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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시모음
2015년 04월 19일 16시 56분  조회:4264  추천:1  작성자: 죽림
<아내 시 모음> 

+ 아름다운 아내 

아내여, 아름다운 아내여.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해 주지 않았어도 
변치 않고 살아주는 아름다운 아내여. 

세상의 파도가 높을지라도 좀처럼 절망하지 않는 
나의 아름다운 아내여. 방파제여. 

당신은 한 그루 나무다. 
희망이라는 낱말을 지닌 참을성 많은 나무다. 
땅만 있으면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어 꽃을 피우는 억척스런 나무다. 

아내여, 억척스런 나무여. 
하늘이 푸르다는 것을 언제고 믿는 아름다운 나무여. 
나의 등이 되어주는 고마운 나무여. 

아내는 방파제다. 
세월 속의 듬직한 나무다. 
(윤수천·시인, 1942-)


+ 아내의 꽃

꽃들은 얼굴을 마주볼 때 아름답다 
술패랭이꽃이 핀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아내의 얼굴에 핀 기미꽃을 본다 
햇볕의 직사포를 피하기 위해 
푹 눌러쓴 모자에도 아랑곳없이 
자꾸 얼굴에 번져가는 아내의 꽃, 
사시사철 햇볕이 없을 수 없듯 피할 수 없이 
아내의 얼굴엔 피어난 꽃이 늘어간다 
아내는 몸 꼭대기에 꽃밭을 이고 다니는 것이다 
기미꽃, 죽은깨꽃, 주름꽃 
다양한 아내의 꽃밭에서 그래도 볼 위에 
살짝 얹어진 웃음꽃이 가끔씩 위안으로 피어난다 
술패랭이꽃들이 몸을 부비는 산책로를 걸으며 
나는 아내의 손바닥에 글씨를 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항상 내 곁에 있다고 
(김경진·시인, 1967-)


+ 아내 시편

베개를 같이 베고 한몸이라 생각하지만
어쩌면 연극보다 더 연출하며 사는지 몰라
시린 날 웅크리고 자는 내 모습 보면 알듯이.
이내 속 그대에게 어찌 다 밝힐 수 있나
더불어 그대 속에 어찌 더 편할 수 있을까
가슴 섶 열어젖혀도 뒷모습 숨게 마련인데
가끔은 모진 바람에 앞자락 다 헤집어져도
알아서 속상할 일은 나 홀로 삭히는 게야
살포시 햇살 한 줌을 아내에게 덮는 이 아침에.
(이승현·시인, 충남 공주 출생)


+ 내 아내  

나 바람 나지 말라고 
아내가 새벽마다 장독대에 떠놓은 
삼천 사발의 냉숫물.

내 남루襤樓와 피리 옆에서
삼천 사발의 냉수 냄새로 
항시 숨쉬는 그 숨결 소리.

그녀 먼저 숨을 거둬 떠날 때에는
그 숨결 달래서 내 피리에 담고,

내 먼저 하늘로 올라가는 날이면 
내 숨은 그녀 빈 사발에 담을까.  
(미당 서정주·시인, 1915-2000)


+ 아내의 구두

아내의 구두굽을 몰래 훔쳐본다
닳아 없어진 두께는 곧 아내가 움직였을 거리
넘어지지 않기 위해 한쪽으로만 기대었던 굽이
다른 한쪽 굽을 더 깊게 파이게 했다
덜 파인 쪽에 힘을 주면 굽의 높이가 같아질까
나를 받아주기 위해 제 몸만 넓혀갔지
헐렁한 건강 한 번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구두
밑창을 갈면 왠지 낯설 것 같은 구두, 버리면
지나간 가난이 서릿발처럼 일어설 것 같아
신발장에 슬며시 들여놓는다
이곳저곳에 이력서를 넣으며 눈물 흘렸을 때
군말 없이 동행해주었던 구두
핼쑥해진 아내의 얼굴처럼 광택이 나지 않는 구두
아무렇게나 신어도 쑥쑥 들어가는 구두가
키를 맞추겠다면서
높은 구두는 고르지도 않던 아내에게
숫처녀 같은 구두 한 켤레 사주고 싶다.
(박정원·시인, 충남 금산 출생)


+ 아내의 봄비 

순천 웃장 파장 무렵 봄비 내렸습니다. 
우산 들고 싼거리 하러 간 아내 따라 갔는데 
파장 바닥 한 바퀴 휘돌아 
생선 오천원 조갯살 오천원 
도사리 배추 천원 
장짐 내게 들리고 뒤따라오던 아내 
앞서 가다보니 따라오지 않습니다 

시장 벗어나 버스 정류장 지나쳐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비닐 조각 뒤집어 쓴 할머니 
몇 걸음 지나쳐서 돌아보고 서 있던 아내 
손짓해 나를 부릅니다 
냉이 감자 한 바구니씩 
이천 원에 떨이미 해가시오 아줌씨 
할머니 전부 담아주세요 
빗방울 맺힌 냉이가 너무 싱그러운데 
봄비 값까지 이천 원이면 너무 싸네요 
마다하는 할머니 손에 삼천원 꼭꼭 쥐어주는 아내 

횡단보도 건너와 돌아보았더니 
꾸부정한 허리로 할머니 
아직도 아내를 바라보고 서있습니다 
꽃 피겠습니다 
(김해화·노동자 시인, 1957-)


+ 늙어가는 아내에게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아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 알 한 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있는 만큼 그대의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 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은 손으로 짚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 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 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황지우·시인, 1952-)


+ 아내의 빨래공식  

아내의 빨래공식은 늘 일정하다
물높이 중간에 놓고
세탁 십 분 헹굼 세번
탈수 삼 분 후에 다시 헹굼 한번

그러나 간혹 공식이 파기될 때가 있다
남편 잘 둔 친구를 만났다던가
나의 시선이 그녀를 빗나갔다 싶은 날이면
아내의 빨래 법칙엔 밟아빨기가 하나 추가된다

그런 날이면 나는 거실에 앉아
아내가 세탁실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린다
잔소리가 어디서부터 터질 것인지
마음 졸이며 지켜보다가
거실을 정리하다가 하지도 않던 걸레질을 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퇴근하고 온 날에도
아내가 빨래하는 시간만 되면 늘 긴장한다
예정된 공식대로 세탁기가 돌아가면
그제서 오늘의 스포츠 뉴스를 본다 
(이기헌·시인, 1958-)


+ 아내를 생각함 

집이 그리운 사람은
사랑할 줄 안다

세상의 딸들은 어미가 되고
어머니의 길을 간다
우리가 언제 변덕스러운 적이 있었나
사랑은 언제나 안에 있었다
자본주의에 실패한 사랑, 
아내를 고생시킨 사람은
사랑할 줄 안다

사치스러운 아내들은 
속고 사는지 모른다

용기만 가지고 살아온 가시나무
여전히 그대는 나의 표준이다 
(최병무·시인, 1950-)


+ 고단孤單

아내가 내 손을 잡고 잠든 날이었습니다
고단했던가 봅니다
곧바로 아내의 손에서 힘이 풀렸습니다
훗날에는, 함부로 사는 내가 아내보다 먼저
세상의 만남과 손을 놓겠지만
힘이 풀리는 손을 느끼고 나니
그야말로 별세別世라는 게 이렇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날이 오면, 아내의 손을 받치고 있던
그날 밤의 나처럼 아내도 잠시 내 손을 받치고 있다가
내 체온體溫이 변하기 전에 놓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는 아내 따라 잠든
내 코고는 소리를 서로 못 듣듯
세상에 남은 식구들이 조금만 고단하면 좋겠습니다
(윤병무·시인, 1966-)


+ 파랑새

행복의 파랑새는
저 멀리 살지 않고

보일 듯 말 듯
나의 곁을 빙빙 맴돌고 있음을

한순간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이 세상에서 나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제일 긴 사람

이 세상에서 나에게
밥상을 가장 많이 차려준 사람

이 세상에서 나의 안팎을
누구보다 세밀히 알고 있는 사람

내 삶의 환한 기쁨과 보람
몰래 감추고픈 슬픔과 고독의 
모양과 숨결까지도 감지하는 사람

그리고 나 때문에
종종 가슴 멍드는 사람

하루의 고단한 날개를 접고
지금 내 품안에 단잠 둥지를 틀었네

작은 파랑새여
아내여
(정연복·시인,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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