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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서화" 뒷면엔 녀인의 얼굴이 없다?... 있다!...
2017년 02월 10일 23시 52분  조회:2368  추천:0  작성자: 죽림
 
비디오 아티스트 박현기
성(聖)과 속(俗)의 차이는 뭘까?

속세와 열반은 종이 한 장 차이 아닐까? 불상(佛像)과 해골, 포르노 영상을 빠른 속도로 중첩시켜 대형 스크린에 투사하는 박현기의 비디오아트 '만다라'(1997)는 영상에서 새어나오는 신음소리 못지않게 관람객을 향해 움찔한 화두를 던진다.

서울시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열리고 있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문패만큼이나 철학적인 전시다. 돌, 철판, 나무, 물, TV 모니터를 소재 삼아 '실재와 허상'에 대한 질문을 집요하게 던졌던 1세대 비디오 아티스트 박현기(1942~2000·사진)가 주인공이다.

백남준 명성에 가려 큰 빛을 보진 못했으나, 박현기는 1970년대 말부터 한국 비디오아트를 선구적으로 이끈 인물이다. 홍익대에서 서양화와 건축을 공부한 뒤 대구로 낙향, 건축 인테리어 사업을 해 번 돈으로 모니터와 카메라를 사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대구 미문화원 도서실에서 우연히 백남준의 1973년 작 'Global Groove'를 보고 충격을 받은 것이 비디오 작업을 시작한 계기. 열 살 연상이던 백남준 영향을 받으면서도, 첨단기술보다는 인간의 온기, 동양적 정신세계를 비디오 작업에 불어넣으려 노력했다. 일본을 비롯해 상파울루 비엔날레(1979), 파리 비엔날레(1980) 등에 출품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글자와 기호들이 낙서처럼 뒤섞인 박현기 드로잉. 자세히 보면 왼쪽 부분에 여인의 얼굴이 보인다.
글자와 기호들이 낙서처럼 뒤섞인 박현기 드로잉. 자세히 보면 왼쪽 부분에 여인의 얼굴이 보인다. /갤러리 현대
이번 전시에서는 '만다라' '낙수' '반영' 같은 대표 영상 작업을 비롯해 그간 소개되지 않은 드로잉 작품 20점을 볼 수 있어 귀하다.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로 열린 박현기 회고전에선 볼 수 없었던 회화들이다. 숲 같기도 하고, 나비 같기도 하며, 수학 강의실 칠판 낙서 같기도 한 드로잉들은 모두 오일스틱으로 그렸다. 작품에 바짝 눈을 들이대고 볼수록 오묘한 재미가 솟는다. 숫자와 도형, 글자와 그림들이 서로를 감추고 덮으면서 중첩된 화면은, 삶의 실체와 진실이 무엇인지 평생 의문하고 답을 구했던 작가의 머릿속을 훔쳐보는 듯 흥미롭다. 호기심 많은 사람이라면 화폭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삼각형과 '物=心' 'spirit' 'matter' 'utopia' 같은 문자들을 암호 해독하듯 풀고 싶어질 것이다. 여인의 얼굴이 희미하게 숨어 있어 섬뜩한 작품도 있다. 미술평론가 강태희는 "실체를 향한 작가의 끈질긴 질문과 그것들을 그림으로 풀기 위한 치열한 투쟁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고 썼다.
 
불상과 포르노 영상을 중첩시켜 보여주는 비디오아트 ‘만다라’
불상과 포르노 영상을 중첩시켜 보여주는 비디오아트 ‘만다라’. /갤러리 현대

전시장 3층, 나무와 철판으로 구성한 설치 작품도 재미있다. 역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두툼한 원목들을 마루처럼 깐 형상인데 다 같은 나무가 아니다. 절반은 철로에 깔았던 낡은 침목, 절반은 박달나무로 만든 다듬이대로 언뜻 보면 구분되지 않는다. 설치물의 정면과 측면에 서로 다른 크기로 그려진 사각 프레임도 묻는다. '진짜 내 모습은 무엇일까?' 음양오행설부터 변증법적 유물론까지 심취했던 작가답게 생각할 거리를 쏟아내는 전시다.

"완전한 대상이 그물에 걸렸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잡았다고 생각하는 그 대상은 추상의 결집이지 대상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생전 작가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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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기(1942~2000)는 모니터를 나무, 돌, 대리석과 함께 설치하고 특정 주제를 가진 영상들을 중첩, 조합해 이미지를 재구성하는 방식의 작업으로 한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흐름을 제시한 작가다. TV모니터를 작업의 재료로 사용하는지라, 곧 잘 세계적 비디오아티스트인 백남준의 후대작가로 불리기도 하지만 “백남준이라는 큰 산을 넘고자 노력했고, 그와는 전혀 다른 예술언어를 구사한다”는 게 후배인 신용덕 미술평론가의 말이다. 이번 전시에는 대표작으로 꼽히는 영상작품을 비롯, 설치작품, 오일스틱 드로잉 등 25점이 선보인다. 

박현기, 무제, 1982, 돌, 가변설치.[사진제공=갤러리현대]

전시를 관통하는 주제는 작가가 살아 생전 관심을 보였던 ‘이미지의 중첩’과 ‘바라보는 것의 문제’로 요약된다. 화면 전체에 배경으로 깔린 수많은 포르노 영상과 불교 만다라 도상의 중첩은 현대사회의 ‘진리’를 그려냈고, 철도에 쓰인 침목과 천을 두들기는데 사용했던 나무 다듬이대는 그 위로 수없이 지나갔던 기차의 시간과 옛 여인의 방망이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 보이지는 않지만 실재했던 타격들의 중첩이다. 또한 바닥에 놓인 다듬이대와 침목의 조합은 관람객의 위치에 따라, 길쭉한 직사각형으로도 혹은 정사각형으로도 보이며 이것이 벽에 설치된 철제 프레임과 쌍둥이처럼 겹쳐진다. 

Untitled, 1993-1994, 한지에 오일스틱, 79x104cm [사진제공=갤러리현대]

이같은 중첩은 회화작업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박현기는 설치작업으로 더 유명하지만 1993~4년엔 회화작업에 몰입하기도 했다. 한지에 오일스틱을 활용한 드로잉으로, 여러번 겹쳐그린 선이 인상적이다. 생활을 위해 건축가로도 활동했던 흔적이 회화에도 드러난다. 짧고 곧으면서도 부드러운 선은 도식화된 건축 드로잉의 특징이기도 하다. 중첩된 선은 여느 추상화 작품처럼 보이나 사실 그 아래 작가가 늘 작품에 차용했던 돌과 모니터, 만다라 등 다양한 이미지가 섞여있다. 화면 하단에 작가 자신의 주민번호가 또렷히 기록된 것 또한 독특하다. 

Untitled, 1993-1994, 한지에 오일스틱, 79x104cm [사진제공=갤러리현대]

신용덕 미술평론가는 “들쑥날쑥 하는 생각의 과정을 뭉툭하게 그려지는 오일스틱으로 한지에 그려낸 것은 명확하고 깔끔함을 추구하는 서양미술에선 일종의 ‘에러(틀린 것)’로 볼 수 있으나, 그렇게 선명하지 않고 빗 맞추는 것의 미학이 있다”며 “국제무대에서 최근 한국미술, 특히 단색화가 재평가 받는 것도 이러한 한국적 미학을 이해하기 시작 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림도, 메모도, 음표도, 단어도 아닌 낙서같은 회화작업 앞에 서면 사실은 명확하지 않은 우리 삶의 모습과 닮았다. 강태희 미술평론가는 전시 서문에서 “특정 대상의 이미지를 그리기보다 즉흥적인 손의 움직임이 그대로 기록되는 인덱스적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Untitled, 1993-1994, 한지에 오일스틱, 79x104cm [사진제공=갤러리현대]

이번 전시는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에서 회고전에 이어 2년만에 열린다. 도형태 갤러리현대 대표는 “지난 회고전에 다루지 못했던 박현기 작가의 다른 모습에 집중했다”며 “단순히 한국 비디오아티의 선구자로 설명되는 박현기를 넘어서 그의 작품세계 전반에 흐르는 철학적 메시지를 깊이있게 다루고자 했다”고 기획의도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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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104㎝, 3월12일까지 갤러리 현대)
 
아들은 부끄러웠다.

자랑스레 친구를 이끌고 아버지 전시가 열리고 있는 전시장을 찾았지만 그림은 없고 돌무더기만 덩그러니 쌓여있었다. 창피한 마음에 아들은 친구의 손을 급히 이끌어 전시장에서 도망치듯 나와버렸다. 얼마나 황당한 일이었을까. 박현기(1942~2000) 작가의 장남 성우씨가 그랬다. 1981년 중학생이었던 아들은 친구에게 아버지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서 ‘결행’한 일이었지만 그런 마음을 송두리째 앗아간 것이다.
 

 
당시 전시가 열리고 있었던 대구 수화랑 전시장에는 강가에서 주운 돌들이 무더기를 이뤘고, 그 중앙에 마이크가 꽂혀 있었다. 전시장 바닥이 나무마루라 관람객들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돌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고스란히 마이크에 전달되도록 한 설치작품이다. 요즘에도 현대미술 문외한들에겐 여전히 별스러운 풍경이다.

1970년대 ‘대구현대미술제’는 한국 현대미술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박현기도 그 공간에서 활동한 작가다. 한국 비디오아트 선구자답게 모니터를 나무, 돌, 대리석 등과 함께 설치하고 특정 주제를 가진 영상을 중첩시켜 작품을 풀어갔다. 

사실상 박현기의 작품은 만다라의 현대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만다라는 우주 법계(法界)의 온갖 덕을 망라한 진수(眞髓)를 그림으로 나타낸 불화(佛畵)의 하나다. 만다라의 본래 의미는 본질이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서 변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생각을 바탕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게 마련인 것이다. 박선기는 그 다양한 층위를 보여주고 싶어 했을 것이다.

박현기의 20년 전 작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티베트불교인 밀교의 만다라 불화 이미지와 포르노그래피 속 남녀 간의 노골적인 성행위를 결합시킨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30분간 흐른다. 여성의 신음까지 더해져 상당히 파격적이다. 언뜻 보면 구더기들이 꾸물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에게 무엇을 보고 무엇이 보이냐고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작가는 컬러풀한 오일스틱 드로잉도 남겼다. 인테리어 일로 생계를 꾸리가면서 작업의 고삐만큼은 놓지 않으려 했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시시각각의 상념들을 잡아두기 위한 고육책이었을 것이다. 

박현기는 대구화단에서 이강소 최병소 등과 맹렬하게 현대미술 실험을 하던 중 위암으로 쉰여덟의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백남준과는 또 다른 비디오아트의 발걸움이 아쉽게도 멈춰버린 것이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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