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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기행】
새해 첫날답사 동산재기로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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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20대 시절에 즐겨 보았던 “한어성구소사전”(제3차 수정본, 1977년 출판)에는 3013개의 한어성구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로부터 30년 세월이 흐른 강남땅 절강 50대 시절에 “동산재기”란 성구에 깊이깊이 매료될줄을 몰랐다.
한어성구소사전에 의하면 동산재기(東山再起)의 재기란 다시 일어나 관리질한다는 뜻, 그 유래는 동진시절 사안(謝安)이라는 사람이 관직을 떠나 동산에 은거하였다가 다시 높은 관직에 오름을 말한다면 실세하였다가 다시 득세함을 비유하는데도 널리 쓰이고 있다. 절강에 온후 대학에서 중국애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며 여러가지 성구에 자주 부딪치지만 성구 “동산재기”에는 그닥 주의를 돌리지 못한것이 사실, 그러다가 동산재기 유래의 주인공—사안의 묘소가 절강 상우에 있다는 관광안내를 보고는 자석마냥 끌림을 어찌할수가 없다.
상우(上虞)면 지구급 시인 소흥시의 한개 현급시로서 소흥과의 거리라야 불과 23킬로미터 밖에 안된다. 나는 고대 겨레발자취에만 매울수가 없어 새해 2010년 1월 1일 양력설(신정)날 정오에 아들애를 데리고 상우 동산 답사길에 올라 보았다. 새해 첫 태양 맞이에 이은 새해첫날 동산재기 답사라 하지만 바깥답사 첫 시작부터 오리무중, 여러 류형의 택시운전사들이 동산은 안다면서도 사안묘라면 도리질을 하니 말이다. 이 운전사, 저 운전사를 두루 거치다가 40대로 보이는 장씨라는 운전사가 안다하여 다시 20킬로미터 밖 상우 상포진에 이르니 사안묘는 모르고 동산재기요, 사안이요 하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후유~한숨만 나온다. 그렇게 어정쩡 헤매다가 다행히 부근에서 사안묘 위치를 확인하고 다시 택시에 오르니 택시는 상포진 동산구역을 다시 에돌아 어느 한 골짜기에 접어든다. 골짜기 어구에 “동산재기지”(東山再起地)라는 대형선전판이 세워져 있으니 오늘 답사가 헛걸음은 아닐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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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는 어느덧 골짜기 어구를 지나 산등성이로 오르는 구비구비 등반길에 들어선다. 저 앞 산등성이에 옛스러운 건물이 보인다. 차로 달리니 상포진을 거치는 아스팔트길에서 산등성이까지 10리도 되나마나한 거리고, 옛스러운 우람진 건물은 동산사(東山寺)라는 사찰의 정문이다. 정문에서 동산사찰까지는 또 산등성이 평탄한 비탈길을 따라 조금 달려야 했다.
그로부터 몇분후 동산이라 불리는 산정아래 펑퍼짐한 곳에 노오란 칠을 한 길다란 담장이 나타나고 담장에는 중국어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는 큰 글씨가 씌여져 있다. 동산사찰이 옳았다. 그때에야 어인 연고임을 알았지만 동산사찰은 이미 일떠선 담장안의 웅장한 대웅보전(大雄寶殿)과 금방 지어놓은 천왕전(天王殿)을 제외하고는 여러 건물과 길 등 모두가 한창 수건중이였다. 사안이라는 이름난 력사인물을 살려 불교사찰과 관광이 하나로 어우러진 상우시 동산관광지를 건설하고 있다함이 옳을듯 하다.
어찌하든 나의 관심사는 첫째도 그러하고 둘째도 그러하고 모두가 옛 사안묘소를 찾는것이 아니던가. 마침 사찰 담장대문 어구에서 20대의 한 젊은이를 만나 물어보니 사안묘소가 저 안쪽 대웅보전 뒤쪽가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는 직접 안내자로 나서기에 그를 따르니 과연 대웅보전 정면 왼쪽가 뒤 산기슭에 시골묘소를 방불케 하는 소박한 모습의 사안묘가 자리하고 있었다. 묘소 앞에는 “상우시 중점문물보호단위, 사안묘, 상우시 인민정부, 1987년 공포”라고 쓴 안내비가 서고있고 묘소에는 “진태부사공묘”(晋太傅謝公墓)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보매 사안 묘소는 옳다고 하는데, 주인없는 스산한 묘와 같아 선뜻 무엇이 안겨오지 않는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흐른다. 묘소 부근 산비탈에 길다란 사찰의 단층집이 보이여 그리고 올라가니 대문이 잠겨 있다. 나에게는 동진 사안의 고향집으로 보이지만 들어갈수가 없다. 다시 사안묘소로 돌아오니 묘소 앞에 “시x천”(始x 泉)이라는 밝힘의 샘물웅덩이가 발목을 잡는다. 사안이 동산에 은거할 때의 샘물터 같았다. 그때를 시작이라는 말 같은데 복판 글자는 어인 판국인지 사전에도 없어 헤아려 볼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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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 사안묘소 앞에 섰다. 묘소 뒤는 울창한 대나무들로 둘러싸여 인상적인데 그 대나무 숲속으로 동진 때의 사안이 걸어나오는 것만 같다. 지금으로부터 1600여년전 동진시절의 사안은 이곳 동산에 은거하여 있다가 다시 조정의 높은 관직에 오르며 불멸의 성구—동산재기를 탄생케 한 력사인물이다.
중국력사를 헤아리면 력사는 4000여년 전의 첫 노예제국가의 탄생으로부터 하, 상, 주 시기를 거쳐 기원전 221년의 진시황 통일에 의한 진(秦)나라에 이른다. 진나라 다음은 한나라요, 한나라는 서한과 동한으로 흐르다가 위, 촉, 오 삼국시기를 거치며 진(晋)나라 시기에 들어선다. 이 진나라(기원 265~420)는 선후하여 150여년을 지속하지만 서진과 동진으로 불리우며 서진은 삼세사주(三世四主)로 52년, 그 뒤를 잇는 동진은 사세십일주(四世十一主)로 력사를 이어간다. 이런 진조가 100여년 세월속에 권력다툼이요, 골육상잔이요 하면서 나라 전체가 혼란과 위기로 흔들리니 오죽하면 중국 유사이래 량진(兩晋)시기가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라 할까.
이같은 어지러운 시절에 사안은 그 시절 이름난 진군양하(陳郡陽夏), 오늘의 하남 태강의 사씨사족 명문가문에서 기원 320년에 태여났다. 아버지는 조정의 리부상서(吏部尙書), 형과 여러 동생들은 모두 관리들이라 사안은 어려서 형을 따라 오늘의 소흥 회계산 일대에서 지내며 총명이 과인하여 4살에 벌써 “이 애는 보통 애가 아니라 장래에 큰일을 할 사람”이라는 평판을 받았다. 소년시절과 청년시절의 사안은 름름한 자태에 풍도와 재질, 지식이 뛰어났으나 관직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어른으로 자라난 후 사안은 처음 조정의 사도부(司徒府)로부터 막료로, 다음은 조정의 좌저작랑(佐著作郞)으로 임명되였으나 모두 병을 핑게로 사절했다. 동산에 은거하니 명성이 급부상, 조정에서는 조정과 손을잡지 않는 명사들에 대해 “금고종신”(禁錮終身)이니, 금고종신이라 하면 지방감시에, 자기 지구를 떠나지 못하고, 정치활동에 가담할수 없다지만 실상은 가혹한 이 정치적징벌도 잘 지켜지지가 않았다. 대신 금고자인 명사의 명망만 부풀어 오를뿐.
동산 은거시절에 사안은 그 시절의 대서예가 왕희지, 문학가 손작, 리윤 그리고 불교계, 학계의 명사들과 동산 저택에서 지식을 론하고 인생을 론하기를 즐기였다. 낚시질에 새잡이, 산수유람에 시와 글짓기에 빠져 든 사안. 은거 기간에 가까이로는 산아래 이름난 강—조아강(曹娥江), 멀리로는 오늘의 항주 저쪽 부춘강 류역 천목산(天目山)에 이르기까지 발자취를 남기니 세월은 그속에 흘러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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