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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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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ㅂ" 시모음
2015년 06월 15일 22시 41분  조회:7632  추천:0  작성자: 죽림

  - 정지용 -
 

돌에

그늘이 차고,

 

따로 몰리는

소소리 바람.

 

앞섰거니 하여

꼬리 치날리어 세우고,

 

종종 다리 까칠한

산(山)새 걸음걸이.

 

여울 지어

수척한 흰 물살

 

갈갈이

손가락 펴고,

 

멎은 듯

새삼 듣는 빗낱

 

붉은 잎 잎

소란히 밟고 간다.

 

 

   - 장만영 -

 

  순이 뒷산에 두견이 노래하는 사월달이면
  비는 새파아란 잔디를 밟으며 온다.

  비는 눈이 수정처럼 맑다.
  비는 하이얀 진주 목걸이를 자랑한다.

  비는 수양버들 그늘에서
  한종일 은빛 레이스를 짜고 있다.

  비는 대낮에도 나를 키스한다.
  비는 입술이 함씬 딸기물에 젖었따.

  비는 고요한 노래를 불러
  벚꽃 향기 풍기는 황혼을 데려온다.

  비는 어디서 자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순이 우리가 촛불을 밝히고 마주 앉을 때

  비는 밤 깊도록 창 밖에서 종알거리다가
  이윽고 아침이면 어디론지 가고 보이지 않는다.

 

 

 

  - 천상병 -

 

비가 내린다
우수를 씹고 있는 나는
돌아가신 분들을 생각한다

 

비는 슬픔의 강물이다.
내 젊은 날의 뉘우침이며
하느님의 보살피심을

 

친구들의 슬픈 이야기가
새삼스레 생각나누나
교회에 혼자 가서 기도할까나.


 

  비

   - 이세일 -


  비가 내린다.
  지상에서 떠난 것들이 내려 오고 있다.
  사랑하다 죽은 넋들이 내려 오고
  미워하다 죽은 넋들이 내려 온다.
  지난 날
  바람으로 머리 빗던 거리에
  벗겨진 신발을 못 잊어서 오는가.
  밤마다 꿈 밭에 심어 놓은 꽃나무
  지금쯤 피었는지 보고 싶어 오는가.

  비가 내린다.
  내 생존이 매달리던 그 밤의
  조그마한 반딧불은 어디로 갔느냐고
  풀잎에 물어보며 빗물은 떠난다.
  한 번 헤어진 사람은 없고
  헤어질 사람만 다시 모여 든
  여기서는 낯설어 못 살고 간다.
  눈여겨 보아두라, 서운한 뒷모습
  저 윤회의 회색 빛깔을.

 

 

             
비가(悲歌)
        - 박세영 -

 

조약돌 씻으며 흐르는 시냇가
동백나무 우거진 그늘 밑에서,
그대와 나는 타는 가슴을 호소하였다,
시냇가 딸기넝쿨로 거닐 때
그대의 손은 소복히 딸기로 찼다,
맑은 물에 발 잠그고 사랑을 속삭이면서
우리의 사랑은 딸기같이 열정이 타던
`로화' 그는 내 사랑이었다.

 

지금은 갔구나, 그 옛날의 사랑,
깨끗한 처녀의 몸으로 갔구나,
동백나무 그늘에서 혼자 거닐면
물방아만 쿵쿵 이 내 가슴 찧고,
낯서투른 처녀가 토드락 빨래만 한다.
시냇가의 딸기넝쿨은 송아지가 짓밟고,
잣봉산 기슭엔 해도 지는데,
`로화' 그는 내 사랑이었다.

 

 

비가

     - 마종하 -

 

  푸른 물에 떠 있는 구름이 울리네.
  나를 흔들어 울리네.
  물의 기류가 켜켜이 쌓이는
  이 길게 뻗친 공간, 냇가에서
  나는 잠긴 채 하늘을 보네.
  저 포플러 사이로 구불구불 흐르는 바람,
  나의 눈은 어리둥절 떠 있네.
  왜 모든 것이 그리 막막하던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말들이며
  흐리멍덩한 웃음 속에
  눈알을 묻고 사는 일이며
  이 정신 나간 시대에
  나는 물 머금은 개천의
  자갈 바닥이나 들여다 보며
  온 몸에 햇빛이나 칠해 보네.
  칠하면 칠할수록 살갗은 벗겨지고
  벗겨지면 없어지는 몸.
  바람은 물 위를 흐른다.
  하늘 한가운데 걸리어 퍼지고
  간간이 빛나는 눈물이나 떨구며
  구름처럼 풀려 가는 몸.
  울음 가득한 푸른 하늘 아래서.

 

 

  비가 내린다

     - 강민 -

 

  충충한 층암의 벼랑에서
  의미를 잃은 언어
  고단한 잠 속에
  그것은 거대한 쭉지를 벌리고
  검은 그늘로 덮여 온다.
  우리 생명의 광맥은
  어디에 숨어 있나
  가위 눌려, 허덕이다 깨어 보면
  무심한 천정에 번진
  어쩌면 독버섯같은
  어쩌면 미소같은
  빗물의 무늬

  모반의 물결에
  갈리고 닦이어 오수중 시민인 의
  조약돌이 찾고 있는 것

  승리의 깃발 없는 깃대에
  어둡게 나부끼는
  잃어버린 심층의 언어,
  녹슨 유자철선 속에서
  언젠가 형제가 찾아 헤맨
  애증의 인간 동산에
  비가 내린다.
  시민의 고단한 잠 속에
  그 비는 내린다.

 

 

 

비가 내리는 마을

          - 강창민 -

 

  회화선생 윌리암은
  비가 올 때마다 '피'가 온다고 한다.
  그에게 내리는 피는 비지만
  우리에게 오는 비는 피였다.

  온 몸이 온 마을이 피에 젖는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순례1

           - 오규원 -

                                              
강가에서 

그대와 나는 비를 멈출 수 없어

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었다.

그 후 그 자리에 머물고 싶어

다시 한 번 멈추었었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강은 젖지 않는다. 오늘도

나를 젖게 해 놓고, 내 안에서

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가는

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

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


혼자 가리라, 강물은 흘러가면서

이 여름을 언덕 위로 부채질해 보낸다.

날려가다가 언덕 나무에 걸린

여름의 옷 한 자락도 잠시만 머문다.


고기들은 강을 거슬러올라

하늘이 닿는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

나무, 사랑, 짐승 이런 이름 속에

얼마 쉰 뒤

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강을 떠난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비 개인 여름 아침

          - 김광섭(金珖燮) -


비가 개인 날,

맑은 하늘이 못 속에 내려와서

여름 아침을 이루었으니

녹음(綠陰)이 종이가 되어

금붕어가 시를 쓴다.

 

 

 

비를 소재로 한 서정별곡

                - 김백겸 -

 


  1
  바위를 베고 누워
  나무 뿌리와 금광석에 닿는 꿈꾸는
  물줄기의 잠이다.
  목마른 풀잎 끝 적시는 시간의 어둠이다.
  창살에 자욱한 안개로 피어오르는
  비는
  애기씨꽃나무 잎새를 두드리는 울음이다.

  2
  허리에 닿는 신열 몇개를 제련하여 얻어낸다.
  산너머 바다에 몰려 있는 구름떼
  흐르려 하는 힘의 방향을
  숲속 어둠의 눈썹 떨리게 하며
  멥새 날갯소리 죽여 접게 하는 이상한 느낌을
  지상에서 하늘까지 안테나를 세우면
  걸린다. 벼랑 끝에 선 저기압의 음모
  선을 건드리는 빗방울
  손톱 끝까지 파고 들어 신경을 태운다.

  3
  사랑, 흐르지 않아도 어제나 흐르는 물줄기.
  열쇠를 가지고 숲의 문 열면
  심장에 흘러드는 비가 보이고
  물오른 애기씨꽃나무
  불씨로 살아오르는 숨껼이 보인다
  꿈, 비가 내리지 않아도 언제나
  바닥까지 생을 적시게 하는 빗줄기.

 

 

 

비둘기 
   - 이광수(李光洙) -


오오 봄 아침에 구슬프게 우는 비둘기
죽은 그 애가 퍽으나도 섧게 듣던 비둘기
이 애가 가는 날 아침에도 꼭 저렇게 울더니.

그 애, 그 착한 딸이 죽은 지도 벌써 일 년
"나두 죽어서 비둘기가 되고 싶어
산으로 돌아다니며 울고 싶어" 하더니

 


비력(非力)의 시

                  - 유치환 -

 

憂患은 獅子 身中의 벌레.

自虐의 盞은 膽汁같이 쓰도다.

진실로 白日이 무슨 意味러뇨.

나는 非力하여 앉은뱅이.

日曆은 헛되이 모가지에 汚辱의 年輪만 끼치고

남은 것은 오직 즘생 같은 悲怒이어늘

말하라, 그대 어떻게 오늘날을 晏如하느뇨

 

 

 

비무장 지대

          - 김창규 -

 

전쟁의 포화가 멈춘

저격능선 무명고지에

바위 모서리 진달래껓

피어 있다.

밤골마을 허물어진 담장

여기저기 뒹구는 깨어진 가마솥

조니워커병이 함께

순이가 닦던 꽃무늬 접시와 어울려

폐허의 마을을 지키고 있다.

수색정찰조가 지나가면 그뿐

노려봐야 할 아무것도 없는 우리땅

휴전선을 넘어서

이데올로기란 휴전선을 넘어서

자유로운 그날

죽일놈 하면서도

서로가 죽여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을 때

미군도 쏘련도 중공군도 물러가고

이 땅에 평화가

참된 세상에 우리가 주인으로 남는

비무장지대

 

 

비밀.1

         - 김경옥 -

 


  붉은 빛깔 잊지 않고 피우기 위해 동백이 내 비밀 깊숙이 뿌리를 감아
왔던 그 겨울. 그대에게 떠나 보낼 수 없는 말들은 내 따뜻한 핏줄 속에
몇 송이씩 벙글어 나는 홀로 동백으로 피고 지고 그러면서 외로왔다.
한밤에 눈뜨면 바다는 우리들 운명을 만지다가 돌아서고 낮동안 반짝였던
우리 사이 마음의 길은 어둠에 헐려, 절망과 위안을 밤바람 속에서 짚곤
했다.
  아아, 우리가 밀물처럼 설레이며 처음으로 서로의 기슭에 닿을 수
있기를, 그런 후에 만조가 된 바다처럼 서로 가득 찰 수 있기를. 위태롭게
꿈꾸는 내 비밀은 동백의 뿌리를 물들이고 줄기를 타고 올라 어느 날
그대는 뜰에서 부끄럽게 서성거리는 내 고백 알게 되리라.

 

 

 

비망록
       - 김경미 -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보니 스물 네 살이었다. 神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졸이며 숨어 있어도 끝내 찾아 주려 노력하지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他人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 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 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 네 살엔 좀 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잇몸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 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 줄는지. 아무 일 아닌 듯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 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비망록

        - 기형도 -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보니 스물 네 살이었다. 신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조리며 숨어 있어도
끝내 찾아주려 노력ㅎ지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타인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 네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 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유잣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 네 살엔 좀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날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줄런지. 아무 일 아닌 듯 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
다섯이면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읍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읍니다. 아무 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비빔밥

   - 김영태 -

 

  입맛이 달아날 때
  혀의 기능은 마비된다
  비빔밥이라는 밥은
  나물과 고추장에 발가락에
  기름을 발라 비벼먹은 밥
  찝찔한 눈물도 이 한숨
  비빌 게 남아 있다면

 

 

 

비소리
      - 주요한 -

 
비가옴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버리고
비는 뜰우에 속색입니다
몰내 짓거리는 명아리 가치

으지러진 달이 실낫 갓고
별에서도 봄이 흐를뜻이
따뜻한 바람이 불더니
오늘은 이 어둔밤을 비가 옴니다

비가 옴니다
다정한 손님가치 비가 옴니다
창을 열고 마즈러 하여도
보이지 아케 속색이며 비가 옴니다

비가 옴니다
뜰우에 창밧게 집웅에 
남 모를 깃븐 소식을
나의 가슴에 전하는 비가 옴니다

 

 

 

비의 image

         - 장만영(張萬榮) -


병든 하늘이 찬 비를 뿌려……

장미 가지 부러지고

가슴에 그리던

아름다운 무지개마저 사라졌다.


나의 「소년」은 어디로 갔느뇨. 비애를 지닌 채로.


이 오늘 밤은

창을 치는 빗소리가

나의 동해(童骸)*를 넣은 검은 관에

못을 박는 쇠마치* 소리로

그렇게 자꾸 들린다…….


마음아, 너는 상복을 입고

쓸쓸히, 진정 쓸쓸히 누워 있을

그 어느 바닷가의 무덤이나 찾아 가렴.


*동해(童骸) : 어린 아이의 뼈.

*마치 : 못을 박거나 무엇을 두드릴 때 쓰는 연장으로 망치보다 작다. 

 

 

 

비의 꿈

     - 원태희 -


  꼭 이렇게 비오는 날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꿈은 씻기기 마련이다
  무더운 여름날 뙤약볕 속에서
  목줄기를 진드기처럼 타고 내리는 진땀에서도
  우리의 꿈은 한꺼풀 벗겨지기 마련이며
  겨울, 눈이 쌓인 벌판에서도
  우리의 꿈은 실명되게 되어 있다
  기다린 메아리를 낮게 깔아 놓으면서
  넘어지는 설해목 소리처럼
  그것들은 계속됨으로 없어진다

  비는 내리지만 쌓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창문틀을 타고, 나뭇잎을 타고
  우리들이 올려보는 얼굴의 살갗을 천천히 타고
  땅으로 스며든다
  혹은 물길을 이루며 바다로도 가지만
  쌓여 있지 않은 유동의 존재
  언제나 흔들리는 부랑이 거기 있다

  우리들의 꿈도 마찬가지여서
  밤새 가슴 속의 뜨거운 핏줄만을 지나지만
  아침의 밝음과 함께 사라지는 부랑이다

  비는 꿈을 나르는 활주로를 가지며 이륙했었다
  오래 전에, 오늘 내리는 빗속에는 오래 전에
  우리들이 밤새 만든 가슴의 조각들이
  묻어 있지만
  그것들은 쌓이지 않는 존재, 꿈이 없는 물방울

  그러나 반사하는 빛을 가질 줄 아는
  유쾌한 리듬
  더불어 음을 내는 건반악기.

  비의 꿈이 두드리는 그것만이
  비의 꿈조각, 혹은
  우리들 꿈의 빗소리

 

 

     비 오는 날

          - 이형기 -

 

  오늘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보다.
  노을도 갈앉는
  저녁 하늘에
  눈 먼 우화는 끝났다더라

  한 색 보라로 칠을 하고
  길 아닌 천리를
  더듬어 가면...

  푸른 꿈도 한나절 비를 맞으며
  꽃잎 지거라
  꽃잎 지거라

  산 넘어 산 넘어서 네가 오듯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보다.

 

 

빈 논

    - 안도현 -


  아버지
  아버지의 논이 비었읍니다
  저는 추운 서생이 되어 돌아와 요렇게 엎드려
  빈 논, 두려워 나가 보지도 못하고
  껴안지는 더욱 못하고 쓸쓸한
  한 편 시를 써 보려고 합니다
  옛날 이 땅에서 당신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참나무 가시나무 마른 억새풀
  아궁이 가득 지펴 펄펄 끓는 쇠죽솥
  쇠죽솥같은 앞가슴
  아직도 만들지 못하여서요,
  저 죽은 논에 까무잡잡 살 없는 논에
  물줄기도 비켜 가지 않게 불러들이고
  그 흙물에 서늘히 발목을 적시고
  눈 닿는 곳이 다 내 하늘이라
  아버지 뼈가 이룬 몸 하나로 버티며 서 계셔도
  아, 바로 아버지가 하늘이었지요
  그때야말로 가난이 넉넉한 재산이었지요
  오늘밤 아버지의 논에 누운 살얼음을 밟고
  달이 둥실 뜨는 것을 아시는지요
  달빛을 따라
  이 궁핍한 밤에도 삽을 들고
  성큼성큼 논으로 나가시는 아버지
  옛날 이 땅에서 당신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스스럼 없이 바지 활활 걷어붙이고
  역사의 논물에 발을 담는 것도
  거머리가 붙으면 이놈의 거머리 하며
  철썩 젖은 종아리 아무 일 아닌 듯 때리는 것도
  저는 겁나는 일이기만 한데
  세상의 어둠 다 몰려와 난리를 치는
  빈 논에 아버지 돌아오셨군요
  아버지의 논바닥 저 깊은 곳에서
  겨울에도 푸른 모들은 힘차게 꼼틀거린다고
  제가 쓰는 시 이 부족한 은유로는
  당신의 삶 끄트머리도 감당할 수 없음을 압니다
  아버지
  꿈에도 논에는 나오지 마라 하시지만

 

 


빈 무덤 앞에서 

        - 황인숙 -

 

내게 와서 묻지 마세요 
이제는 죽음을 아느냐고.

 

내게 아무것도 묻지 마세요. 
나는 평생을 피곤했고 
이제사 예서 쉬노니.

 

 

  빈 산

     - 김지하 -

 

  빈 산
  아무도 더는
  오르지 않는 빈 산

  해와 바람이
  부딪쳐 우는 외로운 벌거숭이 산
  아아 빈 산
  이제는 우리가 죽어
  없어져도 상여로도 떠나지 못할 저 아득한 산
  빈 산

  너무 길어라
  대낮 몸부림이 너무 고달퍼라
  지금은 숨어
  깊고 깊은 저 흙 속에 저 침묵한 산맥 속에
  숨어 타는 숯이야 내일은 아무도
  불꽃일 줄도 몰라라

  한 줌 흙을 쥐고 울부짖는 사람아
  네가 죽을 저 산에 죽어
  끝없이 죽어
  산에
  저 빈 산에 아아

  불꽃일 줄도 몰라라
  내일은 한 그루 새푸른
  솔일 줄도 몰라라.

 

 

빈 살을 채우기 위하여

             - 박덕규 -


  정확히 5분 늦게
  철교를 지나는 기차소리를 들으며
  그는 들길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기차가 언덕을 넘어 모습을 나타냈을 때
  그는 침목을 밟고 서서
  마주오는 기차를 보고 있었다

  기차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고
  그는 눈을 감지 않았다 기적소리가
  귀를 뚫었다 순간 그의 몸이 탁
  갈갈이 튀어올라 흩어지는 것을

  나는 멀리서 보았다
  눈이 아리었다
  그의 누이가 울부짖었다

  며칠 동안 그의 형체를 찾아
  철길 주변을 헤매다녔다
  그의 살과 뼈와 채 마르지 않은
  피를 보았다

  관 속에 그의 몸을 맞추어 넣었다
  찾을 수 없는 살과 뼈를 그려 넣었다
  눈과 목과 왼팔과 한쪽 무릎과 헌 구두

  그의 누이가 피를 토했다
  눈이 아리어왔다 기적소리와
  들길 울부짖음과 흩어진 살이

  보였다 그의 빈 살을 맞추기 위하여
  피를 쏟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그 빈 곳을 채우기 위하여
  기적소리와 살과 뼈 언제나 그 빈 살

  고개 들면 먼 길
  햇살 많이 부서지는 나날 내 삶의
  눈 앞은 아련히 비어 있는 아우성이었다

 

 

빈자 여행

     - 조윤호 -


  월수 이십만원 못되는 사람끼리
  우주여행을 떠나자

  철새는 남북으로 날고
  잘 사는 사람들은 동서로 날고

  날지 못한 사람끼리
  우주여행을 떠나자

  카운트다운은 필요 없다
  유산균음료병 같은 우주선에
  시내버스처럼 가득 타고
  우주여행을 떠나자

  둥둥 하늘로 치솟아
  빙글빙글 돌면서
  웃자웃자
  하루종일 웃고웃다
  저녁 때 슬그머니 내려오자

  내려올 때 조심하자
  이북땅에도 내리지 말고
  미국땅에도 내리지 말고
  변두리변두리 정류장에
  잊지말고 내리자

 

 

 빈 잔

       - 박몽구 -


  너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시간은 기린 목보다 길다
  문 밖으로 돌려진 내 마음은
  술이다
  벌겋게 타고 있다

  내가 걷고 있는 길이
  돌밭뿐인데도
  기꺼이 뿌리 내려
  이쁜 꽃이 된 사람아

  오늘은 왜 이리 늦는지
  너를 기다리고 있자면
  나는 다 비어서
  빈 잔이 된다
  채워지기를 기다리며
  저물도록 말라가고 있다

 

 

 

 

빈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나,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빈집의 꽃들

          - 博川 최정순 -

 

미숙이 돈석이 나와 함께 살다

떠나 버린 텅 빈 전설 같은 집
장독대 주변 이들이들 핀 꽃들

어제의 향기 아련히 꿈틀거리고

돌배나무 가지 위 참새 기웃거리면

허리 허물어진 돌담 아래

사금파리 무덤에선 조무래기들

재잘거리며 튀어 나온다

미숙이, 돈석이, 나.

미숙이 족두리꽃 머리에 얹어

시집갈 준비하고

돈석이 분꽃 목에 걸어

님 맞을 준비하였는데

미숙이 싶팔 세 폐병

순백홥화로 고개 숙여 다시 피어나고

반백이 다 되도록 돈석이 시집 안 가

허리 굽은 순할미꽃 되었네

도깨비 불꽃으로 살다가는 나,

심심산천 시들지 않는 도라지 꽃

마음에 가득 담았네.

 

 

빈 차

    - 박상일 -


  봄에 피어서
  가을에 지는 꽃
  산구비 하나 돌아
  뻐스 종점
  화면이 바뀌듯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
  제비처럼 네가 떠나고
  멀리 프라타나스 숲 사이로
  아이들 함성
  소학교 운동장
  이겨라 이겨라
  한나절 반나절
  햇살같은 것
  사람없는 빈 차가
  도로 나가고
  어찌 흐르는 것이
  꽃잎 뿐이랴
  불러도
  이제 먼 사람아.

 

 

 

빈 컵
        - 박목월 -


빈 것은
빈 것으로 정결한 컵.
세계는 고드름 막대기로
꽂혀 있는 겨울 아침에
세계를 마른 가지로
타오르는 겨울 아침에.
하지만 세상에서
빈 것이 있을 수 없다.
당신이
서늘한 체념으로
채우지 않으면
신앙의 샘물로 채운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나의 창조의 손이
장미를 꽂는다.
로오즈 리스트에서
가장 매혹적인 죠세피느 불르느스를.
투명한 유리컵의
중심에.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 이인해 -

 

  산에 오르면 알리라.
  오르고 싶은 곳 산봉이 솟았고
  쉬고 싶은 곳 나무 그늘이 있음을.
  그 그늘에 잠시 쉬고 있노라면
  바위 아래로 돌돌돌 흐르는 물개울.
  그때, 그대의 시선은 자유롭고, 알리라.
  오솔길에 아무렇게 펴있는 풀잎들도
  저마다 한 몫으로 살아 있음을.

  그러나 나는 아직 아지 못한다.
  오솔길에 풀 한포기 흔들리는 까닭을.
  풀 한포기 되어 보지 않고서는
  풀 한포기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을,
  바람 한자락이 되어 보지 않고서는
  풀 한포기 흔드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바람이 지나가면 풀 한 포기 흔들리고
  바람이 지나지 않아도 풀 한 포기 흔들린다.

  바위 아래로 돌돌돌 흐르는 물개울
  흘러서 어디 가는가.
  물 한방울이 되어 보지 않고서는
  물 개울의 흐름도 알지 못한다.
  물개울로 흘러 보지 않고서는
  저 강의 물방울들 모임도,
  바다를 떠돌아보지 않고서는
  바다의 출렁거림도 알지 못한다.
  내가 물 한 방울이 되지 못하는데도
  바다는 밤늦도록 출렁거린다.

  밖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나는 학자들의 책을 밤늦도록 읽는다.
  밤 새워 읽은 뒤
  내 방종의 뜰에 핀 꽃 몇 송이
  자기를 키운 가지를 떠나
  옆으로 툭 불거졌다.
  옆으로 툭 불거진 엉겅퀴는
  바람이 웬만큼 불어도 흔들리지 않고
  흔들리는 것은 거짓의 풀잎, 거짓의 바람,
  나는 웃는다.
  그때, 낙엽이 웃음처럼 지고
  내 방종의 뜰에도 겨울이 왔다.

  밤에 오는 눈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먼 곳에서
  누가 눈을 눈이라고 하였는가.
  아직도 비가 오지 않았는가.
  밤새워 눈이 와도 녹아버리고
  내가 찾은 한 마디의 말
  아침에 아무런 흔적이 없다.
  아직도, 비가 오지 않았는가.

  겨울은 그러나 어김없이 왔고
  이 겨울 나뭇가지를 떠나 방황하는 새
  비로소 처음 추위를 느낀다.
  새 울음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내 한 때 방종의 뜰에도
  겨울 짧은 해 빨리 지고
  밤눈이 조금씩 쌓이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속으로 제 몸을 감추기 시작할 때
  나는 무엇을 조금씩 알아가는가.
  그러나 산에 오르면 알리라.
  오르고 싶은 곳 산봉이 솟았고
  쉬고 싶은 곳 나무 그늘이 있음을.

 

 

 

빗소리

     - 주요한 -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
 비는 뜰 위에 속삭입니다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같이.

이지러진 달이 실낱 같고
 별에서도 봄이 흐를듯이
 따뜻한 바람이 불더니
 오늘은 이 어둔 밤을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다정한 손님같이 비가 옵니다.
창을 열고 맞으려 하여도
 보이지 않게 속삭이며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뜰 위에 창밖에 지붕에
 남모를 기쁜 소식을
 나의 가슴에 전하는 비가 옵니다.

 

 

 

빛이 드는 언덕에는 새 풀들이

                  - 박정남 -

 

  빛이 드는 언덕에는 새 풀들이 돋고 있었다.
  노랑 나비는 은빛 못을 박고
  셀로판 종이 상자 안에 와서
  가지런히 날개를 펴서
  끝없이 날았다.

  가을은 더 깊고 무거운 서릿발의 낮은 보리밭에 엎드려서 봄으로 갔고
  가장 푸른 하늘은 먹구름 끝에서 왔다.

  수녀원의 저녁 미사에서 울고 있는
  검은 옷 입은 핏빛 노을도
  진흙밭으로 가서
  이마가 맑은 연꽃으로 피었다.

 

 

보길도의 5월

        - 이은미 -


  갠 날이면 멀리 남끝섬이 보인다고들 했다.
  거룻배가 삐걱삐걱 들어서는 날이면
  수선스레 뭍 풍물이 섞여 들고
  어쩌다 하늘이라도 갈앉을라치면
  물먹은 자갈밭은
  창자 빠지는 소리로 하늘을 불러댔다.
  그때가 5월이라
  동백이 진다고들 했다.
  그때가 5월이라
  유채도 샛노랗게 흐드러지고
  그때가 5월이라
  왼섬이 가랑비 속에 흐르기도 했다.
  그렇게 보길도엔 5월이 묵어갔다.

  불쑥 소리없이 찾아든 사람닮은 6월이,
  보길도의 5월에 그만 가슴을 비우고는
  우지근한 열풍만을 안은 채
  섬을 돌아 뭍으로 돌아와 앉은 후.

  보길도엔 아직도 5월의 순한 사람들이
  까치발로 서서 남끝섬을 보고 있으리라.

 

 

 

 보따리

           - 博川 최정순 -

 

물건 안아 꾸린 뭉치

너 보따리라 부르지

누가 처음 만들었을까

가슴 텅 빈 보자기를

사람들 너

싸고 들고 풀며

사연들 얼마나 많았더냐

책보따리 꾀보따리 익살보따리

하많은 추억 웃기도 많이 했어

피난보따리 삶보따리 이별보따리

상처난 짐승처럼 울기도 많이 했지

얼마 남지 않은 내 삶의 여로

또,

어떤 보따리 싸 들고 가다 풀 것인가

 

 

보리고개

        - 황금찬 -

 

  보리고개 밑에서
  아이가 울고 있다.
  아이가 흘리는 눈물 속에
  할머니가 울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할아버지가 울고 있다.
  아버지의 눈물, 외할머니의 흐느낌
  어머니가 울고 있다.
  내가 울고 있다.
  소년은 죽은 동생의 마지막
  눈물을 생각한다.

  에베레스트는 아시아의 산이다.
  몽불랑은 유럽,
  와라스카는 아메리카의 것,
  아프리카엔 킬리만자로가 있다.
  이 산들은 거리가 멀다.
  우리는 누구도 뼈를 묻지 않았다.
  그런떼 코리어의 보리고개는 높다.
  한없이 높아서 많은 사람이 울며 갔다.
  --굶으며 넘었다.
  얼마나한 사람은 죽어서 못 넘었다.
  코리어의 보리고개,
  안 넘을 수 없는 운명의 해발 구천 미터
  소년은 풀밭에 누웠다.
  하늘은 한 알의 보리알,
  지금 내 앞에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보리고개

      - 박훈산 -

 

  아지랭이는 손에 감돌 듯
  저 언덕을
  타 넘어 왔는데
  볼수록
  나의 얼굴은
  추하여라.

  버들피리 불면서
  새싹을 주워 보려던
  나의 어린 날은
  이미
  떨어진 꿈

  봄은
  보리 고개
  숨가쁜
  계절
  꽃은
  제 멋대로
  피어라.

  가난한 마음 골짝에
  스며든
  앓는 가슴아
  나는 지금
  어머니를 기다린다.

 

 

 

보리밭

     - 이희목 -


  보리밭 물결 사이
  밝고 오는 여인의
  나들이 옷자락
  강은 비로소 제 얼굴을 가진다.

  연두빛 바람에
  눈을 뜨는 풀꽃의
  꽃자리마다
  열려오는 청명
  하늘.

  놀란 멧새
  흘린 울음
  한 점 구름으로 날고 있다.


      

 

보리 밟기

     - 조남아 -


  나는 보리 밟기가 아주 좋아서
  외숙네서 닷새를 지내는 동안
  내처 보리 밟기만 하였어요
  투명한 햇살을 등에 지고
  잔설의 흔적이 쬐금씩 남아 있는
  가파른 산등의 몇십평쯤은
  아주 재미난 일이었지요
  첫돌 지난 놈의 잠지처럼
  봉곳이 솟아오른 푸른 청보리
  초장이 웃자라면 안된다고
  엽수를 잘 가려야 한다고 해
  짧은 섣달 한 나절을
  사방 팔방으로 돌아다니며
  삐쭘이 쳐들은 초움들을
  싹수부터 암팡지게 밟았지요
  외숙은 여러 번 말했어요
  보리는 그렇게 밟으면 밟을수록
  보숭보숭한 속살이 오르고
  동토를 헤집고 솟아오르는
  강한 힘력이 길러진다고
  그러니 폭설이 언땅을 내리치고
  만상이 길게 동면을 해도
  보리만은 쑥쑥 솟아올라
  이 땅의 산천을 누비고 누비며
  그 푸르른 힘력을 자랑하지요
  나는 그것이 참 신기하여
  외숙네서 닷새를 지내는 동안
  내처 보리 밟기만 하였어요

 

 

보리피리

         - 한하운 -


보리 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 
어린 때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人間事)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 닐니리. 

 


    복숭아

        - 김동호 -


  복숭아야 복숭아야
  가슴이 고와서
  얼굴이 빨간 소녀야
  비밀이 고와서
  입술이 빨간 소녀야.
  네 꼭 담은 꼭지
  젖뺨 하늘에
  내 가슴이 이렇게도 뛰는 것은
  내 작은 가슴에 박힌 
  너의 화살 때문이 아니다.

  문둥이도 너를 보고
  백옥이 되었다는

  백치도 너를 보고
  하늘이 되었다는

  옛날 옛날
  아주 옛날
  이 세상 최초의 이야기 때문이다.

 

 

 

복 종

     - 한용운 -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 하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해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 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 없읍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본전 생각 

     - 최영철 - 
 

파장 무렵 집 근처 노점에서 산 호박잎
스무장에 오백원이다
호박씨야 값을 따질 수 없다지만
호박씨를 키운 흙의 노고는 적게 잡아 오백원
해와 비와 바람의 노고도 적게 잡아 각각 오백원
호박잎을 거둔 농부의 노고야 값을 따질 수 없다지만
호박잎을 실어 나른 트럭의 노고도 적게 잡아 오백원
그것을 파느라 저녁도 굶고 있는 노점 할머니의 노고도 적게 잡아 오백원
그것을 씻고 다듬어 밥상에 올린 아내의 노고도 값을 따질 수 없다지만
호박잎을 사들고 온 나의 노고도 오백원

그것을 입안에 다 넣으려고
호박쌈을 먹는 내 입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 김소월 -

 

이 나라 나라는 부서졌는데

이 산천 여태 산천은 남아 있드냐

봄은 왔다 하건만

풀과 나무에 뿐이어

 

오! 설업다 이를 두고 봄이냐

치어라, 꽃닙에도 눈물뿐 흩으며

새무리는 지저귀며 울지만

쉬어라, 이 두근거리는 가슴아

 

못보느냐, 벌겋게 솟구는 봉숫불이

끝끝내 그 무엇을 태우려 함이료

그리워라 내 집은

하늘 밖에 있나니

 

애닯다 긁어 쥐어 뜯어서

다시금 짧아 졌다고

다만 이 희긋희긋한 머리칼뿐

인저는 빗질할 것도 없구나

 


     - 이성부 -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 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 없다. 
가까스로 두 팔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 오세영 -

 

  봄은
  성숙해 가는 소녀의 눈빛
  속으로 온다.

  흩날리는 목련꽃 그늘 아래서
  봄은
  피곤에 지친 춘향이
  낮잠을 든 사이에 온다.

  눈 뜬 저 우수의 이마와
  그 아래 부서지는 푸른 해안선

  봄은
  봄이라고 발음하는 사람의
  가장 낮은 목소리로 온다.

  그 황홀한 붕괴, 설레는 침몰
  황혼의 깊은 뜨락에 지는 낙화.

 

 

 

  - 오규원 -

 

  저기 저 담벽, 저기 저 라일락, 저기 저 별, 그리고 저기 저 우리집 개똥
하나, 그래 모두 이리와 내 언어 속에 서라. 담벽은 내 언어의 담벽이
되고, 라일락은 내 언어의 꽃이 되고, 별은 반짝이고, 개똥은 내 언어의
뜰에서 굴러라. 내가 내 언어에게 자유를 주었으니 너희들도 자유롭게
서고, 앉고, 반짝이고, 굴러라. 그래 봄이다.

  봄은 자유롭다. 자 봐라, 꽃 피고 싶은 놈 꽃 피고, 잎 달고 반짝이고
싶은 놈은 반짝이고, 아지랑이고 싶은 놈은 아지랑이가 되었다. 봄이
자유가 아니라면 꽃 피는 지옥이라고 하자. 그래 봄은 지옥이다. 이름이
지옥이라고 해서 필 꽃이 안 피고, 반짝일 게 안 반짝이던가. 내 말이
웃으면 자, 자유다 마음대로 뛰어라.

 

 

 


  - 서정주 -


복사꽃 피고,
복사꽃 지고,
뱀이 눈뜨고,


초록제비 묻혀 오는
하늬바람 위에
혼령 있는
하늘이여.


피가 잘 돌아-----
아무 병(病)도 없으면
가시내야, 슬픈 일 좀
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

 

 

   - 한하운 -


제일 먼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좁은 지역에도 한 포기의 꽃을 피웠더냐.

 

하늘이 부끄러워 
민들레꽃 이른봄이 부끄러워.

 

새로는 돋을 수 없는 빨간 모가지 
땅속에서 움돋듯 치미는 모가지가 부끄러워.

 

버들가지 철철 늘어진 초록빛 계절 앞에서 
겨웁도록 울다 가는 청춘이요 눈물이요.

 

그래도 살고 싶은 것은 살고 싶은 것은 
한 번밖에 없는 자살을 아끼는 것이요.

 

 

 

봄 길

        - 최남선 -

 

버들잎에 구는 구슬 알알이 짙은 봄빛,
찬 비라 할지라도 잉의 사랑 담아 옴을
적시어 뼈에 스민다 마달 수가 있으랴.

볼 부은 저 개구리 그 무엇에 쫓겼관대
조르르 젖은 몸이 논귀에서 헐떡이나.
떼봄이 쳐들어 와요, 더위 함께 옵데다.
저 강상 작은 돌에 더북할쏜 푸른 풀을
다 살라 욱대길 제 그 누구가 봄을 외리.

줌만한 저 흙일망정 놓쳐 아니 주도다.

 

 

 

봄 날

     - 여상현(呂尙玄) -

 


논두렁가로 바스락 바스락 땅강아지 기어나고

아침 망웃 뭉게뭉게 김이 서리다


꼬추잠자리 저자를 선* 황토물 연못가엔

약에 쓴다고 비단개구리 잡는 꼬마둥이 녀석들이 움성거렸다


바구니 낀 계집애들은 푸른 보리밭 고랑으로 기어들고

까투리는 쟁끼* 꼬리를 물고 산기슭을 내리는구나


꿀벌떼 노오란 장다리* 밭에서 잉잉거리고

동구밖 지름길론 갈모*를 달아맨 괴나리봇짐*이 하나 떠나간다


성황당 돌무데기 우거진 찔레ㅆ엔

사철 하얀 종이쪽이 나풀거리더니 꽃이 피었네


느티나무 아래 빨간 자전거 하나

자는 듯 고요한 마을에 무슨 소식이 왔다


* 저자를 서다 : 장이 서다. 여기에서는 잠자리들이 매우 많다는 의미.

* 쟁끼 : 장끼[수꿩]의 방언.

* 장다리 : 무나 배추 따위의 꽃줄기.

* 갈모 : 기름 종이로 만들어, 비가 올 때 갓 위에 덮어 쓰는 것.

 

 

 

봄비

    - 이수복 -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외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香煙)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봄 바다   
        - 김 사인 -


구장집 마누라 
방뎅이 커서 
다라이만 했지 
다라이만 했지

구장집 마누라는 
젖통도 커서 
헌 런닝구 앞이 
묏등만 했지 
묏등만 했지

그 낮잠 곁에 나도 따라 
채송화처럼 눕고 싶었지 
아득한 코골이 소리 속으로 
사라지고 싶었지

미끈덩 인물도 좋은 
구장집 셋째 아들로 환생해설랑 
서울 가 부잣집 과부하고 
배 맞추고 싶었지

 

 

  봄바람

          - 김억 -

 

  하늘 하늘
  잎사귀와 춤을 춤니다.

  하늘 하늘
  꽃송이와 입맞춥니다.

  하늘 하늘
  어디론지 떠나갑니다.

  하늘 하늘
  떠서 도는 하늘 바람은

  그대 잃은
  이 내 몸의 넋들이외다.

 

 

 

봄바람

      - 김유선 -

 


  철없는 니 춤바람 신바람이
  외진 산등성이 무덤잔디
  새순을 키워도
  가슴구렁 그 언저리만
  건드리고 건드릴 뿐
  목마른 나뭇가지 축이지 못하고
  시든 풀머리에
  꽃비녀 얹어주지 못하누나.
  바람아, 실성한 듯
  밖으로만 내도는 바람아

 


 

봄은 간다
        -  김 억  -
                                                       
 
밤이도다
봄이도다.
 
밤만도 애닯은데
봄만도 생각인데
 
날은 빠르다
봄은 간다
 
깊은 생각은 아득이는데
저 바람에 새가 슬피운다
 
검은 내 떠돈다
종소리 빗긴다
 
말도 없는 밤의 설움
소리 없는 봄의 가슴

꽃은 떨어진다
님은 탄식한다.

 

 

 

봄은 고양이로소이다 
                      - 이장희 -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봄은
         -  신동엽  -
                                                       
봄은
남해에서도 북녘에서도
오지 않는다.
 
너그럽고
빛나는
봄의 그 눈짓은
제주에서 두만까지
우리가 디딘
아름다운 논밭에서 움튼다.
 
겨울은,
바다와 대륙 밖에서
그 매운 눈보라 몰고 왔지만
이제 올
너그러운 봄은, 삼천리 마을마다
우리들 가슴 속에서
움트리라.
 
움터서,
강산을 덮은 그 미움의 쇠붙이들

눈 녹이듯 흐물흐물
녹여 버리겠지.

 

 

 

봄을 기다리는 마음

            - 신석정 -

 

  우수도
  경칩도
  머언 날씨에
  그렇게 차가운 계절인데도
  봄은 우리 고운 핏줄을 타고 오고
  호흡은 가빠도 이토록 뜨거운가?

 

  손에 손을 쥐고
  볼에 볼을 문지르고
  의지한 채 체온을 길이 간직하고픈 것은
  꽃피는 봄을 기다리는 탓이리라.

 

  산은
  산대로 첩첩 쌓이고
  물은
  물대로 모여 가듯이

  나무는 나무끼리
  짐승은 짐승끼리
  우리도 우리끼리
  봄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봄을 맞는 폐허에서

          - 김해강(金海剛) -

 


어제까지 나리든 봄비는 지리하던 밤과 같이

새벽바람에 고요히 깃을 걷는다


산기슭엔 아즈랑이 떠돌고 축축하게 젖은 땅우엔 샘이 돋건만

발자취 어지러운 옛 뒤안은 어이도 이리 쓸쓸하여……


볕 엷은 양지쪽에

쪼그리고 앉어

깨어진 새검파리*로 성을 쌓고 노는

두셋의 어린 아이

무너진 성터로 새어가는

한떨기 바람에

한숨지고 섯는 늙은이의

흰 수염은 날린다


이 폐허에도 봄은 또다시 찾어 왔건만

불어가는 바람에

뜻을 실어 보낼 것인가

오- 두근거리는 나의 가슴이여!

솟는 눈물이여!


그러나 나는

새벽바람에 달음질치는

동무를 보았나니

철벽을 깨트리고

새 빛을 실어오기까지

오 그 걸음이 튼튼하기만 비노라 이 가슴을 바쳐

 

 

 

봄에 앓는 병

         - 이수익 -

 

  모진 마음으로 참고 너를 기다릴 때는
  괜찮았느니라.

  눈물이 뜨겁듯이 그렇게
  내 마음도 뜨거워서,
  엄동설한 찬 바람에도 나는
  추위를 모르고 지냈느니라.
  오로지
  우리들의 해후만을 기다리면서...

  늦게서야 병이 오는구나,
  그토록 기다리던 너는 눈부신 꽃으로 현신하여
  지금
  나의 사방에 가득했는데
  아아, 이 즐거운 시절
  나는 누워서
  지난 겨울의 아픔을 병으로 앓고 있노라.

 

 

 

봄의 소리

      - 김창범 -

 

  누가 재가 되었다고 했는가
  부러져 말라버린 나뭇가지가 되었다고 했는가

  모래틈에서 터진 민들레 꽃잎 속에서
  명주실같이 감기는 물소리가 되어
  아 누구에게나
  숨 넘어갈 듯이 달려오는 것

  꽃들이 흐드러지게 웃어 댄다고 모르겠느냐
  바람들이 수선을 떨며 쏘다닌다고
  누가 잊어버리겠느냐

  생각해서야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다
  고함쳐야 들리는 것은 더욱 아니다

  모두 모두 떠나고 만 봄날
  길고 긴 낮잠 속에서도

  자꾸만 흔들리며 밀리며 일어나는
  저 수많은 소리

 

 

봄잠

   - 윤지용 -


  뜰에 내린
  어느날의 빛이 되어
  당신은 나의 잠 속에만
  내린다.
  밤 이슬로 내린다.
  고궁에
  한 마리 새가 되어 날으는
  눈뜬 우기의 하늘,
  그 질기고 곧은 평생의
  하루 하루가
  수실로 뜨이는
  펄럭이던 이념의
  헹궈낸 나뭇잎의
  게으름 깁고
  빛 그림자를 깁고
  한때 결별의 뜻이 되어
  무너져 내리는 소리, 소리
  (찬란한 봄은
  그늘을 밴 여자다)
  사시사철 잠 속에 차오르는
  견고한 목숨의 바다
  바다는 봄의 푸르른 뿔로 돋고
  움터오는 우리의 세계
  봄뿔은 단단한 눈물을 만들면서
  끝없는 잠의 추적
  그 어두운 사원을 간다.
  때론 파닥이는 은비늘인 것을
  전신이 꽃송이
  천만개의 환희인 것을
  오오 물보라,
  물수레 바퀴의
  참 건강한 나날인 것을
  고전에 내리는
  어느날의 말씀이 되어
  한 마리의
  어린 새가 되어
  헹궈낸 잠의 당신의
  보석
  잎잎마다 차오르는
  하늘이여, 빛인 것을...

 

 

 

봄 처 녀

     - 이은상 -

 

 

 봄 처녀 제 오시네 새 풀옷을 입으셨네
 하얀 구름 너울 쓰고 구슬신을 신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누굴 찾아 오시는고.

님 찾아 가는 길에 내 집 앞을 지나시나
 이상도 하시오다 행여 내게 오시는가
 수집고 어리석은 양 나가 물어 볼꺼나.

 

 

 

봄 편지

     - 황영순 -


  나는 꽃씨입니다
  아름다운 호미질을 기다려 온
  흙 속의 꽃씨입니다

  추운 들녁에서
  얼지 않고
  쓰러지지 않으려고
  모진 결심으로 혈서를 쓰면서
  긴 눈물로 왔읍니다

  슬픈 내 피 늦게야 이곳
  이곳으로 와서
  저녁마다 금빛 도리깨로
  곤한 잠 깨우고
  어두움을 털어내고 있읍니다

  오늘은
  하나의 우주가 열리고
  누군가 어둠 속에서
  커다란 기침으로 올 것 같은
  향그러운 새날입니다

  꿈길로 바람소리 파도소리 밀려 오는
  풍란처럼
  풍란처럼
  숨어서도 눈부시게 행복한
  나는 꽃씨입니다

 

 

 

봉린산 심원사

               - 博川 최정순 -

 

지금은 갈 수 없는

부친 고향

평북 박천군 산양리

산정(山頂) 바위 봉황새 나래 펴고

아래 너럭바위 기린 목 닮아

봉린산(鳳麟山) 심원사(深源寺)

 

배흘림 통 굵은 기둥 보광 전에

조모 백일기도 스며들어

얻은 부친,

고향바라기하며 기도할 때

법당 창 쏟아지는 별빛

높새풍 예제없이 춤추고 

야화 성글게 뒹구는 뒤란 

목어 홀로 울 적 

 

청천강 새밭 추억

마음 황포돛배 싣고

서해로 흘러, 흘러 

꿈에서나 만나네,

봉린산 심원사  조모를

 

 

 

봉양동

      - 김윤현 -

 


  수업이 끝나자
  책보자기 등에 울러메고
  뛰었다 좁은 등하교길 십오리
  산굽이 돌아 쉬지 않고 뛰었다
  이끼 끼고 말없는 앞산 돌성은
  6.25때 아군적군 없이
  우리눈 우리가 찔렀던
  싸움의 흔적을 보여줄 뿐
  주위에 흩어진 탄피
  주우려 배고파도 뛰었다.

  썩은 풀속 말없는 뼉다귀
  푸른 하늘 쳐다보는 해골
  사이로 녹슨 탄피 주워
  장난감 딱총을 만들 때
  불발탄 탄창 모아 엿바꿔 먹을 때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징용 갔던 삼촌도 멀리서 바라나 볼 뿐
  이 땅에 살아 있는 자들 아무도
  남아 뒹구는 뼉다귀의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적개심만 가르치고 요구할 뿐
  통일에 대한 희망과 의지는
  우리 손에 쥐어진 탄피처럼
  녹슬어 있었다.

 

 

봉원사 가는 길

       - 정재희 -


  강이 바라다보이는
  양지 바른 언덕
  그곳에 영원의 집을 짓고
  오늘도 무심한 날을 기다림으로
  버티어 선,
  비문 한 줄
  흔적의 흙 한줌 세우지 못한
  그대의 영혼

  새들이 번나들고
  계절이 때마다 오가지만
  발길 멈춘 외로움에
  활활 사르지 못한 짧은 생애
  아픔마저도 가져가 버린
  망각의 먼 추억이 불을 켜면
  아슴한 기억으로 달려와
  못 견디게 하는 그대의 모습

  안아 일으키는 불꽃
  꺼질줄 모르는 어제들이
  흔들리며 떠가는 아쉬운 손짓으로 여기
  헐벗은 남루를 가슴 여미게 할 뿐

  봉원사 가는 길은 멀고 멀어서
  지척에 이 발길 그리 더디고
  못내 잊혀진 그림자 밟고 오르는
  매정한 세월만 쏜살같이 멀어 간다

 

 

 

봉천

    - 벡학기 -


  우리 봉천에 갈까
  아 그러나 가엾은 땅
  논 팔고 우리 그 땅에 가면
  소작인만 자리 지키는 땅

  우리 봉천에 갈까
  압록강 건너
  뗏목들 흐르고
  힘가쁜 조국아

  나는 바라본다
  이어짐을
  우리가 다리로 만나고
  흐르면 그곳엔
  피묻은 기ㅅ발

  우리 봉천에 갈까
  아름다운 조국

  그러나
  그곳엔
  피비꽃 피지 않는다

 

 

 

봉황수(鳳凰愁)

     - 조지훈 -

 


벌레 먹은 두리 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風磬) 소리 날러간 추녀 끝
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
(玉座) 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을 밟고 가
는 나의 그림자. 패옥(佩玉)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正一
品), 종구품(從九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 둘 곳은 바이 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에 호곡(呼哭)하리라.

 

 

 

바느질

     - 강정화 -

 


  한땀 두땀
  옮긴 손끝에
  때때옷 되어 빛나던
  어린날의 깃발.

  한올 두올 엮으신
  매듭진 옷고름이
  풀지 못한 인연인 것을

  어느 뉘가
  풀어 헤쳐 이 자리를 채우리까

  명주올 매만지신
  고운 손
  세월이 걸려
  굵은 삼베옷 되어
  갈라져 가니

  실꾸리처럼 길게
  살자 하신
  언약 날아가고
  서러움만 올올이 배이네.

 

 

 


바다
        - 서정주 -

 

   귀 기울여도 있는 것은 역시 바다와 나뿐.
   밀려왔다 밀려가는 무수한 물결 우에
   무수한 밤이 왕래하나,
   길은 항시 어데나 있고,
   길은 결국 아무 데도 없다.

 

   아-- 반딧물만한 등불 하나도 없이
   울음에 젖은 얼굴을 온전한 어둠 속에 숨기어 가지고… 너는,
   무언의 해심에 홀로 타오르는 
   한낱 꽃 같은 심장으로 침몰하라.

 

   아-- 스스로이 푸르른 정열에 넘쳐
   둥그런 하늘을 이고 웅얼거리는 바다,
   바다의 깊이 위에 피리를 불고… 청년아.

   애비를 잊어버려,
   에미를 잊어버려,
   형제와, 친척과, 동무를 잊어버려,
   마지막 네 계집을 잊어버려,

 

   알라스카로 가라, 아니 아라비아로 가라,
   아니 아메리카로 가라, 아니 아프리카로
   가라, 아니 침몰하라. 침몰하라. 침몰하라!

   오-- 어지러운 심장의 무게 위에 풀잎처럼 흩날리는 머리칼을 달고
   이리도 괴로운 나는 어찌 끝끝내 바다에 그득해야 하는가.
   눈뜨라. 사랑하는 눈을 뜨라… 청년아.
   산 바다의 어느 동서남북으로도
   밤과 피에 젖은 국토가 있다.

 

   알라스카로 가라!
   아라비아로 가라!
   아메리카로 가라!
   아프리카로 가라!

 

 

바다

   - 조병화 -

 

사랑하는 사람아 
그리운 사람아 
먼 곳에 있는 사람아 
아주 먼 곳에 있는 사람아

 

바다가 우는 걸 본 일이 있는가 
바다가 흐느끼는 걸 본 일이 있는가 
바다가 혼자서 혼자서 
스스로의 가슴을 깎아내리는 
그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들은 일이 있는가

 

네게로 영 갈 수 없는 
수많은 세월을 
절망으로 깨지며 깨지며 
혼자서 혼자서 사그라져내리는 
그 바다의 울음소리를 들은 일이 있는가.

 

 

 

바다
    - 정지용 -


오,오,오,오,오,오, 소리치며 달려가니,
오,오,오,오,오,오,연달아서 몰아온다.

간밤에 잠 살포시
머언 뇌성이 울더니,

오늘 아침 바다는
포도빛으로 부풀어졌다.
철썩, 처얼썩, 철썩, 처얼썩, 철썩
제비 날아들 듯 물결 사이사이로 춤을 추어

 

 

바다 2

      - 정지용(鄭芝溶) -

 


바다는 뿔뿔이

달아나려고 했다.


푸른 도마뱀 떼같이

재재발렀다.


꼬리가 이루

잡히지 않았다.


흰 발톱에 찢긴

산호(珊瑚)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


가까스로 몰아다 부치고

변죽을 둘러 손질하여 물기를 씻었다.

이 애쓴 해도(海圖)에

손을 씻고 떼었다.


찰찰 넘치도록

돌돌 구르도록

 

휘동그란히 받쳐 들었다!

지구(地球)는 연(蓮)잎인 양 오므라들고 …… 펴고 …….

 

 

 

바다

     - 이원섭 -

 

  나로 하여 너와 함께 있게 하라
  끝없이 짙은 네 외로움 속에
  지나가는 기러기가 흘리고 간
  핏방울처럼 꺼지게 하라

  임께서 나를 찾아 오시는 날은
  네 치마자락 안에 얼굴을 묻고
  슬픈 노래 부르듯 타신 뱃전에
  고요히 고요히 바서지리라

 

 

 

바다로 나가볼까

           - 이상호 -


  바다에는 커다란 음반이 하나
  밤낮 돌면서
  제 가슴을 비워
  푸른 물소리를 만들고.

  뭍에서 뜻을 잃은 새들은
  바다로 가서
  바람에 귀를 씻고
  그 소리를 듣고 있다는데.

  나도 마음 한구석 설레며
  바다로 나가볼까
  몸 기울여
  바다가 될까.
  가까이 갈수록 바다는 조금씩 몸을 감추었지만
  음질이 좋은 푸른 음반은 돌면서
  흐린 내 귀를 씻어주는데
  바다에 몸 기울인 새들은
  날아서 뜻을 짓는구나.

  떠나간 이여
  떠나간 이여
  바다를 버린 새들만이
  진실로 바다로 돌아올 수 있다네.

  가슴에 막막한 구름 흐르거든
  오늘밤 비 내리기 전에
  바다를 향하여
  마음 열어도 좋으리.

 

 


바다와 나비 
            - 김기림 -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움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무우밭인가 해서 내려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 젖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바다여

       - 맹후빈 -

 
인간의 온갖 슬픈 눈물과 기쁜 눈물 
흘러 흘러서 모인 곳 바다여 
너는 둥그런 지구를 품에 안고 
푸른 머리풀어 쉬임없이 출렁이면서 
장엄한 교향곡을 연주한다

 

억만 년의 모진 세월 가슴에 담고 
지금 너는 무엇을 생각하느냐?
끼륵끼륵 갈매기 우는 소리는 
바다의 간주곡인가?
아득한 수평선 바라보아도 
바다는 대답 없고 철석거릴 뿐

 

호젓이 해변을 걸어가는 나 
한낱 모래알 되고 싶구나 
드높은 하늘 네 눈동자에 아로새기고 
언제나 밝고 푸른 너와 함께 
나는 영원히 살고 싶구나 바다여

 

 

바다의 시간

          - 이복웅 -


  바다는 어디쯤 내리고 있을까

  죄처러 흩날리는
  어둠과 어둠을 거두어가는
  넓은 모래밭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떠올라
  무당처럼 목이 쉬어버린

  바람을 안고 사는
  금이 간 바다

  헝클어진 멀미를 앓고
  밤을 흔들고 있다

 

 

 

바다 일부

          - 홍영철 -

 

  1
  내 사랑은 우리집 책상 속에 잠들어 있어요. 고운 노래를 들으면 그것은 하늘
위로 날아갔다 돌아오곤 해요. 꿈꾸는 바다가 보여요. 깨울 수 없는 그
바닷가에는 고기떼들만 하얗게 죽어 있어요.

  2
  새들의 지붕 위로 푸른빛 저녁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어요. 발가락을
간지르던 새앙쥐도 떠나가고 나는 심심히 오래된 그림책을 펼쳐요. 잠든 때에도
오렌지빛 바다는 얘기해요. 흩날리는 거리에서 돌아오면 피곤한 손을 닦아
주기도 해요.

  3
  나는 모른다고 했어요. 책상 위 제라늄이 왜 자꾸 시드는지를. 내 낡은 머리칼
위에는 왜 늘 겨을 바람이 펄럭이는지를. 이따금 열린 창틈으로 새틀구름이
지나가고 지금 내 귀에는 어둠 소리만 가득해요. 떨어져 쌓이는 쓸쓸한 바닷가도
보여드릴께요.

 

 

 

 

바다처럼

       - 이추림 -

 

  E선 위를 부는 바람처럼 가늘어서 좋습니다
  불길 위를 부는 바람처럼 더워서 좋습니다
  나무 위를 부는 바람처럼 자라서 좋습니다
  물 위를 부는 바람처럼 부드러워서 좋습니다
  바위 윌 부는 바람처럼 되돌려 주셔서 좋습니다
  구름 위를 부는 바람처럼 눈 부시어서 좋습니다
  하늘 속을 부는 바람처럼 모가 없어서 좋습니다
  노랠 수놓는 우아한 새 같은 당신
  모래 윌 부는 바람처럼 바람이 많습니다
  얼음판 위를 부는 바람처럼 당신은 맑습니다

 

 

   

바닥에 어머니가 주무신다

              - 박형준 -                      

 
침대에 앉아, 아들이 물끄러미                        
바닥에 누워 자는 어머니를 바라본다                        
듬성듬성 머리칼이 빠진 숱 없는 여인의 머리맡                        
떨기 나무 사이에서 나타난 하나님이                        
서툴게 밑줄 그어져 있다, 모나미 볼펜이                        
펼쳐진 성경책에 놓여 있다                        
침대 위엔 화투패가 널려 있고                        
방금 운을 뗀 아들은 패를 손에 쥔다                        
비오는 달밤에 님을 만난다                     

생활이 되지 않는 것을 찾아                        
아들은 밤마다 눈을 뜨고                        
잠결에 앓는 소리를 하여                        
어머니가 무릎을 만지고                        
무더운 한여름밤                        
반쯤 열어논 창문에 새앙쥐 꼬리만한 초생달                       

들어온다, 삶이란                        
조금씩 무릎이 아파지는 것                        
가장 가까운 사람의 무릎을                        
뻑뻑하게 하는 것이다                        
이미 저 여인은 무릎이 비어 있다                       

한 달에 한 번 시골에서 올라와                        
밀린 빨래와 밥을 해주고                        
시골 밭 뒤 공동묘지 앞에 서 있는 아그배나무처럼                        
울고 있는 여인                        
어머니가 기도하는 자식은 망하지 않는다                        
가슴을 찢어라 그래야 네 삶이 보인다, 고                         
올라올 때마다 일제시대 언문체로 편지를 써놓고 가는                        
불타는 떨기나무는 이미 꺼진 지 오래,                        
불길에 하나도 상하지 않던                        
열매들은 모두 어디론가 흩어졌지만                        
일찍 바닥에서 일어난 어머니가                        
침대 위의 화투를 치우고                        
모로 누운 서른 셋 아들의 머리를 바로 뉘어주고                        
한 시간 일찍 서울역에 나가 기차를 기다린다                      

해가 중천에 떠오른 그 시각                        
밭 갈 줄 모르는 아들의 머리맡에                        
놓인 언문 편지 한 장.                      

"어머니가 너잠자는데 깨수업서 그양 간다 밥잘먹어라                        
건강이 솟애나고 힘이 잇다."                        
가난한 여인, 새벽 세 시에 아들은                        
혼자 화투패를 쥐고 내려다보는 것이다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 김소월 -

 

나는 꿈 꾸었노라, 동무들과 내가 가지런히

벌 가의 하루 일을 다 마치고

석양에 마을로 돌아오는 꿈을,

즐거이, 꿈 가운데.

 

그러나 집 잃은 내 몸이여,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당이 있었더면!

이처럼 떠들으랴, 아침에 저물손에

새라새로운 탄식을 얻으면서.

 

동이랴, 남북이랴,

내 몸은 떠 가나니, 볼지어다,

희망의 반짝임은, 별빛의 아득임은,

물결뿐 떠올라라, 가슴에 팔 다리에.

 

그러나 어쩌면 황송한 이 심정을!

날로 나날이 내 앞에는

자칫 가느른 길이 이어가라.

나는 나아가리라

한 걸음, 또 한 걸음.

보이는 산비탈엔 온 새벽 동무들

저 저 혼자··· 산경(山耕)을 김매이는.

 

 

 

바라춤  -서장-
             - 신석초 -

 
언제나 내 더럽히지 않을
티없는 꽃잎으로 살어 여려 했건만
내 가슴의 그윽한 수풀 속에
솟아오르는 구슬픈 샘물을 어이할까나.
 
청산 깊은 절에 울어 끊긴
종소리는 아마 이슷하여이다.
경경히 밝은 달은
빈 절을 덧없이 비초이고
뒤안 으슥한 꽃가지에
잠 못 이루는 두견조차
저리 슬피 우는다.
 
아아 어이하리, 내 홀로
다만 내 홀로 지닐 즐거운
무상한 열반을
나는 꿈꾸었노라.
그러나 나도 모르는 어지러운 티끌이
내 맘의 맑은 거울을 흐리노라.
 
몸은 설워라
허물 많은 사바의 몸이여!
현세의 어지러운 번뇌가
짐승처럼 내 몸을 물고
오오, 형체, 이 아리따움과
내 보석 수풀 속에
비밀한 뱀이 꿈어리는 형역(刑役)의
끝없는 갈림길이여.
 
구름으로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 소리
지는 꽃잎도 띄워 둥둥 떠내려가것다.
부서지는 주옥의 여울이여!
너울너울 흘러서 창해에
미치기 전에야 끊일 줄이 있으리.
저절로 흘러가는 널조차 부러워라.
 
             - 이하 생략 -

 

 

 

바람의 집 - 겨울 版畵(판화) 1
                      - 기형도 -
 

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둥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우를 깎아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 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자정 지나 앞마당에 은빛 금속처럼 서리가 깔릴 때까지 어머니는 마른 손으로 종잇장 같은 내 배를 자꾸만 쓸어내렸다. 처마 밑 시래기 한 줌 부스러짐으로 천천히 등을 돌리던 바람의 한숨. 사위어가는 호롱불 주위로 방안 가득 풀풀 수십 장 입김이 날리던 밤, 그 작은 소년과 어머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바람

    - 김송배 -


  멀리서 쓰러진따.
  누군가 마른 풀씨만 씹다가
  썩지 않은 마음 한쪽 남겨놓고
  한 생의 막을 내리는가.

  하늘이 엷게 흔들린다.
  흔들리는 저 언저리
  시린 시야 밖으로
  돌아가 눕는 저녁 새떼
  바람만
  빗살고운 무늬로 어른거린다.

  오늘밤
  귀에 젖은 물소리는
  밤의 중심으로 흐르고
  홀로 잠들지 못하는 섬 하나
  거기에 나는
  그리움처럼 남아 있다.

 

 

바람 부는 날

      - 박성룡 -

 

  오늘따라 바람이
  저렇게 쉴새없이 설레고만 있음은
  오늘은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여희고만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풀잎에
  나뭇가지에
  들길에 마을에
  가을날 잎들이 말갛게 쓸리듯이
  나는 오늘 그렇게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여희고만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아 지금 바람이
  저렇게 못견디게 설레고만 있음은
  오늘은 또 내가
  내게 없는 모든 것을 깨닫고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바람불

      - 장종권 -


  내가 돌이었으면 나무였으면 산아
  항상 네 살 속에 나를 섞을 수 있었다
  내가 꽃이었으면 산호였으면 여자여
  항상 네 살냄새와 함께 할 수 있었다
  눈감고 내가 아니기를
  너를 떠나는 내가 아니기를
  바다여 깊은 뜻으로 이해한다
  이해한다
  속살 다 비치도록 고운 네 옷
  얼굴 붉히며 들여다보는 발톱
  머릿결로 치마폭으로
  흩날리는 본능
  나는 너의 한 묶음 꽃이 되지 못하고
  너의 부끄러운 타인이 되어
  배암이 되어

 

 

 

바람이

        - 김동현 -

 

  날마다 창 너머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보노라면
  바람은 매일 와서 무얼 빚고 있을까.

  부드럽게 쓸리는 나무들 위로
  맑디 맑은 무언가가
  열기를 여윈 서늘한 불꽃으로 피어 오르고
  가끔 새가
  불꽃 속을 날카롭게 날아간다.

  이 세상 아닌 어느 하늘에서도
  내가 보는 나무의 흔들림을 받아서
  나무는 저렇게 흔들리고
  거기 사는 이들은 눈이 맑아서
  나 대신 바람이 빚는 것을 보고 있을까.

  몇 굽이 몸살을 앓고 나면
  바람이 무얼 빚는지
  나도 알 수 있을까.

  이제 저녁을 먹었으니
  다만 고향바다를 내 안에 불러들여
  바닷가에 꽃게나 한 마리 놀게 해야지.

 

 

바람에 기대어

      - 김유신 -

 

  서운산을 넘어
  가슴에 젖어오는
  빗방울.

  푸른 잎 속
  화안한 꽃송이 터지는
  흙의 꿈.

  속살까지 저려오는
  빛의 향기

  풋과일 성그는
  바람에 기대어

  한종일 한종일 빗소리 재운다.
  밤 깊도록 빗소리 재운다.

 

 

 

바람의 말
          -  마종기 -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거야.

꽃잎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 재고만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바람의 손 끝이 되어

              - 박이도 -

 

  욕실에 든 여인을 위해
  나는 창문을 연다

  싱그러운 바람-

  검은 빛깔 갈매기처럼
  바다로 날아 가네

  여인의 머리카락에선
  바다 바람이 인다

  젖은 입술 사이
  흰 잇발이 파도 끝처럼 다가온다

  아, 보이지 않는 것
  바람의 손 끝이 그대를 어루만질 때

  이미 나는 바람 속의
  한 마리 갈매기

 

 

바람으로 멱감으며

          - 최병준 -


  눅눅한 이부자리에서
  이상과 뭉기적이다가

  산에
  오르면
  마음은 바다
  깊숙이 침잠되고

  억새, 솔내음을 만지며
  알몸이 되면

  헐렁헐렁해지는
  긴장에

  신명이 은밀하게
  고여 온다

  화장품 냄새에
  불순하게 배설했던,
  주택복권을 겸연쩍게 샀던,

  모두의 기억들을
  휴지통에 넣고

  덕지덕지한 누더기를
  벗고
  구멍마다
  가득한 고름을

  바람으로
  날리면

  끈끈한 일상과는
  유쾌한
  이별이다

  수렁에서 피어나는
  한 송이
  연꽃

  모두 잊어먹고, 잃어먹고
  아무것도 안 느끼고, 안 바라고

  절대절명의
  허심, 무화

  아!
  이 성스러운 작업

  알몸인 채
  바람으로 빗질하면서

  무명에서
  벗어나는 희열

  없는 자유가
  있는 모두보다
  훨씬
  개운하다는 것을...

  어디서
  이렇게
  징이 울린다

 

 

바람처럼

       - 이추림 -


E선 위를 부는 바람처럼 가늘어서 좋습니다
 불길 위를 부는 바람처럼 더워서 좋습니다
 나무 위를 부는 바람처럼 자라서 좋습니다
 물 위를 부는 바람처럼 부드러워서 좋습니다
 바위 윌 부는 바람처럼 되돌려 주셔서 좋습니다
 하늘 속을 부는 바람처럼 모가 없어서 좋습니다
 노랠 수놓는 우아한 새 같은 당신
 모래 윌 부는 바람처럼 바람이 많습니다
 얼음판 위를 부는 바람처럼 당신은 맑습니다

 

 


     바보의 살

       - 정의홍 -

 

  지난 몇해간은
  날 잘 잠재우는 여자 하나 있어
  날 잘 잠재우는 통달한 여자 하나 있어
  바보의 살을 찌우면서
  대낮의
  깊고 깊은 잠 속으로
  익사해 가기도 했읍니다만
  또한 몇해간은
  한 그루 목련을 심고
  그것이 자라 꽃 피우고 잎 피우는
  순서를 따라가 보기도 했읍니다만
  소리 내지 않는 생장의 법, 침묵의 법,
  그것이 거기 있기는 있었읍니다만
  끝없이 푸르고 푸르게 출렁이는
  바다가 그러나 나를 다시 일깨우고
  내 피는 뜨거워, 뜨거워,
  맑고 맑은 피는 다시 고이고 고이어
  온 몸으로 일어서는 법,
  뜨거운 목청으로 노래하는 법,
  그걸 공부하려고
  낡은 바랑 하나 짊어지고
  안 간 데 없이 찾아다니는
  이제 또다시 밤이 깊어갑니다.
  천지 가득
  바다의 출렁임 소리 드높고 드높습니다.
  나의
  바보의 살이 내립니다.

 

 

바보 이력서 
            - 임보 -

 

친구들은 명예와 돈을 미리 내다보고
법과대학에 들어가려 혈안일 때에
나는 영원과 아름다움을 꿈꾸며
어리석게 문과대학을 지원했다


남들은 명문세가를 좇아
배우자를 물색하고 있을 때
나는 가난한 집안에서 어렵게 자란
현모양처를 구했다


이웃들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 강을 넘어 
남으로 갔을 때
나는 산을 떨치지 못해 추운 북녘에서
반평생을 보냈다


사람들은 땅을 사서 값진 과목들을 심을 때
나는 책을 사서 몇 줄의 시를 썼다


세상을 보는 내 눈은 항상 더디고
사물을 향한 내 예감은 늘 빗나갔다


그래서 한평생 내가 누린 건 무명과 빈곤이지만
그래서 또한 내가 얻은 건 자유와 평온이다. 

 

 

바 위
            - 유치환 -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박꽃
      - 신대철 -

 

박꽃이 하얗게 필 동안
밤은 세 걸음 이상 물러나지 않는다

벌 떼 같은 사람은 잠들고
침을 감춘 채
뜬소문도 잠들고
담비들은 제 집으로 돌아와 있다

박꽃이 핀다

물소리가 물소리로 들린다

 

 

  박문답.5

          - 정대구 -

 

  내가 죽은 김수영을 읽고 있을 때
  까치가 세 번 혹은 네 번 울고 날아간다.
  까치는 울면서도 날아갈 줄을 알지마는
  김수영은 죽어서도 노래하고
  노래하면서도 욕을 할 줄 아는 시인이다.
  까치는 침묵할 줄을 알지마는
  김수영은 죽어서도 침묵하지 않고
  누워서 책을 보고 있는 나에게 욕을 퍼붓는다.
  깍깍깍 이 제엔장할 밤중에도
  까치 소리만 듣고 있는 나에게
  된소리로 욕을 퍼붓는다.
  나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처럼 또
  깍깍깍 울고 있는 저놈의 까치 저놈의 까치
  나로서도 된소리로 이 시를 끝내야 할까보다
  끝내야 할까보다가 다 뭐냐 말야
  이 시에서 끝에서 세 줄, 혹은 네 줄이
  내 마음에 더욱 들지 않는다.

 

 

 

반도의 눈물

        - 이가림 -

 

  기러기여,눈물나게 아름다운 우리나라의
  푸른 하늘에서 소총에 맞은 기러기여
  울어다오 자유의 이마가 깨어져
  반절의 지도보다 커다랗게 피가 얼룩지는 것을.
  보이지 않는 저정의 뒤뜰에서는 날마다
  더러운 무소들의 싸움이 들려오고
  딴 아픔 딴 목소리의 털보들에게 밟혀
  젊은 보리들의 배에 실려 팔려 간다 모르는 곳
  캄캄한 자본의 구렁으로 죄수들처럼
  아아 모가지여, 저당 잡힌 모가지여

 

 

반성 
        - 김영승 -
 

밍키가 아프다
네 마리 새끼가 하도 젖을 파먹어서 그런지
눈엔 눈물이 흐르고
까만 코가 푸석푸석 하얗게 말라붙어 있다
닭집에 가서 닭 내장을 얻어다 
끓여도 주어보고
생선가게 아줌마한테 생선 대가리를 얻어다 끓여 줘 봐도
며칠째 잘 안 먹는다
부엌 바닥을 기어다니며
여기저기 똥을 싸 놓은 강아지들을 보면
낑낑낑 밍키를 보며 칭얼대는
네 마리 귀여운 강아지를 보면
나는 꼭 밍키의 남편 같다.

 

 

반쯤 깨진 연탄     

                  - 안도현 -

언젠가는 나도 활할 타오르고 싶은 것이다 
나를 끝 닿는 데까지 한번 밀어붙여 보고 싶은 것이다 
타고 왔던 트럭에 실려 다시 돌아가면 
연탄, 처음으로 붙여진 나의 이름도 
으깨어져 나의 존재도 까마득히 뭉개질 터이니 
죽어도 여기서 찬란한 끝잔을 한번 보고 싶은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뜨거운 밑불 위에 
지금은 인정머리 없이 차가운 갈라진 내 몸을얹고 
아래쪽부터 불이 건너와 옮겨 붙기를 
시간의 바통을 내가 넘겨 받는 순간이 오기를 
그리하여 서서히 온몸아 발갛게 달아오르기를 
나도 느껴 보고 싶은 것이다 
나도 보고 싶은 것이다 
모두들 잠든 깊은 밤에 눈에 빨갛게 불을 켜고 
구들장 속이 얼마나 침침하니 손을 뻗어 보고 싶은 것이다 
나로 하여 푸근한 잠 자는 처녀의 등허리를 
밤새도록 슬금슬금 만져도 보고 싶은 것이다

 

 

발견

       - 김기문 -


  석굴암 교무 일법 스님과 토굴을 나와 나란히 걸을 때, 신유년
소슬바람에 그해 무성ㅎ던 나뭇잎 바람 따라 굴러오네.
  떨어지기 위하여 맺혀 있음이어 우리들 발길에 밟히기까지 수백 생의
인연의 덧없는 바스라짐, 대저 산을 넘고 시간의 장막 저편 나 또한
누군가를 기다리는 낙엽이로다.
  석굴암 교무 일법 스님과 이 나라 온 승려가 다 각기 한 조각 크고 작은
이파리임을, 각자의 업에 맞는 비탈을 택해 반짝이며 떨고 있는 일순의
매달림.

  마음이 머물다 간 빈 가지마다 만유는 인연이요 바람이요 굴러옴이요
또한 매달림이요 기다림임을.

 

 

발을 씻으며

      - 송희철 -


  발바닥에 깔린
  땀내 절은 하루가
  찬물 속에 녹아 번진다,

  허물벗 듯 벗겨져
  옆으로 던져진
  열두시간 만의 면 양말이
  내 고단한 노동처럼
  빨래 바구니 속에
  아프게 구겨져 누워 있다.

  낮은 데로
  낮은 데로 흐르는
  이 세상의 모든 강

  멍든 우리들의
  검은 발가락이
  강물 가득히 떠내려 간다,

  두쪽 발
  물에 담그고
  팍팍한 무르팍 두들기며

  무좀같이
  뜯어 먹힌 죽은 하루를
  한꺼번에 쏟아버린다.

 

 

   - 장서언 -

 

  바람 불어 거스러진
  샛대 지붕은
  고요한 달밤에
  박 하나 낳았다.

 


       - 김동명 -


밤은
푸른 안개에 싸인 호수,
나는
잠의 쪽배를 타고 꿈을 낚는 어부다.


밤 1 
   - 김동리 -
 

부엉이 올빼미 두견새들이 
나무 가지가지 깊은 덩굴 속에 싸여 앉아

 

어둠을 울어, 어둠으로 황홀하게 
달고 향기로운 술을 빚어 내는가

 

밤은 깊어질수록 어둠을 뿜고 
어둠은 짙어 갈수록 달고 향기로운 술이어라

 

오랜 옛날부터 뇌수(腦髓)(눈먼 새들의)로 먹은 
하늘의 별 따에 찬 꽃들이 
어둠으로 빚어져 향기로운 술이어라

 

술아 모든 잔에서 넘쳐 
온갖 목숨 있는 것들을 축복하라

 

나무 가지가지 깊은 덩굴 속에 싸여 앉아 
어둠을 빚는 새여

 

하늘과 땅, 그 속의 모든 울음 있는 것을 
취케 하라, 흐르게 하라.


 

  밤

        - 심훈 -

 

  밤, 깊은 밤 바람이 뒤설레며
  문풍지가 운다.
  방, 텅 비인 방안에는
  등잔불의 기름 조는 소리뿐...

 

  쥐가 천정을 모조리 써는데
  어둠은 아직도 창 밖을 지키고
  내 마음은 무거운 근심에 짓눌려
  깊이 모를 연못 속에서 자맥질한다.

 

  아아, 기나긴 겨울 밤에
  가늘게 떨며 흐느끼는
  고달픈 영혼의 울음소리...
  별 없는 하늘 밑에 들어 줄 사람 없구나!

 

 

 

밤 길

       - 박남수(朴南秀) -


개구리 울음만 들리던 마을에

굵은 빗방울 성큼성큼 내리는 밤 ……


머얼리 산턱에 등불 두 셋 외롭고나.


이윽고 홀딱 지나간 번갯불에

능수버들이 선 개천가를 달리는 사나이가 어렸다.


논둑이라도 끊어져 달려가는 길이나 아닐까.


번갯불이 스러지자

마을은 비 내리는 속에 개구리 울음만 들었다.

 

 

밤바다에서

        - 박재삼(朴在森) -

 

누님의 치맛살 곁에 앉아

누님의 슬픔을 나누지 못하는 심심한 때는

골목을 빠져 나와 바닷가에 서자.


비로소 가슴 울렁이고

눈에 눈물 어리어

차라리 저 달빛 받아 반짝이는 밤바다의 진정할 수 없는

괴로운 꽃비늘을 닮아야 하리.

천하에 많은 할 말이, 천상의 많은 별들의 반짝임처럼

바다의 밤물결되어 찬란해야 하리.

아니 아파야 아파야 하리.


이윽고 누님은 섬이 떠 있듯이

그렇게 잠들리.

 

그때 나는 섬가에 부딪치는 물결처럼 누님의 치맛살에 얼굴을 묻고

가늘고 먼 울음을 울음을,

울음 울리라.

 

 

밤에 산엘

      - 민재식 -

 

  밤에 산엘 올라가면
  어둠을 딛고 설 수 있다.
  밤에 산엘 올라가면
  어둠을 이고 설 수 있다.
  어둠은 까만 스폰지
  딛어도 소리 없는, 치켜도 소리없는
  그러나 온몸에 밀착해 오는
  죽은 탄력성

  밤에 산엘 올라가면
  하늘에도 바다에도 별이 뜬다.
  밤에 산엘 올라가면
  눈에도 가슴에도 별이 어린다.
  별은 빛으로 통하는 스폰지의 구멍
  후벼도, 헤쳐도, 꺼지지 않는
  빛의 부스러기

 

 

밤의 노래 1

      - 조원규 -


  오늘 지는 해가
  저토록
  빛나는 것을
  어느 누가 기억하랴
  질병의 흙에 뒤엉키며
  터뜨려지며
  결코 인간의 역사를 장식치 않는
  늦장미와 여윈 바람을
  훗날

  어느 또 한 눈 먼 인간이 있어
  살려는 자와
  살고 싶지 않은 자의
  하루와
  역사 이래의 서럽고도
  서러운 인간들의 욕정을
  막막한 오후

  백열의 뇌세포 속에
  못박아
  새기기를 원할 것인지
  나는 생각치 않으련다
  무한히 살고 싶다
  손끝까지 빛에 감싸이면
  엎드린 도회의 어깨 너머로
  다함없는 저 시간의
  약속들 속에서


       밤의 노래 2


  밤은 존재하고
  나도 존재한다
  황량한 진리를
  누구든 기억해다오
  인간이 변하고
  거듭 변치 않을 수 없음이란
  서럽고도
  아름다운 일이라고

  나는 기억하련다
  왜 죽고 싶었던가를
  푸른 하늘 쏟아지던
  어느 새벽 어느
  도회의 일몰들을
  파헤쳐진
  모래와 같이
  살기 시작했음을

  밤이 존재한다 하여
  나까지 존재하는 것은
  도회의 쇠못과
  망치를 노래하기 위함
  온갖 쓸모없는 것들을
  한 세계의 경계로
  내팽개쳐진
  쇠와 피의 아버지들을
  저토록
  차가운 세상에 누워
  내 과거를 지키는 눈초리들을

 

 

 

밤 차

    - 박팔양(朴八陽) -


추방되는 백성의 고달픈 백(魄)을 실고

밤차는 헐레벌덕어리며 달어난다

도망군이 짐싸가지고 솔밭길을 빠지듯

야반(夜半) 국경의 들길을 달리는 이 괴물이여!


차창밖 하늘은 내 답답한 마음을 닮었느냐

숨맥힐 듯 가슴 터질 듯 몹시도 캄캄하고나

유랑(流浪)의 짐 우에 고개 비스듬히 눕히고 생각한다

오오 고향의 아름답든 꿈이 어디로 갔느냐


비닭이*집 비닭이장같이 오붓하든 내 동리

그것은 지금 무엇이 되었는가

차바퀴 소리 해조(諧調)*마치 들리는 중에

희미하게 벌려지는 괴로운 꿈자리여!


북방 고원의 밤바람이 차창을 흔든다

(사람들은 모다 피곤히 잠들었는데)

이 적막한 방문자여! 문 두드리지 마라

의지할 곳 없는 우리의 마음은 지금 울고 있다


그러나 기관차는 야음(夜音)을 뚫고 나가면서

'돌진! 돌진! 돌진!' 소리를 질른다

아아 털끝만치라도 의롭게 할 일 있느냐

아까울 것 없는 이 한 목숨 바칠 데가 있느냐


피로한 백성의 몸 우에

무겁게 나려 덥힌 이 지리한 밤아

언제나 새이랴나 언제나 걷히랴나

아아 언제나 이 괴로움에서 깨워 일으키랴느냐

 
* 비닭이 : 비둘기.

* 해조 : 아름다운 가락.

 

 

 

밤하늘의 별들은

          - 안재동 -

 

밤하늘의 별들은  

백사장 모래알보다 많지만  

언제나  

서로 조화로워 보이고

주위가 어두울수록 빛난다

  

작은 어려움이나 슬픔에도  

힘겨워하고 우울해하며

시도 때도 없이 부딪혀  

쪽박처럼 깨지는  

사람들 같지가 않다

  

밤하늘의 별들은  

자신의 빛을  

쉽게 사그라지게 하지 않으며

함박눈만큼 부드럽고  

호수의 수면처럼 잔잔하게  

율동한다

 

 

방랑의 마음
                 -오상순-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오 ---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나의 혼(魂).
 
바다 없는 곳에서
바다를 연모(戀慕)하는 나머지에
눈을 감고 마음 속에
바다를 그려 보다
가만히 앉아서 때를 잃고.
 
옛 성 위에 발돋움하고
들 너머 산 너머 보이는 듯 마는 듯
어릿거리는 바다를 바라보다
해 지는 줄도 모르고 …….
 
바다를 마음에 불러일으켜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면
깊은 바닷소리
나의 피의 조류(潮流)를 통하여 오도다.
 
망망(茫茫)한 푸른 해원(海原) …….
마음 눈에 펴서 열리는 때에
안개 같은 바다와 향기
코에 서리도다.

 

 

 

방심
    - 손택수 -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뒷문을 열어놓고 있다가, 
앞뒷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 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순간에, 
스쳐 지나가버렸다

집이 잠시 어안이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뻥 
뚫려버린 순간,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 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

 

 

 

 

배꽃이 피면

      - 마종하 -

 

  배꽃이 피면 내님은 돌아올까
  은의 월쓰 반짝이는 달빛 속에
  그대의 웃는 이빨 차고 시려서
  배꽃이 피면 강물도 푸르러
  불밝힌 열차가 서럽게 떠나는 밤
  저녁 잠결에서 깨어나 앉으면
  창 밖엔 어느새 희게 웃는 바람소리
  빗발은 밝게 꽃잎에 부서지고
  멀리서는 떠난 밤차의 긴긴 울음소리
  배꽃이 피면 끊어질 듯 서러워
  달빛은 흘러내린 산모래를 적시고
  그대의 물빛 크림 상기도 싱그러워
  그대의 밝은 손은 내 가슴에 어른거려
  오 코를 묻네 눈을 감네 향기로 뜨네.

 

 

배를 밀며장석남

        - 장석남 -

 

배를 민다
배를 밀어보는 것은 아주 드문 경험
희번덕이는 잔잔한 가을 바닷물 위에
배를 밀어넣고는
온몸이 아주 추락하지 않을 순간의 한 허공에서
밀던 힘을 한껏 더해 밀어주고는
아슬아슬히 배에서 떨어진 손, 순간 환해진 손을
허공으로부터 거둔다.


사랑은 참 부드럽게도 떠나지
뵈지도 않는 길을 부드럽게도


배를 한껏 세게 밀어내듯이 슬픔도
그렇게 밀어내는 것이지


배가 나가고 남은 빈 물 위의 흉터
잠시 머물다 가라앉고


그런데 오, 내 안으로 들어오는 배여
아무 소리 없이 밀려들어오는 배여

 

 

 

배를 바라보며

        - 송무 -


  징그러운 덩어리
  우리들 부끄럽고 그 요량없는 유희의
  무슨 증거같은 저것 좀 봐
  저 속악의 연장
  오리무중의 삶의 전염
  뜨뜻하고 눅눅한 어둠 속에서 무슨 뽀루지처럼 돋아나
  점점 커져 저렇게 아우성 치는 것 좀
  무를 수 없는 시작이지
  때때로의 뻔뻔함의 시작
  불확실의 확산
  가난의 연쇄
  길듦으로의 진화야
  그래도 저것 좀 봐
  속도 모르고 뭉글뭉글 호기롭게 움직이는 것 좀
  안보고 싶어도 들여다 봐지네
  철없는 주장처럼
  데모처럼 겁없이
  뚝심만으로 불록불록 움직이고 있어
  너희들과는 다르다, 고 소리치며
  위험하고 무섭게
  저 물컹물컹 살아 있는 덩어리가
  우리들 씨에서 자란 우리의 거부자가
  걷잡을 수 없이 움직이고 있어
  저 거대한 타인이

 

 

 

   배반

       - 이유경 -

 

  내 이름 불러주는  아이 하나 없다
  여자도 그 잡년의 사랑도 없다
  하남 벌은 지옥에 처박혀
  바람에 휩쓸리고 있다
  논길들이 쫓겨 다니고
  벌레껍질들이 부질없이 흩어지고
  (대낮에도 오가는 사람 없길래 길에 뿌연 오줌 깔기고 코를 풀고 이까짓
언 땅)

  내 어린 날 더러웠던 아이들 자라
  다시 더러운 아이들 낳고
  잡년들 늙어서 앓아 눕꼬
  지금 새 한 마리 날지 않는다
  하남벌에 돌아와 한숨쉬는
  내 십 년의 배반

 

 

 

배우일지 5

      - 김정웅 -

 

  멀리 수평선을 가로막으며 고딕체로 누워있는 긴 봇둑, 붉게 타는 나문재
질펀히 깔린 간척지의 갯바닥, 조수가 밀지 않는 갯고랑, 폐선 한 척-
공중에 뻔쩍 들린 고물이 아직도 녹슨 닻줄에 매어 있다.

  연일 힘 없이 부는 바람이
  낡은 밧줄이
  부러진 마스트에 칭칭 감겨 있다.

  해가 바뀌어도 물러가지 않는 몇 개의 황혼이
  병풍처럼 둘러 서 있다.

  조심스런 프롬프터의 목소리가
  무언극의 저쪽에서 가늘게 떨린다.

  들린다, 들린다, 안 들린다.

 

 

백년 후에 부르고 싶은 노래

                      - 구석봉 -

 

  그것은 몽롱한 구름을 타고, 장승마냥 서 있는 나를 향하여 무쇠의
형벌을 가하면서, 겹겹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의 시야속은 온통 그들로해서 가득하고, 어떤 날 그들은 밀물과 썰물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그해만의 특권처럼 음탕한 6월이 숨어버리고, 뒤미쳐 달려온 7월도 흠뻑
자란 어느날, 난 마을 사람들의 박꽃 얼굴 빛을 본뜨고 있었다.

  우리들의 뒤로는 훌훌히 버리고 뜬 푸른 산이 있었고, 가난한 이들의
집과 황량해진 논밭이 조을고 있었다.

  -거기 지나쳐 간 갖가지 슬픈 실화가 있었다.

  위도와 경도가 선뜻 취해 잠꼬대를 했기, 지구 위의 조그만 귀퉁이에
불은 노도처럼 날뛰고 있었다.

  낯이 검어 가는 태양 아래 가을이 익고 있을 무렵, 엎드려 피를 토한
나의 시집이 있었고, 배만 움켜쥔 채 신음했을 그 일그러진 퇴색한
초가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시멘트 벗은 부엌이 설워 돌아가는 아줌마, 펌풋대 우뚝 우뚝 묵묵한
공허가 있었다고, 젖내 풍기는 고사리 손을 놀려 어영차 밥도 짓고 국수도
썰고, 내 아우랑 여설 살 짜리 계집애랑 각시 신랑 혼례식장 꾸미던 그
회상의 담장 아래로, 아 탄피가 있었고, 해골이 희쭉 웃고 있었다.

  거기 슬프게 억센 아이들의 입다문 눈 빛에서 무한히 겹쳐간 밤의 살생과
야만을 읽을 수 있었다. 뼈가 녹아날 태양의 투시처럼 읽어 나갈 수
있었다.

  위도와 경도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만물은 다시
바위의 굳굳한 위치로 돌아가고 있었다.

  우리들의 뒤으로 미망인의 울음 소리가 들려오고, 시가지엔, 죄인 같은
고아와 불구자의 행렬이 밀려 가고 있었다.

  나의 시야 속은 어느 지점 눈 덮이는 이국벌판 위에, 새로 생긴
공동묘지가 폭풍우를 삼켜가면서 울고 있었다.

 

 

白 鹿 潭 
               -  정 지 용 -

  1 
  絶頂에 가까울수록 뻑국채 꽃키가 점점 消耗된다. 한마루 오르면 허리가 슬어지고 다시 한마루 우에서 목아지가 없고 나종에는 얼골만 갸옷 내다본다. 花紋처럼 版박힌다. 바람이 차기가 咸鏡道끝과 맞서는 데서 뻑국채 키는 아조 없어지고도 八月한철엔 흩어진 星辰처럼 爛漫하다. 山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 않어도 뻑국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긔서 기진했다.

  2 
  巖古蘭, 丸藥 같이 어여쁜 열매로 목을 축이고 살어 일어섰다.

  3 
  白樺 옆에서 白樺가 骨蜀 骨婁가 되기까지 산다. 내가 죽어 白樺처럼 흴것이 숭없지 않다.

  4 
  鬼神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모롱이, 도체비꽃이 낮에도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

  5 
  바야흐로 海拔六千口尺우에서 마소가 사람을 대수롭게 아니녀기고 산다. 말이 말끼리 소가 소끼리, 망아지가 어미소를 송아지가 어미말을 따르다가 이내 헤여진다.

  6 
  첫새끼를 낳노라고 암소가 몹시 혼이 났다. 얼결에 山길 百里를 돌아 西歸浦로 달어났다. 물도 마르기 전에 어미를 여힌 송아지는 움매--움매-- 울었다. 말을 보고도 登山客을 보고도 마고 매여달렸다. 우리 새끼들도 手色이 다른 어미한틔 맡길것을 나는 울었다.

  7 
  風蘭이 풍기는 香氣, 꾀꼬리 서로 부르는 소리, 濟州회파람새 회파람부는 소리, 돌에 물이 따로 굴으는 소리, 먼 데서 바다가 구길때 솨--솨-- 솔소리, 물푸레 동백 떡갈나무속에서 나는 길을 잘못 들었다가 다시 측넌출 긔여간 흰돌바기 고부랑길로 나섰다. 문득 마조친 아롱점말이 避하지 않는다.

  8 
  고비 고사리 더덕순 도라지꽃 취 삭갓나물 대풀 石茸 별과 같은 방울을 달은 高山植物을 색이며 醉하며 자며 한다. 白鹿潭 조찰한 물을 그리여 山脈우에서 짓는 行列이 구름보다 壯嚴하다. 소나기 놋낫 맞으며 무지개에 말리우며 궁둥이에 꽃물 익여 붙인채로 살이 붓는다.

  9 
  가재도 긔지 않는 白鹿潭 푸른 물에 하눌이 돈다. 不具에 가깝도록 고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좇겨온 실구름 一抹에도 白鹿潭은 흐리운다. 나의 얼골에 한나잘 포긴 白鹿潭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祈禱조차 잊었더니라.

 


백록담

   - 이영도 -

 

차라리 스스로 달래어
싸느라니 고였는가

 

그 날 하늘을 흔들고
아우성치던 불길

 

투명한 가슴을 열고
여기 내다뵈는 상채기.
  

 

백수광부의 처에게

          - 이승하 -


  새도록 누워 뒤척이던 저 강이
  새벽을 향해 흘러 내 가슴께에 차오른다
  숙취의 새벽이다 내 아낙이여
  감당할 수 없는 세월을 흘러
  마을을 하나씩 일으키고
  들판의 곡식을 마저 익게 하라
  산은 그대 잘 익은 젖가슴처럼
  솟아있도다
  야밤에 융기되는 그대 젖에 의해서
  한 사내가 튼튼히 완성되어 왔다
  도도히 흐르는 시간
  말릴 수 없는 시간의 물결이 흘러간다
  내 검은 머리칼 휘날리며 몸을 던졌다 아낙이여
  마디마디 쑤시고 저린
  노래를 불러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노래라도 불러 취해서 바라보면
  죽은 것도 산 것도 다를 게 없도다
  하나의 계절이 온전히 저물어
  말술과 땀으로 온 누리가 젖을 것이다
  희끗희끗 세어질 것이다 다 잊자고 그대 그토록
  마셨는가 마셨다 취하였다 다만 내 이대로
  잠들고 싶다 기나긴 잠
  죽음과 삶이 어우러진 잠을 향해
  단호한 몸짓으로 백수의 사내가 도하하는 날
  아낙이여, 오래 울어
  아름다운 이여
  강이 되어 산 아래 그냥 드러눕는구나
  그를 사랑한, 그가 사랑치 않은.

 

 

 

백운사(白雲寺).

        - 매창(梅窓)이향금 -

步上白雲寺(보상백운사) 걸어서 백운사에 오르니 
寺在白雲間(사재백운간) 절이 흰 구름 사이에 있네
白雲僧莫掃(백운승막소) 스님이여 흰 구름을 쓸지 마소 
心與白雲閑(심여백운한) 마음은 흰 구름과 함께 한가롭소.

 

 

백지의 피

       - 정일근 -


그 시인 출판 기념식장에서 구겨진 백지 묶음 주웠다

처녀시집 묶어온 자리에 덧댄 고급 종이였다

시가 난무하는 세상, 시 한 줄 몸에 받지 못한

백지, 나무에서 종이가 될 때까지의 빛났던

운문정신이 꾸깃꾸깃 어둡게 구겨져 있었다

깊은 밤 그 백지 한 장 한 장 다려 펴며 물었다

백지가 휴지되어 버려지는 시대에 나는 시인인가?

종이의 날 선 귀퉁이에 시들이 우수수 베이고

태어나지 않은 시의 깊은 곳에서 피가 스며 나온다

 

 


백자

   - 허영자 -

 

불길 속에

머리칼 풀면

사내를 호리는

야차같은 계집

 

그 불길 다스려 다스려

슬프도록 소슬한 몸은

現身하옵신 관음보살님

-이조 항아리
  


백자부(白磁賦)

           - 김상옥 -
                                                

찬서리 눈보라에 절개 외려 푸르르고

바람이 절로 이는 소나무 굽은 가지

이제 막 백학(白鶴) 한 쌍이 앉아 깃을 접는다.

 

드높은 부연(附椽) 끝에 풍경 소리 들리던 날

몹사리 기다리던 그린 임이 오셨을 제

꽃 아래 빚은 그 술을 여기 담아 오도다.

 

갸우숙 바위 틈에 불로초 돋아나고

채운(彩雲) 비껴 날고 시냇물도 흐르는데

아직도 사슴 한 마리 숲을 뛰어 드노다.

 

불 속에 구워 내도 얼음같이 하얀 살결

티 하나 내려와도 그대로 흠이 지다.

 
흙 속에 잃은 그 날은 이리 순박(淳朴)하도다.
 

 

부릅뜬 태풍의 눈

        - 김창영 -

 

기억은 애매하다 그리고 
또 좀 모자랐다
그래서 뭐라고 말할 수 없다든
여자는 레이즈비언을 자처했단다.

 

여자와 나는 팝콘 한 봉지를 사들고
어느 한계, 그 꼭대기를 향하여
에스파니아식 나선영 층계를
자꾸 올랐다.

 

그 곳, 하지선이 가까운 한 낮의 절정
그 절정 허리 춤으로 깔아 뭉개진
우리의 표고, 그 하늘의 한껏을
구름은 로코코풍 과거를 몽뚱그려
지구 바깥
먼 대류권을 흘렀다.

 

그래 지금 어디쯤에서 
부릅뜬 태풍의 눈,
비바람 전부를 장전한 채 
밝음, 너를 거역하는 
어느 아열대의 해일이더냐?

 

ㅡ 그게 무슨 상관이죠 우리 와......

 

너와 나 2인층의 
저기, 하얀 공백의 모서리 
낮달 반 쪼가리 해골바가지
부릅뜬 여자늬 눈.눈.
태풍의 그 눈.

 

ㅡ 우리는 어쩌자는 거죠.

 

 

부부

   - 문정희 -

 

부부란

무더운 여름밤 멀찍이 잠을 청하다가

어둠 속에서 앵하고 모기 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둘이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이다

 

너무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이다

남편이 턱에 바르고 남은 밥풀 꽃만한 연고를

손끝에 들고

어디 나머지를 바를 만한 곳이 없나 찾고 있을 때

 

아내가 주저 없이 치마를 걷고

배꼽 부근을 내어 미는 사이이다

그 자리를 문지르며 이달에 너무 많이 사용한

신용카드와 전기세를 문득 떠올리는 사이이다

 

결혼은 사랑을 무효화시키는 긴 과정이지만

결혼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부부란 어떤 이름으로도 잴 수 없는

백 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

그것이 풍화하는 긴 과정과

그 곁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 더미를

풍경으로 거느린다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네가 쥐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내 손을 한번 쓸쓸히 쥐었다 펴보는 그런 사이이다

 

부부란 서로를 묶는 것이 쇠사슬인지

거미줄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묶여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느끼며

어린 새끼들을 유정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이이다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 김춘수 -

 
다뉴브강(江)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東歐)의 첫겨울
가로수(街路樹)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黃昏)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발(數發)의 쏘련제(製) 탄환(彈丸)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순간(瞬間),
바숴진 네 두부(頭部)는 소스라쳐 삼십보(三十步) 상공(上空)으로 튀었다.
두부(頭部)를 잃은 목통에서는 피가
네 낯익은 거리의 포도(鋪道)를 적시며 흘렀다.
너는 열 세 살이라고 그랬다.
네 죽음에서는 한 송이 꽃도
흰 깃의 한 마리 비둘기도 날지 않았다.
네 죽음을 보듬고 부다페스트의 밤은 목놓아 울 수도 없었다.
죽어서 한결 가비여운 네 영혼(靈魂)은
감시(監視)의 일만(一萬)의 눈초리도 미칠 수 없는
다뉴브강(江) 푸른 물결 위에 와서
오히려 죽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소리 높이 울었다.
다뉴브강(江)은 맑고 잔잔한 흐름일까,
요한·슈트라우스의 그대로의 선율(旋律)일까,
음악(音樂)에도 없고 세계지도(世界地圖)에도 이름이 없는
한강(漢江)의 모래 사장(沙場)의 말없는 모래알을 움켜 쥐고
왜 열 세 살 난 한국(韓國)의 소녀(少女)는 영문도 모르고 죽어 갔을까,
죽어 갔을까, 악마(惡魔)는 등 뒤에서 웃고 있었는데
열 세 살 난 한국(韓國)의 소녀(少女)는
잡히는 것 아무 것도 없는
두 손을 허공(虛空)에 저으며 죽어 갔을까,
부다페스트의 소녀(少女)여, 네가 한 행동(行動)은
네 혼자 한 것 같지가 않다.
한강(漢江)에서의 소녀(少女)의 죽음도
동포(同胞)의 가슴에는 짙은 빛깔의 아픔으로 젖어든다.
기억(記憶)의 분(憤)한 강(江)물은 오늘도 내일도
동포(同胞)의 눈시울에 흐를 것인가,
흐를 것인가, 영웅(英雄)들은 쓰러지고 두 달의 항쟁(抗爭) 끝에
너를 겨눈 같은 총(銃)뿌리 앞에
네 아저씨와 네 오빠가 무릎을 꾼 지금,
인류(人類)의 양심(良心)에서 흐를 것인가,
마음 약(弱)한 베드로가 닭 울기 전(前) 세 번이나 부인(否認)한 지금,
다뉴브강(江) 살얼음이 지는 동구(東歐)의 첫 겨울
가로수(街路樹)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黃昏)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발(數發)의 쏘련제(製) 탄환(彈丸)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부다페스트의 소녀(少女)여,
내던진 네 죽음은
죽음에 떠는 동포(同胞)의 치욕(恥辱)에서 역(逆)으로 싹튼 것일까,
싹은 비정(非情)의 수목(樹木)들에서보다
치욕(恥辱)의 푸른 멍으로부터
자유(自由)를 찾는 네 뜨거운 핏속에서 움튼다.
싹은 또한 인간(人間)의 비굴(卑屈) 속에 생생한 이마아쥬로 움트며 위협(威脅)하고
한밤에 불면(不眠)의 염염(炎炎)한 꽃을 피운다.
부다페스트의 소녀(少女)여,

 

 

부모

     - 김소월 -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 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랴?

 


부엌을 기리는 노래

           - 정현종 -

 

여자들의 권력의 원천인 
부엌이여 
利他의 샘이여, 
사람 살리는 자리 거기이니 
밥하는 자리의 공기여 
몸을 드높이는 노동 
보이는 세계를 위한 聖壇이니 
보이지 않는 세계의 향기인들 
어찌 생선비린내를 떠나 피어나리요.

 

 

부질없는 시

         - 정현종 -                                
 

보아라 깊은 밤에 내린 눈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아무 발자국도 없다 
아, 저 혼자 고요하고 맑고 
저 혼자 아름답다

 

 

 

부침

    - 이근배 -

 

  잠들면 머리맡은 늘 소리 높은 바다
  내 꿈은 그 물굽이에 잠겨들고 떠오르고
  날 새면 뭍에서 멀리 떨어진 아아 나는 외로운 섬

  철썩거리는 이 슬픈 시간의 난파
  내 영혼은 먼 데 바람으로 밤새워 울고
  눈 뜨면 모두 비워 있는 홀로 뿐인 부침의 날.

 

 

 

부킹 노래방

         - 이해리 -

 

중앙통 뒷골목 낡은 건물 2층
퇴역 교장의 근엄함과 쥐오줌 지린 건물 얼룩이 
엇박자를  치는 부킹 노래방
한 시간에 오천 원만 내면 오만 노래 다 틀어준다
미니스커트들의 펄펄 뛰는 노래
비틀거리는 소주병들의 고래고래 노래
한  소절씩  허리춤 흘리는 계모임들의 뽕짝노래....
그 불협화음을 양푼에 쓱쓱 비벼 저녁을 때우며 
틈만 나면  바닥을 쓸고 닦는 부킹 노래방
노래방 안벽에 붙은 수칙은 엄격하다
가래침 뱉는 인간 음료수 과자 흘리는 인간
낙서하는 인간 욕하는 인간 적발 즉시 퇴장 당합니다 
가히 위협적이다 노래가
즐거워서 부르는 것만이 아니듯이 
노는 것도 막 놀면 
손님에서 인간으로 강등되어 쫓겨난다는 일방적 통고 
나는 실실 웃음이 나서 노래도 못하겠는데 친구는  
언젠가 내 가슴 스쳐간 슬픈 노래 한 가락
사무치게 부른다
흐르는 눈물이 휴지로 나를 싸서 버리는 순간
나는 그만 인간이 된다
캄캄한 하늘과 
네온사인처럼 잡다한 노래가 고래고래 부킹하는 
부킹노래방
아직 이완되지 못한 슬픔 하나 목울대에 걸려
돌아오는 거리, 푸른 달 하나 따라온다 

 

 

 

 

부활

     - 서정주 -

 

내 너를 찾아왔다, 순아. 너 참 내 앞에 많이 있구나.

내가 혼자서 종로를 걸어가면, 사방에서 네가 웃고 오는구나.

새벽닭이 울 때마다 보고 싶었다. 내 부르는 소리 귓가에 들리더냐.

순아, 이게 몇 만 시간만이냐.

그날 꽃상여 산 넘어서 간 다음, 내 눈동자 속에는 빈 하늘만 남더니,

매만져볼 머리카락 하나 머리카락 하나 없더니, 비만 자꾸오고....

촛불 밖에 부엉이 우는 돌문을 열고 가면 강물은 또 몇 천리인지.

한 번 가선 소식 없던 그 어려운 주소에서 너 무슨 무지개로 내려왔느냐.

종로 네 거리에 뿌우연히 흩어져서, 뭐라고 조잘대며 햇볕에 오는 애들.

그 중에도 열아홉 살쯤 스무 살쯤 되는 애들, 그들의 눈망울 속에, 핏대에,

가슴 속에 들어 앉아 순아! 순아! 순아! 너 인제 모두 다 내 앞에 오는구나.

 


   - 김영랑 -
                                                     

자네 소리하게 내 북을 잡지

 

진양조 중머리 중중머리

엇머리 자진머리 휘몰아 보아

 

이렇게 숨결이 꼭 맞어사만 이룬 일이란

인생에 흔치 않아 어려운 일 시원한 일

 

소리를 떠나서야 북은 오직 가죽일 뿐

헛 때리면 만갑(萬甲)이도 숨을 고쳐 쉴밖에

 

장단을 친다는 말이 모자라오

연창(演唱)을 살리는 반주쯤은 지나고

북은 오히려 컨덕터―요

 

떠받는 명고(名鼓)인데 잔가락을 온통 잊으오

떡 궁! 동중정(動中靜)이요 소란 속에 고요 있어

인생이 가을같이 익어가오

 

자네 소리하게 내 북을 치지.

 

 

북방에서
          - 백석 -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를 숙신을 발해를 여진을 요를 금을

   흥안령을 음산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이깔나무의 슬퍼하든 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의 붙드든 말도 잊지 않었다

   오로촌이 멧돌을 잡어 나를 잔치해 보내든 것도

   쏠론이 십리길을 따러나와 울든 것도 잊지 않었다

 

   나는 그때

   아모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나왔다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아츰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그동안 돌비는 깨어지고 많은 금은보화는 땅에 묻히고 가마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

   이리하여 또 한 아득한 새 옛날이 비롯하는 때

   이제는 참으로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나는 나의 옛 한울로 땅으로―나의 태반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해는 늘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북어

    - 최승호 -

 

  밤의 식료품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 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북쪽

    - 이용악 -

 

북쪽은 고향

그 북쪽은 여인이 팔려간 나라

머언 산맥에 바람이 얼어붙을 때

다시 풀릴 때

시름 많은 북쪽 하늘에

마음은 눈감을 줄 모르다

 

북청 물장수
           - 김동환 -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물을 쏴 퍼붓고는
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북청 물장수.
 
물에 젖은 꿈이
북청 물장수를 부르면
그는 삐걱삐걱 소리를 치며
온 자취도 없이 다시 사라져 버린다.
 
날마다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북청 물장수

 

 

북치는 소년

               - 김종삼 -

      

내용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이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양(羊)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분수

    - 황명 -

 

  1
  오죽하면 하늘을 우러러 스스로의
  노여움을 자제하는 저
  묵시의 입김은
  얼마나 거룩한
  종교 같은 것이라 할까.

  2
  일찍 하늘로 승화하지 못한
  먼 태고인 적 우리
  어버이들의 눈물이 마침내
  영원과 맞서는 자리에
  찬란한 무지개를 피우듯
  아기찬 우리들의
  의욕으로 되살아 오르는가.

  3
  언제고 한 번은
  끝없는 강물을 이루고 싶은 마음에서
  우러러 오던
  하늘이여,
  해여,
  달이여,
  별이여,
  지금은 모두가
  나에게로 어울려 드는
  이 창업의 경이 같은
  아 청청히 나의 가슴을
  굽이치는 강물아

 

 

   분수

        - 조병화 -

 

  분수야 쏟아져 나오는 정열을 그대로 뿜어도
  소용이 없다
  차라리 따스한 입김을 다오
  저녁 노을에 무지개 서는
  섬세한 네 수줍은 모습을 보여라
  향수는 없어도 좋다
  긴 치맛자락 그대로의 냄새를 피워라
  빨간 옷고름이 노을 바람에
  다시 보고 싶은 편지 조각같이 휘날리는
  아 네 모습 그대로 있어 다오
  분수야 네게 어울리는 잔디밭에 영 있어라
  너는 외로운 사랑을 부르지 않아도 좋다
  외로움은 언제나 나에게 주어라
  노을 바람이 스치기만 해도
  수줍어 하네 옷고름 같은 그리운 것은
  나에게 주어라
  하두 그리워서 네 곁을 소리없이
  오고가는 그 마음을 영 나에게 주어라
  분수야 쏟아져 나오는 정열이란 말라
  차라리 부끄러워 하는 입김을 내어
  영 그리움일랑 나에게 다오

  분수야 쏟아져 나오는 정열을 그대로 뿜어도
  소용이 없다
  차라리 따스한 입김을 다오
  저녁 노을에 무지개 서는
  섬세한 네 수줍은 모습을 보여라
  향수는 없어도 좋다
  긴 치맛자락 그대로의 냄새를 피워라
  빨간 옷고름이 노을 바람에
  다시 보고 싶은 편지 조각같이 휘날리는
  아 네 모습 그대로 있어 다오
  분수야 네게 어울리는 잔디밭에 영 있어라
  너는 외로운 사랑을 부르지 않아도 좋다
  외로움은 언제나 나에게 주어라
  노을 바람이 스치기만 해도
  수줍어 하네 옷고름 같은 그리운 것은
  나에게 주어라
  하두 그리워서 네 곁을 소리없이
  오고가는 그 마음을 영 나에게 주어라
  분수야 쏟아져 나오는 정열이란 말라
  차라리 부끄러워 하는 입김을 내어
  영 그리움일랑 나에게 다오

 

 

 

분 수

    - 여상현(呂尙玄) - 

 

슬픈 역사가

오수에 잠긴 고궁

 

홰를 치며 우는

닭의 울음이 어데서 들릴 것만 같다


하늘을 쏘는 분수

지열과 함께 맹렬히 뿜는 의분이런가


장(墻) 넘어 불타는 아스팔트 거리에는

생활이 낙엽처럼 구르고


텅 비인 정원엔 성조기 하나

'공위(共委)'* 휴회후, 원정(園丁)*은 때때로 먼 허공만 바라볼 뿐


비둘기 깃드는 추녀 끝엔 풍경이 떨고

꼬리치며 모였던 금붕어떼 금새 흩어진다


노상 속임수 많은 여름 구름은

무슨 재주를 필듯이 머뭇머뭇 지나가는데

내 마음의 분수도 사뭇 솟구치려 하는구나

(덕수궁에서)


* 공위(共委) : 미소공동위원회.

* 원정(園丁) : 정원사.

 

 

 

분수

    - 서은숙 -


  한 번 떠난 목숨은 돌아오지 않는다.
  한 번 떠난 사람도 돌아오지 않을 때가 있다.
  소중한 건
  지금의 한 사람
  소중한 건
  한 귀절 지금의 노래
  소중한 건 나를 지켜 주는
  한 가닥 지금의 목숨.
  찰랑이는 밤하늘 무수한 눈동자 속으로
  언 바람이 시린 소리로 비껴가고 있다.
  대지를 박차고 치솟는 물줄기 속으로
  지금 막
  잊어버린 얼굴이 하얗게 부서져
  떨어지고 있다.

 


 

분천역에서

      - 함명춘 -

 

이백 평은 무슨, 내 꿈은

백 평에서도 한참 빠지는 땅 위에

손바닥만한 흙집 짓고, 마당 한켠

손금처럼 흐르는 밭고랑에 상추며 고추를 심어보는 거

울타리에서 지붕까지 수세미가 영글어가고

가객처럼 하루 세 번 기차가 집 앞을 지나며

부르고 가는 한 소절의 노래에 두 귀를 열어보는 거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날이면

언제나 마당을 가득 채우는 햇볕의자에 앉아서

한 번도 자본 적 없는 긴 잠을 자보고

기찻길 건너 유리알 같은 강물을 깨고 들어가

견지 낚싯줄로 은어의 심금을 울렸다 달래보는 일

일 년은 무슨, 삼 개월에서도 한참 빠지는 날만이라도

세상에서 키워왔던 잔시름 뒷동산에 벗어던지고

참새 같은 마누라, 다람쥐 같은 자식들도 저리 가라

먹고사는 일에 저만큼 떠밀린 詩 한번 써보고

기척이라곤 소달구지처럼 삐걱거리는 바람 소리뿐인

저 먼짓길 끝까지 갔다가 돌아와보는 거

천치같이 잊지 못한 淑이 생각에 몇 번 울다가

그리움이 주소인 듯 배달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도는 바람의 편지를 한번 대필해보는 거

하나둘 햇볕의자를 거둬들이는 저녁이 오면

울타리에서 지붕까지 영글어가는 수세미와 함께

벌써 한 달을 아무도 내리는 이 없는 간이역 같은 내 가슴에

환한 달빛이 내려앉기를 기다려보는 거

 

 

 

불국사
      - 박목월 -

 

흰 달빛
자하문

달 안개
물 소리

대웅전
큰 보살

바람 소리
솔 소리

범영루
뜬 그림자

흐는히
젖는데

흰 달빛
자하문
바람 소리
물 소리

 

 

 

불 길

     - 유진오(兪鎭五) -


그리운 사람이 있음으로 해

더 한층 쓸쓸해지는 가을밤인가 보다


내사 퍽이나 무뚝뚝한 사나이

그러나 마음 속 숨은 불길이

사뭇 치밀려오면

하늘도 땅도 불꽃에 싸인다


아마 이 불길이 너를 태우리라

이 불길로 해

나는 쓸쓸하고

안타까운 밤은 숨막힐 듯 기인가 보다

불길이 스러진 뒤엔

재만 남을 뿐이라고

유식한 사람들은 말하더라만

더러운 돼지 구융*같이 더러운 것

징글맞게 미운 것들을

모조리 집어 삼키는 불길!

이것은 승리가 아니고 무엇이냐

 

나는 일찍이 이렇게

신명나는 그리고 아름다운

불길을 사랑한다


낡은 도덕(道德)이나

점잖은 이성(理性)은 가르친다

그것은 너무나 두렵고

위험(危險)하지 않느냐고


어리석은 사람아

싸늘한 이성 뒤에 숨은

네 거짓과 비겁을

허물치 말까 보냐


네가 생각지도 못한

꿈조차 꿀 수 없던 그런 것이

젊은이 가슴에 손에 담겨서

그득히 앞으로만 향해 간다


외곬으로 타는 마음이 있어

괴로운 밤

나의 사랑 나의 자랑아

나는 불길에 싸여버린다

 

 

佛心

      - 박천 최정순 -

 

부처님 오신 날

마을 산 속 절 가보니

구름처럼 모여든 많은 인파

수행정진 관음보살 佛心 아니어도

貧者의 소박한 축원 한 자락

四海 處處 부처님 자비 얻고저 

起臥佛事 시주 소원성취 기원하네

부처님 찾아 지붕 올라가려다

복 짓지 못하고 모질게 산산조각

처참히 부서져 나딍구는 무더기

공양물 用處 죽어 버린 기와들

이리저리 구석구석 쳐박혀

발에 밟히고 밟혀도 佛心 아니던가.

 

 

 

 

불을 켜며

     - 성낙희 -


  사람은
  누구나 제 안에
  명명한 촛불,
  화예 한 쌍
  품고 또 품었어라.

  여기
  불 그늘 깊은 둘레
  아름다운 혼들
  불러 뉘이자.

  보이지도
  들리지도 아니 하는
  이 은미한 것을
  언제 만날 수 있으리.

  빈 하늘
  빈 들판처럼
  마음 항시 비워서
  불 향기만 소솔히
  감돌게 하라.

 

 

불청객 
      - 이윤근 -


가난한 집에 
손님맞이 
안절부절 못하는데
불청객은
 
그래도 시침이 떼고 
산수 좋고 공기 맑으니 
며칠만 쉬어갈까 하오

그런데 불청객은 
겨울이라는 손님

가난한 주부는 
그 손님 떠난다기에 
얼굴 펴며 환히 웃음 짓는 
개나리 같은 마음이라

 

 

불행 속의 휴식
             - 앙리 미쇼 -

 
불행, 위대한 나의 경작자, 
불행, 앉으라, 
휴식하라, 
내 너와 함께 잠시 쉬리라, 
휴식하라, 
너는 나를 발견하고, 시험하고, 증명한다. 
나는 너의 붕괴.

위대한 나의 연극, 나의 항구, 나의 아궁이, 
황금의 지하실, 
나의 미래, 진정한 나의 어머니, 나의 지평선, 
너의 빛, 너의 폭, 너의 공포, 그 속에 
내 몸을 맡기리라.

 

 

불놀이

       - 주요한 -

 

  아아, 날이 저문다. 서편 하늘에 외로운 강물 위에 스러져 가는 분홍빛
놀... 아아, 해가 저물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사월이라 파일 날, 큰 길을 물밀어 가는 사람 소리는
듣기만 하여도 흥성스러운 것을, 왜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없는고?

  아아,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시뻘건 불덩이가 춤을 춘다. 잠잠한 성문
위에서 내려다 보니, 물 냄새, 모래 냄새, 밤을 깨물고하늘을 깨물은
횃불이 그래도 무엇이 부족하여 제 몸까지 물고 뜯으며, 혼자서 어둔 가슴
품은 젊은 사람은 과거의 퍼런 꿈을 찬 강물 위에 내어던지나 무정한
물결이 그 그림자를 멀출 리가 있으랴?-아아 꺽어서 시들지 않는 꽃도
없건마는, 가신 임 생각에 살아도 죽은 이 마음이야, 에라 모르겠다. 저
불길로 이 가슴 태워 버릴까. 어제도 아픈 발 끌면서 무덤에 가 보았더니
겨울에는 말랐던 꽃이 어느 덧 피었더라마는 사랑의 봄은 또 다시 안
돌아오는가, 차라리 속 시원히 오늘 밤 이 물속에... 그런데, 행여나
불쌍히 여겨 줄 이나 있을까... 할 적에 퉁탕 불티를 날리면서 튀어나는
매화포, 펄떡 정신을 차리니 우구구 떠드는 구경꾼의 소리가 저를 비웃는
듯 꾸짖는 듯, 아아, 좀 더 강렬한 정열에 살고 싶다. 저기 저 횃불처럼
엉기는 연기, 숨막히는 불꽃의 고통 속에서라도 더욱 뜨거운 삶을 살고
싶다고 뜻밖에 가슴 두근 거리는 것은 나의 마음...

  사월달 따스한 바람이 강을 넘으면 청류벽 모란봉 높은 언덕 위에
허어옇게 흐느끼는 사람떼. 바람이 와서 불적마다 봄빛에 물든 물결이 미친
웃음을 웃으니, 겁 많은 물고기는 모래 밑에 들어 박히고, 물결치는
뱃속에서 졸음오는 리듬의 형상이 오락가락-어른거리는 그림자, 일어나는
웃음소리, 달아논 등불 밑에서 목청 길게 빼는 어린 기생의 노래, 뜻밖에
정욕을 이끄는 불구경도 이제는 겹고, 한 잔 한 잔 또 한 잔 끝없는 술도
인제는 싫어, 지저분한 배 밑창에 맥없이 누우면 까닭 모르는 눈물은 눈을
데우며, 간단 없는 장구 소리에 겨운 남자들은 때때로 불 이는 욕심에 못
견디어 번득이는 눈으로 뱃가에 뛰어 나가면, 뒤에 남은 죽어가는 촛불은
우그러진 치마 깃 위에 조을 때, 뜻 있는 듯이 찌걱거리는 배젖개 소리는
더욱 가슴을 누른다...

  아아, 강물이 웃는다. 괴상한 웃음이다. 차디찬 강물이 컴컴한 하늘을
보고 웃는 웃음이다. 아아, 배가 올라온다. 배가 오른다. 바람이 불 적마다
슬프게 삐걱거리는 배가 오른다.

  저어라 배를, 멀리서 잠자는 능라도까지, 물살 빠른 대동강을 저어
오르라. 저기 너의 애인이 맨발로 서서 기다리는 언덕으로 곧추 뱃머리를
돌리라. 물결 끝에서 일어나는 추운 바람도 무엇이리오. 괴이한 웃음
소리도 무엇이리오. 사랑 잃은 청년의 가슴 속도 너에게야 무엇이리오.
그림자 없이는 밝음도 있을 수 없거늘-오오 다만 네 확실한 오늘을 놓치지
말라. 오오 사르라, 오늘밤! 너의 빨간 횃불을 빨간 입술을 눈동자를 또한
너의 빨간 눈물을.

 

 

불 사루자

         - 노자영 -

 

  아, 빨간 불을 던지라, 나의 몸 위에
  그리하여 모두 태워 버리자
  나의 피, 나의 뼈, 나의 살!
  <전적> 자아를 모두 태워 버리자!

  아, 강한 불을 던지라, 나의 몸 위에
  그리하여 모두 태워 버리자
  나의 몸에 붙어 있는 모든 애착, 모든 인습
  그리고 모든 설움 모든 아픔을
  <전적> 자아를 모두 태워  버리자.

  아, 횃불을 던지라, 나의 몸 위에
  그리하여 모두 태워 버리자
  나의 몸에 숨겨 있는 모든 거짓, 모든 가면을
  오 그러면 나는 불이 되리라
  타오르는 불꽃이 되리라
  그리하여 불로 만든 새로운 자아에 살아 보리라.

  불 타는 불, 나는 영원히 불나라에 살겠다
  모든 것을 사루고, 모든 것을 녹이는 불나라에 살겠다.

 

 

불효 

  - 변수환 -

 

해마다 추거 성묘 한번 못 가고
해마다 구정 성묘 한번 못 가고
가고파도 갈 수 없는 고향인가
보고파도 볼 수 없는 고향인가
먹고살기 어려워서 더욱 어렵습니다.
성묘 및 벌초를 
진정 언제나 가보려나
내 신세만 처량한 타향살이
흙으로 돌아가렵니다.
못살아도 좋습니다.
외로워도 좋습니다.
언제인가는 가렵니다.
성묘하러 벌초하러 아버님 비석 세우러

 

 

 

붓 한 자루

        - 이광수 -

 

  붓 한 자루
  나와 일생을 같이 하란다.

  무거운 은혜
  인생에서 얻은 갖가지 은혜,
  언제나 갚으리
  무엇해서 갚으리 망연해도

  쓰린 가슴을
  부둠고 가는 나그네 무리
  쉬어나 가게
  내 하는 이야기를 듣고나 가게.

  붓 한 자루야
  우리는 이야기나 써볼까이나.

 

 

 

벼 
  - 이성부 -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워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 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 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 하종오 -

 

  우리야 우리끼리 하는 말로
  태어나면서도 넓디넓은
  평야 이루기 위해 태어났제
  아무데서나 푸릇푸릇 하늘로 잎 돋아내고
  아무데서나 버려져도 흙에 뿌리박았는기라
  먼 곳으로 흐르던 물줄기도 찾아보고
  날뛰던 송장메뚜기 잠재우기도 하고
  농부들이 흘린 땀을 거름삼기도 하면서
  우리야 살기는 함께 살았제
  오뉴월 하루볕이 무섭게 익어서
  처음으로 서로 안고 부끄러워 고개 숙였는기라
  우리야 우리 마음대로 할 것 같으면
  총알받이 땅 지뢰밭에 알알이 씨앗으로 묻혔다가
  터지면 흩어져 이쪽 저쪽 움돋아
  우리나라 평야 이루며 살고 싶었제
  우리야 참말로 참말로 참말로
  갈라설 수 없어 이 땅에서 흔들리고 있는기라

 

 

벽모(碧毛)의 묘(猫)

         - 황석우(黃錫禹) -

어느 날 내 영혼의
낮잠터되는
사막의 위 숲 그늘로서
파란 털의 고양이가 내 고적한
마음을 바라보면서
"이애, 너의
온갖 오뇌(懊惱), 운명을
나의 끓는 삶 같은
애(愛)에 살짝 넣어 주마.
만일에 네 마음이
우리들의 세계의
태양이 되기만 하면
기독(基督)이 되기만 하면."

 

 

 

벽시계

      - 최창렬 -


  우리집 개들이
  몰아 온
  햇살 가득한 아침

  주섬주섬 햇살을 걸치고
  마당으로 나갔다

  뽀삐의 재롱
  늘 그렇듯
  꼬리를 치며 몸을 뒤틀며 뛰어 오르며 마당 한 바퀴 도는 인사

  개밥그릇 옆
  두 마리의 쥐가 죽어 있었다

  밤새
  우리집 개들은
  두 마리의 쥐를 놓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쥐 두 마리를 쓰레기통에 넣으면서 이들이 부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내 청소부가 들어 오더니 쓰레기통을 들고 나갔고 연탄재도 들려
나갔다

  방으로 들어 오다가 무심히
  벽시계를 보았다

 

 

별들은 따뜻하다 
                    - 정호승 -
 
하늘에는 눈이 있다
두려워할 것은 없다
캄캄한 겨울 
눈 내린 보리밭길을 걸어가다가 
새벽이 지나지 않고 밤이 올 때 
내 가난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나에게 
진리의 때는 이미 늦었으나 
내가 용서라고 부르던 것들은  
모든 거짓이었으나 
북풍이 지나간 새벽거리를 걸으며 
새벽이 지나지 않고 또 밤이 올때 
내 죽음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별을 처다보며

                - 노천명 -

 

나무가 항시 하늘로 향하듯이
발은 땅을 딛고도 우리
별을 쳐다보며 걸어갑시다. 친구보다
좀더 높은 자리에 있어 본댔자
또 미운 놈을 혼내주어 본다는 일
그까짓 것이 다- 무엇입니까 술 한 잔만도 못한
대수롭잖은 일들입니다.
발은 땅을 딛고도 우리
별을 쳐다보며 걸어갑시다

 

 

 

별 헤는 밤
                  -  윤동주  -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 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거외다.

 

 

 

병(病)에게
               - 조지훈 -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生)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虛無)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즉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생(生)에의 집착과 미련은 없어도 이 생(生)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지옥(地獄)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說服)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잘 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리 다시 인생(人生)을 얘기해 보세 그려


                   .

 

병든 서울

         - 오장환(吳章煥) -


8월 15일 밤에 나는 병원에서 울었다.

너희들은 다 같은 기쁨에

내가 운 줄 알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일본 천황의 방송도,

기쁨에 넘치는 소문도,

내게는 곧이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저 병든 탕아(蕩兒)로

홀어머니 앞에서 죽는 것이 부끄럽고 원통하였다.


그러나 하루 아침 자고 깨니

이것은 너무나 가슴을 터치는 사실이었다.

기쁘다는 말,

에이 소용도 없는 말이다.

그저 울면서 두 주먹을 부르쥐고

나는 병원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어째서 날마다 뛰쳐나간 것이냐.

큰 거리에는,

네거리에는, 누가 있느냐.

싱싱한 사람 굳건한 청년, 씩씩한 웃음이 있는 줄 알았다.


아, 저마다 손에 손에 깃발을 날리며

노래조차 없는 군중이 만세로 노래를 부르며

이것도 하루 아침의 가벼운 흥분이라면……

병든 서울아, 나는 보았다.

언제나 눈물 없이 지날 수 없는 너의 거리마다

오늘은 더욱 짐승보다 더러운 심사에

눈깔에 불을 켜들고 날뛰는 장사치와

나다니는 사람에게

호기 있이 먼지를 씌워 주는 무슨 본부, 무슨 본부,

무슨 당, 무슨 당의 자동차.

 

그렇다. 병든 서울아,

지난날에 네가, 이 잡놈 저 잡놈

모두 다 술취한 놈들과 밤늦도록 어깨동무를 하다시피

아 다정한 서울아

나도 밑천을 털고 보면 그런 놈 중의 하나이다.

나라 없는 원통함에

에이, 나라 없는 우리들 청춘의 반항은 이러한 것이었다.

반항이여! 반항이여! 이 얼마나 눈물나게 신명나는 일이냐


아름다운 서울, 사랑하는 그리고 정들은 나의 서울아

나는 조급히 병원 문에서 뛰어나온다

포장친 음식점, 다 썩은 구루마*에 차려 놓은 술장수

사뭇 돼지 구융*같이 늘어선

끝끝내 더러운 거릴지라도

아, 나의 뼈와 살은 이곳에서 굵어졌다.


병든 서울, 아름다운, 그리고 미칠 것 같은 나의 서울아

네 품에 아무리 춤추는 바보와 술취한 망종이 다시 끓어도

나는 또 보았다.

우리들 인민의 이름으로 씩씩한 새 나라를 세우려 힘쓰는 이들을……

그리고 나는 외친다.

우리 모든 인민의 이름으로

우리네 인민의 공통된 행복을 위하여

우리들은 얼마나 이것을 바라는 것이냐.

아, 인민의 힘으로 되는 새 나라


8월 15일, 9월 15일,

아니, 삼백예순 날

나는 죽기가 싫다고 몸부림치면서 울겠다.

너희들은 모두 다 내가

시골 구석에서 자식 땜에 아주 상해 버린 홀어머니만을 위하여 우는 줄 아느냐.

아니다, 아니다. 나는 보고 싶으다.

큰물이 지나간 서울의 하늘아

그때는 맑게 개인 하늘에

젊은이의 그리는 씩씩한 꿈들이 흰구름처럼 떠도는 것을……


아름다운 서울, 사모치는, 그리고, 자랑스런 나의 서울아,

나라 없이 자라난 서른 해

나는 고향까지 없었다.

그리고, 내가 길거리에서 자빠져 죽는 날,

'그곳은 넓은 하늘과 푸른 솔밭이나 잔디 한 뼘도 없는'

너의 가장 번화한 거리

종로의 뒷골목 썩은 냄새 나는 선술집 문턱으로 알았다.


그러나 나는 이처럼 살았다.

그리고 나의 반항은 잠시 끝났다.


아 그 동안 슬픔에 울기만 하여 이냥 질척거리는 내 눈

아 그 동안 독한 술과 끝없는 비굴과 절망에 문드러진 내 쓸개

내 눈깔을 뽑아 버리랴, 내 쓸개를 잡아 떼어 길거리에 팽개치랴.

 


* 구루마 : 짐수레. 달구지.

* 구융 : '구유'의 사투리로 마소의 먹이를 담아 주는 나무 그릇.

 

 

 

병원(病院)

       - 윤동주(尹東柱) -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병적 계절(病的季節)
              - 이상화 -


기러기 제비가 서로 엇갈림이 보기에 이리도 설은가. 
귀뚜리 떨어진 나뭇잎을 부여잡고 긴 밤을 새네. 
가을은 애달픈 목숨이 나누어질까 울 시절인가 보다.

 

가없는 생각 짬 모를 꿈이 그만 하나 둘 잦아지려는가. 
홀아비같이 헤매는 바람떼가 한 배 가득 구비치네. 
가을은 구슬픈 마음이 앓다 못해 날뛸 시절인가 보다.

 

하늘을 보아라 야윈 구름이 떠돌아다니네. 
땅 위를 보아라 젊은 조선이 떠돌아다니네.

 

 

 

병풍 屛風
               - 김수영 -


병풍(屛風)은 무엇에서부터라도 나를 끊어 준다. 
등지고 있는 얼굴이여 
주검에 취한 사람처럼 덧없이 서서 
병풍(屛風)은 무엇을 향하여서도 무관심(無關心)하다. 
주검의 전면(全面)같은 너의 얼굴 위에 
용(龍)이 있고 낙일(落日)이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끊어야 할 것이 설움이라고 하면서 
병풍(屛風)은 허위(虛僞)의 높이보다 더 높은 곳에 
비폭(飛瀑)을 놓고 유도(幽島)를 점지한다. 
가장 어려운 곳에 놓여져 있는 병풍(屛風)은 
내 앞에 서서 주검을 가지고 주검을 막고 있다. 
나는 병풍을 바라보고 
달은 나의 등 뒤에서 
병풍의 주인 육칠옹해사(六七翁海士)의 인장(印章)을 비추어 주는 것이었다

 

 

 

  벌거숭이의 노래

            - 김형원 -
 
  1
  나는 벌거숭이다.
  옷같은 것은 나에게 쓸 데 없다.
  나는 벌거숭이다.
  제도 인습은 고인의 옷이다.
  나는 벌거숭이다.
  시비도 모르는, 선악도 모르는.

  2
  나는 벌거숭이다. 그러나 나는
  두루마기까지 갖추어 단정히 옷을 입은
  제도와 인습에 추파를 보내어 악수하는
  썩은 내가 몰씬몰씬 나는 구도덕에 코를 박은,
  본능의 폭풍 앞에 힘없이 항복한 어린 풀이다.

  3
  나는 어린 풀이다.
  나는 벌거숭이다.
  나에게는 오직 생명이 있을 뿐이다.
  태양과 모든 성신이 운명하기까지,
  나에게는 생명의 감로가 내릴 뿐이다.
  온 누리의 모든 생물들로 더불어,
  나는 영원히 생장의 축배를 올리련다.

  4
  그리하여 나는 노래하려 한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감투를 쓴 사람으로부터
  똥통을 우주로 아는 구더기까지.
  그러나 형제들아,
  내가 그대들에게 이러한 노래를
  (모순되는 듯한 나의 노래를)
  서슴지 않고 보내는 것을 기뻐하라.
  새로운 종족아! 나의 형제들아!
  그대들은 떨어진 옷을 벗어던지자.
  절망의 어둔 함정을 벗어나고자 힘을 쓰자.

  5
  강장한 새로운 종족들아!
  아침 해는 금 노을을 친다.
  생장의 발은 아직도 처녀이다.
  개척의 괭이를 들었느냐?
  핏기 있는 알몸으로 춤을 추며,
  굳세인 목소리로 합창을 하자-

  6
  나는 벌거숭이다.
  우리는 벌거숭이다.
  개성은 우리가 뿌릴 ^6 236^생명의 씨^356 3^이다.
  우리의 밭에는 천재자변도 없다.
  우리는 오직 어린 풀과 함께
  햇빛을 먹고 마시고 입고,
  길이길이 노래만 하려 한다.

 

 

범부의 노래

      - 김남조 -

 

  1
  바다는 큰 눈물
  웅얼 웅얼  울며 달을 따라가지
  그 눈물 다 가면
  광막한 벌이라네

  바다는 그저 눈물
  눈물이 더 불어 누워 돌아오지
  그리곤 또 가네
  몇 번이라도 달 때문이네

  2
  이 바람을 어이랴
  실바람 한 오락지 살갗에만 닿아도 사람 내음에 절은 머리털 한 움큼에
열 손가락 찔러 넣듯, 진홍의 관능에 몸서리치며 내 미치네
  이적진 ?랐던
  이리도 피가 달아진 일
  아아 바람에, 바람에, 이 살을 다 풀어 주어야 내가 살겠네

  3
  사랑만으로는
  결코 배부르게 못해 줄
  지금 세상의 사나이들,
  신이 한 가지만을 주신다 하면
  나는 역시 한 남자를 갖겠다.

  패전한 국민이 소리를 모아 부르는
  국가의 절망과 그 소망을 품겠지.

 

 

벗은 사람을 위하여

            - 박주관 -

 

  태어날 때부터 벗었고
  죽어서도 안경을 벗었으므로
  나무는 언제든 잎사귀가 없었다.
  지금은 갈 수 없는 땅에서 돌아와
  창신동 언덕받이에서 미군들
  초상 그리며 끼니 때우던
  키 크고 목이 흰 사내는
  아내의 발을 씻겨 주며
  거짓말 하지 않았고
  큰 소리 한번 쳐보지 못했지만
  오늘도 살아서 우리들 앞으로
  예수처럼 나타나는 환쟁이
  박수근 당신 앞에
  벗은 나무들이 헐벗은 채로
  지금도 동네 어귀마다 걸어가고 있구려

  갖기 위하여 남를 해치지 않아도
  행복은 올 수 있고
  사랑을 찾지 않아도
  가슴 속에 이미 있는 것
  바라보리라 바라만 보리라
  당신의 안경 너머로
  떠가는 흰구름 바라보며
  벗고 서서 떠나간 사람들의 목소리 그리고
  돌아오는 발소리에
  아낙과 더불어 한 밤을 지새우리라.

 

 

 

벙어리장갑

         - 오탁번 -

 
여름내 어깨순 집어준 목화에서
마디마디 목화꽃이 피어나면
달콤한 목화다래 몰래 따서 먹다가
어머니한테 나는 늘 혼났다
그럴 때면 누나가 눈을 흘겼다
—겨울에 손 꽁꽁 얼어도 좋으니?
서리 내리는 가을이 성큼 오면
다래가 터지며 목화송이가 열리고
목화송이 따다가 씨아에 넣어 앗으면
하얀 목화솜이 소복소복 쌓인다
솜 활끈 튕기면 피어나는 솜으로
고치를 빚어 물레로 실을 잣는다
뱅그르르 도는 물렛살을 만지려다가
어머니한테 나는 늘 혼났다
그럴 때면 누나가 눈을 흘겼다
—손 다쳐서 아야 해도 좋으니?
까치설날 아침에 첫눈이 내리면
우스꽝스런 눈사람 만들어 세우고
까치설빔 다 적시며 눈싸움한다
동무들은 시린 손을 호호 불지만
내 손은 눈곱만큼도 안 시리다
누나가 뜨개질한 벙어리장갑에는
어머니의 꾸중과 누나의 눈흘김이
하얀 목화송이로 여태 피어나고
실 짓는 물레도 이냥 돌아가니까

            

 

 

베스트셀러

     - 안애경 -


  꿈꾸게 해 주셔요
  가난한 집 이야기는 싫어요 잘 알거든요
  부유한 남자와 가련한 처녀의 사랑을 다룬
  고전적인 이야기도 좋아요
  사치스런 곳에서 벌어지는 부자들의
  화끈화끈한 현대적 이야기도 좋아요.
  사소한 감정 문제로 그들이 몹시 고민하도록 하세요
  사소할수록 더 좋아요.
  암 그렇구 말구
  돈 많다고 다 행복한 것은 아니라구
  우리는 그들을 동정하고.
  우리의 영웅은
  슬럼가에서 태어나
  푸줏간에서 샌드백 대신 갈비짝을 두들기고
  마침내는 챔피언을 링 속에 침몰시키는
  왼손잽이 록키예요.
  와와 사람들은 주먹을 휘두르며 기뻐 날뛰고
  뒷골목 만세
  인간도 어디에서든 살 수 있는 만세(쥐들처럼 왕성히).
  실패하는 이야기는 싫어요
  꿈꾸게 해 주세요 소설가 아저씨.

 

 

베짜기

     - 오재동 -


  길아.

  오천년을 어머니 등 뒤에서
  흐르던 길아
  딸각딸각
  오늘은 한 마장쯤 가고
  내일은 두 마장쯤 가고

  길은 길어서 비틀어진 길
  최활로 잡아주고
  더러는 패인 웅덩이 물 고이고
  쑥국새 울음 빠져들던
  길아
  딸각딸각
  오늘은 한 마장쯤 가고
  내일은 두 마장쯤 가고

  가다 보면
  낮달이 질펀히 엎어져
  울기도 하던 길아.

 

 

 

베트남.1

        - 김명인 -

 

  먼지를 일으키며 차가 떠났다, 로이
  너는 달려오다 엎어지고
  두고두고 포성에 뒤짚히던 산천도 끝없이
  따라오며 먼지 속에 파묻혔다 오오래
  펼칠 수 없는 나라의 여자, 로이
  너는 거기까지 따라와 벌거벗던 내 누이

  로이, 월남군 포병 대위의 제3부인
  남편은 출정 중이고 전쟁은
  죽은 전남편이 선생이었던 국민학교에까지 밀어닥쳐
  그 마당에 천막을 치고 레이션 박스
  속에서도 가랭이 벌여 놓으면
  주신 몸은 팔고 팔아도 하나님 차지는 남는다고 웃던
  로이, 너는 잘 먹지도 입지도 못하였지만
  깡마른 네 몸뚱아리 어디에 꿈꾸는 살을 숨겨
  찢어진 천막 틈새로 꺾인 깃대 끝으로
  다친 손가락 가만히 들어올려 올라가 걸리는 푸른 하늘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행복한가고
  네가 물어서
  생각하면 나도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다

  잊어야 할 것들 정작 잊히지 않는 땅 끝으로 끌려가며
  나는 예사로운 일에조차 앞날 흐려 어두운데
  뻑뻑한 눈 비비고 또 볼수록, 로이
  적실 것 더 없는 세상 너는 부질없이도 비 되어 내리는지
  우리가 함께 맨살인데 몸 섞지 않고서야 그 무슨
  우연으로 널 다시 만날 수 있겠느냐
  로이 만난대서 널 껴안을 수 있겠느냐

 

 


뼈저린  꿈에서만 

     - 전봉건 -

 

그리라  하면

그리겠습니다.

개울물에  어리는  풀포기  하나

개울 속에  빛나는  돌맹이  하나

그렇습니다.

고향의  것이라면

무엇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지금도  똑똑하게  틀리는  일  없이

얼마든지  그리겠습니다.

 

말을  하려면

말  하겠습니다.

우물가에  늘어선  미루나무는  여섯  그루

우물  속에  노니는  큰  붕어도  여섯 마리

그렇습니다.  고향의  일이라면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고

지금도  생생하게  틀리는 일  없이

얼마든지  말하겠습니다.

 

마당  끝  큰 홰나무  아래로

삶은  강냉이  한 바가지  드시고

나를  찾으시던  어머님의  모습

가만히 옮기시던

그  발걸음  하나하나

나는  지금도  말하고  그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한  가지만은

그러나  아무리  몸부림쳐도  그것만은

내가  그리질  못하고  말도  못합니다.

강이  산으로  변하길 두번

산이  강으로 변하길  두번

 

그리고도  더  많이 흐른  세월이

가로 세로  파 놓은 어머님 이마의

어둡고  아픈  주름 살

 

어머님

꿈에  보는  어머남  주름살을

말로  하려면  목이  먼저  메이고

어머님

꿈에  보는  어머님  주름살을

그림으로 그리라면  눈앞이 먼저  흐려집니다.

 

아아  이십 육 년

뼈저린 꿈에서만  뫼시는  어머님이시여.

 


 

뿌리에게
                 - 나희덕 -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처음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
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떨던
아, 나의 사랑을
 
먼 우물 앞에서도 목마르던 나의 뿌리여
나를 뚫고 오르렴,
눈부셔 잘 부스러지는 살이니
내 밝은 피에 즐겁게 발 적시며 뻗어가려무나
 
척추를 휘어 접고 더 넓게 뻗으면
그때마다 나는 착한 그릇이 되어 너를 감싸고
불꽃 같은 바람이 가슴을 두드려 세워도
네 뻗어가는 끝을 하냥 축복하는 나는
어리석고도 은밀한 기쁨을 가졌어라.
 
네가 타고 내려올수록
단단해지는 나의 살을 보아라
이제 거무스레 늙었으니
슬픔만 한 두릅 꿰어 있는 껍데기의
마지막 잔을 마셔다오.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내 가슴에 끓어오르던 벌레들,
그러나 지금은 하나의 빈 그릇,
너의 푸른 줄기 솟아 햇살에 반짝이면
 
나는 어느 산비탈 연한 흙으로 일구어지고 있을 테니.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리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빨래 너는 여자 
              - 강은교 -

 

햇빛이 ‘바리움’처럼 쏟아지는 한낮
한 여자가 빨래를 널고 있다
그 여자는 위험스레 지붕 끝을 걷고 있다
러닝셔츠를 탁탁 털어 허공에 쓰윽 문대기도 한다
여기서 보니 허공과 그 여자는 무척 가까워 보인다
그 여자의 일생이 달려와 거기 담요 옆에 펄럭인다

그 여자가 웃는다 
그 여자의 웃음이 허공을 건너 햇빛을 건너 
‘바리움’처럼 우리의 살에 스며든다
어물거리는 바람, 어물거리는 구름들

그 여자는 이제 아기 원피스를 넌다
용수처럼 발끝을 곧게 하고 서서 
허공에 탁탁 털어 빨랫줄에 건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그 여자의 무용은 끝났다
그 여자는 뛰어간다
구름을 들고

 

 

 

   - 이세룡 -

 

  이것이 희망으로 보일 때
  어리석은 사람들은
  집을 담보로 잡히고서라도
  끝까지 간직하려고 애쓰겠지요

  또 이것이 불만으로 보일 때
  똑똑한 사람들은
  밤을 새우더라도
  끝까지 씹으려고 덤비겠지요

  그러나 이것이 밀가루 빵으로 보일 때
  사람들은 
  제조한 날로부터 사흘이 경과되면
  대체로 상하기가 쉽다는 걸 알게 됩니다
  희망에 대해서도
  불만에 대해서도 알게 됩니다


 

붉은 동백 

     - 문태준 -

 

   신라의 여승 설요는 꽃 피어 봄마음 이리 셀레 환속했다는데

   나도 봄날에는 작은 절 풍경에 갇혀 우는 눈먼 물고기이고 싶더라

   쩌렁쩌렁 해빙하는 저수지처럼 그렇게 큰 소리는 아니어도

   봄밤에는 숨죽이듯 같혀 울고 싶더라

   먼발치서 한 사람을 공양하는 무정한 불목하니로 살아도

   봄날에는 사랑이 살짝 들키기도 해서

   절마당에 핀 동백처럼 붉은 뺨이고 싶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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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7 詩人共和國, 碑共和國 2015-11-13 0 4535
776 詩碑가 是非로 되지 않기까지의 詩碑로 되기... / 詩를 고발하다... 2015-11-13 0 4853
775 詩碑 是非 ㅡ 세상보기 2015-11-13 1 4704
774 是非의 나라, 詩碑의 나라 2015-11-13 0 5323
773 詩碑의 是非 2015-11-13 0 4535
772 시를 지을 때 비법은? / 시와 련애하는 법 2015-11-11 0 4998
771 선생은 詩 읊기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2015-11-11 0 5081
770 고로, 난 시인이 아니다! 2015-11-09 0 5402
769 하늘 저 켠을 공연스레 볼 뻔하였다... 시는 시적인것. 2015-11-06 0 4456
768 사랑 詩 10수 / 가슴으로 하는 詩 2015-11-06 0 4542
767 "온몸시론" 2015-11-06 0 4326
766 시는 언어를 통한 언어 파괴의 자화상이다...?! 2015-11-06 0 4678
765 참된 령혼이 시인을 만든다... 2015-11-06 0 4688
764 이미지즘과 한국詩 2015-11-06 0 4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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