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이란 타고난 재능이 없이는 하지 못하는 법이다. 그런데 재능에는 한계가 있으니 한 사람이 여러 장르의 작품을 써내기는 어렵다. 또한 여러 장르의 우수작을 써내기는 더욱 어렵다. 허나 세상에는 글 쓰는 사람들이 부러울 지경으로 갖가지 장르의 작품을 성공시키는 작가들도 있다. 그가 바로 조선작가의 한 분인 백인준. 노시인 구상은 그에 대해 호감을 갖지 않았으나 새 세대의 작가였던 황석영 씨는 자기가 본 그대로 그 사람을 받아들였다.
1989년 3월 20일, 전쟁 후 남쪽 작가로서는 처음 북쪽에 간 소설가 황석영 씨를 평양 순안비행장에서 환영하면서 《잘왔소, 이게 얼마만이요.》라고 한 사람이 바로 백인준작가. 황석영 씨는 이렇게 당시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의 백인준 위원장을 묘사했다.
“백인준 선생은 금년에 일흔둘이며 연희전문과 와세다를 나왔고 시인 윤동주와 동경 시절에 같이 하숙을 했다고 한다. 시의 제목은 생각나지 않지만- 남의 땅 남의 나라에서 어머님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보니, 삶은 어려운데 시가 왜 이렇게 쉽게 써지느냐고 하는- 그 유명한 시를 쓸 무렵에 백선생과 윤동주는 함께 살았다고 한다.
백선생은 근년에 들어 영화문학을 하는데 4.19를 다룬 [성장의 길목에서]라든가 항일 무장투쟁을 주제로 한 시나리오를 여러 편 썼다. 그는 허리가 꼿꼿하고 어깨가 딱 벌어졌으며 머리가 벗어진 건강형의 체격으로 보였다. 《4월의 봄》예술축전을 함께 보다가 해외동포들의 순서가 되자 그들이 통일된 조국에 떳떳하게 돌아와 살지 못하는 나라 형편이 분하다고 눈물을 짓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의 건강 비결에 대하여 물었더니 학생 때부터 테니스를 해왔다는데 요즈음도 아파트 근처의 코트에 나가 계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몇해 전의 남북 문화교류 때에 서울에 왔던 적이 있어서 비교적 서울을 잘 아는 편이었다.”
여기에서 일흔둘이라는 나이는 아무리 한국식으로 계산해도 맞지 않아 보인다. 보다 권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의 자료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만능작가
백인준(1920. 10.27~1999. 1.20, 필자가 자료를 인용한 부분을 그대로 표기했음을 알립니다- 편집자)
작가. 다양한 명작들을 수많이 창작한 다재다능한 대문호였다. 평안북도 운산군 영웅리의 농민가정에서 출생하여 사립학교를 나온 후 평양과 서울, 외국에서 공부하였다.
청년시절부터 시인이 될 꿈을 안고 모대기던 그는 새 조국 건설로선을 무한한 감동속에 접한 후, 태양송가 《그대를 불러 우리의 태양이라 노래함은》(1947년)을 발표하는 것으로 새로운 문학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조국과 인민이 사랑하는 로동당시대의 세계적인 대문호로 성장하였다.
광복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지도원, 과장으로, 정권기관과 인민군대의 문화선전부문에서 사업하였으며 전쟁시기에는 조선인민군 군관으로 복무하였다. 1956년부터 조선작가동맹 현역작가를 거쳐 작가동맹 평안북도 지부장, 영화문학창작사 작가, 1969년이후부터 백두산창작단 작가, 부단장, 단장으로 사업하였다.
1986년부터 조선문학예술총동맹중앙위원회 위원장, 1996년부터 조선작가동맹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창작활동을 정력적으로 벌렸다. 또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6기-10기), 최고인민회의 부의장(1990-1998), 조국통일범민족련합 북측본부 의장(1993-1999)으로서 당과 인민정권을 강화하고 문학예술을 발전시키며 조국의 자주적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정력적으로 사업하였다.
그는 조선문학예술에서 형상창조의 첫 선구자의 한사람으로서 근 50여년간의 창작생활기간에 혁명력사를 형상한 성과작들을 수많이 창작하였다.
특히 그는 문학예술혁명이 수행되던 시기에 《꽃파는 처녀》를 비롯한 불후의 고전적명작들을 영화와 가극, 연극 등에 옮기는 사업과 5대혁명연극창조사업에서 특출한 공로을 세웠다.
▲ 백인준이 시나리오를 쓴 조선영화 <금희와 은희의 운명>(1974년)의 한 장면
그의 창작에서 특징은 시대정신에 민감하고 철학적으로 깊이가 있으며 주제와 양상이 다양하고 극성이 예리한것이다. 대표적인 작품들로 영화문학들인 《누리에 붙는 불》(1977년), 《민족의 태양》(1부 1987년, 5부 1991년), 《려명》(전후편, 1987년), 《친위전사》(1982년), 《성장의 길에서》(1-2부, 1965년), 《최학신의 일가》(상하편, 1966년), 《금희와 은희의 운명》(1974년)과 희곡 《최학신의 일가》(1955년), 서정시들인 《우리의 태양이라 노래함은》(1947년), 《크나큰 그 이름 불러》(1952년), 서정시 《조국에 대한 생각》, 풍자시《벌거벗은 아메리카》(1960년), 가사 《오직 한마음》(1968년), 시집으로 《인민의 노래》(1947년), 《소박한 사람들의 목소리》(1953년), 《벌거벗은 아메리카》(1961년), 《백인준시선집》(1993년)이 있다.
그는 또한 혁명적가정을 형상한 영화문학 《려명》(전후편 1987년), 항일의 녀성영웅을 형상한 영화문학들인 《사령부를 멀리 떠나서》(1978년), 《미래를 꽃피운 사랑》(1982년)을 내놓았다. 또한 문학평론활동과 다른 나라들과의 예술교류사업, 작가, 예술인후비육성사업에도 적극 참가하였다.
그는 생애말기에 불치의 병속에서도 여러편의 시들을 창작하였다. 그는 《최고훈장》수훈자(1980년), <<계관인상>>(1972년), 《조국통일상》수상자(1995년), 로력영웅(1972년)이다. 묘는 애국렬사릉에 있다.
그렇게 많이 렬거했으나 영화문학 《우리 동무들》같은 것들이 빠진 상태이다. 작품을 전부 적으면 정말로 놀라운 숫자일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금희와 은희의 운명》은 쌍둥이 자매 금희와 은희가 북과 남에서 판판 다른 삶을 사는 모습을 그린 영화로서 《꽃파는 처녀》에 이어 중국에서도 한때 인기를 끌었었다. 그리고 《벌거벗은 아메리카》는 현대조선의 풍자시 걸작으로 꼽힌다. 유명한 노래 《최령감네 평양구경》도 그가 작사했다고 기억된다. 시대마다 뭇사람의 환영을 받고 문학사에 남을만한 작품을 써냈다는 것이 얼마나 부러운 일인가 생각된다. 또한 사회활동가로서도 뚜렷한 자욱을 남겼다. 그런데 그의 그 많은 작품속에서도 《최학신의 일가》(희곡과 씨나리오)가 가장 특이하지 않겠는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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