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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마 유치환 시인과 정운 이영도 시조시인와의 사랑詩
2016년 05월 24일 23시 45분  조회:5177  추천:0  작성자: 죽림
청마 유치환과 이영도의 사랑 시

 

이영도 : 시조시인. 호는 정운(丁芸).
경상북도 청도(淸道) 출생. 시조 시인 이호우(李鎬雨)의 여동생이다.

1945년 [죽순]동인으로 활동하며 등단함. 민족 정서를 바탕으로 잊혀가는 고유의 가락을

시조에서 찾고자 노력하였으며, 간결한 표현으로 자신의 정감을 다스리며 인생을 관조하는

세계를 보여줌. 시집으로는 《청저집》(1954),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1968) 등

정운(이영도)는 재색을 고루 갖춘 규수로 출가하여 딸 하나를 낳고 홀로 되어

해방되던 해 가을 통영여중 가사 교사로 부임했다.

해방이 되자 고향에 돌아와 통영여중 국어교사가 된 청마의 첫눈에 정운은 깊은

물그림자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일제하의 방황과 고독으로 지쳐 돌아온 남보다 피가 뜨거운 서른 여덟 살의 청마는

스물 아홉의 청상 정운을 만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불길이 치솟았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통영 앞 바다에서 바위를 때리고 있는 청마의 시

'그리움'은 뭍같이 까딱 않는 정운에게 바친 사랑의 절규였다.
유교적 가풍의 전통적 규범을 깨뜨릴 수 없는 정운 이기에 마음의 빗장을 굳게 걸고 청마의

사랑이 들어설 틈을 주지 않았다.
청마는 하루가 멀다하고 3년 동안 편지를 쓰고 시를 써댔다.
날마다 배달되는 편지와 청마의 사랑 시편들에 마침내 빙산처럼 까딱 않던 정운의 마음이

녹기 시작했으니 청마가 정운에게 보낸 편지들은 모두 그대로 시였다.

 

내가 언제 그대를 사랑한다던?
그러나 얼굴을 부벼들고만 싶은 알뜰함이
아아 병인양 오슬오슬 드는지고 덧없는 목숨이여
소망일랑 아예 갖지 않으매
요지경 같이 요지경 같이
높게 낮게 불타는 나의 -노래여, 뉘우침이여
나의 구원인 정향! 절망인 정향!
나의 영혼의 전부가 당신에게만 있는 나의 정향!
오늘 이 날이 나의 낙명(落命)의 날이 된달지라도 아깝지 않을 정향
-

 

끝이 보이지 않던 유치환의 사랑은 갑작스런 죽음으로 끝이 났다.

1967년 2월 13일 저녁,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붓을 영영 놓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이렇게 고운 보배를 나는 가지고 사는 것이다

마지막 내가 죽는 날은 이 보배를 밝혀 남기리라 - 유치환 -

 

통영 여자중학교 교사로 함께 근무하면서 알게 된 이영도

그녀는 일찍이 결혼하여 21살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당시 딸 하나를 기르고 있었다

청마는 1947년 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보냈다.
그러기를 3년, 마침내 이영도의 마음도 움직여 이들의 플라토닉한 사랑은 시작됐으나
청마가 기혼자여서 이들의 만남은 거북하고 안타깝기만 했다.
청마는 1967년 2월 교통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20년 동안 편지를 계속 보냈고 이영도는 그 편지를 꼬박꼬박 보관해 두었다.
그러나 6·25전쟁 이전 것은 전쟁때 불타 버리고 청마가 사망했을 때 남은 편지는

5,000여 통이었다.

당시 <주간한국>이 이들의 '아프고도 애틋한 관계'를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라는 제목으로 실은 것이 계기가 되어
청마의 편지 5,000여 통 중 200통을 추려 단행본으로 엮었다.

 


이 청마의 사랑 편지가 책으로 나오자 그날로 서점들의 주문이 밀어 닥쳤고
베스트셀러가 되어 무명 중앙 출판출사는 대번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마땅히 인세는 청마의 유족에게 돌아 가야 할 것이나
정운은 시전문지'현대시학'에 '작품상'기금으로 기탁 운영해 오다 끝을 맺지 못하고
1976년 3월 6일 예순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뜬다.

.

탑(塔) 詩/ 이영도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
손 한 번 흔들지 못하고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는 사리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

 

시인 청마 유치환과 이영도의 20여년에 걸친 플라토닉사랑은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는

전설과 같을 것이다.
사랑은 미완성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이 시를 읊을 때마다 그 애절하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고백이 눈물겹다

 

불장난이 아닌 충실한 사랑을 짙게 물들여 그의 장년기를 수놓는 제2의 청춘 가로 채웠던

그는 외로운 사랑을 했으며 죽음도 그 안에서 너그러운 사랑 속에 안길 수 있었다.
바로 <주는 사랑>의 행복한 연가로 폭을 넓히고 무르익었다. 영원한 것,

平常無事의 터득 속에서 익힌, 온화한 자애의 소근거림을 펼쳐 보이고 있다.

교육자이기도 한 그는 같은 학교에서 만난 이영도를 정신적으로 무척 좋아하였다....
이미 처 자식이 있는 상태였던 그는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가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기 전까지 그녀에게 200통의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

 

이영도 정운 선생이 1976년 예순의 나이로 타계한 뒤 무남독녀 박진아씨가 유품을 정리하니

미리 써둔 유서가 나왔고 유서에는 딸에게 사위에게 외손에게 부탁하는 말이 들어 있었다.

거기에는 죽음을 알릴 사람의 이름과 화장해 달라는 말,

그리고 장례비에 써달라는 상당한 액수의 돈이 함께 들어 있었다.

남에게 신세지기를 꺼리고 신세를 지면 갚으려고 하는 분이었기에 당신의 죽음 역시

비록 딸이지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하였던 모양이다.

근검절약으로 일생을 부지런히 살았던 그녀는 택시를 타는 일이 거의 없고, 값비싼 음식을

사먹는 일이 없고 물건을 쌌던 포장 노끈까지도 잘 간수했다가 재활용하고 원고지

뒷면의 활용은 물론 편지를 쓰다가도 틀린 곳은 다시 종이를 덧붙여 썼다.

철 지난 달력의 아름다운 그림들은 잘 손질하여 화장실 부엌 같은 곳에 진열하기도 했다.

자신의 삶을 이렇게 근검 절약하면서도 남을 위한 배려는 돈독하였다.

후배 문인의 딱한 사정을 접하면 언제나 먼저 나서 도우고자 하였다.

냉기 속에서 청춘의 타오르는 불꽃을 오로지 시조로써 달래야 했던 정운 선생.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우려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窓만 바라다가

그대로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이것은 첫 시조집 '청저집(靑苧集)'(54년)에 실렸던 작품('무제Ⅰ')으로,

경남 통영시에서 당시 교편을 잡고 있던 정운 선생이 청마 유치환과의 연정을 한창 싹틔우고 있을

무렵의 심경을 토로한 작품이다.

 

정운 선생은 1940년 대말~50년 대말 통영에서 10여 년간 머물렀고, 50년 대 말에 부산으로

옮겨와서 67년 초까지 부산에서 생활했다.

일찍이 혼자가 되어 오직 시를 쓰는 일과 딸 하나를 키우는 일에 전념하면서 어느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 이영도는 그 당시의 많은 남성 문우들로부터 선망을 받고 있었다.

이영도가 혼자의 몸으로, 그렇게 꿋꿋하게 그의 시와 딸을 지키면서 살 수 있었던 것은

청마 유치환과의 애정에 크게 힘입었던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이영도로 하여금 외로움과 여러 가지 고난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받쳐 주는

든든한 정신적 지주가 되었으며 청마를 향한 그리움은 그의 시를 시들지 않게 해준

충분한 자양이 되었다.


사랑하는 정향!
바람은 그칠 생각 없이 나의 밖에서 울고만 있습니다.
나의 방 창문들을 와서 흔들곤 합니다.
어쩌면 어두운 저 나무가, 바람이, 나의 마음 같기도 하고
유리창을 와서 흔드는 이가 정향, 당신인가도 싶습니다.
당신의 마음이리다.
주께 애통히 간구하는 당신의 마음이 저렇게 정작 내게까지 와서는 들리는 것일 것입니다.

나의 귀한 정향, 안타까운 정향!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나와 같은 세상에 있게 됩니까?
울지 않는 하느님의 마련이십니까?
정향! 고독하게도 입을 여민 정향!
종시 들리지 않습니까?
마음으로 마음으로 우시면서 귀로 들으시지 않으려고 눈감고 계십니까?
내가 미련합니까?
미련하다 우십니까?
지척 같으면서도 만리 길입니까?
끝내 만리 길의 세상입니까?

정향!
차라리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 죄 값으로 사망의 길로 불러 주셨으면 합니다.
아예 당신과는 생각마저도 잡을 길 없는 세상으로

-유치환으로부터 이영도 여사에게-

 

 

여기 지고지순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정운 이영도의 시조를 적어 본다.

황혼에 서서 - 이 영도


산(山)이여, 목메인 듯
지긋이 숨죽이고

바다를 굽어보는
먼 침묵(沈默)은

어쩌지 못할 너 목숨의
아픈 견딤이랴

너는 가고
애모(愛慕)는 바다처럼 저무는데

그 달래입 같은
물결 같은 내 소리

세월(歲月)은 덧이 없어도
한결 같은 나의 정(情)


진달래 - 이영도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爛漫)히 멧등마다,

그 날 스러져 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恨)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가슴 위엔
하늘이 무거운데,

연연(戀戀)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山河).

 

이 시조는, 산에 난만히 피어 있는 진달래로 부터 4·19 혁명 때 희생당한 젊은이들의 넋을

떠올리며 그들에 대한 추모와 자기 회한의 정을 읊은 작품이다.

선생의 무덤은 경북 청도군 내호 마을 선영 아래 오빠인 이호우 선생 곁에 있다.

정운 선생이 배출한 제자는 그리 많지 않지만 다들 괄목할만한 시인으로 성장하였다.

에필로그 ; 유치환과 이영도의 사랑을 떠올리며 - 김남식


이루지 못할 사랑인 줄 알면서도 20년 간 지켜간 그네들의 사랑은 불륜이라 치부하기엔

진정한 사랑과 고통이 있었기 때문으로 흔히 나의 이야기는 '로맨스'고,

남의 이야기는 '불륜'이라지만, 이 두분의 사랑은 불륜이라 이름하기엔 너무 아름답다.

청마가 유부남이고 자신은 딸을 둔 미망인이라는 이유로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지만
청마는 3년 동안 혼자서 변함없는 사랑을 보였다.


흔히 이별의 가장 많은 원인은 자존심 때문이기에 진정한 사랑엔 자존심이 살아있지 않음을

혼자서라도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 주는 청마가 곁에 있는 이영도 시인이 부러웠다.
과연 청마 외에 이런 남자가 있을까라는 생각도 해 보면 이영도의 가슴 아픔이 저려 온다.
싫어서가 아닌데..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그 마음을 그 누가 알까요?
한편으론 행복하고 한편으론 아팠을 그 마음 변함없는 사랑에 어쩜 유치환 보다

더 울었을 이영도 사랑 한다고 할 만큼 아팠을 이영도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픔이 얼마나 크게 아팠을까요.

그리고 바로 건너편 2층 집에 그토록 사랑 할 여인이 곁에 있었으니
어쩜 유치환은 행복하기만 했을까?

이영도가 있었기에 바위처럼 꿋꿋하기만 했던 청마도 애련의 글을 쓸 수가 있었다.
이영도는 청마의 시 세계를 넓혀주었다.
3년만에 청마에게 마음을 연 이영도로 인하여 그들은 20년 동안 사랑을 키웠다.
인스턴트 사랑이 판치는 현대에서 분명 이들의 사랑은 가치가 있는 것으로
아마 유치환이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죽지만 않았다면 더 긴 세월을 사랑했을 것이다.

 

유치환에게 받은 편지를 한 통도 버리지 않고 모아 둔 이영도의 마음이 너무 예쁘다

훗날 어디에 쓰려고 그렇게 모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거창하게 출판까지는 꿈꾸지 않았을것이다
유치환이 이영도를 사랑한 만큼 이영도는 유치환을 사랑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누군가에게 연서를 보낼 수 있고 또한 받을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세간에서 불륜이라기 보다는 참 아름다운 숭고한 사랑이라고 이름해 주는

그런 사랑을 나의 태도에 상관없이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

 

 

청마기념관은 2층으로 되어 있는데 청마에 대한 대부분의 자료를 수집해 놓고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청마 사후 시조시인 정운 이영도님이 발간한 청마의 서한집(청마가 정운에게

보낸 편지모음)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라는 오래된 책자다. 1967년 청마가 교통사고로 죽은지

한달만에 발간되어 당시에는 기록적인 25,000부가 팔렷다는 베스트 셀러였다.

 

 

 

시인 김규태의 인간기행 <2> - 이영도의 청마연서 출판사건 이란 글에 이책이 간행된 일화가 나온다.

 

 

 

청마 유치환은 세계에서 가장 긴 연서를 쓰고 간 시인이다. 아마 기네스북도 이런 고급스러운 기록을 발견했더라면

호재로 삼았을 것이다. 그가 40대 전후의 나이에서 운명한 60세까지 5000여 통의 간절한 연서를 한 여인에게 간단없이

띄웠으니 말할 나위없다. 그것은 하나의 일과였다. 시조를 정갈하게 써 온 정운 이영도는 누가 보더라도 청초한 아름

다움과 남다른 기품을 지닌 여인상이었다. 평생 한복을 입었다. 계절에 맞춰 하늘하늘한 옥색 모시적삼이나 하얀 모시

옷을, 진보라나 검정 한복을 즐겨 입었다. 머리 매무새는 조선조의 여인처럼 동백기름을 발라 뒤로 땋아서 말아 올렸다.

 그는 어느 날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만일 재혼을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남으로부터 손가락질은 젖혀두고라도 더

불행해졌거나 가여움을 받았을 것이다. 자신과 재혼을 주선했던 상대들이 모두 저명한 인사들이었는데 자신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이란다. 그 가운데는 영문학자이며 시인 수필가인 이양하 교수가 있었다. 이를 두고 일찍이 타계한 예로

삼았다. 딸 하나 있는 청상으로서 불행한 재혼보다 청마와의 염결한 사랑의 지속을 다행으로 여긴다는 얘기다.

청마가 병마 아닌 교통사고로 운명했을 때 이왕 비극은 맞았지만 또 하나의 걱정거리가 생겼다. 이영도는 우선 다른 젊은

여인들이 청마의 연서를 책으로 묶어 내는 것이 두려웠다. 이런 여인들 문제로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다. 서둘러야

했다. 이 지상에서 청마를 진정으로 사랑한 당사자는 자신이라는 징표를 남겨두기 위해서다. 청마가 운명하자마자 연서

뭉치를 상품화하는 행위를 부도덕으로 밀어붙일 것이 염려되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운명한 지 불과 한달 사이다.

 이영도는 이 때 평소 청마와 자기 사이의 다리를 묵묵히 놓아 주던 최계락의 얼굴이 떠올랐다. 최계락은 당시 국제신보의

문화부장이었다. 이영도가 최 부장을 은밀히 만나 의논한 끝에 청마의 연서를 최계락의 안목으로 가려 뽑는 조건으로 책으로

묶기로 했다.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란 표제가 붙여졌다. 청마 시의 한 구절에서 따 왔다. 연서집은 2만5000부가량 팔려

나갔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다. 수익금은 뒷날 '현대시학사'에 넘겨져 정운 문학상의 기금으로 적립되었다.

 

 

 

청마가 통영여중에 근무할 당시인 1947년에는 국어 청마 유치환, 음악 윤이상, 미술 전혁림, 가사 정운 이영도 선생님이 가르

쳤다니 그당시 통영여중 학생들은 대단한 선생님들께 배운것이다.

 

 

 

1987년 청마 사후 한달만에 발간된 서한집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청마의 유명한 시. 행복

 

 

 

 

 

 

 

 

 유명한 청마의 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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