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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半島의 血 제1부 22.
2012년 09월 24일 13시 59분  조회:4237  추천:0  작성자: 김송죽
 

22.       

 

   땅이 너르고 인구가 만다고 반드시 이기는건 아니다. 력사를 보면 약세(弱勢)해보이는 자가 강해보이는 자를 이긴 실례가 적지 않은 것이다. 일본은 땅이 넓고 인구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중국을 전승함으로써 력사에 그 실례를 유력하게 하나 더 보태였다. 전쟁을 하려하면서 그 무슨 정의는 필승이요 비정의는 필패요 하는 따위의 말은 하지도말아야 한다. 그건 다 말공부쟁이들의 기편적인 선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일본이 정의가 있어서 승리한것이 아니고 청나라가 비정의적이여서 패배한것도 아니지 않은가. 전쟁이란 그를 원하는 자의 힘과 지혜를 겨루는 악마장의 도박일뿐이다. 

  

  로씨야의 륙군대신 꾸로바트낀은 자기의 일기에다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 황제(니꼴라이2세)의 머리속에는 로씨야를 위해 만주를 탈취하고 조선을 로씨야에 귀속시키며 또 티베트(西藏)를 자국에 귀속시키며 페르샤를 탈취하려는.... 웅대한 계획이 있다.>>

   

  짜리로씨야의 이같은 식민지확장정책은 일본의 질투심을 야기시켰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감미로움과 쓰라림이 뒤섞이는 회억에 잠겼다.

 《청일전쟁은 과연 멋들어진 승리였지! 이제 로씨야와 싸워도 그 멋으로 돼야할할텐데... 헌데 로씨야, 불란서, 독일의 항의에 못배겨 나는 히로시마에서 즉각 어전회의를 개최해야했었지....3국의 요구대로 료동반도를 중국에 반환해야 했다....제 입에다 넣은 고기덩이를 되게워놓다니 원....지금도 그것을 생각만 하면 가슴이 쓰라리구나. 하긴 그 대신에 은 3,000만량을 배상금으로 더 추가하기는했지만. 이홍장은 멍청이짓을 많이 했지.》

   중국으로 놓고 보면 그때는 외교적정세가 유리하게 되였음에도 이홍장은 외교적인 활동을 할 궁리를 하지 않았다. 3국을 비롯한 국제렬강이 대소동을 일으켜 일본을 견책하였고 대만인민들도 궐기하여 자력으로 대항하였던 것이다. 만일 이홍장이 머리가 좋아 외교를 할줄 알았다면 일본이 이렇게 국제적으로 고립된 기회를 빌어 만청정부로 하여금 조약의 비준을 거절하도록 청원하거나 또는 방임해두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도 다소간이나마 리권을 만회 할 수 있었을게 아닌가. 그러나 이홍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뿐만아니라 도리여 오정방(伍廷芳)을 급히 천진에 파견하여 천진주재 일본령사를 데리고 대고(大沽)에 함께 가서 비밀히 동경에 전보를 쳐서 일본정부로 하여금 만청정부에게 조약을 교환하도록 독촉하게 하였던것이다. 마치 만청정부가 신속히 조약을 비준하지 않으면 자기가 일본에 대하여 미안하기나 한 것 처럼.

   그때 이또오 히로부미는 만청정부가 조약을 거둘까봐 얼마나 속을 졸이였던가! 대만문제를 처리하는데도 그렇다. 시모노세끼조약이 조인되기전에 벌써 대만인민들은 대만이 할양되는건 불가피한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지사(志士) 구봉갑(邱逢甲)의 발의로 민주국을 창립하고 의원(議院)을 열었으며 람색바탕에 황색범을 그린 국기를 만들고 대만국이란 명의를 내세워 저항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그같이 나오니 이홍장은 되려 황황하여 대만인민들은 이처럼 횡포하다면서 이또오 히로부미에게 《일본은 해륙 량군을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고 치안을 유지하도록 하라.》는 요청을 하였던 것이다.

    대만에는 항쟁에 나선 대만인민들로 조직된  흑기군(黑旗軍)이 있었다. 일본의 해, 륙군은 4개월이나 그 의용군을 토벌하여 무자비한 피비린 탄압을 한 끝에야 비로서 대만을 점령할수 있었다.

   정부가 부패무능하고 부실하니 별수있는가? 청일전쟁이후 중국은 완전히 반식민지적인 지위로 전락되고말았던 것이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군사가가 아니지만 적을 알고 자기를 알면 싸워서 이길수 있다는 상식쯤은 잘알고있는 사람이였다. 이제는 로씨야와 겨루기위해서 그는 로씨야와 손을 잡는 이홍장의 일거일동을 주시해왔다. 몇해전, 청일전쟁이 끝나 이듬해인 1896년 3월 8일에 이홍장은 로씨야와 가까와지려고 중국인과 외국인으로 구성된 많은 수원을 대동하고 기선으로 상해를 출발하였다.

   출발전에 그는 황준헌(黃遵憲)에게 말했다.

  《서양과 련락하여 일본을 견제하는것이 이번행차의 주요한 목적이다.》

   로씨야는 이 큰 흥정을 매우 중요시하고 전용기선을 알렉산드리야 항구에까지 보내여 그를 영접케하였다. 4월 27일에 이홍장일행은 오뎃싸에 도착했다. 로씨야정부는 륙군원수를 특파하여 그가 상륙하는 것을 영접하게하였다. 그 의식은 매우 성대하고도 정중했다. 이홍장일행은 30일에 뻬쩨르부르그에 도착하였는데 짜리로씨야는 포위정책을 써서 마침내 5월중에 중로밀약(中露密約)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던것이다.

 

   1. 중, 로량국이 만일 일본으로부터의 침범을 당하면 침범당한 것이 어느 나라임을 막론하고 중, 로 량국은 군사상에서 또는 군수품보급에 있어서 호상 원조할 것이다.

   2. 전쟁이 발생하는 경우에는 로씨야군함은 중국의 모든 항구에 들어갈수 있다.

   3. 중국은 로씨야가 흑룡강, 길림지방으로부터 철도를 련접 부설하여 울라지보스톡에 이르게(중동철도)할 것을 허락하며, 중국은 그 일을 화아도승은행에 맡겨 처리하게 한다.

 

   밀약의 중요한 조항이였다.

   일본은 로씨야와의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것을 예견하고 경제공황을 곱잡아 겪으면서도 군비를 계속적으로 확충하여 그사이 이미 상비병력 15만에다 전시병력 60만으로 하는 륙군건설과 22만톤의 함대건설을 함으로써 전쟁준비를 거의 완료한 것이다. 자신의 불패를 확보하려면 적을 격패시킬만한 그 어떠한 기회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오만한 로씨야여, 이젠 우리가 너희들을 조선땅에서 밀려나게 만들테니 어디 두고보거라!》

    이것은 이또오 히로부미의 야심적이면서 신심에 찬 부르짖음이였다.

    1903년 10월의 어느날, 망망한 일본해에 군함 60여척이 떳다. 저 북쪽 출렁이는 일본해를 가운데두고 일본렬도와 마주하고있는 로씨야, 원동지구의 그 해군기지 울라디보스톡에 로씨야함대가 정박하고 있었다. 일본은 그를 상대로 해상무력시위를 벌리는 판이다.

   해안에 사구가 발달하고 사시절 기후도 알맞춤해서 일본에서는 가장 살기좋은 현으로 지목되고 있는 이시가와현, 평화로운 이 현의 나와자와시의 시민들도 노또반도의 주민들도 이날 숱해 해변가에 나와 실전을 방불케하는 화약내풍기는 해상전투훈련을 구경하느라 시간가는줄을 몰랐다.

   일본은 청일전쟁 때 군함이 모두 55척을 소유하였었는데 그것은 약 6만 1,000톤이였다. 그나마 전투에 참가할수 있는것은 겨우 21척뿐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60여척 군함이 다 싸울수 있거니와 22만톤이나 되는 것이다. 그 속에는 이미 한차례 전쟁을 겪으면서 공을 세운  기요다, 히에이, 아까기, 다까지호, 하시다데 등 여러 군함도 끼여있고 중상을 입고도 침몰되지 않은 후소군함도 있으며 격상을 입고도 전투지휘를 끝까지 한 지휘함 마쯔시마호도 있었다.

    일본군함은 그번의 전투를 과연 멋들어지게 했다. 그 군함들은 압록강입구 대동구의 해전에서만도 처음에 중국 군함 제원호를 격침하여 그 군함의 사령 등세창을 비롯한 전체장병 250명을 몰살시켰고 이어서 치원, 경원호를 격침했으며 다음에는 초용, 양위 두 군함을 함포사격으로 명중하여 소각해버렸던 것이다. 두 군함의 사령은 바다에 빠진채 구원되지 못했고 군함에 있던 전체 장령들도 군함과 함께 불에 타 죽었다. 정원은 지휘함이였는데 통령 정녀창이 거기에 있었다. 그는 지휘대에서 전투를 지휘하면서 먼저 큰 대포로 적을 공격하였다. 이 대포는 바로 지휘대밑에 있었는바 함포가 발사하는바람에 지휘대가 흔들리면서 정녀창은 지휘대에서 굴러떨어졌다. 그는 정신을 잃고 기절하면서 얼굴에 상처를 당하고 발도 타박상을 입어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하여 부하들이 그를 부축하여 아래 함실로 데리고 가게되였는데 다시날아온 일본의 함포탄에 맞아 부축하고 가던 사람 전부가 몰살되고말았다. 이때 또 포탄 하나가 날아와 돛대를 명중했다. 돛대가 부러지자 그 밑에서 일본군함을 공격하기 위해 감시하던 7명이 다 굴러떨어졌다. 영국인 때로얼은 사격을 지휘하다가 대포소리에 고막이 터져 귀가 멀었고, 독일인 하프멘은 부상당하고 영국인 니꺼로스는 배앞머리에서 붙는 불을 끄다가 탄환을 맞고 죽었다. 그러나 장병 17명이 주검을 낸 이 배가 일본의 지휘함 마쯔시마와 다른 한 전함 후소를 격상했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함 5척이 격상당했을 뿐 침몰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우리는 이겼어! 이기구말구! 그러나 3국의 간섭으로 료동반도를 돌려준건 더없는 치욕이다. 와신상담하면서 군비를 충실히 하고 국력을 양성하였다가 기회를 타서 또다시 달려들테다!》

   그때 이또오 히로부미는 이같이 부르짖었다.

  《우리도 이만하면 강유력한 해군을 갖춘셈이다! 그러니 이제는 로씨야와 겨뤄볼만하다!》

   이번의 해상훈련을 보고 거의 모든 호전광들이 한결같이 웨치였다.

 

   1904년 2월 4일. 일본정부는 궁중에서 어전회의(御前會議)를 열고 자유행동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5일에 로씨야와 국교를 단절하였다. 그리고나서  그 다음날인 6일에는 일본함대가 려순에 있는 로씨야함대를 공격하였는바 이로하여 마침내 로일전쟁이 정식폭발하게되였던것이다.

   전날 즉 로씨야와 국교를 단절한 그 날에 근위사단을 비롯한 여러 일본부대가 ������조선림시파견대������라는 명목밑에 서울진입행동을 개시했고 6일에는 일본해에서 해전훈련을 해본 60여척의 해군함선으로 무어진 련합함대가 인천에 진입하는 한편 그 일부는 로씨야군대가 주둔하고있는 중국 려순항으로 진격했던것이다.

   인천항구에는 로씨야군함 코레쯔호와 와리야크호 두척이 있었는데 일본군함은 아무런 선전포고도 없이 돌연습격하여 일거에 그것들을 부숴버렸다. 이는 일본이 조선쟁탈에 경쟁자로 나선 로씨야를 불의에 타격을 함으로써 전쟁의 주도권을 쥐며 일본군의 조선진입에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전략적인 보취였던것이다.

   첫발을 이렇게 뗀 일본군은 아무런 저애도 받지 않고 당날로 두 번에 나뉘여 5만명이 인천에 상륙했으며 2월 9일에는 서울에 진입하였다.

   기병용 말도 1만여필이나 되었다.

  《서울시내는 우리의 군대가 덮히혔습니다. 우리는 조선정부 군대의 병실을 쓰고 공공건물 중 쓸만하것은 다 쓰고있습니다.》

   일본 사령관 하세가와가 고무라공사에게 한 보고였다.

  《그러면 해결이 되는가?》

  《그것만으로야 어립도없지요. 안됩니다. 택부족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부득불 학교까지 점령하게됩니다. 마구간이 없으니까요.》

   하세가와사령관은 보고를 일단락짓고나서 청시를 하듯이 보태였다. 병실을 짖기위해서는 농경지를 점해야 하고 백성의 살림집을 허물어 그 부지를 련병장으로 사용해야겠다는것이였다.

   일본군의 이같은 방약무위한 행위가 서울일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국 각지에 미치기시작했다. 한 것은 일본병력이 서울과 인천일대를 중심으로 해서 전국 각지에 널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일본병력은 서북부지방에 까지도 신속히 진입하고있었다. 그것은 서북조선일대에 로씨야 군대가 들어와 있었기에 일본은 경쟁자의 그 군대를 밀어내기 위함이였다.

   2월 19일 서울에서 출발한 한갈래의 부대가 3월 1일 원산에 진입했고 그보다 인원수가 많은 다른 한 갈래의 부대는 22일 서울을 떠나 3월 5일 평양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 부대는 그기간 이르는곳마다 백성의 재산을 략탈하고 부녀자들을 릉욕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완전히 야만적인 폭행이였다.

   일본 무력은 일단 평양에 진입한 후 일부는 남고 일부는 거기서 다시갈라져 나와 의주, 창성을 비롯한 서북부 국경일대까지 장악했다. 조선의 민족적 자주권은 이렇게 란폭하게 유린당하고있었다. 

 

   도오꾜오. 수상 관저.

   이또오 히로부미는 수상 가쯔라 다로오와 자기가 구상한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의 초안을 내놓고 검토하고있었다.

  《의정서의 목적이 첫째는 로씨야세력을 조선에서 몰아내기 위해 벌려놓은 이번의 로일전쟁을 승리적으로 추진시키자는것이고.....》

  《그러찮구요. 나도 응당 력점은 거기다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둘째는 복잡한 전쟁시기를 리용해서 조선을 우리들의 지배하에 넣기 위한 확고한 기초를 닦아놓자는데 있는것이요.》

  《그렇구말구. 우리 모두의 념원이 그렇게 모여진게 아닙니까. 조약초안이 멋지게 만들어졌습니다!》

   가쯔라 다로오는 두말없이 찬동을 표시했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조선정복문제의 론의에서 시종 군인출신이며 단행론을 적극 주장하고있는 이 활약적이며 고집스러운 사나이의 마음을 처음부터 사로잡고있었다.

   가쯔라 다로오는 야마가따 아리또모가 근 3년간 수상으로 있다가 자리를 내자 1901년부터 수상자리에 올라 바삐보내고 있다. 1847년도 생이니 이해에 나이 57세. 이또오 히로부미보다 6살이 지하다. 가쯔라 다로오역시 전수상 야마가따 아리또모처럼 륙군장교로서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인데 그도 메이지유신운동시 적극적인 참가자였다. 가쯔라 다로오는 23살을 먹던 해에 독일에 가 거기서 3년간 군사를 학습했고 귀국한 후에는 독일주재 공사관무관, 륙군성 군무국장 등을 력임하였고 갑오중일전쟁때에는 제3사단장으로 있었다. 전쟁이 끝나서는 대만총독으로 있었다. 그는 1898년도에 륙군상을 지내기도했었는데 군인출신이여서 그런지 굳고 고집스러우며 때로는 조급스러운 결단성이 너무강해 다른사람에게 여지를 주려하지 않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겠지만 총적으로 보아 수상의 재질을 갖춘 열정가였다.    

   가쯔라 다로오는 한일의정서초안을 보고나서 별로 첨삭할것도 없는지라 이또오 히로부미와 자기는 만프로동의라면서 함께 곧 천황을 보러 가자고 했다.

   천황역시 그것을 보고는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결국 그대로 채택된 한일의정서의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大韓皇帝陛下의 外部大臣署理 李址鎔과 大日本 帝國天皇陛下의 特命全權大使 林權助는 委任을 받아 左의 條約을 協定함.

 

   제1조  한일량국은 항구불역하는 친교를 보지하며 동양의 평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대한제국은 일본을 확신하고 시정개선에  관하여 그 충고를 용납할사.

   제2조  대일본정부는 대한국황실의 확실한 친의와 안전한 강녕을 담보할사.

   제3조  대일본정부는 대한국황실의 독립과 영토보존을 확보할사.

   제4조 제삼국의 침해 혹은 내란으로 대한국황실의 안녕보존에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일본국정부는 급속히 임기하여 필요한 조치를 행할것이요 대한정부는 대일본정부의 행동을 용이케 하기 위하여 충분한 편리를 주며 대일본정부는 전항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택하여 수용함을 득할사.

   제5조 대한국정부와 대일본정부의 상호간의 문의 승낙을 경치않고 후래에 본협정취지에 위반하는 조약을 제3국과 정립함을 불득할사.

   제6조  본협약에 관련한 미비한 세조는 대일본대표자와 외부대신간에 임기협정할것.  

   

    이것은 일본이 조선의 외교, 내정, 기타 모든 것에 간섭하려는 첫걸음이였다. 의정서에도 명시된 바와 같이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확보한다고 여러번이나 내외에 성명하였다. 그러나 내심은 딴판이였으니 그것을 감추면서 목적대로 침략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거짓소리를 해야했다. 이 조약은 실제상 일본이 한국과의 특수리해관계를 표명함으로써 신임을 얻고 제3국의 간섭을 불허(不許)하는 하나의 술책이였다. 일본은 이 조약을 체결해야만 조선의 내정과 외정(외국과의 관계를 맺기 위한 정부의 활동)에 마음대로 개입할 권리를 가질수 있는것이다.

   로일전쟁이 개시되자 로, 일 량국은 중국의 인력(人力)을 리용하면서 중국령토안에서 전쟁을 진행하려하였다. 허나 만청정부는 3월 13일에 중립을 선언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은 원래의 타산을 수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경의선철도가 수요되였다. 조선정부는 일본의 압력에 못이겨 경의선을 일본에 빌려주었다. 일본은 필요시 이 철도를 전쟁에 리용할 생각이였던 것이다....

 

   도오꾜오.

   일본정부는 어느날  중요한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 참석한 최고위수뇌들로는 수상 가쯔라 다로오와 추밀원 의장 이또오 히로부미, 육군총참모장 야마가따 아리또모와 외무대신 고무라 주다로 그리고 외무성 정무국장 주라찌 데쯔기찌로외 몇사람해서 모두 10여명이였다.

   야마가따 아리또모가 로일전쟁에 대한 현황보고를 했다. 그는 이번전쟁에 직접참가하여 지휘하는 사람으로서 자기가 장악하고있는 정황을 상세하게 구술하고나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력점을 찍어 말했다.

   《려순함락 전투는 계속되고 있다. 희생이 막중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난공불락의 요새를 꼭 짓부셔버리고말것이다. 조선림시파견대는 우리가 계획한대로 지금 재빨리 조선전부를 점령하고 있다. 조선땅에서도 이제 곧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그때가서 우리는 로씨야 군대를 몰아내게 될 것이다. 조선을 엿보고 만주에다 <황색로씨야>를 창설하려던 짜리제의 꿈은 꼭 우리손에 깨여지고 말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두고보라, 만주에 근거를 두고 우리와 조선을 쟁탈해보려는 로씨야의 기세는 우리 군대에 의하여 꺾어지고 말 것이다.》 

    가쯔라 다로오가 그의 말을 뒷받아 신심있게 보충했다.

   《우리는 화태와 극동까지도 점령하는 그날이 올것이다.》

    수상이 말했듯이 화태와 극동까지도 점령하는 것은 일본이 그려놓은 원경의 일부분이였다. 그들은 조선을 먹어버리는데 신심을 갖고있었다. 탐욕이 이정도에 이리고있으니 이네들의 위는 한정없이 늘어날것만같았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두사람이 하는 말을 기분좋게 들으면서 2년전에 일본이 영국과 동맹의 성립을 본 것은 외교상 가장 큰 성공이였음에 만족했다. 일본이 력사상 서양열국과는 첫동맹이 되는 이 조약은 외무대신 고무라 주따로가 특명전권대사로 파견되여 서명을 한 것이다. 영일량국간에 맺어진 그 조약은 로일전쟁에 대한 사전의 준비였는바 일본은 그 조약에서 영국이 로씨야를 원조못하게 하였을뿐만아니라 일본이 영국의 해군기지를 리용하여 로씨야해군의 활동을 격파할 수 있도록 규정해놓았던 것이다.

   조선의 문제를 대함에도 잘되였다.

   조약의 제1조에 다음과 같이 밝혀놓은것이다.

 

   <<량 동맹국(즉 영국과 일본)은 호상 중국과 조선의 독립을 승인한다. 만일 타국의 침략행위, 또는 중국 및 조선 량국의 내부소동으로 말미암아 동맹국의 리익이 저애를 받게되는 경우에는 량 동맹국은 필요한 수단을 취한다.>>

 

   가쯔라 다로오수상과 이또오 히로부미를 비롯한 최고위의 수뇌자들은 이번 회의에서 로씨야와 피비린 대결을 계속하면서 한편으로 조선정부를 손안에 단단히 넣기 위한 작업에 박차를 가하기로했다. 

   일은 되어가는 것 같았다.

   로일전쟁을 발동한 일본군은 이해 즉 1904년 2월 6일 려순항을 습격하여 대승리를 함으로 하여 온 국민이 미칠것 같이 기쁘게 만들었던 것이다.

   려순항에 주둔하고있던 로씨야 려순함대사령은 제 부인의 명명일무도회(命名日舞蹈會)를 열었다. 함대의 관병모두가 해군구락부에서 술을 퍼마시고 취해서 미친듯 춤추며 놀았다. 이 기회에 일본함대가 돌연히 로씨아 철갑함대에 나타났던 것이다.  

 로씨아는 전함 3척이 눈깜짝새에 침몰됨과 동시에 몇십문의 대포가 몽땅 일본군에 의하여 회멸되고 만 것이다.

 

   한데 일본군은 이러한 승리가 자석같이 조선을 끌어당기리라 여겻는데 그렇지 않았다.

   전날의 그 사람들이 다시금 한자리에 모이였다.      

  《조선의 황제는 우리 일본과 우호적으로 지내고싶은 맘이 없는 것 같습니다. 분석컨대 그 원인이라면 일본과 가까와진다면 자기의 지배권이 위태롭다고 여기고있기때문인 것 같습니다.》

   정부의 부름을 받고 조선에서 온 하야시 곤스께공사의 사업보고였다. 그는 일전에 고종을 찾아가 조, 일 두나라간에 우의를 증진할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그의 속마음을 떠보았던 것이다.

   하야시 곤스께는 고종이 지금은 어리숙하지 않아 일본에 대해 경각성을 높히고있으니 말을 인차 들어줄 것 같지 않을거라했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한일의정서는 글자 하나 문구 하나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조인하게 만들어야 한다하고나서 강조했다.

  《제2보는 조선정부로하여금 전에 로씨야와 맺은 모든 조약을 무효로 되게끔 성명을 내리게 하는것인데 제1보인 이번 작전이 만약시 그 어떤 저애로 인하여 실패하거나 지연된다면 우리는 목적한바를 이루지 못하고말것이다.》

   가쯔라 다로오도 말했다.

  《각하의 말씀이 과연 지당합니다. 우리는 수단을 다해서 이번 조약에 조인을 하게끔 만들어야합니다.》

   조선정부가 조일의정서를 받아들이는가 받아들이지 않는가하는 것은 일본이 조선을 장악하는가 못하는가에 관건이니 자못 중요했다. 한즉 실패로 돌아가게말아야 했다. 조선반도를 세계지도에서 색갈이 빨간 일본과 같게 만들어 일본렬도에 넣어버리고말자고 마음먹은지 오랜 그 꿈이 이제는 현실로 다가온다. 이 거창한 작업을 추진함에 실제상 모사(謀士)로 총지휘자로 되어 온 이또오 히로부미는 아무리해도 자기가 직접출마해야겠다고 맘먹으면서 한가지 일을 알아보았다.

   《하야시공사, 한데 조선정부내에다는 우리의 세력을 대체 얼마만큼이나 길렀는지 그걸 한번 말해보오. 내 말은 친일분자를 말이요.》

   《예, 각하! 한마디로 말씀드려서 잘되여가는 추셉니다. 학부대신 이완용은 우리가 부려먹을만한 첫인물입니다.》

   《그렇단말이지!》    

    로일전쟁이 일어난 후 가장 철저한 친로파였던 이완용이 심기일전(心機一轉)하여 이제는 친일로 탈바꿈하자 조선정부내에는 그를 중심으로 하는 친일파가 급속히 생겨난것이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이틑날 당장 조선으로 향했다.

   그는 조선에 오자마자 먼저 친일파를 리용하여 국왕의 처와 아들을 꾀이게 하는 한편 자기는 직접 고종을 배알했다.

   고종은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가 자기의 지배권을 위태롭게 한다는 것을 깨달은지라 순응하지 않는 태도로 나왔다.

   (허깨비야, 그 주제에 황제라고 틀을 차리고있는거냐.)

    이또오 히로부미는 속으로 고종을 우숩게 보고있었다. 그가 죽은 제 애비 대원군보다 성격이 강하지 못하고 취약하며 담도 크지 못하다는 것을 잘알고있는 것이다.      

   《페하는 일본을 믿고 일본과 주의와 방침을 같이하며 의정서의 취지대로 한일동맹의 열매가 맺아지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는 고종을 부드러운 말로 타이르는 한편 그가 우유부단하면서 요구를 들어주려하지 않으니 위협하기도 했다.

   《감히 동요하고 모호하게 나오면서 방침을 정하지 않는 것은 한국을 위하여 득책이 아닙니다.... 만일 그 방침을 정하지 않을 때에는 귀국에 대하여 적대적행동으로 나오지 않을수 없습니다.》

   《?!........ 》

    조선정부의 고위급관리들 중에는 "한일의정서"의 강요에 불만을 가지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근본적 주의에서 우리를 반대하니 심한 방해의 근원이 됩니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반대하는 관리들에게는 은근히 압력을 가했다.

   조선정부는 압력에 못이겨 1904년 2월 23일에 마침내 "한일의정서"에 조인하고말았다. 한일의정서 제1일조에는 대한제국은 일본을 확신하고 시정개선(施政改善)에 관하여 그 충고를 용납해야한다고 했다. 일본은 조약이 조인되자 시정개선을 한다면서 조선정부가 몇가지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했다.

   그 몇가지 요구라는 것이 아래의 여섯가지였다.

      

            1, 일본고문관을 채용할 것.

            2, 재정을 정리할 것.

            3, 일본차관을 받아들일 것.

            4, 화페제도를 개혁할 것.

            5, 군비를 축소할 것.

            6, 관리를 갈아치울 것.

 

   조선정부는 마치 코를 꿰운 송아지마냥 끄는대로 고스란히 따라야했다. 

   1904년 5월 12일, 조선정부는 로씨야정부와 맺은 모든 조약을 무효로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1904년 8월 22일에 "한일협정서(韓日協定書)"를 체결. 일본은 이를 통하여 조선정부에 고문(顧問)을 임명하여 박아넣기시작했다.

         

             재정고문ㅡ 일본대장성 주세국장 메가다.

             외교고문ㅡ 일본외무성고문인 미국인 스티븐스.

             경찰고문ㅡ 일본경시청경시 마루야마.

             궁내부고문ㅡ 조선주재 일본공사 가또.

             군부고문ㅡ 륙군중좌 노쯔. 

             학부고문ㅡ 시네하라.

 

   이리하여 일본은 조선정부의 정치를 좌우지하게 되었는데 이른바 고문정치(顧問政治)란 여기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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