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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시모음
2015년 04월 05일 15시 29분  조회:4627  추천:0  작성자: 죽림

도종환 시 모음

시 제목에 클릭하세요 


가을사랑 겨울 골짜기에서 그대여 절망이라 말하지 말자
담쟁이 사연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인차리 5 차라리 당신을 잊고자 할 때 사랑의 길
홍매화 돌아가는 꽃 흔들리며 피는 꽃
오월 편지 여린 가지 벗 하나 있었으면
홀로 있는 밤에 겨 울 나 기 그대 잘 가라
꽃씨를 거두며 끊긴 전화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다시 떠나는 날 당신과 가는 길
당신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아홉 가지 기도 어떤 편지
이 별 접시꽃 당신 종이배 사랑
풀잎 하나를 사랑하는 일도... 꽃잎 비 내리는 밤
늦깎이 깊은 물 어떤 날
맑은 물 어릴 때 내 꿈은 꽃 피는가 싶더니 꽃이 지고...
가죽나무 식민지의 이 푸르른 하늘 밑에... 만들 수만 있다면
먼 발치서 당신을 구름처럼 만나고 헤어진 많은... 시집 - 부드러운 직선/시낭송(10편)



가을사랑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부는 저녁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읍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읍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입니다. 






겨울 골짜기에서

낮은 가지 끝에 내려도 아름답고
험한 산에 내려도 아름다운 새벽눈처럼
내 사랑도 당신 위에 그렇게 내리고 싶습니다.
밤을 새워 당신의 문을 두드리며 내린 뒤
여기서 거기까지 걸어간 내 마음의 발자국 그 위에 찍어
당신 창 앞에 놓아두겠습니다.
당신을 향해 이렇게 가득가득 쌓이는 마음을 모르시면
당신의 추녀 끝에서 줄줄이 녹아
고드름이 되어 당신에게 보여주겠습니다
그래도 당신이 바위처럼 돌아앉아 있으면
그래도 당신이 저녁산처럼 돌아앉아 있으면
바람을 등에 지고 벌판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당신을 사랑했었노라는 몇 줄기 눈발 같은 소리가 되어
하늘과 벌판 사이로 떠돌며 돌아가겠습니다. 






 그대여 절망이라 말하지 말자


 
그대여 절망이라 말하지 말자.
그대 마음의 눈 녹지 않는 그늘 한쪽을 
나도 함께 아파하며 바라보고 있지만 
그대여 우리가 아직도 아픔 속에만 있을 수는 없다. 
슬픔만을 말하지 말자.
돌아서면 혼자 우는 그대 눈물을 우리도 알지만 
머나먼 길 홀로 가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지 않은가 
눈물로 가는 길 피 흘리며 가야 하는 길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밤도 가고 있는지 
그대도 알고 있지 않은가
벗이여 어서 고개를 들자
머리를 흔들고 우리 서로 언 손을 잡고
다시 일어서 가자 
그대여 아직도 절망이라고만 말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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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쟁이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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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연

한평생을 살아도 말 못하는 게 있습니다.
모란이 그 짙은 입술로 다 말하지 않듯
바다가 해일로 속을 다 드러내 보일 때도
해초 그 깊은 곳은 하나도 쏟아 놓지 않듯
사랑의 새벽과 그믐밤에 대해 말 안하는 게 있습니다
한평생을 살았어도 저 혼자 노을 속으로 가지고 가는
아리고 아픈 이야기들 하나씩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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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자연의 하나처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서둘러 고독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기다림으로 채워간다는 것입니다.
비어 있어야 비로소 가득해지는 사랑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평온한 마음으로 아침을 맞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몸 한쪽이 허물어지는 것과 같아
골짝을 빠지는 산울음소리로
평생을 떠돌고도 싶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흙에 묻고
돌아보는 이 땅 위에
그림자 하나 남지 않고 말았을 때
바람 한 줄기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 사는 동안 모두 크고 작은 사랑의 아픔으로
절망하고 뉘우치고 원망하고 돌아서지만
사랑은 다시 믿음 다시 참음 다시 기다림
다시 비워두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찢긴 가슴은
사랑이 아니고는 아물지 않지만
사랑으로 잃은 것들은
사랑이 아니고는 찾아지지 않지만
사랑으로 떠나간 것들은
사랑이 아니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비우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큰 사랑의 그 속에 들 수 있습니까
한 개의 희고 깨끗한 그릇으로 비어 있지 않고야
어떻게 거듭거듭 가득 채울 수 있습니까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평온한 마음으로 다시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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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차리 5

인차리를 돌아서 나올 때면
못다 이룬 사랑으로 당신이 내게
슬픔을 남기고 떠나갔듯
나 또한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슬픔을 남기고 떠나야 하는 때가 있음을 생각한다.
사랑으로 인해 꽝꽝 얼어붙은 강물은
사랑이 아니고는 다시 풀리지 않으리라
오직 한번 사랑한 것만으로도 우리가
영원히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확실히 살아 있는 것들이
이 세상엔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언젠가 한번은 꼭 다시 만나야 하는 그날
우리 서로 무릎을 꿇고 낯익은 눈물 닦아주며
기쁨과 서러움으로 조용히 손잡아야 할
그때까지의 우리의 사랑을 생각하는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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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당신을 잊고자 할 때

차라리 당신을 잊고자 할 때
당신은 말없이 제게 오십니다.
차라리 당신에게서 떠나고자 할 때
당신은 또 그렇게 말없이 제게 오십니다.
남들은 그리움을 형체도 없는 것이라 하지만
제게는 그리움도 살아있는 것이어서
목마름으로 애타게 물 한잔을 찾듯
목마르게 당신이 그리운 밤이 있습니다.
절반은 꿈에서 당신을 만나고
절반은 깨어서 당신을 그리며
나뭇잎이 썩어서 거름이 되는 긴 겨울동안
밤마다 내 마음도 썩어서 그리움을 키웁니다.
당신 향한 내 마음 내 안에서 물고기처럼 살아 펄펄 뛰는데
당신은 언제쯤 온몸 가득 물이 되어 오십니까
서로 다 가져갈 수 없는 몸과 마음이
언제쯤 물에 녹듯 녹아서 하나되어 만납니까
차라리 잊어야 하리라 마음을 다지며 쓸쓸히 자리를 펴고 누우면
살에 닿는 손길처럼 당신은 제게 오십니다.
삼 백 예순 밤이 지나고 또 지나도
꿈 아니고는 만날 수 없어
차라리 당신 곁을 떠나고자 할 때
당신은 바람처럼 제게로 불어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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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길

나는 처음 당신의 말을 사랑하였지
당신의 물빛 웃음을 사랑하였고 
당신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였지 
당신을 기다리고 섰으면 
강 끝에서 나뭇잎 냄새가 밀려오고 
바람이 조금만 빨리 와도 
내 몸은 나뭇잎 소리를 내며 떨렸었지 
몇 차례 겨울이 오고 가을이 가는 동안 
우리도 남들처럼 아이들이 크고 여름 숲은 깊었는데 
뜻밖에 어둡고 큰 강물 밀리어 넘쳐
다가갈 수 없는 큰물 너머로 
영영 갈라져버린 뒤론
당신으로 인한 가슴 아픔과 쓰라림을 사랑하였지 
눈물 한 방울까지 사랑하였지
우리 서로 나누어 가져야 할 깊은 고통도 사랑하였고
당신으로 인한 비어있음과 
길고도 오랠 가시밭길도 사랑하게 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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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매화

눈 내리고 내려 쌓여 소백산자락 덮어도
매화 한송이 그속에서 핀다 

나뭇가지 얼고 또 얼어 
외로움으로 반질반질해져도 
꽃봉오리 솟는다. 

어이하랴 덮어버릴 수 없는
꽃같은 그대 그리움

그대 만날 수 있는 날 아득히 멀고
폭설을 퍼붓는데

숨길 수 없는 숨길 수 없는 
가슴 속 홍매화 한 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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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꽃

간밤 비에 꽃 피더니 
그 봄비에 꽃 지누나

그대로 인하여 온 것들은 
그대로 인하여 돌아가리

그대 곁에 있는 것들은
언제나 잠시 

아침 햇빛에 아름답던 것들 
저녁 햇살로 그늘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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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며 피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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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린 가지

가장 여린 가지가 가장 푸르다.
둥치가 굵어지면 나무껍질은 딱딱해 진다.
몸집이 커질수록 움직임은 둔해지고
줄기는 나날이 경직되어 가는데
허공을 향해 제 스스로 뻗을 곳을 찾아야 하는
줄기 맨 끝 가지들은 한 겨울에도 푸르다
모든 나무들이 자정에서 새벽까지 견디느라
눈비 품은 잿빛 하늘처럼
점점 어두운 얼굴로 변해가도
북풍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가지는
살아 움직이기 때문에 엄동에도 초록이다.
해마다 꽃망울은 그 가지에 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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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 하나 있었으면

마음 울적할 때 저녁 강물같은 벗 하나 있었으면
날이 저무는데 마음 산그리메처럼 어두워 올 때
내 그림자를 안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울리지 않는 악기처럼 마음이 비어 있을 때
낮은 소리로 내게 오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 노래가 되어 들에 가득 번지는
벗 하나 있었으면...

오늘도 어제처럼 고개를 다 못 넘고 지쳐 있는데
달빛으로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주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라면 칠흙 속에서도 다시 먼길 갈 수 있는
벗 하나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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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있는 밤에

이것이 진정 외로움일까 
다만 이렇게 고요하다는 것이 
다만 이렇게 고요하게 혼자 있다는 것이 
흙 위에 다시 돋는 풀을 안고 엎드려 
당신을 생각하다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홀로 깊이 어두워져가고 있는 다만 이 짧은 순간을
외로움이라 말해도 되는 것일까 
눈물조차 조용히 던지고 떠난 당신을 생각하면 
진정으로 사랑을 잃고 비어 있는 것은 내가 아닌데 
나도 당신으로 인해 이렇게 비어 있다고 
내가 외롭다 말해도 되는 것일까 
새로 돋는 풀 한 포기보다도 떳떳치 못하고
돌아오는 새들보다 옳게 견디지 못한 채 
이것을 고독이라 말해도 되는 걸까 
저 길고 긴 허공을 말없이 떨어져
어둔 땅 너머로 빗발들은 소리없이 잠겨가는데
빗방울 만큼도 참아내지 못하면서

겨우 몇 날 몇 해 홀로 길 걷는다고 
쓸쓸하다 말해도 되는 것일까 
흔들리기만 하면서 흔들리기만 하면서 
고독하다고 말해도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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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 울 나 기

아침에 내린 비가 이파리 위에서
신음소리를 내며 어는 저녁에도
푸른 빛을 잃지 않고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

하늘과 땅에서 얻은 것들 다 되돌려 주고
고갯마루에서 건넛산을 바라보는 스님의
뒷모습처럼 서서 빈 가지로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

이제는 꽃 한 송이 남지 않고
수레바퀴 지나간 자국 아래
부스러진 잎사귀와 끌려간 줄기의 흔적만 희미한데
그래도 뿌리 하나로 겨울을 나는 꽃들이 있다.

비바람 뿌리고 눈서리 너무 길어
떨어진 잎이 세상 거리에 황망히 흩어진 뒤
뿌리까지 잃고 만 밤
씨앗 하나 살아서 겨울을 나는 것들도 있다.

이 겨울 우리 몇몇만
언 손을 마주 잡고 떨고 있는 듯해도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견디고 있다.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이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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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잘 가라

그대여 흘러흘러 부디 잘 가라
소리없이 그러나 오래오래 흐르는 강물을 따라
그댈 보내며
이제는 그대가 내 곁에서가 아니라
그대 자리에 있을 때 더욱 아름답다는 걸 안다.
어둠 속에서 키 큰 나무들이 그림자를 물에 누이고
나도 내 그림자를 물에 담가 흔들며
가늠할 수 없는 하늘 너머 불타며 사라지는
별들의 긴 눈물
잠깐씩 강물 위에 떴다가 사라지는 동안
밤도 가장 깊은 시간을 넘어서고
밤하늘보다 더 짙게 가라앉는 고요가 내게 내린다
이승에서 갖는 그대와 나의 이 거리 좁혀질 수 없어
그대가 살아 움직이고 미소 짓는 것이 아름다와 보이는
그대의 자리로 그대를 보내며
나 혼자 뼈아프게 깊어가는 이 고요한 강물 곁에서
적막하게 불러보는 그대
잘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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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

아무리 몸부림쳐도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자정을 넘긴 길바닥에 앉아
소주를 마시며 너는 울었지
밑바닥까지 내려가면 다시
올라오는 길밖에 없을 거라는 그따위 상투적인 희망은
가짜라고 절망의 바닥 밑엔 더 깊은 바닥으로 가는 통로밖에
없다고 너는 고개를 가로 저었지
무거워 더이상 무거워 지탱할 수 없는 한 시대의
깃발과 그 깃발 아래 던졌던 청춘 때문에
너는 독하디 독한 말들로 내 등을 찌르고 있었지
내놓으라고 길을 내놓으라고
앞으로 나아갈 출구가 보이지 않는데
지금 나는 쫓기고 있다고 악을 썼지
살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희망이 있는 것이라는
나의 간절한 언표들을 갈기갈기 찢어 거리에 팽개쳤지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던지는 모든 발자국이
사실은 길찾기 그것인데
네가 나에게 던지는 모든 반어들도
실은 네가 아직 희망을 다 꺾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것마저도 너와 우리 모두의 길찾기인데
돌아오는 길 네가 끝까지 들으려 하지 않던
안타까운 나의 나머지 희망을 주섬주섬 챙겨 돌아오며
나도 내 그림자가 끌고 오는
풀죽은 깃발 때문에 마음 아팠다.
네 말대로 한 시대가 

그렇기 때문에 가벼워질 수밖에 없다고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도대체 이 혼돈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너는 내 턱밑까지 다가와 나를 다그쳤지만
그래 정말 몇 면이 시 따위로
혁명도 사냥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한올의 실이 피륙이 되고
한톨의 메마른 씨앗이 들판을 덮던 날의 확실성마저
다 던져버릴 수 없어 나도 울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네 말대로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 네 말대로 무너진 것은
무너진 것이라고 말하기로 한다
그러나 난파의 소용돌이 속으로 그렇게 잠겨갈 수만은 없다.
나는 가겠다 단 한 발짝이라고 반 발짝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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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씨를 거두며

언제나 먼저 지는 몇 개의 꽃들이 있습니다.
아주 작은 이슬과 바람에도 서슴없이 잎을 던지는 
뒤를 따라 지는 꽃들은 그들을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꽃씨를 거두며 
사랑한다는 일은 책임지는 일임을 생각합니다.
사랑한다는 일은 기쁨과 고통,아름다움과 시듦,
화해로움과 쓸쓸함 그리고 삶과 죽음까지를
책임지는 일이어야 함을 압니다.
시드는 꽃밭 그늘에서 아이들과 함께 꽃씨를 거두어
주먹에 쥐며 이제 기나긴 싸움은 시작되었다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끝나지 않았고 삶에서 죽음까지를 책임지는 것이
남아있는 우리들의 사랑임을 압니다.
꽃에 대한 씨앗의 사랑임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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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긴 전화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었다 말이
없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 전화가 끊어졌다.
누구였을까 깊은 밤 어둠 속에서 아직도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가 두근거리는 집게손가락으로
내 가장 가까운 곳까지 달려와
여보세요 여보세요 두드리다 한발짝을
더 나아가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하고
그냥 돌아선 그는 누구였을까

나도 그러했었다 나도 이 세상 그 어떤 곳을 향해
가까이 가려다 그만 돌아선 날이 있었다
망설이고 망설이다 항아리 깊은 곳에
버린 것을 눌러 담듯 가슴 캄캄한 곳에
저 혼자 삭아가도록 담아둔 수많은 밤이 있었다
그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채 나 혼자만 서성거리다
귀뚜라미 소리 같은 것을 허공에 던지다
단 한마디 전하지 못하고 돌아선 날들이 많았다.

이 세상 많은 이들도 그럴 것이다
평생 저 혼자 기억의 수첩에 썼다 지운
저리디 저린 것들이 있을 것이다
두 눈을 감듯 떠오르는 얼굴을 내리닫고
침을 삼키듯 목끝까지 올라온 그리움을 삼키고
입술 밖을 몇번인가 서성이다 차마 하지 못하고
되가져간 깨알같은 말들이 있을 것이다.
한발짝을 더 나아가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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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저녁 숲에 내리는 황금빛 노을이기보다는
구름 사이에 뜬 별이었음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버드나무 실가지 가볍게 딛으며 오르는 만월이기보다는
동짓달 스무날 빈 논길을 쓰다듬는 달빛이었음 싶어

꽃분에 가꾼 국화의 우아함보다는
해가 뜨고 지는 일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구절초였음 해
내 사랑하는 당신이 꽃이라면
꽃 피우는 일이 곧 살아가는 일인
콩꽃 팥꽃이었음 좋겠어

이 세상의 어느 한 계절 화사히 피었다
시들면 자취 없는 사랑말고
저무는 들녘일수록 더욱 은은히 아름다운
억새풀처럼 늙어 갈 순 없을까
바람 많은 가을 강가에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우리 서로 물이 되어 흐른다면
바위를 깎거나 갯벌 허무는 밀물 썰물보다는
물오리떼 쉬어가는 저녁 강물이었음 좋겠어
이렇게 손을 잡고 한세상을 흐르는 동안
갈대가 하늘로 크고 먼 바다에 이르는 강물이었음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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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떠나는 날

깊은 물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는 물고기처럼
험한 기슭에 꽃 피우길 무서워하지 않는 꽃처럼
길 떠나면 산맥 앞에서도 날개짓 멈추지 않는 새들처럼

그대 절망케 한 것들을 두려워 하지만은 않기로
꼼짝 않는 저 절벽에 강한 웃음 하나 던져 두기로
산맥 앞에서도 바람 앞에서도 끝내 멈추지 않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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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가는 길

별빛이 쓸고 가는 먼 길을 걸어 당신께 갑니다.
모든 것을 다 거두어간 벌판이 되어
길의 끝에서 몇 번이고 빈 몸으로 넘어질 때
풀뿌리 하나로 내 안을 뚫고 오는
당신께 가는 길은 얼마나 좋습니까
이 땅의 일로 가슴을 아파할 때
별빛으로 또렷이 내 위에 떠서 눈을 깜빡이는
당신과 가는 길은 얼마나 좋습니까
동짓달 개울물 소리가 또랑또랑 살얼음 녹이며 들려오고
구름 사이로 당신은 보입니다.
바람도 없이 구름은 흐르고
떠나간 것들 다시 오지 않아도
내 가는 길 앞에 이렇게 당신은 있지 않습니까
당신과 가는 길은 얼마나 좋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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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초저녁달이 떴습니다.
당신과 헤어지던 팔월입니다.
당신과 함께 죽음에 맞서 싸우던 그 뜨겁던 여름 석달처럼
올해도 뜨거운 여름입니다
당신에게서 얻은 겨자씨만한 사랑을
이 세상에 심고 가꾸는 일이 어찌 이리 어렵습니까
사랑하는 사람과는 죽음으로 가는 길까지도 하나 되어가지만
미워하는 사람 어두운 사람들의 밭에
씨앗 하나 가꾸고 풀 한 포기 뽑아내는 일이
이 세상에서는 어쩌면 이리 어렵습니까
크고 하나인 것을 사랑하는 것보다
작은 여럿인 것을 사랑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가는 길은
초저녁달이 구름을 헤치고 가는 것처럼
그렇게 가는 길이 아닙니다.
풀벌레 울음이 깊은 밤의 가운데를 뚫고 가는 것처럼
그렇게 은은히 가지 않습니다.
자식을 찾는 어머니의 애끓는 목청처럼 갑니다.
모래밭에 쓰러진 이에게 마지막 남은 내 몫의 물을 내어주고
내가 타는 목으로 가듯 가는 길입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던 그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하는 일보다
이 세상을 두루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더 어려운지
알게 하시려는 뜻으로 새기며 조용히 견디고 있습니다.
지금은 나를 여기 가두고 창 밖으로 흐르는 세월을 봅니다.
비가 내리다 그치고

구름이 모였다 흩어지면서
아침이 오고 저녁바람이 부는 것을 봅니다.
많은 이들이 우리 곁을 울면서 떠나고
손에 끌려 돌아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물 그들의 돌아서던 뒷모습까지
사랑하기로 했습니다.
지금은 말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우리를 미워하던 이들까지도 사랑할 것입니다
다만 지금은 여기 이 자리에 끝까지 남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결코 삿되지 않았으므로
나는 이 감옥에 홀로라도 남습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기로 함께 손을 잡고 다짐하던
처음 그 마음 한가운데 남아
먼 길을 지나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을 기다릴 것입니다.
걸어온 길보다 걸어가야 할 길이 더 많아서
함께 나눈 사랑보다 함께 해야 할 사랑의 날들이 더 많아서
이 세상을 사랑하는 일이 그저 살아가는 일이 될 때까지
여기 이 자리에 남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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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가지 기도

나는 지금 나의 아픔 때문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오직 나의 아픔만으로 기도하지 않게 하소서
나는 지금 나의 절망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나 오직 나의 절망만으로 기도하지 않게 하소서
나는 지금 깊은 허무에 빠져 기도합니다
그러나 허무 옆에 바로 당신이 계심을 알게 하소서
나는 지금 연약한 눈물을 뿌리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남을 위해 우는 자 되게 하소서
나는 지금 죄와 허물 때문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또 다시 죄와 허물로 기도하지 않게 하소서
나는 지금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모든 내 이웃의 평화를 위해서도 늘 기도하게 하소서
나는 지금 영원한 안식을 기도합니다
그러나 불행한 모든 영혼을 위해 항상 기도하게 하소서
나는 지금 용서받기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을 더욱 사랑할 수 있는 자 되게 하소서
나는 지금 굳셈과 용기를 주십사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더욱 바르게 행할 수 있는 자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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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편지

진실로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자만이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자만이
한 사람의 아픔도 외면하지 않습니다
당신을 처음 만난 그 숲의 나무들이 시들고
눈발이 몇 번씩 쌓이고 녹는 동안
나는 한번도 당신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나던 그때는
내가 사랑 때문에 너무도 아파하였기 때문에
당신의 아픔을 사랑할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헤어져 돌아와 나는 당신의 아픔 때문에 기도했습니다.
당신을 향하여 아껴온 나의 마음을 당신도 알고 계십니다.
당신의 아픔과 나의 아픔이 만나
우리 서로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생각합니다.
진실로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동안은 행복합니다.
진실로 모든 이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줄 수 있는 동안은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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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별

당신이 처음 내 곁을 떠났을 때
나는 이것이 이별이라 생각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내 안에 있고
나 또한 언제나 당신이 돌아오는 길을 향해 있으므로
나는 헤어지는 것이라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꾸 함께 있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는 이것이 이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별은 떠날 때의 시간이 아니라
떠난 뒤의 길어지는 시간을 가리키는 것인가 합니다.
당신과 함께 일구다 만 텃밭을
오늘도 홀로 갈다 돌아옵니다
저물어 주섬주섬 짐들을 챙겨 돌아오면서
나는 아직도 당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당신이 비록 내 곁을 떠나 있어도
떠나가던 때의 뒷모습으로 서 있지 않고
가다가 가끔은 들풀 사이에서 뒤돌아 보던 모습으로
오랫동안 내 뒤를 지켜보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헤어져 있는 시간이 이렇게 길어가도
이 세상이 다 저물기 전의 어느 저녁
그 길던 시간은 당신으로 인해
한 순간에 메꾸어 질 것임을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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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꽃 당신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 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 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약한 얼굴 한 번 짖지 않으며 살려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어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어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 것 없는 눈 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을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 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 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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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배 사랑

내 너 있는 쪽으로 흘려 보내는 저녁 강물빛과
네가 나를 향해 던지는 물결소리 위에
우리 사랑은 두 척의 흔들리는 종이배 같아서
무사히 무사히 이 물길 건널지 알 수 없지만

아직도 우리가 굽이 잦은 계곡물과
물살 급한 여울목 더 건너야 하는 나이여서
지금 어깨를 마주 대고 흐르는 이 잔잔한 보폭으로
넓고 먼 한 생의 바다에 이를지 알 수 없지만

이 흐름 속에 몸을 쉴 모래톱 하나
우리 영혼의 젖어 있는 구석구석을 햇볕에 꺼내 말리며
머물렀다 갈 익명의 작은 섬 하나 만나지 못해

이 물결 위에 손가락으로 써두었던 말 노래에 실려
기우뚱거리며 뱃전을 두드리곤 하던 물소리 섞인 그 말
밀려오는 세월의 발길에 지워진다 해도
잊지 말아다오 내가 쓴 그 글씨 너를 사랑한다는 말이었음을

내 너와 함께하는 시간보다
그물을 들고 먼 바다로 나가는 시간과
뱃전에 진흙을 묻힌 채 낯선 섬의
감탕밭에 묶여 있는 시간 더 많아도

내 네게 준 사랑의 말보다 풀잎 사이를 떠다니는 말
벌레들이 시새워 우는 소리 더 많이 듣고 살아야 한다 해도
잊지 말아다오 지금 내가 한 이 말이
네게 준 내 마음의 전부였음을

바람결에 종이배에 실려 보냈다 되돌아오기를 수십번
살아 있는 동안 끝내 이 한마디 네 몸 깊은 곳에
닻을 내리지 못한다 해도 내 이 세상 떠난 뒤에 너 남거든
기억해다오 내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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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 하나를 사랑하는 일도 괴로움입니다

풀잎 하나를 사랑하는 일도 괴로움입니다..
별빛 하나를 사랑하는 일도 괴로움입니다..
사랑은 고통입니다..
입술을 깨물며 다짐했던 것들을 우리 손으로 허물기를 몇 번,
육신을 지탱하는 일 때문에 어둠 속에서 울부짖으며 뉘우쳤던 허물들을
또다시 되풀이하는 연약한 인간이기를 몇 번,
바위 위에서 흔들리는 대추나무 그림자 같은 우리의 심사와 불어오는
바람같은 깨끗한 별빛 사이에서 가난한 봄들을 끌고 가기 위해 많은
날들을 고통 속에서 아파하는 일입니다..
사랑은 건널 수 없는 강을 서로의 사이에 흐르게 하거나 가라지풀 가득한
돌자갈밭을 그 앞에 놓아두고 끊임없이 피 흘리게 합니다..
풀잎하나가 스쳐도 살을 베히고
돌 하나를 밟아도 맨살이 갈라지는 거친 벌판을 우리 손으로 마르지 않게
적시며 적시며 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사랑 때문에 깨끗이 괴로워해본 사람은 압니다.
수없이 제 눈물로 제 살을 씻으며 맑은 아픔을 가져보았던 사람은 압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고통까지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런 것들을 피하지 않고 간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서로 살며 사랑하는 일도 그렇고 우리가 이 세상을 사랑하는
일도 그러합니다.
사랑은 우리가 우리 몸으로 선택한 고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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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

처음부터 끝까지 외로운게 인생이라고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지금 내가 외로워서가 아니다.
피었다 저 혼자 지는 오늘 흙에 누운 저 꽃잎 때문도 아니다. 
형언할 수 없는 형언 할 수 없는
시작도 아지 못할 곳에서 와서 끝 모르게 흘러가는 존재의 저 외로운 나부낌
아득하고 아득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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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밤

빗방울은 장에 와 흐득이고 마음은 찬 허공에 흐득인다
바위 벼랑에 숨어서 젖은 몸으로 홀로 앓는 물새마냥 이레가 멀다하고
잔병으로 눕는 날이 잦아진다.

별마다 모조리 씻겨 내려가고 없는 밤 천리 만길 먼 길에 있다가
한 뼘 가까이 내려오기도 하는 저승을 빗발이 가득 메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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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깎이

고통 속에서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 때문에 고통은 깊어갑니다.
이별이 온 뒤에야 사랑을 알고 사랑하면서 외로움은 깊어갑니다.
죽음을 겪은 뒤 삶의 뜻 알 것 같아 고개 드니 죽음이 성큼 다가섭니다. 

우리가 사는 이 짧은 동안
잃지 않고 얻는 것은 없으며 최후엔 또 그것마저 버리게 됩니다.


 깊은 물

물이 깊어야 큰 배가 뜬다 얕은 물에는 술잔 하나 뜨지 못한다.
이 저녁 가슴엔 종이배 하나라도 뜨는가
돌아오는 길에도 시간의 물살에 쫓기는 그대는
얕은 물은 잔돌만 만나도 소란스러운데 큰물은 기어서 소리가 없다. 
그대 오늘은 또 얼마나 소리치며 흘러갔든가
굽이 많은 이 세상의 시냇가 여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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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날

어떤 날은 아무 걱정도 없이 풍경소리를 듣고 있었으면
바람이 그칠 때까지 듣고 있었으면
어떤 날은 집착을 버리듯 근심도 버리고 홀로 있었으면
바람이 나뭇잎을 다 만나고 올 때까지 홀로 있었으면
바람이 소쩍새 소리를 천천히 가지고 되오는 동안 밤도 오고
별 하나 손에 닿는 대로 따다가 옷섶으로 닦고 도 닦고 있었으면
어떤 날은 나뭇잎처럼 즈믄 번뇌의 나무에서 떠나 억겹의 강물 위를
소리없이 누워 흘러갔으면 무념무상 흘러 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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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물

맑은 물은 있는 그대로를 되비쳐 준다 
만상에 꽃이 피는 날 산의 모습은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보여주고 
잎 하나 남지 않고 모조리 산을 등지는 가을 날은
쓸쓸한 모습 그대로를 보여 준다.
푸른 잎들이 다시 돌아오는 날은 돌아오는 모습 그대로 새들이 떠나는 날은 떠나는 모습 그대로
더 화려하지도 않게 구태여 더 미워하지도 않는다
당신도 그런 맑은 물 고이는 날 있었는가
가을 오고 겨울 가는 수많은 밤이 간 뒤
오히려 더욱 맑게 고이는 그대 모습 만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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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내 꿈은

어릴 때 내 꿈은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나뭇잎 냄새 나는 계집애들과 
먹머루빛 눈 가진 초롱초롱한 사내 녀셕들에게 
시도 가르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들려주며
창 밖의 햇살이 언제나 교실 안에도 가득한
그런 학교의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플라타너스 아래 앉아 시들지 않는 아이들의 얘기도 들으며
하모니카 소리에 봉숭아꽃 한 잎씩 열리는
그런 시골학교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나는 자라서 내 꿈대로 선생이 되었어요.
그러나 하루 종일 아이들에게 침묵과 순종을 강요하는 
그런 선생이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밤늦게까지 아이들을 묶어놓고 험한 얼굴로 소리치며
재미없는 시험문제만 풀어주는
선생이 되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옳지 않은 줄 알면서도 그럴 듯하게 아이들을 속여넘기는 
그런 선생이 되고자 했던 것은 정말 아니었어요.
아이들이 저렇게 목숨을 끊으며 거부하는데
때묻지 않은 아이들의 편이 되지 못하고 
억압하고 짓누르는 자의 편에 선 선생이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어요. 

아직도 내 꿈은 아이들의 좋은 선생님이 되는 거예요. 
물을 건너지 못하는 아이들 징검다리 되고 싶어요.
길을 묻는 아이들 지팡이 되고 싶어요.
헐벗은 아이들 언 살을 싸안는 옷 한 자락 되고 싶어요.
푸른 보리처럼 아이들이 쑥쑥 자라는 동안
가슴에 거름을 얹고 따뜻하게 썩어가는 봄 흙이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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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 피는가 싶더니 꽃이 지고 있습니다

피었던 꽃이 어느 새 지고 있습니다. 
화사하게 하늘을 수놓았던 꽃들이 
지난 밤비에 소리없이 떨어져 
하얗게 땅을 덮었습니다. 
꽃그늘에 붐비던 사람들은 흔적조차 없습니다. 
화사한 꽃잎 옆에 몰려 오던 사람들은 
제각기 화사한 기억속에 묻혀 돌아가고 
아름답던 꽃잎 비에 진 뒤 강가엔 
마음없이 부는 바람만 차갑습니다. 
아름답던 시절은 짧고 
살아가야 할 날들만 길고 멉니다.
꽃 한송이 사랑하려거든 그대여 
생성과 소멸, 존재와 부재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아름다움만 사랑하지 말고 아름다움 지고 난 뒤의 
정적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올해도 꽃 피는가 싶더니 꽃이 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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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죽나무

나는 내가 부족한 나무라는 것을 안다.
어떤 가지는 구부러졌고
어떤 줄기는 비비꼬여 있다는 걸 안다.
그래서 대들보로 쓰일 수도 없고
좋은 재목이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다만 보잘 것 없는 꽃이 피어도
그 꽃 보며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도 기쁘고
내 그늘에 날개를 쉬러 오는 새 한 마리 있으면
편안한 자리를 내어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내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사람에게
그들의 요구를 다 채워 줄 수 없어
기대에 못 미치는 나무라고
돌아서서 비웃는 소리 들려도 조용히 웃는다.
이 숲의 다른 나무들에 비해 볼품이 없는 나무라는걸
내가 오래 전부터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 한 가운데를 두 팔로 헤치며
우렁차게 가지를 뻗는 나무들과 다를게 있다면
내가 본래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누군가 내 몸의 가지 하나라도
필요로 하는 이 있으면 기꺼이 팔 한 짝을
잘라줄 마음 자세는 언제나 가지고 산다.

나는 그저 가죽나무일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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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의 이 푸르른 하늘 밑에 또다시 가을이 오면

나뭇잎 몇개가 떠서 지켜보는 그 날의 하늘도
오늘처럼 이렇게 푸르렀을 겁니다
푸르른 가슴으로 그들도 젊음에 대하여 생각하고
과일처럼 자라오는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을 겁니다.
이 세상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그들도 보장된 미래와 영예롭게 빛나는
자신의 이름 하나를 가꾸기 위해
제복 속에서 꿈꾸고 행복하였을 겁니다.
적어도 식민지에 대하여 눈뜨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내 이웃의 삶과 빼앗긴 땅에 대하여 생각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나 자신보다 더 큰 것을 사랑하면서부터
이 땅에는 피 흘리며 지켜야 할 것이 있음을 알면서부터
그들은 사랑보다는 고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남보다 먼저 깨어 피 흘리며 살았습니다.
자신밖에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빗장을 걸어 잠그고 문을 닫은 채 창 안에서 흘리는
소리없는 비웃음도 받았습니다
물살이 거세면 물살만을 탓하고
불길이 세차면 불길만을 두려워하며
사랑에 대하여 평등에 대하여 정의에 대하여
한 발짝도 걸어 나갈 줄 모르는 사람들이
등 돌리고 서서 질타하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오랜 세월 우리 모두를 짓밟아온 이민족의 총대 밑에서
아직도 다만 기다려야 한다고만 하는
사람들과도 섞여 살았습니다.
용기에 대하여 민족에 대하여
지나치다고만 탓하는 근엄한 꾸지람을 들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이 땅을 지켜온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아니다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말해온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이민족의 총칼 앞 그 가장 가파른 선봉에 서서
쓰러지던 이들은 누구였습니까
이민족과 야합하여 동족의 등을 밟고 선 사람들의 주먹을 향하여
가장 먼저 팔 걷고 나서던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그렇게 살아 오랏줄에 꽁꽁 묶여 차디찬 감옥으로
가장 많이 끌리어가던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분단된 이 나라 눈물의 이 나라
철조망을 걷어내는 일까지 두려워하지 않으며
함께 걸음을 딛던 이들은 누구였습니까
태극기의 그 절반의 붉은 피를 목에 걸고
목메어 목메어 통일의 그 날을 향해 가는 이는
지금 또 누구입니까
식민지의 이 푸르른 하늘 밑에 또다시 가을이 오면
그들도 이 땅의 많은 이들과 똑같이 사랑하고 아파하고
사랑하는 이의 어깨에 기대어 
투정할 줄 아는 젊은 가슴들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장례행렬이 끊이지 않는 죽음의 이 시대에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버리고 가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이 땅은 진정 누가 피 흘리며 지켜오는 나라입니까
이토록 푸르른 가을하늘 밑에
끊임없이 붉은 피 흐르는 이 나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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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 수만 있다면

만들 수만 있다면 
아름다운 기억만을 만들며 삽시다. 
남길 수만 있다면 
부끄럽지 않은 기억만을 남기며 삽시다. 

가슴이 성에 낀 듯 시리고 외로웠던 뒤에도 
당신은 차고 깨끗했습니다.
무참히 짓밟히고 으깨어진 뒤에도 
당신은 오히려 당당했습니다 
사나운 바람 속에서 풀잎처럼 쓰러졌다가도
우두둑 우두둑 다시 일어섰습니다. 

꽃 피던 시절의 짧은 기쁨보다 
꽃 지고 서리 내린 뒤의 오랜 황량함 속에서 
당신과 나는 가만히 손을 잡고 마주서서 
적막한 한세상을 살았습니다. 
돌아서 뉘우치지 맙시다 
밤이 가고 새벽이 온 뒤에도 후회하지 맙시다. 

만들 수만 있다면 
아름다운 기억만을 만들며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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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 발치서 당신을

처음엔 당신이 나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도 사람들 뒷 편에서
당신 모습 바라보다 돌아왔습니다 
사람들 틈에 쌓여 있는 당신 모습이 
전보다 더 야위어 보인다고 생각했습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당신이 
나를 알아보시지 못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왜 당신에게 좀더 가까이 가서 
내 자신을 
당신에게 드러내보이기 부끄러운 것일까요
혼자 맘으론 당신이 내 목소리를 잊지 않고 
계시리라 생각하곤 하면서 
이렇게 
다시 천천히 되돌아 걸어오곤 하는 것인지요 
돌아오는 길에 먼 어둠 속에서
불빛 두어 개 반짝이는 걸 보았습니다. 
별 몇 개 그 위에 희미하게 떠서 
내가 생각하는 
당신 마음처럼 반짝이는 걸 보았습니다. 
나는 왜 당신 앞에 
가까이 나서기가 부끄러운 것인지요 
처음엔 당신이 
나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무엇인가 자꾸만
당신 앞에 떳떳하지 못하여 
나 혼자만 생각하는 당신 향한
이 마음을 그리움이라 말하고 
당신이 기쁘게 나를 알아보실 때까지 
내가 몰래 보내는 
나의 이 작은 목소리를 
다만 기다림이라고 달래보면서 
살고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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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름처럼 만나고 헤어진 많은 사람 중에

구름처럼 만나고 헤어진 많은 사람 중에
당신을 생각합니다.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간 많은 사람 중에
당신을 생각합니다.
우리 비록 개울처럼 어우러져 흐르다
뿔뿔이 흩어졌어도
우리 비록 돌처럼 여기 저기 버려져
말없이 살고 있어도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많은 사람 중에
당신을 생각합니다.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으나 어딘가에 꼭 살아있을
당신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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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벚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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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꽃이 핀 교정에서 편지를씁니다.
당신이 떠나고 없는 하루 이틀은 한 달 두 달처럼 긴데
당신으로 인해 비어있는 자리마다 깊디 깊은 침묵이 있습니다.
낮에도 뻐꾸기 울고 찔레가 피는 오월입니다.
당신있는 그곳에도 봄이 오면 꽃이 핍니까
꽃이 지고 필때마다 당신을 생각합니다.
어둠 속에서 하얗게 반짝이며 찔레가 피는 철이면 더욱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가 많은 이 땅에선
찔레 하나가 피는 일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 세상 많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사랑하여
오래도록 서로 깊이 사랑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 생각을 하며 하늘을 보면 꼭 가슴이 메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서로 영원히 사랑하지 못하고 
너무도 아프게 헤어져 울며 평생을 사는지 아는 까닭에
소리내어 말하지 못하고 오늘처럼 꽃잎에 편지를 씁니다.
소리없이 흔들리는 붓꽃잎처럼 마음도 늘 그렇게 흔들려
오는 이 가는 이 눈치에 채이지 않게 또 하루를 보내고
돌아서는 저녁이면 저미는 가슴 빈자리로 바람이 가득가득 밀려옵니다.
뜨거우면서도 그렇게 여린데가 많던 당신의 마음도
이런 저녁이면 바람을 몰고 가끔씩 이땅을 다녀갑니까
저무는 하늘 낮달처럼 내게와 머물다 소리없이 돌아가는 사랑하는 사람이여.


 



 



오월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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