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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파시와 미래파시인은 미래가 있을가...
2016년 01월 20일 20시 41분  조회:4985  추천:0  작성자: 죽림
 

 <미래파> 시인들의 시 이렇게 읽었다

미래에 관한 몽상

                                         /이경수(문학평론가)

1.<웰 메이드(Well-made)>의 비애
먼저 고백할 것이 있다. 2000년대 상반기의 일군의 젊은 시인들의 시적 경향에 대해 <미래파>라고 규정하는 것에 대해 솔직히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러한 명명하기의 방식에는 개별 시인들의 차이에 주목하기보다는 이들에게서 공통적인 성향을 추출해 그것을 집단화하고자 하는 인정투쟁의 욕망과 세대론적 전략이 숨어 있게 마련이다. 명명하기에 동의하지 않으며 이들의 공통점보다는 차이에
좀더 주목하겠다는 뜻이다. 권혁웅은 황병승, 장석원, 김민정, 유형진의 시를 대표적으로 들며 역사와 시대에 대한 채무의식이 없고 전통 서정의 흐름에 포섭되지 않는 일군의 젊은 시인들을 새로운 흐름이라 보며 <미래파>라 지칭한다. 오래 전에 잊혀진 역사적 이름을 재호명하기는 했지만, <미래파>라는 정의에 이들이야말로 우리 시의 미래를 열어갈 만한 새로운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는 긍정적 평가가 전제되어 있다. 좀더 엄밀하게 말해서 내가 <미래파>라는 명명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는, 이들이 보여주는 시세계가 새롭다는 사실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는 그 새로움에 대한 가치평가에 동의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미래파>라는 명명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선이해에 이들의 시가 그다지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지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적어도 이들의 시가 지니는 미학적 전복성만큼은 미래파라는 규정에 얼마간 부합한다고 양보할 수 있겠다. 다만, 그것이 과거와는 달리 삶의 기반을 뒤흔드는 인식의 전복성에로 나아가지 못하고 미학적 전복성에 그친다는 데 과거의 미래파와 새로 호명된 <미래파>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어떤 것을 구획 짓고 정의내리지 않으면 논의를 진행하는 데 훨씬 어려움이 따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한 어려움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글이 <미래파>라는 정의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는 앞서 말한 차이가 지니는 의미가 생각보다 큰 것임을 환기하고자 함이다. 새로움은 인정하되 그 새로움에 대한 가치평가에 생각의 차이가 있는 것이므로, <미래파>라는 규정을 따르지는 않더라도 이 글에서 다루는 시인들의 범위는 우리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선을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시들과 얼마간의 공통점을 지니면서도 출생년도라든가 시집 출간 시기, 작품의 다양한 성향 등에서 어긋나 논의의 중심에서 소외된 시인들의 시 역시 이 글에서는 가급적 논의의 대상으로 끌어들이려고 한다. 편의상 배제되었던 시들에서 이질적인 흐름을 포착할 수만 있다면 우리 시의 <다른> 미래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래파>라는 규정에 대해 동의하거나 혹은 침묵하거나로 일관해 왔던 평단의 반응에 아주 작은 파장이라도 일으켜 우리 시의 미래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되기를 희망하며 <다른> 미래를 꿈꾸는 몽상을 이제 시작하려 한다.
먼저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2000년대 상반기의 새로운 시적 경향이 보여주는 언어적 완성도에 대해 나 역시 인정하고 매혹을 느끼고 있다는 점을 밝힌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이들의 시적 경향은 우리 시의 스펙트럼을 다양하게 넓히고 있으며, 첫 시집을 내는 시인답지 않게 이들은 개성적인 자기 언어와 전략을 가지고 새로운 시를 쓰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들의 시는 잘 제작된 시이다. 바로 여기에 이 시들의 매력과 한계가 동거하고 있다. 전략이 분명하고 시집 한 권이 고른 완성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은 칭찬할 만하지만, 신기하게도 바로 그 점으로 인해 이 시들은 가슴보다는 머리로 읽는 시에 가까워진다. 분석의 욕망을 불러일으키지만, 가슴을 치거나 울리는 절절한 감동은 없는 시. 아니, 애초에 그런 감동을 노리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시론과 기획을 가지고 씌어지되, 애초에 선을 분명히 긋고 시작하는 시. 잘 정제 된 만큼 거친 단면이 잘 보이지 않는 시. 아니, 거친 단면조차도 철저하게 계산된 시. 날것의 언어를 쓰고 기성의 언어를 끊임없이 전복하는데도 소수만이 읽을 수 있는 마니악(maniac)한 시. 그래서 아무리 부정해도 엘리트주의의 잔향을 풍기는 시. 다른 매체나 장르와의 혼종적 상상력을 통해 놀이로서의 문학을 구현하되 놀이 뒤의 배후가 궁금해지는 시. 나는 잘 제작된 최근의 시들을 읽으며 <웰 메이드>의 한계랄지 비애를 느꼈다. 즐거워야 할 언어의 유희가 그다지 즐겁지 못한 까닭은 이러한 비애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2. 자기모멸과 냉소의 배후
어느 시대나 문학예술은 기성의 문학을 극복하고 넘어서고자 한다. 새로움이라는 가치가 부상하게 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새로움에 대한 추구는 우리 문학의 자장을 넓혀 왔지만, 그것이 강박으로 작용할 때 자기 함정에 빠지기도 한다. 물론 문학사에서 어떤 성공보다 의미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러한 실패가 이후의 문학에 미친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이미 지난 세기에 하늘 아래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다고 선언되었지만, 여전히 새로운 것을 향한 강박적 추구는 계속되고 있다. <지금, 여기>에서 그러한 추구는 시라는 장르 관습을 허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정시를 정의해온 수많은 이론들은 <지금, 여기>의 한국 현대시를 설명하는 데 무력해지진 지 오래이다.
황병승, 장석원, 김민정의 시는 오랫동안 통용되어 오던 서정시의 장르 관습을 허물고 있다는 점에서 함께 다룰 만하다. 이들의 시가 취하는 전략은 저마다 다르지만, 서정시의 원리로 <회감>을 말하거나 <세계의 자아화>를 떠올리거나 <동일성>을 거론하는 기성의 관점을 거부하고 다성성과 혼종성을 구현하려 한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황병승 시의 주체는 통합되지 않은 분열의 양상을 보이고, 장석원의 시는 다성적 발화를 실험하며, 김민정의 시는 기괴한 것을 가볍게 다루는 유희의 전략을 시도한다. 이들의 시는 서정시라는 장르 관습을 파괴하며 넘치는 발화의 욕망을 시에 담아내고자 한다. 기존의 서정시라는 그릇으로는 그것을 다 담아낼 수 없으므로 기존의 그릇을 깨뜨리고 <다른> 그릇을 찾고자 한다. 적어도 이들의 시에서는 여러 개의 가면이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하는 일이 가능하며 그것이 하나의 얼굴로 통합되지 않는다. 아니, 통합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결국 모든 것은 진력이 나게 마련이다 크로켓이든 카드놀이든

앨리스 부인은 창밖으로 펼쳐진 눈세계를 바라보다, 소설책을 내려놓았다
십 년 만의 외출, 그녀는 스케이트를 어깨에 메고
생쥐들과 함께 눈물 호수 쪽으로 걸었다

혹한이 휩쓸고 간 숲 속의 고요한 아침
태엽장치 돼지들의 함성도 오리앵무새의 구슬픈 노랫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텅 빈 허공에 대고 입술을 맞춰보는 시간)
이것 봐, 올겨울엔 아무도 스케이트를 타지 않았어
눈물 호수 앞에서 앨리스 부인이 소리쳤다,
칼자국 하나 없는 이 빙판 좀 봐!

그녀는 생쥐들과 함께 빙판을 내달렸다.

언제나 그렇듯, 왼편은 원숭이 오른편은 토끼
이쪽은 춤추고 저쪽은 눈물바다지
어느 쪽으로 가도 상관없어 어차피 양쪽 다 미친 것들이니까
구름을 흔드는 웃음소리,
하늘에 걸린 체셔 고양이의 얼굴

스케이트 날이 지나간 자리마다 검은 물이 엷게 배어나왔고
나쁜 냄새가 났다.
―황병승, 「Cheshire cat′s Psycho Boots 7th sauce―여왕의 오럴섹스 취미」(『여장남자 시코구』,2005)부분

크로켓이나 카드놀이에 진력이 난 앨리스 부인처럼 황병승 시인 역시 서정시를 둘러싼 장르 관습에 진력이 난 것인지도 모른다. 칼자국 하나 없는 빙판에서 스케이트를 타듯 자유롭게 어디든 갈 수 있다고 그의 시는 말한다. <왼편은 원숭이 오른편은 토끼>로 나뉘어 한쪽은 놀이에 빠지고 다른 쪽은 과장되게 진지해져 신파가 되는 일은 어디서든 일어난다. 왼편과 오른편이 낡은 이분법을 겨냥한다면, 우리의 문학 역시 오랫동안 낡은 이분법의 망령에 시달려 왔다. 여기서 황병승 시인은 <어느 쪽으로 가도 상관없어 어차피 양쪽 다 미친 것들이니까>라고 말하며 왼편과 오른편을 동일시해 버린다. 이들이 비슷한 오류를 범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역사와 시대에 대한 채무의식이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언은 언제든 이분법의 양극단의 차이는 물론이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마저 일거에 무화하는 또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다. 이쯤에서 혁명적 새로움에 매혹된 미래파의 문학이 초기의 파시즘과 쉽게 제휴하는 오류를 범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제 그는 어디로 가든 광기를 벗어나기는 어려워 보인다. 기존의 것을 부정하고 파괴하여 다른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부정의 대상이 분명해야 한다. 황병승 시인이 부정하고 싶었던 것은 기성의 언어, 기성의 장르 관습이었겠지만, 과거에 있었던 모든 것을 부정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그의 시는 어디로 가든 마찬가지가 되어 버린다. 전방위적 부정은 부정을 위한 부정이 되기 쉬우며, 허무주의와 냉소주의에 닻을 내리기 쉽다. <구름을 흔드는 웃음소리>는 통쾌한 폭로의 웃음이라기보다는 공허하고 헛헛한 웃음이 된다. 그의 시가 피우는 <나쁜 냄새>는 어디까지나 기성의 도덕적 관점으로 봤을 때 나쁜 냄새인 것이지만(여기까지라면 <나쁜 냄새>는 다분히 문학적이다), 그것이 유일무이한 자유와 미래라는 가치를 획득하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정말 <나쁜 냄새>를 피우고 만다. 이 시들이 열어갈 미래에 대한 긍정적 찬사가 <스케이트 날이 지나간 자리마다> 엷게 배어나오는 <검은 물>마저 가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황병승 시의 미덕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자기모멸의 언어를 내뱉는 바로 그 아이러니에 있는 것이 아닐까.

끝난 것은 사랑이 아니라 혁명이고, 여전히 끝나지 않은 것이 혁명이라는 반혁명도 존재하고, 반혁명의 혁명을 꿈꾸기에 아직도 미래를 열어보이겠다고 호언하는 방사성 동위원소 같은 존재들도 있다. 혁명 너머를 생각하지 않는 나의 후배 혁명이는 그래서 오토바이를 조그만 반역의 불수레라고 생각한다. 그의 이름은 주민등록증에 革命이라고 지재되어 있다. 진실은 저 너머에 있지 않고 행정 서류에 기재되어 있다.

시대를 관통하는 사슬과 그 사슬에 묶여 있는 노인의 초상을 본다. 종교적인 긴장이 찾아온다. 갑자기 행성과 항성이 충돌하고, 중성자가 원자핵을 관통하고, 남자가 여자를 지나가고, 그가 나를 돌파한다. 때로 유령이 떠돌기는 했으나 안전했다. 안전한 춤을 추기에 이 집은 적당하다.
―장석원,「동방의 서점에는」(『아나키스트』, 2005)부분

장석원의 시에서 지난 시대의 꿈이었던 혁명은 이미 끝난 것으로 선언된다. 아직도 색깔론이나 이념논쟁을 들먹이며 혁명을 경계하는 세력(반혁명)과 아직도 시대착오적 망상에 사로잡혀 장밋빛 미래를 열어 보이겠다고 호언장담하는 낭만주의자들을 시인은 방사성 동위원소 같은 존재들이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규정에 진실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을 동일시해버리는 순간 지난 시대는 죽은 과거가 되어 폐기처분당하고 만다. 그리고 혁명은 한낱 언어유희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린다. 그것이 우리 시대의 단면을 정확히 겨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노리는 바가 어디에 있는지를 좀더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진실은 저 너머에 있지 않고 행정 서류에 기재되어 잇다>고 냉소적으로 진단하는 순간, 지난 시대의 진실은 파시즘으로 규정되며 차이 없이 묻혀 버리고 만다. 그러나 그렇게 비웃어 버리기에는 지난 시대의 진실의 무게가 그리 가볍거나 만만치 않다. 시인은 자신이 살아온 시대를 모멸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안전한 춤을 추기에> 적당한 집을 비웃고 싶었는지도 모르지만, 이 자기 모멸에서는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말마따나 끝난 것은 사랑이 아니라 특정한 의미로 제한된 혁명일 뿐이다. 혁명을 향한 지난 시대의 꿈은 사랑의 다른 이름에 다름 아니다. 아니키스트를 표방하는 지독한 모멸과 냉소 뒤에는 이 시대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단호한 사형선고가 깔려 있는 셈인데, 이제 장석원 시인은 아니키스트를 동경하며 자기모멸을 퍼붓고 있는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할 필요가 있다. 냉소를 지지함으로써 희망 없음을 미리 전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여 안전한 춤을 추기에 적당한 집에 덜 미안하게 정착하기 위한 자기합리화는 아닌지, 아나키즘과 자유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시인이 그토록 부정하고 싶어하는 제도와 국가와 권력에 대한 무관심을 조장하는 정치성을 모른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면서 말이다. 그가 새롭게 시도하는 다성성의 전략이 냉소와 자기모멸과 전방위적 부정을 넘어서 사랑의 발견으로 나아가는 언어의 혁명을 이룰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자기 시로부터 한걸음 물러설 필요가 있어 보인다.
김민정의 시에 나타나는 만화적 상상력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지면에서 언급한 적이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엽기적인 만화적 상상력을 통해 그녀가 노리는 가벼움과 유희의 전략에 대해서만 간략히 논하려고 한다. 김민정의 시는, 감추고 숨기는 것이 미덕이었던 시어의 함축성에 과감히 도전장을 던진다. 그녀의 시는 노골적으로 까발려 보여주는 노출의 전략을 통해 시 장르의 경계 확장에 공헌하고 있다. 가족과 성이라는 이름으로 <지금, 여기>에 남아 있는 금기를 위반하고 해체하기 위해 그녀의 시는 서정시를 둘러싸고 있던 언어의 감옥을 부수어 버린다. 가볍게 웃어젖히며 그녀의 시는 모든 종류의 도덕적 금기와 진지함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 웃음은 통쾌하기보다는 히스테릭해 보인다. 웃음의 배후에는 <지금, 여기>에 대한 불안함이 깔려 있지만, 아무것도 책임지고 싶어하지 않는 그녀의 시는 불안의 징후를 은폐하며 끝없이 달아나려고 한다. 허기진 듯 미끄러지는 그녀의 언어는 좋게 말해서 탈주의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머릿속의 유목이자 모니터 앞에서의 환상일 뿐이다. 그녀가 구사하는 위반의 전략이 파괴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불안의 정체에 대한 탐색이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러시아의 미래파가 마야코프스키라는 걸출한 시인을 낳았고 이후 1917년의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지는 계기를 마련한 데 비해, 이탈리아에서 미래파가 초기의 파시즘과 결합되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차이와 다양성을 내세우며 <지금, 여기>에 대해 허무주의적이고 냉소주의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이들의 시가 <지금, 여기>을 불가항력이자 대안이 없는 세계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단호한 배제의 전략을 내세우는 또 하나의 파시즘을 산출할 수 있다는 점은 정말이지 아이러니하다. 90년대 중반 이후 집중적으로 비판받았던 80년대의 파시즘이 단순하고 순진한 면을 지니고 있었던 데 비해, 차이를 가장한 <지금, 여기>의 파시즘의 가능성은 훨씬 교묘하고 여러 겹으로 은폐되어 있어서 그만큼 더 프로페셔널하고 더 위험해 보인다. 머릿속으로는 자유로운 유목을 펼치지만 그것은 불가항력의 현실에 대한 대리만족의 수단일 뿐이어서 자칫 냉소적 태도만을 양산할 우려가 있다. <다른 미래>의 가능성을 애초에 봉쇄해 놓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또한 분명히 정치적이다.

3. 메타시의 빛과 그늘
2000년대 상반기의 젊은 시인들의 시는 낡은 서정성을 신봉하는 기성의 시를 겨냥하고 있다. 90년대에 생태주의의 유행과 함께 떠오른 신서정은 낭만적 신화와 근대적 계몽의 한계를 동시에 노출했다. 자연으로 도피하고 고향을 신화화하는 시들이 대거 씌어지면서 90년대 이후 집단적 흐름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2000년대 상반기에 젊은 시인들이 보여준 새로운 감수성과 언어 실험은 생태주의에 기반을 둔 신서정의 흐름에 대한 거부라는 점에서 일정한 의미를 지닌다. 생태주의의 이념은 진보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불행히도 그것이 문학적 성취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우리의 생태주의 문학은 <지금, 여기>에 대한 고뇌보다는 낭만적 환상으로의 도피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 자연은 이미 근원으로서의 순수성을 훼손당한 존재임을, 생태주의와 결합한 서정시는 간과했다. 이 글에서 다루는 일군의 2000년대의 젊은 시인들이 자연과 고향을 잃어버린 존재로 자기 세대를 규정하는 까닭은 생태주의 문학이 놓친 지점을 환기하기 위해서이다.
유형진은 디지털적 감각을 지닌 자신의 세대를 <모니터킨트>(「모니터킨트」, 『피터래빗 저격사건』, 2005)라 부르며 이들에게 자연과 고향은 더 이상 서정적인 의미를 지니지 못함을 고백한다. 오히려 이들에게는 모니터 속에 펼쳐지는 시각적 인공 세계야말로 정신적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서정시를 대타향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시는 메타시라불릴 만하다. 표제시인 「피터래빗 저격사건」 연작 세 편은 유형진 시인이 왜 그토록 고향에서의 낭만적 시간을 망각하고 싶어하는지 좀더 분명히 보여준다. 유년의 고향을 기억하면서부터 시적 주체는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고 평화로움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는 피터래빗의 저격을 의뢰하면서 자신에겐 고향이 없다고 선언한다. 고향을 잃어버린 것도 잊은 것도 아닌, 그냥 없을 뿐이라는 선언은 유년의 고향에 대한 전면 부정이다. 애초에 돌아갈 고향이 없다는 점이야말로 자기 세대의 특징임을 유형진 시인은 간파한다.
등단작인「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바나나파이를 먹었다」에서만 해도 아날로그적 감성과 변화한 디지털적 감각 사이에서 흔들리는 시적 주체의 모습이 발견되지만, 이후 그녀의 시는 피터래빗을 죽이고 디지털적 감각에 스스로를 맡긴다. 디스토피아적 인식이 엿보이는 「UN 성냥」이나 「애주가i」, 「버블버블랜드의 츄잉」(『현대시학』,2005.10) 같은 시에서 <지금, 여기>의 현실에 대한 세기말적 진단과 절망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논리적이고 전략적인 그녀의 시에서 해석의 잉여는 그리 풍부하지 못하다. 특히 「애버뉴b」연작시 같은 작품은 그녀의 시적 관심이 <지금, 여기>의 현실을 환기하거나 반성적 시선을 견지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의 언어로 독립된 세계를 구축하는 것으로 이동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기 언어와 전략을 가져야 한다는 강박이 그녀의 시에 냉소와 환멸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게 하는 것은 아닌지 조금은 우려 섞인 시선으로 그녀의 시집 이후의 추이를 지켜보아야 할 것 같다.
권혁웅의『마징가 계보학』(2005)은 치밀한 전략으로 짜여진 지난 시대에 대한 후일담이라는 점에서 메타시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시집이다. 그의 시에서 만화영화나 대중가요, 에로영화 같은 대중문화의 체험과 그가 체험한 폭력(시대적 폭력으로부터 개인사적 폭력에 이르기까지)은 교묘히 맞물리며 웃음의 전략을 구사한다. 그의 시에서 웃음은 해석의 시선으로부터 발생한다. 가령 아내에게 지칠 줄 모르고 폭력을 행사하는 고철 수집상(마징가Z)과 그의 폭력을 보다 못해 나서서 그를 흠씬 두들겨 팬 오방떡을 파는 사내(그레이트 마징가)와 그가 열심히 일하는 사이에 바람나서 집을 나가버린 그의 아내(찡가)와 그들의 위력과 세월마저 잊게 하는 힘(그랜다이저)을 늘 새롭게 업그레이드되었던 만화영화 속 로봇의 계보학으로 구성해냄으로써 지난 시대의 후일담이라는 서사를 완성하는 것은 그의 두드러진 시적 전략이다.(「마징가 계보학」)거기에 만화영화 주제가의 적절한 삽입과 계란 사용법이라는 비유적 장치를 활용해 짐짓 딴청을 피우는 시적 주체의 어법과 전략이 웃음을 자아낸다. 그 웃음은 냉소보다는 실소에 가깝다.
「애마부인 略史」나 「광기의 역사」등을 통해 권혁웅 시인이 구축하는 계보학은 아날학파의 미시사의 방법론을 시에 도입한 형태에 가깝다. 이러한 방법론은 그의 시에서 기원과의 낯선 마주침을 통해 <지금, 여기>를 흔들거나 간섭하는 방식으로 작용하기보다는 세목들을 부각시킴으로써 인간사의 지리멸렬함을 보여준다. 그가 펼쳐놓은 후일담에는 시적 주체의 해석의 시선이 들어있지만, 그의 관심사는 시대와 역사적 의미를 들어낸 인류의 보편사에 놓여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권혁웅의 시 역시 지난 시대의 시, 좀더 정확하게는 거대 역사에 대한 관심이 지배적이었던 80년대의 시에 대한 메타시로서의 기능을 갖는다. 자칫 단조로워질 수 있는 메타시의 한계를 시인이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그 역사의 세목들을 시적 주체를 둘러싼 가난의 체험이라는 서사와 웃음의 전략으로 채우고 있을 뿐이다.

4. 차이를 만들기 위한 첫걸음
<미래파>라 명명되어 온 2000년대의 젊은 시인들을 묶어서 보았을 때 가질 수 있는 장점은 분명하다. 이들의 시가 공통적으로 지니는 새로운 감수성에 세대론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이 집단적 흐름을 이룬다면 새로움의 의미가 지니는 파장이 더욱 커질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공통점 못지않게 이들 시인에게서 발견되는 차이가 크고 그것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에 주목하면, 이러한 정의 내리기가 흐름에 쉽게 포섭되지 않는 많은 시인들을 배제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설령 앞서 살펴본 시인들과 함께 묶여 논의된다 해도, 환상성이라든가 대중문화적 상상력의 유입, <다른 신체―되기>의 상상력 등이 집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시인들의 경우라든가 의도된 전략이 앞서의 시만큼 강하게 드러나지 않는 시를 쓰는 시인들, 주된 흐름에 포섭되기보다는 이질적으로 빠져나가는 부분이 더 많은 시를 쓰는 시인들의 경우에는 논의의 중심에서 소외될 게 뻔하다.
이제 2000년대 시인들에 대한 논의의 중심에서 배제되거나 주변화 되어 온 몇몇 시인들의 가능성을 살펴보면서 이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앞서 다룬 시인들과 전략적으로나 감수성의 측면에서나 얼마간의 유사점이 발견되면서도 이질성을 띠는 시인으로 정재학, 진은영, 이재훈, 김이듬 등을 들 수 있다. 2004년 1월에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라는 첫 시집을 낸 정재학 시인은 환상성의 구현이라는 측면에서 오히려 선구적이었지만 최근의 젊은 시인들을 대상으로 한 논의의 장에서는 소외되어 왔다. 앙드레 브루통의 초현실주의 선언을 문득문득 떠올리게 하는 정재학의 시는 그로테스크하고 암울하고 잔혹하고 병적인 환상의 세계를 구축한다. 반복의 주술을 종종 활용하는 정재학 시의 환상에서는 <지금, 여기>의 현실을 환기하는 이미지들이 이따금씩 발견되어 슬픔을 유발한다.<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라는 불가능한 언술이 주문처럼 반복되면서 희생과 구원의 이미지를 형성하게 되고 마침내 제의가 완성된다. 반복의 주술성은 정재학의 시에 靈性을 불어넣는데, 이러한 특징은 그의 시가 환상의 허무주의에 함몰되는 것을 막는다.
진은영의 시에도 환상은 자주 출몰하는데, 그것은 대개 낭만과 잔혹이라는 양극단의 얼굴을 하고 있다. 대립적이고 모순적인 언술이 공존하는 것은 진은영 시의 특징이다. 그녀의 시가 부정하는 대상은 근대적인 제도로서의 가족으로부터 낡고 고정적인 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녀의 시에는 천상과 지상을 잇는 상상력이 종종 등장하는데, 그녀가 자유자재로 펼치는 환상의 배후에는 천상의 세계에 속한 <어머니―손가락>으로의 근원적인 회귀가 자리 잡고 있다.(『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2003) 진은영 시의 환상은 유희성과 관계가 없다는 점에서 동시대 시인들의 시와 차별된다.
광활한 시공을 끌어들임으로써 시원에 대한 신비한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는 이재훈의 경우는 쉽사리 포섭되지 않는 시적 개성으로 인해 최근의 시에 관한 논의에서 배제되었지만, 오히려 개성적으로 우리 시의 또 다른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2005)는 치밀하게 짜여진 전략에 의해 구성된 시집은 아니지만, 들쑥날쑥하다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표제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가 보여주는 세계는 우리 시의 형이상학의 한 영역을 개척할 수 있는 긍정적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2005년에 『별 모양의 얼룩』이라는 시집을 출간한 김이듬 시인은 황병승, 김민정, 이영주 등과 함께 묶여서 종종 거론되지만, 상대적으로 덜 전략적인 특성으로 인해 논의의 중심에서는 소외되어 왔다. 유년의 상처가 시의 원천을 질기게 형성하고 있는 김이듬의 시는 몸이나 성적인 이미지가 자주 출현한다는 점에서 김민정의 시와 함께 논의될 때가 많지만, 유희적 전략을 구사하는 김민정의 시와는 달리 억눌리고 닫혀 있는 자폐적인 세계를 구축함으로써 깊은 슬픔을 자아낸다. 김이듬의 시는 전략을 내세우거나 시론을 내세우는 시가 아니지만, <노력해야 한다면 그만둬야 해요>(「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사소한 문제」)라는 발언을 통해 제작하는 시에 대한 거부 의사를 표명하고 있어서 동시대 시에 대한 반성적 언술로도 주목할 만하다. 그녀는 시집 제목처럼 <별 모양의 얼룩> 같은 시를 쓰고 싶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별 모양> 같은 의미로 읽힐 수 있고, 지우려 들수록 더 스며들고 번져서 통증처럼 자리 잡은 시. 죽음 가까이 갔다가 모두의 기대를 배반하며 눈을 뜨는 시. 김이듬의 시 역시 아직은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데 급급하지만, 적어도 전략을 전면에 내세워 시를 제작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녀의 시에서는 진정성이 느껴진다.

특정한 경향의 시인들을 주로 다루는 글이므로 여기서는 서정의 흐름을 계승한 새로움의 징후를 보이는 시인들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못했다. <미래파>라는 명명은 새로운 경향의 젊은 시에 속하지 않는 흐름을 노골적으로 배제하면서 긍정적 미래의 가능성을 미래파에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서 대체로 나타나는 <이 세계는 이미 끝났다>는 판단은 도저한 허무주의와 냉소주의를 동반한다. 냉소주의는 종종 폭로의 전략과 어우러지는데, 이 글에서 다루는 시인들의 시는 장르 관습과 기성의 시적 언어에 대한 위반과 전복을 꾀하기는 하되, 자기 기반을 폭로하지는 않는다. 이들의 시가 이미 전제하고 있는 이 세계의 불가항력은 뿌리 깊은 절망을 생산하지도 못하면서 <다른 미래>의 가능성을 아예 차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제 물어보아야 할 때이다.
<다른 미래>를 위한 첫 걸음은 상상만으로 오지 않는다. 분류와 명명의 욕망에 굴복하지 전에 이질적인 차이를 발견하고 다른 흐름을 만들어 가려는 실질적인 노력이 뒷받침될 때, 불가항력의 벽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할 것이다. <다른 미래>는 <다른 현재>를 위해 한 걸음을 내딛는 데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냉소와 자기모멸에 우리 시의 미래를 헌납하기 전에 <다른 미래>를 여는 이질적인 흐름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개개의 시인들이 보여주는 이질적인 면모에 좀더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미래파>라 명명된 시인들 역시 우리 시의 미래의 한 축을 담당하겠지만, 이들 개개의 차이에 대해 좀더 주목할 필요가 있고, 이들과는 다른 이질적인 흐름에서 <다른 미래>의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움직임이 지속될 필요가 있다. 시대와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이 없다고 말해지는 이들의 시에서도 아이러니하게도 80년대 문학의 그림자가 여전히 어른거린다고 말하면 내가 과민한 것일까. 그 억압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지난 시대의 문학을 어떻게 버리고 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축적되어야 한다. 미학적으로는 급진적이되 현실 앞에서는 무기력하고 불가항력인 <지금, 여기>의 젊은 시를 우리 시의 미래라고 추켜세우기에 앞서, 문학은 물론 문화 전반에 출몰하고 있는 유희적인 문학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좀더 진지한 성찰이 필요해 보인다. 요동치는 波高 위에서는 발 빠른 것만이 능사는 아닌 듯하다. 유행과는 무관하게 움직이는 이질적인 흐름들을 포착하는 밝은 눈이 그 어느 때보다는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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