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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1000권 읽기 75
2015년 02월 11일 16시 30분  조회:2039  추천:0  작성자: 죽림

 

 

741□속이 보이는 심연으로□최하림, 문학과지성시인선 107, 문학과지성사, 1991

  시에 불필요한 이미지가 거의 없고 군더더기 역시 거의 없어서 시를 쓰는 역량이 대단한 시인임을 알 수 있는 시집이다. 적당히 부푼 몸집과 주제를 뼈로 제시하지 않고 살에 담아서 제시하는 풍만함도 갖추었다. 다만 제1부에서 보이는 상실감과 고독에 반하는 정서들이 그 뒷부분에 드문드문 나타나 애써 이룬 균형감을 깨는 것이 흠이다. 이것은 다양한 삶의 정서 가운데 일부러 어느 하나를 고집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그런 방법상의 선택과 선별이 철저하게 이루어져야만 온전한 시집이 될 것이다. 게다가 개인의 내력을 다룬 뒷부분의 시들은 아주 잘 쓴 시들이지만, 체험에 매몰되어 객관성을 잃은 부분도 적지 않다. 전체의 주제에 매달려 표현이 좀 밋밋해진 것이, 단점은 아니지만, 좋은 시를 위해서는 반드시 건너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한자는 버려야 할 것이다.★★☆☆☆[4337. 8. 5.]

 

742□서울 세노야□곽재구, 문학과지성시인선 95, 문학과지성사, 1990

  1980년대의 시가 어떤 것이며, 그것이 10년밖에 안 된 지금 이토록 처참하게 무너졌는가 하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시다. 광주를 원죄로 한 지식인의 시 쓰기와 그러한 행위의 절정과 몰락의 기미를 몽땅 보여주는 1980년대 시의 한 전범이다. 요컨대 삶이 없다. 이 시집 안을 차지하고 있는 것들은 1980년대라는 정치이념으로 재구성한 허구이다. 허구가 실제로 느껴지던 때가 1980년대이다. 이웃의 아픔이 내 아픔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환상의 시대가 1980년대였다. 이웃의 아픔과 고통과 절망을 나의 그것과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던 시대의 시를 이보다 더 잘 대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독자로부터 왕따 당하는 시가 어떻게 생겨났는가 하는 것까지도 아주 잘 보여주는 시집이다.

  관념은 유행 같은 것이어서 그 유행에 빠져있는 사람은 자신의 모습이 늘 최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철만 지나면 우스워지는 것이 유행이다. 그 유행의 절정에서 한 시대를 울린 이념의 맹랑함과 시인의 진정한 리얼리티를 잃어버린 시의 운명을 본다. 시에서 개인의 삶이 빠지면 그것은 만담이거나 연설문일 뿐이다.★★☆☆☆[4337. 8. 6.]

 

743□혼자 가는 먼 집□허수경, 문학과지성시인선 118, 문학과지성사, 1992

  시간에 대한 과격한 판단과 무모한 반발이 시의 중요한 축을 이루는 시집이다. 그래서 시에는 늙음, 울음, 병, 상처 같은 것으로 가득 차게 된다. 과격하다는 건 자신의 좌절을 중심으로 시간을 재구성했다는 뜻이고, 무모한 반발이라는 건 모순을 용납할 만한 곳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가 형식을 제대로 갖추는 것조차 귀찮아하게 된 것이다. 송곳처럼 예민해진 자신의 감성과 판단으로 세계를 읽는 것이기 때문에 그 예리함만 살아있다면 다른 어설픈 수사보다 훨씬 더 좋은 효과를 낸다. 그렇기 때문에 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라는 시집을 낸 시인에게서 이런 시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둘 중의 하나는 가짜일 텐데, 그럴 만큼 처세에 능란하다는 뜻인가? 아니면 그 세월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이웃에 눈을 돌렸다고 보아야 할까? 이제는 떠나도 되는 세계일까? 그렇기 때문에 그 과격한 판단조차도 믿음이 가질 않는다. 언제든지 버리고 돌아설 수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논조를 지닌 시인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반응은 자살이다. 절망도 한자로 한다는 것이 우습다.★★★☆☆[4337. 8. 6.]

 

744□두만강 여울 소리□연변교포시인 시선집, 문학과지성시인선 113, 문학과지성사, 1991

  외국에서 언어의 정체성을 갖고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을 못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하는 것이 자신의 삶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뻔히 보이는 장애를 넘기 위해서 스스로 택하는 길이라면 그것은 시 이전에 정신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4337. 8. 6.]

 

745□서울 1992년 겨울□이세방, 문학과지성시인선 120, 문학과지성사, 1992

  불필요한 표현에 집착하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마주치고 느끼는 것들을 세심하게 그려낸 것이 아주 돋보이는 시집이다. 외국에서 생활해서 그런지 한국에서는 놓치기 쉬운 큰 문제, 예컨대 통일이라든지 민족이라든지 하는 것들까지 무리 없이 들어왔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 설명 투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에서는 설명이 들어가면 긴장이 떨어지고 함축성이 줄어든다. 수필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어디까지 설명을 해야 하고 어디까지 설명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판단을 잘 해야 한다. 마음이 급하면 설명하기 마련이다. 설명해도 안 될 것은 없지만, 설명을 하면 시는 길어진다. 길어지면 호흡이 흩어진다. 호흡이 흩어진 시는 긴장을 잃고, 긴장을 잃은 시는 늙은이의 주름살 같다.★☆☆☆☆[4337. 8. 6.]

 

746□열 손가락에 달을 달고□이준관, 문학과지성시인선 122, 문학과지성사, 1992

  남들이 보지 못하는 아주 희귀한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갖추었다. 보통 시인들한테서 보기 힘든 희귀한 아름다움이다. 그런데 시가 거칠다. 세세한 부분에서 제대로 처리를 못해서 그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키지 못하는 흠을 갖고 있다. 먼저 불필요한 부분이 너무 많다. 생략해도 좋을 그런 부분들이 거의 없는 곳이 없다. 이것은 시인이 직관한 아름다움이 기존의 세계와 너무 달라서 시인 스스로 자신만의 독창성을 언어화시키는 데 필요한 화법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것을 시인만의 어눌함이라고 강변하려 하면 스스로 대화를 중단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리고 좋은 이미지를 감탄형으로 말해버림으로써 이미지와 주제의 불필요한 중복이 많이 빚어진다. 그리고 현실 속에서 찾아보기 힘든 옛 풍경을 뜽금없이 등장시키는 경우가 잦다. 그런 세계 속에서 발견한 아름다움 때문이겠지만, 그런 풍경이 단순히 소재로 등장하는 것과, 그런 배경으로 작용하여 시 전체를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것은 다른 것이다. 시집 전체에서 시들을 좀 더 매끈하게 다듬는 것이 남은 숙제가 되겠다. 한자는 불필요한 숙제이다.★★★☆☆[4337. 8. 7.]

 

747□운주사 가는 길□임동확, 문학과지성시인선 123, 문학과지성사, 1992

  정신의 순결주의라고나 할까? 지켜야 할 것과 지켜지지 않는 것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그러나 역사로부터 받은 상처가 마음에 큰 짐이 되어 상상력이 짓눌린 경우에 해당한다. 너무나 큰 짐의 무게에 주제가 상상력을 딱딱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역사로부터 마음의 짐을 부려놓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지만, 그 짐에 짓눌려 할 말을 제대로 못하는 것 역시 역사의 몫이라고 해도, 시인으로서는 큰 단점이다. 오히려 억눌린 상상력을 구원해서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역사의 그 아픔을 더욱 잘 드러내어 독자를 그리로 안내하는 것이 역사의 짐을 벗는 좋은 방법일 것이다. 아픔을 끌어안고 삭기를 기다리는 것도 좋지만, 때로 멀리 솟아서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한자는 빨리 벗어야 할 짐이다.★★☆☆☆[4337. 8. 7.]

 

748□내 무덤, 푸르고□최승자, 문학과지성시인선 133, 문학과지성사, 1993

  세계를 정의한다는 것은 개념화하는 일이고, 개념은 사고의 추리과정이라는 점에서 시에서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시에서 꼭 필요한 것은 개념화 과정에서 덧들어나는 감정이다. 그런 점에서 세계를 개념화하고 그것을 공격하고자 할 때는 이런 감정들이 뒤쪽으로 물러서서 시가 자칫하면 공허해진다. 1980년대의 노동시가 범한 오류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리고 같은 시대에 이른바 문명비판을 기치로 내건 시들 역시 이런 오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 시집은 상상력의 울림이 없다. 주제가 겉으로 너무 드러났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이미지들이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복종하고 있다. 그래서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칭찬 받을 일이지만, 시를 삶의 거울로 삼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거북살스럽고 어색하다. 한자 역시 어색하다.★★☆☆☆[4337. 8. 7.]

 

749□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박형준, 문학과지성시인선 144, 문학과지성사, 1994

  이미지를 처리하는 능력도 좋고 시를 매끄럽게 다듬는 재주도 제법인데, 주제 빈약이다. 동원되는 이미지나 시어의 양에 견줄 때 주제가 너무 약하다. 주제 빈약은 어떤 능력으로도 대체 못할 결정타이다. 그리고 세부를 묘사하는 능력은 뛰어난데, 전체를 보는 능력이 부족하다. 나무를 보되 숲을 보지 못한 경우라 하겠다. 따라서 동원된 이미지나 시어들이 시 안에서 크게 필요한 것이 아니면 과감하게 잘라버려서 시가 가볍지 않게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  게다가 시집 뒤쪽에는 습작기의 탈을 벗지 못한 시들이 꽤 실려있다. 한자는 습작기 때 버렸어야 할 물건이다.★☆☆☆☆[4337. 8. 7.]

 

750□무늬□이시영, 문학과지성시인선 137, 문학과지성사, 1994

  시가 짧은 양식이고, 짧아도 큰 울림을 전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는 시집이다. 짧을 수 있는 것은 인식이 깊고 그 만큼 안으로 응축되었기 때문임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것은 많은 부분 삶의 이력에서 오는 것이어서 더욱 값지다. 젊은 시인들이 흉내낼 수 없는 깊은 맛이 시 곳곳에 들어있다. 다만 시의 절반 가량이 더 풀어냈으면 하는 아쉬운 수준에 머물렀다. 짧게만 한다고 좋은 것이 아니요, 길게 한다고 좋은 것도 아니지만, 짧은 호흡의 관성에 밀려 풀어야 할 곳을 덜 푼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의 구성력 여하를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풀 곳에서는 풀어주어야 하는 것이 시이다. 한자는 풀리지 않는 군더더기이다.★★☆☆☆[4337.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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