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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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장편《반도의 혈》

사론발췌
2012년 07월 09일 22시 57분  조회:4437  추천:0  작성자: 김송죽

 

 에필로그

      

  

                                당벽진참안과 서일의 조천

                                        (當壁鎭慘案 与 徐一朝天)

                          


   1. 서일이 찾은 구국방략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 2천만형제자매여, 단군황조(檀君皇朝)께서 상제좌우(上帝左右)에 명을 내리시여 우리에게 기운(機運)을 주셨다. 세계와 시대와는 우리에게 복리를 주자고 한다. 정의는 무적(無敵)의 칼이므로 이로써 하늘에 거스리는 악마와 나라를 도적질하는 적을 한손으로 무찌르라. 이로써 4천년 조종(朝宗)의 영휘(榮輝)를 빛내고 이로써 2천만 적자(赤子)의 운명을 개척할 것이다.

   궐기하라! 독립군! 독립군은 일제히 천지를 바르게 한다.

   한번 죽음은 사람의 면할 수 없는 바이니 개, 돼지와도 같은 일생을 누가 원하는 바이랴! 살신성인(殺身成仁)하면 2천만동포는 같이 부활할 것이다.

   일신을 어찌 아낄것이냐, 힘을 기울여 나라를 회복하면 삼천리옥토는 자가소유(自家所有)이다. 일가의 희생을 어찌 아깝다고만하겠느냐.

   아아!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 2천만형제자매여! 국민된 본령을 자각한 독립인것을 명심할것이요, 동양평화를 보장하고 인류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의 자립인것을 명심하도록 황천의 명명(明命)을 받들고 일제의 사악(邪惡)으로부터 해탈하는 건국(建國)인 것을 확신하여 육탄혈전함으로써 독립을 완성할 것이다.”

     이것은 무오년(戊午年)인 1918년 11월에 서일이 길림 화룡의 삼도구 총본사에서 대종교 제2세교주 김교헌(金敎獻)을 비롯한 윤세복과 김동삼, 신규식, 박은식, 박찬익, 김좌진, 리시영, 리상룡, 신채호, 리동녕 등과 함게 대종교중진을 주축으로 하여 39명의 서명자를 모아 만주와 로령, 미주의 유지일동이란 명의로 세상에 발표한 독립선언서인 것이다. 중광단의 발기로 발표했다하여 혹은 “중광단선언”이라고도 하는 이  “무오독립선언”은 일제에 항쟁한 거족적인 3.1운동의 선언서는 물론 일본 동경류학생들이 발표한 2.8독립선언서보다도 선구적으로 썩 앞섯거니와 그에 기폭제로 되였기에 무엇보다 력사적인 의의와 가치가 매우 큰 것이다.

 

   “무오독립선언”은 이같이 민족종교인 대종교바탕위에 항일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그것은 조국을 광복시키고야말겠다는 굳은 결심과 결단코 살신성인(殺身成仁)으로 독립전쟁을 하여 우리 조선민족의 자주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깨우치면서 일떠나 항일하라고  호소한 것이다.

   “궐기하라! 독립군!.... 육탄혈전함으로써 독립을 완성할 것이다.”

   만민에게 열혈이 끓게하는 이 구호를 제일먼저 내놓고 웨친 사람이 곧바로 서일이였다. 이는 구국방략인 것이다!

 

   당벽진(當壁鎭)이 대체 어떤곳인가?

   당벽진은 현재 중국의 동북(옛적의 만주) 흑룡강성에서는 동남쪽구역에 들어있는 한 자그마한 촌마을로서 앞에는 흡사 망망한 바다와도 같은 흥개호(興凱湖)가 활짝 펼쳐져있다. 해변가의 풍경을 방불케하는 그 일망무제의 커다란 호수가에 자리잡은 이 촌락은 서남쪽으로 호수에 흘러드는 자그마한 냇물을 국계로 하여 로씨야땅과 중국땅이 거이맞붙는다. 가믐이 좀만들어도 내의 수심은 정갱이를 넘지 않으니 웬간한 절름발이도 저켠땅을 밟을수 있는 것이다. 명색이 국경인 그 졻고도 얕다란 내를 건너 남쪽으로 몇리를 안가서 저켠 이국인 로씨야국토의 뚜리로그정거장이 있는것이다. 그 뚜리로그정거장은 1916년부터 통차(通車)가 시작된 철길ㅡ 로씨야의 중심부를 지나 멀리 원동으로 뻗은 그 기나긴 씨비리아대철도가 북쪽의 하바롭쓰크에서 남쪽으로 꺾이여 이만(伊曼)을 경유하면서 멀리 남쪽끝 해변가도시인 울라지보스톡으로 가다가 서북으로 겯가지를 오리변자모양으로 꼬블꼬블 뻗은 다른 한갈래철길의 맨 말단역이 되는 것이다. 맑게 개인날 언덕에 올라서면 그 자그마한 도회지의 정거장을 육안으로도 볼수있다. 

   이 당벽진에는 1889년부터 인가가 생겨났는데 그때는 여기를 쾌당별(快當別)이라 불렀다. 그러다가 1912년부터 이사호가 점점 늘어나면서 자그마한 가계방도 생겼고 1917년부터는 조선서 건너온 피난민들이 여기에 한 집 두 집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닥 높지 않은 야산을 내놓고는 황량한 들판이였지만 미개간지가 많았고 토지는 비옥했다. 그래서 제고향에서 그냥살자니 왜놈의 꼴이 보기싫고 가혹한 착취에 배겨내지 못해 농사를 지어먹어도 좀 편안히 지어먹으며 살아보자는 생각에 남부녀대로 솔가도주를 한 이사호들은 이곳에 와서는 이사짐을 푼것이다.

   그리멀지 않은 거리다. 여기서  북쪽으로 곧추 50여리 들어가면 밀산(密山)이다.

   밀산(密山)은 본명이 봉밀산(蜂密山)인데 역사가 유구하거니와 그때 벌써 주민도 근 만여호에 달하는 큰 부(府)였다. 그런것을 1913년에 이르어 부(府)를 페지하고 이곳에다 행정기관인 현(縣)을 세운것이다. 한족, 만족, 허저족의 이사호가 점점 많아감에 따라 당벽진과 마찬가지로 밀산현내의 다른마을인 하량자(下亮子), 삼성촌(三成村), 향양촌(向陽村), 영안촌(永安村), 복전촌(福田村), 북하촌(北河村), 기성촌(箕城村) 등 마을에도 조선족호수가 늘어났던 것이다.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하여 기분좋고 힘도났지만 수백리 머나먼 안쪽밀산의 당벽진까지 여러날을 행군하고보니 서일역시 다른 여늬사람과 마찬가지로  지치였다. 하지만 그는 그러면서도 시름놓고 쉬지는 않았다. 그럴 형편이 못되였던 것이다.

   이곳은 대종교 동이도본사관구(東二道本司管區)였다. 서일은 전해에 한기욱(韓基昱ㅡ壬戌3月15日解任)선생에게 여기 밀산일대의 대종교사업을 맡긴바있다. 고맙게도 그가 책임지겠다고 잔진해나섯던 것이다. 대종교의 사업 역시 무장투쟁과 마찬가지로 중히 여기면서 시종 교세확장을 강조해 온 서일은 이곳에 와서도 의연히 전투적인 긴장한 태세로 나날을 보냈다. 그는 우선 한기욱선생을 데리고 함께 여기 당벽진(當壁鎭)에 거주하고있는  백여호의  동포집부터 하나하나 찾아 방문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이 살아가는 형편을 제대로 료해하고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교당이 적극적으로 나섯다. 이 마을의 주민은 다가 대종교도들이였는데 그들이 자진하여 제마을에 오는 독립군의 주숙과 작식을 책임지마고했던 것이다. 허나 고맙긴해도 그건 현실적이 되지 못했다. 하루이틀이면 몰라도 시일이 얼마걸릴지 모를 3,500명넘는 사람의 입을 그들이 담당해낼수 있을가? 말도되지 않는 일이였다. 그래서 잠을 가가호에 나누어 자기로 하고 식사는 몇군데 장소를 잡아 모여하기로 했으며 매일 독립군이 소모하는 다량의 식량은 밀산시내에 있는 량점(糧店)의것을 사오기로한 것이다. 

 

    2, 밀산지주 송곰보

 

    그런데 그 량점의 주인은 전해에 한번 소작료인상문제로 인하여 서일과 불쾌한 마찰이 있은 쑹마즈(송곰보)였다. 그의 땅은 밀산에만있는것이 아니라 그 지역을 벗어나 멀리 왕청에도 얼마가량있어서 대리인을 내놓고 세도를 부리며 사는 대지주였던 것이다.

     그는 령황지주(領荒地主)에다 권세렴토지주(權勢廉土地主)를 겸하는 자였다.

     무엇을 령황지주(領荒地主), 권세렴토지주(權勢廉土地主)라고 하는가? 당시 북만의 지주는 대체로 세가지 부류로 나뉘였는데  황무지를 헐값으로 사서 령황토(領荒土)를 비준받은 자를 령황지주(領荒地主)라하고  관리의 가족이거나 친척으로서 세력을 믿고 령세농민의 토지를 헐값으로 사들이였거나 관부에서 땅을 재일 때 뢰물을 먹이고 면적을 적게 매기여 많은 땅을 차지한 자를 권세렴토지주(權勢廉土地主)라 했다. 그밖에 토지를 사지 않고도 묘한 수단으로 토지대장(土地臺帳)을 가진 자가 있었는데 그런자를 점황지주(占荒地主)라 했다.

   속담에 바다는 메워도 사람의 욕심은 못메운다했다. 밀산의 송곰보는 두가지를 겸한 지주였건만도 소작농의 고혈을 좀이라도 더 빨아먹자고들었다.

   근년의 일이였다. 그가 왕청소작농들의 소작료를 인상하려하자 서일은 한말(韓末) 젊었을적에 중국사신(中國使臣)으로 경성(京城)에 와있었던 원세개(袁世凱)를 생각하고 용정촌(龍鼱村)에 있는 이동춘(李東春)선생을 찾아가 이 일을 하소하고 그의 방조를 받은바있다.. 이동춘(李東春)선생은 전에 한때 원세개(袁世凱)의 통역관으로 일을 보아주었기에 그와는 누구보다 교분이 있었던 것이다. 이동춘(李東春)선생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문을 한 장 써갖고 서일과 같이 북경에 갓다. 그때 총통의 보좌에 올라앉앗던 원세개(袁世凱)는 상소문을 보고나서 종이에 몇글자 적어 봉투에 넣어 합봉한 후 그것을 호명신(胡明臣)비서에게 주면서 동반하여 봉천의 군무독리(軍務督理)이자 길림, 흑룡강 두 군무독리를 겸한 진안상장군(鎭安上將軍) 장석란(張錫鑾)에게 갓다주어 처리하게끔 한 것이다. 이 일이 있은 후로 밀산의 송지주는 찍소리못했다.

    그러나 때가 지나 지금에 이르러는 달라졌다.

    하다면 이때는 형편이 어떠했는가?

    만주행정기구(滿洲行政機構)를 볼 것 같으면, 광서(光緖) 33년에 길림장군(吉林將軍)이 길림성(吉林省)으로 바뀌고 선통(宣統) 3년 즉 1911년에는 그 아래에다 서남, 서북, 동남, 동북 등 4道를 두어 11府, 1州, 5廳, 18縣을 관할케했는데 밀산은 본래 녕고탑부도통(寧古塔付都統)에 예속되여 있다가 광서(光緖) 33년(1907년)에 갈라져 나와 밀산부(密山府)를 설립한 것이다. 한데 신해혁명에서 내각총리대신으로 되었다가 대총통의 직위를 절취한 원세개(袁世凱)가 북경에다 지주매판련합독재의 북양군벌정권을 세운후 내전을 일으키면서 약법을 뜯어고치고 독재전제를 실시하고자 국회를 해산시키는 한편  1914년 5월 1일에는 <<中華民國約法>>(“民三約法” 또는 “新約法”이라고도 함)을  공포했다. 그 약법은 법률상 총통의 극대(極大)의 권리를 보장하는것인바 원세개(袁世凱)가 처음부터 꾸어 온 황위(皇位)의 꿈을 실현키 위한 조치였던 것이다. 그는 성(省)을 다시금 장군부(將軍府)로 고쳐버렸다. 중앙은 물론 지방에 이르기까지 관제를 이같이 자꾸 개변하는지라 바람부는데 따라 낯짝이 변해가는 구관료들의 손에 조종되고있는 아래의 기관들은 혼란하기 짝이 없었다.

   불온한 세상이 괴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악착스런 흡혈귀로 변해버린 밀산의 송지주는 량식값을 올려놓고 독립군에 팔면서 값을 깔축없이 받았다. 독립군의 돈을 많이 버니 웃음집이 흔들흔들했다.

 

   3. 청보산토비(靑寶山土匪) 진사해(陳四海)  

 
   밀산(密山) 송곰보의 가원은 웬간한 황궁못지 않게 으리으리했다. 송곰보는 밀산(密山) 본토배가 아니였다. 10살나던해에 산동(山東)에서 들어온 이주민의 자식인 것이다. 조상의 뫼(墓)를 잘써서인지 아니면 부지(敷地)가 좋았던지 어른이 되여서는 숱한 토지를 소유한 지주로 된 것이다. 그는 여러 세대가 모여사는 세가이다보니 권속이 근 백여명에 이르었다. 그는 관리도 아니였는데 무슨재간에 권세렴토지주로는 되였겠는가? 물론 관리는 아니였지만 처남 둘중 큰처남이 현장의 부원이고 작은처남은 인원이 근 300명이나되는 청보산토비(靑寶山土匪)였던 것이다. 그자가 성명이 진사해(陳四海)였는데 그가 은근한 뒤심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송곰보의 아들 둘중 큰것은 방량(方亮)무리의 새자(崽子)였던 것이다. 급이 없는 하졸토비를 가리킨다. 방량패는 인원이 30명도안되는 토비였다.

   당시 항간에는 이런 노래가 나돌았다. 

   

   한가마밥먹어야 친할까

   토비와 군대는 한형제라네

   서로좋고 배가 맞아

   두바지 갈아입으며 살아간다네 

   

   나라의 군대와 토비는 가리지 못할 지경으로 한통속이라는 백성들의 원성이였다.

   토비가 소털같이 많은 만주땅에서 송가모양으로 버젓이 살아갈려면 부모가 자식을 최소한 다섯형제정도는 출산하라했다. 그래서 자라면 하나는 군인, 하나는 마적, 하나는 관리, 하나는 상업, 하나는 집지킴을 한다는 것이였다. 형제가 그같이 군인, 마적, 관리, 상업, 집주인으로 되어 엉켜 붙으면 만일의 경우 불의의 사고가 생겨도 상호 련계가 되어 맺히는 고리를 푸는것이다.    

   인간세상이 대체 얼마나 넓고 생사변역(生死變易)하는 존재 또한 얼마나 될가? 옛기재에 보면 360항업(恒業)이라 했지만 그것만이아니였다. 어느때부턴지는 알수는 없지만 이 대천세계(大千世界)에는 비적(匪賊)이라는 하나의 특수한 직업이 생겨낫던 것이다. 이를 어떤 지방에서는 호자(胡子)라 했고 어떤 지방에서는 향마(響馬) 또는 봉자수(棒子手), 마적(馬賊), 강도(强盜)라 불렀다. 해를 거듭하고 대를 내려오면서 그 한무리도 점차 자라고 성숙해져 자체의 조직기구가 있게 되였고 자기들의 두목을 내오는 방식이 있게 되었으며 종교와 신앙이 있어서 토템과 숭배가 있게 되였고 자기들만의 언어와 규률과 풍속이 따로 있는 하나의 사회적인 존재로 뚜렷이 자리잡은 것이다.   

   류자(綹子)수가 거의 300명이나 되는 청보산(靑寶)이 웅거하고있는 산채(山寨)는 완달산(完達山)의 심처에 있었는데 진사해(陳四海)는 그 청보산토비무리에서 수이샹(水香)의 자리에 있었다. 수이샹(水香)이라면 산채(山寨)에서는 물론 출정시 초소(哨所)를 포치하고 초병을 관리하며 전반 류자(綹子)들의 규률을 제정하고 장악하는 직책을 맡은 자인것이다. 토비를 통털어 류자(綹子)라 부르는데 새자(崽子)라 하면 일자반급도 없는 일반 류자(토비)를 말한다. 류자(綹子)가 수백명 천에 달하는 무리에서는 그 수괴(首魁)인 따당쟈더(大當家的ㅡ큰형님)아래에 리쓰량(里四梁)과 외쓰량(外四梁) 즉 8대금강(八大金剛)이 제대로 갖추어진다. 그같이 조직구성이 째이고 조직화된 규모를 갖춘 큰 토비무리에서 수이향(水香)은 네 번째 자리에 있으니 주인급인 땅쟈더(當家的)줄에 드는 것이다.

    두령인 따당쟈더(大當家的)아래 여덟금강(八大金剛)은 포토우(炮頭), 량타이(梁臺), 수이샹(水香), 반둬둬(翻垜的), 양즈방(秧子房), 화서즈(花舌子), 챠챈더(揷千的), 즈좡(字匠)이다. 포토우는 전반대오를 이끄는 코치고 량타이는 량식관리, 수이샹은 기률, 화서즈는 련락, 챠챈더는 정찰, 즈좡은 문서(文書)를 맡은 것이다. 

   어떤 일로 마찰이 생기면 원쑤되기쉽고 그러면 복수가 따르기에 피비린 살육이 불가피한 것이다. 그리고 그 후과는 예측키 어려운것이다. 오늘 어우렁더우렁 지내다가도 밤자고나면 심기일전하여(心機一轉) 서로 등을 돌릴때도 있으니 약육강식(弱肉强食)을 하는 것이 바로 북만토비사회였던 것이다.

 

   4. 독립군의 역경 

 

   여러 독립군이 다 모이자 로시야로 이전해야 한다는 설계가 나온것이다. 당시 연해주방면에 동포한인(韓人)은 30여만에 이르었다. 그리고 그곳 한인조직들은 이쪽에서 건너가면 기꺼이 맞아주리하는 태도를 보이기도했다. 하자만 그곳으로 넘어가는 움직임자체가 믿음성이 당당치는 못했으니  사실상 그것은 현실을 떠나 리상적이 되지 못한것이였다.

   

   국경너머의 땅에서 볼세비키와 꼴챠크지간의 전쟁이 끝났다하여 이쪽에서 바란것과 같이 평화로워진건 아니였다. 당시 로씨야의 원동지방을 놓고 보면 그곳을 영원히 장악하려는 야심을 품고 출병한 일본무력의 부축으로 세워졌던 치따의 쎄묘노브정권이나 아무르주 해란포(海蘭泡) 즉 블라고베쉔스크(자유시)의 리노브정권이나 그리고 흑용강과 우쑤리강의 합수목에 있는 큰도시 하바롭쓰크에 세워졌던 백계정권이나 다가 홍군무력에 의하여 하나하나 붕궤되였다. 

   두해전이던 1918년 11월의 일이다. 꼴챠크가 씨비리아의 옴스크(鄂木斯克)에다 제일큰 괴뢰정권인 꼴챠크정권을 세우고는 쎄묘노브정권, 리노브정권과 카르미꼬정권을 령도한다고선포했었다. 허나 그것은 명의였지 실질은 아니였다. 1920년 1월에 이르러서는 원동지방에서 한때 기염이 대단히 높았던 그 꼴챠크정권이 결국 쏘련홍군에 의하여 분쇄되였거니와 그 두목들은 2월 6일에 처단되였던 것이다.

   볼쉐비크는 승리했다. 하지만 그러했음에도 볼쉐비크주권이 세워진 쏘련은 제구실을 못했다. 민족해방을 절절히 바라는 약소국을 구원해준다고 선포했지만 불손한 자들이 신의를 저버림으로 하여 약소국가를 해치여 되려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것이다. 그것은 누구도 예상못한 일이였다. 

   이에 앞서 그 어떤 예감이였다할가 서일은 비록 여러수뇌자들의 일치한 요구에 의해 새로 결성된 독립군단의 총재로 추대는 되였지만 제 주장을 세움에는 맥을 그리쓰지 못한것이다.  여러날을 두고 의논했건만도 부대를 살리려면 쏘련으로 건너가야한다는 주장이 우세였기때문이다. 그는 끝내 하는수없이 제 주장은 보류하기로 하고 대다수의 의견에 따르었을 뿐, 처음부터 그의 주장은 의연히 독립군단이 피전책(避戰策)으로 일시 로시야 원동지방으로 넘어갈수는 있으되 그곳 쏘련공산당계 조선사람의 무장대와 합치거나 완전편입되는데는 동의하지 않는 태도였던 것이다. 그가 그렇게 나오게 된것은 신생한 쏘련공산당 즉 볼쉐비크가 약소국가의 운명에 대해 지극히 동정하고 관심을 한다고 태도를 표시하기는 하지만 아직은 정권이 공고하지 못하거니와 따라서 너무나 생소해서 믿음이 가지 않았던것이다.   

   로씨야 그쪽에는 지금 믿을만한 사람도 없었다. 우선 한고향사람 최재형(崔在亨)이 없어졌다. 두가지 같잖은 설(說)이 나돌았다. 왜병이 씨베리아에 출병하여 쌍성(雙城)을 격파할적에 김리직(金理直), 황경섭(黃景燮), 라계필(羅桂弼) 등과 함께 화를 입었다고도 하고 그런게 아니라 적색분자들이 전에 최재형(崔在亨)이 짜리에 충성하면서 수차의 훈장을 받았다는 리유로 <<불령선인>>으로 몰아 없애버렸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그러니 그곳은 너무나도 생소하면서 말못할 두려움까지  생기였던 것이다.

 
   1921년 1월, 엄동설한이였건만 새로결성된 대한독립군단은 밀산의 당벽진(當璧鎭)을 떠나 동북쪽의 호두(虎頭)에서 국경선인 우쑤리강얼음판을 걸어 이만(伊曼)으로 갔다. 지금은 로씨야원동지방에서 주요한 군사요지로 되고있는 이만(伊蔓)이 그 당시는 원동수부인 하바롭스크에서 남으로 뻗은 씨비리대철도선에 있는 그리 크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도시로서 서로 적대가 되는 쏘련군과 일본군의 완충지대에 놓여있은것이다.

  

  그때 서일자신은 국경을 넘어가지 않고, 형세를 봐가면서 차차 움직이기로 작정하고 밀산남쪽의 당변진에 남은것이다. 자기까지 떠난다면 그곳을 잃을것만같아서였다. 하여 그는 그곳을 떠나지 않은것이다. 만일의 경우 쏘련으로 건너간 이들이 돌아온다해도 몸둘곳은 있어야할게 아닌가. 여기 당벽진(當璧鎭)에서 논을 풀고 농사질을 하여 월경한 군인들의 뒷바라지를 하리라했다. 그것역시 그가 기여히 당벽진(當璧鎭)에 남게된 주요원인의 하나였다. 그는 그곳을 근거지로 삼고 장차 독립군이 다시모이면 둔병제를 실시할 타산이였던 것이다. 

   그가 당벽진에 데리고 남은 인원이 많지는 않았다. 다해봤자 40여명이였다.

   밀산의 당벽진에 모이여 새로결성된 독립군단은 다가 로시야로 건너갔다.

   원 북로군정서의 사병 천여병도 건너갔다.

   그런데 운명이 고약한 희롱질을 한다고나 할가. 새로 정비된 부대가 월경함으로 하여 앞길은 열려지는게 아니라 생각과 다르게 점점 막연해지기시작한 것이다. 쏘련은 그들이 희망을 품었던것과 달랐다. 이쪽을 대해줌이 처음과같지 않고 변해갔던 것이다. 갈수록 수미산이니 꿈밖이였다.  

    부대를 이끌고 월경한 장령중 맨먼저 각성이 된 사람은 김좌진이였다. 그는 쏘련의 한인(韓人) 볼세비키측에서 군사훈련지도를 맡아달라고 요청하니 그에 응해 경위원몇을 데리고 자유시쪽으로 갓다가 되오고말았다. 가보니 교련을 받게되여있는 상대가 전부 로씨야에 와서 태여난 후대들이였는데 로씨야말만 번질줄을 알았지 제 민족어는 한마디도 번질줄을 모르니 기구멍이 막히는 일이라 너무도 한심해서 실망하고는 에라 나는 못해내겠다 그만 이만(伊蔓)으로 되돌아오고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는 사이에 쏘련측대표 카라한과 중국주재 일본공사 요시사와 사이에 캄챠카반도부근의 해상어업권에 관한 문제를 놓고 담판이 있더니 형세가 묘하게 변해버렸다. 김좌진은  볼세비키측이 독립군을 향해 무장해제를 강요해오자 분노하여 자기가 거느리고왔던 원 북로군정서대오를 되돌려 우쑤리강을 건너 만주로 들어오고말았다. 그가 자유시로 가지 않고 그렇게 이만(伊曼)에서 밀산으로 되돌아온것은 과연 현명한 결책이였던 것이다. 그가 그같이 행동했기에 원 북로군정는 처참한 자유시사변을 모면한 것이다.

   한편 쏘련의 처사에 불만이 생겼던 서일은 김좌진이 대오를 이끌고 분연히 되돌아온것을 참 잘했다고 환영하면서 새로운 행동을 모색했다. 선견지명이 있다고 할가, 원견이 있다고 할가, 그는 중광단설립초부터 정처가 불온하여 류랑하는 구의병(舊義兵)을 적극끌어모았거니와 만주에 거주하며서 북로군정서의 관할내에 든 동포주민들을 상대로 하여 징병제를 실시해 자체의 병력을 멋지게 키웠던것이다. 그러했기게 만약 경우 부대가 부득불 해산될시 그들은 흩어져도 몸둘곳이 있는것이다. 쏘련에 대한 믿음이 희박했던 서일은 지금에 이르러 황차 쏘련이 배신을 하고있으니 도무지 믿을바가 못돼서 훗날 부르면 다시모이기로 약속하고 자기가 데리고 당벽진에서 농사짓고있는 그 40여명만 그전대로 그냥남아 농사를 계속짓게하고는 그 외의 원 북로군정서인원들을 모두 해산시켜 그곳을 떠나도록했다.

   김좌진은 서일의 의견에 쫓아 밀산에도 당벽진에도 남지 않고 대원 몇만 데리고 독목하(獨木河)에 갔다. 그는 거기서 지내면서 시기를 보아 동산재기(東山再起) 할 생각이였던 것이다.

   서일이나 김좌진이나 이 처사도 잘된것이였다. 그렇게해야하는 것이다. 당장 적을 겨루고 싸움도, 훈련도 할수없는 상황이였는데 군량도 풍족히 장만한것 없는데 그냥 집결해있어서는 뭘하는가, 그럴필요없는 것이였다.   

 

   5. 횡래지액(橫來之厄)

 
   조선의 독립운동사상 대비극으로 기록이 된 자유시사변!

   전사자 272명, 행방불명 250명, 포로된자 917명, 만주로 되건너오려고 흑룡강에 뛰여들었다가 익사한자 31명.  

   발생한 시간은 1921년 6월 28일!  

 

   그것은 독립군단의 총재였던 서일의 탓도 그 누구의 탓도 아니였다. 사건전반을 모두어 분석해보면 원인은 곧바로 쏘련의 오하묵같은 한인(韓人)볼쉐비크분자들이 리성을 잃을지경으로 정권욕, 군권욕이 극도로 팽창됐기 때문이였다. 그들은 저들을 믿고 건너간 이쪽의 그 3천명넘는 독립군을 보자 마치 굶주린 하이네가 먹이를 만나 서로 빼앗듯이 암투를 벌렸던 것이다. 그런자들이 이만에 간 독립군을 블라베쉔스크(자유시)로 오라고할적부터, 한데모이라고할적부터 군권욕은 팽창할대로 팽창해 극에 오르고있었건만 이쪽은 누구도 그것이 빚어낼 후과를 예상못했으니 그것은 그들을 대함에 경각성이 너무나 무디고  신중하지 못했음을 말한다. 대방에 대한 그 믿음이라는 것이 지어는 무감각할지경 어리석었으니 독립군은 앙화(殃禍)를 입기마련이였던 것이다.   

 

   자유시사변에서 패잔병의 신세가 된 이들은 저마끔 국경을 넘고 길을 간신히 찾아 밀산의 당벽진(當璧鎭)에 다시모여들었다. 여기를 내놓고야 누가 그들을 용납할가, 다른 어디로는 갈곳없는 신세였다. 

   아직은 곡식이 익고있어서 수학을 할 수 없는 계절이였다. 황차 이런때였으니 어느 농가면  여량식이 족했으랴? 제 구복도 달래기 어려울지경 집집이 거개가 량식은 각박하고 지어 내먹을것도 없을지경 극난일 때였다. 한즉 동정은 하면서도 함께 굶어죽자 할 사람은 없었다. 형편이 그러했으니 흩어져서 살길을 찾아 헤매이는 그들이 이제는 그들에게 부담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속담에 “절간의 중도 사흘굶으면 빈대를 잡아먹는다”고 했다. 철같이 굳던 군규(軍規)는 언녕 허물어지고말았다. 있어도 아사지경(餓死之境)에 이른 그들이였으니 그것에 속박되여  죽어버릴수는 없었다. 그들은 살아보려했다. 그래서 구걸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무죄한 백성을 해치면 죄악이라는것만은 명기했기에 막짓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유한 집을 대함에는 달랐다. 주지 않으며 빼앗아먹었다. 그러다 그들은 어느날 총을 들고 상점에 뛰여들었고 밀산의 량점(糧店)을 털었다.

   리유야 어떠했던지간에 그들은 이미 다른 일종의 사나운 인간ㅡ 흉악스런 략탈자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막바지에 이른 그들은 눈에 달이 올랏던 것이다.

   이 일로하여 밀산시내는 혼잡해졌고 어젯날 정의롭게 뵈였던 한국독립군이 반전(反轉)하여 한족(漢族)들의 눈에는 도적놈, 략탈자, 강도로 변해버려 증오의 대상이 되고만 것이다. 

    그들은 송곰보가 차린 량점(糧店)을 털어먹은것이다. 그러했으니 송곰보가 절치부심(切齒腐心)하면서 보복하려하지 않을리있는가? 당연한 일이였다.

    송곰보의 큰아들은 량점(糧店)이 독립군의 습격을 받아 털리웠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그는 당장 저의 방량패 따당쟈더에게 고발해서 보복하겠노라 했다.

   당시 방량패(方亮覇)는 기국(起局)한지는 꽤오라지만 류자(綹子)수는 다해봤자 모두 30명밖에 되지 않았다. 우선 송곰보가 아들이 직접 보복에 나서는것을 꺼려했다. 독립군이 자유시사변을 당하여 비록 볼꼴없는 거지모양의 무리가 돼서 구걸을 하다가 나중에는 략탈을 하고있지만 아무튼 그들은 군인이고 손에 무장이 쥐여있으며 인원수도 거의 300명에 이르는 것이다. 자칫하면 그깟 30명의 방랑패(方亮覇)같은건 되녹아나고말것 같았다. 송곰보는 아들보고 “급한 개 당장뛰여넘고 문다”면서 보복을 하자면 청보산(靑寶山)이 나서야한다고 했다. 청보산(靑寶山)은 류자(綹子)가 300명에 이르니 독립군수자와 같아 대비가 되는 것이였다. 그리고 그 무리의 수이샹(水香)은 쑹마즈의 둘째처남인 것이다.

 

   1921년 8월 27일 밤중에 진사해는 완달산(完(達山)에 있는 그 무리를 휘동하여 당벽진을 습격했다. 굶고 지쳐 곤하게 자고있던 독립군들은 얼마 반항도 못해보고 하나하나 피못에 쓰러지고말았다. 그것은 한입으로는 이루다  말할 수 없는 훼멸이요 어쩌지 못하고 당한 참혹하고도 잔인한 대살육이였던 것이다!  

   독립군들은 신변보호를 해야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장을 제대로 갇추지 못했다. 대부분 사람이 거의 그것을 다룰 맥조차 없어서 버렸렸거니와 생에 대한 의욕마저 읺어가고있었던 것이다. 이제와서 적수공권이나다름없는 꼴이니 살인에 미쳐 맹호같이 달려드는 자들을 어찌 당해내는가?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들 독립군은 그렇게 면양모양으로 거의 반항도 못해보고 죽음을 당하고만 것이다. 

 

   이틑날이였다. 포교일로 여러날 당벽진을 떠나 다른마을에 가있은 서일은 당벽진에서 참변이 생겼다는 소리에 놀라 달려와 보니 과연  소문과 같은지라 억장이 무너졌다. 온 마을이 불에타 없어졌고 살아남은 사라은 몇이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훼멸성적이였다. 자기를 따라서 함께 당벽진에 남아서 농사를 짓고있었던 젊은 군인과 자유시사변을 겪고나서 분산적으로 되건너온채 다른 어디로든 가지 않았던  젊은 군인들이 거의 다 죽고만것이다. 그결에 주민이 죽은것도 여럿되였다. 눈에 보이는것이 그러했은즉 서일의 심정이 과연 어떠했겠는가? 자유시사변이 지난지 이제 두달인데 독립군은 또 그런 참사를 곱잡아당했으니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 아프다! 우리 동포는 뉘가 우리 한님단군의 거룩하시게 길러주신 영특한 인간들이 아니오. 그러나 모두가 근본을 잊으며 근원을 저바리고서 사특한 길에 달리고 참함에 아득하며 가달길에 잠기어서 죄바다로 떨어지매 마치 초불에 닿는 약한 나비와 우물에 빠지는 아이와 같거늘 하물며 또...”

   홍암대종사 라철의 최후를 눈앞에 그리면서 그는 그가 남긴 유서를 다시금 생각했을 것이다.

   “굿것이 수파람하고 도까비 뛰노니 한울 땅의 정기빛이 어두우며 배암이 먹고 도야지 뛰어가니 사람겨례의 피, 고기가 번지를 하도다. 나라땅은 유리쪽으로 부서지고 티끌 모래는 바람, 비에 날렸도다. 날이 저믈고 길이 궁한데 인간이 어디메뇨? 아! 슬프다!...”

    총재였던 그는 눈앞이 캄캄해졌을건 더 말할것 없고 비감과 절망은 극에 달해 더 살 용기를 잃었을것이요 그럴수록 자기의 책임이 중함을 깨달았을 것이다.


 총재였던 그는 눈앞이 캄캄해졌을건 더 말할것 없고 비감과 절망은 극에 달해 더 살 용기를 잃었을것이요 그럴수록 자기의 책임이 중함을 깨달았을 것이다.

   사흘만에야 사람들은 뒷산에서 돌을 베고 곧바로 누운채 숨을 거운 그를 발견했다. 그 자태가 줄을 그은것같이 두팔을 곧게 드리우고 눈을 조용히 감았으니 그로보아서 사람들은 그역시 대종사 라철이 구월산에서 조천할때의 모양으로 한얼이 되야만이 쓸수있다는 페기법으로 자결했음을 알았다. (당시 대종교도들의 분석이다)   

 

   6. 원인분석

   (1)

   처째, 서일은 자유시사변에 너무나 큰 타격을 받았다.

   전혀 예상밖이였다.

   그런일이 왜서 발생했는가?  

   아래것은 자유시사변대한 격토문(擊討文)의 한구절인데 이것만 보아도 그 발생원일을 얼마든 알수있는 것이다.

   

   “이 대한의용군에 참가한 단체는 싸하린군대 , 이만군대, 로령광복단, 군정서, 의군부, 도독부, 혈성대 등으로서 중령(中領)에서 넘어간 독립군 3천여명이며, 로령에서 살던 우리 교포로 군인에 입대한이가 4천여명 도합 7천여명이 박일리야 박그레고리가 령도하였고, 이청천, 이종, 채영, 최진동, 안무, 조욱, 오광선, 강남일 등 15명이 참모부원으로 있었으나 이청천 등 중령(中領)에서 넘어간 간부들은 사건발생 3일전인 동년 6월 25일 자유시를 탈출하여 흑하에 나와있었다. 그런데 로령에 거주하는 일부 한인의 자치기관인 한족회는 전대한민의회라 고치고 그 수령으로 문창범, 김하석, 원세훈 등은 자기의 세력발휘를 위하여 대한의용군의 존재를 악마와 같이 생각하던바 이들의 음모와 오하묵과 박일리아와의 불화가 이 참극을 연출하였다. ....” 

   

    (2)

   그렇다면 당병진참안은 어떠한가? 그 참안은 왜 발생했는가?

   그에 대해서는 조사보고도 격토문(擊討文)도 없다. 보고자료도 뚜렸한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목격자의 진술과 분석으로 규명할수밖에 없다.

 

   서일은 멀리 앞을 내다본 기초에서 방략을 세우고 전진을 모색한 것이다. 시급히 로씨야로 건너갈것이 아니라 시세를 좀 더 관망하자고 한 그의 주장은 틀리지 않았거니와 독립전쟁시행과 교세확장을 병행시키면서 밀산을 쉽사리 버리지 말자는 생각, 그냥 눌러있으면서 그 지방을 장기적인 근거로 하여 농사를 짓고 둔전양병하면서 장차 새로운 격전을 맞이하자고한것은 옳은것이였다.

   (3)

   토비에 대한 서일의 태도는 어떠했던가? 큰할아버지 서장록은 토비손에 죽은것이다. 말을 달라는 토비를 마주해 뻔뻔스럽다면서 장기쪽을 낯에다 뿌렸던 것이다. 그래 토비는 총을 놓아 그의 귀한 생명을 빼앗은 것이다. 

   그는 토비에 대해서 깊이 연구하지는않았지만 토비에 대해 무지하지는 않았다. 그 몇 토비는 중광단의 말을 억다짐로 빼앗지도 도적질도 하지 않고 몇필 달라고 했다. 그런것을 큰할아버지 서장록로인은 뻔뻔스럽다면서 장기쪽으로 낯을 때린것이다.

   훗날 그는 그의 죽음을 회상하면서 이런말을 했다.

   “달라면 줄게지 장기쪽은 왜 뿌리려, 그놈은 토빈데.”.

   토비가 강도질하는건 천직인 것이다. 그렇다고 토비면 다가 막짓을 한다고 여겨서는 안된다. 

   화룡에서 왕청으로 오는 도중 그를 동반한 일행은 뜻밖에 토비 한무리와 조우하게 된다. 행패를 부리자고 드는 자가 석현의 지주집에서 머슴살이를 살았던 자였다. 그를 알아본 서일은 다른말없이 종이에 장송린(張松麟)라는 석자를 써서주었다. 그랬더니 토비는 그것을 보고 더 시끄럽게굴지 않고 그만 물러갔다. 그 석자는 석현지주의 이름이였던 것이다. 토비는 서일이 제 주인과는 좋은 사이임을 알고 행패를 부리지 않은것이다.

 

   토비가 소털같이 많은 만주땅에 발을 붙이고 살자면 우선 그들을 알아야 하고 지혜있게 대처할줄을 알아야 할 것이다.

 

   7월이 다가고있던 어느날, 마적두목 당산(唐山)이 고등군사반이 있는 고산자분교(孤山子分校)에 돈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부하 70여명을 이끌고 와서 갑자기 습격하여 윤기섭이하 박옥산 등 8명을 랍치해갔던 것이다. 이 학교에 군자금이 들어왔다는 정보를 알아내고 그것을 빼앗자는 궁리였던 것이다. 그 군자금은 최형구가 만들어서 준것이였다.

 

   마침 이때 만주의 독립군상황을 료해하느라 안정근이와 함께 순회를 하고있던 조성환이 고산자분교를 찾아가다가 날이 저믈고 비도 내리는지라  통화현내에 있는, 고산자의 하동과는 거리가 불과 5리밖에 안되는 한 산간의 중국마을에 들려 그 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거기서 공교롭게도 꿈밖에 이러한 변이 생긴 것을 알게되였다.

  사람을 랍치할 때는 필시 어떤 교역을 하자는 것임을 알아챈 조성환은 위험을 무릅쓰고 토비굴을 찾아들어가 직접 그 수괴(首魁) 당산을 만나 그와 마주앉아 그자들의 불의한 행실을 조리있게 질책함과 동시에 군자금 8천원이 어떻게 모여진건가, 나라독립을 쟁취하려고  국민이 한푼두푼 모으고 지어 가산을 팔아가며 지원해 모여진건데 너희들이 아무런 리유도 없이 그것을 빼앗아가면 뭐가 되는가, 이건 어린애 코에 묻은 밥알까지 갈퀴질하는게 아니냐 하고는  무도의한 일제의 침략본질에 대해 중오를 품고 말하니 당산은 곰곰이 듣더니 동정심이 생기고 잘못이 느껴져 다시 더 돈을 내라는 말이 없이 인질로 잡아둔 사람들을 내놓으면서 이 일은 없어던셈 치자고 량해를 구하기까지 한 것이다.

   역경에 처할수록 당황해말아야 한다. 담략과 지략만 있으면 그 역경을 돌릴수도 있는것이다. 

 

   자유시사변을 겪고 만주로 되건너온 이들이 밀산(密山) 고지주의 량점(糧店)을 털어먹었는데 막부득한 사정뿐이였던가? 달리 더는 생로를 찾을수 없었단말이가? 량점(糧店)주인이 누구였고 그 배경이 어떠하였는가를 좀만 알았어도 한끼 배불리자고 목숨을 전당잡히지 않았을 것이다.

   한마디로 당벽진참안이 발생하게된데는 패잔병의 본성 그대로 자유시사변에 분산된 독립군인들이 규률을 무시하고 극도로 물란해진데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부록  1.

①  최형구ㅡ 정주인이며 1910년 대전에서 대명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 1912년군자금을 모집하고 자기 재산을 팔아 금(金) 6천700원을 만주 림관호(林寬浩), 장관선(張寬善) 등 에게 송금하고. 독립운동자금조달과 남만신흥무관학교 운영자금 8천원을 모집하여 한진석(韓晉錫) 등에게 송금하고. 사유재산처분금과 모집한 군자금 5천3백원을 휴대하고 도만(渡滿), 한진석 등 동지에게 수교(手交)하고. 1919년 3월 리승훈(李昇薰)의 련락으로 전주, 선천, 철산, 양평 신의주 등에 독립만세시위를 선도하고 삼성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새배달신문사 주필로 활약. 1920년 의용단을 조직활동하다가 왜적의 밀정 박춘하(朴春河)의 야습(夜襲)으로 체포되여 가배산록(家背山麓)에서 피살되였다.      
 (韓國獨立史 805쪽)  

 

②  토비를 통털어 류자(綹子)라고 부르는데 그들 중 일자반급도 없는 자를 새자(崽子)라 한다. 전통적인 이런 토비무리의 류자면 누구나 다 목에다 불상을 걸어야했다. 포대화상(布袋和尙)이다. 포대화상은 18라한 중 17번째 라한인데 일명 달마다라(達摩多羅)라고도 한다. 달마는 보디달마의 략칭인데 이역으로는 도법(道法)이다. 기원 527년에 숭산 소림사(小林寺)에 와서 벽을 마주하고 종일 말한마디 없이 앉아있기를 9년이여서 벽관(壁觀)이라했다. 리입(理入)과 행입(行入)의 수행(修行)방법을 내놓았는바 그는 서천(西天) 선종(禪宗) 제 28조와 동토(중국) 선종초조(禪宗初租)였다. 그러한 그가 바로 만주토비들이 조상으로 모시고 떠받들면서 숭배하는 신(神)이 된 것이다.

 

③  군벌혼전에 나라가 치정(治定)이 안되니 그 무슨 대성(大成)이요 오합군(五合軍)이요 쌍양호(双陽好)요 서패천(西覇天)이요 하는 이름을 버젓이 내걸고 료략질을 해먹으니 그놈의 토비성분이 과연 복잡하기도했다.

    전문 가난한 백성집을 돌아가며 터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것이 알짜강도였다. 그런자들은 거개가 기와가마는 감히 다치지 못하면서 보통백성을 인질로 잡아가거나 생활이 중축이 아니면 그보다 못한 집의 재물만 노리는 것이다. 민간에서 호자(胡子)라 부르는 것이 바로 그런자들이다. 그들은 인원수가 많아야 7~8명, 지어는 혼자서도 이름을 달고 료략질을 해먹었다. 백성들은 이런자들을 제일증오하고 저주했다. 
    토비면 그저 다가 마구잡이로 략탈하고 살인을 도락으로 삼는아니다. 처음해먹는 막잡이 떨거지를 내놓고는 그들도 도덕에 위배되는 짓은 하려하지 않거니와  그런짓을 하는 자는영향이 나쁘다고 미워하고 없애버린다..그러니 자칫잘못했다가는 되려 제 생명을 잃고마는 것이다. 큰 토비무리는 헌병이 되어 작은토비무리를 감독하고 지배하는바 말을 듣지 않으면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것이다. 그래서 토비지간 싸움도 가끔 생기는 것이다.  떨거지 막잡이를 내놓고 규모를 일정하게 갖춘 무리의 류자(綹子)들은 10계률을 지켜야 한다.

 

    1. 백성의 우마차는 물론 신랑신부의 꽃마차를 건드리지 않고    

    2. 상가의 령구를 건드리지 않으며

    3. 우편차를 건드리지 않으며

    4. 나룻배를 건드리지 않으며

    5. 보짐의사를 건드리지 않으며

    6. 도박꾼의 돈을 빼앗지 않으며

    7. 도부장사의 짐을 털지 않으며

    8. 대차점을 털지 않으며

    9. 승려, 도인, 불가의 것을 빼앗지 않으며

    10. 과부집과 홀몸으로 길가는 사람을 털지 않는다.

 

    억강부약(抑强趺弱), 살부제빈(殺富濟貧)의 깃발을 들고 전문 기와가마를 털고 때로는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기도 하는 류자가 있는데 이런 토비는 우의것과 성질이 완연히 달랐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인원수가 많고 무장이 갗추어졌으며 우두머리는 담략이 있고 총잘쏘며 리외사량(里外四梁) 팔주(八柱)는 모두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기와가마를 들부시는 외에 가난한 사람을 도와 자질구레한 비도손에 잡혀간 인질을 되찾아주기도했다. 이런 큰 무리의 토비는 자연히 정부측과 겨루면서 관계를 발생했는바 왕왕 대량의 경찰대거나 군인무장의 습격을 받아 숙청될 위험이 있길래 자체를 보호할 무장력을 장대시킴과동시에 산채의 안전에 대해서 각별한 주의를 돌리였다.

    염왕산토비가 바로 이러했다.

    염왕산의 개척자는 위삼포(魏三浦)의 아버지 위록산(魏錄山)인데 그는 본래 청나라 장교출신이였다. 청나라때 생겨난 흑룡강장군아문(黑龍江將軍衙門)은 완전히 군정통치를 위해 설치된것으로서 그것은 하나의 엄격한 군사조직이였거니와 흑룡강장군휘하의 조직형식이였다.

    동치(同治) 2년(1863)이후 흑룡강장군은 팔기병(八旗兵)중에서 꼴꼴한 자들만 선발하여 따로 팔기련병(八旗練兵)을 편성해 자기 관할하에 두면서 광서(光緖) 8년(1882)에는 봉천(심양)에서 교습(敎習)을 청해오고 천진에서 대포를 가져다 7년간 기계화훈련을 했다. 이 기간 흑룡강의 치치할, 후룬벨, 무얼근, 훅호트 등 성(城)의 훈련군은 보병 74개소대, 기병 16개중대, 포병 4개중대였는데 병력은 도합 4,700여명이였다.  

     그때 기병소대장이였던 위록산은 나이 이미 50세를 넘겼고 처자까지 있는 몸이였지만 대중이 공인하는 출중한 기마술과 용감성으로 하여 퇴대하지 않고 중대장으로 승급하게 되였다. 그런데 그와 암암리에 지위를 다투던자가 그의 증조할아버지가 조정에 있다가 반역죄로 몰려 관동에 추방되여 온 이왕지사를 새삼스레 들춰내여 그것을 상급에다 밀고하는바람에 위록산은 그만 관문에 올랐다가 나떨어지고말았다. 이에 앙심을 먹은 위록산은 기회를 노리던 중 어느날 밀고자를 칼로 찔러 죽여 머리와 밸을 병영의 대문에다 걸어놓고는 그 자리로  부대를 뛸쳐나와 산에 들어가 록림객이 되고말았던것이다.

    한 번 들여놓은 길에서 발길을 돌리기는 어려웠다. 그후 그는 이 산을 근거지로 삼고 관동일판을 횡행하기시작했다. 그러다가 1900년 의화단운동이 일어나자 그해의 7월에 그도 자기의 류자들을 거느리고 구국성전에 나섰다. 그는 봉천에서 모집해 온, 축로공과 파산된 농민으로 조직된 의승군(義勝軍)과 함께 흑룡강의 청나라군대인 진변군(鎭邊軍)을 협력하여 싸하로브소장이 지휘하는, 하바롭쓰크로부터 송화강을 거슬러올라오는 로씨야침략군을 항격하여 용감히 싸웠다. 그러다가 이듬해의 봄에 새자를 거느리지 않고 외지로 나갔던 그는 전에 한차례 지반쟁탈로 인하여 마찰이 있었던 밀산일대의 토비습격을 돌연히 받아 목숨을 잃고말았다.

     그때 아들 위삼포가 나이 31세였는데 그는 창졸간에 사랑하고 애대하던 아버지를 잃고나니 구곡간장이 끊어질 듯 절통하여 련며칠을 울음속에 파묻혀있다가 분연히 떨쳐나가 싸워 끝내 적패를 섬멸하고 원쑤를 사로잡았다. 위삼포는 산채에 돌아오자바람으로 원쑤에게 <하늘구경>을 시켰다. <하늘구경>은 토비들이 쓰고있는 형벌중 가장 잔혹한 형벌이다. 위삼포는 새자(崽子)를 시켜 굵기가 팔뚝만한 백양나무를 한길만큼 남기고 우를 자르게 한 다음 웃끝머리를 뾰족하게 깎게 했다. 그리고는 붇잡아 온 자를 알몸뚱이되게 발가벗겨 들어서 그 우에 올려놓았다. 나무가 믿구멍으로 들어갔다. 자체의 육중한 몸무계에 의하여 굵은 나무가 몸속에 점점 깊이밖혔으니 그 정도가 어떠했겠는가. 위삼포는 그렇게 원쑤를 죽여서는 목을 잘라 아버지의 제단에 올려놓아 제를 지낸것이다.

 

④ 부드러움이 위삼포의 성품인건 절대아니였다. 신의 권능(權能)으로도 어쩌지 못한다는 북만토비의 거두 위삼포는 문무겸전(文武兼全)하여 감히 어깨를 겨룰자가 없거니와 용력과 지모가 난당이요 억강부약(抑强扶弱), 살부제빈(殺富濟貧)을 부르짖어 후덕(厚德)을 과시하나 잔인함은 상상키 어려워 동당들의 경탄과 악명을 함께 날리고 있었다. 
 

   당시 토비들이 즐겨 부른 노래 하나만으로도 짐작이 가는 것이다.

 

      관동 삼성 패왕은 누구냐

      장작림일세

      장작림이 누구냐

      그도 본래는 록림객이라네

      산밖에 장작림이 있고

      산채에 위삼포있네

      농사를 지으려면 벌방으로 가고

      벼슬을 하려거든 산으로 와야지

      백년을 살아봤자 삼만 륙천오백일

      쓰거운 인생 누가 바랄가

      달콤한 인생 누가 싫을가

      현가주연 접배거상이요

      대원성취 시산혈해라네.

 

   현가주연 접배거상(弦歌酒宴 接杯擧觴)이란 <<천자문>>에 있는 구절인데 뜻인즉 거문고 타고 노래하며 주연을 벌리고 잔과 잔이 쉴새없이 부딧친다니 인생향락을 말하는 것이요, 대원성취 시산혈해(大願成就 屍山血海)라니 뜻인즉 바라는 바를 이루자면 시체가 산이 되게 하고 피가 바다 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잔인한 토비들의 철학을 적라라하게 드러낸 것이다.

 

⑤ 류자들은 꿈을 대단히 중히 여긴다. 간밤에 꿈을 꾸었다면 그 꿈을 꼭 해몽했고 그런후에야 행동했는데 특히 맏두령이 더 그러했다. 만일 아이들이 나가는 상여를 붙잡고 우는 꿈을 꾸었다면 그것은 대단히 불길한 징조로 여겼고 큰 바람이 부는 꿈을 꾸었다면 그것은 바람이 재산을 날려보낼 징조라면서 산채밖을 나가지 않았다. 꿈에 늙은 범을 보았어도 산채밖을 나가지 않았다. 늙은 범은 산신령나으리였는데 나가기만 하면 강자를 만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더욱히는 개가 사람쫓는 꿈을 꾸었거나 나무에서 사람이 뛰여내리는 꿈을 꾸었다면 절대 가마마스러 나가지 않거니와 새자들이 개별적으로 산채를 나가는것 조차도 허락치 않았다. 그따위 꿈은 경찰이나 군대가 류자를 잡자는 흉몽으로 풀이되기 때문이다. 한즉 두령이 꾸는 꿈은 실제상 산채의 모든 행사를 결정하고 모든 류자의 행동을 통제하는 지휘봉이나답지 않았던것이다.

 

진사해는 도부상을 잡아세워놓고 몇푼안되는 돈을 말끔히 털냈다. 그리고는 그가 자기의 눈두덕에 난 흉터를 보았으니 아무때건 소문이 나서 시끄러우리라 여기고는 아예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기까지했던 것이다. 산채에서는 호인풍의 사나이란 평을 받아온 그가 밖에 나와서는 바로 이러했다. 자기가 간담상조하게 된 사람이 실은 사람을 파리잡듯해온 진짜살인광임을 황보재는 미처몰랐던것이다.. 그가 청보산패에 있을 때였다. 사람의 생간을 먹으면 처음은 눈이 빨개졌다가 점차 파래지면서 나중에는 해리의 눈처럼 밝아진다는 말을 주어듣고는 거울까지 갗춰놓고 들여다보면서 련거퍼 다섯사람이나 죽이고 간을 빼먹었다. 온 관동땅을 들썽케했던 《당벽진참안》을 빚어냈을 때는 방향잃고 헤매는 나젊은 조선독립군전사를 붙잡아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깨고 대골을 빼먹었다. 그런짓을 했길래 그는 민호를 볼때마다 자기가 그때 저질러놓은 죄행이 다시금상기됐고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기분이 잡치군했다. 한 것은 눈이 밝아지기는커녕 그후부터 이뿌리가 통세나는 무서운 병만 얻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따위짓은 다시는 하지 않고있는건데 어쩐지 민호가 자기를 뒤쫓고있는 독립군의 유령같기도해서 내가 과연 아무때건 저놈의 손에 잘못되지 않을가 하는  무서움에 가슴이 떨려나기도했던것이다.  

    산채에는 전에 진사해의 절름발이 할애비가 다 호적질을 해먹었다는 사이비한 얘기가 나돌아 심심해죽자는 류자들의 무료증을 풀어주고 있었다.

   전에는 로씨야에서 정배살이하는 죄인들이 적잖게 변경지대에 몰려와있으면서 그곳의 한인(漢人)도적과 배가 되어 료략질을 해먹었다. 한데 그 이방인들은 동양인과는 유전인자가 달라서인지 거의가 붉은 수염이 얼굴을 덮고 있어서 퍼그나 이색적이였다. 그렇다해서 항간에서는 그자들을 몰잡아 홍호자(紅胡子)라불렀다. 수염이 붉은 마적이라는 거다.

  함풍(咸豊)년간(1831년ㅡ1861년)에는 악질토호들이 사사로이 검객을 모아 그들이 붉은수염을 달고다니면서 백성집을 털게 했다.

   진사해의 할애비도 그렇게 살고싶었다. 그런데 사지가 남처럼 성하지 않고 절름발이가 돼놔서 처음에는 퍼그나 고민했다. 내가 왜 이렇게 병신이 됐느냐고 신세를 한탄하기도 하고 팔자를 원망하기도했다. 그러면서도 다른 어떤 벌이로 생계를 유지하고푼 맘은 없어서 머리통을 다시굴려본 끝에 결국은 일확천금을 꿈꾸고 나도 한 번 홍호자노릇을 해보자고 맘을 먹었던것이다.

 

염왕산류자들은 식량만은 략탈하지 않고 여지껏 제 돈을 주고 삿다. 자금은 주로 아편을 팔아 마련되였다. 그러나 식량을 구매하자면 해마다 미리 잘 연통해야했다. 관방에서 토비에게 먹을 것을 대여주면 《통비범(通匪犯)》으로 론죄하여 가차없이 목을 잘랐기 때문이다. 형편이 그러했건만 농사군들은 갖은 방법을 다해 정부를 속여가면서 제가 지은 낟알을 한근이라도 토비에게 팔아먹으려 했다. 그들이 그같이 위험불구하고 량식을 파는 원인이 어디에 있었을가? 다른게 아니다. 그것은 바로 염왕산은 언제나 쌀값을 후하게 줫거니와 뒷수습을 잘해주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쌀판 이들이 후환이 없게끔 해주었다는 그거다. 위삼포는 만약 어느 마을에 고발자가 나지기만 하면 에누리 없이 그의 가족을 도룩냈다. 징계가 그러했길래 그들은 서로 감싸면 감쌌지 남을 물어먹는 짓은 절대 하려하지 않았다. 위삼포는 이같이 염왕산 주변에 있는 마을들을 어렵잖게 제 식량공급기지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마을들은 실제상 그의 보호권내에 들어 다른 토비들의 위협을 적게 받았으니 편안히 보낸셈이다.

 

⑧ 진사해의 끝장

   밀산과 동녕에다 정보망을 두고있은 청보산패는 “당벽진참안"을 일으켜 독립군을 무수히 살해한 일로 하여 여러 토비무리에서 분별없이 너무 잔인했다는 비난을 들었거니와 실력이 그닥잖으면서 남을 깔보았다. 그리하여 만주 여러 무리의 미움을 사게됐고 북만에서는 첫손을 꼽는 장광재령의 염왕산토비 위삼포(魏三蒲)를 잘못건드렸다가  그의 손에서 녹아나고말았다. 300명중 그 잔여 50여명은 "당벽진참안"을 일으킨 이듬해 겨울에 동강 고태자에서 무고한 허저인 장년 40명을 살해하였다가 동강아문(同江衙門)에서 조직한 허저인복수대손에 끝끝내 전멸당하고말았다.  그 두 참안을 조작한 흉범 진사해(陳四海)는 살길을 찾아 염왕산에 들어왔다가 암암리에 자기를 6년간이나 끈질기게 추격한 독립군전사 정민호(鄭民鎬)손에 끝내 죽고만다. 정민호는 자유시사변 때 흑룡강에 뛰여들었다가 싸할린의용대전사와 함께 허지인의 손에 구원된 독립군전사였다. 그를 구원해준 사람이 바로 나의 채방을 받은 허저인 로인 나쟈(那加)다. 

 

⑨  연구과제

 

(1) 서일이 사망을 그린 같잖은 서술.

(2) 당벽진참안에 사망된 정확한 수자는?

 

⑩ 자료출처

 

   나는 근 30여년간 전문 만주의 토비만 연구했다. 나의 첫장편 <<번개치는 아침>>과 세 번째 장편<<관동의 밤>>은 다가 토비운명을 다룬것이다.

   1987년도 겨울에 나는  <<중국조선족이 걸어온 발자취>>과외편집작가신분으로 임무를 맡고 성정부에서 떼여준 소개신을 갖고 요하에 가서 요하항일유격대와 최용권, 리학만에 관한 력사자료들을 수집했다. 5일간 당안관에 파묻혀있노라니 일부 독립군의 이름이 비치였다. 그에 앞서 썩 몇해전엔 나는 <<당벽진참안>>이라는것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그리하여 력사를 추종하게 된 것이다.

   이듬해 10월달에 나는 동강(同江)에 갔다. 거기서 나는 허저족(혈철족)의 력사상ㅡ1922년 동강근처의 고태자마을(이미 없어졌음)에서 40명혈철족이 토비손에 살해된 <<고태자참안>>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였다. 그리하여 그 사실을 잘알수있는 혈철족을 찾기시작한것인데 면바로 한사람을 발견한 것이다. 나쟈(那加)라는 사람이였는데 그해 그는 나이가 이미 86세의 고령에 오른 늙은이였다. 그는 동강아문(同江衙門)에서 <<고태자참안>>을 일으킨 <<청보산>>토비는 <<악의 유령>>이라 하여 그것이 존재하는 한 백성은 안녕할 수 없다면서 꼭 숙청해버려야한다고 하자 허저인(혈촐족) 복수대를 조직하고 그 대장이 되어 토비숙청에 나섰던 사람이다. 그의 부친 가싼다(세습향장) 유만진이 고태자에 갔다가  토비손에 참살을 당한것이다. 허저인(혈철족) 복수대는 1922년가을에 조직되였는데 그 이듬해인 1923년겨을에 이르러 청보산토비  잔여를 끝끝내 숙청해버린 것이다.

   나는 “청보산”토비정황을 아는것만큼 더 알려줄수 없는가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완달산에서 50여명의 “청보산”무리를 끌고 나와 고태자에서 자기 아버지 가싼다 유만진을  포함한 허저인(혈철족)장년 40명을 살해한 주범은 청보산의 진사해(陳四海)였다면서 그는 그전에 당벽진에서 항일을 하는 조선인(朝鮮人)을 그만큼 살해했노라 알려주었다. 살해된 수자가 정말 그것밖에 안되느냐고 내가 물어보았다. 그러니 그는 자기가 알기에는 허저족장년이 죽은 수자와 같았다면서 그자들이 사람을 그렇게 죽인게 그 어떤 산신제(山神祭)가 아니였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위하연(魏夏演)이가 그 일을 자기보다 더 잘아는데 했다. 위하연이라는 사람 역시 그와 동족의 허저인(혈철족)이였는데 내내 독신으로 지냈다면서 그는 동강아문(同江衙門)에서 모집한 토비숙청대내의 “허저인복수대”에서 저격명수들로 따로 조직된 “포수대”의 대장질을 한 사람이였는데 청동매를 길러 집승잡이를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껏 살아있으면 아마 백살이이 넘을거라했다. 그러면서 나쟈(那加)로인은 나보고 다 지나간 일인데 이제 그건 알아서 뭘하느냐했다. 나는 내가 작가니 소설을 쓰자고 그런다했더니 그는 웃으면서 그녀석을 놓쳐버려 맹랑해했더니 그녀석은 위삼포(魏三蒲)손에 죽었다고 하면서 지벌을 입은거야 지벌을 입은거야했다. 내가 누구를 놓고 그러냐 물었더니 그는 자기 집의 배를 빼앗아간 진사해(陳四海)를 말한다면서 청보산무리에서는 가장 지악한 놈이라했다. 하여 나는 “당벽진참”이 발생하게 된 연유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게되였던 것이다.

   그 허저인(혈철족) 로인이 알려줘서 나는 그한테 조선족 매부가 있었다는 것도, 그는 자유시사변때 그한테 구원된 독립군인 정민호였다는것도 알게되였다. 그가 제공한 자료를 소재로 하여 쓴것이  나의 세 번째 장편소설 <<관동의 밤>>인 것이다.             

  
                                             
 

 부록 2.

                         日本內閣總理大臣原敬 閣下

 

   기미 칠월 일 조선인사 서일(徐一), 계화(桂和), 김붕(金鵬), 김일봉(金一鋒), 정신(鄭信), 김성(金星) 등은 일본내각총리대신 원경(原敬) 각하에게 삼가 글을 보냅니다. 무릇 시(時)는 다시오지 않고 세(勢)는 양립할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시무(時務)를 아는 자는 세(勢)에 연유하기를 귀히 여기고, 세위(勢位)를 잡는 자는 시(時)타기를 귀히 여기니, 이것이 소위 시무(時務)와 세위(勢位)가 아니면 영웅을 만들 수 없는 것입니다.

   금일 일본은 과연 동아선진국이니 저희들은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으며, 훗날 일본이 또다시 세계 부강국가가 되니 저희들은 또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집사자(執事者)는 조선인으로써 조선을 위해 듣기를 꾀하지 않을 수 없으니 동양의 다행스러움이 심합니다. 시험삼아보건대 서세(西勢)가 동점(東漸)하는 것이 날로 심한데 하루라도 오히려 동양인의 위세가 멀리 서양땅에 한치라도 보탰다는 것을 듣지 못한 것은 무엇입니까?

   무릇 오족(五族)중에 세력의 우승(優勝) 경계를 점한 자는 오로지 백인(白人)이며, 6대주(六大洲)중에서 크게 시국의 경쟁마당이 된것은 오로지 동아(東亞)입니다. 영국이 인도에게, 프랑스가 안남에게, 독일이 소아세아에게, 아프리카가 서백리아에게 있는 것이 모두 그러한데, 오로지 일본이 욱일승천(旭日昇天)하는 기세로 원동(遠東)의 한 모퉁이에서 일어나 유신(維新) 50년에 울연(蔚然)히 동아(東亞)의 강자가 되었으니, 일전(一戰)하여 청조(淸朝)에서 대만(待滿)을 나누어 가지고, 두 번 싸워 아령에서 여순을 빼앗고, 세 번 싸워 덕조에서 청도를 점거하였습니다. 이에 일본의 세력이 해가 중천에 뜬 것 같아서 백인의 원동(遠東)의 책략이 드디여 크게 꺾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은 다만 땅을 넓힐 계획에만 힘쓴다면 이미 심근고체하여 황족(皇族: 아시아황인종) 사이에서 우이(牛耳)를 잡자고하는 것과 같으니, 장차 백인(白人)의 뜻을 능가함이 있다면 일본이 지금 동아세아에 베플고 있는 책략 또한 이미 늦었을 뿐이니 어찌하겠습니까?

   다만 19세기 이래로 서인 침략주의의 자취를 늘어놓는다 하더라도 진실로 20세기가 갈수록 새로워지는 좋은 계책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성효(成效)는 항상 착착(着着) 서인(西人)의 뒤에 서게되니 어찌하겠습니까?

   다행인것은 한늘은 가득찬 것을 누르고, 크게 강한것은 반드시 꺾으므로 구주의 전쟁이 생각 밖에서 일어나면 백인이 우세하고 강한 자가 저절로 서로 죽이는 까닭으로 황족의 화가 그 때문에 조금 늦어질 뿐입니다. 만약 수천년전에 백인국으로 하여금 마음과 힘을 합하여 오로지 원동(遠東)의 계책에 뜻을 두었다면 하나의 일본으로는 능히 그 칼끝을 묶어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세가 진실로 추(鄒)나라로 초(楚)나라 대적하기를 면하지 못하고 황족(黃族)의 살이 백인의 강식(强食)이 되지 않는 것은 거의 드믈 것입니다. 지금 즉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의 세력이 한 번 죽고 한 번 다치는데 만약 가운데 서서 그 변하는 것을 보는 자가 있어서 다치는 것을 따라서 찌른다면 저 백인이 어찌 저자거리의 새끼줄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때에 황족이 떨치지 못하는 것은 그 또한 백인의 다행일 뿐입니다. 개전(開戰)이래 구주(歐洲)와 백인(白人)의 나라가 상처를 입지 않음이 없었는데도 백년동안 도모하던 원동(遠東)의 책략이 일거에 땅을 휩쓸자 이에 서서 도모하는 자는 그 배꼽을 씹고, 앉아서 이야기하는 자는 그 발을 그려서 시(時)를 구하고 세(勢)를 당길 책략에 급급(汲汲)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평화(平和)의 회의가 겨우 끝나자 연맹(聯盟)의 논의가 또 거론되니, 이 두가지가 백인을 위한 계책이라 한다면 가(可)하나 진실로 황족(黃族)의 이로움은 아닙니다.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까?

   수 년 동안의 전쟁에서 백인의 성년(成年) 중 열에 하나도 남지 않았으니, 이와 같은 수년을 이어간다면 백족은 남아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평화회의가 부득불 속개(續開)되여야 하는 것입니다. 또 난(亂)을 겪는 여러 국가로 하여금 백성과 더불어 휴식함으로써 삶을 도모하고 교훈의 계책으로 삼지 않는다면 백족(白族)의 강일(强日)이 없으니, 연맹회가 부득불 계속해서 일어나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 백인 은 어찌 능히 동아(東亞)의 여러 나라를 두려워하게습니까?     

   오로지 하나의 일본이 있어서이니 백인이 베개조차 감히 높이베지 못하고, 황화(黃禍)의 설이 따라서 일어나면 밖으로는 평화(平和)의 주장을 펼쳐 동서(東西) 소약(小弱) 제족(諸族)들이 합치기를 유혹(誘惑)하지만, 안으로는 실로 황족(黃族)의 강자(强者)를 견제(牽制)하는 것입니다. 호주는 인종차별을 철페하고자 하지 않는 나라인데 이것이 아니면 어찌하겠습니까?

   미국은 배일(排日) 운동을 때만 있으면 격렬하게 일으키는 자인데 또 이것이 아니면 어찌하겠습니까?

   이것이 진실로 동양지사들이 한 번 아프고 두 번 눈물 흘리는 때인데, 방관자(傍觀者)는 이것을 황족의 위기(危機)라 하지 않는 자가 없고, 당국자(當局者)는 오로지 스스로 편안히 여기는 계책으로 삼는 즉 어찌 스스로 원교근공(遠交近攻)의 계책에 빠진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의 진취주의(進取主義)를 견지하는 자는 걸핏하면 섬나라는 답답해서 살수가 없을 뿐이니 반드시 한반도를 병탄(倂呑)해서 대륙으로 나아가는 거점으로 한 연후에야 동양의 패권(覇權)을 잡을 수 있고, 서양인이 세상에 횡행(橫行)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오호라, 이는 바로 시(時)를 지나치고 세(勢)를 거스르는 주장입니다. 대저 시(時)와 세(勢)라는 것은 상(常)을 범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최고의 전제국가인 로시야(露西亞)가 변하여 공화정이 되니 시(時)에는 상위(常位)가 없으며, 세계최대 강국인 보로사(普魯士: 프로이센)이나 한 번 패하여 포로 죄수가 되니 세(勢)에는 상승(常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바로 민족평등의 시대이며, 특별히 지난날 한 사람이 횡행하던 시대가 아닙니다. 그러한 즉 소위 침략주의자(侵略主義者)는 이미 호로(葫蘆)가 되었을 뿐입니다. 다만 조선 한 가지 일로 논한다면 합병하는 것이 일본에 유리한것은 하나도 없으며, 그것이 불리를 야기하는 것은 거의 굽힐 수 없으니 무엇때문입니까?

   조선은 오래된 나라입니다. 그 역사가 독립되고 그 종교가 독립되였으며 언어 문자 윤리습속에 이르기까지 한가지라도 독립하지 않음이 없으니 진실로 대만(臺灣)이나 유구(琉球)에 비할바가 아닙니다. 만약 그 백성의 지혜가 조금이라도 열리고 인심(人心)이 자결(自決)한다면 수 십년내에 정부가 동화(同化)를 고심한 것이 헛된일로 돌아갈 뿐이니 그 것이 첫 번째 불리함입니다.

   합병한 이래 한국에게 베푼 시책이 성수불루(盛水不漏)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생각이 압죽사순 달퇴암수인 까닭에 관리에 있는 자 감히 대도시 가운데를 혼자 걸을 수 없어서 항상 경찰의 역할에 급급해야 하며, 마음을 쓰고 재물을 쓰는 것이 미치지 않는 것이 없으니, 그것이 두 번째 불리함입니다.

   조선은 가난한 나라입니다.

   온 나라의 재물을 통털어도 경상의 용도에 제공할 수 없어 모국(母國)의 재물을 쏟아 보충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것이 세 번째 불리함입니다.

   조선은 강한 민족입니다. 임전무퇴(臨戰無退) 배물견적(背勿見敵)의 유훈(遺訓)과 여습(餘習)이 오래도록 사람들의 마음속에 젖어왔습니다. 그러므로 조춘(早春)에 독립(獨立)을 선언한 이래로 적수단심(赤手丹心) 갑부을기(甲仆乙起)로 사상(死傷)과 형옥(刑獄)의 참상(慘狀)을 당하였으나 분발하여 스스로를 돌보지 아니하고 광복한 후에야 그만두기를 기약하니 까마귀도 궁하면 오히려 쪼는데, 하물며 온 나라 사람이 일심(一心) 동성(同聲)함이겠습니까? 만약 일본으로 하여금 대규모로 진압정책을 시행하고 수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수억의 재물을 쓴다면 다행히 전승(全勝)하는 공(功)은 있겠으나, 진실로 그 마음을 열복(悅服)시키기에는 어려우니, 그것이 네 번째 불리함입니다.

   또 황족의 다툼은 백인의 이득이니 조개가 도요새를 물면 받드시 어부의 독수(毒手)가 있을 것이며, 참새가 사마귀를 잡으면 우인(虞人ㅡ 경험이 많고 능숙한 사냥꾼)의 비탄(飛彈)이 없을 수 없으니, 그것이 다섯 번째 불리함입니다.

   일한(日韓)의 다툼이 한 번 일어나면 중화(中華)의 반대당과 (俄國)의 과격파(過激派) 또한 장차 기회를 타서 동양평화를 유지하는 대책이 장차 무너질 것이니, 그것이 여섯 번째 불리함입니다.

   또 일본의 강함은 구미(歐美) 사람이 싫어하는 바가 될것이며, 그것이 조선독립을 도와 독립(獨立)하게 하는 것이라 말하는 자가 어찌 우리 한국을 진실로 애련(愛憐)해서이겠습니까? 그 방도가 진실로 일찍이 일본의 세력을 점점 깎으려는 것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으니, 반드시 군사를 일으키는 일에 재물을 써서 없애는 것에 조금도 아까움을 돌아보지 않고 하나로서 팔(八)을  굴복하려고 하니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습니까?  그것이 일곱 번째 불리함입니다.

   이러한 큰 불리(不利)가 있는데도 일본이 오로지 유리하다고 한다면 저희들은 리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동아를 위한 계책으로는 두가지 이익에 만전을 기하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조선을 분립(分立)함으로써 지난날 우방이 부식(扶植)한 맹약을 실천하고, 중화(中華)와 친선(親善)함으러써 동양평화유지 정책을 온전히 하는 것입니다. 정치(鼎峙)하여 서고, 순치(脣齒)로 의지하며 그 주권을 굳건히 하고, 그 실력을 배양하여 구미 사대강국과 능히 싸울 수 있은 다음에 나아가 안남(安南) 인도(印度) 등 백인에게 속박아래에 있는 동아 제족(諸族)들을 구한다면 서인(西人)들이 감히 고기를 묵듯이 할 수 없으며, 동양인들은 일본에 덕(德)을 돌리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무릇 이와같이 한다면 천하(天下)를 대적하는데 장차 무엇이 꺼리껴 하지 못하겠습니까? 백인이 일패도지(一敗塗地)하고 일본이 홀로 동아의 영웅이 되는 것 또한 시세(時勢)의 조화가 아님이 없으며 실로 천년에 한번도 만날 수 없는 좋은 기회입니다. 때가 이르렀는데 행하지 않으면 지자(智者)가 경계할 바이며, 그 허물은 적은 것이 아닙니다. 어찌 당국(當局) 집사(執事)가 심모원려(深謀遠慮)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병렬(竝列)하여 오강(五强 )을 논하자면 일본이 자부심으로 기뻐하기에는 부족하며, 인종차별은 바로 일본의 막대한 치욕입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이 이 계책을 계획한 것은 진실로 선제후진(先齊後秦)이 아니며 일본이 이 계책을 쓰는 것 또한 위초비조(爲楚非趙)가 아닙니다. 원컨대 광부(狂夫)의 말이라 하여 버리지 말고 또한 사사로이 도모한 것이라 의심하지 않으신다면 진실로 우리 동양의 다행이요 황족(黃族)의 복입니다.

   각하의 판단을 공경하며 편안하시기 바랍니다.

 

 

부록 3.

 

         무오독립선언서 (대한독립선언서) 원문 / 대종교총본사 전강실 풀이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

 

   우리 대한 동족 남매와 온 세계 우방 동포여!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과 신성한 평등복리로 우리 자손 여민(子孫 黎民)에 대대로 전하게 하기 위하여, 여기 이민족 전체의 학대와 억압(抑壓)을 해탈하고 대한 민주의 자립을 선포하노라.

   우리 대한은 예로부터 우리 대한의 한(韓)이요, 이민족의 한이 아니라, 반만년사의 내치외교(內治外交)는 한왕한제(韓王韓帝)의 고유 권한(固有權)이요, 백만방리의 고산려수는 한남한녀(韓男韓女)의 공유 재산(公有産)이요, 기골문언(氣骨文言)이 구아(歐亞)에 뛰여난(拔粹) 우리 민족은 능히 자국을 옹호하며 만방을 화합하여 세계에 공진할 천민(天民)이다. 우리 나라의 털끝만한 권한(韓ㅡ部의 權)이라도 이민족(異族)에게 양보할 의무가 없고, 우리 강토의 촌토(韓ㅡ尺의 土)라도 이민족이 덤할 권한이 없으며, 우리 나라 한 사람의 한인(韓ㅡ個의 民)이라도 이민족이 간섭할 조건이 없으니, 우리 한(韓)은 완전한 한인(韓人)의 한(韓)이다.

   슬프도다 일본의 무력과 재앙(武孼)이여. 임진 이래로 반도에 쌓아 놓은 악은 만세에 엄페(可掩)치 못할지며, 갑오이후 대륙에서 지은 죄는 만국에 용납(能容)지 못할지라. 그들이 전쟁을 즐기는(嗜戰) 악습은 자보(自保)니 지위(自衛)니 구실을 만들더니, 마침내 하늘에 반하고 인도에 거스리는(反天逆人) 보호 합병을 강제(逞)하고, 그들이 맹세를 어기는 〔□(※변할투)盟〕패습(悖習)은 영토니 문호니 기회니 구실을 거짓 삼다가 필경 모의비법(沒義非法)한 밀관협약(密款脅約)을 강제로 맺고(勒結), 그들의 요망한 정책은 감히 종교와 문화를 말살하였고, 교육을 제한하여 과학의 유통을 막았고〔防□(※막을 알)〕, 인권을 박탈하며 경제를 농락하며 군경(軍警)의 무단과 이민이 암계(暗計)로 한족을 멸하고 일인을 증식(滅韓殖日)하려는 간흉을 실행한지라.

   적극소극(積極消極)으로 한(韓)족을 마멸시킴이 얼마인가.

   십년 무력과 재앙의 작란(作亂)이 여기서 극에 이르므로 하늘이 그들의 더러운 덕(穢德)을 꺼리시어(厭) 우리에게 좋은 기회(時機)를 주실새, 우리들은 하늘에 순종하고 인도에 응하여(順天應人) 대한독립을 선포하는 동시에 그들의 합병하던 죄악을 선포하고 징계하니(宣布懲辨),

   1. 일본의 합방동기는 그들의 소위 범일본주의를 아시아에 실행함이니, 이는 동아의 적이요,

   2. 일본의 합방수단은 사기강박과 불법무도와 무력폭행을 구비하였으니, 이는 국제법의 악마이며,

   3. 일본의 합병결과는 군경의 야만적 힘(蠻權)과 경제의 압박으로 종족을 마멸하며, 종교를 억압하고 핍박(抑迫)하며, 교육을 제한하여 세계 문화를 저지하고 장애(沮障)하였으니 이는 인류의 적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뜻과 사람의 도리(天意人道)와 정의법리(正義法理)에 비추어 만국의 입증으로 합방 무효를 선포하며, 그들의 죄악을 응징하며 우리의 권리를 회복하노라.

   슬프도다 일본의 무력과 재앙이여! 작게 징계하고 크게 타이름(小懲大戒)이 너희의 복이니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고, 대륙은 대륙으로 회복할지어다.

   각기 원상(原狀)을 회복함은 아시아의 바램(幸)인 동시에 너희도 바램이러니와, 만일 미련하게도 깨닫지 못하면 화근이 모두(全部禍根) 너희에게 있으니, 복구자신(復舊自新)의 이익을 반복하여 알아듣게 타이를 것(反復曉論)이다.

   보라! 인민의 마적이였던 전제와 강권은 잔재가 이미 다하였고, 인류에 부여된 평등과 평화는 명명백백(白日이 當空)하여, 공의(公儀)의 심판과 자유의 보편성은 실로 광겁(曠劫)의 액(厄)을 일세(一世)코자 하는 천의(天意)의 실현함이요, 약국잔족(弱國殘族)을 구제(濟)하는 대지의 복음이니라.

   장(大)하도다 시대(時)의 정의(義)여, 이때를 만난 우리는 함께 나아가(共進) 무도한 강권속박(强權束縛)을 해탈하고 광명한 평화독립을 회복함은, 하늘의 뜻을 높이 날리며 인심을 순응시키고자 함이며, 지구에 발을 붙인 권리로써 세계를 개조하여 대동건설을 협찬하는 소이로서 우리 여기 2천만 대중의 충성(赤衷)을 대표하여, 감히 황황일신(皇皇一神)께 분명히 알리고(昭告) 세계만방에 고하오니(誕誥), 우리 독립은 하늘과 사람이 모두 향응(天人合應)하는 순수한 동기로 민족자보(民族自保)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함이요, 결코 목전의 이해(眼前利害)에 우연한 충동이 아니며, 은혜와 원한(恩怨)에 관한 감정으로 비문명한 보복수단에 자족한 바가 아니라, 실로 항구일관(恒久一貫)한 국민의 지성이 격발하여 저 이민족으로 하여금 (彼異類) 깨닫고 새롭게 함(感悟自新)이며, 우리의 결심은 야비한 정궤(政軌)를 초월하여 진정한 도의를 실현함이라.

   아 우리 대중이여, 공의로 독립한 자는 공의로써 진행할지라, 일체의 방편(一切方便)으로 군국전제를 삭제하여 민족평등을 세계에 널리 베플(普施)지니 이는 우리 독립의 제일의 뜻(第逸意)이요, 무력겸병(武力兼倂)을 근절하여 평등한 천하(平均天下)의 공도(公道)로 진행할지니 이는 우리 독립의 본령이요, 밀약사전(密約私戰0을 엄금하고 대동평화를 선전(宣傳)할지니 이는 우리 복국의 사명이요, 동등한 권리와 부(同權同富)를 모든 동포(一切同胞)에게 베풀며 남녀빈부를 고르게 다스리며(齊), 등현등수(等賢等壽)로 지우노유(知愚老幼)에게 균등(均)하게 사해인류(四海人類)를 포용(度)할 것이니 우리 건국(立國)의 기치(旗幟)요, 나아가 국제불의(國際不義)를 감독하고 우주의 진선미를 체현(體現)할 것이니 이는 우리 대한민족의 시세에 응하고 부활(應時復活)하는 궁극의 의의(究竟義)니라.

   아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同心同德) 2천만 형제자매여! 우리 단군대황조께서 상제(上帝)에 좌우하시어 우리의 기운(機運)을 명하시며, 세계와 시대가 우리의 복리를 돕는다.

   정의는 무적의 칼이니 이로써 하늘에 거스리는 악마와 나라를 도적질하는 적을 한손으로 무찌르라. 이로써 5천년 조정의 광휘(光輝)를 현양(顯揚)할 것이며, 이로써 2천만 백성(赤子)의 운명을 개척할 것이니, 궐기(起)하라 독립군! 제(齊)하라 독립군!

   천지로 망(網)한 죽음(一死)은 사람의 면할 수 없는 바인즉, 개 돼지와도 같은 일생을 누가 원하는 바이리오. 살신성인하면 2천만 동포와 동체(同體)로 부활할 것이니 일신을 어찌 아낄것이며, 집안이 기울어도 나라가 회복되면(傾家復國) 3천리 옥토가 자가의 소유이니 (一家)를 희생하랴!

   아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 2천만 형제자매여! 국민본령(國民本領)을 자각한 독립임을 기억할 것이며, 동양평화를 보장하고 인류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자립인 것을 명심할 것이며, 황천의 명령을 크게 받들어(衹奉) 일절(一切) 사망(邪網)에서 해탈하는 건국인 것을 확신하여,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성 할 지어다.   

                                건국기원 4251년

 




                                                     
 

                                                              2012.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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