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이미지즘은 1909년부터 1917년까지에 이르는 영미의 젊은 시인들의 새로운 시 운동이다. 언어와 시의 기교에 혁신을 부르짖고 나선 이미지스트들은 분명 현대시의 선구자들이다. 이미지스트들은 인습화되어 낡아빠진 언어와 기교로 진부한 주제에 관심을 쏟던 동시대의 조오지왕조 시인들과는 달리, 시인의 감정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언어에 관심을 집중했던 것이다. 이 새로운 시 운동의 모체가 된 것은 T. E. 흄의 "반낭만주의 사상"과, 에즈라 파운드의 중세문학(희랍문학과 라틴문학)과 동양시(중국문학[이백]과 일본문학[하이쿠])에서 영향을 받은 "고전주의(혹은 상고주의) 시론"이다. 그리고, 거기에 "프랑스의 상징파 시 운동의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이미지스트들의 출발은 1909년 런던에서 흄과 파운드를 중심으로 한 청년시인들의 모임에서 비롯하였다. 이미지즘에 관하여 철저한 연구를 한 코프만의 설에 의하면, 이미지즘의 이론은 흄에게서 나왔고, 그 이론을 널리 보급시키고 그들을 "이미지스트"(Les Imagistes)라고 불러서 계속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 방향으로 발전시킨 공로는 파운드에게 있다고 한다. 미국에서 발간된 『시』(Poetry, a Magazine of Verse)를 비롯 『에고이스트』(Egoist) 등을 통하여 산발적으로 발표된 이미지스트들의 시가 한 권의 사화집에 집대성된 것은 1914년 『이마지스트』(Des Imagistes)에서였고, 다시 1915년에는 『수명의 이미지스트 시인들』(Some Imagists Poets)이라는 이름으로 로월에 의하여 발간되었다. 이들 사화집에 실린 이미지스트들을 보면, 오올딩턴, 두우리틀, 파운드, 플린트, 로월, J. G. 플레처 등이 주요 멤버이고, 조이스나 D. H. 로렌스의 이름도 들어 있다. 이들 이미지스트들은 실제 시에서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내세운 슬로우건이 현대시의 방향을 설정했다는 점에서 매우 이채롭다. 그러므로 이미지즘의 의의는 기교의 문제가 아니라 시의 본질과 기능에 대한 태도에서 찾아야 한다. 이들의 슬로우건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로월의 "6항의 원칙"이다. 이 이론은 흄의 철학에서 나왔고, 파운드의 호응으로써 굳어진 것으로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1. 일상적 언어를 쓰되 반드시 정확한 언어를 쓸 것. 2. 새로운 감정의 표현으로서 새로운 리듬을 창조할 것. 3. 제재의 선택에 절대 자유를 허용할 것. 4. 한 이미지를 표현할 것(그래서 이미지스트라는 이름이 붙는다). 5. 시는 견실하고 분명해야 할 것이지, 흐리고 불분명해서는 안 된다. 6. 끝으로, 우리는 모든 집중이 시의 근본이라고 믿는다.
나. 먼저 흄은 그의 유명한 저서『사색』에서 반낭만주의, 반휴머니즘, 반자연주의의 입장에서 이미지즘 시 운동을 체계있는 이론으로 전개한다. 그는 시의 대목표를 "정확, 정밀, 명확"이라 설정하고, <가을>이라는 작품에서 살필 수 있듯이 "고담하고 정확한 이미지" 위주의 시를 섰다. 하지만 시각적 이미지를 중시한 그의 시는 "간단한 풍경의 스케치" 같은 인상을 줄 뿐, 내면적으로 깊은 감동을 주지 못한다. 이미지스트라는 말은 파운드가 지어낸 말로 image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image라는 말은, 번역하면 心像 혹은 映像이라는 뜻이므로 정신적인 인상에서 느껴지는 그림(mental picture) 같은 것이 된다. 따라서 imagism은 寫像主義라고도 번역한다. 이미지즘의 시인들이 주장하는 시는 심상의 명확을 중요한 골자로 한다. 이미지는 詩想의 한 단위가 되는 것이다. 또한 심상은 심리학과 문학 연구에 관련되는 논제가 된다. 심리학에서 볼 때 심상은 반드시 시각적인 것은 아니라도 과거의 감각적이거나 자각적인 경험에서 오는 심적인 재현, 즉 기억을 말하는 것이다. 이미지즘의 시인들은 시의 특수한 것을 정확하게 표현하여야 하며, 막연한 보편적인 것을 취급하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미지즘의 시인들이 "심상의 명확성"을 대단히 중요시하였지만, 이론상 또 실제상의 이 운동의 지도자인 파운드는 심상을 회화적인 표상으로서가 아니고 "즉각적인 知와 精의 복합"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즉 "상이한 직관의 합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이미지스트가 하지 말아야 할 몇가지>에 나오는 파운드의 이미지에 대한 정의를 읽어보기로 하자.
<이미지>는 일순간에 지적이고 정서적인 복합체를 나타내는 것이다. ... 그러한 <복합체>를 순간적으로 드러냄은 갑작스러운 해방의 식, 시간적 한계와 공간적 한계로부터의 해방 의식, 그리고 우리가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 앞에서 경험하는 갑작스런 성장 의식을 고취시킨다. 많은 양의 작품들을 내놓은 것보다 일생에 걸쳐 하나의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이 낫다. (『시의 이해』p. 138에서 인용)
또한 "시의 용어"에 관해 계속 이어지는 그의 글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불필요한 말 형용사 따위를 쓰지 말 것. ... 추상적인 말을 두려워 할 것. ... 오늘 전문가가 싫어한 것은 일반 독자들은 내일이면 싫어 할 것이다. ... 시의 기교가 음악의 기교보다 더 단순하다고 생각하지 말 것. ... 할 수 있는 한 많은 훌륭한 예술가들의 영향을 받을 것. ... 장식적인 말을 사용하지 말든지 그렇지 않으면 훌륭한 장식적인 말들을 사용할 것. (앞의 책, p. 139 참조)
위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파운드가 이미지즘을 지도한 시의 원리는, 첫째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사물을 직접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 표현에 도움이 안 되는 말은 절대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물을 직접 다룬다"는 것은 시는 이미지로써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고, "표현에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란 시 전체에 유기적 작용을 하지 않는 장식적 표현을 말하는 것이다. 시가 이미지로써, 그것도 기능적 이미지로써 표현됐을 때 그것은 좋은 산문만큼 간결하고 정확해진다고 한다. 그는 "객관성"과 "정확성"을 가장 강조한 시인이다. 시에 상투적 표현, 인습화된 언어, 판에 박힌 문구를 쓰면 시인 자신의 감정이나 의미가 정확히 표현될 수 없고, 자기가 말하려는 것을 똑바로 쳐다보고 쓸 때만 비로소 정확성이 기해진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 파운드는 현대시의 발전을 위하여 『에고이스트』지를 이미지스트의 동인지로 하였고, 『소평론』(Little Review) 『시와 시론』(Poetry) 『폭풍』(Blast) 등의 전위적 문학잡지의 편집에 관계하여 새로운 시인들을 세상에 소개하였다. 1922년에는 T. S. 엘리어트의 『황무지』의 초고를 읽고 약간 수정하여 출판케 한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일이다. 엘리어트는 그 헌사에서 "나보다 더 위대한 시장에게"라고 하여 파운드를 예찬하였다. 1917년에는 그의 장시 『시편』(Cantos)을 『시와 시론』에 발표하기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거의 50여 년 동안 117장을 썼다. 이것은 단순한 시가 아니라 시를 초월한 인간 역사에 전개되는 모습으로 조이스의 『피네간의 철야제』와 비견되는 작품이라 한다. 종전후 파운드는 파시스트에 동조한 그의 행적이 말썽이 돼 "반역죄"로 재판을 받게 되었으나 정신이상자란 판정으로 성엘리자배드병원에 위탁되었다. 이 무렵 쓴 『피사의 칸토스』(74-84)가 볼링켄 상을 수상한 사실이 또한 인구에 회자되기도 했다. "근대시의 순교자"라 지칭되는 파운드의 이미지는 그가 이미지를 지적, 정서적 복합체로 본 점, 장식적이 아닌 기능적인 이미지를 강조한 점, 의미가 충만한 이미지를 주장한 점 등으로 보아, 흔히 이미지스트의 시에서 보는 것과 같은 속이 텅 빈 "머리속의 그림"에 불과한 이미지와는 다른 폭과 깊이를 지니고 있다. 그 점에서 그는 분명히 형이상학파 시의 이미지를 주장한 것으로서, 엘리어트의 이론으로 설명하면 그는 "감각화된 사상"으로서의 이미지를 주장한 것이다. 1910년대 초기에 그렇게 관심을 집중하여 지도 육성한 이미지즘 운동에서 그가 손을 뗀 것(1914년)도, 실은 그 이미지즘의 주장과 같은 소박한 부르짖음만으로는 큰 성과를 거둘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의 시는 대체로 이미지스트로서의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의 간결하고 정확한 언어가 주된 특징이 되어 있다. 파운드의 寫像파시인으로서의 역량을 충분히 보여주는 시로서는 단연 <지하철 정거장에서>을 들 수 있다. 우선 시인 자신의 말부터 들어 보기로 한다.
3년 전에 나는 파리의 라 꽁꼬르드에서 지하철에서 내려 갑자기 한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또 다른 얼굴, 그리고 또 다른 얼굴, 그리고 한 아름다운 어린아이의 얼굴, 그리고 또 다른 아름다운 부인을 보고서, 그 날 종일 그 인상받은 것을 나타낼 말을 찾고자 애썼지만, 그 돌연한 감정만큼 가치 있고 아름다운 말을 찾을 수 없었다. ... 나는 30행의 시 한 편을 썼지만 그것을 찢어 버린 것은 그것이 소위 "강열도 제 2위"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6개월 후에 그 반 정도 길이의 시를 썼고, 1년 후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지었다.
군중들 사이에서 홀연히 나타난 이 얼굴들, 축축한 검은 가지의 꽃잎들.
우리가 어떤 사상의 파격 속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고서는 그것이 무의미하리라고 생각한다. 이런 종류의 시에서는 외부적 객관적인 것이 내적 주관적인 것으로 변하거나 그 속으로 투사되는 정확한 순간을 기록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하철 정거장에서>는 단 2행 짜리 소품이지만, 한 순간의 인상의 단면을 매우 선명하게 나타낸 이미지즘의 표본 같은 시이다. 이 시에는 하등의 사상도 생의 의미도 감상도 들어 있지 않다. 그야말로 한 개의 이미지뿐이다. 사상파시인들은 이와 같이 시인의 주관적 사상이 배제된 정확하고 선명한 객관에 충실한 그림을 그려 내는 것을 시의 임무로 생각하였다. 이번에는 "4월"을 소재로 한 초서, 파운드 그리고 엘리오트의 시를 비교해보기로 한다.
4월의 감미로운 소나기가/ 3월의 가뭄을 속속들이 꿰뚫고/ 꽃을 피게 하는 습기로/ 온세상 나뭇가지의 힘줄을 적시어 주면/ 서녘바람 또한 달콤한 입김을 ... -초오서 <캔터베리 이야기>의 전체 서시 중에서
요정들의 흩어진 사지들// 세 명의 요정들이 다가와/ 나를 찢어 끌어갔다,/ 올리브나무 가지들이 벗겨져/ 땅위에 누워 있는 곳으로.// 투명한 안개 아래 창백한 시선들. -파운드 <4월> 전문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차라라 겨울은 우리를 따뜻하게 했었다./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 마른 구근으로 가냘픈 생명을 키웠으니./ -엘리오트 <황무지> 의 첫구절
초오서의 <캔너베리 이야기> 처음에 나오는 기쁨과 재생의 4월은 시인의 주관적인 서정의 세계를 노래한 시이다. 그러나 파운드의 시는 "요정들의 사지들"에서와 같이 오비디우스의 『변신』Ⅲ, 723-724에서의 번안된 인용과 "투명한 안개 아래 창백한 시신들"에서 볼 수 있는 감정을 배제한 이미지의 제시를 통한 객관적 묘사를 하고 있다. 엘리오트의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란 말은 이러한 주·객관의 변증법의 단계를 거쳐 나온 표현임을 알 수 있다. 그 뜻에서도 봄과 희망과 재생의 계절인 봄이 현대를 상징하는 황무지의 주민들에겐 오히려 고통스럽다는 말인데, 단순한 표현이라기보다는 초오서와 파운드의 相衝된 내용이 가져다주는 충격을 해소하기 위해 새롭게 해석한 측면이 강하다. 현실 또는 현재에 대한 예술가로서의 그의 좌절과 환멸은 그의 명시 <휴·셀윈·모벌리>(1920)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시는 모두 18편의 시가 제1부와 제2부로 나누어져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1919년에 쓰여진 13편의 시로 되어 있고, 제2부는 1920에 쓰여진 5편의 시로 되어 있는데, 제1부의 화자는 파운드 자신이며 제2부의 화자는 모벌리라고 하는 파운드가 만들어 낸 시인으로, 이와 같이 파운드와 모벌리는 동일 인물이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벌리는 사실 파운드가 극복하려고 하는 유미주의적 시인의 화신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따라서 파운드 자신의 한계점과 약점을 경고해 주고 있는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년 동안 그의 시대와는 멀리 떨어져 그는 시라는 죽은 예술을 소생시키려 애썼네. 낡은 감각의 [장엄]을 유지하기 위해. 처음부터가 잘못이었지- 아니야. 그가 태어난 곳이 반쯤은 야만적인 나라 시대에 뒤떨어진 건 그럴 수밖에 도토리 알에서 백합꽃을 피우려 굳게 마음먹은 캐퍼뉴스. 아니 가짜 미끼에 걸려드는 숭어. -<휴·셀윈·모벌리> 제1부에서
위의 인용 첫 행에서의 "3년"은 아마도 그의 이미지즘 시 운동이 막을 내리고 이 시를 쓸 때까지의 기간을 뜻하는 것 같다. 그 다음 행에 나오는 "죽은 (시)예술"은 그 자신의 시세계에 대한 자만과 동시에 새로운 감각의 시에 대한 끊임없는 열망을 보여주는 시어이다. 이 시의 중요성은 파운드가 이 작품 제1부의 제목으로 "스스로의 무덤을 선택하는 에즈라 파운드의 송시"라고 쓴 것에서 시사하듯이 이 시가 시인으로서 그의 역할("도토리 알에서 백합꽃을 피우려 굳게 마음먹은")에 대해 "자기정의"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파운드의 문명관과 세계관은 그의 대표작 『칸토스』에 잘 구현되어 있다. 이 작품은 1017년에 시작되어 거의 일생 동안 집필된 시들의 모음으로 되어 있는데, 인류문명의 붕괴과정을 세 시대-고대, 르네상스시대, 그리고 현대에 걸쳐 추적한 파운드의 필생의 대작이다. 그러므로 마치 조이스의 『피네간의 철야제』처럼 역사, 인류학, 신화, 그리고 고대의 기호, 상형문자 등으로 가득 차 있어서 주석과 해석을 필요로 하는 난해성과 현학성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집을 통해 한시와 한자 문화에 대해 지속적이고도 진지한 관심을 보였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파운드의 이미지즘의 시론은 그가 특히 취미를 붙여 연구한 한자와 한시에 영향받은 바 크다. 상형문자로서의 한자는 "나무"와 "산" 같은 객관적인 물건이 직접 취급되어, 거기서 글 쓴 사람의 주관적인 설명이 없이 그 물건들의 의미가 암시되어 있다. 파운드는 그렇게 객관적이고 간결란 표현에 매혹되어 그 한자로 쓰여진 한시의 영역을 시도하기도 한다. 파운드는 이미지즘 운동이 한창이었던 1915년 페놀로사가 일본에서 한문 공부를 하며 남긴 한시 초역본을 근간으로 하여 『한시편』(Cathay, 1915)이라는 색다른 시집을 세상에 내놓았다. 물론 이러한 작업들에서 오류가 적지 않은 것으로 밝혀지고 있으나 이 과정에서 한시가 갖는 소위 "은유의 그림"(picture of metaphor)의 멋과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 그리고 고도로 긴축된 언어의 묘미 등을 충분히 살려내 그의 詩才가 발휘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백의 시에서 보는 바와 같은 두드러진 시각적 요소와 상징성에서 파운드는 선명하고 간결하고 고담한 새로운 시의 전형을 찾았던 것이다.
라. 한국 근대시에서 모더니즘, 이미지즘, 주지주의 등이 혼용되기도 하고 구별해서 쓰이기도 한다. 김윤식은 "모더니즘시 운동양상"이란 글에서 "한국의 모더니즘시 운동이란 1930년대 중반에 크게 신장한 시단의 경향이며, 그 시론상의 거점은 이미지즘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김윤식은 이미지즘과 모더니즘을 협의에서는 등식으로 보려고 하나, 영문학에서는 이를 구별하는 것이 지배적인 경향이다. 모더니즘의 시론적 거점을 이미지즘이라고만 보는 데에는 문제점이 있다고 보는 문덕수는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이미지즘과 모더니즘을 합해서 모더니즘이라고 부른다면 별문제이나, 이 둘을 명백하게 구별하는 입장에서 보면, 한국의 모더니즘도 이미지즘과 모더니즘 또는 주지주의로 구별하는 것이 사실을 명확하게 한다. 곧, 정지용과 김광균 및 김기림을 합해서 모더니스트로 일괄할 수 있으나, 정지용과 김광균을 이미지즘으로, 김기림을 모더니즘 또는 주지주의로 구별해 보는 것이 이들의 특질을 명백히 할 수 있다. 정지용과 김광균은 다 같이 주지적, 객관적 태도, 시각적 이미지, 사물시(physical poetry) 등을 중시하나, 그들에게서는 파운드의 관념형상방법(ideogrammic method), 엘리어트의 전통과 역사의식, 형이상학파시의 방법 등을 발견할 수 없다. 김기림은 이들이 가진 이미지즘의 요소에서 한 걸음 더 전진하고 있다.-『한국모더니즘시연구』
문덕수의 上記 연구는, 그러나 오세영에 의해 당장 반박을 받는다. 그들은 김기림의 모더니즘(모더니티)의 위상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를 두고 다소 입장을 달리 한다. 오세영은 김기림이 모더니즘을 로맨티시즘의 부정으로부터 출발했다고 말한 것(『시론』, p. 74) 은 모더니즘에 대한 그의 입장 즉 모더니즘=이미지즘과 네오클래식(주지주의)이라는 공식을 확인해주는 증거가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영미의 이미지즘과 네오클래식을 제외할 때 오늘의 서구 모더니즘은 일반적으로 신낭만주의라 보는 것이 공통된 견해이기 때문이다. 또한 김기림이 모더니즘의 본질을 낡은 센티멘탈로맨티시즘의 거부와 함께 "말의 가치 발견"에서 찾는 것이 바로 그 같은 내용을 확증하는 단서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하게 여기서 끝나지 않고 있다. 우리가 정지용·김광균 등을 30년대 이미지스트라 한 것은 서구 모더니즘의 제경향을 우리 모더니스트들을 분류시킬 때 이들이 다른 어느 유파보다도 이미지스트에 가깝다는 뜻이지 그들이 영미 모더니스트와 일치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기에 이미지즘의 이미지가 꼭 시각성 만을 강조하지 않았으나 이것을 어떻게 보느냐의 차이에 따라 "이냐/ 아니냐"의 범주를 가르는 분기점으로 작용하는 편향은 올바른 태도가 될 수 없다. 더다구나 이미지즘이 프랑스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았음을 상기해 볼 때 그 양상은 더 복잡해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근대시가 바로 프랑스의 상징주의의 유입으로 크게 자극 받았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지용 연구"는 바로 그와 같은 난맥을 초래하고 있다. 30년대 모더니즘의 특성을 그에게서 찾으려는 연구는 연구자의 성향에 따라 상이한 결과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미지즘의 원리를 적용하여 정지용 연구를 할 때 "시각성"이 주안점이 된 정지용의 초기시와 "산수시"인 후기시의 경계 설정이 관건이 되고 있다. 초기부터 일관되게 이미지즘적인 방법에 의한 창작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일군과 후기시에 가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이미지즘 시 창작이 이루어진다는 또 다른 일군의 논쟁이 서로 물러섬이 없이 팽팽하다. 뿐만 아니라 아예 정지용은 상징주의적인 시어의 구사에 머물렀을 뿐 엄밀한 의미에서 이미지즘과 무관하다고 보는 일각의 목소리도 점차 그 힘을 얻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아무튼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러한 연구 성과를 토대로 정지용의 신비가 더더욱 확대 재생산되어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04. 3/24)
<참고문헌> 1. 장경렬 "이미지즘의 원리와 <시화일여>의 시론",『작가세계』1999년 겨울 2. 송욱 『시힉평전』일호각 3. 사나다 히로코『최초의 모더니스트 정지용』역락 4. 김용지 외 『모더니즘 연구』자유세계 5. 오세영 『20세기한국시연구』새문사 6. 문덕수 『한국모더니즘시연구』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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