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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송시선 7
2015년 02월 13일 17시 54분  조회:4878  추천:0  작성자: 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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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의 애송시 I
          제1권

  편집고문:서정주, 조병화, 이어령
  펴낸이:장석주
  펴낸곳:청하 출판사
  발행일:1985년 7월 25일
  묵자책의 페이지:437
  점자책의 페이지:
  입력기간:1992년 2월 15일
  입력 및 교정자:임종욱
  제작:부산맹인점자도서관

 

    차례

  서문

  작고시인 61인선

  한용운
  님의 침묵
  나룻배와 행인
  꽃싸움

  최남선
  해에게서 소년에게
  봄길

  이병기
  난초
  아차산
  오동꽃

  이광수
  붓 한 자루
  서울로 간다는 소

  김억
  봄바람
  삼수갑산

  오상순
  첫날밤

  남궁벽
  말

  황석우
  소녀의 마음
  초대장

  노자영
  불 사루자

  변영로
  논개

  김형원
  벌거숭이의 노래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의 침실로

  주요한
  불놀이
  빗소리
  샘물이 혼자서

  홍사용
  나는 왕이로소이다

  김동명
  파초
  내 마음은

  김동환
  산너머 남촌에는
  북청 물장수
  강이 풀리면

  박영희
  유령의 나라

  박종화
  청자부

  백기만
  청개구리
  은행나무 그늘

  심훈
  그날이 오면
  밤

  오일도
  5월의 화단

  김상용
  남으로 창을 내겠소
  향수

  김소월
  진달래꽃
  산유화
  초혼
  엄마야 누나야
  금잔디
  접동새
  못잊어
  가는 길
  왕십리
  가막 덤불
  풀따기

  이장희
  봄은 고양이로다
  청천의 유방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오-매 단풍 들것네
  내 마음을 아실 이

  양주동
  산길
  산 넘고 물 건너
  나는 이 나랏 사람의 자손이외다

  이은상
  가고파

  박용철
  떠나가는 배
  고향
  눈은 내리네

  이육사
  청포도
  광야
  일식
  절정
  자야곡
  꽃
  호수
  황혼

  김광섭
  성북동 비둘기
  저녁에

  신석정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
  산수도
  추석
  임께서 부르시면

  유치환
  깃발
  바위
  생명의 서
  그리움
  의주ㅅ 길
  춘신

  신석초
  고풍
  바라춤

  이상
  거울
  꽃나무
  절벽
  오감도 15호

  김용호
  주막에서
  눈오는 밤에

  이호우
  개화
  난
  살구꽃 핀 마을

  김현승
  눈물
  플라타너스
  가을의 기도
  절대고독

  노천명
  사슴
  남사당
  이름없는 여인이 되어

  장만영
  달, 포도, 잎사귀
  비
  소쩍새
  길 손

  박목월
  나그네
  윤사월
  청노루
  산도화
  산이 날 에워싸고
  우회로
  난

  이영도
  백록담

  함형수
  해바라기의 비명

  윤동주
  서시
  별 헤는 밤
  참회록
  십자가
  자화상
  또 다른 고향

  조향
  Episode

  허민
  산록기

  김종문
  샤보뎅
  첼로를 켜는 여인
  의자

  한하운
  보리피리
  여인

  이동주
  강강수월래
  혼야

  조지훈
  승무
  고풍의상
  완화삼

  김수영
  풀
  달나라의 장난
  폭포
  눈

  김종삼
  북치는 소년
  그리운 안니, 로, 리
  시인학교

  한성기
  역

  공중인
  설야의 장

  박용래
  강아지풀
  월훈
  풀꽃
  저녁 눈
  황산메기
  겨울밤

  이인석
  도척의 개

  송욱
  장미
  개의 이유

  구자운
  청자수병
  우리들은 샘물에

  박인환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김관식
  옹손지
  연
  거산호

  이경록
  이 식물원을 위하여 5

    원로, 중견 85인선 I

  강계순
  안개속에서

  강민
  비가 내린다

  강우식
  사행시초
  타는 사랑은

  강인환
  귀

  고원
  모나리자의 손

  고은
  문의 마을에 가서
  신해가사
  투망
  삶
  화살
  조국의 별

  구경서
  정물

  구상
  초토의 시
  수난의 장

  구석봉
  백년후에 부르고 싶은 노래

  권국명
  나는 사랑이었네라

  권달웅
  감처럼

  권일송
  풀잎
  레오나르도  다빈치 서설

  김경린
  국제 열차는 타자기처럼

  김광규
  안개의 나라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김광균
  추일서정
  설야
  와사등

  김광림
  파리의 개
  석쇠

  김광협
  말씀

  김광희
  피리를 불자

  김규동
  오는구나 봄이
  곡예사

  김규태
  갇힌 뻐꾸기
  졸고 있는 신

  김규화
  솔베이지 노래를 주제로 한 시

  김남석
  길은 하난데

  김년균
  문의

  김남조
  목숨
  범부의 노래
  생명
  겨울바다
  정념의 기

  김달진
  단장
  체념

  김대규
  사랑 잠언

  김동현
  바람이

  김명수
  월식
  우리나라 꽃들에겐

  김사림
  가을

  김상억
  성터에서

  김상옥
  백자부

  김석규
  풀밭
  사랑에게

  김양식
  눈바람
  조춘

  김여정
  돌

  김영석
  감옥 3

  김영태
  호수근처
  한 잔 혹은 두 잔
  비빔밥

  김요섭
  음악
  꽃

  김용진
  소네트

  김용팔
  기원

  김원호
  과수원
  조카딸에게

  김유신
  천리향
  바람에 기대어

  김윤성
  나무
  애가

  김윤희
  첫눈

  김재원
  몸 부딪는 비둘기
  입만 다물면야

  김정웅
  배우일지 5
  돌아온 편지

  김종길
  고고
  하구에서

  김종원
  달팽이

  김종해
  향해일지 18

  김지하
  황톳길
  빈산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향
  이 평범한 풍경이여

  김차영
  부릅뜬 태풍의 눈

  김창완
  수유리의 침묵
  돌멩이

  김춘수
  꽃
  꽃을 위한 서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늪
  처용

  김해강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김형영
  여우
  모기

  김혜숙
  딸에게

  김후란
  설야
  포도밭에서

  나태주
  대숲 아래서

  낭승만
  가을의 기도

  노영란
  초야

  노향림
  가을편지

  마종기
  연가 9
  연가 12

  마종하
  비가
  배꽃이 피면

  모윤숙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문덕수
  꽃과 언어
  손수건

  문병란
  코카콜라
  폐염전

  문충성
  이어도
  제주바다 1

  민영
  냉이를 캐며

  민재식
  밤에 산엘

  박경석
  졸본꾀꼬리

  박근영
  동정의 시

  박남수
  새
  종소리

  박두진
  해
  도봉
  묘지송
  청산도
  꽃
  당신의 사랑 앞에

  박봉우
  휴전선
  눈길 속의 카츄사

  박성룡
  교외
  바람 부는 날
  풀잎

  박의상
  풍뎅이
  아내와 함께

  박이도
  나의 형상
  바람의 손 끝이 되어

  박이문
  내 꿈속의 나비는

  박재륜
  편지

  박재릉
  서울

  박재삼
  울음이 타는 가을 강
  아득하면 되리라
  어떤 귀로
  천년의 바람
  자연
  가난의 골목에서는

  박정온
  차에서

  박정희
  술래의 편지

  박제천
  장자시
  사기등잔과 함께

  박태진
  무교동

  

 

 <한국인의 애송시>를 펴내면서

  이 시선집은 그 제목이 시사하고 있듯이 최남선, 이광수, 등의
신문학기 이후의 작고 시인으로부터 80년대의 신예 시인까지를 포괄하여
애송될 만한 작품들을 선정 수록한 책이다. 이 책의 기획 의도는 오늘의
사회 전반을 침식, 부패시키는 불건강한 정서의 오염을 막고, 시적 정화와
의식의 혁신을 불러 일으키는 범문화적인 새바람을 일으키는 시의 애송을
생활화하고, 그에 따라 시정신이 주도하는 문화풍토를 조성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 우리는 거대한 도시산업화 속의 획일화, 집단화, 익명화라는
변화지향의 압력 속에서 살고 있다. 이 압력은 인간의 고유한 창조적
자아의 근거와 기반마저 위협하는 폭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때 시는
혼의 울림을 일으키는 넋의 어휘로서, 비인간화된 세계의 비인간적 힘에
굴복하여 박제화된 자아가 상실한 역동적 자유로움을 회복하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시적 명상과 사고는 삶과 그 삶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의미와
본질을 날카롭게 일깨워줄 뿐만 아니라, 존재의 충실에 이르게 한다는
점에서 그 값을 더하고, 그 빛을 더 밝게 한다.
  일찌기 한 시인은 시작행위를 ^6 236^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356 3^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라는 표현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시인들의 삶과 세계를 바라보고 이해하려는 진정성의 밀도이다.
위대한 시인들은 바로 그러한 진정성의 밀도 속에 민족적 삶의 결을 담아
노래하려고 애써 왔다. 따라서 나날의 삶의 무의미하고 시시콜콜한 반복과
지리멸렬을 넘어서는 삶의 본질적인 국면 속에 깃들어 있는 궁국적 의미와 가치를
묻고 캐내는 시인들의 창조적인 작업은 그 자체로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 그것은 시대의 혼란 속에 묻혀 흔히 간과되기 쉬운 진실의
전체성을 드러내는 작업으로, 마음에 새길 만한 민족적 자산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여기 <한국인의 애송시>의 시편들의 하나하나는 시인들의 살아
있는 얼과 뜻이 응축되어 있는 삶의 공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작업은 1984년 여름에 처음 시작되었다. 애송시의 선정이라는 주관적
작업이 빠질 수 있는 객관성의 결핍을 보완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지혜를
짜내 그에 따라 단계적으로 작업을 진행시키느라 많은 시간이 소모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먼저 KBS 방송국의 전국 애청자 1,296명을 대상으로
집계한 자료를 받아 일반의 애송시에 대한 기초자료를 만들 수 있었다.
여기에 서울의 10개 대학과 지방의 15개 대학의 국문과 학생들에게 조사한
설문지를 기준으로 하여 조금더 정밀한 기초자료를 작성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우리의 기대에 흡족할 만한 애송시 목록을 만들어낼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다시 금년 1월에 시인 150분의 명단을 작성하고,
애송시로 낭송될 만한 1) 1950년 이전에 발표된 시 10편과, 2) 1950년 이후
발표된 시 10편을 추천해 달라는 설문지를 발송하였고, 설문의 내용이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까다로웠음에도 불구하고 82P의 회답을 얻었으며, 이
결과 <한국인의 애송시>의 전체적인 윤곽을 붙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다시 현역시인 거의 모든
분들에게 <한국인의 애송시>의 기획의도를 밝히고, 거기에 수록할 만한
자천 시와 간단한 시인의 이력, 시적 경향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을
협조받았다. 그 작업의 번거로움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분들이 빠짐없이
자료를 보내주셔서, 우리는 그 자료를 토대로 최종적인 마무리 작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렇게하여 최종적으로 집계된 시인들은 319분이었고 작품은 무려
599편이나 되는 방대한 책으로 묶여지게 된 것이다. 이것을 다시 3부로
나누었는데 1부에서는 작고 시인 61분의 161편의 시를, 2부에서는
1945년도까지 출생한 시인 210분의 356편의 시를, 그리고 3부에서는
1945년도 이후에 출생하여 1979년도까지 문단에 등단한 시인 48분의 82편의
시를 2권으로 나누어 <한국인의 애송시>로 묶은 것이다. 시인들의 순서에는
1부에서는 작품활동 연대를 기준으로 했고, 2부와 3부에서는 가나다 순으로
했음을 덧붙여 밝혀둔다.
  워낙 많은 시인들의 시편을 다루었기 때문에 다소 무리한 점도 있었다.
예를들면 3부로 작품을 나누는 작업에서 중견과 신예시인을 구분함에 있어
출생연도에 비해 등단연도가 좀 늦었거나 빨랐을 경우 과연 중견과 신예를
출생연도에만 기준으로 한다는 것이 적절한 것인가, 그리고 객관적 형평의
원칙이 지켜져야 할수록 시인을 선정하는 점에서, 시인별 수록 작품 편수를
결정하는 점에서 우리의 편견은 얼마나 잘 억제되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끝으로 <한국인의 애송시>를 만드는 진행 과정에서 조언과 협조를 아끼지
않은 여러분들의 성함을 일일이 밝혀 고마움을 표하지 못하는 우리의
게으름도 용서를 구한다.

  1985년 5월 10일
  <한국인의 애송시> 편집고문
  서정주. 조병화. 이어령.

 

       작고시인 61인선

 

  한용운. 1879 - 1944. 충남 홍성 출생. 호는 만해. 3.1운동 당시 불교계
민족 대표 중의 한 사람. 타고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시작 전편을 통해 불교적인 사상이 개진되고 있다.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개혁자로서 또한, 위대한 민족 운동가로서 실천한 민족시인이었다.
시집으로 <님의 침묵>과 소설 <흑풍>및 저서 <불교유신론> <불교대전>
<신협담 주해> <한용운 전집>이 있다.

     님의 침묵

  님은 갔읍니다. 아아 나의 사랑하는 님은 갔읍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읍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 갔읍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읍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 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읍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 부었읍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읍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나룻배와 행인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았읍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읍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꽃 싸움

  당신은 두견화를 심으실 때에 꽃이 피거든 꽃싸움하자고 나에게
말하였읍니다.
  꽃은 피어서 시들어가는데  당신은 옛 맹세를 잊으시고 아니 오십니다.

  나는 한 손에 붉은 꽃수염울 가지고 한 손에 흰 꽃수염을 가지고
  꽃 싸움을 하여서 이기는 것은 당신이라 하고 지는 것은 내가 됩니다.
  그러나 정말로 당신을 만나서 꽃싸움을 하게 되면 나는 붉은 꽃수염울
가지고 당신은 흰 꽃수염을 가지게 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나에게 번번히 지십니다.
  그것은 내가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나에게 지기를 기뻐하는 까닭입니다.
  번번히 이긴 나는 당신에게 우승의 상을 달라고 조르겠읍니다.
  그러면 당신은 빙긋이 웃으며 나의 뺨에 입맞추겠읍니다.
  꽃은 피어서 시들어 가는데 당신은 옛 맹세를 잊으시고 아니오십니다.

 

  최남선. 1890 - 1957. 서울 출생이며 호는 육당.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수학
했고 신문화 운동의 선구자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학 잡지 <소년> 외에
<새별> <청춘> 등을 발간. 개화기 문화운동에 공이 크며 기미독립 선언문을
기초하기도 한 신문학 3대 천재 중 한분. 주요 저서로는 <백팔번뇌>
<조선역사> <역사일감> <시조유취> 등이 있다.

     해에게서 소년에게

  1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따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태산같은 높은 뫼 집채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따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처얼썩 처얼썩 척 튜르릉 콱.

  2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내게는 아무것 두려움 없어
  육상에서 아무런 힘과 권을 부리던 자라도
  내 앞에 와서는 꼼짝 못하고
  아무리 큰 물결도  내게는 행세하지 못하네.
  내게는 내게는 나의 앞에는
  처얼썩  처얼썩 척 튜르릉 콱.
  
  3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나에게 절하지 아니한 자가
  지금까지 있거든 통기하고 나서 보아라.
  진시황 나팔륜 너희들이냐.
  누구 누구 누구냐 너희 역시 내게는 굽히도다.
  나하고 겨룰 이 있건 오너라.
  처얼썩 처얼썩 척 튜르릉 콱.

  4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조그만 산 모를 의지하거나
  좁쌀같은 작은 섬 손벽만한 땅을 가지고
  그 속에 있어서 영악한 체를
  부리면서 나 혼자 거룩하다 하는 자
  이리 좀 오너라 나를 보아라.
  처얼썩 처얼썩 척 튜르릉 콱.

  5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나의 짝 될 이는 하나 있도다.
  크고 깊고 너르게 뒤덮은 바 저 푸른 하늘
  저것은 우리와 틀림이 없어
  작은 시비 작은 쌈 온갖 모든 더러운 것 없도다.
  저 따위 세상에 저 사람처럼
  처얼썩 처얼썩 척 튜르릉 콱.

  6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저 세상 저 사람 모두 미우나
  그 중에서 똑 하나 사랑하는 일이 있으니
  담 크고 순진한 소년배들이
  재롱처럼 귀엽게 나의 품에 와서 안김이로다.
  오너라 소년배 입맞춰 주마.
  처얼썩 처얼썩 척 튜르릉 콱.


     봄 길

  버들잎에 구는 구슬 알알이 짙은 봄빛,
  찬 비라 할지라도 임의 사랑 담아 옴을
  적시어 뼈에 스민다 마달 수가 있으랴.

  볼 부은 저 개구리 그 무엇에 쫓겼관대
  조르르 젖은 몸이 논귀에서 헐떡이나.
  떼봄이 쳐들어 와요, 더위 함께 옵데다.
  저 강상 작은 돌에 더북할쏜 푸른 풀을
  다 살라 욱대길 제 그 누구가 봄을 외리.
  줌만한 저 흙일망정 놓쳐 아니 주도다.

 

  이병기. 1891 - 1968. 전북 익산 출생이며, 한성 사범을 졸업했다. 호는
가람. 1927년 <동광>에 시조 '고향으로 돌아갑시다'를 발표하여 문단
활동을 시작했고, <국민학파>의 일원으로서 시조 부흥에 기여했다.
저서로는 시조집 <가람시조집> <역대시조선> <현대시조선총> 등과
<국문학개론> <가람문선> <국문학전사> 등이 있다.

     난초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줏빛 굵은 대공 하얀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디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미진도 가까이 않고 우로 받아 사느니라.


     아차산

  고개 고개 넘어 호젓은 하다마는
  풀섶 바위 서리 빨간 딸기 패랭이꽃.
  가다가 다가도 보며 휘휘한 줄 모르겠다.

  묵은 기와쪽이 발끝에 부딪히고,
  성을 고인 돌은 검은 버섯 돋아나고,
  성긋이 벌어진 틈엔 다람쥐나 넘나든다.

  그리운 옛날 자취 물어도 알 이 없고,
  벌건 메 검은 바위 파란 물 하얀 모래,
  맑고도 고운 그 모양 눈에 모여 어린다.


      오동꽃

  담머리 넘어드는 달빛은 은은하고 
  한두 개 소리 없이 내려지는 오동꽃을
  가랴다 발을 멈추고 다시 돌아보노라.

 

  이광수. 1892 - ?. 평북 정주 출생. 호는 춘원.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
중퇴. 와세다 시절 우리나라 최초의 장편소설 '무정'을 발표하는 등
육당과 더불어 우리나라 신문화 여명기의 개척자. 시집으로 <춘원시가집>이
있으며, 6.25 때 납북되어 생사불명.

     붓 한 자루

  붓 한 자루
  나와 일생을 같이 하란다.

  무거운 은혜
  인생에서 얻은 갖가지 은혜,
  언제나 갚으리
  무엇해서 갚으리 망연해도

  쓰린 가슴을
  부둠고 가는 나그네 무리
  쉬어나 가게
  내 하는 이야기를 듣고나 가게.

  붓 한 자루야
  우리는 이야기나 써볼까이나.


     서울로 간다는 소

  깍아 세운 듯한 삼방 고개로
  누른 소들이 몰리어 오른다.
  꾸부러진 두 뿔을 들먹이고
  가는 꼬리를 두르면서 간다.

  움머움머 하고 연해 고개를
  뒤로 돌릴 때에 발을 헛짚어,
  무릎을 꿇었다가 무거운 몸을
  한 걸음 올리고 또 돌려 움머.

  갈모 쓰고 채찍 든 소장사야
  산길이 험하여 운다고 마라.
  떼어두고 온 젖먹이 송아지
  눈에 아른거려 우는 줄 알라.

  삼방 고개 넘어 세포 검불령
  길은 끝없이 서울에 닿았네.
  사람은 이 길로 다시 올망정
  새끼 둔 고산 땅, 소는 다시 못 오네.

  안변 고산의 넓은 저 벌은
  대대로 네 갈던 옛터로구나.
  멍에에 벗겨진 등의 쓰림은
  지고 갈 마지막 값이로구나.

 

  김억. 1893 - ?. 평북 곽산 출생.호는 안서. 19때에 시 '미련'
'이별' 등을 발표하여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창조> <폐허> 동인으로
활약하면서 프랑스의 상징파 시운동을 소개한 <오뇌의 무도>(1921)와 근대 최초의 개인 시집인 <해파리의 노래>(1923)를 내어 신시 운동의 선구자로 이바지했다. 김소월의 스승이기도 한 그는 이 땅의 자유시, 서정시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치었고 한글시에 압운을 주장, 정형시를 시도하기도 했으나 6.25때
이북으로 납치되었다. 저서로는 <오뇌의 무도> <해파리의 노래> <안서시집>
<먼동이 틀 때> <망우초> 등이 있으며 <소월시초>의 편자로서도 알려져
있다.

     봄바람

  하늘 하늘
  잎사귀와 춤을 춤니다.

  하늘 하늘
  꽃송이와 입맞춥니다.

  하늘 하늘
  어디론지 떠나갑니다.

  하늘 하늘
  떠서 도는 하늘 바람은

  그대 잃은
  이 내 몸의 넋들이외다.


     산수갑산

  삼수갑산 가고지고
  삼수갑산 어디메냐
  아하 산첩첩에 흰구름만 쌓이고 쌓였네.

  삼수갑산 보고지고
  삼수갑산 아득코나
  아하 촉도난이 이보다야 더할소냐.

  삼수갑산 어디메냐
  삼수갑산 내 못가네
  아하 새더라면 날아 날아 가련만도.

  삼수갑산 가고지고
  삼수갑산 보고지고
  아하 원수로다 외론 꿈만 오락가락.

 

  오상순. 1894 - 1963. 서울 출생. 호가 공초인 그는 <폐허>동인으로 문단에
데뷔(1920)했다가 일제시에는 절필, 해방후 다시 붓을 들어 허무와 명상의
구도적 작품을 다수 발표했다. 중앙고보, 보성고보 등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고 각지의 사원을 두루 다니며 참선의 생활도 했다. 1962년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고, 시집으로 <오상순시집>(1963)이 있다.

     첫날밤

  어어 밤은 깊어
  화촉동방의 촛불은 꺼졌다.
  허영의 의상은 그림자마저 사라지고...

  그 청춘의 알몸이
  깊은 어둠 바다 속에서
  어족인 양 노니는데
  홀연 그윽히 들리는 소리 있어,

  아야... 야!
  태초 생명의 비밀 터지는 소리
  한 생명 무궁한 생명으로 통하는 소리
  열반의 문 열리는 소리
  오오 구원의 성모 현빈이여!

  머언 하늘의 뭇 성좌는
  이 빰을 위하여 새로 빛날진저!

  밤은 새벽을 배고
  침침히 깊어 간다.

 

  남궁벽. 1895 - 1922. 평북 함열 출생. 호는 초몽. 서울 한성고보를 졸업하고
도일하여 <폐허> 동인으로 참가하여 자연의 생명을 예찬한 낭만적 경향의 작품들을 발표했다. '신뢰'^별의 아픔' 등이 유작시로 발표되었다.

     말

  말님.
  나는 당신이 웃는 것을 본 일이 없읍니다.
  언제든지 숙명을 체관한 것 같은 얼굴로
  간혹 웃는 일은 있으나
  그것은 좀처럼 하여서는 없는 일이외다.
  대개는 침묵하고 있읍니다.
  그리고 온순하게 물건을 운반도 하고
  사람을 태워 가지고 달아나기도 합니다.

  말님, 당신의 운명은 다만 그것뿐입니까.
  그러하다는 것은 너무나 섭섭한 일이외다.
  나는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의 악을 볼 때
  항상 내세의 심판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같이
  당신의 은명을 생각할 때
  항상 당신도 사람이 될 때가 있고
  사람도 당신이 될 때가 있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황석우. 1895 - 1958. 서울 출생이며, 호는 상아탑. <폐허> 동인으로 활동,
문단에 데뷔(1915). 난해한 상징시로 서구 상징시의 선구자로 불리워졌으나
'장미촌' 시대에는 낭만주의로 전환하여 낭만주의 시인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 전문지 <장미촌>과 <조선문단>(1922) 발간.
조선일보 기자, 국민대 교무처장 등을 역임했고, 저서로 <자연송>(1929)이
있다.

     소녀의 마음

  소녀의 마음은 봄잔디 풀!
  그는 밟으면 으크러지고 
  그는 불대면 터진다.

  소녀의 마음은 유리 풍경
  그는 바람 부딪치면 울리고
  그는 내던지면 깨진다.


     초대장

  꽃동산에서 산호탁을 놓고
  어머님께 상장을 드리렵니다.
  어머님께 훈장을 드리렵니다.
  두 고리 붉은 금가락지를 드리렵니다.
  한 고리는 아버지 받들고
  한 고리는 아들딸, 사랑의 고리
  어머님이 우리를 낳은 공로훈장을 드리렵니다.
  나라의 다음가는 가정상, 가정훈장을 드리렵니다.
  시일은 ^6 236^어머니의 날^356 3^로 정한
  새 세기의 봄의 꽃.
  그 날 그 시에는 어머님의 머리 위에
  찬란한 사랑의 화환을 씌워 주세요.
  어머님의 사랑의 공덕을 감사하는 표창식은
  하늘에서 비가 오고 개임을 가리지 않음이라.
  세상의 아버지들, 어린이들
  꼭, 꼭, 꼭, 와 주세요.
  사랑의 용사,
  어머니 표훈식에 꼭 와 주세요.

 

  노자영. 1898 - 1940. 호는 춘성. <백조>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시집 <내 혼이
불탈 때는> <처녀의 화환>을 간행하기도 했다. <시인문학>을 직접
주재하기도 했고, 평론집 <인생 안내>를 간행했다. 그의 작품 세계는
감상적인 연정에 바탕을 둔  서정주의적 세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불 사루자

  아, 빨간 불을 던지라, 나의 몸 위에
  그리하여 모두 태워 버리자
  나의 피, 나의 뼈, 나의 살!
  <전적> 자아를 모두 태워 버리자!

  아, 강한 불을 던지라, 나의 몸 위에
  그리하여 모두 태워 버리자
  나의 몸에 붙어 있는 모든 애착, 모든 인습
  그리고 모든 설움 모든 아픔을
  <전적> 자아를 모두 태워  버리자.

  아, 횃불을 던지라, 나의 몸 위에
  그리하여 모두 태워 버리자
  나의 몸에 숨겨 있는 모든 거짓, 모든 가면을
  오 그러면 나는 불이 되리라
  타오르는 불꽃이 되리라
  그리하여 불로 만든 새로운 자아에 살아 보리라.

  불 타는 불, 나는 영원히 불나라에 살겠다
  모든 것을 사루고, 모든 것을 녹이는 불나라에 살겠다.

 

  변영로. 1898 - 1961. 서울 출생. 호는 수주. 미국 산호세 대학 졸업 후
동아일보, 이화여전, 성균관대 교수 역임. <폐허> 동인으로 활동.
'정신계의 생명은 영원히 산다^356 3^는 사상으로 알려져 있다. 제1회
<문화상>을 수상(1948)했고, 시집으로는 <조선의 마음>(1924)과 영문시집 <아젤리아>
등 다수를 발표하였다.

     논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렬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이릿땁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 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훈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김형원.1901 - ?. 충남 강경 출생. 호는 석송. 보성고보 중퇴. 1920년대에
문단에 데뷔하여 <개벽>에 미국의 민중 시인 휘트먼을 소개하였으며, 민중,
민족주의적인 긍정적 세계를 지향하는 시들을 발표하였다. 시집으로 <아,
지금은 새벽 4시> <내가 조물주라면> <생장의 균등> <벌거숭이의 노래>
등이 있다. 6.25때 이북으로 피납되었다.

     벌거숭이의 노래
 
  1
  나는 벌거숭이다.
  옷같은 것은 나에게 쓸 데 없다.
  나는 벌거숭이다.
  제도 인습은 고인의 옷이다.
  나는 벌거숭이다.
  시비도 모르는, 선악도 모르는.

  2
  나는 벌거숭이다. 그러나 나는
  두루마기까지 갖추어 단정히 옷을 입은
  제도와 인습에 추파를 보내어 악수하는
  썩은 내가 몰씬몰씬 나는 구도덕에 코를 박은,
  본능의 폭풍 앞에 힘없이 항복한 어린 풀이다.

  3
  나는 어린 풀이다.
  나는 벌거숭이다.
  나에게는 오직 생명이 있을 뿐이다.
  태양과 모든 성신이 운명하기까지,
  나에게는 생명의 감로가 내릴 뿐이다.
  온 누리의 모든 생물들로 더불어,
  나는 영원히 생장의 축배를 올리련다.

  4
  그리하여 나는 노래하려 한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감투를 쓴 사람으로부터
  똥통을 우주로 아는 구더기까지.
  그러나 형제들아,
  내가 그대들에게 이러한 노래를
  (모순되는 듯한 나의 노래를)
  서슴지 않고 보내는 것을 기뻐하라.
  새로운 종족아! 나의 형제들아!
  그대들은 떨어진 옷을 벗어던지자.
  절망의 어둔 함정을 벗어나고자 힘을 쓰자.

  5
  강장한 새로운 종족들아!
  아침 해는 금 노을을 친다.
  생장의 발은 아직도 처녀이다.
  개척의 괭이를 들었느냐?
  핏기 있는 알몸으로 춤을 추며,
  굳세인 목소리로 합창을 하자-

  6
  나는 벌거숭이다.
  우리는 벌거숭이다.
  개성은 우리가 뿌릴 ^6 236^생명의 씨^356 3^이다.
  우리의 밭에는 천재자변도 없다.
  우리는 오직 어린 풀과 함께
  햇빛을 먹고 마시고 입고,
  길이길이 노래만 하려 한다.

 

  이상화. 1900 - 1941. 경북 대구 출생. 호는 상화. 일본 동경 외국어학교
불어과 졸업. 월탄, 팔봉 등과 <빽조>를 창간(1921). 중국대륙을 방랑하며
낭만적이고  상징적인 시를 썼으며, 잘 알려져 있는 '나의 침실로'는
18세때 작품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며
  종달이는 울타리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다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같은 멀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쁜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도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셈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서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몸 신명이 집혔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나의 침실로

  마돈나! 지금은 밤도 목거지에 다니로라 피곤하여 돌아 가련도다.
  아, 너도 먼동이 트기 전으로 수밀도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
오너라.

  마돈나! 오려무나, 네 집에서 눈으로 유전하던 진주는 다 두고 몸만
오너라.
  빨리 가자. 우리는 밝음이 오면 어딘지 모르게 숨는 두 별이어라.

  마돈나! 구석지고도 어둔 마음의 기리에서 나는 두려워 떨며 기다리노라.
  아, 어느 덧 첫닭이 울고-뭇개가 짓도다. 나의 아씨여, 너도 듣느냐.

  마돈나! 지난 밤이 새도록 내 손수 닦아 둔 침실로 가자, 침실로!
  낡은 달은 빠지려는데, 내 귀가 듣는 발자국-오, 너의 것이냐?

  마돈나! 짧은 씸지를 더우 잡고, 눈물도 없이 하소연하는 내 마음의
촛불울 봐라.
  양털같은 바람결에도 질식이 되어 얕푸른 연기로 꺼지려는도다.

  마돈나! 오너라, 가자. 앞산 그리매가 도깨비처럼 발도 없이 이곳 가까이
오도다.
  아, 행여나 누가 볼는지-가슴이 뛰누나,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마돈나! 날이 새련다. 빨리 오려므나. 사원의 쇠북이 우리를 비웃기 전에
  네 손이 내 목을 안아라. 우리도 이 밤과 같이 오랜 나라로 가고 말자.

  마돈나! 뉘우침과 두려움의 외나무다리 건너 있는 내 침실, 열 이도
없으니!
  아, 바람이 불도다. 그와 같이 가볍게 오려무나, 나의 아씨여, 네가
오느냐?

  마돈나! 가엾어라. 나는 미치고 말았는가. 없는 소리를 내 귀가 들음은-
  내 몸에 피란 피-가슴의 샘이 말라 버린 듯 마음과 몸이 타려는도다.

  마돈나! 언젠들 안 갈 수 있으랴. 갈 테면 우리가 가자, 끄을려 가지
말고!
   너는 내 말을 믿는 마리아-내 침실이 부활의 동굴임을 네가 알련만...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얽는 꿈, 사람이 안고 궁그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느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

  마돈나! 별들의 웃음도 흐려지려 하고, 어둔 밤 물결도 잦아지려는도다.
  아, 안개가 사라지기 전으로 네가 와야지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주요한. 1900 - 1979. 평남 평양 출생이며, 호는 송아. <창조> 동인으로
우리나라 신시운동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이며 전원과 자연을 구가한
낭만적인 세계를 노래한 시인. 주요 작품으로는 '불놀이'(1919)가 있고,
시집 <아름다운 새벽>(1924)) <3인의 시가집>(1929:이광수, 김동환 공저)
및 <복사꽃>(1930)이 있다.

     불놀이

  아아, 날이 저문다. 서편 하늘에 외로운 강물 위에 스러져 가는 분홍빛
놀... 아아, 해가 저물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사월이라 파일 날, 큰 길을 물밀어 가는 사람 소리는
듣기만 하여도 흥성스러운 것을, 왜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없는고?

  아아,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시뻘건 불덩이가 춤을 춘다. 잠잠한 성문
위에서 내려다 보니, 물 냄새, 모래 냄새, 밤을 깨물고하늘을 깨물은
횃불이 그래도 무엇이 부족하여 제 몸까지 물고 뜯으며, 혼자서 어둔 가슴
품은 젊은 사람은 과거의 퍼런 꿈을 찬 강물 위에 내어던지나 무정한
물결이 그 그림자를 멀출 리가 있으랴?-아아 꺽어서 시들지 않는 꽃도
없건마는, 가신 임 생각에 살아도 죽은 이 마음이야, 에라 모르겠다. 저
불길로 이 가슴 태워 버릴까. 어제도 아픈 발 끌면서 무덤에 가 보았더니
겨울에는 말랐던 꽃이 어느 덧 피었더라마는 사랑의 봄은 또 다시 안
돌아오는가, 차라리 속 시원히 오늘 밤 이 물속에... 그런데, 행여나
불쌍히 여겨 줄 이나 있을까... 할 적에 퉁탕 불티를 날리면서 튀어나는
매화포, 펄떡 정신을 차리니 우구구 떠드는 구경꾼의 소리가 저를 비웃는
듯 꾸짖는 듯, 아아, 좀 더 강렬한 정열에 살고 싶다. 저기 저 횃불처럼
엉기는 연기, 숨막히는 불꽃의 고통 속에서라도 더욱 뜨거운 삶을 살고
싶다고 뜻밖에 가슴 두근 거리는 것은 나의 마음...

  사월달 따스한 바람이 강을 넘으면 청류벽 모란봉 높은 언덕 위에
허어옇게 흐느끼는 사람떼. 바람이 와서 불적마다 봄빛에 물든 물결이 미친
웃음을 웃으니, 겁 많은 물고기는 모래 밑에 들어 박히고, 물결치는
뱃속에서 졸음오는 리듬의 형상이 오락가락-어른거리는 그림자, 일어나는
웃음소리, 달아논 등불 밑에서 목청 길게 빼는 어린 기생의 노래, 뜻밖에
정욕을 이끄는 불구경도 이제는 겹고, 한 잔 한 잔 또 한 잔 끝없는 술도
인제는 싫어, 지저분한 배 밑창에 맥없이 누우면 까닭 모르는 눈물은 눈을
데우며, 간단 없는 장구 소리에 겨운 남자들은 때때로 불 이는 욕심에 못
견디어 번득이는 눈으로 뱃가에 뛰어 나가면, 뒤에 남은 죽어가는 촛불은
우그러진 치마 깃 위에 조을 때, 뜻 있는 듯이 찌걱거리는 배젖개 소리는
더욱 가슴을 누른다...

  아아, 강물이 웃는다. 괴상한 웃음이다. 차디찬 강물이 컴컴한 하늘을
보고 웃는 웃음이다. 아아, 배가 올라온다. 배가 오른다. 바람이 불 적마다
슬프게 삐걱거리는 배가 오른다.

  저어라 배를, 멀리서 잠자는 능라도까지, 물살 빠른 대동강을 저어
오르라. 저기 너의 애인이 맨발로 서서 기다리는 언덕으로 곧추 뱃머리를
돌리라. 물결 끝에서 일어나는 추운 바람도 무엇이리오. 괴이한 웃음
소리도 무엇이리오. 사랑 잃은 청년의 가슴 속도 너에게야 무엇이리오.
그림자 없이는 밝음도 있을 수 없거늘-오오 다만 네 확실한 오늘을 놓치지
말라. 오오 사르라, 오늘밤! 너의 빨간 횃불을 빨간 입술을 눈동자를 또한
너의 빨간 눈물을.


     빗소리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
  비는 뜰 위에 속삭입니다.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같이.

  이즈러진 달이 실낱같고
  별에서도 봄이 흐를 듯이
  따뜻한 바람이 불더니
  오늘은 이 어둔 밤을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다정한 손님같이 비가 옵니다.
  창을 열고 맞으려 하여도
  보이지 않게 속삭이며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뜰 위에 창 밖에 지붕에
  남 모를 기쁜 소식을
  나의 가슴에 전하는 비가 옵니다.


     샘물이 혼자서

  샘물이 혼자서
  춤추며 간다.
  산골짜기 돌 틈으로

  샘물이 혼자서
  웃으며 간다.
  험한 산길 꽃사이로

  하늘은 밝은데
  즐거운 그 소리
  산과 들에 울리운다.

 

  홍사용. 1900 - 1947. 경기 수원 출생. 호는 노각이며, 휘문의숙을 졸업했다.
<백조> 동인으로 감상적이며 애수가 어린 서정시를 발표하여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적 시인으로 불린다. 신극운동에 투신, 희곡작가로도 활동한
그는 <토월회> 멤버이기도 했다. 시와 수필, 회상기 등의 작품 다수를 발표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님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가장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
  그러나 시왕전에서도 쫓기어난 눈물의 왕이로소이다.
  <맨 처음으로 내가 너에게 준 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며는
  <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받은 것은 사랑이었지요마는 그것은
눈물이더이다>하겠나이다. 다른 것도 많지요마는...
  <맨 처음으로 네가 나에게 한 말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며는
  <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드린 말씀은 ^6 236^젖 주셔요^356 3^ 하는 그
소리였읍니다마는, 그것은 ^6 236^으아^356 3^-하는 울음이었나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말씀도 많지요마는...

  이것은 노상 왕에게 들리어 주신 어머님의 말씀인데요.
  왕이 처음으로 이 세상에 올 때에는 어머님의 흘리신 피를 몸에다
휘감고 왔더랍니다.
   그 말에 동네의 늙은이와 젊은이들은 모두 <무엇이냐>고 쓸데없는
물음질로 한창 바쁘게 오고갈 때에도
  어머님께서는 기꺼움보다도 아무 대답도 없이 속아픈 눈물울
흘리셨답니다.
  벌거숭이 어린 왕 나도 어머니의 눈물을 따라서 발버둥질치며,
'으아' 소리쳐 울더랍니다.

  그날 밤도 이렇게 달이 있는 밤인데요,
  으스름 달이 무리 서고, 뒷동산에 부엉이 울음 울던 밤인데요,
  어머니께서는 구슬픈 옛 이야기를 하시다가요,
  일없이 한숨을 길게 쉬시며 웃으시는 듯한 얼굴을 얼른 숙이시더이다.
  왕은 노상 버릇인 눈물이 나와서 그만 끝까지 섦게 울어버렸오이다.
울음의 뜻은 도무지 모르면서도요.
  어머니께서 조으실 때에는 왕만 혼자 울었소이다.
  어머니의 지으시는 눈물이 젖 먹는 왕의 뺨에 떨어질 때이면 왕도 따라서
시름없이 울었소이다.

  열 한 쌀 먹던 해 오월 열 나흗 날 밤 맨 잿더미로 그림자를 보러 갔을
때인데요, 명이나 긴가 짜른가 보랴고.
  왕의 동무 장난꾼 아이들이 심술스럽게 놀리더이다 모가지 없는
그림자라고요.
  왕은 소리쳐 울었소이다. 어머니께서 들으시도록, 죽을까 겁이 나서요

  나뭇군의 산 타령을 따라가다가 건넛 산 비탈로 지나가는 상둣군의
구슬픈 노래를 처음 들었소이다.
   그 길로 옹달 우물로 가자고 지름길로 들어서며는 찔레나무
가시덤불에서 처량히 우는 한 마리 파랑새를 보았소이다.
  그래 철없는 어린 왕 나는 동무라 하고 좋아 가다가 돌부리에 걸리어
넘어져서 무릎을 비비며 울었소이다.

  할머니 산소 앞에 꽃 심으러 가던 날 아침에
  어머니께서는 왕에게 하얀 옷을 입히시더이다.
  그리고 귀밑 머리를 단단히 땋아 주시며 <오늘부터는 아무쪼록 울지
말아라>
  아아 그 때부터 눈물의 왕은-어머니 몰래 남 모르게 속 깊이 소리 없이
혼자 우는 그것이 버릇이 되었소이다.

  누우런 떡갈나무 우거진 산길로 허물어진 봉화 뚝 앞으로 쫓긴 이의
노래를 부르며 어슬렁거릴 때에
  바위 밑에 돌부처는 모른 체하며 감중련하고 앉았더이다.
  아아, 뒷동산 장군 바위에서 날마다 자고 가는 뜬 구름은 얼마나 많이
왕의 눈물을 싣고 갔는지요.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외아들 나는 이렇게 왕이로소이다.
  그러나 눈물의 왕-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이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김동명. 1901 - 1968. 강원 강릉 출생. 호는 초허. 시 '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 주신다면'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923).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전원에 묻혀 참신하고 투명한 서정으로 민족의
비애를 노래한 전원파 시인. 해방후 정치와 사회에 대한 관신이 높은
참여의 시인이었으나 종교인이었던 만큼 관조적이며 철학적인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집으로는 <파초>(1938), <삼팔선>(1947), <목격자>(1957)와
수필집 <세대의 삽화>(1958) 등이 있다.

     파초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을 향한 불타는 향수.
  너의 넋은 수녀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 맡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너의 그 드리운 치마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라.


      내 마음은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라.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 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 주오.
  나는 달 아래 귀를 기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깐 그대의 뜰에 머무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다.

 

  김동환. 1901 - ?. 함북 경성 출생. 호는 파인. <금성>에 시를 발표,
데뷔한 이후 잡지 <삼천리>와 순문예지 <삼천리 문학>을 간행했다.
우리나라 신시사상 최초의 서사시집 <국경의 밤>(1925)을 출간하여 문단적
위치를 확고히 했고 시집으로 <승천하는 청춘>(1925), <해당화>(1942) 등을
발표했으나 6.25 때 납북되어 생사불명이다.

     산 너머 남촌에는

  1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꽃 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는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데나.

  2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저 하늘 저 빛깔이 저리 고울까?

  금잔디 넓은 벌엔 호랑나비떼.
  버들밭 실개천엔 종달새 노래.

  어느 것 한 가진들 들려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데나.

  3
  산 너머 남촌에는 배나무 있고,
  배나무 꽃 아래엔 누가 섰다기,

  그리운 생각에 영에 오르니,
  구름에 가리어 아니 보이네.

  끊였다 이어 오는 가느단 노래
  바람을 타고서 고이 들리네.


     북청 물장수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물을 쏴-퍼붓고는
  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북청 물장수.

  물에 젖은 꿈이
  북청 물장수를 부르면
  그는 삐걱삐걱 소리를 치며
  온 자취도 없이 다시 사라져 버린다.
  날마다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북청 물장수.


     강이 풀리면

  강이 풀리면 배가 오겠지
  배가 오며는 임도 탔겠지.

  임은 안 타도 편지야 탔겠지
  오늘도 강가서 기다리다 가노라.

  임이 오시면 이 설움도 풀리지
  동지 섣달에 얼었던 강물도

  제멋에 녹는데 왜 아니 풀릴까
  오늘도 강가서 기다리다 가노라.

 

  박영희. 1901 - ?. 호는 희월. <백조> 동인으로 1924년 이후 예맹파로
전향하여 카프의 중심 멤버가 되었으나 1933년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다'라는 유명한 선언을 하고 전향한
시인이다. 시집으로 <희월시초>가 있고 6.25 때 납북된 후 생사불명이다.

     유령의 나라

  꿈은 유령의 춤추는 마당
  현실은 사람의 괴로움 불붙이는
  싯벌건 철공장

  눈물은 불에 단
  괴로움의 찌꺼기
  사랑은 꿈속으로 부르신 여신!

  아! 괴로움에 타는
  두 사람 가슴에
  꿈의 터를 만들어 놓고
  유령과 같이 춤을 추면서
  타오르는 사랑은
  차디찬 유령과 같도다.

  현실의 사람 사람은
  유령을 두려워 떠나서 가나
  사랑을 가진 우리에게는
  꽃과 같이 아름답도다.

  아! 그대여!
  그대의 흰 손과 팔을
  저 어둔 나라로 내밀어 주시오

  내가 가리라, 내가 가리라.
  그대의 흰 팔을 조심해 밟으면서!
  유령의 나라로, 꿈의 나라로
  나는 가리라! 아 그대의 탈을-.

 

  박종화. 1901 - 1981. 서울 출생. 호는 월탄. <백조> 동인이며, 시동인지
<장미촌>을 통해 시작활동을 했다. 상징에 의한 낭만적 감상에 젖어 있는
그의 시는 민족적 전통 의식에 기조를 두고 있다. 시 '밀실로
들어가다'와 소설 '목매는 여자' 등이 그의 출세작이나
주로 역사 소설가로 알려지고 있다.시집 <흑방비곡>(1924),
<청자부>(1946)와 소설 <다정불심> <금삼의 피> <전야> <민족> <대춘부>
<임진왜란> 등이 있고 수필집 <청태집>(1942)이 있다.

     청자부

  선은
  가냘픈 푸른 선은
  아리따웁게 구을려
  보살같이 아담하고
  날씬한 어깨여
  4월 훈풍에 제비 한 마리
  방금 물을 박차 바람을 끊는다.

  그러나 이것은
  천 년의 꿈 고려 청자기!

  빛깔 오호 빛깔!
  살포시 음영을 던진 갸륵한 빛깔아
  조촐하고 깨끗한 비취여
  가을 소나기 마악 지나간
  구멍 뚫린 가을 하늘 한 조각,
  물방울 뚝뚝 서리어
  곧 흰 구름장 이는 듯하다.

  그러나 오호 이것은
  천년 묵은 고려 청자기!

  술병, 물병, 바리, 사발
  향로, 향합, 필통, 연적
  화병, 장고, 술잔, 벼개
  흙이면서 옥이더라.

  구름무늬 물결무늬
  구슬무늬 칠보무늬
  꽃무늬 백학무늬
  보상화문 불타무늬
  토공이요 화가더냐
  진흙 속 조각가다.

  그러나, 이것은
  천년의 꿈, 고려 청자기!

 

  백기만. 1901 - ?. 대구출생. 호는 목우. 일본 와세다대학을 중퇴했고
1920 - 25년 사이에 문단에 등단했다. 3.1운동 때 대구 학생운동의
주모자로 투옥, 해방될 때까지 항일운동을 했다. <금성>을 통해 정열적인
시를 발표한 순정 비분파의 시인. 6.25 때 납북되었다.

     청개구리

  청개구리는 장마 때에 운다. 차디찬 비 맞은 나뭇잎에서 하늘을 원망하듯
치어다보며 목이 터지도록 소리쳐 운다.

  청개구리는 불효한 자식이었다. 어미의 말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어미 청개구리가 <오늘은 산에 가서 놀아라!> 하면 그는 물에 가서 놀았고,
또, <물에 가서 놀아라> 하면 그는 기어이 산으로 갔었느리라.

  알뜰하게 애태우던 어미 청개구리가 이 세상을 다 살고 떠나려 할 때,
그의 시체를 산에 묻어 주기를 바랬다. 그리하여 모로만 가는 자식의 
머리를 만지며 <내가 죽거든 강가에 묻어다고!> 하였다.

  청개구리는 어미의 죽음을 보았을 때 비로소 천지가 아득하였다.
그제서야 어미의 생전에 한 번도 순종하지 않았던 것이 뼈 아프게
뉘우쳐졌다.

  청개구리는 조그만 가슴에 슬픔을 안고, 어미의 마지막 부탁을 쫓아 물
맑은 강가에 시체를 묻고, 무덤 위에 쓰러져 발버둥치며 통곡하였다.

  그 후로 장마비가 올 때마다 어미의 무덤을 생각하였다. 싯벌건 황토물이
넘어 원수의 황토물이 넘어 어미의 시체를 띄워갈까 염려이다.

  그러므로 청개구리는 장마 때에 운다. 어미의 무덤을 생각하고는 먹을
줄도 모르고 자지도 않고 슬프게 슬프게 목놓아 운다.


     은행나무 그늘

  훌륭한 그이가 우리집을 찾아왔을 때
  이상하게도 두 뺨이 타오르고 가슴은 두근거렸어요.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없이 바느질만 하였어요.
  훌륭한 그이가 우리집을 떠날 때에도
  여전히 그저 바느질만 하였어요.
  하지만 어머니, 제가 무엇을 그이에게 선물하였는지 아십니까?

  나는 그이가 돌아간 뒤에 뜰 앞 은행나무 그늘에서
  달콤하고도 부드러운 노래를 불렀어요.
  우리 집 작은 고양이는 봄볕을 흠뻑 안고 나무가리 옆에 앉아
  눈을 반만 감고 내 노래소리를 듣고 있었어요.
  하지만 어머니, 내 노래가 무엇을 말하였는지 누가 아시리까?

  저녁이 되어 그리운 붉은 등불이 많은 꿈을 가지고 왔을 때
  어머니는 젖먹이를 잠재려 자장가를 부르며 아버지를 기다리시는데
  나는 어머니 방에 있는 조그만 내 책상에 고달픈 몸을 실리고 뜻도 없는
책을 보고 있었어요.
  하지만 어머니, 제가 무엇을 그 책에서 보고 있었는지 모르시리다.

  어머니, 나는 꿈에 그이를, 그이를 보았어요.
  흰 옷 입고 초록 띠가 드리운 성자 같은 그리운 그이를 보았어요.
  그 흰 옷과 초록 띠가 어떻게 내 마음을 흔들었는지 누가 아시리까?
  오늘도 은헹나무 그늘에는 가는 노래가 떠돕니다.
  고양이는 나무 가리 옆에서 어제같이 조을고요.
  하지만 그 노래는 늦은 봄 바람처럼 괴롭습니다.

 

  심훈. 1901 - 1936. 서울 출생. 본명은 대섭이다. 1935년 동아일보에
소설 '상록수'가 당선하여 문단에 확고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가 남긴 저항시는 해방 후에 출간 되었는데 시에 담긴 고귀한 정신은
중요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시집으로는 <그날이 오면>(1949)이 있다.

      그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드리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밤

  밤, 깊은 밤 바람이 뒤설레며
  문풍지가 운다.
  방, 텅 비인 방안에는
  등잔불의 기름 조는 소리뿐...

  쥐가 천정을 모조리 써는데
  어둠은 아직도 창 밖을 지키고
  내 마음은 무거운 근심에 짓눌려
  깊이 모를 연못 속에서 자맥질한다.

  아아, 기나긴 겨울 밤에
  가늘게 떨며 흐느끼는
  고달픈 영혼의 울음소리...
  별 없는 하늘 밑에 들어 줄 사람 없구나!

 

  오일도. 1901 - 1946. 경북 영양 출생이며, 본명은 희병이다. 서울에서
중학교편을 잡으며 시단에 등단, 1935년 <시원>지를 창간하여 5호까지
주재했다. '시문학'파의 흐름을 받아 우수어린 순수시를
지향한 시인이다.

     5월의 화단

  5월의 더딘 해 고요히 나리는 화단

  하루의 정열도
  파김치같이 시들다.

  바람아, 네 이파리 하나 흔들 힘 없니!

  어두운 풀 사이로
  월계의 꽃 조각이 환각에 가물거린다.


     누른 포도잎

  검젖은 뜰 위에
  하나 둘...
  말없이 내리는 누른 포도잎.

  오늘도 나는 비 들고
  누른 잎을 울며 쓰나니

  언제나 이 비극 끝이 나려나!

  검젖은 뜰 위에
  하나 둘...
  말없이 내리는 누른 포도잎.

 

  김상용. 1902 - 1950. 경기 연천 출생. 호는 월파. 이화여전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35년 <시원>을 통해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첫시집
<망향>(1939)에 '남으로 창을 내겠소' 등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시집을 통해 명랑하고 관조적인 시세계를 깔끔한 필치로 표현하고 있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 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깔 이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향수

  인적 끊긴 산 속
  돌을 베고 하늘을 보오.

  구름이 가고,
  있지도 않은 고향이 그립소.

 

  김소월. 1902 - 1934. 평북 곽산 출생이며, 본명은 정식. 오산학교
시절의 스승 김억의 영향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개벽>에
'진달래꽃'(1922)을 발표,김동인과 함께 <영대>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아름다운 서정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의 시는 우리나라
고유의 민족적 시형에 향수, 애수 등을 담아 독자적인 세계로 묘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동아일보 지국을 경영하다 운영 실패 등 인생에 대한
회의에 빠져 33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시집으로는 <진다래꽃>(1925) 외에
최근에 나온 <먼 후일 그 때에>(1983) 등이 있다.

     진달래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산유화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찌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초혼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그 소리는 비껴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멀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엄마야 누나야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금잔디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 산천에 붙는 불은
  가신 임 무덤가에 금잔디.
  봄이 왔네, 봄빛이 왔네.
  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
  봄빛이 왔네, 봄날이 왔네.
  심심 산천에도 금잔디에.


     접동새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 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 나라
  먼 뒷쪽의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읍니다.

  누나라고 불러 보랴
  오오 불설워
  시샘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읍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는 오랍동생을
  죽어서도 못 잊어 차마 못 잊어
  야삼경 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 산 저 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


     못잊어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한 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 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

  그러나 또한긋 이렇지요,
  <그리워 살뜰히 못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지나요?>


     가는 길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 오라고 따라 가자고
  홀려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왕십리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 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

  웬걸, 저 새야
  울랴거든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 다고,
  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히 젖어서 늘어졌다네.
  비가 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구름도 상마루에 걸려서 운다.


     가막 덤불

  산에 가시나무
  가막덤불은
  덤뿔 덤불 산마루로
  벋어 올랐소

  산에는 가려 해도
  가지 못하고
  바로 말로
  집도 있는 내 몸이라오

  길에는 혼잣몸의
  홑옷 자락은
  하룻밤 눈물에는
  젖기도 했소

  산에는 가시나무
  가막덤불은 
  덤불덤불 산마루로
  벋어 올랐소.


     풀따기

  우리집 뒷산에는 풀이 푸르고
  숲 사이의 시냇물, 모래바닥은
  파아란 풀 그림자, 떠서 흘러요.

  그리운 우리 님은 어디 계신고.
  날마다 피어나는 우리 님 생각.
  날마다 뒷산에 홀로 앉아서
  날마다 풀울 따서 물에 던져요.

  흘러가는 시내의 물에 흘러서
  내어던진 풀잎은 옅게 떠갈 제
  물살이 해적해적 품을 헤쳐요.

  그리운 우리 님은 어디 계신고.
  가엾는 이내 속을 둘 곳 없어서
  날마다 풀을 따서 물에 던지고
  흘러가는 잎이나 맘해 보아요.

 

  이장희. 1902 - 1928. 경북 대구 출생이며, 호는 고월이다. 1924년
<조선문단>을 통해 시단에 등단했으며, <금성> 동인으로 활동했다.
'시란 광채없고 탄력성 없는 굵다란 철사선이어서는
안된다'라고 말한 그는 인생과 사회에 대한 몸부림 속에서 27세 때
음독자살한 천재시인이다. 전해지는 작품은 300여 편인데 주로 모더니즘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봄은 고양이로다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우리로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청천의 유방

  어머니 어머니라고
  어린 마음으로 가만히 부르고 싶은
  푸른 하늘에
  따스한 봄이 흐르고
  또 흰 별을 놓으며
  불룩한 유방이 달려 있어
  이슬 맺힌 포도 송이보다 더 아름다와라.

  탐스러운 유방을 볼지어다.
  아아 유방으로서 달콤한 젖이 방울지려 하누나
  이때야말로 애구의 정이 눈물 겨웁고
  주린 식욕이 입을 벌리도다.
  이 무심한 식욕
  이 복스러운 유방...
  쓸쓸한 심령이여 쏜살같이 날라지어다.
  푸른 하늘에 날라지어다.

 

  김영랑. 1903 - 1950. 전남 강진 출생. 본명은 윤식이며 동경
청산학원에서 수학했다. <시문학> 동인으로 정지용, 박용철과 작품을
발표하였던 그는 언어의 리듬을 시의 제의적인 것으로 주장, 우리에게
알려진 서정시인이다. 해방 후의 작품들은 당시 상황에 비춘 작품들을
밢표했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작품들은 고향의 미를 추구한 것으로
예술지상주의적인 정신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6.25 동란 때 포탄의
파편으로 변사. 시집으로 <영랑시집>(1935), <영랑시선>(1956)이 남아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어느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ㅎ게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르러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은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머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오-매 단풍 들것네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은 골 붉은 감잎 날아와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래 기둘리리
  바람이 잦이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그래도 어디나 계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우리는 티끌과
  속임 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 밤 고이 맺는 이슬 같은 보람을
  보밴 듯 감추었다 내어 뜨리지.

  아!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 맑은 옥돌에 불이 달아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

 

  양주동. 1903 - 1977. 개성 출생. 호는 무애. 와세다대학 불문과 졸업.
<금성>지와 <문예공론>을 발간하면서 '조선의 맥박' 등 일련의
작품을 발표했다. 대체로 시인 비평가로서의 그의 문단활동은
1922 - 1935년 경까지이며 그 뒤는 향가의 해독과 고려가요의 연구 등
국문학 연구에 전심했다. 그의 시세계의 특징은 민족과의 정신적 연대성,
그리고 가요적인 서정성에 있다.

     산길
  1
  산길을 간다, 말 없이
  호울로 산길을 간다.

  해는 져서 새소리 그치고
  짐승의 발자취 그윽히 들리는

  산길을 간다, 말 없이
  밤에 호올로 산길을 간다.

  2
  고요한 밤
  어두운 수풀

  가도 가도 험한 수풀
  별 안 보이는 어두운 수풀

  산길은 험하다.
  산길은 멀다.

  3
  꿈같은 산길에
  화톳불 하나.

  (길 없는 산길은 언제나 끝나리)
  (캄캄한 밤은 언제나 새리)

  바위 위에
  화톳불 하나.


     산 넘고 물 건너

  산 넘고 물 건너
  내 그대를 보려 길 떠났노라.

  그대 있는 곳 산 밑이라기
  내 산 길을 토파 멀리 오너라.

  그대 있는 곳 바닷가라기
  내 물결을 헤치고 멀리 오너라.

  아아, 오늘도 잃어진 그대를 찾으려
  이름 모를 이 마을에 헤매이노라.


     나는 이 나랏 사람의 자손이외다

  이 나랏 사람은
  마음이 그의 옷보다 희고,
  술과 노래를
  그의 아내와 같이 사랑합니다.
  나는 이 나랏 사람의 자손이외다.

  착하고 겸손하고
  꿈많고 웃음 많으나,
  힘없고 피없는
  이 나랏 사람-
  아아 나는 이 나랏 사람의 자손이외다.

  이 나랏 사람은
  마음이 그의 집보다 가난하고
  평화와 자유를
  그의 형제와 같이 사랑합니다.
  나는 이 나랏 사람의 자손이외다.

  외로웁고 쓸쑬하고
  괴로움 많고 눈물 많으나,
  숨결있고 생명있는
  이 나랏 사람-
  아아 나는 이 나라 사람의 자손이외다.

 

  이은상. 1903 - 1980. 경남 마산 출생. 호는 노산. 연희전문과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수업했다. 동아일보에 '어포 달 밝은 밤에'를
발표하여 문단활동을 시작. 이화여전, 호남일보 사장 등을 역임했다.
시조집에 <노산시조집> <노산시조선집> <푸른 하늘의 뜻은>, 기행문에
<향산유기> <탐라기행 한라산> <기행 지리산> <피어린 육백리> 등이 있다.

     가고파

  -내 마음 가 있는 그 벗에게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이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린 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 간들 잊으리오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

  가서 한데 얼려 옛날같이 살고 지라
  내 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 웃고 지내고저
  그 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

  물 나면 모래판에서 가재 거이랑 달음질하고
  물 들면 뱃장에 누워 별 헤다 잠들었지
  세상 일 모르던 날이 그리워라 그리워.

  여기 물어 보고 저기 가  알아 보나
  내 몫엔 즐거움은 아무데도 없는 것을
  두고 온 내 보금자리에 가 안기자 가 안겨.

  처자들 어미 되고 동자들 아비된 사이
  인생의 가는 길이 나뉘어 이렇구나
  잃어진 내 기쁨의 길이 아까와라 아까와.

  일하여 시름 없고 단잠들어 죄 없는 몸이
  그 바다 물소리를 밤낮에 듣는구나
  벗들아 너희는 복된 자다 부러워라 부러워.

  옛 동무 노젓는 배에 얻어 올라 치를 잡고
  한바다 물을 따라 나명들명 살까이나
  맞잡고 그물 던지며 노래하자 노래해.

  거기 아침은 오고 또 거기 석양은 져도
  찬 얼음 찬 바람은 들지 못하는 그 나라로
  돌아가 알몸으로 살꺼나 깨끗이도 깨끗이.

 

박용철. 1904 - 1938. 전남 광산 출생. 호는 용아. 일본 동경 외국어대
독문과와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했다. 1930년 김영랑, 정지용 등과 함께
시동인지 <시문학>을 창간했고 이어 <문예월간>과 순수 문예지 <문학>을
창간하여 태서문학파의 문학운동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박용철 전집>
전 2권이 1940년에 출간되었다.

     떠나가는 배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구인들 손쉽게야 버릴거냐.
  안개같이 물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 사랑하는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
  돌아다 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미련이나 있을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 보낼거냐.
  나 두 야 간다.


     고향

  고향은 찾어 무얼 하리
  일가 흩어지고 집 흐너진대
  저녁 까마귀 가을풀에 울고
  마을 앞 시내로 옛자리 바뀌었을라.

  어린 때 꿈을 엄마 무덤 위에
  남겨두고 떠도는 구름 따라
  멈추는 듯 불려온 지 여남은 해
  고향은 이제 찾어 무얼 하리.

  하늘 가에 새 기쁨을 그리어보랴
  남겨둔 무엇일래 못 잊히우랴
  모진 바람아 마음껏 불어쳐라
  흩어진 꽃잎 쉬임 어디 찾는다냐.

  험한 발에 짓밟힌 고향생각 
  -아득한 꿈엔 달려가는 길이언만-
  서로의 굳은 뜻을 남께 앗긴 
  옛 사랑의 생각 같은 쓰린 심사여라.


     눈은 내리네

  이 겨울의 아침을
  눈은 내리네

  저 눈은 너무 희고
  저 눈의 소리 또한 그윽하므로

  내 이마를 숙이고 빌까 하노라
  임이여 설운 빛이
  그대의 입술을 물들이나니
  그대 또한 저 눈을 사랑하는가

  눈은 내리어
  우리 함께 빌 때러라.

 

  이육사. 1904 - 1944. 경북 안동 출생. 본명은 원록이며 아명은
원삼이다. 중국 북경 대학 사회학과 졸업. <자오선> 동인으로 활약하다가
일본 관헌에 피검되어 북경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일제의 형무소에서
복역할 때 감방 번호가 264였기 때문에 육사라 했다고 한다. 34편의 시를
남겼고 광복 후에 출간된 <육사시집>이 있다.

     청포도

  내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주절이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 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며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리.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 곳을 범하던 못 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일식

  쟁반에 먹물을 담아 비쳐 본 어린 날
  불개는 그만 하나밖에 없는 내 날을 먹었다.

  날과 땅이 한줄 위에 돈다는 그 순간만이라도
  차라리 헛말이기를 밤마다 정녕 빌어도 보았다.

  마침내 가슴은 동굴보다 어두워 설레인고녀
  다만 한 봉오리 피려는 장미 벌레가 좀치렸다.

  그래서 더 예쁘고 진정 더없지 아니하냐
  또 어디 다른 하나를 얻어
  이슬 젖은 별빛에 가꾸련다.


     절정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갈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켜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자야곡

  수만 호 빛이래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러라.

  슬픔도 자랑도 집어 삼키는 검은 꿈
  파이프엔 조용히 타오르는 꽃불도 향기론데

  연기는 돛대처럼 날려 항구에 돌고
  옛날의 들창마다 눈동자엔 짜운 소금이 절여

  바람 불고 눈보라 치잖으면 못 살리라
  매운 술을 마셔 돌아가는 그림자 발자취소리

  숨 막힐 마음 속에 어데 강물이 흐르느뇨
  달은 강을 따르고 나는 차디찬 강 맘에 드리노라.

  수만호 빛이래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러라.


     꽃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 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쪽 순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움직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아 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여

  한 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성에는
  나비처럼 취하는 회상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호수

  내어 달라고 저운 마음이련마는
  바람 씻은 듯 다시 명상하는 눈동자

  때로 백조를 불러 휘날려 보기도 하건만
  그만 기슭을 안고 돌아누워 흑흑 흐느끼는 밤

  희미한 별 그림자를 씹어 놓이는 동안
  자줓빛 안개 가벼운 명상같이 내려 씌운다.


     황혼

  내 골방의 커어틴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 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 보련다.
  그리고 네 품안에 안긴 모든 것에게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다오.

  저-십이월 성좌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소리 저문 산림 속 그윽한 수녀들에게도
  시멘트 장판 위 그 많은 수인들에게도
  의지가지 없는 그들의 심장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사막을 걸어가는 낙타 탄 행상에게나
  아프리카 녹음 속 활 쏘는 토인들에게라도
  황혼아, 네 부드러운 품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의 반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다오.

  내 오월의 골방이 아늑도 하니
  황혼아 내일도 또 저-푸른 커어틴을 걷게 하겠지
  암암히 사라지길 시냇물 소리 같아서
  한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나 보다.

 

  김광섭. 1905 - 1977. 함북 경성 출생. 호는 이산.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일제때 반일 혐의로 4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고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애탄하며 많은 글을 남긴 그는 <극예술 연구회>에도
참가. <서울시문화상>(1957), <국민훈장 모란장>(1970),
<예술원장상>(1974)을 수상했으며 <동경> <마음> <해바라기> <성북동
비둘기> <반응> 등의 시집이 있다.

     성북동 비둘기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인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 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 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꽈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저녁에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신석정. 1907 - 1974. 충남 서천 출생. 시 ^6 236^선물^356 3^이
<시문학>에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1930). 도회지를 멀리 떠나 전원생활을
하며 부단히 움직이는 역사와 더불어 응결된 서정시를 발표한 그는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시집으로 <촛불> <슬픈 목가> <빙하>
<산의 서곡> <대바람 소리>와 역시집 <중국 시집> <매화 시집> 등이 있다.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 합니다.
  언덕에서는 우리의 어린 양들이 낡은 녹색 침대에 누워서
  남은 햇빛을 즐기느라고 돌아오지 않고,
  조용한 호수 위에는 이제야 저녁 안개가 자욱히 내려오기
시작하였읍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늙은 산의 고요히 명상하는 얼굴이 멀어가지 않고
  머언 숲에서는 밤이 끌고 오는 그 검은 치맛자락이
  밤길에 스치는 발자욱 소리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멀리 있는 기인 둑을 거쳐서 들려오는 물결 소리도 차츰차츰 멀어갑니다.
  그것은 늦은 가울부터 우리 정원을 방문하는 까마귀들이
  바람읋 데리고 멀리 가버린 까닭이겠읍니다.
  시방 어머니의 등에서는 어머니의 콧노래 섞인
  자장가를 듣고 싶어하는 애기의 잠덧이 있읍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이제야 저 숲 너머 하늘에 작은 별이 하나 나오지 않았읍니까?


     봄을 기다리는 마음

  우수도
  경칩도
  머언 날씨에
  그렇게 차가운 계절인데도
  봄은 우리 고운 핏줄을 타고 오고
  호흡은 가빠도 이토록 뜨거운가?

  손에 손을 쥐고
  볼에 볼을 문지르고
  의지한 채 체온을 길이 간직하고픈 것은
  꽃피는 봄을 기다리는 탓이리라.

  산은
  산대로 첩첩 쌓이고
  물은
  물대로 모여 가듯이

  나무는 나무끼리
  짐승은 짐승끼리
  우리도 우리끼리
  봄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산수도

  숲길같이 이끼 푸르고
  나무 사이사이 강물이 희어...

  햇볕 어린 가지 끝에 산새 쉬고
  흰 구름 한가히 하늘을 지난다.

  산가마귀 소리 골짝에 잦은데
  등 너머 바람이 바람이 넘어 닥쳐 와...

  굽어든 숲길을 돌아서
  시내물 여운 옥인 듯 맑아라.

  푸른 산 푸른 산이 천 년만 가리...
  강물이 흘러 흘러 만 년만 가리...

  산수는 오로지 한폭의 그림이냐?


     추석

  가윗날 앞둔 달이 지치도록 푸른 밤,
  전선에 우는 벌레 그 소리도 푸르리.

  소양강 물 소리며 병정들 얘기소리,
  그 속에 네 소리도 역력히 들려오고.

  추석이 내일 모레, 고무신도 사야지만,
  네게도 치약이랑 수건도 부쳐야지...


     임께서 부르시면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호수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
  말없이 재 넘는 초승달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포곤히 풀릱 봄 하늘 아래
  굽이굽이 하늘 가에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파아란 하늘에 백로가 노래하고
  이른 봄 잔디밭에 스며드는 햇볕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유치환. 1908 - 1967. 경남 충무 출생이며 호는 청마. 연회전문 문과에서
수학했으며 동인지 <생리>를 발간(1929)하기도 했다. <문예월간>에
'정적'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1931). 생명과 자연, 허무와
신을 노래한 시인으로 14권의 시집과 수상록을 발간했다.  시집으로는
<청마시초> <생명의 서> <울릉도> <보병과 더불어> <청령일기> 외에 다수의
작품집이 있다.

     깃발

  이것은 소리 없는 아수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바위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깍이는 대로
  억 년 비정의 함묵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
  꿈 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생명의 서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에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번 뜬 백일이 불사신 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6 236^나^356 3^와 대면하게 될지니
  하여 ^6 236^나^356 3^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그리움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찌기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언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더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드메 꽃같이 숨었느냐.


     의주ㅅ 길

  장안을 나서서 북쪽가는 천 리 길
  아카시아 꽃수술에 꿀벌 엉기는
  이 길을 떠나면 다시 오지 안하리니

  속눈썹 감실감실 사랑한 너야
  이대로 고이 나는 너를 하직하노니
  누가 묻거들랑 울지 말고 모른다 하소.

  천리 길 너 생각에 하염없이 걷노라면
  하늘도 따사로이, 뒷등도 따사로이
  가며가며 쉬어쉬어 울 곳도 많아라.


     춘신

  꽃등인 양 창 앞에 한 그루 피어오른
  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 새로
  작은 멧새 하나 찾아와 무심히 놀다 가나니.

  적막한 겨우내 들녘 끝 어디에서
  작은 깃 얽고 다리 오그리고 지내다가
  이 보오얀 봄길을 찾아 문안하여 나왔느뇨.

  앉았다 떠난 아름다운 그 자리 가지에 여운 남아
  뉘도 모를 한 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나니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작은 길이여.

 

  신석초. 1909 - 1976. 충남 서천 출생. 본명은 응식이며 일본 호오세이
대학에서 수학했다. 1935년 <자오선> 동인으로 시를 쓰기 시작, 한때
발레리에 심취하기도 했다. 시집으로 <신석초시집> <바라춤> 등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다.

     고풍

  분홍색 회장저고리
  남끝동 자주 고름
  긴 치맛자락을
  살며시 치켜들고
  치마 밑으로 하얀
  외씨버선이 고와라.
  멋들어진 어여머리
  화관 몽두리
  화관 족두리에
  황금 용잠 고와라.
  은은한 장지 그리메
  새 치장하고 다소곳이
  아침 난간에 섰다.


     바라춤

  언제나 내 더럽히지 않을
  티 없는 꽃잎으로 살어여러 했건만
  내 가슴의 그윽한 수풀 속에
  솟아오르는 구슬픈 샘물을
  어이할까나.

  청산 깊은 절에 울어 끊인
  종소리는 아마 이슷하여이다.
  경경이 밝은 달은
  빈 절을 덧없이 비초이고
  뒤안 이슥한 꽃가지에
  잠 못 이루는 두견조차
  저리 슬피 우는다.

  아아 어이 하리. 내 홀로
  다만 내 홀로 지닐 즐거운
  무상한 열반을
  나는 꿈꾸었노라.
  그러나 나도 모르는 어지러운 티끌이
  내 맘의 맑은 거울을 흐리노라.

  몸은 서러라.
  허물 많은 사바의 몸이여!
  현세의 어지러운 번뇌가
  짐승처럼 내 몸을 물고
  오오, 형체, 이 아리따움과
  내 보석 수풀 속에
  비밀한 뱀이 꿈 어리는 형역의
  끝없는 갈림길이여.

  구름처럼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 소리
  지는 꽃잎도 띄워 둥둥 떠내려가것다.
  부서지는 주옥의 여울이여
  너울너울 흘러서 창해에
  미치기 전에야 끊일 줄이 있으리.
  저절로 흘러가는 널조차 부러워라.

 

  이상. 1910 - 1937. 서울 출생. 본명은 김해경. <조선과 건축>에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구인회 동인으로 활동했다. <조선중앙일보>에
오감도를 연재하다가 각계의 비난을 받고 중단(1934)했고, <조광>에
단편소설 '날개'를 발표(1936)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암담한
생활에 대한 회의로 일본에 건너갔다가 지병인 폐환으로 27세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유작으로 <이상전집>이 있다.

     거울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께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꽃나무

  벌판한복판에꽃나무하나가있소. 근처에는꽃나무가하나도없소. 꽃나무는
제가생각하는꽃나무를열심으로생각하는것처럼열심으로꽃을피워가지고섰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소. 나는막달아났소. 한꽃나무를위
하야그러는것처럼나는참그런이상스런흉내를내었소.


     절벽

  꽃이보이지않는다. 꽃이향기롭다. 향기가만발한다. 나는거기묘혈을판다.
묘혈도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묘혈속에나는들어앉는다. 나는눕는다. 또
꽃이향기롭다. 꽃은보이지않는다. 향기가만발한다. 나는잊어버리고재처거
기묘혈을판다. 묘혈은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묘혈로나는꽃을깜빡잊어버
리고들어간다. 나는정말눕는다. 아아, 꽃이또향기롭다. 보이지도않는꽃이
-보이지도않는꽃이.


     오감도. 15

  1
  나는거울없는실내에있다. 거울속의나는역시외출중이다. 나는지금거울속
의나를무서워하며떨고있다. 거울속의나는어디가서나를어떻게하려는음모를
하는중일까.

  2
  죄를품고침상에서잤다. 확실한내꿈에나는결석하였고의족을담은군용장화
가내꿈의백지를더럽혀놓았다.

  3
  나는거울있는실내로몰래들어간다. 나를거울에서해방하려고그러나거울속
의나는침울한얼굴로동시에꼭들어온다. 거울속의나는내게미안한뜻을전한다.
내가그때문에영오되어있드키그도나때문에영오되어떨고있다.

  4
  내가결석한나의꿈내위조가등장하지않는내거울무능이라도좋은나의고독의
갈망자다. 나는드디어거울속의나에게자살을권유하기로결심하였다. 나는그
에게시야도없는들창을가르치었다. 그들창은자살만을위한들창이다. 그러나
내가자살하지아니하면그가자살할수없음을그는내게가르친다. 거울속의나는
불사조에가깝다.

  5
  내왼편가슴심장의위치를방탄금속으로엄폐하고나는거울속의내왼편가슴을
겨누어권총을발사하였다. 탄환은그의왼편가슴을관통하였으나그의심장은바
른편에있다.

  6
  모형심장에서붉은잉크가엎질러졌다. 내가지각한내꿈에서나는극형을받
았다. 내꿈을지배하는자는내가아니다. 내가악수조차할수없는두사람을봉쇄
한거대한죄가있다.

 

  김용호. 1912 - 1973. 경남 마산 출생. 호는 학산, 야돈, 추강이다. 일본
메이지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면서 <맥> 동인으로 활동했다. <자유
문학상>(1956)을 수상했고 시집으로는 <향연> <해마다 피는 꽃> <날개>
<의상세례>와 서사시 '남해찬가' 등이 있다.

     주막에서
 
  어디든 멀찌감치 통한다는
  길 옆
  주막

  그
  수없이 입술이 닿은
  이 빠진 낡은 사발에
  나도 입술을 댄다.

  흡사
  정처럼 옮아 오는
  막걸리 맛

  여기
  대대의 슬픈 노정이 집산하고
  알맞은 자리, 저만치
  위의 있는 송덕비 위로
  맵고도 쓴 시간이 흘러가고

  세월이여!

  소금보다도 짜다는
  인생을 안주하여
  주막을 나서면
  노을 빗긴 길은
  가없이 길고 가늘더라만
  내 입술이 닿은 그런 사발에
  누가 또한 닿으랴
  이런 무렵에.


     눈오는 밤에

  오누이들의
  정다운 얘기에
  어느 집 질화로엔
  밤알이 토실토실 익겠다.

  콩기름 불
  실고추처럼 가늘게 피어나던 밤

  파묻은 불씨를 헤쳐
  잎담배를 피우며

  <고놈, 눈동자가 초롱 같애>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할머니,
  바깥엔 연방 눈이 내리고.
  오늘 밤처럼 눈이 내리고.

  다만 이제 나 홀로
  눈을 밟으며 간다.

  오우버 자락에
  구수한 할머니의 옛 이야기를 싸고,
  어린 시절의 그 눈을 밟으며 간다.

  오누이들의
  정다운 얘기에
  어느 집 질화로엔
  밤알이 토실토실 익겠다.

 

  이호우. 1912 - 1970. 경북 청도 출생. 호는 이호우. <문장>지에
'달밤'이 추천(1940)되어 문단에 데뷔, 낙동강인으로
활약했다. 제1회 <경북 문화상>을 수상. 시조집으로 <이호우 시조집>과,
누이 이영도와 함께 낸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 <고금 시조 정해> 등이
있다.

     개화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


     난

  벌 나빈 알 리 없는
  깊은 산 곳을 가려

  안으로 다스리는
  청자빛 맑은 향기

  종이에 물이 스미듯
  미소 같은 정이여.


     살구꽃 핀 마을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
  뉘 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바람 없는 밤을 꽃그늘에 달이 오면,
  술 익는 초당마다 정이 더욱 익으리니,
  나그네 저무는 날에도 마음 아니 바빠라.

 

  김현승. 1913 - 1975. 전남 광주 출생. 호는 남풍, 다형. 숭실전문시절
<동아일보>에 시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이
발표됨으로 문단에 데뷔한 그는 지적이고 건강한 생리를 지닌 기독교적 주지
시인이다. <서울시 문화상>(1973)을 수상. 시집으로는 <김현승 시초>
<옹호자의 노래> <절대 고독> <김현승 시선집> 등이 있다.

     눈물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는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플라타나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나스,
  너의 머리는 어느 덧 파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 모르나
  플라타나스,
  너는 내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나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너의 영혼을 불어 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나스,
  나는 너와 함께 신이 아니다!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플라타나스,
  너를 맞아 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나는 길이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가을의 기도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무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절대고독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영혼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하품을 하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아름다운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나는 무엇인가 내게로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스한 체온을 느낀다.

  그 체온으로 내게로 끝나는 영원의 먼 끝을
  나는 혼자서 내 가슴에 품어준다.
  나는 내 눈으로 이제는 그것들을 바라본다.

  그 끝에서 나의 언어들을 바람에 날려 보내며,
  꿈으로 고인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 보낸다.

  나는 내게서 끝나는
  무한의 눈물겨운 끝을
  내 주름 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때 나아갈 수 없는 그 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나의 시는.

  노천명. 1913 - 1957. 황해 장연 출생.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일생을 독신으로 진내며 <조선중앙일보> <조선일보> <여성> 등의
여기자로 활동하며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여류시인. 시집으로 <산호림>
<창변> <별을 쳐다보며>  <사슴의 노래>와 수필집 <산딸기> <나의
생활백서> 등의 작품 다수를 발표했다.

     사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 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남사당

  나는 얼굴에 분칠을 하고
  삼단 같은 머리를 땋아내린 사나이

  초립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들이
  날라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두르고 나는 향단이가 된다.
  이리하여 장터 어느 넓은 마당을 빌어
  램프불을 돋운 포장 속에선
  내 남성이 십분 굴욕되다.

  산 너머 지나온 저 동리엔
  은반지를 사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 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나는 집시의 피였다.
  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우리들의 도구를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의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라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삽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장만영. 1914 - 1976. 황해 연백 출생. 호는 초애. 일본 미자키
영어학교를 졸업. 유학시절 <동광>에 시 '봄노래'가 김억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했다. 그의 시는 이미지즘을 바탕으로 했으며 현실
의식이 크게 반영된 작품과 농촌적 이미지화라는 두 개의 의식을 이중으로
노출시킨 세련된 시로 평까받고 있다. 시집으로 <양> <축제> <유년송>
<밤의 서정> <저녁 종소리>와 자작시 해설집 <이정표> 등이 있다.

     달, 포도, 잎사귀

  순이 벌레 우는 고풍한 뜰에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 왔구나.

  달은 나의 뜰에 고요히 앉아 있다.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

  동해바다 물처럼
  푸른
  가을
  밤
  포도는 달빛이 스며 고웁다.
  포도는 달빛을 머금고 익는다.

  순이 포도덩쿨 밑에 어린 잎새들이
  달빛에 젖어 호젓하구나.


     비

  순이 뒷산에 두견이 노래하는 사월달이면
  비는 새파아란 잔디를 밟으며 온다.

  비는 눈이 수정처럼 맑다.
  비는 하이얀 진주 목걸이를 자랑한다.

  비는 수양버들 그늘에서
  한종일 은빛 레이스를 짜고 있다.

  비는 대낮에도 나를 키스한다.
  비는 입술이 함씬 딸기물에 젖었따.

  비는 고요한 노래를 불러
  벚꽃 향기 풍기는 황혼을 데려온다.

  비는 어디서 자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순이 우리가 촛불을 밝히고 마주 앉을 때

  비는 밤 깊도록 창 밖에서 종알거리다가
  이윽고 아침이면 어디론지 가고 보이지 않는다.


     소쩍새

  소쩍새들이 운다.
  소쩍소쩍 솥이 작다고
  뒷산에서도
  앞산에서도
  소쩍새들이 울고 있다.

  소쩍새가
  저렇게 많이 나오는 해는
  풍년이 든다고
  어머니가 나에게 일러 주시는 그 사이에도
  소쩍소쩍 솥이 작다고
  소쩍새들은 목이 닳도록 울어 댄다.

  밤이 깊도록 울어 댄다.
  아아, 마을은
  소쩍새 투성이다.


     길손

  길손이 말없이 떠나려 하고 있다.
  한 권의 조이스 시집과
  한 자루의 외국제 노란 연필과
  때 묻은 몇 권의 노트와
  무수한 담배꽁초와
  덧없는 마음을 그대로
  낡은 다락방에 남겨 놓고
  저녁놀 스러지듯이
  길손이 말없이 떠나려 하고 있다.

  날마다 떼지어 날아와 우는
  검은 새들의 시끄러운
  지저귐 속에서
  슬픈 세월 속에서
  아름다운 장미의 시
  한편 쓰지 못한 채
  그리운 벗들에게 문안편지
  한 장도 내지 못한 채
  벽에 걸린 밀레의
  풍경화만 바라보며 지내던
  길손이 이제 떠나려 하고 있다.

  산등 너머로 사라진
  머리처네 쓴 그 아낙네처럼
  떠나 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을
  영겁의 외로운 길손
  붙들 수조차 없는 길손과의
  석별을 서러워 마라.
  닦아 놓은
  회상의 은촛대에
  오색 촛불 가지런히
  꽃처럼 밝히고
  아무 말 아무 생각하지 않고
  차가운 밤하늘로 퍼지는
  먼 산사의 제야의 종소리 들으며
  하룻밤을 뜬 채 세우자.

 

  박목월. 1916 - 1978. 경북 경주 출생. 대구 계성중학을 졸업했다.
<문장>지에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해방후, 좌익 우익의
대립 양상 속에서 <청록파> 동인을 만들어 민족적 서정시집인
<청록집>을 발간했다. 예술원 회원으로 시전문지 <심상>을 발행하여 많은
시인을 배출했으며, 시집으로 <산도화> <난, 기타> <행복의 얼굴> <경상도
가랑잎>, 자작시 해설집인 <보랏빛 소묘>가 있다.

     나그네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윤사월

  송홧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운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고
  엿듣고 있다.


     청노루

  머언 산 청운사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

  오리목
  속잎 피는 열 두 구비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산도화

  산은
  구강산
  보랏빛 석산

  산도화
  두어 송이
  송이 버는데

  봄눈 녹아 흐르는
  옥같은
  물에

  사슴은
  암사슴
  발을 씻는다.


     산이 날 에워싸고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고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고 살아라 한다.

  어느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구름처럼 살아라 한다.
  바람처럼 살아라 한다.


     우회로

  병원으로 가는 긴 우회로
  달빛이 깔렸다.
  밤은 에테르로 풀리고
  확대되어 가는 아내의 눈에
  달빛이 깔린 긴 우회로
  그 속을 내가 걷는다.
  흔들리는 남편의 모습.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메스를 가아제로 닦고
  응결하는 피.
  병원으로 가는 긴 우회로
  달빛 속을 내가 걷는다.
  흔들리는 남편의 모습.
  혼수 속에서 피어 올리는
  아내의 미소(밤은 에테르로 풀리고)
  긴 우회로를
  흔들리는 아내의 모습
  하얀 나선 통로를
  내가 내려간다.


     난

  이쯤에서 그만 하직하고 싶다.
  좀 여유가 있는 지금, 양손을 들고
  나머지 허락 받은 것을 돌려보냈으면
  여유 있는 하직은
  얼마나 아름다우랴.
  한 포기 난을 기르듯
  애석하게 버린 것에서
  조용히 살아나고
  가지를 뻗고,
  그리고 그 섭섭한 뜻이
  스스로 꽃망울을 이루어
  아아
  먼 곳에서 그윽히 향기를
  머금고 싶다.

 

  이영도. 1916 -  경북 청도 출생. 호는 정운. <죽순>에 시조를
발표(194)하면서 데뷔했다. 고유한 민족 정서를 바탕으로 인생에 대한
관조를 간결한 수사로 구현한 그는 시조집 <청저집>과  수필집인
<청근집> <비둘기 내리는 뜨락> <머나먼 사념의 긺목> 등이 있다.

     백록담

  차라리 스스로 달래어
  싸느라니 고였는가

  그 날 하늘을 흔들고
  아우성치던 불길

  투명한 가슴을 열고
  여기 내다뵈는 상채기.

 

  함형수. 1916 - 1946. 함북 경성 출생. <시인부락> 동인으로 창간호에
시 '해바라기의 비명'을 발표하면서 데뷔. 일종의 데카당한
모더니즘 계열의 시인으로, 심한 정신 착란증으로 사망했다. 그의 전
작품은 10여 편에 불과하나 1930년대 후반기 시인으로 유명하다.

     해바라기의 비명
  -청년화가 ㄴ을 위하여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비ㅅ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깥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윤동주. 1917 - 1945. 북간도 명동촌 출생. 아명은 해환이다. 연희전문과
일본 도오지샤 대학을 다녔으며, 재학중 독립운동의 혐의를 받아 2년의
선고를 받고 큐우슈의 형무소에서 복역중 옥사했다. 자아에 대한
내적응시와 조국광복의 염원이 그의 시에 나타나 있다. 유고 30여 편을
묶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1948년에 발간되었다.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차 있읍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6 236^프랑시스 잠^356 3^,
^6 236^라이너 마리아 릴케^356 3^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읍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읍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 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십자가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읍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왔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읍니다.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읍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읍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읍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읍니다.


     또 다른 고향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밤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조향. 1917 - 1984. 경남 사천 출생. 본명은 섭제, 니혼 대학 상경과
수학. <매일신보> 신춘문예로 등단(1941)하여 동인지 <노만파>
<일요문학>을 주제했으며 <후반기> 동인으로 참여했다. 그는 시에 외래어를
대담하게 도입하고, 종래의 산문적 설명적 요소를 철저히 배격하여
초현실주의 계열의 시풍을 확립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사화집
와 소설 <구관조> 등 작품 다수를 발표했다.

     Episode

  열 오른 눈초리, 하잔한 입 모습으로 소년은 가만히 총을 겨누었다.
  소녀의 손바닥이 나비처럼 총 끝에 와서 사쁜히 앉는다.
  이윽고 총 끝에선 파아란 연기가 몰씬 올랐다.
  뚫린 손바닥의 구멍으로 소녀는 바다를 내다보았다.

  -아이! 어쩜 바다가 이렇게 똥그랗니?

  놀란 갈매기들은 황토 산태바기에다 연달아 머릴 쳐박곤 하얗게 화석이
되어 갔다.

 

  허민. ? - 1943. 출생연도나 출생지가 확실치 않은 시인으로 미발표 유작
백여 편이 남아 있다. 소설가이기도 한 그는 유고시집 제8권(이중 3, 4권
분실)을 남겼으며 동시대 시인인 윤동주와 쌍벽을 이루는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산렵기

  추석 이튿날 그와 바람 없는 골에 들어
  산새들이 먹다 남긴 산과를 따며

  산 밖을 나가는 날의 설움을 잊어보려고
  가재 웅크린 개울에서 노래도 불렀드니라

  전설도 없는 이 산천 깊숙한 넌출아래
  가지고 오신 괴로움을 모다 묻어두어서

  사람을 보고도 피하지 않는 짐승들로하여
  다양한 봄날을 기다려 파 내도록 당부하였드니라.

  허울차게 태고의 꿈이 감긴 교목에
  유원한 한숨을 보여 주시는 너드렁이 비탈

  머루랑 다래랑 으름이랑 한껏
  그와 노나먹으며 철없이 잠들었드니라.

 

  김종문. 1919 - 1981. 평남 평양 출생. 일본 도오꼬오 아테네 프랑세
졸업. 평론 ^6 236^문학의 문화에 미치는 영양에 대해^356 3^를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 균형잡힌 지성을 바탕으로 폭넓은 미학의 질서를 보여준 그는
파이프 시인이라 불리기도 한다. 시집으로 <벽> <불안한 토요일>
<시사시대> <인간조형> <신시집> 등이 있다.

     샤보뎅

  하늘에서 모래알이 쏟아지고 있었다.
  인간은 바람결에 소리를 내며
  이루고 있었다. 평원과 산을
  생각하는 모래알처럼.

  인간이 죽어간 폐허 위에
  집을 지으며 정원을 가꾸며 살고 있었다.
  행복하다는 생각을 생각하며.

  사막에서 떠나 살 수 없는 체념에서 해골바가지를 들고
  오아시스를 찾는 여정을 더듬어 가고 있었다.

  태양이 흘리며 간 적은 피자국들은
  뉘의 눈에도 뛰우지 않았다.
  태양의 유형처럼.

  하늘에서 모래알이 쏟아지고 있었다.
  하늘도, 땅도, 사막
  저 멀리 사막 사이를 가고 있었다.
  검은 스카프로 얼굴을 가리운 여인이.


     첼로를 켜는 여인

  무대는 여인의 차지다.

  부푼 유방, 파인 허리, 부푼 만삭,

  긴 머리채로 가리우고, 긴 팔로 가리우고

  진동하는 저음, 아가의 고성을 묻고,

  비트는 긴 모가지, 꼬아 붙이는 두 다리,

  객석은 남자의 차지다.


     의자

  내가 서양 문명의 혜택을 입었다면
  그것은 단 한 가지, 의자이다.
  그렇지만 나의 의자는
  바로크풍이나 로마네스크풍과는 거리가 멀고
  더우기 대감들이 즐기던 교의 따위도 아니다.
  나의 의자는 강원도산 박달나무로
  튼튼한 네 다리와 두터운 엉덩판과 가파른 등이
  나의 계산에 의해 손수 만들어졌고
  칠이라고는 나의 손때 뿐이다.
  나의 의자는
  나의 무게를 저울보다는 잘 알고 있고
  나의 동작 하나 하나에 대해 민감하며
  나의 거칠어지는 피부를 어루만질 줄 안다.
  나의 고독은 나의 의자와의 교감이기에 고독이 아니고
  나의 독백은 나의 의자와의 대화이기에 독백이 아니다.
  낮을 밤에 이어 시를 쓰노라면
  나의 의자에서 시가 우러나며
  나의 다리, 나의 엉덩판, 나의 등이 되어
  때로는 지하 8척 아래로, 때로는 구중의 탑 위로
  나를 운반하지만
  나의 의자는 항시 제자리에 있다.
  나의 의자는 세계의 축, 나의 만세반석이다.
  세상에는 빈 것이 하도 많지만
  나의 의자는
  비록 공석중이라도 비어 있지 않다.

 

  한하운. 1919 - 1975. 함남 함주 출생. 본명은 태영. 나병의 재발로
월남하여 한때 방랑생활을 했다. 나병의 병고에서 오는 저주와 비통을 읊어
문단의 주목을 끌었으며, 시집으로는 <보리피리> <한하운 시선집> 자작시
해설 <황토길> 등이 있다.

     보리피리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
  눈물의 언덕을
  피ㄹ 닐니리.


     여인

  눈여겨 낯익은 듯한 여인 하나
  어깨 넓직한 사나이와 함께 나란히
  아가를 거느리고 내 앞을 무심히 지나간다.

  아무리 보아도
  나이가 스무살 남짓한 저 여인은
  뒷모습 걸음걸이 하며
  몸맵시 틀림없는 저... 누구라 할까...

  어쩌면 엷은 혀 끝에 맴도는 이름이요!
  어쩌면 아슬아슬 눈 감길 듯 떠오르는 추억이요!
  옛날엔 아무렇게나 행복해 버렸나 보지?
  아니 아니 정말로 이제금 행복해 버렸나 보지?

 

  이동주. 1920 - 1979. 전남 해남 출생. <조광>에 시를 발표하면서 시작
활동을 했으며 <문예>에 '황혼'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한
그는 전통적인 정서 세계를 심미적으로 노래한 서정시인이며
실명소설분야를 개척 저명 문인의 일대기를 소설화하기도 했다. 시집으로
<혼야> <강강술래> 등이 있다.

     강강술래

  여울에 몰린 은어떼.

  삐비꽃 손들이 둘레를 짜면
  달무리가 비잉빙 돈다.

  가아응, 가아응, 수우워얼래애
  목을 빼면 설움이 솟고...

  백장미 밭에
  공작이 취했다.

  뛰자 뛰자 뛰어나 보자
  강강술래.

  뉘누리에 테이프가 감긴다.
  열 두 발 상모가 마구 돈다.

  달빛이 배이면 술보다 독한 것

  기폭이 찢어진다.
  갈대가 쓰러진다.

  강강술래
  강강술래.


     혼야

  금슬은 구구 비둘기...

  열 두 병풍
  첩첩 산곡인데
  칠보 황홀히 오롯한 나의 방석.

  오오 어느 나라 공주오이까.
  다수굿 내 앞에 받아들었오이다.

  어른일사 원삼을 입혔는데
  수실 단 부전 향낭이 애릿해라.

  황촉 갈고 갈아 첫닭이 우는데
  깨알 같은 쩡화가 스스로와...

  눈으로 당기면 고즈너기 끌려와 혀 끝에 떨어지는 이름
  사르르 온 몸에 휘감기는 비단이라
  내사 스스로 의의 장검을 찬 왕자.

  어느 새 늙어 버린 누님 같은 아내여.
  쇠갈퀴 손을 잡고 세월이 원통해 눈을 감으면

  살포시 다시 찾아오는 그대 아직 신부고녀.
  금슬은 구구 비둘기.

 

  조지훈. 1920 - 1968. 경북 영양 출생. 본명은 동탁이며, 혜화전문학교를
졸업했다. 1939년 <문장>지에 시가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1939)하여
<백지> 동인으로 활동했다. 초기 시는 불교적 선의 감각을 엿볼 수 있으며
동양적 정신의 깊이를 보여주는 시세계를 완성했다.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청록집>을 발행하기도 했다.

     승무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설러워라.

  빈 대에 황촉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똥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양 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고풍의상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 끝 풍경이 운다.
  처마 끝 곱게 늘이운 주렴에 반월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가는 밤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자줏빛 호장을 받친 호장저고리
  호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살살이 퍼져 내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곡선을 이루는 곳
  열 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치마 끝에 곱게 감춘 운혜 당혜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삶며시 문을 열고,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
  호접인 양 사풋이 춤을 추라, 아미를 숙이고...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 눈 감고 거문고 줄 골라 보리니
  가는 버들인 양 가락에 맞추어 흰 손을 흔들어지이다.


     완화삼

  차운 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한성기. 1923 - 1984. 함남 정평 출생. <문에>와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그는 사물과 실재에의 겸허하고도 차분한 접근과 통찰을 통하여 경이로운
질서와 참신한 시적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시인. 시집으로 <산에서>
<낙향이후> <실향> 등이 있으며, <호서문학> 동인이기도 했다.

     역

  푸른 불 시그낼이 꿈처럼 어리는
  거기 조그마한 역이 있다.

  빈 대합실에는
  의지할 의자 하나 없고
  이따금
  급행열차가 어지럽게 경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눈이 오고
  비가 오고...

  아득한 선로 위에
  없는 듯 있는 듯
  거기 조그만 역처럼 내가 있다.

 

  공중인. 1923 - 1966. 호는 서양. 필명은 시예리, 운서, 공화이다.
<시탑> 동인으로 활약했으며 씨집으로 <무지개>(1956)가 있다.

     설야의 장

  새하얀 장미의 탄식과도 같이
  눈 내리는, ^6 236^마리아^356 3^의 밤!

  옛날의 그이를 사모쳐
  새하얀 공간에 가득히
  그려 놓은 새하얀 그림들이
  일시에 무너지듯이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가 없는 추억을 묻히고
  밤을 묻히고, ^6 236^청춘^356 3^이 작별한
  나의 마음을 묻힌다.
  밤이 새도록 쉴 새 없이
  머언 그이의 사라진 발자욱처럼

  꽃과 나비와 낙엽들의
  쓰러져 하염없는 사연처럼
  눈은 내 고독의 숲을 내려 쌓인다.

  아- 이러한 밤에
  ^6 236^예수^356 3^는 태어났는가!
  바람들이 남기고 간
  이 새하얀 영원의 여백.

  하늘과 땅이 융합하는
  그 설백한 사랑의 노래는,
  그지없는, ^6 236^운명^356 3^을 우는
  나의 혼을 갈앉히우며
  세계를 덮는다.
  ... 눈 내리는 밤에.

  김수영. 1921 - 1968. 서울 출생. 연세대 영문과 졸업. 박인환, 김경린
등과 엔솔로지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1948)을 간행했으며,
반서정과 참여시의 기치를 높여 문단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또한 현실과
생활에 밀착된 지성에 의해 전개된 서정시라는 평을 받았고 4.19후에는
참여시를 즐겨 쓰기도 했다. 시집으로는 <달나라의 장난>과 합동시집
<평화에의 증언> 등이 있다. 48세 때 교통사고로 사망.

     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 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더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달나라의 장난

  팽이가 돈다
  어린아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 한 번 팽이를 돌려 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 안에서 쫓겨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 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찝을 가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게 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 던지니
  소리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에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년전의 성인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폭포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햐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눈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김종삼. 1921 - 1984. 황해 은율 출생. 일본 도오꼬오 문화학원에서
수학했으며 유치진 씨에게 사사하여 연극 음악을 담당하기도 했다.
<현대시학상> 수상(1971). 시집으로 <12음게> <본적지>(공저) <전쟁과
음악과 희망과>(공저) <북치는 소년> 등이 있다. <현대시> 동인으로 활동한
그는 음악적 리듬과 회화적 형상화를 중요시한 시인이었다.

     북치는 소년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그리운 안니, 로, 리

  나는 그동안 배꼽에
  솔방울로 돋아
  보았고

  머리 위로는 몹쓸 버섯도 돋아
  보았읍니다 그러다가는
  ^6 236^맥웰^356 3^이라는
  노의의 음성이

  자꾸만
  넓은 푸름을 지나
  머언 언덕가에 떠오르곤 하였읍니다

  오늘은
  이만치하면 좋으리만치
  리봉을 단 아이들이 놀고 있음을 봅니다

  그리고는
  얕은
  파아란
  페인트 울타리가 보입니다

  그런데
  한 아이는
  처마 밑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않고
  짜증을 내고 있는데

  그 아이는
  얼마 못가서 죽을 아이라고
  푸름을 지나 언덕가에
  떠오르던
  음성이 이야기ㄹ 하였읍니다

  그리운
  안니, 로, 리라고 이야기
  하였읍니다.


     시인학교

  오늘 강사진

  음악 부문
  모리스 라벨

  미술 부문
  폴 세잔느

  시 부문
  에즈라 파운드
  모두
  결강

  김관식, 쌍놈의 새끼들이라고 소리지름. 지참한 막걸리를 먹음.
  교실내에 쌓인 두터운 먼지가 다정스러움.

  김소월
  김수영 휴학계
  전봉래
  김종삼 한 귀퉁이에 서서 조심스럽게 소주를 나눔. 브란덴브르그 협주곡
제5번을 기다리고 있음.

  교사.
  아름다운 레바논 골 기에 있음.

 

  박용래. 1925 - 1984. 충남 부여에서 출생하여 강경상고를 졸업했다.
1955년 <현대문학>에 ^6 236^가을의 노래^356 3^를 추천받아 문단에 데뷔,
한국적 정서를 바탕으로 섬세하고 간결한 함축미를 특징으로 하는 작품을
발표했다. 시집으로 <싸락눈>, 유작집으로 <먼 바다>가 있다.

     강아지풀

  남은 아지랑이가 훌훌
  타오르는 어느 역 구
  내 모퉁이 어메는 노
  오란 아베도 노란 화
  물에 실려 온 나도사
  오요요 강아지풀. 목
  마른 침묵은 싫어 삐
  걱 삐걱 여닫는 바람
  소리 싫어 반딧불 쀼리는. 동네로 다시 이
  사 간다. 다 두고 이
  술 단지만 들고 간다.
  땅 밑에서 엣 상여 소
  리 들리어라. 녹물이
  든 오요요 강아지풀.


     월훈

  첩첩 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읍니다. 잎 진 사잇길, 저 모래뚝, 그
너머 강기슭에도 보이진 않습니다.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마을.

  갱 속 같은 마을. 꼴깍, 해가, 노루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콩깍지처럼 후미진 외딴 집, 외딴집에도 불빛은 앉아 이슥토록
창문은 모과빛입니다.

  기인 밤입니다. 외딴 집 노인은 홀로 잠이 깨어 출출한 나머지 무우를
깎기도 하고 고구마를 깎다, 문득 바람도 없는데 시나브로 풀려 풀려
내리는 짚단 짚오라기의 설레임을 듣습니다. 귀를 모으고 듣지요. 후루룩
후루룩 처마깃에 나래 묻는 이름 모를 새, 새들의 온기를 생각합니다. 숨을
죽이고 생각하지요.

  참 오래 오래, 노인의 자리맡에 밭은 기침 소리도 없을 양이면 벽 속에서
겨울 귀뚜라미는 울지요. 떼를 지어 웁니다. 벽이 무너지라고 웁니다.

  어느덧 밖에는 눈발이라도 치는지, 펄펄 함박눈이라도 흩날리는지,
창호지 문살에 돋는 월훈.


     풀꽃

  홀린 듯 홀린 듯 사람들은
  산으로 물구경 가고

  다리 밑은 지금 위험수위
  탁류에 휘말려 휘말려 뿌리 뽑힐라
  교각의 풀꽃은 이제 필사적이다
  사면에 물보래치는 아우성

  사람들은 어슬렁 어슬렁 물구경 가고.


     저녁 눈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적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 터만 다니며 붐비다.


     황산메기

  밀물에
  슬리고

  썰물에
  뜨는

  하염없는 개펄
  살더라, 살더라

  사알짝 흙에 덮여

  목이 메는 백강하류

  노을밴 황산메기는

  애꾸눈이 메기는 살더라
  살더라.


     겨울밤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 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밑 딸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이인석. 1917 - 1979. 황해도 해주 출생. 해주고보 졸업. 해방후
월남하여 <백민>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 1959년도 <자유문협상>을
수상했으며 이 무렵부터 시극을 발표함으로써 우리나라에 시극이란
문학형태를 개척해 놓았다. 시집으로 <사랑> <종이집과 하늘>이 있다.

     도척의 개

  밤의 고요를 찢으며
  줄기차게
  절망을 운다

  원한이 납덩이로 가라앉은
  담장높은
  흉가들...

  공포의 성곽을 둘러치는 충견이여
  이 밤 또 네 주인은
  무엇을 음모하여 미소짓는가.

 

  송욱. 1925 - 1960. 서울 출생. 서울 문리대 영문과를 졸업. 1952년
<문예>지에 '꽃'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한 그는 문명비평적인 풍자와 패러독스를 즐겨 다루었다. 시집 <하여지향> <나무는즐겁다> 시론집 <시학평전> 등이 있다.

     장미

  장미밭이다
  붉은 꽃잎 바로 옆에
  푸른 잎이 우거져
  가시도 햇살 받고
  서슬이 푸르렀다

  벌거숭이 그대로
  춤을 추리라
  눈물에 씻기운
  발을 뻗고서
  붉은 해가 지도록
  춤을 추리라

  장미밭이다
  피 방울이 지면
  꽃잎이 먹고
  푸른잎을 두르고
  기진하며는
  가시마다 살이 묻은
  꽃이 피리라


     개의 이유

  살결이 아니라 털결이 흡사 눈송이와 같다. 스핏쓰란 이름처럼 주둥이가
뾰죽하다. 밖에서 돌아오면 채 앉을 사이도 없이 무릎 위로 기어오르다가
눈덩이처럼 온 몸이 돌돌돌 뭉쳐지며 떨어진다. 눈덩이처럼 아프지 않다!

  마치 첫사랑으로 껴안은 때같이 죽을 듯 되살아날 듯 한 시이에서
저리도록 기쁜 소리가 목청 속에서 사뭇 구구대다가 구르기만 하다가 트일
새 없이 온갖 몸짓으로 자지러진다!

  가려우면 날카로운 발톱에 침칠하고 긁는다. 침과 발톱, 이상하게 색다른
두 가지 무기를 갖추었다!
  아무리 귀한 손님이라도 낯을 가려 마구 짖는다. 아무리 다정한 사이라도
먹는 사이에는 얼씬 못하게 한다. 원수와 먹이를 보면 태고적처럼 법열에
들어 정신을 통일한다!

  잠들어도 종긋한 두 귀는 안테나 삼아 세워 둔다. 콧길 씀씀이 이루
이르지 않는 데가 없고 빈틈 없는 주의력이 레이더망과 같다.

  되도록 납작하게 엎드리어 대지와 일치한 몸매로써 두 발로 뼈다귀를
쥐고 깨무는 이빨! 구미가 당기면 명주 행주처럼 접시를 말끔히 훔쳐 놓는
혓바닥! 전쟁에 익숙하며 능히 평화를 즐길 줄 안다.

  오직 애무를 청할 때만 비로서 쫑긋한 귀를 재우고 손을 핥아 준다. 아아
경계라는 마지막 깃발을 내린 셈이다!

  이 때문일까. 너무나 아름다워 적막한 설경에는 흔히 사랑스런 강아지가
보이는 것은! 뛰노는 눈덩이가, 딩구는 눈덩이가 보이는 것은!

 

  구자운. 1926 - 1972. 부산 출생. 소아마비의 불구인 그는, <현대문학>에
시 '균열'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했으며 <현대문학신인문학상>을 수상(1959) 했다. <60년대 사화집> 동인, 한국적인 소재를
노래하면서도 사물의 존재의 영원성까지 노래한 것이 그의 시의 특징이다.
시집으로 <청자수병> <벌거숭이> 등이 있다.

     청자수병

  아련히 번져 내려
  구슬을 이루었네.
  벌레가 살며시
  풀포기를 헤치듯
  어머니의 젖빛
  아롱진 이 수병으로
  이윽고 이르렀네.
  눈물인들
  또 머흐는 하늘의 구름인들
  오롯한 이 자리
  어이 따를손가.
  서려서 슴슴히
  희맑게 엉긴 것이랑
  여민 입
  은은히 구을른 부프름이랑
  궁글르는 바다의
  둥긋이 웃음 지은 달이라커니.

  아롱아롱
  묽게 무늬지어 어우려진 운학
  엷고 아스라하여라.
  있음이어!
  오, 저어기 죽음과 이웃하여
  꽃다움으로 애설푸레 시름을
  어루만지어라.

  오늘
  뉘 사랑 이렇듯 아늑하리야?
  꽃잎이 팔랑거려
  손으로 새는 달빛을 주우려는 듯
  나는 왔다.

  오, 수병이여!
  나의 목마름을 다스려
  어릿광대
  바람도 선선히 오는데
  안타까움이야
  호젓이 우로에 젖는 양
  가슴에 번져내려
  아렴풋 옥을 이루었네.


     우리들은 샘물에

  저물녘 흥청대는 이끼를 뜯으면서
  우리들은 샘물에 씻기는 해골일 걸세.
  소금인 양 흰 덩어리 이루어
  아늑한 깊은 수풀의 길표 옆에서.
  점백이 뱀이 움틀거린다.
  전엔 희망이었을 엷은 눈을 뜨고서
  반역의 바위를 물어뜯을 때,
  우리들은 꿈꾸느니, 어슬녘의 파선을,
  검은 절망의 물결 드높이
  벼락불의 축복을 가져오며,
  허무의 고요가 기슭으로 밀려닥침을
  그리고 갓난 아이의 울음이 어머니의 오장을 꿰뚫음을,
  캄캄한 어둠에서 아침이 태어남을,
  노여움이 아니고 배의 키바퀴도 아니고,
  영롱한 맑은 숨결로 엉긴
  소리들이 날개 이루어 파닥거려 옴을.

  우리들은 밤잠에 잠기는
  썩어 버린 관 속의 해골일 걸세.
  빗물인 양 내리는 나뭇잎의 입맞춤에 덮인,
  그리고 가끔씩 하품을 하며 있는 야심 없는 꽃,
  묻혀서 보이진 않지만 가장 뚜렷한
  작은 거울 쪽.

 

  박인환. 1926 - 1956. 강원 인제 출생.  평양 의학전문시절부터 시작을
했던 그는 해방과 함께 의학을 중단, 서점을 경영하면서 많은 시인들과
교류를 갖기 시작했다.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하여 모더니즘 운동을 활발히 전개, 도시적이면서도 인생파적인 비애가
다른 동인들보다 두드러진 것이 그의 시세계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시집으로 <박인환 시선집>과 <목마와 숙녀>가 있다.

     목마와 숙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 보아야 한다.
  ... 등대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세월이 가면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 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신동엽. 1932 - 1969. 충남 부여 출생.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장시
^6 236^이야기 하는 쟁기꾼의 대지^356 3^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으며
시극운동에도 참여하여 단막 시극 ^6 236^그 입술에 파인 그늘^356 3^을
공연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서사적 긴 호흡과 민족사의 수난을
바탕으로 했으며 시집으로는 <아사녀> <금강> 등이 있다.  39세에 요절.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 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
  티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모아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김관식. 1934 - 1970. 충남 논산 출생. 호는 우현. 유년시절에 한학을
했으며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아 데뷔(1955)했다.  우달리 주벽이 심해
숱한 에피소드를 남겼으나 강직하고 너그러운 천성의 시인으로 10여년간의
가난과 질병을 청산하고 3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시집 <낙화집>과 에세이
등 다수를 발표했다.

     옹손지

  해 뜨면
  굴 속에서
  기어나와
  노닐고,

  매양 나물죽 한 보시기
  싸래기밥 두어 술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다.

  남루룰 벗어
  바위에 빨아 널고
  발가벗은 채 쪼그리고 앉아서
  등솔기에 햇살을 쪼이다.

  해지면
  굴 안으로
  기어들어
  쉬나니.


     연

  수천만 마리
  떼를 지어 날으는 잠자리들은
  그날 하루가 다하기 전에
  한 뼘 가웃 남짓한 날빛을 앞에 두고, 마즈막 타는, 안쓰러히 부서지는
저녁 햇살을.
  얇은 나래야 바스러지건 말건
  불타는 눈동자를 어즈러히 구을리며
  바람에 흐르다가 한동안은 제대로 발을 떨고 곤두서서
  어젯밤 자고온 풀시밭을 다시는 내려가지 않으리라고
  갓난 애기의 새끼손가락 보담도 짧은 키를 가지고
  허공을 주름잡아 가로 세로 자질하며 가물 높이 떠 돌아다니고 있었다.

  연못가에서는
  인제 마악 자라 오르는 어리디 어린 아그배나무같이
  물 오른 아희들이 웃도리를 벗고 서서
  그 가운데 어떤 놈은 물 속의 하늘만을 들여다보고 제가끔 골똘한 생각에
잠겼다.
  허전히 무너져 내린 내 마음 한구석 그 어느 그늘진 개흙밭에선
  감돌아 흐르는 향기들을 마련하며
  연꽃이 큰 봉오리를 열었다.


     거산호

  산에 가 살래.
  팥밭을 일궈 곡식도 심우고
  질그릇이나 구워 먹고
  가끔, 날씨 청명하면 동해에 나가
  물고기 몇놈 데리고 오고
  작록도 싫으니 산에 가 살래.

 

  이경록. 1948 - 11977. 경북 월성 출생. 중대 문예창작꽈 졸업.
<월간문학>으로 문단에 데뷔하여 각 문예지와 <자유시> 동인지를 통해
활동하면서 자신의 의식 구조에 숨어 있는 좌절과 죽음의 그늘을 딛고
일어서려는 강한 초극의지와 사랑에의 접근을 시화시킴으로써 관심을
모았으나 1977년에 지병인 백혈병과의 악전고투 끝에 30세의 아까운
나이로 요절했다. 시집으로 <이 식물원을 위하여>가 있다.

     이 식물원을 위하여 5

  우리 서로 합창합시다. 구화로
  꽃을 피웁시다. 구화로
  우리만의 암유를 위해서, 구화로
  우리만의 결사를 지키기 위해서, 구화로

  산난초가 입을 벙긋합니다. 포인세티아도 입을 벙긋합니다. 남천도
벙긋하고, 진달래도 벙긋합니다. 일렬의 철쭉, 동백, 열대식물들도 따라
벙긋합니다. 식물원의 식물들은 모두 입만 벙긋댑니다. 언젠가 때가 오면,
두 발 독사도 알게 될 겝니다.

  우리 서로 합창합시다. 구화로,
  꽃을 피웁시다. 구화로,

 

    원로, 중견 85인선 I

 

  강계순. 1937년 경남 김해 출생. 성균관대 불문과 졸업. <사상계>를 통해
문단에 데뷔하여 <시단> 동인에 참여했다. 시집으로 <강계순 시집> <천상의
활> <흔들리는 거울>과 에세이 <아! 박인환> 등이 있다. 현재 <여류시>
동인으로 작품에 전념하고 있다.

     안개속에서

  땅 속에는 마르지 않는
  물의 근원이 있었서
  수만 가지 색깔의 눈물로
  봄을 피워 올리고

  하늘 속에 떠 있는
  맑고 맑은 우물
  마르지 않는 눈물을
  나는 길어 올리고 있다.

  욕심을 놓고 돌아서면
  사방에서 소리치고 있는 안깨
  안개 속에 떠 있는
  무중력의 사랑을 본다.

  돌아가리라
  가진 것 다 돌려주고
  이제야 몸 가볍게 시작하는
  여행

  휘적이며 휘적이며
  조금씩 소멸해 가는
  우리들의 매듭.

  돌아가리라
  이른 아침
  승천하는 맨 살의 안개
  다친 몸 거두어
  비단 수건으로 닦아 내고
  이제
  무연의 들판에 돌아가리라.

 

  강민. 1933년 서울 출생. 본명은 성철.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주부생활> <학원> 등에서 기획실장으로 일했다. 시집으로 <6월>
<일요일에> <노래> 등이 있고 현재 금성출판사 편집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그는 강한 현실감과 개성의 추구에 몰두하는 시작품을 쓰고 있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비가 내린다

  충충한 층암의 벼랑에서
  의미를 잃은 언어
  고단한 잠 속에
  그것은 거대한 쭉지를 벌리고
  검은 그늘로 덮여 온다.
  우리 생명의 광맥은
  어디에 숨어 있나
  가위 눌려, 허덕이다 깨어 보면
  무심한 천정에 번진
  어쩌면 독버섯같은
  어쩌면 미소같은
  빗물의 무늬

  모반의 물결에
  갈리고 닦이어 오수중 시민인 의
  조약돌이 찾고 있는 것

  승리의 깃발 없는 깃대에
  어둡게 나부끼는
  잃어버린 심층의 언어,
  녹슨 유자철선 속에서
  언젠가 형제가 찾아 헤맨
  애증의 인간 동산에
  비가 내린다.
  시민의 고단한 잠 속에
  그 비는 내린다.

 

  강우식. 1941년 강원도 주문진 출생. 성균관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현대문학>에 '사행시초'(1966)를 추천받아 문단활동을 시작한
그는 서민들의 한을 질펀하고 끈질긴 맛으로 시에 토속적인 색감을 잘
살리고 있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지하동인회> 동인이며 현재 성균대
강사로 출강.

     사행시초

  (하나)

  내외여, 우리들의 방은 하나의 사과속 같다.
  아기의 손톱 끝에련듯 해맑은 햇볕속
  누가 그 순수한 외계의 안쪽에서
  은밀하게 짜올린 속살 속의 우리를 알리.

  (둘)

  순이의 혓바닥만한 잎새 하나
  먼 세상이나 내다보듯
  초록의 물구비를 넘어나
  짝진 머슴애의 얼굴을 파랗게 쳐다보네.

  (셋)

  화사한 잔치로 한 마을을
  온통 불길로 휩쓸 것 같은 노을이 타면
  그 옛날 순이가 자주 얼굴을 묻던
  내 왼쪽 가슴팍에 새삼 피어 오르는 쓰린 눈물이여.

  (넷)

  계집애들의 뱃때기라도 올라타듯
  달이 뜬다. 젖물같이 젖어 오는
  저 빛살들은 내 어머님의 사랑방 같은 데서
  얼마나 묵었다 시방 오는가.

  (다섯)

  낙엽은, 한 여자가 생리일에 꾸겨버린 색종이처럼
  나무가지 끝에 매달려 있다. 가을날
  무덤 속같이 생각이 깊어버린 여자 곁에서
  사랑이여, 우리가 할일이라곤 하나도 없다.


     타는 사랑은

  태양에 끄을린 살갗이
  하루나 이틀쯤 쓰려오는
  팔월이면 별이 박히듯
  떠오르는 여자들이 있어
  아파라

  살뭉치로 살뭉치로 와서
  타는 사랑은
  물집이 생기는 아픔으로 일어
  올리브 향유나 바르며
  온밤을 뒤척이게 하고

  아내 몰래 창가에서
  그 옛날 여자들의 이름을 죄처럼 쓰고
  어떤 때는 그리움으로,
  아픔으로 지우나니.

  팔월이면 어이하여 살이든지,
  마음이든지
  이리 불타고

  살아 있다는 것이
  가만히 가만히 그리운 이름들을

  하나씩 떠올리듯
  행복하기만 하냐.

  강인한. 1944년 전북 전주 출생. 전북대학교 국문과 졸업.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전남문학상>을
수상(1982). <목요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시집으로 <이상기후>
<불꽃> <전라도 시인>이 있다.

     귀

  길이 끝나는 곳에서
  바람이 일어난다.
  바람보다 투명한 우리들의 귀.
 
  하찮은 이야기에도
  놀라기를 잘해
  잠자는 시간에도 닫혀지지 않고
  문 밖에 나가 쪼그려 앉은
  가엾은 우리들의 귀.

  이 세상 어디선가
  총성이 울리고, 사람이
  사람이 눈 부릅뜬 채 거꾸러져도
  전혀 듣지 못하고

  수도 꼭지에서 방울방울
  무심히 떨어지는 물방울
  그 동그란 소문 속으로 들어가버린
  편리한 우리들의 귀


     남행길

  서울에서 정읍까지
  적막한 직선으로
  눈이 내린다.
  영하 오도의 슬픔으로 내린다.
  검은 고속도로 위에
  도로정비를 하는 늙은 인부들의
  오렌지빛 제복 위에
  삼륜차로 달달거리는 가난한 이삿짐 위에
  내린다.
  창밖을 바라보는
  나어린 작부의 취한 눈망울
  떠나온 방직공장 기숙사 지붕 위에
  손금처럼 말라붙은 만경강 줄기 위에
  갈가마귀 북풍 속을
  떼지어 날아가는 남행길

  반도의 하반신에

  어루만지듯이 눈이 내린다.

[출처] [펌] 한국의 애송시 (1)|작성자 수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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