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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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시) 매돌 댓글:  조회:839  추천:21  2010-08-16
매돌   돌아가는 교향악속엔 노랑 언어들이 픽-픽-으깨지며 줄느런히 휘뿌려진다   말은 밑천을 찾아야 제곬으로 흐른다   불군 콩을 매돌 입속으로 자꾸 퍼넣는 일에 게을리 하지말아라   입벌리고 있는 하늘은 늘 땅을 원망하기 마련이다   저기 들풀들은 땅에 발을 묶이여 잔신음을 계속한다
91    (시) 꽃의 임신 댓글:  조회:878  추천:24  2010-08-16
꽃의 임신   어느날 심히 화려하게 생긴 꽃이 이슬을 감빨고 있었다 바람이 스쳐가고 나비가 스쳐가자 꽃은 시를 임신했다 아기가 태여나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돈냄새 풍기는 많은 사람들이 아기를 사가자고 했다 꽃은 아기를 팔수없었다 이슬을 닮은 아기 바람을 닮은 아기 아기는 더욱 현란한 새꽃이 되였다 어느날 새꽃은 해님을 안고 뜨거운 키스를 날렸다 달님도 꽃의 진한 향에 녹아들었다 새꽃은 또다시 숱한 새아기를 임신했다 이 땅엔 숱한 이쁜 아기들이 고고성 높이 탄생했다 파도가 잠든 고즈넉한 저녁 아기들은 몽땅 하늘에 날아올라 별이 되였다 오늘밤도 저 하늘에선 천만송이 별들이 갖가지 신비론 빛과 향을  세상에 선물한다…  
90    (시) 꽃의 해산 댓글:  조회:992  추천:21  2010-08-14
꽃의 해산   산의 목을 메이게 하는 그윽한 향기를 마시고 꽃은 이슬을 한가득 낳는다   별같은 그 이슬을 마시고 이슬들은 원무하면서 저 불덩이 태양을 뿜는다   타끓는 열기를  시원히 마시고 태양의 머리칼들은 맑디맑은 달을 토한다   달의 속심은 은하수의 시원한 비말을 맞으며  한줌 두줌 별을 뿌린다            --2010년 1월 16일
89    (시) 파보기 댓글:  조회:981  추천:19  2010-08-14
   검은 흙을 파고 파보니 맑은 물이 샘솟아 나왔다   이쁜 꽃을 파보니 탐스런 열매가 나왔다     하얀 구름을 깊이 파보니 향기론 단비가 나오고   불덩이 태양을 파보니 밝은 달님이 나왔다   찬란한 아침을 파보니 노을빛 저녁이 나오고   내사랑 너를 파보니 니사랑 내가 나왔다…   아미를 살풋 숙인 수녀님을 파보면 청산속 해맑은 시내가 나올가?   머리흰 목사님을 파보면 저 인자한 하나님이 나오실가?                  
88    (시) 로인 댓글:  조회:1067  추천:24  2010-08-14
노인   권유에 못이겨 글한줄 남겨놓고 사막으로 들어간 산 다시는 누구도 본적 없다.   인간에는 영원한 숙제를 남겨놓고 고비에는 오아시스 차려놓고 하늘에는 총총 별을 돋쳐놓고   하얀 눈이 되여 내려오는가? 하얀 수염이 되여 휘날리는가? 하얀 신선이 되여 우렷이 우리들앞에 앉아계시는가?   누구도 알바없다 누구도 모른다 땅우의 풀들이 알가? 하늘의 별들이 알가? … …                 2010년 6월초
87    (시) 말세 댓글:  조회:995  추천:20  2010-08-14
말세   노오랗게 잘 구워진 알을 보는 순간 황금빛 해를 보듯 마음속밑창까지 즐겁다   빛이 여기저기 흩뿌려지면서 숱한 황금알을 깐다 기쁨이 차넘쳐 세상이 좁아진듯 여기저기 온통으로 웃음바다다   차츰, 알이 커진다 기쁨이 커진다 웃음이 탱탱 영근다 둥-둥 북치며 쉼없이 커지는 알들이 위험하다   풍-팡- 여기저기서 알이 터진다 향기와 향기가 맞부딛치며 불꽃을 튕긴다 화약냄새가 진동한다 알들이 서로 부딛치며 깨진다 나의 거리 푸른 거리엔 온통 고름이 질펀하다…                   2010.5
86    (시) 30년간 바래진 눈물 댓글:  조회:1359  추천:18  2010-08-14
30년간 바래진 눈물 -대학시절 녀동창들의 얼굴 다시 대하고              어- 벌써 30년세월이 살같이 날았구나 옥이, 영희, 분이, 숙이...가  벌써 시어매 가시어매가 되잔다...   참 기가 차기도 하지 고 자르르 기름기 돌던 청춘은 누가 다 앗아갔나? 눈가에 해빛처럼 찬란한 잔주름이 사설을 뿜는다   고 까아만 눈동자에 짜랑짜랑 별을 띄우던 싱싱함은 누가 다 털어버렸지? 눈동자에 비껴간 우수가 시부모, 시동생들의 전설을 안아온다…   우리 미녀들을 개물함지로 만들어논 요 지독한 세월네월아, 왜 우리 여창들을 짓밟아 요롯케 황홀한 노대기들로 만들었남 귀밑머리에 몇가닥씩 하아얀 서리가 눈부시다 ! 2010.  1。9
85    (시) 그녀는 먼지 림금산 댓글:  조회:907  추천:13  2010-07-18
그녀는 먼지                        림금산   그녀는 먼지였다 물이였다 물가의 청초였다   청초끝의 벌레였다 나비였다 꽃을 잉태하는 날개였다   바람을 향기로 반죽하고 땅을 꽃잎으로 걸구고 호수를 눈동자에 펼쳤다   어느날 호수속엔 불똥이 떨어졌다 호수속에선 불길이 황-황- 쏟아져나왔다   호수에서 타오른 불은 들판으로 번지고 하늘로 치솟았다   우주의 자궁은 불길에 데여 한껏 흔들리였다   하늘은 천둥소리를 뽑아지르며 눈물을 퍼부었다   소나기가 가로수를 다 분질러 버렸다   불은 꺼져버렸다 꺼진자리마다 연기는 가늘게 피여올랐다   연기는 비물에 감기여 내물로 흘러들었다 내물은 청초를 감빨며 어디론가 그냥 흘러를 갔다   날개가 부러졌다 바람도 꺼졌다 물방울 안은 꿀벌은 움직일수가 없었다   벌레도 기여갈 맥이 없었다 차츰 물도 말라버리고 땅도 말라버리고 나무도 잎도 다 말라버리고   그녀는 먼지가 되였다 어디론가 날아갈 바람찾는 먼지가 되여버렸다.            2010년 7월 1일 오전              
84    [시]당신은 아십니까(림금산) 댓글:  조회:570  추천:13  2010-05-04
당신은 아십니까   림금산     사랑이라는 두 글자는 한획만 틀리게 씌여져도 글자마다 아파하지요.       시인략력: 림금산, 1960년 길림성 도문시 출생.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현재 <중국조선족소년보> 주임편집.       - <중국조선족 명시> 에서 선정.
83    (수필) 충북으로 가다 10. 댓글:  조회:816  추천:16  2010-04-06
13. 잘있으라! 충청북도여….   이튿날엔 충북도지사가 우리 일행을 만나주겠다고 해서 청주에 있는 도지사 사무실로 발길을 옮겼다. 헌데 이게 어디 사무실인가? 나는 여태껏 중국에서 살면서 이런 사무실은 처음본다. 일개 고위급관원의 사무실인데 사무실이라기보다 차라리 개인집 객방을 방불케했다. 일찍 서울시시장으로까지 있었다는 도지사 리원종님의 사무실에 들어서니 우리 민족 정취가 다분히 풍겨 아늑하고 오붓한 정이 흘러넘쳤다. 병풍도 둘러있고 문풍지를 바른 나무문도 있고 쏘파도 모두 민족특색이 짙은 옅고 가벼우며 아늑하고 말쑥한 빛을 던져주었다. 퍽 유모아적인 리원종님은 자기 이름자가 종이라고 진짜 자그마한 구리종을 사무상옆에 놓고있었는데 충북의 문화와 문학에 대해서 특별히 잘 알고있엇다. 다년간 종합신문사에서 주필을 맡아보시던 양은희녀사가 문학정신, 선비정신 등 화제를 두고 여러가지 문제를 문의했는데 아주 솔직하게 투철하게 자기견해를 잘 말씀해주어 우린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외에도 우리는 이번 걸음에 여러곳을 많이 돌았지만 모두 충북은 문화의 향연이 진하게 익어가는 곳이며 우리의 마음속에 문화민족이란 구경 어떤 민족이고 문화의 향토란 구경 어떤 곳인가를 깊이깊이 터득하게 했다. 아직도 락후하고 (특히 문화의식면에서 )깨지 못한 우리 사는 고장과 비해볼때 발달국가란 단순 경제적발달정도인것만이 아님을 나는 이번 걸음에 새삼 느꼈다. 온민족의 차원높은 문화의식제고가 없다면, 또 그를 위한 지식적 정보적 축적과 착실한 지적이고 심적인 준비가 없다면 발달국가의 행렬에 들어선다는건 실로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힘겨운 작업이 아닐수 없다. 하루에도 16-17시간씩 일한다는 대한의 사람들, 그 드바쁜 와중에도 명시를 읊으며 신나게 삶의 터전을 걸구어가는 그들앞에 존경과 믿음, 부러움이 넘쳐흐름을 어찌할수없었다. 우리 일행은 그후 며칠간 서울도 가보았고 주최측의 안배로 제주도 관광도 다녀왔지만 충북에서 받은 인상을 초과해 더 깊은 인상을 느끼지 못했다. 그것은 고차원의 문화를 향수하고있는 충북만이 당당히 대한의 으뜸으로 솟아오르리란 믿음때문이였을것이다. 잘있으라 ! 문화의 향토 충청북도여… (끝)                                                  2005년 11월 하순 …
82    (수필) 충북으로 가다 9. 댓글:  조회:973  추천:14  2010-04-06
11. 사과의 도시 충주   충청북도에서 그래도 꼽을만한 도시는 충주라 하겠다. 우리 일행은 충북에서 두번째로 크다는 도시 충주로 향했다. 충주로 가는 차안에서 동양일보사 조철호회장께서 재미나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옛날 송강정철의 자손이 되는 정호란 분이 있었는데 영조때 큰 인물이였단다. 그가 늙으막에 벼슬을 그만 두고 충주에 내려가 살고있었는데 하루는 리형좌가 왕의 령을 들고 찾아왓단다. 정호는 마침 회초리같은 배나무묘목 여라문 그루를 밭뚝에 심고있었단다. 이를 본 리형좌가 웃으면서 말했다. “어느 세월에 배를 따시려고 수고스러운 일을 하십니까?” 정호의 나이가 그때 이미 여든이였으므로 배가 열릴때까지 살아계시겠냐는 뜻이였다. 그런 일이 있은후 여러해가 지나 리형좌가 다시 정호를 찾아가니 조촐한 주안상이 들어오는데 큼직한 배 여라문개가 곁들어져 있었다. 먹어보니 참으로 맛이 좋은 배였다. “이처럼 맛이 좋은 배를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그러자 정호가 이마의 주름을 펴면서 말했단다   “언젠가 그대가 찾아왔을때 심은 나무에서 딴것이요…그대는 내가 이 배를 먹지못할줄 알았지만 배를 따먹기 시작한지 벌써 몇해째나 된답니다…” 아마 그때로부터 심기 시작한 과일나무였는지 충주시 도처에 사과향기 넘쳐나고 지어 가로수들도 그대로 사과나무로 되여있는 거리가 많았다. 그리고 도처에 사과향이 확-확- 풍길정도로 사과광고가 이쁘고 환하게 나붙어있었다… 실로 사과의 고향이란 말이 과하지 않았다. 가로수에 달린 연지꼰지를 빨갛게 찍은 사과들이 탐스럽게 웃고있는데 어느 길손하나 그 사과를 다칠념 않는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사과를 무드기 쌓아놓고 파는데 돈주고 사서 먹으면 먹었지 길거리에 나무에 달린건 누구든 다치지않는건 거의 습관적이고 관례로 되여있는듯 싶었다. 참 우리가 사는 곳에서는 살구알이 크기도 채 안컸는데 누가 필하는지 이미 다 망가버리기가 일쑤인데 말이다. 살구가 나무에서 당하는건 둘째치고라도 길거리의 택시문화만 봐도 말이 안나갈정도로 한심한게 요즘 우리가 사는 많은 중국 중등도시의 현실이다. 차라리 택시안의 의자에다 흰천을 씌우지나 말았으면 얼마나 좋을가? 그걸 씌워놓으니 거기에 진때가 다닥다닥 묻어 택시기사보다 손님이 막 부끄러워나기가 일쑤다. 외국손님들한테 택시를 불러줄 경우만 차안을 한번 잘 들여다 보고난 뒤에야 모시게 된다.   12. 감자꽃노래비   충북수부도시였었다는 충주에서 우리의 발걸음을 제일 먼저 끄당겨간 곳은 탐금대였다. 나는 또 소년아동신문사에서 일하다보니 그래도 “감자꽃노래비”앞에 먼저 발길을 멈추게 되였다.   자주꽃 핀건 자주감자 파보나마다 자주감자   하얀 꽃 핀건 하얀 감자 파보나마나 하얀 감자   권태응선생님께서 지으신 동요 “감자꽃”을 아로새긴 “감자꽃노래비”가 이쁘게 세워졌는데 주위는 파아란 잔디가 쪽- 깔려있고 그 뒤로는 총총한 소나무들이 푸르게 우거져 있었다. 권태응선생님은 충주시 칠금동에서 태여났는데 일본이 조선반도를 강점하고 창씨개명을 한답시고 우리 민족 이름자마저 일본어로 고칠때 이를 저항하여 동요 “감자꽃”을 썼는데 널리 알려지고 불리워졌던것이다. 보는바와 같이 권태응선생은 일본군국주의자들이 조선민족을 자기들 마음대로 짓밟으려는데 대비해 자주빛감자꽃밑에 파묻힌건 흰감자일수 없고 힌감자꽃밑에 파묻힌 자주감자일수 없다는 즉 우리 백의민족은 절대로 일본민족으로 될수없다는 점을 짧디짧은 동요로 강렬하게 호소한것이다. 충주에서의 가을밤, 밖에서는 사과향기가 진하게 풍기는데 시청안에서는 우리들의 “명사시낭송회”가 문화의 향기를 듬뿍듬뿍 풍기고 있었다. 몇몇 시인들이 찾아와 명함장을 건네주는데 들여다보니 시청의 분들이였다. 시청기관에까지 시회가 성립되여있었는데 이 도시의 문학정신이 뼈처럼 뿌리내리고 있음을 측면으로도 능히 엿볼수 있었다. 도지사까지 충주에서 내려와 시낭송에 참여하였고 저녁식사도 직접 충주시장이 동석해주어 더욱 맛있게 먹었다.
81    (수필) 충북으로 가다 8 댓글:  조회:608  추천:25  2010-03-27
9. 이상설 사당과 생가   우리는 리상설(1870-1917) 사당앞에 숭엄히 모였다. 이 세상에 민족의 자존심과 얼을 휘뿌리며 필생의 정력으로 이 나라와 이 나라의 존엄을 위해 분투해온 리상설의 얼을 가슴깊이 새기였다. 우리는 리상설동상앞에서, 리상설숭모비앞에서, 그리고 그가 탄생한 곳인 초가앞에서 수없이 기념사진을 남겼다.     이상설은 1894년에 문과에 급제한뒤 한림학사, 의정부 참찬 등을 지냈었다. 이상설은 왕조관인이지만 누구보다 앞장서 근대사상과 학문을 받아들여 구미의 정치, 경제, 문화를 섭취하였고 스스로 영어, 프랑스어, 로씨야어, 일어를 구사할수 있었다. 그보다도 국가정치와 섹계대사를 인식하여 국가와 민족의 진로를 밝힐수있는 당대의 동량으로 추앙되였고 또한 스스로 앞장서 민족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그의 뜨락에서 우리는 그의 숨결이 지금도 맥맥히 굽이치는 가마뚜껑이며 온돌이며 그리고 모래불로 되여있는 앞마당가며를 마주하며  실로 리상설님의 모든것이 되살아나 우리한테 민족을 강의하시고 자존심을 력설하시는상 싶었다. 나는 리상설사당안에 있는 자료에서 중국연변룡정시 실험소학교의 현모습도 찾아보게 되였고 당시 현임교장인 정금석과 진천군관계자들이 함께 리상설기념모임준비에 서두르는 사진도 찾아보고 감개가 무량했었다.   룡정시실험소학교의 전신은 서전서숙인데 중국에서는 제일 첫 우리 민족학교였고 리상설이 자기의 사재를 털어 세운 학교라는데서 더욱 유명하게 되였다..그때 이상설은 서전서숙을 세우고 얼마안되여 황제의 밀사로 리준등과 함께 네델란드(화란) 헤이그에서 소집된 만국회에  주요 조직자로 참가했었다… 그때 리준이 비참가국가에 몰쫓기우게 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자결로서 대항하였었다..그후에도 리상설은 순국할때까지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섰었다. 후에 리상설은 비분의 마음을 억누루며 리준을 당지에 안장하였다가 후에 충북으로 모셔 지금의 사당을 앉힌걸로 전해진다…   이제 룡정에서 있게 된다는 중한리상설기념모임은 더욱 세인들의 주목을 받게 되리라 생각하면서 아쉬운 발길을 옮겼다.   10. 송강정철사당   우리를 실은 봉고차는 또 정송강사에로 흘러갔다… 송강정철이라고 하면 우리는 중국조선족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송미인곡”, “사미인곡”을 돌이키게 된다. “관동별곡”은 우리가 중학시절에 그렇게도 애독하고 외우기까지 한 가사였으며 우리 민족에게 둘도없는 천하명작임에 틀림없다. 강원도, 전라도, 함경도 삼도의 관찰사를 차례로 지낸후에 좌의정에까지 오른송강정철이다….   송강사당은 정면 3칸, 옆면두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으로 1665년에 묘소를 이장한후 창건되였다. 우리는 시간의 제한으로 곧추 가파로운 산록에 있는 정철묘소로 올리달렸다. 나와 시인 최룡관씨, 장백산잡지사 부주필 리여천씨, 종합신문 주필 양은희씨는 헐레벌떡거리며 진땀을 빼서야 겨우 높은 언덕우에 있는 송강정철묘소에 이르렀다. 온통 푸른 수림이 우거지고 잔디가 쭉-깔린 잠풍한 정철의 묘쇼가 조용히 우리를 맞아주었다. 양은희씨와 리여천씨는 묘비를 마주하고 비문의 내용을 메모하느라 여념이 없는데 최룡관시인님은 묘우에 막 엎드리기도 하고 앉기도 하면서 우리의 모습을 렌즈에 담느라 여념이 없었다. 참 우리 모두는 거대한 옛문학신선의 뜨락에서 아이들처럼 몸과 맘을 들뛰며 거침없이 활랑이였다.   잠시후 우리는 옷깃을 여미고 더없이 흥분된 상태로 정연히 서서 송강정철의 묘쇼에 절을 올리고 경모의 심정을 휘뿌렸다. 나에게는 아마 이 순간이 내가 문학을 사랑해서 제일 숭엄한 심경을 안았던 때이리라… 일대 문학의 거인앞에서 옷깃은 여며지고 가슴이 솟구치도록 세차게 일렁임은 당연한 일이 아닐가? 송강사당남쪽 100메터 지점의 산록에 위치한 정철묘는 높이 1.6메터, 둘레 20메터의 봉분과 상석, 묘비, 문인석과 망부석으로 되여있었다. 묘는 조선 현종 6년에 송시렬선생이 지금의 자리로 묘지를 정하고 후손 정양이 이장하였단다..   날거든 뛰지마나 섰거든 솟지마나 부용을 꽂았난닷 백옥을 묶었난닷 동명을 박차난닷 북극을 괴왔난닷 … …   나는 천고의 명구인 송강가사를 소리내여 읊으며 자주자주 송강정철의 묘소를 돌아보았다. 진짜 일대기를 주름잡아 굵게굵게 금을 긋고간 대작가의 묘소를 뒤에 두고 발길을 옮기자니 누가 뒤에서 자꾸 잡아당기는것 같은 느낌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산아래에서 봉고차의 경적소리가 울리기에 그냥 아쉬운대로 내려오는 수밖에 없었다…
80    (수필) 충북으로 가다 7 댓글:  조회:624  추천:21  2010-03-27
10. 포석-조명희의 고향에서   소설”낙동강”으로 중국조선족들 한테도 널리 알려진 포석-조명희의 고향 진천군, 더구나 쏘련에 망명가서 눈부신 문학활동을 화려하게 펼치다가 쓰딸린의 KGB에 체포되여 종내는 원한을 품고 옥중에서 비밀리에 총살당한것으로 더욱 우리들의 가슴을 꼭 집어뜯게 만드는 한국 민족민중문학의 선구자 포석-조명희, 그의 고향에 발길이 닿은 우리들 마음은 몹시도 설레였다.   나는 중학시절에 중국땅에서 “낙동강을 배우고 크게 감동을 받은 일이 있었고 대학에 가서 또다시 문학교원한테서 더욱 깊이있게 “낙동강”을 연구하였으며 고중에서 교편을 잡으면서는 또 나의 제자들에게 “낙동강”을 강의하면서 이 작품을 뼈속깊이 느끼본 일이 있어 더욱 조명희님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었다. 그래서일가? 이 순간 말못할 흥분이 온몸을 휩싸고 도는걸 막을길이 없었다… 헌데 유감스러운것은 언젠가 인천공항에서 “어디로 가느냐?”는 공항해관일군의 물음에 포석-조명희문학제 행사로 방문차 왔다니 조명희란 도대체 누구냐? 왜 조명희네 집에 친척방문왔는가? 그럼 조명희한테 전화를 해란다….기가 막히는 일이 많았다…포석이라니 포석과 조명희는 형제간인가? 상세히 대란다…ㅋㅋㅋ 하기야 내같은 촌놈이 아직도 조명희요 포석이요 하면 좀 애짭잘한 감흥에 젖겠지만 그 분들이 조명희를 알아 뭘하고 포석을 기억해 뭘하랴? 마침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따라 포석의 제사날이여서 진천군문화원과 동양일보에서는 공동으로 “조명희제사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하는님도 아마 이 원혼의 시인을 슬퍼하는지 아침부터 잔잔한 비를 내려뿌리고 있었다.. 제사는 조명희의 시비가 세워진 진천문화원 앞들에서 거행되였다. 7-80명되는 문인, 언론인 지성인들이 참가,우리 일행 7명은 중국조선족문인들을 대표하여 조명희시비앞에 알뜰히 다듬은 흰 국화꽃을 한송이씩 정연히 놓았다. 그리고 조명희시비앞에서 조용히 묵도를 드리고 기념사진도 남기고 마음밑창으로부터 솟구쳐 오르는 추모의 감정을 고즈넉이 쏟아놓았다.              ...  ...              천년을 산              만년을 산              낙동강              낙동강              하늘가에 간들             잊을 소냐  일힐소냐             아-하-야….   포석의 “낙동강”이 그냥 가슴에 북을 치는데 우리는 모임을 마치고 조용히 “조명희추모백일장”장소로 발길을 옮겼다… 포석-조명희시인은 1894년 8월 10일, 충북진천군 진천면 벽암리에서 출생하였다. 서울중앙고보를 거쳐 일본 동양대 철학과를 수학, 희곡 “김영일의 사”, 시집“봄잔디밭위에서” 를 출간, 소설집 “낙동강”을 출간하였고 1928년에는 쏘련에 망명하였다. 쏘련에서 신문 “선봉”의 편집으로 있다가 조선사범대 교수로 활약했으며 쏘련작가동맹 원동지부 간사로 있었다. 지금 쏘련 따쓰겐트 벡쩨미르지역에 “조명희거리”가 명명되였고 “조명희문학기념관”이 설립되였으며 까자흐의 알마아따 등 한인회사에서는 “조명희문화협회”가 건립되였다. “조명희문화유산위원회”에서는 “조명희선집”도 펴냈다. 중국조선족들 가운데서도 “조명희문학연구회”가 결성되였고 조명희문학제가 여러차 거행되여 인기를 끌고있다.   9. 3국통일의 명장-- 김유신장군이 탄생하신 곳   진천에는 고결한 력사의 숨결이 살아있었다. 김유신장군의 탄생지로써 삼국통일위업을 이뤄낸 정기가 살아있었으며 유구한 력사를 대변하는 문화재들이 많이 있었다. 진천 연곡리 석비, 김유신탄생지 및 태실 등 국가지정문화재와 진천농교, 길상사, 대모산성, 또 갓 건설된 보탑사 등이 있었으며 더구나 우리 마음을 사로잡은건 리상설 생가와 묘지, 정송강사와 송강정철묘소였다… 보탑사로 가는 길에 우리는 흥무대왕 김유신장군의 출생지와 태령산 정상에 봉분형태로 된 태실과 태실을 둘러싼 석축이 산성처럼 드리워진 유적을 바라보면서 신비스럽고 전설같은 장군의 모습을 오래오래 마음속에 새김질해 넣었다. 태수인 아버지 김서현공이 화성과 토성 부별이 자기에게로 내려오는 모습을 본 신기한 꿈을 꾼후 임신하여 20개월만에 해산했다는 동화같은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탄생지일대에 있는 말을 훈련시키던 치마대, 식수로 사용하였던 연보정, 투구모양의 바위, 등을 오래도록 응시하였다. 푸른 수림으로 꽉찬 산속의 정취가 풀냄새와 나무냄새와 장군의 큰 뜻을 우리한테 훈훈히 풍겨주어 우리는 민족정기가 휘뿌리는 장군의 위훈을 피부에 닿게 가까이 느꼈다
79    (수필) 충북으로 가다 6 댓글:  조회:503  추천:14  2010-03-27
8.. 정지용문학회관   정지용문학회관은 그리 크지않지만 아담하고 현대화 설비를 다분히 갖추고 있어 부드럽고 친절한 가운데 은은한 문학향기와 색채, 다분한 가족적분위기와 시적감흥으로 방문객을 흠뻑 빨아드리는 면에서 전형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물론 설비도 설비겠지만 어디까지나 지용시인님의 그 시혼이 하도 매력적이기에 그 숨결이 방문객들의 발길을 붙잡고 놓지않는것이 그 주되는 원인인것은 뻔한 일이고 .   정문에 들어서면 우편으로 정지용님께서 앉아계시는 모습이 확 안겨왔다. 그래서 누구나 신발을 벗고 신을 신장안에 올려놓은 다음 지용님을 향해 숙연히 고개숙여 인사를 한다음 다른 본관으로 향한다.   워낙 물덤벙 술덤벙하는 거칠은 나의 성미로는 이런 례절마저 잊고 급하여 신발을 벗기 바쁘게 달려들어가다 그만 관리인원한테 한마디 핀잔을 맞았다.. “저 선생님, 지용시인님께서 앉아계시는데 인사하고 들어가야죠!” 나는 그제야 제정신이 든듯 지용시인님의 동상을 향해 꾸벅 90도경례를 하고 조용히 문학전시실에 들어섰다. 전시실에는 해설원도 안보이고 방문객 자체로 지용님의 연보와 시인이 살았던 시대배경, 문학사의 전개속에서 그가 어떤 삶을 살았다는 상세한 내용을 소개받게 하고 있었다. 스크린북에 상영되는 영상을 통해서는 추억의 앨범을 한장, 한장 넘기듯 시인의 자취를 더듬어 보게 되여있었다. 다음 녹음기를 귀에 걸고 년대기와 주제별로 4구역(향수, 바다와 거리, 나무와 산, 산문과 동시)으로 나누어 시인의 삶과 문학세계를 심도있게 이햐할수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현대시가 어떻게 변화발전하여 왔는가를 한눈에 볼수있게 하여 그속에서의 정시인이 차지하는 비중과 위상을 확인할수있게 하였으며 정지용시인님의 시집과 여러개의 저작들을 진렬하였었다. 다음 문학체험관 같은데서는 직접 자기손으로 스크린이 되여 시를 읽어볼수있게 만들었고 영상시화실에서는 음악과 영상을 배경으로 성우의 시낭송을 들으며 시를 폭넓게 이해할수있도록 만들었다.. “향수”영상실에 들어서면 뮤직비디오로 제작된 가곡 “향수”를 감상할수있게 되여있고 시어검색실에 들어서면 이해하기 힘든 시어들을 검색해 그 의미와 시적 표현을 이해할수있게 되여있었다. 시낭송실에 들어서면 벼경영상과 음악위에 자막으로 흐르는 시인의 시를 낭송해볼수있도록 하였다. 마치도 노래방에 가서 자막으로 흐르는 가사를 보면서 노래를 부르는것과 비슷한 설비들이였다. 영상실에 들어서면 시인의 삶과 문학, 인간미 등을 서정적이며 회화적으로 그린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문학교실에 들어서면 강좌, 시토론, 세미나, 문학동아리활동 등 공간이 마련돼 있어 단체관람객을 대상하여 오리엔케이션을 진행하는 열린 문학공간이 펼쳐져있다. 실로 온 옥천군의 혼과 마음, 심장이 모아진 문학정신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 같았다…   9.생거진천 진천군은 충북 중북부에 위치하여 청주, 천안, 안성, 입장, 증평, 음성읍과 접경을 이루고 있으며 차령산맥의 푸른 정기를 받아 미호천을 중심으로 광활한 옥토가 펼쳐진 고장으로 한재 수재가 없어 인심이 후덕하고 살기좋아 예로부터 “생거진천”이라 불리워 왔다. 발길닿는 곳마다 조상들의 숨결이 살아숨쉬는 문화유산과 자연경관이 분포되여 있어 후손들이 아름답고 훌륭하게 전승하고 있는 충절의 고장이며 군민모두가 한마음으로 “앞서가는 진천”을 만드는데 최선을 다하고있었다. 해마다 10월이면 열리는 태권도화랑 문화축제, 생거진천쌀축제가 있는가 하면 진천 종박물관, 중앙컨트리클럽, 진천청소년수련원, 진천향토민속자료 전시관 등이 흥미롭게 관광객들의 발길을 붙잡기도 한다. 그보다도 나의 마음을 혹하게 만드는건 오매에도 그리던 포석-조명희님의 고향이 바로 진천군이라는 그점이다..
78    (수필) 충북으로 가다. 5 댓글:  조회:495  추천:13  2010-03-27
7.. 우리도 마침내 시인을 가졌노라   충북 남부지방에서 내 마음을 제일 짜릿하게 자극한것은 옥천군이였다. 한것은 거기엔 내가 그렇게도 사랑하는 시 <향수>의 시인 정지용님의 혼불이 그냥 숨쉬고있기때문이다. 그리고 지난번 (2005년 봄) 나는 성인시집<불새>를 민족출판사에서 출간했는데 바로 정지용님의 이름으로 명명한 <지용문학상>입상작품집으로 간행된것이다. 옥천군은 진짜 시인의 고향답게 온 군이 정지용이란 그 숨결속에 진한 향기를 터쳐올리고있었다. 옥천사람들은 누구나 지용시인님이 있음으로 하여 자부심에 넘쳐 세인에게 웨친다. <우리도 마침내 시인을 가졌노라!>고 . 지용님께서 살던 생가가 그대로 복원되여있었고 생가마당가에는 까치밥이 달린 감나무가 한그루, 그리고 바로 그 옆에 남으로 쭉 뻗어간 옥천벌을 휘감으며 실개천이 여전히 흐르고있었다. 후에 만들어놓았겠지만 우리 키보다도 훬씬 더큰 물방아도 옆에 있어 더구나 시인의 숨결을 가까이 느낄수 있게 했고 오른쪽 한 50메터쯤에는 정지용님의 동상과 올해 (2005년)갓 개관했다는 현대화적인 설비로 완미화된 <정지용문학관>이 멋진 건물로 장식되여 보란듯이 옥천의 자랑인 정지용님의 그 혼불을 추켜들고 있었다. 너무나도 뭉클하는 감동을 억제할길이 없어 그날 저녁 11시 30분즈음에 나는 청주에 마련된 숙소에 와서 인터넷으로 중국에 있는 대형 조선문문학지 <장백산>지에다 채 익지도 않은 시 3수를 날렸다. 그중 한수는 이렇게 썼었다.   님을 만나보았습니다.   휘돌아 나간 실개천 한오리로도 족했습니다 마당앞 까치밥 감 한알로도 풍성했습니다. 님께서 사색을 일구시던 도배한 온돌방과 물난 두리상 너무나 소박한 초가에 너무도 아름찬 명상을 펼쳤습니다 하늘 높이 휘날리는 저-혼불의 새새끼들이 지금도 옥천벌 가득 불이 되여 날아내립니다.   1902년 음력 5월 15일 충북 옥천군 옥천면(현 옥천읍) 하계리에서 부친 정태국과 모친 정미하의 장남으로 출생한 정지용은 옥천보통공립학교와 휘문보고를 거쳐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휘문고보에 다닐 때부터 습작활동을 시작하여 1922년 <풍랑몽>을 쓰면서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지금 들어도 어마어마한 <시문학>, <구인회>등의 문학동인과 <카톨릭청년>, <문장>등의 편집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휘문고보의 교원을 거쳐 해방후에는 리화녀전문대 교수, 경향신문주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 등 직을 력임하기도 했다. 그후 조선전쟁이 일어나자 전쟁의 란리속에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정확한 행적은 알수 없고 그의 죽음에 대해 소문과 추측만이 떠돌아 더욱 애절하고 더욱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리다. 그의 시집으로 <정지용시집>, <백록담>, <지용시선>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문학독본>, <산문>등이 있다. 그의 작품들에는 시골(전통)과 도시(현대), 동심(동요)과 구원(종교시), 바다(이미지즘)와 산(동양정신)등이 빛나는 언어로 완성되여있다. 절제된 사물에 대한 정확한 묘사, 그리고 섬세한 언어감각으로 빚은 시편들을 통해 그는 한국현대시의 성숙에 결정적인 기틀을 마련하였다.  
77    (수필) 충북으로 가다 4. 댓글:  조회:492  추천:11  2010-03-27
         5.. 내마음의 안식처 – 속리산   우리는 그 드바쁘고 힘들고 또한 즐거운 시낭송과 문화기행의 여가에도 속리산이나 직지박물관, 세계비엔날레엑스포 등곳을 돌아보는데 게을리 하지않았다. 물론 동양일보와 각 군청에서 성심껏 마련해준 것이 주되는 원인이긴 하지만도 . 충북남부지방에 있는 보은군사람들에게 제일 보배로운 재산은 아마 그 수려하고 신비하고 또한 은은한 향기와 향긋한 체취를 발하는 한국의 8대명승지의 하나로 꼽힌다는 속리산일것이다.   그 이름부터가 속리산(俗离山)이라 하니 이 인정이 점차 메말라 가는 속세를 멀리 떠나가 있는 산이라는 뜻이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시낭송이 끝나자 우리 일행은 시간이 얼마 남지않았기에 (보은군에서 그날로 또 청주에 있는 숙소까지 와야하기 때문) 직접 내속리산 산속에다 차를 대였다. 문지기아저씨가 차를 그곳까지 가져다 대일수없다고 그렇게 말렸지만 질기고 내밀성이 강한 맵짠 우리의 동양일보사 꼬마대장 강태미주임을 이기지 못한것이였다. 한창 단풍이 물들어 머리에 어깨에 마음에까지 푹젖어내리는 계절이라 우리 일행은 무두 정에 겨워 사진기를 휘둘러대고 고개를 자주 돌려 여기저기 기발처럼 나붓기는 내속리산 괴곡의 단풍구경에 구곡간장이 다 녹아내렸다. 단풍속에 그림처럼 소박하게 가로누운 돌다리에 올라서니 한잎두잎 단풍잎이 뜬 맑디맑은 물속에는 고기떼들이 무리지어 시원히 가을산책을 하고 있었다. 언젠가 금강산 구룡연으로 올라가는 길에서도 나는 이렇게 맑은 물은 여러군데에서 보았지만 거기에도 고기떼만은 없었다. 헌데 이 아름다운 가을의 속리산속에 고기떼까지 생명의 약동을 발하여주어 산은 더욱 싱싱해 보이고 단풍은 더욱 이뻐보이고 우리들 심신은 더욱 맑게 순화되였다. 매일매일을 일상에 젖어 헤매이다가 혹시 시간이 좀 나지면 친구들이나 알맞춤한 녀사를 불러앉히고 술놀이나 벌리며 흥청거리다가 사지가 잘 말을 안듣고 혀가 꼬부라져서야 무거운 다리를 질질 끌며 집으로 향하던 우리의 소행을 생각하니 이 깨끗하고 맑지고 천하절승인 속리산에서의 산속 마음샤와는 실로 나에겐 소중한 체험이 아닐수 없다. 한 두어달쯤만 좀 몸을 이런 자연속에 푹 잠가놓고 마음을 정리하고 차분히 가라앉아봤으면 얼마나 좋을가?   6. 정이품송(正二品松)   법주사에서 조용한 목탁소리속에 쌍사자석등, 팔상전, 석련지 등을 돌아보며  다시 내속리산을 명상한 다음 돌아나오다 6백여년 동안 줄곧 그 미모를 자랑했다는 이 세상에서 관직이 제일 높은 명송 정이품송을 만나게 되여 더구나 마음이 설레였다. 옛적 한 임금이 가마에 앉아 속리산에 오게 되였는데 마침 한 아름드리 멋진 소나무가 아지를 시원히 펼치고 섰는데 가마를 탄 임금은 그 아지때문에 도무지 그곳을 지나지 못하게 되였단다. 그래서 하인들도 어쩔바를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는데 글쎄 그 소나무가 자기의 멋진 가지를 천천히 들어올려 임금님을 무사히 지나도록 했단다. 너무도 감격한 임금은 이 나무가 하늘의 뜻을 안고있는 나무라고 찬탄해마지 않다가 종내는 이 나무한테 “정이품송”(正二品松)이란 관직을 내렸단다. 아마 이 세상에서 이 나무보다 저 높은 관직을 가진 나무는 없으리라. 헌데 지난 2004년 3월초, 한차례의 폭설에 의하여 아깝게도 몇백년동안 자기의 수려한 모습을 떨쳐주던 이 나무가 상하게 되였다.   <한국일보>2004년 3월9일차의 보도에는 이렇게 쓰고있다. <우산 모양의 단아한 자태를 다시 볼수 있을지 …>속리산의 얼굴이자 천연기념물 103호인 정이품송(正三品松)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상판리)이 이번 폭설로 치유하기 어려운 큰 상처를 입어 지역주민들을 안타깝게 하고있다. 쉴새없이 눈밭이 내리던 지난 5일 오전, 정이품송은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정상부 몸퉁에서 서쪽으로 뻗은 가지 3개를 잃었다. 직경10cm, 길이 4.1m짜리 본가지 1개와 직경 5cm, 길이 2.5m의 중간가지 2개가 힘없이 부러져버려 특유의 좌우대칭 원추형 외모를 잃고말았다. 거의 같은 시각 정이품송과 ‘내외지간(内外之间)’이라고 전해오는 정부인송(贞夫人松 . 보은군 외속리면 서원리 .천연기념물 352호)도 똑 같은 수난을 당했다. 지름 30cm, 길이 10m나 되는 큰 가지 3개가 부러졌고 지름 10~20cm, 길이 4~7m짜리 중간가지도 5개, 지름 5cm 미만의 잔가지는 40여개나 꺾이거나 부러져버렸다. 가지가 낮고 풍성하게 퍼져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조선녀인을 련상케했던 우아한 모습은 온데 간데 없다. 충북 보은군만이 아니라, 또 속리산만이 아니라 온 한국과 우리 민족에게 아름다운 지조와 미모로 축복과 향기를 듬뿍듬뿍 뿜어주던 정이품송은 앓아서는 안된다. 우리는 문화민족이자 정의 민족이고 례의민족이고 다정다감한 민족임에 틀림없다. 정이품송에 대하여 가슴아프게 생각한 원림일군들은 정이품송과 정부인송의 정사를 잘 연구하고 다듬어 끝내는 몇천그루나 되는 그들사이의 후손을 요즘에 배육해내였는데 지금 한창 원예사들의 손끝에 받들려 묘목장에서 싱싱하게 자라고있단다. 참 기가 막히게 고마운 일일수밖에 없다. 이제 그애들이 제2의 정이품송과 제2의 정부인송으로 반도의 산과 들에 미모를 떨칠 때를 생각하면 자연 마음이 뿌듯해지고 저절로 육신이 후련해진다.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이쁨을 아끼고 정을 다듬는다는것이 어찌보면 우리 민족이 타민족과 구별되는 피줄속에 맥맥히 굽이치고있는 또 하나의 특징이 아닐가!
76    (수필) 충북으로 가다 3. 댓글:  조회:569  추천:10  2010-03-27
3. 괴산군은 괴상한 군이였다.   괴산군은 이름과 같이 괴상한 군이였다. 군수가 우리를 접대하여 식사를 나누는데 우리한테 줄 선물이야기를 하셨다. “우리 괴산군은 특산이 고추가루인데 중국서 오신 귀빈들한테 어떻게 고추가루를 선물하겠는가?”는 말씀이 참 우스웠다. 진짜 고추가루를 선물하게 되면 공항같은데서 혹시 고추가루봉지가 터지기나 하면 온 공항의 고객들이 그 고추가루향기의 험악한 세례를 받아야할건 뻔한 일이 아닐가? 괴산 민중들은 너무나 문화적이고 진취적이고 부지런한 민중들임을 나는 세계에서 제일 큰 가마솥을 보고서야 새삼 깊이 느끼게 되였다. “세계최대가마솥”을 바로 이 괴상한 괴산군군민들이 부어만들었던 것이다. 온군의 군민들이 저마다 쇠숱가락, 쇠저가락, 쇠부지깽이 등을 모아서 만들었는데 일곱번이나 실패하고 여덟번째에 솥을 만드는데 성공하였단다. 이 솥은 쌍룡이 여의주를 물고 하늘에 날아오르는 모양으로 가마고리를 만들었고 가마옆벽에는 12마리의 거북과 12송이 무궁화를 새겼는데 12개의 화구는 괴산군의 한개 군과 11개 읍을 상징한단다. 솥의 규모는 높이가 2.2메터이고 둘레의 길이는 17.85메터이며 무게는 43.5톤이란다. 이 가마로는 4만명이 함께 먹을수 있는 음식을 만들수 있는데 이미 감자와 옥수수를 삶아냈단다. 가마뚜껑은 기중기로 여닫는단다. 이 가마솥은 이미 세계의 제일 가마솥으로 기네스기록을 책임진 국제 해당부문에 신청된지 오래단다. 우리 중국같은 경우는 아직도 의식주 등이 여우롭지 못한데 비하여 한국은 자그마한 한 군에서까지도 새로운 특색과 고차원의 문화를 척척 창조하여 인류에게 선물하고자 하는  문화적 지향과 진취심이  참으로 대견하고 인상적이였다.   홍명희 생가   충북 괴산군 인산리에는 또 우리에게 그렇게도 엄청나게 안겨오는 우리 민족의 걸출한 작가이며 민족문학사의 큰 봉우리이고 장편대하소설을 “림꺽정”을 써서 세인을 놀래운 홍명희(1888-1968)의 생가도 덩실하게 자리하고 있엇는데 홍명희 생가는 퍽 크고 호화로운 편이였다. 앞채 옆채 뒤채까지 있었는데 뒤에는 보기 한창 좋은 야산도 척 안받침 되여있어 아주 신선한 감을 안겨주었다. 일대기를 빛낸 대작가 홍명희님의 생가를 이칸 저칸 돌아보는 우리들의 마음은 몹시도 설레였고 누구나 말보다 샤타를 누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발다슨 문턱이랑 옛스런 맛이 확-확- 풍겨오는 기와랑 모든것이 그렇게 친절하게 안겨올수가 없었다. 괴강을 거슬러 오르다 왼쪽 기슭에 하얀 비석이 이쁘게 세워져있어 눈부신 빛을 발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벽초 홍명희 문학비”였다.문학비를 둘러싸고 선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여러개의 돌기둥이 깊은 가을날의 따뜻한 볕을 받아안고 눈시리게 안겨왔다. 기념사진들을 남기고 비석아래에 눈주어 보니 거기에는 이 문학비를 다녀간 수많은 문인들의 마디마디의 느낌이 새겨져 있었는데 우리한테 엄청나게 안겨드는 대문인들의 이름도 수두룩하여 우리를 감격시켰다. 고즈넉이 흘러흐르는 괴강, 가을을 아름벌게 안고 흐르는 자그마한 이 강 기슭에 태를 묻고 그렇게도 우람한 기둥작가의 봉우리로 솟아오른 홍명희작가님의 형상앞에서 한낱 문학을 한답시고 촐랑거리고있는 내가 얼마나 가소로운 존재이고 보잘것없는 존재인가를 가슴깊이 느끼며 나는 옷깃을 여미고 숙연히 머리숙이지 않을수 없었다....
75    (수필) 충북으로 가다 2. 댓글:  조회:717  추천:14  2010-03-27
2. 울고넘는 박달재   우리 일행은 동양일보의 안내하에 이튿날인 10월 21일부터 청주에서 제일 먼거리에 있는 단양군으로부터 순회하기 시작하였다. 제일 먼저 만난 문화재가 단양군으로 가는 도중 천둥산 꼭대기에 있는 “박달재노래비”였다. 그렇게 익숙히 불러오던 “울고넘는 박달재” , 그 전설의 땅을 내가 직접 밟아보고 전설도 듣고 시진도 남기고… 옛날예적 단양군의 박달이라고 부르는 한 총각이 고을에 과거보러 가느라 박달재를 넘게 되였단다. 재에 이른 총각이 먼길에 지쳐 하루밤 민가에서 머물러 가게 되였다. 그런데 그집에서 박달이를 접대한 여인이 바로 가근방에 소문높도록 환하게 생긴 주인의 딸 금봉이였다. 그 처녀는 너무나 이쁘고 목소리 또한 물소리같이 청아하여 과거보러 가던 박달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박달은 너무나 황홀하여 과거고 뭐고 까맣게 잊고 그 처녀한테 사랑을 고백했다. 둘은 너무도 끔직히 사귀여 낮이면 해와 함께 산길을 오르내리고 밤이면 달과 함께 비탈을 누비며 따뜻한 사랑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박달을 너무나 사랑한 금봉이는 사랑하는 사람이 더 큰 인물이 되기를 원하여 그더러 빨리 과거보러 고을로 떠나도록 하였다. 사랑하는 사람의 정어린 권고라 박달은 아쉬운 마음으로 길을 떠났다. 그런데 고을에 이른 박달이 제아무리 머리를 동이고 과거시험준비에 달라붙었으나 책만 들면 눈앞에 금봉이의 고운 얼굴이 떠올라 도무지 공부가 안되였다. 결국 박달은 과거시험에서 락방되고 말았다. 박달은 사랑하는 사람 금봉이에게 너무도 미안스럽게 생각되여 천둥산밑에 도착했으나 감히 금봉이를 대하지 못하였다. 박달은 련며칠 천둥산기슭에서 맴돌다가 다시 고을로 올라가 매일매일 금봉이를 그리는 시를 지으면서 참기어려운 고독의 나날들을 보냈다. 헌데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은 금봉이는 또 매일같이 손채양해들고 고을에 과거보러 간 박달이가 돌아오나 동구밖에 있는 벼랑바위우에까지 가서 온종일 우두커니 서있군 했다. 과거가 끝난지도 오래된 기일이 지났지만 날이 가고 달이 가도 사랑하는 님이 돌아오지 않자 금봉이는 속이 새까맣게 타다못해 나중엔 앓아눕고 말았다. 결국 상사병으로 내내 앓다가 꽃잎은 시들어가고 금봉이는 사랑하는 님을 다시 만나지 못한채 그리움많은 한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박달이도 너무나 금봉이의 얼굴이 보고싶어 종내는 천둥산에 달려가 금봉이를 찾았다. 허나 금봉이는 이미 3일전에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가슴속에서 분화산이 터진 박달은 너무나 기가 막혀 천둥산에 있는, 금봉이가 자기를 기다려며 서있던 벼랑위에 달려가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후에 사람들은 그들의 사랑에 목이 메여 그 재를 “박달재”라고 이름짓고 오늘은 그 자리에 박달과 금봉이의 조각상을 높이 세우고 “박달재노래비”까지 세웠다.
74    (연재수필) 충북으로 가다 1 댓글:  조회:531  추천:12  2010-03-27
충북으로 가다   림금산 우리 일행이 대한민국 충청북도로 떠난것은 <동양일보>에서 주최하고 충청북도가 후원하는 전국 <명사시랑송회>에 참가하려고 간것이다. 초청은 동양일보에서 했고 우린 연길시에 있는 <조명희문학회>의 성원으로 활약한것이 인연이 되어 조명희고향에 초청된것이다. 비록 한국행은 여러차 했지만 충북만은 이번이 처음이다. 모두들 서울이 좋다고 하지만 나는 그래도 바다가 쭉-깔린 부산이 더욱 좋았고 작지만 깜찍한 문화도시 목포같은데도 마음이 들었고 더구나 남국의 신선하고 따뜻함을 뽐내는 한국의 명주-제주는 더구나 좋았다. 마산이나 대전, 광주나 대구 등지는 별로 큰 인상을 못받았었다. 하다면 충북은 도대체 어떤 곳일가? 한국의 중심부위에 위치해있고 또 한국에서는 륙지에 속한다는 큰 강과 바다가 없는 충북, 충북은 과연 어떤 곳일가? 첨으로 충북행에 나선 나의 마음은 너무너무 설레였다. 한때는 또 서울수도를 충북에 옮긴다는 말도 떠돌았고 충북은 너무나도 이름있는 문화향토란 말도 나를 신비로움에 빠지게 한것이다. 헌데 세계속의 도시를 지향하는 충북 수부도시 청주에 도착하니 벌써 문화의 향연이 확-확 풍기였다 청주국제공항에는 벽체에 큰 TV가 걸려있는데 큰 글자 그대로 시줄이 줄줄 흘러내리고있었고 공항2층에는 여러군데에 충북의 아름다운 풍경들과 충북 공예품 등이 그득 전시되여 전람되고있었는데 2층 대청의 크나큰 공간을 거의 채우고있었다. 때는 10월20일 가을도 막 가 우리가 사는 연변땅은 쌀쌀한 바람이 몸을 옴츠리게 하였었지만 충북에 도착해보니 한창 무르녹는 가을이여서 산빛도 곱고 단풍도 확 불타올라 우리 마음을 짙은 가을로 포옥 감싸주었다. 동양일보에 도착하여 우리일행(시인,수필가,언론인,기업인)7명을 맞아준것은 우리를 초청해주신 동양일보 조철호회장님과 조성훈사장님이였다. 그분들의 열정적인 환영사와 일정배치를 듣고 나의 호기심은 더해갔다. 아니 글쎄 이번 <명사시랑송회>를 충북 12개 시 ,군가운데서 11개 군을 순회하면서 펼친다는것이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시랑송전문가들과 대전, 충북 등지에 있는 시낭송전문가들, 우리 일행 7명, 그리고 각 도, 시, 군의 명사(충북도 도지사, 시장 ,군수, 의장, 경찰서장, 교장 등)들이 근 200여명이나 이번 랑송회에 참가하여 랑송한단다. <명사시낭송회>의 맛과 멋은 어떤것일가? 충북에는 도대체 어떤 문화재들이 그냥 숨쉬고있을가? 우리를 연길역까지 배웅해주던 연변일보 리임원선생이 말하던 속리산단풍과 정2품송은 또 어느만큼 멋질가? 나의 궁금증은 더욱 더 기승스레 내마음을 달구었다.   1. 가을밤 적신 청주명사시랑송회   이번 순회랑송회 첫 코스는 당연 충북 수도 청주시에서 펼쳐졌다. 동양일보가 매년 문화의 달 (11월)을 맞아 <명사시랑송회>를 여는것은 채바퀴를 돌듯 바쁘고 고단한 일상이지만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한, 그리고 사회를 받쳐주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이들이 시를 읽는한,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희망이 있을것이라는 믿음때문이였다. 깊어가는 가을밤 첫 랑송회가 성황리에 세계인쇄문화의 요람인 청주고인쇄박물관 대회청에서 펼쳐졌다. 청주시 시장으로부터 시랑송이 시작되여 의장님들, 교수님들, 경찰서장님들, 중국 문인들, 학생들이 한국명시와 세계명시를 위주로 자작시까지 정에 푹 젖어 랑송하였다. 사실 시끄러운 말같겠지만 우리 중국같은데서 어느 당위서기나 어느성장, 현장어른님들을 시랑송회에 참가하여 세계명시같은걸 랑송하라고 초청장을 보내면 이게 무슨 미친놈인가 하고 이상해 할것이다. 무대우와 무대아래가 동심일체로 가을밤을 익혀들었는데 시를 랑송한 명사들한테 생화묶음이 날아들고 시랑송가운데 무용수들도 가끔 나와 고차원의 무용을 선물했다. 그리고 올 행사에서는 특별히 포석-조명희시인님의 11수의 시로 엮어서 만든 새로운 실험시극이 공연되였다. 서울서 오신 시랑송전문가 (대통령상 수상자) 이화선양을 비롯한 이들이 비장한 선률과 색채속에서 시극을 연극하였는데 크나큰 인기를 끌었다. 더우기 서울서 오신 대통령상을 받아안았다는 절색으로 이쁘게 생긴 사회자 박현진양의 사회는 시랑송회를 고조에로 밀어갔다. 우리일행도 모두 무대에 올라가 인사말씀과 시를 랑송하였는데 명사로 된 기쁨을 한껏 만끽하였으며 따뜻하고 행복한 감회속에서 깊어가는 가을을 오래오래 가슴속에 새겼다.
73    (동시) 娃娃的瞳人 댓글:  조회:730  추천:14  2010-02-07
娃娃的瞳人                    林锦山                  金学泉 译   没有 一丝杂质 令人疑心   没有 一点污染 令人担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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