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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의 意味論 / 김주연
意味性의 意味
詩의 가장 바람직한 상태를 시가 지니고 있는 意味여부에 두는 주장이 있다. 하기는 시뿐만 아니라 문학, 나아가 예술 전반에 걸쳐 작품이 가지는 의미는 독자가 그 작품을 이해하여 가는 과정에서 궁극적으로 부딪치는 문제로서, 엄밀히 말하여 의미를 포기한 작품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한 편의 시를 분석하는 데 대체로 세 가지의 입장이 있다고 생각한다. 시의 인식, 시의 가치, 시의 의미로 나누어 분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 분석의 입장은 전혀 軌를 달리하면서 횡적으로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을 기본 전제로 하고 종적으로 연결되는 이해의 순서로 파악된다. 언어 형태로 본 詩作, 그 가치로 본 시작, 그리고 독자가 거기서 획득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으로 시작을 나누어 분석하는 파이퍼의 견해는 그러므로 매우 타당하게 여겨진다. 말하자면 매우 고차적인 실험으로 이룩된 無意味의 작품이라 할지라도 최소한 언어가 지니는 기본적이고 일상적인 반복성을 벗어나는 곳에 있지 못하며, 넌센스라는 가장 우직한 장소에서 시도되는 일련의 遊戱는 토마스 만이 적고 있듯 ‘우리의 새로운 이로니’, 혹은 적어도 만에게서 발견되는 이로니性, 다시 말해 현대의 이로니와 같은 것으로 충분한 詩的 가치 위에 서 있는 예술로서의 의미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시에 있어 의미 문제는 시가 사회를 향해 무엇을 그때 그때 말해줄 수 있는가 하는 방향으로만 쏠리는 경향이 있어 의미 문제의 좌표를 분명히 하여 놓는 일은 시를 정당하게 평가하는 데 퍽 기초적인 업무가 될 듯하다. 아무리 창백한 시에 있어서도, 혹은 어떠한 다혈질의 시에 있어서도 量으로 계산된 의미는 비슷하게 나타나리라고 본다. 하이네에게서나 또는 노발리스에 있어서나 의미는 제대로의 부피로 존재한다. 그럴 것이 멧데르니히의 전제정치에 항거하여 쏟아놓은 하이네의 울분은 청년 독일파와 연결되는 의미 위에 서 있고 어둠과 죽음에 대한 찬가를 부른 노발리스는 사랑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章을 마련하는 낭만성의 의미와 맺어진다. 자연에 대한 조용한 ?誦에 빠져 있던 아이헨돌프의 無爲에 가까운 시편에서 조차 의미를 쫓아낼 수는 없다. 더욱 벤을 비롯해 현대에 들어서 행해지고 있는 무의미의 질서가 행사하는 답답한 분위기의 의미는 의미 문제가 정당하게 평가되어야 할 스케일에 좋은 참고로서 등장한다. 인식과 가치와 의미의 문제로 시 분석의 입장을 설명해 놓고 보면, 따라서 어떻게 조립된 시가 가장 우수한 작품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나는 이 경우 이 세 가지의 요소가 서로 매우 알맞은 내접점으로 포개질 때 이른바 ‘힘’이 있는 시가 제작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흔히 金春洙에게는 의미가 없다. 또는 의미를 제거하려고 노력한다는 이야기라든가 金洙暎은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는 이야기 등은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 약간 어색한 느낌이든다. 내가 보기에는 두 시인의 차이는 의미의 제거 여부에 있다고 보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김춘수에게서 발견되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나는 오늘의 김춘수를 시인으로서 비판할 수 있으며 이러한 사정은 김수영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두 시인은 모두 자기나름대로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이것은 또 다른 많은 시인에게 있어서도 비슷한 사정이 된다. 그러므로 시의 의미 여부에 시의 우수성을 부여하는 일은 대체로 편견인 것으로 보이며 이와같은 약간의 혼란은 인식과 가치의 의미의 정당한 분석과 평가로써 씻어지리라 믿는다.
純粹美의 자율성과 限界
본질을 밝혀둔다거나, 감정의 진실됨을 말해준다거나 하는 일이야말로 詩가 지니는 가장 핵심적인 기능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서정시는 「色이 제거된 공동의 씨앗」이라는 벤의 시에 대한 확신에 대해서 나는 동의한다. 이러한 믿음 아래에서 시가 지니는 唯美的인 자율성이 논의되고, 이것이 벤이 말하듯 ‘색이 제거된’무의미의 상태에서 증류수와 같은 순수한 自轉의 아름다움을 구현한다면, 몇 가지의 문제점이 스스로 제기된다. 시의 긴장, 혹은 본질을 밝혀내는 照明, 그리고 감정의 진실성과 같은 막중한 시적 개념은 우선 그 개념이 매우 애매해 보인다. 긴장의 강도, 조명의 농도, 진실의 높낮이라 하는 것은 사실에 있어서 아주 측량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이때 唯美的인 자율성 속에서의 詩 작품은 흔히 과도한 唯美 제일의 형식에 의해서 침해되거나 혹은 윤리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말하자면 관념이 너울거리는 그곳에 끼이게 된다. 金丘庸의 「四曲」과 같은 詩作은 적당한 예증이 될 것이다.
어떻게 하면 구경꾼을 웃길 수 있을까
답답한 詩여.
어떻게 하면 구경꾼에게
위로를 줄 수 있을까,
메마른 詩여,
어떻게 하면 나는 시간처럼
너의 것이 될 수 있을까,
不在의 詩여.
‘어떻게 하면’으로 시작되는 부분이나 ‘詩여’하며 끝나는 부분의 押韻들은 전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오직 지리한 同質感 만을 줄 뿐이다.
도대체 여기서 ‘답답한’, ‘메마른’, ‘不在의’ 등의 형용사들은 어떻게 상이한 이미지를 조작하는 데 공헌하고 있는지 별로 알 길이 없다. 이것은 말하자면 시의 음운과 관련하여 시인이 노리고 있는 언어의 無效性 에 대한 실험이 완전히 무효화되고 있는 증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四曲 」에서만도 이러한 압운 효과의 실패는 도처에서 찾아진다.
잎은 젖꼭지를 위해 領域하고
꽃은 아기를 위해 지는데
불火로 沐浴하는 남녀들
正確한 目的의
充分한 喪失.
이 詩行에 이르면 관념으로 인한 시의 파탄을 보게 된다.「四曲」에서 시도되고 있는 것은 문명에 대한 비판이 주제로서 시인은 이것을 주로 패러디와 시네포엠적인 처리로 社會詩의 냄새를 배제하고 시의 묘한 이로니 위에 서보려고 하는 듯하다. 그러나 생경한 한자어를 비롯해 경험적 언어와 비경험의 언어를 의식적으로 혼란시켜 서투른 형이상학과 윤리학의 달갑지 않은 뒷맛만을 남겨 놓고 있다. 지저분한 설명에 의해서 관념은 제대로의 이미지도 형성하지 못한 채 결렬되고 있다. 얼마든지 응축될 여지를 외면하고 「四曲」이 장시로 뻗어나간 것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다. 아마 유미적인 자율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처음에 지적될 수 있는 한계의 이탈인 듯하다. 인식 이전의 純粹美의 파탄이다. 순수미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서사성에서 출발한 시이고, 디히퉁이 발레리의 서정시와 같은 서정성 위에서 잘 빨려진 상태라는것에 대체로 합의되고 있으며, 이러한 인식의 보편성(Universalism)을 주장하는 것이 현대시의 중요한 핵을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마을이나 사회, 국가의 풍광은 이미 작품에서 찾아보기 힘들고 다만 야생화를 방불케 하는 싱싱하면서도 요조스러운 造花와도 같은 실체로서 작품은 존재한다. 발전하기에 따라서 드디어 작품은 하나의 풍광으로서 존재하기에 이른다는 이론은 이리하여 성립된다. 순수미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극도로 집단을 배제한다. 민족에 대해서도 여러 형태의 사회에 대해서도 거부의 몸짓을 취한다. 시인의 감성으로서 이것을 수용하기를 거절하는 것이다. 이러한 집단에의 거부는 마침내는 인간에 대한 거부로까지 나타난다. 미를 위해서만 순수한 것이다. 순수시가 지니는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 나는 우리 현대시와 관련하여 생각할 때 약간의 의문을 가지게 된다.
눈 속에서 초겨울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다.
서울 近郊에서 보지 못한
꽁지가 하얀 작은 새가
그것을 쪼아 먹고 있다
越冬하는
忍冬잎의 빛깔이
이루지 못한 人間의 꿈보다도
더욱 슬프다.
金春洙의 「忍冬 잎」이 보여주는 시적 성과는 현실에 대한 울분이나 노여움도 아니고 한국 사람의 정서의 근본을 만드는 회한의 한숨도 아니다. 「忍冬잎」이라는 사물에 대한 인식이 시의 힘으로써 지탱되고 있다. 사실상 우리 시에 있어 김춘수만큼 철저한 인식의 시인도 드물다. 그것은 세계의 일반적인 질서에 이르는 개인의 눈을 그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가정 속에서 아버지, 혹은 아들로서의 나, 집단 속의 성원, 국가에서의 한 시민의 자격이라든가 습관과 종교 그리고 어떤 모랄의 구속 밖에 있는 자아로서의 개인에 의한 인식은 시가 순수성에 도달하는 과정이며 목적이다. 많은 다른 한국 시인에게 있어 그렇듯이 꽃은 김춘수가 즐겨 사용하는 시의 오브제다. 여기「忍冬잎」도 인식의 방법으로 이 시의 오브제로서 지배당하고 있다. 말하자면 忍冬 잎을 빌어 자연의 허무스러움을 탄하고 있다든가 인동 잎이 현실의 상징으로서 숨어 있다고는 보기 힘들며 다만 인동 잎이라는 사물이 내포하는 실체성 속에서 시적 실체일 수 있는 것만을 골라 제시하는 데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우리가 짚어보고 있는 이른바 시의 의미는 극도로 위축된 처지에 빠지게 된다. 윤리와 관념을 가진 인간성은 쏙 배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忍冬 잎」의 경우는 우리가 순수하게 인식의 시라고 받아들이기에 적잖게 주저하게 된다는 것을 나는 지적하여야만 될 것 같다. ‘이루지 못한 人間의 꿈보다는 더욱 슬프다’는 詩行에서 의문은 일어난다. ‘슬프다’는 형용사의 주체는 바로 숨겨져 있는 인간성이라는 사실에 대한 지적이다. 그러니까 일체의 비유라든가 이미지의 상징성은 말끔히 가셔져 있으며 인식은 감상의 범주를 조금 상회하고 있을 뿐이라는 느낌으로 시의 인식은 멈추어 있다. 파이퍼의 의견에 따르면 순수미와 가장 외형적인 단서는 시의 운율-외형율과 내재율이 포함된-에 있으며 가장 내적인 극렬성은 모든 행동과 사고의 선언을 벗어나는 데 있다. 이 두 가지의 노력은 실제로 시의 의미를 전체 시의 힘-균형에서 가장 침식해 들어가는 일이 되는 것으로 보이며 그 자율성의 한계는 필연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외형적인 단서를 중심으로 하여 볼때 金丘庸? 朴喜璡 혹은 趙炳華의 작품들이 의식적으로 순수미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는 것을 가끔 볼 수 있다. 근엄한 고전성 아니면 분열과 갈등 의식이 없는 낭만성이 그들에게서 나타난다. 결국 ‘아무 것도 아닌 의미’가 현실과 밀착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다시 詩作에 있어서 진지성과 유희성의 문제로 연결된다.
그러나 순수미의 한계를 이야기하고 여기서 의미의 소재를 예술 기능으로서 파악하게 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사고적 선언을 배제하는 내적인 극렬성에 있으며 이 경우 우리로서는 별로 마땅한 자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金春洙를 비롯한 朴南秀 혹은 全鳳健이 이러한 시도를 하고 있지만「忍冬 잎」에서 얻어지는 것과 같은 성과를 넘어서는 작품을 보기가 매우 힘들다. 그렇지 않으면 趙炳華가 일으키는 일상적 도시 감정을 조직의 혼란을 통한 우회로로서 환상적인 분위기에 도달하는 全鳳健의 세계가 기껏 있을 뿐이다. 순수미의 세계는 발레리와 같은 대표적 시인에게서조차 성공적으로 구현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사실상 완전한 지지를 얻기는 힘들다. 인식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이 절대표현만으로 얼마나 이룩되기 힘든가 하는 것을 발레리도 스스로 보여준 적이 있다. 이 경우 자연히 설명이 많아지고 관념의 詩로 흐르기 쉬우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된다. 그러므로 시가 스스로의 힘으로 존재하고 그 자체가 절대자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행복한 순간으로 가기 위한 가장 가까운 자리에 김춘수 등의 시작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리고 나로서는 이들에게 우선 순수미의 한계를 말해주기에 앞서 일부 작품에서 보여지는 無爲에 가까운 작업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무위에 예술적인 이로니의 기능이 깔릴 수 있을 때까지 순수미는 추구되기를 바랄 수 밖에 없다. 이 부근에 이르면 자연히 시적 무위는 과연 무위 자체에 의하여 보다 효과적으로 이룩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의미의 붕괴를 통해서 보다 효과적으로 이룩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게 된다.
進擊性과 遊戱性
시가 집중적이고, 본질을 조명하는 힘을 가진 것이라는 개념이 성립하는 한, 그것은 존재자의 진지성으로 남게 된다는 것을 피할 도리는 없다. 마찬가지로 시는 하나의 형상화된 힘을 지닌다는 점에서 내려다볼 때, 그것이 유희성을 바닥으로 한 자유로운 헤엄 운동과 같다는 것도 서정시의 이론에 합일된다.
시는 언어의 아름다움 속에서 세계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어야 한다. 아름다움은 가장 진실에 가까운 하나의 ‘이데’이다. 아름다움은 그것이 실재하는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모습으로 詩的‘이데’를 보여줄 때, 그러니까 결국 언어가 가장 아름답게 될 때 우리를 즐겁게 한다. 시의 언어는 시 속의 언어이자 인간의 언어이다. 시의 자율은 곧 인간에게 있어 하나의 의미로 맺어지는 것이다. 이 의미를 반영하는 각도는 그러나 대체로 두 가지의 견해에 의해서 대표되고 있는 듯하다. 그 하나는 처음부터 인식으로 시종하여 의미와 연결되는 입장이다.
바람이 인다, 나뭇잎이 흔들린다.
바람은 바다에서 온다.
生鮮가게의 납세미 도다리도
그대는 나의 지느러미,
나의 바다다.
바다에 물구나무 선 아침 하늘
아직은 나의 純潔이다.
金春洙의 「處容三章」 終聯이다. 첫 行의 묘사에서 제二행으로 옮기면서 시는 자그마한 인식의 땅으로 들어선다. 바람이 바다에서 온다는 것은 이 詩聯에서 하나의 ‘내부의 묘사’인 것 같기 때문이다. 인식이란 말하자면 ‘내부의 묘사’인 것이다. 三,四,五,六행을 지나면서 이 ‘내부의 묘사’는 더욱 筆力을 얻어 가다가 마지막 二행에서 드디어 맑은 상징의 이미지로 인식은 끝나고 있다. 그러면 대체 이 시는 무엇을 의미한 것일까? 나로서는 이 작품에 걸려 있는 詩題의 구속에서 떠나 이 시의 의미는 ‘바다의 순결’인 것처럼 보인다. 바다는 상징인 것도 같고 혹은 분위기 전체를 상징으로 볼 때는 아닌 것도 같지만 맑고 비비드한 내부의 묘사는 ‘바다의 순결’에 대해서 생각게 한다. 그렇다면 이 시의 의미는 바다의 순결이다. 이것이 전체 시와의 관련성에서 어떠한 면모로 자리할 것인지는 물론 문제 밖이다. 내가 보기에는 이 시련에서 처음 二행을 제외해 놓고 보면 우리 시에서 별로 찾기 힘든 ‘바다’라는 오브제에 대해 이 시는 주목할 만한 明澄한 인식을 보이고 있는 듯하다. 아마 그렇다면 이 시는 인식만으로 의미에 도달한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첫 행에서 볼 수 있는 묘사의 평면성을 제외하고도 「處容三章」의 종련이 내부의 묘사, 곧 인식을 흐리게 하는 최대의 장애가 마지막 행 ‘아직은 나의 純潔이다’는 시행에서 일어나고 있다. 詩作 노우트에서 金春洙 자신도 밝히고 있는 대로 이 행의 설명은 비록 앞 행들의 유약한 탄력성을 보강하기 위한 적절한 조처라 할지라도 나로서는 아직껏 우리 시가 인식만으로 의미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 필연적인 현상으로 해석하고 있다. 아무튼 그러나 이 정도의 작업은 우리 시에서는 인식만으로 의미에 접근할 수 있는 가장 비근한 일이 된다. 그리고「處容三章 」에도 나와 있지만 이러한 인식의 시들이 알기 쉽게 내보여주는 일들은 인격의 거부인 것으로 보인다. “나의”, “내”등의 인칭이 빈번히 사용되고 있음에도 독자로서는 그것이 품고 있는 것이 막연할 뿐이니 말이다. 金春洙의 이러한 詩作 태도는 우리 시의 한 패턴으로서는 매우 보존함직 하지만 그의 시적인 관심이 ‘꽃’ 혹은 ‘處容’과 같은 한국적인 정서나 윤리에서 출발하였다는 검을 볼때 그의 작품은 아직도 무의미 이전의 의미에 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 같다. 나는 金春洙가 하고 있는 이러한 일련의 시작 태도를 시의 유희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와 대조적인 詩作 태도로써 의미를 추구하는 시인이 金洙暎이다.
우리는 격하지 않고 얘기할 수 있었어 훌륭하게 얘기할 수 있었어
그의 약간의 誤謬는 문제가 아냐 그의 誤謬는 꽃이야
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나라의 首都의
한복판에서
가령 ‘H'라고 이름된 그의 작품의 일부만 보더라도 사물에 대한 인식이 읽혀지기에 앞서 우리 피부에 강하게 와서 부딪치는 의미에 퍼뜩 놀라게 된다. 그것은 詩作의 실제에 있어 시도되는 것과는 逆順으로 의미가 다른 어떤 요소-이를 테면 인식이나 가치-보다 감성에 일차적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의미가 직접적으로 이렇게 강조되는 시는 우리가 비유나 상징으로 먼저 느끼는 일보다 분위기로서 먼저 느끼는 일이 많다. 그리고 비유에 의한 이미지의 구축보다 상징의 절대적인 힘에 의지하기가 일쑤다. 'H’의 제二연은 사물에 대한 차근한 내부의 묘사를 포기하고 ‘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나라의 首都의 한복판에서’ 얘기할 수 있다는 것만도 훌륭하고 약간의 誤謬는 오히려 꽃이라는 사회 풍자를 하고 있다. 이 경우 분위기로서의 이로니는 전혀 시인의 새로운 탐색, 인식에 의한 언어의 발견에서 유래한 것이라기보다는 산문적으로 문맥이 통하는 하나의 의미를 위해 필요한 언어들이 韻文的으로 기묘한 결합을 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정당하다. 의미를 조작하려는 시인의 강한 의지가 그 속에 살아 있다. 적어도 金洙暎의 시는 내부의 묘사를 그 내부에서 처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항상 논리의 완벽성을 그 안에 안고 있는 듯이 보이는데, 그가 거의 언제나 시적 결단을 보류하는 ‘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나라’같은 시행이 보여주는 침묵의 의미는 한 번 검토됨직하다. 아마도 김춘수의 시가 인식으로만 사물을 처리하지 못하고 무의미 이전의 의미를 즐기는 결함을 갖고 있다면, 김수영의 시는 상징으로서의 의미를 구축해 놓고 그것을 갖다 기대어 놓을 현실의 벽을 고르지 못하고 있는 보류로서의 침묵이 아닐까 하는 해석이다. ‘이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나라’의 침묵은 시인 본래의 침묵과는 상당한 거리에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金洙暎의 이와 같은 의미에의 집착은 詩作의 태도로 보아 시적 진지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진지성과 유희성, 어느 것이 보다 시의 힘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은 매우 쑥스러운 일이다. 시의 보람 있는 성과는 사물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에서부터 시작하여 ‘이야기되는 것’과 ‘형상화되는 것’의 가치가 붙어진 다음 세계의 보편적인 질서의 발견에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미라는 것은 따라서 모든 시적인 것이 완전히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바로 일컫는 것이라고 믿어 무방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진실과 아름다움이, 그리고 진지함과 유희성이 합일의 순간에 도달하는 것, 그때 시의 좌우로 늘어선 인식과 감각과 그리고 언어의 唯美性을 구성하는 여러 형태들은 모두 각각의 질과 자격으로서 참여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훌륭한 시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金春洙와 金收暎
상징적인 이야기로 해서 예술은 넌센스라는 말이 있다.이러한 견해는 결국 ‘인생은 넌센스’라는 말과 같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예술에 있어, 특히 시에 있어 센스는 넌센스라는 말이나 넌센스는 센스라는 말이나 결국 동일한 분석과 추론을 요구하는 이야기라고 본다. 실존하는 모든 것의 의미는 부인되지 못하며 이러한 의미들로 하여금 내부에서 비등하는 세계를 증발?표백하는 시가 넌센스일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은 충분한 논거를 가지지만, 나는 그것 자체를 시의 의미로서 파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유미적인 자율성을 누리는 시를 볼 때 유희성이 바탕인 무의미가 그 본질을 이루는 것은 마땅하지만 ‘이데’로서 수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의미를 전제로 한 어떠한 詩作도 그것이 의미를 전제로 하고 행해지는 한에 있어 그 의미는 건져지기 힘들 것이다. 김춘수와 김수영은 이 점에 있어 퍽 좋은 對比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김춘수가 사물에 대한 천착을 할 때 김수영은 다만 관망하고 있으며, 김춘수가 묘사를 시작할 때 김수영은 그것을 기술하고 있다. 김춘수는 그것을 그대로 그의 내무의 인식으로 옮겨가며, 김수영은 수집된 인상들을 오브제로 수용하는데 거부 혹은 주저하고 있다. 외부에서 지배하려 든다. 인식의 철저성을 기하고 있다는 것이 곧 의미를 제거한다는 생각은 그러므로 옳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김춘수의 인식은 우리 시가 인식으로 의미에 도달할 수 있는 정도를 보여주고 있으며 김수영은 다만 상징으로서 주어지는 의미의 內包가 얼마나 단순하고 평범적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의미는 인식의 발전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적어도 오늘의 우리는 이러한 입장 위에 서야 하리라고 나는 믿는다. (『狀況과 人間』, 박우사, 1969.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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