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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주는 시와 말하는 시...
2017년 08월 17일 02시 23분  조회:1927  추천:0  작성자: 죽림

보여주는 시와 말하는 시 
박영호 
(문학평론가, 협성대 교수) 


Ⅰ. 

시가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위주로 파악할 때 효용론적 관점은 성립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인의 목적이 효과적으로 전달되었는가의 여부와 독자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점이다. 시가 독자에게 미친 영향은 다시 ‘교시적 측면’과 ‘쾌락적 측면’으로 분류된다. 
“시는 유용하고 즐거이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라는 아놀드(M.Arnold)의 진술이나, 『논어(論語)』 「양화(陽貨)」편에 나오는 “시는 흥을 일으키고, 인정을 살피게 하며, 무리 짓게 하고, 원망하게 하기도 한다. 가깝게는 어버이를 섬기게 하고, 멀게는 임금을 섬기게 하며, 조수초목(鳥獸草木)의 많은 이름을 알게도 한다” 라는 구절은 모두 시의 교시적 기능에 대한 설명이다. 반면에 쇼펜하우어는 “문학의 본질은 ‘미’의 추구에 있으며, 이때의 ‘미’는 세속적인 이해에서 벗어나 윤리 도덕과는 일차적으로 단절된 비목적적 차원의 체험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쇼펜하우어보다 앞서 예술활동이란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숭고한 지적 행위가 되어야 한다는 ‘무목적의 목적성’을 주장하였던 칸트의 견해는 시의 쾌락적 기능을 염두에 둔 설명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시의 기능을 구체화하는 방법에 있다. 필자는 ‘보여주는 시’와 ‘말하는 시’로 대별된다고 생각한다. 전자가 진술보다는 이미지 위주로 시를 형상화하는 방법이라면, 후자는 반대로 이미지보다는 진술에 의존한다. 어떤 방법을 활용하든 중요한 것은 심리적 안정과 정서적 쾌감을 제공해주거나 반성을 통한 신생(新生)의 의지로 작용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계절에 출간된 잡지에 수록된 작품들을 일별(一瞥)하면서 이와 같은 생각을 해보았다. 하여 그런 관점에서 작품을 선별하였다. 

Ⅱ. 

시인이 자신이 정서를 구체화할 때 대상과 자신의 체험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방법을 ‘보여주기’라고 한다면, 시인이 시적 화자가 되어 직접 진술하는 방식을 ‘말하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여주기’는 시인이 말하고 싶은 내용을 직접 말하지 않고 대상을 이미지로 승화시켜 간접적으로 제시하는 방법으로 ‘묘사’에 의존한다. 아치볼드 매클리쉬가 “시는 의미해서는 안 된다. 다만 존재할 뿐이다” 또는 “시는 사실 자체를 말해서는 안 되고 등가적이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 모두 이미지를 통한 간접적인 발화방식을 염두에 둔 진술이다. 가능한 한 진술을 배제하고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정서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작품을 보기로 하자. 

청둥오리는 연푸른 수면 위에 목안처럼 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수면 밑에서 쉴새없이 물을 젓고 있다. 쌀쌀한 바람에 묻어 있는 연두색 미나리 냄새를 가려내는 내 시린 코끝처럼, 귤빛 오리발은 시시각각 변하는 물의 온도를 재고 있다. 

시베리아 고원 자작나무 숲을 건너는 눈바람 소리를 찾아, 미지의 길을 날개 칠 순간을 기다리는 오리의 몸은 언제나 반쯤 수면 밑에 잠겨 있다. 한 번의 폭발을 위하여 화약가루가 머금고 있는 적막한 기다림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오리. 

삭막한 겨울풍경에 대한 그리움을 접은 날개 밑에 품은 채 오리들은 비취색 물빛 위를 고요히 흐르고 있다. 바람은 언제나 미래 쪽에서 불어온다. 기다림에 서린 긴장을 견디지 못한 야생의 매화가 첫 꽃망울을 터뜨리는 순간, 오리들은 일제히 물을 차는 자욱한 깃 소리가 되어 눈부신 하늘에 퍼진다. 
―허만하, 「오리는 순간을 기다린다」 

수면 아래로 반쯤 몸을 숨긴 채 날개 칠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오리의 긴장된 모습은 둘째 연까지 지속된다. 견고한 긴장은 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리는 순간 물을 차고 비상하여 하늘로 퍼지는 셋째 연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 원경(遠景)에서 근경(近景)으로 좁혀오며 점차 그 실체를 확실하게 드러내는 것처럼, 오리가 비상하기까지의 과정을 조금씩 조금씩 근접해오고 있다. 점차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에 비례하여 밀도는 조밀해진다. 그래서 독자 역시 점차 숨이 막혀온다. 끝 부분에 이르면 결빙된 얼음이 깨져나가는 듯한 숨소리를 토해내게 된다. 
여기서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시인의 의도이다. 무엇을 말하고자함이었을까? 수면 위로 드러난 오리의 형체는 비록 평온해 보여도 수면 아래서는 평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물갈퀴를 젓고 있다는 감추어진 사실을 인식하여야 한다는 것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림과 동시에 비상하는 오리처럼 격발(擊發) 직전과 같은 긴장감으로 무장하고 우리 삶을 응시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함이었을까? 그 어떠한 의미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려 할 때 작품이 갖는 의미는 오히려 반감된다는 사실이다. 낡은 의미로 덧칠하여 작품이 갖는 아름다움을 훼손시키는 오독(誤讀)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범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허만하 시인의 작품이 갖는 의미를 우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시인은 진술을 철저하게 차단하고 오직 정경만을 제시함으로써 오히려 많은 의미들을 생생하게 살려내고 있다. 행간과 행간,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관계, 원경에서 근경으로 집약해오는 시적 기법 그리고 이들 사이에 내재하고 있는 일촉측발과도 같은 긴장감, 이런 것들만으로도 훌륭한 시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가을이 와서 오래된 램프에 불을 붙인다 작은 할머니가 가만가만 복도를 지나가고 개들이 컹컹컹 짖고 구부러진 언덕으로 바람이 빠르게 스쳐간다 이파리들이 날린다 모든 것이 지난해와 다름없이 진행되었으나 다른 것이 없지는 않았다 헛간에 물이 새고 울타리 싸리들이 더 붉어 보였다 
―최하림, 「마음의 그림자」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상반된 이미지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라고 시인이 말한 울타리 싸리 역시 변한 것은 아니다. 더 붉어 보였다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시인이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근원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결국 달라진 것은 없다. 다만 세월의 흐름과 함께 조금씩 내가 퇴락해갈 뿐. 그렇듯이 산다는 것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러한 큰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조금씩 확인하고, 천천히 수용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이 인식한 사실을 작품 어느 곳에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다만 작품의 내면에 자신이 인식하기까지의 치열함과 그것을 기꺼이 수용하고자 하는 가슴 시린 숙연함만이 드리워져 있을 뿐이다. 
상반된 이미지로 대립의 각을 세우고 이를 다시 통합하여 자신의 의도대로 이끌어 나가는 동안 자신의 정의(情意)를 직접 진술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작품으로부터 생성되는 서늘한 자장(磁場)은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다. 
허만하 시인과 최하림 시인의 작품은 진술보다는 묘사에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처음 읽으면 그림을 보는 듯한, 그도 아니면 몇 장면의 영상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거듭 읽다보면 묘사 뒤에 숨겨져 있는 많은 의미들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말하고 있는 가도 그만큼 중요하다. 김소월의 「진달래 꽃」이 좋은 시로 평가되는 것은 이별의 정한을 노래해서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 시는 모두 다 좋은 시가 되어야 한다. 언어와 이미지 그리고 리듬 등 시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이별의 정한으로 형상화되기 때문에 좋은 시로 평가받는 것이다. 두 시인 모두 자신의 의도를 감춤으로써 오히려 독자들에게 의미가 여실하게 전달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묘사로 일관된 작품을 읽을 때 독자들은 시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거나 정반대로 파악하는 실수를 범한다. 이같은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 시인들은 이미지나 상징 그리고 비유와 대비 등과 같은 시적 기법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자신의 의도를 슬쩍 흘려놓는다. 다음에 인용한 두 편은 묘사에 의존하면서도 상반된 이미지를 대비시키거나 시적 대상에 자신의 정서를 응축시키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우리는 시인의 정서를 엿볼 수 있다. 

지율(知律), 계율을 안다 
거짓되고 그릇되게 행함을 막는 율법을 안다는 이 말, 
참으로 무서운 말 아닌가 
내가 아는 한 비구니의 법명이 지율이다 
천 명의 성인이 나온, 천 가지 연꽃이 핀 것 같은 
천성산(千聖山) 
아래 내원사에서 조용히 수도하며 지냈던 
눈매가 그윽하고 맑고 단단한 사람 

그가 깊은 산 속 깨끗하고 차가운 물에만 산다는,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만 산다는 꼬리치레도롱뇽을 살리려고 생명을 내놓았다 

형상이 있거나 없는 모든 것을 화엄이라 한다는데 
산정에 펼쳐진 늦가을 화엄벌은 흰 눈이 덮인 듯 억새의 물결로 장엄해 
관통 터널 공사도 도롱뇽 소송도 다 잊고 사람들 탄성을 지른다 

이 화엄벌의 늪에 지율의 친구 도롱뇽이 산다 
갈색 등에 노란 점무늬가 별처럼 펼쳐져 있는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꼬리치레도롱뇽은 겨울잠에 들었나 

화엄늪의 화엄세계가 바로 너의 우주인데 
팔색조야 황조롱이야 청딱따구리야 삼광조야 
천성산은 천성산만의 근심이 아닌 것을 이제야 알겠구나 

지율(知律), 어둑해져가는 부산 시청 앞에 앉아 곡기를 끊고 
도롱뇽 수를 놓고 있다 
한 땀 한 땀의 바느질로 뭇생명을 살리려 하고 있다 
―조용미, 「도롱뇽 수를 놓다」 

경부고속철 노선이 천성산을 관통하는 것에 반대하여 석 달 넘게 단식으로 저항하고 있는 지율 스님에 시인은 자신의 의도를 투사하고 있다. 모두가 격의 없이 어우러져 사는 세상, 그것이 곧 ‘화엄의 세계’이다. 그런 화엄이 깨지는 것은 우리 삶의 근거지가 파괴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시인은 “천성산은 천성산만의 근심이 아닌 것을 이제야 알겠”다고 토로한다. 그렇지만 천성산 아래 속세는 어떠한가? 억새의 물결에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잊고 탄성을 지른다. 이들 속세의 사람과 한낱 도룡뇽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고 있는 지율 스님은 명백하게 대비된다. 
시인의 의도는 분명하다. 순간의 고비를 넘기고 나면 모든 것을 잊고 마는 우리의 천박함과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뭇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부산 시청 앞에 앉아 곡기를 끊고 도룡뇽 수를 놓고 있을 지율 스님의 거룩함을 대비시켜 많은 것을 생각하도록 이끌고 있다. 필자가 위 작품을 눈여겨보았던 것은 시인의 의도 때문만은 아니다. 그 보다는 시인이 자신의 정의(情意)를 드러내는 법 때문이었다. 유사한 방식으로 씌어진 작품을 한편 더 읽어보기로 하자. 

내 안에 오랫동안 닫아두었던 바느질함이 열렸다 
사개 물려놓은 한쪽 귀퉁이가 
밤새 울컥이며 삐걱거리더니 
그 닫혀 있던 뚜껑이 털썩, 한숨 내려놓듯 열린 것이다 
가득 붉은빛이다 
내 안에서 들썩이던 바람을 꾹꾹 눌러 박음질 해둔 
붉은 솔기들이 보인다 
그가 차가운 눈빛으로 돌아설 때마다 
내 속으로 들어와 촘촘히 박혀 
망설임으로 새겨진 무늬들 
그 붉은 날들을 내 안 깊숙이 넣어두고 
오랫동안 재워 두었던 밤들 
어쩌자고 그대로 넣어두려 했던 것일까 
나를 비집고 나온 솔기들이 
저렇듯 곱고 생생한데 

아직 그대로 있는 마음 

이제는 열어 두기로 한다 
―정진영, 「이상한 상자」 

시를 읽고 상상을 한번 해보자. 그가 차가운 눈빛으로 돌아설 때마다 나는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왜 나는 할말이 없었겠는가. 망설이다 고작 침묵으로 대신했다. 그러나 침묵은 지워지지 않고 내 가슴에서 상처로 남아있다. 상처를 달래며 보낸 밤들 그 끝에서 결국 상처는 곪아터지듯 내 가슴에서 붉은 빛으로 터져나왔다. 막상 터져나오자 곱고 생생하다. 하여 이제는 내 마음을 열어두기로 했다. 
앞에 인용했던 조용미 시인은 ‘지율’과 ‘사람’ 그리고 정진영 시인은 ‘바느질 함’과 ‘비집고 나온 솔기’라는 상반된 의미를 함유하고 있는 시어를 대립시켜 두 시인 모두 자신의 생각을 직접 말하지 않고 우회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이를 위해 묘사와 진술을 혼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지율 스님의 단식과 바느질함으로부터 비집고 나온 솔기를 말하고 있는 듯하지만 그 이면에는 시인이 말하고자 했던 진정한 의미가 감추어져 있다. 시를 읽는 일이 시인이 행간과 행간 사이 그리고 함축을 통해 숨겨놓은 사실을 찾아가며 시인과 공감대를 형성해 가는 과정이라면, 두 작품은 바로 시를 읽는 즐거움을 제공해 줄 것이다. 
지금까지 묘사에 의존하는 ‘보여주기’ 방식으로 씌어진 작품들을 살펴보았다. 이제 시인이 직접 시적 화자로 개입하여 자신의 의도를 진술하는 ‘말하기’ 방식으로 씌어진 작품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뭉개진 귀를 보면, 
굳은살 하나 박히지 않은 
말간 내 두 손바닥이 부끄러워진다 
높은 곳을 향해 뻗어가는 벽 위의 덩굴손처럼 
내 손은 지상의 흙 한번 제대로 움켜쥔 일 없이 
스쳐 지나가는 헛된 바람만 부여잡았으니, 
꼬리 잘린 한 마리 도마뱀처럼 
바닥을 짚고 이리저리 필사적으로 기어다니는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비애를 
나는 알지 못한다 

고단한 생의 매트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머리에 깔려 뭉개져버린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슬픈 두 귀를 보면, 
멀쩡한 두 귀를 달고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평형감각 없이 흔들리는 
내 어리석은 마음이 측은하고 
내 것 아닌 절망에 귀기울여 본 적 없는 
잘 생긴 내 두 귀가 서글퍼진다 

삶은 쉴새없이 태클을 걸어오고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몸은 둥근 통나무 같아 
쓰러지고 구르는 것이 그의 이력이지만, 
地球를 끌어안 듯 
그는 온몸 바닥에 밀착시키며 
두 팔 벌려 몸의 중심을 잡는다 
들린 몸의 검은 눈동자는 
水準器 유리관 속 
알코올과 섞인 둥근 기포처럼 
수평을 잡기 위해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두 귀는 
세월의 문짝에 매달려 거친 바람 소리를 듣는, 
닫힌 내일의 문을 두드리는 마음의 문고리다 
―박후기,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슬픈 두 귀」 

레슬링 선수의 뭉개진 귀와 말간 내 두 손바닥을 대비시켜 삶에 대하여 강건한 자세를 취할 것을 다짐하고 있는 위의 시는 주지하듯 묘사보다는 시인의 심회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진술이 주를 이루고 있다. 레슬링 선수와 자신의 대비는 지속되는데, 작품 중반부와 후반부에 이르면 귀가 짓뭉개지도록 꼬리 잘린 도마뱀처럼 이리저리 필사적으로 기어다니는 레슬링 선수의 비애와 내 것 아닌 다른 사람의 절망에는 귀기울여 본 적 없는 나의 이기심에 대한 반성으로 확장된다. 마지막 연에서 보여주고 있는 시인의 다짐이 울림을 낳을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준열한 반성을 전제로 했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대비를 통해 시인은 자신의 어리석었던 삶을 반성하고 새로이 강건한 삶의 자세를 취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지천명 넘어서면 
먼 강 아스라한 적벽의 시간들이 
아름다워질 때 있을 것이다. 
억새밭 거기 상처투성이 
아픈 급물살들이 풀어놓은 여울 곳에 
이름없는 시인의 불우한 노래 한 편 
홀로 숨어살 수 있어서 
어진 농부 가난한 땅으로 돌아가 
착한 시간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저 고향이나 지키면서 살아온 것이 
큰 죄라도 진 것처럼 
부끄러울 때 많이 있다는 
여주땅 도리 이장 이경희씨 
장차 무슨 농사를 지어야 할지 걱정이라며 
남한강 건너 논밭 바라보는 
그의 눈 바로 보지 못하는 
나 또한 대죄인인 것이다. 
시를 써서 세상을 속인 죄 
얼마나 큰줄 아냐고 
저 강물이 나에게 단호히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홍일선, 「시를 써서 세상을 그만 속이자」 

홍일선 시인의 창작 모티프는 여주땅 도리 이장 이경희씨의 삶이다. 농산물 수입이 개방되면서 농사를 짓는 일이 더 이상 경제적으로 이익을 보장해주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농촌과 고향을 등지고 떠났다. 주변 사람이 하나 둘씩 떠나도 자신만은 고향을 지키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는 무슨 농사를 지어야 할지 알 수가 없다고 근심한다. 그러나 이경희씨가 정작 근심하는 것은 무슨 농사를 지어야 할지 몰라서가 아니라, 그러다 자신도 결국 고향을 떠나야할지 모른다는 불길함이다. 그래서 그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두려워하고 있다. 그런 그를 통해 시인은 오히려 자신이 더 큰 죄인임을 고백하고 있다. 세상을 바로 알리고, 때로는 어긋난 세상을 바로 잡는 것을 감당하여야 할 책무를 지닌 시를, 오히려 자신은 세상을 속이는 데 활용했던 것은 아닌가 뒤돌아보고 있다. 그런 그를 향하여 강물은 세상을 속인 죄가 고향을 떠나야 할지 모른다는 이경희씨의 근심보다 더 큰 죄라고 호통치고 있다. 
박후기 시인의 작품과 홍일선 시인의 두 작품 모두 묘사보다 진술에 의존하고 있다. 시의 본질이 함축과 거기에서 파생되는 길고 긴 여운이라고 한정한다면, 두 작품은 시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 그렇지만 두 작품 모두 깊은 여운을 남기고 있다. 그것은 타인의 삶을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계기로 삼는 한편 결연한 의지로 확장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님 
그러시면 안 되지요 
지도 제 잘못은 압니다 
제가 화분을 쓰러뜨리자 
주인님은 신문지 말아 
툭툭 치며 주의를 주었지요 
이러면 안 되는 거구나 
그 후 화분 근처에선 발걸음도 무거웠지요 
제가 어디 화분을 그곳에 둔 
주인님을 탓하더이까 
귀 닫고 남의 탓이라 하지도 않지요 
개 주제인 제가 보기에도 
주인님 
그러시면 안 되지요 
―이길원, 「개 4 ―항변」 

작품의 화자는 ‘개’이다. ‘개’가 ‘인간’인 주인을 일깨워주고 있다. 미물인 개조차도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것은 물론 더욱이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전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주인님/ 이러시면 안 되지요”라는 구절에서 보듯 사람은 동일한 잘못을 되풀이하고, 자신의 잘못을 세상 탓으로, 다른 사람 탓으로 회피하려 한다. 이길원 시인의 작품 역시 우리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가 지켜야 할 덕목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주고 있다. 
작품 전체가 진술로만 이루어져 있지만 시인의 말하고자 했던 위와 같은 사실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구절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독자들은 시인의 의도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의인화(擬人化)된 시적 화자의 입을 빌어 말하고 있는 비아냥거리는 어조가 이를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길원 시인의 작품뿐만이 아니라 박후기, 홍일선 시인의 작품은 모두 진술에 의존하고 있으며, 새로운 각오와 다짐으로 종결하고 있다. 세 시인이 보여준 각오와 다짐이 깊은 여운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처절한 자기 반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공자(孔子)는 『시경(詩經)』에 수록된 삼백 편에 일관하는 정신을 ‘사무사(思無邪)’라 하였다. 사무사란 무엇인가? 세속의 욕망으로 인하여 더럽혀진 마음을 씻어내는 정화작용을 의미한다. 시를 읽는 행위를 처음의 순결한 상태로 돌아가게 하는 과정으로 인식할 때 교시적 기능은 성립된다. 박후기, 홍일선, 이길원 세 시인의 작품은 시가 교시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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