상 수상자 는 프랑스 작가 15명, 미국 작가 12명, 영국 작가 10명, 독일 작가 8명, 스웨덴 작가 8명, 스페인 작가 6명, 이탈리아 작가 6명, 폴란드 작가 4명, 아일랜드 작가 4명 등이고 언어권으로 분류하면 영어권 27명, 불어권 16명, 독일어권 13명, 스페인어권 11명, 스웨덴어권 7명, 이탈리아어권 6명, 러시아권 5명, 폴란드어권 4명, 노르웨이권 3명이다. 수상자들의 유럽 편향성, 작가의 사상 문제로 수상이 반려된 경우도 있다. 1회 최종 유력후보 레프 톨스토이는 무정부주의를 지지했기 때문에 후보에 오르고도 받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1958년『닥터 지바고』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옛 소련 정부의 압력으로 수상을 거부해야 했다. 반면에, 실존주의 문학 활동을 펼친 장 폴 사르트르(1964)는 “모든 공적인 명예를 거부한다.”며 자신의 의지로 노벨 문학상을 거부했다. 사르트르는 스웨덴 아카데미 앞 으로 수상을 거부한다는 편지를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장-폴 사르트르’라 서명하는 것과 ‘노벨상 장-폴 사르트르’라 서명하는 데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작가는 설령 그것이 가장 명예로운 방식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기관화 되는 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오늘날 문화전선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투쟁은 동서양의 문화가 평화적으로 공존토록 하는 것입니다. 인간과 문화는 '기관'의 간섭 없이 존재해야 합니다. 수상 작가 연설문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시상식에 앞서 스웨덴 스톡홀롬 아카데미에서 수상 소감 연설 겸 강연을 한다. 수상자가 직접 쓴 연설문에는 작가의 문학관과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주요 작가의 연설문을 보면 알베르 카뮈(1957)는 ‘작가는 진실에 대한 섬김과 자유에 대한 섬김이라는 짐을 지고 있으며 판단하기보다 이해하려고 애쓰는 이’를, 귄터 그라스(1999)는 ‘자신이 주체로서 주제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주제가 미리 주어져 있는 것’을, 가오싱젠(2000)은 ‘문학은 이런저런 주의의 속박을 벗어던지고 인간 생존의 딜레마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오르한 파묵(2006)은 ‘어느 날엔가 우리가 쓴 것들이 읽히고 이해될 거라는, 왜냐하면 사람들은 세계 어디에서나 서로 닮아 있기 때문이라는 믿음’을, 르 클레지오(2008)는 ‘새로운 시대의 작가는 더 나은 삶의 모델을 낳겠다는 자만심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201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프랑스 소설가 ‘파트리크 모디아노’는 “노벨문학상 수상이 비현실적”이라며 놀라워했고, 여성으로서는 13번째 수상을 거머쥔 2013년 수상작가 ‘앨리스 먼로’는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 같았던 수많은 몽상 중 하나였다. 노벨문학상 수상은 빛나는 영광”이라고 수상 소감을 전했다. 주요 수상 작가의 작품세계 파트리크 모디아노(2014) 201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파트리크 모디아노' 제2의 마르셀 프루스트로 불려온 프랑스 문학의 거장이다. 유대계, 나치 점령과 정체성 상실이란 주제를 작품 대부분에서 다루고 있다. 1968년 작 '별의 자리'는 후에 독일에서 포스트 홀로코스트의 대표작으로 칭송받았다. 바스러지는 과거, 잃어버린 삶의 흔적으로 대표되는 생의 근원적 모호함을 신비로운 언어로 탐색해 온 작가는 1968년 첫 소설『에투알 광장』으로 로제 니미에상, 페네옹상을 받으며 데뷔하였다.『외곽 순환도로』(1972)로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을, 『슬픈 빌라』(1976)로 리브레리상을,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1978)로 프랑스의 가장 권위 있는 콩쿠르 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2014년 프랑스 작가로는 15번째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스웨덴 한림원은 ‘붙잡을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기억의 예술로 환기시키고 직업의 생활세계를 드러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앨리스 먼로(2013) 2013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앨리스 먼로' 캐나다의 대표적 소설가로 현존하는 최고의 단편 작가다. 평생 단편 창작에 몰두해 작가는 각각의 짧은 이야기 속에 삶의 복잡한 무늬들을 섬세한 관찰력과 탁월한 구성으로 아름답게 그려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1968년 첫 소설집 『행복한 그림자의 춤』으로 캐나다 총독문학상을, 1978년『당신은 당신이 누구라고 생각합니까?』로 캐나다 총독문학상 2번째 수상을, 1986년『사랑의 진행』으로 캐나다 총독 문학상 3번째 수상했다. 미국에서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오헨리상’을, 2009년에는 ‘맨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영미권에서는 높은 인지도와 명성을 누리고 있는 작가다. 모옌(2012) 201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모옌' 모옌은 중국의 윌리엄 포크너, 프란츠 카프카로 불리는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이다. 모옌의 작품세계는 환상 리얼리즘으로 규정할 수 있다. 1988년 를 각색한 영화 이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을, 2000년『홍까오량 가족』이 이 선정한 ‘20세기 100대 중국어 소설을, 2008년『인생은 고달파』로 홍루몽상 최고상을, 201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스웨덴 한림원은 ‘환상과 현실, 역사적 관점과 사회적 관점을 엮어, 그 복합적인 면에서 윌리엄 포크너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에 비견할 만한 세계를 창조해냈다’고 선정이유를 밝혔다. 이어 ‘미국 작가 윌리엄 포크너나 콜롬비아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연상시키는 세계적인 스타일을 창조했으며 중국 고전 문학과 구비문학이 그 뿌리가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2011) 2011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는 스웨덴 서정시를 대표하는 국민 시인이며 영미권에서도 ‘은유의 거장’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1954년 첫 시집『17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여정의 비밀』(1958),『반향과 흔적』(1966),『거대한 수수께끼』(2004) 등이 있다. 그의 시는 말똥가리처럼 높은 지점에서세상을 신비주의적 차원에서 바라보되 지상의 자질구레한 세목들에 날카로운 초첨을 맞추고 있다고 하여 ‘말똥가리 시인’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특히 스칸디나비아 특유의 자연환경에 대한 깊은 성찰과 명상을 통해 삶의 본질을 통찰하며 서구 현대시의 새 길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작품 안에서 스웨덴의 자연은 정치적 다툼보다 북극의 얼음이 해빙하고,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포용과 화해의 공간으로 그려진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2010) 2010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현대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대표하는 페루의 저항 작가이자 지식인이다. 사회문제서 에로티시즘까지 장르 넘나드는 전개가 탁월하다. 1963년『도시와 개들』로 간이도서상, 스페인 비평상을, 1966년『녹색의 집』으로 페루 국가소설상, 스페인 비평상을, 1994년 세르반테스문학상을, 2000년『염소의 축제』를 출간했다. 201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스웨덴 한림원은 ‘권력구조에 대한 면밀한 묘사와 이에 대한 개인의 저항, 항거, 좌절에 대한 정곡을 찌르는 은유를 보여줬다’고 선정이유를 밝혔다. ‘남미의 대표적 저항작가’로 불릴 만큼 초기에는 군사독재와 부패를 비판하는 소설 세계를 선보이고 60년대 사회주의와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을 옹호했지만, 80년대 이후에는 우파로 정치적 입장을 바꾸어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의 소설 세계도 변화를 보여 70년대 사회비판적인 리얼리즘에 기반을 둔 소설들을 주로 선보이다가 이후에는 유머와 에로틱한 이야기를 곁들인 가벼운 색채의 포스트모더니즘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 헤르타 뮐러(2009) 2009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헤르타 뮐러' 헤르타 뮐러는 루마니아 출신의 독일 여성 작가로 니콜라에 차우세쿠 독재정권 아래에서 고통받은 이들의 상처를 작품에 담아왔다. 1984년『저지대』로 문단 데뷔를, 1989년『외다리 여행자』로 마리 루이제 플라이서 문학상을, 1994년『마음 짐승』로 클라이스트 문학상을, 200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스웨덴 한림원은 ‘응축된 시정과 산문의 진솔함으로 소외층의 풍경을 묘사했다’고 선정이유를 밝혔다. =======================================================================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자와 수상작품 ▲1901년 쉴리 프뤼돔(프랑스 시인) 구절과 시 ▲1902년 테오도어 몸젠(독일 역사가) 로마의 역사 ▲1903년 비에른 스티에르네 비외른손(노르웨이 소설가) 행운아 ▲1904년 프레데리크 미스트랄(프랑스 시인) 미레유 호세 에체가라이(스페인 극작가) 광인인가 성인인가 ▲1905년 헨리크 셍키에비치(폴란드 소설가) 쿠오바디스 ▲1906년 조수에 카르두치(이탈리아 시인) 레비아 그라비아 ▲1907년 러디어드 키플링(영국 소설가) 정글북 ▲1908년 루돌프 크리스토프 오이켄(독일 철학자) 대사상가의 인생관 ▲1909년 셀마 라게를뢰프(스웨덴 소설가) 닐스의 모험 ▲1910년 파울 요한 폰 하이제(독일 시인 소설가) 아라비아타 ▲1911년 모리스 마테를링크(벨기에 극작가) 파랑새 ▲1912년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독일 극작가) 해뜨기 전 ▲1913년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인도 시인) 기탄잘리 ▲1914년 수상자 없음 ▲1915년 로맹 롤랑(프랑스 소설가) 장크리스토프 ▲1916년 베르네르 폰 헤이덴스탐(스웨덴 시인) 폴쿵스의 나무 ▲1917 카를 아돌프 겔레루프(덴마크 소설가) 깨달은 자의 아내 헨리크 폰토피단(덴마크 소설가) 죽음의 제국 ▲1918년 수상자 없음 ▲1919년 카를 슈피텔러(스위스 시인 소설가) 올림포스의 봄 ▲1920년 크누트 함순(노르웨이 시인 소설가) 굶주림 ▲1921년 아나톨(프랑스 소설가) 페도크 여왕의 불고기집 ▲1922년 하신토 베나벤테 이 마르티네스(스페인 극작가) 타산적인 이해, 사악한 선행자들 ▲1923년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아일랜드 시인) 이니스프리의 호도 ▲1924년 브와디스와프 레이몬트(폴란드 소설가) 농민 ▲1925년 조지 버나드 쇼(아일랜드 극작가) 피그말리온 ▲1926년 그라치아 델레다(이탈리아 소설가) 코시마 ▲1927년 앙리 베르그송(프랑스 철학자) 물질과 기억 ▲1928년 시그리 운세트(노르웨 소설가) 크리스틴 라브란스다테르 ▲1929년 토마스 만(독일 소설가) 마의 산,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1930년 싱클레어 루이스(미국 소설가) 메인 스트리트, 엘머 갠트리 ▲1931년 에리크 악셀 카를펠트(스웨덴 시인) 프리돌린의 노래 ▲1932년 존 골즈워디(영국 소설가) 포사이트가의 이야기, 충성 ▲1933년 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소련 소설가) 마을 ▲1934년 루이지 피란델로(이탈리아 소설가 극작가) 헨리 4세, 버림받은 여자 ▲1935년 수상자 없음 ▲1936년 유진 오닐(미국 극작가) 밤으로의 긴 여로, 느릎나무 밑의 욕망 ▲1937년 로제 마르탱 뒤가르(프랑스 소설가) 티보가의 사람들 ▲1938년 펄 벅(미국 소설가) 대지 ▲1939년 프란스 에밀 실란페(핀란드 소설가) 젊었을 때 잠들다 ▲1940~1943년 수상자 없음 ▲1944년 요하네스 빌헬름 옌센(덴마크 소설가) 긴 여행 ▲1945년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칠레 시인) 비수 ▲1946년 헤르만 헤세(스위스 소설가) 데미안 ▲1947년 앙드레 지드(프랑스 소설가) 좁은 문 ▲1948년 T.S.엘리엇(영국 시인) 황무지 ▲1949년 윌리엄 포크너(미국 소설가) 자동차 도둑 ▲1950년 버트런드 러셀(영국 철학자) 권위와 개인 ▲1951년 페르 라게르크비스트(스웨덴 시인) 바라바 ▲1952년 프랑수아 모리악(프랑스 소설가)- 테레즈 데케루 ▲1953년 윈스턴 처칠(영국 정치가) 제 2차대전 회고록 ▲1954년 어니스트 헤밍웨이(미국 소설가) 무기여 잘 있거라 ▲1955년 할도르 락스네스(아이슬란드 소설가) 독립한 민중 ▲1956년 J.R.히메네스(스페인 시인) 프라테로와 나 ▲1957년 알베르 카뮈(프랑스 소설가) 이방인 ▲1958년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소련 소설가) 닥터 지바고 ▲1959년 살바토레 콰지모도(이탈리아 시인) 시인과 정치 ▲1960년 생-종 페르스(프랑스 시인)원정, 연대기 ▲1961년 이보 안드리치(유고슬라비아 시인) 드리나강의 다리 ▲1962년 존 스타인벡(미국 소설가) 불만의 겨울 ▲1963년 게오르게 세페리스(그리스 시인) 연습장 ▲1964년 장 폴 사르트르(프랑스 철학자) 구토 ▲1965년 미하일 솔로호프(소련 소설가) 고요한 돈강 ▲1966년 S.요세프 아그논(이스라엘 소설가) 출가 넬리 작스(스웨덴 시인) 엘리 ▲1967년 미겔 아스투리아스(과테말라 소설가) 과테말라의 전설집 ▲1968년 가와바타 야스나리(일본 소설가) 설국 ▲1969년 새뮤얼 베케트(아일랜드 극작가) 고도를 기다리며 ▲1970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소련 소설가) 수용소 군도 ▲1971년 파블로 네루다(칠레 시인) 지상의 주소 ▲1972년 하인리히 뵐(독일 소설가) 기차는 늦지 않았다 ▲1973년 패트릭 화이트(호주 소설가) 폭풍의 눈 ▲1974년 H.마르틴손(스웨덴 시인) 아니 아라 E.욘손(스웨덴 소설가) 해변의 파도 ▲1975년 에우제니오 몬탈레(이탈리아 시인) 오징어의 뼈 ▲1976년 솔 벨로(미국 소설가)- 새믈러씨의 혹성 ▲1977년 비센테 알레익산드레(스페인 시인) 파괴 또는 사랑 ▲1978년 아이작 싱어(미국 소설가) 고레이의 사탄 ▲1979년 오디세우스 엘리티스(그리스 시인) 방향 ▲1980년 체슬라브 밀로즈(폴란드/미국 시인) 대낮의 등불 ▲1981년 엘리아스 카네티(영국 소설가) 현혹 ▲1982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콜롬비아 소설가) 백년동안의 고독 ▲1983년 윌리엄 골딩(영국 소설가) 파리 대왕 ▲1984년 야로슬라프 세이페르트(체코슬로바키아 시인) 프라하의 봄 ▲1985년 클로드 시몽(프랑스 소설가) 사기꾼 ▲1986년 월레 소잉카(나이지리아 극작가)- 사자와 보석 ▲1987년 요세프 브로드스키(미국 시인) 연설 한 토막 ▲1988년 나기브 마푸즈(이집트 소설가) 도적과 개들 ▲1989년 카밀로 호세 세라(스페인 소설가) 파스쿠알 두아르테 일가 ▲1990년 옥타비오 파스(멕시코 시인) 태양의 돌 ▲1991년 나딘 고디머(남아공 소설가) 사탄의 달콤한 목소리 ▲1992년 데렉 월코트(세인트루시아 시인) 또 다른 삶 ▲1993년 토니 모리슨(미국 소설가) 재즈 ▲1994년 오에 겐자부로(일본 소설가) 개인적 체험 ▲1995년 셰이머스 히니(아일랜드 시인) 어느 자연주의자의 죽음 ▲1996년 비슬라바 쉼보르스카(폴란드 시인) 모래 알갱이가 있는 풍경 ▲1997년 다리오 포(이탈리아 극작가) 돼지 등 타기 ▲1998년 주제 사라마구(포르투갈 소설가) 눈먼 자들의 도시 ▲1999년 귄터 그라스(독일 소설가) 양철북 ▲2000년 가오싱젠(중국 극작가) 영산 ▲2001년 비디아다르 네이폴(영국 소설가) 세계 속의 길 ▲2002년 임레 케르테스(헝가리 소설가) 운명 ▲2003년 J M 쿠치(남아공 소설가) 불명예 ▲2004년 엘프레데 옐리네크(오스트리아 소설가) 피아노 치는 여자 ▲2005년 해럴드 핀터(영국 극작가) 과거 일들의 회상 ▲2006년 오르한 파무크(터키 소설가) 내 이름은 빨강 ▲2007년 도리스 레싱(영국 소설가) 마사 퀘스트 ▲2008년 르 클레지오(프랑스 소설가) 대홍수 ▲2009년 헤르타 뮐러(독일 소설가) 저지대 ▲2010년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페루 소설가)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2011년 토머스 트란스트로메르(스웨덴 시인) 창문과 돌 ▲2012년 모옌(중국 소설가)-붉은 수수밭 ▲2013년 앨리스 먼로(캐나다 소설가) 행복한 그림자의 춤 ▲2014년 파트릭 모디아노(프랑스 소설가) 어두운 상점의 거리 ▲2015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우크라이나 작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출처]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자|작성자 cyber-z
481    고향문단소식 두토리 댓글:  조회:4379  추천:0  2016-09-30
김학천 한문시집“시공간 넘나드는 안단테” 출간    2016-09-07 10:56:31               (흑룡강신문=하얼빈) 윤운걸 길림성특파원= 김학천씨의 한문시집“시공간 넘나드는 안단테”(穿越时空的行板)가 최근에 민족출판사에서 출판되여 독자들 특히 한족독자들과 대면하게 되였다.   중국작가협회 부주석 겸 로신문학원 원장인 지다마쟈(이족)는 이 시집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김학천씨의 시집 “시공간 넘나드는 안단테”는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다듬어낸 한문시집이다. 이 시집의 시들을 읊어내려가노라면 저자가 시상을 가라앉히고 시의 이미지를 “발효”시키기위해 노력함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가하면 간혹은 방황과 더불어 곤혹에서 몸부림치며 자기의 창작을 다시 한번 돌이켜보고 심열하고 론증하면서 지은것이 엿보인다.   그러기에 이 시집에 수록된 시편들은 점점 더 후적박발(厚积薄发)의 특징을 갖고있어 독자들로 하여금 “새김질”하면서 음미하도록 유도하고있다.   이 시집의 시편들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감정이 포만하며 시상이 분발하기에 시맛이 절실하게 드러나있다. 한국의 저명한 문학평론가 홍기삼교수가 언급했듯이 김학천씨의 시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지식인들의 이미지가 다분하게 깃들어 있다. 보다싶이 김학천씨의 시편들은 시인의 은근한 약속(隐约)의 모습이 담겨있으면서도 또 지극히 분방하며 절제된 감정세계에서의 시인의 존재를 느끼게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인의 철학관과 미적 추구를 엿볼수 있다. 이 시집에 수록된 “별다른 고독”, “벌거벗은 수림”, “파티야의 밤”, “태평양 피안의 로스엔젤레스”, “부르친의 달님”등 시편에서 우리는 이점을 느낄수 있다.   김학천씨의 시집 “시공간 넘나드는 안단테”는 “큰강남북”, “이역만리”, “고향운치”, “시공간터널”, “달빛언어”와 “령혼목방” 등 6개 부제로 편성되였다. 시집의 내용을 살표보면 시공간의 거시적인 면도 있고 심령적인 미세한 세절도 있어 능란하게 또한 여러가지 부동한 제재와 사물의 부동한 측면을 다룰수 있는 가장 적절하고 가장 감성적인 감수력과 표달력이 돋보인다.   지다마쟈는 이상과 같이 이 시집을 평했다.   일찌기 연변작가협회 주석,연변민족문화원 원장 등 직무를 이행한 김학천씨는 “꿈많은 백화림”등 5부의 한문시집을 펴냈고 여러부의 조선문시집을 한문으로 번역했다.   김학천씨는 제7기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제4기한국문학광장 문학상 등 다수상을 수상했고 “중국당대한문시집년감”에 수록되였다.   그는 또 “중국조선족문학작품정수”(한문판,5권6책) 등 세부의 책 주필을 맡기도 했다.   ㅡ [주:                안단테란 악보에서 느리게 연주하라는 말] ================================== [서울=동북아신문] 주청룡 특약기자= 9월 18일 창간 20돐 기념행사가 용정시 문화방송신문출판국의 주최로 용정에서 거행되었다. 대회에서 먼저 용정시 문화방송신문출판국의 라송화국장이 개회사를 올리고 신문사 황상박주필이 신문이 걸어온 20년을 회고하였다.     ▲ 개회사를 하고 있는 라송화국장 1996년 4월 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조선족가사신문으로 고고성을 울렸는데 초창기에는 등사판으로 발행되다가 점차적으로 지성인들의 대폭지지로 인쇄판 월간지로 매달 1000부씩, 연변 주내는 물론 동북3성, 조선, 한국, 로시아, 미국, 캐나다까지 발행되고 있다.   2006년 연변가사협회가 성립되면서 회원이 500여 명으로 발전되면서 전에 있어 본적이 없었던 가사창작열이 일어나면서 가 진정으로 “작사자의 집”, “작곡가의 맑은 샘”으로 되였다. 20년래 는 4만여 수의 가사를 실었으며 그 가운데서 4,000여 수가 작곡되었고 그 중 1,000여 수가 라디오, 텔레비전, 간행물, 출연 등 형식으로 대중들에게 보급되였다. 그리고 500여 수가 중앙, 성, 주의 상을 받았다.     ▲ 사업보고를 하고 있는 황상박주필 황상박주필의 사업보고에 이어 연변인민출판사 손중언 전임사장과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 박장수 전임회장의 축사가 있었으며 북경, 대련, 장춘 흑룡강성 등지의 시인, 작사자, 작곡가들이 보내온 축사가 대독되였다. 대회에서는 또 특수 공로가 있는 사장 오정묵, 주필 황상박에게 특수공로패를 시상하였으며 기타 31명에게 감사패를 증정하였다. 이번 행사에 기업가 최근이 10,000원을 협찬을 하였다. 황상박주필이 용정시 당안국에 합본을 기증하였다.   대회에서는 또 작사자대표 최정일, 작곡가 대표 황상룡의 발언하고, 간단한 축하공연으로 막을 내렸다.     ▲ 오정묵사장에게 특수공로패를 증정     ▲ 황상박주필에게 특수공로패를 증정
480    베이징문단소식 한토리 댓글:  조회:5106  추천:0  2016-09-30
[ 2016년 10월 01일 08시 51분 ]     /// 천안문광장 중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 시상식 북경서    2016-09-29 09:18:35               (흑룡강신문=하얼빈) 피금련 특약기자= 27일, 중국작가협회와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서 공동주최한 제11회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 시상식이 북경 중국현대문학관에서 성대히 개최되였다.     중국작가협회 주석 철응, 중국작가협회 당조서기이며 부주석인 전소천촌 등이 시상식에 참가하여 축사를 했다. 이밖에 중국작가협회 부주석 리빙, 중선전부 부부장 경준해, 국가민위 부주임 리창평, 중국작가협회 명예부주석 단증,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명예회장 마라친부(玛拉沁夫) 및 북경에서 중국작가협회 8기 10차 주석단 확대회의에 참가한 전체 회원들도 시상식에 참가했다.   중국작가협회 주석 철은은 개막사에서 "소수민족문학은 우리 나라 사회주의문학의 중요한 구성부분으로서 중화민족의 문화발전을 추동하는데 적극적인 공헌을 하고 있다. 이번 수상작품들은 여러 민족 군중들의 현실과 리상, 분투와 생활에 깊이 뿌리 박고 민족전통의 영양분을 섭취하였기에 민족성이 짙고 세계성을 가지고 있다" 고 지적했다.   이번 제11회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 평선은 2012년부터 2015년까지 중국 경내에서 출판된 소수민족작가들의 작품에서 선발, 49명으로 구성된 평심위원회의 실명제 투표를 거쳐 최종 장편소설, 중단편소설, 시가, 산문 등 쟝르에서 각각 5편, 보고문학에서 4편, 그리고 3명의 번역상을 수상했는바 총 15개 민족의 27명 작가가 '준마상'을 획득했다. 24부 수상작품중 몽골문, 장문, 카자흐문, 조선문, 위글문 등 5가지 소수민족 모어 작품 7부가 포괄되였는데 이는 수상작품의 약 30%를 차지했다.   조선족 작가 및 작품으로는 김관웅교수의 '력사의 강 두만강을 말하다'와 최룡관시인의 '최룡관 시선집'이 이번 '준마상' 영예를 받아안았다.   1981년에 중국작가협회와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서 공동으로 설치한 중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은 소수민족문학창작을 고무격려하고 중국 다민족문학의 발전을 추동하는데 취지를 둔 문학상으로서 '모순문학상', '로신문학상', '전국우수아동문학상' 등과 함께 중국 당대의 국가급 최고의 4대 문학상으로 불리우며 4년에 한번씩 평한다.     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 시상식 북경서,조선족 두명 수상 편집/기자: [ 최화 ]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6-09-29 10:22:10 ] 수상후 기념사진을 남긴 최룡관(왼쪽 세번째사람),김관웅(왼쪽 네번째사람) 조선족 김관웅, 최룡관이 제11기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아 조선족문단에 또 하나의 쾌거를 기록했다. 중국작가협회, 국가민족사무위원회의 공동주최로 27일 중국현대문학관에서 제11기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준마상”시상식이 개최되였다. 이번 평선은 2012년부터 2015년까지 우리 나라 경내에서 출판된 소수민족작가들의 작품에서 선발했는데 응모작품은 력대를 초과한 총 309부였다. 최종 김관웅의 “두만강은 말한다” 등 5부의 산문, 최룡관의 “최룡관 시 선집” 등 5부의 시가, 리전봉의 “백호채”등 5부의 장편소설, 마금련의 “장하” 등 5부의 단편소설, 풍설송의 “방대증: 소실과 재현” 등 4부의 보고문학 도합 24부의 작품과 3명 번역자가 수상했다. 평심위원들은 《김관웅의 작품 는 사학과 문학을 겸비하면서 깊은 인문정서와 리성적인 정신을 표현하고있다》고 평했고 최룡관의 “최룡관 시 선집”은《조국, 고향, 인민에 대한 깊은 열애를 표달하며 천지인화(天地人和) 경지를 체현하면서 조선족시가의 특색을 나타냈다》고 평했다. 김관웅교수는《이 상은 나의 모어창작에 대한 격려이고 중국 조선족 작가 모어창작에 대한 표창이라고 생각한다》고 소감을 밝히면서《중국 조선족과 기타 소수민족 모어창작이 계속 아름답게 피여나길 바란다》고 전했다. 최룡관시인은《준마상은 작가들한테는 하늘의 별따기와 같은것이다. 이 상은 나한테 있어 가장 큰 영광이다》고 했다. “최룡관 시 선집”에는 총 120수의 시가 수록돼있고 그중 47%가 “하이퍼시”이다. “하이퍼시”로 유명한 최룡관시인은 이제 곧 “하이퍼시창작론”을 출판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1981년 창설된 "준마상"은 "모순문학상", "로신문학상", "전국우수아동문학상" 등과 함께 국가급 4대 문학상중 하나로 매 4년에 한번씩 평한다.
479    섣부른 시지기 다시 한번 섣부르게 하면서... 댓글:  조회:6180  추천:0  2016-09-29
  [ 2016년 10월 03일 11시 17분 ]                                     [ 2016년 10월 03일 11시 17분   조회:3201 ]     장백산북쪽 - 비룡폭포 === 장백산북쪽관광구(1)=== === 장백산남파관광구(2)=== 안동서 한옥 관리하는 중국 동포 ‘옌볜 정지용문학상’ [중앙일보] 입력 2016.08.30 01:07 수정 2016.08.30 01:33 |  기자 송의호 기자 SNS 공유 및 댓글 SNS 클릭 수   김승종 시인 ‘우물 일곱 개…’ 경북 안동에서 한옥을 관리하는 중국 동포가 고향을 그리며 쓴 시로 ‘옌볜(延邊) 정지용문학상’을 받았다. 충북 옥천문화원은 제20회 ‘옌볜 정지용문학상’ 수상자로 김승종(53·사진)씨를 선정했다. 수상작은 ‘우물 일곱 개였던 마을…’이다. DA 300   중국에서 등단한 시인인 김씨는 안동종가음식체험관인 ‘예미정’에서 한옥을 관리하고 토마토 등을 재배해 왔다. 그는 고향인 중국 지린(吉林)성 허룽(和龍)시 허룽작가협회 주석(회장)을 지냈으며 옌볜일보 해란강문학상 등도 받았다. 옌볜대학을 졸업한 뒤 허룽(和龍) 등지에서 교사와 은행원으로 근무하다가 2010년 한국으로 왔다. 김씨는 “이육사 시인의 고향인 안동에서 저의 고향 옌볜과 어머니를 그리며 시를 지을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옌볜 정지용문학상은 옥천문화원이 옥천 출신인 정지용 시인의 문학 정신을 기리고 동포 문학인 발굴을 위해 옌볜작가협회와 함께 매년 선정한다. 그해 발표된 시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작품을 뽑는다. 수상자에겐 고료와 함께 시집 1000권을 출간해 준다. 시상식은 다음달 2일 옌볜대학에서 옥천문화원 주관으로 개최되는 제20회 옌볜지용제 기간에 열린다. 안동=송의호 기자 yeeho@joongang.co.kr///////////////////////////////////// [아시아뉴스통신] = 김성수 기자/ 그동안 문학을 통한 한민족의 결속을 다지는 계기가 돼온 연변지용제가 올해로 20돌을 맞으면서 국제교류의 징검다리가 되는 등 그 의의가 커졌다. 대홍수란 악재에도 불구하고 연변 동포의 열망으로 행사가 취소되지 않고 계획대로 치러진 데다 연길시와 이웃한 용정시와 교류를 시작하는 성과를 얻었다. 4일 충북 옥천군에 따르면 제20회 연변지용제가 지난 1일부터 2일까지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일원에서 펼쳐졌다. 이번 행사는 지난달 30일부터 3일 간 북·중 접경지역에 내린 폭우로 연길시 주변에 '100년만의 큰 홍수'가 난 비상시국이라 자칫 모든 행사가 취소될 뻔 했다. 하지만 이 곳 최고의 문학축제로 발돋움 한 연변지용제는 한·중 두 나라 행사주관 단체인 옥천문화원(원장 김승룡)과 연변작가협회(주석 최국철)의 노력과 현지 동포들의 염원으로 중국 당국의 양해를 받아 예정대로 치러졌다. 연변의 구삼절(9월3일) 기념행사를 축소하고 수해복구에 총력을 기울이는 상황에서 중국 측이 연변지용제를 일정대로 추진 할 수 있도록 해 준 것은 연변에 사는 한민족들이 이 행사를 얼마나 뜻 깊게 생각하고 바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구삼절은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된 날(1952년 9월3일)로 이곳에서는 중국 최대의 명절인 춘절(음력 1월1일)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지난 2일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연변대학교 예술학원 실천극장에서 제20회 연변정지용문학상 시상식을 갖고 수상자인 김승종 시인(가운데)과 김영만 충북 옥천군수(맨왼쪽), 김승룡 옥천문화원장(맨오른쪽)이 기념촬영 하고 있다.(사진제공=옥천군청) 이번 연변지용제는 지난 1일 '제5회 연변정지용백일장'을 시작으로 막을 올렸다. 연길시 제10중학교에서 열린 이번 백일장에는 이 학교 학생 370명이 참가했다. 원래 운동장에서 열릴 예정이던 개막식이 폭우로 인해 좁은 강당에서 펼쳐졌지만 연변 중학생들의 문학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기엔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고학년(3학년) 주제 '달빛'과 저학년(1~2학년) 주제 '가을 하늘'이 내걸릴 때마다 예상을 했는지 못했는지 학생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어 지난 2일에는 연변대학교 예술학원 실천극장에서 제20회 연변지용문학제와 축하 음악제가 현지 동포들과 옥천군 방문단 등 3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연변 측에서는 리호남 연변주위 선전부 부부장, 최국철 연변작가협회 주석 및 회원과 동포들이 참석했고 옥천군에서는 김영만 군수를 비롯한 김승룡 옥천문화원장, 류웅렬 옥천교육장 등이 함께 했다. 특히 옥천군의회 유재숙·이재헌 의원이 지난 20년 간 이어온 연변지용제의 발자취를 살피고 앞으로의 발전방안을 구상하고자 힘든 여정을 함께하며 현장 중심의 의정활동을 펼쳐 눈길을 끌었다. 문학제에서는 이번 연변정지용문학상 수상자인 김승종 시인에 대한 시상식과 각계각층 인사들의 축하 메시지, 옥천지용시낭송협회와 연변 시낭송 회원들의 정지용 시낭송 등이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 김영만 옥천군수는 "중국 동포들이 보여준 열망과 결속으로 20돌을 맞이한 연변지용제가 예년보다 더 의미 있고 앞으로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문학제에서는 전날 열린 ‘제5회 연변정지용백일장’ 시상식도 이뤄졌다. 수상은 고학년부 대상에 연길시 제10중학교 3학년 5반 김정혜, 저학년부 대상에 1학년 2반 전유나 학생이 받았다. 이들에게는 상금 각 45만원이 주어지고 옥천군과 옥천문화원은 내년 5월 충북 옥천 정지용 생가 일원에서 열리는 ‘제30회 지용제’에 두 학생을 초청했다. 이 외에도 금상, 은상, 동상, 우수상 등 고학년부 24명, 저학년부 34명이 이번 백일장에 입상했다. 심사는 김수복 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를 위원장으로 홍용희 경희사이버대학 교수, 김성장 옥천작가회의 회장 등 저명한 문학인이 맡았다. 3일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명동에 있는 윤동주 생가에서 충북 옥천군 방문단이 마을 촌장으로부터 생가에 관해 설명을 듣고 있다.(사진제공=옥천군청) 연변 동포의 열망으로 힘든 환경 속에서도 탈 없이 치를 수 있었던 이번 연변지용제는 연길시와 이웃한 곳의 용정시와 교류를 시작하는 성과도 얻었다. 용정시는 청나라 때부터 나라님께 바칠 벼를 재배할 정도로 고품질의 쌀을 생산하는 곳이며 정지용 시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널리 알려진 민족 저항시인 윤동주 선생이 태어나 자란 곳이다. 윤동주 선생의 고향인 용정시 명동에는 옥천 정지용 생가와 같이 윤 시인의 생가가 보존돼 있으며 한민족이 연변을 여행할 때마다 반드시 들르는 독립운동가의 마을이며 관광지이다. 옥천군은 짧은 연변지용제 기간에 틈을 내 정 시인과 시적 공감 및 독립운동으로 연을 맺은 윤 시인의 고향 용정시에 유색 벼를 이용해 넓은 땅을 홍보매체로 활용할 수 있는 선진 농업기술을 전수하며 교류의 장을 열었다. 용정시는 윤 시인의 고향마을 명동 일대를 연변에 사는 우리 동포 학생들을 위한 배움의 성역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하는 한편 내년 연변정지용백일장을 이곳 명동에서 열자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김승룡 옥천문화원장은 “중국 동포에게 문학적 향수를 일깨운다는 취지로 1997년부터 시작된 연변지용제가 그간 단순한 문학축제로 비춰진 부분이 있지만 내막에는 한민족을 결속하고 정 시인의 고향 옥천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숨은 공신으로 톡톡한 몫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옥천군과 옥천문화원은 용정시 명동 윤동주 생가에 정지용 시인의 시적 증표를 세워 그들 간의 시 감성과 관계를 부각시키고 국제교류도 확대하고자 용정시를 비롯한 중국 관련 당국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향수”의 시인 정지용(1902-1950)의 시세계를 기리기 위해 마련된 2016 제20회 연변지용문학제가 2일 연변대학 예술학원 음악홀에서 열렸다. 연변작가협회가 주관하고 한국 옥천군청 및 옥천문화원에서 주최하는 문학제는 지용문학상 시상식, 지용백일장 시상식과 지용음악제 등 세 부분으로 나뉘여 진행되였다. 올해 연변 “지용문학상”은 김승종시인이 수상했다. 그의 시집 《우물 일곱개였던 마을-“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는 실존공간에서 던진 의문에 주옥같은 시적언어로 명쾌한 답을 얹어주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실존을 추구하였으며 시는 기묘한 소리와 빛으로 태여나 청각적, 시각적으로 즐거움을 선사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승종시인에게는 상패와 더불어 수상시집이 증정되였다. 한편, 문학제에 앞서 1일 연길시제10중학교에서 350여명 학생들이 참가한 가운데 펼쳐진 제5회 연변지용백일장의 수상결과가 발표되였으며 이어 시상이 있었다. 지용음악제에서는 중국과 한국측에서 각기 준비한 수준 높은 문예공연을 선보였으며 극장밖에서는 “한국 향수사진 전국 공모전”에서 입상한 중국 출품작품 30점이 전시되였다. 옥천군 김영만군수는 옥천에서는 지용문학상과 백일장, 세미나 등 각종 행사를 통해 시인의 정신을 기리고있다고 소개하면서 “연변과 더불어 정지용시인을 기리는 행사를 20회째 이어갈수 있은것은 량측 지성인들의 로고뿐만아니라 민족적동질성을 갖고있기때문”라고 밝혔다. 옥천문화원 김승룡원장은 “회를 거듭할수록 수상자들의 수준이 높아지고있는것 같다”며 “앞으로도 지용문학제를 확대발전시켜 중한 두 나라의 작가와 예술인들, 학생들 사이의 교류를 촉진하도록 힘쓰겠다”고 밝혔다. 옥천군 의회 류재숙의원은 “연변에서 지용문학제가 20회째 이어지지만 행사에 참가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면서 “행사에 앞서 예산심의를 할 때만 해도 미미한 효과를 예산했지만 와보니 그것이 빗나간 생각임을 알았다. 돌아가서 앞으로도 연변지용제에 큰 무게를 두면서 더욱 적극적인 방안을 모색할것”이라고 밝혔다. [연변일보] = 박진화 기자 [출처] 연변지용문학제 열려...  김승종 "지용문학상" 수상 - {모이자 뉴스} ////////////////////////////////////////////////////////////////////////////// 김승종시인 제20회 지용문학상 수상 편집/기자: [ 김태국 ]  / [ 길림신문 ]  /  [ 2016-08-25 13:31:17 ]    김승종시인 한국 충청북도 옥천문화원은 화룡태생인 김승종시인의 “우물 일곱개였던 마을,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를 제20회 연변지용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했다고 일전에 밝혔다.   이 작품은 “고향의 어머니와 친구들이 작품속 시적화자로 등장하면서 통속적인 언어의 맛과 어울려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는 평을 받았다. 연변대학 사범학원을 졸업한 죽림 김승종(1963.12.17-)은 교사와 은행직원 등을 거쳐 현재는 자유기고인으로 활동하고있는 시인이다. 시인은 1980년 《도라지》잡지에 시 《고추》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보리 한알과 등록되잖은 Ⓡ와 일회용 삶》, 《보리깜부기와 〈구혼광고〉의 흰 그림자의 삶》, 《두 동네 은회색 카니발》(공저) 등 시집들을 출간하고 《두만강여울소리》 시탐구상, 한국 세계계관시인문학회 본상 , 연변작가협회 《가야하》인터넷문학상, 연변일보 《해란강》 문학상 등 다수를 수상했다. 시상식은 9월 2일 오후 2시,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펼쳐지는 제20회 연변지용제에서 개최되는데 연변지용제는 연변작가협회와 옥천문화원이 옥천 출신인 “향수(鄕愁)”시인 정지용(1902∼1950)의 문학정신을 기리고 실력있는 조선족시인을 발굴하는 한편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해마다 연변에서 개최하는 민족문학 축제이다. 연변지용문학상은 연변작가협회와 옥천문화원이 그해 발표된 최우수작을 엄선하여 시상하며 수상작은 무료로 1000권의 단행본을 출판, 발행한다. ========================================   (흑룡강신문 = 하얼빈) 한국 안동의 한옥식당에서 일하는 중국 조선족 동포가 식당 숙소에서 고향을 그리며 쓴 시가 정지용문학상을 받았다.   충북 옥천문화원은 최근 "'제20회 옌볜(延邊) 정지용문학상'에 김승종(53`중국) 씨의 시 '우물 일곱 개였던 마을,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를 선정했다"고 밝혔다.   심사를 맡은 최국철 옌볜 정지용문학상 운영위원회장은 "고향의 어머니와 친구들이 작품 속 시적 화자로 등장하면서 통속적인 언어의 맛과 어울려 하나의 형이상학적인 풍경을 이룬다"고 평했다. 시상식은 다음 달 2일 옌볜대학 예술학원에서 옥천문화원 주관으로 개최되는 제20회 옌볜 지용제에서 열린다.   상을 받은 김 씨는 "이육사 시인의 고향인 안동 땅에서 고향 옌볜과 어머니를 그리며 시를 지을 수 있었다는 것 자체에 감사한다"면서 "고향에 돌아가면 다시 한국에서 우정을 나눈 친구들을 그리며 시를 써 볼 생각"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안동종가음식체험관 예미정에서 건물 관리 일을 하는 김 씨는 중국에서는 이미 등단한 '프로' 시인이다. 그는 고향인 중국 허룽(和龍)시 허룽작가협회에서 주석을 지냈으며, 옌볜작가협회 인터넷문학상과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김 씨는 옌볜대 사범대학 출신으로 륭징(龍井)과 옌볜 일원에서 교사와 농촌상업은행원으로 근무하다 지난 2010년 한국으로 와 예미정에서 식당 건물 관리 업무를 맡고 있다.   옌볜 정지용문학상은 옥천문화원이 옥천 출신인 정지용(1902~1950) 시인의 문학 얼을 기리는 동시에 동포문학인 발굴과 민족문화 우수성을 알리고자 옌볜작가협회와 손잡고 선정하는 상이다. 매년 그 해 발표된 중국 동포 작품 중 가장 돋보이는 작품을 골라 시상한다. 수상작에 대해서는 고료와 함께 시집 1천 권을 무료로 출판해 준다.         ▲ 연변 지용문학상 수상자 김승종 시인(가운데)이 수상 후 포즈를 취했다. [서울=동북아신문]= 올해 연변 ‘지용문학상’은 김승종 시인이 수상했다. 지난달 2일 연변대학 예술학원 음악홀에서 열린 ‘향수’의 시인 정지용(1902-1950)의 시세계를 기리기 위해 마련된 2016 제20회 연변지용문학제에서 김승종 시인이 ‘지용문학상을 수상했다. 연변작가협회가 주관하고 한국 옥천군청 및 옥천문화원이 주최하는 연변지용문학제는 지용문학상 시상식, 지용백일장 시상식과 지용음악제 등 세 부분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김승종 시인의 수상 시집 ‘우물 일곱개였던 마을-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는 실존공간에서 던진 의문에 주옥같은 시적 언어로 명쾌한 답을 얹어주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실존을 추구했다. 시는 기묘한 소리와 빛으로 태어나 청각적, 시각적으로 즐거움을 선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승종 시인에게는 상패와 더불어 수상시집이 증정됐다. 한편, 문학제에 앞서 1일 연길시ㅍ제10중학교에서 350여명 학생들이 참가한 가운데 펼쳐진 제5회 연변지용백일장의 수상결과가 발표되고 이어 시상이 있었다. 지용음악제에서는 중국과 한국측에서 각기 준비한 수준 높은 문예공연을 선보였으며 극장밖에서는 ‘한국 향수사진 전국 공모전’에서 입상한 중국 출품작품 30점이 전시됐다. 김영만 옥천군수는 “옥천에서는 지용문학상과 백일장, 세미나 등 각종 행사를 통해 시인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고 소개하면서 “연변과 더불어 정지용 시인을 기리는 행사를 20회째 이어갈 수 있는 것은 양측 지성인들의 노고뿐만 아니라 민족적 동질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옥천문화원 김승룡 원장은 “회를 거듭할수록 수상자들의 수준이 높아지고 있는 것 같다”며 “앞으로도 지용문학제를 확대발전시켜 한중 두 나라의 작가와 예술인들, 학생들 사이의 교류를 촉진하도록 힘쓰겠다”고 밝혔다. 옥천군 의회 류재숙 의원은 “연변에서 지용문학제가 20회째 이어지지만 행사에 참가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면서 “행사에 앞서 예산심의를 할 때만 해도 미미한 효과를 예산했지만 와보니 그것이 빗나간 생각임을 알았다. 돌아가서 앞으로도 연변지용제에 큰 무게를 두면서 더욱 적극적인 방안을 모색할 것”이라고 밝혔다.               【옥천=뉴시스】이성기 기자 = 지난 2일 중국 연길시 연변대학교 예술학원 실천극장에서 20회 연변 정지용문학상 수상자 김승종 시인(가운데)과 김영만 옥천군수(왼쪽), 김승룡 문화원장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2016.09.04 (사진=옥천군 제공)  ====================================================================== [동북아신문] [출처: 중앙일보] 안동서 한옥 관리하는 중국 동포 ‘옌볜 정지용문학상’
478    제20회 연변 정지용문학상 밝혀지다... 댓글:  조회:7356  추천:0  2016-08-24
        {충청다임즈}= 옥천문화원은 중국 연변작가협회와 함께 주관하는 20회 연변 지용문학상에 김승종씨(53·사진)의 시 ‘우물 일곱개였던 마을,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 ’를 선정했다고 23일 밝혔다.  김씨의 작품은 “고향 어머니와 친구들이 작품 속 시적 화자로 등장하면서 통속적인 언어의 맛과 어울려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는 심사위원의 평을 받았다.  옥천문화원은 연변 지용문학상을 받은 김씨의 시집 1000권을 무료로 출간해 줄 계획이다. 연변사범학원 출신인 김 씨는 교사와 농촌상업은행원으로 근무했고 중국 화룡작가협회 주석을 지냈으며, 현재는 자유기고가로 활동하고 있다. 시상식은 9월 2일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열리는 20회 연변 지용제및 음악제에서 열릴 예정이다. /옥천 권혁두기자 ================================================== 【옥천=뉴시스】이성기 기자 = 충북 옥천문화원은 중국 연변작가협회와 함께 주관하는 20회 연변 지용문학상에 김승종(53) 씨의 시 '우물 일곱개였던 마을,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를 선정했다고 23일 밝혔다.  김씨의 작품은 "고향 어머니와 친구들이 작품 속 시적 화자로 등장하면서 통속적인 언어의 맛과 어울려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는 심사위원의 평을 받았다.  옥천문화원은 연변 지용문학상을 받은 김씨의 시집 1000권을 무료로 출간해 줄 계획이다. 연변사범학원 출신인 김 씨는 교사와 농촌상업은행원으로 근무했고 중국 화룡작가협회 주석을 지냈으며, 현재는 자유기고가로 활동하고 있다. 연변작가협회 인터넷 문학상, 연변일보 해란강 문학상 등을 수상하는 등 수상경력도 화려하다. 시상식은 9월 2일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열리는 20회 연변 지용제및 음악제에서 열릴 예정이다. 올해 연변 지용제 및 음악제에서는 중국 동포들에게 정지용 시인의 문학사적 업적을 알리기 위해 연변지용문학상 시상식과 지용백일장 시상, 시낭송·노래·무용·합창 공연과 향수옥천 작품 전시 등을 다채롭게 준비한다. 옥천문화원은 옥천 출신 정지용(1902~1950) 시인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중국 연변작가협회와 함께 그 해에 발표한 중국 동포 작가의 작품 중 우수작을 선정해 옌볜 지용문학상을 시상하고 있다. sklee@newsis.com ============================= 충북 옥천문화원은 제20회 옌볜(延邊)지용문학상 수상작에 김승종 씨(53·중국·사진)의 시(詩) ‘우물 일곱개였던 마을,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를 선정했다고 23일 밝혔다. 김승종 시인 이 상은 옥천문화원이 중국옌볜작가협회와 함께 옌볜 교포 문학인들의 창작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그해 발표된 최우수작을 엄선해 시상한다. 수상작은 1000권을 무료로 발행해 준다.   이 작품은 “고향의 어머니와 친구들이 작품 속 시적 화자(話者)로 등장하면서 통속적인 언어의 맛과 어울려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는 평을 받았다. 김 씨는 연변대 사범학원 출신으로 교사와 농촌상업은행원을 지낸 뒤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다. 중국 허룽(和龍)작가협회 주석을 지냈고, 옌볜작가협회 인터넷 문학상, 연변일보 하이란강 문학상 등을 받았다. 시상식은 다음 달 2일 중국 연변대 예술학원에서 열리는 제20회 옌볜지용제에서 열린다.  옌볜지용제는 옥천문화원과 옌볜작가협회가 옥천 출신인 ‘향수(鄕愁)’ 시인 정지용(1902∼1950)의 문학정신을 기리고 실력 있는 동포 문학인을 발굴하는 한편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해마다 옌지(延吉) 시 일원에서 개최하는 민족문학 축제이다. ///동아일보 장기우 기자 straw825@donga.com =================================================== (옥천=            동양일보 임재업 기자) 20회 옌볜(延邊)지용문학상에 김승종(53·중국)씨의 시 '우물 일곱개였던 마을,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가 선정됐다.   심사위원들은 "고향의 어머니와 친구들이 작품 속 시적 화자로 등장하면서 통속적인 언어의 맛과 어울려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고 작품평을 냈다.   옥천문화원이 이 지역 출신인 정지용(鄭芝溶·1902~1950)의 문학 얼을 기리고자 옌볜작가협회와 손잡고 선정하는 이 상은 올해 발표된 중국 동포 작품 중 가장 돋보이는 작품을 골라 시상한다.   김씨에게는 그의 시집 1000권을 무료로 출판해 줄 예정이다.   옌볜사범학원 출신인 김씨는 교사와 농촌상업은행원을 역임한 뒤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다.   중국 화룡(和龍) 작가협회 주석을 지냈고, 옌볜작가협회 인터넷 문학상, 옌볜일보 해란강 문학상 등을 받았다.   시상식은 9월 2일 옌볜대학 예술학원에서 열리는 20회 옌볜 지용제에서 개최된다.       ▲ 20회 옌볜 지용문학상 수상자 김승종씨   옥천 [중부매일 윤여군 기자]= 옥천문화원은 제20회 옌볜(延邊) 지용문학상에 김승종(53·중국)씨의 시 '우물 일곱개였던 마을,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를 선정했다고 23일 밝혔다. 심사위원들은 "고향의 어머니와 친구들이 작품 속 시적 화자로 등장하면서 통속적인 언어의 맛과 어울려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고 평했다.  옥천문화원이 이 지역 출신인 정지용(鄭芝溶·1902~1950)의 문학 얼을 기리고자 옌볜작가협회와 함께 선정하는 이 상은 올해 발표된 중국 동포 작품 중 가장 돋보이는 작품을 골라 시상한다.  옌볜작가협회는 김 씨의 시집 1천권을 무료로 출판해 줄 예정이다.  옌볜사범학원 출신인 김씨는 교사와 농촌상업은행원을 역임한 뒤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며 중국 화룡(和龍) 작가협회 주석을 지냈고 옌볜작가협회 인터넷 문학상, 옌볜일보 해란강 문학상 등을 받았다.  시상식은 다음 달 2일 옌볜대학 예술학원에서 열리는 제20회 옌볜 지용제에서 있을 예정이다.    ================================================ [충청투데이]=     옥천문화원은 제20회 옌볜(延邊) 지용문학상에 김승종(53·중국·사진) 씨의 시 '우물 일곱개였던 마을,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를 선정했다고 23일 밝혔다. 심사를 맡은 옌볜 정지용문학상운영위원회 최국철 회장은 "고향의 어머니와 친구들이 작품 속 시적 화자로 등장하면서 통속적인 언어의 맛과 어울려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고 평가했다.  옥천문화원이 이 지역 출신인 정지용(鄭芝溶·1902~1950)의 문학 얼을 기리고자 옌볜작가협회와 손잡고 선정하는 이 상은 올해 발표된 중국 동포 작품 중 가장 돋보이는 작품을 골라 시상하고 시집 1000권을 출판해 준다.  옌볜사범학원 출신인 김 씨는 교사와 농촌상업은행원을 역임한 뒤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며 중국 화룡(和龍) 작가협회 주석을 지냈고, 옌볜작가협회 인터넷 문학상, 옌볜일보 해란강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상식은 다음 달 2일 옌볜대학 예술학원에서 열리는 제20회 옌볜 지용제에서 개최된다. 옥천=박병훈 기자 pbh0508@cctoday.co.kr ======================================== [충북일보=옥천]  옥천문화원은 20회 옌볜(延邊) 지용문학상에 김승종(53·사진·중국)씨의 시 '우물 일곱개였던 마을,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를 선정했다.  문화원에 따르면 이 지역 출신인 정지용(1902~1950)의 문학 얼을 기리고자 옌볜작가협회와 손잡고 선정하는 이 상은 올해 발표된 중국 동포 작품 중 가장 돋보이는 작품을 골라 시상하고 있다. 이 작품 심사위원들은 "고향의 어머니와 친구들이 작품 속 시적 화자로 등장하면서 통속적인 언어의 맛과 어울려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고 작품평을 냈다.  김씨한테는 그의 시집 1천권을 무료로 출판해 줄 예정이다. 옌볜사범학원 출신인 김씨는 교사와 농촌상업은행원을 역임한 뒤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다. 중국 화룡(和龍) 작가협회 주석을 지냈고, 옌볜작가협회 인터넷 문학상, 옌볜일보 해란강 문학상 등을 받았다. 시상식은 다음 달 2일 옌볜대학 예술학원에서 열리는 20회 옌볜 지용제에서 있을 예정이다. 옥천 / 손근방기자 =======================================   김승종씨, 옌볜 지용문학상 수상   2016년 08월 23일 (화) 19:26:14 황의택 기자  missman8855@hanmail.net         [충청매일]= 충북 옥천문화원은 제20회 옌볜(延邊) 지용문학상에 김승종(53)씨의 시 ‘우물 일곱개였던 마을,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를 선정했다. 김씨의 작품은 심사위원들로부터 “고향의 어머니와 친구들이 작품 속 시적 화자로 등장하면서 통속적인 언어의 맛과 어울려 하나의 풍경을 이룬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문화원은 김씨에게 시집 1천권을 무료로 출판해 줄 예정이다.   옌볜사범학원 출신인 김씨는 교사와 농촌상업은행원을 역임한 뒤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며 중국 화룡(和龍) 작가협회 주석을 지냈고, 옌볜작가협회 인터넷 문학상, 옌볜일보 해란강 문학상 등을 받았다. 옥천문화원이 이 지역 출신인 정지용(鄭芝溶·1902~1950)의 문학 얼을 기리고자 옌볜작가협회와 손잡고 선정하는 이 상은 올해 발표된 중국 동포 작품 중 가장 돋보이는 작품을 골라 시상한다. 시상식은 다음달 2일 옌볜대학 예술학원에서 열리는 제20회 옌볜 지용제에서 있게 된다.   ========================================= 제20회 연변지용문학상에 김승종씨 ‘우물 일곱개였던…’     충북 옥천문화원은 제20회 연변지용문학상 수상작에 김승종 시인의 "우물 일곱개였던 마을,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를 선정했다고 밝혔다.   이 작품은 “고향의 어머니와 친구들이 작품 속 시적 화자(話者)로 등장하면서 통속적인 언어의 맛과 어울려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는 평을 받았다. 시상식은 다음 달 2일 중국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열리는 제20회 연변지용제에서 더불어 열린다.    김승종 시인은 연변대 사범학원 출신으로 교사와 은행원을 지낸 뒤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다.  1980년 《도라지》잡지에 시 《고추》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보리 한알과 등록되잖은 Ⓡ와 일회용 삶》, 《보리깜부기와 〈구혼광고〉의 흰 그림자의 삶》, 《두 동네 은회색카니발》(공저) 등 시집들을 출간,《두만강여울소리》 시탐구상, 한국세계계관시인문학회 본상 , 연변작가협회 《가야하》인터넷 문학상, 연변일보 《해란강》 문학상 등 상을 수상했다.    한편 연변지용제는 옥천문화원과 연변작가협회가 옥천 출신인 ‘향수(鄕愁)’ 시인 정지용(1902∼1950)의 문학정신을 기리고 실력 있는 동포 문학인을 발굴하는 한편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해마다 연변에서 개최하는 민족문학 축제이다. 이 상은 옥천문화원이 연변작가협회와 그해 발표된 최우수작을 엄선해 시상한다. 수상작은 1000권을 무료로 발행해 준다.   [종합신문] /김혁   경북 안동종가음식체험관 예미정에 근무하는 중국 조선족 동포 김승종씨(53)가 제20회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한다. 충북 옥천문화원은 '우물 일곱 개였던 마을,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김씨의 시를 수상작으로 선정했다고 30일 밝혔다. 김씨의 작품은 고향의 어머니와 친구들이 작품 속에서 시(詩)적 화자(話者)로 등장하면서 통속적인 언어의 맛과 어울려 하나의 형이상학적인 풍경을 이룬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씨는 연변대 사범대학 출신으로 용정과 연변 일원에서 교사와 농촌상업은행원으로 근무하다 2010년 한국으로 들어와 안동 예미정에서 근무하고 있다. 현재 시문학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고향인 중국 화룡시 화룡작가협회에서 주석을 지냈으며 연변작가협회 인터넷문학상과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정지용문학상은 옥천문화원이 중국 연변작가협회와 함께 조선족 교포 문학인들의 창작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매년 최우수작을 선정해 시상하고 있다. 김씨는 "이육사 시인의 고향인 한국 안동 땅에서 고향 연변과 어머니를 그리며 시를 지을 수 있었다는 자체에 감사한다“며 ”고향에 돌아가면 다시 한국에서 우정을 나눈 친구들을 그리며 시를 써 볼 생각이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그는 6년 전 중국 연변에서 열린 이육사문학제를 통해 안동과 인연을 맺었다. 시상식은 오는 9월2일 중국 연변대 예술학원에서 열릴 예정이다. [대구 . 경북 뉴스 1] /피재윤 기자(ssanaei@) ===========================================     ▲ 9월 2일 연길시 연변대학교 예술학원 실천극장에서 열린 제20회 연변 지용제 참석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옥천군청) 안동종가음식체험관 예미정에 근무하는 중국동포 김승종 시인(53)은 최근 중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에서 옥천문화원 주관으로 열린 제20회 정지용문학제에서 정지용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돼 오는 9월2일 중국 연변대 예술학원에서 수상한다. 김 시인의 수상작(우물 일곱개였던 마을,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은 고향의 어머니와 친구들이 작품 속에서 시적(詩的) 화자(話者)로 등장하면서 통속적인 언어의 맛과 어울려 하나의 형이상학적인 풍경을 이룬다는 평을 받았다. 연변대 사범대학 출신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와 연변 일원에서 교사와 농촌상업은행원으로 근무하다가 2010년 한국으로 와 안동 예미정에서 재직 중이며, 현재 시문학 프리랜서로도 활동하고 있다. 고향인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 화룡작가협회에서 주석을 지냈으며, 연변작가협회 인터넷문학상과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정지용문학상은 옥천문화원이 중국 연변작가협회와 함께 조선족 교포 문학인들의 창작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매년 그 해 발표된 작품 가운데 엄선해 시상하고 있다. 수상작은 고료와 함께 시집 1천권을 무료로 발행해준다. 연변 정지용문학제는 옥천 출신 시인 정지용(1902∼50)의 문학 정신을 기리고 동포문학인 발굴과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열리고 있다. 김 시인은 “이육사 시인의 고향인 안동 땅에서 고향 연변과 어머니를 그리며 시를 지을 수 있다는 자체에 감사한다”면서 “연변에 돌아가면 다시 한국에서 우정을 나눈 친구들을 그리며 시를 써 볼 생각”이라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영남일보] 안동=이두영기자 victory@yeongnam.com ////////////////////////////////////////////////////////////////////////////// (옥천=연합뉴스) 박병기 기자 = 충북 옥천문화원은 제20회 옌볜(延邊) 지용문학상에 김승종(53·중국)씨의 시 '우물 일곱개였던 마을,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를 선정했다고 23일 밝혔다. 제20회 옌볜 지용문학상 수상자 김승종씨 [옥천문화원 제공 = 연합뉴스]   심사위원들은 "고향의 어머니와 친구들이 작품 속 시적 화자로 등장하면서 통속적인 언어의 맛과 어울려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고 작품평을 냈다. 옥천문화원이 이 지역 출신인 정지용(鄭芝溶·1902~1950)의 문학 얼을 기리고자 옌볜작가협회와 손잡고 선정하는 이 상은 올해 발표된 중국 동포 작품 중 가장 돋보이는 작품을 골라 시상한다.     김씨한테는 그의 시집 1천권을 무료로 출판해 줄 예정이다. 옌볜사범학원 출신인 김씨는 교사와 농촌상업은행원을 역임한 뒤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다. 중국 화룡(和龍) 작가협회 주석을 지냈고, 옌볜작가협회 인터넷 문학상, 옌볜일보 해란강 문학상 등을 받았다. 시상식은 다음 달 2일 옌볜대학 예술학원에서 열리는 제20회 옌볜 지용제에서 있을 예정이다. bgipar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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