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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피카소" 미국 길거리 화가 - 장 . 미셸 바스키아
2017년 01월 30일 19시 09분  조회:3901  추천:0  작성자: 죽림
 
출생일 1960년
사망일 1988년
 
장-미셸 바스키아
장-미셸 바스키아

벽이나 화면에 낙서처럼 긁거나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는 그래피티를 예술로 승화했다는 평가를 받는 미국 화가. 1980년대 극단적인 추상미술에 대한 반동으로 생긴 신표현주의와 원시주의 성향의 작품을 제작하면서 일약 스타 화가로 떠올랐다. 주류 미술계에서 볼 수 없는 길거리 화가 출신이라는 점에서 작품 외적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바스키아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협업을 제안한 앤디 워홀과의 관계도 유명하다.

1960년 뉴욕에서 아이티 출신의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덕분에 그는 영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도 유창하게 할 수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어머니는 그에게 일찍부터 미술을 가르쳤다. 그를 데리고 미술관을 자주 갔으며 여섯 살 때는 미술관에서 미술 강좌를 듣게 했다. 여덟 살 때 우연히 해부학 교과서를 보면서 근육, 골격, 장기 등 인체의 구조와 형태에 익숙해졌다. 이런 해부학적 이미지들은 그의 그림 스타일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같은 해 부모님의 별거로 바스키아는 아버지와 함께 푸에르토리코에서 2년을 살았다. 열한 살 때는 어머니가 심각한 정신질환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열다섯 살에 가출해서 길거리 생활을 했는데 친구 한 사람과 함께 ‘세이모(SAMO, Same Old Shit의 약자로 마약류를 지칭하는 비속어이다)’라는 그래피티 아티스트 그룹을 결성하여 근처 빌딩에 그래피티를 그렸다. 1978년 〈빌리지 보이스〉를 비롯해 여러 매체에서 세이모를 소개하면서 바스키아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1979년 바스키아는 세이모 활동을 그만두고 방송 출연과 록밴드 활동을 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80년 여러 아티스트가 참여한 타임 스퀘어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여 주목을 끌었다. 1981년 애니나 노제이 갤러리에서 작업실을 제공해 주어 그림 작업에 전념했고 이듬해 같은 갤러리에서 열린 최초의 개인전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이후 바스키아는 성공 가도를 달렸다. 1982년에는 이탈리아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뉴욕 최대의 상업 갤러리인 개고시언 갤러리 등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펑크 록의 대부 데이비드 보위와도 작업했다.

1983년 당시 미술계의 중요 딜러인 브루노 비쇼프버거의 제안으로 앤디 워홀을 만나 공동 작업을 몇 차례 진행했다. 워홀이 먼저 작업을 하면 바스키아 그 위에 덧그리는 방식으로 진행된 작업이었다. 두 사람 모두 죽음을 앞두고 있었지만 둘은 가깝게 지냈다. 1983년 미국에서 최고 권위 있는 비엔날레인 휘트니 비엔날레에 최연소 화가로 참가하고, 1985년에 뉴욕 타임스 매거진의 표지를 장식하는 등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높아져 가는 명성과 경제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마약에 빠지고 말았다. 앤디 워홀이 1987년 사망하면서 바스키아는 정신적 지주를 잃어버린 상실감에 정신적으로 피폐해졌으며, 이를 달래려고 더욱 더 약물에 의존했다. 결국 헤로인 중독으로 1988년에 사망했다.

바스키아는 인종차별주의 비판, 만화, 죽음, 해부학 등의 주제를 낙서 속에 담아냄으로써 낙서를 예술로 승화시켰고 신표현주의의 유명주자가 되었다. 그림에 대한 천재성과 원시미술을 연상시키는 스타일 때문에 ‘검은 피카소’라는 별명을 얻었다. 거리의 부랑아에서 하루아침에 스타 예술가로 짧은 생을 마감한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은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위 순위권 내 작품(2014년 기준)

• 63위. 〈더스트헤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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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시기 1982년
가격 $48,843,750(512억 4000만 원)1)
작가 장-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1960~1988)
 
장-미셸 바스키아, 〈더스트헤즈〉,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 오일스틱, 스프레이 에나멜, 메탈릭 페인트 / 182.8×213.3cm
장-미셸 바스키아, 〈더스트헤즈〉,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 오일스틱, 스프레이 에나멜, 메탈릭 페인트 / 182.8×213.3cm
“나는 평생 길거리 부랑아로 살 거라고 생각했어요.”
-장-미셸 바스키아

국제 미술 시장 분석 기관인 아트프라이스닷컴(artprice.com)은 매년 ‘한 해 동안 전 세계에서 낙찰 총액이 가장 높았던 작가’ 리스트를 발표한다. 장-미셸 바스키아는 2012년 발표한 리스트에서 11위에 올랐다.

바스키아는 1980년대에 10년도 채 안 되는 짧은 기간 작품 활동을 했고 스물여덟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지만, 피카소, 모네, 워홀 같은 역사적 대가들에 버금가는 인기를 얻고 있다는 뜻이다. 아트프라이스닷컴 발표 다음 해인 2013년 5월에 열린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급기야 회화 한 점이 4884만 달러(512억 4000만 원)에 낙찰되는 기록을 세우며 바스키아 작품 가운데 최고 경매가 기록을 세웠다.

작품을 팔 때는 시기가 중요하다. 2013년 5월은 바스키아의 주가가 한창 올라가던 때였다. 마침 세계 최고 갤러리라 할 수 있는 개고시언 갤러리가 그해 초 뉴욕에서 바스키아 회고전을 열어 수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가는 등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덕분에 경매 직전 바스키아에 대한 관심이 크게 올라갔다. 경매 직후에는 개고시언 갤러리 홍콩 지사에서 바스키아 개인전이 열릴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개고시언 같은 세계적 갤러리가 이렇게 대규모 전시회를 열어 화제를 만들면 사람들의 관심이 그 작가에게 쏠리고, 미술 시장에서도 자연스럽게 그 작가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다.

‘낙서 같은 이 그림이 수백억 원이라고?’

바스키아의 그림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황당해서 잠시 말을 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휘갈긴 듯한 그림을 남긴 바스키아는 놀랍게도 현대 미술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가 시대정신을 잘 표현한 작가였기 때문이다.

좋은 작가가 되는 여러 조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나는 ‘시대성’을 꼽겠다. 자신이 속한 그 시대를 잘 읽어 내고 반영하는 작가는 길이 남는다. 인상파 화가들, 피카소, 워홀도 결국 그런 작가였다. 바스키아는 1980년대 미국 사회를 그대로 반영한 작가다. 그래서 이토록 중요한 작가가 된 것이다.

1980년대 뉴욕은 화이트칼라 중산층 인구가 점차 증가하면서 겉으로는 발전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당시 이 도시에 살고 있던 이민족과 저소득층은 변두리 슬럼가나 싸구려 거주 지역, 길거리로 밀려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젊은이들의 정신적 공황이 심해져 마약과 범죄가 판치는 도시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젊은이들의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드러내는 재즈와 힙합 문화로 도시의 열기가 터질 듯했다.

바스키아는 아이티 출신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 시기 뉴욕의 전형적인 저소득층 이민자 가정에서 나고 자란 그는 시대에 반항하는 젊은이였다.

열다섯 살에 가출해 길거리를 나돌며 친구와 함께 ‘세이모(SAMO)’라는 이름으로 거리의 벽에 스프레이로 그림과 메시지를 그렸다. SAMO는 ‘Same Old Shit’, 즉 늘 똑같은 것, 반복되는 것이라는 뜻의 줄임말로, 그들이 늘 피우던 마리화나를 의미한다. 그러나 SAMO 프로젝트는 함께하던 친구와 관계가 틀어지면서 1979년에 그만두었다.

이어 바스키아는 스물한 살이던 1981년부터 캔버스와 종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거리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이어 붙여 콜라주도 했다. 바스키아의 그림에서 인종 문제, 범죄, 마약 등 당시 뉴욕이 겪었을 사회적 불안이 느껴지는 것은 작가가 바로 그런 사회적 문제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에게는 ‘시대성’이 제일 중요하다고 했는데, 어떤 시기에 어떤 형태의 작품을 만들었는지도 중요하다. 바스키아가 폭발하는 감정을 숨김없이 표현한 1980년대 초는 마침 미술계에서 표현주의적인 그림에 대한 갈증이 있던 때였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까지 유행한 미니멀리즘 미술은 표현 방법과 재료를 최소한으로 줄여 ‘작가의 손’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니 1980년대에 이르러 사람들이 다시 ‘작가의 손’이 많이 들어가고 표현이 풍부한 미술을 원할 만도 했다. 바스키아는 주제 면에서는 불안한 시대의 정신을 담으면서 작품의 외형은 사람들이 원하는 짙은 표현주의적인 형태를 띠었으니 198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가 될 모든 조건을 갖춘 셈이다.

특히 바스키아와 같은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살던 뉴욕 동남부의 ‘이스트 빌리지(East Village)’는 1981년부터 1987년 사이에 예술로 폭발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사이에 이스트 빌리지에서만 갤러리가 백 군데 이상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이런 조건들이 뒷받침되면서 바스키아는 1980년 화가로 정식 데뷔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잘 팔리는 작가’가 되었다. 1985년에는 《뉴욕 타임스 매거진》의 표지에 국제 시장에서 가장 잘 팔리는 새로운 작가로 소개되기도 했다.

바스키아는 1980년에 워홀을 만나 자신의 작품 몇 점을 보여 주었다. 이때 워홀은 그의 천재성에 탄복했고 이후 공동 작업을 하는 등 죽을 때까지 약 7년간 바스키아와 아주 가까이 지냈다.

1987년 자신의 적극적 후원자이자 정신적 지주로 여기던 워홀이 담낭 수술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바스키아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러다 이듬해 스물여덟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1980년대를 불꽃처럼 살다 간 그의 인생은 오히려 신화로 남았다. 그의 역사적 중요성 때문에 세계 주요 미술관에서 그의 회고전이 꾸준히 열리고, 미술 시장에서 수요가 많아 값도 천정부지로 올랐다.

거침없는 표현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바스키아의 특징을 한눈에 보여 준다. 그는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초상화를 즐겨 그렸다. 이 작품은 바스키아의 전형적 특징인 해골 같은 얼굴 두 개가 등장하고, 온갖 원초적 색깔과 흑백색이 아낌없이 발현되었으며, 두꺼운 질감의 표현도 넘쳐 난다. 이 그림은 1996년 토니 샤프라지 갤러리에서 열린 바스키아 회고전에 나왔는데, 당시 미국의 권위 있는 미술 월간지인 《아트 뉴스》에서 이 전시를 리뷰 하며 이 작품을 직접 예로 들어, 바스키아의 원초적 표현력이 한껏 드러나는 작품이라고 언급했다. 어떤 작품이 판매될 때는 이런 기록이 작품 가격에 큰 영향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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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문화의 가교 한경


장 미셸 바스키아(1960~1988)는 ‘검은 피카소’로 불리며 1980년대 미국 화단을 풍미했다. 스프레이, 마커(채색용 물감), 오일 크레용으로 뉴욕 소호 거리의 외벽에 ‘낙서 그림’을 그리는 세이모(SAMO:Same Old Shit, 흔해 빠진 쓰레기) 그룹에서 활동하며 ‘그래피티 아트(graffiti art)’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그는 1980년대 초 팝아트계의 거장 앤디 워홀의 소개로 단숨에 뉴욕 화단의 중심부로 진입했고, 8년여의 짧은 활동 기간에 세계적인 스타 화가 반열에 올랐다.
 

 

뉴욕에서 헤로인 중독으로 27세에 요절하기 6년 전 그린 이 작품은 낙서인지 작품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파격적 화풍의 자화상이다. 악마를 연상시키는 얼굴을 강렬한 검은색과 브라운 톤, 파란색의 붓터치로 묘사했다.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 현대인의 온갖 욕망과 위선을 색깔 미학으로 은유했다. 이 작품은 2016년 4월 10일 뉴욕 크리스티경매에서 추정가를 훨씬 뛰어넘은 5730만달러(약 668억원)에 팔렸다.

/김경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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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계의 검은피카소_
장 미셸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 
 
장 미셸 바스키아는 
천진하고 익살맞은 내용의 낙서화로 
뉴욕 미술계의 주목을 받으며 혜성같이 등장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어린아이의 낙서 같고 무질서해 보이지만,
모아놓고 보면 단순한 낙서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아우라가 있습니다.  
 
장 미셸 바스키아는
20대에 생을 마감하는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그의 작품은 여전히 
우리에게 긴 여운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을 감상해볼까요? 
 
 

 

세계 미술 경매에서 가장 잘 팔린 현대미술가 장미셸바스키아(848억,아트프라이스)가 앤디워홀의 뮤즈였다는 사실 알고계셨나요? :)  
 
'흑인 피카소'라고 불리는 장 미셸 바스키아 (Jean-Michel Basquiat, 1960년 12월 22일 ~ 1988년 8월 12일)는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티계 미국인 입니다.  
 
어릴 적 어머니와 함께 갔던 뉴욕현대미술관 MOMA의 피카소-게르니카 앞에서 눈물을 흘리던 엄마의 모습을 보며 화가가 되기로 마음을 먹은 그는 그래피티 그룹 세이모 SAMO에서 방랑예술가의 길을 시작하게 되고, 당시 가장 유명한 아티스트였던 앤디워홀에게 자신의 엽서를 1달러에 팔게되면서 친분을 맺게 되었습니다.  
 
1970년대 뉴욕의 미술시장이 어마어마하게 커지면서 앤디워홀도 더한 성공을 누리게 되고 바스키아 역시 새롭게 조명되어 인기를 얻게됩니다. 갤러리에서는 때마침 새로운 아티스트를 찾고있었고 바스키아 그림은 그들에게 적격이었지요. 지금은 흔하지만 당시에는 낙서예술이 신선한 충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작품은 '암시적인 이분법'의 성격을 띄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부와 가난, 통합과 분리, 내면과 외면, 이미지와 텍스트, 추상과 형체, 역사적 정보와 현대비평을 긴밀히 결합시키곤 하였습니다. 또한 작품에 사회 비판적 메세지를 담음으로써 사회에 뿌리박힌 권력 구조와 인종차별주의를 공격하고자 하였습니다.  
 
바스키아와 워홀은 서로의 동경의 대상이자 뮤즈로서 왕성히 활동하였습니다. 바스키아는 워홀과 함께 작업하고 공동전시회를 열며 부를 축적해 갔으며, 신표현주의와 원초주의로 세계적인 성공을 거뒀으나 앤디워홀이 1987년 2월 사망하자 그도 1년뒤인 1988년 워홀의 건물에서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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