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고르 레비트의 에릭사티 '짜증' 연주. [유튜브 캡처]
이 작품은 괴짜 작곡가였던 사티가 1890년대에 작곡한 곡이다. 악보는 단 네 줄. 사티는 악보의 맨 위에 ‘840번을 연이어 연주하기 위해서는 움직이지 않고 깊은 침묵을 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썼다. 사티는 다른 작품에서도 ‘주머니에 송곳을 넣고’ ‘과식하지 말고’ ‘의문을 가지고’ ‘구멍을 파듯’이라는 미스터리한 지시어를 남겼던 작곡가다. 사티는 이런 식으로 기존의 음악과 작곡법, 그중에서도 엄숙주의에 반대했다.
미스터리한 작품 ‘짜증’의 공연 시도가 처음은 아니다. 20세기의 대표적 괴짜 아티스트 존 케이지는 1963년 뉴욕에서 피아니스트 10명과 함께 18시간 동안 이 곡을 연주했다. 1970년엔 피터 에반스가 혼자 완주에 도전했지만 595번 반복 후 포기했다.
레비트는 뒤로 갈수록 지치고 피로해 보였지만 연주 중간중간 물을 마셔가며 완주에 성공했다. 느리게 시작했던 연주는 중간중간 속도를 올렸다가 다시 평온한 템포로 돌아오곤 했다. 피아노 옆의 사이드 테이블에는 바나나와 칩 등이 놓여있었지만 먹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숨을 내쉬거나 이마를 짚어가며 괴로워했던 레비트는 연주가 모두 끝난 후엔 피아노 뚜껑을 덮고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휴대전화를 집어든 채 무대를 떠났다. 7시간대와 11시간대에 휴식 시간을 가졌다.
이고르 레비트.
러시아 태생으로 8세에 독일에 이민 온 레비트는 21세기의 사티라 불릴 수 있는 독특한 피아니스트다. 유럽과 북미의 중요한 무대에서 각광받는 연주자이지만 정치적 발언, 소신있는 행보를 계속해왔다. 2017년 7월엔 런던의 BBC 프롬스 무대에서 브렉시트를 비판하며 EU찬가를 앙코르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이번 ‘짜증’ 마라톤 연주는 코로나 19로 인한 예술인들의 피해를 돕기 위해 기획했다. 레비트는 사티의 한장짜리 악보를 840장 복사해 한장 한장 바닥에 던져가며 완주했고, 이 악보들을 경매에 부칠 예정이다. 경매 수익금은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연주 기회를 잃은 예술인들을 위해 쓴다.
/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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