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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강을 건너기 위한 긴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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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뭉치면 새 세상 된다네 남자가 모여서 지배를 낳고 지배가 모여서 전쟁을 낳고 전쟁이 모여서 억압세상 낳았지 여자가 뭉치면 무엇이 되나? 여자가 뭉치면 사랑을 낳는다네 모든 여자는 생명을 낳네 모든 생명은 자유를 낳네 모든 자유는 해방을 낳네 모든 해방은 평화를 낳네 모든 평화는 살림을 낳네 모든 살림은 평등을 낳네 모든 평등은 행복을 낳는다네 여자가 뭉치면 무엇이 되나? 여자가 뭉치면 새 세상 된다네 "여자가 하나 되는 세상을 위하여―이야기 여성사·6" ---------------- 어렸을 적 불렀던...긴 것은 기차..기차는 빨라...빠른 것은 비행기.....라는 구전동요처럼 생명-자유-해방-평화-살림-평등-행복으로 물고 이어지는, 여자가 뭉쳐서 만드는 세상과 지배-전쟁-억압으로 물고 이어지는, 남자가 만드는 세상을 대비하면서 가부장제 사회의 본질을 잘 드러내고 있네요. 남자인 저로서도 충분히 공감가게 하는 진술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임당, 허난설헌 같은 역사적 인물을 등장시킨 아래 시도 참 재미나네요. 왜 고정희 시인을 여성주의 시인이라 하는지,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만드는 시들입니다. -------------------- 사임당이 허난설헌에게 이야기 여성사 3 고정희 사임당상이라니 기상천외이외다 경번당 허 자매 그대 나보다 뒷세상에 태어났지만 기실 명문가에 적을 둔 정실규방 신세 한가지로 살아왔으니 그 허와 실 뼛속에 사무치리라 싶어 꾸밈 없는 속이야기 서둘러 봉하외다 오늘에사 나는 조선의 정실부인들이 모여 해마다 신사임당상이라는 것을 주고받으며 원삼 족두리 잔치를 벌이고 신사임당 사당까지 지어 여자 예절교육 본으로 삼고 있다 하는 비보를 접했기 때문이외다 아니 이는 분명 흉보 중에 흉보요 재앙 중에 재앙이라 아니할 수 없사외다 내가 알기로는 지금의 조선은 십년 강산이 몇백 번씩 바뀌고 시대 또한 놀랍게 변하였다 들었사외다 여자들의 무예가 하늘을 찌르고 첨단과학 문명이 옷섶에 나부끼며 민주 진보 급진사상이라는 것이 머리 깨친 사람들의 대세라 들었사외다 그런 조성땅에 아직 손가락 하나 끄떡 않는 세 가지 바뀔 줄 모르고 변할 줄 모르는 세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니까 여자에게 현모양처 되라 하는 것이요 남자에게 현모양처 되겠다 빌붙는 것이요 여자가 남자 집에 시집가는 것이외다 시집가서 아들 낳기 원하는 것이외다 그 현모양처 표본이 바로 나 신사임당이라 하여 내 시대 율법으로 내 시대 관습에 특출한 여자 골라 여자들 이름으로 상 주고 박수 친다니 이 무슨 해괴한 시대 변고이니까 요즘 알아듣는 말로 치자면 절반 하늘 절반 땅 절반 경제 절반 나라살림 좌우하는 여자해방하면서 여자 팔자소관 하나 바로잡지 못한다면 기상천외 요절복통 하세월이외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시대라지만 우리 해동 조선에 버티고 있으니 국토분단 장벽보다 먼저 민족분단 장벽보다 먼저 남녀분단 장벽 허물 일이 급선무이외다 삼종지도 장벽 무너지지 않는 집에 어찌 민주며 통일이 있으리까 또 내가 현모양처 모범이니 영원한 구원의 여인상이니 하여 칭송 아닌 칭송을 늘어놓는 것도 똑바른 사람이 할 짓이 아니외다 솔직히 말하건대 내 당대의 율곡을 길러 냈다고는 하나 당대의 여자 율곡을 길러 내는 일보다 자랑이 못 되며 사대부 집안에서 뼈가 굵은 탓으로 반상에 적응하는 자중을 조금 알고 시국관 거스르지 않는 지혜 조금 깨우쳤을 뿐 (이는 반가 정실부인들의 생존전략이외다) 규방에서 난초 치고 글 짓는 일이란 여자 한이 방울방울 아롱진 탓이로되 내 평생 절반을 친정집에서 살고 반평생 친정부모 모시는 데 바쳤으니 현모양처 계율로는 어림없는 일이외다 하물며 과학만능 우주시대 여자들이 어찌하여 현모양처 망령에 이끌린단 말이니까 오고 있는 시대를 좇아야 하외다 정실부인론을 곡함 그러나 허 자매 다시 거듭거듭 걱정하거니와 오늘날 해동의 어여쁜 여자들이 현모양처 허상에서 깨어나기란 일부일처 관습이 대세를 이루는 한 분단장벽보다 어려울 것이외다 요즘 시국관으로 사회변혁운동이란 말이 유행이라 들었사외다 이 사회변혁운동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부르주아 중산층 계급이라 들었사외다 버릴 수도 취할 수도 없는 계급 관습유지의 보호막인 계급 생각은 많으나 믿을 수 없는 계급 이미 체제에 순응하고 있는 계급 이것이 바로 중산층이라면 그것의 받침목은 중산층 부인들이 아닐 수 없사외다 말하자면 현대판 정실부인들이외다 이 말을 새겨듣기 바라외다 일례로 며칠 전 우주위성중계를 통해 여의도 텔레비전 방송에서 벌어지는 집중 여자토론회를 시청했사외다 그곳에 초청된 모든 정실부인들은 조선조 여자관을 빼다 박았더이다 시국의 변화에는 아랑곳없되 여자 일 남자 일 따로 있어서 여자는 밥하고 빨래하고 아이 기르는 일에 한치도 벗어나선 안된다는 것이외다 이 어찌 가슴 치지 않을 수 있으리까 일찍이 이익이 잘못했던 말, 여자는 학문을 해서는 안되고 재능을 날려서는 나라의 재앙이다, 엄포를 놨던 말이 우아한 유령으로 사라 있단 뜻이외다 대저 일부일처제란 무엇이니까 여자를 소유로 보자는 내막이외다 정실부인이란 무엇이니까 소실과 첩을 엄중히 처단하잔 여자율법이외다 소실과 첩이란 무엇이니까 기둥서방 문화의 희생물이외다 기둥서방 문화란 무엇이니까 무릇 남자의 성기 밑에 여자의 자궁을 예속시키자는 영원무궁한 음모이외다 그러므로 정실부인의 반열에 든 여자들은 여자가 여자 자신의 적이다, 이 말을 거의 선진적으로 깨우쳐 스스로 만든 장벽 넘어가지 않는다면 탄하노니 여자 절개의 무게 태산과 같고 여자 목숨의 무게 깃털과 같다 한들 오천년 피눈물이 부족하단 뜻이니까 저승 여자들이 줄지어 곡하외다 남자들이 싫어하는 여자 세 가지 그렇다고 곡만 할 수 없사외다 생존에는 전략이 필요하다 하였으니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란 말도 있듯이 허허실실 병법이 허사는 아니외다 상고해 보건대 어찌하여 신사임당이 조선조 남자들의 철옹성 속에서 조선조 남자들의 붓으로 기록하는 현모양처상이 되었나이까 그것은 다름 아닌 조선조 남자들이 하나같이 지닌 세 가지 허를 깨쳤기 때문이외다 반상을 막론하고 조선의 남자들이 싫어하는 세 가지 허가 있으니 첫째는 남자 체면 깎이는 것 용납 않는 허요 둘째는 남자보다 높은 식견 인정 않는 허요 셋째는 남자 앞에서 큰소리 거북스런 허외다 그래서 남자가 싫어하는 세 가지 여자란 남자보다 잘난 체하는 여자요 남자 자존심 건드리는 여자요 남자보다 큰소리로 웃는 여자이외다 내 전략이 구식일진 모르지만 여자의 특질과 부드러움 이용하여 이 허를 찌르기란 어렵지 않사외다 다만 이는 전략이로되 이녁 살아 있는 뜻 당당하게 세우는 비수 한 자루 간직할 터인즉 여자는 최후의 피압박계급? 내 잠시 잠깐도 잊어 본 적이 없는 규방 여자들의 한이 있사외다 동지섣달 길쌈하는 소리는 날 잡숴, 날 잡숴, 여자 사지 찢어 나르는 소리요 달빛 설핏한 밤 다듬이질 소리는 여자 팔자 두룸박 팔자 여자 팔자 두룸박 팔자 여자 팔자 두룸박 팔자…… 조선 여자 뒤통수 내리치는 비명이거늘 오직 천추의 한으로 간직할 뿐 이 결박 스스로 풀지 못했으니 어즈버 문명국이 된 오늘날까지 방직공장과 기성복 공장 그리고 또 무슨무슨 공장에서 우리의 이쁘고 이쁘고 이쁜 딸들이 저임금과 철야, 잔업에 시달리며 생산증대 길쌈과 바느질로 돈받이 달러받이 일삼는 것 아니리까 구중궁궐 기계실과 밀실에서 성폭력과 강간폭력 노동통제 남근에 깔려 어머니 당했어요, 현모양처 되기는 다 틀렸어요, 돈이나 벌겠어요! 기생관광 인당수에 몸 던지는 것 아니리까 딸아, 현모양처상을 화형에 처해라 네 비수로 정절대를 ㅤㅉㅣㅅ어라 단숨에 찢어발겨라, 이 불쌍한 것 여자의 이 아픔 여자의 이 억압 여자의 이 억울함 하늘을 찌르고 땅에 솟구친들 속시원히 노래한 시인이 조선에 있는지요 최근에 박노해라는 노동시인이 이불을 꿰매며, 라는 여자해방시를 썼다고 하나 찬찬히 뜯어보건대 나도 내 아내를 압제자처럼 지배하고 있었다……이런 고백에 지나지 않아요 원통하구려! 오천년 당한 수모 약이 될 수 없으리까 정작 길닦이가 없었나이까 아니외다 사백 년 전 경번당 당신은 이미 여자의 처지를 계급으로 절감했사외다 사백 년 전 난설헌 당신은 이미 여자의 팔자를 피압박 인민으로 꿰뚫었사외다 사백 년 전 초희 당신은 이미 남자의 머리를 봉건제 압제자로 명중했사외다 아니 아니 난설헌 당신은 최초로 조선 봉건제에 반기를 든 여자시인이며 여자를 피압박계급으로 직시한 최초의 시인이 아니리까 밤 깊도록 베 짜는 외론 이 심사 뉘 옷감을 이 몸은 이리 짜는가 팔베개 수우잠도 맛볼 길 없이 텅텅텅 북 울리며 베 짜는 몸엔 겨울의 긴긴 밤이 그저 추울 뿐 뉘 옷감을 이 몸은 이리 짜는가 가위로 싹둑싹둑 옷 마르노라면 추운 밤에 손끝이 호호 불리네 시집살이 길옷이 밤낮이건만 이내 몸은 해마다 새우잠인가 가난한 여자를 위한 이 오언절구 절창에 어느 여자 무릎을 치지 않으리요 어즈버 하늘이 낸 시인 난설헌 조선에 태어난 백성 중에서 하늘이 낸 시인이 있더이까 난설헌 바로 당신이외다 조선에 터잡은 백성 중에서 하늘이 낸 천재가 있더이까 경번당 바로 당신이외다 조선에 뿌리내린 백성 중에서 하늘이 낸 절세가인이 있더이까 초희 바로 당신이외다 세상이 우러르던 재상 허엽과 강릉 김씨 딸로 당신 태어났건만 그 문벌 그 족벌이 무슨 소용 있으리 독서와 강의는 선비의 일이니 부인이 이에 힘쓰면 폐해무궁하리라, 하여 훈학에 힘입은 바 없고 문벌 족벌에 기댄 바 없으나 네 살박이 여자아이의 매서운 눈초리 네 살박이 딸의 처절한 분노는 하늘의 밑둥을 흔든 성싶사외다 오라버니 어깨너머로 깨친 글솜씨 백가서책을 스스로 통달하여 다섯 살에 시 지으니, 여신동이요 여덟 살에 백옥루 상량문 올리니, 조선의 문웅이요 스스로 난설헌이라 호를 짓고 수수편편 백옥 같은 시의 장강 이루니, 여자 두보요 안동 김씨 김성립과 혼인하여 천추의 삼한을 품고 살되, 하늘이여 어찌하여 조선을 내고 나를 내었나이까 하늘이여 어찌하여 남자를 내고 다시 나를 여자로 내었나이까 하늘이여 어찌하여 김성립을 남편으로 점지하였나이까 하늘을 대지른 그 울연한 기상 다스려 가이 득음의 경지에 넘나들 제 글자마다 주옥이요 글귀마다 산호 열려 천의무봉 시세계 천고명작 이루니, 이 세상 일 같지 않다 이르더이다 어즈버 하늘이 낸 시인 어즈버 하늘이 낸 천재 어즈버 하늘이 낸 절세가인이여 중국 대륙에 삼대 부인문장가가 있다고 하나 조대가와 반희와 설도가 당신에 견줄 수 있으리까 아까운 스물일곱 해 그 짧은 생애 마칠 때 평생의 시고가 시의 노적가리 이루었다 하건만 이녁 유언대로 한 점 재로 돌아가 무덤에 덮이니 아깝고 아깝도다 다만 친정에 남아 있던 유고 이백여 수가 명나라 사신 주지번에 의하여 천육백육 년 중국에서 간행될 제 낙양의 종이값을 오르게 하였다니 주지번의 발문대로 이제 허난설재의 문집을 보니 아득히 티끌 속세를 초탈하여 아름다워 때묻지 않고 유현하면서도 구상이 있어 선경에 유영하는 제작품이 다시 선가仙家에 관통했으니…… 백옥루각이 한번 이룩됨에 ……떨어진 글자욱은 모두 주옥을 이루어 인간 세계에 영원히 그윽한 감상을 하게 했구나 어찌 어리석고 하잘 나위 없는 우리들이 한숨짓고 억지로 읊어서 그 불평한 심사를 묘사하여 한갓 아녀자의 웃음과 빈축을 사는 것 따위리요…… 한번 이룩된 백옥루가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대 다시 없으리 - 고정희 시집 "여성해방출사표", 1990. |
[고정희 시인 시모음]
겨울 사랑
그 한 번의 따뜻한 감촉 단 한 번의 묵묵한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활짝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사이로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범람하던 치자꽃 향기, 소백산 한 쪽을 들어올린 포옹,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 그 한 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 번의 이윽한 진실이 내 일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상한 영혼을 위하여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을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무심히 지나는 출근버스 속에서도 추운 이들 곁에
따뜻한 차 한잔 끓는 것이 보이고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여수 앞바다 오동도쯤에서 춘설 속의 적동백 화드득
화드득 툭 터지는 소리 들리고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중국 산동성에서 날아온 제비들 쓸쓸한 처마, 폐허의 처마 밑에 자유의 둥지 사랑의 둥지 부드러운 혁명의 둥지 하나 둘 트는 것이 보이고
우리동네 구자명 씨 일곱달된 아기엄마 구자명씨는 출근버스에 오르기가 무섭게 아침 햇살 속에서 졸기 시작한다 경기도 안산에서 서울 여의도까지 경적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옆으로 앞으로 꾸벅꾸벅 존다 차창 밖으론 사계절이 흐르고 진달래 피고 밤꽃 흐드러져도 꼭 부처님처럼 졸고 있는 구자명씨, 그래 저 십분은 간밤 아기에게 젖물린 시간이고 또 저 십분은 간밤 시어머니 약시중든 시간이고 그래그래 저 십분은 새벽녘 만취해서 돌아온 남편을 위하여 버린 시간일거야 고단한 하루의 시작과 끝에서 잠 속에 흔들리는 팬지꽃 아픔 식탁에 놓인 안개꽃 멍에 그러나 부엌문이 여닫기는 지붕마다 여자가 받쳐든 한 식구의 안식이 아무도 모르게 죽음의 잠을 향하여 거부의 화살을 당기고 있다
가을 편지
흑룡강 기슭까지 굽이치는 날 무르익을 수 없는 내 사랑 허망하여 그대에게 가는 길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길이 있어 마음의 길은 끊지 못했습니다
수미산 산자락에 기립해 있는 날 황홀할 수 없는 내 사랑 노여워 그대 향한 열린 문 닫아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문이 있어 마음의 문은 닫지 못했습니다
수묵색 눈물비에 젖어 있는 날 작별할 수 없는 내 사랑 서러워 그대에게 뻗은 가지 잘라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무성한 가지 있어 마음의 가지는 자르지 못했습니다
문을 닫고 가지를 잘라도 저녁 강물로 당도하는 그대여 그리움에 재갈을 물리고 움트는 생각에 바윗돌 눌러도 풀밭 한벌판으로 흔들리는 그대여 그 위에 해와 달 멈출 수 없으매 나는 다시 길 하나 내야 하나 봅니다 나는 다시 문 하나 열어야 하나 봅니다
꿈꾸는 가을 노래 꿈꾸는 가을 노래 들녘에 고개 숙인 그대 생각 따다가 반가운 손님 밥을 짓고 코스모스 꽃길에 핀 그대 사랑 따다가 정다운 사람 술잔에 띄우니 아름다워라 아름다워라 늠연히 다가오는 가을 하늘 밑 시월의 선연한 햇빛으로 광내며 깊어진 우리 사랑 쟁쟁쟁 흘러가네 그윽한 산그림자 어질머리 뒤로 하고 무르익은 우리 사랑 아득히 흘러가네 그 위에 황하가 서로 흘러 들어와 서쪽 곤륜산맥 열어놓으니 만리에 용솟는 물보라 동쪽 금강산맥 천봉을 우러르네
날개 생일선물을 사러 인사동에 갔습니다 안개비 자욱한 그 거리에서 삼천도의 뜨거운 불기운에 구워내고 삼천도의 냉정한 이성에 다듬어낸 분청들국 화병을 골랐습니다 일월 성신 술잔같은 이 화병에 내 목숨의 꽃을 꽂을까, 아니면 개마고원 바람소릴 매달아 놓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장백산 천지연 물소리 풀어 만주대륙 하늘까지 어리게 할까 가까이서 만져보고 떨어져서 바라보고 위아래로 눈 인두질하는 내게 주인이 다가와 말을 건넸지요 손님은 돈으로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선물을 고르고 있군요 이 장사 삼십년에 마음의 선물을 포장하기란 그냥 줘도 아깝지 않답니다 도대체 그 분은 얼마나 행복하죠? 뭘요... 마음으로 치장한들 흡족하지 않답니다 이 분청 화병에는 날개가 달려있어야 하는데 그가 이 선물을 타고 날아야 하는데 이 선물이 그의 가슴에 돌이 되어 박히면 난 어쩌죠?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목을 길게 뽑고 두 눈을 깊에 뜨고 저 가슴 밑바닥에 고여 있는 저음으로 첼로를 켜며 비장한 밤의 첼로를 켜며 두 팔 가득 넘치는 외로움 너머로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러질 때까지 어두운 들과 산굽이 떠돌며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달력 속에서 뚝, 뚝, 꽃잎 떨어지는 날이면 바람은 너의 숨결을 몰고와 측백의 어린 가지를 키웠다 그만큼 어디선가 희망이 자라오르고 무심히 저무는 시간 속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 나는 너에게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수없는 나날이 셔터 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꿈의 현상소에 당도했을 때 오오 그러나 너는 그 어느 곳에서도 부재중이었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바람으로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더 먼저 더 오래 더 먼저 기다리고 더 오래 기다리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기다리는 고통 중에 사랑의 의미를 터득할 것이요. 더 먼저 달려가고 더 나중까지 서 있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서 있는 아품중에 사랑의 길을 발견할 것이요. 더 먼저 문 두드리고 더 나중까지 문 닫지 못하는 사랑이 복이 있나니 저희가 문닫지 못하는 슬픔중에 사랑의 문을 열게 될것이요. 더 먼저 그리워하고 더 나중까지 그리워 애통하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그리워 애통하는 눈물 중에 사랑의 삶을 차지할 것이요. 더 먼저 외롭고 더 나중까지 외로움에 떠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외 로움의 막막궁상 중에 사랑의 땅을 얻게 될 것이요. 더 먼저 상처받고 더 나중까지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은 복이 있나 니 저희가 상처로 얼싸안는 절망중에 사랑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요. 더 먼저 목마르고 더 나중까지 목 말라 주린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주리고 목마른 무덤 중에서라도 사랑의 궁전을 짓게 되리라. 그러므로 사랑으로 씨 뿌리고 열매 맺눈 사람들아 사랑의 삼보 - 상처와 눈물과 외로움 가운데서 솟는 사랑의 일곱 가지 무 지개 이 세상 끝 날까지 그대 이마에 찬란하리라.
모든 사라지는 것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
그대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를 매달아 놓습니다
커다란 돌덩이를 매달아 놓습니다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해서
제 설움 넘치는 밤일수록
크고 무거운 돌덩이 하나 가슴 한복판에 매달아 놓습니다.
하늘에 쓰네 하늘에 쓰네 그대 오지 않아도 나 그대 속에 산다고 하늘에 쓰네
더 나중의 기쁨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내 나중까지 그대를 사랑함은 그대보다 더 먼저 즐거움의 싹을 땄기 때문이리니
억조창생 물굽이에 달뜨는 사람이여 끝남이 없으니 시작도 없는 곳 시작이 없으니 멈춤 또한 없는곳, 수련꽃만 희게 희게 흔들리는 연못가에 오늘은 봉래산 학수레 날아와 하늘 난간에 적상포 걸어놓고
열두 대의 비파에 실으니 천산의 매화향이 이와 같으랴 수묵색 그리움 만리를 적시도다 만리에 서린 사랑 오악을 감싸도다
동트는 하늘에 쓰네 그대 오지 않아도 나 그대 속에 산다고 해지는 하늘에 쓰네.
가슴 밑으로 흘려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언강물 풀리는 소리는 내며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
저 비 그치고 보름달 떠오르면 우리들 가슴 속의 수문을 열자 봄비 찰랑대는 수문을 쏴 열고 꿈꾸는 들판으로 달려 나가자 들에서 얼싸안고 아득히 흘러가자 그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리 다만 둥그런 수평선 위에서 일월성산 숨결같은 빛으로 떠오르자
너는 섬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바리새인들은 하루종일 정결법 논쟁으로 술잔을 비우고
푸른 풀밭, 마지막 낙조에 눈부시게 빛나는 너의 이름과 비구상의 시간 위에 쓰라린 마음 각을 떠 널다가 두 눈 가득 고이는 눈물 떠나가는 강물에 섞어 보냈다.
지울 수 없는 얼굴
냉정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얼음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불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무심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징그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부드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그윽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따뜻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내 영혼의 요람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샘솟는 기쁨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아니야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당신이라 썼다가 이 세상 지울 수 없는 얼굴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 시대의 아벨
며칠째 석양이 현해탄 물구비에 불을 뿌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막 닻을 내린 거룻배 위에는 저승의 뱃사공 칼롱의 은발이 석양빛에 두어 번 나-부-끼-더-니, 동서남북 금촉으로 부서지며 혼비백산 숲에 불을 질렀읍니다. 으-아, 솔바람 불바람 홀연히 솟아올라 둘러친 세상은 넋나간 아름다움 넋나간 욕망으로 끓어 오르고 있었읍니다. 아세아를 건너지른 `오그덴 10호'가 현해탄에 당도한 건 바로 이때입니다.
몇 명의 수부들을 바다 속에 처넣고 벼락을 때리며 외쳤습니다.
너희 안락한 처마밑에서 함께 살기 원하던 우리들의 아벨, 너희 따뜻한 난롯가에서 함께 몸을 비비던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 너희 풍성한 산해진미 잔치상에서 주린 배 움켜 쥐던 우리들의 아벨 우물가에서 혹은 태평 성대 동구 밖에서 지친 등 추스르며 한숨짓던 아벨 어둠의 골짜기로 골짜기로 거슬러 오르던 너희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 믿음의 아들 너 베드로야 땅의 아버지 너 요한아 밤새껏 은총으로 배부른 가버나움아 사시장철 음모뿐인 예루살렘아 음탕한 왕족들로 가득한 소돔과 고모라야 너희 식탁과 아벨을 바꿨느냐 너희 침상과 아벨을 바꿨느냐 너희 교회당과 아벨을 바꿨느냐 독야청청 담벼락과 아벨을 바꿨느냐? 회칠한 무덤들, 이 독사의 무리들아 너희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너희 족보를 짊어진 아벨 너희 탐욕과 음습한 과거를 등에 진 아벨 너희 자유의 멍에로 무거운 아벨 너희 사랑가로 재갈물린 아벨 일흔 일곱 날 떠돌던 아벨을 보았느냐? 아흔 아홉 날 한뎃잠을 청하던 아벨을 보았느냐?
돌들이 일어나 꽃씨를 뿌리고 바람들이 달려와 성벽을 허물리라 지진이 솟구쳐 빗장을 뽑으리라 바람부는 이 세상 어디서나 아벨의 울음은 잠들지 못하리
외마디 소리마저 빼앗긴 아벨을 위하여 나는 너희 식탁을 엎으리라 나는 너희 아방궁을 엎으리라 나는 너희 별장을 엎으리라 나는 너희 교회당과 종탑을 엎으리라 소돔아 너를 엎으리라 고모라야 너를 엎으리라 가버나움아 너를 엎으리라 예루살렘아 너를 엎으리라 천사야 너도 엎으리라 깃발을 분지르고 상복을 입히리라 생나무 마른 나무 함께 불에 던지고 바다더러 산 위로 오르라 하리라 산더러 너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바람부는 이 세상 어디서나 이제 침묵은 용서받지 못한다 울지 않는 종은 입에 칼을 물리고 뛰지 않는 말은 등에 창을 받으리 날지 않는 새는 뒷축에 밟히리 뒷날에 참회는 적당치 못하다 너희가 쫓아 버린 아벨 너희가 쫓아 묻어 버린 아벨 너희가 쫓아 묻고 부인한 아벨 너희는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시치미뗀 아벨의 울음 소릴 들었느냐? 금동이의 술잔에 아벨의 피가 고이고 은소반의 안주에 아벨의 기름 흐르도다 촛농이 녹아 흐를 때 아벨이 울고 노랫가락 높을 때 아벨이 탄식하도다
나는 이 세상 어디든 달려가 너희 잔치상과 보신탕을 엎으리라 너희 축복과 토룡탕을 엎으리라 너희 개소주와 단잠을 엎으리라 돌들이 일어나 옥답을 일구고 지진이 솟구쳐 평지 풍파 일으키리라 바람더러 주인이라 주인이라 부르리라
너희의 절망인 아벨 너희의 자유인 아벨 너희의 멍에인 아벨 너희의 표징인 아벨 낙원의 열쇠인 아벨 아벨 아벨 아벨 아벨 아벨……
불 탄 수염을 쥐어뜯으며 대지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가 눈물 흘리는 동안만이라도 주는 우리를 용서하소서
오그덴 10호가 현해탄의 대기권을 완전히 떠나갔다고 보도했습니다.
* 창세기 4장 2절 이하에 기록된 대로 인간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첫아들 카인과 둘째 아들 아벨을 낳았다.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었고 카인은 농부가 되 었는데, 형 카인은 아벨에 대한 질투 때문에 아우를 들로 꾀어내어 쳐 죽였다. 이때 야훼께서 이렇게 꾸짖으셨다.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 1981년 8월 초 한반도에도 상륙한 태풍 이름.
고백 (너 여섯)
너에게로 가는 그리움의 전깃줄에 나는 감 전 되 었 다
고정희 高靜熙 (1948 - 1991) 전남 해남 출생. 5남 3녀 가운데 장녀로 태어났다.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한 뒤 1975년 시인 박남수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연가》 《부활과 그 이후》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하였다. 허형륫ㅁ窪唜징ㅐ瀁예?ㅌ蒡仄퐈ㅁ믄예?등과 ‘목요회’ 동인으로 활동하였고,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여성문학인위원회 위원장, 시창작분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1984년부터는 기독교신문사, 크리스찬아카데미 출판간사, 가정법률상담소 출판부장,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을 거쳐 여성문화운동 동인 ‘또하나의 문화’에서 활동하는 등 사회활동도 적극적으로 하였다. 1991년 6월 9일 지리산 등반 도중 실족사하였다.
시집으로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1979), 《실락원 기행》(1981), 《초혼제》(1983), 《이 시대의 아벨》(1983), 《눈물꽃》(1986), 《지리산의 봄》(1987),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1989), 《녀성해방출사표》(1990), 《광주의 눈물비》(1990),《아름다운 사람 하나》(1991)와 유고시집으로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1992)가 있다. 시집 가운데 《초혼제》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남도가락과 씻김굿 형식을 빌어 민중의 아픔을 위로한 장시집(長詩集)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강한 의지와 생명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노래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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