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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시론의 력사
2015년 07월 04일 22시 04분  조회:4306  추천:0  작성자: 죽림
[ 2015년 07월 06일 11시 00분 ]

 

 

(남아프리카 더반주에서...)


 

한국 포스트/모더니즘 시론의 역사

 

 

이만식

 

 

1. 한국 포스트/모더니즘 시론의 역사

 

 

『시와 표현』에서 특집의 원고를 청탁하면서, 5~60년대와 80~90년대의 시적변모를 이미 다루었으니 2000년대에 주목받은 시인들의 시를 분석하여 시와 시적 표현이 과거와 어떻게 달라졌는지 차이를 드러내어 제시해달라는 주문을 하였다. 과거와 달라진 2000년대의 대표적인 유파 중의 하나가 소위 미래파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시와 시적 표현에 대한 선호 여부에 따라 산발적이고 제한적인 분석은 있었지만 한국문학사를 관통하는 관점에서 거시적이며 체계적으로 검토된 바는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2000년대 시인들의 시작업의 주요한 특징들 중 하나가 소박한 감상주의를 벗어나서 현대문학이론의 성과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한국 시론의 역사, 특히 포스트/모더니즘 시론의 역사 속에서 이를 바라보면 최근의 시와 시적 표현의 특징을 뚜렷하게 구별·분석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든다. 1930년대의 김기림에서 시작된 한국 포스트/모더니즘 시론이 1960년대의 김수영에서 실질적인 결실을 맺고, 1980~90년대의 오규원, 김준오와 이승훈의 시론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으며, 2010년에 발간된 소위 미래파의 이론가 권혁웅의 시론에 이르러전환점을 맞는 과정을 읽어보는 것이 이런 관점에서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2. 모더니티/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티/포스트모더니즘

 

 

한국 포스트/모더니즘 시론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분석하기 전에 모더니즘, 모더니티,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티를 둘러싼 개념의 혼란을 정리하면서 서구 포스트/모더니즘 시론의 역사를 개괄하는 것이 논리전개의 기반이 될 것이다. 모더니티modernity가 근대성이라고 번역될 수 있다면, 모더니즘modernism은 19세기말의 예술운동을 지칭한다. 이 두 개의 용어는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개념이다. 모더니티, 즉 근대성은 르네상스 시대에 중세적 사고체계를 벗어나면서 시작되어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발전되어 온 근대화의 기본 논리를 뜻한다. 이러한 모더니티는 프랑스혁명에서구체화된다. 문학을 중심으로 한 문화적 대중교육을 통하여 천부인권설天賦人權說이 사회의 주류 이론이 되고, 이러한 인권 개념을 기반으로 근대국가가 수립되게 되는데, 이 근대국가 체제가 서세동점의 과정에 의하여 현재까지도 비서구권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인간, 즉 개개인의 권리는 하늘이 부여한 것으로서 인간은 누구나 동일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천부인권설에 가정되었던 인간의 개념 속에 남성이 아닌 여성, 백인이 아닌 유색인, 인간이 아닌 자연 등의 타자他者가 배제되어 있다는 1960년대 이후의 깨달음이 모더니티에 대한 본격적인 반성을 유도하면서 포스트모더니티postmodernity, 즉 탈근대성이라는 개념을 진지하게 검토해보지 않을수 없게 되었던 저간의 사정은 현대문학이론을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조금씩은 알게 된 사실이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은 이러한 포스트모더니티의 인식에서 기인하는 1960년대 이후의 예술운동인데, 19세기말에 있었던 모더니즘 예술운동에 이후以後라는 뜻의 포스트post를 붙여서 사용하는 바람에 개념의 혼란이 가중되었다. 르네상스에서부터 전개되어 온 모더니티에 대한 반성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던 것이 모더니즘 예술운동이니까 포스트모더니즘과 거의 같은 맥락에 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더니즘 예술운동의 경우에는 모더니티에 대한 본격적이고 철저한 철학적 반성이 전제되어 있지 않은 예술적이며 본능적인 반발이었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미래파Futurist처럼 근대의 기계문명이란 모더니티를 찬양하는 예술운동과 근대적인 인식의 이면에 있는 무의식에 대한 깨달음을 소개하는 초현실주의처럼 당대의 모더니티의 모순을 지적하는 예술운동이 혼재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한 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렵다. 19세기말의 모더니즘이나 1960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이 각자 나름대로 당대의 모더니티에대한 반성 행위이기는 하지만, 모더니즘은 그 시발점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고 포스트모더니즘은 철학적 인식에 기반을 둔 근본적이며 본격적인 반성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이 역사적 발전이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기존의 철학적 연구로부터 도움을받은 예술운동이기 때문에 그 인식의 깊이에 있어서 문제점을 드러낸다. 이런 관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예술작품들보다 모더니즘의 예술작품들이 아직까지도 그 의의를 상실하지 않고 힘 있는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모더니티와 포스트모더니티의 논의에 있어서 잊지 않아야 할 전제조건은 모더니티의 시대가 가고 포스트모더니티의 시대가 왔다는 식의 단선적인 역사전개의 논리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근대국가라는 체제가 여러 가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기는 하지만 유엔 등의 국제기구가 대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정치적인 현실을 생각해보면, 모더니티의 효용성이 약화된 것은 틀림없으며 그래서 모더니티에대한 반성이 철저하게 제기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는 있지만, 포스트모더니티의 논리가 모더니티를 대체한다고 말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런 역사전개의 과정을 고려할 때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이 모더니즘의 이론을 대체한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단지 모더니즘 예술운동을 계승하면서도 문제적인 국면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근대화의 전개과정을 시론의 관점에서 설명하자면, 프랑스혁명의 기반이 되었던 천부인권설은 19세기 초 영국 낭만주의에서 꽃을 피우게 되는데, 낭만적 상상력의 철학적 기반이 바로 인간 개개인의 권리를 인정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낭만적 상상력이 갖고 있었던 문제점이 인식되면서 19세기 말에 이르러 모더니즘 예술운동이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모더니즘에서 암시적으로 제시되었지만 1960년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인식된 인간 개념의 문제점을 시론의 관점에서 설명하자면 자아의 완전성에 대한 반성일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낭만적 사랑에서 사랑하고 사랑받는 ‘나’와 ‘너’라는 자아의 이면에 무의식이 있다는 것이 모더니즘 예술운동에서 발견되었다면, 1960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러서는 과연 ‘나’와 ‘너’라는 자아가 독자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에 대해 본격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3. 김기림의 『시론』

 

 

한국 포스트/모더니즘 시론의 역사는, 아니 한국 시론의 역사는 김기림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김기림의 『시론』의 분석은 한국문학사의 시작을 이론적인 측면에서 점검하는 것이 된다.

김기림이 “한일합병으로 끝나는 이조 최후의 약 반세기간은 조선이 그 자신의 근대화를 필사적으로 회피하려고 하여 빚어낸 세계문화사상 침통한 「동·키호테」의 재연이었다.”라고 지적하는 바와 같이 한국의 근대화는 자생적인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래서 한국문학은 초기 신문학에서부터 현재까지 청산되지 않은 “봉건적·유교적 구사상”의 잔재와 싸우고 있는 측면이 있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시조의 부활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 싸움의 양상이 배타적인 투쟁이라기보다는 포월包越에 가까워지고 있다. 한국문학의 또 하나의 결정적인 약점은 “극히 짧은 기간 동안에 모방 혹은 수입의 형식을 거쳐 속성해야 하는 동양적 후진성”과 “근대화의 과정이 지지할 뿐 아니라 정상적이 아니었다는 것”에서 기인하는다음과 같은 근대문학의 기형성이다.

 

 

그러나 우리 신문학의 「이데」는 결코 이 초기의 단계에 그리 오래는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서구가 이미 5세기나 6세기를 두고 걸어온 근대문학의 형성과정을 그대로 더듬어 속성해야 했다. 실로 30년이라는 짧은 동안에 그것을 졸업해야 할 벅찬 짐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신문학사가 나이로는 극히 어리면서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서구제국의 근대문학사 전부에 필적하는 복잡성을 가지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중략]

 

그러면 오늘의 우리 문학은 근대정신을 완전히 붙잡았으며 그것을 재현하였는가. 그래서 20세기적 단계에까지 도달하였는가. 이렇게 스스로 물어볼 때에 유감이나마 우리 생활과 사고, 사고와 생활 사이에는 중세와 근대의 틈바귀가 그대로 남아 있는 구석이 있으며 또 한 정신 속에도 봉건사상과 인문주의가 동서하며 한 작가나 시인의 문학 속에 19세기와 20세기가 뒤섞여 있으며 한 상징시인 속에 낭만파와 민요 시인과 유행가수가 겹쳐 있는 것조차 도처에서 쉽사리 구경한다. 이를 김현이 ‘새것 콤플렉스’라고 정의한 바 있는데, 지금의 포스트모던시대에 이르러서는 문학의 혼재성이 결함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김기림은 1950년 4월에 『시의 이해―I. A. 리차즈를 중심하여』를 쓰게될 정도로 모더니즘의 시운동에 이론적 근거가 되었던 리차즈의 이론을 한국문학에 도입하려고 노력한다. 심리학에 기반을 두고 시의 경험의 과학적 분석을 도입하여 영문학과의 창설에 기여한 리차즈의 이론은 모더니즘의 이론이 되어 현재까지도 영문학과의 표준 교육과정인 뉴크리티시즘New Criticism 비평이론을 창설하는 데 공헌한다. 한국문학 현장의 후진성에도 불구하고 이론적으로는 서구와 보조를 맞추려고 노력하였다는 점에서 김기림의 선구적 기여를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조선에 있어서 「모더니즘」은 집단적 시운동의 모양은 갖지 못했다. 또 위에서 말한 특징을 개개의 시인이 모조리 갖춘 것은 아니었다. 오직 대부분은 부분적으로만 「모더니즘」의 징후를 나타냈다. 또 그것이 반드시 의식적인 것도 아니고 시인적 민감에 의한 천재적 발현인경우가 많았다.

김기림이 명민하게 이론적 측면에서나마 한국문학에 모더니즘을 도입하려고 하였지만, 모더니즘이 탄생한 서구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못하면서 이론만 도입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이론적으로도 드러내 보이고 있으며, 이는 결국 한국문학의 큰 약점이 된 것 같아 보인다.

「모더니즘」은 우선 오늘의 문명 속에서 나서 신선한 감각으로써 문명이 던지는 인상을 붙잡았다. 그것은 현대의 문명을 도피하려고 하는 모든 태도와는 달리 문명 그것 속에서 자라난 문명의 아들이었다. 그 일은 바꾸어 말하면 우리 신사상에 비로소 도회의 아들이 탄생했던 것이다. 題材부터 우선 도회에서 구했고 문명의 뭇면이 풍월 대신에 등장했다. 문명 속에서 형성되어가는 새로운 감각·정서·사고가 나타났다.

김기림의 모더니즘은 후진국에서 경험하는 모더니티일 뿐이었다. 서구의 모더니즘이 르네상스 이후 19세기말까지의 모더니티의 전개에 대한 실망감의 표현이며 반성의 모색이었다면, 후진국 지식인 김기림의 경우에는 도시문명이라는 르네상스적인 모더니티에 대한 감탄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근대의 과정을 아직 현실적으로 겪어보지 못한 후진국의 지식인이 근대에 대한 본질적인 반성의 논리인 모더니즘을 이론적인 측면에서나마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한계의 표현일 것이다. 문제는 김기림의 이런 약점이 지금도 무반성적으로 계승되고 있는 측면이 보인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작품분석에 있어서 작품의 전체적인 측면을 고려하고 평가하기 보다는 작품의 부분일 뿐인 인상적인 측면이나 이미지들을 강조하는 평론이 현재 한국문학의 대세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4. 김수영의 시론

 

 

김기림은 시대적 한계 때문에 육화된 근대문학이론을 전개하지 못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반면에 김수영은 다음과 같이 번역작업 등을 통하여 서구의 근대문학을 체험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의 시론에는 현장감이 있다.

 

그러나 현대시로서의 진정한 자질을 갖춘 처녀작이 무엇인가하고 생각해볼 때 나는 얼른 생각이 안 난다. 요즘 나는 리오넬 트릴링의 「쾌락의 운명」이란 논문을 번역하면서, 트릴링의 수준으로 본다면 나의 현대시의 출발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나하고 생각해보기도 했다. 얼른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10여년전에 쓴 「병풍」과 「폭포」다. 「병풍」은 죽음을 노래한 시이고, 「폭포」는 나태와 안정을 배격한 시다. 트릴링은 쾌락의 부르죠아적 원칙을 배격하고 고통과 불쾌와 죽음을 현대성의 자각의 요인으로 들고 있으니까 그의 주장에 따른다면 나의 현대시의 출발은 「병풍」 정도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고, 나의 진정한 시력은 불과 10년정도밖에는 되지 않는다.

 

김수영이 자괴감이나 선입견 없이 서구의 문학이론을 자신의 시세계에위와 같이 적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근대문학이 갖고 있었던 모방과 수입일변도란 한계적인 국면을 벗어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김수영은 다른 곳에서 “죽음이 없으면 사랑이 없고 사랑이 없으면 죽음이 없다. 詩에 다소나마 교양이 있는 사람이면 나의 이러한 연애관이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키이츠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라 실제의 체험에서 배운 것이니까 어디까지나 나의 것이다. 새로운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나의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요컨대 김수영의 강

점은 근대문화나 근대문학을 서구에 일방적으로 의존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체험적으로 형성해나가고 있다는 데에 있다.

서구의 모더니티와 모더니즘이 한국에 제대로 정착한 상황인지에 대해서는 “우리의 현대시는 아직도 제대로의 발언을 못하고 있다. 자기의 언어를 못 갖고 있다. 피부 속까지 스며드는 뼈저린 언어를 못 갖고 있다.”라고 김수영이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얼마 전에 비하면 소위 모더니스트들의 비현대적인 시도 많이 줄어진 것 같고, 詠月派의 색채가 진한 젊은 시인들의 모더니티에 접근하려는 은근한 기도가 엿보이게 된 것도 같은데, 이 달의 시만 보더라도 확고한 우리의 모더니티의 기반에서 우러나온 시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없다. 시의 모더니티란 외부로부터 부과하는 감각이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지성의 火焰이며, 따라서 그것은 시인이 -육체로서― 추구할것이지 詩가 ―기술면으로― 추구할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젊은 시인들의 모더니티에 대한 태도가 근본적으로 안이한 것 같다.

 

김수영이 시의 기교의 측면에서가 아니라 시인의 세계관의 측면에서 근대성을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선배의 허세가 아니라 울림이 있는 강력한 주장이 되는데, 이는 김수영이 한국적인 상황에서 확보해낸 모더니티의 시론이 다음과 같이 전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으로 밀고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 되고, 내용이 형식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으로 밀고나가는 것

이다.

 

김수영은 온몸시론 등 자생적 모더니즘 문학이론을 확립하면서 한국문학사에 새로운 길을 열어주게 된다.

 

 

5. 오규원의 『현대시작법』

 

 

한국 포스트/모더니즘 시론의 역사를 검토하면서 오규원의 『현대시작법』을 언급하는 이유는 김수영의 다음과 같은 지적에 대한 적절한 대응책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대시가 서구시의 식민지대로부터 해방을 하려는 노력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서구의 현대시의 교육을 먼저 받아야한다. 그것도 철저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이 교육이 모자라기 때문에「참여파」고 「예술파」고를 막론하고 그들의 작품이 거의 전부가 위태롭게 보인다. 이런 의구심은 2,30대의 시인들의 오히려 좋은 작품을 대할 때에 더 커진다.

 

1990년에 발행된 오규원의 이 책은 그 이후 여러 곳에 개설된 대학과정의 문예창작과의 기본교재가 되었는데, 이로 인해 한국근대시의 근대성에 대한 의구심을 더 이상 제기할 필요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란 감정의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세계가 숨기고 있는 모든 가치로운 것들을 감지하고 표현하는 예술 형식이다. 그런 까닭으로 시에는 푸념이나 혼잣소리가 끼어들 틈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그런 감정의 세계이다.”라는 오규원의 설명을 통과하면서 한국시의 중세적 잔재는 우려할 필요가 없는 수준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6. 김준오의 『시론』

 

 

김준오는 “개성을 남에게 드러내 보이기에는 아직 미숙하고 또 쑥스러웠기 때문”에 자신의 저서인 『시론』에다 “‘同一性의 詩論’이라는 제목을 붙이고자 했으나 결과는 그냥 『詩論』이라 해버렸다.”라고 말한다. 김준오가시의 원리를 논하는 자신의 저서에서 동일성identity이라는 개념을 핵심으로 삼는 이유는 “詩는 同一性이다”라는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서사나 극과 구분되는 서정시의 장르적 특징은 무엇보다도 “자아와 세계의 일체감”과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이라는 “시 정신 또는 시적 세계관이나 비전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의식의 차원에서, 즉 실제의 현실에서 자아와 세계는 엄연히 분리되어 있다. 나는 타인과 다르며 나 아닌 모든 사물과도 엄연히 구분된다. 그러나 서정적 자아는 세계를 내면화(자아화 또는 인간화)한다. 이런 서정적 자아의 작용에 의해서 서정시에서 자아와 세계는 동일성·일체감의 상상적 공간 속에 놓인다. 이것이 서정시의 원형이다. 세계를 내면화하는 서정적 자아의 행위 자체는 현실의 차원에서 상실된 동일성을 회복하는 일이 된다.

김준오는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은 시의 원래의 모습이자 시인이 몽상하고 갈망하는 고향”이며 이런 자아를 ‘서정적 자아’라고 부른다고 설명한다. 왜냐하면 “서정시는 극과 서사와 달리 자아와 세계 사이의 거리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거리의 서정적 결핍’lyric lack of distance이 서정시의 본질이라고 김준오는 강조한다. 이런 서정적 자아는 “세계를 자아화한다는 점에서” “어디까지나 ‘단일한 의미자’다. 다시 말하면 서정시는 ‘한’의식의, ‘한’ 목소리의 독백이다.”

김준오의 서정적 자아를 위한 동일성의 시론은 현재까지도 한국시단의 주류 이론이다. 한국시단에서 ‘시’란 대부분의 경우 ‘서정시’를 말하는데, 그 근저에 있는 대표적인 이론이 바로 지금까지 설명한 김준오의 서정적 자아의 시론일 것이다. 이런 김준오의 시론은 뉴크리티시즘에 기반을 두고 있다, 김기림이 1930년대에 도입하려고 시도하였던 뉴크리티시즘 이론을 김준오가 1980년대에 이르러 제대로 전개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I. A. 리차즈에 의해 시작된 뉴크리티시즘 이론은 T. S. 엘리엇이 비판하는 바와 같이 모더니티에 대한 비판이었던 모더니즘 예술운동을 문학비평의 한 측면에 국한하여 축소시킨 과오가 있다. 김준오가 1993년 『도시시와 해체시』를 쓰면서 이런 축소지향의 과오를 극복하려고 노력한 바 있지만, 그의 동일성의 시론이 1960년대 서구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된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운동을 포괄할 수 없었다는 현실로 나타난다.

사실 많은 현대시들에서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대립·갈등이 지배적이다. 이기철학의 용어를 빌린다면 차이·분별의 원리인 氣만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세계의 자아화라는 서정장르 이론과 전면적으로 일치하지 않으며 이 불일치 자체는 서정시 이론의 불충분함을 시사한다.

김준오의 위와 같은 자기비판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론』에서는 이에 대한 대응책, 즉 동일성의 시론에 기반을 둔 서정적 자아가 어떻게 변해야하는지 제시해내지 못하고 있다. 단지 “서정시의 한 순간은 ‘충만한 현재’다. 비록 인생의 줄거리가 없도 시는 한 순간 속에 오히려 강렬하고 집약된 형태로 자아를 표현한다.”라고 설명하면서 새로운 시문학을 위한 총체적 연구의 과제를 피하고 있다.

 

 

7. 이승훈의 시론

 

 

이승훈은 시 같은 평론 그리고 평론 같은 시를 쓰면서 이제 65권째의 저서를 냈다. 이승훈이 이렇게도 많은 글을 쓰는 이유는 자신의 존재가 모더니티의 시대와 포스트모더니티의 시대 사이에 걸쳐져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춘수는 모더니티의 시대의 끝자락에 위치하면서 자신의 시세계의 언어가 새로운 시대 속에서 무의미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그런 반면에 이승훈의 시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불안’의 정서는 두 시대 사이에 어쩔 수 없이 걸쳐 있어서 정착할 수 없게 된 자신의 자아를 끊임없이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생긴다. 이승훈이 최근에 보내온 두 권의 저서는 평론집 『선과 하이데거』 그리고 해방시학 『라캉으로 시읽기』인데, 그 제목만으로도 김준오가 회피했던 새로운 시문학을 위한 총체적 연구의 과제를 자신이 떠맡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연구 자세는 이승훈으로 하여금 한국문단의 주류 이론인 서정적 자아를 위한 동일성의 시론에 대한 전면 공격을 감행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이승훈은 『현대시의 종말과 미학』이나 『시적인 것도 없고 시도 없다』 등의 제목에서처럼 주장하게 된다. 여기서 이승훈은 ‘시’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문단의 주류 시론이 중심으로 삼는 ‘서정시’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승훈은 ‘서정시’만 ‘시’인 것은 아니라고 말하면서, 이런 해방적인 시론의 전개가 한국문학에 새로운 시문학을 창출해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8. 권혁웅의 『시론』

 

 

권혁웅은 2000년대 한국시단의 새로운 경향인 미래파라는 용어를 제시한 이론가로서 2010년 664쪽에 이르는 『시론』을 상재하였다. 권혁웅의 『시론』은 2000년대에 주목받은 시인들의 시를 분석하여 시와 시적 표현이 과거와 어떻게 달라졌는지 설명해달라는 『시와표현』뿐만 아니라 한국문단 전체의 주문에 대한 중요한 대답이라고 볼 수 있다.

이승훈이 자신의 내면에서 얼핏 발견되는 서정시적인 측면을 무시할수 없어서 다소 흥분된 어조로 소위 한국의 서정시 일변도에 대해 공격하였다면, 권혁웅은 그런 관습과 전통에서 자유롭기 때문인지 차분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분석을 시작한다.

 

 

세계의 자아화가 서정시라는 주장이 있다. 자아가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투사, 세계가 자아로 들어오는 것을 동화라고 한다. 세계를 관통하고 수렴하는 주체의 환원적 운동이 동화라면, 세계에 스며들고 확장해가는 주체의 분산적 운동이 투사다. 어느 쪽이든 서정시는 동일시의 산물이며, 이때 세계는 주체의 모노드라마가 된다. 시적인 대상이 주체의 발언을 대신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주체와 대상이 융합되는 체험, 곧 각각의 자리가 소멸되어 통전하는 체험이 서정적 체험이다.

권혁웅은 이와 같은 동일성의 시론이 “장르론에서 말하는 서정을 서정시의 영역으로 전유”한 논리적 모순을 안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시 장르를 일컫는 서정과 시의 하위장 르로서의 서정이 교착交錯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실 이것들은 좌표상의 기준점이지 범주가 아니다. 다시 말해 서정적인 것, 서사적인 것, 극적인 것, 교술적인 것이 있지, 서정과 서사와 극과 교술이라는 실체가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장르를 언술을 나누고 가르는 형식화된 체계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체계가 차이와 배제를 속성으로 삼고 있으므로 이 때의 서정은 서사와 극과 교술 장르의 잉여이거나 분할로 정의될 수밖

에 없다. 서정을 이렇게 정의하면 시 가운데 서정시 아닌 게 없게 된다. 모든 문학이 시였고, 그중에서 어떤 것들이 소설로 희곡으로 수필로 분화해갔기에 지금의 시가 모두 서정시라는 주장이 그래서 나왔다. 이 주장은 틀린 주장은 아니지만, 무의미한 주장이다. 그로써 해명되는 시적특질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서정 장르와 서정시의 위와 같은 개념적인 혼란을 제외한다면, 김준오가 주장한 동일성의 시론에 대한 검토가 서정시에 대한 반론의 핵심이 될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운동을 시론의 관점에서 정리하자면 동일성의 시론이 전제로 하고 있는 자아의 완전성에 대한 반성의 표현일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러서는 과연 자아가 독자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에 대해 본격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권혁웅은 이를 시론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하는데 한국 미래파의 시들을 이해하는 한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목소리를 대상을 지배하는 자아나 화자의 문제로 환원하지 말고, 대상과의 관련에서 생겨나는 주체의 문제로 간주하자. 대상의 본질과 배열을 검토해야 목소리를 온전히 해명할 수 있다. 시의 의미론적 국면을 검토하지 않으면 주체의 위치와 정체를 살필 수 없다. 다시 말해 시적 발언들을 에오라지 자아의 것으로 간주하면, 대상끼리의 관계와 거기에서 생겨나는 발화의 주체를 해명할 수 없다. 자아를 분석의 전제로삼는다는 것은 ‘나는 내가 한 발언들을 알고 있으며, 그 발언의 주인으로서 발언들을 온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가정을 수락하는 것이다. 차라리 ‘나는 제출된 발언의 결과로 생겨나는 목소리이며, 그 발언의 결과로서 발언들에 온전히 속해 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시와 시인과 화자를 혼동하는 악무한에서 벗어날 길이 열린다.

 

김준오의 동일성의 시론의 핵심이 자아의 완전성의 개념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그런 논리로는 현대시의 목소리를 온전히 해명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권혁웅은 “자아나 화자 개념 대신에 주체 개념을 활용”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면 첫째, “시 장르 역시 세계의 실상을 온전히 드러내는 장르라는 점이 증명”될 것이며, 둘째, “어조의 기저형을 탐색할 수”있으며, 셋째, “의미론을 시 해명의 중심 과제로 설정할 수” 있으며, 넷째, “감각의 운용 방식을 살필 수” 있다는 것, 즉 새로운 시론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모든 대상을 장악한다는 가정으로는 발화

의 심층적 층위가 드러날 수 없는” 상황이므로 “주체 개념을 활용하면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바로) 이것을 말한다’는 형식에 다음과 같은 전언들을 추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모르는) 이것을 말한다.’ ‘나는 (내가 모르는 척하는) 이것을 말한다.’ ‘나는 내가 말한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내가 말하지 않은) 이것을 말한다.’

권혁웅이 지금 개척해나가고 있는 새로운 시론은 한국문학을 포스트모더니즘을 포함한 세계의 문학과 같이 발맞추어나갈 수 있게 할 것인 바,이러한 권혁웅의 시론을 둘러싼 미래파의 개척 작업이 한국문학의 중요한 미래를 배태할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만식

1992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 『시론』, 『하느님의 야구장 입장권』, 『아내의 문학』 외

『나는 정말 아주 다르다』, 평론집 : 『해체론의 시대』 외

현 : 경원대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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