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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성을 사랑한 화가로, 근대의 다양한 모습을 화폭에 옮겼다.
에두아르 마네는 인상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화가로, 근대화되어 가는 파리의 일상을 세련되고 활기찬 필치로 그려냈다.
마네는 1832년 1월 23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오귀스트 마네는 법무부의 인사 부장이었고, 어머니 외제니 데지레 푸르니에는 외교관의 딸로 상류 부르주아 계층이었다. 카농 푸알루 초등학교, 롤랭 중학교 등을 거치며 고전 문학과 프랑스어를 배웠으며,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관심이 있었다. 조숙하고 냉정한 관찰가 기질이 있었던 마네는 주위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 홀로 소묘와 데생을 하면서 지내는 걸 좋아했고, 중학생 무렵 화가가 되고자 마음먹었다. 그러나 자신의 뒤를 이어 법률학교에 진학하기를 원했던 아버지가 맹렬히 반대했고, 마네는 타협하여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하기로 했다.
그러나 해군사관학교 입학시험에 탈락하자 마네는 르아브르 호의 견습 선원이 되어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로 갔다.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거친 선원들의 삶과 검은 눈, 검은 머리의 브라질 여인들에 매료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프랑스로 돌아온 후 다시 해군사관학교 시험에 응시했으나 탈락했고, 아버지는 그를 상류사회에 편입시키기를 포기했다.
그해 가을 마네는 토마 쿠튀르의 화실에 들어가 6여 년간 그림을 배웠다. 한편으로 루브르 박물관을 비롯해 이탈리아와 네덜란드, 독일 등을 여행하며 수많은 미술관을 둘러보고 고전 작품들을 모사했다. 그는 루벤스와 렘브란트, 벨라스케스를 특히 좋아했고,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와 보들레르가 주창한 ‘근대성’을 사랑했다. 따라서 당시 화가들이 중시하던 역사화를 거부하고 ‘근대의 생활’을 사실주의적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1859년, 마네는 살롱전에 〈압생트를 마시는 남자〉를 출품했다. 압생트는 19세기 말 파리에서 연간 200만 리터가 소비될 만큼 인기를 끈 술인데, 이 압생트를 마시는 술주정뱅이를 사실주의적인 필법으로 묘사한 그림이다. 술 취한 철학자의 이미지, 포도주와 대마초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보들레르의 영향을 받은 동시에 19세기 말 프랑스의 일상을 그린 것이기도 하다. 비록 낙선했지만,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외젠 들라크루아가 이 작품에 주목했고, 시인 보들레르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게 되었다는 점에서 성공작이라 할 수 있었다.
1863년, 마네는 수잔 레호프와 결혼했다. 마네는 쿠튀르의 화실에 다닐 무렵 동생들의 음악 선생으로 드나들던 수잔과 연인 관계를 맺었다. 수잔은 1852년 아들 레옹을 낳았는데, 마네는 그를 한 번도 친자라고 인정한 적이 없고 아이는 수잔의 동생으로 입적되었다. 마네가 왜 수잔과의 관계를 발전시키지 않았는지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1862년 아버지가 죽고 나서야 수잔과 결혼했다는 데서 네덜란드인이자 음악교사 출신이었던 그녀를 마네의 가족이 못마땅해했으리라고 짐작될 따름이다. 수잔은 평온하고 넉넉한 성정으로 마네에게 안정적인 가정을 선사했고, 이후 화가로서 추문에 시달릴 때 그의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1863년, 마네는 자신의 이름을 프랑스 화단에 널리 떨치게 할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살롱전에 출품했다. 이 그림은 살롱전에서 낙선하여 살롱 낙선전(살롱에서 낙선한 작품들을 전시한 전시회)에 걸렸는데, 이로써 엄청난 물의를 빚었다. 숲 속 나무 아래 양복을 차려입은 두 신사와 벌거벗은 채로 앉아 있는 여인의 그림은 ‘퇴폐성’으로 사람들을 당혹시켰다. 한 비평가는 그가 퇴폐적인 그림으로 유명세를 타고 싶은 모양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기존의 누드화가 여신이나 요정 등 신화 속 등장인물들로 현실적이기보다 이상화된 미(美)를 표현한 데 반해 마네의 누드는 현실적이고 평범한 인물의 사실적인 누드였기 때문에 세간의 당혹을 불러일으키며 저속하고 퇴폐적인 그림으로 평가받았다. 게다가 아카데미의 관습적인 작품 구성과 원근법 역시 부정하고 있어 화가로서의 재능조차 의심받았다.
===@<쐐기 참고>@===
19세기 중반 프랑스 화단은 실험적인 젊은 화가들의 열기로 가득했다. 문화를 선도하는 아방가르드를 자처한 젊은 작가들이 국가가 주도하는 대표적 공모전인 살롱전의 권위에 집단적으로 반발한 것은 당연했다. 살롱전에서 낙선한 젊은 작가들의 항의가 거세지자 나폴레옹 3세는 낙선한 작품만 따로 모아 대중의 심판을 받게 하자는 해결책을 내놓았다. 1863년의 ‘낙선자 살롱전’이었다.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면서 전시장은 연일 관람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인상주의 화풍의 창시자 에두아르 마네의 유명한 ‘풀밭 위의 점심 식사’도 이때 전시된 작품이다. 나체의 여인이 정장을 한 두 남성과 함께 숲속 호숫가에서 담소를 나누는 행락 풍경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했다. 나체라는 소재, 빛과 그림자의 생략 등이 인상주의 회화에 익숙해진 당시 비평가들의 눈에는 매우 낯설게 비쳤다. 그러나 마네는 이 그림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꾀하면서 인상주의의 새로운 변화를 예고했다.
/ "한국경제" 김경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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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후 마네는 살롱전에 〈올랭피아〉를 출품하면서 다시 한 번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는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에서 구도를 따와 현대적으로 재창조한 작품으로, 이번에도 모델이 지나치게 현실적이라는 이유로 퇴폐 논란에 휩싸였다. 아르테미스나 비너스 여신이 아닌 고급 매춘부가 나신으로, 그것도 관람객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이 그림은 당대 관람객과 비평가들에게 노골적인 성적 암시를 담은 외설적인 그림으로 여겨졌다. 관습적인 회화 구성을 타파하고 새로운 회화 양식을 창출한 시도로 마네는 다시 한 번 외설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파문에 휩싸였다.
마네는 “나는 본 대로 그린다.”라며 항변했지만 사건은 그가 수습할 수 없을 지경으로 커졌다. 그를 옹호해 준 사람은 보들레르와 에밀 졸라뿐이었다. 보들레르는 당시 마네에게 쏟아진 조롱을 ‘민주주의와 부르주아의 어리석음’이라고 말하며 마네를 예술이 노쇠한 시대에 태어난 ‘시대를 앞선 천재’라고 불렀다. 비난을 견디다 못한 마네는 스페인으로 떠났다.
===@<쐐기 참고>@===
1863년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가 세상에 나왔을 당시에도 사회적 충격과 비판은 상상을 초월했다.
‘올랭피아’는 이탈리아 화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모방한 작품이다. 그러나 '우르비노의 비너스'와는 달리 마네의 작품은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게 된다. 두 작품 모두 누드화인데 말이다. 왜 그랬을까. 당시엔 작품속 나체 여성은 신격화된 모습으로 그려졌는데 마네의 그림 속 주인공은 창녀를 모델로 했던 것. ‘올랭피아’는 창녀들이 사용하던 예명이었다. 마네는 그림에서 부도덕하고 저급했던 파리의 밤의 단면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그의 전작인 ‘풀밭위의 점심식사’도 그렇고 마네는 사회현실을 고발하는 매우 혁신적인 작가였다. 그렇기에 사회는 그를 곱지않은 시선으로 바라봤고 그가 내놓는 작품마다 비판이 쏟아졌다. ‘루이 오브리’는 미술사에서 올랭피아만큼 사람들의 비웃음과 야유를 산 작품은 없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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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로 돌아온 후에도 마네는 1866년 살롱전에 〈피리 부는 소년〉을 출품했으나 외면당했고,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는 출품을 거부당했다. 반면 에밀 졸라는 마네의 작품을 새로운 미술 운동이라고 열렬히 옹호했고, 점차 마네의 그림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네의 그림은 아카데미 화풍을 따르는 화가, 비평가들에게는 비난받았으나 드가, 피사로, 르누아르, 바지유, 모네 등 젊은 화가들에게는 열렬한 찬사를 받았다. 마네는 이들과 교유하는 한편, 경마, 증기선, 항구 등 다양한 근대의 모습을 화폭에 옮겼다.
1868년에 〈졸라의 초상〉이, 이듬해 〈화실에서의 점심식사〉와 〈발코니〉가 살롱전에서 입상했으나 데생 실력마저 의심받는 등 화가로서의 자질에 대한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마네는 일생 명성을 추구했는데, 이는 그가 살롱전에 끈질기게 출품한 데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본인의 바람과 달리 마네는 늘 19세기 프랑스 화단의 문제아로 취급받았다. 또한 그는 늘 그림으로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증언하고자 했는데, 그 관심은 특히 1867년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이라는 작품으로 표출되었다. 멕시코 혁명으로 막시밀리안 황제가 처형된 사건을 그린 이 그림은 당시 황제 정부였던 프랑스에서 용인되기 힘들었고, 결과적으로 마네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를 건드린 셈이었다. 이 그림 역시 또 한 번 논란을 일으키며 공개 전시가 금지되었다.
마네는 모네, 르누아르, 세잔 등 젊은 화가들과 친밀하게 교유했고, 특히 모네를 아꼈다. 1870년대 아르장퇴유에 머물던 시기에는 모네와 많은 그림을 나누며 영향을 주고받았고, 특히 〈보트의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네〉는 마네가 처음으로 야외에서 그린 그림이다. 1874년 앵데팡당전을 시작으로 인상주의자라고 불리게 될 이들은 그전까지는 ‘마네파’라고 불렸을 정도로 마네와 친밀한 관계였다. 그러나 마네는 자신이 인상주의자들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그는 스스로를 에밀 졸라가 말한 자연주의자, 혹은 사실주의자라고 여겼기 때문에 인상파 전시회에 한 번도 그림을 전시하지 않았다.
세속적 명성에 집착하는 한편, 자신의 재능에 확신을 가졌던 마네는 이를 대중적으로 인정받고 싶어 했다. 마네는 1881년에서야 살롱전에 입상하고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는 등 그토록 염원하던 명성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이 무렵 류머티즘이 악화되어 붓을 들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때문에 말년에는 파스텔화같이 육체적인 피로가 적은 그림을 그렸다.
1882년, 마네는 말년의 대작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을 완성했다. 분칠한 여인들의 냄새가 풍기는 파리의 명소를 그린 이 작품은 근대 자본주의 도시의 흥분과 번잡함을 보여 준다. 바로 마네를 일생 사로잡았던 ‘파리’와 ‘근대성’이 응축된 것이었다.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을 완성하고 병석에 누운 마네는 얼마 지나지 않아 1883년 4월 30일,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1월 에콜 데 보자르에서 추모전이 열렸고, 마네는 프랑스 화단의 문제아가 아니라 시대를 앞선 천재로 미술사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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