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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가 그린 삶과 사랑과 죽음의 시
한반도에 표현주의미술이 상륙하다
얼마 전부터 우리나라에도 낯설게만 느껴졌던 독일 표현주의미술을 비롯한 다양한 경향의 미술이 활발히 소개되고 있다. 근대서양미술 하면 으레 빈센트 환 호흐(Vincent van Gogh)의 「자화상」모티프나 「해바라기」혹은 그의 광기와 총기자살, 피카소의 입체주의 작품 속에 나타난 뒤틀린 여성들의 육체와 그 유명한 「게르니카」, 어린 시절 방에 걸린 르느아르와 드가의 회화 속 유복한 프랑스소녀들의 이채로운 아름다움, 남태평양으로 떠난 뽈 고갱의 생애를 다룬 서머싯 몸의 소설「달과 6펜스」, 모딜리아니의 그림에 등장하는 목이 긴 여인들 정도가 떠오를 것이다.
오늘날 미술에 대해 조예가 깊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딜레탕트 기질을 지닌 풋내기들에게까지 표현주의미술의 영역은 재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표현주의 미술에 대한 관심을 지적허영심으로 폄하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보다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중반까지 독일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표현주의화가들이 표현하려고 했던 주제가,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까지 잊을 수 없는 파급을 주는 어떤 매력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더욱 설득력을 지닐 것이다.
산업사회 속의 인간소외, 그리고 푸른 예술가들
후기자본주의 사회 속의 20세기 초 유럽대륙은 과학문명의 진보로 후끈 달아 있었다. 모든 것이 진보에 대한 과장 섞인 희망으로 한껏 부풀었던 ‘벨 에포크(La belle epoque)'시대의 이면에는, 인간을 한낱 상품으로 전락시키는 물질문명 속의 끔찍한 인간소외와 고통이 매섭게 드리워져 있었다. 사회주의 혁명가들과는 또 다른 관점으로 표현주의화가들은 산업사회의 후미진 구석에 예리한 시선을 뻗쳤다. 감수성이 예민한 빛나는 눈에 포착된 세상은 그릇된 모순으로 점철된 病과 혼돈의 시대일 뿐이었다. 고로 그들은 아름다운 세계를 낭만주의적인 관점으로 보기 좋고 고상하게 그리던 이전세대와 결별을 선택한다.
부모를 잃어버린 ‘후레자식들’이 소재를 구하는 장소는 근대도시의 구석진 쓰레기통 또는 성병과 통곡이 쉴 새 없이 이어지는 환락가였다. 시궁창에서 예술이 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기꺼이 그들의 누드모델이 되어준 이들은 직업적인 모델이기보다는, 싸구려 여관을 음습하게 전전하는 쓸쓸한 창녀들이었다. 화가들이 이제 예술적 영감을 얻는 곳은 싸구려 삼류술집이었다. 보들레르의 詩구절처럼 “시궁창에서 예술의 연금술은 연마”되었다. 참을 수 없는 비애와 부유하는 욕망에 참패당한 비쩍 마른 알코올 중독자의 움푹 패인 눈동자를 캔버스에 옮겼다. 허름한 뒷골목에서 발견한 세상의 또 다른 진실은 표현주의화가들에 의해 美로 변증법적으로 승화되며 예술의 영역을 확장하게끔 돕는다.
이제 예술가들을 사로잡는 이상은 더 이상 神의 섭리나 자연의 고요함이 아니었다. 이미 벌거벗겨진 세상은 가난과 굶주림 속에 ‘문명의 열차’에 탑승하지 못한 패배자들이 득시글거리는 지옥 같은 소굴로 변질되었다. 이 즈음 마르크스는 「공산당선언」을 발표해서 국제적인 혁명을 일구어냈고, 다윈은 「진화론」을 발표해서 神중심의 딱딱한 과학에 반기를 들었다. 예술가들 또한 이런 급박한 시대적 조류에 부흥해서 허무와 악마주의적인 시각으로 위선에 가득 찬 시대를 조롱했다. 일체의 전통을 부수려고 하는 극단적인 운동 또한 감지될 지경이었다.
하지만 혼돈의 흔들거리는 위태로움은 부정적인 것들만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예술에서는 이전에 볼 수 없는 새로운 사상이 투입되며 낯설지만 가치 있는 변화의 질서를 탄생시켰다.
에드바 뭉크(Edvard Munch)의 성장기
노르웨이 출신의 화가인 에드바 뭉크는 현대회화 계보 중에서도 표현주의 운동의 개척자로 평가받는다. 일찍부터 새로운 신기원(epoch)을 개척한 사람 중의 하나로 독일과 중부유럽에서 각광받았다. 뭉크의 작품세계는 1890년 부근에 완성된 그림이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고 인기도 높지만, 다른 후기작품들 또한 위대한 매력을 낳고 있다.
에드바 뭉크는 노르웨이의 수도인 크리스티아나Christiana(현 오슬로)에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인 크리스티안 뭉크(Christian Munch)는 잘 알려진 역사학자인 P.A. 뭉크의 형제로서 종교심이 투철한 군의관으로 적당한 수입을 벌어들였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무려 20살 연하의 여성으로서 뭉크가 불과 다섯 살 때 병으로 죽었다. 에드바의 큰누나인 소피도 15세의 어린 나이로 죽었다. 에드바 자신도 자주 아픈 병약한 아이였다. 여동생 또한 일찍부터 만성적인 정신병에 시달렸다. 가족 가운데 유일하게 결혼에 성공한 동생 안드레아스도 결혼한 지 몇 달 만에 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년기는 문화적인 자극으로 부풀었으나, 뭉크는 그를 옭아매는 병과 죽음 그리고 슬픔 속에서 성장했다.
공업학교를 마친 후 뭉크는 예술에 진로를 집중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노르웨이의 내로라 하는 화가인 크리스티안 크로흐(Christian Krogh)의 지도를 받을 수 있는 ‘왕립회화아카데미’에서 전통적인 회화기법을 배운다. 그의 초기작들은 프랑스에 영향 받은 사실주의 화풍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그의 뛰어난 예술적 기량은 이내 발견된다.
1885년에 마침내 파리로 그림 유학을 떠난다. 그 해에 특출 난 성공작인 「병든 아이」를 그리기 시작한다. 그는 스승인 크리스티안 크로흐에 영향받은 대로 급진적인 공백을 만든다. 뭉크의 그림은 누이인 소피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오랜 동안 그 모티프 앞에서 투쟁했고, 고통스럽고 개인적인 경험을 표현하기 위한 ‘첫 인상’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평단은 그의 작품들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
뜻밖에 몇몇 그의 주요작품은 형식면에서 덜 도발적이다. 1889년작 「해변의 잉거」는 서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 그의 재주를 한껏 드높인 것으로, 당시 새로운 낭만주의적인 조류와 호응하는 것이었다.
뭉크의 그림들은 오스고르스트란드(Asgardstrand)를 배경으로 그려진 것이 많다. 그 곳은 Horten 근처에 위치한 고풍스러운 해안마을이다. 수많은 뭉크 그림에 등장하는 의미 짙은 해안선과 동기(leitmotif)는 그 마을에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변방에서 탄생한 세기말 데카당스
그 당시까지만 해도 문화적으로 낙후했던 변방 노르웨이 출신 뭉크는 문화의 중심이라고 일컬어지던 파리에 오면서 화가로서의 작품세계를 본격적으로 열었다. 그는 파리체류 초기 보수적인 회화교육에 급급했던 레옹 보나(Leon Bonnat)에게서 미술의 기초를 배우지만, 이내 인습적인 미술교육에 함몰 당한 교육방법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다. 초기작품 속에는 당시 서유럽의 자연주의와 인상주의에 깊숙이 감염된 북유럽풍의 색채가 짙다. 당시 북유럽회화의 자연주의는 서유럽과는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에밀 졸라(Emile Zola)로 대표되는 자연주의문학을 차용한 성격이 감지되었다. 예쁜 그림을 그리는 도안, 스타일면의 보수성, 국민주의적 색채, 낭만적인 우울함 (오늘날 끊임없이 북유럽을 규정짓는 멜랑콜리라는 정서?)에 머물며, 새로운 창의성을 온전히 끌어내지 못한 채 선진외국미술에 수동적으로 경도되기 바빴다.
새로움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싶었던 젊은 뭉크는 스칸디나비아미술의 척박함을 벗어나려고 시도한다. 즉, 훌륭한 ‘모방자’에서 그치는 요행을 피한 채, 외롭지만 창작에의 혼을 마음껏 풀 수 있는 새로운 ‘창작자’의 세계로 성큼 다가선다. 험난한 개척에 나선 그에게 가장 긴요한 도움을 준 작가들은 마네(Edouard Manet)와 독일의 막스 클링거(Max Klinger), 스위스의 아르놀트 벡클린(Arnold Bocklin)의 그림들이었다. 위의 세 화가들은 저마다 아카데미 화풍에 반기를 들고 제도권예술에 반항한 면모라는 공통점을 공유했다.
뭉크도 이 시기에는 스스로를 ‘자연주의화가’라고 간주했다. 1985년作인「병든 소녀(Det syke barn)」는 급진적인 자연주의 색채가 짙은 작품이다. 뭉크를 사로잡은 주제는 거리의 창녀들과 데카당스 예술가들 그리고 병들어 죽어 가는 아이들이었다. 1895년 그려진 「병실에서의 죽음(Døden i sykeværelset)」은 밀실공포증환자 같은 몽환적인 정서로, 누이 잉거와 앉아 있는 친척 로라를 등장시키고 작가는 무대 뒤로 후퇴한다.
딜레마 후 상징주의에 들어서다
1887년은 뭉크가 예술가로서의 딜레마에 빠진 해이다. 뭉크의 생애는 실상 여러 가지 스캔들의 연속으로 이어졌다. 그의 작품은 계속 일반대중들뿐만 아니라 당시에 내로라 하는 평론가들한테 가차 없게 외면당했고, 연인인 밀리 탈로우와의 관계는 갈수록 꼬여만 갔다. 1889년부터 1891년까지 파리에 거주하면서 전반적인 예술과 연극(헨릭 입센의 드라마), 문학, 문화를 섭렵하게 된다.
파리에 도착한 첫 번째 가을에 그는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 시기에 그려진 「밤」이라는 작품에는 심연의 외로움과 우울함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창문이 있는 외로운 대상 옆의 어두운 실내장식은 파란 색상에 의해 완전하게 지배당하며 휘슬러(James McNeil Whistler)의 「밤의 색깔의 하모니」를 연상시킨다. 이러한 모더니즘적이고 독립적인 작품은 종종 세기말의 데카당스적인 기후를 드러낸다.
1891년 크리스티아나에서 개최한 전시회에서 뭉크는 ‘우울함’을 그린 여러 개의 그림들을 선보였다. 굵게 깎아 내린 선들과 단일한 색상들은 표면을 덮으며, 프랑스 생테티슴/종합주의(synthetism)에 깊은 영향을 받은 이러한 작품들의 모티프들을 단순화되고 형식화되는 공통점을 엿볼 수 있다. 뭉크는 이를 가리켜 “상징주의에서 자연은 자아의 마음에 의해 형성된다”라고 말했다.
그는 프랑스 인상주의로부터 그의 작품세계를 탄탄하게 정립할 수 있는 중요한 것을 배우게 된다. 특히 거리풍경을 캔버스에 옮기는 인상주의화가들의 작업은 그를 강렬하게 사로잡았다. 특히 파리도시 특유의 풍경을 화폭에 옮기는 것에 흠뻑 반한다. 고갱을 비롯해 환 호흐와 뚤르즈-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에게서 간과할 수 없는 영향을 받게 된다. 무엇보다도 휘슬러(James McNeill Whistler)에게서 가장 큰 영향을 사사하게 된다.
그는 권위에만 급급하던 보네와의 결별 후 ‘생 끌루 거리’에 정착하며 스스로의 예술관을 탄탄하게 적립해 나가기 시작한다. 인습적인 소재에 머물렀던 익숙한 방식을 탈피해서 살아 있는 인간, 나아가 뭉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신성하고 강력하게 그려야겠다고 결심한다. 생 끌루에서 피사로(Camille Pissarro)와 휘슬러를 패러디해서 파리를 그려낸다. 그는 묘사적이기보다는 암시적이고, 사실보다는 분위기를 중요시하는 색과 형식의 조화를 시도한다. 자연과 교감을 나누는 선에서 멈추는 것을 탈피해서, 그림을 통해 인간이 감정이입을 이끌기를 바랐다. 하지만 비과학적이고 상징적인 색채 사용은 이내 그와 자연주의와 만나는 시간이 그다지 길지 않음을 알리는 예감이기도 했다.
당시 뭉크는 잘 알려진 「절규」의 첫 번째 스케치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점묘주의적인 다양한 인상주의 그림들을 완성했고, 모티프들은 주로 세느강이나 크리스티아나市에서의 산책, 그리고 ‘카를 요한 거리’였다. 그러나 그것들은 영혼의 영감을 담은 작품들이었기에 단순히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작품들은 아니었다. 그것은 뭉크의 주요한 관심사였다.
「절규(Skrik)」는 종종 최초의 표현주의적인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또한 그 작품은 뭉크의 그림 가운데에서 가장 극단적인 작품 중의 으뜸이다. 강렬한 표현은 그림들의 역동성이나 색깔, 선에 의해 크게 좌우되었다. 이 장면은 그로테스크하게 비틀어져있고 뭉크 자신 내면의 지옥에서 연유한 것이었고 그림은 세기말(fin-de-siecle)의 절망적인 면과 불안, 묵시론적 세계를 담은 것이었다.
뭉크의 파란빛
뭉크의 그림에 나타난 파란색은 외로움과 갈망, 신비로움을 상징하는 의미 깊은 색깔이다. 막스 클링거의 「푸른 시간」에 나타난 중세 스칸디나비아적 낭만주의와 휘슬러의 미학적 인식은 뭉크를 이내 상징주의 세계로 진입하게 만들었다. 예컨대 1892년작 「키스(Kyss)」를 보면 탁한 푸른색이 인상 깊게 와 닿는다.
생애 전체를 통해 불운한 사랑 때문에 가슴앓이를 했던 그는 상징주의자들이 선호한 주제였던 여자, 사랑, 불행에 이내 매료되었다. 그 즈음 덴마크 출신의 상징주의시인인 엠마누엘 골드슈타인(Emanuel Goldstein)과 친밀한 교재를 나누기 시작하면서 그는 차츰 자연주의와의 이별을 선언한다. 객관적인 묘사와 사회 중심적 주제를 거부하는 대신, 그는 처음도 끝도 없고 주관적이고 낯설고 무시무시한 주제에 천착한다. 인물들의 심리적 상태와 해설자(시인)의 감정적 상태가 조응하는 것은 뭉크의 1890년작 「생 끌루의 밤」에서 잘 나타난다. 뭉크는 무일푼으로 가난하게 살아가는 파리에서의 소외 받은 예술가로서의 생활을 새로운 프레임 안에 담아냈다. 그 안에는 이국에서의 소외와 경제적인 빈곤함뿐만 아니라, 연인에게 배신당한 처절한 좌절감과 죽은 아버지에 대한 복잡 미묘한 애도가 숨겨져 있었다.
뭉크는 성서와 신화를 조합해서 ‘사랑과 죽음, 죄, 징벌’이라는 소재를 봉합했다. 막스 클링거의 작품인 「사랑: 문 앞에서(1867)」와 「사랑: 공원에서」와 같은 작품에서 나타나는 것을 변모시켜서, 색채의 상징적인 사용으로 상징주의의 수준을 한층 드높였다. 하지만 뭉크가 사랑과 죽음에 대해 지니는 생각은 막스 클링거보다 훨씬 이교도적이고 복잡다단했다.
뭉크와 문학, 뭉크와 스트린드베리의 그림들
스스로의 예술관을 수준 높게 정립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그림뿐만 아니라, 글쓰기에도 뛰어난 재주를 보인 재능과 당시 유럽문학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한 영특함이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뭉크와 함께 보수적인 노르웨이사회에서 배제된 극작가 헨릭 입센이나 쿠느트 함순(Knut Hamsun), 그리고 스웨덴의 이단아인 스트린드베리(August Strindberg)의 작품을 지지하는 것을 넘어서 그들의 작품집 삽화를 그려주며 문학에 대한 사랑을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파리에서 그는 입센의 극작품의 상연을 위한 두 개의 포스터를 제작했다. 이 작품은 ‘Theatre de L‘œuvre'에서 상연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보들레르의 「악의 꽃(Les fleurs du mal)」책표지도 만들었다. 1898년 노르웨이에 귀국한 후 독일잡지인 「Quickborn」의 표지를 만들기도 했다. 그것은 스트린드베리에 의해 편집되는 것이었다.
노르웨이의 대표적극작가인 헨릭 입센이 1906년 죽었다. 1906년에 뭉크는 막스 라인하르트(Max Reinhardt)가 베를린의 ‘도이체 극장(Deutsches Theater)'에서 입센의 작품 「유령」을 상연할 때 무대디자인을 선도적으로 도왔다.
스트린드베리와 뭉크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림을 그렸다. 뭉크는 전업화가가 아닌 극작가 스트린드베리로부터 자유분방한 창의성의 발현과 ‘자기반성과 발견의 행동’으로써 미술을 배우게 된다.
뭉크는 철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뭉크는 ‘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니체에 대한 존경으로 여러 해 바이마르에 그의 삶과 정신세계를 좇기 위해 여행을 감행했고, 여러 개의 작품을 니체의 누이인 엘리자베트 페르스터-니체(Elisabeth Forster Nietzsche) 초상화를 그리는데 할애하기도 했다.
보헤미안이 될 수 없는 보헤미안 뭉크, 그리고 반여성주의자(?) 뭉크
1889년에 크리스티아나의 보헤미안의 우두머리인 한스 얘거(Hans Jæger)의 초상화를 그렸다. 뭉크와 한스 얘거와의 우정은 그가 무정부주의자들과 교류를 하기 시작한 점을 넘어서, 작품세계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고 그의 내부에 새로운 근심과 갈등을 초래했다.
당시 뭉크는 그의 생애의 다양한 결들을 투사하는 거대한 글쓰기 작업을 하는데 온갖 정성을 바쳤다. 이러한 초기 글들은 1890년대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해설서 같은 성격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 시점을 즈음해서 얘거와 스승인 크리스티안 크로흐(Christian Krogh)와 더불어 ‘보헤미안운동’에 깊숙이 빠져든다. 기존의 가치를 거부하고 기독교적인 관습에 반기를 든 보헤미안운동은 동시에 자유연애와 여성해방을 주창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종교적인 아버지에게서 혹독하게 교육받은 종교적 엄숙함은 그를 끝내 보헤미안기질에 전적으로 빨려 들어가는데 훼방을 놓는다. 뿐만 아니라, 보헤미안그룹에서 알게 된 여자(Milly Thaulow)와의 사랑이 결국 파탄으로 치닫자, 그는 여성에 대한 혐오의 감정으로 보답한다. 뭉크에게 있어 여자는 聖女가 아닌, 다만 惡女에 가까운 부정적인 존재로서 그림작업을 방해하는 대상에 지나지 않게 된다. 연거푸 사랑이 환멸 짙은 실연으로 귀결되자, 결국 죽을 때까지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사랑은 또 다른 고통이고 질투로 돌아오고 만다”는 냉소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눈視 속의 눈」같은 작품에는 「별빛 짙은 밤」의 주제가 변용되어서 남녀관계를 표현한다. 이 그림에서 ‘나무’는 에덴동산의 ‘지식의 나무’를 상징하고, ‘정원’은 아담과 이브가 맘껏 뛰놀았던 에덴동산을 상징한다. 하지만 뭉크는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남성을 악으로 유혹하는 거대한 힘을 내포하고 있고, 남성은 여성의 접근을 이겨낼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므로 끝내 파국에 이른다”고 생각했다.
생의 프리즈-삶과 사랑과 죽음의 시
고향인 크리스티아아에서 자연주의를, 파리에서 인상주의를, 베를린에서 상징주의를 거친 뭉크는 「생의 프리즈-삶과 사랑과 죽음의 시」라는 연작을 제작한다. 그는 “이 연작은 따로따로 감상하면 이해하기 힘들 것이므로, 하나의 맥락 하에 감상되어 이해되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20세기미술은 사진의 발명과 발전에 힘입어 더 이상 사실 그대로 정확하게 표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마침내 해방된다.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적인 세계에 주목하기 시작하며, 무엇보다도 주관적인 느낌을 중시하게 된다. 특히 연작의 테마는 “사랑의 눈뜸”, “사랑은 피어나고 시든다”, “삶의 공포, 죽음”이라는 소제목을 지닌다.
1892년 가을 뭉크는 파리에서 체류한 기간 동안 그린 그림들을 전시해보며 나름대로 작품세계를 점검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전시회 덕택에 뭉크는 작품들을 ‘베를린 예술가협회’에 전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것은 실로 무시무시한 스캔들의 성공(succes scandale)을 불러일으켰다. 일반대중들과 나이든 화가들은 뭉크의 예술작품을 무정부주의적인 직설법으로 해석했고, 전시회는 반대여론 때문에 일찌감치 막을 내려야 했다.
그 점 때문에 뭉크는 자신의 이름을 독일에서 뚜렷하게 각인 시킬 수 있었고, 그는 이내 그 곳에서 머물기로 결심한다. 스칸디나비아반도 출신 지식인들과 예술가들, 문필가들을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풍성히 가졌다. 여기에는 노르웨이의 건축가인 비겔란(Gustav Vigeland)과 덴마크 작가 홀거 드라흐만(Holger Drachman), 폴란드 시인 Stanislaw Przybyszewski와 독일의 예술사학자 율리우스 마이어-그라페(Julius Meier-Graefe)뿐만 아니라,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니체의 철학이나 신비주의(occultism), 심리학, 섹슈얼리티의 어두운 이면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1893년 12월에 뭉크는 「여섯 개의 연작; 사랑」이라는 주제로 ‘운터 덴 린덴(Unter den Linden)'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이것은 뭉크가 이후 「삶의 프리즈(frieze)-삶과 사랑과 죽음에 관한 시」라는 연작의 시작점이었다. 이러한 작품들에는 「폭풍」, 「달빛」, 「별빛 짙은 밤」으로 이어졌다. 다른 모티프들은 사랑의 어두운 면을 투영한 것들로서 「장미와 아멜리」, 「흡혈귀」같은 작품에서 두드러져 나타난다.
다양한 그림들은 죽음을 테마로 그려졌다. 그림 속의 드라마틱한 접근은 뭉크 그 자신을 상징한다. 「삶의 프리즈」 이듬해에 뭉크는 좀 더 큰 화폭에 상징주의적인 「근심」, 「재들」, 「세 개의 무대 안의 여성들」등을 그렸다.
「카를 요한 거리의 저녁」이라는 작품을 보면 얼굴 속에 감추어진 모습이 나타난다. 그것은 평화로운 모습 뒤에 드리운 무덤과 창백한 시체의 형상이다. 군중 속의 근심과 고립이 짙게 풍기며 모든 인물들의 눈은 비정상적이다. 1886년에 완성한 「사춘기(Pubertet)」는 성적발달현상 앞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소녀의 추레한 나신이 나타난다. 이 그림에서 그림자는 과거의 기억의 표현으로 뭉크가 경험한 삶의 체취의 반영이다. 그림 속 소녀는 섹슈얼리티의 개화와 대중사회에서 익명의 존재로 자라난다는 이중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커다랗게 뜨고 있는 두 눈은 대중에게 보여질 수밖에 없는 산업사회 속의 왜소한 개인을 상징한다. 1889년에 완성한 「봄」에서는 죽음의 테마가 강렬하게 나타난다. 뭉크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가면을 쓴 것 같은 그로테스크한 얼굴에 움직임이 긴박하게 돌아간다. 다시 말해 그림 속 인물들은 언제나 두 가지 타입으로 일반화되는데, 하나는 개인이고 두 번째는 어떤 대표성을 가지는 일반화된 타입들이다. 그는 매우 단순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종합주의와 상징주의를 결합해서 그만의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뭉크의 작품에 대한 독일에서의 냉대
지금 보면 그다지 특이하지도 요란하지도 않을 듯한 「흡혈귀」같은 작품은 당시 크나큰 반향을 몰고 왔다. 보수적인 풍토가 팽배한 독일에서 뭉크의 작품들이 심각하게 평가 절하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결국 전시회는 7일 만에 막을 내리는 선에서 봉합된다.
당시 독일미술계는 자연주의가 주류를 이루면서 전통적 아름다움과 인물을 정확히 묘사하는데 그쳤다. 뒤늦게 산업혁명에 뛰어든 독일은 산업화의 질주에 힘입어 물질적인 풍요는 차츰 이루어냈지만, 그에 비해 괄목할 만한 문화?예술 분야의 성장은 취약했다. 새로운 예술을 향한 동경은 이내 뭉크를 포함한 젊은 예술가들의 혁신적인 창의성과 도전으로 차츰 깨져나갔다. 하지만 뭉크의 작품은 ‘다리파(Die Brucke)' 예술가들인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흐너(Ernst Ludwig Kirchner)나 조지 그로쉬(George Grosz) 같은 화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드레스덴에서 활동하던 ‘다리파'는 뭉크의 그림에 관심이 짙었지만, 뭉크의 전시회를 개최하는 것을 돕는 것에는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비록 뭉크가 독일인은 아니었지만, “뭉크는 비독일인 가운데 현대독일미술에 가장 깊은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라고 ‘베를린국립갤러리’ 원장인 루드비히 유스티는 말한다.
귀국 후 맞이한 조국에서 엄습하는 죽음
뭉크는 독일에서의 파란만장한 활동을 마무리하고 고향인 노르웨이로 귀국한다. 노르웨이미술계에서 뭉크는 조각가인 비겔란(Gustav Vigeland)과 함께 가장 국제적인 명성을 누리는 소수의 노르웨인 가운데 으뜸이다.
세기말 즈음에 뭉크는 「삶의 프리즈」시리즈를 마감하기 위해 혼신을 다했다. 그는 수많은 그림을 그렸고 그것들 중 몇 개는 큰 그림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아르누보 미학을 일깨우는 작품들이었다. 연거푸 사랑에 실패하면서 그에게 그림은 구원으로서 성격을 띠게 된다. 세기말에 그는 쉴 새 없이 다양한 실험을 벌였다. 좀 더 색깔이 짙고 장식적인 스타일은 ‘나비派(Nabis)'에 영향을 받은 면이 크다. 특히 모리스 드니(Maurice Denis)는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899년 초기에 그는 「삶의 춤(Livets dans)」이라는 작품을 그리면서 사랑스럽고 장식적인 평면 스타일에 개인적인 기념비를 완성했다.
크리스티아나 피오르드를 그린 풍경화의 연작들은 장식적이고 감각적인 것들이었다. 자연은 북유럽 특유의 신화와 결합되어서 상징적인 메시지를 담아냈다. 고전적이고 다양한 이미지를 환기시키는 「다리 위의 소녀」는 1901년 여름 오스고르스트란드에서 그려진 것이다.
그의 작품세계의 중요한 주제인 죽음에 대한 집착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짙어져갔다. 그는 평생을 걸쳐 끊임없이 죽음에 대한 공포에 짓눌린다. 지옥의 문책에 시달리는 강박관념에서 탈피할 수 없었던 그는 병마와 착란으로 점철된 유년기 집안 분위기를 “아기에게 있어 산파와 같은 영향을 주었다”며 작품세계 안에서 효과적으로 승화시켰다. 그는 말년에 “공포와 병이 없었더라면 나의 생애는 방향타 없는 배와 같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뭉크의 초기작부터 후기작까지 죽음은 셀 수 없이 변형되어서 나타났다. 죽음의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던 어린 시절 경험으로 미루어보면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는 “나는 보고 있는 것을 그리지 않는다. 나는 예전에 봤던 것만을 그린다”고 얘기하며, 어린 시절 죽은 누이와 어머니에 대한 추억을 수도 없이 그림에 반영했다. 1890년작 「생 끌루의 밤」에 나타난 그림 속 남자는 바로 친구인 엠마누엘 골드슈타인이다. 그가 그리려고 하는 것은 우울한 이, 죽음을 의식하는 이로서, 죽음을 현재 속에서 사고하는 인물이다. 뭉크는 한 글 속에서 “인간의 얼굴은 아름다움과 세상의 고통으로 동시에 가득 차 있다. 왜냐하면 죽음과 삶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낯은 몇 천 년 동안, 태어난 뒤 죽은 사람들의 생명순환의 사이클이 투영된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여성의 세 개의 무대」라는 1894년 작품을 보면 그림 안에 세 명의 여성들이 등장한다. 제일 왼쪽에 있는 여성은 ‘바다의 여인’으로 바다요정으로서 남성의 구애에 초월한 존재 이레네(Irene)이다. 두 번째 있는 여자는 악녀를 상징하는 교태로운 여성으로 삶의 기쁨(joie de vivre)을 표방하는 여성으로 마야(Maya)이다. 세 번째 있는 여자는 뭉크의 슬픈 누이로서 창백한 표정을 머금으며 이레네의 최후의 운명을 암시한다. 평론가 모니카 그랜은 이를 가리켜 “고통의 꽃”이라고 불렀다.
뭉크의 색, 선, 판화술
그의 세 가지 연작인 사랑과 삶, 죽음이라는 주제는 그의 비관적인 인생관과 표현주의 언어가 훌륭하게 결합되어서 뭉크만의 색을 창조해낸다. 그에게 있어 색은 단순한 묘사의 수단이기보다는, 하나의 상징으로서 음악적인 특성까지 내포한다. 즉, 모티프 내면의 감정적인 측면과 정서적 측면을 뭉크의 자전적인 경험과 함께 아우른 것이다. 그는 아르누보적 율동적인 물결 선과 강한 대비를 이루는 직선형태의 수평선을 조화시켜서 강렬한 표현을 이루어냈다.
그는 단순화된 선의 강렬함을 살리기 위해서 판화작업에 매달리며 모티프를 변형하고 확장했다. 판화가 내면세계를 드러내는데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주로 초상화를 동판화로 그리면서 에칭기법과 등사기법을 최대로 사용해서 표현의 영역을 확대했다. 이후 그는 돌 위에 석판화를 완성하면서 「삶의 프리즈」 모티프를 흑백으로 옮기는데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일견 원시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화과정을 기울인 끝에 파도무늬와 석판의 커다란 평면이 상호 교환적 역할을 하면서 아르누보를 꽃피운 것이다.
1896년 봄부터 그래픽 매체(graphic medium)에 큰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그는 베를린에서 리소그래피(석판인쇄)와 에칭에 관심을 확대했다. 그는 유명한 화가인 Auguste Clot과 함께 나무 위에 판화를 제작하며 독특한 색깔을 창조해내는데 애정을 불어넣었다. 뭉크는「거울」이라는 주제로 판화작업을 지속하며 「삶의 프리즈」 시리즈를 확대 발전시켰다. 오늘날 뭉크는 미디어에 대한 체계적인 감각과 그의 독특한 색채를 다루는 기법으로 인해 그래픽 예술가 중에서 위대한 선조로 손꼽히고 있다.
성공과 위기
새로운 세기에 뭉크는 그의 직업세계를 확고하게 체계화해 나갔다. 1902년에 그는 「삶의 프리즈」시리즈 전체를 베를린에서 연속적으로 전시했다. 1905년 체코의 프라하에서 개최한 전시회는 프라하 출신 예술가들에게 불꽃같은 영감을 선사해주었다. 1904년 그려진 「린데 박사의 아들들」은 현대인물화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예술적인 성공은 이내 개인적인 파멸로 귀결되었다. 알코올은 심각한 문제로 남게 되었고 뭉크는 늘 정서적으로 평안하지 못했다. 그는 지난 시절 옛 사랑의 실연에 몹시 괴로워했고 1902년 오스고르스트란드에서 권총자살을 시도하면서 왼쪽 손에 심각한 부상을 입기도 했다. 그는 이 사건의 치욕을 온전히 극복해내지 못했다. 그 해 벌어진 사건들은 망상과 강박관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마라트의 죽음」에서 보여지는 여성의 모습은 남자들과 여자들 사이의 사랑에 관한 다툼이라고 알려진다.
이 기간 동안 새로운 모티프들은 좀더 외향적인 성격을 나타나게 된다.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 그려진 「목욕하는 남자들」이라는 작품에는 생명력 짙은 남성성에 대한 강렬한 시선이 투영돼 있다. 그러나 알코올중독증과 정신병적인 증세는 최고조에 이르렀고 뭉크는 여덟 달 동안 정신병원에 머물기로 결심한다.
이 때를 즈음하여 그의 조국인 노르웨이는 그의 작품세계의 위대함에 차츰 눈을 뜨기 시작했고, 노르웨이의 국왕인 성 올라프는 그에게 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뭉크 생애의 밝은 햇살
그는 고향에서 주로 오스고르스트란드(Asgardstrand)에 머물며 외부와 철저히 단절하도록 애썼다. 당시 모더니즘을 대도시와 결부시켰던 다른 예술가들과 달리, 그는 한적한 마을에서 근대성을 탐구했다. 술과 그림과 바다가 유일한 위안이 되었다. 내면세계를 응시하며 화려한 흥청거림의 도시생활에서 느낀 소외와 고독을 그림 속에 절절히 담아내었다. 철저히 혼자가 되는 과정을 통해 그는 생의 불안과 죽음의 공포를 ‘감히’ 표현했다. 1908년 귀국 후 그린 그림은 독일에서 그린 작품들에 비해 상당부분 밝아진다. 특히 크라게르에서 그린 그림들은 밝은 색상을 짙게 쓰며 스스로 병을 치유하고 싶은 그의 의지가 돋보인다. 1909년부터 그의 삶의 최후까지 노르웨이에 머물렀다. 처음에는 남쪽에 위치한 크라게르(Kragerø)에 정착했다. 여기에서 그는 여러 가지 겨울풍경을 담은 작품들을 그렸고 크리스티아나 대학교의 새로운 강당인 Aula를 위한 디자인에 온갖 정성을 바쳤다. 1912년에 쾰른에 영구적으로 뭉크를 기념하는 전시장을 가지게 되었다. 크라게르에서 그는 커다란 실외 스튜디오를 가질 수 있었고, 여러 해 동안 Aula의 완성을 위해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뭉크의 작품은 드디어 1916년 완성되기에 이른다.
뭉크 그 자신에 따르면, 아울라의 모티프들은 “삶의 인지적인 힘들”을 담아 내려한 시도였다. 건물의 뒤에는 피오르드 주변의 햇볕이 보인다. 이 모습은 뭉크가 크라게르에서 살았던 환경을 따온 것이었다. 널따란 환경은 광활하고 삶을 선사하는 빛의 위대함에 모아졌다.
뭉크는 후반기에 이르러 당시 부흥하는 노동운동에 대한 관심이 짙어졌다. 「집으로 가는 노동자들」(1913-1915)은 전망과 운동을 포괄하는 역동적인 연구가 담겨 있는 작품이다.
1916년에 뭉크는 크리스티아나 외곽의 에켈리(Ekely)를 샀다. 풍경은 자연 그리고 말?쟁기들과 일치를 이루었고, 이것은 이내 강렬하고 명확한 색깔을 사용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상큼하고 자발적인 붓의 움직임에서 그는 투박하고 감각적인 이미지로 태양과 공기와 지구를 그렸다. Ekely에서 뭉크는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고립에 묻혀서 지냈다. 단지 자기가 그린 그림들로 둘러싸인 고즈넉한 공간에서 그는 후반기 작업에 몰입했다. 그는 여전히 생산적인 그림활동을 벌였고 그의 작품들은 전 세계의 많은 나라에 선을 보이게 되었다.
생의 끝 부분에서 뭉크는 살아 있는 모델을 사용한 여러 작품들을 선보였다. 이것들 중 일부는 강렬하고 삶을 끌어안는 질로 평가받는다. 다른 것들은 그가 1890년대에 실험한 갈등으로 가득 찬 주제의 연속선상에서 고찰될 수 있다.
자연을 그린 그림들에도 긴장과 대립의 정서는 확연하게 나타난다. 1913년에 그려진 「오리들과 칠면조들」은 위의 예에 속하는 작품이다. 1913년에 그려진 「하품하는 여자」는 「절규」의 여성적 변형으로도 일컬어지며, 특히 “야수파의 색채가 물씬 풍긴다”라고 아르네 에굼과 위르겐 슐체는 지적하고 있다. 마티스에 의해 주도된 야수파는 뭉크의 예술적 접근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적잖았다.
뭉크의 자화상
마지막으로 뭉크의 자화상들을 보자. 커다란 화폭에 전신상을 그린 초상화 시리즈는 그의 작품세계에 있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의 자화상은 무자비하고 정확하고 쉴 새 없이 문제를 제기하는 은유가 담겨져 있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초기부터 죽음으로 향할 때까지 자화상 그리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자화상은 미술사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심리학적이고 사회학적이고 전기적인 성격도 동시에 가진다. 1906년부터 그려진 『와인 잔 앞의 자화상』은 무기력하고 밀실공포증적인 카페 인테리어 속의 외로운 내면을 보여준다.
자화상을 그린 렘브란트부터 시작해서 환 호흐, 페르디낭 호들러(Ferdinand Hodler, 스위스의 아르누보 화가), 막스 베크만(Max Beckmann)으로 이어지는 초상화의 역사 중에서 뭉크 또한 결코 누락할 수 없는 인물이다.
의외로 그의 죽음은 평온하게 다가왔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벌써 한 번 죽었다.” 그는 1944년 1월 숨을 거둔다. 그의 회화작품 대부분과 그의 작품세계와 삶을 적은 글모음들을 오슬로 시에 헌사되었다. 연속적으로 ‘뭉크 미술관(Munch Museet)’은 1963년 문을 열었고 뭉크의 작품들 중 중요한 수많은 작품들을 보유하고 있다. 그의 작품세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초기작들은 주로 뭉크 박물관과 베르겐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낯선 북구에서 활동한 그의 작품을 보고 매료되는 것은, 그의 작품 안에 우리들의 고독, 사랑, 소외, 질투, 미움, 공포, 광기를 표현해주는 메타포가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울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내면의 또 다른 뭉크가 살아 있기 때문에 우리 역시 그의 절규에 몸서리치게 되는 것이리라.
참고문헌;-
에드바 뭉크, 「뭉크 뭉크」, 이충순 역, 다빈치, 2000
Ulrich Bischoff, 「Edvard Munch 1863-1944」, Taschen, 2000
Louise Lippincott, 「Edvard Munch: Starry Night」, Getty Museum Studies on Art, 1998
Frank Høifødt, 「Edvard Munch」, the Norwegian Ministry of Foreign Affairs,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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