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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1000권 읽기 88
2015년 02월 11일 16시 53분  조회:1876  추천:0  작성자: 죽림

871□나는 별 아저씨□정현종, 문학과지성시인선 3, 문학과지성사, 1978

  염세주의자가 유독 예술이나 표현에 대해서 대단한 열정을 보이는 것은, 시를 보면 곧 죽을 것 같이 외로운 사람들이 적당한 지위에 넙죽넙죽 올라앉아서 잘 사는 것과 같은 모순이 아닐런가? 깨달음을 얻으려면 좀 더 분명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깨달아 봤자라는 관념을 전제해놓고서 깨달으려 한다면 그것을 인간답다고 봐야 할지 위선이라고 봐야할지 언뜻 구별하기 쉽지 않다. 그런 점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지마저 예술이라는 이름의 뒤에 흉기처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염세주의로 살든 회의주의로 살든 독자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시 안에 내장된 모순은 걷어내는 것이 예술에 뜻밖의 집착을 보이는 염세주의의 성공을 보장할 최소한의 예비가 아닐런가? 한자는 염세의 대상이 아닌가?★★☆☆☆[4337. 11. 6.]

 

872□떨어져도 튀는 공처럼□정현종, 문학과지성시인선 38, 문학과지성사, 1984

  자신의 생각을 시의 뒤로 숨기는 법을 많이 체득했다. 그래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생각과 그 생각이 요구하는 표현의 괴리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전히 함량 미달의 작품들이 많다. 그것을 생각의 긴장으로 풀어야겠지만, 생각이라는 것이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도 아니다. 방법이 바뀔 때 그 전의 자신감을 대체할 그 어떤 장치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거기에 도달하기까지는 아직 시간도 깨달음도 더 필요하다. 시가 특수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믿음을 바꾸지 않는 한 이런 절름발이 행보는 그치지 않을 것이다. 시는 생각의 귀퉁이에 쓰레기통처럼 몰려있다. 한자는 버려지지 않은 옴 자국이다.★★☆☆☆[4337. 11. 6.]

 

873□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최하림, 문학과지성시인선 218, 문학과지성사, 1998

  말을 묘사로 대신하는 능력이 일정한 성과를 보인다. 그런데 묘사는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감정을 대신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묘사된 이미지들이 그 감정을 싣고 가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미지들이 전해야 할 그 감정들이 이미지들의 확실한 묘사만큼 따라주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이미지들이 단순한 풍경 묘사와 감정 전달의 중간에 애매한 태도로 놓여있다. 결국은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좀 더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얘기다. 한자는 걷어야 할 이미지이다.★★☆☆☆[4337. 11. 6.]

 

874□자명한 산책□황인숙, 문학과지성시인선 281, 문학과지성사, 2003

  고독의 식탁에서 쓸쓸함의 나이프로 허무의 빵조각을 씹어먹는 풍경. 이런 식이면 시가 노래할 수 있는 것은 고독과 사랑 둘로 압축하면 될 일이다. 옹달샘 앞에서 바닥에 겨우 차는 물을 자꾸 퍼낸들 거기서 무엇이 나올 것인가? 바닥만 드러내는 샘 앞에서 투정할 것이 아니라 한 발 물러서서 기다리면 거기 물이 고이고 소금쟁이가 뜨고 이끼가 끼고, 또 그러다 보면 어느 샌가는 물고기도 살기 마련이다. 그렇게 퍼내서 보여주고 싶은 것이 외로움이라면 이제 그 위에 고여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볼 만한 나이가 되지 않았는가? 하지만 꼭 필요한 말을 필요한 상황에서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은 살 만하다. 그렇기에 더욱 아쉬운 일이다. 한자 역시 아쉽다.★★★☆☆[4337. 11. 7.]

 

875□영혼의 북쪽□박용하, 문학과지성시인선 236, 문학과지성사, 1999

  과잉의 시집이다. 하고픈 말도 많고 동원된 말도 많고 담아야 할 내용도 많아서 탈이다. 많은 것을 절약하지 못하니 번거롭고 지루하다. 같은 말과 이미지가 반복되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것이 어떤 전략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시는 돌이킬 수 없는 약점을 지닌 셈이다. 무엇보다도 말들이 어떤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부풀려가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렇게 되면 상황이 모호해진다. 그리고 말들만 남지 그 말들을 넘어서 뚫고 들어가는 어떤 것이 잘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부분 성급하게 쓸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한자부터 버릴 일이다.★★☆☆☆[4337. 11. 7.]

 

876□노을 아래서 파도를 줍다□한승원, 문학과지성시인선 227, 문학과지성사, 1999

  시인들한테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면이 있다. 상상력이 거침없이 자신이 겨눈 바를 향해서 나아가고 그 과정에서 냉정하고 다양한 묘사가 뒤따른다. 그러나 산문이 갖는 둔중한 행보를 걷어내지 못해서 시가 불필요하게 무거운 주제에 예속된 시들이 너무 많다. 이 무거움을 걷어내는 것이야말로 시의 가벼움으로 무거움을 소화하는 특질을 잘 이해하는 길일 것이다.★★☆☆☆[4337. 11. 7.]

 

877□사이□이시영, 창비시선 142, 창작과비평사, 1996

  짧은 묘사는 암시와 환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암시와 환기는 짧은 전체를 모아놓았을 때 전하고자 하는 어떤 것을 분명하게 담고 있을 때 위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짧은 묘사의 뒷면에는 불가불 사상이나 철학이 버티고 있는 형국이 된다. 그런데 그것이 전체를 다 조합한 뒤에도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으면 짧은 묘사는 말장난이나 덜 깨달은 땡중의 넋두리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그러니 짧은 시의 완성도를 묻기 전에 그 짧은 묘사가 전하고자 하는 것이 스스로 분명한가 하는 것을 물을 수밖에 없다. 시대의 어둠을 죽음이라는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인 애매한 관념으로 은유해가지고는 철학이나 사상이 되지를 못한다. 한자도 청산하지 못한 상황에서 시대의 어둠과 죽음을 노래할 수 있겠는가?★★☆☆☆[4337. 11. 8.]

 

878□참 맑은 물살□곽재구, 창비시선 137, 창작과비평사, 1995

  수필로 써야 할 것을 시로 썼다. 시 쓰는 재주는 나무랄 것이 없겠다. 그러나 방향이 문제이다. 남의 이야기를 내 이야기처럼 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뿐더러 너와 내가 구별되지 않는 세계는 민요를 닮는다. 민요는 노래이다. 민요에서는 개인이 사라진다. 개인이 사라지면 관념의 덩어리로 변하기 마련이다. 그런 위험을 굳이 마다하지 않는 것은 시인의 태도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시대가 있었다. 그것이 변하지 말았어야 할 그 무엇이어야 하건만 시절이 하 수상하니 안타까울 뿐이로고!★★☆☆☆[4337. 11. 8.]

 

879□사라지는 것은 사람일 뿐이다□양성우, 창비시선 159, 창작과비평사, 1997

  이야기가 시의 전면으로 드러난 것은 옛날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는 더욱 심하다. 그런데 내용은 더 물렁해졌다. 이것은 외면의 적이 시간이라는 내면의 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인데, 이것이 전력의 약화를 가져올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길인지 알 수 없다. 연애시의 어조를 많이 띠고 있어서 다소 혼돈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누구나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분위기로 많이 바뀌었다. 그것이 시의 세계가 깊어지는 쪽으로 가야 하는데, 아직은 실험 중인 것 같다. 다만 이대로 남으면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가락은 여전히 잘 살아있다.★★☆☆☆[4337. 11. 9.]

 

880□귀로 웃는 집□임영조, 창비시선 157, 창작과비평사, 1997

  비유는 방법상 가장 안전한 방법이다. 그것은 시에서 오랜 세월 동안 쓰여오면서 나름대로 시의 어법을 형성한 가장 묵은 화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칫하면 낡아 보이기가 쉽다. 게다가 대상이 선정되지 않으면 쓸 수가 없고, 자신의 마음속에 든 것을 정확하게 건네줄 어떤 사물이나 상황을 만나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신의 세계를 드러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단점은 어떤 대상을 선택했을 때 그 대상이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그 한계를 넘어서면 마치 작은 옷을 입은 사람처럼 거북하다. 이 시집에서도 그런 거북한 모습이 아주 많이 눈에 띈다. 더욱이 뒤로 가면서 심해진다. 단순 비유는 깔끔하게 보여주어야지 너무 많은 말을 하면 안 된다. 게다가 한자까지 뒤섞여서 뒤숭숭하다.★★☆☆☆[4337.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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