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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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장편《반도의 혈》

반도의 혈 제3부 24.
2012년 07월 09일 22시 36분  조회:3577  추천:0  작성자: 김송죽
 

24.

 

   2만여명 적가운데서 청산리지역으로 침입한것이 5,000여명으로 추계, 이를 상대로 하여 서일은 김좌진 현천묵 등과 함께 북로군정서를 이끌고 새 근거지를 창설코저 장백산밀림으로 가던 도중 청사에 길이빛날 청산리회전을 치룬것이다.

 

   그때의 독립군의 병력을 종합하면 북로군정서 약 600명, 대한독립군 약 300명, 대한국민회의 국민군 약 250명, 의군부 약 150명, 한민회 약 200명, 광복단 200명, 의민단 약 100명, 신민단 약 200명으로서 도합 2,000여명밖에 안되였다.

   일제 “토벌군”이 삼도구상촌에 도착하기 전날인 10월 10일이였다. 이날 묘령(廟嶺)에서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 련합부대의 수뇌들은 련합회의를 열고 간도에 침입한 일제토벌군과 회전 등을 론의했다.

   군정서의 간부로 위장침투하여 활동했던 한 일본군의 첩자는 이 회의내용과 결말을 탐지하여 다음과 같이 저의 상부에 보고했다.

 

   <<일본군대가 삼도구 충신장 상촌에 도착하기 전일 제2차로 묘령에서 현천묵, 계화, 이범석, 안무, 이학근, 홍범도, 박녕희 등 군정서측 및 홍범도측의 수뇌가 회합하여 일본군 대응책에 대하여 토의하였다. 전투할것인가 회피할것인가 량파의 의논이 백출하였으나 결국 현천묵 등이 주장하는 다음의 론지에 기초하여 당분간 일본군의 공세를 회피할것을 결의하였다. 훈춘사변에 의하여 드디여 일본군대가 출동하여 아작전(我作戰)에 장애를 가져온것이 심대하다. 이에 간도에서 일본군대와 교전하면 그 승패는 미지수에 속할지라도 그 때문에 지나측의 감정을 해하고 일본측은 다대의 병원을 증파하기에 이를것이다. 아단체는 실로 내외독립의 과아(瓜牙)로서 역시 광복의 명아이다. 분전의 호기는 멀지 않았다. 시하 자중을 요한다.>>

 

   그런데 독립군의 피전책(避全策)은 내외정세를 감안하여 세우는 전략이였지 결코 독립전쟁을 늦추거나 포기하려는것은 아니였다.

   10월 12일과 13일에 북로군정서의 600여명의 정예병력과 100명가량의 보충대병력은 청산리부근에 도착하여 포진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그들이 기관총 4정, 신식군총 500정, 수류탄 1,000개 그리고 마차 약 20량분량의 탄환을 갖추고있음을 탐지하고 있었다.

 

   총사령 김좌진은 병력이 려행대장 라중소와 중대장 이범석이 인솔한 사관졸업생 중심의 약 300명의 려행단과 자기가 직접 인솔하는 본대로 나뉘여져있었던것을 회전직전에 다음과 같이 그 편제를 개편하여 격전을 치르게 되었다.

 

   사령부사령관ㅡ 김좌진

   참모장ㅡ 라중소

   부관ㅡ 박녕희

   련성대장ㅡ 이범석

   종군대장ㅡ 이민화, 김 훈, 백종렬, 한건원

   대대장서리(제2중대장)ㅡ 홍충희

   제1중대장서리ㅡ 강화린

   제2중대장ㅡ 홍충희

   제3중대장ㅡ 김찬수

   제4중대장ㅡ 오상세

   대대부관ㅡ 김옥련

   소대장ㅡ 신희경, 강승경, 채 춘, 김병하, 이허구, 정면수, 김동변

   소대장서리ㅡ 이운강

   기관총대 소대장서리ㅡ 김덕선, 최린걸

   제1중대 특무정사ㅡ 라성원

   제2중대 특무전사ㅡ 권중생

 

   김좌진이 사령관으로 참모부하와 련성대를 거느리는 사령부를 두고 그밑에 홍충희를 대대장서리로 하는 1개 대대로 재편성했다. 그리고 그 대대를 4개중대와 1개의 기관총소대로 편성하였던 것이다.

   김좌진은 높고도 힘찬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백만발의 탄환을 쓸 때는 인제야 돌아왔다! 원한과 치욕을 씻어버리자!》

   가슴속에서 복수의 불길이 타오르고있는 전사들은 앙양된 투지로 격전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1920년 10월 18일.

   가을날씨는 음침하고 스산했다. 청산리골어구를 향해 행진하고있던 북로군정서는 오후 4시경에 저쪽 끝없이 펼쳐진 벌판에서 장사진을 이룬 대렬이 구불구불 움직이고있는것을 발견했다. 적군이였다.

   여러병종으로 편성된 이 부대는 아쯔마 마사이꼬 륙군소장의 수하 야스가와소좌가 이끌고있는데 그들도 독립군을 발견한 것이다.

   두 대오사이의 거리는 약 10여리. 북로군정서는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려고 급보로 전진했다.

   김좌진은 전위대를 이끌고있는 련성대장 이범석더러 빨리 송림평(松林坪)북방고지를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면서 적이 만약 불의습격을 한다면 그 유리한 지세를 리용하여 적을 타격한 다음 인차 급행군하여 청산리어구로 오라고 했다.

   대오는 해질녘에 송림평마을에 이르렀다.

   김좌진총사령은 충신장부근에 가서 적정을 감시하던 정찰병의 보고를 받았다.

  《적들은 보병, 기병, 포병, 공병으로 구성된 혼합부대임. 병력은 약 한 개 려단. 아군의 정황을 몰라서 진군을 멈추고 충신장에 주둔중임. 적의 전위부대는 충신장남쪽 칠리지점인 맹가장부근에 머물고 경계선을 포치하였음.》

  《음ㅡ 됐어!》

   김좌진은 적이 추격을 멈춘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곧 회의를 열어 작전계획을 세웠다. 송림평고지앞의 개활지에 오른 적을 타격할수는 있지만 자칫하면 우세한 적의 포위에 들수 있는것이다. 그러니 이곳에서는 싸움을 벌리지 말아야 한다. 싸움에 승산이 있자면 반드시 깊은 골안으로 적을 유인한 후 유리한 지세를 리용해 그를 타격해야 하는 것이다.

   김좌진은 친히 자기의 검정말을 잡아타고 진위대가 머믈고있는 송림평마을로 달려갔다.

   송림평마을의 어른들은 이때 독립군을 위로한다면서 소 한 마리를 잡아서 한창 고기를 끓이고있는 판이였다.

   마을에 다달은 김좌진은 즉각 군사들을 집합시켜놓고 명령했다.

  《룡정을 떠난 왜군이 우리를 소탕하려고 바싹 뒤따라오고있다. 전원은 당장 이곳을 떠날것!》

   마을사람들은 끓고있는 소고기도 대접시키지 못하고 자기의 자제병들을 떠나보내는 것이 안타까와 만류했다.

  《여기서 기다렸다가 싸우면 안됩니까?》

  《잠깐만 더 기다려 익은 소고기나 자시구 가시우다.》

   김좌진은 그들의 지성에 감사함을 거듭표시하고나서 사세가 너무급해 막부득이하다, 사정이 이러한것 만큼 일각의 유예도 없이 자리를 떠나야한다, 여기서 싸우면 무고한 백성들이 화를 입게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때가 밤 2시였다. 그는 송림평마을에는 늟은 로인만 몇분 남기고는 주민들까지 데리고 급히떠났다. 그러면서 남아있는 늙은이들 보고 일본군이 마을에 오면 독립군은 무장장비가 형편없고 사기도 없어서 군대같지도 않다고 말하라 시키였다.

   한편 김좌진은 또 이곳 지형에 익숙한 사냥군 몇에게 이도구와 무산으로 통하는 큰길을 정찰하게 했다. 

   10월 20일 부대가 청산리골안에서 행군을 계속하고있는데 새벽 3시경에 후위에서 적기병정찰이 나타났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오후. 사냥군과 정찰병의 보고가 들어왔다. 이도구의 적들은 봉밀구로 후퇴하고 있으며 무산으로해서 두만강을 건너온 적 한 개 부대는 바로 개가장쪽으로 전진해오고있는데 지금 적들은 삼면으로 청산리를 포위하여 독립군을 섬멸할 작정이라는 것이였다.

    이때 북로군정서는 계획대로 보병 3분의 2와 가족들을 포함한 비전투인원으로 편성된 제1대는  서일이 이끄는 사령부를 따라서 이미 전투장에서 멀리 에 있었고 사관졸업생을 전투원으로 한 제2대  만이 전투준비를 한 것이다.

 

   이때 송림평에서 늙은이들로부터 독립군의 형편을 들은 일본군은 자신만만히 청산리골로 깊숙이 따라 들어오고있었다.

   청산리는 함북도북쪽에 자리잡은 삼도구(충신장. 지금의 화룡진)로부터 시작되는 장장 60리의 장곡으로서 그안에는 대진창, 송평리, 청산리(평양촌), 싸리밭골 등 몇 개의 자그마한 마을들이 띠염띠염 자리잡고 있었다.

   삼도구에서 서남방향으로 20여키로메터 되는 곳에 청산리마을이 있고 그 마을에서 10여km 더 들어가면 백운평이라는 자그마한 마을이 있다. 이곳은 해란강의 상류지역이다. 그래서 골짜기로 올라갈수록 수량도 적어져 어떤데는 너비가 불과 2메터좌우밖에 안되는 개천이여서 능히 건너뛸수 있었다.

   이 백운평에서 개울을 따라 약 2키로메터가량 더 올라가면 베개봉(증봉산)이 있는데 그 산의 동쪽밑에 직소(直沼 )라 불리우는 자그마한 공지가 있다. 복멸전을 벌리기에 이 이상 좋은 곳이 있을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김좌진은 이곳에서 적을 섬멸하기로 마음먹었다.

   여기 골짜기 좌우량켠은 톺아오르기 힘든 산이고 골짜기가 어찌나 좁은지 불과 20m~30m 되나마나하고 넓은곳이래야 40m~50m밖에 안되므로 여기로 들어온 적군이 일단 습격만 받으면 전투대형같은것은 펼칠수도 없는 곳이였다.

   만원경을 손에 쥔 김좌진은 말우에서 신심어린 미소를 지었다.

   아, 얼마나 리상적인 지형인가!

   청산리쪽에 위치한 이도구방면의 밀림지대는 북간도의 조선인 이주지역의 요지인 룡정에서 두도구와 이도구를 거쳐 백리지점에 위치한 어랑촌을 위시해서 갑산촌, 천수평, 봉밀구 등의 여러촌락이 점재한 장곡의 심산지대였다.

   청산리와 이도구의 밀림지대는 서남쪽으로는 안도현의 험준한 지대를 지나 백두산을, 북쪽으로는 천보산을 각각 배경으로 하고있으며 또한 서쪽으로는 장백산맥에 둘러싸여있기에 오직 한면만 열려있는 동남쪽의 두도구와 룡정방면의 방어만 잘하면 족한 요새였다.

   김좌진은 서일총재와 가끔 군사를 론하군했었다. 손자병법(孫子兵法)에 이르기를 이른바 성지(聖智)란 성스러운 슬기를 말하는 것이요 성지(聖智)한 사람은 병력을 사용함에 평시에는 준비를 잘했다가 필요시에만 출동하는 것이다. 부득한 정황이 아니고는 나가 싸우지를 않는다고 했다.

   지금이 바로 그런 형세였다.  

   지휘자는 적과 싸움을 함에 형세를 자기 원칙에 유리하게 만들고 령활기변(靈活機變)하며 전장(戰場)에 주동권을 잡아야 한다.

   개전(開戰)하기 전에 싸워서 얼마든 이길 것 같으면 그것은 계획이 주밀하고 승리할수 있는 조건이 충분하다는 것을 말함이요, 개전(開戰)하기 전에 싸워도 이길것 같지 않으면 그것은 계획이 주밀치 못하고 승리할 조건도 모자람을 말하는 것이다. 계획이 주밀하고 조건이 구비됐으면 싸워 이길것이요, 계획이 주밀치 못하고 조건도 안되면 싸워도 이기지를 못할건데 하믈며 계획도 조건도 없으면야?... 이 점을 잘 알아두면 승부는 명백해지는 것이다.

   김좌진은 발아래 펼쳐진 좁은 골짜기와 맞은켠 산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추격하고있는 적들은 기필코 이 참대통같은데를 지날것이다. 적이 미처 방비못하는 곳을 공격해야 한다. 그러면서 적이 미처 생각못할 때 행동해야 한다. 

   김좌진은 곁에 나란히 서있는 이범석을 보며 말했다.   

  《여봐, 리군! 전투는 벌써 우리들의 승리일세. 아직도 이 만주의 지형에는 깜깜인 놈들은 여기 이 밀림과 수풀속에 독립군이 숨어서 총끝을 제 이마빼기에 겨누는걸 어찌 알기나 하겠소.》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로 여기서 꺼들거리는 그놈들을 일망타진해 조선사람의 본때를 보입시다!》

   이범석역시 자신만만해하였다.

   김좌진은 이제 20살밖에 안되는 이 전도유망한 어린 장군의 예지로 빛나는 눈을 보면서 승리심을 갖고 머리를 끄덕이였다.

   이범석은 1900년에 태여난 서울청년이다. 그는 1915년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1919년에 운남륙군강무학교 기병과를 졸업하고 곧추 만주로 달려온 것이다.

 

   하늘이 미워한다 배달민족의

   자유를 억탈하는 왜적놈들을

   삼천리 강산에서 열혈이 끓어

   분연히 일어나는 우리 독립군...

 

   그는 어느결에 이번의 청산리전투를 맞으면서 “기전사가(祈戰死歌)”를 지어 불렀다. 전사들은 이 노래를 따라부르면서 목숨바쳐 싸워 성결한 전사로 되리라 결심했다.

   이번의 전투는 선두부대만 참가했다.

   작전포치가 곧 있었다. 이범석은 이민화 소속부대와 한건원 소속중대를 거느리고 우익의 동쪽산을 맡고 김좌진은 김훈 소속중대와 다른 한 중대를 거느리고 정면과 서쪽산을 맡았다.

   600여명의 독립군전사들은 명령이 내리자 10m씩 간격을 두고 삽시에 세쪽산의 요소에 빙둘러 매복했다. 기관총과 박격포들도 자리를 잡았다.

   밤이 되었다. 여름도 아닌 늦가을의 밤기온은 너무 차거웠다. 쥐죽은 듯 고요한 산간에 이따금 산짐승의 울음소리 처량한데 싸늘한 한기는 전사들이 입고있는 얇은 여름옷을 사정없이 꿰뚫고 들어와 뼈속까지 스며들었다. 이럴 때 전사들은 모닥불을 얼마나 그리웠으랴. 하건만 담뱃불 하나도 비쳐서는 안되는 적막속에서 오직 때가 돌아오기만 기다려야 할 뿐 자리를 비워도 안되였다.

   시간은 각일각 흘렀다. 사냥개같이 약은 왜적은 언제나 나타나려는지 쪼각달마저 사라진 골짜기는 앞이 아른아른 겨우겨우 보일 정도였다.

   이때 김좌진장군은 나어린 강위곁에 있었다.

  《아, 추워라.》

   강위가 혼자소리로 내지르는 말을 듣고 장군은 가랑잎을 모아 덮어주었다.

  《총사령님, 인젠 따스해요.》

   강위는 가만히 있더니 몸이 가랑잎에 묻히자 어린애같이 기뻐했다. 그리고는 입을 다시열어 물었다.

  《총사령님, 오늘이 중구날이지요?》

  《그렇지.》

  《중구날이면 우리 고향 남도는 따뜻하겠네요. 거겐 제 누이동생이 있어요.》

  《이름이 뭔데?》

  《계순이라해요. 아직은 어린애죠. 전 걔를 숙부집에 맡겨놓고 왔는데요... 인젠 우리 집 식구는 나하구 걔뿐입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다 돌아가셔서.》

   이 애처럼 부모잃고 참군한 젊은이가 한둘 아니였다. 언제면 독립연에 한자리에 모여놓고 맛좋은 명절음식을 즐겁게 먹여줄가. 이시각 장군은 그가 유달리 측은하면서 생각이 깊어졌다.

   이윽고 강위는 잠이 들었는지 코고는 소리났다.

   장군은 허리를 펴고 일어서서 사방을 휘둘러 보았다. 먼동이 트고있는 대지는 희끗희끗했다.

   바로 이때였다. 전초에 나가있던 척후병이 그의 앞으로 달려와 헐떡이면서 보고했다.  

  《총사령님, 보고합니다! 네시사십분 현재, 전선 약 오마장의 지점에 왜적 약 2,000명이 나타났습니다. 그자들은 지금 이쪽을 향하여 행진중! 대렬의 길이는 약 한키로반쯤 되며 선두에는 기병대가 섯습니다.》

  《뭐라?! 리대장에게는 알렸는가?》

  《예, 알렸습니다! 오는 길에 보고했습니다.》

  《음. 됐어!》

   척후병이 물러가기도전에 김좌진은 왼편에 있는 제일높은 닭볏바위에 올라가 휘뿌연 새벽빛속에 잠긴 백운평쪽을 바라보았다.

   아닌게아니라 거기로부터 꿈틀거리면서 이 산협을 향해 박근하고있는 길다란 적군의 대렬이 눈에 띄였다.

   장군은 바위에서 뛰여내리면서 웨치였다.

  《주의!》

   독립군들은 일제히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총을 거머쥐였다.

   한편 가까이로 온 적의 척후병은 가끔 허리굽혀 말똥을 주어서는 온도를 재보면서 종적을 감춰버린 독립군의 행방을 탐지하였다.

   적 전위의 지휘자가 나타났다. 중성 한알을 박은 야스가와소장이였다. 종개수염을 기른 그는 노루장갑을 낀 오른손에 만원경을 쥐였고 왼손으로는 군도자루를 잡고있었다. 적토마를 탄 그는 가슴을 오만스레 내밀기는 했어도 그 어떤 좋잖은 예감이 드는지 조심스레 전진했다.

   적들이 입은 군복은 독립군이 입은것과 거의비슷한 떡갈나무색이였다. 그래서 야스가와가 이끄는 이 전위부대는 흡사 한 마리의 거대한 독사같아보였다.

   1분, 2분, 3분, 4분...

   적의 길다란 행렬은 마침내 독립군이 매복하고있는 자모양의 매복권내에 완전히 들어오고말았다.

  《땅!》

   이범석대장이 쏜 신호총소리가 울리자 사격개시를 알리는 나팔소리 새벽의 고요를 깨뜨렸다.

   원쑤들을 잔뜩 노리고있었던 소총, 기관총, 박격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어 요란한 작렬소리는 심곡을 메우면서 일대 수라장을 만들어놓았다.

   야스가와소좌는 첫방에 고꾸라져버렸다. 지휘자를 잃은 적대렬은 단통 혼란에 빠지였다. 공포에 광란하는 말들의 울부짖음소리와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뒤엉키여 아비규환의 지옥같이 떨고있는 골짜기로 복수의 명중탄이 우박같이 쏟아졌다. 이리하여 불과 반시간이 되나마나하는 사이 멋모르고 기어들었던 적의 제73련대의 선발대 200명은 하나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몽땅 전멸되고말았다. 이때 일본군은 1인당 거의나 5발이상 독립군의 총탄을 맞고 쓰러진 것이다.

   독립군들은 만세를 부르면서 뛰여나가 전리품을 수습해가지고 제자리에 돌아왔다.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던것이다. 한시간이 채안되여 일본군의 주력부대가 다가왔다. 허나 적은 저들의 전위부대가 몰살된 꼴을 보고는 분별없이 막 뛰여들지 않았다.

   적들은 병력우세를 믿고는 매개중대를 밀집종대로 무어 계단식돌격을 하면서 기관총과 박격포로 맹사격을 해댔다.

   전투가 한창 치렬하게 벌어지고있을 때 총지휘부로부터 세가지 명령이 전해왔다.

   (1) 봉오구로부터 우회하던 적이 약 한시간후에 백운평에 도착하게 된다. 본군의 퇴로가 차단될 위험이 있으니 즉시 이도구방면으로 철거할 것.

   (2) 제2대는 여전히 원 진지에서 저항하되 제1대가 포위선을 벗어난 다음 기회를 보아 철거할 것.

   (3) 제2대는 래일새벽 2시전까지 이곳에서 160리 떨어진 갑산촌에 반드시 도착할 것.

   이때가 바로 정오경이였는데 섬멸전으로부터 방어전으로 넘어간 제2대는 기를 쓰고 달려드는 적군과 점점 힘겹게 싸우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윽해서 마침내 제1대가 이미 청산리를 벗어났다는 보고가 날아왔다. 그래서 제2대도 한근원의 한 개 중대만 남아 계속 엄호하도록하고 그 외는 모두 철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적들은 이런줄을 모르고 계속 부대를 동원해 남북 량측으로부터 백운평을 향해 진공해왔다.

   어느덧 늦가을의 짧은 해가 얼굴을 감추어버렸다. 그러자 수목이 우거진 골안은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엄호를 책임졌던 한근원의 중대는 남과 북 량측의 적이 서로 접전할수 있는 거리까지 진격해오자 저희들기리 맛불질을 하도록 불을 달아놓고는 감쪽같이 철거해버렸다. 청산리골안에서는 총소리, 포소리에 진감했다. 적아도 가리지 못한 일본군은 저희들끼리 결사적으로 싸워댔다. 이같은 극적인 장면이 벌어진데는 이때 독립군이 입은 옷의 색깔이 일본 군복과 흡사한데에 원인이 있기도했다. 그래서 일본군은 저희들끼리 기를 쓰고 죽이기를 했으니 자상자가 많이 생겨난 것이다. 이날이 바로 10월 21일이였다.     

   한편 여기를 떠난 독립군은 곧 밤새 행군을 강행하여 21일새벽 천수동(泉水洞)에 도착하였는데 이때 척후가 일본군기병 40여 명이 근처에 머믈고있다고 보고하자 곧 독립군 80명이 사방을 포위하고 공격하여 4명을 제외한 그 기병대를 전멸했다.

   이 싸움에서 독립군은 적정에 관한 귀중한 자료를 얻었으니 그것은 일본군 중대장이  대장에게 보내는 보고서였다.

   <<19사단사령부는 어랑촌에 주둔해 있고 島田중대가 천수평으로 온것은 이도구의 경비를 擔當하기 위함이다.>>

   이는 아군이 적에게 괴멸당할 위기에서 구출될 수 있는 천행(天幸)의 정보였다. 적의 작전계획을 안 독립군은 즉시 분초를 다투어 어랑촌으로 이동했다. 

   한편 달아난 4명의 보고를 받은 어랑촌주둔 일본군은 곧 보병 2개 대대, 기병 1개 중대, 포병 1개 중대를 출동시켰다.

   그러나 일본군보다 한 발 앞서 독립군은 어랑촌 서남쪽 전방고지를 점령하여 전투준비를 완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의 독립군은 일본군과 병력을 비교하면 무려 10대 1의 열세였는바 무장장비도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오전 9시부터 전투가 개시되였다. 최인걸(崔麟杰)이 지휘하는 기관총중대는 산위로 기여오르는 적을 격퇴시켰거니와 어랑촌뒤쪽의 삼림으로부터 공격하여 오는 적도 성공적으로 격퇴시켰다.

   이날의 전투는 몹시 치렬하였다. 김좌진사령관의 모자가 포탄에 날아났고 이범석대장의 지휘도가 적탄에 두동강나기도 했다. 오전부터 밤까지 계속된 이 전투에서 누구보다 눈물겨운 활동을 한것은 부근에 살고있던 동포백성들이였다.

   그들은 총탄이 비명을 내지르면서 날아다니는 속에서도 주먹밥을 날라다 전사들의 입에 넣어주었고 부상자들을 업어나르고 치료했으며 수류탄을 던져 적과 대항하기도했던 것이다. 기관총중대장 최인걸(崔麟杰)은 철수하는 독립군을 끝까지 엄호하느라 자기의 몸에 기관총좌를 묶고 돌진하다가 장렬히 희생되였다.

   한편 산위에 있던 1개소대의 40여명 독립군도 모두 장렬히 희생된 것이다.

   그러나 적의 피해는 더 말할것 없었다.

   22일 북쪽으로 이동하던 독립군은 맹개골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10여명을 사살하였으며 만녹구(萬鹿溝)에서도 일군 30여명을 사살하였다.

   23일 산림속에서 휴식을 하고있을 때 일본군포병 1백여명이 지나는 것을 공격하여 이를 전멸시켰다.

  《승리만세!》

  《승리만세!》

   10월 20일부터 23일까지 10여차례의 전투가 청산리대첩이라 일컬어지은 것이다.

   련속 참패만 거듭한 일본군은 전사자의 시체마저 미처 처리못해 목만 잘라가는 형편이였으니 그 참상이야 다시 말해 무엇하랴.

   

   상해에서 발간되는 <<독립신문>> 1921년 1월 18일자에는 일군사살 연대장 1, 대대장 2, 기타 1,254명이라하였고 같은신문 제91호, 즉 1921년 1월 21일자에는 <<김좌진씨 부하 600명과 홍범도씨 부하 300명은 대소전투 10여회에 왜병을 격살한자 1,200명중 적이 자상사살한자 400명>>이라고 청산리대첩을 기술했다.

   <<독립신문>>은 이어서 1921년 2월 25일자에 북로군정서총재 서일이 상해임시정부에 보낸 일본침략군참패와 독립군부대의 승전원인을 분석한 글을 실었다.

                          적의 실패리유

   (1) 병가에서 제일 꺼리는 것은 적을 경시하는 것인데 심산협곡을 별로 수색도 없이, 경계도 없이 맹진(盲進)하다가 항상 일부 혹은 전부의 함몰(陷沒)을 당함이며

   (2) 국지전(局地戰)에 대한 경험과 연구가 부족하여 삼림과 산지중에서 종종의 자상(自相)충돌을 당함이며

   (3) 그들 군인의 염전심(厭戰心)과 피사도생(避死逃生)하는 비겁심이 극도에 달하여 군기가 문란하며 사법(射法)이 부정(不精)하여 1발의 효과가 없는 란사(亂射)를 행할뿐이다.

 

                           아군의 전승(全勝)리유

   (1) 생명을 불구하고 분용(奮勇) 결투하는 독립에 대한 군인정신이 먼저 적의 지기(志氣)를 압도함이요.

   (2) 량호한 진지를 선점(先占)하고 완전한 준비로 사격성능을 극도 발휘함이요

   (3) 응기수변(應機隨變)의 전술과 예민(銳敏), 신속한 활동이 모두 적의 의표(意表)에 출함이다.

 

   전반의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은 련대장 1명, 대대장 2명을 포함하여 전사자와 부상자가 무려 3,300여명인데 비하여 독립군측은 전사자 60명과 부상자 90여명에 달하였다.

   이번의 청산리회전에서 나어린 전사 강위도 희생되였다.

 

        산에 나는 까마귀야 사체보고 우지마라

        몸은비록 죽었으나 독립정신 살아있다

        만리장천 외로운 몸 부모형제 다 버리고

        홀로 섯는 나무밑에 힘도 없이 쓰러졌네  

 

   독립군에서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보귀한 청춘과 생명을 바친 렬사들을 추모하여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한편 청산리회전소식은 재빨리 전국, 나아가서는 세계에 까지 퍼졌다. 일본신문들에서까지도 커다란 편폭으로 청산리회전에 대한 보도를 실었다. 일본군사당국도 참패를 승인하면서 훗날 청산리골에다 <<초혼비(招魂碑)>>를 세웠다. 거기에 새겨진 비문은 이러했다.

 

   <<대정 9년 10월 대일본군이 조선인부랑배를 토벌하였던 전역에서 전몰한 영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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