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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이전 시: 한용운 - 님의 침묵
2015년 12월 10일 23시 18분  조회:3077  추천:0  작성자: 죽림

 

한용운 선생 생가지 (韓龍雲 先生 生家址)』

<충남 홍성군 결성면에 있는 독립운동기요 승려이자 시인인 한용운 선생이 태어난 곳>

종목; 충남 기념물 제 75호  |  분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인물기념 / 탄생지  |  면적; 484㎡  |  지정일; 1989. 12. 29.

소재지; 충남 홍성군 결성면 만해로 318번길 83  |  전화; 041) 642-6716  |  관리자; 홍성군

관람안내; 매주 월요일 휴관  |  답사일; 2014. 09. 30(火), 충남 홍성의 역사 인물답사

 

 

충남 홍성의 역사 인물 답사여행, <백야 김좌진 장군 생가>에 이어 두번째로 찾은 곳은

독립운동가요 승려이자 시인이셨던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선생이 태어난 곳, 만해 한용운선생 생가」였습니다.

이곳에는 한용운 선생의 생가(生家), 사당인 만해사, 민족시비공원, 만해문학체험관 등이 잘 갖추어져 있어서

여유롭고 조용한 자연 속에서 만해 선생의 주옥같은 시편들과 함께 그의 애국정신도 느껴볼 수 있었습니다.

 

 

 

 

 

한용운 선생 생가지 전경,

이곳 만해 한용운 선생 생가는 홍성8경 중 제 3경입니다.
 

 

 


 

만해 한용운 선생 생가지 소개,

 


 


 

1989년 충청남도 기념물 제 75호로 지정된 만해 한용운 선생 생가지 안내문,

 

 

 

 

 

▲ 한용운 선생 생가지, <사진; 문화재청>

 

 

한용운 선생 생가지】승려이며 시인인 한용운(1879∼1944) 선생이 태어난 곳.

선생은 충남 홍성 출신으로 독립운동가로도 활동했으며 호는 만해(萬海).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체포되어 3년형을 받았다. 일제에 대항하는 단체였던 신간회를 주도적으로 결성하였는데, 이 신간회는 후에 학생 의거와 전국적인 민족 운동으로 전개되고 추진되었다. 저서로 『님의침묵』, 『불교대전』 등을 남겼으며 그의 사후인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낮은 야산을 등진 양지 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생가가 쓰러져 없어진 것을 1992년에 복원하였다. 가옥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초가인데 양 옆으로 1칸을 달아내어 광과 헛간으로 사용하고 울타리는 싸리나무로 둘렀으며 바깥에 흙벽돌로 화장실을 만들었다. <출처; 문화재청>

 

 

 

 

 

가장 먼저 한용운 선생 생가를 둘러보았습니다.

 

 



 

싸리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본채가 있고 바깥쪽에는 흙담 화장실,

 

 

 

 

 

문화재 표지석과 싸리나무 울타리 그리고 그 너머에는 만해 선생의 생가,


 

 


 

 

늙은 감나무 아래에서 본 생가 전경,


 



 

 

생가 가운데방 문에는 선생의 시 "님의 沈默"이 걸려 있고 방안에는 사진에 걸려있습니다.

 

 

 

 

 

 

가운데 방문 위에는 만해 한용운 선생의 "轉大法輪(전대법륜, 진리의 변화를 설명한 글)" 서각이 걸려 있습니다.

 


 


 

 

생가 후원에 있는 우물과 장독대,

 

 


 

 

초가의 양 옆에 1칸을 달아낸 모습,

 

 

 

 

 

 

한용운 선생 생가 맞은편에 세워져 있는 ㄱ자 형태의 초가,

관광객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禁門(금문)" 이란 편액이 걸려 있는 만해 한용운 선생의 사당 신문(神門),

 

 

 

 

 

 

금문 아래에서 본 만해사(卍海祠, 사당),

스님이셨던 만해 한용운 선생의 사당.

 

 


 

 

만해사 금문 앞에서 바라본 만해체험관,

 

 

 

 

 

민족시비공원에서 바라본 한용운 선생 생가와 사당,

이제 시비공원으로 민족시를 찾아 나섭니다.


 

 


 

한용운 선생의 '복종' 시비가 가장 먼저 반깁니다.

 

 

복종 服從  |  한용운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는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민족시비공원길은 아름다운 소나무 숲속 오솔길을 따라 약 30여 편의 주옥같은 시를 새긴 시비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백석(白石 白奭, 1912~1996) 시인의 "모닥불"부터 하나 하나 음미해보며 걷는 길이 참 좋았습니다.


 

 

 

 

동문수학했던 김남주(金南柱, 1946~1994) 형의 시 "자유"도 읊어 보았습니다.

 

 

자유  |  김남주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이다

땀 흘려 힘껏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이다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이다

피와 땀과 눈물을 나눠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맨날 겉으로는 자유여형제여동포여외쳐 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민족시비공원 산책로와 만해정(卍海亭),

 

 

 

 

 

 

민족시비공원 앞 감나무에는 따사로운 가을 햇살에 감들이 붉게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민족시비공원 앞에 세워진 한용운 시비(韓龍雲 詩碑, 왼쪽 사진)와 나손 김동욱 문학비(羅孫 金東旭 文學碑),

 

 

알수 없어요  |  한용운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波紋)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돍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갓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自嘲 자조  |  나손(羅孫) 김동욱(金東旭, 1922~1990, 국문학자)

 

하늘 위에 구름이 떠가면 / 잠시 기다리자

새소리가 들리면 잠깐 멈춰서자

그리고 구름 위에 아무소리 없이 태양이 가는 굉음을 들어보자

 

 

 




만해 선생의 어록비와 "나룻배와 行人" 시비

나루ㅅ배와 行人  |  한용운

 

나는 나루ㅅ배 / 당신은 行人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

나는 나루ㅅ배 / 당신은 行人



 

 

 

만해 한용운 선생이 기초한 3·1독립선언문의 공약삼장(公約三章),

 

 

 

 

 

 

한용운 선생 생가터에 있는 민족시비공원 전경,


 

 

 

 

한용운 선생 생가터에 있는 만해문학체험관,


 

 

 

 

만해문학체험관 옆에 세워진 선생의 흉상,


 

 

 

 

만해문학체험관 내부,

이곳에는 60여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어린이 체험실에는 만해 탁본교실과 300여권의 책이 비치되어 있습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초상화,

 

萬海堂龍雲大禪師之眞影(만해당용운대선사지진영)이라 쓰여 있고

그의 대표 시인 "님의 沈默"이 함께 쓰여 있습니다.

 

 

 

 

 

 

만해 연보와 님의 침묵 재간본,

 


 

 

 

만해 한용운 선생,

 

 

 

 

한용운 - 님의 침묵(沈默)



 

 
 

 

 

 

 

님의 침묵(沈默)

 

 

                        한용운 / 승려, 시인, 독립운동가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얏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독립운동가이며 승려이시고 시인이신

만해 한용운님의 시 님의 침묵.

 

 

이 시는 88편이 실린 시집 《님의 침묵》의

표제가 된 작품.

님의 침묵은 제목이 말해 주듯이 `님이 침묵하는시대'

의 님을 잃은 슬픔과 새로운 신념을 노래한

서정시.

식민지의 조국, 그의 시대를 님이 침묵하는 시대로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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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님의 일화 모음



 

▶城谷의 神童
 선생은 어릴 적부터 남달리 기억력과 이해력이 뛰어나 가끔 어른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를 신동(神童)이라고 불렀으며, 선생의 집은 신동집으로 통했다 한다.  
어느날 선생이 서당에서 《대학 大學》을 읽으면서 책의 군데군데 시커멓게 먹칠을 하고 있었다. 이상이 생각한 훈장(訓長)이 그 까닭을 물으니,
 "정자(程子)의 주(註)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미 아홉 살 때에 《서전 書傳》을 읽고 기삼백주(朞三百註)를 자해(自解) 통달했다고 하는 천재였지만, 훈장은 또 한번 놀랐다.

▶비녀가 소용없다
 선생은 1912년을 전후하여 장단(長湍)의 화장사(華藏寺)에서 〈여자단발론 女子斷髮論〉을 썼다. 당시 남자들에 대한 〈단발론〉이 사회적 물의를 크게 자아내고 있을 때 감히 여자의 단발을 부르짖은 것은 선생의 선각적인 일면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아깝게도 이 원고는 지금 전하지 않아 그 자세한 내용은 알 길이 없다. 런데 그 무렵 선생은 "앞으로 20년쯤 후가 되면 비녀가 소용없게 된다."고 예측하였으며 좋은 금비녀를 꽂고 있는 부인을 보면,  "앞으로 저런 것은 소용없게 될텐데......"하였다는 것이다.
 
▶어서 덤벼 봐라 
선생이 고성(高城) 건봉사(乾鳳寺)에 계실 때였다.
어느날 길을 가다가 술에 취한 그 지방의 어떤 부자를 만났다.
"이놈, 중놈이 감히 인사도 안 하고 가느냐? "
하고 지나쳐 가려는 선생을 가로막고 시비를 걸었다.
선생은 못 들은 척하고 가던 길을 다시 재촉하자, 그 부자는 따라와서 덤벼들었다.
선생이 한번 세게 밀었더니 그는 뒤로 나동그라져 언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선생이 절로 돌아온 얼마 후 수십 명의 청년들이 몰려와 욕설을 하며 소란을 피웠다.
"이놈들 어서 덤벼 봐라. 못된 버릇을 고쳐주겠다."하고 드디어 화가 난 선생은 장삼을 걷어붙이고 힘으로써 대결하였다. 치고 받고 하여 격투가 벌어졌다.
자그마한 체구였으나 어릴 때부터 남달리 힘이 세었던 선생을 당하는 사람이 없어 하나둘씩 꽁무니를 뺐다.

강석주(姜昔珠) 스님은 선학원(禪學院) 시절의 선생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선생은 기운이 참 좋으셨습니다. 소두(小斗) 말을 놓고 그 위를 가부좌(跏趺坐)를 한 채 뛰어넘을 정도였으니까요. 팔씨름을 하면 젊은 사람들도 당하지 못했지요."
선생은 심우장(尋牛莊)에서 종종 선학원을 찾아갔는데 혜화동을 거치는 평지길을 택하지 않고 삼청동 뒷산을 넘어다니셨다. 이때 선생을 따르던 저는 당시의 일이 이렇게 생각난다.
"삼청동 뒷산을 넘을 때 선생은 어찌나 기운이 좋고 걸음이 빠른지 새파란 청년이었던 제가 혼이 났었지요. 그저 기운이 펄펄 넘쳤어요. 선생은 보통 걸음으로 가시는데 저는 달음박질을 해도 따라가지를 못했어요."
또 조명기(趙明基)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만해 선생은 힘이 셀 뿐 아니라 차력(借力)을 하신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지요. 왜경이 뒤쫓을 때 어느 담모퉁이까지 가서는 어느 틈에 한길도 더 되는 담을 훌쩍 뛰어넘어 뒤쫓던 왜경을 당황케 했다는 말이 있어요. 그리고 커다란 황소가 뿔을 마주대고 싸울 때 맨손으로 달려들어 두 소를 떼어놓았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지요."
아무튼 선생은 남다른 역사(力士)이기도 했다.

▶痲醉하지 않은 채 받은 手術
 선생이 만주 땅 간도(間島)에 갔을 때의 일이다. 어떤 고개를 넘다가 두서너 괴한(怪漢)들이 쏜 총탄을 목에 맞고 쓰러졌다. 피가 심하게 흘러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환상으로 관세음보살이 나타났다. 하얀 옷을 입고 꽃을 든 아름답기 그지없는 미인의 모습인데, 미소를 던지면서 그 꽃을 선생에게 주면서 "생명이 경각에 있는데 어찌 이대로 가만히 있느냐"고하였다.
이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려 중국 사람의 마을을 찾아가서 우선 응급치료를 받고 곧 한국 사람들이 사는 마을의 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되었다. 이때 의사는 큰 상처여서 매우 아플테니 마취를 하고 수술하자고 했으나 선생이 굳이 마다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마취를 하지 않았다. 생뼈를 깎아내는 소리가 빠각빠각 날 뿐 아니라 몹시 아플텐데도 까딱 않고 수술이 끝날 때까지 견뎌냈다. 의사는 "그는 인간이 아니고 활불(活佛)이다"고 감탄하며 치료비도 받지 않았다 한다.

▶네 郡守지, 내 군수냐
선생이 백담사(百潭寺)에서 참선(參禪)에 깊이 잠겨 있을 때 군수가 이곳을 찾아왔다. 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와서 영접을 하였으나 선생만은 까딱 않고 앉아 있을 뿐 내다보지도 않았다.
군수는 매우 괘씸하게 생각하여, 저기 혼자 앉아 있는 놈은 도대체 뭐기에 저렇게 거만한가! "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선생은 이 말을 듣자마자 "왜 욕을 하느냐?" 고 대들었다. 군수는 더 화가 나서,뭐라고 이놈! 넌 도대체 누구냐? "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선생은 "난 한용운이다."하고 대답했다.
군수는 더욱 핏대를 올려 "한용운은 군수를 모르는가! "하고 말하자, 선생은 더욱 노하여 큰 목소리로, "군수는 네 군수지, 내 군수는 아니다."라고 외쳤다.
위엄 있는 이 말은 군수로 하여금 찍 소리도 못하게 하였다.
 
▶僧侶娶妻論의 辯
 《불교유신론 佛敎維新論》을 발표했을 때 이중에 들어있는 승려취처론에 대한 시비가 벌어졌다. 이때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당면문제보다도 30년 이후를 예견한 주장이다. 앞으로 인류는 발전하고 세계는 변천하여 많은 종교가 혁신될텐데 우리의 불교가 구태의연(舊態依然)하면 그 서열에서 뒤질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금제(禁制)를 할수록 승려의 파계(破戒)와 범죄는 속출하여 도리어 기강(紀綱)이 문란해질 것이 아닌가. 후세 사람들은 나의 말을 옳다고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한 나라로서 제대로 행세를 하려면 적어도 인구는 1억쯤은 되어야 한다. 인구가 많을수록 먹고 사는 방도가 생기는 법이다. 우리 인구가 일본보다 적은 것도 수모(受侮)의 하나이니 우리 민족은 장래에는 1억의 인구를 가져야 한다.

▶月南 李商在와의 訣別
 3·1운동을 준비할 때, 선생은 이 독립운동을 조직화하기 위해서는 민중의 호응을 가장 널리 불러일으킬 수 있는 종교단체와 손을 잡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기독교측의 이상재 선생을 만나서 대사(大事)를 의논하였다. 이 자리에서 월남은
 "독립선언을 하지 말고 일본 정부에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를 제출하고 무저항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유리하오."라고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선생은
 "조선의 독립은 제국주의에 대한 민족주의요, 침략주의에 대한 약소 민족의 해방 투쟁인 만큼 청원에 의한 타력본위(他力本位)가 아니라 민족 스스로의 결사적인 행동으로 나가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하고 주장했다.
 이같이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선생은 월남과 정면 충돌하였기 때문에, 월남을 지지하는 많은 기독교 인사들이 선생의 의견에 호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생은
 "월남이 가담했더라면 3て1운동에 호응하여 서명하는 인사가 더욱 많았겠지만...... 죽음을 초월한 용맹이 극히 귀하다."고 한탄했다. 서명서에 기명 날인이 잘 되면 백명 이상은 되리라던 예측이 그만 무너지고 말았다.
 
▶죽기 참 힘든 게로군
 선생은 3·1운동의 준비 공작을 서두르는 동안 여러 인사를 만났다. 박영효(朴泳孝)와 한규설(韓圭卨)과 윤용구(尹用求)들을 차례로 접촉해 보았다. 그러나 대개는 회피하고 적극적인 언질을 피하였다. 서울의 소위 양반과 귀족들은 모두가 개인주의자요, 국가와 민족을 도외시한다고 한탄하며
 "죽기 참 힌든 게로군! "하고 말했다.

▶당신을 그대로 둘 수 없다
선생은 최린(崔麟)의 소개로 천도교 교주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이때 의암은 조선 갑부 민영휘(閔泳徽)て백인기(白寅基), 그리고 고종(高宗) 못지 않은 호화로운 생활을 했으며, 조선인으로서는 제일 먼저 자가용 자동차까지 가지고 있었다. 선생이 3て1운동에 천도교측이 호응해 주기를 요구했더니 먼저 이상재는 승낙했느냐고 물었다. 선생은
"손 선생께선 이상재 선생의 뜻으로만 움직입니까? 그러면 이 선생이 반대하니 선생도 그를 따르렵니까? 그러나 이미 대사(大事)가 모의되었으니 만일 호응하지 않으면 내가 살아있는 한, 당신을 그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하고 힘의 행사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말을 하였다.
이 말에 적이 놀란 의암은 자기를 총대표(總代表)로 내세우는 조건으로 서명을 승낙했다. 의암의 이 승낙으로 천도교의 여러 인사들은 의암을 그대로 따르게 되었다.
 
▶함께 독립 만세를 부릅시다
 기미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중 김병조(金秉祚), 길선주(吉善宙), 유여대(劉如大), 정춘수(鄭春洙) 네 사람을 제외한 29인이 명월관 지점인 태화관에 모여 독립을 선언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가 너무 심하여 선언서를 낭독할 겨를조차 없었다. 부득이 선언서의 낭독을 생략하여 연설로 대신하고 축배를 들게 되었다.

 최린의 권고로 만해 선생이 앞에 나서서 33인을 대표하여 독립 선언 연설을 하였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민족을 대표해서 한자리에 모여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기쁘기 한이 없습니다. 그러면 다 함께 독립 만세를 부릅시다! "
 간단하고 짧은 연설이지만 선생은 하고 싶은 말을 다한 셈이었다.

▶가짜 권총
  3·1운동 준비로 동분서주하던 선생은 당대의 거부 민영휘(閔泳徽)를 찾아갔다. 그에게 독립운동에 협조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거절하므로 선생은 권총을 끄집어내었다. 민영휘는 새파랗게 질려 벌벌 떨면서 돕겠노라고 맹세했다. 이때 선생은 힘있게 쥐었던 그 권총을 그의 앞에 내놓았다. 이 권총은 다름아닌 장난감 권총이었다. 탐정 소설에나 나오는 듯한 흥미있는 이야기지만 선생의 이런 수단은 오직 독립만을 생각하는 나머지 취해진 비장한 행위였다.
 민영휘는 맹세한 터라 "비밀리에 모든 협조를 하겠소. 그에 필요한 비용도 주겠소. 그러나 이후부터는 다시 나를 찾지 말고 내 아들 형식(衡植)과 상의하여 일을 추진시켜 주기 바라오. 부디 성공을 비오."라는 간곡한 뜻을 말했다.
 민형휘는 이 일이 있은 후 선생의 절친한 친구의 한 사람이 되어 물심양면으로 조선 독립을 도왔고, 선생이 별세하였을 때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와서 선생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 郭鍾錫과 萬海
  만해 선생은 3·1운동을 계획하면서 독립선언 서명자 가운데에 유림(儒林) 출신의 인사가 한 사람도 끼어 있지 않는 것을 개탄했다. 서울에는 유림 지도자들이 있으나 거의 친일에 기울어져서 경남 거창(居昌)에 사는 대유학자 면우(면宇) 곽종석 선생을 찾아갔다.
  만해 선생은 면우 선생에게 먼저 세계 정세를 알리고 독립운동의 참가 여부를 물으니 즉석에서 협조할 것을 쾌락하고 곧 가사(家事)를 정리한 뒤에 서울에 올라가 서명하겠노라고 약속을 했다.
  그러나 면우 선생은 공교롭게도 독립 선언일을 몇일 앞두고 급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래서 아들에게 자기 인장을 갖고 만해 선생을 찾아 뵙게 하였다.
 
▶獄中에서의 大喝
 3·1운동으로 투옥되어 있을 때, 최린은 일본이 우리나라 사람을 차별대우할 뿐만 아니라 압박하고 있다는 말들을 하며 총독 정치를 비판했다.
 이때 묵묵히 듣고 있던 선생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아니, 그럼 고우(古友)는 총독이 정치를 잘한다면 독립 운동을 안 하겠다는 말이오! "라고 하였다.

▶監房의 汚物
 민족 대표들은 모두 감방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이렇게 갇혀 있다가 그대로 죽음을 당하고 마는 것이 아닐까? 평생을 감옥 속에서 살게 되지나 않을까? "
 그들이 속으로 이러한 불안을 안고 절망에 빠져있을 때, 극형에 처한다는 풍문이 나돌았다. 선생은 태연자약하였으나 이런 얘기를 전해들은 몇몇 인사들은 대성통곡을 하였다. 이 모스?? 지켜보던 선생은 격분하여 감방 안에 있는 똥통을 뒤엎어 그들에게 뿌리고,
 "이 비겁한 인간들아, 울기는 왜 우느냐. 나라 잃고 죽는 것이 무엇이 슬프냐? 이것이 소위 독립 선언서에 서명을 했다는 민족 대표의 모습이냐? 그 따위 추태를 부리려거든 당장에 취소해 버려라! "라고 호통을 치니,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日本은 敗亡한다
 독립 선언 서명자들이 이 법정에서 차례로 신문(訊問)을 받을 때, 선생은 일체 말을 하지 않았다. 재판관이 "왜 말이 없는가? "라고 묻자, 다음과 같은 대답으로 재판관을 꾸짖었다.
 "조선인이 조선 민족을 위하여 스스로 독립 운동을 하는 것은 백번 말해 마땅한 노릇. 그런데 감히 일본인이 무슨 재판이냐? "
 신문이 계속 되자, 선생은 "할 말이 많으니 차라리 서면으로 하겠다."고 지필(紙筆)을 달래서 옥중에서 장문의 〈조선독립의 서 朝鮮獨立의 書〉를 썼다.
 여기에서 선생은 조선 독립의 이유, 독립의 자신, 독립의 동기, 민족의 자유 등에 대한 이론을 전개하고 총독 정치를 비판하였던 것이다.
 결심공판(結審公判)이 끝나고 절차에 따라 최후 진술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선생은
 "우리들은 우리의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 정치란 것은 덕(德)에 있고 험(險)함에 있지 않다. 옛날 위(魏)나라의 무후(武侯)가 오기(吳起)란 명장(名將)과 함께 배를 타고 강을 내려오는 중에 부국(富國)과 강병(强兵)을 자랑하다가 좌우 산천을 돌아보면서 "아름답다 산하의 견고함이여, 위국(魏國)의 보배로다"하고 감탄하였다. 그러나 오기는 이 말을 듣고 "그대의 할 일은 덕에 있지, 산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덕을 닦지 않으면 이 배 안에 있는 사람 모두가 적이 되리다"고 한 말과 같이, 너희들도 강병만을 자랑하고 수덕(修德)을 정치의 요체(要諦)로 하지 않으면 국제사회에서 고립하여 마침내는 패망할 것을 알려두노라."라고 말했다.
과연 선생의 말씀대로 일본은 패전의 고배를 마시고 쫓겨갔다.
 그러나 이 사실을 예견했던 선생은 끝내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바로 그 전해에 별세하였다.
 
▶ 마중받는 인간이 되라
 선생이 3·1운동으로 3년간의 옥고(獄苦)를 치르고 출감하던 날, 많은 인사들이 마중을 나왔다. 이들 중 대부분은 독립 선언 서명을 거부한 사람이요, 또 서명을 하고도 일제의 총칼이 무서워 몸을 숨겼던 사람들이었다. 선생은 이들이 내미는 손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얼굴둘만을 뚫어지게 보다가 그들에게 침을 탁탁 뱉았다. 그리고는,
 "그대들은 남을 마중할 줄은 아는 모양인데 왜 남에게 마중을 받을 줄은 모르는 인간들인가."라고 꾸짖었다.

▶鐵窓  哲學
 선생이 3·1운동으로 3년 동안의 옥고를 치르고 나온 약 1개월 뒤, 조선불교청년회의 주최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강연회가 열렸다. 이때의 연제는 철창 철학이었는데 회장은 초만원을 이루었다. 일제의 임검으로 온 경관은 미와(三輪)란 일본 형사였다. 연설이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해산 명령은 물론이며, 현장에서 연사를 포박해가는 때였으나 이런 분위기에서도 선생은 임검에 거슬리지 않게 하면서 청중들을 열광시켰다. 약 2시간 동안이나 연설을 하였는데 맨 마지막에는 비장한 어조로
 "개성 송악산(松岳山)에서 흐르는 물은 만월대(滿月臺)의 티끌은 씻어가도 선죽교(善竹橋)의 피는 못 씻으며, 진주 남강(南江)에 흐르는 물은 촉석루(矗石樓) 먼지는 씻어가도 의암(義岩)에 서려있는 논개(論介)의 이름은 목 씻는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우뢰와 같은 박수 소리가 오래 계속되었으며, 이 일본 경찰관까지 박수를 쳤다고 한다.
 
▶島山과 萬海
 만해 선생이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과 나라의 장래를 의논한 일이 있다.
 이때 도산은 우리가 독립을 하면, 나라의 정권은 서북(西北) 사람들이 맡아야 하며, 기호(畿湖) 사람들에게 맡길 수는 없다고 하였다.
 만해 선생이 그 이유를 물으니, 도산 선생은 기호 사람들이 오백년 동안 정권을 잡고 일을 잘목했으니 그 죄가 크며, 서북 사람들은 오백년 동안 박대(薄待)를 받아왔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한다. 그후부터 만해 선생은 도산 선생과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 인도에도 金允植이 있었구나
 3·1운동이 일어난 얼마 뒤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이 그전에 일제가 준 남작(男爵)의 작위를 반납한 일이 있다. 이것은 독립 운동의 여운이 감도는 당시에 취해진 민족적인 반성이었다. 이 일이 있은 몇달 뒤 인도(印度)에서는 우발적인 일치랄까, 우리나라를 동방의 등촉이라고 노래한 바 있는 시인 타고르가 영국에서 받았던 작위를 반납하였다. 이것은 간디의 무저항주의적인 반영(反英) 운동의 자극을 받은 때문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선생은,
"인도에도 김윤식이 있었구나"하는 묘한 비판을 하였다.

▶神이여, 自由를 받아라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저명 인사들의 강연회를 열었을 때, 선생은 마지막으로 자유에 대하여 연설하였다.
 "여러분, 만반진수(滿盤珍羞)를 잡수신 후에 비지찌개를 드시는 격으로 내 말을 들어 주십시오. ...... 아까 동대문 밖을 지날때 과수원을 보니 가지를 모두 가위로 잘라 넣았는데 아무리 무정물(無情物)이라도 대단히 보기 싫고 그 무엇이 그리웠습니다"하는 비유를 들어 부자유(不自由)의 뜻을 말하자, 청중들은 모두 박수를 쳤다. 부자유를 과수원의 가지 잘린 나뭇가지에 비유한 것은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자유를 빼앗긴 것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입회 형사는 그 뜻을 모르고 박수를 하는 청중들에게, 고작 과수원 전정(剪定) 이야기인데 박수를 하느냐고 청중의 한 사람에게 따졌다. 그랬더니 이 사람은 재치 있게도,
 "낸들 알겠어요. 남들이 박수를 하니 나도 따라 쳤을 뿐이지요"라고 임기웅변으로 대답했다. 그래서 잠시 폭소가 터졌다고 한다. 선생은
 "진정한 자유는 누구에게서 받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주는 것도 아닙니다. 서양의 모든 철학과 종교는 "신이여, 자유를 주소서"하고 자유를 구걸합니다. 그러나 자유를 가진 신은 존재하지도 않고 또 존재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이 부자유할 때 신도 부자유하고 신이 부자유할 때 사람도 부자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히려 스스로가 자유를 지켜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이여, 자유를 받아라" 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하고 열을 뿜었다.
 "신이여, 자유를 받아라" 하는 이 말을 그때 참삭했던 사람들은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自 助
1923년 조선민립대학 기성회의 선전 겅연회가 종로 기독교회관에서 열렸다. 만원을 이룬 가운데 월남 이상재 선생의 사회로 유성준(兪星濬) 선생의 조선민립대학 기성회 발기 취지에 대하여라는 열변에 이어 만해 선생은 자조라는 연제로 불은 뿜는 듯한 열변을 토했다. 말끝마다 청중의 폐부를 찌르는 선생의 독특한 웅변은 청중들을 열광케 했다.
 
▶우리의 가장 큰 원수
 선생은 웅변에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말이 유창하고 논리가 정연하며 목소리 또한 맑고 힘찼다. 그리고 선생이 강연을 하게 되면 으레 일제의 형사들이 임석하게 되었는데 어찌나 청중들을 매혹시키는지 그들조차 자기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고 한다.
 "여러분, 우리의 가장 큰 원수는 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소련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미국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아슬아슬한 자문자답식 강연에, 임석했던 형사들은 차차 상기되기 시작했다. 더구나 청중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장 큰 원수는 일본일까요? 남들은 모두들 일본이 우리의 가장 큰 원수라고 합디다" 선생의 능수능란한 강연은 이렇게 발전해 갔다. 임석 형사가 눈에 쌍심지를 켠 것은 바로 이때다.
 "중지! 연설 중지! "
 그러나 선생은 아랑곳없이 어느새 말끝을 다른 각도로 돌려놓고 있었다.
 "아닙니다. 우리의 원수는 소련도 아니요, 미국도 아닙니다. 물론 일본도 아닙니다. 우리의 원수는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 우리들 자신의 게으름, 이것이 바로 우리의 가장 큰 원수라는 말입니다."
 말끝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청중들은 박수갈채를 했다. 이쯤 되니 일제 경찰들도 더 손을 못 대고 머리만 긁을 뿐이었다.

▶昭和를 燒火하다
 선생이 신간회(新幹會)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으로 있을 때 공문을 전국에 돌려야 할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인쇄해 온 봉투의 뒷면에는 일본 연호인 소화(昭和) 몇 년 몇 날이란 글자가 찍혀있었다. 이것을 본 선생은 아무 말 없이 천여장이나 되는 그 봉투들을 아궁이 속에 처넣어 태워버렸다.
 이 광경을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선생은 가슴이 후련한 듯
 "소화(昭和)를 소화(燒火)해 버리니 시원하군! " 하는 한마디를 던지고는 훌훌 사무실을 떠나버렸다.

▶나를 埋藏시켜라
  선생은 젊은이들을 사랑할 뿐 아니라 모든 기대를 그들에게 걸었다. 따라서 젊은 후진들이 선생 자신보다 한걸음 앞장서 전진하기를 마음 깊이 바라고 있었다. 공부도 더 많이 하고 일도 더 많이 하여 선생 자신과 같은 존재는 오히려 빛이 나지 않을 정도로 되기를 바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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