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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장군 피살을 론함
량 환 준 (리함 정리)
편자의 말
고 량환준선생은 지난세기 20년대후기와 30년대초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남만도위 선전부장, 고공청만주총국선전부장, 중공아성현위 선전부장, 아성현위 서기 등 중책을 지고 활동한 항일로선배이다. 광복후에는 연변인민출판사 제1임사장을 맡았고 만년에 정협연변조선족자치주위원회 문사자료위원회에 근무하였으며 조선족역사연구, 더우기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역사연구에 전력하였다.
그는 생전에 김좌진장군 피살관련 글들을 적지 않게 남겼다. 지금 보면 량환준선생이 이런 글을 쓸 때 의연히 좌적사상이 남아있을 때라 김좌진장군을 극단적으로 평가한 면이 보이지만 김좌진장군의 피살상황을 구명함에 유조하다고 생각되어 그의 글중 일부분을 발취해 참고로 제공한다.
《문화산맥》
1
1928년부터 일본제국주의는 중국에 대한 침략을 가일층 다그쳤다. 그해 6월에 일제는 봉천 황고툰역에서 동삼성군벌두목 장작림을 폭사시킴으로써 만주부터 먼저 손아귀에 넣으려 하였다. 일제는 공산주의를 반대한다고 더욱 떠들어대면서 동삼성군벌에게 협력을 강요하는 한편 만주내의 조선인민족주의단체들과 공산주의단체들에 대한 탄압을 가일층 강화하였다.
동만지구에서만 해도 동만조선인청년총동맹, 조선인로동총동맹, 조선인여성청년동맹과 환성회, 근북회 및 신간회지부, 근우회지부 등 조선인혁명적군중단체들의 활동을 금지하거나 탄압하여 혁명운동은 모두 지하로 들어갔다. 이런 형세밑에서 용정을 중심으로 김근, 강상야 등 7명이 철혈단을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준비하기 위하여 활동하였다. (이 문제는 다른 기회에 상세히 서술하려 함). 발끝까지 무장한 원쑤들앞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지 않고서는 혁명활동을 추진할수 없게 되였던것이다.
그런데 이런때에 민족주의파와 공산주의자들간에 모순이 날로 격화되어갔다. 1927년 2월, 조선내에서 통전단체로서 신간회가 결성되자 만주의 조선인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분자들도 통일전선결성을 위하여 분주하였다. 좌, 우 각파대표들이 몇차례의 회담은 하였으나 통일전선결성은 실패되고 도리여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 우익세력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었다. 이때 일제는 더 말할것없이 공산주의운동을 말살해보려고 발악하였고 동북군벌의 새 대표자인 장학량은 일제의 침략과 압력에 대처하여 남경국민당반동정부에게 의지함을 표시하여 청천백일기를 내여거는 한편 밀령을 내려 공산당을 탄압하였다.
이런 형세밑에서 조선인민족주의 우익은 더욱 반동적이였다. 남만의 정의부 우익두령들은 민국 길림성공서의 고급관원으로 있는 오인화(조선사람)을 통하여 군벌과 결탁하여 남만조선인농민동맹, 재중조선인청년동맹과 수화상극이 되어 헐뜯던끝에 1929년 겨울에 학살사건을 빚어냈다. 이를테면 남만의 신빈현 왕청문에서 정의부무장대는 리활민이하 혁명군중 13명을 살해하였고 동시기 류하현 삼원포에서는 한청옥, 박기주 등 12명을 살해한 류혈참안을 빚어냈다. 그후 정의부 두목가운데 김리대, 고활신은 일제의 주구로 변했고 일부는 관내로 들어가 혁명하였으며 량서봉, 고이허 등 일부는 항일전쟁마당에서 혁명을 위해 희생하였다.
북만의 민족주의단체인 신민부의 반동두목 김좌진은 1929년에 할빈주재일본총령사관 경찰부장 마쯔모도(松本 또 松岛라고 함)와 결탁하여 수치스러운 민족의 역적으로 되었다. 그는 중동철도연선에서 공산당인들의 활동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며 조선인 공산주의운동을 파괴하였고 마쯔모도는 김좌진에게 활동자금을 대주었다. 김좌진은 이 돈으로 산시(山市—해림서쪽)에서 정미소를 차리고 첩을 얻어 타락한 생활을 하는 한편 《동청철도호로군사령부》와 결탁하여 중동선의 횡도하자로부터 해림에 이르는 구간의 객차에 신민부 무장사복대를 파견하여 조선공산당인들을 마음대로 수색하고 체포하여 치떨리는 살인사건이 적지않게 발생되었다. 조선 함남 정평에서 한 진보적청년이 녕안으로 오느라고 중동선렬차에 올랐다가 신민부사복대놈들에게 체포되어 산시에 구금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그의 아버지가 조선에서 찾아와서 사정하니 속신금 5백원을 바치라는것이였다. 그는 조선에 다시 나가 밭을 다 팔아 겨우 5백원을 마련해가지고 들어와 보니 아들은 놈들의 악형에 시달려 이미 죽고말았다.
조공 아성총국(즉 화요파)에서는 더 그냥 내버려둘수 없다고 인정되어 김좌진을 없애치우기로 결정지었다. 1929년 가을에 총국에서는 공도진(최동범, 리복림)을 산시에 잠입시켜 김좌진일파가 경영하는 정미소에 일군으로 들어가 그들의 신임을 얻게 하였다. 1930년 1월 24일, 김좌진이 부하 몇놈을 데리고 정미소를 시찰하러 왔을 때 공도진은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들고 김좌진에게 거퍼 두방을 갈겼다. 김좌진이 거꾸러지자 그 부하들이 어쩔바를 모르는 사이에 공도진은 삼림속으로 냅다뛰여 도망쳐 버렸다.
공도진은 화룡현 서성향 명암촌사람으로서 필자와 한 마을사람이며 조공의 한 지부내의 성원이였다. 1928년 여름에 그는 상급의 지시를 받고 녕안현에 들어갔댔는데 1년후 산시에 파견되어가서 이 특수한 과업을 수행했던것이다. 필자가 1930년 3월, 아성현에 갔을때 해거우(海沟)에서 공도진을 만났는데 그가 직접 김좌진을 죽이던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었고, 필자가 조공 만주총국 책임비서 김백파에게 왜 김좌진을 죽여버렸는가 물어보았더니 김백파도 우에서 말한 사실들을 또 나에게 해설해주었다. 이밖에 지희겸도 이 사실들을 증실하였고 동북항일련군의 리연록장군의 회억록에도 이 사실이 적혀있다.
또 다른 사료에 의하면 1929년 7월에 김좌진일파는 무정부주의단체인 흑색동맹의 성원들인 남대관, 리강훈 및 신숙 등과 제휴하여 소위 《한민총련합회》란것을 조작하고 있었는데 김좌진이 피살된뒤 그 도당들인 남대관, 권수정 등 수십명은 1930년 여름에 길림성정부의 군법처 오과장(오인화)과 결탁하여 토공대(讨共队)를 조직하였다. 그해 겨울, 그 일부는 연변각지에서 공산당인과 혁명군중 수천명을 체포, 학살하였으며 다른 일부는 북만 중동철도연선에서 수많은 공산당인과 혁명군중을 체포, 투옥시켰다.(이 사실은 다른 기회에 좀 더 자세히 언급할 예정이다.)
종합해 말하면 일제와 국민당군벌 그리고 조선인민족주의 우익집단들이 재만조선인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박해와 탄압을 강화하고 있었으므로 당시 만주의 조선공산당인들은 국제공산당의 12월제강에 의하여 조직을 재정돈하지도 못하였으며 중공에의 가입도 아직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형편에서 조급정서가 자라났고 더욱 좌경적인 길을 걷게 되었다.
주: 김백파는 일명 김성득, 김득수이다. 김백파는 남만 통화 신흥사관학교 졸업생으로서 1927년 10월 간도공산당 제1차검거사건후 조공당만주총국 선전부장으로 임명되었다. 1928년 9월 만주총국 책임비서 리동산(리동성)이 남만으로 간후 김백파가 만주총국 책임비서를 맡았다.
_ 《연변문사자료 제4집》(1985년 11월),
《20년대후기 재만 조선공산당인들의 활동》(량환준) 에서
2
공도진(최동범, 리봉림)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출생하여 1925년경에 평강 이도구명암촌에 이주하여왔다. 리동선의 소개로 조공에 가입하고 1928년 8월에 녕안현으로 전이하였다. 1929년 가을에 파견을 받아 김좌진의 본부인 산시에 잠입해있다가 1930년 1월 24일에 김좌진을 처단하고 도망쳐돌아왔다. 1930년 10월에 중공아성현위 서기로 임명되었다. 11월에 민국군대에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1931년 11월에 봉천에서 출옥하였다.
1932년 봄에 중공만주성위순시원의 신분으로 주하현에 와서 주하중심현위 조직부장으로 임명되어농민을 발동하여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33년 6월, 리계동, 조상지와 함께 손조양의 반일부대에 침투해 들어갔다. 1933년 10월에 주하항일유격대를 성립하고 조상지는 대장이고 리복림이 당지부서기를 담임하였는데 대원은 70여명으로 발전되었다. 1934년 6월, 주하유격대를 동북반일유격대 하동지대로 개편하고 조상지를 사령으로, 리복림을 지대당위서기로, 허형식을 제1대대장으로 임명했다. 그해 겨울 하동지대는 일본군과 위만군의 련합토벌을 여러차례 분쇄하였다.
1935년 1월, 중공만주성위의 지시에 근거하여 하동지대를 기초로 하여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을 성립하고 조상지를 군장으로, 리복림을 군법처장으로 임명하였으며 9월에 리복림을 1퇀 정치부주임, 허형식을 3퇀 정치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1936년 8월, 리복림은 항일련군 제3군 제1사 정치부 주임 겸 하동유격대사령을 담임하였다. 그해 겨울에 리복림은 중공 북만림시성위 조직부장으로 선임되였고 동시에 제 3, 6, 8, 9군련합의동(依东)판사처 주임으로 사업하였다. 1937년 1월, 3군주력의 서부원정에 배합하기 위하여 1사 1퇀을 령솔하여 할빈동부각지에서 작전하다가 그해 4월에 통하현 얼도허즈전투에서 적탄에 맞아 영용하게 희생되었다.
《연변문사자료 제4집》(1985년 11월),
《20년대후기 재만 조선공산당인들의 활동》(량환준)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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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은 1889년에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출생하여 1917년에 남만의 류하, 길림일대에 와서 류랑하다가 1918년에 《대종교》에 가입함으로써 서일의 중시를 받았다. 1919년 《3.1》운동 때 서일이 북로군정서총재로 되고 김좌진이 북로군정서 사령으로 되었다. 청산리전투뒤 김좌진은 밀산으로 철퇴하였다. 반쏘반공정서를 품은 김좌진과 그의 부하들은 소련으로 넘어가지 않고 밀산경내에 머물으면서 밀산진의 상점과 량식상점을 털어먹었다. (지금 북만의 70여세되는 로인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있다).
서일은 이 사실을 듣고 비분에 차 밀산현 당벽진(当壁镇)에서 굶어자진하였다. 김좌진은 부하 수십명을 데리고 목릉현에 가서 성동사관학교(城东士官学校)를 꾸렸으나 군중들이 반대하고 농민들이 경비와 식량을 내지 않아 페교하고 말았다. 1925년 산시일대에 가서 《통치식》단체인 《신민부》를 세우고 스스로 총사령이 되였으나 밀산, 목릉, 동녕, 녕안(동남부)과 주하, 아성 등지의 조선족농민들이 경비와 식량을 납부하지 않아 아주 고립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1928년, 이른바 《삼부통감》운동때 김좌진의 획책밑에서 《재만유일당책진회》를 내왔는데 그때 연변의 전성호가 이 유일당운동을 크게 고취하였다. 그러나 호응하는자가 적어서 그 세력이 해림으로부터 횡도하자 구간에만 국한되였었다.
1929년, 그가 벌린 죄악적활동은 세가지였다. ①중장철도호로군사령부와 결탁하여 사복한 부하를시켜 중동철도기차에서 공산당 혐의자로 여겨지는 사람들을 함부로 체포하였다. ② 할빈일본총령사관에 주재하고있는 총독부 특무 마쯔시마와 결탁하여 그놈에게 북만의 공산당활동정보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수만원의 일본돈을 받아 산시에 정미소를 꾸리고 첩을 두어 향락하였다. ③ 신숙, 정신 등 인과 가장 반동적인 《한민총련합회》를 성립하였다. 김좌진은 이와 같이 조선족인민에게 큰 죄를 지었다. 그리하여 1930년 1월 24일, 조선공산당 무장공작대대원 공도진(최동범)이 산시 정미소에서 그를 처단하였다.
《연변문사자료 제4집》(1985년 11월),
《20년대후기 재만 조선공산당인들의 활동》(량환준) 에서
4
▲ 윤해, 신숙은 1929년에 《김좌진과 합작하여 조선총련합회란것을 조작하여 민족주의파를 끌어모아 반공을 책동했다. 남대관, 권수정 등의 반공활동과 련계있다.》
주: 윤해는 함남 영흥사람인데 1917년 12월에 문창범, 김립 등과 함께 《전로한족회 중앙총회》를 조직한 인물이다.
《해당연변역사의 인물보》(량환준 1981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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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은 자초지종 반공이였다. 1928년 남만 화전에서 정의부를 비롯한 19단체, 39명대표가 모인 민족유일당 결성협의회에 참가하지 않고 따로 북만에서 〈재만유일책진회〉를 조작하였다.
1929년에 녕안현 산시에서 정신, 민무, 리붕해 그리고 신숙 등과 더불어 〈한족련합회〉를 만들고 그수석자리에 앉았다. 군자금이니, 독립운동비니 등등 모금으로 김좌진 등은 관료생활을 하여왔으므로 민분이 높아갔고 공산당(조선공산당을 가리킴)의 활동을 백방으로 방해하는 한편 할빈 일본령사관 주재 조선총독부 특파원 마쓰시마와 련계하여 공산당의 활동정보를 제공하였다. 1930년 1월초 자기 부하로 있던 잠복한 공산당청년 최동범(원명 공도진, 간도이도구 명암촌 사람)의 총탄을 맞고 그 반동생애를 끝마쳤다.》
《해당연변역사의 인물보》(량환준 1981년)에서
6
△《1927년 10월 제1차 간도공산당검거사건후 각파가 분렬되고 김찬이 연해주에서 녕안에 와서 조공당만주총국(화요파)을 조직할때 우룡선이 위원으로 되고 동만도위(道委) 책임비서로 임명되어 연변에 왔다. 1928년 가을에 북만에 왔을 때 신민부(김좌진파)의 밀고로 중국관헌에 체포(최승권, 안근규와 우룡선 셋이 체포)되어 길림감옥에 압송, 옥중에서 병사하였다.》
<< 해당연변역사의 인물보》(량환준 1981년)에서
▲ 《북만에서 민족주의단체 신민부와 이른바 무정부주의자 남대관, 권수정, 자치촉진회파 (전성호 일파)는 결탁하여 1929년 7월에 반공적인 〈한족총련합회〉를 결성하고 동북정부내의 반동군벌과 더불어 창궐하게 반공하였다. 동년 12월에 산시의 화요파청년 최동범(원명 공도진)이 김좌진을 죽이고 각현 조선족농민들이 일어나 신민부 무장을 반대하고 구축하였다. 례컨대, 녕안현 남호두의 농민들이 신민부의 군자금을 반대하여 그들을 몰아냈고 빈현의 농민들도 일어나서 그들을 반대하였다. 목릉현 팔면통의 농민들은 일찍 일어나 그들을 구축하였다.》
《1929년 가을, 빈현에서 김좌진의 부하(무장인원) 들이 빈현에 이르러 조선인 농호들에서 강박적으로 군자금세를 거둘때 농민들이 견결히 거절하였다. 그들 이른바 독립군은 총을 쏘아 당장에서 2명을 사살하고 4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농민학살사건이 터지자 빈현 농민들의 분노를 일으켜 일떠나 신민부 간부와 무장인원을 구축하였다.》
주: 남대관, 권수정:
한민총련합회 주요성원들인 남대관, 권수정 등은 1929년~ 1930년 사이 동북군 돈화주둔 제7퇀과 결탁하여 연변내, 더우기 왕청일대에서 사처로 쏘다니며 《공산당토벌》(1930년 6월후는 모두 중공계렬) 에 광분하여 중공왕청현위 제1임서기 김훈(항일렬사), 왕청현위 제2임서기 김상화(항일렬사) 등 수많은 조선족혁명자들을 체포, 학살하여 피비린 대혈채를 빚어내였다.
《조선공산당간사》(량환준 미발표작 1981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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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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