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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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당신 댓글:  조회:926  추천:26  2009-06-17
봄아씨가 해죽해죽 웃으며 저만치서 귀엽게 손질합니다. 설레임도 함께 마음의 창을 살며시 노크합니다. 만물이 움직임을 함께 하면서 인생이라는 노오란 포물선을 허공에 보기좋게 날립니다. 얄미운 사연들도 어설프게 다가서며 마음의 지퍼를 열어갑니다. 봄기운이 파고 들면서 시들시들 해진 사유의 골짜기에 별다른 생기를 부여합니다. 무겁게 축 처졌던 어깨도 어느새 힘을 주며 일어섭니다. 허전하던 마음에도 밝음이 뾰족뾰족 돋습니다. 어둑시그레하던 마음의 뒤골목에도 가로등이 하나 둘 눈을 뜹니다. 사랑이라는 들먹임이 가볍게 몸의 여기저기에 이슬을 뿌려줍니다. 봄아씨의 고운 살결이 어느덧 내 몸에 충전을 걸어옵니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안성맞춤한 충전이여서 령혼도 맑게 세탁이 됩니다. 너무도 마음에 가까운 다정한 부름이이여서 인정은 또 다른 언덕우로 물결칩니다. 너무도 편하고 정다운 그 부름소리에 나는 나를 운전하면서 또 다른 나를 재생시킵니다. 봄아씨의 가벼운 미소에 주책없이 내리던 눈송이들도 하나 둘 존재를 감춥니다. 따스한 기운이 써렁하던 집안에 온기를 뿌립니다. 미소 하나만으로도 만족이 앞서면서 늘 다가서기에 분망하던 그 때가 꿈만 같이 오늘 봄아씨의 손길에 묻혀 내 마음의 뒤안길에 파아란 잔디밭을 가꿉니다. 잔디밭 한가운데 보기좋게 세워진 간판하나가 유난히도 마음을 끌어갑니다. 동화의 세계처럼 다가서는 자그마한 간판에 쭈욱 그어진 이름자 하나만으로도 행복이 물결처럼 밀려옵니다. 보드라운 물결에 손이 닿는 순간 당신의 존재를 다시금 느껴봅니다. 봄아씨의 고르로운 숨결뒤에 조용히 숨겨진 당신의 그림자가 그처럼 아름다운줄을 오늘에야 조용히 조용힌 느껴봅니다…2009/05/08 흑룡강신문
24    당신의 삶에는 정답이 있습니가? 댓글:  조회:971  추천:42  2009-06-17
인간의 가장 큰 흠이라면 삶의 정답에 너무 자신을 밀착시키는것이 아닐가? 그 수많은 순간 순간의 삶에서 무작정 정답을 고집하는 그 자체가 너무 힘겹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인간만큼 삶의 욕망이 강한 존재가 없을것이라는 슬픈 생각이 가슴에 맞혀온다.매일 거듭되는 삶을 이어가면서 그속에서 자신의 정답을 찾으려고 허우적거리는 그것으로 인생을 마감할지도 모르는것이 인생의 삶이 아닐가. 오직 하나의 미련을 두고 자신을 밀어붙이는 아집을 여직 버리지 못하는것이 못내 안타깝다. 그것도 사회를 위한다거나 타인을 위하는 그런 정답을 찾는다면 경모의 정이라도 가지련만 현실은 그렇지가 아니 하니 다치고 상하는것은 애매한 마음뿐이다. 자신의 리익을 챙기고 이를 위해 갖은 수단을 가리지않는것이 어쩌면 인간의 공동한 특징인지도 모른다. 현실을 보아도 인간은 리익이라는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날뛰고 허우적거린다. 자신의 리익을 챙기는것을 삶의 정답으로 간주하고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그런 모습은 실로 소경의 막대질이 아니랴! 어찌보면 삶의 정답을 구하는것이 아니라 먼저 결과를 정해놓고 뜯고 마스고 부셔서 그 결과에 과정을 맞추는 저능아의 수학계산이나 다름이 없다. 간혹 수단에 오차가 생겨 리익에 티끌만한 손실이 생기면 그런대로 스치는것이 아니라 밤을 패가면서 생각의 밑바닥까지 깡그리 털어서 보다 고명한 수단과 방법을 구하기에 여념이 없다. 이런 인간은 자신의 령혼을 마구 짓밟는 그런 차질이 아닐가.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고을에 로인과 아들이 살고 있었다. 어느날 아들이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큼직한 금덩이를 주어 부자가 되였다고 기뻐했다. 이런 아들을 보며 로인은 오늘의 금덩이가 래일의 화가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후에 아들이 기생집에 드나들다가 차사고를 당해 다리 하나를 잃게 되였다…삶에는 정답이 없다는 생각이다. 오직 참다운 자세로 열심히 살아간다면 그 이상 더 판단이 필요 있으랴. 리익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량심의 천평에 달아봄이 바람직하다. 일단 자신의 삶을 깨끗한 샘물로 살찌워간다면 정답은 당신의 몫이 아닐것이다. 2009/05/15 흑룡강신문
23    제비뽑기 (리창현) 댓글:  조회:1180  추천:34  2009-03-14
제비뽑기      오령감이 한국에서 중병으로 몹시 앓고 있다는 소문은 난지가 오래지만 그 누구도 병세에 대하여 굳이 캐여묻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피는 못속인다고 그래도 부실한 막내아들놈인 철구가 속을 끙끙 앓으면서 저으기 걱정하는 기색이였다. 밥도 한때에 둬 서너사발씩은 히쭉 웃으면서 굽을 내던것이 아버지가 몸이 안좋다는 소식을 얻어 들은 후부터는 식량도 퍼그나 줄었다. 그래도 마누라 노릇을 하느라고 옥녀는 철구에게 고기붙이들을 사들이느라 야단스러웠다. 비록 열이 안되는 옥녀지만 철구와 맞서기에는 조금은 아까운 편이였다. 옥녀도 가정이 몹시 가난하다보니 결국은 철구네 돈을 넘보고 시집을 온것이였다. 비록  애를 낳지 못하는 불치의 병이 있어도 마음만은 그래도 비단이여서 철구하나만은 아들못지않게 잘 건사해주었다. 그래서 철구의 엄마와 아버지도 다소 시름을 놓고 한국행을 선택했던 것이였다. 이제 같이 생활한지도 어언 10여년은 잘 되였다. 그사이 철구도 이전보다 많이 생각도 컸고 일에 대한 처사도 어느정도는 할줄을 알게 되였다. 모두가 옥녀의 공으로 세워진 비석이나 다름이 없었다. 철구는 우로 누나가 하나 있고 형님이 셋이나 있었다. 모두가 한동네서 살고 있지만 평소에 크게 철구에 대하여 관심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도 별다른 음식이라도 생기면 묘하게도 냄새를 맡고 빠지지 않았다. 그럴때마다 옥녀는 가타부타 말없이 사람좋게 대해주었다. 올케들도 그저 음식만 홀랑 먹고는 자리를 피하군 하였다. 그많은 음식그릇은 늘 옥녀에게 차려지군 하였다. 그래도 옥녀는 아무 말도 없이 철구하나만은 잘 돌봐주었다. 그래서인지 철구도 형님이나 형수들이 옥녀에 대하여 뭐라고 핀잔이라도 주면 두눈을 부릅뜨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군 하였다. 그런멋에 옥녀는 늘 만족하군 하였다. 아무리 남편이 부실하게 행동하고 일처리를 해도 다른 친척들 앞에서 비웃는 일이 한번도 없었다. 늘 조용히 철구를 불러놓고 아들애를 교육하듯이 옳고 그름을 가르쳐주군 하였다. 그때면 철구는 고분고분 말을 잘도 들었으며 자기절로도 고치려고 노력하는 모습까지 제법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한국으로부터 오령감의 병세가 악화되여 후처사를 해야 한다는 긴급 전화가 날아왔다. 철구와 옥녀는 아침밥도 먹지 않고 근심에 눈물을 흘리고있었다. 반드시 자식들이 한국으로 나가서 아버지의 뒤처사를 해라는 병원측의 부탁이 날아왔다. 당연히 철구와 옥녀가 가야할 자리였다. 그래도 여직 아버지와 엄마을 모시기에는 옥녀와 철구의 공이 컸으며 아버지도 제일 걱정스러운것이 막내아들인 철구였던 것이다. 어디서 소문을 넘겨 들었는지 형들이 여우같은 마누라들을 앞세우고 철구네 집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면서 모두가 철구와 옥녀가 한국으로 가는것에 대하여 부동의였다. 형수들은 입이 다슬도록 철구와 옥녀를 교육하고 있었다. 너희들같이 얼뜰한 사람들이 가서 어찌 뒤처사를 할수있는가면서 부산을 떨었다. 하지만 초청장은 두장으로 제한되여 있다보니 모두가 신경을 도사리고 있었다. 둘째 형수는 그래도 저희들이 가서 아버지의 뒤처사를 알뜰하게 하기에 손색이 없다면서 한발 나섰다. 그러자 맞이가 그래도 아버지의 일은 가문에서 맞이가 해야 한다면서 저희들이 가겠다고 사정을 주지 않았다. 셋째 아들은 기회를 보고 있었다. 그냥 옆에서 마누라가 남편의 다리를 짖누르는 모습이였다. 그러다보니 셋째는 그저 엉덩이만 들었다 났다 할뿐 아무런 태도표시를 하지 않았다. 철구와 옥녀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보고만 있었다. 그러다보니 해가 넘어가도록 결정이 내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튿날로 토론을 미루고 모두가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저녁으로 아버지가 병을 이기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돌아갔다는 전화가 날아왔다. 철구는 구들을 두드리며 통곡하였다. 사람이란 아무리 부실해도 보모잃는 설음은 꼭 같이아프다는 도리를 다시금 들려주는 순간이였다. 그날 저녁 철구와 옥녀는 울다가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새벽녁이 되여서 자지러지게 울려오는 전화소리에 철구와 옥녀가 놀라서 깨여났다. 전화는 철구엄가가 걸어온 전화였다. 뒤일을 처리하러 철구와 옥녀가 오도록 수속을 신청하였다는 얘기였다. 이제 수속이 며칠안으로 밟아지면 철구와 옥녀가 한국으로 가게 되였다. 하지만 철구와 옥녀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눈물만 흘리고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을 만나볼 설음을 생각하느라니 국직한 눈물이 철구의 두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철구는 실성한 사람처럼 이불을 확 뒤집어 쓰더니 엉—엉--- 하고 소리내여 슬프게 울었다. 날이 희붐이 밝아오고 있었다. 둘째네 내외가 쪼르로 달려왔다. 그 뒤로 맞이네와 셋째네도 뒤질세라 뒤를 밟고 들어섰다. 평소에는 전혀 볼수없는 그런 풍경이 였다. 형들 내외는 서로가 철구에게 잘 보이느라고 야단법석이 였다. 철구는 그저 아무 말도 없이 형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성격이 급한 큰 형수가 철구에게 돈을 3만원 정도를 주겠으니 어떻게 하나 저희들 내외가 한국으로 가도록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저자 옆에있던 둘째 형수가 자기네는 3만 5천원을 주겠으니 저희들을 나가게 해달라고 철구의 두손을 꼭 잡고 애처롭게 사정을 하였다. 눈치를 가만히 보고있던 셋째 형수가 자기는 5만원을 주겠으니 너희들은 앉아서 돈이나 벌고 저희들이 가겠다고 나섰다. 옥녀는 철구의 눈치만 보고 있을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형제들은 서로가 철구의 켵으로 바싹 다가들면서 사정을 하느라고 야단이였다. 얼마후 철구는 종에 네장을 꺼내더니 제비뽑기를 하자고 하였다. 즉 제비뽑기를 하는데 누가 맞기 기호를 친 종이를 쥐면 한국으로 간다고 결정을 하는것이였다. 옥녀는 눈이 휘둥그래서 남편의 행동을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철구는 이미 준비한 종이장을 구들에 조심스레 놓았다. 형수들은 그래도 제비는 남자가 뽑아야 한다면서 남편들을 밀어놓았다. 서로가 조심스레 제비를 뽑는 그 장면은 실로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철구는 제비를 뽑은후에는 반드시 아무말도 없이 그저 제비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부탁을 하였다. 형들은 조심스레 제비를 뽑은후에는 신을 신고 볼사이도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마누라들은 뒤에서 달달거리며 남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 이튿날부터 형들의 집안에서는 노래소리가 흥겹게 울려나왔다. 그 누구를 살필 겨를도 없이 모두가 그저 기쁨에 빠져 흥얼거리고 있었다. 오직 철구네 집만이 조용할뿐이였다. 철구와 옥녀는 려권을 가지고 심양행 기차에 몸을 싫었다. 실상 철구는 모든 제비에 다 맞기기호를 쳐놓았던것이였다. 옥녀는 철구의 말을 듣더니 저으기 자랑스러운 눈길로 남편을 쳐다보며 이상한 웃음을 짓는것이였다……                                              
22    말 같지 않은 말은 아예 흘러보내고... 댓글:  조회:962  추천:48  2009-03-11
                   말 같지 않은 말은 아예 흘러보내고...(리창현) 말에도 말같은 말이 따로 있고 말같지 않은 말이 따로 있답니다. 모든 말을 다 듣고 보면 기쁨보다 설음이 배로 커지게 된답니다. 우리들은 말을 듣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말같은 말은 그냥 조용히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말같지 않은 말은 그냥 그대로 흘러보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같은 말을 하기 즐기고 어떤 사람은 말같지 않은 말을 하기에 습관이 되였나봅니다 그냥 제가 한 말은 다 도리라고 착각하지만 청자는 아예 도리질뿐입니다 미움은 강물처럼 미련없이 흘러보내라고 하신 어느 선배님의 말씀은 얼마나 좋은 말인지 모릅니다 말은 그 사람의 마음에서 울려오는 메아리입니다 말같은 말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사람같은 존재라고 믿어봅니다 말같지 않은 말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아마도 사람과는 좀 거리가 있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말같은 말에는 성의껏 두 귀를 열어주고 말같지 않은 말에는 두 귀를 꽁꽁 잠그고 그냥 그대로 흘러보내는 지혜를 가꿔봅시다 자신도 편하고 타인도 편하게 말입니다.
21    기축년에 부치는 생각 (리창현) 댓글:  조회:2035  추천:18  2009-02-15
   얄팍한 허영 하나로 늘 자신을 감추면서 살아가는것만큼 어색하고 슴슴한 순간은 더 이상 없다는 생각이 기축년의 종소리와 함께 내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몰아왔다. 여느때와 달리 조용히 구겨진 마음을 다림질하면서 고마움도 함께 몰고 왔다. 여직 그렇게 자신을 감추면서 살아온 뒤마당을 빗질하여 보느라면 자신에게도 미안하고 타인에게도 얼마나 미안한지 모르겠다. 솔직하지 못한 자신의 일면도 부끄러움을 머금은채 처녀의 얼굴처럼 발그스레 상기되여 있었다. 실상 사람의 인식이란 시간의 차이에 있을뿐이다. 그래서 아마 사람들은 예로부터 세월을 가장 공정한 재판관으로 인정하고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세월앞에 자신을 세우고 보면 래면을 속이지 못하게 되는것이다. 사람들이 가장 쉬이 하고 있는 말도 역시 세월에 대한 두터운 믿음이라는 생각이다. 어떤 불리 앞에서 사람들은 흔히들 하는 말  \'하늘이 다 알고 있으니 걱정 말아라.\' 도 역시 세월에 대한 공정한 평판을 갈망하는 순간이 아닐수 없다. 이로보아 부득불 자신의 허영을 뒤집고 그속에 갖힌 크고 작은 감춤들을 아마도 하나하나 정리하면서 살아가는 자체가 바로 가장 정확한 인생이 아닐가 하는 생각과 함께 닫혀진 마음의 지퍼를 열어본다.   유난히 밝게 다가서는 감춤 하나가 어색하게 어두운 구석에서 신음을 하고 있었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몇년은 잘 되였으니 자신의 감추는 수준도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생각도 무섭게 다가선다. 그만큼 미안함도 커가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 무슨 악의적인 감춤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얄팍한 편견이자 타인에 대한 얄팍한 기편이다. 이 감춤은 제가 문학이라는 신성한 울타리에 발을 들여놓은 얼마후였다는 생각만은 새삼스럽다. 이럭저럭 졸작들을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를 하기 시작하면서 어느날엔가 자신에 대한 감춤이 아프게 갈마드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였다. 비록 그 순간에 자신을 달래지 않은것은 아니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 그냥 그렇게 고집을 붙잡고 무자년을 지나 기축년까지 몰고 온것이다.  문학을 하면서 이런저런 회의들이 점차 많아지기 시작하였다. 만남의 장은 그야말로 너무도 아름다운 순간들이였다. 나는 정말 자신이 문학에 발을 들여놓은것에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적지않은 글들을 쓴것도 기쁘지만 그보다도 많은 문학선배들을 알게 된것이 저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큰 재부로 되여 얼마나 행운스러운지 모른다. 저는 이런 인연들을 늘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열심히 자신의 문학에 대한 열정을 한시도 늦추지 않고 날마다 부지런히 뛰고 뛰면서 자신을 갈고 갈았다. 문학인들은 비록 처음의 만남일지라도 그처럼 편하고 가까운것이다. 아마도 사람을 보기전에 언녕 그 사람의 글을 통하여 마음이 한자리에 모였는지도 모른다.   한번은 할빈에 교원수필상을 타러 갔던 일이다. 그날도 너무 일찍 도착하다보니 주최측의 안배대로 호텔에 누워서 시상식의 시간을 기다리게 되였다. 얼마쯤 지났을가 하였는데 문을 노크하는 소리와 함께 50대의 남자가 들어왔다. 서로 인사를 나누면서 간단한 소개를 하였는데 글쎄 그 남자가 저의 손을 꼬옥 잡아주면서 너무도 반갑게 맞아주는것이였다.  \'아니 나이가 어린 분이구만  당신의 글들을 많이 보았소. 어린 나이에 정말 대단하오. \" 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도 선배님의 글제목을 들어가면서 참 좋은 수필이라고 이야기를 하였더니 제목까지 다 기억했는가 하시면서 저으기 기뻐하시는것이였다. 후에 알고 보니 그 분은 해림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리복철 선생님이였다. 비록은 짧은 상봉이였건만 선배로서 후배에 대한 관심과 격려는 얼마나 컸는지 모른다. 그날 자신의 소개에서 나는 녕안의 모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고 하였다. 그 후에도 많은 문학인들을 알게 되였는데 그냥 소개는 중학교의 교원으로 자신을 포장하였던것이다. 어쩐지 소학교 교원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소학교 교원이라고 하면 꼭 마치도 자신의 인격이 떨어져가는듯한 기분이 여서 그냥 후에도 나는 자신을 중학교 교원으로 소개하기에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 그 누구도 조사를 하지도 않았거니와 캐여 묻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마음은 늘 개운치가 않았고  늘 무겁기만 하였다.  하여 한번은 마음을 크게 먹고 솔직하게 소개를 하려고 작심하였다. 무엇보다도 후에 그것이 탈로날가봐 근심이 앞서군 하였다. 그래서 한번은 인사를 나누면서 제가 녕안의 모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고 하였더니 상대방이 되려 믿지 않는것이였다. 아무리 내가 소학교 교원이라고 하여도 결국은 그날도 역시 중학교 교원으로 대접을 받게 되였다. 그날 나는 술도 많이 마이고 말도 꽤나 많이 하였다. 무엇보다 솔직한 자신앞에서 모든것이 그토록 편하고 즐거웠기 때문이다. 실상 우리 문인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정말 소학교 교원이 몇이 안된다. 태반이 중학교의 교원들이며 일부는 행정부문에서 퇴작한 분들이다.  소학교 교원인 제가 그속에서 자리를 잡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부터 흐뭇해진다. 그후부터 여러회의에서 저는 모든 허영을 훌훌 털어버리고 소학교 교원이라고 소리높이 소개를 하군 하였다. 생각과는 달리 보다 기분좋은 일들이 많이 생기군 하였다. 그리고 칭찬의 농도도 전보다 더 높아가는 모습이여서 너무도 즐거웠다. 실상 소학교 교원이든 중학교 교원이든 문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것이다. 그저 얄팍한 체면을 세우느라고 허영을 붙잡는 노릇에 불과한것이다. 이제 기축년에는 모든 허영을 털어버리고 보다 솔직한 자세로 신성한 문학에 자신의 힘을 다하려는 생각이다. 보다 좋은 작품들을 창작하여 소학교 교원인 자신을 보다 솔직하고 훌륭한 문인으로 가꿔가기에 몸과 마음을 다 하려는 결심을 기축년의 첫날에 날려본다.
20    이런 교원이 되고싶다 (리창현) 댓글:  조회:2046  추천:24  2009-02-09
애들에게 실망보다는 신심을 선물하는  그런 교사가 되고 싶다.   애들에게 아픔보다는 행복을 선물하는 그런 교사가 되고 싶다.   애들에게 불신보다는 믿음을 선물하는 그런 교사가 되고 싶다.   애들에게 미움보다는 사랑을 선물하는 그런 교사가 되고 싶다.   애들에게 질책보다는 고무를 선물하는 그런 교사가 되고 싶다.   애들에게 매보다는 쓰다듬을 선물하는 그런 교사가 되고 싶다.   애들에게 거짓보다는 솔직함을 선물하는 그런 교사가 되고 싶다.   애들에게 가면보다는 진심을 선물하는 그런 교사가 되고 싶다.   애들에게 비웃음보다는 칭찬을 선물하는 그런 교사가 되고 싶다.   애들에게 겉치레보다는 실속을 선물하는 그런 교사가 되고 싶다.   애들에게 설음보다는 포용을 선물하는 그런 교사가 되고 싶다.   애들에게 짜증보다는 너그러움을 선물하는 그런 교사가 되고 싶다.   애들에게 화려함보다는 평범함을 선물하는 그런 교사가 되고 싶다.   애들에게 오만함보다는 겸손함을 선물하는 그런 교사가 되고 싶다.   애들에게 두려움보다는 편안함을 선물하는  그런 교사가 되고 싶다.   애들에게 가르침보다는 배움을 선물하는  그런 교원이 되고 싶다. …… 애들이 어렵고 힘들 때 편안히 기댈수 있는 그런 나무가 되고 싶다.   애들이 아프고 쓸쓸할 때 편안히 누울수 있는  그런 구들이 되고 싶다.   애들이 목이 마를 때 시원히 마일수 있는 그런 샘물이 되고 싶다.   애들이 배고프고 추울 때 마음껏 먹을수 있는 풍성한 식탁이 되고 싶다.   나는 이런 교사가 되고 싶다. 나는 이런 교사가 되련다. 나는 이런 교사가 될것이다.
19    기쁨앞에서 너무 흥분하지 마라 댓글:  조회:2136  추천:25  2009-01-25
기쁨앞에서 너무 흥분하지 마라 (리창현)   오늘의 기쁨앞에서 너무 흥분하지 마라 오늘의 기쁨이 래일의 슬픔일지도 모른다 섭리를 속이려는 얼뜰한 생각은 접어놓고 기쁨도 하나하나 정리할 필요가 있는것이다 슬픔만이 정리가 필요한것이 아니라 기쁨도 정리가 더욱 필요한것이다 기쁨앞에서 너무 흔들리다보면 슬픔도 그만큼 커지는법이거늘   오늘의 기쁨앞에서 너무 뽐내지 마라 오늘의 뽐냄이 래일의 아픔일지 모른다 철리를 속이려는 마음은 깡그리 버리고 기쁨도 알뜰한 반성이 필요한것이다                                                                                                            아픔만이 반성이 필요한것이 아니라 기쁨도 깨끗한 반성이 따라야 한다 기쁨앞에서 너무 뽐내고보면 아픔도 배로 돌아오는 법이거늘.
18    실현못할 일은 말도 내지 맙시다 댓글:  조회:2195  추천:27  2009-01-24
실현못할 일은 말도 내지 맙시다 (리창현)    얄팍한 흥분에 쫓기여  부질없는 한마디로  고민을 만들지 맙시다    한잔의 술에 들떠서  뱉어낸 큰 소리로  근심을 세우지 맙시다    순간의 밸김에 눌리워  흘러나간 거북한 말에  장밤을 뒤척이지 맙시다    말속에는 정령이 숨쉬거늘  실현못할 말들은 아예 삼킴이 바람직합니다  부질없는 한마디로  늙음을 만들지 말고  즐거운   한마디로 젊음을 만들어 갑시다   해뜨는 아침이면 해빛같은 말로 달뜨는 저녁이면 달빛같은 말로 짧디짧은 우리네 인생을 믿음으로 채워갑시다   실현못할 일은 말도 내지 맙시다 실수의 쪽배에 오르고 보면 어렵고 힘든것은 우리네 삶인가 봅니다   실현못할 일은 말도 내지 맙시다 허영의 울타리에 발을 들여 놓고 보면 어둡고 침침한것은 우리네 인생인가 봅니다   실현못할 일은 말도 내지 맙시다 기분의 언덕에서 방황하다 보면 아프고 쓸쓸한것은 우리네 수치인가 봅니다.      
17    고향에 보내는 편지 댓글:  조회:2098  추천:25  2009-01-20
산문시  고향에 보내는 편지 고향에 보내는 편지 .산문시.   고향이 그리운줄 이제 나마 가슴치며 느껴봅니다. 타향살이 몇해동안 설음도 많았습니다. 타향의 구석구석은 그냥 그처럼 차겁게만 안겨오기도 하였습니다. 눈치가 모든것을 웃도는 인생살이에 많이도 힘이 들었습니다.  믿음보다도 항상 가면이 앞서야만 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늘 눈치의 바줄을 꼭 틀어쥐고 놓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어리숙하게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자랑은 모두가 저희들 몫으로 남고 잘못은 늘 나에게로 활시위를 당기군 하였습니다. 수시로 꽂히는 아픔에는 피방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상처는 그대로 그냥 다음의 상처를 물어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래도 타향에는 그늘이 퍼그나 컸습니다. 어렵고 힘들때에 기댈수있는 그런 그늘이 한두개라도 있어서 얼마나 편안했는지 모릅니다. 비록 고향의 그늘처럼 그렇게 너그럽지는 못해도 마음만은 대충 기대일수가 있었습니다. 비바람도 피할수 있었고 눈보라도 피할수가 있었으며 폭풍우도 잠시나마 피할수가 있었습니다. 옷깃을 적시는 설음들이 싸늘한 가을바람에 날려오기도 하였습니다. 마음을 적시는 안타까움들이 봄바람에 실려 주책없이 마음의 언저리에 내려앉군 하였습니다. 녹아내릴줄도 모르고 그냥 오똑하게 앉아서 뭔가에 초점을 맞추고 신경을 도사리는 모습도 퍼그나 불쌍하기만 하였습니다. 그래도 타향에는 인정의 우물들이 가끔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비록은 낡아빠진 우물이긴 하지만 따스함으로 늘 얼어든 마음들도 달랠수가 있어서 발길은 그냥 우물가로 옮겨지군 하였습니다. 비록 찾는 사람들은 가물에 콩난격이지만 존재의 리유만으로도 사람들은 퍽 즐거워하는 모습들이기도 하였습니다.  타향의 하늘은 너무너무 낮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실수의 악취들은 좀처럼 증발을 거절하는 모습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냥 맴돌면서 떠날념을 않는 그 자체에 무엇인가 두려움도 커만갔습니다. 꿈자리도 그냥 시원치가 않고 어지럽기만 하였습니다. 그래도 해뜨는 아침이면 마음만은 뜨겁게 달아오르군 하였습니다. 빨리 달아오르고 빨리 식는 그런 뜨거움이라도 만족하며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런 만족으로 자신은 날마다 커가군 하였습니다. 울안의 백양나무처럼 가끔은 슬픔의 뼈다귀를 씹기는 하였어도 살찌는 마음만은 지울수가 없어서 늘 만족하군 하였습니다. 타향에는 고마움도 서러움도 함께 동행하군 합니다. 눈비가 주책없이 내리는것처럼.
16    사람은 (외1수) 댓글:  조회:2321  추천:23  2009-01-20
리창현 사람은 (외1수) 사람은   사람은 스스로의 교육에  만족이 앞설 때엔 타인의 교육에  부러움이 앞선다 사람은  스스로의 교육에 불만이 앞설 때엔 타인의 교육에 신경을 도사린다 사람은 이렇게 안과 밖의 선명한 대조속에서 늙음을 만들어간다   슬픔   가깝던 사람이 어느날엔가 간벽을 쌓을 때 설음은 마음에 거미줄을 쳐놓는다 멀던 사람이 어느날엔가 간벽을 허물고 다가서면 설음은 마음에 시퍼런 이끼를 씌운다 설음이 설음같은 설음으로 다가설 때라야 인간은 인간답게 바로 선다
15    우리의 교육 아직도 무엇이 결핍한가? 댓글:  조회:2038  추천:52  2008-09-12
우리의 교육 도대체 아직도 무엇이 결핍한가?     뿌리가 흔들리고 있는 나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그루의 나무로서 뿌리가 흔들리고 있다는것은 삶과 죽음의 간격이 줄어들고 있다는것을 너무도 현명하게 의미하는것이다. 그것도 단순간에 삶의 결속을 보는것이 아니라 너무도 무서운 고통과 신음을 겪으면서 날로 야위여 가는 진통을 겪어야하는 가슴 아픈 일이다. 언제부턴가 우리의 민족교육의 뿌리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다시말하면 민족교육이 위기라는 울타리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말이겠다. 날로 학생원천이 고갈되여가는 현실앞에서 부득불 마셔야 하는 고배이기도 한것이다. 역시 우리 민족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나 다름이 없다. 그것은 순간이 아니라 민족의 생존과 전망에 대한 일종의 무서운 도전이기도 하다. 필경은 다가선 도전이니 그것을 회피하여서는 절대 안되겠다. 반드시 우리는 현실에 맞서야 한다. 하나같이 가슴 아파하고 하나같이 똘똘 뭉쳐야지 절대로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어리석은 생각들은 깡그리 버려야 한다. 더우기 교원으로서는 이럴바가 못된다는 말이다. 교원 한사람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해를 받는것은 오직 한사람뿐이 아니라 민족의 밝은 미래를 떠메고 나갈 우리 후대들이다. 반드시 민족이라는 사명감을 떠메고 나갈 기둥들에 좀벌레가 끼지 않도록 열심히 기름을 칠해야 한다는 말이다. 한마리의 좀벌레라도 끼지 말도록 자신의 눈동자처럼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민족교육의 일선에서 로심초사 하시는 민족령도들의 다함없는 노력으로 우리의 민족교육은 여전히 빛을 잃지 않고 한층계 한층계 높은 차원으로 올라서고 있다. 얼마나 고맙고 자랑스러운 분들인지 모르겠다. 추호의 사리도 모르고 민족교육의 앞날을 위해 매일 매일 열심히 뛰고 있는 민족교육의 령도들이 있기에 우리의 교육은 앞날이 창창한 것이다. 하지만 옥에 티처럼 아직도 일부 문제들이 존재하고 있어서 가슴 아프고  근심이 일어서는것이다. 그럼 우리의 교육 구경 아직도 무엇이 결핍한가? 첫째: 사생 관계가 아직도 긴장한 상태에 처해있다. 사생의 관계에 대한 수많은 설들이 떠돌고 있지만 아직도 긴장한 매듭은 풀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과당에서나 생활에서나 나름대로 존재하고 있는 현실이다. 더욱이 학습성적이 뒤진 학생과 교원사이의 관계가 여전히 엄중한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말하자면 일부 학습성적이 차한 학생들은 교원을 만나면 회피하는 현상이 존재하고 있는것이다. 차한 학생일수록 응당 교원과의 관계가 밀접하고 친근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게 되지 못하고 있으니 걱정이 아닐수 없다. 한 중학생의 솔직한 고백에 의하면 교원은 학습성적이 차한 자신에게 던지는 눈길마저 그렇게 차갑다는것이다. 그리고 과당 시간에 자신에게 근본 기회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부 교원들은 인물이 고운 학생들에 대하여서는 눈길도 밝고 웃음도 많지만 인물이 못났거나 언행이 좀 차한 학생에 대해서는 태도가 그처럼 다르다는 말이다. 정말 걱정이 아닐수 없다. 학교는 인물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는 그런 헐망한 곳이 아니라 사람의 표준에 따라 사람을 육성해내는 신성한 곳이다. 이런 곳에서 이토록 험한 일들이 머리를 쳐들고 있다는 현실은 민족교육에 하나의 무서운 지뢰가 아닐수 없다. 교원이라면 반드시 위인사표 (为人师表)를 갖추고 언제 어디서든 공정하고 공평한 인격을 갖추어야 한다. 인물이나 성적으로 한 사람을 평가해서는 절대 안된다는 말이겠다. 학생들이 가장 존경하고 우러르는 원인이 바로 공정한 마음을 지닌 그런 교원이다. 사생의 긴장한 관계를 지울수 있는 가장 유기력한 무기가 바로 매 학생들에 대한 공정심이 아닐수 없다. 어느 학생이든 교원과 가까운 친구처럼 지내고 싶은 생각은 모두 불같은것이니 교원의 생애에서 가장 갚진 재산인 학생들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지니는것이야말로 우리 민족교육이 보다 높은 자리에 발을 들여놓을수 있는 시작이 아닐가? 둘째: 교원과 학생의 배합이 잘되지 않는다.  상호 배합은 곧 바로 믿음에서야만 최고의 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하지만 믿음이 결여한 배합은 결국은 연극에 불과한것이다. 우리가 요구하는 배합이란 자연스러운 배합이지 어색하고 만들어놓은 배합이 아니다. 억지로 만들어 놓은 배합은 언제든 사람의 눈을 속일수가 없는것이다. 아무리 고명한 수단으로 배합을 만들었다 할지라도 종당에는 드러나고 마는법이다. 그러니 우리들은 교수에서 언제든 학생과의 자연스러운 배합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문제는 교원들의 너무 성급한 탓으로 가끔 사생의 배합이 부서지는 경우도 있다. 더우기 일부 교수연구활동가운데서 흔히 배합을 만드는 현상이 존재하는데 지어 어느 학생이 어느 말을 해야 한다는것까지 배합의 중점으로 틀을 만들어 놓았으니 그것을 어찌 한시간의 교수라고 말할수 있을가? 우리들의 교수는 반드시 사생의 부담없고 자연스러운 배합이여야 한다. 학생의 각도에서는 묻고 싶은것을 마음껏 물을수 있고 교원의 각도에서는 목이 마른 애들에게 얼마든지 샘물을 줄수 있는 준비가 되여야 한다. 각별히 애들에게 사유의 여유를 주어 그들이 마음껏 생각할 기회를 주어야 하는데 일부 교원들은 너무도 성급하여 학생들이 얼마든지 해낼수 있는 문제들도 결국에는 자신이 혼자서 해결하려고 드니 학생도 무미건조하고 자신도 힘들뿐 아무런 결실도 없게 된다. 그러니 교원은 너무 성급해 하지 말고 학생들에게 얼마든지 사유할수있는 공간을 주어 그들이 마음껏 시름놓고 생각할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관건은 교원이 가르쳐야만 애들이 더 잘할수 있는 점과 교원이 가르치지 않고서는 애들이 할수 없는 문제들에 초점을 두고 교수를 이끌어가야 사생의 배합에서 또 다른 멋진 풍경이 아닐가? 셋째: 형식에 기우는 현상이 엄중하다. 삶도 그렇고 배움도 그렇고 형식에 머무는것은 어디까지나 찬성할바가 못된다. 형식은 어디까지 형식이지 그것이 현실에 도움이 안된다는 말이겠다. 더우기 학생들의 교육에서 형식이 나름대로 살판친다면 너무도 무서운 현실이 아닐수 없다. 과정개혁이래 과당에서 학생들에게 토론이라는 새로운 학습방법을 던지게 되였는데 여기에도 상당한 형식주의가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다. 말이 토론이지 아마 일부 그 효과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을지 모른다. 그저 다른 사람들이 교수에서 다 하고 있으니 하지 않으면 말을 들을것같고 하여 억지로 형식이라도 보이는 경향이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토론은 시간만 랑비하지 아무런 결실도 얻지 못한다. 정말 토론할 문제가 있으면 목적이 명확하게 그리고 학생들도 열성껏 토론에 참석하는 그런 토론이여야 하지 그저 형식에 머무는 그런 수단은 필요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반급의 벽보도 형식에 많이 눌리여 있다. 실상 벽보는 학생들의 학습과 삶에 도움이 되는 무대로 되여야 하는데 일부 반급의 벽보는 그저 형식에만 국한되지 아무런 작용도 없다는 말이다. 벽보는 다양한 지식을 체현시켜 학생들의 실제 생활에 도움을 주는 교원의 알뜰한 손길이 가야 하는데 그저 학생들에게 맡겨놓고 자신은 감독만 하여서는 절대 안된다. 우리는 부질없는 형식을 버려야 한다. 항상 현실에 비추어 하고있는 일에 마음을 쏟으면서 보다 좋은 경험들을 탐구하여 민족교육의 발전과 전망에 다소 한점의 빛이라도 부여하는것이 더 바람직 하지 않을가? 넷째: 전업지식을 갖춘 교원이 부족하다. 우리 민족교육의 교원대오들을 살펴보면 전업지식을 갖춘 교원이 너무도 부족하다. 소학교에서는 그런대로 배운 지식으로 가르칠수 있지만 중학교는 어딘가 좀 어려운 것이다. 요즘 중학교들에서는 교원이 부족하면 소학교에서 우수한 교원을 초빙해가는데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는것이다. 글쎄 소학교 교원이라서 못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업학교를 졸업한 교원과 비기자면 어딘가 좀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다른건 제쳐놓고 학생들에게 지식을 가르치는 방법과 수단상에서 벌써 상당한 차별을 가지고 있다는것이다. 실상 한편으로 배우면서 한편으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교원도 없는것은 아니다. 이렇게 하는 교수가 잘 되면 얼마나 잘 될가? 요즘에 우리 민족학교들에 전문적인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사업에 참가한 교원이 극 소수이다. 각별히 금방 사범학교를 졸업한 젊은 교원들은 거의가 연해도시나 외국나들이에 몸을 휘두르고 있다. 우리의 교원대오가 건전하고 민족교육이 보다 높은 차원으로 진입하려면 우선 먼저 젊은 교원들을 붙잡아 두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너무도 비참한것이다. 지금은 대부분 교원이 그저 고중이나 (혹은 초중) 졸업하고 함수를 거쳐서 일정한 학력을 갖고 애들을 가르치고 있는 현실이다. 교육학이나 심리학적으로 너무도 동떨어져 있을뿐만 아니라 근본  연구가 령매김을 받고 있는것이다. 진정 교원이라는 차원에서 자신을 희생시키면서 하나라도 열심히 정성껏 가르치려는 태도가 겹핍한것이다. 일부 교원들은  그저 닥치는 대로 가르치는 경향도 없는것은 아니다. 이런 가르침을 받은 학생들이 공부를 잘하면 얼마나 잘 할가? 자신의 교육이나 교수방법에 대해 반성하는것이 아니라 무작정 학생들을 질책하는 교원들을 보느라면 걱정스러운 생각이 무겁게 걸려온다. 그러니 전업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민족교육사업에 종사하고 있는 교원들에 한해서 어느 정도 대오를 높여주어 그들의 류동을 막아야 한다. 교육에서 혁신은 이것도 두렵고 저것도 근심스럽게 생각하여 결단성이 없는 사람들로는 해결이 아주 힘든것이다. 반드시 담도 크고  감히 자신의 주관과 교육의 동태에 대하여 유의하면서 대담하게 발을 내 딛는 젊은 교원들이 주체가 되여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혁신이란 말뿐이지 운운은 상당히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 아닐수 없다.  물론 전업지식을 갖추지 못했다 할지라도 부단히 자신에 대한 충전을 홀시하지 않는다면 역시 훌륭한 교원으로 자리매김을 할수도 있는것이다. 관건은 자신에 대한 요구를 부단히 높이면서 실무능력 제고에 노력을 늦추지 않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가? 다섯째: ‘구멍 틀어막기’가 엄중하게 존재한다. 글쎄 구멍이 생겼으면 틀어 막는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관건은 무엇으로 어떤 구멍을 막느냐가 상당히 중요한것이다.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의 교육에 아직도 구멍을 틀어막는 현상이 존재하고 있다. 존재하는 만큼 방도가 있는것도 사실이지만 문제는 구멍과 틀어막는 재료가 합리해야만 후과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말이다. 아무리 급한 사정일지라도 너무 성급하게 틀어막고 보면 너무도 놀라운 후과를 초래하게 되는것이다. 글쎄 아무리 림시라 할지라도 그것은 학생들로 말하면 림시가 아니라 한순간이라도 홀시해서는 안되는 과정인것이다. 그런줄 모르고 자신의 헐망한 처사에 만족하는 그런 현실이 존재하지 않는것도 아니다. 학생들의 배움은 한순간도 홀시해서는 절대 안되는 신성한 일인만큼 반드시 신중해야 한다. 우리들은 반드시 구멍이 뚫리기전에 해결책을 대는 알심을 갖추어 민족교육에 한점의 홀시라도 존재하지 않도록 하나같이 똘똘 뭉쳐야 하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것이야말로 민족교육의 밝은전망에 가장 바람직한 자세가 아닐가? 여섯째: 교원자체가 먼저 흔들리는 경향이 엄중하게 존재한다. 자신의 보다 밝은 전망과 생존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것은 나쁜 일이 아니지만 관건은 현실의 자신을 정시하는것이 무엇보다 값진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요즘 우리의 민족학교들이 학생 고갈로 하여 하나 둘 문을 닫고 있다. 이런 현실은 우리 교원들의 평온하던 마음에 파문을 던지기 시작하였다. 날로 줄어드는 학생원천앞에서 부득불 생기는 조건반사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부득불 떠나야만 해결이 좋다는 결론은 아직 너무 이르다는 생각이다. 농촌 학교들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관계망도 있고 일정한 능력을 갖춘 교원들은 거개가 현성학교로 떠나려고 맴돌고 있다. (적잖은 교원들이 이미 떠났음) 그들의 리유라면 이러다가 학교가 갑자기 문을 닫게되면 어디로 가야할지 너무도 근심스럽다는 하나같은 대답이다. 글쎄 일리가 없는것은 아니지만 자신 한사람의 성급함으로 해를 받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지 않은가를 고려함이 바람직하다. 실상 우리의 사업은 곳이나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반드시 현성의 큰 학교에서 사업해야만 교원이고 교원대오를 받는다는 도리는 아직 성립이 되지 않는것이다. 아무리 작은 농촌학교일지라도 열심히 자신이 맡은 사업을 착실하게 해나간다면 역시 교원으로서의 가치는 빛을 잃지 않는다는것이다. 듣은 말에 의하면 한 농촌의 민족학교에 학생이 세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어느 교원인가 학생들을 보고 너희들도 빨리 다른 학교로 가라고 권고를 하더라는 실책도 민간에서 떠돌고 있다는것은 현실이다. 이는 교원으로서 할 처사가 아닌데 가끔은 자랑스럽게 말하는 경우를 본적도 있다는 비참한 현실에서 우리들은 자신을 각성해야 한다. 실상 마지막까지 현성의 학교로 가지 못하는 학생들은 거개가 생활형편이 구차하여 움직이지 못하고있는 현실인데 그것도 리해못하고 자신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해 권고를 보내는 교원도 한심하다는 생각이다. 이런 교원들이 우리의 민족교육에 공헌을 했다면 구경 얼마나 했을가 의심이 다가선다. 일부 교원들은 지어 학부모들하고 하는 말이 학교가 곧 문을 닫게 될것이니 애를 빨리 다른 학교로 전학시켜라는 얼떨떨한 처사까지 곁들이고 있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수 없다. 이러고서야 어찌 민족교육의 뿌리가 흔들리지 않을가? 실상 이런 교원들은 민족교육의 뿌리를 뽑는 우둔한 일을 하고 있음을 모르고 항상 머리를 쳐들고 제밖에 없노라고 흔들거리는 교원대오 중의 쓰레기가 아닐수 없다.  이상으로 자신의 소박한 견해를 적으면서 우리 민족교육이 날로 번영하고 창성하길 진심으로 기대한다. 또 그렇게 될것이라고 굳게 믿어본다.
14    [시]설음 (리창현) 댓글:  조회:2468  추천:49  2008-08-21
설음 리창현 내안에 네가 있고 네안에 내가 있건만 내안의 네가 나를 모르고 네안의 내가 너를 모르니 이게 바로 비극인가 하노라 산산이 부서지는 설음쪼각들이 너와 나의 심장에 화살처럼 날려올적에 터치는 피방울들에 꽃잎처럼 다가서고싶다  <<연변문학>> 2008년 7월호
13    [시]꽃보다 아름다운 생각(리창현) 댓글:  조회:1250  추천:76  2008-08-21
꽃보다 아름다운 생각 (동경성)리 창 현 어느날 누군가가 그대에게 괴로움을 몰아왔다면 그저 가볍게 웃고 지나가세요 괴로움앞에서 화를 내고보면 상하고 다치는외에 아무런 소득도 없습니다 우리는 몰아온 괴로움을 잔잔한 미소로 받아주는 지혜와 다시 너그러운 마음으로 보내주려는 자세가 매우 필요합니다 잔잔한 미소앞에서 괴로움도 어쩌지 못하고 물러서게 됩니다 하지만 괴로움을 몰아온 그 사람만은 그냥 괴로움에 못이겨 설음을 토하며 방황할것입니다 필경 그 괴로움의 주인은 그 사람이기때문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괴로움의 주인이 되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괴로움을 미워해서는 더욱 안됩니다 몰려온 괴로움마다 모두 주인이 있기에 우리는 아무리 큰 괴로움이라도 반가운 손님처럼 맞아주고 담담한 미소와 향기로 배웅까지 해준다면 우리의 마음엔 순식간에 잔잔한 기쁨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반짝 빛을 뿌리면서 내려앉을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기쁨의 주인이지 괴로움의 주인은 아닙니다 괴로움의 주인이 되려는 사람은 언제나 괴로움의 함정속에서 괴로움을 마시면서 괴로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연변문학>> 2008년 7월호
12    아늑한 둥지 잔잔한 행복 (수필) 댓글:  조회:2041  추천:63  2008-05-30
결혼의 문턱을 넘어선지도 어언 10여년 세월이 흘렀다. 한 사람의 인생에 10년 세월이 몇개 있으련만 그래도 잔잔한 행복에 만족하며 오늘까지 자신의 둥지를 아끼고 사랑하며 열심히 삶의 터전을 갈고 또 갈아왔다. 남들처럼 큰 성과는 없더라도 오늘까지 자신의 둥지를 아끼고 지켜왔다는 하나만으로도 스스로 만족을 느낀다. 그러면서 내 곁을 지켜주고 삶의 용기를 부여한 안해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결혼 초기에 나도 남들 못지 않게 아름다운 꿈을 키웠었다. 멋진 인생의 그라프를 그리면서 행복의 물결우에 누워보기도 했다. 수시로 밀려오는 크고 작은 파도에도 두려움을 모르며 용케 삶의 터전을 가꿔왔다. 사랑하는 상대가 존재한다는 리유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하기만 했다. 안해에게 미안함 같은것이 없는것은 아니다. 그처럼 아름답던 꿈들이 10년 세월이 흐르도록 세월의 바위에 짓눌려 잠자고있다는 현실로 안해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어느 날 새벽에 꿈같이 머리를 쳐들었다. 그러나 안해는 아무런 티도 없이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고있다. 진실을 가늠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행복하다는 안해의 그 마음가짐으로 다소 위안이 된다. 사리에 밝고 흉금이 넓은 안해를 맞은것이 다행이다. 그런 안해가 아니였다면 나 자신도 인생의 뒤골목에서 방황했으리라. 사람이 살다보면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 동네 여느 녀자들이 멋진 옷차림으로 넉넉함을 자랑하는 모습을 엿보노라면 남편으로서 가슴이 아플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경제가 넉넉하면 욕망대로 안해에게 이것저것 해주고싶지만 로임에 매여사는 못난 인간이라 그렇게 할수도 없다. 마음뿐이고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로 때로는 모진 아픔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더욱더 안해에게 자신의 사랑을 표하고싶다. 얼마전에 한국에 간 동생이 제 녀자친구에게 옷가지며 화장품을 선물로 보내왔다. 그것도 내가 몸을 담고있는 학교로 부쳐왔다. 형수 몫이라며 똑같은것을 두 몫으로 보내기는 했지만 개운한것은 아니였다. 옷가지며 화장품을 받아들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안해의 모습을 지켜보노라니 저으기 서운한 감이 들기까지 했다. 필경은 내 선물이 아니니 말이다. 《동무도 언젠가 한국에 가면 저에게 멋진 옷을 사주세요.》 그날 밤, 잠자리에 든 안해가 조용히 하는 말이였다. 악의 없는, 순수한 말이였지만 나는 가슴이 짜릿해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언젠가는 멋진 선물을 안겨주리라 다져온 결심을 여직 실현하지 못한 자신이 안타까왔다. 그래서 소리 없이 안해를 포옹했다. 내 체온을 통해 나의 심정이 안해에게 전해질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가 하는 기대뿐이였다. 그 후에도 안해는 내 앞에서 이런 저런 일로 투정하는 일이 없었다. 빈정거리거나 신경을 꼬집는 일도 없었다. 그런 안해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털어놓지 못하는 안해가 얼마나 슬플가 하는 생각이 이 가슴을 모질게 허빈다. 해준것이 없는 나로서는 안해앞에 서면 자책뿐이다. 생각이 없어서,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지갑이 엷으니 그렇게 지내온것이다. 그래도 항상 안해에게 큰 기쁨을 선사하려는 마음 하나만은 깊숙이 지니고 다닌다. 그런 내 소행으로 안해가 만족하는지도 모른다. 가끔은 몇푼 안되는 원고료를 받으면 안해 선물을 장만하곤 한다.  보잘것 없는 선물이지만 내 마음을 두배로, 세배로 담는다. 그래서인지 안해는 내가 주는 선물이라면 무작정 만족이란다. 그래서 선물은 가격보다도 마음이 더욱 가치있는줄로 믿고있다. 살아가노라면 하찮은, 작은 일로 안해와 옥신각신 다투는 때도 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지나면 내 인생에서 더 없을 아픈 후회로 나를 몰아간다. 안해가 밉기에 앞서 못난 자신으로 채찍을 드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매번 다투고나면 나는 부엌을 드나들며 부산을 피운다. 안해의 여린 가슴에 상처를 남길가 두렵고 그 아픔을 달래주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 내 앞에서 안해는 눈물까지 찔끔 짜며 설음을 토하노라 여념이 없다. 그런 안해의 설음으로, 안해의 눈물로 나는 높아가는 사랑의 탑을 느끼고 잔잔한 행복이 가정 구석구석에 깃들고있음을 느낄수 있다. 가끔은 로임이 몇푼 안되는 교원직을 팽개치고 해외로, 도시로 떠나고싶은 생각이 굴뚝같이 치민다. 이래도 한생, 저래도 한생인데 남들처럼 큰소리 떵떵 치며 살아보자고 마음을 다진다. 그러나 내가 떠남으로 해 외롭게 살아갈 안해를 생각하면 모질게 먹었던 마음도 스르르 녹아내린다. 그리고 순간순간의 잔잔한 행복에 집념하며 내 둥지를 더욱 아끼고 사랑한다. 부모없이 거리를 헤매는 애들을 지켜보노라면 걱정과 아픔이 꾸역꾸역 괴여오른다. 부모들이 해외로, 도시로 진출해 경제상으로는 걱정이 없겠지만 정신상으로 체험하는 그 고통을 아는 사람은 적을것이다. 그래서 잘 살아보려는 그 욕망은 좋지만 자신의 둥지를 지키고 알뜰히 가꾸는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가 하는 생각도 가져본다. 우리는 서로에게 물질적인 행복을 주지는 못하지만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잔잔한 행복으로 살아가고있다. 여느 사람들의 눈에는 보잘것 없는, 하찮은 삶일지도 모르지만 우리 부부는 만족하며 살아왔다. 요즘 세월엔 삶의 방식과 수단이 다르겠지만 스스로의 삶에 만족할줄 아는것도 삶의 지혜임을 나는 자각하고있다. 물질적인 행복도 좋겠지만 서로의 믿음과 아낌이 진정한 행복임을 나는 고집하고있다. 오늘도 우리 부부는 얼마 안되는 로임으로 만족하며 살고있다. 없으면 없는대로, 있으면 있는대로 이웃들과 주고받으며 사는 나로서의 삶의 방식이 얼마나 편한지 모른다. 깨끗한 마음으로 진정을 주고받는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다. 삶이란 만족이라는 천평우에서 가늠돼야 할것이다. 모든것이 평행을 이룰 때만이 가장 보람차고 행복한것으로 알고있다. 그래서 나는 자신의 삶이야말로 오염없는 삶이라고 고집한다. 한국의 유명한 시인 이롯 선생님의 시 《삶의 바람소리》가 떠오른다. 어렵고 힘들다고또는 괴롭다고꼭 나쁜것만은 아니다세상이 그저 있는 그대로아름답고 우리 또한지금 있어야 하는 리유만으로존재할만한 가치가 있는것처럼그 속에도 우리가 살아가야 할분명한 진실이 있다애써 도망치려 한다면오히려그만큼 삶도 지쳐갈것이다구름이 흐르는 언덕에비도 오고억새도 무성하게 자란다행복은 위선적이지 않다…
11    리창현 프로필 댓글:  조회:1380  추천:89  2008-05-29
리창현1973년 5월 흑룡강성 녕안시에서 출생연변대학 통신학부 졸업흑룡강조선족작가 창작위원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회원.녕안시 조선족작가 창자위원회 부회장.수필 <<남자가 해보는 변명>>등 다수 발표.현재: 흑룡강성 녕안시에서 교육사업에 종사함.Email: lichangxian512@hanmail.net핸드폰: 13115330268  주택전화: 0453---7902268
10    딸 며느리 그리고 된장과 고추장(리창현) 댓글:  조회:1404  추천:76  2008-04-28
          딸 며느리 그리고 된장과 고추장    누구네 며느리는 어떻게 잘하오, 누구네 며느리는 어떻게 무정하오 하는 식의 말들을 들을적마다 천사만감이 교차된다.  아들로서 부모님앞에 며느리의 위치와 인격을 상기시킨다는 자체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어찌보면  똑같은 마음의 위치지만 그래도 자신을 속이면서 부모쪽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많다. 그러느라면 마누라도 제쪽에서는 물까지 찔찔 짜면서 서럽다 한다. 결국은 불쌍한 놈이 아들이다.  부모에게는 효자가 되고싶고 마누라에겐 모범남편이 되고싶은 심정은 굴뚝같지만 가끔 터지는 《화산》앞에서는정말 힘들어지는 경우가 많아진다. 이럴즈음에는 딸로 태여났으면 하는 허망한 생각도 엉뚱하게 가져본다. 어찌보면 딸과 며느리는 모두 장독과 같다는 생각이 불쑥 떠오른다. 부모들이 가장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그런 장독 말이다.아끼면서 멀리하고 멀리하면서 아끼는것이 바로 장독이 아닐가싶다. 부모들이 온갖 정성을 다하는 그런 장독이 아닐가?  아무리 가난해도 반드시 갖추어야만 마음이 편한 그런 장독이 아닐가? 먹어도 먹어도 싫지 않은 그런 장독이 아닐가? 집집마다에 거의 두개의 장독을 마련하게 된다. 하나는 된장을 담은 장독이고 다른 하나는 고추장을 담은 장독이다. 가지런히놓여진 장독은 그 가문의 자랑이기도 하다. 그래서 부모님들은 하루에도 열번쯤은 열어보는 장독이다. 어찌보면 딸은 된장과도 같다는 생각이다. 구수한 향기가 그대로 풍기는 된장과 같다. 그래서 아버지들은 술을 많이 마신 이튿날에는 무작정 된장국부터 찾는것도 일리가 있는것이다.  아무튼 속에 걸린 모든것들을 그대로 남김없이 깨끗이 씻어주는 된장의 존재에  부모들은 항상 만족이다. 그리고 부모앞에서 딸의 실수란 근본 존재가 없는것이다. 무작정 실수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에 앞서 리해가 도우니 참으로 별스런 힘이기도 하다.     며느리는 어찌보면 고추장과 같다는 생각이 엉뚱하게 마음에 걸린다. 고추장이라면 우선은 색갈부터 고와야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부모들은 고추장을 담글적에는 정말 조심스레 담그는것이다. 고추가루도 가장 좋은걸 골라서 담그군 한다. 문제는 색갈이 미우면 사람들의 구미부터 떨구기때문이다. 고추장이 된장처럼 미지근하면 그건 우선 쓰레기통에 들어가야 한다. 그래도 고추장이라면 얼얼한 맛이 있어야 마음을 상쾌하게 하기때문이다. 매운탕을 끓여도 땀을 뻘뻘 흘릴 정도로 매운맛이 있어야 일미로 간주하게 된다. 우선은 색갈이 고와야 하고 다음은 매운맛이 있어야 하지만 그보다도 탈이 없어야 한다. 그대로 저절로 숙성되는 그런 고추장이야말로 진정 사람들의 마음을 잡을수 있는 고추장인것이다. 숙성될수록 맛도 좋아지고 색갈도 고와지는것이 고추장이 아닐가?    고추장은 고추장대로, 된장은 된장대로 나름대로 맛이 있다. 무작정 된장에만 미련을 둔다면 마음을 다치기가 쉽고 무작정 고추장에만 미련을 둔다면 감정을 상하게 된다. 그리고  된장과 고추장을 함께 먹으려 해도 문제가 생기기 쉽다. 된장을 먹을 때엔 된장만 먹고 고추장생각이 나면 고추장만 먹는것이 그래도 편한것이다. 한 밥상우에 두가지 장을 다 올려놓으면 어느 장의 맛이 더 나은지 알기도 어려운것이다. 부질없는 욕심으로 마음만 다치지 말고 항상 존재의 리유만 명석하게 알고 정성을 다함이 너무도 바람직하다.   실상 고추장이든 된장이든 모두 부모님들의 정성에서 생겨나는것만큼 항상 똑같은 존재다.고추장생각이 나면 고추장을 만나고 장생각이 나면 된장을 만나면 그뿐인데 하필이면 한쪽에다 미련을 두고보면 상하고 다치는건 마음뿐이다. 그리고 절대로 고추장을 푸던 주걱으로 된장을 푸려 하거나 된장을 푸던 주걱으로 고추장을 푸려는 경솔한 짓은 삼가해야 한다.  문제는 고추장을 푸던 주걱으로 된장을 푸다보면 기분부터 잡치게 되고 된장을 푸던 주걱으로 고추장을 푸다보면 마음부터 다치게 되니 절대로 두가지 장을 한가지 장으로 착각하지 말고 항상 마음으로 가늠함이 무엇보다 바람직한것이다.     그렇다! 된장같은 딸이든 고추장같은 며느리든 상관없이 자기 나름대로의 존재가치가 따로 있는것이다. 절대로 된장이 고추장으로 변할것을 바라거나 고추장이 된장으로 탈바꿈할것을 바라는 그런 허망한 생각을 버리고 된장은 된장대로 아끼고 고추장은 고추장대로 아낀다면 서로가 화목이라는 징검다리를 보다 든든하게이어갈것이다. 모든 정성을 다한다면 된장이면 어쩌고 고추장이면 어쩌랴!!!
9    내 인생길에 펼쳐진 록색주단 (리창현) 댓글:  조회:1027  추천:76  2008-03-14
  <<흑룡강신문>> 내 인생길에 펼쳐진 록색주단   비록 맺어진 인연이 시간적으로 길지는 않지만 순간 순간에 속삭임의 여운이 내 마음의 골짜기에 너무도 아름찬 존재로 남아있음을 자각하는 순간 고마움이 물씬거리며 수많은 사색의 반딧불을 떠올린다.   질주없이 닥치는 대로 삶의 운전자가 되었던 어제의 흔적 앞에서 나름대로의 반성이 펑 뚤린 마음의 호주머니를 메우면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무작정 달려야만 직성이 풀리던 어제가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수 없으리 만큼 질책의 채찍소리는 진하게 울려온다. 삶의 벼랑에서 오염된 자신의 영혼 앞에서 \'으악- \'하고 비명같은 실망 앞에서 방황하던 자신이 오늘에 스스로의 만족과 문학이라는 너무도 성스러운 존재 앞에서 폐수를 배설하면서 오염의 도가니 속에서 파닥이던 자신이 부끄러움의 모자를 훌쩍 벗어 던지고 열심히 자신의 삶에 푸르름을 더해가는 데서 가슴속 깊이에서 튀어 나오는 고마움의 메아리는 \'흑룡강신문\'에 확실하게 낙인을 찍는다. 요염한 눈물같은 것은 완전히 포개 버리고 또 다시 삶에 채찍을 가한다. 따사로운 고마움 보다는 묵묵히 침묵으로 \'흑룡강신문\'에 폐부에서 울리는 고마움을 간직한다.   매일 신문을 보면서 활자로 찍혀진 문장과 이름자를 보는 순간 욕심스러운 생각이 마음을 건드렸다. 어려서부터 오매에도 그려오던 꿈이 머리를 쳐들고 내 영혼에 거름으로 덮혀왔다.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통크게 접어든 처녀작인 벽소설 \'비둘기\'를 가냘픈 희망의 연줄에 꿰매어 \'흑룡강신문\'에 날려 보냈다. 그러고는 눈이 빠지게 \'진달래\'면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날 \'진달래\'면의 톱에 \'비둘기\'라고 씌여진 활자가 눈앞에 띄었다. 설마 하면서 눈여겨 보는 순간 \'으악- \'하고 경악에 가까운 소리에 옆의 동료들을 놀라게 할 만큼이나 풀려진 입을 막지 못했다. 흥분에 젖어서인지 손발이 좀처럼 멈추질 않았고 전신은 최고의 흥분으로 신경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베개 옆에 놓여진 신문을 아마도 30번쯤은 읽은 걸로 기억이 새롭다.   가엾은 \'비둘기\'가 삶의 희망을 얻은 셈이었다. 그뒤로 속속 수십편의 작품을 아무런 두려움도 모르고 날려보냈다. 행운이라 할가?!  띄워보낸 작품마다 햋볕쪼임을 할수 있었다는 그 자체가 자신의 삶에 빛을 안겨주었다. 그 당시 자신이 뭐 큰 벼슬이라도 얻은 듯한 기분이어서 대단한 작가로 성장한 듯한 착각에로 사로잡혔다.   이제 와서 생각하느라니 \'진달래\'면의 담당편집을 맡고 계시던 한춘 선생님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어린 새싹을 그렇게 아끼고 사랑해 주시면서 손목을 잡아주신 한춘 선생님께 가장 깨끗한 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절절한 마음이다. 하지만 자신이 변덕스러운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다보니 아직 알뜰하게 술 한잔도 부어올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깝다. 가끔 작품에 대한 선생님의 평어까지 메일로 보내주시면서 고무했는데 자신이 얼마나 컸는지 모른다. 여하튼 고마움은 영원토록 마음속 깊이에 간직하면서 열심히 뛰고 또 뛰련다. 그리고 교육면의 편집을 맡고 계시는 라춘봉 선생님께도 심심한 사의를 표시한다. 가정면의 편집을 맡고 계시던 이인선 선생님께도 가장 깨끗한 고마움을 간직한다.   어지럽게 오염되었던 자신의 삶에 다시금 생기가 흐르면서 새로운 자신을 수립하기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렇다! \'흑룡강신문\'은 내 삶의 인생길에 펼쳐진 너무도 평범한 녹색주단이다. 오염없이 깨끗한 주단 위에서 자신을 키울 수 있었고 손목을 잡아주었으며 힘겨울 땐 옆에서 말없이 지켜주었다. 삶의 도리들을 선물해주면서 알뜰히 키워준 \'흑룡강신문\'에 다함없는 경모의 정을 간직한다.  비록 아직은 사람을 놀래는 그런 기적은 만들지 못했지만 아마 멀지않은 꿈으로 자신이 넘친다.  오늘도 \'흑룡강신문\'을 베개옆에 포개놓고 삶에 오염이 범람할 적마다 열심히 읽으면서 마음을 세척한다.  고맙다! \'흑룡강신문\'이여,영원한 내 삶의 오염없는 깨끗한 녹색주단이여!  
8    엉큼한 남자 앙큼한 여자 (리창현) 댓글:  조회:1137  추천:62  2008-03-07
엉큼한 남자 앙큼한 여자         가끔 부질없는 생각으로 자신을 아픔의 골짜기로 밀어 넣곤 한다. 하지만 가끔 아픔을 씹으면서 아픔의 진미를 감수해보는 것도 자못 감명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상 아픔이란 새로운 삶을 위한 일종의 인생수련이기도 하다. 진정 마음의 골짜기에서 흐르는 티없이 맑고 깨끗한 단물로 마음의 어지러운 구석들을 깔끔하게 청소해야지 그저 순간의 얄팍한 행위로 대처하는 그런 유치한 장난이 아니다. 조용히 구겨진 마음을 펴기도 하고 상처 진 구석들을 달래면서 다시금 자신의 인생에 대한 진단이자 해부이다. 그래서 인지 한번쯤 아픔을 삼키고 나면 어쩐지 마음도 퍼그나 개운해난다. 울다가 해시시 해지는 아이의 귀여운 모습이랄까? 아니면 소나기 뒤의 청신한 공기라 할까? 여하튼 살면서 스스로 아픔을 씹으면서 얼룩진 어제를 돌아보기도 하고 창창한 내일을 만들어보는 그 멋 또한 인생의 필수적인 과당수업이 아닐 수 없다. 나이 한 살을 더 먹고 보니 어쩐지 갑자기 철이 드는듯한 그런 멋진 감각도 생기고 인생을 다시금 멀리 보는 그런 재주도 느는 것 같은 기쁨도 가져본다. 누가 어떻든 간에 자아감각이 좋으니 몸도 편하고 마음도 개운해서 별 기분인 것 같다. 어찌 보면 기쁨은 순간적인 것이다. 즉 빨리 살아지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인생의 한길엔 언제나 기쁨이 주렁주렁 열렸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마음속에 오랫동안 가두려 해도 자꾸만 갈 길을 찾아 도망가는 그런 존재이니 너무도 아쉽다는 생각이다. 아픔은 그와 달리 자신이 아무리 버리려고 몸부림치고 미치게 발광을 해도 도무지 떠날 생각을 않고 굳게 자리를 지킨다. 철이 든 오늘 아픔의 고마운 소행에 다시금 감사한 마음을 키운다. 아픔은 항상 마음속에 오랫동안 남아서 한 인간으로 하여금 긴긴 여운을 안겨준다. 기쁨도 그것의 존재로 때로는 너무도 순간적이 되고 있지만 이 역시 고마움이 아닐 수 없다. 필경 아픔은 태어날 적에 아픔을 녹이는 그런 임무를 수행하려고 복잡한 인간세상에 발을 붙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픔은 언제나 다음에 다가올 아픔과의 간격을 늘이려고 갖은 노력을 다한다. 자신의 모든 선량함을 동원하여 주인의 마음에 올바른 인생관을 부여한다. 하지만 또 아픔이 다가섰을 적엔 조용히 눈물을 머금고 살며시 자리를 감춘다. 돌아보지도 않는 아픔의 마음에는 어느덧 상처가 역력하다. 그때에야 인식하고 후회의 빗물을 날려도 소용없이 살아진다. 아픔을 아낀다는 자체가 바로 인생에 대한 승화이고 삶에 대한 보람인 것이다. 남자나 여자를 막론하고 다가서는 아픔 앞에서는 아연지고 마는 법이다. 남자라 해서 다가오는 아픔을 꽥- 하고 소리를 지른다고 질겁해서 돌아설 존재가 아니다. 막을래야 막을 수 없는 인생의 덫이나 다름이 없다. 즉 스스로 만들어놓은 덫에 자신을 밀어 넣는 아픔만큼 아플 수가 더 있으랴 만 가끔 살다 보면 꼭 마치 그 여정을 거쳐야만 한 인간으로 하여금 보다 성숙의 단계로 올라서는 그런 감수도 마음속에서 안개처럼 피어난다. 소홀함이 남긴 경고라고나 할까?   여자는 남자와 달리 아픔 앞에서 비교적 애처롭다. 첫 반응이 여자의 유일한 무기인 눈물로 대처하면서 상처 진 마음이나 그늘진 구석들을 알뜰하게 정리한다. 하지만 그 아픔을 오래오래 마음속에 가두고 어제와 내일을 가늠하면서 조심스레 인생길을 걷는다. 이점이 여자라는 이름 앞에 걸리는 가면인지 모를 일이다. 여하튼 인간의 위대함은 언제나 여자가 먼저 갖춘다는 존재 앞에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래서 여자가 엄마의 위대함을 물려받았는지도 모른다.   서로 부부가 되여 멋진 약속이나 무서운 결심도 하면서 영원을 약속한 부부라지만 서로 모르게 상대방에게 아픔을 심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다. 듣기 좋게 시대의 조류라나? 아니면 인생의 승화라 할까?  여하튼 남자나 여자를 막론하고 서로 검은 아픔들을 적지 않게 만들고 있으니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글쎄 자신도 그런 역사의 그림자를 만들었지만 언제부턴가는 비교적 정직하게 살아가려고 모질음을 써보기도 하였지만 실상은 고통이 먼저 자리를 잡더라는 고백이다. 여하튼 말을 시작했으니 부끄럼도 깡그리 버리고 고백을 해야겠다.   그럼 먼저 엉큼한 남자에 대해 이야기 해보련다. 참으로 남자들은 너무도 엉큼하다는 말이다. 겉으로는 어쩌는 척 하지만 속으로 엉큼한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특히 여색 앞에서는 더 감출 바도 못 되는 엉큼한 존재이다. 길을 가다가도 멋진 여자가 머리카락을 날리면 조건반사인지 아니면 야생이 살아 있어서인지 아내의 존재도 착각하고 쳐다본다. 그림에 떡인 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꼭 그렇게 해야 하는 미련을 가지고 있는 것이 어쩐지 이상할 정도이다. 그러면 아내의 얼굴을 금시 흐려지고 옷매무시를 다듬느라고 어딘가 분주하다. 이렇게 엉큼한 것은 아마 여자도 피차일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젊은이나 늙은이나 그 이상 이하도 없을 것이다.   조금 남자의 비밀 같은 것이라면 특히 노래방 같은 곳에서 아가씨와 춤을 추면서 그렇게 정다울 수가 없다. 완전히 마누라보다도 예쁘면 어디 그렇게 예쁠 수가 있을까? 글쎄 감각 같은 거야 좀 다르겠지만 그렇게 혼이 나갈 정도까지는 불필요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다. 각별히 짚고 넘어갈 점이라면 모든 남자가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엉큼한 그런 남자들 말이다. 겉으로는 얼마나 정직한 것 같지만 전등불이 꺼지면 먼저 접어드는 그런 엉큼한 남자 말이다. 어떤 여자들은 그런 남자들을 기가 막히게 좋아한다나?   그래도 그렇게 엉큼해도 잠만은 제집에 들어와서 자는 그런 남자들은 책임감 하나 만은 만점이다. 그래도 아내 옆에 와서 편히 자는 그런 남자에 대해 여자들은 다소 칭찬도 해 줄만하다. 그렇지 않고 밤까지 어는 어둑진 곳에서 지낸다면 후과는 상상도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남자가 따로 있는 것이지 절대가 아니다. 실상 남자가 아무리 엉큼하다 해도 여자만은 못하다. 남자들은 언젠가 꼭 들통나고 만다. 아무리 어떻게 감추고 꾸민다 해도 예민한 여자의 제6감각을 피하지 못한다. 그렇게 우기다가 나중에는 수그러들면서 큰소리는 그래도 뻥뻥 쳐대는 것이 남자이다. 끝까지 감추지 못하고 감추다 감추다가 나중에는 남은 것을 자기 절로 다 내놓는 사람이라서 남자인지도 모른다. 여하튼 남자들의 계획이 주밀 하지 못한 것만 사실이니 역시 부족 점이라도 과언이 아니겠다. 부족 점이 아니라면 죄책감이 드는데 다행이라는 생각이 더 합당할 것 같다. 총적으로 남자들은 자아공제 능력이 약하다 보니 여자들도 이해 할만하다. 언제든 도를 넘으면 재미가 슬하니 항상 가정이라는 개념을 머리 속에 기억하면서 일들을 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일이 아니라 다른 아내나 자식을 위하는 그런 엉큼한 마음을 가지고 엉큼함 속에 숨겨진 사랑으로 아내나 자식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남자의 진정한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이제라도 깨끗하게 손을 딱 씻고 가정의 울타리에 남자의 든든한 기둥을 깊숙이 박고 움직이는 가정의 동력을 가해보자!  엉큼하다는 여자들의 때도 깔끔히 씻으면서 시름 놓고 살아보자!   이제는 남자들에 대해 이만하고 여자들에 대해 이야기 해보련다. 뭐 여자들을 얼마나 안다고 죄꼬만 여석이 그런 잠꼬대냐 하는 여자들의 얄팍한 핀잔도 있으련만 아는 만큼 끝까지 해보려는 고집을 이겨보려는 생각이다. 여자들의 양해를 먼저 빌면서 말이다.   여자들은 아주 앙큼하다. 즉 남자들보다 더 무섭다는 말이겠다. 여자들의 속을 알기가 상당히 어렵다. 오죽했으면 어느 선배님께서  “여자는 영원히 다 읽을 수 없는 책이다.” 고 말씀했으랴!  이는 여자들의 앙큼한 농도가 상당히 높다는 말로 이해 된다. 그렇게 남편과 고분고분하면서도 저로서의 생각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감추는 재주가 상당하다는 말이다. 이는 여자들의 재주보다도 남자들이 어리숭한 표현인지도 모른다. 여하튼 여자들은 남자들을 얼리기가 그렇게 쉽다고 입말처럼 해댄다. 그것도 살아가는 길에서 일종의 무기이니 언제든 필요한 것이다. 그러지 않고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어찌 복잡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으랴!  가장 앙큼하게는 옆집 나그네를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제 남편 앞에서는 무감각이다. 아무리 따져봤자 헛물을 캐고 마는 일이다. 나중에는 결국 옆집 나그네의 실수로 들통이 나게 된다.   그래도 여자들은 끝까지 혀를 가로물고 아집을 지키려고 몸부림을 쳐댄다. 여하튼 무서운 존재임을 알아두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앙큼하기는 정말로 앙큼하다는 생각이다.   어찌 보면 여자들은 감추는 것이 습관된 모양이다. 그래서 철들어서는 감추기에 신경을 곤두세우는지 모른다.  감출 것을 감춰야지 무작정 감추는 것은 미가 아니다.   아무리 남자들이 눈이 근시라고 해도 그렇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상식적으로 알아둘 필요가 있다.  회사에 일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 온밤 다른 남자의 품에서 애교를 부리고 있다는 정보가 날아왔을 적에 남자들은 너무도 실망한다. 그 다음은 말을 안 해도 짐작이 갈 것이다.   어떻게 남자 앞에서 엉큼하게 행동했다 할지라도 역시 이제라도 가정에 마음을 붙이고 얼마 안 되는 여생을 살아가는 것이 더 바람직한 걸로 알고 자신의 어리숙한 감춤으로 세월을 속이려는 엉뚱한 음모나 계획 같은 것은 버려야 할 시기가 닥쳐왔음을 인식하라!   이제는 남자들의 눈도 많이 밝아졌고 감각은 여자들을 훨씬 초과했다. 시대가 불쌍한 남자들에게 새로운 선물 <제9의 감각>을 보내주었다. 그러니 여자들도 자신의 얄팍한 엉큼함에 만족을 버리고 남편과 자식과 행복하게 살아감이 우선 해야 할 일이라고 권고한다.   엉큼한 남자- 이는 좋은 꼬리표가 아니기에 언제든 정직한 남자로 탈바꿈을 해보자!  하루를 살아도 편하게 죽음 앞에서 미안함이 없도록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해내는 남자들의 용맹을 치켜들고 아내와 자식의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를 주지 말고 오늘 이 순간부터라도 부질없는 엉큼한 생각들을 깡그리 버리고 새롭게 삶의 발동을 걸어보자!   앙큼한 여자- 제 자신이 엉큼하다고 만족 말고 세상일을 속이려는 짧은 생각을 어서 빨리 버리고 남편의 넓은 품에서 자신을 말없이 반성해보라!  머리가 길면 생각이 긴 것이 아니니 짧은 머리라도 열심히 살다 보면 아름다움이 사방에서 피여 날 것이다!  연분을 아끼면서 서로가 서로를 믿어주면서 얼마 안 되는 인생길을 재미있게 걸어보자! 불쌍한 여자들이여!   남자가 엉큼하든 여자가 앙큼하든 누가 누구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할 필요는 없으니 오직 가정이라는 이 하나의 위대한 공정만을 열심히 해나간다면 우리들의 삶도 선진국의 삶과 한자리에 놓이게 될 것이다. 오직 마음만 먹으면 못해 낼 일이 무엇이랴!   남자들아 힘을 내자!  여자들아 고운 마음 계속 키워가면서 가정에 한 떨기의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으로 피어있으라!                                     
7    길(리창현) 댓글:  조회:2418  추천:45  2008-02-24
길    달리던 버스가 고장이 생겨 잠시나마 처음으로 고속도로에서 휴식을 가지게 되였다. 날듯이 달리는 각양각색의 차량들이 아찔할정도로 옆을 스치며 신바람나게 달린다. 눈깜빡할사이에  희미한 꽁무니만 남기고 사라진다. 쏟아지는 무더위로  땀을 훔칠새가 없다. 길가에는 그늘이 될만한 나무하나도 찾아보기가 힘이 들다.  다소 거의 죽어가는 나무 한그루가 시선에 찾아들었다. 나무라해봤자 그늘도 거의 없는 그런 존재였다. 불어오는 더위는 가슴에  김을 뽑는다. 모두가 하나같이 허덕이는 모습을 지켜보느라니  저도몰래 고향의 길과 고향의 아름드리 나무가 사무치게 그리워난다. 아무리 가파로운 길이라도 오르다가 힘이 들면 시원한 그늘을 찾아 마음의 더위를 단김에 빼버리는 그 감각이 얼마나 그리운지 모른다. 그리고 가로세로 뻗어나간 비록 지금처럼 콩크리트로 만든 그런 고속도로는 아닐지라도 항상 마음에 생기를 심어주는 그런 길이 오늘따라 사무치게 그리워남을 막을길 없다.  그러면서 울퉁불퉁한 고향의 그  정든 길들이 포물선을 그리면서 마음의 오솔길에 수많은 여운을  물어온다.    철모르던 그때  고향에는 그래도 국도가 시원하게 뻗어있었다. 국도라야 기껏해야  흙으로 다져진  길이였다.  그 누구도 물론하고 마음껏뛸수있는 그런 자유의 길이였다. 가다가 힘들면 마음껏 휴식의 허리띠도 풀수가있는 그런 편한길이 였다. 당시 큰길은 우리들로 하여금 마음껏 휴식을 할수있는 유일한 공원이나 다름이 없었다. 거기에서 각양각색의 차들을 익혀왔고  얼굴은 몰라도 마음만은 항상 밝아야 함도 배워왔고  길은 각별히 위험한 장소이니 조심성도 절로 배워왔다. 항상 부모님들은 근심이 태산같았으나 고향의 큰길에서 어느 한사람이 사고로 돌아갔다는  력사는 기록에 없는 줄로 알고있다. 이제와서 새삼스레 안겨오는 그 점이 바로 고향의 그 길은 여직껏 숨을 쉬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숨소리가 우리들에게 생기를 주었고  생명에 빛을 뿌려주었으며 어려서부터 마음에도  길을 닦아야 함을  너무도  편하게 가르쳐주었다. 그런 엄마의 가르침같은  무한한 가르침은  고향사람들에게  소중한 마음의 재부를 갖춰주었다. 그것은 비록 길뿐이 아니였다. 끊어지는 인정을 이어주는 그런 고마움의 뉴대이기도 한것이다.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이어지고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이어지는 그런 길의  순직한 마음하나로 고향은 항상 평화의 락원으로 탈바꿈을 하였다. 애들은 건강하게 자라나고 로인들은 장수하고  게다가 해마다 풍년이 들어 집집마다에서 기쁨의 노래가락이 문사이를 비집고 이집 저집에 아름다운 멜로디로 울려간다.   고향의 길은 너무너무도 많은 인생도리를 가르쳐주었다. 숨소리마저 심장의 박동과 같이하여 언제든 마음이 편한 그 고향의 길이 가슴을 적신다. 여하튼 인간이면 갖추어야 할 참도리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가르쳐주었다. 가장 기억에 새로운것이라면 너그러운 인품이다. 니것내것을 모르던 어린시절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마음의 쪽문을 살며시 열고 향기를 뿜는다. 시원한 그 향기앞에서 자신이 갑작스레 너무도 왜소함을 느껴보기도 한다. 여직 길이 가르친 그런 참도리들을 진정 삶의 보람으로 간직해왔는지 아픔부터 앞선다. 여직 살아오면서 인품도 말리 삭막해졌다는 그 점은 부정할수 없지만 자신이 진정 그런 삭막함으로 오열을 느끼면서도 그런 한류속에 묻혀버렸는가가 너무도 근심스레 가슴에 돌멩이를 던진다. 색다른 음식이 나지면  먼저 이웃부터 걱정하여 량적으로도 더 준비하는 고향정에  메마른 마음의 강도 어느덧 젹셔온다. 여하튼 고향정은 지울수없는 락인이 되여 마음의 큰길에 아름다운 록색주단을 깔아준다. 그러면서 고향길에 보다 큰 고마움을 간직하면서 마음의 길도 열심히 닦아야 함을 절실히 느껴본다. 30여년의 삶에 연장선과 길을 닦아왔지만 구경 내 마음의 길은 어느정도로  만족을 주는지  그리고 고향길과 마주하면 또 그 어떤 부끄러움들이 사태처럼 쏟아지지 않을가 걱정스럽다. 아예 고향길에 가보고 싶다. 너그러운 고향길에 모을 맏기고 싶다. 실컷 고향길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삶을 열심히 진단하고  부끄러운같은것은  몰래 버리고 싶다. 그렇지만 반성만은 꼭 열심히 할것이다. 그러면 고향의 길도 보다 장수하고  자리잡힌 주름들도  쫘악- 하고 펴질것같은 그런 기쁨으로  비록은 고속도로에서 더위와 모지름을 쓰고 있지만 이상스럽게 마음속으로부터  뿜어오르는 시원한 향기가  구겨진 내 마음의 길우에서 나풀나풀 춤을 추면서  또다시 삶의 질을 승화시킨다. 하지만 반면에  아픔의 씨앗도 살며시 머리를 쳐든다. 즉 길의 외로움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  그 깨끗한 길이건만  인생의 참도리를 가르쳐주는 그런 신성한 존재이건만  가름침을 받으려고 찾아오는 그림자가 적어졌으니  마음은 모질게 아파만난다.   가끔 애들을 데리고 고향의 길에 몸을 실어야겠다. 자식들에게도 보다 아름다운 추억들을 심을수있는 그런 절호의 기회를 절대로 놓지지 않으련다. 그리고 성명절이면 꼭꼭 찾아뵙고 싶은 결심도 가슴에 새겨둔다. 고향의 그 길 영원히 내 삶의 등대가 되여주고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사랑을 베풀면서  아프거나 쓸쓸할때에도 하냥 그 숨소리로  사랑의 향기를 뿌려줄것을 열심히 기도해본다. 항상 고향의 그 길에 깨끗한 고마움을 간직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리라고 굳게 맹세한다.          
6    안해와 남편 댓글:  조회:2382  추천:53  2008-02-22
안해와 남편(리창현) 때가 되면 서로가 짝을 무어  기인긴 세월을  서로 의지하면서 너무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살아가는것이 인간인가 보다.  부모라는 이름자를 가지게 되는 그 순간부터 가련한 마음도 함께 마음의 중심에 그라프를 그리게 된다.  그 누가 이 세상을 오차도 없이  정확히 짚으랴고  늘 근심덩어리를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영원한 감독과 재판장노릇을 하는것도 역시 부모라야 겠다.  그래서 부모들은 언제나 덕을 쌓기에 힘을 아끼지 않는가싶다.  남의집 애가 불행을 겪으면 꼭 마치 자기집일처럼 그렇게 가슴아파하고 걱정하신다.  당시는 몰랐었는데 이제와서 생각하느라니  그 모두가  오직 자식을 위한 그토록 고마운 마음임을 때늦은 인식이 가슴에 파문을 일으킨다.  보모님들께서 얼마나 힘드셨을가하는 생각도 살며시 머리를 쳐든다.  여하튼 부모님께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면서 있는 정성 다하여 효성하리라 굳게 다짐해본다.  그러면서 이렇게 짝을 무어준 부모님들께  큰절을 올리고 싶다.   이렇게 짝을 무어 남자는 남편이라는  <<갑옷>>을 입게 되였고 녀자는 안해라는 면사포를 쓰게 되였다.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한다고 크게 약속을 해왔지만 현실은 그렇게 랑만적이 아니였다. 너무도 갑작스레 들이닥치는 생각밖의 일들로 서로가 얼굴을 붉히면서  그라프에 깜찍한 포물선들을 긋는다. 그것은 오직 하나의 포물선만이 아니였다.   안해는 비교적 개성이 강한 편이다. 최씨네 딸이니 더 말이없어도 알만한것이다. 하지만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개성이 너무 강한편이다보니  모순의 해결에서 무작정 내가 흰기를 내드는 비례가 많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안해를 무서워한다는 말은 아니겠다. 어느 선배님께서 오죽했으면  <<녀자들의 말을 들으라구. 절대 랑패가 없다니깐! >>라고  말씀했으랴!     이러고 보면 내가 비교적 명석한 편이라 할가? 아니면 남들이 말하는 치괄얜 이라고 할가? 여하튼 남들이사 어떻게 말하든간에 나로서는 그래도 맘이 퍼그나 편한 축이여서 그 어떤 평판도 받아들일만한 사상경계가 갗추어져있다.  현대사회에서  그래도 이런 무기쯤을 갖추자면  보다높은 의식이 필요한것이다.  때로는 나자신도 한번쯤은 큰 소리를 땅- 하고 쳐보지만  그러고나면 어쩐지 마음이 늘 개운치가 않고 꼭 마치 어느 물개에게라도 물리운듯한 그런 어색한 기분이여서 아예 져보는편이 더욱 매력이 아닐가고  나로서의 철학을 만들기도한다.   이렇게 말하면 일부 남자들이 무슨 개똥철학이냐하고  픽-하겠지만  그렇게 극단적으로 생각말고 어느정도 각도를 바꾸어 사고함이 너무도 필요하다는 말이다. 글쎄 년세가 많은 분들에게는 유치원아이의  견해나 다름이 없으련만 우리 젊은이들로서는 생각이 너무도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매번마다 안해와 다투고 난 후에는  그저 아무일도 없었듯이 스치고 지난후면 안해로서도 어딘가 좀 부끄러운 생각이 드는지 누가 말도안했는데 제딴에서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면서 눈물까지 찔끔 짜는것을 보느라면 남편으로서의 매력이 쭈욱- 하고 펴지는것같은 기분이다.  아무리 명석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살다보면 서로 얼굴을 붉히기가 일쑤이다. 매번의  작은 일들이라해도 절대로 소홀히 여기지 말고 제때에 깨끗하게 씻어야지 그것들이 제때에 소독이 잘 안되면 언젠가 곪아서 무서운 후과를 초래하게 된다.   남편이라는 그런 존엄하나로 땅- 하다나면 언젠가는 여린 안해의 가슴에 대못을 박기가 너무도 쉬운일이다. 절대로 남자가 무서워서 떠나지 않고 살아가는 안해가 너무도 소수라는 말이겠다.   남편으로서  해야할일도 많지만 그가운데서 가장 큰 일이 바로 가정이라는 이 자그마한 사회를 열심히 이끌어가는것이다.  가정이 무너지면 모든것이 무너지는 그런 무형의 존재가 수시로 인간의 주위에 올가미로 놓여있는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남편이라도 가정이라는 이 자그마한 울타리도  이끌지못하면  다른 무슨 사업을 론할가?!   안해도 마찬가지다.  지금 적잖은 안해들은 돈에 눈이 아홉이다. 그저 그놈의 돈때문에 애매한 남편에게  아픈 상처를 남기고 있는것이다. 매일의 작은 상처들이  하나 둘 모여서 언젠가는 큰 후회를 가져오게 된다. 그러니 너무  눈 앞만 내다보지 말고 저 멀리 내다보면서 자신의 삶에 만족할줄아는 능력을 키워야한다. 매 한마디의 잔소리도 남편에게 힘이 될수있게 그렇게 좀 유머적으로 함이 너무도 바람직하다. 실상  지금 가정이 좀 구차하다 하더라도  만약 행복한 가정을 움직이고 있다면 그 이상 더 큰 재부가 이세상에 없는것이다.  항상 대방의 마음을 리해하여주고  대방에게 해줄말을 열심히 연습한후 해봄이 얼마나 중요한지모른다. 아무리 부부라 해도 아무말이나 훌훌 나오는대로 하는것이 말이 아니다.  이러고보면 대방의 자존심을 깨뜨리기가 일쑤이니 언제든 해줄말이라면  그 말이 힘이 되는가 아픔이 되는가에 충족한 고려가있은후 결정함이 바람직하다.   서로는 안해이고 남편이지만 자식에게는 또 부모라는 위대한 존재이니 서로에게 훌륭한 대방이 되여보고 자식에게는  훌륭하다는 론하지못하더라도 최저한   자식으로서 가정이라는  요람의 존재로 만족을 느낄수있게 해야한다.  딱 잘먹고 잘입어야 행복한 가정이 아니다. 못살아도 서로가 한마음이 되여 가난을 함께 이겨내느라면 언젠가는 행복의 신이 당신의 가정에 아름다운 무지개를 뿌리내려 줄것이다.   남편- 너무 낡아빠진 전통에만 자신을 담고 힘들게 살지말고  안해의 마음속도 가끔은 뒤져보면서 눅거리 선물이라도  슬그머니 챙겨주느라면   안해들은  눈물나게 고마워한다. 실상 녀자들을 만족시키기가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니다. 항상 작은일에 초점을 두고 정성을 담아서 해준다면  쓸데없이 잔소리를 해댈 안해가 이 땅에 아직은 존재하지 않을것이다.   안해- 너무 자신이 불쌍하다고  본가집 부모들 앞에서 자신의 현실에 하소연말고 남편 흉도 적게 보면서  효과없는 잔소리같은것도 적게 하면서   남자들의 허줄한 자존심일지라도 높이 봐주면서  슬그머니 춰도 주면서 살다보면 남자들은 너무도 감격되여 눈물까지 찔끔 짤것이다.    그렇다! 남편이든 안해든 언제나 한마음이 되여 기인긴 인생로정에 서로가 서로를 위해 헌신하려는 위대한 마음을 지니고  함께 손잡고 달려보자! 힘들면 쉬여가더라도 절대 대방을 원하지 말면서  보람있는 삶을 위해 날마다 날마다  부지런히 달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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