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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생명력
///유한근
많은 분들이 요즘의 시를 걱정한다. 한국현대시의 향방을 알 수 없다느니 혹은 난해하고 수필인지 시인지 알 수 없다느니 등의 염려를 흔히 듣게 된다. 이런 걱정을 하는 분은 정직한 분이다. 난해시를 보고 이해하는 척하지 않는, 시를 사랑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진솔하게 토로하건데, 30년 넘게 시 평론을 해온 나도 이해가 되지 않는 시들이 많다. 대충 짐작은 되지만, 그 시의 방향이나 의의(?) 즉 존재 이유를 가늠할 수 없는 시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나는 그것들을 과감하게 버린다. 고등학교 학력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시는 시라 아니라고 분노(?)하며 버린다. 그들은 눈 깜짝 하지 않겠지만. 과격하게 말하면 그것들은 쓰레기같은 시다. 한 편의 시는 독립된 존재물이다. 그 자체 유기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시인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와 인쇄 형태로 존재할 때부터, 독자들에 의해 그 시는 생명력을 갖게 된다. 그 시를 단 한 명의 독자가 향유하더라도 그 시는 생명력을 갖는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 널려 있는 많은 시들은 죽어 있다. 사체가 되어 썩어가고 있다. 그것들은 태어날 때 생명을 담보로 한 치열한 정신으로 써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의 생명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고 썼기 때문이다. 그것을 일별하고 그 가능지평을 탐색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21세기에 들어 한국시의 하나의 화두는 ‘신서정’ 또는 ‘다른 서정’이다. 그동안 서정담론은 시인의 자아와 세계의 동일화로부터 일탈한 시의 문법과 발화방식의 다양성에 대하여도 부단히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하나로 요약될 수는 없어도 변할 수 없는 하나의 사실은, 서정시는 자연 친화적 상상력으로 시작되고 자아 발견이나 일탈로 끝난다는 사실 그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서정시의 개념을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을 가장 짧게 표출하는 주관시’라고 규정한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사상은 시정시는 감정만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까지도 서술되는 것이다는 것과 짧게 표출한다는 것. 여기에서 특히 우리는 ’표출‘이라는 언어에 주의해야 한다. 표출(表出)의 사전적 의미는 ‘겉으로 나타냄’이다. 표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라 할 때, 표출은 시인의 내면적 속에 있는 것들이 자연발생적으로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들어내게 하는 것은 상상력이다.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가 혹은 나라는 존재로 부터의 일탈이 무엇인지 알게 하는 힘은 상상력이며, 가장 적절한 문학 장르는 서정시이다. 서정민요시집(Lyrical Ballards)》을 펴낸 워즈워드 W. Wordsworth는 서정시를 “시는 강한 감정의 자생적인 분출이다. 시인은 일반적인 열정 속에서 생각하고 느”끼는 시로 정의한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곧 상상력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정시의 개념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주관시”라는 부분이다. 여기에서의 주관시라는 개념은 정서와 운율, 사상 등의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시를 의미한다. 일상적인 자아나 경험적 자아가 아닌 서정적 자아(Das Lyriche ich)에 의해서 쓰여진 시를 의미한다. 서정적 자아는 시인의 내밀한 정서와 사상으로 보여지기 때문에 특별하다 개성적이다. 보편적인 것과는 달리 개별적이며 특수하다. 서정시의 대상은 오직 시인 자신 뿐이다. 주위에 있는 사물이나 사상을 자기화하는 표현 양식이나, 그와는 반대로 자기 자신을 사물화하여 표현하는 방법 등도 모두 그 대상은 자신 자신에 있다. 주체적인 대상은 오직 시인 자신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인의 특별한 상상력으로 가능해진다. 흄은 자연을 포함한 사물이 반드시 차이를 동반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그 사물이 변화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것을 응시하는 정신 때문이라도 말한다. 그리고 “서로 다른 나타남을 등록하면서 이를 수축시키거나 중첩시키는 것은 상상력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상상력은 모든 이미지들을 수축이나 반복된 첨가로 의해 하나의 이미지에 담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자연물 중 한 사물을 반복적으로 관찰해도 그 차이가 나는 것은 응시된 정신 즉 상상력의 힘이라는 것이다. 사물에 대한 존재 인식을 자기화하여 정착하거나 일탈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인 자신의 체험, 그 범주를 기조로 하여 상상력이 생겨나고 그로 인해 다른 사물과의 상응도 꾀한다. 그러다보니 카타르시스적인 쾌감만으로 자신을 위무하기 위해 시를 쓴다. 이러한 현상의 극단화로 인해 서정시의 종말을 보인 시인은 파울 첼란이다. 비의秘義적 서정시(Das hermetische Gedicht)라 통칭되는 첼란의 시는 전통적인 서정시의 개념에 상당히 부합되는 모티브들을 수용하고 있지만, 새로운 언어 결합에의 부단한 실패로 인해서 난해시로의 전락을 보임으로써 독자와의 거리를 좁히지 못한다. 이에 따라 우리는 기존의 서정시에 절망한다. 그리고 기존 서정시의 절망은 신서정시의 가능 지평을 만들어냈고, 그 지평의 연상상에 실험을 계속될 수밖에 없다. 실험은 멈출 수 없다. 어느 국면이나 위상에 머물러 있을 때 그 실험은 끝난다. 그래서 실험은 언제나 날이 서있고 첨단적이다. 그래서 80년대의 한국시는 실패했고 21세기 벽두에 간헐적으로 나타났던 실험시도 그 빛이 지속되지 못하고 있다. 80년대의 실험시는 신문이나 잡지의 기사 혹은 내용의 일부를 그대로 가져야 모자이크 혹은 퍼즐 맞추기 하여 쓰여 졌다. 그러나 21세기 후기 정보화시대 혹은 하이텍스트 시대에 들어 컴퓨터와 인터넷의 정보 속에서 새롭게 실험할 수 있는, 혹은 이 시대를 전면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실험시를 ‘하이퍼시’라고 할 때 이 시는 하이퍼시라 할 수 있을까? 하이퍼시(hyperpoetry)는 하이퍼텍스트적인 시를 의미한다. 하이퍼텍스트는 비선형, 비인과, 비고정, 탈중심, 탈관념, 다방향 등의 특성을 가진 디지털시대의 새로운 세계이다. 하이퍼링크(hyper link)와 쌍방향성이라는 컴퓨터의 특성을 결합한 특성을 지닌다. 이러한 특성을 현대시에 차용한 개념의 시가 하이퍼시라 할 수 있다. 이들의 시 문법은 하이퍼텍스트의 특성을 차용하여 기존의 문장 구조를 의도적으로 비틀어 의도적으로 통사적 맥락을 끊어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인 이미지와 의미 구조를 공유한다. 그러니까 그 이미지들은 시니피에보다는 시니피앙에 집중되어 언어적 트릭으로 나아간다. ‘하이퍼시’는 21세기의 현대시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모색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이다. 부담스러운 모더니스트들의 이미지에 대한 압박으로부터의 일탈로 초월하려는 의지의 표상으로 나타난 다층적 의식 구조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며, 또한 인터넷을 통한 신유목인적인 의식이 현실과 비현실을 뛰어넘는 이미지 창출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어쩌면 디지털 영상에 대한 반영의식이기도 한다.(졸고 <하이퍼시의 정체성>에서) 또 다른 국면에서 현대시는 두 가지 기능이나 역할이 하나로 합치는 하이브리드 (hybrid)시로 까지 전개된다. 디지털과 아나로그적 속성이 합친 시라기 보다는 문학 장르의 해체까지를 실험하는 시로 전개될 전망이다. 이를 전제사항으로 하고, 시의 생명력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 의혹을 갖고 그것을 탐색하자. 시가 지녀야 할 기본 요소는 네 가지다. 시어, 운율, 이미지, 구조이다. 이 네 가지 기본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어야만 비로소 ‘시’라는 존재물이 된다. 시에 생명력을 가지려면 ‘시어’가 기본 요소로 있어야 한다. 시어는 아어(雅語)일 필요는 없고 일상어로 족하다고 말한 사람은 워즈워드다. 그러나 일상적인 사전적인 의미와 시인의 주관적으로 상징하거나 은유하는 비유의 언어인 텐션(Tension)언어이어야 한다. 인텐션(intension, 내포)와 익스텐션(extension, 외연)이 합쳐진 긴장된 텐션의 언어이어야 한다. 그래서 시인은 어떤 작가보다도 언어에 대한 남 다른 인식이 필요하다. 주관적 감성과 상상을 표출해낼 새로운 인식의 언어를 가져야 한다. 그 다음의 시의 구성요소는 운율이다.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지향한다고 말한 사람은 쇼펜하우어이다. 또 누군가는 “음악은 가장 직접적인 것이다. 인간을 엄습해서 그를 우둔한 일상성으로부터 탈피시켜 생의 원천으로 이끌어주는 그러한 음의 힘은 말로써 재현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모든 시는 음악으로 지향한다는 가설이 옳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다만 문학과 음악은 발라드댄스를 예술의 기원으로 볼 때, 그 명상성에서 기원을 같이 한다. 운율의 ‘숨’의 반복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생명력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음을 환기하는 의미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시는 운율을 띤 언어와 문자로 리듬, 가락, 음성 따위로 이루어진다. 음악도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데 있어 그 형성과 그 발전의 과정을 같이 해왔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영역의 독립성까지는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 유기적 연관성 또한 부정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내재율로 이미지의 반복이나 의미의 반복을 통해서 나타난다. 21세기는 영상의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에 살면서 시인은 영상 언어로 아닌 문자 언어로 대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창작을 할 수 밖에는 없다. 문자 언어가 폐기처분될 수도 있다는 사실 인식을 극복하면서 시를 쓰게 된다. 이에 따라 서정시는 개인의 감정이나 사상에 조응하는 운율양식의 표출에 중요한 가치를 두며 언어의 형상, 그 자체의 음악적 효과를 중시한다. 이는 구태여 몰톤의 견해나 서정시의 원의까지 소급되어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주지하는 바이다. 그러나 서정시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개념적 특성 면에서 의혹을 받아왔다, 언어의 형상화로는 감성이나 사상의 표징을 분명하게 할 수 없다는 절망과 지적 갈증을 서정시로는 채울 수 없다는 자괴감이 그것이다. 이런 발생적인 서정시의 개념에 획기적인 변혁을 가한 시인은 말라르메이다. 그를 이어 상징주의자, 초현실주의자로 불리는 발레리, 보들레르, 랭보, 베르렌느 등에 의해서 서정시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들의 서정시 미학은 단적으로 ‘형상성’에 있다. 삶의 공소함, 무기력, 절대고독과 절망, 비인간화와 무신론 등 등의 인간 말세적 체험에서 일탈할 수 있는 초월적인 국면을 그들은 ‘형상성’에서 찾았다. 그것은 주지주의자들처럼 객관적 상관물의 논리에 의해 비유, 반개성을 표방하나 이들의 내면에는 자신의 본체를 구명하려는 탐색의지를 엿보이게 된다. 그것은 이미지의 형상성을 통해서 발현된다. 시인이 차용하고 있는 독자와의 소통 방식은 어떤 표현구조인가? 시인은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그린다. 내면에 은밀하게 은폐되어 있는 영혼을 언어인식을 통해 탐색한다. 탐색의 도구를 언어로 하지만, 근본적인 그림은 이미지를 통해서 하게 된다. 그래서 시의 표현구조를 은유, 상징, 아이러니, 알레고리라는 방법을 차용한다. 그 방법 중 많이 쓰는 표현구조는 은유와 상징인데, 현대에 이르러서는 독자와의 소통 접근성을 확보하기 위해 그전에 차용했던 방식이 아닌 직설화법으로 하고 있는 것 그 표현 구조가 아이러니와 알레고리이다. 그 이유는 은유나 상징에 대한 절망감 때문이다. 이미 기존의 선배 시인들이 고차원적인 표현 구조를 실험해고 사용해왔기 때문에 그에 미치기도 어렵다는 절망감 때문이다. 현대의 젊은 시인들은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Socratic Irony)방법 보다는 언어적 아이러니 방식을 차용한다. 의도적으로 무지함을 가장하여 상대방을 점차 모순으로 빠져들게 하여 독자 스스로 무지를 깨닫게 하는 표현구조. 자신을 비아냥거리고 자조하여 은폐함으로써 무거움을 가볍게 하는 방법을 취한다. 구조적인 아이러니보다는 언어적 아이러니(verbal Irony)로 진의와는 반대되는 언어를 가장하면서 오히려 비난이나 부정적 의미를 신랄하게 나타내려고 언어 트릭을 사용하는 것이 그 특성이다. 또는 간헐적이기 하지만, 기지(機知wit)로 가벼운 풍자와 유머를 차용하기로 한다. 미국의 상당수 신비평가들은 아이러니를 문학적 가치를 판단하는 일반적인 기준척도로 사용했다. 앤드류 말벨은 아이러니를 어떤 한 가지 경험을 다루면서 ‘가능성이 있는 또 다른 경험’이 있다는 것을 인정함을 의미하는 ‘내적인 균형’이라고 말하고, I. A. 리처즈는 아이러니를 ‘대립물의 평균’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아이러니 그 자체가 현실적인 시의 특징이 된다고도 말하고 있는 데 그의 견해는 일견 타당성이 있다. 시는 엄격한 행(Line)과 연(Stanza)과 유기적 구조로 이루어진다. 이 구조는 산문과는 달리 생리적이다. 생명력을 갖는다. 현대시는 이러한 시 구조의 유기성을 포기한다. 시 구조의 신비와 생명성을 유기하고 나름의 실험을 꾀하기 때문에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행과 연의 유기적 구조를 폐기할 때 시의 장르적 특성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을 간과하지 않을 때, 시는 서정시의 본래의 모습, 원형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나는 그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동어반복적으로 서정시의 핵은 비가(悲歌)라는 사실을 환기해왔다. 그것이 19세기의 ‘슬픈 노래’가 아니라 이 세대에 맞는 현대인들에 맞는 비가여야 함을 역설했다. 비가가 인간을 가장 강하게 전율케 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감동 없는 시대에 감동을 되찾아주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느 시대이든 어디에서든 감동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간으로서 살아있게 하는 생명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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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시에 대해
난해시가 가진 장점이 있다면
그건 어떻게 해석해도 좋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의미 때문에 평론가는 주로 난해시를 해석하곤 한다
뭘 어떻게 다루든 그건 시보다는 평론을 더 돋보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난해시는
그 이름처럼 난해하다
난해한 사람이 쓰는 시가 난해 시일까?
하여튼 명료함보다는 그는 얽히고설킨 실타래 같은 길을 끌고 간다
처음엔 독자의 손을 잡고 가는 듯 하나
어느 순간 그는 사라져 버리고,
나(독자)는 덜렁 혼자 이상한 나라에 떨어지고 만다
그러나 찾지 못할 길은 아니어서, 그는 한 동안 이상한 세계에서
이상한 감정에 빠져 있다가, 겨우 詩의 밖으로 나온다
그러나 나는 이상하게 힘들다. 복잡한 감정에
나는 도대체 뭘 보았단 말인가. 보긴 보았으나
나는 말 더듬으로 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한 토막을 끌어내어 설명한들, 그것은 토막에 대한 장황한 설명일 뿐
설명하면 설명할수록 詩의 전제성에서 멀어져버린다.
///전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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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시 사랑
복효근
난 난해시가 좋다
난해시는 쉬워서 좋다
처음만 읽어도 된다
처음은 건너뛰고 중간만 읽어도 한 구절만 읽어도
끝부분만 읽어도 된다
똑같이 난해하니까 느낌도 같으니까
난 난해시가 좋다
난해시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 사람도 나하고 같이 느낄 테니까
인상적인 한 구절만 언급하면 된다
더구나 지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니까
그런 시를 쓰는 시인은 많이 배웠겠다 싶다
그런 시를 언급할 정도면, 더구나
좋다 말할 정도면 고급독자이겠다 싶다
난 난해시가 좋다
독자가 어떻게 이해하든 독자의 몫이라고
존중해주니까
내 느낌 내 생각 다 옳다잖아
나도 그 정도는 시는 쓰겠다 싶어 나를 턱없이
자신감에 넘치게 하는 시
나도 시인이 될 수 있겠다 하고 용기를 갖게 하는 시
개성 있어 보이잖아
남 눈치 안 보고 얼마나 자유로운지
적당히 상대를 무시해 보이는, 그래서 있어 보이는 시
단숨에 두보도 미당도 뛰어넘어 보이는 시
난 난해시가 난해시인이 좋다
죽었다 깨나도 나는 갖지 못할 보석을 걸친 여인처럼
나는 못 가진 것을, 못하는 것을 갖고 하니까
나도 난해시를 써보고 싶다
그들처럼 주목 받고 싶다
평론가들이, 매우 지적인 평론가들이 좋아하는
그들이 나는 부럽다
그런 것도 못하는 치들을 내려다보며
어깨에 당당히 힘을 모으며 살아가는 그들이 부럽다
[출처] 복효근 - 난해시 사랑 |작성자 gofo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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