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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장편《반도의 혈》
1.
흡사 앞발을 쳐들고 일어선 한 마리의 토끼와도 같은 조선지도! 이 지도를 펼쳐놓고 자세히 보노라면 우로 불쑥 치켜 올린 귀의 끝쪽, 북위43°선 이북으로 이국인 중국과 국경을 이루고있는 두만강 가까이에 좁쌀알 같이 찍혀있는 한점에 금희동(金熙洞)라 써놓은걸 발견하게 된다. 함경도 경원군 안농면 금희동(咸鏡道慶源郡安農面金熙洞)ㅡ3천리금수강산에서 금희동은 위치상 맨 치벽한 북쪽 두메요 그래서 오지나 다름없는거니 그 누가 일러주랴. 여기는 거의 소외된 변비나 다름없는 고장이였다. 하지만 자연의 섭리만은 너그러워 여기도 여느 다른 고장과 마찬가지로 해해년년 계절만은 드팀없이 찾아오군한다.
개가 답싸리그늘밑에서도 혀를 빼문다는 삼복철.
이글거리는 불덩이가 중천으로 기여오르면서 한껏 불비를 뿜는다. 하늘마저 왜 이럴가. 다른 때 같으면 얼마간은 푸르러서 그래도 좀은 시원스러운 감이라도 주련만 요즘은 내내 태양이 내뿜는 부글거리는 거품에 색갈마저 바래져 그대로 끝간데 없이 말라버린것만 같다. 이런 더위속에서 애들이 거북바위라 이름지은 솟뚜껑모양의 둥글넙적한 큰돌 하나가 뜨겁게 달고있는데 등판에는 얍게 저민 감자 몇쪽각이 딱지딱지 붙어있다.
감자살이 언영 다 익어 꺼둑꺼둑 타버릴 지경이건만 애들은 물장난질에 정신이 싹 팔려 그건 아예 가많게 잊고들있다.
《야, 임마 물 한 바가지 더 먹겠니.》
《히떤 소린 작작치구 너나 콱 먹어라.》
두 애는 다시 붙는다.
서로 맞받아 치는 물살에 고운 무지게발이 일어선다.
물 한 바가지 더 먹여주겠다는 애는 덩치 큰 성묵이고 히떤 소리 작작치라는 애는 서기학이다. 저쪽보다 덩치작아도 약삭바른 서기학(徐夔學)은 볕에 그슬려 구리빛나는 방망이같은 두 팔을 치켜 치렁치렁한 머리태를 잼쳐 감아올리고나서 어디 해보자면서 다시금 달려든다.
《물배때기 둥둥! 물배때기 둥둥! 》
《누구 배 먼저터지나 보자! 누구 배 먼저터지나 보자!》
두 발가숭이가 재미좋다면서 짝짝꿍을 친다. 박기호와 최삼용이다.
똑같이 8살나이의 네 동갑. 이들은 다가 1881년도 한해에 어머니의 복통끝에 세상을 보게 된 애들이였다. 이 넷중 성묵이를 내놓고 서기학(徐夔學)이와 박기호와 최삼용이는 이 금희동의 태생이거니와 이름도 다가 세상에 태여나던 그해에 마을 의 늙은 유생훈장 배창식(裵昌植)이 지어준거다. 서기학이가 출생일이 제일 일러 음력 2월 26일이고 그 아래로 기호, 삼용인데 경성태생인 성묵이는 기호보다도 하루늦어 출생했으니 누가 형이고 동생이냐는 불보듯 빤했다.
하건만도 성묵이가 와서부터 가끔 시비가 오도되는 판이다. 성묵이는 수평높은 서당훈장한테서 한학(漢學)을 배우겠다면서 3년째 제 고모집에 와 있는건데 마을의 동갑들과 섭쓸려 어느덧 극진한 사이로 지내지면서도 덩치큰걸 턱대고 완력으로 제가 형노릇을 하겠다해서 가끔 애들한테 몰리기도한다. 그 애의 겨룸대상은 물론 하루먼저 세상을 본 서기학(徐夔學)이였다.
둘다 어지간히 지치고말았다.
서기학(徐夔學)이 숨찬 가슴을 내리쓸면서도 지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끝장은 봐야 해.》
성묵이가 물작란을 거두고 물어본다.
《기학이 너 어디 말해봐, <샤만호>가 무슨배냐?》
《미국배.》
《병인양요때는?》
《프랑스배》
《<운양호>는?》
《일본배. 건데 넌 그따위건 왜 물는거냐? 시골뜨기 초립동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구해서?....쳇.》
서기학(徐夔學)은 언잖아서 노려보다가 되묻는다.
《좋아, 그럼 네가 어디 제꺽 대답해봐. <제물포조약> 어느때 맺었나?》
《음....저....》
성묵은 머리가 얼른 돌지 않는지 깝자른다. 그러자 박기호가 잘코사니를 부르면서 뚱겨준다.
《임마, 넌 까마귀알 먹은게 아녀? 그건 우리가 태여난 이듬해야.》
《1882년?》
《그렇다. 어느달 어느날? 그것까지 맞혀야 넌 아는거야.》
서기학(徐夔學)의 말이였는데 방금까지 아노라던 박기호도 그건 말못한다.
《7월 17일. 이젠 기억나겠지. 그 조약에 우린 대단히 믿졌다잖아.》
애들은 그제야 생각나 머리를 주억거렸다.
기학(夔學)이란 초휘(初諱)요, 당호(堂號)는 삼혜(三兮)니 기선(其先)은 이천(利川)이다. 소시적부터 남달리 지닐총이 좋았던 그는 셈이 들면서 이름을 서일이라 고쳤고 훗날 대종교성자가 되면서 백포 (白圃)라는 새 호를 받은 것이다.
목강하던 애들은 어지간히 지쳐서야 물에서 나왔다.
바로 지척에 초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마을이다.
그리 너르지 않은 논판건너 저기 맨 앞줄 울바자안 옥수수밭곁의 감자밭과 땅콩밭너머로 바당문과 창문을 다 열어놓은 박기호네 집이 보이고 그 옆 가까이에 조롱박을 여러개 얹은 최삼용이네 초가이영도 보인다. 그 두 집의 뒤쪽 저기 서북켠으로 해서 좀 동안떠있는 것이 서기학이네 집인데 흰 수건으로 머리를 처맨 어른이 풀단얹은 지게를 지고 마당에 들어서고 있다. 소먹일 꼴을 베오는 서기학(徐夔學)의 큰할아버지 서장록(徐長祿)이다. 기학(夔學)이는 세상에 태여나 첫돌이 될 때 까지 엄마의 젖을 먹고는 슬하에 일점혈육이 없는 큰할아버지께로 갔다. 작은할아버지는 서장은(徐長恩)이고 아버지는 성명이 서재원(徐在源)이였다. 그에게 세상을 보게한 생부모(生父母) 다 건재하며 지금 함흥에서 살고있다. 함흥서 그들은 어느 한 염색업자에 붙어 품팔이를 하고 있었는데 보수가 적지만 산골에서 몇마지기 안되는 척박한 논밭뙈기에 매달려 살기보다는 그래도 사는 멋이 낳은것 같아 그냥 눌러 지내는 판이다.
보살의 배속에 삼검불이 들어있건 넝마가 들어있건 그걸 알아선 뭘하냐 듯이 어른들이야 이렇게 보내든 저렇든 보내든 걱정없이 난 내멋으루 글이나 잘읽고 무병하면 되는거야 하는것이 이 애들의 공유한 심리였다.
북쪽으로 수림이 우거진 산이고 그 산은 서쪽산과도 동쪽산과도 줄기가 이어붙어 있었다. 그 산 남쪽의 약간 둔덕진 기슭에 터를 잡고 오손도손 모여앉은 60여호동네 금희동은 살기 좋은 마을이였다. 뙈기밭과 마을앞을 흐르는 개울이 합쳐져 한폭의 아름다운 자연풍경화가 되는 여기가 어찌보면 풍진세월과는 격원한 두메인가 싶었다.
《아차, 감자! 감자!》
최삼용이 불시로 생각이 떠올라 제 이마빼기를 찰싹 때린다.
다른 애들도 뒤따라 발가벗은채 우루루 거부기바우로 달려간다.
애들은 저마다 익은 감자를 재게 주어 입에다 넣는다.
《가만, 이건 다치지 말어!》
서기학(徐夔學)이가 뻗혓던 손을 얼른 움츠렸다. 뜨겁게 달아오른 돌우에서 개미들이 감자부스러기를 어디론가 끌고가느라 분주했다.
《요것들 보지.... 먹거리나졌다구 데죽을것두 무르는구나!》
성묵의 말에
《생사결판이다. 불쌍하잖니. 건다리지 말고 내쳐둬!》
박기호가 감자쪼각을 애써 움직이는 개미를 여겨보며 하는 말이다.
《요것들이 이제 날라다놓고 먹을 때는 피투성이 될거야.》
성묵이가 내뱉는 말에
《건 왜서?》
하고 서기학이 따진다.
《제가 더많이 먹겠다구 싸울테니까.》
《넌 억측이야. 개미가 이래뵈두 제편끼리는 끔찍스레 화목한거야.》
성묵이는 그의 말이 틀린다고 지적한다.
《임마, 어쩜 그럴수있나. 이놈들은 자사자리한 미물인데.》
《체, 개미가 미물이라? 미물이면 인간처럼 제 고향을 알가. 》
《허튼소리!.》
허튼소리라? 좋다, 내가 물어볼테니 어디 들어보거라 뭐라구 대답하는가 하면서 기학(夔學)이는 개미들을 향해 과연 입을 연다.
《개미야, 개미야, 너희들은 고향이 어디메뇨?.... 오 알았다! 알았어! 허리 도(道) 가늘 군(郡) 만지 면(面) 부러지 리(里).》
성묵이 그만 말구멍이 막혀 제 이마빼기를 긁적이는데 기호와 삼용이는 깔깔 웃어대며 엄지를 뽑아든다. 서기학의 깜찍한 응변술에는 귀신도 기구멍막혀 달아나리라면서.
마을안 어디선가 갑자기 요란한 악기소리 들려왔다. 새납소리도 꽹가리 소리도 아니였다. 잦은 북소리에다 얄팍한 쇠쪼박지들이 부딧쳐서 내는 절그렁 쟁그랑....그것들이 한데융합되는 조잡성이였다.
《가보자!》
최삼용이가 약간 사팔뜨기의 눈을 치켜가며 옷을 먼저 주어 입자
《가만! 들어보자. 뉘집에서 나는가구.》
성묵이가 마치 촉각 예민한 쪽제비가 굴속에서 나와 동정살피듯이 목을 빼들고 마을쪽을 살핀다.
《박진사네 댁이다!》
박기호가 동글스럼한 얼굴에 웃음꽃을 확 피우면서 틀리면 제 손바닥에다 장을 지지란다.
《옳아, 옳다야! 그 집의 따님이 내내 병으루 말썽이잖니. 그걸 떼보자구 무당불러 굿하는모양이다.》
서기학(徐夔學)역시 알아맞힌다.
《무당이 병을 떼?.... 힝.》
성묵은 힝 콧방구를 뀌였다.
《그걸 누가알어, 가서 박진사하고 물어보려무나.》
박기호가 하는 소린데 최삼용이가 팔을 내젓는다.
《무당 병고치구 안고치구 상관할거 뭐냐. 빨리 가보기나 하자! 우리야 무당년이 지랄춤추는거나 구경하면 돼.》
애들은 옷을 주어 입고는 마을을 향해 장달음을 놓았다.
마을복판에 자리잡은 큰집이 박진사댁이다. 기와이영을 떠인 집이 아니 랄 뿐 툇마루까지 딸린 팔간초옥이요 이 마을서는 제일괜찮게 산다는 집이다. 식솔로는 현유 80순이 넘는 로모(老母)에다 환갑이 지난 박진사내외하고 임오년에 <폭동군>남편이 청군에 피살되는 통에 과부로 돼버려 의지가지 할 곳 없으니 친정이라 찾아 온 큰딸과 지난해에 이름모를 급병에 덕대같으던 남편을 덜렁 떼워 또 하나의 청상과부로 돼버린 둘째 딸, 그리고 위인이 똑똑치 못한건 아니건만 왜선지 나이 설흔이 다 되도록 장가갈 념을 안하고있는 아들해서 여섯인데 지금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것은 서기학의 말과 같이 박진사가 큰딸의 병을 떼보려고 벌린 노릇이였다. 그녀는 남편을 잃은 후 지지 잘자라던 아들을 이름모를 급병에 잃는바람에 억이 막혀 말도 못하고 실신을 하더니 그만 정신이 들락날락하기 시작한건데 이제는 페인이 다 된거나 다름없다. 그래도 부모로서는 그 꼴을 그냥 내쳐두고 볼 수는 없는지라 치료가 되리라는 방법이면 다해보는 판이다.
저것이 주문이라는 걸가. 마귀도 더위만은 참지를 못하겠던지 방문들을 다 열어놓은 집안에서 50대의 녀무당이 애들은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를 련방 중얼대면서 마치 풍을 일구듯 눈알을 희번득거리며 신바람나게 돌아치고 있었다.
한참 그러던 중 급기야 판은 엉뚱하게 번져지고만다. 방 중간에 고스란히 앉아 꼼짝않고있던 병자가 어찌된 일인지 갑작스레 벌떡 일어나더니만 밖으로 달려나왔던거다. 그러니 무당도 뒷따라나오면서 손에 든 그놈의 귀신북을 그냥 흔들어 댄다. 그런데 이건 또 웬 일이냐, 의례 오솝서리 돌아서거나 아니면 얌전해져야 할 환자가 힛죽힛죽 웃음을 흘리더니만 제사 신명이 나는지 얼싸좋다 덩달아 너펄너펄 춤을 춰대기 시작한다. 그래서 모여든 구경꾼들이 죽겠다고 웃는데 누군가는 배꼽이 튀여나온다고 아부재기까지 쳐서 박진사네 무당굿은 그만 웃음거리로 판을 내고말았다.
금동리는 돌팔이의사도 없는 마을이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집집이 웬간한 병은 자약을 해서 고치는 전래의 습성이 이어져 사망이 그리 많지 않고 애나 어른이나 거개 무병히 자랐다.
애들은 공부를 열심히 했다. 금동리가 호수는 비록 60여호밖에 안되는 작은 마을이지만도 서당은 선지가 대단히 오래서 린근의 여러마을 중 제일 앞선 편이였다. 훈장이 15대째 바뀌였다고 한다. 환갑이 지난 유생(儒生) 배창식(裵昌植)이 훈장이 되여 한학(漢學)을 배워준것만도 40여년. 외지에서 부러 그한테 배우러 찾아 오는 학생도 년년이 끊기지를 않고있으니 일개 시골서당치고는 어느정도 품위를 갖춘 셈이겠다.
한데 코페르니스크가 지전설(地轉說)을 내놓은 것이 16세기요 그 학설이 조선에 들어와 소개된 지도 한세기가 지났건만도 조선에는 아직도 태고 천황씨 이래의 하늘은 둥글고 땅은네모졌다는 따위의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을 고집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늙은 유생 배창식이도 그 류형에 속했다. 그는 제가 사고하는 방식대로 학생을 엄하게 가르치고있었는데 재래의 고루하고 따분한 교학방법에 따르는것이 애들에겐 그야말로 고역이나 다름없었다.
어느날 경성에서 와 고모집에 있으면서 공부하는 성묵이가 글을 외우다 말고 꺼벅꺼벅 고개방아를 찧어댔다.
훈장께 들키면 회초리맛을 보기 첩경이건만 하도 졸음이 오니 견디지를 못하겠던 모양이다.
기학이가 옆에서 선생의 눈치를 봐가며 옆구리를 쿡 쿡 찔렀다.
한데도 성묵은 정신차리지 못한다.
놀려서 잠을 깨게 하는 수밖에.
《견수야 계사신, 구불학 갈위인?(犬守夜 鷄司晨 苟不學 葛爲人?)》
기학이 한마디 던지자
저켠에서 박기호가 뒤를 이어 놀려준다.
《잠토사 봉양밀, 인불학 불여물. (蠶吐絲 蜂釀密 人不學 不如物)》
《와 하하하!...》
애들이 그만 왁작 웃음통을 텃쳣다.
그제야 성묵이는 정신을 펄쩍 차리며 잠을 깨는데 웬 웃음인지를 몰라 두 눈을 데룩거린다. 그 모양이 우수워 애들이 또 한바탕 폭소.
두 친구가 겪끔내기로 엮어댄 건 <삼자경>에 있는 글귀였데 그 뜻인즉.
개는 밤을 지키고 닭은 새벽을 알리거늘
사람이 배우지 않고서야 어찌 사람노릇하리요?
누에는 실을 뽑고 벌은 꿀을 빚거늘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짐승만 못하도다.
뒤늦게야 놀림 당한 것을 깨달은 성묵이는 낯이 벌개나면서 씨근거렸다. 하학하면 어디보자 내가 네녀석들의 대갈통을 하나하나 다 까부시고 말테다고 땅벼락같이 벼르면서. 하지만 크게 을러메기만했지 정작 하학해서는 코를 벌름거리다가 씩 웃어버리고 마는 그였다. 독불장군이라 혼자 완력을 써봤자 소용없다는걸 아니까.
금희동마을의 서당도 다른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천자문(千字文)>, <사략초권(史略初卷)>, <동몽선습(童蒙先習)> 이 세권을 소학과목으로 설치를 해놓았는데 지력이 같지 않다보니 그걸 3년이 돼야 다 배워내는 애도 있고 2년 지어는 1년내에 다 배워내는 애도 있었다. 기학(夔學)이는 늘 앞서고 있었다. 그는 그 세과목을 언녕 다 떼고나서는 벌써 지난해의 초부터는 <명심보감(明心寶鑑)>에 들어갔다. 동갑넷중에 지력에 제일 차한 애는 최삼용이였다. 그는 난 크면 장사꾼이 될란다, 이깟걸 열심히 배워선 뭘해 가감승제나 할줄 알면 단걸갖구서 하면서 게으른 소 장기끌 듯이 서당공부를 억지로 하고 있었다.
기학(夔學)이 입학하던 날 서당훈장은 <천자문>을 주면서 글자마다 보배로운 말귀로다 너희들은 게을리 말고 잘 배워 입신양명(立身揚名)을 하거라 했다. 기학(夔學)이는 과연 훈장의 그 말씀을 명기하고 지금까지도 배움에 게을리하지 않은건데 계선(繼善)이니 천명(天命)이니 권학(勸學)이니 치가(治家)니....제목만도 무려 24가지요, 저그만치 163토막이나 되게 꾸며진 그놈의 장문(長文)을 얼음판에 표주박밀 듯 줄줄 외우자니 아닌게아니라 벅찼다. 그 혼자만이 아니였다. 초달에 매여있는 서당생도는 다가 선생의 <오륜전비기언해(五輪全備記諺解)>를 귀담아 듣고 면양같이 길들여져야했으니 이것이 조선의 실태였다.
명심보감(明心寶鑑)을 한 벌 다 훑고나서 어린 기학(夔學)이는 생각에 잠겼다. 우리도 제 글이 있는데 선생은 왜 그걸 소용없다면서 넓적글(漢字)만 읽으라는가?...아직 한글이라는 말이 생겨나지도 않았다. 국문(國文)을 흔히들 <언문>아니면 <반절(半切)>이라 했다. 세종대왕은 위대하신 분이다. 그이가 그래 소용없는 글을 창제했단말인가? <암클>이면 뭐라나, 알아둠이 랑패없지. 남들이야 뭐라건간에 나는 그것을 공부할테다. 기학(夔學)이는 이러면서 짬짬이 자학(自學)을 해서 그것을 읽히고말았다. 알고보니 세상배우기쉬운게 제 나라의 글이였다.
한데 훈장이 이 일을 알고 마뜩잖아할줄이야!
어느날 그가 기학(夔學)이를 앞으로 불러내였다.
《듣자니 너 지금 암클에 정신팔렸다며? 그래 내가 배워준건 대체 어느만큼이나 알고 그러는거냐?....문제를 하나 낼테니 어디 답해보거라. 만약 제대로 못하면 알겠지?...》
그의 손에는 벌써 회초리가 쥐여져 있었다.
《자, 옛다. '높다'는 뜻의 글자를 써보거라.》
기학(夔學)이는 훈장이 주는 붓을 받아 말없이 먹즙을 찍으면서 감태같이 까만 눈을 깜짝거리더니 종이에다 큼직하게《堯》자 하나를 써놓았다.
《아니, 네가?!....》
성묵이가 낯을 찡그렸다.
《왜 그걸 쓰니? 그게 무슨잔데?》
《요자다, 요임금 요자도 모르니?》
《건데?....넌 응당 높을 고(高)자를 써야잖아?》
《이 글자도 뜻은 높다는거야.》
훈장은 빙그레 웃음지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네라! 그럼 얘야, 이번에는 어디 멀다는 뜻이 되는 글자 더 써보거라.》
《선생님, 제가 이미 쓰지 않았습니까. 요(堯)자는 높다는 뜻도 되고 멀다는 뜻도 되지요.》
《옳다, 네말이 맞네라! 헌데 애야, 넌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옥편을 봤어요.》
《오, 그래? 넌 옥편까지 외자구드는구나!》
허연 턱수염을 내리쓰는 훈장의 주름간 얼굴에는 대견해 하는 빛이 역연(歷然)했다.
기학(夔學)이는 총명이 과인해 이때부터 마을사람들께 신동(神童)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한데 풍파없는 시골서당이라 해서 배움의 길이 순조롭기만한것은 아니였다. 여러해나 내내 글을 배워주던 선생이 어느날 갑자기 병상에 눕게 되였다. 하여 서당은 부득불 문을 닫게 되었다.
지겹게 공부에 매달려있던 애들이 얼싸좋다고 뜀질을 했다. 물론 기학(夔學)이도 례외는 아니였다. 하지만 그는 놀아도 어벌통크게 “옥편”마저 떼려했다.
《에ㅡ참. 이걸.....》
그가 하루는 철렁거리는 머리태가 거치장스러워 짜증냈다.
큰할아버지 서장록(徐長彔)은 그모양을 보고 몹시 노여워했다.
《네 이놈! 음질은 왜 쓰는거냐? 그게 그리두 민망스러우냐? 알아둬, 네 몸뚱이허구 네 머리카락은 네 목숨과 같이 부모가 준거야. 그리해서 세상 제일 귀중한건데 네가 그걸 미워하다니 원. 음ㅡ》
《잘못했어요, 할아버지.》
기학(夔學)은 비는 수밖에 없었다.
큰할아버지는 그제야 노염이 풀리는 양 말이 없더니 정주간에있는 안해를 불러 들어오라 해놓고는 전혀 예상못한 문제를 불쑥 내놓는것이였다.
《네가 이젠 셈이 들었으니 대사를 치러야겠구나. 이미 정해놓은 혼처도 있겠다....》
《할아버지! 전 이제 금방 여덟살이예요. 할아버진 저보구 뭐랬어요. 늘 학업에 열중해 가정을 빛내거라 하시지 않았어요?. 소년이로 학난성(少年易老 學難成), 일촌광음 불가경(一寸光陰 不可輕)이라 했어요. 그게 무슨소린가구요? 소년은 늙기쉬우나 학문은 이루기 어렵네라, 순간 순간의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는거죠.》
《또 무슨 말이 있느냐. 있거든 어디 해보거라.》
《정말 그리하랍니까. 그럼 한마디 더하죠. 미각지당 춘초몽(味覺池塘 春草夢). 계전오엽 이춘성(階前梧葉 而春聲)》
《됐다, 뙜어. 그만해라!》
큰할아버지는 손자가 알아도 듣지 못할 말을 번지는지라 손사래를 쳤다.
할머니가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 물어왔다.
《이런거죠. 연못가의 봄풀이 채 꿈을 깨기전에 게단 앞 오동나무잎이 가을을 알린다. 무슨 뜻이겠나요. 때를 놓치지 말고 배우라는 거죠. 한데두 날 장가가라면 그래 글은 어느 세월에 배우랍니까?》
손자의 입에서 이런 오돌찬 말이 나올줄을 전혀몰랐던 두 내외는 그만 말구멍이 막히고말았다.
한마을에 사는 유생 채항곡의 귀동딸 희연(姬燕)이가 두집간에 언녕 정해놓은 기학의 색시감이였는데 나이 동갑인 그가 서기학(徐夔學)이와는 손꿈놀이때부터 아기자기한 사이였다. 하니까 둘이 천생배필이 아인가싶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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