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사람은 오래전부터 와인을 식사의 일부로 여겨 음식과 함께 샴페인, 화이트, 레드, 스위트 와인 순으로 마셔왔습니다. 1869년 예술의 도시 파리에 뮤지컬, 발레, 곡예, 마술 그리고 누드 공연이 열리는 최초의 뮤직홀 폴리-베르제르가 문을 엽니다. 이곳으로 예술가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인상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 역시 즐겨 찾아 그의 작품 소재로 등장시킵니다. 런던의 코톨드 갤러리가 소장하고 있는 ‘폴리-베르제르의 술집’(A Bar at the Folies-Bergère)은 마네의 마지막 주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처음 발표된 1882년 파리 살롱에서 비평가들에게 원근법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습니다. 마네는 스페인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 1599~1660)의 영향을 받아 거울을 이용한 그림을 그립니다. 화가와 여성과 거울이 일직선상에 위치한다고 가정하면 화가는 거울에서 여성의 뒷모습을 볼 수 없어야 하지만 그림의 오른쪽 거울에는 여성의 뒷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후 그림의 상황을 재현하는 사진 작업이 진행되었고, 그 결과 화가는 여성의 정면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치우친 위치에서 본 장면을 그린 것임이 밝혀집니다.
스파클링 와인은 길쭉한 모양의 잔에 따르는데 그 이유는 와인의 기포를 즐기기 위해서입니다. 와인의 기포는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으로도 느낄 수 있습니다. 기포가 있는 와인을 통칭하여 스파클링 또는 발포성 와인이라고 합니다. 특히 상파뉴 지역은 라벨에 원산지를 표시하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와인 산지로, 오직 스파클링 와인만 생산합니다. 이곳에서 전통 방식으로 만든 와인을 지역명과 같은 명칭인 상파뉴 또는 영어식 발음으로 샴페인이라고 합니다.
예술가들의 메카 폴리-베르제르에서 술이 빠질 수 없었고, 마네 역시 이 작품 속에 다양한 술을 표현합니다. 그림 속의 바 테이블 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병 입구 부분이 금색 코일로 쌓여 있는 스파클링 와인입니다. 식탁 위의 와인은 맑은 금빛을 띱니다. 흡사 화이트 포도 품종으로 만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화이트뿐만 아니라 레드 포도 품종이 블랜딩되어 만들어집니다.
중년 신사 닮은 ‘샴페인 바론 드 로칠드 브뤼’와 발랄한 소녀 같은 ‘파이퍼 하이직 퀴베 브뤼’
금융 명문가인 로칠드 가문의 문장(紋章) 속의 5개 화살은 다섯 아들의 화합을 바라는 마이어 암셸 로칠드(1744~1812)가 남긴 유언입니다. 그의 뜻에 따라 아들들은 프랑스 상파뉴(Champagne) 지역에서 최초로 하나의 뜻을 펼칩니다. 아들들이 함께 만들어낸 와인이 샴페인 바론 드 로칠드 브뤼(Champagne Barons deRothschild Brut, 이하 바론 드 로칠드)입니다. 마네가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에서 여러 송이 꽃들이 함께 샴페인을 머금은 모습으로 표현했듯이, 로칠드는 화합의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각기 다른 색을 가진 분들과 함께 좋은 밸런스를 이루는 로칠드 브뤼로 와인의 시작을 열어보시기 바랍니다.
샴페인이 다른 지역에 비해 명성을 얻는 가장 큰 이유는 와인의 기포에 있습니다. 파이퍼 하이직 퀴베 브뤼(Piper Heidsieck Cuvee Brut, 이하 파이퍼 하이직) 역시 오밀조밀한 기포를 가지며 지속력이 좋습니다. 샴페인은 샤르도네, 피노 누아 그리고 피노 뫼니에 품종이 블랜딩되는데, 각 샴페인 하우스마다 사용 품종과 비율은 각각 다릅니다. 로칠드 브뤼는 와인에 산도와 꽃 그리고 감귤류의 풍미를 주는 샤르도네와 구조감, 바디감과 여운을 주는 역할을 하는 피노 누아를 6:4로 블랜딩해 만듭니다. 코로 은은하게 아카시아 꽃향이 나기 시작해 서양배, 복숭아 그리고 그 뒤로 샴페인 특유의 비스킷과 잘 구워진 빵의 풍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섬세한 기포들이 촘촘하고 힘있게 올라옵니다. 입안에 머금으면 기포가 터지며 역시 흰 꽃에서 시작해 시트러스, 열대과일 향을 거쳐 이스트 풍미를 가지며, 충분히 좋은 크리스피한 산도가 받쳐줍니다. 전체적으로 훌륭한 밸런스를 이루며 부드럽게 넘어갑니다.
바론 드 로칠드가 기품 있고 고급스러운 중년 신사의 느낌이라면, 파이퍼 하이직은 아직은 어리고 톡톡 튀는 소녀같은 와인입니다. 파이퍼 하이직은 화이트 포도 품종을 포함하지 않고 오직 레드 품종만을 사용합니다. 피노 누아와 함께 블랜딩되는 또 다른 레드 품종인 피노 뫼니에는 와인에 과실 향을 주어 어릴 때 마시기 좋습니다. 향의 복합미 또한 뛰어납니다. 빵과 비스킷의 향으로 시작해서 파인애플 같은 열대과일을 거쳐 서양배의 풍미로 마무리됩니다. 혀 위에서 역시 자몽과 붉은 사과 같은 신선한 과실 향이 인상적이며, 충분한 산도를 가집니다.
/서민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공예문화정보디자인학과 강사 겸 금속공예작가로 개인전을 5회 개최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에서 금속공예와 주얼리를 전공했고, 템플대학교에서 CAD-CAM 학위를 받았다. 영국 와인전문교육기관 WSET를 수료한 와인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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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5-06-02 10:25:09 | 수정 2016-12-30 09:50:56
【런던=AP/뉴시스】
소더비 경매사는 24일 런던서 에두아르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 술집'을 경매한다고 1일 발표했다. 소더비는 이 프랑스 인상파 작품의 예정가를 2300만∼3070만 달러로 발표했다. 201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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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
<압생트를 마시는 여자> 1876년, 캔버스에 유채, 92*68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연말입니다. 한해를 마무리 하는 모임에
참석하느라 바쁠 때이지요. 저 또한 이런 연말의 부산함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벌써 문자로만 받은 것이 8개의 모임입니다. 모임을 가면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이 술입니다.
첨잔하며 한 두잔 기분좋게 마시면 분위기도 돋우고, 가일층 기분도 좋지만
지나치면 항상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이 술이죠.
오늘은 그림 속에 나타난 <술 마시는 사람들>과
그들이 즐겨 마신 압생트란 술에 대해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드가의 작품 <압생트를 마시는 여자>는 당시 유명한 파리의 카페 누벨 아테네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곳은 마네와 드가가 자주 들렀던 카페였죠. 당시 여배우인 엘엔 앙드레를 모델로 삼아
당시 패션의 아이콘으로 명성을 날리던 파리여인들, 파리지엔의 삶을 그려냈습니다.
바로 카페에서 그녀가 마시고 있는 술이 압생트란 것입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들의 모습을 화폭에 자주 담았습니다.
이번 주 미국 타임지에 흥미 있는 기사가 올랐습니다. 이란 기사인데
번역하자면 "압생트의 부활, 압생트가 돌아왔다" 정도가 되겠지요. 도대체 이 압생트가 뭐길래 난리일까요?
인터넷을 찾아보니 그 유해성을 둘러싸고 찬반론도 만만치가 않더군요.
압생트의 기원은 18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피에르 오디넬이란 프랑스 출신의 의사가
편백나무와 아니스라 불리는 향료식물, 회향열매(흔히 마리화나라고 하지요), 약용 박하를
함께 증류해서 치료용으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처방전이 당시 유명한 주류업체인
페르노 리카르에 넘어가게 되지요. 이 회사의 유명한 브랜드가 바로 시바스 리갈입니다.(이건 잘 아시죠)
이후 이 증류주는 인기를 끌면서 당시 부르주아 사회와 드미 몽드(당시의 고급창녀)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매해 2백만 리터가 소비될 정도로 그 인기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죠.
장 베로 <카페에서> 연도미상, 캔버스에 유채, 퐁텐블로 경매에서 낙찰
유럽에서 인기를 끌었던 이 압생트는 한 세기동안 미국내에 유통이 되지 않았습니다.
미국 연방정부에서 술 자체에 들어있는 환각유발효과를 근거로 수입을 하지 못하게 막았지요.
압생트는 지중해산 약용/향료 식물인 아니스에서 추출한 연두빛 향이 눈길을 끄는 술입니다.
1800년대 후반 프랑스에선 정신이상을 유발한다는 악평을 들어야 했던 술이었고
그 유명한 빈센트 반 고흐도 이 술에 중독되어 자신의 귀를 잘랐다는 후문까지 있습니다.
장 베로 <카페에서> 캔버스에 유채, 연도미상, 개인소장
<초록빛 요정>이라 불리는 압생트는 쑥과 식물인 웜우드에서 추출해낸
연두빛깔이 그 생명입니다. 아주 곱지요. 문제는 이 식물이 환각효과를 유발하는 화학성분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편백나무 껍질에서 추출되는 이 Thujone
이 환각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것 때문에 이 물질을 넣지 않고 술을 제조한다는 조건 하에
압생트를 미국에서 판매할 수 있도록 허락을 한 것이죠. 여기에
유럽의 주류업자들의 강력한 로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후문입니다.
1890년 후반의 파리를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절이란 말로 설명합니다.
당시 활동했던 장르화가 중에 장 베로란 작가가 있습니다. 파리지엔의 일상과 거리의 풍경을
마치 사진으로 찍듯 묘사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죠. <카페에서> 시리즈에 나오는
저 술....연두빛 압생트입니다. 당시 값싸고 도수가 높아 예술가들에게도 큰 인기를 얻었죠
좌 : 빈센트 반 고흐 <압생트가 담긴 잔과 물병> 1887년, 46.3*33.2cm캔버스에 유채 반 고흐 미술관
이번 빈센트 반 고흐전에 가시면 <압생트가 담긴 잔과 물병>이란 작품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을 그리던 당시 고흐는 거의 알콜 중독 상태였다고 하죠. 거리가 보이는
창문 앞쪽에 놓인 테이블, 그 위에 놓여진 압생트 (물론 물로 희석해서 마셨을겁니다)
는 작가의 외로움과 고독을 드러내는 일종의 장치이기도 했죠.
툴루즈 로트렉(1864-1901)
<물랭루즈에서> 1892년, 캔버스에 유채, 123*141cm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헬렌 버치 바틀렛 기념 컬렉션
파리의 밤 풍경을 즐겨 그린 로트렉의 그림 속 카페 물랭루즈는
지금으로 치면 극장식 술집이었던 셈입니다. 물론 여기서도 압생트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겠지요
술과 질펀한 유희가 가득한 이곳에서, 사람들은 압생트를 마시며
더욱 생생한 기분을 느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그림 속에 나오는 사람들은 그저 카페를
찾아온 일반 사람들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화가의 지인들이죠. 화가와 시인, 사진작가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모델로 삼아 초록빛 얼굴을 한 광대의 모습을 아주 정밀하게 그려냅니다.
광대의 모습이 일정부분 화면에서 지워진 것은 당시 사진의 영향이라고 하네요.
파블로 피카소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 1901년, 종이에 구아슈와 파스텔,
에르미타쥬 미술관, 생 페테르 부르크
최근 연구자료를 보면 이 압생트에 포함된
Thujone은 마치 강한 커피를 수십잔 마신것과 같은 효과를 준다고 해요
신경자극을 통제하고 전달하는 효소를 막음으로써 뇌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더구나 이 성분에는 납이 일정량 포함되어 오랜동안 음용할 경우 건강을 해친다고 하는 것이죠.
피카소 또한 이 압생트에 푹 빠져 있었다고 하죠. 1901년 가을
파리의 한 카페에서 이 압생트를 마시는 여인을 보고 그린 그림입니다.
보라색과 황색의 강한 대비가, 마치 술에 취했을 때 느껴지는 신산함을 토해내지요.
파블로 피카소
<압생트를 마시는 여자> 1901년 캔버스에 유채,
태생적으로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다보니
사실 거나하게 취해야 하는 자리엔 약간 불청객 취급을 받기도 합니다.
행복한 기분 올려주는 한 두잔의 술까지 싫어하는 것은 아니죠.
그저 눈이 내리고 꽃이 지는 날, 인생에서 배운 것들이 나를 살찌울때 반주 겸 곁들였으면 합니다.
연말에 술 너무 드시지 마시고요. 좀더 풍성하고 아름다운 한해의 갈무리 하셨으면 하네요.
후회없는 올 한해의 마무리를 향하여.....에디프 피아프의 <난 후회하지 않아> 듣습니다.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가을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번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연꽃 소리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정호승의 <술 한잔>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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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마네가 남긴 마지막 작품으로, 현재 영국 런던의 코톨드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제목의 "폴리베르제르"는 프랑스 파리에 있는 콘서트홀로, 서커스, 콘서트 등이 공연되었다고 합니다.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기도 하고요.
무엇보다도 이 그림에서 눈에 들어오는 존재는, 화면 정중앙에 위치한 바텐더 아가씨입니다. 세로로 이어진 그녀의 상의 단추는, 이 화면의 정중앙을 수직으로 2등분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화려하고 떠들썩한 홀을 등진 채, 까닭을 알 수 없는 무심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녀는 어디를 보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그녀 등뒤의 홀입니다. 사실 그녀 등뒤에 보이는 홀의 모습은, 그녀 등뒤에 놓인 커다란 거울에 맺히고 있는 영상인 것입니다. 이 사실은 그녀가 손을 얹고 있는 대리석 재질의 바가 그녀의 등뒤에도 있다는 점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 위에 놓인 병이 비치는 모습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요(사실 그림 오른쪽에 보이는 여자의 뒷모습도 바텐더 아가씨의 뒷모습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광학 법칙에 어긋나는 부분인데, x선을 투사해서 보면 스케치를 여러번 고치면서 구도를 변경하다가 이런 일이 생겼음을 알 수 있다고 하네요.). 저는 홀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무심한 눈빛이 무척 마음에 듭니다. 군중속의 고독...같은 것이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더욱이 그녀의 눈빛은 작자인 마네의 인생과도 맞닿은 부분이 있습니다.
마네는 고등법관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나 당시 문화예술의 중심지였던 파리에서 자란 그는 세련된 파리지앵이었습니다. 그는 대도시로서의 파리를 사랑했고, 그래서 파리 시민들의 도시적 삶의 모습을 자주 화폭에 담았습니다(교외의 풍경화를 자주 그렸던 동료들, 모네나 르누아르 등과는 성향이 달랐습니다). 한편 그는 전형적인 기득권층이었음에도 보헤미안 기질이 다분하여, 금기와 관습을 깨는 문제작을 많이 그렸습니다. 그 유명한 <올랭피아>, <풀밭위의 점심식사> 등이 그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는 젊은 시절 모진 혹평을 견뎌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화풍으로 주류 화단의 문을 꾸준히 두드렸고, 만년에야 비로소 인정을 받아 화가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레종 도뇌르(명예 훈장)까지 받게 됩니다. 그러나 수상의 기쁨도 잠시, 그는 화가로서의 생명을 오래 이어가지 못합니다. 젊은 시절의 방종 때문에 얻은 매독으로 인해 한쪽 다리가 썩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다리가 썩어들어가는 고통 속에서 (공식적으로) 마지막 작품인 이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을 완성했고,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다리를 절단하고 난 마네는 자신이 더 살지 못할 것임을 예감했다고 합니다. 병상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파리 시내를 내다보던 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그는 그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화려하고 세련된 대도시, 파리에 작별을 고해야만 했습니다. 병상에서 누워 활기찬 파리 시내를 내다보던 그의 표정은, 아마도 시끌벅적하고 화려한 홀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는 바텐더 아가씨의 표정과도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이 표정에 대해 미술사학자 프랑수아즈 카생은 "이 그림은 마네를 줄곧 사로잡은 파리 생활의 마지막 이미지의 결론을 말해 주는 듯하다. 잔치는 끝나고, 아름다운 여인들과 아름다운 생애도 막을 내렸으며, 이제는 그림에게도 마지막 인사를 고해야 할 시간이 왔으니까.(프랑수아즈 카생著, <<마네~이미지가 그리는 진실~>>, 시공사, 1998 중에서)"라고 평한 바 있습니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비평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제쯤 이런 의문이 드시리라 생각합니다. 왜 맥주랑 관련도 없는 이야기를 왜 이렇게 주절주절 썼을까? 아마 제 의도를 눈치채신 분도 있을겁니다.
화면 아래에 어디서 많이 본 라벨이 붙은 병이 보이네요~아~~
많은 분들이 드셔보셨을 BASS입니다. 1777년에 버튼온트렌트에 설립되었고, BASS의 대표격인 맥주 페일에일은 1877년에 처음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림이 그려진 것이 1880년대이니, 확실히 출시된 이후네요. 그림속의 라벨은 빨간 삼각형에 녹색 테두리인데, 인터넷 검색 결과 아래 사진의 라벨과 제일 유사한 것 같습니다.
인상파의 아버지 마네의 작품과 정물의 조화
이번 호에서는 마네의 말년을 장식하는 가장 유명한 작품인 “폴리베르제르의 술집(1882)”에 앞 정물들을 배치해서 그려 보았다. 명화와 정물을 조합해서 “명화 다시 그리기”의 형식으로 연재를 하기 시작한지도 4달째에 접어들었다. 한 달에 한번쯤은 거장들의 작품을 분석하고 연구하며 현대의 정물들을 그들 거장의 시각으로 해석해 보는 것도 정말 좋은 공부라 할 수 있겠다. 더불어 작가의 삶과 함께 예술철학과 시각, 그 당대의 역사와 환경도 함께 알아볼 수 있으니, 수채화를 공부해 나가는 입장으로서는 일석이조의 테마가 될 수 있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 그림 그리기에도 최적의 환경이 돌아왔고 계절에 거스름 없이 익어가는 들녘과 착한 열매들처럼, 노력함에 게으름 없는 여러분들에게도 좋은 결과물이 있기를 바란다.
01
인물과 앞 정물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세밀하게 묘사하지 않아도 되는 그림이기에 4B연필을 날카롭게 깎아, 연필을 약간 눕힌 상태에서 밝음과 어두움의 위치구분만 해 놓는다는 개념으로 스케치했다. 스케치선이 결국 채색과정에서 모두 묻힐 그림이므로 빠른 속도로 그리되, 인물만큼은 정확한 비례로 자세하게 그려야 한다.
02
터치를 겹쳐가며 맑기를 유도하는 학생형+입시형 그림이 아니기에, 굳이 초벌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자료를 위한 그림그리기가 아니었다면 필자도 직접 제 색을 얹어나갔을 것이다. 다만, 채색에 들어갈 때의 두려움이나 머뭇거림을 없애고 싶다면 사진에서처럼 간략한 초벌을 하는 것을 권한다.
03
원화를 잘 살펴보면 샹들리에와 함께 배경의 작은 인물들이 실은 거울에 비친 인물군임을 알 수 있다. 우울한 표정의 여종업원과 상반된 배경의 화려함이(규모가 큰 술집임을 알 수 있다) 대조를 이루는 이 부분은, 인디고에 반다이크 브라운을 약간 섞어서 명암처리 하는 정도로만 채색해 놓았다.
04
붓터치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그림인 반면 색상의 무게를 맞추는 일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 큰 술집이 여급의 뒤에 있는 거울에 비친 부분이므로 선명도도 약하고, 아마도 담배연기나 평평하지 않았을 거울의 반사면의 얼룩으로 보이는 부분들이 자주 보인다. 울트라마린 딥에 오페라를 섞고 물을 많이 혼합하여 색상을 가볍게 만들어 칠 해 놓았다.
05
마네는 호평만큼이나 악평도 많았던 작가로 유명하다. 당대의 실존인물들을 작품에 그대로 옮겨 그려 당혹감을 주기도 하였고, 명암이 조용히 옮겨갈 뿐만 아니라 강한 색채가 등장하더라도 반드시 중간색이나 회색의 매개에 의해 연결하던 당대의 일반적인 화법과는 달리 선명하게 색상이 대비되거나 평면적으로 칠해서 관객들에게 이질감이 느껴지고 생뚱맞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 부분처럼 거칠게 남아 있는 붓자욱 역시 비방의 원인이었다.
06
인상파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는 마네지만 그는 인상파 화가들과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그 중 기억해야 할 점은 색채로서의 검정색을 중요시 했으며 이를 매혹적으로 사용한 화가라는 점이다. 즉, 같은 검정이라도 밝고 품위 있는 검정, 분위기 있는 검정 등으로 구분해서 사용했으며 아주 적은 변화 외에는 검정은 검정색으로 펼쳐 칠해 놓는 솔직하고 강한 주장이 있는 화가였다.
07
굳이 초벌이라고 구분하자면 이 정도의 과정이 될 것이다. 여종업원의 짙은 색 옷은 인디고에 반다이크 브라운을 약간 섞어서 듬뿍 만들어 놓은 후에 펼쳐 칠해 놓았다. 완전히 마른 후에는 두 번 세 번 같은 색을 반복해서 칠해서, 터치 보다는 색상으로 먼저 느껴지기를 원했던 마네의 생각을 따라 갈 것이다.
08
인상파 화가로 분류되는 마네이지만 실제로 인상파전에는 한번도 참여하지 않았던 것은 역설적이다. 사진에서 보이는 부분처럼 거친 필치들을 보면 분명히 인상파처럼 섬세하지도 않고, 빛에 의한 색의 과정을 찬찬히 넘어가 주지도 않는 불친절함(?)까지 엿보이는 것이 마네 그림의 특징이다. 필자 역시 따라 그리는 과정에서 점점 흥미가 붙어가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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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작품을 수채화로 옮겨 그려 보는 것이 점차로 흥미로워지고 있는 중이다. 수채화가 가진 특성, 즉 맑음과 탁함을 표현하는데 자유로우면서도 유화에 비해서 간편하고 빠르다는 장점이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인물도 유화로 따라 그리는 경우라면 마르기 기다리느라고 속이 답답했을 텐데 수채화로는 색상의 무게만 맞추어 나가면 금방 해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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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생존당시 저널리즘에 나온 혹평은 다음과 같다. “...음영도 양감도 없고 이처럼 강한 색채를 평평하게 늘어놓다니 회화에 대해 무식해서 그랬거나 그렇잖으면 사람들을 모욕하기 위해서 그랬을 것이다.” 정말 가혹한 악평이지만 사진에서처럼 평평한 얼굴표현을 보면 당시에는 그리 말했을 비평가의 시각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에는 화면에서 어떻게 하면 3차원적인 깊이를 표현할 수 있을까에 대해 서구 회화가 지향해 온 전통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알 수 있고, 그것을 부정한 마네의 힘겨운 싸움도 익히 짐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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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종업원의 옷을 검정에 가까운 인디고 계열로 짙게 완성해 놓았다. 간신히 외곽부분에만 블루를 살짝 얹어 놓은 마네의 재치이기도 한 솔직한 표현을 이해할 수 있는 듯하다. 평면에 그리는 그림을 입체로 보이게 하기위한 화가들의 노력과의 단절이 무엇보다 마네의 미술사적 위치를 대변해 주는 것이며, 여기에서부터 비로소 근대에로의 문이 열리고 있다는 미술사를 기억하며 복숭아에서도 습관적인 반사광 처리를 아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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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마네야말로 사실주의를 표방한 작가였다는 생각이 든다. 마네라면 장미를 채색할 때에도 명암의 단계를 복잡하게 구분하며 넘기려 애쓰지 않고, 밝음은 그대로 두고 어두운 부분에만 강하게 필치를 얹었을 것이고, 빵은 빵대로 빵이 가진 갈색계열 색상 외에는 쓰지 않았다는 사실도 좋은 공부가 되고 있다. 장미를 칠한 후에는 세밀하게 스케치 했던 밝음 부분의 연필선은 다 지워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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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여기에 닿자 괜히 초벌칠을 했구나 하는 엷은 후회가 들었지만, 1800년대에 결코 평탄하지만은 못했던 마네가 만년에야 찾아온 영광과 찬사에 이르기까지의 “마네 역사”에 대한 공부로 미루어 보면, 앞 정물은 빛 부분은 남기고 어둠은 강하게 잡으면 가능하리라는 낙관적인 생각이 들고 있으니, 대가를 공부해 가는 여정이 결코 헛된 공부가 아님에는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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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치가 울컥거리며 남게 되더라도 색상 선택이 솔직하게 이루어지면 뒷면의 마네 그림과의 괴리감이 적어지게 될 것이다. 붓을 세우거나 내리긋는 등의 터치법에 좌우되지 않고 사물이 전달해 주는 정도의 색상만을 찾아서 정물 자체의 솔직한 표현에 집중하기로 하였다. 일반 정물화였다면 아마도 빛이 닿고 어둠으로 넘어가는 포인트 부분에 엄청난 밀도와 화려한 색 올리기를 하였겠지만 마네의 손이었다면 과연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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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를 위한 학생작 기준에서라면 식빵의 표현에서도 분명 다른 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식빵의 외곽부분 즉, 여종업원의 짙은색 옷과 닿는 부분이나 바구니의 손잡이와 식빵이 닿는 부분에 화사하게 넣어주었던 반사색 처리를 절제하고 식빵 제 색상으로만 칠 해 보았다. 인상파 화가들이 추구했던 과학적 성찰과는 달랐던 마네의 시각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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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듯한 유화의 붓자욱과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혼합재로로 그릴 때 쓰던 일명 막붓(기름진 매체나 마스킹 액을 쓸 때 썼던 붓이다)으로 바꿔 칠하니 훨씬 나아지는 느낌이다. 색상의 혼합도 파렛트에서 완전히 섞던 방법에서 벗어나 직접 물감을 찍어 화지에 바르듯이 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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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비기도 하고 색상을 그대로 얹어 놓기도 하면서, 당대에 비난을 많이 받기는 했으나 작업표현 방법에서 스스로의 기질과 의지가 강건했던 마네처럼 칠하는 과정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이다. 평범한 캔트지에도 가능한 수채화가 가진 풍부한 색상과 다양한 표현방법을 적극 활용하면서 느낀 생각은, 재료를 아끼지 않고 쓰는 것도 좋은 습관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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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도 과정에서 전체를 한 눈으로 보는 것이 필요하다. 실제 원화는 가로길이가 있는 작품으로 거울에 비친 우울한 표정의 여종업원의 뒷모습과 그녀 앞에 마주 서 있는 수염있는 당대의 신사도 그려져 있어 이 세 인물의 배치가 교묘하게 연출되어 있음을 찾을 수 있다. 이 그림은 마네의 말년을 장식하는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이 그림의 성공을 마지막으로 보고 난 후 마네는 병든 육신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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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느라면 인물도 원과 원기둥의 조합으로 보았을 것이고, 모네였다면 빛에 따라 색상이 변화하는 찰나들로 인물을 표현했을 것이나, 마네는 인물의 살색을 인물이 가진 색상 그대로 표현하고자 했다고 한다. 당시 인상주의 그림에 열광하던 사람들이 그에 익숙해져 있었던 눈으로 마네의 작품을 보았으니 그 지나치게 단순하고 생생한 살색을 보고 당혹스러워 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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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네가 인상파와 맥을 같이 하면서도 표현이 다른점은 모네와는 달리 고유색을 희생해서까지 프리즘적인 빛의 물결에 자신을 몰입시키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즉 외광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인상파 화가들과는 방법적인 거리감이 다른 점이라는 것이다. 여급의 옷에 있는 장식물에서도 솔직하게 보이는 부분만을 표현한 마네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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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구니 손잡이의 채색에서도 반사면에 주조색의 보색인 보라 계열색을 쓰지 않고, 직접 갈색으로 색상을 칠했다. 칠하는 붓의 모양새를 살펴보면 붓 몸 전체로 종이를 강하게 내리누르며 색상을 올리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때때로 일상에서 벗어나는 여행이 사람을 충전시켜 주듯이, 일반적인 채색 방법에서 벗어나 마네와 함께 하는 것도 그러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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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네는 무척 성실하고 단순하며 분별있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사람이지만, 불행하게도 천성이 낭만주의의 껍질을 달고 있다.” 마네의 친구이자 대시인 보들레르가 마네의 일면을 평한 말이다. 주제와 방법의 혁신을 꾀한 최초의 혁명자라고 할 수 있는 마네이지만 어떠한 글도, 그림에 대한 언급도 하지 않았던 화가였으며, 천성적으로 부르조아적인 습성을 가져 지나치게 명예에 집착한다는 비난도 함께 받았었다니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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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사진에서 바구니를 채색할 때 바구니가 가진 고유의 색을 고집해서 칠해졌듯이, 복숭아는 복숭아라는 과일이 전달해 주는 색상에 충실하고자 노력했다. 터치나 물방울이 남아도 될 것이고, 밝은 부분은 붓으로 닦아서 복숭아다운 부드러움을 표현하면 되기에 심리적으로 평화롭다고나 할까, 마음이 부드러워지는 방법이라고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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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마네가 유화로 표현했더라면 더욱 강렬한 색상으로 식빵이 채색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적어도 마네가 표현하고자 하는 채색의 방법적인 부분은 공부가 되었기에 여러분도 이정도 과정에 이르러서는 색상 선택과 필체가 많이 자유로워졌으리라 생각한다. 마네는 풍경화, 인물화, 정물화 등 모든 부분에서 자신의 방법을 구축해가며 많은 양의 그림을 그렸던 화가이다. 인터넷이나 화집을 통해서 꼼꼼히 살펴보기를 권한다.
25 Susanna's Comment
에두아르 마네(Eduard Manet, 1832~1883)는 인상파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는 인상파의 거장이다. 우리는 흔히 모네와 너무도 헷갈린다는 얘기를 많이 하는데, 단지 이름이 주는 어감이 우리에게 혼돈을 주는 것뿐이지 그들의 그림을 함께 기억한다면 절대로 헷갈리지 않을 정도로 큰 차이가 있다. 마네는 외교관의 딸이었던 어머니와 법률가인 아버지를 둔 유복한 상류층이었으나, 그가 화단에서 인정을 받기까지는 악평의 스캔들로 그 어떤 화가보다도 우여곡절이 많았던 화가였다. 마네가 말년에 그린 이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이 살롱에 전시되었던 1882년에 마네는 최고의 영예인 레죵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나 이듬해에 죽었으며 그 후에 불멸의 명예를 안게 되었다. 미술사에서 기술적으로나 묘사 방식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이룩하여 20세기 회화를 전면적으로 바꿔 리드한 인물로 평가되는 마네의 그림에 여러분들도 도전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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