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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지휘자, 그리고 "신의 소리"
2016년 12월 07일 23시 06분  조회:5994  추천:0  작성자: 죽림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Wilhelm Furtwangler,1886∼1954, 독일 )
- 시대의 어둠을 뚫고 환희의 합창으로

 

 

 

 

 

 Inner Link

 

신의 권위를 대신하게 된 지휘자

 

 

 

세르주 첼리비다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아돌프 히틀러

파울 힌데미트

멤피스 벨(영화)

 

   양의 중세 사회는 기악 연주자를 낮게 평가했다. 기악 연주자들의 사회적 위치는 교회음악이론가나 성악가에 비해 형편없이 낮았다. 그 대표적 원인은 중세의 음악이 종교 음악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기독교 교회에서는 물질 숭배를 멸시했기 때문에 악기 연주가 허락되지 않았다. 중세 사회를 지배한 음악적 양식은 단선율 음악으로 서기 500년에서 1100년 사이에 성행했다. 악보는 9세기경의 산물로 단선율 음악은 악보가 필요 없었다. 이런 단선율 음악은 성()음악과 속()음악으로 구분되어 전해지는데 대표적인 것이 찬트(chant), 플레인송(plain song)이고 속음악은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12-13세기에 이르러 찬트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고 당대의 음악가들은 다성음악을 만들기 위해 엄격하고 경직된 교회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시대의 흐름을 견딜 수 없었던 교회는 다선율 음악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14세기 이후 작곡가들은 필리프 드 비트리의 새 체계에 따라 악보를 쓰기 시작했으며, 이 방식은 유럽 전역에 퍼져 서양음악의 기초가 되었다. 중세 교회의 권위와 세력이 점차 약화되고 있다는 증거는 음악에서 제일 먼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후 봉건 영주의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이제 음악가들은 교회와 귀족이라는 양자 택일이나마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드디어 초기 오케스트라가 결성되고 장 밥티스트 륄리란 지휘자가 최초로 지휘봉이란 것을 들고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 시작했다.(후일 이 지휘자는 자신이 지휘하던 지휘봉에 제 발을 찔러 죽고 만다. 당시의 지휘봉은 말 그대로 봉() - 지팡이만한 막대기였기 때문이다.)

  오케스트라의 비약적인 발전은 근대에 이르러 교회와 귀족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시민 계급이 형성되면서부터이다. 단원의 숫자가 늘어나고, 복잡하고 장대한 규모의 교향곡 같은 관현악곡이 만들어지는 등, 이때부터 오케스트라는 비좁은 교회와 궁정을 벗어나 대규모 음악당과 오페라 하우스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지휘자는 비로소 신의 권위를 짊어진 교회와 권력의 정점이었던 황제와 귀족, 부를 축적한 시민 계급을 대신해 오케스트라를 자신의 지휘봉 아래 두게 된다. 지휘자가 음악을 해석하고 창조해내는 절대적 권위는 어찌보면 신으로부터 위임받은 신성 불가침의 영역이 되어버린 것이다.

 

젊은 시절의 푸르트벵글러 - 그는 인문학적인 소양을 쌓을 수 있는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그런 소양을 바탕으로 훌륭한 인격자로 단원들의 존경을 받았다.

 

 

 

지휘하는 푸르트벵글러 - 그의 지휘법에 대해서는 때로 단원들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투덜대기도 했지만 그가 일반적인 지휘법을 몰라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단원들을 위해 정식의 지휘법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결국 단원들의 이해를 구할 수 있었고, 최고의 연주를 보여주었다.

 

 

 

불타는 독일제국의회 의사당 - 나치는 이 사건을 빌미로 독일 내 공산당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공포정치의 시작이었다.

 

 

 

 

 

불후의 명반으로 손꼽히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베토벤 교향곡 제9번 - 전후 녹음이다. 최근들어 그의 전시 녹음도 역시 절대 명연으로 추증되었다. 이외에도 그의 연주 중 명반으로 손 꼽히는 연주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몇 년도 녹음이냐에 따라 그의 해석 방식도 달라진다. 베토벤의 교향곡 전곡, 특히 3번 ‘영웅’ (52년), 5번 ‘운명’(54년), 6번 ‘전원’(52년), 7번(50년) 등 EMI 스튜디오 레코딩과 푸르트벵글러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는 라이브 레코딩인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의 3번(44년)과 5번 (47년), 그리고 EMI 레이블의 유명한 바이로이트 실황 9번 ‘합창’ (52년) 등이 그것이다. 한편 슈만의 교향곡 4번(DG, 51년), 브람스의 교향곡 1번(DG, 52년), 3번(EMI, 49년), 4번(EMI, 48년) 등도 명반이다. * 참고로 한 말씀 더 드린다면 나는 푸르트벵글러의 <베토벤 9번>의 전시 녹음과 전후 녹음을 다 가지고 있는데 전시 중 녹음은 아직까지 포장도 뜯지 않은 상태로 보관하고 있다. 정말 듣고 싶지만 나에게 가장 특별한 순간 경험하고 싶기 때문이다.

 

 


독일 후기낭만주의의 지휘계보와 20세기 음악사

  19세기말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가 된 한스 폰 뵐로는 신적인 권위를 가진 지휘자 상을 정립한 신화적인 인물이었다. 20세기로 접어들며 작곡에서의 거장의 시대가 저물고 바야흐로 20세기는 지휘의 시대가 되었다, 그 시기를 열어젖힌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한스 폰 뵐로였다. 그 위대한 지휘자의 세기인 20세기에서도 가장 위대한 지휘자가 바로 지금부터 말하려고 하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이다. 뵐로의 대를 이은 아르투르 니키쉬(Artur Nikisch), 그리고 다시 그것을 이어받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독일 후기 낭만주의의 전통을 정점으로 끌어올렸다. 그런 그와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 바로 아르투르 토스카니니였다. 즉물주의로 함축되는 그의 지휘 철학에 있어서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은 단지 '알레그로 콘 브리오(빠르고 쾌활하게)'일 뿐이었다.

  그는 주관성과 연주장에서의 감정 이입 같은 것은 철저히 배제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악보의 해석에 골몰했다. 토스카니니의 이런 해석은 당시로서는 커다란 찬반 양론의 격론을 불러일으켰고, 독일을 제외한 다른 지역의 지휘자들로부터 찬사를 받으며 미국의 NBC 방송국은 그를 위해 오케스트라를 조직해 주기까지 했다.(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토스카니니편에 하겠다.) 어쨌든 이 두 사람은 세계 지휘계를 양분하며 영향력을 행사했다. 어느날 푸르트벵글러가 토스카니니를 우연히 만나 나의 연주를 듣고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토스카니니는 "나는 악보에 적혀 있는 것을 그대로 소리로 옮기고 있다"고 대꾸했고, 이 말을 들은 푸르트벵글러는 "그렇다면 나는 악보 뒤에 숨어 있는 음표들을 찾고 있다"고 응수했다. 이 두 거장의 음악관을 알아차릴 수 있는 일화이다. 이처럼 푸르트벵글러는 소리 뒤에 숨어 있는 정신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함으로써 실제의 연주는 물론 레코드를 통해서도 정신을 느끼게 하는 명반을 많이 남기고 있다.

푸르트벵글러와 루드비히 반 베토벤

  토벤은 서양 음악사의 최고 정점이었다. 베토벤은 자신의 시대가 어떤 격랑 속에 휩싸여 있으며 다가오는 시대가 어떤 것이 될 것인지 누구보다 먼저 감지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고전주의를 완성하고 낭만주의로 넘어가는 가교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을 깨달았으며 바흐와 헨델, 모짜르트와 하이든으로부터 자양분을 흡수했다.

  그는 귀족이나 후원자가 아닌 오직 자기 자신의 폭풍우치는 내면을 위해 작곡한 최초의 작곡가이기도 했다. 그것이 진정한 근대의 정점이었고, 근대를 위한 음악이었다. 베토벤은 또한 지휘를 작곡과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았다. 베토벤 이후의 작곡가들은 이제 서양음악의 정점에 올라선 베토벤으로부터 어떻게 내려올 것인지를 고민해야만 했다. 이후 등장하게 되는 낭만주의의 공통된 우상은 역시 베토벤이었지만 낭만주의자들은 두 패로 나뉘어 서로 베토벤의 적자임을 자처했다. 얼마전 우리나라를 휩쓸고 지나간 실체(?)없는 흐름 중 하나였던 포스트 모더니즘 논쟁에서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이를테면 포스트(post)를 후기로 볼 것인지 탈()로 볼 것인지가 주된 논쟁이었던 것처럼 베토벤을 두고서 리스트, 베를리오즈, 바그너, 볼프로 이어지는 혁신주의자들은 베토벤의 그늘에서 벗어날 것을, 슈만, 슈베르트, 브람스, 말러의 경우처럼 베토벤을 계승할 것을 주장하며 격돌했다. 1850년대 이후 이 논쟁에 바그너가 참여하고 브람스를 공격했다. 이런 논쟁과는 사실상 무관하게 이 두가지 흐름은 사실상 푸르트벵글러에 이르러 다시 후대에 계승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푸르트벵글러는 주술적인 해석과 견고하고 장대한 구조를 구축함으로써 베토벤과 이후의 음악들을 연결해주었기 때문이었다.

푸르트벵글러의 생애 - 시대를 고뇌해야하는 예술가

  실 푸르트벵글러의 생애에 대해서 굳이 소개해야 할 필요는 없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인터넷상의 많은 페이지들이 그의 생애에 대해서 정리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만 눈여겨 찾아보면 그에 관한 많은 자료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이는 이유는 이 페이지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에 대한 나름의 오마주를 바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angler)는 1886년 1월 25일 베를린에서 베를린대학의 고고학 교수 아돌프 푸르트벵글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인문학적인 소양을 쌓을 수 있도록 어린 빌헬름을 그리스나 이탈리아 여행에 데리고 다니며 유럽의 여러 예술을 접할 수 있게 해주었다. 빌헬름 또한 예술과 인문학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의 부모는 특별히 음악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음악에 대한 애정만큼은 남달랐다. 그의 아버지 아돌프는 베를린필의 연주회에 빠지지 않을 만큼 음악애호가였고, 어머니 아델라는 피아노 연주를 즐겼다.

  아버지를 따라 자주 오페라나 콘서트에 참석했던 빌헬름은 어릴 적부터 음악가로서의 꿈을 키워 나간다. 그의 부모는 아들의 음악적인 재능이 남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어린 빌헬름에게 음악을 공부할 수 있도록 하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오르가니스트이자 작곡가 조셉 라인베르거(Josef Rheinberger)에게 작곡의 기초를 배우고, 지휘자이자 작곡가였던 막스 폰 쉴링스(Max von Schillings)의 제자가 된 후로 지휘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나이 18세 때 젊은 빌헬름은 실링스의 천거로 뮌헨에서의 한 연주회에서 대리 지휘를 맡으면서 지휘의 세계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다. 20세가 되던 1906년 그는 뮌헨의 카임관현악단을 지휘하며 정식 지휘자로 데뷔하게 된다. 이때 그가 택한 데뷔곡은 브루크너의 <교향곡 9번>이었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이 젊은 지휘자의 이름은 빠르게 전유럽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독일과 스위스, 프랑스 등 유럽의 여러 무대에서 객원 지휘자로 활동하며 경험을 쌓는다.

   그는 1915년 29세의 나이로 만하임 오페라와 만하임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5년 동안 활동하며 지휘자로서의 자기 주관을 확립해가기 시작한다. 1922년 1월 23일 당시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였던 니키쉬가 죽게되자 푸르트벵글러는 이 거장의 서거를 추모하는 그해 2월 9일의 연주회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영웅>과 브람스의 <4개의 엄숙한 노래>를 베를린 필과 연주하게 된다. 이 공연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고, 베를린 필은 만장일치로 푸르트벵글러를 지지한다. 그는 니키쉬의 유언에 따라 니키쉬가 맡고 있던 오케스트라였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도 맡게된다.

  1924년 5월 결혼 후에 신혼여행을 겸한 이탈리아 데뷔 콘서트, 같은 해 런던에서의 로열 필하모닉과의 성공적인 데뷔 이후 그는 자주 런던으로 초청받게된다. 이듬해 1월 3일에는 뉴욕 카네기 홀에서 미국 데뷔 콘서트를 연다. 이날 그는 청중들뿐만 아니라 단원들까지 감동시켜 뉴욕 필의 상임이 되어달라는 제안을 받기도 한다.

  1927년 그는 빈 필의 상임 지휘자가 됨으로써 유럽 최고의 오케스트라들을 석권하며 바야흐로 제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맡았던 여러 오케스트라의 상임 자리를 포기하고  베를린 필에만 전념하기로 한다. 그의 이상을 가장 잘 반영해줄 오케스트라로 베를린 필을 선택한 것이었다.

나치 통치하의 독일보다 베토벤이 필요한 곳이 어디 있겠는가?

  가 자신의 활동반경을 줄이게 된 데에는 독일의 하늘에 전체주의의 그늘이 낮게 드리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히틀러가 집권하며 독일 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많은 유태계 독일인들은 하나둘씩 추방되기 시작했고, 그것은 베를린 필 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단원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탄압의 손길을 다소 늦추는 정도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모든 자리를 사임하고 오직 베를린 필 연주에만 임한다. 하지만 히틀러는 순수 아리안계 혈통의 세계적 거장인 푸르트벵글러의 정치적 선전효과에 주목한다. 히틀러 자신이 바그너를 숭배하는 인물 중 하나였기 때문에 그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도 푸르트벵글러가 필요했다. 1933년 7월 그를 프로이센 추밀원 고문으로 임명해 버렸다.

  그가 카라얀과 달리 나치 당원이 아니었음에도 종전 후 전범으로 몰리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모노 시대의 지휘자들이 어떤 형태이던지 시대를 고민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당시에 비해 스테레오 시대의 지휘자들은 상대적으로 시대를 고민하는 부담은 적었다. 하지만 푸르트벵글러의 시대는 조국과 음악 중 어느 한 가지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시기였다. 푸르트벵글러는 자신의 조국에서 음악을 하기로 결심하였고, 그런 그의 순수한 마음을 히틀러와 나치는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그가 다른 예술가들처럼 미국으로 망명했다면 그에게는 평온한 생활 속에 각광받는 마에스트로로서 생애를 보낼 수 있었고, 상대적으로 더 오래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나치의 억압된 체제와 전쟁의 공포 속에 시달리는 자신의 동포들을 버릴 수 없었다. "나치 통치하의 독일보다 베토벤의 음악이 더 절실하게 필요한 곳이 어디있겠는가?"라는 그의 말이 이를 증명해준다.

  1934년 푸르트벵글러는 파울 힌데미트(Paul Hindemith)의 신작 오페라 <화가 마티스>의 초연을 베를린 국립가극장에 올리겠다고 발표한다. 힌데미트는 유태인은 아니었지만 유태인 아내를 두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오페라의 내용이 문제가 되었다. 1524년에 있었던 독일 농민전쟁을 배경으로 오페라가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나치가 보기에 이 내용은 불온했고 너무나 선동적이었기 때문에 공연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푸르트벵글러는 음악적인 면에서의 결정권은 오로지 자신에게 있으며 정치가 예술에 간섭해서는 안된다는 이유로 공연을 강행했고, 이 사건은 대중의 열렬한 호응 속에 커다란 파문을 불러 일으킨다. 이 소식은 곧 히틀러에게 알려지고. 그는 특별지시를 내려 힌데미트의 오페라를 금지하고, 힌데미트는 국립음악학교장의 지위를 버리고 망명해버린다. 푸르트벵글러는 이에 항의하여 모든 공직을 사임한다. 그의 사임은 받아들여졌고, 망명할 수 없도록 출국을 금지당한다.

  결국 이듬해 4월 푸르트벵글러는 다시 독일에서 지휘를 하게 되지만 예전처럼 나치에 항거할 수 있는 힘은 그에게 남겨져 있지 않았다. 아니 나치 정권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세밀히 관리하기 시작했고, 지휘할 음악과 장소를 모두 나치의 규제하에 두어야 했다. 이것은 후에 푸르트벵글러가 나치에 굴복했다는 식으로 전세계에 알려진다. 그 자신은 나찌에 협력할 의사가 없었으나 정치는 그를 철저히 이용하여 선전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베를린에서 히틀러 탄생 축하 연주를 지휘해야만 했고, 1945년까지도 그는 폭격 속에서도 베를린 필과 연주를 계속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해 1월 22일 연주회 도중 연합국의 공습으로 연주는 중단되고 그는 곧 빈으로 갔다가 스위스로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그는 패전이 확정될 무렵까지 음악이 필요한 독일 동포들에게 음악을 들려주었고, 많은 이들이 그의 음악을 통해 삶의 보람을 찾을 수 있었다.

참고사이트 & 참고 도서

 상식 밖의 예술사』/ 정윤 지음/ 새길/ 1995년
  
- 예술사를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통해 느껴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읽다보면 상식도 늘고 예술이란 게 복잡한 이론을 늘어논다고 해서 알 게 되는 것이기보다는 자신이 어떻게 느끼고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임을 새삼 일깨워주는 대중적인 예술사 입문서적이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1-4』/ A.하우저 지음/ 백낙청.염무웅 옮김/ 창작과 비평사/ 1974년
  
- 예술사에 있어서 고전 중의 고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책이다. 지금의 바람구두 홈페이지의 기본적인 텍스트 중 하나로 삼고 있는 책이다.예술사의 철학』과 함께 강력히 추천한다.

 전설 속의 거장 - 20세기를 매혹시킨 클래식의 천재들』/ 조희창 지음/ 황금가지 / 1998년 
  
- 오랫동안 <객석>의 기자로 일했던 조희창 씨가 자신이 연재했던 글을 모아 책으로 엮은 것이다. 매혹적이란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거장들의 이야기가 대중적인 필치로 잘 그려져 있다. 강력 추천한다.(바람구두 실력 뽀록나게 하는 책이다.)

 이 한장의 명반』/ 안동림 지음/ 현암사 / 1999년
 
 - 국내에서 클래식 음악, 음반에 관한한 고전 중 하나가 된 책이다. 클래식 음악 초심자들에게 더 없이 좋은 길잡이다. 애호가들에게도 지휘자와 지휘자의 차이, 가수와 가수의 차이까지 식별하는 심미안을 키우는 데 유익한 길동무다. 음악사에 빛나는 명곡들을 망라하면서, 한편 한편마다 곡해설은 물론 작곡가의 생애, 시대적 배경, 작곡과정에 얽킨 사연, 녹음과정, 다른 음반과의 차이점 등을 일목요연하게 알려준다.

 『클래식내비게이터』/ 조희창 지음/ 음악세계/ 2000년
  
- 이 책은 자주 콘서트장을 찾을 수 없는 이들을 위해서 혹은 이미 사라져버린 불멸의 연주자들을 찾기 위해 유용한 나침반 역할을 한다. 연주자별, 레이블별, 시대별, 가격대별, 작곡가별로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책의 최대 단점은 많은 재원을 필요로 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사고 싶은 음반이 너무 많아지기 때문에.

 『The 100 greatest classical recordings of all time』/Gramophone/1995

  고전음악동호회  
 
 - 고전음악동호회이다. 다양하고 질좋은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 고전음악에 처음 입문하는 분들부터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른 이들까지 모두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이트이다.(한글)

  죽은 지휘자들을 위한 홈  
 
 - 거장들의 세기가 지나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이트라 생각되어서 소개해본다.(영문)

 


푸르트벵글러와 베토벤 고난과 환희의 합창

  르트벵글러와 베토벤은 앞서도 말한 것처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런 그가 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 일명 <합창>의 절대 명연, 불후의 명반을 남긴 것은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할 수밖에 없다. 고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인류에 대한 화합과 사랑을, 새 시대를 맞이하는 환희를 노래한 작곡가와 온갖 굴욕 속에서도 지휘봉을 놓지 않고 사랑을 실천한 푸르트벵글러. 이 두 사람의 만남이 빚어낸 연주의 환희는 어떤 지휘자라 할지라도 다시 재현해낼 수 없는 감동일 수밖에 없다. 베토벤 9번 교향곡은 두 장의 역사적 명반이 있다. 한 장은 1942년 3월의 베를린 실황 연주를 녹음한 것이고, 다른 한 장은 바이로이트 축제 실황 연주를 녹음한 것이다. 두 장의 음반 모두 모노 시대의 녹음이며 스튜디오 녹음을 혐오했던 푸르트벵글러답게 실황 녹음이다. 그러나 이 두 음반의 의미는 단순히 그 연주가 명연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이 음반들이 담고 있는 역사적 의미가 또한 크기 때문이었다.

  독일의 패전으로 베를린은 미·영·프·소의 4개국 점령하에 분할 통치에 들어간다. 이때 전쟁 중 녹음된 귀중한 음원들이 소련군에 의해 소련으로 건너갔다가 1991년에야 정식으로 독일에 송환된다. 종전 후 푸르트벵글러는 전범으로 몰렸으나 나치 집권시절에 어려움을 무릅쓰고 도와준 유태인 음악가, 반체제 인사들의 구명운동 덕에 1947년 1월 무죄 판결을 받고 다시 연주해도 좋다는 연합군의 허가를 받는다. "모두가 망명을 떠난다 해도 나는 고통받는 독일인을 위해 베를린 필을 지휘하겠다"던 그의 진심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었다.

  1951년 바이로이트 축제가 다시 재개된다. 전쟁의 상처가 아직 여기저기 그대로 나뒹굴고 있을 당시 푸르트벵글러는 개막 공연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을 선택한다. 패전의 상처와 대학살의 범죄자로 낙인찍힌 독일국민들에게 그는 전인류에 대한 사랑과 화합을 노래한 <환희의 송가>를 통해 다시 한 번 독일 국민들에게 희망과 삶의 보람을 일깨줘주는 명연을 들려준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장의 음반이 있다. 당시 독일 전국토는 연합군의 공중폭격에 노출된 상태였고 함부르크와 쾰른, 브레멘 등에서 대규모 폭격으로 인해 잇따라 숱한 민간인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던 시기였다. 베를린 상공 역시 언제 연합군 공군의 폭격이 시작될 모르는 상황에서 푸르트벵글러는 독일 국민을 위해 지휘봉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전쟁의 공포와 히틀러의 잔인한 통치 아래 신음하는 독일 국민들에게 푸르트벵글러는 삶의 위안이었고, 인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도록 촉구하는 것이었다. 이 두 장의 음반을 듣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의 위대한 힘이 인간을 정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체현해낸 인물이 바로 푸르트벵글러였다.

 
 

  푸르트벵글러는 종전 후 첼리비다케에 넘겨주었던 베를린 필의 상임 자리를 1952년 베를린 필 창립 70주년에 다시 복귀한다. 그러나 66세의 푸르트벵글러는 이미 몸이 쇠약해져 가고 있었고, 폐렴이 도져 결국 1953년 빈 필과의 연주 중 실신하고 만다. 푸르트벵글러는 요양을 위해 바덴바덴으로 옮겨갔으나 1954년 11월 30일 68세의 이른 나이(다른 거장 지휘자들이 80을 넘기며 장수한 것에 비해)에 운명한다. 종전 후 10년이 지나 1954년 베를린 필은 미국으로의 첫 연주여행을 계획하게 된다. 물론 푸르트벵글러가 이 연주여행의 지휘자가 되어주기를 기대했지만 1955년 2월 워싱턴에서 있었던 베를린 필의 미국 데뷔 연주는 푸르트벵글러가 경원시했고, 출세를 위해 나치당원이 되는 일도 서슴지 않았던 카라얀이 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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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5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축구선수평화", 남의 일이 아니다. 2020-06-15 0 2059
2954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축구선수평화", 남의 일이 아니다. 2020-06-15 0 1938
2953 [세상만사] - 연주는 계속 되고지고... 2020-06-01 0 3731
2952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농사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2020-05-31 0 3563
2951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력사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2020-05-28 0 3883
2950 [그것이 알고싶다] - "미술계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2020-05-28 0 3846
2949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대기오염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2020-05-17 0 3609
2948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력사는 력사로 존중해야... 2020-05-14 0 3666
2947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기후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2020-05-09 0 3639
2946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메돼지병", 남의 일이 아니다... 2020-05-09 0 4014
2945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동물보호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2020-05-03 0 3970
2944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음료수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2020-05-03 0 4048
2943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황새야, 별탈없이 잘 자라거라... 2020-04-26 0 3341
2942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인간들 문제", 애매한 꽃들만 탈... 2020-04-24 0 3878
2941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동물원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2020-04-22 0 3864
2940 [그것이 알고싶다] -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 2020-04-22 0 3476
2939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벌레문제", 심중하게 처리해야... 2020-04-22 0 3948
2938 [잊혀진 민속] - 담뱃대 2020-04-21 0 4178
2937 [그것이 알고싶다] - 지구의 날 2020-04-21 0 3721
2936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매연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2020-04-20 0 3586
2935 [우리의 것] - 활쏘기 2020-04-20 0 3551
2934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먼지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2020-04-20 0 3241
2933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방사능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2020-04-18 0 3752
2932 [민속] - 인절미(찰떡) 2020-04-15 1 5641
2931 [잊혀진 민속] - 뻥튀기 2020-04-13 0 3850
2930 [잊혀진 민속] - 짚신 2020-04-13 0 4313
2929 [잊혀진 민속] - 미투리 2020-04-13 0 4553
2928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대기오염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2020-04-13 0 3633
2927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동물보호", 남의 일이 아니다... 2020-04-11 0 3297
2926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메뚜기 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2020-04-10 0 3599
2925 [민속] - 담배쌈지 2020-04-10 0 4475
2924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히말라야, 계속 같이 놀쟈..." 2020-04-10 0 3685
2923 [세계속에서] - 원주민들과 비상사태... 2020-04-10 0 3341
2922 [별의별] - "거리두기" 2020-04-10 0 3499
2921 [세계속에서] - 봉쇄령길에 피여난 "모성애꽃" 2020-04-10 0 2890
2920 [세계속에서] - 인간들 때문에 욕보는 꽃들... 2020-04-10 0 3217
2919 [민속] - 통발 2020-04-07 0 3629
2918 [민속] - 뚝배기 2020-04-07 0 3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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