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http://www.zoglo.net/blog/jinsongzhu 블로그홈 | 로그인
<< 2월 2025 >>
      1
2345678
9101112131415
16171819202122
232425262728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나의카테고리 : 장편《반도의 혈》

半島의 血 제1부 3.
2012년 09월 12일 00시 02분  조회:3284  추천:0  작성자: 김송죽
 

  3.

 

   저기 북쪽 백두산머리에 떠이고 있는 천지에서 떨어지는 한 줄기의 맑은 폭포수가 산아래 기슭의 소에 모여서는 방향을 남으로 잡고 흐르는데 이 한갈래의 맑은 물이 다른 여러갈래의 작은 골물과 합쳐서 나중에는 도도한 압록강을 이룬다. 이 압록강은 수백리의 심산계곡을 소리내며 흘러 내려오다가 조선의 함경도(현재 량강도)땅에서 북쪽으로 흘러드는 허천강(虛川江)과 합쳐서는 갑자기 방향을 서쪽으로 꺾어 흐르고 있는데 이 두 강의 합수목에서 얼마안되는 거리에 혜산(惠山)이 있다.

    혜산(惠山)은 자그마한 읍(邑)에 불과하지만 산수좋고 공기맑아 살기좋은 곳이다. 북쪽에 압록강을 끼고있는데 여기서 압록강은 사람이 걸어서도 건널수 있었다. 강건너편 중국 마을에서 개짖는 소리도 들을수 있고 닭울음소리도 다 들을수 있다. 이러한 혜산(惠山)에는 조선의 조종산이 되는 백두산을 향해 하늘제를 올리는 제천당(祭天堂)이 있는것이다. 옛적부터 나라에서는 제관을 파견하여 여기서 제를 지내군했었다.

   하늘제를 올리는 그 제천당주변 석판에는 다음과 같은 시구(時句)가 새겨져 있다.   

    

           (六月雪色白頭而雲霧)

           눈쌓인 유월의 백두산에 운무가 감돌고

           (萬古流聲水 鴨綠而洶湧)              

           만고에 흐름이 끊지 않는 압록강은 용솟음치도다.  

   

   어느 문객의 필끝에서 흘러나온건지 한번다시 읆미해 볼만한 글이다. 혜산 주민들은 백두산이 가깝거니와 제천단이 있고 절묘한 이 시구(詩句)가 있음을 자랑으로 삼고있었다. 

    지겨운 한해가 지나가고 새해가 돌아왔다.

    성품이 순후한 헤산의 백성들은 새해에 무사하기를 하늘에 빌었다. 그러나 그네들의 기원과는 다르게 이 해에 재난이 덥치였다. 지난해 6월에 청나라 도적떼가 갑산, 단천까지 가서 살인하고 략탈을 하더니만 올 4월에는 가까운 혜산에 달려들어서 또 한번 세인이 공노할 그따위 만행을 저지르고 달아난 것이다. 

   청나라 도적떼가 혜산을 습격한 소문이 퍼지자 온 나라가 들끓었다. 

  《우린 왜 되놈의 도적떼 하나 막아내지 못해 욕을 봐야 하느냐?》

   이제 12살, 어른이 되자면 아직 아득한 나이의 기학(夔學)이였건만 청나라도적떼가 올해도 국경넘어와 행패부리고 달아났다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이 아파났다. 제 나라의 무고한 백성들이 남한테 그저 당하기만 하는 처참한 꼴을 보고있는 그는 두고보아라 내가 크면 이제 장군되어 군사를 몰고가 네놈들을 씨알머리리도 안남게 깡그리 없애버고말테다고 벼르었다.

  《얘야 기억하거라. 우리 利川徐氏 가문에도 의젓한 장군이 났었네라. 바로 서희라는. 너는 그 서희의 35대손이 되네라.》(阿干公 35세손)

   언젠가 아버지 서재원(徐在源)이 말한것을 가슴깊이 새겨두고있는 그였다. 서희(徐熙)는 고려태조(高麗太祖) 25년(942)에 출생하여 목종원년(穆宗元年ㅡ998)에 병사할때까지 56년간의 짧디짧은 생애였지만 벼슬길에 올라 지모가 출중한 정치가로 외교가로 활약한 력사인물이다. 고려 성종(成宗) 12년 즉 서기 993년, 당시 거란(契丹)이 고려에 침입하였을적에 서희(徐熙)는 중군사(中軍史)로서 적영(敵營)에 들어가 적장 소손녕(蕭遜寧)을 직접 만나 그와 담판을 벌려 결국 유리한 강화를 맺고 돌아왔던 것이다. 고려공신(功臣)이였던 그의 시호는 장위(章威)다.

    高麗史 券94 列傳을 보면 그의 아버지 서필(徐弼)은 성격이 엄격하고 강직하였다. 희(熙)의 할아버지 서신일(徐神逸)이 어느날 화살을 맞고 쫓기는 사슴을 살려주었더니 그날밤 꿈에 한 신이 나타나서 감사하여 말하기를 나의 아들이 너 때문에 목숨구했으니 이에 보답키 위해 너의 자손은 대대로 재상(宰相)이 될것이라 하였다 한다. 이리하여 신일은 80에 필(弼)을 낳고 필(弼)이 희(熙)를 낳고 희(熙)가 눌(訥)을 낳았는데 이 4대가 전부 벼슬이 재상(宰相)에 이르었다.   

   서기학(徐夔學)이는 나이 어리지만 자기는 이같이 명가(名家)의 후예임을 자랑으로 삼으면서 꼭 나라의 동량지재(棟梁之材)로 되리라 맘먹고 있었다. 

 

   7월초순의 어느날, 전해에 금동리에 왔다 간 그 의문의 신비스런 청년이 문득 다시나타났다. 그가 나타나자 마을 사람들은 또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번처럼 형세가 험하게 번져지지 않았다. 이렇게 되는데는 최풍헌(崔風憲)이 처사를 잘했기 때문이다.

   최풍헌을 놓고 보면 이 마을에서는 권위자요 그래서 웃어른의 취급을 받고있는 사람인데 그가 경원에 갔다가 거기서 우연히 전해에 왔다간 젊은이를  만나서 그를 청한거다. 그저 청한게 아니라 귀인으로 각근히 모셨다.

   동네사람들이 처음에는 그의 처사가 리해되지 않아 머리를 저었다.

   그럴줄을 알고있은 최풍헌은 마을사람들앞에서 진지하게 설명했다.      

  《다들 보다싶히 요즘은 노규선생이 몸이 불편해 누웠소. 그렇다해서 학교가 그냥 문을 닫아 학생이 학업을 중단케 헐수야 없잖어. 그래 림시루라도 맡아서 배워줄 사람을 찾게 된건데 마침 이 젊은이가 왔길래 내가 청한거요. 성명은 김호, 지식이 대단하니 꼭 잘 가르치리라 믿소. 일후 모두들 김호선생님이라 불러야 하고 존대하기를 바라오.》

    늙은유생 몇이 반대곡을 부르느라 입방아를 찧다말았다. 한편 따분한 구식교육에 매이여 지겹게 보내던 학생들은 한결같이 그를 환영했다.

   《네가 서기학이라는 애냐?》

    김호가 마을의 학교를 잠시맡아 교단에 오른 첫날이였다. 기학(夔學)이가 그를 선생님이라며 인사하니 저쪽은 반가운 기색을 띠면서 물는것이였다.

  《예! 제가 서기학입니다, 선생님.》

  《전해에 왔을적 네가 날 찾아왔더라며. 그런일이 있었느냐?》

  《예, 선생님. 저하구 친구들이 같이요.》

  《무슨일에 날 찾았니?》

  《우린 갑신정변에 대해서 똑똑히 알구펐던겁니다.》

  《성공못하고 실패를 해서 그렇지 그게 잘못된건 아니였네라.》

   김호선는 이렇게 말해놓고나서 눈을 감고 무언가를 조용히 사색했다.

   기학이는 이윽고 입을 열어 침묵을 깼다.

  《선생님, 물어도 될까요?》

  《뭘 말이냐? 물어보거라.》

  《왜놈은 왜 우리 나라에 들어왔나요?》

  《도와주느라 들어왔지.》

  《정부일을 란폭하게 간섭한다던데요?》

  《거야 조선이 너무도 쇄국책을 쓰고있으니까 그러는게지.》

  《그렇다면 문열어 맘대로 들어오게해서 그네들이 제멋대로 짓을 피우게 해야하는가요?》

  《넌 어쩜 눈은 있어도 망울이 없는 애같구나.》

  《그래요. 선생님이 그렇게 볼수도 있지요. 난 이제야 어섯눈을 떳으니까.》

  《아니다. 난 너를 그렇게는 보지 않네라.》

  《선생님. 왜놈이건 되놈이건 제 땅 아닌 남의 나라에 들어와서 감놓아라 배놓아라 하는건 정말 꼴불견이얘요.》

  《그럴거다. 네 심정을 내가 알만하네라. 건데 얘야. 알아두거라. 일본인이 조선에 들어와 활개는 친다지만은 지금 그토록 도에 넘치는 막짓은 하지 않네라. 내가 좀 더 설명해줄테니 넌.....》

  《선생님, 말씀하세요.》

   기학의 짐작이 맞았다. 새로 모신 김호선생은 개화파를 두둔하고 있었다.

  《나라개혁은 해야겠는데 청국이 전적으로 수구파들의 뒤를 바래주지. 그래서 개화파는 부득히 일본의 힘을 빌지 않을 수 없게 됐던거네라. 주로는 국정개혁에 필요한... 네가 내 말을 알아들을만하냐?》

  《말씀하세요. 그래서요?》

  《국정개혁을 할려면 자금이 있어야 할게 아니냐. 그래말이다 필요한 자금조달과 일단 유사시에는 일본군한테 왕궁보위를 맡기자는것이였네라.》

  《꼭 그렇게 해야만했던가요?》

  《그렇지. 사세부득하니 할 수 없는 일이였네라. 개혁을 하자면 어쨌든 걸림돌이 되고있는 사대당을 타도해놓고 봐야했지.》

  《저봐요, 선생님! 잠간만!.... 그래서 그네들이 사람을 죽였는가요?》

  《죽였지. 변이 생기던 날 밤에 좌영사 이조윤이 하고 후영사 윤태준이 그리구 전영사 한규직이 밀모를 하고서는 청국병영에 통지를 할려다가 그만 발각이 돼서 후당에 끌려가 목숨을 잃고말았네라. 그리구 입시를 하는 보국 민태호, 조녕하, 민영목이도 잡아서 죽여버렸네라. 그래야 정권을 잡지. 안그러구는... 보거라, 조선보다 뒤떨어졌던 일본도 명치유신을 겪고나서 지금은 동양의 강국으로 돼가고있지를 않느냐. 조선도 일본을 본받아 개혁을 해야 하네라. 개혁을 안하면 나라는 결국 쇠망하는 꼴이 되고말 것이다.》

  《그런가요!》

   선생의 말씀에 깊이 심취된 기학(夔學)은 머리를 주억거렸다. 이제는 좀 깨도가 있게된 그였다.

   최풍헌이가 좋다고 청해온 김호선생은 나이가 스믈다섯, 여지껏 가정도 이루지 않은 단신이라는데 김노규선생처럼 뭣보담도 력사와 지리를 더 중시했다. 장차 자라서 제나라를 바르게 운전해나갈 국민이 되자면 례의니 문서니 하는데만 매달려 신경을 쇄약하게 만들것이 아니라 그런것들을 더 잘 알아둬야 쓸모가 있다고 가르치는것이였다.

   그의 그 가르침이 기학(夔學)의 구미에도 맞는것이였다.

  《회녕이 어디에 붙었는지 아는가?》

   어느날 김호선생이 조선암사지도를 한 장 그려갖고 와서 학생들보고 짚으라 했다. 함경도에서 북쪽으로 두만강과 가까운 경원, 농안과 그 곁의 금동, 그리고 앞동네 농포, 안원, 동림은 척척 짚는데 회녕은 짚지를 못했다.

  《어서 짚어보거라, 회녕이 어디냐?》

   선생이 집요한 투로 다시물었다.

  《웃쪽에 있습니다.》

  《아닙니다, 서쪽에 있습니다.》

  《아닙니다, 남쪽에 있습니다.》

   대답들이 중구남방이였다. 고향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 회녕을 모르는 학생들이였으니 제 나라의 력사를 알면 얼마나알가?.

   김호선생은 자기가 그려온 그 암사지도에다 서쪽에서 흘러온 두만강이 남에서 흘러온 회녕천(會寧川)과 합쳐져 방향을 북쪽으로 갑작스레 꺾고있는 바로 그 합수목에다 동그라미를 그려 이것이 회녕(會寧)이다 표기해놓고나서 말했다.

  《임진란 때에 가또 기요가마사가 이곳까지 점령했다가 결국은 조선의병한테 격패당한건데....회령에는 그때의 칠의사대첩비가 있었지.》

   성묵이가 머리를 찌붓거리더니 벌떡 일어나 물었다.

  《선생님, 있었지요라니? 그럼 지금은 비석이 없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그 비석은 일본으로 옮겨졌지. 지금 도꾜 박물관에.》

   학생들은 일본사람이 무슨 권리로 남의 땅에 세워놓은 비석은 가져갔느냐, 그건 그렇고 그걸 주기는 왜 줬느냐고 떠들었다.

   김호선생은 거기에 대해 해석하지 않았다. 그 내막은 자기도 잘 모르니  해석해줄수 없다는 것이였다. 그러나 한가지, 일본은 옛적부터 조선을 침략하자는 야심을 품어왔으니 그점을 의례 빼놓지 말고 언급해야할것이다. 그런데 김호선생은 거기에 대해서 아직 말하지 않고 있었다. 임진왜란ㅡ 그것이 이제는 까마아득히 지나간 옛일로 돼버렸지만 부모들이 얘기해줘서 조선의 아이들은 상세히는 몰라도 그 실질은 거의나 알고있었던 것이였다.    

   기학(夔學)은 이제 김호선선생님한테 물어 상세히 알아두리라 맘먹었다.

   이러던 차 박기호가 제기했다.

  《선생님, 지금 비석이 없어도 세웠던 자리야 있겠지요. 그거라도 한번 가봅시다. 우린  여적지 회녕엘 못가봤습니다.》

   이 말이 나오자 성묵이나 기학(夔學)이는 물론 다른 여러애들도 겪끔내기로 가보자고 들고일어났다.

   이렇게 되어 전교 32명학생중 5명이 옷과 신발이 안된다고 빠지고는 27명 학생이 어느날 선생을 따라서 회녕(會寧)구경을 떠나게 된 것이다.

   그들이 보게는 회녕은 경원과 크기가 비슷했다.

   칠의사대첩비(七義士大捷碑)는 안보이고 그 자리에 남은건 쓸모없는 석재(石材)뿐이라서 스산했다. 그래 모두 두만강이나 구경하자했다. 서쪽에서 흘러오다가 북으로 도라진 여기의 두만강은 금희동의 거기에 비해 폭이 절반쯤이나 되나마나한데 건너편은 첩첩 산이였다. 기슭에 농가 대여섯호있고 풀을 뜯는 소떼와 염소도 가끔보였다. 발가숭이애들이 목강을 하고있는데 수심이 그리깊지 않고 얕아보였다. 그래서 아마 옛날부터 여기는 밀수군이 많이 넘나들었던 모양이다.

  《선생님, 임진왜란이 어떻게 되어 일어났는지 거기에 대해 좀 상세히 얘기해줄 수 없겠습니까?》

   기학(夔學)이가 마침내 제의했다.

   김호선생은 그러지 하고 그의 제의를 선선히 받았다.

   애들은 자리잡고 앉아 김호선생이 하는 얘기에 귀를 기우렸다.

  《지금으로부터 3백여년을 거슬러 올라가 1592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그해에 <가도입명(假途入明)> 즉 명나라에 들어가고저 길을 빌려한다는 국서를 내여 조선에 보냈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명나라와의 관계를 더 중히 여겼기에 그 요구를 거부하였던겁니다. 그래서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그해 4월에.... 》

  《그래서 우리 나라로 쳐들어왔다 그거겠죠? 선생님, 그런데 그때 침략해온 사무라이 수는 얼마나 되였습니까?》

   누군가 조급스레 캐물어서 김호선생은 하던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조선땅에 진입한 일본군은 16만명이되였노라고 알려주었다. 

  《선생님, 명나라로 가기 위해 길을 빌려달라는거야 구실이였지요. 그자의 본심이야 우리 나라를 침략하자는게 아니였습니까?》

   기학(夔學)이가 이같이 찍어 말하니 김호선생은 글쎄하고 애매한 대답을 한다. 그래서 기학(夔學)은 속으로 아니 왜 저러나 하면서 그의 얼굴을 다시쳐다봤다. 김호선생의 가르침은 그가 바라는것과는 다르게 어딘가 모호했던 것이다.

   확실히 그러했다. 김호는 조선사람이면 자손만대 내려가면서 전하려고 하는 제 민족의 그 참혹한 수난의 력사를 명확히 가르쳐주지 않았다. 왜서일가? 몰라서일가? 실은 그런것이 아니였다. 그건 그로서의 사정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사람이였던 것이다. 

   애들 모두가 알고자 하는 사실의 진상은 이러했다.

   혼란을 평정하고 국내를 통일한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일본의 새 지도자로 되자 더 나아가 조선과 명나라를 정복하려는 야심을 먹었다. 당시 일본본토와 조선사이에 있는 섬 쓰시마(對馬島)의 번주로서 쓰시마를 지배하는 소씨(宗氏)가문이 조선과 일본의 교류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있었는데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그 소씨에게 <<조선은 도요도미에게 복종하고, 명나라 정복의 선두에 서라, 그리고 조선임금은 즉시 사신을 일본에 보내라.>>는 요구를 조선에 전하라고 지시했던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그 요구를 받아줄리 만무라는것을 알고있은 소씨는 그의 지시를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새 일본국왕이 되었으니 친선통신사를 파견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으로 내용을 바꾸었다. 한데 그런 요청마저도 조선이 거절할줄이야! 조선은  그러다가 거듭되는 극심스러운 요청에 못이겨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두해전인 1590년에 일본에 통신사(通信使)를 파견하였다. 사절의 목적은 물론 도요도미의 전국통일을 축하하는것이였다. 그러나 도요도미는 조선이 자신에게 복속을 승인한것이라 스스로 여겨 <<조선군은 일본군을 위해 명나라정복의 선발대가 되라>>는 <<정명향도(征明嚮導)>>를 요구하는 국서를 냈던것이다. 조선이 만약 이 국서를 본다면 불복할것은 물론 량국간에 전쟁이 일어날것이 빤하기에 쓰시마의 번주 소씨는 정명향도를 가도입명으로 바꿔치기를 하여  조선과 협상을 하였던것이다. 이러는 사이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전쟁준비를 다그쳤다.

   한편 일본에 파견되였던 사절이 돌아와서 일본은 조선을 침략할 징후가 보인다고 보고했다. 그랬건만 경각성이 무디였던 조선의 조정에서는 그를 믿지 않으면서 마비상태에서 일본을 대처할 준비도 하지 않은것이다....        

  《선생님, 그놈이 여기까지 들어왔단말입니까?》

   박기호가 물었다.

   김호선생은 머리를 가볍게 젓고나서 알려주었다.

  《도요도미가 이 회녕까지 들어왔는지는 력사에 기재가 없어 모르겠지만  그의 선봉장이던 가또 기요마사가 여기기까지 북상한것만은 분명하지.》  

   도요도미니 고시니니 가또니 구로다니 하는 적장들의 이름과 행실과 일본군의 만행에 대하여, 거북선을 만들어 해전에 사용함으로써 위국전쟁에 탁월한 공훈을 세운 리순신을 비롯하여 신입, 휴정, 곽재우, 고경명, 권률 등 장군과 리정암의병장 그리고 고승 서산대사와 사명당에 대하여, 기생 논개와 월선에 대하여, 일본군으로서 그때의 싸움은 명분없는 전쟁이라는것을 깨닫고 조선에 투항하여 일본군과 싸운 사무라이 사야카에 대하여...  3백년이 지낫건만 지금도 항간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생겨난 력사일화가 많이 전해지고있어서 그것을 알고있는  애들이 적지 않았다.

  《가또 기요마사라면 정유재란때도 선봉장질을 한 살인마가 아녀?  그자는 략탈을 수많이 감행한 대악한이였단다.》

   어느 애가 이 말을 해서 그때 조선사람이 당한 참혹상이 떠오른 기학(夔學)은 김호선생과 물었다. 

  《선생님, 제가 보기엔 선생님도 개화사상을 갖고있는것 같은데 일본에 가보셨습니까?》

  《건 왜 나하구 물는거냐?》

   김호선생은 조금 놀래는 빛이더니 의아쩍어하면서 되물었다.

  이에 기학(夔學)이가 말했다.

  《일본땅에 우리 조선사람의 코무덤이 있다는 말을 제가 들은적있어서 그럽니다. 선생님, 과연 그렇습니까?》  

  《있긴있는데 코무덤아니구 그건 귀무덤이지.》

   하면서 김호선생은 당돌한 질문을 들이대는 아이를 심각한 기색으로 다시금 찬찬히 눈여겨보는것이였다.

   코무덤이건 귀무덤이건 그것은 일본군이 저지른 만악의 죄증이였다.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당시 저항의 최대거점이였던 전라도를 전멸시키라했다. 그리하여 정유재란때 전라도 남원성 전투와 충청도 지역 전투때 일본군은 그곳 주민들의 코베기에 혈안이 되어 날뛰였던것이다. 그자들은 산 사람이건 죽은 사람이건, 병사건 백성이건 가리지 않았느바 여성, 아이, 로인에 이르기까지도 마구 닥치는대로 코를 베여 수집하여 그것으로 전공을 나타냈던 것이다. 일본군 감찰관은 병사들이 잘라온 코의 수를 증명하느라 코수령증을 발행하였는데 그 통계만도 10여만개가 넘었던 것이다.

   인피를 쓰고서는 감히 하지 못할 그런 귀축같은 만행을 일본군이 했으니 그야말로 지천(地天) 치를 떨고 대노할 일이였다.

 

  <<적병은 무릇 우리 나라 사람을 붙잡기만하면 코를 베여 위세를 보였다.>>  

 

   당시 조선의 재상이였던 유성룡이 남긴《징비록》에 적혀있는 글이다.

   

  역사상 이 전쟁처럼 슬픈것은 없다. 병사들이 가는곳마다 살육을 일삼고 불을 지르니 그 연기가 마을마다 가득하였다. 조선 사람의  머리와 코를 대바구니에 담으니 대바구니가 가득했고 병사들은 모두 피투성이가 된 바구니를 허리춤에 달고 싸웠다.

   

    그 일을 분코의 지방 우스키의 안요사(일본 규수 지방 오이타현의 우스키 지방의 절) 주지였던 승려 교넨(慶念)은 《조선일일기》에다 이같이 더 상세히 적어놓았다.

   

   1597년 9월 28일에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조선에서 모아 보내온 코를 묻어서 분묘를 만들고 코무덤이라 이름지었다. 그런것을 그 후 그가 죽자 새 통치자를 섬긴 유학자 하야시 라잔(林羅山)이 코무덤(鼻塚)의 잔인함에 고민하다가 그 비석을 귀무덤(耳塚)으로 이름을 바꾼것이다.  

    조선은 명(明)나라때부터 중국의 번속으로서 조공(朝貢)에 근실하여왔으며 일본과 함께 동해에 처해있었다.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16만대군을 몰고 조선에 침입한것은 명나라 만력(萬曆)년간이였는데 전국 팔도(八道)를 유린하여 조선이 거의 망하게 되었다. 명나라는 자국의 병력을 총동원하였으나 조선을 구원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죽어 전쟁을 중지하고 철병하게돼서야 팔도는 다시 조선인민의 소유로 될수있었던겄이다. 1598년에 가서야! 장장 7여녀간의 싸움이였다!

  《기학이는 뭘 그리 생각하는가?》

   김호선생이 머리를 수굿하고있는 기학(夔學)이를 향해 묻자 기학(夔學)은 고개를 번쩍 들고 응대했다.

  《우린 왜 남한테 당하기만하느냐 하는걸 생각하고있었습니다.》

  《그래서?》

  《손자(孫子)가 말하기를 <론어(論語)에 나라를 다스림에는 충족한 병력이 있어야 한다>고 했답니다.》

  《그것뿐인가?》

  《또 있습니다. 사마법(司馬法)은 <남을 함부로 죽이는 자 있으면 나는 그 자를 가히 죽일 수 있는 것이다>고 했답니다. 우리도 군사력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지를 않으면 장차 아무 때건 또 남의 유린을 당하게 될겁니다, 바로 임진란때 처럼.》

   나어린 일개 서당생도의 입에서 예상치 않은 이런 말이 튀여나오는지라 김호선생은 아니 네가 어쩌면 하고 놀래는 낯빛으로 그를 다시다시 본다.   

   촌아이의 궁리마저 이러한데 국방력을 자래우지 않고 있는 량반의 나라 조선은 지금 무슨꼴이 돼가고있는가?

 

   <<오호라, 과인은 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십구년간이나 위에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좋은 정치를 못해서 백성들의 죄가 모두 과인의 한몸에 모여든 것을 아노라. 이제 후회한들 소용있으랴. 과인이 즉위한 이래 토목공사를 일으키여 백성의 재물을 거두어 빈곤케한것도 과인의 죄요, 그동안 여러번 돈을 바꾼것도 과인의 죄요, 서원을 철페한것도 과인의 죄요, 신기한 물건을 끌어들여 아무에게나 상을 준것도 과인의 죄요, 미신을 과신하여 돈을 랑비한것도 과인의 죄요, 사람을 잘못 쓴것이나 궁중을 단속치 못한것도 과인의 죄요, 뢰물을 공행케 한것이나 창고가 비게 한것도 과인의 죄요, 각국과 련합하여 백성들을 의심케 한것이나 변고가 자주일어나 백성들이 고생한것이나 린국에 신용을 잃게 하고 천하에 웃음거리를 사게 한것도 모두다 과인의 죄다. 후로는 이런 점에 류의하여 정사에 정력하겠노라.>>

 

   이것은 1882년 7월 20일ㅡ굴욕적인 《제물포조약》을 체결하고나서 사흘만에 국왕 고종이 자기의 과실을 자책하여 전국에 반포한 륜음이다. 반성이 얼마나 심각한가!

   10년이 된다. 하건만 나아진 것이란 하나도 보이지를 않고 나라꼴은 점점 더 흉하게만 변해가니 대체 무슨일인가?

 

   지난 한해만도 4월에 제주도에 민란,     

                 5월에 평안도지방민 만주로 도망하는자가 10만,

                 6월에 청나라도적들이 갑산, 단천에서 략탈,

                 8월에 일본어선 제주도에서 백성들에게 폭행,

                 동월 고성에서 민란,

                 10월에는 평산민(平山民) 향리(鄕吏)의 포학을 진정했다.

   올해는 어떤가?

                 3월에 함흥, 덕원에서 민란,

                 4월에 청나라도적 혜산진을 습격,

                 5월에 한오수교조약 일본 도오꾜오에서 조인.

    

    국사라 찾아볼수 있는건 조약을 맺았다는 그 하나뿐. 닭이면 둥구리에서 알이나 낳을 것이다. 국왕은 궁궐에 들어앉아 대체 이 세월을 뭐로 알고 보내는가?... 방방곡곡에서 원성이 자자하니 래일이 암담 할 뿐이였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88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68 반도의 혈 제1부 12. 2012-09-16 0 3641
67 半島의 血 제1부 11. 2012-09-16 0 3720
66 반도의 혈 제1부 10. 2012-09-13 0 3489
65 반도의 혈 제1부 9. 2012-09-13 0 3965
64 반도의 혈 제1부 8. 2012-09-13 0 3771
63 半島의 血 제1부 7. 2012-09-13 0 3517
62 半島의 血 제1부 6. 2012-09-13 1 3699
61 半島의 血 제1부 5. 2012-09-12 0 3503
60 半島의 血 제1부 4. 2012-09-12 0 3211
59 半島의 血 제1부 3. 2012-09-12 0 3284
58 半島의 血 제1부 2. 2012-09-11 0 3467
57 半島의 血 제1부 1. 2012-09-11 0 3745
56 한마디로 말해 백포종사 서일(白圃宗師 徐一)은 2012-08-26 0 3138
55 대하역사소설 半島의 血 부록 1. 일본내각총리대신 하라타카시 에게 보낸 편지 2012-08-09 1 4179
54 사론발췌 2012-07-09 0 4437
53 반도의 혈 제3부 26. 2012-07-09 0 4109
52 반도의 혈 제3부 25. 2012-07-09 0 3238
51 반도의 혈 제3부 24. 2012-07-09 0 3576
50 반도의 혈 제3부 23. 2012-07-09 0 3648
49 반도의 혈 제3부 22. 2012-07-09 0 3756
‹처음  이전 1 2 3 4 5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