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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의 명신 학봉 김성일 13.파란많은 사행길 4)
2015년 08월 17일 13시 09분  조회:1936  추천:2  작성자: 옛날옛적
4)
    삼복더위가 지속되는 7월 20일에 사신일행은 일본관백의 허락을 받고 수도인 교도(京都)에 이르렀다. 수도에 온 뒤 황윤길과 허성은 한시름을 놓고 거리를 쏘다녔다. 그들은 일본사람들이 타고다니는 가마를 별재미로 알고 타고다니면서 거리구경을 일삼았다. 김성일은 그들이 조선국의 사신으로서의 본분을 지키지 않고 의관을 벗은채 아무곳이나 마음대로 나다니고 일본사람들앞에서 굽신거리는꼬락서니가 눈에 몹시 거슬렸다.
    <<황상사, 우리는 조선국의 사신이라는것을 잠시도 잊지 말아야 하오. 사신으로서 자중할줄 알아야 되지 않겠소.>>
    김성일은 그들을 여러차례 타일렀으나 그 말은 다 소귀에 경읽기였다. 김성일이 복장을 단정히 입고 다니라고 하니 그들은 궁전에 들어가 일본왕을 뵈올 때 입을 사신복장을 하고서 아무곳이나 꺼리낌없이 떠돌아다녔다. 길에 나온 일본 백성들은  그들의 꼬락서니를 보고 손가락질하기가 일쑤였다.
    학봉선생은 언제나 옷을 단정하게 입고 행차를 하였는데 그의 름름한 풍채를 일본국의 선비들이나 녀사들은 우러러보았고 대궐근방을 지날 때면 높은 벼슬아치들도 두손을 맞잡고 읍하며 경의를 표시하군 하였다.
    어느덧 삼복계절이 지나가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8월에 들어섰다.  8월 2일, 김성일은 황윤길, 허성 등 사신들과 함께 교도의 명소인 대덕사(大德寺)를 구경하러 갔다. 그들은 대덕사안에 있는 대선원( 大仙院), 정수원( 正受院), 흥림원(兴临院 ), 금모각( 金毛阁) 등 건물들을 두루 구경하다가 한낮이 되자 나무그늘에 놓인 돌걸상우에 둘러앉아 쉬였다.
    <<이제 오래지 않아 일본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게 되겠는데 회견절차를 한번 토론해보기오.>>
    아무런 정신준비도 없다가 일본관백이 부르면 그때가서 당황망조하여 일을 그르칠가봐 념려한 김성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놓고 말하년 그는 일본 관백으로서 일본국을 손바닥우에 놓고 쥐락펴락하는 인물이요. 그러니 그를 만날 때는 정하배(庭下拜: 뜨아래에서 엎드려 하는 절)를 올려야 되지 않을가요?>>
    관백의 호감을 사려는 허성이 먼저 자기의 생각을 내놓자 황윤길이 대뜸 반대의견을 제기했다.
    <<서장관의 말씀은 옳지 않소. 일본 관백한테는 영하배(楹下拜: 대청에 들어가서 하는 절) 를 올려야 마땅하오.>>
    뒤이어 김성일이 자기의 태도를 표시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국의 실권자이기는 하지만 일본국왕은 아닌고로 우리와 대등한 신하에 불과하오. 우리가 만약 정하배를 올린다면 우리 나라의 국왕은 일본국왕과 대등한 지위에 놓일수 없게 될것이요. 우리 사신의 행차가 백년만에 일본국에 왔은즉 이것 또한 하나의 처음맞는 일인것이요.우에서 절하거나 아래에서 절하는 그 기틀을 닦는것이 오늘의 결정에 달렸는데 어찌 그 처음을 삼가하지 않겠소? 첫시작을 잘못하여 후날에 올 사신들로 하여금 팔을 걷어붙이며 정하배를 올리는 굴욕이 사신 아무개 때부터 생겼다고하는 원망을 듣겠소? 상사의 말씀대로 정하배를 하지 말고 영하배를 행하는것이 마땅한 일이요.>>
    <<학봉선생의 말씀이 지당하오. 내가 일시 잘못 생각하여 하마트면 큰일을 저지를번 하였소.>>
    김성일의 말을 듣고 허성은 낯을 붉히며 자기의 잘못을 승인했다.
    보이지 않는 시간은 빨리도 흘렀다. 그들이 총견원에 들어와 대기한지도 어느덧 두달이 다가왔다. 그렇지만 그들은 아직까지 국서를 전달하지 못했으니  안타까와 어쩔줄을 몰랐다. 그들이 안달복달하고있을 때 평이지가 일본 관원 몇사람을 데리고 찾아왔다. 아마도 관백과 만날 날자를 토의하러 왔는 모양이군 하고 생각한 사신들은 평이지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부관께서 어인 일로 여길 찾아오셨소?>>
    궁금한 나머지 황윤길이 먼저 말을 건네자  평이지가 빙긋이 웃으면서 찾아온 사유를 말하였다.
    <<오늘 저녁 조정에서 연회가 있는데 귀국의 악기소리를 듣고싶어하는 사람들이 많기에 특히 귀국의 악공들을 빌리려 왔소이다.>>
    평이지의 말을 듣고난 사신들의 눈에 어렸던 희망의 빛은 금시 사라지고 불안의 빛이 어렸다. 그들은 누구도 평이지의 물음에 답복을 피하였다.
    <<악공들을 빌려줘서 음악으로 저자들의 마음을 흐뭇하게 해준다면 혹시 평이지의 마음이 돌아서서 국서를 좀 일찍 전달할수 있지 않을가요?>>
허성의 말에 찬동하는 뜻을 보인 황윤길이 김성일에게 눈길을 돌리였다.
<<황공께선 어떻게 생각하시오?>>
    <<우리들이 왕명을 받들고 일본에 온 뒤 아직 국서도 전달하지 못했으니 이것은 처녀가 아직까지 시집을 못간것과 마찬가지요. 천명(天命)은 잊어버리고 령악(令乐)만 도중에 내보내서 외국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구경거리가 된다면 그것은 규중의 처녀가 큰길에 나와서 노래를 파는것과 무엇이 다르겠소? 하물며 항성이 없는것이 일반 사람들의 마음인데 악사들이 악기를 가지고 시가지안에서 밤새껏 놀게 한다면 아무런 사고도 생기지 않으리라고 누가 담보할수 있겠소?>>
    낮으나 근엄하게 타이르는 학봉선생의 말에서 문제의 엄중성을 깨달은 황윤길은 평이지에게 악사를 빌려줄수 없다고 말하고 그를 돌려보내였다.
    학봉선생이 총견원에 머무르는 동안에 일본의 중 종진(宗陈 1561--1619)이 찾아왔다. 종진은 일본 림제종(临济宗)의 중으로서 자는 고계( 古溪)요 호는 포암(蒲庵 )이며 교도(京都 )  대덕사(大德寺 ) 제117대 주지로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야( 慈野)에 총견원(摠见院 )을 세울 때 제1세 개산자(开山者 )로 모셔갔던 인물이였다. 그는 관백에게서 상당한 대우를 받고있는 고승(高僧 )이기에 학봉선생은 그에 대해 매우 중시했다. 학문에 조예가 깊은 두 사람은 필로써 서로의 생각을 표달하였다고 시를 지어 서로 화답을 하면서 하루를 즐거이 보내였다.
며칠이 지난 뒤 종진은 <<대명일통지(大明一通志)》라는 책을 가지고 와서 조선과 관련되는 기사에 대해 질문을 들이댔다.
     <<대명일통지>>는 천순(天顺) 5년인 1461년에 명나라 조정에서 리현(李贤)등 력사학자들을 시켜서 편찬한 백과전서와 비슷한 책이였다. 이 책에는 중국의 력사, 지리, 풍속 등에 대해 상세히 기록된 이외에도 중국 주변에 있는 많은 나라의 력사와 지리, 풍속에 대하여 기록되여있는데 외국에 대한 부분 특히 조선부분에는 틀린 내용이 수두룩하였다. 조선국 연혁(沿革)이라는 제목아래 서술된 줄거리는 조선국의 력사와 조선민족의 력사가 아니라 한(汉)민족의 점령사와 지배사로 되여있었고 그 점령과 지배범위에 대해서도 사실과 상반되거나 과장된것이 수두룩하였다.
     학봉선생은 한두마디의 말로써 그 많은 오유를 다 고칠수 없었기에 뒤날 답복해주기로 하고 종진을 돌려보냈다.
종진이 돌아간후 학봉선생은 <<대명일통지>>의 조선부분에 관한 연혁과 풍속부분에 대해 하나하나 검토하면서 상세하게 오유를 지적하고 진상을 해명하였는데 그 일부분은 다음과 같다.
 
  <<연혁1>> 주나라때 기자(箕子)가 봉한 나라가 있었다.
     <<검토(考异 1》기자이전에 단군조선(檀君朝鲜)이 있었고 단군은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나라를 세웠다.
    <<연혁 2>> 진(秦)조때 와서 조선은 료동의 외곽에 속하였다.
    <<검토 2>> 진시황이 중국내의 6국을 삼켰으나 우리나라는 삼키지 못하였다. 따라서 료동밖에 속해있었다는것은 틀린말이다.
    <<연혁 3>> 한(汉)조 초에 연(燕)나라 사람 위만(卫满)이 그 땅을 차지했었다.
    <<검토 3 >> 기자의 후계세력이 쇠미하더니 기준(箕准)에  이르러 연나라 사람 위만이 진나라의 관리를 피해와서 기왕(箕王)의 허약을 틈타 나라를 빼앗자 기왕은 남쪽으로 금마군(金马郡)에 옮겨 정착하였다. 나라는 드디어 3분되여 마한(马韩: 전라도),변한( 卞韩: 충청도), 진한(辰韩: 경상도)으로 칭하니 3한이란 이름이 이로부터 시작된것이다. 위만이 그 땅을 웅거했다는것은 평양 옛도읍을 둘러싼 땅을 뜻함이고 3한을 점령하지는 못했었다.
    <<연혁 4>> 한무제가 조선을 평정하여 진번(真蕃),림툰(临屯), 악랑(乐浪), 현토(玄兔) 등 4개 군을 만들었는데 소제(昭帝)가 그것을 악랑, 현토 등 2개군으로 합병하였다.
    <<검토 4>> 한나라가 평정했다는 땅은 곧 위만이 점령했던 땅일뿐이고 조선의 전 지역은 아니다.
    <<연혁 5>> 한조말엽에 공손도(公孙度)가 점령한바 있어 그의 손자인 연( 渊)에까지 전해오다가 위(魏)나라가 그것을 멸했고 위에서 진(晋)으로 와서 진조말엽에 고려에게 함락몰입(没入)했다. 
    <<검토 5 >> 공손도가 점령한것은 고구려의 료동땅이고 고구려의 전 지역은아니다. 대개 위만조선의 뒤에 3국이 정립하여 고구려는 평양에 도읍하였고 백제는 부여(곧 변한의 땅)에 도읍하였고 신라는  경주(곧 진한의 당)에 도읍하였는데 령토가 다 수천여리에 달하였다. 진(晋)조때의 영가(永嘉)말에 료동땅을 고구려가 차지하였는데 여기에는 어느 지방이 함락되였다고 말하지 않았으니 기록이 상세치 못하다. 또 고구려를 고려라고 하여 탈락시킴으로써 고씨의 고구려와 왕씨의 고려를 혼동하였다.
    <<연혁 6>>  당나라가 <고구려>를 쳐서 평양을 빼앗고 안동도호부를 설치하니 그 나라는 동으로 압록강, 남으로 천여리를 옮겨갔다.
    <<검토6 >>  3국시대에 고구려가 당나라한테 굴복하지 않으니 당태종이 천하의 군대를 동원하여 친히 출정하였는데 료동성은 함락하였으나 안시성(安市城)은 빼앗지 못한채 돌아갔고 고종이 즉위한 뒤 좌부사(左讣射)리적(李绩)을 보내 평양성을 쳐서 비로소 함락시키고 안동도호부를 설치했기에 고구려는 드디여 망했다. 그러나 그 자손이 동으로 옮긴듯이 말한것은 잘못이다. 또 당나라가 함락시킨것은 고구려 한나라ㅃㄴ이며 그것도 그뒤에 당이 소유하지 못하고 다 신라에 귀속되였다.
    <<연혁 7 >>  5대(五代),당(唐)조때 왕건이 고씨를 이어 령토를 더욱 넓게 개척하여 옛 신라와 백제를 합병통일하였다. 송악(松岳 개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평양은 서경(西京)이라 불렀다.
    <<검토 7>> 신라말에 궁예(宫裔)는 후고구려로 칭하면서 철원에 웅거하였고 견훤(甄萱)은 후백제로 칭하년서 전주에 웅거하고있었는데 왕건태조가 다 평정하였고 신라왕이 또한 납토칭신(纳土称臣: 령토를 바치고 신하로 자칭함)하여 3국의 땅을 병유(并有)하였다. 그뒤에 서남오랑캐를 정벌하고 수천리의 땅을 넓히니 녀진 말갈의 땅이 다 판도안에 들어왔다. <<일통지>>의 이른바 <,령토를 넓게 개척했다.>>는것은 사실이다. 다만 고구려의 멸망이 이미200여년이고 왕건태조는 실로 신라를 이어서 왕이 된것인데 <<일통지>>에 고씨를 이어 일어났다는것은 잘못이다.또 왕씨는 처음부터 송악에 도읍한것이고 평양으로부터 천도한것은 아니다.
    <<연혁 8>>  원나라의 지원(至元)년간에 서경이 내속되여 동녕로총관부(东宁路总管府)를 설치하고 자비령(慈悲岭)을 획(划)하여 경계로 삼았다.
<<검토 8 >> 고려말의 역적 조위총(赵位葱)이 서경을 할거한것을 고려정부가 토벌하니 조위총이 할수 없어 서경을 가지고 원나라에 투항하였고 원나라는 거기에 동녕로를 두고 자지령으로 경계를 삼았으나 그뒤 조위총이 주살되매 원나라가 서경을 우리나라에 돌려주어서 우리 땅으로 되여있다.
 
이제 학봉선생이 조선풍속에 대한 <<일통지>>의 그릇된 부분의 비판을 보기로 하자.
 
    <<풍속 1 >> 온유하고 근후한것이 풍기를 이루고 있다.
    <<검토 1.>>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인성이 겸손하고 자상하여  집에 들어오면 부형을 공경하는 도를 닦고 나아가면 임금과 이상분들을 위해 충성과 의리를 다하며  종조간에 화목하고 이웃을 보살펴 길흉사에 서로 돕고 환난을 당해 서로 구해준다. 사대부들은 례의를 숭상하고 렴치에 힘쓰며 백성들은 또한 본분을 지켜 범본릉상(范本凌上)의 기습이 없다. 다만 온유하고 근후한 풍습만 있는것이 아니다.
    <<풍속 2 .>> 남녀가 서로 좋아하면 혼인한다.
    <<검토>> 우리 나라는 원래 례의를 숭상하고 혼인관계는 더욱 정중하게 처리한다. 동성끼리 혼인하지 않고 반드시 문호가 맞고 기풍이 훌륭한데를 골라서 혼인을 상의하되 먼저 중매군을 통해 교섭이 있은 뒤에 두집에서 합의되면  문명(问名), 납채(纳采 ) 등 륙례를 갖추고 혼사날에 이르러 량가의 향당종족(乡党宗族) 이 각각 서로 모여  례를 도우며... 국조혼인(国朝婚姻)의 례가 이와같이 근엄한데 어찌 상열위혼(相悦为婚)하고 빙폐(聘弊) 도 없단 말인가? 중국에서 떠도는 말대로 잘못 기록해두었으니 참으로 통분한 일이다. 서민층에서는 능히 례를  구비하지 못하고 간략해서 지내는 풍습이 있으나 역시 그 부모가 반드시 중매를 통해 납채로 성례를 하고 <<상열위혼>>하는 례는 없다. 소위 <<상열>>이라는것은 일본 경성자(倾城者)의 소위와 같은것이다. 우리 나라에도 간혹 이런 음풍이 있으나 나라사람들이 천대하여 사람으로 쳐주지 않는다. 
    《풍속 3 >> 죽은자는 3년이 지난 뒤에 장례를 지낸다....장례하고나서 죽은 사람의 물건을 나누어가진다.
    <<검토 3 >> 우리 나라의 풍속은 일반적으로 남의 초상이 생기면 누구나 달려가서 일을 도와주고 친척붕우의 상고에는 돈, 의복, 향촉 등 물품으로 박의(博仪)를 하여 조상을 하는 정과 례를 다하고있다. 만약 장사날에 죽은 사람의 물건을 쟁취한다면 이것은 금수나 도적과 다를바 없다. 어찌 례의지국에서 차마 이런짓을 하겠는가?>>
    <<풍속 4>> 사는 집은 모두 초가집이다.
   << 검토 4>>  서울의 인가는 다 기와집이고 외방에도 그러하다. 오직 시골의 농민들이 초가집에서 산다.
    <<풍속 5 >> 불교와 귀신을 숭상한다.
<<검토 5>>  우리 나라에는 불교사원이 있으나 다 산속에 있어서 민간집들과 까까이 있지 않으며 또 승려들이 집단적으로 성안에 들어오지 못한다. 신당(神堂)은 촌락이나 총림중에 있는데 사대부나 식자층은 숭배신앙하는 사람이 없고 오직 시골의 무지한 사람들만이 잘못 신봉하는 편이다. 질병이 생기면 의원을 맞이하여 처방에 따라 약을 먹는다. 음양에 구애되여 약을 먹지 낞고 양밥만 하는것은 있을수 없다. 지친(至亲)의 병을 가보지 않고 사후에 렴습(敛袭)을 외면하는것은 짐승만도 못한 일이니 우선 국법이 허용치 않는것이다.
 
<<대명일통지>>의 기사를 하나하나 비판한 책을 쓰고난 학봉선생은 종진에게 보내는 짧은 편지 한통을 부쳤다.
 
<<,천리부동풍( 千里不同风)하고 백리부동속(百里不同俗)이라>고 한바와 같이 풍속이 나라마다 서로 다른것은 조금도 이상하게 여길것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 나라는 기자이래로 례의가 성숙하여 중국과 다를 바 없으며 그중에 다른것이 있다면 항간에서의 사소한 풍속 있는것입니다. 명나라에서 도청도설(道听途说)한 이야기를 주어모아 <일통지>속에 실었는데 그말이 비렬하고 근거도 없습니다. 
외국사람으로서 우리 나라에 직접 와보지 못한 이들은 이 기록을 그대로 믿으면서 그것이 허위인줄을 모를것입니다. 이로 미루어보아 귀국풍속에 관한 <일통지>의 기록이 또한 진실하지 못한데가 많을것으로 생각됩니다. 맹자 말씀에 <책을 다 믿으면 책이 없는것만도 못할것이다.> 고 했는데 <일통지>야말로 그런것입니다.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스님이 때마침 물어왔기에 우리 나라의 례속의 한두가지를 각각 대강 소개하고 각각 그 밑에 주석을 달아서 그 잘못된 부분을 변파한것이지만 이것은 다만 <일통지>의 기록에 한해서 말한것이고 우리 나라의  례속으로 들어 말할것이 이것뿐이란 뜻은 아닙니다. 스님께서 이 점을 살피시고 또 귀국풍속이 <일통지>에 잘못 기록된점이 있거든 적어서 나에게 보여주어 나의 의혹을 깨뜨리게 해준다면 대단히 다행한 일이 될것입니다.>>
며칠 뒤 종진한테서 답서가 왔다.
 
   <<조선국고찰>>이란 책을 보여줌을 통해 귀국의 풍속의 진실을 한눈으로 보게 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뒤날 박륙후(博陆候:관백을 가리킴)를 뵙게 되면 꼭 보여주겠습니다.>>
 
  <<대명일통지>>에 대한 학봉선생의 과감한 비판은 조선민족력사의 주체성과 문화례속의 우수성을 국제적으로 소리높이 천명하였으며 명나라의 대국주의 력사관을 비판하고 중화문화권에 속해있는 조,일 두 나라가 중국적인 사고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각기 민족문화의 독자성을 존중할것을 표명하였다.
    사신들이 수도에 와있은지 몇달이 지나서야 동부지방의 령주들을 정복하러 갔던 관백이 돌아왔다. 황, 김, 허 세사람은 관백과 만나서 처신할 일을 토론하고있었다.
    이때 평이지가 침소로 찾아왔다.
    <<래일은 관백께서 천궁으로 참지하러 가기로 했으니 공들은 유람을 떠나시오.>>
    <<우리는 아직 왕명도 전달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마음편케 유람을 떠날수 있겠소?>>
    평이지의 말이 도리에 어긋남을 안 김서일이 이렇게 대답하자 평이지가
    <<그까짓 국서야 어느날 전하던지 상관있소? 숙소에 있기보다 소풍하는것이 좋지 않소? 자, 우리 유람을 떠납시다.>>하고 말했다.
    <<국서를 올리기전에는 유람을 할수 없으니 미안하오.>>
    <<그럼 제공들은 좋도록 하시오.>>
    학봉선생이 기어코 사양하자 평이지는 인사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이윽고 대덕사의 중 하나가 사신들을 보러 왔다. 그는 사신들이 평이지를 돌려보냈다는 말을 듣고나더니 입을 쩝쩝 다시면서 사신들을 나무랐다.
    <<평이지의 청은 바로 관백의 뜻이요. 이제 평이지의 요청에 응하지 않으셔서 후회가 될것 같소.>>
모르면 약이지만 알고나면 병이라더니 정작 일본중의 말을 듣고보니 사신들은 소름이 돋아났다. 조국과 천리상거한 오랑캐땅에 와서 봉변이 절대 생기지 않을것이라고 누가 감히 담보할수 있단 말인가? 중의 말을 듣고난 사람들은 부지불식간에 천여년전   박제상(朴堤上)이 당한 일을 생각하였다. 사신들의 머리칼은 곤두서기 시작하였고 가슴은 세차게 들먹였다. 중이 가고나자 눈물을 질금질금 짜는 수행인원도 나타났다. 부모처자를 정든 고향에 두고 오랑캐땅에 와서 무주고혼(无主孤魂)이 될것을 생각하니 원통하기 그지없었다. 박제상이 당했던 화가 오늘 다시 자신들한테 덥칠것만 같았다.
 
    박제상은 신라 눌지왕때의 충신이였다. 파사왕의 5대손이요 물품의 아들인 그는 삽량주의 간으로 있을 때 지혜와 용맹으로 이름을 떨치었다. 실성왕때 신라에서는 내물왕의 아들인 미사흔을 일본에 볼모로 보내게 되였다. 실성왕 11(412)년에는 미사흔의 형인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게 되였었다. 417년 눌지왕이 즉위하자 박제상은 왕명을 받고 고구려로 들어가 복호를 본국으로 데려왔고 그 다음해에는 또 일본으로 건너가서 계책으로 미사흔을 신라로 빼여돌리고나서 자신은 일본놈들에게 잡혀 목을 잘리였었다. 눌지왕은 박제상이 피살되였다는 비보를 듣고 통곡하다가 박제상에게 대아찬이란 벼슬을 추증하고 박제상의 둘째딸을 미사흔에게 출가시키는것으로 충신의 은공에 보답하려 했던것이다...
      <<제공들 진정하시오. 일본의 관백이 제아무리 포악한 자일지라도 사신으로 온 우리들을 제마음대로 해치지는 못할것이요. 설사 우리들이 박제상의 처지로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라 위해 몸바치는 성스러운 일이 아니겠소? 공들이 운다고 죽음이 찾아오지 않고 울지 않는다고 살사람이 죽겠소. 마음을 굳게 가지기오.>>
     김성일의 일장설화에 사람들의 정서는 얼마간 안정되였다. 우스개를ㄹ 주고잗는 사람들도 하나둘 불어났다.
     <<어제 궁전 근방에 가봤더니 래일 관백이 천궁으로 참지하러 가지 않는다더군요.>>
     밖에 나가 허실을 탐지하고 돌아온 허성이 새소식을 알려주자 황윤길은
     <<그럼 마침 잘 되였소. 래일 아침에 직접 관백을 찾아가기오.>>하고 말했다.
     <<관백이 우리를 골려주느라고 일부러 그러는데 찾아간들 그가 만나주겠소?>> 하고 김성일이 반대의견을 내놓자 허성이 다시 황윤길의 주장을 지지하고 나섰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데 우리가 찾아갔는데야 관백이 설마 만나주지 않겠소. 이침일찍 가봅시다.>>
     이튿날 아침, 사신일행은 황윤길과 허성의 주장에 좇아 관백의 숙소로 찾아갔다. 그러나 문지기가 대문을 열어주지 않아 그들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밀려나왔다. 그뒤 세차례나 다시 찾아가봤으나 관백은 여전히 그들을 만나주지 않았다. 문지기의 말에 의하면 관백은 궁궐이 아직 다 건설되지 않았기에 궁궐건설이 끝날 때까지 일체 외인을 접견하지 않는다는 전갈을 내렸다는것이였다.
     관백을 만나러 갔다가 번번이 헛탕만 치고 맥없이 침소로 돌아온 사신들은 무료한나머지 수도안팎의 명승고적을 돌아보면서 시간을 보내기로 하였다.
      <<관백이 이핑게저핑게를 대면서 국서를 받지 않는 목적이 혹시 우리를 억류시키려는것이 아닐가요?>>
     근심걱정에 사로잡힌 허성이 이렇게 말하자 황윤길도 슬그머니 겁이 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자들에게 뢰물을 먹이고 국서를 빨리 전달하도록 하는것이 어떻겠소?>>
     <<무슨 방도를 대서라도 국서만은 한시바삐 전달해야겠는데...>>
     김성일이 곁에서 들어보니 허성도 황윤길의 의사에 동의할 눈치였다.
     (뢰물을 먹이고나서 국서를 바치다니. 정말 천고에 보기 드문 치사로구나.)
     김성일은 그들의 그릇된 생각을 고쳐주려고 말없이 필을 들었다. 그는 손님과 주인이 주고받는 말의 형식을 빌어 그들의 잘못을 비판하였다.
 
   손님: 민부경 법인(民部卿 法印)과 산구전 현량(山口殿 玄亮)은 관백의 좌우에서 일보는 사람들인데 마침 사신을 접대하는 직책을 맡고있으니 당신이 그들에게 뢰물을 보내여 그자의 환심을 사게 된다면 우리가 사신의 임무를 완수할 날이 멀지 않을것이요.>>
답:  <<사신이 왕명을 받들고 국경을 나서면서 비록 한결같이 례법대로 구차스런짓을 하지 않더라도 몸을 실수하여 왕명을 욕되게 할까 념려되는것인데 하물며 좌우사람들에게 뢰물을 먹일수 있겠는가?... 사신된 도리는 마땅히 의리로써 반복적으로 타일러야 할뿐이요.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비굴한짓을 했다가는 왕명을 욕되게 하는 죄가 커지게 되여 씻을래야 씻을수 없을것이요.>>
 
   눈치빠른 허성은 김성일이 써놓은 글을 읽어보고나서  겁이 더럭 났다. 일국의 사신으로 외국에 왔다가 국서를 전달하기 위해 외국의 관리에게 뢰물을 먹였다는 소문이 퍼져나가면 나라의 치욕도 치욕이려니와 귀국한 뒤 국법을 범했다는 죄를 모면할수 없다는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였다. 글을 다 읽고난 황윤길과 허성은 부득불 김성일의 주장을 따르는수밖에 없었다.
    무성한 여름도 지나가고 단풍잎이 울긋불긋 곱게 물든 가을도 다 지나가고 찬바람이 가끔 몰아치는 겨울이 찾아왔다. 일본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1월 7일 새로 지은 에 궁전에서 조선사신일행을 만나겠다는 통지를 보내여왔다.
     약정한 시간이 되자 조선사신들은 접빈사의 안내하에 주옥으로 장식된 화려한 궁궐안으로 들어갔다. 궁궐의 정좌에 높이 앉아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본 조선국의 사신들은 관백의 앞에 가서 영하배를 올렸다.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두손을 모아 거만하게 읍으로 답례하고나서 
     <<원로에 수고가 많았겠소.>>라는 말 한마디만 하였다. 그는 황윤길이 올리는 조선국의 국서를 받더니 대충 읽어보고나서 수하에게 조선국의 사신들을 위한 연회를 베풀어주라는 말을 남기고는 내찰로 들어가버렸다.
연회가 끝난 뒤에 조선국의 사신들은 즉석에 일본국의 답서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답서를 받을 때까지 그냥 기다렸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시 얼굴도 내밀지 않았다. 해질무렵이 되여 하는수없이 총견원으로 돌아온 사신들은 답서가 오기를 알각이 삼추같이 안타깝게 기다렸다. 나흘이 지난뒤에 궁전에서 전령병이 오더니 글쪽지를 주고는 돌아갔다. 사신들이 그 글쪽지를 펼쳐보니 
<<회답문서는 일후에 써보낼터이니 사신들은 계빈에 가서 기다리시오.>>라는 몇글자가 적혀있었다.
    일본의 수도에 와서 무단히 억류될가봐 두려워하던 사람들은 이제야 범굴에서 빠져나오게 되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급히 그곳을 벗어나려고 행장을 수습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황상사, 우리는 아직까지 일본국의 회답문서도 받지 못했으니 사신의 임무를 다한것이 아니오. 그러니 잠시 출발하지 말고 여기서 일본국의 국서를 받을 때까지 기다려보기오. 계빈은 여기서 백리나 떨어진  먼 곳인데 만약에 중도에 문제거리라도 생긴다면 어떻게 서로 왕래하겠소?>>
    <<김공, 여기는 안전지대가 아니니 계빈에 가서 다시 보기오.>>
황윤길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수행인원들은 범에게 쫓기는 노루마냥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면서 부두로 달려갔다. 통신사일행을 다 보내고 홀로 총견원에 남아있을수는  없게 된 학봉 김성일은 하는 수 없이 무거운 한숨을 후------ 내쉬고나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그들의 뒤를 따라 부두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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