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용수 조글로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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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죽음 체험기 댓글:  조회:5566  추천:0  2013-03-28
스페셜 리포트 0.35평 관 속에 누워 죽음을 통해 묻다 “나는 잘 살고 있는가?”   ▲ 지난 5월 12일 서울 서초동 능인선원에 있는 죽음 체험 수련장 ‘지구별여행자’에 16명의 참가자가 모였다. 유서, 묘비명, 자서전을 쓴 후 입관 직전의 모습. 맨 끝에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저승사자가 서 있다. 나는 죽었다. 나는 600×1900×450㎜ 크기 나무 관 안에 누워 있다. 누런 삼베로 만든 수의를 입고 손과 발은 흰색 끈으로 꽁꽁 묶여 있다. 이 생의 마지막 양식이라며 입에 넣어 준 생쌀 한 숟가락은 조금 전에 다 삼켰다. 움직일 수 없다. 옆으로 돌아누울 수도 없고, 무릎을 굽힐 수도 없다. 얼굴이 가려운데 긁을 수도 없다. 캄캄하다. 빛 한 조각 들어오지 않는다. 10분 정도 지났다. 답답함이 아늑함으로 바뀐다. 엄마 자궁 속이 이러했을까? 이때 밖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삶을 살고 싶습니까?”        나는 지금 죽음 체험 수련 중이다. 지난 5월 12일 죽음체험수련원을 운영하는 비영리단체 ‘지구별여행자’(구 ‘아름다운 삶’·대표 김기호)가 진행하는 행사에 16명의 참가자가 모였다. 지구별여행자는 서울 서초구 서초동 능인선원 내 방 한 칸을 빌려 사용하고 있었다. 이날 체험 참석자는 50~60대가 대부분이고, 30대 초중반의 젊은 여성 두 명과 30대 후반 부부도 있었다. 자서전 쓰기, 죽음 명상, 유언장 쓰기, 묘비명 쓰기, 입관 체험 등으로 진행되는 이 프로그램은 4시간30분 동안 진행됐다. 지구별여행자는 매달 한 번씩 죽음 체험 수련을 한다. 개별 신청자도 있고, 기업이나 관공서 등 단체 체험도 한다. 2002년부터 총 1만5000명이 죽음 체험을 거쳤다고 했다.        내가 취재를 위한 체험을 한 이날, 미국의 인터넷 매체 VICE라는 곳에서 촬영단이 찾아왔다. 지구별여행자 김기호 대표는 “입관 체험 문화는 한국에만 있어 유럽이나 미국 등에서 신기해 한다. CNN이나 내셔널지오그래피에서도 찾아왔다”고 말했다. 그는 참가자들에게 동의를 구하고, 자신이 촬영되길 원치 않는 참가자는 미리 얘기를 해 달라고 했다. 최대한 죽음 체험에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오후 4시50분. 조용한 음악과 함께 자서전 쓰기가 시작됐다. 출생에서부터 초·중·고등학교 입학과 졸업, 결혼과 출산, 회사 입퇴사 등 내 삶의 결정적인 순간을 만나는 시간이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이력서가 아니라,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 인생의 빛나는 순간들. 여백을 한 자 한 자 채워 가며 내 인생을 슬라이드처럼 돌려본다. 두 번째 자서전 양식이 놓여 있다.        ‘내 인생의 3대 뉴스는?’        ‘이번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는?’        ‘이번 삶에서 내가 배운 교훈은?’        ‘만약 나에게 삶이 6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면 꼭 하고 싶은 것은?’        수련도우미이자 자원봉사자 하지원(여·50대)씨가 자신을 소개한다. 그는 2년 전 이맘때 임종 체험을 했다고 한다.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강력한 동기 때문에 자살시도를 했고, 불행 중 다행으로 1차 시도에 실패한 후 이곳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죽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지구별여행자 김기호 대표는 “한번 죽어 보십시오” 하고 죽음 체험을 권유했다. 하씨는 죽음 체험을 통해 자신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됐다고 했다. “정말 소중한 것들을 다 놓치고 죽으려 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죽음 체험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됐습니다.” 간호학을 공부한 그는 전공을 살려 뒤늦게 웰다잉 프로그램 보조강사로 일하는 중이다.        오후 5시30분. 김기호 대표의 강연이 시작됐다. 일명 죽음학 강의. 그는 “죽음도 하나의 여행상품”이라고 했다. 우주적 존재가 되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이 체험을 ‘지구별 여행’이라고 불렀다. 그는 100장이 넘는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넘겨가며 차분히 강연을 이어갔다. 동영상과 애니메이션, 사진과 통계 자료를 활용한 강연은 흥미로웠다. 강연의 요지는 “2차원에 사는 개미들에게 3차원에 사는 우리의 존재가 안 보이듯, 죽음은 현실의 너머에 있고 죽음 체험은 시공간을 초월한 우주 여행과 같다”는 것이다.        오후 6시30분. 수의를 갈아입는다. “수의는 아래부터 입으십시오.” 금색 보자기를 풀어 수의를 보자 죽음 체험을 한다는 게 실감난다. 태어나 처음 만져보는 수의를 내가 직접 입는 기분, 묘하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달려 있지 않다. 죽은자는 갖고 갈 게 없다. 양쪽 발목을 묶고, 허리까지 꽁꽁 동여맸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참석자들에게 촛불을 하나씩 나눠 주고 형광등을 끈다. 나의 부고 일지, 유언장, 묘비명을 쓰라고 했다. 하나씩 써 나갔다.     “묵언하십시오. 죽는 날인데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유언장 쓰면서 99%는 웁니다. 통곡하고 싶으면 하십시오.”        속으로 ‘진짜 유언장도 아니고, 가상 체험인데 설마 99%가 울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나의 부고 일지를 먼저 쓴다. ‘나는 오늘 ( )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나를 ( )했던 사람이었다고 기억할 것이다. 나의 죽음을 가장 슬퍼할 사람은 ( )일 것이다.’ 이어서 유언장을 쓴다. 내 앞에는 편지지 두 장이 놓여 있다. ‘진짜 이 순간이 마지막이라면?’ 상상해 본다. 사랑하는 사람들 얼굴이 하나둘 스친다. 버킷리스트에 적어둔 여행지들이 좌르르 떠오른다. 한 자 한 자 적어 나간다. 담담하게 시작한 유언장 반 장이 채워지면서 점점 감정이입이 돼 간다.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에게 이 생의 마지막 말을 남기면서 코끝이 시큰해진다. 여기저기에서 훌쩍거리기 시작한다. 참으려 하는데 눈물이 줄줄 흐른다. 도우미가 조용히 다가와 휴지를 한 움큼 뽑아 놓고 간다. 어느새 콧물까지 흘리며 울고 있다.        오후 7시30분. 입관할 시간이다. 산 중턱에 내가 들어갈 관이 입을 떡 벌리고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저승사자를 따라 500미터 정도의 숲길을 걸어 들어가야 한다. “영혼의 거리는 3미터입니다. 앞사람과 거리를 유지하십시오.” 한 손에는 촛불을, 한 손에는 나의 묘비명과 유언장을 들고 산으로 향한다. 어느새 어둑신하다. 서쪽하늘에 주황빛 노을이 서려있다. 서울 강남구 도곡동 타워빌딩의 조명이 하나둘 켜진다. 바람이 차다. 싸한 공기가 감싸면서 오한이 느껴진다. 내 관 앞에 섰다. 관 속에 들어갔다. 도우미 두 명이 다가와 흰 천으로 손과 발을 꽁꽁 묶는다. 관 뚜껑을 덮는다.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깜깜하다. 잠시 후,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쾅! 쾅! 쾅!” 관 뚜껑 위에 망치질을 한다. 귀청이 찢어질 듯하다. 이따금 김기호 대표가 질문을 던진다.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삶을 살고 싶습니까?”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1.14㎡(약 0.35평)의 공간에 누워, 나는 언젠가 내가 가야할 길을 이렇게 먼저 가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20분? 30분? 시간 개념이 무화됐다. 누군가 꺼내 주지 않으면 나는 관에서 나갈 수도 없다.        “자 이제, 당신은 다시 태어날 시간입니다.”        관 뚜껑이 열린다. 먼발치 도시의 조명에 눈이 부시다. 일어나 앉는다. 봄밤 바람이 피부에 확 닿았다. 새롭다. 바람에 풀꽃들이 한들거리는 것도 새삼스럽다. 나는 가장 짧은 시간에 먼 여행을 다녀왔다. 너무나 강렬한 체험이었다. 출처: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2&nNewsNumb=002257100008 죽음 배우는 사회 죽음책 쏟아지고 죽음체험 해보고 웰다잉 강사 키우고 죽음준비학교 만들고… 죽음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예일대 셸리 케이건 교수의 ‘죽음이란 무엇인가’는 출간 6개월 만에 15만부가 팔렸고, 한국죽음학회 최준식 회장(이화여대 한국학과 교수)은 4월 말 ‘죽음학 개론’ ‘임종 준비’를 동시에 냈다. 생사학연구소 오진탁 소장(한림대 철학과 교수)이 4월 말 ‘자살 예방, 해법은 있다’를 출간했다. 부제는 ‘죽음 이해가 삶을 바꾼다’. 오진탁 소장은 총 50권짜리 ‘생사학 총서’를 기획 중인데, 그 첫 책인 ‘삶, 죽음에게 길을 묻다’를 펴내기도 했다.        ‘웰다잉(Well-dying·아름다운 마무리)’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웰다잉 칼럼니스트’라는 신종 직업도 생겼고, 복지재단들은 웰다잉 전문강사를 적극 육성 중이다. 전국 복지관에서는 일반인을 상대로 ‘죽음준비학교’를 부지런히 연다. 정부 역시 ‘웰다잉’에 무게를 두고 각종 정책에 이를 반영하는 추세다. 지난해 한림대 생사학연구소는 인문한국지원사업단(HK)에 선정됐다. 이 사업은 교육과학기술부와 한국연구재단이 주관하는 것으로, 한림대 생사학연구소는 향후 10년간 매년 5억원의 연구비를 지원받는다. 또한 지난해 초 보건복지부 산하 국가생명윤리정책연구원을 창립, 존엄사와 임상실험 등 생명을 둘러싼 첨예한 이슈를 본격적으로 다룬다.        왜 최근 들어 죽음에 대한 관심이 급증한 것일까. 오진탁 생사학연구소장은 “삶의 질(웰빙) 문제를 넘어 죽음의 질(웰다잉)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에 접어들면서 생긴 현상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사회 지도층의 자살이 늘고, 학교폭력이나 왕따로 인한 청소년들의 자살도 죽음에 대한 관심을 부추긴 요소”라고 밝혔다.        웰다잉은 노인이나 죽음에 임박한 사람들만의 관심사가 아니다. 웰다잉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은 크게 두 부류다. 하나는 ‘죽음 이해가 삶을 바꾼다’는 측면에서 죽음을 현상학적·인식론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로, 죽음에 대해 적극적으로 공부하는 부류다. 또 한 부류는 ‘아름다운 마무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죽음에 가까운 사람들이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받지 않는다는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하는 등 인생의 마지막 길을 스스로 정하는 사람들이다.        먼저 전자를 보자. 이들에게 죽음 공부는 ‘삶 공부’와 동의어다. 죽음이란 과연 무엇이며 사후세계는 존재하는지를 탐구하고 임종체험 등을 통해 현재의 삶을 더욱 충실히 사는 것이 목표다. 죽음체험수련원인 지구별여행자 김기호 대표는 “과거에는 자살을 시도했거나 죽음이 머지않은 노인 등 물리적인 죽음과 가까운 사람들이 주로 찾아왔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20대도 찾아오고 30대 젊은 부부도 많이 온다. 기업 등 단체 체험 역시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에 삼성전자 서비스, 한화생명, JTBC 등의 기업체로 찾아가 죽음 체험 교육을 했다. 임종 체험자가 남긴 소감문을 몇 개 보자.        “삶은 쏜살같이 날아가는 것을 100년, 1000년 살 것같이 집착하면서 산 자신이 너무 부끄럽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하심하면서 겸손하게 살겠습니다.”(정희영·57)        “방향성 없는 ‘성공’에 집착하던 내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내가 이만큼 삶에 집착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지 이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죽음을 경험하신 어머니의 마음이 어땠을지 생각하니 계속 눈물이 났습니다.”(장소현·22)        한국죽음학회의 성격도 비슷하다. 명칭과는 달리 연구자 중심이나 학술적인 단체가 아니다. 일반 대중과 함께하는 장으로 “죽음을 통해 삶을 이해하자”는 게 목표다. 2005년 창립 당시 최준식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행복해지고 싶은가. 그렇다면 죽음부터 배워라.” 성동구 하왕십리동에 있는 ‘한국죽음학회’ 사무실은 현재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대표 손명세·연세대학교 보건대학원장) 사무소로 쓰고 있다.        사전의료의향서는 식물인간이나 질병의 말기처럼 회복 가능성이 없는 상태가 됐을 때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혀두는 의향서다. 병원에 입원해 생명유지장치를 주렁주렁 달지 않고 품위 있는 죽음을 맞겠다는 사람들이 의식이 건강할 때 미리 작성해 두는 것이다. 사전의료의향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이름: )는 명료한 정신 상태에서 직접 이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합니다. 건강을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진단과 치료에 대하여 나 스스로의 의사 표시가 불가능해질 때 담당 의료진과 가족들이 이 사전의료의향서에 기록된 나의 뜻을 존중해 주기를 바랍니다.”        실천모임은 3년 전 민간단체로 출범했는데, 지금까지 1만명 정도가 이 의향서를 작성했다. 사무실(02-2281-2670)에 전화하면 우편으로 의향서 서식을 무료로 보내준다. 본인이 직접 작성한 후 ‘사전의료의향서’와 동봉된 두 장의 ‘사전의료의향서 작성 확인증’ 역시 본인이 보관한다. 8000명까지는 실천모임 사무소에서 보관했지만 개인정보 유출의 문제가 있어 더 이상 보관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전의료의향서 자체는 법적 효력이 없으나 판례법상 효력을 갖는다.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는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는 것이 중요하고, 위급한 병으로 입원할 경우 병원에 의무기록과 함께 첨부하면 중대 자료가 될 수 있다.        지난 5월 13일 오후,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 사무실을 찾아갔다. 실천모임은 웰다잉에 관심있는 자원봉사자 12~13명의 도움으로 운영된다. 한 대뿐인 전화기에서 쉴 새 없이 벨이 울렸다. 자원봉사자 권창중(69)씨와 틈틈이 대화를 나눴다. 그 역시 아내와 함께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해 뒀다고 했다. 그는 “병원에서 불필요한 생명연장장치에 의존하고 싶지 않다. 자식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집에서 편안하게 임종을 맞으려 한다”고 했다. 의향서를 작성하는 사람들 대다수는 70대로, 작성 이유는 권씨와 비슷하다고 한다. “자식들은 처음엔 동의하지 않았지만 여러 번 설득 끝에 우리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됐다”고 말했다.        70대 할머니 한 분이 찾아왔다. 백발 단발에 금테 안경을 쓰고 빨간 립스틱을 곱게 바른 그는 우아했다. 노부부의 사랑과 존엄사를 다룬 프랑스 영화 ‘아모르’의 여자 주인공을 연상시켰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사는 장영자(75)씨. “참 고우시다”고 말을 건네자 “우리 바깥양반 아프기 전에는 더 고왔는데”라며 미소 지었다. 그는 “이 집은 전화가 잘 안 돼. 할 때마다 통화 중이야. 그래서 찾아왔어”라고 했다. 그가 사전의료의향서를 쓰기로 한 것은 병상에 있는 남편을 보면서다. 그의 남편은 3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져 의식이 없는 상태다. 큰 병원 세 곳을 전전하다가 치료 가능성이 희박해 경기도 광주에 있는 요양원으로 옮겼다고 했다. 그는 “나는 저 짓 안 하려고. 딸이 둘인데, 내가 쓰러지면 병원에 데리고 가지 말라고 했어. 병원에 입원하면 살아있는 사람을 너무 고생시켜”라며 “내가 친구들 여러 명한테 바람 넣었어. 나 따라서 이거(사전의료의향서) 쓴 사람 많아”라고 말했다. 그는 “시신기증도 하려고. 잘 살았는데 뭘 더 바라겠어. 아무 여한 없어”라며 자리를 떴다.        전문가들은 ‘웰다잉’을 위해서는 죽음에 대한 부정적 인식부터 버리라고 충고한다. 지구별여행자 김기호 대표는 “죽음이 슬프고 두렵다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죽음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만나는 순간”이라고 하고, 생사문제연구소 오진탁 소장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한다. 오 소장은 “한국은 죽음을 터부시하는 경향이 특히 강하다”고 지적한다.        김명민과 하지원 주연의 영화 ‘내 사랑 내 곁에’에 단적인 예가 나온다. 극중 직업이 장례지도사인 하지원은 바람직한 죽음 문화 정착을 위해 입관체험을 진행하지만 노인들의 거센 항의로 행사가 중단된다. 노인 참가자들은 “나보고 죽어보라는 거냐. 노인네들 모아 놓고 희롱하는 거냐”며 폭언을 해댄다. 기자가 월간조선 근무 당시에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2004년 호스피스 간호사 최화숙씨가 쓴 ‘아름다운 죽음을 위한 안내서’ 발간 직후 독자들의 항의를 종종 받았다. “아름다운 죽음이 말이 되냐? 왜 재수 없게 그런 제목의 책을 냈냐”는 항의였다. 화장장이 들어서면 인근 땅값이 떨어지고, 엘리베이터에 ‘4’ 대신 ‘F’가 적힌 것도 죽음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이다.        오진탁 소장은 “죽음 준비, 죽음 체험이라는 직접적 표현 대신 ‘웰다잉’이라는 표현이 일반화되면서 서서히 인식이 바뀌고 있다”고 말한다. ‘웰빙’의 연장선상에서 ‘웰다잉’을 바라보면서 죽음을 무조건 외면하는 풍조가 서서히 걷히고 있다는 것이다.     품위 있는 죽음을 추구하는 사람 역시 늘고 있다. 인공호흡기, 강심제와 승압제, 혈액투석, 체외순환 등 생명유지장치를 주렁주렁 매달면서 여명을 늘리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지난해 보건복지부가 진행한 ‘생명나눔 국민인식도 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72.3%가 연명치료 중지에 찬성했다. 서울대병원 허대석 교수의 자료에 의하면 1년에 18만명 정도의 만성질환자가 말기 상태로 사망하는데, 이 중 15만명 정도가 인공호흡기를 거부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서울아산병원 환자 대상 조사결과는 더욱 분명하다. 내과계 중환자실 환자 중 생명유지장치 사용을 원한다는 대답은 1%에 불과했다.        그러나 한국에는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 있지 않다. 미국 대부분의 주와 오스트리아, 스위스, 프랑스, 독일 등은 연명치료 중단을 위한 제도가 허용돼 있고, 일본 역시 1998년부터 사전의료의향서를 존중하기로 결정했지만, 한국은 사전의료의향서에 대한 허용 지침이 없어 병원마다 제각각이다.        2009년 김할머니 사건으로 촉발된 존엄사 논쟁은 여전히 논란의 중심에 있다. 김할머니 사건은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환자가 폐암 조직검사를 받다가 과다출혈로 의식불명 상태가 되자 자녀들이 김할머니의 연명치료 중단을 요구하며 소송을 건 사건이다. 김할머니는 입원 전 자녀들에게 “혹 내가 식물인간 혹은 의식불명 상태가 되면 인공호흡기를 끼우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대법원은 유가족의 손을 들어줘 연명치료 중지를 인정했다. 김할머니는 연명치료를 중단하면 당장 생명이 위독하다는 병원 측의 말과는 달리 인공호흡기를 뗀 지 201일 만에 존엄사했다.        이후 18대 국회에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신상진 의원과 김세연 의원이 존엄사 관련 법안을 대표발의했지만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일단 종교계의 반발이 거세다. 생명경시 풍조를 낳는다는 이유다. 또한 죽음에 임박한 환자의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자기 결정권은 국가의 생명권 보호에 관한 헌법적 가치와 충돌하는 문제도 있다. 다시 말해 존엄사는 국가의 생명보호의무와 모순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곧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과 관련된 제도화 방안이 마련될 전망이다. 대통령 소속 국가생명윤리심사위원회(이하 생명윤리심의위)에서는 지난해 12월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 제도화 특별위원회’(위원장 이윤성·서울대 의대 법의학과 교수)를 구성했다. 의료계, 법조계, 종교계, 시민사회단체 등 18명으로 이루어진 사회적 협의체인 이 위원회는 매달 1회 이상 논의를 거쳤으며, 5월 29일 최종 공청회를 갖는다. 공청회에서 합의된 사항을 생명윤리심의위에 보고할 예정이며, 이를 기반으로 제도화 여부와 가이드라인을 결정할 방침이다.        존엄사의 제도화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삶과 죽음의 정의, 생명의 절대성과 사회적 효율성 등 기본 가치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중요한 것은 삶의 질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인 죽음을 생각하면서 살아있는 동안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 소설가 서영은은 일찌감치 이런 유서를 써 뒀다.        “의식이 없을 때는 절대 병원에 가지 않을 것이며, 장례는 가족 친지들과 간소하게 치를 것이며, 화장한 재는 산의 나무 밑에 뿌려서 거름이 되게 해 주면 좋겠다.…” 출처: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2&nNewsNumb=002257100009     죽음체험수련원 ‘지구별여행자’ 김기호 대표        “사(死)테크를 하면 삶이 달라집니다”     ‘지구별여행자’(구 ‘아름다운 삶’)는 국내에서 가장 먼저 생긴 임종 체험 수련원이다. 2002년에 정식으로 문을 열어 12년째 운영 중이다. 비영리단체로 능인선원에서 장소를 제공하고, 자원봉사자들의 자발적 참여로 운영된다. 개인 참가자를 대상으로 매달 한 번씩 정기적으로 수련을 진행하며, 오붓한 체험을 원할 경우 부부 단위의 신청도 받는다. 청소년들의 자살예방 교육으로 호응이 높다. 참가자가 10~20명일 때 수련의 몰입이 잘 된다고 한다.        지구별여행자는 한 출세지향주의자의 대대적인 전향에 의해 탄생했다. 서울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한 김기호(48) 대표.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석사학위까지 취득한 후 대한항공에 입사해 기획부에서 일하던 그는 “1996년 가을까지만 해도 출세를 향해 맹목적으로 전진하는 엘리트주의자였다”고 고백했다. “타인에 대한 배려 없이 나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았다”고도 했다. 그가 삶에 대한 시각이 달라진 것은 임사체험자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다.        이후 그는 어린 시절에 묻어두었던 꿈을 다시 꺼냈다. 더 늦기 전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실천하기로 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유학길에 올라 호주 퀸스랜드대학에서 호스피스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귀국한 후 1999년부터 북한산 인근에서 봉사자들을 모아 죽음 교육을 시작했다. “만약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면?”을 주제로 진행한 교육에 관심과 호응이 점점 늘었다. 그는 “행복해지려면 죽음을 알아야 한다” “죽음을 알면 삶이 더 아름다워진다”며 이렇게 말했다.        “죽음을 생각하면서 살면 삶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삶에서 진정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게 됩니다. 사(死)테크라는 말을 씁니다. 애플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는 17세부터 죽음을 생각하면서 현재를 충실히 살았습니다. 그의 말대로 죽음은 최고의 발명품입니다. 죽음을 알면 삶이 더 빛납니다.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죽음을 두려워 마십시오. 죽음을 생각하면서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십시오.”
167    《장가들다》와 《시집가다》 댓글:  조회:4641  추천:0  2013-03-16
《장가들다》와 《시집가다》   전통적으로 혼인의 형식은 크게 취가혼(聚嫁婚)과 초서혼(招壻婚)으로 나눌수 있습니다. 취가혼이란 남자집에서 여자를 맞아들이는 혼인인데, 처음부터 여자가 남자집에 들어가서 사는 경우이고, 초서혼은 솔서혼(率壻婚)이라고도 하는데, 여자집에서 데릴사위를 맞아들여, 남자가 여자집에 들어가서 사는 경우를 말합니다.   《朝鮮王朝實綠》에서 찾아보면, 우리민족 고유의 혼인풍속에는 “男歸女家”婚이라는 풍속이 있었는데, 초서혼에 해당되는 풍속이였습니다. 남자는 丈人, 丈母가 사는 丈家에 들어가서 그집딸과 혼인식을 치르고, 계속 장가에 눌러앉아 한시기 신혼생활을 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장가를 든다”, 혹은 “장가를 간다”고 하였습니다.  “男歸女家” 혼인풍속은 고대로부터 전하여 내려온 우리민족 고유의 혼인풍속이 였는데, 중국《三國志 魏書 乌丸鲜卑東夷傳》에 기록되여 있는, 고구려 서옥(壻屋)제라는 혼인풍속이 그 기원인것으로 짐작합니다. 서옥(壻屋)이란 서방(壻房)이란 말과도 통하는데 사위집이라는 뜻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남자집과 혼사말을 정하고, 여자의 부모는 자기집 뒤에 서방(壻房)이라는 작은 신혼방을 꾸며 놓습니다. 저녁녘에 사위 될 사람이 와서 신분을 밝히고, 이집딸과 하루밤 잘것을 청구합니다. 혼인 절차에 따라 두번 세번 청구하면 여자집 부모는 드디여 허락하고, 납채로 가져온 돈과 비단을 받아 놓습니다. 이것으로 혼인이 성사된 셈이죠. 그리하여 우리민족 고유어에서 남자들이 결혼하는 것을 "서방 간다"고도 하였으며, 여자들이 자기남편을 "서방님"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어느정도 성장한 다음에, 장가에서는 자기딸이 와-와- 재롱을 피우는 아이를 업고, 자기 신랑을 따라 시집에 가서 살도록 허락합니다. 지금과는 달리 丈家 주도의 혼인제도였지요. 그런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중국 유가사상이 인입되여 숭상받고, 주자가례(朱子家禮)가 보급되면서, 유가의 엄격한 남존여비 관념에 의하여 “남귀여가” 혼인풍속은 많은 비판을 받게 되였습니다. 그리하여 “남귀여가” 혼인풍속은 얼마간 고집스레 지속되어 가다가, 조선조 제13대 왕인 명종(재위 1545∼1567) 때에 이르러 절충적인 혼인방법이 나오게 되였습니다. 즉 혼례는 예전과 같이 계속 신부집에서 치르되, 삼일만 신부집에 묵고, 삼일후 부터는 신랑집에 가서 사는, 반친영제(半親迎制), 또는 삼일신행제(三日新行制) 혼인방법이였습니다. 이 혼인방법이 실행되면서 후에 점차 관습으로 굳어졌습니다. 지금에는 이런 혼인풍습도 이미 없어졌지만, 요즘의 신혼부부가 결혼하여 신혼여행을 갔다가 돌아와서는, 먼저 신부집에서 하루밤 자고, 다음날 시부모집으로 가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습의 흔적이 아닐가고 생각합니다.   “시집가다”에서 “시집”이란 결혼한 남자의 집을 말합니다. 그곳은 바로 시부모가 사는 집이고, 신랑과 함께 사는 집입니다. 여자가 결혼하면 자기가 살던 친정집을 떠나서, 시부모가 사는 시집으로 가서, 신랑과 함께 시부모를 섬기며 산다는 의미에서, 여자가 혼인하는 것을 “시집간다”고 합니다. 《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는 “싀집”이라는 어휘가 있는데 "싀집에 가 여러해 돌아오디 아니 더니"하는 구절이 있고, 또 옛 문헌 《五綸》에도 "싀어미 잘 섬기라(善事吾姑)"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때의 “싀”가 후에 와서 “시”로 발음되고, 표기도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있는 “싀집”이 바로 오늘 우리가 말하는 “시집”입니다. 이 “싀집”이란 말은 순수한 우리 말인데, 이말을 한자로 표기하게 되면서, 여인은 시집살이 하면서 마음 고생을 많이 한다는 뜻을 살려, 마음思자를 붙여서 시집을 한자로는 “媤家”, 혹은 “媤宅”이라고 쓰게 되였습니다. 우리민족의 전통 혼인형식의 산생과 변화,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초기에는 남자가 장가를 들었고, 후기에 여자가 시집을 가게 되였으며, 이런 양상에 의하여 우리 말에서 혼인에 관하여 “장가들다”와 ”시집가다”라는 어휘가 만들어 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던가? 요즘의 젊은이들은 결혼을 한다 하여도, 남자는 장가 들 필요가 없고, 여자는 시집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부모들이 거금을 내여 따로 마련해 준 신혼집에 가서 처음부터 독립적으로 신혼생활을 합니다. 본질적 의미에서 우리민족 전통적인 시집장가 혼인제도는 이미 기본상 페지되였습니다. 민속학의 견지에서 지금의 결혼과 전통적인 시집장가 혼인제도는 엄격히 구별됩니다. 전통적인 시집장가 혼인제도는 효도에 기초한 혼인이 였지만 지금의 결혼은 완전히 그런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    혼례는 우리민족 기본家禮중의 四禮인 관례·혼례·상례·제례의 하나로서, 남자와 여자가 혼인을 하여 부부가 되는 절차를 규정한 예식입니다. 혼례가 혼인의 절차를 규정한 예식이라면 한자로 응당 “婚禮”라고 표기가 되였어야 하는건데, 가례의 최초 원본인 《朱子家禮》를 포함한 옛문헌에서는 모두 어두울 “昏”자를 택하여, “昏禮”라고 표기가 되여 있습니다. 어두워 지는 황혼무렵에 올리는 예식이란 뜻이 되겠죠. 그럼 옛사람들은 무엇때문에 혼인예식을 어두워 지는 황혼무렵에 올리는 예식이라고 했을가요?   혼인이란 통속적으로 말하면 남자와 여자가 만나 부부가 되는 예식인데, 그것을 철학적으로 해석하면 음(陰)과 양(陽)이 만나는 것이므로, 혼인예식을 올리는 시간도 낮과 밤이 교차되는 황혼무렵이 합당하다는 취지였습니다. 예서(禮書)에서 말한것처럼 "양이 가고, 음이 오는 까닭을 취한 것(取陽往陰來之義)"이지요.     하루중에 양과 음이 교차하는 시각은 아침과 자녁으로 두번이 있습니다. 혼례에서 저녁을 택하게 된 이유는, 고대에서는 혼인예식 장소가 바로 신랑과 신부가 직접 첫날밤을 지내는 장소였고, 혼인예식이 끝나면 곧바로 첫날밤을 차리는 합궁례(合宮禮)를 치루고 한자리에 들어야 하였으므로, 신부가 부끄럼을 타서 일을 그르칠가봐, 삼라만상이 모두 잠드는 안늑한 밤 환경을 마련해 준다는 취지였을 것입니다.   알다싶이 남자와 여자가 만나 부부가 되는 일을 한어로 婚姻이라고 하는데, 婚이 장가든다는 뜻이 되고, 姻이 시잡간다는 뜻이 됩니다.   婚이 장가든다는 뜻이 되는 까닭은, 한 여인(女)과 저녁때(昏)에 예식을 올리고, 한자리에 드는 것이 곧 장가드는 것이기 때문이고, 姻이 시집간다는 뜻이 되는 까닭은, 古禮에서는 여자의 집에서 신랑감을 구할때, 반드시 媒婆에 의거해야 했는데, 媒婆(女)의 중매에 인(因)하여 인연을 맺고, 한 남자를 따라 가는 것이 곧바로 시집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혼인은 음과 양이 화합하여, 삼라만상이 창조되는 대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일이며, 대자연의 섭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짝을 찾는 순수한 人情에 맞추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古禮에서는 "천지의 리치에 순응하고, 인정의 마땅함에 맞추는 것이 곧바로 혼인이니라!"고 했습니다.     현성원 글 2013년3월  
166    설의 어원에 대하여 댓글:  조회:3839  추천:1  2013-02-06
 설의 어원에 대하여 우리말 의 어원에 대하여 문의하는 사람은 많은데 유감스럽게도 아직 확실한 정설이 없습니다. 《東國歲時記》에서 고 한것이나, 고 한것은 모두 학술적 해석이라고 하기보다 오락적 묘사. 즉 설을 가지고 말장난 했다는 편이 더 적절할것 같습니다. 그외에도 나름대로 몇가지 설법들이 있기는 하나 모두 사람들을 설복시키기에는 무언가 부족합니다.   그런데 우리말 의 어원을 고증함에 있어서 한가지만은 확실한 결론을 내릴수 있습니다. 그것은 즉 우리민족 전통 설문화는 기실 우리민족 고유의 문화가 아니라, 일찍 고대 중국으로 부터 받아들인 외래문화라는 점입니다. 설이 있자면 먼저 설을 확정하는 력법이 있었어야 하는건데, 우리민족은 고대부터 근대까지 줄곧 중국의 력법과 중국의 력대 황제년호를 따라 사용하여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말 의 어원도 우리의 고유어가 아니고 중국어를 그대로 본따 쓰다가 우리말로 고착된 외래어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사유로선에 근거하여 저는 방향을 바꾸어 우리말 의 어원을 설과 상관되는 중국어에서 두루 찾아 보았습니다.   자료에 의하면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기에 이미 고대력법에 의하여 새해를 상징하는 첫날을 명절로 정하고 경축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날을 일컬으는 명칭은 각 조대를 내려 오면서 변화가 많았습니다: 례를 들면 진나라까지는 새해 첫날을 대체로“上日”혹은 “元日”로 부르다가 한나라때에 와서는 “岁旦”、“正旦”、“正日”등으로 불렀으며, 唐宋元明때에는 “元旦”、“岁日”、“岁首”、“新元”등으로 불렀고, 清代에 와서는 줄곧 “元旦”혹은 “元日”로 불렀습니다. 公元1911년12월31일, 중화민국 성립을 앞두고 통보를 내여  서양력을 채용한다고 선포하고 서양력 1월1일을 "新年"이라고 칭하고, 전통음력 정월 초하루를 처음으로 “春节”이라고 개칭하였습니다. 公元1949년 9월27일,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앞두고 중앙정치협상회의 제1차회의에서는 公元纪年法을 채용한다고 결정하고, 公元력법 즉 양력의 1월1일을 “元旦”으로 정하고, 음력의 정월 초하루를  “春节”로 고정하여 그 이름으로 중국 명절법전에 올리고 오늘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력대로 새해 첫날을 일컬으는 이상의 “元旦”、“岁日”、“新元”、“春节”등 명칭에서, 우리말 과 어음이 가장 비슷한 명칭이 당나라때에 많이 사용된 이라는 명칭입니다. 우리말로 이라고 발음이 되죠.   중국에서는 唐宋詩詞가 상당히 유명한데, 에는 을 주제로 한 唐詩들만 하여도 20여편이 수록되여 있습니다. 이것은 당나라때에 설을 일컬어 이란 명칭이 상당히 보편적으로 사용되였음을 의미합니다. 그중에서 유명한 당나라 시인 元稹의 오언절구 를 례로 듭니다:   그당시 반도에서는 고구려말, 통일신라, 고려초 등 시기를 걸치면서, 당나라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민족 구전문학 규률에 대비할때, 이 이란 말이 습관화 되면 로 복합발음이 되였다가, 오랜세월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불리워 지는 과정에서 로 변이 되는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론리적 분석일 뿐이고, 아직 확실한 최후의 정설이 아니므로, 참고로 제공합니다.   우리민족의 특수한 력사적 원인으로 하여, 우리말중의 많은 명칭들은 그 확실한 어원을 찾을수 없습니다. 그런 명칭들이 산생된 원인이 각기 다르고, 그 과정이 상당히 복잡하므로, 고정된 사유방식으로 정설만 추구한다면, 억지의 착오를 범할수 있습니다. 해석이 필요한 허다한 우리말 명칭들은 그 상관적 력사적 기록을 찾을수 없어, 여러가지 해석이 있게 되는데, 아주 정상적인 일이며, 이것이 바로 우리말의 신비성과 다양성이 아닐가 싶습니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성원 작성 2013년2월  
165    우리민족 성씨가 보급되던 과정 댓글:  조회:3970  추천:0  2013-01-30
★ 우리민족 성씨가 보급되던 과정 ★ 조선초만해도 성씨있는 양반은 10%밖에 안되었는데 조선중기 양반계급이 족보를 가지게 되면서 부터 평민들도 각 씨족 별로 구전 해오던 자료에 의하여 족보를 만들기 시작하였고 토착민들은 지역별 연결에 따라 동일 씨족으로 족보를 가지게 되었다. 집성촌을 이루지 못하고 생활한 유랑민이거나 원래 천민은 성씨없이 돌쇠,떡쇠, 개똥이, 삼돌이 등 이름으로만 불리웠는데   조선후기에는 양반들의 도움으로  성 하나 만은 가지게 되었고. 1909년 일제가 민적법 시행시 성씨가 없던 천민들에게 다시 원하는 성씨의 호적을 일제가 주었는데, 그 때 가장 인기 있던 성씨가 흔하면서도 유명한 "김, 이, 박 등등"이었다.   그래서 유명한 성이 더욱 흔해지게 된 것이다. 일제가 성이 없던 밑바닥 천민(노비)계층에게 이들에게 신청하는 대로 유명성씨의 호적을 준 것은 조선의 양반 성씨들이 씨족별로 단결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나온 것이고, 노비를 양민화시켜서 수탈의 대상을 늘이기 위한 식민통치정책의 일환이였다.   일례로 김좌진 장군댁 노비 100명도 안동 김씨 호적을 만들어 가졌다고 한다. 조선시대 양반집 법도는 엄격한 유교의 윤리로 교육되어 우리가 알고 있는 양반으로 행세하기는 행동거지가 참으로 어렵고 엄했다고 한다.   따라서 천민은 흉네 낼 수도, 낼 필요성도 느끼지 못는 사회였다. 그리하여 품성과 관계없이 성씨만으로 양반입네 떠들던 사람들은 혹시 원래는 양반집의 "돌쇠"었거나, 그 마을 "개똥이"였을 확률이 높다.   양반은 항상 따르는 권속들에 대한 책임감과 가문의 명예를 위해 중압감을 느끼며 생활하였으며 자신의 행동이 가문과 직결되었기 때문에 오늘같은 막된 행동이나 막 말을 할 수가 없었으며 지역사회에서 한번 쌍놈의 가문으로 찍혀지면 자녀들의 출가 문제로 직결되기 때문에 성씨가 그 사람의 품행을 구속했다고 한다.   법도와 예를 생명같이 여기고 살아간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점에서 양반사회는 순기능 역활도 했다고 판단된다. 성씨에 대한 이해를 돕기위하여 아래의 자료를 첨부해 본다.   2000년에 조사한 우리 나라의 성씨별 인구가 통계청 홈페이지에 떴는데, 1985년 발표 당시보다 성씨의 숫자가 12 개 늘었다.   그 때는 274개였는데, 이번은 286개가 되었다. 우리 나라 10대 성씨의 순위는 변화가 없었다.   김(金) 이(李) 박(朴) 최(崔) 정(鄭) 강(姜) 조(趙) 윤(尹) 장(張) 임(林)...   “김(金)” 씨는 우리 나라 인구의 21.6%인 992만 여 명으로 여전히 제일 많았다. “이(李)” 씨는 그보다 훨씬 적은 14.8%로 679만 여 명으로 조사되었다. “박(朴)” 씨는 또 그보다 훨씬 적은 8.5%로 389만 여 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 뒤를 잇는“최(崔),정(鄭)”씨는 4% 대이고, “강(姜), 조(趙), 윤(尹), 장(張)”씨는 2% 대, 그리고 “임(林)”씨부터 21위“전(全)”씨까지 1%대를 유지하고 있는데... 성씨별 인구 수가 거의 일정한 차이를 유지하며 계속 나열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중국이나 일본의 성씨는 1위부터 2, 3위의 분포가 비교적 고르게 나타나 특정 성씨로 지나치게 몰리는 경우가 없다는데.... 우리 나라의 경우만 1, 2위가 이상할 정도로 특별히 많아진 것은 1900년대 초에 처음 호적법이 시행될 때 “양반이 되고 싶은”사람이 너무 많아서 이런 기형적인 분포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게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 때에 “전 국민의 성씨 가지기” 정책을 시행하여 전 국민으로 하여금 성씨를 만들어 가지도록 하였는데, 이 때 대부분의 국민들은 각자 자기 집의 위치나 동네의 특징을 살린 성씨를 만들어서 가졌다고 한다.   “田中, 中村, 松下...” 등 다양하게 창씨된 성씨의 숫자가 순식간에 8만 개나 되었는데....   일본은 이러한 특징 때문에 특정 성씨가 지나치게 많은 경우는 없다고 하며... 또한 성씨만 가지고는 가문의 역사 같은 것은 이야기할 수가 없기 때문에, 민족의 역사를 논할 때 성씨가 무언가 하는 것은 별로 따지지 않는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당연히 성씨에 대한 자부심이나 애착 같은 것이 거의 없다. 중국이나 한국과는 여기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그로부터 불과 몇 년 뒤에 일본이 우리 나라, 즉 대한제국에 와서도 계급을 타파한다면서 “신분 표시가 없는 호적법”을 시행하였고, 여기에서도“전 국민의 성씨 가지기”운동을 전개하여 전 국민으로 하여금 성씨를 만들어 가지도록 하였는데, 결과는 일본과 전혀 다르게 나타났다.   국민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던 “돌쇠, 밤쇠, 삼월이, 오월이..” 들은 일본처럼 새로이 성씨를 만드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이들 대부분이 그 동네 지주나 양반들에게 부탁하여 그 “양반님”들의 성씨를 얻어 와서는 관청에 신고하는 현상이 일어났는데....   이 때에 김(金) 씨나 이(李) 씨가 갑자기 늘어나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특정 성씨가 총 인구의 20%를 넘어 가는 경우는 없는데, “양반 대우를 받고 싶은 사람이 너무 많았던” 우리 나라에서만 나타난, 대단히 특이한 현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하여튼 우리나라는 결과적으로 “전 국민의 양반화”가 자연스러이 이루어졌고, 옛날 이야기에 그 많던 “방자, 향단이, 마당쇠, 구월이...”의 자손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우리 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슨 무슨 정승, 판서의 몇 대 손”이 되어 버렸고, 오로지 양반의 후손만이 존재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래서 덕분에 우리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양반이 많은 나라가 되었고, 또한 제사가 가장 많은 나라가 되어 버렸다. 불과 100 여 년 전만 해도 “성씨도 없는 쌍놈들”은 제사고 차례고 지낼 수가 없었는데, 요즈음은 집집마다 장손이면 모두 명절날 차례를 지낸다.   참고로 5000년 전부터 성씨를 사용해 온 중국의 경우를 보면 성씨별 인구 1, 2, 3위의 비율은 각각 7.4%, 7.2%, 6.8%로 되어 있어서, 특정 성씨로 몰리는 현상은 없다. 중국은 인구 0.1% 이상을 차지하는 성씨가 모두 129개로 나타났는데, 이 129개 성씨의 인구 합계는 중국 인구의 87%라고 한다.   이는 2006년 1월 10일 중국과학원에서 중국역사상 가장 정밀한 자료조사를 거쳐 발표했다는 “100대 성씨”에 근거한 것이다. 이번 발표에서 “인구기준 성씨순위”가 1987년의 발표자료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하는데, 이는 표본조사한 기초자료의 차이 때문이라고 한다.   1987년 조사는 겨우 57만 명 정도를 표본조사하여 순위를 매긴 것이고, 이번 조사는 그 때에 비하여 500배도 넘는 약 3억 명을 표본 조사하여 순위를 매긴 것이기 때문에 그 정밀도가 엄청나게 향상되었다고 한다.   이번 조사에서 중국 10대 성씨는 “이(李), 왕(王), 장(張), 유(劉), 진(陳), 양(楊), 황(黃), 조(趙), 주(周), 오(吳)”로 판명되었다.   이 순위는 자동적으로 전세계의 10대 성씨가 되기도 한다. 이 중 “李”는 중국 인구의 7.4%인 9천 600만 명 정도가 될 것이라고 발표하였는데, 우리 나라의 679만여 명을 합치면 “李”씨는 1억 명을 넘어 가는 세계 유일의 성씨가 된다.   약 900년 전인 서기 1100년대에 북송(北宋)에서 발표한 『백가성(百家姓)』이란 책자가 최초의 성씨 조사 기록이었고, 명(明)나라의 『천가성(千家姓)』, 청(淸)나라의 『백가성(百家姓)』 등이 뒤를 이었으나 이 책들은 모두 성씨별 인구수를 기준으로 서열을 매긴 것은 아니었다.   900년 전 『백가성(百家姓)』에서의 성씨 순위는 “趙錢孫李周吳鄭王...”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인구수 순위가 아니었다.   “조(趙)”는 북송을 건국한 황제의 성이었고, “전(錢)”은 당시 가장 힘이 강했던 오월국(吳越國)의 국왕 성씨였고, “정(鄭)”은 그 왕후의 성씨였으며, “이(李)”는 그 다음 강국인 “남당(南唐)”의 국왕 성씨였던 것인데... (중국의 1100년대는 송나라가 약간 힘이 강한 정도였고, 고만고만한 나라들로 나누어져서 도토리 키재기로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900년 전 『백가성(百家姓)』에서의 성씨 순위는 인구 순이 아니라 예우(?)를 받아야 할 성씨의 순위였고, 최근 중국 일부 신문에서 보도한 “900년만에 조(趙)가 1위에서 8위로 밀렸다”는 내용은 옛날 기록의 특징을 잘못 이해한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하여튼 어찌 되었든 간에 우리 나라 성씨의 순위를 기준으로 하여 중국 성씨 순위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金 : 21.59%, 한국 1위 (중국 64위) 한국 발음이 현재는 “김”이지만 옛날에는 “금”으로 읽었다는 주장도 있음. 현재 중국 배우 중에도 이 성씨를 가진 배우가 있는데 “금성무”라고 보도되고 있음 이 글자의 현대식 중국 표준발음은 “찐”임   李 : 14.78%, 한국 2위(중국 1위 7.4%) 한국, 중국 합하면 1억이 넘어 가는 전 세계 단 하나의 성씨임 중국, 북한에서는 “리”라고 하는데, 남한에서만 “이”라고 읽고 있음. 그런데, 남한 사람들도 영어로 쓸 때에는 대부분 “Lee(리)”라고 하는 버릇이 있음   박 : 8.47%, 한국 3위(중국 100위 내에서는 안 보임) 한자로 “朴”을 쓰기도 하지만, 원래 “바가지”란 뜻의 순우리말 토종 성씨임. “박혁거세”의 “박”은 “박만큼이나 커다란 알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붙은 말임 영어로 "Park" "Pak" 을 대부분 사용하고 있으나 "Paak" 이라고 쓰는 것이 가장 무난함.   최(崔) : 4.72%, 한국 4위(중국 58위) 정(鄭) : 4.37%, 한국 5위(중국 21위) 강(姜) : 2.27%, 한국 6위(중국 50위) 조(趙) : 2.14%, 한국 7위(중국 8위) 윤(尹) : 2.06%, 한국 8위(중국 95위) 장(張) : 2.00%, 한국 9위(중국 3위) 임(林) : 1.66%, 한국 10위(중국 17위/일본에 정착한 일족이 있음) 오(吳) : 1.54%, 한국 11위(중국 10위) 한(韓) : 1.53%, 한국 12위(중국 26위) 신(申) : 1.52%, 한국 13위(고려태조가 하사한 성씨, 일본으로 넘어가 정착한 일족이 있음)   서(徐) : 1.51%, 한국 14위(중국 11위) 권(權) : 1.42%, 한국 15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 황(黃) : 1.40%, 한국 16위(중국 7위) 안(安) : 1.39%, 한국 17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 송(宋) : 1.38%, 한국 18위(중국 23위) 유(柳) : 1.31%, 한국 19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 일본에 정착한 일족이 있음 ) 홍(洪) : 1.13%, 한국 20위(중국 99위) 전(全) : 1.07%, 한국 21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고려 왕씨 유래설이 있음) 고(高) : 0.95%, 한국 22위(중국 19위) 문(文) : 0.93%, 한국 23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 손(孫) : 0.90%, 한국 24위(중국 12위) 양(梁) : 0.85%, 한국 25위(중국 20위) 배(裵) : 0.81%, 한국 26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 조(曺) : 0.79%, 한국 27위(중국 27위) 백(白) : 0.76%, 한국 28위(중국 79위) 허(許) : 0.65%, 한국 29위(중국 28위) 남(南) : 0.56%, 한국 30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일본에 정착한 일족이 있음)   우리 나라 31위 이후의 성씨는 다음과 같음.   31-40 심(沈) 유(劉) 노(盧) 하(河) 전(田) 정(丁) 성(成) 곽(郭) 차(車) 유(兪) 41-50 구(具) 우(禹) 주(朱) 임(任) 나(羅) 신(辛) 민(閔) 진(陳) 지(池) 엄(嚴) 51-60 원(元) 채(蔡) 강(康) 천(千) 양(楊) 공(孔) 현(玄) 방(方) 변(卞) 함(咸) 61-70 노(魯) 염(廉) 여(呂) 추(秋) 변(邊) 도(都) 석(石) 신(愼) 소(蘇) 선(宣) 71-80 주(周) 설(薛) 방(房) 마(馬) 정(程) 길(吉) 위(魏) 연(延) 표(表) 명(明)   81-90 기(奇) 금(琴) 왕(王) 반(潘) 옥(玉) 육(陸) 진(秦) 인(印) 맹(孟) 제(諸) 91-100 탁(卓) 모(牟) 남궁(南宮) 여(余) 장(蔣) 어(魚) 유(庾) 국(鞠) 은(殷) 편(片) 101-110 용(龍) 강(疆) 구(丘) 예(芮) 봉(奉) 한(漢) 경(慶) 소(邵) 사(史) 석(昔) 111-120 부(夫) 황보(皇甫) 가(賈) 복(卜) 천(天) 목(睦) 태(太) 지(智) 형(邢) 피(皮) 121-130 계(桂) 전(錢) 감(甘) 음(陰) 두(杜) 진(晋) 동(董) 장(章) 온(溫) 송(松)   131-140 경(景) 제갈(諸葛) 사공(司空) 호(扈) 하(夏) 빈(賓) 선우(鮮于) 연(燕) 채(菜) 우(于) 141-150 범(范) 설(?) 양(樑) 갈(葛) 좌(左) 노(路) 반(班) 팽(彭) 승(承) 공(公) 151-160 간(簡) 상(尙) 기(箕) 국(國) 시(施) 서문(西門) 위(韋) 도(陶) 시(柴) 이(異) 161-170 호(胡) 채(采) 강(强) 진(眞) 빈(彬) 방(邦) 단(段) 서(西) 견(甄) 원(袁) 171-180 방(龐) 창(昌) 당(唐) 순(荀) 마(麻) 화(化) 구(邱) 모(毛) 이(伊) 양(襄)   181-190 종(鍾) 승(昇) 성(星) 독고(獨孤) 옹(邕) 빙(?) 장(莊) 추(鄒) 편(扁) 아(阿) 191-200 도(道) 평(平) 대(大) 풍(馮) 궁(弓) 강(剛) 연(連) 견(堅) 점(占) 흥(興) 201-210 섭(葉) 국(菊) 내(乃) 제(齊) 여(汝) 낭(浪) 봉(鳳) 해(海) 판(判) 초(楚) 211-220 필(弼) 궉(?) 근(斤) 사(舍) 매(梅) 동방(東方) 호(鎬) 두(頭) 미(米) 요(姚) 221-230 옹(雍) 야(夜) 묵(墨) 자(慈) 만(萬) 운(雲) 범(凡) 환(桓) 곡(曲) 탄(彈)   231-240 종(宗) 창(倉) 사(謝) 영(永) 포(包) 엽(葉) 수(水) 애(艾) 단(單) 부(傅) 241-250 순(淳) 순(舜) 돈(頓) 학(?) 비(丕) 영(榮) 개(介) 후(侯) 십(?) 뇌(雷) 251-260 난(欒) 춘(椿) 수(洙) 준(俊) 초(肖) 운(芸) 내(奈) 묘(苗) 담(譚) 장곡(長谷) 261-270 어금(魚金) 강전(岡田) 삼(森) 저(邸) 군(君) 초(初) 영(影) 교(橋) 순(順) 단(端) 271-280 후(后) 누(樓) 돈(敦) 소봉(小峰) 뇌(賴) 망절(網切) 원(苑) 즙(?) 증(增) 증(曾) 281 삼(杉) : 282 우(宇): 소(肖)예(乂) 빙(氷) 경(京) : (이상 총 286개 성씨)   이 중 최근에 새로 생긴 성씨 중에는 동사무소 직원이 잘못 기재하여 그리 된 것도 있고, 국제 결혼으로 우리 나라 국적을 취득한 동남아 또는 중국 사람들의 성씨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현대 중국의 주요 성씨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李 : 중국 7.4%, 중국 1위(한국 2위) 당나라 황제 이세민(李世民)이 개국공신들에게 “李”를 하사했고, 나중에 후위(後魏)의 선비족(鮮卑族)에서도 “李”씨로 바꾸어 사용한 사람들이 많음. 중국인들은 영어로 표기할 때 "Li"를 주로 사용하며, 미국 "Lee"와의 관계는 불명확함   王 : 중국 7.2%, 중국 2위(한국 83위) 중국 전한(前漢)과 후한(後漢) 사이의 신(新)나라 때 황제 왕망(王莽)의 성씨임. 중국 사람이라 하면 “비단장사 왕서방”이라 할 정도로 중국에 왕 씨가 많았음 한국에서도 고려시대 왕족이 “왕건(王建)”의 왕씨였으나 고려 멸망 이후 거의 자취를 감춤.   張 : 중국 6.8%, 중국 3위(한국 9위) 장삼이사(張三李四 : 중국인들은 대개 張씨네 셋째 아들 아니면 李씨네 넷째 아들이라는 뜻)라는 말도 있을 정도로 중국에는 전통적으로 張씨가 많았음. 지금도 “장가계(張家界)”는 관광지로 유명함.“왕삼이사(王三李四)”란 말이 생기지 않은 것은 “왕이 셋이면..”으로 잘못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됨.   劉(유) : 중국 4위(한국 32위) 陳(진) : 중국 5위(한국 48위) 楊(양) : 중국 6위(한국 55위) 黃(황) : 중국 7위(한국 16위) 趙(조) : 중국 8위(한국 7위)   周(주) : 중국 9위(한국 71위) 吳(오) : 중국 10위(한국 11위) 徐(서) : 중국 11위(한국 14위) 孫(손) : 중국 12위(한국 24위) 朱(주) : 중국 13위(한국 43위)   馬(마) : 중국 14위(한국 74위) 胡(호) : 중국 15위(한국 161위) 郭(곽) : 중국 16위(한국 38위) 林(임) : 중국 17위(한국 10위) 何(하) : 중국 18위(한국에는 없음)   高(고) : 중국 19위(한국 22위) 梁(양) : 중국 20위(한국 25위) 鄭(정) : 중국 21위(한국 5위) 羅(나) : 중국 22위(한국 45위) 宋(송) : 중국 23위(한국 18위)   謝(사) : 중국 24위(한국 233위) 唐(당) : 중국 25위(한국 173위) 韓(한) : 중국 26위(한국 12위) 曹(조) : 중국 27위(한국 27위) / 한국에서는 “曺(조)”란 글자를 주로 사용함 許(허) : 중국 28위(한국 29위)   鄧(등) : 중국 29위(한국에는 없음) 蕭(소) : 중국 30위(한국에는 없음)   중국 31위부터 100위까지는 다음과 같음   31-40 馮(풍),曾(증),程(정),蔡(채),彭(팽),潘(반),袁(원),于(우),董(동),余(여), 41-50 蘇(소),?(협),?(여),魏(위),?(장),田(전),杜(두),丁(정),沈(심),姜(강) 51-60 范(범),江(강),傅(부),?(종),?(노),汪(왕),戴(대),崔(최),任(임),?(육) 61-70 廖(료),姚(요),方(방),金(금),邱(구),夏(하),?(담),?(위),?(가),?(추) 71-80 石(석),熊(웅),孟(맹),秦(진),?(염),薛(설),侯(후),雷(뢰),白(백),?(용) 81-90 段(단),?(학),孔(공),邵(소),史(사),毛(모),常(상),万(만),?(고),?(뢰) 91-100 武(무),康(강),?(하),?(엄),尹(윤),?(전),施(시),牛(우),洪(홍),?(공)   중국 측 발표에 의하면 현재 중국의 성씨는 56개 종족에 약 12000개의 성씨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고 한다. 13억 인구 전부를 조사 못해서 이런 추정치라는 것을 발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신판 『중국성씨대사전(中國姓氏大辭典)』에는 무려 23000개의 성씨가 소개되어 있다.   우리는 중국, 한국, 일본의 성씨에 대한 역사나 인식들에 대하여 약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우선 중국의 성씨관...   중국은 예로부터 성(姓)과 씨(氏)는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다. 원래 성(姓)이라 함은 모계제 사회의 흔적으로 “어머니의 출신지”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씨(氏)는 “출생한 뒤에 아버지와 함께 살던 곳”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중국인들이 모두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믿고 있는 “황제(黃帝)”의 경우 성(姓)은 “희(姬)”이고 씨(氏)는 “헌원(軒轅)”이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성격이 조금 바뀌어 황제(皇帝), 즉 천자(天子)가 내려 주는 것은 성(姓)이라 했고, 제후(諸侯) 또는 국왕(國王) 정도가 내려 주는 것은 씨(氏)라 했다.   언제나 성(姓)이 한 단계 위의 개념이었는데, 보통 성(姓)은 한 글자였고 씨(氏)는 두 글자가 많았다.   그리고 한(漢) 나라 때에 족보라는 것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천자가 각 제후나 공신들의 자제들에 대한 특별 관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때부터 천자가 만든 족보에 이름이 있는지 없는지가 권력의 유무를 판별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성씨는 남자들만의 혈통을 표시하는 것이 되어 버렸고 생물학적으로 특정한 Y염색체의 유전 상황을 표시하는 도구가 되어 버렸다. 어쨌든 중국의 성씨는 역사가 5000년이 되었고, 성씨는 문화의 전승과 남성 혈통의 흐름을 연구하는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같은 성씨이면 무조건적으로 친근감을 느끼는” 관습이 자연스러이 형성되었고, 이러한 혈연 관계는 인간생활에 활력을 넣어 주기도 하고, 또 때로는 해악을 끼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 한국의 성씨관...   원래 우리 나라의 토착민들은 성씨가 없었다고 한다. 계속적인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 일부 고위 관리들에게서 성씨를 가진 자들이 간간이 나타났고, 삼국시대 말기 신라에서는 국력의 세계화를 기치로 내걸고 왕족을 중심으로 성씨를 스스로 만들어서 가졌다.   그래서 왕족들은 이미 수백 년 전에 죽고 없는 먼 조상님들(혁거세, 알지 등등)에게도 소급해서 성씨를 만들어 붙이고 했다.   조선시대 말까지도 우리나라는 양반보다 쌍놈들이 더 많았고, 성씨를 갖고 있는 사람들 숫자도 그리 많지는 않았다. 대한제국 시절 일본의 압력 덕분에 호적에 성씨란 것을 처음으로 만들어 올린 사람들도 많았지만,“만들어 올렸다”는 그 사실은 언제까지나 “가문의 비밀”로 숨겨 두어야 했다.   성씨의 유무와 관련한 성씨의 위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우리 백성들은 양반제도가 비록 법적으로 폐지되었다고는 하지만 이 어렵게 얻은 “양반의 성씨”만큼은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1940년대에 일본이 “이제 조선과 일본은 명실상부한 한 나라”임을 강조하면서 일본식으로 창씨하는 것을 허용한다고 발표하고, 앞으로 성씨로 인한 조선인, 일본인 간의 차별대우는 영원히 없어질 것이라 하였다.   성씨 자체를 “가문의 역사”로 생각하는 많은 우리 백성들은 당연히 반대하였고, 성씨의 역사가 불과 50년밖에 안 되어 성씨에 대한 자부심 같은 것도 없었던 일본 정부에서는 조선인들의 반대를 보고 “거참, 이상하다. 그깟 성씨 가지고 왜들 저러지?”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성씨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 일본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성씨를 만들어 신고한 사람도 있었다. 소설가 춘원 이광수는 신청 첫날 아침에 맨 먼저 신고하였는데, 이광수가 만든 성씨는 “일본 천황 고향의 뒷산인 향구산(香久山)의 이름에서 따 왔다는” 향산(香山)이었다.   이광수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성씨란 건 별 것 아니야”라는 자기네들의 전통적 인식을 한국식으로 바꾸지는 않았다.   어쨌든, 지금의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여자가 결혼 후에도 자신의 성씨를 그대로 유지하는” 나라가 되어 있다. 전 세계의 남자들이 한국인들에게 깜짝 놀라는 것이 두 가지라 하는데, 한 가지는 부인의 성씨 문제이고 또 한 가지는 “부인이 남편 통장을 관리”하는 것이라 한다. “자다가 벌떡 깨어 다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그들이 보는 한국은 거의 구제불능성 선천적 여성천국이라 한다.   마지막으로 일본의 성씨관...   일본은 우리 한반도의 영향을 받아 백제와 교류할 때부터 성씨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고, 오랜 기간 동안 그럭저럭 잘 살아왔다. 가물에 콩 나듯 하는 중국과의 교류도 크게 활발한 적이 없기 때문에 성씨의 위력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19세기말 미국이 군함을 밀고 들어오고, 일본 청년들이 세계일주도 하는 과정에서 외국인들이 “패밀리 네임”이란 것을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많이 보게 되었다.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을 보니 자기네들의 직업을 가지고 만든 성씨도 있고, 자기네 마을의 특징을 살려서 만든 성씨도 있었다.   그래서 일본도 성씨란 걸 만들어서 쓰기로 하였다. 그런데, 일본의 학자들에게 물어 보니 동양 문화권에서는 성(姓)이라는 것도 있고 씨(氏)라는 것도 있는데.. 성(姓)이란 것은 황제가 직접 만들어서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이라 하였다.   백성이 한두 명도 아닌데 어느 세월에 만들어서 준단 말인가... 그냥 일본은 씨(氏)를 만들어서 쓰기로 하고 창씨(創氏)하는 업무는 각 사무라이들에게 그냥 맡기기로 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순식간에 수만 개의 씨(氏)가 만들어졌는데... 지금도 일본은 어떤 장부이든지 “성명(姓名)”이란 칸은 없고 어디든지 모두 “씨명(氏名)”이란 칸만 있다. 19세기 말 갑자기 시행된 창씨(創氏)였기 때문에 각자의 씨(氏)에 대한 커다란 자부심 같은 것은 당연히 없다.   청일 전쟁 승리 이후 조선에게도 성씨 없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고자 호적법을 만들어 창씨(創氏)의 기회를 주었으나, 조선인들은 이상하게도 창씨(創氏)는 않고 기존 양반들의 성(姓)을 빌려 와서 관청에 신고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한 글자 짜리인 성(姓)을 사용하는 사람은 중국 또는 조선인이고 두 글자 짜리 씨(氏)를 쓰는 사람은 일본인.... 어찌 되었든 간에 국적 구별이 쉬워서 좋기는 했다.   조선을 삼키고 난 뒤에 조선인들로부터 “같은 나라가 되었다고 해 놓고는 차별대우가 너무 심하다”는 등 불만사항이 많이 접수가 되었지만, 우선 이름에서부터 출신이 확연하게 표시가 나니 일본 정부로서도 별로 뾰족한 대책이 없어서 그냥 대충 세월만 보냈다.   그러다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일본군들이 매일매일 죽어 나가고... 조선인들이라도 군인으로 뽑아서 내보내야겠는데 차별대우 해소를 위한 근본대책을 세우라고 매일 투덜대는 저 조선인들을 그냥 일본군으로 들여 보냈다가는 전투도 제대로 못해 보고 질 것 같고... 일본정부는 착잡해졌다.   누군가 묘안을 냈다. 일본식으로 창씨(創氏)할 기회를 한 번 더 줄 터이니 이 참에 일본식으로 제대로 창씨를 해라... 어차피 얼굴 생긴 것도 똑같고.. 조선 출신을 차별대우하고 싶어도 조선 출신이란 표시가 없으니 못할 것 아니냐... 그러나 그대신 조선 청년들 군대에 좀 가 줘야 되겠다.... 이렇게 하여 1940년대에 창씨(創氏)할 기회를 주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곳에서 문제가 터졌다. “어떻게 그 동안 써 오던 성(姓)을 버리고 그보다 격이 낮은 씨(氏)를 쓸 수 있느냐”라는 것이었다.   일본인들로서는 얼른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었다. 이미 오래 전에 법적으로 양반이란 것도 없어졌고 문벌이란 것도 이제 큰 의미가 없어졌는데 허울만 남은 성(姓)을 가지고 왜 그리 집착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그래도 차별대우 철폐란 것이 어차피 민간 차원에서는 불가능한 문제이고 정책 차원에서 조선출신이라는 표시가 안 나게 해 주겠다는 것인데...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의 불만에 대해 잘 이해가 안 갔지만 그래도 강제 창씨를 계속 밀고 나갔다. (이 때 林, 柳, 南씨 일부는 일본에도 있는 성씨라 하여 새로 창씨를 하지 않았다고 함).... 그리고 조선인들을 일본군으로 받아 들여 전쟁을 계속 수행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조선사람들만 일본군복을 입은 채로 애매하게 죽은셈이 되어 버렸고 몇 년 후 일본은 전쟁에서 졌다.   1945년에 전쟁도 끝이 나고 살림살이도 일본 내부로 축소되었으니 일거리도 줄어들고 오히려 편해졌다. 일본인들도 이제 성씨를 사용한 지 거의 100년이 다 되어 간다. 100년 동안 의 짧은 역사가 일본인들에게 성씨에 대한 관념을 얼마나 변화시켰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아직까지는 성씨에 대한 뚜렷한 자부심 같은 것은 없는 것 같다.   어쨌든 일본인은 성씨의 종류는 8만여 가지로 무지하게 많지만 성씨별 인구 수에 대해서는 아직은 신경을 쓰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다. 우리나라 양반의 자손들이 볼 때에는 분명히 일본인은 "근본도 모르는 쌍놈들"일 뿐이다.   ○ 글쓴이 : 문학박사 황재순(제물포고 교감)        
164    고령화 시대와 로인, 그리고 … 댓글:  조회:5087  추천:1  2013-01-27
고령화 시대와 로인, 그리고 … 18세기 말엽에 《말사스》라고 하는 한 영국의 학자는 《인구원리》라는 자기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인류사회에서 농작물, 공업품 등 생활자료는 산수식(1,2,3,4…)으로 증장하고 인구 수량은 급수식(1,2,4,8…)으로 증장한다. 그러므로 인류가 의식적으로 인구의 증장을 억제하지 못한다면 빈궁과 재난은 피면할수 없게 된다. 인구 증장을 억제하는 수단에는 주로 두가지가 있는데 한가지는 독신으로 살거나 결혼을 늦게 하는 등 도덕적 억제 수단이고, 또 다른 한가지는 전쟁, 질병, 온역, 재난, 등 적극적 억제 수단이다. 적극적 억제 수단이란 다시 말해서 전쟁이나 온역같은 잔혹하고 효과적인 수단을 적극 리용하여 과잉인구를 억제함으로써 지구상의 생활자료 형편에 따라서 인구 비례를 평형시키는 것이다.… …   말사스의 《인구원리》는 한때 히틀러 등 파쑈들의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유태인 대학살을 감행하는 등 리론근거로 채납되여 왔으며 이미 력사적으로 많은 철학가들과 정치가들의 비판을 받았다. 말사스는 동식물에게나 적용될는지 하는 원리를 가지고 인류를 분석하였으며 인류의 문명과 사회제도의 적극적인 역활을 보아내지 못하였다.   그런데 지금 진짜로 세계적 인구과잉 시대가 서서히 도래하고 있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수 없다. 우리의 지구는 적도 둘레길이가 단지 4만키로, 지구의 대부분 면적은 바다에 잠겨 있으며 육지면적은 29%밖에 되지 않는다. 그나마 육지면적의 80%이상은 또 고비사막이 아니면 빙설에 묻혀 있으며 단지 16%의 면적에만 인류가 상기 거주할수 있다. 지구인구가 계속 이렇게 무제한 증장되게 내버려 둔다면 그리 멀지않은 래일에 가서 인류에게 훼멸성 재난이 닥치게 되리라는 것은 의심할바 없다.   그럼 어떻게 인구의 증장을 효과적으로 공제하고 인류를 구할수 있겠는가? 기실 이런 문제는 우리 로백성 신분에서 해답할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세계 제일의 인구대국인 우리 중국에서는 이미 40여년 동안 계회생육을 기본국책으로 지정하고 엄격히 실행하여 왔다. 중국의 백성으로서 세기적 난제에 한번 관심을 갖고 나름대로 구상하여 볼 따름이다.   2011년의 유관 통계에 의하면 중국의 총인구는 이미 13억을 넘었는데 그 당해의 출생률이 1.2%였고 사망률이 0.7%였다. 그러니 중국의 그 당해 인구 자연 증장률은 약 0.5%가 되는 것이다. 이 속도로 계속 나간다면 이제 본세기 말에 가서 중국의 인구는 또 50%가 증가되여 20억좌우로 될 것이며 세계의 인구는 지금의 약 70여억으로 부터100억선을 넘어서게 될것이다. 지구가 용납할수 있는 인구총량의 극치에 접근한다.   지구 인구가 100억을 넘으면 어떻게 될가? 참 흥미로운 문제이다. 나는 상상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한번 적극적인 방면으로 구상하여 본다:   그때에 가서는 중국의 GDP총량이 이미 미국을 훨씬 초월하여 세계는 패권이 없는 중국 주도의 다원화 질서로 다스려 질 것이다. 세계적으로 나라의 공능이 약화되고 유엔의 공능과 새로 건립된 국제 자유무역 기구의 역활이 강화될 것이다. 핵무기와 대량 살상무기같은 불길한 물건은 유엔의 감독하에 기를 나누어 계획적으로 없애버릴 것이며 세계의 영구한 평화가 보장될 것이다. 고신 과학기술 성과를 세계적으로 공동히 향수할 것이며 세계적 초요사회가 실현되여 나라지간의 빈부차이가 그리 크지않을 것이다. 인류의 육아교육과 양로복지는 완전히 사회에서 책임지게 될것이며 혼인은 가정에 예속되지 않은 자유적인 결합으로 될것이다. 즉 아이를 키우고 로인을 모시는 일에 젊은이들이 더는 근심할 필요가 없고 외도하고 들킬가봐 조마조마 조심할 필요도 없게 된다. 사람의 수명은 보편적으로 100살에 접근할 것이고 70세이상의 로인 비례가 20%이상을 차지하게 될것이며 처음으로 세계적 고령인구 고봉위기를 맞이하게 될것이다. 인류는 인구를 공제하기 위하여 세계적 범위에서 엄격히 생육을 절제할 것이며 또 로년복지 사회기제를 완벽화 하여 고령인구 고봉위기를 안전하게 넘기기 위하여 유력한 조치를 실시할 것이다. 고령인구 고봉위기를 안전하게 넘긴 후에는 인구수량이 점차 줄어들 것이다. 만일 고령인구 고봉위기가 쉽게 해결되지 않고 인구가 계속 불어 난다면 유엔 인구대회에서 일본대표가 《사망을 제도화 할데 관한 제안》을 제출할 것이다. 즉 장수로인들이 100세가 되면 의무적으로 사망하는 제도이다. 지금의 규정년령이 된 사람들을 무조건 퇴직시키는 제도처럼 말이다. 그러나 일본대표의 정령사망 제안은 결국 통과되지 못할것이며 인류는 자기의 지혜를 충분히 발휘하여 끝내는 더욱 현명한 방법으로 고령인구 고봉위기를 아슬아슬 넘길것이다.… …   지금 세계에서 대체적으로 락후하고 빈궁한 나라일수록 인구 증장률이 높고 선진적이고 부유한 나라일수록 인구 증장률이 내려가는 추세이다. 독일과 같은 선진국가는 이미 몇년째 인구의 마이너스 증장률을 확보하고 있다. 즉 인구가 해마다 줄어 든다는 말이다.   그런데 인구의 증장률을 효과적으로 공제한 선진적인 나라에서는 또 다른 더욱 어려운 사회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인구 고령화이다. 지금 사회적으로 60세 이상의 로인비례가 10%를 넘으면 고령화 사회라고 한다. 의학이 발전하고 생활환경이 개선되면서 사람들의 수명이 보편적으로 많이 연장되였는데 일본이나 독일처럼 부유한 나라에서는 60세 이상의 로인비례가 이미 20%를 넘어 섰으며 나라적으로 로년 복지비용이 엄청나게 들어간다. 그리하여 지난 1월21일, 일본정부는 사회보장제도 개혁에 관한 국민대회를 열었는데 《말기 연명치료에 관한 건강보험제도 개혁안》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일본 아소다로(麻生太郞) 부수상겸 재무상은 《연명치료를 받고 있는 불치병 말기 로인일 경우, 만약 본인들이 죽고 싶어하면 얼른 죽을수 있게 해야 한다》고 발언하여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현재 일본에서는 고령화로 인하여 로인 의료비가 엄청나게 불어난 탓에 건강보험제도가 위기에 처하게 되였다. 아소다로의 본의는 나라의 재정부담을 줄이고 복지비용을 더욱 유용한 곳에 쓰자는 뜻이였으나 사회에서 비난이 쏟아지자 자기의 관점이 아직 시기상조임을 의식하고 결국 사과하고 걷어 들이고 말았다.   기실 우리도 평소에 불치병 말기 로인들이 연명치료 과정에 자살을 시도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연명치료란 완치의 가망이 전혀 없는 말기 환자로인을 약물로 죽음을 지연시키는 행위로서 기실 환자로인에게는 고통만 더해 줄 뿐이고 사회적으로 랑비를 조성하고 의료보험에 부담만 증가할 뿐이다. 그러나 병원의 립장에서는 환자로인이 아무리 고통스러워 할지라도 치료비만 보장되여 있다면 거의 끝나가는 희망없는 생명을 만구하기 위하여 끝까지 치료를 견지하는 것이 현대 인도주의의 기본 표준이고 병원 경영의 기본 방침이다. 한 리직간부 환자가 페암으로 8년을 시달리다가 인젠 연명치료가 너무나 지겨워 해탈되려고 몰래 많은 수면제를 삼켰다. 그런데 그만 인차 발각되여 의사들이 구급을 드리대는 바람에 다시 깨여나게 되였다. 그러자 그는 《좀 편히 죽자고 하였는데 나에겐 죽을 권리도 없구나!》하면서 한탄하였다. 중국의 법률상에서 자살과 안락사는 절때 용인되지 않기 때문에 사연이야 어찌 되였든 의사로서 환자가 자살로 안락사 하려는 것을 알면서도 제지시키지 않았거나 구해주지 않았다면 그 의사는 도덕의 질책을 받게 되며 심지어 법률의 추궁을 받을수도 있다.   인류사회에서 평화로운 환경이 지속되고 문명과 향락의 요소가 많아지면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욕망이 더욱 강해진것 같다. 기실 아무리 엄중한 불치병 말기 로인이라고 하여도 진정으로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극히 적다. 한 불치병 말기 로인이 평소에 죽겠다는 말이 입에서 끊기지 않으니 그의 딸은 듣기가 민망스러워 사탕 한알을 로인의 손에 은근히 쥐여 주면서 《이것을 잡수시면 편안히 사망할수 있으니 얼른 잡수세요!》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로인은 대뜸 사탕을 뿌려 던지며 대노하더라고 한다. 자기가 건강할 때에는 불치병 말기 로인들의 너무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고는 《내가 저 처지라면 방법을 대여 죽어 버려야지!》하고 생각할수 있지만 일단 정말로 자기가 불치병에 걸려 그 처지가 되고 보면 도리여 죽을 용기가 없어지고 무한히 살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다.   사람은 태여나면서부터 자기 일생을 살만큼 살고 만년에 가서는 꼭 죽어야 한다고 세월과 어길수 없는 계약이 맺어진다.  그리하여 만년에 가서 불치병으로 죽지 않으면 죽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불치병이 오는 것이다. 지구는 마치도 공간과 좌석이 제한되여 있는 공공뻐스와도 같다. 먼저 뻐스에 오른분들은 일정한 구간을 려행한후에는 반드시 내려야 한다. 그래야만 또 다른분들이 이 뻐스에 오를수 있는 공간과 좌석이 생긴다. 만일 이 세상에 정말로 《장생불로약》이 있어서 2천여년전의 공자나 진시황같은 분들이 모두 떼질쓰고 죽지 않고 버티면서 오늘까지 살아 계신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될가? 상상하기조차 무서운 일이다. 수명이 다 하여 죽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로서 로인들은 스스로 평온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로인들의 만년의 행복은 많은 정도에서 평온한 마음가짐에서 온다고 할수도 있다.   고령화 시대에 접어 들면서 로인들은 어쩔수 없이 본의가 아니게 사회와 가정의 부담으로 되였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로인들의 탓이 아니다. 자연규률과 사회규률에 의하여 인류가 자기의 발전과정에서 반드시 넘어야 할 어려운 시련고비이다. 그렇다고 사회와 가정에서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로인들을 기시하고 홀대한다면 사회에서는 인도주의 대재난이 폭팔하여 고령화 시대보다 더욱 무서운 현대식 야만시대가 올 것이다.   지금 사회와 가정에서 로인문제가 점점 심각해 가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로인들의 건강과 장수는 여전히 사회와 가정의 응당한 존경과 축복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오늘의 사회와 가정은 바로 그들에 의하여 계승되고 창조되고 건설되였으며 그들의 처지가 곧바로 현대사회 문명수준의 직접적인 표징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와 가정에서 자체건설을 부단히 완벽화 하여 로인복지 수준을 보장하고 제고시키는 것이야 말로 고령화 시대난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도경의 하나이다.   우리민족은 전통적으로 《환갑례》,《회혼례》등 부모들의 장수를 축하하는 례의가 있다. 《환갑례》는 탄생60주년 기념인데 기실 《로인례》에 해당하며, 《회혼례》는 결혼 60주년 기념인데 낳은 자식들을 하나라도 저승에 앞세웠다면 이 축수를 받을 자격이 없다. 근년에 와서는 《환갑을 쇠고 나면 빨리 늙는다.》는 관념이 성행하면서 환갑을 십년 미루어 일흔하나에 가서 쇠는것이 보통이다. 그만큼 지금 사람들은 너무 일찍 로인대접을 받는것을 싫어한다. 그리고 장례에도 《호사》라는 것이 있었는데 《인생칠십 고래희》라 하여 70세이상 장수하시고 사망한 로인의 경우에만 적용되였다. 장례에서 《호사》의 경우에는 조문시에 상주와 주부에게 위안의 말을 하여 주는것이 아니라 축하와 치하의 말을 하여 주며, 출상시에는 상여를 메고 《상여가》를 높이 부르며 장난치면서 오락의 분위기가 농후하였다. 그리고 우리의 《상여가》에는 《삼천갑자 동박삭》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동방삭이라는 신선이 삼천갑자를 살았다고 하였으니 삼육이 십팔하여 십팔만년을 산셈이다. 기실 동방삭(기원전154년~기원전93년)이라는 사람은 중국 한무제때에 실제로 존재한 수수한 문관이였는데 생평이 61년, 즉 한 갑자밖에 살지 못하였으며 가령 오늘까지 살아 계신다 하여도 2167세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는 워낙 자기 자랑에 특기가 있어 우리민족의 신선으로 탈바꿈 되여 오면서 자기 나이를 일약 3000배 올리 붙여서 십팔만세 장수신으로 되였으니 아마 우리민족이 예로부처 장수로인을 특별히 존경한다는 소문을 많이 들은것 같다.   시대가 발전하면서 현대 로인들의 가장 큰 변화는 자식들을 모두 내 보내고 혼자 사는 것이다. 반려가 함께 있는 로인들은 그런대로 서로 등이라도 긁어줄수 있지만 독거로인들은 감기에 걸려도 물 한컵 떠다줄 사람이 없으며 그리하여 집에서 고독사 하는 로인들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지금 시대에서는 돈을 많이 벌어야 하니까 젊은이들이 부모를 옆에 모시고 있으면서 보살필 사이가 없다. 그리하여 자리가 어려운 로인들은 보통 경로원에 맡겨지는데 정부에서 꾸린 경로원은 그런대로 사람 사는곳 비슷하지만 개인적으로 꾸린 경로원은 그 정황이 상당히 복잡하다. 지금 사회적으로 로인 복지내용과 기제가 점차 풍부하여 지는데 단 한가지만은 여직까지 공백이다. 그것이 곧 로인들의 사망시 장례복무 기제이다.   《조선족 장례풍속》이 무형문화재로 되고 내가 대표 전승인이 되면서 그 동풍을 빌어 조선족 장례 어려움을 해결한다는 종지로 유관부문의 비준을 받고 《시대상조》를 설립하였다. 정작 사업을 시작하고 보니 내 혼자의 힘에는 엄청 부치는 일이여서 유관부문의 지지와 능력있는 분들의 리해와 도움이 필요하였다. 그런데 우리 조선족들은 죽을《死》자를 특별히 싫어한다. 특히 상업이나 무역을 하는 분들이 더욱 그렇다. 《死》와 상관되는 사람, 사연, 혹은 물건을 가까히 하면 크게 재수 없어진다고 믿는다. 오늘까지 나한테 과감히 접근하여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한 조선족 지명인은 한명도 없다. 힘이 모자라 힘을 합치려고 사회에 많은 초빙고시 내 보냈지만 감히 응하는 사람이 없다. 물론 아직까지 현명한 방안이 나오지 못한것이 그 주요한 원인일 것이다. 그런데 한번은 한 젊은 조선족 사업가의 유치하고 어처구니 없는 말을 듣고는 너무나 서글퍼서 며칠밤 잠을 설쳤다; 《산사람 사업을 하자해도 끝이 없는데 하필이면 죽은사람 사업입니까? 우리가 무슨 할일이 없어서 이런일에 손을 대겠습니까? 친구들의 웃음을 살 일입니다. 미안하지만 도움을 줄수가 없네요.》… …   하여튼 우리의 사업이 일시 지지부진하면서 당분간 우리 문화와 상관없는 사람들에게 밀리여 조선족 상가에 응당 주어야 할 도움을 줄수 없고 마감길 가는 조선족 로인들에게 우리 례의로 명복을 빌어줄수 없는것이 참으로 미안하고 가슴이 아플 뿐이다. 그러나 보증하건대 이제 몇달이 안가서 우리의 사업은 궤도에 오를 것이며 연변실정에 부합되는 조선족 상조가 참신한 모습으로 나타나 연변의 조선족들에게 실혜적인 봉사를 제공하여 줄수 있을것이다.   나도 로인이다. 나는 늦게나마 얻은 이 사업의 기회를 생명처럼 소중히 여긴다. 우리 《시대상조》에는 100년 대계가 있다. 그러니 나에게는 죽을때까지 분투하여도 완성할수 없는 임무가 있게 되였다. 참 잘된 일이다. 늙으막에도 계속 할일이 있다는 것을 참으로 다행스럽게 여긴다. 비록 이런 일을 그누가 부러워 할 사람은 없겠지만도. 그런대로 나는 우리의 100년 대계 완성을 바라고 매일매일을 열심히 출근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러다가 그 어느날에 가서 염라왕님이 불시에 나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번에는 당신이 죽어야 할 차례요!》하고 통지를 보내오면 나는 흔쾌히 《예잇- 곧 갑니다.》하고는 이대로 두 사신을 따라 저승으로 떠나 갈것이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성원 씀 2013-01-27  
163    《고려장》전설과 《고려장》현대판 댓글:  조회:4297  추천:2  2013-01-02
《고려장》전설과 《고려장》현대판 《高麗葬》이란 우리 전설에서 옛날 고려때에 있었다는 일종의 장사 악법이다. 자기 부모가 로쇠하여 더는 일할수 없게 되면 산속에 땅굴을 파서 그곳에 부모를 가두어 놓고 죽기를 기다리다가, 일단 죽으면 큰돌을 옮겨 땅굴을 봉해 버렸다고 한다. 이 《고려장》과 관련하여 두가지 전설이 기억난다; 한가지 전설에서는 고려때에 한 농부가 자기 부친이 인젠 늙어서 일할수 없고 밥만 축내게 되니 당시 풍속에 따라서 자기 부친을 지게에 담아 지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 땅굴을 파서 가두어 놓은후 지게마저 버리고 돌아오려고 하는데, 함께 갔던 그 농부의 어린 아들이 그 버린 지게를 기어코 가지고 가자고 조른다. 왜서냐고 물었더니 그 어린 아들이 하는 말이 나중에 아버지가 늙으면 역시 이 지게로 져서 버려야 하는것 아니냐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그 농부는 크게 뉘우치고 늙으신 자기 부친을 다시 집으로 모셔 내려와 지성으로 봉양했다고 한다. 또 한가지 전설에서는 한 선비가 당시의 풍습대로 늙으신 자기 어머니를 버리려고 산에 업어 같는데,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 자기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 갈때 길을 잃을까봐 걱정되여 나무가지를 꺾어 표시를 해 두었다. 그 선비는 이렇게도 인자하신 어머니를 차마 버릴수가 없어서 다시 집으로 모시고 왔다. 그러던 어느날, 당나라 사신이 똑같이 생긴 말 두필을 가져고 와서 고려의 대신들더러 어미와 새끼를 가려내라고 한다. 모두들 가려내지 못하는데 그 선비의 어머니가 그 말들을 하루 굶긴 뒤에 여물을 주어서 먼저 먹는 놈이 새끼이고 양보하는 놈이 어미라고 알려 주어 문제를 풀수 있었다. 그 뒤로 조정에서는 늙은이들에게는 젊은이들에게 있을수 없는 보귀한 경험과 지혜가 있다는 것을 알고 령을 내려 늙은 부모를 버리는 악습을 금지했다고 한다. 이상의 두 전설을 얼핏 듣기에는 효도를 선양한 전설인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기실 그것이 아니다. 위치를 바꾸어 생각해 보면 자고로 례의와 효도가 우리 민족의 우량전통이라고 세상에 소리높이 자랑하여 온 우리 민족의 력사에 《고려장》이라는 이런 악습이 있었다는 것은 너무나 잔혹한 일이다. 체면을 생명처럼 중히 여기는 우리 고국의 글꾼들은 언녕 이점을 감지한것 같다. 네이버 검색란에 《고려장》이라고 쳐 넣고 검색하여 보았더니 절대 대부분의 글들에서는 《고려장》이란 어디까지나 전설일 따름이지 실제로 있은 우리민족 력사사실은 아니라는 주장으로 일색이다. 《고려장》이 우리 민족의 형상에 크게 먹칠한다고 여기는 것 같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세종 44권, 11년(1429 기유 / 명 선덕(宣德) 4년) 4월 4일(기묘)세번째 기사 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예조에 교지를 내리기를, “사람의 자식으로 부모가 살았을 때는 효성을 다하고, 죽어서는 슬픔을 다하는 것은 천성(天性)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고, 직분(職分)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것이다. 고려 말기에 외방(外方)의 무지(無知)한 백성들이 부모가 죽으면 도리어 간사한 마음으로 즉시 그 집을 무너뜨리고, 또 부모가 거의 죽어갈 때에, 숨이 아직 끓어지기도 전에 외사(外舍)로 내어 두게 되니, 비록 다시 살아날 이치가 있더라도 마침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장사지내는 날에는 향도(香徒)들을 많이 모아서 술을 준비하고 풍악을 베풀기를 평일과 다름이 없이 하니, 어찌 유속(遺俗)이 아직까지 없어지지 아니하였는가. 아아. 사람은 진실로 각기 상도(常道)를 지키는 천성(天性)이 있으니, 누가 그 부모를 사랑하지 않으리요마는, 다만 오래도록 습속(習俗)에 젖어 이를 생각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지금부터는 유사(攸司)가 나의 지극한 마음을 몸받아 교조(敎條)를 명시(明示)하여, 가가(家家)로 하여금 구습(舊習)의 오점(汚點)을 환히 알도록 하여 자신(自新)해서 인효(仁孝)의 풍속을 이루게 할 것이다. 만약 혹시 고치지 않는다면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은 엄격히 금지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리민족의 《조선왕조실록》은 가장 진실하고 가장 완정한 흔치않은 력사문헌중의 하나이다. 이상의 기록에서 살펴보면 고려말기부터 외방의 무지한 백성들에게서는 부모의 죽음과 장사에 상관되는 간사한 악습이 전해져 내려왔는데, 현명하신 조선조 세종대왕님께서 예조에 교지를 내리시여 금지시키는 것이다. 이로부터 추정컨대 《고려장》같은 장사 악습도 우리민족 력사의 어느 한시기에 실제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것은 아니다. 기실 한개 민족이 력사에 이런저런 오점이 있었다는 것은 매우 정상적인 일이다. 세상의 그 어느민족의 력사에 오점이 없겠는가? 한개 민족의 력사상에 이런저런 오점이 있었으므로 하여 그 민족은 그 오점을 시정하는 과정에서 더욱 성숙되는 것이다. 불행한것은 한개 민족의 력사상의 오점이 다시 현대판으로 바뀌여 재연되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고려장》악습은 조선조의 세종대왕님께서 예조에 교지를 내리시여 금지시킨후, 유교를 전면적으로 보급시키면서 례의를 중시하고 부모에 효성하는 규칙을 제정하시여 백성들이 지키게 함으로써 그 우량한 전통이 오늘까지 이어 내려올수 있게 하시였다. 그런데 현대 문명사에서 전례없는 최고의 성세를 맞이하고 있다는 최근에 와서 우리의 주위를 다시 한번 살펴 보시라; 필생의 정력으로 자식들을 다 출세시켜 보내고 나니 세집에 덜렁 버려진 늙으신 아버님들, 외국에 돈벌이 간 자식들을 망연히 기다리며 빈집을 지키고 계시는  허약한 어머님들, 혼자서 살다가 혼자서 죽어야 하는 고독한 할아버지들, 치매에 걸린후 싸구려 경로원에 후사처리까지 이미 맡겨진 불쌍한 할머님들, 빈집에서 혼자 사망한후 며칠후에야 발견된 불행한 망령들… …, 현재 우리 주위에서 심심찮게 볼수있는 이런 현상들이 그래 현대판《고려장》이 아니고 무엇인가? 고대에서는 현명하신 세종대왕님이 계셨기에 예지에 교지를 내리시여 그 간사한 《고려장》악습을 금지시킬수 있었다면, 현재에 와서는 어떤 《성인》이 나타나시여 어떤 현명한 시책으로 곤혹스러운 이 현대판 《고려장》을 철저히 없앨수 있으리까? 성원 글 2013년1월2일
162    죽음학 연구학자와의 인터뷰 댓글:  조회:4077  추천:0  2012-12-01
죽음학 연구학자와의 인터뷰 _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기계_   죽음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놀라울 만큼 적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확실하게 아는 것이 없다. 죽음을 다룬 책들을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종교적 관점에서 쓴 책 말고는 별다른 저작물이 없었다. 그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니다. 죽어본 사람만이 죽음에 대해 정확히 말할 수 있을 테니까. 미국 예일대 철학과 교수 셸리 케이건(Kagan·58)은 1995년부터 17년간 '죽음(Death)'이란 제목의 강의를 해오고 있다. 그의 강의는 '열린 예일 강좌(Open Yale Courses)'라는 제목으로 인터넷에 공개돼, 미국과 유럽, 아시아에서 열띤 호응을 얻고 있다.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으로 교탁에 앉아 강의하는 그의 친근한 모습도 인기에 한몫하고 있다. 그가 올 4월 펴낸 저서 '죽음이란 무엇인가'가 최근 한국에서 출판됐다(엘도라도 刊). 이 책이 미국 밖에서 번역돼 나온 것은 한국이 처음이다. 이 책은 '죽음'을 주제로 한 철학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영혼은 존재하는가? 영혼이 있다면 영생하는가? 죽음은 나쁜 것인가? 영원히 살고 싶은가?…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봤음 직한, 그러나 논리적으로 따져보지 않았을 질문들에 대해 집요하게 논리적이고 비판적으로 묻고 대답한다. 이런 질문들에 대해 케이건은 조목조목 대답을 내놓고 있지만, 자신의 결론이 옳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한 번쯤 이 질문에 답해보라'고 권한다. 이 책을 읽는 것은 그런 면에서 매우 의미 있는 독서다. 이 '교탁 위의 철학자'를 지난달 23일 미국 뉴헤이븐(코네티컷주)에 있는 예일대 캠퍼스에서 만났다. '죽음의 철학자'라는 선입견과 달리 청바지와 체크무늬 셔츠, 운동화를 신은 그는 매우 유쾌하고 소탈한 사람이었다. ―이 책이 다른 나라에서도 출판될 계획이 있습니까. "한국어판이 처음이고, 중국어판이 진행 중입니다. 솔직히 제 책이 두 나라에서 먼저 번역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기쁘고도 놀랐습니다." ―한국에서 처음 번역됐고 한국 기자가 찾아온 셈인데, 왜 한국에서 죽음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걸까요. "한국에서 온 당신에게 묻고 싶은 질문입니다. 죽음은 모든 인간이 겪어야 하는 경험인데 왜 한국일까? 몇 달 전에 중국 베이징대에서 열린 학술회의에 갔다가 예일대 졸업생인 서울대 철학과 이석재 교수를 만났습니다. 그가 '한국에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엄청나게 팔렸다'고 하더군요. 한국 인구가 5000만명인데 100만부가 넘게 팔렸다고요. 인구에 비춰 보면, 미국에서는 고전을 제외한 어떤 책도 그렇게 많이 팔리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 책은 심각하고 학술적인 내용인데요. 한국이 특히 지적인 사회이거나 '정의'에 민감하기 때문일까요? 그건 잘 모르겠지만, 내 책이 처음 번역된 것과 무관하지는 않다고 봅니다. 죽음이나 정의 모두 인간 삶의 중심적 질문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어쩌면 한국의 대학 강의실에서는 이런 문제에 대해 충분히 접하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샌델 교수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등장하는 사례 중 '정의란 무엇인가'와 유사한 것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한 사람을 희생시켜 장기를 이식하면 5명을 살릴 수 있다고 가정할 때, 그 사람을 희생시키는 일이 옳은가' 하는 사례 같은 거죠. "그것은 비슷한 게 아니라 똑같은 비유입니다. '장기이식 사례'라고 부르는 건데, MIT(매사추세츠공대)의 철학 교수 주디스 톰슨이 만들어낸 사례입니다. 나와 샌델은 이 사례를 각각 다른 것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죠. 어쩌면 두 강의가 비슷한 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사례일지도 모릅니다." '장기이식 사례'는 공리주의(功利主義)를 설명하는 데 쓰인다. 샌델은 정의를 논하면서 이 사례를 들었고 케이건은 자살에 관해 강의할 때 이 사례를 거론한다. ―제 생각엔 '죽음'과 '정의' 두 강의나 책이 소재만 다를 뿐 결국 '철학 입문' 수업이 아닌가 싶습니다.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을 학부생에게 가르치는 강의라는 것이죠.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샌델의 강의는 정치학의 입문 코스이고, 내 강의는 철학의 입문 수업입니다. 두 강의 모두 많은 주제를 넓게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게다가 샌델은 정치철학자이기도 하지요. 내 저술은 대부분 전문 철학가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죽음'은 평범한 개인들을 위한, 누구나 생각해 봄 직한 주제들을 다룹니다. 그동안 아무도 많은 대중과 공유하려고 하지 않았던 주제였죠. 나는 수업시간에 칸트나 밀, 흄, 홉스에 대해 말하지만 학생들이 진정 그런 위대한 철학자를 이해할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철학이 어떤 학문인지, 어떻게 논리적이고 신중하게 생각할 것인지 배우길 바랄 뿐이죠. 죽음과 사후, 영혼에 대해 논하면서 이런 논쟁적인 문제에 대해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가르치는 것이 내 강의의 목표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특정한 관점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관점을 갖게 되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죠." ―학생이나 독자는 당신으로부터 올바른 관점을 배우려고 하지 않을까요. "강의하는 방식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내 관점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는 거예요. 내 카드를 가슴 가까이 대고 안 보여주는 거죠. 이를테면 제가 가르치는 윤리학 강의는 그런 식으로 합니다. 그렇지만 죽음 강의에서는 내가 옳다고 믿는 관점을 말합니다. 마치 과학 강의처럼 말이죠. 과학 선생은 '지구가 둥글다는 관점이 있고 평평하다는 관점이 있다. 나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둥글다는 이론을 지지한다'고 하겠죠. 다만 죽음 강의에서 저는 제 관점을 학생들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학생들이 여러 가지 관점을 배우고 자신만의 관점을 갖길 바라는 것이죠." ―이 강의를 17년간 해오고 있다면서요. "예일대에 온 것이 17년 전입니다. 죽음 강의는 이전에 있던 시카고 일리노이주립대에서부터 했어요. 그게 1985년이니까, 최소 25년은 했을 겁니다. 교수로서 첫 직장은 피츠버그주립대였습니다. 거기서 저는 주로 윤리학을 가르쳤는데, 일리노이주립대로 옮길 때 그 대학 학과장이 '죽음에 대해 가르쳐볼 생각 있느냐'고 하기에 좀 생각해보고 '하겠다'고 했어요. 그것이 이 강의의 시작이었습니다. 처음엔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큰 그림을 그리지 못했어요. 아까 내 수업을 '철학 입문'이라고 했는데, 어떤 입문 강의는 경품 주머니(grab bag) 또는 뷔페 테이블(smorgasbord) 식으로 하는 게 좋을 때가 있습니다. 몇 해 동안 이 강의를 하다 보니 다양한 주제를 넓게 다루는 방식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음이 무엇인지 묘사할 수 있는가, 죽으면 존재가 없는데 어떻게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죽음이 두려울 수 있는가 하는 생각들이 떠오른 것이죠. 그런 식으로 내 강의의 스토리라인을 짜게 된 것입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 당신은 영혼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영혼이 있다고 믿음으로써 마음의 평안을 얻습니다.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겠죠. "물론입니다. 영혼을 믿는 것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지요. 특히 많은 사람은 종교적인 이유로 영혼을 믿습니다. 물론 내 강의나 책의 목적이 그런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려는 것은 아닙니다(웃음). 그렇지만 진실은 때때로 불편한 것이죠. 아이들도 자라면서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잖아요?" ―이를테면 산타클로스의 존재 같은 건가요. "그렇죠. 아주 익숙한 사례입니다. 또 아이들은 자라면서 세상에는 나에게 해로운 것이 많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나는 세상을 좀 더 정확하게 보게 해주려는 겁니다. 그것이 설령 받아들이기 힘들다 하더라도 말이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지만, 왜 그것이 합리적이지 않은가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단계의 위안이나 평안을 얻을 수도 있지요." ―그렇지만 '인간은 로봇보다 나은 기계에 불과하다'는 식의 주장은 너무 비인간적이지 않습니까. "나는 인간이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기계라고 생각합니다. 기계와 자유의지는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꼭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은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는 기계이며, 어떤 계기를 통해 자유의지를 갖게 된 것이지요." 어쩌면 그의 책에서 이 부분이 많은 독자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 그는 영어판에서도 'machine'이란 용어를 쓰면서 인간을 기계에 비유하고 있다. 우리는 아무 결함 없는 기계로 태어나 점점 낡게 되고 부품을 교체하기도 하지만, 결국 고장나서 어느 날 쓸모없이 돼버린다는 것이 그가 말하는 죽음의 요체다. ―사람들은 타인의 죽음이나 기르던 개나 고양이의 죽음, 심지어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죽음을 상상하곤 합니다. 그것이 당신이 생각하는 죽음과 일치합니까. "그렇죠. 토끼나 금붕어, 낙엽과도 다를 것이 없어요. 만약 내가 망치로 당신의 스마트폰을 부숴버린다면 미안하지만 스마트폰은 '죽어'버릴 것입니다. 기능을 멈추는 것이죠. 살아있을 때 하던 모든 것을 할 수 없는 상태가 죽음입니다. 그런 개념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이 내 강의의 요점이기도 해요. 내 삶은 우리 집 오디오가 낡아서 고장나는 것과 똑같은 과정을 거쳐 고장나고 결국 죽음에 이를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런 설명을 영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친구나 가족, 아이가 죽는다면 무척 슬프고 화가 나지요. 그렇다면 영원히 산다는 것은 좋은 것일까요? 영생이 나쁜 것이기 때문에 죽음 그 자체는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을 두려워하거나 나쁘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시간여행도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아, 어려운 질문인데요.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시간여행이 과연 말이 되는가'와 '시간여행이 물리적으로 가능한가' 두 가지입니다. 이를테면 '사람이 팔을 빨리 휘저으면 하늘을 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을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죠. 나는 항공역학(aerodynamics)은 잘 모르지만, 개념상으로는 인간이 날 수 있을 만큼 빨리 팔을 휘저으면 날 수도 있지요. 그러나 과연 그렇게 빨리 팔을 휘젓는 것이 물리적으로 가능할까? 아마도 아닐 겁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늘을 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죠. 시간여행 역시 관념적으로는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물리적으로는, 글쎄요.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게 가능한지는 물리학자에게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수업시간에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무엇입니까. "매우 많은 다양한 질문을 받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큰 질문(big question)은 학생들 스스로 물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나는 영원히 살고 싶은가' 하는 질문이죠. 아무도 나에게 '영혼이 있습니까' 하고 묻지는 않아요. 이미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을 알기 때문이죠. 학생들의 질문은 대개 세세한 부분에 대한 것들입니다. 사례를 들어 설명할 때 질문이 많아집니다. 내가 물리적인 존재, 기계에 불과하다면 사후의 삶이 가능한가? 신이 우리를 부활시킬 때 죽어서 썩은 시체를 다시 조립해 부활시키면 그것은 과연 나인가? 내 시계가 고장나서 일부 부품을 교체했다면 그것은 여전히 내 시계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죠. 내 아들이 나무블록으로 쌓은 탑을 '엄마에게 내일 보여주겠다'고 한 뒤 잠들었어요. 그런데 내가 실수로 그걸 무너뜨렸습니다. 그래서 설명서를 보고 그것과 똑같이 다시 쌓은 뒤에 아내에게 '이것 봐, 우리 아이가 쌓은 탑이야'라고 한다면 과연 두 탑은 똑같은 탑일까요? 이런 얘기를 하면 질문도 많고 말도 많아집니다. 흥미로운 사례 하나를 더 말해보죠. 의학적으로 뇌 이식이 가능해져서, 뇌를 이식하면 모든 기억이 그대로 옮겨진다고 가정합시다. 내가 큰 사고를 당해 뇌만 남고 모든 신체 기능이 죽어있는데, 존스라는 사람이 뇌만 죽고 신체만 멀쩡하다고 칩시다. 내 뇌를 존스의 몸에 이식해서 그 사람이 깨어났다면, 그 사람은 존스인가요, 나인가요? 심지어 뇌를 두 개로 나눠서 두 사람에게 똑같이 이식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두 사람의 몸에 나의 뇌가 반씩 이식되는 것은 '두 명의 나'가 되는 것일까요? 이것은 의학적으로 성공일까요, 실패일까요? 내 강의는 한 학기 내내 이런 복잡하고도 흥미로운 케이스에 대해 토론하고 생각해보는 시간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학생들은 스스로에게 물을 질문을 만들어 가는 것이죠."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한다기보다 원치 않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게 아닐까요. 일찍 죽는다든가 사고로 죽는다든가 하는…. "물론 그렇죠. 스무살에 죽는다면 너무 일찍 죽는 것이죠. 어떤 사람은 여든살에 죽어도 일찍 죽는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인간이기 때문에 대략 50세가 지나면 낡아지기(wear down) 시작해서 기능이 저하되고 결국 죽음에 가까워집니다. 80세가 됐을 때 30년을 더 보장받는다면 그것은 선물(present)인가요, 저주(curse)인가요? 조너선 스위프트가 '걸리버 여행기'에서 영생의 나라를 처음엔 환상적으로 묘사했지만 결국 끔찍한 형벌이라고 썼지요. 그것처럼 인간은 늙고 병들기 마련이기 때문에, 죽음은 때때로 구원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원하는 모든 것을 누리고 죽는 사람은 극히 드물어요. 나도 할 수만 있다면 100세까지 철학 공부를 하고, 물리학 공부를 100년, 음악 공부에 100년, 세계 여행에 100년을 쓰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너무 일찍 죽게 되겠지요." ―그렇지만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나면, '어차피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인데 열심히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죽음이 끝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나는 이 책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말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무엇을 해야 내 인생이 의미 있는 것이 될까, 하고 끊임없이 생각해야 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심오한 사실은 '내가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70억명과 함께 같이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다음에 해야 할 질문은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이 선한 것인가'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진정한 가치를 찾은 뒤에 그것을 목표로 삶을 다듬어 나가는 것이 의미 있는 인생입니다. 결국 내가 학생들이나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도 그들의 인생이 앞으로 어떠해야 할지 생각하게끔 하려는 것입니다." 그가 명함을 가져오지 않았다며 이메일 주소를 적어준 쪽지 뒷면에는 공교롭게도 이번 학기 '죽음' 강의의 리포트 과제가 인쇄돼 있었다. 그 문제는 이러했다. "고대 로마 철학자 루크레티우스는 '죽은 뒤 내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나쁘다면 태어나기 전에 내가 존재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기분 나빠야 할 것이다. 태어나지 않아 존재하지 않았던 상태에 대해 기분 나쁠 수는 없으므로, 죽은 뒤에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기분 나빠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라고 말했다. 이 주장에 대해 5페이지에 걸쳐 논하라." 그의 저서 '죽음이란 무엇인가'는 이런 종류 질문들의 향연(饗宴)이다. ―책의 가장 마지막 장에서 자살을 다루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자살에 반대하는 것 같은데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를테면 회복 불가능한 환자가 스스로 생을 마감할 권리 같은 것까지 자살에 포함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전쟁터에서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몸을 던지는 자살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 강의를 듣는 아이들이 누굽니까. 스무살 안팎의 아이들입니다. 특히 예일대 학생들은 엄청나게 똑똑하고 재능이 있으며 대단한 기회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 나는 그 아이들 누구라도 자살을 선택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확신을 주고 싶습니다. 특히 미국의 10대들은 너무 시야가 좁아서 자살을 택합니다. 그것을 막으려는 것이 이 강의와 책에서 자살을 다루는 이유입니다." ―학기 말쯤 되면 학생들 상당수가 당신의 관점에 동의합니까. "놀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런 걸 물어보지 않습니다. 학기 초에나 학기 말에나 '여러분 중 얼마나 영혼을 믿나요?' 하고 묻지 않는다는 거죠. 아마도 자신의 관점을 바꾼 학생도 있겠고 아닌 학생도 있겠죠. 학기 말에 학생들로부터 짧은 평을 받아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을 보낸 강의'라는 평부터 '정말 지루하고 재미없었던 한 학기'라는 양극단의 평가가 나옵니다. 이것은 얼마든지 괜찮습니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학생들의 관점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관련된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해 생각해보게끔 만드는 것이니까요." ―학점을 짜게 주는 사람으로 유명하던데, 그것 역시 학생들이 '가치있는 인생'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인가요. "나는 학점 짠 사람(hard grader)으로 유명한 것 맞아요. 이유는 아주 단순해요. 학생들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만약 모든 학생에게 좋은 학점을 준다면, 누군가 특별한 성취를 했을 때 어떻게 구별해 줄 수 있죠? 모두가 A학점을 받는다면 전체 평점이 올라가고 나중에 취직할 때 좋겠지만, '내가 A학점을 받을 만큼 했구나' 하는 성취감은 없어지는 거죠. 예일대에 진학했다는 것은 정말로 뭔가 성취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학생들에게 아무 생각 없이 A학점을 줄 수는 없죠. 그리고 예일대 가이드북에 따르면 B학점은 잘했다(good)는 의미입니다. 많은 학생이 잘 하고 있기 때문에 B학점을 받는 거예요." 인터뷰를 마치고 그와 함께 '죽음' 강의가 열리는 강의실로 향했다. 스테인드글라스로 창문이 장식된, 200여명이 앉을 수 있는 아름다운 교실이었다. 마침 추수감사절 휴일이어서 텅 비어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죽음을 토론함으로써 삶을 얘기해왔다. 그가 교탁 위로 풀쩍 뛰어올라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교탁 뒤에 서 있으면 불편해서 견딜 수 없단 말이죠. 한국 사람들도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나요?"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161    《조선족빈장관리조례》를 제정할데 관한 건의 댓글:  조회:3440  추천:0  2012-11-21
关于制定《朝鲜族殡葬管理条例》的建议 (编写人大议案提供参考)  问题的提出 1997年国务院颁布《殡葬管理条例》,全面推行全国范围的殡葬改革,除了信仰伊斯兰教的几个少数民族外,具备条件的地方一律实行火葬,其目的主要是节省土地。 随后,全国各地的各级地方政府,都结合当地的实际情况制定了当地的《殡葬管理方法》,以指导当地的殡葬管理工作。例如;1999年吉林省政府出台了《吉林省殡葬管理方法》,2003年长春市政府出台了《长春市殡葬管理方法》,2005年吉林市政府出台了《吉林市殡葬管理方法》…等等。 殡葬改革已经施行了30多年,作为少数民族地区,全国唯一的朝鲜族自治州的延边,至今没有出台有关朝鲜族的殡葬管理条例和法规,朝鲜族在殡葬习俗方面的合法权益得不到保障。 如今,在延边境内的四大殡仪馆中,竟然见不到一处朝鲜族殡仪设施,没有一项朝鲜族殡仪服务项目,实际上没有朝鲜族自己的殡仪场所,朝鲜族传统殡葬文化濒临绝迹。 《国务院殡葬管理条例》第六条明确规定;“尊重少数民族的殡葬习俗,自愿改革殡葬习俗的,他人不得干涉。” 1999年6月颁布的《民政部、国家民委、卫生部关于国务院中尊重少数民族的丧葬习俗规定的解释》中也进一步明确指出;“在殡葬管理中要尊重少数民族保持或者改革自己丧葬习俗的自由。” 我们把所谓的“殡葬习俗”不应该只单纯理解为土葬或火葬,殡葬习俗还包含着很多传统殡葬文化和理念,例如,入殓、吊唁、祭祀、孝道、礼仪…等等。这些习俗和理念反映一个民族的特色,失去特色,就失去区别于其他民族的优势。 施行殡葬改革,实行火葬,是益于当代,福于后代的积德工程,朝鲜族先人们也曾经在高丽时代(918~1392)的近500年间一直实行过火葬,因此,实行火葬与朝鲜族传统殡葬文化和理念没有根本性的冲突。可是,就因为把殡葬改革和朝鲜族殡葬习俗的关系处理不当,造成宝贵的朝鲜族传统殡葬文化被毁,这不能不说是遗憾。   二、产生这种问题的原因 1、文革年代的民族抹杀论影响没有彻底消除。 2、党的少数民族政策没有有效贯彻、落实。 3、民族干部普遍害怕触犯民族主义错误。 4、民俗文化和封建迷信没有正确分别。 5、对于朝鲜族传统丧葬文化认识不足。   三、政府为拯救朝鲜族殡葬文化而采取的措施 为了拯救朝鲜族殡葬文化,延边州政府和吉林省政府在2009年6月,将“朝鲜族丧葬习俗”分别批准为州级和省级的非物质文化遗产名录项目(吉政发【2009】16号文件,延州政发【2009】9号文件),而保护责任单位指定为延边朝鲜族礼仪研究会,代表性传承人指定为玄龙洙先生。 2010年2月,延边州民政局签发文件同意了州文化局和有关社会团体提出的在延吉殡仪馆设立“朝鲜族告别厅”的建议。 2010年12月,延边州文化局召开了“朝鲜族丧葬习俗研讨会”,邀请了资深民俗学者们和20多个有关部门和单位参加,发表了共八篇论文,论证了“朝鲜族丧葬习俗”的文化性和合理性。 2011年6月1日,国家正式施行《非物质文化遗产法》,从此,“朝鲜族丧葬习俗”的保护和传承活动也有法可依了。   三、我们的建议 1、我们的建议所依据的法律文件: (1)、延边朝鲜族自治州自治条例(2003年1月) (2)、国务院殡葬管理条例(1997年7月21日) (3)、民政部、国家民委、卫生部…解释(1999年6月10日) (4)、民政部殡葬改革…指导意见(2009年12月3日) (5)、延边州人民政府文件(延州政发〔2009〕9号) (6)、吉林省人民政府文件(吉政发 〔2009〕16号) (7)、中华人民共和国非物质文化遗产法(2011年6月1日)   2、为了有效保障朝鲜族丧葬习俗的合法权益,为了巩固和发展延边殡葬改革工作的成果,延边朝鲜族自治州制定《朝鲜族殡葬管理条例》很有必要。 根据延边的特殊情况和广大朝鲜族群众的要求,我们建议在拟制定的《朝鲜族殡葬管理条例》中要写进以下几个内容: 【1】、朝鲜族的殡葬活动及其管理的原则是:实行火葬,改革土葬,革除殡葬陋习,坚持简易,突出特色,文明节俭办丧事。 【2】、尊重朝鲜族殡葬习俗,提供朝鲜族特色殡仪场所和设施,设立朝鲜族殡仪服务项目和朝鲜族殡仪服务人员培训机制,建立朝鲜族殡仪服务社会性制度。 【3】、政府重视保护“朝鲜族殡葬习俗”的工作,合理规划制定建设朝鲜族殡仪馆、祭祀堂以及系列朝鲜族殡葬设施(包括纳骨堂、公墓等)的方案。 【4】、延边境内的各大医院都在院内建立“朝鲜族殡仪服务站”,设立现代化的专业入殓室,以避免在同病房的病僚面前草草施行入殓的不文明现象,设立人性化的吊唁室,以避免大批唁客都拥挤到火化场去进行吊唁的不合理现象。 【5】、要求各地政府加快推行惠民殡葬政策,以免除特困人员等重点救助对象的基本殡葬费为基础,扩大至当地所有朝鲜族居民范围,逐步实现殡葬补贴全面覆盖。(具体方案待定) … … … … … … 以上资料仅供参考,希望有关人大代表进行广泛调查,认真研究,使其成熟完美,最后正式向州人民代表大会提交为盼。   延边朝鲜族礼仪研究会 联系:138-9438-7438 2012-11-20 (本建议书已经交付到新一届州人大有关部门)
160    인생의 성공을 결정하는 다섯가지 인소 댓글:  조회:3721  추천:0  2012-10-28
인생의 성공을 결정하는 다섯가지 인소(참고자료)   김두규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 '점쟁이'들은 인간은 사주팔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고, '풍수쟁이'들은 인간의 길흉만사가 모두 터에서 비롯한다고 말한다. 누구 말이 맞을까? "왕에서 서인에 이르기까지, 성현에서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머리와 눈이 있고 혈기를 지닌 동물이라면 운명을 지니지 않을 수 없다. … 귀하게 될 운명을 지닌 사람은 남들과 함께 배워도 홀로 벼슬을 하고, 함께 관직에 나가도 혼자 승진한다. 빈천의 운명을 지닌 사람은 이와 상황이 다르다. 어렵게 벼슬에 이르고 겨우 승진하며, 어렵게 얻고 일을 성취하지만 잘못을 저질러 죄를 받고, 질병으로 뜻하지 않게 재산을 잃게 되어 지녔던 부귀마저 상실하고 빈천해진다." 위 문장은 중국 최초의 유물론 철학자 혹은 무신론자로 평가받고 있는 후한(後漢)의 지식인 왕충(王充)의 독백이다. 그는 낙양의 책방을 돌며 책이란 책은 모두 읽었고, 한 번 읽은 책은 그대로 암기할 정도로 시대의 천재였다. 하지만 배경이 없던 그는 벼슬에 나아가지 못하고 가난에 허덕여야 했다. 불우한 처지에서 그는 '논형(論衡)'이란 명저를 썼는데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지식인들에게 읽히는 고전이다. 그는 우리가 여기서 다루는 사주와 풍수 이론의 기본 범주에 대한 형이상학적 상징 부여를 거부했다. 그러한 왕충조차도 알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맥없이 굴복한 것이다. 그런 전통 탓인지 중국인들은 "一命(일명) 二運(이운) 三風水(삼풍수) 四積陰德(사적음덕) 五讀書(오독서)"란 말을 자주 한다. 한 개인의 성공에 첫째 타고난 명, 둘째 운, 셋째 풍수, 넷째 음덕 쌓기, 다섯째 공부 순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점쟁이'와 '풍수쟁이'들 어깨에 힘이 들어갈 법도 하다. 그와 반대로 공부만이 성공이라 믿고 자녀 교육에 '올인'하는 '맹모(孟母)' 입장에서는 맥 풀리는 말이다. 필자 역시 우리 사회에서 공부가 작은 성공에는 확실한 방법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중국인들이 그렇게 말하고, 또 크게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공부가 전부가 아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나라를 다스린 왕이나 기업을 경영하는 오너 CEO는 공부만이 전부일 수 없다. 조선조 세조 임금이 '국가 CEO'로서 사주와 풍수를 어떻게 수용하였는지를 보면 '세조의 조선'과 그 이후 조선의 국운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알 수 있다. 1464년 8월 6일 세조 임금은 훗날 조선 유림의 종장(宗匠)으로 추앙받게 될 젊은 김종직을 파직한다. 파직 이유는 '임금이 문신들로 하여금 유학 말고도 천문·지리·음양·율려·의약·복서 등 잡학을 함께 공부하게 함은 마땅치 않다'고 직무 보고(윤대)에서 말하였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된 잡학 가운데 천문·지리·음양·복서는 사주와 풍수로 표현할 수 있으니 김종직은 이것들을 율려·의약과 함께 배제하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에 세조 임금은 "김종직은 경박한 사람이다. 잡학은 나도 뜻을 두는 바인데, 김종직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옳은가?"라면서 그를 파직한 것이다. 조선이라는 국가 경영을 위해서 유학뿐만 아니라 잡학을 함께 써야 한다는 주장과 유학(특히 성리학)만으로 충분하다는 주장이 부딪쳐 후자가 패한 셈이다. 오너 CEO 세조 입장에서는 미래 전문 CEO가 되어야 할 김종직의 생각이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위험했던 것이다. '세조의 나라'와 훗날 '김종직의 조선'은 어떻게 서로 다른 길을 갔을까? 또한 그들의 후손은 어찌 되었는지도 궁금할 것이다. 다음에 계속하기로 한다. 키워드 | 사주팔자, 음양오행, 내년운세, 풍수지리, 김두규 교수의 국운풍수
159    (아리랑방송) 2012추석성묘와 차례 지내는 법 댓글:  조회:6025  추천:1  2012-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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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조선족 인생의례-혼인 1 댓글:  조회:3559  추천:0  2012-09-22
조선족 인생의례-혼인 1 제1절 ≪주자가례≫가 조선민족의 혼인풍속에 준 영향 ≪주자가례≫를 일명 ≪주문공가례≫, ≪문공가례≫, ≪가례≫라고 한다. 이 책의 저자에 대하여 두가지 설이 있다. 한가지 설은 주희(朱熹)라 하고 다른 한가지 설은 저자가 명확하지 않다고 한다. 구경 누가 이 책의 저자인가에 대하여 비록 견해가 다르기는 하지만 이 책에서 천명한 관, 혼, 상, 제 4개 방면의 내용은 모두 주희의 견해라는것에 대해서는 일치하다. 주희(1130년—1200년)를 주자, 문공이라고도 칭하며 호는 회암(晦庵)이다. 그는 남송시기의 저명한 철학가로서 정영(程影)과 정이(程頤)의 리(理)와 기(氣)의 관계에 관한 학설에 근거하여 리기학(理氣學)을 집대성하였고 완전한 객관적유심주의의 리학체계를 세운 사람이다. 이리하여 그는 중국력사에서 리학대사로 명망이 높다. 하지만 조선반도에서는 리학대사로서뿐만아니라 ≪주자가례≫로도 명망이 높다. ≪주자가례(이하 ≪가례≫라 략칭)≫는 세상에 나온후 한족의 풍속문화보다 오히려 조선민족의 풍속문화에 더욱 심각하고 장원한 영향을 주었다. 혼인풍속을 놓고 볼 때 ≪가례≫중의 허다한 의례가 한족들가운데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들어보지도 못한 고례로 되였지만 전안례(奠雁禮), 교배례(交拜禮), 합근례(合巹禮), 현구고례(見舅姑禮) 등 의례는 조선민족가운데서 20세기 40년대까지 전승되여왔고 어떤 의례는 지금까지 전승되고있다. 1. ≪가례≫의 조선반도에로의 전파 조선민족의 조상들이 처음으로 ≪가례≫를 접촉하기 시작한것은 고려(918년—1392년) 말기였다. 그때 안향(安晌)이라는 학자가 중국(원조)에 왔다가 고려로 돌아갈 때 ≪주자대전(朱子大全)≫을 갖고가 성리학(性理學)과 함께 이것을 조선반도에 전파하였다. 이에 앞서 ≪주례(周禮)≫, ≪례기(禮記)≫ 등과 같은 례의는 이미 조선반도에 들어간지 오래지만 ≪가례≫가 조선반도에 전해진것은 이것이 처음이였다. ≪가례≫는 사대부계층의 례법에 속하므로 고려에 전파된후 우선 사대부계층의 환영을 받았다. 고려시기에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으므로 불교의 관념이 사람들가운데 뿌리 깊게 자리잡고있어 유교관념에 의해 편찬된 ≪가례≫가 기타 계층에는 보급되지 못하였다. 조선왕조시기(1392년—1910년)에 이르러 통치자들은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정책을 실시하면서 유교를 나라를 다스리는 국교로 확정하였다. 그리하여 유학의 관념으로 조선민족의 고유한 풍속을 대대적으로 개혁하였다. 이 과정에서 ≪가례≫를 유학의 ≪사서(四書)≫나 ≪오경(五經)≫ 등과 동등한 위치에 놓고 과거시험의 중요한 내용의 하나로 결정하였다. 례학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가 부단히 깊어짐에 따라 조선사회에는 ≪가례≫에 관한 해석본과 번역본들이 륙속 나오게 되였다. 이를테면 조호익(曹好益)의 ≪가례고증≫, 김장생(金長生)의 ≪가례집람≫, 유계(俞棨)의 ≪가례원류≫, 리의조(李義朝)의 ≪가례증해≫, 신식(申湜)의 ≪가례언해≫, 리재(李縡)의 ≪사례편람(四禮便覽)≫ 등과 같은 저서들이다. 상술한 저서들가운데서 특별히 지적할만한 점은 리재의 ≪사례편함≫이다. 이 책이 편찬되기이전에 신의경(申義慶)이 ≪가례≫중의 상제(喪祭)부분을 대강(大綱)으로 하고 기타 관련 서적들을 참조하여 편찬한 ≪상례비요(喪禮備要)≫가 사회에 널리 전해지고있었다. 하지만 학자들이 보기에 이 책은 결함이 많았다. 그후 리재가 ≪상례비요≫를 토대로 하고 ≪가례≫와 기타 문헌들을 참작하면서 관(冠), 혼(婚) 두개 방면을 첨부하여 ≪사례편람≫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오래동안 조선민족들가운데서 본보기 서적으로 간주되여 내려왔다. 조선왕조시기 정부의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하에 ≪가례≫는 여러 경로를 걸쳐 널리 선전되였으나 필경 그것은 다른 나라의 례의에 속하는것이였으므로 조선본토의 재래적인 리념과 풍속의 저지를 받지 않을수 없었다. 이리하여 ≪가례≫는 조선왕조 중기 후에 이르러서야 점차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수용되였고 조선왕조 말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전국적으로 널리 보급되였다. 2. ≪가례≫의 혼인제도와 조선민족의 혼인풍속 조선왕조시기 ≪가례≫가 보급된후 재래식의 혼인풍속은 혼인관념, 혼인방식, 혼인절차 등 방면에서 모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그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남귀녀가(男歸女家)제로부터 친영(親迎)제로 조선반도에서 ≪가례≫를 보급하는 과정에 상례제도에 비해 혼인제도가 퍽 늦게 실시되였는데 그 주요한 원인은 ≪가례≫의 혼인방식이 조선민족의 재래의 혼인방식과 전혀 달랐기때문이다. 조선민족의 재래의 혼인방식은 신랑이 먼저 신부집에 장가를 들어 한동안 생활하다가 처자를 신랑집으로 데려와서 생활하는것이다. 이것을 “남귀녀가혼” 혹은 “처가살이혼”이라고 한다. 우리말중의 “장가를 간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혼인풍속에서 기인된것이다. ≪가례≫가 조선반도에 전파된후 이러한 “남귀녀가”식의 혼인방식은 유학자들의 비난을 받게 되였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이러한 혼인방식은 양(陽)이 음(陰)을 따르는, 천지가 거꾸로 된 아주 잘못된 페습이였다. 그들은 ≪가례≫에 제정된 친영방식을 가장 아름다운 방식(法之至美者)으로 보면서 이를 실시할것을 극력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세종(재위, 1418년—1450년)과 성종(재위, 1469년—1494년) 시기에 이르러 친영방식을 혼인제도의 규범으로 하면서 ≪왕자신민혼례(王子臣民婚禮)≫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기입하였다. 또한 세종 17년에는 파원군 윤평(坡原君尹泙)이 솔선하여 친영의 방식으로 태종의 딸 숙신옹주(淑慎翁主)를 맞아들였다. 평민계층에서 친영방식을 실시하기 시작한것은 그후 수십년이 지난 중종시기(1506년—1544년)였다. 중종 13년에 김치운(金致雲)이라는 평민이 친영방식으로 혼사를 치루었는데 이것이 첫번째로 되는 실례이다. 이 과정에 임금을 수반으로 한 통치자들은 국민을 왕자, 왕녀, 경대부(卿大夫), 사서가문(士庶之家) 등 세개 계층으로 나누고 몇개 단계를 나누어 친영법을 추진하였다. 첫번째 단계에서는 왕자, 왕녀들이 솔선적으로 친영법을 실시하여 경대부들이 모방하게 하고 두번째 단계에서는 경대부가문에서도 일률적으로 친영법을 실시하게 하였다. 하지만 “례는 서민과 무관하다.(禮不下庶人)”는 관념에 의하여 사서계층에 대해서는 친영법을 강요하지 않았다.  명종시기(1545년—1567년) 이전까지 서민계층에서는 신랑이 잔치날에 신부집에서 자고 3일날에 합근례를 치렀다. 명종시대에 이르러 저명한 성리학자였던 서경덕(徐敬德),조식(曹植) 등이 서민계층을 대상하여 재래식혼인풍속과 친영법을 절충시켜 잔치날에 신랑이 신부집에서 합근례(결혼식)를 치르고 이튿날에 신부가 시부모에게 인사를 올리는 반친영(半親迎)법을 만들어냈다. 후에 이것이 다소 개변되여 신랑이 잔치날에 신부집에서 초례(醮禮)를 치른 뒤 신부집에서 이틀 묵고 3일날에 신부를 모시고 신랑집으로 가게 되였다. 그후로부터 반친영방식은 서민계층의 주요한 혼인방식으로 되였으며 중국 조선족가운데서도 20세기 50년대 이전까지 반친영법과 친영법이 병행하다가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 이후부터 완전히 친영법으로 통일되였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남도사람(조선반도의 남반부에서 온 사람)들이 많이 살고있는 지방에서는 반친영법의 유습이 남아있어 잔치날에 신랑이 신부측에 가서 결혼식을 거행한다. 2) 중매인과 납페 ≪가례≫에는 혼례를 할 때 “반드시 중매자가 오가면서 말을 건네고 녀자측에서 허락한 뒤 납채를 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이 말의 뜻은 남녀가 혼약을 하자면 반드시 중매인의 소개를 거쳐야 한다는것이다. 혼인에서 중매인은 일부일처제와 함께 산생되였다. 인류력사에서 일부일처제가 산생된 토대와 근본적인 원인에 대하여 엥겔스는 “대우혼가정(對偶婚家庭)에서 산생하였다.… 그것은 남편의 통치하에 건립된것으로서 그 뚜렷한 목적은 의심할바없는 일정한 아버지로부터 태여난 자식을 생육하려는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간단하게 해석한다면 일부일처제를 실시한 근본목적은 남자들이 진정으로 자기의 혈통에 속하는 자녀를 얻기 위한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려면 혼인에서 청년남녀가 자유롭게 만나는것을 엄금하고 제3자가 중간에 오가면서 쌍방을 소개해야 한다. 그리하여 혼인에서의 중매자가 나타나게 되였다. 봉건사회의 종법제도에서 사람들은 개인의 리익보다 가족의 리익을 더 중히 여겼다. 혼인은 한개 가정과 가족의 흥망화복과 직접 관계되는 대사이다. 때문에 자녀들의 혼인에 대하여 부모들이 결정하는것이다. 상술한 두가지 원인으로 하여 남녀지간의 혼인은 자연적으로 부모와 중매인에 의하여 결정되게 되는것이다. 조선반도에서는 고려시기까지도 남녀가 자유롭게 만날수 있었으며 혼인에서 “남녀가 스스로 부부를 맺는것을 금하지 않았다.(男女自爲夫妻者不禁。)” 하지만 조선왕조시기에 이르러서는 청년남녀가 마음대로 만나는것을 엄금하는것은 물론이고 어린아이들에게까지도 “남녀 칠세 부동석”을 강요하였다. 혼인제도에서는 “혼인은 인륜대사이므로 마땅히 중매인을 통하여 정혼하는것을 례로 삼아야 한다.(婚姻乃人倫重事, 當媒聘以禮。)”고 주장하였다. 이런 관념의 지배하에 남녀가 혼사에서 중매인의 소개를 거치는것이 보편적인 풍습으로 되였다. 중국의 조선족들도 20세기 초반까지 보편적으로 중매혼인을 실시하였고 청년 남녀의 혼사는 모두 부모와 중매인에 의하여 결정되였다. 1920년대초에 이르러 맑스-레닌주의사상과 서방의 민주주의사상이 연변일대의 조선족들속에 전파되면서 지식인과 청년학생들 가운데서 자유련애가 실시되였고 이것은 그후 점차적으로 기타 계층에까지 파급되였다. 중국의 봉건사회에서 혼인을 맺는 주요한 형식은 납페(納幣)를 하여 처를 얻는것이다. 주나라때에 제정한 륙례가운데는 납채(納采), 문명(問名), 납길(納吉), 납징(納征), 청기(請期), 친영(親迎) 등이 포함되여있다. ≪가례≫에서는 륙례를 의혼(議婚), 납채, 납페(납징을 말함.), 친영 등 사례로 간략하였다. 간략된 사례에 납페가 포함된것을 보아 납페의 중요성을 알수 있다. 납페는 혼사를 결정하는 전제적인 조건으로서 안해를 얻으려면 반드시 녀자측에 일정한 재물을 주어야 한다. 때문에 납페를 통하여 안해를 얻는 혼인제도의 본질은 결국 매매혼인인것이다. 조선반도에서는 고려시기까지 량반사대부계층에서는 혼인을 맺을 때 약간한 납페를 하였고 서민계층에서는 단지 술과 쌀로 서로간의 정을 나눌뿐이였다.(貴人仕族婚嫁略用聘委幣, 至庶民唯以酒米通好而已。) 하지만 조선왕조시기에 이르러 납페는 혼인에서의 불가결의 절차로 결정되였다. ≪사례편람≫의 혼인부분에서 ≪가례≫와 마찬가지로 혼인절차를 의혼, 납채, 납페, 친영 등 사례로 규정하였다. 심지어 서당학도들이 배우는 교과서인 ≪동몽선습(童蒙先習)≫에까지 “중매인을 통하여 의혼을 하고 납페를 한 뒤 친영을 한다.(行媒議婚, 納幣親迎。)”고 명확히 적혀있다. 납페는 안해를 얻는 전제적인 조건으로 되였던것이다. 때문에 조선민족이 봉건시기에 실시한 혼인제도도 본질상에서 보면 매매혼인에 속한다. 3. 혼인절차와 혼례특징 ≪가례≫가 조선반도에 전해지기이전에 조선민족이 실시한 혼례방식은 공식형(共食型)이였다. 남자측에서 녀자측에 혼사를 제기하여 녀자측의 동의를 얻으면 녀자측에 가서 잔치를 치른다. 잔치 첫날에 신방에 초불을 밝히며 신랑신부가 동침을 한다. 이튿날에는 연회를 베풀고 친척과 손님들을 대접하는데 이것을 람침연(覽寢宴)이라 한다. 3일엔 신랑과 신부가 상견례(相見禮)를 거행하며 함께 큰상를 받는다. 이것을 3일대반(三日對飯)이라 한다. 이러한 혼인과정과 혼례방식은 ≪가례≫의 혼인제도와 다르다. ≪가례≫의 혼인과정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의혼, 납채, 납페, 친영, 현구고례, 신부묘현(新婦廟見), 서현부지부모(婿見婦之父母) 등 7개 절차로 나눌수 있다. ≪사례편람≫중의 혼인과정도 상술한 7개 절차로 되여있다. 근현대 조선민족(중국 조선족을 포함.)의 혼인과정은 대체로 의혼, 대례, 후례 등 3개 단계로 나뉘어져있다.  이 3개 단계에 ≪가례≫의 7개 단계가 기본상 포함되여 있는데 구체적으로 말하면 의혼단계에는 대체로 ≪가례≫의 의혼, 납페 등 절차가 포함되여 있고 대례단계는 ≪가례≫의 친영절차에 해당하며 후례단계는 ≪가례≫의 현구고례, 신부묘현, 서현부지부모(귀녕) 등 절차에 해당된다. 친영은 ≪가례≫ 혼인과정의 7개 절차가운데서 중점적인 고리로서 고사당(告祠堂), 초자례(醮子禮), 교배례, 동뢰합근(同牢合巹) 등 의례가 포괄되여있다. 한 민족이 일정한 력사단계의 혼인풍속에서 어떠한 의례형식을 취하는가 하는것은 그 당시 혼인의 목적에 대한 인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람은 왜 결혼하는가에 대하여 ≪가례≫에서는 “혼례란 성이 같지 않은 두 남녀가 합치여 우로는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고 아래로는 가계를 이어가는것이다.(婚禮者將合二姓之好, 上以事宗廟, 而下以繼後世也。)”라고 하였는바 봉건사회에서의 혼인의 근본목적에 대하여 아주 투철하고도 정확하게 개괄하였다. 봉건사회의 가부장제도하에서 남녀가 결혼하는 근본목적은 후대를 양육하여 가계(家系)를 이어가는것이다. 혼인을 인생의 대사로 간주하는 원인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관념에 의하여 결혼잔치날에 제일 먼저 진행하는 행사가 고사당이다. 혼사를 주관하는 주혼자가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에 가서 오늘 아무개의 아들 아무개가 아무 집의 규수를 안해로 모셔온다고 고한다. 그 목적은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고 가계를 이어가는 대사가 락착되였음을 알리기 위한것이다. 이어서 초자례를 진행한다. 신랑이 술을 한잔 땅에 따른 뒤 제전(祭奠)의 뜻을 표명하고 자기도 한잔 마신다. 그리고나서 아버지앞에 꿇어앉아 아버지의 분부를 듣는다. 이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안해를 맞아들여 우리 가문의 종사를 받들도록 하라.”고 분부한다. 이로부터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일이 혼사의 주요한 목적이였음을 알수 있다. 전안례는 신랑이 기러기(산기러기나 나무로 만든 기러기)를 애정의 증표로 신부측에 전하는 의례이다. 신랑이 기러기를 장인에게 드리면 장인의 시종자가 장인을 대신하여 그것을 받는다. 전안례의 함의에 대하여 두가지 설이 있는데 한가지는 “음양의 오고감을 따른다.(取其順陰陽往來之義。)”는 뜻이고 다른 한가지는 기러기는 일단 배필을 잃으면 다시 배필을 얻지 않는다는 속신(俗信)에 의한것이라고 한다. 즉 변함없는 사랑을 상징하는것이다. 교배례는 신랑신부가 서로 절을 하는 의례이다. 신부가 먼저 신랑에게 절을 두번 하면 신랑이 한번 답례를 한다. 이것을 거듭하는데 이런 식으로 절을 하는것을 협배(俠拜)라 한다. 부부지간의 호상 존중과 사랑을 의미한다. 동뢰는 신랑과 신부가 함께 음식을 나누는 의례이다. 합근은 신랑과 신부가 함께 음주하는 의례이다. 근(巹)은 바가지를 말한다. 조롱박을 절반 쪼개여 신랑신부가 각기 나누어들고 그것으로 술을 마신다. 합근은 동뢰와 함께 진행하는데 신랑신부의 일심동체와 새로운 생활의 시작을 상징한다. 상술한바와 같이 ≪가례≫로부터 인기된 친영의 혼인방식에서의 매 절차는 모두 뚜렷한 상징성이 있다. 이러한 상징성이 바로 서약형(誓約型)으로 특징지어지는 서방의 혼례와 부동한 점이다. 조선민족의 구식혼례에서의 대례단계는 ≪가례≫의 친영단계에 해당된다. 이 대례단계에 고사당, 초자례, 전안례, 교배례, 합근례, 큰상받기 등 의례가 포함된다. 그중 교배례와 합근례(근배례라고도 함.)는 혼례식의 주요한 의례이다. 혼례식을 거행하기전에 먼저 전안례를 진행하며 혼례식을 마친 뒤에 신랑이 큰상을 받는다.(신부는 신랑집에 가서 큰상을 받는다.) 신랑과 신부가 큰상을 받는것을 고대에서는 “3일대반”이라 하였다. 어떤 책에서는 이것을 “동뢰연”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3일대반”은 조선민족의 고대혼인풍속에 속하는것이고 “동뢰연”은 중국의 고대혼인풍속에 속하는것이다. 동뢰에 관하여 ≪례기·혼의≫에는 “신부가 도착하면 신랑이 읍을 하여 맞아들여 동뢰공식을 한다.(婦至, 揖婦以入, 共牢而。)”는 기록이 있다. 이에 대해 당조의 저명한 학자였던 공영달(孔穎達)은 “동뢰는 신랑방에서 행한다.(共牢而食者, 在夫之寢。)”고 해석하였다. 이것을 보아 동뢰는 그 시간과 장소가 조선민족의 큰상받기와는 다르다는것을 알수 있다. 조선민족의 혼인풍속에서 보면 혼례를 치른 그날 밤에 신랑신부가 신방에서 간단한 음식을 함께 나누는데 이것이 바로 고대의 동뢰의례에 해당하는것이다.  ≪가례≫에서는 동뢰와 합근을 함께 집행하지만 조선민족의 혼인풍속에서는 각기 따로 진행한다. 대례식을 할 때 합근례를 행하고 신부가 저녁에 신방에 들어가서 동뢰상에 간단한 음식을 차려 함께 먹는다. 이것이 동뢰에 해당하는것이다. 이런 의례들이 ≪가례≫에 비해 다소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내포된 뜻은 같다. 신랑신부가 큰상을 받는 의례는 ≪가례≫에 없는 조선민족의 고유한 풍속이다. 신랑신부가 잔치날에 받는 음식상은 길이와 너비가 각기 10자 가량(幾至方丈) 정도로 크기때문에 그것을 큰상이라 부른다. 반친영방식에서는 전안례, 교배례, 합근례 등을 모두 신부의 집에서 행하지만 친영방식에서는 신부의 집에서 전안례와 신랑이 큰상을 받는 의례만 행하고 신랑이 신부를 모시고 자기 집에 와서 교배례와 합근례 그리고 신부가 큰상을 받는 의례 등을 행한다. ≪가례≫에서 현구고례는 친영을 한 이튿날에 행하고 신부묘현례(신부를 사당에 데리고 가서 조상에게 고하는 의례)는 친영을 한 3일날에 행하며 사위가 장인과 장모를 배알하는 의례는 친영을 한 4일만에 행하도록 규정되여있다. ≪사례편람≫의 규정도 이와 같다. 중국 조선족의 구식혼례에는 반친영이나 친영을 막론하고 신부가 신랑집에 온 이튿날에 현구고례를 행하고 3일에는 귀녕을 간다. 그것은 후에 와서 신부묘현례가 페지되였으므로 귀녕날자를 하루 앞당긴것이다. ≪가례≫의 혼례에서는 음악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그 원인에 대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설이 있다. 첫번째 설은 혼례는 음성에 속하고 음악은 양성에 속하기때문이라는것이다. 두번째 설은 혼례는 정중한 의례이므로 정중성을 지키기 위하여 음악을 사용하지 않는다는것이다. 세번째 설은 신랑과 신부가 장차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로 되는것은 인류의 질서에 해당되는것이기에 음악으로 경하할 필요가 없다는것이다. 조선민족의 구식혼례식에서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음악을 사용하지 않았다. 조선민족의 지난날의 혼인풍속을 보면 혼인과정의 주요한 절차가 ≪가례≫와 비슷할뿐만아니라 그 세절들에도 같은 점들이 많았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것이다. 총각과 처녀가 약혼을 할 때 사주(四柱, 즉 출생 년, 월, 일, 시)로 궁합을 맞추어 길흉화복을 점친다. 그리고 잔치날 신랑이 말을 타고 신부집으로 갈 때와 신부가 가마를 타고 신랑집으로 올 때 모두 초롱불을 들고 길안내를 한다.  잔치날 신랑일행이 신부집으로 갈 때 신부집 마당에 직접 들어서지 않고 사처집에 잠간 들려 휴식을 하면서 옷차림을 정리한다. 교배례를 행할 때 신랑은 동쪽에 서고 신부는 서쪽에 선다. 현구고례를 할 때 대추와 밤을 사용하는데 아들을 일찍 낳으라는 뜻을 내포하고있는것이다.(早立子) 혼인과정의 금기에 관한 규정도 ≪가례≫와 같다. 뿐만아니라 신랑신부가 결혼식에 입는 례복도 중국 명조시기의 관복이였다. 신랑은 관복을 입었고 신부는 공주가 입는 옷을 입었다. 이와 같이 ≪가례≫의 혼인제도와 지난날 조선민족의 혼인풍속은 많은 면에서 류사하지만 량자가 완전히 같은것은 아니였다. 조식(曹植) 등 유학자들이 중국의 례의를 받아들일 때 ≪가례≫의것을 그대로 옮긴것이 아니라 혼례에서는 주요한 정신만 따르고(循其大綱) 상례에서는 실제에 따라 증감하는(隨宜損益) 원칙을 내세웠다. 신랑신부가 큰상을 받는 습속, 동상례(東床禮), 단자놀이 등은 모두 ≪가례≫와 ≪사례편람≫에 없는 습속이다. 그리고 신랑신부가 교배례를 행할 때 신랑이 신부의 개두(蓋頭, 머리쓰개)를 벗기는 의례는 ≪가례≫와 ≪사례편람≫에 모두 기재되였으나 그후 조선민족의 혼례에서 이것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조선왕조시기에 형성된 조선민족의 전통적인 혼인풍속은 ≪가례≫의 혼인제도와 조선민족 고유의 혼인풍속이 결합되여 이루어진 풍속이다. 이러한 결합으로 하여 조선민족 고유의 혼인방식은 남귀녀가로부터 녀귀남가의 친영방식으로 바뀌였으며 혼례식의 형태에서도 한자리에 모여 음식을 나누는것을 주요한 형식으로 하던 ≪공식형≫으로부터 상징성이 강한 ≪의식형(儀式型)≫으로 전화되였다. 조선민족 전통혼인풍속의 근원을 따져보면 많은 방면에서 ≪가례≫의 영향을 받았다. 이것을 통하여 조선민족의 문화는 력사적으로 중국문화와 밀접한 련계가 있었음을 알수 있다. 오늘날 조선민족의 혼인풍속은 중국 조선족이나 조선반도의 조선민족이나를 막론하고 ≪가례≫의 혼인제도에 비해 이미 현저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것은 력사발전의 필연적인 현상인것이다.
157    조선족 인생의례-혼인 2 댓글:  조회:2885  추천:0  2012-09-22
조선족 인생의례-혼인 2 제2절 말과 닭, 초례, 큰상 1. 말과 닭 조선민족의 전통혼인풍속에 잔치날 신랑은 말을 탔으며 최초에는 말가운데서도 흰말을 숭상하였다. 그리고 초례(결혼식)를 치를 때 교배상에 암수 산 닭 한쌍을 놓으며 신랑과 신부가 받는 큰상에 모두 통닭을 하나씩 놓는다. 이런 풍속의 연유에 대해 아래와 같은 몇가지 견해가 있다. 1) 말에 관하여 (1) ≪역경(易經)≫의 둔괘(屯卦)와 효사(爻辭)에 의하면 중국의 은조시기(기원전 14세기—기원전 11세기)에 결혼할 때 신랑이 말을 타고 간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풍속을 기자(箕子)가 조선(고조선)에 오면서 전파하였다. (2) 신라국(新羅國)의 제1대 임금인 박혁거세(朴赫居世)는 흰색 천마가 하늘에서 안고 내려온 알에서 태여났다. 천마를 기념하기 위하여 후세사람들은 잔치날에 신랑이 말을 타게 되였다. (3) 먼 옛날에 말은 륙상교통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였으며 조선민족도 고대에는 말을 잘 타는 민족이였다. (4) ≪주역≫에 의하면 말은 하늘, 양성(陽性), 남성(父) 등을 상징하는데 말은 건강하고 씩씩한 동물이기때문이다. (5) 말가운데서도 백마를 선호하는 까닭은 조선민족은 고대로부터 흰색을 좋아하였기때문에 이는 광명을 주는 태양에 대한 숭배관념과 천마를 숭경하는 천마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것이다. 2) 닭에 관하여 (1) 우에서 언급한 박혁거세전설에 의하면 박혁거세왕의 부인인 알영왕후(閼英王後)는 계룡(雞龍)의 겨드랑이에서 태여난것이다. 후세사람들은 계룡을 기념하기 위하여 초례청의 교배상과 신랑신부가 받는 큰상에 닭을 놓았다. (2) 초례청 교배상우에 올려놓는 닭은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물이다. (3) 조선민족의 전통관념에 닭은 제액초복을 상징하는 길조이다. 수탉의 울음소리는 어둠과 잡귀를 물리치고 광명을 초래한다 하여 옛날에는 음력설에 출입문에 닭의 그림을 붙였다. 이런 신앙에 의해 신랑신부의 행복을 축원하는 큰상에 길상물로 닭을 놓았다. (4) 닭은 다산의 상징이다. 우에 언급한 몇가지 설가운데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지고있는것은 백마계룡설, 즉 박혁거세와 알영부인에 관한 설화에서 기인된것이다. * 박혁거세 설화 먼 옛날에 신라가 창건될 때 진한(辰韓) 6개 촌의 촌장들이 알천(閼川)강의 강뚝우에 모여 훌륭한 인물을 임금으로 모시고 나라를 건립할것을 의론하던 끝에 높은 곳에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밑 라정(羅井)우물곁에 이상한 기운이 번개처럼 땅에 드리우더니 웬 흰말 한마리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시늉을 하고있었다. 조금있다가 거기를 살펴보니 보라빛알 한개가 있고 말은 사람을 보자 울음소리를 길게 뽑으면서 하늘로 올라갔다. 그 알을 쪼개니 생김새가 단정하고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있었다. 놀랍고도 이상하여 아이를 동천(東泉)이란 샘물터에 가서 목욕을 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모두 춤을 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맑게 밝았다. 그래서 이름을 박혁거세라 하고 신라의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날 사량리(沙梁裏) 알영우물(閼英井)에서 계룡이 나타나더니 왼쪽 옆구리로부터 녀자아이를 낳았는데 자색이 뛰여났다. 6개 촌의 촌장들은 그 애를 박혁거세왕의 왕비로 정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라사람들은 박혁거세왕과 알영왕후를 기념하기 위하여 결혼잔치를 할 때 신랑은 백마를 타고 큰상을 차릴 때 통닭을 길상물(吉祥物)로 놓았다고 한다. 2. 초례 전통혼례방식은 잔치날에 신부집 마당에서 초례식(혼례식)을 거행하는데 문앞에 병풍을 세우고 그앞에 교배상(交拜床)을 남북향으로 놓고 초례를 거행한다. 교배상 중간에는 산 닭 한쌍(날개죽지와 두다리를 노끈으로 묶고 청색과 흑색비단으로 몸을 싼다.)과 밤과 대추를 한그릇씩 놓고 량쪽에 청송, 록죽을 꽂은 꽃병을 놓고 청실홍실로 련결한다. 그외에 교배상의 량쪽에 초불을 한대씩 켠다. 여기에서 밤과 대추는 일찍 아들을 낳음(早立子)을, 청송록죽은 청춘의 활기를, 청색과 홍색은 음과 양(신부와 신랑)을 상징하고 초불은 고대에 저녁에 초불을 켜고 결혼식을 치렀던 유습이며 닭은 제물 혹은 길상물로 되는것이다. 초(醮)는 고대에 초례를 거행할 때 신선에게 술을 올리는것을 의미하는것이며 교배상은 독제상(纛祭床)에서 변화된것으로서 하느님께 제사를 올리는 제사상인것이다. 그러므로 초례의 실질은 신랑신부가 하느님을 향해 백년해로를 맹세하는것이다. 초례에는 교배례와 합근례(合巹禮, 일명 巹杯禮)가 포괄되여있고 초례를 치르기전에 먼저 전안례(奠雁禮)를 치른다. 전안례란 잔치날에 신랑이 나무기러기를 안고 가서 상우에 놓고 절을 하는것을 말한다. 중국 조선족의 전안례는 신랑이 전안상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두손으로 부채를 가로쥐고 세번 미는것을 말한다. 조선민족의 전통관념에 기러기는 애정에 충성한 새로 인식되여있고 전안례는 변함없는 사랑을 상징하는것이다. 초례를 거행할 때 신랑은 교배상 동쪽에, 신부는 서쪽에 선다. 교배례는 신랑신부가 서로 절하는것을 말하는데 서로에 대한 존중과 관심을 의미한다. 합근례에서 근은 조롱박을 절반 쪼개서 만든 술잔을 말하고 합근례는 신랑신부가 이런 술잔을 하나씩 쥐고 술을 권하는 의례로서 신랑신부의 일심동체를 상징하는것이다. 초례의 선명한 상징성은 조선민족의 전통혼례식의 특징으로서 서구의 서약형(誓約型)혼례식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3. 큰상 잔치날에 신랑과 신부에게 차려주는 풍성한 음식상을 원래는 유밀과상(油蜜菓床)이라 하였는데 유밀과(지금의 과줄과 비슷함.)는 고려시기까지 조선민족의 대표적인 음식으로서 잔치상에는 꼭 유밀과를 놓았기때문이다. 유밀과상을 큰상(大桌)이라고도 하였는데 그것은 유밀과상이 다른 음식상에 비해 특별히 크기때문이다. 문헌기록에 의하면 유밀과상의 너비와 길이는 각기 10자 정도 된다고 하였다. 반친영혼례에서 초례를 마친 뒤 신랑은 신부집에서 큰상을 받고 신부는 3일만에 신랑집에 가서 큰상을 받는다. 큰상에 유밀과외에 통닭과 돼지갈비를 놓는데 닭은 길상물이고 닭의 부리에 물린 붉은고추(끝이 뾰족한것.)는 남성의 상징이며 돼지갈비는 다산(多產)을 상징한다. 연변일대에서 신랑과 신부에게 주는 밥그릇에 닭알을 3개 묻는데 그것도 다산을 상징하는것이다. 이런 풍속은 다산다복(多產多福) 관념에서 산생된것이다. 조선민족의 전통혼례에서 전안례, 교배례, 합근례는 중국의 주자가례에서 온것이고 신랑신부가 큰상을 받는 풍속은 조선민족의 고유풍속이다. 조선왕조시기의 통치자들은 큰상을 받는 의례는 고례(주자가례)에 없는 페습이라면서 페지할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서민계층에서는 버리지 않고 계속 끈질기게 계승해왔다. 한국에서는 미국의 혼례식을 따르다보니 큰상을 받는 의례를 이미 버리였지만 중국 조선족과 조선에서는 지금까지 보존되고있다. 어떤 사람들은 환갑상과 돌생일상도 큰상이라 하는데 그것은 실제 정황과 맞지 않다. 몇십년 전까지만 하여도 결혼잔치를 제외하고 환갑, 진갑, 회혼례 등 인생의례에서는 주인공들이 모두 자그마한 독상을 받았으며 손님들도 제각기 독상을 받았다. 환갑잔치나 회혼잔치때에 부부가 함께 풍성한 음식상을 받는 현상은 최근 몇십년사이에 산생된것이다. 돌상을 큰상이라고 하는것은 더욱 잘못된 인식이다. 돌상은 단순한 음식상이 아니므로 큰상이라 할수 없다.
156    조선족 인생의례-혼인 3 댓글:  조회:3409  추천:0  2012-09-22
조선족 인생의례-혼인 3 제3절 20세기 50년대이전시기의혼인풍속 20세기 50년대 이전에 중국 조선족은 청나라와 민국 시기 봉건사회시기와 일제 강점시기―반봉건반식민지시기를 거쳤다. 이 기간의 조선족의 혼인풍속은 기본상 조선반도로부터 갖고온 전통적인 혼인풍속이였다. 이 시기의 혼인방식에는 “반친영”과 “친영” 두가지가 있었으며 특수한 혼인형태로는 지복혼(指腹婚), 민며느리혼, 데릴사위혼, 과부동이기혼 등이 있었다. 이 시기의 조선족혼인풍속에 대하여 1931년 “9.18”사변을 계기로 하여 1930년대 이전시기와 이후시기로 나누어 서술하고저 한다. 1. 20세기 30년대 이전시기 이 시기 조선족가운데서 실시된 혼인방식은 “반친영”과 “친영” 두가지였는데 “반친영”이 더 보편적이였다. 1) 반친영 이 시기의 반친영방식은 주로 의혼(議婚), 대례(大禮), 후례(後禮) 등 3개 절차로 나뉘여 진행되였다. (1) 의혼 남녀지간의 혼사는 중매자를 통해 거론된다. 혼사가 제기되면 남녀 두집에서는 믿을만한 사람을 시켜 상대편의 인격, 품행, 가정형편 등을 알아보게 한다. 이것을 선을 본다고 한다. 이 시기에 혼인을 맺는것을 조사하여보면 첫째로 문벌을 보고 둘째로 당사자의 성격과 집안의 가풍을 본다. 남자나 녀자나 인물과 년령에 대해서는 크게 따지지 않는다. 때문에 11~12살이 되는 신랑이 17~18살 되는 신부를 얻는 경우가 적지 않다. 1920년대에 연변의 룡정일대에서는 로씨야사회주의10월혁명의 영향을 받아 자유련애사상이 전파되면서 지식청년계층에서는 자유련애를 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남녀 량가에서 혼인을 맺을것을 동의하면 남자집에서 중매자를 통해 녀자집에 청혼서를 보낸다. 청혼서는 한문으로 쓰는데 그 서식은 아래와 같다. 伏惟茲長 尊體動止萬重 仰溯區區之至 筍家兒親事 尚無指處 得聞宅閨養淑哲雲 此意通於彼宅 俾結秦晉之誼如何 不備伏惟 尊照 謹拜上狀 年  月  日  某貫後人  姓名 이것을 조선말로 번역하면 대체로 아래와 같다. 생각하옵건대 존귀하신 그대께서 귀체 안강하세온지 평소부터 사모해오던터이옵니다. 우리 집에서 아직 아들의 혼사를 이루지 못하고있던차에 귀댁에 현숙한 따님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혼인을 맺었으면 하는 의향을 권하는바입니다. 그닥 훌륭한 형편이 못되는 처지에서 삼가 절을 올립니다. 년 월 일 모 본관 후손 성명 녀자집에서 청혼서를 받고 동의하면 중매자를 통하여 허혼서(許婚書)를 보낸다. 허혼서 격식은 아래와 같다. 伏惟辰下 尊體震民萬護仰區之至 第親事勤導若是 敢不聽從 四星回示如何 不備伏惟 尊照謹拜上狀 年  月  日 某貫後人 姓名 이것을 조선말로 번역하면 대체로 아래와 같다. 생각하옵건대 존귀하신 그대께서 귀체 안강하시리라고 믿습니다. 댁에서 우리 집과 혼인을 맺을 의향을 전해왔으니 우리 어찌 그 반가운 의향에 따르지 않겠습니까? 이제 자제분의 사성을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년 월 일 모 본관 후손 성명 사성(四星)을 일명 사주(四柱)라고도 하는데 청혼자의 출생 년월일시(年月日時)를 말한다. 사성과 혼인에 관한 서식에서의 년도와 시간을 모두 천간(天幹)과 지지(地支)를 결합한 간지법(幹支法)으로 표기한다. 총각의 사주를 적은 사주단자(四柱單子)를 녀자측 세대주의 주소와 이름을 적은 봉투에 넣어 두겹으로 된 보자기(안은 붉은색, 겉은 남색)로 싸서 녀자집에 보낸다. 이때 간단한 감사편지를 첨부하는데 녀자측에서 연길(涓吉)을 알려줄것을 요구한다. 연길이란 잔치날로 선택한 길일을 말한다. 사주단자의 서식은 아래와 같다. 사주단자 봉투 띠 녀자집에서 남자의 사주단자를 받으면 음양오행설의 상극상생(相克相生)원리에 의하여 처녀의 사주와 맞춰보고 길흉화복을 판단한다. 이것을 궁합(宮合)을 맞춘다고 한다. 남녀 두사람의 출생 년월일시를 다 맞춰보는것을 속궁합이라고 하고 출생한 년도만 맞춰보는것을 겉궁합이라고 한다. 중국 조선족은 일반적으로 겉궁합을 맞춘다. 음양오행설에 의하면 60갑자가운데서 매 한쌍의 간지(幹支)는 모두 일정한 물질을 상징한다고 한다. 례컨대 경오(庚午)와 신미(辛未)는 로방토(路旁土)에 해당하며 무진(戊辰)과 기사(己巳)는 대림목(大林木)에 해당된다고 한다. 이런 원리에 의하여 만약 총각과 처녀가 모두 경오년이나 신미년에 출생하였다면 토성(土性)에 속하는것이다. 이제 이것을 가지고 궁합을 해석한 책을 펼쳐보면 남토녀토(男土女土)는 부귀장수(富貴長壽)이며 개화만지(開花滿枝)라고 풀이를 하였다. 이것은 길조(吉兆)이므로 남녀가 천상배필이 되는것이다. 만약 총각은 경오년이나 신미년에 출생하였고 처녀는 무진년이나 기사년에 출생하였다면 총각은 토성에 속하고 처녀는 목성(木性)에 속하는데 이에 대해 궁합책에서는 남토녀목(男土女木)은 단명반흉에 고목봉추(短命半凶, 枯木逢秋)라고 해석되여있다. 이런 경우면 절대 결혼못한다. 오늘날의 안광으로 볼 때 궁합을 맞춘다는것은 아무런 과학적근거가 없는 허황한것에 불과하지만 옛날사람들가운데는 그것을 천칙같이 믿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녀자측에서 궁합을 맞춰보고 별문제가 없으면 잔치날을 확정하여 종이에 적어서 봉투에 넣어 남자측에 보내는데 이것을 연길서(涓吉書)라 한다. 연길서의 서식은 아래와 같다. 奠雁某年某月某時 納幣同日先行 이것을 조선말로 번역하면 아래와 같다. 전안례는 모년 모월 모일 모시에 진행하고 납페도 같은날에 먼저 진행하면 되겠습니다. 만일 남자측에서 잔치날을 택하여 녀자측에 알리는 경우면 상술한 연길서가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전안례는 모년 모월 모일 모시에 진행하고 납페도 같은날에 먼저 진행하겠습니다. 여기에서 전안례는 잔치날을 말하고 납페는 신랑측에서 신부측에 드리는 대장함을 말한다. 남자측에서 연길서를 받거나 연길서를 녀자측에 보낸후 혼서(婚書)를 작성한다. 혼서는 전통적혼인에서의 약혼증명서인데 지금의 결혼증서와 같다. 혼서는 대장함에 넣어서 잔치하기 반달전 혹은 잔치날에 녀자집에 준다. 그러면 신부가 그것을 잘 간직하여 두었다가 결혼한후 부부가 사망될 때 그것을 반으로 갈라서 제각기 관속에 넣어간다. 혼서의 격식은 아래와 같다. 時維孟春(隨時稱) 尊體百福 仆之長子(隨稱)某 年既長成 未有伉儷 伏蒙尊慈許以令愛貺室 茲有先人之禮 謹行納幣之儀 不備伏惟 尊照 謹行上狀 年 月 日  某貫後人 姓名 拜 이것을 조선말로 번역하면 대체로 아래와 같다. 맹춘시절(계절에 따라 칭함)에 림하시여 귀체 건강하시리라 믿습니다. 저의 맏아들(정황에 따라 칭함) 아무개가 이미 성년이 되였으나 배필을 얻지 못하고 있던차에 존귀하신 당신께서 귀한 따님을 우리 가문에 주셔서 감사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선인들의 례의에 쫓아 약소한 례물이나마 성의를 표하고저 하오니 받아주시기 바라면서 삼가 절을 올립니다. 년 월 일 모 본관 후손 성명 배 혼인을 맺은 두집의 거리가 가까우면 혼서를 쓰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일단 혼약을 맺게 되면 총각이 처녀집에 가서 3년동안 무상으로 일을 해야 한다. 조선반도 남반부에서 온 사람들과 평안도 사람들은 잔치날을 반달가량 앞두고 신부측에 대장함(례장이라고도 함.)을 보내고 연변일대의 함경도사람들은 잔치날에 대장함을 드린다. 이 시기 연변의 룡정일대에서 납채를 한 정황을 보면 흔히 목천 20필을 주며 비녀, 귀걸이 같은것은 일정한 규정이 없이 생활형편에 따라 주었으며 은전을 납페로 주기도 하였는데 적어서 10냥, 많아서 160냥 정도로 주었다. 연변의 훈춘일대에서는 생활형편에 따라 베천, 목천, 비단 같은것으로 이부자리감을 주었다. 잔치날자가 일단 확정되면 남자측에서는 총각의 관례(冠禮)를 행하고 녀자측에서는 처녀의 계례(笄禮)를 행한다.(관례와 계례 방식은 제6장 제1절에서 서술하였음.) (2) 대례 잔치날에 행하는 행사를 대례라 한다. 잔치날이 되면 신랑의 아버지가 먼저 사당에 가서 오늘 아무개가 누구 집의 딸과 결혼하게 된다는것을 조상들의 위패(位牌)를 향해 아뢴다. 이것을 고사당(告祠堂) 혹은 고묘(告廟)라고 한다. 그리고는 방에 들어와 신랑복을 차려입은 아들을 앞에 꿇어앉히고 술을 한잔 권하여 마시게 한다. 이것을 초라고 한다. 이것은 사대부계층에서 행하던 방식이고 중국 조선족은 일반적으로 사당이 따로 없었으므로 집안에서 조상제사를 간단히 지낸다. 제사상을 차리고 지방(紙榜)을 세운 다음 술을 한잔 따르고 오늘 아무개가 잔치를 하게 된다는 소식을 아뢰고는 절을 한번 한다. 지방의 서식은 아래와 같다. 顯曾祖考學生府君之位 顯曾祖妣孺人某氏之位 여기에서 두번째줄의 “某”자에 성(姓)을 쓴다. 이 시기 신랑의 옷차림은 통일적인것이 없었다. 사모관대는 얻기 힘들므로 명주로 만든 한복을 착용하는자가 다수였다. 문헌기록에 의하면 연변의 훈춘일대에서는 잔치날에 신랑은 연한 남색명주바지저고리에 검은색 배자(背子)를 입고 미투리를 신으며 머리에는 상투를 틀고 망건을 띠고 검은 갓을 쓰며 손에는 기름종이로 만든 큰 부채를 쥔다고 하였다. 평안도사람들이 거주하고있는 압록강일대에서는 잔치날에 신랑이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쓰고 총배기신을 신으며 손에는 채색비단으로 만든 차선(遮扇)을 든다. 연길에서는 겨울철에 신랑이 흰색 한복바지저고리우에 검은 “제매기(두루마기)”를 입으며 머리에는 상투를 틀고 망건을 맨 다음 휘항을 쓰고 그우에 검은 갓을 썼다. 신랑이 신부집으로 초례를 치르러 갈 때에는 말을 타거나 가마에 앉는다. 가마에는 마차나 우차에 가마모양으로 장식한 수레가마와 사람이 메고가는 가마가 있다. 사람이 메는 가마에는 신랑가마와 신부가마가 있다. 신랑일행이 신부집으로 갈 때 신부가마를 마련해가지고 간다. 20세기 20년대부터 연변의 룡정일대에서는 쏘련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면서 쏘련식 네바퀴마차를 신랑신부의 승용도구로 사용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신랑이 신부집으로 갈 때의 혼행(婚行)행렬에는 마부(혹은 교군), 안부(雁夫), 함진아비, 등롱군(燈籠君), 상객 등이 있다. 마부는 신랑이 탄 말의 고삐를 잡고 가는 사람이고 교군은 가마를 메는 사람이고 안부는 나무기러기(경상도사람들은 나무오리를 갖고간다.)를 안고가는 사람이고 함진아비는 대장함을 지고가는 사람이며 등롱군은 초롱불을 들고가는 사람이고 상객(연변일대에서는 “생빈”, “새인”이라 한다.)은 신랑가문의 대표자이다. 상객은 남성어른 한사람이 가는데 함경도사람은 아버지를 제외한 기타 근친이 가고 다른 도(道)의 사람들은 아버지가 직접 간다. 잔치날에 초롱을 들고가는것은 고대 혼속의 유습으로서 초롱불을 상징하는것이다. “婚”자를 본래는 “昏”으로 썼는데 그것은 고대에는 황혼때에 결혼잔치를 치렀기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랑일행이 신부를 맞으러 가자면 홰불을 들고가야 했다. 이것이 후세에 와서 초롱불이나 초롱을 들고가는것으로 변하였다. 조선왕조시기에 잔치날에 홰불을 들고가는 수효는 품계(品階)에 따라 달랐는데 2품 이상의 관리는 10병(柄), 3품 이하의 관리는 6병을 들고 갈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이 시기 중국 조선족이 잔치날에 들고가는 등롱은 빨간 종이와 흰 종이로 만들었는데 먼저 빨간 종이를 안에 바르고 흰 종이를 드문드문 구멍을 내여 겉에 바른다. 그러면 마치 붉은 빛이 비쳐나오는것처럼 보인다. 등롱의 수효는 알수 없으나 6개를 넘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신랑이 신부네 마을근처에 이르면 신랑이 부채나 차선으로 얼굴의 눈아래부분을 가리운다. 신랑일행은 신부집으로 직접 들어가지 않고 신부집 근처에 정해놓은 사처집(반장집이라고도 함.)에 들려 잠간 휴식하면서 초례를 거행하기를 기다린다. 초례를 거행할 시간이 되면 신랑일행은 “사처”를 떠나 신부집으로 간다. 신랑이 대문어구에 이르러 말에서 내릴 때 노죽섬(지방 사투리—가마니나 마대안에 량곡을 넣은것.)을 딛고 내린다. 그리고 마당안으로 들어갈 때에는 부채나 차선으로 얼굴의 눈아래부분을 가리고 디딜페(지방 사투리—신랑이 신부집 마당으로 들어갈 때 길에 펴는 도구.)를 딛고 들어간다. 디딜페는 베천을 펴기도 하고 돗자리를 펴기도 한다. 초례는 신부집 마당에서 거행하는데 전반 과정을 사회자가 홀기(笏記)에 적은 식순에 의하여 집행한다. 전통적인 초례식순에는 신랑하마(新郎下馬), 주인영서문(主人迎婿門), 봉안치어탁상(奉雁置於桌上), 교배석전(交拜席前), 신랑신부교배(新郎新婦交拜), 근배례재행여지(巹杯禮再行如之) 등 10여가지가 있다. 중국 조선족은 이러한 식순대로 하는 사람이 희소하고 아래와 같은 절차로 간단히 진행한다. 혼례가 시작되면 신랑이 입장한다. 이때 장인이 출입문앞에 나서서 대기하고있는다. 신랑일행이 신부집 마당으로 들어갈 때 안부가 기러기를 안고 제일 앞에 서고 그뒤에 대장함을 안은 짐군과 상객이 따르며 그뒤에 신랑이 따른다. 안부가 기러기를 신부측에 넘겨주면 신부의 숙모나 형님이 받아서 마당에 놓은 전안상(奠雁床, 상우에 백지를 편다.)우에 놓는다. 그러면 신랑이 그앞에 꿇어앉아 두손으로 부채를 가로쥐고 기러기를 세번 민다. 첫 두번은 살짝 밀고 세번째는 좀 길게 민다. 이어서 전안상을 사이에 두고 방안에 앉아있는 신부와 맞절을 하는 경우도 있고 전안상을 놓지 않고 기러기를 디딜페우에 놓고 한손으로 세번 미는 경우도 있다. 례장함은 상객이 짐군에게서 받아 신부측에 드리면 신부측의 녀자친척 한명이 신부의 치마를 겉에 입고(이 치마를 “허망치마”라 한다.) 치마폭으로 받아서 두어번 굴린다. 그런 뒤 방안으로 안고 들어가 쌀독우에 놨다가 내려놓은 다음 펼쳐놓고 녀자친척들이 구경한다. 대장함안에는 혼서와 신부옷감을 넣는다. 그외에 쌀을 두세줌 종이봉투에 넣어서 놓는데 그것은 후에 신랑신부가 사망될 때 입안에 넣는 반함미(飯含米)로 사용한다. 그리고 신혼후에 생활이 잘 피여나라고 채당콩을 넣기도 하고 첫아이는 아들을 낳으라고 대장함 안 네귀에 빨간 고추(길고 끝이 뾰족한것.)를 넣기도 한다. 전안례와 대장함(례장함)드리기가 끝나면 초례를 시작한다. 교배상(교배상 차림은 본장 제2절 초례부분에서 상세히 설명하였음.) 동쪽에 신랑과 신랑대반(남성)이 서고 서쪽에 신부와 신부대반(녀성, 두명)이 선다. 이 시기 신부와 혼례복은 통일된것이 없고 비단으로 만든 한복치마저고리면 훌륭한것이였다. 연변일대에서는 소매에 한삼이 달린 빨간 비단반회장저고리에 빨간 비단치마를 입고 외태를 풀어 달비를 섞어서 큰머리를 얹거나 낭자를 틀고 족두리를 쓴다. 낭자에 꽂은 큰비녀 량쪽에 도투락댕기를 달며 신발은 미투리를 신는다. 압록강일대에 거주하고있는 평안도사람들은 신부가 잔치날에 붉은 비단치마저고리를 입고 쪽진 머리에 미투리를 쓴다. 생활이 빈궁하여 비단옷을 못입는 경우에는 홍화꽃(민간에서는 호얘꽃이라 한다.)즙으로 베천에 물감을 들여 첫날옷을 해입는다. 신랑신부가 교배례를 할 때 조선반도 서울 이남에서 이주하여온 사람들은 교배를 시작하기전에 먼저 “북향재배(北向再拜)”를 한다. 지난날 서울 이남에서 살던 사람들은 초례를 행할 때 먼저 북쪽에 있는 임금에게 절을 두번 올렸는데 그들이 중국에 온 뒤에도 그 풍속을 그대로 전승하였다. 교배를 할 때 신부는 4배, 신랑은 2배를 한다. 신부가 먼저 신랑에게 절을 두번 하면 신랑이 무릎을 꿇고앉아 받는다. 신랑이 한번 답배를 하면 신부가 역시 무릎을 꿇고앉아 받는다. 이런 식으로 재차 반복한다. 이런 방식으로 절하는것을 협배라 한다. 합근례를 행할 때 조롱박 술잔의 꼬리부분에 구멍을 뚫고 청실홍실을 달아맨것을 접시에 2개 담아서 교배상우에 놓는다. 합근례가 시작되면 신랑측 대반이 술잔에 술을 따라 신랑에게 준다. 신랑이 받아서 신부측 대반에게 넘겨준다. 신부측 대반이 그것을 신부에게 주면 신부는 받아서 입술을 댔다가 도로 대반에게 준다. 대반은 그것을 받아 퇴주(退酒)하고 빈잔을 상우에 놓는다. 신부가 음주할 때 신랑은 읍을 하며 감사를 표시한다. 이어서 신부가 다른 술잔에 술을 부어 신부측 대반에게 주면 대반이 그것을 신랑측 대반에게 넘겨준다. 대반이 받아서 신랑에게 주면 신랑이 받아서 쭉 들이마신다. 이때 신부도 허리를 굽혀 국궁을 하며 감사를 표시한다. 초례에서 합근례만 마치면 신부가 신랑집의 식구가 되는것이다. 이것은 중국 조선족초례의 특징이다. ≪가례≫의 규정에 의하면 신부는 신랑집에 온 3일만에 고사당(告祠堂)을 해야 신랑가문의 식구로 인정받는다. 이 시기에 어떤 지방에서는 초례를 할 때 신부가 붉은 비단으로 된 두건을 머리우에 덮어쓰고 얼굴을 가리우는데 이것은 한족들의 풍속에서 온것이다. 연변의 훈춘일대에서는 혼례를 행할 때 정안례를 하기전에 신랑측 상객이 례장함에서 혼서를 꺼내여 신부측에 주면 신부의 아버지가 그것을 받아서 갖고있다가 례장함을 받은후 도로 그안에 넣는다. 후에 신부가 우귀(於歸)하여 신랑집 마당에 이르러 가마에서 내리면 신랑측에서 그것을 대장함에서 꺼내여 읽는다. 큰상은 웃방에 차린다.(큰상에 관하여 본장 제2절 “큰상” 부분에서 상세히 기술하였음.) 신랑이 큰상을 받을 때 먼저 단자(單子)놀이를 한다. 이것은 신부측의 친척이나 손님들이 종이에 간단한 시구나 수수께끼를 써서 신랑더러 화답하거나 풀이를 하게 하여 신랑의 학식과 총명 정도를 알아보는 놀이이다.  서당이 있는 마을에서는 서당훈장이 시구를 한구 써서 필묵까지 갖추어 학도를 시켜 잔치집에 보내면 신랑이나 상객이 답구를 써서 돌려보내는데 음식도 푸짐히 보낸다. 그 시기에 대다수 사람들의 문화정도가 극히 낮았으므로 단자놀이에서 시구를 화답할수 있는 형편은 못되고 해학적인 글자유희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례컨대 단자에 “馬上平安來(말을 타고 무사히 오셨습니까?)”라고 쓰면 “念德平安來(념려해주신 덕분에 무사히 왔습니다.)”라고 회답한다.  만약 단자에 “鳥郎”이라고 쓰면 얼핏 보면 “새신랑”이란 뜻을 갖고있는듯 하지만 실제로는 새 “조”자에 남편 “랑”자를 합한것이니 새의 남편이란 뜻으로서 신랑을 희롱하는 어구인것이다. 이 때에는 “黃口滿庭”이라고 회답하는데 그것은 “부리에 아직 누른 빛을 가시지 못한 새새끼들”이란 뜻인것이다. 단자놀이가 끝나면 신랑측 대반이 신랑에게 술을 석잔 권한다. 신랑은 석잔 술을 마시고나서 큰상의 음식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다는 의향을 말한다. 보통 집에 부모가 계시니 큰상의 음식을 좀 대접하고싶다고 말한다. 그러면 여러가지 음식을 조금씩 덜어내여 종이에 싸서 신랑측 상객에게 맡기여 가져가게 한다. 이것을 “봉을 싼다.(경상도)”고 하거나 “큰상을 친다.(함경도)”고 한다.  큰상의 나머지 음식은 신랑과 손님들의 술안주로 한다. “남도사람”들은 큰상을 하나도 다치지 않고 몽땅 따로 싸서 신랑집에 보낸다. 신랑앞에 큰상을 차릴 때 신랑측 대반의 앞에도 음식상을 따로 차려준다. 그러나 통닭을 놓지 않는다. 음주가 끝나면 신랑이 점심을 먹는다. 이때 밥과 국을 한그릇씩 놓는데 밥그릇안에 껍질을 벗긴 통닭알을 3개 묻는다. 신랑은 그것을 한두개만 파먹고 나머지는 신부에게 주어(밥과 함께) 먹게 한다. 신랑이나 신부의 밥그릇에 닭알을 묻는것은 자손이 번성함을 상징한다. 평안도와 경상도 사람들은 이와 달리 신랑신부 음식상에 모두 국수를 놓는데 그것은 신랑신부의 장수를 기원하는것이라 한다. 신랑이 큰상을 받을 때 신랑측 상객은 먼저 큰상을 구경하고있다가 단자놀이가 시작되면 신랑곁에 앉아서 신랑을 도와 단자풀이를 한다. 단자놀이가 끝나면 상객은 상객방에 가서 상객상을 받는다. 이때 신랑을 따라온 수행인원들은 다른 방에 모시여 식사를 마치면 상객과 함께 그날로 집으로 돌아간다. 신랑신부가 첫날밤을 지내는 신방은 신랑이 큰상을 받던 웃방에 정한다. 방안에 자그마한 상을 하나 놓고 그우에 초불을 켜놓는다. 함경도사람들은 초를 한토막 끊어서 불을 달아 상우에 세우고 평안도사람들은 초 두대에 불을 달아 각기 쌀을 담은 그릇에 꽂아서 상우에 놓는데 동쪽의것은 “신랑불”, 서쪽의것은 “신부불”이라고 한다. 밤이 되면 신부는 결혼례복을 입은채로 신방에 앉아서 신랑이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신랑이 신방에 들어가면 신부의 숙모나 형님이 간단한 동뢰상을 차려 들여간다. 동뢰상에는 술과 신랑의 큰상에 차렸던 음식을 두세가지 놓는다. 연변일대의 함경도사람들은 이때 큰상에 놓았던 음식 한두가지를 채에 담아서 신랑신부에게 주는데 그것은 신혼생활에 행복이 떡가루 쏟아지듯 하라는 의미가 내포되여있다.  신랑은 신부가 술잔에 술을 따라주면 받아마시고 술을 권하지 않으면 신부의 손목을 쥐여 술을 따르게 하여 받아마신다. 그리고나서 먼저 신부의 큰머리나 족두리를 벗기고 옷고름을 풀어준다. 그러면 신부도 신랑의 모자와 저고리를 벗겨준다. 압록강과 훈강 일대에 사는 평안도녀성들은 결혼하기전에 외태를 땋고 또 량쪽 귀의 웃쪽에 각기 두가닥씩 머리를 가느다랗게 땋아서 뒤통수에 가져다가 태머리와 합친다. 이것을 귀밑머리라고 한다.  결혼잔치를 하는 전날 뒤의 태머리는 풀어서 쪽지고 귀밑머리는 그대로 놔두었다가 첫날밤 신랑이 풀어준다. 그리하여 평안도녀성들은 자기의 남편을 “귀밑머리 풀어준 사람”이라고 한다. 초불을 끌 때 한토막을 켰을 경우에는 저절로 꺼질 때까지 놔두고 두대를 켰을 경우에는 쌍초불은 동시에 끄는것이 좋다 하여 신랑이 한손에 초불을 한대씩 쥐고 량손으로 마주 비벼끄거나 초불을 거꾸로 쌀그릇에 꽂아서 끈다.  신랑신부가 자리에 누울 때 먼저 눕는 사람이 먼저 죽는다 하여 신랑신부가 동시에 눕는다. 신랑신부의 이러한 거동을 신부의 친척들이 문창호지를 뚫고 몰래 엿보는데 이것을 “신방엿보기”라고 한다. 이러한 풍속은 옛날에 조혼(早婚)으로 인하여 어떤 신랑이 잘못되는 경우가 있으므로 신랑신부를 보호하기 위한데로부터 산생된것이라고 한다.  이튿날 낮에 마을의 젊은이들이 신부집에 놀러와서 신랑에게 “형벌”을 주는 동상례를 한다. 이것을 원래는 람침연이라고 하였는데 주로 사위와 관련되는 놀이였으므로 동상례로 개칭하게 되였다. 동상은 사위라는 뜻이다. 때문에 민간에서는 동상례를 “신랑다루기”라고 한다. 바줄로 신랑의 두발목을 동여매여 대들보에 거꾸로 달아매거나 한쪽 발목을 동여매서 바줄을 바싹 당긴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나무막대기나 회초리로 신랑의 볼기를 치거나 발바닥을 치면서 “이놈, 너는 왜 남의 마을에 와서 처녀를 도둑질해가느냐?” 하고 “심문”을 들이댄다. 신랑이 아픔을 참지 못해 소리를 지르면 장모가 들어와서 청년들에게 요구되는것이 있으면 만족시켜드리겠으니 신랑을 때리지 말라고 애걸한다. 그러면 청년들이 “돼지잡아”, “닭잡아” 하면서 음식을 요구한다. 이때 신부집에서는 닭을 잡고 다른 음식도 풍성하게 차려서 청년들을 대접한다. 그러면 청년들은 신랑의 배동하에 실컷 먹고 마시고는 집으로 돌아간다. (3) 후례 후례에는 우귀(於歸)와 귀녕(歸寧)이 포괄된다. 초례를 마치고 신부가 처음으로 신랑을 따라 시집으로 가는것을 우귀라 한다. 민간에서는 첫길을 간다고 한다. “반친영”법의 우귀는 초례를 치른 3일만에 하기에 3일우귀라 한다. 이날 신랑신부는 모두 혼례복을 차려입으며 신랑은 여전히 말을 타고 신부는 가마를 타고 간다. 신랑이 말을 탈줄 모르면 가마에 앉아간다. 일반적으로 신부가마는 두사람이 메고 신랑가마는 네사람이 메며 신부가마는 창문을 닫고 신랑가마는 창문을 열고 간다. 우귀를 가는 도중에 요귀의 침습을 막기 위해 가마우에 호랑이가죽을 덮는데 신랑도 가마를 타고가는 경우엔 신랑가마우에 호랑이가죽을 덮고 앞에서 간다. 신부의 가마안에는 요강과 바가지가 놓여있는데 바가지는 신부가 멀미가 나서 구토할 때 사용하는것이고 요강은 신부가 도중에 내리지 못하므로 가마안에서 소변을 보도록 마련해놓는것이다. 신부가 집에서 나올 때 남도사람들은 오빠나 사촌오빠가 업고나와 가마에 앉힌다. 신부가 자기 집 마당을 밟으면 시집갔다가 도루 쫓겨올수 있다 하여 땅을 밟지 못하게 하는것이다. 신부가 시집갈 때 신랑의 근친들에게 드릴 례물을 례단이라 한다. 그외에 이부자리, 옷농 같은것도 가지고 가며 돗자리도 몇잎 가져가서 신랑신부가 잠자는 방에 편다. 신부측 상객으로는 신부의 아버지 혹은 삼촌 한사람이 간다. 함경도사람들은 아버지가 가지 않고 삼촌이나 오빠가 간다. 기타 수행자들로는 교군(혹은 마부), 짐군, 마부 등이 있다. 신부일행이 신랑집 대문어구에 이르면 신랑측 사람들이 잡귀와 액을 물리치기 위해 공중에 대고 사냥총을 쏘며 대문어구에 짚을 놓고 불을 달아놓는다. 신부가마와 수행자들은 모두 불우를 넘어서 마당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신랑측에서 배치한 녀성대반 2명이 마중나와 신부를 부축해 내린다.  이때 연변일대의 풍속은 신부측 상객이 혼서를 신랑의 아버지에게 드리고 그자리에서 그것을 읽는다. 경상도사람들의 풍속은 신랑의 부모가 이때 신부를 보지 못하므로 집안에 들어가 있어야 하며 평안도사람들은 이때 근친들이 처마밑에 서는것을 엄금하며 시어머니와 신부가 서로 마주보는것을 꺼리므로 시어머니는 굴뚝뒤에 서서 가만히 본다. 만약 추운 계절이면 신부를 방안에 모시고 따뜻한 계절이면 마당에 돗자리를 펴고 병풍을 둘러놓고 그앞에 신부를 모신다. 신부의 량옆에는 녀자대반이 한명씩 배동하여 앉고 그옆에 신부가 가져온 베개, 이불, 례단 같은것을 놓는다. 이날 신부가 큰상을 받는것을 평안도사람들은 “색시잔치”라 한다. 신부가 받은 큰상차림은 신랑의 큰상차림과 같다. 만일 신부가 잔치날에 신랑이 큰상을 받을 때 함께 받았으면 다시 받지 않는다. 신부의 큰상음식은 신부가 점심식사를 마친 뒤 몽땅 따로 싸서 신부측 상객이 갈 때 보낸다. 신부가 큰상을 받을 때 신부측 상객과 기타 수행인원들은 따로 모시여 음식을 대접한다. 일반적으로 신부측 상객에게는 신랑측 상객보다 음식을 더 잘 차려준다. 식사가 끝나면 신랑측 남성근친들이 신부측 상객과 일일이 절을 하며 면목을 익힌다. 이어서 신부측 상객들이 신랑신부를 곁에 불러놓고 앞으로 서로 관심하고 시부모를 잘 모시며 행복하게 살것을 부탁하고는 집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인사가 끝나면 신부가 대반의 부축을 받으며 신랑과 함께 먼저 신랑의 조부모를 배알하고 이어서 신랑의 부모와 근친들을 배알한다. 그리고나서 손님들에게 음식을 대접한다. 연변일대에서는 손님들이 잔치집에 올 때 녀자들은 술, 떡, 엿 같은 음식을 갖고와서 부조하고 남자들은 돈으로 부조한다. 이날 손님들에게 음식을 대접할 때 남자손님들은 모두 방안에 모시는데 식사가 끝나면 인차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는 또 다음 손님들이 앉는다. 녀자손님들은 식사를 마치고 돌아갈 때 모두 음식을 조금씩 갖고간다. 손님들이 다 간 뒤 신랑의 친척들이 한자리에 앉아 중참을 먹는다. 이것을 가족연이라 한다. 이튿날 아침식사를 마친 뒤 현구고례를 행한다. 구(舅)는 시아버지, 고(姑)는 시어머니를 말한다. 아래방에서 웃방으로 들어가는 사이문어구의 바깥쪽에 비단이나 종이를 편 상을 하나 놓고 신부는 웃방에 앉고 신랑의 근친들은 아래방에 앉는다. 신랑의 아주머니나 누님이 신부곁에 앉아서 시아버지부터 모든 근친들을 신부에게 일일이 소개한다.  이때 신부가 소개받는 사람들에게 술을 한잔 따라드리고 절을 한번 하고는 갖고온 례물을 드린다. 시부모에게는 흔히 베천옷을 한벌 그리고 다른 친척들에게는 흔히 베천으로 만든 저고리, 치마, 적삼 같은것을 한견지씩 선사한다. 3일날 아침, 신부는 일찍 일어나 시누이 혹은 동서의 안내하에 외양간(혹은 마구간)에 들어가 소나 말에게 여물을 주고 나와 돼지뜨물독에 손을 담궜다가 물에 헹군다. 이렇게 함으로써 가축이 잘될것을 바란다. 그다음 신부가 부엌에 나가 손수 불을 지피고 밥을 지어 처음으로 작식솜씨를 보여준다. 그러나 신부가 밥을 다 짓지 않고 부엌아궁이에 불만 지피고 솥에 쌀만 앉히는 경우가 많다. 아침식사를 마친 뒤 신랑신부가 음식을 마련해가지고 신부의 본가집으로 간다. 이것을 귀녕, 근친(謹親) 혹은 “3일을 간다.”라고 한다. 만약 3일만에 귀녕을 못하면 3달만에 귀녕해야 한다. 신부가 귀녕할 때 미리 본가집에서 마련해준 한복 치마저고리를 입고 가는데 이것을 “삼일옷”이라 한다. 신랑신부는 신부의 본가집에서 약 이틀동안 놀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온다. 만약 신부집에서 혼례를 치른 이튿날에 신랑다루기를 안하였으면 신부가 귀녕하였을 때에 한다. 연변일대의 함경도사람들은 신랑신부가 자기 집으로 돌아온 뒤 신부가 시집올 때 베개속에 넣어온 쌀(베개쌀이라 한다.)로 찰떡을 친다. 베개떡(베개쌀로 친 떡)은 문턱을 넘지 못한다 하여 친척들을 신랑집에 청하여 함께 먹는다. 신부가 귀녕을 갔다온후 신랑친척들이 일일이 신랑신부를 청하여 음식을 대접한다. 이것을 반살미(연변일대에서는 “집보기”라고 함.)라고 한다. 2) 친영방식 전통적인 친영방식에는 납채(納采),문명(問名),납길(納吉),납징(納征),청기(請期),친영(親迎) 등 6례가 있다. 후에 중국의 유학자들도 이것이 너무 번다함을 느끼고 납채, 납페, 청기, 친영 등 네가지 내용과 단계만 포괄한 4례로 개변시켰다. 조선의 유학자들도 친영방식에서의 6례를 그대로 실시하지 않고 의혼, 납채, 납페, 친영 등 네가지 내용만 포괄한 4례로 개변시켰다.  여기에서 “의혼”은 중매자를 통해 혼사를 제기하는것이고 “납채”는 일정한 례물을 갖추어 혼약을 맺는것이며 “납페”는 일단 혼약이 맺어지면 신랑집에서 신부집에 례물을 보내는것이고 “친영”은 결혼잔치날에 신랑이 신부를 자기 집으로 모셔오는것이다. 중국 조선족의 친영방식에는 그 내용과 단계가 “반친영”과 마찬가지로 의혼, 대례, 후례 등 3례가 있다. 반친영과 친영의 근본적구별을 보면 반친영은 신랑이 신부집에서 혼례를 행한후 2일간 신부집에 있다가 3일만에 신부를 데리고 신랑집으로 가는것인데 이것을 3일우귀라 하고, 친영은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전안례를 치르고 큰상을 받은후 그날로 신부를 모시고 신랑집으로 돌아오는것인데 이것을 당일우귀라 하는것이다. 이외에도 아래와 같은 몇가지 구별이 있다. 반친영방식은 신부집에서 초례를 거행할 때 전안례, 교배례, 합근례 등 례식을 행하지만 친영방식은 흔히 신부집에서 전안례만 행하고 큰상을 받으며 신랑집에 돌아와서는 신부가 큰상을 받는 례식만 행한다. 반친영방식은 일반적으로 신랑이 신부집에서 초례를 행한 이튿날에 동상례를 하지만 친영방식은 초례를 치른 3일만에 신랑신부가 함께 신부집으로 귀녕을 갔을 때 한다. 2. 20세기 30~40년대 이 시기의 혼인형태는 1931년 “9.18”사변 이전시기와 마찬가지로 반친영과 친영 두가지가 실시되였다. 혼인형식은 별로 변하지 않았으나 사람들의 과학문화수준이 높아지고 자본주의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의 영향을 받아 봉건적인 사상관념에서 점차 해방됨에 따라 혼인관념과 혼인의 세부면에서 새로운 변화가 생기게 되였다. 이것은 주로 아래와 같은 몇가지 방면에서 찾아볼수 있다. 1) 20세기 20년대까지는 남자가 11~12살이 되면 결혼하는 조혼현상이 적지 않았으며 11~12살 되는 신랑이 17~18살 되는 신부를 얻는 현상도 존재하였다.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11~12살에 결혼하는 현상이 존재하기는 하였으나 극히 적었고 일반적인 결혼년령은 16세부터 20세사이였다. 2) 전에는 청년남녀가 약혼할 때 당사자들은 상대방의 얼굴을 볼수 없었지만 이 시기에 와서는 중매자가 당사자들의 사진을 갖고다니며 소개하여 결혼전에 상대방의 얼굴모양이라도 볼수 있게 되였다. 또한 이 시기에 들어와서는 청년남녀들중 학교에 들어가 공부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남녀간의 접촉이 많아짐에 따라 자유련애현상도 현저히 늘어났다. 3) 이 시기에 와서는 남녀의 사주로 궁합을 맞춰보고 혼사를 결정하는 현상이 점차 적어졌다. 4) 남자들의 상투머리는 점차 페지되고 하이칼라머리가 류행되였으며 결혼잔치때에 사모관대를 세내여 사용할수 있게 되여 사모관대차림을 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며 양복에 넥타이를 매는 현상도 나타났다. 신발도 미투리가 적어지고 구두를 신기 시작하였다. 신부의 차림을 보면 큰머리 대신 낭자를 트는 현상이 많아지고 혼례복 옷소매에 한삼을 다는 습속이 없어졌으며 너울을 쓰는 현상이 새로 나타나고 버선에 미투리를 신던것이 갓신, 코신, 구두 같은 신발로 대체하였다. 5) 이 시기에는 관례와 계례가 점차 페기되였고 연변일대와 흑룡강성 목단강일대에서는 “친영”방식이 점차 보급되면서 혼례식에서 전안례만 치르고 큰상을 받는 현상이 점차 많아졌으며 신식혼례식이 나타나게 되였다. 신식혼례식에는 주로 다음과 같은 절차가 포괄된다. (1) 신랑신부 입장. (2) 신랑신부 례물 교환.(신랑은 신부에게 반지를, 신부는 신랑에게 시계나 만년필을 선사한다.) (3) 래빈 축사. (4) 친척 답사. 3. 혼인에서의 몇가지 특수형태 20세기 50년대 이전시기의 혼인풍속에는 일반적인 풍속과 다른 특수한 풍속이 있었는데 주로 아래와 같은것들이다. 1) 지복혼(指腹婚) 어린애가 아직 출생하기도전에 부모들이 어린애의 장래혼사를 결정하는것을 지복혼이라고 한다. 사이가 친근한 두집에서 녀주인이 모두 임신했을 때 앞으로 한집에서 아들을 낳고 한집에서 딸을 낳으면 두 아이를 부부로 정하도록 약속한다. 일단 이렇게 약속해 놓으면 두 아이가 세상에 태여나서 성장하는 과정에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절대 언약을 어기지 못한다. 청나라시기 선통원년(宣統元年, 1909년)에 편찬한 ≪장백회정록(長白滙征錄)≫의 조선족풍속에 관한 기재에 의하면 조선족은 “녀자가 임심하였을 때에 벌써 혼약을 맺는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20세기초까지 조선족가운데는 지복혼현상이 존재하였음을 알수 있다. 2) 민며느리를 두는 풍속 남의 집의 나이어린 녀자애를 데려다가 키워서 며느리로 삼는것을 민며느리라고 한다. 남자집에서 가난한 집의 녀자애를 10살 좌우에 데려다가 한집식구처럼 키운다. 녀자애가 커서 결혼할 나이가 되면 결혼잔치를 하기전에 녀자를 자기 집으로 보내여 일반적인 결혼방식으로 결혼잔치를 간단히 하여 녀자를 남자집으로 다시 데려온다. 이 시기에 생활이 매우 구차한 집들에서 이런 방식으로 자식을 결혼시켰다. 이러한 결혼방식은 그 유래가 아주 오래된것으로서 일찍 조선반도의 고대국가 동옥저(東沃沮)에 이런 풍속이 있었다고 ≪삼국지(三國志)≫에 기재되여있다. 3) 데릴사위를 얻는 풍속 남자가 녀자집에 사위로 들어가 녀자집의 성원으로 되는것을 데릴사위라 한다. 부부가 나이가 많고 아들이 없거나 아들의 나이가 아직 어려서 남성로동력이 결핍한 경우에 데릴사위를 얻는다. 데릴사위를 얻는 혼인형태에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가 있다. 한가지는 혼약을 맺을 때 남자가 데릴사위로 들어갈것을 결정하고 결혼잔치를 한다. 결혼한후 신랑은 계속 신부집에 머물러있으면서 처가집 식구들과 함께 일하고 생활하며 처가 부모를 봉양하는 의무를 감당한다. 다른 한가지는 딸의 나이가 아직 어려서 결혼을 못할 경우에 먼저 한 청년남자와 혼약을 맺는다. 그러면 약혼한 남자가 그때로부터 녀자집에 들어가 처가집 식구들과 함께 일하고 생활하다가 딸애가 16~17세 정도 되면 결혼례식을 행하여 부부를 맺는다. 데릴사위를 삼는 풍속은 20세기 60년대 이후에도 개별적으로 존재하였다. 4) 과부동이기 풍속 녀자들은 한평생 남편을 한사람밖에 모시지 못한다는 유교관념으로 말미암아 조선왕조시기에 과부의 재가는 오래동안 엄금되였다. 19세기 후기에 이르러 과부의 재가가 점차 허용되기는 하였으나 과부가 재가하는것은 정조를 지키지 못하는 행실로 간주되여 여전히 여론의 비난을 받았다. 과부를 동여가는 혼인풍속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배경하에서 산생된것이다. 과부가 주동적으로 재가하면 비난을 받지만 강박적으로 동여가게 되면 비난을 받지 않는다. 과부를 동여가는 혼인에는 두가지 경우가 있다. 한가지는 과부를 돌연습격하여 강박적으로 동여가는것이고 다른 한가지는 미리 과부와 상론하여 과부의 동의를 얻은후 과부를 강탈하는척하며 동여가는것이다. 과부를 동여가는 방식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홀아비집에서 힘이 센 남자를 몇명 청하여 밤에 소수레를 몰고 과부가 있는 마을로 간다. 소수레는 마을밖에 세워놓고 사람들만 과부집 안에 뛰여들어가 과부를 랍치한후 녀자와 남자가 서로 등을 맞대게 하여 업고 마을밖으로 도망친다. 마을밖에 이르러서는 소수레에 싣고 간다. 홀아비집에서는 음식을 푸짐히 마련해놓고 기다리다가 과부를 업어오면 그들에게 대접한다.  이런식으로 강탈해온 과부는 그가 동의했건 동의하지 않았건 일단 홀아비집에서 하루밤만 자면 과부의 시집에서는 그녀가 이미 남의 집 사람이 된것으로 인정하며 강탈자들에 대해서도 문책하지 않았다. 이러한 풍속은 20세기 40년대까지 존재하였다.  
155    조선족 인생의례-혼인 4 댓글:  조회:3431  추천:0  2012-09-22
조선족 인생의례-혼인 4 제4절 20세기 50년대 이후시기의 혼인풍속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후 반봉건, 반식민지 사회제도가 뒤엎어지고 새로운 사회주의제도가 건립되면서 사상관념, 도덕표준 등 의식형태령역에서 커다란 변화가 생기였다. 따라서 혼인풍속에도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10년 동란시기(1966년 10월—1976년 10월)에 이르러 극“좌”적인 사조가 전국에서 극도로 팽창, 범람하면서 조선족풍속의 허다한 행사 역시 “낡은것” 혹은 “미신적인것”으로 간주되여 비난받거나 페지되였다. 혼인풍속도 이러한 사조의 세례를 받게 되여 “혁명적”으로 행하였으므로 민족적인 전통과 특징은 깡그리 말살되고 오로지 앙상한 줄거리 정도로만 남게 되였으며 여러가지 기괴한 현상들이 나타났다. 1978년말, 당중앙위원회 제11기 제3차 전원회의가 열린후 중국은 개혁개방의 새로운 력사시기에 들어서게 되였다. 사상이 해방되고 인민들의 물질생활이 눈에 뜨이게 향상되면서 조선족의 혼인풍속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10년 동란시기에 페지되였던 일부 행사들이 회복되는 한편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풍속들이 나타났다. 이 시기의 혼인풍속에 대하여 건국초기, 10년 동란시기, 1980년대 이후시기 등 몇개 시기로 나누어 서술하고저 한다. 1. 건국초기 1) 건국초기 혼속의 변화 혼인형태에서 이 시기에는 친영방식으로 통일되였다. 또한 혼인의 기타 여러가지 행사에서도 현저한 변화가 생겼는데 주로 아래와 같은 몇가지 면에서 체현된다. 이전에는 주로 중매자와 부모의 의향에 따라 남녀간의 혼약이 맺어졌지만 이때에는 청년남녀가 직접 만나고 사귀면서 애정을 키운 기초에서 부모의 동의를 얻는 자유혼인방식이 주류로 되였다. 잔치날에 신랑이 말을 타고 신부가 가마를 타거나 신랑신부가 모두 가마를 타던것이 이때에는 신랑신부가 대부분 가마를 설치한 마차나 우차를 리용하였다. 사모관대를 하는 신랑이 극히 적고 중산복이나 양복을 입는 신랑이 많아졌다. 신부는 한복을 입고 너울을 썼으며 큰머리, 한삼 같은것은 소실되였다. 남녀 량가에서 혼약을 맺을 때 궁합을 맞추고 청혼서, 허혼서 같은것을 쓰는 현상이 압록강류역의 일부 지방에만 잔존하고 대부분 지방에서는 페지되였다. 남녀의 혼약을 법적으로 확인하는 혼인등록증이 허혼서를 대체하였다. 신부의 가마가 신랑집 마당으로 들어갈 때 공중에 대고 총을 쏘거나 교군들이 불을 넘으며 들어가는 미신적인 행사가 없어지고 연변일대에서는 신랑의 부모가 춤을 추며 신부를 영접하는 풍속이 나타났다. 또한 교배례, 합근례 등이 없어지고 전안례도 간소화되였다. 이전에는 신랑일행이 혼행할 때 안부가 나무기러기를 안고 가서 전안례를 행하였으나 이때에는 신부측에서 나무기러기를 마련해놓았다가 신랑이 도착한 뒤 그것을 쟁반우에 놓고 신랑더러 슬쩍 밀게 하였다. 신랑다루기풍속이 페지되고 신랑신부가 손님들과 함께 오락활동을 벌리는 풍속이 나타났다. 지복혼, 민며느리혼, 과부동이기혼 등이 사라졌으며 11~12살에 결혼하는 조혼현상도 없어졌다. 2) 이 시기 혼인의 일반과정 이 시기에 보편적으로 행해진 친영방식은 의혼, 잔치, 후례 등 세가지 단계로 나뉘여진다. 이러한 과정에서 진행되는 행사에 대하여 1950년대 이전시기와 같은것은 생략하고 부동한것만 기술한다. (1) 의혼 의혼단계에는 말떼기와 사돈보기가 있다. ① 말떼기 남자집에서 녀자집에 가서 청혼하여 동의여부를 받는것을 말떼기라 한다. 이 행사에는 당사자와 당사자의 아버지 혹은 삼촌, 형님 등 근친 한사람이 가며 돈을 다소 갖고간다. 녀자의 부모를 만나서 혼인을 맺을 의향을 정식으로 제출하여 녀자의 부모가 동의하면 총각이 처녀의 부모님께 절을 하여 사의를 표한다. 그리고는 남자집에서 갖고온 돈으로 간단히 음식을 마련하여 함께 나눈다. 만약 처녀의 부모들이 시원한 대답을 주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서로 헤여진다. ② 사돈보기 남자집에서 말떼기를 거쳐 녀자집의 동의를 얻게 되면 후에 다시 날자를 정하여 음식과 례물을 갖춰가지고 녀자집에 가서 혼사에 관한 문제를 상세히 의논한다. 이때 갖고가는 례물로는 주로 처녀의 옷감과 화장품이다. 이날 녀자집에서는 가까운 친척들과 동네 로인들을 청하여 남자집에서 가져온 음식을 대접한다. 이것으로 자기 집 딸의 혼사가 이미 결정되였음을 공개한다. 이날 량가 부모들이 의논하여 잔치날을 결정한다. (2) 잔치 잔치날이 되면 신랑이 수레가마에 앉아 신부를 모시러 떠난다. 상객으로는 신랑의 삼촌이나 형님 한사람이 따른다. 경상도사람들은 아버지가 간다. 례장함에는 신부의 첫날옷, 너울, 신부와 신부측 상객이 달 꽃, 결혼증명서 같은것을 넣는다. 신랑일행이 신부집 마당에 도착하면 신부측에서 지정한 신랑측 대반이 출입문밖에 서서 기다리고있다가 신랑을 안내한다. 신랑은 수레가마에서 내릴 때 도복섬(가마니나 마대안에 량곡을 넣은것.)을 딛고 내린다. 신랑측 상객이 례장함을 드리면 신부의 녀성친척 한사람이 허망치마를 입고 문턱안에 서서 치마폭으로 받아 정주에 놓고 그안의 물건을 녀자측 친척들에게 구경시킨다. 례장함을 드린후 신랑이 디딜페를 딛고 방안에 들어가 큰상을 받는다. 큰상을 받을 때 먼저 단자놀이를 한다. 그다음 점심식사를 한다. 큰상과 점심상의 차림, 단자놀이방식 등은 모두 1950년대 이전시기와 같다. 신랑이 식사를 끝마치면 신부와 함께 신부의 부모님께 작별인사로 절을 한번 한다. 그리고는 신랑신부가 함께 수레가마에 앉아서 신랑집으로 떠난다. 이때 신부가 갖고가는 물품으로는 례단, 이부자리, 베개, 농짝 같은것이다. 이러한 물건들은 다른 수레에 싣고 간다. 례단은 트렁크에 넣어서 가지고 간다. 연변일대에서는 찹쌀 20~30근 정도를 베개속에 넣고 가는데 그것을 “베개쌀”이라 한다. 신부가 본가집에 귀녕을 갖다온 뒤 그것으로 찰떡을 쳐서 신랑의 친척들을 청하여 함께 먹는다. 신부일행이 신랑집 마을에 도착하면 먼저 결혼식을 거행한다. 결혼식은 흔히 신랑집 마당이나 학교 교실에서 거행한다. 결혼식장 정면에 “신랑×××, 신부×××화혼식”이라고 쓴 프랑카드를 걸어놓는다. 결혼식순은 아래와 같다. ① 주례(사회자)가 결혼식 시작을 선포. ② 좌석 정돈. ③ 신랑측 친척들은 혼례식장 정면을 향하여 오른켠에 앉고 신부측 친척들은 왼쪽켠에 앉는다. ④ 한쌍의 어린 남자애와 녀자애가 앞에 서서 뒤로 꽃보라를 뿌리며 안내한다. 이때 신랑은 신부의 왼쪽에 서서 걸어들어간다. 프랑카드앞에 이르러 손님들을 향하여 돌아선 뒤에도 신랑은 여전히 신부의 왼쪽에 선다. ⑤ 주례사—오늘은 누구와 누구의 결혼식이라는것을 소개한다. ⑥ 결혼증서 발급. ⑦ 신랑신부 례물교환—신랑은 흔히 신부에게 반지(구리반지나 백철반지)를 선사하고 신부는 신랑에게 만년필을 선사한다. ⑧ 신랑신부 상견례. ⑨ 량가 친척 상견례. ⑩ 래빈축사 및 기념품 증정—일반적으로 결혼을 기념하는 글을 쓴 거울을 선물한다. ⑪ 신랑신부 답사. ⑫ 기타. ⑬ 신랑측의 대표가 손님들에게 감사를 표시한다. ⑭ 신랑신부 퇴장. ⑮ 페식 선포. 결혼식이 끝나면 신부가 신랑집 웃방문으로 들어가 큰상을 받는다. 연변일대에서는 신부가 방안에 들어가기전에 신랑이 먼저 정주간에 들어가면 숙모나 아주머니가 신부의 큰상에 놓을 음식(사과쪽 등)을 바가지에 조금 담아준다. 신랑이 한발로 부뚜막을 딛고 그것을 받아 먹은후 빈 바가지를 정주간 온돌바닥에 활 던진다. 바가지가 엎어지면 아들, 반듯이 누우면 딸을 낳는다고 한다. 경상도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방에서는 신부가 방에 들어가기전에 신부에게 사탕물을 대접하는데 그것은 신혼생활이 사탕처럼 달콤하라는 뜻을 상징하는것이다. 밤이 되여 신랑이 신방에 들어갈 때 신부는 너울을 쓴채로 신방에서 기다린다. 신랑이 신부의 너울을 벗겨주면 신부는 신랑의 모자를 벗겨준다. 이튿날 아침식사를 마친 뒤 현구고례(연변에서는 집안잔치라고 함.)를 행한다. 신부는 첫날옷차림을 하며 신부앞에 도리상 하나를 놓고 그우에 마른명태, 사탕 같은것을 놓고 술 한병, 술잔 하나를 놓는다. 신랑의 근친들이 술상을 사이두고 신부 맞은켠에 앉는다. 신부곁에는 신랑의 누님이나 아주머니가 앉는다.(연변일대에서는 이런 녀자를 “둘러리”라 함.) 둘러리가 신부에게 신랑의 근친들을 시아버지부터 일일이 소개하면 신부가 술을 한잔 따라 드리고 절을 한번 하고나서 례물을 선사한다. 례물을 받은 사람은 절값으로 돈 같은것을 내놓는다. (3) 후례 잔치한 3일날 아침, 신부가 일찍 일어나 부엌에 내려가 불을 지핀다. 아침식사를 마친후 신부가 신랑과 함께 귀녕을 간다. 본가의 친척들과 동네사람들이 신랑신부와 함께 오락을 즐긴다. 3일만에 신랑집으로 돌아오면 반살미(연변일대에서 말하는 “집보기”)를 한다. 2. 10년 동란시기(1966년 6월—1976년 10월) 10년 동란시기에 실시된 혼인방식은 대체로 아래와 같다. 1) 의혼 이 시기의 의혼방식은 동북해방 이후시기와 마찬가지로 자유련애와 중매혼인이 결합된 방식이였다. 하지만 혼약을 맺는 구체적인 방법에 있어서는 조선민족의 전통적인 방법과 다르고 동북해방직후와도 달랐다. 이 시기의 의혼방식은 동북해방이후의 20세기 50년대처럼 말떼기와 사돈보기 2개 절차로 나누어 행하는것이 아니라 이 두가지 절차를 한데 합치여 진행하였다. 총각의 삼촌이나 형님이 되는 근친이 총각을 데리고 녀자집에 가서 청혼하는 한편 결혼날자까지 토론하여 결정하였다. 약혼하러 갈 때 례물도 사지 않고 녀자집의 동의를 얻은후에도 총각이 처녀집에 놀러다닐뿐 사돈보기라는것을 하지 않는다. 2) 잔치 이 시기의 결혼잔치는 아래와 같은 몇가지 면에서 시대적특징을 보여주고있다. (1) 신랑의 옷차림을 보면 사모관대는 봉건시대의 옷이라 하여 입지 못하고 양복은 서양옷이라 하여 입지 못하다보니 천편일률로 중산복을 입었으며 또한 혁명적기풍을 나타내기 위하여 의복의 색상도 국방색(군복색)을 택하여야 했다. 신부의 옷차림은 한복 혹은 등산복이였다. 너울을 쓰는것은 서양식이라 하여 금지되였다. (2)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가거나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올 때 가마에 앉거나 말을 타는것이 아니라 먼거리면 공공뻐스를 타거나 장식하지 않은 수레에 앉았다. 가까운 거리면 도보로 오가야 했다. (3) 례장함에는 신부옷이나 장식품을 넣는것이 아니라 모택동저작, 맑스, 레닌의 저작과 호미 같은 생산도구를 넣었다. (4) 전안례, 교배례, 합근례 등 구식혼례식은 더 말할나위도 없고 1950년대에 행하였던 신식혼례식도 없어졌다. (5) 신랑이 큰상을 받을 때 진행하던 단자놀이도 이 시기에 이르러 없어졌다. (6) 신방에 초불을 켜거나 신랑신부가 서로 상대방의 머리쓰개나 겉옷을 벗겨주는 습속이 없어지고 때가 되면 불을 끄고 동침하였다. 3) 후례 (1) 잔치한 3일만에 신부가 신랑과 함께 귀녕을 가서는 본가집 친척들과 함께 음식을 나눌뿐 오락을 벌리고 즐겁게 놀던 습속이 페지되였다. (2) 신부는 신랑과 함게 본가집에 귀녕을 갔다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하여 그날로 신랑집으로 돌아와야 했으며 신랑집에 돌아와서는 그날 혹은 이튿날부터 집체생산로동에 참가해야 하였다. 3. 10년 동란 이후시기 1) 이 시기 혼속의 새로운 변화발전 (1) 배우자선택 동북해방(1945년 8월)이전에는 대체로 부모들의 의향에 의하여 혼사가 결정되였으므로 당사들이 배우자를 선택할 권리가 거의 없었다. 동북해방이후 봉건적인 혼인풍습이 파괴되면서 자유련애의 성행과 더불어 비로소 자기의 념원에 의하여 배우자를 선택할수 있게 되였다. 그전에는 혼사에서 문벌과 가풍을 중시하였지만 20세기 40~50년대에는 전쟁이 빈번하고 계급투쟁을 강조하던 년대였으므로 사람들은 배우자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상대방의 정치면모, 계급출신, 로동표현 등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10년 동란시기에는 전국 각지의 정부기관, 공장, 기업, 학교 등이 모두 마비상태에 빠져있고 오직 군대만이 질서가 잡혀있었으며 또 지방의 “문화대혁명”은 그 지방의 무장부와 해방군이 령도하게 되였으므로 녀자들이 배우자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군인들이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개혁개방의 새로운 력사시기에 들어선후 경제체제가 계획경제로부터 시장경제로 전변되고 무엇보다도 경제발전을 앞자리에 세우고 과학기술발전을 중요시하게 되면서 기업가들과 과학기술인재들의 사회적지위가 높아졌다. 하여 이 시기에는 경제생활이 좋은 사람, 지식수준이 높은 사람, 좋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이 녀자들이 선호하는 배우자감이였다. (2) 초혼(初婚)년령 20세기 30년대까지 조선민족에게는 조혼현상이 많이 존재했다. 이때 남자들의 보통 초혼년령은 16~20세였는데 그중에서 19세가 다수였다. 녀자들의 초혼년령은 보통 16~19세였는데 그중에서 18세가 다수였다. 1949년 이후 연변일대 조선족의 초혼년령 변화상황은 다음과 같다. 1949년에는 17.87세, 1958년에는 20.42세, 1969년에는 22.19세, 1979년에는 23.84세, 1988년에는 24.49세이다. 제3차 전국인구보편조사자료에 따르면 연변지구에서 27~39세의 미혼남녀가 같은 년령의 남녀가운데서 3.37%를 차지하였는데 이 비례는 길림성에서 장춘시와 길림시 다음으로 가며 길림성의 몇개 지역가운데서 가장 높았다. (3) 결혼비용과 부조돈 1987년 8월에 연변일보사 곽철권기자가 연길시의 128쌍 청년 남녀의 결혼비용상황을 조사한데 따르면 1985년 이전에는 평균 3,250원(사돈보기를 포함.)이였고 1985년에서 1987년까지는 평균 5,310원(사돈보기를 포함.)으로 늘어났으며 최고로는 8,980원에 달하였고 최저로는 1,870원이였다. 1993년에 필자가 료녕성 동구현일대의 조선족 결혼비용상황을 조사한데 따르면 1만5,000원이 없이는 잔치를 치르지 못하는 형편이였으며 결혼할 때 천연색텔레비죤, 전기랭장고, 세탁기 등 세가지 물건은 반드시 갖춰야 하는것으로 되였다. 동시기 흑룡강성 탕원현일대 조선족의 결혼비용상황을 조사한데 의하면 딸을 시집보내는데 3,000원 이상 있어야 하고 며느리를 맞으려면 적어도 5,000원이 있어야 했다. 1998년에 연변일대 조선족의 결혼비용상황을 보면 농촌에서는 만원 좌우, 도시에서는 1만~2만원에 달하였다. 다른 한편 이 시기에 이르러 결혼부조돈의 표준은 전에 비해 많이 늘어났다. 즉 1980년대초에는 5~10원이였으나 1993년에는 50~100원으로 늘어났다. (4) 새로 나타난 풍속 몇가지 이 시기에 조선족의 전통적인 혼인풍속에서 찾아볼수 없는 새로운 풍속들이 나타났다. 그중 일부 풍속은 한족풍속에서 온것이다. ① 흑룡강성 치치할시일대의 조선족들은 잔치날 신랑이 신부를 데려오려고 신부집 마당에 도착하면 신부집에서 출입문을 안으로 걸어놓는다. 신랑이 한족말로 “어머님, 제가 왔습니다. 문을 열어주십시오!” 하고 소리치면 안에서 돈을 내야 문을 열어준다고 대답한다. 신랑이 큰상을 받고 신부를 데리고 떠날무렵이 되면 신부댁 친척들이 신부의 신발을 감추어둔다. 신랑이 돈을 내놓아야 신부의 신발을 내놓는다. 이런 풍속은 금전만능사상의 영향하에서 새로 나타난 한족들의 풍속을 따라배운것이다. ② 지금 많은 지방에서 잔치때 신랑측에서 신부의 부모에게 신부를 키워준 “젖값”이라는것을 준다. ③ 도시에서 살고있는 조선족들은 결혼식을 치르기전에 식당에서 손님을 대접할 때 신부와 신랑이 손님들에게 일일이 담배불을 붙여준다. ④ 잔치날 신부가 신랑집 마당에 도착하면 신랑집에서 폭죽을 터쳐 환영과 축하의 뜻을 나타낸다. 료녕성일대에서는 이것을 “오독도기”를 터친다고 한다. ⑤ 길림, 장춘 일대의 조선족들은 잔치날을 택할 때 흔히 양력과 음력이 모두 짝수로 되는 날을 택하며 그중에서도 뒤의 수자가 “8”자로 된 날자를 길(吉)한 날로 인정한다. 한어에서 “发”자는 운이 트인다는 뜻을 갖고있는데 “8”자의 한어음이 “发”자와 비슷하므로 길한 수자로 인정하는것이다. ⑥ 조선족풍속에는 잔치날에 상객이 한사람만 간다. 그러나 지금은 상객이 몇명 지어는 10여명씩이나 가며 신부측의 상객은 신랑측의 상객보다 배나 되는 경우도 있다. 이것 역시 한족풍속을 배운것이다. ⑦ 20세기 80년대에 이르러 많은 지방에서는 신랑이 큰상을 받을 때 단자놀이 대신 신부댁 친척이나 마을손님들이 큰 종이에 구멍을 몇개 뚫어서 신랑앞에 놓고 돈으로 그 구멍을 메우라고 한다. 그리고 신랑과 상객이 신부를 데리고 떠나면서 문턱을 넘을 때에는 “문턱세”를 내야 하고 승용차에 앉아 길을 떠날 때에는 “길세”를 내야 한다. (5) 혼인에서의 몇가지 관념의 변화 인류의 혼인발전과정을 대체로 다음과 같은 3개 단계로 나눌수 있다. 첫번째 단계는 원시사회의 자유혼인단계이고 두번째 단계는 노예사회와 봉건사회의 페쇄적혼인단계이며 세번째 단계는 자본주의사회의 개방식혼인단계이다. 첫번째 단계인 자유혼인의 주요목적은 경제적리익을 얻는것이고 두번째 단계인 페쇄식혼인의 주요목적은 가계계승(家系繼承)을 위한것이며 세번째 단계인 개방식혼인은 진지한 사랑을 위한것이다. 중국 조선족의 혼인은 줄곧 페쇄적혼인단계에서 가계계승을 주요목적으로 하여왔다. 그러다가 새로운 력사시기에 들어서면서 자본주의 개방식혼인관념의 영향과 기타 여러가지 요소의 영향으로 혼인에서의 일부 전통적관념들이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되였다. ① 가계계승관념의 변화 “혼례란 성이 같지 않은 두 남녀가 합치여 우로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아래로는 가계를 이어나가는것이다.(婚禮者將合二姓之好, 上以事宗廟,而下以繼後世。)” 혼인에서의 이러한 가계계승관념은 수천년동안 중국사람들의 혼인의 주요목적으로 되였을뿐만아니라 조선민족도 전반 봉건사회단계에서 이것을 혼인의 주요목적으로 간주하였던것이다. 새로운 력사시기에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자아가치의식이 점차 높아지고 혈통계승관념이 점차 모호해짐에 따라 혼인의 근본목적을 가계계승에 두는것이 아니라 부부간의 힘과 마음을 합쳐 행복한 생활을 꾸려나가는데 두고있다. ② 정조관념의 변화 인류의 혼인력사는 모계사회의 군혼제도로부터 부계사회의 일부일처제로 전환되면서 정조관념을 강요하게 되였다. 조선왕조시기에 이르러 정조관념은 녀성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도덕표준으로 되였다. 세종왕 28년 6월 계묘일에 세종왕이 의정부에 글을 써서 지시하기를 “녀자가 정조를 지키지 못하는것은 남편을 배반한것과 같다. 남편을 배반한 녀자는 천지간에 용납할수 없으니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 조선왕조시기 녀성들은 비단 남편이 살아있을 때에 정조를 지켜야 할뿐만아니라 남편이 죽은후에도 정조를 지켜 재가를 하지 말아야 하였다. 봉건통치자들과 유교학자들의 이러한 설교로 하여 봉건시대에 조선민족녀성들은 정조를 생명처럼 중히 여겼다. 그리하여 녀성들은 중매자와 부모의 의사에 따라 일단 면목 모르는 남자와 결혼만 하면 남자가 그 어떤 결함이 있더라도 녀자가 주동적으로 리혼할수 없었으며 남편이 죽은후에도 재가를 하지 못하고 수절을 해야 하였다. 20세기 중엽까지 중국 조선족녀성들중에는 이러한 정조관념이 상당히 농후하게 존재하였다. 하지만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이러한 정조관념이 완전히 타파되여 과부재가는 아주 보편적인 일로 되였다. 하여 이 시기에 이르러 리혼률과 중로년재혼률이 그 어느 시기보다도 높아졌다. 집계에 따르면 1995년에 전국적으로 재혼등록을 한 사람이 50여만명이였는데 1996년에는 86만 2,000명으로 늘어났다. 조선족들의 확실한 재혼수자는 알수 없으나 전국적인 상승비률보다 높으면 높았지 낮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6) 섭외혼인 개혁개방의 새로운 력사시기에 들어서면서 조선족 혼인풍속에서의 또 하나의 큰 변화는 섭외혼인현상이 대폭적으로 늘어난것이다. 1950년대 초기(1950년—1953년)에 중국인민해방군에 참가하였고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하였던 일부 사람들이 조선녀자들과 결혼하였다가 귀국시 중국으로 함께 온 사례들이 있었다. 그외에는 1980년대 이전시기에 특수한 정황을 제외하고 중국인이 외국인과 결혼하는것을 허용하지 않았기에 섭외혼인현상이 극히 희소하였다. 1992년에 중, 한 두 나라가 수교하고 수년후에 또 중국 조선족과 한국인의 결혼이 허용되면서 중국 조선족녀성들이 한국으로 시집가는 현상이 급증하게 되였다. 한국의 집계에 따르면 한국으로 시집간 중국 조선족녀성이 1992년에는 1,000여명이였는데 1995년에는 7,700여명으로 급증하였으며 1999년에는 2만명 좌우로 추산되였다. 1999년 3월과 4월에 한국 관계 부문에서 한국 강원도지방으로 시집간 중국 조선족녀성 300명을 대상으로 그들이 한국남자와 결혼하게 된 동기에 대하여 설문조사를 한데 따르면 “경제적안정을 얻기 위해서”가 81%, “부모의 권유”가 6%, “직업을 얻기 위해서”가 2%였다. 설문에 응한 중국 조선족녀성들의 평균나이는 28.9세였다. 연변일대에서 한국으로 시집간 조선족녀성들가운데서 미혼녀성은 25%밖에 안되였다. 1990년대 초기에 중국 조선족의 섭외혼인 대상국은 최초에는 한국뿐이였는데 불과 몇년사이에 오스트랄리아, 미국, 일본, 조선, 로씨야, 홍콩, 마카오, 대만 등 국가와 지역으로 확장되였다. 중국 조선족의 섭외혼인의 특징은 남자의 외국녀자와의 결혼이 아니라 녀자의 외국인과의 결혼이 절대다수였다는것이다. 약 130년전인 기사년(1869년)과 경오년(1870년)에 조선에 큰 흉년이 들어 수많은 조선사람들이 기근을 참지 못해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동북에 와서 살길을 찾아 헤맬 때 많은 사람들이 만족들에게 안해와 딸을 빼앗겼다. 그때에는 녀자들이 남편과 자식 혹은 부모와 형제들을 살리기 위하여 타민족에게 원치 않는 시집을 갔지만 지금은 많은 녀성들이 자진하여 외국으로 시집가고있다. 중국의 적지 않은 사람들은 순전히 돈에 반하여 남에게 기편당하기도 하고 남을 기편하기도 하였으며 심지어 일부 녀자들은 남편과 “가짜리혼”을 한후 한국인과 “위장결혼”을 한다. 이런것들은 지난 시기 중국 조선족의 혼인력사에서 찾아볼수 없는 현상들이다. 이것은 시장경제시대에 금전제일관념이 혼인생활에서 빚어낸 일종의 피면키 어려운 현상이라 하겠다. (7) 농촌총각 장가들기 어려운 현상 20세기 80년대 이전에 조선족들은 생활형편이 아무리 구차해도 장가를 못가는 총각은 없었으며 안해를 얻지 못하는 홀아비도 희소했다. 우리 속담에 “헌신짝도 짝이 있다.”고 한것처럼 그 시기의 사람들은 아무리 궁핍한 산골에서 사는 사람들이라 하여도 배필을 얻는것이 문제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시기에 한족들가운데는 홀아비가 많았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정은 완전히 거꾸로 되였다. 한족과 기타 민족들은 농촌의 농민이라 하여도 총각들이 장가못가는 현상이 별로 없지만 농촌의 조선족총각들가운데는 장가못가는 사람이 절대다수였던것이다. 연길시에 속하는 어느 한 조선족마을에 인구가 500여명 되는데 23살부터 35살까지 장가 못든 남성수가 40여명이나 되였다. 흑룡강성 상지시 하동향의 여러 조선족마을마다 장가갈 나이가 되여도 장가를 가지 못하고있는 총각들이 수십명씩 되며 오상시 민락향 홍광촌의 300여호에서 25~30살 사이의 총각중 약 60%가 결혼을 못하고있다. 료녕성 환인현 아하조선족향 아하촌에는 조선족이 126호 있는데 20여명 처녀와 30여명의 젊은 색시들이 도시로 들어가는 바람에 로총각이 20여명이나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현상들은 일부 지방의 부분적농촌에만 존재하는것이 아니라 전반 조선족 농촌마을의 보편적현상으로 되고있다. 그리하여 조선족농촌의 총각들이 한족녀자와 결혼하는 현상이 늘어나고있다. 농촌총각들이 장가를 못가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 주요한 원인은 다음과 같은 몇가지 면에 있다. ① 녀자들이 한국으로 시집가는 바람과 도시진출의 바람이 젊은 녀자들로 하여금 농촌에 마음을 붙이지 않게 했다. 농촌의 처녀들은 한국으로 시집가지 않으면 시내의 나이트클럽이나 노래방, 음식업체와 같은 곳으로 들어간다. 그러다보니 농촌에는 젊은 녀자가 희소하다. ② 1970년대 초기부터 우리 나라에서 계획출산정책을 실시하여 한쌍의 부부가 한족은 어린애를 하나, 소수민족은 둘밖에 낳지 못하도록 규정하였다. 조선족들은 남존녀비관념으로 다수 가정에서 아들만 낳다보니 20~3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처녀보다 총각이 훨씬 더 많아진 결과를 초래하였다. ③ 다른 민족에 비하여 조선족남자들이 녀자를 천대하는 페습이 있다. 이런 상황은 도시보다 농촌이 더욱 심하다. 남녀평등사상의 영향으로 하여 농촌녀성들도 이제는 더는 남편의 구속과 천대를 받으며 살려고 하지 않는다. ④ 새로운 력사시기에 이르러 물질생활수준이 현저하게 높아짐에 따라 사람들의 문화생활에 대한 추구도 강화되였다. 그러나 현재 농촌의 상황을 보면 문화생활시설이 결핍하여 청년들이 만족하지 않는다. 하여 다소 지식이 있는 청년들은 농촌을 벗어나 시내로 들어가려 한다. 그런데 당면 도시의 상황을 볼 때 젊은 녀성들은 일자리를 얻기 쉬우나 남자들은 일자리를 얻기 매우 힘들다. 그래서 농촌에는 처녀들보다 총각들이 더 많이 남게 된다.
154    조선족 인생의례-혼인 5 댓글:  조회:2918  추천:0  2012-09-22
  조선족 인생의례-혼인 5 2) 10년 동란 이후시기 혼인의 일반과정 이 시기 조선족혼인의 일반과정은 지방에 따라 다소 부동하며 농촌과 도시가 다소 차이가 있다. (1) 농촌혼인의 일반과정 농촌혼인의 일반과정은 약혼, 잔치, 후례 등 3개 단계로 나뉘여져있다. 그 단계마다의 구체적방식은 1960년대 이전시기와 대동소이하다. 연변을 비롯한 함경도사람들이 많이 살고있는 지방에서는 잔치날에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그저 큰상을 받고는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와 신부에게 큰상을 차려주며 결혼식을 별도로 거행하지 않는다. 기타 지방에서는 결혼잔치날에 신랑이 신부집 마당에서 먼저 결혼식을 올린 뒤 큰상을 받는다. 그다음 신부를 모시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신부에게 큰상을 차려준다. 신부집 마당에서 결혼식을 치를 때 결혼식장 정면에 일반적으로 국기나 중국공산당 당기를 걸어놓는다. 결혼식의 절차는 1950년대와 같다. 잔치날에 신랑은 양복차림을 하고 신부는 한복을 입는다. 평안도사람들이 모여사는 압록강연안일대에서는 잔치날에 신부가 면사포를 쓰지 않고 기타 지방에서는 면사포를 쓴다. 잔치날에 신랑은 보통 승용차로 신부를 맞아온다. (2) 도시혼인의 일반과정 도시의 혼인도 농촌과 마찬가지로 약혼, 잔치, 후례 등 3개 단계로 나뉜다. ① 약혼 약혼방식에는 자유혼인과 중매혼인 두가지가 있다. 중매혼인은 친척, 친구 혹은 혼인소개소, 오작교란의 광고 등의 소개와 연줄로 이루어진다. 자유혼인이든 중매혼인이든 남녀가 일정한 료해과정을 거쳐 부부가 되기를 원한다면 총각의 부모가 총각을 데리고 처녀집에 가서 처녀의 부모에게 정식으로 청혼한다. 일단 허혼이 되면 총각이 처녀의 부모에게 절을 올리며 량가의 부모들이 함께 음식을 나누면서 잔치날을 정하고 기타 행사들을 의논한다. 총각의 부모가 애초에 약혼이 성사될수 있다고 생각될 경우에는 이날 처녀에게 선사할 돈이나 자전거 같은 례물을 가지고 간다. 성사될 파악이 없을 경우에는 먼저 말떼기를 하고 후에 사돈보기를 한다. 말떼기나 사돈보기때의 음식값은 총각측에서 지불한다. 혼약이 맺어지면 처녀와 총각의 부모들은 서로 친척과 가까운 이웃들을 청하여 음식을 대접한다. 이것을 “약혼턱”이라고 한다. 일부 사람들은 약혼하기전에 남녀의 궁합을 맞춰보기도 한다. ② 잔치 잔치날 신랑은 양복을 차려입고 신부는 한복차림에 면사포를 쓴다. 신랑신부가 모두 가슴에 붉은꽃을 단다. 신랑은 승용차에 앉아 신부를 모시러 간다. 신부를 안아 승용차에 앉히고 례식장으로 가는데 도중에 공원에 들려 기념사진을 찍기도 한다. 1983년 3월, 연길시 한 빌딩에 전문적으로 혼례식을 거행하는 례식장—성홍례식장을 개설하였다. 그때로부터 연변일대의 조선족들은 처음으로 대형 례식장에서 혼례식을 거행하게 되였다. 그후 연변일대의 몇개 도시와 료녕성의 심양 같은 곳에서도 여러가지 인생의례를 거행하는 례식장을 개설하게 되여 도시에서 생활하는 조선족들이 례식장에 가서 혼례를 치르는 현상이 점차 일반화되였다. 례식장의 구조는 대체로 극장과 비슷하다. 무대의 정면에 “×××, ××× 결혼식”이라고 쓴 프랑카드가 가로 걸려있고 그아래 량켠에 커다란 꽃바구니를 하나씩 놓고 무대복판에 음식을 풍성하게 차린 큰상을 놓는다. 그리고 신랑신부의 부모와 친척들이 무대아래의 량켠에 갈라 앉되 신랑측 친척들은 신랑켠 방향에 앉고 신부측 친척들은 신부켠 방향에 앉는다. 그뒤에 래빈들이 앉는다. 결혼식은 주례의 주최하에 진행되는데 주례를 선택하는 방식에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가 있다. (ㄱ) 례식장을 세를 낸 측에서 배치한다. (ㄴ) 신랑측에서 물색하여 결정한다. (ㄷ) 례절문화원 같은 곳에서 혼례식을 담당하는 경우엔 례절문화원 직원이 직접 주례를 담당한다. 연길시에서 결혼식, 환갑잔치, 돌잔치 같은 인생의례에서 주례나 사회를 담당하는 사람들을 보면 남녀를 막론하고 그저 말재간이 좋은 사람들이나 연예인들이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혼식 절차는 대체로 아래와 같다. * 혼례식 시작을 선포. * 신랑신부 입장. * 신랑신부가 입장할 때 남녀 대반이 동반하고 한쌍의 동남동녀가 앞에서 걸으며 뒤쪽 신랑신부를 향해 “꽃보라”를 뿌린다. 신랑신부가 무대에 오른후 남녀 대반도 함께 남좌 녀우의 방향으로 큰상을 마주하여 서고 동남동녀는 퇴장한다. * 신랑신부 약혼사 소개. * 신랑신부 교배례. * 신랑이 먼저 신부에게 절을 하고 신부가 답례한다. * 신랑신부 교배주 마시기. * 신부가 신랑에게 술을 한잔 따라서 권하면 다시 신랑이 신부에게 술을 따라서 권한다. 신랑신부가 잔을 들고 팔을 엇걸고 함께 마신다. * 신랑신부 례물교환—신랑은 흔히 신부에게 금반지나 목걸이를 선물하고 신부는 시계를 선물한다. * 성혼인사—신랑신부가 함께 먼저 량가 부모에게 인사하고(신부의 부모에게 먼저 인사한다.) 다음 래빈들께 인사한다. * 큰상받기—신랑신부가 큰상앞에 앉는다. 신랑은 왼쪽에 앉고, 신부는 오른쪽에 앉아 상을 받는다. * 닭알먹기—신랑이 밥그릇속에 묻은 닭알을 찾아내여 1개를 먹고 신부에게 넘겨주면 신부가 밥속에서 다시 1개를 찾아 먹는다. * 동뢰상감 마련하기—녀자 한분이 첫날밤 신랑신부에게 대접할 동뢰상에 차릴 음식을 몇가지 채에 담아 내간다. * 오락—가수 혹은 신랑신부 량가 친척과 친구들이 노래부르고 춤추며 축하한다. * 페식 선포. * 기념사진 촬영. 우에서 언급한 혼례식절차외에 또 일부 사회자들이 집행하는 혼례식에는 “닭목빼기”, “결혼증서 선독” 같은 내용도 있다. “닭목빼기”란 신랑이 큰상에 놓은 통닭의 목을 비틀어끊어 호주머니에 넣는것인데 이것은 1950년대 이후에 연변일대에서 산생된 풍속으로서 아주 문명하지 못한것이다. 우에서 언급했지만 닭은 큰상의 길상물이다. 결혼식을 끝마치기전에는 닭을 다치지 말아야 한다. “결혼증서 선독”이란 결혼식에 사회자가 신랑신부의 결혼증서를 선독하거나 서로 교환하게 하는것을 말한다. 우리 나라에서 청나라시기까지 결혼증서라는것이 없었고 남자집에서 녀자집에 납페만 하면 혼사가 결정되였다. 민국시기에 이르러 처음으로 결혼증서가 생기면서 구식혼례식의 개혁조치로서 한족들의 “문명혼례식”에서 결혼증서를 읽게 되였다. 그리고 어떤 사회자들은 한국의 혼례식을 모방하여 신랑과 신부의 어머니가 무대에 올라가 “점촉(초에 불을 다는것.)”을 하게 하고 신랑신부가 “서약(誓約)”을 하게 한다. ③ 후례 결혼식을 거행한 이튿날 신랑신부가 음식을 장만해갖고 신부집에 귀녕간다. 당일 혹은 이튿날에 다시 시집올 때 베개안에 넣어온 “베개쌀”로 찰떡을 쳐서 일가친척들이 모여 함께 먹는다. 신랑의 근친들이 날을 봐가면서 신랑신부를 집에 데려다가 음식을 대접한다. 이것을 “반살미” 혹은 “집보기를 한다.”고 한다. 상술한 혼례방식외에 1980년대에 들어와 려행식혼례, 수정궁집체혼례 등 새로운 혼례방식들이 나타났고 신랑은 사모관대차림을 하고 신부는 대례복에 족두리를 쓰고 신랑신부가 함께 가마에 앉아가는 풍속도 다시 나타났다. 또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결혼식을 거행한 뒤 신부집에서 하루밤을 자고 이튿날에 신부와 함께 자기 집으로 가는 “반친영”풍속도 나타났다. 하지만 이런것들은 개별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그리고 천주교나 기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완전히 서양식으로 결혼식을 거행한다. 이런 현상은 일제통치시기에 벌써 존재했으며 20세기 90년대에 와서 다시 부활했다. (3) 혼인에서의 금기풍속 조선족풍속에서 금기(禁忌)가 가장 많은것이 생육풍속이고 버금으로 가는것이 혼인과 음식생활 풍속이다. 혼인에 관한 금기는 주로 아래와 같은 몇가지 면에서 체현된다. ① 동성불혼과 근친불혼 조선족의 선인들은 고려시기까지도 동성혼과 근친혼 현상이 아주 많았다. 고려말기와 조선왕조초기에 이르러서야 유학자들과 통치자들은 동성결혼은 자손번성에 아주 해롭다는것을 인식하게 되였다.(婚娶同姓, 子孫不衍。) 그리하여 동성혼과 근친혼을 엄금하는 조치를 취하게 되였다. 세종왕 24년 6월 계축일에 세종왕은 종부사(宗簿寺)에 지령을 내려 “금후에 리씨 종친간에는 근친이 아니라 하더라도 영원토록 혼인을 금하도록 하라.(今後大小宗親,雖非族屬,凡李姓之人,毋得相婚,以爲恒式。)”고 하였다. 그후 성종 2년 6월 기미일에 성종은 례조에 지령을 내려 “금후부터는 외종 6촌 이내에도 결혼을 금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동성뿐만아니라 근친간의 결혼도 금지되였다. 성종 13년에 우승지(右承旨)로 있던 김세적이란 사람이 자기의 사촌누이를 첩으로 삼았다가 사형을 당하고 철산(鐵山)의 한 평민과 고양(高陽)의 한 량반은 자기의 친녀동생과 간통하였다가 전자는 참형(斬刑)을 당하고 후자는 릉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하였다. 조선왕조시기에 상술한 현상들에 대하여 엄혹한 형벌을 가했기때문에 동성불혼과 근친불혼 관념은 조선민족가운데에 확고히 뿌리박게 되였다. 이러한 관념은 중국 조선족에게도 그대로 전승되였다. 이에 관하여 20세기 20년대에 편찬된 ≪훈춘현지≫에서는 조선민족의 혼인풍속에 세가지 불혼(不婚)이 있는데 첫째는 동성불혼이고, 둘째는 친척간의 불혼이고, 셋째는 상복을 입는 기간의 불혼이라고 하였다. 지난날의 동성불혼풍속은 오늘에 와서 다소 변화되여 동성이본인 경우에는 결혼이 허용되고 동성동본과 이성동본인 경우에는 결혼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동성동본인 경우라도 3대 직계친척이 아니면 법에 따라 결혼이 허용된다. ② 탈상전 불혼(脫喪前不婚) 집에 상사가 생겨 상복을 입고있는 경우에는 혼사를 치르지 못한다. 이런 풍속은 조선왕조시기에 산생된것이다. 태종왕 4년 8월 기축일에 의정부로부터 부모상에는 3년 내에, 기년상(期年喪)에는 100일 내에 결혼을 금한다고 규정하였다. 지금 중국 조선족의 풍속은 부모가 세상을 뜬 경우 1년내에 결혼을 못하는것으로 되여있다. 다른 한편 혼사를 치를 준비를 하고있을 때에 집식구들은 남의 상례에 참가하지 못하며 초상난 집의 사람들은 남의 혼사준비나 혼사에 참가하지 못한다. ③ 혼인과정에서의 금기 (ㄱ) 남녀의 궁합이 맞지 않으면 결혼하지 못한다. 지금도 일부 사람들은 이런 풍속을 지키고있다. (ㄴ) 과부, 홀아비, 아들을 낳지 못하는 녀자, 임신부, 리혼한 사람 등은 남의 혼사나 신랑신부와 직접 관계되는 행사에 참여하지 못한다. (ㄷ) 상처를 하였거나 안해가 임신한 남자는 신랑의 대반을 서지 못한다. (ㄹ) 부모의 생일날을 자식의 잔치날로 정하지 않는다. (ㅁ) 경상도사람들은 잔치날 신부가 신랑집 마당으로 들어올 때 시부모들이 신부를 보지 못한다. (ㅂ) 평안도사람들은 잔치날 신부가 신랑집 마당으로 들어올 때 신랑의 친척들이 처마밑에 서지 못한다. (ㅅ) 약혼한 남녀가 상대방에게 손수건과 구두를 사주면 갈라지기 쉽다고 한다. (ㅇ) 처녀와 총각은 신랑신부의 대반을 서지 못한다. (ㅈ) 음력 섣달(12월)은 썩은 달이라 하여 결혼잔치를 치르지 않는다. (ㅊ) 윤달에 약혼하지 않는다. (ㅋ) 결혼잔치날에 신랑이나 신부가 상대방의 집으로 들어갈 때 문턱을 딛지 못하며 문지방을 만지지 못한다. (ㅌ) 외가집의 친척들은 신랑측 대반 혹은 신부측 대반을 서지 못한다.
153    한국전통혼례 댓글:  조회:4923  추천:0  2012-09-22
     문화특집으로 가기   유래와 의미  |  결혼식 전  |  전통 혼례  |  결혼식 후  |  결혼 의복 우리나라에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은 두 개인이 합친다는 의미보다 두 가족이 결합한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결혼식을 종종 대례라 부르고 모든 친척, 이웃, 친구, 직장 동료들이 참석합니다. 전통적인 유교의 가치를 담고 있어, 한 쌍의 짝을 짓는 일에서부터 결혼식 후의 의식행사에 이르기까지, 실제 결혼과 연관된 예식과 부대 행사는 장기간 공이 많이 드는 일입니다. 전문 결혼 중매인이 신랑 신부 후보들을 짝을 지워주는데 어떤 경우에는 신랑신부가 결혼식장에서 처음 만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가족들은 점쟁이에게 두 사람의 궁합을 본다든지 하면서 다방면의 검토를 거쳐 결혼 여부를 결정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조혼제도가 일반화되어 15세 전후에 결혼을 시켰으며 종종 여자가 남자보다 몇 살 더 많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신랑은 보통 결혼식을 위해 신부의 집으로 가서 결혼식을 거행 후 3일 동안 신부집에서 머문 후 신랑집으로 데려갑니다. 실제 결혼식은 수없이 절을 하고 여러 가지 상징적인 행위로 이어지는 의식의 연속입니다. 전통 결혼식의 몇몇 양태는 유지하고 있기는 해도, 대부분 현대의 결혼식은 전통 한국 혼례식보다 서양 결혼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국의 많은 민속 마을이나 박물관에서는 살아있는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전통 혼례식을 거행합니다.   의혼(議婚) 자식의 훌륭한 배우자를 고르는 일은 주로 중매쟁이를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중매쟁이는 그 지방 미혼 남녀의 사회적 지위, 교육 정도, 가문의 전통 등 모든 정보를 수집하여 필요한 집에 서비스를 하였습니다. 중매쟁이는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상대를 골라 서로의 부모가 만나도록 주선을 합니다. 이 때 부모들은 상대 신랑 신부 후보를 봅니다만 정작 당사자끼리는 이 때까지 서로 볼 수 없습니다. 신랑후보 집에서 신부후보 집으로 정식 청혼서를 보내면 신부후보 측 부모가 결혼 여부를 결정합니다. 납채(納采) 청혼이 받아들여지면, 신랑후보 집에서 사주(四柱)를 준비해서 신부후보 집으로 보내는데, 사주는 신랑후보의 음력 생년월일과 생시를 적은 것입니다. 가로 40cm, 세로 90cm의 흰 종이 중앙에 사주를 적고 다섯 번 접어 흰 봉투에 넣습니다. 봉투를 봉하지 않고 대나무 가지로 싸서 청실, 홍실 매듭으로 묶었습니다. 그 위에 안 쪽은 붉은 천, 바깥쪽은 푸른 천으로 된 사주보로 쌌습니다. 사주의 정보를 토대로 신부후보 측에서 통상 점쟁이와 상의해 결혼 길일을 잡습니다. 신부후보 집에서 혼례일을 적어 신랑후보 집으로 보내는 것을 연길(涓吉)이라 하는데, 이 때 신랑후보의 신체 치수도 묻습니다. 납폐(納幣) 결혼 전에 신랑집에서 신부와 그 가족들에게 상자 속에 선물을 넣어 보내는데 이를 ‘함’이라 합니다. 함을 전달하는 사람을 ‘함진애비’라 하는데 보통 신랑의 친한 친구 중 한사람이 맡으며 친구 몇 명이 동행하여 신부집 앞에서 “함 사시오”라고 외치면서 함이 도착했음을 알립니다. 신부집에서는 이들을 극진히 대접하기 위해 봉채떡과 주안상을 준비합니다. 함을 전달하는 일이 신부 부모들에게 함을 파는 형태로 변하면서 갖은 심술을 부려 신랑 친구들의 최대행사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최근에는 간혹 이 무리들이 매우 거친 행동으로 많은 돈을 요구하여 밤새 술값으로 다 날려 물의가 되기도 합니다.) 함에는 통상 검은 비단으로 싼 혼서(婚書), 채단(采緞), 혼수(婚需) 3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혼서는 보내는 사람의 이름과 보내는 목적(결혼)이 적혀 있는데 이는 신부가 오로지 일부종사(一夫從事)할 것을 상징하며 신부는 이 문서를 영원히 보관하여야하며 신부가 죽었을 때 같이 묻습니다. 채단은 청색과 홍색의 신부 치마감입니다. 청색 비단은 홍실로 싸고 홍색 비단은 청실로 쌌습니다. 이 두 색은 음양의 원리를 뜻합니다. 혼수는 신랑의 부모가 신부에게 주는 패물들을 일컫습니다.   드디어 혼례 날이 되면, 양가 부모와 마을 사람들이 혼례식 광경을 보기 위해 다 모입니다. 혼례의 여러 복잡한 절차는 각각 깊은 의미와 상징성이 있습니다. 친영(親迎) 전통적으로 혼례식은 신부의 집에서 치러졌습니다. 신랑은 통상 조랑말을 타고, 그의 하객이나 종들은 걸어서 신부의 집 혹은 혼례식장으로 갔습니다. 하객들은 축제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하여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습니다만 신부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엄숙한 표정으로 있어야만 했습니다. 전안례(奠雁禮:기러기를 드리는 예) 나무 기러기를 든 기럭아비의 인도로 신랑이 신부집에 들어갑니다. 신부집에 도착하여 기럭아비가 신랑에게 기러기를 주면 신랑은 기러기를 작은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장모에게 두 번 절하면 장모는 기러기를 안고 방으로 들어갑니다.( 옛날에는 살아 있는 실제 기러기를 드렸다고 함.) 교배례(交拜禮) 종종 이 때 처음으로 신랑 신부가 서로를 보게됩니다. 신랑 신부 각각 2명의 동료가 이 절차 내내 도와줍니다. 우선, 신랑이 혼례탁자 동쪽으로 걸어가면, 신부가 서쪽으로 갑니다. 신랑을 돕는 사람들이 신랑을 위해 멍석을 깔면, 신부를 돕는 사람들도 동일하게 합니다. 그러면 신랑 신부는 혼례탁자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봅니다. 신랑 신부를 돕는 사람들이 신랑 신부의 손을 씻어 줍니다. 손을 씻기는 의미는 혼례를 위해 신랑 신부를 정갈히 한다는 상징입니다. 동료의 도움을 받아 신부가 먼저 신랑에게 2번 절하면 역시 동료의 도움을 받으면서 신랑이 한 번 절합니다. 다시 신부가 신랑에게 2번 절하고 신랑이 신부에게 한 번 절합니다. 무릎을 꿇고 서로 마주보는 것으로 이 절차가 끝납니다. 절을 하는 의미는 서로에 대한 허락의 약속입니다. 합근례 이 절차는 지역적인 차이로 2가지의 변종이 있습니다. 한가지는 동료들이 술잔을 신랑 신부에게 전달해주면서 신랑 신부가 같은 술잔으로 마시는 것이고, 다른 한가지는 신랑 신부가 표주박의 각각 반쪽으로 마시는 것입니다. 술을 마시는 것은 새로운 부부의 인연과 조화를 상징합니다. 게다가 표주박의 각각의 반쪽으로 술을 마시는 것은 그 반쪽이 합쳐져야 비로소 완전한 하나의 표주박이듯이 신랑 신부도 각각은 반쪽이며 합쳐졌을 때 비로소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우선, 신랑을 위하여 조그만 잔에 술을 따르면 신랑이 술을 마십니다. 다시 신부에게 한 잔 따르면 신부는 입술만 축이거나 마시는 척만 합니다. 그러면 술을 다시 신랑에게 따라주고 신랑이 재차 마십니다. 신부에게 다시 따르면 신부는 재차 입술만 축이거나 마시는 척만 합니다. 마지막으로 신랑 신부가 함께 3번 절합니다: 부모에게 한 번, 조상에게 한 번, 하객들에게 한번.     폐백(幣帛) 혼례식이 끝나면 곧장 신부는 시부모를 만납니다. 이 절차는 안방에 병풍을 치고 하는데 신랑 아버지가 동편에 앉고, 어머니가 서편에 앉습니다. 신부가 시부모에게 4번 절하여 시댁과 시댁의 조상에 대한 존경과 충절의 뜻을 표합니다. 이 때 시부모에게 간단한 음식을 올리는데 이를 폐백이라 합니다.               신방 신랑 신부는 신부집에서 이 날을 위해서 특별히 치장한 방에 머물게 되는데, 과거엔 방 밖에는 친지와 마을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방 문의 한지를 뚫어 방안의 광경을 몰래 구경합니다. 표면상으로는 신부가 낭패하여 도망가지 않을까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종종 신랑이 신부보다 어렸기 때문에 무었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던 것입니다. 어린 부부가 어울리는 것을 돕기 위해 양가의 몸종들이 혼례복의 맨 겉옷을 벗기고, 신부의 몸종이 신랑의 저고리를 벗기면 신랑의 몸종이 신부의 저고리를 벗겼습니다. 몸종들이 자리를 피해주면 신부가 부탁을 안 해도 신랑이 신부의 나머지 옷을 벗겼습니다.   우귀(于歸) 3일 후에 신랑 신부는 신랑 부모의 집으로 갑니다. 신랑은 자신이 타고 온 조랑말을 타고 가고 신부는 신랑의 몸종들이 가마에 태워 데려갑니다. 신랑 부모 집에 다다르면 마을 이웃들이 행렬에 따라왔을지도 모르는 모든 악귀를 쫓아내기 위해 빨간 콩, 목화씨, 소금을 뿌렸습니다. 현구례(見舅禮) 신랑 부모의 집에서 모든 신랑 가족들에게 신부를 정식으로 소개합니다. 폐백의 절차와 유사하지만 그렇게 딱딱하지는 않습니다.   현구례(見舅禮) 신랑 부모의 집에서 모든 신랑 가족들에게 신부를 정식으로 소개합니다. 폐백의 절차와 유사하지만 그렇게 딱딱하지는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평민들은 축제나 특별한 날에는 밝고 화사한 옷을 입었지만 보통 때는 흰옷이나 감정이 절제된 옷을 입었습니다만, 결혼은 한 인간의 일생일대의 중대사이므로, 이 때만큼은 참석자들이 궁중 의상을 본뜬 의상을 입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의상 외에도 의전용 사모(紗帽)를 했습니다. 신랑은 검은 모자를 썼으며 신부는 절차의 반이 지날 때까지 베일로 얼굴을 가렸으며 머리에는 비녀를 했습니다.(상세 정보는 문화특집의 전통 의복을 참조바랍니다.) 신부의 복장 원삼(圓衫) 신부는 정성스럽게 만든 외투를 입었는데 소매는 손을 완전히 가리도록 길게 했습니다. 당시 궁중의 왕족들의 의상과 유사한 옷으로, 원삼이라는 이 옷은 안 쪽은 푸른 비단으로, 바깥쪽은 붉은 비단으로 지었습니다. 원삼 의 앞뒤에는 부귀, 장수, 우아함을 나타내는 꽃들을 수놓았으며, 굽이치는 소매에는 청, 황, 적 등의 색동을 넣고 끝에는 손을 가리도록 흰 헝겊을 덧대었습니다. 조선 시대에(1392-1910) 활옷을 대신해 원삼을 입기 시작했으며 따라서 대부분의 신부들이 따라했습니다. 공주는 녹색 옷을 입었으며, 넓은 소매에는 종종 4-5가지의 색동과 흰 헝겊을 덧대었습니다. 대대(大帶) 홍색 공단에 심을 넣어 만들어 금박 무늬를 찍은 것으로, 활옷이나 원삼을 입은 뒤 앞가슴께에 대대의 중앙이 오도록 대고 양쪽으로 돌려 뒤에서 묶어 늘어뜨립니다. 족두리 족두리는 몽고의 여자들이 외출시 사용하던 모자를 따른 것으로, 족두리는 이 보다 작아 모자라기보다 일종의 악세사리입니다. 왕족들은 칠보 족두리를 했습니다. 용잠과 댕기 신부의 머리카락은 뒤로 바싹 당겨 목 뒤에서 묶었는데, 묶은 머리 사이에 용잠을 찔렀습니다.( 용잠은 긴 비녀로 끝단부에 용머리가 장식되어 있음.) 도투락댕기는 활옷이나 원삼을 입을 때에 화관이나 족두리에 맞춰 머리 뒤로 늘어뜨리는 큰 댕기로 검은 자주색 비단에 자수와 칠보로 화려하게 장식하여 말들었으며 지방에 따라서는 오색실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앞 댕기는 쪽 찐 비녀에 감아 드리움으로써 족두리나 화관에서 어깨를 거쳐 웃옷까지로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는 댕기로, 검은 자주색 비단에 꽃무늬를 금박으로 중앙과 양끝에 찍고 끝에는 구슬을 10개정도 꿰어 달았습니다. 당의와 화관 왕비, 공주 혹은 고위 관료의 부인들이 왕궁에서 간단한 행사를 할 때 입었던 옷이 당의입니다. 양반 집 규수들도 혼례 때는 당의를 예복으로 입었습니다. 당의는 통상 안쪽에 붉은 비단 바깥쪽에 녹색 비단을 사용했거나, 안쪽에 분홍색 바깥쪽에 자주색 비단을 사용했습니다. 당의는 소매가 좁고 끝단은 반달형입니다. 당의와 함께, 족두리와 유사하지만 훨씬 화려한 화관을 머리 장식용으로 썼습니다. 신랑의 복장 사모관대로 불리는 신랑의 복장은 조선 시대 궁중 최하위직 관료의 복장과 유사합니다. 복장의 색깔과 벨트의 장식은 궁중 관료체계의 계급을 상징합니다. 결혼은 일생의 가장 중요한 행사이므로 신랑은 궁중 관료가 아니더라도 이 복장을 입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고위 관료들은 혼례식 때 다른 복장을 착용했습니다.) 바지와 저고리 바지는 헐렁한 바지가 통이 좁은 바지보다 마루에 앉기 훨씬 편하므로 다리통이 넓습니다. 대님이라는 끈으로 바지 밑단을 발목에 묶습니다. 바지끝단이 장화 위를 덮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저고리는 당시 남자들의 전통적인 상의입니다. (여자용 저고리와 명칭이 같습니다.) 단령포(團領袍) 원래 단령포는 궁중 관료들의 평상복입니다. 통상 청색이나 적갈색으로 가슴 부분 중앙에 2마리의 홍학을 수놓았습니다. 신부의 대대처럼 허리에 각대를 하였습니다. 신발은 목화라고 하는 천으로 된 검은 장화를 신었으며, 머리에는 사모(紗帽)를(양옆에 장식 깃이 달려있는 가파른 모자) 썼습니다. 문화특집으로 가기  
152    배달민족이란? 댓글:  조회:3905  추천:1  2012-09-16
배달민족이란?   첫번째 설: 배달은 우선 순수 우리말이 아니라 한문입니다. 배달=倍達 이렇게 표기하죠.   상고시대 이래로 우리나라·우리민족을 지칭할 때 사용되어온 '배달(倍達)'이란 말의 어원이 정립되지 못하고 여러 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고 사용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 듯 합니다. 설이 다양하다는 것은 곧 정설이 아직 확립되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나라와 민족·역사에 관계되는 용어에 대한 어원정립이 제대로 이우어지지 못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반성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배달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견이 있으나 가장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은 분의 견해를 소개해 드리도록 하죠(대종언어연구소의 박대종님의 견해입니다). 대표적인 학설들을 조사해본 결과, 어느 학설은 반은 맞지만 나머지 반은 틀려 있거나 설득력 면에서 미진했으며, 또 다른 학설은 그와는 반대되는 현상을 보였다. 따라서 배달(倍達)에 관한 한, 이들을 체계있게 통합하면 그 어원은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차근차근 풀어보도록 하자. 먼저 배달(倍達)할 때의 배에 대해서는『桓檀古記』의 번역자인 임승국 선생께서 예를 잘 들어놓았기 때문에 그것부터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말의 음운법칙이 박·백이 배로 변하는 실례가 많은 바, 백천(白川)이 배천(白川온천), 박고개[赤峴] 혹은 붉고개가 배오개(동대문시장)로 변하는 지명의 실례가 있고..." (한단고기; 1992, p.19) 그분의 견해는 우리말 '밝다'의 어간 밝이 배달(倍達)할 때의 배로 변했다는 것인데, 만약 밝이 백(白)의 변음임을 알았더라면 밝보다는 白(백)과의 관계에 더 주목했을 것이다. 동방문자 白(흰/환할/밝을 백)의 자음 백이 종성 ㄱ이 탈락되어 배로 변한, 이른바 'ㄱ음 탈락현상'은 다음 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①復(돌아올 복, 다시 부) : 復歸(복귀), 復活(부활) ②讀(읽을 독, 구두/이두 두) : 讀書(독서), 句讀(구두) ③惡(나쁠 악, 미워할 오) : 善惡(선악), 憎惡(증오) ④食(밥/먹을 식, 밥/먹일 사) : 食氣(사기), 食鼎(식정) 위 내용들을 요약하면, 배달(倍達)할 때의 배는 백(白)의 종성 ㄱ이 탈락된 것이며, 여기서의 倍는 白(백)의 생략음 배를 표기하기 위해 임시로 빌어쓴 가차자이다. 우리가 白의 음 백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그것이 '밝다'의 어간 밝과 영어 bright, speak, speech 등으로 변형되었다는 것이다.(보다 자세한 사항은『나는 언어정복의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제 1권(1999, p.107) 참조요.) 다시 말해 白의 음 백이 모음변형된 것이 박이요, 이 박 음에 윤활자음 ㄹ이 첨가된 것이 '밝다'의 어간 밝이다. 白: 1. 백 → 박 → 밝(bright) 2. 백 → 배 (ㄱ 탈락) 이상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국조 檀君단군과 관계있는 '박달나무[檀단]'의 어원에 대한 단서도 찾을 수 있으니, 곧 박달나무[檀단]는 다른 말로 배달나무이자, 단군 및 단군족의 나무라는 사실이다. 이에 황궁씨의 후예 6만명이 그곳을 지키고, 나무를 베어 뗏목 8만개를 만들어 신부(信符)를 새겨 천지(天池)의 물에 떠내려보내 사해 제족을 초청케 하였다. 제족이 그 신부가 새겨진 뗏목을 보고 차례차례 모여들어, 박달(朴達)나무 숲에 신시(神市)를 크게 열고 악심을 다스려 마음을 정화한 다음 천상(天象)을 살펴 마고의 계보를 정리하고 그 족속의 근원을 밝힘과 아울러 천부의 음에 준하여 어문을 정리하였다... 이로부터 매 10년마다 필히 신시를 여니 이에 어문이 통일되고 천하가 하나로 평정되어 인간세상은 크게 화합하였다... (부도지 제 14장 중에서; 필자 新解) 우리말[동방어]에서는 '檀(단)'을 일러 '박달(朴達)' 혹은 '백달(白達)'이라고 한다... (『규원사화』'단군기' 중에서; 東語謂檀曰朴達, 或曰白達) 위의 문구들에서와 같이 그 음을 취해 통상 朴達박달 식으로 표기하고 있는 박달나무의 바른 동방문자 표기는 白達백달이라는 중간결론과 함께, 이번에는 白에 뒤이어 배달(倍達)이란 말의 뒷부분에 위치한 달(達)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배달(倍達)의 달(達)을 풀이할 때, 그간 많은 학자들은 우리말 응달[陰地]·양달[陽地]을 예로 들며 땅[地]으로 풀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필자는 이와 견해를 달리한다. 배달(倍達)이란 말은 응달·양달과는 달리 상고시대 이래로의 말이기 때문에 상고시대 달(達)이 어떤 뜻을 나타내었는지 조사해야 한다. 상고시대 우리 조상들의 언어자료를 보여주는『삼국사기』지리지 권 35, 37 등에 실린 達 관련, 자료원문은 다음과 같다. 達 : 土山縣本高句麗息達 / 高木根縣本高句麗達乙斬 위 자료를 근거로 남한의 이기문·박병채 교수, 북한의 언어학자 류렬·김수경씨 등은 삼국시대 당시까지 山과 達은 동의어였음을 밝히고 있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삼국시기까지의 달(達)은 山 또는 高의 뜻이지 땅[地]이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중요한 언어학적 사실을 간과하고 상고시대의 언어인 배달(倍達)의 달(達)을 山이 아닌 땅으로 풀이하는 경향이 많으니, 이것이 바로 배달의 어원이 왜곡되게된 주요 원인이다. 『三聖記全』상편 첫머리에는 우리 白衣백의민족의 시원에 관련된 다음과 같은 중요한 문구가 기록되어 있다. 日降童女童男八百於黑水白山之地 (어느날 동남동녀 800명이 흑수와 백산의 땅에 내려왔다.)   이상의 내용을 토대로 도출된 결론은 다음과 같다. 배달(倍達)은 백달(白達)의 음운변형이고, 박달(白達)은 백달(白達)의 모음변형이며, 백달(白達)은 백산(白山)의 다른 표기이다. 박달나무는 배달민족의 나무라는 뜻이며, 우리는 백산(=배달)민족, 곧 백두산 민족이다. 이 백산(白山)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의 백두산 외에, 중국 대륙의 태백산과 심지어 히말라야산까지 연관짓는 경우가 있는데, 필자는 백두산으로 본다.     두번째 설: 우리 민족을 배달민족이라고도 한다. 개인적으로 한민족이란 말보다 배달민족이란 말을 더 좋아한다. 한민족이란 말에는 웬지 반도사관적인 냄새와 함께 소위 단일민족이라는 미명의 순종혈통주의의 편협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식으로 사용되어진 말이기도 하다. 그럼 배달민족은 무슨 뜻인가. 배달은 바로 환웅이 환국으로부터 갈라져 나와 신시에 도읍을 정하고 세운 나라를 말한다. 이른 바 환국-배달국-조선으로 이어지는 우리 겨레 국통의 중추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단군신화는 이걸 일개 3대부자父子 가계사로 전락시킨 망령에 불과하다. 흔히 古조선의 건국이념으로 알고 있는 '홍익인간 제세이화 광명이세'는 배달국의 건국이념이다. 배달국 말기 흐트러진 종족연방체를 재규합하여 조선을 세운 단군왕검께서 배달국의 국통을 고스란히 이어받으며 이를 다시 건국이념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아울러 조선도 그랬지만 배달국은 바로 다수민족으로 이루어진 연방국가 형태였다. 중국측 사료를 포함한 고대사료를 보면 우리 민족을 칭한 다양한 호칭을 접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아주 빈번하게 보이는 명칭이 구이九夷, 구환九桓 등의 이름이다. 여기서 구이九夷란 9개의 이夷족을 뜻하는데 즉 풍이, 양이, 견이 등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 민족은 여러 부족의 연맹체였다고 보면 된다. 후일 처음에 십제로 출발한 백제도 이런 식의 조어법이다. 그리고 구이 등은 구려, 구리, 고리 등과도 관련이 있고 고구려란 이름도 구려에 높은 고高를 붙인 것이라는 설도 있다. 어쨌든 우리민족의 고대사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인터내셔널적이었다. 이夷는 원래 큰 대大 자에 활 궁弓 자를 합친 말로서 '큰 활을 가진 용맹한 민족'을 뜻한다. 이걸 후대에 중국역사가들이 오랑캐라고 비하하였고 여기에 우리의 사대주의자들이 부화뇌동한 것이다. 중국이 자신들을 중원에 놓고 사방부족을 칭했던 이름인 동이 남만 서융 북적은 모조리 짐승을 뜻하는 부수가 붙어 있는데 다만 유일하게 이夷만큼은 그 어근이 전혀 다른 것이다. 우리민족이 동이족이라고 불리웠던 시기는 배달국 15대 자오지환웅(치우천황) 때부터이다. 이때의 사료를 보면 중국의 시조인 황제와의 전투에서 배달국은 '대로'라고 하는 초대형 활을 썼다는 기록이 있다. 대로는 지금의 최첨단 미사일 쯤 되는 무기였다. 배달겨레에서 갈라져 나간 민족들은 모두 공통점이 있는데 말을 아주 잘 타고 활을 잘 쏘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을 틍틀어 기마종족이라고도 한다. 몽골, 여진, 돌궐, 거란, 선비, 흉노 등이 바로 그들이다. 우리민족의 고구려 벽화를 보면 말을 타고 활로 호랑이 사냥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실상 고구려는 이들과 배달국 이후 조선의 범아시아 연방체에 속했던 형제였다고 보면 된다. 후일 조선의 연맹체가 깨지면서 북부여 외 열국으로 갈라지지만 여전히 형제국으로서 유대관계에 있었다. 그러다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에 이르러 우리민족이 한민족이라는 틀에 스스로를 가두면서 그들과의 연대를 잘라내기 시작하였다. 이에는 당연히 동아시아의 새로운 패자로 등장하기 시작한 중화족에 대한 사대의식이 작용했던 것이다. 가령 예를 들면 거란이 요를 세울 때 제일 먼저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형제국으로서 연대를 회복하자고 하였다. 그런데 조정의 사대주의자들이 송에 대한 신의를 저버릴 수 없다고 망발을 하며 거란의 호의를 철저하게 무시해버린다. 이런 식의 넋빠진 행태는 그 이후로 주욱 이어지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배달이란 말에 담긴 의의를 다시 안다는 것은 참으로 중대한 일이다. 이에 대한 제대로 된 역사인식이 없이는 그 어떤 역사찾기도 빈껍데기일 수밖에 없다. 아니면 편협한 국수주의에 빠지든지 말이다. 정리도 안되고 거의 나오는대로 끄적인 글이다. 원래 내가 하고자 했던 얘기도 지금은 어디로 새버렸는지 오리무중이다. 하지만 그대로 올린다. 역사란 것이 과연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되는 건지 한번 숙고할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세번째 설: 배달(倍達)의 어원은 원래 단군 조선 이래의 고구려말 밝달(빛의 산)에서 온 것이다. 우리 나라의 역사는 단군 조선 이후 삼국인을 중심으로 배달 민족을 규정하며 서술되어왔다. 그러나 통일신라가 세워진 후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면서 배달 민족의 개념은 한반도 거주인으로 국한되고 말았다. 사실 신라는 백제를 병합하며 그 국토와 백성을 흡수하였으나, 실제로 고구려를 정벌하여 통일했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통일신라의 후손인 우리는 고구려를 상실하면서 배달민족도 남북으로 반분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엄밀히 따지면 큰형이 집을 떠나 따로 살림을 차린 셈이다. 한사군의 설치로 조선이 멸망한 후 우리 민족은 당분간 제대로 된 국가체제를 갖추지 못하다가 제각기 분리 독립된 국가들이 요동과 한반도를 중심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으로 정립되고, 비록 당나라의 후원을 받았지만 삼국의 통일을 신라가 이루었다. 그러나 당의 압력을 물리치고 백제의 대다수 유민과 국토는 신라가 차지하였지만, 대 고구려의 수많은 유민과 방대한 국토는 신라가 흡수하지 못하였음으로 이 통일은 한반도의 일부만을 포함한 불완전한 민족 통일이었다. 고구려의 백성과 영토는 안동도호부의 설치로 잠시 당나라의 지배하에 놓여 있다가, 다시 고구려인을 주축으로 역시 동이족으로서 우리 한 겨레 지맥의 하나로 볼 수 있는 말갈인을 흡수하여 세워진 발해의 통치에 놓여지게 된 것이다. 발해는 해동성국으로 불리면서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하여 그 위세를 떨치다가, 역시 이족의 하나인 선비족으로 구성된 거란의 요나라에 의해 멸망한다. 그러나 발해가 망하였다고 해서 그 유민들이 다 죽거나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후손들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붕괴에서 보듯이 다시 부락단위로 흩어져 살다가 후에 금나라를 세우게 되고, 다시 청나라를 세워서 마침내 동이족의 힘에 의하여 중원천하를 통일하게 되는 것이다. 말갈 여진이란 명칭이 결국 만주족으로 불려지듯이 민족의 개념이란 결국 삶의 터전인 영토와 결부되며, 역사가 진행되면서 계속 분열되어 세계적으로 현재 3,000여종이나 된다. 사실 삼국 이전의 역사를 파괴당하고 상실한 우리는 현재 우리의 민족 호칭조차 중국 사서에 의하여 명명되어 있다. 중국은 사방 변방의 민족을 각각 동이 서융 남만 북흉이라 하여 모두 오랑캐라 부르며, 그들 민족을 화족(華族)이라고 하여 스스로 세계최고의 민족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소위 동이족이라 불리는 우리는 고조선의 영토를 중심으로 성립되어 배달민족이라 자칭하며 수천년동안 중화족과 세력을 겨루어욍다. 동이족으로 본다면 단군 통치아래 동방 조선의 구이가 모두 한 겨레이며, 말갈 여진뿐만 아니라 일본도 왜이족으로서 여기에 포함된다. 비록 역사가 진행되면서 배달민족이 분열되어 현재는 만주족과 한족 그리고 일본족으로 나누어졌다고 볼 수 있지만, 우리는 또한 우랄 알타이 언어 계통의 퉁구스 몽골인종에 속하므로, 더 올라가면 선비족이나 흉노족의 나라로 불리는 북방의 거란과 몽고뿐만 아니라 서방의 티베트 헝가리까지 소위 광역 이족(夷族)에 의해 세워진 나라로서 동족개념에 포함된다고 볼 수도 있다.     네번째 설: 배달이라는 말을하기전에 흉노를 알지못하면 설명할수가 없다. 흉노의기원은 제3대단군 가륵임금이 자신의 동생인 색정을 흉노의 지역에 보내 흉노의 우두머리가 된이후로 색정은 흉노의 시발이 된다. 기원전 2177년전에 색정은 이렇게 흉노의 시조가 되었다. 배달이라는 말의 기원은 흉노제국이 생긴 기원전 204 ~207년에 박타르(바타르)가 건국하고 BC 207~ 216년에 모돈선우가 전조를세워 중원을 누비던시기에 생겨난것이다. 거대한 흉노제국을 건설한 박타르(bakttar)는누구인가? 유라시아의영웅이며 전유럽을 재패했던 그야말로 흉노의 영웅중의 영웅이다. 흉노(shun-nu)는 슝누/순-누 라고불렀으며 고대 알타이어로는 하늘또는 해를뜻한다. 즉 하늘의겨례 태양의족속의 의미를 shun 이라고 불렀다. 슝/순의 정확한발음은 (ㅎ슝)이다 ㅎ과 ㅅ 발음이 섞여불렀다. 때로는 훈,슝,순,슈-웅, 이라고 불렀던것이다. 선비는 AD 216~349 년에 선비씨에의해 후조가 세워진이래, 선비모용씨의 전연 AD 349~370 년에 건국한 모용황은 동호로 불리웠다. 후연 AD 370~ 386 또한 부여 고구리계의 동호가 세운 선비국이었다. 선비,오환족이세운 북위는 AD 386 ~534 년에 단석괴가 세워 통치했었다. 선비 (shun-bi)=슝비,순삐.의 bi는 유일 ,하나라는뜻으로 유일한태양, 유일한천손 이라는뜻이다. 고대알타이어에 하늘과태양을뜻하는언어로 호(hor)(호르)가 있다. 중국화하족이 이호를 昊로 표기했었는데 이것은 지나족이 자신들의 황 皇으로 대항해서 사용했다. 동이의 태양과천신을 의미하는 호 (昊 )에 대항해서 지나가( 皇)을사용 함으로서, 중국에는 황제 (皇帝)가 있었고, 동이족에게는 호천제 昊天帝가 있게 된것이다. 이호(昊)라는 동이계열의발음은 정확하게 ㅋㅎ~ㄹ 이다. ㅋㅎ~ㄹ (ㅋ=高 忽)고~홀 자와 같이 쓰였던 것이다. 그러다 호 ~ㄹ 은 방언체계를가져서 chor ,zor, sor, 등으로 불리게된다. 촐/졸/솔/ ==은 홀본, 졸본, 솔본이 된것이다. 즉 하늘의 태양의 의미이다. 고조선은 원시 알타이어를 사용했다. 흉노(슝노/순노) 선비(순삐/슝삐) 조선(朝鮮)은 chor- sun 초 ~ㄹ 순, 호~ ㄹ 순(hor-shun)또는 소 ~ㄹ순/슝(sor- shun)으로 불렀다. =즉 하늘의 빛나는 태양 이라는뜻이다. 태양의자손 하늘의천손을 자부하는 흉노(슝누), 선비(순삐), 조선(초~ㄹ순) 등 shun계와 또다른 태양족 천손을 자부하는 고제씨(高帝氏)인 쿠리(구리)(코리) qori 계열이 단군왕검(tangur agahan)을 모시고 중국대륙을 위협했다. 이것은 중국의 태양신 황(皇)과 동이의 태양신 호(昊)간의 상징적인대결 이었다. 중국의 화하족이 이 (昊)를 오랑캐호(胡)로 바꿔 써버린것이다. 흉노 (匈努), 선비(鮮卑)처럼말이다. 슝누역시 여러종족이 있었고, 순삐역시여러종족, 촐순/초~슝또한 여러종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하늘의태양신 단군(tangur 탕그르,텡그르)의 후예들이었으며, 태양새(qori 코리)(쿠리)를 똑같은이름으로 부르며 숭배했다. 그리고 玄鳥 qori (코리/쿠리)는 고구려(qori)의 또다른 이름이었고, 화하족의 용과 자웅을 겨뤘던 봉황의 또다른 분신이었다. 그들은 중국에도 있었고 한반도에도 있었으며 일본, 서역, 시베리아 로마, 아메리카, 아프리카에도 있었다. 그들이 어디에 있었던간에 그들은 바타르게레(batar-gere)(배달겨례) 로서 영웅족을 이루어 때론 협력하고 경쟁하면서 상무정신과 기상이 우리피속에 흐르고있다. 그래서 배달(baedal)이란말은 흉노제국을 건설한 유라시아의 절대영웅 바타르(batar)에서 온것이며, 그뜻은 영웅이란뜻이다. 몽골의 수도가 울란바타르(현대어=울란바토르)는 울란=붉은, 바타르(현대어 바토르)는 영웅 이라는뜻이된다. 퉁구스어족에는 아에 자신을 batar (바타르)라고 부르는 민족도 있다. 겨례는 고대알타이어 게레(gere)에서온말이다. 그뜻은 민족 이라는뜻이다. 그래서 바타르게레 (batar - gere)는 영웅민족 이라는 뜻이되는것이다. 바타르게레 (batar - gere) 라고 부르면 우리는 영웅민족 이라고 외치는것이된다. 몽골에가서 바타르-게레 라고 외치면 유식한몽골인들은 금방알아듣는다. 고대알타이어(바타르- 현대몽골어로는 바토르) 게레는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어 다 알아듣는다.
151    죽음학 댓글:  조회:5708  추천:1  2012-09-15
죽음학 문화에 있어서 의 수용 죽음을 의식하고 그것을 문화 중에 받아들이고 있는 점에서 인류는 특이한 생물이다. 모든 인류문화는 죽음에 대해서 어떤 대처법, 또는 죽음을 하나의 문제로 본 경우, 그의 해결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죽음의 기원에 대한 신화적 설명, 사후 세계의 신앙 등은 이 해결을 관념과 공상의 영역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것 이며, 인간의 죽음을 계기로서 행하여지는 의례 즉, 장제의 존재는 상징적ㆍ연극적 표현 영역에서 인류가 이루고자 한 죽음에 대한 해결을 시도를 나타내고 있다. 이런 문제의 설정과 해결의 시도를 일반화해서 이라는 것도 생기는데, 그 깊은 곳에는 수용의 모습을 한 이 숨겨져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죽음을 개인의 인격의 완전한 무화(無化)로 보고, 그 무화에 대한 대상(代償)을 전혀 준비를 하지 않고 있는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후에도 존속하는 영혼과 타계에서의 제2의 생이라는 직접적인 형태를 취하는 경우도 있는 반면, 죽음 후에 이 세상에 남는 자손이나 명성, 또는 생전에 이룬 사적 등의 물상에 의지하는 경우도 있으며, 또한 살아남은 사람들이 사자를 위하여, 또한 살아남은 사람들이 사자를 위해서 행하는 기념행사인 경우도 있는데, 인간의 문화는 반드시 물리적 죽음을 초월하는 어떤 것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 항에서는 미개라고 불리는 문화를 예를 들어서, 죽음의 대상이나 해결로서 여기에 든 세 가지의 방식에 대해서 언급하기로 한다.   영혼과 타계 E.B. 타일러에 의한 애니미즘설에서는, 인간이 신체와는 별도의 개성적 실체(영혼)를 가진다는 이원론적 관념이 꿈의 경험에 의해서 지지되며, 나아가서 꿈속에 이미 죽은 사람의 상을 봄으로서 이 실체는 사후의 존재(사령(死靈))와 결부된다. 즉, 사자가 꿈에 보이는 이상 그(의 영혼)는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설명이 성립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는 타계, 영계의 이미지의 성립으로 유도된다고 한다. 타일러의 설은 너무나 합리주의적인 설명이라는 비판을 받지만, 사후의 존재와 타계의 표상의 발생을 인간의 기억 능력과 심상의 외적투영에서 구한 것은 기본적으로 올바르다. 사령(死靈)으로서 사후에도 인간의 개성이 존속한다는 신앙은 그리스도교 등의 역사종교에서의 영혼불사의 사고방식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미개문화에서는 이 불사를 영원한 것으로 보는 경우는 드물다. 즉 대부분의 경우, 타계에서의 생은 이 세상의 생과 매우 유사한 것으로 이미지 되어 있으며, 그 때문에 영혼도 또한 저 세상에서 죽는다고 생각되고 있다. 이 경우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 불사(不死)를 대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제2의 생(재생)을 대치시킨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동남아시아의 산지민 사회에서 가끔 보이는 관념에 의하면, 영혼은 용해되어서 안개나 비가 되어 대지로 들어와서 곡물을 열매맺게 한다. 이를 먹음으로써 후의 인간은 생활을 계속하는 것이며, 여기에 일종의 윤회사상이 맹아, 죽음에서 생으로 복귀의 모티브를 볼 수 있다.   사회적 대상(代償) 타계에서의 제2의 생이라는 관념이 충분히 전개되어 있지 않은 문화(가령, 아프리카의 목축민사회)에서는 개인의 죽음은 자손의 번영이나 이름의 계승 등 사회적 대상(代償)으로서 일종의 구제를 받는다. 누엘족 사이에서 유령혼으로 알려진 관습은 결혼을 하지 않고 죽은 인물의 명의로 다른 자가 결혼함으로써 거기에서 태어난 아이를 사자의 아이로 보는 제도인데, 재산의 상속 등 경제적인 측면을 별로도 해도, 이로써 사자는 사회적 무화(無化)에서 피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죽음이라는 문제를 사회제도 중에서 매우 교묘하게 순화하는 것 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웃의 딘카에서도 아이를 가지는 것은 불사를 달성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한다. 동남아시아 대륙부 부터 도서부에 걸쳐서 보이는 거석문화 하에서는 거석기념물의 건조가 그것을 세운자의 생(生)의 표시이며,사후 그의 존재가 사회 중에 영원히 남는 것을 보증한다. 이와 같이 사회적 달성으로 죽음을 극복하려는 심리는 세속화된 현대사회에도 해당될 것이다.   의례적 해결 인류에 보편적으로 보이는 현상중 하나에 죽음을 의례로 채색하는 것이 있다. 이중에는 가끔 죽음을 상징적으로 극복하는 생 또는 재생의 모티브가 나타나는데 그 극단적인 예는 멜라네시아의 몇 민족에서 행하여지고 있다. 유족이 사자의 육체의 전부 또는 일부를 먹는, 소위 족내식인(族內食人)의 의례이다. 이는 사자의 생자에 대한 직접적 동화에 의한 죽음의 극복인데, 그 이외에도 죽음의 의례는 성적 풍요의 표현(가령 난교)이나 유희의 과잉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해서 의례는 죽음을 생으로 치환 하는 장치가 된다. 때로는 사후에 성대한 의례가 행하여지는 것 자체가 큰 의미를 가지는 경우도 있다. 슬라웨시에 사는 트라쟈족은 낭비적이라고 할 정도의 제사를 사자를 위해서 베푸는데, 이로써 개인의 죽음은 사회성원과의 광범위한 관계를 획득하는 것이며, 죽음을 생자의 삶 중에 적극적인 의의를 가진 것으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의 관념 인간의 죽음에는 자기의 죽음과 타자의 죽음의 양면이 포함되어 있는데, 현실적으로는 그중 한 쪽에 중점을 두어서 보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그 중점을 두는 방법의 차이에 따라서 죽음의 관념이나 죽음에 대한 태도에 여러 가지 변화가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타자의 죽음은 관찰할 수 있지만, 자기의 죽음 또는 그 관념은 일종의 극한적인 경험으로써 상상이나 표상의 영역에 결부되어 있다. 가령 죽음에 관한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인식과 종교적ㆍ철학적 인식의 차이는 그와 같이 해서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위의 두 가지 입장에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가 한쪽에서 행하여졌는데 그중에서 죽음에 관한 다양한 신화나 의례가 발생하고, 독특한 신체론이나 우주론이나 타계관이 형성된 것이다. 이어서 죽음의 현상은 이 지상에서 더러워진 육체의 소멸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있는 동시에, 죽음의 현상은 생의 현상과 표리의 관계를 유지해서 사후의 세계와도 상관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있다. 즉, 죽음을 생과의 절단을 상징하는 절대점 이라는 것이 전자이며, 이에 대해서 생의 세계를 사후의 세계로 접속하는 매개점이라는 것이 후자이다. 전자의 절대점을 강조한 것은 서구의 그리스도교 문화권이며, 그에 대해서 후자의 매개점을 강조한 것은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의 불교문화권이다.   공자, 불타, 그리스도 그런데 중국의 공자는 죽음을 미경험의 영역으로 위치 지었는데, 인도의 불타는 죽음을 열반으로 보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 위한 출발점으로 생각했다. 이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희생되고, 죽어서 다시 살아났다. 즉, 대략적으로 말해서 공자는 죽음을 불가지(不可知)의 대상으로 보고, 불타는 그것을 생의 충실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마지막은 죽음이 재생에 이르기 위한 단절로 보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죽음에 대한 세 가지의 태도는 시대를 초월해서 지역을 초월해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며, 신화나 예술, 문화이나 철학 등의 각종 관념이나 발상의 모태도 되었다.   서구에서의 그러나 일반적으로 죽음에 대한 자각이 심화된 것은 중세였다. 공자나 불타나 그리스도 등이 활약한 고대 세계에서는 죽음을 천체의 운행과 같은 불가피한 운명으로 보는 관념이 우세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중세 세계는 죽음에 대한 의식의 반성을 통해서〈죽음의 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발전을 본 때였다. 즉 J. 호이징거의 『중세의 가을』에 의하면, 유럽의 중세를 특징짓는 죽음의 사상은 13세기 이후에 성행한 탁발수도회의 설교에서 주요한 테마 ㅡ 의 훈계와, 14~15세기에 유행한 을 주제로 하는 목판화 의해서 상징된다고 한다. 당시의 그리스도 교회가 일상적인 설교에서 반복적으로 선전하였던 죽음의 사상은 육체의 부패라는 표상과 호응하였다. 육체의 멸시가 의 성스러운 합창으로 접속된 것이다.   죽음에 대한 태도의 유형 프랑스의 역사가 아리에스(Philippe Aries)의 『죽음과 역사』에 의하면, 유럽의 중세야마로 이 발견된 시대였다고 한다. 그의 저작은 죽음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역사적으로 개관한 것인데, 그것은 결국 현대에 이르러서 태도로 바뀌었다고 한다.
150    "가지 말라"고 할까? "편히 가라"고 할까? 댓글:  조회:5766  추천:1  2012-09-15
생명의 마감길 가는 이에게 "가지 말라"고 할까? "편히 가라"고 할까?   1000여명 임종환자 지켜본 호스피스 전문의가 인간의 죽음을 말한다 드라마 주인공처럼 예쁘게 죽는 사람 없다고… 고독사 두려워 말고 혼자서도 즐겁게 살다가 안전하게 죽을수있는 시스템을 만들라.   삶의 마지막에 마주치는 질문 "비 오는 아침, 환자의 호흡이 멈추는 것을 조용히 지켜봤다. 오후에는 여러 가정을 방문했다. 작은 집, 큰 집, 따뜻한 분위기의 집, 조금은 차가운 분위기가 느껴지는 집. '선생님, 이제 전 죽는 건가요?' '영양제라도 더 놔주세요. 어떻게든 해주세요.' 부딪칠 곳 없는 분노와 슬픔을 온몸으로 받아낸다. 어제 밤부터 오늘 새벽까지 3번이나 응급왕진이 있었다." 오츠 슈이치(大津秀一·35)는 호스피스 전문의다. 도쿄 세타가야구에 있는 완화의료 클리닉에서 죽어가는 환자들을 돌본다.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1000명 넘게 임종하고 쓴 책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21세기북스)가 일본에서 20만부, 한국에서 40만부 팔렸다. 이 책은 후속판이다. 간결한 문장은 여전하지만 바라보는 방향은 전혀 다르다. 전작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뤘다. 이 책은 '인간은 어떻게 죽는가'를 들여다본다. ◇당신은 TV에서 본 것처럼 죽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암 환자는 마지막 2개월까지 배변·보행 기능을 유지한다. 심·폐질환 말기 환자는 몇 차례 위험한 고비를 넘긴 뒤 급속도로 최후를 맞기 쉽다. 치매와 노쇠처럼 진이 빠지게 기나긴 루트도 있다. 어느 쪽이건 남은 수명이 한 달 안쪽이 되면, 주위의 도움 없이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된다. 동시에 극심한 권태감이 찾아온다. 수명이 일주일 이하가 되면 자주 의식이 혼미해진다. 시간과 장소가 뒤죽박죽 되고, 가족도 왕왕 못 알아본다. 죽음을 24~48시간 앞두고 최후의 고비가 찾아오는데, 의학의 힘을 총동원해도 이때의 고통은 없앨 수 없다. 이 고비를 넘기면 온화한 시간이 온다. 드라마 주인공은 맑은 정신으로 유언하고 스르르 눈을 감는다. 현실에서 그런 일은 극히 드물다. ◇가족도 피가 마른다 오츠는 40대 주부의 임종을 지켜본 경험이 있다. 초등학생 장남이 막 숨을 거둔 엄마를 향해 울부짖었다. "지금 죽어버리면 어떡해! 살 수 있다고 해놓고!" 울던 아이를 진정시킨 건 동생이었다. "형, 이제 그만해."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던 아버지가 아직 따뜻한 시신을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잘 버텨줘서 고마워. 이제 우리는 서로를 위해주면서 잘 살아갈게." 오츠의 경험상,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면서 단번에 "잘 가"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처음엔 누구나 "가지 말라"고 매달린다. 시간이 흐르면서 차차 "뒷일은 걱정 말고 편히 가라"고 말하게 된다. 환자의 숨이 끊어지자마자 "○○○씨가 ○시○분에 사망하셨다"고 선언하는 의료진이 있다. 오츠는 가족이 죽음을 받아들일 때까지 1시간이든 2시간이든 기다려주고 있다. ◇사무라이와 작별하는 법 연로한 CEO가 오츠에게 불평한 적이 있다. "면회객이 밀려들지만, 다들 똑같은 얼굴로 빈말을 늘어놓을 뿐이야." 어느 날 한 청년이 문병 왔다. 청년이 아무 말 없이 앉아만 있자, CEO가 면박을 줬다. "말도 안 할 거면 뭐하러 왔나. 어서 가게." 청년이 그제야 싱긋 웃었다. "화내시는 걸 보니 여전하시네요." 오츠가 보기에 문병이란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다. 청년은 상대방이 이야기하고 싶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필요한 만큼만 말하고 갔다. CEO는 두고두고 이때 일을 유쾌하게 회상했다. 메이지 시대의 정객 가쓰 가이슈가 중병을 앓는 사무라이 야마오카 뎃슈를 문병 간 일이 있다. 가쓰는 "감회가 어떻냐"고 물었다. 야마오카는 "이승에서 볼일이 끝났으니 먼저 가보겠다"고 했다. 가쓰는 간결하게 답했다. "그런가, 그럼 편한 마음으로 가시게."(124~125쪽). ◇고독사는 나쁘다고 쉽게 말하지 말라 그러나 현대인은 좀처럼 담백하게 죽음을 맞지 못한다. 고령화와 핵가족화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노인과 함께 사는 사람이 적어졌다. 이런 사회 변화가 대부분의 사람들을 '죽음의 초보자'로 만들어 버렸다.(108쪽)이런 풍조가 현명할까. 오츠가 보기에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죽음을 깨달을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러려면 우선 떠나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 모두 죽음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고독사를 두려워한다. 혼자 사는 사람에게 "고독사는 슬프니까 어떻게든 가정을 꾸리라"고 다그치기도 한다. 오츠가 보기엔 현명치 않다. "고독사는 불행하다"고 지레 못박기보다, 혼자서도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게 낫다. 문득 궁금해진다. 오츠는 직업이 '임종'인 남자다. 아무리 많은 죽음을 봐도 그때마다 새롭게 무력감이 밀려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음 환자를 돌보러 힘차게 일어선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삶이 괴롭다는 분들이 많다. 살아가는 데 힘이 되는 방법을 함께 생각하고 싶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을 생각하는 일이다." 인생은 유한한 만큼 멋지게 살지 않으면 안 된다.  
149    (연변방송) 2012장례서비스 시장이 무엇이 문제? 댓글:  조회:2587  추천:0  2012-09-13
연변방송국 프로그램 9-15일 프로 현회장님 인터뷰 내용: (15분 좌우)   ※(2009년에 연변주 정부와 길림성 정부에서는 《조선족장례풍속》을 각기 주급과 성급의 무형문화재로 확정,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가 보호책임단위로 지정되였고, 현용수 회장이 대표성 전승인으로 지정되였음)   현재 주내 상조시장의 현황 (상조시장발전력사, 현존의 상조관련 업체 경영상황, 장례용품시장현황,상조서비스내용 등등)   【답】중국에서 이라고 하면 좀 생소한 술어입니다. 相助를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서로 돕는다’는 뜻입니다. 상조서비스는 1947년에 일본에서 기원하여 1982년에 한국에 인입되였으며 혼인이나 장례 등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관혼상제 행사에 따르는 비용부담을 줄이기 위해 월부 형식으로 일정한 금액을 일정기간내에 납부하고, 나중에 행사가 있을 때 가입한 업체로부터 상관사무에서 우대표준으로 제공받는 종합적인 서비스를 말합니다. 상조업체들은 원래 장례는 물론이고 결혼이나 돐잔치, 회갑 등 가족행사를 모두 다루었지만 대부분은 수익이 가장 높은 장례서비스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은 라고 하면 보통 장례업체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연변에서도 과거에 민간에 황두월이요, 상여계같은 장례호조 조직이 있었는데 상조서비스업의 원시적인 연변모델이라고 하겠습니다. 중국에서는 현재 장례항업을 정부 민정부문에서 주관하고 있습니다. 1997년에 국무원에서 를 반포하고 일부 소수민족을 제외하고 전국적으로 조건이 되는 지방에서는 일률로 화장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유체운반, 유체보관, 유체화장 등은 기본 빈장항목으로 규정하고 정부에서 주관하는 빈의관에서 책임지고 집행하며 그외의 선택성 항목(장례용품, 염습, 장례의식 등)은 원칙상에서 시장관리를 실시하고 있는데 이부분이 바로 소위의 상조업체들에서 할수있는 일들입니다. 현재 연변의 장례항업의 현황을 살펴보면 정부에서 화장터, 빈의관, 납골당 등을 책임지고 운영하고 있으며, 민간의 장례업체라고 말하자면 각 지방에서 한족들이 경영하고 있는 상시옷 상점들이 전부인데 장례서비스 업체로서의 규모와 공능을 아직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조선족 고유의 장례풍속은 오늘에 와서는 거의 소실되여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변조선족은 이 근년에 출국하고 관내로 간 사람들이 많아 지면서 지방에는 혼자사는 로인들이 대량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연변에는 아직 장례서비스 사회기제가 건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정에서 일단 상사가 나면 아직도 가정에서 책임지고 구체 장례사무를 처리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사망한지 며칠후에 발견되거나 유체의 가속을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현재 이런 딱한 사정이 자주 발생하는데 이에 비추어 조선족 장례서비스 사회기제를 건립하는 것이 당면의 급선무로 나서고 있습니다. 오늘까지 조선족들은 상시옷과 염습에서는 자기의 장례풍속을 희미하게 나마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상시옷을 비롯한 장례용품은 개인상점에 가서 높은 값으로 사야만 하고, 염습 등 장례서비스는 아무런 훈련도 받은적 없고 아무런 예속도 없는 민간인에게 맡겨 처리되기 때문에 그 질량을 보증하기 어렵고 비용표준을 장악하기 어렵습니다.   현재 주내 상조시장에는 어떤 문제점들이 존재하는가?   【답】현재 주내 상조시장이라고 말하자면 각 지방에서 주로 한족들이 경영하고 있는 상시옷 상점들인데 장례서비스 업체로서의 규모와 공능을 아직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으며 많은 문제점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첫째; 상시옷 품목이 구전하지 못합니다. 둘째; 상시옷 구조가 합리하지 못합니다. 세째; 상시옷 가격이 합리하지 못합니다. 네째; 조선족 염습의 기술상에 표준이 없습니다. 다섯째; 조선족 장의사 배양과 관리기제가 없습니다. …………………………………   주내 장례서비스비용은 엄청나다. 상조시장의 용품가격이 비싼 반면, 서비스는 전면적이지 못하고 만족도가 낮은데, 이렇게 상조시장이 규범화되지 못한 원인은 무엇인가?   【답】첫째; 조선족 장례서비스 사회기제가 건립되지 못하였습니다. 내지의 대중도시의 정부 빈의관에서는 운구, 보관, 화장 등 기본빈장항목만 취급하고 기타의 장례사무는 기본상에서 가두판사처를 단위로 하는 빈의복무소를 통하여 처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연변에는 아직 이런 사회기제가 없습니다. 둘째; 조선족 장례서비스 항목이 아직 규범화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장례업계에서 합법적 지위가 없습니다. 빈의관에서 한족들의 장례서비스 항목은 모두 항업표준이 있고 장의사 합격증 관리기제가 있으며 정부에서 규정한 수금표준까지 있지만 조선족 장례서비스 항목은 이런것이 없습니다. 세째; 조선족 장례풍속을 보호하는 구체적인 법률의거가 없습니다. 1997년에 국무원에서 《빈장관리조례》를 반포하고 빈장개혁을 실시한 이래 각 성, 시, 자치구로부터 각 지방의 지급시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기의 《빈장관리방법》을 제정하고 있는 형편에서 소수민족 민속문화 보호과제가 특히 복잡한 우리 연변에서는 오히려 오늘까지도 자기의 《빈장관리방법》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연변의 조선족 빈장관리는 부득불 조선족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없는 《길림성빈장관리방법》에 기준하여 실시되기 때문에 조선족의 장례문화는 자기의 합법적 지위를 잃게 되였으며 조선족의 장례시장은 규범화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 주내에는 전문적인 상조회사가 없이 장례용품상점에서 장례서비스를 대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상조시장이 혼란스럽고 규범화되지 못한 원인중 하나다. 앞으로 우리 주에도 전문적인 상조회사가 필요하지 않은가?   【답】우리는 앞으로 우리 주에서도 전문적인 상조서비스가 필요하다고 인정되여 지금 각 방면으로 적극적으로 탐색하고 있는 중입니다. 앞으로 우리 주에서 상조서비스를 실시하자면 먼저 적어서 다음과 같은 몇가지 조건이 구비되여야 한다고 봅니다. 첫째; 연변에서 장례서비스 사회기제가 건립되여야 합니다. 이 목적의 실현을 위하여 우리는 지금 상관부문과 함께 연길시 지역별로 《빈의복무소》설립사항을 토론하고 있는 중입니다. 둘째; 《연변조선족자치주빈장관리조례》가 나와야 하며 조선족 장례풍속을보호하고 관리하는 상관 세칙이 나와야 합니다. 이것은 주 인대에서 해야할 일들입니다. 세째; 조선족 장례풍속이 간편화, 규범화, 합법화 되여야 합니다. 이 목적을 위하여 우리는 《조선족 장례,제사 지도서》를 편찬하고 있는데 지금 진일보 완미중에 있습니다.   현재 주내 상조시장의 구체적 상황에 비춰 정부부문의 어떤 감독관리가 필요하다고 보는가?   【답】선택성 장례서비스는 시장관리를 실시하기 때문에 정부에서 보통 지나친 간섭을 하지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방면에 존재하는 문제점들을 해결하자면 우선 장례서비스 사회기제를 건립하고 장례서비스에 종사하는 형식을 개인상점 차원에서 《빈의복무소》나 《유한책임회사》차원으로 승급시켜야 합니다. 그래야만 장례서비스 시장을 효과적으로 감독관리할수 있습니다.   주내에 전문적인 상조회사가 나타난다면 우리 주 실정에 맞춰 어떻게 경영해야 한다고 보는가?   【답】상조업무는 어느정도 보험업무와 비슷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첫째; 약정금액을 완전납부전에 행사치르게 되면 모자라는 부분을 일차성으로 내야합니다. 둘째는 나라의 상관 《보험법》이 적용되지 않으며 회사가 파산되거나 페업할 경우 보상받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일단 상조업무가 시작되면 많은 사람들의 리익과 관계되기 때문에 우선 엄격한 사회관리기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일본이나 한국의 모식을 그대로 옮겨와 실시할것이 아니라 우리 중국과 연변의 실정에 맞게 조절해야 한다고 봅니다. 조선족 장례서비스 사회기제를 건립하고 앞으로 상조서비스 업체를 운영하여 보고 싶은 분들은 우리와 련계하여 주십시요.   이상.
148    운수보기, 꿈해몽, 이름짓기 댓글:  조회:4311  추천:0  2012-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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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조선족 장례복무 사회기제 건립방안 댓글:  조회:3747  추천:0  2012-08-29
关于建立朝鲜族殡仪服务社会性机制的方案   2009年6月,延边州政府和吉林省政府将“朝鲜族丧葬习俗”分别确定为州级和省级的非物质文化遗产,保护责任单位指定为延边朝鲜族礼仪研究会,州级代表性传承人指定为玄龙洙先生。 2011年6月1日,国家正式施行《非物质文化遗产法》,从此,“朝鲜族丧葬习俗”的保护工作和传承活动也有法可依了。   延边朝鲜族处理丧事的现状 目前,延边朝鲜族处理丧事还是以家庭为主体进行,延边境内以城市为中心的大部分地区已经基本上施行火葬,遗体搬运、遗体保管、遗体火化等三项服务项目规定为基本殡葬服务项目,一律归政府殡仪馆负责执行,入殓、守灵、遗体告别、安神祭祀等补助性殡葬服务项目方面在各地殡仪馆没有特为朝鲜族丧户设立的设施和项目,一律按统一规格、统一标准提供服务。 如今,延边朝鲜族保存下来的传统色彩的丧葬习俗主要表现在寿衣和入殓上,家里有临终病人,寿衣和入殓是每一家朝鲜族家属首要关切的事情。 家里出丧事或即将出丧事,朝鲜族家属一般到市面的寿衣店里去购买相关朝鲜族寿衣,并找一位民间入殓人员约定相关入殓事宜。入殓结束以后联系殡仪馆灵柩车把遗体运走,保管在殡仪馆的冷藏箱里,很少有安排夜间守灵,一般都回家,在家设灵座接待吊唁客人。出殡当天先把遗体迁移到殡仪馆告别厅,举行简单告别仪式,而后把遗体直接送到火化炉火化,接到骨灰盒后家属和客人一同到殡仪馆后院去举行安神祭祀,最后把骨灰盒寄放在殡仪馆纳骨堂或其他处理。这是延边朝鲜族丧户举行葬礼的基本过程。   二、延边朝鲜族在办丧方面的问题和困难 1、熟悉朝鲜族丧葬礼仪规范的老年人大多已经过世,办丧时家族里没有人指导具体丧葬礼仪规范,葬礼的严肃性受到影响,不能充分寄托家属对死人的哀思。 2、办丧需要很多人手,民间固有“办婚可不去,办丧不可不去”之说法。如今的朝鲜族出国的人多了,进城的人多了,进关内的人多了,一旦家里出丧事,往往欠人手搭理后事,而且,这种情形今后会越来越严重。 3、年轻人没有充分时间照顾老人,在家守空巢的孤寡老人越来越多,而这些老人一旦在家突然死亡,很难及时发现。 4、寿衣等殡仪用品和入殓等殡仪服务的费用过高,服务内容没有规范,服务质量不能保证。 5、延边境内殡仪馆里没有特为朝鲜族丧户设立的殡葬服务设施和项目,朝鲜族只能因地发挥,勉强完成所谓的朝鲜族式的葬礼。   三、我们的建设性方案 1、建立朝鲜族殡仪服务社会性机制 2009年,民政部《关于进一步深化殡葬改革促进殡葬事业科学发展的指导意见》中明确指出;“政府主导,市场参与。…对基本殡葬服务(运输、保管、火化—编者注),政府要加大投入。对其他选择性殡葬服务(入殓、用品、仪式等—编者注),注重发挥市场调节作用,满足人民群众多层次需求。” 根据民政部的上述《指导意见》精神,我们准备建立朝鲜族殡仪服务社会性机制,主要经营选择性殡葬服务项目,在筹备阶段先以“延边朝鲜族礼仪研究会白花相助服务中心”(已有工商注册),的执照进行服务活动,筹备一些运营资金,待到今后确保一定业务量以后,正式注册成立正规的朝鲜族殡仪服务机构。 社会效益; 我们认为建立朝鲜族殡仪服务社会性机制是时代的需要,可以为朝鲜族解决办丧难问题和传统葬孝文化保护难问题。我们力求达到,只要朝鲜族丧户给我们服务中心打来一个委托电话,此次丧葬事务就可以圆满得到解决。我们不断提高文化素质和业务素质,把朝鲜族殡仪服务社会性机制长期坚持下去,让健康的朝鲜族葬孝文化长期发扬光大。 经济效益; 1、延边市场;延吉2500户/年,其他1500户/年。 2、经营收入;500元/户×4000户/年=200万元/年。 2、设置朝鲜族告别厅。 现在延边地区殡仪馆施行的告别仪式都是旋转式瞻仰形式,我们不反对朝鲜族也举行这种告别仪式,今后也不会反对。我们主张的是朝鲜族在不违背《殡葬管理条例》的前提下,应该拥有举行民俗葬礼的自由,应该拥有选择的权利,只允许举行一种形式的仪式而没有选择的余地,这对朝鲜族来说不太公平。就此,我们已经向州民政局提出了“在延吉殡仪馆设立朝鲜族告别厅的建议”,并得到了支持。我们正在各方寻找实现这一方案的有效方法。 3、建立朝鲜族殡葬服务从业人员培训机制。 如今社会上从事朝鲜族殡葬服务业的人员基本上是文化素质浅薄的社会闲散人员,他们是为了生计不得不选择这一行的。对这部分人实行有组织的培训制度和持证上岗制度,这对于实现朝鲜族殡葬服务行业规范化和提高朝鲜族殡葬服务质量方面有着很积极的意义。 4、建立朝鲜族殡仪服务“相助”制度。 所谓的“相助”制度起源于日本,已经在日本和韩国运转得很成熟,是解决当代办丧难问题的有效制度,今后我们也可以试一试。 5、建立朝鲜族殡仪服务全国联销机制。 延边以外,在东北三省也有不少朝鲜族聚居地点,我们可以根据我们的优势,建立朝鲜族殡仪服务全国联销机制。 6、利用互联网进行面对全国朝鲜族的网上殡葬用品服务。 当今的朝鲜族逐步变成城市民族,在全国范围内的凡是发达地区里都有不少朝鲜族人生活,我们可以利用互联网进行面对全国朝鲜族的网上殡葬用品服务。 7、今后有雄厚资力的时候可以考虑申请建设朝鲜族公墓。 有一天朝鲜族有自己的公墓也是很美好的事情,今后有雄厚资力的时候可以考虑申请建设朝鲜族公墓。   四、我们的困难和问题 1、殡仪领域是政策性很强的领域,关于“朝鲜族丧葬习俗”传承活动方面,因为没有政府的针对性文件,卫生部门、民政部门、延边医院等有关部门和单位无法制定有效的配合或协助的相关制度。 2、有关朝鲜族殡葬管理方面没有针对性的政策或法律,例如,延边地区至今还没有出台有关朝鲜族的《殡葬管理方法》,因此,朝鲜族在殡葬习俗方面的一些合法权益得不到认可和保护,我们的“朝鲜族丧葬习俗”传承活动也得不到有关部门的有效配合和协助。 3、经费来源没有保障。进行“朝鲜族丧葬习俗”传承活动需要很多经费,例如;办公经费、传承活动经费、建设传承基地经费…等等,这些经费只能靠我们的有偿服务收入来解决。可是如今我们的市场竞争能力和经营能力都很有限。 4、目前,朝鲜族寿衣、入殓等选择性殡葬服务市场被社会的一些寿衣店老板所垄断,成为他们谋取暴利的手段,搞独立王国、抢生意、乱收费等泛滥成灾,我们的合法传承活动受到很大阻力。   五、我们的解决方案 1、我们准备向州文化局(我们的主管局)提出建议,并共同努力,争取出台一份关于扶持“朝鲜族丧葬习俗”传承活动的州政府办公室文件,保障我们的工作正常进行,为出台延边的《殡葬管理方法》探索必要的经验。 2、我们多方联系州内外朝鲜族企业家、事业家和各界人士,向他们详细解释我们事业的情况和意义,争取投资、赞助、合作等形式的资金和人才支持,实现我们方案的早日启动、实施。 启动资金需求;10万元 启动资金用途;广告宣传、购进殡仪用品、朝鲜族告别厅。 3、我们通过各种渠道争取资金,建立丧葬费用补助基金,专门用于那些无依无靠的孤寡老人的丧葬费用。         延边朝鲜族礼仪研究会 二○一二年九月一日   조선족 장례복무 사회기제 건립방안 방안종지; 1/ 조선족의 장례 치르기 어려운 문제를 해결,                2/ 조선족의 장례비용을 경감                3/ 조선족 장례문화의 건전한 발전을 보장 방안배경; 1/《조선족장례풍속》이 주급,성급 무형문화재로 확정                2/《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가 보호잭임단위로 지정                3/《조선족 전통장레,제사》대표전승인 임명 주관부문; 연변주 문화국 등기비준; 연변주 민정국 주체단위;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집행기구; 백화상조(장례)복무중심 복무범위; 수의등 장례용품, 염습, 제사, 면례, 장례대리…등 시장규모; 조선족 상가 연길지역;2500집/일년, 기타지역;1500집/일년,                연변지역 도합4000집/일년 영업규모; 200만원/일년 ……………………………………………………………………………… 유치자금; 10만원 주요용도; 텔레비광고, 영업장소비용, 영업물품비용, 기타 보상방법; 첫번째방안;                1/ 투자인의 본금을 2년에 나누어 물어준다.                2/ 장례복무 매 한건당에 100원씩 투자인이 수입한다.                (만부하의 경우 연변지역에서 적어서 40만원/일년)                두번째방안;                합작의 형식으로 유한책임회사를 새로 건립한다. 구체사연; 면담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2012년8월30일 자문전화; 138-9438-7438  
146    연변조선족 빈장의 현황과 앞으로의 방향 댓글:  조회:3924  추천:0  2012-08-26
연변조선족 빈장의 현황과 앞으로의 방향    1/ 연변조선족 빈장의 개황 1966년에 시작된 문화혁명 이전까지 중국의 조선족들은 그래도 기본상에서 조선반도에서 가지고 들어온 전통 장례제도를 실행하였다. 마을마다 丧舆契와 같은 민간 상조 조직들이 있었으며, 집체로 자금을 내여 丧舆를 만들어서는 마을에서 떨어진 편벽한 곳에 상두막을 지어놓고 보관하였으며 도감을 한 사람 선발하여 마을의 장례행사를 관리하게 함으로써 일단 마을에서 사람이 죽게되면 굴심을 할 사람과 상여, 그리고 상여를 멜 사람들까지 통일적으로 배치하였다. 마을에서 제일 나이가 많고 덕망이 높은 좌상어른은 마을에서 진행되는 매차례의 장례의식을 엄격히 감독하였으며, 집집의 제사에 대하여서도 구체적으로 지도하여 주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가풍을 다스리고, 문풍을 단정히 하고, 민족의 우량한 전통이 대대로 전해지도록 보증 하였다. 문화혁명이 시작되면서 조선족 전통문화에서 제일 먼저 재앙을 당한것이 상여이다. 1967년 《네가지 낡은것을 타파》하는 운동이 터지면서 연변각지의 상여는 거의 같은 시간에 각지의 반란파들에게 의하여 학교마당에 끌려나와 두들겨 부서지고 모조리 불타 버리고 말았으며 조선족 장례문화는 훼멸성적인 타격을 받았다. 그후에는 간단한 운구용 소수레로 상여를 대체하고, 장례제도를 최저한도로 간단하게 하였으며, 일체 소위의 봉건색채를 띤 장례 절차를 일률로 금지하였다. 그후로 부터 조선족 전통 장례문화는 점차 빛을 잃게 되였다. 문화혁명이 결속된후, 80년대부터 시작하여 나라에서는 성시를 중심으로 조건이 되는 지방에서는 모두 유체를 화장 할것을 제창하였다. 초기에 대부분 조선족 주민들은 감정상에서 이렇게 화장하는 장례제도를 일시 접수하기 어려워 하였다. 그러나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1985년에 국무원에서는 《빈장관리에 관한 잠행규정》을 내오고, 1997년에 이르러 정식으로 《빈장관리 조례》를 출범 시키면서, 성시를 중심으로 조건이 되는 지방에서는 일률로 유체를 화장한다고 규정하였다. 그러면서도 《조례》의 총칙 제6조에는 《소수민족의 장례풍속을 존중하며, 자원적으로 장례풍속을 개혁하려는 것을 타인은 간섭하지 못한다》고 특별히 규정하여 놓았다. 나라의 빈장개혁 정책에 따라 연변에서도 지난세기 80년대부터 정부의 엄격한 통제하에 연길부터 시작하여 장의관을 건설하고 화장을 실시하게 되였다. 오늘에 와서 이미 증명된바와 같이 빈장개혁을 실행하여 화장제도를 실시한것은 나라와 백성에게 리롭고 후손만대에 깨끗한 환경을 물려주는 지속발전을 위한 조치의 하나였다. 여기서 반드시 한가지 명확히 짚고 넘어가야 할것이 있는데 그것은 火葬 역시 우리 조선족 전통장례풍속의 한가지라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은 조선족 전통장례풍속은 土葬이며 오늘의 빈장개혁이란 토장을 화장으로 개혁하는 것이라고 단순히 여기는데 기실은 그런것만이 아니다. 우리민족은 력사상 고려시기(기원918년~1392년 총473년)에는 국교가 불교였으므로 줄곧 화장을 실시하여 왔으며 리씨조선시기(기원1392년~1910년)에 들어와서 국교가 유교로 바뀌면서 비로서 토장을 실시하게 되였다. 고려문화가 우리민족 전통문화중의 중요한 한부분이라고 할때 火葬 역시 우리민족의 전통장례풍속의 중요한 한가지 내용이라고 해야 한다. 토장이냐? 아니면 화장이냐? 하는것은 기실 빈장문화에서 안장형식의 한가지일뿐 전반 빈장문화를 대표하지 못한다. 빈장문화에는 안장형식외에도 많은 례의범절과 전통리념들이 포함되여 있다. 빈장개혁에 따라 그에 상응하여 빈장문화도 개혁되여야 함은 의심할바 없다. 그러나 빈장문화 개혁에 의하여 한개 민족의 빈장문화가 완전히 사라지게 되였다면 그런 개혁은 완미하게 성공적인 개혁이라고 할수없다. 국무원에서 《빈장관리 조례》를 출범시킨후 전국의 각 성,시,자치구로부터 각 지급시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지역의 특수 실정에 따라 각기 그 지역의《빈장관리 방법》을 제정하여 그 지역의 빈장관리 사업을 지도하고 있다. 하지만 연변은 전국의 유일한 조선족 자치주이면서도 오늘까지 자기의 《빈장관리 방법》을 제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연변의 빈장관리 사업은 줄곧 조선족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없는 《길림성 빈장관리 방법》에 기준하여 진행될수밖에 없었다. 지금 연변의 4대 장의관에서는 조선족들을 위하여 따로 설치한 장례시설이라곤 한가지도 없으며 장의관의 여러가지 복무항목중에도 조선족 장례풍속에 관한 내용은 한가지도 없다. 이것이 조선족 장례문화가 사회의 중시를 받지 못하고 오늘처럼 거의 근절의 위기에 처하게 된 근본원인이라고 하겠다.   2/ 연변조선족 빈장의 현황 목전, 연변조선족들의 빈장사무 처리는 여전히 가정을 기본단위로 하여 진행되고 있다. 연변경내에서 지금 성시를 중심으로 대부분 지역에서는 이미 보편적으로 화장을 실시하고 있는데 유관규정에 따라 유체운반, 유체보관, 유체화장, 등 세가지를 기본적인 빈장복무항목으로 지정하고 일률로 정부가 주관하는 빈의관에서 책임지고 집행하며, 령구지키기, 유체고별, 안신제사, 등 보조성 장례복무항목에 대하여서는 각지 빈의관에서 조선족에 관한 항목이 따로 없이 일률로 통일규격, 통일표준으로 복무를 제공하고 있다. 지금 연변조선족들이 보존하고 있는 전통색채의 장례풍속은 주요하게 상시옷과 염습에서 많이 표현된다. 그리하여 집에서 상사가 나면 상시옷과 염습은 매개 조선족 상가에서 우선 관심하게 되는 일로 되여있다. 가정에서 상사가 나게 되면 조선족 상가에서는 일반적으로 거리의 상시옷상점에 가서 조선족 상시옷을 살수 있는데 보통 그곳에서 염습과 기타 상관 복무까지 계약할수 있다. 염습이 끝나면 빈의관에 련계하여 령구차를 불러와 유체를 실어 가서 빈의관의 랭동보관상에 보관한다. 지금 조선족들은 보통 밤에 령구를 지키지 않으며 집에 돌아와서 령좌를 차려놓고 조문객들을 맞이하며 기타 상관 행사들을 진행한다. 장례날에는 유체를 빈의관 고별청에 옮겨다 놓고 간단한 고별의식을 마치고 직접 화장실에 맡기여 화장한다. 빈의관 뒤울안에 많은 제단을 만들어 놓았는데 골회함을 남기든 남기지 않든 안신제사는 기본상에서 모두 지내는데 일반적으로 유가속과 전체 장례객들이 모두 참석한다. 안신제사를 마치고 골회함을 납골당에 맡기고는 유가속에서는 장례객들을 위로하여 식당에 가서 한끼를 대접한다. 이것으로 장례는 기본상에서 끝난것으로 된다.   3/ 연변조선족들이 장례를 치르는 과정의 문제와 곤난 첫째; 조선족 장례규범을 아시던 선배님들이 이미 모두 사망하고 계시지 않으므로 가족에서 장례를 치를때 구체적으로 장례규범에 대하여 지도해줄 사람이 없다. 그리하여 장례행사가 엄숙성이 떨어지고 초라하게 되며 유가족의 슬픈마음을 충분히 위로해 주기 어렵게 된다. 둘째; 자고로 장례를 치르는 데는 많은 일손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민간에는 《동네 결혼잔치에는 가지않아 괜찮지만 동네 장례집에는 꼭 가야한다.》는 설법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조선족들은 출국하고, 시내로 가고, 관내로 들어간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일단 가정에서 상사가 나면 장례를 돌볼 사람들이 모자라 쩔쩔 매게 된다. 앞으로 이런 상황은 점점 심해갈 것이다. 세째; 지금 연변의 조선족 사회에서는 혼자서 빈집을 지키는 로인들이 많아지면서 만년에 혼자서 살다가 혼자서 죽는 고독사 시대가 바야흐로 도래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혼자사는 로인들이 어느날 갑자기 집에서 사망하면 제때에 발견하기 어렵다. 네째; 상시옷 등 장례용품과 염습 등 장례복무의 비용이 너무 비싸며, 장례용품과 복무내용에 표준이 없고, 그 질량을 보장하기 어렵다. 다섯째; 빈의관에 조선족 장례시설과 조선족 복무항목이 따로 없으므로 조선족들은 부득불 빈의관에서 통일적으로 실시하는 장례방식을 따를수 밖에 없다.   4/ 우리의 방안 1; 2009년 민정부에서는 《진일보 빈장개혁을 심화하고 빈장사업의 과확적 발전을 촉진시킬데 관한 지도의견》을 발표하여 다음과 같이 명확히 제출하였다; “정부에서 주도하고 시장을 참여시킨다.……기본빈장복무(운수, 보관, 화장—편자주)에 대하여 정부에서 투입을 더 늘여야 한다. 기타 선택성빈장복무(염습, 용품, 의식등—편자주)에 대하여서는 시장의 조절작용을 발휘하여 인민군중의 여러차원의 수요에 만족을 주어야 한다” 우리는 민정부의 상술한 《지도의견》의 정신에 좇아 조선족 빈의복무 사회성 기제를 건립하려 한다. 그리하여 조선족 가정에서 일단 상사가 났을때 장례복무중심에 전화 한통만 치면 모든 장례사무가 순조롭게 원만하게 해결을 보도록 한다. 주요하게 염습, 장례용품, 의식 등 기타 선택성 빈장복무항목을 경영한다. 초기계단에는 “백화상조복무중심”(이미공상등기를 했음)의 이름으로 경영활동을 진행하면서 경험도 쌓고 운영자금도 모으면서 일정한 업무량이 온정된 후에 정식으로 “유한책임공사”성질의 조선족 빈의복무중심을 건립한다. 조선족 빈의복무 사회성 기제를 건립하는것은 시대의 수요이며 조선족 사회복리를 위한 민심공정으로서 조선족을 위하여 세가지 시대성 난제를 해결할수 있다; 첫째는 조선족들의 장례치르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수 있고, 둘째는 혼자사는 로인들의 고독사를 제때에 발견하고 제때에 처리할수 있으며, 세째는 전통 장레문화와 효도문화를 장기적으로 보호할수 있다. 2; 조선족 빈장복무항업에 종사하는 인원들에 대한 직업교육기제를 건립한다. 오늘날 사회상에서 조선족 빈장복무항업에 종사하는 인원들은 보편적으로 문화소질과 업무소질이 높지못한 사회의 한산인원들이다. 그들은 생계를 위하여 부득불 이 항업을 선택한 것이다. 이 부분의 인원들에 대하여 조직적으로 직업교육을 진행하고 합격증을 가지고 일하는 제도를 실시한다면 조선족 빈장복무항업의 규범화를 실현하고 조선족 빈장복무의 질량을 제고하는 방면에 적극적인 의의가 있다. 세째; 빈장복무 수금표준을 대폭 내린다. 우리들이 새롭게 실시하려는 선택성 빈장복무항목의 수금표준과 기존의 시장수금표준을 대비하면 다음과 같다; 号 복무항목 시장수금표준 새수금표준 1 수의계렬 300.00元起价 200.00元起价 2 염습 300.00元/俱 200.00元/俱 3 면례 1.000.00元/座 800.00元/座 4 장례총비용 5.000.00元/次 2.000.00元/次     우리들이 장례복무내용을 진일보 규범화 하고 장례용품의 디자인과 규격을 합리하게 개혁하고 관리를 진일보 가강한다면 장례복무 수금표준을 더한층 내리울수도 있다.   5/ 맺는말 자고로 조선족은 《례의민족》으로 중국에서 이름이 높았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 조선족의 일련의 중요한 전통 례의문화들은 시대의 충격에 의하여 점차 매몰되고 있다. 특히는 조선족의 장례문화는 문화혁명 시기에 이미 훼멸성적인 충격을 받았고 그후에도 줄곧 중시를 받지 못하고 홀시당하여 오다가 인젠 완전히 소실될 위기에 직면하였다. 조선족 장례문화를 살려내기 위하여 연변주 정부와 길림성 정부에서는 2009년6월에 《조선족 장례풍속》을 각기 주급과 성급의 무형문화재로 확정하고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를 보호책임단위로 지정하였으며 현성원선생을 주급 대표성 전승인으로 임명하였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는 산하에 《조선족장의연구사무실》과 《백화상조(장례)복무중심》이 있다. 기본종지는 조선족 전통장례문화를 정리하고 현실에 맞는 조선족 장례규범을 내오며, 조선족 장례복무 사회기제를 건립하여 조선족 상가의 장례 어려움을 해결해 드리며, 조선족 장례문화가 책임성 있는 사회집행기구에 맡겨져 세세대대로 이어가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조선족 장례,제사 지도서》를 편찬하였으며 지금 진일보 완미중에 있다. 우리는 무형문화재 보호사업의 수요로부터 전통적인것에 대하여 충분히 료해하고 연구한 기초상에서 이미 간소하여진 현재 조선족 장례방법을 계속 견지하면서 거기에 필요한 조선족 특색적인것을 첨부시켜 간편하면서도 특색적인 현대 조선족 장례규범을 확정함으로써 광법한 조선족 주민들의 수요에 만족을 주고 후대들에게 체계적인 문화유산으로 남겨주려 한다. 우리는 현재 조선족 빈장복무 사회성 기제를 건립하기 위하여 각 방면으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그리하여 앞으로는 조선족 가정에서는 일단 상사가 나면 당황해 할 필요가 없이 우리 빈장복무중심에 전화 한통만 걸어 오면 전반 장례사무가 우리식으로 경제적으로 순조롭게 원만하게 해결을 볼수 있도록 하련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2012년8월26일  
145    (해석시) 칠석을 노래한 중국 고대 시사 묶음 댓글:  조회:4504  추천:0  2012-08-23
关于七夕的古代诗词集锦 (조선글 해석배합 성원.) 七夕 (唐)杜甫   牵牛在河西,织女处河东。             万古永相望,七夕谁见同。         견우성이 은하수 서쪽에 있고,      직녀성이 은하수 동쪽에 있구나.      만고에 영원히 서로 바라보는데,      나는 칠석에 누구와 만날가? 七夕 (唐)白居易   烟霄微月澹长空,银汉秋期万古同。   几许欢情与离恨,年年并在此宵中。      엷은구름 쪼각달에 밤하늘도 훤한데      은하에서 칠석날은 만고에 여전하더라.      만나서 갈라지기를 그 몇번 하였더냐?      해마다 모두 이날밤의 일이였어라.   七夕 (唐)李商隐   鸾扇斜分凤幄开,星桥横过鹊飞回。   争将世上无期别,换得年年一度来。      어산도 마주 들었고 휘장도 열렸는데,      은하교를 놓으려고 까치들이 날아 드는구나.      세상에 무기한 리별이 다시는 없게 하고,      한해에 한번씩이라도 만나게 하여다오.   鹊桥仙 (宋)秦观   纤云弄巧,飞星传恨,银汉迢迢暗渡。   金风玉露一相逢,便胜却人间无数。   柔情似水,佳期如梦,忍顾鹊桥归路!   两情若是长久时,又岂在朝朝暮暮!      비단구름 흐르면서 천태만상 뽐내는데      그리운 사연 류성에 실어 먼저  전하고서      가없는 은하수를 가만히 건너 왔노라.      금봉옥루의 한번 만남에      인간의 무수한 만남이 무색해 지는구나.      부드러운 그정은 물과도 같고      만남의 이시각은 꿈과도 같은데      오작교서 갈라질땐 차마 보질 못하겠네.      두사람 애정만 장구하여 진다면야      어찌 조석으로 같이 있기만 바라리오. 行香子(七夕) (宋)李清照   草际鸣蛩,惊落梧桐,正人间、天上愁浓。   云阶月地,关锁千重。   纵浮槎来,浮槎去,不相逢。   星桥鹊驾,经年才见,想离情、别恨难穷。   牵牛织女,莫是离中。   甚霎儿晴,霎儿雨,霎儿风。      풀속의 귀뚜라미 우는 소리에     오동나무 잎사귀 놀라서 떨어지네.     한창 고독에 빠져 시름하는데     하늘에도 깊은 수심이 서리여 있구나.     바라보니 천궁에도 자물쇠가 잠겼음에야.     떼목을 몰고 하늘을 두루 돌면서도     견우와 직녀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네.       까치들이 날아와 다리를 놓았다지만     한해 지나 하루밤만 만날수 있다네.     한해동안 갈라져 있던 그리움을 생각하면     하루밤 만남에 어찌 직성이 풀리랴?     견우와 직녀는 아직도 만나지 못했을가?     개였다가 비가오고 바람도 부는걸 보니.  七夕 (唐)权德舆   今日云骈渡鹊桥,应非脉脉与迢迢。   家人竟喜开妆镜,月下穿针拜九宵。     구름을 몰고 와서 오작교를 건넸노라,     멀리서 그리워만 하다가 오늘 드디여 만났다네.     집사람은 기쁨에 겨워 화장하느라 분주한데,     이제 달빛아래 바느실 꿰면서 온밤을 새워야지.    七夕 (唐)徐凝   一道鹊桥横渺渺,千声玉佩过玲玲。   别离还有经年客,怅望不如河鼓星。   七夕今宵看碧霄,牛郎织女渡鹊桥;   家家乞巧望秋月,穿尽红丝几万条。      하늘에 한갈래 오작교가 놓였는데      직녀가 건네오는 옥패소리 잘랑잘랑.      남들은 한해씩이나 갈라져 있었다니      견우성을 바라보기가 부끄러워 지는구나.            칠석의 오늘밤 저녁하늘 쳐다보니      견우직녀 오작교 건너 서로 만나는구나.      녀인들은 손재간 달라고 가을달 쳐다볼제,      붉은실을 바늘에 꿰기를 몇만줄이 였드냐?       七夕词 (唐)崔颢   长安城中月如练,家家此夜持针线。   仙裙玉佩空自知,天上人间不相见。   长信深阴夜转幽,瑶阶金阁数萤流。   班姬此夕愁无限,河汉三更看斗牛。      七夕 (宋)杨璞   未会牵牛意若何,须邀织女弄金梭。   年年乞与人间巧,不道人间巧已多。    七夕 (唐)曹松   牛女相期七夕秋,相逢俱喜鹊横流。   彤云缥缈回金辂,明月婵娟挂玉钩。   燕羽几曾添别恨,花容终不更含羞。   更残便是分襟处,晓箭东来射翠楼。    七夕 (唐)崔国辅   太守仙潢族,含情七夕多。   扇风生玉漏,置水写银河。   阁下陈书籍,闺中曝绮罗。   遥思汉武帝,青鸟几时过?    七夕 (唐)崔涂   年年七夕渡瑶轩,谁道秋期有泪痕?   自是人间一周岁,何妨天上只黄昏。    七夕 (唐)窦常   露盘花水望三星,仿佛虚无为降灵。   斜汉没时人不寐,几条蛛网下风庭。   楚塞馀春听渐稀,断猿今夕让沾衣。   云埋老树空山里,仿佛千声一度飞。    七夕 (唐)杜牧   银烛秋光冷画屏,轻罗小扇扑流萤。   天街夜色凉如水,卧看牵牛织女星。    七夕 (唐)杜牧   云阶月地一相过,未抵经年别恨多。   最恨明朝洗车雨,不教回脚渡天河。    七夕 (唐)杜审言   白露含明月,青霞断绛河。天街七襄转,阁道二神过。   袨服锵环佩,香筵拂绮罗。年年今夜尽,机杼别情多。 七夕赋咏成篇 (唐)何仲宣   日日思归勤理鬓,朝朝伫望懒调梭。   凌风宝扇遥临月,映水仙车远渡河。   历历珠星疑拖佩,冉冉云衣似曳罗。   通宵道意终无尽,向晓离愁已复多。    七夕 (唐)李贺   别浦今朝暗,罗帷午夜愁。   鹊辞穿线月,花入曝衣楼。   天上分金镜,人间望玉钩。   钱塘苏小小,更值一年秋。    奉和七夕两仪殿会宴应制 (唐)李峤   灵匹三秋会,仙期七夕过。查来人泛海,桥渡鹊填河。   帝缕升银阁,天机罢玉梭。谁言七襄咏,重入五弦歌。    同赋山居七夕 (唐)李峤   明月青山夜,高天白露秋。花庭开粉席,云岫敞针楼。   石类支机影,池似泛槎流。暂惊河女鹊,终狎野人鸥。    七夕歌 (唐)刘言史   星寥寥兮月细轮,佳期可想兮不可亲。   云衣香薄妆态新,彩輧悠悠度天津。   玉幌相逢夜将极,妖红惨黛生愁色。   寂寞低容入旧机,歇著金梭思往夕。   人间不见因谁知,万家闺艳求此时。   碧空露重彩盘湿,花上乞得蜘蛛丝。      七夕偶题(唐)李商隐   宝婺摇珠佩,常娥照玉轮。灵归天上匹,巧遗世间人。   花果香千户,笙竽滥四邻。明朝晒犊鼻,方信阮家贫。    壬申七夕(唐)李商隐   已驾七香车,心心待晓霞。风轻惟响佩,日薄不嫣花。   桂嫩传香远,榆高送影斜。成都过卜肆,曾妒识灵槎。   辛未七夕(唐)李商隐   恐是仙家好别离,故教迢递作佳期。   由来碧落银河畔,可要金风玉露时。   清漏渐移相望久,微云未接过来迟。   岂能无意酬乌鹊,惟与蜘蛛乞巧丝。   七夕寄张氏兄弟(唐)李郢   新秋牛女会佳期,红粉筵开玉馔时。   好与檀郎寄花朵,莫教清晓羡蛛丝。    七夕 (唐)李中   星河耿耿正新秋,丝竹千家列彩楼。   可惜穿针方有兴,纤纤初月苦难留。    七夕 (唐)刘威   乌鹊桥成上界通,千秋灵会此宵同。   云收喜气星楼晓,香拂轻尘玉殿空。   翠辇不行青草路,金銮徒候白榆风。   采盘花阁无穷意,只在游丝一缕中。    七夕二首 (唐)刘禹锡   河鼓灵旗动,嫦娥破镜斜。满空天是幕,徐转斗为车。   机罢犹安石,桥成不碍槎。谁知观津女,竟夕望云涯。   天衢启云帐,神驭上星桥。初喜渡河汉,频惊转斗杓。   馀霞张锦幛,轻电闪红绡。非是人间世,还悲后会遥。   七夕 (唐)罗隐   络角星河菡萏天,一家欢笑设红筵。   应倾谢女珠玑箧,尽写檀郎锦绣篇。   香帐簇成排窈窕,金针穿罢拜婵娟。   铜壶漏报天将晓,惆怅佳期又一年。  七夕 年代:【宋】 作者:【杨朴】 体裁:【七绝】 类别:【】 未会牵牛意若何,须邀织女织金梭。 年年乞与人间巧,不道人间巧已多。 七夕 年代:【清】 作者:【吴绡】 体裁:【七律】 类别:【】 星光历历汉悠悠,怅望双星独倚楼。 莫谓人间多别恨,便疑天上有离愁。 梁清谪去谁相伴,子晋归来合公游。 惟有月娥应最妒,一轮风露不胜秋。 怨王孙 七夕 年代:【清】 作者:【朱彝尊】 一水填却双星如约。 乞巧谁凭。 诉愁君莫,知道呆女痴牛,肯怜不。 悠悠岁月辞家者,孤眠且。 此夕何夕也。   红娘子 年代:【清】 作者:【朱彝尊】 袖薄吹香过,发重萦鬟亸。 压众风流,倾城色笑,趁时梳裹。 惯新诗咏罢少人知,一篇篇教和。 别泪看频堕,密约何曾果。 七夕星河,中秋院落,上元灯火。 悔当时花月可怜宵,镇相逢闲坐。 七夕 年代:【宋】 作者:【仇远】 河鼓天孙各老成,无愁可解任秋声。 痴儿笑月羞眉曲,稚女穿针斗眼明。 夜半且分瓜果供,天中岂识别离情。 未能免俗消光景,醉卧西风梦亦清。   鹊桥仙 七夕 年代:【宋】 作者:【范成大】 体裁:【词】 双星良夜,耕慵织懒,应被群仙相妒。娟娟月姊满眉颦,更无奈、风姨吹雨。相逢草草,争如休见,重搅别离心绪。新欢不抵旧愁多,倒添了、新愁归去。
144    오늘은 칠석날 댓글:  조회:4986  추천:0  2012-08-23
세시이야기.....칠석      1. 칠석의 유래 해마다 음력7월 7일을 칠석(七夕)이라한다. 이 날은 1년 동안 서로 떨어져 있던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 이라고 하는데, 그들의 애틋한 사랑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내려온다. 하늘나라 목동인 견우와 옥황상제의 손녀인 직녀가 결혼하였다. 그들은 결혼하고도 놀고 먹으며 게으름을 피우자 옥황상제는 크게 노하여 견우는 은하수 동쪽에, 직녀는 은하수 서쪽에 떨어져 살게 하였다. 그래서 이 두 부부는 서로 그리워하면서도 건널 수 없는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애태우면서 지내야 했다. 이러한 견우와 직녀의 안타까운 사연을 전해들은 까마귀와 까치들은 해마다 칠석날 에 이들을 만나게 해 주기 위하여 하늘로 올라가 다리를 놓아 주었으니 그것이 곧 오작교(烏鵲橋)이다. 그래서 견우와 직녀는 칠석날이 되면 이 오작교를 건너 서로 그리던 임을 만나 1년 동안 쌓였던 회포를 풀고 다시 헤어진다. 그래서 칠석날 세상에는 까치와 까마귀는 한 마리도 없으며, 어쩌다 있는 것은 병이 들어 하늘로 올라갈 수 없는 것들이라고 한다. 또 까마귀와 까치는 이날 다리를 놓느라고 머리가 모두 벗겨지게 된다고 한다. 칠석날 전후에는 부슬비가 내리는 일도 많은데, 이는 견우와 직녀가 서로 타고갈 수레 준비를 하느라고 먼지 앉은 수레를 씻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물이 인간 세상에서는 비가 되어 내리므로, 이 비를 '수레 씻는 비' 즉 '세차우(洗車雨)'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칠석날 저녁에 비가 내리면 견우와 직녀가 상봉하여 흘리는 기쁨의 눈물이라고 하며, 이튿날 새벽에 비가 내리면 이별의 슬픈 눈물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때의 비를 '눈물 흘리는 비', 곧 '쇄루우(灑淚雨)'라고도 한다. 이 이야기는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데, 중국 한대(漢代)의 괴담(怪談) 을 기록한 책인《재해기(齋諧記)》에 이러한 이야기가 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7월 7일 저녁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갈라졌던 견우성과 직녀성이 만나는 자연적인 현상에서 성립되었다. 즉 천문학상의 명칭으로 견우성(牽牛星)은 독수리별자리[鷲星座]의 알타이어(Altair)별이고, 직녀성(織女星)은 거문고별자리[琴星座]의 베가(Wega)별을 가리키는 것으로 원래 은하수의 동쪽과 서쪽의 둑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별은 태양 황도상(黃道上)의 운행 때문에 가을 초저녁에는 서쪽 하늘에 보이고, 겨울에는 태양과 함께 낮에 떠있고, 봄 초저녁에는 동쪽 하늘에 나타나며 칠석 때면 천장 부근에서 보게 되므로 마치 1년에 한 번씩 만나는 것처럼 보인다. 최남선은《조선상식(朝鮮常識)》에서, 견우성과 직녀성이 1년에 한번씩 마주치게 보이는 것은 일찍이 중국 주대(周代) 사람들이 해마다 경험하는 천상(天象)의 사실이었는데, 여기에 차츰 탐기적(耽奇的)인 요소가 붙어 한대(漢代)에 와서 칠석의 전설이 성립된 것이라고 하였다. 2. 칠석의 풍속 칠석날의 가장 대표적인 풍속으로는 여자들이 길쌈을 더 잘할 수 있도록 직녀성에게 비는 것이다. 이 날 새벽에 부녀자들은 참외, 오이 등의 초과류(草菓類)를 상위에 놓고 절을 하며 여공(女功:길쌈질)이 늘기를 빈다. 잠시 후에 상을 보아 음식상 위에 거미줄이 쳐져 있으면 하늘에 있는 선녀가 소원을 들어주었으므로 여공(女功)이 늘 것이라고 기뻐한다. 혹은 처녀들은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놓은 다음, 그 위에 고운 재를 평평하게 담은 쟁반을 올려놓고 바느질 재주가 있게 해달라고 비는데, 다음날 재위에 무엇이 지나간 흔적이 있으면 영험이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풍속은 직녀를 하늘에서 바느질을 관장하는 신격으로 여기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으 며, 원래는 칠석날 밤에 궁중이나 민가의 부녀자들이 바느질감과 과일을 마당에 차려 놓고 바느질 솜씨가 있게 해달라고 널리 행하던 중국 한대(漢代)의 걸교(乞巧)의 풍속을 따른 것이다. 이 풍속은 당대(唐代)에 와서 주변 민족들에 전파되었는데, 우리 나라의 칠석 풍속은 중국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이 날 각 가정에서는 밀전병과 햇과일을 차려놓고, 부인들은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놓고 가 족의 수명장수와 집안의 평안을 기원하기도 한다. 또 이북지방에서는 이 날 크게 고사를 지내거나 밭에 나가 풍작을 기원하는 밭제[田祭]를 지내기도 한다. 중부지방에서는 '칠석맞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단골무당에게 자녀의 무사 성장의 기원을 부탁하는 것이다. 무당은 물동이를 타고 기원의 상징인 명다리를 내어 바람에 불리고, 다시금 무사 성장의 기원을 한다. 한편 7월이면 무더위가 한풀 꺾이는 시기이다. 농가에서는 김매기를 다 매고 나면 추수때까지는 다소 한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래서 장마를 겪은 후이기도 한 이때, 농가에서는 여름 장마철 동안 눅눅했던 옷과 책을 내어 말리는 풍습이 있다. 이 날은 집집마다 내어 말리는 옷과 책으로 마당이 그득하다.《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7월 7일 인가에서는 옷을 햇볕에 말린다 하여 이는 옛날 풍속이라 하였는데, 이 날에 내어 말리는 옷과 책의 수량에 따라 잘살고 못사는 것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최남선의《조선상식(朝鮮常識)》에는 칠석은 원래 중국의 속절(俗節)로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공민왕(恭愍王)은 몽고 왕후와 더불어 내정에서 견우·직녀성에 제사하였고, 또 이날 백관들에게 녹을 주었으며, 조선조에 와서는 궁중에서 잔치를 베풀고 성균관 유생들에게 절일제(節日製)의 과거를 실시하였다고 하였다. 다양한 생활주기와 가치관의 변화 속에서 오늘날 칠석의 풍속은 다만 견우와 직녀의 전설이 동심의 세계에 꿈을 부풀리는 기능을 하고 있을 뿐이다.
143    혼자서 살다가 혼자서 죽어야 하는 사회 댓글:  조회:5190  추천:4  2012-08-21
혼자서 살다가 혼자서 죽어야 하는 사회 우리민족의 로인절인 8.15가 금방 지나갔습니다. 살아서 별로 해놓은 일도 없는데 우리도 어느덧 늙어 버렸습니다. 세월이 하는 노릇이라 어쩌는 수 없지요. 그런데 시대가 바뀌였습니다. 지금도 전통 가정환경에 미련을 가지면서 자식손군들의 효성속에서 받들려 살다가 죽기를 원한다면 너무나 사치한 념원이라고 하겠습니다. 일본의 로인들은 이미 혼자서 살다가 혼자서 죽는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답니다. 한국의 로인들도 이미 혼자서 살다가 혼자서 죽는것을 그리 두려워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도 바야흐로 로년에 혼자서 살다가 혼자서 죽어야 하는 시대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환경에서 우리 로인들이 정신상에 준비가 없고 구체 대책이 없다면 우리의 만년은 비참할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바야흐로 도래하는 고독의 로년시대를 평온한 마음으로 맞이하겠는가? 여기에 왕림하신 분들이 자기의 견해들을 아래에 댓글로 달아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련계전화:13894387438 메일주소:sy10088@163.com 2012년8월20일   [만물상] 노인 고독사(孤獨死) 일본에선 해마다 1만명 넘게 목욕탕에서 익사한다. 대부분 노인들이다. 홀로 살다 이렇게 죽으면 며칠씩 모른 채 지나가기 십상이다. 그래서 ‘욕조 익사’를 막는 장치들이 등장했다. ‘오사카가스’라는 회사는 물을 감지하는 센서가 달린 목걸이를 내놓았다. 목걸이가 20초 이상 물에 잠겨 움직이지 않으면 경고음을 울린다. 가족 없는 노인이면 동사무소나 복지센터로 비상신호를 보낸다.   ▶일본 고베시는 가스 사용량으로 독거(獨居) 노인의 안부를 챙긴다. 노인이 아침에 가스레인지를 켜면 사용정보가 무선시스템을 통해 복지단체나 가족에게 전달된다. 사용량이 ‘0’이면 복지단체에서 집으로 전화를 건다. 벨이 30차례 울려도 받지 않으면 구조대가 달려간다. 고베엔 독거노인들의 가스 사용을 24시간 점검하는 복지센터가 75곳이나 된다. 1995년 대지진으로 가족을 잃은 노인이 유난히 많아서다.   ▶지켜보는 이 없이 홀로 죽는 ‘고독사(孤獨死)’가 일본에서 사회문제로 된 건 1970년대다. 고령화와 핵가족화로 도시 노인들의 쓸쓸한 죽음이 부쩍 언론을 탔다. 지난해 도쿄에서만 2714명이 그렇게 세상을 떴다. 주검이 발견되기까지 평균 일주일이 걸렸다. 6%는 한 달 넘어서야 발견됐다. 60~70세 자식이 80~90세 부모를 돌보는 ‘노노(老老) 개호(介護)’도 많아 늙은 자식이 먼저 가면 부모가 도리없이 뒤따른다.   ▶올해 초 폭설이 내린 충남 어느 마을에서 칠순 할머니가 장독대 눈을 치우려다 지붕에서 무너져내린 눈더미에 깔렸다. 할머니는 숨진 채 7일을 묻혀 있었다. 서울서 달려온 아들은 온 동네를 헤매다 뒷마당에 쌓인 눈 30㎝ 아래서 아끼던 털모자를 쓴 채 얼어버린 어머니를 발견했다. 도시에선 단칸방에서 홀로 죽어 한참 뒤 발견되는 노인들 얘기가 일본 못지않게 줄을 잇는다.   ▶우리나라 고령인구가 느는 속도는 총인구 증가속도보다 13배나 빠르다고 어제 통계청이 발표했다. 독거노인은 1998년 49만명에서 2005년 83만명으로 불어났다. 노인 다섯 명 중 한 명이 홀로 산다. 대부분 빈곤층이지만 그나마 기초생활보장 혜택을 받는 경우는 4분의 1밖에 안 된다. 자식에 짐 될까 혼자 고단한 삶을 살다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아직 사회안전망의 그물코가 성긴 우리에게 ‘방치된 죽음’은 일본보다 더 심각하고, 그래서 더 방치할 수 없는 문제다.     홀로 살다 홀로 죽는 일본인, 내일 우리들의 모습   조선일보에 연재되고 있는 '혼자 살다 혼자 죽는 사회, 일본' 특집은 독자를 으스스하게 만든다. 일본에선 사망 후 4일 이상 지나 발견되는 고독사가 한 해 1만5600명에 달하고, 죽어도 시신을 인수할 가족이 없는 무(無)연고 사망자가 3만2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도쿄에선 죽는 이 10명 가운데 3명은 이른바 직장(直葬), 장례식 없이 곧바로 화장터로 가고 있다. 현재 일본 30대 남성 10명 가운데 3명, 여성 10명 중 2명은 50대가 될 때까지 결혼을 못할 거라고도 한다. 결국 일본은 '혼자 살다 혼자 죽는 사회'가 돼가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인 '가족 울타리'가 약해지고, 급속하게 진행된 저출산·고령화로 돌봐줄 자식이 없거나, 자식이 있다 해도 20년 경기침체로 부모를 보살필 경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인구 구성 비율은 일본을 10~15년 차이를 두고 뒤따라가고 있다. 오늘 일본의 스산한 모습이 내일의 우리 모습이라는 이야기다. 일본은 지난 20년 인구가 감소하면서 기업 매출이 떨어지고, 일자리가 줄고, 그것이 다시 소비를 위축시키는 악순환을 겪어왔다. 작년 일본의 226개 백화점 가운데 매출이 늘어난 건 3곳뿐이었다. 어린이 인구(0~14세)가 1990년 2248만명에서 작년엔 1648만명으로 줄면서 제과점 파산이 속출했다. 청년실업이 늘어나면서 1990년 780만대였던 신차 판매가 2009년 488만대로 감소했다. 금융자산의 75%(1125조엔·약 1경5000조원)를 가진 노인들은 여생이 불안하다며 갈수록 지갑을 닫고, 일자리를 갖지 못한 젊은이들은 쓰고 싶어도 쓸 돈이 없다. 젊은이들 성격도 변했고 이에 따라 사회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직장도 학교도 안 다니면서 하릴 없이 시간을 죽이는 니트족, 뚜렷한 일자리 없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프리터족이 늘면서 자기 체념을 뜻하는 '하류지향(下流指向)'이란 말이 유행어가 돼버렸다. 30~34세의 직장인 가운데 결혼한 비율은 정규직 60%, 비정규직 30%, 프리터 17%다. 일자리가 불안한 젊은이들은 결혼을 기피하고 이것이 다시 저출산과 경기침체를 악화시키고 있다. 일본은 1996년부터 생산연령인구(15~64세)가, 2008년부터는 총인구 자체가 감소했다. 우리도 2017년 생산연령인구가 줄기 시작하고 2019년부터 총인구가 감소할 것이다. 일본의 65세 이상 노인이 1990년 1489만명에서 2010년 2941만명(전체 1억2800만명의 22.9%)으로 늘었다. 지난해 우리의 노인 인구는 535만명이었는데, 2030년엔 1180만명(전체 4860만명의 24.3%)이 된다. 일본의 경우 노인요양보험인 개호(介護)보험 지출액이 2000년 3조8000억엔에서 작년 7조9000억엔으로 2배 늘었다. 우리의 노인장기요양보험은 작년 지급액이 2조5000억원이었는데 2030년엔 15조6000억원으로 6배 늘 것이라는 전망이 나와 있다. 저출산·고령화가 이런 식으로 경제활력을 떨어뜨리면 잠재성장률은 현재 4.1%에서 2020년 1.9%까지 낮아질 것이라는 예측이다. 그렇게 되면 작아진 파이를 서로 더 많이 먹겠다고 다투는 계층 간, 직업 간, 세대 간 갈등은 더 심해진다. 저출산·고령화는 한 번 추세가 형성되면 되돌려놓기가 힘들다. 일본도 온갖 몸부림을 쳤지만 실패했다. 저출산·고령화 추세가 고착(固着)되기 전에 흐름을 돌려놓아야 한다. 지금 하늘을 찌를 기세로 부풀어 오르는 중국의 미래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가장 큰 요인도 중국의 급속한 노령화다. 역사상 저출산·고령화의 흐름에 떠밀려가면서도 번영을 누렸던 나라는 한 나라도 없다. 우리 정부는 저출산 흐름을 되돌리기 위해 GDP의 0.7% 예산을 쓰고 있다. 저출산·고령화 시한폭탄의 뇌관(雷管)을 제거하기에는 어림도 없는 예산이다. OECD 평균이 2.3%다. 저출산·고령화 문제는 장관들에게만 맡겨놓기에는 너무나 중대한 문제다. 대통령이 10년 후, 20년 후 나라의 운명을 바로 보고 역사적 문제의식을 갖고 임해야 한다.   "서럽지만 이게 내 팔자…", 홀로 죽음을 맞는 노인들 혼자 살다 혼자 죽는 사회…70살 이상 1인 가구 79만 세대 소외계층으로 갈수록 고독…마지막 순간 지켜보는 건 'TV'   지난 2월 충남 아산의 한 아파트의 다른 집에서 시신 2구가 같은 날 발견됐다. 숨진 박모(여·65)씨와 이모(남·52)씨는 모두 가족과 떨어져 홀로 살던 '1인 가구'였고, 고혈압 등의 지병을 앓고 있었다. 당시 출동했던 경찰에 따르면 박씨는 3일, 이씨는 7일 이상 숨진 채 방치돼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전형적인 '고독사(孤獨死)'다. 한국에서도 1인 가구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일본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외로운 죽음'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200~300 가구가 아파트나 오피스텔에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고 있지만 이 공간에선 전통적인 '이웃'의 개념이 사라진 지 오래다. 한국의 1인 가구 비율은 노인·청년·장년층을 가리지 않고 급격한 속도로 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0년 우리나라의 1인가구 수는 403만으로 전체 가구(1,733만 가구)의 23%에 달한다. 30년 전인 1980년에는 1인 가구의 비중이 4.8%에 불과했다. 1990년에는 9%, 2000년에는 15%로 늘었다. 30년 사이 5배로 늘어난 것이다. 1인가구 증가 속도는 정부의 예상치를 훨씬 넘는다. 2009년 말 통계청은 2030년이 돼야 1인 가구의 비율이 23%를 돌파할 것으로 전망했지만 정부의 예측보다 20년이나 빠르다. 김용학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부유층과 비교해 소외계층으로 갈수록 사회적 네트워크가 약해지는 '인맥의 양극화 현상'이 한국에서도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홀로 거주하는 독거노인은 106만 명을 넘어섰으며 계속해서 증가하는 추세다. 특히 독거노인의 발생은 이들의 사회적 교류 단절 문제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실제 연구자료를 보면 독거노인의 24% 정도가 한 달에 한 번도 가족과 연락하거나 만나지 못하는 등 사회적 고립 정도가 매우 크고, 이 때문에 독거노인 10명 중 3명 정도가 우울증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에서 홀로 사는 김유복(82) 할머니는 "자식이 6명이나 되지만 다들 벌어먹느라 바빠서 1년에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을 때도 있다"며 "서운할 적도 많지만 다 내 팔자다. 이러다 혼자 죽는 건가 하는 걱정뿐이다"라며 눈물을 보였다. 정부는 전체 독거노인 중 약 18% 정도를 위험군에 속한 독거노인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을 위해 2007년부터 '노인돌봄 기본사업'을 실시 중이다. 이 사업은 노인돌보미들이 일대일로 방문해 안전 확인하고 생활에 필요한 교육과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나 정부의 예산 부족 등으로 18% 중 14% 정도만 혜택을 누리고 있다. 나머지 4%는 지원 사각지대에 놓인 것이다. 지자체가 직접 나선 예도 있다. 경기도는 이웃에 혼자 사는 노인을 새마을부녀회원이 돌보는 '생활밀착형 홀몸노인돌봄 사업'을 11월 한 달간 시범 추진했다. 자원봉사자인 새마을 부녀회원이 이웃의 홀몸노인과 결연을 맺고 수시로 가정을 방문해 노인돌보미의 역할을 수행한다. 왕명순 미산면 새마을부녀회장은 "방송이나 매체를 통해 고독사가 많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됐다"며  "그런 일도 방지하면서 혼자 사는 노인의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덜어 드리고자 사업에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경기도는 지난 10월 새마을부녀회원과 읍면동장을 대상으로 12차례 간담회를 개최해 사업내용을 설명하고 의견을 수렴했으며, 새마을부녀회원 1300여명에 대해 8차례 사전교육을 실시했다. 64개 읍면동 새마을부녀회에서는 지난 1일부터 밑반찬, 생필품 등을 홀몸노인에게 지원하고 있다. 고순자 도 복지여성실장은 "내 이웃에 홀로 사는 노인을 돌봄으로 인해 '우리'라는 의식을 회복하고자 사업을 시작했다"며 "소외계층에 대한 생활밀착형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복지담당 공무원 모두가 온 힘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경기도는 남양주, 포천, 양주, 동두천, 가평, 연천 등 6개 시·군 홀몸노인을 대상으로 시범사업을 추진한 뒤 그 결과에 따라 지속적으로 확대할 방침이다.  
142    부모가 계시는 분들은 보시요. 댓글:  조회:2460  추천:0  2012-08-18
中國,新‘효도계명24’ 인민망 한국어판 - 새로운 미디어, 세계속의 차이나>>사회 2012-8-15 [] 명절과 휴일을 부모님과 보내기, 부모님께 직접 요리 만들어 드리기, 매주 부모님에게 전화하기 등등...... 13일, 전국부녀연합 산하 노인업무협조 판공실과 전국노인판공실 그리고 전국 ‘마음 나누기’ 조직위원회는 새로운 ‘효도계명 24’를 공동으로 발표하였다. 우위사오(吳玉韶) 전국노인판공실 부주임 겸 전국 ‘마음 나누기’ 조직위원회 부주임은 “신 ‘효도계명 24’는 이전 계명과 다른 점이 많다. 이는 시대가 끊임없이 변함에 따라 ‘효’ 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시대에 걸맞는 창의적인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설명했다. ◆ 新 ‘효도계명 24’ 1. 배우자와 자녀를 데리고 자주 부모님 찾아뵙기 2. 명절과 휴일을 부모님과 자주 보내기 3. 부모님을 위한 생신 축하연 마련하기 4. 부모님에게 직접 음식 만들어 드리기 5. 매주 부모님에게 전화하기 6. 부모님에게 용돈 넉넉히 드리기 7. 부모님에게 카드(교통카드, 전화카드 등) 만들어 드리기 8. 부모님의 과거 이야기 경청하기 9. 부모님에게 인터넷하는 법 가르쳐 드리기 10. 자주 부모님 사진 찍어 드리기 11. 부모님에게 사랑 표현하기 12. 부모님의 마음 헤아리기 13. 부모님의 여가 활동 돕기 14. 혼자 사시는 부모님의 재혼 돕기 15. 정기적으로 부모님 건강검진 해드리기 16. 부모님에게 알맞은 보험 들어드리기 17. 부모님과 자주 마음 속 이야기 나누기 18. 부모님을 모시고 중요한 행사 참석하기 19. 부모님에게 자식이 다니는 직장 보여드리기 20.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 혹은 전에 살던 곳 찾아가기 21. 부모님과 함께 운동하기 22. 부모님 일에 적당히 참여하기 23. 부모님을 모시고 옛 친구분 방문하기 24. 부모님과 옛날 영화 함께 보기 (魏銘言) 기자  
141    “百歲는 만들어 나가는 것…” 댓글:  조회:3114  추천:0  2012-08-16
“百歲는 만들어 나가는 것…” 醫學만의 문제는 아니죠…유전보다 환경 영향 크고 어떤 음식을 먹느냐 보다 어떻게 먹느냐가 더 중요   “100세까지 장수하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42세 직장인이다. 대학 때는 산에 오르며 몸을 다졌고 최근엔 마라톤과 맨손체조로 건강을 지키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100세까지 살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쌓이는 스트레스 때문에 걱정이다. =스트레스가 없어야 장수하는 게 아니다. 스트레스를 이기는 자기만의 방법을 개발하는 게 중요하다. 백세인(百歲人)들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이겨낸 사람들이다. 한국전쟁때 눈앞에서 생자식이 죽는 모습을 보기도 하고, 풀을 뜯으며 연명하기도 했다. 현대인처럼 직업적 스트레스는 덜 받았겠지만, 스트레스가 없던 것은 아니다.   =현대 직장인들은 술로 스트레스를 푼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백세인 할머니의 20%, 백세인 할아버지의 40%는 음주(飮酒)를 한다. 식사 전에 소주한 잔을 반주로 드시는 분이 많았다. 소량의 알콜은 위액 분비를 촉진한다. 하지만 과음하는 백세인은 거의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10년 넘게 직장생활을 하다가 최근 친구와 레스토랑을 열었다. 특히 여성들은 평생 직장을 구하기가 어렵다. 나이를 더 먹으면 새 일을 시작할 용기가 나지 않을 것 같아 창업을 했다. 직장과 장수와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요즘 직장은 평생 직장이 아니라 ‘반평생 직장’이다. 80세까지만 살아도 50세 때 은퇴하면 30년을 놀아야 한다. 80~90세까지 사는 요즘 40~50세는 젊은 나이다. 은퇴 후 몇 년 살다가 죽을 계획이 아니면 새로운 일을 시작하라. 정년퇴임은 졸업식에 불과하다. 새로운 학교에 진학할 준비를 미리미리 해야 한다.   =노인 입장에서 늙는다는 것은 불안하고 초조하다. 자식을 위해 모든 걸 희생했지만, 요즘 부모 말에 순종하는 자식은 흔하지 않다. 효(孝)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 =지금 백세인은 자식에게서 봉양받는 마지막 세대다. 구박하던 시어머니이지만 부모니까 당연히 모셔야 한다는 며느리들이 많았다. 어느 100세 노인의 70대 며느리는 “100세된 시어머니를 모시는 나는 이담에 누가 돌보느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족 구조가 너무 많이 달라졌다. ‘효’라는 개념만으로 장수 노인을 모시기는 어렵다. 그리고 노인들도 이런 변화에 적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큰며느리가 모시면 장수한다는 말도 있는데. =지역에 따라 백세인을 돌보는 사람이 다르다. 경상도·전라도 지역은 주로 큰며느리가 모신다. 이곳 백세인들은 둘째아들이 이웃에 살아도 꼭 큰아들 집에서 산다. 이 때문에 시어머니를 64년 동안 모신 큰며느리도 있다. 그러나 강원도·제주도는 형제들이 돌아가며 똑같이 모신다. 이 지역 장수인들은 자식들의 대접을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 자기 일은 언제나 스스로 처리한다. 미래엔 자식에게 모든 걸 주지 않는 게 장수의 비결이 될지도 모른다.   =백세 할머니는 많지만 백세 할아버지를 만나기는 힘들다. =남자는 직장이 있을 때까지만 삶의 주도권을 갖는다. 그러나 은퇴 후 경제권을 뺏기면 남성 노인들은 불쌍해진다. 경로당이나 노인대학은 80% 이상 할머니들이 점령하고 있다. 몇 안 되는 할아버지들은 구석자리 신세다. 그러나 남성 장수 인구가 많은 강원도의 할아버지들은 100세가 되도록 경제권을 놓지 않는다. 자식에게 대접받는 대신 자기 재산을 스스로 관리하며 여전히 일한다. 딴 지역의 노인들은 환갑만 넘으면 광 열쇠, 인감 도장 등을 자식에게 넘기지 않는가?   =남자가 오래 사는 지역도 있나? =사하라 사막이나 중국 신강성처럼 환경이 거친 곳에 남성 장수 인구가 많다. 환경이 험할수록 남자들이 장수하는 것 같다. 이런 지역의 남성들은 늙어도 일을 한다. 또 술·담배를 안 하는 모르몬교 집단에서도 장수하는 남자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70~80세가 되면 할머니들은 손자를 돌보는 등 할 일이 있지만, 할아버지들은 그렇지 않다. 결국 늙어서도 일하는 지역이 남성 장수 지역인 셈이다.   =부부 관계도 중요한 것 같다. 부부의 성격·취미가 비슷해야 장수하는 것 아닌가? =남자는 결혼을 해야 오래 살고 여자는 혼자 살아야 장수한다는 보고서도 있다(웃음). 중요한 것은 부부관계가 종속관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가까운 친구 같은 관계가 좋다. 장수 사회에선 100세나 80세나 그게 그거다. 친구일 따름이다. 나이나 성별을 앞세워 대접을 받으려면 곤란하다. 늙으면 남자도 부엌일을 해야 한다. 물 한 컵 정도는 자기가 떠먹어야 한다. 나도 쉰 살이 넘어서 부엌에 들어가려니 솔직히 어색하다. 그러나 이젠 생존전략이다(웃음).   =남편이 변해야 한다는 말인가? =남자는 나이를 먹으면 여성적이 되고 여자는 남성적이 된다. 따라서 여성은 그동안 억압받던 감정이나 욕구를 과감하게 분출할 때가 많다. 따라서 남편들이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부부관계는 삐걱거리게 된다.   =장수 음식이란 존재하는가? =오키나와 식단, 지중해 식단 등이 유명하다. 이들의 공통점은 생선·야채·과일·해조류가 풍성한 식단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백세인의 조사 결과, 장수와 직결되는 특별한 음식은 발견하지 못했다. 무엇을 먹느냐보다는 어떻게 먹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백세인들은 세 끼 식사의 양과 시간을 정확하게 지킨다. 간식으로 빵을 먹으면 그만큼 다음 식사량을 줄인다. 식사 시간은 꼭 지킨다. 밥상이 5분이라도 늦게 나오면 난리가 난다. 움직이는 양만큼 비례해서 식사를 한다. 감자 세 개에 밥 한 공기를 싹싹 비우는 백세인도 있다. “이렇게 많이 드시느냐”고 물으면 소식(小食)이라고 대답한다. 된장·간장·고추장 등 콩에서 발효된 식품이 몸에 좋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장수에 유전적·선천적 요인이 있는가? =30%쯤은 유전적 요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환경이 장수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최근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백세인 학술대회에서 여자 노인은 스트레스를 받아야 오래 산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아프리카에서 열대어를 수입할 땐 열대어의 천적을 어항에 넣는다고 한다. 열대어들이 적당히 긴장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아야 오랜 여행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스트레스는 인생의 도전이자 자극이다. 스트레스를 삶의 한 부분으로 즐기는 태도가 중요하다.   =성(性)관계와 장수 간에는 상관이 있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오래 산 왕일수록 부인과 자식도 많다. 성관계는 건강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인 셈이다. 건강해야 성관계도 가능한 것 아닌가? 백세인 중에는 80대 중반까지 부부관계를 가진 사람도 흔하다. 문제는 노인들의 성을 ‘추하다, 주책이다’라고 생각하는 사회 분위기다. 노인은 ‘화석(化石)’이 아니다. 강원도의 98세 할아버지는 몇 해 전부터 부인과 ‘손만’ 잡고 주무신다고 했다. 그래야 오래 산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노인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존재다.   =실버타운이 많이 생기고 있지만, 노인 스스로 선뜻 가지 않으려는 경우가 많다. =공기 좋고 물 좋은 데 있다고 무조건 좋은 실버타운이 아니다. 도심과 가까워서 가족들과 연계가 끊이지 않거나 친구들을 쉽게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외국 양로원은 도심에 들어와 있는 경우가 많다. 외롭거나 쓸쓸한 곳은 좋지 않다.   =장수 시리즈를 마치면서 장수의 비결을 살짝 알려준다면? =100세 장수는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은퇴 후에는 돈 버는 것 말고, 봉사활동 등을 열심히 해야 한다. 무언가 쓸모있는 존재가 된다는 게 중요하다. 50대 이상에선 경제력보다 존재 가치를 확인하는 일이 장수에 도움이 된다. 봉사활동을 하는 분들은 언제나 즐겁다. 엔돌핀이 샘솟아 노화를 늦추는 것 같다. 생명 현상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과거에 대통령을 했거나 미스터코리아였다는 사실은 장수에 의미가 없다. 현재 70세라도 100세까지는 30년이 남았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데 결코 늦은 법은 없다.   ◆ 장수하려면 장수의 지혜를 배워라.   1. 무조건 소식(小食)하지 말고, 젊었을 때보다 적게 먹어라. 2. 어떻게 먹느냐가 중요하다. 정해진 시간에 일정한 양만 먹어라. 3. 튀긴 음식을 피하고, 짠 음식을 멀리하라. 4. 간염·당뇨병을 조심하라. 백세인은 간염·당뇨병이 없다. 5. 일하는 사람의 평균 수명은 노는 사람보다 14년 길다. 6. 자식에게 의존하지 말라. 문제는 자신이다. 7. ‘바쁜 노인’은 치매가 없다. 끊임없이 책을 읽고 대화하라. 8. 시계추처럼 살아라. 규칙적으로 기상·식사·노동·취침이 건강 비결이다. 9. 친구를 많이 사귀어라. 외로움은 장수의 적이다. 10. 등산은 장수운동이다. 중산간(中山間) 지역에 장수마을이 많다.
140    五福을 부르는 삶 댓글:  조회:4045  추천:0  2012-08-11
五福을 부르는 삶      궁극적으로 행복이란 무엇인가? 복 받는 삶을 사는 것이 행복이고, 그 중의 으뜸은 오복을 다 갖춘 삶을 사는 것이다. 오복이란 그 다루는 범위에 따라서 많이 다른데 한생을 살아감에 있어서의 오복이란 壽(수), 富(부), 康(강), 德(덕), 善終(선종)이라고 하겠다. 오복 가운데서도 으뜸의 복은 장수하는 것이다. 권력을 지닌 임금이나 최고의 재부를 지닌 석숭 같은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하여도 일찍 죽는다면 복 있는 삶이 아니다. 옛말에 개똥밭에 굴러 다녀도 이승이 좋다고 하지 않았던가? 오복 중 둘째복은 부자로 사는 삶이다. 개똥밭에 굴러 다녀도 이승이 좋다고 하였지만 한평생을 가난 속에서 허덕이며 살아간다는 것은 역시 복 있는 삶이라고 할수 없다. 정당하게 재부를 일구어 놓고 좀 풍족하게 살라는 의미인데 가장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목표이다. 세 번째 복은 강녕으로서 건강을 뜻한다. 오래도록 살았고 또 부자로 살았어도 몸에 병이 많고 건강하지 못하게 살았다면 본인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아주 힘든 삶이 될것이니 역시 행복한 삶이라고 할수 없다. 네 번째 복은 덕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찬미를 받으며 삶을 의미한다. 덕은 행복을 끌어 당기는 힘이 있다. 논어(論語)에 이라는 명구가 있는데, 덕이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외롭지 않고 반드시 친한 이웃이 있다는 의미이다. 논어에서는 또 라는 말도 나온다. 먼 곳(遠方)으로부터 벗들이 기쁨을 가지고 찾아올 정도로 덕이 많은 사람이라면 가까운 곳(近方)으로부터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쁨을 가지고 찾아 올지는 不聞可知가 아닌가? 오복의 마지막 복은 善終, 즉 잘 죽는 것이다. 어린 자식을 두고 불의의 사고로 죽었거나, 젊은 나이에 병사한 사람의 장례식장에 가보라; 가속의 비통함과 애절함에 하늘도 눈물을 흘릴 지경이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사람이 천수(天壽)를 누리고 죽었다면 죽는 것 자체가 무겁고 서글픈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호상(好喪)이라는 말이 실제로 존재하며 호상엔 장례를 마치 축제처럼 치렀다. 선종이란 바로 아무런 원망과 유감이 없이 아주 만족스럽게 만년을 살다가 고통없이 죽는것을 말한다. 위의 오복을 정리하면 장수(長壽)와 강녕(康寧), 선종(善終)은 건강에 관한 복으로 분류할 수 있고, 덕(德)은 주변인과의 좋은 관계의 중요성을 이야기한 부분이며, 부(富)는 사회적 성공의 필요성을 언급한 것이다. 오복을 모두 누리고 사는 사람은 드물겠지만 대체적으로 행복하게 산다고 공인받는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즉 그들의 평상시의 생각과 삶의 방식이 바로 복을 불러 온다는 사실이다. 복이 있는 사람들은 우선 자기 자신을 잘 관리하고, 아울러 주변 사람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배려하며,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시종 락관하며 살아간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정리
139    족보 도서관 댓글:  조회:3465  추천:0  2012-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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