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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장편《반도의 혈》
23.
대박이 터졌다고 얼싸좋다며 돌아간 최삼용은 과연 이쪽에서 시키는대로 했다. 그는 번개식행동으로 기한내에 신을 500컬레가져왔거니와 유용한 정보도 얻어온 것이다. 그는 라남(羅南)에 있는 일본군 19사단에 목숨이 매여있는 첩자였다. 조선주재 신임 일본군사령관 오니와가 요즘 다까시마사단장을 찾아온 것을 보니 일군은 어떤 중대한 움직임이나 계략이 있다는 것이였다.
《개구리가 궁둥이를 땅에 붙일때야 뛰자는게지. 그자들의 계략이야 무슨 구실이든 달아 만주를 점령하자느 것 밖에 있겠냐.》
《개 똥먹는 버릇못고치지.》
서일이 하는 말에 계화가 이렇게 동을 달아 모두 웃었다.
서일과 계화, 조성환 그들 셋이 무기구입을 하느라 장기간을 가있은 국경너머저쪽 로씨야의 씨베리야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으니 그것인즉은 거기에 원동공화국이라는 새 국가가 생겨난 것이였다.
방금 정권을 장악한 쏘베트정권은 로씨야 서쪽에서는 파란의 지주무장이 위협하고 남쪽에서는 등니차잔여비도가 계속 위협하고있는 상황이였기에 아직은 일본과 전쟁할 맥이 없었거니와 이미 얻은 령토를 수복하기도해야했다. 하여 일본과의 대결은 피하는 책략을 취하느라 하는수없이 바이깔동쪽 태평양연안까지의 광활한 지역에다 민주주의 깃발을 내건 새 국가ㅡ 원동공화국을 세우고는 그것의 독립은 선포하고 승인한 것이다.
이러함에도 남의 나라의 혁명에 무력으로 간섭하는건 사실상 멋쩍은 짓이였다. 그리하여 1920년 4월 1일에 미군마저 철거해버리니 로씨야땅에 남은건 일본군뿐이였다.
문제는 그리하여 생긴 것이다.
일본군의 지속적인 주둔은 원동지구인민들의 강렬한 불만과 반항을 야기시켰다.
몇달전인 1920년 3월, 묘가성(廟街城)주둔 일본군, 백파잔여비도와 터리피령이 지휘하는 당지 무장유격대지간에는 격전이 벌어졌는데 유격대가 이겼다. 유격대는 성을 수비하던 일본군과 백파비도를 포로하고 묘가성(廟街城)을 점령했다. 이렇게 되자 실패를 달라와하지 않은 일본군은 암암리에 원병을 청해 자기들을 구원해주기를 바랐다. 터리피령이 지휘하는 무장유격대는 적들의 이러한 계책을 알아내자 5월 27일에 일본 지원부대가 당도하기전에 묘가성안에 있는 어느 한 커다란 집에다 포로한 일본군과 묘가에 주재하고있었던 령사관원과 그의 가족 그리고 당지의 일본교민 등 300여명을 몽땅잡아 가두고는 불을 질러 모두태워 죽이였다.
이것이 세계사상 유명한 “묘가사건”인 것이다.
이 사건은 일본침략자에 대한 원동지구인민들의 분노의 감정을 표시한 것이였다. 하지만 일본은 쉽사리 물러가지 않고 7월 3일에 “묘가사건”은 일본제국의 위신을 떨어뜨린 것이니 보복조취로 로씨야의 원동지구를 점령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일본정부가 이같은 성명을 발표하기 두달전에 동경의 상야(上野)공원에서 일본국내의 15개 단체가 5.1국제로동절을 경축하느라 모인 기회에 함께 로씨야에 가있는 군대를 속히 철거할것을 정부에 청구했다. 그리고 두달지나 미국정부가 성명을 발표하여 일본이 “묘가사건”을 구실대고 출병한것을 견책했던 것이다.
미국정부가 성명을 발표한 같은 날 즉 1920년 7월 16일에 일본무장간섭군은 핍박에 못이겨 대표를 파견하여 원동공화국과 전쟁상태정지담판을 했다.
<<로씨야 령토내에다 다른 그 어떤 무력간섭이든 받지 않는, 여러정권을 하나로하는 단일정부를 만들어 완충국이 되게 함으로써 본지구의 평화적인 질서를 보장한다.....>>
쌍방의 단판내용은 이러했다.
일본이 원동공화국을 승인하게 된 것은 한 방면으로는 그들자신의 목적이 있고 다른 한 방면으로는 달리 더 어쩔 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했다. 저들이 계략으로 일으켜세웠던 꼴챠크는 명이 짧았다. 하여 희망을 더 걸데가 없었던 일본은 원동공화국을 승인해놓고는 온갖방법을 다하여 로씨야땅에서 저들의 세력을 계속 유지해보려고했던 것이다.
하다면 만주에서는 어떠했는가?
일본은 대부대를 간도의 주위에 집결시킴과 동시에 전투에 유리한 요새와 기지로부터 독립군을 철퇴시킬것을 중국군 당국에 강력히 요구하고 있었다. 자칫잘못하면 중일전쟁이 재다시 일어날 가능성까지 있는지라 중국측은 곤경에 빠져 일본의 말을 들어주는 형편이 되였다.
한데 북간도지방에서는 서간도지방과는 달리 독립군에 대한 중일합동수색작전이 처음부터 행하여질 수 없었다.
그것은 바로 전부터 길림성장 서정림(徐鼎林)은 일본의 요구를 거부하여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당에는 수색이 있기마련이여서 북간도의 독립군은 연길도윤 장세전(張世銓), 중국군려단장 맹부덕(孟富德) 등과 교섭을 벌려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의 타협을 보았다.
1. 중국군은 일본군의 간도친입의 구실을 막기 위하여 부득이 독립군토벌을 위한 출동을 하지 않을 수 없음으로 독립군은 이와같은 중국측의 립장을 고려하여 그 대책을 세워 상호타협, 행동한다.
2. 그리하여 독립군은 시가지나 국도상에서 군인의 복장이나 무기를 휴대하고 대오를 지어 행동함으로써 중국측을 난처하게 만들지 않는다.
3. 중국군은 토벌을 위한 출동전에 독립군에게 그 내용을 사전에 통보하여 독립군의 근거지이동에 필요한 준비와 시간을 갖게 한다.
4. 중국인과 독립군은 서로 피전을 약정하고 중국군이 출동해도 독립군은 공격하지 않고 중국군은 독립군의 이동과 삼림지대 등지에서 새 기지건설 등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런 타협이 있은후 여러 독립군부대는 8월하순부터 일제토벌군의 간도침략을 사전에 막고 새로운 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장정을 시작한 것이다. 허나 북로군정서는 속히 움직일 수 없었다. 로씨야에 가있는 서일총재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그가 오기를 기다려야했다. 그리고 사실은 김좌진본신부터 잘 건설해 놓은 군사기지를 버리고 훌쩍 떠나가자니 가슴이 몹시 아파났던 것이다.
인차움직이지 않으니 동삼성당국은 마침내 왕청현 서대파구에 자리잡고있는 이 북로군정서와 그의 사관련성소에 대해서도 누구의 눈에도 잘 띄이지 않을 더 깊은 삼림지대로 퇴각할것을 권고하여왔다.
그러더니 며칠안되여 맹부덕(盟富德)이 부하 200명을 거느리고 직접 서대파구에 나타났다.
《이거, 참! 보깨는 걸!》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김좌진은 조급해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그까짓 200명 끌고와서는 대체 어쩔셈인가고 속으로 웃었다.
그러나 맹부덕(盟富德)은 완력으로 독립군을 쫓으러 온것이 아니라 약속한대로 일제측에게는 “토벌”을 내세우면서 내면적으로는 북로군정서의 근거지를 조속히 이동시킬것을 간청하러 온 것이다. 이날이 9월6일이였다. 서일에게 한번다시 알려야 했다. 하여 이틑날 리교성이 무기운반대원 몇을 데리고 로씨야로 급속히 떠났다.
김좌진은 부총재 현천묵을 비롯한 여러 요인들과 상론하여 소와 돼지를 잡아서 맹부덕과 그의 병사들을 호궤(犒饋)하면서 협상했다.
《과연 미안하게됐습니다. 총재께서 계시지 않아 제가 접견함을 리해하시오.》
김좌진은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부대가 여지껏 움직이지 못한 원인에 대한 변명이기도했다.
립장이 딱함을 말하던 맹부덕은 술잔을 들면서 거듭거듭 미안해하였다.
《이것은 우리들의 본의가 아니요. 그러나 중국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장군은 우리들의 이 권고를 리해하실거요. 참으로 딱한 청이오마는 일본에 대한 우리들의 약속을 리행시키기 위해서, 그냥 얼마쯤 물러나주십시오. 안도현의 수풀속이든지 어디든지 밀림지대로... 그리고 다시싸워주시오. 장군! 일본이 우리들의 공동의 적일진대 중국과 조선의 수호관계만은 언제까지나 의심하지 마시오!》
《고마운 말씀이요.》
그와 마주앉아 잔을 드는 백야 김좌진사령은 이렇게 가벼이 응수하는 수밖에 달리는 대답할 방법이 없었다.
협상결과 원만한 타협이 이루어져 맹부덕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다음날 퇴각했다.
그가 돌아 갈 때 서로군정서의 독판 김동삼이 서일을 만나러 십리평에 왔다. 그가 온 목적은 당전의 긴장한 형세를 론하고 이제 근거지를 옮기면 어디로 옮길것인가, 西路軍政署와 北路軍政署 두 진영이 련계를 밀접히 하면서 행동을 일치하게 하자는 것이였다. 한데 만나야 할 사람이 없어서 그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노라니 며칠안되여 마침내 로씨야에 가있던 서일일행이 리교성의 운바대와 함께 무기를 한짐씩 지고 본부로 돌아왔다.
《일본은 그 무슨 구실이든 잘 찾는 재간하나야 좋지! 두고보오만 그자들은 이제 저들의 무력을 동원시켜서 만주에서 자라고있는 우리의 독립군세력을 박멸하려고 그 어떠한 비렬한 수단도 가리지 않고 다 쓸거요. 틀림없다니까.》
서일은 김좌진의 보고를 받고나서 이같이 긍정적으로 말했다.
조성환은 머리를 끄덕여 자기역시 일본을 그렇게 보고있노라 했다. 그는 조선주재 신임 일본사령관 오니와가 라남(羅南)주둔 19사단 다까시마사단장을 만났다니 벌써 그런 조짐이 긍정적으로 보인다고했다.
정녕 그러하다면 격전은 불가피한 것이다. 모두들 그렇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 불가피면적으로 벌어지게 될 일장의 격전을 눈앞에 그리였다.
그런데 근거지를 어디다잡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량론이 갈리여 대립되였다.
서일은 후일에 대비하여 근거지를 왕청현 서대파에서 더 북상하여 로씨야와 접경지대인 북만의 밀산(密山)쪽으로 옮기자했다. 그같이 북상하여 독립전쟁에 대한 준비를 더 착실히 한 후에 독립전쟁을 하자는 것이였다. 점진론자(漸進論者)의 의견이였다.
그러나 그 의견은 아직은 만주에 와있는 조선사람의 수가 적은 편이고 중조국경(中朝國境)과는 거리 가 멀기에 일본군으로부터 공격의 위험성은 적으나 그대신 인적(人的), 물적(物的) 특히는 군자금을 모금하는데 크게 지장이 있는 단점이 있다, 또한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면에서도 인심(人心)을 리탈할 가능성이 더욱 크지 않겠는가, 그리고 북간도국민회와 그의 독립운동단체와의 대립이 있는 현실속에서 일본군을 피하여 더 북상하여 오지(奧地)로 이동한다는 것은 맞지 않다면서 북로군정서간부진영 중에서도 서일의 주장을 따르는 사람은 적었다.
총사령 김좌진 은 로씨야에서 들여온 신식무기로 전부 무장하니 전사들은 사기가 충천하지 않은가, 남하하여 백두산근처에 근거지를 정하고 재만한인(在滿韓人)의 다수가 거주하고있는, 후원과 지지속에서 훈련되여 무어진 병력으로써 일제와 한번 독립전쟁을 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에 대부분이 찬성이였기에 서일은 제 주장을 더는 세울수 없었다.
북로군정서는 곧 이동준비에 들어갔다.
한편 김동삼(金東三)은 한주일가량 지내는 사이 사관련성소의 훈련을 보고 군인들의 입을 동복을 생산하고있는 피복공장도 보았다.민생(民生)정황을 료해하기위해 덕원리에 갔던 그가 목격하고 특히 감격한 것은 서일이 중광단(重光團)때로부터 말을 많이 사들인다더니 거의 집집마다 몇필씩 기르는 그것이였다. 전부 기마용인줄로 알았더니 그런것이 아니였다. 백여호의 동네에 80호가 여기 만주의 한인(漢人)마을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적어서 말 세필이상이 다섯필리 끌기로 돼있는, 바퀴둘레에다 동그란 철을 둘러박은 중국식의 마차가 있었던 것이다. 유사시 그것이 출동하면 곧바로 치중병(輜重兵)구실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오, 그런거로구만!》
김동삼은 몹시 감탄하여 부르짖었다. 여기서는 모든일들이 잘되여가고있음에 그는 놀라고 기뻣다.
서일이 출발을 위한 간부련석회에서 말했다.
《무거운 짐수레를 다 끌고는 제때 도착키 어려울것이다. 그렇다고 더러버린다면 결국 잃고마는것이다. 치중차를 없애서는 안된다. 량식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고 준비한 물자를 없애면 부대는 자기의 명(命)을 이어가기 어려운 것이다. 누구나 이것을 꼭 알아야한다.》
《옳은 말이요. 서총재는 과연 원견성있게 착실히 준비해왔구만! 그러니 어찌 따르지 않리오! 존경하지 않으리오!》
김동삼은 이같이 부르짓기까지 했다. 참으로 미더웠다. 그리고 부러웠던 것이다. 그의 눈에는 서일총재의 그 능력의 지배하에서 여지껏 무탈하게 성장해 온 옹근 북로군정서가 당당하고도 대견해 보였다.
《적은 이미 보복적인 행동을 개시한것만큼 우리도 타당한 대응책이 있어야 할 것이다.》
북로군정서의 요인들과 함께 하는 련석회의에서 김동삼이 한 말이다.
모두들 그거야 더 말할게있느냐 응당그래야지 하면서 봉오동전투를 상기했고 그로 인하여 전세(戰勢)는 상상외로 격화되고있음에 대해서 운운했다.
바로 3개월전인 6월 7일의 그 전역(戰役)에 대한 이쪽의 공보는 이러했다.
<<그날 오전 7시에 동만에 주둔한 독립군 7명이 북로사령부(北路司令部)의 소재지인 왕청현 봉오동을 향하여 행군하다가 갑작스레 왜적을 만나서 지휘관 홍범도(洪範圖), 최명록(崔明錄)은 급격(急擊)하여 130명을 살상(殺傷)하고 적의 패주함을 추격하니 적은 지금 전투중이라고 급보하였다. 이 급보를 받은 동만사령관은 즉시 전투지로 달려갔다. 6월 4일부터 7일에 적과 교전하여 아군사상자 25명 손해가 적지 않았고 적사상 12명, 이것은 적군사령부가 공포한 것이니 국경방면 우리 군대 활동에 대한 일면을 알것이다. 6월 4일 오전5시경 독립군 약 20명은 강양동(江陽洞)에 진주하려다가 적병척후와 충돌되어 교전하였으며 적의 남양파견대는 주력부대와 헌병, 경찰관을 합하여 17명이 남양으로부터 강을 건너 아군의 배후를 끊으니 아군은 일시저항하다가 사방으로 퇴각하여 삼툰자지방(三屯子地方)을 포기(抛棄)하였다. 이 전투에서 아군은 사망1, 부상 2, 피금(被擒ㅡ포로) 2, 소총 퇀환 445발, 기타 잡품(雜品)을 상실하였다.
6월 7일 오전4시, 안산지방부락에서 약 20명의 우리 아군은 적과 충돌하였고 적은 오전 6시30분 봉오동(鳳梧洞)에 도착하여 부근부락의 민가를 수색하였다. 봉오동부락은 벌써 사령부의 지령에 의하여 로인과 부녀자를 피난시키고 완전한 임전태세를 취하였으므로 빈집뿐이였다. 적추격대는 봉오동부근고지에서 아군의 복병에게 포위사격을 당하였고 표고(標高) 503고지와 그 부근 고지에서 격렬하게 항전하였다.
동만의 왕청현 봉화리(烽火里)에 주둔하던 독립군 100여명은 6월 6일 상오에 국경을 넘어 잠입한 적군 500명과 교전하여 대파(大破)한바 적이 사자(死者) 60, 부상자 50여를 내었는데 아군은 부상자 2명, 촌민이 류탄(流彈)에 죽은 사람이 9명이다. 아군의 대부분은 타방면(他方面)에 출동중이였으므로 적을 전멸하지를 못하였다.>>
봉오동전투는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본때를 보여준 것이니 여러 독립군이 따라배울만한 본보기로 되겠다.
《분산은 위험하니 우리 손잡고 단합해서 잘 싸워봅시다!》
김동삼(金東三)이 돌아가면서 여러사람들과 궂이 당부한 말이였다.
시국에 대한 독립운동자들의 분석과 예견은 절대 틀리지 않았다. 일제가 훈춘사건을 조작한것만으로도 충분히 증명하고 남음이 있는 것이다.
이해의 5월상순, 이른바 “조선총독부” 제3대총독 사이또오의 지령을 받고 중국 만주의 봉천, 길림지방으로 출장나온 “조선총독부”의 경무국장 아까지는 현지에서 일본령사관 령사 및 길림성, 봉청성 독군고문으로 있는 사또, 마지노 등과 협의하고 동삼성순열사 장작리(張作霖)에게 봉천, 길림 각지에서 조선인 반일무장단체에 대한 련합수사를 요구하여 허락을 얻었다.
얼마후 일본군 남양수비대는 19사단보병부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독립군이 주둔하고있는 삼툰자(三屯子)를 공격했다. 허지만 일제는 6월 4~5일에 두차례있었던 삼툰자전투에서 도독부(都督府)의 독립군사령관 최진동(崔振東)이 지휘하는 독립군에 대패하고말았다. 그리고 또 6월 7일에는 지형에 어두운 봉오동을 공격했다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부대의 유인술에 걸려 그같이 참패를 거듭했던 것이다. 사툰자전투와 봉오동전투에서의 일본군의 대패는 독립군의 사기만 높여주었다. 그리하여 절치부심하게 된 일제는 남의 나라에서 자기들이 대병력을 움직일 수 있는 하나의 전략적인 수단으로서 만주의 마적단(馬賊團)을 써먹기에 이른 것이다.
만주(滿洲)땅에 마적이 소털같이 많았다하면 아무렴 하고 곧이듣지 않고 의문을 갖겠지만 그 비유가 지나친건 아니였다. 사실 도처에 마적이였으니 그놈의것이 과연 많기도 많았다. 한데 대부분 마적이 도적질을 할지언정 의리(義理)에 벗어나는 행위는 하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중에는 본성이 악질이여서 돈이면 무슨짓이나 하는 자도 있었으니 왜군은 이런 자를 찾아 무기를 공급하는 동시에 천방백계를 다해 그 속에 혼입, 마적단을 움직여서 독립군을 박멸하려했다. 그러나 그것이 되지 않으니 거액의 돈으로 그 수뇌자를 매수했던 것이다.
그들이 지목한 향마(响马ㅡ마적) 장강호(長江好)는 본명이 라명성(羅明星)인바 길림성 구태(九台)사람이다. 장강호(長江好) 류자(綹子)의 우두머리 따당쟈더(大 當家的)였던 그는 근 400명에 이르는 새자(崽子)를 휘동하여 주로 영길(永吉), 화전(樺甸)일대에서 횡행하면서 료략질을 감행했는데 앞에다 버젓이 내건 구호는 반일(反日)이였다.
키가 헌칠하고 름름해서 사나이답게 생긴 그가 1870년생이니 그때 나이 50살, 류자(綹子)에서 새자(崽子)형제들을 돌봄이 극진하나 꺽지손이 세고 성정이 횡포하기가 이를데 없는 인간이였다.
토비들의 생활이란 이런 몇가지였다.
砸窑ㅡ기와가마를 마스고,
绑票ㅡ인질을 붙잡고,
换票ㅡ인질을 바꾸고,
义举ㅡ옳음을 들고일어나고,
报复ㅡ보복을 하고,
吃票ㅡ인질을 없애버리고
靠票ㅡ일질로 벌이를 하고
典鞭ㅡ형벌로 본때를 보여 다스리고...
겨울이 되면 마치 학교에서 학생이 방학을 하듯이 어느 무리나 이 철이 돌아오면 한달 혹은두달간은 산채(山寨)를 떠나 자유적인 생활을 기껏하고 때가 되면 일제히 다시모이군하는데 이것을 묘동(猫冬)이라 한다.
어느 토비무리나 다가 략탈물을 돈으로 만들어 저축했다가는 묘동(猫冬)때면 그것을 나누어 가지는데 그것을 배분(配分)이라한다. “長江好”라는 듣기좋은 이름을 날려온 구태출신의 마적 라명성(羅明星)은 대체 어떻게 했는가? 류자(綹子)가 400명에 이르었던 장강호(長江好)는 이왕년에 비해 이해에는 횡재가 그닥지 않던차에 독립군이 조선에 나가 군자금(軍資金)을 걷어온다는 소리를 듣고는 그것을 노리여 무지할지경 악한짓을 감행한 것이다. 그것은 6월18일(음력 5월2일)의 일이였다. 무송(無松)에 있는 흥업단원(興業團員) 전성규(全星奎), 오제동(吳濟東), 김재호(金在鎬), 송계원(宋桂元) 등 4명을 길림성 몽강현(濛江縣) 해청구(海靑構)로 유인하여 결박하고는 돈을 내라면서 련4일간이나 때리면서 고문을 하다가 류하현에 있는 한족회원(韓族會員) 7명과 함께 임강현 육도구 압록강상류의 삼림속에서 살해하였던 것이다.
이같이 돈에 눈이 어두운 장강호(長江好)는 자기가 시키는대로만 하면 올해의 묘동(描冬)에 쓸 돈은 문제없이 생기리라는 일본특무의 감언리설에 넘어가 그보다 더 엄청난 짓을 한것이다.
9월 25일에 훈춘지방의 반자구(潘子溝)에 진출했던 장강호(長江好)는 10월 2일 오전 5시에 구식야포(태깔) 3문으로 진을 벌리고는 새자(崽子) 400명으로써 훈춘성을 공격했다. 당시 훈춘의 왜령사분관에는 령사관경찰서원 전원과 함께 왜총독부에서 파견한 경찰대원과 함북도경찰부에서 파견한 경찰대원, 그리고 재향(在鄕)군인을 합하여 약 50명가량 주둔하고 있었다. 외부에서 들이치게 되니 훈춘성을 방위하는 중국군사령의 청원에 의하여 왜경찰대원도 더러는 성문을 지키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원래 공격해오던 마적외에 약 1대가량되는 별동대마적이 합심(合心)하여 성을 공격했다.
이들은 사전에 왜군과 내통이 있었기에 무난히 입성하여 략탈을 감행하다가 오전 9시에 퇴각했는데 이 싸움에서만도 중국군인 70명과 조선사람 7명이 죽었다. 그것뿐아니다. 이 마적떼는 미리 피난하여 비여있는 왜령사관도 습격했거니와 함북도에서 파견된 경찰과 그의 일가족 9명을 살해하였던 것이다.
왜적은 이 사변을 구실로 삼아 중국당국과는 전혀 협상도 없이 미리준비하여 대기중이던 라남군사단(羅南軍師團)에 출동명령을 내렸다....
경원 수비대장 자와사끼대위가 거느린 80명대오가 그날 오전에 훈춘에 도착했다. “성복전약방문”이라 려단사령부 쥬지중좌의 명령을 받고서 움직인 뒤늦은 출병이였다. 그러면서도 마적토벌은 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長江好마적패의 두목 라명성(羅明星)은 일본특무손에 암살되였다.
한편 함북도 경찰부위생과장(警察部衛生課長)이 두명의 부하와 살인명수인 57명경관과 밀정(密偵) 여럿을 거느리고 한국혁명단체를 습격하기 위하여 10월 6일에 훈춘에 도착했다. 적측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한국독립단간부의 본적(本籍), 주소(住所), 성명(姓名), 년령(年令), 용모(容貌), 경력(經歷) 등을 정밀히 조사했거니와 훈춘 한민회(韓民會)의 지방기관과 독립단체소재지의 지형을 조사하여 명부록(名簿錄)을 만들어 4일 오후7시에 행동을 개시, 15일 오후9시에 목적지인 사도구(四道溝)에 도착하여 혁명단체간부 약 300명을 체포하였다.
왜적은 16일 아침부터 방화, 살인, 강간 등 만행을 감행하고는 18일에 훈춘에 돌아갔는데 이것이 제1차 학살사건인 것이다.
이에 앞서 맹부덕이 십리평에 왔다가고 김동삼이도 왔다가자 일본군의 대거침입정보를 수집한 홍범도(洪範圖)장군으로부터 안무(安武) 등 국민회부대와 함께 백두산밀림지대로 들어가서 기회를 보아 일대격전을 하자는 서신이 날아왔다. 서일총재와 김좌진장군은 홍범도장군의 제의를 쾌히 접수하여 사관련성소에서 6개월간 훈련해온 298명의 사관련성생의 수련을 다그쳐 끝내고 9월 9일 제1회졸업식을 앞당겨 성대히 거행하였다.
군인들이 입을 동복은 한찬 제작중이였다. 하지만 모두가 떡갈나무색갈을 들이여 만든 여름군복으로 입었고 일치하게 운두가 둥그런 모자에 새 찌까다비를 일매지게 신은데다 신식의 체코식장총으로 무장하고 보니 그 의용이 이를데 없이 름름한지라 찬탄하여 갈채를 보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북로군정서는 12일까지 졸업사관생을 중심으로 하는 려행단(교성대)과 150명가량의 사관으로 사령관경비대와 북로군정서군의 본대를 편성하고 장정준비를 마무리하였다.
중국측의 강요에 의한 北路軍政署는 이동에 앞서 재편성이 이루어졌다. 무기운반에 동원되였던 100여명이 입대를 적극적으로 지망하였기 때문이다.
재편성딘것을 보면 이러했다.
총 재ㅡ 서 일
총사령관ㅡ 김좌진
참 모 장ㅡ 라중소
부 관ㅡ 박영희
연성대장ㅡ 이범석
종군장교ㅡ 이민화, 백종렬, 한달원, 기 훈.
보병대대장ㅡ 김규식
대대부관ㅡ 김옥현
제1중대장ㅡ 홍충희
제2중대장ㅡ 강화린
제3중대장ㅡ 김찬수
제4중대장ㅡ 오상세
서부전선에 소속된 주력부대는 선발대와 본대로 나누어 김좌진장군의 인솔하에 총과 탄약 등 군수품을 4대의 운송마차에 싣고 9월 17일에 청산리쪽을 향해 떠났고 서일은 다음날 적과 조우전을 계획하여 북로군정서기관과 가속 그리고 후방부대를 이끌고 동으로 움직이였다. 치중차(輜重車)로 동원된 마차만도 모두 84대. 두 대오의 행렬을 합하면 10리도 넘는지라 사기충천한 독립군의 이 행군이야말로 위용이 대단하여하여 보고는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동해가는 로변(路邊)마다 동포들의 환대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백두산하 넓고넓은 만주뜨락은
구국영웅 우리들의 운동장일세
걸음걸음 떼를 지어 앞만향하여
활발발 나아감이 엄숙하도다
한양성 자유종이 떵떵 울리고
삼천리 독립기를 펄펄 날리세
자유의 새 정부를 건설하고서
무궁화 동산에서 만세부르세
전사들이 부르는 힘찬 노래소리 산간을 울리였다.
그러나 북로군정서는 이미 중국군과의 약속이 있었으므로 국도대로를 통과할 수 없었고 지어는 평야의 농로마저 낮에는 마음대로 리용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악조건하에서 김좌진이 이끄는 대오는 주로 야음을 타서 대황구(大荒溝)를 거쳐 왕청현이북으로 수십리떨어진 험산준령을 지나 의란구의 깊은 산길을 따라 행군했다. 그러다가 그들은 로투구령(老頭溝嶺)을 넘은 후 서구(西溝)앞으로 내려가 장인강(長仁崗), 이도구(二道溝)를 도는 약 450리 험로를 행군한 끝에 마침내 목적지인 청산리에 이르렀다.
때는 출발한지 한달만인 10월 12일과 13일사이였다.
김좌진사령관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장군이 인솔한 대한독립군, 대한국민회의 국민군 등의 련합부대가 이같이 서남쪽에. 백두산록에 자리잡은 안도현과 접경인 이도구와 삼도구방면의 험준한 밀림지대로 집중한 것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나들기 편리한 백두산록에다 새로운 항일기지를 건설하려는 데서였다.
손자병법에 이르기를 천리길행군해도 피로치않음은 적이 방어하는 지역이 아니기 때문이요 진공해서 능히 이길수 있음은 적의 방어가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요 방어가 잘됨은 적이 쳐들어 올 곳을 잘 지켜내기 때문이라했다.
안도현의 백두산록지방은 지세가 험준한데다 삼림이 울창해서 독립군이 일본군과 항전하기 유리했고 또한 독립군본영으로 삼기 좋은 요새가 많았다. 더욱이 이 지역을 놓고볼 때 동북3성중 봉청성과 길림성의 접경지역이 되었기에 일제의 사촉에 못이겨 길림성군이 공격하여 올 경우에는 그 둘의 관할밖인 봉천성으로 독립군이 피할수 있고 반대로 봉천군이 공격해올 경우에는 길림성지역으로 얼마든 이동할수 있는 지리적요충지였다.
서일은 부대의 출발을 앞두고 김좌진과 군사리론에 대해서 자기가 알고있는 지식을 론했다. 빠른 행동은 질풍같이, 공격은 열화같이, 방어는 산악같이, 은페는 안개속에 든것 같이, 돌격은 벼락치듯해야 한다면서 그는 적아쌍방의 교전지점을 미리알고 교전시간을 미리안다면 천리길을 걸어가도 싸워서 이길수 있고, 어디서 언제 싸우는지 미리알지 못하면 좌측이 우측을 구해줄 수 없고 우측이 좌측을 구해줄 수 없으며 앞쪽에서 뒤쪽을 구해줄 수 없고 뒤쪽에서 앞쪽을 구해줄 수 없는 것이다. 이쯤은 군사를 통솔하는 사람이면 의례 알게 아니냐 했다. 군대는 싸움에 갖들어갔을 때 사기가 포만하지만 한동안지나면 해태해지고 마지막에는 아예 쇠갈되고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병사를 다루는 사람은 적의 첫 예기(銳氣)를 피했다가 그들이 해태해질 때 타격을 가해야 한다, 군대의 사기를 장악하고 쓰는 방법이 이러하다고 했다.
《절간(絶澗), 천정(天井), 천뇌(天牢), 천라(天羅), 천함(天陷), 천극(天隙) 이 여섯가지 지형을 만났을 때는 반드시 신속히 떠나야지 가까이말아야 하오. 아군은 멀리 피해가고 적을 거기를 가까이가게해서 그네들이 그런곳을 등지게 만들어야 하오. 총명한 장수라면 문제를 고려할 때 반드시 리로움과 해로움 이 두 방면을 충분히 겸해 생각하는거요. 정황이 불리할 때 유리한 조건을 보아내면 대사는 순리하게 되어질 수 있고, 순리로운 정황에서 불리한 인소를 보아내면 우환을 미연에 없앨수 있는 것이요.》
김좌진은 곰곰이 듣더니 천만지당한 말이라면서 머리를 끄덕이였다.
생각해보면 사실 그렇다. 김좌진은 그같이 자기만못지 않게 군사지식을 장악하고있는 총재가 뒷심이 되여주니 마치 태산을 등진듯이 속이 든든했다. 그는 온 부대의 운명이 자기에게 달렸기에 혼신의 힘을 다하리라 결심했다.
“훈춘사건”을 조작하여 만주로 출발할 구실을 만든 일제는 10월 2일 경험을 쌓은 지휘관들을 배치하여 보병, 포병, 기병 등 갖가지의 병력을 풀어 곧 독립군“토벌”에 동원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계획을 보면 이소무라륙군소장이 보병 19사단 제38려단 사령부, 보병 제75련대, 보병 제76련대, 기병 제27련대, 야포병 제25련대를 령솔하여 훈춘방면 토벌을 맡고 로싸야에 출병하였다가 귀로에 오른 제14사단의 일부 부대와 합세하여 공동히 작전하기로 했다.
기무라륙군보병대좌의 휘하에 있는 보병 제76련대의 일부, 기병 제27련대의 일부, 포병 제1중대, 공병 제19대대는 조선 온성으로부터 두만강을 건너 왕청방면으로 진격해서 서대포(西大蒲), 십리평(十里坪), 대감자(大坎子), 백초구(百草溝), 하마탕 일대의 독립군을 토벌하기로 했다.
아쯔마 마사히꼬 륙군소장은 보명 제37려단 사령부, 보병 제73련대, 보병 74련대, 기병 27련대의 일부, 야포 25련대, 공병 19대대 일부를 령솔하여 룡정방면에서 진출하면서 일본군 제20사단의 제77련대와 협동작전하여 안도와 돈화방면으로 이동하는 독립군을 막기로 했다.
그리고 아베소장은 로씨야의 포세트만을 침공했던 일본군 제14사단의 제28려단을 쯔지가도시지대, 하네이리지대, 야스니시지대로 편성하여 동녕현쪽으로부터 남하하면서 각 지대를 혹은 분산 혹은 집중하면서 독립군을 토벌하기로 했다.
이상의 “토벌대”총지휘는 제19사단장 다까시마중장이였다. 그는 총지휘부를 룡정에다 잡고 수하에 보병 제74련대, 비행기반, 천상전신반과 비둘기통신반을 두고있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남만에 주둔하고있던 일본관동군은 철령의 스기야마대좌의 보명 제19련대로 무순, 홍경, 통화, 환인, 관전 등지를 토벌하기로 했고 공주령의 구니중좌가 령솔하는 기병 제20련대가 공주령, 삼원포, 통화, 홍경, 영액성, 상가대, 개원 등 지방을 토벌하도록 했다.
이밖에 장작림(張作霖)의 군경으로 두 개의 “조사반”을 무어 압록강이북 각지에서 활동하고있는 독립군들을 교란하고 견제하기에 동원했다.
한편 근거지이동을 나선 북로군정서는 의기양양한 자태로 동포들이 사는 지역을 지났다. 연도환영이 대단했다. 어느 한 마을을 지날때는 그 마을의 늙은이들이 “하늘에 빕니다. 우리의 군대 잘싸워 이겨주시오!” 절을 하면서 빌기까지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北間島國民會의 지역을 지날때는 형편이 아주 여 달랐다. 대부대가 그 지역을 통과하는것을 허락지 않고 막았기에 충돌이 생겼던 것이다. 그 충돌에서 대대장 김규식(金圭植)이 그만 불행하게도 총상을 입게되였다. 그로 인하여 대행군을 통솔하는데 크게 지장을 초래한건 더 말할 것 없었거니와 이것으로 인하여 일본군은 행군을 하고있는 北路軍政署의 병력과 장비 그리고 전투력(戰鬪力)을 알게되였기기에 토벌(討伐)에 박차를 가하게되였던 것이다.
평소 독립군지간의 대립에서 오는 알륵으로부터 서로 적대시하는 지경에 이르었으니 이는 독리군진영의 치명적인 약점이 아닐수 없다. 김좌진의 말과 같이 과연정말 “빌어먹을 당파심”의 작괴(作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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