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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1000권 읽기 90
2015년 02월 11일 16시 58분  조회:2172  추천:0  작성자: 죽림
 

891□마음의 수수밭□천양희, 창비시선 122, 창작과비평사, 1994

  묘사도 얌전하고 꼼꼼한데, 그런 묘사를 통하여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너무 엷다. 이미지가 이 정도 전개되었으면 할 말이 나와야 하는데, 정작 그 할 말을 제대로 담지 못한다. 그래서 시가 밋밋하다. 애써 찾아낸 발견과 이미지들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고만고만한 상태로 웅크려있다. 이런 이미지들에 활달한 생기를 불어넣고 힘차게 움직이도록 하는 방법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할 시집이다. 그리고 그것은 기교의 문제가 아니기에 정말 중요한 위치에 와있다. 한자는 버려야 할 기교이다.★★☆☆☆[4337. 11. 13.]

 

892□넋이야 넋이로다□하종오, 창비시선 58, 창작과비평사, 1986

  정말 할말없게 하는 시집이다. 제목에 굿시집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니, 굿시로 봐야 할 것 같고, 넓게 잡자면 극시의 범주에 넣어야 할 것 같다. 행사에 동원된 것이니, 그 행사에 참여하지 않은 자들은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시와 행동이 붙어있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한 번쯤 생각하게 한다.★☆☆☆☆[4337. 11. 13.]

 

893□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정호승, 창비시선 161, 창작과비평사, 1997

  전환기에 와 있는가? 표현은 간절한데, 내용은 너무 허하다. 시가 짧아지면 잠언의 형태로 나아가는데, 여기서는 그 흉내만 내고 있다. 그러니 좀 더 깊어져야만 시의 상징이 깊은 울림을 갖게 될 것이다. 분노가 만든 사랑에서 분노가 사라졌기 때문일 것인데, 그렇다면 그냥 말 그대로 사랑으로 다가가기 위해서는 건너야 할 마음의 강이 있다. 그것을 건너면 부처가 될 것이다.★★☆☆☆[4337. 11. 13.]

 

894□가장 가벼운 짐□유용주, 창비시선 117, 창작과비평사, 1993

  밋밋하다. 특별히 모난 것도 없고,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도 없다. 있다면 자신의 땀에 정직한 냄새를 풍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밋밋한 것은 그러한 태도가 갖는 사상성 내지는 계급의식이 희미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이것은 이 시집의 한계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장점으로 볼 수도 있다. 다만 기법이 보여주기의 수법에 많이 의존하고 있는데, 그런 기법으로 담기에는 거북한 감정들이 많다는 것이 문제로 작용할 수 있다. 이것은 스스로 옥쇄를 차는 형국인데, 어떤 방식으로든 풀어야 할 것이다. 감정이 격할 때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인데, 너무 점잖은 방법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것은 시의 내용과는 달리 점잖은 시작법을 배웠다는 뜻이다. 계급의식을 강화하거나 상상력의 진폭을 넓힐 필요가 있는 시집이다.★★☆☆☆[4337. 11. 14.]

 

895□사진리 대설□고형렬, 창비시선 116, 창작과비평사, 1993

  이게 시라면 세상의 어떤 글이든 행만 찢어놓으면 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선 시가 무엇을 노래하려고 하는가 하는 것부터가 분명치를 않다. 묘사를 하고 말을 하면서도 전체의 묘사를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가 없거나 있어도 별로 중요치 않은 시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주제가 없으니 말들이 뿌리 없는 부유물처럼 모호한 관념 위에서 둥둥 떠돌고 있다. 시 안에서 넋두리라도 이루어져야 판단을 하고 평가를 할 수 있는데,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애매모호하여 처음부터 그런 판단이 어렵다. 무엇이 시이고, 어떻게 해야 시가 되는가 하는 것부터 새로 배워야 할 일이다. 그보다 서둘 일은 한자를 버리는 것이다.★☆☆☆☆[4337. 11. 14.]

 

896□아름다운 손□나해철, 창비시선 110, 창작과비평사, 1993

  내용 없이 시를 쓸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하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시집이다. 겉보기엔 아무런 문제점도 없어 보이지만 볼수록 말들이 겉돌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것은 솜씨가 모자라서도 아니요, 내용이 부실하기 때문이다. 본디 시가 다루지 못할 것은 없지만, 시가 다룰 수 있는 것을 알아내는 것은 시인의 능력이다. 시가 될 것 같지 않은 것을 가지고 시를 만들면 될 듯 될 듯하면서도 안 되는 것이 시이다. 시가 무엇을 노래할 것인가 하는 것을 오래 고민해야 할 시집이다.★☆☆☆☆[4337. 11. 14.]

 

897□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나희덕, 창비시선 125, 창작과비평사, 1994

  1부와 4부의 몇 편은 절창이다. 다 보여주지 않아도 다 보여준 것보다 더 풍부한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시의 기능을 자주 잘 활용할 줄 아는 시인이다. 그런 눈을 갖추는 것은 쉽지 않다. 감정의 절정에 올라있되, 그 감정에 휩싸이지 않는 냉정한 시선만이 잡아낼 수 있는 그런 것이다. 그러니 재주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요, 스스로 그런 비극의 한가운데에 있지 않다면 쓸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나머지 많은 시들이 맥없이 늘어져있다. 그리고 절창이 노래한 감정들은 김고독 극본, 이절망 각색, 박허무 주연의 멜로물이어서 오래 머물러 있을 만한 것이 못되는데, 그 성취도를 보아서는 한 동안 이런 감정에 머물러 있을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든다. 그것은 한 시인의 비극이 아니라 한국시의 비극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처치하지 못한 한자 또한 비극이다.★★★☆☆[4337. 11. 16.]

 

898□독도□고은, 창비시선 126, 창작과비평사, 1995

  논리의 비약과 장황한 시상 전개는 여전하다. 그런데 이미지에 많이 의존하고 있는 것이 좀 달라졌다면 달라진 점이다. 그것도 시각 이미지가 전면으로 솟았다. 이것은 생각이 냉정해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많이 가라앉았지만, 곳곳에서 거친 목소리가 솟아난다. 아마도 시인의 특성이리라. 그러나 그 특성이 좋은 방향으로 작용하도록 하는 방법이 있을 듯도 한데, 자신감 때문일까? 아니면 중요한 것이 시의 뒤에 서린 그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때문일까? 전해 개의치 않겠다는 투다. 사실은 말릴 일도 없을 것 같다. 너무 큰 걸음이 때로는 허방을 짚는 수도 있지만, 그 행보의 의기만큼은 가상하다. 시원한 걸음이 역시 시원하다. 그러나 시원함으로만 친다면 시는 어쩐지 불편하다. 이 불편을 해소할 생각도 없겠지만, 해소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바람’의 경우는 명작이다.★★★☆☆[4337. 11. 17.]

 

899□두 하늘 한 하늘□문익환, 창비시선 75, 창작과비평사, 1989

  무엇보다도 시의 정서가 어떤 것이며, 어떤 것을 노래해야 시가 되는가 하는 것을 아주 잘 아는 시인이다. 모든 언어를 어떤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서 배치하는 저력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다만, 감정이 아주 격한 절정의 위치에서 노래를 하기 때문에 그 감정의 바탕을 이해할 수 없거나 동의하기 어려운 자리와 때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무리수를 두는 것으로 비칠 따름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단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 있는 법이고, 때가 있는 법이고, 곳이 있는 법이다. 그것까지 탓할 것은 없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시인의 탓이라기보다는 시대의 몫이기 때문이다.★☆☆☆☆[4337. 11. 17.]

 

900□어여쁜 꽃씨 하나□서홍관, 창비시선 80, 창작과비평사, 1989

  시를 참 잘 쓰는 시인이다. 목청을 높여야 하는데도 목청을 높이는 것이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고 목청을 일부러 낮추어 조용히 얘기할 줄 아는 것은 시를 아는 냉정함은 물론 인내력까지도 갖추었다는 증거이다. 흥분할 만한 내용을 아주 조용하고 냉정한 시각으로 묘사하여 끝내는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감정에 동감하도록 유도하는 능력이 대단하다. 이야말로 정말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기본 요건이다. 격동의 시대인 1980년대에 이런 시를 쓸 수 있는 시인이 있다는 것이 놀랍다. 이러한 냉정한 눈길 속에서도 따뜻한 아랫목처럼 따스한 가슴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그 따스함은 양심에 인정을 추가해야만 하는 것인데, 사람 알기를 고기 덩어리로 여기기 쉬운 의사라는 직업인에게서 이런 따스함이 느껴진다는 것이 또한 놀랍다. 좀 아쉬운 것은 상상력이 너무 위축돼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사상과 주제가 중요하더라도 상상력이 활발하게 활개쳐야 시가 생동감 있게 살아날 수 있다. 그런 단점으로도 가릴 수 없는 맑은 정신과 양심이 살아있는, 읽기에 즐거운 시집이다.★★★☆☆[4337.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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