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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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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4    詩숲속에서의 名詩 - 웃은 죄 댓글:  조회:3262  추천:0  2016-01-17
웃은 죄 김동환     지름길 묻길래 대답했지요. 물 한 모금 달라기에 샘물 떠 주고, 그러고는 인사하기에 웃고 받았지요. 평양성에 해 안 뜬대도 난 모르오, 웃은 죄밖에.       《신세기》(1938. 3) 수록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 (가람기획 증보판, 2003)            1938. 3 에 실린 시입니다. 참 오래된 시인데 우물가에서 물 떠주는 처자 하면  조선을 물려받은 이성계의 설화가 생각납니다. 사냥을 하다가 목이 말라 우물가의 처자에게 물을 청하는데 천천히 드시라고 버들잎을 띄워줍니다. 시 속의 처자는 버들잎을 띄워주지는 않았지만 물을 청하는 낯선 이에게 물을 떠 주고 고맙다고 인사를 하기에 웃고 받습니다.    시 속에 남정네는 과거보러 한양 가던 선비였는지도 모르겠고 나무하고 산을 내려오다 목이 말라 물 한 바가지 떠 달라는 잘 생긴 타동네 총각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물을 떠 준 처자는 떠꺼머리 총각만 봐도 얼굴 살짝 붉히는 앳된 처녀였을지도 모르겠고 아직 고추도 설 여문 예닐곱 신랑한테 시집을 와서 암 것도 모르는 꼬마신랑 땜에 애 태우는 새색시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질러가는 길 없냐고 묻기에 대답해주고 물 한 모금 달라기에 옆에 있는 샘물 떠 주었을 뿐입니다. 그리곤 잘 먹었다고 고맙다고 인사하기에 웃음으로 얼버무린 것 밖에 없을 뿐입니다.    그런데 달 마중을 갔었는데 임 마중을 갔었다고 소문이 나는 것처럼 그새 누가 봤는지 온 동네에 소문이 나버렸습니다. 물을 달라기에 물을 떠 건네주었을 뿐이고 누가 어떤 소문을 내든 웃음 죄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데 소문의 당사자는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죄가 있다면 살포시 흘린 웃음이었겠지요. 미디어가 없던 시대에 우물가는 소문의 진원지가 되기도 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뉴스의 장소였습니다. 평양성에 해 안 뜬다고 해도 모르는 일이라고 처자는 항변하지만 웃음의 의미를 두고 퍼져나가는 소문을 잠재우기에는 부족한 듯 보이는 재미난 시입니다.  ///////////////////////////////////////////////////////////////////////////////////////////////////////////////////////////////     김종한           /  "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 능수버들이 지키고 섰는 낡은 우물가 우물 속에는 푸른 하늘 조각이 떨어져 있는 윤사월 ---아주머님 지금 울고 있는 저 뻐꾸기는 작년에 울던 그놈일까요? 조용하신 당신은 박꽃처럼 웃으시면서 두레박을 넘쳐 흐르는 푸른 하늘만 길어 올리시네. 두레박을 넘쳐 흐르는 푸른 전설만 길어 올리시네. 언덕을 넘어 황소의 울음 소리도 흘러 오는데 --물동이에서도 아주머님 푸른 하늘이 넘쳐 흐르는구려. 이 시는 김종환의 데뷔작이다. 그는 이념적, 사회적 경향의 시를 배격하면서 섬세한 언어 감각과 지적인 재치가 번득이는 작품을 즐겨 썼다. 이 시에서도 우리 고유어를 적절히 사용하여 전통적인 전원의 한가한 풍경을 재현시켜 놓았다. 능수버들 아래 낡은 우물이 있는 집은 그 내력이 매우 오래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한다. 윤사월의 청명한 하늘 조각이 깊은 우물 속에 비치는 가운데 뻐꾸기 소리조차 한가롭게 들리는 전형적인 전원 농가의 모습이 한 폭의 수묵화처럼 그려져 있다. 아마도 종가(宗家)의 맏며느리일 것으로 추정되는 아주머님은 호젓한 우물가에 서서 하염없이 물을 길어 올린다. 그런 광경을 바라보는 화자는 아주머니에게 '지금 울고 있는 저 뻐꾸기는 작년에 울던 그 놈'이 아니겠느냐며 말을 걸어보지만, 아주머니는 박꽃처럼 화사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없이 두레박질만 한다. 초여름의 한적한 오후에 들리는 뻐꾸기, 황소 울음 소리는 농촌의 한가함을 한결 돋우어 준다. 삼라 만상의 움직임이 일순 정지해 버린 듯한 고요와 정적을 깨뜨리는 것이 바로 뻐꾸기와 황소의 울음 소리이다. 나지막하고 게으른 듯한 자연의 소리, 그 속에서 두레박으로 푸른 전설을 넘치도록 길어 올려 물동이에 이고 일어선 아주머니, 출렁이는 물동이에 담긴 윤사월의 시리도록 푸른 하늘 이러한 소재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면서 그윽한 평화와 아름다움이 넘치는 전원 풍경을 완성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김동환의 '웃은 죄'와 비교해 볼 만한 작품인데, 이 작품은 그보다 한 해 먼저 발표된 것이다... ///////////////////////////////////////////////////////////////////////////////////////////////// 고원(故園)의 시                                               - 김종한 -   밤은 마을을 삼켜 버렸는데   개구리 울음소리는 밤을 삼켜 버렸는데   하나 둘...... 등불은 개구리 울음소리 속에 달린다.       이윽고 주정뱅이 보름달이 빠져나와   은으로 칠한 풍경을 토(吐)한다  =================================   김윤식 교수의 문학산책   지난 2004년 1월 15일 설산, 인촌, 춘원, 상백 등이 공부한 와세다 대학에 갔소. 경외하는 학자 오무라 마쓰오(1933~ ) 씨의 최종강의를 듣기 위함이었소. 윤동주의 육필 원고를 이 지구상에서 최초로 열람했으며 윤동주의 무덤을 처음으로 확인한 바 있고 의 저자인 씨인지라, 그의 학문적 마무리의 장면이 궁금할 수밖에. 물론 개인적 책무도 있긴 했소. 내 퇴임강의 때 씨가 현해탄을 건너와 맨 앞줄에 앉아 있었으니까. 내 관심 중의 하나엔 이른바 친일문학에 대한 씨의 최종적 견해의 어떠함도 들어 있었소. 씨의 연구서 속엔 (1992)가 있거니와, 여기에서 씨는 한국에서는 김용제를 친일문학자라 규정하여 돌보지 않았고 일본문학계에서도 그의 존재가 잊혀졌음을 지적했소. 한국 쪽의 망각은 그럴 만할지 모르겠으나, 일본 쪽의 망각은 다음 두 가지 점에서 ‘태만’이라 규정했소. 국제적인 벗이 행한 역할에 둔감함이 그 하나. 이웃나라의 진보적 문학자에 친일문학을 강요하고 그로 하여금 전투도 제대로 못할 만큼 기진맥진케 한 사실을 통렬히 직시하고자 하지 않았음이 그 다른 하나. 나프(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동맹)의 서기이며 옥중투쟁으로 크게 활동한 조선인 시인 김용제를 어떻게 평가할까에 대한 한 성실한 일본인 연구자의 모럴 감각이 거기 있었소. 씨의 최종강의에서는 이 점이 어떤 형태로 묻어날까. 이러한 내 기대는 조금 어긋났소. 평생을 공부하면서 느낀 이런저런 감회를 걷어낸 최종강의의 알맹이인즉 시인 윤동주와 시인 김종한에 집중된 까닭이오. 전자에 대해서는 적어도 실증적 연구에서 국내 어느 학자보다 앞서 있었던 만큼 감회가 남달랐을 터이나, 김종한에 그토록 씨의 관심이 깊었음은 의외였소. 그러나 조금 깊이 살펴보면 그 곡절이 조금 드러나오. 일찍이 씨는 이렇게 말한 바 있소. “한국문학사는 ‘일제 말 암흑기’에 민족의 빛을 가져온 시인으로 윤동주를 내세운다. 문학사상 김종한의 자리는 없지만 만일 설정한다면 윤동주의 대극의 마이너스 좌표에 놓일 터이다”라고. 그렇기는 하나 “두 시인의 나이, 작풍, 삶의 방식 등이 다르나 1936, 7년의 시점에서는 공통항목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라고. 대체 김종한(1914~1944)은 어떤 시인인가. 31세로 요절한 출신의 김종한을 처음으로 평가한 논자는 (1966)의 저자 임종국(1929~1989) 씨였소. 황민시(皇民詩)가 일반적으로 예술성이 빈곤한 선동이기 쉬웠다는 통례를 깨고 시로서의 품격을 갖춘 것을 썼다고 전제한 임씨는 또 이렇게 지적했소. “비록 황민시이지만 이나 같은 시는 기교나 예술성에서는 흠을 찾기 어려운 작품”(, 1991)이라고. 여기서 말하는 황민시에 주목할 것이오. 조선어로 쓴 친일시 따위와는 변별되는 용법으로 보이기 때문. 일어로 시국적인 시를 쓰되, 기교와 예술성에서 흠을 찾기 어렵다면 이는 한일간의 문학공간에 놓인 ‘작품’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씨의 마음의 흐름이 감지되오. 가령 일어로 된 (1942)을 우리말로 옮기는 자리에서 임씨는 이렇게 말했소. 당시 일반적 풍조가 ‘내선일체’의 근거를 동근동조(同根同祖)에 두고 있음에 반해 에서는 돌배나무와 능금, 곧 이질적 종자의 접목이라는 시선으로 읊었다는 것.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임씨가 미처 지적하지 않은 부분이오. 발표 당시 엔 이른바 반가(反歌)가 붙어 있었다는 점이 그것. 이는 중요한데, 일본의 고대 시집 에 견주었다는 점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오. 장가의 뒤에 이를 요약, 보충하는 단가를 두고 반가라 하거니와, 의 반가는 이러하오. “어머니의 의향에 거역하면 너도 나도 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대의) 그렇다면 어머니란 무엇인가. 돌배나무 그것이 아니겠는가. 시집 (1943)에서 시인은 의 이 반가를 삭제해버렸지요. 왜 그랬을까. 이러한 추측이 가능하오. 이 시집 전체가 에 맞서기라는 점. 시집 후기에서 김종한은 이렇게 적었소. “내선일체에 헌신하는 한 사람의 문화인의 운명을 갖고 있는 인과의 아름다움과 슬픔을 우의(寓意)하려 했다”라고. 그것은 태평양전쟁(1941. 12. 8)이 난 지 만 일 년을 겨냥해 쓴 시 (1942)에서도 엿볼 수 있소. “긴 창경원 돌담을 끼고/그렇게도 계절의 가혹함에 고분고분해진 그들에게/대체 무슨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해질 때, 이 양가적 애매성은 음미의 사항이라 할 만하오. 임씨의 지적이 새삼 음미의 사항으로 우리 앞에 던져져 있소. ‘황민시’이긴 해도 예술성에 흠을 찾기 어렵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 물음이 음미 사항으로 ‘우리’ 앞에 던져져 있다고 할 때 그 ‘우리’란 오무라 교수의 시선에서 보면 한일 근대문학의 관련 양상이오. 내 시선에서 보면 어떠할까. 이중어 글쓰기 공간(1942~1945)에서의 조선인의 이중어 글쓰기의 제6형식이겠소. 제1형식(유진오, 이효석, 김사량), 제2형식(이광수), 제3형식(최재서), 제4형식(한설야), 제5형식(이기영) 다음 차례에 오는 것. 이처럼 글쓰기의 유형들이 거기 있었소. 그러기에 이중어 글쓰기의 공간이 제7형식으로도 응당 열려 있지 않겠는가.   ================================   김종한; 시인·평론가. 함경북도 경성군(鏡城郡) 명천(明川) 출생. 호는 을파소(乙巴素)·월전무(月田茂). 니혼[日本]대학 예술과 졸업. 193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이 당선되고, 39년 《문장》에 《귀로》 《고원(故園)의 시》 등이 추천되면서 문단활동을 시작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해협의 달(1938)》 《연봉재실(1940)》 《살구꽃처럼(1940)》 등이 있다. 그의 시는 솔직·명쾌하며, 속도감이나 시각적 공간성을 추구하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그는 또  주지적 경향을 비난하면서 이른바 《최고의 순간》을 표하는 단시(短詩)를 주장하였는데, 이는 한국 현대시사에서 등장한 최초의 선시이론(禪詩理論)으로 꼽힌다.    ////////////////////////////////////////////////////////     ‘국경의 밤’의 시인 파인(巴人) 김동환에게 ‘웃은 죄’라는 시가 있다. “지름길 묻길래 대답했지요. 물 한 모금 달라기에 샘물 떠 주고, 그러고는 인사하기에 웃고 받았지요. 평양성에 해 안 뜬대도 난 모르오, 웃은 죄밖에.” 길가는 남정네와의 뜬소문을 무마하려는 시골 아낙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이 시는 웃음의 무죄를 역설한다. 하지만 근대 이전에 웃음은 결코 헤프게 남발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심지어 불경함과 불온함의 상징이었다. 움베르트 에코(U Eco)의 『장미의 이름』을 보면 눈 먼 호르헤 수사(修士)가 웃음을 극도로 경멸하는데 그것은 중세적 도그마를 수호하기 위해서였다. 바흐찐(M Bakhtine)이 엄숙주의를 파괴하는 웃음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후 웃음은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오늘날엔 ‘웃음 치료’가 등장할 정도로 그것은 우리의 마음뿐만 아니라 몸도 치유하는 만능의 처방으로 대두하여 가가호호(家家戶戶) 웃기에 골몰한다.  그러나 시세가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때에 따라 웃음은 망신이 될 뿐만 아니라 ‘죄’가 될 수도 있음을 고금의 사례는 보여준다. 아마 이 방면의 최초의 사례는 멀리 주(周)나라 유왕(幽王) 때의 총희(寵姬) 포사(褒)가 될 것이다. 소설 『동주열국지(東周列國誌)』를 보면 엄청난 미인이었던 그녀는 도무지 웃질 않아서 임금을 안달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봉화를 잘못 올려서 사방의 군대가 왕궁으로 쇄도했다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는 모습을 보고 깔깔 웃었다고 한다. 그후 임금이 포사의 웃는 얼굴을 보려고 자주 거짓 봉화를 올리게 했다가 나중에 정말로 견융(犬戎) 오랑캐가 쳐들어왔을 때 구원병이 오지 않아 나라가 망했다는 이야기이다. 사실 이 경우 죄는 웃었던 포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임금에게 있는 것이지만 어쨌든 웃음이 재앙을 초래한 사례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소설 『삼국지』에도 영웅 조조가 웃음으로 인해 스스로 만고의 웃음거리가 되고 만 사건이 있다. 제50회 ‘제갈량이 지혜로 화용도를 예상하고 관우가 의리로 조조를 놓아주다(諸葛亮智算華容, 關雲長義釋曹操)’편을 보면 조조가 적벽에서 패하고 달아나는 와중에도 병법 실력을 자랑하여 세 곳에서 세 번이나 제갈량을 비웃다가 그때마다 매복했던 유비의 군대가 나타나 기겁을 하고 급기야는 관우에게 사로잡힐 뻔할 지경에 이르게 된다. 경솔한 웃음이 자신을 망친 사례이다.   남의 웃음으로 엉뚱한 사람이 피해를 본 경우도 있다. 조선 연산군 때의 문신 장순손(張順孫, 1457~1534)은 얼굴이 돼지를 닮아 ‘저두(猪頭)’라는 별명이 있었는데 궁중의 제사상에 올린 돼지머리를 보고 기생이 웃었다고 한다. 연산군이 웃는 이유를 캐묻자 장순손의 모습이 떠올라서 그랬다고 대답하니 둘 사이에 무슨 정분이 난 줄 알고 귀양가 있던 장순손을 처형하라고 명하였다. 마침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 장순손은 목숨을 건지고 후일 영의정에까지 오르게 된다. 지엄한 자리에서의 실소(失笑)가 남의 목숨을 위태롭게 한 사례이다. 그리고 또 최근 어떤 모모한 인물이 막중한 현안을 논의하는 자리에서의 부적절한 언행과 웃음으로 공분(公憤)을 사 파직된 일이 있었다. 만능의 처방이 도리어 몸에 이롭지 않게 된 사례로 기억될 만하다. ◆정재서=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신화학과 도교학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상상력을 풀고 있다. 저서 『이야기 동양신화』 『중국 신화의 세계』등.  
383    아시아인 최초 노벨문학상 - 인도 시성, 국부 = 타고르 댓글:  조회:2659  추천:0  2016-01-03
타고르 [1861.5.7~1941.8.7]      요약  인도의 시인 ·철학자 ·극작가 ·작곡가. 원어명  Rabndranth Tagore  본명  타쿠르  국적  인도  활동분야  문학, 철학, 음악  출생지  인도 캘커타  주요수상  노벨문학상(1913)  주요저서  《기탄잘리》(1909) 콜카타에서 태어났다. 벵골어로는 타쿠르( hākur)라 한다. 벵골 명문의 대성(大聖)이라 불리는 아버지 데벤드라나트의 15명의 아들 중 열넷째 아들로, 형들도 문학적 천분이 있었고, 타고르가(家)는 벵골 문예부흥의 중심이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11세경부터 시를 썼고, 16세 때 처녀시집 《들꽃》을 내어 벵골의 P.B.셸리라 불렸다. 인도 고유의 종교와 문학적 교양을 닦고, 1877년 영국에 유학하여 법률을 공부하며 유럽 사상과 친숙하게 되었다. 귀국 후 벵골어로 작품을 발표하는 동시에 스스로 작품의 대부분을 영역하였고, 산문·희곡·평론 등에도 문재를 발휘하여 인도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초기 작품은 유미적(唯美的)이었으나, 1891년 아버지의 명령으로 농촌의 소유지를 관리하면서 가난한 농민생활과 접촉하게 되어 농촌개혁에 뜻을 둠과 동시에, 작풍에 현실미를 더하게 되었다. 아내와 딸의 죽음을 겪고 종교적으로 되었으며, 1909년에 출판한 시집 《기탄잘리 Gī tāñ jalī》로 1913년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아 세계에 알려졌다. 그뒤 세계 각국을 순방하면서 동서문화의 융합에 힘썼고, 캘커타 근교에 샨티니케탄(평화학당)을 창설하여 교육에 헌신하였으며 벵골분할 반대투쟁 때에는 벵골 스와라지 운동의 이념적 지도자가 되는 등 독립운동에도 힘을 쏟았다. 그가 세운 학당은 1921년에 국제적인 비스바바라티대학으로 발전하였고, 오늘날에는 국립대학이 되었다. 시집에 《신월(新月) The Crecent Moon》 《원정(園丁) The Gardener》(1913) 등, 희곡에 《우체국 The Post Office》(1914) 《암실의 왕 The King of the Dark Chamber》(1914), 소설에 《고라 Gorā 》1910) 《카블에서 온 과실장수》, 평론에 《인간의 종교》 《내셔널리즘 Nationalism》(1917) 등이 있다. 벵골 지방의 옛 민요를 바탕으로 많은 곡을 만들었는데, 그가 작시·작곡한 《자나 가나 마나 Jana Gana Mana》는 인도의 국가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M.K.간디와 함께 국부(國父)로 존경을 받고 있다. 한편, 타고르는 한국을 소재로 한 두 편의 시, 《동방의 등불》 《패자(敗者)의 노래》를 남겼다. 그 중 《패자의 노래》는 최남선(崔南善)의 요청에 의하여 쓴 것이고, 다음에 전문을 든 《동방의 등불》은 1929년 타고르가 일본에 들렀을 때, 《동아일보》 기자가 한국 방문을 요청하자 이에 응하지 못함을 미안하게 여겨 그 대신 《동아일보》에 기고한 작품이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촉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마음엔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은 곳/ 진실의 깊은 속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 벌판에 길 잃지 않은 곳/ 무한히 퍼져 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당으로/ 나의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주요한 옮김. 1929.4.2). 동방의등불 [東方-燈-]     인도의 사상가이자 시인 겸 극작가인 라빈드라나드 타고르(Rabindranath Tagore:1861~1941)의 시.   저자  라빈드라나드 타고르  장르  시  발표  1929년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마음엔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는 곳 진실의 깊은 속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림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벌판에 길 잃지 않는 곳 무한히 펴져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국으로 내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1929년 4월 2일자 《동아일보》에 발표된 자유시이다. 당시 주요한(朱耀翰)의 번역으로 실린 이 시는 《동방의 등촉(燈燭)》 또는 《동방의 불꽃》으로도 번역되었다. 1929년 인도의 시성(詩聖) 라빈드라나드 타고르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동아일보》 기자로부터 한국 방문을 요청받았으나 응하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을 대신하여 《동아일보》에 기고한 작품이다. 이 시는 타고르가 한국을 소재로 쓴 두 편의 작품 중 하나로, 일제 식민치하에 있던 한국인들이 희망을 잃지 말고 꿋꿋하게 싸워 독립을 이루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보낸 격려의 송시(頌詩)이다. 이 시는 한국 민족문화의 우수성과 강인하고도 유연한 민족성을 '동방의 등불'로 표현하여 당시 식민치하에 있던 한국 민족에게 큰 격려와 위안을 주었으며, 특히 한국의 독립쟁취에 대한 시인의 강렬한 기원을 진취적이고 희망적 어조로 노래하여 3·1운동 이후 실의에 빠져 있던 한국 민족에게 큰 감동과 자긍심을 일깨워준 작품으로 평가된다. . 「 동 방 의 등 불 」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될지니. The Lamp of the East In the golden age of Asia  Korea was on-e of its lamp - bearers  And that lamp is waiting to be lighted on-ce again  For the illumination in the East.” 그런데 이 시가 짧게 끝나 아쉬웠던지, 언제부터인가 이 뒤에 『기딴자리(Gitanjali)』의 제 35번째 시가 덧붙여져서 유포되었습니다. 이 시는 타고르가 영국에 항거하는 인도 사람들을 위하여 쓴 시인데, 아마 우리의 처지도 그와 비슷하여 자연스럽게 끌어들여진 것 같습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마음에 두려움 없이 머리를 높이 치켜들 수 있는 곳 지식이 자유로울 수 있는 곳 작은 칸으로 세계가 나누어지지 않은 곳 말씀이 진리의 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곳 피곤을 모르는 노력이 완성을 향하여 팔 뻗는 곳 이상의 맑은 흐름이 무의미한 관습의 메마른 사막에 꺼져들지 않는 곳 님의 인도로 마음과 생각과 행위가 더욱 발전하는 곳 그런 자유의 천국으로 나의 조국이 눈뜨게 하소서, 나의 님이시어. Gitanjali 35 Where the mind is without fear and the head is held high ;  Where knowledge is free ;  Where the world has not been broken up into fragments by narrow domestic walls ;  Where words come out from the depth of truth ;  Where tireless striving stretches its arms towards perfection ;  Where the clear stream of reason has not lost its way into the dreary  desert sand of dead habit ;  Where the mind is led forward by thee into ever-widening thought and action -- Into that heaven of freedom, my Father, let my country awake. 『기딴자리』는 타고르의 대표 시집으로 "신(神)에게 바치는 송가(頌歌)"라는 뜻입니다. 벵골 어로 된 157편의 서정시를 묶어 1910년에 처음 출판됐는데, 타고르는 여기에서 57편을 추리고 다른 시를 첨가하여 모두 103편을 직접 영어로 옮겨 1912년에 영국에서 다시 출간했습니다. 이 시집으로 이듬해인 1913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1923년 안서 김억이 우리말로 번역하여 소개한 바 있습니다. 타고르의 시는 만해 한용운 등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                                                            시성 타고르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 1861. 5. 7 캘커타~1941. 8. 7 캘커타. 인도의 시인·사상가·교육자. 191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며, 인도 문학의 정수를 서양에 소개하고 서양 문학의 정수를 인도에 소개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위대한 성자 데벤드라나트 타고르의 아들로서 일찍이 시를 짓기 시작했다. 1880년대에 몇 권의 시집을 낸 뒤 시가집 〈아침의 노래〉(1883)로 그의 예술의 기초를 확립했다. 1890년에는 그의 성숙된 천재성을 보여주는 〈 마나시 Mnas〉라는 시모음집을 펴냈는데 〈마나시〉에는 형식에 있어서 오드를 비롯해서 벵골에서는 시도되지 않았던 시형을 지닌 시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그의 대표적인 시들도 상당수 실려 있다. 이 시집에는 또한 그가 지은 최초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시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1891년 실라이다와 사이야드푸르에 있는 아버지 소유의 부동산을 관리하게 되었다. 그는 거기서 마을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냈고, 그들의 빈곤과 후진성에 대한 깊은 동정심은 나중에 그의 많은 저작들의 핵심적인 주제가 되었다. 1912년에 출간된 〈한 다발의 이야기들 Galpaguccha〉에는 그들의 '비참한 삶과 자그마한 불행들'에 대한 이야기가 모아졌다. 그는 정치적·사회적 문제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었으나, 결코 인도의 독립을 지상의 목적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그는 실라이다에서 벵골의 전원을 사랑하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갠지스 강을 사랑하여 그의 문학의 중심 이미지로 삼게 되었다. 이곳에 머무는 여러 해 동안 그는 〈황금 조각배 Sonr Tari〉(1893)·〈경이 Citr〉(1896)·〈늦은 추수 Caitli〉(1896)·〈꿈 Kalpan〉(1900)·〈찰나 Kak〉(1900)·〈희생 Naibedya〉(1901) 등의 작품집과 함께 〈Chitrgad〉(1892), 〈Chitra〉라는 제목으로 1913년에 재출간)와 〈정원사의 아내 Mlin〉(1895)라는 서정적 희곡을 출간했다. 1902~07년 사이에 처자식과 사별한 그는 울적한 심경을 훌륭한 시로 형상화했다. 그는 1913년 널리 알려진 작품집 〈기탄잘리 Gtnjali〉('찬송을 헌정함'이라는 뜻, 1910)의 영역본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그는 1915년 영국으로부터 기사작위를 수여받았으나, 1919년 암리차르에서의 대학살에 대한 항거의 표시로 그 작위를 반납했다. 타고르는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도 수많은 작품을 썼다. 그는 생애의 후기 25년 동안 21권의 저작을 펴냈다. 그는 이 기간의 대부분을 유럽, 아메리카, 중국, 일본, 말레이 반도, 인도네시아 등지를 여행하며 강연하는 일로 보냈다. 그의 작품들 상당수가 그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영역되었지만, 영역본들은 벵골어 원작에 비해 문학적 가치가 상당히 떨어진다. 그는 시와 단편소설 외에 주목할 만한 소설도 여러 편 썼는데, 〈 고라 Gor〉(1907~10, 영역 1924)는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타고르는 1901년 볼푸르 근처 산티니케탄에 학교를 세우고 인도와 서양의 각 전통에서 최상의 것들을 선별해 조화시켜 가르치고자 했다. 그는 1921년 그곳에서 비스바바라티대학교를 세웠다. 한편 1920년 〈동아일보〉창간에 즈음하여 〈동바의 등불〉이라는 시를 기고하여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한국민에게 큰 감동을 안겨주기도 했다. 타고르가 태어난 시대에는 세 가지 운동이 일어났다. 하나는 형식적이고 물질적인 교의로 막힌 정신적 의의의 길을 여는 개혁 운동인데, 이것은 일종의 종교적인 것으로서 새로운 사상에 의심을 품는 정통파 사람들에게는 정면의 도전이었다. 둘째는 벵갈 문학의 개혁 운동이었는데, 이는 문학 표현의 자유를 찾자는 취지로 일어났다. 셋째는 국민운동으로서, 이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즉, 영국의 굴욕적인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광범한 민족 운동이다. 특히, 인도 청년 중에 과거의 유산으로 내려오는 자기 문화 관습을 조소하는 풍조가 유행하였다. 국민이 스스로를 모욕하고 무시하는 민족성을 구하고자 타고르 가족은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타고르 문학의 가치는 문명의 선진으로도 과학의 우세로도 감히 무시 못할 깊이에까지 도달한 인간 공감의 극치에 있다고 하겠다. 그의 문학은 언어 장벽까지도 초월할 수 있는 인간 정서의 최고봉이다. 그의 시는 근대 시인에게서는 보기 드문 조화와 성숙에 이른 것으로, 그의 말 하나, 움직임 하나가 모두 시요, 미요, 또 지혜다. 말하자면 동양과 서양을 묘하게 조화시킨 아름다운 꽃이라 하겠다. 이처럼 최대의 자유와 무한한 개성과 또 온 세계와도 대결하는 불굴의 반항 정신이 그의 시 세계인 까닭에, 시에 뛰어난 철학이 담겨 있다. 현대의 어느 시인보다도 소박한 표현 속에서 가장 깊은 사유의 세계에 접할 수 있게 하는 시인이다. 타고르의 '임'에 대하여 '우파니샤드'에 의하면 본질에 있어 만유의 빛이요, 생명이요, 또 세계 의식인 존재가 브라만이다. 이 브라만이 타고르의 '임', 곧 절대자[=신(神)]이다. 신은 지극히 나약한 존재인 인간을 무한의 경지에까지 이끌어 준다. 그것이 또한 신의 기쁨이 된다. 그러나 고마운 신은 창조로써 존재에 이바지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항상 새로운 생명으로 그 존재의 부족을 채워 준다. 타고르의 '임'은 이처럼 존재인 동시에 생성(生成)인 것이다. 브라만은 완전하여 분석하거나 해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브라만은 오직 사랑과 기쁨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브라만에 도달하기 위한 기쁨과 사랑의 노래로 타고르의 시를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임'의 실체는 만해 한용운의 시에도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타고르가 우리 문학에 미친 영향 타고르는 우리 나라에 "패자의 노래", "동방의 등불"이라는 두 편의 시를 보내기도 했다. 그의 시는 , 등에 소개되었고, 김억에 의해 시집 , , 등이 번역되었다. 이렇게 번역된 타고르의 시는 임을 노래한 연시(戀詩), 산문시의 가락 등에서 만해 한용운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되고 있다. 타고르의 시와 범아일여 범아일여(梵我一如)는 인도의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사상으로서, 이 사상은 고대 인도의 바라문 계급을 중심으로 발달한 종교인 바라문교의 철학 사상인 고대 인도의 철학사상이다. 이는 우주의 근본 원리인 범(梵)과 개인의 중심인 아(我)가 일치한다는 점이다. 타고르는 이를 시의 바탕에 깔고 있다. 타고르의 시에 대하여 타고르의 시의 경향을 대강 분류해 보면 우선 종교 및 철학적인 시가 있다. 애인을 그리워하는 소녀의 순정으로 신을 사모하는 감동적인 종교시가 있다. 다음 영국의 식민지 정책 압제하에 신음하는 조국 인도의 비참한 상황과 형극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줄기차게 앞날의 영광을 노래하는 민족적 또는 사회적 저항시가 있다. 갖은 압박과 고난과 실의 속에서 뚜렷이 조국의 앞날을 예언하면서 동포에게 용기와 의식을 높이고 세계 열강의 횡포에 단호한 심판의 예언과 경고를 보낸다. 이에 겸하여 사회에 대한 저항 의식을 형상화하고 또 인류의 정의감을 호소하는 절규가 시사되어 있다. 이러한 민족 사회시라고 일컬을 만한 것으로서는 '시들' , '꽃다발 ' , '백조는 날고' 등을 꼽을 수 있다. 셋째는, 서정적인 사랑의 시다. 인도 고유의 풍속과 향토미에서 우러나는 애정을 편력하면서 인간의 영혼에 깃들어 있는 가장 아름다운 정서를 발굴한다. 그리고 이를 근대화의 과정에 있는 시대 조명에 비추어 감각적이요 또 순수한 표현으로 극적이고도 서정적인 맛을 보태고 심오한 정신적 깊이까지 더하도록 한다. 이런 경향의 작품들로서는 '정원사' , '애인의 선물' . '샤말리에서' , '망명자 및 기타' 등이 있다. 넷째는, 어린이 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인류 중에서 가장 순수하고 속세와 현실에 오염되지 않은 인간 원형 시대의 어린이 세계를 어른의 입장에서 혹은 어린이 자신의 입장에서 노래한 것이다. 참으로 독자로 하여금 천사의 세계에 놀게 하고 저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로 사람을 다시 돌아가게 하는 법열(法悅)이 경지를 방불케 하는 예술의 세계다. 여기에 또 룻소의 자유와 자연의 사상이 은연중에 스며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인류의 씨로서 또 그 핵으로서 또 미래의 인류의 주인으로서의 어린이 세계를 참으로 고귀하고 또 아리땁게 그린 것을 볼 수 있다. 이 경향에는 '저녁 노래' , '어린이' , '초승달' 등을 들을 들 수 있다... =============================================================== 기탄잘리(Gitanjali)는 인도의 시인 타고르가 지은 시집입니다.  한국에서는 1923년 시인 김억(金億)이 이문관(以文館)에서 간행한 번역본이 최초의 것이며, 한용운(韓龍雲), 김소월 등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기탄잘리(Gitanjali)는 '신(神)에게 바치는 송가(頌歌)'라는 뜻으로, 157편을 수록하여 1910년에 출판했습니다. 그 중에서 57편을 추려 타고르 자신의 영역(英譯)으로 1912년에 영국에서 출판하였고, 다음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유럽에서도 절찬을 받았습니다.   영역판에 수록된 시에는 제목이 없고 번호만 붙였습니다. 모두가 종교적이고 상징적인 것으로, 원시(原詩)의 유려한 운율과 힘찬 것을 잃은, 박력이 결여된 점이 있다고는 하나, 이는 영역이라기보다 영어에 의한 새로운 작품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신(神)에의 귀의(歸依)와 열렬한 경애(敬愛)의 정(情), 즉 뜨거운 신앙을 뼈대로 한 이 시집에는 "나는 당신을 모든 면에서 보며/모든 면에서 당신과 교제하며/밤낮을 가리지 않고 당신에게 사랑을 바칩니다"에서 보여주듯 경건하면서도 감미로운 시가 많습니다.    
382    명사 시인과 명시 꽃 댓글:  조회:3456  추천:0  2016-01-02
꽃 / 조병화 꽃이 스스로 혼자 피어서  한동안 이승을 구경하다간  스스로 사라지듯이  나도 그렇게 구경하다 가리 꽃이 꺾이면 꺾이는대로 그렇게  꺾여가듯이  나도 그렇게  이승을 살다 가리 꽃이 어느 불행한 시인에게  눈에 들어  사랑을 받듯이  나도 그렇게  어느 불행한 여인에게 눈에 들어  아, 그렇게 사랑을 받았으면   꽃을 버릴 때처럼 / 조병화 꽃을 버릴 때처럼  잔인한 마음이 있으리 아직도 반은 살아 있는 꽃을  버릴 때처럼  쓰린 마음이 있으리 더우기 시들은 꽃을 버릴 때처럼  애처로운 마음이 또 있으리 한동안 같이 살던 것들  같이 지낸 것들  같이 있었던 것들을  버릴 때처럼  몰인정한 마음이 있으리 아, 그와도 같이  버림을 받을 때처럼  처참한 마음이 또 있으리    꽃 / 유 치 환 가을이 접어드니 어디선지 아이들은 꽃씨를 받아 와 모우기를 하였다 봉숭아 금전화 맨드라미 나발꽃 밤에 복습도 다 마치고 제각기 잠잘 채비를 하고 자리에 들어가서도 또들 꽃씨를 두고 이야기--- 우리 집에도 꽃 심을 마당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어느덧 밤도 깊어 엄마가 이불을 고쳐 덮어 줄 때에는 이 가난한 어린 꽃들은 제각기 고운 꽃밭을 안고 곤히 잠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꽃 / 이육사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北)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 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여. 한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 성(城)에는 나비처럼 취(醉)하는 회상(回想)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꽃 / 박두진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한 번만의 어느 날의 아픈 피 흘림.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섶 위에 떨궈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꺼질 듯 보드라운 황홀한 한 떨기의 아름다운 정적(靜寂). 펼치면 일렁이는 사랑의  호심(湖心)아.    꽃 / 박양균   사람이 사람과 더불어 망(亡)한  이 황무(荒蕪)한 전장(戰場)에서  이름도 모를 꽃 한 송이  뉘의 위촉(委囑)으로 피어났기에  상냥함을 발돋움하여 하늘과 맞섬이뇨. 그 무지한 포성(砲聲)과 폭음(爆音)과  고함(高喊)과 마지막 살육(殺戮)의 피에 젖어  그렇게 육중한 지축(地軸)이 흔들리었거늘 너는 오히려 정밀(靜謐) 속 끝없는  부드러움으로 자랐기에  가늘은 모가지를 하고  푸르른 천심(天心)에의 길 위에서  한 점 웃음으로 지우려는가-.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꽃/ 김춘수 그는 웃고 있다. 개인 하늘에 그의 미소는 잔잔한 물살을 이룬다.  그 물살의 무늬 위에 나는 나를 가만히 띄워 본다.  그러나 나는 이미 한 마리의 황나비는 아니다.  물살을 흔들며 바닥으로 바닥으로 나는 가라앉는다.  한나절, 나는 그의 언덕에서 울고 있는데,  도연(陶然)히 눈을 감고 그는 다만 웃고 있다.                  [출처] 꽃에 관한 명시들|작성자 헌책  
381    난해시의 현재까지 끝판왕 - 李箱 詩 댓글:  조회:3185  추천:0  2016-01-01
      李箱의 시집 (1932.7)     아래는 시집에 수록된 시 전체의 목록   이상의 시에 대해서 여러가지 해석이 있지만 독자분들의 상상력의 몫에 맡긴다...   그럼 감상해보시길...           1.AU MAGASIN DE NOUVEAUTES   建築無限六面角體       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   사각이난원운동의사각이난원운동의사각이난원   비누가통과하는혈관의비눗내를투시하는사람   지구를모형으로만들어진지구의를모형으로만들어진지구   거세된양말(그여인의이름은워어즈였다)   빈혈면포,당신의얼굴빛깔도참새다리같습네다   평행사변형대각선방향을추진하는막대한중량   마르세이유의봄을해람한코티의향수의맞이한동양의가을   쾌청의공중에붕유하는Z백호.회충양약이라고씌어져있다   옥상정원.원후를흉내내이고있는마드모아젤   만곡된직선을직선으로질주하는낙체공식   시계문자반에Ⅻ에내리워진일개의침수된황혼   도어-의내부의도어-의내부의조롱의내부의카나리아의내부의감살문호의내부의인사   식당의문깐에방금도달한자웅과같은붕우가헤어진다   파랑잉크가엎질러진각설탕이삼륜차에적하(積荷)된다   명함을짓밟는군용장화.가구를질구하는조화분연   위에서내려오고밑에서올라가고위에서내려오고밑에서올라간사람은   밑에서올라가지아니한위에서내려오지아니한밑에서올라가지아니한위에서내려오지아니한사람   저여자의하반은저남자의상반에흡사하다(나는애련한후에애련하는나)   사각이난케이스가걷기시작이다(소름이끼치는일이다)   라지에터의근방에서승천하는굳바이   바깥은우중.발광어류의군집이동               2.열하약도 No.2(미정고)   이 항목부터는 쉽게 정상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드므로 주의해라.       1931년의풍운을적적하게말하고있는탱크가이른아침짙은안개에붉게녹슬어있다.   객석의구들의내부.(실험용알콜램프가등불노릇을하고있다)   벨이울린다.   아이가20년전에사망한온천의재분출을알린다.               3.진단 0 : 1   어떤환자의용태에관한문제   1 2 3 4 5 6 7 8 9 0 ●   1 2 3 4 5 6 7 8 9 ● 0   1 2 3 4 5 6 7 8 ● 9 0   1 2 3 4 5 6 7 ● 8 9 0   1 2 3 4 5 6 ● 7 8 9 0   1 2 3 4 5 ● 6 7 8 9 0   1 2 3 4 ● 5 6 7 8 9 0   1 2 3 ● 4 5 6 7 8 9 0   1 2 ● 3 4 5 6 7 8 9 0   1 ● 2 3 4 5 6 7 8 9 0   진단 0 : 1   2 6ㆍ1 0ㆍ1 9 3 1   이상 책임의사 이상           4.22년   전후좌우를제한유일한흔적에있어서   익단불서 목대불도   반왜소형의신의안전에서내가낙상한고사가있다     현재까지 완벽한 해석이 되지 않는 한국 난해시의 끝판왕 | 인스티즈     (장부 그것은침수된축사와다를것인가)           5.출판법   I       허위고발이라는죄목이나에게사형을언도했다. 자태를감춘증기속에서몸을가누고나는아스팔트가마를비예하였다.   ─직에관한전고한구절─   기부양양 기자직지   나는안다는것을알아가고있었던까닭에알수없었던나에대한집행이한창일때나는다시금새로운것을알아야만했다.   나는새하얗게드러난골편을주워모으기시작했다.   '거죽과살은나중에라도붙을것이다'   말라떨어진고혈에대해나는단념하지아니하면아니되었다.   II 어느경찰탐정의비밀신문실에서       혐의자로검거된남자가지도의인쇄된분뇨를배설하고다시금그걸삼킨것에대해경찰탐정은아는바가하나도있지않다. 발각될리없는급수성소화작용 사람들은이것이야말로요술이라고말할 것이다.   '너는광부에다름이없다'   참고로부언하면남자의근육의단면은흑요석처럼빛나고있었다고한다.   III 호외       자석수축하기시작하다   원인극히불문명하나대외경제파탄으로인한탈옥사건에관련되는바가크다고보임. 사계의요인들이머리를맞대고비밀리에연구조사중.   개방된시험관의열쇠는내손바닥에전등형의운하를굴착하고있다. 곧이어여과된고혈같은강물이왕양하게흘러들어왔다.   IV       낙엽이창호를삼투하여내정장의자개단추를엄호한다.   암살   지형명세작업이아직도완료되지않은이궁벽한땅에불가사의한우체교통이벌써시행되었다. 나는불안을절망했다.   일력의반역적으로나는방향을잃었다. 내눈동자는냉각된액체를잘게잘라내며낙엽의분망을열심히방조하는수밖에없었다.   (나의원후류에의진화)               6.   균열이생긴장가이녕의땅에한대의곤봉을꽂음.   한대는한대대로커짐.   수목이자라남.   -1 이상 꽂는것과자라나는것과의원만한융합을가르침.   사막에성한한대의산호나무곁에서돼지같은사람이생매장당하는일을당하는일은없고쓸쓸하게생매장하는것에의하여자살한다.   만월은비행기보다신선하게공기속을추진하는것의신선이란산호나무의음울함을더이상으로증대하는것의이전의일이다.   윤부전지 -1 전개된지구의를앞에두고서의설문일제.   곤봉은사람에게지면을떠나는아크로바티를가르치는데사람은해득하는것은불가능인가.   지구를굴착하라.   동시에   생리작용이가져오는상식을포기하라.   열심으로질주하고 또 열심으로질주하고 또 열심으로질주하고 또 열심으로질주하는 사람 은 열심으로질주하는 일들을정지한다.   사막보다도정밀한절망은사람을불러세우는무표정한표정의 무지한한대의산호나무의사람의발경의배방인전방에상대하는자말적인공구때문이지만사람의절망은정밀한것을유지하는성격이다.   지구를 굴착하라   동시에   사람의숙명적발광은곤봉을내어미는것이어라#   *사실차8씨는자발적으로발광하였다. 그리하여어느덧차8씨의온실에는은화식물이꽃을피우고있었다. 눈물에젖은감광지가태양에마주쳐서는히스므레하게빛을내었다.               7.대낮 ─어떤ESQUISSE─   ELEVATER FOR AMERICA   ○       세마리의닭은사문석의계단이다. 룸펜과모포.   ○       삘딩이토해내는신문배달부의무리. 도시계획의암시.   ○       둘째번의정오싸이렌.   ○       비누거품에씻기우는닭. 개아미집에모여서콘크리트를먹고있다.   ○       남자를반나하는석두.   남자는석두를백정을싫어하듯싫어한다.   ○       얼룩고양이와같은꼴을하고서태양군의틈사구니를쏘다니는시인. 꼭끼요─.   순간 자기와 같은태양이다시또한개솟아올랐다. ====================================   시인·소설가. 본명은 김해경(金海卿). 서울 출생. 보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학과를 졸업,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원(技員)이 되었다. 31년 《이상한 가역반응》 《파편의 경치》 등 일본어로 된 시를 발표하면서 문학활동을 시작, 33년 각혈로 기원직을 그만두고 요양을 하면서 이태준(李泰俊)·박태원(朴泰遠)·김기림(金起林)·정지용(鄭芝溶) 등과 사귀었고, 34년 구인회(九人會)에 가입하였다. 그 뒤 다방·카페 등을 열었으나 경영에 실패하고, 36년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사상불온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로 인하여 건강이 더욱 나빠져 도쿄대학[東京大學]부속병원에서 죽었다. 한국 자의식문학의 선구자였던 그는 《거울(1933)》 《오감도(烏瞰圖, 1934)》 등의 시를 통해 매우 특이한 실험을 시도하였다. 특히 《오감도》에는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적인 측면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감각의 착란, 객관적 우연의 모색 등 작품이 갖는 비상식적 세계는 그의 현실에 대한 비극적이고 지적인 반응에 주로 기인한다. 말년에 《날개 (1936)》 《종생기(1937)》 《동해(童骸, 1937)》 등 소설을 발표하였다   답변추천해요0 이 상 李箱 (1910-1937) 시인.소설가. 본명 김해경(金海卿). 서울 출생. 보성고보(普成高普)를 거쳐 경성고공(京城高工) 건축과를 나온 후 총독부의 건축기수가 되었다. 1931년 처녀작으로 시 '이상한 가역반응(可逆反應)' '파편의 경치'를 《조선과 건축》지에 발표하고, 1932년 동지에 시 '건축무한 육면각체(建築無限六面角體)'를 처음으로 ‘이상(李箱)’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 이상이라는 이름을 쓰게 된 것은 공사장 인부들이 그의 이름을 잘 모르고 ‘리상(李씨)’이라고 부르니까 그대로 ‘이상’이라고 했다지만 학교 때의 별명이라는 설도 있다. 1933년 폐결핵에 의한 각혈로 총독부 기수직을 버리고 황해도 배천온천으로 요양을 가게 되며 이때부터 그는 폐병에서 오는 절망을 이기기 위해 본격적으로 문학을 시작했다. 이 곳 휴양지에서 그는 기생 금홍을 알게 되고 금홍과 함께 서울로 돌아와 백부가 물려 준 통인동 집을 처분,'제비'라는 다방을 차렸다. 이 무렵부터 격심한 고독과 절망, 그리고 자의식에 침전돼 수염과 머리를 깎지 않은 채 거리를 활보하기도 하고, 온종일 어둠침침한 방에 박혀 술만 마시기도 하였다.1934년 난해시 '오감도(烏瞰圖)'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했으나 독자들의 빗발치는 항의로 중단했다. 잇단 사업의 실패와 병고로 말미암아 그는 이미 정신적 황폐를 겪고 있었고,몸도 극도로 쇠약해졌다. 그는 아우 운경의 청소부 봉급으로 생활을 지탱해 갔으며 셋방을 전전 방세를 못내 거리로 쫓겨나기도 했다. 1936년 에 단편소설 '날개'를 발표함으로써 시에서 시도했던 자의식을 소설로 승화시켰다. '날개'는 그의 첫사랑 금홍과 2년여에 걸친 무궤도한 생활에서 얻어진 작품으로 그 자신의 자화상이라고도 할수 있는 의 번득임이 나타나 있다. 를 발표할 무렵 같이 폐를 앓고 있던 작가 김유정과 함께 자살을 기도한 적도 있었다. 1936년 여름,친구인 화가의 여동생과 돈암동 홍천사에서 결혼했으나 생활은 비참했고 몸은 극도로 쇠약해져 갔다. 같은 해에 '동해(童骸)', '봉별기(逢別記)' 등을 발표하고 폐결핵과 싸우다가 갱생(更生)할 뜻으로 도쿄행[東京行]을 결행한다. 이듬해 토쿄 거리를 굶주림과 병마에 시달리며 백회하다 사상불온 혐의로 일경에 체포되었하였으나, 병보석으로 풀려 났고 자기 생활의 결산과도 같은 장편 '종생기' 1편을 남기고 1937년 4월 17일 도쿄대학 부속병원에서 병사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전기 외에 소설 '지주회시(會豕)', '환시기(幻視記)', '실화(失花)' 등이 있고, 시에는 '이런 시(詩)'. '거울', '지비(紙碑)', '정식(正式)', '명경(明鏡)', 수필에는 '산촌여정(山村餘情)', '조춘점묘(早春點描)', '권태(倦怠)' 등이 있다. 1957년 80여 편의 전 작품을 수록한 《이상전집(李箱全業)》 3권이 간행되었다. 이상은 그 당시 유럽(특히 프랑스를 중심으로 함)에서 유행했던 초현실주의 기법을 시에 도입하여 쓴 거의 최초의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 기법을 통해 분열된 자의식 세계의 탐구에 주력했고, 숫자와 기하학적 낱말, 관념적 한자로 구성된 특이한 작품을 주로 썼다. 특히 위의 '거울' 뿐만 아니라, '오감도', '꽃나무' 등 주요 시들에서 볼 수 있듯이 행간의 띄어쓰기를 하지 않는 등 독특한 수법을 많이 썼다. 이러한 시의 구성의 파격과 독특함 때문에 그는 26년의 짧은 인생에도 불구하고 '천재'라는 평을 받았으며, 후세의 시 문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바퀴벌레는 진화 중                         김기택 믿을 수 없다, 저것들도 먼지와 수분으로 된 사람 같은 생물이란 것을.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시멘트와 살충제 속에서만 살면서도 저렇게 비대해질 수 있단 말인가. 살덩이를 녹이는 살충제를 어떻게 가는 혈관으로 흘려보내며 딱딱하고 거친 시멘트를 똥으로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입을 벌릴 수밖엔 없다, 쇳덩이의 근육에서나 보이는 저 고감도의 민첩성과 기동력 앞에서는.     사람들이 최초로 시멘트를 만들고 집을 짓고 살기 전, 많은 벌레들을 씨까지 일시에 죽이는 독약을 만들어 뿌리기 전, 저것들은 어디에 살고 있었을까. 흙과 나무, 내와 강, 그 어디에 숨어서 흙이 시멘트가 되고 다시 집이 되기를, 물이 살충제가 되고 다시 먹이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빙하기, 그 세월의 두꺼운 얼음 속 어디에 수만 년 썩지 않을 금속의 씨를 감추고가지고 있었을까.     로보트처럼, 정말로 철판을 온몸에 두른 벌레들이 나올지 몰라. 금속과 금속 사이를 뚫고 들어가 살면서 철판을 왕성하게 소화시키고 수억 톤의 중금속 폐기물을 배설하면서 불쑥불쑥 자라는 잘 진화된 신형 바퀴벌레가 나올지 몰라. 보이지 않는 빙하기, 그 두껍고 차가운 강철의 살결 속에 씨를 감추어둔 채 때가 이르기를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아직은 암회색 스모그가그래도 맑고 희고, 폐수가 너무 깨끗한 까닭에 숨을 쉴 수 없어 움직이지 못하고 눈만 뜬 채 잠들어 있는지 몰라.     -        바퀴는 3억 년 전에 이 지구상에 출현하여 지금은 4만 종이 넘을 정도로 다양하게 진화해 왔다. 그 중에서 해충으로 분류된 것은 20종 정도인데, 그들은 언제부턴가 인간의 거주지로 몰려와 서로 친구가 되기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바퀴에 대한 인간의 적대는 다른 어느 생물종보다혹독하다. 말 그대로 바퀴와의 전쟁(컴배트)이다. '컴배트'가 드디어 바퀴를 몰아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3억 년간 진화해 온 바퀴의 생명력과 적응력은 결코 만만치가 않다. 그들의 몸은 핵폭발에서도 살아남는다고 한다. 강한 약을 쓰면 바퀴는 더 강한 내성으로 대응한다.인간은 도리어 바퀴가 더욱 강하고 단단하게 진화하는데 한 몫을 하고 있다. 과연 최후의 승자는 누구일까? 지금 바퀴는 인간을 노려보며 콘크리트 속에서 강철 같은 무장을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끔찍하다. '아직은 암회색 스모그가 그래도 맑고 희고, 폐수가 너무 깨끗한 까닭에....'     우리를 기다리는 미래가 이렇게 암담하다면 인간은 바퀴에게서 레드 카드를 받고 퇴장 당할지도 모른다.   김기택(金基澤, 1957 ~ ) 생애 1957년 11월 6일 ~ 출생 경기도 안양 분야 문학 작가 시인. 경기 안양 출생.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가뭄’과 ‘꼽추’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일상과 사물을 깊이 있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이를 특유의 묘사와 비유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시집으로 “태아의 잠”(1991), “사무원”(1999), “껌”(2009) 등이 있다. 작품 바퀴벌레는 진화 중 이 시는 환경 오염 문제가 미래에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는 우려를 ‘바퀴벌레’라는 독특한 소재를 통하여 형상화하고 있다. 1연에서는 현대 문명을 상징하는 ‘시멘트와 살충제’ 속에서 인간이 싫어하는 ‘바퀴벌레’가 비대하게 증식하는 현실을 통해 현대 문명으로 인한 환경 오염의 심각성을 드러낸다. 2연에서는 비정상적인 ‘바퀴벌레’가 등장한 이유가 인간이 오랫동안 환경을 파괴해 왔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즉, 현대 문명의 발달로 환경이 오염되고 생태계가 파괴되는 과정을 보여 줌으로써 환경 오염에 적응을 잘하는 바퀴벌레의 놀라운 생명력을 설명해 주고 있다. 3연에서는 현대 문명이 발달할수록 환경이 더 파괴될 것이라는 우려를 ‘신형 바퀴벌레’의 등장에 비유하여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전개 과정을 거쳐 결국 이 시는 현대 문명이 초래한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고발하고 있다. 즉, 현대 문명이 발달할수록 환경은 파괴된다는 점과 ‘바퀴벌레’는 오염된 환경에서 더욱 비대해지고 증식하는 생물이라는 점을 바탕으로, ‘바퀴벌레’는 미래에 ‘신형 바퀴벌레’로 진화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지금과 같이 인간의 편리함을 위해 환경을 생각하지 않는 개발이 계속된다면 인간 문명이 환경과 생태계를 지금보다 더 파괴할 것이라는 섬뜩한 경고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수록교과서 : (문학) 지학 멸치 이 시는 반찬으로 접시에 담긴 멸치의 작은 무늬에서 바다의 흐름과 하나가 되어 헤엄쳤던 멸치의 역동적 생명력을 발견하고 있다. 바다의 물결과 분리되지 않고 한 몸처럼 움직이던 멸치는 인간이 던진 그물에 잡혀 점차 생명력을 잃고 결국 반찬이 되어 접시에 담기게 된다. 그러나 화자는 이미 딱딱해져 접시에 담긴 멸치에 아직 ‘바다’가 있고 ‘물결’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화자는 생명력의 상실이라는 부정적 인식에 머무르지 않고,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으며 저항하는 역동적인 생명력이 아직 멸치에 있음을 인식하며 생명력 회복의 가능성을 노래하고 있다. *수록교과서 : (문학) 두산, 상문 사무원 이 시는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리는 사무원의 모습을 불교 수행자의 고행에 빗대어 표현으로써 주체성을 상실하고 사물화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을 풍자하고 있다. 의자에 앉아 사람 다리와 의자의 다리가 구분되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는 것은 사무원의 삶의 모습이 사물과 다름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암시한다. 자기 삶에 대한 성찰적 태도가 결여된 채 현상 유지에 급급해하며 주어진 일만 수행하는 수동적인 사무원의 모습은 인간 본연의 가치 추구와는 거리가 멀다. 시인은 이러한 사무원의 모습을 풍자하면서 현대인의 삶에 대한 강한 비판과 반성을 시에 담아내고 있다. *수록교과서 : (문학) 천재(정재찬) 다리 저는 사람 이 시는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찬 지하철 역사 안에 장애인 한 사람이 걸어가는 풍경을 묘사한다. 그 풍경 묘사에서 시인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선명하게 대비시킨다. 시인의 묘사에서 한쪽은 움직이고 있고, 한쪽은 정지되어있다. 움직이는 쪽은 오히려 장애인이다. '춤추는 사람처럼', '팔랑팔랑 지나가고 있었다.'는 표현들은 장애인의 움직임이 보여 주는 생명력과 아름다움을 전해 준다. 그 아름다운 생동은 '못 걷는 다리 하나를 위하여/온몸이 다리가 되어 흔들어 주고 있었다.' 라는 표현에서 절정을 이룬다. 시인은 아주 차분하게 사람들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지만, 여기서 우리는 장애인을 새롭게 보게 되고, 우리자신을 반성하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진정으로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된다. 소 이 시는 소의 크고 촉촉한 눈망울을 보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했을 법한 생각을 담고 있다. 소는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친구이자, 가족이었고, 농가에 없어서는 안될 일꾼이었다. 천성이 순한 초식동물이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난동을 부리는 일이 거의 없는 소는, 유순한 성격 때문에 또한 안타가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화자는 가만히 소의 눈을 들여다본다. 크고 맑은 눈망울은 분명 화자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것 같은데 동물인 소는 그럴 수가 없다. 2연에서는 말하고 싶은 마음을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있다'라는 감각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표현하였다. 3연에서 화자는 소의 눈을 '순하고 동그란 감옥'으로 비유하였으며 4연에서는 소의 소화계 특성인 '되새김질'을 소가 말하고 싶은 마음에 빗대어 소의 특성을 효과적으로 표현해 내었다. ==================================================              괄호의 미학   뒤샹의 과 김기택 시집『갈라진다 갈라진다』(문학과지성사, 2012)    지배이데올로기는 대중에게 강조해 보여줄 미디오만을 '괄호'에 넣는다. 어떤 판단이든 '괄호'에 넣어진 것은 '괄호'에 안 넣은 것을 무시한다. 우상의 실체를 보려면 내부로부터 '괄호 벗기기'(unbracketing)를 해야 한다.    알랭 바디우가 『비미학(非美學)』이라는 책을 낸 것은, 미학을 부정하고 제거하자는 말이 아니라, 본래 ‘괄호’ 안에 들어가 있는 미학의 ‘괄호’를 벗기고 재구성 하자는 것이다. 새로 ‘괄호’ 안에 넣고, 또 ‘괄호’를 벗겨 새로운 의미를 산출하자는 것이다.  1.       1917년에 있었던 뉴욕 앵데팡당(inde'pendant)전 출품작으로 R.MUTT란 가명의 인물이 출품한 작품은 남성용 변기였다. 변기회사 이름인 Mott Works라는 단어를 살짝 바꾼 이름의 제출자 R.MUTT라는 자가 내놓은 작품 ‘변기’의 작품제목은 이었다. 당시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이었다.    뒤샹은 그해 앵데팡당전의 운영위원이었다. 뒤샹 이외의 운영위원들과 설치위원들은 이 작품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황당했다. 참가비 6달러만 내면 누구나 작품을 내걸수 있는 특별전시회였지만, 결국 운영위들은 이 작품을 전시장 칸막이 뒤에 놓기로 했다.    뒤샹은 전시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에게 반격했다. 을 왜 전시하지 않았는지 주장하며 뒤샹은 미술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작가의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이 일은 ‘예술작품은 작가가 자신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전복시킨 사건이었다. 뒤샹은  그후 이 외에 자전거 바퀴나 옷걸이 등 원래 있는 사물을 전시했고, 이런 사물들에 대해 그는 '레디 메이드(ready made, 기성품)라는 이름을 붙였다.    뒤샹이 미술전에 변기를 전시한 것은 새로운 예술을 “괄호에 넣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괄호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선언이다. 만약 뛰어난 예술이라면 ‘괄호’ 안에 넣고 벗겨도 다른 해석을 허락할 것이다.     벤야민은 복제시대에는 예술작품의 아우라가 사라진다고 말한다. 실은 그 반대로 복제시대에 그때까지의 예술작품에 아우라가 부여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까지 무관심의 대상이었던 앤디 워홀 같은 이의 복제품이 ‘괄호’에 넣어진 것이다. 2.     ...김기택 시인이 신간『갈라진다 갈라진다』(문학과지성사, 2012)을 내셔서, 선배님의 밥을 얻어 먹었다. 내가 모셔야 하는데 얻어 먹었다. 대신 내가 좋아하는 코코브루니에 가서 차를 대접했다. 내가 방금 ‘대접’이라고 썼는데, 나에게 김기택 시인은 그런 존재다.     다른 장르에 한눈 팔지 않고 시집만 여섯 권 내는 일은 쉽지 않다. 여섯 권이라는 숫자는 그의 집중력과 성실성을 증명하는 숫자다. 노동자 시인 최종천 형님과 더불어 내가 이 시대의 시인으로 존경하는 몇 안 되는 시인이다. 숙명여대에서 내 수업을 들었던 학생 중 시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은 졸업하기 전에 꼭 김기택 시인의 시창작론을 들으라고 권해 왔다. 그날 선배와 대화하다가 얻은 두 가지 말을 기록해두고 일해야겠다.     “김 선생님이 일본에서 있는 동안 시 쓰기 어려웠을 꺼예요. 아무래도 외국에 있으면 좋은 시를 읽고 시에 질투를 느끼는 기회가 적지 않을까요?"    나는 ‘시의 질투를 느낀다’는 문장에서 멈칫 했다. 바꾸어 말하면 김기택 시인은 좋은 시에 질투를 느끼며 더 탁월한 시를 쓰려고 집중해 왔다는 고백일 것이다. 그가 미학적 질투를 느낀 결과, 그가 즐겨 쓰는 수법은 ‘괄호의 미학’이 아닌가 싶다. 나는 김기택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뒤샹의 이 생각나곤 했다. 김 시인의 시 중 비교적 짧은 시를 읽어보자.            트럭 앞에 속도 하나가 구겨져 있다.      부딪쳐 멈춰버린 순간에도 바퀴를 다해 달리며      온몸으로 트럭에 붙은 차체를 밀고 있다.      찌그러진 속도를 주름으로 밀며 달리고 있다.      찢어지고 뭉개진 철판을 밀며      모래알처럼 사방으로 흩어지는 유리창을 밀며      튕겨나가는 타이어를 밀며      앞으로 앞으로만 달리고 있다.      겹겹이 우그러진 철판을 더 우그러뜨리며 달리고 있다.      아직 다 달리지 못한 속도가      쪼그라든 차체를 더 납작하게 압축시키며 달리고 있다.      다 짓이겨졌는데도 여전히 남아 있는 속도가      거의 없어진 차의 형체를 마저 지우며 달리고 있다.      철판 덩어리만 남았는데도      차체가 오그라들며 쥐어짠 검붉은 즙이 뚝뚝      바닥에 떨어져 흥건하게 흐르는데도      속도는 아직 제가 멈췄는지도 모르고 달리고 있다.            ㅡ김기택,「고속도로・4」전문(밑줄은 인용자)    김기택 시인의 특장을 잘 드러내 주는 시다.     시의 첫행은 “트럭 앞에 속도 하나가 구겨져 있다”다. 이 시에 나오는 ‘속도’라는 단어를 ‘사람’ 혹은 ‘운전자’로 대체하면 어떨까. 그렇지만 시인은 끝까지 ‘속도’로 명기한다. 인간은 오직 속도와 다름없다. 시인이 주목하는 ‘괄호’ 안에는 오직 인간을 비인간화 시키는 ‘속도’만이 존재한다.     김기택 시인은 한 장면을 ‘괄호’에 넣는다. 그리고 ‘괄호’ 안에 돋보기를 들이민다. ‘괄호’ 안을 치밀하고 끈질기게 투시하고 묵상하고 미시(微示)적으로 해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괄호’를 벗겨내고, ‘괄호’ 안에 들어가지 못한 ‘무관심’의 입장에서도 ‘괄호’ 안을 판단한다. 그는 늘 ‘괄호’ 안의 비극적인 사건을 무관심의 거리에서 바라보아, 전혀 낯설게 만들어 버린다. 급한 낭만주의자라면 ‘괄호’ 안에서만 평가하려 할 것이다. 저 자동차에 탄 인간의 죽음을 비극적으로 묘사할 것이다. 김기택 시인은 ‘괄호’ 밖에서 ‘괄호’ 안을 무관심하게 전복시킨다. 시인의 ‘괄호’ 안에는 이미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발한다. 인간의 대체물이 된 ‘속도’는 처절하게 붕괴되어도, “아직 제가 멈췄는지도 모르고 달리고 있다.” 3.     “선배님 시 중에 지하철에 관한 시가 있어요. 그쵸?”    “맞아요. 나는 지하철이나 카페에서 시를 쓰곤 해요. 골방에서 쓰면 시가 잘 안 돼요.”    여기서도 멈칫 했다. 작가들 대부분은 골방에서 글을 써야 한다고 한다. 송경동은 거리나 광장에서 시를 쓴다. 나는 거리/연구실, 학교 교실/대중강의, 고급문체/홈리스 문체의 ‘사이’에서 글을 쓰려 했다.     김기택 선배는 지하철이나 카페에서 시를 쓰고, 컴퓨터로 교정 보기보다는 프린트 해서, 원고 교정 보듯이 본다고 한다.    김기택 시인은 철저하게 대상에 거리를 두며 시를 쓰는 성실한 문사다. 그의 창작 미학 중의 한 방법은 괄호에 넣고 빼기다. 위에 인용한 시에서 ‘속도’를 비판했듯이, 그는 느린 삶을 살고 있나보다.     지배이데올로기는 대중에게 강조해 보여줄 미디오만을 ‘괄호’에 넣는다. 어떤 판단이든 ‘괄호’에 넣어진 것은 ‘괄호’에 안 넣은 것을 무시한다. 그렇지만 뒤샹과 김기택 시인은 ‘괄호’ 안을 의심하고, ‘괄호’에 들어가지 않아 주목되지 않는 ‘비인간화’를 오히려 괄호에 넣는다. 그래서 우상의 실체를 보려고 내부로부터 고정관념을 ‘괄호 벗기기’(unbracketing) 한다.    김 선배 시집을 연구실에 들어와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첫페이지에 써있는 을 읽어 본다. 대단한 자신감이다. 부럽다. 저 ‘괄호의 미학’에 질투해야겠다.        "죄송하지만 또 시집을 낸다. 시 쓰는 일 말고는      달리 취미도 재주도 할 일도 없는 내 뛰어난      무능력과 활발한 지루함과 앞뒤 못 가리는       성실함 탓이다."           ㅡ2012년 10월 김기택 시 창작이란 무엇인가 김기택 (시인) 시는 일상적인 언어의 말하기와는 달리 ‘창작’이라고 말한다. 창작이란 이전에는 없던 것을 새로 만든다는 의미이다. 왜 일상적인 언어는 창작이라고 하지 않으면서 시는 창작이라고 하는가. 시를 쓰면 이전에 없던 무엇이 새로 있게 되는 것인가? 즉 무의 상태에서 유의 상태로 바뀌는 그것은 무엇일까? 시가 일상적인 어법, 산문적인 문장과 다르기는 하지만, 다르다고 해서 거기에 창작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인가? 행갈이나 연 구분, 리듬이나 비유, 상징, 반어, 역설 등을 사용하면 이전에 없던 새로운 언어나 문장이 생기는 것인가? 요즘 텔레비전에서 음식에 대한 프로그램을 많이 방영한다. 거기 보면 어느 유명한 식당의 요리라든가 또는 어느 지방의 특별한 재료를 사용했다는 음식들이 소개되기도 하고, 어느 음식이 맛이 있는지 경쟁하기도 한다. 공중파라는 매체의 특성상 시청자는 시각과 청각으로만 그 음식을 대하면서 상상할 수 잇을 뿐, 그것을 먹어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시청자들에게 일일이 맛을 보여주는 것은 불가능하니 음식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고 나서 출연자가 대표로 맛을 본다. 맛을 봤으면 시청자들에게 그 맛이 어떤지 말로 설명을 한다. 그 설명이란 것이 고작 ‘담백하다’, ‘깔끔하다’, ‘쫄깃쫄깃하다’, ‘고소하다’ 이런 정도인데, 아무리 잘 설명한다 해도 출연자가 직접 먹어본 맛의 경험 그대로를 시청자들에게 전달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즉 맛에 대한 감각 체험을 시청자가 비슷하게라도 체험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말이 턱없이 빈약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결국 출연자가 하는 말은 ’직접 먹어봐야 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마 시청자는 출연자의 그 빈약한 말보다는 영상을 통해 상상하는 것이 맛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는데 훨씬 유리할 것이다. 어쨌든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의 맛을 체험적으로 표현해 줄 단어나 문장이 이렇게 부족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수천 년간 말을 써왔고, 단어나 표현법이 계속 생겨서 말이 계속 발전을 해왔는데도 말이다. 맛 뿐만 아니라, 소리는 어떤가? 처음 듣는 새 소리, 처음 들어보는 새로운 노래나 연주, 말로 그 느낌이나 감동을 실제 체험하는 것처럼 설명할 수 있을까? 냄새, 향기는 어떻고, 몰래 좋아하던 애인의 손을 처음 만졌을 때의 촉감은 또 어떤가? 또 감정이나 정서는 어떤가? 내가 이성에게 반해서 온몸이 그 사람에게 강력하게 끌리는 것을 느낄 때, 그 생생한 느낌을 어떻게 상대방에게 체험한 그대로 말로 전달할 수 있을까? ’사랑‘이라는 말이 그 체험의 실감과 질감을 그대로 나타내줄 수 있을까? 가족이나 친한 친구가 죽었는데, 그 느낌을 ’슬픔‘이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실제의 느낌과 얼마나 가까울까? 어렸을 때의 기억, 오랜 시간이 지나도 저절로 떠오르는, 다시 체험하고 싶은 추억들은 또 어떤가? 이것들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보여줄 수는 없지만, 분명히 우리 몸 안에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을 체험하듯 생생하게 표현해 줄 마땅한 단어나 문장은 의외로 찾기 힘들다. 우리 몸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그 실체가 느껴지는 생명체가 분명히 있다. 그것은 하루 종일, 일생 내내 나와 함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생명체를 체험한 그대로 표현해 줄 단어나 문장은 이 세상에 없다. 우리가 그것을 우리의 내면에서 꺼내어 언어에 옮기고자 하는 순간, 그 살아있는 생생한 체험은 개념으로 변하고 만다. 짜다, 달다, 아름답다, 곱다, 사랑, 슬픔, 괴로움 따위의 말이 그것이다. 개념은 의미를 압축시켜 놓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즉 우리가 체험한 것에서 몸의 살아있는 느낌은 모두 빼고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의미만 남겨놓은 것이다. 그것은 몸의 생생한 체험을 머리가 처리할 수 있는 의미로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슬프다고 말하면 우리는 그것을 그 사람이 체험한 그대로 느끼는 대신에 머리로 이해하고 만다. 그때 그 의미는 머리로 처리하는 정보라는 점에서 교통 상황이나 뉴스 같은 정보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현대는 정보의 시대이고 개념화는 짧은 시간에 많은 정보를 처리하여 세상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게 됩니다. 정보는 곧 권력이며, 인간은 이미 오래 전에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동물이 되어 세계를 지배해왔고 지금도 그 지배력은 날로 강화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감이나 감정, 정서 등으로 체험한 살아있는 느낌, 보이지는 않지만, 이름도 없지만, 분명히 실체가 느껴지는 그 생명체(이것을 편의상 ‘이름 없는 생명체’라고 부르자)는 언어에 담는 순간 죽어버리게 된다. 체험이 개념으로 바뀌는 순간 의미라는 뼈다귀는 남고 체온과 떨림과 호흡이 있는 피와 살은 거의 다 제거되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관습은 대부분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 우리는 의사소통을 하거나 정보를 전달할 때 대개 머리로 이해할 수 있도록 개념화한다. 그래서 머리로는 많은 것을 알게 되지만, 살아있는 느낌은 모두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우리가 체험한 것들은 어떻게 되는가? 언어에서 주로 개념만 남고 살아있는 생명체는 거의 제거되고 나면, 그 사라진 것들은 어디로 갈까? 아마도 그 대부분은 언어를 통해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몸에 기억으로 무의식으로 축적될 것이다. 저장되었다가 어느 순간 잠깐씩 단편적으로 환기될 것이다. 그중에서도 슬픔, 분노, 괴로움 등과 같은 부정적인 정서는 숙변처럼 몸에 쌓여 무의식의 정신 작용으로 몸에 잠재하면서 왜곡된 형태로 행동이나 말이나 꿈에 나타나고 종종 나를 괴롭히기도 하고 심한 경우, 눈에 드러나는 정신 장애를 일으키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있으나 보이지 않는 이 생명체를 몸 밖으로 꺼내고 싶다는 욕구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언급한 카타르시스 작용과 같이 그것들을 연민이나 공포를 통해 배설시키기고 싶을 것이다. 몸에서 꺼내는 방법으로 가장 유력한 것은 그것을 말에 실어 내보내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오감이나 감정, 정서와 같이 그 살아있는 체험은 개념화된 언어에 잘 담겨지지 않는다. 언어에 담는 순간, 살과 피와 체온인 체험, 감정, 정서 따위는 새어버리고 뼈다귀인 개념만 언어의 그물에 걸리기 십상일 것이다.  그러면 언어에 담겨지지 않는 이름 없는 생명체를 어떻게 산 채로 언어에 담을 수 있을까? 그것은 가능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언어 대신 사물이나 사건, 장면 등을 사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치환의 「깃발」의 첫 행,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을 보자.  여기서 “이것”은 깃발을 지시하는 대명사다. 즉 “깃발”이 “아우성”이라는 말이다. 왜 깃발이 아우성일까? 깃발은 긴 막대기 위에 매단 사각형의 천 조각인데 왜 이 시각적인 사물이 청각적 이미지인 아우성이 되었을까?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 깃대에 매달린 깃발을 상상해 보자. 깃발은 사각형의 천조각이다. 그 천조각은 얇고 가벼워서 바람이 세차게 불면 쉽게 날아갈 수 있다. 그러나 깃발이 날아가지 못하도록 천조각의 두 모서리는 깃대에 단단하게 메어있다. 바람의 힘에 의해 날아가려는 힘과 말아가지 못하게 꽉 붙들고 있는 힘 사이에서 그 연약한 깃발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나? 물론 펄럭이는 것이지만, 그 펄럭임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해보면 떨기도 하고 바람의 방향에 따라 뒤틀리기도 하고 천조각의 물질성 때문에 물결무늬가 생기기도 하면서 여러 가지 다양한 몸짓이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람의 난폭한 힘과 깃대의 고집불통의 힘 사이에서 허공을 향해 미친 듯이 격렬하게 움직이는 천조각의 모습은 마치 무엇인가를 애타게 호소하기도 하고 견딜 수 없이 괴로워 떨기도 하고 대단히 절박하게 용을 쓰고 있는 “아우성”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 아우성은 소리가 없다. 마치 벙어리의 몸부림처럼 그 아우성은 소리 대신 온몸으로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속에서는 울음 같은 격렬한 외침이 터져 나올 것 같은데 소리는 나오지 않는 이 답답한 상황이 깃발의 격렬한 뒤틀림을 더욱 절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유치환이 일제 강점기의 시인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 깃발의 몸짓이 무엇인가는 비교적 쉽게 환기된다. 현실의 제약을 뚫고 광대한 세계와 우주를 향해 새처럼 훨훨 날아가고 싶은 욕망과 그 욕망을 억누르는 현실의 여러 가지 고집 붙통의 여건들 사이에서 유치환의 내면에 있는 깃발처럼 부드럽고 연약한 ‘이름 없는 생명체’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아마도 미친 듯이 허공을 향해 격렬하게 떨고 뒤틀며 움직이는 깃발의 몸짓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시의 후반부에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이라는 구절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시인은 그런 내면의 모습을 ‘깃발’이라는 사물에 비유하여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깃발이 환기하는 ‘체험’과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이 의미하는 바를 비교해 보라. 시인이 그것을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이라고만 표현한다면 그것은 시인의 몸속에 있는 어떤 살아있는 생명체와는 크게 상관이 없는 개념적인 언어가 된다. 슬픔, 애달픔, 마음 따위와 같은 개념만 남고 시인의 몸속에 있는 생명체는 죽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언어의 ‘개념’ 대신에 깃발이라는 ‘사물’을 제시한 것이다. 깃발의 격렬한 떨림과 뒤틀림, 날아갈듯 날개처럼 넓고 가볍지만 하늘을 앞에 두고 날아가지 못하게 두 모서리가 단단하게 묶여있는 모습, 그 사이에서 허공을 향해 온몸으로 외치는 연약한 천조각의 몸짓, 그러나 아우성을 들리지 않고 벙어리처럼 온몸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모습, 바로 그것이 시인의 몸속에 있는 살아있는 감정이나 정서에 더 가까운 것이다. 이 깃발이 독자에게 주어지는 순간, 독자는 깃발의 움직임 속에서 시인이 갖고 있었음직한 마음을 즉각적으로 환기하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몸속에 있는 이름 없는 생명체를 개념적인 언어에 담아서는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언어의 개념 대신에 사물을 빌린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깃발의 저 움직임과 유사한 마음의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깃발이라는 사물을 통해서 시인의 감정이나 정서를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깃발’은 바로 시인의 감정이나 정서에 해당하는 ‘객관적상관물’이다. 영국의 시인 T. S. 엘리엇은 “예술의 형식으로 정서를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객관적상관물(客觀的相關物)을 찾는 것이다. 즉, 개인의 정서의 외형이 되는 사물이나 장면이나 사건들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독자의 감각경험과 관련 있는 외부 경험이 주어졌을 때, 정서가 즉각적으로 환기되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즉, 감정이나 정서는 형태도 없고 이름도 없고 언어에 잘 담기지 않으니까, 그것과 외부적으로 유사한 상관물(사물, 사건, 장면)을 찾아서 독자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면 독자는 자신의 감각 경험과 유사한 사물을 통해서 감정이나 정서를 일시에 환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상 언어 관습에서 사용하는 ‘개념’을 버리고 그 개념 대신 사물이나 사건, 장면을 사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객관적상관물이란 시인의 감정이나 정서와 등가를 이루는 사물을 제시하고 그 사물을 통해 감정이나 정서가 환기되도록 고안된 일종의 폭발장치 같은 것이다. 사물이나 장면이나 사건에 뇌관을 만들어 놓고 그 뇌관을 건드려 그것들과 등가를 이루는 감정이나 정서를 환기하는 순간 그 폭발물이 폭발하도록 하는 장치인 것이다. 객관적상관물을 통해 표현된 시적 언어는 두 가지 면에서 일상 언어와 분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첫째는 몸속의 감정이나 정서 따위의 이름 없는 생명체를 독자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거나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게 한다는 것이다. 즉 머리로 알게 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다. 객관적상관물은 개념의 뼈다귀만 남은 언어에 살과 피와 체온이 있는 살아있는 몸을 부여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즉 형체 업  소리 없고 만질 수 없는 감정이나 정서를 마치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는 것처럼 변형시키는 것이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아는 것으로 끝나지만, 체험은 몸이 떨리거나 호흡이 가빠지거나 오싹해지거나 후련해지거나 흥분되는 것과 같이 구체적으로 몸이 움직이는 것이다. 둘째로 객관적상관물은 시인 자신의 체험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자신의 경험, 자신의 감정과 정서를 통해 체험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시는 단지 독자가 자신의 경험이나 기억, 감정이나 정서를 환기하도록 사물이나 장면이나 사건만 제시하는 것이고, 독자는 자신이 살아온 삶의 경험 속에서, 자기 몸의 감정이나 정서를 깨워 그것으로 체험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남에게 얻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체험이기 때문에 그 체험은 시인의 것이 아니라 독자의 것이 된다. 자발적으로 자신의 몸을 깨워 만들어낸 체험이기 때문에 그만큼 강렬한 것이 된다. 시인의 창작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이 독자의 몸속에서 독자의 경험과 감정과 정서를 가지고 재연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제2의 창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객관적상관물은 시라는 장르가 난해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보여주기도 한다. 일상 언어의 관습으로는 생명체를 언어에 담아 전달할 수가 없기 때문에 시적 언어는 일상 언어의 관습을 고의적으로 비틀어 사용합니다. 앞에서 인용한 유치환의 시 구절은, 시인의 내면의 이름 없는 생명체를 깃발로, 깃발이라는 시각적인 사물을 청각적인 아우성으로, 그 아우성이은 소리가 없다는 모순 어법으로, 세 번이나 뒤튼 문장을 사용했다. 살아있는 체험을 전달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언어를 이렇게 뒤튼 것이다. 그래서 박이문은 시를 “언어를 통해서 언어에서 해방되려는, 언어를 씀으로써 언어를 쓰지 않는 언어가 되려는 불가능하고 모순된 노력”이라고 했으며, “언어로부터의 해방을 꾀하지 않는 언어”,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가장 원시적인 감각을 언어로써 표현하고자 하지 않는 언어”는 시가 아니라고 단언하였다. 시는, 일상 언어 문법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이름 없는 생명체’를 전달하려는 특별한 언어관습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일상 언어 관습은 말하는 사람이 전달하고자 하는 이름 없는 생명체를 죽이기 때문에, 그것을 산 채로 전달하기 위해 고안된 특별한 언어 관습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가 창작이라고 할 때, 시가 만드는 것은 일상 언어 관습에는 없는 새로운 언어 형식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의 언어 관습에는 없는 새로운 언어관습이기 때문에 많이 경험해온 소재나 이야기라도 세상에 나와서 처음 보고 경험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따라서 시를 창작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 없는 언어 관습, 처음 보는 언어 형식을 만들어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존의 형식을 답습한다면 거기에 ‘창작’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주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시라는 새로운 언어 관습은 앞에서 언급한 난해해질 수밖에 없는 특성 외에 몇 가지 슬픈 운명을 더 타고 났다. 그 하나는 일상 언어와는 달리 오나성된 형태의 문장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참여할 수 있는 여백과 공간을 만들어 불완전하게 끝낸다는 것이다. 즉 완성품이 아니라 반제품으로 독자에게 내놓는 것이다. 왜냐하면, 독자가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시인이 제시한 사물이나 사건, 장면 들을 통해 자신의 감각이나 감정, 정서, 경험 등을 깨워 환기하여, 시가 설치해 놓은 ‘체험’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시는 독자가 참여하여 어떤 환기 작용을 통해서 체험을 하는 순간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훈련된 독자가 아니면, 이 환기 장치는 무용지물이 된다. 일상 언어관습에만 익숙해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 그것은 외국어 같은 모국어이다. 따라서 시는 그것을 좋아하고 어느 정도 시적 언어에 훈련된 사람들끼리 소통하는 폐쇄적인 말하기이다. 시를 읽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시를 읽지 않는다고 해서 생계에 지장을 받거나 생활에 그다지 불편을 얻는 일이 없으므로 안 읽으면 그만이다. 따라서 시라는 말하기의 관습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소수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대다수가 쓰지 않는, 마치 사멸되어 가는 소수 민족의 언어처럼 슬픈 소통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시가 가지고 있는 슬픈 운명은 창작이라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일상 언어처럼 사회적으로 약속된 기호를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쓰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쓰면 그것은 더 이상 창작이 아닌, 모방이나 복제가 된다. 시는 끊임없이 새로운 말을 만들어내어 사용하는 말하기이다. 그리고 한 번 사용된 말은 다시 만들어서 쓸 수 없다. 많은 시가 창작되어 읽히면 더 소통이 풍요로워야 하는데, 시인은 고의적으로 이미 만들어진 말을 피하여 새로운 말을 만들어 써야 한다. 유치환의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은 단 한 번만 창작될 수 있으며, 같은 문장은 물론 비슷한 문장도 피하여 새로운 말을 만들어 써야 한다. 의사소통이 주용 목적인 말의 특성상 이러한 소통 방법은 대단히 비효율적인 것이다. 이미 만들어진 말을 쓴다면 대단히 생산적이고 효율적일 것이다. 시는 아무리 불편하더라도(실제로 시 읽기의 괴로운 경험을 상기해 보라) 끊임없이 이 세상에서 쓰지 않은 새로운 말을 만들어 쓰는 대단히 이상하고 특별한 말하기라고 할 수 있다.  난해성과 소수만이 소통하는 폐쇄성과 기존에 있는 말을 버리고 끊임없이 새로 말을 만들어 쓰는 비효율성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3천년 이상 시를 쓰고 즐겨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詩學’(the Poetics)은 기원전 330년 전에 씌어졌다. 시학에는 이미 호머(Homer, Homeros)의 서사시 '일리아드(Ilias)'와 '오디세이(Odysseia)'가 언급되어 있는데, 이 작품들은 기원전 800년 전에 씌어진 것입니다. 중국의 공자가 엮은 ‘詩經’에는 305편의 작품이 있는데, 가장 늦은 것이 기원전 600년의 작품이고, 가장 이른 것이 기원전 1115년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시가 3000년 이상 생명력을 유지해온 것은 그만큼 사람을 끌어당기는 강력한 매력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특별한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시를 쓰고 읽는 것이 즐겁지 않다면, 그 즐거움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면, 시는 사라져도 벌써 옛날에 사라졌을 것이다.  언어에 담겨지지 않은 이름 없는 생명체를 산 채로 언어의 그물로 잡을 때, 우리는 그 생명체를 밖으로 꺼내낼 뿐만 아니라 말할 수 없이 큰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과 정서는 씻겨나가면서 마음이 편안해지고 무언가가 충족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삽날이 목에 찍히자 뱀은  떨어진 머리통을  금방 버린다 피가 떨어지는 호스가 방향도 없이 내둘러진다 고통을 잠글 수도꼭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뱀은  쏜살같이 어딘가로 떠난다 가야 한다 가야 한다 잊으러 가야 한다 - 이윤학, 「이미지」 전문 농촌에서 삽을 들고 밭일을 하다가 뱀이 나타나면 일어날 법한 장면이다. 이 시는 삽날에 목이 잘린 뱀이 도망하는 사건을 객관적상관물로 제시하였다. 이 시는 독자에게 목이 잘린 뱀이 되어 그 상황을 체험하게 한다. 1연은 그런 상황의 제시이다. 이 시의 백미는 2연이다. “피가 떨어지는 호스가 방향도 없이 내둘러진다”는 것은 뱀이 머리가 없어 세상이 캄캄한데, 몸속의 살아있는 본능은 강렬하게 움직이는 상황의 묘사이다. 세차게 물이 나오는 호스로 물을 뿌리거나 세차를 하다가 놓친 상황을 상상해 보자. 호스에서 분출하는 물의 압력은 큰데, 물이 나아갈 방향을 굳게 잡아줄 손이 없으면 호스는 요동친다. 몸에서 삶의 본능은 세차게 밀고 올라오는데 세상은 캄캄하고 가야할 방향이 없는 뱀의 모습이 ‘목이 잘린 뱀’과 ‘호스’라는 확장은유를 통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묘사는 머리가 없는 몸이 살아서 어딘가로 간다는, 죽음보다도 더 끔찍한 고통을 체험적으로 상상하게 한다. “고통을 잠글 수도꼭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그 고통이 근원적으로 주어진 것이며, 누구도 그것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절망감을 나타내고 있다. 이 시는 삶의 어느 국면에서 몸과 마음으로 처리할 수 있는 용량의 한계를 넘어서는 큰 고통을 경험했을 때의 화자의 심리상태를 암시하고 있다. 이를테면 자신이 마음으로 크게 의지하는 부모나 배우자나 자식의 죽음이나 이별을 경험했다거나 어떻게 수습할 수 없는 큰 사고가 났다거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병의 진단을 받았거나 등등 자신의 의지를 결정적으로 꺾는 좌절을 겪었을 때의 심리상태를 추측해볼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마음이 겪는 고통을 일상 언어로 표현한다면 아무리 잘 표현한다 해도 이름 없는 생명체의 모습과는 크게 다른 것이 될 것이다. 시는 이런 부정적인 경험을 꺼내는 과정의 즐거움을 제공한다. 그 즐거움은 이미지를 통해 부정적인 정서의 찌꺼기들이 씻겨나가는 경험이다.  끝으로 객관적상관물이 보여 주는 다른 효과는 그것이 시작과정에서 분출하는 감정을 효과적으로 억제하는데 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읽어 본 이윤학의 시는 감정을 격정적으로 드러내기가 쉬운 시이다. 그러나 목이 잘린 뱀의 비유는 그런 감정의 분출을 적절하게 차단하고 있다. 시에서 극적인 체험을 하려면 감정이 한껏 분출되어야 하는데 왜 그것을 억제해야 할까? 감정은 시 쓰기에 있어서 에너지와 같은 것이다. 시작 과정에서는 감정이 마음껏 분출되어야 시작 과정의 체험도 강력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에너지는 타서 없어지는 것이다. 즉 감정은 시작 과정에서는 극적인 체험을 하도록 마음껏 분출되지만 정작 시에서는 모두 연소되어 없어지게 되는데, 객관적상관물이 바로 그런 역할을 돕는 것이다. 위의 시에서 화자가 겪었음직한 극도의 절망감은 목 잘린 뱀의 체험으로만 제시되어 있다. 그 외의 어떠한 감정도 개입되어 있지 않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좋은 객관적상관물은 폭탄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독자가 감춰진 감정이나 정서를 사물이나 사건을 통해 환기했을 때 폭발할 수 있도록 하는 뇌관을 장치하는 것이다. 그때 시의 겉모양은 모양은 차갑고 단단하고 표면이 매끄럽고 광채가 나는 유선형의 쇳덩어리뿐이다. 어디에도 물기가 없다. 그러나 그 속에는 강력한 폭발물이 감추어져 있으며, 그것은 오로지 뇌관을 건드린 자만이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시에 감정이 노출된다는 것은 정작 폭발해야 할 폭발물이 겉으로 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경우에 결국 속이 텅 비게 되므로 폭발은 일어나지 않는다. 감정을 효과적으로 억제한 시에서는 독자가 시인의 목소리를 느낄 수 없다. 오직 폭발작용만 일어난다. 그 폭발은 독자의 몸과 마음속에 있는 에너지가 폭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시인은 오로지 뇌관만 제공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정이 겉으로 드러난 시는 시인이 독자의 시 읽기에 계속 참견을 한다. ‘나는 이렇게 슬프니까, 너도 같이 슬퍼해 줘. 내가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왜 너는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거야. 당연히 내가 우는 목소리만큼 너도 고통스러워야지.“ 라고 독자에게 감정을 구걸하거나 강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시인은 독자의 몸속에 있는 감정이나 경험이나 정서를 깨워 그것으로 체험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시인 자신의 감정, 정서, 체험을 독자가 수용하고 거기서 체험을 하도록 강요하게 된다. 이 경우 자발적이고 강력한 폭발작용은 없고, 억지 체험이나 고개를 끄덕거리는 이해 정도에서 그치기 십상이다.    ==================================================================   시 창작에 대하여 1. 시 쓰기에 가장 큰 장애물은 언어이다. 언어는 시의 재료이면서도 시 쓰기를 방해한다. 언어와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의 다양한 정서 사이에는 아득한 거리가 있다.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담기에는 언어는 너무 상투적이고 단단한 외피로 둘러싸여 있다. 더구나 시인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는다. 시의 원료는 기억과 경험과 오감과 여러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뒤섞여 있는 혼돈 상태인데, 이것을 슬픔이나 사랑 따위의 두루뭉실한 언어로 어떻게 표현한단 말인가. ‘슬픔’이라는 단어는 시인의 마음 속에 있는 정서를 얼마나 표현해줄 수 있을까. 그것이 읽는 이에게 전달되었을 때에는,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는 모두 죽고, 공허한 언어의 외피만 남게 된다. 읽는 이의 몸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몸으로 전달되지 않으면 감동은 없다. 시를 읽는 즐거움은 없다. 머리로 감동하는가? 정보만 얻으면 감동하는가? 감동이라는 말은 느낄 감, 움직일 동, 즉 몸에 무엇인가가 들어와서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떨림, 미열, 숨가쁨, 기분 좋음, 기운이 생김, 눈물이 나옴, 소리가 들림, 냄새가 남 등과 같이 구체적으로 몸이 변화하는 것이다. 2002 월드컵 경기를 떠올려 보자. 16강전에서 이탈리아에 내내 끌려 다니며 지고 있다가 동점골, 역전골이 터졌을 때 몸은 이겼다는 정보를 얻는 것으로 그쳤는가? 사전을 통해 입수한 정보와는 무언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골이 터질 때 몸은 구체적으로 반응했다. 떨림, 눈물, 소리가 터져 나옴 같은 구체적인 몸의 변화가 있었다. .그런데, 슬픔, 사랑, 기쁨 따위의 말을 하면 몸이 움직이는가? 그런 말들이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말들을 반에 반만이라도, 옮겨줄 수 있을까? 개인이 갖고 있는 정서는 대단히 개인적인 것이며, 복잡다단하고 미묘하다. 그것을 어떤 단어로 옮긴다는 것은 정서의 팔과 다리, 이목구비 따위를 모두 제거하는 것처럼 폭력적인 일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말들은 개인적인 정서가 갖는 몸통의 일부 조차도 산 채로 전달할 수 없다. 몸과 마음 속에 있는,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정서는 분명히, 눈과 코, 입, 귀, 팔다리가 달린, 살아있는 생명체였다. 언어는 뼈다귀와 같은 개념 덩어리이기 때문에, 산 것을 그대로 담아서 전달할 수가 없다. 일단 개인의 고유하고 다층적이며 미세하고 미묘하고 예민한 뿌리들이 가득 달린 무수히 많은 정서의 세목들을 언어에 담자면 우선 그 정서들을 죽여서 몸통에 달라붙은 이목구비며, 팔다리며, 머리카락 따위 자잘한 것들을 모두 발라내야 한다. 그런 후라야 앙상한 의미나 감정 따위가 겨우 전달될지 모르겠다.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비하면 언어는 개념의 뼈다귀로 이루어진 너무 폭력적인 도구이다. 실제로 언어의 생명은 딱딱한 개념의 외피 속, 보이지 않는 곳에 깊이 감춰져 있다. 2. 왜 시 쓰기를 창작이라고 하는가? 창작이란 창조와 같이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이다. 시는 없는 언어를 만들어 내는가? 시어란 이전에는 세상에 없었는데 시인에 의해 새로 생겨난 언어인가? 시인은 시어를 창조하는가? 시인이 사용하는 언어도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일상어임이 분명하다. 간혹 조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조어가 시의 창조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조어는 시가 아니더라도 여러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생겨난다. 그렇다면 왜 시 쓰기가 창작인가? 시는 우리가 표현하고자 하는 복잡하고 미묘한 개인적인 정서,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정서를 죽이는 언어를 숙명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그 언어들은 정서를 시로 표현하고자 할 때 끊임없이 시 쓰기를 방해하며 시의 도구로서 사용된다. 시를 창작한다는 것은 숙명적으로 시 쓰기를 방해하는 폭력적인 언어,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정서를 죽이고자 하는 언어를 통해서 정서를 죽이지 않고, 가능하면 덜 다치게 하고, 산 채로 전달하는 것이다. 언어 안에 시인의 정서가 산 채로 담겨 있어야 그것은 단순한 정보가 되지 않고 읽는 이의 몸에 들어가 몸을 움직이게 하는 변화로서의 감동을 전달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시가 주는 감동이 스포츠에서 얻는 감동이나 즐거움, 쾌감 따위처럼 직접적이고 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스포츠나 오락 등에서 얻는 감동은 시에 비해서 보다 직접적이고 즉각적이고 표피적이다. 시의 감동은 약해보이고, 때로는 잘 느끼지 못할 수도 있고, 늦게 나타날 수도 있다. 대신 그것은 보다 심층적이고 지속적이다. 3. 어떻게 고유하고 복잡 미묘한 개인의 정서를 죽이지 않고 산 채로 언어에 담는가? 그것은 실체가 분명해 보이지 않는 감정, 정서, 고통, 생각 등 온갖 추상적인 것들을 사물로 표현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즉, 개념덩어리인 언어를 볼 수 있는 것, 들을 수 있는 것, 냄새 맡을 수 있는 것, 맛볼 수 있는 것, 손으로 만져서 촉감을 느낄 수 있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실체가 없는 말에 육체를 입히는 것이다. 육화하는 것이다. 허공과 같은 말, 개념의 뼈다귀만 있는 말에게 살과 피를 입히는 것이다. 정서가 말의 살과 피와 체온에 스며들어 함께 살아있게 하는 것이다. 이미지, 객관적상관물, 직유, 은유, 병치, 아이러니 따위와 같이 시에서 사용하는 여러 기교는 바로 사물을 통해 개인의 복합적인 정서를 드러내는 도구들이다. 예를 들면 을 보자. 엘리어트는 “예술의 형식으로 정서를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객관적상관물(客觀的相關物)을 발견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 특유한 정서의 일정한 외형이 될 일조(一組)의 사물이나 장면이나 일련의 사건들을 찾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은 감가경험으로 낙착되는 외부적 사실들이 주어졌을 때에, 정서가 즉각적으로 환기되도록 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즉, 객관적상관물은 사물을 통해 정서를 환기시키는 장치이다. 사물은 육체를 가지고 있다. 볼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고,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다. 객관적상관물은 이 사물에다가 시인의 정서를 심어놓는 것이다. 이때 객관적상관물로 표현된 사물은 시인의 정서와 등가물(等價物)이 된다. 사람의 몸에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 겪은 여러 경험과 수억 년 몸의 유전자에 새겨진 진화의 기억이 저장되어 있다. 이 기억들은 감정과 정서를 가지고 있다. 객관적상관물은 개인적인 기억과 정서를 사물에 심어 읽는 이로 하여금 사물을 통해 그것들을 환기하도록 한 것이다. 그것은 사물을 통해 감지한 것이므로 환기되는 순간 육체성을 갖게 된다. 즉 개인의 고유한 몸의 기억은 환기 작용을 통해 보편적인 정서, 살아있는 정서로 재생되는 것이다. 이미지(심상)도 언어를 육화시키는 데 매우 유용한 도구이다. 이미지스트들은 이미지를 라고 하였다. 이미지로 표현된 것은 사물의 육체를 갖고 있지만, 그 육체에는 시인이 투사시킨 지식과 정서가 복합적으로 들어있다. 개념적, 추상적인 말로는 획득하기 어려운 육체성을 통해 시인의 정서는 읽는 이에게 선명하게 제시된다.  4. 시는 사물과의 대화라고 할 수도 있겠다. 사물은 생김새, 물성, 운동, 크기, 무게, 냄새 등과 그것이 있는 위치와 장소, 그것들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여러 가지 특성과 인상을 가지고 있다. 개개 사물이 가지고 있는 육체성은 우리 몸이 갖고 있는 정서와 감정과 서로 통하는 바가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람들은 사물에 인격을 부여하거나 사물을 의인화시켜 그것들로 하여금 사람의 말을 대신하게 하거나 그것들과 이야기하기를 즐겨 하였으며, 많은 문학 작품이 직접적으로 이런 내용을 다루거나 이런 방법을 사용해 왔다. 5. 시인들은 이와 같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정서, 감정, 의미 등을 전달하기 위해 여러 가지 기교를 사용해 왔다. 그러나 이런 노력들은 시인의 본능이 찾아낸 방법이지 시를 창작하는데 고정된 어떤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고정된 방법은 오히려 시 정신을 죽인다. 좋은 시는 과거의 시인들이 기울인 노력에 더하여 살아있는 언어를 만들어 내려는 노력에 의하여 얻어질 것이다. 좋은 시는 과거에 사용했던 방법이 아니라 새로운 방법을 찾으려는 노력에 의해서 계속 바뀌게 될 것이다. 스포츠나 만화, 영화, 모험 등 모든 육체적인 감동과 변화를 주는 것은 시 창작 방법에 응용될 수 있다. 문제는 살아있는 생생한 언어, 시인의 의식과 정서를 극적,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방법이지, 정해진 시작 방법에 교과서적으로 대입하는 것은 아니다. 만 명의 시인이 있다면, 만 가지의 시작 방법이 있는 것이다. 각자의 얼굴 생김새, 마음 생김새가 다르듯이 시작 방법도 다를 수밖에 없다.   =====================================================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김기택             크고 작은, 굵고 가는, 뒤얽히고 헝클어진, 단순하거나 배배꼬인, 쩍 벌어져 다물 수 없는, 가당찮은, 기가 막힌, 눈물에 녹아 나오는, 한숨 에서 진액이 추출되는, 웃음이 뱃살을 잡아당기는, 이 세상에서 일어난 일 같지 않은, 한쪽에서는 계속 사라지고 한쪽에서는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는   이야기들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표정을 하고 흔해빠진 옷을 걸치고 전동차에 앉아 있다. 하품을 하고 코 후비고 눈을 끔벅거리고 있다. 두리번거리거나 하릴 없이 전동차 광고판이나 쳐다보고 있다. 너무 많은 자잘한 삶 속에 아무 것도 아닌 척 들어가 있다. 오랫동안   컴컴한 곳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거의 죽었다가 살아난, 창자를 다 훑어낼 듯 독하지만 아직은 몇 개의 귀에만 겨우 들어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구덩이에 수백 번 소리쳐도 더 나올 말들이 남아 있는, 기억은 지금 막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크고 생생해도 말은 늘 어눌하고 답답한, 말이 나올 때마다 살점이 우두둑 뽑혀 나오는, 위장병이 되고 탈모가 되고 틀니가 되고 우울증이 되고 치매가 되는   이야기들이       아무도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그 말이 그 말 같은, 여러 번 들어 짜증나고 귀찮은, 한 말 또 하고 또 하는, 잔뜩 튀겨지고 부풀려진, 술 취해 말의 앞뒤나 문장의 구조가 꼬부라지거나 뒤죽박죽된, 시비 붙어 욱 하고 나오는, 욕지 거리에 뚝뚝 끊어지며 나오는, 중얼거림 속에 숨어 있다가 가끔씩 소심하게 나오는   이야기들이       줄 달린 전화로 걸지 말고 핸드폰으로 걸란 말이야, 핸드폰. 똥 싸면서도 걸 수 있잖아 핸드폰은. 보험 든 게 벌써 세 개나 있대? 그게 무슨 상관이야. 안 되는 것도 되게 하는 거야 영업이라는 거는. 어머머 얘 좀 봐! 호기심 좀 있으면 안 되냐고? 뭐? 알고 싶은 거 좀 있으면 안 되냐고? 야! 그 까짓것 알고 싶다고 꼭 남자랑 자고 들어와야 되겠어? 그게 어떤 건지 알 권리가 뭐가 그렇게 중요한데? 이거 왜 이래. 나 운전면허 한 번에 딴 여자야. 시끌벅적 야단법석 노발대발 횡설수설 웅성웅성 쑥덕쑥덕 수근수근 속닥속닥   이야기들이       입을 꾹 다문 채 전동차 안에 서거나 앉아 있다. 백발에 UCLA 모자를 쓰고 앉아 있다. 고개를 힘차게 흔들며 졸고 있다. 심각하게 문자를 치고 있다. 지루한 얼굴로 신문을 보고 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머리를 흔들고 있다. 핸드폰과 다정하게 조잘대고 있다. 아직도 서로의 허리를 꽉 껴안고 있다. 동전이 든 파란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고 찬송가를 부르며 지나가고 있다. 전동차가 서고 한 무리의 이야기들이 나가고 한 무리의   이야기들이     들어온다. 길고 복잡하고 구불구불하고 누덕누덕 기워진 이야기들이 들어 온다. 터져 나오지 못하고 내장을 들들 볶아대기만 하는   이야기들이                                     김기택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 , , , ,껌>,
379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신동집 - 오렌지 댓글:  조회:4554  추천:0  2015-12-27
  오렌지                    /신동집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오렌지는 여기 있는 이대로의 오렌지다. 더도 덜도 아닌 오렌지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찹잘한 속살을 깔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대는 순간 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다. 오렌지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다. 시간이 똘똘 배암의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에 한없이 어진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누구인지 잘은 아직 몰라도.     * ​포들한 : 부드럽고 도톰한 찹잘한 : 차갑고 달착지근한​​    1989년 시집 [누가 묻거든]에 수록된 시이다. 전 6연으로 된 주지시이다. 제 1연에서는 오렌지라는 의미 이전의 사물 그 자체로서의 오렌지가 묘사된다. 제 2∼3연은 '나'가 인식하는 단순한 외형적 사물로서의 오렌지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렌지의 껍질을 벗길 수도 속살을 깔 수도 있다. 제 4∼5연은 존재의 본질로서의 오렌지이다. '나'가 그를 파악했다고 느끼는 순간, 오렌지는 '손을 댈 수 없는' 주체적 존재로 마주한다. 그러므로 '나'와 오렌지는 서로를 경계해야 하는 상대적 존재로 대립해 있는 위험한 상태에 있다. 제 6연은 오렌지와 '나'의 긴장이 계속된 채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어진 그림자'의 존재를 막연히 감지함으로써 긴장 해소의 예감을 느낀다. 이 시는 존재의 본질 자체에 대한 물음을 오렌지라는 소재를 통해 던지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는 우리가 어떤 사물을, 혹은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는가 하는 회의에서 시작되고 있으며, 그 회의을 깨끗이 없애지 못했지만 '한없이 어진 그림자' 같은 구원이 있을 수도 있다라는 가능성을 보여 주는 데서 끝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물에 관심을 둘 때는 그것의 껍질을 벗기고 속살을 벗길 수 있는 때, 즉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때인데, 그러나 거기서 나아가 사물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하려 할 때는 존재의 규명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말을 전하고 있다. 존재의 본질을 파악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하는 회의로 시작된 이 작품은 한 가닥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사물의 생명 본질에 닿을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느끼게 하는 시이다. (현대시 목록, 인터넷)   * 이 시는 '오렌지'라는 소재를 통해 존재의 본질에 근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 준다. 오렌지의 외면만 보고는 그 본질적 의미를 알 수 없고, 껍질을 벗긴다 해도 본질에 도달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 이미 오렌지의 본질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한계를 느낀 화자는 안타까워하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다. 존재의 본질에 다다갈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한권에 잡히는 현대시)   * 대구 시인 신동집 " 그는 대구의 성주(城主)였다. 이 땅 내륙의 중심부, 덥고 추운 땅 대구를 지키며 살아온 시인이다. 해방 전 대구에 이상화, 이육사가 있었다면, 해방 후에는 김춘수와 신동집이 있었다. 그러나 세인들은 신동집을 ‘기억되지 않는 천재 시인’으로 곧잘 얘기한다. 그가 태어나 평생을 산 곳은 바닷물이 출렁거리거나, 문명이 채색된 출세의 땅이 아니었다. 분지 대구에서 둔중하게 살며, 깊은 생각들을 시로 갈고 깎아냈다. 그는 키는 크지 않았지만, 육중한 몸을 가졌다. 얼굴에 살도 많았다. 빨리 걷지도 않고, 늘 사색하며 무겁게 움직였다. 그에겐 드러내고 싶지 않은 외면적 상처가 있었다. 1950년대 후반 어느 추운 겨울밤이었다. 문우들과 향촌동에서 술을 마시고 남산동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익숙한 길이었지만 비탈길에서 넘어졌다. 그런데 한쪽 눈을 실명하고 말았다. 음악을 좋아하던 그가 이 날도 레코더판을 구입해 들고 가던 길이었다. 넘어지면서도 레코드판을 보호하기 위해 팔을 짚지 않는 바람에 어처구니없게도 그만 깨어진 레코드판이 눈을 찌르고 만 것이다. 그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근원적인 의미탐구를 집요하게 추구한 시인이었다. 6·25 전쟁의 극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자의 존재론적 갈등을 형상화한 초기 작품 ‘목숨’(1954)을 비롯해 ‘송신’(1973), ‘오렌지’(1989) 등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주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계열의 시를 주로 발표했다. 중기 이후에는 삶에 대한 뜨거운 서정과 철학적 사유가 바탕을 이루는 시와 서구적인 감각과 동양적 예지와의 조화를 추구하는 시 세계를 추구했다. 1983년 고혈압으로 쓰러진 뒤에도 왕성한 창작활동을 했다. 그의 시처럼 ‘바이없는 종국의/잠이 내릴 때까지’ 시에 매달렸다. 진지한 자기 성찰과 존재 탐구에 매달리며 고뇌한 것이 그의 초상이다. 그러나 이 한 장의 사진(아래)은 그의 인간적인 면모가 잘 드러난다. 1968년 6월 찍은 사진이다. 그러나 누가 찍은 지에 대한 정보는 없다. 검은 뿔테 안경에 골초였던 그가 담배를 물고 ‘씩~’ 웃고 있다.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그가 워낙 과묵해 잘 웃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한번 웃을 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이 초상은 시인의 존재감이 잘 드러난다. 어두운 밤, 별을 쫓아 살아온 외골수의 눈동자 속에 웃음이 퍼진다. ‘풍화(風化)하지 않는/어느 얼굴의 가능을 믿으며/참으로 많은 표정들 가운데서/나도 임의의 표정을 짓는다.’(시 ‘표정’ 중에서) 임의의 표정일까, 아니면 그가 그토록 가꾸고자 했던 슬픔 속의 꽃을 본 것일까. " (김중기/기자, 매일신문 '초상')                                         * 1924년 대구 출생. 본명은 동집(東集). 호는 현당(玄堂).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인디애나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수학하고, 경북대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 1954년 시집 [서정의 유형]으로 아시아 자유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 1955년 영남대 강사를 시작으로 영남대 교수, 계명대 교수, 계명대 외국학대학장, 한국현대시인협회 명예회장 등을 지냈다. * 2002년 한국현대시인협회 명예회장 및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했다. * 시집으로 처녀시집인 [대낮](1948)을 시작으로, [서정의 유형(流刑)](1954), [모순의 물](1963), [빈 콜라병](1968), [귀환](1971), [송신](1973), [해뜨는 법](1977), [암호](1983), [여로](1986), [누가 묻거든](1989), [오렌지](1989) 등 다수의 시집을 남겼다. [신동집 시선집](1974), [신동집 시연구](1987), [신동집과 영미시](1989), [휘트먼 역시집](1981) 등의 저서가 있다. 아시아자유문학상(1955), 현대시문학상(1975), 대한민국 문화예술상(1981), 옥관문화훈장(1987), 대한민국예술원상(1982) 등을 수상했다.   ◈ 빈 콜라병/신동집   빈 콜라 병에는 가득히 빈 콜라가 들어 있다. 넘어진 빈 콜라 병에는  가득히 빈 콜라가 들어 있다.   빈 콜라 병에는 한 자락 밝은 흰 구름이 비치고  이 병을 마신 사람의  흔적은 아무 데도 보이지 않는다.   넘어진 빈 콜라 병은  빈 자기를 생각고 있다. 그 옆에 피어난 들국 한 송이 피어난 자기를 생각고 있듯이.   불고 가는 가을 바람이  넘어진 빈 콜라 병을 달래는가. 스스로 풀어내는 음악(音樂)이 빈 콜라 병을 다스리고 있다. ​   ​ 1968년 「동아시단(東亞詩壇)」에 발표한 시(詩). 시집 《빈 콜라병》(68)에 수록되었다. 빈 콜라병은 마치 한송이 들국화가 옆에 피어 있듯이 스스로 존재한다. 자연물이나 인공물의 구별을 초월해 스스로 존재하고 있음을 보인 작품(作品)이다. 산이나 들에 가면 흔히들 풀섶 같은 데서 빈 사이다 병이나 콜라병이 버려져 있는 것을 본다. 그러한 데서 이런 물건을 대하면 종종 일종의 야릇한 감동을 받을 수 있다. 넘어져 뒹구는 그 병이, 쓸모 없는 그 빈 병이 너무나 당당하게도 자기를 주장하고 있는 것을 본다. 사이다나 콜라를 넣기 위한 방편 도구로서 병이 존재한다면, 내용물을 다 마신뒤에는 병도 소용없는 물건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오히려 속이 텅 비었을 때, 버려져 뒹군 이 빈병은 더욱 자율적으로 자기를 주장하고 있다. 「빈 콜라 병에는 가득히/빈 콜라가 들어 있다/넘어진 빈 콜라 병에는 가득히/빈 콜라가 들어있다(제1련)」 빈 콜라 병에는 콜라가 없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빈 콜라」가 가득히 들어 있을 것이다. 「없는 것」도 분명히 하나의 「있는 것」이 된다. (국어국문학자료사전) ​   ◈ 송신(送信)/신동집   바람은 한로(寒露)의 음절을 밟고 지나간다. 귀뚜리는 나를 보아도 이젠 두려워하지 않는다. 차운 돌에 수염을 착 붙이고 멀리 무슨 신호를 보내고 있나.   어디선가 받아 읽는 가을의 사람은 일손을 놓고 한동안을 멍하니 잠기고 있다. 귀뚜리의 송신(送信)도 이내 끝나면 ​하늘은 바이 없는 청자(靑瓷)의 심연이다.​   ​ 1973년 시집 [송신]에 수록된 시이다. 가을날 돌담 아래서 우는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를 통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비애와 숙명을 담담하게 노래한 작품이다. 이 시는 발신자와 수신자라는 전달의 양자관계를 바탕에 두고 이루어진 시이다. 제1연에서 발신자(송신자)는 바로 가을이 깊었음을 알려주는 귀뚜라미이다. 한로(깊은 가을)임을 알려주는 바람, 계절을 알려주는 귀뚜리, 그 귀뚜리는 사람의 인기척만 들어도 소리를 그치게 마련인데, 그런 귀뚜리가 더 이상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더 이상 나를 두려워하지 않고 무슨 신호인가를 보내고 있다고 했다. 왜 그럴까? 그 해답은 한로에 의해서 드러나는 시간적 의미에서 찾을 수 있다. 깊은 가을은 마지막, 죽음, 조락의 이미지를 갖는다. 이 시는 생명의 시효가 끝나는, 죽음이 임박해 있는 시간이다. 그러니 귀뚜리는 인간이란 존재가 두렵지 않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무슨 신호란, 죽음이나 종말을 알리는 신호라고 할 수 있다. 제2연에서 이런 귀뚜리의 신호를 받고 있는 사람 역시 가을의 사람이다. 특히, 인생의 황혼 단계에 있는 노인일 것이다. 이런 노경에 이른 그는 귀뚜리의 죽음의 신호를 들으면서 일손을 놓고 망연해 한다. 귀뚜리의 송신을 매개로 멀잖은 삶의 종말을 예감했기 때문에 일손을 놓고 깊은 생각에 잠기는 것이다. 이윽고 귀뚜리의 울음이 끝나고 나면 세상에는 적막만이 남는다는 것을 '하늘은 바이 없는 / 청자의 심연이다.'라는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다. 귀뚜라미의 애절한 울음소리, 또는 그가 겪어야만 하는 죽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늘은 그 청자의 오묘한 색감같이 더욱 푸르러질 뿐이라는 자연의 영원함과 신비로움을 강조함으로써 유한자적 존재의 무상감이 상대적으로 부각되어 나타나고 있다. (현대시 목록) ==========================================================================================   신동집의 시는 전체적으로 보면 초기에는 휴머니즘의 강렬한 옹호와 서구적인 주지시의 경향을 보였으나, 중기에 접어들면서 인생론적 존재의 탐구에 천착하면서 노장을 비롯한 동양사상에 회귀적 궤적을 확충해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주로 인간·존재·자연·자유였다. 또한 그는 일상생활에서 얻은 시어를 새롭게 조탁해가면서 유연하고 인상적인 특유의 가락으로 시적 리듬을 살리는 데도 소홀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초기에는 휴머니즘적 입장을 바탕으로 한 인간 존재의 근원 탐구에 주력하였으나,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내면 의식의 추구와 함께 사물과 언어의 즉물적 발현이라는 과제를 실행하려 노력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참고 : , 권영민 편, 누리미디어, 2002 , 가람기획편집부 편, 가람기획, 2000         생애     경북 대구에서 출생한 신동집은 1951년 서울대학 정치과를 졸업하고 1959년 미국 인디애나대학에서 1년간 수학했다. 1948년 서울대학 재학 당시 습작집 을 간행한 이래 1952년 시집 으로 문단의 각광을 받았다. 영남대학 영문과에 교편을 잡으면서 시집 , , , 등을 내놓았으며, 1969년 계명대학 영문과로 직을 옮긴 이후 시집 , , 등을 간행하였다. 초기에 보인 형이상학적 시에서 흄 · 파운드를 거쳐 엘리어트에 이른 모더니즘적 경향이, 서정의 존재론적 관점에서 사물의 내용적 의미의 탐구에로 경주, 후기에는 동양적 관조의 철학시를 시도하였다.      약력   1924년 경북 대구 출생 1938년 일본 산구현 방부시 다다량 중학에 입학 1945년 광복 후 경성대학교 예문과 갑류에 편입, 양주동과 방종현에게 배우며 향가문학을 처음 접함 1950년 6·25 당시 통역장교로 입대, 진해의 육군사관학교 · 정훈감실 · 고급부관학교에서 복무 1951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정치과 졸업 1955년 영남대학교 교수 역임 1960년 미국 인디애나대학교 대학원 수학 1961년 효성여자대학교 강사 1970년 계명대학교 교수 1980년 경주 동국대학분교 강사 / 현대시인협회 명예회장 1983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피선 1985년 경북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수여      상훈   1955년 아세아자유문학상 - / 국방장관표창장 1961년 경북문화상 1980년 한국현대시인상 1981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1987년 대한민국옥관문화훈장 1989년 세계시인상 1992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94년 순수문학상         저서       • 시집 (1948) (1954) (1958) (1963) (1965)  (1968) (1970) (1971) (1973) (1974)  (1975) (1975) (1976) (1977)  (1979) (1979) (1981) (1983) (1986)  (1987) (1988) (1989) (1990)   [귀환(문원사,1971)]   [암호(학문사,1983)]         작품세계        작가의 말   내가 걸어온 시의 도정을 살펴볼 때 나의 시가 현재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 또한 어느 지점으로 이동해 갈는지 아무래도 잘은 알 수 없다는 것이 옳은 말일 것이다. 아마도 내가 시필을 끊는 날이 오면 그때는 대충 그 전말을 알게 될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런 날이 언제 올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는 일이며 당장 내일에라도 올는지, 또는 조금은 뒷날에 올는지 아무도 알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시작이란 끊임없이 무(無)에 직면하는 일이며 한 언어운술가(言語芸術家)의 눈 앞에는 언제나 희멀건 무의 들판이 가로놓여 있는 일뿐이다. 안이한 예측이나 짐작은 아예 거부하면서 한 발자국 말을 찾아 놓아가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는 일이다. (……) 그동안의 작품들을 훑어보니 여러 가지 부끄러운 시행착오의 흔적도 보인다. 실은 한 편의 쓸만한 작품이 나오기엔 적어도 열 편, 스무 편의 시행착오가 따르기 마련인가보다. 시란 수많은 시행착오 사이로 은총과도 같이 내다보이는 한 조각 하늘의 푸름이나 아닐까. (……) - ‘후기’, 신동집, , 학문사, 1974     시작(詩作)은 응집된 밤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그리하여 눈이 캄캄해지는 일이다. 혹은 시작은 응집된 대낮 속으로 뛰어드는 일이다. 그리하여 눈이 캄캄해지는 일이다. 혹은 시작은 응집된 낮과 밤을 풀어 섞는 일이다. 낮과 밤을 풀어 섞으면 백야가 된다. 시는 백야의 체험이다. 그리하여 시작은 백야 속에 홀로 남는 일이다. 배경도 전경도 구별 없는 백야 속에 무(無)의 광원(光源)으로 눈떠 있는 일이다. (……) 침묵에서 우러난 언어는 항상 침묵의 상태를 동경한다. 시는 침묵에서 날아오른 언어의 비상이며 그 비상의 궤도이다. 시는 침묵의 상형문자이다. 언어의 파장이 그린 언어의 궤도이다. 침묵을 상실한 언어는 수직으로 일어설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한다. 시에서는 언어가 언어로 직접 연결되어서는 안된다. 침묵이 언어와 언어를 연결해주어야 한다. 훌륭한 시는 언제나 침묵의 빛깔로 빛이 나고 있다. (……) 시에서 무슨 해답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가령 해답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죽어버린 해답이다. 시는 미지속에 막막히 서는 일이며 간단없이 물음을 던지는 일이다. 이 물음은 답변을 요하지 않는다. 이 물음이 바로 해박(解博)이 되는 일도 있다. 부단히 물음을 던지는 자문 속에 시는 절로 얼굴을 나타내는지도 모른다. 마치 어느 날 아침 갑자기 꽃봉이 열리듯이. 시는 변모다. (……) 작품은 오직 한 번의 행위이다. 그러나 시인의 자기증명은 결코 한 번만이어서는 안된다. 필생을 통해서 그는 자기 증명을 되풀이 계속해야 한다. 골백 번이라도. 시인이 작품 이외 무엇으로 자기 증명을 할 수 있겠는가. 시인이란 집요하게도 끝까지 노래하는 시인을 말한다. 왜냐하면 그에겐 노래가 존재이니까. 만약 그가 진정한 시인이라면, 비록 그의 시가 점점 너절해지고 마침내 자기의 무참을 드러내는 한이 있더라도, 그는 여전히 노래할 것이다. 심지어 자기의 비참을 노래로 퉁겨낼 용기를 가져야 한다. 다만 특수한 예외로 랭보와 같은 이상변이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을 본받아서는 안된다. 그는 이미 살았어도 죽어 있었으니까. 시인의 정신은 부토(腐土)다. 시의 궁극적인 패턴은 재생이며 회귀다. (……) - ‘나의 시론, 나의 팡세’, 신동집, , 혜화당, 1993      평론   (……) 신동집 시인에 있어서 시의 본령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시인의 본분은 무엇이며 시인이 갖추어야 할 요건들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되새겨보고 가다듬어 보는 일에 직결된다.  ‘시인의 요건’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그의 시론이 대변해 주듯이 신동집에 있어 시인이란, 즉 시인이 갖추어야 할 요건이란 시작의 기법 문제라든가 시 작품의 내부구조 문제 등 시학적인 문제에 선행하는 것이다. 그의 관점에서 시인이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요건이란 다음과 같다. 첫째, 시인은 언어-문체를 포함한 넓은 의미의 언어-에 대한 사랑을 지녀야 한다. 그 언어란 모국어를 말하는 것이며 한국시인에게는 한국말을 의미한다. 따라서 한국말에 대한 남다른 자각을 가지고 모국어를 영생시키는 일과 그 모국어로 지상의 존재를 노래로 지켜주고 찬양해주는 일이 시인의 사명 중 으뜸가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시인은 모국어를 캐는 구현자에 다름아닌 것이다. 둘째, 시인이 갖추어야 할 요건은 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의 견자란 ‘사물의 본질과 핵심을 강력한 비전으로서, 강력한 상상력과 직관으로써 투시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견자란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줄 아는 사람이다. 시인의 눈은 곧 우리의 일상생활의 주변에 깔려 있는 수많은 소재를 자기 정신의 자장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견자의 눈, 즉 강력히 펼쳐진 레이더와 같은 정신을 말한다. 즉 시인은 언제나 눈떠 있는 레이더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생에 대한 예지, 즉 생에 대한 총체적 진리로 모아져야 할 것이다.         연계정보        관련도서   , 신동집, 영학출판사, 1984 , 신동집, 혜화당, 1993 , 이영걸, 문학과비평사, 1989 , 김용직 외, 민음사, 1989 , 신동집, 학문사, 1974 詩人 신동집(申瞳集) ▣   본명 : 신동집(申東集) 호 : 현당(玄堂) 1924년 대구 출생 1948년 대학 재학 중 습작 시집 의 간행으로 작품활동을 시작, 첫 시집 대낮으로 등단 1951년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 1955∼1969 영남대 교수 1959년 미국 인디애나 대학원 수학 1954년 시집 『서정의 유형』발표, 아시아 자유문학상 수상 1960년 아시아 자유문학상 1970∼1986 계명대 교수 1980년 한국현대시인상 수상 1981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수상 1982∼1985 계명대 외국어대학장 신동집시인은 주로 인간, 자연, 존재 등을 추구하였으며, 특히 형이상학적 시에서 모더니즘적 경향을 보였다. 그 뒤 서저의 존재론적 관점에서 사물의 내용적 의미의 탐구에도 노력하였으며, 동양적 관조의 철학도 시도했다. 또한 시인은 구문법이나 호흡을 파괴하고, 그 특이한 구술체(口述體 ; 시의 종결형의 처리가 거의 현재 진행형을 쓰고 있는 점이나 구문상의 도치가 선용되고 있는 것 등)에 의거 고도 지식인 사회로 진입해 들어간 시인이다. 그의 시는 존재(存在)와 무(無) 등 인간의 근원적 자각에 집요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 깊이와 풋풋한 감동을 잃지 않는다. 평이하면서도 철학적 바탕이 다원적(多元的) 은유를 살리고 있다. 그는 이라는 글에서 '시는 즐거움으로 시작하여 예지로 끝난다'는 프로스트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 말은 그의 시세계에 매우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즉 즐거움과 예지는 그의 미학이 떠받치고 있는 두 날개이다. ■시집 ■ 대낮(1948), 서정(抒情)의 유형(流刑)(1954), 제이(第二)의 서시(序詩)(1958), 모순(矛盾)의 물(1963), 들끓는 모음(母音)(1965), 빈 콜라병(1968), 새벽녘의 사람들(1970), 귀환(1971), 송신(送信)(1973), 신동집 시선(1974), 미완(未完)의 밤(1976), 장기판(1979), 진혼(鎭魂)·반격(反擊)(1981), 암호』(1983), 신동집 시전집(1985), 송별(1986), 여로(旅路)(1987), 누가 묻거든(1989) 등 번역시집 : 휘트먼 譯시집(1981) 저서 : 신동집 詩연구(1987) 신동집 시가 있는 명상노우트(1987) 신동집과 영미시(1989) ■시 감상하기 ■ ※ 목차 ※ 1. 목숨 2. 송신(送信) 3. 오렌지 4. 어떤 사람 5. 표정 6. 한로(寒露) 7. 변신(變身) 8. 빈 콜라병 9. 좋았던 날 10. 한알의 씨앗 11. 노을 12. 소년 13. 동행 14. 추일별곡 15. 조국으로 가는 길 16. 진혼 17. 평범한 가을밤 18. 봄비 19. 누가 누구를 닮았다는 건 20. 크리스마스가 지난 뒤 어느 대학촌에서 21. 눈 22. 행인 -1- 23. 항아리 24. 한 사람의 슬픔 25. 하일명상(夏日瞑想) 26. 편지 27. 추일유정(秋日有情) 28. 잠들기 전 29. 이사 30. 오, 하나씩의 이름들 31. 여로 -1- 32. 싸리나무 33. 비가(悲歌) 34. 바다 35. 모과나무 36. 끝나는 계절 37. 금조비가(金鳥悲歌) 38. 가을 햇살 39. 마음 이 한 때 40. 나의 손 ☞ 목숨 ☜ 목숨은 때묻었다. 절반은 흙이 된 빛깔 황폐한 얼굴엔 표정(表情)이 없다. 나는 무한히 살고 싶더라. 너랑 살아 보고 싶더라. 살아서 죽음보다 그리운 것이 되고 싶더라. 억만 광년(億萬光年)의 현암(玄暗)을 거쳐 나의 목숨 안에 와 닿는 한 개의 별빛. 우리는 아직도 포연(砲煙)의 추억 속에서 없어진 이름들을 부르고 있다. 따뜻이 체온(體溫)에 젖어든 이름들. 살은 자(者)는 죽은 자를 증언(證言)하라 죽은 자는 살은 자를 고발(告發)하라 목숨의 조건(條件)은 고독(孤獨)하다. 바라보면 멀리도 왔다마는 나의 뒤 저편으로 어쩌면 신명나게 바람은 불고 있다. 어느 하많은 시공(時空)이 지나 모양 없이 지워질 숨자리에 나의 백조(白鳥)는 살아서 돌아오라. ☞ 송신(送信) ☜ 바람은 한로(寒露)의 음절을 밟고 지나간다. 귀뚜리는 나를 보아도 이젠 두려워하지 않는다. 차운 돌에 수염을 착 붙이고 멀리 무슨 신호를 보내고 있나. 어디선가 받아 읽는 가을의 사람은 일손을 놓고 한동안을 멍하니 잠기고 있다. 귀뚜리의 송신(送信)도 이내 끝나면 하늘은 바이없는 청자(靑瓷)의 심연이다. ☞ 오렌지 ☜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오렌지는 여기 있는 이대로의 오렌지다. 더도 덜도 아닌 오렌지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찹잘한 속살을 깔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대는 순간 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다. 오렌지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다. 시간이 똘똘 배암의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에 한없이 어진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누구인지 잘은 아직 몰라도. ☞ 어떤 사람 ☜ 마지막으로 한번 더 별을 돌아보고 늦은 밤의 창문을 나는 닫는다. 어디선가 지구의 저쪽켠에서 말 없이 문을 여는 사람이 있다. 차겁고 뜨거운 그의 얼굴은 그러나 너그러이 나를 대한다. 나직이 나는 묵례를 보낸다. 혹시는 나의 잠을 지켜 줄 사람인가 지향없이 나의 밤을 헤메일 사람인가 그의 정체를 나는 알 수가 없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창문을 열면 또 한번 나의 눈은 대하게 된다. 어디선가 지구의 저쪽켠에서 말없이 문을 닫는 그의 모습을 나직이 나는 묵례를 보낸다. 그의 잠을 이번은 내가 지킬 차롄가 그의 밤을 지향없이 내가 헤메일 차롄가. 차겁고 뜨거운 어진 사람은 언제나 이렇게 나와 만난다. 언제나 이렇게 나와 헤어진다. ☞ 표정 ☜ 참으로 많은 표정들 가운데서 나도 일종의 표정을 지운다 네가 좋아하던 나의 표정이 어떤 것인지 내가 좋아하던 너의 표정이 어떤 것인지 다 잊어버렸다고 하자 우리에게 남은 단 하나의 고백만은 영원히 아름다운 약속 안에 살아 있다 풍화(風化)하지 않은 어느 얼굴의 가능을 믿으며 참으로 많은 표정들 가운데서 나도 임의의 표정을 지운다 표정이 끝난 시간을랑 묻지를 말라 창살 속에서 갇히운 나의 노래를 위하여 ☞ 한로(寒露) ☜ * 1 * 허수아비의 헐어빠진 옷자락이나 되어 남는 일이다. 허수아비의 어깨 위 길 잃은 한 마리 새나 되어 남는 일이다. 옷을 갈아입고 단정히 비록 넥타이를 맨다 해도 으스스 바람 도는 한로의 무늬를 어찌할까. 그런 마음의 들판을 어찌할까. 남은 일은 미치는 일이요. 그지없던 날의 옥빛은 갔으니 그런 날의 보람은 갔으니. ☞ 변신(變身) ☜ 잎을 벗어 버린 나뭇가지는 어찌 보면 땅에서 하늘로 뻗은 나무 뿌리라 할까 뒤엎어 놓은 밤이 내낮이라면 뿌리는 가지로 변해도 될 일 간절한 꿈에서 열매가 맺고 영근 방울에서 보람이 터질 때 세계는 얼마나 아리게 도치(倒置)했을까 뒤엎어 놓은 내낮이 우리의 밤이라면 백야(白夜)여 주어(主語)없는 강물을 덮어 달라 생자(生者)를 뒤엎어 죽은 자라면 푸른 하늘은 무덤 속을 날아야 할 일 말씀은 안테나 끝으로 푸라티나의 빛을 퉁기고 저기 급하게 피안(彼岸)으로 달리는 짙은 구름群 가지로 변해 선 나무 뿌리에 흔들이며 달려 오는 풍경(風景)은 밀착(密着)한다. 꿈을 배우는 제비야 옳은 신화(神話)를 알려주마 나래 설익은 제비야. ☞ 빈 콜라병 ☜ 빈 콜라병에는 가득히 빈 콜라가 들어 있다. 넘어진 빈 콜라 병에는 가득히 빈 콜라가 들어있다. 빈 콜라 병에는 한 자락 밝은 흰 구름이 비치고 이 병을 마신 사람의 흔적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는다. 넘어진 빈 콜라병은 빈 자기를 생각고 있다. 그 옆에 피어난 들국 한 송이 피어난 자기를 생각고 있듯이. 불고 가는 가을 바람이 넘어진 빈 콜라 병을 달래는가. 스스로 풀어내는 음악이 빈 콜라병을 다스리고 있다. ☞ 좋았던 날 ☜ 좋았던 날은 하마 가고 없다. 두서없이 보내온 지난날의 일들. 그 사이도 하염없이 귀한 것은 새어내리고 오늘은 벌써 찬바람이 돌고 있다. 어디로 갔는가 제비는 이미 보이지 않고 귀뚜리도 바이없이 죽을 자리를 더듬고 있다. 보라 스민 노을은 하르라니 서산마루에 떨고 더없이 귀한 날은 저문다. 예저기 불이 돋은 창문들의 마음 아이를 찾는 아낙네 목소리는 저문다. 나도 밤이 되어갈 때다 별이 되어 갈 때다 ☞ 한알의 씨앗 ☜ 한알의 씨앗에도 움은 돋는가 가지에 피어날 꽃잎은 지레 보이고 두 알의 씨앗에도 움은 돋는가 가지에 맺을 열매는 지레 보이고 애달파라, 트지 않는 나의 씨앗 기다려도 기별은 없고 보듬어도 보람은 없고 봄이 와 무릇 씨앗들은 돋아도 소망은 바이 없이 흙의 잠을 자리라 ☞ 노을 ☜ 더없이 날은 가고 없다 잔잔히 번지는 수먹물의 노을 좋았던 날은 이리저리 가고 어디로 제비는 날아갔는가 날은 어둑하여라 하르라니 떠는 비늘구름 하나 좋았던 날은 하마 가고 없고 지나고야 비로소 그지없는 노을 파르라니 떨며 날은 저문다. ☞ 소년 ☜ 아득한 옛날 호젓한 네거리에는 붉은 우체통이 고즈너기 서 있었다 서투른 휘파람을 불면서 소년은 우체통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지나간다. 한손엔 잠자리 채를 들고서. 무심코 잠자리가 한 마리 앉다 말다 지나간다. 보릿집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엿장수 가위소리는 고달피 지나간다. 내 어느날 다시 이 길을 간다 해도 여전 그렇게 지날 것이다.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가이없이 변해도 홍안은 찌들어 어깨처진 남루의 막대는 지나가도. ☞ 동행 ☜ 길을 가는 우리는 서로 만나 인연껏 함께 가는 同行이다. 同行이란 무엇일까 속속들이 상대를 아는 것도 아니리라. 서로는 그런 요구를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저마다 혼자 가는 우리는 언제나 더듬거리는 목숨이요 다다라 쉴 잠이 어디에 있는지, 되도록이면 이마 위에 별을 이고 저마다의 밤을 헤어갈 뿐 가다가 琴線에 와 닿는 그런 것이 있다면 고마웁게 받아들이며 또한 소중히 나누어 가지며 우리는 함께 가는 同行이다. 인연껏 가다 마칠 그런 同行이다. ☞ 추일별곡 ☜ 하마트면 일 뻔도 한 위험한 관계를 미안히 생각하며 오늘은 내가 떠날 차례 그러면 둘이는 다 추일풍경이 되어보는 날이다. 채칼에 뚝뚝 떨어지는 물배 이슬을 거두며 떠나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한자리에 앉고 보면 우리네 생활사는 그래도 숨어 드나부다. 작별의 술잔에 남빛 고름은 비친다. 허리춤에 찬 향주머니 인형의 실눈썹은 비친다. 가을이 너의 소매끝에 닿아도 함부로 설레이진 말일 가지에 앉은 새가 엿보고 있으니, 아리는 미소를 한 군데 가릴 토끼풀 하나 노랗게 익은 탱자알 하나 너의 손에 들어 있어 더욱 좋은 일. 추일은 마침 별곡이 던다. 가다가 잘못 산신령을 만나면 꼰바둑이나 한 판 둘 여유는 있어야지 이마 푸른 고려선비는. ☞ 조국으로 가는 길 ☜ 솜구름 말가히 나르고 푸른 들 기름진 땅 불꽃이 마구 올라 붙는 하늘이 서러웁거든 우리 눈알을 한데 모아 조국으로 가자 노래를 한데 엮어 조국으로 가자 그대는 바꿀 수 없는 우리의 운명 속일 수 없는 우리의 혈맥 보다 아름다이 꾸민 땅도 있으리 복되게 사람 사는 부러운 나라도 있으리 이득한 한숨 가슴을 덮드래도 조국은 지울 수 없는 우리의 발자욱임을 어찌하느냐 조국은 자랑스런 우리의 깃발이다 조국은 자랑스런 우리의 훈장이다 우리 눈알을 한 데 모아 조국으로 가자 노래를 한 데 엮어 조국으로 가자 그대는 자랑스런 우리의 꿈이 아니냐 그리하여 조국으로 가는 길은 항쟁의 길이다 자유로 가는 길은 진격의 길이다 조국은 한양 고난속에 부활하는 것인가 넘어져도 열 번 일어나는 용기를 배우자 하나로 가는 길은 영광의 길이다 양편바다 함박꽃이 피는 길이다 ☞ 진혼 ☜ 가장 미더웁던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가장 미더웁던 나 자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남은 일은 정처없이 펄럭이는 일이다 아무런 방비도 없이 그러나 되도록이면 탁하지 않게. 약간은 흙바람에 눈이 시려도 그럴 수 있는 일, 아침 노을의 무슨 약속이 한 그루 나무로 자라던가. 가장 바라던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가장 바라던 나 자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남은 일은 갈피 없이 펄럭이는 일이다 그러나 되도록이면 추하지 않게. 그러면 이 펄럭임도 약간은 진혼의 노래가 될는가 돌아오지 않는 사람 돌아오지 않은 나 자신을 위하여. 언덕마루에 상기 비가는 바람불고 있다. ☞ 평범한 가을밤 ☜ 평범한 가을밤엔 평범한 과일이 낫다. 단 미를 걸러낸 평범한 말이 나에게 더 어울릴 때도 있다. 떠나는 막차 소리를 기억 속에 들으며 한 장의 엷은 잠의 막을 넘어서면 꿈 속을 한 개 커다란 과일이 떨어진다. 어느 깊이로 떨어져 갔는지 내일 아침 출발하는 바람에게 물어 보리라. ☞ 봄비 ☜ 전에는 잘 다닌 길인데 그 사이 왠지 시들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찾는 이 길 모퉁이를 돌아서자 낯익은 가게들이 몽땅 헐리고 있다. 약방이며 과일점 이런 저런 식당들. 변했구나. 얼마 후 다시 이 길을 지나자 불도저가 요란하다. 얼마 후 다시 지나자 철골(鐵骨)이 마구 치솟고 있다. 얼마 후 다시 지나자 마친 단장에 미끈한 허우대. 지극히 당연한 듯 빌딩이 서 있다. 유수한 모 기업체 사옥. 어리둥절 들어서 본 나는 열없이 도로 나온다. 수상히 훑어보는 사원도 있다. 사원이여 그럴 필요는 없는데. 이제야 나도 알아지는 것이 있구나 변한 거리에 변한 이 사람 때마침 부슬부슬 봄비가 내리고 있다. ☞ 누가 누구를 닮았다는 건 ☜ 누가 누구를 닮았다는 건 참 재미 있는 일이다. 가령 길에서나 어디에서 문득 만난 사람이라도 꼭히 누구를 닮았다고 짚는 순간에 기어코 그는 소를 닮고 말 여우 토끼 고양이 거북이도 닮는다. 꼭히 누구를 닮았다고 짚는 순간에 과연 그는 아보가도로 빠스깔을 닮고 또는 바세도오, 쥐포수를 닮고 시골 정미소 주인을 닮는다. 짖궂은 생각은 다시 얼굴에 턱수염을 달아 붙이고 갓을 씌우면 아 정말 그렇다 李朝 때 아무개 참판을 닮는구나 참 신나는 일이다 동그랑땡. ☞ 크리스마스가 지난 뒤 어느 대학촌에서 ☜ 저마다의 진한 겨울을 안고 처녀(處女)들은 한 아름씩 소포(小包)를 띄우고 있던데, 지금은 다 어디로 갔는지 흔적이 없다. 한산해진 우체국에 들어서면 갑자기 들어온 이유(理由)를 잊고 나는 몇 장의 우표(郵票) 밖에 살 것이 없다. 말하자면 그들로 볼 때 시(詩)는 편리한 날개의 대용일 수도 있지만 사람은 그렇지 못할 때 계원(係員)은 나에게 우표(郵票)를 내어주며 잠시 나의 속으로 들어가 본다. 밖을 나오면 동한(凍寒)의 젖빛 거리 어쩌면 띄우고 말 한 장의 편지 그 웃머리를 생각하며 참으로 거짖 없는 한 줄의 육성(肉聲)을 생각하며 며칠 못 본 주인(主人) 눅은 악기점(樂器店)으로 그 옆의 낯익은 주점(酒店) 주점(酒店) 속의 바다로 뛰어든다. ☞ 눈 ☜ 아주 너를 떠나 보내고 돌아오는 길은 펑펑 눈이 오는 밤이었다. 돌아서는 모퉁이 마다 내자욱 소리는 나를 따라오고 너를 내 중심에서 눈의 것으로 환원하고 있었다. 너는 아주 떠나버렸기에 그러기에 고이 들을 수 있는 내 스스로의 자욱 소리였지만 내가 남기고 온 발자욱은 이내 묻혀 갔으리라. 펑펑 내리는 눈이 감정 속에 묻혀 갔으리라. 너는 이미 나의 지평(地平)가로 떠나갔기에 그만이지만 그러나 너대신 내가 떠나 갔더래도 좋았을 게다. 우리는 누가 먼저 떠나든, 황막히 내리는 감정속에 살아가는 것이냐. ☞ 행인 -1- ☜ 길을 가다 발이 무거워 한동안 나무 그늘 돌 위에 쉬어 본다. 이마에 밴 땀을 씻으며 아래켠으로 눈을 돌리면 들판을 건너가는 사람의 흰 옷이 간혹 조만하게 아른거리고 있다. 이웃 마을이나 읍내로 잠시 나들이나 가는 길인지, 그런데 이들은 왜 하나같이 가면은 다시 안 올 행인으로만 보일까. 길은 분명 같은 길이요 내키면 언제라도 올 수 있는 길인데. 한동안 나는 생각해 본다. 지난 날 인연 있던 사람들의 일을. 바람이나 잠시 쏘이러 또는 장에나 가듯이 가벼운 인사말로 떠난 사람도 알고 보면 다시 못 올 헤어짐이 될 줄이야. 내일 또 만나자던 웃음 먹은 얼굴이 지금은 해밝은 하늘에만 걸려있는 사람도 았다. 쉬었던 몸을 일으켜 발을 다시 옮기면, 아른거리며 가는 저 들판의 사람 눈에 나도 또한 가면은 아니 올 행인으로나 보일까. 기우는 해그늘에 제비는 돌아가고 철교에 느릿이 화물차는 지난다. 오는지 가는지 구별도 없이. ☞ 항아리 ☜ 떠나온 사람의 눈에 유현(幽玄)한 항아리는 비친다. 항아리의 겉면을 한 자락 구름이 돈다 한 마리 학이 날은다. 바람을 따라가는 구름의 마음을 아는가 구름을 따라가는 학의 마음을 아는가. 알려면 한평생 걸려도 볼 일 걸려서 마침내 학의 부리를 또 한 번 이승으로 돌려볼 일이다. 어쩌면 길이 굽은 하늘에 시방도 하염없이 학은 날고 있으니. ☞ 한 사람의 슬픔 ☜ 쓰지 않았다면 좋았을 그런 것만 써 왔구나 여태. 버릴 데도 없는 이 역겨운 말 누더기. 그러나 여전 나는 쓸 것이다 모래 위에, 물 위에 종이 위에, 허공에. 결코 쓰지 못할 그런 꿈을 위하여 나는 쓰고 또 쓸 것이다. 종국의 수락이 부슬비처럼 내릴 때까지. 나를 늙었다고 하라 마음대로 젊었다고 하라. 기약 없는 이 붓끝에서 끝내 터지는 말은 무엇일까. 울분도 실의도 아니다 깊이 엉긴 한 사람의 슬픔이다. ☞ 하일명상(夏日瞑想) ☜ 노년은 하잘없는 한낱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다. 누가 이런 말을 하던가 손뼉 치며 소리 높이 허리 굽은 남루를 찬양하라. 격조 높은 정밀(靜謐)의 이마 푸른 현자도 때로는 느닷없는 광기에 사로잡히며 스스로의 운명을 이룩하는 수가 있다. 묵묵히 돌아도 안 보고. 명심하라. 헤매이며 떠돌던 노한 노년도 비로소 냉엄히 끓는 눈을 부릅뜬다. 이승을 엿본 자 무슨 한이리오 떠나며 가벼이 코나 풀 일. 더위도 바야흐로 막바지 8월 귀뚜리도 엊그제 울기 시작했다. 꿀벌이여, 제비 나는 빈 집에 와 집을 지어라 황망히 살다 갈 집을 지어라. ☞ 편지 ☜ 거리에도 여저기 군밤이 나돌고 가랑잎도 이리저리 굴러다니면 다 쓴 편지에도 마지막 우표를 단다. 그러면 나름으로 길을 떠나리라. 떠나는 후조에 길이 있듯이 띄우는 편지에도 길은 있으니 시월 상달 높은 하늘에 눈을 풀어 적시면 사람도 한동안 무늬 이는 옥빛이다. ☞ 추일유정(秋日有情) ☜ * 1. 한로(寒露) * 진보라 가지나무에 물을 주는 사람의 흰 발도 사라지면 어언 소매 끝에 와 닿는 한로의 바람 무늬. 그러면 나의 노래도 청자의 하늘빛을 닮을 때가 되었는가. 노래는 상기 맑아 오르지 못하고 부질없이 고이는 한로의 이 냉기. 나의 의지도 한 마리 후조의 나래깃을 닮을 때 청자의 심연에서 일어서는 나는 고려 선비다. * 2. 가을의 얼굴 * 줄기에도 주룽히 보석의 열매가 맺는 날이다. 이마 푸른 선비의 마음은 한로에 젖어 잘 굽은 나무 사이로 보이는 옥빛 하늘. 그러나 아른대이는 보살님 머리에 가리워 서역(西域)은 잘 안 보인다. 그래도 상관은 없는 일, 오늘은 돌 속에 보살님을 캐는 날이니, 제일 맑은 가을의 얼굴을 캐는 날이니. * 3. 송신(送信) * 바람은 한로의 음절을 밟고 지나간다. 귀뚜리는 나를 보아도 이젠 두려워하지 않는다. 차운 돌에 수염을 착 붙이고 멀리 무슨 신호를 보내고 있나. 어디선가 받아 읽는 가을의 사람은 일손을 놓고 한동안을 멍하니 잠기고 있다. 귀뚜리의 송신도 이내 끝나면 하늘은 바이 없는 청자의 심연이다 ☞ 잠들기 전 ☜ 거리의 가게도 뚜르르 문을 닫는 소리가 들린다. 하루의 수지도 이리저리 맞추어 보는 시간이다. 또한 텔레비전 화면 앞에 모여 오늘의 마무리 뉴스를 지켜보는 가족도 있다. 무언가 석간을 더듬는 가장의 그늘진 이마 주름도 보이고 또는 잠자리 세수도 대강 마치고 잠시 거울 앞에 앉는 아낙네 그 옆에 고사리 손을 불끈 쥐고서 새근거리는 아기의 잠도 보인다. 고요히 깊어가는 이 밤 나의 안에도 나직이 밤 노래는 흐르고 스르르 잠들기도 전에 꼬리 달린 이삭 별이 하나 동녘 하늘로 떨어지고 있다. ☞ 이사 ☜ 늘은 건 세월의 누더기라 하자, 그런대로 불에 사른 것도 많다. 밥을 메겨 시계룰 걸어 놓고 문패도 달아 붙이면 이 집도 당분은 나의 거처가 된다. 잊은 물건도 더러 생각이 나나 묻지 말라 잊기 위한 이사도 있는 법이니. 이 빠진 고흐의 걸상이 여까지 따라오고 보면 질긴 건 인연이다. 수상히 짖던 개도 알아보는지 이내 조용해지면 머리 위에 째잭 인사를 떨구는 새도 두엇 보인다. 일손을 놓고 우러다 보면 앞산 마루 여저기 눈은 아직 남아 있다. 언제면 이 집도 다시 옮길지 기약은 없지만 한 번은 혼자 떠날 그런 이사도 문득 생각이 난다. 어느 날 발에 맞는 새 신을 신고 아득히 먼 가믈 현(玄)으로 나서면 그 때는 무어라 새들은 인사를 할까 알아도 보았으면. ☞ 오, 하나씩의 이름들 ☜ 오, 하나씩의 이름들 무시로 떠오르는 하나씩의 이름들 돌이며 길, 들이며 강 풀이며 나무, 별이며 무덤 그리고 또 그리고 또 이런저런 이름들. 이들은 결국 하나씩의 암호였던가. 우리들의 삶의 융단천 그 둘레 안으로 누구인가 짜 넣은 암호였던가. 우리는 저마다의 암호를 안고 이 지상을 살다 가는 것이리라. 조금씩은 나름으로 풀다 말다 하면서 그러나 결코 풀지 못하며, 그리곤 다시 한 번 풀기 위하여 깨어나 지상으로 돌아오는 것이리라. ☞ 여로 -1- ☜ 사람은 문득 원경(遠景) 속에 서 있는 자기를 볼 때가 있다. 어릴 때 흔히 그린 크레용 그림 그 속의 조그만 인물을 닮은 자기의 모습을. 그리곤 잠시 지나온 여로를 생각해 본다. 산과 들이 처음 놓이고 한두 채 집이랑 나무, 길이 놓이고 여저기 구름이 놓인 크레용 그림. 그림 속의 인물은 지금도 걸어가고 있다. 불러도 이쪽을 돌아보는 일 없이 한 손엔 무언가 일호 봉투를 들고. 그렇다, 돌아올 리 없는 나요 지금도 원경 속을 가는 사람은. ☞ 싸리나무 ☜ 잠자리는 살아 있는 싸리나무엔 앉지 않는 법이다. 언제나 죽은 싸리나무 그 꼭대기에 가 앉는다. 몸에 비해 유달리 눈이 큰 잠자리는 언제나 죽음의 정상에 가 앉는다. 엷은 나래에 모시 하늘은 비치고…… 바람이 살짝 싸리잎을 흔들면 꿈에서나 깨어난 듯 잠자리는 떠난다 어느 또한 싸리 마른 가지를 찾아서. 오늘은 또 오늘의 묘비명이다. 바람에 휘적이는 묘비명이다. ☞ 비가(悲歌) ☜ * 1 * 바람에 희끗이 머리카락은 날린다. 삐에로여 작별의 인사말을 아는가. 너의 눈 속에 한 자락 노을 구름은 돈다. 길 잃은 잠자리의 그리매도 저물면 대지의 노래 속에 떨어지는 나뭇잎들, 늦도라지 보라 속에 꿈을 헤맨 사람은 귀뚜라미 울음에도 마음이 설레이고 삐에로여 잠잠히 춤을 거두어라. 사람의 손에 인형은 때묻고 술잔에 남은 머루씨 댓 톨 바람에 희끗이 머리카락은 날린다. * 2 * 계절 사이로 간간이 웃음 소리는 밝게 들린다. 여름을 살아 남아 여까지 온 사람은 비탈에 그늘 여문 가을꽃을 바라본다. 이것도 그래 다행한 일이다 늦도라지 보라 속에 비치며 사라지는 행인의 그림자. 익어 여문 과일의 무게가 문득 손에 무거울 때 굴러가는 가랑잎은 누구의 것일까. 귀뚜리여 아직은 죽을 자리를 더듬지 말라. 시월 상달 해 짧은 날에 옥빛 바람은 풀어 섞이고 이러할 때 상머리 생명은 유정(有情)이다. * 3 * 기적 소리도 울고 가면 그만, 누가 오래 견딜까 이 멀건 들판을. 한 줄기 걸인의 모닥불이 피어 오른다. 간간이 풍기는 고무 타는 내. 이러할 때 날카로이 새는 노을에 빛나고…… 저녁 새여 아직은 더 울어라. 나락 말던 사람의 그리매는 사라지고 굽어 도는 강나루 모서리도 저물면 남은 건 한 가지 최후의 기슭에 별이 뜬다. * 4 * 사람이 두 발로 일어서 걸어 온 시간이 아득히 보인다. 내가 두 발로 일어서 걸어 온 시간이 아득히 보인다. 무엇을 위한 여로인가. 엿장수의 가위 소리는 일찍 해진 길로 발을 돌리고 우수수 달력 속에 날은 어둡다. 이승을 엿본 자 무슨 한이리오 떠나며 가벼이 코나 풀 일. 삐에로여 잔을 들어라 바람이 너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바람이 방금 너의 이름을 지우고 있다. 삐에로여 잔을 놓아라 ☞ 바다 ☜ 바다여, 옷에 묻으면 잘 안 지는 너는 푸른 잉크 물이다. 살에 묻으면 잘 안 지는 너는 진한 잉크 물이다. 수면으로 내려앉는 돌층계도 뱃전에 날아 뜨는 갈매기떼도 떠나는 고동 소리도 지우려면 다 지울 수 있지만 해만의 끝머리 흰 등대도 등대 위에 조으는 구름 자락도 흩어진 섬들의 밝은 무덤도 지우려면 다 지울 수 있지만 바다여, 한 번 묻으면 잘 안 지는 너는 푸른 잉크 물이다. 찍어서 내가 쓰는 가슴의 잉크 물이다. ☞ 모과나무 ☜ 유난히도 포근한 초동 날씨 더없이 옥빛 귀한 하늘빛이다. 고마와라, 이런 날도 있었던가 좋았던 날은 하마 가고 없는데. 하늘거리며 그리 춥지도 않은 바람이 시름없이 건너가고 있다. 뜰의 모과나무엔 예저기 아직도 매달린 가랑잎새들 하르라니 살랑이며 맑게 떨고 있다. 그때는 구슬프기 짝이 없던 나문데 그 사이 어언 자라 실하고 당당한 나무가 되었다. 여름이면 보기에도 시원히 잎새를 살랑이며 호젓한 저녁 한때를 심심히도 반겨 주더니 그 사이도 식구들은 하나 둘 줄고 뜻밖에도 이 몸은 망가져 삽시에 많은 것이 변하고 말았다.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햇살에 살랑이는 모과나무의 향내라 할까. 햇살 바른 뜰에는 향기 드높이 코에 스미던 모과 열매도 지금은 거진 다 따고 말았다. 몇 개만 가지 끝에 지금도 남아 있을 뿐. 바람이 하늘거릴 때마다 지금도 향내는 코에 스미듯 감돌고 있다. 드디어 나뭇잎도 다 떨어지면 사람들은 영하 깊이 문을 닫아 걸리라. 원컨대 해가 바뀌면 또 가지 추운 나무도 다시 살아나 향내 그윽한 열매를 달아 주기를. 바라는 것이 또 무엇이랴, 유난히도 포근한 초동(初冬) 날씨에 더없이 옥빛 귀한 이 하늘 고마와라, 이런 날도 있었던가 좋았던 날은 하마 가고 없는데. 경건히 고개 숙여 지팡이를 다시 짚는다. ☞ 끝나는 계절 ☜ 쌀을 안치는 소리가 부엌에 들린다. 짧은 해는 빨리도 기울고 밖에 놀던 아이도 집으로 돌아온다. 들어서며 부르는 갓 배운 콧노래 저무는 날은 오히려 밝기도 하다. 나에게도 한 계절은 끝나고 있다 기울기엔 상기 이른 한 계절이. 아침에 갈아입은 와이셔츠도 후줄히 때가 묻었다. 청마루 한 모서리 어느 날의 잊었던 단추를 주우면 멀리 울리는 열차의 기적 소리. 부엌에 끓는 찌개 소리가 노을에 한창 풀어 섞이고 있다. ☞ 금조비가(金鳥悲歌) ☜ * 1 * 어느 고도(古都)의 박물관에서 마침내 너를 보았다, 황금(黃金)의 새여 혹은 보았다고 여전 지금도 생각고 있다. 그리는 크지 않는 순금(純金)의 몸매 접동이나 방울새 크기만 할까. 허공에 고개를 치껴 들고 방금도 울 듯이 머문 너의 부리, 너의 눈은 뜨고 있는 잠인가 자고 있는 생시인가. 그 사이도 수없이 꽃잎은 피고 지고 맺어서 떨어진 열매들의 행방. 그 사이도 허다히 왕조는 바뀌고 발굽 소리는 요란히 지나간 뒤에도 여전 울 듯이 부리는 허공에 머물고 있다. 간혹은 내 하염없는 생각에 잠길 때면 무시로 나의 눈에 너는 어리고 울 듯이 굳어 버린 너의 울음에 쭝긋이 나귀의 귀를 나는 모아 본다. * 2 * 오늘도 생각 속에 너를 대하여 무엇을 나는 바랄 것인가 황금의 새여, 그렇다, 죽기 위해 태어난 그런 몸은 아니라 너는 말하리라. 그 말도 맞는 말이다 경우에 따라선 그 말이 옳을는지 모른다. 자고로 시인은 무어라 이르던가, 너는 죽지 않는 새 남들은 다 가도 너는 가지 않는 새 그런 새라 시인의 한 사람은 말하더라. * 3 * 이승에 태어나 누가 한두 번 살고 싶은 저 영생을 바라지 않았던가. 보라, 망가지듯 두드리는 건반의 두 손을, 미친 듯 휘두르는 백발의 지휘봉을, 쫓기듯 또한 쫓듯 줏어 넘기는 책장을 핏발 선 독서의 눈을. 보라, 신들려 떠는 굿소리 구슬픈 저 염불 소리를 목메인 기도의 탄식을, 보라, 우수수 가랑잎에 남은 잔을 비우고 나룻배를 부르는 행인의 목소리를. 누가 한두 번 살고 싶은 저 영생을 바라지 않았던가. * 7 * 한 번의 봄을 살은 사람은 한 번의 가을이면 되는 일 무엇을 또 바라랴. 한 번의 꽃을 피운 사람은 한 번의 가는 길이면 되는 일 무엇을 또 바라랴. 해 져도 해 떠도 그저 멍멍할 따름. 눈이 탄 사람은 탄 채 멀건 들판을 헤매이고 아니면 웅크려 식은 간(肝)이나 쪼으며 기억의 아침 노을 그런 저녁 노을을 시리게 다시 또 맞이할 뿐이다. * 8 * 황금의 새여, 이젠 눈을 열어라 열어서 마침내 울어 보아라 소리없는 울음에 나의 귀는 열려 있으니 살아보고 사라질 목숨의 향기로 울어서 참다운 너의 네가 되어라. 그런 뒤면 또 한번 천 년을 잠들면 어떠랴 만 년을 잠들면 어떠랴. 뜻 있는 사람이 그 때도 살아 있다면 그들은 그들의 슬픔 속에서 간절히 또한 너의 울음을 원할 것이니 황금의 새여 오늘은 오늘의 눈을 열어 울어라 황망히 살다 가는 이 행인을 위하여 다하지 못한 그의 꿈을 위하여 슬퍼하지도 안하지도 말고서. ☞ 가을 햇살 ☜ 우리들이 둘러 앉은 이 언저리 나무잎은 물들어 더러는 떨어지고 더러는 남아 가지에 무늬 맑게 설렁이고 있다. 보아라, 천지에 부드러운 이 햇살을 인제는 한이 없는 가을 이 햇살을. 이런 날의 한 때를 위해 사람은 여태 살아 왔던가. 해는 짧아라, 가을날의 오후 서너 시 혹은 반 이런 볕이 너무도 아까워 사람은 쉬이 자리를 뜰 수 없구나. 왕릉(王陵)이 보이는 풀밭에 상기도 무늬 맑은 웃음은 감돌고 한동안 그지없이 목숨은 기쁘다 기뻐서 도리 없이 목숨은 슬프다. ☞ 마음 이 한 때 ☜ 피며는 그저 피는 줄만 알았던 꽃잎들 여물면 그저 여문 줄로만 알았던 열매들, 이들은 왜 하나같이 더없는 귀한 걸로 보이는 것일까. 피며는 그저 피는 줄로만 알았던 노을의 분홍빛 변하면 그저 변한 줄만 알았던 보라며 수묵 어린 빛, 고목(古木)은 한 그루 노을 다한 하늘에 우뚝 서 있고 두어 채 방금 불이 돋은 창문들, 이들은 왜 하나같이 더없는 의미로만 보이는 것일까 기쁘고도 서러운 마음 이 한때. ☞ 나의 손 ☜ 나의 손은 크도 작도 않은 손 알맞게 하나님이 만드신 손 큰 일은 못해도 작은 일은 더욱 못하는 손. 착한 일은 못해도 악한 일은 더욱 못하는 손. 이런 손에 죄가 있다면 분수대로 산 죄밖에. 넘보지도 얕보지도 않고 나름으로 산 죄밖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프나 고프나 나름으로 산 죄밖에. 어느 정도 쥐어도 보고 털털 털어도 본 손 털어도 별 먼지는 안 나는 손 무엇인가 만들고는 부수고 부수고는 다시 만들고 흩어진 장기알도 챙겨서는 다시 두고 모기 파리는 그 자리에 때려 잡아도 함부로 살생은 안한 손 약손은 못되어도 독손은 더욱 못되는 손 어쩌다 꽃을 꺾어도 병에 담기 위한 것. 담아서 짧은 이승 마음 주기 위한 것. 나의 손은 크도 작도 않은 손 알맞게 하나님이 만드신 손. 오늘도 이 손으로 시를 씁니다. 나의 시를 말이지요, 오늘도 이 손으로 코를 풉니다. 오늘도 이 손으로 도장을 찍습니다. 어떠캅니까. 하나님은 아시리라 믿고 손톱을 깎습니다. ================================================== 목          숨                                                          - 신동집 -     목숨은 때 묻었다 절반은 흙이 된 빛깔 황폐한 얼굴엔 표정(表情)이 없다.   나는 무한히 살고 싶더라. 너랑 살아보고 싶더라 살아서 죽음보다 그리운 것이 되고 싶더라.   억만광년(億萬光年)의 현암(玄暗)을 거쳐 나의 목숨 안에 와 닿는 한 개의 별빛   우리는 아직도 포연(砲煙)의 추억(追憶) 속에서 없어진 이름들을 부르고 있다. 따뜻이 체온(體溫)에 젖어 든 이름들   살은 자(者)는 죽은 자(者)를 증언(證言)하라 죽은 자(者)는 살은 자(者)를 고발(告發)하라 목숨의 조건(條件)은 고독(孤獨)하다.   바라보면 멀리도 왔다마는 나의 뒤 저 편으로 어쩌면 신명나게 바람은 불고 있다.         어느 하많은 시공(時空)이 지나 모양 없이 지워질 숨자리에 나의 백조(白鳥)는 살아서 돌아오라.                  - (1954) -   해        설     [ 개관정리 ] ◆ 성격 : 존재론적, 의지적, 주지적, 형이상학적, 명상적 ◆ 표현 : 명령형 종결어미를 통한 선언적인 표현(화자의 반성에의 의지를 강화하는데 기여)              형이상학적인 계열의 시임에도 불구하고, 발상이나 언어구사에 있어 생경함이나 난해함이 없음 ◆ 중요 시어 및 시구   * 1연 → '목숨이 때묻었다'는 '흙이 된 빛깔'과 '황폐한 얼굴' 등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표현임.                전쟁으로 인한 목숨과 생명에 대한 회의로부터 비롯됨.   * 산 자는 죽은 자를 증언하라 → 살아 남아 있는 자는 허무하고 처절하게 죽어간 생명에 대한 증언을 하라.                                                   전쟁의 비극성을 고발하고 있다.   * 죽은 자는 산 자를 고발하라 → 죽은 자들이 고발할 내용(온갖 방법으로 생존을 도모했던 구차한 모습)에            대해 반성하라.  살아 남은 자의 부끄러움이 나타남.    * 목숨의 조건은 고독하다 → 살아 남은 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이 바로 죽은 자에 대한 죄의식이기에, 목숨         의 조건은 고독한 것이다.(삶의 의미는 죽음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을 통해 더욱 아름다울 수 있음)    * 백조 → 반성적 삶에 투철함으로써 성취된 삶. '순수한 생명'의 심상 ◆ 주제 ⇒ 생명의 고귀함과 순수한 삶에 대한 동경     [ 시상의 흐름(짜임) ] ◆ 1연 : 목숨의 황폐함(전쟁에서 살아남은 자의 죽음보다 못한 삶) ◆ 2연 : 삶에 대한 소망(생명에의 질긴 의욕) ◆ 3연 : 목숨의 소중함 ◆ 4연 : 죽은 목숨에 대한 애틋함. ◆ 5연 : 목숨의 조건(살아남은 것에 대한 치열한 반성적 자세) ◆ 6연 : 미래의 삶에 대한 낙관적 전망 ◆ 7연 : 순수한 삶의 구현 소망     [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  시 은 1950년대 한국의 특수상황에서 거둔 수확의 하나로, 전쟁시, 참여시 또는 순수시와 모더니즘 계열의 시가 범람하는 분위기에서 원격조정된 '신동집 스타일'의 한 표본을 보게 되는 작품이다. 전쟁이라는 극한적 상황에서 살아남은 자의 존재론적 갈등이 형상화된 작품인데, 시적 화자는 전쟁이라는 민족적 수난과 폐허 속에서도 삶의 의욕과 목숨의 영원을 마침내 깨닫게 된다.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고 존재론적 갈등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1연에서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의 얼굴에서 죽음보다 못한 삶의 황폐함 곧, 절망과 죽음의 상황을 발견해 내고 있다. 2연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목숨에 대한 강한 열망을 보이며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3연에서는 존재론적 한계에서 맞이하게 되는 인간 존재의 구원의 빛을 발견하고 있다. 기나긴 고통의 시간을 거치면서도 강인한 생명력의 뿌리를 내리며 빛을 발하는 소중한 개인의 생명의 불빛을 보는 것이다. 4연에서는 전쟁을 치르면서 육체는 사라지고 이름으로만 남아있는 죽은 자들의 흔적이 제시되고 있다. 5연은 시대를 꿰뚫어 보는 자의 예지가 응결된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진정한 삶의 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해 선언적 어투를 사용한다. 인간다운 삶이란 육체적인 생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전쟁이라는 비극적 상황에서 죽어간 자들의 처절한 삶을 증언하고 온갖 방법으로 생존을 도모했던 구차한 모습들을 반성할 때에 비로소 진정한 삶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목숨의 조건은 고독하다.'는 단언적 표현은 이러한 치열한 반성적 자세를 갖출 때 필연적으로 찾아들 수밖에 없는 존재의 고독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6연과 7연에서는 시간의 흐름으로 인해, 전쟁의 포화로 점철된 시대와는 또다른 시대가 올 수 있다는 낙관적 전망이 제시된다. 자신의 목숨이 빚어낼 한많은 생애가 모양도 없이 지워지는 죽음의 순간에 '나의 백조'로 표상되는 자신의 진정한 삶이 소생하기를 기원한다.   ['목숨의 조건은 고독하다'라는 구절의 의미에 대해서] : 김윤식 교수의 시 특강에서 전쟁은 평범한 사람들의 목숨을 순식간에 앗아 간다. 그들의 죽음은 필연적이기보다는 우연적이다. 어떤 사람은 살고 어떤 사람은 죽는다. 삶과 죽음은 순식간에 한치의 차이로 결정된다. 이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누가 총을 맞을런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목숨의 필연성과 소중함을 믿었던 사람들은 여기서 실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삶과 죽음의 차이,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의 광포한 속성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아무런 죄도 없이 죽어 간 자를 위해 산 자가 할 일이란 그 죽음의 우연성과 전쟁의 비극성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것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죽은 자에 대해 부끄럽고 죄가 된다는 인식 때문이다. 산 자와 죽은 자는 결코 만나지 못한다. 산 자는 살아 있어도 산 것이 아니다. 목숨은 고귀하고 존엄하다. 그러나 산 자는 그 목숨 때문에 죽은 자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살아 있음이라는 삶의 조건 자체가 부끄러움의 원천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 고귀한 목숨을 전쟁은 한순간에 제거해 버린다. 산 자의 고독은 목숨을 지닌 것의 부끄러움과 인간의 삶의 조건의 허망함 때문에 생겨난다.       [출처] 신동집(申瞳集)|작성자 나무  
378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문정희 - 겨울 일기 댓글:  조회:6788  추천:0  2015-12-26
겨울 일기 - 문정희 나는 이 겨울을 누워 지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려  염주처럼 윤나게 굴리던  독백도 끝이 나고  바람도 불지 않아  이 겨울 누워서 편히 지냈다. 저 들에선 벌거벗은 나무들이  추워 울어도  서로 서로 기대어 숲이 되어도  나는 무관해서 문 한번 열지 않고  반추동물처럼 죽음만 꺼내 씹었다.  나는 누워서 편히 지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이 겨울.        ----------------------------------------------------  [작품 해설] ㅁ주제 : 임을 읽어버린 슬픔  ㅁ시적화자의 정서 : 슬픔, 고통, 괴로움  ㅁ시적화자의 태도 : 절망적이며, 극복할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고 체념적  ㅁ표현 특징 : 1연과 3연의 반어법과 2연의 자연물과의 대조 [감상]  ㅁ1연 : 나는 이겨울을 누워지냈다 /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려           ->시적화자는 임과의 이별로 인해 절망적이며 고통스럽고 무기력하게 누워만 지냈다는걸 알 수 있다.             이겨울 누워서 편히 지냈다           ->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렸는데 편히 지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걸 보면, 반어법으로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ㅁ2연 : 저 들에서 벌거벗은 나무들이 추워 울어도 서로 서로 기대어 숲이 되어도 나는 무관해서            -> 자연물과 시적화자의 대조적인 모습. 자연물인 나무는 추운겨울에도 서로 기대면서.. 위로하면서 더불어 지내는데..시적화자는 혼자이기 때문에.. 그게 자기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ㅁ3연 : 문 한번 열지 않고, 반추동물처럼 죽음만 꺼내 씹었다.           -> 현실세계와의 통로인 문을 열지 않고, 고립된 방안에서 슬픔으로 인해 반추동물처럼 죽은 것같이 움직이지 않고 지낸다는걸 알 수 있다. 이런 의미로 보아, 이 시에 나타난 겨울은 추운 시련의 계절인데다가, 임과의 이별까지 겹쳐 좀더 부정적인 시어라고 볼수 있습니다. ==========================   이혼 앞둔 시인 / 문정희         이혼 앞둔 여시인은 말하네 고통, 네 덕에 여태 살았다 고통? 네 덕에라니....눈물나게 화려한 수사를 따라가다 다시 아침 신문을 자세히 보니 아흔 앞둔 여시인은 말하네* 고통, 네 덕에 여태 살았다 아슬한 벼랑 끝자락에서 펼쳐 본 그녀의 식민지 시로 새긴 혼란과 전쟁, 궁핍과 수탈의 소용돌이 아흔 앞둔 여시인의 시집은 이것이 연단과 장화와 성숙이었다고 말하네 아직은 아흔보다 이혼이 더 절박한 아침 유효 기간이 끝난 찰떡 같은 결혼을 노래하고 싶네 이불 꿰매는 독바늘을 꺼내어 결혼의 정수리에 꽂고 길게 뻗어 가는 철로와 레일을 푸른 불꽃 망치로 찍어 보고 싶네 물귀신 같은 시집을 펼치어 위선과 성모욕 없이는 유지 안 되는 녹슨 쇠사슬을 이혼 앞둔 아니, 아흔 앞둔 여시인은 노래하고 싶네 고통, 네 덕에 여태 살았다       *『조선일보』2012. 6. 8일자, 홍윤숙 시집 소개「그 소식」.       -《시작》(2012년 가을호) ========================================                       문정희 나는 아무래도 나쁜 시인인가봐.  민중 시인 K는 유럽을 돌며  분수와 조각과 성벽 앞에서  귀족에게 착취당한 노동을 생각하며  피 끓는 분노를 느꼈다고 하는데  고백컨대  나는 유럽을 돌며  내내 사랑만을 생각했어  목숨의 아름다움과 허무  시간 속의 모든 사랑의 가변에  목이 메었어.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며  눈물을 흘렸지.  아름다운 조각과 분수와 성벽을 바라보며  오래 그 속에 빠지고만 싶었지.  나는 아무래도 나쁜 시인인가봐.  곤돌라를 젓는 사내에게 홀딱 빠져  밤새도록 그를 조각 속에 가두려고  몸을 떨었어.  중세의 부패한 귀족이 남긴 유적에 숨이 막혔어.  그 아름다움 속에 죽고 싶었어.      ============================================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되지 하고  돌아누워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나에게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 준 남자   남편 / 문정희       문정희 시인은 현재 고려대 교수로 재직중임     칠순 바라보는 '소녀 시인'                    야성으로 詩 토해내다     시집 '응' 펴낸 문정희 시인           (서울=연합뉴스) 황윤정 기자 = 문정희(67) 시인이 열두 번째 시집 '응'(민음사)을 냈다. 2010년 '다산의 처녀'를 내놓은 지 4년 만이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소녀'인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꿈틀대는 생명력을 뿜어낸다.    "시가 차오를 때면 응! 야성의 호흡으로 대답했다. 어느 땅, 어느 년대에도 없는 뜨겁고 새로운 생명이기를."   이 시집에는 그렇게 깊은 곳에서 시가 차오를 때마다 '응!'하고 야성의 호흡으로 내지른 78편의 시가 담겨 있다.   이번 시집에 "목숨을 걸었다"는 시인은  연합뉴스에 "시집을 낼 때마다 그 시집만이 가지는 '등뼈'를 세우는데 이번 시집의 등뼈는 야성의 호흡"이라면서 "다른 말로 하면 늑대의 호흡 같은 생생한 생명의 소리"라고 말했다.   또 "그동안 피지배자로서 억압받은 여성의 삶을 많이 노래했는데 여성성이라는 문제에 너무 오래 집착하는 것도 굴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이번 시집에서는 여성이라는 대지가 갖고 있는 생명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야성의 목소리로 생명을 품고 키우는 대지로서의 여성성을 노래했다"고 했다.    '자유'와 '고독'을 화두 삼아 시를 지어온 지 벌써 45년째. 시인의 열정은 사그라지기는커녕 오히려 활화산처럼 타오른다.    "늑대를 숲 속의 빈터라고 생각해 보자/사랑 때문에 심장을 도려낸 여자라고 생각해 보자/가보(家寶)로 내려오는 북을 찢고/적국의 밀림 속에 신방을 차린/번개나 태풍!/울부짖는 달그림자라고 생각해 보자"('늑대 여자' 중 )    "여자가 시를 쓰는 것은/불을 만지고 노는 것과 같다/몸속에 키운 천둥을 홀로 캐내는 일과 같다/소리 없이 비명처럼 내리는 비로/땅 위에 푸른 계절을 만드는/여자가 시를 쓰는 것은/비상벨을 눌러/감히 신과 키스를 하려는 것과 같다/이것은 죄는 아니지만 위험한 일이므로/문학사는 오랫동안/여자의 시를 역사 밖으로 던져 버렸다"('불을 만지고 노는 여자' 중)   문학평론가 이숭원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는 "문정희 시인은 독자적 개성으로 무장한 시의 화신"이라면서 "늑대 여인의 열정과 가을 폭설의 정밀을 두루 화해시킬 수 있는 동력은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나를 발견하는 데서 온다"고 풀이했다.   여성의 삶을 보듬는 시인의 시선은 사실적이면서도 따뜻하다.    "일찍이 농촌을 떠나와/그때 막 시작된 산업화 시대의 여직공이 되어/밤낮으로 수출 공장에서 일을 했던/우리 순임이(중략)/초로의 할머니가 되어 마을 회관에서/동네 노인들과 복분자 술을 나눠 마시고 있었다/동남아 며느리가 낳은/눈이 약간 검은 손자를 자애로이 품에 안고"('우리 순임이' 중)   시인은 "순임이는 찬밥댕이처럼 가장 그늘에 서 있지만 식구들에게 따뜻한 밥을 먹이고 몸에서 가장 따뜻한 사랑을 내뿜으면서 세상을 고쳐나가는 존재"라고 설명했다.   한국 여성시 계보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 시인은 1969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한 뒤 힘 있는 '여성적 생명주의' 시 세계를 구축해왔다. 동국대 석좌교수,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맡고 있다.   마케도니아 테토보 세계 시인 포럼 '올해의 시인상', 스웨덴 '시카다상' 등을 받으며 해외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프랑스 시인이자 평론가인 미셸 메나셰는 "문정희는 국경을 초월한다. 그녀는 세계적인 반항아"라면서 "그녀의 시는 범속한 묘사, 즉각적인 감각으로 우주적 메타포와 결합한다"고 평했다. ================================================================== "치명적 연애 못해봐 열등감… 이젠 치사해‘에이 관둬라’"         “이번에 플라멩코를 보니 목이 꺽꺽 메었어요. 어린 시절 듣던 남도의 판소리와 육자배기, 미친 여자들의 춤, 장돌뱅이의 몸부림이 다 들어있더라고. 가슴이 아프면서도, 그 오만불손한 아름다움에 매료됐지요.”   ...스페인 ‘책의 밤’ 행사에 참석하고 돌아온 문정희(68) 시인은 마드리드에서 본 플라멩코를 이렇게 말했다. 그가 몇 년 전 멕시코에서 본 플라멩코는 관능적이었다. ‘햇살 가득한 대낮/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꽃처럼 피어난/나의 문자/“응”’(‘응’ 일부)이라는 시가 그때 나왔었다. 여전히 ‘문학의 도끼’를 들고 자신의 삶을 깨우고 있는 문 시인에게 어떤 깊이가 더해진 걸까. 여성의 대지적 생명력을 꿈틀대는 관능의 언어로, 활달한 사유로 망설임 없이 노래해 온 문 시인은 한국시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열어왔다. 그의 시들이 국내·외에서 계속 애송되는 건 시들지 않는 이런 싱싱함 때문이다. 가부장적 폭력성에 맞선 시로 그를 평단 일각에선 페미니즘 문학의 선두로 꼽기도 한다. 한국시인협회장을 맡은 그는 이전부터 외국문학계의 초청으로 해외 나들이가 잦았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봉은사 부근 호텔의 커피숍에서 문 시인을 만났다. 세르반테스 기일에 맞춰 열리는 스페인 ‘책의 밤’ 행사에 그는 소설가 공지영과 함께 한국 대표로 참가했었다. ―스페인어권에서 한국 시에 대한 반응이 궁금한데. “내 시집 ‘나는 문이다’(2007)가 스페인어 ‘요 소이 문’(Yo soy moon)으로 지난해 가을 번역됐어요. 그 덕분에 지난 2월 쿠바 아바나도서전에 한국 최초로 참가했고 이번에도 초청을 받았죠. ‘나는 문이다’의 전체적인 주제는 생명, 여성, 사랑이거든요. 우리로 치면 홍대 앞 같은 문화의 거리에 설치된 부스에서 그것을 주제로 한 짧은 강연과 스페인 여성작가 3명하고 대담을 했어요. 열띤 분위기였고, 생각지도 못한 호응이었어요. 세르반테스를 낳은 ‘문학 종주국’에서 시가 살아있구나, 존중받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었어요.” 문 시인의 시는 10여 개 언어권에서 출간됐고, 2010년엔 스웨덴의 ‘시카다상’을 받았다. 그의 시는 외국어로 번역했을 때 오차가 아주 적다는 평을 듣는다. 주제의 보편성도 있지만, 비비 꼬지 않고 탁 터지는 직선적 시어가 언어 장벽을 넘어 전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님 시가 정열적인 스페인어권과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은데. “스페인이 주는 열기는 제국주의적인 권위와 전통에 대한 자부가 있으면서도 플라멩코나 투우로 표현되는 어떤 천부의 광기, 피, 햇살…, 그런 거죠. 스페인 청중들도 내 시에 쉽게 빨려드는 느낌을 받았어요. 당신은 굉장히 스페인권에 어울린다는 청중도 있었고. 내가 그쪽 문화권인 파블로 네루다 등의 시에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내 피 속에는 아마 스페인의 햇살과 피가 DNA처럼 들어가 있을 것이라고 그런 얘기도 했습니다.” ―이번에 본 플라멩코는 달랐나요. “저는 여성시인이지만 감상을 혐오해요. 하지만 이번에 본 플라멩코는 내가 호남의, 남도의 딸로서 밑바닥에 가지고 있는, 어린 시절 들었던 판소리, 육자배기, 미친 여자들의 춤, 장돌뱅이의 몸부림이 다 있더라고요.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아팠어요. 내게 문학적 재능이 있다면,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모어(母語)가 굉장히 영향을 미쳤죠. 호남의 판소리적 과장 어법이랄까, 그런 것이 내 뇌파 속에 심어졌고. 열한 살 때 혼자 광주로 유학을 가, 엄청난 외로움이 밀려왔던 것도 좋은 문학의 모태를 이루지 않았나 싶어요. 6·25전쟁 후 열한 살까지 뛰놀던 황폐한 남도의 자연도 있을 테고.” 그에 따르면 자신을 시인으로 키운 두어 가지 중 어머니와 남도의 소리와 들판이 그 첫 번째다. 이번에 플라멩코는 그것을 건드려 공명시킨 것 같다. “마드리드 명품거리엘 갔더니 서점이 있고 가장 좋은 테이블에 시집이 있었어요. 스페인의 국력은 쇠락했다지만, 문학의 일등국으로서 충분히 고개가 숙어지더군요. 돌아와 우리 주변에 횡행하는 최하류의 언어들…, 그것들이 흙탕물처럼 느껴졌어요. 정치적 언어들도 좀 세련되고 멋있을 수 있잖아요. 어떻게 입에 그런 언어를 품고 다니는지.” ‘광기와 예술’의 나라에서 돌아와 문 시인은 곧바로 “답답하다”고 했다. 보궐선거와 연금개혁 등으로 정치판의 주판알을 굴리는 뉴스가 온통 시끌시끌하던 때였다.  ―우리 사회가 나이 든 사람이든, 젊은이든 기댈 곳 없이 어렵습니다. 시가 어떤 위로가 될 수 있을 까요. “저도 너무 절실하고 평생 해온 질문인데…. 그런데 사회에 이익이 돼야 하고, 의미가 있어야 하고, 그런 시도 있겠으나 저는 실제로 그걸 좋은 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시는 존재함으로써 그 자체가 위로를 줄 때가 있고, 자극을 줄 때도 있는 거지. 꽃이 피었다 해서 그것이 위로를 주려 한 건 아니고 그럴 이유도 없고. 시인이 헤쳐오고 가꾸어온 삶과 언어가 그냥 위로가 된다면 그것이 다라고 봐야죠.” ―시가 사람들을 치유하는 시대는 끝났다는 말인지. “사람들이 시를 갈증 하는 데 그걸 덜어주지 못한다면, 시인들의 역량이 부족하다고 봐요. 시가 어렵고 제대로 닦이지 않은 엉성한 채로 발표되는 게 많아요. 과잉이 더 나빠요. 쉬운 시가 꼭 좋은 것은 아니지만, 자기의 암실에서 혼자 지껄이던 암호문 같은, 무당의 주문 같은, 제대로 발효되지 않은 미성숙 작품을 쏟아내면 사람들의 갈증을 해소시키겠냐는 거죠. 나에게 어떻게 쑥쑥 시를 쓰느냐 하는 분들이 있는데, 정말 수천 번 고쳐요. 최근에 내 시를 좋아하는 분이 계시구나 하는 것을 실감할 때, 그것은 어렵고 복잡한 시에 대한 실망의 상대적인 효과라고 봅니다.” 그는 지난해 말 발표한 시에서 ‘속도와 물신 앞에 무릎 꿇지 않으려고 버둥거렸지만/시간의 검푸른 이끼 속으로 빨려들어 갔어요/이윽고 내 안의 늙은 독재자가 나를 덮쳤어요’(‘독재자에 대하여’ 중)라고 시인으로서의 쉽지 않은 삶을 고백했다. “제가 성인으로 살아온 50년이 한국사회로서는 속도와 경제가치가 극대화된 시기예요. 이런 사회는 시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죠. 이 말도 안 되는 시를 가지고, 이 미약한 향기로 생을 유지한다는 것은 엄청난 기적이고, 무모한 모험이에요. 그런데 이런 것을 견디고, 견디고, 거기까지 언어로 투시하는 힘을 가져간다면 흔들리지 않는 자기 것을 성취하겠지요. 제가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려고 노력하기는 합니다.” ―어려서부터 ‘문학 천재’로 이름을 날렸는데, 문학적 재능은 어떤 건가요. 문학의 경락(經絡)이 뚫린 분들이 시인이 되는가요. “중등학교 시절 전국 백일장을 제패하고 막상 대학에 가 전공을 할 때 ‘과연 내게 재능이 있나’하는 회의가 들었어요. 백일장엔 자신이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문학과 부딪히니 재능이란 하찮은 거더군요. 결국 삶과생활에서 시가 나오는 거죠. 타고난 재능은 어머니와 남도의 자연과 소리, 어려서의 고독에서 나왔다면, 서울로 와서 공부하고 결혼해 뉴욕 유학까지 공간이 확장되면서 사고도 같이 넓어지며 변모했던 것 같아요. 내 시가 나이가 들수록 힘이 세진다는 것도, 지난한 삶 속에서 단련된 때문이죠.” ‘저녁 현관문이 열리고 결혼이 들어온다/추위와 무더위 속에서도 굳건한 고려와 조선과/일렬횡대의 전주 이씨 족보가/든든한 서방님이 들어오신다/신사임당이 어우동에게/시(詩)를 숨기고 나가 있으라 눈짓한다’(‘퇴근시간’ 중 일부) 그는 여성들이면 누구나 공감하는 시들을 여럿 발표했다. 이로 인해 페미니즘 시의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지만, 그에 대해서는 불편한 기색이다. “내 시를 페미니즘 시로 묶으려는 건 음모예요. 여성시로, 페미니즘 시로 묶어 문학사에 정식 인양을 안 하려는 것이에요. 내 시가 궁극적으로 노래하려고 하는 게 생명이요 사랑이지, 단순히 남녀의 문제가 아니에요. 페미니즘 시라는 하나의 굴레를 씌워 나를 배제하려는 문학의 기술방식을 단호히 거부해요. 자궁이라는 것이 여성의 몸에 있지만, 인류의 몸에 있는 것이듯 말이죠.” 문 시인의 ‘남편’이란 시는 중년 이상 여성뿐 아니라 남성들 사이에서도 자주 읊어진다.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되지 하고/돌아누워 버리는/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남편’ 중 일부) “내 시에서 늘 남편은 악역의 모델이죠. 미안하고 고맙죠. 그 사람도 재미있어하고. 그 사람한테 시 ‘남편’에 대해 질문이 많은 모양이에요. 그러면 ‘아내’라는 제목으로 이름만 바꾸면 자기 심정이라고 얘기했다고 하더라고요.” 문 시인의 작품에서 사랑과 욕망은 빼놓을 수 없다. ‘요새는 왜 사나이를 만나기가 힘들지/싱싱하게 몸부림치는/가물치처럼 온몸을 던져오는/거대한 파도를…’(‘다시 남자를 위하여’ 일부)도 인기 목록에 오른 시다. ―사랑과 욕망이 여전히 성성하신가요. “그야말로 치명적인 연애를 못 해본 것, 이것이 늘 시인으로서 열등감이었어요. 몰락, 파멸, 벼랑, 이렇게 치명적인 연애를 한 번 못해 본 시인이 창피하고 그랬었어요. 너무 뻔뻔하게 가정을 유지하는 것 같고, 애들 잘 키우고, 제사도 지내고, 학교 교수도 하고, 그러면서 시 속에서는 온갖 엄살을 떨고. 그런데 최근에는 생각을 고쳐먹었어요. 연애, 이미 한 것 같아요. 충분히 탐미나 관능시를 쓰기에 어렵지 않으니, 구체적 사건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어요. 욕망도 여전하지만, 요새 내가 나를 연애하는 여자로 설득하기가 어려워요. 가장 화가 나는 칭찬이 뭐냐면 ‘아직도 너무 고우세요’하는 거예요. 곱다는 것은 노인을 묘사하는 단어니까. 너무 매력 있어요. 이게 좋아요. 치사해서 에이, 관둬라. 연애 따위 차버리기로 했어요. 그런데 지뢰를 사방에 깔아 놓았으니 누가 밟으면 막지는 않겠어요, 하하하.” 그는 이미 시로 답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남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되고 말았다//(…)사랑하는 사람아/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비망록’ 중)       ==================================   문정희(文貞姬, 1947 ~ ) 생애 1947년 5월 25일 ~ 출생 전라남도 보성 분야 문학 작가 시인. 전남 보성 출생. 1969년 “월간 문학” 신인상에 ‘불면’과 ‘하늘’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주로 삶의 생명력과 의미에 대한 관찰 및 통찰을 시로 나타냈으며, 최근에는 여성성과 일상성을 기초로 한 특유의 시적 에너지와 삶에 대한 통찰을 담은 시를 많이 썼다. 시집으로 “문정희 시집”(1973), “아우내의 새”(1986), “그리운 나의 집”(1987), “제 몸 속에 살고 있는 새를 꺼내 주세요”(1990), “찔레”(2008) 등이 있다. 작품 작은 부엌 노래 이 시는 여성이 불평등한 결혼 제도와 가부장적 억압의 현실에서 벗어나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여 주체적인 삶을 영위해야 함을 시사해 주는 작품이다. 이 시의 주된 공간적 배경은 부엌이다. 한국 사회에서 부엌은 여성들의 공간으로 인식되어 왔고, 집안일 역시 여성들의 몫이라는 불평등한 고정 관념이 이어져 왔다. 화자는 가사 노동에 시달리는 여성들의 모습과 그 과정에서 겪는 고통과 아픔을 후각적 심상, 청각적 심상, 촉각적 심상 등 다양한 이미지를 사용해 감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또한 이 시는 단순히 여성의 억압적 현실을 나타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앞으로 여성이 나아가야 할 방향까지 제시하고 있다. ‘천형의 덜미를 푸는’과 ‘허물 벗는 소리’ 등을 통해 여성이 불평등한 현실을 극복하고 하나의 주체로서 당당히 자기 정체성을 획득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수록교과서 : (국어) 천재(정재찬), 상문 비망록 이 시는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남보다 나를 더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기를 희망하였으나 '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된 화자의 고백과 자기반성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심지어 화자는 '별'처럼 소중하고 아름다운 사랑하는 사람보다 자신을 더 사랑했기에 그로 인한 후회가 '돌'처럼 가슴에 아프게 박혀 있다고 말한다. 화자가 그러한 삶을 살아왔기에 '허둥거리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이 시의 제목이 '비망록'인 것도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을 기록하며다시는 그러한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화자의 다짐을 반영한 것이라 볼수 있다. 찬밥 이 시의 화자는 아픈 몸을 일으켜 '찬밥'을 먹고 있다. '찬밥'은 어머니의 사랑을 일깨워 주는 소재이면서, 항상 가족들에게 따스한 밥을 먹이고 정작 자신은 '찬밥'을 드셨던 어머니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화자는 아픈 몸을 이끌고 일부러 '찬밥'을 먹으면서 몸에서 제일 따스한 사랑을 품던, 신(神)을 대신하던 어머니를 떠올린다. 그러한 '어머니'라는 위치는 현재 화자의 위치와 같다. 자신의 처지가 곧 한 가정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화자는 '어머니'라는 시어를 한번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어머니'는 '사람', '그녀'로 대신 한다. 그것은 이 시에서 그리고 있는 대상이 화자의 어머니로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 시를 읽는모든 이의 어머니를 대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자 또한 '찬밥'을 먹으면서 우리의 어머니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동시에 스스로 어머니로서의 삶에 대한 가치를 다시금 떠올리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화자가 '세상의 찬밥'이 되었다는 의미는 세상에서 '어머니'에 대한 평가가 '찬밥'과 같지만 그 안에는 '희생과 사랑'이 가득하다는 의미의 또 다른 표현이다. 흙 이 시의 화자는 흙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흙의 이름이라고 드러내며 흙에 대한 예찬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특히 '흙 흙 흙'하고 흙을 부르면 '심장 저 깊은 곳으로 부터 / 눈물 냄새가 차오르고', ' 눈물샘 저 깊은 곳으로 부터 / 슬프고 아름다운 목숨의 메아리가 들려'오며, '하늘이 우물을 파놓고 두레박으로 / 자신을 퍼 올리는 소리가 들려온다'고 하며 흙에 대한 감흥을 형상화하고 있다. 또한 화자는 도공이 흙으로 달덩이를 낳고 농부가 흙에 씨앗을 뿌려 한 가마의 곡식을 만들어 내는 것을 바탕으로 '생명의 태반'이며 '귀의처'인 흙의 속성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즉,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모성성' 역시 시인이 여성의 삶에 대한 통찰을 주로 작품화시켰다는 점에 주목하여 해석할 수 있다. 퇴근 시간 이 시는 남편이 퇴근하는 것과 동시에 어우동과 같은 자신의 내밀한 욕망을 숨기고 신사임당과 같은 현모양처로 바뀌어야 하는 가부장제 속의 여성에 대한 담론을 드러내고 있다. 시의 표면에 그려진 가정의 모습은 '종요로운 가화만사성'이라 할 수 있을 만큼 평화로운 곳으로 비춰진다. 그러나 이는 억압적인 모순을 드러내기 위한 반어일 뿐이다. '굳건한 고려와 조선', '일렬횡대의 전주 이씨 족보', '우리의 든든한 서방님'은 면면히 이어온 가부장제를 의미한다 할 수 있다. 그러한 가부장제의 현실 속에서 여성은 시를 쓰고자 하는 꿈틀거리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든든한 서방님'이 퇴근한 이후로는 그러한 욕망을 감출 수밖에 없다. 심지어 그러한 욕망이 완전히 숨겨지질 않아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풋고추는 '난도질' 당한다. 그것도 모자라 여성의 내밀한 욕망을 상징하는 찌개는 끓어 넘치기까지 한다. 이처럼 이 작품은 여성의 내밀한 욕망을 숨기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억압적인 가부장제의 모순을 비판하고 있다. 겨울 일기 이 시는 사랑하는 임과 이별한 사람의 슬픔과 고통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 시에서 이별의 계절은 하필이면 차갑고 추운 겨울이다. 임과 이별하게 된 시적 화자는 그저누워서 죽을 것 같은 고통만 반추 동물처럼 반복해서 씹으면서 무기력하게 겨울을 보내고 있다. '누워서 편히 지냈다.'라는 것은 반어법으로, 실제로 편하게 지내서가 아니라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상태로 겨울을 보냈음을 뜻하는 표현이다. 어떻게든 되돌려 보려고 내뱉었던 수많은 말들도 아무 소용없이 지나가고, 이젠 마음 속에 어떤 분노나 열정도 남아 있지 않은 채 화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죽음만을 생각하며 누워 있는 것 뿐이다. 모든 것에 관심을 끊고 체념한 화자의 모습은 이별을 겪어 본 독자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           안녕하세요~ 가족·꿈·사랑 가족 여러분! 프론티어 기자단 6기 임윤경입니다. ^^ 광화문글판 25년을 맞아 지난 시간에는 광화문글판을 빛낸 시인, 정호승 시인과의 만남을 가졌는데요, 이번에는 문정희 시인과 함께 나눈 이야기를 여러분께 소개해드리려 해요.   교과서에서나 만나 뵙던 분들을 직접 만나 무척 설레고 긴장한 나머지 프론티어 기자단이 던진 우문에 문정희 시인께서는 너무도 멋진 현답을 해주셨는데요, 문정희 시인이 말하는 광화문글판, 그리고 시인의 문학관, 문정희 시인이 우리 청춘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까지 지금부터 그 모든 것을 펼쳐보도록 할게요!           문정희 시인은 진명여고 재학 중 첫 시집 『꽃숨』(1965)을 발간했고, 1969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불면」과 「하늘」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답니다. 이후 『문정희 시집』(1973),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1984), 『아우내의 새』(1986), 『그리운 나의 집』(1987), 『제 몸속에 살고 있는 새를 꺼내어 주세요』(1990) 등 수많은 시집을 냈으며 1975년 시극집 『새떼』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답니다. 문정희 시인은 국내의 각종 문학상을 수상하는 것은 물론 국제적으로도 큰 주목을 받았는데요, 2012년 프랑스 퀼트르(France Culture)의 인기 프로그램에 번역 시선집 『찬밥을 먹던 사람』이 소개되었고, 최근에는 프랑스의 예술전문방송 아르테 텔레비전이 이라는 5부작 프로그램을 제작하며 문정희 시인을 취재하기도 했다고 해요. 문정희 시인은 자유와 고독을 화두로 삼아 시를 지어온 작가로 평가 받고 있는데요, 여기에 다양한 각도에서 여성의 존재를 고찰해오면서 '여성적 생명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로도 손꼽히고 있답니다.       ==================================================================   나는 많은 곳을 여행했고,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렇게 세상을 떠돌다가 돌아올 때면, 그만큼 나의 영혼도 더 넓어졌기를, 그리고 책은 언제나 나와 가장 내밀한 혈연을 유지하기를 기도했다. 가을은, 빛나는 시어, 알알이 여문 지혜로 내 안에 숨은 아름다움을 깨우는 계절이다. 한 권의 책으로, 문학의 도끼로 내 삶을 깨워라. 책 없는 행복은 없다.  진명여고 재학 중 백일장을 석권하며 주목을 받았고, 여고생으로서는 한국 최초로 첫 시집『꽃숨』을 발간했다. 미당 서정주의 문하에서 시를 배웠으며, 동국대 국문과에 재학 중이던 1969년『월간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일찍이 을 수상했고 과 , 마케도니아 테토보 세계 문학 포럼에서 작품「분수」로 을 받았다. 2010년 스웨덴의 노벨문학상 수상시인 헨리 마르틴손 재단이 수여하는 을 수상했다. 시집으로『남자를 위하여』『오라, 거짓 사랑아』『양귀비꽃 머리에 꽂고』『나는 문이다』『다산의 처녀』 외에 시선십『지금 장미를 따라』 등이 있다. 영어 번역시집『Woman on the terrace』외 다수의 시집이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 세계 10여 개 언어권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고려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동국대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청춘에 대한 당부를 끝으로, 지금까지 광화문글판을 빛내주신 문정희 시인과의 만남을 가져보았는데 어떠셨나요? 프론티어 기자가 실제로 만나본 문정희 시인은 변함 없는 삶의 열정으로 가득 찬 매우 멋진 분이셨답니다. 가꿈사 가족 여러분도 문정의 시인의 열정을 가득 느껴보셨기를 바라요. 마지막으로 2009년 광화문글판 겨울편을 빛내주었던 문정희 시인의 을 소개해드리며 마치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 ^0^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 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문정희, ====================================================       한국시인협회(회장 문정희)가 반년간(半年刊) 시 전문 웹진 『시인불멸』을 창간, 공개. 시인협회가 창설된 이래로 58년만에 오프(Off Line) 문예지가 아닌 웹진으로 공개해서 시단 에서 크게 주목하고 있다. 사실 『시인불멸』의 창간은 지난해 타계한 故 김종철 전 한국시인협 회장의 의지에 따른 것으로 김 전 회장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한국시인협회의 새로운 도약과 한국 시단의 발전을 을 위해 협회에서 주관하는 시전문지가 절실하다고 판단해서 실무팀을 꾸 리고 전폭적인 헌신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에 지금의 문정희 회장이 고인의 뜻을 이어받아 시전문 웹진(Webzine)을 한국시인협회 홈 페이지와 연계하여 한국토지주택공사의 후원으로 제작되었다.      김 전 회장은 생전에 쓴 창간사에서 "외부의 불필요한 말들이 섞이지 않은, 오직 시와 시인만을 위한 잡지가 창간된다는 것은 가슴 뛰는 일"이라며 "의미 있는 혁신을 담는 시 전문지로 이어지 기를 바란다"고 소회를 밝혔다.​ ​ ​   ​ 웹진 『시인불멸』 편집위원:   김요일 시인, 박정대 시인, 박상순 시인, 박후기 시인, 김이듬 시인, 황병승 시인, 김도언 시인, 이해존 시인​ ​ ​   김요일, 박정대, 박상순, 박후기, 김이듬, 황병승, 김도언, 이해존 시인 등이 편집위원으로 위촉 되어 1년 가까운 준비기간을 거쳐 공개된 '시인불멸'이라는 제호는 시인은 언제든지 소멸할 수 도 있지만, 소멸해서는 안 된다는 다짐과 각오의 표현이다.     이번 창간호에는 강은교, 김영승, 함성호, 허연, 함기석, 김중식, 조말선, 조동범, 이준규, 김산, 최창균, 류근, 고영민, 김지율, 이제니, 신동옥, 박장호, 리산 등의 18명의 의 다양한 신작시를 비 롯하여 기획특집으로 한국시인협회 58년의 역사를 반성적으로 돌아보는 성찰과 ‘시대 정신과 시’라는 주제의 대담이 실렸으며 평론을 겸하고 있는 이재훈 시인의 ‘우리 시사의 대표 시론-허 만하 편’, 시단의 어른 정진규 선생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실렸으며 또한 박은정 시인 이 장석주 시인과 대화를 나눈 '시인 선배를 만나다', 편집위원인 황병승이 싱어송라이터 요조 를 만나 대화를 나눈 '예술가의 초상', 김경주 시인의 24시간을 밀착 취재해 선보이는 '시인의 2 4시' 등이 담겨 있다. ​ 한국시인협회에 의해 새로이 창간된 웹진 『시인불멸』은 한국시인협회 홈페이지(http://www.koreapoet.org)에 접속하면 무료로 연중 24시간 무료로 구독할 수 있다.             @@ 독거의 꽃으로서의 자유와 고독을 노래하던 제가 한국시인협회의 깃발 아래 섰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단체와 조직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 시인협회라는 이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속도와 물질 가치로 혼탁한 이 시대, 시인은 심해 잠수부와 같이 침몰한 세상을 인양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시인들이 모인 한국시인협회는 여러 의미에서 지금 더욱 특별하고 절박한 의미를 갖습니다.   좋은 시는 고통과 절망을 외면하지 않고 바로 보며, 창의적인 상상력으로 불확   실한 것들에 의미와 형태를 부여합니다.   좋은 시인은 삶과 세계를 통찰하고 그것을 선험과 직관의 언어로 세상에 돌려주는 비둘기들입니다.   그런 시인들이 있음으로 세상은 보다 밝아지고, 우리 삶의 안과 밖은 풍요해집니다.   시인협회는 진정 살아 있는 문학을 지향해야 합니다.   문학은 늘 젊습니다.   새로운 숲을 탐험하는 것은 가슴 뛰는 일입니다.   문명과 네트워크가 시대를 점령한다 해도 세계를 언어로 호명하여 정화시키는 시의 감동은 영원합니다.   세련되고 격조 있는 한국의 시에 세계의 눈들이 쏠릴 것을 확신합니다.   저는 임기 동안 고 김종철 회장이 꿈꾸었던 열정적인 계획들을 잇고 가다듬어 실천해 나가겠습니다.   시의 달 제정, 시 잡지 발간들에 더 보태 한국 프랑스 수교 120주년을 기념하는 프랑스 시낭송,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수의 대학과 문화원 등을 통한 번역 소개 및 시낭송 등을 추진하여 세계를 향한 의미 있는 발걸음을 내딛고자 합니다.   시인은 시를 쓰고 있을 때만이 시인입니다.   회원 여러분의 진정한 시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2014년 9월   한국시인협회 제40대 회장 문 정 희 =============================================       사단법인 한국시인협회에서는 제39대 故 김종철 회장의 별세에 따라 2014년 8월 26일(화) 평의원회의(김남조 시인 외 11인)를 열고 협회 現심의위원장이면서 동국대 석좌교수인 문정희 시인을 제40대 회장으로 추천, 9월 4일(목) 등기이사회의 인준을 마침. 신임 문정희 회장은 전임자의 잔여 임기 2016년 3월까지 임기를 수행.           .                               미당 서정주시인과 함께      목숨의 노래 문정희    당신 처음 만났을 때 사랑한다 이 말은 너무 작았습니다   같이 살자 이 말은 너무 흔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두고 목숨을 내걸었습니다   목숨의 처음과 끝 천국에서 지옥까지 가고 싶었습니다   맨발로 당신과 함께 타오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타오르다 죽고 싶었습니다       물 만드는 여자   딸아, 아무 데나 서서 오줌을 누지 말아라 푸른 나무 아래 앉아서 가만가만 누어라 아름다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미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아라 그 소리에 세상의 풀들이 무성히 자라고 네가 대지의 어머니가 되어 가는 소리를   때때로 편견처럼 완강한 바위에다 오줌을 갈겨 주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제의를 치르듯 조용히 치마를 걷어올리고 보름달 탐스러운 네 하초를 대지에다 살짝 대어라 그리고는 쉬이쉬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밀 때 비로소 너와 대지가 한 몸이 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푸른 생명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내 귀한 여자야         손톱                                                        지는 저녁해를 마주하고 앉아 팔순 어머니의 손톱을 자른다 벌써 하얀 반달이 떠오르는 어머니의 손톱을 자르면 세상의 바람 소리도 모두 잘리어나간다 어쩌면 이쯤에서 한쪽 반달은 이승으로 떨어지고 또 한쪽은 어머니 따라 하늘로 가리 시시각각으로 강물은 깊어가는데 이제 작은 짐승처럼 외로운 어머니의 등 은비늘처럼 부드러운 어머니의 손톱이 피울 저 먼나라의 꽃은 무슨 색일까? 무슨 꽃이 어머니의 꽃밭에 피어나 날마다 그녀가 주는 물에 나처럼 가슴이 젖을까. 흔들리며 흔들리며 팔순 어머니의 손톱을 자른다.       순간                                                        찰랑이는 햇살처럼 사랑은 늘 곁에 있었지만 나는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지 못했다   쳐다보면 숨이 막히는 어쩌지 못하는 순간처럼 그렇게 눈부시게 보내버리고 그리고 오래오래 그리워했다       시간 2                                                      갈수록 갈수록 멀기만 하다.    너는 내게 있어 흐르는 물이 아니었다.    소용돌이었다.    그래서 나는 네가 좋았다.    위로 치솟을 땐 어지러웠고    부서져내릴 때는 신이 났다.    그 몰락조차도 재미있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 속에 빠져 부드러이 죽어갔다.        알몸노래                                                 - 나의 육체의 꿈     추운 겨울날에도 식지 않고 잘 도는 내 피만큼만 내가 따뜻한 사람이였으면 내 살만큼만 내가 부드러운 사람이었으면 내 뼈만큼만 내가 곧고 단단한 사람이었으면 그러면 이제 아름다운 어른으로 저 살아 있는 대지에다 겸허히 돌려드릴 텐데 돌려드리기 전 한번만 꿈에도 그리운 네 피와 살과 뼈와 만나서 지지지 온 땅이 으스러지는 필생의 사랑을 하고 말 텐데       우리들 마음속에                                         빛은 해에게서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그대 손을 잡으면 거기 따뜻한 체온이 있듯 우리들 마음속에 살아 있는 사랑의 빛을 나는 안다.   마음속에 하늘이 있고 마음속에 해보다 더 눈부시고 따스한 사랑이 있어   어둡고 추운 골목에는 밤마다 어김없이 등불이 피어난다.   누군가는 세상은 추운 곳이라고 말하지만 또 누군가는 세상은 사막처럼 끝이 없는 곳이라고 말하지만   무거운 바위 틈에서도 풀꽃이 피고 얼음장을 뚫고도 맑은 물이 흐르듯 그늘진 거리에 피어나는 사랑의 빛을 보라 거치른 산등성이를 어루만지는 따스한 손길을 보라   우리 마음속에 들어 있는 하늘 해보다 눈부시고 따스한 빛이 아니면 어두운 밤에 누가 저 등불을 켜는 것이며 세상에 봄을 가져다주리.       유리창을 닦으며                                         누군가가 그리운 날은 창을 닦는다   창에는 하늘 아래 가장 눈부신 유리가 끼워 있어   천 도의 불로 꿈을 태우고 만 도의 뜨거움으로 영혼을 살라 만든 유리가 끼워 있어   솔바람보다도 창창하고 종소리보다도 은은한 노래가 떠오른다   온몸으로 받아들이되 자신은 그림자조차 드러내지 않는 오래도록 못 잊을 사랑 하나 살고 있다   누군가 그리운 날은 창을 닦아서   맑고 투명한 햇살에 그리움을 말린다.       유쾌한 사랑의 노래                                     대장간에서 만드는 것은 칼이 아니라 불꽃이다 삶은 순전히 불꽃인지도 모르겠다 시가 어렵다고 하지만 가는 곳마다 시인이 있고 세상이 메말랐다고 하는데도 유쾌한 사랑도 의외로 많다 시는 언제나 천 도의 불에 연도된 칼이어야 할까? 사랑도 그렇게 깊은 것일까? 손톱이 빠지도록 파보았지만 나는 한번도 그 수심을 보지 못했다 시 속에는 꽝꽝한 상처뿐이었고 사랑에도 독이 있어 한철 후면 어김없이 까맣게 시든 꽃만 거기 있었다 나도 이제 농담처럼 가볍게 사랑을 보내고싶다 대장간에서 만드는 것은 칼이 아니라 불꽃이다       율포의 기억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소금기 많은 푸른 물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바다가 뿌리 뽑혀 밀려 나간 후 꿈틀거리는 검은 뻘밭때문이었다 뻘 밭에 위험을 무릅쓰고 퍼덕거리는 것들 숨 쉬고 사는 것들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먹이를 건지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왜 무릎을 꺾는 것일까 깊게 허리를 굽혀야만 할까 생명이 사는 곳은 왜 저토록 쓸쓸한 맨살일까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저 무위(無爲)한 해조음을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물 위에 집을 짓는 새들과 각혈하듯 노을을 내뿜는 포구를 배경으로 성자처럼 뻘 밭에 고개를 숙이고 먹이를 건지는 슬프고 경건한 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별 이후                                                    너 떠나간 지 세상의 달력으론 열흘 되었고 내 피의 달력으론 십년 되었다. 나 슬픈 것은 네가 없는데도 밤 오면 잠들어야 하고 끼니 오면 입 안 가득 밥알 떠넣는 일이다. 옛날 옛날에 그 사람 되어가며 그냥 그렇게 너를 잊는 일이다. 이 아픔 그대로 있으면 그래서 숨막혀 나 죽으면 원도 없으리라 그러나 나 진실로 슬픈 것은 언젠가 너와 내가 이 뜨거움 까맣게 잊는다는 일이다.         전보                                                   나는 너에게 전보가 되고 싶다   어느 일몰의 시간이거나 창백한 달이 떠 있는 신새벽이어도 좋으리라   눈부신 화살처럼 날아가 지극히 짧은 일격으로   네 모든 생애를 바꾸어 버리는 축전이 되고 싶다   가만히 바라보면 아이들의 놀이처럼 싱거운 화면, 그 위에 꽂히는 한 장의 햇살이고 싶다   사랑이라든가 심지어 깊은 슬픔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전보가 되고 싶다       젊은 날                                                    새벽별처럼 아름다웠던 젊은 날에도 내 어깨 위엔 언제나 조그만 황혼이 걸려 있었다 향기로운 독버섯 냄새를 풍기며 손으로 나를 흔드는 바람이 있었다 머리칼 사이로 무수히 빠져 나가는 은비늘 같은 시간들 모든 이름이 덧없음을 그때 벌써 알고 있었다 아! 젊음은 그 지느러미 속을 헤엄치는 짧은 감탄사였다 온 몸에 감탄사가 붙어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른 잎사귀였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는 광풍의 거리 꿈과 멸망이 함께 출렁이는 젊음은 한 장의 플래카드였다 그리하여 나는 어서 너와 함께 낡은 어둠이 되고 싶었다 촛불밖에 스러지는 하얀 적막이 되고 싶었다       젊은 사랑                                             - 아들에게   아들아 너와 나 사이에는 신이 한 분 살고 계시나 보다.  왜 나는 너를 부를 때마다 이토록 간절해지는 것이며 네 뒷모습에 대고 나는 언제나 기도를 하는 것일까.  네가 어렸을 땐 우리 사이에 다만 아주 조그맣고 어리신 신이 계셔서  사탕 한 알에도 우주가 녹아들곤 했는데  이제 쳐다보기만 해도 훌쩍 큰 키의 젊은 사랑아  너와 나 사이에는 무슨 신이 한 분 살고 계셔서 이렇게 긴 강물이 끝도 없이 흐를까.       제비를 기다리며                                                제비들을 잘 돌보는 것은 우리집 가풍 말하자면 흥부의 영향이지만, 솔직히 제비보다는 박씨, 박씨보다는 박씨에서 쏟아질 금은보화 때문이지만 아시다시피 나는 가풍을 잘 이어가는 착한 딸 처마 밑에 제비들을 두루 잘 키우고 싶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강남에도 제비들이 좀체 나타나지 않아 지하철역에서 복권을 사서 주말이면 허공으로 날리기도 하고 참다못해 빈 제비집에 손을 넣었다가 뜻밖에 숨은 뱀에게 물리기도 한답니다 포장마차에서 죽은 제비다리를 구워먹으며 시름을 달래며 솔직히 내가 기다리는 것은 박씨거나 박 속에서 쏟아질 금은보화가 아니라 물찬 제비! 날렵하게 사모님처럼 허리를 감고 한바퀴 제비와 함께 휘익! 돌고싶은 것은 누구보다 당신이 더 잘 아시겠지       조등이 있는 풍경    이내 조등이 걸리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무도 울지 않았다 어머니는 80세까지 장수했으니까 우는 척만 했다 오랜 병석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머니가 죽었다 내 엄마, 그 눈물이 그 사람이 죽었다 저녁이 되자 더 기막힌 일이 일어났다 내가 배가 고파지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죽었는데 내 위장이 밥을 부르고 있었다 누군가 갖다준 슬픈 밥을 못 이긴 척 먹고 있을 때 고향에서 친척들이 들이닥쳤다 영정 앞에 그들은 잠시 고개를 숙인 뒤 몇 십 년만에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니, 이 사람이 막내 아닌가? 폭 늙었구려." 주저없이 나를 구덩이 속에 처박았다. 이어 더 정확한 조준으로 마지막 확인 사살을 했다 "못 알아보겠어. 꼭 돌아가신 어머니인 줄 알았네"       찔레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 꽃이 되었을 이름 오늘은 송이송이 횐 찔레꽃으로 피워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듯 추억을 털며 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다.   그대 사랑하는 동안 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아픔이 출렁 거려 늘 말을 잃어갔다.   오늘은 그 아픔조차 예쁘고 뽀족한 가시로 꽃 속에 매달고   슬퍼 하지 말고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       찬밥                                                     아픈 몸 일으켜 혼자 찬밥을 먹는다 찬밥 속에 서릿발이 목을 쑤신다 부엌에는 각종 전기 제품이 있어 1분만 단추를 눌러도 따끈한 밥이 되는 세상 찬밥을 먹기도 쉽지 않지만 오늘 혼자 찬밥을 먹는다 가족에겐 따스한 밥 지어 먹이고 찬밥을 먹던 사람 이 빠진 그릇에 찬밥 훑어 누가 남긴 무우 조각에 생선 가시를 핥고 몸에서는 제일 따스한 사랑을 뿜던 그녀 깊은 밤에도 혼자 달그럭거리던 그 손이 그리워 나 오늘 아픈 몸 일으켜 찬밥을 먹는다 집집마다 신을 보낼 수 없어 신 대신 보냈다는 설도 있지만 홀로 먹는 찬밥 속에서 그녀를 만난다 나 오늘 세상의 찬밥이 되어       키 큰 남자를 보면   키 큰 남자를 보면 가만히 팔 걸고 싶다 어린 날 오빠 팔에 매달리듯 그렇게 매달리고 싶다 나팔꽃이 되어도 좋을까 아니, 바람에 나부끼는 은사시나무에 올라가서 그의 눈썹을 만져 보고 싶다 아름다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그의 눈썹에 한 개의 잎으로 매달려 푸른 하늘을 조금씩 갉아먹고 싶다 누에처럼 긴 잠 들고 싶다 키 큰 남자를 보면       축복의 노래 - 문 정 희   사랑의 이름으로 반지 만들고 영혼의 향기로 촛불 밝혔네   저 멀리 반짝이는 아름다운 별 하나 둘이 함께 바라보며 걸어가리라   오늘은 새 길을 떠나는 축복의 날 내딛는 발자국마다 햇살이 내리어 그대의 맑은 눈 빛 이슬 매쳤네   둘이서 하나되어 행복의 문을 열면 비바람인들 어이 눈부시지 않으리 추위인들 어이 따스하지 않으리   아아 오늘은 아름다운 약속의 날 사랑의 이름으로 축복하리라   돌아가는 길  - 문정희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 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라는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첼로처럼 살고싶다   - 문정희   하룻밤 쯤 첼로처럼 살고싶다 매캐한 담배연기 같은 목소리로 허공을 긁고싶다   기껏해야 줄 몇개로 풍만한 여자의 허리 같은 몸통 하나로 무수한 별을 떨어뜨리고 싶다 지분 냄새 풍기는 은빛 샌들의 드레스들을 넥타이 맨 신사들을 신사의 허세와 속물들을 일제히 기립시켜 손바닥이 얼얼하도록 박수를 치게 하고 싶다   죽은 귀를 잘라버리고 맑은 샘물을 길어올리게 하고 싶다 슬픈 사람들의 가슴을 박박 긁어 신록이 돋게 하고 싶다   하룻밤 쯤 첼로처럼 살고 싶다     사랑 신고    -문정희   사랑은 자주 불법 위에 터를 닦고 행복은 무허가 주택이기 쉽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철거반이 오기 전에 마치 유목민의 천막처럼 이내 빈 터만 남으니까   가끔 불법 유턴을 하여 위반과 비밀 위에 터를 닦지만 사랑을 신고할 서류는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를 발명했는지도 모른다 오늘 밤 그런 생각을 해본다   사람들은 진실로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문득 이 도시의 모든 평화가 위조 같다 어떤 사랑으로 한번 장렬하게 추락할 수 있을까 맹목의 힘으로 끝까지 밀고 나가볼까 사람들이 가끔 목젖을 떨며 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진정한 사랑, 진정한 고통, 진정한 희망은 어떤 서류에도 기록되지 않는다 오늘 밤 그런 생각을 해본다   돌아가는 길  - 문정희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 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 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라는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수목사이로   - 문정희 시인   왜 나는 저 쭉 쭉 뻗은 수목들을 서방삼을 생각을 못 했을까   손가락을 쫙 펴고 뜻도 없이 어깨에 힘을 주고 서 있는 아이들 그림만 쳐다보았을까   시간은 레먼 같은 것 처음엔 향긋한 냄새도 풍기지만 찔금찔금 눈물도 나게 하지만 그러나 벗기고 나면 아무것도 안 남느니,   하늘을 찌를 듯한 검초록을 두르고   쉽게 흔들리지 않는 수목이나 서방삼아 크낙새 같은 새끼들이나 주르르 낳았어도 좋았을 것을 크낙새 같이 귀한 자식들 퍼덕퍼덕 길러 봐도 좋았을 것을   사람의 가을-문정희   나의 신은 나입니다. 이 가을날 내가 가진 모든 언어로 내가 나의 신입니다. 별과 별 사이 너와 나 사이 가을이 왔습니다. 맨 처음 신이 가지고 온 검으로 자르고 잘라서 모든 것은 홀로 빛납니다. 저 낱낱이 하나인 잎들 저 자유로이 홀로인 새들 저 잎과 저 새를 언어로 옮기는 일이 시를 쓰는 일이, 이 가을 산을 옮기는 일만큼 힘이 듭니다. 저 하나로 완성입니다. 새, 별, 꽃, 잎, 산, 옷, 밥, 집, 땅, 피, 몸, 물, 불, 꿈, 섬 그리고 너, 나 이미 한 편의 시입니다. 비로소 내가 나의 신입니다. 이 가을날   물새   - 문정희   저물녘 석모도 앞바다에 떠 있는 저 물새는 한채의 암자 같다 깊고 푸른 멍 같은 바다를 깔고 앉아 가파른 물살을 잠재우는 것을 보라   쉴새없이 기우뚱거리는 마음 차가운 심연에 담그고 부르튼 발로 자맥질하여 물 위에 암자를 세운 저 새는 누구일까   나인지도 모른다 산허리를 돌아 도무지 뜻을 알 수 없는 어둠이 내려오는 시간 날개로 허공을 밀며 천리를 달려온 저 새는   지금 움직이지 않고 홀로 또 천리를 가고 있다   이렇게 말해도 될는지 생이란 물 위에 뜬 하루라 바람의 발목을 잡고 출렁이는 생이란 끝없는 물음인지도 모른다   고달픈 아랫도리 물에 담그고 문득 좌선에 든 저물녘 물 위에 뜬 암자를 향해 나는 조바심처럼 돌을 들어 힘껏 화두 하나를 던진다 바다의 살점이 불끈 고통처럼 치솟는다 날개를 펼치고 암자는 불현듯 먼 하늘로 사라진다   연인에게 --문정희   연인아, 여름이 오면 손잡이가 빨간 가위 하나 들고 와 함부로 뻗친 가지 척척 잘라다오 부질없는 내 열망을 잘라다오 수북이 땅 위에 나뭇가지 쌓이면 그 가지로 허공에다 새집 한 채를 지어다오 바람 불 때마다 흔들리며 노래를 알처럼 까는 새 한 마리 키우리라   한밤중에 ―문정희  한밤중에 번개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단숨에 내 심장에서  붉은 루비 같은 죄들을 꺼내  검은 하늘에 대고 펄럭이었다  낮 시간 동안 그토록 맑은 햇살을 풀어  푸른 숲과 새들을 키우던  저 산이 보낸 거라고는 믿기 어려운  번개가 한밤중에 나를 찾아왔다  부들부들 떨고 잇는 내 심장에서  붉고 선명한 루비들을 꺼내  검은 하늘에 뿌렸다  내일 아침 나의 침대에는  한 사람의 죄수가 밤새  깊고 슬픈 자술서를 쓰다  쓰러져 있으리라  문정희 시인의 시는 술술 잘 읽혀 내려간다. 관념적인 상징이나 작위적인 기교 없이 원초적 본능에 충실하게 씌어진 솔직하고 건강한 시를 생산해 내기 때문이다. 인용시 「한밤중에」서도 ‘한밤중에 번개가 나를 찾아왔다’는 일상적인 이야기로 시작한다. 번개와 천둥의 원인을 밝히는 과학적인 설명에 상관없이 번개 치는 밤이면 누구나 죄의식에 한 번쯤 사로잡혀 보았을 것이다. 번갯불이 번쩍하고 공포의 순간인 몇 초가 지나면 벼락 떨어지는 소리, 천둥소리가 한바탕 나고 누군가 나대신 죄값을 치르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몸을 낮추거나 눈을 감고서라도 공포의 순간을 피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러나 문정희 시인은 한밤중 찾아온 번개를 피하지 않고 정면 승부한다. 번개의 칼로 심장에서 죄들을 끄집어내도 피하지 않는다. 두렵고 끔찍한 장면이 ‘붉은 루비 같은 죄들’이라는 환상적인 표현으로 보상을 받는다. 그의 죄의 모습은 투명하고 빛이 아름다운 일급 보석인 루비인 것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짓는 죄가 무슨 죄가 될 수 있느냐는 신에 대한 항변의 대가물이기 때문이다. 신이나 초인(超人)이 아닌 이상, 모든 인간은 세속적인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사회적인 동물로서의 인간은 신의 입장에서 보면 숱한 죄의 덩어리로 보이겠지만, 피조물인 인간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만들어 낸 조물주에게 따질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낮에는 맑은 햇살을 풀어내고 푸른 숲과 새들을 키우며 자신의 피조물들을 자랑하던 신(산으로 상징된)이 한밤중에 어떻게 그 죄값을 물을 수 있다는 것인지, 시인은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들은 신이 각인시킨 원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시인의 심장에서 신은 죄를 끄집어내 검은 하늘에 뿌린다. 검은 하늘에 던져진 붉은 루비는, 즉 죄의 실체는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한 사람의 ‘죄수’가 되어 밤새도록 자신의 죄를 반성하고 ‘깊고 슬픈 자술서를 쓰’며 신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번개나 천둥이 요란하게 치는 밤이면 누구나 원죄의식에 사로잡히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너의 죄를 고백하라고 하늘에서 호통을 치는 것 같은 소리로 들릴 때도 있었을 것이다. 문정희 시인은 이러한 인간의 원죄의식을 자연현상을 통해 명료하게 그려내, 벗어날 수 없는 원죄의식에 대한 절망감과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게 한다.    사랑만을 위해 꿈꾸는 완전한 고립  ― 문정희의 「한계령을 위한 연가」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이 시는 5개의 연으로 이루어진 사랑의 노래, 사랑을 위한 노래이다. 흔히 사춘기(思春期)에 들어선 젊은이들이 부르는, 사랑을 위한 '소망의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쉽고 평이한 단어들이 사용되고 있으며, 화자는 줄거리를 어렵게 이끌어가려고 애쓰지 않는다. 자신의 일기장 한켠에 적어두고 싶은 비망록(備忘錄)처럼 화자는 숨김없이 솔직한 감정들을 쏟아놓고 있다.  화자는 시라는 구조나 틀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대신에 감정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맡긴다. 화자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얗게 눈이 덮인 겨울, 사람들의 감탄이 공포와 두려움으로 변해갈 때에도 화자는 자신이 설정한 고립의 자리, 즉 '동화의 나라'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것을 생각하며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한다.  그러나, 화자는 현재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지도 않은 상태이고, 화자가 눈부신 고립을 꿈꾸며 한겨울 한계령을 넘어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미완성의 노래일 수밖에 없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못 잊을 사랑을 생각하며 미완성이나마 한바탕 사랑의 노래를 지어 부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할 것이다.  이제 다섯 개의 연을 따라 화자가 부르는 연가(戀歌)를 살펴보기로 하자. 화자가 그리고 있는 동화의 나라에서 함께 사랑의 노래를 불러보아도 좋으리라.  먼저, 첫째 연에서 화자는 하나의 꿈을 꾼다. 화자에게 있어서 그 꿈은 장난삼아 꾸어보는 꿈일 수도 있고, 현실의 외로움을 타개할 운명의 사람을 만나 운명적인 사랑을 나누고 싶은 절박한 꿈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전체적인 흐름을 통해 볼 때, 진지하고 절박한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 절박함은 화자의 톡톡 튀는 '끼'에 뒤덮여 보이지 않는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화자는 대뜸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어한다. 화자는 자신이 처해 있는 삶에 확실한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특별한 사건을 꿈꾸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뜻밖의 폭설이다. 화자는 구차하게 계획된 삶보다는 운명처럼 묶여 돌아가는 자유분방한 삶을 추구하고 있다. 뜻밖의 폭설이라는 외부적인 조건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그 상황에 묶여들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화자는 뜻밖의 폭설을 기대하고 있지만, 화자가 설정하고 있는 여러 가지 상황을 미루어 볼 때, 화자에게 있어서 폭설은 결코 '뜻밖의' 것이 될 수가 없다. 화자가 못 잊을 사람과 함께 한계령을 넘는 시간적인 배경이 한겨울이고, 공간적인 배경으로 설정된 한계령은 겨울철에 가장 많은 눈이 내리는 곳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화자에게 못 잊을 사람이 있어서 함께 고개를 넘는다면, '뜻밖의 폭설'이 아닌, 처음부터 화자가 의도하고 있는 일상적인 폭설을 만나게 될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화자는 능청스럽게도 '뜻밖의 폭설'을 운운하며 자신이 꿈꾸는 사랑을 색다르고 운명적인 것으로 부각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4행 이하에서 화자는 폭설을 만나 벌어질 제반 상황들을 소개한다. 가장 객관적인 보도 역할을 하는 뉴스들은 앞다투어 기록적인 폭설을 알리고, 쌓인 눈 때문에 자동차들은 제 기능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야단법석을 피운다. 그러나, 7행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화자는 그 무질서한 현장 속에서도 은근히 자신의 꿈을 꾸고 있다. 그 상황이 좀더 악화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황, 인간의 힘으로는 얼마간 극복할 수 없는 그 자연이 주는 한계를 못 이긴 척 받아들이며 묶이고 싶어 안달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화자는 다른 사람들의 불편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만을 위한 짜릿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다.  2연은 화자의 작은 소망이 좀더 구체화되고 있다. 그(혹은 '그녀', 이하 '그'로만 표기)에게 고립은 오히려 눈부신 것이다. 그가 꿈꾸던 대로, 모든 것들이 눈 속에서 단절되어 오갈 수 없는 한계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화자에게 있어서 그 나라는 동화의 나라이다. 그가 꿈꾸었던 대로 모든 일들이 척척 풀려나가는 행복한 나라이다. 이제 화자가 꿈꾸는 것은 물리적으로 그의 발이 묶이는 정도가 아니라, 그의 운명이 묶이는 것이다.  이러한 화자의 소망은 못 잊을 사람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다. 여기에서 상황이나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오히려 악한 상황을 빗대어 창조적으로 사랑을 만들어나가려는 화자의 강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오직 사랑만을 꿈꾸고 사랑만을 생각하는 화자의 지고한 사랑에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3연에 들어서 화자는 날이 어두워지자 하얗게 쌓인 눈에 취해 감탄하던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씩 공포로 변하는 것을 지켜본다. 사람들은 이제 저마다 두려움의 모습들을 드러내기 시작하지만, 그럴수록 화자는 그 시간이 신나기만 하다. 그가 꿈꾸던 완전한 고립이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현실 속에서도 도리어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못 잊을 사람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헬리콥터가 출동한다. 그러나, 화자는 자신을 구조하기 위해 하늘을 선회하는 헬리콥터를 향해 자신의 위치를 알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눈 속에 꼭꼭 숨어 그 고립의 순간을 즐기겠다는 것이다. 헬리콥터가 인명 구조를 마치고, 눈 속에서 먹이를 찾지 못한 야생의 새들과 짐승들을 위해 먹이를 뿌릴 때에도 구조 요청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화자에게는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  4연은 3연의 내용과 연결되는 것으로,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구조를 요청하지 않고 고립의 상황 속에 남아 있을 것을 다시금 반복하고 있다. 산은 폭설 속에서도 살아 있다. 나무들은 폭설 속에서도 살아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화자 역시 시퍼렇게 살아 있다. 그것이 사랑의 힘이고 생명의 힘이다.  전쟁터에서 젊은 군인들의 심장을 향해 포탄을 퍼부어 대던, 무섭고 무자비하던 헬리콥터들이 이제는 역할을 바꾸어 생명을 살려내기 위해, 사람만이 아닌 야생의 동물들에게까지 자비롭게 일용할 양식을 뿌려줄 때에도 화자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겠다는 것이다. 사람이 주는 인위적인 혜택을 거부하고, 화자는 자연이 가져다 준 운명, 즉 폭설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함께 하고 싶은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 화자는 자신에게 닥쳐온 폭설이 결코 시련이나 아픔이 아니라, 도리어 축복의 순간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 축복의 순간을 즐기면서 흥분된 마음으로 몸둘 바를 몰라하는 화자의 모습을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웃음이 나오지 않는가.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오직 한 사람만을 생각하며 진정 그 사람과 함께 운명을 같이할 사람은 흔치 않으니, 우리의 삶 속에서 뜻밖에 찾아오는 아픔과 시련은 우리가 누군가를 진실하게 사랑하는지 시험하는 좋은 시금석(試金石)이 될 것이다.               [출처] [스크랩] 문정희 시 모음|작성자 한동안            
377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최두석 - 성에꽃 댓글:  조회:4144  추천:0  2015-12-26
성에꽃                       최두석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어제 이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깁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낸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자리를 옮겨다니며 보고  다시 꽃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  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낸 정열의 숨결이던가  일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  성에꽃 한 잎 지우고  이마를 대고 본다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가 금지된 친구여.                                               -------------------------------------------  *성에꽃 : 민중의 애환과 열정이 서려 있는 삶의 결정체로, 민중의 삶에 대한 시인의 애정이 반영되어 있는 이미지이다.  *정열의 숨결 : 공동체 구성원들끼리 나누는 연대의식이나 애정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여 : 민중의 삶을 억압하는 현실 상황 속에서 그에 대항하다 굴레를 쓰고 있는 친구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나타나 있다. ●핵심정리 ▶갈래: 자유시, 서정시  ▶성격: 상징법, 비유적(객관적 상관물), 역설법, 사회 비판적  ▶제재: 버스 창문에 핀 성에꽃  ▶주제: 서민들의 애환에 대한 애정  ▶표현상 특징  -경험에서 연상된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일상의 사물에 주관적 의미를 부여하여 새로운 형상으로 창조하고 있다. ●이해와 감상 겨울 새벽녁 차창에 서리는 뿌연 성에에 꽃이라는 이름을 달아주면서 그 속에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김과 숨결이 성에꽃으로 아름답게 형상화된 작품으로, 80년대 아픈 역사의 상흔을 "친구"를 통해 드러냄으로서, 시대적인 아픔을 공감하게 한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은 지워져도 그 차가운 아름다움은 희망처럼 존재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에꽃에서는 가슴 저리고, 눈물나도록 아름답고 또 행복을 거부하지 않는 그런 삶이 떠오릅니다. 시인은 이렇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경계를 통찰하였습니다.    이 시에서 성에꽃은 그것이 지워지고 난 자리에 비치는 시적 화자의 얼굴로, 다시 자신과 함께 민주화 운동을 하던 친구로 이미지가 전이되는 객관적 상관물로서, '엄동 혹한일수록 / 선연히 피는 성에꽃'의 구절과 '다시 꽃 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에서 역설적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 / 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 낸 정열의 숨결이던가'에서는 그 의미가 친구에서 서민들로까지 확장된다.    친구에 대한 의미는 마지막 구절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여'에서 친구가 같은 삶(민주화 운동)의 여정을 걸어 왔으나 암담한 사회적 상황으로 인하여 현재 옥살이를 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한겨울의 새벽녘에 시내 버스를 타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한 번쯤 차창에 낀 성에를 손으로 문지르거나 입김으로 불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시는 엄동설한의 새벽 버스 차장에 낀 성에를 보며 80년대의 우울한 시대상, 또는 사람들의 남루하고 고달픈 생활의 초상들을 노래하고 있다.  화자는 성에가 아닌, 성에꽃을 보며 지난 밤에 이 버스를 탔던 사람들을 떠올린다. 이들은 신경림의 시에 나타나는 '못생긴 얼굴'같이 초라하면서도 남루한 삶의 길을 걷는 서민들이다. 흔히 민중 또는 소외계층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팍팍하고 고단한 삶에 의해 선연하게 아름다운 성에꽃이 피어났다. 어찌 보면 가장 미미한 존재들에 의해 가장 황홀한 아름다움이 탄생한 것이다.  화자는 유리창이라는 매개물을 통해 우리 사회의 우울한 표정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소외된 삶의 풍경들을 들여다 본 것이다. 화자는 '차거운 아름다움'을 한껏 느끼기 위해 이리저리 자리를 오가고 성에꽃을 지우기도 한다. 순간 장면이 바뀌면서 차창에는 푸석한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친구는 아마도 뒤틀리고 얼룩진 우리 사회를 고쳐가기 위해 올곧은 길을 걸었던 친구일 것이다. 그러나 그 친구는 시대의 암담함과 어두움에 맞서다 지금은 면회까지 금지되고 말았다. 이렇듯 은 서정적인 소재를 통해 민중들의 고단한 삶과 무겁고 어두운 사회 현실을 지성과 감성의 조화로 노래한 작품이다. *'창'의 의미  시에서 이른 새벽 성에가 낀 버스의 '차창'은 세상을 바라보는 통로가 된다. 그 창에 비친 세상의 풍경은 얼룩져 있고,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은 막막하다. 그러나 그 막막하고 팍팍함에 오는 슬픔을 '성에'를 통해 잊게 된다. 왜냐하면 '성에꽃'은 동시대인들의 숨결과 입김으로서 공동체 의식 그 자체의 의미를 띠기 때문이다. ========================================   최두석 시인 소개   1956(11, 23)년 전남 나주 출생 서울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80 '심상'에 시 '김통정'을 발표하여 등단 시집으로 대꽃(문학과 지성사 1984) 임진강(청사 1986)   ~~~~~~~~~~~~~~~~~~~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무슨 꽃인들 어떠리  그 꽃이 뿜어내는 빛깔과 향내에 취해  절로 웃음짓거나  저절로 노래하게 된다면  사람들 사이에 나비가 날 때  무슨 나비인들 어떠리  그 나비 춤추며 넘놀며 꿀을 빨 때  가슴에 맺힌 응어리  저절로 풀리게 된다면   ~~~~~~~~~~~~~~~~~~~~~   찔레를 보면   찔레열매 보면 찔레꽃 떠오르네  절로자라 피우는 아름다움이  얼마나 생생하며  얼마나 그윽한 향내 풍기는지 보이네  꽃향기의 축제가 열린  무르익은 봄날의  잉잉대는 음악소리가 들리고  너울거리는 춤사위가 보이네  찔레꽃 보면 찔레열매 떠오르네  서리 맞고 눈 맞으며  추위와 허기를 견디는 새들에게  기꺼이 양식이 되는  열매가 품고 있는 여문 씨앗이 보이고  까치 뱃속을 통과한 씨앗이  볕바란 언덕에서 움트는  찔레의 일생이 보이네    ~~~~~~~~~~~~~~~~~~~~~   느티나무와 민들레   간혹부러 찾는  수백년 묵은 느티나무 아래  민들레 꽃씨가  앙증맞게 낙하산을 펼치고  바람타고 나는걸 보며  나는 얼마나 느티나무를 열망하고  민들레에 소홀하였나 생각한다.  꿀벌의 겨울잠 깨우던 꽃이  연둣빛 느티나무 잎새 아래  어느새 꽃씨로 변해 날으는  민들레의 일생을 조망하며  사람이 사는데 과연  크고 우람한 일은 무엇이며  작고 가벼운 일은 무엇인가 찾아본다.  느티나무 그늘이 짙어지기 전에  재빨리 꽃 피우고 떠나는  민들레 꽃씨의 비상과  민들레 꽃 필때  짙은 그늘 드리우지 않는 느티나무를 보며  가벼운 미소가 무거운 고뇌와  함께 어울려 사는 모습을 떠올린다.  꽃에게 길을 묻는다 / 문학과 지성사    ~~~~~~~~~~~~~~~~~   노래와 이야기     노래는 심장에, 이야기는 뇌수에 박힌다 처용이 밤늦게 돌아와, 노래로써 아내를 범한 귀신을 꿇어 엎드리게 했다지만 막상 목청을 떼어내고 남은 가사는 베개에 떨어뜨린 머리카락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하지만 처용의 이야기는 살아 남아 새로운 노래와 풍속을 짓고 유전해 가리라 정간보는 오선지로 바뀌고 이제 아무도 시집에 악보를 그리지 않는다 노래하고 싶은 시인은 말 속에 은밀히 심장의 박동을 골라 넣는다 그러나 내 격정의 상처는 노래에 쉬이 덧나 다스리는 처방은 이야기일 뿐 이야기로 하필 시를 쓰며 뇌수와 심장이 가장 긴밀히 결합되길 바란다.     대꽃 / 문학과지성사, 1984   ~~~~~~~~~~~~~   타잔  내 빈약한 힘살을 비웃듯이  너는 빤스만 걸친 몸으로  총을 든 악한들과 싸운다  토요일 밤이면  사자와 표범과 악어들이 출몰하는  식민지 자손들의 안방 한구석에서  결국 이기는 싸움만 한다  원숭이 치이타와 코끼리 록키  소년 자이가 그림자처럼 따르고  너는 잽싸게 줄을 탄다  그리하여 정글이 없는 한반도의 아이들도  너를 따르고 싶고  빨래줄로 흉내를 내다  목졸려 죽은 아이도 있었다  둥둥 북치는 아프리카  근대화를 통해 빚수렁에 빠진 한국  창조도 진보도 있을 수 없는  아프리카 토인들의 역사  일제의 식민사관  타잔 너는 미국의 차관과 결부되어  수입되고 상연되고  밀림의 평화를 위한다지만  밀림의 법칙은 약육강식  국제 간 불변의 공식인 것을  이 땅의 아이들은 알 수 없지, 그러므로  너는 너를 출생시킨 나라  미국의 이미지를 위해 싸우는 줄을  아이들은 통 알 수가 없지.  ~~~~~~~~~~~~~   미소  쓸쓸한 이에게는  밝고 따스하게  울적한 이에게는  맑고 평온하게 웃는다는  서산 마애불을 보며  새삼 생각한다  속 깊이 아름다운 웃음은  그냥 절로 생성되지 않는다고  생애를 걸고  암벽을 쪼아  미소를 새긴  백제 석공의  지극한 정성과 공력을 보며  되짚어 생각한다  속 깊이 아름다운 웃음은  생애를 두고 가꾸어가는 것이라고  아름다운 미소가  세상을 구하리라 믿은  천사백 년 전 웃음의 신도여  그대의 신앙이  내 마음의 진창에  연꽃 한 송이 피우누나.    꽃에게 길을 묻는다 / 문학과지성사   ~~~~~~~~~~~~~~   마라도 바다국화  뿌리로 검은 바위 끌어안고  난바다 거센 파도 소리 삼키며  모진 바람에 고개 숙여  잔디처럼 바닥을 기다가도  꽃만은 그윽이 푸른 가을 하늘  마주 보며 피우누나  내가 아는 눈빛 맑은 여인  세상살이 온통 허무해져  바다에 몸을 던지러 왔다가  바다국화 꽃 피우는 모습 보고는  마음 다잡고 다시 삶의 자리로  돌아가게 됐다는구나.  꽃에게 길을 묻는다 / 문학과지성사    ~~~~~~~~~~~~~~~~~~~   마애관음보살을 보며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랑의 눈길과 손길을 거쳤던가 하지만 각별하게 따스했던 눈길과 손길마저 얼마나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가 경주 남산 바위에 새긴 수더분한 모습의 관음보살을 보며 든 생각이다   우람하거나 정교한 조각이 아니라서 더욱 정겨운 보살이 쥐고 있는 정병은 천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무수한 이들이 어루만진 손길로 반질거린다 그 정병을 기울여 약물을 마시면 어떤 마음의 병도 나을 것 같다.     투구꽃 / 창비, 2009.   ~~~~~~~~~~~~~~~~~   투구꽃     사노라면 겪게 되는 일로 애증이 엇갈릴 때 그리하여 문득 슬퍼질 때 한바탕 사랑싸움이라도 벌일 듯한 투구꽃의 도발적인 자태를 떠올린다   사노라면 약이 되면서 동시에 독이 되는 일 얼마나 많은가 궁리하며 머리가 아파올 때 입술이 얼얼하고 혀가 화끈거리는 투구꽃 뿌리를 씹기도 한다   조금식 먹으면 보약이지만 많이 넣어 끓이면 사약이 되는 예전에 임금이 신하를 죽일 때 썼다는 투구꽃 뿌리를 잘게 잘라 씹으며 세상에 어떤 사랑이 독이 되는지 생각한다   진보라의 진수라 할 아찔하게 아리따운 꽃빛을 내기 위해 뿌리는 독을 품는 것이라 짐작하며 목구멍에 계속 침을 삼키고 뜨거워지는 배를 움켜쥐기도 한다.     투구꽃 / 창비, 2009.   ~~~~~~~~~~~~~~   만남에 대하여  만나고 싶다  다혈질 인정 많은 친구여  그대의 눈물에 흥건히 젖어  나는 변하고 싶다  만나고 싶다  치밀하고 열심인 친구여  사실은 멱살이라도 잡고  땀방울의 진가를 확인하고 싶지만  끝내 별일 없이 헤어질지라도  나를 아는 모든 이여  내가 아는 모든 이여  혹은 미지의 사람이여  만나고 싶다  온갖 허위의 허물 벗어버리고  그대의 속내에  보름밤 쥐불처럼 호기심 불타는 것은  이 폭력과 정신병의 세상에  희망을 잃지 않고  함께 살아가기 위하여.  ~~~~~~~~~~~~~~~     나비와 개구리  주룩주룩 장대비 내리는 날  산길 걷다가  나비를 만나면 슬프다  비 피할 집 없이  어디론가 날아갈 기척도 없이  흠씬 젖어 있는 제비나비를 보면  내 숨겨둔 날개가 젖은 듯  후줄근해진다  주룩주룩 장대비 내리는 날  산길 걷다가  개구리를 만나면 기쁘다  좋아라고 만세 부르듯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무당개구리  번들거리는 초록 피부를 보면  내 살갗도 촉촉이 젖어  생생해진다.  꽃에게 길을 묻는다 / 문학과지성사 / 2003. 6  ~~~~~~~~~~~~~~~~       나비와 개구리  콩꽃 떨기마다 이상한 나방이 射精을 하고 다녔다. 그때  나는 국어 선생이었다. 깊이 사랑했던 이념의 말이 교과서  구석에 씌어 있었다. 지면을 응시하자 낱말은 괴성을 지르  며 교실을 울리고 멀리 운동장 미루나무 이파리에 머물렀  다. 구름은 정말 한가롭게 지나가고 학생들의 한 떼는 교  련 시간이었다. 엎드려 쏴! 찔러, 길게 찔러. 이파리는 사  살되어 무참히 찢기우고, 고개를 돌렸을 때 교과서의 활자  는 뻔뻔하게 그대로 박힌 채였다. 그 해 농부들이 수확한  콩은, 껍질은 탱탱하고 의연했지만 모두 가투였다. 나는 가  투의 의미를 가르칠 뿐이었다.      ~~~~~~~~~~~~~~~~~     구절초  계절이 바뀌는 산등성이에서  단풍잎 응시하며 피는 꽃이 있다  지상의 마지막 시간 앞두고  청을 높여 우는 풀벌레 소리 따라  아련히 맑은 향내 풍기다가  낙엽과 함께 사라지는 꽃이 있다.  시와시학 / 2000 가을호   ~~~~~~~~~~~~~~   다시 경포에서  안개비 속에  뿌옇게 흐린  경포 호수를 바라보며  문득 생각한다  고여 거울이 되지 못하는 물은  썩게 마련이라고  출렁이는 마음속  뿌연 거울을 들여다보며  새삼 생각한다  불혹이란  자기 몫의 외로움을 겸허하게  견디는 일이라고  무리를 잃고  뻘흙 위 갈숲에서  병을 다스리는 새여  네가 물을 차고 솟구치는 날  숭어가 고니로 변해 날아올랐다는  전설이 완성되리라.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때 / 문학과지성사 1997    ~~~~~~~~~~~~~~~   아우라지에서  진달래 꽃잎 띄우고  그리움은 어디로 흘러가는가  겨울 골짜기에 얼어붙었던  슬픔은 어디로 흘러가는가  그리움은 슬픔을 만나  깊어지고 넓어지고  슬픔은 그리움을 껴안아  강이 된다고 넌지시 일러주며 하염없이 일렁이는 물살은  어디로 아득히 흘러가는가  여울을 지나 소를 지나  다시 오지 않을 생애의 한 굽이를  소용돌이치며 돌아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 문학과지성사.1997.  ~~~~~~~~~~~~   겨울 폭포  겨울 폭포가 흘리는  눈물 머금어보았는가  얼어붙은 마음에  어설픈 햇살 받으며  벙어리 눈물 흘리다가  다시 얼어붙고 마는  고드름으로 빼곡한 가슴 보았는가  함성으로 세차게 흘러  거침없이 융융한 강이 되고 싶은데  키 넘게 눈 덮인 첩첩산중에  굳센 얼음기둥 세우고서  숨죽인 채  겨울 폭포가 흘리는  눈물 삼켜보았는가.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 문학과지성사.1997.    ~~~~~~~~~~~~~~ 최두석 시            노래와 이야기  노래는 심장에, 이야기는 뇌수에 박힌다  처용이 밤늦게 돌아와, 노래로써  아내를 범한 귀신을 꿇어 엎드리게 했다지만  막상 목청을 떼어내고 남은 가사는  베개에 떨어뜨린 머리카락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하지만 처용의 이야기는 살아 남아  새로운 노래와 풍속을 짓고 유전해 가리라  정간보가 오선지로 바뀌고  이제 아무도 시집에 악보를 그리지 않는다  노래하고 싶은 시인은 말 속에  은밀히 심장의 박동을 골라 넣는다  그러나 내 걱정의 상처는 노래에 쉬이 덧나  다스리는 처방은 이야기일 뿐  이야기로 하필 시를 쓰며  뇌수와 심장이 가장 긴밀히 결합되길 바란다.  지은이 : 최두석  갈래 : 서정시, 자유시  성격 : 인용적, 당부적  제재 : 노래와 이야기  주제 : 시의 본질, 노래와 이야기의 결합으로서의 시  출전 : (문학과 지성사, 1990)  내용 연구  뇌수 : 뇌를 말하고, 신경 세포가 모여 신경계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부분.  척수와 함께 중추 신경계를 이루어 온몸의 신경을 지배하며, 대뇌·간뇌·소뇌·중뇌  ·뇌교·연수로 나눈다.  처용(處容) : 설화에 나오는, 신라 제49대 헌강왕 때의 기인(奇人).  879년에 왕이 동부를 순행할 때 기이한 생김새와 옷차림으로 나타나 가무를 하며  궁궐에 따라 들어와 급간(級干)의 벼슬을 받았는데, 어느 날 아내가 역신과 동침  하는 것을 보고 향가 〈처용가〉를 지어 불러 역신을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실려 전한다.  정간보 : 조선 시대 세종이 창안한 악보.  오선지(五線紙) : 악보를 그릴 수 있도록 오선을 그은 종이.  유전(流轉) : 이리저리 떠돌아 다님.  덧나다 : 병이나 상처 따위를 잘못 다루어 상태가 더 나빠지다.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시의 본질을 시로 표현한 작품으로, 이 시는 언어를 통하여 사람들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시의 본질을 다루고 있다.  '노래는 심장에, 이야기는 뇌수에 박힌다'는 구절은 시인의 고민을 그대로 보여준다.  시인은 시에 자신의 감성(노래)을 그대로 담아내려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것은  잊혀지고 사실(지성, 이야기)만 남는다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시인은 자신의 격정(노래)을 다스리기 위해 이야기를 시로 쓴다.  그리고 ‘뇌수와 심장이 가장 긴밀히 결합되길 바란다.'고 표현하여 '시란 무엇이  어야 하는가'에 대한 작가의 고민을 담아 내고 있다.  자료  최두석(催斗錫)  1955년 전남 담양 출생으로 서울대 사대 국어과와 서울대학원 국문과를 나왔다.  1980년 '심상'에 등을 발표하여 시단에 등장한 그는 1982년부터 '오월시'  동인에 참가,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의 첫 시집인'대꽃'은 그의 感性과 知性의 어려운 통합을 이뤄내고 있는 시인  임을 넉넉히 보여 준다. 그는 단단한 현실 인식과 섬세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독특한  양식을 창출하여 참담한 현실을 놀라울 만큼 차분하게 이야기하는데  그 차분함 속에는 짙은 슬픔과 분노와 사랑이 은밀히 충만(充滿)되어 있고, 그 속에  서 감성과 지성의 어려운 통합을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집에 , (서사시), 등이 있다.  '노래와 이야기' 시에 나타난 내용을 중심으로 시어의 특성을 말해 보자.  이 시는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작가의 고민을 담아 내고 있는 작품이다.  우리들이‘시'에 대해 가지고 있던 기존의 지식에 기대어 이 시가 나타내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유의해야 한다.  '노래' 와 '이야기', '심장' 과 '뇌수, 라는 서로 대비되는 시어의 의미를 파악  하고, 특히 '노래'가 의미하는 바에 주목하여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한다.  시인은 시에서 '뇌수와 심장', 즉 이성과 감성이 '가장 긴밀히 결합되길 바란다.'  그런 시인에게 노래는 쉽게 덧나는 '격정의 상처' 이면서 '악보' 이고, 이야기는  노래의 빈틈(뇌수)을 메울 수 있는 형식적 장치이다.  따라서 시어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느낌 그 자체(심장, 격정의 상처)를 골라 넣고  (11행) 다스린(13행) 결과물이다. 또한 '이제 아무도 시집에 악보를 그리지 않지만,  여전히 시어는 심장이 일정한 리듬감을 타고 뛰듯이 보이지 않는 은밀한 리듬을  갖는다(10~11행 참조). 즉 시어는 시인의 감성(노래)을 담고 있으면서, 그것을 정제  된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며, 확연하게 드러나거나 은밀하게 감춰진 리듬을 갖는다.      =================================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시 성에꽃의 앞 구절이다. 고등학교 문학시간동안 수없이 읊조리던 시를 쓴 시인이 우리학교(한신대) 교수님이라는 것을 아는 학생은 몇이나 될까.‘ 성에꽃’의 시인인 문예창작학과 최두석 교수는「성에꽃」을 비롯하여 많은 시에서 꽃과 나무, 자연을 소재로 하는 작품을 썼다. 꽃과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악인이 없다했던가. 우리 주변의 들과 산에 피고 지는 꽃들과 말없이 자리를 지키는 나무들을 소재로 시를 쓰는 우리 학교(한신대) 문예창작학과 최두석 교수를 만나면 그것을 더욱 절감하게 된다.     출생 1956년 11월 23일, 전남 담양군 직업 대학교수 성별 남성 학력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프로필   학력 -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경력 2003 한신대학교 인문대학 문예창작학과 교수 2001 ~ 2003 한신대학교 문예창작대학원 원장 1997 한신대학교 인문대학 한국문화학부 문예창작전공 부교수 6년만의 시집, 시적 자아가 살아있는 자기 확인 오랜만에시집을낸최교수의소감이궁금했다. 언제나시 집을 내는 일은 설레는 일일 것이다“. 문학 판에 나온 지가 벌 써 30년이 되었지요「. 투구꽃」이 여섯 번째 낸 개인 시집인데 시집을 낸다는 건 시인으로서의 생명력을 상실하지 않았다 는, 다른말로시적자아가아직은살아있다는자기확인이되 는 것 같아요. 시적자아가 살아있어야 시를 쓸 수 있는데 말 이죠.”최교수는이어6년간의정황에대해서말했다“. 이시 집에 실린 시가 예순 세편인데, 6년 동안 쓴 거죠. 이전에 낸 시집들도 대체로 6년 터울로 시집을 냈어요. 왕성하게 쓰는 다른 시인들은3,4년 터울로시집을내기도하지만난 6년 정 도가 내 시 쓰는 속도나 체질에 맞는 것 같아요. 나름의 최선 을 다하는 게 중요하니까. 신통치 않은 시 100편보다야 신동 엽의「껍데기는 가라」같은 시 한 편이 낫죠. 서둘러서 안 되는 시까지포함해내고싶진않았어요. 버리는시도많았죠.” 자기를 지켜내는 싸움을 벌이지 않으면 꽃을 피울수 없다 시집「투구꽃」안에는 총 예순 세편의 시가 있다. 그중에 서도 굳이「투구꽃」을 시집의 제목으로 정한 데에는 어떤 이 유가 있었을까.“ 시집 전체의 주제를 은근히 드러내는 것이 바로「투구꽃」이었기 때문이에요. 투구꽃의 뿌리가 한약재 로 부자인데, 조금씩 쓰면 사람들의 원기를 왕성하게 해주는 약인데 많이 쓰면 그것이 독이 되어 사약으로 쓰여요. 사물 을 볼 때 양면성을 보는 거지. 약인 동시에 독이 되니까요. 모 든 약이 그렇지. 세상을 표면만 보고 살아서는 곤란해요. 또 다른 이유는 꽃모양이 투구 모양인데 투구는 싸울 때 쓰는 거죠. 투구꽃은 가을꽃인데 굉장히 아름다워요. 그런데 그 아름다운 꽃을 피우려면 생존경쟁,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 위 한 싸움을 거쳐야죠. 그래야만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다. 이게 시집 전체 주제와 통해요.” 생태적 상상력으로 가꿔낸 꽃과 나무 「투구꽃」을 보면 유독 꽃, 나무, 자연들을 벗 삼아 노래한 시들이 많다. 그 전의 시집에 수록된 시들도 그러하다. 자연 을 노래하는 이유가 특별히 있는 것일까.“ 처음부터는 아니 고, 1990년대 중반이후에 꽃과 나무를 소재로 시를 많이 썼 지요. 생태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나니 자연스레 그리되더라 고. 사실 요즘 사람들은 쓸데없는 운동선수 이름은 잘 알면 서 자기가 늘 보는 나무 이름도 잘 모르니까. 삶이 참 답답한 거지. 공자는 시경(詩經)에 있는 시들을 이야기하면서 동식 물 이름을 잘 알려주니 시경을 읽어야 한다고 말했어요. 이 땅에서 살고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것을 시로 쓰는 것이 시인으로서의 사명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요. 결국 사회속의 인간과 자연속의 인간이 어떻게 조화로운 상태에 이를까가 내게 중요한 화두에요. 휴머니즘이 인간중심주의로 기울면 곤란하고 그것이 자연생태 차원으로 폭넓게 열리기를 기원 하는데 그러한 차원에서 생태적 상상력에 비중을 두고 시를 썼어요.” 이야기 같은 시는 나의 브랜드,「 투구꽃」은 예외 우리가 문학시간마다 소리 내어 읽던 유명한 시「성에꽃」 과 같은 시들은 대개 서사적인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투구 꽃」만은 좀 더 음악성이 강한 이유는 무엇일까.“ 내 첫 시집 「대꽃」의 맨 앞에 수록된 시가‘노래와 이야기’라는 시에요. 노래와 이야기 사이의 긴장은 내가 시를 쓰는 가장 중요한 창작 방법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다른 말로 하자면 예술성과 현실성 사이의 긴장이죠. 이야기 시는 내 시의 브랜드라고나 할까. 예전엔 한창 민주화가 중요한 과제여서 사람살이의 문 제에 몰두했죠. 그땐 이야기 중심의 시를 써야했으니 사회역 사적 상상력을 중요시했고 지금은 생태적 상상력을 바탕으 로 하니 노래중심이 됐어요. 여전히 노래와 이야기 사이의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해요. 두 가지를 통합시 키는 게시 쓰기에요.” 시라는 것은 의사소통의 한 양식 쉽게 읽히는 시는 쓰기가 더 어렵다. 쉽게 읽을 수 있는 시 를 쓰라는 것이 최 교수의 가르침이었다「. 투구꽃」의 시들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그 내용은 깊었다. 최 교수 는 기자의 말에 그렇게 읽어주어 고맙다며 답을 이었다.“ 시 라는 것은 하나의 의사소통이에요. 그런데 의사소통을 거부 하는 시를 쓴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모순이죠. 그러면서도 시라는 것이 응축적인 양식이기 때문에 한번 읽고 버리는 것 이 아니라 여러 번 읽어도 계속해서 새로운 의미가 솟아나는 시를 쓰고 싶어 하죠. 소재를 잡으면 마음속에 두고 계속 생 각해서 의미가 제대로 맺힐 때까지 기다려요.” 시를 쓰는 일은 삶의 의미 찾기 과정 국어교육과를 나온 걸로 아는데 교육자의 진로를 가다가 시인의 길을 택한 이유가 궁금해졌다. 시를 쓰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다른 것은 별로 내키지가 않고 시 쓰는 것이 끌려서 시를 쓰게 된 것이고, 삶의 의미를 찾기라고나 할까 요. 뭔가 의미를 찾으며 살고 싶어서, 나에게는 시를 쓰는 것 이 가장 좋았으니까. 그런데 준비가 필요해요. 시를 쓰면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고민을 했죠. 그러다보니 국 어교사를 하면서 시를 쓰면 좋겠다 싶어서 국어교육과에 간 거죠. 지금 문예창작과 시 창작 교수로 있는 것도 그거죠. 시 쓰는 것과 이게 어울리겠구나 싶어서. 시 쓰기에 안 맞는 직 업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돈벌이에 눈이 멀어서는 시를 쓰기 어렵죠. 시를 쓰려면 일을 해야 하는데 그 일자체도 의 미가 있었으면 싶었지요.” 그럼 시인이면서 교수직을 병행하면서 힘든 점이나 좋은 점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최 교수는 말을 이었다.“ 시만 써서 는 생활을 할 수가 없어요. 전업시인은 경제적으로는 실업자 이지요. 그러니까 시를 쓰려면 다른 일을 해야 했죠. 그래서 적절한 게 뭘까 고민을 해서 국어교사를 조금 했죠. 그랬더 니 표현의 자유가 제한 되요. 예전엔 어디에 글 하나만 발표 해도 내용을 문제 삼고 그랬어요. 교사가 아니라면 별 상관 도 없는 일을 갖고 귀찮게 구니까 더 자유로운 대학교수를 하자 생각했죠. 시창작전공이다 보니 늘 시를 생각해야 하잖 아요? 시를 쓰면서 법열감이라고 할까 희열을 느껴서 좋지 만, 대학이라는 곳이 생활체험으로부터는 격리되기 쉽죠. 생 생한 생활체험이 문학의 원천인데 말이죠. 그래서 될 수 있 으면 연구실에 붙어있지 않고 삶의 체험을 접할 수 있는 곳 으로 답사를 많이 가죠. 그런 식으로 극복하려고 하죠.” 한 시간여의 인터뷰를 마치며 최두석 교수는 젊은 문학도 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맹자에 나오는 말인데‘항심 (恒心)’이라는 말이 있어요.‘ 한번 뜻을 세우면 변하지 않는 마음’이 항심이에요. 다른 일도 그렇고 문학이라는 게 짧은 시간에 승부를 낼 수 없단 말이지. 마라톤선수처럼 글쓰기에 정진해야 꿈을 이룰 수가 있겠죠.”미리 읽어간 시집에 싸인 을 청하자 최 교수는 한참을 고민하고 만년필로 한마디씩을 적어주었다. 주문처럼 시집 안으로 꿈이새겨졌다.     글꼴조정 공유하기 북마크
  우리가 눈발이라면    안도현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살이 되자    ------------------------------    * 느낌: 안도현 시인은 2010학년도 1학년 교과서에   많은 작품이 실린 시인 중에 한 명입니다. 이 시외에도 , , , 등이 실려 있으니까요.   그 중에서 내게 가장 친근감이 느껴지는 시가 이 시 입니다. 2001년에 개정된 7차교육과정에서도 1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어서 10년간 보았기 때문이지요 *^^*   그런 인연과 관계 없이 이 시가 좋았습니다.   진눈깨비는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더욱 힘들게 만드는 존재이고, 함박눈은 그들을 따듯하게 보듬는 존재겠지요. 시인은 진눈깨비가 아닌 함박눈이 되어서 이런저런 고민으로 잠 못 드는 이의 창문을 통해 편지가 되어 위로하고 새살이 되어 상처를 치료하자고 했습니다.   이 시를 가르치면서 어려운 사람을 배려하는 그 마음이 눈물겹도록 고마웠지요. 지금의 세상이 너무도 살벌하니 이 시의 삶이 더욱 그리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언제 우리는 따뜻한 세상에서 살게 될까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강부자 고소영이 아닌 서민을 위하는 세상이 어서 오기를 바라면서 이 시를 다시 읽었습니다.     * 안도현(1961~ )  : 시인.  경북 예천에서 태어남.     원광대 국문학과 졸업.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뒤 작품 활동을 하고 있음. 시집 , , , , , 등과 동시집 을 펴냄.   * 자료 출처 : 2010학년도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이 배우는 국어교과서와   에 실려 있음. ===================================================     예천(醴泉) /안도현     있잖니껴, 우리나라에서 제일 물이 맑은 곳이 어덴지 아니껴? 바로 여기 예천잇시더. 물이 글쿠로 맑다는 거를 어예 아는지 아니껴? 저러쿠러 순한 예천 사람들 눈 좀 들이다보소. 사람도 짐승도 벌개이도 땅도 나무도 풀도 허공도 마카 맑은 까닭이 다 물이 맑아서 그렇니더. 어매가 나물 씻고 아부지가 삽을 씻는 저녁이면 별들이 예천의 우물 속에서 헤엄을 친다 카대요. 우물이 뭐이껴? 대지의 눈동자 아이껴? 예천이 이 나라 땅의 눈동자 같은 우물 아이껴?               -안도현 시집 중에서 ========================================= //     안도현 시인   196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원광대 국문과와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모닥불』『그대에게 가고 싶다』『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리운 여우』『바닷가 우체국』『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간절하게 참 철없이』등을 냈다. 현재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가을 엽서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분홍지우개   분홍지우개로  그대에게 쓴 편지를 지웁니다  설레이다 써버린 사랑한다는 말을  조금씩 조금씩 지워나갑니다  그래도 지운 자리에 다시 살아나는  그대 보고 싶은 생각  분홍지우개로 지울 수 없는  그리운 그 생각의 끝을  없애려고 혼자 눈을 감아 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지워질 것 같습니다                     사랑은 싸우는 것   내가 이 밤에 강물처럼 몸을 뒤척이는 것은  그대도 괴로워 잠을 못 이루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창 밖에는 윙윙 바람이 울고  이 세상 어디에선가  나와 같이 후회하고 있을 한 사람을 생각합니다  이런 밤 어디쯤 어두운 골짜기에는  첫사랑 같은 눈도  한 겹 한 겹 내려 쌓이리라 믿으면서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쓰고 누우면  그대의 말씀 하나하나가 내 비어 있는 가슴속에  서늘한 눈이 되어 쌓입니다  그대  사랑은 이렇게  싸우면서 시작되는 것인지요  싸운다는 것은  그 사람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 벅찬 감동을 그 사람 말고는 나누어 줄 길이 없어  오직 그 사람이 되고 싶다는 뜻인 것을  사랑은 이렇게  두 몸을 눈물 나도록 하나로 칭칭 묶어 세우기 위한  끝도 모를 싸움인 것을  이 밤에 깨우칩니다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인 것을                    사랑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죄 짓는 일이 되지 않게 하소서  나로 하여 그이가 눈물 짓지 않게 하소서    사랑으로 하여 못 견딜 두려움으로  스스로 가슴을 쥐어뜯지 않게 하소서  사랑으로 하여 내가 쓰러져 죽는 날에도  그이를 진정 사랑했었노라 말하지 않게 하소서  내 무덤에는 그리움만  소금처럼 하얗게 남게 하소서                   그대에게 가는 길     그대가 한자락 강물로 내 마음을 적시는  동안 끝없이 우는 밤으로 날을  지새우던 나는 들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밤마다 울지 않으려고 괴로워하는 별을 바라보았습니다  오래오래 별을 바라본 것은 반짝이는 것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어느 날 내가 별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헬 수 없는 우리들의 아득한 거리 때문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지상의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길들을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해 뜨는 아침부터 노을 지는 저녁까지 이 길 위로 사람들이 쉬지 않고 오가는 것은 그대에게 가는 길이 들녘 어디엔가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랍니다                        간격        숲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을 때는 몰랐다. 나무와 나무가 모여 어깨와 어깨를 대고 숲을 이루는 줄 알았다.   나무와 나무 사이 넓거나 좁은 간격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벌어질대로 최대한 벌어진, 한데 붙으면 도저히 안 되는, 기어이 떨어져 있어야 하는, 나무와 나무 사이.   그 간격과 간격이 모여 울울창창 숲을 이룬다는 것을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숲에 들어가 보고서야 알았다                     그대에게 가고싶다     그대에게 가고 싶다  해 뜨는 아침에는  나도 맑은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밤새 퍼부어대던 눈발이 그치고  오늘은 하늘도 맨처음인 듯 열리는 날  나도 금방 헹구어낸 햇살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창가에 오랜만에 볕이 들거든  긴 밤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띄워 보낸  내 그리움으로 여겨다오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그리움으로 하나로 무잔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 아니냐  진정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만큼  새날이 밝아오고  진정 내가 그대 가까이 다가서는 만큼  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와 내가  하나되어 우리라고 이름 부를 수 있는  그날이 온다면  봄이 올 때 까지는 저 들에 쌓인 눈이  우리를 덮어줄 따스한 이불이라는 것도  나는 잊지 않으리  사랑이란  또 다른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리고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  지치고 상처입고 구멍난 삶을 데리고  그대에게 가고 싶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할 신천지  우리가 더불어 세워야 할 나  사시사철 푸른 풀밭으로 불러다오  나도 한 마리 튼튼하고 착한 양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강  너에게 가려고  나는 강을 만들었다 강은 물소리를 들려주었고 물소리는 흰 새떼를 날려보냈고 흰 새떼는 눈발을 몰고 왔고 눈발은 울음을 터뜨렸고 울음은 강을 만들었다 너에게 가려고 ====================================================   연탄 한 장                                          - 안도현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 요점 정리 -- ㅁ 지은이 : 안도현  ㅁ 갈래 : 서정시, 자유시  ㅁ 제재 : 연탄  ㅁ 성격 : 희생적, 헌신적, 성찰적(반성적)  ㅁ 표현 : '-네'의 반복을 통한 운율 형성(각운)  ㅁ 어조 : 반성적·성찰적 어조  ㅁ 특징 : ① 청각적 심상과 촉각적 심상을 사용하여 감각적으로 표현함.               ② 일상의 사물을 통해 삶의 자세를 가다듬음.               ③ 지난 날을 돌아보며 자신의 삶을 반성함.  ㅁ 주제 : 아낌없이 헌신하는 삶(사랑)에 대한 희구(希求), '연탄 한 장'같은 삶을 살려는 소망,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애 ㅁ 출전 : (1994) -- 내용 연구 --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아낌 없이 헌신하는 것, '헌신적인 삶을 사는 것', '자신을 잊고 아낌없이 나누어주는 것'정도의 의미가 있다.) - 삶의 의미 방구들(밑으로 고래를 켜서 방을 덥히게 만든 방바닥. 온돌) 선득선득(살갗이나 몸에 갑자기 서느런 느낌이 드는 모양)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연탄차'에서 아름다운 이미지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시인은 이를 재해석해서 그것에서 아름다움의 의미를 이끌어 내고 있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연탄의 속성으로 자신을 태워서 누군가를 따뜻하게 해 줌)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자신의 따뜻한 삶을 있게 한 존재를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자신을 불살라 방구들과 밥과 국물을 덥히는 헌신적(희생적)인 존재]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의 '나무'와 같은 삶을 살지 못한 시적 자아의 반성. 시적 화자는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 보지 못한 자신에 대해 자책감을 느끼고 있다.]- 연탄의 의미와 사랑의 실천에 소극적인 '나'의 태도에 대한 자책 생각하면 / 삶이란 /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자신을 부수어서 빙판 위에 사람들이 디딜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 남을 위해서 헌신하는 삶)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고통스러운 세상, 험한 세상)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자신의 헌신적인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는 일) -- 이해와 감상 -- 시인은 연탄 한 장을 바라보다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연탄의 속성에 대해 생각한다. 지금까지 자신은 타고남은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것이 두려워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 되지 못하였'던 삶을 살아왔구나 하고 반성한다. 이 세상사는 동안 우리가 하는 일이 결국 타고남은 재처럼 쓸쓸한 결말로 내게 온다 할지라도 의미 있는 일을 위해 몸을 태우는 일,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일' 그 자체로서 삶은 의미 있는 것이 될 것이다. 시인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 허무한 한 덩이 재마저 산산이 으깨어 미끄러운 세상에 마음놓고 걸어갈 길을 만드는 일에 바치는 삶이 있다는 걸 생각한다.   쉘 실버스타인의 를 연상하게 하는 시이다. 우리가 사는 동안 잊어서는 안 될 가치 중 하나가 바로 나눔과 헌신이 아닐까 한다. 이것은 그 어디서나 누구에게 건 불변의 가치가 아닐까? 아낌없이 나눈 후에 찾아오는 행복은 아마도 법정 스님이 에서 말씀하고 계신 "다 비우고 나야 비로소 채워진다"는 불교적 깨달음과도 통한다. -- 자료 -- 안도현(1961∼  )    : 시인. 경북 예천 출생. 1981년 대구 신춘 문예에 시 '낙동강'이, 1984년 신춘 문예에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에 , , , , , 등이 있고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 '관계', '사진첩' 그리고 산문집 등이 있다. (1) 이 시에서 '연탄'이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 보고, 그것과 바꾸어 볼 수 있는 사물과 그 이유를 말해 보자. 교수·학습 방법 : 특히 2연에서 '연탄'의 의미를 파악해 보도록 하고, 이 시의 '연탄'처럼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고 다른 이를 위하여 마지막까지 헌신하는 사물이 있는지 찾아보도록 한다. 예시 학생 활동 : 사랑이란 누군가의 배경이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했던가. 이 시에서의 연탄은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자신을 태워서 다른 누군가를 따뜻하게 해 주고, 마지막에는 스스로를 부수어서 빙판 위에 사람들이 디딜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 그저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살 수 있는 삶을 시인은 연탄에 빗대고 있는 것이다. =============================   연탄재 발로 차지마라                          - 안도현   연탄재 발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자신의 몸뚱아리를   다 태우며  뜨끈뜨끈한   아랫목을 만들었던   저 연탄재를   누가 발로 함부로 찰 수 있는가?   자신의 목숨을 다버리고   이제 하얀 껍데기만 남아 있는   저 연탄재를   누가 함부로 발길질 할 수 있는가? ==================================================     안도현 ㅡ "시는 열이 나고,  동시는 흥이 나" ㅡ"내 글은 갖가지 즐거움 뒤섞인                        '비빔밥'이고파"      동시집 '냠냠'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안도현 시인 ⓒ 뉴데일리       "시는 머릿속으로 열을 내면서 써야 하는데, 동시는 쓰는 순간이 신나고 흥이 납니다." 6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 벨라지오에서 안도현 시인의 동시집 '냠냠' 출간 기념 기자 간담회가 열렸다. 간담회 참석을 위해 이날 새벽부터 전주에서 올라온 그는 "안도현 입니다. 출판사의 강요에 못 이겨 나왔습니다."라며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말 문을 열었다.  문학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우리 시대 대표 시인 안도현의 '냠냠'은 그의 두 번째 동시집이다. 안도현 시인은 이번 작품을 통해 순수하고 장난기 가득한 동심의 세계를 마음껏 담아냈다. 섬세한 시선과 능청스러운 입담을 통해 삶의 이치와 깨달음을 전해 준 그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동시집에서도 그만의 엉뚱함과 발랄함 속에 음식에 대한 철학과 메시지를 녹여 담는 것 또한 놓치지 않았다.    안도현 시인의 동시집 '냠냠' ⓒ 뉴데일리       "동시가 변방문화로 밀려난 현실 안타까워"  안도현 시인이 동시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은 동시가 문학의 변방으로 밀려난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그는 "동시가 어린이가 읽는 중요한 장르에도 불구하고 아동문학 판에서도 변방으로(동화가 중심이고) 밀려나있는데 화가 났습니다."라며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학교에서 문학교육에도 문제가 있겠고, 동시 쓰는 분도 스스로 변방의식을 가지고 있기도 하거든요. 내가 문학의 중심이 아니고 변방에 있다는 의식이죠."라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우리나라의 동시는 신문학 초기부터 굉장히 중요한 장르로 손꼽히며 윤동주, 정지용, 박목월 시인 등 유명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100년 전 동시가 정점으로 100년 가까이 제자리걸음을 하게 된다. 안도현 시인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생각하다 동시를 써 보자는 마음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아이들에게 밥 한 숟가락의 소중함을 알려주고 싶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냠냠'은 영양가 높은 먹을거리들이 가득하다. 가지가지 밥과 누룽누룽 누룽지, 파마한 라면, 동글동글 보름달 같은 단무지, 퀴퀴한 김치 악당, 아파트 닮은 깻잎장아찌, 빗줄기로 만든 국수, 불자동차 떡볶이 등 재미난 음식 이야기들이 신선하고 기발한 시적 상상력 속에 가득 담겨 있다.     안도현 시인의 동시집 '냠냠' ⓒ 뉴데일리       음식의 맛과 모양, 색, 냄새, 재료, 영양, 조리 방법, 도구 등 음식에 관한 다양한 소재들로 풀어낸 동시들이 오감을 자극하고, 읽는 내내 웃음을 자아내며 입맛을 돋운다. 노래처럼 흘러가는 동시들을 읽다 보면 입안에 침이 고이고, 고소한 냄새가 나고, 뚝딱뚝딱 요리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안도현 시인은 이 동시집을 쓰면서 밥이 하늘처럼 귀하고, 밥 한 숟가락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려주고 싶었다고 한다. 또 음식이 만들어내는 소리와 빛깔, 냄새도 음미하며 밝고 건강한 아이들로 자라라는 마음을 듬뿍 담았다. 그는 음식을 소재로 한 이유에 대해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먹는 것인데, 요즘은 먹는 게 넘쳐나서 고민이 되는 때를 살고 있죠. 먹는 것의 중요성을 동시라는 형태로 아이들한테 말을 건네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라고 설명했다. 고기만 좋아하고 야채 안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야채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같은 민족이지만 세끼 밥을 못 먹는 아이들도 있다는 것, 먹는 게 투정부리고 욕심 부리는 대상이 아니라 살과 피를 만드는 대상이라는 것을 전하고 싶었다. 안도현 시인은 "음식이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것으로써의 기능보다는 우리 아이들이 엄마가 음식을 만들 때 음식 만드는 것을 유심히 봤으면 좋겠다 생각했죠."라며 "밀가루 반죽할 때 만져봐야 그 감각을 제대로 채득할 수 있는 것이잖아요. 음식 만드는 일에도 참여하는 것. 그게 창의성 교육에도 중요하겠다 싶어요. 단순히 먹는 것에만 아니고 만들어보고 참여함으로 먹는 것이 중요하구나 느낄 수 있게 해야 해요."라고 말했다.   이번 작품을 준비하며 실제 유치원과 초등학교의 식단을 점검하고, 음식 관련 논물들을 통해 아이들의 식생활에 대한 문제점을 살펴봤다는 그는 "어떤 광고에 보면 부모인가 학부모인가 하는 광고가 있더라고요. 아이들한테 먹거리 주는 엄마들의 과잉공급과 과보호로 아토피, 유아비만이 생긴다고 해요"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러한 문제점에 대한 부모와 아이들을 향한 조언을 동시 속에 고스란히 녹여냈다. '밥 한 숟가락' 시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한 숟가락도/남기지 마라/한 숟가락 남기면/밥이 울지/밥 한 숟가락도/못 먹어 배고픈/아이들이 울지'.  안도현 시인은 "저는 어릴 적에 저는 집에서 밥을 먹으면 미역국이든 된장국이든 한 숟가락도 남기면 안 된다고 엄하게 가르침 받으며 성장했어요."라며 "요즘 아이들은 먹고 싶으면 먹고, 남기고 싶으면 남기지요."라고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동어반복과 천사주의 '동시' 탈피해야"  일반적으로 시는 행복과 영광스러운 것의 편이 아닌 불행과 상처의 편이라 이야기 한다. 그러나, 그는 동시만큼은 부정적인 면보다 긍정적인 면을 보여주고, 고민 역시 즐겁게 표현하는 것이라 말한다.    동시집 '냠냠'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안도현 시인 ⓒ 뉴데일리      실제 스스로를 철이 없다고 말하는 안도현 시인은 동시를 쓰며 자신을 유치원생으로 생각하고 작품에 임했다. 아이들의 눈높이가 어딘지, 어른들이 범접할 수 없는 엉뚱함의 힘에 기대려고 했다.  원고를 탈고한 뒤에는 직접 주변 아이들에게 감수를 받았다. 동그라미표와 가위표로 냉정한 평가를 내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를 통해 안도현 시인이 느낀것은 예상 밖으로 아이들의 눈이 다양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랑같이 들리겠지만 동그라미를 골고루 받았습니다"라고 웃어보였다.  안도현 시인이 생각하는 우리 동시의 문제점은 천사주의표라는 것이다. 즉, 아이들의 마음에 천사가 있다고 여기고 무조건 귀엽고 예쁜 동시를 써서 가르친 것을 지적했다. 그는 "이 천사주의 동시가 우리 동시의 문학을 변방으로 몰게 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라며 "시인들이 아이들의 눈높이와 상상력을 따라가지 못하고 옛날식 방식대로 써서 아이들의 심장을 따라가지 못하지요. 지금 이 시기 아이들이 생각하고 머릿속에 뭐가 있는지 검토하지 않으면 동시를 쓰기 어려워요."라고 조언했다. 또한, 그는 "우리 동시는 그동안 동어반복으로 일관해 왔다"고 비판했다. 실제 학교 교육에서 동시를 가르칠 때 ‘토끼는 ****’라고 묻는다. 답은 깡충깡충이다. 아이들 모두가 같은 답을 해야 한다. 하지만, 안도현 시인은 토끼가 깡충깡충 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으며 토끼장안에서 엉금엉금 기어가는 것 만을 봤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동시를 '비빔밥'이 말한다. 먼저, 눈이 즐겁고 갖가지 채소가 들어서 맛이 즐겁고, 또 골고루 영양분이 들어서 즐거운 비빔밥 처럼 다양한 즐거움이 있는 작품이고 싶다는 소망이다.  끝으로 안도현 시인은 "시를 써야만 고매하게 평가해 주는 경향이 있다"며 "동시도 쓰면 집 나가서 바람 피우는 것처럼 오해하죠. 동시도 시이기 때문에 쓰고, 동화도 시인이기 때문에 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에게 시는 조강지처, 나머지는 첩?"이라며 자신의 작품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한편, '냠냠'은 비룡소의 '동시야 놀자'의 열번째 작품으로, 이는 한국 현대 시문학을 대표하는 시인들이 각각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자신의 시 세계와 개성을 특색 있게 선보인 국내 최초의 동시집 시리즈다. 지난 2007년 신현림 시인의 '초코파이 자전거'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한자와 생리 현상 등 다양한 소재로 출간돼 10만부 가량의 판매고를 올렸다. 또한, 이번 안도현 시인의 '냠냠' 다음으로는 함기석 시인이 수학을 소재로 11번째 동시집을 준비 중이다.  시인 안도현은 어떤 사람?  1962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다. 원광대학교 국문과와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돼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 전북 이리중학교에 국어 교사로 부임했으며, 이듬해 첫 번째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을 출간했다. 1998년 소월시문학상, 2005년 이수문학상, 2007년 윤동주문학상, 2009년 백석문학상 등 많은 상을 수상했다. 현재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작품으로는 시집 '그대에게 가고 싶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리운 여우', '바닷가 우체국',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간절하게 참 ㅓㄹ없이' 등이 있고, 동시집 '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 어른들을 위한 동화 '연어', '관계', '짜장면', '나비', '연어 이야기' 등이 있다. 뉴데일리 김은주 기자  ========================================================================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좋아서 나는 시를 쓰지 않아도 시인이다!” 독자들을 위해 인사 글을 좀 써줄 수 있겠냐는 부탁에 그는 흔쾌히 그러겠노라 했다. 하얀 종이를 책상위에 올려놓고 그는 한참을 고심했다. “시 아주 어렵게 쓴다니까요. 시 안 써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시를 쓰지 않아서 행복하다고 말했지만, 인터뷰 내내 그는 ‘시의 매력’을 이야기했고 그가 트위터에 올린 글은 한 편의 시와 다름없었다. 2012년 ... 이후, 검찰에 기소되어 재판을 받게 된 시인은 ‘...에서는 시를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시는 쓰지 않지만 ‘어떻게든 말을 걸고 싶은 욕망’에 트위터로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 은 그가 3년 동안 트위터에 올린 글들을 모은 책이다. 말 걸고 싶은 시인의 ‘잡념과 중얼거림’에 귀를 기울여 본다.   트위터는 가장 예민한 안테나 Q ...이후에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웃음) 밀린 시집들 많이 읽었어요. 처음에 시를 당분간 쓰지 않겠다고 한 것이 모든 글을 쓰지 않겠다고 말한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절필선언’이라고 언론사에서 말하고 나니까 심각한 느낌을 주잖아요. 밥 먹던 사람이 곡기 끊은 것처럼 비장해지고. 그동안 시를 붙잡고 있었어요. 소리도 치고 대항도 하고 중얼거리기도 해봤는데, 그런데 이게 참, ... 세상에선 부질없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안 쓴 거예요. 처음엔 불안했어요. 이러다 완전히 놓아버리는 것 아닌가 싶어서.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진짜 행복해요. Q 트위터는 어떻게 시작하셨는지 궁금해요. 휴대폰이 없다 보니 SNS하고 멀어질 수밖에 없잖아요. ...전후에 트위터 한 번 해볼까 싶었어요. 2012년 초에 트위터를 시작했는데 ...시작할 때 나도 시작한 것 같아. (웃음) 저는 뜬금없이 ...위반으로 기소되고 아직도 재판 중이죠. 그런 일을 겪고… 트위터를 해보니까 몇 가지 장점이 있어요. 하나는 세상 흐름을 빨리 알 수 있다는 것, 가장 예민한 안테나 같은 생각이 들고요. 트위터에 조성됐던 이야기들이 2-3일 뒤에 방송에 나오고 또 하루 이틀 지나면 신문에 나오더라고요. 그리고 또 140자 라는 게 나한테 너무 딱 맞는 거예요. 140자면 무슨 이야기든 다 할 수 있거든요.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연결되기도 하니까 아주 짧은 것 같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고요. 처음에는 시간을 꽤 많이 뺏겼어요. 신문보다 먼저 보고 쉬는 시간에도 보고, 자기 전에도 확인하게 되고. Q 국가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자주 표현하셨는데, 요즘은 어떠세요? 똑같죠, 뭐. 세월호 관련된 발언을 몇 번 했었고, 최근에는 ..과 관련해서 쓴 것 같고. 시인이 현실에 대해 말하고, 시에 현실을 발언하는 일이 없어질 줄 알았어요. 그런데 7, 8년 전부터 시인을 다시 광장으로 부르고 있어요. 시인을 한가하고 게으르게 만드는 게 좋은 세상이라고 생각하는데 시인한테 어떤 역할이 자꾸 주어진다는 것은 별로 좋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거죠. Q 정치현실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으면 하고 바라세요? 크게 보면 수십 년 동안 많은 사람들 피와 땀으로 일궈낸 민주주의 가치가 정상화돼야겠고 또 하나는 아직도 분단된 나라에 살고 있잖아요. 분단된 나라에 살고 있는 한, 휴전선 이남은 섬이라고 생각해요, 그것도 이상한 섬이죠. 휴전선이라는 벽이 있는 섬. 남북이 화해하고 협력해야만 거대하게 변화하는 세계사 물결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다, 생각하죠. 모든 게 정치권력의 판단미스로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돌려놓는 것이 필요하죠. 개인적으로 평양에 사과나무 심는 일 하고 있거든요. 지금 완전히 중단됐는데 2008년에 평양 근교에 심어놓은 사과나무가 크고 있는지 빨리 보러 가고 싶어요. 사과나무 심는 일은 2002년부터 4, 5년 했죠. 한겨레 신문하고 08년 봄에 전라북도 장수에 있는 묘목 12000주를 인천에서 남포항으로 실어가서 심었어요. 그 이후에 5.24조치(천안함 사건 이후 남북 간 교역을 전면 중단하는 대북 제재 조치)로 모든 게 중단이 됐죠. Q 시인이 왜 정치에 관심을 갖느냐는 질문도 종종 받으시잖아요. 시인이기 때문에 발언하는 것도 있지만, 말하고 싶은데 말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아요. 정치적 발언은 그런 사람들을 대신하는 것도 있고요. 문학을 하면서 배운 것 중 하나가 세상의 일에 대해서 시인이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정치가 잘 되고 국민들이 잘 먹고 잘 산다고 생각하면 굳이 간섭할 필요가 없죠. 비정상적인 정치현실을 정상적으로 돌리는 데 도움이 된다면 좀 말해야겠다는 것이지 정치에 관심을 갖고 발언을 해서 정치인이 되겠다, 이런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너 장관 되려고 그러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는데 전혀!     혼자 있는 시간은 시인에 가까워지는 시간 Q 안도현 시인의 어린 시절은 어땠나요?   범생이죠. 면소재지에서 우리 집은 가게, 점방을 했고요. 외갓집과 큰집이 거기서 멀지 않은 시골에 있었어요. 방학 때는 늘 외갓집이나 큰집에 가 있었어요. 농사짓는 집이었는데 옛날에 놀잇감도 별로 없고, 혼자 있는 걸 잘 버티고 좋아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비 오는 날 낙숫물 떨어지는 걸 오래 봤고, 또 외갓집 뒷산에 야생 버섯이 장마철에 났는데 그런 거 따러 가는 것 좋아했고 혼자 잘 놀았던 것 같아요. 뭐 감수성 이런 게 아니라 혼자 잘 노는 시간들이 개인적으로 잘 쌓였다고 생각해요. 시를 쓰다 보면 어릴 때 순간순간 만났던 풍경들이 어느 틈에 시에 들어와 있을 때가 있어요. Q 자연이 내는 소리나 생명의 움직임에 예민하신데요, 어린 시절의 경험한 자연이 영향을 주었을 것 같아요. 빗소리라든지 나뭇잎이 물드는 것이랄지 이런 게 나랑 별개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시골 출신이잖아요. 그런 삶이 시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편이고. 말을 조금 바꾸면 낡아빠지고 촌스러운 태도가 될 수 있지만, 자연이라는 게 도시가 있고, 도시 바깥에 있는 게 아니에요. 문명과 자연을 떼놓고 생각하는 방식도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아파트 안에도 꽃과 나무들이 있죠. 앞으로 태어나고 자라나는 아이들도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병원에서 태어나지만 전세대가 누렸던 만큼 자연과 가까워져야 할 의무가 있고, 기성세대들은 제공을 해줘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Q 자연적인 삶이 시에 가깝다고 느낄 때는 언제예요? 혼자 있을 시간이 별로 없어요. 혼자 있는 시간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면 누구나 시인에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요즘 사람들은 혼자 있지를 못해요. 다른 말로 하면 외로워할 줄 모른다. 혼자 있는 시간을 더 많이 확보하고 그걸 즐길 줄 아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행복할 거라는 생각을 하죠. 세상이 혼자 두게 만들지 않잖아요. Q 꽃 이야기가 많아요. 따로 꽃에 대한 공부를 하시나요? 식물을 안다는 건 식물이라는 타자를 이해한다는 거거든요. 식물들은 다양하고 살아가는 방식도 다 다르고 그래서 자꾸 관심을 가지다 보니까 말을 많이 하게 되는 거죠. 잘난 척 하는 거예요. (웃음)     “...끝나는 날부터 시 발표할 것” Q 시가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하는 글들이 군데군데 나와요. 시인은 사람을 아프게 하려고 태어났다고도 하셨고, 시는 감성으로만 쓰는 게 아니라 지식과 지혜, 열정과 기술로도 쓴다고도 하셨어요. 시란 무엇인가요? 시를 읽지 않아도 돈 잘 벌 수 있고 시간도 잘 가고, 뭐 다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시를 읽고 그 시간에 빠져 본 사람은 그걸 읽지 않은 사람과는 다른 삶을, 빛나는 삶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해요. 저도 고등학교 때 시를 읽는 재미에 빠져서 쓰게 됐는데 소설처럼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되고, 언제든지 펼쳐보면 되고, 또 모르면 모르는 대로 넘어가도 아무 문제없고. 그러다 진짜 좋은 시를 만나게 되면 구름처럼 붕 뜨는 기분이 들어요. 저한테는 백석이 그랬어요. 한 편에 시를 구성하는 게 굉장히 많아요. 언어. 시인의 감성, 소재, 분위기 등등 총체적인 게 모여서 시가 되는데 백석 시는 ‘시는 이래야 한다’고 꿈꾸던 모든 게 거의 모든 시마다 들어있어요. 80년대 해직교사 시절에 외치고 싶은 게 있었어요. 지나치게 외치는 것은 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가르쳐준 것도 백석인 것 같고. 광장에서 지쳐서 시를 때려치울까 할 때도 시는 오래 쓰는 것이라고 알려줬죠. 백석을 가장 좋아했고, 우리나라 시인들의 시를 좋아했어요. 거의 다 읽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고은, 신경림, 황동규, 정현종 같은 어른들부터 최근 젊은 시인들까지 시를 많이 읽었어요. 제가 시를 제일 잘 쓰지는 못하지만 나만큼 읽은 시인은 별로 없을 거예요. 재미있으니까 읽는 거예요. 시를 읽으면 시간이 잘 가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상상력을 만나면 놀라는 재미. 시를 자꾸 읽다 보면 나 스스로 고여 있게 만들지 않고 변화해야겠다는 생각을 시가 가르쳐주죠. Q 그래서 시는 도대체 뭔가요? 그걸 어떻게 알아, 그걸.(웃음) 굳이 말하라면, 여기가 아닌 여기 너머에 있는 걸 꿈꾸게 해주는 양식인 것 같아요. 늘 여기 갇혀 있잖아요. 이 안에서 잘 먹고 잘 사는데 빠져있지만, 여기가 아닌 더 멋진 세상을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 보여주는 것 같아요. 때로는 사람들이 기대고 싶은 언덕 같은 구실을 하고, 떠 마시는 냉수 같은 구실을 하잖아요. 또 어떤 사람은 시를 읽고 위안 받기도 하고. 시의 역할은 다양한 것 같아요. Q 시를 쓸 때 타자의 눈으로 자기를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셨는데요, 시는 아주 내밀하고 개인적인 문학이라 타자가 낄 자리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이 시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시에 등장하는 나를 시인과 일치하는 것이에요. 읽는 사람도 쓰는 사람도 시에 나오는 ‘나’를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거든요. 내 이야기만 하려면 일기에 쓰면 되죠. 시를 쓰지 않아도 되요. 내가 아닌 주변 사람들이 말하고 싶어 하는 것, 느끼는 것을 대신 써주는 사람이 시인이라고 생각해요. Q 시라면 무조건 고개를 젓는 사람들이 있어요. 시의 매력에 빠지게 하려면 어떤 방법이 좋을까요?  우리가 이 세상 모든 노래를 다 좋아하고 다 외울 필요가 없듯이 시도 그 때 그 때 자기가 좋은 것 몇 편만 취하면 돼요. 노래를 누가 공부하듯이 하나요.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즐기는 것처럼 시를 즐겨야지. 학교 다니면서 시로 공부만 해가지고... 시를 보면 함축적 의미를 찾고 그러는데 그럴 필요 없어요. Q 그런데 정말 이해 안 되는 시들이 있어요. 그럴 때는 그냥 넘어가면 되죠. 왜 붙잡고 있어야 돼요? 코스 음식 나오는데 계속 먹기 싫은 거 나오면 그거 왜 먹어야 돼요? 그냥 나가서 자장면 한 그릇 먹든지. 그것도 음식이잖아요. 싫은 건 안 읽으면 돼요. 머리 짤 필요가 없어요. Q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별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도 하셨는데 어떤 어른, 어떤 시인이 되길 바라시나요? 아이고, 나 아직 어른 되려면 멀었어요. 아직도 철이 없는데. 진짜 마음은 아직 30대 같아요. 아직까지도 담배 끊으려고 생각한 적도 없고 술도 마찬가지고. 50대가 넘으면 친구들이 전부 몸이 어디가 안 좋네, 거기에 무슨 약이 좋네 뭐 이런 얘기하는데... 그런 거 싫어요. 시는 좋은 시를 쓰고 싶죠. ...끝나는 날부터 좋은 시를 쓰고 싶어요. 어떤 친구는 꼬불쳐 둔 거 아니냐고 하는데 실제 시를 쓰고 있지는 않아요. 그런데 쉬었다 쓰면 겁나게 잘 써야 되겠다, 이 생각은 좀 있어요. 그 동안도 열심히 썼지만, 좀 쉬더니 잘 쉬었구나, 이런 말 듣고 싶죠. 문학을 했기 때문에 삶이 아름다웠다는 말을 듣는 사람으로 늙어가야겠죠.  Q ...끝났는데, 더 한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해요? (웃음) 그 때부터는 다시 무기를 갖추고 싸움의 시를 써야죠. 그런 일은 오지 않을 거예요. 나는 낙관론자예요.  Q 마지막으로 독자들께 하고픈 말이 있다면요? 이 책 홍보를 하겠습니다.(웃음) 이 책은 순서대로 안 읽었으면 좋겠어요. 순서대로 읽을 필요가 없어요. 하루에 많이 읽지도 않았으면 좋겠어요. 야금야금 씹어 먹듯이 아무데나 펼쳐서 읽으면 좋겠어요.         [출처] 안도현의 '예천 연탄 한 장 - 안도현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 요점 정리 -- ㅁ 지은이 : 안도현  ㅁ 갈래 : 서정시, 자유시  ㅁ 제재 : 연탄  ㅁ 성격 : 희생적, 헌신적, 성찰적(반성적)  ㅁ 표현 : '-네'의 반복을 통한 운율 형성(각운)  ㅁ 어조 : 반성적·성찰적 어조  ㅁ 특징 : ① 청각적 심상과 촉각적 심상을 사용하여 감각적으로 표현함.               ② 일상의 사물을 통해 삶의 자세를 가다듬음.               ③ 지난 날을 돌아보며 자신의 삶을 반성함.  ㅁ 주제 : 아낌없이 헌신하는 삶(사랑)에 대한 희구(希求), '연탄 한 장'같은 삶을 살려는 소망,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애 ㅁ 출전 : (1994) -- 내용 연구 --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아낌 없이 헌신하는 것, '헌신적인 삶을 사는 것', '자신을 잊고 아낌없이 나누어주는 것'정도의 의미가 있다.) - 삶의 의미 방구들(밑으로 고래를 켜서 방을 덥히게 만든 방바닥. 온돌) 선득선득(살갗이나 몸에 갑자기 서느런 느낌이 드는 모양)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연탄차'에서 아름다운 이미지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시인은 이를 재해석해서 그것에서 아름다움의 의미를 이끌어 내고 있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연탄의 속성으로 자신을 태워서 누군가를 따뜻하게 해 줌)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자신의 따뜻한 삶을 있게 한 존재를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자신을 불살라 방구들과 밥과 국물을 덥히는 헌신적(희생적)인 존재]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의 '나무'와 같은 삶을 살지 못한 시적 자아의 반성. 시적 화자는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 보지 못한 자신에 대해 자책감을 느끼고 있다.]- 연탄의 의미와 사랑의 실천에 소극적인 '나'의 태도에 대한 자책 생각하면 / 삶이란 /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자신을 부수어서 빙판 위에 사람들이 디딜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 남을 위해서 헌신하는 삶)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고통스러운 세상, 험한 세상)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자신의 헌신적인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는 일) -- 이해와 감상 -- 시인은 연탄 한 장을 바라보다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연탄의 속성에 대해 생각한다. 지금까지 자신은 타고남은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것이 두려워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 되지 못하였'던 삶을 살아왔구나 하고 반성한다. 이 세상사는 동안 우리가 하는 일이 결국 타고남은 재처럼 쓸쓸한 결말로 내게 온다 할지라도 의미 있는 일을 위해 몸을 태우는 일,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일' 그 자체로서 삶은 의미 있는 것이 될 것이다. 시인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 허무한 한 덩이 재마저 산산이 으깨어 미끄러운 세상에 마음놓고 걸어갈 길을 만드는 일에 바치는 삶이 있다는 걸 생각한다.   쉘 실버스타인의 를 연상하게 하는 시이다. 우리가 사는 동안 잊어서는 안 될 가치 중 하나가 바로 나눔과 헌신이 아닐까 한다. 이것은 그 어디서나 누구에게 건 불변의 가치가 아닐까? 아낌없이 나눈 후에 찾아오는 행복은 아마도 법정 스님이 에서 말씀하고 계신 "다 비우고 나야 비로소 채워진다"는 불교적 깨달음과도 통한다. -- 심화 자료 -- 안도현(1961∼  )    : 시인. 경북 예천 출생. 1981년 대구 신춘 문예에 시 '낙동강'이, 1984년 신춘 문예에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에 , , , , , 등이 있고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 '관계', '사진첩' 그리고 산문집 등이 있다. (1) 이 시에서 '연탄'이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 보고, 그것과 바꾸어 볼 수 있는 사물과 그 이유를 말해 보자. 교수·학습 방법 : 특히 2연에서 '연탄'의 의미를 파악해 보도록 하고, 이 시의 '연탄'처럼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고 다른 이를 위하여 마지막까지 헌신하는 사물이 있는지 찾아보도록 한다. 예시 학생 활동 : 사랑이란 누군가의 배경이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했던가. 이 시에서의 연탄은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자신을 태워서 다른 누군가를 따뜻하게 해 주고, 마지막에는 스스로를 부수어서 빙판 위에 사람들이 디딜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 그저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살 수 있는 삶을 시인은 연탄에 빗대고 있는 것이다 (醴泉)'|작성자 허산재  
375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나희덕 - 못 위의 잠 댓글:  조회:7917  추천:0  2015-12-25
못 위의 잠  - 나희덕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도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   ◈1~8행 : 현재 - 아비제비를 바라봄  종암동 버스 정류장, 흙바람은 불어 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 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 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도 흙바람이 몰려오나 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 잡은 그림자를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 9~25행 : 과거 회상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를 마중 나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 26~27행 : 현재 - 아버지의 꾸벅거림을 기억하게 하는 못 위의 잠  [핵심 정리]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 성격 : 회상적,  ◈ 특징  ① 못 위에 앉아 잠을 자는 제비와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지 못했던 아버지의 처지를 중첩시켜 표현하였다.  ② 과거의 사건과 경험을 떠올리는 회상적인 어조로 시상을 전개하였다.  ③ 경어체의 표현을 사용하며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④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등 대상을 감각적으로 재현하며 시각적인 심상을 환기하고 있다.  ◈ 제재 :  ◈ 주제 : 남루했던 아버지의 삶에 대한 연민의 정  [시의 짜임] 1~8행 : 현재 - 아비제비를 바라봄  9~25행 : 과거 회상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를 마중 나감  26~27행 : 현재 - 아버지의 꾸벅거림을 기억하게 하는 못 위의 잠  [감상과 이해] 이 시의 전체 시상은 병렬적으로 제시되는 두 개이 장면에 의해 전개되고 있다. 시적 화자는 둥지가 비좁아 못 위에 겨우 앉아서 밤을 지새는 아비제비의 모습을 올려다보며 기억 속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된다. 실직자의 신세를 면치 못한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생계를 꾸려 가야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시적 화자는 비애와 아픔, 좌절감을 느꼈을 과거의 아버지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작품의 말미에서 시적 화자는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애틋한 그림자를 떠올리는데, 아버지의 꾸벅거림과 못 위에서 자는 제비의 꾸벅거리는 모습이 겹쳐지고 있다.  이 시는 경어체의 표현을 사용하며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상의 특징은 어린 시절의 아버지를 회상하는 작품의 성격과 긴밀히 맞물려 있다. 즉, 어린 시절에 겪었던 일과  아버지에 대한 느낌을 더욱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경어체의 어법을 통해 대상을 서술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는 시각적인 심상을 다양하게 구사하고 있는데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등은 대상을 감각적으로 재현하며 시각적인 심상을 환기하고 있다.  [해설] 이 작품은 27행의 전연시이다. 연 구별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작품이다. 제비집 옆의 못 위에서 잠을 자는 제비 아비의 모습과 종암동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한 사내의 모습이 병치되고 있다. 작품의 행간의 의미를 짚어 보면 다음과 같다. 1-3행 : 너무도 작은 제비집에 새끼들을 재우고 어미는 둥지 위에 간신히 잠들었다. 4행 : 그 옆에 못 하나가 있는데 5-6행 : 제비 새끼들의 아비는 그 못에서 밤을 보냈다. 7-8행 : 그런 제비 아비의 모습을 화자는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 본다. 여기까지를 내용상 하나의 연으로 묶는 것이 좋다.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아빠를 보면서 왜 화자는 눈이 뜨거워진 것일까? 왜 눈물을 흘린 것일까? 감동의 눈물인가? 연민의 감정인가? 9-10행 : 장면이 바뀐다. 너무도 작은 제비집은 흙바람 부는 버스 정류장으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너무도 작은' 것이나 '흙바람 불어오'는 것이나 그 환기되는 분위기는 동일하다. 그러한 정류장에 아이 셋과 함께 누군가를 마중 나온 사내에게 시인은 시선을 멈춘다. 11-13행 : 그 사내는 아내를 기다렸다. 그 여자는 오랜 노동을 끝내고 온 모양인지 몇 번의 버스 뒤에서야 비로소 피곤에 지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 여자의 얼굴이 시인에겐 매우 창백하게 보였고 그래서인지 반쪽의 달조차 매우 창백하게 보인다. 14-16행 : 아이들은 엄마에게 달려가고, 물끄러미 달빛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사내'의 모습이 시인에게 각인된다. 창백한 달빛을 바라보며 사내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일까? 무력한 자신에 대한 자책일까? 17-20행 : 이 부분은 시인의 논평에 해당한다. 정류장에서 만난 그 '사내'가 실업자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렇지만 이는 시인의 주관적인 생각이다. 오랜 실업 속에서 마땅한 직장도 쉽게 나타나지 않아 변변한 집 한 채 갖지 못하고 단칸 셋방에 세들어 사는 사내. 아랫목에 아이들을 재우고 자신은 결국 '못' 위에서 잠을 자며 힘든 삶을 견딘 사내. 21행 : 정류장에서 그 사내의 가족들이 좁은 거리로 이동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흙바람은 불어오고 22-25행 : 비록 달빛이 식구들이 손잡고 걸어가는 그림자를 따뜻하게 만들어 주기도 하지만, 그렇게 위안하기엔 그들이 헤쳐나아가야 할 삶은 너무도 힘들고 언제나 한 걸음 쯤 뒤쪽에서 걸어갈 수밖에없는 아버지 26-27행 : 그런 아버지의 삶이 바로 '못 위의 잠'이다. 이 정도 독해를 하였으면 이제 장면을 연상하면 된다. 과거에 시인은 못 위에 꾸벅 꾸벅 졸고 있는 제비의 모습을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우연히 종암동 버스 정류장에서 한 사내를 만나게 되었다. 그 사내의 모습에서 제비 아비의 모습이 겹쳐지고 있다. 남편은 실직자이고 아내가 이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고 인물이라고 시인은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 이 사내와 같은 아버지의 모습이 많지 않은가? IMF 실업대란 이후 우리 사회에 당당한 아버지의 모습이 사라졌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구조조정의 칼바람에 옷깃을 세우며 당당히 서 있으려 했지만 자꾸만 움츠려는 어깨를 가진 아버지만 남아있을 뿐이다. 못 위에서 꾸벅 꾸벅 잠들 수밖에 없는 이 시대의 아버지. 비록 자신은 구조 조정의 시퍼런 칼바람이 삶이 지치고 힘들어도 가족만큼은 따뜻한 아랫목에서 쉬게 하고 싶은 이 시대의 슬프고 위대한 아버지. 겉으로는 가족의 사랑과 관심을 외면한 채 차가운 못 위에서 꾸벅이며 안식을 취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뜨거운 눈물과 연민이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어쨌거나 이러한 아버지 모습에 대해 시인은 연민과 안타까움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관련작품]  ◈부모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의 정을 노래한 시  김종길 성탄제 / 고은 성묘 / 박재삼 ‘추억에서’ / 기형도 ‘엄마 걱정’ / 이성복 ‘또 비가 오면’ / 이용악 ‘달있는 제사’ , ‘플벌레 소리 가득차 있었다’ / 강우식 ‘어머니의 물감상자’ / 정한모 어머니 / 정인보 자모사 / 김상훈 아버지의 창 앞에서  꾸벅거리는 아비제비⇒경제적으로 무능력했던 아버지를 떠올리게 함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아비제비의 애처로운 모습을 지켜보며 어린 시절의 아버지를 떠올리는 시적 화자  제비집→정류장 : 과거 회상의 시작됨  흙바람 : 삶의 고단함과 세파  시적 화자에게 비친 삶에 지치고 고단한 어머지의 삶을 상징 / 감정이입  창백한 표정의 어머니를 바라보지 못하는 아버지의 심리 /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경제적으로 무력한 자신에 자책의 심리 - 화자의 추측  달빛 :  잠시나마 단란하고 정겨운 식구들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소재  과거에서 현재로 되돌아 오는 부분으로 아버지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드러나 있다.     아버지의 삶 =못 위의 잠          【나희덕 시인】 *충남 논산 출생.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등단. *연세대 국문학과와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 * 현재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시집으로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반 통의 물』 『저 불빛들을 기억해』, 시론집으로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한 접시의 시』 등. =================================   1. 나희덕의 시와 삶 - 역사주의 비평으로 분석하기  나희덕은 첫 시집《뿌리에게》후기에서 '시란 내 삶이 진솔하게 육화된 기록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만큼 그의 작품은 시인과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 그의 작품 속에서는 시를 통한 '사회·역사적인 문제들을 구체적인 체험과 융화'시키고자 하는 작가의 끊임없는 노력이 드러나고 있다. 결국 그녀에게 있어 시란 삶이고, 삶이 곧 시인 것이다.  1.1. 창비시선 95『뿌리에게』중「우리는 들에서 떠났네」- 원본확정  나희덕의 시「우리는 들에서 떠났네」는 1991년 발행된 그녀의 첫 시집『뿌리에게』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집은 나희덕이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한지 2년 만에 출간된 것으로 창작과 비평사 출판사에서 창비시선 95로 나왔고 이 시는 시집 제 1부에 게재되어 있다.  1.2. '우리'의 역사성 - 언어의 역사성  제목과 시 본문에 걸쳐 등장하고 있는 '우리'라는 말은 유독 우리 민족이 즐겨 쓰는 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라는 단어는 말하는 이가 자기와 자기 동아리를 일컬을 때, 말하는 이와 제 삼자만을 일컬을 때, 말하는 이와 말 듣는 이만을 일컬을 때, 일부 명사 앞에 쓰이면서 '나의'의 뜻으로 쓰일 때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나', '너', '그들'도 아닌 '우리'라 함은 이 시를 통해 어떤 의미를 갖고 있으며 어떤 역할을 하는가. '우리'라는 말은 나와 너,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말로 동질감을 나타내고자 할 때 자주 쓰인다. 본문에서의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시속에서의 '우리'는 '뿌리내리지 못한,' '들에서 떠난' 자들이다. 중심부에서 이탈한 자들, 혹은 버려진 자들,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의 동질감이라는 것에는 절박함이 들어있다. 중심에서 벗어나 주변부에서 하나가 되는 '우리'에게는 들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던 아픔이 자리잡고 있으며 '꿈자리마처 덮치는' 냉혹한 현실이 있다. 결국 '우리'는 그 상황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어디론가 밀려갈' 수밖에 없는 절박함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절박함에서 오는 동질감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힘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1.3. 교사로서, 여성으로서의 나희덕 - 작가의 전기  나희덕은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로 등단하기 전인 1988년부터 수원의 창현고등학교에 재직하면서 교사 생활을 하였다. 또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 소속이었던 시인인만큼 교직원 노동자로서의 생활이 시속에 담겨 있으며 특히 제자들에 대한 사랑을 확인 할 수 있다.「우리는 들에서 떠났네」에는 직접적인 제자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은 아니나, '우리'의 자식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 아이들은 '흔들리는 불빛 아래 쪼그리고 앉아 숙제하고' 있으며, '뿌리내리지 못한 사람들의 마지막 뿌리'로 불안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작은 불씨 마냥 간직하고 있는 존재이다. 그 아이들은 '우리'가 치고 있는 '가난한 양떼'들이며 정체성을 상실하여 '들에서 떠나와 또 어디로 흘러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존재이다.  나희덕은 90년대 초에 등단한 여류시인이다. 90년대에 문단에 여성 작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던 것과 관련하여 시문학에서도 나희덕의 등장은 이것과 연관시켜 볼 수 있다. 여류 시인의 시가 갖고 있는 개성이란 어떤 것일까. 나희덕의 시에서는 여타 다른 시인들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모성이 흐르고 있다. 소소한 일상 - 대학시절의 흔적들, 교사 노릇을 하며 겪은 일들, 가정생활의 느낌들 그리고 기타 사회·경제적인 문제들 - 이 시에 묻어나기 때문이다. 또한 일상이 시속에 묻어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따뜻하게 감싸안으려 하는 모성적 따뜻함이 느껴진다. '철없던 시절의 단꿈'을 꾸고 있을 때, 어디선가 다가오는 '포크레인'은 '우리의 꿈자리마저 덮'쳐버리고 말지만 이내 '식은땀을 씻어내리다 보면' '세상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시인은 삶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는다. 그 끝 어딘가에 삶의 희망이라는 작은 불씨를 발견하고 그것을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  1.4. 들에서 떠나 어디론가 밀려가다 - 역사적 전후관계 속에서의 의미  이 시에서는 동작이 이어지고 있다. 어딘가에서 떠났고 떠남 혹은 밀려감이라는 다음 행위가 이어지고 결국 '어둠도 가시고 세상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은 특히 2연과 4연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2연에서는 '우리는 들에서 떠나와 또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 것일까.'라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것은 방향을 상실한 '우리'의 고민의 흔적이며 앞으로 이러한 삶이 쉽게 끝나지 않고 고난이 계속 될 것이라는 아픈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3연에서의 '논밭이 쩍쩍 갈라지고,' '천정에 우르릉 금이' 가고, '포크레인이 걸어들어와 우리의 꿈자리마저 덮치는' 삶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삶이란 떠난 자들이 겪게 되는 고통인 것이다. 결국 이런 말은 지난한 삶에 대한 파노라마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폴 고갱(Paul Gaugin)의 작품을 비교함으로써 더 선명하게 그 내용의 의미가 전달이 된다. 고갱의 1897년 작품인『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Where do we come from? Who are we? Where are we?)는 유년기, 청년기, 노년기의 삶을 화폭 하나에 담아내고 있으며 인생의 단면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그려내어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낙원의 나무에서 열매를 따는 타히티의 이브에서부터 흐느끼는 표정의 인물들, 그리고 페루 미이라의 자세로 쪼그리고 앉아 점쟁이 같은 노파에 이르기까지 상징성으로 충만해 있다. 또한 고갱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성경에 비교될 정도의 주제를 가진 철학적인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다분히 철학적 주제를 내포하고 있는 고갱의 작품과 나희덕의 시「우리는 들에서 떠났네」는 '통시적 관계를 벗어나 다양한 시대와 장소에서 사용된 동일한 주제'라고 할 수 있다.  1.5. 상실감의 시대 - 문화적 배경  이 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91년 발행된 나희덕의 첫 시집『뿌리에게』에 수록되어 있는 시이다. 나희덕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시기는 80년대 말이었고 첫 시집이 간행된 시기는 91년으로 90년대 초의 일이다.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는 냉전시대의 종식에서 소련의 붕괴와 함께 이어진 이념의 붕괴, 탈정치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던 시기였다. 또한 크게 보면 이 시기는 세기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때의 정신적 공황 상태를 고려해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시를 통해서 갑작스런 이념의 붕괴와 공산주의 체제였던 동구 국가의 해체로 혼란스러웠던 그 시대의 '우리'들을 보여준다. '개구리 울음소리로 가득'한 공간, '포크레인이 걸어들어와' 꿈자리 마저 뒤숭숭하게 만드는 공간은 시대적으로 이념을 상실해버린 '우리'가 처한 위치이다. 이념이 전부라 믿었던 80년대, 그 믿음이 깨어진 90년대. 그 10년만큼의 거리감은 '우리'를 주변부로 내쫓아냈고 우리는 그저 다시 '어디론가 밀려가는' 것이다. 세기말적 분위기로 진행된 이 시기는 연도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80년대 말 90년대 초에 해당하는 시기이며 이 문화적 배경은 시속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1.6. 기승전결의 스토리 - 전통적 관례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기승전결의 형식은 원래 한시(漢詩)의 절구체(絶句體)에 있어서의 구성법을 그 유래로 하고 있다. 제 1구를 기구(起句), 제2구를 승구(承句), 제3구를 전구(轉句), 제4구를 결구(結句)라 하며, 이 네 구의 교묘한 구성으로 한 편의 절구를 만드는 방법이 기승전결에 해당하는 것이다. 기구에서 시상을 일으키고, 승구에서 그것을 이어받아 발전시키며, 전구에서는 장면과 사상을 새롭게 전환시키고, 결구는 전체를 묶어서 여운과 여정이 깃들도록 끝맺는 것이다. 또한 시작품 외에도 소설이나 희곡에서 줄거리나 구성을 고안하는 데도 사용되는 형식 중 하나가 바로 기승전결이다. 이러한 점에서 나희덕의 이 시는 이러한 전통적 관례를 아주 모범적으로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연으로 이루어진 시를 들여다보면 1연에서는 들에서 떠나는 모습, 2연에서는 떠나는 우리의 자식들의 모습, 3연에서는 꿈자리마저 덮치는 외부로부터의 공격, 4연에서는 어둠이 가신 세상에서 어디론가 다시 밀려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스토리로 이어지고 있으며 또한 한시의 절구체 형식을 통해서도 맞아떨어지고 있다. 갈등이 생기는 3연과 갈등이 해소되고 또 다른 현실이 펼쳐지는 4연은 독자에게 긴장감과 함께 카타르시스를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    뿌리에게 / 나희덕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처음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  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떨던  아, 나의 사랑을  먼 우물 앞에서도 목마르던 나의 뿌리여  나를 뚫고 오르렴  눈부셔 잘 부스러지는 살이니  내 밝은 피에 즐겁게 발 적시며 뻗어가려무나  척추를 휘어접고 더 넓게 뻗으면  그때마다 나는 착한 그릇이 되어 너를 감싸고  불꽃 같은 바람이 가슴을 두드려 세워도  네 뻗어가는 끝을 하냥 축복하는 나는  어리석고도 은밀한 기쁨을 가졌어라  네가 타고 내려올수록  단단해지는 나의 살을 보아라  이제 거무스레 늙었으니  슬픔만 한 두릅 꿰어 있는 껍데기의  마지막 잔을 마셔다오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내 가슴에 끓어오르던 벌레들,  그러나 지금은 하나의 빈 그릇,  너의 푸른 줄기 솟아 햇살에 반짝이면  나는 어느 산비탈 연한 흙으로 일구어지고 있을 테니                                   부패의 힘 / 나희덕      벌겋게 녹슬어 있는 철문을 보며 나는 안심한다 녹슬 수 있음에 대하여 냄비 속에서 금세 곰팡이가 피어오르는 음식에 나는 안심한다 썩을 수 있음에 대하여 썩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 덜 썩었다는 얘기도 된다 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는 것 부패는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이다 일종의 무릎 꿇음이다 그러나 잠시도 녹슬지 못하고 제대로 썩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방부제를 삼키는 나여                      풀포기의 노래 / 나희덕      네 물줄기 마르는 날까지  폭포여, 나를 내리쳐라  너의 매를 종일 맞겠다  일어설 여유도 없이  아프다 말할 겨를도 없이  내려꽂혀라, 거기에 짓눌리는  울음으로 울음으로만 대답하겠다  이 바위틈에 뿌리 내려  너를 본 것이  나를 영영 눈뜰 수 없게 하여도  그대로 푸른 멍이 되어도 좋다  네 몸은 얼마나 또 아플 것이냐                     바람은 왜 등뒤에서 불어오는가 / 나희덕    바람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눈이 멀 것만 같아  몸을 더 낮게 웅크리고 엎드려 있었다.  떠내려가기 직전의 나무 뿌리처럼  모래 한 알을 붙잡고  오직 바람이 지나가기만 기다렸다.  그럴수록 바람은 더 세차게 등을 떠밀었다.  너를 날려버릴 거야  너를 날려버릴 거야  저 금 밖으로, 흙 밖으로  바람은 왜 등 뒤에서 불어오는가  수천의 입과 수천의 눈과 수천의 팔을 가진 바람은  나는 엉금엉금 기어서  누군가의 마른 종아리를 간신히 붙잡았다.  그 순간 눈을 떴다  내가 잡은 것은 뗏목이었다.  아니, 내가 흘러내리는 뗏목이었다.                      못 위의 잠 /나희덕   저 지붕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못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 봅니다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 온 제비,  거리에선 아직 흙 바람이 몰려 오나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하는 못하나,  그 위의 잠     뜨거운 돌 /나희덕     움켜쥐고 살아온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놓고 펴 보는 날 있네  지나온 강물처럼 손금을 들여다보는  그런 날이 있네  그러면 내 스무 살 때 쥐어진 돌 하나  어디로도 굴러가지 못하고  아직 그 안에 남아 있는 걸 보네  가투 장소가 적힌 쪽지를 처음 받아들던 날  그건 종이가 아니라 뜨거운 돌이었네  누구에게도 그 돌 끝내 던지지 못했네  한 번도 뜨겁게 끌어안지 못한 이십대  火傷마저 늙어가기 시작한 삼십대  던지지 못한 그 돌  오래된 질문처럼 내 손에 박혀 있네  그 돌을 손에 쥔 채 세상과 손잡고 살았네  그 돌을 손에 쥔 채 글을 쓰기도 했네  문장은 자꾸 걸려 넘어졌지만  그 뜨거움 벗어나기 위해 글을 쓰던 밤 있었네  만일 그 돌을 던졌다면, 누군가에게, 그랬다면,  삶이 좀더 가벼울 수 있었을까  오히려 그 뜨거움이 온기가 되어  나를 품어 준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하네  오래된 질문처럼 남아 있는 돌 하나  대답도 할 수 없는데 그 돌 식어 가네  단 한 번도 흘러 넘치지 못한 화산의 용암처럼  식어 가는 돌 아직 내 손에 있네                      삼베 두 조각 / 나희덕       눈 내리는 아침     할머니는 손수 지어놓으신 수의로 갈아입으셨다 수의는 1978년 7월 15일자 신문지에 싸여 있었다 수의를 지어놓고도 이십년을 더 사신 할머니는 백살이 가까운 어느 겨울날이 되어서야 연듯빛을 군데군데 넣어 만든 그 수의를 벽장 속에 숨겨둔 날개옷처럼 차려 입으신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버선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도 허지, 그것을 안 맨들 양반이 아닌디 아닌디...... 어리등절해하는 사람들을 향해 할머니의 두 입술은 설핏 웃는 듯도 하였다 상자 속에는 버선 대신 삼베 두 조각이 들어 있어서 그걸로 잘 마른 장작 같은 두 발을 싸드렸다 삼베 두 조각을 두고 할머니는 왜 끝내 버선을 만들지 않으셨을까 1978년 7월 15일자 신문지 에 싸여 있던 수의 한벌과 삼베 두 조각으로 따뜻하게 여며 입고 할머니는 1998년 1월 19일 아침 횐눈이 내리는 새로운 집으로 걸어들어 가셨다                             보리수 밑을 그냥 지나치다 / 나희덕        가로등 너는 아득한 전생에  보리수나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뜨거운 발등 앞에 가부좌를 틀고 있는  석가를 물끄러미 굽어본 적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다  고요히 흘러 넘치는 그의 뇌수를  딱 한 방울 맛본 힘으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여기까지  걸어왔는지 모를 일이다  가로등 황금열매가 실하게 익어 가는 밤  설령 네가 그 날의 보리수였다고 해도  기대하지는 마라  이 시대에 누가 네 앞에 가부좌를 틀고  부처가 되려고 하겠느냐?  너를 붙들고 오열하다가 발등  왈칵 더럽히는 석가들이 있을 뿐  어쩌다 심각한 표정으로 혼자 가는 중생  있다손 치더라도  그는 전생에 너를 몰라보고 끄덕끄덕  보리수 밑을 찾아가는 중일 것이다                           와온臥溫에서 / 나희덕        산이 가랑이 사이로 해를 밀어 넣을 때,  어두워진 바다가 잦아들면서  지는 해를 품을 때,  종일 달구어진 검은 뻘흙이  해를 깊이 안아 허방처럼 빛나는 순간을 가질 때,  해는 하나이면서 헷, 셋이면서 하나  도솔가를 부르던 월명노인아,  여기에 해가 셋이나 떴으니 노래를 불러다오  뻘 속에 든 해를 조금만 더 머물게 해다오  저녁마다 일몰을 보고 살아온  외온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떨기꽃을 꺾어 바치지 않아도  세 개의 해가 곧 사라진다는 것을 알기에  찬란한 해도 하루에 한 번은  짠물과 뻘흙에 몸을 담근다는 것을 알기에  쪼개져도 둥근 수레바퀴  짜디짠 내 눈동자에도 들어와 있다  마침내 수레가 삐걱거리며 굴러가기 시작한다  와온 사람들아,  저 해를 오늘은 내가 훔쳐간다         옥수수밭이 있던 자리 / 나희덕       텅 비어 있다 어제까지 열려있던 문이 닫혀있다 바람에 소리를 내던 옥수수밭이 사라져버렸다  옥수수가 사라지면서  흔들림도, 허공도 함께 베어졌다 허공은 달빛을 안을 수 있는 팔들을 잃었다 소리내어 울 수 있는 입술들을 잃었다 갑옷과 투구 부딪치는 소리, 석탄을 지닌 산줄기가 먼저 폐허가 되듯이 열매가 실한 순서대로 베어져 나갔다 밑둥에는 아직 피가 마르지 않았다 드문드문 남아있는 옥수숫대, 형기가 유예된 수인처럼 한 종족이 거기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을 뿐. 밭은 더 어두워질 것이고 성근 열매들은 여분의 삶을 익혀 갈 것이다 희고 붉고 검은 옥수수알들이 익어갈 것이다 수확한 옥수수를 자루에 넣는 손들. 피 흘리는 허공도 함께 푸른 자루를 실은 트럭이 산모퉁이를 돌아간다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 나희덕     해질 무렵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당신은 성문 밖에 말을 잠시 매어두고 고요히 걸어 들어가 두 그루 나무를 찾아보실 일입니다. 가시 돋힌 탱자울타리를 따라가면 먼저 저녁해를 받고 있는 회화나무가 보일 것입니다. 아직 서 있으나 시커멓게 말라버린 그 나무에는 밧줄과 사슬의 흔적 깊이 남아 있고 수천의 비명이 크고 작은 옹이로 박혀 있을 것입니다. 나무가 몸을 베푸는 방식이 많기도 하지만 하필 형틀의 운명을 타고난 그 회화나무, 어찌 그가 눈 멀고 귀 멀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당신의 손끝은 그 상처를 아프게 만질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더 걸어가 또다른 나무를 만나보실 일입니다. 옛 동헌 앞에 심어진 아름드리 느티나무, 그 드물게 넓고 서늘한 그늘 아래서 사람들은 회화나무를 잊은 듯 웃고 있을 것이고 당신은 말없이 앉아 나뭇잎을 헤아리다 일어서겠지요 허나 당신, 성문 밖으로 혼자 걸어나오며 단 한번만 회화나무 쪽을 천천히 바라보십시오. 그 부러진 나뭇가지를 한번도 떠난 일 없는 어둠을요. 그늘과 형틀이 이리도 멀고 가까운데  당신께 제가 드릴 것은 그 어둠뿐이라는 것을요. 언젠가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사이를 걸어보실 일입니다.              다음 생의 나를 보듯이 / 나희덕                  어느 부끄러운 영혼이            절간 옆 톱밥더미를 쪼고 있다.            마치 다음 생의 나를 보듯이 정답다.            왜 하필이면 까마귀냐고             묻지는 않기로 한다.             새도 짐승도 될 수 없어             퍼드득 낮은 날개의 길을 내며             종종걸음 치는 한 生의 지나감이여             톱밥가루는 생목의 슬픔으로 젖어 있고             그것을 울며 가는 나여             짙은 그늘 속             떠나지 않는 너를 들여다보며            나는 이 생의 나와 화해한다.            그리고 산을 내려가면서             불쌍히 여길 무엇이 남아 있는 듯            까욱까욱 울음소리를 한번 내보기도 한다.                       칸나의 시절 / 나희덕      난롯가에 둘러앉아 우리는  빨간 엑스란 내복을 뒤집어 이를 잡았었지.  솔기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이들은 난로 위에 던져졌지.  타닥타닥 튀어 오르던 이들, 우리의 생은  그보다도 높이 튀어오르지 못하리란 걸 알고 있었지.  황사가 오면 난로의 불도 꺼지고  볕이 드는 담장 아래 앉아 눈을 비볐지.  슬픔 대신 모래알이 눈 속에서 서걱거렸지.  봄이 와도 칸나가 필 때까지는 겨울이었지.  빨간 내복을 벗어던지면 그 자리에 칸나가 피어났지.  고아원 뜰에 칸나는 붉고  우리 마음은 붉음도 없이 푸석거렸지.  이 몇 마리 말고 우리가 키울 수 있는 게 있었을까.  칸나보다도 작았던 우리들, 질긴  나일론 양말들은 쉽게 작아지지 않았지.  황사의 나날들을 지나 열일곱 혹은 열여덟.  세상의 구석진 솔기 사이로 숨기 위해 흩어졌지.  솔기는 깊어 우리 만날 수도 없었지.  마주친다 해도 길을 잃었을 때뿐이었지.  이 한 마리마저 키울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나일론 양말들, 다시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런 저녁을 밝혀줄 희미한 불빛에게  나는 묻지. 네 가슴에도 칸나는 피어 있는가, 라고.                           별 / 나희덕      모질고 모질어라  아직 생명을 달지 못한 별들  어두운 무한천공을 한없이 떠돌다가  가슴에 한 점 내리박히는 일  그리하여 생명의 입김을 가지게 되는 일  가슴에 곰팡이로나 피어나는 일  그 눈부심을 어찌 볼까  눈물 없이 그 앞을 질러 어떻게 달아날까  밤하늘 아래 얼마나 숨죽여 지나왔는데  얻어온 별빛 하나 어디에 둘까  어느 집 나무 아래 묻어놓을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 나희덕      살았을 때의 어떤 말보다  아름다웠던 한마디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이 잎을 노랗게 물들였다.  지나가는 소나기가 잎을 스쳤을 뿐인데  때로는 여름에도 낙엽이 진다.  온통 물든 것들은 어디로 가나.  사라짐으로 하여  남겨진 말들은 아름다울 수 있었다.  말이 아니어도, 잦아지는 숨소리,  일그러진 표정과 차마 감지 못한 두 눈까지도  더이상 아프지 않은 그 순간  삶을 꿰매는 마지막 한땀처럼  낙엽이 진다.  낙엽이 내 젖은 신발창에 따라와  문턱을 넘는다, 아직은 여름인데.                     땅 끝 / 나희덕     산너머 고운 노을을 보려고  그네를 힘차게 차고 올라 발을 굴렸지  노을은 끝내 어둠에게 잡아먹혔지  나를 태우고 날아가던 그넷줄이  오랫동안 삐걱삐걱 떨고 있었어  어릴 때는 나비를 쫓듯  아름다움에 취해 땅끝을 찾아갔지  그건 아마도 끝이 아니었을지 몰라  그러나 살면서 몇번은 땅끝에 서게도 되지  파도가 끊임없이 땅을 먹어들어오는 막바지에서  이렇게 뒷걸음질치면서 말야  살기 위해서는 이제  뒷걸음질만이 허락된 것이라고  파도가 아가리를 쳐들고 달려드는 곳  찾아나선 것도 아니었지만  끝내 발 디디며 서 있는 땅의 끝,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위태로움 속에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는 것이  땅끝은 늘 젖어 있다는 것이  그걸 보려고  또 몇번은 여기에 이르리라는 것이                         속리산에서 / 나희덕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 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 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 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                       귀뚜라미 / 나희덕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 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가자, 그 복숭아 나무 곁으로 / 나희덕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 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 꽃과 분홍 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 꽃과 분홍 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서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저녁이 오는 소리 가만히 들었습니다  흰 실과 검은 실을 더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길 위에서 / 나희덕      길을 잃고 나서야 나는 누군가의 길을 잃게 했음을 깨닳았다 그리고 어떤 개미를 기억해내었다 눅눅한 벽지 위 개미의 길을 무심코 손가락으로 문질러버린 일이 있다 돌아오던 개미는  지워진 길 앞에서 두리번거리다가 전혀 엉뚱한 길로 접어 들었다 제 길 위에 놓아주려 했지만 그럴수록 개미는 발버둥치며 달아나버렸다 길을 잃고 나서야 생각한다 사람들에게도 누군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냄새 같은 게 있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인연들의 길과 냄새를 흐려 놓았던지, 나의 발길은 아직도 길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상현上弦  / 나희덕  차오르는 몸이 무거웠던지 새벽녘 능선 위에 걸터앉아 쉬고 있다 신神도 이렇게 들키는 때가 있으니!  때로 그녀도 발에 흙을 묻힌다는 것을  외딴 산모퉁이를 돌며 나는 훔쳐보았던 것인데  어느새 눈치를 챘는지  조금 붉어진 얼굴로 구름 사이로 사라졌다가  다시 몸을 일으켜 저만치 가고 있다  그녀가 앉았던 궁둥이 흔적이  저 능선 위에는 아직 남아 있을 것이어서  능선 근처 나무들은 환한 상처를 지녔을 것이다  뜨거운 숯불에 입술을 씻었던 이사야처럼                       어떤 出土 / 나희덕       고추밭을 걷어내다가 그늘에서 늙은 호박 하나를 발견했다 뜻밖의 수확을 들어올리는데 흙 속에 처박힌 달디단 그녀의 젖을 온갖 벌레들이 오글오글 빨고 있는 게 아닌가 소신공양을 위해 타닥타닥 타고 있는 불꽃 같기도 했다 그 은밀한 의식을 훔쳐보다가 나는 말라가는 고춧대를 덮어주고 돌아왔다   가을갈이를 하려고 밭에 다시 가보니 호박은 온데간데 없다 불꽃도 흑 속에 잦아든 지 오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녀는 젖을 다 비우고 잘 마른 종잇장처럼 땅에 엎드려 있는 게 아닌가 스스로의 죽음을 덮고 있는 관뚜껑을 나는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한 웅큼 남아 있는 둥근 사리들!                        어두워진다는 것 / 나희덕    5시 44분의 방이  5시 45분의 방에게  누워 있는 나를 넘겨주는 것  슬픈 집 한채를 들여다보듯  몸을 비추던 햇살이  불현듯 그 온기를 거두어가는 것  멀리서 수원은사시나무 한그루가 쓰러지고  나무 껍질이 시들기 시작한는 것  시든 손등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는 것  5시 45분에서 기억은 멈추어 있고  어둠은 더 깊어지지 않고  아무도 쓰러진 나무를 거두어가지 않는 것  그토록 오래 서 있었던 뼈와 살  비로소 아프기 시작하고  가만, 가만, 가만히  금이 간 갈비뼈를 혼자 쓰다듬는 저녁                               섶섬이 보이는 방 / 나희덕   - 이중섭의 방에 와서     서귀포 언덕 위 초가 한 채 귀퉁이 고방을 얻어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다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방보다는 차라리 관에 가까운 그 방에서 게와 조개를 잡아먹으며 살았다 아이들이 해변에서 묻혀온 모래알이 버석거려도 밤이면 식구들의 살을 부드럽게 끌어안아 조개껍데기처럼 입을 다물던 방, 게를 삶아 먹은 게 미안해 게를 그리는 아고리와 소라껍데기를 그릇 삼아 상을 차리는 발가락군이 서로의 몸을 끌어안던 석회질의 방, 방이 너무 좁아서 그들은 하늘로 가는 사다리를 높이 가질 수 있었다 꿈 속에서나 그림 속에서 아이들은 새를 타고 날아다니고 복숭아는 마치 하늘의 것처럼 탐스러웠다 총소리도 거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섶섬이 보이는 이 마당에 서서 서러운 햇빛에 눈부셔 한 날 많았더라도 은박지 속의 바다와 하늘, 게와 물고기는 아이들과 해질 때까지 놀았다 게가 아이의 잠지를 물고 아이는 물고기의 꼬리를 잡고 물고기는 아고리의 손에서 파닥거리던 바닷가, 그 행복조차 길지 못하리란 걸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알지 못한 채 살았다 빈 조개껍데기에 세 든 소라게처럼     * 화가 이중섭과 그의 아내가 서로를 부르던 애칭.             이중섭과 아내 그리고 두 아들이 6.25 전쟁 중 살던 방, 초가집의 오른 쪽 끝에 있다                      벗어 놓은 스타킹 / 나희덕       지치도록 달려온 갈색 암말이 여기 쓰러져 있다 더 이상 흘러가지 않을 것처럼   생의 얼굴은 촘촘한 그물 같아서 조그만 까그라기에도 올이 주르르 풀려나가고 무릎과 엉덩이 부분은 이미 늘어져 있다 몸이 끌고 다니다가 벗어 놓은 욕망의 껍데기는 아직 몸의 굴곡을 기억하고 있다 의상을 벗은 광대처럼 맨발이 낯설다 얼른 집어들고 일어나 물 속에 던져 넣으면 달려온 하루가 현상되어 나오고 물을 머금은 암말은 갈색빛이 짙어지면서 다시 일어난다 또 다른 의상이 되기 위하여   밤새 갈기는 잠자리 날개처럼 잘 마를 것이다               *******************************************************   나희덕 시인 1966년 충남 논산 출생 1988년 연세대 국문과 졸업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 당선 김수영문학상 (1999)   현대문학상 (2003) 수상 시집 < 뿌리에게 >   <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  < 그 곳이 멀지 않다 > < 어두워진다는 것 > 산문집 등                              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   생에 대한 반성으로 여성으로서 자기 정체성 찾아가는 과정 표현    “이전에 삶이란 과거가 만들어낸, 견뎌야 할 어떤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제 과거가 미래를 만들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들뢰즈의 말처럼, 기억의 되새김질보다 생성의 순간에 몸을 맡기고 싶다. 오늘도 봄 그늘에 앉아 기다린다, 또 다른 나를.(‘시인의 말’ 중에서)” 생에 대한 단단한 반성과 성찰을 이끌어내는 시인, 나희덕의 시집 ‘야생사과’(창비)가 5년 만에 나왔다.   그가 ‘시인의 말’을 통해 밝힌 대로 상처와 고통을 따뜻하게 감싸 안아왔던 그의 시선은 좀 더 넓어지고 깊어졌다. ‘야생사과’를 통해 자신에게 야생사과를 건네준 사람들이 사라진 수평선에서 등 뒤에 서있던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대화’를 통 해 자기 속의 자벌레는 타인 속의 무당벌레에게  말을 건네 대화를 시도한다. 무엇보다 시인은 이번 시들을 두고 ‘여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 이라고 설명했다. “그동안 제가 페미니즘적인 기조를 밖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많은 시들이 가부장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경계를 넘는 여성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죠.” 이는 “내 안의 물기가 거의 말라갈 무렵 낯선 땅에서 물의 출구를 발견한 셈이다. 무수한 나를 흘려보내는 것이 첫 물줄기를 향해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었다”는 작가의 말과도 연관된다. ‘누가 내 이름을’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에서는 가부 장적인 세계로부터 독립해 경계 너머의 삶을 지향하는 여성의 모습을 담아냈다. 특히 ‘분홍신 을 신고’에서 시인은 음악에 몸을 맡긴 채 시간을 벗어나 어디론가 갈 수 있다고 노래한다. 오랫동안 자신을 붙잡아두었던 분홍신을 벗고 경계를 넘어서 나아가는 결연한 의지와 함께. “나는 이제 어디로든 갈 수 있어요/ 강물이 둑을 넘어 흘러내리듯/ 내 속의 실타래가 한없이 풀려 나와요/ 실들이 뒤엉키고 길들이 뒤엉키고/ 이 도시가 나를 잡으려고 도끼를 달려와도/ 이제 춤을 멈출 수가 없어요/ 내 발에 신겨진, 그러나 잠들어있던/ 분홍신 때문에/ 그 잠이 너무도 길었기 때문에.(‘분홍신을 신고’ 부분)” 두 남매가 아버지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영화 ‘안개 속의 풍경’의 일부를 인용한 ‘우리는 낙엽처럼’에서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근원,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나희덕 시인은 “안개 속에 있는 것처럼 우리 여정은 암담해 보이지만 그럴 때조차 시에서는 아버지란 존재를 빼고 스스로 길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마치 현대사에서 좋은 지도자를 찾고자 하지만 가도 가도 안개가 걷히지 않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스스로 강을 건너야 함을 알려주듯이 말이다. “이제 우리는 강을 건너요/ 한 조각 배를 타고/ 그것이 삶과 죽음의 경계인 줄도 모른 채/ 조금만 기다리세요/ 다 왔어요.(‘우리는 낙엽처럼’ 부분)” 나희덕 시인은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며 작품 활동 을 시작했고, 지금까지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조선대학교 문예창착학과 교수로 8년째 재직 중이다.        
374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기형도 - 빈집 댓글:  조회:4088  추천:0  2015-12-25
기형도의 「빈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작가 소개   기형도 (1960~1989). 경기도 연평 출생. 연세대학교 정외과를 졸업하고 1984년 중앙일보사 입사, 정치부 ․문화부 ․편집부 등에서 근무하였다. 1989년 3월 7일 새벽, 서울 종로의 한 심야 극장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하였다. 대학 재학 시절 윤동주 문학상 등 교내 주최 문학상을 받았고,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안개」가 당선되면서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중앙일보에 근무하는 동안 여러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하였으며, 구체적 이미지들을 통해 우울한 자신의 과거 체험과 추상적 관념들을 독특하게 표현하는 시를 썼다. 유고 시집으로는 『입 속의 검은 잎』(1989),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1990), 『기형도 전집』(1999) 등이 있다.    ▰ 기형도 작품경향 : 그의 작품은 주로 유년기에 경험했던 일들에 대한 우울한 기억이나 회상, 그리고 현대의 도시인들의 살아가는 생활을 독창적이면서도 강한 개성이 묻어 나오는 시어와 문체로 그려내고 있다. 그의 시에는 죽음과 절망, 불안과 허무 그리고 불행의 이미지가 환상적이고 일면 초현실적이며 공격적인 시인 특유의 개성적 문체와 결합하여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 평가받는 독특한 느낌의 시를 이루어 내고 있다. 동일 이미지의 반복이 중첩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든지 돌연한 이미지와 갑작스런 이질적 문장의 삽입, 도치, 콤마에 의한 분리, 감정의 고조(그는 감탄사를 연발한 드문 경우의 시인이었다)등 시어 구성과 문체가 일관되게 지속된 그의 암울한 세계관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유년시절 불우한 가족사와 경제적 궁핍, 그리고 죽음에 대한 체험과 이에 대한 강렬한 심미적 각인이 시 전체에 가득한 삶에 대한 부정적 영상을 이끈 원인이자 그의 시적 모티브를 유발하고 있는 동인이며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창을 닫고 비관적 세계로 침잔케 한 주된 이유로 이해되고 있다. 그의 시에는 현실에 대한 역사, 즉 역사적 전망이 없으며 따라서 그의 시는 퇴폐적이라 말할 수 있다는 비판이 있으나 초현실적 이미지를 추구하면서도 일상의 현실을 비판한 독특한 시세계는 주목할 만 하다 하겠다         ■ 핵심정리   ․ 성격 : 애상적, 서정적   ․ 제재 : 빈집에 갇힌 사랑   ․ 주제 : 사랑의 고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           사랑을 잃은 후의 슬픔과 폐쇄된 마음   ․ 특징 : 。시각적 이미지를 활용하고 있다.           。영탄적 표현을 활용하여 내적 고뇌를 드러내고 있다.           。관념을 사물의 이미지로 환치하고 있다.     ■ 이해와 감상 1  과거의 슬픈 사랑에서 벗어나려는 한 남자의 눈물겨운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시적 화자는 사랑을 잃고 편지를 쓰고 있다. 그 편지의 수신자는 화자 자신이며, ‘잘 있거라’의 대상 또한 사랑했던 사람이 아니라 화자 자신이다. 화자는 사랑의 열망에 사로잡혔던 가슴 아픈 추억과의 단절을 통해 사랑의 고뇌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과거의 구체적인 모습은 2~3연에 묘사되어 있다. 시적 화자는 겨울 안개가 온 세상을 뒤덮고 있는 긴 겨울밤, 촛불을 환하게 켜놓고 책상 앞에 앉아 있다. 흰 종이에 무언가를 쓰려고 하지만 아무 것도 쓰지 못하고 눈물만 흘린다. 이윽고, ‘짧은’ 겨울밤은 다 지나고 날은 밝아 온다. 화자는 지난밤의 모습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이것들과의 이별을 시도한다. 그 방법은 추억이라는 관념적인 것을 넣고 잠글 수 있는 사물의 이미지로 바꾸고, 이것을 ‘빈집’에 가두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상은 실현 불가능한 것이기에 화자의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라는 표현에서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연민을 보임으로써 고통스런 추억과의 결별에 실패하고 있다.       ■ 이해와 감상 2 화자는 이별을 겪은 이후 편지를 쓰고 있다. 그 편지의 수신인은 과거의, 이별하기 전의 자신의 모습들이다. 그 과거의 모습은 ‘짧았던 밤’, ‘창 밖을 떠돌던 겨울안개’, ‘촛불’, ‘종이들’, ‘눈물들’과 같은 시어들로 암시적으로 표현된다. 이 시어들을 통해서 우리는 몇 가지 장면들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촛불이 켜져 있는 밤이다. 그때 창밖에는 겨울 안개가 떠돌고 있다. 화자는 촛불이 켜진 방에서 흰 종이를 펼쳐 놓고 무언가를 쓴다. 그러나 그는 흰 종이를 보며 공포를 느낀다. ‘사랑한다’는 고백을 쓰고 싶지만 용기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내내 망설인다. 망설이는 자신이 안타깝고 답답해서 급기야는 서글픈 마음이 들어 눈물을 흘린다. 그러다 문득 밤은 다 지나가고 날이 밝아온다. 화자는 이런 자기 자신의 모습들에 하나하나 인사를 한다. 3연에서는 안녕을 고한 과거의 자신에게서 떠나면서 그들이 머무르고 있는 공간을 폐쇄시킨다. 그 ‘폐쇄’작업은 그것들이 있는 공간 바깥에서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문을 잠근다는 설정으로 표현된다. 나의 그 모든 ‘열망’(가엾은 내 사랑)들은 빈집에 갇히고, 나는 그 빈집을 떠나가는 것이다.     ■ 이해와 감상 3 시적 자아는 아마 어떤 대상을 짝사랑한 모양이다. 밤새도록 그 사람만 생각하며 간절히 그리워했기에 긴긴 겨울밤도 '짧'아 보이고 그 사람 생각에 못 이겨 캄캄한 밤 창문을 열었기에 '하얀 겨울 안개'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마침내 그리움을 못이긴 시적 자아는 촛불을 켜고 사랑 고백이라는 조마조마하고 무섭기까지 한 편지('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를 쓰려고 했을 것이고 그러나 차마 사랑한다는 표현은 하지 못하고 망설이면서 눈물을 흘린다. 그런 일이 늘 반복되어 이제 그 사물들이 친구처럼 사람처럼 친근하게 다가올 정도이다. 그런데 어느 날 시적 자아가 사랑하면서 간절히 그리워했지만 표현 한 번 못해 보았던 그 사랑을 그만 잃어 버렸다. 의미를 가졌던 모든 사물들은 이별을 고해야 하는 대상이 되고 말았다. 밤도 안개도 촛불도 흰 종이도 눈물도 열망도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해져 버리고 말았다. 그 모든 것을 결별하고 시적 자아는 돌아서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다. 사랑하는 마음은 끝까지 버릴 수 없다. 그 모든 것에 결별을 고하면서도 결별을 고하지 못하는 대상에 대한 서러운 사랑, 그래서 결별의 인사는 사랑을 떠나는 일이 아니라, 거꾸로 '사랑이 갇히는 일'이 되고 말았다.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사랑과 함께 의미를 가졌던 것들을 모두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대상에 대한 간절한 짝사랑의 기억까지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기억을 버릴 수 없다. '사랑을 잃고', '나'라는 시적 자아는 그 사랑과 함께 의미를 가졌던 모든 것들을 결별하고 사랑의 기억마저 결별하려고 시를 '쓰'고 '문'까지 잠그지만 결국은 '빈집에 갇혀 버려', 아무런 주체적 결별도 이루어 낼 수 없는, '가엾은 내 사랑'이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아무리 '잘 있거라'라고 목청껏 결별을 선언해도 잊혀지지 않은 사랑, 어떤 탈출도 이룰 수 없는 짝사랑에 대한 처절한 미련이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라는 구절로 형상화되어 있다. 고백 한 번 못해 본 외로운 짝사랑, 더구나 그 짝사랑과의 결별을 확인하는 순간의 고독은 얼마나 더 큰가? 잊어버리자고 시를 썼지만 잊어버리지 못하는 안타까운 미련, 그래서 시적 자아는 통곡한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이 시는 짝사랑하는 대상, 그러나 고백한 번 못해보고 잃어버린 짝사랑에 대한 처절할 정도의 미련이 잘 형상화되어 있는 짝사랑 이별가, 짝사랑 사랑가의 절창이다.     ■ 수능형 문제 여명의 종이 울린다. 새벽 별이 반짝이고 사람들이 같이 산다는 것이다. 닭이 운다, 개가 짖는다. 오는 사람이 있고 가는 사람이 있다. 오는 사람이 내게로 오고 가는 사람이 다 내게서 간다.   아픔에 하늘이 무너지는 때가 있었다. 깨진 그 하늘이 아물때에도 가슴에 뼈가 서지 못해서 푸르런 빛은 장마에 황야처럼 넘쳐 흐르는 흐린 강물 위에 떠 갔다. 나는 무너지는 둑에 혼자 서 있었다. 기슭에는 채송화가 무더기로 피어서 생의 감각을 흔들어 주었다.   1. 위 시의 화자(‘생의 감각’의 화자)가 ‘빈집’의 화자에게 할 수 있는 말로 적절한 것은? ① 당신은 스스로를 절망에 가두고 있군요. 저도 한때는 당신처럼 절망했던 적이 있지만 지금은 희망을 바라보고 살아요. ② 당신은 의지가 너무 약하군요. 강인하고 굳센 의지가 있어야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어요. 빨리 마음을 고쳐먹도록 해요. ③ 나는 절망의 끝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는 사람들을 존경해요. 나도 당신처럼 용기를 갖고 어려움을 이겨 나가야겠어요. ④ 저도 당신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어요. 우리 인생은 왜 이렇게 힘든 것일까요? 저도 가끔씩 다른 세계로 달아나고 싶은 때가 있어요. ⑤ 자신의 아픔에만 관심을 기울이면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해요. 너무 당신의 고통에만 묶여 있지 말고 타인의 아픔에도 관심을 갖도록 해요.   : 1번 [시평]  젊은 날의 사랑은 순수하다. 그러므로 더욱 열정적이다. 길지 않았던 사랑에의 기억은 그 열정으로 인하여 더욱 가슴이 아프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러한 사랑을 잃고, 사랑을 하던, 그 짧았던 밤들에게, 창 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에게, 아무 것도 모르며 타오르던 촛불에게, 눈물에게, 열망에게 아픈 작별을 고한다.   그리고 이내 그 사랑의 열정으로 인하여 ‘장님처럼 더듬거리던 그 사랑의 문을 잠그고’ 그리고는 이내 그 사랑, 빈집에 가두어 버리고 만다. 사랑은, 젊은 시절, 그 사랑에의 열망은 이와 같이 우리에게 혹독한 것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아, 아 진실한 것이다. =====================================      기형도 시인(奇亨度 1960.2.16-1987.3.7) 1.프로필 1960. 2.16  경기도 옹진군 연평도에서 3남4녀중 막내로 출생                부친 기우민(황해도에서 피난온후 교사와 공무원 제직)과 모친 장옥순 1965.         5세때 광명시 소하동(경기도 시흥군 소하리)에 정착                 6세무렵에는 신문에 나온 한자를 읽어 주위에서 '신동'소리를 들음 1967.        부친이 농사로 전업하였으며 시흥국민학교에 입학 1969.        부친이 뇌졸증으로 쓰러지면서 모친이 가계를 꾸려감 1973.        시흥국민학교 졸업                성적이 우수하고 노래와 그림에 재주를 보임 1975.        불의의 사고로 셋째 누이가 사망 1976.        신림중학교 수석 졸업(1회)                교내 중창단에서 바리톤으로 활동                백일장 시화전에서 두각을 나타냄 1979.        중앙고등학교 수석 졸업.                연세대학교 입학                교내 문학동아리에서 본격적인 문학수업 시작 1980.        교내 신문인{연세춘추}에서 소설 [영하의 바람]으로 '박영준문학상'가작 입선                교지 [연세]지에서 시 [가을에]로 '백양문학상' 가작 입선 1981.7.      방위병으로 안양에서 군복무                안양 문학동인지에 [사강리(沙江里)]발표 1982.6.      전역후 복학                [겨울판화(版畵)] [포도밭 묘지] [폭풍의 언덕]등 작품 발표                교내 신문[연세춘추]에서 [식목제(植木祭)]로 '윤동주 문학상'수상 1984.10.    중앙일보사에 입사 1985.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안개]로 수상                [전문가(專門家)].[먼지투성이의 푸른종이].[늙은 사람].[白夜(백야)]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밤눈].[오래된 서적(書籍)].[어느 푸른 저녁]                등의 시 발표                2월에 연세대학교 정치외교과 졸업.                수습기간거쳐 중앙일보 정치부에 배속 1986.        중앙일보 정치부에서 문화부로 옮김.                [위험한 가계(家系)].조치원[鳥致院)].[집시의 시집(詩集)].[숲으로된 성벽]                [바람으니 그대쪽으로].[포도밭 묘지1.2]등 작품 발표 1987.        여름 휴가로 유럽 여행                [나리나리 개나리].[식목일(植木日)].[오후 4시의 희망].[여행자]                [장미빛 인생]발표 1988.        중앙일보 편집부로 옮김                [짧은 여행의 기록].[진눌깨비].[죽은 구름].[추억에 대한 경멸].                [흔해빠진 독서].[노인들].[길위에서 중얼거리다].[물속의 사막].                [바람의 집].[겨울판화].[삼촌의 죽음].[너무 큰 등반이 의자]                [정거장에서의 충고].[가는비 온다].[기억할만한 지나침]등 발표 1989.        [성탄목(聖誕木)-겨울판화3].[그집앞].[빈 집].[가수는 입을 다무네].                [질투는 나의 힘].[대학시절].[나쁘게 말한다].등 발표 1989.3.7.   새벽3시 종로2가 한 극장안에서 숨진채 발견(사인은 뇌졸증)                경기도 안성소재 천주교 수원교구 묘지에 묻힘                5월 유고시집[입속의 검은잎]-'문학과 지성사'발간                유작으로 [잎속의 검은 잎].[그날].[흘린 사람]발표 1990.3.     산문집[잛은 여행의 기록]-'살림출판사'출간 1994.2.     추모문집[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솔출판사'출판 1999.3.     전집[기형도 전집'-문학과지성사'출판          2.출생및 성장   1960.2.16(음력) 경기도 옹지군 연평도 출생 3남 4녀중 막내로 당시 부친은 황해도에서 피난온 후 교사를 거쳐 공무원으로 재직하였다. 부친은 간척사업에 손을 댓으나 실패한후 유랑생활을 정리하고 경기도 시흥군 소하리 (지금의 광면시 소하동)에 정착하였다. 당시 소하리는 급속한 산업화에 밀린 철거민,과 수해 이재민이 정착촌을 이루었던곳으로 전형적인 도시의 그늘에 가린 모습이었다. 1985년 신춘문예에 시 부문으로 당선작인 [안개]가 바로 이런 모습의 배경이 되었다 시흥국민학교,신림중학교,중앙고등학교를 거쳐 연세대학교 법정대학에 입학하여 정치외교과 를 종업하였고 중앙일보에 입사하여 정치부,문화부,편집부를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였다 1989년3월7일 한 극장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되어 생을 마감하고 지금은 경기고 안성소재 천주교 묘지에 묻혔다   3.활동및 작품 경향   대학 입학 후 교내 문학동아리 '연세문학회'에 입회,본격적인 문학수업을 시작한 이후 대학 문학상인 박영준 문학상(소설부문)에 [영하의 바람]이 가작으로 입선.[식목제]가 대학문학 상인 '윤동주문학상'시부문에 당선되었다. 안양 근교에서 방위병으로 복무하며 안양의 문학동인인'수리'에 참여하고 동인지에[사강리] 등을 발표,시작에 몰두하였다 다수의 작품을 쓰며.신춘문예에 응모하기 시작하여,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안개]가 당선되었다.이후 문예지에 [전문가].[먼지추성이의 푸른 종이].[늙은 사람].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백야].[밤차].[오래된 서적].[어느 푸른 저녁].등의 시를 발표. 중앙일보에 근무하며[위험한 가계][조치원][집시의 시집][바람은 그대쪽으로][포도밭 묘지1.2][숲으로 된 성벽]등의 작품을 지속적으로 발표하며 문인 및 출판관련 인사들과도 활발히 교류하였다. 1989년5월 유고시집[입속의 검은 잎]-(제목은 평론가 김힌이 정하였음)이 발간되었고 유작으로 산문집[짧은 여행의 기록1990][기형도 전집/1999과 시 [입속의 검은 잎], [그 날],[흘린 사람]이 발표되었다 그의 작품은 주로 유년기에 경험했던 일들에 대한 우울한 기억이나 회상,그리고 현대의 도시인들의 살아가는 생활을 독창적이면서도 강한 개성이 묻어 나오는 시어와 문체로 그려내고 있다. 그의 시에는 죽음과 절망,불안과 허무 그리고 불행의 이미지가 환성적이고 일면 초현실적 이며 공격적인 시인 특유의 개성적 문체와 결합하여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 평가받는 독특한 느낌의 시를 이루어 내고있다. 동일 이미지의 반복이 중첩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든지 돌영한 이미지와 갑작스런 이질적 문장의 삽입,도치,콤마에 으한 문리,감정의 고조(그는 감탄사를 연발한 드문 경우위 시인) 등 시어 구성과 문치가 일관되게 지속된 그의 암울한 세계관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형상화 시키는데 효과적으로 사용되고있으며 유년시절 불우한 가족사와 경제적 궁핍,그리고 즉음에 대한 체험과 이에대한 강렬한 심미적 각인이 시 전체에 가득한 삶에 다한 부정적 영상을 이끈 원인이자 그의 시적 모티브를 유발하고있는 동인이면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창을 닫고 비관적 세계로 침잔케 한 주된 이유로 이해되고있다. 그의 시에는 현실에 대한 역사,즉 역사적 전망이 없으며 따라서 그의 시는 퇴폐적이라 말할 수 있다는 비판이 있으나 초현실적 이미지를 추구하면서도 일상의 현실을 비판한 독특한 시세계는 주목할만 하다 하겠다.              시인 기형도에 대한 평가의 시간, 그속에서 우리는 시인 기형도를 만난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돋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안개-   시비는 지역 문화예술인들이 중심인 기형도기념사업회가 제안하고 광명시가 1천만 원을 들여 건립한 것이다. 시비 제막식 이전 행사였던 '시인 기형도'의 세미나의 촛점은 지역문화인물로서의 기형도를 검증하는 자리로 현대 시인으로서의 지역문화인물 탐구,시 속 비유를 통해 시인의 삶과 지역성을 모색하는 광명시의 인물로 그를 꼽은것이다   안개시인'기형도' 는 경기도 옹진군 연평도에서 태어나 다섯살 되던 해 현 광명시 소하동으로 이주해 유년시절을 보냈다. 기형도 시인은 1983년 연세대를 졸업하고 84년 중앙일보 정치부기자로 입사,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안개'라는 시로 당선 등단한다.   ▲ 기형도 시인   84년 신문기자로 활동 ,그는 특유의 섬세함과 꼼꼼함으로  채워진 취재노트와 스크랩북은 단순 취재기록뿐만 아니라 관련전문 자료를 첨부해 자신의 의견을 기록하는 섬세한 사람이었다. 70~80년대 서민들의 가난한 삶과 시대적 아픔은 기형도의 시 속에서 다양하게 표현된다.   시인 기형도는 22세 되던해 82년 윤동주 문학상을 수상한다. 기형도는 문학이외에 음악에도 타고난 재능을 발휘하여 중앙고 재학시절 교내 중창단 '목동'에서  바리톤으로 활동을 한 바 있으며 그 음악적 재능을 발산 할 수 있도록 누님이 대학시절 사준 기타가 조율해둔 채로 보관되어져 있다. ▲ 기형도의 누님 기애도씨가 사준 조율 된 채 보관되어 있는 기타   ▲ '빈집' 소재가 된 기형도의 생가 ▲ 기형도의 육필원고 그는 매일 시를 한편씩 썼다고 한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안개,물속의사막,빈집,388종점의 지역을 배경으로 쓰여졌다고 한다. 기형도 시인은 89년 3월 29세의 아까운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기형도의 시비제막식에는 광명시장을 비롯한 지역인사들과 그의 유족인 누님 '기애도'여사가 참여하여 건립기념식과 추모식의 행사가 치루어졌다. 광명시장은 "우리 고장의 시를 마음의 꽃으로 향기로 꿈으로 키워낼 수 계기가 되길 바란다"라고 인사말을 통해 전했다.   기형도 시인의 누나인 기애도 여사는 '시비에 적힌 있는 어느 푸른 저녁에 우리가 서 있다"라며 "푸른 저녁을 맞이하는 날들이 많았으면 한다"는 짧은 인사말을 통해 기형도를 기리는 시비를 세우는데 있어 노력해 주신 모든분께 감사하다는 뜻을 전했다. ▲  시비 '어느푸른저녁에'라는 시가 두귀절로 나뉘어 새겨져 있다.   기념사업회 이정남 대표는 "기형도를 사랑하는 시민들의 노력의 결실로 올해 축제의 기간에 기형도를 기리는 시비식을 갖게 되어 너무나 뜻 깊은 일이다"라며 "시민들이 약수터를 지나는 길목에 시비를 세워 지역에서 명실상부한 문화인물로 자리매김하길 바란다" 며 시비 건립의 취지를 밝혔다.     ===================================================================   기형도 시 모음 시인 기형도 : 입 속의 검은 잎 : 빈집             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어두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바람은 그대 쪽으로     어둠에 가려 나는 더 이상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영혼(靈 魂)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그대 창문(窓門)으로 다가간다. 가축 들의 순한 눈빛이 만들어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 곳을 찾고 있다. 외롭다. 그대, 내 낮은 기침소리가 그 대 단편(短篇)의 잠속에서 끼어들 때면 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다오. 내 그 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침묵(沈默)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닌다. 그대는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 한다. 불빛은 너무 약해 벌판을 잡을 수 없 고, 갸우뚱 고개 젓는 그대 한숨 속으로 언제든 나는 들어가고 싶었다. 아 아,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 한 잎의 불을 끄리라. 나는 소리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꺾는다. 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고 나는 내가 끝끝내 갈 수 없는 생(生)의 벽지(僻地)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대, 저 고단한 등피(燈皮)를 다 닦아내는 박명(簿明)의 시간, 흐려지는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움직임이 그 치고 지친 바람이 짧은 휴식을 끝마칠 때까지.        봄날은 간다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그림자들은 한 장 열풍(熱風)에 말려 둥글게 휘어지는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미루나무 얕은 그늘 속을 첨벙이며 2시반 시외버스도 떠난 지 오래인데 아까부터 서울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 신작로 위에는 흙먼지, 더러운 비닐들 빈 들판에 꽂혀 있는 저 희미한 연기들은 어느 쓸쓸한 풀잎의 자손들일까 밤마다 숱한 나무젓가락들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사내들은 화투패마냥 모여들어 또 그렇게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간다 여자가 속옷을 헹구는 시냇가엔 하룻밤새 없어져버린 풀꽃들 다시 흘러들어온 것들의 인사(人事) 흐린 알전구 아래 엉망으로 취한 군인은 몇 해 전 누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자는 자신의 생을 계산하지 못한다. 몇 번인가 아이를 지울 때 그랬듯이 습관적으로 주르르 눈물을 흘릴 뿐 끌어안은 무릎 사이에서 추억은 내용물 없이 떠오르고 소읍(小邑)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하다, 누구일까 세숫대야 속에 삶은 달걀처럼 잠긴 얼굴은 봄날이 가면 그뿐 숙취(宿醉)는 몇 장 지전(紙錢)속에서 구겨지는데 몇 개의 언덕을 넘어야 저 흙먼지들은 굳은 땅 속으로 하나둘 섞여들는지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다. 여섯 개의 줄이 모두 끊어져 나는 오래 전부터 그 기타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때 나의 슬픔과 격정들을 오선지 위로 데리고 가 부드러운 음자리로 배열해주던' 알 수 없는 일이 있다. 가끔씩 텅 빈 방에 홀로 있을 때 그 기타 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나는 경악한다. 그러나 나의 감각들은 힘센 기억들을 품고 있다. 기타 소리가 멎으면 더듬더듬 나는 양초를 찾는다. 그렇다.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이상한 연주를 들으면서 어떨 때는 내 몸의 전부가 어둠 속에서 가볍게 튕겨지는 때도 있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입 속의 검은 잎    택시 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 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 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그 입 속에 악착 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소리의 뼈   김교수님이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다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것이다 모두 그 말을 웃어넘겼다, 몇몇 학자들은 잠시 즐거운 시간을 제공한 김교수의 유머에 감사했다 학장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은 일 학기 강의를 개설했다 호기심 많은 학생들이 장난삼이 신청했다 한 학기 내내 그는 모든 수업 시간마다 침묵하는 무서운 고집을 보여주었다 참지 못한 학생들이, 소리의 뼈란 무엇일까 각자 일가견을 피력했다 이군은 그것이 침묵일 거라고 말했다. 박군은 그것을 숨은 의미라 보았다 또 누군가는 그것의 개념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모든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에 접근하기 위하여 채택된 방법론적 비유라는 것이었다 그의 견해는 너무 난해하여 곧 묵살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 다음 학기부터 우리들의 귀는 모든 소리를 훨씬 더 잘 듣게 되었다.       가는 비 온다   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고 넓은 가로수 잎들은 떨어지고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 저 식물들에게 내가 그러나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 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 지금은 한 여자가 그 집에 산다 그 여자는 대단히 고집 센 거위를 기른다 가는 비…는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 적실 뿐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음성은 이제 누구의 것일까 이 상점은 어쩌다 간판을 바꾸었을까 도무지 쓸데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우산을 쓴 친구들은 나에게 지적한다 이 거리 끝에는 커다란 전당포가 있다, 주인의 얼굴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시간을 빌리러 뒤뚱뒤뚱 그곳에 간다 이를테면 빗방울과 장난을 치는 저 거위는 식탁에 오를 나날 따위엔 관심이 없다 나는 안다, 가는 비…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며 누구도 죽음에게 쉽사리 자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 버리는 가는 비…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       가수는 입을 다무네   걸어가면서도 나는 기억할 수 있네 그때 나의 노래 죄다 비극이었으나 단순한 여자들은 나를 둘러쌌네 행복한 난투극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어리석었던 청춘을, 나는 욕하지 않으리   흰 김이 피어 오르는 골목에 떠밀려 그는 갑자기 가랑비와 인파 속에 뒤섞인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모든 세월이 떠돌이를 법으로 몰아냈으니 너무 많은 거리가 내 마음을 운반했구나 그는 천천히 얇고 검은 입술을 다문다 가랑비는 조금씩 그의 머리카락을 적신다 한마디로 입구 없는 삶이었지만 모든 것을 취소하고 싶었던 시절도 아득했다 나를 괴롭힐 장면이 아직도 남아 있을까 모퉁이에서 그는 외투 깃을 만지작거린다 누군가 나의 고백을 들어주었으면 좋으련만 그가 누구든 엄청난 추억을 나는 지불하리라 그는 걸음을 멈춘다, 어느새 다 젖었다   언제부턴가 내 얼굴은 까닭없이 눈을 찌푸리고 내 마음은 고통에게서 조용히 버림받았으니 여보게, 삶은 떠돌이들을 한 군데 쓸어 담지 않는다, 그는 무슨 영화의 주제가처럼 가족도 없이 흘러온 것이다 그의 입술은 마른 가랑잎, 모든 깨달음은 뒤늦은 것이니 따라가 보면 축축한 등 뒤로 이런 웅얼거림도 들린다   어떠한 날씨도 이 거리를 바꾸지 못하리 검은 외투를 입은 중년 사내 혼자 가랑비와 인파 속을 걷고 있네 너무 먼 거리여서 표정은 알 수 없으나 강조된 것은 사내도 가랑비도 아니었네     그  날   어둑어둑한 여름날 아침 낡은 창문 틈새로 빗방울이 들이친다. 어두운 방 한복판에서 김(金)은 짐을 싸고 있다. 그의 트렁크가 가장 먼저 접수한 것은 김의 넋이다. 창문 밖에는 엿보는 자 없다. 마침내 전날 김은 직장과 헤어졌다. 잠시 동안 김은 무표정하게 침대를 바라본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침대는 말이 없다. 비로소 나는 풀려나간다, 김은 자신에게 속삭인다, 마침내 세상의 중심이 되었다.   나를 끌고 다녔던 몇 개의 길을 나는 영원히 추방한다. 내 생의 주도권은 이제 마음에서 육체로 넘어갔으니 지금부터 나는 길고도 오랜 여행을 떠날 것이다. 내가 지나치는 거리마다 낯선 기쁨과 전율은 가득 차리니 어떠한 권태도 더 이상 내 혀를 지배하면 안 된다.   모든 의심을 짐을 꾸리면서 김은 거둔다. 어둑어둑한 여름 날 아침 창문 밖으로 보이는 젖은 길은 침대처럼 고요하다. 마침내 낭하가 텅텅 울리면서 문이 열린다. 잠시 동안 김은 무표정하게 거리를 바라본다. 김은 천천히 손잡이를 놓는다. 마침내 희망과 걸음이 동시에 떨어진다. 그 순간, 쇠뭉치 같은 트렁크가 김을 쓰러뜨린다. 그곳에서 계집아이 같은 가늘은 울음 소리가 터진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빗방울은 은퇴한 노인의 백발 위로 들이친다.     그 집 앞   그날 마구 비틀거리는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너무도 가까운 거리가 나를 안심시켰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기억이 오면 도망치려네 사내들은 있는 힘 다해 취했네 나의 눈빛 지푸라기처럼 쏟아졌네 어떤 고함 소리도 내 마음 치지 못했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모든 추억은 쉴 곳을 잃었네 나 그 술집에서 흐느꼈네 그날 마구 취한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사내들은 남은 힘 붙들고 비틀거렸네 나 못생긴 입술 가졌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벗어 둔 외투 곁에서 나 흐느꼈네 어떤 조롱도 무거운 마음 일으키지 못했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 잃었네       기억할 만한 지나침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서기(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 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깊고 텅 빈 사무실 창 밖으로 눈이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 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 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늙은 사람   그는 쉽게 들켜 버린다 무슨 딱딱한 덩어리처럼 달아날 수 없는, 공원 등나무 그늘 속에 웅크린   그는 앉아 있다 최소한의 움직임만을 허용하는 자세로 나의 얼굴, 벌어진 어깨, 탄탄한 근육을 조용히 핥는 그의 탐욕스런 눈빛   나는 혐오한다, 그의 짧은 바지와 침이 흘러 내리는 입과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허옇게 센 그의 정신과   내가 아직 한 번도 가본 적 없다는 이유 하나로 나는 그의 세계에 침을 뱉고 그가 이미 추방되어 버린 곳이라는 이유 하나로 나는 나의 세계를 보호하며 단 한 걸음도 그의 틈입을 용서할 수 없다   갑자기 나는 그를 쳐다본다, 같은 순간 그는 간신히 등나무 아래로 시선을 떨어뜨린다 손으로는 쉴새없이 단장을 만지작거리며 여전히 입을 벌린 채 무엇인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그의 육체 속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그 무엇이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대학 시절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왔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 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토리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물 속의 사막   밤 세 시, 길 밖에서 모두 흘러간다 나는 금지된다 장마비 빈 빌딩에 퍼붓는다 물 위를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이 지나가고 나는 더 이상 인기척을 내지 않는다   유리창, 푸른 옥수수잎 흘러 내린다 무정한 옥수수나무… 나는 천천히 발음해 본다 석탄가루를 뒤집어 쓴 흰 개는 그 해 장마통에 집을 버렸다   비닐집, 비에 잠겼던 흙탕마다 잎들은 각오한 듯 무성했지만 의심이 많은 자의 침묵은 아무것도 통과하지 못한다 밤 도시의 환한 빌딩은 차디 차다   장마비, 아버지 얼굴 떠내려 오신다 유리창에 잠시 붙어 입을 벌린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우수수 아버지 지워진다, 빗줄기와 몸을 바꾼다   아버지, 비에 묻는다 내 단단한 각오들은 어디로 갔을까? 번들거리는 검은 유리창, 와이셔츠 흰 빛은 터진다 미친 듯이 소리친다, 빌딩 속은 악몽조차 젖지 못한다 물들은 집을 버렸다! 내 눈속에는 물들이 살지 않는다       바람의 집   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우를 깎아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자정 지나 앞마당에 은빛 금속처럼 서리가 깔릴 때까지 어머니는 마른 손으로 종잇장 같은 내 배를 자꾸만 쓸어 내렸다. 처마 밑 시래기 한줌 부스러짐으로 천천히 등을 돌리던 바람의 한숨. 사위어 가는 호롱불 주위로 방 안 가득 풀풀 수십 장 입김이 날리던 밤, 그 작은 소년과 어머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숲으로 된 성벽     저녁 노을이 지면 신(神)들의 상점(商店)엔 하나 둘 불이 켜지고 농부들은 작은 당나귀들과 함께 성(城) 안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성벽은 울창한 숲으로 된 것이어서 누구나 사원(寺院)을 통과하는 구름 혹은 조용한 공기들이 되지 않으면 한 걸음도 들어갈 수 없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그 성(城)   어느 골동품 상인(商人)이 그 숲을 찾아와 몇 개 큰 나무들을 잘라내고 들어갔다 그곳에는…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본 것은 쓰러진 나무들뿐, 잠시 후 그는 그 공터를 떠났다   농부들은 아직도 그 평화로운 성(城)에 살고 있다 물론 그 작은 당나귀들 역시       식목제 (植木祭)   어느 날 불현듯 물 묻은 저녁 세상에 낮게 엎드려 물끄러미 팔을 뻗어 너를 가늠할 때 너는 어느 시간의 흙속에 아득히 묻혀 있느냐 축축한 안개 속에서 어둠은 망가진 소리 하나하나 다듬으며 이 땅 위로 무수한 이파리를 길어 올린다 낯선 사람들, 괭이 소리 삽소리 단단히 묻어 두고 떠난 벌판 어디쯤일까 내가 연기처럼 더듬더듬 피어 올랐던 이제는 침묵의 목책 속에 갇힌 먼 땅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 흘러간다 어디로 흘러가느냐, 마음 한 자락 어느 곳 걸어 두는 법 없이 희망을 포기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리, 흘러간다 어느 곳이든 기척 없이 자리를 바꾸던 늙은 구름의 말을 배우며 나는 없어질 듯 없어질 듯 생(生) 속에 섞여 들었네 이따금 나만을 향해 다가오는 고통이 즐거웠지만 슬픔 또한 정말 경미한 것이었다 한때의 헛된 집착으로도 솟는 맑은 눈물을 다스리며 아, 어느 개인 날 낯선 동네에 작은 꽃들이 피면 축복하며 지나가고 어느 궂은 날은 죽은 꽃 위에 잠시 머물다 흘러갔으므로 나는 일찍이 어느 곳에 나를 묻어 두고 이다지 어지러운 이파리로만 날고 있는가 돌아보면 힘없는 추억들만을 이곳저곳 숨죽여 세워 두었네 흘러간다, 모든 마지막 문들은 벌판을 향해 열리는데 아, 가랑잎 한 장 뒤집히는 소리에도 세상은 저리 쉽게 떠내려간다 보느냐, 마주보이는 시간은 미루나무 무수히 곧게 서 있듯 멀수록 무서운 얼굴들이다, 그러나 희망도 절망도 같은 줄기가 틔우는 작은 이파리일 뿐, 그리하여 나는 살아가리라 어디 있느냐 식목제(植木祭)의 캄캄한 밤이여, 바람 속에 견고한 불의 입상(立像)이 되어 싱싱한 줄기로 솟아오를 거냐, 어느 날이냐 곧 이어 소스라치며 내 유년의 떨리던, 짧은 넋이여           안 개   □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  2   이 읍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군단(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 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 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성역(聖域)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 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겁탈당하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醉客)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총신(銃身)을 겨눈다. 상처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  3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어느 푸른 저녁   □  1   그런 날이면 언제나 이상하기도 하지, 나는 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을 걷고 있는 것이다, 검고 마른 나무들 아래로 제각기 다른 얼굴들을 한 사람들은 무엇엔가 열중하며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혹은 좁은 낭하를 지나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 가는   나는 그것을 예감이라 부른다,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숨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그런 때를 조심해야 한다, 진공 속에서 진자는 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씩 흔들리는 것은 무방하지 않은가 나는 그것을 본다   모랫더미 위에 몇몇 사내가 앉아 있다, 한 사내가 조심스럽게 얼굴을 쓰다듬어 본다 공기는 푸른 유리병, 그러나 어둠이 내리면 곧 투명해질 것이다, 대기는 그 속에 둥글고 빈 통로를 얼마나 무수히 감추고 있는가! 누군가 천천히 속삭인다, 여보게 우리의 생활이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 세상은 얼마나 많은 법칙들을 숨기고 있는가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느낌은 구체적으로 언제나 뒤늦게 온다, 아무리 빠른 예감이라도 이미 늦은 것이다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  2   가장 짧은 침묵 속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결정들을 한꺼번에 내리는 것일까 나는 까닭 없이 갸우뚱해본다 둥글게 무릎을 기운 차가운 나무들, 혹은 곧 유리창을 쏟아버릴 것 같은 검은 건물들 사이를 지나 낮은 소리들을 주고 받으며 사람들은 걸어오는 것이다 몇몇은 딱딱해 보이는 모자를 썼다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 가는 나는 그것을 습관이라 부른다, 또다시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그러나 안심하라, 감각이여!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느 투명한 저녁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모든 신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여행자      그는 말을 듣지 않는 자신의 육체를 침대 위에 집어 던진다 그의 마음 속에 가득찬, 오래 된 잡동사니들이 일제히 절그럭거린다 이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가,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이곳까지 열심히 걸어왔었다, 시무룩한 낯짝을 보인 적도 없다 오오, 나는 알 수 없다, 이곳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내 정체를 눈치챘을까 그는 탄식한다, 그는 완전히 다르게 살고 싶었다, 나에게도 그만한 권리는 있지 않는가 모퉁이에서 마주친 노파, 술집에서 만난 고양이까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중얼거린다, 무엇이 그를 이곳까지 질질 끌고 왔는지, 그는 더 이상 기억도 못한다 그럴 수도 있다, 그는 낡아빠진 구두에 쑤셔박힌, 길쭉하고 가늘은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고 동물처럼 울부짖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           오래된 서적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 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몇 안 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보며 서표(書標)를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보라   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 볼 것이가, 하지만 그 경우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 줄일 수도 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위험한 가계(家系) 1969   □  1   그 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 해도 되겠구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시면서 말했다. 이젠 그 얘긴 그만하세요 어머니. 쌓아 둔 이불에 등을 기댄 채 큰누이가 소리질렀다. 그런데 올해에는 무우들마다 웬 바람이 이렇게 많이 들었을까. 나는 공책을 덮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잠바 하나 사주세요. 스펀지마다 숭숭 구멍이 났어요. 그래도 올 겨울은 넘길 수 있을 게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실 거구. 풍병(風病)에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잖아요. 마늘을 까던 작은누이가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지만 어머니는 잠자코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수건을 가만히 고쳐매셨다.   □  2   아버지. 그건 우리 닭도 아닌데 왜 그렇게 정성껏 돌보세요. 나는 사료를 한줌 집어 던지면서 가지를 먹어 시퍼래진 입술로 투정을 부렸다. 농장의 목책을 훌쩍 뛰어 넘으며 아버지는 말했다. 네게 모이를 주기 위해서야. 양계장 너머 뜬, 달걀 노른자처럼 노랗게 곪은 달이 아버지의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이리저리 흔들 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팔목에 매달려 휘 휘 휘파람을 날렸다. 내일은 펌프 가에 꽃 모종을 하자. 무슨 꽃을 보고 싶으냐. 꽃들은 금방 죽어요 아버지. 너도 올 봄엔 벌써 열 살이다. 어머니가 양푼 가득 칼국수를 퍼 담으시며 말했다. 알아요 나도 이젠 병아리가 아니예요. 어머니. 그런데 웬 칼국수에 이렇게 많이 고춧가루를 치셨을까.    □  3   방죽에서 나는 한참을 기다렸다. 가을 밤의 어둠 속에서 큰누이는 냉이꽃처럼 가늘게 휘청거리며 걸어왔다. 이번 달은 공장에서 야근 수당까지 받았어. 초록색 츄리닝 윗도리를 하나 사고 싶은데. 요새 친구들이 많이 입고 출근해. 나는 오징어가 먹고 싶어. 그건 오래 씹을 수 있고 맛도 좋으니까. 집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었다. 누이의 도시락 가방 속에서 스푼이 자꾸만 음악 소리를 냈다. 츄리닝이 문제겠니. 내년 봄엔 너도 야간고등학교라도 가야 한다. 어머니. 콩나물에 물은 주셨어요? 콩나물보다 너희들이나 빨리 자라야지. 엎드려서 공부하다가 코를 풀면 언제나 검뎅이가 묻어나왔다. 심지를 좀 잘라내. 타버린 심지는 그을음만 나니까. 작은누이가 중얼거렸다. 아버지 좀 보세요. 어떤 약도 듣지 않았잖아요. 아프시기 전에도 아무것도 해논 일이 없구. 어머니가 누이의 뺨을 쳤다. 약값을 줄일 순 없다. 누이가 깎던 감자가 툭 떨어졌다. 실패하시고 나서 아버지는 3년 동안 낚시질만 하셨어요. 그래도 아버지는 너희들을 건졌어. 이웃 농장에 가서 닭도 키우셨다. 땅도 한 뙈기 장만하셨댔었다. 작은누이가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죽은 맨드라미처럼 빨간 내복이 스웨터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러나 그때 아버지는 채소 씨앗 대신 알약을 뿌리고 계셨던 거예요.   □  4   지나간 날들을 생각해 보면 무엇하겠느냐. 묵은 밭에서 작년에 캐다 만 감자 몇 알 줍는 격이지. 그것도 대개는 썩어 있단다. 아버지는 삽질을 멈추고 채마밭 속에 발목을 묻은 채 짧은 담배를 태셨다. 올해는 무얼 심으시겠어요? 뿌리가 질기고 열매를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심을 작정이다. 하늘에는 벌써 티밥 같은 별들이 떴다. 어머니가 그만 씻으시래요. 다음날 무엇을 보여주려고 나팔꽃들은 저렇게 오므라들어 잠을 잘까. 아버지는 흙속에서 천천히 걸어나오셨다. 봐라. 나는 이렇게 쉽게 뽑혀지는구나. 그러나, 아버지. 더 좋은 땅에 당신을 옮겨 심으시려고.      □  5   선생님. 가정방문은 가지 마세요. 저희 집은 너무 멀어요. 그래도 너는 반장인데. 집에는 아무도 없고요. 아버지 혼자, 낮에는요. 방과 후 긴 방죽을 따라 걸어오면서 나는 몇 번이나 책가방 속의 월말고사 상장을 생각했다. 둑방에는 패랭이꽃이 무수히 피어 있었다. 모두 다 꽃씨들을 갖고 있다니. 작은 씨앗들이 어떻게 큰 꽃이 될까. 나는 풀밭에 꽂혀서 잠을 잤다. 그날 밤 늦게 작은누이가 돌아왔다. 아버진 좀 어떠시니. 누이의 몸에서 석유 냄새가 났다. 글세, 자전거도 타지 않구 책가방을 든 채 백 장을 돌리겠다는 말이냐? 창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 바람에 불려 몇 그루 미루나무가 거대한 빵처럼 부풀어오르는 게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날,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  6   그 해 겨울은 눈이 많이 내렸다. 아버지, 여전히 말씀도 못 하시고 굳은 혀. 어느 만큼 눈이 녹아야 흐르실는지. 털실뭉치를 감으며 어머니가 말했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신다. 언제가 봄이에요. 우리가 모두 낫는 날이 봄이에요? 그러나 썰매를 타다보면 빙판 밑으로는 푸른 물이 흐르는 게 보였다. 얼음장 위에서도 종이가 다 탈 때까지 네모반듯한 불들은 꺼지지 않았다. 아주 추운 밤이면 나는 이불 속에서 해바라기 씨앗처럼 동그랗게 잠을 잤다. 어머니 아주 큰 꽃을 보여드릴까요? 열매를 위해서 이파리 몇 개쯤은 스스로 부숴뜨리는 법을 배웠어요. 아버지의 꽃 모종을요. 보세요 어머니. 제일 긴 밤 뒤에 비로소 찾아오는 우리들의 환한 가계(家系)를. 봐요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저 동지(冬至)의 불빛 불빛 불빛.         장미빛 인생  문을 열고 사내가 들어온다 모자를 벗자 그의 남루한 외투처럼 희끗희끗한 반백의 머리카락이 드러난다 삐걱이는 나무의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밀어 넣고 그는 건장하고 탐욕스러운 두 손으로 우스꽝스럽게도 작은 컵을 움켜쥔다 단 한번이라도 저 커다란 손으로 그는 그럴 듯한 상대의 목덜미를 쥐어 본 적이 있었을까 사내는 말이 없다, 그는 함부로 자신의 시선을 사용하지 않는 대신 한 곳을 향해 그 어떤 체험들을 착취하고 있다 숱한 사건들의 매듭을 풀기 위해, 얼마나 가혹한 많은 방문객들을 저 시선은 노려보았을까, 여러 차례 거듭되는 의혹과 유혹을 맛본 자들의 그것처럼 그 어떤 육체의 무질서도 단호히 거부하는 어깨 어찌 보면 그 어떤 질투심에 스스로 감격하는 듯한 입술 분명 우두머리를 꿈꾸었을, 머리카락에 가리워진 귀 그러나 누가 감히 저 사내의 책임을 뒤집어쓰랴 사내는 여전히 말이 없다, 비로소 생각났다는 듯이 그는 두툼한 외투 속에서 무엇인가 끄집어낸다 고독의 완강한 저항을 뿌리치며, 어떤 대결도 각오하겠다는 듯이 사내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얼굴 위를 걸어 다니는 저 표정 삐걱이는 나무의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밀어 넣고 사내는 그것으로 탁자 위를 파내기 시작한다 건장한 덩치를 굽힌 채, 느릿느릿 그러나 허겁지겁, 스스로의 명령에 힘을 넣어가며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       정거장에서의 충고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 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 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 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 속에 옮겨 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 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죽은 구름   구름으로 가득 찬 더러운 창문 밑에 한 사내가 쓰러져 있다, 마룻바닥 위에 그의 손은 장난감처럼 뒤집혀져 있다 이런 기회가 오기를 기다려 온 것처럼 비닐 백의 입구같이 입을 벌린 저 죽음 감정이 없는 저 몇 가지 음식들도 마지막까지 사내의 혀를 괴롭혔을 것이다 이제는 힘과 털이 빠진 개 한 마리가 접시를 노린다 죽은 사내가 살았을 때, 나는 그를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다 그를 사람들은 미치광이라고 했다, 술과 침이 가득 묻은 저 엎어진 망토를 향해, 백동전을 던진 적도 있다 아무도 모른다, 오직 자신만이 홀로 즐겼을 생각 끝끝내 들키지 않았을 은밀한 성욕과 슬픔 어느 한때 분명 쓸모가 있었을 저 어깨의 근육 그러나 우울하고 추악한 맨발 따위는 동정심 많은 부인들을 위한 선물이었으리 어쨌든 구름들이란 매우 조심스럽게 관찰해야 한다 미치광이, 이젠 빗방울조차 두려워 않을 죽은 사내 자신감을 얻은 늙은 개는 접시를 엎지르고 마루 위엔 사람의 손을 닮은 흉칙한 얼룩이 생기는 동안 두 명의 경관이 들어와 느릿느릿 대화를 나눈다 어느 고장이건 한두 개쯤 이런 빈집이 있더군, 이 따위 미치광이들이 어떻게 알고 찾아와 죽어 갈까 더 이상의 흥미를 갖지 않는 늙은 개도 측은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저 홀로 없어진 구름은 처음부터 창문의 것이 아니었으니     진눈깨비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에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집시의 시집     □  1   우리는 너무 어렸다. 그는 그해 가을 우리 마을에 잠시 머물다 떠난 떠돌이 사내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어른들도 그를 그냥 일꾼이라 불렀다.   □  2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손을 가리켜 신(神)의 공장이라고 말했다.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굶주림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무엇엔가 굶주려 있었다. 그는 무엇이든지 만들었다. 그는 마법사였다. 어떤 아이는 실제로 그가 토마토를 가지고 둥근 금을 만드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그가 어디에서 흘러 들어왔는지 어른들도 몰랐다. 우리는 그가 트럭의 고장 고등어의 고장 아니, 포도의 고장에서 왔을 거라고 서로 심하게 다툰 적도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저녁 때마다 그는 농장의 검은 목책에 기대 앉아 이상한 노래들을 불렀다.   모든 풍요의 아버지인 구름 모든 질서의 아버지인 햇빛 숲에서 날 찾으려거든 장화를 벗어 주어요 나는 나무들의 가신(家臣), 짐승들의 다정한 맏형   그의 말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른들은 우리들에게 호통을 쳤다. 그는 우리의 튼튼한 발을 칭찬했다. 어른들은 참된 즐거움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란다. 그들은 세상을 자물통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러나 세상은 신기한 폭탄, 꿈꾸는 부족(部族)에겐 발견의 도화선. 우리는 그를 믿었다. 어느 날은 비에 젖은 빵, 어떤 날은 작은 홍당무를 먹으며 그는 부드럽게 노래불렀다. 우리는 그때마다 놀라움에 떨며 그를 읽었다.   나는 즐거운 노동자, 항상 조용히 취해 있네 술집에서 나를 만나려거든 신성한 저녁에 오게 가장 더러운 옷을 입은 사내를 찾아주오 사냥해온 별 모든 사물들의 도장(圖章) 모든 정신들의 장식 랄라라, 기쁨들이여! 과오(過誤)들이여! 겸손한 친화력이여!   추수가 끝나고 여름 옷차림 그대로 그는 읍내 쪽으로 흘러 갔다. 어른들은 안심했다. 그러나 우리는 벌써 병정놀이들에 흥미를 잃고 있었다. 코밑에 수염이 돋기 시작한 아이도 있었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한동안 그 사내에 대해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오랜 뒤에 누군가 그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우리는 이미 그의 얼굴조차 기억하기 힘들었다. 상급반에 진학하면서 우리는 혈통과 교육에 대해 배웠다. 오래지 않아   □  3   우리는 완전히 그를 잊었다. 그는 그해 가을 우리 마을에 잠시 머물다 떠난 떠돌이 사내였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는 우리가 꾸며낸 이야기였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저녁마다 연필을 깎다가 잠드는 버릇을 지금까지 버리지 못했다.     추억에 대한 경멸   손님이 돌아가자 그는 마침내 혼자가 되었다 어슴푸레한 겨울 저녁, 집 밖을 찬 바람이 떠다닌다 유리창의 얼음을 뜯어내다 말고, 사내는 주저앉는다 아아, 오늘은 유쾌한 하루였다, 자신의 나지막한 탄식에 사내는 걷잡을 수 없이 불쾌해진다, 저 성가신 고양이 그는 불을 켜기 위해 방 안을 가로질러야 한다 나무토막 같은 팔을 쳐들면서 사내는, 방이 너무 크다 왜냐하면, 하고 중얼거린다, 나에게도 추억거리는 많다 아무도 내가 살아온 내용에 간섭하면 안 된다 몇 장의 사진을 들여다보던 사내가 한숨을 쉰다 이건 여인숙과 다를 바 없구나, 모자라도 뒤집어쓸까 어쩌다가 이봐, 책임질 밤과 대낮들이 아직 얼마인가 사내는 머리를 끄덕인다, 가스레인지는 차갑게 식어 있다 그렇다, 이런 밤은 저 게으른 사내에게 너무 가혹하다 내가 차라리 늙은이였다면! 그는 사진첩을 내동댕이친다 추억은 이상하게 중단된다, 그의 커다란 슬리퍼가 벗겨진다 손아귀에서 몸부림치는 작은 고양이,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독한 술을 쏟아 붓는, 저 헐떡이는, 사내     포도밭 묘지 1    주인은 떠나 없고 여름이 가기도 전에 황폐해버린 그해 가을, 포도밭 등성이로 저녁마다 한 사내의 그림자가 거대한 조명 속에서 잠깐씩 떠오르다 사라지는 풍경 속에서 내 약시(弱視)의 산책은 비롯되었네. 친구여, 그해 가을 내내 나는 적막과 함께 살았다. 그때 내가 데리고 있던 헛된 믿음들과 그 뒤에서 부르던 작은 충격들을 지금도 나는 기억하고 있네. 나는 그때 왜 그것을 몰랐을까. 희망도 아니었고 죽음도 아니었어야 할 그 어둡고 가벼웠던 종교들을 나는 왜 그토록 무서워 했을까. 목마른 내 발자국마다 검은 포도알들은 목적도 없이 떨어지고 그때마다 고개를 들면 어느 틈엔가 낯선 풀잎의 자손들이 날아와 벌판 가득 흰 연기를 피워올리는 것을 나는 한참이나 바라보곤 했네. 어둠은 언제든지 살아 있는 것들의 그림자만 골라 디디며 포도밭 목책으로 걸어왔고 나는 내 정신의 모두를 폐허로 만들면서 주인을 기다렸다. 그러나 기다림이란 마치 용서와도 같아 언제나 육체를 지치게 하는 법. 하는 수 없이 내 지친 발을 타일러 몇 개의 움직임을 만들다 보면 버릇처럼 이상한 무질서도 만나곤 했지만 친구여, 그때 이미 나에게는 흘릴 눈물이 남이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내 정든 포도밭에서 어느 하루 한 알 새파란 소스라침으로 떨어져 촛농처럼 누운 밤이면 어둠도, 숨죽인 희망도 내게는 너무나 거추장스러웠네. 기억한다. 그해 가을 주인은 떠나 없고 그리움이 몇 개 그릇처럼 아무렇게나 사용될 때 나는 떨리는 손으로 짧은 촛불들을 태우곤 했다. 그렇게 가을도 가고 몇 잎 남은 추억들마저 천천히 힘을 잃어갈 때 친구여, 나는 그때 수천의 마른 포도 이파리가 떠내려가는 놀라운 공중(空中)을 만났다. 때가 되면 태양도 스스로의 빛을 아껴두듯이 나 또한 내 지친 정신을 가을 속에서 동그랗게 보호하기 시작했으니 나와 죽음은 서로를 지배하는 각자의 꿈이 되었네. 그러나 나는 끝끝내 포도밭을 떠나지 못했다.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나는 모든 것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어느 날 기척 없이 새끼줄을 들치고 들어선 한 사내의 두려운 눈빛을 바라보면서 그가 나를 주인이라 부를 때마다 아, 나는 황망히 고개 돌려 캄캄한 눈을 감았네. 여름이 가기도 전에 모든 이파리 땅으로 돌아간 포도밭, 참담했던 그해 가을, 그 빈 기쁨들을 지금 쓴다 친구여.       포도밭 묘지 2 아아, 그때의 빛이여. 빛 주위로 뭉치는 어둠이여. 서편 하늘 가득 실신한 청동의 구름떼여. 목책 안으로 툭툭 떨어져 내리던 무엄한 새들이여. 쓴 물 밖으로 소스라치며 튀어 나오던 미친 꽃들이여. 나는 끝을 알 수 없는 질투심에 휩싸여 너희들을 기다리리. 내 속의 모든 움직임이 그치고 탐욕을 향한 덩굴손에서 방황의 물기가 빠질 때까지.   밤은 그렇게 왔다. 포도압착실 앞 커다란 등받이 의자에 붙어 한 잎 식물의 눈으로 바라보면 어둠은 화염처럼 고요해지고 언제나 내 눈물을 불러내는 저 깊은 공중(空中)들. 기억하느냐, 그 해 가을 그 낯선 저녁 옻나무 그림자 속을 홀연히 스쳐가던 천사의 검은 옷자락과 아아, 더욱 높이 흔들리던 그 머나먼 주인의 임종. 종자(從者)여, 네가 격정을 사로잡지 못하여 죽음을 환난과 비교한다면 침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네가 울리는 낮은 종소리는 어찌 저 놀라운 노을을 설명할 수 있겠느냐. 저 공중의 욕망은 어둠을 지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종교는 아직도 지상에서 헤맨다. 묻지 말라, 이곳에서 너희가 완전히 불행해질 수 없는 이유는 신(神)이 우리에게 괴로워할 권리를 스스로 사들이는 법을 아름다움이라 가르쳤기 때문이다. 밤은 그렇게 왔다. 비로소 너희가 전생애의 쾌락을 슬픔에 걸듯이 믿음은 부재(不在) 속에서 싹트고 다시 그 믿음은 부재의 씨방 속으로 돌아가 영원히 쉴 것이니, 골짜기는 정적에 싸이고 우리가 그 정적을 사모하듯이 어찌 비밀을 숭배하는 무리가 많지 않으랴. 밤은 그렇게 노여움을 가장한 모습으로 찾아와 어두운 실내의 램프불을 돋우고 우리의 후회들로 빚어진 주인의 말씀은 정신의 헛된 식욕처럼 아름답다. 듣느냐, 이 세상 끝간 곳엔 한 자락 바람도 일지 않았더라. 어떠한 슬픔도 그 끝에 이르면 짓궂은 변증의 쾌락으로 치우침을 네가 아느냐. 밤들어 새앙쥐를 물어 뜯는 더러운 달빛 따라 가며 휘파람 부는 작은 풀벌레들의 그 고요한 입술을 보았느냐. 햇빛은 또 다른 고통을 위하여 빛나는 나무의 알을 잉태하느니 종자(從者)여, 그 놀라운 보편을 진실로 네가 믿느냐.           흔해빠진 독서 휴일의 대부분은 죽은 자들에 대한 추억에 바쳐진다 죽은 자들은 모두가 겸손하며, 그 생애는 이해하기 쉽다 나 역시 여태껏 수많은 사람들을 허용했지만 때때로 죽은 자들에게 나를 빌려 주고 싶을 때가 있다 수북한 턱수염이 매력적인 이 두꺼운 책의 저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불행한 생을 보냈다, 위대한 작가들이란 대부분 비슷한 삶을 살다 갔다, 그들이 선택할 삶은 이제 없다 몇 개의 도회지를 방랑하며 청춘을 탕진한 작가는 엎질러진 것이 가난뿐인 거리에서 일자리를 찾는 중이다 그는 분명 그 누구보다 인생의 고통을 잘 이해하게 되겠지만 종잇장만 바스락거릴 뿐, 틀림없이 나에게 관심이 없다 그럴 때마다 내 손가락들은 까닭없이 성급해지는 것이다 휴일이 지나가면 그뿐, 그 누가 나를 빌려 가겠는가 나는 분명 감동적인 충고를 늘어놓을 저 자를 눕혀두고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저녁의 거리로 나간다 휴일의 행인들은 하나같이 곧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다 그러면 종종 묻고 싶어진다, 내 무시무시한 생애는 얼마나 매력적인가, 이 거추장스러운 마음을 망치기 위해 가엾게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흙탕물 주위를 나는 기웃거렸던가! 그러면 그대들은 말한다, 당신 같은 사람은 너무 많이 읽었다고 대부분 쓸모없는 죽은 자들을 당신이 좀 덜어가 달라고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 도 종 환            견우직녀도 이 날만은 만나게 하는 칠석날 나는 당신을 땅에 묻고 돌아오네 안개꽃 몇 송이 함께 묻고 돌아오네 살아 평생 당신께 옷 한 벌 못 해주고 당신 죽어 처음으로 베옷 한 벌 해 입혔네 당신 손수 베틀로 짠 옷가지 몇 벌 이웃께 나눠주고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돌아오네 은하 건너 구름 건너 한 해 한 번 만나게 하는 이 밤  은핫물 동쪽 서쪽 그 멀고 먼 거리가  하늘과 땅의 거리인 걸 알게 하네  당신 나중 흙이 되고 내가 훗날 바람 되어  다시 만나지는 길임을 알게 하네  내 남아 밭 갈고 씨 뿌리고 땀 흘리며 살아 야  한 해 한 번 당신 만나는 길임을 알게 하네                                                                      ▲ 일러스트=이상진   영원한 사랑을 믿는가? 사랑이 영원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요즘으로 치면 좀 촌스럽다. 만남도 헤어짐도 '쿨해져 버린' 시대니까. 사랑에 빠진 직후라면 영원한 사랑 운운이 자연스러울 수도 있겠다. 그런데 도종환(54) 시인은 사랑에 막 빠졌을 때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할 때 사랑의 영원을 노래한다. 이런 사랑법, 예컨대 '사랑의 뒷심'이 세상의 나지막하고 소소한 뒷마당을 지켜가는 소중한 힘이 되기도 한다. '당신 나중 흙이 되고 내가 훗날 바람 되어' 다시 만나질 그날을 예비하며 헐벗은 벌판을 경작하는 시인의 어깨는 고단하다. 하지만 현실의 고단함을 기꺼이 짐 지는 것이 진정으로 당신을 만나는 길임을 믿기에 시인은 '밭 갈고 땀 흘리며' 묵묵히 당신을 그리워한다. 도종환은 이별과 그리움과 눈물의 시인. 1986년 출간 이후 당대의 밀리언셀러였던 시집 《접시꽃 당신》이 시인을 세상에 알렸지만, 이 시집의 놀라운 판매량은 비극적인 개인사에 대한 세간의 관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80년 광주의 상처로부터 출발한 암울한 시대의 중반에 인간의 근원적 상처인 삶과 죽음을 진정성 가득한 서정시로 빚어 올린 이 시집은 개인의 비극과 시대의 비극이 긴밀히 연결된 지점에서 독자들의 마음을 위로했다. 사람들은 시집을 보며 눈물 흘렸고 눈물은 우리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었다. 실제로 도종환 시인을 만나면 많이 울었던 사람의 눈빛과 마주친다. 그는 잘 웃는 편인데 그 웃음이 세상의 무게를 견디고 있는 느낌일 때가 많다. 왜 아니랴. 당신이 사랑한 세상은 여전히 문제투성이고, 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오늘의 세상을 더 많이 사랑해야 한다. 옥수수밭 옆에 묻은 당신을 끝내 붙잡아두고 싶었던 세상이므로, 이 세상이 조금씩 더 나아질 수 있게 나는 무엇이든 해야 한다. 그것이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므로. '(…)/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접시꽃 당신〉) 쓸쓸하게 버려진 세상의 뒷마당들에 씨앗을 심고 가꾸는 시인은 '공공 선(善)'이랄지 '희망' 같은 구닥다리 말들이 여전히 사랑을 지키는 근원 힘임을 알고 있다. 변방의 사람들을 향해 그가 내미는 노래들은 따뜻하고 순연하다. 그 노래들 속에 사랑의 푸른 빛들이 반짝인다. 영원한 사랑을 믿느냐고? 영원한 사랑은 있다. 내 안에 당신이 있는 방식으로, 혹은 '당신 나중 흙이 되고 내가 훗날 바람 되어' 만나는 방식으로. 아무리 세상이 낡고 슬픔이 많다 해도 사랑은 앞으로 나아간다. 【 김선우·시인 】       흔들리며 피는 꽃/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 시인의 시집 [사랑의 마음에 꽃이 진다]에 실린 글이다.  이 시는 평범한 자연 현상을 통해 인생의 진리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세상의 모든 꽃들은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는 과정을 거쳐 아름다운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이런 삶의 진실을 평이한 언어로 담담하게 진술하고 있어 독자의 공감을 자아낸다.  생각해 보면 우리네 삶은 편안하고 행복한 시간보다는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 더 많은 것이 인생의 참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방황, 고뇌, 고통, 슬픔 등은 우리가 부정하고, 회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성숙시키고, 완성시키는 것이므로 긍정적으로 수용하자는 것이 이 시에 담겨 있는 뜻이다.  이 시는 반복과 변조를 통해 시적 의미를 강조하는 동시에 운율감을 조성하여 독자에게 선명한 인상을 심어 주는 작품이다. 1연에서의 '흔들림'과 '사랑'이 2연에서 '젖음'과 '삶'으로 변조되어 있는데 각 시어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동일하다. (현대시 작품, 인터넷)           ​ * 도종환 시인 "나는 들국화 같은 사람" ​  도 시인은 목원대 교양교육원이 명사들을 초청해 진행하는 '르네상스 교양특강'의 첫 강사로 목원대를 방문해 자신을 '들국화 같은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도 시인은 지난 2011년 출간한 열 번째 시집 ‘세시에서 다섯 시 사이'와 같은 제목의 시를 직접 낭송하며 "인생을 시간에 비유한다면 뜨겁게 살아온 30대인 낮 12시에서 1시 사이를 지나 지금 내 인생은 오후 3시에서 5시 사이에 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1980년 광주민주항쟁 당시 군인 신분으로 언덕에서 총을 겨누며 시민군이 다가오기를 기다린 경험 이후 시대와 정면으로 맞서며 뜨거운 30~40대를 보냈다. ‘분단시대' 동인 결성과 민족문학운동, 부인의 죽음, 해직 교사와 구속, 복직 등을 겪으며 심신의 피로로 쓰러진 뒤 교직을 그만두고 속리산에서 칩거하기도 했다. ​이 같은 굴곡진 시간들을 견뎌낸 도 시인은 "나를 일으켜 세운 힘은 좌절"이라며 학생들에게 "여러분의 인생은 이제 막 오전 9시를 지나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때이니 소중한 인생을 열정적으로 살아라"고 당부했다. (중략)  그는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로 시작하는 시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를 인용해 꽃과 인생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꽃은 누가 먼저 피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늦게 피더라도 얼마나 아름답게 피었는지, 얼마나 최선을 다해 꽃을 피우려는 노력을 했는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한 도 시인은 "인생도 꽃과 같아 늦게 피어난다고 절망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아름다운 꽃을 피우려고 노력해야한다"고 당부했다. 이런 점에서 자신을 ‘들국화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한 도 시인은 "이름 없는 산과 들 어디든 보는 사람 없어도 묵묵히 꽃을 피우는 게 들국화인데 이처럼 산비탈에 핀 꽃도 황량한 비탈을 아름다운 꽃밭으로 바꾼다는 데서 절대 그냥 피어나는 꽃은 없다"며 의미를 부여했다. (디트 news 24. 목원대 '르네상스 '교양특강') ​ * ​흔들리며 피는 꽃 - 도종환  남해 유자의 향은 유난히 짙으면서도 은은합니다. 척박한 땅에서 세찬 해풍을 견디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흔들리며 피는 꽃, 아프면서 크는 나무,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사람에게도 특별한 향기가 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도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우고 가장 애틋한 사랑도 위태롭게 흔들리면서 깊어졌으니, 어디 빛나는 꽃과 사랑만 그런가요. 아주 작은 이슬에도 젖고 빗줄기에도 휘청거리는 우리 역시 비바람 속에서 더 따뜻한 잎을 피워올릴 수 있습니다. 고난을 딛고 재기한 사람도, 평생 외길을 걷는 장인도, 불모지에서 신산업을 일으킨 기업가도, 실패를 거듭하며 우주의 비밀을 발견해낸 과학자도 우리보다 더 흔들리며 살았을 것입니다. (고두현/문화부장·시인, 한국경제) ======================================================= 도종환 시비 위치 : 충남 보령시 주산면 삼곡리 26 시와 숲길                           접시꽃 당신                                                    도종환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 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 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 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악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 높음과 영육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 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 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 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도종환 1954. 9. 27 충북 청주~. 시인·작가. 도종환은 청주 중앙초등학교를 거쳐 청주중학교를 졸업했다.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3년 동안 원주고등학교에서 유학한 뒤 바로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진학했다. 1985년 충청북도 청원군 부강중학교에 근무하던 시절에 발간한 그의 첫 시집 〈고두미 마을에서〉를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그는 이미 이때부터 깊숙한 자기 울림의 세계를 그려낸 훌륭한 시인으로 인정받기에 충분했다. 또한 어린 두 아이를 두고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그의 아내에게 바친 시집 〈접시꽃 당신〉과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1988)이라는 2권의 시집은 그가 얼마나 깊은 사랑을 지니고 있는지 보여주었다.   도종환은 교사가 된 후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약칭 전교조) 결성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었고, 수인의 몸으로 교육 시집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1989)을 발간했다. 그후 도종환은 전교조 충북지부장으로서, 또한 충북문화운동연합의장으로서 활동했다. 그는 청주와 대구를 넘나들며 '분단시대'라는 동인 모임을 결성, 군부독재의 탄압에 맞서 동인지 간행을 주도했고(1984년 1집을 발간한 이후 5집까지 발간함) 그 문학적 열정과 업적을 인정받아 1990년 '신동엽 창작 기금'에 이어 제7회 민족예술상을 수상했다.   그는 1990년 산문집 〈지금은 묻어둔 그리움〉과 〈그대 가슴에 뜨는 나뭇잎 배〉, 그리고 1998년 〈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를 발간했다. 또한 1993년 시집 〈당신은 누구십니까〉와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1994), 그리고 〈부드러운 직선〉(1998) 등을 연달아 발표했다.   도종환은 1998년 9월 충청북도의 작은 시골 학교인 진천 덕산중학교로 복직되었다. 그는 2004년 건강 문제로 교직을 떠났다. 그밖의 저서로는 시집 〈슬픔의 뿌리〉(2002)·〈해인으로 가는 길〉(2006), 산문집 〈모과〉(2000)·〈사람은 누구나 꽃이다〉(2004)·〈마지막 한 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2000), 동화 〈바다유리〉(2002)·〈나무야 안녕〉(2007) 등이 있다. 민족예술상(1997), 거창평화인권문학상(2006),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부문 예술상(2006) 등을 수상했다.           접시꽃 당신/도종환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촟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죽일 줄 모르고 약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읍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읍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 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읍니다               시인 도종환의 제2시집 [접시꽃 당신]은 실천문학사에서 1985년 발간되었다.  표제작인 은 암으로 사별한 아내에 대한 사랑을 소박하면서도 진솔한 시어를 통해 절실하게 노래한 시이다. 이 시에서 아내는 질병으로 인하여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 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급속하게 생명력을 잃고 있는 존재이다. 작가는 이러한 아내의 모습에 대한 자신의 커다른 슬픔을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오고”와 같은 표현을 통해 숨기지 않고 표현하면서, “남은 하루 하루의 앞날은/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와 같이 아내를 잃은 자신의 삶에 대한 격정을 토로한다. 그러나 작가는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보잘 것 없는 눈높음과 영욕까지도/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내 마음의 모두를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아파해야 합니다”라는 깨달음을 통하여 이러한 슬픔을 극복하고,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난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겠다는 아내에 대한 영원한 사랑을 고백한다. 이처럼 이 시는 아내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라는 인간적인 감정을 서정적으로 진솔하게 표현하면서도,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이러한 슬픔을 영원한 사랑에 대한 의지로 승화시킴으로써 시적 감동을 자아내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후반 시집 가운데 최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한국현대문학대사전)     * 시인 도종환과 '접시꽃 당신'  마흔 넘은 대한민국 사람으로 1986년에 출간된 도종환 시인의 시집과 시 《접시꽃 당신》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시인은 ‘애절한 사랑’이라는 접시꽃의 꽃말답게 그 시집에서 아내와의 지순한 사랑을 노래했다. 그는 암에 걸려 시한부 생을 살아가는 아내를 간호하며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 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이 “우수수” 빠져나가는 아내의 여위어 가는 몸을 보며 아려 오는 가슴을 노래했다.  그는 “먹장구름”처럼 시시각각 아내를 덮쳐 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보고,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악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던 아내를 왜 데려가려느냐고 절규한다.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도 아내와 함께 베어 내야 하고, 남아 있는 “묵정밭”도 아내와 함께 갈아엎어야 한다고 애원한다. 한때 그 시집은 전 국민의 심금을 울리며 초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영화로까지 만들어졌다.  
372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오세영 - 그릇 1 댓글:  조회:4034  추천:1  2015-12-25
오세영 '그릇1' 해설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깨지면서 칼날이 되는 그릇   절제(節制)와 균형(均衡)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圓)은 모를 세우고 이성(理性)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하는 그릇   맹목(盲目)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魂) / 획일적인 사고를 강요하는 깨진 그릇과 상처를 통한 성숙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조화와 안정을 잃었을 때 비뚤어진 본질을 드러내는 모든 존재들   *깨진 그릇 : 그릇의 원을 통해 연상할 수 있는 절제 또는 균형이 사라진 상태   주제 : 중용적인 생활 자세 추구(왜곡된 세계에 대한 대결 의지) 어조 : 중용의 도를 노래하는 차분한 어조   이해와 감상 : 이 시는 구체적인 사물인 그릇을 통해 모나지 않은 합리적 생활과 중용의 미덕을 추구하려는 작품으로,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려는 작가의 시세계가 형상화되어 있다고 봅니다. 깨지지 않은 온전한 상태의 그릇은 모나지 않은 원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이 원은 절제와 균형에 바탕을 둔 것이므로 그릇과 원은 조화와 원만함이라는 추상적인 세계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빗나간 힘에 의하여 그릇이 깨지면, 원은 그 본질을 잃고 날카롭게 모를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모는 ‘이성의 차가운 눈’, 곧 어느 한쪽으로만 일방적으로 치우치고 편중된 이념, 사고방식을 낳게 됩니다. 따라서 깨진 그릇은 정상적인 그릇과 완연히 대비되게 절제와 균형을 상실하고만 비합리적인 세계를 표상하게 됩니다. ========================================     ▲ 백담사 ㅡ 오세영 시비. '강물'            -------------- 강 물 --------------/오세영/ 무작정  앞만 보고 가지마라 절벽에 막힌 강물은 뒤로 돌아 전진한다. 조급히 서두르지 마라 폭포 속의 격류도 소(沼)에선 쉴 줄을 안다. 무심한 강물이 영원에 이른다 텅빈 마음이 충만에 이른다 [출처] 백담사 오세영 시비|작성자 들꽃향   ==================================   해남 땅끝 마을에서 "땅끝 마을에 서서"라는 오세영 시인의 시비   ------------- 누가 일러 땅끝마을이라 했던가. 끝의 끝은 다시 시작인 것을......   내 오늘 땅끝 벼랑에 서서 먼 수평선을 바라보노니 천지의 시작이 여기 있구나. 삶의 덧 없음을 한탄치 말진저 낳고 죽음이 또한 이 같지 않던가.   내 죽으면 한 그루 푸른 소나무로 다시 태어나 땅끝 벼랑을 홀로 지키는 파수꾼이 되리라.             그릇 1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역두에서                                                   우리는 단지 잠깐 쉬고 있을 뿐이다. 저무는 플랫폼 길은 영원으로 열려 있고 영원에 종점이란 없다. 쉰다는 것은 이별과 만남의 교차, 달리는 순간엔 모두가 하나다. 떠난 자를 미워마라 참으로 열심히 달려왔다. 긴 터널과 외로운 가교 복사꽃 피는 마을도 있었지만 폭풍우 치는 밤이 더 많았다. 이 세상은 승차와 하차로 이루어지는 평행선. 그 끝없는 레일을 달리며 우리의 이별은  만남을 다시 꿈꾼다.         원시(遠視)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무지개나 별이나 벼랑에 피는 꽃이나 멀리 있는 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것는 까닭에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별을 서러워하지 마라, 내 나이의 이별이란 헤어지는 일이 아니라 단지 벌어지는 일일 뿐이다. 네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기 위해선 이제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 늙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다는 것은 것이다. 머얼리서 바라다볼 줄을 안다는 것이다.         라일락 그늘 아래서                                      맑은 날, 네 편지를 들면 아프도록 눈이 부시고 흐린 날, 네 편지를 들면 서럽도록 눈이 어둡다. 아무래도 보이질 않는구나. 네가 보낸 편지의 마지막 한 줄, 무슨 말을 썼을까.   오늘은 햇빛이 푸르른 날, 라일락 그늘에 앉아 네 편지를 읽는다. 흐린 시야엔 바람이 불고 꽃잎은 분분히 흩날리는데 무슨 말을 썼을까. 날리는 꽃잎에 가려 끝내 읽지 못한 마지막 그 한 줄.       황 홀                                                              아름다움은 시각을 통해서 오고, 황홀은 후각을 통해서 온다. 봄에 뜻없이 황홀에 젖어 스르르 눈꺼풀이 감기는 것은 천자만홍(千紫萬紅)그의 찬란한 색깔보다 향기 때문이다. 10대 소녀의 청순한 ─백합, 20대 소녀의 순결한 ─라일락, 30대 여인의 달콤한 ─아카시아, 40대 숙녀의 요염한 ─장미, 의 체취. 봄에 꽃들은 일제히 입을 벌리고 향기로 말을 쏟는다. 후각으로 오는 봄       강물                                                          무작정 앞만 보고 가지 마라. 절벽에 막힌 강물은 뒤로 돌아 전진한다. 조급히  서두르지 마라. 폭포 속의 격류도 소紹에선 쉴 줄을 안다 무심한 강물이 영원에 이른다. 텅 빈 마음이 충만에 이른다.         신념                                                       꽁꽁 얼어붙은 겨울 밭, 무우 하나 땅에 묻힌 채 강그라지고 있다. 돌아보면 텅 빈 들판, 강추위는 몰아치는데 분노에 일그러져 시퍼렇게 하늘을 노려보는 그 눈,   뽑혀 생명을 보전하다가 일개 먹이로 전락하기보다는 차라리 뿌리를 대지의 중심에 내리고 스스로 죽는 길을 선택했구나.   승산 없는 전투가 끝난 전선, 지휘관을 따라 부대는 모두 투항해버렸는데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다 비인 들녘에서 외롭게 총살 당한 푸른 제복의 병사 하나.         오월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부신 초록으로 두 눈 머는데 진한 향기로 숨막히는데 마약처럼 황홀하게 타오르는 육신을 붙들고 나는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아아, 살아 있는 것도 죄스러운 푸르디푸른 이 봄날, 그리움에 지친 장미는 끝내 가시를 품었습니다. 먼 하늘가에 서서 당신은 자꾸만 손짓을 하고       이별의 말                                                  설령 그것이 마지막의 말이 된다 하더라도 기다려달라는 말은 헤어지자는 말보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별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하는 것이다 "안녕" 손을 내미는 그의 눈에 어리는 꽃잎 한때 걱정으로 휘몰아치던 나의 사랑은 이제 꽃잎으로 지고 있다 이별은 봄에도 오는 것, 우리의 슬픈 가을은 아직도 멀다 기다려 달라고 말해다오. 설령 그것이 마지막의 말이 된다 하더라도.         사랑하는 이에게                                        집으로 오르는 계단을 하나 둘 밟는데 문득 당신이 보고 싶어집니다 아니, 문득이 아니예요 어느 때고 당신을 생각하지 않은 순간은 없었으니까요 언제나 당신이 보고싶으니까요  오늘은 유난히 당신이 그립습니다 이 계단을 다 올라가면 당신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어요 얼른 뛰어 올라갔죠 빈 하늘만 있네요   당신 너무 멀리 있어요 왜 당신만 생각하면 눈앞에 물결이 일렁이는지요. 두눈에 마음의 물이 고여서 세상이 찰랑거려요 그래서 얼른 다시 빈 하늘을 올려다 보니 당신은 거기 나는 여기 이렇게 떨어져 있네요 나, 당신을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어요 햇살 가득한 눈부신 날에도 검은 구름 가득한 비오는 날에도 사람들속에 섞여서 웃고 있을때도 당신은 늘 그 안에 있었어요 차을 타면 당신은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구요 신호를 기다리면 당신은 건너편 저쪽에서 어서오라고 나에게 손짓을 했구요 계절이 바뀌면 당신의 표정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나 알고 있어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당신을 내 맘속에서 지울 수 없으니까요 당신 알고 있나요. 당신의 사소한 습관하나 당신이 내게 남겨준 작은 기억 하나에도 내가 얼마나 큰 의미를 두고 있는지 당신은 내 안에 집을 짓고 살아요 나는 기꺼이 내 드리고요 보고 싶은 사람 지금 이 순간 당신을 단 한번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오늘도 나는 당신이 이토록 보고 싶고 그립습니다                                 8월                                                          8월은 분별을 일깨워주는 달이다. 사랑에 빠져 철없이 입맞춤하던 꽃들이 화상을 입고 돌아온 한낮, 우리는 안다. 태양이 우리만의 것이 아님을, 저 눈부신 하늘이 절망이 될 수도 있음을, 누구나 홀로 태양을 안은 자는 상철 입는다. 쓰린 아픔 속에서만 눈뜨는 성숙, 노오랗게 타 버린 가슴을 안고 나무는 나무끼리 풀잎은 풀잎끼리 비로소 시력을 되찾는다. 8월은 태양이 왜, 황도(黃道)에만 머무는 것인가를 가장 확실하게 가르쳐주는 달.         4월                                                           언제 우리 소리 그쳤던가, 문득 내다보면 4월이 거기 있어라. 우르르 우르르 빈 가슴 울리던 격정은 자고 언제 먹구름 개었던가, 문득 내다보면 푸르게 빛나는 강물, 4월은 거기 있어라. 젊은 날은 또 얼마나 괴로웠던가, 열병의 뜨거운 입술이 꽃잎으로 벙그는 4월. 눈 뜨면 문득 너는 한 송이 목련인 것을, 누가 이별을 서럽다고 했던가. 우르르 우르르 빈 가슴 울리던 격정은 자고 돌아보면 문득 사방은 눈부시게 푸르른 강물.         그리운 이 그리워                                       그리운 이 그리워 마음 둘 곳 없는 봄날엔 홀로 어디론가 떠나 버리자. 사람들은 행선지가 확실한 티켓을 들고 부지런히 역구를 빠져 나가고 또 들어오고, 이별과 만남의 격정으로 눈물 짓는데 방금 도착한 저 열차는 먼 남쪽 푸른 바닷가에서 온 완행. 실어 온 동백꽃잎들을 축제처럼 역두에 뿌리고 떠난다. 나도 과거로 가는 차표를 끊고 저 열차를 타면 어제의 어제를 달려서 잃어버린 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운 이 그리워 문듣 타 보는 완행 열차 그 차창에 어리는 봄날의 우수.         적막                                                       '아' 하고 외치면 '아' 하고 돌아온다. '아' 다르고 '어' 다른데 '아'와 '어', 틀림없이 다르게 돌아오는 그 산울림. 누가 불렀을까, 산벚나무엔 다시 산벚꽃 피고 산딸나무엔 다시 산딸꽃 핀다. 미움과 사랑도 이와 같아라. 눈물 부르면 눈물이, 웃음 부르면 웃음 오느니 저무는 봄 강가에 홀로 서서 어제는 너를 실어보내고 오늘은 또 나를 실어보낸다. 흐르는 물에 텅 빈 얼굴을 들여다보는 눈이 부시게 푸르른 봄날 오후의 그 적막.         그 사람                                                      저녁에 팔 베고 누워 흐르는 계곡에 귀 기울이면 거기 카츄샤의 슬픈 사랑의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꽃잎으로, 꽃잎으로 흐르다가 드디어 물이 된 그 사람.   자정에 목침을 베고 누워 솔잎 스치는 바람 소리에 귀기울이면 어린 월명이 누이와 이별하는 소리가 들린다. 갈잎으로, 갈잎으로 날리다가 어느덧 바람이 된 그 사람.   아제 아제 바라 아제 바라 승 아제 모지 사바하. 이 무슨 부질 없는 독경 소린가. 이 무슨 부질 없는 목탁 소린가.   새벽에 무릎을 곧추세우고 앉아 댓잎의 이슬 맺는 소리에 귀기울이면 출가하는 싯달다의 뺨에서 떨어지는 눈물 방울 소리가 들린다. 안개로, 안개로 흐르다가 이제 하늘이 된 그 사람.       이별이란                                                    어디에나 너는 있다. 산 여울 맑은 물에 어리는 서늘한 너의 눈매, 눈은 젖어 있구나. 솔 숲 바람에 어리는 청아한 너의 음성, 너는 속삭이고 있구나. 더 이상 연연해 하지 않기로 했다. 이별이란 흐르는 강물인 것을, 이별이란 흐르는 바람인 것을, 더 이상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싸락눈 흩뿌리는 겨울 산방에 서러운 듯 피어오른 난 한송이, 시방 너는 내 앞에서 울고 있구나.     나무처럼                                                 나무가 나무끼리 어울려 살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가지와 가지가 손목을 잡고 긴 추위를 견디어 내듯 나무가 맑은 하늘을 우러러 살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잎과 잎들이 가슴을 열고 고운 햇살을 받아 안듯 나무가 비바람 속에서 크듯 우리도 그렇게 클 일이다. 대지에 깊숙이 내린 뿌리로 사나운 태풍 앞에 당당히 서듯 나무가 스스로 철을 분별할 줄을 알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꽃과 잎이 피고 질 때를 그 스스로 물러 설 때를 알 듯     질그릇                                                    질그릇 하나 부서지고 있다. 질그릇의 밑바닥에 잠긴 바다가 조용히 부서지고 있다. 스스로 부서져 흙이 되는 저 흔들리는 바다. 질그릇에 담긴 生鮮의 뼈, 질그릇에 담긴 暴風, 질그릇에 담긴 空間, 그 空間 하나 스스로 부서지고 있다.   슬픔                                                         비 갠 후 창문을 열고 내다보면 먼 산은 가까이 다가서고 흐렸던 산색은 더욱 푸르다. 그렇지 않으랴, 한 줄기 시원한 소낙비가 더렵혀진 대기, 그 몽롱한 시야를 저렇게 말끔히 닦아 놨으니. 그러므로 알겠다. 하늘은 신(神)의 슬픈 눈동자, 왜 그는 이따금씩 울어서 그의 망막을 푸르게 닦아야 하는지를, 오늘도 눈이 흐린 나는 확실한 사랑을 얻기 위하여 이제 하나의 슬픔을 가져야겠다.   1월                                                        1월이 색깔이라면 아마도 흰색일 게다 아직 채색되지 않은 신의 캔버스 산도 희고 강물도 희고 꿈꾸는 짐승 같은 내 영혼의 이마도 희고 1월이 음악이라면 속삭이는 저음일 게다 아직 트이지 않은 신의 발성법 가지 끝에서 풀잎 끝에서 바람은 설레고 1월이 말씀이라면 어머니의 부드러운 육성일 게다 유년의 꿈길에서 문득 들려 오는 그녀의 질책 “아가 일어나거라 벌서 해가 떴단다.” 아! 1월은 침묵으로 맞이하는 눈부신 함성   바람의 노래                                             바람 소리였던가. 돌아보면... 길섶의 동자꽃 하나, 물소리였던가. 돌아보면... 여울가 조약돌 하나, 들리는 건 분명 네 목소린데... 돌아보면 너는 어디에도 없고, 아무데도 없는 네가 또 아무데나 있는... 가을 산 해질녘은 울고 싶어라. 내 귀에 짚이는 건 네 목소린데... 돌아보면... 세상은 갈바람 소리. 갈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 소리.   겨울 들녘에 서서                                      사랑으로 괴로운 사람은 한 번쯤 겨울 들녘에 가 볼 일이다 빈 공간의 충만, 아낌 없이 주는 자의 기쁨이 거기 있다. 가을 걷이가 끝난 논에 떨어진 낟알 몇 개 이별을 슬퍼하는 사람은 한번쯤 겨울 들녘에 가 볼 일이다 지상의 만남을 하늘에서 영원케 하는 자의 안식이 거기 있다 먼 별을 우러르는 둠벙의 눈빛 그리움으로 아픈 사람은 한번쯤 겨울 들녘에 가 볼 일이다 너를 지킨다는 것은 곧 나를 지킨다는 것, 홀로 있음으로 오히려 더불어 있게된 자의 성찰이 거기 있다 빈들을 쓸쓸히 지키는 논둑의 저 허수아비.    오세영 吳世榮 (1942. 5. 2 ∼   )                                                                   1942년 전라남도 영광(靈光)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인간 존재의 실존적 고뇌를 서정적·철학적으로 노래하는 중견시인이자 교육자이다.   장성(長城)과 진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60년 신흥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5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68년 동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에 진학해 석사학위(1971) 및 문학박사학위(1980)를 취득했다. 충남대학교(1974~1981)와 단국대학교(1981~1985)에서 국문학을 강의했다. 1985년부터 서울대학교에서 현대문학(현대시)을 강의했으며,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버클리캠퍼스(1995~1996)에서 한국현대문학을 강의했다. 2002년 현재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968년 박목월(朴木月)에 의해 시 《잠깨는 추상》이 《현대문학》에 추천되어 시인으로 등단했다. 첫시집 《반란하는 빛》(1970)에서 알 수 있듯이 모더니즘에 심취해 있던 초기시에서는 감각적인 언어의식과 날카로운 직관으로 기교적이며 실험정신이 두드러지는 시들을 발표했다. 1972년 《현대시》에 동인으로 참여했다. 첫시집 출간 후 언어의 예술성에 철학을 접목시키는 방법론적 문제로 고민하던 시인은 동양사상 특히 불교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이후 불교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사물의 인식을 통해 존재론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 주력함으로써, 지성적인 시어로 현대문명 속에서 아픔을 느끼는 인간정서를 서정적으로 형상화하는 시적 변모를 모색한다. 이러한 변화는 생에 관한 서정적 인식을 노래한 두 번째 시집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1983)와 존재의 실존적 고뇌를 '무명(無名)'이라는 동양적 진리를 통해 탐구한 세 번째 시집 《무명연시(無名戀詩)》(1986)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연작시 《그릇》을 들 수 있다.   1970년 첫시집을 펴낸 이래 2001년 열한 번째 시집 《적멸의 불빛》을 펴낸 시인은 예순 살을 넘긴 나이에도 언제나 서정의 초심을 잃지 않고 절제와 균형의 미덕인 동양적 중용의 의미를 형상화함으로써, 형이상학적이면서도 삶의 체취가 느껴지는 개성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민족정서와 세계정신의 보편성이 녹아 있는 작품들이 높이 평가되어, 한국시인협회상(1983), 녹원문학상(평론부문, 1984), 소월시문학상(1986), 정지용문학상(1992), 편운문학상(평론부문, 1992), 공초문학상(1999), 만해문학상(2000) 등을 수상했다.   저서에 시집 《반란하는 빛》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모순의 흙》(1985) 《무명연시》 《불타는 물》(1988) 《사랑의 저쪽》(1990) 《신의 하늘에도 어둠은 있다》(1991) 《꽃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1992) 《어리석은 헤겔》(1994) 《벼랑의 꿈》(1999) 《적멸의 불빛》(2001) 등이 있다. 이 밖에 평론집 《한국낭만주의 시 연구》(1981) 《20세기 한국시 연구》(1987) 《한국현대시의 해방》(1988) 《상상력과 논리》(1991) 《문학연구방법론》(1993) 등이 있고, 산문집 《꽃잎우표》(2000)와 시론집 《시의 길 시인의 길》(2002)이 있다.        
371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최승호 - 북어 댓글:  조회:5081  추천:0  2015-12-25
북어 최승호 밤의 식료품 가게 부정적 시간(군사독재정권)  → 장사가 끝나 문을 닫아 놓은 건어물 가게의 북어(케케묵은 먼지에 덮여 있음)들의 모습 시적대상이자 비판의 대상(화자를 포함한 독재정권하의 사람들)    → 군사독재정권하에 사는 획일화된 소시민들의 모습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생명력을 잃은 현대인의 무기력한 모습 ▶ 1~8행 : 밤의 식료품 가게에 진열된 북어들의 모습       → 권력 앞에서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침묵하는 사람들의 모습(=말의 변비증)    →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현실을 바라보는 능력의 상실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상실(지느러미는 목표를 향해 헤엄치는 도구) 막대기 같은 생각 경직되고 딱딱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북어(현대인)에 대한 연민의식 ▶ 9~19행 : 북어의 모습에서 현대인들의 무기력한 모습을 떠올림        느닷없이 시상의 전환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북어의 말 - 무기력한 삶에 대한 화자의 자기 반성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환청이자 자기 삶에 대한 반성과 비판 ▶ 20~23행 : 무기력한 삶에 대한 자기 반성             ① 시의 느낌     화자 : 나 (북어를 바라보는 사람 ≒ 북어 같은 사람)       ↓     시적대상 : 북어       ↓     상황 : 북어를 바라보며 현대인과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함       ↓     정서 : 부끄러움, 반성       ↓     주제 : 현대인의 무기력한 삶에 대한 비판과 반성   ② 시의 기본적 이해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 성격 : 풍자적, 자조적, 상징적     ㉢ 표현상의 특징         ㈀ 감각적 이미지를 통해 시적 대상인 '북어'를 구체적으로 묘사함         ㈁ 비판의 대상이 비판의 주체로 반전되는 아이러니를 통해 주제의식을 부각함     ㉣ 출전 :《고해문서》(1981)     ㉤ 함께 읽어보면 좋은 시 : 김수영의   ③ 시의 심층적 이해     이 시는 식료품 가게에 진열된 '북어'의 모습을 통해, 획일화되고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삶에 대해 비판하고 반성하는 작품이다.       시인은 사람들 북적거리는 한낮의 시장, 그 한 귀퉁에 있는 건어물 가게의 북어를 말하고 있지 않다.  그가 이야기 하는 것은, 장사가 끝나 문을 닫아 건 밤의 건어물 가게에 놓인 북어다. 케케묵은 먼지가 덮인 채 또 하루를 더 기다리고 있는 북어 말이다.       아마도 시인은 이런 북어의 이미지로써 우리의 삶을 말하려는 것일 게다.  살아 있지만 살아 있는 것 같지 않다는 느낌, 별다른 의미도 없는 목숨을 다만 하루하루 더 연장해 가고 있을 뿐이라는 느낌, 하루하루 지날수록 더 때묻고 딱딱하게 말라가는 것만 같은 느낌,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삶 말이다. 시인은 그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들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왜 우리의 삶이 이 북어들을 닮았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이건 삶에 대한 터무니없는 비관이자, 우리를 향한 이유 없는 모욕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시인은 말한다. 꼬챙이에 꿰여 딱딱해진 북어들의 혀처럼 우리는 '말의 변비증'을 앓고 있다고.  '무덤 속의 벙어리'들처럼 아무 말 없이 살아가고 있다고. 그리고 지느러미가 말라서 빳빳하게 굳어 버린 북어들처럼, 무리들도 '빛나지 않는 막대기'처럼 굳어서 어디로도 헤엄쳐 가지 못하는 게 아니냐고. 또 헤엄쳐 갈 곳도 없지 않냐고.       아마도 이 시를 쓸 때에 시인은, 부당한 독재 권력에 대해 한 마디 비판의 말도 못하는 굴종의 삶을 가리켜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 '무덤 속의 벙어리'라 말한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암울한 시대를 살면서 아무런 희망도 품지 못하는 삶을 가리켜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라 말한 건지도 모른다.         어쨌든 시인의 이런 비판은 타인들만을 향해 있지는 않다.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순간'에 북어들이 일제히 입을 벌리고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하고 귀가 먹먹해지도록 큰 소리로 외쳤다는 시인의 환청, 그것은 시인이 자신의 삶에 대해 고백하는 진실일 것이다.    ④ 작가 소개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나 춘천교육대를 졸업하고 강원도의 벽지 초등학교에서 근무했다. 후에 전업시인으로, 대학의 시간 강사로 활동하며, 시집과 동시집을 함께 출간하고 있다. 1977년 로《현대시학》의 추천을 받고 시단에 데뷔했다. 1982년 제6회 오늘의 작가상, 1986년 제5회 김수영문학상, 1990년 제2회 이산문학상, 2000년 제8회 대산문학상, 2001년 제47회 현대문학상, 2003년 제3회 미당문학상을 수상했다.       최승호와 시  도시는 현대 문명의 표상이다. 현대문명의 명암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는 곳이 바로 도시이다. 도시는 바로 꽃이 무성한 악의 온상이다. 따라서 현대시가 도시적 삶의 양상을 표상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도시적 삶의 양상을 통해서 현대문명으로 인한 삶의 부정적 측면을 보다 분명히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농촌시와 대별되는 도시시는 생태시와는 또 다른 측면에서 현대문명으로 인해 파괴된 삶의 양상을 도시적 일상에서 찾고 있다. 이것은 또한 철저하게 세속화된 현대적 삶의 이면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도시시의 독자적인 영역을 꾸준히 추구하고 있는 시인이 바로 최승호 시인이다. 최승호 시인의 시 읽기를 통해 현대문명으로 인한 인간의 세속화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세속화에 대한 성찰은 또한 미궁에 갇힌 현대적 삶에 대응하는 길을 찾는 고통스러운 과정이기도 하다.  세속도시의 즐거움 2  / 최승호  상복 허리춤에 전대를 차고  곡하는 여인은 늦은 밤 손익을  계산해 본다  시체냉동실은 고요하다  끌어모은 것들을 다 빼앗기고  (큰 도적에게 큰 슬픔 있으리라)  누워 있는 알거지의 빈손,  죽어서야 짐 벗은 인간은  냉동실에 알몸거지로 누워 있는데  흑싸리를 던질지 홍싸리 껍질을 던질지  동전만한 눈알을 굴리며 고뇌하는 화투꾼들,  그들은 죽음의 밤에도 킬킬대며  잔돈 긁는 재미에 취해 있다  외로운 시체를 위한 밤샘,  쥐들이 이빨을 가는 밤에  쭉정이 되는 추억의 이삭들과 침묵 속에서  냄새나는 이쑤시개를 들고 기웃거리는  죽음의 왕  시체냉동실은 고요하다  홑거적 덮은 알몸의 주검이  혀에 성에 끼는 추위 속에 누워 있는 밤,  염장이가 저승의 옷을 들고 오고  이제 누구에게 죽음 뒤의 일을 물을 것인지  그의 입에 귀를 갖다댄다  죽은 몸뚱이가 내뿜는  서늘한  虛  붉은 고깃덩어리  /최승호  고깃덩어리가 피를 흘린다  칼로 친 핏줄들의 구멍을 다 열어놓고  도마 위에 남은 피를 내뿜는다.  수술대 위에서  제왕절개 수술로 꺼낸 붉은 핏덩이  화사한 봄날 각혈하고 죽은 시인  누구나 피를 흘리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칼이 심장을 베지 않아도  조용히 마취의 피를 쏟으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붉은 고깃덩어리여  그렇게 그렇게 죽어가는 것이다 발이 묶인 채  꽥꽥거리다 조용해지는 도살용 돼지들과  시퍼런 낙인이 찍힌 채 도살장에서 끌려나오는 살덩어리들,  나는 기름걸레 같은 창자를 입에 물고 서로 찢느라  퍼덕거리를 까마귀들의 싸움을  인간의 마을에서 본다.  그렇게 그렇게 서로 물고 찢으며  죽어가는 것이다. 붉은 고깃덩어리여  피가 뚝뚝 떨어지는 황소의 두개골을  늙은 백정이 강물에 헹구듯이 나의 피가  어쩔 수 없는 흐름을 따라 흘러가는 것을  그러나 지금은 핏줄들이 칼에 떨고 있는 밤이다.  고깃덩어리가 피를 쏟는다.  칼로 친 핏줄들의 구멍을 다 열어놓고  남은 피를 내뿜는다. 칼금이 무수한  도마 위에서  뭉게구름  /최승호  나는 구름 숭배자는 아니다 내 가계엔 구름 숭배자가 없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구름 아래 방황하다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구름들의 변화 속에 뭉개졌으며 어머니는 먹구름들을 이고 힘들게 걷는 동안 늙으셨다 흰 머리칼과 들국화위에 내리던 서리,지난해보다 더 이마를 찌는 여름이 오고,뭉쳐졌다 흩어지는 내 업의 덩치와 무게를 알지 못한채 나는 뭉개구름을 보며 걸어간다 보석으로 결정되지 않는 고통의 어느 변두리에서 올해도 이슬 머금은 꽃들이 피었다 진다 매미울음이 뚝 그치면 다시 구름 높은 가을이 오리라  「작가세계」 2001년 가을호  열목어  /최승호  서울에서 나는 저녁의 느낌들을 잃어버렸다  스타빌딩에서 큰 네온별이 번쩍거리면  초저녁이다  저녁 어스름도 땅거미도 없이  벌써 발광하는 거리, 발광하는 간판의 불빛들로  눈은 어지러워진다  수정체가 조금씩 찢어지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눈에서 열이 날 때  열목어를 생각한다  눈이 태양처럼 벌게졌을 때  안과의사가 벌건 눈을 까뒤집고 들여다볼 때  의사 선생님,  제 눈이 매음굴처럼 벌게졌나요?  아니면 정육점 불빛처럼 불그죽죽합니까?  눈의 피고름을 짤 때  붕대로 공 같은 안구를 눌러대고 있을 때  열목어를 생각한다  서늘한 계곡에서 눈 식히는 열목어  그 적막 깊은 골짜기에서  멋모르고 얕은 서울로 내려왔다면  열목어야, 네 눈구멍에서  붉은 연기와 그을음 조각들이 치솟았으리  -작가세계 2002년 여름호-  자동차에 치인 눈사람  /최승호  자동차는 말썽이다. 왜 하필 눈사람을 치고 달아나는가. 아이는 운다. 눈  사람은 죽은 게 아니고 몸이 쪼개졌을 뿐인데, 교통사고를 낸 뺑소니 차를  원망하는 것이리라. "눈사람은 죽지 않는단다. 꼬마야, 눈사람은 절대 죽지  않아." 아이는 나를 빤히 쳐다본다. "아저씨, 눈사람은 죽었어요. 죽지 않는  다고 말하니까 이렇게 죽었잖아요."  종이공장  /최승호  나는 내 시의 경작지에  종이공장을 하나 세워놓는다  보이지 않는  종이인간들이 일하는 종이공장을  그리고 종이공장을 겹겹의  섬세한 가시철망으로  뺑 둘러막는다  종이인간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그럴 줄 알았다  그새 나의 횡포를 참지 못하고  안 보이던 종이인간들이 투명한  품삯을 달라고 가시철망에 달라붙고 있다  골이 났는지  종이가슴들을 찢어 열어젖히고  두 손을 집어넣고  종잇조각들을 모조리 밖으로 내던지고 있다  어떤 종이인간은  제 몸에 불을 지르고 있다      //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 일러스트=잠산 시름 많은 사람들과 "어두운 땅 한 평 가꾸다 갈래요/ 우리나라 하늘 한 평 비추다 갈래요"라고 노래했던 시인 고정희(1948~1991). 이 시를 읽고 있으면 마치 그녀가 상한 영혼의 곁에 앉아 작은 목소리로 "흙에 심은 뿌리 죽는 법 보았나요"라고 묻는 것 같다. 평론가 김주연이 분석한 대로 이 시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신다"는 성경의 말씀과 겹쳐 읽힌다. '하늘 아래'라는 표현도 예수의 언약과 임재(臨在)를 둥글게 포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 넋으로 기댈 곳 없이 큰 고통에 놓여있는 사람들을 힘껏힘껏 껴안고 살겠다는 강한 의지를 이 시는 보여준다.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했고 다분히 기독교적인 신앙에 기초한 시편들을 써낸 고정희 시인은 기독교의 현실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칼을 들이댔다. "하느님을 모르는 절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이쁜 우매함인가"라고 질문했고, 동시에 "하느님을 등에 업은 행복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맹랑한 도착 신앙인가"라며 고민했다. 그녀가 비판하고 날카롭게 투시한 대상은 눈앞의 현실 그 자체였으며, 돌봄이 있는 따뜻한 공동체는 그녀가 꿈꾸는 세계였다. 고정희 시인은 한 생애를 정열적으로 살다 간 여성운동가이기도 했다.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을 지냈고, 여성주의 문화집단인 '또 하나의 문화' 창립 동인으로도 활동했다. "제도적 억압의 굴레를 극복하려는 힘, 그것이 자유 의지라고 말할 수 있다면 나의 시는 항상 자유 의지에 속해 있는 하나의 에너지"라고 자평했는데, 조금의 호락호락함도 없이 평소 신념을 시 창작과 생활에서 실천했다. 한 시대의 깊고 어두운 계곡을 묵상했으므로 그녀의 시는 미지근하거나 융융한 그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시는 80년대의 격문이면서 '우릉우릉 폭발하는 화산(火山)'이었다. 1991년 6월 지리산 뱀사골을 오르다 폭우로 불어난 물에 휩쓸려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충격적인 죽음을 생각하면 생전에 쓴 시 '지리산의 봄 1-뱀사골에서 쓴 편지'가 자꾸 떠오른다. "아득한 능선에 서 계시는 그대여/ 우르르우르르 우뢰 소리로 골짜기를 넘어가는 그대여/(…)/ 아름다운 그대 되어 산을 넘어갑니다/ 구름처럼 바람처럼/ 승천합니다"라고 쓴 시. 그녀의 시를 읽고 있는 오늘 새벽은 내 가슴이 아프다.      고정희의 문학과 생애   1. 서 론 시인 고정희는 해남군 삼산면에서 출생하여 독신녀로 치열한 현실 인식과 여성해방주의, 기독교정신과 지리산을 그리고 해남을 떠올리게 했던 시인이었다. 실천문학사 일을 보던 소설가 김영현이 본 고정희의 마지막 모습은 종로에서 있었던 국민대회 때 거리에 가득한 최루탄 속에서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었다. 부당한 현실에 분노하고 개혁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며 시를 쓰던 시인은 우아하고 고상한 여류문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해남 그의 생가는 시인이 생전에 사용하던 물품과 손때 묻은 책들을 그대로 보존한 방을 비워두고 있고 그 곳을 찾아간 사람들은 그의 생전의 지향점과 흔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또 고향집 뒷동산에 늘 정갈하고 푸르게 관리되는 그의 묘소에 참배까지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렇게 각별하고 지극하게 기억되는 걸까. 그의 시작품들을 통해 시세계를 살펴 보기로 한다. 2.존재의 이유와 구원의 시작(詩作) 시인의 시혼이 그 누구보다도 치열하고 열정적이었음은 일단 다작의 시집들과 각 시집들과 각 시집의 독자성에서 알 수 있다. 그가 남긴 10권의 시집에는 시대와 사회와 삶에 대한 성찰과 고뇌 뿐 아니라 어둠을 뚫고 나아가 새벽을 깨우려는 의지로 충만해 있다. 최초의 시집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평민사,1979)를 출간한 것을 비롯하여 10권 정도 되는데 1979년부터 1991년까지 1-2년 사이에 꾸준히 한권의 시집을 출간하였다. 유고집「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창작과 비평사,1992)와 한국대표시인 100인 선집 중 90번째 시선「뱀사골에서 쓴 편지」(미래사,1991)가 있다. 고정희는 놀랄 만한 다산성 시인이면서도 결코 어느 하나 함부로 창작해 내지는 않았다 고 평가된다. 오직 '시를 쓰기 위해서 살았던'것 같은 그에게 시는 존재의 결과이자 이유였고 구원이었다. 3. 남다른 열정과 사회활동 그의 삶이 남다른 열정과 순수로 점철된 탁월한 것이었음은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평가이다. 그는 자신과 주변 사람,사회와 세상과의 관계를 선명히 파악한 사라마으로서 인생을 일관성있게 그리고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인생에서 우리가 소망하고 또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실천한 사람 중의 하나이며 시와 삶이 거의 일치한 보기 드문 시인이었다. 기독교 신문사,크리스챤 아카데미 출판간사, 가정법률상담소 출판부장, 초대 편집주간을 거쳐 여성문화운동 동인에서 열심히 활동하였는데 이런 활동들은 그의 시를 "정환(情恨)'이나 '슬픔' 등과는 거리가 먼, 활기와 강인함으로 가득 차게 한 계기가 되었다. 그의 시는 사유나 관념을 통해서 창작된 것이 아니고 현실 생활을 통해서 창작되었고 그래서 늘 살아 움직여 역동성과 다양성을 지녔던 것이다. 그 생애의 치열함에는 수유리 종교의식과 광주의 역사의식,그리고 여성의식이 기저에 깔려 있었다. 새벽 다섯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시를 쓰거나 묵상에 잠기는 생활을 했던 그는 분명 시를 통해 구원에 이르려 한 시인이었다. 4. 어둠의 시대와 불기둥의 시(詩) 시인의 초기 시편들은 막막한 광야를 인도하는 불기둥을 지향하고 있다. '불기둥'은 구약성서에서 '구름기둥'과 짝을 이루는데 모세를 좇아 애굽의 노예생활을 벗어나 새로운 땅을 찾아 광야를 헤매이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이 보내신 가이드가 바로 불기둥과 구름기둥이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인도하신 하나님에게서 고정희는 구름기둥이 아닌 불기둥을 취하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바로 낮이 아닌 밤이요, 어둠과 암흑의 땅이며 바로 '실락원'이라는 인식 때문이었으리라. 시인의 정신과 영혼이 '불의 상상력'에 근거해 있음을 절감해 왔다는 정효구 교수의 지적과 같이 그의 초기 시집들은 이 '불기둥'이 장악하고 있으며 성서의 비유와 상징을 즐겨 사용하고 있어 서구적인 분위기가 가득하다. 그의 첫 시집「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는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술틀 밟는 여자'의 이미지로 채워져 있다. 포도주를 만들기 위한 술틀을 밟는다는 행위자체가 지중해 연안의 이국적 정서를 유발할 뿐 아니라 짜라투스트라, 카타콤베,브라암스,파블로 카잘스 등의 제목에서도 서구적 정서를 느끼게 해 이런 주제들이 어쩐지 시인의 몸에 잘 맞지 않는 어딘지 겉도는 옷처럼 여겨지는 것이 사실이다. 『실락원기행』이야말로 더더욱 불길의 뜨거움으로 휩싸여 있다. 춥고 어두운 땅과 인간들을 녹일 수 있는 질화로의 뜨끈함,밤과 암흑의 시대를 밝힐 수 있는 램프의 밝은 빛, 꿈의 불기둥을 꿈꾸었던 것이다. 그리고 시적 자아의 지향은 끊임없이 불을 붙여 어둠을 밝혀야한다는 에 사로잡혀 있었다. 내가 불을 붙이지 않거나 그대가 불을 붙이지 않거나 우리가 불을 붙이지 않는다면 이 어둠을 어떻게 밝힐 수 있을까? 『이 시대의 아벨』 시편들에서 두드러지는 것도 시대의 어둠에 대한 인식이다. 카인에게 무고하게 살해된 아우 아벨을 찾는 하나님의 물음과 질타가 고정희의 시를 통해 우리에게 쏟아지고 있다. 안락과 번영과 평안을 위해 우리가 저버린 아벨은 누구인가? 아벨은 바로 억압받는 민중이며 억울하게 숨져간 광주의 원혼들이다. 오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 너의 안락한 처마 밑에서 함께 살기 원하던 우리들의 아벨, ...중 략... 너의 식탁과 아벨을 바뀠느냐 너의 침상과 아벨을 바뀌느냐 너희 교회당과 아벨을 바뀠느냐 회칠한 무덤들, 이 독사의 무리들아 너희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이 시대의 아벨」중간 부분 80년대 초 우리 사회를 무고한 아벨을 죽인 어둠의 시대로 인식하였지만 춥고 어두운 겨울의 무덤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희망과 용기를 간직하는 것만이 오직 어둠을 이기는 비결이라고 생각했다. 이 어둠 속에서 우리가 할 일은 오직 두 손을 맞잡는 일 손을 맞잡고 뜨겁게 뜨겁게 부둥켜 안는 일 부등켜안고 체온을 느끼는 일 체온을 느끼며 하늘을 보는 일이거니 -「서울 사랑-어둠을 위하여」일부 5. 살림의 굿,마당굿시 모태신앙인으로 자라나 기독교 정신이 충일하던 고정희는 한국적 전통의 계승과 남도 가락의 재현을 시인으로서 부여받은 최대 과제로 인식했다. 대한민국문학상을 수상한 시집인 『초혼제』는 고정희의 시세계를 본격적인 수준에 오르게 한 장시집이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종교적이며 상징적인 방법을 통해 씻겨 줌으로써 저승으로 천도할 수 있도록 하는 무속적 제의인 '씻김굿'을 차용한 이시집에서 그는 죽음과 부활을 다루었는데 총5부중 특히 과 를 마당굿시로 창작하였다. 이는 죽은 사람을 대상으로 행해지는 씻김굿이 시대의 어둠과 절망에 짓눌려 죽은 영혼을 천도하는데 적합한 제의라는 것을 수용한 반기독교로의 전환인 동시에 우리의 전통적 가락을 오늘에 새롭게 접목시키려 한 관심사의결과였다.  이에 비해 6년 후에 출간한『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에서 우리는 좀더 본격적인 '굿시'를 대할 수 있다. 이 시집은 부당한 역사에 대한 회개에서 치유와 화해에 이르는 씻김굿을 그 주요한 창작의 근간으로 삼고 있으며 그 굿의 효과적인 정서적 공감대 형성의 토대로서 어머니라는 주의 한을 어머니의 가슴으로 품어 역사속에서 희생당한 뭇 민중여성의 넋에 접맥시키려는 여성민중주의를 표방한  점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5월의 광주를 절규하거나 새기는 많은 시인들이 있었지만 그 상처와 한을 역사 속에서 이름도 없이 희생당하고 숨져간 민중여성과 관련시켜 예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위로하면서 또한 민주화에 방해가 되는 바람직하지 못한 여성의 리스트를 열거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어찌하여 민주길이 막혔는고 하니 복종생활 순종생활 굴종생활 '석삼종'때문이라 여자팔자 빙자해서 기생 노릇하는 여자 현모양처 빙자해서 법적 매춘하는 여자 사랑타령 빙자해서 노리개 노릇하는 여자 미모 빙자해서 사치놀음 하는 여자 가정교육 빙자해서 자녀차별 하는 여자 남편출세 빙자해서 큰소리치는 여자 -이하 중략- 이 땅의 여성 중 이 화살을 비껴갈 만한 여성이 있을까? 이 같은 현실을 넘어서서 우리가 지어야 할 '살림 의 집'아름답고 이상적인 집이 그려지기도 하였다. 누구나 일할 권리 있는 집이요 누구나 쉴 자유 있는 집이요 누구나 맡은 임무 있는 집이요 누구나 타고난 천성대로 받들 책임 있는 집이라 집안살림 나라살림 출입문 따로 없고 가사일 바깥일 따로 없는 집이라 차별이 없는 중에 자기 길 각자 있고 귀천이 없는 중에 각자 직분 있는 집이라 조화 있고 화목있고 위로 있는 집이라 원래 마당굿판을 위한 대본으로 쓰여진 이 시집으로 실제 공연을 하면서 그 현장성을 점검했더라면 훨씬 더 감칠맛 나고 거침없는 그리고 화자의 청중들이 그야말로 하나가 되어 한 판 어우러지는 그런 시로 향상될 수 있었으리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6. 눈물의 시와 광주 고정희의 시세계는 흔히 첨예한 현실인식과 준열한 역사의 증언을 줄기차게 해댄 '메시지 강한 목적시'로 인식되지만, 80년대 후반에 이르면서 그의 시에서 처연한 슬픔과 절망,고독이 점차 짙어지고 '불기둥'으로 서기보다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 바다'에 침잠함을 볼 수 있다. 이는 늘상 '있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것'을 좇으며 살아온 열정적인 그의 삶 속에서 눌려 있던 눈물많고 낭만적인  섬세한 심성이 시대의 무게를 떨쳐내면서 자연스레 점차 자신의 시세계를 장악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개인적으로는 고향을 상징하는 어머의 부음과 독신자로서 맞게 되는 40대의 회환 등이 결핍과 갈망을 한층 강화하게 된 때문이라 이해된다. 해남에서 태어나 70년대말 광주 YWCA간사로 일한 적 있는 그에게 광주는 마음의 고향이었고 그래서 광주의 고통은 뼈저리게 다가왔다. 『눈물꽃』이나 『지리산의 봄』『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광주의 눈물비』 등의 시집에 이르면 온통 흘러내리는 눈물이 가득하다. '눈물꽃'에서 가장 처벌한 세계인식이 드러난 시는 『프라하의 봄.8』시편들이다.  산발하고 눈물 핏물 뒤집어 쓴 채 젖가슴 도려낸 흉악한 꼴로 두 눈에 쌍불커고 오는 '미친년'이 바로 5월의 원혼이다. 처참하게 죽어 구천을 헤매는 영령들은 '하나님께 삿대질하며,하늘의 동맥에다 칼을 꽂는'미친 짓을 한는데 이는 바로 절망에 대한 시인의 인식이요 절규이다.  하지만 눈물 범벅이 된 속에서도 고정희의 시는 여전히 뜨겁고 강하다. 상처를 그냥 덮어두고 쉬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잊어서는 안된다고 외치는 그의 모습은 '광야의 선지자'와 같았다. 오월이라는 의미를 그대 저녁밥상에서 밀어내지 말라 광주는 그대의 밥이다 오월이라는 눈물을 그대 마른 가슴에서 닦아내지 말라 광주는 그대의 칼이다 -「망월동 원혼들이 쓰는 절명시」일부 눈물에 젖어 세계를 향해서 외치는 시인의 음성은 한없이 강인하고 절박하면서도 섬약하고 투명해서 '불의 혼'과 '물의 심성'으로 시작품에 스며들어 단일성을 거부하는 폭넓은 시세계를 형성할 뿐 아니라 리얼리즘시와 서정시의 화해를 가능케 하였다. 7. 지리산과 고향 그리고 어머니 지리산은 고정희의 정신적 고향이었다. 고단하고 외로울 때 그에게 사랑과 희망을 충전시켜 품어주던 지리산은 늘 시혼을 일깨워주던 그리운 곳이었다. 그리고 결국 그가 최후에 안긴 곳이 되고 말았다. 아름다워라 세석고원 구릉에 파도치는 철쭉꽃 ...중략... 나는 다시 구불거리고 힘겨운 길을 따라 저 능선을 넘어가야 한다 고요하게 엎드린 죽음의 산맥들을 온몸으로 밟으며 넘어가야 한다 이세상으로부터 칼을 품고, 그러나 서천을 물들이는 그리움으로 저 절망의 능선들을 넘어가야 한다 -「지리산의 봄4-세석고원을 넘으며」일부 아름다운 철쭉이 파도치는 지리산을 울음을 참으며 그리움을 품고 절망의 능선을 넘어가는 시인의 모습은 왠지 비장하기까지 하다. 가슴속의 불을 뿜어내고 나약해져가는 육신을 다독이며 지리산 자락에서 위안과 책망을 얻는 것이다. 시인의 말처럼 '시도 때도 없이 두 눈을 타고 내려와 내 완악한 마음을 다숩게 저미는 눈물,세상에 남아 있는 것들과 세상 밖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게 하는 눈물 그 눈물이 '지리산의 봄' 시편들에 한껏 배어있다. 그의 시를 '리얼리즘의 시'로 특징지으면서 그녀의 시에는 시적 자야와 세계와의 갈등 양상이 리얼하게 드러나 있고 시적 자아의 진리에의 염원이 잘 나타나 있다고 지적한 송현호 교수는 고정희의 시가 서정시 중심의 우리 시단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여 우리 시의 폭을 넓혔다고 그 의의를 평가하였는데 이는 고정희에게 지리산과 고향인 해남,어머니가 늘 자리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여겨진다. 고향의 주인이신 어머니는 고정희에게 있어서 영원한 안식처인자 우주의 자궁이며 해방 사회의 이상적인 인간형이기도 하다. 내가 내 자신에게 고개를 들 수 없을 때 나직이 불러 본다 어머니 짓무른 외로움 돌아누우며 새벽에 불러본다 어머니 더운 피 서늘하게 거르시는 어머니 달빛보다 무심한 어머니 ...중략... 천지에 가득 달빛 흔들릴 때 황토 벌판 향해 불러 본다 어머니 이 세계의 불행을 덮치시는 어머니 만고 만건곤 강물인 어머니 오 하느님을 낳으신 어머니 -「어머니, 나의 어머니」 그 어떤 어머니가 가슴 저리게 그립지 않으리오만 '부음'을 받고 달려가 '수의를 입히며' 바람개비처럼 가벼운 어머니를 '하관'해 땅에 묻고 '유채꽃밭을 지나며' 회상하는 과정 과정마다 눈물겨운 시작품들이 뒤따름은 그의 삶의 중심축에 어머니가 자리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의 시에서 어머니는 눌림받은 여성의 대명사이며 잘못된 역사의 고발자요 증언의 기록이며 동시에 치유와 화해의 미래이다. 그래서 시인은 인간세계의 본을 어머니의 자궁으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그가 운동가가 아닌 시인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지리산과 고향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고향정신'은 시세계의 서정적 원천이 되어 리얼리즘시에 서정성을 부여하는 긍정축으로 작용하였다고 생각된다. 8. 일생마침 우리나라 여성해방운동과 여성문화운동에 있어서 고정희의 궤적은 큰 발자취로 남겨졌다. 그의 시집명대로 '여성해방출사표'를 던지면서 시작된 그의 여성해방운동과 글쓰기는 우리 여성사와 문학사에 길이 기억될 만한 것이다 이 시집에서 우리는 여성해방사상만을 목소리 높게 외쳐대는 구호성 시와는 다른 차원 시다운 시를 접하게 되는데 여성사에 대한 남다른 이해를 바탕으로 역사와 시의 새로운 결합을 꾀한 점 여성들 간의 벽을 충분히 인식해 계층간의 차이나 결혼 여부를 뛰어넘는 대동단결을 호소한 점 사람의 근본과 돌아갈 곳을 '어머니'의 모성으로 상징화한 점 등이 탁월하다. 고정희 시인은 시인이며 구도자이며 운동가이자 학자이고 싶었던 그의 삶이 지향하는 대로 늘 치열하고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 그에게 있어 시와 삶은 하나였던 것이다. 그런데 시인다운 통찰력으로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던 것일까? 사후에 그의 책상 위에서 발견된 시「독신자」는 그로부터 며칠 후 있을 자신의 장례식 광경을 미리 본 것처럼 묘사하고 있어 많은 사람을 경악케 하였다. 환절기의 웃장을 정리하듯 애증의 물꼬를 하나 둘 방류하는 밤이면 이제 내게 남아 있는 길 내가 가야 할 저만치 길에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크고 넓은 세상에 객사인지 횡사인지 모를 한 독신자의 시신이 기나긴 사연의 흰 시트에 덮이고 내가 잠시도 잊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달려와 지상의 작별을 노래하는 모습 보인다 뒤늦게 달려온 어머니가 내 시신에 염하시며 우신다 내 시신에 수의를 입히시며 우신다 저 칼날 같은 세상을 걸어오면서 몸이 상하지 않았구나 다행이구나 내 두 눈을 감기신다. -「독신자」중 일부 해남가는 길에 동행했던 벗들에게 시인은 이렇게 자기 삶을 정리하는 시를 남겼다. 시인은 1991년 6월 9일 즐겨 찾던 지리산에서 안좋은 일기에 감행한 산행 도중 실족사하여 생을 마감하였다. 장례식은 광주기독병원에서 치루어졌다. 중년의 문턱에서 마감한 짧은 생애동안 현실과 여성을 끊임없이 일깨우며 자신을 부단하게 채찍질하던 여성 시인 고정희는 이렇게 우리 곁을 떠나간 것이다.     고정희 시비 -광주문학로드 문화예술회관   [출처] 고정희 시비|작성자 김을현       겨울 사랑                                                   그 한 번의 따뜻한 감촉 단 한 번의 묵묵한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활짝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사이로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범람하던 치자꽃 향기, 소백산 한 쪽을 들어올린 포옹,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 그 한 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 번의 이윽한 진실이 내 일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상한 영혼을 위하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을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고요하여라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무심히 지나는 출근버스 속에서도 추운 이들 곁에  따뜻한 차 한잔 끓는 것이 보이고 울렁거려라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여수 앞바다 오동도쯤에서 춘설 속의 적동백 화드득 화드득 툭 터지는 소리 들리고 눈물겨워라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중국 산동성에서 날아온 제비들 쓸쓸한 처마, 폐허의 처마 밑에 자유의 둥지 사랑의 둥지 부드러운 혁명의 둥지 하나 둘 트는 것이 보이고         우리동네 구자명 씨                                    ―여성사연구 5 맞벌이부부 우리동네 구자명씨 일곱달된 아기엄마 구자명씨는 출근버스에 오르기가 무섭게  아침 햇살 속에서 졸기 시작한다 경기도 안산에서 서울 여의도까지 경적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옆으로 앞으로 꾸벅꾸벅 존다 차창 밖으론 사계절이 흐르고 진달래 피고 밤꽃 흐드러져도 꼭 부처님처럼 졸고 있는 구자명씨, 그래 저 십분은 간밤 아기에게 젖물린 시간이고 또 저 십분은 간밤 시어머니 약시중든 시간이고 그래그래 저 십분은 새벽녘 만취해서 돌아온 남편을 위하여 버린 시간일거야 고단한 하루의 시작과 끝에서 잠 속에 흔들리는 팬지꽃 아픔 식탁에 놓인 안개꽃 멍에 그러나 부엌문이 여닫기는 지붕마다 여자가 받쳐든 한 식구의 안식이 아무도 모르게  죽음의 잠을 향하여 거부의 화살을 당기고 있다         가을 편지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가을이 흑룡강 기슭까지 굽이치는 날 무르익을 수 없는 내 사랑 허망하여 그대에게 가는 길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길이 있어 마음의 길은 끊지 못했습니다 황홀하게 초지일관 무르익은 가을이 수미산 산자락에 기립해 있는 날 황홀할 수 없는 내 사랑 노여워 그대 향한 열린 문 닫아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문이 있어 마음의 문은 닫지 못했습니다 작별하는 가을의 뒷모습이 수묵색 눈물비에 젖어 있는 날 작별할 수 없는 내 사랑 서러워 그대에게 뻗은 가지 잘라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무성한 가지 있어 마음의 가지는 자르지 못했습니다 길을 끊고 문을 닫아도 문을 닫고 가지를 잘라도 저녁 강물로 당도하는 그대여 그리움에 재갈을 물리고 움트는 생각에 바윗돌 눌러도 풀밭 한벌판으로 흔들리는 그대여 그 위에 해와 달 멈출 수 없으매 나는 다시 길 하나 내야 하나 봅니다 나는 다시 문 하나 열어야 하나 봅니다         꿈꾸는 가을 노래                                  꿈꾸는 가을 노래 들녘에 고개 숙인 그대 생각 따다가 반가운 손님 밥을 짓고 코스모스 꽃길에 핀 그대 사랑 따다가 정다운 사람 술잔에 띄우니 아름다워라 아름다워라 늠연히 다가오는 가을 하늘 밑 시월의 선연한 햇빛으로 광내며 깊어진 우리 사랑 쟁쟁쟁 흘러가네 그윽한 산그림자 어질머리 뒤로 하고 무르익은 우리 사랑 아득히 흘러가네 그 위에 황하가 서로 흘러 들어와 서쪽 곤륜산맥 열어놓으니 만리에 용솟는 물보라 동쪽 금강산맥 천봉을 우러르네         날개                                                  생일선물을 사러 인사동에 갔습니다 안개비 자욱한 그 거리에서 삼천도의 뜨거운 불기운에 구워내고 삼천도의 냉정한 이성에 다듬어낸 분청들국 화병을 골랐습니다 일월 성신 술잔같은 이 화병에 내 목숨의 꽃을 꽂을까, 아니면 개마고원 바람소릴 매달아 놓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장백산 천지연 물소리 풀어 만주대륙 하늘까지 어리게 할까 가까이서 만져보고 떨어져서 바라보고 위아래로 눈 인두질하는 내게 주인이 다가와 말을 건넸지요 손님은 돈으로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선물을 고르고 있군요 이 장사 삼십년에 마음의 선물을 포장하기란 그냥 줘도 아깝지 않답니다 도대체 그 분은 얼마나 행복하죠? 뭘요... 마음으로 치장한들 흡족하지 않답니다 이 분청 화병에는 날개가 달려있어야 하는데 그가 이 선물을 타고 날아야 하는데 이 선물이 그의 가슴에 돌이 되어 박히면 난 어쩌죠?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목을 길게 뽑고 두 눈을 깊에 뜨고 저 가슴 밑바닥에 고여 있는 저음으로 첼로를 켜며 비장한 밤의 첼로를 켜며 두 팔 가득 넘치는 외로움 너머로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러질 때까지 어두운 들과 산굽이 떠돌며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향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달력 속에서 뚝, 뚝, 꽃잎 떨어지는 날이면 바람은 너의 숨결을 몰고와 측백의 어린 가지를 키웠다 그만큼 어디선가 희망이 자라오르고 무심히 저무는 시간 속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 나는 너에게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수없는 나날이 셔터 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꿈의 현상소에 당도했을 때 오오 그러나 너는 그 어느 곳에서도 부재중이었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바람으로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더 먼저 더 오래                                     더 먼저 기다리고 더 오래 기다리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기다리는 고통 중에 사랑의 의미를 터득할 것이요.  더 먼저 달려가고 더 나중까지 서 있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서 있는 아품중에 사랑의 길을 발견할 것이요.  더 먼저 문 두드리고 더 나중까지 문 닫지 못하는 사랑이 복이 있나니  저희가 문닫지 못하는 슬픔중에 사랑의 문을 열게 될것이요.  더 먼저 그리워하고 더 나중까지 그리워 애통하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그리워 애통하는 눈물 중에 사랑의 삶을 차지할 것이요.  더 먼저 외롭고 더 나중까지 외로움에 떠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외 로움의 막막궁상 중에 사랑의 땅을 얻게 될 것이요.  더 먼저 상처받고 더 나중까지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은 복이 있나 니 저희가 상처로 얼싸안는 절망중에 사랑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요.  더 먼저 목마르고 더 나중까지 목 말라 주린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주리고 목마른 무덤 중에서라도 사랑의 궁전을 짓게 되리라.  그러므로 사랑으로 씨 뿌리고 열매 맺눈 사람들아  사랑의 삼보 - 상처와 눈물과 외로움 가운데서 솟는 사랑의 일곱 가지 무 지개  이 세상 끝 날까지 그대 이마에 찬란하리라.         모든 사라지는 것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 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       사랑법 첫째                                              그대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를 매달아 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다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에 커다란 돌덩이를 매달아 놓습니다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해서 내 외롬 짓무른 밤일수록 제 설움 넘치는 밤일수록 크고 무거운 돌덩이 하나 가슴 한복판에 매달아 놓습니다.         하늘에 쓰네                                                그대 보지 않아도 나 그대 곁에 있다고 하늘에 쓰네 그대 오지 않아도 나 그대 속에 산다고 하늘에 쓰네 내 먼저 그대를 사랑함은 더 나중의 기쁨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내 나중까지 그대를 사랑함은 그대보다 더 먼저 즐거움의 싹을 땄기 때문이리니 가슴속 천봉에 눈물 젖는 사람이여 억조창생 물굽이에 달뜨는 사람이여 끝남이 없으니 시작도 없는 곳 시작이 없으니 멈춤 또한 없는곳, 수련꽃만 희게 희게 흔들리는 연못가에 오늘은 봉래산 학수레 날아와 하늘 난간에 적상포 걸어놓고 달나라 광한전 죽지사 열두 대의 비파에 실으니 천산의 매화향이 이와 같으랴 수묵색 그리움 만리를 적시도다 만리에 서린 사랑 오악을 감싸도다 그대 보지 않아도 나 그대 곁에 있다고 동트는 하늘에 쓰네 그대 오지 않아도 나 그대 속에 산다고 해지는 하늘에 쓰네.       봄비                                                         가슴 밑으로 흘려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언강물 풀리는 소리는 내며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 오 그리운 이여 저 비 그치고 보름달 떠오르면 우리들 가슴 속의 수문을 열자 봄비 찰랑대는 수문을 쏴 열고 꿈꾸는 들판으로 달려 나가자 들에서 얼싸안고 아득히 흘러가자 그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리 다만 둥그런 수평선 위에서 일월성산 숨결같은 빛으로 떠오르자       강물                                                       - 편지1 푸른 악기처럼 내 마음 울어도 너는 섬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암울한 침묵이 반짝이는 강변에서 바리새인들은 하루종일 정결법 논쟁으로 술잔을 비우고 너에게로 가는 막배를 놓쳐버린 나는 푸른 풀밭, 마지막 낙조에 눈부시게 빛나는 너의 이름과 비구상의 시간 위에 쓰라린 마음 각을 떠 널다가 두 눈 가득 고이는 눈물 떠나가는 강물에 섞어 보냈다.          지울 수 없는 얼굴                                       냉정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얼음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불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무심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징그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부드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그윽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따뜻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내 영혼의 요람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샘솟는 기쁨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아니야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당신이라 썼다가 이 세상 지울 수 없는 얼굴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 시대의 아벨                                           며칠째 석양이 현해탄 물구비에 불을 뿌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막 닻을 내린 거룻배 위에는 저승의 뱃사공 칼롱의 은발이 석양빛에 두어 번 나-부-끼-더-니, 동서남북 금촉으로 부서지며 혼비백산 숲에 불을 질렀읍니다. 으-아, 솔바람 불바람 홀연히 솟아올라 둘러친 세상은 넋나간 아름다움 넋나간 욕망으로 끓어 오르고 있었읍니다. 아세아를 건너지른 `오그덴 10호'가 현해탄에 당도한 건 바로 이때입니다. 오그덴 10호*는 몇 명의 수부들을 바다 속에 처넣고 벼락을 때리며 외쳤습니다. 오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 너희 안락한 처마밑에서 함께 살기 원하던 우리들의 아벨, 너희 따뜻한 난롯가에서 함께 몸을 비비던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 너희 풍성한 산해진미 잔치상에서 주린 배 움켜 쥐던 우리들의 아벨 우물가에서 혹은 태평 성대 동구 밖에서 지친 등 추스르며 한숨짓던 아벨 어둠의 골짜기로 골짜기로 거슬러 오르던 너희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 믿음의 아들 너 베드로야 땅의 아버지 너 요한아 밤새껏 은총으로 배부른 가버나움아 사시장철 음모뿐인 예루살렘아 음탕한 왕족들로 가득한 소돔과 고모라야 너희 식탁과 아벨을 바꿨느냐 너희 침상과 아벨을 바꿨느냐 너희 교회당과 아벨을 바꿨느냐 독야청청 담벼락과 아벨을 바꿨느냐? 회칠한 무덤들, 이 독사의 무리들아 너희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너희 고통을 짊어진 아벨 너희 족보를 짊어진 아벨 너희 탐욕과 음습한 과거를 등에 진 아벨 너희 자유의 멍에로 무거운 아벨 너희 사랑가로 재갈물린 아벨 일흔 일곱 날 떠돌던 아벨을 보았느냐? 아흔 아홉 날 한뎃잠을 청하던 아벨을 보았느냐? 이제 침묵은 용서받지 못한다 돌들이 일어나 꽃씨를 뿌리고 바람들이 달려와 성벽을 허물리라 지진이 솟구쳐 빗장을 뽑으리라 바람부는 이 세상 어디서나 아벨의 울음은 잠들지 못하리 오 불쌍한 아벨 외마디 소리마저 빼앗긴 아벨을 위하여 나는 너희 식탁을 엎으리라 나는 너희 아방궁을 엎으리라 나는 너희 별장을 엎으리라 나는 너희 교회당과 종탑을 엎으리라 소돔아 너를 엎으리라 고모라야 너를 엎으리라 가버나움아 너를 엎으리라 예루살렘아 너를 엎으리라 천사야 너도 엎으리라 깃발을 분지르고 상복을 입히리라 생나무 마른 나무 함께 불에 던지고 바다더러 산 위로 오르라 하리라 산더러 너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바람부는 이 세상 어디서나 이제 침묵은 용서받지 못한다 울지 않는 종은 입에 칼을 물리고 뛰지 않는 말은 등에 창을 받으리 날지 않는 새는 뒷축에 밟히리 뒷날에 참회는 적당치 못하다 너희가 쫓아 버린 아벨 너희가 쫓아 묻어 버린 아벨 너희가 쫓아 묻고 부인한 아벨 너희는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시치미뗀 아벨의 울음 소릴 들었느냐? 금동이의 술잔에 아벨의 피가 고이고 은소반의 안주에 아벨의 기름 흐르도다 촛농이 녹아 흐를 때 아벨이 울고 노랫가락 높을 때 아벨이 탄식하도다 오 불쌍한 아벨을 찾을 때까지 나는 이 세상 어디든 달려가 너희 잔치상과 보신탕을 엎으리라 너희 축복과 토룡탕을 엎으리라 너희 개소주와 단잠을 엎으리라 돌들이 일어나 옥답을 일구고 지진이 솟구쳐 평지 풍파 일으키리라 바람더러 주인이라 주인이라 부르리라 너희의 어둠인 아벨 너희의 절망인 아벨 너희의 자유인 아벨 너희의 멍에인 아벨 너희의 표징인 아벨 낙원의 열쇠인 아벨 아벨 아벨 아벨 아벨 아벨…… 그때 한 사내가 불 탄 수염을 쥐어뜯으며 대지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가 눈물 흘리는 동안만이라도 주는 우리를 용서하소서 다음날 신문은 오그덴 10호가 현해탄의 대기권을 완전히 떠나갔다고 보도했습니다.                    * 창세기 4장 2절 이하에 기록된 대로 인간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첫아들 카인과                     둘째 아들 아벨을 낳았다.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었고 카인은 농부가 되                     었는데, 형 카인은 아벨에 대한 질투 때문에 아우를 들로 꾀어내어 쳐 죽였다.                      이때 야훼께서 이렇게 꾸짖으셨다.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 1981년 8월 초 한반도에도 상륙한 태풍 이름.       고백 (너 여섯)                                                          너에게로 가는 그리움의 전깃줄에 나는 감 전 되 었 다                     고정희 高靜熙 (1948 - 1991)                           전남 해남 출생. 5남 3녀 가운데 장녀로 태어났다.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한 뒤 1975년 시인 박남수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연가》 《부활과 그 이후》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하였다. 허형륫ㅁ窪唜징ㅐ瀁예?ㅌ蒡仄퐈ㅁ믄예?등과 ‘목요회’ 동인으로 활동하였고,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여성문학인위원회 위원장, 시창작분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1984년부터는 기독교신문사, 크리스찬아카데미 출판간사, 가정법률상담소 출판부장,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을 거쳐 여성문화운동 동인 ‘또하나의 문화’에서 활동하는 등 사회활동도 적극적으로 하였다. 1991년 6월 9일 지리산 등반 도중 실족사하였다.   시집으로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1979), 《실락원 기행》(1981), 《초혼제》(1983), 《이 시대의 아벨》(1983), 《눈물꽃》(1986), 《지리산의 봄》(1987),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1989), 《여성해방출사표》(1990), 《광주의 눈물비》(1990),《아름다운 사람 하나》(1991)와 유고시집으로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1992)가 있다. 시집 가운데 《초혼제》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남도가락과 씻김굿 형식을 빌어 민중의 아픔을 위로한 장시집(長詩集)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강한 의지와 생명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노래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369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김용택 - 섬진강 1 댓글:  조회:4141  추천:0  2015-12-24
섬진강 1                            김용택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하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걸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64』 (조선일보 연재, 2008)  (『섬진강』. 창작과비평사. 1985)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4편 수록 중 1편. 2007)                     방의 3면이 서가로...    시인의 집을 떠나 섬진강을 따라 걷는 길가에는 여기저기에 김용택 시인의 시를 새긴 시비들...    
368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곽재구 - 새벽 편지 댓글:  조회:3769  추천:0  2015-12-24
  [현대시] -  곽재구,       「새벽 편지」     ■ 감상의 맥       이 시에서 화자는 고통과 슬픔의 세상 속에서 그 고통과 슬픔의 세상을 직시하면서 새벽에 일어나 가슴속에 담긴 뜨거운 사랑(순수하고 진정한 삶)의 마음을 편지에 담아내고 있다. 따라서 화자에게 밝아오는 ‘새벽’은 이 험한 세상에 새로운 희망을 기대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 작품 읽기   새벽에 깨어나 ↑가슴 속에 뜨거움과 만나는 시간 →사랑과 희망의 샘이 출렁이는 시간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삶에 대한 사랑과 희망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현실에는 찾기 힘들지만 반드시 있는 사랑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세상을 사랑으로 채우는 샘 ▲ 1~4행 : 삶에 대한 새로운 희망과 기대       ㉡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의 정령들은 잠들고   ↑현실의 괴로움 눈시울이 붉어진 인간의 혼들만 깜박이는 아무도 모르는 고요한 그 시각에                        ↑새벽 아름다움은 새벽의 창을 열고 우리들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과 만난다            ↑새벽 별을 보고 있으면 가슴속에 열정이 생김 다시 고통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해야겠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꿈꾸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고통을 참고 견디겠다는 뜻   →화자의 의지가 드러남                 ↗화자가 생각하는 긍정적 세계 이제 밝아 올 아침의 자유로운 새소리를 듣기 위하여                               ↑화자가 추구하는 가치를 담고 있는 소재 ↗화자가 생각하는 긍정적 세계 따스한 햇살과 바람과 라일락 꽃향기를 맡기 위하여 ▲ 5~12행 : 새해 아침의 마음 자세        ↗반복을 통한 진실성(강조)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 새벽 편지를 쓰기 위하여  ↑진실된 마음으로 쓰는 사랑과 희망의 편지 『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 『 』-수미상관 →주제 강조 ↑화자가 추구하는 소중한 가치 ▲ 13~17행 : 삶에 대한 새로운 희망과 기대 - 곽재구, 「새벽 편지」-    ■ 핵심 정리      ▶ 화자 : 새벽에 깨어나 별을 바라보며 희망을 생각하는 사람    ▶ 시적 상황 : 새벽에 일어나서 별을 바라보고 있음    ▶ 정서와 태도 : 희망적, 낭만적인 태도    ▶ 주제 : 새벽 별을 보며 느낀 새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    ▶ 특징      ① 수미상관식 구조로 시상을 전개함.      ② 비유법을 사용하여 화자의 정서를 형상화함.      ③ 시간적 배경이 상징성을 지님. \\\\\\   곽재구 『우리가 사랑한 1초들』 지상의 두렵고 쓸쓸한 영혼들에게 바치는 현자의 노래       2009년 7월, 시인 곽재구는 순천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의 시 강의를 잠시 멈추고 타고르의 고향인 산티니케탄으로 떠난다. 그리고 2010년 12월 28일까지 540일 동안, 그는 산티니케탄에 체류하며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고 여행을 한다.   2000년대 최고 베스트셀러 중 하나였던 『포구기행』이후 시인은 여러 작가들이 참여하는 앤솔로지에 한 편씩 글을 발표하기도 하고, 동화를 쓰거나 신문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 발표하는 신작 산문집 『우리가 사랑한 1초들』은 어느 지면에도 발표한 적이 없는 ‘전작’이며, 사실 책의 출간에 대한 의식도 없이 ‘필연적으로 쓰여진’ 글들을 묶은 것이다.   이 산문집의 배경은 비슈와바라티 대학교가 자리한 한적인 시골 마을인 산티니케탄이지만, 그것은 여느 여행기나 인도에 관한 잠언집들과는 출발점부터 차이가 있다. 시인에게 그것은 “오래 묵힌 마음의 여행”이었다.   “하루 24시간 86,400초를 다 기억하고 싶었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스무 살 때였지요. 1970년대 중반이었고 삶의 현실을 척박했습니다. 정치적 피폐함이 극에 이른 시간 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타고르의 시편들을 읽는 순간들은 작은 천국이었지요.   시가 있어서 행복했고 타고르가 있어서 지상 위의 어떤 길이건 끝없이 걸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매일 아침 눈을 떠 처음 쓴 시의 한 줄을 타고르에게 보여주고 싶었지요.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이 그의 빛나는 눈빛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쓴 허름한 시들은 그의 형형한 눈빛의 체에 걸러져 단 한 줄도 지상에 남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요. 그렇지만 언젠가는 그의 성긴 체에도 걸러지지 않고 남을 시를 꼭 써서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깊었습니다. 이봐요, 타고르… 지금 얼른 내게 와요. 내 시 좀 봐줘요…”   시인이 인도의 유명한 성지도 장엄한 풍광이 사람을 압도하는 여행지도 아닌 산티니케탄으로 떠난 것은 바로 40년 동안 꿈꿔왔던 ‘만남’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평화의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산티니케탄은 타고르가 작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전까지는 평범한 농촌 마을이었다.   타고르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였지만, 계급과 빈부 격차를 타파하기 위한 혁명적 이상을 품고 가문의 본향인 산티니케탄에 ‘아마르 꾸띠르(나의 오두막집)’라는 농촌 공동체를 세운다.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흔적은 남아 있지만, 산티니케탄에서 타고르의 영향은 물질적인 것이라기보다 내면적인 것, 사람들의 삶 속에 깊이 파고들어 전해지는 ‘정신’에 가깝다. 타고르에 대한 애정과 열망에서 출발한 시인의 산티니케탄 체류는 가장 소박하지만 가장 완벽한 삶의 방식을 간직한 산티 사람들과 교류하고 공감하면서 스스로를 사랑하고 이해하는 열반의 순간들을 선사한다. 그것은 지금 우리 곁을 스쳐 가는 1초 1초들을 사랑하는 지혜를 터득함으로써 앞으로 맞이하고픈 행복하고 귀한 1초를 불러들이는 제의와 같은 시간들이다.   1. 우리가 별과 별 사이를 여행할 때| 사람이 하나의 별이라면   시인이 묘사하는 산티니케탄은 우리나라의 1960년대 농촌과 비슷한 풍경이다. 초가집들, 뙤약볕 아래 논에서 일하는 농부들, 우물 긷는 아낙네, 흙먼지 이는 시골길 위로 자전거 타고 가는 아가씨, 소와 개와 염소들, 맨발로 뛰어다니는 아이들, 저녁마다 전깃불이 나가면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반짝이는 반딧불들… 신을 섬기며 농사짓고 아이를 기르고 정을 나누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산티 사람들은 욕심도 경쟁도 고통도 절망도 알지 못한다. 시인은 이들을 ‘별’이라 일컫는다. 1부에서는 그 별과 같은 사람들과 얽힌 ‘인연’에 관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시인은 벼룩시장에서 어린 소녀에게 10루피를 주고 종이배를 산다. 10루피는 한화로 250원 정도지만 인도에서는 한 끼 식사를 배불리 할 수 있는 돈이다. 따라서 아이가 만든 종이배를 10루피를 주고 사는 것은 누가 봐도 실없는 짓이다. 그런데 시인은 소녀의 종이배를 보며 타고르의 시「종이배」를 떠올리고 소녀를 타고르 시인이 보낸 선물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종이배를 사 가지고 와서 마을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아가씨가 시인에게 말을 건넨다. 생명의 물이라는 뜻의 암리타라는 이름의 아가씨는 시인이 타고르를 사랑하여 산티니케탄에 왔다는 얘기에 감동한다. 그리고 타고르의 시 중에 가장 아름다운 「황금빛 배」라는 시를 꼭 읽어보라며 가르쳐준다. 소녀의 종이배가 이어준 또 하나의 인연이다. (「종이배를 파는 아이가 있었네 1, 2」)   어느 날은 짜이 가게 앞을 지나는데 한 인도 아가씨가 그를 보고 미소 지으며 안으로 들어오라 하더니 차를 대접한다. 영문을 모르고 차를 얻어 마신 날 밤, 옥상에 올라가 별을 보며 누워 있다가 시인은 벌떡 일어난다. 시인은 8년 전에도 산티니케탄에 며칠 머문 적이 있었다. 당시 그는 맨발의 어린 소녀에게 신발값을 주었다. 신발을 사주고 싶었지만, 그 신발이 해지면 다시 신발을 사 신을 수 없는 아이의 처지를 생각해 돈으로 주었던 것이다. 짜이 가게의 처녀는 바로 8년 전의 맨발의 아이였다. 시인은 잊었는데, 론디니라는 이름의 그 소녀는 아직도 그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인연」)   아버지가 타고르 시인의 주방장이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찻집 주인 ‘깔루다’ 이야기, 인도로 유학 온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과의 교류, 비슈와바라티 대학 영어 강사이자 타고르 문학을 영역(英譯)하여 책으로 펴낸 브라만 계급 처녀인 투툴 등등, 신분과 나이와 빈부와 국적을 초월한 어울림의 시간들을 시인은 ‘별과 별 사이의 여행’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부겐빌레아」라는 시 속에서 이러한 사람과 사람의 만남, 소중하고 따뜻한 1초 1초가 쌓여 이루어지는 우리의 삶은 별들이 모여 은하수를 이루는 시간이 된다. (「우리가 별과 별 사이를 여행할 때」)   2.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릭샤 스탠드| 행복을 찾는 가장 빠른 길   산티니케탄에 체류하는 동안 시인의 일상을 늘 함께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릭샤’라 불리는 자전거 택시를 모는 ‘릭샤왈라’들이다. 시인은 산티니케탄의 모든 릭샤왈라들의 이름을 한 번씩 다 불러보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처음 보는 릭샤왈라에겐 꼭 이름을 묻는다. 그의 이런 버릇은 산티의 릭샤왈라들 사이에 금세 소문이 퍼졌고, 어느 순간 먼저 다가와 자기 이름을 얘기하는 릭샤왈라들이 생겨난다.   오십대인 수보르는 릭샤도 새것이고 늘 하얀 양말에 깨끗한 구두를 신고 핸드폰도 들고 다닌다. 못생기고 허름한 릭샤를 일부러 골라 타는 시인과는 친해질 일이 없는 릭샤왈라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시인에게 다가와 “내 이름은 수보르야”라고 말했고 시인은 그런 그가 마음에 들었다. 수보르는 릭샤를 몰면서 마주치는 사람들, 개들, 풀들, 꽃들 모두에게 “안녕 친구!”라고 인사한다. 시인에게 산티의 수많은 꽃이름들을 벵골어로 가르쳐준 것도 바로 수보르다. 꽃을 사랑하는 시인에게 수보르는 ‘꽃 선생님’이자 시인보다 더 시인의 영혼을 가진 릭샤왈라다. (「수보르, 나의 시 선생님」)   다보스는 릭샤왈라이자 ‘노래하는 집시’인 바울이기도 하다. 시인은 다보스에게 한 차례 반소리(피리) 레슨을 받았다. 소리를 제대로 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 후로 시인은 다보스를 만나면 언제나 깍듯하게 “자이구루!(너의 스승에게 경배를!)”라고 인사한다. 어느 날 시인은 산티니케탄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삼바티 마을에 들렀다가 우연히 다보스를 만난다. 다보스는 시인을 릭샤에 태우더니 동네 안의 아주 좁은 골목길로 데려간다. 영문을 몰랐지만 시인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릭샤왈라가 이끄는 대로 따른다. 동네 안쪽엔 뜻밖에도 연꽃이 만발한 연못이 있다. 다보스는 시인에게 그 연꽃 호수를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시인은 산티니케탄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할지 먼저 결정하지 않는다. 그저 마음을 열고 사람들과 만나고 그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어떤 이방인도 보지 못하는 진짜 삶의 모습과 마주치게 된다. 거기서 시인은 생의 가장 행복하고 빛나는 순간을 체험하고 시를 발견하는 것이다. (「연꽃 만발한 삼바티 마을에 가다」)   3. 마시 이야기| 일상 속 소중한 1초들   마시는 ‘가정부’를 뜻하는 벵골어다. 인도의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선 마시를 고용한다. 밥 하는 마시와 청소하는 마시가 따로 있고 정원사와 운전수가 따로 있다. 마시의 존재는 인도가 계급사회이자 빈부격차가 극심한 나라임을 실감하게 하는 대목이다.   인도에 정착한 시인은 집을 구하면서 그 집에서 일하던 마시까지 물려받게 된다. 그 마시들을 고용하지 않으면 그들은 다른 집에 일자리를 구해야 했기에 시인은 졸지에 2명의 마시를 부려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마시 월급은 한 달에 2만원. 두 명을 쓰더라도 경제적인 부담은 없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다른 곳에서 생긴다. 마시들과 인간적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정해진 일만 제대로 한다면 출퇴근 시간은 자유롭게 하라’고 배려했더니 그다음 날부터 마시들이 너무 늦게 나와 너무 일찍 돌아가고, 거짓말을 일삼고, 가끔은 아예 안 나오기도 한다. 의사소통이 자유롭지 못한 시인은 혼자 고민하고 실망하고 의심하고 속을 끓이다가 이웃 유학생들에게 상담을 청하기에 이른다.   산티에서의 일상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마시 이야기」에는 이러한 풍경들이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만만한 주인’과 ‘만만치 않은 마시들’의 줄다리기는 때론 우스꽝스럽고 때론 가슴 졸이게 하고 때론 안타깝거나 화가 나기도 하지만 결국은 감동적인 소통에 이른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에는 행복과 기쁨은 물론이고 갈등과 반목을 극복해나가는 과정 또한 포함된다는 평범한 지혜를 엿볼 수 있는 글편들이다.   4. 가난한 신과 행복한 사진 찍기| 지상이 극락인 시간이 여기에   벵골어를 공부하여 타고르의 시들을 한국어로 옮기는 것이 시인이 1년 6개월 산티니케탄 체류의 중심 과제였지만, 산티 사람들과 지내다 보니 작가로서 그곳의 사정을 기록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처음 산티니케탄에 들어오던 날이 생각나는군요. 공항에서 차를 타고 오는데 아스팔트 도로가 녹아 타는 듯, 유리 징인 듯 보였습니다. 이곳은 2월 말이면 이미 40도가 넘습니다. 연일 48도를 넘나드는 초열지옥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덥지만, 그래서 꼭 한 가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해 떠오르기 직전부터 낮 12시까지는 글 쓰는 재미로 지내는 거지요.”   4부에서는 이 정주의 기간 동안 터득하게 된 삶의 지혜들에 관한 글이 주를 이룬다.   시인은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산티의 노천카페 거리인 ‘라딴빨리’에 나간다. 반얀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그늘 아래 앉아 짜이를 마시며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그가 이 나무 아래 앉아 있는 데는 까닭이 있다. 맞은편에 ‘달빛의 냄새’가 난다는 ‘조전건다’ 나무가 서 있기 때문이다. 어린 소녀에게 종이배를 산 날 말을 걸어온 암리타라는 아가씨가 알려준 꽃나무였다. 그는 1년 동안 조전건다 나무를 지켜보며 꽃이 피기를 기다리고, 2010년 5월, 마침내 찬란한 빛의 축제와도 같은 광경을 목도한다. (「조전건다 꽃이 필 때」 1, 2)   한편, 인도에 체류하면서 시인은 처음으로 만년필 대신 노트북을 사용하여 글을 쓰게 된다. 그런데 키보드 자판 하나가 고장 나서 글을 쓸 수 없게 되자 그것을 고치기 위해 산티에서 차로 4시간 거리인 콜카타까지 두 번을 왕복하게 된다. 처음에는 컴퓨터 수리를 맡기기 위해, 그다음은 수리된 컴퓨터를 찾기 위해서. 기차를 타고 택시를 타고 걷고 뛰며 콜카타의 교통지옥을 뚫고 밤 열차에 몸을 싣고 산티로 돌아오는 험난한 여정을 시인은 담담하게 ‘소풍’이라고 말한다. 느리게 사는 지혜를 터득한 현자의 성찰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고장 난 노트북과 콜카타로 소풍 가기」)   또한 시인은 인도에서 10루피로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헤아리다가 10루피가 “세상에서 가장 착하고 아름다운 돈”임을 깨닫고, 시간 약속에 대한 개념이 없는 인도인 가족과 영화를 보러 간 날의 속 터지는 이야기를 적으면서 “생이 이러한 초대의 연속이라면 싶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마음의 넓이를 얻는다.   『우리가 사랑한 1초들』은 시인 곽재구가 “산티니케탄에서 만난 시간의 향기에 관한 이야기”이자, 그가 평생 꿈꿔왔던 “별과 별 사이의 여행”의 기록이다. 시인이 산티에서 만난 범박한 생들은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힘겹고 아프지만 그 모두가 경이롭다. 한 생이 살아온 시간의 흔적과 고단의 자취는 시인의 눈을 통해 별다른 수사나 꾸밈이 없이도 한 편의 긴 서정시가 된다.   “대저 시가 무엇인지요? 그 또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아니겠는지요. 우리 곁으로 다가오는 생의 1초들을 사랑하는 일 아니겠는지요. 이기적이고 모순된 삶 속에서 우리들이 꿈꾼 가장 어질고 빛나는 이미지들을 우리들의 시간 속에 반짝 펼쳐 보이는 것 아니겠는지요.” _책머리에 중에서   ∵책 속에서   크와이의 벼룩시장에서 만난 어린 소녀는 색색의 그림이 그려진 일곱 개의 종이배를 팔았습니다. 우리의 유년 시절이 종이배를 접었고 다시 태어날 세대들도 종이배를 접어 시냇물에 띄울 겁니다. 허름한 영혼이지만 우리 모두 작은 종이배가 되어 인생의 강물 속으로 흘러들어가겠지요. (19쪽)   운이 좋은 날에는 한 줄기 바람이 지나가는 때도 있어서 나무 의자에 앉아 별을 보노라면 폭염의 공포에서 잠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반딧불이들이 반짝반짝 날아가는 것을 바라보며 어둠 속에 펼쳐진 모든 풍경들에 연민이 이는 것을 느낍니다. 길, 나무, 집, 숲의 새들과 원숭이들, 오늘도 다들 열심히 제 몫의 삶을 살아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 위대한 일이 아닐는지요. (37쪽)   이 학교는 지상에서 네 번째 아름다운 학교입니다. 이곳이 지금까지 내가 지상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학교지만 이보다 더 아름다운 학교가 이 세상 어딘가에 세 개쯤은 더 있어도 좋겠습니다. 아름다운 학교에서 자란 아이들이 만든 세상 또한 아름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47쪽)   꽃을 꺾어가지고 놀던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꽃을 그냥 버리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 꽃을 주워 들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한 아름 연꽃을 안고 릭샤를 탑니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이 다 손을 흔들어줍니다. 나는 그들에게 연꽃 송이들을 흔들어줍니다. 연꽃 한 아름을 들었을 뿐인데 사람들이 다들 행복해하는군요. (135쪽)   당신과 우리 모두 기다리며 한세상을 살아왔지요. 기다림이 없는 시간이 바로 절망의 시간 아닌지요. 우리 모두 부지런히 살아요. 몸 안의 강변길에 늘어선 꽃나무들이 달빛의 냄새를 흩뿌릴 때까지. (278쪽) ===============================   우전 해수욕장의 곽재구 시비             새벽 편지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의 정령들은 잠들고 눈시울이 붉어진 인간의 혼들만 깜박이는 아무도 모르는 고요한 그 시각에 아름다움은 새벽의 창을 열고 우리들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과 만난다 다시 고통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해야겠다 이제 밝아올 아침의 자유로운 새소리를 듣기 위하여 따스한 햇살과 바람의 라일락 꽃향기를 맡기 위하여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 새벽편지를 쓰기 위하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사평역(沙平驛)에서                              -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히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 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바람이 좋은 저녁                                            내가 책을 읽는 동안 새들은 하늘을 날아다니고 바람은 내 어깨 위에 자그만 그물침대 하나를 매답니다 마침 내 곁을 지나가는 시간들이라면 누구든지 그 침대에서 푹 쉬어갈 수 있지요 그 중에 어린 시간 하나는 나와 함께 책을 읽다가 성급한 마음에 나보다도 먼저 책장을 넘기기도 하지요. 그럴 때 나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다 바람이 좋은 저녁이군, 라고 말합니다 어떤 어린 시간 하나가 내 어깨 위에서 깔깔대고 웃다가 눈물 한 방울 툭 떨구는 줄도 모르고       소나기                                            저물 무렵 소나기를 만난 사람들은 알지 누군가를 고즈넉이 그리워하며  미루나무 아래 앉아 다리쉼을 하다가 그때 쏟아지는 소나기를 바라본 사람들은 알지   자신을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 격정이라는 것을 사랑하는 이를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 분노라는 것을  그 소나기에 가슴을 적신 사람이라면 알지 자신을 속이고 사랑하는 이를 속이는 것이 또한 얼마나 쓸쓸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마음                                            아침 저녁 방을 닦습니다 강바람이 쌏인 구석구석이며 흙 냄새가 솔솔 풍기는 벽도 닦습니다 그러나 매일 가장 열심히 닦는 곳은 꼭 한군데입니다 작은 창 틈 사이로 아침 햇살이 떨어지는 그곳 그곳에서 나는 움켜진 걸레 위에 내 가장 순결한 언어의 숨결들을 쏟아 붓습니다 언젠가 당신이 찾아와 앉을 그 자리 언제나 비어 있지만 언제나 꽉차 있는 빛나는 자리입니다.       희망을 위하여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굳게 껴안은 두 팔을 놓지 않으리  너를 향하는 뜨거운 마음이  두터운 네 등 위에 내려앉는  겨울날의 송이눈처럼 너를 포근하게  감싸 껴안을 수 있다면  너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져  네 곁에 누울 수 없는 내 마음조차도 더욱  편안하여 어머니의 무릎잠처럼  고요하게 나를 누울 수 있다면  그러나 결코 잠들지 않으리  두 눈을 뜨고 어둠 속을 걸어오는  한 세상의 슬픔을 보리  네게로 가는 마음의 길이 굽어져  오늘은 그 끝이 보이지 않더라도  네게로 가는 불빛 잃은 발걸음들이  어두워진 들판을 이리의 목소리로 울부짖을지라도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굳게 껴안은 두 손을 풀지 않으리.        복종                                            밥을 먹다가 바로 앞 당신 생각으로 밥알 몇 개를 흘렸답니다 왜 흘려요? 당신이 내게 물었지요 난 속으로 가만히 대답했답니다 당신이 주워 먹으라 하신다면 얼른 주워 먹으려구요       그리운 폭우                                            어젠 참 많은 비가 왔습니다 강물이 불어 강폭이 두 배로 더 넓어졌답니다 내 낡은 나룻배는 금세라도 줄이 끊길 듯 흔들렸지요 그런데도 난 나룻배에 올라탔답니다 내 낡은 나룻배는 흙탕물 속으로 달렸습니다 아, 참 한 가지 빠트린 게 있습니다 내 나룻배의 뱃머리는 지금 온통 칡꽃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폭우 속에서 나는 종일 꽃장식을 했답니다 날이 새면 내 낡은 나룻배는 어딘가에 닿아 있겠지요 당신을 향한 내 그리움의 지름길은 얼마나 멀고 또 험한지........ 사랑하는 이여. 어느 河上엔가 칡꽃으로 뒤덮인 한 나룻배가 얹혀 있거든 한 그리움의 폭우가 이 지상 어딘가에 있었노라 가만히 눈감아줘요.         또다른 사랑                                            보다 자유스러워지기  위하여 꽃이피고 보다  자유스러워지기  위하여 밥을 먹는다 함께 살아갈 사람들 세상 가득한데 또 다른 무슨 사랑이 필요있으리 문득 별 하나 뽑아 하늘에 던지면 쨍 하고 가을이 운다     기다림                                            이른 새벽 강으로 나가는 내 발걸음에는 아직도 달콤한 잠의 향기가 묻어 있습니다 그럴 때면 나는 산자락을 타고 내려온 바람 중 눈빛 초롱하고 허리통 굵은 몇 올을 끌어다 눈에 생채기가 날 만큼 부벼댑니다 지난밤,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낡은 나룻배는 강둑에 매인 채 출렁이고 작은 물새 두 마리가 해 뜨는 쪽을 향하여 힘차게 날아갑니다 사랑하는 이여 설령 당신이 이 나루터를  영원히 찾아오지 않는다 해도 내 기다림은 끝나지 않습니다 설레이는 물살처럼 내 마음  설레이고 또 설레입니다.        가거도 편지                                            한 바다가 있었네  햇살은 한없이 맑고 투명하여  천길 바다의 속살을 드리우고  달디단 바람 삼백예순 날 불어  나무들의 춤은 더없이 포근했네  그 바다 한가운데  삶이 그리운 사람들 모여 살았네  더러는 후박나무 숲그늘 새  순금빛 새 울음소리를 엮기도 하고  더러는 먼 바다에 나가  멸치잡이 노래로 한세상 시름을 달래기도 하다가  밤이 되면 사랑하는 사람들 한 몸 되어  눈부신 바다의 아이를 낳았네  수평선 멀리 반짝이는  네온사인 불빛 같은 건 몰라  누가 국회의원이 되고  누가 골프장 주인이 되고  누가 벤츠 자동차를 타고  그런 신기루 같은 이야기는 정녕 몰라  지아비는 지어미의  물질 휘파람소리에 가슴이 더워지고  지어미는 지아비의  고기그물 끌어올리는 튼튼한 근육을  일곱물 달빛 하나하나에  새길 수 있다네  길 떠난 세상의 새들  한 번은 머물러 새끼를 치고 싶은 곳  자유보다 소중한 사랑을 꿈꾸는 곳  그곳에서 사람들이 살아간다네  수수 천년 옛이야기처럼 철썩철썩 살아간다네.         따뜻한 편지                                            당신이 보낸 편지는 언제나 따뜻합니다 물푸레나무가 그려진 10전짜리 우표 한 장도 붙어 있지 않고 보낸 이와 받는 이도 없는 그래서 밤 새워 답장을 쓸 필요도 없는 그 편지가 날마다 내게 옵니다 겉봉을 여는 순간 잇꽃으로 물들인 지상의 시간이 우수수 쏟아집니다 그럴 때면 내게 남은 모국어의 추억들이 얼마나 흉칙한지요   눈이 오고 꽃이 피고 당신의 편지는 끊일 날 없는 데  버리지 못한 지상의 꿈들로 세상 밖을 떠도는 한 사내의 퀭한 눈빛 하나 있습니다       첫눈 오는 날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하늘의 별을  몇 섬이고 따올 수 있지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새들이 꾸는 겨울 꿈 같은 건 신비하지도 않아 첫눈 오는 날 당산 전철역 오르는 계단 위에서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 가슴속에 촛불 하나씩 켜들고 허공 속으로 지친 발걸음 옮기는 사람들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다닥다닥 뒤엉긴 이웃들의 슬픔 새로 순금 빛 강물 하나 흐른다네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이 세상 모든 고통의 알몸들이 사과꽃 향기를 날린다네         바닥에서도 아름답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날은 올 수 있을까 미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은 채 그리워진 서로의 마음 위에 물먹은 풀 꽃 한 송이 방싯 꽂아 줄 수 있을까 칡꽃이 지는 섬진강 어디거나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한강변 어디거나 흩어져 사는 사람들의 모래알이 아름다워 뜨거워진 마음으로 이 땅 위에 사랑의 입술을 찍을 날들은 햇살을 햇살이라고 말하며 희망을 희망이라고 속삭이며 마음의 정겨움도 무시로 나누어 다시 사랑의 언어로 서로의 가슴에 뜬  무지개 꽃무지를 볼 수 있을까 미장이 토수 배관공 약장수 간호원 선생님 회사원 박사 안내양 술꾼 의사 또끼 나팔꽃 지명수배자의 아내 창녀 포졸 대통령이 함께 뽀뽀를 하며 서로 삿대질을 하며 야 임마 너 너무 아름다워 너 너무 사랑스러워 박치기를 하며 한 송이의 꽃으로 무지개로 종소리로 우리 눈 뜨고 보는 하늘에 피어날 수 있을까         두 사람                                            자전거 두 대가 나란히 꽃길을 지나갑니다 바퀴살에 걸린 꽃향기들이 길 위에 떨어져 반짝입니다 나 그들을 가만히 불러 세웠습니다 내가 아는 하늘의 길 하나 그들에게 일러주고 싶었습니다 여보시오 여보시오 불러놓고 그들의 눈빛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습니다 내가 아는 길보다 더 아름다운 길을  그들이 알고 있을 것만 같아서 불러서 세워놓고 아무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천 일이 지나면                                              오늘 내가 한 편의 시를 쓰고    내일 두 편 모레 세 편 쓴다면    천 일 후엔 천 편의 시를 쓸 수 있을까    그때 나는 말하리라    이 아름다운 땅에 태어나    시간이 흐른다고 써야 할 시들을 쓰지 못한다면    사랑하는 사람들 또한 시간이 흐른다고    사랑한다 말하지 못하잖겠는가    써야 할 시들은 많은데    바람들은 맑은 햇살을 뿌리며    응달의 강기슭을 돌아가는데    울먹인 가슴 녹이며    이제는 고요하게 지켜보아야 할    두려움 모를 그리움만 들판 가득 쌓였는데    천 일이 지나면 혹시 몰라    이 아름다운 나라에 태어나    내가 하루 천 편의 시를 쓰지 못해 쓰러질 때    그때 말 못할 그리움은 밀려와서    내 대신 쓰지 못한 그리움의 시들    가을바람으로나 흔들려    내 사랑하는 사람들 귓속에    불어넣어주고 있을지.        겨울의 춤                                            첫눈이 오기 전에 추억의 창문을 손질해야겠다 지난 계절 쌓인 허무와 슬픔 먼지처럼 훌훌 털어내고 삐걱이는 창틀 가장자리에 기다림의 새 못을 쳐야겠다 무의미하게 드리워진 낡은 커텐을 걷어내고 영하의 칼바람에도 스러지지 않는 작은 호롱불 하나 밝혀두어야겠다 그리고 춤을 익혀야겠다 바람에 들판의 갈대들이 서걱이듯 새들의 목소리가 숲속에 흩날리듯 차갑고도 빛나는 겨울의 춤을 익혀야겠다  바라보면 세상은 아름다운 곳 뜨거운 사랑과 노동과 혁명과 감동이 함께 어울려 새 세상의 진보를 꿈꾸는 곳 끌어 안으면 겨울은 오히려 따뜻한 것 한 칸 구들의 온기와 희망으로 식구들의 긴 겨울잠을 덥힐 수 있는 것 그러므로 채찍처럼 달려드는 겨울의 추억은 소중한 것 쓰리고 아프고 멍들고 얼얼한 겨울의 기다림은 아름다운 것 첫눈이 내리기 전에 추억의 창문을 열어 젖혀야겠다 죽은 새소리 뒹구는 벌판에서 새봄을 기다리는 초록빛 춤을 추어야겠다       나무                                            숲속에는  내가 잘아는  나무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나무들 만나러  날마다 숲속으로 들어갑니다  제일 키 큰 나무와  제일 키 작은 나무에게  나는 차례로 인사를 합니다.  먼 훗날 당신도  이 숲길로 오겠지요  내가 동무 삼은 나무들을 보며  그때 당신은 말할 겁니다  이렇게 등이 굽지 않은  言語(언어)들은 처음 보겠구나  이렇게 사납지 않은  마음의 길들은 처음 보겠구나         깡통                                            아이슬랜드에 가면 일주일에 한 번 TV가 나오지 않는 날 있단다 매주 목요일에는 국민들이 독서와 음악과 야외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국영 TV가 앞장을 서 세심한 문화 정책을 편단다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돌아와 앉은 우리나라 TV에는 이제 갓 열여덟 소녀 가수가 선정적 율동으로 오늘밤을 노래하는데 스포츠 강국 선발 중진국 포스트모더니즘  끝없이 황홀하게 이어지는데 재벌 2세와 유학 나온 패션 디자이너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지는 주말 연속극에 넋 팔고 있으면 아아 언젠가 우리는 깡통이 될지도 몰라 함부로 짓밟히고 발길에 채여도 아무 말 못 하고 허공으로 날아가는 주민증 번호와 제조 일자가 나란히 적힌 찌그러진 깡통이 될지도 몰라  살아야 할 시간들 아직 멀리 남았는데 밤하늘 별들 아름답게 빛나는데.      받들어 꽃                                          국군의 날 행사가 끝나고 아이들이 아파트 입구에 모여 전쟁놀이를 한다 장난감 비행기 전차 항공모함 아이들은 저희들 나이보다 많은 수의 장난감 무기들을 횡대로 늘어 놓고 에잇 기관총 받아라 수류탄 받아라 미사일 받아라 끝내는 좋다 원자폭탄 받아라 무서운 줄 모르고 서로가 침략자가 되어 전쟁놀이를 한다 한참 그렇게 바라보고 서 있으니 아뿔싸 힘이 센 304호실 아이가 303호실 아이의 탱크를 짓누르고 짓눌린 303호실 아이가 기관총을 들고 부동자세로 받들어 총을 한다 아이들 전쟁의 클라이막스가 받들어 총에 있음을 우리가 알지 못했듯이 아버지의 슬픔의 클라이막스가 받들어 총에 있음을 아이들은 알지 못한다 떠들면서 따라오는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과 학용품 안 아름을 골라 주며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 앞에서 나는 얘기했다 아름답고 힘 있는 것은 총이 아니란다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과 별과 나무와 바람과 새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서 늘 피어나는 한 송이 꽃과 같은 것이란다 아파트 화단에 피어난 과꽃 한 송이를 꺾어 들며 나는 조용히 얘기했다 그리고는 그 꽃을 향하여 낮고 튼튼한 목소리로 받들어 꽃 하고 경례를 했다 받들어 꽃 받들어 꽃 받들어 꽃 시키지도 않은 아이들의 경례 소리가 과꽃이 지는 아파트 단지를 쩌렁쩌렁 흔들었다             불어오는 바람 한 줄기, 흔들리는 나뭇잎, 가로등의 어슴푸레한 불빛, 사랑하는 사람의 전화 목소리조차 마음의 물살 위에 파문을 일으킨다.   외로움이 깊어질 때 사람들은 그 외로움을 표현하는 자신만의 방식이 있다. 어떤 사람은 밤새워 술을 마시고 어떤 사람은 빈 술병을 보며 운다.   지나간 시절의 유행가를 몽땅 끄집어 내 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래전에 연락이 끊긴 이의 집에 전화를 걸어 혼곤히 잠든 그의 꿈을 흔들어 놓기도 한다.   아예 길가의 전신주를 동무 삼아 밤새워 씨름하다 새벽녘에 한움큼의 오물덩이를 남기고 어디론가 떠나는 이도 있다.   나는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우리들 삶의 골목골목에 예정도 없이 찾아오는 외로움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외로울 때가 좋은 것이다. 물론 외로움이 찾아올 때 그것을 충분히 견뎌내며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다들 아파하고 방황한다. 이 점 사랑이 찾아올 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사랑이 찾아올 때...... 그 순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행복해진다. 길을 걷다 까닭 없이 웃고, 하늘을 보면 한없이 푸른빛에 가슴 설레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난 모르는 이에게도 '안녕' 하고 따뜻한 인사를 한다.   사랑이 찾아올 때, 사람들은 호젓이 기뻐하며 자신에게 찾아온 삶의 시간들을 충분히 의미 깊은 것으로 받아들인다.   외로움이 찾아올 때, 사실은 그 순간이 인생에 있어 사랑이 찾아올 때보다 귀한 시간이다.   쓴 외로움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한 인간의 삶의 깊이, 삶의 우아한 형상들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 곽재구의 포구기행 中에서 -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황지우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애국가 경청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이상향을 향한 새들의 비상(飛翔) 우리들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기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 앉는다. //시적 화자의 이상과 현실적 좌절      * 주저 앉음의 의미 -영화를 즐기러 온 극장의 어둠 속에 부동 자세로 서서 애국가를 경청하도록 강요받는 현실은 시적 화자에게 '피곤하고 역겨울'뿐이다.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가는 새떼들의 영상을 보며 시적화자는 이 폭압적 현실을 벗어나 멀리 떠나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애국가가 끝나고 새떼들은 화면에서 사라지고 다시 어둠이 찾아온다. 이 때 화자는 어쩔 수 없는 암울한 현실을 인식하고 좌절감에 주저않고 만다. ▶ 감상의 초점 이 시는 황지우의 첫 시집 에 수록된 작품이다. 본 시집에 수록된 모든 작품이 그렇듯, 이 작품 역시 작가가 현실적 삶을 통해 보고, 듣고, 느낀 삶에 대한 회의와 절망, 그리고 피곤하고 역겨운 현실을 탈피하여, 좀더 바람직하고 인간다운 삶을 희구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중요한 시상 전개의 축은 '어디론가 떠나고자 하지만' 떠나지 못하고 '주저 앉는다.'는 것이다.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가는' 흰 새때의 비상과 같이 화자는 70~80년대의 암울하고 억압적인 군사 정권의 현실로부터 멀리 떠나고 싶은 강한 욕구에 사로잡혀 있다. 화자의 삶은 애국가 노래 가사 속의 '삼천리 화려 강산'과 거리가 멀다. 애국가 노래 가사가 끝나기도 무섭게 서둘어 자리에 주저 앉는다는 표현은 현실에 대한 화자의 강한 절망감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성격 : 낭만적, 현실 비판적 ▶구성 : ① 애국가 경청(1-2행)             ② 이상향을 향한 새들의 비상(飛翔)(3-10행)             ③ 시적 화자의 이상과 현실적 좌절(11-20행) ▶제재 : 새 ▶주제 : 암울한 현실적 삶에 대한 좌절감 ▶특징: ①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암시 ② 화자의 처지와 심리를 새와 대비시켜 제시함 1. 작품 전체의 시상으로 보아, 이 세상은 삶의 안식처가 못된다. 세상에 대한 화자의 냉소적 태도를 엿보게 하는 시어(의태어) 셋을 찾아 쓰라.(단, 같은 시어는 한 번만 쓸 것.) ▶ 끼룩거리면서,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2. 화자는 자신의 좌절감을 우리 모두의 운명론적 좌절로 비약시키고 있다. (1)그것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게 하는 시어와 (2)연속된 두 시행을 찾아 쓰라. ▶ (1) 우리도     (2)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 주저앉는다. 군사 정권의 폭압적인 정치 속에서 숨죽이고 살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정부에서는 본 영화가 상영되기 전 애국가를 부르도록 조처했다. 군사 정권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에게 애국심을 일깨워 주자는 의도였을 터이다. 영화를 즐기러 간 사람이 차렷 자세를 하고 어둠 속에 서서 마치 엄숙한 의식을 베풀 때처럼 애국가를 경청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삼천리 화려 강산'을 떠나 줄지어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가는' 흰 새떼의 영상을 보며 화자는 우리도 대열을 이루어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 고통스런 폭압적 정치 현실로부터 멀리 떠나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삼천리 화려 강산'은 차라리 역설일 뿐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라는 애국가의 끝 구절이 나오면서 사람들은 서둘러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이 시인은 그것을 '주저앉는다'는 말로 마무리짓는다.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 사람이 '주저앉는다'는 말 속에 도사리고 있는 깊은 절망감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는 훌륭한 독자이다. 80년대의 시가 세칭 민중시와 형태 파괴시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할 때, 그 두 가지 흐름을 하나로 통합시키며 독자적인 시 세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한 시인이 바로 황지우다. 그가 이질적인 두 세계를 하나로 통합시킬 수 있던 바탕은 물론 섬세한 서정성이다. 그는 민중시 운동이 부분적으로 드러내고 있던 극단적인 이념 추구 방향뿐 아니라, 순수시의 정서적 안일성까지도 극복의 대상으로 삼고 다양한 실험적 기법을 사용, 언어의 힘을 최대로 활용한다.  '시를, 당대에 대한, 당대를 위한, 당대의 유언으로' 쓰고자 했던 그가 바라본 80년대는 죽음과 절망으로 가득찬 곳이자, 차라리 초월해 버리고 싶은 환멸의 공간이었다. 이 시는 바로 그러한 현실 인식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폭압적 현실 상황에 대한 극도의 좌절감을 풍자라는 수법을 통해 보여 주고 있다. 풍자라는 면에서는 당대의 그 어떤 시도 달성하지 못한 극적인 야유 효과를 갖고 있으며, 그 효과의 실체는 신성 모독에 있다. 자신이 태어난 조국이 정말로 살고 싶지 않은 곳이라는 환멸적 인식과,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살고 있다는 자괴감은 극장에서의 애국가 상영을 매개로 형상화됨으로써 충격적 효과를 배가시킨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관람석의 불이 모두 꺼진 캄캄한 극장은 바로 암울한 현실 상황을 표상하며, '삼천리 화려 강산'을 배경으로 울려퍼지는 애국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일제히 부동자세를 취하는 관객들은 군사 독재 정권하에서 맹목적인 삶을 따라야 했던 당시의 민중들을 의미한다.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민중의 한 사람인 화자는 '삼천리 화려 강산'을 떠나 줄지어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가'는 극장 화면의 새떼들을 보며, '한 세상 떼어 메고 /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 우울한 소망을 갖는다. 그 같은 소망도 잠시일 뿐, 애국가가 끝나는 순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화자는 더 큰 좌절감에 빠져든다. 여기서 '삼천리 화려 강산'이란 풍자의 대상인 조국이 더 이상 '화려 강산'일 수 없다는 역설로 쓰이고 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ㅡㅡㅡ단 5분만에 쓰여진 시? 몇년 전 강은교 시인이 시인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직접 고른 시들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책이 출판된 적이 있다. 이 책 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은 바로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에 관한 내용이다. 그럼 잠시 강은교 시인과 황지우 시인의 문답을 살펴보자. Q) 이 시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착상이 떠올랐는지요? 그 동기는 무엇이었는지요? 구체적으로 답해주십시오. A) "이 시는 1986년 11월 어느 날 중앙일보 사옥 내 계간 에 속한 한 빈 책상 위에서 씌어졌습니다. 그 당시 나는 건국대 사태 이후 5공의 탄압 국면이 날로 극성을 부리던 때 어떤 일 때문에 지명수배되어 이른바 ‘도바리’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낮에는 주로 안전지대인 신문사 도서관에서 책도 보고 잡지사 잡글도 쓰고 하면서 노닥거렸죠. 그런데 하루는 그 신문사에 딸린, 무슨 하이틴 잡지에 근무하는 선배 시인이 부서를 지나가다가 문득 나를 발견하고는 “이봐, 황시인! 시 하나 줘. 하이틴이야. 쉽고 간단하게 하나 얼른 긁어줘!”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한 5분 걸렸을까요, 쓰윽 긁어서 줬습니다. 그리고는 잊어버렸습니다. 독자를 경멸하면서 함부로 써버린, 이 무시받고 망각된 시를 내가 다시 의식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 달 뒤 이듬해 봄이었습니다. 친구 부인이 모 대학가 앞에서 그 당시 불온시 되던 사회과학 서점을 하고 있었는데, 그 뭣이냐, 너를 기단린다나 어쩐대나 하는 시가 어느 시집에 있느냐고 물어오는 거겼어요. 그게 성우 출신 김세원 씨가 어느 FM 방송에서 낭송한 뒤로 여러 사람이 와서 찾는다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얼핏 수치심 같은 걸 느꼈습니다. 2001년 6/15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지고 그해 8월 서울에서 이산가족 상봉이 있던 날 아침, 차를 몰고 학교로 가다가 나는 한 FM 라디오에서 50년 동안 누군가를 필사적으로 기다려야만 했던 우리 역사의 슬픈 객들을 위해 이 시가 음송되는 걸 우연히 들었습니다. 이 매우 객관적인 매체에 의해 들려지는 내 시가 내 귀에 아주 낯설었지만, 그날 이후로 나는 이 시를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출처 : 시에 전화하기 ) 사랑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자, 사랑에 빠져든 자, 사랑에 아파해본 자 등 사랑과 관련된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한번은 접해보았을 황지우 시인의 대표작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 단 5분만에 지어진 것이라면 누가 믿을까? 이에 대해서 강은교 시인은 '진정성'이라는 단어로 이 현상을 풀이하였다. 그의 수배생활이 순간적으로 독자와 진실로 마음과 마음으로 만난 것이라고 평가했다. 사견을 달자면 강은교 시인이 평가했던 진정성에 대해서 실로 동감하는 바이다. 시인들은 대게 두가지 방식으로 시를 쓴다고 한다. 한가지는 제도적 교육을 통해서 갈고 닦은 여러 기교들을 통해서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잘 정리하여 시로 탄생시키는 것이다. 다소 인위적인 창작의 방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한가지는 수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어느 순간 시어가 선택되어지고 그로 인해 시가 저절로 나오는 것이다. 말그대로 순간적인 영감을 바탕으로 그대로 시를 적어내는 방식이다. 개인적으로는 후자의 방법이 독자들에게는 더욱 와닿는다고 생각한다. 전자의 방법은 어느정도 감정의 정화가 이뤄진 후에 독자와 대면한다고 보면 후자의 방법은 순수한 시인의 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시인들은 후자와 같은 방식으로 시를 쓴다고 한다(몇몇 이름이 떠오르지만 쓰지 않는게 좋을듯 해서 생략함). 황지우 시인이 그당시 어떤 상황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와 동시대를 살아오지 않은 나같은 독자로서는 감히 그 시절을 상상하기가 힘이 든다.  하지만 그가 이 시를 쓸 당시 그의 가슴에는 뜨거운 사랑이 있었다는걸 우리는 감지할 수 있다. 어느 시인이 몇분, 몇시간, 혹은 몇일 만에 어떤 시를 만들어 내었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시를 접하는 동안 작가가 하고자 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그 말을 통해서 내가 무엇을 느낄 수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단 5분동안, 너무나 쉽게 써버린 시라고 할지라도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은 아직도 수많은 남녀들의 입을 부지런히 오가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 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 (1990) 착어(着語) : 기다림이 없는 사랑이 있으랴. 희망이 있는 한, 희망을 있게 한 절망이 있는 한. 내 가파른 삶이 무엇인가를 기다리게 한다. 민주, 자유, 평화, 숨결 더운 사랑. 이 늙은 낱말들 앞에 기다리기만 하는 삶은 초조하다. 기다림은 삶을 녹슬게 한다. 두부 장수의 핑경 소리가 요즘은 없어졌다. 타이탄 트럭에 채소를 싣고 온 사람이 핸드 마이크로 아침부터 떠들어대는 소리를 나는 듣는다. 어디선가 병원에서 또 아이가 하나 태어난 모양이다. 젖소가 제 젖꼭지로 그 아이를 키우리라. 너도 이 녹 같은 기다림을 네 삶에 물들게 하리라.   [핵심정리]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성격 : 감각적, 고백적, 역설적    운율 : 내재율    어조 : 절실하고 안타까운 어조    제재 : 기다림    주제 : 기다림의 절실함과 안타까움    출전 : (1990)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을 기다림의 절실한 심정을 평범한 일상어를 통해 절묘하게 형상화하고 있으면서도 쉽지 않은 깨달음에 이른다. 기다림이라는 것이 일방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너에게로 가는 능동적인 행위가 된다는 것이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라는 구절에 드러나 있다. 이 시는 내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앞 부분(1∼12행)에서는 '너'를 초조하게 기다리지만 끝내 오지 않는 '너'로 인해 절망하는 '나(시적 화자)'의 심리를 표현하였다. '나'는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미리 가서 초조함과 설렘 속에 '너'를 간절히 기다리지만, '너'는 끝내 오지 않고, 매번 '너'인 줄 알았다가 네가 아님을 확인하는 일은 '가슴 애리는' 고통을 가져다 준다. '너'는 아직도 아주 멀리 있지만 그러한 시공간적 한계는 극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설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 화자가 절실하게 기다리는 '너'는 누구일까? 그것은 13행에 드러난 대로 사랑하는 연인일 수도 있으며, 작가가 작품의 후기에서 말한 것처럼 '민주, 자유, 평화, 숨결 더운 사랑'일 수도 있다. 그것은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소중한 것이지만 현재에는 부재(不在)하는 어떤 것들, 즉 소망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끝내 오지 않을지도 모를 '너'를 기다리는 행위는 실현되지 않을 미래에 대한 기대라는 점에서 비극적이고 절망적이지만, '너를 기다리는 동안'의 '나'의 마음은 한없는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 찬 것이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며, '나'를 절망의 현재로부터 희망의 미래로 향하게 한다는 점에서 긍적적이다. 이런 점에서 이 시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 보여 준 역설적인 깨달음처럼, 부재와 상실이라는 절망적 순간에서 오히려 희망을 건져 올리는 시라고 할 수 있다.     :realImgView('http://cfs4.blog.daum.net/upload_control/download.blog?fhandle=MDZ5bm5AZnM0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EvMTQ4LmpwZw==&filename=148.jpg')" style="text-decoration: none; word-wrap: break-word;" target="_blank">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映畵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렬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출가하는 새                                                                           새는 자기의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자기가 앉은 가지에 자기가 남긴 체중이 잠시 흔들릴 뿐 새는 자기가 앉은 자리에 자기의 투영이 없다. 새가 날아간 공기 속에도 새의 동체가 통과한 기척이 없다. 과거가 없는 탓일까. 새는 냄새나는 자기의 체취도 없다. 울어도 눈물 한 방울 없고 영영 빈 몸으로 빈털터리로 빈 몸뚱아리 하나로 그러나 막강한 풍속으로 거슬러 갈 줄 안다. 生後의 거센 바람 속으로 갈망하며 꿈꾸는 눈으로 바람 속 내일의 숲을 꿰뚫어 본다.   거대한 거울                                               한점 죄(罪)없는 가을 하늘을 보노라면 거대한 거울, 이다: 이번 생의 온갖 비밀을 빼돌려 내가 귀순(歸順)하고 싶은 나라: 그렇지만 그 나라는 모든 것을 되돌릴 뿐 아무도 받아주지는 않는다 대낮에 별자리가 돌고 있는 현기증나는 거울   재앙스런 사랑                                             용암물이 머리 위로 내려올 때 으스러져라 서로를 껴안은 한 남녀; 그 속에 죽음도 공것으로 녹아버리고 필사적인 사랑은 폼페이의 돌에 목의 힘줄까지 불끈 돋은 벗은 生을 정지시켜놓았구나  이 추운 날 터미널에 나가 기다리고 싶었던 그대, 아직 우리에게 體溫이 있다면 그대와 저 얼음 속에 들어가 서로 으스러져라 껴안을 때 그대 더러운 부분까지 내 것이 되는 재앙스런 사랑의 이 더운 옷자락 한가닥 걸쳐두고 싶구나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한 말은 아무리 하기 힘든 작은 소리라 할지라도 화산암 속에서든 얼음 속에서든 하얀 김처럼 남아 있으리라   거룩한 식사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을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 세상 떠넣어 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뼈아픈 후회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神像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을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 ; 그것도 파워랄까, 그것마저 없는 자들에겐 희생은 또 얼마나 화려한 것이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고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의 말을 넣어주는 바람이 떠돌다 지나갈 뿐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初經을 막 시작한 딸 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리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 ;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자의 水位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거울에 비친 괘종 시계                           나,이번 생은 베렸어 다음 세상에선 이렇게 살지 않겠어 이 다음 세상에선 우리 만나지 말자   ......     아내가 나가버린 거실 거울 앞에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사나이가 있다 치자 그는 깨우친 사람이다 삶이란 게 본디,손만 댔다 하면 중고품이지만 그 닳아빠진 품목들을 베끼고 있는 거울 저쪽에서 낡은 쾌종 시계가 오후 2시가 쳤을 때 그는 깨달은 사람이었다 흔적도 없이 지나갈 것 아내가 말했었다 "당신은 이 세상에 안 어울리는 사람이야 당신,이 지독한 뜻을 알기나 해? " 쾌종 시계가 두 번을 쳤을 때 울리는 실내:그는 이 삶이 담긴 연약한 막을 또 느꼈다 2미터만 걸어가면 가스벨브가 있고 3미터만 걸어가면 15층 베란다가 있다 지나가기 전에 흔적을 지울 것 쾌종 시계가 들어가서 아직도 떨고 있는 거울 에 담긴 30여평의 삶:지나치게 고요한 거울 아내에게 말했었다:"그래,내 삶이 내 맘대로 안 돼" 서가엔 마르크시즘과 관련된 책들이 절반도 넘게 아직도 그대로 있다 석유 스토브 위 주전자는 김을 푹푹 내쉬고   발작                                                         삶이 쓸쓸한 여행이라고 생각될때 터미널에 나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싶다 짐 들고 이 별에 내린 자여 그대를 환영하며 이곳에서 쓴맛 단맛 다 보고 다시 떠날때 오직 이 별에서만 초록빛과 사랑이 있음을 알고 간다면 이번 생에 감사할 일 아닌가 초록빛과 사랑: 이거 우주 기적 아녀     일 포스티노                                                자전거 밀고 바깥 소식 가져와서는 이마를 닦는 너, 이런 허름한 헤르메스 봤나 이 섬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해보라니까는 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으로 답한 너, 내가 그 섬을 떠나 너를 까마득하게 잊어먹었을 때 너는 밤하늘에 마이크를 대고 별을 녹음했지 胎動하는 너의 사랑을 별에게 전하고 싶었던가, 네가 그 섬을 아예 떠나버린 것은 그대가 번호 매긴 이 섬의 아름다운 것들, 맨 끝번호에 그대 아버지의 슬픈 바다가 롱 숏, 롱 테이크되고; 캐스팅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나는 머리를 박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떤 회한에 대해 나도 가도 가해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 땜에 영화관을 나와서도 갈 데 없는 길을 한참 걸었다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휘파람 불며 新村驛을 떠난 기차는 문산으로 가고 나도 한 바닷가에 오래오래 서 있고 싶었다   당신은 홍대 앞을 지나갔다                         내가 지도교수와 암스테르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커피 솝 왈츠의 큰 통유리문 저쪽에서 당신이 빛을 등에 지고서 천천히 印畵되고 있었다. 내가 들어온 세계에 당신이 처음으로 나타난 거였다. 그것은 우연도 운명도 아니었지만, 암스테르담은 어떤 이에겐 소원을 뜻한다. 구청 직원이 서류를 들고 北歐風 건물을 지나간 것이나 가로수 그림자가 그물 친 담벼락, 그 푸른 投網 밑으로 당신이 지나갔던 것은 우연도 운명도 아닌, 단지 시간일 뿐이지만 디지털 시계 옆에서 음악이 다른 시간을 뽑아내는 것처럼, 당신이 지나간 뒤 물살을 만드는 어떤 그물에 걸려 나는 한참 동안 당신을 따라가다 왔다. 세계에 다른 시간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들은 어느 축선에서 만난다 믿고 나는 돌아왔던 거다. 지도교수는 마그리트의 파이프에 다시 불을 넣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당신은 홍대 앞을 지나갔다. 암스테르담을 부르면 소원이 이뤄졌을지도 모른다. 마그리트 씨가 빨고 있던 파이프 연기가 세계를 못 빠져나가고 있을 때 램브란트 미술관 앞, 늙은 개가 허리를 쭉 늘여뜨리면서 시간성을 연장한다. 권태를 잡아당기는 기지개; 술집으로 가는 다리 위에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다. 그친 음악처럼.   소나무에 대한 예배                                      학교 뒷산 산책하다, 반성하는 자세로, 눈발 뒤집어쓴 소나무, 그 아래에서 오늘 나는 한 사람을 용서하고 내려왔다. 내가 내 품격을 위해서 너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 너 잇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것이 나를 이렇게 휘어지게 할지라도. 제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이 地表 위에서 가장 기품있는 建木; 소나무, 머리에 눈을 털며 잠시 진저리친다   바깥에 대한 반가사유                                  해 속의 검은 장수하늘소여 눈먼 것은 성스러운 병이다  활어관 밑바닥에 엎드려 있는 넙치. 짐자전거 지나가는 바깥을 본다. 보일까  어찌하겠는가. 깨달았을 때는 모든 것이 이미 늦었을 때 알지만 나갈 수 없는 無窮의 바깥; 저무는 하루. 문 안에서 검은 소가 운다.    몹쓸 동경(憧憬)                                   그대의 편지를 읽기 위해 다가간 창은 지복이 세상에 잠깐 새어들어오는 틈새; 영혼의 인화지 같은 것이 저 혼자 환하게 빛난다. 컴퓨터, 담뱃갑, 안경, 접어둔 畵集 등이 공중에 둥둥 떠다니고, 천장에서, 방금 읽은 편지가 내려왔다. 이데올로기가 사라지니까 열광은 앳된 사랑 하나; 그 흔해빠진 짜증스런 어떤 운명이 미리서 기다리고 있던 다리를 그대가 절뚝거리면서 걸어올 게 뭔가. 이번 生에는 속하고 싶지 않다는 듯, 모든 도로의 길들 맨 끝으로 뒷걸음질치면서 천천히 나에게 오고 있는 그러나 설렘이 없는 그 어떤 삶도 나는 수락할 수 없었으므로 매일, 베란다 앞에 멀어져가는 다도해가 있다. 따가운 喉頭音을 남겨두고 나가는 배; 그대를 더 오래 사랑하기 위하여 그대를 지나쳐왔다. 격정 시대를 뚫고 나온 나에게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지루한 것이었다. 맞은편 여관 네온에 비추인 그대 속눈썹 그늘에 맺힌 것은 수은의 회한이었던가? "괴롭고 달콤한 에로스" 신열은 이 나이에도 있다. 혼자 걸린 독감처럼, 목 부은 사랑이 다시 오려 할 때 나는 몸서리 쳤지만, 이미 山城을 덮으면서 넓어져가는 저 범람이 그러하듯 지금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그대는, 이삿짐 트럭 뒤에 떨궈진 생을 두려워하지는 않는지. 신화와 뽕짝 사이 사랑은 영원한 동어 반복일지라도 트럭집 거울에 스치는 세계를 볼 일이다. 황혼의 물 속에서 삐걱거리는 베키오 石橋를 그대가 울면서 건너갔을지라도 대성당 앞에서, 돌의 거대한 음악 앞에서 나는 온갖 대의와 죄를 후련하게 잊어버렸다. 나는 그대 앞의 시계를 보면서 불침번을 선다. 그대 떠나고 없는 마을의 놀이터 그네에 앉아 새벽까지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다. 동경은 나의 소명받은 병이었다. 지구 위에 저혼자 있는 것 같아요. 라고 쓴 그대 편지를 두번째 읽는다.   시에게                                                   한때 시에 피가 돌고, 피가 끓던 시절이 있었지; 그땐 내가 시에 촌충처럼 빌붙고 피를 빨고 앙상해질 때까지 시를 학대하면서도, 딴에는 시가 나를 붙들고 놔주질 않아 세상 살기가 폭폭하다고만 투덜거렸던 거라.  이젠 시에게 돌려주고 싶어. 피를 갚고 환한 화색을 찾아주고 모시고 섬겨야 할 터인데  언젠가 목포의 없어진 섬 앞, 김현 선생 문학비 세워두고 오던 날이었던가? 영암 월출산 백운동 골짜기에 천연 동백숲이 한 壯觀을 보여주는디 이따아만한(나는 두 팔을 동그랗게 만들어 보인다) 고목이 허공에 정지시켜놓았던 꽃들을 고스란히 땅 우에, 제 슬하 둘레에 내려놓았드라고! 産달이 가까운 여자후배 하나가 뚱게뚱게 걸어서 만삭의 손으로 그 동백꽃 주우러 다가가는 순간의 시를 나는 아직까지 못 찾고 있어. 상하지 않고도 피가 도는 그 온전한 시를......   늙어가는 아내에게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알 한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 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집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신 벗고 들어가는 그 곳                                아파트 15층에서 뛰어내린 독신녀, 그곳에 가보면 틀림없이 베란다에 그녀의 신이 단정하게 놓여 있다 한강에 뛰어든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시멘트 바닥이든 시커먼 물이든 왜 사람들은 뛰어들기 전에 자신이 신었던 것을 가지런하게 놓고 갈까? 댓돌 위에 신발을 짝 맞게 정돈하고 방에 들어가, 임산부도 아이 낳으러 들어가기 전에 신발을 정돈하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뛰어내린 곳에 있는 신발은 생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것은 영원히 어떤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다만 그 방향 이쪽에 그녀가 기른 熱帶魚들이 수족관에서 물거품을 뻐끔거리듯 한번의 삶이 있을 따름이다   돌아보라, 얼마나 많은 잘못 든 길들이 있었는가 가서는 안 되었던 곳, 가고 싶었지만 끝내 들지 못했던 곳들; 말을 듣지 않는, 혼자 사는 애인 집 앞에서 서성이다 침침한 밤길을 돌아오던 날들처럼 헛된 것만을 밟은 신발을 벗고 돌아보면,생을'쇼부'칠수 있는 기회는 꼭 이번만은 아니다   두고 온 것들                                               반갑게 악수하고 마주앉은 자의 이름이 안 떠올라 건성으로 아는 체하며, 미안할까봐, 대충대충 화답하는 동안 나는 기실 그 빈말들한테 미안해, 창문을 좀 열어두려고 일어난다.  신이문역으로 전철이 들어오고, 그도 눈치챘으리라, 또다시 핸드폰이 울리고, 그가 돌아간 뒤  방금 들은 식당이름도 돌아서면 까먹는데  나에게서 지워진 사람들, 주소도 안 떠오르는 거리들, 약속 장소와 날짜들, 부끄러워해야 할 것들, 지켰어야만 했던 것들과 갚아야 할 것들; 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세상에다가 그냥 두고 왔을꼬!  좀더 곁에 있어줬어야 할 사람, 이별을 깨끗하게 못해준 사람, 아니라고 하지만 뭔가 기대를 했을 사람을 그냥 두고 온 거기, 訃告도 닿을 수 없는 그곳에 제주 風蘭 한점 배달시키랴?    제주 바닷가를 걸어간 발자국                          요즘엔 신문을 봐도 무슨 천문학자나 고고학자의 새로운 발견 같은, 그런 기사만 눈여겨보게 되대이.  南제주 대정 바닷가에서 5만년 전 舊石器人 발자국을 발견했다는 일면 톱기사를 식탁에서 읽다가 김치 썰던 주방용 가위로 스크랩 해두었어; 그때 한 인간이 빠르게 내 옆을 스쳐 지나가더라고, 어디 먹을 거 없나...... 하는 그런 필사적인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돌칼 들고 5만년 전의 바람 속으로 들어가는데 내가 맡은 바다냄새를 킁킁거리며 그 근처에서 풀을 뜯던 말들이 고개를 돌려 일제히 이쪽을 넘보는 거야 5만년 후의, 유리 깔린 내 식탁으을...... 5만년 뒤 헌 쓰리빠 같은 발자국 화석을 눌러놓은 몸이, 그 한 몸이 다음 몸을 무수히 복제하여 나에 이른 이 냄새, 수저를 들어올리는 손의 이 공기에 대한 느낌; 아, 그 맣은 새들이 내 발자국 주위로 성가시게 내려앉고 아, 살아야 해, 살아야 해!하면서 실은 나는 얼마나 많이 이미 살었등고!  게으르게 밥알 씹다가 뒤집어본 스크랩 뒷면, 전두환씨 아들의 괴자금 170억 사건; 나는 식어버린 된장국물을 후루룩 마셨어.        황지우 黃芝雨 (1952. 1. 25 -  )본명 황재우                    1952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나 1968년 광주제일고교에 입학했다. 1972년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여 문리대 문학회에 가입,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1973년 유신 반대 시위에 연루, 강제 입영하였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 1981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제적되어 서강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1985년부터 한신대학교에서 강의하기 시작하였고 1988년 서강대학교 미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하였다. 1994년 한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다가 1997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로 있다.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연혁(沿革)》이 입선하고, 《문학과 지성》에 《대답없는 날들을 위하여》를 발표, 등단하였다.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는 형식과 내용에서 전통적 시와는 전혀 다르다. 기호, 만화, 사진, 다양한 서체 등을 사용하여 시 형태를 파괴함으로써 풍자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극단 연우에 의해 연극으로 공연되었다. 《나는 너다》(1987)에는 화엄(華嚴)과 마르크스주의적 시가 들어 있는데 이는 스님인 형과 노동운동가인 동생에게 바치는 헌시이다. 또한 다른 예술에도 관심이 많아 1995년에 아마추어 진흙조각전을 열기도 하고 미술이나 연극의 평론을 쓰기도 하였다. 《게눈 속의 연꽃》(1991)은 초월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노래했으며《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는 1999년 상반기 베스트셀러였다. 《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는 생의 회한을 가득 담은 시로 대중가사와 같은 묘미가 있는 시집이다. 이 시집에 실려 있는 《뼈아픈 후회》로 김소월문학상을 수상했고 시집으로 제1회 백석문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시는 '시 형태 파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정치성, 종교성, 일상성이 골고루 들어 있으며 시적 화자의 자기 부정을 통해 독자들에게 호탕하되 편안한 느낌을 준다. 또한 1980년대 민주화 시대를 살아온 지식인으로서 시를 통해 시대를 풍자하고 유토피아를 꿈꾸었다.    그 밖에 《예술사의 철학》 《큐비즘》등의 저서가 있고, 《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 》(1985),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1995), 《등우량선》(1998) 등의 시집이 있다. [출처] [스크랩] 황지우 시 모음|작성자 한동안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 소리 호루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1984년 대학교에 입학해서 누군가로부터 복사한 시집을 한 두 권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누군가는 교양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는데... 내가 詩에 대해서 잘난 척을 하니까 그랬는지... 그 잘난 척을 인정해줘서 그랬는지, 정말 나에게 文才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랬는지... 정말 問題兒여서 그랬는지...  후후... 아무튼 복사된 시집을 두 권 받았었는데, 그 중 한 권은 정지용의 시집이었고, 또 한 권은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이었습니다.   그 때는 서정시인 정지용의 詩도 납북작가라는 이유로 禁書로 지정되어 있어서 販禁되어 있었을 때였습니다. 물론 ‘타는 목마름’역시 판금되었던 시집이었지요.   그 두 권의 시집을 읽으면서... 몰래 읽으면서... 손을 떨면서 읽으면서... 가슴 떨림을 느끼던 적이 있었습니다. 나에게 詩는 그 때 떨림이었습니다. 손 끝을 통해서 가슴으로 떨림을 전해주고, 가슴의 그 떨림이 온 몸에 감전된 전류처럼 흐르는 그런 전율이었습니다.     정지용의 詩에서는, 이렇게 아름다운 抒情詩가 단지 납북작가라는 이유만으로 교과서 뿐만 아니라 나라의 금서가 되어서 일반 사람들이 접근할 수도 없다는 것에 대해서... 내가 모르는 어둠에 뿌리를 두고 있는 거대한 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그냥 느꼈었습니다.     김지하의 詩는, 가슴 속에 목마른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이른 새벽 뒷골목에서 남 몰래 써야 한다는 시적 상황이 당시의 현실 속에서도 선명하게 집약되었기에... 후에 노래를 붙인 노래곡을 배웠을 때에도 자주 흥얼거렸던 적이 있는 詩였습니다.     김지하의 이 시가 프랑스의 시인 폴 엘뤼아르가 제 2 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프랑스 점령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운동을 전개하면서 발표한 저항시 “자유” 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생각은 나중에 문학이라는 것을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이 시를 좋아했습니다. .     이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시는 1975년에 발표되었었고, 이 시를 발표함으로써 시인은 또다시 체포,구급되는 상황을 맞게 되고, 이 작품은 불온한 작품으로 내가 대학에 입학할 때에도 불온서적이었지요.   물론 이후에는, 이 시집이 시중에서 편히 팔리게 되었을 때에는, 정작 시인이 생명사상이니 뭐니 하면서, 스스로를 세상과 不穩하게 했지요. ㄹㄹ   하지만 아직도 나에게는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처럼 이 시를 만날 때에는 떨림이 있습니다. 시인이 그 당시에 가졌던 절실함과 열망이 느껴지고, 당시의 숨막히는 상황이 詩語들의 행간에서 읽히기 때문. ... ...   예정된 시나리오들처럼 느껴지고...   내 예측이 틀리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  ‘왜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지'를...   어수선한 세상... 늘 무사하시길만을 .     김지하 시인 (서울경제 DB)   표절 의혹을 받고 있는 김지하의 시 ‘타는 목마름으로’가 교과서에까지 수록된 것으로 확인돼 논란이 일고 있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최근 자기 트위터에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가 발표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게 (폴) 엘뤼아르의 표절인 걸 알았지만 말하지 않았다. 민주화의 대의가 중요했기 때문. 지금 생각하면 그게 잘한 일이었는지 묻게 된다”라는 글을 올렸다. 시인 노태맹도 올 초 한 지방지에 게재한 글에서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시는 엘뤼아르의 ‘자유’라는 시를 대 놓고 베낀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타는 목마름으로’가 ‘자유’를 표절했다는 의혹은 오래전부터 제기됐다. 2000년대 중반에도 변형이냐 표절이냐를 놓고 논란이 일었다. 김지하 역시 ‘자유’의 영향을 받아 ‘타는 목마름으로’를 썼다는 건 부정하진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엘뤼아르와 김지하의 작품은 억압 속에서 자유를 부르짖는 강렬한 주제의식, 자유와 민주주의를 각각 의인화해 이인칭으로 호칭하는 점, ‘쓴다’는 행위를 반복해서 열거하는 점 등에서 닮았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두 시는 모두 짧은 문장을 나열해 작품을 완성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문단 일각에서는 소설가 신경숙이 한 문단의 유사성 때문에 표절 시비에 휘말린 만큼 이참에 김지하의 작품에 대해서도 시비를 가려야 한다는 지적이 조심스럽게 일고 있다.  ‘타는 목마름으로’의 표절 시비를 명확하게 가려야 하는 이유는 이 시가 교과서에까지 수록돼 있을 정도로 유명한 데다 수많은 국민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기자가 취재한 결과 현재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 2종에 ‘타는 목마름으로’가 수록돼 있는 것으로 확인. 워낙 주제와 호소력이 강한 탓에 작품을 읽고 감명 받은 학생도 적잖다... ‘타는 목마름으로’는 정치인들에게까지 큰 영향을 끼친 작품. 엘뤼아르의 ‘자유’와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의 전문. ‘내 학생 때 공책 위에/ 내 책상이며 나무들 위에/ 모래 위에도 눈 위에도/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읽어본 모든 책상 위에/ 공백인 모든 책상 위에/ 돌, 피, 종이나 재 위에도/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숯칠한 조상들 위에/ 전사들의 무기들 위에/ 왕들의 왕관 위에도/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밀림에도 사막에도/ 새 둥지에도 금송화에도/ 내 어린 날의 메아리에도/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밤과 밤의 기적 위에/ 날마다의 흰 빵 위에/ 약혼의 계절들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내 하늘색 누더기 옷들에/ 곰팡 난 해가 비친 못 위에/ 달빛 생생한 호수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들 위에 지평선 위에/ 새들의 날개 위에/ 그림자들의 방앗간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새벽이 내뿜은 입김 위에/ 바다 위에 또 배들 위에/ 넋을 잃은 멧부리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구름들의 거품 위에/ 소낙비의 땀방울들 위에/ 굵은 또 김빠진 빗방울에도/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반짝이는 형상들 위에/ 온갖 빛깔의 종들 위에/ 물리적인 진리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잠깨어난 오솔길들 위에/ 뻗어나가는 길들 위에/ 사람 넘쳐나는 광장들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켜지는 램프 불 위에/ 꺼지는 램프 불 위에/ 모여 앉은 내 집들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겨울의 또 내 방의/ 둘로 쪼개진 과실 위에/ 속 빈 조가비인 내 침대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주접떠나 귀여운 내 개 위에/ 그 쫑긋 세운 양쪽 귀 위에/ 그 서투른 다리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내 문턱의 발판 위에/ 정든 가구들 위에/ 축복 받은 넘실대는 불길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사이 좋은 모든 육체 위에/ 내 친구들의 이마 위에/ 내미는 손과 손마디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놀란 얼굴들의 유리창 위에/ 침묵보다도 훨씬 더/ 조심성 있는 입술들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파괴된 내 은신처들 위에/ 허물어진 내 등대들 위에/ 내 권태의 벽들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나는// 욕망도 없는 부재 위에/ 벌거숭이인 고독 위에/ 죽음의 걸음과 걸음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다시 돌아온 건강 위에/ 사라져 간 위험 위에/ 회상도 없는 희망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그리고 한 마디 말에 힘입어/ 내 삶을 다시 시작하니/ 너를 알기 위해 나는 태어났다/ 네 이름지어 부르기 위해// 오 자유여’ (폴 엘뤼아르의 ‘자유’)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 ============================== 최재봉 기자는,ㅡ  “비슷하면 표절”이라는 논리가 신경숙 표절 사건의 여파를 타고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공간에서 횡행한 것처럼 말하지만 수긍할 수 없는 주장이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를 더 많이 접할 수 있다. 그의 글에서 “비슷하면 표절” 의혹을 받을 법한 사례로 김지하, 김남주, 윤동주의 시가 언급돼 있는데 김지하의 경우 맥을 잘못 짚었다.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는 폴 엘뤼아르의 ‘자유’를 ‘필사’한 뒤 뼈대는 그대로 두고 살을 다른 것으로 덮어쓰기 한 것이다. ‘타는 목마름으로’는 ‘쓴다’라는 표현의 반복에서 ‘자유’와 ‘구체적’으로 낱낱이 닮아 있다.   표절은 남의 작품을 자신의 것처럼 속이는 행위다. 최 기자가 ‘타는 목마름으로’가 ‘자유’를 표절한 것이 아니라 차용했거나 그것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려면, 김지하가 그 시에 출처를 달았거나 발표 당시 엘뤼아르와의 연관성을 언급했어야 했다. 만약 ‘자유’가 낯선 외국시가 아니고 김지하 시에서 누구나 엘뤼아르를 떠올릴 수 있다면, 출처 표기가 없더라도 표절 시비는 비껴갔을 것이다. 그러나 ‘타는 목마름으로’는 오랫동안 김지하의 고유한 창작물이자 대표작으로 영예를 누려왔지 않은가. 의 구절이 담긴 윤동주의 ‘서시’를 표절이라고 할 수 없는 것도 천하가 다 아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김남주가 ‘조국은 하나다’를 쓸 때도 “쓰리라” 구절의 반복이 당대에 고전이 된 ‘타는 목마름으로’에서 발상을 가져왔다면 차용이나 모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표절 시비에 대해 “인용 출처를 밝히지 않은 작가의 단순 실수”라고 해명하는 것은 신경숙, 권지예, 황석영 등 표절 혐의를 부인할 수 없게 된 작가들이 단골로 입에 올린 변명이었다. 물론 자신의 행위가 표절이라는 명백한 인식이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출처를 표기하지 않을 경우 남들이 자신의 온전한 저작으로 오해할 수 있는 여지가 고려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점에서 그동안 내가 쓴 글을 돌이켜보니 나 또한 남의 말을 할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내가 쓴 글에서도 남의 주장을 가져와 쓰면서 출처를 밝히지 않은 것이 몇 건 있음을 알았다. 그걸 단순 실수라고 변명할 생각은 없다. 나는 당시 내 행위가 표절이라는 인식은 없었지만, 내가 가져온 남의 생각이 내 것이라고 남들에게 여겨졌으면 하는 욕망은 분명히 있었다. 창피하고 부끄럽다.   표절은 독자들이 잘 모를 것 같은 작품이 대상일 듯하지만 국내 유명 작품도 가리지 않으며 문학 장르에 국한하지 않고 인터넷 게시물, 만화 등 전방위적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표절 의혹을 신중히 제기해야 한다는 주장에 토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주장이 마땅히 제기되어야 할 표절 시비를 가로막거나 표절 작가들을 빠져나가게 하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아야 할 것이다.   정문순 문학평론가     1973.4. 7 서울 명동성당, 김수환 추기경(오른쪽)의 주례로 결혼하는 시인 김지하와 소설가 박경리의 딸 김영주. ==============================================================   ▲ 김지하시인의 병을 낫게 한 장병두옹. "남편 정신병원 12번 입원, 그리고 완치… 밖에선 김지하를 잘 몰라" 옥중의 김지하를 순교자 만들려는 계획거절하자 운동권서 따돌림 출감 후 이혼할 결심도 운동권측과의 갈등으로 남편, 정신발작 일으켜 어느 날 김지하(金芝河) 시인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지금까지 내가 12번이나 정신병원에 입원했어요. 이젠 완전히 나았어요. 잠을 자도 꿈에 안 시달려요. 병원·한의원 어디서도 못 고친 걸 장병두 할아버지가 낫게 해줬소. 내 처와 자식들도 그렇게 나았소. 그런 분을 의사 면허증이 없다고 환자를 못 보게 막습니다.   법과 제도가 사람 살리는 걸 막고 있는 격이오. 그분 연세가 105세요. 살 날이 얼마 안 남았소. 전통 춤·노래·공예 부문에 ‘인간문화재’가 있듯이, 그분을 전통의술 부문 ‘인간문화재’로 만들 순 없겠소. 그분 비방이 합법적으로 전수될 수 있게 말이오.”   장병두옹은 사회적 논란이 됐던 인물이다. 한쪽에서는 그를 ‘현대판 화타’로 떠받든다. 암·당뇨·간질·백혈병·중풍 등 난치병을 그가 고쳐왔다는 것이다. 다른 쪽에서는 한낱 ‘무면허’ 한의사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그는 2006년 의료법 위반 혐의로 고발됐다. 이는 제도의학과 민간의술의 충돌이기도 했다. 그는 1·2심에서 똑같이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그 뒤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대법원은 고령(高齡)의 나이를 감안해 판결을 내리지 않기로 했다. 그에 대한 검증은 사실 불가능하다. 설령 그의 치료 효과를 봤다 한들 또한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김지하가 그동안 12번이나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모처럼 그 가족이 ‘건강’해졌다는 스토리는 들을 만하다고 판단했다. 나는 강원도 원주로 가서 김지하 대신 부인 김영주(65)씨를 만났다. 김지하보다는 좀 더 객관적으로 얘기할 것 같았다. 토지문화관 관장인 그녀는 어머니 박경리(朴景利)를 쏙 빼닮았다. 말에는 경상도 억양이 남아있었다. “외부에서는 김 시인(김지하)이 어떠했는지 몰라요. 출감(1980년)한 뒤로 늘 술에 절어 살았죠. 5년쯤 지나니 도저히 못 참겠더라. 제가 이혼하려고 했어요. 김 시인이 ‘이혼은 못 한다. 대신 당신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고 해서, 환경을 바꾸면 좋아질 것 같아 전남 해남으로 이사갔어요. 그런데 여기까지 찾아온 사람들이 김 시인의 속을 뒤집어 놓았어요. 그들이 떠나간 뒤 헛소리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했어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소위 운동권 동지·후배들의 집단따돌림, 이에 대한 분노·배신감·피해의식 등이 복잡하게 작용했겠지요. 그때부터 정신병원에 12번이나 입원했어요. 발광해 들어가면 약을 한 주먹씩 먹였어요. 몸이 고릴라처럼 부어 멍하게 앉아있어요. 조금씩 약을 줄여가고 그렇게 1년쯤 지나면 사회 활동을 합니다. 세상 일에 대해 못 견뎌했어요. 그러다가 다시 발작하고. 1991년 시위 때 분신자살이 유행하자, 운동권 세력을 향해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고 조선일보에 쓴 것도 그러했던 거죠.” 당시 나는 현장을 취재했다. 아침에 눈뜰 때면 ‘지금 어디서 누군가 또 자살할지 모른다’고 괴로워했다. 열댓명이 ‘민주화’라는 명목으로 유행처럼 자살했다. 그때 김지하가 작심하고 쓴 ‘죽음의 굿판’ 칼럼은 세간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운동권 동지·후배들로부터 욕설과 비난, 협박 전화가 끊이질 않았어요. 우리 집에 경찰을 보내 지켜주겠다고 했어요. 나는 필요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 스트레스를 못 견뎌 정신병원에 또 들어가고. 지나고 보면 격렬하게 저항하는 것이 저 사람의 소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 사건 이후 운동권에서는 김지하를 ‘변절자’ ‘생명사상 교주’로 욕했지요. 어린 후배조차 소위 인연을 끊었습니다. “조직적으로 매도하고 따돌렸어요. 그 모욕감에 김 시인이 술 마시고 들어오면 대성통곡을 했어요.” ―그쪽에서 보면 ‘배신’과 ‘변절’일 수도 있지요. 김지하는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김 시인은 ‘나는 달라진 게 없다. 나는 어떤 조직에 들어간 적도 없고, 모든 운동조직은 나 스스로 만들었다. 나 자신은 공산주의자도 아니다. 그러니 나와 다르다면 저네들이 변절자다. 내가 변절한 적은 없다’고 했어요. 감옥에 갇혀 있을 때부터 ‘동지’라는 사람들이 김 시인을 죽이려 했고, 그게 안 되자 그를 따돌렸어요.” ―납득이 안 되는군요. 동지들이 수감 중인 그를 왜 죽이려고 하며 어떻게 죽일 수 있습니까? “김 시인은 형무소에 들어갔지만 ‘투사’가 돼 죽으려는 생각은 없었어요. 그렇게 7년이나 오래 독방 수감 생활을 할 줄은 자신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 세력은 김 시인을 소위 민족의 제단에 바치는 제물로 삼으려고 했지요. 박정희 체제에 더 극렬하게 저항하는 문건을 옥중에서 계속 쓰도록 요구했어요.    박정희로 하여금 김 시인을 죽이도록 해 김 시인을 ‘투사’나 ‘영웅’으로 만들려는 것이었지요. 그 동력으로 박정희 체제를 엎어버리려고 했습니다. 어느 날 엄마(박경리)가 ‘동지들이 김지하를 죽이려고 하는구나’ 했어요. 이를 막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어요. 그러니 우리 모녀도 죽이려고 했어요. 누가 동지고 적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정말 믿기 어려운 얘기입니다. 증거도 없고. 어떤 피해의식에 근거한 망상 아닙니까? “세상에서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른 것이 있어요. 당시 첫 번째 오는 택시는 안 탔어요. 그렇게 납치될 뻔한 경험을 했거든요. 이런 얘기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요. 우리는 지나간 일은 덮고 가려고 했어요. 선과 악 모두가 당시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김 시인을 매도하고 건드려요. 그것에 쇼크를 받고 정신병원에 갑니다. 폐인에 가까운 상태였어요. 사람 사는 게 아니었어요. 발작을 일으켜 집을 나가면 제가 찾아서 병원에 데려가요. 그러면 퇴원시켜달라고 전화로 난리칩니다.”   ▲ 김영주씨는“김지하가 정치적으로 그렇게 휘말릴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말했다. 원주 토지문화관=최보식 기자 ―김지하는 어떤 사람입니까? “억세고 무서운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면이 있긴 하나, 순한 사람이에요. 결혼 전에 이 사람에게서 세 가지를 봤어요. 굉장히 여성적인 모습과 속이 텅텅 빈 허(虛)한 느낌, 그리고 골짜기가 많은 큰 산 같다는 인상이었어요. 앞의 둘은 부정적인 느낌이었는데 들어맞았어요. 마지막은 모르겠어요. 골짜기에 가만히 있으면 편할 것 같았는데 살아가면서 아직 그런 맛을 못 봤어요.” ―처음 어떻게 만났습니까? “동료 문인들과 함께 정릉의 우리 집으로 어머니를 만나러 왔어요. 제가 대학원을 졸업했을 때였어요. 그가 ‘오적(五賊)’을 발표한 시인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때는 시를 읽어보진 않았어요. 그다음 왔을 때는 ‘수배받고 있으니 숨겨달라’고 했어요. 딸과 단둘이 살고 있는 엄마로서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를 보내면서 마음이 안됐어요. 어릴 때 외할머니가 제게 ‘너는 복(福)이 많아 잘 살 것’이라고 했는데, 내 복의 절반을 저 사람에게 떼줬으면 했어요. 결혼 생각은 없었는데…, 결국 내가 그를 선택한 것이었어요. 수배가 풀리자 그가 다시 나타났어요. 엄마가 결혼을 허락했어요. 하지만 내가 그런 인생을 살게 될 줄은 몰랐죠. 정치적으로 그렇게 휘말릴 줄은 몰랐던 거죠. 딸을 보면서 평생 속상해한 거지.” ―1973년 결혼하자마자 바로 이듬해 김지하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수감됐는데(당초 사형선고를 받고 감형돼 1980년 석방됐다). “자기가 붙잡혀 들어갈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런 준비를 다 해놓은 뒤였어요. 그러고는 저와 결혼을 한 거죠. 그때 결혼 안 했으면 결혼 못 했을 것이고. 어떤 면에서는 이기적이었지요. 감옥에 들어가면서 생후 몇 달 안 된 아들까지 남겨놓았으니….” ―그런 남편과 같이 살았다는 점만으로도 김 관장께서는 충분히 대단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버리겠습니까. 김 시인이 멀쩡하면서 애를 먹였다면 같이 안 살죠. 병이 나서 그러니 누가 데려갈 사람도 없지, 할 수 없는 일이죠. 저는 상황에 매달려 질질 끌려왔어요. 그 상황을 책임질 수밖에 없었어요. 김 시인은 외부 강연에서는 ‘마누라 덕분에 어쩌고저쩌고’ 해놓고, 막상 조금만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삐쳐요.    어떨 때는 집을 나가버려요(웃음). 하지만 매일 한 주먹씩 정신병 약을 먹고 지금껏 살아있다는 게 대단해요. 장병두 할아버지 치료를 받을 때 그 약을 끊으라고 하니 겁을 냈어요. 약 안 먹으면 잠을 못 드는데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어떻게 장병두옹의 치료를 받게 됐습니까? “발작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아이들은 상처받고 무서워했어요. 둘 다 대학을 못 갔어요. 이제 서른살이 넘었지만 결혼을 안 하려고 합니다. 아버지처럼 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이 무의식에 있는 것 같아요. 김 시인에게 ‘당신이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꿋꿋하게 서 있어줘야 한다’고 말해왔어요.   어느 날 큰아이가 우울증에 걸렸을 때는 정말 미칠 것 같았어요. 그때는 제가 죽고 싶었어요. 병원에 데려가도 소용없고. 한 지인의 소개로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장병두 할아버지를 찾아간 겁니다.” ―김 관장 본인도 치료를 받았다면서요. “저도 만날 아팠어요. 하체에 감각이 없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어요. 할아버지의 약을 먹고 어느 날 앙가슴에서 울화로 맺힌 불덩어리가 확 빠져나가는 걸을 느꼈습니다. 그분으로 우리 가족 모두가 정상으로 돌아왔어요. 생명의 은인이지요.” 장병두옹의 구술(口述)로 엮은 ‘맘 놓고 병 좀 고치게 해주세요’란 책에서 김지하가 서문을 썼다. ‘큰아들은 나의 발광을 보고 극도의 우울증에 사로잡혔다. 작은아들도 내 발광에 놀라 뇌신경의 반이 마비돼 낮에는 자고 밤에는 깨어있다…. 두 아이가 선생에 의해 완전히 치료됐다.   우리 식구 중 끝까지 잘 치료가 안 되고 끝없이 아파하고 괴로워하던 아내도 어느 날 몇 시간 몸부림치다 기적처럼 치유의 경험을 했다.’ ―세월이 많이 흘렸는데도 김지하 마음속의 응어리는 풀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와의 통화에서 “과거에 내가 어려울 때 이명박씨는 3000만원이나 도와줬다. 지난 정권 때 정신병원에 세 번이나 입원했지만 그쪽에선 아무도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운동권 사람들이 많이 들어간 지난 정권에서 비리가 터져나왔을 때는 참지 못했어요. ‘도둑질이나 해먹고 너희가 인간이냐’며. 후배들에게 전화를 걸어 몇 시간씩 욕을 해대요. 그래서 아예 휴대폰을 빼앗아 버렸어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했을 때도 자살 행위를 비판해 더욱 적을 만들었지요.” ―이제 본인을 위해서라도 분노를 비우고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할 때가 됐습니다. “김 시인도 그걸 알고 있어요. 할아버지도 처음 ‘서푼짜리 노여움을 풀어라’는 말부터 했어요.” ―그런데 박경리와 김지하 중 누가 더 문학적 천품을 타고난 것 같습니까? “모두 대단한 사람이지요. 엄마는 친구도 없이 딸 달랑 하나와 살았어요. 글을 그렇게 많이 고쳐요. 파지가 산더미 같았어요. 원고를 쓰면 제게 읽어보라고 했고, 제가 고쳐주곤 했어요. 어떤 때는 제가 읽기 싫다고 하면 화를 냈지요. 너무 가까이 있었으니까 어머니가 얼마나 큰 사람인지 몰랐어요. 김 시인은 천상 시인이에요.      모든 시가 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탁월한 시들이 많아요. 하지만 산문 쓰는 것, 어려운 글 쓰는 것은 못마땅해요. 내가 ‘누구 읽으라고 그런 글을 쓰나’고 타박하면 화를 벌컥 내요. 참견한다고.” 이런 자리를 만들어준 장병두옹은 올라오는 길에 잠깐 만났다. 105세의 나이란 귀한 것이다. \   시인 김지하, ㅡ 문호(文豪) 박경리에게서 '화엄개벽'을 보다     [문갑식의 하드보일드] "어머니들, 아이들 억압하지 마세요" 여성의 힘 되살아나는 새 문명사가 '화엄개벽' "장모는 주역의 대가" "창조적 발상은 여성에게 의존할 수박에 없어" 시인(詩人)은 화가 나 있었다. 얼마 전 스웨덴에 간 걸 두고 뒷얘기가 있었다. 노여움에 불을 지른 건 '노벨문학상을 노린다'는 해석이었다고 한다. 김지하(金芝河·68)의 스웨덴행(行)은 한·스웨덴 수교 50주년 강연 때문이었다. "내가 ○나 △같은 졸때기도 아니고…, 문학을 상(賞) 타려고 해? 괴로워서 하는 거잖아! 전 이미 옥중(獄中)에서 제3세계의 노벨문학상이라는 로터스 특별상(1975년)을 탔어요. 상(賞)하고의 인연은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해요." 인터뷰 이야기에 불쾌한 기억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친구 이야긴 묻지도 마. 정치 얘기도 안 할 거고." 경망(輕妄)의 대표격인 한 인물을 결코 입에 올리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제야 흡족한 듯 그가 '숙제'를 냈다. "잡지에 글을 썼어요. 박경리(朴景利) 선생 평론인데 제목이 '흰그늘과 화엄(華嚴)'이야. 200자 원고지 400장짜린데 꽤 어려워. 다 읽고 오세요. 근데 말투가 조폭(組暴) 같은데, 토건(土建)업자 냄새도 나고?…."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토지(土地)문학관은 산속에 있었다. 자궁(子宮) 속 태아(胎兒) 같은 모습이었다. 앞은 황금빛 들판이었다. 내방객은 드물었다. 시인은 약속했던 낮 12시가 훨씬 지난 1시쯤 나타났다.     ▲ 토지문학관 앞 소나무 곁에 시인(詩人)이 서 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흡족하게 웃으며 이리저리 포즈를 취해줬다. 한 폭의 동양화 같다는 느낌이 그 순간 들었다.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김지하는 기분이 좋은 듯했다. '흰그늘과 화엄'의 보충자료라며 육필(肉筆) 원고 복사본을 건넸다. "여기가 남에게 잘 안 보여주는 곳"이라며 방으로 안내했다. 목판 속에 새겨진 박경리가 사위와 기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인연 문학청년 시절 김지하는 서울 정릉 박경리 집에 가끔 갔다고 한다. 한번은 김동리(金東里)의 집에 갔다 허탕친 후 박경리 집으로 발길을 돌리기도 했다. 유현종(劉賢鍾), 김국태(金國泰)와 함께 그는 맥주를 얻어먹었다. 1972년 10월 유신(維新) 선포 때도 그곳에 갔다. "기관원들이 잡으러 올 게 분명하니 며칠만 숨겨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박경리는 딱 부러지게 거절했다. 딸 김영주는 어머니에게 "매정하다"고 했다. 터덜터덜 뒤돌아 나가는 그에게 김영주가 달려왔다. "어머니가 혼자 살다 보니 성격이 그렇다. 이해해 달라"며 대신 사과한 것이다. 소설(小說)의 산맥(山脈)과 시의 거봉(巨峯)이 연결되는 순간이었다. 친구 집에서 하루를 보냈다. 설악산으로 숨기 위해 새벽 골목길을 나서다 친구 집 앞 담벼락에 백묵으로 뭔가를 썼다. '민주주의 만세.' 그 문구가 훗날 절편(絶篇)으로 탄생했다. '타는 목마름으로'다. '신새벽 뒷골목에/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오직 한 가닥 있어/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 김지하의 표정은 다양했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카리스마에 섞여 극명하게 드러났다. 나중에 사진을 확인하면서 사진기자가 말했다.“ 워낙 표정이 좋아서 크게 써도되겠는데요? ―'박경리론'이란 평론이 꽤 어렵더군요. "제 전공이 미학(美學)이잖아요. 박 선생 문학을 정리하려고 벼르다 이번에 그 글을 썼습니다." ―장모의 문학을 평하는 게 쉽지는 않지요. "장모가 돌아가신 후 기념행사가 많았어요. 매번 그런 자리 나가기도 그렇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궁리하다 내용으로 그분의 기념비(紀念碑)를 세워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아시아권에서 상(賞)을 만들 계획도 있고요." ―'시장과 전장' '김약국의 딸들' '토지' 소설 세 편을 분석했습니다. '흰그늘의 미학'으로 시작되는데 무슨 뜻입니까. "게로니모스 하이로미에라는 15세기 이탈리아 시인이 '흰 눈부심을 거느린 검은 악마들의 시위'라는 시를 썼습니다. 윤리적 타락이 극에 달했을 땝니다. 종교 지도자의 사생아 30명이 여자를 끼고 거리를 활보할 정도였어요. 정신 질서가 붕괴될 때 나타난 게 옛 희랍 인문학입니다." ―희랍의 인문학이 흰색, 윤리적 타락은 검은색이라는 건가요. "검은색을 다 부정할 순 없지요. 죽여 없앨 수도 없고. 어스름 저녁 물빛을 보면 반짝하고 흰빛이 순간적으로 비쳐요. 융합되는 것, 그게 바로 흰그늘입니다." ―일전에 칼럼에서는 '욕이 많아지는 게 르네상스가 온다는 증거'라고도 했습니다. "오늘 '측천무후(아내)'가 절대 욕하지 말라고 했는데, 피렌체나 베네치아의 귀족, 귀부인들이 당시 쓴 욕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심했어요. 우리도 남자 성기(性器)를 가리키는 말이 PC방 상호(商號)가 될 정도잖아요. 그게 네오(Neo) 르네상스가 올 징조지요." ―박경리 선생의 '시장과 전장'에서 시인은 '경제적 삶의 흙탕물 속에서 끝내 삶의 신조를 버리지 않는 젊은 여인의 하얀 이미지'를 흰그늘이라 했습니다. "그건 서세동점기(西勢東漸期), 근대문명의 변화와 압력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여성 서사(敍事)의 압권이지요. 여성이 미래를 어떻게 개척해나갈 것인가를 암시하기도 합니다. '아시안 네오(Neo) 르네상스를 위한 미학'이 바로 흰그늘이란 말에 숨어 있습니다. 박 선생은 대단한 분이었어요." ―수년 전부터 아시안 네오 르네상스가 온다고 주장했는데 실제로 올까요. "미국 국가정보위원회나 파이낸셜타임스는 이미 세계가 다극(多極)체제가 됐다고 선언했습니다. 중국 해남성(海南省)에서 열린 포럼에서도 자본의 중심이 동아시아에 와있다고 했습니다. '예수 가는 데 마음 간다'는 말 알죠?" ―무슨 뜻입니까. "마음이 가치잖아요. 자본 중심이 옮겨왔으면 가치 중심도 동아시아로 오게 됩니다. 박경리 선생의 소설을 읽으면서 새삼 놀라요. 예지자(豫知者)의 면모를 느꼈습니다." ―그런 소설을 왜 평론가 백낙청은 멜로 드라마적 조작이라고 평했을까요. "크게 잘못한 거지요. 하버드대에서 엘리어트나 좇던 사람이 6·25를 어떻게 제대로 알겠어요. 깊이 새긴 뒤에 평필(評筆)을 들어야지." ―박경리 선생이 생전(生前)에 시인의 분석에 동의하던가요. "사위와 장모가 작품을 놓고 논할 수는 없지요." ■파국 박경리론은 '흰그늘'에서 '검은 암소(牝牛·빈우)' '검은 구멍(玄牛·현우)'과 '화엄개벽(華嚴開闢)'으로 확장된다. 검은 암소는 주역(周易)에 등장한다. 모성(母性), 생산력, 포용력, 부드러움을 총괄하는 개념이다. 여성의 힘이 되살아날 때 도래할 새 문명사가 불교(佛敎)와 동학(東學) 용어를 합친 화엄개벽이다. 시인은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과 '토지'에 이 암시가 숨어 있다"며 "표는 안 냈지만 장모는 주역의 대가"라고 했다. ―하필 여자가 '검은 암소'나 '검은 구멍'입니까. "복희씨(伏羲氏)가 동굴 속에서 여자, 아이들과 7년을 보냅니다. 거기서 인류 최초의 문자인 '결승'을 만들어 가르치지요. 검은 굴 속에서 깨달음의 흰빛이 나오는 거지요. 영화 '워낭소리' 봤어요?" ―못 봤습니다. "그 영화 세 번 봤는데 사람들이 숨죽여 우는 대목이 있어요. 농부가 아끼는 소가 늙어 병이 드는데 시커먼 우리 속에서 웁니다. 그 눈물이 하얘요. 시커먼 구멍 속에서의 흰빛, 그게 숨은 모성입니다." ―여성이 세상의 주도권을 잡는 시대가 온다는 건데…. "이미 왔어요. TV 드라마나 영화에 유독 '어머니'란 단어가 많이 등장하잖아요. 영화 '마더(Mother)', '엄마를 부탁해', 이미 어머니가 아이콘(icon)이 됐습니다. 아버지의 시대는 간 거지요."  ―시인께서 이런 주장을 하기 전에 페미니스트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다르죠. 3000년 전 세상은 모계(母系)사회였어요. 그 위치가 주(周) 문왕 이후 상실됩니다. 페미니스트들은 남자를 철천지원수, 부르주아 대(對)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처럼 봅니다. 헤겔, 칸트부터 다윈까지 가세한 남성 가부장제 권위라는 반동만 자초했지요." ―검은 암소, 검은 구멍 다음에 황상(黃裳)이란 말이 나옵니다. 중국 한대(漢代)의 노장(老莊) 학자 왕필(王弼)이 한 말인데요. "황상은 '여성 왕통(王統)'을 뜻합니다. 여성 임금을 들어올려야 혼돈이 극복되고 개벽기의 전환적 대안이 된다는 거지요. 조건은 있어요. 여성 왕통을 보완해주는 남성 지혜자가 꼭 필요합니다. 지금의 이원집정제(二元執政制)나 재상총권(宰相總權)이 배합돼야 합니다. 이건 과학적으로도 증명돼요." ―과학적으로 증명된다고요? "태양(陽) 위주의 사고체계가 변하고 있어요. 요즘 기후현상을 온난화로만 설명하지만 실제 태양열은 식어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태양열이 아닌 태양빛이 더 필요한 시대가 됐습니다. 달(陰)은 새롭게 조명됩니다. 미국 NASA의 이탈리아 과학자 에밀리아노 포플러가 달에 물이 존재할 뿐 아니라 아예 물의 벨트가 있다고 했어요. 우주의 변동이 가장 영향을 미치는 게 경제현상입니다."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태양열에 대한 버블(Bubble·거품) 현상이 가져온 게 뭡니까, 금융위기잖아요. 경제뿐 아닙니다. 신종플루나 동남아를 강타한 쓰나미도 우주의 변동과 관련 있습니다." ―'황상'이 박근혜(朴槿惠) 한나라당 의원을 연상시키는데요. "허허, 그렇게 보여?(여기서 시인의 표정이 싹 바뀌었음을 유의해야 한다) 날 죽이려 했지만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을 두 가지 면에서 인정해. 일본 극우재벌의 돈을 안 썼고 청와대 캐비닛에 달러가 그득했지만 다 남 주고 정작 본인은 막걸리에 북어포만 먹었잖아." 사단(事端)이 결국 일어났다. '시인이 이토록 박경리 문학에 매달리는 게 평생 돈벌이 못하고 장모에게 신세를 졌기 때문이라는데…'라는 말을 꺼낸 직후였다. 이후의 상황을 요약하면 이런 식이었다. "나, 몇살이야?"(시인) "우리 나이로 예순아홉이시죠."(기자) "당신은?" "(큰일 날 태세여서 잽싸게 두살 얹어) 오십입니다." "그런데 그리 싸가지 없는 질문을 해? 뭐? 황상에서 박근혜가 연상돼? 천박한 질문 같으니!" 기자는 부글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기 위해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갔다. 위층의 김영주 토지문학관장이 황급히 달려왔다.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20분쯤 뒤 파투의 위기가 지나갔다. ■2막 대화는 독방(獨房) 이야기로 재개됐다. "참 무서운 거야. 천장이 내려오고 벽이 밀고 들어오면 정신이 끝장나는 거야. 그때마다 교도관들이 '박 대통령께 용서해달라는 각서를 쓰라'는 거야." 그는 민주화의 상징이었다. "내가 위대해서도 아니고 아내도, 아이들도 보고 싶었어요. 그렇다고 배신할 순 없잖아. 나중에 보니 세계 각국에서 그때 수십억원을 지원해줬어요. 난 한 푼도 못 받았지만." 옥고(獄苦)의 후유증으로 시인은 지금까지 12차례나 정신병원을 들락거렸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내가 노무현 정권 때 정신병원에 3번이나 갔어요. 병원비는커녕 안부전화 한 통 거는 놈도 없더군." ―제가 범인들만 쫓다 보니 질문이. "한 대학에서 석좌교수를 했어요. 그때 얼마나 기뻤다고. 영국에 유학 간 작은놈 도와줄 수 있으니 얼굴 좀 펼 것 같았어요. 그런데 학교에 가니 노무현 전 대통령 얼굴이 잔뜩 붙어 있는 거야." ―그래서요. "학벌 없는 그이가 대통령이 된 거 그걸 존경하는 건 이해해. 하지만 대통령이 개인이야? 돈 받아먹고 조사하는 게 국가의 공적 과정이잖아. 왜 도망가? 우리나라에 한 해 자살자가 1만3000명으로 세계 4위인데 '베르테르 효과'란 거 있잖아, 다 따라 죽어? 그걸 조장하는 게 교육이야? 집사람한테 말했어요. '기분 나쁘면 그만두라'고 하더군. '너희 같은 놈들하고 같이 산다는 게 창피하다'고 하고 관뒀지. 올라올 때는 통쾌했지만 아버지 위해 기도하는 둘째 놈 생각하니 눈물이 나. 실존적 문제거든." ―그만 하시지요. "내가 서울대 미학과에서 올 A였어요. 구한말 김홍집(金弘集) 재상 있었죠? 그분 손자가 김정록 교수님이라고 중국 북경대에서 모택동(毛澤東)도 벌벌 떨게 한 대학자 곽말약(郭沫若)의 제잡니다. 그 동양사상사의 대가가 날 예쁘게 봐 '교수하라'고 했는데 제가 '썩어서 싫다'고 했어요." ―왜 그런 말을. "한 교수가 강독(講讀) 시간에 특정 학생만 시키는 거야. 어느 날 새벽 낙산에서 운동하고 오는데 그가 그 교수 집에 청주 병을 들고 서 있더군. 교수가 칙사대접하며 술병을 받는 걸 보고 구역질이 났어요."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내가 공부를 더 하려고 학부만 8년 다녔어요. 그때 읽은 책들이 지금의 기초가 됐지. 중정(中情)은 '직업적 학생혁명가가 되려는 고의적 장기 학적 보유자'라고 했지만. 우리 증조부, 조부가 동학혁명 했고 아버지는 코뮤니스트였어요. 월출산(月出山)에서 빨치산도 했고. 난 절대 공산주의에 안 빠져요. 아버지가 빠진 게 뭔지 공부는 했지만. 지금 관료 중에 마르크스의 '자본론' 읽은 사람이 몇이나 돼? 다 엉터리 좌파지. 자, 어디까지 얘기했지? 그래 여성에 의한 획기적 재분배, 우리 역사에 전례가 있어. 우리 인제 이성적으로 하자고." ―어떤 전례인가요. "중앙아시아 사마르칸드에서 벽화를 보고 놀랐어. 중앙에 고구려인이 있는 거야. 시(市) 입구에 서 있는 돌에는 '초포나타'라고 쓰여 있어요. 고구려 졸본성(卒本城)이야. 당(唐) 이세민이 왜 고구려를 없애려 안간힘을 썼겠어요. 고구려부터 중앙아시아는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사이였거든. 중국은 자기들을 포위한 걸로 봤겠지. 이 부족연맹들의 시장(市場)이 얼마나 복잡했겠어요. 그걸 획기적으로 재분배한 게 여성이 참여하는 신시(神市)의 전통에서 나온 겁니다." ―남성은 왜 획기적 재분배를 못할까요. "월가(街) 앞에 항상 탐욕이라는 수식어가 붙죠? 대표적인 남성적 시장이지. 지금 외식(外食)이 증가하잖아. 그것도 여성이 맡아야 해요. 얼마 전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만나서 '왜 포스트 한류(韓流)를 시장에 맡기느냐'고 했어요. 말은 그럴듯하지만 직무유깁니다. 잘 이해를 못하더군. 창조적 발상을 하도록 지원하는 시스템이 마련돼야 하는데 그건 여성의 아이디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요." ―과학에서 역사까지 종횡으로 달리는 주장을 세상이 이해할까요. "누군가 편지를 보냈어요. 겉봉투에 '金美親(김미친)'이라고 썼더군. 미쳤다는 거지. 신비주의자로도 보이고." ■어머니 시인은 '종합병동(病棟)'이라 불릴 만큼 여러 병으로 고생했다. 그런데 작년 말 '백학선생'의 제자라는 104세 한의사를 만나 쾌차했다. 약 없이 잠들 수 없었던 그는 요즘 꿈도 꾸지 않고 숙면을 취한다고 했다. 몸이 개운해지니 기억도 돌아와 시작(詩作)에 한창이다. 이름이 '땡'이라는 고양이에 정을 들여 같은 이름의 시집을 낼 계획이다. '화엄 개벽 모심의 길'을 비롯한 몇권의 책과 오역(五譯) 화엄경도 쓰고 있다. ―아직도 세상은 '오적(五賊)'의 시인으로 기억합니다. "그 시를 사흘 만에 썼는데 아무도 믿지 않아요. 그 시를 쓴 후 절망했어요. 붕어 키우느라 온도 맞추고 집 안에 에스컬레이터 있다고 썼는데 다 상상이었거든요.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절 껴안으며 '김지하, 넌 애국자야'라고 하는 겁니다. 시적 상상이 사실이었다니, 얼마나 절망적입니까." ―고양이에 애정을 느끼는 건 무슨 이윤가요. "스톡홀름 가면서 파김치가 됐어요. 꿈에 '땡'이가 떠올라요. '야옹!' 하면서. 내가 늙었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돌아와 보니 땡이도 내 방문 앞에서 그렇게 울었대요. 정(情)의 정체가 뭘까, 여성성 아닐까요." ―모든 여성이 다 온화하고 획기적 재분배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죠. "희랍신화에 이시스와 고르곤이라는 여신(女神)이 있습니다. 이시스가 백색을 뜻하는 모성의 상징이라면 고르곤은 제 새끼를 씹어먹는 흑색입니다. 르네상스 시절 피렌체와 베네치아에도 그런 부류들이 있었어요. '파스쿠치'라 불렀죠." ―어떤 인간들이었습니까. "파스쿠치들이 약소국 그리스의 성전(聖殿) 유물을 헐값에 사 메디치가(家) 같은 명문가에 비싸게 되팝니다. 그렇게 축적한 부(富)로 희귀한 정력제를 사먹고 우아와 음란을 오가지요. 르네상스가 와야겠죠? 파스쿠치들은 어둠이죠. 아시안 네오르네상스가 온다고 하면 웃는 이들이 많은데 우리 주변에도 징조가 있어요." ―뭡니까. "고르곤이나 파스쿠치 같은 여자들 안 보여요?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로 번 돈을 들고 아이들 팽개치고 향락에 빠진 여자들이오. 여자들 얼굴이 하나같이 희지요? '맨하탄 화이트'거든. 지금은 눈 주위 컴컴하게 칠해 마귀 같은 여자가 많잖아. 색마(色魔)가 악마(惡魔)로 변한 거죠. 옛날 전설의 고향에 나올 법한 여자들이 거리를 활보하잖아. 사실 박 선생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주인공들도 독하기 그지없습니다. 불륜도 저질렀고. 그런데 그 안에 다 장치가 숨어 있는 겁니다." ―무슨 장친가요. "서희가 소설 마지막 부분에 스님과 대화합니다. 법화(法華) 신앙인데, 법화는 화엄세계에 들어가는 꽃무늬입니다. 알면 알수록 장모님이 참 묘해요, 생각할수록." ―'토지'도 펄벅의 대지(大地)와 같은 개념이 아니겠군요. "단순한 땅이 아닌 인간이 발 딛고 사는 세계의 근거, 삶의 정체(正體) 같은 겁니다. 그게 화엄이고요." ―시인의 어머니는 어땠습니까. "어렸을 적에 그림을 잘 그렸어요. 양반 가문인 어머니는 그걸 못하게 했어요. 두 손을 묶고, 제가 발가락에 붓 끼워 그림 그리면 발까지 묶었어요. 아버지와 백부가 기술자여서 연장이 그득했는데 그것도 못 만지게 했어요. 제가 지금 컴퓨터를 못 다뤄요. 집에 뭐 고장나도 못 고치는 기계치(痴)가 됐죠. 그래서 미학과를 택한 겁니다." ―그림과 미학이 무슨 관계입니까. "억눌림을 당하면 자기 검열을 하게 됩니다. 공부도 하고 그림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아 택한 겁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비겁한 절충이었지요. 이 말 꼭 써주세요. 세상의 어머니들에게. 아이들 억압하지 말라고." 북한 서열 22위인 '간첩 대장' 이선실이 "민족의 제단에 김지하를 바치겠다"며 그의 주변에 거액을 뿌렸다. 시인에게 반(反)정부 성명 발표를 종용해 옥사(獄死)를 유도하려는 것이었다. 이 고백에는 함축이 많다. 장모는 사위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했다. 그런 박경리를 운동권은 핍박했다. 시인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시스와 고르곤의 틈에서 살았던 것 같다. 그러면서 장모에게서 '어머니'를 본 것이 아닐까. 차마 글로 옮길 수 없는 긴 사연을 듣고 나서야 시인이 말한 '흰그늘' '검은 암소' '화엄개벽'이 명료해졌다. 그가 박경리라는 큰 품을 만난 게 얼마나 다행인가. 기자에게 시인은 여러 번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게 인터뷰가 잘되려고 그랬던 모양"이라며 웃었다. 격정(激情)마저 없었다면 시인은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가슴의 한(恨)을 잠시라도 풀고 후련해질 수 있다면 욕 천 마디가 대수랴.  "어둠속 '흰 그늘'과도 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ㅡ 김지하 문학관 1.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우선 3년 전에 쓴 한 편의 시, ‘詩(시)’라는 제목의 시로부터 그 대답을 시도해 보자.  짓지도 쓰지도 말라  이제 속에서 떨리고 밖에서 흐르라  넋이 넋이 아니거든  쓰지 말라 때로 창녀와의 풋사랑이  흰 그늘 빛나는 한 편의  詩.  쉽게 말하자. 궁상도 청승도 허풍도 다 접고 한 마디로 말하자. 넋이 내 시의 기점(起點)이다. 넋이 무엇인가?  넋은 사람이 죽었을 때 ‘날아오르는’ 혼(魂)이요 ‘흩어지는’ 백(魄)이다. 넋은 사람이 살았을 때, 안에서 ‘떨리는’ 영(靈)이요 밖에서 ‘흐르는’ 생명(生命)이다.  혼 없이 백 없고 백 없이 혼 없듯이, 영 없이 생명 없고 생명 없이 영은 없다. 영이 커질수록 생명은 복잡해지고, 생명의 복잡성이 촘촘해질수록 영의 깊이 또한 깊어진다.  영이 안에서 ‘떨리고’ 생명이 밖에서 ‘흐르는’ 것을 일러 풍류(風流)라 한다.  ‘떨리고 흐르는 넋’을 두고 ‘풍류도(風流道)’라 한다.  “넋은 곧 도(道)인가?”  그렇다.  “도는 바로 넋인가?”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넋의 풍류 탓이다.  그 뿐.  2. “너의 시는 억압, 투쟁, 고통, 외침, 저항, 혁명, 고문, 죽음으로 가득 차 있지 않았던가? 그것이 모두 넋의 시란 말인가?”  그렇다.  “왜?”  그 극한적인 것들에 대한 내 넋의 떨리는 감응과 흐르는 반응이 곧 나의 시였다.  “예를 들어라!”  거의 모두 다 떨림과 흐름이 없을 때, 즉 나의 넋이 넋이 아닐 때 나는 짓지도 쓰지도 못하거나 아니면 태작을 썼다. 그러매 30년 시업(詩業)이 거의 적막하기까지 하다.  “그 기념비(記念碑)는 무엇인가?”  아마도 ‘황톳길’이나 ‘불귀(不歸)’나 ‘어름’이 아닐까?  “그것은 아주 옛날인데 3년 전에 그 시론(詩論)을 반복했다는 말인가?”  그렇다.  “왜?”  내 넋이 새로운 도전에 부딪쳐 전처럼 결연하지 못하고 방만했기 때문이다.  “너의 시를 정치적 선동 선전시로 분류하는 사람도 있다.”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은 아니다.  “그럼 3년 전 앞뒤의 새로운 도전이란 무엇인가?”  3. ‘애린’이다.  그러나 나는 ‘애린’의 도전을 역시 내 넋의 떨림과 흐름으로 결연히 응전하지 못했다.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창녀(娼女)와의 풋사랑이다.  애린은 창녀다.  창녀는 천민(賤民)이다.  인간과 신(神)이 합일(合一)하는 순간의 기적이라 할 수 있는 사랑을 직업으로 하기 때문에 가장 참혹하게 저주받은 인간이다. 그러매 창녀와의 풋사랑은 고통에 찬 기적이다. ‘모순 어법’이다.  “그것이 너의 새로운 문학이요 문학의 동기인가?”  그렇다.  “미학 또는 시학으로 그 말을 바꿀 수 있는가?”  있다. ‘흰 그늘’이다. ‘그늘’은 삶의 신산고초요 생명의 복잡성이다. ‘흰 빛’은 초월적 ‘아우라’요 신령함이다. ‘흰 그늘’이란 ‘신비의 과학’이나 ‘은총의 중력(重力)’처럼 ‘모순 어법’이다.  “그것은 문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인가?”  그렇다. ‘그늘’은 우선 우리 민족 전통예술 일반에 적용되는 민족 미학의 제1원리다. 그것은 윤리적이면서 미적인 패러다임이요, 전통적이면서 초현대적 패러다임이며 슬픔과 기쁨, 골계(滑稽)와 비장(悲壯), 이승과 저승 그리고 영성적이면서 생태학적인 패러다임이다.  그러나 그 패러다임은 일단은 미학적 계율에 불과하다. 그로부터, 그 안으로부터 새하얀 ‘아우라’, 동양적 표현으로는 신성한 ‘무늬’가 생성 계시될 때까지는.  4. “너의 등단 배경을 말할 필요가 있다.”  시인이기 이전에 나의 꿈은, 아직 확실치는 않았으나 일종의 ‘사드비프라’(인도 사상가 사르카르의 ‘행복한 길 운동’에서 주체로 설정된 영적 혁명가) 혹은 일종의 ‘요기-싸르’(내면적으로는 수행자이자 외면적으로는 혁명가인 사람)이었다.  명상과 변혁의 통일자, 혹은 ‘영적 혁명가’ 혹은, ‘삼ㆍ일신고(三ㆍ一神誥ㆍ단군이 겨레 지도자들에게 전한 가르침)식으로 말하자면 ‘성통공완’(性通功完ㆍ성품을 도통하고 세상을 바꾸는 공을 이룸)의, ‘신선혁명가(神仙革命家)’를 꿈꾸었고 이곳 저곳을 찾아 헤맸다.  동학(東學)에서 이것은 ‘시인(侍人)’ 즉 ‘모시는 사람’이니 ‘안으로 신령(神靈)이 있고 밖으로 기화(氣化)가 있는 사람’이라 칭한다. 안의 신령과 밖의 기화란 다름아닌 영의 떨림과 생명의 흐름이다.  어쩌다 시인이 되었다. 시와 행동(行動)이 붙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했다. 길흉(吉凶)을 점(占)치는 소발굽 같기도 하고 하나가 됐다 둘이 됐다 하는 만파식적(萬波息笛)의 설화 같기도 했다.  등단 전에 내 주변엔 ‘폰트라’(PONTRAㆍPOEM ON TRASH, 쓰레기 위에 시를!)라는 사귐이 있었다. 여기서 어느날 한 여자 선배 왈, ‘네가 결혼하거나 연애를 하려면 반드시 사회적 지위가 있어야 하니 시인으로 문단에 등록해라’고 자꾸만 권유했다. 그래서 마지못해 등단했다.  그런데 그 뒤의 나의 시가 과연 ‘폰트라’의 길을 갔던가?  5. 거듭된 저항과 투옥으로,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된 피로감을 술로 풀다 풀다가 나는 지치고 병들었다. 내 자신이 쓰레기가 되어갔다.  혹독한 ‘죽임’의 예감으로 나의 시는 일종의 ‘묵시’가 되기도 했으나 그 극단적인 시적 ‘반혼(返魂)’ 속에서 도리어 넋의 무거운 만가(輓歌)로, 영적 파탄으로까지 변해 갔다. 그 반환점이 곧 ‘애린’의 출현이다.  그러나 애린은 ‘흰 그늘’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이제 내 앞에, 밑에, 틈에, 그리고 내 뒤에서까지 ‘흰 그늘’을 부름으로써 진정한 넋의 떨림과 흐름, 영과 생명의 풍류로 나아가고자 함이 지금의 내 삶과 내 시의 동기다.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바로 그것,  넋의 풍류 탓이다.  그 뿐.  6. 내가 앓았던 그 오래고 오랜 질병의 한 끝에서 10여년 전에 나는 또 한 편의 시를 얻었다. 그 시 ‘속’으로부터 대답의 마지막을 갈무리해 보자.  솔직한 것이 좋다만 그저 좋은 것만도 아닌 것이  詩란 어둠을 어둠대로 쓰면서 어둠을 수정하는 것  쓰면서 저도 몰래 햇살을 이끄는 일.  ‘어둠’과 ‘햇살’!  이 때 이미 ‘흰 그늘’은 왔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분열되어 있었다.  확실한 미학적 의식으로 확대되고 심화된 과정은 4ㆍ19 직후인 스무 살 때의 아득한 흰 길의 한 환상, 민청학련 무렵인 서른 세 살 때의 우주에의 흰 길의 한 환상, 재구속되어 옥중에서 100일 참선에 돌입했던 서른 여덟 살 때의 흰 빛과 검은 그늘의 한 투시, 그리고 4년 전 율려 운동을 시작하던 쉰 여덟 살 때의 대낮의 뚜렷한 한 문자 계시를 통해서 왔다. 그리고 3년 전 가야(伽倻) 여행에서 점차 시학적 명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흰 그늘’의 길은 그 자체로서는 아득하다.  지금 내게 있어 그 길은 우선 삶의 길을 뜻한다.  목숨이 살아야 한다.  그러나 영성적으로 살아야 비로소 넋이 넋다운 떨림과 흐름의 풍류도로 내게 다가올 것이다.  그러매 시는 내게 있어 일단은 하나의 ‘활인기(活人機)’다.  ‘죽임이 가득한 이 세상과 이 넋의 지옥에서 ‘삶’과 ‘사람’과 ‘살림’을 가져올 하나의 ‘활인기’다.  되풀이하지만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한 마디로 말하자. ‘살기 위해서’다.  어찌 살려 하는가?  이 길!  나의 시, 나의 삶으로 가는 이 ‘흰 그늘’의 길!  우주 저편으로까지 이어지는 이 ‘흰 그늘의 길’에 서는 것.  나그네는 반드시 길에서 죽는다던가?  • 1941년 전남 목포 출생 • 1966년 서울대 미학과 졸업  • 1969년 문예지 '시인'에 '황톳길' 등 시 5편 발표 등단 •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1964) '오적(五賊)'사건(1970) 민청학련 사건(1974) 등으로 8년여 투옥 • 1988년 문화운동단체 '율려학회' 발족 • 시집 '황토' '타는 목마름으로’ '애린' '별밭을 우러르며' '이 가문 날의 비구름' '중심의 괴로움' 등 산문집 '밥' '남녘땅 뱃노래' '살림' '옹치격' '생명' '생명과 자치' '사상기행' '예감에 가득찬 숲 그늘' '옛 가야에서 보내는 겨울 편지' 대설(大說) '남' 등 • 로터스특별상(1975) 위대한시인상(1981) 크라이스키인권상(1981) 이산문학상(1993) 정지용문학상(2002) 등 수상   [허문명 기자 ㅡ‘김지하와 그의 시대’] 김지하 시인을 처음 만났을 당시 1970년대 초반의 박경리 선생. 단아한 모습의 전형적인 한국형 미인이다. 박 선생은 당시 암 투병 중에도 토지 1부를 써내 문단으로부터 존경받는 문인이었지만 은둔하다시피 살고 있었다. 동아일보DB 주로 원주에 머물던 김지하는 서울에 올라오면 문단의 지인들과 어울렸다. 1971년 가을 그날은 ‘현대문학’ 편집장 김국태 형(2007년 작고·소설가·김근태의 형)과 소설가 유현종(73·전 한국문학예술진흥회장·전 중앙대 국문과 교수)과 함께였다. 일행은 1차를 마치고 더 마시고 싶었지만 주머니에 돈이 없었다. 인근에 있는 가까운 작가들 집에 쳐들어가기로 마음먹고 먼저 성북동에 살고 있던 소설가 김동리 집으로 갔다. 선생은 마침(?) 출타 중이었다.  김 편집장이 “가까운 곳(정릉)에 박경리 선생 집이 있으니 그리로 가자”고 제안했다. 박 선생은 69년부터 현대문학에 토지 1부를 발표한 상황이어서 두 사람은 잘 아는 사이였다. 김지하 역시 토지를 읽었던 상태였고 이미 당대 최고 작가 반열에 올라 있던 박 선생에 대해 그 역시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박 선생은 다행히(?) 집에 있었다. “맥주 한잔 얻어먹으러 왔다”고 하는 일행을 흔쾌히 안으로 들였다. 선생 옆에는 딸 김영주(현 토지문화관 이사장)가 서 있었다. 김영주는 당시 연세대 사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뒤 문화재관리국 연구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선생과 일행들 간에 이야기꽃이 피기 시작했다. 김지하의 회고다.“말로만 듣던 박 선생을 그날 처음 뵈었다. 얼굴이 굉장히 미인이셨다. 말씀도 잘 들어주시고 대답도 잘 해주셨지만 쉽게 속내를 알 수는 없었다. …역사(歷史) 이야기가 나오자 식견이 보통 탁월한 것이 아니었다. 주로 내가 여쭙고 박 선생이 답을 했는데 경상도 전라도 지리산 등등 민감한 지역 문제들에 대해서도 막힘이 없었다. 화엄불교, 동학에도 해박했고 동서양 역사는 물론 한국 현대사까지 줄줄이 꿰고 있었다. 혹시 공산주의자인가 싶어 은근슬쩍 물었더니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아주 비판적이었다. 나는 작가들 중에서 그렇게 똑똑한 사람을 태어나서 그때 처음 보았다.” 일행은 맥주를 잔뜩 얻어먹고 나왔다. 박 선생은 일행을 배웅하며 “또 놀러 오라”고 말했다. 평소 낯가림이 심하기로 유명했던 선생으로서는 이례적인 말이었다. 일행은 “박 선생이 저런 말씀을 하시다니 아마 지하가 마음에 드셨나 보다” 하는 반응들이었다.  김지하도 그날 만남이 오래 잊히지 않았다.  며칠 뒤에는 한밤중에 홀로 자신의 일본어판 첫 시집 ‘긴 어둠의 저편에’를 박 선생 집 신문 넣는 구멍을 통해 집어넣고 왔을 정도였다. 그리고 또 며칠 뒤엔 혼자 놀러 가기도 했다. 김지하는 “박 선생이 따뜻하게 대해 주어 고마웠다. 그 뒤로도 가끔 놀러 갔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그는 ‘광복 이후 한국 문학이 거둔 최대의 수확’이라는 평가를 받는 ‘토지’의 작가 그리고 그의 딸과 훗날 장모와 아내라는 운명적 인연을 맺게 되리라는 것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박경리 선생은 김지하와의 첫 만남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박 선생(2008년 작고)은 생전에 인터뷰를 극도로 사양했다. 어렵게 이뤄진 인터뷰에서도 가족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1994년 작가세계 가을호에서 서울대 송호근 교수(사회학과)와 장시간 인터뷰를 하면서 김지하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내 나이 마흔여섯이었을 거예요. ‘토지’를 집필하자 곧 (유방)암 수술을 받았지요. 나는 소풍가는 기분이었어요. 의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실지로 그랬지요. 그늘, 태어나고부터 줄곧 나를 억누르던 그늘에서 이제야 해방된다는 홀가분한 심정이었어요. (내가 쓴 소설) ‘시장과 전장’은 실화예요. 서대문 형무소에서 남편이 죽고 (곧이어 소설) ‘불신시대’를 쓰기 전에는 아들이 죽었지요. …(어느 날) ‘현대문학’ 김국태 씨가 지하와 함께 왔어요. ‘오적’을 읽고 싶었는데 구하질 못해 읽어보지는 못했던 때였죠. (글을 쓰는 내가) 글 잘 쓰는 젊은이에게 호감을 갖는 것은 당연하잖아요?” 71년 가을 그날, 김지하가 박 선생을 처음 만났을 때 선생은 69년 집필을 시작한 토지를 위해 거의 은둔하다시피 살고 있었다. 그해 암으로 오른쪽 가슴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고도 수술 뒤 보름 만에 퇴원해서는 수술 부위를 붕대로 싸맨 채 토지를 썼던 그였다(토지 2부를 쓸 때는 사위 김지하가 구속되면서 또 다른 고초를 겪는다). 선생을 평생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딸 김영주 토지문화관 이사장은 당시 어머니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한다.  “마음속으로 온갖 고통을 꾹꾹 누르고 있다가 마지막 해를 넘기는 날 같은 때에는 한 번씩 창자가 끊어지듯 우셨어요…지금도 잊히지 않는데 어느 연말 어수선한 밤, 방에서 울려나오던 통곡소리가, 마음 바닥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마치 가슴이 터져버릴 듯 통곡하시던… 그 밤이 잊히지 않습니다. 그 무렵 어머니는 작가로서 별처럼 반짝이며 떠오르고 있었고, 그것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질시의 표적이 되었던 것 같은데 그날은 아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험한 말을 들으셨나 봐요. 어머니는 마치 온몸을 부숴 버릴 듯 통곡을 하시고 난 다음엔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단정하게 앉아, 그야말로 모질게 원고지 앞에 앉아 펜을 드시곤 했습니다.” 김 이사장은 “어머니가 김 시인을 처음 만난 날 호감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라며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암 투병 후 내 결혼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당신이 언제 죽을지 모르니 하나 남은 딸자식에게 꼭 인연을 만들어주고 죽어야겠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실제로 김 시인을 만나기 전에 어머니가 주선해 선도 한 번 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김 시인을 우연히 만나보고는 마음에 드셨던 거지요. ‘오적’을 낸 시인이니 앞으로 고난은 좀 있겠지만 똑똑한 젊은이니까 처자식 밥은 굶기지 않겠구나 생각하신 거죠. 하지만 보기 좋게 틀린 생각이 되었습니다(웃음).” ========================================           목포 유달산 자락에 있는 김지하 시인의 시비 목포시 죽교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목포에서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볼 수 있는 좋은 곳 [출처] 김지하 시비|작성자 돌비늘   ◈ 김지하 '오적(五賊)'       1970년 5월 《사상계》에 발표된 작품이다. 담시(譚詩)라는 독창적인 장르를 택해 전통적 해학과 풍자로 사회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한 풍자시이다. 1970년대 초 부정 부패로 물든 한국의 대표적 권력층의 실상을 을사조약 당시 나라를 팔아먹은 오적(五賊)에 비유해 적나라하게 풍자함으로써, 문단에 파문을 일으키며 김지하라는 시인의 존재를 널리 알린 문제작이다. 이 작품을 발표한 《사상계》는 폐간되고, 작가와 편집인 등이 국가보안법 위반이란 죄목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시인은 이 작품을 통해 1960년대의 시에 대한 강렬한 비판 의식을 담아내고 있다. 작품 속에서 일제 통치 시대의 수혜 특권층이라고 할 수 있는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오적'이라 일컫고, 이들을 모두 '犬(개 견)'자가 들어가는 신조어 한자로 표현함으로써 인간의 탈을 쓴 짐승으로 등장시킨다. 짐승스런 몰골의 다섯 도둑들이 서울 장안 한복판에서 도둑질 대회를 벌이는 것으로 사건을 전개시키며 고대소설처럼 등장 인물들을 차례대로 풍자해 나간다.   재벌과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 들의 부정부패와 초 호화판의 방탕한 생활은 통렬한 풍자를 통해 그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게다가 부정 부패를 척결할 임무를 부여받은 포도대장(경찰 또는 사법부의 비유)이란 인물은 나라 망신시키는 오적을 잡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에게 매수되어 오적을 고해바친 죄 없는 민초 '꾀수'를 무고죄로 몰아 감옥에 집어넣고 자신은 도둑촌을 지키는 주구로 살아간다. 작가는 포도대장과 오적의 무리가 어느 날 아침 기지개를 켜다가 갑자기 벼락맞아 급살한다는 고전적 기법으로 이야기를 끝맺는다.   이 시는 일제 강점기라는 암울한 시기에 소실되어버린 민족의 가락을 되찾아 계승하고 발전시키려는 뚜렷한 목적 의식 아래 씌어진 작품이다. 창작 서사시로서 한국의 현대시문학사에 '담시'라는 새로운 형식과 전통적인 풍자 기법을 되살렸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특히 이야기를 소리로 형상화함으로써, 특권 지배층을 날카롭게 공격하고 피지배계층의 한을 드러낸 점과 판소리를 계승 발전시킨 점은 높이 평가된다.     이 시는 1970년 5월 '사상계'를 통해 '담시'라는 독창적인 이름으로 발표, 파문과 물의를 일으키며 김지하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오적'은 민중의 집단적 창조력에 의해서 긴 역사적 과정을 거쳐 완성된 예술 형식의 하나인 판소리 양식으로 뒷받침되어 있으며, 일제 식민 통치의 암흑기 속에서 쇠잔하고 소실되어 버린 민족의 가락을 되찾아 계승하고 발전시키려는 뚜렷한 목적 의식 아래 씌어졌다. 그것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민족 문학의 새로운 진로에 큰 빛을 던져 주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따라서 이 시를 대할 때에는 그 안에 담긴 내용 못지 않게 양식과 가락에 대해서도 크게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담시(譚詩)란 '단형 서정시보다 길고 단편 소설보다 짧은' 길이 속에 당대의 정치적 문제를 기습적으로 전달하는 '이야기 시'의 독특한 장르이다. 기습성(담시의 발표 연도와 정치적 사건의 맥락에서의), 공격성(반민중적 소수 집단을 향한 정치적 풍자시라는 점에서), 이야기 전달성(담시의 형식적인 면과 감추어진 진실의 폭로라는 의도에서) 등의 특성을 지닌 이 새로운 장르의 출현은 역사적 현실의 가장 첨예한 내용의 요청에 부응하려는 시도에서 그 정당성을 지닌다.   '오적'을 보면 대뜸 느낄 수 있는 것이, 이 작품의 핵심은 표면 구조에 있지 않고 심층 구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오적이라고 못 박은 사람들 즉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란 한 마디로 말해서 일제 식민 통치의 수혜 특권층이라 할 수 있다. 이 오적을 통해서 의도한 바는 이 작품에 그린 과장되고 희화화되고 풍자의 대상이 된 모든 인물들의 행태가 바로 불식되지 못한 일제 식민 유산의 부산물로, 진정으로 자율적이고 근대화된 통치 질서를 이 땅에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식민 잔재의 완전한 청산을 통한 새로운 인간에 의한 새로운 통치 이념의 구현이 필요하다는 방향 제시였다고 할 수 있다.          1   시(詩)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 전에 끌려가   볼기를 맞은 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겄다   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맞을 때는 맞더라도   내 별별 이상한 도둑이야길 하나 쓰것다.   옛날도, 먼 옛날 상달 초 사훗날 백두산아래 나라선 뒷날   배꼽으로 보고 똥구멍으로 듣던 중엔 으뜸    아동방(我東方)이 바야흐로 단군 아래 으뜸    으뜸가는 태평 태평 태평성대라   그 무슨 가난이 있겠느냐 도둑이 있겠느냐   포식한 농민은 배 터져 죽는 게 일쑤요   비단옷 신물나서 사시장철 벗고 사니   고재봉 제 비록 도둑이라곤 하나   공자님 당년에도 도척이 났고   부정부패 가렴주구 처처에 그득하나   요순시절에도 시흉은 있었으니   아마도 현군양상(賢君良相)인들 세상 버릇 도벽(盜癖)이야   여든까지 차마 어찌할 수 있겠느냐   서울이라 장안 한복판에 다섯 도둑이 모여 살았겄다.   남녘은 똥덩어리 둥둥   구정물 한강 가에 동빙고동 우뚝   북녘은 털빠진 닭똥구멍 민둥   벗은 산 만장 아래 성북동 수유동 뾰죽   남북 간에 오종종종종 판잣집 다닥다닥   게딱지 다닥 코딱지 다닥 그 위에 불쑥   장충동 약수동 솟을대문 제멋대로 와장창   저 솟고 싶은 대로 솟구쳐 올라 삐까번쩍   으리으리 꽃궁궐에 밤낮으로 풍악이 질펀 떡치는 소리 쿵떡   예가 바로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라 이름하는,   간뗑이 부어 남산하고 목질기기가 동탁 배꼽 같은   천하 흉포 오적(五賊)의 소굴이렷다.    사람마다 뱃속이 오장 육보로 되었으되   이놈들의 배 안에는 큰 황소 불알 만한 도둑보가 겉붙어 오장 칠보,   본시 한 왕초에게 도둑질을 배웠으나 재조는 각각이라   밤낮 없이 도둑질만 일삼으니 그 재조 또한 신기(神技)에 이르렀것다.   하루는 다섯 놈이 모여   십 년 전 이맘때 우리 서로 피로써 맹세코 도둑질을 개업한 뒤   날이날로 느느니 기술이요 쌓으느니 황금이라, 황금 십만 근을 걸어놓고   그간에 일취월장 묘기(妙技)를 어디 한번 서로 겨룸이 어떠한가   이렇게 뜻을 모아 도(盜)짜 한자 크게 써 걸어놓고 도둑 시합을 벌이는데   때는 양춘가절(陽春佳節)이라 날씨는 화창, 바람은 건듯, 구름은 둥실   지마다 골프채 하나씩 비껴들고 꼰아잡고   행여 질세라 다투어 내달아 비전(泌傳)의 신기(神技)를 자랑해 쌌는다.   2   첫째 도둑 나온다 재벌이란 놈 나온다   돈으로 옷 해 입고 돈으로 모자 해 쓰고 돈으로 구두 해 신고 돈으로 장갑 해 끼고   금시계, 금반지, 금팔지, 금단추, 금넥타이 핀, 금카후스보턴, 금박클, 금니빨,   금손톱, 금발톱, 금작크, 금시계줄.   디룩디룩 방댕니, 불룩불룩 아랫배, 방귀를 뽕뽕 뀌며 아그작 아그작 나온다   저놈 재조 봐라 저 재벌놈 재조 봐라   장관은 노랗게 굽고 차관은 벌겋게 삶아    초치고 간장 치고 계자 치고 고추장 치고 미원까지 톡톡 쳐서 실고추과 마늘 곁들여   나름   세금받은 은행돈, 외국서 빚낸 돈, 왼갖 특혜 좋은 이권은 모조리 꿀꺽   이쁜 년 꾀어서 첩 삼아 밤낮으로 작신작신 새끼 까기 여념 없다   수두룩 까낸 딸년들 모조리 칼 쥔 놈께 시앗으로 밤참에 진상하여   귀뜀에 정보 얻고 수의 계약 낙찰시켜 헐값에 땅 샀다가 길 뚫리면 한 몫 잡고   천(千)원 공사(工事) 오 원에 쓱싹, 노동자 임금은 언제나 외상 외상   둘러치는 재조는 손오공 할애비요 구워 삶는 재조는 뙤놈 술수 빰 치겄다.   또 한 놈 나온다.   국회의원 나온다.   곱사같이 굽은 허리, 조조같이 가는 실눈,   가래 끓는 목소리로 응승거리며 나온다   털 투성이 몽둥이에 혁명 공약 휘휘 감고   혁명 공약 모자 쓰고 혁명 공약 배지 차고   가래를 퉤퉤, 골프채 번쩍, 깃발같이 높이 들고 대갈 일성, 쪽 째진 배암 샛바닥에    구호가 와그르르   혁명이닷, 구악(舊惡)은 신악(新惡)으로! 개조(改造)닷, 부정 축재는 축재 부정으로!   근대화닷, 부정 선거는 선거 부정으로! 중농(重農)이닷, 빈농(貧農)은 잡농(雜農)으로!   건설이닷, 모든 집은 와우식(臥牛式)으로! 사회정화(社會淨化)닷,   정인숙(鄭仁淑)을, 정인숙(鄭仁淑)을 철두철미하게 본받아랏!   궐기하랏, 궐기하랏! 한국은행권아, 막걸리야, 주먹들아,   빈대표야, 곰보표야, 째보표야,   올빼미야, 쪽제비야, 사꾸라야, 유령(幽靈)들아, 표 도둑질 성전(聖戰)에로 총궐기하랏!   손자(孫子)에도 병불(兵不) 후사, 치자즉도자(治者卽盜者)요 공약즉공약(公約卽空約)이니   우매(遇昧) 국민 그리 알고 저리 멀찍 비켜서랏, 냄새난다 퉤 -    골프 좀 쳐야겄다.   3   셋째 놈이 나온다   고급 공무원 나온다.   풍신은 고무풍선, 독사같이 모난 눈, 푸르족족 엄한 살,   콱다문 입 꼬라지 청백리(淸白吏) 분명쿠나   단 것을 갖다주니 쩔레쩔레 고개 저어 우린 단것 좋아 않소,   아무렴, 그렇지, 그렇구 말구   어허 저놈 뒤 좀 봐라 낯짝 하나 더 붙었다   이쪽보고 히뜩히뜩 저쪽보고 혜끗혜끗, 피두피둥 유들유들   숫기도 좋거니와 이빨꼴이 가관이다.   단것 너무 처먹어서 새까맣게 썩었구나, 썩다못해 문들어져   오리(汚吏)가 분명쿠나   간같이 높은 책상 마당같이 깊은 의자 우뚝나직 걸터앉아   공(功)은 쥐뿔도 없는 놈이 하늘같이 높이 앉아 한 손으로 노땡큐요 다른 손은 땡큐땡큐   되는 것도 절대 안 돼, 안될 것도 문제 없어, 책상 위엔 서류뭉치, 책상 밑엔 지폐 뭉치   높은 놈껜 삽살개요 아랫놈껜 사냥개라, 공금은 잘라먹고 뇌물은 청(請)해 먹고   내가 언제 그랬더냐 흰 구름아 물어보자 요정(料亭) 마담 위아래로   모두 별탈 없다더냐.   넷째 놈이 나온다   장성(長猩) 놈이 나온다   키 크기 팔대장성, 제 밑에 졸개 행렬 길기가 만리장성   온몸이 털이 숭숭, 고리눈, 범아가리, 벌룸코, 탑삭수염,   짐승이 분명쿠나    금은 백동 청동 황동, 비단 공단 울긋불긋, 천 근 만 근 훈장으로 온몸을 덮고 감아   시커먼 개다리를 여기차고 저기차고   엉금엉금 기나온다 장성(長猩)놈 재조 봐라   쫄병들 줄 쌀가마니 모래 가득 채워놓고 쌀은 빼다 팔아먹고   쫄병 먹일 소돼지는 털 한 개씩 나눠주고 살은 혼자 몽창 먹고   엄동설한 막사 없어 얼어죽는 쫄병들을   일만하면 땀이 난다 온종일 사역시켜   막사 지을 재목 갖다 제 집 크게 지어놓고   부속 차량 피복 연탄 부식에 봉급까지, 위문품까지 떼어먹고   배고파 탈영한 놈 군기 잡자 주어패서 영창에 집어놓고   열중 쉬엇 열중 열중 열중 쉬엇 열중   빵빵들 데려다가 제 마누라 화냥끼 노리개로 묶어 두고   저는 따로 첩을 두어 운우서수공방전(雲雨魚水攻防戰)에 병법(兵法)이 신출귀몰(神出鬼沒)   마지막 놈 나온다   장차관이 나온다   허옇게 백태 끼어 삐적삐적 술지게미 가득 고여 삐져 나와   추접무화(無化) 눈꼽 낀 눈 형형하게 부라리며 왼손은 골프채로 국방을 지휘하고   오른손은 주물럭주물럭 계집 젖통 위에다가 증산 수출 건설이라 깔짝깔짝 쓰노라니   호호 아이 간지럽사와요   이런 무식한 년, 국사(國事)가 간지러워?   굶더라도 수출이닷, 안팔려도 증산이닷, 아사(餓死)한 놈 뼉다귀로 현해탄에 다리 놓아 가미사마 배알하잣!   째진 북소리 깨진 나팔소리 삐삐빼빼 불어대며 속셈은 먹을 궁리   검정세단 있는데도 벤쯔를 사다놓고 청렴결백 시위코자 코로나만 타는구나   예산에서 몽땅 먹고 입찰에서 왕창 먹고 행여나 냄새 날라 질근질근 껌 씹으며   켄트를 피워 물고 외래품 철저 단속 공문을 휙휙휙휙 내갈겨 쓰고 나서 어허 거참   달필(達筆)이다.   추문 듣고 뒤쫓아온 말 잘하는 반벙어리 신문 기자 앞에 놓고   일국(一國)의 재상더러 부정(不正)이 웬 말인가 귀거래사(歸去來辭) 꿍얼꿍얼, 자네 핸디 몇이더라?   4   오적(五賊)의 이 절륜한 솜씨를 구경하던 귀신들이   깜짝 놀라서 어마 뜨거라 저놈들한테 붙잡히면 뼉다귀도 못 추리것다   똥줄빠지게 내빼 버렸으니 요즘엔 제사지내는 사람마저 드물어졌겄다.   이라한참 시합이 구시월 똥호박 무르익듯이 몰씬몰씬 무르익어가는데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나라 망신시키는 오적(五賊)을 잡아들여라   추상같은 어명이 쾅,   청천하늘에 날벼락치듯 쾅쾅쾅 연거푸 떨어져내려 쏟아져 퍼붓어싸니   네이- 당장에 잡아 대령하겠나이다, 대답하고 물러선다   포도대장 물러선다   포도대장 거동봐라   울뚝불뚝 돼지코에 술찌꺼기 허어옇게 묻은 메기 주둥이, 침은 질질질   장비사돈네팔촌 같은 텁석부리 수염, 사람여럿 잡아먹어 피가 벌건 왕방울 눈깔   마빡에 주먹혹이 뛸 때마다 털렁털렁   열십자 팔벌이고 멧돌같이 좌충우돌, 사자같이 으르르르릉   이놈 내리훑고 저놈 굴비 엮어   종삼 명동 양동 무교동 청계천 쉬파리 답십리 왕파리 왕십리 똥파리 모두 쓸어모아다   꿀리고 치고 패고 차고 밟고 꼬집어 뜯고 물어뜯고 업어 메치고 뒤집어 던지고   꼰아 추스리고 걷어 팽개치고 때리고 부수고 개키고 까집고 비틀고 조이고   꺾고 깎고 벳기고 쑤셔대고 몽구라뜨리고   직신작신 조지고 지지고 노들강변 버들같이 휘휘낭창 꾸부러뜨리고   육모방망이, 세모쇳장, 갈쿠리, 긴 칼, 짧은 칼, 큰칼, 작은칼   오라 수갑 곤장 난장 곤봉 호각   개다리 소다리 장총 기관총 수류탄 최루탄 발연탄 구토탄 똥탄 오줌탄 뜸물탄 석탄 백탄   모조리 갖다 늘어놓고 어흥 -   호랑이 방귓소리 같은 으름장에 깜짝, 도매금으로 끌려와 쪼그린 되민중들이 발발     전라도 갯땅쇠 꾀수놈이 발발 오뉴월 동장군(冬將軍) 만난 듯이 발발발 떨어댄다.   네놈이 오적(五賊)이지   아니요   그럼 네가 무엇이냐   날치기요   날치기면 더욱 좋다. 날치기, 들치기, 밀치기, 소매치기, 네다바이 다 합쳐서   오적(五賊)이 그 아니냐   아이구 난 날치기 아니요   그럼 네가 무엇이냐   펨프요   펨프면 더욱 좋다. 펨프, 창녀, 포주, 깡패, 쪽쟁이 다합쳐서   풍속사범 오적(五賊)이 바로 그것 아니더냐   아이구 난 펨프이니요   그럼 네가 무엇이냐   껌팔이요   껌팔이면 더욱 좋다. 껌팔이, 담배팔이, 양말팔이, 도롭프스팔이, 쪼코렛팔이 다   합쳐서   외래품 팔아먹는 오적(五賊)이 그아니냐   아이구 난 껌팔이 아니요   그럼 네가 무엇이냐   거지요   거지면 더더욱 좋다. 거지, 문둥이, 시라이, 양아치, 비렁뱅이 다 합쳐서   우범오적(五賊)이란 너를 두고 이름이다. 가자 이놈 큰집으로 바삐 가자   애고 애고 난 아니요, 오적(五賊)만은 아니어라우. 나는 본시 갯땅쇠로 농사로는   배고파서 돈벌라고 서울 왔소. 내게 죄가 있다면은   어젯밤에 배고파서 국화빵 한 개 훔쳐먹은 그 죄밖엔 없습네다.   이리 바짝 저리 죄고 위로 틀고 아래로 따닥   찜질 매질 물질 불질 무두질에 당근질에 비행기태워 공중잡이   고춧가루 비눗물에 식초까지 퍼부어도 싹아지 없이 쏙쏙 기어나오는 건   아니랑께롱   한 마디뿐이겄다   포도대장 할 수 없이 꾀수놈을 사알살 꼬실른다 저것 봐라   오적(五賊)은 무엇이며 어디 있나 말만 하면 네 목숨은 살려주마   꾀수놈 이 말 듣고 옳다꾸나 대답한다.   오적(五賊)이라 하는 것은   재벌과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란 다섯 짐승, 시방 동빙고동에서   도둑시합 열고 있오.   으흠, 거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이다. 정녕 그게 짐승이냐?   그라문이라우, 짐승도 아조 흉악한 짐승이지라우.   옳다됐다 내 새끼야 그말을 진작하지    포도대장 하도 좋아 제 무릎을 탁치는데   어떻게 우악스럽게 처 버렸던지 무릎뼈가 파싹 깨져 버렸겄다, 그러허나   아무리 죽을 지경이라도 사(死)는 사(私)요, 공(功)은 공(公)이라   네놈 꾀수 앞장서라, 당장에 잡아다가 능지처참한 연후에 나도 출세해야겄다.   꾀수놈 앞세우고 포도대장 출도한다   범눈깔 부릅뜨고 백주대로상에 헷드라이트 왕눈깔을 미친듯이 부릅뜨고   부릉 부릉 부르릉 찍찍   소리소리 내지르며 질풍같이 내닫는다   비켜라 비켜라   안 비키면 오적(五賊)이다   간다 간다 내가 간다    부릉부릉 부르릉 찍찍 우당우당 우당탕 쿵쾅   오적(五賊)잡으러 내가 간다   남산을 훌렁 넘어 한강물 바라보니 동빙고동 예로구나   우레 같은 저 함성 범 같은 늠름 기상 이완대장(李浣大將) 재래(再來)로다   시합장에 뛰어들어 포도대장 대갈 일성,   이놈들 오적(五賊)은 듣거라   너희 한갖 비천한 축생의 몸으로   방자하게 백성의 고혈 빨아 주지육림 가소롭다   대역무도 국위 손상, 백성 원성 분분하매 어명으로 체포하니   오라를 받으렸다.    5   이리 호령하고 가만히 들러보니 눈 하나 깜짝하는 놈 없이   제일에만 열중하는데   생김생김은 짐승이로되 호화찬란한 짐승이라   포도대장 깜짝 놀라 사면을 살펴보는데   이것이 꿈이냐 생시냐 이게 어느 천국이냐   서슬 푸른 용트림이 기둥 처처 승천하고 맑고 푸른 수영장엔 벌거벗은    선녀(仙女) 가득    몇 십 리 수풀들이 정원 속에 그득그득, 백만 원짜리 정원수(庭園樹)에 백만 원짜리 외국(外國)개   천만 원짜리 수석 비석(瘦石肥石), 천만 원짜리 석등석불(石燈石佛), 일억 원짜리   붕어 잉어, 일억 원짜리 참새 메추리   문(門)도 자동, 벽도 자동, 술도 자동, 밥도 자동, 계집질 화냥질 분탕질도 자동자동   여대생(女大生) 식모두고 경제학박사 회계 두고 임학(林學)박사 원정(園丁)두고   경제학박사 집사 두고 가정 교사는 철학 박사 비서는 정치학 박사 미용사는 미학(美學) 박사   박사 박사 박사 박사   잔디 행여 죽을세라 잔디에다 스팀 넣고, 붕어 행여 죽을세라 연못 속에 에어컨 넣고   새들 행여 죽을세라 새장 속에 히터 넣고, 개밥 행여 상할세라 개집 속에 냉장고 넣고    대리석 양옥(洋屋)위에 조선기와 살쩍 얹어 기둥은 코린트식(式) 대들보는 이오니아식(式)   선자추녀 쇠로 치고 굽도리 삿슈 박고 내외분합 그라스룸 석조(石造)벽에 갈포 발라   앞뒷퇴 널찍 터서 복판에 메인홀 두고 알 매달아 부연얹고   기와 위에 이층 올려 이층 위에 옥상 트고 살미살창 가로닫이 도자창(盜字窓)으로 지어놓고   안팎 중문 솟을대문 페르샤풍(風), 본따 놓고 목욕탕은 토이기풍(風), 돼지우리 왜풍(倭風)당당   집 밑에다 연못 파고 연못 속에 석가산(石假山), 대대층층 모아놓고   열어 재킨 문틈으로 집안을 언 듯 보니   자개 케비넷, 무광택 강철 함롱, 봉그린 용장, 용그린 봉장, 삼천삼백삼십삼 층 장   카네숀 그린 화초장, 운동장만한 옥쟁반, 삘딩같이 높이 솟은 금은 청동 놋촉대,   전자시계, 전자밥그릇, 전자주전자, 전자젓가락, 전자꽃병, 전자거울, 전자책,   전자가방, 쇠유리병, 흙나무그릇, 이조청자, 고려백자, 거꾸로 걸린 삐까소, 옆으로 붙인 샤갈,   석파란(石坡蘭)은 금칠액 틀에 번들번들 끼워놓고, 산수화조호접인물 (山水花鳥蝴蝶人物)    내리닫이 족자는 사백 점 걸어 두고, 산수화조호접인물 (山水花 鳥蝴蝶人物)   팔천팔백팔십팔 점이 한꺼번에 와글와글,   백동토기, 당화기, 왜화기, 미국화기, 불란서화기, 이태리화기, 호피 담뇨 씨운테레비, 화류문갑 속의 쏘니 녹음기,   대모책상 위의 밋첼 카메라, 산호책장 곁의 알씨에이 영사기, 호박필통에 꽂힌 파카 만년필, 촛불 켠 샨들리에,   피마주 기름 스탠드라이트, 간접 직접 직사 곡사 천장 바닥 벽 조명이 휘황칸칸 호화율율.   여편네들 치장 보니 청옥 머리핀, 백옥 구두 장식,   황금 부로취, 백금 이빨, 밀화 귓구멍 마개, 호박 밑구멍 마개, 산호 똥구멍 마개,   루비 배꼽 마개, 금파 단추, 진주 귀걸이, 야광주 코걸이, 자수정 목걸이, 싸파이어 팔지    에머랄드 팔지, 다이야몬드 허리띠, 터키석 안경대,   유독 반지만은 금칠한 삼 원짜리 납반지가 번쩍번쩍 칠흑 암야에 횃불처럼   도도 무쌍(無雙)이라!   왼갖 음식 살펴보니 침 꼴깍 넘어가는 소리 천지가 진동한다   소털구이, 돼지 콧구멍 볶음, 염소 수염 튀김, 노루 뿔 삶음, 닭 네 발 산적, 꿩 지느라미 말림,    도미날개지짐, 조기 발톱 젓, 민어 농어 방어 광어 은어 귀만 짤라 회무침,   낙지해삼비늘조림, 쇠고기 돈까스, 돼지고기 비후까스, 피 안 뺀 복지리,   생율, 숙율, 능금, 배 씨만 발라 말리면서 금딱지로 싸놓은 것, 바나나 식혜,   파인애플 화채, 무화과 꽃잎 설탕 버무림,   롱가리트 유과, 메사돈 약과, 사카린 잡과, 개구리알 구란탕, 청포 우무, 한천묵,   괭장망장과화주, 산또리, 계당주, 샴펭, 송엽주, 드라이찐, 자하주, 압산,   오가피주, 죠니워카, 구기주, 화이트호스, 신선주, 짐빔, 선약주, 나폴레옹 꼬냑,   약주, 탁주, 소주, 정종, 화주, 째주, 보드카, 람주(酒)라!   아가리가 딱 벌어져 닫을 염도 않고 포도대장 침을 질질질질질질 흘려싸면서   가로되   놀랠 놀짜로다   저게 모두 도둑질로 모아들인 재산인가   이럴 줄을 알았더면 나도 일찍암치 도둑이나 되었을 걸   원수로다 원수로다 양심(良心)이란 두 글자가 철천지 원수로다   6   이리 속으로 자탄망조하는 터에   한놈이 쓰윽 다가와 써억 술잔을 권한다   보도 듣도 못한 술인지라   허겁지겁 한 잔 두 잔 헐레벌떡 석 잔 넉 잔   이윽고 대취하여 포도대장 일어서서 일장 연설 해보는데   안주를 어떻게나 많이 쳐먹었는지 이빨이 확 닳아 없어져 버린 아가리로   이빨을 딱딱 소리내 부딪쳐가면서 씹어 뱉는 그 목소리 엄숙하고 그 조리 정연하기   성인군자의 말씀이라   만장하옵시고 존경하옵는 도둑님들!   도둑은 도둑의 죄가 아니요, 도둑을 만든 이 사회의 죄입네다   여러 도둑님들께옵선 도둑이 아니라 이 사회에 충실한 일꾼이니    부디 소신껏 그 길에 매진, 용진, 전진, 약진하시길 간절히 바라옵고 또 바라옵니다.   이 말끝에 박장대소 천지가 요란할 때   포도대장 뛰어나가 꾀수놈 낚궈 채어 오라 묶어 세운 뒤에   요놈, 네놈을 무고죄로 입건한다.   때는 가을이라   서산낙일에 객수(客愁)가 추연하네   외기러기 짝을 찾고 쪼각달 희게 비껴    강물은 붉게 타서 피 흐르는데   어쩔꺼나 두견이는 설리설리 울어쌌는데 어쩔꺼나   콩알 같은 꾀수 묶어 비틀비틀 포도대장 개트림에 돌아가네   어쩔꺼나 어쩔꺼나 우리 꾀수 어쩔꺼나   전라도서 굶고 살다 서울 와 돈번다더니   동대문 남대문 봉천동 모래내에 온갖 구박 다 당하고    기어이 가는구나 가막소로 가는구나   어쩔꺼나 억울하고 원통하고 분한 사정 누가 있어 바로잡나   잘 가거라 꾀수야   부디부디 잘 가거라.   7   꾀수는 그길로 가막소로 들어가고   오적(五賊)은 뒤에 포도대장 불러다가   그 용기를 어여삐 녀겨 저희집 솟을대문,   바로 그 곁에 있는 개집 속에 살며 도둑을 지키라 하매,   포도대장 이말 듣고 얼시구 좋아라   지화자 좋네 온갖 병기(兵器)를 다가져다 삼엄하게 늘어놓고 개집 속에서 내내   잘살다가   어느 맑게 개인 날 아침, 커다랗게 기지개를 켜다 갑자기 벼락을 맞아 급살하니   이때 또한 오적(五賊)도 육공(六孔)으로 피를 토하며   꺼꾸러졌다는 이야기. 허허허   이런 행적이 백대에 민멸치 아니하고 인구(人口)에 회자하여   날 같은 거지 시인의 싯귀에까지 올라 길이 길이 전해오겄다.     
0 정호승(鄭昊昇) (원명; 정영택) 시인. 1916년 충청북도 충주(忠州) 출생. 1935년 소설가 지봉문과 함께 <조선문학사>를 열어 30년대 대표적 문예지인 《조선문학》을 발간하였다. 농민문학의 선구자인 소설가 이무영(李無影)과 교분이 두터웠고 그의 시 여러 곳에서 농민문학적 성향이 엿보인다. 대표적 시집 《모밀꽃》은 식민지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무기력한 모습과 농촌풍경을 배경으로 일제강점 아래 한국민족의 좌절을 형상화하여 서정성과 민족의 비극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46년 남로당 가입과 좌익운동, 동인지 《아우성》을 발간한 일로 6개월간 감옥살이를 하였고 남북협상 때 김구(金九)와 함께 북한을 다녀와서 1년간 다시 복역하였다.   답변추천해요0 정호승   ■ 프로필       1950년 대구 출생, 경희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73년 신춘문예 시 '첨성대' 당선  1982년 신춘문예 단편소설 '위령제' 당선  1989년 제3회 소월문학상 수상  1997년 제10회 동서문학상 수상   ■ 작가 이야기   순결한 동심의 정서와 맑고 아름다운 서정의 결 평론가 하응백의 간명한 표현처럼 정호승은 '사랑'의 시인이다. 눈사람처럼 순백한, 그래서 눈사람과 사랑의 교감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순도 높은 서정 세계는 첫 시집 에서부터 다채롭게 펼쳐진다. 시인 특유의 순결한 동심의 정서가 맑고 아름다운 서정의 결을 일관되게 유지케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시는 값싼 감성을 자극하는 싸구려 산파극이나 요즘 베스트셀러 순위를 점령하고 있는 수많은 대중시와는 자못 다르다. 무엇보다도 그의 순정한 사랑과 동화적 시심의 뒤란에는 가난과 소외, 불행과 고통에 대한 동정과 타자에 대한 연민의 정서가 배음(背音)으로 깔려 있기 때문이다. 불행한 사람들의 영혼을 위무하고 그 생채기를 치료하는 어머니 젖가슴과 같은 '따뜻한 슬픔'! 두 번째 시집 에서도 사랑을 위한 기다림의 끈기를 계속해서 보여준다. "아직도 사랑할 자유밖에 없는/너희는 날마다 해 뜨는 곳에/그리움과 기다림의 씨를 뿌려라"('서울 복음 2'). 세 번째 시집 에서 시인의 사랑은 사회 전체로 확대 ·변주 ·일반화된다. 그는 전태일의 고귀한 희생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허연 최루가스를 뒤집어쓰고/홀로 울고 있는 꽃다발 하나"('꽃다발')을 영전에 바친다. 네 번째 시집 에서 시인은 역사와 시대에 대한 좌절과 절망에서 촉발된 통렬한 자기 반성을 시작한다. 엇갈리는 사랑과 죽음을 동시에 노래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했을 때/너는 이미 숨져 있었고/네가 나를 사랑했을 때/나는 이미 숨져 있었다"('어떤 사랑'). 이후 7년만에 상자한 다섯 번째 시집 에서 시인은 사랑의 본성과 존재 원리에 대한 체득이 외로움과 숙명적으로 결합하여 우주적인 교감의 세계로 확산되는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외로움이 내재된 슬픔 사랑을 그의 시적 영토로 이주시켜 다음 같은 절창을 낳는다. "울지 마라/외로우니까 사람이다/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수선화에게'). 최근 시인은 를 간행했다. 사랑의 본질은 비움과 채움, 감춤과 드러냄의 끝임 없는 길항(拮抗)임을 간결한 시행에 담아 낸, 그야말로 이 시집에 진주처럼 박혀 있는 빛나는 소품 하나. "아무도 반달을 사랑하지 않는다면/반달이 보름달이 될 수 있겠는가/보름달이 반달이 되지 않는다면/사랑은 그 얼마나 오만할 것인가"('반달') 어쨌든, 그는 문학성과 대중성의 행복한 조화를 누리는 시인이다. (류신/문학평론가)       @@ 정호승 임을 밝힘...     슬픔이 기쁨에게 / 정호송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 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 슬픔이 기쁨에게(1979)   ■ 시구 및 구절 풀이 ․ 나 : 슬픔 ․ 너 : 이 시의 청자인 기쁨으로 사랑에 무관심한 사람들로 '우리 모두'를 일컬음. ․ 소중한 슬픔 : 역설적인 표현으로 슬픔은 남의 아픔을 보듬고 소외된 사람들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존재를 말한다. ․ 겨울 밤 거리에서~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 : 소외받은 그리고 약자인 사람들을 상징 ․ 귤값을 깎으면서 : 아주 작은 이익을 탐하고, 약자들의 아픔을 모르는 소탐대실(小貪大失)의 이기적인 태도로 이웃의 삶을 통찰하는 따뜻함 마음이 없음. ․ 어둠 : 고통스럽고 소외된 삶을 총칭 ․ 내가 어둠 속에서~웃어 주질 않았다 :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외면하며 산다. ․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 :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와 같은 의미로 추위에 떠는 사람과도 통함, ․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 : 남의 아픔을 성찰할지 모르는 애타적인 사랑을 모르는 이기적인 마음 ․ 슬픔, 기다림 :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 따뜻한 마음, 더불어 사는 것, 이웃과 불행을 나누면서 그것이 극복될 때까지 지켜보는 마음 ․ 함박눈 : 온갖 슬픔과 고통스러운 것들 ․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 너를 설득해 이 길을 같이 가고 싶다. ․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를 통해 고통을 이해하게 하고, 사랑의 참다운 의미를 깨닫게 하겠다.   ■ 맥락 읽기 1. 말하는 이는? ☞ 나(슬픔)   2. 누구에게 말하고 있지? ☞ 너(기쁨)   3. 나는 너에게 무엇을 주고 싶어 하는가? ☞ 슬픔, 기다림   4. 너는 어떤 사람이길래 그것을 주고 싶어 하는가? ① 겨울 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 귤값을 깍으면서 기뻐했다.         ☞ 이웃의 삶을 통찰하는 따뜻함 마음이 없다. ②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았다.            ☞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외면하며 산다. ③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얼어 죽을 때 / 무관심했다.         ☞ 이웃의 죽음에 냉담하다.   5. 그러면 ‘슬픔, 기다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 따뜻한 마음, 더불어 사는 것 ☞ 이웃과 불행을 나누면서 그것이 극복될 때까지지켜보는 마음   6. 나는 너에게 ‘슬픔, 기디림’을 준 다음에 또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가? ☞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 함박눈(?) ☞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하며 ☞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 가겠다.   ## 수 많은 너를 설득해 이 길을 같이 가고 싶다.   7.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일까? 제목과 관련지어 생각해 보자. ☞ 자기만의 기쁨이 아닌 이웃과 함께 하는 마음 ☞ 이웃을 아끼는 마음, 아파하는 마음 ☞ 이웃을 위해 슬퍼할 줄 아는 것.   8. 독자의 삶은 ‘슬픔’ 쪽인지, ‘기쁨’쪽이었는지 생각해 보자.   ■ 핵심정리  1. 갈래 : 자유시, 서정시  2. 성격 : 의지적, 박애(博愛)적, 설득적  3. 제재 : 슬픔  4. 주제 : 이기적인 삶에 대한 반성 촉구,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추구   ■ 이해와 감상 1   이 시는 슬픔에 대한 성찰을 통하여 이기적인 삶의 자세를 반성하고, 사랑을 위해서는 슬픔이 필요하다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노래하고 있다. 이 시에서 '기쁨'은 소외된 사람들에게 무관심한 이기적인 존재이고, '슬픔'은 남의 아픔을 보듬고 소외된 사람들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존재이다. 자신의 행복에 취해서 자신만의 안일을 위해 남의 아픔에 무관심하거나 그 아픔을 돌볼 줄 모르는 이기적인 세태를 비판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의 청자인 '너'는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일 수 있다. '모든 진정한 사랑에는 슬픔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랑은 슬픔을 어머니로 하고 눈물을 아버지로 한다. 사랑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은 바로 고통 때문이다'라고 시인은 말한다.   ■ 이해와 감상2    '슬픔'의 시인 정호승은 인간을 옹호하고 민중을 신뢰하는 낙관주의적 태도와 냉철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한 '따스한' 작품 세계를 펼쳐 준다. 그는 자신의 시를 통해 슬픔의 내용을 확장시키거나 깊게 하는 일에 몰두하는 시인으로, '슬픔'은 그에게 있어서 모든 시적 사색의 출발점이 된다. 그러나 그의 '슬픔'은 전통적인 정서인 한이나 비애의 세계와는 분명히 구분되는 것으로, 그는 이 '슬픔'을 통해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들의 아픔, 전쟁이나 분단, 독재로 얼룩진 우리 현대사의 상처까지도 끌어안고 따뜻이 위무해 준다. 이처럼 그는 현실의 모순 아래서 고통받고 있는 삶을 노래하면서도 그 삶의 미래에 대해 낙관하는 미래 지향적 자세를 보여 준다는 면에서 그를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중 시인으로 평가하는데 망설임이 없게 한다.     이 시는 그의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에 실려 있는 대표작으로, 한 시대를 살아가는 시인의 운명을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화자인 '나'로 대치된 시인은 '내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서 있다. 그는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세상 속으로 고단한 길을 떠난다.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에서 '진실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으로, 다시 '진실로 슬픔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으로 심화되는 과정을 통해 그가 그토록 기다리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슬픈 것들이 진정한 아름다움으로 빛나게 될 때이다. 이처럼 슬픔에서 아름다움을 읽어내는 시인의 밝은 눈은 자신의 '인생을 내려놓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삶에 대한 깊은 공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거기에다 '슬픔', '기다림', '아름다움'이 저녁 들길의 아름다운 풍경과 어우러져 빚어내는 고즈넉하고 쓸쓸함의 정서는 이 시를 더욱 아름다운 작품으로 만드는 원동력이 아닐 수 없다.   ■ 생각해 봅시다 1. 그러면 ‘슬픔, 기다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 따뜻한 마음, 더불어 사는 것     이웃과 불행을 나누면서 그것이 극복될 때까지 지켜보는 마음   2.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일까? 제목과 관련지어 생각해 보자. ⇒ 자기만의 기쁨이 아닌 이웃과 함께 하는 마음, 이웃을 아끼는 마음, 아파하는 마음, 이웃을 위해 슬퍼할 줄 아는 것.   ■ 수능형 기출 문제 [1~5]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가)   설일(雪日)                                      김남조   겨울 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 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나) 우리가 눈발이라면                                          안도현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든 이의 창문 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    (다)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 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1.  (가)~(다)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가), (나)에는 대상에 대한 화자의 그리움이 드러나 있다. ② (가), (다)에는 현실을 외면한 채 살아온 삶에 대한 반성적 태도가 드러나 있다. ③ (나), (다)의 화자는 더불어 사는 삶을 지향하고 있다. ④ (가), (나), (다)의 화자는 자신이 처한 현실에 단호한 의지로 대응하고 있다. ⑤ (가), (나), (다) 모두 화자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관적 인식이 드러나 있다.   2.  다음의 신문 기사 중, (다)의 화자가 비판할 만한 사회적 현실은? ① 사망한 지 3일 만에 발견된 70대 노인       ○○동에 사는 김 아무개 씨(71세)가 죽은 지 3일 만에 외판 영업 사원에 의해 발견되었다.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홀로 살던 김 씨가 노환으로 숨을 거뒀으나 평소 김 씨를 찾던 사람이 아무도 없어 김 씨는 죽은 후 3일 동안 방치되었던 것······. ② 마약이 부른 비극      ○○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인 박모 씨(23세)가 약물 과다 복용으로 목숨을 잃었다. 법관이 꿈이던 박 씨는 고시 공부를 열심히 해 오다 1년 전부터 마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 퍼진 마약의 위험성에 경종을 울리는 사건이라고들······.  ③ 과속 운전이 부른 참사      26일 오후 3시 경부고속도로에서 10여 명의 사상자를 낸 교통 사고가 발생했다. 김모 씨(48세)가 승합차를 과속으로 몰던 중 앞서 가던 승용차를 추돌, 전복되면서 뒤따라오던 승용차와 다시 부딪혀 11명의 사상자가 발생······. ④ 무면허 성형 수술로 인한 피해자 증가     최근 무면허자에 의한 성형 수술의 부작용으로 인해 병원을 찾는 이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성형 전문의 장모 씨(43세)에 따르면 그 동안 한 달에 2~3명씩 찾아오던 수술 부작용 환자들이 겨울 방학 기간이 되면서 평균 7~8명으로 늘었다는 것······. ⑤ 폭설로 인한 피해 속출      12일 현재 강원도 영동 지방에는 예상량을 훨씬 넘는 폭설로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특히 속초시는 적설량이 80cm에 달해 교통이 두절되고 일부 지역에서는 전선이 끊어져 정전 사태가 빚어지고 있다. 이는 천재지변에 대한 대비가 충분하지 못한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들······.   3 ㉮에서 영감을 얻어 와 같은 시를 썼다고 가정할 때, 고려했을 사항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 보 기 〉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① ‘삶’과 ‘사랑’을 자연 현상에 비유하여 표현하는 것은 어떨까?  ② 동일한 시어를 반복하여 힘든 현실의 모습을 표현하면 어떨까?  ③ 지나온 삶을 반성하는 내용을 추가로 삽입하는 것도 좋을 거야.  ④ 원시(原詩)에 나타난 화자의 삶에 대한 인식은 그대로 살려야겠어.  ⑤ 의문형 종결 어미를 사용하여 독자의 공감을 유도하는 것은 어떨까?    4. ㉠의 표현상의 특징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비유적 묘사를 통해 원근감을 보여주고 있다.  ② 의인화된 대상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③ 반어적 표현을 통해 삶의 가치를 드러내고 있다.  ④ 색채의 대비를 통해 선명한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⑤ 구체적 사물을 관념적 대상에 비유하여 표현하고 있다.   5.  ⓐ~ⓔ 중, 시적 이미지가 이질적인 것은?  ① ⓐ       ② ⓑ       ③ ⓒ       ④ ⓓ      ⑤ ⓔ [정답] 1.③   2.①   3.③   4.②   5.② [해설] (가) 김남조,   이 작품은 눈 내리는 어느 겨울날의 풍경을 보면서 삶의 자세를 짚어 보고 있는 작품이다. 차분하고 담담한 어조로 평소 종교적 신앙심을 생활에 연결짓고 있다. 쉽고 평이한 시어 속에 인생에 관한 관조적 삶의 태도를 느낄 수 있다. (나) 안도현,   바람 불고, 춥고, 어두운 상황 속에서 함박눈이 되고, 남에게 반가운 소식을 알리는 편지가 되고, 남의 상처를 보듬는 새 살이 되기를 소망하는 시적 화자의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 남의 상처를 덮어 주고 남의 삶을 따뜻하게 보듬고 싶은 화자의 긍정적 삶의 자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다) 정호승,   반어적 발상을 바탕으로 이웃의 어려운 사람들의 아픔에 관심과 사랑을 보일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을 갖고 살아가길 바라는 시적 화자의 소망이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1. [출제의도] 작품의 공통점 찾기 (나)는 세상의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힘이 되자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다)는 반어적 발상을 토대로 이웃의 불행에 무관심한 대상이 따뜻한 마음을 갖게 되기를 바라는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2. [출제의도] 구체적 상황에의 적용 (다)의 화자는 따스한 인간성의 회복을 통하여 더불어 사는 삶을 살자고 노래하고 있다. 따라서, 타인에게 무관심한 현대 사회의 냉정함을 비판한 ①이 가장 가까운 답이다. [오답피하기] ②는 절제하지 못하는 개인의 부덕함을, ③ 잘못된 운전 습관에 대한 비판을, ④ 무면허 의료 행위가 근절되지 않는 현실의 문제를, ⑤는 재해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한 안일함을 비판하고 있다.   3. [출제의도] 다른 상황에의 적용 의 시에는 지나온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은 보이지 않는다.  [오답피하기] ①은 ‘꽃이 흔들리며 핀다’는 대목에서, ②는 ‘흔들리다’, ‘젖다’의 시어를 반복하여 시련의 현실을 드러내고 있으며, ④는 원시(原詩)에 드러난 삶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또 ⑤ ‘있으랴’의 설의적 표현을 통해 독자의 공감을 유도하고 있다. 4. [출제의도] 표현상의 특징 파악 ‘머리채 긴’은 바람을 의인화한 것이고, ‘투명한 빨래’는 바람을 시각화한 표현이다. 따라서, ㉠의 표현상 특징은 ②가 된다.   5. [출제의도] 시어의 의미 파악 ⓐ는 힘들고 지친 사람을 더욱 어렵게 하는 존재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고, ⓑ는 어려운 사람에게 희망과 행복을 주는 존재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 ⓓ, ⓔ는 현실의 부정적인 고난을 의미한다. 따라서, ⓑ는 긍정적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있고 나머지는 부정적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또 기다리는 편지" 는 부재(不在)하는 임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는 시입니다.   또 기다리는 편지   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 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 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 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 내용연구 지는 저녁 해[소멸의 이미지]를 바라보며[시적 화자의 위치와, 쓸쓸하고 외로운 분위기를 나타냅니다.]   오늘도[지속되는 사랑]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이미 어떤 것이 포함되고 그 위에 더함의 뜻을 나타내는 보조사 '도'를 붙여 예전부터 쭉 늘 그래왔던 것처럼 오늘도 곁에 없는 그대를 사랑하였다는 말입니다.]   날 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시적 화자는 날이 저물었는데 별조차 뜨지 않는 상황에서, 임을 만나지 못하는 절망감을 자연 현상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별'은 '그대'를, 홀로 사랑해야 하는 힘겨운 상황은 '저문 하늘'이라는 시간적 배경과 호응하고 있습니다. '날 저문 하늘'이 임이 부재(不在)하는 상황을 상징한다면, '별'은 화자가 그리워 하는 임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잠든 세상 밖으로 새벽달 빈 길['그대'가 없는 외로움의 공간]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사랑과 절망이 함께 공존하는 공간]에 나가   저무는 섬(외롭고 쓸쓸하며 구원받지 못하는 운명의 이미지 / 화자의 외로움과 단절감을 극대화하는 객관적 상관물)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잠든 세상 밖으로~떠올리며 울었습니다 : 외로움과 임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전전반측(輾轉反側)했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잠든 세상 밖으로 나가 새벽 달 빈 길에 뜰' 때까지 방황했다는 것은 기다림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감정입니다. '어둠의 바닷가'는 '그대'를 만나지 못하는 절망의 공간을, '저무는 섬'은 그로 인해 외롭고 쓸쓸하며 구원받지 못하는 운명의 이미지를 지닌 화자를 상징하며 시간의 변화에 따라 감정의 기복이 '울었습니다'로 심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외로운 사람[임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기다림의 내면화를 '사라져서'라는 말로 표현]   해마다 첫눈['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에 나타난 정서를 비유적으로 형상화한 시어]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 기슭[세계와 단절된 절대 고독의 공간]에 앉아[외로운 사람들은~기슭에 앉아 : 화자와 마찬가지로 '외로운 사람들'은 첫눈 내리는 기쁨과 설레임으로 그리운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나 화자는 '섬 기슭에 앉아' 더욱 심한 고독과 그리움을 느끼게 됩니다. '새벽보다 깊은 새벽'은 새벽달이 떴을 때보다 시간이 더 흘렀음을 알 수 있는 부분으로 화자의 심리적 변화와 맞물리는 상황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오늘도(계속 반복되는 시간을 의미)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오늘도 그대를~더 행복하였습니다. : '그대'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반어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돌아오지 않는 임을 기다리는 처지를 '행복'으로 수용하고자 하는 화자의 태도가 담겨 있으며, 재회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있습니다.]     정호승 鄭昊昇 폰트확대| 폰트축소| 공유하기|   인쇄 미리보기   시대 근대 유형 인물 관련 사건 한국전쟁 출생 1916년 사망 미상 직업 시인 작품/저서 모밀꽃 성별 남 분야 문학/현대문학 요약 1916∼? 시인. [개설] 본명은 영택(英澤). 충청북도 충주 출신. [생애 및 활동사항] 1929년충주공립보통학교(현 교현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에 입학하였다.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시 좌경서적을 읽다가 발각되어 정학처분을 몇 차례 당하고는 결국 학업을 중단하고 말았다. 1935년서울로 다시 올라와 조선문학사를 열어 문예지 『조선문학』을 지봉문(池奉文)·이무영(李無影) 등과 함께 간행하였다. 사회주의 사상에 기울어져 8·15광복 직후, 남로당에 입당하였고, 남북협상차 북행하는 김구(金九)를 따라 북한에 갔다가 청주교도소에 1년간 수감되기도 하였다. 출감 이후, 줄곧 도피생활을 하다가 한국전쟁을 맞게 되었다. 그때 그는 고향인 충주에서 예술동맹위원장을 맡아 좌경활동을 하다가 월북하였다. 그의 시작활동은 1939년 조선문학사에서 간행된 시집 『모밀꽃』 이전까지 3∼4년으로 국한되며, 시집 수록분을 포함하여 40편 가까운 시작품을 지상에 발표하였다. 그의 시 대부분이 향토적 정서를 노래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고향에서 보낸 성장기의 체험과 연관된다. 그의 이런 체험이 좌익성향과 결부되어 피폐한 농촌의 현실을 고발하는 시작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향토적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이념성의 원리가 훨씬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 =========================================================== ===========================================================  정호승(鄭昊昇) 되찾기의 겉과 속       1. 실종문인, 민족적 비극의 표상       문학은 ‘개인’으로부터 그들이 모여 살고 있는 ‘사회’까지를 대상으로 하는 사회과학의 한 분야로 볼 수 있다. 본질적으로 사회적 함의(含意)를 띠고 있는 것이 문학인 것이다. 그런대 개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중단위 사회가 민족(국가)사회이다. 그래서 문학은 민족사회를 단위로 구별되어 존재한다. 민족사회는 언어, 혈통, 풍습, 정서 등이 같아서 변별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경기문학과 충청문학은 변별력이 없거나 극미하지만, 한국문학과 영국문학은 선명한 변별적 자장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민족이나 나라마다 그 문학의 특수성이 검출되는 것인데, 그것은 그들이 처한 고유한 사회·역사적 환경 때문이다. 문학은 기본적으로 민족성을 토대로 피어나는 꽃이다.   한국 근·현대문학의 특수성을 만드는 요인을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서구문화의 수용’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 수난사’이다. 전자는 주로 근·현대문학의 촉발요인으로 작용했고, 후자는 그것의 특수성을 조성하는 무거운 요인이 되었다. 그래서 ‘일제강점’과 ‘민족분단’은 한국 근·현대문학의 특수성을 강하게 통제하고 있는 두 기둥이라고 할 만하다. ‘일제강점’은 민족 주체성의 보존과 관련된 민족문학의 검증요소로서 작동될 뿐만 아니라, 민족 언어의 훼손 및 장애 문제나 검열 문제 등을 내포하면서 한국문학의 민족의식이나 고유성을 확인하는 전제가 된다. 한편 ‘민족분단’은 분단 이후와 그 이전까지도 한구 문학사를 반쪽 문학사를 만들어 놓았으며, 언제 해결될지 모르는 민족문학의 정체성(Identity)을 묻고 있다. 또한 이데올로기와 표현의 자유를 제약함으로써 한국현대문학의 깊이와 높이를 규제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한 마디로 ‘민족분단’은 한국문학의 비극적 특수성의 외연과 내포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민족 수난사’의 흐름 속에서 ‘민족분단’이라는 강물은 비극적 특수성이라는 홍수를 이루면서 민족의 보물인 작품이나 작가가 ‘실종’ 또는 ‘매몰’되는 재해를 불러와 그 비극성을 고조시켰다.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실종문인’은 그러니까 그 자체가 우리 민족문학사의 비극적 특수성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존재인 것이다. 수많은 문인이 실종되다니, 그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일일뿐만 아니라 ‘실종문인’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거나 생소할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실종문인’은 한국문학사에서 빼내지 못한 가시처럼 미해결의 문제로 아직 아프게 걸려 있는 것을.   한국문학사에서 실종문인은 월북문인을 비롯해서 납북문인, 재북문인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월북문인이다. 월북문인은 월북시기에 따라 3차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차 월북문인은 조선문학건설본부(1945.8.16 설립)와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1945.9.17 설립)이 조선문학가동맹(1946.2.)으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주도권을 상실한 카프 맹원들(이기영, 한설야, 송영, 윤기정, 안막, 박세영 등)이 월북함으로써 발생하였다. 제2차 월북문인은 1947년부터 1948년 8월 사이에 생겨나게 되는데, 이는 미군정당국이 박헌영에 대한 체포령을 발표하면서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심인물들(이태준, 임화, 김남천, 이원조, 홍명희, 안회남, 허준, 박찬모, 현덕, 김소엽, 김동석,김영건, 조영출, 조남령, 조벽암, 조허림 등)이 월북한 것을 가리킨다. 제3차 월북문인은 1950년 6.25 한국전쟁 중에 발생하였다. 서울에 남아 있던 조선문학가동맹 문인들은 이를 해체하고 사상전향을 선언한 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전향의지를 실천하던 중 전쟁이 발발하였고, 그 전쟁의 와중에서 자의 또는 타의로 북으로 향했던 것인데, 이용악, 이병철, 이선을, 조운, 김상민, 유종대, 박산운, 김광현, 박태원, 정지용, 설정식, 이흡, 김상훈, 임학수, 여상현, 임호권, 양운한, 지봉문, 엄흥섭 등 실로 다수의 문인들이 이에 속한다. 이들은 해방과 전쟁이 세상을 뒤흔드는 격동의 시기에 이중 삼중의 사상적 혼란을 겪다가 전화에서 잠시 비껴 있고자 하다가 끝내 분단의 긴 세월 속에서 역사의 고초를 한 몸으로 겪으면서 망각되고 매몰된 비운의 문인들로서 민족사의 비극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주인공들이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시인 정호승(鄭昊昇, 1916 ∼ ?)도 제3차 월북문인의 한 사람으로 고난의 문학적 생애가 매몰되었던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필자는 이 글에서 묻혀 있던 정호승 시인을 처음으로 발굴한 사람으로 그 경위와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2. 고향, 그 뽑히지 않는 마목(馬木)       시조시인 정완영은 「버꾸기 소리 떠내려 오는 시냇물에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향이란 그 사람의 가슴엔 사랑의 원류이기도 하고 눈물의 원천이기도 하고, 때로는 보이기도 하고 병이기도 하며, 버리려야 버려지지도 않는 모토(母土)인 것이며, 뽑으려야 뽑아지지도 않는 마목(馬木) 같은 것이라고. 실로 고향은 어머니와 의미 자장을 함께하는 사랑의 이름인 것이다. 그래서 고향을 떠나게 되더라도 사람들은 언제나 그 마목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인력에 이끌리면서 살아가게 마련이다. 거기에 매여 있는 마음의 고삐를 풀지 못하고 그 주위를 맴돌며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매몰되었던 정호승 시인을 필자가 찾아내게 된 것도 이 마목의 덕분이었다. 정호승 시인은 그의 작품 여기저기에 마목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단서를 남겼고, 그의 가족들은 그 마목으로 돌아와 그것을 지키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필자 또한 그 마목에 이끌려 그곳을 찾았던 것이다.   정호승 시인은 충주 지방 사람이면 금방 알 수 있는 ‘鷄足山’, ‘모시레들’, ‘彈琴臺’, ‘虎岩堤’, ‘合水머리 같은 지명들을 작품 속에 사용하였다. 그리고 ‘풀무고개에서’라고 작품을 쓴 장소를 부기한 것이 여러 편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蜘蛛峰밑 넓은들에 너울치는/ 가난한 모밀꽃 香氣를 마시고/ 아담스런 木花송이에 쌓여/ 풀무고개 기슭 오막사리 초가집 굴앙선에서도/ 북도더 키워지든 이몸이였다우(「잡스러운이몸」)’라는 구절이 있어, 그가 풀무고개 출신임을 추정할 수 있었다. 또한 ‘情겨워 뛰놀든 풀무고개(「노래를 잊은 이몸」)’나 ‘풀무고개 성황나무 가지에/ 내넋은 파랑새되여 앉는다(「故鄕을 떠나며」)’ 등에서도 이러한 사실은 간접적으로 확인되는 것이었다. 이에 필자는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창동이 정호승 시인의 마목일 것이라고 추단하였던 것이다... ===============================   호승 정영택 시비   정호승 시인의 장남인 정태준 시인의 가족들       시비 뒷면     충주시 가금면 창동리 시인의 종가 자리에 세워진 절   정경원(종조부)의 집터   가운데가 장남 정태준 시인 내외       장남 정태준 시인의 감사말씀(뒤는 사회를 맡은 시인 이석)         모밀꽃·1 -정호승   어느 女人의 슬픈 넋이 실린 양 해쪽이 웃고 쓸쓸한 모밀 꽃   모밀꽃은 하이얀 꽃 그女人의 마음인양 깨끗이 피는 꽃   모밀 꽃은 가난한 꽃 그女人의 마음인양 외로이 피는 꽃   해마다 가을이와 하이얀이 피여나도 그마음 달랠길 없어 햇쪽이 웃고 시드는 꽃   세모진 주머니를 지어 까-만 주머니 가득 하이얀 비밀을 담어놓고 아모 말없이 시드는 꽃   1937년도에 발간된 . 그런데 이 책에서 이상한 점이 있는데 목차가 없으며, 맨 뒤에 페이지도 없다. 누군가가 일부러 오려 낸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 책속에 있는 작가들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요즘 말로 하면 '빨갱이'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당시 이 책을 가지고 다니는 것조차 상당히 위험이 따랐을 것이다.  이 책 속에는 이라는 사람의 시 이 있다.     정호승. 정호승 시인하면 대부분은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수선화)의 시인을 생각한다. 서정적이면서도 가슴을 에는 시어로 팬을 확보한 시인의 명성 때문이다. 그 시인은 아니지만 같은 이름으로 시단에서 활동하던 시인이다.     충주에서 태어나 월북한 모밀꽃 시인 정호승.  월북작가라는 딱지로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진 정호승 시인은 남북분단의 비극으로 문학사에서도 철저하게 잊혀진 작가로 남아 있다. 민족의 아픔과 농민의 고난을 시로 담아낸 그의 문학정신도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묻혔던 것이다.     하지만 월북하기 전까지 시인의 발자취를 보면 결코 짧은 문단 생활이라 할 수 없다. 그는 1950년 월북 전까지 1930년대 대표적인 문예지 '조선문학'의 발행인이자, 주간을 맡아 문학 활동을 벌일 정도로 유능한 문학인이었다.     1916년 충주에서 태어난 그는 송강 정철의 13대손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1923년 충주공립보통학교(현 교현초)에 입학하였고, 서울 중앙고보에 입학해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하지만 중앙고보 시절 시인은 좌경서적을 읽다 학교로부터 정학과 무기정학을 네 차례나 받는 등 향후 험난한 앞날이 예고된다.     이후 1935년 서울로 올라온 정호승은 왕십리에서 운수사업체를 열었고, 건물 2층에 조선문학사를 옮겨 1930년대의 대표적인 문예지인 '조선문학'발간에 참여한다. 1933년 당시 유일한 문학지인 '조선문학'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기관지 역할을 담당하면서도 순수문학 작품을 게재해 우리나라 문단사에 영향력을 미쳤다. 또 시인은 이무영과 이흡, 지봉문 등 충북 출신 작가들을 조선문학에 끌어들여 문학교류를 갖는 등 지역 작가들에게도 문단의 길을 열어 주었다.     정호승 시인은 1939년 첫 시집이자 유일한 시집 '모밀꽃'을 발표한다. 가난한 농촌의 현실을 생생한 시어로 녹여낸 시어들은 일제강점기에 우리말로 펴낸 시집이란 점에서 의의가 크다. 시집 발간 이후 일본의 감찰과 원고가 불태워지는 등 고초를 겪었다.     시인의 삶은 그러나 1945년 광복을 맞으며 극명해진다. 시인에서 사회주의 사상가로 변모한 그는  '아우성'을 발간하며 사회주의 운동에 적극 가담한다.     이러한 사건들로 1946년 청주교도소에 6개월간 수감됐으며, 1948년에는 김구 선생의 입북을 따라 북행한 뒤 2차 옥고를 치렀다. 광복 공간에서 좌익 문인으로 활동했던 정호승은 1950년 6·25전쟁 중 충주지역 예술동맹위원장을 지내다 결국 월북 문인에 합류한다.     격동의 시대를 온몸으로 끌어안고 이상을 꿈꿨던 월북 시인들은 그러나 북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채 역사의 비운으로 남겨졌다. 정호승 역시 월북작가로 매몰됐다가 1980년 납·월북작가 작품 해금조치로 민족적 삶을 총체적으로 다룬 모밀꽃이 비로소 빛을 보게 됐다.                             - 오른쪽이 그의 시 이다-   그의 시 을 보자.     어제가 3분전인 이 방안에 ............................. 잊혀지지 못하는 아롱진 그날 汽笛소리에 넋을잃고 머-ㄹ리 아물아물 사러저가든 네손수건만이 --잡힐뜻--잡힐뜻-- 오--玉아! (중략) 부르릉 이를 갈며 떠는 문풍지 마음대로 안되든 내마음 같은게지 나만이 부르든 玉아! 화로불 피우든 玉아! 향기 그윽히 나붓기든 때묻은 저 이부자리우로 네 幻影만이 어른 어른 화로불이 시들어도 이부자리속이 그리 탐탁치가 않고나      위 시속에서 화자는 ‘汽笛소리와 함께 떠나간 玉’ 이를 그리워하고 있다. 이때 ‘玉’이가 ‘나만이 부르던 玉아’라는 호칭형을 통해 화자의 애인으로 추측해 볼 수도 있으나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살어갈 길 없어 용솟음치는 불안’을 통해서 바로 玉이가 가난 때문에 집을 떠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이 시속에서 ‘때묻은 이부자리’로 표상 되는데, 이렇게 막연히 집을 떠난 여성들은 당시 대부분 일본 사람들의 집에서 파출부를 하거나 접대부로 팔려갔다. 이처럼 여성의 희생과 수난은 현실극복의 한 방편이 되기도 하였으나, 이로 인해 한 존재로서의 여성들의 삶은 이중적 수난으로 매우 비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위 시속에는  ‘저’-老婆의 젊은時節이 몇分前이었든고 머지않어 내얼골도 주름질게다’와 ‘ 전력을 드린 내 소망 재가될까 두려워 몸부림친다’를 통해 현실에 대한 시인의 무력감과 이로 인한 고독을 드러내고 있다. 이때에 화자의 두려움과 고독의 정체는 다름 아닌 ‘수 없는 자신의 무능함에 대한 자책과 흐르는 시간에 대한 일종의 불안심리’라 할 수 있다. 즉 처참한 민족 현실 앞에서 방황하는 지식인 곧 정호승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의 다른 시를 보자.             뉘를 위해 아껴왔는지   싹싹 긁어뫃아야 석섬을   두섬을 짊어지고 가니   凶年이라고 두말을 감해주더라   (중략)   시선을 피해서 고개를 돌리니   옆에 있는 도야지 울엔   누룩 도야지가 길게 누워 낮잠만 자는구나   그- 욕심많은 놈이   배ㅅ대지가 여간 불러서야   죽을 저-만큼 남겼을게냐   그 놈의 배ㅅ대지   지주님의 배ㅅ대지와 흡사하다   가-마니 있자 이도야지가?   그렇지! 우리것과 한날 사왔었지-   우리새끼가 원악 적기야했지만   짐성두 먹어야 크지!   내꼴좀보지 살한점붙었나   (중략)   집에 남은 베한섬을 마저   질머지고 나오는 나의 꼴을   바라볼 식구들의 표정이   지금부터   눈에 발피구 발피구      위의 작품은 소작인과 지주를 마르고 작은 도야지와 욕심 많고 살찐 누룩도야지로 대비시키는 방식을 통해 풍자하고 있다. 시어의 선택에서도 흉년, 장리벼, 베한섬은 소작인을, 누룩 도야지는 지주로 비유하면서 식민지 현실의 모순성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다. 예컨대 지주와 일제에 의한 착취를 동질로 인식하고 라는 구체적인 대상물을 설정 풍자하고 있어 정호승 프로시세계의 특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소작인과 지주의 대립적인 관계는 식민지 현실의 피폐상을 드러내는 한 방식으로써, 당시 프로 작가들이 자주 활용한 기법이다. 달리 말하자면 일제 식민 치하에서 지주는 일본인이 대부분이었으므로 계급모순은 늘 상 민족 모순과 연계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이 시속에는 흉년들어 추수한 것 석 섬 중, 두 섬을 지주에게 바치러 가는 소작인의 비애가 ‘벼한섬 마저 짊머지고 나오는 가장을 바라보는 식구들의 얼굴 표정’에서, 그리고라는 반복어를 통해 극대화되고 있다.      오늘은!   독사뱀 아가리로 들어간 개고리는 몇 마리   독수리가 채간 병아리는 몇마리   쏟아저나온 내피땀은 몇섬이나 될것인고?   집에서는 지금쯤   죽먹기 싫다거니   보리밥을 달래거니   칭얼대는 자식놈이 발버둥을 칠때다   (중략)   아침에 죽한그릇   점심에 간신히 막걸리 한사발   (그것도 권승지네 김밭에서 春奉아범 덕택으로 얻어 마신 술이다)   새이도 못 먹고 단마지기 김을 매다니   참! 내힘두 어지간하다.   폭이폭이 밴 내精力 내피땀   무럭 무럭 자라도   그리 신통치 않을 것을 번연히알면서   來日은 또 서낭당이 서속밭을 매야만하나?       위 작품도 앞에서 논한 시와 형상화 방식에서 많이 닮아있다. 독사뱀․개고리․독수리․병아리․죽․보리밥․하나 남은 박아지․죽 한 그릇․막걸리 한사발 등의 시어는 당시 피폐한 민중의 생활상과 착취계급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독사뱀과 독수리는 악랄한 지주와 일제를 상징하고 있으며, 개고리와 병아리는 민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병아리나 개고리가 독사뱀과 독수리에게 무력하게 당하고 마는 상황 역시 일제치하에서 우리민족이 당하는 수모와 피탈을 의미한다.     이 시인의 작품은 거의 다 위와 같다.     그런데 이 시인의 시를 보면 마치 1960-1970년대를 보는 것 같다. 어쩌면 한결같이 똑같은지 모른다.     일제시대와 박정희정권. 말만 바꾸어 놓은 듯하다. 그래서 이 시인의 시를 보면 등을   보는 것 같다.     들키면 영락없이 감옥으로 가기 때문에 표지를 띁어내고 다른 종이로 싸서 다닌 것도 똑같다.     지금 그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가? 그들 역시 어짼가는 잊혀져 지는가?     남북분단의 비극으로 역사 소용돌이에 묻힌 정호승시인. 안타까울 뿐이다. 그리고 반드시 재조명 되어야 하리라. 통일이 되어야 할 이유이다. ==============================    아버지와     ​ ​ 모밀꽃 1 ​               정호승鄭昊昇 ​ ​   어느 女人의 슬픈 넋이 실린양 햇쪽이 웃고 쓸쓸한 모밀꽃   ​ 모밀꽃은 하이얀꽃 그 女人의 마음인양 깨끗이 피는꽃   ​ 모밀꽃은 가난한꽃 그 女人의 마음인양 외로이 피는꽃   ​ 해마다 가을이와 하이얀이 피여나도 그마음 달랠길없어 햇쪽이 웃고 시드는꽃   ​ 세모진 주머니를 지어 까 - 만 주머니 가득 하이얀 비밀을 담어놓고 아모말없이 시드는꽃     ​ ​ ​   위의 詩는 1939년 社에서 출간한 아버지의 시집 에 실린 작품이다. 모밀꽃1, 모밀꽃2 연작시로 되어있다. 1992년 이른 봄, 아버지의 시집을 처음 대하고 몇 날을 울다가 모밀꽃1, 모밀꽃2에 曲을 붙였다.   모밀꽃1은 전 어머니 江陵崔氏에 대한 아버지의 애절한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모밀꽃2는 나라를 빼앗긴 백의민족의 보편적 통한이 가득 배어있는 詩다. 다음 기회에 詩와 曲을 올리려고 한다.     ​   전 어머니 江陵崔氏가 그렇게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왕십리에 차렸던 경충무역사와 社를 정리하고 낙향을 하였다. 1937년 8월부터 1939년 지봉문池奉文이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되어 속간할 때까지 을 휴간하게 된 연유다.   열아홉 살에 결혼을 하여 병치레로 합방도 못하다가 겨우 서울살림 몇 달 만에 그리 사별을 하였으니 아버지의 심정이 어땠을까 생각을 하니 가슴이 저리다. 소생이 있을 리 없다.     ​ ​                   무지개 ​                              정호승鄭昊昇 ​ ​산삼꽃 향기로운 / 저 - 산말냉이에 / 무지개 박었다 하기로 / 내 그곳을 찾어갔소 / 아아 ! / 꼬리를물은 산봉오리만 / 숨막킨 눈알을 볶어댈뿐 / 무지개는 나를 피해 / 저 바다복판으로 옮겼구나 / 산삼마저 뽑어가지고 갓기에 / 기 - ㄴ 한숨 박어놓고 / 타박 타박 / 내 흐느껴울며 도루왔소   ​ ​   그 당시의 아버지 심사가 잘 나타나는 詩다. 시집 에 실려 있다. 통곡을 하고 싶은 현실을 詩 창작으로 겨우겨우 달래며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지나던 어느 봄날, 아버지는 엄마를 만난다. 경성사범을 갓 졸업하고 (現) 충주교현학교로 첫 발령을 받고 온 엄마였다. 1938년 봄날이었다. ​     - 송강 정철 13대손임   가끔 현재 시창작활동을 왕성하게 하고 있는 정호승의 아들이냐고 반갑다고 인사하는 전화가 온다. 정호승 시인은 나보다 젊은 사람이다. =============================================== ​                  등 주옥같은 시와 동화를 쓰고 있는 1950년생의 시인 정호승(鄭浩承) 선생이 있다.   하지만 같은 1950년 우리 문학사에서 자취를 감춘 충주 출신의 월북시인 정호승(鄭昊昇-본명: 정영택(鄭英澤) 선생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16년 충주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을 가 중앙고보에 입학하였으나 재학 중 좌경 서적을 읽다 정학, 무기정학을 연이어 당하고 퇴학한다. 이후 약관의 나이인 1935년 '조선문학사' 발행 및 편집인으로 2년 간 활동하기도 했던 정호승 선생은 24살이 되던 1939년 시집 을 조선문학사를 통하여 출간하기도 했다.   이후 동아일보, 조선문학, 시건설, 자오선, 풍림 등에 시를 꾸준히 발표하였고, 해방 직후 좌익 활동으로 복역을 하기도 했다. 1948년(33세)에는 남북협상을 위해 노력하던 김구 선생과 동행하여 북에 갔다가 돌아와 2차 복역을 하기도 했다. 전쟁 중이던 1950년에 충주지역 예술동맹위원장을 역임하다가 월북한 인물이다.   현재 그의 가족은 충주와 청주 등지에서 살고 있으며, 1968년 북한의 모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듣기는 했지만, 확인된 바 없다.   그의 시집 은 출간 56년이 흘러 도서출판 온누리에서 1995년 재출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진대 국문학과 서범석 교수의 연구결과와 시인 도종환 선생의 도움을 받아 재출간되었다.   시인 정호승인 1930년대 한민족의 현실을 특유의 서정성과 사회적 현실성으로 묶어 꽃피워 낸 시인, 약관의 나이에 '조선문학'의 발행인 겸 편집인을 역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문학사에서 이름이 사라진 이유는 작품을 많이 발표하지 않았고, 월북을 한 관계로 신상이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례로 1974년 서울대 동아문화연구소에서 발간한 에도 '조선문학'은 창간초기 중국인 정호승이 발간했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그의 대한 정보는 잘못된 것이 많다. 또한 일제의 탄압과 해방 직후에도 좌익 활동을 꾸준히 한 관계로 소실된 원고가 많다는 것도 그 이유 중에 하나이다.                 정호승 시인의 시집 (도서출판 온누리)에서 압권은 제목도 없는 4줄짜리 서시이다.   나는/들 가온데 외로이 선 허수아비/소슬바람에 풍겨오는/메밀꽃 향기를 사랑한다   시인은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고독한 지식인의 모습.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자신의 모습에 자조하고 자탄하며 스스로를 허수아비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심약하고 고독한 시인은 소박하고 순결한 꽃향기를 품고 살고 싶어 하는 희망의 모습을 품고 있기도 하다.   까닭모를 슬픔이/따스한 봄위에 차다//숨끼만하는 수집은 이乳房이/진달내 꽃까지 받어들고/바르르 떨기만 하노니//연못가에 수양버들/매디 매디 호들기여/행여나 어린꿈을 바숴놓지 마옵소.               호들기여(전문)   꽃다운 처녀에게 봄은 아직도 슬프다. 처녀의 가슴엔 진달래가 피었다. 지나가는 나그네여 숫처녀 가슴 울리는 버들피리는 불지마라.                                 어느넋의 슬픔이기에/이리도 구슬피 흐느끼느뇨//방안에 가득 초ㅅ불이 차듯/빗소리 가득 뜰에 차고/내마음에 차고//무슨傳說의 토막인양/머-ㄹ리 캉캄한 어둠속으로/반디불 깜박 호들기소리 잇겨/-太古속으로/뱅고름이 피여나는 동백꽃-//초마끝 낙수물 똑. 똑./잃어진 수집음이 문득 그리워/눈망울이 매끈히 젖고//아지랑이의 슬픔 촉촉이/햇쪽이 웃고 돌아서는 머리채로/서글피 도사리는 밤이다.            봄비나리는밤(전문)   시인의 봄비 내리는 소리를 구슬피 우는 소리라고 말하고 있다. 잔잔히 들려오는 낙수물 소리가 내 마음에 차고 가슴에서 넘치는 슬픔으로 다가온다. 나는 빗소리에 눈물 흘리며, 밤잠을 설친다.                              요  죄많은 꽃아/고  해맑은 눈초리로/왜  햅필 이가슴에다/빩안 생채기를 내여놓는단 말이냐//내  속사랑을 아서가겠거든/조꼼도 남기지말고/나  몰내 싹싹 핧어가든지//요  서투른 도적아/고  볼우물에 고힌 웃음으로/선불만 질너놓고 어찌하겠느냐?//왜  대답이없느냐?/어찌하겠느냐?/요  서투른 도적아........               서투른도적아(전문)                    예쁘지만 3~4일 밖에 가지 않는 꽃을 두고 서투른 도적이라고 표현하는 시인의 글 솜씨가 대단하다. 첫사랑처럼 마음 설레게 하는 꽃들이 피고지면서 나의 마음에 선불만 지피고 떠난다.                                                                해마다 봄이오면/나는/한가지 꽃을 피우기위하야/만가지 잡초를 솎어왔소.//그러나/아!/꿈심은 터전엔/회오리바람도 잦었소.//뜯맞는 벗들은/生活이 아서가고/사랑은/生活아닌 生活이 짓밟었소.//이해도 벌서/봄이 왔나보오/저 들창문을 닫어주오/호들기소리 듣기싫소.//알알의 슬픔을 색인/슬픈 마음의 墓誌銘은/푸른술로 달내주어야하오.//女人의 때묻은 속옷/한떨기꽃인양/내 나비되면 고만아니겠소.//나는 외로운 蕩兒/나는 마음弱한 蕩兒/술과 게집과 그리고/한가닥 담배연기를 사랑하오.      나는蕩兒(전문)   식민지 지식인의 아픔과 슬픔을 그대로 표현한 것 같은 작품이다.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현실과 한 가지 꽃을 피우기 위해 만 가지 잡초를 솎아내었던 자신의 무능력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꿈도 희망도 없는 현실 속에서 술과 담배, 여자로 허송세월을 하고 있는 지식인의 모습을 질타하고 있는 듯하다.               山蔘꽃 香기로운/저 - 山말냉이에/무지개 박었다 하기로/내 그곳을 찾어갔소//아아 !/꼬리를물은 山봉오리만/숨막킨 눈알을 볶어댈뿐/무지개는 나를 피해/저 바다복판으로 옮겼구나//山蔘마저 뽑어가지고 갓기에/기 - ㄴ 한숨 박어놓고/타박 타박/내 흐느껴울며 도루왔소                무지개(전문)   희망과 무지개를 찾아 떠났지만, 눈앞에 잡힐 것 같은 무지개는 다가설수록 멀어지고 한숨은 두고 돌아오면서 새로운 희망을 찾는 내일을 그리고 있는 듯하다.   어느 女人의/슬픈 넋이 실린양/햇쪽이 웃고 쓸쓸한/모밀꽃//모밀꽃은/하이얀꽃/그女人의 마음인양/깨끗이 피는꽃//모밀꽃은/가난한꽃/그女人의 마음인양/외로이 피는꽃//해마다 가을이와/하이얀이 피여나도/그마음 달랠길없어/햇쪽이 웃고 시드는꽃//세모진 주머니를 지어/까 - 만 주머니 가득/하이얀 비밀을 담어놓고/아모말없이 시드는꽃          모밀꽃,1(전문)   슬픈 여인의 모습을 한 모밀꽃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시인 정호승의 서정성과 목가적인 향취를 느낄 수 있다.   올해 같이/가무는 해는/들에 가 - 득/모밀꽃이 피여나//모밀꽃이/많이 피는해는/마음이 가난하고/나라가 가난하고//올해 같이/목마른 해는/젊은이 가슴가득/모밀꽃이 피여나//모밀꽃이/많이피는해는/마음이 가난하고/나라가 가난하고//하이얀 메밀꽃을/위로해 주지못하고/주머니 가득/하이얀 비밀을/어루만저 주지않어//몇해만큼 한번씩/들에가득/마음에 가득/모밀꽃이 피여나기 위하야//날은 가물고/목은 마른다.            모밀꽃.2(전문)   전편과는 달리 가난한 농촌의 현실과 힘없는 나라의 모습을 모밀꽃을 통하여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날이 가물고 목이 마른 당시 조선의 현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뉘를위해 아껴왔는지/싹싹 긁어뫃아야 석섬을/두섬을 짊어지고가니/凶年이라고 두말을 減해주더라//今年같은해/農事 참 잘되었다구/연방 치하도 하고/장예벼나 속히가주오라구/命令詞를 붙이는 地主님/눈초리도 음침하다//視線을 피해서 고개를돌리니/옆에있는 도야지울엔/누룩도야지가 길게누워 낮잠만자는구나/그-욕심많은 놈이/배ㅅ대지가 여간 불러서야/죽을 저-만큼 남겼을게냐/그놈의 배ㅅ대지/地主님의 배ㅅ대지와 흡사하다//가-마니있자 이도야지가?/그렇지! 우리것과 한날 사왔었지-/우리새끼가 원악 적기야했지만/짐성두 먹어야크지!/내꼴좀보지 살한점붙었나//말해야 所用없을줄 짐작은하면서/延期해달란게 나의불찰일가?/안된다면 그만이지/눈을 그렇게 흘겨뜨고/소리소리 지를게 뭬-람//집에남은 베한섬을 마저/질머지고 나오는 나의꼴을/바라볼 식구들의 表情이/지금부터/눈에 발피구 발피구//         - 풀무고개에서                 소작인(전문)                        앞에서 선보인 시인의 시와는 전혀 다른 형식과 내용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지주와 소작인 그리고 소작인이 키우는 돼지를 통하여 나라 잃은 백성 가운데 특히 소작인의 아픔과 슬픔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어쩌면 소작인 보다 마음이 편할 것 같은 소작인의 돼지가 부러운 날이다. ======================================================     아버지와     ​ ​   아버지(鄭英澤)는 1916년 1월 5일 충주군 충주읍 교현동 420 번지에서 3남 1녀의 맏이로 태어났다. 序一은 前 忠南知事 성락서成樂緖에게 시집 간 고모 정기택鄭基澤이고 序二가 아버지 정영택鄭英澤이다. 序三은 남동생으로 정구택鄭龜澤, 序四도 남동생으로 정규택鄭奎澤이다. 아버지와 고모는 여덟 살 차이가 난다. 그 사이에 둘을 잃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1924년 아홉 살에 (現)충주교현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서당과 유치원을 다녔다고 학적부 입학전경력入學前經歷 난에 기록되어 있다. 가장 잘 하였던 과목이 가창歌唱(음악)이다. ​   ​   아버지는 교현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중앙고보에 들어갔다(1930년). 열다섯 살이었다. 그 당시에는 내외에서 일본에 조직적으로 항거를 하기 시작하였고 특히 전 해(1929년)에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의 여파가 전국 각지에 퍼지고 공산주의로 이론 무장을 하여 항거가 심화되던 시점이었다. 교현학교 입학 전에 서당과 유치원을 다녀 동학년생 보다도 한두 살 위였던 아버지는 조숙하였던 모양이다. 학업보다는 사회의 흐름에 촉이 쏠려 좌익 서적을 탐독하였다. 2학년이 되면서 정학을 반복하다가 기어이 퇴학을 당하고 말았다. 일본에 항거하는 이론 무장이 공산주의였기 때문에 좌경화 되어가는 아버지를 그냥 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충주로 내려왔다. 서울로 올라갈 때는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이였지만 퇴학을 당하고 고향으로 내려올 때는 좌경화된 청년이 되어 있었다.   ​   고향에 내려와서는 음성의 이무영李無影과 충주 신니의 이흡李洽, 충주읍내의 지봉문池奉文 등의 문인과 어울리면서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1932년 아버지가 열일곱 살 때였다.     ​   1933년 10월에 이무영李無影, 이흡李洽, 지봉문池奉文과 아버지 정영택鄭英澤은 편집인에 지봉문池奉文 발행인에 이무영李無影으로 일제강점기 유일한 종합문예지 조선문학朝鮮文學을 창간 한다. 칠백석지기 재산이 진외가 쪽으로 많이 흘러 들어가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재산마저 바닥이 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계기가 된다. 조선문학朝鮮文學을 창간하는데 아버지가 재정을 도맡았기 때문이다.       1934년에 江陵崔氏와 결혼을 하였다. 내게 전 어머니다. 열아홉 살 때였다. 江陵崔氏 전 어머니는 함월涵月 최응성崔應聖의 후손으로 충주 살미가 친정이다. 지금은 충주댐에 수몰되어 살던 곳을 찾을 수 없고 다만 살미에 있었던 함월涵月의 옛집이 수안보 가는 길가로 옮겨져 그 자취만 느낄 뿐이다.   아버지는 결혼을 하고서 폐결핵을 앓았다. 아버지는 체구가 가냘펐다. 교현학교 학적부에 의거하면 1학년 때는 영양상태가 甲이었는데 6학년 졸업 할 때는 乙이었고 척추도 5학년 때까지는 정상이었는데 6학년 졸업 때는 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 열두 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서는 어린 나이에 감당키 어려운 부친과의 사별이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하였다. 서울 중앙고보에 들어가서도 학업에 열중하지 못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어 문학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 그 당시 文人들의 염세적 자학적 생활을 아버지도 뒤따르지 않았을까 싶다. ​  할머니는 아버지와 전 어머니 江陵崔氏를 떼어 놓았다. 같은 방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할머니의 지극정성(?) 덕분에 아버지의 폐병이 완치되었다. 거의 1년만이었다.   ​   1936년 이무영李無影은 조선문학朝鮮文學을 떠났다. 좌경화된 文友 이흡李洽, 지봉문池奉文, 아버지 등과 조선문학朝鮮文學이라는 같은 공간에서 더 이상 문학 활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친일파가 되어 있었다.   이무영李無影이 조선문학朝鮮文學을 떠나자 아버지가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되었다. 할머니를 설득시켜 전 어머니 江陵崔氏와 서울로 이사를 갔다. 왕십리에 2층집을 얻어 위층은 조선문학朝鮮文學을 아래층은 경충무역사京忠貿易社를 차려 운수업을 하였다. ​   세상물정 모르는 아버지가 운수업을 제대로 꾸려나갈 리가 없었다. 거기에다가 조선문학朝鮮文學을 편집, 발행하면서 밑빠진독에 물붓기로 들어가는 돈을 감당하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이제 충주에는 팔아서 현금화시킬 땅도 바닥이 난 상태였다. 전 어머니 江陵崔氏는 시집올 때 지니고 온 금비녀며 금반지며 값나가는 노리개 등을 있는대로 다 내다 팔았으나 더 이상 지탱하기가 어려웠다. 12월 한 겨울 어느 날 전 어머니 江陵崔氏가 생목숨을 하였다. 우리집에 대를 이어 내려오는 비극이었다. =============================================    아버지의 좌익 思想과 活動   ​ ​   아버지의 좌경화 사상은 중앙고보를 다니면서 부터였다. 중앙고보에 입학하던 해인 1930년은 1929년의 광주학생사건에 이어 평양 숭실전문학교의 만세 시위, 한용운의 항일비밀결사 卍黨이 결성 되는 등 항일 운동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간도의 공산당사건에서는 40명이 처형되기도 하는 시국이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아버지는 일찍이 공산주의 서적을 탐독하게 되었고 점차 사상도 좌경화되기 시작하였다. 학교에서 금하는 서적을 읽으면서 정학과 무기정학이 반복되다가 결국에는 퇴학을 당하면서 아버지의 좌익사상은 차츰 굳어져갔다. ​   중앙고보를 중퇴하고 충주로 내려와 고향의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사유思惟의 폭이 넓어지고 깊어졌다. 특히 함께 문학활동을 하였던 이흡李洽은 아버지에게 문학뿐만 아니라 사상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흡李洽도 좌경화된 문인이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 당시의 많은 지식인이 그랬듯이 아버지도 反日의 수단으로 좌익사상이 선택되어졌고 이는 친일파가 된 이무영李無影과 소원해지는 원인이 되어 함께 창간하였던 에서 이무영이 손을 떼는 상황까지 가게 되었다. 아버지와 이무영李無影과의 관계는 거기까지였다. ​   중앙고보 학생시절에 이어 왕십리에서 경충무역사와 조선문학사를 운영하던 아버지의 두 번째 서울 생활도 전 어머니 강릉 최씨가 그렇게 돌아가시자 낙향으로 이어졌다. 엄마와 결혼을 할 무렵에는 아버지의 좌익 사상은 이미 확고해졌을 때다. 수시로 고등계 형사들이 들락거리자 엄마는 좌익 서적과 아버지의 詩 원고들을 이리저리 숨기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급기야는 詩 원고 보따리를 몽땅 태우기도 하였다. 아버지의 한창 무르익었을 思惟의 詩가 한순간에 한줌의 재로 변하였다. 아버지의 시집이 한 권뿐인 연유다.   ​   아버지는 달래강 건너의 고향 창골에 자주 들렸다. 참판공의 집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창골에 야학방을 차려 글을 가르쳤다. 시집 에 실린 -내누이-라는 제목의 詩에 언뜻 내비치기도 했다. ​   - 전략 - 이제 앞으로 석달 夜學방 先生님 쇠돌이가 나오면 또 夜學방을 차리겠지 나도 너도 粉이도 가갸 거겨 고교 구규 나냐 너녀 노뇨 누뉴 - 후략 - ​     아버지가 야학방을 차려 동네 청년들을 가르치는 것을 보아서 그랬는지 엄마도 야간학교를 차렸다. 먼 훗날 이야기다. 지금은 세종시가 된, 그 당시의 행정구역으로 충남 연기군 금남면 대평리에 살 때다. 내가 금남초등학교 육학년 때 엄마는 가정과 선생으로 금호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엄마는 대평리 국도 변에 있는 교회를 빌려 학업을 계속하지 못 한 그곳 청년들에게 중학교 과정의 영어와 수학을 가르쳤다. 강사는 같은 학교에 근무하던 선생님들에게 부탁을 하여 봉사하였다. 그러나 그 야학당은 일 년도 못 채우고 엄마가 좌익운동을 한 아버지에 연좌되어 저 멀리 태안중학교로 쫓겨 가면서 문을 닫았다.   ​   해방이 되고서 좌와 우가 남과 북에서 신탁信託 반탁反託으로 격렬하게 대립하던 1946년 아버지는 좌익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2년을 선고 받고 청주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6개월만에 풀려나는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 조선 총독부의 고등계 형사들이 해방이 되면서도 대부분 그대로 경찰의 대공 분야를 맡고 있어 강점기 때부터 쫓아다녔던 그들이 아버지를 그냥 놓아둘 리는 없었다. 결국에는 1948년 김구 선생의 남북협상 차 월북하는 대열에 합류했다가 다시 체포되어 2차 옥고를 치렀다.   ​   출옥 후 아버지는 엄마가 복직하여 근무하고 있던 김천의 직지국민학교(옛 경북 금릉군 대항면)가 있는 마을로 오셨다. - 엄마의 친정이 경북 금릉군 구례실이라 경북에서 복직을 신청하여 직지국민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   1948년 가을, 하루는 아버지를 찾아온 손님 사이에 끼어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아버지와 그 손님은 참으로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의 그 손님이 50여년이 흐른 어느날 내가 살고 있는 충주 창골로 문득 찾아왔다. 월북작가들의 작품이 해금되고서 아버지 이야기가 신문과 방송을 타면서 수소문 하여 찾아온 것이다. 이정기李廷基 국민대 영문학과 교수였다. ​  그때 그 손님이었다. 아버지와 오래도록 이야기 나누던..... 문학과 사상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다. 말로만 연좌제 폐지지 완전히 연좌제가 없어진 것은 아니니까 언행을 조심하라고 했다. 일제의 잔재가 아직 도처에 남아있다고 했다. 지금도 당신은 사찰 대상이라고도 했다. 아버지와 만난 다음 해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영어 영문학과에 입학하였다고 했다.   내가 아버지를 본 것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처음인 것은 해방이 되면서 좌우 대립이 극에 달하자 아버지는 충주 고향을 떠나 이리저리 피신을 하였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서른세 살 나는 다섯 살이었다. ​     1950년 6.25가 발발되면서 남한이 아래로 밀려 내려가자 아버지는 충주로 들어가 충주지역의 예술동맹위원장을 맡아 활동을 하였다. 다시 남한이 북으로 밀고 올라가면서 아버지도 충주를 떠났다. 월북을 하였다고 했다. 끝에 삼촌(鄭奎澤)도 형님 따라 간다고 떠난 후 행방불명이 되었다.   1980年代 중반이었던지 싶다. 일가 중의 어느 한 분이 6.25때 월북하였다가 간첩으로 남파된 후 전향한 충주의 어느 사람에게 아버지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함께 월북을 하던 도중 아버지가 각혈을 하였다고...... 아마 살아있지 못했을 거라고.... 전에 앓았던 폐병이 재발 되었던 모양이다.   ​   중앙고보에 진학하면서 접한 좌경서적을 탐독하면서 反日의 수단으로 좌경화가 되기 시작하였고 문학을 접하는 과정에서 연배의 이흡李洽의 영향으로 문학과 좌익사상이 깊어졌다. 일제강점기 내내 고등계 형사들의 감시 대상자로 이리저리 피신을 하면서 단순 이론의 좌익사상은 점점 행동화가 되었다.   해방을 전후해 좌우 대립이 극대화 되면서 민족주의적인 아버지의 좌익사상은 점점 빨갱이(?)로 몰려가기 시작하여 끝내는 6.25를 전후해 월북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두 번이나 옥고를 치루었고 좌익사상적 색채가 짙은 ‘아우성’我友聲이라는 동인지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월북하는 도중 전에 앓았던 폐병이 재발되면서 각혈을 하였다. 아버지는 그렇게 한 삶을 마치셨다. 서른다섯 살이었다. =========================================       모밀꽃으로 다시 핀 아버지의 思想 ​ ​ ​   모밀꽃 2 ​ ​   올해 같이 가무는 해는 들에 가 - 득 모밀꽃이 피여나   ​ 모밀꽃이 많이 피는해는 마음이 가난하고 나라가 가난하고   ​ 올해 같이 목마른 해는 젊은이 가슴가득 모밀꽃이 피여나   ​ 모밀꽃이 많이 피는해는 마음이 가난하고 나라가 가난하고   ​ 하이얀 모밀꽃을 위로해 주지못하고 주머니 가득 하이얀 비밀을 어루만저 주지않어   ​ 몇해만큼 한번씩 들에가득 마음에 가득 ​모밀꽃이 피여나기 위하야   ​ 날은 가물고 목은 마른다.   ​ ​   일제 강점기 아버지의 좌경화 되었던 사상의 흐름이 어디로 흘러갔는지 잘 나타난 詩다. 아버지의 대표시라고 할 수 있는 모밀꽃1과 모밀꽃2는 모밀꽃이라는 동일한 사물을 표현의 소재로 삼으면서도 그 지향하는 사유의 길은 전혀 다르다. 모밀꽃1은 사연을 품고 먼저 간 전 어머니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삶의 한 폭의 수채화였다면 모밀꽃2는 일제 강점기 막막한 현실 앞에 홀로 서있는 창백한 詩人의 절규라고 할 수 있겠다. 아버지 시집 의 序言的 詩에 그 외로움이 짙게 풍긴다. ​ ​   나는 들 가온데 외로이 선 허수아비 소슬바람에 풍겨오는 모밀꽃 향기를 사랑한다     ​ ​   따스한 봄날 자는 듯 그렇게 떠나고 싶다던 엄마는 엄동설한에 설을 며칠 앞두고 가셨다. 버적! 문지방 앞에 놓아진 바가지를 깨고 꽃상여에 실려 가시던 날 눈발이 풀풀 날리는 하늘에 오색 해무리가 둥그렇게 꽃상여 위에 떴다. 아버지 지석도 엄마와 함께 꽃상여에 모셨다. ​       무 덤   ​ ​ 언 땅 파고 어머니 묻었습니다 ​풀풀 날리는 눈발 섞어 꼭꼭 묻었습니다 ​ 아무도 보아줄 이 없는 고운 옷 처음으로 입혀드리고 고이고이 묻었습니다   ​ 사람이 그립다고 하시던 어머니 홀로 남겨 놓고 떠나왔습니다 ​ 행여 북풍에 웅크리실까 이엉 엮어 덮어드리고 떠나왔습니다   ​ 가던 길 되짚으며 허이허이 돌아왔습니다 ​ ​ ​       어머니   ​ ​ 나를 낳으시고 양식 떨어져 쌀 서 말 구해 이고 오시다 삐꺽한 허리 지금은 땅에 더욱 가깝고 멀쩡하시다가도 들어가면 끙끙 앓는 소리 내시는 나의 어머니 -그게 싫어 못 들은 척 방으로 내빼고-   ​ 아버지 詩想 찾아 理念 따라 北으로 가신 후 우리 사 남매 치마폭이 너무 좁아 다 감싸 키우지 못하시어 작년엔 큰 누나 올핸 작은 누나 외갓집 떼어 놓으시고 호롱불 불빛에 눈물 언뜻 비치시던 우리 어머니   ​ 동생 업고 내 손 잡아끌고 달래강 철교 쫓기듯 건너 忠州를 떠나시던 밤도 오늘처럼 이렇게 달이 밝았단다   ​ 인민군 학교 싸이렌 떼어가는 걸 추풍령 철로까지 쫓아가시어 다시 빼앗은 겁도 없으시던 直指국민학교 女선생 우리 어머니   ​ 어느 한날 밤 설쳐 뒤척이시다가 金泉 시내 나가신 후 커다란 보따리 구멍가게 벌여 놓으시고는 한 달도 못가서 문 닫으신 경상도 말투와 충청도 말투를 어울러 쓰시던 어머니 늘 ‘가고파’ 노래를 부르시고   ​ “남편복 없는 내 팔자 무슨놈의 자식복......” 한탄 소리에 가슴 답답하던 어린 기억 남겨 놓으신 나의 어머니   ​ 젖가슴 만지려고 동생과 서로 밀어내기하던 기억조차 없으면 女人일 것 같지 않은 지금은 젖무덤 흔적도 없어져 ​ 귀 밑으로 곱게 흘러내리던 까만 머리 엉클어진 백발 콧등이 시큰 눈물이 솟다가도   생트집 소리 꽥 지르실 땐 정내미 뚝 떨어지는   ​ “내가 이눔의 집구석에 와서......” 내뱉으시던 恨도 이젠 들어볼 수 없고   ​ 봉당마루 양지쪽 쪼그리고 앉아 詩想 따라 理念 따라 北으로 훌쩍 떠난 아버지 뒤를 쫓고 계실 우리 어머니 ​ ​ ​ ​     아버지   ​ ​ 보이소 누굴 찾능교   누구예 그런 사람 없는데예   ​ 아 - 뭐 - 詩 쓴다고 가슴앓이하던   ​ 그 사람 떠난 지 오래 됐심더   뭐라카더라 자기는 없어진 사람이라 카면서 떠났다는데예   ​ 어디예 빈손으로 갔다캅니더 연필 한 자루 종이 한 장 들지 않고 맨손으로예   ​ 아마 다신 안 올 겁니더 못 올 겁니더   모르겠심더 어디로 갔는지   ​ 그냥 그렇게 떠났심더 ​ ​ ​         이제 나의 家門, 家族史를 마무리 지어야겠다. 조선 개국부터 구한 말, 일제 강점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부지런히 달려왔다. 오늘이 3.1절 날인데 아직 바람은 차다. ​   - 終 - ​ ​ ​ 비(紙碑)와 석비(石碑)       지비(紙碑)와 석비(石碑)     리 헌 석 (문학평론가)     우리 겨레의 암흑기였던 일제시대에 우리 언어를 지키며 문학활동을 한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좋을 독립운동이다. 언어가 겨레의 얼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일임을 상기할 때, 우리 언어를 예술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문학 창작은 그야말로 경탄할 일이다.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한 분들이 어디 한두 분이시겠는가? 그러나 아직도 기억 속에 묻혀 현창(顯彰)하지 않은 분들이 있다는 것은 후예들의 부끄러움이다. 이러한 부끄러움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하여, 2013년 5월 25일에 호승 정영택(鄭英澤) 선생의 시비를 사단법인 문학사랑협의회에서 건립하였다. 선생의 향리인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창동리에 건립한 시비는 크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지만, 우리들의 작은 사랑과 존경과 정성의 표징이다. 선생의 장남 정태준 시인과 상의하여 시비 전면에는 「모밀꽃 2」를 새겼다. 정태준 시인은 저명한 작곡가로, 고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추심’이 수록되었으며, 충주여자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을 한 분이다. 고향 야산의 능선에 부친의 시비를 세우며, 그는 얼마나 가슴이 먹먹하였을까? 가슴 속에 남았던 회한이 어느 정도 씻겨졌을까? 그의 눈빛을 보면서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늦었다고 생각하고 그 사업을 접는 것보다는, 실천하여 우리의 존경을 현창하는 것이 소중하다. 마음으로 존경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작은 일이라도 현실에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도와주신 분들의 정성에 고마운 인사를 드리며, 시비 후면에 새긴 ‘건립기’를 밝힌다.   정호승(鄭昊昇) 시인의 본명은 영택(英澤)이시다. 조선조 공신이며 문인이셨던 영일인(迎日人) 송강(松江) 정철(鄭澈) 공(公)의 후손이시다. 1916년 충주 교현동 420번지에서 부(父) 정운익(鄭雲益), 모(母) 전의이씨(全義李氏) 슬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성장하셨다. 향리(鄕里)에서 충주공립보통학교(현 교현초등학교)를 졸업, 서울에 유학하여 중앙고보에서 수학하다가 중퇴하고, 이무영 이흡 지봉문 선생 등과 문학 운동을 하셨다. 1935년 《조선문학(朝鮮文學)》의 주간(主幹)과 발행인(發行人)으로 일제시대(日帝時代) 민족예술의 암흑기에 문학의 촛불을 밝히셨다. 1939년 시집 『모밀꽃』을 발간하신 후, 신문학 여명기에 헌신적으로 창작 및 활동을 하시다가, 6.25 민족전쟁 중에 행방불명이 되셨다. 선생의 문학사적(文學史的) 공로를 선양(宣揚)하고 계승(繼承)하며, 순정(純正)한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이 자리에 비(碑)를 세운다. 2013년 5월 25일 사단법인 문학사랑협의회 이사장 리헌석   신록이 찬란한 5월의 하늘은 맑았다. 호승 정영택 시인을 존경하는 사람들, 문학사랑협의회 가족들, 충주의 문인들과 지인들, 그리고 시인의 후손들이 모여 시비를 제막하였다. 식전행사로 가야금 독주. 산기슭에 청아한 가야금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충조호의 물결처럼 참석자들의 가슴에도 울림을 지었다. 이어 시비를 제막. 양쪽 끈 중에서, 한끝은 정태준 선생을 비롯한 가족 친지들이 잡고, 한끝은 우리 문인들이 마음을 모아 잡았다. 합심하여 조심스럽게 끈을 당겼고, 드디어 시비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호승 정영택 선생의 순정한 문학정신을 기리는 우리의 마음이 오롯하게 담겨 보였다. ... 우리의 작은 정성이 모여 단출한 석비(石碑)를 탄생시켰지만, 우리 겨레의 암흑기에 호승 선생께서 세우신 지비(紙碑)는 형언할 수 없는 감동으로 우리의 가슴에 남이 있을 역사이다.   =================================================   정호승(鄭昊昇) 되찾기의 겉과 속       1. 실종문인, 민족적 비극의 표상       문학은 ‘개인’으로부터 그들이 모여 살고 있는 ‘사회’까지를 대상으로 하는 사회과학의 한 분야로 볼 수 있다. 본질적으로 사회적 함의(含意)를 띠고 있는 것이 문학인 것이다. 그런대 개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중단위 사회가 민족(국가)사회이다. 그래서 문학은 민족사회를 단위로 구별되어 존재한다. 민족사회는 언어, 혈통, 풍습, 정서 등이 같아서 변별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경기문학과 충청문학은 변별력이 없거나 극미하지만, 한국문학과 영국문학은 선명한 변별적 자장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민족이나 나라마다 그 문학의 특수성이 검출되는 것인데, 그것은 그들이 처한 고유한 사회·역사적 환경 때문이다. 문학은 기본적으로 민족성을 토대로 피어나는 꽃이다.   한국 근·현대문학의 특수성을 만드는 요인을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서구문화의 수용’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 수난사’이다. 전자는 주로 근·현대문학의 촉발요인으로 작용했고, 후자는 그것의 특수성을 조성하는 무거운 요인이 되었다. 그래서 ‘일제강점’과 ‘민족분단’은 한국 근·현대문학의 특수성을 강하게 통제하고 있는 두 기둥이라고 할 만하다. ‘일제강점’은 민족 주체성의 보존과 관련된 민족문학의 검증요소로서 작동될 뿐만 아니라, 민족 언어의 훼손 및 장애 문제나 검열 문제 등을 내포하면서 한국문학의 민족의식이나 고유성을 확인하는 전제가 된다. 한편 ‘민족분단’은 분단 이후와 그 이전까지도 한구 문학사를 반쪽 문학사를 만들어 놓았으며, 언제 해결될지 모르는 민족문학의 정체성(Identity)을 묻고 있다. 또한 이데올로기와 표현의 자유를 제약함으로써 한국현대문학의 깊이와 높이를 규제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한 마디로 ‘민족분단’은 한국문학의 비극적 특수성의 외연과 내포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민족 수난사’의 흐름 속에서 ‘민족분단’이라는 강물은 비극적 특수성이라는 홍수를 이루면서 민족의 보물인 작품이나 작가가 ‘실종’ 또는 ‘매몰’되는 재해를 불러와 그 비극성을 고조시켰다.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실종문인’은 그러니까 그 자체가 우리 민족문학사의 비극적 특수성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존재인 것이다. 수많은 문인이 실종되다니, 그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일일뿐만 아니라 ‘실종문인’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거나 생소할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실종문인’은 한국문학사에서 빼내지 못한 가시처럼 미해결의 문제로 아직 아프게 걸려 있는 것을.   한국문학사에서 실종문인은 월북문인을 비롯해서 납북문인, 재북문인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월북문인이다. 월북문인은 월북시기에 따라 3차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차 월북문인은 조선문학건설본부(1945.8.16 설립)와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1945.9.17 설립)이 조선문학가동맹(1946.2.)으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주도권을 상실한 카프 맹원들(이기영, 한설야, 송영, 윤기정, 안막, 박세영 등)이 월북함으로써 발생하였다. 제2차 월북문인은 1947년부터 1948년 8월 사이에 생겨나게 되는데, 이는 미군정당국이 박헌영에 대한 체포령을 발표하면서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심인물들(이태준, 임화, 김남천, 이원조, 홍명희, 안회남, 허준, 박찬모, 현덕, 김소엽, 김동석,김영건, 조영출, 조남령, 조벽암, 조허림 등)이 월북한 것을 가리킨다. 제3차 월북문인은 1950년 6.25 한국전쟁 중에 발생하였다. 서울에 남아 있던 조선문학가동맹 문인들은 이를 해체하고 사상전향을 선언한 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전향의지를 실천하던 중 전쟁이 발발하였고, 그 전쟁의 와중에서 자의 또는 타의로 북으로 향했던 것인데, 이용악, 이병철, 이선을, 조운, 김상민, 유종대, 박산운, 김광현, 박태원, 정지용, 설정식, 이흡, 김상훈, 임학수, 여상현, 임호권, 양운한, 지봉문, 엄흥섭 등 실로 다수의 문인들이 이에 속한다. 이들은 해방과 전쟁이 세상을 뒤흔드는 격동의 시기에 이중 삼중의 사상적 혼란을 겪다가 전화에서 잠시 비껴 있고자 하다가 끝내 분단의 긴 세월 속에서 역사의 고초를 한 몸으로 겪으면서 망각되고 매몰된 비운의 문인들로서 민족사의 비극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주인공들이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시인 정호승(鄭昊昇, 1916 ∼ ?)도 제3차 월북문인의 한 사람으로 고난의 문학적 생애가 매몰되었던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필자는 이 글에서 묻혀 있던 정호승 시인을 처음으로 발굴한 사람으로 그 경위와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2. 고향, 그 뽑히지 않는 마목(馬木)       시조시인 정완영은 「버꾸기 소리 떠내려 오는 시냇물에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향이란 그 사람의 가슴엔 사랑의 원류이기도 하고 눈물의 원천이기도 하고, 때로는 보이기도 하고 병이기도 하며, 버리려야 버려지지도 않는 모토(母土)인 것이며, 뽑으려야 뽑아지지도 않는 마목(馬木) 같은 것이라고. 실로 고향은 어머니와 의미 자장을 함께하는 사랑의 이름인 것이다. 그래서 고향을 떠나게 되더라도 사람들은 언제나 그 마목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인력에 이끌리면서 살아가게 마련이다. 거기에 매여 있는 마음의 고삐를 풀지 못하고 그 주위를 맴돌며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매몰되었던 정호승 시인을 필자가 찾아내게 된 것도 이 마목의 덕분이었다. 정호승 시인은 그의 작품 여기저기에 마목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단서를 남겼고, 그의 가족들은 그 마목으로 돌아와 그것을 지키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필자 또한 그 마목에 이끌려 그곳을 찾았던 것이다.   정호승 시인은 충주 지방 사람이면 금방 알 수 있는 ‘鷄足山’, ‘모시레들’, ‘彈琴臺’, ‘虎岩堤’, ‘合水머리 같은 지명들을 작품 속에 사용하였다. 그리고 ‘풀무고개에서’라고 작품을 쓴 장소를 부기한 것이 여러 편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蜘蛛峰밑 넓은들에 너울치는/ 가난한 모밀꽃 香氣를 마시고/ 아담스런 木花송이에 쌓여/ 풀무고개 기슭 오막사리 초가집 굴앙선에서도/ 북도더 키워지든 이몸이였다우(「잡스러운이몸」)’라는 구절이 있어, 그가 풀무고개 출신임을 추정할 수 있었다. 또한 ‘情겨워 뛰놀든 풀무고개(「노래를 잊은 이몸」)’나 ‘풀무고개 성황나무 가지에/ 내넋은 파랑새되여 앉는다(「故鄕을 떠나며」)’ 등에서도 이러한 사실은 간접적으로 확인되는 것이었다. 이에 필자는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창동이 정호승 시인의 마목일 것이라고 추단하였던 것이다.   ...
    당고개 성지 ㅡ 이해인 수녀 시비(詩碑)           서울 용산구 신계동 당고개 순교성지에서 이해인 시비(詩碑)          ...제막식에서 이해인 수녀는 “암투병을 하며, 일상에서의 순교정신이 더욱 필요하다는 묵상 안에서 이 시를 쓰게 됐다”며“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실천할 수 있는 순교의 삶은 매일 긍정적인 생각을 더하고, 이웃에게 고운 말을 건네고, 겸손하게 행동하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살아있는 날은                           이海仁 마른 향내 나는  갈색 연필을 깎아  글을 쓰겠습니다. 사각사각 소리 나는  연하고 부드러운 연필 글씨를  몇 번이고 지우며  다시 쓰는 나의 하루. 예리한 칼끝으로 몸을 깎이어도  단정하고 꼿꼿한 한 자루의 연필처럼  정직하게 살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의 살아 있는 연필  어둠 속에도 빛나는 말로  당신이 원하시는 글을 쓰겠습니다. 정결한 몸짓으로 일어나는 향내처럼  당신을 위하여  소멸하겠습니다.   -----------------------------------------------------------   1. 연필은 볼펜이나 사인펜으로 쓴 것처럼 뚜렷하지도 않고 색색이 곱지도 않은 부드럽고 연하고, 검은 톤 하나 뿐입니다. 진실되고 수수한 모습으로 신을 섬기 겠다는 뜻이지요. 눅눅하지도 않은 '마른 향내' 난다는 건 소박한 준비나마 충실하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봅니다.   2, 연필은 쓰면 쓸수록 줄어들고, 끝을 날카롭게 새우려면 깎아야 합니다. 그런 연필은 지은이의 신앙심을 나타냅니 다.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라도 신을 섬기겠다는.. 그런 연필을 전혀 아끼지 않고 몇 번이고 지웠다 다시 쓰 는 신중함을 보이고 있지요. 신실함을 나타내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3. 그 의지를 굳건히 합니다. 정직한 삶에의 소망. 4. 5  시인으로서 또한 종교인으로서의 삶을 더욱 굳건히 지키겠다는 의지 즉, 신에게 자신의 의지를 천명합니다.     이해인 시비 위치 : 충남 보령시 주산면 삼곡리 26 시와 숲길                다른 옷은 입을 수가 없네                                                             이해인         "하늘에도 연못이 있네" 소리치다 깨어난 아침     창문을 열고 다시 올려다본 하늘 꿈에 본 하늘이 하도 반가워     나는 그만 그 하늘에 빠지고 말았네     내 몸에 내 혼에 푸른 물이 깊이 들어 이제 다른 옷은 입을 수가 없네         이해인(본명 : 이명숙) 1945년 6월 7일 강원도 양구군 출생 천주교 수녀이자 시인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아버지가 납북 되었고, 가족은 부산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이 때는 부산성남초등학교에 다녔고, 서울이 수복된 후에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 창경초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당시에 이해인의 언니가 가르멜 수녀원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는 수녀가 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   1958년에는 풍문여자중학교에 입학하였고, 이 무렵에 시 〈들국화〉가 쓰여졌다. 이후 1961년에는 성의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졸업 후 1964년에 올리베타노의 성 베네딕토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세례명은 클라우디아이다. 입회한 이후부터 '해인'이라는 필명으로 가톨릭에서 발간하는 《소년》지에 작품을 투고하기 시작했다. 1968년에 수도자로 살 것을 서원한 후,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에서 경리과 보조 일을 하였다.   이후 필리핀에 있는 성 루이스 대학교에서 영문학과 종교학을 공부하였다. 귀국한 후 1976년에 첫 시집인 《민들레의 영토》을 발간하였다. 서강대학교 대학원에서는 종교학을 공부하면서 타 종교에 대한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되었으며, 〈시경에 나타난 福 사상 연구〉라는 논문을 집필했다. 1983년 가을에는 세 번째 시집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를 발간하였다.   1992년에 수녀회 총비서직을 맡게 되었다. 비서직이 끝난 1997년에 '해인글방'을 열어두고 문서 선교를 하기 시작했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 부산 가톨릭대학교의 교수로 지산교정에서 '생활 속의 시와 영성' 강의를 하였다. 2008년에 직장암 판정을 받아 항암 방사선 치료를 받고 2009년 4월부터 부산에서 장기휴양을 하고 있다.   그녀의 작품 중 하나인 《말의 빛》은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언어 영역 읽기 교과서에 실려 있다.             =================       이해인 시 문학관은 중동부전선 최전방지역인 강원 양구군 파로호 상류에 위치. 한국철학을 대표하는 김형석 안병욱선생의 철학을 테마로한 공간과 조망대 청춘관으로 꾸며져있음.   이해인 시인(수녀님)은 수많은 시들로 희망과 위로를 주신 분이며 오랫동안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이시며 암투병 후에도 따뜻한 글, 씩씩함 잃지 않아서 “국민이모”라는 별명까지 얻으신분 교통카드와 주민등록증이 전 재산이라는 분 하늘나라로 이사를 간다는 분 아품과 연민과 사랑과 기쁨이 함께 들어있고 바람과 비와 했살이 함께 녹아있는 이해인님 시들로 문학관을 채우고... 언제 읽어도 편안하고, 그리고 시인의 감정이 그대로 잘 전달되는 이해인님의 시...      중 동부전선 최전방지역인 강원도 양구군 파로호 상류에 위치   첫 시집 인 민들레의 영토 나의 시가 민들레 솜털처럼 미지의 독자에게 날아가 위로와 희망을 줬을때 행복하다고 말함     어머니로 부터 물려받은 유품과 원고     사회를 살아가노라면 꼭 필요한 말이겠죠                       2층엔 북한 평안도가 고향인      한국철학을 대표하는 김형석 안병욱선생의 철학을 테마로한 공간과 조망대      청춘 관   으로 꾸며져 있음니다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수녀이자 시인인 저자는 1945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나 1964년 수녀원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입회, 1976년 종신서원을 한 후 오늘까지 부산에 살고 있다. 필리핀 성 루이스대학 영문학과, 서강대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했으며, 제9회 새싹문학상, 제2회 여성동아대상, 제6회 부산여성문학상을 수상했다.   1,고독에게     나의 삶이 느슨해지지 않도록 먼데서도 팽팽하게  나를 잡아당겨 주겠다구요? 얼음처럼 차갑지만 순결해서 좋은 그대 오랜 사귀다 보니 꽤 친해졌지만 아직은 함부로 대할 순 없는 그대 내가 어느새 자아도취에 빠지지 않게 그 맑고 투명한 눈및으로 나를 지켜주겠다구요? 고맙다는 말을 이제야 전하게돼 정말 미안해요       고독에게2     당신은 나를 바로 보게 하는 거울입니다 가장 가까운 벗들이 나의 약점을 미워하며 나를 비켜갈 때 노여워하거나 울지 않도록 나를 손잡아준 당신 쓰라린 소금을 삼키듯 절망을 삼킬 수 있어야 하얗게 승화될 수 있음을 진정 겸손해야만 삶이 빛날 수 있음을 조심스레 일러준 당신 오른을 당신에게 감사의 들꽃 한 묶음 꼭 바치렵니다 제 곁을 떠나지 말아주세요 천년이 지나도 녹지 않는 아름다운 얼음 공주님...     꿈을 위한 변명     아직 살아 있기에 꿈을 꿀 수 있습니다. 꿈꾸지 말라고 강요하지 마세요 꿈이 많은 사람음 정신이 산만하고 삶이 맑지 못한 때문이라고 단정 짓지 마세요 나는 매일  꿈을 꿉니다 슬퍼도 기뻐도 아름다운 꿈 꿈은 그대로 삶이 됩니다 오늘의 이야기도  내일의 이야기도 꿈길에 그려질 때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꿈이 없는 삶 삶이 없는 꿈은 얼마나 지루할까요 죽으면 꿈이 멎겠지만 살아 있는 동안은 꿈을 꾸고 싶습니다. 꿈이 있어 외롭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비의 연가     가르쳐 주시지 않아도  처음부터 알았습니다. 나는 당신을 향해 날으는 한 마리 순한 나비인 것을 가볍게 춤추는 나에게도 슬픔의 노락 가루가 남몰래 묻어 잇음을 알았습니다. 눈멀 듯 부신 햇살에 차라리 날개를 접고 싶은 황홀한 은총으로 살아온 나날 빛나는 하늘이 훨뤌 날으는 나의 것임을 알았습니다. 행복은 가난한 마음임을 가르치는 풀잎들의 합창 수없는 들꽃에게 웃음을 가르치며 나는 조용히 타버릴 당신의 나비입니다. 부디 꿈꾸며 살게 해 주십시오 버려진 꽃들을잊지 않게 하십시오 들릴 듯 말 듯한 나의 숨결은 당신께 바쳐지는 無言의 기도 당신을 향한 맨 처음의 사랑 不忘의 나비 입니다, 나는     나를 위로하는 날     가끔은 아주 가끔은 내가 나를 위로할 필요가 있네 큰일 나닌데도 세상이 끝난 것 같은 죽음을 맛볼 때 남에겐 채 드러나지 않은 나의 허물과 약점들이 나를 잠 못들게 하고 누구에게도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은 부끄러움에 문 닫고 숨고 싶을 때 괜찮아 괜찮아 힘을 내라구 이제부터 잘하면 되잖아 조금은 계면쩍지만 내가 나를 위로하며 조용히 거울 앞에 설 때가있네 내가 나에게 조금 더 따뜻하고 너그러워지는 동그란 마음 활짝 웃어주는 마음  남에게 주기 전에 내가 나에게 먼저 주는 위로의 선물이라네       너에게 띄우는 글     사랑하는 사람이기보다는 진정한 친구이고 싶다. 다정한 친구이기 보다는 진실이고 싶다. 내가 너에게 아무런 의미를 줄 수 없다 하더라도 너는 나에게 만남의 의미를 전해 주었다. 순간의 지나가는 우연이기 보다는 영원한 친구로 남고 싶었다. 언젠가는 헤어져야할 너와 나이지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수 있는 친구이고 싶다. 모든 만남이 그러하듯 너와 나의 만남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진실로 너를 만나고 싶다. 그래, 이제 더 나이기보다는 우리이고 싶었다. 우리는 아름다운 현실을 언제까지 변치 않는 마음으로 접어두자 비는 싫지만 소나기는 좋고 인간은 싫지만 너만은 좋다. 내가 새라면 너에게 하늘을 주고 내가 꽃이라면 너에게 향기를 주겠지만 나는 인간이기에 너에게 사랑을 준다       내 혼(魂)에 불을 놓아 언제쯤 당신 아에 꽃으로 피겠습니까. 불고 싶은 대로 부시는 노을빛 바람이여. 봉오리로 맺혀 있던  갑갑한 이 아픔이 소리없이 터지도록 그 타는 눈길과  숨결을 주십시오. 기다림에 초조한 애 비 밀스런 가슴을 열어놓고 싶습니다. 나의 가느다란 꽃슬이 가느다란  슬픔을 이해하는 은총의 바람이여, 당신 앞에 "네"라고  대답하는 나의 목소리는 언제나 떨리는 3월입니다.  고요히 내 혼에 불을 놓아 꽃으로 피워 내는 뜨거운 바람이여.     벗에게1 내 잘못을 참회하고 나서 처음으로 맑고 투명해진 나의 눈물 한 방울 너에게 선물로 주어도 될까? 때로는 눈물도 선물이 된다는 걸 너를 사랑하며 알았어 눈물도 아름다운 사랑의 표현임을 네가 가르쳐주었어 나와의 첫 만남을 울면서 감격하던 너 너를 너무 사랑하게 될까봐 두려웠던 내 마음 이해하면서도 힘들었지? 나를 기다려주어 고맙고 나를 용서해주어 고맙고 그래서 지금은 내가 울고 있잖아   벗에게2 내가 누구인지 벗이여 오늘은 그대에게 묻고 싶다 잠에서 깨어나 거울 앞에서 바라보는 낯선 얼굴의 나 밤길을 걷다 나를 따라붙는 나보다 큰 나의 검은 그림자가 두렵고 낯설었다 이젠 내가 나와 친해질 나이도 되었는데 갈수록 나에게서 멀어지는 슬픔 나를 찾지 못한 부끄러움에 오늘도 시름시름 앓고 있는 내게 벗이여  무슨 말이라도 해다오     벗에게3     내가 죽더라도 너는 죽지 않으면 좋겠다 꼭 죽어야 한다면 내가 먼저 죽으면 좋겠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같은 날 같은 시에 죽으면 좋겠다 이 또한 터무니 없는 욕심이라고 너는 담담히 말을 할까 우정보다 더 길고 깊은 하나의 눈부신 강이 있다면 그 강에 너를 세우겠다 사랑보다 더 높고 푸른 하나의 신령한 산이 있다면 그 산에 너를 세우겠다  내게 처음으로 하늘과 사람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내 목숨보다 귀한 벗이여   보고 싶다는 말     생전 처음 듣는 말처럼 오늘은 이 말이 새롭다 보고 싶은데...... 비오는 날의 첼로 소리 같기도 하고 맑은 날의 피아노 소리 같기도 한 너의 목소리 들들 때마다 노래가 되는 말 평생을 들어도 가슴이 뛰는 말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감칠맛 나는 네 말 속에 들어 있는 평범하지만 깊디깊은 그리움의 바다 보고 싶은데...... 나에게도  푸른 파도 밀려오고 내 마음에도 다시 새가 날고......     나를 키우는 말     행복하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정말 행복해서 마음에 맑은 샘이 흐르고 고맙다고 말하는 동안은 고마운 마음 새로이 솟아올라 내 마음도 더욱 순해지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잠시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마음 한 자락이 환해지고 좋은 말이 나를 키우는 걸 나는 말하면서 다시 알지       슬픈 날의 편지     모랫벌에 박혀 있는 하얀 조가비처럼 내 마음속에 박혀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슬픔 하나하도  오래되어 정든 슬픔 하나는 눈물로도 달랠 길 없고 그대의 따뜻한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다른 이의 슬픔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듯이 그들도 나의 슬픔 속으로  깊이 들어올 수 없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지금은 그저 혼자만의 슬픔 속에 머무는 것이 참된 위로이며 기도입니다. 슬픔은 오직 슬픔을 통해서만 치유된다는 믿음을 언제부터 지니게 되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항상 답답하시겠지만 오늘도 멀찍이서 지켜보며 좀 더 기다려주십시오 이유 없이 거리를 두고 그대를 비켜가는 듯한 나를  끝까지 용서해 달라는 이 터무니없음을 용서하십시오       성 금요일의 기도     오늘은 가장 깊고 낮은 목소리로 당신을 부르게 해 주소서 더 많은 이들을 위해 당신을 떠나 보내야 했던 마리아의 비통한 가슴에 꽂힌 한 자루의 어둠으로 흐느끼게 하소서 배신의 죄를 슬피 울던 베드로의 절절한 통곡처럼 나도 당신 앞에 겸허한 어둠으로 엎드리게 하소서 죽음의 쓴잔을 마셔 죽음보다 강해진 사랑의 주인이여 당신을 닮지 않고는 내가 감히 사랑한다고 뽐내지 말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했기에 더 깊이 절망했던 이들과 함께 오늘은 돌무덤에 갇힌 한 점 칙칙한 어둠이게 하소서 빛이신 당신과 함께 잠들어 당신과 함께 때어날 한 점 눈부신 어둠이게 하소서       민 들 레     은밀히 감겨간 생각의 실타래를 밖으로 풀어내긴 어쩐지 허전해서 차라리 입을 다문 노람 민들레 앉은뱅이 몸으로는 갈길이 멀어 하얗게 머리 풀고 솜털 날리면 춤추는 나비들도 길 비켜 가네 꽃씨만한 행복을 이마에 얹고 바람한테 준 마음 후회 없어라 혼자서 생각하다 혼자서 별을 헤다 땅에서 하늘에서 다시 피는 민들레   민들레의 영토(領土)   기도는 나의 음악 가슴 한복판에 꽂아 놓은 사랑은 단 하나의 성스러운 깃발 태초(太初)부터 나의 영토(領土)는 좁은 길어었다 해도 고독의 진주를 캐며 내가 꽃으로 피어나야 할 땅 애처로이 져다보는 인정(人情)의 고움도 나는 싫어 바람이 스쳐가며 노래를 하면 푸른 하늘에게 피리를 불었지 태양에 쫓기어 활활 타다남은 저녁 노을에 저렇게 긴 강(江)이 흐른다. 노오란 내 가슴이 하얗게 여위기 전 그이는 오실까 당신의 맑은 눈물 내 땅에 떨어지면 바람에 날려 보낼 기쁨은 꽃씨 흐려오는 세월의 눈시울에 원색의 아름을 씹는 내 조용한 숨소리 보고 싶은 얼굴이여       빈 꽃병의 말 2     꽃들을 다 보낸 뒤 그늘진 한 모퉁이 에서 말을 잃었다 꽃과 더불어 화려했던 어제의 기억을 가라앉히며 기도의 진주 한 알 입에 물고 섰다 하얀 맨발로 섰다 아무도 오지 않는 텅 빈 가슴에 고독으로 불을 켜는 나의 의지 누구에세도 문 닫는 일 없이 기다림에 눈 뜨고 산다 희망의 잎새 하나 끝내 피워 물고 싶다     바람이 내게 준 말       넌 왜 내가 떠난 후에야 인사를 하는 거니?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왜 제때엔 못하고 한 발 늦게야 포현을 하는 거니? 오늘도 이끼 낀 돌층계에 앉아 생각에 잠긴 너를 나는 보았단다 봉숭아 꽃나무에 물을 주는 너를 내가 잘 익혀놓은 동백 열매를 만지작 거리며 기뻐하는 너를 지켜보았단다 언제라도  시를 쓰고 싶을 땐 나를 부르렴 어느 계절에나 나는 네게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단다 나의 걸음은  네게로 달려가는  내 마음보다도 빠르단다 사랑하고 싶을땐 나를 부르렴 나는 누구의 마음도 다치지 않으면서 심부름 잘하는 지혜를 지녔단다 세월이 가도 늙지 않는 젊을을 지녔단다     비 밀     겹겹이 싸매 둔 장미의 비밀은 장미 너만이 알고 속으로 피흘리는 나의 아픔은 나만이 안다 살아서도 죽어 가는 이 세상 비인 자리 이웃과 악수하며 웃음 날리다 뽀얀 외롬 하나 구름으로 뜨는 걸 누가 알까 꽃밭에 불밝힌 장미의 향기보다 더 환히 뜨겁고 미쁜 목숨 하나 별로 뜨는 사랑  누가 알까      살아 있는 날은     마른 향내 나는 갈색 연필을 깍아 글을 쓰겠습니다 사각사각 소리나는 연하고 부드러운 연필 글씨를 몇 번이고 지우며 다시 쓰는 나의 하루 예리한 칼끝으로 몸을 깍이어도 단정하고 꼿꼿한 한 자루의 연필처럼 정직하게 살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의 살아 있는 연필 어둠 속에도 빛나는 말로 당신이 원하시는 글을 쓰겠습니다. 정결한 몸짓으로 일어나는 향내처럼 당신을 위하여 소멸하겠습니다.     시의 집     나무 안에 수액이 흐르듯  내 가슴 안에는 늘 시가 흘러요 빛까로 냄새도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어 그냥 흐르게 놔두지요 여행길에 나를 따라오는 달처럼 내가 움직일 때마다 조용히 따라오는..... 슬픔때도  힘이 되어주는 시가 흘러 고마운 삶이지요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나는 문득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누군가 이사오길 기다리며 오랫동안 향기를 묵혀둔 쓸쓸하지만 즐거운 빈집 깔끔하고 단정해도 까다롭지 않아 넉넉하고 하늘과 별이 잘 보이는 한 채의 빈집 어느 날 문을 열고 들어올 주인이 '음,마음에 드는데......' 하고 나직이 속삭이며 미소지어 줄 깨끗하고 아름다운 빈집이 되고 싶다.     우정일기 1     1 내 마음속엔 아름다운 굴뚝이 하나 있지. 너를 향한 그리움이 하 얀 연기로 피어오르다 노래가 되는 너의 집이기도 한 나의 집. 이 하 얀 집으로 너는 오늘도 들어오렴, 친구야. 2 전에는 크게, 굵게 쏟아지는 소낙비처럼 한꺼번에 많은 것을 이야 기하더니 지금은 작게, 가늘게 내리는 이슬비처럼 조용히 내게 오는 너. 네가 어디에 있든지 너는 쉬임없이 나를 적셔준다. 3 소금을 안은 바다처럼 내 안엔 늘 짜디짠 그리움이 가득하단다. 친구야. 미역처럼 싱싱한 기쁨들이 너를 위해 자라고 있단다. 파도 에 씻긴 조약돌을 닮은 나의 하얀 기도가 빛나고 있단다. 4 네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 나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구나. 네 대신 아파줄 수 없어 안타까운 내 마음이 나의 몸까지도 아프게 하는 거 너는 알고 있니? 어서 일어나 네 밝은 얼굴을 다시 보여주렴. 내게 기쁨을 주는 너의 새 같은 목소리도 들려주렴. 5 내가 너를 보고 싶어하는 것처럼 너도 보고 싶니, 내가? 내가 너 를 좋아하는 것처럼 너도 좋아하니, 나를? 알면서도 언제나 다시 묻 는 말. 우리가 수없이 주고받는 어리지만 따뜻한 말. 어리석지만 정 다운 말. 6 약속도 안했는데 똑같은 날 편지를 썼고, 똑같은 시간에 전화를  맞걸어서 통화가 안되던 일, 생각나니? 서로를 자꾸 생각하다보면 마음도 쌍둥이가 되나보지? 7 '내 마음에 있는 말을 네가 다 훔쳐가서 나는 편지에도 더 이상 쓸 말이 없다'며 너는 종종 아름다운 불평을 했지? 오랜만에 네게 편지  를 쓰려고 고운 편지지를 꺼내놓고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무슨 말을  쓸거니?' 어느새 먼저 와서 활짝 웃는 너의 얼굴. 몰래 너를 기쁘게  해주려던 내 마음이 너무 빨리 들켜버린 것만 같아서 나는 더 이상 편지를 쓸 수가 없구나. 8 '밥 많이 먹고 건강해야 돼. 알았지?' 같은 나이에도 늘 엄마처럼 챙겨주는 너의 말. '보고 싶어 혼났는데... 너 혹시 내 꿈 꾸지 않았 니?' 하며 조용히 속삭이는 너의 말. 너의 모든 말들이 내게는 늘 아 름다운 노래가 되는구나, 친구야. 9 나를 보고 미소하는 네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아도, 네가 보내준 편지들을 다시 꺼내 읽어봐도 나의 그리움은 채워지질 않는구나. 너 와 나의 추억이 아무리 아름다운 보석으로 빛을 발한다 해도 오늘의 내겐 오늘의 네 소식이 가장 궁금하고 소중할 뿐이구나, 친구야. 10 비오는 날 듣는 뻐꾹새 소리가 더욱 새롭게 반가운 것처럼 내가  몹시 슬픔에 젖어 있을 때 네가 내게 들려준 위로의 말은 오랜 세월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단다. 11 아무도 모르게 숲에 숨어 있어도 나무와 나무 사이를 뚫고 들어와 나를 안아주는 햇빛처럼 너는 늘 조용히 온다. 12 네가 평소에 무심히 흘려놓은 말들도 내겐 다 아름답고 소중하 다. 우리집 솔숲의 솔방울을 줍듯이 나는 네 말을 주워다 기도의 바 구니에 넣어둔다. 13 매일 산 위에 올라 참는 법을 배운다. 몹시 그리운 마음, 궁금한  마음, 즉시 내보이지 않고 절제할 수 있음도 너를 위한 또 다른 사랑 의 표현임을 조금씩 배우기 시작한다. 매일 산 위에 올라 바다를 보  며 참는 힘을 키운다. 늘 보이지 않게 나를 키워주는 고마운 친구야.     우정일기 2     14 내 얕은 마음을 깊게 해주고, 내 좁은 마음을 넓게 해주는 너. 숲 속에 가면 한그루 나무로 걸어오고, 바닷가에 가면 한점 섬으로 떠 서 내게로 살아오는 너. 늘 말이 없어도 말을 건네오는 내 오래된 친 구야, 멀리 있어도 그립고 가까이 있어도 그리운 친구야. 15 사랑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천사의 몫을 하는 게 아니겠어? 참 으로 성실하게 남을 돌보고, 자기를 잊어버리고, 그래서 몸과 마음 이 늘 사랑 때문에 가벼운 사람은 날개가 없어도 천사가 아닐까? 오 늘은 그런 생각을 해보았어. 16 친구야, 이렇게 스산한 날에도 내가 춥지 않은 것은 나를 생각해  주는 네 마음이 불빛처럼 따스하게 가까이 있기 때문이야. 꼼짝을  못하고 누워서 앓을 때에도 내가 슬프지 않은 것은 알기만 하면 먼  데서도 금방 달려올 것 같은 너의 그 마음을 내가 읽을 수 있기 때문 이야. 약해질 때마다 나를 든든하게 하고, 먼데서도 가까이 손잡아 주는 나의 친구야, 숨어 있다가도 어디선지 금방 나타날 것만 같은  반딧불 같은 친구야. 17 방에 들어서면 동그란 향기로 나를 휘감는 너의 향기. 네가 언젠 가 건네준 탱자 한알에 가득 들어 있는 가을을 펼쳐놓고 나는 너의 웃음소릴 듣는다. 너와 함께 있고 싶은 나의 마음이 노란 탱자처럼 익어간다. 18 친구야, 너와 함께 별을 바라볼 때 내 마음에 쏟아져 내리던 그 별 빛으로 나는 네 이름을 부른다. 너와 함께 갓 피어난 들꽃을 바라볼  때 내 마음을 가득 채우던 그 꽃의 향기로 나는 너를 그리워한다. 19 네가 만들어준 한 자루의 꽃초에 나의 기쁨을 태운다. 초 안에 들 어 있는 과꽃은 얼마나 아름답고 아프게 보이는지. 하얀 초에 얼비 치는 꽃들의 아픔 앞에 죽음도 은총임을 새삼 알겠다. 펄럭이는 꽃 불 새로 펄럭이는 너의 얼굴. 네가 밝혀준 기쁨의 꽃심지를 돋우어 나는 다시 이웃을 밝히겠다. 20 너는 아프지도 않은데 '아프면 어쩌나?' 미리 근심하며 눈물 글썽 인다. 한동안 소식이 뜸할 뿐인데 '나를 잊은 것은 아닌가?' 미리 근 심하며 괴로워한다. 이러한 나를 너는 바보라고 부른다. 21 '축하한다. 친구야!' 네가 보내준 생일카드 속에서 한묶음의 꽃들 이 튀어나와 네 고운 마음처럼 내게 와 안기는구나. 나를 낳아주신 엄마가 더욱 고맙게 느껴지는 오늘. 내가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너를 만날 수도 없었겠지? 먼데서 나를 보고 싶 어하는 네 마음이 숨차게 달려온 듯 카드는 조금 얼굴이 상했구나. 그 카드에 나는 입을 맞춘다. 22 친구야, 너는 눈물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았니? 너무 기쁠 때에 도, 너무 슬플 때에도 왜 똑같이 눈물이 날까? 보이지 않게 숨어 있 다가 호수처럼 고여오기도 하고, 폭포처럼 쏟아지기도 하는 눈물. 차가운 나를 따스하게 만들고, 경직된 나를 부드럽게 만드는 고마운 눈물. 눈물은 묘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아. 내 안에도 많은 눈물 이 숨어 있음을 오늘은 다시 알게 되어 기쁘단다. 23 아무리 서로 좋은 사람과 사람끼리라도 하루 스물네 시간을 함께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것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나를 늘 쓸쓸하 게 하는 것 중의 하나란다. 너무 어린 생각일까? 24 나는 따로 집을 짓지 않아도 된다. 내 앞에서 네가 있는 장소는 곧 나의 집인 것이기에, 친구야. 나는 따로 시계를 보지 않는다. 네가 내 앞에 있는 그 시간이 곧 살아 있는 시간이기에, 친구야. 오늘도 기도 안에 나를 키워주는 영원한 친구야.     어 머 니     당신의 이름에선  색색의 웃음 칠한 시골집 안마다의 분꽃 향기가 난다 안으로주름진 한숨의 세월에도 바다가 넘실대는 남빛 치마폭 사랑 남루한 옷을 겇친 나의 오늘이 그 안에 누워 있다 기워 주신 꽃골무 속에 소복히 담겨 있는 幼年의 추억 당신의 가리마같이 한 갈래로 난 길을 똑바로 걸어가면 나의 연두 갑사 저고리에 끝동을 다는 다사로운 손길 까만 씨알 품은 어머니의 향기가 바람에 흩어진다.     왜 그럴까, 우리는     자기의 아픈 이야기 슬픈 이야기는  그리도 길게 늘어놓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아픈 이야기 슬픈 이야기에는 전혀 귀기울이지 않네 아니, 처음부터 아예 듣기를 싫어하네 해야 할 일 뒤로 미루고 하고 싶은 것만 골라하고 기분에 따라 우선 순위를 잘도 바꾸면서 늘 시간이 없다고 성화이네 저 세상으로 떠나기 전 한 조각의 미소를 그리워하며 외롭게 괴롭게 누워 잇는 이들에게도 시간 내어주기를 아까워하는 건강하지만 인색한 사람들 늘 말로만 그럴듯하게 살아 있는 자비심 없는 사람들 모습 속엔 분면 내 모습도 들어 잇는 걸 나는 말고 있지 정말 오 그럴까 왜조금 더 자신을 내어놓지 못하고 그토록 이기적일까, 우리는.......     어느 꽃에게       넌 왜 나만 보면 기침을 하니? 꼭 한마디 하고 싶어하니? 속으로 아픈 만큼 고운 빛깔을 내고남 모르게 아픈 만큼 사람을 깊이 이해할 수 있다고 오늘도 나에게 말하려구? 밤낮의 아픔들이 모여 꽃나무를 키우듯 크고 작은 아픔들이 모여 더욱 향기로운 삶을 이루는 거라고 또 그 말 하려구?       어느 말 한 마디가     어느 날 내가 네게 주고 싶던 속 깊은 말 한 마디가 비로소 하나의 소리로 날아갔을 제 그 말은 불쌍하게도  부러진 날개를 달고 되돌아왔다 네 가슴 속에 뿌리를 내려야 했을 나의 말 한 마디는 돌부리에 채이며 곤두박질치며 피 묻은 얼굴로 되돌아왔다 상처받은 그 말을 하얀 붕대로 싸매 주어도 이제는 미아처럼 갈 곳이 없구나 버림받은 고아처럼 보채는 그를 달랠 길이 없구나 쫓기는 시간에 취해 가려진 귀를 조금 더 열어 주었다면 네 얼어붙은 가슴을 조금 더 따뜻하게 열어 주었다면 이런 일이 있었겠니 말 한 마디에 이내 금이 가는 우정이란 얼마나 슬픈 것이겠니 지금은 너를 원망해도 시원찮은 마음으로 또 무슨 말을 하겠니 네게 실연당한 나의 말이 언젠가 다시 부활하여 너를 찾을 때까지 나는 당분간 입을 다물어야겠구나 네가 나를 받아들일 그 날을 기다려야겠구나   장미를 생각하며     우울한 날은 장미 한 송이 보고 싶네 장미 앞에서 소리내어 울면 나의 나눔에도 향기가 묻어날까 감당 못할 사랑의 기쁨으로 내내 앓고 있을 때 나의 눈을 환히 밝혀주던 장미를 잊지 못하네 내가 물 주고 가꾼 시간들이 겹겹의 무늬로 익어 있는 꽃잎들 사이로 길이 열리네 가시에 찔려 더욱 향기로웠던 나의 삶이 암호처럼 찍혀 있는 아름다운 장미 한송이 '살아야 해, 살아야 해' 오늘도 내 마음에 불을 붙이네
  묘비명 / 김광규           단 한 줄의 시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은 어디에 무엇을 남길 것이냐       좀팽이처럼 / 김광규          돈을 몇 푼 찾아가지고 은행을 나섰을 때 거리의  찬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려놓았다 대출계 응접 코너에 앉아 있던  그 당당한 채무자의 모습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신촌 일대를 지나갈 수 없었다  인조 대리석이 반들반들하게 깔린 보도에는 껌자국이 지저분했고  길 밑으로는 전철이 달려갔다 그 아래로 지하수가 흐르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시뻘건 바위의 불길이 타고 있었다 지진이 없는 나라에 태어난 것만 해도  다행한 일이지 50억 인구가 살고 있는  이 땅덩어리의 한 귀퉁이 1,000만 시민이 들끓고 있는  서울의 한 조각 금고 속에 넣을 수 없는 이 땅을 그 부동산업자가 소유하고 있었다 마음대로 그가  양도하고 저당하고 매매하는  그 땅 위에서 나는 온종일  바둥거리며 일해서  푼돈을 벌고  좀팽이처럼 그것을 아껴가며 살고 있었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 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 나         김광규   살펴보면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들이고 나의 아들의 아버지이고         나의 형의 동생이고 나의 동생의 형이고       나의 아내의 남편이고 나의 누이의 오빠이고         나의 아저씨의 조카이고 나의 조카의 아저씨이고       나의 선생의 제자이고 나의 제자의 선생이고         나의 마을의 예비군이고 나의 친구의 친구이고       나의 적의 적이고   나의 의사의 환자이고       나의 단골 술집의 손님이고 나의 개의 주인이고       나의 집의 가장이다.         그렇다면 나는   아들이고 아버지이고 동생이고 형이고 남편이고 오빠고 조카고 아저씨고 제자고 선생이고 납세자고 예비군이고 친구이고 적이고 환자이고 손님이고 주인이고 가장이지..         오직 하나뿐인 나는 아니다.         과연 아무도 모르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누구인가..?   ===========================================   김광규 시인  1941년 서울 출생. 서울대 및 동대학원 독문과를 졸업, 독일 뮌헨 대학교에서 수학  현재 한양대 독문학 교수로 재직중  1975년 계간 을 통해 등단 1979년 첫 시집 을 발표. 제1회 녹원문학상 수상 1984년 2시집 로 제 4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1994년 5시집로 제 4회 편운문학상을 수상  시집 시선집 산문집           등 번역 시집과 영역 시집 독역시집 등   --------------------------------------------게시 목록----------------------------------------------------   어린 게의 죽음 / 김광규 묘비명 / 김광규  좀팽이처럼 / 김광규  안개의 나라 / 김광규 밤꽃 향기 / 김광규 대장간의 유혹 / 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젊은 손수 운전자에게 / 김광규  생각의 사이 / 김광규 인디언과 다른 점 / 김광규 도다리를 먹으며 / 김광규   연통 속에서/김광규 달력 / 김광규           어린 게의 죽음 / 김광규     어미를 따라 잡힌 어린 게 한 마리   큰 게들이 새끼줄에 묶여 거품을 뿜으며 헛발질 할 때 게장수의 구럭을 빠져나와 옆으로 옆으로 아스팔트를 기어간다 개펄에서 숨바꼭질하던 시절 바다의 자유는 어디 있을까 눈을 세워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달려오는 군용 트럭에 깔려 길바닥에 터져 죽는다 먼지 속에서 썩어가는 어린 게의 시체 아무도 보지 않는 찬란한 빛       묘비명 / 김광규     단 한 줄의 시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은 어디에 무엇을 남길 것이냐       좀팽이처럼 / 김광규      돈을 몇 푼 찾아가지고 은행을 나섰을 때 거리의  찬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려놓았다 대출계 응접 코너에 앉아 있던  그 당당한 채무자의 모습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신촌 일대를 지나갈 수 없었다  인조 대리석이 반들반들하게 깔린 보도에는 껌자국이 지저분했고  길 밑으로는 전철이 달려갔다 그 아래로 지하수가 흐르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시뻘건 바위의 불길이 타고 있었다 지진이 없는 나라에 태어난 것만 해도  다행한 일이지 50억 인구가 살고 있는  이 땅덩어리의 한 귀퉁이 1,000만 시민이 들끓고 있는  서울의 한 조각 금고 속에 넣을 수 없는 이 땅을 그 부동산업자가 소유하고 있었다 마음대로 그가  양도하고 저당하고 매매하는  그 땅 위에서 나는 온종일  바둥거리며 일해서  푼돈을 벌고  좀팽이처럼 그것을 아껴가며 살고 있었다 2006년 2월호,     안개의 나라 / 김광규   언제나 안개가 짙은  안개의 나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안개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안개 속에 사노라면  안개에 익숙해져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그러므로  보려고 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  듣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  귀는 자꾸 커진다  하얀 안개의 귀를 가진  토끼 같은 사람들이  안개의 나라에 산다.       밤꽃 향기 / 김광규     술잔처럼 오목하거나  접시처럼 동그랗지 않고  양물처럼 길쭉한 꼴로  밤낮없이 허옇게 뿜어내는  밤꽃 향기  쓰러진 초가집 감돌면서  떠난 이들의 그리움 풍겨줍니다  대를 물려 이 집에 살아온  참새들  깨어진 물동이에 내려앉아  고인 빗물에 목을 축이고  멀리서 고속철도 교각을 세우는  크레인과 쇠기둥 박는 소리에 놀라  추녀 끝으로 포르르 날아오릅니다  참새들이 맡을 수 있을까요  아까운 밤꽃 향기 시집 - 처음 만나던 때(문학과지성사)       대장간의 유혹 / 김광규     제 손으로 만들지 않고 한꺼번에 싸게 사서 마구 쓰다가 망가지면 내다 버리는 플라스틱 물건처럼 느껴질 때 나는 당장 버스에서 뛰어내리고 싶다 현대 아파트가 들어서며 홍은동 사거리에서 사라진 털보네 대장간을 찾아가고 싶다 풀무질로 이글거리는 불 속에 시우쇠처럼 나를 달구고 모루 위에서 벼리고 숫돌에 갈아 시퍼런 무쇠낫으로 바꾸고 싶다 땀 흘리며 두들겨 하나씩 만들어낸 꼬부랑 호미가 되어 소나무 자루에서 송진을 흘리면서 대장간 벽에 걸리고 싶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온통 부끄러워지고 직지사 해우소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져내리는 똥덩이처럼 느껴질 때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문득 어딘가 걸려 있고 싶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 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젊은 손수 운전자에게 / 김광규     네가 벌써 자동차를 갖게 되었으니  친구들이 부러워할 만도 하다  운전을 배울 때는  어디든지 달려갈 수 있을  네가 대견스러웠다  면허증은 무엇이나 따두는 것이  좋다고 나도 여러 번 말했었지  이제 너는 차를 몰고 달려가는구나  철따라 달라지는 가로수를 보지 못하고  길가의 과일 장수나 생선 장수를 보지 못하고  아픈 애기를 업고 뛰어가는 여인을 보지 못하고  교통 순경과 신호등을 살피면서  앞만 보고 달려가는구나  너의 눈은 빨라지고  너의 마음은 더욱 바빠졌다  앞으로 기름값이 또 오르고  매연이 눈앞을 가려도  너는 차를 두고  걸어다니려 하지 않을 테지  걷거나 뛰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남들이 보내는 젊은 나이를 너는  시속 60km 이상으로 지나가고 있구나  네가 차를 몰고 달려가는 것을 보면  너무 가볍게 멀어져 가는 것 같아  나의 마음이 무거워진다       생각의 사이 / 김광규     시인은 오로지 시만을 생각하고 정치가는 오로지 정치만을 생각하고 경제인은 오로지 경제만을 생각하고 근로자는 오로지 노동만을 생각하고 법관은 오로지 법만을 생각하고 군인은 오로지 전쟁만을 생각하고 기사는 오로지 공장만을 생각하고 농민은 오로지 농사만을 생각하고 관리는 오로지 관청만을 생각하고 학자는 오로지 학문만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이 낙원이 될 것 같지만   시와 정치의 사이 정치와 경제의 사이 경제와 노동의 사이 노동과 법의 사이 법과 전쟁의 사이 전쟁과 공장의 사이 공장과 농사의 사이 농사와 관청의 사이 관청과 학문의 사이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면 다만   휴지와 권력과 돈과 착취와 형무소와 폐허와 공해와 농약과 억압과 통계가   남을 뿐이다.       인디언과 다른 점 / 김광규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콜로라도 고원을 달려가던 인디언이 갑자기 벌판 한 가운데서 내려달라고 고집했다.  그렇게 고속을 달려가면, 영혼이 육신을 쫓아올 수 없기 때문에, 육신을 멈추어 서서 영혼을 기다리겠다는 것이었다. 점보제트기를 타고 유럽에서 한국까지 불과 열 시간만에 날아온 날, 현지 시간 적응한답시고, 반주 곁들여 푸짐하게 저녁을 먹고,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자명종이 울리는 새벽에 눈을 뜬 순간, 여기가 어딘가, 어는 호텔 방인가, 국제선 여객기 속인가, 어느새 집에 돌아왔나, 분별이 안 되어 어리둥절……  억지로 아침 먹고, 늠름하게 출근하니, 그때부터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소화가 안 되고, 화장실에 못 가고, 하품만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정신은 서울에 돌아왔지만, 육체는 아직도 서양의 어느 도시를 헤매고 있구나  인디언과 다른 점인가  정신보다 느린 나의 육체가 우랄알타이 산맥을 넘어 고비 사막을 지나  동쪽으로 동쪽으로 나를 찾아오려면, 앞으로 두 주일은 더 걸릴 듯     도다리를 먹으며 / 김광규   일찍부터 우리는 믿어 왔다 우리가 하느님과 비슷하거나 하느님이 우리를 닮았으리라고 말하고 싶은 입과 가리고 싶은 성기의 왼쪽과 오른쪽 또는 오른쪽과 왼쪽에 눈과 귀와 팔과 다리를 하나씩 나누어 가진 우리는 언제나 왼쪽과 오른쪽을 견주어 저울과 바퀴를 만들고 벽을 쌓았다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이 자유롭게 널려진 산과 들과 바다를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누고 우리의 몸과 똑같은 모양으로 인형과 훈장과 무기를 만들고 우리의 머리를 흉내내어 교회와 관청과 학교를 세웠다 마침내는 소리와 빛과 별까지도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고   이제는 우리의 머리와 몸을 나누는 수밖에 없어 생선회를 안주삼아 술을 마신다 우리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어 온몸을 푸들푸들 떨고 있는 도다리의 몸뚱이를 산 채로 뜯어먹으며 묘하게도 두 눈이 오른쪽에 몰려 붙었다고 웃지만 아직도 우리는 모르고 있다 오른쪽과 왼쪽 또는 왼쪽과 오른쪽으로 결코 나눌 수 없는 도다리가 도대체 무엇을 닮았는지를       연통 속에서 / 김광규     바닷가 나무 없는 벌판에 직각으로 꺾어진 시멘트 건물 겨우내 비워둔 방 석유난로 연통 속에서 새끼참새 우짖는 소리 짚가리도 처마도 없고 아무 데도 깃들 곳 없어 바람막힌 연통 속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음산한 서북향 연구실에서 난로불도 못 피우고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창가를 서성거린다 연통 속에서 함석을 긁는 새발짝 소리 안쓰러워       달력 / 김광규     TV 드라마는 말할 나위없고 꾸며낸 이야기가 모두 싫어졌다 억지로 만든 유행가처럼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는 글도 넌더리가 난다 차라리 골목길을 가득 채운  꼬마들의 시끄러운 다툼질과 참새들의 지저귐 또는  한밤중 개짖는 소리가 마음에 든다 가장 정직한 것은 벽에 걸린 달력이고      작은 사내들.                                                - 김광규 - 작아진다 자꾸만 작아진다 성장을 멈추기 전에 그들은 벌써 작아지기 시작했다 첫사랑을 알기전에 이미 전쟁을 헤아리며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자꾸만 작아진다 하품을 하다가 뚝 그치며 작아지고 끔찍한 악몽에 몸서리치며 작아지고 노크 소리가 날 때마다 깜짝 놀라 작아지고 푸른 신호등 앞에서도 주춤하다 작아진다 그들은 어서 빨리 늙지 않음을 한탄하며 작아진다 얼굴 가리고 신문을 보며 세상이 너무 평온하여 작아진다 넥타이를 매고 보기 좋게 일렬로 서서 작아지고 모두가 장사를 해 돈 벌 생각을 하며 작아지고 들리지 않는 명령에 귀 기울이며 작아지고 제복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작아지고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며 작아지고 수많은 모임을 갖고 박수를 치며 작아지고 권력의 점심을 얻어먹고 이를 쑤시며 작아지고 배가 나와 열심히 골프를 치며 작아지고 칵테일 파티에 나가 양주를 마시며 작아지고 아제는 너무 커진 아내를 안으며 작아진다   작아졌다 그들은 마침내 작아졌다 마당에서 추녀끝으로 나는 눈치 빠른 참새보다도 작아졌다     그들은 이제 마스크를 쓴 채 담배를 피울 줄 알고 우습지 않을 때 가장 크게 웃을 줄 알고 슬프지 않은 일도 진지하게 오랫동안 슬퍼할 줄 알고 기쁜 일은 깊숙이 숨겨둘 줄 알고 모든 분노를 적절하게 계산할 줄 알고 속마음을 이야기 않고 서로들 성난 눈초리로 바라볼 줄 알고 아무도 묻지 않는 의문은 생각하지 않을 줄 알고 미결감을 지날 때마다 자신의 다행함을 느낄 줄 알고 비가 오면 제각기 우산을 받고 골목길로 걸을 줄 알고  들판에서 춤추는 대신 술집에서 가성으로 노래 부를 줄 알고 사랑할 때도 비경제적인 기다란 애무를 절약할 줄 안다 그렇다 작아졌다 그들은 충분히 작아졌다 성명과 직업과 연령만 남고 그들은 이제 너무 작아져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더 이상 작아질 수 없다     나 홀로 집에                        김광규   복실이가 뒷다리로 일어서서 창틀에 앞발 올려놓고 방 안을 들여다본다 집 안이 조용해서 아무도 없는 줄 알았나 보다 오후 늦게 마신 커피 덕분에 밀린 글쓰기에 한동안 골몰하다가 무슨 기척이 있어 밖으로 눈을 돌리니 밤하늘에 높이 떠오른 보름달이 창 안을 들여다본다 모두들 떠나가고 나 홀로 집에 남았지만 혼자는 아닌 셈이다     교대역에서                             김광규   3호선 교대역에서 2호선 전철을 갈아타려면 환승객들 북적대는 지하 통행로와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오르내려야 한다 바로 그 와중에서 그와 마주쳤다 반세기 만이었다 머리만 세었을 뿐 얼굴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서로 바쁜 길이라 잠깐 악수만 나누고 헤어졌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그와 나는 모두 서울에 살고 있지만     늙은 소나무                                     김광규   새마을 회관 앞마당에서 자연 보호를 받고 있는 늙은 소나무 시원한 그림자 드리우고 바람의 몸짓 보여주며 백여 년을 변함없이 너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송진마저 말라 버린 몸통을 보면 뿌리가 아플 때도 되었는데 너의 고달픔 짐작도 못하고 회원들은 시멘트로 밑동을 싸 바르고 주사까지 놓으면서 그냥 서 있으라고 한다 아무리 바람직하지 못하다 해도 늙음은 가장 자연스러운 일 오래간만에 털썩 주저앉아 너도 한번 쉬고 싶을 것이다 쉬었다가 다시 일어나기에 몇 백 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너의 졸음을 누가 막을 수 있으랴 백여 년 동안 뜨고 있던 푸른 눈을 감으며 끝내 서서 잠드는구나 가지마다 붉게 시드는 늙은 소나무     다시 목련                                      김광규   사월이 오면 목련은 왜 옛마당을 찾아와 피는 것일까 어머님 가신 지 스물네해 무던히 오랜 세월이 흘러갔지만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고 잔디잎이 눈을 뜰 때면 어머님은 내 옆에 돌아와 서셔서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보신다 하루 아침엔 날이 흐리고 하늘에서 서러운 비가 나리더니 목련은 한잎두잎 바람에 진다 목련이 지면 어머님은 옛집을 떠나 내년 이맘때나 또 오시겠지 지는 꽃잎을 두손에 받으며 어머님 가시는 길 울며 가볼까       영산                                 김광규   내 어렸을 적 고향에는 신비로운 산이 하나 있엇다. 아무도 올라가 본 적이 없는 영산이었다.   영산은 낮에 보이지 않앗다. 산허리까지 잠긴 짙은 안개와 그 위를 덮은 구름으로하여 영산은 어렴풋이 그 있는 곳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영산은 밤에도 잘 보이지 않았다. 구름 없이 맑은 밤하늘 달빛 속에 또는 별빛 속에 거무스레 그 모습을 나타내는 수도 있지만 그 모양이 어떠하며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 마음을 떠나지 않는 영산이 불현듯 보고싶어 고속버스를 타고 고향에 내려갔더니 이상하게도 영산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이미 낯설은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런산은 이 곳에 없다고 한다.         능소화                                   김광규 7월의 오후 골목길 어디선가 해피 버스데이 노래를 서투르게 흉내내는 바이올린 소리 누군가 내 머리를 살짝 건드린다 담 너머 대추나무를 기어올라가면서 나를 돌아다보는 능소화의 주황색 손길 어른을 쳐다보는 아기의 무구한 눈길 같은         자유시                         김광규   시를 어떻게 만드는가 그것은 자유다 다만 종이에 써서 누구에겐가 보여 주고 발표해야 한다 그러면 그것은 시다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고 책상서랍에 넣어 둔 것은 시가 아니다   마음껏 발효할 수 없을 때 좋은 술은 익을 수 없어 몇 푼 안 되는 원고료를 받아 마시는 술은 피처럼 진하지도 않고 깊은 향기도 없다 (자유시는 그러므로 자유로운 시도 아니고 자유에 관한 시도 아니다)   다만 여기에 세금이 붙는다         나 홀로 집에                        김광규   복실이가 뒷다리로 일어서서 창틀에 앞발 올려놓고 방 안을 들여다본다 집 안이 조용해서 아무도 없는 줄 알았나 보다 오후 늦게 마신 커피 덕분에 밀린 글쓰기에 한동안 골몰하다가 무슨 기척이 있어 밖으로 눈을 돌리니 밤하늘에 높이 떠오른 보름달이 창 안을 들여다본다 모두들 떠나가고 나 홀로 집에 남았지만 혼자는 아닌 셈이다       술병                           김광규   건강증진센터의 진단과 처방을 미루고 미루다가 마침내 술을 끊었다 지나간 반세기 동안 즐겨온 술을 끊어버리자 술 마시던 나와 술 끊은 나 사이에 새로운 싸움이 시작되었다 두 개의 나 가운데 어느 쪽도 편들 수 없어 괴롭다 오랫동안 술 마셔온 나는 이미 늙고 병들었으니 불쌍하고 얼마 전에 술 끊은 나는 아직 어리니까 손자처럼 귀엽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서 시달리다가 몸과 마음이 갈라져 나는  결국 쓰러지고 말 것 같다 쓰러져 건강하게 살기는  더욱 힘들 터인데           김광규(金光圭) 시인      1941년 서울에서 출생. 서울대 및 同 대학원 졸업.1975년 계간 《문학과 지성》을 통하여 데뷔. 1983  로 문학박사 학위 취득. 저서로는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아니다 그렇지 않다』, 『크낙산의 마음』, 『좀팽이처럼』,  『아니리』,  『물길』,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처음 만나던 때』, 『시간의 부드러운 손』, 『하루 또 하루』 등 10권의 시집과 『대장간의 유혹』,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누군가를 위하여』등 시선집과 영역시집 『Faint Shadows of Love』, 『The Depths of a Clam』, 『A Journey to Seoul』, 독역 시집 『Die Tiefe der Muschel』, 『Botschaften vom gruenen Planeten』, 일역시집 『金光圭 詩集』,  스페인어 시집『Tenues sombras del viejo amor』와 중국어 번역시집 『模糊的旧愛之影』 산문집 『육성과 가성』,  『천천히 올라가는 계단』 등이 있음. 譯書로는 베르톨트 브레히트 시선집 『살아남은 자의 슬픔』, 하인리히 하이네 시선집, 귄터 아이히 시선집 등이 있음. 오늘의 작가상, 녹원 문학상, 김수영 문학상, 편운 문학상, 대산 문학상, 이산 문학상, 시와 시학 작품상 수상과  2006년도 독일 언어문학 예술원의 프리드리히 군돌프상과 2008년도 이미륵상 수상.                     김광규(金光圭) 시인.  1941년 1월 7일 일제말기의 경성부 통인정 74번지(현 종로구 통인동 74번지)에서 엄격한 유교 집안의 후손인 김형찬(金炯璨)씨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처음 글을 쓴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무렵의 일이다. 어느 날 느닷없이 교무실로 불려간 몇몇 성적이 좋은 학생들에게, 문예작품 제출 공문이 내려왔으니 뒷동산에 올라가 작문을 하나씩 써서 내라 하였는데 얼떨결에 글을 써 본 것이 계기라고 한다. 그리고 서서히 작문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3학년, 당시 작문 교사였던 조병화 시인과 김광식 선생을 만난 때이다.     이전까지에는 글이란 특별한 것을 써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빠져 있었던 그는 비로소 이 세상 모든 것이 글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후, 시인의 집에 세들어 살던 여순경이 국화 화분을 깨뜨린 평범한 이야기를 쓴 , 시골에서 기르던 묏새와의 추억을 쓴 등이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최고 인기 잡지 《학원》지에 실렸는가 하면, 학교신문에도 그의 글들이 실리기도 했다.     이때부터 그는 몇몇 친구들과 어울려 이 집 저 집을 몰려다니면서 이른 바 문예수업을 했었는데 당시 《여명》이라는 등사판 문집을 만들 정도로 그 열의가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신문과 교지를 만드느라 학교 수업도 빼먹고 출판사와 신문사를 돌아다니며 다른 학교 문예반 학생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는데, 그때 어울렸던 친구들이 지금 현역 문인으로 다수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비로소 시를 쓰기 시작한 때는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다. 이전까지는 주로 산문을 써왔는데, 문예작품 낭독회 같은 학교 행사에 출품하기에는 산문보다는 시가 적절했고, 시가 아무래도 산문보다 한 수 위인 것만 같은 엉뚱한 생각이 들어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그느 그의 산문에 적고 있다. 그 무렵, 하이틴의 연정을 노래한 가 서울 고등학교에서 주는 경희문학상을 받았고, 라는 시는 전국의 학생을 대상으로 한 《신문예》 문학 작품 공모에 당선작으로 뽑히기도 했다.     그때부터 그는 같은 또래의 친구들보다는 조숙하게 《현대문학》이나 《사상계》를 읽었으며, 고전음악을 들으며 음악실에 앉아 인생과 문학을 논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자신을 본인은, 문학적 허영심을 과시한 건방진 청소년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1960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독문과에 진학했다. 그에게는 본격적인 시인의 문학수업이 시작된 시절이다. 이곳에서 그는 이청준, 김주연, 염무웅, 박태순, 정규웅, 홍기창, 김현, 김치수, 김승옥 등의 문학 분야의 인재들과 문우로서 활동했다.     그러나 연이은 4·19와 5·16으로 인해 그의 대학 1∼2학년 시절은 한마디로 만신창이 신세였다. 3학년이 되어 그가 독문학에 깊이 빠져 있을 때, 동료들은 하나 둘 신춘문예와 문예지로 등단을 하고 더러는 동인지를 만들어 문단에 나가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때 그는 독문학의 일가를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우리 글을 쓰기보다는 세계문학과 독일문학에 전념하며 대학 후반기를 보냈다. ​   ​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군대에 들어갔다. 사병으로 입대해서 대한민국의 남자로서의 의무를 다하며 평범한 경력을 쌓은 것이다. 그러나 그의 문학에 대한 열의는 군대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는 병영의 체험들을 쓴 글들을 신춘문예에 여러 차례 투고했다. 그때마다 예심을 통과하는데 그치곤 하였는데 그 결과, 고등학교 시절의 시인의 문예 경력이 주는 우월감에 젖어 있던 자신감이 크게 허물어지며, 자신의 문학에 대하여 반성하는 기회로 삼았다. 기실 문학을 하는 이가 자신의 글에 대하여 객관화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시문학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시를 올곧게 쓰는 이는 누구나 자신의 시에 대해 객관화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자신의 부족함을 크게 깨달었다     그는 제대 후 정혜영(鄭蕙英) 씨와 결혼을 하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이후 서울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독일의 뮌헨대학교에서 유학했다.      독일로 향한 김광규 시인의 태도에서 우리는 시인의 문학에 대한 열의와 인간으로서의 용기를 엿볼 수 있다. 가부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중견 교사로서의 안정된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던 시인은 오직 향학의 일념으로 홀연히 타국으로 가 손수 장을 보고, 밥을 짓고, 빨래도 하고, 새로 배우는 입장이 되어 20대 안팎의 학생들과 교통해야 했다.     바이에른의 알프스 지역에 위치한 아름다운 휴양촌에서 시작된 시인의 독일 생활은 고독과 향수의 연속이었다. 시인의 외톨이 성격은 그것의 깊이를 더해 감상적이고 추상적인 고독이나 향수라는 말을 조금도 부끄럽지 않게 쓸 수 있었다고 하니, 그 상황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하겠다. 시인은 그런 생활을 하면서 많은 단어들을 새롭게 배웠다. 물론 독일어 단어들만이 아니라 한글 단어들도 마찬가지였다.     단어의 올바른 의미를 시인은 그러한 현실 속에서 체험으로 얻어낸 듯 싶다. 그리고 그것은 곧 그의 시작법에 영향을 준 것 같다. “사물을 명명한 것이 바로 언어라는 가장 기초적 상식을 떠나 언어 자체에다 의미를 부여하려는 무의미한 짓을 해 왔음을 깨달았다.” “문학이나 예술의 모든 장르가 그렇듯 시도 한마디로 규정될 수 있는 완성된 이상형을 가질 수는 없다. 시는 결코 아름다운 꽃만도 아니고, 이미지의 세련된 나열만도 아니고, 사라진 민요의 부활만도 아니며, 현실 개혁의 구호만도 아니다"라고 시인은 말하기도 했다. ​     시인이 1974년 독일 유학을 끝내고 귀국하여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곳이 부산대학교였다. 이곳에서 시인은 6년 동안 독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게 되는데, 3대가 함께 살았던 서울의 가정 형편으로 인해 시인은 부득이 서울에서 부산으로 기형의 출퇴근을 하게 된다. 일주일 중에 평일 나흘이나 닷새는 부산에서, 주말은 서울에서 보내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시인은 여관이나 하숙방을 전전하는 신세로, 요즈음 흔히 말하는 주말 부부인 셈이었다. 그런 사정을 시인은 자신의 ‘역맛살’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이 부산에서 시인은 계간지 《문학과 지성》에 , , 을 75년에 발표하여 문단 데뷔를 한다.     이곳에서 시인은 많은 시를 썼고 여러 편의 저서와 번역서를 썼다. , , , , , 등이 직접 부산에서 씌어진 시들이며 를 비롯하여 200여 편의 근대 및 현대 독일시를 우리말로 옮긴 것도 이때였다. 남들이 단란한 가정생활을 누리는 동안에 시인은 하숙방이나 여관방에서 시를 쓰고 책과 글과 씨름하며 외로움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그는 부산에서 내내 독일 문학 텍스트를 읽고 젊은이들을 가르쳤다.  첫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을 펴낸 것도 이곳에서 였다. 그런데 이 첫시집은 인쇄일과 실재의 발행일은 몇 개월 정도 차이가 난다.     사정인 즉, 인쇄일인 1979년 10월 20일은 박정희대통령의 유고일인 10월 26일의 일주일 전이다. 이 10·26 사태로 인해 인쇄와 제본이 끝난 상태의 시집이 검열에 걸려 나오지 못한 것이다. 당시의 서슬 푸른 계엄 하에서 달리 어찌할 방도가 없어 시인은 술로 울분을 달랬다고 한다. 다행히 몇 개월 후 우여곡절 끝에 검역필 도장을 맡아서 시집은 햇빛을 보게되었다. 그렇게 출간된 그의 첫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은 지금까지 꾸준히 20판을 넘게 찍었다. 별똥별처럼 반짝했다가 사라지고 마는 대다수의 베스트 셀러에 비해 비록 희미하지만 영원히 빛나는 무릇 작은 별 같은, 명실공히 스태디 셀러이다. 그의 이 첫시집에 수록된 그의 시〈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은 명실공히 그를 대표하는 시이기도 하다. ​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을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ㅡ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문학과지성사, 1979)      ​   김광규의 시는 대부분 평이한 언어와 명료한 구문(構文)으로 씌어진 일상시(日常詩)이면서도 그 속에 깊은 내용을 담고 있어, 그를 흔히 난해시에 식상한 독자와의 통교(通交)를 회복시킨 시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 시 역시 일상적 삶에서 얻은 구체적 체험을 바탕으로 평이한 표현 방법을 통해 중년기 사내의 소시민적 의식 구조를 명징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이 시에는 화자가 중심이 된 간단한 줄거리가 담겨 있다. 4․19가 일어나던 무렵, 젊은 혈기와 ‘때묻지 않은’ 순수로 살던 화자는,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어느 ‘세밑’, 중년의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옛 추억이 서린 곳에서 동창들을 만난다. 그들은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기’고 전화번호가 달라진 만큼, 각 분야에서 어느 정도의 부와 지위를 얻은, 비교적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는 중년이 되어 있다. 월급이 대화의 전부가 되고, 물가가 고민의 주종을 이루는 소시민의 중년이 되어 버린 그들은, ‘늪’ 같은 일상적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옛사랑’을 노래하던 젊음을 떠올려 보기도 하지만, 결국은 ‘포커’나 ‘춤’으로 대표되는 향락적 세계를 즐길 뿐이다.​     어쨌든 바로 그 첫시집이 출간되기까지 부산에서의 6년 동안, 그 어려운 생활을 충실히 이겨낸 결과, 시인이 이룬 문학적 성과도 성과려니와 제자들 중에는 부산 일대에서 교사로 재직 중인 사람들과, 문학 언론 출판 사업 등 각계의 중견으로 활약하는 사람들, 또 대학 교수가 된 사람들도 있다. 이렇듯 시인이 한양대학교 독문과로 직장을 옮기기까지의 부산에서 보낸 30대 후반의 6년은 외롭고 힘들었던 만큼 실로 보람찬 날들이었다. 시인이 부산을 들어 자신의 30대의 고향이라 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    한양대로 직장을 옮긴 이후 그은 퇴직하기까지 줄곧 같은 대학에서 독문학 교수로 재직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작문을 시작하여 중·고등학교의 화려한 문학소년 시절을 지나 대학에 진학, 도전의 독일 유학, 그리고 교수로 이어지는 시인의 인생 항로에 ‘키’ 역활을 해온 시, 그 시는 이렇듯 독자적인 시의 일가를 이루어 나름의 성공을 거두었다. 차분하고 조용하게 그리고 묵묵히 주어진 길을 오직 외길로 걸어온 시인은, 치국평천하의 올바른 의미를 알았기에 수신제가에 열중하느라 서른다섯 나이에 데뷔하여 1981년 시선집 『반달곰에게』로 제5회 오늘의 작가상, 1984년 『아니다 그렇지 않다』로 제4회 김수영문학상, 1994년 시집 『아니리』로 제4회 편운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시인이자 독문학자로서 지금까지 독일문학 작품의 번역 등에도 힘쓰며 독일과 한국의 문학 교류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브레히트 시집  『살아남은 자의 슬픔』, 귄터 아이히 시집  『햇빛 속에서』, 하이네 시집  『로렐라이』 등을 번역·출간하였고, 1993년 '독일문학의 주간' 행사를 주관한 이후 한·독 문학 교류 행사를 매년 갖기도 하였다. 또 독일과 오스트리아·스위스 등지에서 열린 '한국 작가 작품 낭독회' 등에 여러 차례 참가하였으며 1999년에는 독역시집  『Die Tiefe der Muschel』을 출간했다.     그밖의 저서로는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아니다 그렇지 않다』, 『크낙산의 마음』, 『좀팽이처럼』,  『아니리』,  『물길』,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처음 만나던 때』, 『시간의 부드러운 손』, 『하루 또 하루』 등 10권의 시집과 『대장간의 유혹』,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누군가를 위하여』등 시선집과 영역시집 『Faint Shadows of Love』, 『The Depths of a Clam』, 『A Journey to Seoul』, 독역 시집 『Die Tiefe der Muschel』, 『Botschaften vom gruenen Planeten』, 일역시집 『金光圭 詩集』,  스페인어 시집『Tenues sombras del viejo amor』와 중국어 번역시집 『模糊的旧愛之影』 산문집 『육성과 가성』,  『천천히 올라가는 계단』 등이 있다.    서정의 정신과 시적 언어의 자유로움을 이어 가장 진실하고 투명한 시를 써내는 김광규 시인. 등단 이후, 그의 작품들은 그의 데뷔작 「靈山」과 「有無1」 등에서부터 일관되게 나타나온 자연과의 합일된 정서에서 보듯  그의 시에 현현되는 자연은 타자로서 관찰되는 대상이 아닌 발화의 주체이다 .시인은 자연을 들여다보는 태도가 아니라 스스로 자연이 되어 삶과 눈을 맞추는 자세를 취하며, 자연으로부터 받는 인상들을 통해  독자에게 삶의 이치들을 깨우치게 한다.      또한 그는 깨어 있는 감각으로 시대를 바라보는 통찰력 또한 잃지 않는다. 지난 2011년 발간된 그의 시집  『하루 또 하루』에서 시인은 공사장 일용직 노동자들의 박한 임금(「굴삭기의 힘」), 소형 임대 아파트 주민들의 소외(「나뉨」), 위안부 문제는 외면한 채 제 잇속 챙기기에 급급한 정치인들의 탐욕(「인수봉 바라보며」) 등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시 속에서 격노한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논리적으로 문제점을 지적하며 사회의 부조리를 심도있게 파해쳤다.     문학비평가 오생근이 말했지만 김광규 시인은 비천한 현실을 파괴하고 해체하기보다는 현실을 적절히 비판하면서 진정한 삶을 긍정하고 있다.     그는 거지에게 빵 하나를 줄 수는 없을지언정 거지를 세상의 추문으로 만드는 시를 쓰는 시인으로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무른다.      말해질 수 없는것 포착하려 홀로 '중얼중얼 중얼…'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시인 김광규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숫자와 결부된다. 첫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생년월일이 결정되고, 뒤따라 주민등록번호가 부여된다.  주소의 번지와 우편번호, 아파트 동 수와 호 수, 학교에 가면 학번, 군대에 가면 군번, 외국에 나가면 여권번호, 전화번호와 휴대폰 번호, 은행구좌번호와 신용카드번호, 각종 비밀번호와 자동차 등록번호, 전산 입력 번호와 납세자 번호….  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번호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돈과 시간을 나타내는 숫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연봉 얼마라는 액수에 얽매여 노예처럼 하루 종일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흘러가면 다시 못 올 시간을 이처럼 숫자놀이로 소진하는 인생을 부러워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인간의 아이덴티티와 화폐와 시간이 모두 숫자로 표시되는 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숫자의 교육이 문자의 습득보다 앞서야 한다고 흔히 믿는다.  그러나 내 자신은 목적으로서의 자본 축적을 이해할 수 없고, 시간을 돈과 함께 계량적으로만 파악하는 경영 마인드에 동의할 수 없다. 숫자의 정확성보다 문자의 상징성에 이끌리는 것은 문학인의 숙명적 체질인 것 같다.  그러나 문자를 도구로 삼아 생계를 유지하기는 힘들다. 소설을 써서 전업작가로 입신한 경우는 더러 있지만, 시를 써서 전업시인으로 살아가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이백(李白)이나 두보(杜甫) 같은 동양의 고전 시성으로부터, 서양의 현대시인 T. S. 엘리엇이나 파블로 네루다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의 시인들이 대개 시업 이외의 생업에 종사했다. 나도 예외가 될 수 없어 생업을 찾기 위해서 많은 방황을 했다.  만 36개월의 군 복무를 끝낸 후 곧장 생업의 현장으로 뛰어들어, 한때는 외환 금융업무에 종사하기도 했다. 당시의 경제 상황으로 보아 대우가 좋고 선망받는 직장이었다.  그러나 모든 업무가 숫자와 돈으로 귀결되는 일을 나는 도저히 견뎌낼 수 없었다.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교직으로 직장을 옮겨, 대학원 과정을 끝낸 뒤 장학금을 얻어서 독일 유학의 길에 올랐다. 이후 삼십여 년을 독문학도로 생활하며 시를 써왔다.  생업과 시업이 똑같이 문학의 영역에 머무르게 된 것은 남들이 보기에 부러울지는 몰라도, 나로서는 삶의 진폭이 좁아진 느낌도 든다.  하지만 문자보다 숫자가 중요한 분야를 감내하지 못한 체질로 보건대, 이것은 스스로의 선택이며 나 자신의 숙명이기도 하다. 어차피 인생은 단선의 궤적을 그리는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1975년 여름 계간지 ‘문학과지성’에 네 편의 시를 발표한 것이 나에게는 창작의 공식적 출발점이었다.  이른바 데뷔 작품 가운데 ‘시론(詩論)’이라는 시도 있었다. 자기의 시론을 시로써 표현한 시인이 나만은 아니었지만, 첫번째 발표작으로 ‘시론’을 쓴 예는 드물 것이다. 어쩌면 당돌하고 건방진 수작으로 보였을 것이다.  @@ 시론(詩論)   여름 한낮 땡볕 아래 텅 빈 광장을 무료하게 지나가다 문득 멈춰서는 한 마리 개의 귓전에 들려오는   또는 포도밭 언덕에 즐비한 시멘트 십자가를 타고 빛과 물로 싱그럽게 열리는   소리를   바닷속에 남기고 물고기들은 시체가 되어 어시장에서 말없이 우리를 바라본다 저 많은 물고기의 무연한 이름들   우리가 잠시 빌려 쓰는 이름이 아니라 약속이 아니라 한 마리 참새의 지저귐도 적을 수 없는 언제나 벗어던져 구겨진 언어는 불충족한 소리의 옷   받침을 주렁주렁 단 모국어들이 쓰기도 전에 닳아빠져도 언어와 더불어 사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아무런 축복도 기다리지 않고   다만 말하여질 수 없는 소리를 따라 바람의 자취를 쫓아 헛된 절망을 되풀이한다     하지만 그때의 내 나이가 삼십대 중반이었고, 내 또래 문인들이 문단의 중견으로 발돋움하던 시점이었음을 감안하면, 늦깎이다운 등단 선언이었다.  이 시는 나의 첫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에 첫번째 작품으로 수록되었다. 동시대의 언어가 권력과 자본에 의하여 조작되고 왜곡되고 훼손되는 현실 속에서 ‘헛된 절망을 되풀이’한 이 시는 첫 시집을 여는 서시로서는 부적절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번째 시 ‘영산(靈山)’과 함께 언어와 문학에 대한 나의 시학을 솔직하게 토로한 것이다. ‘언어와 더불어 사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다만 말하여질 수 없는/ 소리를’ 하나의 형상으로 포착해보고자 시도한다. 끝내 성공할 수 없는 이 시도를 나는 지금까지 되풀이하고 있는 셈이다.  시는 오늘날 멋진 아리아가 될 수 없다. 오페라에 비유한다면, 테너나 소프라노의 열창으로 관객을 감동시키는 아리아가 한때 시인을 의미하던 가객의 몫으로부터 이제는 다른 매체의 인기 직종으로 옮겨갔다.  시인이 아직도 무엇인가 읊조린다면, 그것은 레시타티브에 불과하다. 하지만 노래와 연기를 연결시키며 오페라를 끌고 가는 레시타티브의 역할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판소리에서 아니리를 빼놓을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창으로만 판소리가 될 수 없고, 아리아만 가지고 오페라를 꾸밀 수 없음을 인식하는 것은, 시를 아니리나 레시타티브에 비유하는 것과는 물론 다르다.  다만 오늘날의 삶에서 시가 차지하는 위상을 나는 그렇게 본다. 이 보잘 것 없는 처지에서 시가 예술로서의 필연적 존재이유를 발견하고, 스스로의 품위를 지켜나가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나의 다섯번째 시집 제목 ‘아니리’는 여기에서 유래한다.  시의 현실적 입지가 약화되는 현상은 지난 십여 년 동안 더욱 가속화되었다. 아니리나 레시타티브는 적어도 커뮤니케이션의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요즘말을 빌리자면 콘텐츠를 전달 내지는 매개하는 역할을 했었다. 그러나 전자매체의 영향력이 급속히 확산되면서 가상현실이 현실의 영역을 확대시키고 삽시간에 상상의 시공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른바 시적 상상력의 자장이 축소된 반면에, 확대된 현실의 온갖 폭력이 언어를 유린하고 있다. 아직도 수많은 시집이 출판되고, 시 전문지도 심심찮게 창간되지만, 시의 독자는 날로 줄어들고, 일부 문인들만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시를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은밀한 속삭임도 못되고, 일방적인 중얼거림으로 바뀌었다.  시인은 이제 혼자서 중얼거리는 이상한 사람으로 되어버린 것이다. ‘중얼거리다’는 상대방을 전제로 하지 않고, 메시지의 전달을 원하지도 않는, 글자 그대로 절대적 고백에 접근하는 언술행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뮤니케이션의 종언을 개의치 않는 중얼거림이 도처에서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차렷!/ 한마디로 연대 병력을 움직이고/ 목숨을 바쳐 싸우겠습니다 여러분!/ 목쉰 부르짖음으로 군중을 열광시키고/ 사랑해 당신을/ 달콤한 속삭임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사로잡고/ 짜장면 하나에 짬뽕 둘!/ 경제 성장률 하향 조정!/ 임금 총액 동결!/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갑니다!/ 자반고등어나 먹갈치 사려!/ 저마다 목청 높여 부르짖는데/ 중얼중얼/ 혼자서 지껄이는 말/ 누가 들으려 하겠는가/ 어디를 가나 그래도 바람결에 실려/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소리/ 들리지 않는 곳 없고/ 한평생 중얼거리는 사람 또한/ 없지 않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중얼중얼 중얼…’  나의 일곱번째 시집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에 실린 위의 시는 ‘시론’에서 시작된 나의 시학이 사반세기 동안 천천히 그려온 궤적의 종점 부근이다.  언어에 대한 부정적 절망에서 출발하여, 오백여 편의 시를 쓰는 동안, 아니리를 거쳐서, 겨우 중얼거림에 도달했다니, 이것은 발전인가 퇴보인가 아니면 제자리 걸음인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격동과 변화의 한 세대를 살아오면서 너무나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한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끔 ‘당신은 중얼거리는 방식이 틀렸다’고 욕을 먹기도 했고, 때로는 ‘참 잘 중얼거렸다’고 상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나는 왜 중얼거리는가’에 관하여 이렇게 글을 쓰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어디서나 들려오고 나처럼 ‘한평생 중얼거리는 사람 또한’ 없지 않다는 사실이다. 심지어는 ‘중얼중얼/ 혼자서 지껄이는 말’을 찾아와 들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시낭송회를 개최한다든가, 한국 작가들이 외국에서 열리는 작품낭독회에 초대받는다든가, 시낭송을 담은 카세트테이프나 CD가 판매된다든가 하는 것들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일사불란한 논리와 정확한 통계숫자와 온갖 미사여구를 총동원하여 사자후를 토하는 광경을 우리는 정치집회에서 자주 보게 된다. 대통령선거나 국회의원선거나 지방선거 때가 되면 온 나라가 확성기의 소음으로 가득차고, 일당 얼마씩에 동원된 박수부대의 연호로 유세장이 들썩거린다.  그러나 밀물처럼 몰려온 이러한 함성의 분출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 일상을 되찾은 우리의 주변에서 풀벌레의 노래가 다시 들려오고, 어디선가 낮은 목소리가 여전히 중얼거린다. 소음과 연호가 우리의 귀를 가득 채웠을 때도 이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다만 들리지 않았을 뿐이다. 큰소리로 똑똑히 말하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도 인간이 오랜 역사를 두고 간직해온 특유의 언술방식이다.  한번 이 낮은 목소리에 귀기울여보면, 이 세상의 온갖 소란한 외침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며, 한 시간에 걸친 시정연설이나, 숫자로 가득한 삼백 페이지의 경제백서가 얼마나 허망한지 알게 될 것이다.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남성 4중창단이었던 블루벨즈(Blue Bells), 정희숙·희정·희옥 세 자매로 이루어졌던 정시스터즈가 각각 1960년대 초에 음반에 담아 발표한 노래다. '푸른 저 달빛은 호숫가에 지는데/ 멀리 떠난 그 님의 소식 꿈같이 아득하여라' 하고 시작한다. 멕시코 출신 3인조 그룹인 로스 트레스 디아만테스의 '보름달(Luna Llena)'을 번안한 노래로 당시 젊은이들의 애창곡이었다. '보름달'은 1960년대에 70개국 이상의 가수들이 불러 라틴 음악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된 노래다. 로스 트레스 디아만테스가 서울에서 공연한 1978년에 시인 김광규는 그 번안 제목을 차용한 시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를 발표했다.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하고 시작한다.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 마지막 대목은 이렇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한양대 명예교수로 올해 70세의 독문학자이기도 한 김광규가 독일 베를린, 스위스 취리히 등지에서 자신의 시 낭송회를... 그는 앞서 열 번째 시집 '하루 또 하루'를 3월24일 펴내면서 이렇게 토로했다. "십진법의 기수에 1을 더한 숫자 10은 두 자릿수가 시작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헌 신발 끈을 다시 조여 매겠다." 그의 시집이 발간될 때마다 다른 일을 제치고 서점부터 찾는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환생한 새우' '시간의 부드러운 손' '누군가를 위하여' 등이 나왔던 때와 마찬가지로 요즘도. 김광규는 대한민국 시인으로는 드물게 영어·독일어·일본어·중국어·스페인어권에서도 시집이 번역 출간돼 왔다. 프랑스어·아랍어로도 번역돼 해당 언어권 현지에서 나올 예정. 그의 시는 중국 베이징대 중문학대학원 입학시험에 출제되기도 했다. 그를 비롯한 대한민국 시인의 시가 더 많은 언어로 소개되고, 더 많은 나라에서 읽히며 감동을 불러일으키게 해야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 시인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날도 오지 않겠는가. [
362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황동규 - 즐거운 편지 댓글:  조회:4886  추천:0  2015-12-23
즐거운 편지 - 황동규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언제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옆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위 시는 소설가 황순원의 아들 황동규가 2002년인가 1년에 서정주 기념 대상에 '탁족'과 더불어 수록되어 서정주시인 대상을 차지한 시의 전문이다. 평론가 이어령도 평했듯이 우리나라 시의 이놈의 다다다 따발총 어미는 정말이지 신경질이 나는 요즘 시의 대부격이다. 그럼에도 서정시의 뭣으로 선정되어 수상하게 된 시이니 뭐라 할 말은 없으나 나름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내용으로 보아 즐거운 편지 제목이 가당치 않다. 추억의 편린을 묘사 했으니 편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것이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이라 하면서 (그렇게 사소한 그대, 그 사소한 사랑이라면 뭣하러 생각하고 뭣하러 그리워하는가~)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대가 볼때에는 사소한 일이나 그대가 언뜻 생각해줘서 기억이 나면 서로 그리워 한다는 평범한 일을 상대편이 듣고 해석하기에는 신경질나는 표현과 문법에도 안맞는 수사로 호도하고 '진실로 진실로'라는 성경적 구사를 하여 자신을 극도로 폄훼하게 만드는 우를 범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대 영문과 교수답게 문맥적 어리숙함을 읽는 독자에게 호도하여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이시가 돌출되도록하는 기교를 부렸다. 그러면서 마지막 6행처럼 그냥 세월 흘러가 듯 그리움을 묘사했다. 라는 기가 막힌 표현도 그 다음 문구 라는 진짜로 왕짜증나는 허식의 사랑 자세로 환장하게 하는 저열함을 보여준다. 하, 우리가 시를 읽음에 간과해서는 안될 일은 복선의 묘라 하겠다. 너무 일직선적인 시를 문맥이 매끄럽다고 좋은 시라 평할 수 없 듯 위 시도 그나마 다행이라면 복선을 두었기에 평점이하의 비평을 스스로 나눠먹는 대상을 수상하는 영광으로 바꿔놓은지도 모르겠다.   이 시를 황동규시인이 19살에 썼다고 했다. 감성적이지만 그 감성에 매몰되지않고 거리를 둔 이성이 더 절실하게 느껴지는 시.ㅡ     * 어느 문학기자와 황동규 시인의 인터뷰 기사                     ㅡ가끔은 이런 '홀로움'에 ...       시인 황동규님의 연구실 문을 열었을 때 시인은 보이지 않았다. 한 걸음 들어서는 순간 책상 쪽에서 언뜻 그의 얼굴이 비친 것도 같은데 반짝 빛 무리가 번졌다가 사라진 듯한 느낌. 이내 시인과 마주앉고 보니 머릿속이 환해져 왔다. 시인의 단단해 보이는 얼굴은 막 세수를 한 것처럼 맑았다. 지칠 줄 모르는 정열로 변화를 거듭하는, 육순이 지난 나이에도 젊음의 시정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얼마 전 열한번째 시집 를 출간했다. "이번 시집은 더 정열적이고 폭도 한층 넓습니다. 30여 년을 키워 온 귓병을 수술하고 나서 쓰기 시작한 시들이지요. 수술하고 나서 정말 큰 힘을 얻었습니다. "그 힘이란 새봄의 충만한 기운 같은 것이 아닐까? 1997년 1월부터 99년 12월까지 꼬박 3년 동안 쓰여진 시를 묶은 이 시집은 '이 세상에 함께 살아 있는 그 무엇'에 대한 사랑과 '홀로움'을 노래하고 있다.  '홀로움'은 그가 만든 시어로, "외로움을 통한 혼자 있음의 환희"라는 뜻이다.   "시인은 숙명처럼 외로운 존재지요. 하지만 시인의 외로움은 외로움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시인이 가난한 것 역시 세상이 원하는 대로 글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선 좋은 조건이지요. 시인이 부유하거나 외롭지 않으면 시가 써지겠어요.   "밤바다에 홀로 서 있는 등대의 외로움이 있을 때 항해하는 배의 외로움은 사라지는 것처럼, 시인의 운명은 등대를 닮았다. 황동규 시인이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고교시절. 그때 교지에 실린 는 지금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으로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중에서)   "는 한 살 연상인 여학생을 짝사랑하여 쓴 시이지만 쉬운 사랑 시 만은 아니에요. 실존주의가 밑에 깔려 있고 소월 시나 한용운 시처럼 한으로 끝나던 사랑 노래를 거부한 것이지요. 사랑도 언젠가는 끝나겠지요, 눈이 그치는 것 처럼요. 이 세상에 끝이 없는 건 없어요.   "학창시절엔 수재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총명했던 그는 68년부터 지금까지 서울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더구나 시인의 아버지는 대작가 황순원 님. 하지만 그는 그런 조건들이 넘어야 할 산이었다고 고백한다. "타고난 좋은 조건은 살면서 싸워야 할 대상이에요. 결국엔 별로 좋은 조건이 아니지요. 특히 시인에게는…. "그래서 시인은 순탄하기 만한 일상에서 벗어나기를 자주 시도했나 보다. 그는 '일상 벗어나기'의 의미로 틈만 나면 여행을 떠났다. 그래서 여행 중에 길어 올린 시들이 많다. 시인의 40여 년 시력에 중요한 기점이 되는, 82년부터 14년 만인 95년에 이르기까지 70편으로 마무리한 연작시  역시 그렇다. 풍장은 남해안 지방의 장례풍습으로 시신을 초분에 안치하여 탈골될 때까지 놓아두는 것. 이 시집의 화두 역시 '죽음'이다. 하지만 삶의 허무와는 거리가 멀다.   "을 쓰면서 죽음과 삶은 한 가지에서 피는 꽃이라는 것을 알았지요. 삶은 죽음을 통해 볼 때 더 절실해지고 간절해집니다. 죽음이 없다면 삶의 의미도 달라지지 않겠어요? 계속 아름답다면 그 아름다움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삶도 마찬가지죠.   "그의 시의 매력은 '힘'에 있다. '죽음의 계곡' 사막에서도 생명의 냄새를 맡을 만큼 그의 시는 역동적이다. 서정시도 힘이 있어야 한다는 그의 시는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시 속에서 시인의 자아가 변해 가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른바 극서정시. 자아의 변화를 따라 좇아가다 보면 마음을 쩡, 하고 울리는 깨달음에 이른다.   "시 속의 자아가 변하고, 시인이 변하고, 나아가 독자가 변하고…. 변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고 문학이 아닙니다. 변해 간다는 건 그만큼 열심히 살고, 거듭난다는 의미지요.   "「오미자 한밤중에 보해소주 30도를 빈 델몬트 병에 붓고 / 익기를 기다린다. / 아, 차츰차츰 더 바알간 색. / … / 내가 술 분자 하나가 되어 / 그냥 남을까 말까 주저하다가 부서지기로 마음먹는다. / 가볍게 떫고 맑은 맛!」(- 중에서)   다시 태어나도 시인으로 살겠느냐는 물음에, "그건 알 수 없지요. 지금 생에 내게 주어진 건 시인이라는 몫의 삶일 뿐, 다음 생엔 혹 벤처사업가가 되어 있을 수도 있겠지요" 하고 허허 웃어 버린다. 그 웃음엔 지금 당장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사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느냐는 속말이 숨어 있다. 시인은 지금 당장 시를 쓰지 못하게 된다고 해도 안타깝지 않다고도 했다. 삶은 시보다 중요하지도 중요하지 않다고도 볼 수 없는 것, 왜냐하면 시와 삶은 공존하기 때문이다. 인터뷰 내내 옆에 같이 앉아 있던 시인의 낡은 가죽가방을 가리키며 얼마나 되었느냐고 물었다. "10년은 넘었을 걸요. " 그 가죽가방에 호기심 많은 시인은 날마다 무얼 넣고 다닐까, 생각했다. 마침표 찍지 못한 시들의 분절음들이 와글거리고 있을까? 언젠가 우리 앞에 빛나는 모습을 드러낼 그 시들이 문득 궁금해졌다. 문밖까지 따라나온 시인과 가볍게 악수, 복도끝 유리문으로 햇빛이 와르르 쏟아져 들어오는 걸 보고 '그래, 오늘부터 봄이다' 작정하고 문득 돌아보니 그가 다시 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딸칵, 문 닫는 소리.   필자 : 김선경님 기자      시인탐방 ㅡ 이별과 여행으로 다진 시인의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40년 창작생활 겨울나무처럼 외롭고 쓸쓸한 삶을 지성으로 노래하는 시인 - 황동규시인  관악산 곳곳에 낙엽이 지고 있다. 지나간 날들을 그리워하듯 푸른 하늘에 눈빛 몇 점 떨군 채 포물선을 긋는다. 서울대 인문관 2동 3층 황동규 시인 연구실에 들어섰을 때 손 때 묻은 누런 책들이 어지럽게 나뒹굴고 서재의 이 빠진 모습이 이미 짐 정리 중임을 말해준다.  올해 나이 예순 다섯. 그이는 68년부터 몸담았던 이 대학을 6개월 후면 떠난다. 풍장에서처럼 생사의 갈림길은 아닐지라도 긴 세월 정든 교정을 떠나려니 덧없는 세월은 주마등처 럼 스치운다.  봉준이가 운다, 무식하게 무식하게/일자 무식하게, 아 한문만 알았던들/부드럽게 우는 법만알았던들,/왕 뒤에 큰 왕이 있고/큰 왕의 채찍!/마패 없이 거듭 국경을 넘는/저 보마(步馬)의 겨울 안개 아래/부챗살로 갈라지는 땅들/포(砲)들이 얼굴 망가진 아이들처럼 울어/찬 눈에 홀로 볼 비빌 것을 알았던들,/계룡산에 들어 조용히 밭에 목매었으련만./눈이 내린다, 우리가 무심히 건너는 돌다리에/형제의 아버지가 남몰래 앓는 초가 그늘에/귀 기울여보아라, 눈이 내린다, 무심히,/갑갑하게 내려앉은 하늘 아래/무식하게 무식하게. (삼남(三南)에 내리는 눈 전문) * 애증의 시대를 노래한 베스트셀러 시인 바야흐로 봉준이처럼 중무장한 가슴으로 신춘문예를 준비하는 계절이다. 그이는 신춘문예 심사를 맡고 있는 중앙문단의 대표적인 시인이기도 하다. 특히, 삼남(三南)에 내리는 눈은 1978년 민음사에서 출간된 이래 지금까지도 7만 권이 넘게 팔린 스테디셀러이다. 많은 신춘문예 준비생과 대학생들의 인기를 차지한 시집이다.  길거리 리어카에서도 장엄한 성우의 목소리에 배경음악이 깔려 나오던 애송시 낭송 테이프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봉준이가 운다,무식하게 무식하게...."라는 그 성우의 목소리가 군홧발 뒷꿈치에서 튀던 유신시대를 지나 5공화국으로 접어들면서 눈보라치는 겨울과 애증이 얼버무려진 시편은 가슴을 축축이 적셔주기에 충분했다.  우리 나라를 일컫는 삼남의 시린 삶이나 민족적 한(恨)을 노래하고 있는 이 시집 속에는 이런 흐름의 시로 계엄령 속의 눈, 비망기, 전봉준, 태평가 등이 더 있다. 황동규 시인은 1938년 평남 영유군 숙천에서 태어났다. 평양에서 40리 떨어진 대동군 재경 초등학교 1학년 때 해방을 맞았고, 이듬해 가족과 함께 남하했다. 고교시절 마종기 시인과 친하게 어울렸고 교과서 대신 타고르 예이츠 영문시집 읽기에 푹 빠져 지냈다. 그러면서 전교 1, 2등을 놓치지 않았고 서울대 문리대에 수석 입학했으니 수재이자 문재였던 셈. 대학 진학 때 법대나 의대 쪽 보다는 문리대를 원했고 아버지는 "후회하지 않을 길이면 가라" 했다. 일제 말엽 자신도 다른 아이들처럼 히라가나를 가르쳐 달라고 졸랐을 때 아버지가 울던 기억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이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소나기, 타인의 후예로 유명한 국민작가 황순원 선생의 아들, 그리고 동시대 대표적 지식인이면서 동시에 독자대중을 이끌고 있는 보기 드문 시인이다. 올곧은 인생철학과 처신, 순수 문학정신으로 일관했던 선생의 뜻을 기르기 위해 후학들이 사회장으로 치르자고 했을 때 상주인 황동규 시인은 이를 정중히 거절했었다. 평소 아버지와 비교되는 것을 꺼려했던 그이지만 겸손과 소박함으로 일관한 부친의 세세한 삶의 흐름만은 놓치지 않았던 셈.  부친이 타계하자 언론사의 인터뷰를 거절한 채 홀연히 백령도로 떠났던 그이는 아버지의 삶과 문학 혼을 짤막한 시로 남겼었다. 부동산은 없고, 몇 병의 술과 셔츠 하나, 그리고 웃으시는 사진 한 장뿐이었다는.  준엄했던 그 아버지를 뛰어넘기 위해 죽어라 뛰어 온 날들. 그렇게 대학 1학년 끝 무렵 갓 스무 살에 미당 서정주 시인의 추천으로 을 통해 등단했다. 당시 폐허 속에서 명동이나 무교동 술집에서 오징어 명태 혹은 감자국에 소주를 마시며 윤동주 서정주 김수영 엘리어트 시를 섭렵하고 삶과 문학을 외치던 문학 청년시절이었다.  * 죽음 노래한 풍장을 넘어 우주로 관심 돌린 작품 세계로 미당문학상 받아 흐르는 물빛 같은 세월. 등단 당시 스승인 미당의 문학적 업적을 기르는 미당 문학상에 그이가 수상자로 결정됐다. 김현 평론가와 함께 늘 새배 다니던 미당. 친일 어용시비와 별개로 미당 시를 읽고 감동 받은 사람들은 그 감동을 진솔하게, 실존적으로 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이는 미당의 작품의 진정성, 나르시시즘, 토속어와 신라정신 등을 배웠다.  그이는 시란 머리가 아니라 온몸으로 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등단 이후 여러 변모를 거듭해온 시 세계는 이번 미당문학상 수상작 적막한 새소리처럼 풍장을 넘어 삶을 궤적을 뚫고 다시 우주와 내통한다. 예수, 석가, 원효, 니체 등 성(聖)과 인간의 속(俗)이 만나는 공간을 노래한다. 일반 독자들에게 이러한 변모는 급작스럽고 부담된 일임에도 한동안 이러한 시도는 계속 될 것 같다. "늦가을 저녁/산들이 긴 그림자를 거두어들일 때/검불 몇 날리는 바람 속에/목소리 막 지우기 시작하는/적막한 새소리."(적막한 새소리 중에서)처럼 시원(始源)의 노래를 불러제끼면서 말이다.  황동규 시인은 여행벽이 심하기로 널리 알려져 있다. 왜 여행을 좋아하느냐에 대해 논리적으로 간명하게 말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운명적으로 역마살이 붙어 있는 겔까? 여행의 동행자는 시대별로 다르지만 김현 김정웅 김병익 서승해(미당 아들) 김주연 홍신선 김명인 하응백 조정권 김윤배 등 평론가와 시인 그리고 건강이 편치 않을 시기에 아버지와 동행을 들 수 있다.  그이는 어릴 적 경의선의 조그만 역에서 십리쯤 더 들어가야 닿는 간리(間里) 마을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인데도 홀로 험준한 월명산 너머 산골 할아버지 댁을 찾아가다가 길에서 혼난 적이 있었다. 산허리쯤에서 늑대가 쫓아올 때는 농부의 도움으로 화를 면했고 이름 모를 적갈색 짐승이 아무리 돌을 던져도 계속 따라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내달렸다. 밤중에 아버지가 동네 청년들과 횃불을 들고 와 그이를 찾아내고 크게 혼냈던 기억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1946년 5월 삼팔선이 채 굳어지기 전에 남한으로 내려와  아버지가 교편 잡던 서울 중학교(서울고) 사택에서 살던 때도 집을 벗어나 홀로 이화동, 돈암동, 청량리, 서대문 등을 헤매다가 경희궁 터 사택으로 울며 돌아오던 시절을 잊을 수 없다. 어릴 적부터 여행 벽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이는 고 2 때부터 본격적인 여행을즐겼던 것으로 기억한다면서 "여행은 일상에 꽉 막힌 숨통을 트게 해줘요. 요즈음엔 여행 다니던 친구들이 저보다 빨리 늙었는지 떠나길 꺼려해 저 또한 여행 횟수가 부쩍 줄었디만요."라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항구에 닿았다. 그런데 배들이 바다를 향해 뛰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 항구를 들여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처음으로 배들이 육지 쪽으로 머리를 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동안 생각한 상징의 겉 구조가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젊은 날 방황과 막막함의 해방구로 꿈꾸던 시인에게 절망적이었을 터. 탈출의 기회라고는 없을 듯한 하늘에 자유롭게 날고 있는 새들을 마주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이를 노래하는 시가 기항지 1이다.  "걸어서 항구에 도착했다/길게 부는 한지(寒地)의 바람/바다 앞의 집들을 흔들고/긴 눈 내릴듯/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지전(紙錢)에 그려진 반듯한 그림을/주머니에 구겨 넣고/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 꺼버리고/조용한 마음으로/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정박중의 어두운 용골들이/모두 고개를 들고/항구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어두운 하늘에는 수삼개(數三個)의 눈송이/하늘의 새들이 따르고 있었다." (기항지 1 전문)  1967년에는 여수와 목포 같은 큰 항구에도 버스가 하루에 두 대 정도였다. 어려운 걸음으로 당도했던 작은 포구. 묶인 배들이 항구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은 우리를 막는 삶의 행위가 도처에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켜 주기도 한다. 항해에 지친 배와 일상에 지친 시인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그 쓸쓸함을 어루만지듯 불빛도 낮게 드리우고 눈이 내린다. 이런 사실적 풍경화를 그린 시가 겨울 항구에서, 낙법, 노래자이의 노래놀이, 망초꽃 등이다.  * 여행에서 시의 모티브 얻고, 14년간 전국 떠돌며 풍장 집필  1982년 가을 또 다시 끝이 보일 것 같지 않은 긴 여행길에 나섰다. 그렇게 10여 년간 서해와 남해 전국을 떠돌았다. 사십대 중반에 자신도 모르게 죽음 길들이 충동이 일어 목적지 없는 여행을 거듭했다. 일상을 떠나는 여행을 통해 삶에 대한 깨달음과 깨달음이 낳은 거듭남을 보았다. 특히 군대시절 자신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이화령 고개를 함께 넘기도 했던 친구 김정강의 죽음(자살)은 삶과 죽음의 문제에 더 집요하게 만들었다.  그 충격에서 벗어나면서 죽음이라는 것이 극히 일상적이라는 인식도 했다. 또한 부친상을 당하면서 인생관이 조금씩 바뀌었다. 부친은 잠들다가 운명한 탓에 유언도 없고 임종도 못하고 몇 시에 돌아갔는지도 몰라 참 허망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40대에 연작시 풍장을 썼다. 풍장은 섬 지방에서 아들이 보름이고 스무날이고 고기잡이 나갔을 때 부모가 세상을 뜨면 매장하지 않고 그가 돌아와 얼굴이라도 볼 수 있도록 한 일종의 의식 장치. 냉동시설이 없던 시절 땅에 묻지 않고 조그만 무인도에 초막을 짓고 풀로 덮었다가 나중에 땅에 묻는 것이다. 대학시절 보길도 선유도 등지에서 이 풍습에 보고 충격을 받았고 곧 풍장의 모티브가 되었다. 82년부터 14년 동안 그렇게 70편에 이르는 풍장 연작시를 집필하여 우리 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는데, 죽음을 노래하면서 허무를 이야기하지 않고 서정성을 잃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좋은 평가를 받았다.  폴 발레리가 해변의 묘지에서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고 노래한 것처럼, 죽음이후 삶을 일깨우는 싱싱한 바 람소리로 가득한 작품이라는 평이었다. 연작시 가운데 그 첫 작품은 이랬다.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 다오/섭섭하지 않게/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손목에 달아 놓고/아주 춥지는 않게/가죽 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군산에 가서/검색이 심하면/곰소쯤에 가서/통통배에 옮겨 실어 다오" 풍화작용에 이녁을 맡겨달라는, 상식을 뛰어 넘어 죽음을 넘어 자연과의 함께 하고 싶은 마음. 연작시를 쓰는 동안 친구인 김현 평론가, 황인철 변호사의 죽음을 보았기에 한동안 죽음의 침묵에 갇히기도 했다. 그러나 막스 삐까르 말처럼 침묵이란, "다만 무엇인가가 결핍된 것이 아니라 어떤 적극적인 것, 가장 깊은 감정은 항상 침묵에 있는 것. 결국 "죽음과 삶의 황홀은 한가지에서 핀 꽃…죽지 않는 꽃은 가화(假花). 삶의 황홀이 없다면 죽음을 맞아 끝나는 삶, 그 삶의 끝남이 무슨 의미를 지닌단 말인가"라는 화두를 던지며 침묵을 깼다.  * 이별을 슬퍼 말라는 시 즐거운 편지가 영화로 상영돼 화제  그이의 시는 초창기이후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절망과 비극, 비관주의가 두드러지고 있다. 고교 때부터 혹독한 전쟁을 겪고 항무지가 된 서울에서 니체, 예이츠, 릴케 등의 영향 탓인 것 같다. 낭만주의자이기도 해 음대에 진학해 작곡가가 되려고도 했지만 친구 마종기 시인이 발성음치라는 사실을 지적하자 그 길을 포기했다. 학교에선 영미 모더니즘을 배우고 정작 시에서는 자기 방식으로 변형시킨 한국의 전통시를 쓰려하면서 갈등도 많이 겪었다. .  어쨌든 그이의 등단작 가운데 하나인 즐거운 편지는 58년의 연애시인 데 97년 두 편의 영화 편지와 팔월의 크리마스가 화제 개봉되면서 베스트셀러 순위에 진입하여 문단에서 두고두고 화제가 되었다.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즐거운 편지 전문) 영화 편지가 개봉되었을 때 극중 최진실은 이 즐거운 편지를 읽었다. 이 소식을 당시 미국 버클리대학에 있을 때 접했다. 시집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고교 3학년 때 사랑했던 연상의 여자에 대해 쓴 이 시의 매력은 사소한 진실로 진실로라는 단어에 있다. 일상의 사소한 일처럼 어디서 무엇을 하든 간에 너를 진실로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 시를 생경하기 위해 앞 소절에 이런 낯설게 하기와 가볍게 하기라는 장치를 해 놓은 게 그이 시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나 보기에 역겨워..."(김소월 진달래꽃), "아, 님은 갔습니다. 나는 님을 보내지 않았습니다"(한용운 님의 침묵), "가시도셔 오쇼서(가시자 마자 돌아 오십시오- 고려가요 가시리) 등 리듬이 우려 나온다. 그러나 지금은 떠나간 당신 언젠가 되돌아 올 날을 믿으며 한없이 기다리겠다는 전통 서정시의 구도나 연애시의 고정관념을 파괴시켜 버린다. 사랑은 늘 만들어 가는 것이지만 언젠가 인간의 끝처럼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으로 믿는다"고 단정한다. 그러면서 그 사랑의 끝이 세상의 끝은 아니라며 반드시라는 단어로 강조한다. 그러기에 더욱 눈물 나는 연애시일까. 이러 흐름의 연애시로 조그만 사랑 노래, 더 조그만 사랑 노래, 비린 사랑 노래 등이 있다. 그이는 "풍장이란 일종의 살을 버리는 행위"라 말했다. 그래서일까? "정년 퇴임하면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묻자 "더 살려는 혹은 무엇에 집착하려는 생각이랑 추호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결국 최후에 뼈로 남는 삶의 부스러기들.... 금방 눈이 내릴 것만 같다. 앙상한 나무 위에 존재의 가벼움으로 눈발이 휘날린다. 가볍게 비우고 간 사람들의 어깨 위와 가슴마다 눈발들 사뿐히 내려앉는다. 이내 흔적도 없이 세상을 축축이 적시며 사라지는 눈발이여....  ■ 황동규 시인은…………… 1938년 평남 평원군 숙천에서 출생, 서울대 입학 영국 에든버러 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8년 서울대 교양과정부 전임강사를 시작으로 현재 영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며 내년 1학기 마지막 강의를 끝으로 정년퇴임을 한다. 58년 에 미당 서정주 시인의 추천으로 시월, 즐거운 편지가 당선돼 문단에 데뷔했고 시집으로 어떤 개인 날, 비가(悲歌), 평균율 1, 평균울 2,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악어를 조심하라고?, 풍장, 버클리풍의 노래, 몰운대行, 미시령 큰바람 등이 있다. 시론집 사랑의 뿌리, 시선집 열하일기, 시적 자서전 시가 태어난 자리, 산문집 겨울 노래, 젖은 손으로 돌아보라 등이 있다. 현대문학상, 연암문학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미당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   작가의 공간 ⑧ 황동규 시인 이별과 여행으로 다져진 ‘40년 창작생활’ “앞서 간 친구들과 부친을 보면서 죽음은 그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걸 배웠습니다” 본 기사를 페이스북에 공유 본 기사를 트위터에 공유 본 기사를 카카오스토리에 공유 본 기사를 구글플러스에 공유 본 기사를 이메일로 보내기 본 기사를 인쇄하기 0 0 겨울나무처럼 외롭고 쓸쓸하게 삶을 노래하는 시인.시를 통해 접한 황동규 시인의 이미지는 그랬다. 고 김현을 비롯해 여행과 문학을 함께 나눴던 친한 문우들을 잃고, 아버지 황순원 선생까지 떠나보낸 예순다섯의 그이는 정들었던 대학과의 ‘이별’을 앞두고 있다. 문단 데뷔의 스승인 미당 선생의 정신을 기리는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그와의 만남. 황동규시인은 내년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다. 관악산 곳곳에 낙엽이 지고 있다. 지나간 날들을 그리워하듯 푸른 하늘에 눈빛 몇점 떨군 채 포물선을 긋는다. 서울대 인문관 2동 3층 황동규 시인의 연구실. 손때 묻은 누런 책들이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는 서재의 이 빠진 모습이 이미 짐을 정리중임을 말해준다. 올해 나이 예순다섯. 그이는 68년부터 몸담았던 이 대학을 6개월 후면 떠난다. 그의 시 에서 처럼 생사의 갈림길은 아닐지라도 긴 세월 정든 교정을 떠나려니 덧없는 세월은 주마등처럼 스치운다. 봉준이가 운다, 무식하게 무식하게 일자 무식하게, 아 한문만 알았던들 부드럽게 우는 법만 알았던들, 왕 뒤에 큰 왕이 있고/큰 왕의 채찍! 마패 없이 거듭 국경을 넘는 저 보마(步馬)의 겨울 안개 아래 부챗살로 갈라지는 땅들 포(砲)들이 얼굴 망가진 아이들처럼 울어 찬 눈에 홀로 볼 비빌 것을 알았던들, 계룡산에 들어 조용히 밭에 목매었으련만. 눈이 내린다, 우리가 무심히 건너는 돌다리에 형제의 아버지가 남몰래 앓는 초가 그늘에 귀 기울여보아라, 눈이 내린다, 무심히, 갑갑하게 내려앉은 하늘 아래 무식하게 무식하게. -‘삼남(三南)에 내리는 눈’ 전문 바야흐로 문청들이 중무장한 가슴으로 신춘문예를 준비하는 계절이다. 그는 신춘문예 심사를 맡고 있는 중앙문단의 대표적인 시인이기도 하다. 특히 시집 은 78년 민음사에서 출간된 이래 지금까지 꾸준하게 팔리고 있는 스테디셀러. 많은 신춘문예 준비생과 대학생들이 이 시집을 찾고 있다. 장엄한 성우의 장엄한 목소리에 배경음악이 깔려 나오던 애송시 낭송 테이프의 단골 레퍼토리이기도 했다. “봉준이가 운다, 무식하게 무식하게…”라는 성우의 목소리가 군홧발 뒤꿈치에서 신음하던 유신시대를 지나 5공화국으로 접어들면서 눈보라 치는 겨울과 애증이 얼버무려진 시편들은 우리들 가슴을 축축이 적셔주기에 충분했다. ‘계엄령 속의 눈’ ‘비망기’ ‘전봉준’ ‘태평가’ 같은 시들이 바로 이 시집에 수록돼 있다. 미당의 추천으로 등단했던 그가 ‘미당문학상’을 수상한 특별한 인연 황동규 시인은 38년 평남 평원군 숙천에서 태어났다. 평양에서 40리 떨어진 대동군 재경초등학교 1학년 때 해방을 맞았고, 이듬해 가족과 함께 남하했다. 고교시절 마종기 시인과 친하게 어울렸고 교과서 대신 타고르 예이츠 등의 영시집에 푹 빠져 지냈다. 그러면서 전교 1, 2등을 놓치지 않았고 서울대 문리대에 수석 입학했으니 수재이자 문재였던 셈. 대학 진학 때 법대나 의대 쪽보다는 문리대를 원했고 아버지는 “후회하지 않을 길이면 가라” 했다. 일제 말엽 다른 아이들처럼 히라카나를 가르쳐달라고 졸랐을 때 아버지가 울던 기억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로 유명한 ‘국민작가’ 황순원 선생의 아들이다. 작년 겨울 황순원 선생이 돌아가시자 선생의 올곧은 인생철학과 처신, 순수 문학정신으로 일관했던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후학들이 사회장으로 치르자고 했을 때 상주인 황동규 시인은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평소 아버지와 비교되는 것을 꺼려했던 그이지만 겸손과 소박함으로 일관한 부친의 세세한 삶의 흐름만은 놓치지 않았던 셈이다. 부친이 타계하자 언론사의 인터뷰를 거절한 채 홀연히 백령도로 떠났던 그는 아버지의 삶과 문학혼을 짤막한 시로 남겼다. 부동산은 없고, 몇병의 술과 셔츠 하나, 그리고 웃으시는 사진 한장뿐이었다는, 준엄했던 그 아버지를 뛰어넘기 위해 죽어라 뛰어온 날들. 황동규 시인은 올해 ‘미당문학상’을 수상했다. 대학 1학년 끝 무렵 갓 스무살에 미당 서정주의 추천으로 을 통해 등단했던 그이니만큼 감회가 남다르다. 지금은 이세상에 없는 평론가 김현과 함께 미당에게 세배 다녔던 황시인. 친일 어용시비와 별개로 미당 시를 읽고 감동받은 사람들은 그 감동을 진솔하게, 실존적으로 전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작품의 진정성과 나르시시즘, 그리고 토속어와 신라정신, 그가 미당에게서 배운 것들이다. 그는 ‘시란 머리가 아니라 온몸으로 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등단 이후 여러 변모를 거듭해온 시세계는 죽음을 노래한 ‘풍장’을 넘어 삶의 궤적을 뚫고 다시 우주와 내통한다. 예수, 석가, 원효, 니체 등 성(聖)과 인간의 속(俗)이 만나는 공간을 노래한다. 일반 독자들에게 이러한 변모는 급작스럽고 부담스러움에도 한동안 이런 시도는 계속될 것 같다. “늦가을 저녁/산들이 긴 그림자를 거두어들일 때/검불 몇 날리는 바람 속에/목소리 막 지우기 시작하는/적막한 새소리.”(미당문학상 수상작 ‘적막한 새소리’ 중에서)처럼 시원(始原)의 노래를 불러 제끼면서 말이다. ”여행은 일상의 막힌 숨통을 틔워준다”는 황동규 시인. 황동규 시인은 여행벽이 심하기로 널리 알려져 있다. 왜 여행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논리적으로 간명하게 말할 수는 없다고 답했다. 운명적으로 역마살이 붙어 있는 걸까? 여행의 동행자는 시대별로 다르지만 고 김현 김정웅 김병익 서승해(미당의 장남) 김주연 홍신선 김명인 하응백 조정권 김윤배 등 대부분 문학판 친구들이다. 어릴 적 경의선의 조그만 역에서 십리쯤 더 들어가야 닿는 ‘간리(間里)’ 마을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홀로 험준한 월명산 너머 산골 할아버지 댁을 찾아가다가 길에서 혼쭐이 났던 기억. 산허리쯤에서 늑대가 쫓아올 때는 농부의 도움으로 화를 면했고 이름 모를 적갈색 짐승이 아무리 돌을 던져도 계속 따라올 때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내달렸다. 밤중에 아버지가 동네 청년들과 횃불을 들고 와 그를 찾아내고 크게 혼냈던 그 기억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46년 5월 삼팔선이 채 그어지기 전, 남한으로 내려와 아버지가 교편 잡던 서울 중학교(서울고) 사택에서 살던 때도 그는 홀로 집을 벗어나 이화동, 돈암동, 청량리, 서대문 등을 헤매다니곤 했다. 본격적인 여행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라고 추억하면서 그는 “여행은 일상에 꽉 막힌 숨통을 트이게 해줘요. 요즈음엔 여행 다니던 친구들이 저보다 빨리 늙었는지 떠나길 꺼려해 저 또한 여행 횟수가 부쩍 줄었지만요”라고 말한다. 82년 가을부터 시인은 10여년간 틈만 나면 서해와 남해 전국을 떠돌았다. 사십대 중반에 자신도 모르게 죽음에 대한 충동이 일 때마다 목적지 없는 여행을 거듭했다. 여행은 그에게 삶에 대한 깨달음과 또 깨달음 뒤의 거듭남을 보게 만들어주었다. 군대시절 자신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친구 김정강의 죽음(자살)은 그에게 삶과 죽음의 문제에 더 집요하게 달라붙게 만들었다. 또한 부친상을 당하면서 그의 인생관은 조금씩 바뀌었다. 잠든 뒤에 운명한 탓에 유언도 없고 임종도 못하고 몇 시에 돌아갔는지도 몰랐던 부친의 주검 앞에서 그는 ‘허망’이라는 단어를 곱씹어야 했다. 그런 모든 경험이 응축된 것이 40대에 시작해 계속되고 있는 연작시 이다. 풍장은 섬 지방에서 아들이 고기잡이 나갔을 때 부모가 세상을 뜨면, 매장하지 않고 아들이 돌아와 얼굴이라도 볼 수 있도록 한 일종의 의식. 땅에 묻지 않고 조그만 무인도에 초막을 짓고 풀로 덮었다가 나중에 땅에 묻는 것이다. 대학시절, 보길도 선유도 등지에서 행해지던 이 풍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그는 곧 시의 모티브로 삼았다. 82년부터 14년 동안 그렇게 70편에 이르는 ‘풍장’ 연작시를 집필하여 그는 우리 문학사에 한 획을 긋는다. 죽음을 노래하면서도 허무를 말하지 않는 그의 시세계. 폴 발레리가 ‘해변의 묘지’라는 작품에서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고 노래한 것처럼, 그는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 다오/섭섭하지 않게/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손목에 달아 놓고/아주 춥지는 않게/가죽 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군산에 가서/검색이 심하면/곰소쯤에 가서/통통배에 옮겨 실어 다오”라고 노래한다. 연작시를 쓰는 동안 친구인 김현 평론가, 황인철 변호사의 죽음을 보았기에 한동안 죽음의 침묵에 갇히기도 했다. 그러나 막스 피카르 말처럼 침묵이란, “다만 무엇인가가 결핍된 것이 아니라 어떤 적극적인 것, 가장 깊은 감정은 항상 침묵에 있는 것” 아니던가. 결국 “죽음과 삶의 황홀은 한가지에서 핀 꽃… 죽지 않는 꽃은 가화(假花). 삶의 황홀이 없다면 죽음을 맞아 끝나는 삶, 그 삶의 끝남이 무슨 의미를 지닌단 말인가”라는 화두를 던지며 침묵을 깼다. 1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즐거운 편지’ 전문) 그의 시 중 독자에게 가장 사랑받는 시를 고르라면 단연 이 ‘즐거운 편지’를 꼽을 수 있다. 58년에 발표된 이 시는 지난 90년대말, 두편의 영화 와 가 이 시를 모티브로 삼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다시금 베스트셀러 순위로 진입해 두고두고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영화 에서 극중 여주인공 최진실이 이 ‘즐거운 편지’를 읽었다는 소식을 그는 미국 버클리 대학에서 들었다. 대체 발표된 지 40년을 훌쩍 넘은 이 시가 아직도 20대 젊은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가 고교 3학년 때 사랑했던 연상의 여자에 대해 썼다는 이 시의 매력은 ‘사소한’ ‘진실로 진실로’라는 단어에 있다. 일상의 ‘사소한’ 일처럼 어디서 무엇을 하든 간에 너를 ‘진실로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 시를 생경하기 위해 앞 소절에 이런 ‘낯설게 하기와 가볍게 하기’라는 장치를 해놓은 게 그의 시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나 보기에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라는 ‘진달래꽃’의 정서나 “아, 님은 갔습니다. (…) 그러나 나는 님을 보내지 않았습니다”라는 ‘님의 침묵’식의 정서를 탈피한다. 사랑은 늘 만들어가는 것이지만 언젠가는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으로 믿는다”고 단정한다. 그러면서 그 사랑의 끝이 세상의 끝은 아니라며 ‘반드시’라는 단어로 강조한다. 이런 흐름을 보여주는 연애시에는 ‘조그만 사랑 노래’ ‘더 조그만 사랑 노래’ ‘비린 사랑 노래’ 등이 있다. 그는 “풍장이란 일종의 살을 버리는 행위”라 말했다. 그래서일까? “정년 퇴임하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마지막 질문에 “더 살려는 혹은 무엇에 집착하려는 생각일랑 추호도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결국 최후에는 뼈로 남을 삶의 부스러기들….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금방 눈이 내릴 것만 같다. 앙상한 나무 위에 존재의 가벼움으로 눈발이 휘날린다. 가볍게 비우고 간 사람들의 어깨 위와 가슴마다 눈발들이 사뿐히 내려앉는다. 이내 흔적도 없이 세상을 축축이 적시며 사라지는 눈발…. 작성일 | 2002.11.10 ■ 글·박상건   꿈, 견디기 힘든                                           그대 벽 저편에서 중얼댄 말 나는 알아들었다 발 사이로 보이는 눈발 새벽 무렵이지만 날은 채 밝지 않았다 시계는 조금씩 가고 있다 거울 앞에서 그대는 몇 마디 말을 발음해 본다 나는 내가 아니다 발음해 본다 꿈을 견딘다는 건 힘든 일이다 꿈, 신분증에 채 안들어 가고 삶의 전부 쌓아도 무너지고 쌓아도 무너지는 모래 위에 아침처럼 거기 있는 꿈         즐거운 편지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언제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三南에 내리는 눈                                         봉준이가 운다 무식하게 무식하게 일자 무식하게. 아 한문만 알았던들 부드럽게 우는 법만 알았던들 왕 뒤에 큰 왕이 있고 큰 왕의 채찍! 마패 없이 거듭 국경을 넘는 저 步馬의 겨울 안개 아래 부챗살로 갈라지는 땅들 砲들이 얼굴 망가진 아이들처럼 울어 찬 눈에 홀로 볼 비빌 것을 알았던 계룡산에 들어 조용히 밭에 목매었으련만 목매었으련만, 대국 낫도 왜낫도 잘 들었으련만. 눈이 내린다, 우리가 무심히 건너는 돌다리에 형제의 아버지가 남몰래 앓는 초가 그늘에 귀 기울여 보아라, 눈이 내린다, 무심히, 갑갑하게 내려앉은 하늘 아래 무식하게 무식하게.         일 기                                                         하루종일 눈. 소리없이 전화 끊김. 마음놓고 혼자 중얼거릴 수 있음. 길 건너편 집의 낮불, 함박눈 속에 켜 있는 불, 대낮에 집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불, 가지런히 불타는 처마. 그 위에 내리다 말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눈송이도 있었음. 누군가 보이지 않는 손이 나비채를 휘두르며 불길을 잡았음. 불자동차는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달려옴. 이하 생략. 늦저녁에도 눈. 방 세 개의 문 모두 열어놓고 생각에 잠김. 이하 생략. "혼자 있어도 좋다"를 "행복했다"로 잘못 씀.         조그만 사랑 노래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가득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떠돌이 별                                           천문학자들은 항성을 행성보다 더 큰 일로 다루지만 나는 떠돌이별, 저 차돌 같은 싱싱한 지구 냄새에 끌려 늦봄의 김포와 강화를 떠돌았습니다. 길에는 붓꼿이 필통처럼 모여 피어들 있고 산 밑에는 수국(水菊)이 휘어지게 달려 벙긋이 웃고 있었습니다. 밤중에 마니산 중턱에 올라 모든 별이 폭발하듯 떠도는 것을 보았습니다. 떠돌이별 하나가 광채도 없이 마니산 중턱에서 숨쉬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아무 것도                                    오늘은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 아침에 편지 반장 부쳤을 뿐이다 나머지 반은 잉크로 지우고 이라 적었다 알 수 있는 것은 주소뿐이다 허나 그대 마음에서 편안함 걷히면 그대는 無名氏가 된다 숫자만 남고 가을 느티에 붙어 있는 몇 마리 까치가 남고 그대 주소는 비어 버린다 아침은 걸르고 점심에 소금 친 물 마셨을 뿐이다 우리에 나가 말 무릎 상처를 보살펴 준다 사면에 가을 바람 소리 울타리의 모든 角木에서 마음 떠나게 하고 채 머뭇대지도 못한 마음도 떠나고 한 치 앞이 캄캄해진다 어둠 속에 서서 잠든 말들의 발목이 나타난다 내일은 늦가을 비 뿌릴 것이다         풍장(風葬)                                               1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트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白金)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 다오  바람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다오.  2 아 색깔의 장마비!  바람 속에 판자 휘듯  목이 뒤틀려 퀭하니 눈뜨고 바라보는  저 옷벗는 색깔들  흙과 담싼 모래 그 너머  바다빛 바다!  그 위에 떠다니는 가을 햇빛의 알갱이들  소주가 소주에 취해 술의 숨길 되듯  바싹 마른 몸이 마름에 취해 색깔의 바람 속에 둥실 떠…… 3 희미한 길 하나  골목에 들어가 길 잃었다가  환한 한길로 열리듯  아픈 이 하나  턱 속에 사라졌다가 바람 불 때  확하고 뇌 속으로 타오르듯이  세상이 세워지다 말고  헐리다 말고  외롭다 말고, 세상이  우리 모여 떠들던 광교의 술집과  잠 못 들다 홀로 몸 붙이고 잠든 방 사이  어디선가 타오른다  인왕산일까 남산쯤 혹은 낙산 그 너머일까  낙산 밑에 밀주 팔던 그 술집일까  안방에 담요 뒤집어 쓰고 화끈 달던  술항아리일까  혹은 우리들보다 더 뜨거운 우리의 골목일까  그런 골목, 우리 코트 버리고  웃옷 벗어 머리에 쓰고 허리 낮추고  불타는 마루를 빠져나와 마당을 빠져나와  대문턱에 걸려 넘어져 엎어진 채로  세상이 마르고, 세상을 태우고, 세상에 물뿌리는 소리를 듣는다  4  쓸쓸한 화령길  어려운 길 석천(石川)길  반야사(般若寺)는 초행길  황간(黃澗)지나 막눈길  돌다리 위에 뜬 어리숙한 달  (그 달?)  등지고  난간 위에 눈을 조금 쓸고  목숨 내려놓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루카치 만나면 루카칠  바슐라르 만나면 바슐라를  놀부를 만나면 흥부를……  이번엔 달을 내려놓고. 7 풍란(風蘭)이 터진다  손가락을 넣으면  빵꾸난 주머니 시원 너덜너덜 너덜  옷꿰맨 곳 터져  살 드러나고  살 꿰맨 곳 터져  뼈 드러나는가  가만,  말 꿰맨 곳 터질 때  드러나는 말의 뼈  실과 바람사이  바람과 난(蘭)사이  풍란(風蘭)과 향기 사이  에서 흰 빛깔과 초록빛깔이 알록달록 가벼이 춤추는  뼈들이 골수속에 코를 박고 벌름대는  이 향기.  12 이 세상 가볍게 떠돌기란 양말 몇 켤레면 족한 것을 헤어지면  기워신고 귀찮아지면 해어지고 (소금장이처럼 가볍게  길 위에 떠서) 아 안 보이던 것이 보인다 콘크리트 터진 틈새로 노란 꽃대를 단 푸른 싹이 간질간질 비집고 나온다 공중에선 조그만 동작을 하면서 기쁨에 떠는 새들 호랑나비 바람이 달려와 마음의 바탕에 호랑무늬를 찍는다 찍어라, 삶의 무늬를, 어느날 누워 깊은 잠 들 때 머릿속을 꽉 채울 숨결의 무늬를,  그 무늬 밖에서 숨죽인 가을비 내릴 때. 14 오늘 낮에 새들한테 당했다 섬 밖 사방에서 날아와 떼지어 맴돌다 한꺼번에 나에게 달려든 저 갈매기표(標) 칼새표(標) 심장들 두둥 두둥둥 마싹 마른 다리로 벌떡 일어나 뒤를 보며 달리다 바닷가에 널어논 그물에 걸려 벌렁 나자빠져 춤추듯 누웠다 온통 맥박투성이의 하늘. 15 숲에서 나와  가까이,  땅의 얼굴에 얼굴 가까이,  그 얼굴에 볼에 가볍게 볼 비비고  그 얼굴에 입에 입 가까이  혀 가까이,  목구멍 가까이,  가볍게  몸이 가벼워져 거꾸로 빙빙 돌며 떠오르는 곳  회오리 바람이는 곳 내 죽음 통하지 않고 고장 승천하는 곳.   16 어젯밤에는  흐르는 별을 세 채나 만났다  서로 다른 하늘에서  세 편(篇)의 생(生)이 시작되다가  확 타며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오늘 오후 만조(滿潮) 때는  좁은 포구에 봄물이 밀어오고  죽었던 나무토막들이 되살아나  이리저리 헤엄쳐 다녔다  허리께 해파리를 띠로 두른 놈도 있었다  맥을 놓고 있는 사이  밤비 뿌리는 소리가 왜 이리 편안한가?   17 땅에 떨어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물방울  사진으로 잡으면 얼마나 황홀한가?  (마음으로 잡으면!)  순간 튀어올라  왕관을 만들기도 하고  꽃밭에 물안개로 흩어져  꽃 호흡기의 목마름이 되기도 한다.  땅에 닿는 순간  내려온 것은 황홀하다.  익은 사과는 낙하하여  무아경(無我境)으로 한번 튀었다가  천천히 굴러  편안히 눕는다.   20  바다는 젖어 있었다. 바다와 해가 맞물려 출렁거려 그 속에서 해당화가 왕보석처럼 빛났다. 색의 창을 슬쩍 여닫는 색의 눈, 해당화를 보다 말고  인간을 향해 그냥 인간의 눈 속으로! 21 인간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속에 사는, 미물(微物) 속에서도 쉬지 않고 숨쉬는, 혹은 채 살아 있지 않은 신소재(新素材)도 날카로이 깎아놓으면 원래의 편안한 모습으로 되돌아가려는, 저 본능! 바람에 흔들리는 저 나무, 저 꽃, 저 풀, 도토리를 먹는 다람쥐의 오르내리는 저 목젖이 동식물도감의 정밀한 사진들 속에 숨지 않으려는 바로 그것! 22 무작정 떠 있다 멍텅구리배. 오늘은 흔들리지도 않는다. 허리 근질거림 참다보면 바다에 떴는지 하는에 떴는지 열(熱)에 떴는지. 처음으로 나무에서 내려와 땅 위에 정신없이 발디딘 원숭이처럼 땅 위에 떴는지. 인간으로 그냥 낡기 싫어 뒤로 돌아 생명의 최초로 되밟아가려다 생명 속에 떴는지. 24 베란다에 함박꽃 필 때 멀리 있는 친구에게 친구 하나 죽었다는 편지 쓰고 편지 속에 죽은 친구 욕 좀 쓰려다 대신 함박꽃 피었다는 얘기를 자세히 적었다. 밤세수하고 머리 새로 씻으니 달이 막 지고 지구가 떠오른다.  25 희양산 봉암사에 다가갔다.  늦가을 저녁  발목이 깊은 낙엽에 빠지고  시냇물 소리도 낙엽에빠지고  바람 소리까지 낙엽에 빠지는  늦가을 저녁.  검음 멈추면  소리내던 모든 것의 소리 소멸,  움직이던 모든 것의 기척 소멸,  문득 얼굴 들면  하얗게 타는 희양산 봉우리,  소리없이 환한.  주위엔 저 옥보라색.  빛들이 몸 가벼운 쪽으로 쏠리다 맑아져  分光 그만두고 스펙트럼 벗어나 우주 속에 사라졌다가  지구의 하늘이 그리워 돌아온  저 색!  때맞춰 하얗게 타는 산봉우리.  26 달마는 면벽(面壁) 구 년에 왜 마르지 않았는가? 달마는 마르는 대신 왜 사지(四肢)의 퇴화를 택했는가? 사지는 말없이 그의 고통과 법열(法悅) 속에 (저 소리없는 신음소리, 아악 소리, 내장(內臟)의 웃음소리, 생명의 폭발소리) 그 모두를 참으며 세포 하나하나에  미소 보내며 기다렸을까? 기다림이란 무엇인가? 퇴화란 무엇인가? 혹시 진화란 퇴화로부터 뒷걸음질치는 것? 발 헛디디며 계속 뒷걸음질치다 벽에 등대고 선 나의 머리와 사지. 27 내 세상 뜰 때 우선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입을 가지고 가리. 어둑해진 눈도 소중히 거풀 덮어 지니고 가리. 허나 가을의 어깨를 부축이고 때늦게 오는 저 밤비 소리에 기울이고 있는 귀는 두고 가리. 소리만 듣고도 비맞는 가을 나무의 이름을 알아맞히는 귀 그냥 두고 가리. 28 내 마지막 길 떠날 때 모든 것 버리고 가도. 혀끝에 남은 물기까지 말리고 가도. 마지막으로 양 허파에 담았던 공기는 그냥 지니고 가리. 가슴 좀 갑갑하겠지만 그냥 담고 가리. 가다가 잠시 발목 주무르며 세상 뒤돌아볼 때 도시마다 사람들 가득 담겨 시시덕거리는 것 내려다보며 한번 웃기 위해 마지막으로 한번 배 잡고 낄길대며 위해 지니고 가리. 30 함박꽃 가지에서 사마귀가 성교 도중 암컷에게 먹히기 시작했다, 머리부터. 머리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이 쾌감! 하늘과 땅 사이에 기댈 마른 풀 한 가닥 없이 몸뚱어리 몽땅 꺼내놓고 우주의 공간 전부와 한번 몸 부비는 저 경련! 31 마른 국화를 비벼서 향내를 낸다 꽃의 체취가 그토록 가벼울 수 있을지 손바닥을 들여다 보다가 마음이 쏟아진다 나비나 하루살이 몸에 식물의 마음 심은 가벼운 것이 되어 떠돌리라 비벼진 꽃 냄새 살짝 띠고 34 옷을 벗어버린 눈송이들이 지구의 하늘에서보다 더 살아 춤추는 우주의 변두리, 혹은 서울의 변두리 밖으로, 가고 싶다. 확대경 속에서처럼 큰 눈송이들이 공해에 찌든 몸의 옷 벗어버리고 속옷도 모두 벗어버리고 속살 그대로 날으며 춤추는 춤추다 춤추다 몸째 춤이 되는 그곳으로, 여섯 개의 수정(水晶)깃만 단 눈송이들이. 35 친구 사진 앞에서 두 번 절을 한다. 친구 사진이 웃는다, 달라진 게 없다고. 몸 속 원자들 자리 좀 바꿨을 뿐, 영안실 밖에 내리는 빗소리도 옆방에서 술 마시고 화투치는 조객들의 소리도 화장실 가기 위해 슬리퍼 끄는 소리까지도 다 그대로 있다고. 36  내 마지막 기쁨은 시(詩)의 액셀러레이터 밟고 또 밟아 시계(視界) 좁아질 만큼 내리 밟아 한 무리 환한 참단풍에 눈이 열려 벨트 맨 채 한계령 절벽 너머로 다이빙. 몸과 허공 0밀리 간격 만남. 아 내 눈! 속에서 타는 단풍. 37 땅속에 발목뼈 채 묻히지 못해 한없이 떠도는 원혼(寃魂)이 된들 어떠리. 원혼 가운데서도 새처럼 가벼운 원혼, 슬피 울지도 못하고 잠투정하듯 초저녁에 잠시 우는, 울다 문득 고막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38 아침에 커피 끓여 마실 때 내 입은 위(胃)와 통화한다, "지금 커피 한잔 발송한다." 조금 있다가 위는 창자와 통화할 것이다. "점막질에 약간 유해한 액체 바로 통과했음." 저녁쯤 항문은 입에게 팩시를 보낼 것이다. "숙주(宿主)에 불면증 있음."  40 선암사 매화 처음 만나 수인사 나누고  그 향기 가슴으로 마시고  피부로 마시고  내장(內臟)으로 마시고  꿀에 취한 벌처럼 흐늘흐늘대다  진짜 꿀벌들을 만났다.  벌들이 별안간 공중에 떠서  배들을 내밀고 웃었다.  벌들의 배들이 하나씩 뒤집히며  매화의 내장으로 피어……  나는 매화의 내장 밖에 있는가,  선암사가 온통 매화,  안에 있는가? 44 바람 소리.  저 마을 뒤에 엉거주춤 서 있는 산,  낯익어 고향 같다.  개울 간신히 건너는 돌다리  낯익어 돌다리 같다.  눈 반쯤 감고 보면 모두 낯익다.  바람 소리에 흔들릴까 말까 주저하는  저 나무의 몸짓도.  언젠가 하루 구름 갠 날  눈 한번 아주 감으면  모든 게 몸서리치게 낯익어지지 않을까?  아 환한 사람 소리.  눈 지긋 감아라. 46 며칠 병(病)없이 앓았다. 책장문들이 모두 열렸고 책들은 길 떠날 채비하고 줄 서 있었다. 더러 외투 껴입고 있는 놈도 있었다. 문밖을 나서니 시야의 초점 계속 녹이는 가을 햇빛. 간판들이 선명해라 지나치는 사람들도 선명해라 책을 들고 걷는 저 여자의 긴 손. 차도(車道)에 바싹 나와 아슬아슬 서 있는 저 흙덩이의 어깨까지 선명해라. 눈이 밝아졌구나, 아 눈이. 47 내 관악산 보이는 곳에 살며 때로는 산이 안개 속에 숨는 것을 보았다. 이슬비가 안개를 벗기기도 안개가 이슬비를 다시 감싸기도 했다. 언젠가 마음 속 간직해온 것과 헤어져야 할 때, 마음의 것들 책상 위에 벌여 놓을 때, 서가에 꽂힌 책 위에도 얹어 놓을 때, 눈앞에서 금방 사라질 것들! 꺼내 놓으라면, 관악산부터 내어 놓으리. 다녀온 암자들도 암자의 약수그릇도 내어 놓고, 가을 저녁 어둡기 직전 남 보지 않을 때 땅을 더듬다 말던 가랑비도. 49 늦가을 저녁 아우라지강을 혼자 만나노니 나의 유해 예까지 끌고 와 부릴 만하이. 앞산 한가운덴 잎갈이나무들 위통 벗고 모여 마지막 햇빛 쪼이고 있고, 주위로 침엽수들 침착히 서서 두 강이 약속 없이 만나는 것을 내려다 보고 있다 껄끄러운 두 강 만나 고요한 강 하나 이룬다 빈 배 하나 흔들리며 떠 있다 시간이 고이지 않는다 50 오늘 서가의 지도(地圖)를 모두 버렸다. 바닷가를 방황하다가 우연히 눈부신 눈을 맞으리. 건너편 섬이 은색 익명(匿名)으로 바뀌다가 내리는 눈발 사이로 넌지시 사라지는 것을 보리. 사라진 섬을 두고, 마음에 박혔던 섬도 몇 뽑고 마음에 들던 섬부터 뽑고 섬처럼 박혀 있던 시간들도 모두 뽑아버리고 돌아오리. 오늘 지도를 모두 버렸다. 59 그대는 상자 속을 들여다 보았는가? 낡은 티셔츠, 벙어리장갑 한 짝, 흑백 사진 몇 장, 몽당연필 한 자루, 붉은 연필로 겉장에 X표 친 노우트, 벙어리장갑 또 한 짝, 을 들치고 속을 보면 어느날 들어간 인사동 골목길 연탄 난로 위에 우동이 끓고 있는 조그만 노점 앞에서 키 큰 소녀 하나가 떡볶이를 먹고 있다.  단발머리 위로 담장 위로 벌겋게 녹슬고 있는 철조망 끝으로 타고 오른 끝이 살짝 말려 있는 나팔꽃 한 줄기 그 위론 예쁘달 것도 귀엽달 것도 없는 낮달 하나 구역질 소녀는 계속 먹고 있다. 시간이 새어나가고 아무런 부피도 무게도 자리 뜬 한줌의 느낌.     70   냇물 위로 뻗은 마른 나뭇가지 끝 저녁 햇빛 속에 조그만 물새 하나 앉아 있다 수척한 물새 하나 생각에 잠겼는가 냇물을 굽어보는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가  조으는가 조으는가 꿈도 없이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자전거 유모차 리어카의 바퀴 마차의 바퀴 굴러가는 바퀴도 굴리고 싶어진다 가쁜 언덕길을 오를 때 자동차 바퀴도 굴리고 싶어진다   길 속에 모든 것이 안 보이고 보인다, 망가뜨리고 싶은 어린 날도 안 보이고 보이고, 서로 다른 새떼 지저귀던 앞뒷숲이 보이고 안 보인다. 숨찬 공화국이 안 보이고 보인다, 굴리고 싶어진다. 노점에 쌓여있는 귤 옹기점에 엎어져 있는 항아리, 둥그렇게 누워 있는 사람들 모든 것 떨어지기 전에 한 번 날으는 길 위로         버클리풍의 사랑노래                                    내 그대에게 해주려는 것은 꽃꽂이도 벽에 그림 달기도 아니고 사랑 얘기 같은 건 더더욱 아니고 그대 모르는 새에 해치우는 그냥 설거지일 뿐, 얼굴 붉은 사과 두알 식탁에 앉혀두고 간장병과 기름병을 치우고 수돗물을 시원스레 틀어놓고 마음보다 더 시원하게 접시와, 컵 수저와 잔들을 물비누로 하나씩 정갈히 씻는 것, 겨울비 잠시 그친 틈을 타 바다 쪽을 향해 창 조금 열어놓고, 우리 모르는 새 언덕 새파래지고 우리 모르는 새 노란 유채꽃이 땅의 가슴 언저리 간질이기 시작했음을 알아내는것. 겁 없이.         밤 여울                                                     아주 캄캄한 밤이 오히려 마음 편하다. 마음속이 온통 역청 속일 때 하늘에 별 몇 매달린 밤보다 아무것도 없는 길이 더 살갑다. 두 눈을 귀에 옮겨 붙이고 더듬더듬 걷다 갈림길 어귀에서 만나는 여울물 소리, 빠지려는 것 두 팔로 붙들려다 붙들려다 확 놓고 혼자 낄낄대는 소리. 하늘과 땅이 가려지지 않는 시간 속으로 무엇인가 저만의 것으로 안으려던 것을 자신도 모르게 놓아버리는 소리.         시 월                                                         1 내 사랑하리 시월의 강물을 석양이 짙어가는 푸른 모래톱 지난날 가졌던 슬픈 여정들을, 아득한 기대를 이제는 홀로 남아 따뜻이 기다리리.  2 지난 이야기를 해서 무엇하리. 두견이 우는 숲 새를 건너서 낮은 돌담에 흐르는 달빛 속에 울리던 木琴소리 목금소리 목금소리.    3 며칠내 바람이 싸늘히 불고 오늘은 안개 속에 찬비가 뿌렸다. 가을비 소리에 온 마음 끌림은 잊고 싶은 약속을 못다한 탓이리.    4 아늬, 石燈 곁에 밤 물소리 누이야 무엇 하나 달이 지는데 밀물 지는 고물에서 눈을 감듯이 바람은 사면에서 빈 가지를 하나 남은 사랑처럼 흔들고 있다. 아늬, 석등 곁에 밤 물소리.    5 낡은 단청 밖으론 바람이 이는 가을날, 잔잔히 다가오는 저녁 어스름. 며칠내 며칠내 낙엽이 내리고 혹 싸늘히 비가 뿌려와서...... 절 뒷울 안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 보면 낙엽 지는 느릅나무며 우물이며 초가집이며 그리고 방금 켜지기 시작한 등불들이 어스름 속에서 알 수 없는 어느 하나에로 합쳐짐을 나는 본다.    6 창 밖에 가득히 낙엽이 내리는 저녁 나는 끊임없이 불빛이 그리웠다. 바람은 조금도 불지 않고 등불들은 다만 그 숱한 향수와 같은 것에 싸여가고 주위는 자꾸 어두워 갔다 이제 나도 한 잎의 낙엽으로 좀더 낮은 곳으로 내리고 싶다.         탁족(濯足)                                                휴대폰 안 터지는 곳이라면 그 어디나 살갑다. 아주 적적한 곳 늦겨울 텅 빈 강원도 골짜기도 좋지만, 알맞게 사람 냄새 풍겨 조금 덜 슴슴한 부석사 뒤편 오전(梧田)약수 골짜기 벌써 초여름, 산들이 날이면 날마다 더 푸른 옷 갈아입을 때 흔들어봐도 안 터지는 휴대폰 주머니에 쑤셔넣고 걷다 보면 면허증 신분증 카드 수첩 명함 휴대폰 그리고 잊어버린 교통 범칙금 고지서까지 지겹게 지니고 다닌다는 생각! 시냇가에 앉아 구두와 양말 벗고 바지를 걷는다. 팔과 종아리에 느닷없이 만나 새긴 화끈한 문신(文身)들! 인간의 손이 쳐서 채 완성 못 본 문신도 있다. 요만한 자국도 없이 인간이 제풀로 맺을 수 있는 것이 어디 있는가?         어느 蘭의 데스마스크                                  낮에 잠깐 품었던 잠을 깬다. 어디 딴 세상 소리처럼 트럭 경음 들리고 무언가 메마른 것이 몸을 적신다. 우박이 내리는가 모르는 사이 베란다 쪽이 어두워지고 유리창이 자못 소란스러워진다. 베란다 화분에 빈 심지로 꽂혀 있는 며칠 전 죽은 난, 마른 줄기들.   깨긴 깨었는가? 베란다의 소리 적이 가라앉고 소리 줄어든 만큼 주위가 환해지고 화분 위엔 전에 못 보던 다리 긴 발 약간씩 뒤틀린 새들 무언가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는 자코메티 풍의 꼿꼿한 새들, 천천히 고개를 든다.   고개 들면 어디로 가겠는가? 유리창 소리가 가시고 베란다가 환해진다. 햇빛 드는 화분 위엔 꼿꼿이 삭은 심지의 촉루, 그래 어디로 가겠는가? 어디로? 갈 데 없는 난의 얼굴에 갈데없는 인간의 얼굴을 부비리라.         허공의 불타                                              - 관룡사 용선대에서   바위에 붙어 있는 풀들도 허공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내민 팔들이 질긴 것 같지만 허공 쪽에서 잡으면 팔을 탁탁 끊어버린다. 그렇다. 밖으로 내민 것 끊지 않고 허공 앞에 설 수는 없을 것이다. 저 아래 새들이 날고 그 밑에 바위 그림자 가라앉을 때 등 뒤에서 태양이 머뭇거릴 때 늦가을 산정(山頂) 바람 예리한 칼끝은 줄곧 옷가슴을 들치며 심장이 여기지, 여기지, 묻는다. 불타와 예수의 앞자리치고 위험치 않은 자리 어디 있으랴? 허공에 나앉은 불타, 몰래 밖으로 내미는 인간의 팔 탁탁 끊어주소! 나무뿌리에 되우 낚아채인 다리 후들거림 멎으며 허공이 텅 빈다.      만해마을 시비        ​소나기 즐거운편지 황금물고기 + 양평 소나기마을     학교 다닐 때 황순원 작가의 소설. 한 편씩은 모두 읽어 보셨죠?   영화까지 만들어졌던 황순원의 소나기. 아직도, 소년과 소녀의 대화가 귓가에 생생합니다. ...           양평에서...   양평에 황순원 소나기 마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당장 달려 갔었습니다.   저에게 황순원 교수는 소나기와 학으로 유명한 작가이기도 했지만 많은 문인들이, 진정한 스승으로 생각하는 표본이 되는, 학자로 느껴졌었거든요.   역시 황순원 문학관을 다녀오니 인간적으로도 배울 점이 참 많았던, 스승이자 학자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15년 출생해서 2000년 사망하기까지 일제강점기와 6.25. 군사정권을 거쳐. 민주화된 대한민국까지 모두 보고 가셨으니. 하고 싶고 쓰고 싶은 말들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리고 황순원 작가의 아들이자, 우리에게는 즐거운 편지로 유명한 황동규 시인. 황동규 시인, 황동규 교수 중. 저에게는 황동규 시인이 더 와닿습니다.   짝사랑하는 누나를 생각하며 썼다는 즐거운 편지가. 박신양 최진실 주연의 영화 에 등장하면서 아주 유명해졌죠. 그리고 나중에는 중학교 교과서에도 실립니다.   아버지가 쓴 글과 아들이 쓴 글이 모두 교과서에 등재된 집안이죠 ^^   황동규 교수도 황순원 작가처럼 평안남도 (북한)가 고향인데요. 그래서 가족모임이 있을 때마다 북한 음식 전문점을 찾아다니며 고향에 대해 그리움을 달랬다고 하네요.   즐거운편지... 그 시를 가르치면서도 참 행복했는데. 부자의 소년감성이, 그대로 고스란히 느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황순원, 황동규를 잇는. 3대 문인 집안의 탄생이라고 유명했던 소설가 황시내 작가입니다. 황금물고기라는 작품 이후, 아직 다른 책은 더 이상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음악적 재능, 미술적 재능, 문학적 재능까지. 다채로운 재능을 갖고 있는 소설가인 듯 했습니다. 작품 속에 그런 부분을 많이 반영해서 소설을 썼더라구요.                   그리고 황순원 작가의 소나기. 양평 황순원 문학관, 소나기마을에 가보면 소나기를 다양한 매체로 활용해 놨더라구요. 그림도 그려놓고, 퀴즈나 퍼즐로도 만들어놓고, 오디오북이랑. 애니메이션까지.   정말 많은 공부, 많은 도움이 되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리고 황순원 작가의 학. 마지막에. 학이 나타나지 않던 마을에서 학이 다시 나타남으써 우리 민족의 밝은 미래를 상징했던...   정말, 짧고 간결하면서도 묵직한 메세지를 희망적으로 잘 전달해주던 황순원 작가. 멋진 분인 것 같아요.   많은 문인들이 존경할만한...ㅡ     [출처] 소나기 즐거운편지 황금물고기 + 양평 황순원마을|작성자 폭풍수다 루루       한반도 통일 기원비  해돋이 전망대 올라가는 초입  땅끝마을에서 바라다 본 다도해~~  무척 평화롭고 한가해 보이죠 해돋이 전망대를 갈려면 모노레일이나 도보를 이용 ~~ 우리는 편도 올라가는것만 모노레일을 타기로 했네요  전망대아래에서 찍은 다도해   해남해돋이 전망대 입장료가 성인 2,000원 전망대에서 안봐도 다도해가 한 눈에 보였답니다.   ^^*전망대 아래 사랑과 언약을 약속하는 자물쇠 , 가족의 행복을 위한 자물쇠 , 나라를 위한 자물쇠 등이 있었지만 전 사랑과 언약을 약속하는 자물쇠가 제일 좋았어요. 사랑에 굶주려서 그렇까요 ㅎㅎ -   고은 시인의 시비 - 땅끝 시중에 '살아온 날들도 함께 왔 습니다'.에  제마음도 그랬답니다. 황동규 시인의 시비 위는 김지하 시인의 시비   그외 많은 시비들이 있었지만 여행자들의 인증샷으로 많이 찍지 못했네요. 시비설립에 관한 비석  가져간 카메라도 스마트폰도 베터리가 다되어 겨우 한 장 건졌네요 .  달마산 정상에 있는 도솔암   창문을 열면 바다가 보이는 일출펜션 전망이 좋았답니다.  공기좋고 해서 곡차도 술술 ~~~  펜션 담벽에 흐드러지게 핀 꽃 ~  꽃이름을 몰라서 꽃에게 미안하네요  인쇄 블로그 카페 북마크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시인 본색 /정희성     누가 듣기 좋은 말을 한답시고 저런 학 같은 시인하고 살면 사는 게 다 시가 아니겠냐고 이 말 듣고 속이 불편해진 마누라가 그 자리에서 내색은 못하고 집에 돌아와 혼자 궁시렁거리는데 학 좋아하네 지가 살아봤냐고 학은 무슨 학, 닭이다 닭, 닭 중에도 오골계(烏骨鷄)!               -정희성 시집 『돌아다보면 문득』(창비) 중에서 [출처] 정희성의 '시인 본색'|작성자 허산재 ===========================================================================================     ♣ 정희성 시인의 시강의를 듣고 ♣   ◆ 우리의 말이 누군가를 감동시키고 누군가의 마음에 아름다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없다면 우리는 더 이상 시를 쓰기를 그만두어야 한다. ◆ 시인들의 낡은 세계 속에서의 낡은 사물들 속에서의 새로운 이미지를 발견해 내는 일은 아마도   과학자들이 낡은 세계 낡은 사물들 속에서 새로운 원소나 원리를 발견해 내는 일에 비견할 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시인은 말을 모시는 사람들 입니다. 말을 잘 모시려면 말을 잘 해야 합니다. 한 편의 시를 이루는 언어의 요소는 말뜻, 소리, 모양(형상, 이미지) 이 세가지 입니다. (말뜻을 강조하면 내용성 또는 이념성이 두드러진 시가 될 것이고, 소리를 강조하면 음악성이 강한 시가 될 것이고, 형상을 강조하면 회화성이 강한 시가 됩니다.)  정희성 시인 프로필   1945년 경남 창원 출생 1964년  용산 고등학교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서울대대학원수료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등단 `972년 숭문고등학교 교사 1974년 시집 (문학동네) 1978년 시집 (창작과 비평) 1981년 제1회 김수영문학상  신경림 시인과 출간 1991년 시집 (창작과비평) 1996년 민족문학작가회의 부이사장 역임 1997년 시와시학상 2001년 제 16회 만해문학상 수상,  평양 815평화문화축전에 도종환, 김준태와 남축대표시집 (창작과비평) 2003년 제8회 현대불교문학상 2006년 민족문학작가회의 16대 이사장 2008년 제5회 육사시문학상 , 시집(창비)         우리에게「답청」과「저문 강에 삽을 씻고」라는 시로 잘 알려진 정희성 시인. 그는 분명 과작(寡作)의 시인이다. 1970년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올해로 40년 가까운 시력(詩歷)의 중견 시인인데 지금껏 그가 펴낸 시집은『답청』(샘터사,1974)『저문 강에 삽을 씻고』(창비,1978)『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창비,1991)『詩에 대하여』(창비,2001) 단 네 권뿐이다. 정희성 시인이 3시집 이후 10년 만에 펴낸, 그것도 43편의 시로 묶여진 4시집『詩에 대하여』에서「가야산 홍류동 바위」를 읽었다. 이 시는 신라 말기에 무너져가는 나라와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려 전방위로 애를 썼지만 반동 귀족 세력들의 반대로 그 시도가 좌절되자 가야산으로 입산해버린 고운(孤雲) 최치원의 삶에 기대고 있다. 특히 가야산 해인사 입구 홍류동 계곡과 그가 남긴 한시「題伽耶山讀書堂」,「入山詩」가 이 시의 배후에 놓여있다. 고운 최치원의 유(儒)․불(彿)․선(仙) 포함삼교(包含三敎)의 풍류도(風流徒) 정신과 뭇 생명을 살리는 접화군생(接化群生)의 큰 사상은 우리 한민족의 정신으로 지금 새롭게 계승되고 있다. “말은 흘러가고/바위만 곧게 앉아”라는 시구는 객관적 실제를 기술한 것이겠지만 큰 사상과 간절한 마음이 어디 그리 허망하게 사라지는 것인가. 정희성 시인이 이 시를 구태여 쓴 연유도 고운의 풍류도와 접화군생의 사상을 좇고 있음이리라. 그렇다. “말은 흘러가고”의 시구처럼 선생의 말(사상)이 흘러 절망의 우리 사회에 새로이 피어나 해원(解寃)과 상생(相生)의 새날을 하루 속히 불러와야만 한다. -이종암(시인) =================================================     정희성 /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2015년 6월, 교보생명 광화문글판이 시원한 여름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이번 〈여름편〉은 정희성 시인의 ‘숲’에서 가져왔습니다. 을 빛내준 정희성 시인은 ‘저문강에 삽을 씻고’ 등 시대상을 차분한 어조로 표현하는 대표적인 시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 문안은 생김새나 종류가 다른 나무들이 조화를 이뤄 아름다운 숲을 이루듯 각자 개성이나 생각이 다르지만 서로 배려하고 포용하며 함께 나아가자는 뜻을 담았습니다...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어느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日月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춘분 그 즈음에  해와 달을 몸받아  누리에 나신 이여 두 손 모아 비오니  천지를 운행하올 제 어느 하늘 아래  사무쳐 그리는 이 있음을  기억하소서  옹기전에서 나는 웬지 잘 빚어진 항아리보다  좀 실수를 한 듯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아내를 따라와 옹기를 고르면서 늘 느끼는 일이지만  몸소 질그릇을 굽는다는  옹기전 주인의 모습에도 어딘다 좀 빈데가 있어 그것이 그렇게 넉넉해 보였다 내가 골라놓은 질그릇을 보고  아내는 곧장 화를 내지만 뒷전을 돌아보면 그가 그냥 투박하게 웃고 섰다  가끔 생각해보곤 하는데  나는 어딘가 좀 모자라는 놈인가 싶다  질그릇 하나를 고르는 데도 실수한 것보다는 차라리 실패한 것을 택하니 얼은 강을 건너며 얼음을 깬다. 강에는 얼은 물 깰수록 청청한  소리가 난다. 강이여 우리가 이룰 수 없어 물은 남 몰래 소리를 이루었나 이 강을 이루는 물소리가 겨울에는 죽은 땅의 목청을 트고 이 나라의 어린 아희들아 물은 또한 이 땅의 풀잎에도 운다. 얼음을 깬다. 얼음을 깨서 물을 마신다. 우리가 스스로 흐르는 강을 이루고 물이 제 소리를 이룰 때까지 아희들아. 씻김 물에서 나와 산으로 쫓긴 영산 태평연월에 총맞아 죽은 영산 저승 가다 먹으려고  도토리 한 알 손에 쥐고  올 같은 풍년에 굶어 죽은 영산 가랑잎 뒤집 쓰고 산에서 죽은 영산 애면글면 살겠다고  버섯 따다 죽은 영산  칠성산 총질 끝에 쓰러져간 젊은 영산 넋이야 넋이로다 죽은 영산 죽인 영산 모두 다 우리 동포 아니시리 우리 형제 아니시리  詩를 찾아서 말이 곧 절이라는 뜻일까  말씀으로 절을 짓는다는 뜻일까 지금까지 시를 써 오면서 시가 무엇인지  시로써 무엇을 이룰지  깊이 생각해볼 틈도 가지지 못한 채 헤매어 여기까지 왔다  경기도 양주군 회암사엔  절 없이 절터만 남아 있고  강원도 어성전 명주사에는  절은 있어도 시는 보이지 않았다 한여름 뜨락에 발돋움한 상사화 꽃대궁만 있고 잎은 보이지 않았다 한 줄기에 나서도  잎이 꽃을 만나지 못하고  꽃이 잎을 만나지 못한다는 상사화 아마도 시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인 게라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인 게라고 끝없이 저자 거리 걷고 있을 우바이 그 고운 사람을 생각했다  시를 찾아서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발표 안 된 시 두 편만  가슴에 품고 있어도 나는 부자다 부자로 살고 싶어서  발표도 안 한다  시를 두 편 가지고 있는 동안은 어느 부자 부럽지 않지만  시를 털어버리고 나면  거지가 될 게 뻔하니  잡지사에서 청탁이 와도 안 주고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거지는 나의 생리에 맞지 않으므로 나도 좀 잘 살고 싶으므로 술꾼 겨울에도 핫옷 한 벌 없이  산동네 사는 막노동꾼 이씨 하루 벌어 하루 먹는다지만  식솔이 없어 홀가분하단다  술에 취해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며 낯선 사람 만나도 알은체하고 남의 술상 앞에서 입맛 다신다 술 먹을 돈 있으면 옷이나 사 입지 그게 무슨 꼴이냐고 혀를 차면 빨래 해줄 사람도 없는 판에 속소캐나 놓으면 그만이지  겉소캐가 다 뭐냐고 웃어넘긴다 서울역 1998 틈만 나면 서울역에 갔다  침침한 지하도 한 구석에는  지쳐 쓰러진 사람들  죄 많은 내가 누워야 할 자리에 다른 사람이 먼저 와 있다  이 꼴을 볼라고 작년에  하느님이 나를 인도에 보내셨던지  북인도가 아프게 꿈에 보였다 노란 겨자꽃이 한창이었다  마알간 거울 속처럼 이상하게도 세상은 고요했고 말을 해도 소리가 되지 않았다  사랑 사설(辭說) 가여운 입술이나 손끝으로 매만질 수 없는 사랑의 깊이를  더러는 우리가 어둑한 심장으로도 느낄 수 있는 것을 왜 몰라  오늘따라 어설피 흰 살점의 눈내리고 이 겨울 우리네 마음같이 어두울 뽕나무 스산한 가지 설운 표정을 목로에서나 달래는 심정으로 훼훼  탁한 술잔을 흔들다가는 시나브로 눈발이 흩날리는 거리로 나서보지마는 언제 우리네 겨울이 인정같이야 따뜻한 것가 어두운 나무에서 반짝이는 눈빛같이야  어차피 반짝일 수 없는 우리네 마음이 아닌 것가  미쳐간 누이의 치마폭에 환히 빛나던 싸리꽃 등속의 그 꾀죄죄한 웃음결만치도  밝게 웃을 수 없다면야 순네의 슬픔에는 순네의 슬픔에 맞는 가락지 우리 모두가 우리네 슬픔에 맞는 사랑을 찾아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 나서볼 일이다 답청 풀을 밟아라 들녘에 매맞은 풀 맞을수록 시퍼런 봄이 온다. 봄이 와도 우리가 이룰 수 없어 봄은 스스로 풀밭을 이루었다. 이 나라의 어두운 아희들아 풀을 밟아라. 밟으면 밟을 수록 푸르른 풀을 밟아라. 너를 부르마 너를 부르마 불러서 그리우면 사랑이라 하마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아도 내 가장 가까운 곳 나와 함께 숨 쉬는 공기(空氣)여 시궁창에도 버림받은 하늘에도 쓰러진 너를 일으켜서 나는 숨을 쉬고 싶다. 내 여기 살아야 하므로 이 땅이 나를 버려도 공기여, 새삼스레 나는 네 이름을 부른다. 내가 그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그 이름을 잘못 불러도 변함없는 너를 자유여. 꽃자리 촉촉히 비 내리던 봄날  부드러운 그대 입술에  처음 내 입술이 떨며 닿던  그날 그 꽃자리  글썽이듯 글썽이듯 꽃잎은 지고  그 상처 위에 다시 돋는 봄  그날 그 꽃자리 그날 그 아픈 꽃자리   ===========================================   "문학이여, 나라도 먼저 침을 뱉어 주마"     [기고] 이것은 '표절 시비'가 아니다                    적요함, 그리고 일지소란      적막하다. 바위처럼 외롭다. 아니 나무처럼, 안개처럼 외롭다. 문학의 신은 이미 오래 전에 사망 선고를 받고 죽었다. 아니, 죽지 않고 떠났는지도 모른다.      슬픔과 그리움과 분노를 먹고 살았던 신, 우리가 외로울 때에 위안을 주었고,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않게' 다독거려 주었던 신, 독재의 푸른 발톱 하에서도 살아 펄펄거리던 문학의 신은 어디로 갔는가.      대신 문학의 제단 앞에는 지금 파리의 이국적인 노천카페에 앉아 한 잔의 카푸치노에 흰 빵을 찍어 먹으며, 혹은 늦은 밤 베란다에 앉아 붉은 와인 한잔을 홀짝거리며 전혜린과 뭉크와 불륜을 꿈꾸는 자들이 앉아 있고, 그들이 신 없는 신전에서 잔치를 벌이는 동안 자신의 정신적 노고를 보답 받지 못한 채 쫓겨난 문학의 사제들은 초라한 거지처럼 저자거리를 떠돌아다니고 있지 않은가.      사방을 둘러본다. 어디에도 살아있는 목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해마다 연중행사처럼 모 시인의 집 앞에는 수많은 기자들이 모여 초조하게 노벨상을 기다렸다 흩어지고, 아직도 문단 황제의 꿈을 버리지 못한 작가들이 판을 휘젓고 다니지만 그럴수록 판은 더욱 초라해져 가고, 살아남은 것은 적요하게 무덤을 지키는 자들 뿐. 분노도 슬픔도, 비판적인 이성도 열정도, 자존심도 품격도 없는 문학 기술자들, 문학 전공자들이 벌이는 축제들 뿐. 대다수의 작가들이 일용직 노동자처럼 궁핍한 시대, 소설 한 편에 수천만 원, 시 한 편에 수천만 원이 호가되는, 로또복권보다 더 로또적인 문학상. 그렇게 자본주의적인, 너무나 자본주의적인 줄을 세우고 있는 자들과 줄서서 입을 벌리고 있는 초라한 군상들 뿐.      제발 문학은 죽어도 작가 정신만은 살아있기만을 바랐던 것은 꿈이었을까.      일제시대에도, 독재정권 하에서도 얼어붙은 가난 속에서도 한잔 술에 살아있던 작가혼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이 어려운 시대, 이 가난한, 분노의 시대에…. 이 도처에 신음소리,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는 시대에….      적요하다. 너무나 적요하여 숨이 막힌다. 나 역시 어디 은둔이라도 할까보다.      그때 어디선가 자그마한 소란이 들려온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는가 보다, 할 뿐 관심이 없어진다. 요즘은 무관심이 미덕이다. 더구나 들려오는 소란의 내용인즉슨 '표절 시비'라는 낯익은 주제라니, 애초부터 누구 말대로 '매력 없는 공방'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소리란 당사들끼리 좀 티격태격하다가 제풀에 사라지게 마련이다. 우리처럼 점잖은, 이름께나 있는(?) 기성 작가들이 나서서 시시비비를 거들 판은 더욱 아닐 것이었다. 아서라! 술이나 마실란다.      그런데 소란은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아니, 누군가가 분명히 분노를 하고 있다. 분노한 목소리는 들으면 금세 안다. 그 목소리 중에 평소에 알고 있는 자의 목소리도 끼어 있다. 드디어 독자까지 나선다. 그의 질타가 소설쟁이란 간판을 달고 사는 나의 귀에 까칠하게 박힌다. 하지만 철저히 적막하고, 철저히 무관심한 요즈음의 문학판에 그의 목소리 역시 바람처럼 곧 지나갈 것이다. 그러길 바라자.           그러나 마음이 한동안 무겁다. 내가 살아온 것. 나의 문학에 대한 오랜 번민에 빠진다. 갑자기 그토록 열정을 바쳐 살아왔던 세월이 모두 허망하게 느껴진다. 온 몸으로 부대끼며 지키려고 했던 가치가 갑자기 부질없어 보인다. 그와 함께 갑자기, 정말 갑자기, 문단의 일각에서 조그만 자리를 차지 한 채 그 역시 무슨 기득권이라고, 만수산 드렁칡처럼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엉켜서 살아왔던 안일함, 스스로 키워온 무력감에 대한 배신감이 물결처럼 밀려온다. 그러고 보니 누구를 원망하기 전에 내가 가장 먼저 이 침묵의 무덤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문학의 신을 죽이고, 작가 정신을 유폐시킨 것은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며 이런 '작은 일'에도 분개할 줄 모르는 가짜 소설쟁이, 가짜 지식인인 바로 나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래, 문학이여, 미안하다! 순정한 독자 제위를 속이고 젠 체 목에 힘을 주고 살아온 자칭 문학도인 척 했던 내 얼굴에 먼저 침을 뱉어주마! 그러고 나서 문학에게, 천박한 유행과 시대에 굴종하여 이빨과 발톱을 다 뽑힌 채 멸시와 천대의 굴레에 떨어진 문학의 얼굴에, 힘껏 침을 뱉어주마! 문학의 신을 유폐시키고 마침내 죽여 버린 우리 시대의 문학 교수, 평론가, 작가, 출판사 기획자, 사장, 신문 기자들, 너와 나를 향해서도 마음껏 침을 뱉어주마! 자신은 아무 상관 없다고, 제발 자기를 이 '매력 없는 시비'에서 좀 빼달라는 우리 시대의 빌라도들에게 가래까지 게워서 침을 뱉어주마!      우리 시대의 빌라도들      내가 알고 있는, 사랑하는 후배 소설가 방현석은 '해명서'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당사자들 간의 대화를 통해 이견이 해소되기를 기대했던 저의 바람과 맞지 않게 전개되는 과정에서 저의 이름이 거명되어 불편한 오해가 확산되는 것을 저는 원치 않습니다. 제가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은 당사자와 언론에 간곡히 당부합니다. 이 매력 없는 공방에 저를 더 이상 관련시키지 말아주십시오."      지랄.      나는 헛웃음이 돌았다. 준엄하고 냉정하기까지 한 그의 '해명서'를 읽으며 나는 그가 내가 알고 있는, 과연 '새벽출정'을 쓴 그 소설가 방현석이 맞는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때까지는 아직 두 편의 소설 조경란과 주이란의 '혀'를 읽기 전이었다.) 그의 글은 소설가 방현석이 쓴 글이라기보다는 거의 형사 앞에 끌려간 피의자가 쓴 심문조서에 가까웠다.      그는 그간 자신이 두 작품과 두 작가, 그리고 출판사 사이에서 했던 역할을 차례로 서술한 다음, 자신은 이 사태로부터 아무런 책임도 없고 아무런 관심도 없으니 더 이상 자신의 영예로운 이름이 거론되지 않기를 간곡히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방현석이 누군가. 누구보다 사태를 냉철하게 파악하는 힘과 논리를 지닌 작가가 아닌가. 그 어느 문장 하나 정서적인 빈틈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조와 주, 두 사람에 대해서 동시에 거리 두기 역시 잊지 않는다. 불편부당(不偏不黨)! 어떤 동정심도 흥분도 눈곱만큼 찾아볼 수 없다.      사실 나는 문단 내에서 방현석과 같은 축으로 분류되는 무리이다. 그의 문제작 '새벽출정'이 에 발표될 때 나의 졸작인 '벌레' 역시 같은 지면에 실렸다. 1980년대의 대표적 작가로서 그는 노동문학과 민족문학을 이끌어왔고 2000년대에는 소설 으로 황순원문학상과 오영수문학상을 동시에 수상하며 건재를 과시했다. 전 편집위원이었고, 현재는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의 해명을 그대로 직역하자면 '난 상관없으니까 제발 나한테 똥물 튀기지 않게 해주십시오!'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얄밉긴 했지만 방현석이 괜한 일에 걸려들었구나, 재수 없겠구나, 하는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그 후 느닷없이, 부산에 살고 있는 소설가 김곰치의 천둥 같은 글이 올라왔다. 방현석의 글보다 훨씬 소설가의 글에 가까운, 다시 말해 열정과 진정이 넘쳐나는 그의 글을 읽으며 나는 비로소 확연하게 깨달을 수가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표절 시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이것은 지금 우리 문학이 처해있는 중병이 어떻게 도져왔는지 알 수 있는 하나의 거대한 폭로이자 전 시대적인 문학 싸움의 전초전이라는 것을. 이것은 중견 작가 조경란과 신인 작가 주이란의 싸움이 아니라 '조경란'이란 코드와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작금 우리 당대 문학 권력과 양심적인, 그러나 파편화되고 힘없는 작가군과의 일대 전쟁의 시작이란 것을.      변방에 살기에 아직 문학적 순정성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이는 소설가 김곰치는 조경란의 '혀'와 주이란의 '혀'를 꼼꼼히 읽어본 다음 아무런 주저함이 없이 조경란의 부도덕성과 재능 없음에 일타를 날렸다. 이런저런 인맥과 이러저러한 안면으로 눈치 보기에 바쁜, 이미 동맥경화증에 걸린 서울 문단으로 보자면 상상할 수도 없는 폭탄이 터진 것이다.       조경란이 누구인가. 신경숙과 은희경을 잇는 다음 세대의 여성작가로서 문학동네신인상을 수상한 이래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을 받으며 이미 문단의 중심으로 떠오른 작가가 아닌가. 언제 어디서 마주칠지 모르는 이런 작가와는 방현석의 말처럼 그저 무심하게 지나는 게 상책이다. 이미 상업주의에 멍든 출판사는 말할 것도 없고, 비판적 전문성 대신 스타의 박수부대로 전락해버린 언론사 문학 담당 기자까지 조경란을 건드려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다고 판단을 한 것 같다. 더구나 극우 보수 신문인 는 때마침 올해 그녀에게 커다란 문학상까지 안겨주지 않았던가!      그런 판에 저 변방, 부산에서, 촌놈 같이 생긴 소설가 김곰치가 겁 없이 몽둥이를 들고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사정없이 죽은 문학의 신전 앞에서 춤을 추고 있는 조경란을 향해 몽둥이를 날린다.      김곰치는 말했다.      "주이란 작가, 당신은 단편 '혀'와 '촛불 소녀'를 출산한 작가로서 자부심을 가지기 바란다. 조경란 말고 다른 누구라도 당신의 작품을 베낄래야 베낄 수가 없다. 베낄 실력들이 되지 않는다. 엇비슷한 혀 절단, 요리 설정이 있지만, 훗날 당신의 장편 가 출간되었을 때, 그 내용을 기사로 미리 다룰 신문 기자의 요약 수준으로 중첩되어 있을 뿐이다. 당신의 '사랑하는, 맛보는, 거짓말하는 혀'의 장편은 줄거리나 아이디어 수준으로 다른 누가 쓸 수 있는 것이 못 된다. 오직 당신만이 쓸 수 있는, 세계에 단 하나뿐인 작품일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미래작을 벌써부터 너무 사랑하고 있는 상태로 보인다. 그 사랑도 큰 재능이지만, 그러나 당신을 일종의 인지협착 상태로 빠뜨리고 있는 듯하다. 두 소설을 읽어보건대 도절당했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겠는데, 만약 도절되었다면 조경란 같은 작가가 도절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길 바란다."       그런가. 그렇게 좋은 신인이 있었단 말인가. 이쯤 되니 나도 소설을 끄적이며 먹고사는 동류의 한 사람으로서 두 사람의 작품을 찾아 읽어보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결과는, 기름끼 많은 서양요리를 먹었을 때처럼 느끼했고, 나중엔 텅 빈 소주잔처럼, 씁쓸했다. 김곰치가 지적한 그대로이다. 그래도 한편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생각을 바꾸어 본다. 심지어는 다 죽은 문학의 시대에 그러면 좀 어때?, 하고 맥락 없는 심통도 좀 부려본다. 이런 약육강식의 시대 살 놈은 살고 죽을 놈은 죽기 마련이지, 도덕이 뭐며, 시대 정신은 뭐며, 작가 정신은 뭐 빌어먹을 작가 정신이냐, 나 아니라도 누군가가 하겠지, 하며 고개를 떨궈 본다.      어떻게 보면 모든 문학은 이전 문학의 표절이며 패러디다. 나는 한 작가의 탄생과 성장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알고 있다. 조경란의 초기작들이 보여주었던 섬세한 감각과 신선한 이미지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만은 아니다. 응원군 삼아 동원된 참고문헌을 보면 더욱 그렇다.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보통 수십 권의 책을 참고로 한다. 그러나 그것을 작품 뒤에 열거해 두지는 않는다. 빈약한 무언가를 감추기 위한 수작이라는 것을 글로 먹고 사는 작가라면 다 알고 있다.      이 너절한 소설 뒤에 붙여놓은 김화영의 너절하고 장황한 해설을 보며 나는 더욱 근질거리는 욕지기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혓바닥 위에 세운 감각의 제국'이라는 거창한 제목 아래 거미줄처럼 이것저것 의미망을 만들어 붙여놓았지만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긴 해설을 붙였을까를 끝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한갓진 인간의 말장난을 보고 있는 느낌이라고 하는 편이 옳겠다. 옛 사람들은 이런 짓을 일컬어 교언영색(巧言令色)이라고 했다던가. 어쩌면 그가 해설의 말미에 사족처럼 달아놓은 말, "소설 혀를 덮으면서 문득 혀 요리보다는 표면만 살짝 익혀, '입 안에서 벨벳처럼 녹아내리는 붉은 색 레어 스테이크'를 선호하는 나의 미각이 다행스럽다는 생각을 잠시 하게 된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목구멍을 간질거리는 것은 '바롤라 존케라'다. 칼도 포커도 필요없는 '바롤라 존케라'를 어디 가면 입술과 혀로 부드럽게 쓰다듬을 수 있는 것일까?"라는 말이 더 쉽게 다가온다. 그들의 살아온 삶의 방식, 그들의 문학적 감수성과 아주 딱 맞아떨어지는 기호니까 말이다.      하긴 요즘 세상 취향대로 살면 그 뿐이다. 너는 너, 나는 나일 뿐이니까. 하지만 현기증은 쉽게 가시지가 않는다.      김화영뿐만이 아니다. 그녀의 뒤에 서서 박수를 쳐주고 그녀의 목에 꽃다발을 걸어주는 일군의 무리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이렇듯 시끄러운 판에 그녀가 거침없이 질주할 수 있게끔 목에 큼지막한 꽃다발을 걸어 준 동인문학상 평생 심사위원인 유종호·김주영·김화영·오정희·이문열·정과리·신경숙의 얼굴이 떠오른다. 무언지 모를 냄새가, 그들만의 커넥션이 그려진다. 모든 것이 이해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들이 권력이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남은 한국 문단의 유일한 파워이다.      모던하고, 댄디하고, 소프트하며, 어떤 이념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지적이며, 고상하며, 어떤 코드와도 잘 들어맞고, 시대와 불화하는 척 포즈를 잡지만 사실은 시대와 가장 잘 야합하는, 그들만이 살아남았던 것이다. 지난 시절 독재와 싸우면서 거대한 힘을 가졌던, 아니 힘을 가졌다고 믿었던 작가회의는 마치 유효기간이 지난 식품처럼 껍데기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 주변에 모였던 작가들은 뿔뿔이 흩어졌거나 방 아무개 작가처럼 피곤한 표정으로 손을 씻고 돌아서기에 바빴다. 그래도 자기는 교수니까.      그리하여 고난의 시대, 자신의 운명을 걸고 싸웠던, 그리하여 거리에서 감옥으로 헤매던 작가들은 이제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거나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 잔치는 끝났다. 오늘날 우리 문학을 상업주의의 덫에 빠뜨려서 구제불능으로 만들어버린 '문학동네', 이빨 빠진 사자 '창비'와 조용하게, 마침내 모든 권력을 차지한 너무나 지성적인 '문학과지성'과 하릴없이 죽어가는 '실천문학'까지 너나 할 것 없이 잔치는 끝났다. 대신 승리는, 문학의 승리가 아니라 현실적 몫으로서 승리는, 이제 모두 털 끝 하나 다치지 않고 무임승차 한 채 숨을 죽이고 있던 자들에게 돌아갔다. 반동적인, 너무나 반동적인 무리들에게.      그리하여 지금 문학은 죽음처럼 조용하다. 어디 한 곳 살아있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간간히 들려오는 자조적인 빌라도들의 헛기침 소리 뿐. 이 적요함. 이 외로움.      숨 막히게 조용하던 시절 일찍이 시인 김수영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래. 이제 나도 여러분도 시작하는 것이다. 자유의 과잉을, 혼돈을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그것을…"      그렇다. 말을 하자. 무슨 말이라도 지껄여보자. 비평의 날을 잃어버린 비평가들, 무력감에 젖어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작가들, 시인들, 문학 교수들, 엉터리 문학 기자들…. 이 거대한 야합을 깨기 위해. 이 무거운, 더러운, 침묵을 깨기 위해.      마치 우리가 그때 그 시절, 순정했던 시절, 처음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그러기 전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침을 뱉어주는 것이다!      다른 누가 문학을 멸시하기 전에 내가 먼저, 재빠르게 먼저, 울대 곳곳에 고여 있는 가래까지 모아, 힘껏 침을 뱉어주는 것이다. 온갖 모멸의 자세로 이 불순하고 음탕한 감성의 시대, 죽어버린 문학 위에, 피를 토하듯 침을 뱉어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찍이 우리가 경배해 마지 않았던, 죽은 신에게 마지막 예의를 갖추어주는 것이다.            -  김영현/소설가·실천문학사 대표       [출처] [김영현] 문학이여, 나라도 먼저 침을 뱉어 주마|작성자 소통  
  산문(山門)에 기대어   송수권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 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옴을    ▲ 일러스트 잠산 하마터면 이 시는 세상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유성처럼 사라질 뻔했다. 송수권(75) 시인이 서대문 화성여관 숙소에서 이 작품을 백지에 써서 응모를 했는데, 잡지사 기자가 "원고지를 쓸 줄도 모르는 사람의 원고"라며 휴지통에 버렸다. 당시 편집 주간이었던 이어랑씨가 휴지통에 있던 것을 발견해 1975년 '문학사상' 지면에 시인의 데뷔작으로 발표했다. 이 일화로 '휴지통에서 나온 작품'이라는 '입소문'을 타 문단에서 화제가 되었고, 발표 이후에는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누이'를 애타게 호명하고 있지만, 이 시는 남동생의 죽음에 바치는 비가(悲歌)였다.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비어 있는 맞은편을 망연히 바라보았을 그 시방(十方)의 비통함은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다. 시인은 무엇보다 죽은 동생의 환생에 대한 강한 희원을 드러낸다.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등의 역동적인 문장은 적극적인 환생을 바라는 시인의 마음을 엿보게 한다. 산문(山門)은 속계(俗界)와 승계(僧界)의 경계이고, 이승과 명부(冥府)가 갈라지는 경계인 바, 산문에 기대어 생사의 유전(流轉)을 목도하는 것은 큰 고통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생사의 감옥에 갇혀 살아도 죽은 사람은 산 사람의 마음속에서 영생을 살아 이처럼 마음을 절절하게 울리는 노래를 낳았다. 송수권 시인은 전통 서정시의 맥을 이어오면서 황토와 대(竹)와 뻘의 정신에 천착해 왔다. 그는 '곡즉전(曲卽全·구부러짐으로써 온전할 수 있다)'을 으뜸으로 받든다. "곡선 속에 슬픔이 있고, 추억이 있고, 들숨이 있지요. 시간이 있고, 희망이 있고, 공간이 있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시는 "고깔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 같아서 사람의 마음을 '애지고 막막'하게 하지만 남도 특유의 가락과 토속어의 사용으로 슬픔과 한을 훌쩍 넘어서는 진경을 보여준다.  [문태준 시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송수권(宋秀權, 1940년 ~ )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전남 고흥에서 출생하였고,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였다. 1975년 《문학사상》에 〈산문에 기대어〉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산문에 기대어》,《꿈꾸는 섬》,《우리들의 땅》 등이 있다. 문공부 예술상, 전라남도 문화상, 소월시문학상, 서라벌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           「산문에 기대어」   「새벽은 부엌에서 온다」    「시골길 또는 술통」           등단작 〈산문(山門)에 기대어〉 얼마 만인가, 이 산문 안에 다시 온 것이…… 젊은 날의 한 해를 여기서 보냈다. 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비승비속의 나날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나 자신의 영혼을 추스를 길이 없었을 때 영혼이 울고 거기서 시혼이 솟고 그 끝에 〈산문에 기대어〉가 있었다. 산문(山門). 그것은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경계의 문이다. 윤회의 끝없음과 부활(환생)이다. 시력 40여 년을 돌아보면 나의 첫 출발은 이 문을 하나 짊어지고 나섰던 것이다. 여기엔 한 생명의 부활과 윤회가 끝없이 한(恨)의 가락을 이루고 있다. 엊그제 폭설이 내리는데 멀리서 온 독자와 함께 선암사에 올라갔다. 일주문을 들어서다 말고 한 발은 일주문 안에 한 발은 일주문 밖에 두고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것―이승이 곧 저승이고 저승이 곧 이승인 불이문(不二門)이다. 삶과 죽음이 하나로 이어지는 그 경계 허물기가 곧 산문이 아닐까. 이승과 저승을 뒤집어 놓는 체험 없이 시를 쓴다는 것은 상처가 없는 행복한 시 쓰기로 시적 진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닐까?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옴을 — 졸시 〈산문에 기대어〉 이 시에서 내가 쓴 그 ‘눈썹’이야말로 한의 끈적끈적한 덩어리이다. 즉, 무주고혼이다. 야산 같은 데서 이장을 하다 보면 뼈는 다 삭아 내렸는데 머리칼과 눈썹만 그 음습한 웅덩이에 고여 있음을 본다. 백발이 아니라 그것이 검은 터럭일 경우 얼마나 섬뜩하고 한에 젖어 있는 터럭들인가? 그래서 이따금 화장실 출입을 하다 수세식 좌변기에 묻어 있는 ‘털’ 하나를 보았을 때, 그 터럭은 공포의 대상이 된다. 이런 날은 오래 잠자던 불면증이 다시 겹친다. 뱃길에서 죽은 자의 혼풀이를 할 때, 무당들이 식기를 흰 띠에 매달아 물속에 처넣었다 건져 올린 후 열어 보면 거기에 들어 있는 것 역시 터럭이다. 출가할 때에는 머리를 깎는다. 땅속에서도 삭지 못하는 그 원한이 젊은 죽음일 때 이 무주고혼은 가을산 그리메에 떠도는 넋이 아니겠는가? 이 덧없는 죽음 위에 돌로 눌러서라도 복수를 하고 싶은 부활 의지, 그 부활 끝에 누이는 이제 산다화를 꺾어 나에게 스스럼없이 건네주는 생명의 인과법칙과 윤회 속에 환생하여 있음을 본다. 휴지통에서 나온 시인  이 시는 바람 부는 늦가을, 기러기가 공중에 길을 내는 것만 보아도 누이(자살한 남동생)의 선험적 이미지인 눈썹(동생은 숱이 짙은 눈썹이었음)의 행방을 보게 되고, 동생의 무덤을 찾아가 술 한 잔을 나란히 따라 놓고 그가 와서 나의 빈 잔을 채워 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의 넋두리는 내가 살아서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 하는 기다림의 넋풀이라 할 수 있다. 이 대화체 형식의 독백 속엔 설움이 깊게 배어 있는 재생적 의지가 짙게 깔려 있다. 이는 곧 넋풀이로서 해한이며 역동적인 생기로 피는 한의 극복 의지이다. 〈산문에 기대어〉는 제1회 《문학사상》 신인문학상 당선작인데, 당시 나는 서울을 떠돌며 생존의 존립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있었다. 어느 여관방에서 갱지에 갈겨쓴 채 10편을 응모했는데, 원고지에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휴지통에 넣은 것을 심사 과정에서 다시 보게 되어 당선작이 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그 주간으로부터 “자넨 휴지통에서 나온 시인이야”란 우스갯소리를 심심찮게 듣는다. 주소도 이름도 낯설어 그 1년 후에야 수소문 끝에 시인을 찾아내게 되었다. 197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의 당선작이 나의 이 시를 표절했다 하여 취소된 사건은 열병을 앓는 문학도의 주가를 엄청나게 상승시켰다. 이 시는 1966년 봄, 24세 남동생이 제대한 그 다음 날 어머니 묘소 앞에서 음독자살한 사건을 다룬 추모 형식의 엘레지다. 부카레스트 1934 동생 수종(秀鍾)은 나와는 세 살 터울이다. 정확히 말해서 동생이 죽은 것은 1966년 3월 초순이었다. 제대복을 입고 허무증을 안고 돌아온 그 이튿날로 놈은 한내천 자기 어머니의 무덤이 보이는 언덕 밑에서 자살을 했다. 놈이 먹다 남은 수면제 알약들이 군복 깃을 타고 흘러 들찔레꽃처럼 아침 이슬에 젖어 하얗게 피어 있었다. 그날부터 점을 치면 죽어서도 놈은 입바람이 나기 시작했다. ‘나 장가 갈래’였다. 동남간 쪽 어느 마을에 색시를 보아 두었다거니, 아무 데 마을 색시는 마음에 안 들고 업살이 꼈다거니 제 주제는 생각지도 않고 횡설수설 떠들어 댔다. 그래서 생넋들끼리 결혼도 시켰다.(산문집 《사랑이 커다랗게 날개를 접고》 《만다라의 바다》 《아내의 맨발》에 있는 ‘겨울나비’ 참조) 그러니 시간 망각하는 법을 배우라. 시간이 지닌 의미를 두려워하지 않는 법도 배우라. 감상적인 기록의 모든 흔적들을 억누르고 곧 사라져 버릴 명상, 어릴 적 추억도 가을도 짓밟힌 꽃잎도 향수마저 억누르라       — 〈부카레스트 1934〉 중에서 잊어버리기 위해서 아니 가슴 속에서 놈의 영원한 무덤을 파내 버리기 위해서 나는 오랜 세월을 짐승처럼 울면서 괴로워했다. 나는 1962년 서라벌예대 문창과를 나왔고 곧 공군에 입대, 1965년 12월에 제대했다. 놈은 그 이듬해 3월에 제대했다. 놈이 죽은 지 6개월 만에 나는 중학교 교단에 발령을 받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에게도 큰 위기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 시절부터 미친놈처럼 〈부카레스트 1934〉를 즐겨 외고 다녔으리라 싶다. 망각하는 것, 이것처럼 좋은 일은 없다. 내가 네 살 때 어머니는 병으로 비슬거렸고 놈은 한 살배기였다. 그는 젖도 못 먹고 자란 놈이었다. 어머니는 놈이 걸을 때쯤 늘 젖무덤에다 고춧가루를 발라 접근하는 것을 피하곤 했다. 그 대신 할머니가 미음을 끓여 먹였다.  전주 예수병원으로 순천 알렉산병원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늘 떠돌아다녔다. 그 바람에 우리는 모성을 잃고 자란 형제였다. 놈은 비슬거리다 중학교 때 어질병이 나더니 고등학교 입학을 포기해야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할머니도 가고 어찌할 수 없이 서모가 들어왔다. 열 살 때 그 어머니도 가고 동생은 일곱 살이었다. 7년간을 담괴가 터진 옆구리를 붙들고 고름을 쏟아내던 어머니, 그 무덥던 여름날 방 안은 고름 냄새로 찌들어 내 코는 마비되었다. 지금도 냄새에 민감하지 못한 것은 그 후유증이다. 옆집 채마밭 가에 핀 치자꽃, 봄철에 핀 철쭉(개꽃)꽃을 꺾어다가 병상의 화병에 꽂아 놓았던 일을 기억할 뿐이다. 내가 대학 다닐 때 놈은 시원찮은 몸을 이끌고 올라와 날품을 팔고 애꿎은 일을 하며 학비에 도움을 주었다. 나는 치사하게도 그 엽전을 긁어먹고 시인이 된 놈이다. 그는 입대를 했고 나는 학교를 나와서도 시인이 되지 못한 채 섬 중학교로만 10여 년을 떠돌았다. 붉은 황톳길 장벽은 무너지고 강물은 흘러흘러…… 고향을 생각하니 눈물이 왈칵 솟는다.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도 못살고 굶주렸던 고향이지만 그러나 마음에 살아 있는 고향은 따뜻하기만 하다. 내 고향은 연산군 때였다던가 파발마를 놓은 역이 생겼대서 속성을 역둘리라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한반도의 최남단 고흥반도다. 고흥읍에서 서북으로 20리를 더 들어가는 두원반도의 중간쯤에 위치한 두원면 학곡리 학림마을 1297번지다. 지금은 폐가가 되어 다 허물어져 가고 있다. 학은 죽실(竹實)을 먹고 사는 영험한 새이다. 바로 이 새가 살았다는 골짜기여서 학림(鶴林) 마을이고, 이 마을에는 학산(鶴山)이 우뚝 솟아 있다. 학산을 넘어가면 사적굴이 있고 사적굴이 있는 동산을 넘다 보면 바로 보성만과 득량만이 건너다보이는 바다가 있다. 예나 지금이나 60여 호쯤, 그저 고만고만한 집들이 양짝, 음짝, 당산마을을 이루면서 창창한 대숲 바람에 잠겨 있다. 나는 양짝마을에서 자랐다. 내 시에 대숲 이야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동생과 나는 서모가 지어준 새벽 밥을 먹고 20리 길을 통학했다. 내가 3학년 때 그는 1학년이었다. 아침이 늦으면 많이 굶고 가기도 했는데 놈의 어질병은 거기서 오지 않았나 싶었다. 큰 고갯길만 해도 자시치고갯길과 송치고갯길이 가로막고 있었다. 비가 오면 질컥거리는 황톳길이었고 마차나 소달구지도 이따금 황토 수렁길에 처박히는 등 갖가지의 추억도 많다. 그때는 운동화가 없어 검정 말표 고무신을 끌고 다녔는데 어떤 날은 맨발로 고갯길을 넘기도 했다. 학교에서 신발 도둑들에게 도둑맞으면 영락없이 이 꼴이었다. 이 길은 어두웠지만 언제나 신선하게 열려 있었고 무한대의 시간이 출렁이고 있었다. 거기에는 항상 원초적인 생명력이 넘쳤고 내 유년에 해당하는 공간이며 따뜻한 신화의 불빛에 젖은 황토를 떠올리게 한다. 읍내에서 두원반도의 끝 대전 해수욕장까지의 50리 길은 아스팔트로 뒤덮여 교통량도 예전 같지가 않다. 마을 뒤의 득량만은 4km의 고흥 방조제가 들어서서 바다를 가르며 녹동항까지 이어져 바다는 죽었다. 훗날 시인이 되어서야 맨 먼저 이 길 위에서 벌어졌던 신화적인 축제 이야기들을 시로 써가기 시작했다. 자전거 짐받이에서 술통들이 뛰고 있다 풀 비린내가 바퀴살을 돌린다 바퀴살이 술을 튀긴다 자갈들이 한 치씩 뛰어 술통을 넘는다 술통을 넘어 풀밭에 떨어진다 시골길이 술을 마신다 비틀거린다 저 주막집까지 뛰는 술통들의 즐거움 주모가 나와 섰다 술통들이 뛰어내린다 길이 치마 속으로 들어가 죽는다 — 졸시 〈시골길 또는 술통〉 이 시는 1975년 등단 이후인 1978년쯤 쓴 작품이지 싶다. 제1 시집 《산문에 기대어》(1980)에 실려 있는 것을 보면 그렇다. 신화의 불빛이 따뜻하게 열려 있는 것을 보면 이후 나의 삶은 이 불빛에서 하나의 상징기호를 얻은 셈이다. 그것은 곡선의 상법이며 황토의 길과 대숲 바람 소리, 뻘로 이루어지는 나의 시 세계와 일치한다. 치마 속으로 들어가는 그 길이 곧 어머니의 자궁이며 나의 시는 이 원형적인 자궁 속에서 탄생했다. 따라서 나의 문학은 동생의 자살이 문학적 열병을 다시 솟아나게 했고 근원적으로는 고독과 모성의 결핍에서 온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친구 임홍재 시인 1966년 10월 16일 나는 중등학교 채용 순위고사에 합격되어 고향 언저리에 있는 영주중학교 국어 교사로 발령이 났다. 1년 만에 나주중학교 교사, 그리고 8개월 만에 이 세상 끝섬이 어딘가를 물어 초도중학교로 자원했다. 나는 이 세상 끝까지 피해 달아나고 싶었다. 동생의 자살은 이렇듯 나를 짓눌렀으며 상처로 남아 있었다. 그곳은 여수항에서 여섯 시간 배를 타고 들어가는 섬 중학교였다. 무려 6년을 주저앉았다. 그리고 상록학원을 열어 간판을 걸고 야학도 시작했다. 일요일에는 무인도를 돌며 낚시하는 재미로 소일했으며 문학잡지 한 권 읽은 적이 없었다. 31세 때 이곳에서 결혼을 했는데, 아내는 영주중학교 때 내가 가르쳤던 제자였다. 그 6년 사이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큰애의 교육을 걱정하여 육지로 발령 신청을 했는데 또다시 고향 언저리 섬이었다. 과감히 사표를 쓰고 1973년 봄부터 아내에게는 일언반구도 없이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 맨 처음 찾아간 곳이 선암사였고 남명 스님을 만나 중이 되고자 결심했다. 그런데 남명 스님은 괴짜승이었고 밤마다 막걸리를 한 되 이상 들이키고 닭 한 마리를 먹어야 잠을 이루었다. 중이 된다는 것도 쉽잖아 보여 몇 개월 만에 서울로 튀었다. 이때 절방에서 문학병이 다시 도지기 시작해서 초안을 잡았던 것이 〈산문(山門)에 기대어〉 외 몇 편이었는데 2007년 《월간조선》 2월호에 나의 문학산실인 ‘벽안당’을 처음 공개하기도 했다. 1976년 또다시 순위고사를 보아 합격하고 발령받은 곳이 지도라는 섬의 지명중학교였는데, 이때는 어엿한 시인 교사였다. 1975년 3월경 그해 신춘문예 당선 시인들과 함께 문학사상 주최로 ‘YWCA’에서 합평회가 있었는데 그때 만난 시인이 임홍재 시인이었다. 그는 〈서울신문〉에 〈바느질〉이란 시와 〈동아일보〉에 시조 〈염전에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그 인연으로 1979년 그가 죽을 때까지 우리는 2백여 통의 편지를 교환했고 방학 때면 서울에 가서 만났는데 박용래 시인과도 친교를 텄다. 그가 청계천 다리에서 실족사로 죽은 후 《여성동아》에 2회에 걸쳐 편지를 공개하기도 했는데, 나는 그가 죽은 2개월 후에야 사무실에서 되돌아온 편지를 받고서 그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등단 이후 지금까지도 나에게는 유일한 친구라면 친구였다. 20대에 등단을 못 하고 30대 중반에 등단해서 내 나이 또래의 시인이 없는 터라 1960년대 시인들의 모임에 갈 수도 없는 어중간한 처지가 되었다. 안성농고에 세워진 그의 시비를 참배하고 오면서 서럽게 쓴 시가 있다. 장터 마당에 눈이 내린다 먹뱅이 남사당패 어디 갔나 남사당은 내 고향 내 몸은 아프다 소리 소리치며 눈이 내린다 설설 끓는 동지 팥죽 저녁 한 끼 시장한 노을 위에 식어가는 가마솥 뚜껑 위에 안성(安城)세지 목화송이 같은 흰 눈이 내린다 비나리패 고운 날라리 가락 속에 눈물범벅이 진 네 얼굴 곰뱅이 텄다 곰뱅이 텄다 70년대를 한판 걸쭉하게 놀아보자던 네 서러운 음성 위에 동녹이 슬어가는 유기전 놋그릇들 위에 눈이 내린다 어스레기* 황혼을 부른 말뚝 위에   *어스레기: 어린 송아지                                       — 졸시 〈안성장터―홍재 시인에게〉 광주시대와 변산시대 섬으로만 떠돌다 1980년 3월에 광주로 입성했다. 근무하던 광주여고는 5·18이 일어난 도청 옆에 있었다. 입성 2개월 후에 5·18이 일어났고 〈전남일보〉(지금의 광주일보)에 〈젊은 광장에서〉라는 복간 시를 쓴 것이 화근이 되어 계엄 당국으로부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어 광주여고 삐라 사건, 홍남순 변호사와 김지하 시인 석방 기념 YWCA 시낭송 사건 등으로 늙은 형사와 함께 똑같이 출근한 것이 무려 2년, 드디어 어느 날 하루아침에 갑자기 서광여중으로 쫓겨나는 몸이 되었다. 아직까지 〈젊은 광장에서〉라는 80여 행의 시는 시집에도 넣지 않았다. 이로부터 효광여중, 광주학생교원 연구사 등 광주시대 15년을 마감한 것이 1995년 8월 31일이었다. 교장 진급이 되지 않을 바에야 명퇴를 서두른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 떠돌이병이 도져 방랑 끼를 주체하지 못했다. 제주도행을 서둘러, 평소 절친이던 현규하 시인 집에 둥지를 틀었다. 그때 낸 책이 《남도의 맛과 멋》이었는데 초당대학교 김창진 교수로부터 낯선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남도의 맛과 멋》의 서설을 읽고 감동받았는데 대학의 교양국어에 한 꼭지를 싣겠다고 했다. 그리고 강의도 맡아주었으면 한다고 했다. 마침 동해 난바다 서해 뻘바다 제주 바람바다라서 제주 겨울바람을 피하고 싶어 곧 육지부로 나와 출강을 했다. 이어 광주여대, 그리고 순천대 김길수 교수가 문창과가 설립된 초창기라면서 출강을 부탁해왔다. 서재를 서귀포에서 변산 뻘밭 가인 격포로 옮겨왔다. ‘낙산일출 월명낙조’란 말처럼 변산은 노을 속에 핀 연꽃밭이었다. 수년간 음식기행을 하고 다녔던 터라 무작정 이곳이 좋아 찾아든 것이다. 양우아파트 304호실, 그곳에서 생활은 행복했다. 밥을 퍼먹는 수저통에까지 노을이 기어들어 내가 밥을 먹는지 노을을 퍼먹는지 어리벙벙하고도 황홀한 순간―그 낙조란 지는 노을이 아니라 새로운 천지 창조의 시간임을 느꼈다. 이때 제9 시집인 《수저통에 비치는 저녁 노을》을 냈고, 산문집 《만다라의 바다》를 펴냈다. 너는 서해 뻘을 적시는 노을 속에 서본 적이 있는가 망망 뻘밭 속을 헤집고 바지락을 캐는 여인들 한쪽 귀로는 내소사의 범종 소리를 듣고 한쪽 귀로는 선운사의 쇠북 소리를 듣는다 만 권의 책을 쌓아 올렸다는 채석강의 절벽 파도는 다시 그 만 권의 책을 풀어 흘려 뻘밭 위에 책장을 한 장씩 넘긴다 이곳에서 황혼이야말로 대역사(大役事)를 이루는 시간 가슴 뜨거운 불꽃을 사방으로 던져 내소사 대웅보전의 넉살문 연꽃 몇 송이도 활짝 만개한다 회나무 가지를 치고 오르는 청동까치 한 마리도 만다라와 같은 불립문자로 탄다 곰소의 빨강을 건너 소금을 져나르다 머슴 등허리가 되었다는 저 소요산 질마재도 마지막 술 빛으로 익는다 쉬어라 쉬어라 잠시 잠깐 해는 수평선 물밑으로 가라앉는다.                                      — 졸시 〈대역사(大役事)〉 나는 이곳에서 우리 국토 산수 정신인 황토와 대(竹)에 이어 뻘의 정신을 마지막으로 천착하기로 했다. 그래서 격포 뻘밭을 선택했으리라. 광주시대까지를 황토와 대(竹)의 정신을 천착했다면 격포시대는 마지막 뻘을 캐기 시작한 뻘짓거리 시대였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가 써온 시집 17권은 이에서 한 치 반 치도 벗어난 적이 없다. 지리산 시대 페로몬 냄새 질퍽한 뻘과 노을 속에 눈썹 날리며 살던 격포 바닷가에서 화개장터 건너편 염창마을로 서재를 옮겨 온 것은 2001년 겨울이었다. 이로부터 순천대학교 문창과 객원교수에서 정식교수로 특채된 행운을 얻어 학교에 상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난생 팔자에 없는 교수가 되고, 그것도 석박사 학위는커녕 학사 졸업장도 없는 터였으니 행운이랄밖에. “시를 쓰면 옷이 나와요, 밥이 나와요?”라고 노상 군소리를 했던 아내도 봉급 통장에 월급이 들어오니 “시도 밥 먹여 줄 때가 있네요.” 했다. 그것도 국립대학교 특채 1호 교수(해방 후 처음)라고 언론이 떠들어 댔다. 이곳에서 학교까지 거리는 40분. 격포의 노을과는 달리 섬진강의 강노을과 지리산의 산노을 또한 유정해서 이곳에서 환갑을 맞았고 2005년 8월 정년을 지나 2012년까지 무려 15년간을 학교에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광주와 격포 시대 18년, 지리산 섬진강 시대 15년이 나의 삶 전체의 절반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이곳은 나의 제2의 고향과도 다름없다. 1977년도에 섬인 지명중학교에서 육지로 상륙했던 곳이 구례중학교였고, 이곳에서 다시 1978년 섬학교인 금당중학교로 가기까지 2년을 살며 〈지리산 뻐꾹새〉 등 많은 작품을 썼던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노고단 산장 벽면에는 1976년 8월 개최했던 ‘산상시화전’ 사진이 남아 있기도 하다. 달궁길, 이 길은 여순사건과 ‘지리산 빨치산’ 이야기를 쓰기 위해 무수히도 넘나들었던 나의 산책로이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써진 것이 장편 서사시 《달궁아리랑》이고 후속작인 〈빨치산〉이었다. 그리고 나의 ‘광주시대’에 제3 시집 《아도(啞陶)》(1985)에서 다룬 5·18 민주화 운동과 서사시집 《새야 새야 파랑새야》(1987)의 1894년 갑오·동학혁명 두 사건은 불과 60년의 시차로 현대사를 뒤흔든 사건이다. 여기에다가 불타는 섬 제주의 4·3사건을 더하면 현대사는 완전히 복원된다. 2014년도에는 4·3사건을 소재로 한 시집 《바람타는 섬》을 출간할 예정이다. 이는 1987년의 장편 서사시 《새야새야 파랑새야》의 연장선에 있는 역사물이기도 하다. 이런 와중에서도 전국 음식 기행을 감행, 〈주간 동아〉에 2년간이나 연재 기행을 했으니 참으로 숨 가쁘게 살아온 시기이기도 하다. 시집 《빨치산·1》에 실린 “날아가는 새가 되지 않으려고/ 밤마다 가슴에 돌을 얹고 잠들었다”라는 시구는 빨치산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삶과 문학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내의 맨발   보험설계사로 일하며 내 뒤치다꺼리를 해온 건강했던 아내는 20년 만에 덜컥 백혈병이 났다. 사표를 던지고 내가 떠돌았을 때마다 악착스럽게 세 아이의 어머니로서 생활을 꾸려 왔다. 한때는 함께 수박농사까지 지으면서 내가 엄두도 못낸 똥장군까지 짊어진 여자였다. 등단작 〈산문에 기대어〉가 발표되기 전 1년간은 그랬다. 행방불명이 된 나를 찾으려고 막내 딸아이를 포대기에 짊어진 채 서울까지 온 아내에게 덜미가 잡혀 집으로 내려가기도 했다. 교수 봉급으로 집 한 채 마련하겠다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아내의 맨발〉이라는 제목으로 투병기를 써 주겠다는 조건으로 이식수술비까지 끌어왔다. 10년째인 지금도 아내는 시난고난한다. 굶어 죽으란 법은 없어서 다행히 올해는 집을 사서 이사를 가게 되었다. 2012년에 김삿갓문학상, 지난해에 구상문학상 등을 수상하고, 여기저기서 특강료와 원고료, 인세 등이 들어와 행운이 겹친 탓이다. 나는 적잖은 상금을 받은 구상문학상의 수상소감에서 밝힌 바대로 ‘종교는 개벽의 논리고 혁명은 정치의 논리며 시는 교화(깨달음)의 논리’라는 큰 교훈을 1980년대 구상 선생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었다. 전담 형사를 달고 다니면서도 혁명투사가 되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뜨거운 모래밭 구덩을 뒷발로 파며 몇 개의 알을 낳아 다시 모래로 덮은 후 바다로 내려가다 죽은 거북을 본 일이 있다 몸체는 뒤집히고 짧은 앞 발바닥은 꺾여 뒷다리와 두 발바닥이 하늘을 향해 누워 있었다 유난히 긴 두 발바닥이 슬퍼 보였다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마취실을 향해 한밤중 병실마다 불 꺼진 사막을 지나 침대차는 굴러간다 얼굴에 하얀 마스크를 쓰고 두 눈은 감긴 채 시트 밖으로 흘러나온 맨발 아내의 발바닥에도 그때 본 갑골문자들이 수두룩하였다                                              — 〈아내의 맨발·3(갑골문자)〉 그녀는 성모병원 20층 무균실에서 투병을 끝내고 엘칸토 후원으로 선물 받은 환자용 구두를 신고 마침내 맨발을 가린 채 뚜벅뚜벅 지상으로 걸어 내려왔다. 아내는 10년 투병 끝에도 비실거리며 집을 사서 들어간다는 말을 또 이렇게 말한다. “시가 집을 사 줄 때도 있네요.”라고. 이제 나의 삶도 저물어간다. 벌써 7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삶도 문학도 팔자런가 싶다.  엊그저께는 학교에서 불러 애들과 이마를 맞대며 특강 마무리를 했다. 사랑, 인연, 만남이란 지상에서 태어난 말이 아니라 하늘돌(운석)을 타고 내려온 말이라고 나의 시 〈파천무(破天舞)〉를 들어 설명했다. 그리고 나를 문학으로 살게 해 준 것은 거기 있었던 휴지통과의 만남이었고 나의 삶을 이끌어준 평생의 은인은 질긴 인연의 학과장인 김길수 교수였다고! 사랑이란 말 함부로 쓰지 말자 인연이란 말 함부로 쓰지 말자 만남이란 말 함부로 쓰지 말자 — 졸시 〈파천무〉 중에서     송수권  1940년 전남 고흥 출생.  1975년 〈산문(山門에 기대어)〉 외 4편이 《문학사상》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산문(山門에 기대어)》에서 《파천무》까지 16권과 시선집 《여승》 등 저서 50  여 권 출간.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역임.  문공부예술상, 금호문화예술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김영랑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만해 님시인상, 한민족문화예술대상, 김삿갓문학상, 구상문학상 등 수상. 현재 한국풍류문화연구소장.    「눈 내리는 대숲 가에서」                       「이매창의 무덤 앞에서」   「땅끝 마을에서 부르는 노래」                 송수권 시인이 2003년 백혈병으로 투병중인 아내 김연엽(53·金蓮葉)씨에게 바친 한 편의 詩 가 읽는 이들의 눈시울을 붉게 만듭니다.  송 시인의 아내는 백혈병에 교통사고로 인한 과다출혈로 서울의 한 병원으로 이송되었는데 이 때 의경들이 피를 나눠줘 목숨을 건졌습니다. 송 시인이 서울지방경찰청장에게 감사하다고 보낸 글의 일부를 옮겨보았습니다.  저의 아내 연잎새 같은 이 여자는, 똥장군을 져서 저를 시인 만들고 교수를 만들어낸 여인입니다. 수박구덩이에 똥장군을 지고 날라서 저는 수박밭을 지키고 아내는 여름 해수욕장이 있는 30리 길을 걸어서 그 수박을 이고 날라 그 수박 팔아 시인을 만들었습니다.  그런가 했더니 보험회사 28년을 빌붙어 하늘에 별따기 보다 어렵다는 교수까지 만들어 냈습니다. 박사학위는커녕 석사학위도 없이 전문학교 (서라벌 예술대학 문창과)만 나온 저를 오로지 詩만 쓰게 하여 교수 만들고 자기는 쓰러졌습니다.  첫 월급을 받아놓고 "시 쓰면 돈이 나와요, 밥이 나와요, 라고 평생 타박했더니 시도 밥 먹여 줄 때가 있군요!"라며 울었습니다. 특별전형을 거쳐 발령통지서를 받고 "여보! 학위 없는 시인으로 국립대학교 교수가 된 사람은 저밖에 없다는 군요. 해방 후 시 써서 국립대학교 교수가 된 1호 시인이라고 남들이 그러는군요!"라며 감격해 하더니 "그게 어찌 나의 공이예요, 당신 노력 때문이지 총장님께 인사나 잘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자기는 이렇게 할 일 다 했다는 듯이 쓰러졌습니다. 친구나 친척들에게서 '골수 이식'을 받아야 한다고 말해도 "2년 후면 송 시인도 정년퇴직인데, 송 시인 거지 되는 꼴 어떻게 봐요, 그게 1억이 넘는다는데..."라며 생떼를 씁니다.  지난 주 금요일이었습니다. 병간호를 하고 있는 시집간 딸 은경이의 친구가 2003년 9월 고등학교 1학년 학력평가 문제지(수능 대비 전국 모의고사)를 들고 왔습니다. 언어영역 문제지에는 저의 詩《山門에 기대어》가 출제되어 있었습니다. 은경이의 친구가 자랑처럼 말하자 아내는 "너는 이제 알았니? 은경이 아빠의 詩, '지리산 뻐꾹새' 와 '여승'도 진작 수능시험에 출제되어 나갔어야!"라고 설명해주고는 눈물을 보였습니다. "난 이제 죽어도 한은 없단다." 라고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것을 자기의 공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가 큰 것이라고 모든 공을 주님께로 돌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몹쓸 '짐승의 피'를 타고난 저는 저의 아내가 어떻게 살아온 것인지를 너무나 잘 압니다. 청장님께 말씀드리지만 저의 아내가 죽으면 저는 다시는 시를 쓰지 않겠습니다. 시란 피 한 방울보다 값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AB형! 그 의경들이 달려와서 주고 간 피! 그것이 언어로 하는 말장난보다 '진실'이라는 것 - 그 진실이란 언어 이상이라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2억5천여만 원에 달하는 수술비가 부담스러워 골수이식을 거부하는 아내에게 “당신이 숨을 거두면 시를 쓰지 않겠다”며 간절하게 설득한 끝에 김씨의 남동생의 골수를 이식 받았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남편을 위한 아내의 희생이 그렇고 교수가 된 남편의 아내에게 대한 감사가 그렇습니다. 오늘날 공(功)을 서로에게 돌리는 겸손이 더욱 그렇습니다. 한 가닥 단비처럼 메마른 삶에 우리의 마음을 포근하게 적셔줍니다... ...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 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山茶花) 한 가지 꺾어 스스럼 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 물 속에 비쳐옴을  ---송수권 (산문(山門)에 기대어)   '산문'은 절집어귀에 있는 문이다. 일주문 같은... 시인은 남동생을 잃고 마음이 무척 헛헛했다 한다. 산문은 이승과 저승, 속세와 절집을 가르는 갈림길이겠다.   누님의 치맛살 곁에 앉아  누님의 슬픔을 나누지 못하는 심심한 때는  골목을 빠져나와 바닷가에 서자.  비로소 가슴 울렁이고  눈에 눈물 어리어  차라리 저 달빛 받아 반짝이는 밤바다의 진정할 수 없는  괴로운 꽃비늘을 닮아야 하리.  천하에 많은 할 말이, 천상의 많은 별들의 반짝임처럼  바다의 밤물결 되어 찬란해야 하리.  아니 아파야 아파야 하리. 이윽고 누님은 섬이 떠 있듯이  그렇게 잠들리.  그때 나는 섬가에 부딪치는 물결처럼 누님의 치맛살에 얼굴을 묻고  가늘고 먼 울음을 울음을.  울음 울리라. (박재삼, 밤바다에서) 그이 시를 읽노라면, 박재삼의 밤바다...가 중첩된다.   박재삼은 1950년대의 가난이고, 송수권은 한 20년 뒤의 가난인데, 참 이나라의 가난의 한은 깊다.   여러 산 봉우리에 여러 마리의 뻐꾹새가 울음 울어 떼로 울음 울어 석 석 삼년도 봄을 더 넘겨서야 나는 길뜬 설움에 맛이 들고 그것이 실상은 한 마리의 뻐꾹새임을 알아냈다. 智異山下(지리산하) 한 봉우리에 숨은 실제의 뻐꾹새가 한 울음을 토해 내면 뒷산 봉우리 받아 넘기고 또 뒷산 봉우리 받아 넘기고 그래서 여러 마리의 뻐꾹새로 울음 우는 것을 알았다. 智異山中(지리산중) 저 連連(연연)한 산봉우리들이 다 울고 나서 오래 남은 추스림 끝에 비로소 한 소리 없는 江(강)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섬진강 섬진강 그 힘센 물줄기가  하동쪽 남해를 흘러들어 南海群島(남해군도)의 여러 작은 섬을 밀어 올리는 것을 보았다. 봄 하룻날 그 눈물 다 슬리어서 智異山下(지리산하)에서 울던 한 마리 뻐꾹새 울음이 이승의 서러운 맨 마지막 빛깔로 남아 이 細石(세석) 철쭉꽃밭을 다 태우는 것을 보았다. (지리산 뻐꾹새, 전문)   지리산 뻐꾹새 역시 절창이다. 그 하염없는 눈물이 세석까지 타오르는 시각으로 눈물겹다.   푸른 이내를 적시는 방울소리 뚝 끊어지고 어느 강물에 시치미도 흘려 버리고 그린 듯이 하늘 가에 나의 매는 섰어라.(그리움, 전문)   절절한 그리움은 기러기든, 매든 하늘 가를 우러르는 눈매에 잡히는 것은 모두 서럽다. 이녘과 뚝, 끊어지는 인연은 푸른 안개 적셔진 온 세상을 서럽게 운다.   아이들이 크는 동안은 다 이렇게 귀여운 것인가 꽃밭 하나를 차지하고 꽃을 가꾸는 아이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들이 피워낸 꽃이 비록 작은 분꽃이나 나팔꽃일지라도(情, 부분)   딸을 가진 기분은 어떨까?   무엇이 마음에 차지 않을 때에는 일부러 개 울음소리를 흉내낸다 아빠가 성난 얼굴을 하면 월,월, 월, 혀를 내둘러 놓고는 냅다 뛴다(정, 부분)   이런 귀염상 가득한 딸의 애교를 보면, 어떤 사상도 다 놓아지지 않을까?   김수영이 생계를 위해 닭을 기른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인상파 회고전'에서 수영을 만난다. 그리고 삶의 비애를 시로 쓴다.   일금 삼십 원을 들고 서서 닭의 밑구멍을 빤히 들여다 보고 서 있는 이젠 이 짓도 그만둘 거라며 두 손 짝짝 털고 무덤 쪽으로 가고 있는 수영의 검은 얼굴... (수영의 닭장, 부분)   김용직은 평론에서 송수권과 박재삼을 마주 대본다.   재삼은 수권이 심각하게 의식해야할 시인이었다. 그는 이미 50년대에 한국적인 정조를 그 씨날로 할 작품들을 양산해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송수권이 시의 발판으로 삼은 지방의 독특한 말씨, 그 감칠맛이 있는 느낌까지가 교묘하게 수용되어 있었다. 그의 기가 펄럭이는 연대에 시단 진출을 한 것이 송수권.(145)   이 시집엔 없으나, 난 그의 '여승'이 참 정겨웁다.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종일 방 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女僧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과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집 처마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발치로 바릿대를 든 女僧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 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小僧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 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로 되돌라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뒤로 나는 女僧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女僧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事物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며 詩를 쓴다. (여승, 전문)     비로소 인간으로서 상대를 인식하기 시작한 무렵, 우연히 만난 여승의 추억은 에서 영랑이 찾던 을 경쾌하면서도 진하게 느끼게 한다.   남도 가락이 유장한 서편제 풍의 송수권의 시는, 그 배경에 깔린 한과 함께 바닷가 비릿한 사람들의 한을 오롯이 담아내는 시를 쓴 사람이다.   지리산 뻐꾹새가 섬진강 줄기따라 울음울며 내리다 남해 다다라 섬 하나에 막혀 솟구친 그런 울음으로 가득한 시집.   ========================================================  생존 인물 문학상 제정 타당한가” 군-문학단체 갈등 심화  ● 이슈분석… 고흥 ‘송수권문학상’ 제정 논란  문학회 “생존작가 이름 내건 문학상은 잘못” 철회 촉구 고흥군, 여론 수렴·의회 검토 거쳐 결정…명칭 진행키로 입력날짜 : 2015. 08.05. 18:24 고흥군이 최근 추진한 ‘송수권문학상’을 놓고 일부 지역문학단체들이 반발하는 등 논란이 거세게 일고 있다. 5일 군에 따르면 문학상은 지난 4월 ‘송수권 시 문학상 운영 조례’ 공포와 함께 시 문학상 운영위원회를 구성해 위원 위촉을 마무리 짓고 문학상 운영위원회의를 열어 문학상 공모분야와 시상계획, 공모안 등 운영전반에 대한 토의를 진행하면서 본격화 됐다. 이후 지난달 전국 학교와 언론 등에 홍보를 진행해 왔다. 군은 오는 10월 한달 동안 작품공모 심사를 거쳐 오는 11월에 문학상 시상식과 시낭송대회 등을 계획하고 있다. 공모자격은 2014년 10월1일부터 오는 9월30일까지 출간된 시집으로 기성부문은 시집 1권, 신인부문은 시 10편을 접수 받게 되며 시 분야 최고상인 대상수상자에게는 3천만원이 수여될 예정이다. ◇문학단체 “문학상 보다 문학관이 우선” 이같은 고흥군의 계획에 대해 지역 문학단체가 반발하고 나섰다. 고흥문학회는 이날 성명서를 통해 “행정 관청이 주관해 생존 인물을 대상으로 문학상을 제정해 우상화한 사례는 없다”며 문학상 제정을 중단할 것을 군에 요구했다. 이어 고흥문학회는 “문학상 제정은 고래로 문학적 공로가 현격하고 추앙받는 고인을 대상으로 제정하는 것이 통례”라며 “생존 문학인을 대상으로 한 문학상 제정은 적절치 않다”고 주장했다. 또한 “문학상 제정을 행정기관이 추진하다보니 역사적 흐름과 보편적 문학현실에 반하는 결정을 내렸다”며 “고흥은 문학상 제정보다 문학관 건립이 더 시급하고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학회는 “만약 중단할 수 없다면 문학상 명칭을 역사성을 띤 이순신이나 목일신·한하운 문학상 등으로 변경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백경 고흥문학회 사무국장은 “송수권문학상 제정 소식을 들은 한국문인협회, 한국현대시인협회 소속 회원·임원 등으로부터 항의가 빗발치고 있다”며 “문단 내에서도 이번 파행적인 문학상에 대해 불만이 있는 만큼 공론화에 힘써 되돌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군 “작가정신 훼손 주장 동의할 수 없다” 고흥군은 이에 대해 입법 예고 기간을 거쳐 의회 검토까지 모두 거쳐서 결정된 사안으로 바꿀 수 없다는 입장이다. 군 관계자는 “송수권 작가는 지역의 대표적인 문학시인으로서 의의를 가지고 추진하게 됐다”며 “문학상 이름을 가지고 일부 생존한 작가의 숭고한 정신을 훼손한다는 주장은 동의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전국 문학상을 일제히 조사했고 실제 국내에서 생존작가의 이름을 내건 문학상도 다수 있다”며 “의회검토 과정에서도 이 부분에 대한 문제가 제기돼 모두 협의를 거쳐 결정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이순신·목일신·한하운 문학상 등 명칭 변경에 대해서는 지역과의 연관성 여부와 이미 관련된 일부 사업들을 진행하고 있어 불가능 하다고 못 박았다.  이 관계자는 “처음으로 진행되는 행사인 만큼 우선 행사를 치른 뒤 장단점을 평가하고 논의점을 찾아야 한다”며 “명칭변경은 섣부른 판단으로 변경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고흥=신용원 기자   =============================================================================== 발신: 고흥문학회                                    수신: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제목: 송수권문학상 제정 및 시행 반대 추가 - 송수권 시문학상  논란  KBC 광주방송 관련  인터뷰     1. 존경하는 선생님은 우리문단에 기둥입니다. 국가창조문학의 진작을 위하여 불철주야 애쓰시는 작가님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2. 금번 고흥군청이 제정·시행코자 하고 있는 송수권문학상에 대하여 고흥 문인 및 전국 문인들의 고견을 경청하여 고흥문학회에서 첨부와 같이 성명서를 송부하오니, 예향의 고장, 우리 고흥의 발전과 우리문단의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고흥군청이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한국문인협회와 회원님들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첨부:  1) 성명서 1부 2) 송수권 문학상 제정 및 시행 반대 의견 1부 3) 마음을 열면 세상 소리가 들린다 1부 4) 우리의 화두는 바른 길이다 1부. “끝” 2015년 7월 31일 고 흥 문 학 회 회장 김형식  1) 성명서  송수권문학상을 철회하라!!! Ⅰ. 송수권문학상을 철회하라! 흔히들 “문학은 예술의 장자”라 한다. 내 고향 고흥군에서 최초 문학상 제정의 부당함에 대하여 고흥문학회 회원 및 전국 문인들의 연대와 응원을 요청한다. 고흥문학회는 고흥을 사랑하는 문인들과 출향 향우 문인들이 함께 활동하고 있는 문학단체입니다. 금번 고흥군에서 제정한 송수권 시인의 문학상 (이하 S문학상이라 칭함) 제정이 심히 부당하여 고흥군 출신 문학인들은 매우 유감스럽고 불편한 마음 금할 수 없다. 먼저 훌륭한 송수권 시인이 내 고향 선배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S문학상 제정이 부당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거론한다. 첫째, S시인은 생존해 계신 분이다. 역사를 더듬어 볼 때, 어느 사회단체나 그 문중에서는 간혹 그런 사례는 있으나 행정 관청이 주관하여 생존 인물을 대상으로 문학상을 제정하여 우상화한 사례는 없다. S시인의 문학상 제정은 전국 문학인 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지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문학상 제정은 고래로 문학적 공로가 현격하고 추앙받는 고인을 대상으로 제정함이 통례로 되어 있기에, 이번 문학상 제정은 적절치 않다. 문학인들의 업적은 사후에 평가 받는다. 문인들은 누구나 이를 알기 때문에 시공에 매이지 않고 진리를 노래할 수 있는 것이다. [사례1] 박경리 (1926~2008) 문학상 제정 생전에 문학상 제정을 고사하신 박경리 선생의 문학상은 강원도와 원주시의 후원으로 2011년에 제정되었다. [사례2] 조정래(1943~ ) 선생은 고향에서 문학상 제정을 거론하였으나 선생의 고사로 추진하지 않고 있음.  [사례3] 역사의 흐름과 문인들의 여론을 무시한 H시의 생존한 L작가에 대한 문학상 및 문학관 건립은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을 뿐만아니라 전 군민의 빈축에 대상이 되고 있다. [참고 자료 1] 생존 작가 이름을 내건 최초 문학상 만든 이외수 . [참고 자료 2] 'L문학상’은 생존 작가의 이름을 딴 최초의 문학상이라고 문단에서는 말한다. 문단에는 문학상 제정에 관한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유명 문인이라도 주위에서 문학상 제정 제안이 오면 ‘겸손하게’ 이를 거절하고, 사후에 제자들이 고인이 된 작가의 유지를 받들어 상을 만드는 것이다. 작가가 자신의 이름을 낮추는 게 미덕인 문단 분위기에다 문학상 제정이 생존 작가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중략).  둘째, 행정 기관인 고흥군청에서 역사적 흐름과 보편적인 문학 현실에 반하는 결정으로 군민의 혈세를 낭비하여 S시인의 고고한 문학정신을 훼손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셋째, S시인을 우상화하여 어느 문중의 위상을 높인다는 의혹이 확산될 소지가 크다. [사례] 충청도의 B시에서는 작고한 L작가의 생가를 매입하여 그 작가의 문학관을 건립하려 하였으나 해당 군민과 향리문학인들이 공공문학관도 없는 상황에서 개인을 우상화하는 문학관 건립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이유를 들어 무산 되었다. Ⅱ. 고흥군민과 전국 문학인들에게 드리는 호소 1, 고흥문학관 건립이 시급하고 우선적 사업이다. 아직 고흥에는 문학관이 없음으로 문학관을 건립하여 고흥 출신으로 국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학인들의 각 장르별 활동 공간으로 활용하도록 함이 예향의 고향, 고흥의 위상을 높이는 길이다. 2. 고흥 문학상 제정은 고흥을 빛내고 문학의 얼을 심은 역사적 인물에서 제정함이 옳은 일이다. 가, 이순신 문학상 (가칭) 이순신 장군은 재임 22년 중 내 고향 고흥에서 12년을 재임한 세계적인 영웅이며 훌륭한 시인이다. 발포는 이순신 장군이 첫 부임지로 재임 2년에 모함으로 관직을 박탈하시고 다시 돌아와 나라를 지켰던 유서 깊은 4포 중 하나이다. 우리가 합심하여 발포순신 문학상을 제정한다면 고흥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가장 빛나는 무형문화재가 될 것이며 세계적인 관광자원이 될 것으로 사료된다. 나, 목일신 문학상 (가칭) 대한민국 초등학교(국민학교)를 졸업한 모든 사람은 목일신 시인의 노래를 기억하고 부르는 국민적인 시인이다. 이런 훌륭한 분의 문학상 제정도 무시하고 30년이나 후배인 생존한 S시인의 문학상을 군민의 혈세로 제정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다, 한하운 문학상 (가칭) 등 한하운 문학상 제정은 역사적으로나, 사회적 정서로 보나 고흥의 위상을 세계적으로 높일 수 있는 길이다.  3, 문학상 제정에 관한 훈훈한 이야기 [사례1] 고인의 문학정신을 기리고 지역 문학의 위상을 높이고자 강진군이 추진한 영랑문학상과 해남군이 추진한 고산문학상은 얼마나 고고하고 보기 좋은가. [사례2] 담양군에서도 훌륭한 분들이 많으나 송순(1493~1582) 문학상을 재정하여 진행 중임. Ⅲ. 비판의 글 고흥군청 관계자의 S시인에 대한 넋 나간 호평 관계자의 보도 내용에 따르면, "서정 시인이자 김소월 시인의 맥을 잇는 순수문학의 대가인 평전 송수권 시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고 동요작가인 목일신(1913~1986) 선생과 함께..." 라 하였으나, S시인은 시 문학적 기여도가 설영 있다 할지라도, 그와 같은 문구는 대한민국의 문학인들을 모독하는 것이며, 문학의 고장을 운운함은 예향 고흥의 문학전통과 이를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는 문학인들 및 군민들의 얼굴에 먹칠하는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Ⅳ. 우리의 결연한 요구 1, 송수권문학상은 제정 시행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 대한민국 역사상 국민의 혈세로 생존한 작가의 문학상을 제정한 사례는 없다 2, 만악 중단할 수 없다면, 문학상 명칭을 다른 이름으로 변경 시행해야 한다.  상기에 제시한 이순신문학상, 목일신문학상, 한하운문학상 등등으로 변경되어야 한다. 3, 이에 대한 송수권 시인과 고흥문화원은 고흥 군민과 고흥 향우, 고흥 문인들과 전국 문학인들에게 납득할 수 있는 입장을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한다.  2015. 7. 31 고흥을 사랑하는  고 흥 문 학 회 회장 김 형 식                                2) 송수권 문학상 제정 및 시행 반대 의견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 이름 석자를 남기기를 원한다.호사유피 인사유명 (虎死有皮 人死有名)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고사다. 이는 중국의 오대사(五代史) 왕언장전(王彦章傳)에서 유래된 말이다. 梁나라가 멸망할 때 唐帝가 왕언장의 무용을 아껴 자신의 부하가 되어 달라고 했으나 왕언장은 아침에 양나라, 저녁에 는 당나라를 섬긴다면 살아서 무슨 면목으로 세상사람들을 대하겠는가 하고 거절 했다. 하여, 그는 세상에 이름을 남겼다. 왕언장은 생전에 글을 배우지 못해 거의 문자를 알지 못 했슴에도 세상 사는 이치를 알아 언제나 이를 즐겨 인용 하고 살았는데 하물며 글을 쓰는 문인들이야 말을해서 무엇하랴. 우리는 흔히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라고 한다. 문학인 역시 그렇다. 그래서 문학을 예술의 장자라고 하지않는가 .더 거슬러 올라가 업적에 대한 평가가 왜 사후의 세상에 맡겨저야 하는지 그시원을 찿아가 보자. 장자는 남화경에서 神人無功 , 聖人無名, 至人無己라 하여 신인은 공을 ,성인은 이름을 구하지 않으며, 지인은 자기가 없다고 했다. 장자가 성인은 열자, 멕고야 신인 이라 거명하면서도 지인의 자리를 비워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그자리가 본인의 자리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사후 선택에 맡긴것이다. 그릇은 비워야 채워지고 명예는 사양의 미덕으로 빛이나는 것이다. 세상의 빛이된 존경 받는 분들이 자신의 평가를 사후에 맡긴 근원을 나는 장자의 남화경 에서 부터 찿는다. 고래로 우리삶의 흔적은 사후에 평가 받는것이 묵시적인 불문률로 되어 있다.역사를 더듬어 보자. 고구려 광개토왕, 신라의 원효대사.혜초.백걸선생, 고려의 일연 .죽림칠현.황희.맹사성, 조선조에는 이율곡 .이퇴계.이순신 . 한석봉 .김삿갓, 현대에 들어 윤동주. 윤봉길.방정환. 이중섭등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다. 이들은 생존시 우상화 되기를 거부하고 사후에 평가를 받았다. 그리하여 위인들은 한결같이 시공에 매이지 않고 진리를 노래할 수 있었다. 송수권 시인은 우리고장을 빛낼 훌륭한 시인임을 자랑한다. 그러나, 금번 고흥군에서 제정하고 시행코자 하는 송수권 시인의 문학상은 첫째, 송시인이 생존하고 있는 분이라는 것과둘째,헐세를 낭비하여 한시인을 우상화 하려 함은 송시인의 고고한 문학 정신을 훼손 하는 처사임을 지적한다. 셋째,송시인이 예향의 고장 고흥의 역사적인 인물로 우리문단에 더 큰 별이 되도록 길을 잡아 주어야 한다. 한갓 여름밤에 유성잔치가 되지 않도록 송수권 시인을 사랑하는 고흥문학회가 한국 문인들의 고견을 들어 직언하는 바이다.분수를 아는것이 참된 도를 아는 것이다. 회장 김형식 3) 마음을 열면 세상 소리가 들린다 (김형식) 조선왕조실록은 1977년에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어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보호받고 있다.  세종이 집권 하고 나서 가장 보고 싶었던 책이 있었다. 뭐냐하면 태종실록 이었다.아버지의 행적을 저 사관이 어떻게 썼을까. 너무도 궁금 해서 태종실록을 봐야겠다고 했다. 맹사성이란 신하가 나섰다. ''마마 보지 마십시요"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왕의 실록을 보시면 저 사관이 그것이 두러워서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세종은 참았다. 몇년이 지났다. 또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그래서 이번에는 " 선대왕의 기록을 봐야 그것을 거울 삼아서 내가 정치를 잘할것 아니냐 "하며 선왕의 실록을 봐야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황희 정승이 나셨다. "마마 보지 마십시요"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이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 할것이고 그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 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 젊은 사관이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마께서는 보지 마시고 이 다음 조선왕도 영원히 실록을 보지 말도록 교지를 내려 주시옵소서" 그랬다. 이말을 세종이 들었다. "네 말이 맞다. 나도 영원히 않보겠다. 그리고 조선의 왕 어느 누구도 실록을 봐서는 안된다"는 교지를 내렸다. 그래서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못보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 해서 조선왕조 실록은 인류의 보물이 되었다.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해 놓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읽어야 한다. 천하의 주인인 세종께서 신하의 진언을 옳다고 판단하고 따랐다는 사실이다.이를 무시하고 선대왕의 기록을 보고 주관적인 판단하에 국사를 펼쳐 갔다면 그를 모신 사관은 어떻게 했을까? 조선왕조 500년 역사가 이어질 수 있었을까, 있*을* 수*있*었*을*까? 깊이 생각 해 볼 일이다. 세종대왕님께 다시 한번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한다 .마음을 열면 세상의 소리가 들린다. 세종께서는 세상의 바른 소리를 들었다. 탐진치를 버리고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러야 한다.   4) 우리의 화두는 바른 길이다 (김형식) 길이란 하나로 통한다.  바른 길은 두개일 수가 없다.  가고자 하는 길이 잘못 된 길이라면 바로 잡아야 한다. 우리는 옳지 않는 길을 알면서도,모르면서도 다닐 수는 있으나  그 길이 바른 길이 아니라면 역사가 반듯이 바로 잡을 것이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미국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오늘 나는 젊은 학창 시절부터 마음속에 담고 있었던  이분의 시 한편을 꺼내 본다. "가지 않는 길"이라는 시이다.  8월이 시작되는 일요일 비가 주걱주걱 내리는 처마 밑에 앉아  고향으로 가는 바른 길을 따라 가며 아름다운 이시를 읊조려 본다.  가지 않는 길 (로버트 프로스트.) 노란 숲 속에 길이, 두갈래 길이 있었지요. 한 몸으로 두 길을 다 가볼 수는 없겠기에 . . .  그러다가 한 길을 택하였지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지요 그길에는 풀이 우거지고 사람의 발자취가 적었지요. . .  생존 하고 계신 S시인의 문학상 제정및 시행은 그 길이 고흥군청이 결정한 일이라 할지라도 바른 길이 아니면  우리가, 본인이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  글이 좋아 사랑 받았던 이광수, 서정주 선생님을 떠 올려 본다.  당시 그분들은 친일이 무엇인지 몰랐을까.  그와는 성격이 다르기는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때도 지금도 화두는 바른 길이다. 눈밝은 민중들이 청언하고 있는데도 귀를 막고 모른척 한다면  그책임을 본인이 안고 가야 한다. 이 청언은 우리곁에 남을 것이다. 역사가 기록 할 것이다. 아놀드 토인비는 "마음과 인격이"먼저 무너졌기 때문에 로마가 무너졌다고 한다. 존경하는 S시인의 고귀한 문학 정신이 바른 길에서 더욱 빛이 나기를 기원한다.   =========================== 한국의 대표적인 시 전문 월간지 과 가 8월호에 이례적으로 합동 성명서를 실었다. ‘‘송수권 시문학상’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제목을 단 이 성명은 전남 고흥군이 제정해 다음달 시행을 앞둔 제1회 고흥군 송수권 시문학상에 대한 ‘우려’를 담았다. 송수권 시문학상의 ‘개선’과 ‘거듭남’을 희망했는데, 상의 이름과 운영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고언으로 읽힌다.   두 잡지가 송수권 시문학상을 걱정하는 가장 큰 까닭은 송 시인이 생존 시인이라는 사실에 있다.   송수권(75) 시인은 고흥 태생으로 순천사범과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75년 을 통해 등단했다. 등단작이 잘 알려진 ‘산문(山門)에 기대어’다.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로 시작하는 서정적이며 리드미컬한 작품이다.   과 는 살아 있는 시인의 이름을 건 문학상이 우리 시단에서는 금기와 같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시단에는 1950년대에 등단한 이들을 비롯해 송 시인보다 나이도 많고 경력도 오랜 원로 시인들이 여럿 있는바, 이번 문학상 제정은 “선배 및 동료 시인들에 대한 존중과 예의에 어긋난다”고 덧붙였다.   송수권 시인은 물론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구상문학상 등 유수의 문학상을 통해 문학적 업적을 인정받은 만큼 그의 이름을 단 문학상 제정이 아예 터무니없는 일만은 아니다. 편운 조병화(1921~2003) 시인 생전인 1991년부터 시상을 한 편운문학상 같은 선례도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이며 부적절한 사례라 보아야 한다. 고흥 지역 문인 모임 고흥문학회가 “적절치 않다”며 상의 철회를 요구하는 민원을 고흥군에 제기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송수권 시문학상의 문제는 더 있다. 고흥군이 조례 제정을 거쳐 밝힌 상의 시행 요강을 보면 기성 시인의 경우 시집 한권을, 신인은 시 10편을 ‘응모’하도록 되어 있다. 시인 자신이 응모할 수도 있고 다른 이가 ‘추천 응모’를 할 수도 있다. 상을 받고 싶으면 신청하라는 것이다. 두 잡지는 이런 선정 방식이 “시인들의 자존을 훼손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고흥군은 또 송수권 시인의 시를 암송해 겨루는 시 낭송대회를 마련해 시상한다고 밝혔는데, 이 역시 “전례를 찾기 힘든 일로, 문학을 사유화하는 것”이라고 두 잡지는 비판했다.   송수권 시문학상은 대상 상금이 3천만원이고 우수상(2명)과 장려상(3명)을 포함한 상금 총액이 6500만원에 이른다. 시 낭송대회 상금도 대상 100만원을 비롯해 총액 680만원으로 결코 작지 않은 액수다. 여기에다 심사비와 시상식 등 운영비를 합하면 1억원 안팎 예산이 쓰일 것으로 보인다.   최재봉 선임기자 지자체들 사이에 자기 지역 출신 문인을 기리는 문학상 제정 바람이 분 것도 벌써 오래된 일이다. 다른 분야가 아닌 문학에 눈을 돌렸다는 것은 일단 고마운 노릇이지만, 문학상 난립 및 경쟁과 과열에 따른 부작용도 없지 않다. 문학적 성과가 의심스러운 이의 이름으로 상이 주어지거나, 반대로 수상자쪽 자격이 의심스러운 경우도 있다. 고흥군이 좋은 뜻으로 마련한 문학상이 출발부터 잡음과 시비에 휘말리게 된 것은 안타깝지만, 시단의 우려와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할 까닭은 없다고 본다. 그렇잖아도 최근 이런저런 불미스러운 일로 눈총을 받는 한국문학이 생존 시인 문학상 제정으로 또 한번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무엇보다 송수권 시인 자신의 지혜로운 판단이 요구된다.   최재봉 선임기자   =============================================================== “생존 인물에 문학상 제정 사례 없다”  고흥군이 추진하고 있는 ‘송수권 문학상’ 제정을 놓고 일부 지역 문학단체들이 반발하는 등 논란이 일고 있다. 고흥문학회는 5일 “행정관청이 주관해 생존 인물을 대상으로 문학상을 제정한 사례는 없다”며 송수권문학상 제정 철회를 군에 요구했다. 고흥문학회는 “문학상 제정은 문학적 공로가 현격하고 추앙받는 고인을 대상으로 제정하는 것이 통례”라며 “생존 문학인을 대상으로 한 문학상 제정은 적절치 않다”고 주장했다. 문학상 제정을 행정기관이 추진하다보니 역사적 흐름과 보편적 문학현실에 반하는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고흥은 문학상 제정보다 문학관 건립이 더 시급하고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학회 관계자는 “고흥 출신으로 작고한 훌륭한 작가들이 많은데 왜 하필 생존해 계신 분 이름의 문학상을 제정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자칫 송수권 시인의 문학정신까지도 훼손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문학회는 고흥군에 이같은 내용으로 민원을 제기하고 다른 문학단체들에도 이같은 사실을 알릴 방침이다. 이에 대해 고흥군은 군민의견 수렴과 의회 검토까지 모두 거쳐서 결정된 사안으로 바꿀 수 없다는 입장이다. 고흥군 관계자는 “생존작가의 이름으로 문학상을 만들지 말라는 법도 없고 생존작가의 이름을 내건 문학상도 다수 있다”며 “의회검토 과정에서도 이 부분에 대한 문제가 제기돼 모두 협의를 거쳐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어떤 이유에서 이런 민원을 냈는지 모르지만 민원을 제기한 부분에 대해서는 문학상 제정의 취지대로 상세히 설명하겠다”고 덧붙였다. [교차로신문사/ 최명희 기자 ========================================  '송수권 문학상 철회 성명서' 관련된 '고흥군청 회신' 글입니다           성명서    송수권문학상을 철회하라!!!   Ⅰ. 송수권문학상을 철회하라!    흔히들 “문학은 예술의 장자”라 한다. 내 고향 고흥군에서 최초 문학상 제정의 부당함에 대하여 고흥문학회 회원 및 전국 문인들의 연대와 응원을 요청한다. 고흥문학회는 고흥을 사랑하는 문인들과 출향 향우 문인들이 함께 활동하고 있는 문학단체입니다.    금번 고흥군에서 제정한 송수권 시인의 문학상 (이하 S문학상이라 칭함) 제정이 심히 부당하여 고흥군 출신 문학인들은 매우 유감스럽고 불편한 마음 금할 수 없다. 먼저 훌륭한 송수권 시인이 내 고향 선배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S문학상 제정이 부당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거론한다.   첫째, S시인은 생존해 계신 분이다.  역사를 더듬어 볼 때, 어느 사회단체나 그 문중에서는 간혹 그런 사례는 있으나 행정 관청이 주관하여 생존 인물을 대상으로 문학상을 제정하여 우상화한 사례는 없다. S시인의 문학상 제정은 전국 문학인 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지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문학상 제정은 고래로 문학적 공로가 현격하고 추앙받는 고인을 대상으로 제정함이 통례로 되어 있기에, 이번 문학상 제정은 적절치 않다. 문학인들의 업적은 사후에 평가 받는다. 문인들은 누구나 이를 알기 때문에 시공에 매이지 않고 진리를 노래할 수 있는 것이다.   [사례1] 박경리 (1926~2008) 문학상 제정 생전에 문학상 제정을 고사하신 박경리 선생의 문학상은 강원도와 원주시의 후원으로 2011년에 제정되었다.   [사례2] 조정래(1943~ ) 선생은 고향에서 문학상 제정을 거론하였으나 선생의 고사로 추진하지 않고 있음.   [사례3] 역사의 흐름과 문인들의 여론을 무시한 H시의 생존한 L작가에 대한 문학상 및 문학관 건립은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을 뿐만아니라 전 군민의 빈축에 대상이 되고 있다.   [참고 자료 1] 생존 작가 이름을 내건 최초 문학상 만든 이외수 .       [참고 자료 2] '이외수문학상’은 생존 작가의 이름을 딴 최초의 문학상이라고 문단에서는 말한다. 문단에는 문학상 제정에 관한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유명 문인이라도 주위에서 문학상 제정 제안이 오면 ‘겸손하게’ 이를 거절하고, 사후에 제자들이 고인이 된 작가의 유지를 받들어 상을 만드는 것이다. 작가가 자신의 이름을 낮추는 게 미덕인 문단 분위기에다 문학상 제정이 생존 작가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중략).      둘째, 행정 기관인 고흥군청에서 역사적 흐름과 보편적인 문학 현실에 반하는 결정으로 군민의 혈세를 낭비하여 S시인의 고고한 문학정신을 훼손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셋째, S시인을 우상화하여 어느 문중의 위상을 높인다는 의혹이 확산될 소지가 크다.   [사례] 충청도의 B시에서는 작고한 L작가의 생가를 매입하여 그 작가의 문학관을 건립하려 하였으나 해당 군민과 향리문학인들이 공공문학관도 없는 상황에서 개인을 우상화하는 문학관 건립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이유를 들어 무산 되었다.   Ⅱ. 고흥군민과 전국 문학인들에게 드리는 호소   1, 고흥문학관 건립이 시급하고 우선적 사업이다.    아직 고흥에는 문학관이 없음으로 문학관을 건립하여 고흥 출신으로 국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학인들의 각 장르별 활동 공간으로 활용하도록 함이 예향의 고향, 고흥의 위상을 높이는 길이다.   2. 고흥 문학상 제정은 고흥을 빛내고 문학의 얼을 심은 역사적 인물에서 제정함이 옳은 일이다.   가, 이순신 문학상 (가칭)  이순신 장군은 재임 22년 중 내 고향 고흥에서 12년을 재임한 세계적인 영웅이며 훌륭한 시인이다.    발포는 이순신 장군이 첫 부임지로 재임 2년에 모함으로 관직을 박탈하시고 다시 돌아와 나라를 지켰던 유서 깊은 4포 중 하나이다. 우리가 합심하여 발포순신 문학상을 제정한다면 고흥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가장 빛나는 무형문화재가 될 것이며 세계적인 관광자원이 될 것으로 사료된다.   나, 목일신 문학상 (가칭)  대한민국 초등학교(국민학교)를 졸업한 모든 사람은 목일신 시인의 노래를 기억하고 부르는 국민적인 시인이다. 이런 훌륭한 분의 문학상 제정도 무시하고 30년이나 후배인 생존한 S시인의 문학상을 군민의 혈세로 제정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다, 한하운 문학상 (가칭) 등  한하운 문학상 제정은 역사적으로나, 사회적 정서로 보나 고흥의 위상을 세계적으로 높일 수 있는 길이다.     3, 문학상 제정에 관한 훈훈한 이야기   [사례1] 고인의 문학정신을 기리고 지역 문학의 위상을 높이고자 강진군이 추진한영랑문학상과 해남군이 추진한 고산문학상은 얼마나 고고하고 보기 좋은가.   [사례2] 담양군에서도 훌륭한 분들이 많으나 송순(1493~1582) 문학상을 재정하여 진행 중임.   Ⅲ. 비판의 글   고흥군청 관계자의 S시인에 대한 넋 나간 호평    관계자의 보도 내용에 따르면, "서정 시인이자 김소월 시인의 맥을 잇는 순수문학의 대가인 평전 송수권 시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고 동요작가인 목일신(1913~1986) 선생과 함께..." 라 하였으나, S시인은 시 문학적 기여도가 설영 있다 할지라도 그와 같은 문구는 대한민국의 문학인들을 모독하는 것이며, 문학의 고장을 운운함은 예향 고흥의 문학전통과 이를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는 문학인들 및 군민들의 얼굴에 먹칠하는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Ⅳ. 우리의 결연한 요구   1, 송수권문학상은 제정 시행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 대한민국 역사상 국민의 혈세로 생존한 작가의 문학상을 제정한 사례는 없다   2, 만악 중단할 수 없다면, 문학상 명칭을 다른 이름으로 변경 시행해야 한다. 상기에 제시한 이순신문학상, 목일신문학상, 한하운문학상 등등으로 변경되어야 한다.   3, 이에 대한 송수권 시인과 고흥문화원은 고흥 군민과 고흥 향우, 고흥 문인들과 전국 문학인들에게 납득할 수 있는 입장을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한다.                                        2015. 8. 6                         고흥을 사랑하는 고 흥 문 학 회 회장 김 형 식      ~~~~~~~~~~~~~~~~~~~~~~~~~~~~~~~~~~~~~~~~~~~~~~~~~~~~~~~~~~~~~   ========================================???!!!=============================   지난 토요일 날, 가까운 데서 송수권 시인이 특강을 한다고 하여 퇴근길에 들렀다. 학생들을 위한 강연이었다. 나는 아직 그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미술학원 가는 둘째를 이웃에게 부탁했다. 그는 정해진 시간에 와서 계획대로 100여 분을 강연했다. 원고는 “나의 詩와 고향 또는 불교적 상상력 - 삶과 죽음은 하나”였다. 원고 안에  등의 작품을 스크랩하듯 실었다.   강연의 절반은 시에 접근하는, 시를 바라보는 이야기였다. 그 나머지는 시를 읽기도 하고, 남의 시를 말하기도 하면서 요즘 시를 쓰는 일이 고달프다는 이야기에 관한 것이었다. 강연 내내 잡고 놓지 않은 것은 시인과 “상상력”과 시의 “서정성”이었다.    그는 아이들과 눈빛을 맞추고, 시인이 멍청해야 한다고 전제했다. 자신은 시골에서 논을 매다 온 사람 정도로 불린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요즘의 시인들은 주머니에 유전자 지도를 넣고 다닌다는 말을 던졌다.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하면서 전통적인 상상의 방식이 구닥다리가 되었는데 아직 서정시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를 반문하였다. 벤야민이 “서정시는 죽었다.”고 한 것을 인용하였다. 도시서정이니, 테크노에 눈뜬다는 이야기가 있기는 하지만 주류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다소 힘을 주어서 말하였는데, 문학은 “인간의 구원에 관한 문제, 인간성의 회복, 인간성의 옹호”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시인은 예언자적 기능을 담당하는 사람이어야 하며 새벽닭이 되어서 세상의 빛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존재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여전히 시의 본령은 노래이며 서정이고 인문학이 바탕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바깥이 아니라 내면의 풍경을 잡아야 한다고 하였다.   문학이 언어의 표현미를 다룬다고 하지만, 문학은 정신의 미를 확장해야 한다고도 하였다. 이 시대에 어떻게 이것이 유용할 지에 대하여 고민하면서, ‘있는 공간과 시간’은 과거의 것이라고 하였다. ‘없는 것, 없는 공간’을 드러내는 것이 시인의 상상력이라고 하였다. 서정주의 이나 백석의 를 말 하였다. 그것은 양념 정도 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시의 충격을 이야기하였었다. 머리로 충격을 주는 시, 가슴으로 충격을 주는 시가 있다고 하였다. 감정 없는 것을 지향하는 최근 시의 경향을 우려하였다. 시인들의 시 쓰는 전략은 대략 30개 정도 되는데 그 코드들이 이미 낡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진부한 것에 기대지 마라, 공부를 해라, 책을 읽어라, 단계를 넘어라 그런 이야기를 하였다. 시에, 한때 “준엄한 정신”을 이야기하던 때가 있었으나 농경사회에서 최첨단의 정보화시대로 넘어가는 이 시대에 그것은 쉽지 않다고 하였다.    시인은 인습, 그 인습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하였다. 우리 시대에 시인은 만여 명 쯤 되는데, 부단히 노력하면서 새로운 정신을 깨어나가는 시인은 백 명 정도에 불과하다고 단호하게 말하였다. 언어를 비비고 정신을 주입하는 시인은 드물다고 하였다. 인문학 코드의 실종이라고 하였다. 등단을 꿈꾸면서 이름을 그 어느 말석에 올리고, 즐기는 시를 창작해 보겠다는 소위 “아줌마부대들”을 경계하였다. 슈거코팅 시, 대중문화코팅 시, 언어가 공허한 시, 알맹이가 없는 시, 창작정신이 없는 시를 경계하였다. 참담한 시대여서, 어제의 진리가 오늘은 거짓이 되는 시대여서 체계적으로 공부하라고 거듭 아이들에게 권하였다.   최근에 발표한 “달궁아리랑”에 대하여 잠깐 이야기하였다. 시인이 늘 시대를 짊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깨끗한 시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문학 공부를 하고 치열한 시를 써야 한다 그렇게 말했다.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을 사살하고 나서 하동 송림 모래밭에서 그를 추모하는 조포 세 발을 쐈다고 하는 토벌대장 차일혁의 사연에 눈이 갔다. 좌우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민중적 유대감에 대하여 부려놓은 것을 내가 읽고 있는 동안, 그는 그의 절창 를 이야기 하고 있었다. 부뚜막에 앉아서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둔 그 사연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음성 어디가 떨리는 것을 들었다. 그에게 남동생이 아주 짧게 스쳐갔으리라. 비가(悲歌)를 말하면서 김광균과 정지용과 박목월과 신라의 고승 월명사를 또 이야기하였다.    그는 다비식 광경을 노래한 시 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인간의 죽음은 옷을 바꿔 입는 것이다, 인간은 꽃이거나 소리이거나 빛으로거나 그렇게 다시 태어난다고 말하였다. 그의 시 을 아이들에게 낭송해 주었다. 김소월의 시처럼 맹아리 없는 시로서 이 시대를 돌파할 수 없다고 하면서 함민복의 시 을 구술하여 아이들에게 받아 적게 하였다. 지난한 세월을 출근하는 얼굴과 상상력의 작동에 대하여 설파하였다. 이승만 정권 때 전라도 지역의 사찰을 불태우라고 하였을 때, 어느 장교가 화엄사 대웅전의 문짝 하나를 떼어 내어서 태우고는 완전 소각을 보고하였다가 나중에 처형당하였다는 이야기를 여담으로 하였다.     강연이 끝나고 나는 인사나 하고 갈까 하여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유월 첫 장마 비가 굵게 내리고 있었다. 시인이 나와서 담뱃불을 붙이며 나를 보길래 인사를 하고 악수를 하였다. 말을 조금 이었다. 아이들이 몇몇 와서 질문을 하고 웃고 돌아가고서, 시인에 대한 예의일 것 같아서 시집 에 사인을 하나 받았다. 그러면서 다시 담배를 무시길래 물었다. 사모님은 좀 어떠하십니까, 늘 그러지 뭐, 늘 그려. 비가 많은데 어찌 가시겠습니까, 차는 가져왔습니까. 고속버스로 왔지, 택시 하나 잡아서 동대구 가서 가면 되지 뭐. 그러는 동안에 다음 소설 특강한다는 작가가 왔다 갔다 하고 분주하였다. 멀리에서 온 시인을 챙기는 사람이 없었다. 비가 오는데 제가 차로 동대구까지 모셔드리겠습니다, 그러고 바깥의 운동장에 두었던 내 차를 몰고 왔다. 시인은 여전히 혼자서 다시 담배를 물고 비를 피해서 서 있었다.    빗방울이 더 세게 차를 때렸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는데, 문태준은 아직 전통 서정 시인이라고 하였고, 만일 시를 쓰려거든 오래 남을 시를 쓰라고 나에게 말하였다. 시가 고단한 때라고 하였다. 아이들이 던진 질문 몇 개를 대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광주행 고속버스의 출발 시간까지 다 기다리지 못하고 자판기 커피 한잔을 나누고는 돌아왔다. 빗속에 시인을 남겨 두고 돌아왔다. 그가 한국의 현대시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으나 오늘은 저 비를 맞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아이들도, 특강을 들은 어른들도 그를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시인은 순천에서 서너 시간을 달려와서 100여 분 강의를 하고 다시 광주로 서너 시간을 달려 갈 모양이다. 지천명(知天命)을 바라보는 송수권 시인의 뒷모습이 고단하게 느껴졌다. 목우(木偶)의 무표정과 어수룩함이 그에게 있었다.   그의 절창 , ,  이다.   *  *  *   산문(山門)에 기대어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날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옴을   여승(女僧)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 종일 방 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女僧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과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 집 처마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발치로 바리때를 든 女僧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 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小僧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 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로 되돌아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 뒤로 나는 여승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女僧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事物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며 詩를 쓴다.   인연(因緣)   내 사랑하던 쫑이 죽었다 어초장 언덕바지 감나무 밑에 묻어주었다   이듬해 봄 감나무 밑에 잎새들 푸르러 컹컹 짖었다. =================================================================     이 낭송을 백혈병으로 의식을 잃고 투병중이신 송수권 교수의 부인께 바칩니다. 저는 송시인님을 잘 모릅니다.얼마전 어느사이트에 올려진 소식을 통해 이렇게 가슴아픈 사연이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족한 낭송을 하면서 눈물이 앞을 가려 작품에 많은 누를 끼쳤지만 더이상 어찌할수 없어 이대로 올립니다. 부디 이 사연을 통해 같은 피를 가진분이 계시다면 한분이라도 가슴이 동요되어 부인께 조금이라도 생명을 보태드렸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시를 쓰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마음만큼 누군가의 생명또한 진실로 사랑하겠기에........ ***아래 송시인님의 길지만 가슴아픈 사연을 그대로 올립니다. 시간이 되시더라도 꼭 읽어 보시고 퍼가셔서 널리 알려주시면 더더욱 고맙겠습니다.*** 연엽(蓮葉)에게 시-송수권 /낭송-전향미 그녀의 피 순결하던 열 몇 살 때 있었다 한 이불 속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때 있었다 연(蓮) 잎새 같은 발바닥에 간지럼 먹이며 철없이 놀던 때 있었다 그녀 발바닥을 핥고 싶어 먼저 간지럼 먹이면 간지럼 타는 나무처럼 깔깔거려 끝내 발바닥은 핥지 못하고 간지럼만 타던 때 있었다. 이제 그 짓도 그만두자하여 그만두고 나이 쉰 셋정정한 자작나무, 백혈병을 몸을 부리고 여의도 성모병원 1205호실 1번 침대에 누워 그녀는 깊이 잠들었다 혈소판이 깨지고 면역체계가 무너져 몇 개월 째 마스크를 쓴 채, 남의 피로 연명하며 살아간다 나는 어느 날 밤 그녀의 발이 침상 밖으로 흘러나온 것을 보았다 그때처럼 놀라 간지럼을 먹였던 것인데 발바닥은 움쩍도 않는다. 발아 발아 까치마늘 같던 발아! 蓮잎새 맑은 이슬에 씻긴 발아 지금은 진흙밭 삭은 잎새 다 된 발아! 말굽쇠 같은 발, 무쇠솥 같은 발아 잠든 네 발바닥을 핥으며 이 밤은 캄캄한 뻘밭을 내가 헤매며 운다. 그 蓮잎새 속에서 숨은 민달팽이처럼 너의 피를 먹고 자란 詩人, 더는 늙어서 피 한 방울 줄 수도 없는 빈 껍데기 언어로 부질없는 詩를 쓰는 구나 오, 하느님 이 덧없는 말의 교예 짐승의 피!거두어 가소서. "다시 시를 쓰면 손가락을 자르겠다" 송수권 시 '山門에 기대어'를 통해 먼저 죽은 동생에 대한 애절한 사랑을 표현했던 송수권 시인(64·순천대 교수)이 이번에는 백혈병으로 투병중인 아내 김연엽(53·金蓮葉)씨에게 바치는 한 편의 詩로 읽는 이의 눈시울을 붉게 하고 있다 송 시인은 아내의 이름을 딴 시 ‘연엽(蓮葉)에게’에서 ‘…그 蓮잎새 속에서 숨은 민달팽이처럼/ 너의 피를 먹고 자란 詩人, 더는 늙어서/ 피 한 방울 줄 수도 없는 빈 껍데기 언어로/ 부질없는 詩를 쓰는 구나…’라며 절규했다. 그는 최근 서울지방경찰청 홈페이지에 자신의 아내에게 피를 나눠준 서울 동대문·종암·성북경찰서의경 18명에 대한 감사의 글을 올리면서 덧붙여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사랑을 노래한 시를 공개했다. 시인의 아내는 지난 5월 백혈병에 교통사고로 인한 과다 출혈로 서울 소재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이 때 의경들이 피를 나눠줘 목숨을 구했다. 시인은 “아내는 어려운 시절 30리 길을 걸어서 수박을 이고 날라 나를 시인으로 만들더니 28년간 보험회사를 다니며 나를 또 다시 교수로 만들었다”면서 “전문학교(서라벌 예술대학 문창과)를 나와 학위조차 없는 내가 순전히 아내의 노력만으로 시를 써서 국립대학교 교수가 된 1호 시인이 됐다”고 밝혔다. 시인은 그러나 “만약 아내가 죽는다면 다시는 시를 쓰지 않을 것”이라면서 “그때도 다시 시를 쓴다면 도끼로 나의 손가락을 찍어버리겠다”고 아내의 병상에서 절필을 선언했다. 이에 대해 그는 “시란 피 한 방울 보다 값 없음을 알았다”면서 “그 의경들이 달려와서 주고 간 피가 언어로 하는 말장난(詩)보다 진실이며, 그 진실은 언어 이상이라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시인은 2억5000여만원에 달하는 수술비가 부담스러워 골수이식을 거부하는 아내에게 “당신이 숨을 거두면 시를 쓰지 않겠다”며 간절하게 설득한 끝에 다음달 김씨의 남동생 인태(47)씨의 골수를 이식 받기로 했다. 아내 김씨는 그동안 "2년 후면 당신도 정년퇴직인데, 당신 거지 되는 꼴을 어떻게 봐요. 그게 1억이 넘는다는데…"라며 극구 이식을 거부해 온것으로 알려졌다. 1940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송 시인은 75년 을 통해 등단, ‘산문에 기대어’ ‘꿈꾸는 섬’ 등 다수의 시집을 발표했고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아내에 바치는 시와 편지 서울지방경찰청장님께 올리는 글 안녕하십니까? 저는 국립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봉직하고 있는 송수권 시인(교수)입니다. 저의 아내는 몇 개 월째 백혈병으로 입원하여 AB형 피를 수혈하며 살고 있습니다. 동대문 경찰서 방범 순찰대 (의경) 중대장님께 감사합니다. 종암경찰서 중대장님 감사합니다.성북경찰서 중대장님 감사합니다. 저의 아내는 몇 개월 째 서울대병원을 거쳐 지금은 여의도 성모병원 1205호실 1번 침대에 누워 있습니다. 백혈병으로 AB형 피를 받아먹으며 지금껏 연명하고 있습니다. AB형 피를 수혈해주신 동대문 경찰서 손승홍, 임춘추, 양상렬, 최원석, 김은광, 권경민 의경님께 백골난망, 이렇게 엎드려 큰절 올립니다. 종암경찰서 김민수, 문종민 이강산, 최의규, 김희동, 전인성 의경님들께 큰절 올립니다. 성북 경찰서 의경 선현철, 김준석, 김두영, 최진영, 이진욱, 양승욱 의경님께도 삼가 큰절 올립니다. 지난 추석연휴절엔 저의 아내는 AB형 혈소판의 피를 수혈하지 못해 내출혈로 온몸에 피멍울 반점으로 얼룩져 누워 있었습니다. 저도 아내도 주기도문을 외우며 위기를 넘겼습니다. 저의 아내 이름은 김연엽(金蓮葉)-어여쁜 연잎새 같은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침상의 시트 밖으로 흘러나온 아내의 맨발바닥을 빨며 다음과 같은 통곡을 했습니다. (내용낭송시와 같음 삭제) 저의 아내 연잎새 같은 이 여자는, 똥장군을 져서 저를 시인 만들고 교수를 만들어낸 여인입니다.수박구덩이에 똥장군을 지고 날라서 저는 수박밭을 지키고 아내는 여름 해수욕장이 있는 30리 길을 걸어서 그 수박을 이고 날라 그 수박 팔아 시인을 만들었습니다. 그런가 했더니 보험회사 28년을 빌붙어 하늘에 별 따기 보다 어렵다는 교수까지 만들어 냈습니다.박사학위는커녕 석사학위도 없이 전문학교 (서라벌 예술대학 문창과)만 나온 저를 오로지 詩만쓰게 하여 교수 만들고 자기는 쓰러졌습니다. 첫 월급을 받아놓고 라고 울었습니다. 특별전형을 거쳐 발령통지서를 받고 라고 감격해 하더니,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자기는 이렇게 할 일 다 했다는 듯이 쓰러졌습니다. 친구나 친척들에게서 '골수 이식'을 받아야 한다고 말해도 라고 생떼를 씁니다. 지난 주 금요일이었습니다. 병간호를 하고 있는 시집간 딸 은경이의 친구가 2003년 9월 고등학교1학년 학력평가 문제지 (수능 대비 전국 모의고사)를 들고 왔습니다. 언어영역 문제지에는 저의 詩《山門에 기대어》가 출제되어 있었습니다. 은경이의 친구가 자랑처럼 말하자 아내는라고 설명해 주고는 눈물을 보였습니다. 라고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것을 자기의 공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가 큰 것이라고 모든 공을 주님께로 돌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몹쓸 '짐승의 피'를 타고난 저는 저의 아내가 어떻게 살아온 것인지를 너무나 잘 압니다. 청장님께 말씀드리지만 저의 아내가 죽으면 저는 다시는 시를 쓰지 않겠습니다. 시란 피 한방울보다 값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AB형! 그 의경들이 달려와서 주고 간 피!그것이 언어로 하는 말장난보다 '진실'이라는 것- 그 진실이란 언어 이상이라는 것을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강의가 끝나고 내일 다시 서울로 올라가기 전에 저의 집필실 마당; 감나무에 올라가 가을볕에 물든 단감을 따고 있습니다. 햇과일이 나오면 그렇게도 아내가 좋아했던 단감입니다. 아내와 함께 다음에 집을 한 채 사면 감나무부터 심자했는데, 이렇게 비록 남의 집 감나무이긴 하지만 감이 익었기 때문입니다. 이 단감처럼 붉은 피가 아내의 혈소판에서 생성되어 AB형 피를 앞으로는 빌어먹지 말았으면 싶습니다. 골수이식까지는 아직도 피가 필요한데 하느님도 정말 무심하십니다. 이 짐승스러운 시인의 피를 저당잡고 죽게 할 일이지, 왜 하필 아내입니까? 저에겐 죄가 많지만 순결한 아내의 피가 왜 필요하답니까? 저를 살려두고 만일에 아내가 죽는다면 저는 다시는 부질없는 詩를 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때도 시를 쓴다면 저는 도끼로 저의 손가락을 찍어버리겠다고 아내의 병상 밑에서 이를 악뭅니다. 청장님, 귀 산하의 동대문 경찰서장님, 종암 경찰서장님, 성북 경찰서장님 그리고 소속 중대장님, AB형 피를 주신 18명의 의경님께 진심으로 은혜의 감사를 드리면서 이 글을 올립니다.내내 평안과 함께 건투를 빕니다. 2003년 10월 2일 국립순천대학교 교수 송수권 올림           고흥군   수신자: 고흥군 도양읍 도덕면 오마신흥길 49-1 고흥문학회 김백경 귀하   제목: 송수권 시문학상 제정 및 시행 반대 성명서 의견 회신   고흥문학 회원님들의 고흥 군정에 대한 관심과 사랑에 감사드리며 귀단체 (고흥문학회)에서 지난 2015년 7월30일 고흥군에 접수한 송수권 문학상 제정 및 시행 반대 성명서에 대한 의견을 붙임과 같이 회신합니다.   붙임 성명서 회신 결과 1부 끝.         고흥군수 (직인) 생략               고흥문학회 송수권 시문학상 제정 및 시행 반대 성명서 회신   1, 접수   접수일: 2015.7.30(목) 민원단체: 고흥문학회 내용   ① 송수권문학상은 제정 시행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 생존한 작가의 대한 문학상 사례는 없다   ② 만약, 중단할 수 없다면 문학상 명칭을 다른 이름으로 변경 시행해야 한다.   ③ 송수권 시인과 고흥문화원은 고흥 군민, 문인, 향우, 전국 문학인들에게 입장표명       2, 회신 내용   민원①: 송수권 문학상 제정 시행을 즉작 중단해야 한다. 생존한 작가의 이름을 딴 문학상을 제정한 사례는 없다.   회신,   송수권 시인은 4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전통주의적 서정시 창작에 골몰하며 가장 향토적이고 한국적인 시인으로 정지용,서정주,김영랑, 김소월 등 전통서정시의 맥을 이어온 한국 최고의 서정시인임.   수록: 목포대 김선태 교수 (열린 시책 2015), 문학평론가 고형진 교수 (주원 문학광장 2013), 문학평론가 장석주 시인 (월간조선 2007)   이의 우리 군에서는 한국 최고 서정시인이며 남도 대표 서정시인인 우리 군 출신 송수권 시인의 문학 정신과 성과 업적을 기리고 예향 고흥을 널리 알리고자 고흥군 송수권 시문학상을 제정 시행하게 되었음.   한편 다양한 문학 자원을 발굴하기 위하여 다른 자치단체에서도 학술포럼. 인물 재조명, 사업의 일환으로 생존한 문인의 문학세계와 정신을 함께 공유하며 고흥의 위상과 문학적 품격을 대내외에 알릴 수 있는 계기로 삼고자 본 문학상을 추진하게 되었음.   생존한 작가의 문학상 제정 사례는 김승옥문학상, 김우종문학상, 이외수문학상등이 있음.   민원②: 만약, 중단 할 수 없다면, 문학상 명칭을 다른 이름으로 변경 시행 해야 한다. 이수신 문학상, 목일신 문학상, 한하운 문학상 등   회신   송수권 시문학상은 이미 군의회에서 의결 조례로 제정되어 운영하고 있음.   현재 동 조례에 따라서 구성된 운영위원회에 의거 작품공모 중에 있으며 작품 접수는 9월1일~9월30일까지로 10월 중 작품 심사를 거쳐 11월 문학상 시상과 함께 시낭송 대회를 개최할 예정으로 있음.   운영위원회의 구성: 7명 (광주, 전남 국문과 문예창작) 교수, 군의회 의원, 지역문인 단체, 공무원)   따라서 현재 작품 응모자들의 관심과 문의가 쇄도하고 있는 가운데 문학상 명칭을 변경할 경우 문학상 신뢰를 훼손우려가 있어 명칭 변경은 어려운 상황임.   민원③: 송수권 시인과 고흥문화원은 고흥군민과 향우, 문인들과 전국문학인들에게 입장 표명을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한다.   회신   우리 군에서는 한국 최고 서정시인이며 남도 대표 서정시인인 우리 군 출신 송수권 시인의 문학 정신을 함께 공유하고 송수권 시문학상이 순수문학 신인 작가 등 훌륭한 문학인을 배출하는 등용문으로 자리 매김되기를 기대함.   참고로 고흥문화원은 본문학상과는 관련이 없음.       ☞                                                  연재를 시작하면서   송수권宋秀權 시인의 호는 평전平田이며, 1940년 전남 고흥에서 출생했다. 고흥중학교와 순천사범학교와 서라벌예술대학을 졸업했으며, 1975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했다(수상작 「山門에 기대어」 등). 시집으로는 제1시집 『산문에 기대어』(문학사상사), 제2시집 『꿈꾸는 섬』(문학과지성사), 제3시집 『아도』(창작과비평사), 제12시집 장편서사시집 『달궁아리랑』(종려나무, 2010), 제13시집 『남도의 밤식탁』(작가, 2012), 제14시집 『빨치산』(고요아침, 2012), 제15시집 『퉁』(서정시학, 2013), 제16시집  『사구시의 노래』(고요아침, 2013) 제17시집 허공에 거적을 펴다(지혜, 2014) 등이 있고, 시선집으로는 『시골길 또는 술통』(종려나무, 2007)과, 그밖에 50여 권의 저서를 출간한 바가 있다.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영랑시문학상, 김달진문학상을 수상했고, 한민족문화예술대상, 만해님시인상(2011), 김삿갓문학상(2012), 구상문학상(2013) 등을 수상했다. 전 순천대학교 교수이며, 현재 한국풍류문화연구소장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송수권은 1975년 우리 시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데뷔작의 하나로 꼽히는 시 「산문에 기대어」가 『문학사상』에 당선되면서 등단한 이래 지금까지 거의 40년에 육박하는 기간 동안 조금도 쉼 없는 시적 열정을 드러내며 우리 서정시의 진경을 펼쳐 보인 시인이다. 그가 시를 써나간 기간 동안 우리 사회는 유례없는 산업화를 겪어 왔고, 우리 시단 역시 그에 대응하는 현실주의 시와 여러 실험 시들을 쏟아냈지만, 송수권 시인은 예부터 우리 선조들이 부리던 손때 묻은 전통시의 연장을 들고 우직하게 전통시의 우물을 파고들어가 마침내 가장 깊고 맑은 전통 서정시의 물을 길어 올렸다. 그의 시는 좁게는 소월, 영랑, 백석, 미당으로 이어지는 전통 서정시의 미학과 형식을 잇고 있지만, 넓게는 정지용과 이용악 시의 언어와 심상까지 품고 있어 우리 전통시의 그릇을 크게 확장해 놓은 시인으로 평가된다. 시인은 40년에 가까운 오랫동안 여러 시세계를 탐색해 나갔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시종일관 놓지 않고 응시했던 하나의 시선은 우리 겨레의 심성이다. 그의 시는 남도의 미학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그는 이 지역에 머물지 않고 우리 강산의 이곳저곳을 샅샅이 유람하면서 우리 겨레의 마음속에 보편적으로 심어져 있는 진정한 정신세계를 통찰해 내었다. 한과 이별의 미학에 머물렀던 우리 전통시의 미학을 넘어 그것을 묵묵히 껴안으며 형성된 넉넉한 품새의 넓은 도량과 형언할 수 없이 깊은 아름다움을 절절한 언어로 그려내어 우리 겨레의 진정한 혼을 일깨운 것은 송수권 시인이 얻은 득의의 시적 성취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는 또한 우리 토착어의 보고를 이루고 있다. 사전에서 잠자고 있는 아름다운 우리말들, 또 지역에서만 맴돌고 있는 정감 넘치고 감칠맛 나는 우리말들이 그의 시 안에서 더욱 빛나는 언어로 거듭나고 있다. ― 고형진, 고려대학교 교수·문학평론가   송수권 시인은 그동안 서정성과 현실성을 고루 갖춘 작품을 창작해온 남도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서정성에 치우치는 시는 대책 없는 순정이 되기 쉽고, 현실성에 치우친 시는 메마른 이념에 불과할 터, 송수권 시인은 둘 사이의 적절한 조화를 통해 서정적 현실, 혹은 현실적 서정의 시학을 구축해왔다. 달궁 아리랑도 그러한 조화의 시학이 도달한 큰 봉우리이다. 이 대작의 연재를 시작하면서 송수권 시인이 사석에서 했던 말씀이 떠오른다. “깜냥엔 한국문학 통일시대를 내다보면서 지리산 서사를 써 보았다네. 태백산맥도 비껴간 지리산을 정면으로 도전해 본 것이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이 작품과 관련된 대가급 시인의 건강한 문학관과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다. 하여 달궁 아리랑은 한국시가 잃어버렸던 가열찬 역사성, 혹은 오롯한 문학성의 귀환을 의미한다. ― 이형권, 충남대학교 교수·문학평론가   제주 4·3 사건이란 무엇인가? 제주 4·3 사건이란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사건을 말한다.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을 하고 미군정 시대에 재등장한 친일세력들이 그들만의 남한 단독정부를 세우고자 했을 때, 남조선노동당은 그것을 격렬하게 반대를 했던 것이다. 친미, 또는 친일 잔존세력들과 공산주의자들의 그 격렬했던 사상과 이념 투쟁 사이에서, 그 어느 노선도 아니며, 아무것도 모르는 제주도민 3만여 명이 무자비하게 대량학살되었던 것이다. 송수권 시인의 『흑룡만리黑龍萬里』는 달궁 아리랑과 빨치산에 이은 세 번째 장편 대서사시집이며, 일제식민시대를 거쳐서, 남북분단과 좌우 이념투쟁에 희생된 제주도민의 넋을 위로하는 진혼가라고 할 수가 있다. 하루바삐 우리 한국인들의 역사적 상처와 그 아픔을 치유하고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노老 시인의 정신이 『흑룡만리黑龍萬里』라는 기념비적인 대서사시로 나타난 것이다. 영국의 셰익스피어, 독일의 괴테, 이탈리아의 단테가 있듯이, 우리 한국문학사도 이제는 송수권 시인이라는 대서사시인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송수권 시인의 『흑룡만리黑龍萬里』를 연재하게 된 것을 우리 애지 편집위원들은 대단히 영광스럽고 기쁘게 생각한다.  (애지 편집위원 반경환, 이형권, 황정산, 이승희, 안서현 일동)       시인의 말     기록이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되고 햇빛에 바래어 지면 역사가 된다고 한다. 한반도의 남국에서 유일하게 창조된 한라 여신들이 빚어낸 신화의 땅에서 벌어진 4·3은 우리에게 무엇을 묻고 있는가. 제주에 와서 신화와 역사가 혼돈되어 현실의 캄캄한 동굴 속에서 분리되고 깨어나는 것을 보면 나는 두려워진다.   2014년 6월 6일 화북 포구에서  송 수권     서시   바람타는 섬   산 살림 갯 살림 먹을 것은 늘지 않고 오백 명이나 되는 아들딸은 배고파 징징거렸다 옷은 헤지고 다래 넝쿨로 엮은 정당빌립 쓰고 말테우리로 산밭 고갯길 그 삼대 숲에 말 울음소리 들릴 때  하루 해 저물고 설문대 어멍은 한 발은 관탈섬에 걸고 한 발은 범섬에 고근산을 깔자리로 걸고 주저 않아 먹감물빛 오늘도 빨래를 하고 갈옷을 깁는다 아우야 너는 이 설움 아느냐 우리가 누구의 아들이고 딸이라는 것을 그러니 외지에서 공부를 하고 온 네 형도 믿을 건 못 된단다   우리들 어멍이 빨랫돌을 두드리는 동안 바람 부는 날 저 영실에 올라보아라 그 아이들 헐벗고 서서 밥 달라 칭얼거리는  울음소리 네 귀가 있다면 듣고  두 눈이 있다면 똑똑히 보아라 이 아이들 몸에  어떤 잡신이 묻어오고 이 아이들 몸에 어떤 문신이 새겨지는가를   백록담에 흰 사슴이 뛰어놀고 노루목에서 암노루 수노루 캥캥거릴 때 올레길 담 구멍으로 제주 바다는 한밤 내 소리쳐 울었다 소리쳐 울지 않는 날은 바람 불지 않는 날 바람 불지 않으면 영등 할미도 딸을 앞세우고 온다. 바람 불면 며눌아기 앞세우고 사나운 물길 거슬러 온다. 그래서 사시장철 바다는 설레었고 사람들은 그  바람 속에서 아기 구덕을 메고 몽생이 떼 몰며 흙을 다졌다   흙속에 씨감자를 넣고 설문대 어멍 잠시 허리 펴고 숨 고를 때 그 숨비 소리 오름 오름을 새어 나와 저 바다의 물 이랑에도 숨이 차서 그 소리 가득했다   오늘도 마파람이 우리들의 지붕을 더 튼튼히 얽는다. 하루의  휴식까지도 노동에 바치며 파도가 부풀며 높아진 때도 젖 빨리는 아이들은 구덕 안에서 자기 몫의 햇빛을 깔고 누워 빨리빨리 잠이 든다. 바다 밑 용문잠 같은 전복을 더 많이 따라고 지금 죽어가는 노인들도 더 빨리 죽는다. 아우야 너는 이 뜻 알겠느냐   네 자랐던 산남山南땅 토산 마을 4·3 사건 때는 어린이와 여자들만의 마을로 국민반 반장도 우리는 그 윗마을에서 돌하르방 하나를 꾸어 왔더란다. 아우야 오늘도 마약 같은 안개가 다시 부풀고 흐린 바다는 수평선을 놓아주지 않는구나 아우야 너는 이 뜻 알겠느냐   저 유도화와 마주수馬珠樹 떼의 여름을 지나 이제 또 겨울이 오면 우리들의 무서운 잠과 하루를 최저로 살아 쌓아온 목숨들 그중의 몇 낱은 저 관목지대에까지 나가 묘지를 깔고 누워 잠들리라 결코 묘지 안에서조차 잠들 수 없는 눈썹 썩으세요 빨리 썩으세요 어머니 그 뻣세디 뻣센 말끝으로 갈옷에 뚝뚝 지는 핏물자국 아우야 너는 이 뜻 알겠느냐   아우야 오랜 슬픔으로 짝짝거리며 오는 저 뭍의 껌 씹는 계집애들 앞에서 만 원짜리 관광으로 우리는 쉽게 길들여지는 조랑말이 아니란다. 그 보다는 우리들의 들먹숨 저 노란 유채꽃밭들의 대군단大軍團이 막을 내리고 어느 날 수평선은 느닷없이 메밀밭 고랑을 달려나와 우리를 놀라게 했을 때 마라도 끝 이어도를 넘어가던 네 삼촌 뱃머리를 찾는 일이란다 사시장철 소금밭이 쓰러져서 우는 갈매기 그 갈매기를  따라가는 일이란다   아우야 사랑하는 아우야 그 어느 곳에도 길은 바다로 이어지고 우리는  바다 쪽에 귀를 묻는 일이란다. 죽을 때도 만조 때 바다에서 구덕을 메고 오는 어머니가 당도하기 전에 빨리빨리 죽어가는 일이란다 비탈길에 말똥이 피듯이 다공질多孔質의 돌담에 빗물이 빨리빨리 날아가 버리듯이   그 구멍 속에서 바람과 함께 솟아난 삼을나와 거센 파도를 헤쳐 온 벽랑국의  세 처녀와 짝을 이루는 한 피붙이로 해안 곳곳 마을 올레 길을 만들고 이모가 되고 고모가 되고 누이와 함께 모커리에 살며 빙떡에 혼을 말아 천왕 닭이 울고 지왕 닭이 운 이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단다. 아우야 사랑하는 나의 아우야 너는 이 뜻 알겠느냐   네 형이 버리고 떠난 산남 땅 토산* 마을 빈집 정낭엔  아직도 세 개의 걸대가 걸려 있구나     * 토산리(마을) : 4·3 당시 18~40살 청장년들이 한꺼번에 희생되어 ‘무남촌’으로 불리는 마을이다. 1948년 12월 18-19일 이틀 동안 군인들에 의해 표선 백사장으로 끌려가 학살된 토산리 주민은 125명(남자 101명, 여자 24명)에 이른다.      흑룡만리黑龍萬里*   우리항공에서 전세 낸 헬리콥터는 5천5백리 흑룡만리 한라산 중산간 마을들의 밭 다믈을 따라 돌고 있다 K 화백의 말에 따르면 불타버린 마을들의 돌담이 보이고 밭담을 두른 초원 지대의 조랑말 떼도 한가롭다   무장대를 따라 죽창을 들고 번을 선 새시방*도 산으로 주먹밥을 날랐던 가시어멍*도 지금은 모두 저 밭 다믈 안에 돌아와 한 가족으로 누웠다 더러는 살아남은 늙은 아낙들 그 돌담 안에서 가을 씨앗을 들이는지 수눌음*이 한창이다   추석 무렵의 소분*이 잘 된 어느 날 나도 머리 깎고 돌아와 저 무덤들 사이 一家를 이루고 싶다   헬리콥터는 산간 마을들을 돌아 해안으로 내려간다 공장 굴뚝 대신 해안 마을 부두 곳곳에 서 있는 붉은 등대들이 가을 바람에 깃발처럼 펄럭인다 멀리 우도와 가파도가 물파랑 속에 뒤집혔다 일어선다   천제연 폭포와 정방폭포를 보는 것이 탐라 천 년 제주의 속살을 보는 듯하고 구럼비 마을 불도저의 흙먼지가 들썩이는 풍경이 지나 온 길 어느 밭담 안에서 본 납골당 무덤을 짓는 모습 같아 나는 잠시 외면한다    흑룡만리 바람타는 섬 물나라의 가을이 깊어 간다     * 흑룡만리黑龍萬里 : 고 김영돈 교수는 중국의 만리장성을 황룡만리장성, 제주의 중산간, 상잣, 중잣, 하잣, 밭담과 골목골목 돌담들의 5천5백리를 환해장성環海長成 흑룡만리黑龍萬里로 표현했다(잣:성城, 돌담). * 새시방 : 새 서방. * 가시어멍 : 장모. * 수눌음 : 품앗이(두레, 수놀음이라고도 한다). * 소분 : 벌초.     수눌음*   잠녀들이 바닷속으로 들어간 까닭은 설문대가 바닷속에서 솟았듯이 수직의 깊이로만 그들은 바닥을 긁는다 한라산이 그녀의 치마 속에서 솟았고 4백여 오름오름이 그 헤진 치마폭 구멍 속에서 쏟아져 쌓인 흙이었듯이 수직으로만 오름을 오르고 수직으로만 한라산을 오른다 용천수가 땅 속에서 솟아나듯이 제주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모두 삶의 길이 그 바닥을 처음부터 보고 있었던 것이다   걸대를 정낭에 걸어 안을 비워 놓고 애기 구덕 하나는 밭가에 부려 놓고 허리에 멱서리를 차고서 바닥을 긁어 씨감자를 묻듯이 외롭고 높고 쓸쓸한 섬을 바다가 늘 수평선으로 빨랫줄을 치듯이 안보다는 밖을 더 튼튼히 얽어 올레길을 만들고 돌담을 쌓는다 유채꽃이 아름다운 빌레밭  오늘은 저녁 노을의 양파밭을 깔고 앉은 그 밭담 안의 수놀음 풍경이 물까마귀들 같이 정겹다   * 수눌음 : 품앗이(두레), 수놀음.     정낭 ― 닫힘과 열림       헌저* 옵서.         여피* 갔수다.           늴* 다시 오라봅서.               * 헌저 : 어서. * 여피 : 이웃. * 늴 : 내일.     김굴산金窟山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다랑쉬 다랑쉬에 달이 오르면 물항아리에 달이 잠긴 듯 놋요강을 깔고 앉은 처녀의 궁둥이를 보듯 말랑말랑한 사랑을 나누고 싶은 밤이 있다 그런 시각에만 애월엔 또 애터진 달이 떠오른다   이런 관음증만으로는 시가 되지 못한다   내 친구 김굴산은 그런 밤 다랑쉬 깊은 굴 속에서 태어났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무장대가 무너지던 날 아침 산에서 내려온 가족들이 면 호적계에 들러서 면서기가 어물쩡 지어준 이름이다   1948년 11월에서 이듬해 봄까지 솥덕을 걸어놓고 차조와 메밀 미음도 동나고 할머니는 생미역 한 두름 걷어 오겠다며 해안 마을 4km, 야간 통행 저지선을 넘다가 서북청년단 토벌대들의 총구멍에 숨졌다   그 김굴산이 오늘은 한라병원 영안실에 누워 다랑쉬에 뜬 달을 바라보며 밤 깊어 찾아 오는 문상객들을 배웅하고 있다     성읍 민속촌에서 일박   전깃불이 없으므로 촛불을 켜야 하리   ‘제주바다는 소리쳐 울 때가 아름답다’는 어느 시인의 시집을 펼쳐 읽는다.   밖에서는 봄비가 오는지 바래선이 아름다운 초가지붕 추녀 끝 지신물* 내리는 소리가 천금 같은 밤이다.   읽던 책을 도로 덮고 측간으로 내려가 뒷물하다 본다. 모슬포에서 먹고 온 자리물회 친구네 집 굅시*에서 먹은 홀아방떡 노오란 차조밥 한 그릇 같은 그것을 씨돼지 한 마리가 킁킁 잘도 받아먹는다.   이것을 귀엽다고 해야 하나 안쓰럽다고 해야 하나 한라산 빗질 바비큐 작전에도 댕댕이 넝쿨을 타고 살아 남은 토종 씨도야지 코가 연밤송이처럼 벌쭉인다 꼬리가 고사리 새순처럼 도르르 말린다   비 맞고  슈퍼까지 뛰어가서 바나나 한쿨 사다가 나누어 먹는다.     * 지신물 : 중산간 지방은 물이 귀하므로 처마에서 흐르는 물을 받아 저장해서 쓴다. * 굅시 : 제사.     산 노을   아직도 한라의 눈은 녹을 기척도 없는데 저무는 산간 놀이 떠서 꿈만 같다. 빌레밭 양파 움으로만 모이는 저녁 햇살들 꽈, 다, 꽝 말 끝마다 사투리를 한밭 널어놓고 지심을 매어나가는 돌 할망들 곁에 잠시 가던 길 멈추고 서서 적막한 슬픔에 젖는다.   밭머리에 놓인 두 개의 아기 구덕이 말매미처럼 쌍을 지어 운다. 무슨 구덕 혼사*라도 있었더냐? 할망들 속에서 두 새댁이 엉금엉금 빠져나와 돌담 밑에서 젖을 빨린다.   제주 여성사女姓史는 바로 이것이었구나   봅서 어디 감수광……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단 한마디 싱그러운 양파 밭의 저녁 햇살과 호미 끝에 잘려 나가는 서러운 서러운 풀내음들과 해안 마을들에 벌써 켜지는 저녁 불빛들 나는 갈매기처럼 양 손을 저어 흙 위에서 나는 시늉을 했다.   * 구덕혼사 : 구덕 속에 있는 아이를 두고 양가에서 혼사를 맺음.     바람이 현무암에 새기고 간 말   역사는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기록되는 것이라고 그 기억되는 것이 어물쩡 종이에 물들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되는 것이라고 제주에 와서 4·3은 묻지마라 모두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라고   그것은 침묵의 또 다른 굴레 바람이 현무암에 새기고 간 말 살암시면 살아진다라고 말한다   동족이 동족에게 저지른 만행 3만 명이 사라졌다는 붉은 섬 아홉 명 중 한 명이 수장되었다는 기억 결코 그 기억은 기억만으로 상처가 될 수 없다   제주에 와서 4·3을 묻지마라 4·3은 비밀스러운 암호로 모두가 동굴 속의 통로에만 숨어 있는 마음과 마음 속으로만 건너가는 통로 어둠 속에서만 살아서 빛나는 눈     빙떡   메밀가루 부침에 팥무채 또는 콩나물 소를 박고 둘둘 말아서 만든 떡 개떡도 아니고 참떡도 아닌 올레 담 구멍을 집집마다 타고 도는 빙떡 어쩌다 소고기를 만나면 숭당숭당 썰어 넣어서 칼국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숨겨 놓고 먹는 떡이 아니라 동네방네 입소문을 내고 먹는 잔치떡 곤떡보다는 친근하고 이웃 사돈을 불러서 배 불리 먹는 떡   4·3사건 때는 산으로 간 사람들 동굴 속에 숨어 솥뚜껑 뒤집어 놓고 비사리와 망개나무 연기 나지 않도록 꺾어다 한 국자씩 빙빙 돌려가며 참취, 고사리나물 소를 박아 조금씩 나누어 먹었던 떡   세경할미 자청비가 산중을 떠돌며 서천꽃밭 속에 숨어 입덧하며 먹었던 떡 세경본풀이에 메밀꽃 피면 눈물 나는 빙떡   * 3떡5편 : 3떡은 백사리(백설기), 둥근 흰떡, 빙떡이며, 5편은 참떡, 곤떡, 절편, 새미떡, 인절미를 말한다(명절 때 중류이상의 가정).     불타는 섬   계엄령이 내리고 길은 끊겼다 바닷새들은 줄을 이어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LST 군함 꿈에도 본 적 없는 저 함포 사격의 불빛 더는 탈출할 수 없는 밤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빌레못 동굴 밖에 서서 보는 빗개* 그 눈시울 밑으로 하염없는 별똥별만 쌓인다 고독한 영혼들은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절벽에 조각달이 서서 칼을 가는 밤 동굴 안에서 더는 갈 수 없어 불 피우고 쇠갈고리 몽둥이를 쌓아놓고 마을 사람들과 무장대들이 모여 죽창을 깎는 밤 통곡소리 울음소리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아, 이 두려움과 낯설음 삼다 6백리 8할이 빨갱이다 모두 불사르고 모두 죽이고 모두 굶겨 죽여라! 물 건너 온 저 잡귀신들의 외침 9연대와 11연대가 저지른 3광3진 작전 온 마을들이 불탄다 우리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굴 밖에 나와 울부짖는 물할망들 16년 전 여름 잠녀들 1천 명이 관덕정 총독부 앞에서 시위할 때도 마을은 불타지 않았다 머리에 흰 수건 쓰고 물안경 쓰고 호미와 빗창 궐기할 때도 마을은 불타지 않았다   불탄다 불탄다 불탄다 외양간이 불타고 마방이 불타고 봄에 뿌릴 씨감자 오쟁이까지 불탄다 불탄다   물 건너온 저 잡귀신들을 그냥 어쩐다냐 아가야, 네가 입어야 할 봇뒤창옷*까지 다 불탄다 우리는 어쩐다냐   * 빗개 : 보초. * 봇뒤창옷 : 배냇저고리.     마당개들   제주 바다는 소리쳐 올 때가 아름답다고 한다 그맘때가 오면 폭낭*을 잘 오르는 아이가 있었다 퐁*을 한 주먹씩 따서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곤 했다 어느 날 스리쿼터와 군용트럭이 들이닥쳐 마을 전체가 불쏘시개로 가라앉았다 어디론가 끌려가는 사람들 아이는 뒤곁의 폭낭으로 올라가 이 모습 지켜보았다 십 년 후에야 어른이 되었을 때 마당개*라고 불렀던 서애청단원의 고백에 따라 사람들의 흔적을 찾게 되었다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 모슬포의 공동묘지가 그곳이다 왜놈들 탄약고로 쓰던 콘크리트 땅굴 속에서 고리고리한 자리젓처럼 삭은 육탈된 해골들만 오글오글 쌓여 있었다 우리가 언제 온코시 반코시* 찾고 살았더냐? 그냥 대충 살가운 뼈만 추려서 뗏장을 얹었다 그때 자란 아이는 식개食皆* 들면 곤밥지어 고사리 비빔밥을 만들고 일가친척 생령들을 불러내어 삼십여 개의 숟가락만 놋양푼에 꽂는단다 이집저집 한밤중 소지 다발을 태우는 귀신불이  지금도 이 마을에선 떠돈다고 한다   * 폭낭 : 팽나무(마을공동체의 상징인 나무). * 퐁 : 폭(팽)의 귀여운 말. * 마당개 : 백정이란 뜻, 어른 백정은 ‘마당개’, 자식은 ‘소근개’라고 불렸다. *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 : 여러 조상 아래 한 자손의 땅이란 뜻(공동묘지). * 온코시 반코시 : 벼슬아치(급제)가 있는 집은 곤떡(횐쌀떡)을 빚을 때 조상의 체형體形을 그대로 빚고 없는 집안은 반코시로 빚는다. * 식개食皆 : 제삿날 또는 그 음식. * 4·3 때 해안선이 녹색지도로 이루어진 반면 4km 전방의 중산간 마을은 군사작전 지도에서 붉은색red island으로 표시되어 120여 마을이 불탔다.     죽음의 트라우마   죽음의 트라우마로 우리는 가면을 쓰고 산다 폐쇄적이고 배타적이란 말 수용의 원리가 아니라 배제의 원리 우리는 그렇게 살아 남았다     항몽 삼별초 100여 년 우리는 조랑말 소리에도 기가 죽었다 일제 강점기 해안 곳곳 절벽 파놓은 동굴 속 흙바람 부는 날 모슬포비행장에 나와 보아라 움막같은 저 격납고 허허벌판 그 언저리 감자꽃 피어 눈부시구나   태평양 전쟁 막바지 20만 도민을 끌어내어 병참기지화로 우리는 총알받이 우리 소년병들은 토코타이 신풍돌격대로 오키나와를 점령하고 제주를 상륙하려는 미 함대에 나무 비행기에 프로펠라를 달고 폭탄을 싣고 함상에 내리는 그 육탄전의 음모 그 침략자의 말발굽 아래서도 살아남았다   반탁이 찬탁으로 돌아서고 건준위(건국준비위원회)가 들어서고 우리는 무엇이 무엇인 줄도 모르면서 민보단 활동을 하고 5·10 단선 투쟁을 벌였다 빨갱이가 무엇인 줄도 모르면서 계엄령이 선포되고 소개령이 내려져 마을들은 불타고 우리는 산으로 들어와 살아남았다   500년간 출륙이 금지된 섬 유배지의 섬 우리만의 독특한 말씨로 소통이 막힌다면 바다 건너 침탈해 온 너희들의 죄. 천만 관광 시대에도 우리는 연기 나는 굴뚝 하나 세우지 않았고  외래 자본으로 물들어 잘려나가는 땅 남해안 시대의 J프로젝트에도 우리는 손들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제주 자치도민보다는 독자성이 강한 탐라 시민이라는 말이 우리에게는 훨씬 더 잘 어울린다     심방길   매인 심방*으로 이곳저곳 떠돌다 보면 괴이쩍은 일이 어디 한두가지 아니깝주 1만8천 신의 신궁神宮을 차린 섬 나라에서 몸주*를 한 분씩 찾아 떠돌다가 화북리의 광넙궤팽나무 그늘을 찾아들어깝주 그곳에서 몸주 한 분을 뵈어깝주 꼭 그것같이 털고삐를 두르고 서 있는 모습에 한참을 낄낄거렸구먼요, 수산벌 초등학교 성담 밖 일곱 살바기 인신공양으로 희생된 진안 애기할망당, 열 살 때 업저지*로 버려진 마라도의 할망당도 한 바꾸 뺑 둘러왔는데 하기사 뱀 신앙까지 토속신으로 받들어 있는 판에 아무리 여자들의 천국이라지만 슬쩍 홀아방 하나 끼워 넣은들 그것을 어찌 금도禁度에서 크게 벗어났다고 타박하리요   그날도 윤 노인은 배를 타고 은갈치 낚질을 나갔구먼요 왠일인지 갈치는 올라오지 않고 돌미륵 하나가 낚시바늘을 물고 올라왔구먼요 꼭 머시기가 거시기만 같아 낄낄 슬쩍 바다 밑으로 쳐넣어 버린거야 그런데 두 번째도 올라오는 것이 돌미륵인지라 참 괴변이로고! 자리를 몇 마장쯤 비껴 낚질을 하는데 또 그놈인 거라. 전생에 무슨 인연이 이리도 질긴가 마씀 배의 뒷고물에다 쳐박아 놓고 낚질인데 갈치가 쌍쌍구리로 줄줄 물고 올라와 한 배 가득 실었구먼요, 이놈을 어쩐다 싶어 생각 끝에 마침 부엌 아궁이의 이맛돌* 벗겨진 것이 생각나 집에 돌아와 그놈을 이맛돌로 박고 불을 지폈어요   그날부터였구먼요, 노인이 등창을 되게 앓은 것은,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 육환장으로 방바닥을 찍으며 이놈아, 은혜를 원수로 갚은 놈도 있다더냐, 나는 본시 경상도에서 제주도의 관음사가 좋다하여 나를 따라 구경삼아 관탈도와 소관탈도를 지나오다 풍랑에 휩쓸려 바닷속을 헤메던 터로 너와 각별한 인연을 맺었갑주 노인은 깜짝 놀라 이맛돌을 빼어 유한 락스 세제로 박박 문질러 때깔 좋은 물색으로 여기 좌정하시는 게 좋겠구먼요 하고, 마을 앞 광넙궤팽나무 그늘 밑에 울타리를 치고 금줄을 둘러 당구덕에 제물을 드리고 치성을 드렸더니 둥창이 씻은 듯이 나았겝주   윤 노인은 그날부터 떼돈을 벌어서 먹물든 하우장 각시*로 동지同知 벼슬까지 얻고 죽어서도 미륵 할망과 함께 한 살림을 차렸구먼요, 초이렛날과 여드렛날 어스름 상현달이 뜨면 가는대구덕*을 멘 아낙들이 모여들어 정성껏 제물을 드리고 어이, 윤첨지 영감, 나도 먹물 든 아들 하나 점지하여 주깝, 하멍 어멍 지금도 비손질이 그치지 않는다는군요.     * 매인심방 : 신들의 이야기를 본풀이로 풀어내는 심방. * 몸주 : 신당神堂의 주인. * 업저지 : 아이보개(아이 보는 어린 계집, 담살이). * 이맛돌 : 아궁지의 받침돌. * 하우장 각시 : 글공부하는 선비. * 가는대구덕 : 당구덕. * 지금 화북포구의 해신사海神祠가 그곳이다.     당할미들   무슨 할망당이 지붕도 기둥도 천정도 없이 오글오글 모여 누대를 이렇게 살고 있나 느티나무나 팽나무 고목 둥치에 너슬너슬 붙어 이렇게도 수명이 기나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와흘리 본향당 나뭇가지 하나 건드려서도 안 된다는 이 금기 어떤 할망당은 나무와 바위가 한몸되어 살고 있다 무명실이나 물색 옷감 지전紙錢이 나뭇가지에 붙어 펄럭이며 아스스하다   열 살 난 아이로 바닷가를 떠돌다 죽었다는 마라도 업저지* 애기할망당 일곱 살에 희생물로 바쳐졌다는 수산水山벌 울타리 밖 애기할망당 제주 할망당은 모두가 닭소리 개소리가 들리지 않은 호젓하고 외진 곳을 좋아한다 해안 마을 바닷가나 마을 밖에 산다   앉아 기다리고 서서 기다리고 천년을 기다린다 이렛당 여드렛당 할멍은 한 달에 삼세 번 누워서도 기다린다   * 업저지 : 아이보개(아이 보는 담살이).     도둑맞은 인장   다시 지삿개의 주상절리대에 섰다 바닷물이 나가는 것을 보고 주상절리대가 통째로 드러난 인장印章들을 보고 싶어서였다 바닷물이 나가자 인장통의 인장 하나가 보이지 않는다 설문대 할망 당신의 인장통에 인장 하나가 왜 없어졌어요? 하고 물었다 파도 소리인 듯 바람소리인 듯 계시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렇구나, 어느 간 큰 시러비 아들놈이 도둑질 해다가 구럼비 마을로 가져 갔다는구나!  내 손을 벗어난 인장이니 크게 탓할 건 없지만 때가 좋지 않구나   평화의 섬 자연의 섬 신화를 삼킨 섬 바람타는 섬, 불타는 섬 파도가 와서 다시 인장통을 흔든다     구럼비 마을   한밤중 폭약 심지를 물고 구럼비 낭 절벽들이 소리친다 이지스함 20척 크루즈호 2척이 정박할 수 있는 해군기지를 건설 중이란다 ‘안보 없는 평화는 없다’고 위정자들의 프래카드가 돌먼지 속에서 펄럭거린다   탐라왕국에 가뭄이 들자 하늘 나라 옥황상제님께 올라가 메밀 씨앗을 가지고 온 자청비*도 구럼비 절벽을 타고 왔을 거라는 전설 깊은 강정江汀 마을 강정천 소낭밭 맑은 냇물 가에 앉아 이 마을에서 봇뒤창옷(배냇저고리)을 입고 자랐다는 현 시인과 함께 은어회를 먹은 적이 있었다   4·3때 많은 양민이 학살당하고 불타버린 ‘잃어버린 마을’ 영남리가 이웃에 있고 구럼비 마을은 바야흐로 지금 때늦게 물 속으로 가라앉는 중이었다 구럼비야 보고 싶구나, 정의구현 사제단의 깃발이 큰 길가 어디서나 펄럭거린다   이름도 고약한 ‘썩은 섬’이 있어 피서와 낚시를 즐겼던 곳 엉또폭포가 흘러내리는 해안 절벽 밑에선 벌써부터 기름 띠를 두른 석유 냄새가 진동한다 ‘좋은 시절은 다 갔다’ 한밤중 까마귀쪽나무들이 뿌리째 넘어지면서 울부짖는 소리가 설문대 할망* 신음 소리보다 크다.   * 구럼비 마을 : 구럼비는 까마귀쪽나무 숲을 말하며 강정마을을 그렇게 부른다. * 자청비 : 세경본풀이에 나오는 제주 농경신화의 할머니, 세경 할미라고도 한다. * 설문대 할망 : 제주(탐라)도를 창조한 여신. 한반도에는 강림신화(단군신화)만 있는데 창조신화는 오직 제주도밖에 없다.     신화를 삼킨 섬   천왕 닭이 세 홰를 치고 지왕 닭이 울어 날이 새자 바람 찬 날 어디서 온 것일까 망망대해 한복판에서 거대한 모습으로 설문대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 빛 바다와 어울리는 섬들을 만들기로 작심이라도 한 듯 치마폭에다 가득 흙을 퍼날라다 산을 쌓았다 치마는 낡고 헤어져 여기저기 구멍이 났지만 설문대는 아랑곳 하지 않고 그 구멍들 사이로 흙부스러기가 떨어져 오름오름을 이루어나갔다   흙을 너무 많이 집어 놓았다 싶은 곳은 주먹으로 봉우리를 탁 쳐서 균형을 잡아나갔다 봉우리가 꺾인 곳은 백록담 솥뚜껑 같은 봉우리가 날아가 앉은 곳은 산방산 솔밭 두 개가 떨어져 나앉은 곳은 가파도와 마라도가 되었다 신비로운 기운이 감도는 곳은 영실이었다 영실은 수려하고 아름다워 감탄을 자아냈다 깎아지른 절벽 병풍처럼 둘러싸인 암벽들 사이로 설문대는 아들들을 불러 모아 그날부터 5백 장군들을 놓아 멱여 길렀다 솥덕을 걸고 죽을 쑤었다.   그제서야 한라산을 베개로 허리가 쑤시면 잠자리 펴고 잠이 오지 않으면 저 멀리 관탈섬에 한 발을 걸고 고근산에 앉아 가장 따뜻한 곳 서귀포 바다에서 물장구를 쳤다   그녀는 산으로 바다로 바장이며 박지에 있는 커다란 박을 솥덕 삼아 밥을 짓고 우도와 가파도를 빨랫돌로 성산 일출봉 분화구를 빨래바구니로 등잔바위를 등불 삼아 밤늦도록 새끼들의 헤진 옷을 기웠다 빨래와 바느질 그녀의 손끝 발끝 하나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바람과 돌과 척박한 땅 먹거리가 항상 부족해 봄비가 부슬거리는 날은 한라산에 올라 고사리 한 줄 꺾어 죽을 쑤었고 바닷가 몰을 뜯어다 몸국을 끓여냈다 그녀는 갑자년 갑자월 갑자일 갑자시에 태어나 을축년 을축월 을축일 을축시에  국자로 죽을 푸다가 헛발 딛어 그만 죽솥에 빠져죽고 말았다 막내 아들이 솥바닥에서 죽은 어멍 흰 뼈들의 흔적을 보고 통곡하며 차귀섬까지 달려나가 선바위로 굳어졌다   늦봄이 오면 그때서야 오백 장군 흘린 피눈물은 한라산을 온통 철쭉꽃밭으로 물들여 놓았다 그녀는 왜 오백이나 되는 아들들을 낳아 길러야 했을까 바람 부는 날은 영실봉에  올라 보아라 아직도 좁쌀 죽粥 냄새가 끈하다     탐라 개국을 엿보다   영평 8년* 을축 3월 열사흗날 자시에는 고을나, 축시에는 양을나 인시에는 부을나, 고,량,부 삼성친이 모흥굴(삼성혈)로 솟아나서 도읍한국이외다. ─ 제주 심방굿 사설중에서   활쏜디왓(三射石)에서 활을 쏘아 화살이 가는 방향의 땅을 가늠해 본다 고을나의 땅 일도동, 양을나의 땅 이도동 부을나의 땅 삼도동을 지나  그들이 결혼했다는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 황루알 혼인지婚姻池의 연못을 보았다. ‘흰죽’굴에서 벽랑국의 세 공주를 하나씩 맞이하여 농경생활을 시작하며 살았다 일설에는 벽랑국 세 처녀는 강진군 남쪽 벽랑도(현 소랑도)에서 왔을거라는 주장이 강하다. 옛 탐진耽津은 탐라국의 탐耽과 그 음이 같고 고대 항로로서 물물교환이 가장 왕성했던 곳이다.  벽랑도와 가까운 마량馬良은 말배가 닿았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또한 세 사냥꾼이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은 농경문화가 이식된 것을 뜻한다.   설문대 할망의 창조신화와 세 신인의 개국신화는 신화시대와 역사시대의 분기점이 아닐까 파도에 쏠리고 바람에 날리고 돌로 다져진 한라의 신화는 여신들과 평화로운 탐라인들의 삶속에서 용출된 이야기들,  한반도의 강림 개벽신화는 제주에 와서 분출된 창조신화와 역사로 뒤바뀌는 것을 본다 자청비의 풀어흘린 치맛자락 같은 사라봉의 능선이 또 노을속에 여울지는 것을 본다.  어둠이 와서 별도원을 덮고 내일 아침은 저 성산 일출봉에서  불수레바퀴 같은 해가 바다위로 굴러 오리라.   * 영평 8년 : 영평은 중국 연호로 후한 시대, 서기 58~75년에 해당. 8년은 서기 65년이 된다. 한무제가 처음 사용한 이래 중화민국이 대만으로 쫓겨날 때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꽃놀이 패   줄줄이 유배 길을 나서는 선비들을 꽃놀이 간다고 했다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길을 돌아와서는 꽃놀이 한번 잘했다고 말한다 죽어서 돌아올지도 모르는 그 길을 가면서도 거드름을 피며 위풍당당했다 시쳇말로 화전花煎놀이 속말로 사당패 놀이라고도 했다   조천항 포구에 바닷물이 썰물로 바뀌었다. 배가 들어오지는 못할 것 같다   조선조엔 2백여 유배객들이 드나들던 나들목 연북정戀北亭에 올라 큰절 한번 올리고 운이 좋은 사람은 보수주인保授主人*도 잘 만났다 고. 을. 나의 땅에서 봇뒤창옷*은 입지 않았어도 말뚝을 박고 슬쩍 끼어들어 뻔뻔한 입도조入道祖가 되기도 한다   광해군의 어머니 인목대비 폐위를 반대한 상소를 올렸다가 역적으로 몰린 간옹艮翁 이익李瀷은 헌마공신獻馬功臣 김만일의 딸을 맞아 경주 李씨 국당공파 파조派祖가 되었고 이성계 정권을 거부한 고려 유신 김만희金萬希는 김해 金씨 좌정승공파 입도조가 되기도 했다   추사 김정희는 4만 평의 땅을 가진 강도순姜道淳의 집에 부처했다 딸은 없어도 안거리 밧거리 쇠막 말방앗간까지 딸린 집 제자를 기르고 추사체를 완성하고 세한도를 쳤다 이만큼이면 화북 포구로 들어오든 조천 포구로 들어오든 쓰라린 세월 꽃놀이 패 한번 잘 놀아 볼만하지 않은가   * 보수주인保授主人 : 유배인의 보증인이 되어 관리하며 시식을 제공했던 사람. * 봇뒤창옷 : 배냇저고리 * 화북포구와 조천포구는 제주에 파견된 관리와 유배객들이 드나들던 2대 관문이었다.     사란결寫蘭訣* ― 대정골 추사관에서   비껴 서지 마라 빈 겨울 하늘만 남은 절벽이다 알 오름을 뒤덮는 까마귀 울음만이 남은 절벽이다 이곳에 와서 더 비껴 설 곳은 없다   절벽을 타고 오르는 불꽃 같은 정신을 보고 서 있으면 붓대신 입에 칼을 물고 싶어진다 얼음을 딛고 서서 언 겨울 하늘에다 청죽靑竹을 치는 사내 등뼈 같은 두 그루의 잣나무와 벼락맞아 한 가지가 비틀어진 두 그루의 소나무 앞에서 얼 빠진 사내처럼 나는 주먹을 휘두르고 싶어진다 더는 비껴 서지말자   변명도 하지말라 변명만으로는 시詩가 되지 않는다 하얀 백지에 흐르는 8년 3개월의 위리안치된 시간들 열 개의 벼루 밑구멍이 뚫리며 천 개의 붓이 닳아 이렇게 제주 수선화는 피었구나 이렇게 난초잎은 둥글게 휘어졌구나 이 밤은 선화지에 듣는 검은 먹물만이 진실이다 물러서지 마라   적적성성寂寂惺惺한 밤이다 너에게도 절복切腹의 시대는 오리라  99푼을 완성하고도 1푼이 모자라 폐기처분 하는 날이 곧 오리라 용서하지 말자 더는 갈 곳이 없다 서릿발 치는 겨울 하늘 울타리 밖은 파도 소리만 높다   * 사란결寫蘭訣 : 추사 김정희(金正喜,1788-1856)는 사란결寫蘭訣 즉 난초를 그리는 비결에서 99를 얻고도 1푼이 부족해 버리는 그림이 된다고 말한다. 1푼은 시인의 정신(정체성)을 말한 것인데 이는 죽란도나 묵란도보다 세한도(59세 때 그린 그림, 64세 해배)에서 유감 없이 밖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 적적성성한 기운은 올곧은 선비 정신을 표현한 것이다. 아호를 33개 이상 지었고, 그의 제자(제주) 박계첨이 정리한 완당인보에 의하면 180개의 인장을 사용했다.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 추사체요 세한도였다. 세한도는 고도의 압축과 감정의 억제, 자기 성찰을 추구한 작품이다.       송수권   1940년 전남 고흥 출생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75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산문山門에 기대어』, 『꿈꾸는 섬』, 『수저통에 비치는 저녁 노을』, 『허공에 거적을 펴다』 등 ―‘소월시문학상’,  서라벌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정지용문학상’, ‘구상문학상’ 등 수상. 순천대학교 문예창작과 명예교수.     산문에 기대어 송수권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山茶花)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옴을   송수권 풍장   오늘은 할아버지 고향 가는 날 차마 성한 육신, 백발로는 가지 못하고 혼백으로 바람 타고 가는 날 살아서는 산도 옮길 듯한 한이 삭아서는 한줌의 재 물길 따라 바람 따라 고향 가는 날 바람아 불어다오   추석달이 뜨면 갈거나 임진각 누마루에 올라 함부로 북녘땅 여기저기 손가락을 디미시던 할아버지 어느 날은 채송화며 봉숭아 꽃씨 주머니를 풍선 끝에 매달아 바람도 없는 날 우우우우......우 입으로 불어올리시던 할아버지   조선호텔 로비에선 웬수 같기만 하던 얼굴이 TV화면에 불꽃처럼 스치던 날 예수당이 강냥욱이 지금도 살아 있었수구레 동갑내기라고 좋아서 껄껄 웃으시며 여기 땅문서가 있다고 고의춤 풀어놓고 손바닥을 흔들던 할아버지   임진강 나루목을 건너 저기 저 개성 뒷산을 넘어서 황해도 해주 근처 옹진반도 안악골까지 바람아 불어다오 오늘은 할아버지 물길 따라 바람 따라 고향 가는 날.   연비燃臂                                               송수권     목어가 울 때마다 물고기들의 싱싱한 비늘이 떨어지고 운판이 자지러질 때마다 날짐승들마저 숨죽이며 날았다 어떤 침묵 하나가 이 세상을 여행 와서 더 큰 침묵 하나를 데리고 그림자처럼 지난다 문득 희나리*의 불꽃 더미 속에서 조실祖室 스님의 흰 팔뚝 하나가 불쑥 떠올라왔다 그 흰 팔뚝에서 아롱진 연비** 몇 방울이 생살로 타면서 얼음에 갇힌 꽃잎처럼 나의 감각을 흔들었다   사람이 죽으면 하늘로 가 구름 되고 비가 되어 칠칠한 숲을 기르는 물이 되고 햇빛 되는 걸까 그 후, 나는 고개를 꺾으며 몹쓸 습에 걸려 무심히 핀 들꽃, 날아가는 새에서도 조실의 흰 팔뚝을 떠올리며 어린애처럼 자주 길을 잃고 헛기침 끝에 온 몸을 떨었다   아니다, 아니다, 조실은 가지 않았다 어떤 믿음의 확신 하나가 이 세상에 다시 와서 나는 참으로 몹쓸 병을 꿈에서도 앓았다 눈보라치는 섣달 겨울 어느 날, 그의 방문을 열다가 평상시와 다름없이 윗목에 놓인 매화분의 둥그럭***에서 빨간 꽃망울 몇 개가 벌고 있음을 보았다 뜨거운 연비 몇 방울이 바야흐로 겨울 하늘에서 녹아 흘러 꽃들은 피고 있었다.     * 희나리 : 덜 마른 장작. ** 연비燃臂 : 불교에서 수행자들이 계를 받고 나서 팔뚝에 불을 놓아 문신처럼 떠내는 의식 또는 그 자국. *** 둥그럭 : 끌텅이   우리 나라의 숲과 새들 -송수권나는 사랑합니다 우리 나라의 숲을, 늪 속에 가라앉은 숲이 아니라맑은 신운(神韻)이 도는 계곡의 숲을, 사계(四系)가 분명한 그 숲을철새 가면 철새 오고 그보다 숲을 뭉개고 사는 그 텃새를 더 사랑합니다,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오신다든가뱁새가작아도 알만 잘 낳는다든가 하는 그 숲에서 생겨난 숲의요정의 말까지를 사랑합니다나는 사랑합니다, 소쩍새가 소탱소탱 울면 흉년이 온다든가솔짝솔짝 울면 솥 작다든가 하는 그 흉년과 풍년 사이온도계의 눈금 같은 말까지를,다 우리들의 타고난 운명을 극복하는 말로다 사랑합니다, 술이 깬 아침은 맑은 국물에 동동 떠오르는동치미에서 싹독싹독 도마질하는 아내의 흰 손이 보입니다, 그 흰 손이우리 나라 무덤을 이루고, 동치미 국물 속에선 바야흐로 쑥독쑥독쑥독새*가 우는 아침입니다나는 사랑합니다, 햇솜 같은 구름도 이 봄날 아침 숲길에서생겨나고, 가을이면 갈꽃처럼 쓸립니다, 그 보다는 광릉 같은데,먼 숲길쯤 나가 보면 하얗게 죽은 나무들을 목관악기처럼 두둘기는딱따구리는 저 혼자 즐겁습니다나는 사랑합니다, 텃새, 잡새, 들새, 산새 살아넘치는우리 나라의 숲을, 스 숲을 베개 삼아 찌르륵 울다 만 찌르레기새도우리 설움 밥투정하는 막내딸년 선잠 속 딸꾹질로 떠오르고밤새도록 물레를 감는 삐거덕,삐거덕, 물레새 울음 구슬픈우리 나라 숲길을 더욱 사랑합니다.   전설(傳說)& 송수권   바닷가 오두막집에 늙은 양주 내외 살았다. 옛날에 할멈은 풀무잡이 윙윙 바람을 풀고 옛날에 영감은 망치집이 쉬지 않고 불꽃을 쳤다 낮과 밤을 이어 끝없는 노동이 시작되고 마을 사람들이 그 앞을 지날 때 타는 불 보고 불 같은 아이를 낳고 싶었다 먼 데 있는 도시의 집들을 꿈꾸고 망치야 날아라 망치야 날아라 새들처럼 가볍게 떠가는 꿈을 꾸었다 폭풍이 치고 온 산과 들 바다에 쿠렁쿠렁 망치소리 울릴 때   길 잃은 배들이 망가진 닻을 풀고 고개 너머 마을 사람들이 연장과 도구를 찾아 갔다 할멈은 풀무잡이 윙윙 바람을 불고 영감은 모루 위에서 쇠집게로 물통 속에 불을 던졌다 물과 불이 만나 싸늘하게 식은 쇳덩이를 토해 내고 이제 우리는 알았다 그것들이 맹수처럼 덤벼 들어서 어떻게 우리를 사냥하고 물어뜯는가를   적막한 바닷가/송수권더러는 비워 놓고 살 일이다하루에 한 번씩저 뻘 밭이 갯물을 비우듯이더러는 그리워 하며 살 일이다하루에 한 번씩저 뻘 밭이 미물을 쳐 보내듯이갈밭 머리 해 어스름녘마른 물꼬를 치려는 지 돌아갈 줄 모르는한 마리 해오라기처럼먼 산 바래 서서아, 우리들의 적막한 마음도그리움으로 빛날 때까지는또는 바삐바삐 서녘 하늘을 깨워가는갈바람 소리에우리 으스러 지도록 온 몸을 태우며마지막 이 바닷가에서 캄캄하게 저물 일이다   징검다리  송수권   햇빛은 산과 들에 부드럽게 빛나고 물결은 풀어져 물방아는 쿵쿵 바둑이가 든 그림책 한 권을 잘도 넘기도 갔다 바둑이 대신 어머니는 자꾸 나를 부르시고…… 지금도 물방앗간 앞을 가로 지른 서른 몇 채의 어느 징검돌 위에 서서 나의 다릿심을 풀어 내느라 어머니는 손을 내밀고 서서 나를 부른다 아마 그때가 입학하던 첫날이었을 게다 물방아도 봄이 되자 더 힘을 내어 돌고 내 이웃의 소녀들처럼 뒷머리채를 흔들어대며 징검돌들은 흐젓이도 물 속에 처박혔었다 낄낄낄 웃음소리를 내고 도령아 이도령아 내 뒷머리채 못 밟아준 것도 죄지…… 이 날은 해가 꼴딱 지도록 어머니와 그 짓을 되풀이하여 내 다릿심이 반남아 풀리는 것을 보았다 팔짝, 팔짝, 쿵, 쿵, 물방아는 돌고 세월은 가고…… 어른이 된 지금에도 아주아주 슬픔에 발을 적시어 내가 영 일어서지 못하는 날은 조약돌 몇 개로 물낯바닥을 마구 흐려 놓고 어머니는 그 돌들 위에 서서 나를 부른다.   아그라 마을에 가서 송수권   우리의 신(神)은 콩꽃 속에 숨어 있고 듬뿍 떠 놓은 오동나무 잎사귀 들밥 속에 있고 냉수 사발 맑은 물 속에 숨어 있고 형벌처럼 타오르는 황토밭 길 잔등에 있다 바랭이풀 지심을 매는 어머니 호미 끝에 쩌렁쩌렁 울리는 땅 얼마나 감격스럽고 눈물 나는 것이냐 캄캄한 숲 너머 모닥불빛 젖어 내리는 서북항로 아그라, 아그라 내 사는 조그만 마을 왔다메! 문둥아 내 문둥아 니 참말로 왔구마 그 말 듣기 좋아 그 말 너무 서러워 아 가만히 불러 보는 어머니   솥단지 안에 내 밥그릇 국그릇 아직 식지 않고 처마끝 어둠 속에 등불을 고이시는 손 그 손끝에 나의 신(神)은 숨쉬고 허옇게 벗겨진 맨드라미 까치 대가리 장독대 위에 내리는 이슬 정화수 새로 짓고 나의 신(神)은 늙고 태어나고 새 새끼처럼 조잘댄다.               한국의 강 / 송수권   강물은 뿌리로 보면 한 그루 나무와 같다.돌무지에서도 어린 느티나무 싹이 자라듯처음은 가느다란 가느다란 풀무치 울음소리가들린다. 그것이 귀또리 울음처럼 잎을 달고 제 날기뼈를 쳐서저 깊은 골짝으로 막 밀어낼 때는, 가지는 휘늘어져검은 구렁이처럼 운다. 이제는 융융하다 소리가 없다.그러나 잘 들어보면 한밤중 그것들은 저 벌판,늑대들처럼 몰려서서 짖는다. 어떤 차이 와도 이 옆구리찌를 수 없고 어떤 대포알이 와도 이 심장 죽일 수 없다.강물은 뿌리로 보면 한 그루 나무와 같다.창창한 어린 잎을 달고서는 계룡산 연봉을 보며우쭐거리던 처녀시절 - 扶餘, 참 좋은 숲 하나를 이루었다.백마를 타고 강폭을 미끄러지던 범선의 돛대를 향하여화살을 날리는 꿈 같던 백제의 청년은 죽었다.시들해지고 그후 밑뿌리까지 다 보일 듯하더니강경에 이르러 장꾼들의 멸치젓 새우젓 어리굴젓 독에서도왁자지껄 진딧물 같은 물벼룩들이 툭 툭 떨어진다.강물은 뿌리로 보면 한 그루 나무와 같다.그것들은 모이고 모여 밑둥까지 꺼머진 채 숲을 이루며어깨와 팔다리의 근육을 우그려뜨려서는 금산사의 미륵보살흰 눈썹에도 어진 손 얹고 지나는 것을, 그러고도논산 제2훈련소 앞을 서서남으로 빗밋이 에두르고휘두르다가는 이제는 그 숲속에서 깨어진 꿈이고무엇이고 탁류에 얼려 이제는 더 어쩔 수 없이전라도 사투리가 열매들처럼 툭 툭 불거진다.아, 저 보아라 저무는 강둑 착한, 젖먹이 소를앞세우고 가는 농부의 뒷모습, 서해 짠물 속에머리를 처박고 들어가 이제는 멸치떼고새우떼고 마구 퍼올리는 한국의 강을, 저이끼 슬은 관촉사의 저녁 종소리가 들릴 때까지 그러고도이 벌판 가득 떠오르는 저 찬란한 별들을.   해빙기(解氷期) & 송수권   며칠째 쌓이던 눈이 다시 녹으면서 대성동(大成洞) 마을 움집들의 추녀 끝을 둘러 고드름발을 쳤다.   우리 고숙(姑叔)은 삼동(三冬)내 눈사태 속을 흐르는 물소리도 싫어지고 마른 산약(山藥) 뿌리를 다듬으며 달장깐이나 막힌 화개(花開)장길이 못내 서운타.   지리산(智異山)을 겉돌면서 살아온 고숙의 한평생 이 봄은 심메마니 어린 싹이라도 볼까 삼동(三冬) 허연 꿈 속에서도 만나지는 떡애기. 아장아장 걸어오는 부리시리 산삼 한 뿌리라도 만나질까.   유마경(維摩經) 한 구절 같은 햇빛 하나가 고드름발에 엉기면서 지리산(智異山)일대의 산봉우리들을 거느리고 왔다.   산맥들이 풀리면서 돌아가는 엇둘 엇둘 소리…….       송수권에게 고향 학림리는 아픔과 그리움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삶 깊숙이 관여한 채 몸을 조여오는 학림리는 그에게 기피의 대상이었다. 학림리가 그에게 던져준 것은 상처였다. 군대를 다녀온 직후 생목숨을 던져버린 동생이 그렇고, 7년 동안이나 방구들에서 병을 앓다 간 생모의 죽음 또한 딛고 일어서기 힘든 상처였다.  그러나 사람은 근본적으로 근원으로 회귀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고, 외면하고자 하는 생각에 비례하여 다시 고향으로 쏠리는 마음을 송수권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한 사람이 이룩한 문학은 근원에 바탕을 두기 마련이다. 송수권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초기 시편들은 대부분 고향 학림리에 대한 기록이며 그는 학림리 안에서 삶과 죽음 사이에 가로놓여진 아득한 경계를 무너뜨린다. 그것은 곧 젊은 나이에 이미 생의 의미를 소진해버린 송수권 자신과 동생의 죽음을 환생의 길로 인도하는 치열한 굿판이었다.  그의 시는 아주 까마득히 잊혀진 정서를 지금의 시간 앞에 다시 끌어다 앉히는 힘을 지녔다. 지금껏 송수권의 이름 앞에 지치지 않고 따라다니는 수식은 ‘토속’이다. 그는 전라도 사투리를 자연스럽게 시 속에 풀어놓으며 대상에 파닥이는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그 토속어들로 인해 그의 시는 농촌의 현실과 정서를 생생하게 살아오게 만든다. 그에게 전라도 사투리는 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우리 시대의 표준어가 서울말이라면 판소리의 표준어는 전라도 사투리다”는 게 송수권의 말이다. 결국 표준은 쓰는 사람에 의해 정해지기 마련이며 송수권식 시어의 표준은 전라도 사투리다.  (「묵호항」 부분)  평생을 같이 했던 사람의 죽음을 단지 슬픔으로만 해석하지 않는 인식의 전환은 자신을 ‘짚방석’보다 못한 존재로 비유하는 고모의 입말을 통해 가능해진다. 현실에서 건진 전라도 말은 슬픔을 넘는 해학이며 아픔의 승화다. 한을 풀어내는 송수권의 방식은 적절한 토속어의 사용 안에 있으며 그가 부리는 언어들은 토속과 어우러질 때 긴 파장을 만든다. 쓰레기통에서 건진 시인  송수권에게 돌아보기 힘든 시절은 학림리에서 수박농사를 짓던 때이다. 교직을 그만두고 방황하던 서울에서 어린 아이를 들쳐업고 자신을 찾아 나선 아내를 만났다. 그녀의 손에 이끌려 학림리에서 흙 파먹고 살았던 시절, 그는 동생의 죽음이 던진 충격에서 쉬 벗어나지 못했다.  동생의 자살이후 송수권에게 삶은 아무 의미없음으로 정리됐다. 몇몇 절을 기웃거리며 출가를 결심하기도 했고, 여차 하면 생을 버릴 요량으로 수면제를 한 움큼 가지고 다녔다. 그 무렵 「문학사상」에서 당선 통고가 왔다. 서울에서 방황하던 때 그는 백지에 휘갈겨 작품을 응모했다. 그의 작품은 원고지에 쓸 줄도 모른다는 이유로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마침 편집주간이던 이어령씨가 쓰레기통에 쌓인 원고들을 보고 꺼내 읽었고, 송수권의 작품에 눈이 번쩍 띄었다. 그런데 막상 주소지 서대문 ‘화성여관’으로 아무리 연락을 해도 있어야 할 작가 송수권은 종적도 없었다. 주간은 그를 1년 동안 찾아 헤맸고 학림리에서 수박 농사짓던 송수권을 찾아냈다. 주간이 그를 만나 대뜸 던진 말은 “자네는 쓰레기통에서 나온 시인이야!”였다.  (「산문에 기대어」 부분)  그의 등단작 ‘산문에 기대어'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산문에 기대어'는 죽은 남동생에 대한 제의로 씌어진 작품이다. ‘산문'은 삶과 죽음의 경계의 문이다.  학림리 산 중턱에 자리잡은 동생의 무덤은 고향 마을을 굽어보고 있었다. 그는 “고향 산허리에 누워있으니 동생은 죽어서 더 편안할 것이다”고 했다.  송수권이 담배에 불을 붙여 동생의 묘 위에 놓았다. 죽은 자에게 건네는 산 자의 예의, 그 행위는 「산문에 기대어」를 관통하고 흐른다. 에서처럼 한 잔은 산 자가 마시고 나머지 한 잔은 죽은 자의 몫이다. 살아 돌아와 술잔을 채워 마시기를 바라는 마음, 궁극적으로 「산문에 기대어」는 살이 썩어도 영원히 남는 터럭(눈썹)을 매개로 한 재생의 길이다. 죽창으로 살아오는 대숲 바람소리 학림리는 행정구역상 고흥군 두원면 학림리이다. 송수권은 그 땅에서 자라며 농촌의 정서에 자연스럽게 물들었다.  송수권의 전매특허와 다름없는 토속적 색채는 곧 고향 학림리의 것에 다름 아니다. 송수권과 함께 찾아간 학림리, 새어머니마저 세상을 등지고 텅 빈 송수권의 고향집은 폐허를 연상시켰다. 넓지 않은 마당은 웃자란 억새로 가득했고 사람의 온기는 이미 없었다. 송수권의 집처럼 고향 학림리도 시름에 잠겨있었다.  (「環村5」 부분)  환촌은 인가가 둥글게 고리모양으로 이루어진 마을을 의미한다. 송수권의 시에서 환촌은 곧 학림리이고, 벌어먹을 땅을 중심에 두고 마을이 형성돼 있어 나라 땅 대부분의 마을은 환촌이다. 여건 자체부터 이미 어려운 현실에서 경제의 논리는 더욱 더 농촌을 외면한다. 송수권의 인식 속에서 학림리는 막막한 땅으로 그려질 수밖에 없었으며 그것은 곧 한이다. 그러나 송수권은 한을 그 자체로 묶어두지 않는다. 한과 맞서 싸워 새로운 기운을 만들어낸다. 그의 대숲소리는 그래서 옹골차다.  학림리에는 대숲이 많다. 송수권의 시에 대의 이미지가 많이 나타나는 것은 여기서 기인한다. 대가 바람에 흔들리며 만들어내는 소리는 단순하지 않다.  (「대숲 바람소리」 부분) 학림리의 대숲소리는 송수권의 시를 통해 죽창으로 되살아온다. 대는 난세에는 죽창으로, 평온한 시절에는 피리로 태어났다. 대나무가 담고 있는 이 양극단의 이미지는 헐벗은 땅을 안으로 보듬어내려는 송수권의 의지가 만들어낸 표현이다. 그는 “황토, 뻘과 더불어 대나무는 우리 국토의 3대 정신이다”고 했다. 그의 시는 곧 국토의 정신과 그 속에 살아내는 사람들을 오롯이 담아내고자 하는 당위성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송수권은 고향 학림리를 돌아나오며 “고향의 흙냄새는 잃었지만 저 대숲마을의 풍경은 무덤 속까지 가져가고 싶다”고 했다. 아마도 그가 무덤에까지 가져가려 하는 것은 단순한 고향 풍경이 아니라 그 속에서 발 딛고 살아낸 사람의 시간과 정신일 것이다.  정상철 기자    송수권은 주변 사람들에게 ‘5분 후에 웃는 사람’으로 통한다. 모든 게 느린 그의 성격 때문이다. 그는 ‘느림의 미학’을 인생의 길로 삼는다. 아무리 원고를 쓰는 일이 버거워도 그는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으며 자동차 운전을 배우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곡선 속에 있다. 희망도 꿈도 사랑도 아픔도 모두 곡선으로 모아진다. 직선 안에는 시간조차 없다. 단지 죽음만이 존재할 뿐이다”는 게 송수권의 말이다.  열 권의 시집을 세상에 내놓는 동안 그는 대나무, 황토, 뻘로 이어지는 국토의 정신을 가다듬는 데 천착했다. 그 안에서 그는 “현세의 질서가 아닌 우주의 정신”을 만났다. 고흥군 두원면 학림리에서 태어난 그는 지난 75년 문학사상에 「산문에 기대어」로 신인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첫시집 『산문에 기대어』를 시작으로 최근에 나온 『파천무』까지 열 권의 시집을 묶어냈으며 김달진문학상과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했다.   송수권 시비 위치 : 전남 장흥군 장평면 봉림리 계명성문학공원           시골길 또는 술통 송수권   자전거 짐받이에서 술통들이 뛰고 있다 풀 비린내가 바퀴살을 돌린다 바퀴살이 술을 튀긴다 자갈들이 한 치씩 뛰어 술통을 넘는다 술통을 넘어 풀밭에 떨어진다 시골길이 술을 마신다 비틀거린다 저 주막집까지 뛰는 술통들의 즐거움 주모가 나와 섰다 술통들이 뛰어내린다 길이 치마 속으로 들어가 죽는다           1940년 전남 고흥 출생. 1975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산문에 기대어』,『꿈꾸는 섬』,『아도』,『우리나라 풀 이름 외기』,『언 땅에 조선매화 한 그루 심고』등. 소월시문학상, 정지용 문학상, 금호문화재단 예술상 수상.                       좋은 시와 나쁜 시 박태일(시인, 교수) 1 시는 제도와 관습의 산물이다. 끊임없이 이어진 시공간적 단위의 구성원이 서로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인 것으로 믿어온 담론 구성물일 따름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 둘레 주류 시론에서 말하고 있는 시에 대한 생각은 부분 개념이거나 역사적 정의에 머문다. 처음부터 시의 본질이니 순수한 시정신이니 호들갑을 떠는 일은 수사적 부풀림이거나, 특정 시관에 대한 배타적 우월성을 굳히기 위한 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점에 대한 자각을 분명히 하지 않는다면 특정 시관을 금과옥조로 일반화시키는 잘못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따라서 시와 비시의 경계는 유동적이다. 너무 느슨해서 오히려 경계의 나눔이 불필요해 보일 정도다. 어떤 작품이 시냐 시가 아니냐는 물음이 어리석은 까닭이다. 그보다는 좋은 시인가 나쁜 시인가 하는, 특정한 시적 취향과 그 관점을 밝히고 그에 대한 정당성을 토구하기 위해 나아가는 일이 생산적이다.  (ㄱ)콩나물죽  후룩후룩 먹으며 아버지 생각하였다 우리 아버지 돌아오시면 죽 안 먹으려니 하고 (ㄴ)새벽빛을 보고 싶어  불을 켜지 않고 지켜보고 있다 새벽빛에 젖고 싶어  한없이 젖어들고 싶어…… 푸르른 몸이여 여명의 마음이여. (ㄱ)과 (ㄴ)은 둘 다 시임에 틀림없다. 무엇보다 먼저 이 둘은 줄글 꼴로 쓰여진 예사로운 산문과는 다르다. 겉꼴에서부터 들쭉날쭉 글줄이 들고 난 가락글이다. 오늘날 가장 흔한, 그리고 가장 낯익은 시꼴이다. 그리고 둘 다 시집이라는 형태공간에 실려 있다. 그러하니 이 둘을 두고 시가 아니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 다만 남은 문제는 있다. 이 둘 가운데서 어느 쪽이 더 좋은가 나쁜가라는, 작품에 대한 호오․취향에 대한 물음이다. 이 둘이 시인가 시가 아닌가라는 물음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먼저 (ㄱ)을 좋은 시로 여기는 이가 있을 수 있다. 시 속에 담겨 있는 현실감각을 눈여겨본 사람일 성싶다. 짐짓 배고픈 아이의 생각과 몸짓을 이음매로 내세운 가난이라는 현실이 짧은 시줄 속에 잘 옹글었다. 거기다 이 시는 나라잃은시기 1930년대 이른바 조선총독부의 검열에 걸려 일간지 지면에 실리지 못했던 작품 가운데 하나다. 조선의 빈궁 현실을 다루어 민족의식을 북돋울 수 있는 위험이 큰 작품으로 보였던 까닭이다. 이런 설명까지 덧붙인다면 (ㄱ)에 대한 독자의 호감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무명시인의 습작기 투고 작품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달리 (ㄴ)을 나쁜 시로 꼽는 이가 있을 수 있다. 이 작품만을 따로 떼어놓고 본다면 (ㄴ)은 구체적인 삶과 겉돌아 추상적이다. 작품 내용도 어름하다. 반복법에 이끌린 영탄조마저 없었다면 이 시를 객쩍은 벌소리로 볼 독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실상 이 작품은 그렇게 낮추어 보기 힘든 시다. 명망가 시인인 정현종의 것인 데다, 그에게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 가장 상금이 많은 시문학상 수상의 영광을 안겨준 작품인 까닭이다. 이런 무거운 사실을 일깨워준 뒤 다시 독자에게 (ㄴ)에 대한 호오를 물어보라. 이 작품을 벌소리에 가까운 것이라 여겼던 이도 마냥 생각을 지켜나가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에 지녔던 눈길을 그대로 밀고 나가려면 유명 문학상과 그 심사위원회의 식견, 그리고 시상 주체의 사회적․제도적 명성과 권위체계를 딛고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 개인이 떠맡기 힘든 일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좋은 시와 나쁜 시를 결정 짓는 취향의 요건 또한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시 자체에서 오는 것 못지 않게 시 바깥에도 있다. 어쩌면 시 바깥 요인이 더 결정적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시 작품은 문학사회의 거시 제도 안에서 마련한 미시전략의 결과다. 각급학교 문학교육, 등단방법, 문학상과 같은 다양한 인정기제나 제도적 틀, 대중매체나 저널 문화면의 명성 생산과 재생산, 또는 인맥․학맥․지맥과 같은 문화자본, 서점 유통 단위에서 나타나는 판매지수나 기호도 순위와 같은 중계회로의 소비전략이 그 내면화의 세부를 이룬다. 이른바 시의 역장이다.  흔히 문학사회 안에서 시의 자리는 세 가지 역장을 보여준다. 고급시와 대중시, 그리고 교양시가 그것이다. 이 셋은 서로 다른 시적 취향과 목표를 겨냥한다. 그러면서 서로 긴장, 대립, 보족 관계를 거듭한다. 오늘날 우리시는 이러한 세 역장을 껴안고 있는 제도의 결과물이다. 좋은 시인가 나쁜 시인가 하는 잣대와 조건은 이 역장 안에서 다시 나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여러 길항관계를 받아들일 때라야만 비로소 시에 대한 열린 개념 정의와 이해가 가능하다. 이러한 전제를 깔고서 좋은 시의 요건을 몇 가지로 들어보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나쁜 시의 모습 또한 자명해질 것이다.  2 첫째, 좋은 시는 무엇보다 좋은 시인으로부터 말미암는다. 좋은 시의 첫째 요건이 이것이다. 시인을 바라보는 눈길에는 크게 둘이 있다. 심리적 시인관과 사회적 시인관이다. 심리적 시인관이란 시인 안쪽에 시인이 됨직한 특질을 갖추고 있다고 보는 생각이다. 이럴 경우 시인은 보통 사람과 나뉘는 특별한 이로 여겨진다. 사회적 시인관은 이와 달리 시인은 사회 안쪽의 인정기제에 따른 결과라는 생각이다. 이럴 경우 시인은 여느 사람과 다름없다. 다만 시 창작 수련과 발표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인 이를 뜻한다. 그가 시인일 수 있는 터무니는 등단 제도나 방식을 거쳤는가 아닌가에 있을 따름이다.  우리 근대시사에서 좋은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이들은 그 삶에서 흔히 특별한 면모를 지닌다. 때로 안타까운 요절이나 열정적 연애와 같은 비장함, 언어 바깥의 선정성으로 겉칠된 삶이 그것이다. 곧 특별한 삶에서 좋은 시가 나올 것이라는 소박한 인과론, 개성론의 틀은 시인 됨됨이에 타고난 각별함을 요구한다. 심리적 시인관을 밀 수 밖에 없다. 시작에 대한 즉흥성과 시인에 대한 예외성을 버릇처럼 요구하는 태도가 이로부터 말미암는다. 그러나 좋은 시인은 세상의 그러한 조급한 기대와는 달리 끊임없이 시와, 언어와 다투는 이다. 그의 작품이 좋은 시 자리에 오를 개연성은 그만큼 크다.  둘째, 언어를 중심으로 좋은 시의 요건을 따져 봄직하다. 시는 두말할 것도 없이 숱한 언어 관습 가운데 하나다. 그러면서 언어의 특이성과 가능성을 극대화하려는 갈래다. 드높은 언어 관습이자 진지한 말놀이인 셈이다. 이 점을 형식주의자의 생각에 따라 일탈이라 부르든 비틀기라 부르든 시가 언어라는 조건을 받아들이는 한에서는 달라지기 힘든 자질이다. 따라서 좋은 시는 언어의 진폭이 넓고, 다채롭게 그 활용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무엇보다 언어는 자민족 중심적이다. 언어 활용의 가능성이란 바로 민족어의 가능성과 다르지 않다. 100년 남짓한 근대 시기 동안 우리시는 노래로 불려졌던 노래시가 아니라 눈으로 읽는 문자시로서 한글의 용례를 키우고 그 쓰임새를 세련시킨 공이 크다. 이 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근대시의 전통이다. 좋은 시는 이러한 전통을 따르면서도 그것을 더욱 변화, 발전시킨 경우다. 따라서 우리 근대의 제국언어였던 일본식 한자 투에 갇혀 있는 시는 좋은 시가 되기 힘들다. 영어 공용어론이 솔솔 피어나고 있는 오늘날 눈길에서 볼 때도 이 점은 달라짐이 없다.  글말이란 입말과 달리 본디부터 지식계층, 엘리트 문화물이다. 따라서 민족 구성원과 더불어 함께 하고자 하는 언어로 나아가지 못하는 시는 특권 문화로 떨어질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다. 근대 민족국가의 민족다움을 재는 주요 상수 가운데 하나는 말할 것도 없이 언어의 동질성이다. 그러나 오해 없기 바란다. 이 말의 요체는 추상적인 정치 이념의 동질성이나, 섣부른 민족혼과 같은 명분론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민족 구성원이면 누구나 손쉽게 다가서서 생각과 느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언어여야 한다는 뜻이다. 담긴 뜻의 깊고 얕음이나, 언어기법의 각별함과는 관계없는 일이다.  셋째, 표현?【? 본 좋은 시의 요건이다. 시는 무엇보다 언어의 긴밀성을 요구한다. 따라서 수필이나 소설과 달리 압축과 생략을 바탕으로 삼는다. 시는 줄여 써서 많이 말하는 길을 따르고, 소설은 늘여 써서 적게 말하는 길을 따른다. 이 둘의 차이를 힘껏 맞세운 자리에 시와 소설의 관습적 정당성이 있다. 시가 소설에 가까워져 번잡하고 느슨해지면 더는 오롯한 시의 자리를 내세우기 힘들다. 거꾸로 소설이 시처럼 줄이고 다듬어 말과 말 사이의 긴장을 애써 키우고, 생각을 건너뛴다면 더는 소설 자리를 고집하기 힘들다.  그런데 압축과 생략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시적 요건이 뜻하는 궁극적인 자리는 어딘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반복불가능성, 곧 다르게 쓰여질 수 없는 상태에 이른 표현이 그것이다. 이 점이 진지한 말놀이로서 시 창작의 즐거움이고, 시가 다른 갈래와 맞서 끊임없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터무니다. 좋은 시란 바로 기지의 표현과 다른 반복불가능성을 실천하고자 한 작품이다. 다르게 쓰여질 수 없는 상태로 나아가기 때문에 그 말에 힘이 실리고, 그 뜻에 환한 자장이 피어나고, 그 주체인 시인에 대한 외경이 솟아난다.  그렇다면 이 점은 어떻게 확인하는가. 간단한 길이 있다. 해당 시의 특정 부분을 다르게 고쳐 보면 될 일이다. 이 경우 고쳐진 상태가 본디 시보다 더 좋아진다면 그 본디 시는 서툴고 나쁜 시다. 거꾸로 다른 이가 손을 대었을 때, 오히려 고쳐진 시의 상태가 더 나빠지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본디 시는 다르게 고쳐 쓰기 힘든 상태, 곧 반복불가능성에 가까이 다가선 경우겠다. 이른바 좋은 시인 셈이다. 아무리 명망을 얻고 있는 시인이라 하더라도 다르게 쓰여질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자 하는 열정과 노력, 그것이 일깨워주는 표현 가치를 포기한다면 하루아침에 범상한 시인으로 떨어지고 만다.  넷째, 작품 내용에서 볼 때 좋은 시의 자질에 대해서는 이미 낯설게하기라는 널리 알려진 개념이 있다. 이것은 단순히 형식적 일탈에 붙인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 개방, 곧 주류 이데올로기에 대한 문제제기나 대거리라는 적극적인 뜻을 지니고 있다. 손쉽게 이를 수 있는 생각이나 느낌, 이미 타자에 의해 만들어진 기지의 세계를 겨냥한 시는 좋은 작품이 되기 힘들다. 널리 승인된 작품 내용이나 문화관습에 가까이 빌붙으려는 유행시, 특정한 내용만을 부풀리는 키치시와 같은 것들이다.  사랑을 하며 산다는 건 생각을 하며 산다는 것보다, 더 큰  삶에의 의미를 지니리라. 바람조차 내 삶의 큰 모습으로 와 닿고  내가 아는  정원의 꽃은 언제나  눈물빛 하늘이지만,  어디에서든 우리는 만날 수 있고 어떤 모습으로든 우리는 잊혀질 수 있다 사랑으로 죽어간 목숨조차 용서할 수 있으리라 시인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있는 어떤 이의 작품 가운데 한 부분이다. “사랑을 하면 산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을 드러냈다. 겉만 번지르하고 막연한 생각에 머물고 있다. 키치시라 일컬을 만큼 감상성도 두드러진다. 이런 작품의 가벼움과 얄팍함 속에는 삶에 대한, 사랑에 대한 범상한 감각만이 담겨 있 따름이다. 좋은 시란 적어도 손쉬운 고정관념으로부터 매몰차게 등을 돌리고 서려는 작품에게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  다섯째, 독자 쪽에서 좋은 시의 요건을 살필 수 있다. 압축과 생락, 곧 줄여서 말하는 방식인 시는 독자 쪽에서 볼 때 늘여서 읽는 일을 근본 방식으로 한다. 늘여서 읽기 어려운 시, 뻔하고 빤하지 않아 한번에 쉽게 뜻이 잡히지 않은 시, 그것이 무엇인가를 거듭 고심하게 만드는 힘이 큰 작품이 좋은 시일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하거니와 적게 말하면서 많은 생각과 느낌을 일깨우고자 하는 역설적 갈래가 시다. 그런 까닭에 독자들의 거듭 읽기와 독서시간의 지연, 곧 소급적 독서는 필연적이다. 좋은 시란 바로 이렇듯 독자들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고, 그들을 작품 안에 묶어두는 힘이 강한 작품인 셈이다.  그리고 그 힘은 여러 방향에서 작용한다. 작품 안일 수도 있고, 작품 바깥일 수도 있다. 문학교육이나 저널의 관심, 문학상과 같은 문학사회의 제도적 장치는 바깥 요인이다. 대중시에 가까울 수록 독자들은 작품 바깥에 의한 규정력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한다. 시 읽기는 문화 훈련이다. 일상언어 활동과는 길이 다르다. 세련된 언어관습으로서 읽기 훈련과 그로 말미암은 내면화는 필수적이다. 독자에게 손쉽게 읽히지 않는 시란 그 훈련에 거듭 이끌어들이는 힘이 강한 시다. 그들이야말로 특정 세대독자나 당대 현실독자가 아니더라도 마침내 문학사나 문화 자체가 독자가 되는 시, 오래도록 독자사회로 열려 있을 좋은 시로 거듭난다.  3 좋은 시란 시인된 됨됨이에서부터 언어를 거쳐 표현 방법과 인식 내용, 그리고 독자사회에 이르기까지 여러 자리에서 살필 수 있다. 위에서 나는 좋은 시를 좋은 시인이, 민족어의 가능성을 극대화시키는 자리 위에서, 어쩌면 될성부르지 않은 반복불가능한 표현을 겨냥하며, 세계를 개방해주는 쪽으로, 멀리 독자를 묶어두는 힘이 강한 작품으로 규정했다. 여러 편차와 다채로운 맥락이 그 안에서 새로 마련되겠다. 그럼에도 좋은 시는 이러한 요건의 그물 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뜻하는 궁극은 마침내 하나다. 뜻있는 말놀이, 문화관습으로서 이르기 힘듦이 그것이다. 그 방위가 어디든 더욱 이르기 힘든 상태를 보여준 작품, 그것이 좋은 시다. 오늘날 문학사회의 환경은 많이 달라지고 있다. 대중매체가 시의 취향을 이끈다. 디지털 기술에 따라 향유 방식도 바뀌고 있다. 시를 향한 취향의 높낮이나 경계, 기대지평이 달라지고 있다는 뜻이다. 대중시의 자리가 시단을 이끌고 있다. 문학의 인정기제 또한 그에 맞물려 움직인다. 세련된 독서로서 시 비평과 연구의 경우 또한 다르지 않다.  그런 속에서도 시의 가능성, 곧 언어를 통한 창조적 가능성의 확대라는 쓰임새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오히려 좋은 시, 또는 시적인 것을 향한 헌신은 문학사회 안팎으로 지난날과는 견줄 수 없을 강도와 방향에서 요구되고 있다. 이 가운데서 당대시의 전통과 관습의 담장을 흔드는 좋은 시가 나올 개연성은 크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익명의 독자사회가 시인들에게 시를 향한 다함없을 헌신을 한결같이 기대하는 시대 분위기, 좋은 시가 나올 수 있는 처음이자 끝자리다.   ==============================================================================   산문에 기대어 / 송수권                       山門에 기대어                                                     송수권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 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 옴을.     * 그리메 : 그림자의 옛말 ** 산다화 : 동백나무의 일종   송수권 시집 중에서       송수권 연보 1940년 전남 고흥군 두원면 학곡리 1297번지 출생.   1959년 순천사범학교 졸업.   1962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75년 ≪문학사상≫에 ≪산문(山門)에 기대어≫ 등이 당선 등단.   1976년 지리산 노고단 ‘산상(山上) 시화전’ 개최.   1980년 제1시집 ≪산문에 기대어≫(문학사상사) 간행.   1982년 제2시집 ≪꿈꾸는 섬≫(문학과지성사) 간행.   1984년 제3시집 ≪아도(啞陶)≫(창작과비평사) 간행. 해방 후 최초로 ≪분단시선집≫ 편저.   1985년 중등학교 교감 자격증 취득.   1986년 산문집 ≪속(續) 산문에 기대어≫(오상사), 제4시집 ≪새야 새야 파랑새야≫(나남) 간행.           금호문화예술상 수상.   1987년 전라남도 문화상 수상.   1988년 소월시문학상 수상.           제5시집 ≪우리들의 땅≫(문학사상사) 간행. 시선집 ≪우리나라 풀이름 외기≫(문학사상사) 간행.   1989년 산문집 ≪사랑이 커다랗게 날개를 접고≫(문학사상사) 간행.   1990년 국민훈장 목련장 수훈.   1991년 역사기행집 ≪남도기행≫(시민) 간행. 한국현대시 100인 시선집 ≪지리산 뻐꾹새≫(미래사) 간행.           제6시집 ≪자다가도 그대 생각하면 웃는다≫(전원) 간행.   1992년 제7시집 ≪별밤지기≫(시와시학사) 간행.   1993년 서라벌문학상 수상.   1994년 제8시집 ≪바람에 지는 아픈 꽃잎처럼≫(문학사상사) 간행. 국제펜클럽 한국 본부 이사(감사).   1995년 30년간 중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연구관으로 명예퇴직.   1996년 남도 음식문화 기행 ≪남도의 맛과 멋≫(창공사) 간행. 제7회 김달진문학상 수상. 광주문학상 수상.   1998년 산문집 ≪빛세상≫(토우) 간행. 순천대학교 문예창작과와 광주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출강.           남도음식문화축제 심사위원. ≪무등일보≫ 편집위원.           제9시집 ≪수저통에 비치는 저녁노을≫(시와시학사) 간행.   1999년 제11회 정지용문학상 수상. 순천대학교 문예창작과 객원교수 임용.           우리 토속꽃 시집 ≪들꽃세상≫(혜화당) 간행. 육필시선집 ≪초록의 감옥≫(찾을모) 간행.   2000년 ≪태산풍류와 섬진강≫(토우) 간행.   2001년 제10시집 ≪파천무≫(문학과경계사) 간행.           3인(고 이성선, 송수권, 나태주) 시집 ≪별 아래 잠든 시인≫(문학사상사) 간행.   2002년 산문집 ≪만다라의 바다≫(모아드림), 자선시집 ≪여승≫(모아드림) 간행(제 1~8 시집 정리).           순천대학교 문예창작과 정교수 발령.   2003년 제1회 영랑시문학상 수상. ≪시인 송수권의 풍류 맛기행≫, 산문집 ≪아내의 맨발≫ 간행.   2005년 제11시집 ≪언 땅에 조선 매화 한그루 심고≫(시학), 비평집 ≪사랑의 몸시학≫  간행.           논총 ≪송수권 시 깊이 읽기≫(나남), 민담시선집 ≪우리나라의 숲과 새들≫(고요아침) 간행.           시 감상선집 ≪그대 그리운 날의 시≫(고요아침), 시창작실기론 ≪송수권의 체험적 시론≫  간행.           김동리문학상 수상. 순천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퇴임.   2006년 비평집 ≪그대, 그리운 날의 시≫, ≪상상력의 깊이와 시 읽기의 즐거움≫ 간행.   2007년 시선집 ≪시골길 또는 술통≫(종려나무), 산문집 ≪소리, 가락을 품다≫(열음사) 간행.   2008년 장편 동화집 ≪옹달샘 꽃누름≫(문학사상사) 간행. 한민족문화예술대상 수상.   2010년 제12시집 장편서사시 ≪달궁 아리랑≫, 비평집 ≪체험적 시론≫ <시창작 실기론> 간행.           지리산인산문학상, 만해님시인상 수상.     ==================================================   석남꽃 꺾어 / 송수권                              석남꽃 꺾어                                           송수권      무슨 죄 있기 오가다 네 사는 집 불빛 창에 젖어 발이 멈출 때 있었나니 바람에 지는 아픈 꽃잎에도 네 모습 어리울 때 있었나니      늦은 밤 젖은 행주를 칠 때 찬그릇 마주칠 때 그 불빛 속 스푼들 딸그락거릴 때 딸그락거릴 때 행여 돌아서서 너도 몰래 눈물 글썽인 적 있었을까     우리 꽃 중에 제일 좋은 꽃은 이승이나 저승 안 가는 데 없이 겁도 없이 넘나들며 피는 그 언덕들 석남꽃이라는데…     나도 죽으면 겁도 없이 겁도 없이 그 언덕들 석남꽃 꺾어 들고 밤이슬 풀 비린내 옷자락 적시어 가며 네 집에 들리라.       송수권 시집 중에서    
359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이성부 - 벼 댓글:  조회:5115  추천:0  2015-12-22
  벼                                               이성부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워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이성부(1974) (1) 주제 : 벼의 강인한 생명력, 서민들의 삶에 대한 연민   (2) 이성부(1942∼)광주 출생.  동인. 1967년 김광협, 이탄, 최하림, 권오운 등과 1960년대의 시인으로서 이른바 현실참여, 혹은 사회시파의 흐름을 대표한다. 농촌의 현실과 고통을 정직하게 노래하는 한편, 전통적 서정과 민중적 연대감을 굳건히 지켜 가기 위해 애쓰는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3) 성격 : 예찬적. 상징적. 낭만적/  어조 : 격정적 어조 (4) 벼  - 공동체 의식에 바탕을 둔 민중의 표상, 민족의식과 생명 의지 (5) 시상전개 - 벼의 외면 --> 벼의 내면(덕성) --> 벼의 내면(태도) --> 예찬 (6) 공동체적 삶(이웃) - ㉠㉣㉤ (7) 벼의 상징성을 단적으로 드러낸 시어 - ㉥백성들(민중) (8) 민중에게 가해진 고난, 시련 - 햇살, 바람, 죄도 없이 죄지어서 (9) ㉦불타는 마음, 가슴이 더움 - 저항의식 (10) 3연은 2연의 부연.. 권력에 짓밟혀 서러움과 노여움으로 가득찬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민중들, 그럼에도 마음 속 깊은 곳에 남아있는 불의에 대한 저항심 (11) ㉩넉넉한 힘 - 사랑 (12)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삶과 민중의 모습 - 공동체적 삶, 인내, 너그러움, 희생, 저항정신, 사랑     이성부 시 모음  ☆★☆★☆★☆★☆★☆★☆★☆★☆★☆★☆★☆★ 가을 사람에게                                    이성부 만날 사람도 없이 머물러야 할 장소도 없이 깊은 거리에 따라 들어가서 진 흙투성이인 마음 되어 나온 그대 참담해진 그대 가을 하늘 발판에 뜬 맑은 살결 하나 붙잡아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안간힘을 다 하지만 어느새 손을 펴보아도 빈 마음일 뿐 진흙의 손바닥일 뿐 그대 한 생애를 두고 몸 씻으면 씻겨질까 씻겨지지 않을 그것들이 다순 가슴 맞이할 수 없는 그것들이...... ☆★☆★☆★☆★☆★☆★☆★☆★☆★☆★☆★☆★ 벼          이성부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와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 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 묻은 그리움,  ☆★☆★☆★☆★☆★☆★☆★☆★☆★☆★☆★☆★ 봄    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 서둘지 않게             이성부  오늘은 천천히 풀꽃들을 살펴보면서 애기똥풀 깨물어 쓴맛이나 보면서 더러는 물가에 떨어진 다래도 주워 씹으면서 좋은 친구 데불고 산에 오른다 저 바위봉우리 올라도 그만 안 올라도 그만 가는 데까지 그냥 가다가 아무 데서나 퍼져 앉아 버려도 그만 바위에 드러누워 흰구름 따라 나도 흐르다가 그냥 내려와도 그만 친구여 자네 잘하는 풀피리소리 들려주게 골짜기 벌레들 기어 나와 춤이나 한바탕 이파리들 잠 깨워 눈 비비는 흔들거림  눈을 감고 물소리 피리소리 따라 나도 흐르다가 흐르다가 풀죽어 고개 숙이는 목숨 천천히 편안하게 산에 오른다 여기쯤에서  한번 드넓게 둘러보고 싶다 ☆★☆★☆★☆★☆★☆★☆★☆★☆★☆★☆★☆★ 숨은 돌이 말한다        이성부  나는 내 안에서 솟는 불길 잠재울 줄을 안다 내 안에서 뻗쳐오르는 돌개바람 같은 욕망 참아낼 줄도 안다 마을이여 당산나무여 나를 좀 어떻게든 밀어올려다오 이 견디기 어려운 함묵緘默의 고빗길마다 응어리 하나씩을 뱉어 내놓았으니 그것들은 빛나고 빛나는 흰 이마 내 그리움의 다른 얼굴일 뿐 ☆★☆★☆★☆★☆★☆★☆★☆★☆★☆★☆★☆★ 안 가본 산        이성부 내 책장에 꽂혀진 아직 안 읽은 책들을 한 권 뽑아 천천히 읽어가듯이 안 가본 산을 물어물어 찾아가 오르는 것은 어디 놀라운 풍경이 있는가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떤 아름다운 계곡을 따라 마냥 흘러가고픈 마음 때문이 아니라 산길에 무리 지어 핀 작은 꽃들 행여 다칠까 봐 이리저리 발을 옮겨 딛는 조심스러운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누대 갈참나무 솔가지 흔드는 산바람 소리 또는 그 어떤 향기로운 내음에 내가 문득 새롭게 눈뜨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성깔을 지닌 어떤 바위벼랑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새삼 높은 데서 먼 산줄기 포개져 일렁이는 것을 보며 세상을 다시 보듬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직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사랑의 속살을 찾아서 거기 가지런히 꽂혀진 안 읽은 책들을 차분하게 펼치듯 이렇게 낯선 적요 속으로 들어가 안기는 일이 나에게는 가슴 설레는 공부가 되기 때문이다 ☆★☆★☆★☆★☆★☆★☆★☆★☆★☆★☆★☆★ 어머니가 된 여자는 알고 있나니         이성부 어머니 그리워지는 나이가 되면 저도 이미 어머니가 되어 있다. 우리들이 항상 무엇을 없음에 절실할 때에야 그 참모습을 알게 되듯이 어머니가 혼자만 아시던 슬픔 그 무게며 빛깔이며 마음까지 이제 비로소 선연히 가슴에 차오르던 것을 넘쳐서 흐르는 것을 가장 좋은 기쁨도 자기를 위해서는 쓰지 않으려는 따신 봄볕 한 오라기, 자기 몸에는 걸치지 않으려는 어머니 그 옛적 마음을 저도 이미 어머니가 된 여자는 알고 있나니 저도 또한 속 깊이 그 어머니를 갖추고 있나니 ☆★☆★☆★☆★☆★☆★☆★☆★☆★☆★☆★☆★ 우리 앞이 모두 길이다            이성부 이제 비로소 길이다 가야 할 곳이 어디쯤인지 벅찬 가슴들 열어 당도해야 할 먼 그곳이 어디쯤인지 잘 보이는 길이다 이제 비로소 시작이다 가로막는 벼랑과 비바람에서도 물러설 수 없었던 우리 가도 가도 끝없는 가시덤불 헤치며 찢겨지고 피흘렸던 우리 이리저리 헤매다가 떠돌다가 우리 힘으로 다시 찾은 우리 이제 비로소 길이다 가는 길 힘겨워 우리 허파 헉헉거려도 가쁜 숨 몰아쉬며 잠시 쳐다보는 우리 하늘 서럽도록 푸른 자유 마음이 먼저 날아가서 산넘어 축지법! 이제 비로소 시작이다 이제부터가 큰 사랑 만나러 가는 길이다 더 어려운 바위 벼랑과 비바람 맞을지라도 더 안 보이는 안개에 묻힐지라도 우리가 어찌 우리를 그만둘 수 있겠는가 우리 앞이 모두 길인 것을...... ☆★☆★☆★☆★☆★☆★☆★☆★☆★☆★☆★☆★ 익는 술       이성부 착한 몸 하나로 너의 더운 허파에 가 닿을 수가 있었으면. 쓸데없는 욕심 걷어 차버리고 더러운 마음도 발기발기 찢어놓고 너의 넉넉한 잠 속에 뛰어들어 내 죽음 파묻힐 수 있었으면. 죽어서 얻는 깨달음 남을 더욱 앞장서게 만드는 깨달음 익어 가는 힘. 고요한 힘. 그냥 살거나 피 흘리거나 너의 곁에서 오래오래 썩을 수만 있다면. ☆★☆★☆★☆★☆★☆★☆★☆★☆★☆★☆★☆★       이성부(李盛夫, 1942- ) 전남 광주생. 광주고등학교졸/ 경희대 국문과 졸.  1959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당선  1962년 [현대문학]에 이 추천 완료, 등단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과 연작시 를 통해 70년대 사회파 시의 흐름 주도. 시집 : 제1시집 (69), (74), 등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전라도 1 좋았던 벗님은 멀리 떠나고 눈부심만이 내 방에 남아 나를 못살게 하네 못살게 하네 터무니없는 욕심도 꽃같이 잠들었던 법석대는 머슴도 착한 마음씨도 못견디게 설운 사랑도 저 모래밭도 九泉에 잠들었네 갈수록 무서운 건 이 노여움의 푸른 잠, 이것을 바로 이것을 땅 위의 모든 책들이 가르쳤네 어째서 책이 조심스럽게 말하는가를 이제 알겠네 이제야 알겠네 벗님도 가버리고 눈부심만 남은 밤을 어째서 그것은 깊이 살아 있고 곳곳에서 소리 없이 고함치는가를... 전라도 2 아침 노을의 아들이여 전라도여 그대 이마 위에 패인 흉터, 파묻힌 어둠 커다란 잠의, 끝남이 나를 부르고 죽이고, 다시 태어나게 한다. 짐승도 藝術도  아직은 만나지 않은 아침이여 전라도여 그대 심장의 더운 불, 손에 든 도끼의 고요 하늘 보면 어지러워라 어지러워라 꿈속에서만 몇번이고 시작하던 내 어린날, 죽고 또 태어남이 그런데 지금은 꿈이 아니어라. 사랑이어라. 光州 가까운 데서는 푸른 삽으로 저녁 안개와 그림자를 퍼내고 시간마저 무더기로 퍼내 버리면 거기 남는 끓는 피, 한 줌의 가난 아아 사생아여 아침이여 창검이 보이지 않는 날은 도무지 나는 마음이 안 놓인다 드러누운 山河에는  마음이 안 놓인다. 전라도 3 왜 나는 거역을 받기 시작했던가 헤어짐과, 그 차디찬 입맞춤으로부터 보드랍지 않은 정신으로부터 때로부터 저 거리로부터 왜 나는 조금씩 거역을 받기 시작했던가 내 눈에 뛰어드는 바다에도 바람에도 밥을 채운 위장에도 내 살을 뚫고 가는 빛과 어두움, 그 同志의  저 많은 손발에도 심장에도 왜 나를 거역을 받기 시작했던가 노오란 얼굴이여 내 귀를 잡아 흔들던, 지난 밤 꿈이 참말로 이제 나에게는 반성의 손길임을 알겠다. 죽어가는 슬픔이 아니라, 탄생이다 아아 눈물뿐인 비가 오고 내 고향의 물이 고인다. 맨발로 밤을 딛어 자빠지는 곳 내가 밟은 것은 뱀이었다 피였다 꿈틀거리고 놀라고 재빠르게 튕기는, 싸늘한 혼란이 나를 껴안았다. 기다리는 아내마저 거역을 일삼는다. 새벽에 걷어찬 이불과 뜨신 방바닥과 기적소리와, 파묻히는 성욕과 저 모든 근심마저 왜 나를 거역하기 시작했던가 왜 나는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던가. 전라도 4 두려움 무릅쓰고 너를 찾아갔다 도적처럼 천천히 고요함을 열고 창문을 열고 들어갔다 커다란 어둠 속에 너는 자고 있었다 깨어 있는 사물이여  빛이여 많은 눈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아 기어이 손을 댈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망설임이 오고 속떨리는 성욕이 오고 눈뜬 死者들이 왔다. 너그러운 밤은 놀라 물러가고 너는 얌전히 맞아들였다 더벅머리 선머슴을 껴안고 너 양갓집 계집은 밤새 흐느꼈다 집에 돌아오니 창백한 아침이 식구들과 더불어 굶주리고 있었다 전라도 5 벌판 끝에서  외로운 늑대의 울음을 그 여인이 운다 옷벗은 주둥이로 울부짖고 목이 마르고, 그리고는 돌아서 간다 그가 섰던 자리에는 공허마저 없다 시간도 없다 죽어버린 언덕에 오직 한마디 뉘우침만 남는다 서울로 가신 님아 전라도 6 어쩌자는 말도 없이 내 떠나갔다 부두에선 밤을 새우고, 일을 찾아 다른 데를 기웃거리고, 정신 없이 정신도 없이 더 슬픈 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아직도 사랑은 남아 있다 아직도 내 살에 스며 있는 그대 더욱 많이 다가오는 그대 그리고 다시 돌아왔다 거리는 다름없고 우는 저녁도 한결같다 두루 찾았더니, 그대 있던 자리 그런데 보이지 않네 보이지를 않네 파고드는 노래의 빛깔 달라지고 숨쉴 산소마저 없고, 그러나 아직도 사랑은 남아 있다 아직도 내 살에 스며 있는 그대 더욱 많이 다가오는 그대 두 해가 지나갔다 말이 없는 사람 무자비한 자유, 잠을 잃은 잠이 나를 사로잡았다 침묵조차도 도무지 말이 없다 오, 굴복하는 사랑의 피의 눈이여 두려워 말고 옷을 벗어다오 좀더 확실하게 옷벗어다오 전라도 7 노인은 삽으로  영산강을 퍼올린다 바닥이 보일 때까지 머지 않아 그대 눈물의 뿌리가 보일 때까지 노인은 다만  성난 사람을 혼자서 퍼올린다 이제는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어떻게 용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노인은 끝끝내 영산강을 퍼올린다 가슴에다 불은 짊어지고 있는데 아직도 논바닥은 붉게 타는데 바보같이 바보같이 노인은 바보같이 전라도 8 파도는 오지 않고 기다리는 배도 오지 않고 바다는 죽고 싶고 나는 답답하고, 그 어두움이다 성급하게 쌓인 무등산 눈이 먼 데를 보고 있다 겨울과 港口를 보고, 다른 데를 보고 그리고 우리의 가난의 權利를 보고 있다 그렇다면 싸움은, 문학은, 우리들은, 떠나고, 또 오는 것이다 그가 오는 것이다 오오 파도가, 우리들의 파도가         광주 대인동 출신 이성부 시인의  시비가 광주고 교정에 건립,  시인과 생전 둘도 없는 절친한 동기였던 소설가 문순태씨가 "둘중 산사람이 먼저 죽은 사람의 추도사를 하자고 약속했다"면서 '이승의 산행을 끝낸 성부에게'라는 추도사를 낭독하자 금세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문씨는 추도사에서 "너의 빈 자리는 초겨울의 빈 들녘처럼 쓸쓸하다. 지금 제막식에서 의식이 짱짱했던 한 시인의 칠생 평생을 본다. 시인은 시로 태어나 다시 시로 돌아갔다. 지금이라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전화가 올 것 같다"고 추모했다.     이승의 山行 끝낸 성부에게 = 이성부 시비 제막식에 부쳐=     성부야, 55년 동안 불러온 이름인데 이제 네 대답을 다시 들을 수 없구나. 어젯밤, 너를 그리워하며 이 글을 쓰느라, 밤새도록 뒤척이다가, 새벽에 비 맞으며 산에 올랐다. 생오지 마을 뒷산 소나무 숲길을 걷다가, 울컥 솟구치는 너에 대한 그리움 주체할 수 없어, 무등산을 바라보며 네 이름을 수없이 불러보았으나, 빗소리만이 헛헛한 내 가슴을 아프게 적셔주더구나. 작년 2월이었지. 세상 뜨기 열흘 전, 수아 씨로부터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듣고, 석학이랑 부랴부랴 서울로 올라가서, 재성이와 셋이서 서울대병원으로 찾아갔었지. 너를 만나면 절대 눈물 보이지 말고 희망적인 말만 하자고 단단히 약속을 했는데도, 마른나무가지처럼 앙상한 네 모습을 보자 가슴이 저미는 것만 같았었다. 그 때 너는 “칠십 년을 살고 이렇게 가는 것도 행복하게 생각한다.” 고 희미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눈물을 주주룩 흘렀었지. 너는 안간힘을 다해 마지막으로 시울이 펑 젖은 눈에 친구들의 얼굴을 담고 있었지. 우리들은 핏기 없는 네 얼굴을 어루만지면서 끝까지 힘을 내라고 말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마지막 이별을 생각하며 눈물을 삼켰단다. 그리고 며칠 후 재성이가 엉엉 울면서 너의 비보를 전해왔을 때, 마지막 보았던 너의 그 쓸쓸한 미소가 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네가 떠난 것이 믿어지지가 않는다. 지금이라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순태야 나 지금 무등산에 와 있다. 어디서 만날까.” 하고 전화를 할 것만 같다. 무등산을 좋아했던 너는 언젠가 무등산을 보면 어머니가 생각난다고 했다. 너는 어떤 시인보다 무등산을 사랑했었지. ‘무등산’은 네 자신에 대한 뼈저린 성찰과 시대정신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80년 5월 광주항쟁이 일어나자, 너는 살아남은 자로서의 절망과 죄의식에 사로잡혀, 자기학대의 깊은 수렁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고향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고 한탄하던 너는 언어에 대한 불신과 분노 때문에 일체의 시 창작을 중단하기까지 하지 않았더냐. 너는 고통을 이겨내려고 시를 떠나 산으로 갔지. 너의 오랜 산행은 구도의 길찾기와 같은 고행이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너는 산에서 새로운 자아와 희망을 찾아 다시 시로 돌아왔지. 그 후 네가 다시 시를 쓰게 한 것은 산이었다. 산이 네 시를 품어주었고 네 시가 산을 감싸 안아준 것이었다. 아, 성부야. 이제 영원히 산을 품게 되었으니 마음이 편안하냐? 이제 네가 산이 되었으니 아무것도 부러울 게 없냐? 산으로 돌아가 그리운 어머니 품에 안기니 마음 포근하냐. 그래 김현승 선생님 다시 만나니 오지고 행복하냐? 세상 떠나기 두 달 전, 광주에 왔을 때 너는 갑자기 김현승 선생이 보고 싶다고 했었지. 무등산 김현승 선생님 시비 앞에 한참 서성이던 너는 소리 내어 ‘눈물’을 낭송하기도 했었지.   그리운 성부야. 너를 떠나보낸 후 나는 슬픔과 안타까움이 커서, 가슴이 아리다 못해 한동안 마음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무기력증에 빠졌었다. 네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 공허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돌이켜 보니 시간은 오는 것이 아니고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신록이 싱그러운 여름, 사방이 푸르름으로 꽉 차 넘치는데, 네가 없는 세상은 마치 초겨울의 빈 들녘처럼 쓸쓸하기만 하구나.아마도 헤어짐이 있기에 인생은 슬프고 무상한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너를 보내고 우리 시대 한 시인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일제강점기에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광복과 6.25전쟁, 4.19와 5.16 군사구테타, 그리고 5.18 민주항쟁 등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온, 의식이 짱짱했던 한 시인의 70년 생애를 돌아본다. 너는 분명 영혼이 메마른 한 시대, 어둠 속에 반짝였던 별이었다. 아니 한 떨기 꽃이었다. 시인은 별이 되어 반짝이고 꽃으로 피어날 수 있으니, 어쩌면 시인에게 생물학적 생명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시인의 죽음은 시에서 태어나 다시 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겠느냐. 아쉬움과 그리움 속에서 태양은 뜨고 지며, 꽃들은 다시 피고 지고, 시간은 이승의 한복판을 강물처럼 덧없이 흐르지만, 너는 영원한 시간 속에 별과 꽃으로 머물며, 강물 위에 부서지는 눈부신 햇살이 되고 있음을 나는 알 것 같구나. 그러고 보니 너는 사라진 것이 아니더구나. 다만 이승의 산행을 끝냈을 뿐이더구나. 비록 너는 갔지만 네가 남긴 추억과 정신적 소산은 참으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단다. 지상에 머물렀던 동안에 남긴 너의 일상은 꽃처럼 너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피어나, 영혼이 고달픈 사람들에게 사랑이 되고 위로의 노래가 될 것이다.   보고 싶고 그리운 성부야. 오늘 우리는, 우리들이 50여년 전 시인의 꿈을 키웠던 모교 교정에 너의 시 무등산을 새긴 시비를 세웠다. 이 자리에는 너의 가족들과, 너를 사랑하는 선배님들과 후배, 친구들이 모였다. 모두들 너의 시를 읽고 그리움을 쓸어안고 있다. 오늘 이 모습을 네가 볼 수 있다면, 너는 결코 먼저 간 것을 아쉬워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승의 강을 건너서도 행복한 시인로구나. 이제 속세의 번뇌와 욕망, 미련과 아쉬움 모두 털어버리고 자유로운 영혼 되어 훨훨 날으거라.성부야, 부디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안식과 평화 누리거라.   2013년 6월 23일 친구 문순태(소설가)  유가족인 미망인 한수아씨는 남편이 서울대 병원 병상에서 별세 5일전 새벽 2시에 아프지 않았던 때처럼 꼿꼿하게 앉아 '멀리 보아서도 바다에 걸쭉하게 뜬 섬입니다…'라는 생전 마지막을 고했던 시 '낭개머리 바위에 앉아'의 창작배경을 설명하고 낭독했다.     유족대표로 인사하는 부인 한수아 씨.     별세 직전 병상에서 쓴 유작시 "낭개머리 바위에 앉아" 낭송     판소리 심청가 중 한 대목, 기세규 씨 (광고 24회),      이애숙 씨의 살풀이춤 한마당 (이화전통무용학원장)      광주고교 교내에 설치된 '광고(光州高校)문학관'내 '이성부 시인의 방'이 마련된 가운데 광주에서 '이성부 시인의 밤'도 열리였다.  이성부 시인은 광주고를 거쳐 경희대 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현대문학'지 시 추천완료 및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이성부 시집'과 '우리들의 양식', '백제행', '전야', '빈 산 뒤에 두고', '야간산행', '지리산', '산이 시를 품었네', '도둑산길' 등 다수를 펴냈다. 현대문학상과 한국문학작가상, 대산문학상, 광주시 문화예술상, 공초문학상, 영랑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이성부 시인을 떠나 보내며  김승웅  
358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신경림 - 농무 댓글:  조회:6233  추천:0  2015-12-22
  (1971)                     - 신경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메어 닫힌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쓴느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 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헤헤대지만 이까짓 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 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만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이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1. 화자 누구? 농무를 추는 사람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에 대해 원통 해 하는 사람 처지? 사는 것이 답답하고 고달프고 원통하다. 대상?   관심사? 답답하고 고달픈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 시적상황 부정적이고 암울한 힘든 현실에 대한 울분이 농무를 통해 승화되고 있다. 농무가 점점 흥이나고.. 감정이 고조되고 있다. 정서 부정적, 슬픔, 벗어나고 싶음, 외로움(농촌에 젊은 남성들이 없음) 어조 부정적 2. 운율 녀석은, ~처럼 반복 3. 심상 시각적 심상, 청각적 심상 4. 표현 설의법(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 친들 무엇하랴) , 직유법 대구법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역설(농무를 통해 암울하고 비참한 현실과 농민들의 한을 전달) 5. 제목 농무를 통해 농촌의 암울한 현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6. 시의 언어 (1) 시어   1.조무래기:자질구레한 물건, 어린아이들을 낮잡아 이르는 말 2.꺽정이:조선 명종 때에 황해도 구월산을 무대로 활동한 백정 출신 의적, 부조리한 사회 현실에 온몸으로 저항한 인물 3.서림이:임꺽정의 모사였으나, 관군의 토벌로 상황이 어려워지자 임꺽정을 배신한 인물. 자기 잇속만 차리고 위험에 처하면 의리를 저버리는 성격을 지님 4.비료값:표준어는‘비룟값’ 5.쇠전:쇠장, 소를 사고파는 장 6.도수장:도살장, 고기를 얻기 위하여 소나 돼지 따위의 가축을 잡아 죽이는 곳       (2) 구절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메어 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 징이 울리고 막이 내렸다. 공연이 끝이 났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 달린 가설무대에 구경꾼이 다 돌아가고 텅 빈 운동장에서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서 술을 마신다. 술을 마시는 이유는 답답하고 사는 것이 고달프기에 원통하기 때문이다. 농촌에서 사는 우리는 왜 답답하고 사는 것이 고달프고 원통한 것 일까?... 흥이 나야하는 농무인데 왜... 흥이 나지 않아 보일까? 얼마나 답답하고 고달프면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실까?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 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헤헤대지만 이까짓 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 친들 무엇하랴 :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아이들만 따라붙어 악을 쓰고, 처녀 애들을 철없이 킬킬댄다. 보름달은 밝아서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부조리한 농촌 현실에 대해 울부짖고 도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잇속만 차리며 헤헤대지만 이까짓 산 구석에 처박혀서 먹고 살기 위해 발버둥 친들 무엇이 달라지겠느냐!!!!!!!! 농촌에 쪼무래기들과 처녀 애들 뿐... 다들 어디로????? 1971경제 개발 상황 속 도시로 gogo... 농촌 피폐해 진 현실 속에 사람들도 점점 사라짐.. 더욱 암울... 소외당함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이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이거나 : 비룟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는 여편네에게 맡겨두고 소를 사고 파는 장을 거쳐 도수장 앞에 올 때 우리는 점점 더 신명이 난다. (이 상황에 신명? 역설적 표현인듯) 이런 우울한 상황에서 우리는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며 어깨를 흔들며 부정적인 현실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힘든 삶의 울분을 토할 것이다.     ※신경림의 는 1971년에 지어졌다. 한국 사회는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경제 개발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으면서 경제 수치를 높일 수 있는 중공업 위주의 산업 정책을 택하게 된다. 도시의 팽창이 이루어지면서 농촌에서 힘들게 일해 봐야 농사꾼 소리만 듣게 되지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한 농촌 젊은이들은 도시로 올라와 노동자로 취직하게 된다. 그 결과 도시는 더욱 비대해지고 노동력을 잃은 농촌은 공동화되면서 도시화 농촌의 격차는 더욱 커진다. 이것이 60년대 중반에서 70년대 초까지 일어난 한국 사 회의 변화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신경림은 농촌 현실을 시적 대상으로 하여 농촌 사람들의 아픔을 드러내고자 한 거 같다. 평소에 소외된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가진 신경림 시인은 농무로 인해 신명감을 갖게 된다는 역설적인 표현을 통해 농민들의 한과 슬픔을 잘 드러낸 거 같다. 오래 전, 이 시를 공부할 땐 의존적으로 신경림의 를 민중시라고 인식했었는데.. 직접 분석해보고 시대 상황과 연결지어 보니 이 시가 정말 민중시의 대표임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   울진 후포항에 세워진 신경림 詩碑     (아시아뉴스통신=)   "비단처럼 빛나는 바다"라는 의미로 '휘라포(輝羅浦)'라 불리는 후포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경북 울진군 후포면 후포 등기산 공원에 세워진 국민시인 신경림 작가의 시비(詩碑)./아시아뉴스통신=남효선 기자  친구가 원수보다 더 미워지는 날이 많다.  티끌만 한 잘못이 맷방석만 하게  동산만 하게 커 보이는 때가 많다.  그래서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남에게는 엄격해지고 내게는 너그러워지나 보다.  돌처럼 잘아지고 굳어지나 보다  멀리 동해 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널따란 바다처럼 너그러워질 수는 없을까  깊고 짙푸른 바다처럼.  감싸고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스스로는 억센 파도로 다스리면서.  제 몸은 맵고 모진 매로 채찍질하면서.  (신경림 시 ‘동해바다 -후포에서’ 전문)  "비단처럼 빛나는 바다"라는 의미의 '휘라포(輝羅浦)'로 불리는 후포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경북 울진군 후포면 후포 등기산 공원에 국민시인 신경림 작가의 시비가 세워졌다.  이번 후포 등기산공원에 세워진 신경림 선생의 시비는 신 시인이 지난 1987년 울진지방을 여행하면서 후포바다를 배경으로 쓴 시로 "속살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후포바다의 청정무구한 자태를 통해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사람살이의 화해와 사랑을 노래한" 서정시로 국민들이 널리 애송하는 시이다.  이번 시비는 "생태문화관광도시" 울진을 "이야기가 있는 곳"으로 조성하기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 임광원 울진군수의 발의로 세워졌다.  시비 건립 소식을 들은 신경림 시인은 지난 해 11월 울진군을 방문하고 임광원 울진군수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방형섭 울진군 기획팀장과 함께  "아름답고 후덕한 고장"으로 각인돼 있는 울진을 찾아 후포항을 비롯 죽변항과 대가실해안의 대숲길, 근남면 주천대, 서면 소광리 황장봉계와 울진금강소나무숲을 다니며 울진의 아름다움을 재음미하는 생태기행을 가졌다.  신 시인은 지난 1987년 작가 세분과 울진을 찾아 사흘을 유숙했다며 특히 울진바다의 아름다움과 울진사람들의 후덕한 정을 평생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 시인은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아름다운 풍광이 고스란히 남아있다며 이는 울진사람들의 자연자원을 보존하려는 탁월한 "생태관 덕분인 것 같다"고 말했다.  시비는 자연석 바위에 앞면에 시편을, 뒷면에 신 시인의 약력을 담고 있다.     목계 장터/신경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靑龍) 흑룡(黑龍)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 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天痴)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1976년 여성지 [엘레강스]에 발표된 작품이다. 원래 1974년 발표되었던 작품에 민요조의 전통가락을 반영시켜 개작해 다시 발표한 것으로, 신경림의 제2시집 [새재](1979)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는 신경림의 떠돌이 장사꾼들의 삶의 공간인 '목계장터'를 중심 제재로 하여 민중들(떠돌이 장사꾼들)의 삶과 애환을 토속적 언어로 담담하게 그려내었다. 이 시는 장돌뱅이의 삶을 형상화한 것으로, 장돌뱅이의 삶은 한 군데 정착해서 평범한 일상을 꾸리는 삶과는 대조적으로, 자유, 구속으로부터의 탈피, 애환, 방랑, 민중적 삶의 표상 등으로 인식된다. 이 장돌뱅이의 삶을 통해 민중의 애환이나 생명력을 그렸다고 볼 수 있는데, 시적자아의 세속적 욕망으로부터 벗어난 초연의 삶의 자세를 동시에 읽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즉, 우리가 살아가면서 한 3년에 한 번쯤은 천치의 삶으로, 순수무구하고 탈세속적인 인간 본연의 돌아와도 좋지 않겠는가. 그 달관되고 초연한 자세를 시인은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계산적이고 실리를 정확히 따지는 이 번잡한 삶의 일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하늘, 땅, 산으로 표상되는 자연이 가르쳐 주고 있다. 이 작품은 내용상 작게는 네 단락 크게는 세 단락으로 나뉘어지며 그 내용도 비교적 단순하다. 첫째 부분(1∼7행)은 방랑의 삶을 보여주는 곳으로 '구름이나 바람', '방물장수'를 통해 이러한 정서를 비유적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둘째 부분(8∼14)은 정착의 삶을 보여주는 곳으로 '들꽃과 잔돌'로써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방랑과 정착의 삶이 셋째 부분에 와서는 집약적으로 재차 반복되고 있다. 시적 자아는 자신에게 '목계장터'에서 '짐부리고 앉아 쉬는 천치', 즉 '방물 장수'가 되어 그 모든 변화와 그 모든 삶의 애환을 보고 듣는 존재가 되라고 하는 운명의 소리를 듣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시인 자신의 삶의 행로, 그리고 민중들의 삶과 밀착되려고 애써 온 그의 시와 일치하고 있다. 그의 마음은 '산 서리 맵차'고 '물여울 모진' 이 세상에서 차라리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고 싶지만, 몸은 끝없이 떠돌 수밖에 없는 처지인 것이다. (김상욱/현대시 목록)   * ‘목계’는 1910년대까지 충북 중원군 목계리 남한강안(南漢江岸)의 수많은 나루터 중에 하나로중부 지방의 각종 산물의 집산지로 가장 번창하기도 했지만, 1921년 일제의 식민지 수탈 정책의 일환으로 충북선이 부설되자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 '목계 장터​'는 남한강 중류의 충주 부근의 나루터에 있던 장터로 위치상 매우 번화했던 곳이다. 이 시는 목계 나루라는 구체적 공간을 배경으로, 떠도는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민중의 애환을 토속적 시어와 상징적인 수법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는 1인칭​ 화자의 독백형식으로 진술되어 있으나, 그 내용은 화자 개인의 삶의 애환이라기보다는 떠돌이로 살 수 밖에 없는 민중의 고뇌라는 일반화된 삶의 현실을 보여 준다. '구름', '바람', '방물장수' 등으로 표상되는 정착의 이미지를 교차시켜, 농촌 공동체의 해체하는시대적 상황 속에서 떠남과 정착의 갈림길에 섰던 농민들의 갈등을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한권에 잡히는 현대시)                                                                                           * 1936년 충북 충주 출생. 동국대 영문과를 졸업했고, * 1955년 [문학예술]에 ,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 1973년 1965년에 다시 작품활동을 시작해서 첫 시집 [농무]를 간행했고, 평론집 [한국 현대시의 이해] 등을 간행했다 농무로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 1979년 봄, 신경림은 두 번째 시집 『새재』를 출간하면서,  제8회 ‘한국문학 작가상’을 받는다. * 1980년 7월, 신경림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고은, 송기원, 조태일, 구중서 등과 함께 서대문구치소에 갇혀 있다가 두 달 만에 공소기각으로 풀려난다. * 1981년 한국문학작가상, 1990년 이산문학상을 수상했다. *1984년에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고문, ‘민주화청년운동연합’ 지도위원, * 1985년에서 1987년까지는 ‘민족민주통일운동연합’ 중앙위원회 위원 등 재야의 중요한 직책을 기꺼이 맡는다. * 1989년 『민요 기행 2』를 펴낸 그는 * 1990년에 들어  기행 시집 『길』을 내놓는다. 이 시집으로 제2회 ‘이산문학상’을 차지한다. * 1993년 시집 『쓰러진 자의 꿈』을 내놓고, *1995년에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을 지내고, 환경운동연합 대표를 맡고, 동국대학교 석좌교수가 되었다. * 1998년 중국·베트남·일본 등지를 여행하고 돌아온 뒤 시집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을 펴내면서 제6회 ‘공초 문학상’을 받는다. * 시집으로 [농무](1973), [새재](1979), [달 넘세](1985), [민요기행 1](1985), [새벽을 기다리며](1985), [남한강](1987), [씻김굿](1987), [가난한 사랑노래](1988), [우리들의 북](1988),[민요기행 2](1989), [우리들의 복](1989), [저 푸른 자유의 하늘](1989), [길](1990), [쓰러진 자의 꿈](1993), [갈대](1996), [목계장터](1999),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1999) [뿔](2002), [낙타](2008) 등이 있고, 평론집에 [한국 현대시의 이해](1981),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1983), [우리 시의 이해](1986) 등이 있다.         * ​사라져가는 농촌에 대한 인류학적 탐구 ​(발췌)(장석주/문학평론가, '나는 문학이다') 1955년 신경림은 동국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한다. 유종호와 함께 하숙한 그는 독서회에 나가면서 『공산당 선언』 등의 좌익 책자를 구해 읽는다. 그 사이 집안 형편은 더욱 기울어 그는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하며 어렵게 서울 생활을 유지한다. 1956년 신경림은 이한직의 추천으로 진보적 성향의 문예지 《문학예술》에 「갈대」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다. ​1965년 신경림은 충주의 한 사설학원에서 영어 강사 노릇을 하며 영어로 된 『공산당 선언』의 문장을 가르치는 위험한 행동을 하는데, 어느 날 시내에서 거지 몰골로 쏘다니던 김관식과 만난다. 술을 걸친 김관식은 막무가내로 “네가 안 쓰면 나도 안 쓰겠다.”며 그의 꺼져가는 시심에 불씨를 지피고, 시골 생활에 적당히 지쳐 있던 그를 서울로 불러 올린다. 김관식의 강권으로 충주에서 짐을 싸들고 서울 홍은동 김관식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뒤 시인은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 쓰기에 몰두한다. 마침내 『농무』의 시편들이 태어나는 것이다. 1970년 신경림은 오랜 침묵을 깨고 유종호의 소개로 《창작과비평》에 시편들을 발표하는데, 「농무」는 이 가운데 한 작품이다. 민중적 화자를 내세워 민중의 현실과 정서를 생생히 보여주는 그의 빼어난 사실주의적인 작품들은 당대 문단에 신선한 충격파를 던진다. 이때만 해도 문단 일각에서는 그의 시를 ‘이상한’ 시로 치부하며 애써 무시하려는 기류가 흐르기도 한다. 그러나 1973년 3백 부 한정판으로 자비 출판한 시집 『농무』가 서점에 깔리자마자 싹 팔려나가면서 신경림이라는 존재는 문단과 독자들로부터 크게 주목받게 된다. 『농무』는 1960년대 이래의 공업화 우선 정책에 밀려 결딴나버린 살림에서 비롯된 농민들의 암울한 심정과 절망, “남의 땅이 돼 버린 논뚝, 조합 빚이 되어 없어진 돼지 울” 앞에서 울분을 터뜨리는 노여움으로 빚어진 시집이다. 그의 시는 “민중시의 물꼬를 텄다.”, “민중시의 개막이 그로 인해 시작되었다.”는 찬사와 함께 당시 《창작과비평》이 걷고 있던 민족 문학론의 창작 성과로 거론된다. 이에 따라 신경림은 단숨에 현실 비판적인 민족문학 진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떠오른다. 시집 『농무』에 실린 대표적인 시로는 「겨울밤」, 「시골 큰집」, 「파장」, 「농무」, 「눈길」, 「그날」, 「폐광」, 「갈대」 등이 있다. 백낙청은 스스럼없이 『농무』에 “이제 우리는, 보아라 이런 시집도 있지 않은가라고 마음 놓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평을 덧붙인다. 신경림은 『농무』 한 권으로 새로운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시인으로 자리매김 되고, 제1회 ‘만해 문학상’을 거머쥔다. 나중에는 『농무』의 영역판 『Farmer’s Dance』가 출간되어 미국 코넬대학교의 한국학 강의 교재로 쓰이기도 한다. 1979년 봄, 신경림은 민요와 『농무』의 민중적 서정이 어우러진 두 번째 시집 『새재』를 내놓는데, 여기에 실린 「목계장터」는 특히 절창이어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다. 「목계장터」는 민요의 기본 율조인 4음보의 가락을 바탕에 깔면서 3음보 가락을 적절히 배치해 지루함을 조절하는, 이 시대 민중문학이 거둔 또 하나의 뜻 깊은 성과다. 단형 소품 서정시 32편에 장시 「새재」가 실려 33편으로 구성된 『새재』에서는 시인의 신념과 민중적 가락이 이전보다 더욱 구체성을 띤 채 펼쳐진다. 신경림은 두 번째 시집 『새재』를 펴낸 지 이태 만에 제8회 ‘한국문학 작가상’을 받는다. 1980년 7월, 신경림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고은, 송기원, 조태일, 구중서 등과 함께 서대문구치소에 갇혀 있다가 두 달 만에 공소기각으로 풀려난다. 침묵을 강요당한 그 시절에 시인은 자신을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강연을 한다. 그뿐 아니라 1984년에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고문, ‘민주화청년운동연합’ 지도위원, 1985년에서 1987년까지는 ‘민족민주통일운동연합’ 중앙위원회 위원 등 재야의 중요한 직책을 기꺼이 맡는다. 1984년 신경림은 ‘민요연구회’를 꾸려 그동안 혼자 해오던 민요 채집을 여럿이 함께 하며 문화운동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그가 민요를 찾아 발품을 팔며 돌아다닌 기록을 갈무리해 펴낸 『민요 기행 1』(1985)은 큰 호응을 받는다. 민요연구회의 활동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낳아 나라 안의 여러 대학에 민요 연구 동아리가 만들어지고 지역 문화 단체에도 민요 모임이 잇달아 생긴다. 1985년 그는 통일을 노래한 본격 민요 시집 『달 넘세』를 내놓는다. 이어 1987년에는 장시집 『남한강』, 1988년에는 시집 『가난한 사랑노래』를 펴낸다. 『가난한 사랑노래』에서 신경림은 도시 변두리 빈민들의 삶으로 눈길을 돌려, 농민 시인에서 민중시인, 노동 시인으로 발돋움한다. 1989년 『민요 기행 2』를 펴낸 그는 1990년에 들어 이 땅의 구석구석까지 뻗어 있는 길과 그 길 위에서 만난 인연을 노래한 기행 시집 『길』을 내놓는다. 『길』에서 시인은 그동안 저도 모르게 얽매인 나머지 민요의 형식을 도식적으로 시에 적용하려고 들던 강박증에서 풀려나 비로소 “민요의 알맹이가 고스란히 녹아든 새로운 언어와 문법”에 바탕을 둔 민요시들을 선보인다. 그는 이 시집으로 제2회 ‘이산문학상’을 차지한다. 신경림은 1993년 시집 『쓰러진 자의 꿈』을 내놓고, 1998년 중국·베트남·일본 등지를 여행하고 돌아온 뒤 시집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을 펴내면서 제6회 ‘공초 문학상’을 받는다. 이마적에 나온 두 시집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개개의 욕망이 어우러지고 부딪치고 서로 밀어내며 만들어내는 사람살이에 대한 그윽한 관찰에서 나오는 성찰의 언어들이며, 강조되는 메시지는 “공생의 윤리”다. 1995년에는 프랑스어로 번역된 시선집이 에서 나와, 신경림 시의 문학성은 이제 국제적으로 공증되는 시기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그가 요즈음 관심의 중심에 놓은 것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살이이며, 그의 눈길은 여기서 비켜나지 않는다. 신경림이 시만 쓰는 게 아니라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을 지내고 환경운동연합 대표를 맡는가 하면 동국대학교 석좌교수가 된 것도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이런 관심 때문이다.   * 생명력이 있는 시를 쓰려면(신경림의 시창작론)(요약) 시라는 것은 남에게 하는 대화이되, 그것이 명확하고 힘이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역시 언어라는것은 남하고 함께 사는 데서 생긴 만큼, 시는 남과 더불어 사는 정서를 담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중요시되지 않으면 시는 난쟁이처럼 작아진다. 세 번째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소재로 하는 만큼 말이 주는 즐거움을 소홀히 해서는 좋은 시를 낳을 수 없다. 그러나 시는 본질적으로 절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등을 재삼 강조하고 싶습니다. 또한 도덕적인 면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그 시는 생명력을 갖기 어렵습니다. 이런 것들이 시를 쓰는 저의 몇 가지 중요한 태도입니다. ​   *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신경림의 시는 우선 읽고 이해하기 쉽다. 첫 시집 『농무』에 붙인 백낙청의 발문대로 시 또는 문학에 대한 특별한 교양이나 공부가 없는 사람이라도 부담감 없이 접근하는 것을 허락한다. 이른바 밑바닥 인생과 이름 없는 자들이 펼쳐 내는 삶의 파노라마가 때로 분노와 슬픔을 자아내는가 하면, 어느새 눈물 나는 웃음과 해학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한결같이 가난하고 소외된 고향 사람들과 산동네 주민들과 허름한 목로주점이나 장터와 같은 노상에서 마시는 텁텁한 막걸리 한 잔과 정담 속에 오갔을 삶의 애환과 고통이 그의 시 전면에 녹아들어 있다. 신경림 시인은 그렇듯 민중의 삶에 깊이 뿌리박은 채 거기서 우러나온 시를 쓰고자 했다. 그리고 민중이 이해하지 못하는 난해한 시를 배격했다. 철저히 민중의 눈높이에 맞춰진 시 세계를 지향했으며, 나아가 민중 또는 서민들이 역사의 주인이 되는 나라를 꿈꾸었다. 그리고 이것은 다분히 현대가 고립되고 소외된 이웃을 양산하는 개인주의 사회라는 판단이 작용하고 있다. 또한 매스미디어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더욱더 사람들 간의 인간적 교류나 교감이 멀어져 간다는 생각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 즉 그의 쉬운 시가 결국 시의 하향 평준화 또는 대중 추수주의라는 일부의 비판을 들으면서까지 민중이 이해할 수 있거나 공감할 수 있는 시를 일관되게 써 나간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당대의 문학이 일부 선택된 소수의 독점물이 되고 있으며, 특히 자족적이고 난해한 시들이 당대의 현실적인 불평등과 정치적인 핍박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반감과 대결 의지가 들어 있다. 다시 말해, 그가 누구나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민중의 생활 언어와 그들의 희로애락을 주된 소재 또는 주제로 삼은 것은, 서구 지향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당대의 시인 또는 작가들 작품 속에 민중 또는 대중에 대한 지적 오만 또는 경멸이 들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임동확/한신대 교수,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 ​파장(罷場)/신경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싯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 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이 시는 산업화로 점점 초라해지는 시골의 현실을 장터의 모습을 통해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시인은 시골장의 개장과 파장이라는 시간적 흐름 속에 향토적인 언어와 비속어 등 일상적인 언어를 적절하게 녹여 농민들의 삶의 현장을 생동감 있게 전달하였다. 이 시는 농촌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더불어 농촌의 궁핍한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시골장터의 개장과 파장이라는 시간적 흐름을 통하여, 서로 안부를 물으며 인정을 나누는 흥겨운 시골 장터의 분위기에서 농촌 현실에 대한 고통스러운 분위기로 시상이 전환되며, 이러한 심리적 이행이 사실적 어휘에 의해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현대시 작품) =======================================================================               신경림 시의 창작방법 특징   공광규     1. 들어가며   신경림(1935~ )은 1955~6년 지에 시 등 여러 시편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등단 후 10여 년간 공백 기간을 가지다가 1970년 에 등의 시편들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본격화 했다. 지금까지 10권의 시집과 이를 모은 전집 2권, 여러 권의 시선집, 민요기행 및 수필집 등 산문집과 평론집을 냈다. 신경림은 한국 현대시사에서 서정시의 창작을 방법적으로 혁신하고, 서사시의 창작 실천을 통하여 방법적으로 확장하였으며, 현실 문제를 시에 반영하는데 있어서 다양한 방법적 확대를 시도한 중요한 시인이다. 등단기부터 현재까지 신경림 시의 창작방법에 관한 변화의 흐름을 간단하게 일별하면 다음과 같다.   가. 등단기의 전통적 서정시 방법 나. 70년대를 전후한 민중의 삶을 제재로 한 이야기 요소를 시에 도입하는 방법 다. 70년대 중반 이후 시에서 민요의 율격과 정서를 수용하는 방법 라. 90년대 이후에 서정성을 강화하는 방법 마. 서사시의 창작을 통한 양식적 실험 바. 최근 산문시의 경향   이러한 변화를 보인 신경림 시의 창작방법상 특징을 요약하면 서정시의 방법적 혁신, 서사시의 방법적 확장, 현실반영시의 방법적 확대이다. 이러한 특징을 시를 통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2. 서정시의 방법적 혁신   신경림은 당시 전통적 서정시나 난해시 위주의 문단 흐름이 당대 민중현실을 형상화하는데 한계가 있다며 서정시의 양식적 혁신을 실험한다. 신경림이 기존 서정시의 전형을 혁신하는 방법은 시에 민중 이야기를 삽화적으로 구성하며, 전통적인 민중시가 양식인 민요와 무가를 수용하는 것이었다. 우선, 신경림 시에 도입된 이야기가 인물의 행위 표출과 사건의 연결을 통해서 어떻게 한편의 시로 구성되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뱃다더라. 어떡할거나. 술에라도 취해볼거나. 술집색시 싸구려 분냄새라도 맡아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 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다오 우리를 파묻어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편지라도 띄워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볼거나. - 전문   단연 26행의 이 시는 전통적 서정시법인 비유나 상징에 의지하기보다 인물의 행위와 사건을 연결하면서 시를 구성하고 있다. 자조적이고 자괴적인 어조가 두드러지는 이 시에 등장하는 인물을 몇 명일까? 화자를 포함하여 7명이나 된다. 또 장꾼들, 면장 딸, 분이, 술집 색시, 이발소집 신랑 등 등장인물의 면면을 봤을 때 소외되고 피폐한 1960~70년대 농촌의 전형적인 인물들이다. 시에 나오는 화자를 비롯한 인물들은 묵내기 화투를 하거나 쌀값 비료값 얘기, 면장 딸 얘기, 분이에 대한 걱정, 묵 먹기, 술 마시고 물세 시비하기, 젓갈 장단에 유행가 부르기, 신랑 다루러 보리밭 건너가기 등의 행위를 연결하여 시를 구성하고 있다. 신경림은 시에 전통적인 민중시가 양식인 민요와 무가를 수용하고 있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하네”( 부분)라고 민요의 율조를 수용하거나, “편히 가라네 날더러 편히 가라네/ 꺾인 목 잘린 팔다리 끌고 안고”( 부분)처럼 무가의 사설 형식을 차용하기도 한다.     3. 서사시의 방법적 확장   신경림은 1,032행의 (1978년)와 1,341행의 (1981년), 그리고 1,661행의 (1985년) 등 세 편의 서사시를 모아서 연작 장편서사시집 을 낸다. 이 시집에 수록된 각 시편의 역사적 배경은 1920년 한일합방, 1919년 삼일운동, 1945년 해방이라는 직선적 흐름으로 구성된다. 이 세편의 시들은 각각 독립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민중의 투쟁이라는 일관되고 공통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 은 일제 강점기 민중의 참담한 현실을 형상화한 (1925년)과 강렬한 민중의 저항의식을 형상화한 (1967)을 전통으로 하는 강한 역사의식이 발현된 동일 계열의 서사시이다. 그러나 신경림은 이들 앞선 서사시들이 갖는 서술방법을 새롭게 하고 있다. 시에 이야기와 노래, 놀이를 결합하거나 집단적 인물배치와 대립을 통해 기존의 서사시 서술 방식을 지양하고 새로운 방법을 모색한 것이다. 신경림 역시 서문을 통해서 을 서구적 의미의 서사시라기보다는 새로운 형식으로서 연작장시로 파악하고 있으며, 세 편 모두 시간과 장소, 기술 방법을 의도적으로 다르게 했음을 밝히고 있다. 민중의 수난과 저항을 서술한 을 읽어가다 보면 서경, 서사, 서정이 유기적으로 배합되는 가운데 민요나 무가 등 전통 민중시가와 공동체 놀이 등이 시의 진행 과정에서 효과적으로 수용됨을 발견할 수 있다. 또 시에 나오는 인물들이 대립하며 갈등과 사건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이 발견된다.   저기 저게 무슨 소리 줄바위 열두 굽이 다람쥐가 뛰는 소리 저기저게 무슨 소리 정참판네 중대문에 왜놈 청놈 나드는 소리   위에 인용한 부분은 전래되어 내려오는 전승사설이 앞에 나오고 창작자가 직접 만드는 창조사설이 나중에 나오는 것을 반복하면서 흐름을 구성하고 있다. 또 사설은 대화형식으로 구성된다. 문답형식의 대창으로 짜인 민요의 서술원리를 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민요형식이 수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아래 인용한 부분과 같이 한 연 안에 노래와 이야기가 섞이는 경우도 잇다.   비야 비야 오지마라 우리 연이 홑적삼 노랑저고리 다 젖겠다 팔배는 흥얼대는데 하룻밤이 지났는데도 마을은 그냥 시끄러워 저 곳간 속에 썩은 쌀은 우리 것이다   정참판의 집을 습격한 주인공인 돌배와 모질이, 근팽이, 팔배가 헌병보조원과 정참판네 하인들에게 쫓겨서 도망을 가는 부분이다. 창작자는 인물들이 도망을 가면서 전래 동요인 를 부르는 것으로 민요와 서사, 즉 노래와 이야기를 결합시킨다. 이렇게 신경림은 서사시에 이야기와 노래, 그리고 놀이를 혼합하면서 집단 인물의 대립과 사건을 연쇄시키면서 시를 구성해 간다.                   4. 현실반영 시의 방법적 확대   신경림은 시를 현실 삶으로부터 분리시키지 않고 있으며, 현실적 삶의 내용을 다양한 창작방식으로 재현하고 있다. 특히 그의 많은 시편들은 정치적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1979)라는 글에서 1950년대 이후 우리 시에서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내용으로 수용하거나 주제로 취하는 예가 극히 드물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적 내용을 가진 시들이 이데올로기의 심부름꾼이나 녹음기 같이 전달에 그친다면 시적으로 실패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신경림은 이데올로기의 시적 수용은 사람의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을 취할 것을 주문한다. 그리고 정치적 상상과 현실을 서정적으로 형상하여 정서화 하기 위한 방식으로 간결한 암시적 묘사와 인유를 활용하고 있다.   나는 죽은 당숙의 이름을 모른다 구죽죽이 겨울비가 내라는 제삿날 밤 할 일 없는 집안 젊은이들은 초저녁부터 군불 지핀 건넌방에 모여 갑오를 떼고 장기를 두고, 남폿불을 단 툇마루에서는 녹두를 가는 맷돌소리. 두루마기 자락에 풀 비린내 묻힌 먼 마을에서 아저씨들이 오면 우리는 칸델라를 들고 나가 지붕을 뒤져 참새를 잡는다. 이 답답한 가슴에 구죽죽이 겨울비가 내리는 당숙의 제삿날 밤. 울분 속에서 짧은 젊음을 보낸 그 당숙의 이름을 나는 모르고. - 전문   단연 15행인 위 시에서 시적 시간은 당숙의 제삿날이다. 이 작품의 핵심은 죽은 당숙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과, 당숙이 울분 속에서 짧은 젊음을 보냈다는 것이다. 죽은 당숙의 이름을 모르니 화자가 어렸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름을 모른다는 것을 반복하여 강조하는 것으로 봐서는 이름을 말하기가 석연치 않은 분위기라는 것이다. 또 젊어서 죽은 당숙인데도 마을에서 아저씨들이 오는 것을 보면, 죽을 당시에 젊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부터 어떤 존경을 받을만한 인물의 예사롭지 않은 죽음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거기다가 “울분 속에서 짧은 젊음을 보”냈다는 부분에서 당숙이 현실에 순응하지 않고 현실에 대한 불만이나 사회개혁을 위해 활동을 하다가 일찍 죽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5. 나오며   이상 논의한 신경림의 시 창작방법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가 서정시의 방법적 혁신이다. 신경림은 시에 이야기의 도입과 민요 및 무가의 차용을 통해 기존의 서정시를 방법적으로 혁신하고 있다. 신경림 시에 이야기가 있는 경우에는 민물의 행위와 사건이 확연하게 드러나 있고 시간 및 공간의 질서 역시 뚜렷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야기의 주체인 민중의 짤막한 이야기나 사건을 연결하는 삽화적 구성을 하고 있다. 또 민요와 무가 등 전통 민중시가 양식을 시에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민요 율격을 계승하고 민중 정서를 재생하며, 무가 운율의 차용과 어법을 활용하는 창작방법상 특징을 보여준다. 둘째는 서사시의 방법적 확장이다. 신경림은 장편서사시 의 창작과정에서 민요와 무가를 이야기 속에 적극적으로 결합시키거나 농무 등 집단놀이를 대거 수용하는 실험을 통해 기존의 서사시를 방법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또 인물을 집단적으로 대립시키고 집단 행위의 갈등과 사건의 전개라는 구성방식을 취하고 있다. , , 세 편의 장시는 연작형식이기는 하지만 화자의 변화와 함께 아야기와 노래 및 놀이의 결합 분포를 다르게 하는 창작방법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셋째는 현실반영 시의 방법적 확대이다. 신경림은 시에 개인의 체험이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현실을 반영할 때 다양한 비유방식으로 정서화, 감각화를 시도한다. 그가 주로 사용하는 방법은 정치적 사건의 암시적 묘사, 역사적 인물과 시사적 사건의 인유를 활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풍유와 우화의 방법도 활용한다. 또한 시에 울음, 통곡, 흐느낌 등 울음과 관련된 어휘의 반복을 통하여 자아 표출의 변화를 끊임없이 보여준다. (문학아)             신경림의 시론                                                                                     ///이승훈 (1) 나는 왜 시를 쓰는가  申庚林은 1955년 《문학예술》지에 〈낮달〉이, 다음 해 〈갈대〉석상〉이 추천되면서 시단 활동을 시작한다. 그의 초기시는 자연을 소재로 삶의 슬픔을 간결하게 노래하지만, 1973년 시집 《농무》를 계기로 이런 숙명적인 슬픔의 정서는 극복된다. 이 시집이 던진 문제점에 대해서는 당시 의견이 분분했지만, 윤영천 교수의 견해에 의하면,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5 ) 첫째는 시와 독자간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한 사회적 성찰의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비슷한 시적 태도를 지녔지만, 난해성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60년대의 김수영·신동엽 등과 변별되는 신경림의 특성으로 부연된다. 둘째는 서정시의 기존 통념에 근본적인 이의를 제기, 그 개념을 혁신코자 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삶의 구체성이 배제되고, 일체의 상황적 의미가 사상된 초역사적 ‘순수서정’이 아니라 ‘생활서정’에 주목하는 현실주의시를 지향한다. 세째로 시적 소재를 민중적 차원으로 확대시켰다는 점이다. 그것은 주로 농민의 궁핍상, 피폐한 광산촌 이야기, 떠돌이 노동자와 도시로 유입된 이농민의 실상 등을 겨냥한다. 윤영천 교수의 이런 지적은 신경림의 시적 특성을 비교적 정확하게 요약한 것으로 생각된다. 신경림에게는 이 시집 외에 《새재》(1979), 《달넘세》(1985), 장시 《남한강》(1987) 등이 있고 평론집으로는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1983), 산문집으로는 《우리 시의 이해》(1986), 문학선집으로는 《씻김굿》(1987) 등이 있다. 그의 대표적인 평론으로는 〈문학과 민중〉(1973), 〈농촌현실과 농민문학〉(1972) 등이, 시론으로는 〈나는 왜 시를 쓰는가〉(1979) 등이 있는 바, 이 자리에서는 후자를 중심으로 시에 대한 그의 견해를 살피기로 한다. 이 시론은 70년대 우리시의 한 경향으로 지적되는 이른바 민중시를 실천한 그의 생각이 솔직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 글에서 그가 강조하는 것은 시적 대상과 독자의 수용문제, 쉬운 표현과 한자문제, 민요적 가락 및 대중가요와 시의 관계 등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로 그는 시적 대상, 그러니까 시의 소재를 민중적 삶에 두어야 하며, 시의 수용 역시 민중에게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그의 고백에 의하면, 자신의 초기시에 대한 비판과 관계된다. 이 시론에서 그가 인용하고 있는 초기시 〈갈대〉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이 시는, 그의 말에 따르면, 아무런 의식 없이 쓴 시에 속한다. 아무 의식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앞에서 나는 그의 초기시가 삶의 숙명론적 우수나 슬픔을 노래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런 시세계가 의식없이 씌여진 것이라면, 그가 말하는 의식이란 단순한 사전적 의미를 넘어서는 개념이라는 할 수 있다. 그의 경우 의식을 가지고 시를 쓴다는 말은 위의 시가 놓치고 있는 부분들에 대한 자각을 뜻한다. 그 자각은 위와 같은 시를 쓰다가 거의 10년을 쉬면서 그가 깨달은 우리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인식이 계기가 된다. 그것은 50년대 말 60년대 초의 우리나라 시골 농촌의 황폐한 실상으로 부연된다. 따라서 그가 새로운 시세계로 넘어가면서, 흔히 민중시의 길을 튼 것으로 평가되는 시집 《농무》는 우리의 삶에 대한 역사의식과 민중의식을 형상화한다. 이때의 민중의식을 그는 ‘이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과 ‘끈질기고 꿋꿋한 생명력’이라는 두 차원에서 이해한다. 전자가 민중의 삶을 억압하는 부정적 요소라면, 후자는 그런 억압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고 꿋꿋하게 삶을 영위하는 민중적 삶을 뜻한다. 말하자면 그의 경우 민중의식은 부정적 요소와 긍정적 요소를 내포한다. 그의 시가 우리시의 역사에 하나의 새로운 충격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두 요소의 변증법적 울림 때문이었으리라. 왜냐하면 우리시의 경우 시골이나 농촌은 신경림만이 노래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시인들은 농촌의 삶이 보여주는 위의 두 요소 가운데 어느 한 요소만을 거의 감상적인 태도로 노래했다. 그런 점에서 그가 노리는 시의 소재로서의 민중의식은 당시로서는 새로운 느낌을 준 것이 사실이다. 또한 이런 의식이 이른바 민중들에게 쉽게 읽혀져야 한다는 그의 주장 역시 타당하다. 그러나 한편 나는 우리시가 모두 그래야 된다는, 그의 주장 배후에 깔린 강압적인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시라는 것이 반드시 무엇을 노래해야 하고, 또한 반드시 어떤 계층에게 읽혀야 한다는 것은 시의 공리성을 지나치게 낙관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시가 민중에게 쉽게 이해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자연스럽게 쉬운 표현의 문제로 발전한다. 시를 쉽게 표현하자는 그의 주장은 당대의 우리시가 보여주던 이른바 난해시의 문제와 관련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난해시의 문제는 아직도 많은 시비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에 의하면 우리나라 난해시는 개인주의가 극도로 발달한 결과 나타났으며, 따라서 남, 이웃, 독자에게 호소하기 보다는 오직 자기고백에 만족한다.  이런 사정을 그는 민중적 바탕의 상실과 관련시킨다. 말하자면 난해시는 ‘민중에 대한 지적 오만 내지 경멸’이 그 밑바탕에서 작용한다고 부연된다. 따라서 난해시는 반역사적·반민중적 엘리트주의의 소산으로 평가절하된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의 난해성은 그렇게 단순하게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엘리트주의나 민중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가 환기하는 예술의 소외, 나아가 인간의 소외와 관계되기 때문이다. 시가 어렵게 된데에는 물론 여러 요인이 있다. 그러나 근대시와의 대조 속에서 읽게 되는 이른바 현대시의 어려움은 먼저 이 시대가 예술을 예술로 수용하지 않는다는 점이 동기를 이룬다. 참된 예술적 가치가 산업적 가치로 둔갑할 때 예술가들이 그런 가치에 저항하는 길은 이른바 아방가르드 예술을 통해서이다. 이 아방가르드 예술은, 시의 경우, 그 매재가 되는 언어의 일상적 기능을 불신하고, 그런 불신은 사회에 대한 저항의 미적 형식이 된다. 언어의 일상적 현실적 기능을 부정할 때 시는 어려워지게 마련이며, 또한 사회로부터 소외된다. 그러나 이런 소외가, 아도르노도 지적했듯이, 사회를 부정하는 잠재력이 된다. 예술의 이런 부정성은 따라서 엘리트주의로 치부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나, 민중주의로 간주되는 반부르주아 이데올로기도 동시에 거부한다. 그것은 이 시대에 오면서 자유, 휴머니티, 정의라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허위의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참된 예술가들이 간파했기 때문이며, 또한 마르크스적 시각에서 강조되는 이데올로기가 지나치게 거칠다는 사실, 나아가 궁극적으로 참된 예술과 이데올로기의 관계는 상호 배타적인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물론 예술은 이데올로기를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존의 이데올로기를 零化 혹은 허위화시킴으로써만 가능하다. 6 )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변증법적 비판을 전제로 할 때, 현대시의 난해성 문제는 무조건 매도되기보다는 좀더 성숙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하리라고 본다. 쉬운 시를 쓰자는 말 자체는 시비거리가 안된다. 그리고 신경림도 지적하듯이 표현이 쉽다는 것은 시의 수준이 낮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쉬운 표현의 문제가 한글 전용의 문제로 발전하는 데에는 논리적 비약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가 한자를 비판하는 것은 그것이 문화의 독점현상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지식인들일수록 어려운 한자나 외래어를 사용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른바 엘리트주의를 지향한다. 이런 견해에는 나도 동감이다. 그러나 성찬경의 시론을 살피면서도 말했듯이, 우리시가 보여주는 관념이나 철학의 빈곤이라는 측면을 염두에 둘 때 순수한 우리말만으로 시를 쓰자는 주장은 자칫하면 국수주의적 폐쇄성으로 나갈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한자를 사용하자는 게 아니라 같은 한자라 하더라도 우리말로 순화시키거나 그것이 어려우면 한글로 표현하면 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렇다고 관념어 투성어인 한자를 무조건 쓰자는 것이 아니다. 가능하면 관념어 역시 한글로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우리시는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다. 신경림 역시  "제 경험을 또 내세우는 것이 되겠는데, 저는 제목 이외에는 모두 시에서 한글 전용을 했습니다만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덧붙여 말씀드려 둡니다. 부끄러운 말씀입니다만 저 자신 한문에 익은 독자들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어 아직 제목만은 한글 전용을 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고백해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한다. 세째로 그는 시가 민중으로부터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 고유의 민요적 가락을 되살리자고 주장한다. 그것은 민요 속에는 ‘이 민족의 한자 설움, 견딤과 참음, 끈질긴 생명력’이 넘치고 있기 때문이다. 되살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죽은 것 혹은 죽어가는 것에 새롭게 생명을 부여하자는 뜻이리라. 민요적 가락을 우리시에 도입한다는 문제는 오늘의 우리시가 음악적 요소를 상실하고, 시각적 요소 아니면 내용전달에만 치우치기 때문이리라. 시가 아니라 산문에 가까운 것들을 시랍시고 발표하는 최근의 우리시의 상황을 놓고 볼 때, 시의 기본요소로서의 음악성을 강조하는 그의 견해는 타당하다. 그러나 민요적 가락의 도입문제는 크게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고 본다. 먼저 우리의 근대시가 형성되면서 비록 아직도 그런 단계에 있기는 하지만, 최초로 자각한 것이 이른바 詩歌의 단계에서 詩의 단계로 넘어간다는 점이다. 이조시가니 고려가요니 부르던 것이 갑오경장 이후 시라는 용어로 분화된다. 따라서 謠와 詩의 분리, 말하자면 노래와 시의 분리는 근대시의 특성을 형식의 차원에서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낳는다. 다음 민요적 가락을 현대시에 되살린다고 할 때, 그 변형과정이 문제된다는 점이다. 시인의 호흡과, 전통적 율격 가운데 하나인 민요적 가락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만일 이런 갈등이나 긴장관계가 상실된다면, 그가 말하듯이 대중가요와 시의 관계는, 형식의 차원에서는 변별성을 상실할 가능성이 크다. 그에 의하면 대중가요는, 내용의 차원에서는, 병든 노래로 규정된다. 그리고 이런 병적 현상은 병든 우리의 사회를 반영한다. 시인은 이런 병적 현상을 치유할 의무가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병든 노래는 개인의 골수에 병균을 옮겨 놓기 때문이다. 병들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교환가치에 지배되는 삶을 뜻한다면, 시인이 할 일은 대중가요와의 싸움보다는 그런 가요의 배후에 있는 상업주의에 대한 미적 저항이 아닐까. 결국 신경림의 시론에서 읽을 수 있는, 이상에서 살펴본 내용들은, 그가 민중시의 개념을 실천하고, 특히 그의 민중의식이 반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를 표방한다는 진보적 태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시적 형식의 차원에서는 지나치게 보수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내용의 진보성과 형식의 보수성은, 그런 점에서, 70년대 민중시의 한 특성으로 지적된다.  ========================================= 신동엽 시인의 생가 [아시아경제 ] 부여에 있는 고 신동엽 시인의 옛집에서 신동엽 시인(1930~1969년)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신경림 시인(79)이 출연해 '한 정신의 탄생지'를 증언하는 뜻 깊은 자리기도 하다.  신동엽문학관은 행사의 제목을 신경림 시의 제목을 따서 '신동엽 시인의 옛집에서'로 정했다.  ‘신동엽문학제’에는 많은 시인, 예술가들이 출연해 창조적 영감을 선사. 여기엔 신동엽 시인과 함께 문단활동을 전개했던 신경림 시인이 들려주는 ‘신동엽 이야기’를 소개... 신경림 시인 주민잔치 '전경인 이야기 마당'이 준비. 전경인(全耕人)이란 신동엽 시인이 1960년대에 예지한 융합적 인간형을 뜻한다.  신동엽문학관은 '신동엽 시인' 영문판 도록 출판기념회와 '신동엽의 금강 이야기'  마련...  ================================================= @!@ 신경림 시인이 고 서정주 시인을 비판했다. "젊었을 때는 좋은 시를 썼는지 몰라도, 늙어서는 나쁜 시를 쓰고 나쁜 짓을 했다"면서 비판의 화살을 날렸다. 신경림 시인은 25일 저녁 경남 진주시 진주문고(대표 여태훈) "북카페"에서 1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열린 초청강연회에서 이같이 말했다. 신경림 시인은 "시와 친해 놓으면 좋다"면서, "세상 살아가는데 아무 피해 보는 것도 없고, 친해 놓으면 남이 가지지 못한 행복을 가질 수 있다"라며, 좋은 시에 대해 이야기 했다. 신경림 시인은 "시와 대화를 하면서 읽어라"고 말했다. "흔히 학교에서 시를 가르칠 때 "은유"가 어떻고, 상징과 비유가 어떻고 하는 것으로 시를 이해하지 말라. 시인과 대화를 한다는 생각으로 읽으면 재미있다."그는 "막연하게 어딘가 가고 싶을 때, 누구와 이야기하고 싶을 때, 한밤 중 친구한테 전화하고 싶을 때, 낯이 익지 않은 사람과 대화를 하고 싶은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런 때 시를 읽으면 재미가 있다"고 설명.그러면서 어릴 때 읽었던 몇 편의 시를 들추었다. 김영랑 시인의 "언덕에 바로 누워"는 청소년 때 읽었는데, 당시 김영랑 시인과 이야기를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 김영랑 시인과 함께 "젊음"과 "그리움" "고독"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시인한테 내 마음을 들려준다고 생각했다는 것.진주 출신의 이형기 시인이 생각난다며 "추상정사"를 소개했다. 풀밭에 누워 어릴 때 먼 것에 대한 막연함을 노래했던 시인데, 이 시를 읽으면서 이형기 시인과 함께 그리움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신경림 시인은 "시를 분석하고 따지려 하지 말라"면서, 좋은 시는 "시를 읽으면 머리에 그림이 뚜렷하게 그려져야 한다"고 말했다. "시를 읽을 때 머리 속에 그림을 하나 그려지면 좋은 시다"며, 김종삼의 시 "묵화"를 소개했다. 또 신경림 시인은 "좋은 시"는 "시를 읽으면 시를 읽는데 끝나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삶에 눈을 뜨게 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직후 월북한 이병철 시인의 시를 소개하면서, 북한에 가서 쓴 "김일성 찬가" 등의 시를 보니 "아니더라"면서, 그가 월북하기 전에 쓴 "나막신"을 소개했다. @!@신경림 시인은 영국의 "워즈워드"라는 시인을 이야기하면서 "시인도 좋은 시를 쓸 때가 있고 나쁜 시를 쓸 때가 있다"면서, "그러나 나쁜 짓을 할 때 쓴 시는 다 버리고 그 일에 대해 비판할 줄 아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두환 앞에 가서 축시 써준 서정주와 비슷한 사람"이라며, 워즈워드를 비판했다. 워즈워드는 "여성교육을 반대하고, 귀족만 교육을 해야 한다 했던 사람"이라며, "철저하게 기득권 보수주의자였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당시 살았던 "로버트 브라운"이란 시인은 39살까지 살면서 워즈워드를 비판했다고 소개. "브라운은 워즈워드는 80살까지 살았는데, 얼마나 오죽 했으면, "그가 모든 시인을 망신시켰다"고 하고 "시인은 빨리 죽어야 한다"고 했겠느냐"라고 소개.신경림 시인은 그러면서 "우리나라에도 시인 중에 젊었을 때 좋은 시를 쓰다가 늙어서 나쁜 시를 쓰고, 나쁜 짓을 많이 한 시인들이 있다"고 말했다. 남한에서는 서정주 시인, 북한에서는 이병철 시인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서정주 시인의 "동천"이란 시도 감흥이 없는 시라고 비판했다. "행적이 나쁘기에 좋은 시로 읽혀지지 않는다"는 것.그는 서정주와 이병철 시인은 "나쁜 시"를 쓰고서, 권력자로부터 대가성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서정주 시인은 "전두환 전 대통령 앞에서 "축시"를 써주고는 세계일주여행이란 대가"를, 이병철 시인은 ""김일성 찬가"라는 시를 써주고는 북한에서 편안한 생활을 보장받았던 것"이 대가성이라 설명.올해 67살인 신경림 시인은 충주에서 태어나 56년 에 시 "갈대"로 등단했고, 73년 첫 시집 를 냈다.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산문학상, 단재문학상을 받았고, 등의 시집이 있다. 신경림의 (1, 2권. 우리교육 간)는 "정지용에서 천상병까지" 다루었다. 조지훈 신석정 김종삼 신동엽 박용래 박봉우 임화 권태웅 이육사 오장환 김영랑 이한적 윤동주 박익환 한용운 백석 신동문 유치환 박목월 김수영 등을 다루었다. ======================================   “내 시라도 수능선 20% 밖에 못 맞춰” 신경림 시인의 ‘시 재미있게 읽는 법’   신경림 시인이 ‘시를 읽는 재미’란 주제로 대중 앞에 섰다. 문화예술위원회가 예술가의 집에서 여는 ‘우리시대 예술가의 명강의’에서 그는 찢어발기기 교육으로 넌더리나는 시와 친해지는 법을 들려줬다. 좋은 시는 독자와 소통을 해야 하고, 남다른 표현, 내재된 이미지, 시대의 모습, 리듬이 있어야 한다는  그의 시 이야기를 소개한다.  “언젠가 대학입시에 내 시가 나왔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학원 선생 하는 후배가 전화를 걸어 왔다. 내 시에 대해 그가 묻는 대로 얘기해줬다. 그런데 나중에 그가 다시 전화해선 “형님은 형님 시의 20% 밖에 못 맞췄어”라고 하더라.”  신경림 시인은 “시가 어려울 필요가 없는데 너무 어려워졌다”면서 “이런 입시 시험이 시 읽는 재미, 시의 참맛을 그르치고 있다”며 시를 재미있게 읽는 법을 풀어 나갔다.  1. 시는 소통이다  신경림 시인은 먼저 “시는 소통이다”라고 생각하면 알기 쉬울 것이라며 강의를 시작했다.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란 18세기 시인은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다. 그 전까지 시는 문어(文語)로 썼는데 워즈워드는 시문학 사상 처음으로 구어(口語)로 시를 썼다. 그런 그도 처음에는 구어로 시를 쓰는 게 자신이 없었다. 1791년쯤인가 ‘서정시집’이란 시집을 냈는데 두려운 나머지 가명으로 냈다. 그 시집이 잘 나가자 재판을 찍으면서 처음으로 이름을 밝혔다. ‘나 워즈워드가 S.T.콜리지와 함께 쓴 것이다’라고…. 그래도 자신감이 부족했는지 거기에 시가 무엇인지 서문을 붙였다. 누구나 시를 쓸 수 있고,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으나 시라면 그래도 무엇 무엇이 있어야 한다고 풀어나갔는데 결론은 ‘시는 소통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소통하는 글을 쓰면 다 시인이냐? 그것은 아니다. 워즈워드는 ‘시인은 그 소통을 힘 있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결국 시는 ‘소통을 힘 있게 하는 것’인 셈이다.”  이런 면에서 시는 심오한 것,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대화하는 것이라고 신경림 시인은 강조했다.  “독자와 대화가 안 되는 시는 문제가 있다. 대화가 안 되는 게 덮어놓고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원칙적으로 소통이 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김영랑의 시는 이런 정의에 잘 맞는 좋은 시라고 했다.  “김영랑은 ‘시는 의미가 아니라 느낌을 전하는 것’이라며 제목도 붙이지 않고, 1, 2, 3, 4… 숫자를 달아 썼다. 나중에 직계제자인 서정주가 시집을 내면서 제목을 달았는데 그것도 생각을 많이 하고 단 게 아니라 각 시의 첫줄을 제목으로 삼았다.”  그러면서 김영랑의 ‘언덕에 바로 누워’를 예로 들었다.  언덕에 바로 누워/ 아슬한 푸른 하늘 뜻없이 바래다가// 나는 잊었습네 눈물 도는 노래를/그 하늘 아슬하여 너무도 아슬하여// 이 몸이 서러운 줄 언덕이야 아시련만/ 마음의 가는 웃음 한때라도 없더라냐// 아슬한 하늘 아래 귀여운 맘 질기운 맘/ 내 눈은 감이였데 감기였데.//  “이 시를 읽으면 아득한 소년 시절의 슬픔과 그리움을 담아 썼음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어떤 시든 그것을 읽고 느낌을 받으면 소통이 된다. 그게 시다.” 신경림의 설명이다.  2. 자기만의 표현이 있어야 한다  신경림 시인은 “아무 것이나 시가 아니다. 남들이 표현하지 못한 것을 표현할 수 있어야 시가 된다”고 했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김수영의 ‘풀’에서)  “‘풀이 눕는다’고 했는데 이런 표현은 김수영 시인 밖에는 할 사람이 없다. 이처럼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만지지 못하는 것을 만지고 그것을 독자에게 이야기하는 게 시인이다.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라고 썼다고 하자. 그것은 시가 아니다.”  김춘수의 ‘꽃’도 들려줬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이 시는 명확하게 꽃의 개념을 색다르게 표현했다. 남이 느끼지 못한 것, 남이 만지지 못한 것을 다뤄야 시가 된다.”  그런 면에서 시는 가요와 구분된다고 했다. 남들이 보지 못한 것만 다뤄서는 좋은 가요가 되기 어려운데 시는 그렇지가 않다는 것.  “언젠가 외부 강의를 하는데 어느 나이 많은 분이 앞에서 열심히 듣고 있었다. 궁금해 하면서 강의를 마치고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그분이 함께 왔다. 저녁 먹고 누군가 노래방에 가자고 해서 갔더니 그분도 함께 갔다.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나니 그 분이 그 노래를 자기가 작사했다고 했다. 다음 순번이 돌아와 노래를 불렀더니 그 노래도 자기가 작사했다고 했다.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세 곡을 불렀는데 모두 그가 작사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친해져서 자주 만나게 됐는데 어느 날 그가 시 한 편 쓰면 고료로 얼마나 되냐고 물어왔다. 5만원 받을 땐데 내 딴엔 자존심도 있고 해서 부풀린다고 10만원이라고 했는데 그가 깜짝 놀라더라.  자기는 노래 한 곡 작사하면 1000만원 받고 많이 받을 때는 3000만원까지 받는다고 했다. 기가 죽었다.  그런데 그도 콤플렉스가 있었다. 원래 시인이 되고 싶었는데 먹고 사는 것 때문에 작사를 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틈틈이 시를 쓴다며 보여줬다. 그에게 남들이 다 보는 것을 잘 정리하면 좋은 가요는 되지만 시는 아니라고 했다.”  3. 시는 설명하지 않는다.  “시는 보여주기만 한다. 사실은 이게 가장 중요하다. 시는 읽는 사람이 느낌을 받는 것이다. 시가 설명을 하면 그것은 좋은 시가 아니다.”  예로 김종삼의 ‘묵화’를 들었다.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이 시를 읽고 이중섭의 ‘소’를 연상했다. 50년대 중반 전쟁 이후 혼자 쓸쓸이 사는 할머니의 모습이 그대로 떠오른다. 시란 그런 것이다. 그만큼 이미지가 중요하다. 시를 읽을 때 (이미지가) 머리에 강렬히 떠오르는 게 좋은 시다.”  곁들여 서정주의 ‘문둥이’ 구절을 읊었다.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이 시는 사람의 원죄를 그렸다. 그런데 시를 읽으면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그런 게 좋은 시다.”  신경림 시인은 아시아의 시에는 원래 이미지에 대한 개념이 있었다고 한다.  왕유는 이백의 시 속에는 산뜻한 그림이 있어서 좋다고 했다.  이규보의 ‘백운소설’에도 그런 대목이 있다. 여기서 소설은 작은 논문을 의미한다. 거기에 시 얘기가 나오는데 ‘시는 보여주는 것이다’라는 개념이 많이 나온다.”  설명하는 것은 좋은 시가 아니란 설명이다.  4. 시는 시대를 그려야 한다.  “시를 읽으면 시인이 어떤 시대에 살았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다. 동시대 시인이라면 어떻게 사는가를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다. 그처럼 시는 그 시대 삶에 깊은 뿌리를 박아야 한다.”  그러면서 이용학의 ‘북쪽’을 예로 들었다. 월북시인인 이용학은 서정주 오장한 임화 등과 함께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꼽혔다. 신경림 시인은 “모두 월북하고 서정주만 남다보니 우리 문학을 왜곡한 면이 있다”고 곁다리로 설명했다.  북쪽은 고향/ 그 북쪽은 여인이 팔려간 나라/ 머언 산맥이 바람에 얼어붙을 때/ 다시 풀릴 때/ 시름 많은 북쪽 하늘에/ 마음은 눈 감을 줄 모르다//  “이 시는 1931년에 썼다. 당시 함경북도는 딸을 팔아먹을 정도로 가난했다. 잡곡 몇 섬 받으려 파는 게 아니라 적어도 팔려 가면 배는 곯지 않으리라는 생각에서 그랬다. 중국이나 러시아로 딸들이 팔려갔다. 그것을 노래한 시다. 그 시대 삶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줬다. 그러한 재미가 있는 게 좋은 시다.”  시가 꼭 현실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것은 좋은 시가 아니란다.  5. 리듬이 있어야 시다.  ‘농무’를 낼 때만 해도 돈 주고 시집 내주는 곳은 거의 없었다. 돈 받고 시집 내는 시인은 서정주 박목월 등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농무’를 내 돈으로 500부 찍었다. 지나가던 친구가 “자네 시집 냈다며…”라면 뛰어 들어가 한 권씩 꺼내다 줄 때다. 누가 두 권 필요하다면 더 가져가라며 다섯 권씩 안겨 보냈다. 남의 회사 다닐 땐데 500부 쌓아 놓으니 자리를 많이 차지해 빨리 치우려고 선생님들께 한 부 보내드린다며 주소를 여쭈면 “오는 게 너무 많아 뜯어보지도 않고 버려”라며 주소조차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 때에 비하면 요즘 사람들이 시를 읽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시가)정말 재미있게 읽히지 않는 것은 ‘리듬’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 시에는 리듬이 없다.”  신경림 시인은 “유치환 시의 첫 번째 미덕은 리듬”이라며 ‘그리움’을 보자고 했다.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언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디메 꽃같이 숨었느뇨//  “이 시의 리듬이 얼마나 좋으냐. 리듬을 다시 찾는 것, 이것이 우리 시가 가야할 길이다. 리듬이라니 글자 수 맞추는 것을 생각하는데 그게 리듬은 아니다. 우리말의 리듬은 서구의 리듬과는 다르다. 높낮이가 없고 액센트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말은 아주 발달해 액센트나 인토네이션이 없어도 (의미) 전달이 잘 된다. 시에선 ‘자연스럽게 읽히는 것, 그것이 리듬이다.’ 자유시도 자연스레 읽히는 게 많다.”  시인은 서정주의 시가 맛깔스럽다며 ‘동천(冬天)’을 예로 들었다.  내 마음 속 우리 임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아주 맛깔스럽다. 특히 호남 말의 맛깔스러움은 착착 감긴다. 아무리 사상이 좋아도 (시라면)착착 달라붙을 정도로 감기는 맛이 있어야 한다. 백석은 평안도 사투리를 기가 막히게 쓰고 박목월은 경상도 사투리를 기가 막히게 써서 말의 맛을 살렸다. 시를 재미있게 읽으려면 말의 맛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화려한 것만 좋은 것은 아니라면서 조지훈의 玩花衫(완화삼)과 박목월의 ‘나그네’를 비교했다. 완화삼은 지훈이 목월에게 준 시다.  차운산 바위 우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지훈의 시에 목월은 ‘나그네’라는 시로 화답했다. 목월은 “해방될 때까지 그는 내가 사귄 유일한 시우였다(박목월, 지훈 회상)”고 할 정도로 지훈과 가까웠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은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시를 주고받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멋진데 그 시구 또한 재미있다.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라는 완화삼의 한 구절을 목월은 ‘술 익은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로 바꿨다.  “많은 사람들이 박목월의 ‘나그네’를 더 좋아하는데 말의 맛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멋진 말은 재미가 없다.” 신경림의 설명이다.  그러면 어느 정도로 맛을 살려야 할까. 신경림은 두보의 춘망(春望)을 가장 뛰어난 시라고 격찬한 청나라 때 문인 기윤의 설명을 빌려 이를 풀어 나갔다. “기윤은 춘망에 대해 하나도 꾸미지 않은 듯한데 실제로는 말의 아름다움이 더하다. 좋은 시는 말의 꾸밈이 보이지 않아야 한다.”  신경림 시에 얽힌 에피스도 하나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로 시작되는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 노래-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1988)’란 시는 입시에도 나올 만큼 알려져 있다. 시인은 이 시에 대한 사연을 소개했다.  “86년 무렵인가, 길음동에 살 때인데 술을 좋아해서 매일 막걸리 몇 잔씩 마시고 가는 집이 있었다. 아주머니와 딸이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집 딸이 상의할 게 있다고 했다. 뭔 일인가 조마조마했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지명수배를 당해 희망이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했다. 그래서 “빨리 결혼하라”고 했다. “지명수배 당해 잘 나타나지도 않는 사람과 어떻게 하냐”기에, “그러면 내가 주례도 서 주고, 축시도 써 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결혼을 하게 됐는데 몰래 올리는 식이라 손님도 몇 명 없고 해서 주례사는 1분 만에 끝내고 ‘그의 사랑’이란 축시를 읽어줬다. 그러고서 나오니 너무 기분이 너무 좋은 거야. 그 흥에 쓴 시가 ‘가난한 사랑 노래’다. 물론 그들 부부는 지금 잘 살고 있고.”  ■ 신경림 시인은    “소수에 의해서만 씌어지고, 또 소수에 의해서만 읽히더라도 시는 영원히 살아남을 것”을 믿을 만큼 그는 끔찍이 시를 사랑한다. 시 읽는 사람 늘리려 홍보대사마냥 시 읽기 강좌에 자주 서는 것도 그래서다.  충주 출신으로 1935년생이다.  1956년 ‘문학예술’에 '갈대' 등을 추천받아 등단했다. 한때 고향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던 그는 충주 일원을 배경으로 한 시를 많이 썼다.  1973년에 출간한 첫 시집 ‘농무’나 최근 출간한 ‘낙타(2008)’를 비롯해 ‘새재’ ‘달넘세’ ‘남한강’ ‘가난한 사랑 노래’ ‘길’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뿔’ 등 다수의 시집을 냈다.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자가상, 이산문학상, 단재문학상, 대산문학상, 만해상, 스웨덴 시카다상, 예술부문 호암상 등 다수의 상을 받았다. 동국대 석좌교수로 집과 가까운 북한산에 자주 간다고 했다.  신경림의 시와 친해지는 법    신경림 시인은 사람들이 시와 멀어진 이유를 잘못된 시 교육과 독자와 소통하지 않는 시인들의 자세에서 찾고 있다. 독자들에게 시 읽기를 권하는 차원에서 두 권의 ‘시인을 찾아서’란 책까지 낸 그는 시와 친해지는 법을 이렇게 설명했다.  “커피 한 잔 값이면 시집 한 권 살 수 있지 않나. 많이 읽어라. 어쨌든 자주 읽어야 시를 알게 된다. 시와 친해져야 시를 맛볼 수 있고, 또 시를 알게 된다.” “시를 읽으면 상상력이 풍부해지고 말을 맛깔스럽게 하는 능력이 커진다”는 그는 “시집 사는 사람이 100명 중 한 명 꼴이니 시를 읽는다면 남이 하지 않는 것을 하는 셈”이라고 했다. “그게 세상을 즐겁게 살아가는 방법”이라고도 했다. 물론 가난한 시인에게도 도움이 되고….  [글·사진 = 정진건 기자]             
357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박용래 - 저녁눈 댓글:  조회:4262  추천:0  2015-12-22
  저녁눈                               /박용래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1966년 [월간문학]에 발표된 시이다. 이 시는 이미지즘 수법의 시들을 통해 생략과 여백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작업을 계속해 왔던 시인의 독특한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으로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애틋한 시인의 정서가 잘 드러나 있다. '말집 호롱불', '조랑말 발굽', '여물 써는 소리', '변두리 빈터' 등 네 장면의 제시 이외에는 동일한 구문의 4회 반복에 불과한 이 시는, '저녁 눈'을 통해 가려져 있는 것, 소외되어 있는 것, 그리고 잊고 있던 자신을 뒤돌아보게 하는 효과를 보여 준다. 먼저 시인은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을 반복 강조함으로써 리듬의 효과와 함께 유랑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 준다. '저녁 눈'은 물질적 현상으로 언젠가는 없어질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존재이다. 그와 함께 위에서 제시한 네 가지 사물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해 가거나 사라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이제 그것들 위로 '붐비듯이' 늦은 저녁 눈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애상적 분위기를 배가시키는 사물들과 결합되어 더욱 을씨년스러운 겨울 저녁 풍경을 한 장의 사진처럼 묘사하고 있을 뿐,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감정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은 4행시 형식의 행간 속에 그 감정이 깊숙이 감추어져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즉 문명의 거센 물결에 밀려 머지 않아 사라져 버릴 토속적 세계를 바라보는 안타까운 마음이 '눈발'로 환치되어 '붐비는' 것으로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어쩌면 시인은 의도적으로 눈 내리는 모습을 '붐비다'로 표현함으로써 적막한 분위기와 '소멸'의 이미지를 역동성의 눈발로 상쇄시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렇듯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은 그로 하여금 화려한 문명의 도시보다는 밀려나 있는 변두리, 즉 향토의 사물 위에 머물게 한다. 시간적 배경으로 제시된 '늦은 저녁'이라는 하강적 이미지와 '눈발'이라는 소멸의 이미지가 한 곳에 어우러져 이루어 낸 '저녁 눈'은 공간적 배경이 되는, 같은 이미지의 네 가지 사물들과 결합됨으로써 이 작품을 텅 빈 아름다움의 시로 만들어주고 있다. (현대시 목록, 인터넷)   * 이 시는 단조로운 구성 속에서 향토적 사물에 대한 향수를 노래하고 있는 시이다. 시인의 그리움의 정서가 투사된 저녁 눈발이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구석진 곳으로 몰려다니는 정황을 동일한 통사 구조의 반복과 전통적 시어의 사용에서 얻어지는 색다른 운율의 효과로 잘 드러내고 있다. (한권에 잡히는 현대시)​           ◈ 겨울밤/박용래​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겨울밤에 떠오르는 고향에 대한 강열한 그리움을 간결하면서도 절제된 형식으로 나타낸 작품이다. '저녁눈'과 같이 이 시도 사라져 가는 향토적 사물의 세계를 치밀한 감각과 절제된 감상으로 표현하면서, 양토적 시어, 반복과 병치, 시행의 시각적 배치 효과를 활용하고 있다.   * ​1960년대에 향토적 서정이 물씬한 시 세계를 일궈낸 시인이 박용래(朴龍來, 1925~1980)다. 「겨울밤」은 응축과 생략의 단형시로 일관한 박용래의 시적 특질을 잘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의 시에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1960년대의 농촌의 거덜난 살림살이와 같은 사회 현실은 애당초 깃들일 여지가 없었다. 어떤 비평가는 “천부적으로 타고난 문명의 비적응성”(송재영)에서 그 까닭을 찾기도 한다. 눈 내리는 겨울밤의 정경을 하나의 그림으로 보여준 「겨울밤」이 머금은 의미체는 원형으로서의 고향이다. 그의 고향에는 당대의 숨결이 빠져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대의 현실에서 비롯되는 실감의 부피가 없다. 박용래의 고향은 지나간 시간 속에 응고된 현실이며, 당대와의 소통이 정지된 자폐적 시간이 고여 있는 공간일 따름이다. 더구나 「겨울밤」에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시점의 주체가 완벽하게 지워져 있다는 점일 것이다. 당대의 현실에서 길어낸 주체의 느낌과 통찰이 머금어 있지 않은 시. 그 인식의 지평은 닫혀 있다. ​박용래는 가까이 지내던 문인들 사이에서 “눈물의 시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생전의 시인과 술자리에서 어울리곤 하던 작가 이문구는 “그는 누리의 온갖 생령(生靈)에서 천체의 흔적에 이르도록 사랑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사랑스러운 것들을 만날 적마다 눈시울을 붉히지 않을 때가 없었다.”고 돌아본다. 그는 우렁 껍질·먹감·조랑말·원두막·얼레빗·쇠죽가마·개비름·초가지붕·도깨비불 같은 세상의 사라져가는 것들, 아무도 돌보지 않는 것들을 즐겨 노래한 시인이다. 박용래 시인이 그토록 자주 눈물을 보인 것은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을 보듬어 안는 그의 따뜻한 마음 때문이다. ​박용래의 딸 연의 술회에 의하면 “시에 대한 정열만은 누구에게도 비할 수 없이 강하셨던 아버지, 어쩌다 동창회에 다녀오신 날에는 밤새워 괴로워하셨지만, 끝내 아버지께서는 몇 구절의 시에 생애를 걸고, 평생 시인이라는 명분 이외에는 그 어느 직함도 가지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박용래는 그에 앞서 김소월, 백석, 서정주 그리고 청록파 시인들이 걸어간 “향토성의 발견”, 혹은 “자연의 발견”이라는 길에서 제 시의 정체성을 찾은 시인이다. 특히 박용래의 시 세계는 전통 율조와 회화적 감각, 향토성이 짙게 배어 있는 박목월의 초기 자연시와 근친적인 관계에 놓인다. 그의 첫 시집인 『싸락눈』에 실려 있는 짤막한 4행시 「저녁눈」은 어떤 군더더기도 없이 눈발 흩날리는 정경을 한 폭의 소묘처럼 담아낸 작품이다. 진술하는 어조가 아니라 미세한 소묘만으로도 사라지는 것들, 곧 스러질 것들에 대한 자신의 연민을 깔끔하게 드러낸다. 그가 즐겨 다루던 소재는 강아지풀, 엉겅퀴, 각시풀, 호박꽃, 상추꽃, 아욱꽃처럼 대수롭지 않게 지나쳐버리기 쉬운 것들과 호롱불, 손거울, 나막신, 우렁 껍질, 조랑말, 창호지처럼 우리 사회에서 사라져가는 것들이다. 그는 이런 소재로 유년기의 기억들을 끄집어내거나, 한국의 농촌 풍경을 그윽하게 묘사하고, 그 속에서 둥지를 틀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붙잡아내 향토에 깃들인 정한의 세계를 노래한다. 바스러지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그의 유별난 관심과 연민은 그의 눈길을 문명한 도시보다는 변두리, 향토의 사물 위에 시종 머물게 한다. 바로 이런 요소가 박용래를 흔치 않은 토착 시인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는 민요의 기본 구조인 언어의 반복과 병렬을 눈여겨보고, 그것이 한국적 정한의 세계와 달관의 정서를 드러내는 데 효과가 있다고 생각해 자기 나름으로 걸러낸 민요의 어법을 시에 자주 살려 쓴다. 1969년에 펴낸 첫 시집 『싸락눈』으로 박용래는 《현대시학》 제정 제1회 작품상을 받는다. 1975년에 제2시집 『강아지풀』을 에서 내고, 1979년에 제3시집 『백발(白髮)의 꽃대궁』을 펴낸다. 시집 『백발의 꽃대궁』으로 1980년에는 제7회 한국문학 작가상을 차지한다. 1980년 여름 취중에 길을 건너다 택시에 치여 3개월 동안 입원하는데, 이때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진다. 같은 해 11월 20일, 전날 밤도 여전히 소주를 마시고 돌아온 그는 다음날 셋째 딸 수명이가 점심을 준비하는 동안 안방에서 조용히 숨을 거둔다. 11월 21일 오후 1시,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발췌) (장석주/문학평론가, '나는 문학이다')   ​ ◈ 연시(軟枾)/박용래   여름 한낮 비름잎에 꽂힌 땡볕이 이웃 마을 돌담 위 연시(軟枾)로 익다 한쪽 볼 서리에 묻고 깊은 잠 자다 눈 오는 어느 날 깨어나 제상(祭床) 아래​ 심지 머금은 종발로 빛나다     1975년 시집 [강아지풀]에 수록된 시이다. 이 시의 내용은, 감이 한여름의 땡볕에 붉어지고, 가을 서리에 익어서, 눈 오는 겨울 어느 날 밤 제상(祭床)에 오른 것을 노래하고 있다. 내용과 형식이 매우 간결해 보이는 이 작품은 그 구성면에서는 상당히 치밀함을 보여주고 있다. 의미상 단락을 구분지으면, 1·2·3 / 4·5·6 // 7·8·9 / 10·11 / 12·13·14 //로 구분된다. 여기에서 10,11연의 위치가 전체 시상 전개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그런가 하면 1∼6연의 주어는 '땡볕'이요, 또 7∼14연의 생략된 주어는 감인데 서술어는 '빛나다'로 되어 있어, 1∼6연의 주어인 땡볕에 연결되어 있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하나의 풋과일이 한여름 땡볕 속에서 성숙한 결실을 맺게되는 과정의 섬세한 묘사를 통해,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진행되는 자연의 오묘한 조화를 포착해 내고 있다. '땡볕-연시'로 옮겨지는 붉은 색의 이미지가 중심을 이루면서, 익기 이전의 감과 비름잎이 지닌 푸른 색의 이미지와 선명한 색채의 대조를 이루고 있다. 또한 한여름 땡볕을 받아 붉어진 감(연시)이 서리를 맞아 익어서 눈오는 어느날 밤 젯상에 오르게 된다는 독특한 발상의 표현을 통해, 상당한 시간의 경과를 거쳐 인간과 자연이 만나게 되는 과정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여기서 시적 화자는 하나의 미립적 자연 현상마저도 범연히 보아 넘기지 않는 날카로움과 자연의 신비를 해독한 지혜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자연에 대한 시인의 깊은 애정과 외경심, 그리고 세심한 관찰력에서 오는 듯하다.(현대시 목록, 인터넷)​ =========================================================     소설 "눈물의 시인" 박용래의 발자취를 찾아 - 이 문 구 - 군자와 군자는 비록 세월이 다르되 길이 같고, 소인과 소인은 세상이 달라도 역시 한 무리일 뿐이라는 옛말이 있다. 인간이 물질에 대해서는 제법 인간다운 행세를 하면서도, 한 어리인 인간에 대해서는 짐승 노릇이 도리인 줄로 아는 세상을 지금으로써 증명하니, 옛말이 도리어 오늘에 이르러 그 뜻이 나타났음은 실로 딱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그리 걱정을 하지 않는다. 스스로 분수를 가늠하여 삶의 줏대로 삼고, 타고난 숨이 다되면 하릴없이 자리를 뜨되, 일생을 지녀온 고운 얼까지도 남에게 물려주고 가던 대인(大人)이 드물지 않았음을 그들은 그들 나름으로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이런 난세에도 하늘은 높으나 고개를 숙여야 하고 땅이 넓어도 길이 아니면 얼씬을 말아야 한다고 이르던 한 아름다운 이가 있었다. 박용래 선생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살아서는 그의 작품을 모르던 이가 없고, 죽어서는 그의 이름을 지울 이가 없을 터임에 세상은 그를 일컬어 시인이라 한다. 일찍이 "배추씨처럼 사알짝 흙에 덮여 살고 싶다"고 했던 그는, 꽃그늘과 풀그늘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능히 알면서도 셈은 남과 같지 않았으니, 마침내 몸소 자기 곳을 찾아 오십추(五十秋) 남짓 되는 생애를 초야에 묻혀 다하였다. 그는 조상 적 이름의 풀꼿을 사랑하여 풀잎처럼 가벼운 옷을 입었고, 그는 그보다 술을 더 사랑하여 해거름녘의 두 줄기 눈물을 석잔 술의 안주로 삼았다. 그는 그림을 사랑하여 밥상의 푸성귀를 그날치의 꿈이 그려진 수채화로 알았고, 그는 그보다 시를 더 사랑하여 나날의 생활을 시편(詩篇)의 행간에 마련해 두고 살았다. 그는 나물밥 30년에 구차함을 느끼지 않았고, 곁두리 30년 탁배기에도 아쉬움을 말하지 않았다. 달팽이집이라도 머리만 디밀 수 있으면 뜨락에 풀포기를 길렀고, 저문 황토길 오십리에도 달빛에 별발이 어리면 뒷덜미에 내리던 이슬조차도 눈물겹도록 고마워하였다. 아아, 앞에도 없었고 뒤에도 오지 않을 하나뿐인 정한(情恨)의 시인이여. 당신과 더불어 산천을 떠난 그 눈물들, 오늘은 어느 구름에 서리어 서로 만나자 하는가. 생전의 박용래 시인 박용래 시인은 1925년 음력 정월 14일, 충청남도 논산군 강경면 중앙동에서 밀양 박씨 가문의 3남 1녀 중 늦동이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원태(朴元泰)씨가 고향인 부여군 부여면 관북리 70번지에서 소지주(小地主)의 넉넉한 살림을 대강 정리하여 강경으로 나온 것은 자녀들의 교육에 남다른 열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말의 유생(儒生)으로서 한학과 한시(漢詩)에 일가를 이룬 것으로 원근의 유림(儒林)에서 일러온 터였지만, 평양·대구와 더불어 전선(全鮮)의 3대시장으로 꼽힐 만큼 육운과 수운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로로서 그리고 내포평야(內浦平野)의 농산과 금강으로 올라온 새로운 문물의 교역처로 중부 이남의 상권을 흔들던 강경에 발판을 다지려 했던 것은, 개화기에 따른 의식이 남보다 뒤지지 않았던 결과였다.   박용래 시비 박용래 시비 금강을 대문으로 삼고 논산천과 강경천을 옆에 두어 삼남(三南)의 보고(寶庫)로 불리던 내포평야는, 미맥 위주의 주곡을 비롯, 모시와 해산물의 집산지로서도 조선시대이래의 큰 장이었다. 더욱이 강경상업학교는 전국에서도 손꼽히던 명문이었다. 박원태·김정자(金正子)씨 부부는 중앙동에 정착하자 봉래(鳳來)·학래(鶴來)·홍래(鴻來)의 학업을 뒷바라지하는 한편으로 막내둥이를 낳았고, 봉황과 학과 기러기의 날개 항렬보다 좀더 상서로운 영물을 찾아 부르니 그것이 곧 용래라는 이름이었다.   홍래 누나와의 추억이 있는 놀뫼와 나루 홍래 누나와의 추억이 있는 놀뫼와 나루 저녁 노을이 유난히 짙어 놀뫼(黃山)라 부르던 채운산(彩雲山) 산자락과 부여를 잇는 놀뫼나루, 황산천과 황산교, 죽마(竹馬)를 타고 오르내렸던 서편의 옥녀봉(玉女峰)들은 뒷날 민요풍(民謠風)의 그윽한 가락을 홀로 읊게 될 한 시인의 어린 시절을 건강하게 키웠다. 홍래 누이는 막내가 중앙보통학교에 입학하고부터 한시도 딴전 볼 겨를이 없었다. 부모가 연만한데다 하나뿐인 누이를 누구보다도 옴살로 따랐기 때문이었다. 박시인은 홍래 누이를 따라 변두리로 다니며 노는 일이 잦았다. 채운산 너머 부투골, 낭청이, 까치말과 채운들 저쪽의 용답급, 돌꽃메, 두테골, 거름실 등 그들 오뉘의 발길이 미치지 않던 곳이 드물었다.   시「마을」에서 엿볼 수 있듯이, 놀뫼와 나루, 논티(論山)의 들녘들은 그로 하여금 자연과의 일체감을 처음 터득하게 했던 본바닥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시의 씨앗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 씨앗들은 뒷날 대싸리, 모과, 능금, 이끼, 달개비, 민들레, 엉겅퀴, 캥이풀, 목화다래, 상수리, 수수이삭, 미루나무, 원두막, 바자울, 쇠죽가마, 잉앗대, 횃대, 멍석, 모깃불, 성황당, 옹배기, 목침, 베잠방이, 얼레빗, 실타래, 옥양목, 까마귀, 동박새, 반딧불, 베짱이, 소금쟁이, 물방개, 버들붕어, 메기, 쏘가리 등 우리 겨레가 아니면 아무런 의미도 없을 시어(詩語)로 영글어 양기 바른 두메의 붙박이 정서를 자아내게 된다. 홍래 누나와의 추억이 있는 논티(論山)의 들녘 그는 강경상업학교에 입학을 했던 1939년의 1학년 초엽부터 누구의 눈에나 쉽게 띌 만큼 여러 가지로 남다른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는 전과목의 우등생이었을 뿐 아니라 품행에서도 남의 본보기로 마땅하였으며, 특히 미술에서 재질을 드러내어 미술반장의 구실에도 정성을 다하였다. 강경상업학교는 그의 생애를 가름했던 가장 중요한 고비의 어설픈 체제였다. 사춘기의 꿈과 낭만을 지레 접어버린 것이 이때라면, 실의와 허무감의 동거인으로서 시련에 의한 타율적인 성장을 이룬 것도 그때였다. 주산(珠算) 우위의 상업적인 교육에서 한몸에 촉망을 모으고도 비상업적인 관심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소질과도 무관한 것이었다. 전교의 수석 졸업생, 학교를 대표하던 정구선수, 구령 한마디로 전교생을 거느렸던 대대장 등 공인적인 위치를 떠날 수 없었던 학창 경력들도 무릇 위임사항에서 그쳤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속에서도 정신적인 숙성을 부추긴 것은 문학이었다. 장터에서 일어나 시림(詩林)이 되기까지, 그의 연보(年譜)에서 누구도 누락시킬 수 없는 사건은, 동기(同氣) 이상의 이상적인 여인상이었던 홍래 누이와의 갑작스런 영결(永訣)이었다. 놀묏내 건넛마울(부여군 세도면)로 시집을 갔던 홍래 누이가 초산의 산고로 이승을 뜬 것은 아무래도 너무 이른 2학년 어름이었다.누이와의 사별은 그의 여러 작품에 떨리는 가락으로 스며 있을 정도로 여운도 긴 아쉬움이었다. 그의 시들은 남의 추측을 불허할 만큼 세필(細筆)에 의한 소묘로서 전위적인 추상(抽象)마저도 원천적으로 포괄하지만, 가을 하늘의 가장 분명한 사건인 기러기떼의 이미지를 통하여 기러기처럼 왔다가 기러기같이 날아간 숙명적인 이름 '홍래'의 애도로 이해할 경우, 보다 가급적(可及的)인 정한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홍래 누이를 묻으면서 비롯된 허무감은 활달하고 숫기 있던 본래의 성격까지 문득 내성적인 규모로 다듬어 보아 서정적인 품위를 마련하여 주었다. 그는 자기도 모른 사이 삶에 대한 회의, 신불(神佛)에의 불신임, 그리고 개체적인 고독과 사사로운 우수의 늪으로 시선을 돌린 것이었다. 박시인은 70년대 말기부터 차츰 고향으로 발걸음을 하였다. 산업시대와 함께 내리막길을 치달려 장터로서의 위신을 잃어버린 강경―그는 바야흐로 기울어가는 고향의 낙조(落照)에 착잡한 감회를 느꼈다. "밀물에/슬리고//썰물에/뜨는//하염없는 갯벌/살더라, 살더라/사알짝 흙에 덮여/목이 메인 백강 하류(白江下流)/노을 밴 황산(黃山)메기/애꾸눈이 메기는 살더라,/살더라."(「黃山메기」전문) 고향에 남은 옛것은 산업시대의 공해에 병들어 생태변화를 일으킨 불구의 메기였다. 이 "노을 밴" 불구의 메기는 누구인가? 초로(初老)에 접어든 시인의 뒷모습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 ... =====================================================================   故 박용래 시인 생가 헐렸다   세월 못이긴 ‘호서문학의 산실’…하늘에서도 눈물 흘리시나요             대전 중구 오류동 149-12번지. ‘눈물의 시인’이라 불리던 고(故) 박용래(1925-1980) 시인이 살던 집이다.  고 박 시인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20여년간 거주했던 이 집은 최근 철거돼 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됐다. 집터는 오는 10월쯤 대전시중구 소유의 공영주차장으로 바뀔 예정으로 현재 지장물을 정리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과거의 흔적조차 찾기 어렵게 된 이 곳은 박 시인의 삶의 궤적이 서린 곳일 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어울려 문학과 예술을 논했던 곳이다. 또 많은 시인·문인 지망생들이 드나들었던, ‘호서문학의 산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 시인의 둘째 딸 박연(49)씨는 아버지를 찾아오던 유·무명 문인·예술가들로 북적이던 당시 집안 분위기를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시인 고은, 박목월, 박두진, 이동주 선생님을 비롯해 도예가 이종수, 조각가 최종태 선생님 등 많은 분들이 집에 들러 아버지와 술잔을 기울이며 문학과 예술을 논하던 기억이 생생해요.”  딸 박 씨는 수십 년 전 아버지 박 시인이 왕성한 문학활동을 펼쳤던 때를 떠올렸다.  박 씨는 “박목월 선생님은 항상 저희 형제들 먹으라고 돼지고기를 손에 들고 오셨다”며 “박목월 선생님과 친분이 두텁던 아버지는 집안 물건만 바꿔도 선생님께 전화해 보고를 드리곤 했다”고 말했다.  박 씨의 기억 속에 남은 오류동 집은 아버지와 당대 예술가들이 함께 어울려 문학과 예술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한바탕 즐거운 술자리가 열리던 ‘즐거운 집’이었다.  때로는 거나하게 취한 아버지의 예술가 친구들 때문에 작품을 공짜로 얻기도 했다고.  박 씨는 “어머니의 초등학교 1년 후배인 조각가 최종태 선생님은 주로 맥주를 사들고 오셔서 부모님과 드시며 담소를 나누셨는데 취기가 오르면 잉크를 가지고 오라 하셔서 인물화 등을 그려 주시곤 했다”고 말했다.  현재 폐암 투병 중인 도예가 이종수 선생도 아들을 데리고 박 시인의 집에 자주 놀러왔으며, 이동주 시인은 박 시인의 자녀들에게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고 한다.  대전의 ‘문화사랑방’ 역할을 했던 102㎡(약 30평) 남짓 오류동 집에서 1980년 늦가을, 박용래 시인은 가족과 전국에서 몰려든 예술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을 맞이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이 곳은 다른 사람에게 소유권이 이전됐다.  박 씨는 “오류동 집은 가족의 추억이 서려있을 뿐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인들이 모여 예술을 꽃피우던 장(場)이었다”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세를 줬던 집이 부득이하게 남의 손으로 넘어갔을 때 형제들은 나중에라도 집을 다시 찾겠다고 다짐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때가 오기도 전, 박 시인의 집은 지난 6월 철거됐고 오는 10월쯤 공영주차장으로 바뀐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 들어야만 했다.  박 씨는 “얼마 전, 집이 있던 자리가 주차장으로 바뀔 것이라는 전화를 받았다”며 “형제, 자매들과 상의했고 땅을 다시 재구매해 기념관을 건립하자는 의견을 모았지만, 이미 주차장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상태”라며 안타까워 했다.  이어 그는 “아버님의 혼이 살아 있고 대전의 문화사랑방 역할을 했던 이곳을 지금이라도 보존하고 싶다”며 “작품을 기증할 의사가 있으니 대전시에 박용래 문학관 건립을 검토해 달라고 최근 건의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대전시중구 교통관리과 관계자는 “소유권은 이미 유족이 아닌 다른 사람이 갖고 있었고, 그 집이 박용래 시인이 살던 집임을 알았을 때는 이미 철거가 끝난 상태였다”며 “유족과 상의해 조그만 기념비라도 건립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故 박용래 시인은 누구?   세상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한 ‘눈물의 시인’   ▲고(故) 박용래 시인   ‘눈물의 시인’ 고(故) 박용래(1925-1980) 시인이 살던 대전 집이 최근 철거됐다. 오류동에 있던 이 집은 고 박 시인이 지난 1965년 대전에 터를 잡고 28년 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창작활동을 펼쳤던 곳이며, 호서문학의 산실이기도 했다. 고 박 시인은 이 집에 살면서 어떻게 창작활동을 했는지, 얼마나 어떻게 울었기에 눈물의 시인, 울보 시인으로 불렸는지 새삼 궁금해진다. 호서문학을 넘어 한국문학을 이끌어갔던 고 박용래 시인과 그의 시선을 조명했다.   ◇박용래 시인은=향토적 정서와 특유의 서정성으로 한국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시인 박용래. 충남 부여 출신인 그는 1945년 강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교사와 은행원으로 활동하던 중 문학에 빠져들었다. 1955년 박두진의 추천을 받아 ‘현대문학’에 ‘가을의 노래’, ‘황토길’ 등을 발표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1965년 퇴직금을 보태 대전에 터를 잡은 곳이 최근 철거된 오류동 집이다. 그는 이곳에서 누구보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아름다운 시선들을 노래했다. 평생 창작에만 전념할 시인의 운명이었을까? 1973년 다시 대전북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지만 고혈압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작품활동에만 매진한다.  그는 이곳에서 향토적 정서와 서정어린 감성을 노래하는 다수의 작품을 발표하며 호서문학의 대표 시인으로 거듭났다. 시집으로는 ‘싸락눈’, ‘강아지 풀’, ‘먼 바다’ 등이 있으며 충청남도 문화상, 현대시학작품상, 한국문학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생전 “배추씨처럼 사알짝 흙에 덮여 살고 싶다”고 말했던 박용래. 그는 1980년 오류동 집에서 임종을 맞이한다. 평생 자연을 노래하던 시인은 그렇게 오십추 남짓 되는 생애을 접고 초야에 묻혔다.  ◇누구보다 술을 사랑했던 ‘눈물의 시인’=시인들은 술을 태워 시를 짓는 에너지를 얻는다고 했던가. 박용래는 그 누구보다 술을 사랑했으며 그는 당대 최고의 문인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삶을 이야기하고 문학을 논했다.  특히 그는 ‘눈물의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얼마 전 작고한 소설가 이문구 씨에 따르면 울지 않던 그를 두 번밖에 못 보았을 정도로 그는 자주 울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눈물은 가난과 애달픔, 외로움 등 때문이 아니었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언제나 그의 눈물을 불렀다. 갸륵하고 어여쁜 것, 소박하고 조촐한 것, 아무렇게나 버려진 것….  그러기에 그는 한 떨기의 풀꽃, 오지굴뚝의 연기, 뒷간 지붕 위의 호박넝쿨, 심지어는 질레덤불에 낀 진딧물까지 사랑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사랑스러운 것들을 만날 때마다 눈시울을 붉혔다.  때문에 그의 시에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향수가 짙게 깔려 있다. 술과 눈물에서 비롯된 박용래 특유의 서정적 감성은 작품에 녹아들어 쓸쓸하면서도 아름답고, 슬프면서도 따뜻한 영혼을 물씬 풍긴다.  김용재 시인(대전문인협회 회장)은 “박용래의 눈물은 세상을 바라보는 순수함과 풍부한 감성의 산물”이라며 “서정성이 바탕이 된 그의 시는 압축과 절제의 묘미가 뛰어나다”고 평했다.  ◇고은 등 문인과 예술가들이 사랑했던 시인=“여기저기서 인터뷰를 하자고 했지만 다 거절했습니다. 대전에 있던 박용래 형이 생각나 대전일보 인터뷰에 응했어요. 생전에 술도 많이 마시고 동고동락하며 한 시대를 형제처럼 살아왔던 형이 그리워서요. 용래 형이 떠올라 ‘박용래문학상’을 만든 대전일보와 얘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한국의 대표 시인이자 노벨문학상 단골 후보로 거론돼 온 고은 시인은 지난해 본보 창간 57주년을 기념하는 특별대담에서 이렇게 밝혔다. 박용래에 대한 애틋한 정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그 역시 술을 지독히 좋아했던 고은은 대전에 자주 내려와 술잔을 기울이며 그와 정을 나눴다. 박용래와의 추억은 고은이 최근 발표한 시에서도 공개된다.  ‘술 먹은 박용래가/ 대전 유성온천 냇둑/ 술 먹은 고은에게 물었다/ 은이 자네는/저 냇물이 다 술이기 바라지? 공연스레 호방하지?/ 나는 안 그려/ 나는 저 냇물이 그냥 냇물이기를 바라고/ 술이 그냥 술이기를 바라네/ 고은이 킬킬 웃어대며/ 냇물에 돌 한개를 던졌다/ 물은 말 없고/ 그대신 냇둑의 새가/ 화를 내며 날아갔다/ 박용래가 울었다 안주 없이 먹은 술을 토했다/ 괜히 새를 쫓았다고 화를 냈다/ 은이는 나뻐/ 은이는 나뻐/ 박용래가 울었다 고은은 앞서가며 울지 않았다’   박용래를 사랑했던 사람은 고은 뿐만이 아니었다. 박목월, 박두진, 이동주, 이문구 등의 문인들이 전국 각지에서 대전의 박용래의 집을 찾아 그와 삶을 얘기하며 술잔을 기울였으며, 많은 문인들이 ‘좋아하는 시인’으로 그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또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탓에 예술인들과의 우정도 특별했다. 도예가 이종수는 박용래의 집과 자신의 가마터를 오가며 멍석을 깔고 함께 누워 그와 많은 얘기를 나눴으며, 조각가 최종태도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 박용래(朴龍來·1925-1980)  ▲충남 부여 출생  ▲강경상업학교 졸업 후 교사·은행원으로 활동  ▲1955년 박두진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가을의 노래’, ‘황토길’ 등 발표  ▲시집 ‘싸락눈’, ‘강아지풀’, ‘먼 바다’ 등 다수  ▲한국문학작가상, 현대시학사 작품상, 충청남도문화상 등 수상        [출처] 故 박용래 시인 생가 헐렸다|작성자 바람으로 ============================================ 대전문학관은 대전의 첫 문학관임에도 한국문학관협회 가입 순으로 보면 60번째다...?!?!...       ▲ 박용래 시인 전시관.   아아, 앞에도 없었고 뒤에도 오지 않을 하나뿐인 정한의 시인이여. 당신과 더불어 산천을 떠난 그 눈물들, 오늘은 어느 구름에 서리어 서로 만나자 하는가. ……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언제나 그의 눈물을 불렀다. 갸륵한 것, 어여쁜 것, 소박한 것, 조촐한 것, 조용한 것, 알뜰한 것, 인간의 손을 안 탄 것, 문명의 때가 아닌 묻은 것, 임자가 없는 것, 아무렇게나 버려진 것, 갓 태어난 것, 저절로 묵은 것…. 그는 누리의 온갖 생령에서 천체의 흔적에 이르도록 사랑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사랑스러운 것들을 만날 적마다 눈시울을 붉히지 않은 때가 없었다. -이문구, 「박용래 약전(略傳)」-      그는 여성적이고 감상적이었다. 그의 몸짓, 말투부터가 너무나 시인다웠고, 시에 관한 한 촌보도 양보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자존심이 있었다…, 나는 그의 영롱한 감성과 서정의 아름다움에 늘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술을 좋아해서 만나면 으레 술잔을 나누었던 그는 한 줄의 시를 위해 몇십 번씩 생각하며 시어를 다듬을 만큼 꼼꼼하고 생각이 깊었다. -호현찬 언론인·영화인, 「수채화처럼 맑고 아름다운 인생」-     돈 세는 일이 역겨워 은행을 그만두시고, 등록금을 독촉하기가 안스러워 결국 교직을 떠나셨다고 말씀하시던 아버지. 어느 곳에나 얽매이기를 싫어하셨던 자유분방함과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하고 여린 심정으로, 어쩌면 아버지는 태어날 때부터 시인으로 운명지워져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박연 서양화가, 박용래시인의 딸, 「아버지는 오십 먹은 소년」中-       술 먹은 박용래가 대전 유성온천 냇둑 술먹은 고은에게 물었다 은이 자네는 저 냇물이 다 술이기 바라지? 공연스레 호방하지? 나는 안 그려 나는 저 냇물이 그냥 냇물이기를 바라고 술이 그냥 술이기를 바라네   고은이 킬킬 웃어대며 냇물에 돌 한 개를 던졌다 물은 말 없고 그 대신 냇둑의 새가 화를 내며 날아갔다 박용래가 울었다 안주 없이 먹은 술을 토했다 괜히 새를 쫓았다고 화를 냈다   은이는 나뻐 은이는 나뻐   박용래가 울었다 고은은 앞서가며 울지 않았다. -고은, 「어느날 박용래」-     「박용래」   소나기 속에 매미가 우네.   황산나루에서 빠져 죽고 싶은 사람 막걸리잔 들고 웃다 우는 사람 상치꽃 쑥갓꽃 하며 호호거리는 사람 맷돌 가는 소리에 또 우는 사람   싸락눈 속에 매미가 우네.   -홍희표, 「박용래」-   박용래   박용래는 훗승에서 개구리가 되었을라 상칫단 씻다 말고 그리고…… 그리고…… 아욱단 씻다 말고 그리고…… 그리고…… 죽은 홍래 누이 그립다가 그리고…… 그리고…… 박용래는 훗승에서 그리고로 울었을라   서정춘 시집 『귀』(시와시학사)에 실린 「박용래」           술 술은 마음의 울타리 술 속에 작은 길이 있어 그 길을 따라 가 보면 조약돌이 드러난 개울 개울 건너 골담초 수풀 골담초 수풀 속에 푸슥푸슥 날으는 동박새 스치는 까까머리 아기 스님 먹물 옷깃 누가 마음의 울타리를 흔드는가 누가 마음의 설렁줄을 당기는가.   江景   안개비 뿌옇게 흐려진 창가에 붙어서서 종일 두고 손가락 끝으로 쓰는 이름 진한 잉크빛 번진 서양 제비꽃, 팬지 입술이 갈라진, 가슴이 너울대는.   오류동 방안에 들였어도 퍼렇게 얼어죽은 삼동의 협죽도 쇠죽가마 왕겨불로 달군 방바닥은 등을 지져도 외풍이 세어서 휘는 촛불꼬리 들리지도 않는 부뚜막의 겨울 귀뚜라미 소리 찔찔찔찔 들린다 해서 잠들지 못하는 초로의 시인 윗목에 얼어죽은 제주도 협죽도가 함께 불면증을 앓고 있었다 대전시 교외 오류동 삼동의 삼경. 귀를 세우고     -나태주, -     맑은 이슬방울이 연잎에서 또르르 굴러 떨어졌는데, 그것은 늙지 않을 것 같다. 박용래는 내 안에서 늙지 않은 채로 항상 이슬처럼 있다. 박용래는 그 타고난 자리를 잃지 않고 그 천분의 자리를 지켜낸 사람 같다.   박용래를 생각하면 내가 지금 꿈의 세계에 있는 듯도 싶다. 박용래라는 사람은 타고 날 때 묻어 있었던, 타고나기 이전의 어떤 것을 아직 지닌 채 살았던 사람같다. 세상 파도가 아무리 거셌어도 박용래에게서 그것을 앗아가지 못했다. 그것이 시가 되고 그는 이 세상에서 오직 시인으로만 살다가 갔다. -최종태 조각가, 「맑은 이슬방울처럼 그렇게 : 박용래를 회상함」-     ‘아내와 아이들 다 職場에 나가는 밝은 낮은 홀로 남아 詩 쓰며 빈집 지키고 해어스름 겨우 풀려 친구 만나러 나온다는 朴龍來더러 ‘장 속의 새로다’하니, 그렇기사 하기는 하지만서두 지혜는 있는 새라고 한다. 요렇처럼 어렵사리 만나러도 나왔으니,   지혜는 있는 새지 뭣이냐 한다. 왜 아니리요. 그중 지혜있는 장 속의 詩의 새는 아무래도 우리 朴龍來인가 하노라.’                                                                 -서정주 ‘박용래’ 전문 문학사상 1976년 1월호에 게재    아버지를 회상하며   가을. 감나무 이파리. 감새의 수리성. 오래 전 일입니다. 방에서 큰 울음소리가 들리고 얼마간의 정적이 흘렀습니다. 조심히 문을 열고 쳐다본 아버지의 모습. 아……. 전 시인을, 우수수 떨어진 청시사의 저녁놀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구름의 행방을 묻지 말자. 구름은 영원한 방랑자.’ 두 줄의 시구를 읊고, 육 개월 후 구름이 되어 가셨습니다.                                                                                       - 박노아  
356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천상병 - 귀천 댓글:  조회:6069  추천:0  2015-12-21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       귀천(歸天)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최근 죽음에 관련된 얘기를 몇 편 쓰다 보니까 뜬금없이 천진무구한 시인 천상병의 [귀천]이 떠 올른다. 그는 살아 생전 만나는 사람마다 '천원만 달라'고 하여 막걸리를 사 먹었던 것으로 유명한데, 1930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나 마산중학교에서 [꽃]이라는 시로 유명한 김춘수 시인에게 국어를 배웠고 서울대 상대를 중퇴했으며, [강물]이라는 시가 유치진 시인의 추천을 받아 문학잡지인 [문예]에 실리게 되어 그때부터 그는 시인의 삶을 그려가기 시작했다.     천상병 시인은 생전에 많은 이야기 거리를 몰고 다니는 그야말로 문학계의 기인 중 기인이었다. 그 중에서도 살아있는 시인이면서 '유고시집(遺稿詩集)'을 냈던 사람은 아마 세상에서 천상병 시인 밖에 없을 것이다.   그 사연은 이렇다. 1967년 당시 우리나라는 "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대남공작단 사건"이라는 소위 '동백림 사건'으로 떠들썩 했다. 정부에서는 북한과 은밀히 연루되었다고 하여서 죄도 없는 예술인들이나 문인(文人)들을 대거 체포하여, 남산에서 그야말로 덮어놓고 고문부터 해서 사람 병신으로 만들어 더 이상 예술활동을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 그야말로 우리 현대사의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일이 자행되었다. 그 사건에 천상병 시인도 연루되어 갖은 고초를 당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의 모습은 고문 당시 얻은 휴유증으로 인해 몸도 마음도 심한 질병을 얻었다. 그런데 이 사건의 실체라는 것은 바로 이렇다. 당시에도 천진난만하고 순진했던 천상병 시인은 서울대 상대 동문이자 친구였던 강빈구(姜濱口)라는 사람과 친하게 어울렸는데, 그 강진구가 독일 유학중 동독을 방문했었다는 얘기를 천상병에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평소 다른 문인들에게도 그랬던 것처럼 천상병은 강빈구로부터도 막걸리값으로 5백원 또는 1천원씩 받아 썼다. 그런데 당시 중앙정보부 발표문은 이러하였다. "강빈구는 간첩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천상병은 강빈구에게 공포감을 갖게 한 뒤, 수십여 차례에 걸쳐서 "1백원 내지 6천5백원씩 도합 5만여원을 갈취착복하면서 수사기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문 이후로 몸은 만진창이가 되버린 천상병은 1970년 겨울 어느 날부터인가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며 떠돌다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그의 친구들은 그가 자주 다니던 명동이나 종로에서도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1971년 봄이 다 가도록 종적을 감춘 그가 나타나지 않자, 그의 안부를 궁금해 하는 몇몇 문인들이 연고가 있는 부산에 연락을 넣어봤지만 거기에도 천상병은 없었다. "죽지 않았을까?" 가까운 시인들은 주민등록증도 없이 이 시인이 길에서 쓰러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결국 이야기는 눈덩이 처럼 불어나, '천상병이 죽었다!'라고 소문이 퍼졌다. "참 아까운 친구였는데...시집 한 권도 없이 세상을 뜨다니..." 시간이 흐를수록 그 예감은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 되버렸다. 그때 시인 민영등이 "요절시인" 천상병의 유고시집을 묶어주기 위해 이리저리 전갈을 넣어 작품을 모으기 시작했다. 잡지에 흩어져 있는 그의 작품 60여편을 모았지만 시집 출간비용을 조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시인 성춘복이 그 시집을 내겠다고 선뜻 나서 시집은 무사히 발간될 수 있었다. 그래서 1971년 12월에 당시로서는 호화장정의 천상병시집 "새"가 나오는데, 시집출간 소식이 신문과 방송 등을 통해 알려지며 장안의 화제거리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천상병이 살아있다는 소식이 날아 들어왔다. 그는 거리에서 쓰러져 있었고 그 것을 사람들은 그를 그저 노숙자나 행려병자로 오인한 탓에 그를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시켜 버렸던 것이다. 얼마 뒤에 천상병은 백치 같은 무구한 웃음을 흘리며, 거짓말 같이 다시 친구들 앞에 나타났다. 이렇게 천상병 시인은 기인답게 버젓이 살아 있으면서 첫 시집을 "유고시집"으로 낸 유일무이한 시인이 되었다.    귀천이라는 시의 미덕은 쉽다는 데 있다. 시라는 것이 괜히 어려워야 맛이 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가끔 볼 수 있는데, 이 시는 쉬운 시가 좋은 시가 될 수 있다는 모범을 우리에게 잘 보여 주고 있다.   각 연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라고 시작한다. 하늘로 돌아간다는 것은 물론 죽음을 뜻한다.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두렵고, 그래서 담담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남겨 두고 가야만 하기 때문에, 또는 어떤 이유로든지 삶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시인은 하늘로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돌아’간다고 말하고 있다. 돌아간다는 것은 시인이 죽음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 준다. 시인은 죽음이란 원점으로 다시 회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삶에 대해 집착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늘로 돌아갈 때 동행하는 것은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이나  노을 같은 사물들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것들인가? 그것은 누구도 혼자서만 소유할 수 없고,그래서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들이다. 화자는 세상을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또한 죽음을 소풍 끝내는 날로 여기고 있다.   이 시를 죽음을 달관한 모습으로만 읽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듯싶다. 다시 말하면, 이 시를 이야기하면서 ‘달관’이나 ‘초극’, ‘죽음을 관조적으로 수용’한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 시에 들어 있는 정서는 외로움이나 쓸쓸함, 괴로움 등일 것이다. 지나온 삶의 괴로운 파편들을 뒤적이면서, 그것을 아름답게 인식하고자 노력하고 그것을 쓸쓸하게 다스리는 데서 우리는 깊은 공감을 느끼게 된다.   그는 이승에서의 삶은 짧지만 즐거운 것, 즉 '소풍'으로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하늘에서 왔으니 생명이 다하면 다시 본원적인 공간인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는 죽음에 대한 달관 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은 인간의 근원적인 두려움인 죽음을 말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가장 두려운 존재로 인식된다. 하지만 이러한 죽음을 소풍으로 표현하면서 시인은 죽음이 가장 아름다운 끝맺음이 될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삶은 어쩌면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같이 짧은 순간에 찬란하게 반짝이는 모습일 수 있고 "노을 빛"처럼 소멸의 순간 가장 아름다운 모습일 수도 있다. 그래서 시인은 이 모든 과정을 아름답다고 말하며 소풍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요즘 이러한 철학은 여러 명상가, 철학자를 비롯해 스티브 잡스의 사생관과도 맥을 같이 한다. 즉, 천상병은 죽음의 철학을 일찍이 달관했다고 보아야 한다.   지금 누구에게나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힘겹고 어쩌면 추할 수 있도 있지만 끝내는 그 시간들도 돌아보면 아름답고 찬란한 순간일 수 있겠구나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시라고 볼 수 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이 시의 마지막 연은 그런 점에서 시를 보는 많은 이들에게 반성과 감동을 불러 일으킬만 하다. 죽음 이후 저 세상에 가서 자신의 지난 생전의 시간을 아름다운 세상에서 보낸 소풍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시인의 처연하면서도 소박한 삶에 대한 자세야 말로 이 시가 우리에게 전하는 진정한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가 소풍을 끝내고 받게 된 몇 백만 원의 조의금은 천상병과 그의 가족들이 살아 생전 만져본 적이 없었던 큰 돈이었고 그것을 장모가 제일 안전한 곳에 두기 위해 아궁이에 감추어 두었다.   그런데 시인의 아내가 그런 사실을 모른 채 아궁이에 불을 지펴 재로 만들었다는 일화는 코미디같기도 하고 오히려 단돈 천원밖에 모르던 천상병이라는 시인을 폐부에 뜨겁게 각인시켜 준다. 살아서도 그렇게 돈을 멀리하더니 죽어 저 세상에서도 가장 순수한 시인이 되겠다는 어떤 영감같게도 느껴지니 말이다.     미망인 목순옥 여사는 인사동에 [귀천]이라는 다방을 경영하는데, 좁은 공간 때문에 인테리어가 독특해서 문인들은 물론 유명세를 타서 일부러 찾아오는 분들이 많고 옛날 다방식 소파에 나무등걸로 합석을 해도 되고 다닥다닥 붙어있지만 천상병님의 사진과 선물받은 그림 등등.. 편안하면서도 독특한 분위기가 정감있는 곳이다.     노년에 목가적인 향수에 젖고 싶다면 한번쯤 들릴만한 곳이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 6번 출구에서 인사동길로 들어서 수도약국 방향으로 200미터 가량 가다 보면 달마도가 그려진 간판이 있는데, 그 골목에 있다. 분점도 있는데 수도약국을 끼고 좌회전하면 약간 큰 골목에 '귀천' 간판이 보인다.     천상병이 그토록 사랑했던 막거리에 대한 시를 읊으며 글을 끝내고자 한다. 막걸리/천상병 남들은 막걸리를 술이라지만  내게는 밥이나 마찬가지다  막걸리를 마시면  배가 불러지니 말이다  막걸리는 술이 아니다  옥수수로 만드는 막걸리는  영양분이 많다  그러니 어찌 술이랴  나는 막걸리를 조금씩만  마시니 취한다는 걸 모른다 그저 배만 든든하고  기분만 좋은 것이다         詩人 淸閑 記               천상병(1930 ~ 1993) 시인. 경남 창원 출생. 서울대 상대 수학. 중학 5년 재학중 담임 교사이던 김춘수 시인의 주선으로 시 이 [문예]지에 추천되었다. 1951년 [문예]에 평론을 발표. 시와 평론 활동을 함께 시작하였다.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루고, 1971년 고문의 후유증과 음주 생활에서 오는 영양 실조로 거리에 쓰러졌다. 이때 행려병자로 병원에 입원되어, 행방을 모르던 친우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유고 시집 [새]를 발간하기도 했다. 가난, 무직, 방랑, 주벽으로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는 그의 작품세계는 우주의 근원과 죽음의 피안(彼岸), 인생의 비통한 현실 등을 간결하게 압축하여 큰 공명을 불러 일으킨다. 시집에 [저승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가 있고,  동화집에[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가 있다. 1. - 귀천(歸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2.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 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그득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週日),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3. ㅡ새 이젠 몇년이었는가 아이론 밑 와이사쓰같이 당한 그날은...... 이젠 몇년이었는가 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 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 내 살과 뼈는 알고 있다. 진실과 고통  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내 마음 하늘  한편 가에서  새는 소스라치게 날게 편다.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 출신인가요?" 사진에서 그를 처음 봤을때 얼핏 그런생각이 들었습니다. 까무잡잡하고 일그러진 얼굴인데 분명히 히죽 웃고 있었습니다.  만약 웃지 않고 사진을 찍었다면 오래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습니다. 나중에서야 그가 시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지요  "천상병" 사실 시인이란 시부터 알게 되고 얼굴은 나중에 아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그에 관해서는 나중에야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천상병의   '행복'-   그럴까요 객관적으로 보면 그의 삶은 불행하기만 했습니다.. 억울하게 간첩사건에 연루되어서 전기 고문을 세 번씩이나 당했습니다.그 후유증으로 행방불명이 되었고 애기도 낳을 수가 없게 됐습니다. 친구들은 그가 죽었다고 유고시집까지 냈습니다.  의사로부터 일주일안에 죽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는 10년이나 더 살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사람들을 만나고 떠들고 웃었습니다. 늘 어린아이처럼 웃으면서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 있습니다.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억울한 고문을 당하고 가난했지만 그가 상처난 가슴에 훈장처럼 품고 있던 단어들입니다.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이세상이 그를 어떻게 대하든지, 사람들이 그에 대하여 뭐라고 말하든지 그는 웃었고 또 웃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웃었습니다.  그건 언제나 괜찮은 일이니까요.그를 고문하고 괄시했던 사람들에게까지도 지금쯤  하늘나라에서  "괜찮다"고하고 있겠지요. 아파트가 없어도 아파트 있는 사람보다 더 잘 웃던 사람, 자신을 억울하게 괴롭혔던 사람들보다, 더 행복했던 사람, 행복은 언제나 주관적이니까요. 내가 나를 행복하다고 하면 행복한 것이고 내가 나를 불행하다고 하면 불행한 것이니까요.  억울한 일을 당해서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었어도 다 용서하고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그가 문득 그리워집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았던 존재 입니다. 그러니 지금 갖고 있는 것이란  덤일뿐입니다. 그걸 잃어봐야 본전인 셈입니다. 그런데 희안하게  우리는 뭔가를 가지면 가질수록 더 웃음을 잃어버리고 삭막해지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일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노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란 시입니다.   소풍 나왔다가 가서 참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근사한 인생 아닐까요? 없는 것 때문에 불행해지지않고, 있는 것 때문에 웃을 수 있는 하루였으면 좋겠습니다. 웃는 얼굴 중에 못생긴 얼굴은 없습니다. 그의 얼굴이 설명해줍니다. 오늘, 내 얼굴은 무엇을 설명하고 있을까요? ================================ 천상병에 대한 일화   1. 술에 관한 일화   #술에 취해 친구의 신혼 집에서 실례를 한 일   술에 취하여 친구와 함께 단칸방을 침입했다. 자다가 깨어보니 친구는 정신없이 곯아 떨어져 있는데 깔고 있던 요가 축축하지 않은가. 놀라서 일어났더니 이게 웬일인가? 두 사람 중 누가 쌌는지는 몰라도 분명히 세계지도가 그려져 있으니.   # 한무숙 선생님 집에서 향수 병을 양주로 착각하고 원샷 한 일   소설가 한무숙 선생님 댁에 기거하고 있을때, 밤에 잠은 안오고 낮에 보았던 선생님 안방 화장대 위에 놓여 있던 양주병이 눈에 아른거려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생각 끝에 선생님 방에 몰래 들어가 양주병을 단숨에 들이켰다. 근데 이게 웬일인가? 갑자기 속에서 향수 냄새가 코를 찌르며 속이 메스꺼워 견딜수가 없었다.   2. 천상병의 습관   #난 11시 아니면 밥 안 먹여요   일년 열두달, 항상 시계를 차고 다녔고 잠잘때도 차고 잠. 자기 시계는 항상 텔레비전 시간과 같은 정확함을 지녔다고 자랑하고 다님. 그 정확한 시계에 맞춰 일 분 일초도 어긋나지 않게 규칙적인 일과를 보내려고 신경을 곤두 세움. 예를 들어, 천상병의 시간표에 따르면 아침 식사는 정각 11시에 해야 옳다. 11시가 오면 장모님께 계속 시간을 알려 드렸다. 마치 카운트다운을 하듯이 “엄마요, 15분 전입니다....” “엄마요, 5분 전입니다...” 만약 2,3분전에 밥이 차려졌어도 기다렸다가 정확히 11시에 밥을 먹는다. 그리고 잠은 항상 12시 40분에 들어야 한다. 그래서 아내가 밤 12시가 되면 텔레비전을 끄고 라디오를 켰다. 잠들기 전엔 항상 라디오를 듣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40분이 되면 라디오마저 끄고 불을 켜고 자는 남편을 위해 30촉 짜리 전구를 10촉 짜리로 바꿔 달았다.   #난 병맥 아니면 안 먹어요    천상병 시인이 맥주를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손님들이 캔맥주를 사들고 왔다. 그런데 천상병은 똑같은 내용물인데도 병맥주는 마시고 캔맥주는 기어이 못 먹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손님들에게 병맥주로 바꿔오라고 채근하기 까지 했다. 그래서 장모님이 손님한테 그러는가 라고 민망한 제스처를 하면 천상병은   “ 아니, 안 먹어요. 안 먹요. 갖다가 버리세요. 그러면!” 이것이 바로 천상병식 고집이었다.   #. 안경 쓴 사람하고 빨간 옷 입는 사람이 싫어요.   천상병이 싫어하는 두가지 부류의 손님이 있다. 안경 쓴 남자와 빨간색 옷을 입은 여자가 그들이다. 아무리 얼굴이 잘나고 태도가 좋아도 이 두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으면 싫어했다. 안경을 쓴 사람을 싫어하는 이유는 분명치는 않지만, 말에 따르면 책을 볼때 앞에다 바짝 대고 봐서 눈이 나빠졌다고, 바보같이 안경을 쓰게 됐다고 싫다는 것이다.  또, 빨간 옷을 입었거나, 빨간 매니큐어를 바른 여성이 오면 계속 “문디 가시나 문디 가시나 문디...” 라고 중얼 거리곤 한다. 그러다 조금 친해지면 아가씨에게 “ 아가씨, 다음에 우리 집에 올 때는 빨간 거 입고 오지마세요. 빨간 것은 빨갱이들이 좋아하고 눈도 나빠지는데.” 라고 말을 꺼냈다.   3. 세금에 대한 일화   천상병의 세금거두기는 널리 알려진 대로 20대부터 시작된 생활수단이었다. 젊었을 때는 세금은 대부분 술값으로 쓰여졌지만, 목순옥과 결혼한 이후부터는 저금을 명목으로 세금을 거뒀다. 세금은 아는 이들에게는 2,3 천원씩 받았고, 친한친구나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 형편이 좋은 사람들에겐 꼭 만원을 달라고 했다.   #석면스님 한 번 면제받는 특혜를 누리다.   친하게 지내던 석면 스님은 천원짜리 세금을 주로 냈다. 하지만 장난을 잘쳐서 만나면 즉시 서로 천원을 달라며 실랑이를 벌였다. 그러던 중에 만원짜리 밖에 없으니 팔천원 거슬러 달라는 석면 스님의 말에 내가 8천원이 어딨냐며 차 한 잔 외상으로 대접할테니 내놔라 하며 만원을 받은 일이있다. 이 일로 석면스님은 당당히 세금 1회 면제권을 받게 된다.   그리고, 천상병 시인은 상대의 호주머니를 봐 가면서 세금을 요구했는데, 돈을 많이번다 싶으면 많이 요구 하고, 적게 번다 싶으면 조금만 받았습니다. 그리고 싫은 사람은 아예 그 쪽에서 준다 해도 받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학생에게는 돈이 없다고 하면 아, 그런가? 그러면 됐어. 됐어 하며 받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어   서울대 의대 출신이면서도 가깝게 지내던 정원식씨 같은 경우에는 반드시 조건을 달고 세금을 내주었다. 돈을 달라고 해도 쉽게 내주지 않았다. 그러고는 따라오라고 해서 평소 목욕을 싫어하는 친구에게 이발소에 데려가서 긴 머리카락이라도 정리 시켜준 후에 세금을 내주 었다.   세금을 거두는 천상병은 주객이 전도 된듯 언제나 스스럼없었고 떳떳해 보이기까지 했으며, 주변 친우들 조차 그의 세금 거두는 행위를 나쁘다 보지 않고, 오히려 재미있어하고 암묵적으로 바치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4. 문순옥 여사님과의 일화   # 그 남자의 첫 인상   시인 천상병은 인상이 좀 독특했다. 함께 있을수록 괴짜라는 느낌이 들었다. 얼굴이 못생기기도 했지만 행동도 우스웠다. 콧구멍을 후비면서 앉아 있다가 우스운 이야기가 나오면 다방이 떠나갈 듯 깔깔깔 웃어대니 사춘기 여고생의 눈에 예쁘게 비칠 리가 없었다.   # 우리 결혼 했어요   천상병과 목순옥 여사가 아직 결혼하기 전일때 천상병은 여사를 친동생 처럼 데리고 다녔다. 연극이나 영화표가 생기면 함께 구경 다녔고 빈털터리가 되면 차비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은성이라는 술집에 외상을 부탁하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목순옥 여사는 별감정이 없었다. 이후 동백림 사건이 터지고, 천상병을 간호하면서 자신을 믿고 자신에게만 의지하는 시인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고, 그래, 내가 도와드리자 라는 결심을 하게 되고, 72년 5월 김동리 선생님의 주례로 식을 올리게 된다.   #남편의 무심함   셋방을 얻었던 집이 장마로 위험했던 적이 있다. 옆 방에 세든 부부와 목순옥 여사는 자꾸만 불어나는 물을 퍼내기 위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한 시간씩 교대로 퍼내는 데 나중에는 지쳐 꼼짝할수 가 없었다. 끝날 것 같지 않는 이 일에 막막해진 심정으로 기도를 했을때, 기적같이 밭 한가운데가 무너져 도랑이 생겨 집으로 들어오는 물이 다 그리로 흘러가게 됐다. 이렇게 모두가 위기를 넘기고 있을 때, 천상병은 태연히 방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한마디 한것이 “ 니가 죄가 많구나. 천둥속리에 그렇게 놀라는 거 보니까.”   #원칙주의자 남편   돈을 빌려 장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장사는 쉽지 않았고, 빚은 점점 늘어만 갔다. 그러자, 돈을 빌려 쓴 달라 아줌마가 셋방으로 쳐들어와 난리를 치며 잠까지 자는 것이었다. 내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그렇게 모욕을 주자, 너무 화가나 울화가 치밀었다. 그런 판국에 남편은 나를 욕하는 것이다. “ 왜 돈을 안 갚습니까. 안 갚으니까 나쁘지요! 돈 안 갚으면 저거 경찰서에 데리고 가시오!” 나로써는 속 뒤집히는 일이었지만 듣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남편의 원칙에 대고 이런저런 사정을 한들 상황이 달라질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럴때면 남편을 남편으로써가 아니라, 아이처럼 바라 보았다. 당연한 원칙을 잊고 사는 어른이 아니라 곧이곧대로 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 아는 어린아이로.   문순옥 여사는 이처럼 남편이 어린아이 같은 막무가내와 순수함으로 곤혹스럽게도 하지만 그것이 즐거움이 될 수도, 맑은 거울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일곱살짜리’ 라는 남편의 별명을 좋아했고 남편이 영원히 일곱 살 어린이로 남기를 원했다 라고 한다. 솔직히 보통의 여자였다면 이런 시인의 행동에 진절머리가 날수도 있었지만, 천상병이라는 시인 기에, 그의 아내 목순옥 여사이기에 이런 상황 조차도 이해할수 있고, 어려움 속에서도 행복한 생활을 할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우리는 천생연분   누구에게나 다 그렇듯 천상병 내외도 그들만의 독특한 애정표현이 있었다. 어쩌다 한 번씩 시인이 여사의 손을 느닷없이 무척 아프도록 꽈악 쥐어 주었다. 그건 단순명쾌한 시인의 시처럼 여사의 가슴에 와닿는 천상병식 애정표현이다. 아내가 사랑스러울 때, 예뻐 보일 때 그렇게 말없이 손을 꽈 쥐어 주는 그 행위는 애틋하기 그지없는 그의 마음을 드러내 보이는 제스처다.    그가 아내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 시의 한부분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 라는 시로 거기서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여자의 으뜸은 물론이지만 아내 이외일 수는 없습니다.   이런 고백 시를 본 묵순옥 여사는  남편이 이런 고백시를 썼지만, 즐겨 서로의 사이를 물어봤답니다.   "마누라가 고마워요, 안 고마워요?" "고맙지, 고맙지, 마누라가 고맙지요. 저는 순전히 마누라 덕택에 살지요." "마누라를 사랑해요?" "사랑하지요, 사랑하지요." "그런데요. 누구를 제일 사랑해요?" "내 아내를 제일 사랑하지요." "옛날부터 좋아하셧어요? 옛날부터?" "물론이지요, 제가 옛날부터 마음 속에서 사랑했지요."   이렇게 그들은 남들은 알지 못하는 두 사람만의 느낌, 남들은 이해하려 들지 않는  두 사람만의 정감, 남들이 흉내내기 어려운  둘만의 내밀한 교류, 이런 것들이 있었기에 평생을 함께 할수 있었던 것 같다.                   ▶ "천상병 시인이 좋아하실 만한 진국만 모여서 마련한 잔치니 하늘나라 그분도 즐거워할 겁니다." 이외수씨는 전시 작품 앞에서"술 취해 흥얼흥얼…아직도 서럽게 울고 있노라"라는 천 시인을 위한 노래도 불렀다. 김경빈 기자 1980년대 한국 사회에 '도적놈' 셋이 있었다. 시 쓰는 천상병(1930~93), 그림으로 도닦는 중광스님(1934~2002), 소설가 이외수(59)씨다. 기인열전(奇人列傳)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세 인물은 서로 외로운 것을 알아보고 함께 세월을 도적질하며 술병깨나 축내고 살았다. 12년 전 천 시인이 이승에서의 소풍을 끝내고 하늘나라로 돌아가고, 3년 전 '걸레 스님' 중광 마저 "괜히 왔다 간다"며 붓을 접자 이외수씨는 먼저 간 두 사람을 그리워하며 홀로 놀았다. "천 시인이 저를 각별하게 아껴주셨어요. 돌아가시고 나서도 챙겨주시네요." 천상병 예술제가 열리는 의정부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이외수씨는 도인 같은 긴 머리에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 천 시인이 남긴 작품에 그림을 붙인 시화와 묵화를 선보이는 특별전 '붓으로 낚아챈 영혼'을 준비하면서 그는 중광 스님의 말을 떠올렸다고 했다. "글을 통해 도에 이른 이는 천상병밖에 없어. 100년 가도 그런 시인은 안 나올 거야. 전기 고문을 세 번씩이나 당하고도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한 사람 아닌가." 이씨는 천 시인의 시를 원고지 그림으로 풀었다. 나무 젓가락으로 투박하게 쓴 시 '귀천''갈대''국화꽃' 옆에 원고지를 갖가지 모양으로 오려 붙였다. 누렇게 바랜 원고지가 사람도 되고 나무도 되고 새도 되는 단출한 작품이다. "컴퓨터 자판 시대라 누가 원고지를 돌아보나요. 글 쓰던 사람에게 원고지는 참 귀한 도구였는데. 원고지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고. 어쨌든 예술로 승화시켜줘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시화와 함께 이씨가 내놓은 묵화는 봉익필로 그려 눈길을 끈다. 봉익필이란 장닭의 꼬리털로 만든 붓이다. 계우 무심필(鷄羽 無心筆)이라고 한다. 삐죽삐죽 제멋대로인 털 때문에 심성이 거세고 먹을 잘 받아들이지 않아 마음을 비우고 찰나에 붓을 놀려야 한다. 도 닦기 좋은 붓이요, 수양하기에 그만인 그림이다. "기교나 재능보다 그리는 사람의 내면이 어떻게 생겨 먹었느냐에 따라 그림이 나오니 어디 숨을 수도 없이 발가벗는 작품입니다." 이씨는 번개를 잡아채듯 하나 해놓고 나면 정신이 상쾌해진다고 말했다. 이외수씨는 요즈음 장편소설 '장외인간'을 쓰느라 밤낮을 잊고 산다고 했다. 주류에서 삐딱하게 삐져 나와 사는 아웃사이더 얘기다. "견주고 따지고 그런 것이 어찌 예술 작품이 되겠습니까"라고 되묻는 그는 종이 속에 먹물 속에 몇 천 번 빠졌다 살아나온 그림과 소설로 세상의 진짜 도적놈이 되겠다고 했다. 정재숙 기자   김시종 시인 하늘은 천상병을 이 땅에 떨어뜨렸고, 그의 수호천사로 목순옥을 내려 보냈다. 천상병은 1930년 경남 창원에서 ‘응애’소리를 울렸고, 그의 천정배필 목순옥은 1935년 경북상주에서 생명을 시작했다. 천상병은 마산고를 거쳐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한 선민(選民)이었다. 목순옥은 상주여고를 졸업한 얼굴보다 마음이 예쁜 걸어 다니는 천사였다.  우리 인생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만남인데, 천상병은 주간법률신문 기자인 목순옥의 오빠를 따라 목순옥의 집을 자주 찾아와 공짜 숙식을 늘상 하여, 친구 여동생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었다. 처음엔 진짜 문학소녀였던 목순옥은 시인 천상병 오빠에게 별 부담감 없이 호감을 품게 되었고, 34세의 과년한 나이로 천상병 시인의 보호자가 되었다. 어린애같이 단순한 천상병에게 왕년의 누이동생 같은 목순옥은 지상최고의 양처가 되어, 거리를 헤매던 천상병에게 가정의 따뜻함을 안겨준 날개 없는 천사였다.천상병의 지적 능력은 천재에 가깝지만, 판단력은 너무 단순한 천치수준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었다. 천상병은 서울대 상과대학 4학년 1학기때, 스스로 서울대를 자퇴했다. 세상에서 시인이 최고인데, 시인이 됐으면 됐지 서울대는 뭐 말라죽은 서울대냐 하는 식이었다. 천상병은 당시 월간잡지 ‘문예’에 평론추천을 받고, ‘현대문학’ 추천시인이 되었다. 천상병은 서울대 상대 학업성적이 상위권 10%안에 들어, 졸업만 하면 한국은행 행원 특채가 약속된 복 받은 엘리트였다. 서울대를 졸업 1년도 안 남기고 자퇴한 천상병의 객기가 오판임이 드러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장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 친구 하숙방을 전전하거나, 살림집을 기습하여 당혹케 하는 일이 잦았지만 대놓고 밀어내는 친구는 없었던 것 같다. 천상병의 천진난만엔 친구들도 성 낼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호주머니엔 땡전 한 푼이 없어도, 술 고픈 것은 잘 참아내지 못하는 천상병이었다. 직장 없이 오래 지내다 보니 천상병은 푼돈 마련하는 노하우도 나름대로 있었다. 문인들이 많이 드나드는 시내 문인단골 다방과 종로에 있던 문인협회 사무국을 기습하여 ‘한 푼만!’ 하고 손을 내밀었다. 돈을 구걸(?)하지만 얼굴 표장이 밝고 결코 비굴하지 않았다. 문인 여러 명 중에 대표로 누가 돈을 쥐어주면, 쏜살같이 포장마차로 쫓아간다. 그 때가 1970~80년대라 보통 300원을 주면 히죽 한번 웃고, 천원짜리 지폐를 건네주면 ‘최고’라며 반색을 했다. 천상병의 기행(奇行)도 오래 못 간건, 현부인 목순옥 여사가 종로구 인사동 뒷골목에 제비 집 만 한 가건물을 세 얻어, 천상병의 시 대표작 ‘귀천(歸天)’을 옥호로 한 다방 ‘귀천’을 꾸렸다. 필자도 1980년대 후반에 다방 귀천에 들렸던 적이 있었다. 필자가 한국문인협회 문경시지부장을 맡으면서, 중견 도예가 도천 천한봉 선생에게 끈질기게 건의하여 제정한 ‘도천문학상’을 뇌졸중 을 앓으면서 초인적 투병을 하는 랑승만 중견시인에게 어느 해 주기로 전격 결정하고 지부장인 필자가 상경하여 드리기로 했다. 인천에 사시는 랑 시인께서 문경까지 오시겠다는 것을 불편한 몸(반신불수)임을 감안하여 필자가 서울로 가서 목순옥 여사가 운영하는 귀천 다방에서 시상을 했다. 필자가 군 복무시절 서울 육본에서 2년간 근무하여 서울 토박이 못지않게 서울거리를 톺았지만, 인사동 뒷골목의 ‘귀천’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는데, 김형! 하고 부르는 랑 시인을 발견했다. 귀천 다방은 허름한 집의 담에 붙여지은 두어 평도 못되는 좁은 공간이었다. 손님이 다섯명 앉기에도 좁았다. 그 이름난 ‘귀천’이 하늘을 나는 제비만 한 쬐그만 공간이었다. 필자, 랑 시인, 황미숙 시인, 목순옥 여사 몫까지 필자가 모과차 네 잔을 시켰다. 도천문학상은 상패·다완1점·금일봉(당시15만원)이었다. 랑 시인은 상금은 안 받고 필자 차비로 주었지만, 그 돈을 받을 만큼 투미한 필자가 아니다. 그 때 랑 시인은 이 상을 다음해엔 천상병 시인에게 주자고 제의했다. 그렇게 되면 너무 매스컴에 오르내릴 것 같아 보류했지만, 몇 해 안 있어 1993년 천상병 시인이 작고하여 미룬 것이 내내 미안하고 후회스럽다.  천 시인 사후 목순옥 여사는 ‘날개 잃은 새의 짝이 되어’라는 자전적 에세이집을 펴내어, 한국 최고의 명 수필집이란 격찬을 듣게 되었다. 2010년 목순옥 여사도 천상병 시인의 뒤를 이어 천국시민이 되었다. 먼저 귀천한 천 시인이 부인 목순옥 여사와 천상재회를 하게 되었다. 다음 대화는 필자가 상상해 본 거다. 천상병 “니도 세상 소풍이 재미 있더노?” 목순옥 “말도 마소, 오빠야가 보고 싶어 목 빠질 뻔 했데이”. 천상병 시인의 시집 ‘귀천’과, 목순옥 여사의 수필집 ‘날개 잃은 새의 짝이 되어’가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면 참 좋겠다.     ================================================================= 김훈의 에서 천상병과 함께 요정에 갔던 경험을 서술한 것이 있다, 소제목은 "'천상병'이라는 풍경"이며   209쪽과 210쪽의 내용이다, 김훈은 요정이라는 곳이 천상병과 자신이 경험할 팔자가 아니라고 하자, " 야, 요 놈아, 요정이 네 팔자에나 없지 왜 내 팔자에 없겠느냐? 있다! 있다! 있다!" 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요정이 평생 처음이라고 소리치는 천상병은, 그러나 한평생 요정에서 굴러먹은 자들도 감히 넘볼 수 없는 호탕함으로 잘 놀았다."고 한다, 건강때문에 부인에게 허락받은 맥주 두 잔 밖에 마시지 않은 채 말이다, "그는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여자의 손을 잡았다, 여자들은 초장부터 천상병의 표정과 체취와 말투에 질려 있었다, 천상병은 침 버캐가 달린 입술을 내밀어 여자의 손등에 입맞추었다. 그는 경이에 찬 눈으로 여자를 들여다 보았고, 그의 삭정이같은 손을 뻗어 요정 여자의 고데한 머리를 만졌다, 여자는 질겁을 하면서 엉덩이를 움츠려 물러났다, 천상병도 엉덩이를 움츠려 여자를 따라갔다, '요놈! 요놈! 요놈! 요 예쁜 놈!' 천상병은 여자를 들여다보면서 앙천대소하면서 그렇게 소리 질렀다, '요놈! 요놈! 요놈! 요 예쁜 놈!' 이, 외마디 비명 세 토막이야말로 아름다운 것들 또는 무구한 것들, 스스로 저 자신일 뿐 다른 아무것도 아닌 것들, 살아서 움직이는 것들을 향해 내뱉는 천상병의 절규이다. 아 절규 앞에서 요정의 사회경제학과 자본주의의 부도덕은 함께 무너져야 싸리라,  천상병의'요놈! 요놈! 요놈! '은 세상이 앗, 할 사이도 주지 않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정조준으로 겨누어 그대로 찍어버린다,"   자 이런 천상병의 겉모습에 질겁을 하는 여자들의 젊음을 향유하는 전상병의 노추를 영화에서 그리도 더러운 것으로 독해를 하는 것인가?   "천상병의  '요놈! 요놈! 요놈! (요 예쁜 놈)'은 요정의 술판을 완전히 제패하고 있었다."   그래, 천상병이 요정여자랑 2차를 갔겠는가? 영화 를 비난하는 무지한 이들은 당연히 요정이니 2차를 갔을 것이다고 자신의 경험을 내뱉는 것이다, 술 먹는 것까지도 마누라의 허락을 받아오라는 천상병이 2차를 갔겠는가?   가지 않았기에 김훈은 이렇게 떳떳이 고백하지 않은가? 영화라는 텍스트를 독해함에 있어 글로 드러낸 것은 결국 자신의 한계. phallus적 인식의 무감성일 뿐이다, 그래서 노자는 상선약수,를 말했던 것이다,   쪽팔리는 오독을 자행하는 통념을 공박할 뿐, 관객의 자신의 수준에 걸맞는 인식을 굳이 따지는 것은 의미의 노역을 하는 것임을 밝힌다,   밀의 에서 말하는 바의 "욕망...강한 충동은 에너지의 또 다른 이름이다, 에너지는 나쁜 목적에 쓰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감각하고 무기력한 것보다는 역동적인 것에서 언제나 더 많은 선이 도출되는 법이다, 자연스런 감정을 가장 많이 소유한 사람들이야말로 그의 감정을 계발했을 때 언제나 가장 강렬한 정서로 승화시키는 법이다," 22쪽에서 재인용   "종래의 철학자, 신학자들은 인간적 속성의 원자재를 잠재적 선보다는 잠재적 악의 원천이라는 점에서 늘 경계하여 왔다. 따라서 이를 통제하고 세련화시킬 것을 언제나 강조하여 왔다, 또 미덕의 원천을 개인의 정열, 욕망, 충동, 감수성 등에서 찾지 않고 양심, 의지, 이성, 자기절제, 예지 등에서 찾았다,"-23쪽 "미풍양속의 침해는 타인에 대한 침해라는 등식은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 낡은 관점이 되어버린 것이다,"-24쪽 도덕적 엄숙주의의 1. 역사의 발전이라는 전망 2, 국가의 권위와 3. 가부장적 권위의 강조라는 세가지 측면으로서의 이성의 역사를 해체하는 것이 탈근대의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압니다, 해서 23쪽의 언급은 이러한 이성적 도덕의 강조이며, 이를 이미 낡은 관념으로 비판하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예술과 철학은 같은 것이다,는 도올의 말을 전하면서 이성과 대비되는 바의 감성이라는 근대의 서양적 이분법은 잘못이며 자연과 인체를 유기적으로 연관지어 이해하엿던 동양적 가치관이 육체와 정신의 통일된 '몸'으로 귀결되어야 하는 것을 내세우는 것이 도올의 입장이라  봅니다, 해서 이처럼 영화의 이해에 있어 그 감성적 교감을 나누지 못하는 물신주의적, 남성적 phallus적 소비향략을 자유라고 말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오독을 할 수 있을만큼 훌륭한 영화라는 역설을 경험하시는 것이 요망됩니다,   밀이 말하였듯이 작품으로 승화된 사랑의 이적요에 대하여 '딱'이지 않겠는가? 이것이 바로 이다,     또 타임캡슐을 매설해두었는데 속에는 천 시인이 생전에 쓰던 안경·찻잔·집필원고 등, 시인의 유품 41종 203점을 모아 (타임캡슐에) 묻었다   이 타임캡술은 천 시인 탄생 200주년을 맞는 2130년 1월 29일 개봉될것이다   순수 시인 천상병님 의정부에 있던 생가를 그대로 옮겨 안면도 대야도에 복원이 되어있다... 의정부에서 먼 안면도에 복원이 되어있을까? 천상병 시인을 좋아하던 "시인의 섬" 펜션을 운영하시는 모종인님이... 재개발로 철거되는것이 너무나 안타까와 사재를 들여 옮겨 두셨다 한다     빗소리가 그대로 들릴듯한 슬레이트 지붕... 겨울이면 벽에서 바깥의 냉기가 그대로 느껴질것 같고....  사람하나 누우면 남는공간이 없을듯 초라한 이공간에서...  내면의 순수함을 일깨워주는 위대한 시가 지어졌다니...     이 작은집에 반쪽은 세까지 주었다니...         천상병 시인이 주로 시를 집필하던 방이라 한다       천상병시인이 평소 애용했다는 의자 아주 조그만하여 작은아이 다니는 유치원의 의자같다...        복원해둔 생가 바로 아래에 조성된 천상병문학관... 올 11월경에 오픈한다는데 시인섬 사장(모종인)님의 배려로 미리 둘러 볼 수있는... 잔잔한 음악을 깔고 아이들에게 시를 들려주는 풍요의 시간도 맛보았다...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다...   [출처] 천상병생가와 시인의섬.....풍요의 공간|작성자 긍정의 힘    안면도, 천상병 시인의 생가! 외로운.. 너무나 외로운 문학관에서 시인의 대표작 '귀천'을 읊조리다 눈시울이 뜨거워 진다.. 다른 시인들의 문학관과 확연히 다른 문학관에서 시인과 더 가까워 진 것 같다. 돌아서는 발걸음 뒤로 비둘기 울음소리로 배웅하는 시인...                   이곳을 관리하시던 분이 작년에 작고하셔서 관리가 전혀 안되고 있다는 태안군청 직원의 설명을 들었답니다..ㅜㅜ             이끼 낀 벤치가 너무 외롭다...             생가 옆 조그만 유리 건물 내부.       시낭송과 노래를 했던 문학 콘서트가 열리기도 했어나 보다..               =============================== 문향 - 마산의 만날고개 내 천상병 시비                글쓴이  │   印香   제  목  │   천상병 시비 건립 고사 축문      維歲次 壬午 二月 辛巳朔 初二日 壬午 한국시사랑협회 敢昭告于  천하의 영봉이신 천왕신님과 지리산 산신님, 土地之神님, 구천을 떠도는 뭇 영혼에게 삼가 고하나이다.  시인으로서 위대함을 갖추시고 인간적으로 존경할 만한 천상병 시인의 추모 시비를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지리산 자락 이곳에 건립하게 되었음을 엎드려 알려 드립니다.  천상병 시인님은 비록 이 세상에서는 고난의 삶을 살았지만 평생토록 아름답고 맑은 시를 쓰시어 모든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셨습니다.  이에 이 분의 업적을 추모하고 문학성을 길이 보존하는 뜻에서 시비를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존경과 추모의 뜻을 담아 오늘 여기에 시비를 건립하고자 하오니 시비 건립 공사에 따른 모든 일에 대해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고 시비 건립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도록 모든 신님들의 음덕과 공덕을 바라옵니다. 아울러 우리 시사랑협회의 무궁한 발전이 있도록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삼가 맑은 술과 여러 제수를 차려 제향하는 뜻을 펴오니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敬伸奠獻尙  響  사건과 천상병 / 그 실체를 말한다. '한심한 작태', '분노하는 정의'. 지난 67년 7월 국내 신문이 건국 이래 최대규모의 간첩단 사건을 두고 외국 언론은 비아냥거리는 제목을 아낌없이 썼다. 우리 정부가 독일, 프랑스 등에서 수많은 유학생, 광원, 예술가를 불법납치해 고문했다 이유에서이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유럽에서 활동하던 현대 음악의 거장 윤이상, 화가 이응로 등 194명을 체포한 뒤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고, 검찰은 윤이상 등 6명에게 사형을. 이응로 등 4명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그러나 독일 등의 강려한 항의로 관련자들은 결국 한명도 남김 없이 모두 석방됐고, 윤이상 등은 씻을수 없는 상처를 안고 이국에서 숨졌다. 19일 밤 11시 30분 문화방송 가 시리즈 두 번째로 '끝나지 않은 동백림 사건'을 방송했다. 제작진은 처음 이 사건이 얼마나 조작됐는지 그 실채를 밝히는 데 목적을 뒀다. 그러나 당시 중앙정보부 수사과장,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자수'했던 핵심인물, 지금은 독일에서 살고 있지만 징역 5년을 선고 받았던 독일 파견 광원, 재판장, 변호사 등을 폭넓게 인터뷰한 뒤 고민의 방향이 달라졌다. 정부가 치밀한 계획 아래 납치작전을 벌이고, 엉터리 혐의로 천상병 시인 등을 고문해 폐인으로 만들고, 서울대의 합법적인 동아리를 간첩조직이라고 날조한 것 등을 분명히 확인했지만, 이수자 지음/창작과 비평사 일부가 동베를린에서 북한과 접촉한 것 또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남과 북 어느 한쪽 편에 서지 않고 하나의 나라로 여기고 행동한 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였다. 김학영 피디는 "일부가 북과 접촉은 했으나 간첩행위는 없었던 간첩단 사건"이라 며 "분단된 어느 한쪽의 눈에서 보면 영원히 풀리지 않는 사건"이라고 결론지었다. 프로그램은 동백림사건의 진상과 함께 "고립된 섬"에서 살 것을 강요받아 온 우리의 시각을 어떻게 수정해야 하는지까지 가늠하게 한다. 보이는 진실은 여전히 평행선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6 8 부정 선거 등으로 민심을 잃고 곤혼스러운 시기였던 1967년 7월. 교수, 유학생, 음악가, 화가 등 약 2백 명이 검거되는 대규모 간첩단 사건, 이른바 '동백림 거점 공작단 사건'이 터졌다. 불법 납치로 인한 국제적 망신이라는 불명예와 함께 우리나라 최대의 공안 조작 사건으로 불리는 '동백림 사건'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MBC 특별 기획 에서는 지난 9월 19일 이 사건을 정면으로 다뤄 큰 관심을 모았다. '물은 아래로 흐른다’는 말은 진실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보고 경험한,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다. 그러나 ‘물이 아래로만 흐른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다. 물이 아래로만 흐른다면 아마 바닥에 모두 모여서 지구는 온통 사막이 될 것이고, 비도 오지 않을 것이며, 식물도 동물도 인간도 살 수 없을 것이다. 물이 위로 갈 수도 있어야 ‘흐른다’는 말도 나올 것이고, '비'라는 말도 나올 수 있다. ‘물은 아래로 흐른다’는 말은 눈에 보이는 틀림없는 진실이지만, '물이 아래로만 흐른다'는 말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을 간과한 틀린 말이 되고 만다. 30년도 지난 동백림 사건을 취재하면서 나는 보이는 진실과 보이지 않는 진실 사이를 많이도 오락가락했다. 방송을 마친 지금도 그 사건의 진실을 온전히 파악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단지 사건 관련자들의 수많은 말들과 재판 기록, 당시 기사를 꼼꼼히 정리하면서, ‘눈에 보이는 진실’에 관해서만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아는 사람 중 하나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떤 사건에 대한 한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의 감정과 말하는 의도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습을 가진다. 증언 다큐멘터리의 어려운 점이 여기에 있다. 어떤 사실에 대해 피해자와 가해자가 서로 다른 것은 물론이고, 피해자 내부에서도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의 말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시청자에게 제시해야 하는 취재팀은 ‘말’이 갖는 위험성을 민감하게 느끼고 숙고해야만 진실에 가까이 갈 수 있다. 거기다 시청자의 재미까지 염려해야 하는 방송 현실 때문에 고민의 무게는 커질 수밖에 없다. ! 어찌보면 좀 비겁해 보이기도 하고, 말하는 주체가 누군지-제목만 보면 MBC인지, 사건 관련자인지 알 수 없다. 제작팀은 사건 관련자가 주체라고 입장을 정 리했다-불분명하기도 한 이 제목의 프로그램은 지난 5월부터 준비됐다. 우선 기획(김윤영 부장)이 정해지고, 프로듀서(윤혁 차장, 이채훈·박노업 차장대우, 필자)가 선정된 후, 아이 템 선정에 들어갔다.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에서 의혹과 미스터리가 남아있는, 이를테면 ‘말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는 사건 위주로 아이템을 찾았고, 제작팀이 종합 결정한 아 이템을 각 프로듀서들이 분배했다. 동백림 사건도 그 중 하나다. 1967년에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동베를린을 거 점으로 한 간첩단 사건’으로 발표된 이 사건은 구속자만 1백94명에 이른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공안 조작 사건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 중에는 세계적 예술가였던 작곡가 윤이상, 이 응로 화백 등이 연루돼 있어, 그들의 귀국 여부와 관련해 국내 언론으로부터 끊임없는 관 심의 초점이 되면서, 최근까지도 재조명을 촉구하는 기사가 심심치 않게 나오곤 했다. 재조명해야 할 정황들은 많이 있었다. 우선 사건이 표면화된 1967년의 상황이 그랬다. 6월 8일에 있었던 총선에서 부정 선거 시비 로 4·19 이후 최대 규모의 데모가 발생했고, 당시 여당은 여론에 밀려 공화당 당선자 중 몇 명을 당선 무효 처리하는 일까지 있었다. 거기다 당시 학생 데모의 주도 역할을 했던 서 울대학교 민족주의비교연구회 관련자들이 함께 검거된 것, 그리고 문단의 기인인 천상병 시 인까지 연루되어 치도곤 매를 맞은 것도 조작의 혐의를 느끼게 하는 대목들이었다. 또한 최 종 판결에서 두 명이나 사형이 선고됐음에도 불구하고 3년이 되기 전에 한 명도 남김없이 석방된 것도 그랬다. 취재팀은 우선 당시의 공판 기록을 구해 꼼꼼히 읽었다 . 수사 기록에 나타난 피의 사실을 확인한 후 피해자 섭외를 시작했다. 그런데 의외로 당시 동베를린에서 잡혀온 주요 피의자 들은 인터뷰를 완강히 거절했다. 심지어 전화 통화까지 거부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는’사람들이 말하기를 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오히려 당시 판사, 중앙 정보부 수사과장 등은 쉽게 인터뷰에 응했고, "사건 관련자들의 혐의는 사실이었고 재판 과 정도 정당했다"고 주장했다. ‘관련자들이 스스로 원했던 명예 회복의 기회를, 조작 사건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이 기 회를, 본인들은 왜 거부하는 것일까?’이러한 의문을 품은 채 독일 현지 취재를 떠났다. 그 곳에 가서야 인터뷰를 거부했던 관련자들의 심경을 알 수 있었다. 작고한 작곡가 윤이상 의 부인 이수자는 "남편은 단지 우리 민족을 사랑한 민족주의자였을 뿐"이라고 말했지만, 광부로 독일에 왔다가 사건에 연루된 박성옥은 "당시 중정 수사 기록은 대부분 사실"이라고 밝혔다. 그의 인터뷰 도중 나온 ‘상선’‘점’‘포섭’ 같은 말들을 들으면서 조작 사건으로만 봤던 시각을 다시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귀국 후 그가 말한 ‘최상선 포섭 책임자’를 만나보기로 했다. 그간 국내 언론에서는 L씨로 표기된 채 한번도 공개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히지 않은 인물, 대통령에게 직접 자수해 중정의 동백림 사건 수사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람, 그는 국내 헤겔 철학의 거두로 자리잡은 임석진 교수였다. 몇 번의 통화 끝에 카메라로 찍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모 호텔 커피숍에서 그를 만나 이야기 를 들을 수 있었다. 왜 동베를린 북한대사관을 접촉하고 북한을 방문하게 되었는지, 그는 조 심스럽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하지만 카메라 촬영은 완강히 거부했다. 취재팀이 내용 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화면에 담기지 않으면 시청자에게 전달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위기였다. 우여곡절 끝에 근 한 달이 지난 후 가까스로 임석진 교수가 촬영에 응하면서 벽에 부딪혔던 취재는 풀려나갔다. 동베를린 북한대사관과 한국 유학생들의 접촉은 윤이상이 월북한 친구의 소식을 알아본 것을 시작으로 급속히 번져나갔다. 북으로 간 가족을 만나기 위해, 통일에 대한 젊은 열정으 로, 혹은 가벼운 호기심으로 갔던 것이 대부분의 이유였지만, 어려운 유학생의 주머니 사정 상 거절할 수 없어 받았던 2백∼3백 달러의 여비와, 다른 유학생들을 대사관에 소개해준 일 등은 후에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에 걸리는 죄목이 되었다. 게다가 북한은 그들 중 일부를 북 한의 체제 선전을 위해 평양에 초청했고, 노동당 입당을 권유하기까지 했다. 6·25 후 10년 이 지난 무렵, 북한은 남한에 비해 월등한 발전을 했고, 그 국력을 바탕으로 한국 유학생에 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이다. 피고인들의 혐의 내용은 대부분 사실이었다. 다만 북한의 의도를 파악하고도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이용당한 사람들과, 오로지 가족을 만나기 위해 또는 순진한 호기심으로 접촉했던 사람들, 그리고 통일에 대해 나름대로 확고한 신념을 갖고 드나들었던 사람 등이, 소위 ‘동백림 간첩단’ 안에는 혼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조작’과 ‘사실’ 사이에서 제작진을 방황하게 만든 주요한 원인이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을 북한대사관에 소개했고, 평양 방문에 이어 노동당 입당까지 했던 임석 진은 여러 이유로 위기감을 느끼고 자수를 결심한 후, 당시 금융계의 유력 인사를 통해 청와대에서 대통령에게 직접 털어놓았고, 대통령은 중정에 수사 지시를 내렸다. 사건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러나 중정 수사 요원이 독일과 프랑스에 가서 관련자들을 직접 체포해오는 명백한 불법 행위(상대국의 주권 침해)를 저지르면서 ‘구속자들의 원상 복귀’를 종용하는 독일의 엄청난 압력이 시작됐고, 재판의 전과정을 감시당하고 ‘남한은 인권 후진국’이라는 오명까지 쓰는 등 국제적 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현재까지도 독일에서 ‘한국’하면 우선 떠오르는 이미지는 ‘광부와 간호원, 그리고 납치’라고 한다. 결국 체포 과정의 불법성 문제는 재판에서는 다루어지지 않았고, 수사 과정에서 있었던 가 혹 행위(천상병의 전기 고문, 윤이상 물 고문, 김학준 구타) 등은 언급조차 없었다. 근본적인 불공정은 제기되지도 않은 채 재판은 ‘공평하게’ 진행되었고 끝났다. 단지, 독일의 압력에 대한 수용을 형집행 단계에서 반영해 사건이 터진 지 3년이 채 되지 않아 두명의 사형수를 포함해 관련자 전원이 석방됐고, 공권력의 불법 행위가 가져오는 결과가 어떤 것인지 명백 히 보여준 대표적 사건이 되었다. 사건은 끝났지만 수사 과정의 가혹 행위는 피해자들의 기억 속에 끝나지 않았다. 천상병 시 인은 아내가 빨간 옷을 입지 못하게 했으며, 윤이상도 10년 가까이 자다가도 일어나 감옥이 아닌 것을 확인하곤 했다. 간첩에 대한 논란은 당시 재판에서 중요한 쟁점이었다. 윤이상은 최후 진술에서 "다른 죄는 주셔도 간첩죄만은 빼달라"고 간청했다 . 자신의 작품이 간첩의 작품이라고 불리는 걸 견딜 수 없다는 것이었다 . 다른 피의자도 마찬가지였다. 난수 표를 국내로 가져온 사람도 사용한 적이 없고, 사용할 의도도 없었으니 간첩이 아니라고 주 장했다. 심지어 동베를린의 북한대사관에 다녀온 것이 무슨 죄가 되느냐고 강력히 항의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 외국에서 잡혀온 유학생들은 국내 소식을 접하지도 못하는 외국에서, 어 떻게 북한에 정보를 제공하는 간첩일을 할 수 있느냐고 항의했다. 그러나 당시 수사 책임자였던 이용택은 "난수표는 사용 방법을 모르면 전혀 의미 없는 종이에 불과하다.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서 간첩이 아니라는 것은, 남파돼서도 가만히만 있으면 간첩이 아니라는 주장과 같다"라며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전혀 다른 견해를 피력했다. 양측의 견해는 여전히 평행선이었다. 이역만리 떨어진 외국에서 한반도 전체를 그리워하고 통일을 보고자 했던 유학생의 시각과, 대립하여 싸우고 있는 분단의 한쪽편에 서서 그 한쪽을 지켜야 하는 시각은 명확히 달랐던 것이다. 학생들의 순수한 의도를 이용하고자 했던 북한 정권의 불순한 의도를 빼면, 당시 유학생들이 찾고자 했던 통일에 대한 의욕과 모색을 비난할 수는 없다. 또 정권 안보 차원에서 동백 림 사건을 확대하고 그 과정에서 저지른 공권력의 불법 행위를 빼면, 당시 공안당국이 선택 한 방식 또한 비난할 수 없다. 결국 공안당국이나 동백림 사건 피의자 모두 각자의 위치에 서 보이는 진실만을 얘기하고 있었다. 동백림 사건의 진정한 해결은 대립하고 있는 이 분단의 상황을 해소할 때에만 가능한지도 모른다. 분단된 조국 저쪽의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동백림 사건의 진실에 온전히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                                                   행 복                          -천 상 병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느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       천상병(1930~1993) 일본 출생 1945년 가족과 함께 귀국한 그는 마산에서 학업을 계속한다. 그의 첫 작품은 그가 아직 학생이었던 1949년 월간 문예지에 실린 "강물"이었다. 1952년경에 는 이미 추천이 완료되어 기성 시인의 대접을 받았다. 서울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부산에서 일을 하였다.   대학 시절 친구의 수첩에서 그의 이름이 발견되어 에 연류되었다는 혐의로 중앙정보부로 끌려간다. 그 곳에서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받고 자식을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고문의 깊은 후유증에 시달리며 술로 나날을 보내던 그는 마침내 1971년 실종된다. 여러 달 동안 친구와 친척들은 수소문했지만 결국 그가 죽은 것으로 결론을 지었다.   그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그의 작품을 모아 유고시집 를 발간하였다. 그가 살아있다는, 거리에서 쓰러져 서울의 시립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 는 소식이 느닷없이 왔다. 심한 자폐증상을 보이는 가운데서도 한 여인의 방 문 이후 병세는 호전되었다. 1972년 천상병은 그 여인과 결혼, 고난과 어려움 을 겪으며 20년을 같이 한다. 그는 살아서 자신의 유고시집을 보는 특권을 누렸다...      =====================================================   김욱의 그 작가 그 작품 ㅡ시인 천상병의 시집 ‘새’ 떫은 삶 뒤에 가려진 깊은 향내를 느끼다 서울대학교 입학한 수재였던 시인 ‘동백림 사건’ 연루 감옥 갔다 무죄 석방…고문 후유증으로 만신창이 정신병원서 노숙자로 발견됐을때 해맑은 미소 지으며 시 쓰고 있어 ‘새’는 첫번째 시집…순수하고 깨끗한 인간의 마음 고스란히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햇빛에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으로 때론 와서  괴로웠음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   - 시집 중에서 ‘나의 가난은’    생전의 천상병(1930~1993년)은 아내와 함께 서울 인사동에서 ‘귀천’이라는 조그만 전통찻집을 운영했다. 돈을 폐지쯤으로 여기는 가난한 시인이 혹여 어렵사리 얻은 불쌍한 아내를 굶기는 건 아닐까 조바심이 난 친구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차려준 찻집이다. 그의 아내는 특히 모과차를 맛깔나게 끓여냈다. 누런 찻물이 깊게 우러난 이 모과차를 마실 때마다 천상병의 시가 떠올랐다. 달콤새큼하면서도 뒷맛이 개운치 않고 향이 입안에 짙게 퍼진다. 굴곡 많았던 천상병의 삶처럼 그의 아내가 끓여내는 모과차에는 인생에 스며드는 갖가지 후회와 기대가 애달프게 서려 있었다.  천상병은 서울대학교 상대에 입학한 수재였다. 스무살 약관의 나이에 시인으로 데뷔한 천재였다. 젊은 날의 천상병을 기억하는 사람들 중 그의 미래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이 순수하고 재능이 가득한 청춘에게 인생은 모진 쓴맛을 보여준다. 공산주의 혁명을 계획했다는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감옥에 가게 된 것이다. 반년 후에야 무죄로 석방된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전기고문의 후유증으로 성불구자가 되었다. 마음에 새겨진 상처로 알코올중독이 되었다. 그의 빛나는 예술혼은 거리를 떠도는 행려병자가 되었다. 행방불명되어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던 천상병이 서울시립정신병원에서 이름 없는 노숙자로 발견되었을 때, 그는 아이 같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약봉지에 시를 쓰고 있었다. 그 시는 달고, 또 한편으로는 맵고 서글펐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 시집 중에서 ‘귀천(歸天)’  는 천상병의 첫번째 시집이다. 행방불명된 천상병이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죽은 줄로만 알았던 동료 시인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발간한 유고시집(遺稿詩集)이다. 그 아픈 태생에도 불구하고 시집 에는 고문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상태에서 벗어난 사람이 썼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순수하고 깨끗한 인간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무것도 감추고 꾸밀 것이 없다는 시인의 결백한 믿음이 슬프도록 가득하다.   천상병은 죽을 때까지 아무도 탓하지 않았다. 누구를 원망하는 말도 입에 담지 않았다. 자신을 손가락질하며 미치광이·불순분자·기인으로 부르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따져 묻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못난 시인의 곁을 지켜주는 아내를 사랑했고, 아이들을 위한 동시를 썼고, 이 모질고 험난한 세상을 보듬고 사랑해주었다. 그에게 아무것도 남겨주지 못한 허망한 세월을 소풍 삼아, 그에게 상처만 가득 안겨준 인생을 놀이터 삼아 고통과 좌절과 슬픔을 딛고 한 세상 철없이 노래하며 떠나가는 아름다운 시인의 모습을 우리에게 남겨준 것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 생활의 걱정이 없다’던 그 찻집은 지금 없다. 2010년 시인 천상병이 목숨보다 아끼고 사랑했던 아내 목순옥씨가 세상을 떠나면서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상병의 흔적과 문학세계는 여전히 느낄 수 있다. 다행히 천상병의 처조카인 목영선씨가 옛 찻집 주변에서 ‘귀천’을 운영하고 있는 덕분이다. 인사동 골목마다 서린 시인의 향기, 모과차처럼 달고 쌉싸래한 향내는 아마도 영원하리라. ======================================   [미디어펜=최상진 기자] 벌써 10년 전 이야기다. 대학시절 한 언론사에서 인턴기자로 갓 언론사에 발을 디딜 때 ‘현장에서 기사를 만들어 오라’는 데스크 지시로 생전 한번 가본적 없는 인사동에 혼자 떨어졌다. 모바일 인터넷도 변변치 않던 시절이라 PC방에서 인터넷으로 ‘인사동’을 검색하던 중 흥미로운 곳을 찾았다. 천상병 시인의 아내 목순옥 여사가 운영하던 카페 귀천이었다.   귀천은 인사동 중심가에서 흔치 않았던 신식건물, 밖이 잘 보이지 않는 1층 한 구석에 있었다. 테이블은 고작 4~5개에 불과했다. 손님은 고작 한 팀이었다.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손님들은 ‘천상병 시인 사모님이 운영하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차를 내오던 목순옥 여사와 눈이 마주쳤다. “기자입니다”라는 얼떨떨한 소개에 특유의 포근한 미소를 건넸다.   ▲ 2006년 인사동 카페 귀천에서 만난 목순옥 여사    천상병의 시와 목여사의 사랑과 동백림 사건의 뒷 이야기 등 물어볼 것은 많았다. 그러나 고작해봐야 ‘귀천’과 인터넷에서 급히 검색한 수박 겉핥기식 지식만 가진 갓 스무살이 넘은 청년은 쉽사리 이야기에 접근하지 못했다. 인터뷰를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바뀌는건 순식간이었다. 결국 물 흐르듯 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카페에 전화 한 통이 왔다. 5분쯤 흘렀을 때 목여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10분쯤 흘렀을 때 그녀는 “감사하다. 다음에 꼭 한번 찾아달라”며 전화를 끊었다. 자리로 돌아온 그녀는 “서해교전에 전사한 병사 아버지네요. 아들이 수양록 앞장에 ‘귀천’을 적어놨는데 다시 돌려보다 생각이 나 전화하셨대요”라며 “귀천이라는 시가 아직도 참 많은 사람들한테 힘이 되고 있나봐요”라고 웃어보였다. 눈앞에 있는 그녀가 수녀로 보였다.   회사로 돌아오는길 문득 ‘교과서에 실린 귀천을 본적 있느냐’는 질문에 “출판사 연락은 받았는데 본 적은 없다”는 목여사의 대답이 떠올랐다. 퇴근길 광화문 교보문고를 뒤져 교과서를 사다가 앞장에 “제대로 된 기자가 되면 꼭 다시 찾아뵙겠습니다”라고 적었다. 그리고 퇴근길 다시 카페를 찾아 교과서를 선물했다. 그녀는 뛸 듯이 좋아했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났을까, 동백림사건의 피해자인 ‘이응노·윤이상·천상병 추모 문화제’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목여사는 두 손을 잡으며 “금방 이렇게 다시 만났네요”라고 말했다. 손님이 많아 길게 인사는 하지 못했다. 그저 “다음엔 공부를 많이 해서 찾아갈게요”라고 말하고 헤어졌다. 그게 마지막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2010년 군대에서 한창 더위와 씨름하던 시절, 인터넷을 통해 목여사가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슬프기보다는 서운했다. 아직 그녀와 나누지 못한 이야기가 많았다. 직업기자가 되면 반드시 찾아가겠다고 다짐했는데 조금만 더 기다려줄 수는 없었는지 서운했다.   ▲ 2006년 인사동 카페 귀천    그래서였을까 직업기자가 된 이후 인사동을 한번도 찾지 않았다. 인사동 부근으로 회사를 옮긴 올해서야 그때 귀천이 있던 자리를 찾았다. 이미 카페는 사라진지 오래된 것으로 보였다. 날씨는 추운데 그녀가 직접 담갔다는 모과차가 그리운데 정작 그녀는 없었다. 쓸쓸히 발길을 돌렸다.   회사로 돌아오던 길 우연치 않게 수운회관에서 천상병 시인의 시화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죄인이 된 것 같아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쉽게 들지 않았다. 몇 시간을 고민한 끝에서야 무거워진 발걸음을 한발 한발 옮길 수 있었다.   경운동 수운회관 13층, 조심스럽게 찾은 유카리 화랑은 조그마했다. 과거 목여사의 찻집과 비교해도 그리 크지 않아 보였다. 창문으로 스미는 햇살이 천상병 시인의 웃음에 미치자 마음이 편안해지는 듯 했다다. 10년 전 목 여사가 건넸던 모과차의 향기처럼.   전시 관계자는 “‘천상병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결성하며 23명의 미술작가 5명의 사진작가가 힘을 모아 이번 전시를 기획하게 됐다”며 “전시회 기간도 당초 6일까지에서 17일까지 연장할 예정이다. 많이 찾아주셨으면 한다”고 부탁했다.   돌아오는 길, 시인 천상병과 평생 그를 보듬은 목순옥이 걸었을 인사동 거리를 오랜만에 다시 걸었다. 코끝 찡한 추위 사이 어딘가에서 전설로 남은 시인과 그의 아내가 소탈하게 웃으며 반겨줄 것만 같았다. 천상병의 해맑은 미소와 목순옥의 따뜻한 차 한잔이 무척이나 그리웠다. ========================================     귀천의 작가, 천상병과 그의 아내, 목순옥. 젊은 시절 단란한 한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김영관, 영상=한용호.   스타를 넘어서다 천상병의 아내, 목순옥편 그리움은 입으로 토해내는 것이다. 아무리 견디려 해도 참을 수 없다. 구토처럼 틀어막은 입을 비집고 나오는 것, 그게 바로 그리움이다. 기자는 어느 시인의 늙은 아내로부터 그 사실을 배웠다.  칠순이 지난 아내는 여전히 남편을 이야기했다. “그 사람은 술을 무척 좋아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고왔다. 늦은 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성우의 목소리는 사람을 취하게 하는 마력(魔力)이 있다. 나이 든 아내의 목소리가 그랬다.  “어린 아이 같은 그 사람은 누구에게나 큰 소리로 말했죠. ‘난 내 마누라가 좋다!’ 그게 그렇게 듣기 좋았어요.” 아내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한다. 카페엔 남편의 사진과 그가 남긴 글들이 널려 있다. “그 사람의 글이 너무 좋아서….” 아내는 수줍게 남편의 글 솜씨를 자랑했다. “그 사람을 기억하는 이들이 자주 찾아와요.” 아내는 다시 남편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긴 시간 동안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이 세상에 없다. 그는 이미 하늘로 돌아갔다. 이른바 귀천(歸天). 떠난 남편의 이름은 천상병, 남겨진 아내의 이름은 목순옥이다. 그녀의 나이는 72세다.  ◆ 남편 천상병, 아내 목순옥  천상병은 소풍을 마치고 하늘로 돌아간 시인으로 기억된다. 병과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해맑은 동심과 웃음을 잃지 않은 사람. 그의 대표작, 귀천은 그런 천상병을 잘 설명하고 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목순옥(72) 여사는 남편 천상병에게 15년째 편지를 보내고 있다. 그동안 쓴 편지는 50여통. 그녀는 편지를 모아 연말쯤 '하늘에 띄우는 편지'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할 계획이다. 사진=김영관, 영상=한용호.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은 1930년 일본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소년은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자랐다. 아버지의 잦은 사업실패 덕분이다. 소년은 몸이 약한 대신 감수성이 예민했다. 마산중학교 재학 시절, 국어교사는 시인 김춘수였다. 스승은 소년의 재능을 눈여겨봤다. 1년간 혹독한 습작의 시간을 보냈다. 1950년, 소년은 스승과 유치환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했다. 문학잡지가 청소년의 마음을 사로잡던 시절. 중학생이던 소년은 전국구 스타가 됐다. 그리고 전쟁이 터졌다. 1951년, 부산으로 옮겨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했다. 전쟁은 감수성 여린 소년에게 현실을 바라보는 눈을 선물했다. 대학에서는 평론가로 유명했다. ‘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라는 다소 과격한 제목의 평론은 지금도 회자(膾炙)되는 유명한 글이다. 아내는 기억한다. “시 쓸 때와 평론할 때, 남편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어요. 아주 독하게 평론을 했답니다. 그의 매를 맞지 않으면 유명한 문인이 아니란 말이 나돌았어요. 때문에 은근히 남편의 평론에 오르내리길 바라는 분들이 많았죠.” 대학을 졸업하면서 한국은행에 입사할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그는 거부했다. “시인은 배가 고파야지.” 그는 홀연히 대학을 떠났다. 그 시절, 아내는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아내의 오빠가 시인의 친구다. 가끔 커피숍에서 만나는 시인은 그녀의 우상이었다. “그 시절엔 문인들이 함께 어울렸어요. 오빠 덕분에 시인을 만났어요. 당시엔 큰 소리로 잘 떠드는 분이셨죠. 가끔 술집에도 따라갔는데 시인은 제 자리에 술잔이라도 올려지면 당장 치웠답니다. ‘미스(Miss) 목은 술 마시면 안돼.’ 이러면서 말이죠.” 1967년, 시인에게 큰 시련이 닥쳤다. 동베를린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것. 대학동기에게 술값을 빌린 게 간첩으로 몰린 이유였다. 중앙정보부에서 전기고문을 세 번 받은 뒤 풀려났다. 시인은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잦은 폭음도 그의 건강을 해쳤다. 부산 형님 댁에 내려갔다 1년 만에 돌아왔다. 서울에 도착한 천상병은 그 길로 친구의 동생을 찾아갔다. “얼굴이 까맣게 변했더라구요. 커피숍에서 문학 이야길 하다 내일 보자며 헤어졌어요. 그런데 사라지신 거예요.” 그날 시인은 길에 쓰러졌다. 술에 취해서였다.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실려갔다. 천재 시인이 행려병자로 바뀐 것이다. 목순옥을 비롯해 시인의 친구들이 그를 찾았다. 허사였다. 그들은 울면서 친구의 유고 시집 ‘새’를 발간했다. 그의 죽음은 신문에도 실렸다. 병원장이 놀라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천상병은 살아있습니다.” 목순옥은 매일 병문안을 갔다. 그녀의 뒷바라지 덕분에 시인의 몸무게는 40㎏에서 60㎏으로 불었다. 병원장이 말했다. “저 사람이 글을 쓰고 못쓰고는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두 분이 결혼하면 어떨까요?”   ◆ 남편의 재능을 사랑한 아내  둘은 부부가 됐다. “그냥 돌봐드려야겠다는 마음이 들더라구요. 깊이 들어가면 그게 사랑이겠죠?” 가진 것은 병과 가난 뿐인 남자. 그런 이를 사랑한 아내는 말했다. “나이가 드니까 잔소리가 늘었답니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 꼭 껴안은 젊은 남녀를 보면 잔소리를 합니다. ‘너무 붙어있지 마라. 빨리 뜨거워지면 금새 식는다.’ 서로 툭툭 치는 젊은 남녀를 봐도 지나치질 못해요. ‘서로 배려해야지. 함부로 대하면 안된다.’ 나이가 드니까 그런 것이겠죠?”   천상병의 아내, 목순옥(72) 여사는 아직도 남편을 그리워한다. 서울 인사동의 작은 카페 귀천에서 아내는 남편의 호흡을 맡고 있다. 사진=김영관, 영상=한용호. 시인과의 결혼 생활은 힘들었다. 그래도 아내는 좋았다. 특히 시인의 아내만 즐길 수 있는 특권에 마냥 기꺼워했다. “시인이 정말 아이 같았어요. 가끔 집에 들어오면 다 써놓은 시를 베게 옆에 가지런히 놓고 잠든 척 했답니다. 저는 가장 먼저 시인의 글을 읽는 사람이 된 것이죠. 좋았냐구요? 그야 물론 너무 좋았죠.” 그녀의 남편 자랑은 이어졌다. “시인은 가만히 앉아 있다 제목을 정하면 한달음에 시를 썼어요. 단 한번도 다시 고치는 걸 보지 못했어요. 정제된 단어가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거죠. 그럼 시를 툭 보이면서 자랑했답니다. ‘이것 봐라, 아내야.’ 천재였던 거죠.” 그럼, 남자 천상병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천재 천상병을 사랑한 것 아닌가. “그랬을 지도 모르죠. 하지만 모든 걸 제게 의지하는 시인이 계셔서 행복했습니다. 사랑이란 가슴에 담아두기도 하고, 상대방을 이해하기도 하고, 내가 줌으로써 기뻐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녀는 시인에게 동생이고, 친구이고, 애인이고, 아내이고 동시에 스승이며 어머니였다. 하긴 그것이 사랑이다. ◆ 남편의 유산(遺産)    천상병의 아내, 목순옥(72) 여사는 아직도 남편을 그리워한다. 서울 인사동의 작은 카페 귀천에서 아내는 남편의 호흡을 맡고 있다. 사진=김영관, 영상=한용호. 천상병은 1988년부터 만성간경화증으로 고생했다. 친구가 의사로 재직하던 춘천의료원에 입원했다. 그래도 시인은 여전히 유쾌했다. “배가 산처럼 불러서 병원에 갔어요. 복수(服水)가 찬 것이죠. 일반인이라면 죽음을 앞두고 많이 두려웠을 거예요. 병원에 도착하니 친구인 정원석 선생님이 야단을 치시더군요. ‘야, 이 놈아. 배가 왜 이리 불렀냐?’ 시인이 대뜸 받아쳤어요. ‘내가 말이다. 임신을 했다, 임신을 했어.’ 그만큼 낙천적이었어요. 덕분에 많이 웃었죠.” 병원에서 아침을 먹이고 서울로 돌아와 카페 문을 열었다. 일이 마치면 다시 춘천으로 향했다. “춘천으로 가는 길이 참 예뻤답니다. 차 안에서 매일 기도했어요. 5년만 더 살게 해주세요. 딱 5년만.” 시인은 거짓말처럼 병을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5년 뒤. 다시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났다. “이른 봄이었어요. 방금 헤어져서 카페 문을 열고 물을 끓이고 있는데. 병원에 실려갔다는 전화를 받았죠. 마음이 덜컥 하더군요. 매일 춘천으로 갈 때, 5년이 아니라 10년을 살게 해달라고 빌 것을….” 시인의 나이 63세였다. 남편이 떠난 지 15년. 아내는 추억을 먹고 산다. 매년 의정부, 산청 등지에선 천상병을 기리는 문학제가 열린다. 시비(詩碑)도 세워졌다. 작은 카페엔 여전히 남편의 친구와 팬들이 찾아온다. 아내는 남편의 기념관을 세우고 억울하게 고문을 받은 간첩사건의 진실을 찾는데 여생을 보낼 예정이다. 그녀에게 의지했던 남편은 세상을 등지고도 아내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양이다. “제게 남겨진 일, 모두 마무리하고 저도 떠나야죠. 하늘에서 다시 만나면 큰 소리를 칠 거예요. 제가 다 처리하고 왔다고 말이죠.” 남편의 그리움은 시가 됐다. 아내의 그리움은 이제 별이 되려 한다. 그들 부부가 서로를 그리워함은 여느 청춘의 사랑에 못지 않다. 문득 남편의 은사인 김춘수의 ‘구름과 장미’가 떠올랐다. 그의 시를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저마다 사람은 임을 가졌으나 임은 구름과 장미되어 오는 것 눈 뜨면 물 위에 구름을 담아 보곤 밤엔 뜰 장미와 마주앉아 울었노니 참으로 뉘가 보았으랴? 하염없는 날일수록 하늘만 하였지만 임은 구름과 장미되어 오는 것   [출처] 천상병의 아내, 목순옥|작성자 나무 =============================== 재미 조선인 소설가 유순호씨 찾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라고 말하리라”라는 시로 유명한 한국의 천상병(1930∼1993) 시인이 우리 곁을 떠난지도 어느덧 13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평소 오래동안 그를 숭배해왔던 필자가 처음 방한하였던 1999년 천상병 시인은 이미 세상에 없었다.    필자에게 처음 천상병시인의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은, 천상병시인과는 서울상대 동문이었고 역시 시인이며 학자였던 이중 총장님(전 연변과기대부총장, 한국숭실대총장)  매년 서울을 찾을때마다 들려가군 했던 인사동골목의 낯익은 다방들을 모조리 제쳐두고 8월9일 오후, 천상병시인의 그 맑디 맑은 영혼과 함께 생전 모습을 실감케 하는 '귀천'부터 찾았다.        앞에서 먼저 안을 들여다보던 이중 총장님이 나를 돌아보며 "천상병시인의 아내 목여사와 만날수 있게 되었네."라고 말하며 얼굴에 희색을 띄었다. 더할 나위 없이 반가웠다. 문을 밀고 들어가니 목순옥 여사는 오래전부터 잘 아는 사이인 이중총장님과 함께 필자에 대해서도 일면여구한 소박한 웃음으로 맞이했다.    죽는 날까지 을 지키렵니다    그동안 바쁜 일정 때문에 오래동안 다방을 찾지못했다는 이중 총장님의 인사말 뒤끝에 "건강은 어떠합니까?"는 물음에 목순옥 여사는 찻잔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보다시피 괜찮아요. 건강해야지요.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거든요. 뜻있는 분들이 힘을 모아 여기 인사동 골목 끝자락에 '천상병기념관'을 세울 예정이에요. 그뿐만 아니라 의정부시에도 '천상병문학관'이 세워질 것 같아요. 건강해야 그 모든 일들이 마무리 되는 걸 지켜볼 수 있잖아요. 매일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고 인사동에 나온답니다. 하루 종일 서성이며 손님맞이하는 일까지, 힘은 들지만 그래도 조카가 도와주고 있답니다."    지금의 '귀천'은 옛날 천상병 시인의 체취가 그대로 묻어있었던 '귀천'이 아니라고 한다. 간판만은 그대로 달고 다시 문 열었다. 옛날 자리를 지키지 못한 게 마음에 아프다고 한다. 그러면서 말했다.    "옛날 찻집이 참 좋았는데…, 나가라니 힘없이 물러났지요. 어쩌겠어요? 정이야 담뿍 들었지만…, 그래도 인사동에 이렇게 다시 문 열게 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침 일본과 미국에서까지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었다. 뉴욕에서 온 필자 외에도 캘리포니아에서 소문 듣고 찾아온 재미 교포 2명이 있었다. 아담하다 보니 열댓 명 앉으니 꽉 찰 듯싶다. 목순옥 여사를 뵈러 온 사람들이 여럿이지만 다행히도 필자와 함께 간 이중 총장님과 친숙한 사이라 목여사는 줄곧 필자를 상대로 이야기를 주고받아주었다.     "오늘이 마침 수요일이라 사람들이 많아요. 인사동 장거리는 수요일부터 그 다음주 월요일까지 오픈한답니다. 뉴욕에 가신지는 언제 되셨습니까? 2003년도에 플러싱의 '금강산'에서 천상병을 사랑하는 뉴욕 사람들의 10주기 기념모임이 열렸댔어요."    필자는 잠시, 목순옥 여사가 다른 손님들과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에 숨을 한 땀 고르며 찻잔을 들었다. 필자의 귀에 익은 문인들 이름과 최근 소식을 듣고 있자니 뉴욕에서 친하게 지내는 박종호 영화감독이 들려주던 천상병 시인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천상병은 시를 썼기 때문에 천상병입니다. 시만 내놓으면 천상병은 천상병이 아닙니다. 충무로에서 영화를 만들 때 인사동에 자주 놀러가군 했어요. 뻐스에서 내리기만 하면 천상병에게 손목 잡히는데 무작정 '1천원만 내.'하고 소리칩니다. 그에게만 손목을 잡히면 무조건 커피값 1천원부터 빼앗기고 봐야합니다. 더 주면 거절합니다. 딱 1천원, 커피 한잔이면 됩니다."    이런 이야기는 이중 총장님에게서도 들었다.    "실은 천상병은 서울상대 다닐때 나의 선배였어요. 동백림사건때 억울하게 몰려 중앙정보부에 잡혀들어갔지요. 그때 매를 맞고 거의 반주검이 되어 놓여나왔는데 하루는 갑자기 실종된거야요. 친구들은 그가 죽은줄 알고 유고시집까지 냈었지요. 그런데 글쎄 하루는 정신병원에서 나타난거예요."    그것은 1971년에 있었던 일이다. 대학 시절 친구의 수첩에서 그의 이름이 발견되어 중앙정보부로 끌려갔다고 한다. 그곳에서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받고 자식을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고문의 깊은 후유증에 시달리며 술로 나날을 보내던 그는 마침내 1971년 실종된다.     여러 달 동안 친구와 친척들은 수소문했지만 결국 그가 죽은 것으로 결론을 지었다. 그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그의 작품을 모아 유고시집 '새'를 발간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그가 살아있다는, 거리에서 쓰러져 서울의 시립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이 느닷없이 왔다.     심한 자폐증상을 보이는 가운데서도 한 여인의 방문 이후 병세는 호전되었다. 1972년 천상병은 그 여인과 결혼, 고난과 어려움을 겪으며 20년을 같이 한다. 바로 목순옥 여사였다.    오늘 시인은 이미 하늘로 돌아간지 13년이 되었지만 필자가 찾아간 시인이 사랑했던 찻집과 시인이 사랑했던 사람과 그윽한 차 향기 그대로 남아 있는 '귀천'에서 '귀천'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의 시를 읊조려보았다.                                           귀천(歸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니 왔나!' 지금도 귀에 선한 그 목소리다. 천상병 시인의 부인 목순옥 여사의 말이다. 가끔 인사동에 있는 찻집 귀천에 들르면 나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 경북 상주가 고향인 목 여사는 바로 옆동네 안동이 고향인 나를 보고  아예 고향 동생 취급을 하셨다.  나는 천상병과 목여사를 선배님, 누님 했다. 천상병 시인은 서울 상대 재학시절에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러자 4학년 2학기 등록을 하지 않았다. 당시, 지금도 그렇지만, 그 대학 졸업장만 있으면 날개를 달 수 있었지만 시인은 배가 고파야 한다며 등록을 포기한 것이다. 천상병과 목여사가 만난 것은 목여사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당시 친오빠가 천상병 시인과 대학 동기여서 서울에 왔다가 명동 돌채 다방에서 함께 만나 아는 사이가 되었다. 1967년 작곡가 윤이상, 화가 이응로, 서울상대 학생 강빈구 등이 연루된 동백림 사건이 터졌다. 천상병도 여기에 걸려들었다. 이유는 강빈구가 간첩인 줄 알면서도 신고하지 않았고 그로부터 돈도 빌렸다는 혐의였다.  그 돈이 '공작금'의 일부가 아니냐는 닥달이었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목여사는 1주일에 두 번씩 빠짐없이 면회를 갔다. 천상병은 6개월 동안 모진 고문을 받아 거의 패인이 되어 출소했다. 그 총명하던 재주도 언어도 어눌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부산 출신의 김종해 시인이 두 사람의 결혼을 권유했다. 거의 사회활동을 못하게 된 천상병을 보호해 주고 보살펴 줄 사람은 목여사밖에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그것이 목여사에게는 일생의 형극이 되었다. 두 사람은 수락산 자락 단칸방에 신방을 차렸다. 결혼을 하고나서부터 천상병의 건강은 많이 좋아졌지만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신문 잡지에 짜투리 글을 가끔 쓰기는 했지만 그걸로 생활이 될 리 없었다. 목여사는 수를 놓아 팔아서 근근이 생활을 했다. 덥친격으로 천상병 시인의 정신병이 재발하여 병원비까지 목여사를 얽어맸다. 그러던 중 천상병의 친구 강태열 시인이 목여사에게 3백 만 원을 건넸다. 당시로서는 제법 큰 돈이었다. 무언가 먹고 살 궁리를 하라는 말이었다. 목여사는 그 돈으로 인사동에 '귀천'이라는 찻집을 차렸다. 6평짜리 콧구멍 가게였다. 목여사는 의정부에서 차를 3번씩 갈아타고 인사동으로 출근했다. 여기서 비밀 아닌 비밀을 밝히자면, 천상병 시인은 그 당시 이미 시(詩)를 쓸 정도로 정신이 맑지 못했다. 천 시인의 후반기 시들은 천상병의 낙서같은 글들을 목여사가 시(詩)로 쓴 것들이었다.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나이보다 열살은 늙어보였던 여사였다. 참... 고생도 많이 한 분... 천상병 시인은 '나 하늘나라로 돌아가거든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고 하고선 눈을 감았다. 천상병 시인이 죽자 부의금이 7백 만원 들어왔다. 갑자기 큰 몫돈을 본 목여사는 보관할 장소를 몰라 하다가 신문지에 싸서 재래식 부엌 재속에 묻어 두었다. 장례라도 끝나면 은행에 넣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친척들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바람에 연기로 사라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천상병 시인의 천국 노자돈이라고 말했다.  그 목순옥 여사가 어제(2010년 8월 26일) 타계했다는 소식이다. 비교적 가까이에서 여사를 지켜본 사람으로 할 말을 잊는다. 천국에서나마 고된 날개 접으시고 편히 쉬시기를 빌 뿐이다. '니 왔나!' 하면서 반기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서경     =============================================          천상병 시 모음   귀천(歸天)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나의 가난은 천상병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햇빛에서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으로 때론 와서 괴로웠을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     갈매기 천상병 그대로의 그리움이 갈매기로 하여금 구름이 되게 하였다. 기꺼운 듯 푸른 바다의 이름으로 흰 날개를 하늘에 묻어보내어 이제 파도도 빛나는 가슴도 구름을 따라 먼 나라로 흘렀다. 그리하여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날이오르는 자랑이었다. 아름다운 마음이었다.         강 물 천상병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까닭은 언덕에 서서 내가 온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밤새 언덕에 서서 해바라기처럼, 그리움에 피던 그 까닭만은 아니다. 언덕에 서서 내가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그 까닭은 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한가지 소원(所願) 천상병 나의 다소 명석한 지성과 깨끗한 영혼이 흙속에 묻혀 살과 같이 문들어지고 진물이 나 삭여진다고? 야스퍼스는 과학에게 그 자체의 의미를 물어도 절대로 대답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억지 밖에 없는 엽전 세상에서 용케도 이때컷 살았나 싶다. 별다를 불만은 없지만, 똥걸래 같은 지성은 썩어 버려도 이런 시를 쓰게 하는 내 영혼은 어떻게 좀 안될지 모르겠다. 내가 죽은 여러 해 뒤에는 꾹 쥔 십원을 슬쩍 주고는 서울길 밤버스를 내 영혼은 타고 있지 않을까?         나는 행복합니다 천상병 나는 아주 가난해도 그래도 행복합니다. 아내가 돈을 버니까! 늙은이 오십세 살이니 부지런한 게 싫어지고 그저 드러누워서 KBS 제1FM방송의 고전음악을 듣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이오. 그래서 행복. 텔레비젼의 희극을 보면 되려 화가 나니 무슨 지랄병(炳)이오? 세상은 그저 웃음이래야 하는데 나에겐 내일도 없고 걱정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찌 어기겠어요?       난 어린애가 좋다 천상병 우리 부부에게는 어린이가 없다. 그렇게도 소중한 어린이가 하나도 없다. 그래서 난 동네 어린이들을 좋아하고 사랑한다. 요놈! 요놈하면서 내가 부르면 어린이들은 환갑 나이의 날 보고 요놈! 요놈한다. 어린이들은 보면 볼수록 좋다. 잘 커서 큰일 해다오!         봄을 위하여 천상병 겨울만 되면 나는 언제나 봄을 기다리며 산다. 입춘도 지났으니 이젠 봄기운이 회사하다. 영국의 시인 바이론도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다고'했는데 내가 어찌 이 말을 잊으랴? 봄이 오면 생기가 돋아나고 기운이 찬다. 봄이여 빨리 오라       푸른 것만이 아니다 천상병 저기 저렇게 맑고 푸른 하늘은 자꾸 보고 또 보고 보는데 푸른 것만이 아니다. 외로움에 가슴 조일 때 하염없이 잎이 떨어져 오고 들에 나가 팔을 벌리면 보일 듯이 안 보일 듯이 흐르는 한 떨기 구름 3월 4월 그리고 5월의 실록 어디서 와서 달은 뜨는가 별은 밤마다 나를 보는가. 저기 저렇게 맑고 푸른 하늘을 자꾸 보고 또 보고 보는데 푸른 것만이 아니다.     약속 천상병 한 그루의 나무도 없이 서러운 길 위에서 무엇으로 내가 서있는가 새로운 길도 아닌 먼 길 이 길을 가도 가도 황토길인데 노을과 같이 내일과 같이 필연코 내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다. 어두운 밤에 천상병 수만 년 전부터 전해 내려온 하늘에, 하나, 둘, 셋, 별이 흐른다. 할아버지도 아이도 다 지나갔으나 한 청년이 있어, 시를 쓰다가 잠든 밤에......       [같은 詩 다른 노래] 귀천(歸天) - 詩: 천상병, 노래: 홍순관,김원중,이동원,오현명,박흥우,서울 바로크 싱어즈   천상병 시인의 삶 귀천(歸天) - 천상병(千祥炳)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서 돌아가리라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 하리라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Back to Heaven - Chon Sang Pyong - translated by Brother Anthony I'll go back to heaven again. Hand in hand with the dew that melts at a touch of the dawning day, I'll go back to heaven again. With the dusk, together, just we two, at a sign from a cloud after playing on the slopes I'll go back to heaven again. At the end of outing to this beautiful world I'll go back and say : It was beautiful..... 천상시인 천상병을 낭독하다  귀천(歸天) - 詩 : 천상병, 작곡 : 한경수, 노래 : 홍순관 귀천(歸天) - 詩 : 천상병, 작곡 : 유종화, 노래 : 김원중 귀천(歸天) - 詩 : 천상병. 작곡 : 신병하, 노래 : 이동원 귀천(歸天) - 詩 : 천상병, 작곡 : 변훈, 노래 : 베이스 바리톤 오현명 귀천(歸天) - 詩 : 천상병. 작곡 : 정덕기, 노래 : 바리톤 박흥우, 피아노 : 조영선 귀천(歸天) - 詩 : 천상병, 작곡 : 정덕기, 노래 : 서울 바로크 싱어즈 다시 없을 순수 영혼 나의 남편 천상병 - 목순옥 나의 남편 천상병 시인은 한마디로 남편이라기 보다 늘 일곱 살짜리 같다는 별명을 붙일 만큼 아기 같은 심성을 가진 남편이다. 때로는 깔깔 웃다가 마음에 안 들면 "문디 가시나"(본인은 애칭이라 함)라고 말을 뱉곤 했다. 남편과의 인연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오빠를 따라 서울에 왔다가 명동 '갈채다방'에서 그와 처음 인사를 나눈 것으로 시작됐다. 그 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살게 되면서 '갈채다방'에 더욱 자주 들르게 됐다. 그때 많은 문인들과 만나게 되었다. 서정주 선생님을 비롯해서 김동리·손소회·박기원·황금찬·박재삼·이근배 선생님 등 많은 분들이 계셨다. 오빠는 '금문다방' '은성다방' 등 여러 곳을 나를 데리고 다녔다. 오빠 친구들이 동생처럼 아껴주시고 귀여워해주셨기에 천상병 시인과도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오빠 친구들과 함께 영화도, 연극도, 대폿집도, 자연스럽게 다녔다. 그때 나의 눈에는, 많은 문인들의 모습이 순수 그 자체처럼 보였다. 욕심 없이 살아가는 그 모습이 왜 그렇게 좋았는지 돌이켜 생각해본다. 내가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다시 가난하고 고생스러운 삶을 택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생긴다. 그러나 긴 터널을 빠져나왔다는 안도감으로, 잘 견디어낸 나 자신에 감사하고 싶다. 천상병 시인이 나의 남편이 되기 전의 일이다.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 옥고를 치른 후 부산 형님 댁에 내려갔다가 7개월 만에 서울에 올라온 그는, 시립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된다. 그의 입원 사실을 모른 채 행방불명이 되었다며 걱정하던 친구들이 여기저기 수소문해도 연락이 없자 죽었다고 생각하고, 유고시집을 만들기로 했다. 성춘복·민영·박재삼 선생들께서 흩어져 있던 그의 시들을 모았다. 민영 선생님이 원고를 정리하시고 성춘복 선생님이 돈을 마련하셔서 유고시집《새》가 나왔다. 김구용 선생님이 쓰신 라는 서문은 가슴을 아프게 했다. 시집 발간 이후 천상병 시인은 시립정신병원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니까《새》는 살아 있는 사람의 유고시집이 된 셈이고, 그것은 천상병 시인만이 가진 유명한 일화가 되었다. 나는 정신병원을 찾아가 그를 면회했고, 병원에서 그를 보살펴주던 김종해 박사님의 권유로 그를 퇴원시켜 2주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김동리 선생님의 주례로 종로5가 동원예식장에서 식을 올렸다. 수락산 밑 초가집 문간방 하나를 얻어놓고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아침이면 일어나 수락산 입구까지 산책하고 돌아와 아침을 먹고, 소꿉놀이하듯 그렇게 시작한 신혼생활은 상상을 초월한 생활이었다. 그 사이 또 한 번의 정신병원 입원 등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꿈이라 생각하고 싶을 뿐이다. 결혼생활 20년, 참으로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살앗다. 남편을 두고 기인이라는 사람들이 있지만, 남편은 결코 기인이 아니라 순수한 삶을 살다 간 아이 같은 심성의 시인이었을 뿐이다. 아마도 그런 순수한 마음의 사람은 앞으로 다시 없을 것이라고, 나 자신에게 거듭 말하곤 한다. 그를 오십년 동안 거울 안 같이 들여다 본 나이기 때문에 감히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남편이 하늘나라로 간 지 30년(13년인데 표기가 잘못된 듯 합니다. 김승규). 올해도 의정부 예술의 전당에서 천상병예술제가 열린다. 앞으로 남은 내 생도 남편을 위해 쓰고 싶다. 소풍 끝내는 날 가서 보고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 월간 문학사상 2006년 4월호 천상병 생각 - 이승하 인사동 거리 걸어갈 때 마주치는 찻집 내 그대 살아 생전의 얼굴 본 적은 없네 그대 반평생 제정신으로 살다 반평생 넋 나가 살았다는 얘기며 술잔만큼의 웃음과 담배 개비만큼의 구걸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을 뿐 나 2000년에 시인으로 살아가기 부끄럽고 한심스러워 ‘歸天’ 간판 못 본 듯 발걸음 옮기네 천상의 시인이었으면 무엇하나 지상의 병든 몸이었던 것을 그대 애꿎게 당한 세 차례의 전기 고문과 생전의 유고 시집 『새』 이후 황폐한 나날에 쓴 시들이 쨍그랑! 내 혼을 깨뜨리네 아프고 또 아픈 몸으로 소풍 나온 아이처럼 웃고 또 웃다가 하늘로 돌아간 그대 생각에 나 부끄러워 그 집 앞 얼른 지나쳐 가네. 귀천(歸天) 2 - 안희선 시인의 모습은 여전했다 한 잔 술에 불콰해진 얼굴이 고왔다 이제, 편안하십니까? 홀로 이승에 남은 부인이 그립다 했다 저승에서도 차마 놓지 못한 사랑 지상에서의 그의 삶은 너무 고된 질곡의 삶이었다 한다 시인에게 물었다 그럼, 아름다운 소풍길은 뭡니까? 살아가는 동안 꿈이라도 고와야 하지 않겠냐고, 그러면서 지극히 단순한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진실한 시를 쓰고 싶으면, 네 영혼에서 피 한 방울 묻어나지 않는 고뇌는 말하지 말라고 부끄러워서, 빨리 꿈을 깨고 싶었다 시인이 말했다 아, 이 사람아 술이나 한 잔 하고 가 여기 하늘나라는 맛좋은 술이 모두 공짜야 카페 귀천에서 - 손희락 인사동 갤러리 타블로 건물 10평 남짓, 새롭게 문을 연 카페 귀천을 찾았을 때 천상병 시인을 만났다 차를 끓이는 단발머리 아내를 도와 주문받은 뜨거운 찻잔을 나르고 있었다 왜 다시 왔냐고 물었더니 매일 타던 용돈도 떨어지고 목줄 타고 흐르는 막걸리도 먹고 싶고 아내가 걱정이 되어서 돌아 왔다는 것 언제 갈 것이냐고 물었더니 기다렸다가 아내가 하늘가는 날 함께 갈 것이라고 대답을 한다 저승도 시인에게는 특별 휴가를 주나 보다 어둠을 밟으며 돌아오는 길 종각쯤에서 뒤돌아보니 은행나무 밑 그가 서서 웃고 있었다 찻집 '귀천' … 누구나 하늘로 가는 길, 쉬어 가면 어떠리 이택희/중앙일보 기자 모과차 맛이 특별한 이 찻집을 시인은 라고 노래했다. 내 아내가 경영하는 카페 그 이름은 '귀천(歸天)'이라 하고 앉을 의자가 열다섯 석밖에 없는 세계에서도 제일 작은 카페 그런데도 하루에 손님이 평균 60여명이 온다는 너무나 작은 카페 서울 인사동과 관훈동 접촉점에 있는 문화의 찻집이기도 하고 예술의 카페인 '귀천(歸天)'에 복 있으라. 인사동의 찻집 '귀천'이다. 이 찻집은 이미 인사동이 아니라 서울의 명소다. 찻집 이름은 시인의 대표작 제목을 빌어다 쓴 것이다. 귀천(歸天), 하늘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시에 나와 있는 것처럼 찻집을 경영하는 사람은 시인의 아내다. 목순옥(睦順玉·67) 여사. 그리고 시를 쓴 사람은 천상병(1930.1.29~1993.4.28) 시인이다. 시인이 하늘로 돌아간 지도 벌써 10년이 되었다. 시인은 살아서는 睦여사의 선생님이고 남편이었으나 피보호자였고, 귀천해서는 睦여사의 신앙이 된 행복한 사람이다. 시에서 표현한 대로 문화의 찻집, 예술의 카페-귀천은 이름으로는 사람들에게 익숙하지만 실제로 인사동에 가서 찾자면 좀 헷갈린다. 한자로 이라고 쓴 예서체 같은 글씨의 간판이 골목을 달리해 세 곳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한 시인을 위해 한 사람이 마련해 놓은 집이다. 첫째는 인사동 골목 한 복판, 해정병원 맞은편 골목에 있는 귀천이다. 주방을 포함해 7평 넓이에 테이블은 4개뿐이다. 벽을 따라 빙 돌아가며 의자를 놓고, 탁자들 사이에도 이동식 의자들이 놓여 있다. 이 집에는 네 자리 내 자리가 없다. 엉덩이 댈 자리만 있으면 모르는 사람도 무릎을 맞대고 어울려 앉는다. 누구도 어색해 하지 않는다. 귀천을 찾아온 사람이면 그 정도의 정서적 공감은 기본이다. 그래서 좁은 집이지만 최고 22명까지 앉아 봤다고 한다. 1985년 3월에 문을 열어 그 자리에서 만 18년 넘도록 변함없이 '문화와 예술의 인사동'을 지키고 있다. 벽에는 그림이 가득 걸려 있다. 들여다보면 문외한이라도 알만한 화가들의 그림이다. 한쪽 벽에는 千시인의 시집들과 손때 묻은 문예지들이 빼곡히 꽂혀 있고 시인의 사진도 몇 장 걸려 있다. 시인과 부인이 활짝 웃고 있는 사진 앞의 자리는 시인의 자리다. 千시인은 생시에 화요일과 금요일마다 의정부 장암동 집에서 나와 귀천의 이 자리에 앉아 차도 마시고 사람도 만났다. 무엇보다 생화(=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벌이) 때문에 함께 있는 시간이 적은 '아내의 그늘'을 즐겼다. 시인의 자리는 이제 주인을 잃고 사진만 남아 활짝 웃고 있다. "아직도 선생님이 귀천에 계신 것 같은 느낌이에요. 나뿐 아니라 선생님과 친분 있던 사람들도 가게에 오면 벽에 걸린 사진을 보고 인사를 해요. '안녕하십니까. 저 왔습니다' 그러면서 생시에 늘 앉던 사진 아래 자리를 보며 선생님을 생각하시지요." 두번째 귀천은 올 2월21일에 문을 열었다. 귀천에 시의 한 구절인 '아름다운 이 세상'이란 부제를 달았다. 12평이니 아주 넓지는 못해도 원조 귀천보다는 훨씬 넓다. 원조 귀천이 너무 좁아 많은 손님들을 헛걸음시켜 미안하던 차에 계기가 생겨 2호점을 열었다. 주인이 건물을 팔려고 내놨기 때문이다. 새 주인이 혹시 가게를 비우라고 할 수도 있기 때문에 미리 대비를 한 것이다. 새로 꾸며 그렇기도 하겠지만 분위기가 첫째 집보다 밝고 깔끔하다. 길가 쪽 벽에는 큰 유리창을 두고, 나무판에 시 '귀천'을 어느 서예가의 글씨로 새겨 걸었다. 그 아래 유리창틀 턱에는 꽃다발을 늘 한 아름씩 안고 있는 항아리 꽃병이 지키고 있다. 시 '귀천'을 받드는 신단(神壇)이라는 생각이 드는 광경이다. 찻집 귀천의 대표차는 모과차다. 모과차는 睦여사가 직접 만든다. 매년 11월 말 15㎏ 한 상자에 25~27개 들이 1백50박스쯤 담근다. 모과가 서리를 맞아야 과일 맛이 깊게 완숙하기 때문에 된서리 내린 다음에 담근다. 睦여사가 모과차 만드는 과정은 통상 알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우선 씻은 모과의 껍질을 모두 깎는다. 껍질이 들어가면 맛이 떫고 시다. 생모와 千시인과 함께 살아 온 의정부시 장암동 동네 아주머니들 손을 빌려 깎은 모과는 우표딱지 크기로 얇게 저민다. 모과차를 담글 때 대개는 저민 모과의 과육과 백설탕을 켜켜이 쟁여 담는데 睦여사는 다르다. 황설탕 시럽을 만들어 모과 저민 것과 섞어 숙성시킨다. 보통은 2~3개월, 길면 6개월쯤 익혀 고인 모과청으로 차를 끓이는 게 일반적이지만 귀천에서는 1년이 안되면 모과차 축에 못 낀다. 귀천이 처음 문을 열었을 때부터 19년째 변하지 않는 원칙이다. 청(淸)이란 궁중음식 용어로 꿀을 이르던 말이다. 과일을 설탕에 절여 과일 향과 맛을 우려낸 시럽을 표현할 우리말이 마땅찮아 그 말을 빌어 쓰자면 모과차를 만드는 원액 시럽을 모과청이라 할 수 있다. 睦여사가 1년을 숙성시켜 뽑아 낸 모과청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 바로 모과차가 된다. 끓는 물 외에는 어떤 것도 더 섞지 않는다. 더울 때 냉모과차를 만들기 위해 얼음을 넣을 뿐이다. 귀천 모과차의 깊은 맛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모과는 호흡기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나는 날씨가 쌀쌀해지면 이 집에 종종 간다. 갈 때마다 모과차를 마시는데 맛이 진해 마시다가 꼭 재탕을 부탁한다. 물만 갖다 부어주면 될 텐데 그러는 법이 없다. 모과청을 조금 더 넣고 물을 채워 준다. 이 인정과 배려가 또한 귀천의 매력이다. 모과차 말고도 귀천의 차는 睦여사사 손수 만드는 것들이다. 그래서 차 맛이 소박하지만 진하고 깊다. 유자차는 한해 1백 박스쯤 담근다. 대추차는 매일 집에서 한약처럼 다려 가지고 와서 차로 낸다. 찾는 손님이 별로 없지만 구색으로 차림판에 올린 커피(3천5백원)와 녹차만 기성품을 쓴다. 팔리기는 모과차가 으뜸이고, 유자차, 대추차가 그 뒤를 따른다. 차 값은 작년까지 3천5백원을 받다가 올해부터 4천원으로 올렸다. 올릴 생각이 없었는데 주변 유사 업소들과 비슷하게 보조를 맞추느라 어쩔 수 없이 올렸단다. 귀천이 '문화 예술의 찻집'인 것은 그 집에서 앉아 있으면 마주치게 되는 문화 예술인들이 증명한다. 문인들만 해도 신경림, 신봉승, 강민, 민영, 황명걸, 윤후명, 이근배, 남정현, 성춘복 등 문단의 어른들을 무시로 볼 수 있다. 생시에 千시인과 형제의 연을 맺은 이외수도 가끔 들르며, 함께 형제의 연을 맺은 중광 스님은 벽에 걸린 그림에 담겨 이승의 인연을 지켜보고 있다. 내가 찾아간 4월 24일에는 시인 정진규 선생이 문하생들과 다담을 즐기고 있었다. 평생 천상병 시인의 보호자였던 睦여사는 남편 千시인을 선생님이라 부른다. 결혼 전 15년, 부부로 20년, 타계 후 10년, 함께 한 세월 45년을 한결같이 그래왔다. 거기엔 신앙에 가까운 믿음과 존경과 사랑이 녹아 있다. 睦여사는 그토록 사랑하고 존경하던 시인의 10주기(4월 28일)를 보내며 반세기 시업(詩業)을 마무르는 일에 동분서주하고 있다. 전국 곳곳에서 천상병 시인을 기리는 행사가 다양하게 열리기 때문이다. 4월21~30일, 5월 12~31일에는 의정부 예술의전당에서 소장 미술품·유품전시회가 계속된다. 전시작품은 천상병문학회 기금 마련을 위해 판매도 한다. 지난 주말(27일)에는 장사익, 이동원 등이 출연한 시낭송회와 추모 공연이 성황리에 열리기도 했다. 5월 첫 주말(3~4일)에는 지리산 천왕봉이 올려다 보이는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에 있는 '귀천'시비(詩碑) 앞에서 제1회 천상병문학제가 열린다. 문학제를 주관하는 시사랑문인협회(02-720-2604)는 천상병문학상 첫 수상자로 문정희 시인을 선정했다. 6월에는 뉴욕 교포 문인들이 10주기 추모행사를 하며 극단 '즐거운 사람들'에서는 추모 뮤지컬 '요놈 요놈 요 이쁜 놈' 전국 순회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단구에 고희 가까운 할머니가 그 와중에도 찻집 두 곳을 경영하는 분주함이 안쓰러워 물어보았다. "이제 선생님 술 사 드릴 일도 없는데 이렇게 열심히 돈 벌어 어디 쓰시게요?" 천상병기념관, 천상병문학상… 睦여사 가슴에는 자금이 필요한 '천상병사업'들이 가득했다. 준비 중인 '천상병기념관'은 인사동에 사 놓은 13평짜리 한옥을 개조해 유품과 사진, 시비 등을 전시할 예정이다. 개관하려면 2∼3년은 더 있어야 한다. 자금이 달려서다. 개관은 안 했지만 여기 '歸天'이라는 간판이 이미 달려 있다. 세번째 귀천이다. 안국동 로터리에서 인사동길 초입 대성산업 정문 맞은편 골목 안에 있다. 시인은 자신의 시업(詩業)을 완성할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을까, '여천사 같은' 장한 아내가 잠자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노래했다. 잠모습 아내 어이없게 어이없게 깊게 짙게 영! 영! 여천사 같구나야! 시간 어이없게 이른 새벽! 8월 19일 2시 15분이니 모름지기 이러리라 짐작되지만 목순옥 아내는 다만 혼자서 아주 형편없이 조그만 찻집 귀천을 경영하면서 다달이 이십만원 안팎의 순이익(純利益)올려서 충분히 우리 부부와 동거하고 있는 어머니(사실은 장모님)와 조카 스무살짜리 귀엽기 짝없는 목영진 애기 아가씨와 합계 네사람 생활, 보장해 주고 또 다달이 약 오만원 가량 다달이 저금하니 …(중략)… 소설가인 이외수(李外秀)씨와 이름 잊은 제수씨가 퇴원 때 집에 와서 한달 동안 자기들 집에서 머물러 달라고 부부끼리 간청했지만…… 다 무시하고 어머니와 영진이가 있는 의정부시 장암동으로 직귀(直歸)했습니다! 아내야 아내야 잠자는 아내야! 그렇잖니 그렇잖니. * 전       화 : ① 02-734-2828 ② 02-3210-2288 * 주       소 : 귀천① 서울 종로구 관훈동 24번지, 귀천② 관훈동 83번지 * 위       치 : ①인사동길 한복판 해정병원 맞은편 세모화랑 옆 골목 철문 안에.                     ②인사동관광안내센터 맞은편 인사동3길 학고재(공사중) 골목안 60m쯤 * 주  메  뉴 : 모과차, 대추차, 유자차, 생강차, 금귤차, 녹차 각 4천원 * 좌       석 : ①최대 20명 ②30석 * 주  차  장 : 종로경찰서 옆이나 낙원상가 뒤 유료주차장 이용 * 영업 시간 : 연중무휴 오전 11시~오후 10시.  우리의 가슴에 영원히 남을 詩   천상병 시인의                   귀천, 새       귀 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귀천」 전문     Back to Heaven*     I'll go back to heaven again. Hand in hand with the dew that melts at a touch of the dawning day,   I'll go back to heaven again. With the dusk, together, just we two, at a sign from a cloud after playing on the slopes   I'll go back to heaven again. At the end of my outing to this beautiful world I'll go back and say: It was beautiful...     *The title of this poem, the Chinese characters Kwi(return) and  Chon(Heaven), gave its name to the tiny cafe in Seoul's Insadong neighborhood run by Mok Sun Ok, the poet's wife. ("The smallest cafe in the world", the poet claims in a poem not included in this selection.) This is the poet's best-known poem, it has several times been set to music.         천상병 시인을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가장 아름다운 시인, 가장 천진난만한 시인, 가장 즐겁게 살다가간 시인, 아니면 가장 불행했던 시인. 어떤 수식어로도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시인이 바로 천상병이다.   시 자체만을 놓고 보면 그는 분명 아름답게 살다간 시인이다. 그러나 그가 세상에서 겪은 고초를 생각하면 누가 그를 가리켜 아름답고, 즐겁게, 천진난만하게 살다가 간 시인이라고 선 듯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시의 요지는 나를 부르는 그 날 세상에 대한 아무 미련 없이 하늘로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매 연마다 첫 행에서 반복되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와 「귀천」이라는 제목에서 이러한 정신은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하늘로 돌아가야 한다. 문제는 우리를 부르는 그 날 어떠한 자세로 돌아갈 것이냐 하는 것이다.   시의 이해를 깊게 하기 위해서는 각연의 주된 이미지를 이루고 있는 ‘이슬’, ‘노을’, ‘소풍’의 시어가 가지는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시 속에도 나와 있다시피 ‘이슬’은 빛이 닿는 순간 사라지게 된다. 즉 이슬은 새벽 시간에만 잠시 존재할 뿐이다. 노을 역시 마찬가지다. 저녁 무렵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소풍’ 역시 아주 짧은 시간을 상징하는 시어이다.   슬픈 드라마보다도 더 비극적이고 힘들었던 천상병 시인의 삶에도 불구하고 이 시가 아름답게 읽힐 수 있는 것은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라는 묘사 때문이다.   세상에서의 시인의 모습은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시인은 세상을 아름다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시의 독특한 기법을 고려할 때 마지막 행에 나오는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를 겉으로 드러난 대로만 이해하는 데는 다소 문제점이 있다.   그것은 역설법이라는 기법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시 속에 나오는 ‘이슬’, ‘노을’이 가지는 숨은 의미 역시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이 시에는 욕심 없는 시인의 마음이 나타나 있기도 하지만 반대로 세상에 대한 진한 아쉬움이 배어 있기도 하다.   2008년 11월 1일 KBS 한국 현대시 탄생 100주년 특집  '시인만세' 가 실시한 대국민 설문조사에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에서  이 시는 5위를 기록했다. 국민들이 이 시를 그토록 애송하는 것은 시 속에 내재되어 있는 또 다른 정서 때문일 것이다.   3연으로 되어 있는 짧은 시지만 시 속에 깃들여 있는 이야기는 몇 날 밤을 새워가며 해도 끝이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래에 천상병의 시집 『귀천』에 실린 그의 삶에 대한 소개를 간략히 적어본다.   천상병 시인은 1993년 4월 28일 세상을 떠났는데, 그것은 오래 전에 예행 연습이 끝난 죽음이었다. 그가 처음 세상을 떠난 것은 1967년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서울 중심부에 있는 그들의 본부인 그 무시무시한 지하실로 그를 끌고 갔을 때였다.   그는 거기서 물 고문과, 성기에 전기 충격을 가하는 전기 고문을 받았다. 간첩 혐의로 기소된 대학 시절 친구의 수첩에서 그의 이름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천상병은 여섯 달을 갇혀 있다가 풀려났다. 자백을 강요받았으나 친구가 여럿 있다는 사실 말고는 자백할 것이 없었다. 이때의 전기 고문으로 그는 자식을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1930년 일본 땅에서 태어난 그는 해방되던 해, 가족을 따라 귀국하여 마산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그가 아직 학생이던 1949년 월간 잡지 에 그의 첫 작품 ‘강물’이 발표되었다.   서울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던 1952년경에는 이미 추천이 완료되어 그는 기성 시인 대접을 받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잠시 부산에서 일을 했는데, 시를 쓰는 한편으로 문학평론을 여러 잡지에 발표하기 시작하면서 평론 활동도 그의 작가로서의 생활을 중요한 일부분을 이룬다.   고문을 받은 사건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천상병은 또 한번 ‘죽음’을 맞게 된다. 고문의 깊은 후유증에 시달리며 술타령을 나날을 떠돌던 그가 마침내 1971년 실종된 것이다. 친구와 친척들은 여러 달 동안 백방으로 그를 찾아보았지만 허사였다. 행려병자로 사망하여 아무도 모르는 어디엔가에 파묻힌 것으로 결론을 내린 그들은, 비통한 심정으로 그의 작품들을 모아 유고 시집을 발간했다.   여러 차례의 죽음으로 점철된 것이 천상병의 생애라면, 그의 삶은 또한 여러 겹의 부활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가 살아 있다는, 서울의 시립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느닷없는 소식이 왔다.   그는 거리에서 쓰러져 그 병원으로 이송되었는데, 그때 그는 자신의 이름과 자신이 시인이라는 사실 말고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이 두 번째 기억이 그의 생명의 끈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심한 자폐증상을 보이는 가운데서도, 대학 때 친구의 여동생인 목순옥의 방문을 받은 뒤로는 그의 병세가 호전되기 시작했다. 의사는 그녀에게 자주 찾아오는 것이 도움이 되며 모든 것이 잘 되면 한두 달 뒤에 퇴원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목순옥은 오빠의 친구를 매일 방문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는 사회로 복귀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다만 그에게는 스스로를 부양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는 철없는 어린애 같았고 어린애처럼 약했다. 천상병과 목순옥은 1972년 결혼을 하게 되고, 이들의 결혼생활은 때로는 심한 고난과 어려움을 겪으며 20년 간 계속된다.   친구들을 좋아하고 그냥 아무나 믿으며 술과 담배를 즐기는 그의 성품으로는 신혼부부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목순옥은 서울 인사동 골목에 작은 찻집을 열었고, 예술인, 작가, 언론인, 지식인들이 단골 손님이 되었다. 천상병 시인의 초기 작품 중 하나의 제목을 따서  이 찻집의 옥호를 ‘歸天’이라 불렀다. 이들 부부는 서울 북쪽 교외로 나가 의정부에 있는 낡은 가옥의 작은 방에서 살림을 시작했다.   술에 곯은 시인의 간장이 성할 리가 없었다. 1988년 목순옥은 의사로부터 남편의 시련이 막바지에 이르렀으며 결코 회복할 가망이 없으니 불가피한 임종에 대비하라는 얘기를 들었다.   춘천에서 개업하고 있는 의사인 친구가 그들을 돕기로 했다. 천상병은 곧 입원했고 목순옥은 그 뒤 여러 달 동안 버스를 타고 춘천까지 달려가 매일 저녁을 그와 함께 보냈다.   그녀는 매일 춘천에서 돌아오는 길에 버스 안에서 이런 기도를 드렸다고 적고 있다. “하느님! 아직은 안 됩니다. 그에게 5년만 더 주십시오. 제발 빕니다. 5년만 더요.”   놀랍게도 그는 원기를 되찾았고, 그 뒤 퇴원하여 그럭저럭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5년 동안이었다. 이 유예의 기간 중에 그의 새로운 시집들과 에세이집들이 출간되었고, 1993년 4월 28일 그는 마지막 귀천 길에 올랐다. 이제 인사동 찻집 문을 열어도, 늘 그가 앉던 자리에서 들려오던 시인의 꺼칠한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열다섯 명만 들어와도 꽉 차는 그곳이 만월일 때에도 그는 말했다. “어서 와요, 여기 자리 있어요, 여기요!”   천상병은 되살아나서 자신의 유고 시집의 출판을 목격하는 진귀한 특권을 누렸으며,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의 첫 유고 시집 이후에 몇 권의 시집을 더 출판할 수 있었다.   그의 두 번째 유고 시집, 이번에는 진짜인 유고 시집이 간행된 것은 1993년이었다.         출처: 도 서 명: 귀천, 지은이: 천상병, 펴낸이: 一庚 張少任 출판사: 도서출판 답게, 출판년도: 2002년 6월 1일 13쇄 귀천 작가 천상병 출판 답게 발매 2001.02.10 -------------------   수락산계곡 / 천상병 공원 / 귀천정(歸天亭)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귀천(歸天)'의 시인 천상병(1930~ 1993)을 기리는 공원이 천 시인이 생전에 살았던 수락산 인근에 '시인 천상병공원'이 있다.   이 공원에는 시비(詩碑), 육필 원고를 새긴 의자, 정자, 천 시인의 등신상(等身像·사람 크기의 조각품)등   사진을 찍을 공간이 마련돼있고, 1.4m 높이 청동 등신상엔 아이들과 즐겁게 어울리는 시인의 모습이 담겨져있다   석재 시비엔 시 '귀천'이 음각됐고 버튼을 누르면 시 낭송이 흘러나오는 음성 시비엔 '귀천' '피리' '새' '변두리' 같은 천 시인의 대표작 20편이 녹음됐다.   또 타임캡슐를 매설해두었는데 타임캡슐에는 천 시인이 생전에 쓰던 안경·찻잔·집필원고 같은 시인의 유품 41종 203점을 모아 (타임캡슐에) 묻었다   이 타임캡술은 천 시인 탄생 200주년을 맞는 2130년 1월 29일 개봉될것이다     >    흐르는 곡/귀천/김원중노래   -------------------------------------- 오늘도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무한한 욕망을 드러내면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몇 년, 몇십 년을 버티지 못하고 우리 모두는 저세상으로 갑니다. 가끔은 산에 올라 무수히 많은 집들과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떠 올리며 백년 후에 살아 있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해 보곤 합니다.   누구나 한 세상을 살다가 저세상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지만, 죽음에 대해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차 죽음이라는 그림자를 생각하게 합니다.   과거보다 죽음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나이를 먹어간다는 증거입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할 때 떠오르는 시가 있습니다. 제가 무척 좋아해서 외우고 있는 ‘시’ 중 한 편으로 천상병 시인의 ‘귀천’입니다.   이 시를 음미하다 보면 무겁고 우울한 죽음이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것으로 변하게 됩니다.   죽음의 길을 볕 좋은 어느 봄날 소풍갔다가 돌아오는 것처럼 아름답게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시를 감상해 보고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음울한 죽음을 소재로 하면서 마치 어릴 적 고향집 양지바른 기슭에서 소꿉장난하는 장면을 떠 올리게 합니다. 죽음이 맑고 영롱한 이슬과 손을 잡고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노을빛과 더불어 노닐다가 구름이 손짓하면은 가겠노라고 합니다. 가서 소풍이 무척 아름다웠다고 말하겠다고 합니다. 시인은 이승과 저승을 소풍을 나왔다 가는 그런 곳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을 이렇게 소풍을 왔다 가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을 보면 시인은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초월자처럼 느껴집니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고 단순한 삶을 살았는가 봅니다.   그래서 그의 언행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기인으로 보이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시의 밑바닥에는 왠지 모를 삶에 대한 애착과 한숨이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슬은 맑음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빛이 닿으면 소리 없이 사라지는 허망한 것입니다. 저녁노을은 아름답지만 곧 어둠이 닥쳐 올 것을 예견하게 합니다. 아름다운 동화 속의 그림을 연상시키지만 곧 닥칠 가혹한 운명을 예고하고 있어 비장한 아름다움이 묻어납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허무나 절망을 슬프고 우울하게 표현하지 않고 아름다움으로 채색하고 있는 것이 이 ‘시’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에 있는 시비       그러나 정작 천상병 시인은 자신은 천주교 신자로서 독실한 신앙심을 이 시에서 표현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시인은 1993년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인은 글을 써서 약간의 돈을 벌기도 했지만 술을 좋아해서 생활인으로서는 낙제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고 나서는 몸도 성하지 못하여서, 72년에 결혼한 목순옥 여사가 인사동에 ‘귀천’이라는 찻집을 열어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귀천’은 문인들의 휴식처가 되었다고 하는데요, 2010년 8월 목여사가 별세하면서 문을 닫고, 그분의 조카가 운영하는 귀천 2호점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인사동 찻집 '귀천'에서 천상병 시인과 목순옥 여사       우리는 시를 보면 그분의 품성이나 됨됨이를 읽을 수가 있습니다. 천상병 시인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마음을 갖고 세상을 살았습니다.   때 묻지 않은 여린 심성이 서정적인 시를 쓰는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승과 저승을 노래한 시가 한 편 더 있어서 내친김에 소개하면서 오늘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날아다니는 새를 보며 노래한 ‘새’라는 시입니다. 그는 이 ‘시’에서 가지에서 가지로 날아다니는 새를 보며 이승에서 저승을 날아 다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지에서 가지로 나무에서 나무로 저 하늘에서 이 하늘로,   아니 저승에서 이승으로   새들은 즐거이 날아오른다.   맑은 날이나 궂은 날이나 대자대비(大慈大悲)처럼 가지 끝에서 하늘 끝에서......   저것 보아라 오늘따라 이승에서 저승으로 한 마리 새가 날아 간다. =================== ▲ 천상병 시인의 시를 영어로 번역해 세계에 알리고 있는 서강대 안선재 교수  ▲ 천상병 시인의 부인 목순옥 여사        천상병공원에 세워진 소개비       천상병 시인의 시를 봐도 잘 아시겠지만 그가 이 곳 상계동 수락산변에서 살면서 수락산을 노래한 시도 적지 않지요 그래서 그를 기리는 공원과 시비등...기념을 하는 것들이 이렇듯 세워져 있습니다 또 한참전에는 의정부에 그의 기념관을 세운다는 계획이 있었다는데.... 시장이 바뀌면서 그 계획이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는 아쉬운 소식이 ....   수락산 물소리쉼터부근에 특히 이런 시가 많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십오 번, 십팔 번 버스종점. 그 당시 상계동은 아마 지금처럼 아파트가 우후죽순처럼 쭉쭉 늘어선 때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상계동 일부에는 무허가 허름한 집이 반대쪽 수락산변에 질서없이 서 있는 곳이 있고 중계동에도 6~70년대의 모습을 간직한 그런 동네가 있습니다 골목 골목에는 연탄재가 쌓여있고, 좁은 골목길이 여기저기로 이어져 있는.... 판자집의 그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 있습니다 개발의 문턱을 넘을 때도 됬건만...주민들과 행정당국과의 이해타산이 맞지 않아 개발이 요원한 상태로 남아 있다네요 그 곳에 천시인이 살면서 삶의 고달픔보다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했으니..그의 평소 삶의 태도를 보는 듯 합니다   이렇게 밝은 가로등을 만나게 되기도 하지만 ... 가로등 뒤에는 검은 길에 유령이 나를 기다리기도 했고....^&^           산길과 산과의 경계선이 이렇듯 허술합니다 그저 사람의 접근을 막는 의미이지만...내게는 지금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어두움의 경계일 뿐...         이 어두움 속을 걷는 시간들....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밝은 것만 익숙하고, 밝은 것만 추구하는 우리네... 눈감고 길을 걸어보는 것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이 공유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항상 같은 길을 가는 일상사를 탈피하고 새로움을 얻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니 왔나!'- 천상병 부인 목순옥 여사의 타계 201년 10월 26일   그 깊은 맛이 배어나던 모과차 이젠 맛 볼수 없나요...?   향년 75세. 아이와 같은 순수한 삶을 살었던 천상병 선생님을 평생 뒷바라지하며, 누구나 일부로나마 한 번 들렸을 법한 인사동골목 한 귀퉁이에서 찻집 '귀천(歸天)' 을 운영, 끝내 노환으로 인한 지병이 악화돼 천상병 선생님께서 계신 저 하늘로 소풍을 떠나셨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부디 맑고 푸른 저 하늘에서 편안히 영면하시길 빕니다.   |   ....금세기 마지막 순수한사랑 목순옥 여사...알려진바 대로, 시인 천상병 님 은,  동백림 간첩사건 조작에 휘말려, 극심한 고문끝에, 성불구가 됐고, 일부 정신적인 혼돈 까지 그 후유증은 실로 한 인간을 나락으로 빠뜨리기에 충분했다...행려병자로 헤메다가, 입원, 당시 간호사 였던 목여사는, 아무것도 없는 시인 천상병의 "사람" 과 "글" 이 좋아서 사랑했고, 평생의 반려자가 됐다... 척박한 세상사는 이분들의 사랑이 아마도 마지막 순수함 으로 기억 될듯 싶다.....   ...필자는  천 시인 님을 여러번 뵌적이 있다...처음 만난것은, 예전에 명동에는 "필 하모니" 라는 크래식 전문 감상실이 있었다..그곳에서 80년 가을, 시 낭송 판 을 벌렸는데, 주인공이 천 시인님 이었다...어눌한 말투로 세번씩 반복하는 특이한 어법... 당시 발표한 시 는 그다지 감흥을 주지는 못했지만, 박정희 를 이기고, 우뚝선 한 시인의 모습을 발견할수는 있었다....박정희 의 복사판 전두환의 집권으로 또다른 동백림 사건들이 출몰 하겠지. 이 우려는 이미 현실이었던 당시 였다....   ....감상실 에서도 막걸리를 마시던 모습... 나는 한동안 , 목여사 님을 이해하지 못했다...혹자들은, 천시인 님의 인세 운운 하는데, 단행본 으로 시집이 팔려나가면 당연히 수입이 동반 하지만, 천시인 님의 "귀천" 은 여러 시 들과 묻어 나가는 경우가 태반 이다보니.. 사실상  시집에 의한 수입은 거의 없다....목여사가 인사동에서 찻집 귀천 을 꾸리는게 생계수단 이었다....   ....대표작 귀천 을 놓고 나는 객기를 부리기도 했다.. " 왜 하늘로 돌아가느냐.. 땅 이래야 그나마 맞는것 아니냐 "는 다소 "시" 를 이해 못하는 억지를 그분과의 술자리에서  했던 기억이 난다...     ....세월이 흐르고 필자도 나이가 들어가자 "돈" 과 "섹스" 없이도 남녀가  사랑할수 있다는 점을 비로소 인정할수 있었고,., 그런 사실을 온몸으로 일깨워 주신분이 바로 목순옥 여사님 이시다....   ....향년 75세...길지도, 짧지도 않은 삶을 보내셨다....오로지 천 시인님.. 아니 어쩌면  인간 천상병 이 아니고, 그분의 "시" 를 사랑 하시다 떠나신......   ....천 시인님은 저승길 노잣돈으로 현금 400만원을 가지고 가셨다. ( 목여사의 어머니가,방이 차갑다며,사위 의 시신이  누어있는 방 아궁이에 불을 지폈는데, 목여사가 그곳에 부조금 400만원을 넣어 논 바람에 불타 버린 일이 있다...)    ....영안실을 나서면서, 천 시인님께서  충분하지는 않지만 노잣돈 으로는 아마 한국최대 의 액수를 지녔으니, 목 여사님은 궂이 현금 없어도 되겠지? 라는 되먹지 않은 상상을 해봤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 고 천상병 시인의 처조카 목영선씨가 자인이 운영하는 서울 종로구 관훈동 전통찻집 '귀천'에서 인터뷰에 응했다.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 명예욕도 충분하고 예쁜 아내니 여자 생각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가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지난 93년 4월 28일 작고한 천상병 시인의 ‘행복’이란 시이다.  19주기를 맞는 천재 고 천상병 시인은 생전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 생활이 걱정 없다'는 그 찻집이 서울 종로구 관훈동 24번지에 있는 ‘귀천’이다. '귀천'은 소위 문학인들의 인사동 찻집으로 알려진 곳이다. 귀천(歸天)은 천상병 시인의 대표적 시다. 85년 3월 문을 연 찻집 ‘귀천’의 주인은 천 시인의 아내 고 목순옥씨였다.  아내 목씨도 이른 네 살의 일기로 지난 2010년 8월 26일 남편인 천 시인에게로 갔다. 천 시인이 살아 있을 당시 종로구 관훈동 24번지에 있던 ‘귀천’의 흔적은 건물 공사로 사라지고, 천 시인의 처 조카인 목영선(48)씨가 맥을 잇고 있다. 목씨는 현재 옛 찻집 주변 관훈동 83번지에 ‘귀천’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 12일 오후 4시 고 천 시인의 아내 오빠의 딸인 조카 목영선씨가 운영하는 ‘귀천’에서 그를 만나 대화를 나눴다.  담배 한 값 막걸리 두 대만 있으면 행복하다고 했던 고 천상병 시인. 아내 목씨가 운영하는 찻집 ‘귀천’은 인사동을 들린 문학인이라면 한번쯤은 찾는 곳이었다. 조카 목씨는 고모(천상병 시인의 아내 고 목순옥씨)와 함께 귀천을 운영했다. 그래서 고모님의 생활상을 누구보다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생전 고모님은 돌아가신 고모부(천상병 시인)의 일이라면 어디든지 찾아다녔다. 찻집을 운영하며, 시간을 내 연극, 백일장, 음악회, 예술제, 세미나 등 고모부의 문학정신을 기리는 행사라면 빵이며 음식을 준비해 어디든지 갔다. 고모부가 살아 있을 때도 잘했지만 영면한 후에도 지성이었다.”         ▲ 91년 생전 촬영한 고 천상병 시인의 아내 고 목순옥 여사           ▲ '귀천'이란 시가 찻집 벽에 걸려 있다.     생전 고모는 된장, 고추장, 김치 등 토속음식을 좋아했다고 말했다. 지난 2010년 8월 건강했던 고모가 갑자기 대장파열로 병원에 입원을 했다고. “대장파열을 모르고 2~3일을 견디었다. 그래서 복막염도 생기고 폐혈증도 나타났다. 중환자실에 입원한 지 나흘 만에 이른 네 살의 나이로 타계했다. 돌아가시기 전인 그해 3월에 척추 디스크 수술을 받기도 했다.”  그는 고모부 천 시인에 대해서도 생전 기억을 되살렸다. “고모부는 일반인의 상식을 뛰어 넘는 천재 시인이었다. 옆에서 지켜본 고모부는 기억력도 좋았고, 욕심 없이 살았다. 어떤 말을 해도 수용하고 받아 드렸다. 시에도 그렸듯이 담배 한 값 막걸리 두 대면 행복했던 사람이었다.”  목씨는 고모부에 대한 말을 계속 이었다. “...지난 67년 고모부가 간첩으로 몰려 옥고를 치렀다. 바로 윤이상 씨도 함께 관계된 ‘동백림’사건이었다. 대학 다닐 때부터 술을 좋아해 술값을 받은 것이 간첩에게 공작자금을 받았다고 구속시킨 사건이다. 전기 고문을 3번 정도 받았다고 들었다. 협박과 고문에도 술값을 받았다는 것 외에 입을 다물었다고 했다.”         ▲ 과거 천 시인의 아내 목순옥씨가 운영했던 찻집 귀천의 내부모습이 판화에 담겨 있다.     그는 천 시인과 아버지 고 목순복 선생은 절친한 친구였다고도 했다. “아버지는 친구 동생인 일곱 살 밑인 고모(고 목순옥씨)를 천 시인에게 시집을 보냈다. 고모부가 지난 67년 동백림사건으로 옥고를 치러 출옥을 했는데도 몸이 좋지 않아, 길거리를 헤매다가 70년대 행려(行旅)병자로 청량리에 있는 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이 때 죽은 줄 알고 동인들이 ‘새’라는 유고 시집을 내기도 했다. 당시 병원에 근무한 고 김종해(의사) 박사가 ‘살아 있다’고 해, 당시 처녀였던 고모가 문병을 갔다. 친구 딸인 고모를 고모부도 좋아해 기다리고 있었다. 고 김종해 박사가 고모에게 천재 시인이 너를 좋아하니 결혼을 하라고 재촉했다. 음악, 시, 그림 등 모르는 것이 없는 천재 시인이 이렇게 죽기는 불쌍하니 고모가 결혼해 함께 하면 몸도 좋아지고 시도 쓸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일곱 살 연상인 고모부(천 시인)과 결혼을 하게 됐다.”          ▲ 천상병 시인의 '행복'이란 시에 그의 캐리커쳐가 그려져 있다.     당시 처녀인 고모는 결혼 전까지 천에 수를 놓은 ‘자수’를 좋아했다고 말했다. 고모와 결혼한 고모부인 천 시인은 규칙적인 생활이 몸에 베여있었다고도 했다. “고모부는 항상 시계를 봤다. 담배를 피울 때도 시간에 맞춰 피웠고, 술을 마실 때도 정확했다.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하면 ‘문동이 자식’하고 입을 다물었다. 정말 마음이 올곧은 사람이었다. 현재 각종 비리, 부정 부패 등 정치인들의 행태를 봤으면 욕을 많이 했을 것이다.”  고모부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처 조카인 목영선씨는 천 시인이 유난히 초록색과 파란색을 좋아했다고도 했다. “왠지 빨간색은 싫어했다. 동백림 사건으로 빨갱이로 몰려 ‘고문’을 받아 빨간색을 싫어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초록색과 파란색은 너무 좋아했다. 이 색을 보면 눈이 좋아지고 정신이 맑아진다고 했다. 빨간 립스틱, 빨간 옷 입고 가면 혼이 났다.”  고 천상병 시인을 그리며 찻집 '귀천'을 운영했던 아내 고 목순옥씨도 세상을 떠났다. 현재 고 천 시인의 처쪽 조카인 목순영씨가 찻집 ‘귀천’을 운영하며 고모부 ‘천 시인’의 문학세계를 알리고 있다. 그에게 앞으로 찻집을 그만두면 누구에게 맥을 이어갈 것이냐고 묻자 “집안에서 이어가도록 할 것”이라고 짤막하게 답했다.  찻집 ‘귀천’은 오미자, 모과자, 매실차, 수정과, 뽕잎차, 쌍화차 등을 위주로 판 전통 찻집이다. '귀천'에는 천상병 시인이 생전 아내와 파안대소한 사진과 귀천, 행복 등의 대표시가 자연스레 눈에 끌렸다. 특히 지난 천 시인의 아내 고 목순옥씨가 운영했던 찻집 내부를 그린 판화가 옛 추억을 되새기게 했다. 판화에는 생전 천 시인과 아내의 다정했던 사진, 아내 문순옥씨가 펴낸 ‘날개 없는 새 짝이 되어’ 등이 새겨져 있다.          ▲ 이외수 소설가와 함께 한 고 천상병 시인     한편, 일 년에 한번 열리는 ‘천상병 예술제’가 지난 4월 21일부터 29일까지 경기도 의정부 ‘예술의 전당’에서 열렸다. 올해로 9회째인 예술제는 가수 최백호, 신형원 씨가 참석해 노래를 불렀고, 강희근 경상대 명예교수의 ‘천 시인의 문학상’에 대해 강연을 했다. 천 시인의 19주기 기일인 4월 28일은 백일장, 음악회, 문학상 시상식 등의 행사가 치러졌다.  이쯤해서 고 천상병 시인의 대표시로 잘 알려진 ‘귀천(歸天)’을 되새겨 본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과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과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 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 [발굴 특종] 귀천(歸天)시인 천상병의 일기·편지 발견 ㅡ"돋보기 살 돈 2만원만 꿔주세요"  ㅡ"3.1절 아침에 만세 세번 불렀다"   ▲ 생전의 천상병 시인(오른쪽)과 부인 목순옥 여사.   천상병(千祥炳·1930~1993) 시인이 1980년대 초반에 직접 쓴 일기 일부와 편지가 발견됐다. 편지는 1981년 국회의원 고(故) 정상구씨에게 2만원을 꾸어달라고 부탁하는 것과 형님에게 안부를 묻는 내용. 그러나 이 편지들은 보내지지는 않았다. 일기는 1983년 2~3월 쓴 것으로, 3·1절에 집에서 만세를 세 번 불렀으며 연동교회 김형국 목사의 설교에 감명을 받았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있다. 부인 목 여사는 “천상병 시인이 돌아가신 직후에 유고들을 정리했는데 그때 누락된 것 같다”고 말했다. 새로 발견된 유고에 대해 천 시인의 친구였던 학술원 회원이자 극작가인 신봉승씨는 “천상병 시인의 생활상과 사상 등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역시 친구였던 강민 시인도 “처음 보는 것들로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평했다. 천상병은 사후에 날이 갈수록 애독자가 늘고 있는 시인이다. ‘천상병 문학제’에 참여하는 사람도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대표작인 ‘귀천(歸天)’은 도처에 시비(詩碑)가 세워졌고 교과서에도 실렸다. 대중가요로도 여러 가수가 불렀다. 문단에서는 “의정부에 있는 천 시인의 묘소에는 떡이 굳는 날이 없고 꽃이 시드는 날이 없다”는 말들을 한다. 그만큼 천 시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자주 찾는다는 말이다. 새로 발견된 유고를 소개한다. ◎ 편지 정상구 의원에게 보내는 편지는 200자 원고지 3매로 돼 있다. 그 중 주요 내용은 안경값 2만원만 꾸어달라는 내용. “…아내가 몇 달 전에 실직(失職)을 해서 요새는 밥도 못 해먹고 근처의 처가집에서 얻어먹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밥문제는 아니고 내가 수일 전에 돋보기 안경을 잘못 취급해서 못쓰게 되었는데 돋보기가 없으면 적은 활자는 읽을 수가 없어서 요새 가을인데 책을 못 읽어서 답답하기 그지 없어서 선생님께 편지를 씁니다. 아내에게 물으니 한 2만원이면 살 수 있다는데 좀 봐주십시오, 내년 4월이나 5월이면 본인의 책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글도 못 쓸 지경이니 어찌합니까. 책이 나오면 그 인세로 2만원 기어코 갚겠습니다. 선생님 딱 한번만 봐 주십시오.”   ▲ 정상구씨에게 쓴 편지   천상병 시인은 원래 가난을 즐겼다. 그리고 아무리 어려워도 부자에게 손을 내밀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단지 오며가며 만나는 가까운 친구에게 장난삼아 손바닥을 내밀고 500원, 1000원을 얻어 막걸리를 마셨다. 돈을 적게 주던 사람이 갑자기 많이 주면 거스름돈을 주기도 할 정도였다. 1980년대 초반에 쓴 그의 시 ‘나의 가난함’을 보자. 나는 볼품없이 가난하지만 인간의 삶에는 부족하지 않다. 내 형제들 셋은 부산에서 잘 살지만 형제들 신세는 딱 질색이다. 각 문학사에서는 날 돌봐주고 몇몇 문인들이 날 도와주고 그러니 나는 불편함을 모른다. 다만 하늘에 감사할 뿐이다. 이렇게 가난해도 나는 가장 행복을 맛본다. 돈과 행복은 상관없다. 부자는 바늘귀를 통과해야 한다. 이처럼 ‘가난이 행복’이라고 노래한 시인이 권력 가진 정치인에게 단돈 2만원만 빌려달라고 한 사정을 이해하려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우선 ‘아내의 실직’에 대해. 천 시인의 부인인 목순옥 여사는 1977년 황학동 벼룩시장에서 친구와 함께 12평짜리 고가구점을 열었다. 워낙 가난한 부부였지만 친구들의 도움으로 문화인이 즐겨찾는 민화나 고가구 등을 파는 가게를 열었던 것. 목 여사는 1년 후에 가게를 독립했다. 그런데 돈이 없어 고리채를 쓰다보니 빚만 늘어갔다. 게다가 당시 금당(金堂)사건으로 알려진, 골동품 가게 주인이 살해되는 사건이 터진 다음부터는 골동품 거래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는 사람에게 꾸어준 돈을 떼였다. 천 시인이 어쩌다 쓰는 시의 원고료는 편당 3000~5000원에 불과했다. 한 달에 2만5000원 하는 방세도 세 달씩 밀리게 됐다. 목 여사는 마침내 1981년 가게를 정리했다. 그러자 빚쟁이들이 몰려들었다. 빚쟁이들은 목 여사에게 “돈 내놓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부부가 자는 방에서 자고 가기도 했다. 그런데 살림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천 시인은 “마누라를 경찰서로 데리고 가라”고 야단이었다고 목 여사는 말했다. 목 여사는 “이때가 경제적으로 생활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바로 이때 천 시인은 돋보기 안경을 깨뜨렸다. 천 시인은 누워있을 때 안경을 꼭 어깨 밑에다 놓았다고 한다. 잠이라도 자다가 몸을 뒤척이면 안경이 깨지기 십상이다. 몇 번이나 “다른 곳에 안경을 놓고 자라”고 해도 듣지 않았다는 것. 이렇게 해서 테가 부러지면 테이프로 붙이고, 또 붙이고 해서 잠시 쓰지만 끝내 쓸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 부지기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는 “안경을 살 돈조차 없었기 때문에 결국은 돈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정상구 의원에게 2만원이라도 꾸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고 목 여사는 추측했다. 당시 야당인 민한당 소속 국회의원이던 정상구씨는 부산여대를 운영하고 시인으로도 활동했다. 천상병 시인과 정상구씨가 특별히 안면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정씨가 문단에서 어려운 작가들을 돕는 인물로 소문난 것도 아니었다. 정씨의 아들인 정영호 교수(부산여대)는 “부친이 가깝게 지내던 김춘수 시인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말은 들었지만 다른 시인을 도왔다는 기억은 없다”고 말했다. 김춘수 시인은 천상병 시인을 시단에 등단시킨 고교 은사이기도 하다. 정 교수는 그러나 “부친이 부산에서 가끔 가까운 시인들에게 식사대접을 하고 여비를 주었다는 말은 들었다”고 전했다. 정상구 의원 앞으로 쓴 편지는 결국 보내지지 않았다. 목순옥 여사는 1982년 친지가 운영하는 인사동의 한 찻집에서 목기 코너를 열어 쌀과 연탄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됐다. 천 시인도 새로 돋보기 안경을 갖게 돼 다시 책을 볼 수 있게 됐음은 물론이다.   ▲ 형님에게 쓴 편지 비슷한 시기에 형님에게 쓴 편지에서 천상병 시인은 핵가족제에 대한 불만을 터뜨린다.   “요새 세상은 핵가족이라고 하여 장남이 장가들면 딴 집에 살게 하는 것이 보통인데, 나는요 이 핵가족제가 영 싫어 죽겠습니다. 키운 보람이 무엇이겠습니까? 장남이 돈을 벌어서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형님은 핵가족이다 하지 말고 같은 집에 살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요즘 보면 보수주의자로서의 면모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신봉승씨는 “천상병 시인이 보수주의자”라고 단언하며 가족과 관련된 두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천 시인은 1960년대에 신혼이던 신씨의 전셋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다. 통금이 있던 당시 천 시인은 매일 밤 11시59분에 집을 찾았다. 그래서 신씨가 “야, 집주인한테 미안하다. 좀 일찍 들어와라”고 하면 천 시인은 “너 같으면 일찍 들어올 수 있겠냐”고 반문하더라는 것. 남에게 더부살이하는 주제에 일찍 들어와 집안차지를 할 수는 없다는 의미이다. 또 한번은 천 시인이 밤에 술을 마신다고 마신 것이 알고 보니 스킨로션을 반 병이나 마셨다. 그래서 신씨가 하루 종일 걱정했는데 그날은 밤 10시30분에 나타나더니 동네 동장집에 문상을 갔다오는 길이라고 하더라는 것. 천 시인은 걱정하는 신씨에게 “동네에서 흉사(凶事)가 있으면 문상을 가야지 혼자 살려고 하냐”고 말하더라는 것. 신씨는 이러한 시인의 언동이 다소 우습긴하지만 보수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설명했다. ◎ 일기 이번에 발견된 일기는 1983년 2~3월 씌어진 것이다. 이전에 발견된 일기는 1989년 8월에 쓴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일기 서두에 “오늘 비로소 아내한테서 일기책을 구했다”고 돼 있다. 천 시인은 이때부터 처음으로 일기를 쓰는 것처럼 쓰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발견된 일기는 그보다 6년 전에 쓴 것들이다. 이번에 발견된 일기를 쓸 때는 부인 목 여사가 인사동에서 친지의 권유로 천 시인의 대표시 이름을 딴 카페 ‘귀천’을 운영하기 시작해 생활이 비교적 안정되기 시작한 시기이다. 이 일기에는 천 시인의 크리스천으로서의 면모가 드러나 있다. 2월 21일 천상병 시인은 아치방(당시 카페 이름)에 가서 이호종이라는 사람으로부터 “크리스처니즘도 샤머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말을 듣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말이 “너무나 놀라운 해석이지만 원시인에게도 하나님은 성령을 베푸셨지 않을까. 일단은 수긍이 갈 만한 말로 들었다”고 한다. 목 여사에 따르면 이호종이라는 사람은 나중에 불승(佛僧)이 됐다.     ▲ 일기   2월 27일 일요일에 천 시인은 교회에서 김형태 목사의 설교를 듣고 감동했다. 천 시인이 찾은 교회는 연동교회다. 천 시인은 원래는 가톨릭이다. 그런데 1981년 기독교 방송을 통해 김형태 목사의 설교를 듣고 감동해 연동교회를 나가게 됐다는 것. 처음 나가는 날 천 시인은 김 목사를 찾아가 큰 소리로 “목사님, 저는 가톨릭입니다. 저는 배신자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목사님 설교가 좋아서 들으러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일찍이 이러한 입장을 ‘연동교회’라는 시로 썼다. 나는 지금까지 약 30년 동안은 명동 천주성당에 다녔는데 그러니까 어엿한 천주신도인데도 81년부터는 기독교 연동교회로 나갑니다. 주임목사 김형태 목사님도 대단히 훌륭하신 목사님으로 그리고 기독교 방송에서 그동안 두번 설교를 하셔서 나는 드디어 그분의 연동교회엘 나갈 것을 결심하고 나갑니다. 교회당 구조도 아주 교회당답고 조용하고 아늑하여 기뻐집니다. 아내는 미리 연동교회였으나 그동안 가톨릭에 구애되어 나 혼자 명동 천주 성당에 나갔으나 그런데 81년부터는 다릅니다. 한번밖에 안 나갔어도 그렇게 좋으니 이제는 연동교회에만 나가겠습니다. 물론 개종은 않고 말입니다. 배신자라는 말 듣기는 아주 싫습니다. 천 시인이 김 목사의 설교를 좋아하게 된 데 대해 목 여사는 “김 목사님의 설교가 당시 다른 목사님들과는 달리 매우 조리있고 차분했었기 때문에 천 시인이 좋아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최근 “내 신학이 가톨릭과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못하며 신부들과의 교제도 스스럼없이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당시에는 군사독재 시대라서 민주화와 인간화에 대한 설교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천 시인은 “부활 예수님은 반드시 한국에서 나실 것”이라는 김 목사의 설교에 충격을 받는다. 천 시인은 일기에서 “3월 1일 아침에 3·1절 만세를 세 번 불렀다”고 썼다. 그리고 감동적인 마음으로 한국일보의 3·1절 특집기사를 죄다 읽었다. 천 시인 부부는 연동교회에서 늘 예배당 내부가 가장 잘 내려다 보이는 교회 3층 제일 앞줄 한가운데 좌석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예배를 보는 동안에는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예배를 본다. 그리고 기도를 할 때는 자주 “하나님 용서해주이소. 용서하이소”라고 말했다고 목 여사는 전했다. 천 시인은 예배 마지막 순서인 축도가 시작되면 재빨리 1층으로 내려간다. 김 목사와 먼저 인사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김 목사는 당시의 천 시인에 대해 “교회에 잘 나왔으며 만나면 늘 인사하는 정상인이며 밖에서 말하는 것 같은 이상한 사람이 전혀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천 시인이 “존귀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천 시인은 3월 7일 ‘막걸리’라는 시를 썼다. 천상병의 시 중에는 ‘막걸리’라는 제목의 시가 모두 3편이 있다. 이 중 두 편은 1984년에 발표된 것이다. 목 여사는 당시 문학지에 발표되지 않은 다음의 시가 1983년에 지은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술을 좋아하되 막걸리와 맥주밖에 못 마신다. 막걸리는 아침에 한 병(한 되) 사면 한홉짜리 적은 잔으로 생각날 때만 마시니 거의 하루 종일이 간다. 맥주는 어쩌다 원고료를 받으면 오백 원짜리 한 잔만 하는데 마누라는 몇달에 한번 마시는 이것도 마다한다. 세상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음식으로 내가 즐거움을 느끼는 때는 다만 이것뿐인데 어찌 내 한가지 뿐인 이 즐거움을 마다하려고 하는가 말이다. 우주도 그런 것이 아니고 세계도 그런 것이 아니고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니다. 목적은 다만 즐거움인 것이다. 즐거움은 인생의 최대 목표이다. 막걸리는 술이 아니고 밥이나 마찬가지다. 밥일 뿐 아니라 즐거움을 더해주는 하느님의 은총인 것이다. 우태영 조선일보 출판국 기획위원
  우리가 물이 되어                      //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處女)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萬里)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푸시시 불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人跡)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  * 감상 : 물이 되어 만난다는 것은 불같이 서로 다투던 욕심과 미움을 버리고 만난다는 것이다. 쉽게 합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사이가 되어 '처녀' 같이 순수의 바다에서 만나기를 바라고 있다. * 상징적 의미 . 물 : 화합, 생성, 정화 . 불 : 갈등, 투쟁, 소멸 * 주제 : 순수한 마음으로 만나는 삶 다음은 '나룻배와 행인'입니다. 나룻배와 행인 : 한용운 시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음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감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깁흐나 엿흐나 급한 여을이나 건너감니다. //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마지며 밤에서 낫가지 당신을 기다리고 잇슴니다. 당신은 물만 건느면 나를 도러 보지도 안코 가심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아러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어 감니다. //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  -----------------------  * 감상 : 사랑의 본질을 자비(慈悲)와 인(忍)에 두고, 그 정감의 깊이를 노래한 이 시는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당신과 나의 관계를 행인과 나룻배에 비유했다. * 구성 : 수미상관  제 1연 : 나와 당신의 관계  제 2연 : 나의 희생  제 3연 : 당신을 만날 수 있다는 나의 믿음을 형상화 *형태상으로 3연으로 되어 있으나 시상의 전개에 따라 1연의 1, 2행을 각각 하나의 연으로 독립시키면, 기 승 전 결 4개의 연으로 나눌 수 있다. * 주제 : 희생과 믿음(불교적 자비) 두 작품의 공통점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유를 통해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는 공통점은 우선 찾을 수 있겠네요. 또 대상에 대한 기다림(우리가 물이 되어에서는 순수한 생명력으로의 만남에 대한 소망. 나룻배와 행인에서는 행인에 대한 기다림)이 나타나 있다. 정도로 찾을 수 있겠군요. 다음은 '내 마음을 아실 이'입니다.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 같이 아실 이  그래도 어데나 계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리우는 티끌과  속임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 밤 고이 맺는 이슬 같은 보람을  보밴 듯 감추었다 내어 드리지.  아 !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날 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 맑은 옥돌에 불이 달아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 감상 : 이 작품의 주제는 그리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그의 내면 세계에 머물러 있는 안개와 같이 깔려 있다. (김소월, 한용운의 님과는 차이가 있음).  1930년대 '시문학'파의 성격인 섬세한 언어 감각과 그윽한 서정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투명한 정서와 조탁(彫琢)된 시어, 음악성을 잘 드러나 있다.  * 어조 : 여성적 어조로 내면의 그리움을 노래 * 주제 : 임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과 회의 우리가 물이 되어와 비교한다면 가장 선명한 것은 간절한 소망의 정서가 드러나 있는 점을 꼽을 수 있겠군요.  ============================================           나의 아버지 - 강은교    속 깊은 마당에 떨어지는 비처럼 늘 함께 계시는 듯 그리운 내 아버지                             얼마나 고독하셨을까, 아버지는. 열심히 걸어오신 삶이 후회스러우면서 문득 억울하다고 생각하진 않으셨을까, 아버지는. 한밤중에 일어나 앉으니, 저 가로등처럼 구부정히 서서 골목을 불현듯 지나가시는 아버지가 보이는 듯하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나도 뒷 허리를 문지르고 있었다, 내 어린 시절의 아버지처럼.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나도 소금물에 눈을 씻고 있었다, 내 어린 시절의 아버지처럼.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나도 안경을 들고 있었다, 내 어린 시절의 아버지처럼.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나도 골목을 멍하니 내다 보고 있었다, 내 어린 시절의 아버지처럼.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나도 몇 개의 알약을 먹고 있었다, 내 어린 시절의 아버지처럼.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나도 한약 한 봉지를 고개를 치켜들고 마시고 있었다, 내 어린 시절의 아버지처럼. 아버지는 그때, 그러니까 내가 아주 꼬마였을 때, 어린 딸을 바라보시며 문득 어떤 생각이 들곤 하셨을까. 그동안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문득 드셨을까? 이제부터라도… 하며 굳게 결심하고 계셨을까. 그때 그렇게 하지 말 것을 하는, 후회로 가슴 아프고 계시진 않았을까. 어느날 불현듯 유서를 써두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계시진 않았을까. 거기엔 당신이 억울한 이유도 조목조목 함께 쓰고 싶으시진 않으셨을까. 그동안 무엇인가 열심히 원고지를 긁적거리며, 무엇인가 늘 세상을 향하여 중얼거림과 외침을 던진 일이 참 쓸데없는 짓이었구나, 하고 생각하고 계시진 않으셨을까. 다만 어린 아이를 보며 그 아이, 참 눈부시구나, 하시며 미소를 짓고 계시진 않으셨을까. 아마도 세상으로부터 한없이 밀려났다는 생각을 하시며. 내가 요즘 연속방송극 같은 것을 열심히 보는 것처럼 신문 연재소설을 읽으시고 라디오 방송극을 열심히 들으신 것이었을까. 평생 신념이 중요하던 아버지에게 그때도 신념은 최후에 신봉하여야 할 그 무엇이었을까? 이상의 아름다움, 그런 것을 그때도 만지작거리고 계셨을까. 아버지의 맨 마지막 시간에 든 생각은 어떤 것이셨을까. 절망이었을까, 희망이었을까. 어머니였을까, 딸이었을까.신념이었을까 빛이었을까, 빛이 뿌옇게 드나드는 창이었을까. '우리가 사는 것, 아마 다 어느 날의 동화일거야. 동화치고는 너무 고통스러운, 가난의 동화, 소외의 동화, 고독의 동화, 투쟁의 동화,이상의 동화일거야'라고 중얼거리시며, '부재가 우리의 운명이리. 새소리에 새소리는 없으리, 우리는 마주오는 불빛밖에 볼 수 없으리'라고 중얼거리시며 마지막 골목길을 걸어가셨을까. 아니 지금 걸어가시고 계시는 걸까. 그러나 아버지라는 공간은 수천 아버지가 들끊는 동심원 같은 공간이다. 그 동심원 속의 속에, 마치 핵같은 점으로 아버지는 들어있다. 아버지의 뼈 속에 불던 바람은 나의 하늘에도 불고 있다. 아버지의 눈썹 밑을 적시던 비는 나의 하늘에도 내리고 있다. 아버지의 어깨 위를 하염없이 비추던 황혼은 나의 하늘에도 내려 앉아 있다. 어느 날 푹푹 내리던 하얀 눈발이 시려운 아버지의 이마. 시금치 나물을 유난히 잘 잡수시던 아버지의 위장, 그 위장 속으로 깊이 깊이 나는 내려간다. 그래서 하나가 된다. 나는 또 하나의 시간이 된다. 아버지는 아름답다. 시간이므로 아름답다. 책갈피에 끼인 어느 날의 단풍잎같은 존재이므로 아름답다. 가끔 꺼내보는 아버지이기에 아름답다. 어머니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어느 유원지 사진 속에 서 계신 아버지이기에 아름답다. 아름다운 아버지는 속깊은 마당이다. 마당에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이다. 그것은 마당 위에 고독한 웅덩이를 남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불멸이다. 어머니가 불멸이듯이, 모든 숨이 불멸이듯이. 아버지는 또한 긴 울타리다. 아버지는 저 지붕이다. 내가 언젠가 진짜 괜찮은 시를 쓴다면 거기 태어나실 꿈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 아버지의 꿈을 쓰지 못했다. 그러기에 아버지는 희망이다. 젊은 시절에 하셨던 일들을 다시 젊은이가 하는 양을 보고 눈부셔지셨을 아버지는 창이다. 언제나 활짝 열리는 과거의 미래이다. 미래의 과거이다.                                    시인 강은교와 가수 조영남  보내주신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편지의 시작이 인상적이었습니다.“조영남 선생께. 안녕하세요? 강은교입니다. 시를 끼적거리고 있죠.” 그래서 나도 답장의 머리글을 이렇게 써봅니다.  “시인 강은교 선생께. 안녕하세요? 조영남입니다. 노래를 흥얼대고 있죠.” 강 선생의 편지를 받아 들고 얼마나 가슴 떨렸는지 모릅니다.  도대체 이게 얼마만입니까. 우리의 첫 인연부터 따지면 굉장합니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한 열여섯 살, 당신이 중학교 1학년 열네 살 무렵부터니까 무려 50년이 넘어가네요. 수치로 반세기 만에 받은 편지라서 크게 놀랐고 반가웠습니다.  나는 늘 강 선생에 대해 듬성듬성 생각하면서 잘살고 있나 궁금했는데 편지봉투에 명함처럼 찍혀 있는 ‘동아대학교 인문과학대학 문예창작학과 명예교수’라는 직함을 보고 아! 먹고는 살았겠구나, 안심이 되었습니다.  내가 강 선생의 뜬금없는 편지를 받고 가슴 설레는 걸 봐서 ‘사람은 몸이 늙지 마음은 늙지 않는구나’ 하는 과장 섞인 생각까지 하게 됐습니다. 진도가 더 나가기 전에 한 가지 양해를 구할 게 있는데 강 선생께서 편지 말미에 답장을 기다린다고 써놨기에 물론 답장을 쓰겠다고 맘먹고 있었는데, 무슨 조화인지 공교롭게도 월간지 ‘신동아’로부터 원고지 20장의 신년수필 원고청탁을 받아놓고 있던 터라 나는 불현듯 강 선생에게 보내는 답문의 전문을 ‘신동아’ 쪽으로도 띄우는 방법을 생각해낸 것입니다. 한 통의 편지가 강 선생과 ‘신동아’ 쪽으로 동시에 배달되는 거죠. 요컨대 우리의 관계를 세상에 털어놓는 겁니다. 강 선생이나 나나 이제 살 만큼 다 살았고 또 어차피 강 선생의 시를 내가 노래로 만들어 부를 경우 세상에 알려지는 건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우리 얘기는 10대 때부터 시작됩니다.  아! 우리에게도 10대 시절이 있었군요. 내가 충청도 시골에서 중학교를 막 졸업하고 서울로 밀려가야 했던 때가 있었죠. ‘밀려간다’는 뜻은 벌써 몇 년 전부터 아버지가 중풍으로 반신불수의 몸이 되어 병석에 누워 계셨기 때문에 시골집에선 고등학교에 올라갈 엄두를 못 내고 서울에 먼저 가 있던 누나네 집으로 쫓겨가야 했다는 겁니다.  그즈음 나를 친동생처럼 대해줬던 강연희라는 이름의 우리 중학교 예쁜 영어선생님이 나한테 쪽지 한 장을 내밀며 이런 식의 설명을 해줬죠.  “영남아, 서울 올라가면 얘를 좀 만나보거라. 이름은 강은교, 내 사촌여동생이다. 이번에 경기여중을 수석으로 입학한 아이야. 은교가 나폴레옹을 몹시 좋아하니까 네가 나폴레옹 초상화를 멋지게 그려서 선물을 하렴.” 대강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처녀 영어선생님이 열댓 살 소년 제자한테 열서너 살 소녀를 중매해준 셈이죠. 이런 걸 보통 쿨-이라 하죠.  나는 물론 장항선 기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와 누나가 취직해서 일하는 을지로 6가 수구문 근처 쪼그만 약방 구석방에 짐을 풀고, 전화 거는 방법과 서울 말씨를 습득해 난생처음 전화를 걸어본 것이 혜화동 강은교네였죠. 달달 떨리는 손가락으로 전화번호를 돌렸고 저쪽에서 따르릉 소리가 들리며 신호가 갔고 “여보세요” 하는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얼른 연습해두었던 서울 말씨로 전화통화를 이어나갔죠.  “여보세요. 저는 충청도 삽다리 중학교 강연희 선생님의 소개로 나폴레옹 초상화를 그려서 들고 온 조영남인데요” 하자 저쪽에서 “네에 제가 강은굔데요. 아! 이걸 어쩌나”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내 입에선 다음 대사가 튀어나오질 않았습니다. 다음 대사를 연습해두지 않았던 거죠. 그것으로 전화통화는 끝이 났죠.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달빛이 어쩌구 새벽별이 어쩌구 하는 멋진 대사 한 구절 없이 그날 우리의 첫 접선은 맥없이 끝났습니다. 다시 시도하는 뭐 그런 것도 없이 말입니다. 서울 소녀와 시골 소년이 가까운 거리에서 쌍방 전화통화를 실현한 것만도 굉장한 사건이었죠.  그 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세월은 흘러갔고 내가 고3 때던가, 대학에 들어가서던가, 내가 다니던 동대문 근처 동신교회 학생 성가대원 중에 경기여고에 다니는 학생이 몇 명 있기에 문득 생각나서 이렇게 물었죠.  “얘들아, 니네 학교에 강은교라는 학생 있니?” 그런데 이름도 기억나는 도건옥이라는 애가 “영남 오빠! 걔 우리 반 반장이야” 하고 알려주더군요. “그럼 학교 가서 강은교한테 내 얘길 해보렴” 했더니 다음 주일 아침 바로 도건옥을 따라 여고생 강은교 당신이 나를 보러 동신교회엘 나온 겁니다. 아! 내 생애에 강은교를 최초로 보게 된 순간이었죠. 당시 내가 본 여고생 강은교의 인상은 유난히 눈이 큰 예쁜 얼굴에 부티가 주르르 흐르는 소녀였습니다. 그 후 우리는 자연스럽게 오빠 동생이 되어 매주 교회에서 만났고 예배가 끝나면 교회가 있던 동대문에서 혜화동 로터리, 어린 강 선생이 손을 흔들며 사라지곤 했던 주유소 뒤 골목 입구까지 바래다주곤 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우리들 젊은 날의 데이트였던 것 같습니다. ================================================ 참으로 잠들수 없어서...   강 은교 선생님은 30년간 나의 짝사랑의 대상이며 극복의 대상이었다. 1974년 떠꺼머리 고교 2년생의 눈에 꽂힌 그렁그렁한 눈 - 오늘의 시인총서 1권 풀잎- 갓 서른이 된 시인의 흔치 않은 시어와 감당하기 어려운 개인사..모든 것이 나를 사로잡았고 그의 작품 모두를 스크랩하기에 이른다.         중견이 되신 이후에는 산문집을 통하여 자신의 삶의 편린 속에서 어떻게 그의 시가 탄생되었는지 보여주시곤 하셨는데 이 책이 나왔을 때 나는 미국에 있었다. 로스 앤젤레스의 한 한국 서점에서 접한 선생님이 너무 반가와 덜컥 사고는 밤새워 읽었다. 시인의 산문집은 항상 시처럼 사는 사람의 생각 따라잡기가 가능해서, 그렇게 쉬운 모티브를 주셔서 참 좋다. 이 책도 자신의 사는 모습에서 느껴진 어리석음들 - 기실 문인들 중 세상 사는 요령에 정통한 사람들은 거의 없다 -을 고백한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한다. 시인은 수영을 배우려다 수영 강사에게 몸에 힘을 빼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곤 배우는 것을 포기한다. 어떻게 힘 빼는지 정말 몰라서...그리고 이렇게 독백한다. ...그러고 보니 세상에 대해서도, 세상 일에 대해서도 저는 늘 필요 이상의 힘을 주고 있었습니다. 속에서부터 거부하고 불신하고 있었습니다...   ...사랑을 중얼거렸지만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제 몸의 힘을 모두 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주 아주 가벼워져서 그 무엇인가로 늘 무거운 자기를 놓아버리고 그런 다음 깊이 깊이 받아들이는 일인 것입니다. 사랑에게 아무 보상의 요구 없이 자기를 던지는 일인 것입니다.....   -------아찌가 추억하는 강은교님    1974년 종로서적에서 만난 여인 깊은 우수의 눈을 하고 병색이 완연하지만(선천성 희귀병) 또렷한 정신으로 나를 응시하는 한 사진 띠동갑 연상의 그녀에 끌려  민음사 간 오늘의 시인총서 초판본을 산다.   70년대 초반 우리 시단에 새 물결을 가져온 '70년대'동인 중 한 분 또 다른 동인 (임 정남 님.전 샘터 간행인)과 결혼하시고 홍귀자 씨와 말레이지아에서 깜짝 결혼을 80년대 중반에 하면서 파계한 다른 동인(허 이름을 잊었다. 스님이셨는데..정씨)과  절친하셨던   그래서인지 아래의 시에 짙은 윤회의 사상이 깔려 있으며 시평에서 미당 선생님이 '그는 '여류'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없는 최초의 시인이다'라고 했던 분   강 은교 님의 초기 시이고 나중에 교과서에도 수록되었다 했다. 내 사춘기의 한 쪽을 지배했던 연상의 여인의 시..... 우리가 물이 되어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Epilogue : 고3때 같이 글쓰던 친구가 죽었다. 그의 시비 제막 때  이 시와 강은교 님의 '하관'을 내가 읊었었지.....   ====================================                                시는 어디에 있는가                                                                                     강 은 교                                 지금까지의 숱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시는 어디에 있는가. 집으로 달려오다가 문득 하늘을 보니 잿빛 허공에 떠 있는 거대한 TV 화면 속에서 적금통장을 들고 마음껏 웃고 있는 여자의 아양 떠는 혀가 보인다, 시는 그 혀 속에 있는가.   시는 어디에 있는가. 산길을 걷다가 그림자로 길을 안으려 애쓰고 있는 나무 한 그루를 본다. 그 나무는 쉴 새 없이 머리를 흔들고 있다. 시는 그 흔들림 속에 있는가.   시는 어디에 있는가. 그 터널은 누우런 금니빨 같은 등불을 번쩍이며 밖으로 나가고 싶어, 나가고 싶어, 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시는 그 터널의 꿈속에 있는가.   시는 어디에 있는가. 그 꽃의 입술은 오늘 아침 활짝 열려 공중을 핥아대고 있다. 두 발이 잘렸음에도 웃음 던지며. 시는 그 꽃의 순간의 열린 입술 속에 있는가.   아, 시는 어디에 있는가. 사유를 위한 존재의 즐거움 속에 있는가. 추악 속에 있는가, 결코 잊을 수 없는 美 속에 있는가. 한 사람의 시는 열 사람의 시인가,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과연 옳은가. 열사람의 시는 또 어디에 있는가. 불행 속에 있는가, 흘러내리는 눈물 속에 있는가. 무덤의 고독 속에 있는가, 시간의 속눈썹 속에 잇는가. 열 사람의 시는 또 어디에 있는가. 시는 오해와 오류 속에 있다, 또는 관계 속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은가.   시는 어디에 있는가. 욕망과 무의식 속에 있는가. 무의식의 생산 속에 있는가. 순환하는 善 속에 있는가, 순환하는 惡 속에 있는가. 시는 어디에 있는가. 감자 속에 있는가. 감자의 얇은 껍질 속에 있는가.   시는 어디에 있는가. 시는 ‘바라봄’ 속에 있는가. ‘바라봄의 꿈’ 속에 있는가. 시는 ‘가짐’ 속에 있는가. ‘가짐’에의 꿈속에 있는가. ‘감-혹은 도달’ 속에 있는가. ‘감-혹은 도달’에의 꿈속에 있는가.   이참에 장자의 우화 하나를 보자.   장자 : 「… 얼마 후에 밭일 하던 노인이 물었다. ‘댁은 무엇 하는 사람이오?’ ‘孔丘의 제자입니다.’하고 대답하니까 밭일 하던 노인은 말했다. ‘댁은 그 널리 배워서 성인 흉내를 내며 허튼 수작으로 대중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홀로 거문고를 타면서 슬픈 듯 노래하여 온 천하에 명성을 팔려는 자가 아니겠소!… 댁은 몸조차 다스리지 못하는데 어찌 천하를 다스릴 겨를이 있단 말이오. 댁은 가보시오. 내 일을 방해하지 말고…’ 자공은 두려워 움츠러든 채 창백해져서 멍청하니 넋을 잃고 말았다. 30리를 가서야 제 정신이 들었다. 」   장자의 말을 오늘 시에 대입한다면, 시인은 ‘홀로 거문고 타며 슬픈 듯 노래하는’ 사람인가.   시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햇빛의 혀가 은빛으로 부서지며 고개를 바짝 쳐든 산봉우리를 핥고 있다. 시는 그 햇빛의 눈부신 혀 속에 있는가.   시는 어디에 있는가. 그 산봉우리는 늘 말없이 서서 이마 위에 흐르는 안개 같은 땀을 닦고 있었다. 시는 그 산봉우리 속에 있는가.   아, 시는 진정 어디에 있는가. 사물 속에 있는가. 하나의 사물을 향하여 수십 수만 개의 줌 렌즈가 달려온다. 수십 수만의 그 사물은 어디에 있는가, 상승되는 정신 속에 있는가, 하강하는 몸속에 있는가. 수십 수만의 사물에 관한 시는 또 어디에 있는가. 개인의 무의미와 그 우연 속에 있는가.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지금 옳은가. 그도 아니라면, 시는 언어 속에 있는가. 이미지 속에 있는가. 시는 언어인가, 언어가 시의 도구인가. 이미지가 시의 도구인가.   시는 시집으로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한 권의 시집 속에 모든 시는 있는 것인가.   책 이야기가 나왔으니 장자의 우화 하나를 더 읽어보자.   장자 : …제나라의 환공이 堂上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윤편이 당하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다가, 몽치와 끌을 놓으며 말했다. 「묻겠습니다만, 전하께서 읽은 시는 건 무슨 말입니까?」환공이 대답했다.「성인의 말씀이지.」「성인이 살아계십니까?」환공이 대답했다.「벌써 돌아가셨다네.」「그럼 전하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군요」환공이 말했다.「내가 책을 읽고 있는데 바퀴 만드는 목수 따위가 어찌 시비를 건단 말이냐. 설명을 하면 괜찮되 그렇지 못하면 죽이겠다.」윤편은 대답했다. 「저는 제 일로 보건대 수레를 만들 때 너무 깎으면 헐거워서 튼튼하지 못하고 덜 깎으면 빡빡하여 들어가지 않습니다. 더 깎지도 덜 깎지도 않는다는 일은 손짐작으로 터득하여 마음으로 수긍할 뿐이지 입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 비결이 있는 것입니다만 제가 제 자식에게 깨우쳐 줄 수 없고 제 자식 역시 저에게서 이어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70인 이 나이에도 늘그막까지 수레바퀴를 깎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사람들의 찌꺼기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시집 속에도 시는 없다. 시집은 찌꺼기일 뿐이다. 그렇다면 시는 어디에도 없다,고 주장해야 한다. 이런 주장은 과연 옳은가.   이미 죽어버린 ‘죽음’ 속에도 시가 있을 리 없다. 결코 선택할 수 없는 출생 속에도 시가 있을 리 없다. 모두 창밖으로 흘러가는 안개를 몽롱한 눈으로 바라보며 커피 잔을 기울이지만, 안개 속에도 실은 시는 없다. 바이칼에 가려고 모두 가장 질긴 신발을 신지만, 바이칼에 가보라. 거기에 바이칼은 없다. 바이칼의 시는 더욱 없다.   그러면 이렇게 한 번 해보자. 중대한 문제들은 길거리에 존재한다,고 철학자 니체는 말했으니, 오늘 시도 거리에서 찾아보자, ―이때의 거리는 물론 비유로서 쓴 것이다. 삶터의 비유로서, 나아가 삶터에서 사는 법의 비유로서 당신은 이해하기 바란다. 생계라고 해도 되리라.―생계의 비유로서, 결국 ‘밥’ 속에서 찾아보자.   問) : 생계의 일과 시작의 관련성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생계의 일이 시작을 방해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答) : 밥 짓는 일과 시를 짓는 일은 썩 사이가 좋은 관계는 아닌 것 같습니다. 밥 짓는 일을 걱정하지 않을 정도가 되면 시 짓는 일이 하찮아 보이겠죠. 반면에 밥 짓는 일이 너무 고달프면 시 짓는 일을 할 시간을 벌기도 어렵고, 또 엄두가 나지 않죠. 둘은 불편한 관계이면서 팽팽한 긴장이 있을 때에야 그나마 사별이 없지요. (시인 ○○○)   答) : 보통 사람들처럼 땀 흘리며 구체적인 직업을 갖고 있어야 생활하는 사람의 보편적인 정서를 시에 담아낼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굳이 예를 하나 더 들자면 교수나 교사라는 직업에서는 큰 시인, 모든 규범을 뛰어넘는 그릇은 나오지 않는 것 같다. 시 편집자의 경우는 시건방진 시 비평가가 되기 쉽고. 그런데 이 자본제 사회에서 도대체 어느 직업이 시인에게 어울리겠는가. (시인 ○○○)   答) : 저는 소위 ‘전업 시인’이라 해서 반드시 좋은 시를 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노동과 시는 따로 노는 관계가 아니라 상관성이 매우 깊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흙에서 멀어진 연장에 녹이 슬듯 항구에 오래 머문 배가 낡아가듯 사유란 노동 속에서 빛나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발을 딛지 않은 사유란 관념과 추상으로 흐르기 십상입니다. 물론 지나치게 생계에 얽매이는 태도는 시작에 장애를 가져다줍니다. 시란 어느 정도의 마음과 몸의 여유에서 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적당한 직업이 시인에게 필요하다고 저는 여기고 있습니다. 가르치는 일에 지나치게 몰두했을 때는 시가 의무의 대상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시작에 치명적입니다. 출판사에서 교정보는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책에 대한 외경심이 사라지기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시인 ○○○)   答) : 전업시인으로 살기는 어려움. 생업(生業)과 시업(詩業) 사이의 갈등 자체가 시의 중요한 소재. (시인○○○)   答) : 시를 생각할 때 맨 처음 떠오르는 것은 ‘삶’입니다. 위의 질문에 맞춰보면 주제적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이 그렇듯 늘 사는 일에 목메고 치이다보니 자연스레 이 삶이 무엇일까, 지금 현재는 나의 미래에 무엇일까, 저 꽃은 저 작업복은, 저 손은, 저 눈은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어떤 삶의 겨움과 꿈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일까를 고심하게 됩니다. 한편 제가 살아 온 삶 역시 평탄치 않다보니 자연스레 기존의 질서 이외의 사회질서를 꿈꾸는 지향이 늘 제 몸에 제 언행에 따라 붙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무척이나 이념적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너무 잘 아시겠지만 그것이 시로 올 때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한 구절이 핵이 되기도 하고, 어떤 상징적 정조를 나타내는 단어 하나, 예를 들면 슬픔이라든가 고독이라든가, 해학이라든가, 상실감이라든가 하는 단어 하나가 시를 마칠 때까지 따라 붙습니다. 그 정서의 흐름이 압축적으로 잡혀 스스로 말하고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깁니다. …헌책방에 먼지 쌓여가는 책들 속에 있는 화석화된 맑스주의, 교조화 된 맑스주의, 전혀 불온하지 않은 맑스주의가 아니라, 노동시가 아닌 다른 불온한 노동시(이런 게 있을 법이나 할까?)를 써보는 것이 꿈입니다. 이 시는 그런 고민 속에 있는 나의 자세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대다수는 칼잠에 새우잠인데 어떤 이는 떡잠인 사회가 여전히 우리 사회라고 봤고, 아무리 노력해도 기회의 균등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우리 사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사회 안에서 자신의 해방을 가지기 위해서는 피치 못하게 ‘싸움’과 ‘갈등’이 불가피한 ‘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인 ○○○)   答) : 바쁜 일 속에서 시는 나온다고 생각한다. 시와 일 둘 중의 하나만 택하여야 한다면 시로 기울겠지만,시가 밥이 되질 않는다는 것을 안다. 나는 시와 밥 중에 밥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시는 나만 먹여 살린다.밥은 식구를 먹여 살린다. 시를 쓴다고 가족의 생계를 팽개칠 수는 없다. 적정한 자괴감이 시를 지탱하는 힘이지만 밥벌이가 없으면 나는 내 문장과 시를 팔아 밥을 구할 것이다. 그 지경의 자괴는 시를 파괴시킬 것이다.☏ 바쁜 일 속에서 시는 나온다고 생각한다. 시와 일 둘 중의 하나만 택하여야 한다면 시로 기울겠지만,시가 밥이 되질 않는다는 것을 안다. 나는 시와 밥 중에 밥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시는 나만 먹여 살린다.밥은 식구를 먹여 살린다. 시를 쓴다고 가족의 생계를 팽개칠 수는 없다. 적정한 자괴감이 시를 지탱하는 힘이지만 밥벌이가 없으면 나는 내 문장과 시를 팔아 밥을 구할 것이다. 그 지경의 자괴는 시를 파괴시킬 것이다. (시인 ○○○)   答) : 이십 대 후반을 저는 전업시인으로 살았습니다. 스무 장의 이력서가 아무 데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전업일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창작의 경우 크게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시인 ○○○)   答) : 저는 시를 어렵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시인보다 선생이 더 좋고 시를 안 쓰고 평화롭게 사는 한 인간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강가에 서 있는 나무처럼 말입니다. 저는 시를 쓰려고 힘을 쓴 적이 별로 없습니다. 살다가 보면 써지지요. 안 써진다고 걱정을 한 적도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교사와 시인도 한 길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시를 택할래, 교사를 택할래. 그러면 나는 둘 다 택하겠다고 우길 것입니다. (시인○○○)   答) : …건설현장에 있을 때는 매직으로 시멘트 포대에 메모를 많이 했습니다. (시인 ○○○)   答) : 지난 1998년 이후 ‘백수’입니다. 생계가 꼭 시작을 방해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저의 경우 직장을 그만 두고 난 뒤 확실히 작품에 몰두할 수 있었고, 따라서 더 많은 작품을 생산하게 된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반성하건데, 생계를 팽개친 작품 활동은 결코 자랑스러울 가치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시인 ○○○)   答) : 모든 글 쓰는 이들의 소망은 인세 받아 살면서 글만 쓰고 사는 게 아닐까요? 저만 그런가요? 그래서 늘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제 글만 쓰고 살면 좋겠다, 그럼 내가 정말 많은 것을 할 수 있겠다, 라고… 하지만 솔직히 생각해보면 과연 그럴까 라는 생각도 합니다. 노동(물론 글 쓰는 일도 노동입니다), 몸을 움직이고,사람들과의 관계를 만들고, 만원버스를 타고 흔들리며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하고, 직장 일이 힘들어 포장마차에서 쓰러지고… 그렇게 살아가는 일상은 너무 힘들지만 그것은 또한 아주 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천재가 아니고 그저 사람들과 섞여 살면서 그들과 부대끼는 일은 글쓰는 일 만큼이나 소중합니다.… (시인○○○)   그러니까 어디에도 없는 오늘의 시는 어디에나 있다. 당신이 삶터에서 땀을 닦고 있는 모든 시간에, 당신이 집에 오면서 들르게 되는 모든 길거리에, 모든 간판 속에, 모든 상황 속에, 당신이 만나는 사람들의 그 어떤 웃음 또는 눈물 속에도 시는 있다. 시는 언어이며 이미지이며, 줌렌즈이며 사물―사물에서 튀어나온 열개의 손가락이다. 시는 죽음에의 꿈속에 있으며, 시는 도달이 아니라 ‘도달’에의 꿈속에 있으며, 시는 ‘감’이 아니라 ‘감’에의 꿈속에 있다. 시는 어디에나 있다. 당신의 첫 연애 속에. 둘째 연애 속에…당신의 섹스 속에. 오늘의 시는 어디에나 있다. 나뭇잎의 입술 속에, 나뭇잎 입술의 꿈속에. 그 사이를 날아다니는 나비의 꿈속에. 시간의 꿈속에, 흩날리는 눈과 앉아있는 눈 속에, 눈(雪)의 눈(眼) 속에, 눈(雪)의 손등 위에. 바이칼이 아니라 바이칼에의 꿈속에. 역사가 아니라, 역사에의 꿈속에. 리얼리즘이 아니라 리얼리즘에의 모더니즘 적 꿈속에, 카프카 속에, 이상 속에. 어디에도 없는 시는 오늘 어디에나 있다. 맑스가 예나에게 보낸 시 속에, 맑스의 시적 혁명을 꿈꾸는 들뢰즈 속에. 시는 오늘 당신이 지나가야 하는 터널 속에도 있다. 터널의 검은 벽 속에. 검은 벽 위에서 번들거리는 등불의 눈물 속에. 터널로 빨려 들어가는 모든 헤드라이트의 공허한 진땀 속에.   늘 안달 하는 애인, 애인의 손가락을 감싸고 있는 보석반지, 그 눈부신 빛줄기 속에 시는 있다. 명품 핸드백이 흔드는 대리석의 욕망 속에 시는 있다. 오늘의 꽃은 향기가 없다. 꽃 파는 화훼공판장에 들러보라.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 한편에 수북이 쌓인 시든 잎들 때문이다. 시는 거기 썩는 향기 속에 있다. 래핑 갈매기의 푸른 날개 속에, 둥지를 밀물에게 내 주고 모래언덕으로 뛰어가는 그 부리 속에, 조개를 찾는 그 붉은 부리 속에. 죽어서도 빈 껍질을 다른 물고기의 집으로 선물하는 굴의 인자함 속에. 순환하는 선이 아니라 선의 꿈속에 정상이 아니라, 정상의 꿈속에. 바람에 눕는 풀의 꿈의 순간 속에, 풀의 그림자의 꿈의 순간 속에. 그 잎이 개구리에게 넓은 삶터를 제공하는 적도의 정글 속 브로멜리아드나무 속에, 일생에 한 번 피는 그 꽃잎의 분홍 뺨 속에, 벌이 올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는 그 꽃잎의 간절한 꿈속에. 살아 있는 것은 무엇이나 가지고 있으며 그것에 자기를 맞추는 리듬 속에, 빛의 리듬 속에, 바람의 리듬 속에, 썰물의 리듬 속에, 리듬의 꿈속에 외재성의 내재성에의 환상 속에 구겨진 일회용 컵 속에, 이제는 아무도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싸구려 시계 속의 , 시계의 꿈속에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베스비오스 화산, 그 속에, 화산의 꿈속에. 잠이 아니라, 잠의 꿈속에 옥상 위를 달리는 토끼가 질질 끌고 있는 초원의 꿈속에. 공간을 끊임없이 살해하는(하이네의 어법) 철도의 꿈속에 영원히 만나지 않지만 간이역에서 영원히 만나고 있는 평행의 철로 속에, 철로의 꿈속에 서울역 로비에 있는 에스컬레이터의 꿈속에   이런 질문도 해본다. :   問) : 시가 잘 써지지 않는 시기(dry period)의 경험이 있으신지? 그럴 땐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시는지?   答) : 전혀 다른 일 하기, 내 편에서도 시를 씻은 듯이 잊어주기. (시인 ○○○)   答) : 시가 한 줄도 안 써지는 고갈의 시기가 분명 있죠. 저한테는 그것이 자주 오고 오래 갑니다. 그렇다고 저는 그것 때문에 ‘타는 목마름’을 느끼거나 고통스러워하지는 않습니다. 시가 안 써지면 그냥 내비 둡니다.아마도 그런 가뭄의 시기에 저는 시 말고 딴 짓거리들을 저질렀던 것 같습니다. 밀교에 심취했다가 금방 싫증을 내고, 진흙을 주무르거나, 연극을 하거나, 선거운동에 빠지거나… 어떤 파멸적인 연애를 시도하거나… 그러나 이런 外道가 시적 고갈을 ‘극복’하는 길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습니다. 그저 시가 내 안에서 자라나도록 방기하고 그것이 필연성을 향해 발효할 때까지 가만 두는 것입니다…. (시인 ○○○)   고독에 대해서도 두어 시인에게 물어보았다.   答) : 나는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독을 단련시킨다. 고독은 시를 발전(發電)시키는 전기와도 같은 그 무엇이 아닐까요. (시인 ○○○)   答) : 뼈에 사무치는 외로움을 가져보지 못한 자는 좋은 시를 쓸 수 없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시인 ○○○)   그러면 나도 내 여섯 가지의 고독을 여기 천명해볼까. 어디에나 있는 시를 위하여, 아무도 읽기 원하지 않는, 그러나, 모든 이가 읽기를 원하는, 나를 위한 그의 시를 위하여,   1. 모든 관계의 긍정의 고독 2. 긍정의 고독 속에 있는 언어의 고독 3. 시의 거룩한 도구성으로서의 언어와 이미지의 고독 4. 존재의 순환 속에 있는 무한 시간의 고독 5. 외면에 버려지는 내면의 고독 6. 예언과 치유의 고독   할 수 없다. 쓰는 수밖에. ‘씀’이 고독 속에서 숙성되어, 범어사 대웅전 천정의 연꽃처럼 이미지의 꽃이 되기만을 우연이 되어 기다릴 뿐. 고독의 거리 속에서 다시 한 번 반복하자. 오늘 시는 어디에나 있다. 사상을 운율에 태우고(니체) 달릴 뿐인 거기에. 그저 달릴 뿐인 ‘모든 거기’에.           시창작을 위한 일곱가지 방법                         강은교 첫째, 장식없는 시를 써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 시적 공간만으로 전해지는 것, 그것이 시의 매력이다.  시를 쓸 때는 기성시인의 풍을 따르지 말고 남이 하지 않는 얘기를 하라.  주위의 모든 것은 소재가 될 수 있으며 시의 자료가 되는 느낌들을 많이 가지고 있게되면  시를 쓰는 어느날 그것이 튀어나온다. 하지만 시는  관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이 구체화되고 형상화되었을 때 시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묘사하는 연습을 많이 하라. 둘째, 시는 감상이 아니라 경험임을 기억하라 시는 경험의 밑바탕에 있는 단단한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때의 경험은 구체적 언어를 이끌어 내 준다.  단지 감상만 갖고서는 시가 될 수 없으며 좋은 시는 감상을 넘어서야 나올 수 있다.  시는 개인으로부터 시작했지만 개인을 넘어서야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감상적인 시만 계속해서 쓰면 '나'에 갇히게 된다.  그러므로 '나'를 넘어선 '나'의 시를 쓰라. 단, 시를 쓰는 일이란 끊임없이  누군가를 격려하는 일임도 기억해야 한다. 졸시 을 보라. 웅덩이 건너편 모래가  웅덩이 쪽 모래를 손짓하는 새  아침별이 저녁별을 손짓하는 새  햇빛 한 올이 제 동무 햇빛을 부르러 간 새 셋째, 시가 처음 당신에게 다가왔던 때를 돌아보고 자신을,  자신이 시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 '내가 정말로 시인이 될 수 있을까?'라고 의심하지 말고 신념을 갖고 시를 쓰라.  나의 시를 내가 믿지 않으면 누가 믿어 주겠으며 나의 시에 내가 감동하지 않으면 누가 감동해 주겠는가. 시가 어렵고 힘들게 느껴지는 순간엔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서 시가 처음 당신에게 다가왔던 때를 돌아보라.  문학 평론가 염무웅은 이렇게 충고한다.  '세상의 하고 많은 일들 중에 왜 하필 당신은 시를 쓰려고 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시를 쓰는가?'라고.  우리는 신념을 갖고 시를 쓰되 남이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써야 한다. 넷째, 시의 힘에 대하여 좋은 시에는 전율을 주는 힘이 있다.  미국의 자연사상가인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이렇게 말했다. ' 떠오르는 아침해를 보고 전율하지 않는 사람은 한물간 사람이다.  오래 살고 싶으면 일몰과 일출을 보는 습관을 가지라.'  그는 자연에서 생의 전율을 느끼라고 충고한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전율을 많이 주는 것은 무엇일까?  연애가 주는 스파크, 음악 등이 아니겠는가.  허나 살다가 보면 이 때의 전율도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시는 정신적으로 전율을 느껴야만 나올 수 있다.  그러므로 시를 쓰려면 전율할 줄 아는 힘을 가져야 한다.  표현과 기교는 차차로 연습할 수 있지만 감동과 전율은 연습할 수 없는 부분이다.  우리에게 감동이 혹은 전율이 스무살 때처럼 순수하게 올 수 있을까?  그 순수한 전율을 맛보기 위해서는 시인의 남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다섯째, 자유로운 정신(Nomade)에 대해서 원래 '노마드(Nomade)' 란 정착을 싫어하는 유목민에서 나온 말이다.  이말은 무정부 상태, 틀을 깬 상태, 즉 완전한 자유를 의미한다.  예술의 힘, 시의 힘은 바로 이 노마드의 힘이 아닐까?  우리의 정신은 이미 어떤 틀에 사로잡혀 있는 국화빵의 틀에 이미 찍혀 있는 상태다.  그러므로 우리는 틀을 깨는 연습부터 해야한다.  흔히 문학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 틀을 깨는 과정에서  술(알콜)의 힘을 빌어야 좋은 문장이 나온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술을 도구로 하여 얻어지는 상태가 과연 진짜 자유인가를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건 자유를 빙자한 다른 이름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술의 힘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어떤 이데올로기도 그려지 있지 않은 순백의 캔버스를 끄집어 내기 위해서만  술을 마셔야 하지 않을까. 여섯째, '낯설게 하기'와 '침묵의 기법'을 읽히자 우리는 상투 언어에서 벗어나 '낯설게 하기' 기법을 익혀야 한다.  상투의 틀에 붙잡히지 말고 끊임없이 새로운 정신으로 긴장을 살려나가자.  감상적인 시는 분위기로밖에 남지 않으며 '시 자체'와 '시적인 것'은 확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시적은 것은 시의 알맹이가 아니다.  시적인 것에만 너무 붙들려 있으면 시가 나오지 않는다.  우리의 시가 긴장하여 이데올로기의 자유를 성취하는 순간 깜짝 놀랄 구절이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에 사로잡히지 않는 자유정신을 지니자.  몸의 자유가 뭐 그리 중요한가? 또한 "침묵의 기술, 생략의 기술"도 익히자.  예를 들어 T.S. 엘리어트 의 황무지라는 시는 우리에게 침묵의 공간을 보여주고 있는 시다.  시와 유행가의 차이는 그것이 의미있는 침묵인가 아닌가의 차이이다.  시는 감상이 아니라 우리를 긴장시키는 힘이 있는 것인데,  만약 설명하려다 보면 감상의 넋두리로 떨어져 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침묵의 기술을 익혀야 한다.  보다 침묵하는 부분이 많을수록 그 시는 성공할 것이다. 말라르메는 말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이 짧은 두 행의 사이에는 시인 자신이 말로 설명 하지 않은  수많은 말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음이 보이는가?  그러나 침묵의 기술을 익히려면 많은 연습이 필요한 법.  우리는 많이 쓰고 또 그 만큼 많이 지워야 한다.  시를 쓸 때도 다른 모든 세상일처럼 피나는 연습이 필요하며  더욱이 말로 다 설명하지 않으면서 형상화하는데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일곱째, '소유'에 대한 시인의 마음가짐 시를 쓰고, 어느 정도의 성취를 맛보려면 약간의 결핍현상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매사 풍요한 상태에선 시가 나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긴 하겠지만 시인이 되려는 사람은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해선 안 되지 않을까? ■ 프로필 1945년 함남 흥원 출생, 연세대 영문과 및 동대학원 국문과 졸업  1968년 로 등단, 한국문학작가상, 현대문학상 등 수상  2001년 현재 동아대학교 한국어문학부 교수 ■ 작가 이야기 허무의 바다에서 돛을 올리는 시세계  시의 위의(威儀)가 여러모로 훼손되고 있는 이즈음, 강은교 시인이 우리에게 보내는 시편들은 작은 축복처럼 느껴진다. 피폐한 우리의 영혼을 따뜻하게 밝혀주는 작은 등불처럼, 시인은 오늘도 어디선가 "저 반짝이는 거품들 사이에서 물고기 한 마리를 건지듯 상황 하나를 건지기 위하여, 혹은 우리에게 우리를 알려주는 은유 하나를, 끝내는 당신의 삶을 쓰다듬을 수 있는 은유 하나를" 낚기 위해 허공의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워 놓고 있다.  이처럼 강은교의 시세계는 허무(허공)의 바다에서 돛을 올린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게 허무란 오랫동안 면벽좌선하여 터득한 선(禪)의 경지도 아니며, 이 세상을 다 살아본 노인들이 체득한 삶의 무상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현실의 삶의 다양한 무늬가 현상되기 이전의 자의식의 영도(零度)이자 '백지상태(tabula rasa)'이다. 촬영 이전의 순도(純度) 높은 필름인 것이다. 다시 말해 그에게 허무는, 김병익의 예리한 표현처럼, 의식이 순수한 결정으로 남을 때까지 모든 것을 분해, 제거함으로써 인식이 가능한 종말과의 해후(邂逅)다. 그럼으로써 오롯이 빛나는 자의식의 투명성! 다시 말해 삶의 허울과 허위를 대담하게 사상(捨象)시켰을 때 남는 절대적 '시원의 시원', 또는 "한 겹씩 벗겨지는 생사의/저 캄캄한 수 세기"('자전(自轉) 1') 속의 심연과도 같은 곳이다. 그의 시가 주술적인 이미지들과 비의적인 상상력, 그리고 유현한 상징들로 가득 차 있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예컨대 허무에 대한 다음과 같은 예언적인 설교로 보라: "길은 어디에도 있고/그러나/어느 곳에도 이르지 않는다."('길') 정주와 유목을 동시에 욕망 하는 길, 존재와 부재, 삶과 죽음을 한 몸에 지닌 존재론적 비애가 바로 길의 근원, 즉 허무의 본질이 아닌가. 이처럼 시인은, 신경림 시인이 갈파한 대로, 삶/죽음이나 현상/존재를 '등가적 동시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지금 이 순간 또 어디서 "탈주하지 않으면서 탈주하는 것, 끊임없이 기표를 살해하면서 기의를 얻으려고 하는 것, 아, 언어"()를 낚으려고 하는 걸까. 그가 조용미 시인이 상상 속에서 그린 "비가 쏟아져내리면 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정에서 푸덕이며 금과 옥의 소리를 낸다는 萬魚山"('萬魚山'), 다시 말해 물고기 등에 산이 솟아올라 있다는 그 신비의 물고기 한마리를 건져 올릴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류신/문학평론가)  강은교 시 모음 40편 ☆★☆★☆★☆★☆★☆★☆★☆★☆★☆★☆★☆★ 가을            강은교  기쁨을 따라갔네  작은 오두막이었네  슬픔과 둘이 살고 있었네  슬픔이 집을 비울 때는  기쁨이 집을 지킨다고 하였네  어느 하루  찬 바람 불던 날 살짝 가 보았네  작은 마당에는 붉은 감 매달린  나무 한 그루 서성서성 눈물을  줍고 있었고  뒤에 있던 산, 날개를 펴고 있었네  산이 말했네  어서 가보게, 그대의 집으로 ☆★☆★☆★☆★☆★☆★☆★☆★☆★☆★☆★☆★ 나무가 말하였네           강은교 나무가 말하였네 나의 이 껍질은 빗방울이 앉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햇빛이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구름이 앉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안개의 휘젓는 팔에 어쩌다 닿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당신이 기대게 하기 위해서 당신 옆 하늘의 푸르고 늘씬한 허리를 위해서 ☆★☆★☆★☆★☆★☆★☆★☆★☆★☆★☆★☆★ 내 만일            강은교 내 만일 폭풍이라면 저 길고 튼튼한 너머로 한번 보란 듯 불어볼 텐데... 그래서 그대 가슴에 닿아볼 텐데... 번쩍이는 벽돌쯤 슬쩍 넘어뜨리고 벽돌 위에 꽂혀 있는 쇠막대기쯤 눈 깜짝할 새 밀쳐내고 그래서 그대 가슴 깊숙이 내 숨결 불어넣을 텐데... 내 만일 안개라면 저 길고 튼튼한 벽 너머로 슬금슬금 슬금슬금 기어들어 대들보건 휘장이건 한번 맘껏 녹여볼 텐데... 그래서 그대 피에 내 피 맞대어볼 텐데... 내 만일 종소리라면 어디든 스며드는 봄날 햇빛이라면 저 벽 너머 때없이 빛소식 봄소식 건네주고 우리 하느님네 말씀도 전해줄 텐데... 그래서 그대 웃음 기어코 만나볼 텐데...  ☆★☆★☆★☆★☆★☆★☆★☆★☆★☆★☆★☆★ 너를 사랑한다          강은교 그땐 몰랐다  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  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게  그땐 그걸 몰랐다  신발들이 저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저 신발의 속 가슴을 보게  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  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그땐 몰랐다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꽃 속에 꽃이 있는 줄은 몰랐다  일몰의 새 떼들, 일출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줄을 몰랐다  꽃 밖에 꽃이 있는 줄 알았다  일출의 눈초리는 일몰의 눈초리를 흘기고 있는 줄 알았다  시계 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  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  너를 사랑한다 ☆★☆★☆★☆★☆★☆★☆★☆★☆★☆★☆★☆★ 동백            강은교 만약 내가 네게로 가서 문 두드리면 내 몸에 숨은 봉우리 전부로 흐느끼면 또는 어느 날 꿈 끝에 네가 내게로 와서 마른 이 살을 비추고 활활 우리 피어나면 끝나기 전에 아, 모두 잠이기 전에 ☆★☆★☆★☆★☆★☆★☆★☆★☆★☆★☆★☆★ 별          강은교 새벽 하늘에 혼자 빛나는 별 홀로 뭍을 물고 있는 별 너의 가지들을 잘라 버려라 너의 잎을 잘라 버려라 저 섬의 등불들, 오늘도 검은 구름의 허리에  꼬옥 매달려 있구나 별 하나 지상에 내려서서 자기의 뿌리를 걷지 않는다 ☆★☆★☆★☆★☆★☆★☆★☆★☆★☆★☆★☆★ 사랑법        강은교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있는 누워있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뒤에 있다. ☆★☆★☆★☆★☆★☆★☆★☆★☆★☆★☆★☆★ 서시            강은교 이제 눈뜨게 하십시오 눈떠 저희의 손과 발 바람 속에 흔들게 하십시오. 수천킬로미터의 들판을 지나 들판에 겹겹이 앉아 있는 노을들과 굽이치는 죽음을 지나 당신이시여 검붉은 피 여직 흐르는 슬픈 가슴이시여 여기엔 머뭇거리는 길뿐이오니 여기엔 눈먼 안개와 허우적이는 그림자들뿐이오니 아,이제 일어서게 하십시오. 일어서 당신의 깊은 가슴 속 저희가 헤엄치게 하십시오 저희의 피가 수평선을 이루고 저희의 흐느낌이 함께함께 출렁이게 하십시오 ☆★☆★☆★☆★☆★☆★☆★☆★☆★☆★☆★☆★ 수평선           강은교  이제는 돌아갑시다 돌아가 깊이깊이 어둠에 얼굴을 담급시다 수만 주름살 가만가만 몸 흔드는 바닷가 철없이 나와 앉은 피안의 등불들 거품으로 거두고 큰 소리 한 번 외쳐 봅시다 부서지는 것은 파도만은 아니리 부서지면서 온전한 것 또한 바다만은 아니리 ☆★☆★☆★☆★☆★☆★☆★☆★☆★☆★☆★☆★ 순례자(巡禮者)의 잠            강은교 바람은 늘 떠나고 있네. 잘 빗질된 무기(無機)의 구름떼를 이끌면서 남은 살결은 꽃물든 마차에 싣고 집 앞 벌판에 무성한 내 그림자도 거두며 가네. 비폭력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죽은 아침 싸움이 끝난 사람들의 어깨 위로 하루낮만 내리는 비 낙과(落果)처럼 지구는 숲 너머 출렁이고 오래 닦인 초침 하나가 궁륭(穹隆) 밖으로 장미가시를 끌고 떨어진다. 들여다보면 안개 속을 문은 어디서 열리고 있는가. 생전에 박아두었던 곤한 하늘 뿌리를 뽑아들고 폐허의 햇빛 아래 전신을 말리고 있는 눈먼 얼굴들이여 떨어지는 것들이 쌓여서 잠이 들면 이제 알았으리, 바람 속에서 사람의 손톱은 낡고 집은 자주 가벼워지는 것을 위대한 비폭력자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가는 아침 돌아옴이 없이 늘 날으는 바람에 실려 내 밟던 흙은 저기 지중해쯤에서 또 어떤 꽃의 목숨을 빚고 있네.  ☆★☆★☆★☆★☆★☆★☆★☆★☆★☆★☆★☆★ 숲        강은교 나무 하나가 흔들린다 나무 하나가 흔들리면 나무 둘도 흔들린다 나무 둘이 흔들리면 나무 셋도 흔들린다    이렇게 이렇게   나무 하나의 꿈은 나무 둘의 꿈 나무 둘의 꿈은 나무 셋의 꿈   나무 하나가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둘도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셋도 고개를 젓는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이 나무들이 흔들리고 고개를 젓는다   이렇게 이렇게 함께 ☆★☆★☆★☆★☆★☆★☆★☆★☆★☆★☆★☆★ 우리가 물이 되어                                      강은교님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에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를 말하면서 올 대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 이유             강은교 오늘 아침 그 간판이 떠지지 않는 눈 비비며 미소하는 이유는 그래서 거기 내리는 안개가 세상을 허옇게 칠하며 일어서는 이유는 그래서 바람 한 줌이 바위들의 어깨 위에 냉큼 올라앉는 이유는 그래서 이슬 한 방울이 부지런히 산을 오르는 이유는 부지런히 산을 오르며 모든 풀잎의 뺨을 쓰다듬는 이유는 모든 풀잎의 뺨 위에서 또로로록 빗방울과 손을 잡는 이유는 조만간 황금빛 햇님이 긴 치마를 펄럭이며 들어설 것이기 때문이다.  ☆★☆★☆★☆★☆★☆★☆★☆★☆★☆★☆★☆★ 일어서라 풀아          강은교 일어서라 풀아  일어서라 풀아  땅 위 거름이란 거름 다 모아  구름송이 하늘 구름송이들 다 끌어들여  끈질긴 뿌리로 긁힌 얼굴로  빛나라 너희 터지는 목청 어영차  천지에 뿌려라 이제 부는 바람들  전부 너희 숨소리 지나온 것  이제 꾸는 꿈들 전부 너희 몸에 맺혀 있던 것 저 바다 집채 파도도 너희 이파리 스쳐왔다 너희 그림자 만지며 왔다 일어서라 풀아  일어서라 풀아 이 세상 숨소리 빗물로 쏟아지면 빗물 마시고 흰 눈으로 펑펑 퍼부으면  가슴 한아름 쓰러지는 풀아  영차 어영차 빛나라 너희  죽은 듯 엎드려 실눈 뜨고 있는 것들.  ☆★☆★☆★☆★☆★☆★☆★☆★☆★☆★☆★☆★ 자전(自轉)            강은교  날이 저문다.  먼 곳에서 빈 뜰이 넘어진다.  무한천공(無限天空) 바람 겹겹이  사람은 혼자 펄럭이고  조금씩 파도치는 거리의 집들  끝까지 남아 있는 햇빛 하나가  어딜까 어딜까 도시를 끌고 간다.  날이 저문다.  날마다 우리나라에  아름다운 여자들은 떨어져 쌓인다.  잠 속에서도 빨리빨리 걸으며  침상 밖으로 흩어지는  모래는 끝없고  한 겹씩 벗겨지는 생사의  저 캄캄한 수세기(數世紀)를 향하여  아무도 자기의 살을 감출 수는 없다.  집이 흐느낀다.  날이 저문다.  바람에 갇혀  일평생이 낙과(落果)처럼 흔들린다.  높은 지붕마다 남몰래  하늘의 넓은 시계소리를 걸어 놓으며  광야에 쌓이는  아, 아름다운 모래의 여자들  부서지면서 우리는  가장 긴 그림자를 뒤에 남겼다.  ☆★☆★☆★☆★☆★☆★☆★☆★☆★☆★☆★☆★ 풀잎     강은교 아주 뒷날 부는 바람을  나는 알고 있어요 아주 뒷날 눈비가 어느 집 창틀을 넘나드는 지도 늦도록 잠이 안 와 살(肉) 밖으로 나가 앉는 날이면 어쩌면 그렇게도 어김없이 울며 떠나는 당신들이 보여요 누런 베수건 거머쥐고 닦아도 닦아도 지지 않는 피(血)를 닦으며 아, 하루나 이틀 해 저문 하늘을 우러르다 가네요 알 수 있어요, 우린 땅 속에 다시 눕지 않아도 ☆★☆★☆★☆★☆★☆★☆★☆★☆★☆★☆★☆★ 23층의 햇빛         강은교 지금 막 심장에 도착했어  뼈 하나를 지났다구  간을 지나  콩팥을 지나  갈거야, 너의 피로  그림자가 오면 그림자를 기대게 하면서  눈물이 오면 눈물을 기대게 하면서  바람이 오면 바람을 기대게 하면서  햇빛의 금빛 손가락 끝에서 그림자들이 일제히 일어선다  새까만 그림자의 손톱들이 차가운 벽의 가슴을 어루만진다  갈거야, 너의 핏 속으로  별이 오면 별을 기대게 하면서.  ☆★☆★☆★☆★☆★☆★☆★☆★☆★☆★☆★☆★ 가는 곳           강은교 달이 뜬다,  산 너머 칡 밭에는  떨어진 눈썹 몇 개  살 몇 점  홀로 채비를 서둔다.  가다가 더러 귀신 만나면  가는 곳 잊지 말고 물어두게.  ☆★☆★☆★☆★☆★☆★☆★☆★☆★☆★☆★☆★ 가을의 書        강은교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여자를  보아라  종이처럼 그 여자 오늘 구겨짐을  보아라  구겨지며 늘 비 흐름을  비 흐르며 그 여자 길 밖으로 떠나감을  보아라  모든 길 밖에 흐르는 길동무들을  보아라  언제나 싸우고 있는 길의 밤꿈을  보아라  정오엔 많은 바람으로 펄럭이다가  사라지는 그 여자의 꿈속  모든 가을길은 멀어서  마지막엔 그대도 보이지 않는걸  보아라  ☆★☆★☆★☆★☆★☆★☆★☆★☆★☆★☆★☆★ 감자          강은교 감자여  거기 검은 비닐의 홑이불을 제치고  두 개의 굵은 뿌리와  백서른다섯 개의 실뿌리를 공중을 향하여 굽이치고 있는 너  온몸을 쭈글쭈글하게 하면서  금빛 욕망을 지구에 접속시키고 있는 너  네 눈물의 소금기가  베란다를 적시고  엘리베이터를 적시고  아파트 정문으로 흘러내린다  모든 향수와  모든 부재와  모든 유토피아  어쩔 수 없구나  일으켜 세우라  눈물이여,  거기 두 개의 굵은 뿌리와  백서른다섯 개의 실뿌리를 지구를 향하여 굽이치고 있는 너  ☆★☆★☆★☆★☆★☆★☆★☆★☆★☆★☆★☆★ 거리 시(詩)        강은교 컴컴한 하늘을 등에 지고 서 있는 그 여자를 보십시오.  쉴 새 없이 외치는 그 여자의 붉은 칠한 입술을 보십시오.  그 여자의 입술이 흔들릴 때마다  몸 흔들며 달리는 찬바람을 보십시오.  번쩍이는 불빛들을 지나서  바람에 문들이 가득 덜컹거리는  골목과 골목을 탐욕스럽게 핥으며  천지에 누운 먼지들  낮은 리어카 위에 쌓는 것을 보십시오.  "오리지날 골덴니트가 싸요, 싸―."  붉은 칠한 입술 속으로  세계의 흙들이 흐르고 있음을 보십시오.  아직도 어둠은 빛의 어머니임을 보십시오.  길을 삼키는 끝없는 길을 보십시오.  꿈을 삼키는 끝없는 꿈을 보십시오.  찬바람에 떠는 그 여자의 두 손이  무덤의 풀처럼 파아랗게  밤하늘의 별을 가리키는 것을 보십시오.  흐르는 무덤들이 이 저녁 거리  흔들림도 없이 지구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십시오.  캄캄한 하늘을 등에 지고 서 있는 그 여자  어둠이 빛인 그 여자.  ☆★☆★☆★☆★☆★☆★☆★☆★☆★☆★☆★☆★ 고독       강은교 잠자리한 마리가 웅덩이에 빠졌네  쭈글쭈글한 하늘이 비치고 있었네  서성대는 구름 한 장  잠자리를 덮어주었네  잠자리 두 마리가 웅덩이에 빠졌네  쭈글쭈글한 하늘이 비치고 있었네  서성대는 구름 한 장, 구름 곁 바람이  잠자리를 덮어주었네  잠자리 한 마리가 울기 시작했네  잠자리 두 마리도 울기 시작했네  놀란 웅덩이도 잠자리를 안고 울기 시작했네  눈물은 흐르고 흘러  너의 웅덩이 속으로 흐르고 흘러  너를 사랑한다.  ☆★☆★☆★☆★☆★☆★☆★☆★☆★☆★☆★☆★ 그 나무에 부치는 노래          강은교 그 나무 지금도 거기 있을까  그 나무 지금도 거기 서서  찬 비 내리면 찬 비  큰 바람 불면 큰 바람  그리 맞고 있을까  맞다가 제일 떨어내고 있을까  저녁이 어두워진다 문득 길이 켜진다  ☆★☆★☆★☆★☆★☆★☆★☆★☆★☆★☆★☆★ 그 여자 1        강은교 아침이면 머리에  바다를 이고 오는 그 여자.  생굴이요 생굴!  햇빛처럼 외치는 그 여자  바람 한 점 없어도  일렁이는 주름 그 여자.  손등엔 가득  먹구름 울고 우는그 여자.  비 언제 올지 몰라…  비 언제 올지 몰라…  늘 파도치는 든든한  엉덩이 그 여자.  어둠보다 빨리  새보다 가벼이  해님하고 같이 걷는  예쁜 예쁜 그 여자.  ☆★☆★☆★☆★☆★☆★☆★☆★☆★☆★☆★☆★ 그대의 들        강은교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로 시작하는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하네  하찮은 것들의 피비린내여  하찮은 것들의 위대함이여 평화여  밥알을 흘리곤  밥알을 하나씩 줍듯이  먼지를 흘리곤  먼지를 하나씩 줍듯이  핏방울 하나 하나  그대의 들에선  조심히 주워야 하네  파리처럼 죽는 자에게 영광 있기를!  민들레처럼 시드는 자에게 평화 있기를!  그리고 중얼거려야 하네  사랑에 가득 차서  그대의 들에 울려야 하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대신  모래야 우리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대신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라고  세계의 몸부림들은 얼마나 얼마나 작으냐, 라고.  ☆★☆★☆★☆★☆★☆★☆★☆★☆★☆★☆★☆★ 꽃    강은교 지상의 모든  피는 꽃들과  지상의 모든  지는 꽃들과  지상의 모든  보이는 길과  지상의 모든  보이지 않는  길들에게  말해다오  나, 아직 별 위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 낙동강의 바람         강은교 그대 있는 곳을  나는 아네.  그러게 이리 정신없이  몸 흔드는 게 아닌가.  그대 잠들지 않는 이유를  나는 아네.  그러게 이리 한많은 소리로  뼈 부서지는 게 아닌가.  살이 살을 뜯는 거리에서  울음떼 무성한 언덕쯤에서  출렁임이 또 한 출렁임 낳아  돌아가지 못하는 것들이여.  오늘은 돌아가지 못하는 것들끼리  저무는 해를 만지고 있는데  그대 가는 곳을  나는 아네.  얼었다 녹으며  녹았다 얼며  이 구름 밑  살지 못해 죽는 그대  오, 죽지 못해 사는 그대.  ☆★☆★☆★☆★☆★☆★☆★☆★☆★☆★☆★☆★ 눈발         강은교 외롭지 않아요. 우린  함께 함께 내려가요. 우린  머리칼 죄 뜯긴 나무 위에 풀 위에  몸살 앓는 잔돌 위에 산등성이 위에  쇠꼬챙이 담벼락 위에  비둘기 날개 위에  안녕 안녕, 돌아서는 사람들 솟은 어깨 위에  납작 누운 불경기 지붕 위에  호텔 보드라운 창틀 위에  취기 오른 불빛 위에  그리고 미사 위에  언제나 언제나 홀로 서 있는 십자가 위에  끝내는 눈물이 되어  눈물이 되어 온 땅  질퍽질퍽 흐느끼게 해요  함께 함께 흐느끼게 해요.  ☆★☆★☆★☆★☆★☆★☆★☆★☆★☆★☆★☆★ 돌아        강은교 너 아직 거기 있느냐  사월에 던진 돌아,  꽃샘바람 몹시도 불어 가는  길모퉁이  연탄재며 밥 찌꺼기  혹은 목 떨어진 개나리꽃 새  꾸부정하게 끼어 앉아  깨진 머리로 빛나는 돌아  으스름 무렵이면  한 잎 가득 피 베어문 하늘이  네 얼굴처럼 달려온다.  날이라도 궂어  출출출 비 내리쏟는 날에는  험집투성이 우리 가슴결엔  화들짝 살아오는 숨소리, 고함소리  난장판으로 강물이 흐르고  뒷산 허리에선  우르르 우르르  우뢰 몸서리 요란했다.  아직 거기 있느냐 너  사월에 던진 돌아,  개나리 활활 일어설 때를 기다려  아, 그 꽃잎 꽃잎에 상채기 흠씬  문댈 때를 기다려  일년이고 십년이고  수유리 한구석  차마 못 떠나는 돌아  네가 못 떠나는 이 땅에  올해도 사월은 가지만  우리는 영영 남아 있다 그 사월에.  ☆★☆★☆★☆★☆★☆★☆★☆★☆★☆★☆★☆★ 등불과 바람        강은교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  등불 하나는 내 속으로 걸어 들어와  환한 산 하나가 되네  등불 둘이 걸어오네  등불 둘은 내 속으로 걸어 들어와  환한 바다 하나가 되네  모든 그림자를 쓰러뜨리고 가는 바람 한 줄기  ☆★☆★☆★☆★☆★☆★☆★☆★☆★☆★☆★☆★ 모래가 바위에게            강은교 우리는 언제나 젖어 있다네.  어둠과 거품과 슬픔으로  하염없는 빛 하염없는 기쁨으로  모든 세포와 세포의 사잇길을 지나  폭풍의 날개 속으로 스며든다네.  한낮에도 가만가만 스며든다네.  길 막히면 길 만든다네.  바람 막히면 바람 부른다네.  세계의 수억 싸움 속에  세계의 수억 죽음 속에  낮은 지붕 위란 지붕 위  썩은 살이란 살 위  넘치고 넘쳐서  우리는 꿈을 꾼다네.  금빛 바위가 되는 꿈을 꾼다네.  ☆★☆★☆★☆★☆★☆★☆★☆★☆★☆★☆★☆★ 무엇이라고 쓸까          강은교 무엇이라고 쓸까  이 시대 이 어둠 이 안개  줄줄 흐르는  흘러야 속이 시원한  이 불면(不眠).  무엇이라고 쓸까  자유롭기를  기쁘기를  시간은 즐거이 가기를  그리고  그대를 기다리길.  무엇이라고 쓸까  어둠 속에서 어둠이 보이지 않는데  빛이 빛을 덮어  눈물이 눈물을 덮어  죽음이 죽음을 덮는데.  무엇이라고 쓸까  친구야 일어서라  어둠이여 밝아라  죽음이여 저리 가라.  정말 무엇이라고 쓸까  아무도 없는데  저 혼자 문이 열렸다 닫힌다.  ☆★☆★☆★☆★☆★☆★☆★☆★☆★☆★☆★☆★ 물방울의 시        강은교 펄럭이네요.  한 빛은 어둠에 안겨  한 어둠은 빛에 안겨  지붕 위에서 지붕이  풀 아래서 풀이  일어서네요, 결코  잠들지 않네요.  달리네요.  한 물방울은 먼 강물에 누워  한 강물은 먼 바다에 누워  거품으로 만나 거품으로  어울려 저흰  잊지 못하네요.  이윽고 열리는 곳  바람은 구름 사이 문 사이로 불고  말없이 한 별  허공에 일어나  부르네요.  눈뜨라 오 눈뜨라  형제여.  ☆★☆★☆★☆★☆★☆★☆★☆★☆★☆★☆★☆★ 물에 뜨는 법        강은교 힘을 빼야 하네  어깨에서 어깨 힘을  발목에서 발목힘을  그런 다음  헐거워진 그대 온몸  곧게곧게 펴야 하네  그대 어깨에서  키 큰 수평선들 달려나오고  그대 발목에서  꽃 핀 섬들 달려 나와  황금빛 지느러미  훨 훨 훨 훨  흔들 때까지  예컨대  길이 길의 옷을 입을 때까지.  ☆★☆★☆★☆★☆★☆★☆★☆★☆★☆★☆★☆★ 배추들에게           강은교 비 내리는 장터에 모여앉은  너희들을 본다.  옹기종기 쓰레기더미 위에 엎딘  너희들을 본다.  비바람에 푸른 살 찢기우고  목숨 꽂은 언 땅에서도 쫓겨나  탐욕의 비늘 낀 손 기다리는  아아 너희들  동강난 뿌리.  너희들은 울고 있다.  파도 빛 이파리 허공에 악물어  펄럭펄럭 왼 동리에  눈물 섞어 휘날리며  허리춤엔 낙동강 흙내를  가슴께엔 두만강 솔바람을.  모가지여  이 비탈에도 눈이 오면  한 무더기씩 두 무더기씩  없는 피 쏟아 내릴  모가지여  머리엔 흰눈이 내려  흰눈 펄펄펄 엎어져  천지에 흐느낌 괴는 지금은  어스름 저녁, 잔별도 돋지 않는.  ☆★☆★☆★☆★☆★☆★☆★☆★☆★☆★☆★☆★ 봄      강은교 노오란 아기 고무신 한 켤레  한길 가운데 떨어져 있네  참 이상도 하지  자동차 바퀴들이 떠들며 달려오다  멈칫 비켜서네  쓰레기터 옆 버스정류소에는  먼지 뽀얗게 뒤집어쓴 개나리 꽃망울  터질락 말락 하고 있는데  '그으대에여어 사아아랑의 미이로오여'  버스에서 내린 한 사람  구르는 돌 하나 냅다 차 던지니  한길 속 거기에 가 서네  참 이상도 하지  햇볕에 젖은  노오란 아기 고무신  누군가 벗어놓은 살처럼 얌전히 꼼틀대는  봄의 깊은 뼈.  ☆★☆★☆★☆★☆★☆★☆★☆★☆★☆★☆★☆★ 붉은 해     강은교 여기서 해는 서산으로 지는데  붉은 해 등진 큰 벌에서  바리바리 피를 모으던 어머니  좋은 날 좋은 시를 가렸지만  부끄러워라 우리 살은  한 대접 냉수에도 쉬이 풀리는  소금이라 하더이다.  ☆★☆★☆★☆★☆★☆★☆★☆★☆★☆★☆★☆★ 비        강은교 부르는 것들이 많아라  부르며 몸부림치는 것들이 많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이 오는 날  눈물 하나 떨어지니  후둑후둑 빗방울로 열 눈물 떨어져라  길 가득히 흐르는 사람들  갈대들처럼 서로서로 부르며  젖은 저희 입술 한 어둠에 부비는 것 보았느냐  아아 황홀하여라  길마다 출렁이는 잡풀들 푸른 뿌리.  ☆★☆★☆★☆★☆★☆★☆★☆★☆★☆★☆★☆★ 연애                강은교                                                그대가 밖으로 나가네 등불 하나를 켜네 뒤에서 빗방울이 달려오네 그대를 따라 깊어진 어둠도 밖으로 나가네 문에는 든든한 네 개의 열쇠를 채우고 늙어오는 길과 늙어 있는 길을 지나 그대가 밖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네 등불 둘을 켜네 뒤에서 빗방울이 달려오네 이 다정한 뭍의 死者들 자정엔 헛소리를 꺼내 드는 아, 이 바닥없는 뭇 잠의 추억들 그대가 밖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네 등불 셋을 켜네 뒤에서 빗방울이 달려오네 그대가 돌아오지 않네  ☆★☆★☆★☆★☆★☆★☆★☆★☆★☆★☆★☆★ 아주 오래된 이야기                                               강은교 무엇인가 창문을 두드린다 놀라서 소리나는 쪽을 바라본다 빗방울 하나가 서 있다가 쪼르르 떨어져 내린다 우리는 언제나 두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이 창이든, 어둠이든 또는 별이든 ☆★☆★☆★☆★☆★☆★☆★☆★☆★☆★☆★☆★    
354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김종길 - 성탄제 댓글:  조회:3256  추천:0  2015-12-20
성탄제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山茱萸) 열매 ―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늘한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 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聖誕祭)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山茱萸)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血液)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김종길(1969)     (1) 주제 :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사랑.            순수한 사랑에 대한 그리움과 그 계승의 참뜻 (2) 시간적 추이 과정에 따라 전개, 공간의 이동     1∼ 5연의 유년 시절의 체험 (시골, 고향)     6∼10연의 어른이 된 화자의 체험 (도시, 타향) (3) 과거와 현재 모두 시간적 배경은 성탄제 가까운 밤 (4) 색채 대비 : 흰 눈 붉은 산수유, 바알간 숯불, 상기한 볼,                             내 혈액 (5) 성탄제- 예수탄생축제로서의 의미가 아닌, 한국의 전통적·복고적 정서로 전이되어 인간의 보편적인 사랑(성탄제의 본질적 의미)의 정점을 보여 주는 한편, 그 분위기에 싸여 가족간의 사랑을 한 차원 상승시켜 주는 매개 (6) 붉은 산수유 열매 - 아버지의 사랑.           설날 아침에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險難)하고 각박(刻薄)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김종길(1969)   (1) 주제 : 새해를 맞는 마음가짐 (2) 김종길(1926~  )경북 안동 출생. 영미 주지주의(主知主義)의 영향을 받아 감상이나 감정을 억제하고 사물의 선명한 이미지의 조형에 주력한다. 절제와 극기의 태도는 그의 시적 감수성 속에 한시(漢詩)적이고 유가(儒家)적인 전통이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집 등. 육사 기념 사업회운영   (3) 성격-주지적, 희망적 (4) 평범한 시어와 간결하고 압축된 표현으로 건강한 삶의 자세를 표출 (5) ㉠ - 새해를 맞는 자세를 총괄적으로 보여줌     ㉡ - 화자의 인생관 (삶에 대해 긍정적, 희망적)     ㉢ - 성장의 기쁨과 반가움          잇몸을 뚫고 나오는 어려움과 같은 삶의 고통을 착함과 슬기로써 이겨내고 기쁨과 반가움을 맛보자는 것. 건강하고 바른 인생관에서 표출함을 보여줌       추천해요0 김종길의 시재는 일상생활의 주변에서 얻어지며, 김종길(金宗吉)  예술가명 : 김종길(金宗吉)    생몰년도 : 1926년~    전공 : 시   김종길의 시재는 일상생활의 주변에서 얻어지며, 열띤 감정이나 감상 또는 혼돈 속에 젖지 않는 것이 시풍을 이룬다. 따라서 언어가 매우 지적이며 절도 있고 간결하다. 그의 시는 영미주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감정이나 감성을 억제하고 사물의 선명한 이미지의 조형에 주력한다. 이런 의미에서 김종길은 뛰어난 모더니스트 중의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명징한 이미지는 그의 시가 지닌 제일의 특성이다. 그러나 다른 이미지스트들과는 달리 김종길의 시는 고전적인 품격을 제공한다. 그의 시가 갖는 미덕은 탁월한 상상력으로 빚은 이미지의 명징성과 고전적 품격에서 비롯되는 정신적 엄결성의 우아한 조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과작(寡作)의 시인인데, 그의 시는 시인의 엄결적 태도를 반영하듯 높은 완성도와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그의 시가 보여주는 예민한 이미지스트로서의 감각과 유가적 정신성의 조화는 한국 현대시가 가지는 득의의 부분이라 할 것이다. 그의 시론 또한 고전적 안정성과 균형감각을 지니고 있어 학문적 성과를 뚜렷하게 하고 있다. - 참고: , 권영민 편, 누리미디어, 2002  , 국어국문학편찬위원회 편, 한국사전연구사, 1995         생애     경북 안동에서 출생한 김종길은 1947년 혜화전문학교 국문과를 졸업, 고려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 다시 동국대학 대학원을 거쳐 영국 에필드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4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이 입선하고 1955년 에 시 를 발표해 등단했다. 그 후 시 , , 등을 발표했고, 평론 , , , , , 등을 발표했다. 1970년에는 국제펜대회에 참가했고, 세계시인대회 개조연설, 아세아시인대회 주제발표, 1996년 동경 아세아태평양펜대회 주제발표를 맡는 등 다양한 문단 활동도 하고 있다.      약력   1926년 경북 안동 출생 194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입선 / 고려대 문과대학 영문과 편입 1950년 고려대 영문과 졸업, 동 대학원 입학 1952년 대구공업고등학교 교사 / 경북대 사범대학 강사 1954년 경북대 문리과대학 전임강사 1956년 청구대 조교수 1958년 고려대 영문과 조교수 부임 1974년 고려대 중앙도서관 학장 1979년 고려대 문과대학 학장 1988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피선 1992년 고려대 명예교수 1993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상훈   1978년 목월문학상 1992년 국민훈장동백장 1996년 인촌상 1998년 은관문화훈장 2000년 대한민국예술원상         저서       [하회에서(민음사,1977)] • 시집 (1969) (1977) (1986)  (1997) • 평론집 (1965) (1973) (1986)  (1986) (1986) • 수필집 (1986)         작품세계        작가의 말   (……) 요즘 우리 시가 전반적으로 저조해 보이는 근본적인 원인은 앞에서 말한 시에 대한 관념에 혼란이 일어났거나 그렇지 않으면 시에 대한 종래의 관념을 무시한 데에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물론 시에 대한 관념은 확연하게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변화와 확대를 거듭하는 유동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그 관념이 때에 따라 전혀 다른 것도 아니다. 예부터 내려오는 시라는 것의 원형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시에 대한 관념에는 변하는 부분과 변하지 않는 부분이 있고 그것에 혼란이 일어나거나 그것을 무시한다는 것은 그것의 변하지 않는 부분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시의 위의(威儀)’를 회복하는 길은 먼저 시의 원형, 즉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 말은 옛날의 시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시이면서도 시 본래의 모습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일견 모순되는 말같이 들릴지 모르나 그때그때의 좋은 시란 다 그러한 시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의미 있는 시를 쓰려는 시인들은 이 이치를 체득하고 실천할 줄 알아야 한다. 새삼스럽게 ‘시의 위의’가 문제되는 것은 그렇지 못한 시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 ‘평범한 이야기’, 김종길, , 민음사, 1997   [시 친필 전문]      평론   무슨 말을 할 것이냐 하는 것은 때로 무슨 말을 하지 말 것이냐 하는 것에 의해서 결정되기도 한다. 한 사람의 사람됨은 그가 한 소리에 못지않게 그가 하지 않은 말에 의해서 정의될 수가 있다. 김종길 씨처럼 수다를 멀리하고 과묵의 미덕을 낱낱의 시편이나 시작의 전과정에서 엄격하게 실천해온 시인의 경우, 우리는 시인이 노래하지 않은 것으로써 시인에게 접근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30년 시력의 소산인 시선 를 읽으면서 우리는 한마디의 군소리도 낭비하지 않은 야무진 언어경제에 놀라게 되는 한편, 40편의 시편들이 그 제작시기에 관계없이 공유하고 있는 균질성에 주목하게 된다. 이 균질성의 바탕이 되어주고 있는 것은 감정의 적절한 억제, 정갈한 말씨와 정밀한 시경, 성숙한 관점, 행간 속에 묻어둔 여백의 미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균질성이 흔히들 한 세대의 완성으로 셈하는 오랜 시간을 넘어서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놀라움은 커지는 것이다.  앞에서 규정해본 이 균질성을 시인이 노래하지 않은 것에 의해서 음화적으로 파악해본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그것을 젊음의 부재라는 측면에서 접근해갈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면 김종길 씨의 시인으로서의 특징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음화적으로 접근하여 청춘의 부재라고 규정해본 성질을 바꾸어 말해본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한마디로 점잖음이 될 것이다. 이 말의 어원적인 의미까지로 포함해서 점잖음은 를 정의할 수 있는 한마디 말로서는 가장 적합한 말이 될 것이다.     우리 현대 시사에서 김종길은 가장 뛰어난 이미지스트 중의 한 사람이다. 명징한 이미지는 그의 시가 지닌 제일의 특성이다. 그러나 다른 이미지스트들의 시가 대개 경박한 모더니티를 보여주고 있는 반면에 김종길의 시는 고전적인 품격을 보여준다. 김종길 시의 의의와 미덕은 탁월한 상상력으로 빚은 이미지의 명징성과 고전적 품격에서 비롯되는 정신적 엄결성의 우아한 조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김종길은 ‘이미지는 보통의 언어로는 나타내기 힘든 사물의 성질에 차이를 나타냄으로써 시의 언어를 정확한 것으로 만들’며, ‘시가 특히 지적인 느낌을 줄 때는 대개 견실한 시적 사고가 주로 이미저리를 통하여 전개되었을 때’라고 말한다. 그는 시작에 있어서 이미지의 중요성을 깊이 통찰하고, 장인의 정성과 솜씨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 이미지들은 처음 본 천연색 사진처럼 경이롭다. (……) 그러나 김종길 시에서 이미지가 소중한 매력이라고는 하나, 그것은 그의 시세계가 추구하는 바, 그 진실에 이르는 시적 방법론일 따름이다. 우리가 김종길의 시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명징한 이미지라는 시적 방법론을 통과하여 그것이 궁극적으로 드러내는 시인의 삶에 대한 태도 혹은 정신적 깊이에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앞서 지적한 대로 그의 시는 고전적 품격을 보여준다. 그의 이미지즘이란 현대적 시작 방법에 훌륭한 솜씨를 구사하지만, 동시에 한시의 전통에 익숙하며 선비정신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일견 모순된 것처럼 보이지만, 서구의 이미지즘이 중국의 당시와 연관이 있고 또 신고전주의의 바탕 위에서 형성된 것임을 생각하면 오히려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김종길 시의 고전적 품격은 우선 엄격한 절제와 거리두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시는 감정을 절제하는 지적인 태도를 보여주며, 시적 자아는 언제나 대상이나 감정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 김종길은 과작의 시인이다. 40여 년간 쓴 시가 시집 한 권 분량에 그친다. 이것은 격에 맞지 않는 작품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엄결성의 한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모두 완성도가 높으며, 우리 현대 시사에서 독특한 지위를 차지한다. 그것은 이미지즘에 정신성을 부여했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 현대시에서 이미지즘이라면 통상 형식과 기교에의 치중과 경박한 모더니즘을 환기시킨다. 그러나 김종길의 시는 이미지즘을 솜씨 있게 구사했을 뿐 아니라 높은 정신성의 추구로 나아갔다. 높은 정신성의 이미지즘은 서구적이고 현대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동양의 한시 특히 선시(禪詩) 같은 데서 빈번히 만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전통적이기도 하다. 명징성과 엄결성을 지닌 김종길의 시는 이 점을 무리 없이 조화시키고 있다.  - ‘명징성과 엄결성’, 이남호, , 미래사, 1991         연계정보        관련도서   , 윤동재, 지식산업사, 2002 , 김종길, 민음사, 1997 , 유종호, 민음사, 1995 , 김종길, 미래사, 1991 , 윤동재, 고려대 박사논문, 2000   솔  개                   김  종  길     병 없이 앓는,   안동댐 민속촌의 헛제삿밥 같은.   그런 것들을 시랍시고 쓰지는 말자.     강 건너 임청각(臨淸閣) 기왓골에는   아직도 북만주의 삭풍이 불고,   한낮에도 무시로 서리가 내린다.     진실은 따뜻한 아랫목이 아니라   성에 낀 창가에나 얼비치는 것,   선열한 육사(陸史)의 겨울 무지개!     유유히 날던 학 같은 건 이제는 없다.   얼음 박힌 산천에 불을 지피며   오늘도 타는 저녁노을 속,     깃털 곤두세우고   찬 바람 거스르는   솔개 한 마리            김종길 시인의 고향, 지례를 찾아서                                               (글/한경희-안동대 국문과 강사)   1. 세상에는 길이 없는 길이 많다. 사실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 헤매는 일이 바로 길 찾기가 아닌가. 어쩌면 이미 없는 고향땅을 찾아가는 길이 진정어린 길 찾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 나서는 길은 낯설거나 혹은 어려워 찾기 힘든 것이 아니라 이미 흔적조차 없어진 곳이라 불편한 길이다. 무슨 모순의 논리를 만들자는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미 그 모순 안에 맴돌고 있다. 없는 고향을 찾는 길, 그 길을 나서자니 횡설수설이다.   임동면 일대가 임하댐이 들어서면서 물에 잠겼고 김종길 시인의 고향도 예외는 아니었다. 임동방향으로 달려가다가 수곡교를 건너 전주류씨 마을을 지나 한참을 달려서 만날 수 있는 곳에 지례마을이 있다. 수곡마을의 도로 이정표에는 지례예술촌 14Km라고 굵게 적혀 있었는데 이 예술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 김종길 시인이 태어난 고향이다. 생가라는 팻말이 있지도 않을 뿐 아니라 남아있을 어떤 흔적도 없는 시인의 고향을 찾아가는 일을 두고 긴장이 일어난다. 그래도 호기심과 함께 그 곳이 궁금해지는 까닭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미 오래전에 담수하고 임하호의 이름을 얻은 그 공간을 바라보는 일을 두고 생기는 이 호기심이란 뭘까.   지례예술촌 가는 길은 굽이굽이 구절양장이다. 물론 도로는 포장이 되어 있어서 자동차가 지나는데 별 어려움은 없으나 경사와 굴곡이 심한 것이 아주 불편하다. 겨울날 눈이라도 내린다면 아마 인적이 뚝 끊어질 그런 위험천만의 길이다. 이 마을 출신들이 더러 산골오지라고 표현한 적이 있었는데 사실, 강원도 깊은 산과 계곡을 찾아가는 기분과 그리 다를 것이 없다. 아스팔트 포장이 된 곳과 시멘트로 발라둔 곳의 소음차이를 실감하면서 구불구불 돌아드는 길을 반복적으로 달려갔다. 수곡마을을 지나는 길에 있었던 수곡샘터에서는 인근 사람들이 물을 길어 먹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또 멀리 임하호 위에 놓인 다리와 깎여나간 붉은 산허리가 어울리지 않게 지례를 향해 가는 길을 함께 하였다.  여름에 접어든 한낮 온도는 충분히 덥다 못해 익을 정도로 따갑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로 들판 곡식이 자라나고 영글어가는 줄 모르지 않으나 땀범벅이 된다. 도로에는 칡넝쿨이 쏟아져 내리듯 길 가장자리를 차지하고 너울너울 햇살을 받고 있다. 계절의 시간이 연초록에서 이미 짙은 초록으로 자리를 옮겨가 앉는 중이다. 새순은 온몸이 한결같이 도로를 향해 쭉 손을 내밀고 있었다. 특별히 땅이 척박한 곳에 칡넝쿨이 자라는지, 계곡이 깊은 곳이어서 칡이 가득한건지, 아니면 특별한 토질영향인지 알 길이 없으나 유독 칡이 산을 가득 덮고 있었다. 시야가 탁 트인 곳에서 지례마을 쪽으로 내려다보니 골골이 길이 이어지면서 첩첩이 몇 겹의 산이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우거진 산과 숲을 내려다보는 아찔함, 숲의 깊이가 한달음에 달려오는 느낌이 위협적일 정도이다가 순간 아찔해진다. 숲에 사는 무수한 생명들이 건강하다는 증거쯤으로 이해하면 되려나. 특별한 날이 아니면 흙을 밟을 수도 없고 구경조차 힘든 일상공간에서 깊이를 가늠하지 못하는 계곡과 만나는 일은 위협적인 일이 되고 있었다. 경외, 두렵지만 공포의 대상이 아니고 낯설지만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숲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간절하다는 건 몹시 부족한 결핍의 반증이라는 정도를 헤아리며 숲을 두루두루 눈여겨본다. 나무와 나무들, 그들이 어울린 공간, 그 빽빽한 밀도와 생명성이 신비하게 보이기도 하고 두렵게도 보인다. 녹색 숲이 짙어지고 짙어지면 검은 숲이 되는 일을 안동에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두렵지만 아름다운 체험임에 분명하다.    고불고불, 땀을 씻으며 내리막길을 한참 내려가니 아주 아늑하고 좁은 길이 나타나고 다시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좁은 길에서 드는 이 한갓진 생각이 내리막길을 따라 줄줄 이어지다가 문득 만나는 숲속 고가. 지례예술촌에 도착했다. 이곳에서는 더 이상 이어진 길이 없다. 예술촌이 마주하고 선 곳은 바로 직진하듯이 임하댐이다. 오늘 길나선 목적은 예술촌이 아니었므로 곧장 임하호 물이 보이는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예술촌은 마침 의성김씨 문중행사로 자동차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예술촌 담장 밖으로 난 길을 따라 임하호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산딸기 몇 알이 달랑달랑 힘겹게 붙어 있는 산길을 조금 내려가니 잔잔한 물가로 바로 이어진다.  그런데 임하호를 향해 노신사 한 분이 그윽하게 서 계셨다. 무척 더운 한낮에 예의를 갖춘 자리를 찾아 드는 손님처럼 깨끗하게 정장을 하신 분이었다. 순간 임하호가 고향이 된 수몰민일 거란 생각이 스쳤다. 그분은 정적을 깨고 등장한 불청객이 아주 못마땅하셨을 것이다. 한참 물가를 물끄러미 보고 계시더니 등을 돌려 길을 떠나시는 분께 지례 마을 이야기를 여쭤볼까를 망설였지만 끝내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대신 지례를 덮은 물과 죽은 나무와 우는 것처럼 들리는 까마귀 소리를 고향흔적으로 받아들이고 한참 그 풍경에 귀 기울이는 걸로 가름했다.  담담하게 햇빛을 받은 임하호의 수면은 차분하다. 한참 가문 때라 물바닥이 더러 몸을 드러내 갯가가 만들어져 있었고 그곳에서는 물비린내가 확 풍겨왔다. 누런 진흙들이 서로 엉켜 흙이 말라있는 곳도 더러 있었다. 저 물들, 잠잠한 수면 아래 지례라는 마을이 있었을 것이고 그 가운데 김종길 시인의 고향집도 있었던 것인데. 물결은 너무도 차분하게 옛 기억을 삼켜서 그저 조용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다만 죽은 나무 몇 그루, 가지조차 제대로 남겨놓지 않은 죽은 나무의 가녀린 몸통을 몇 군데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갯가를 이어 비어 있는 공간에서 마구 자란 풀들은 바람 따라 허리를 휘며 땅으로 눕고 있었다. 아마도 여름 장마철이나 태풍이 오면 물이 차오를 공간이거나 또 댐을 위해 필요한 여유 공간이거나. 하여간 물을 둘러싸고 있는 어떤 풍경도 옛집의 기억을 보태주는 일은 없었다. 임하댐 어느 쪽에서부터 날아온 건지 까마귀의 굵고 깊은 소리에 슬픔이 진하게 들렸고 별 소리 없이 날아드는 물새들의 날개도 한층 힘겹게 다가왔다.  2.  라는 시집에는 아름다운 고향이야기 몇 편이 있다. 교통이 불편했던 시절일수록 장소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모양이다. 쉽게 공간이동이 이뤄지지 않으니 공간의 지속성이 생활습관으로 남아있었고 이것이 전통으로 지켜진 것이 한 둘이 아니다. 전통사회의 유교문화 일체가 지속되는 공간과 무관하지 않은 것을 봐도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러니 떠나온 고향이나 사라진 고향에 대한 미련은 단지 공간의 단절만이 아닌 개인 내면의 상처를 크게 만들었던 것이다.  「원주근방」이라는 시는 안동과 서울 사이에 고속도로가 나기 전,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앙선 기차를 타고 다니던 시절에 느꼈던 감정을 잘 확인시키는 이야기이다. 원주는 안동-서울의 중간지점으로 의미가 있었다. 청량리에서 기차가 출발해서 원주까지 도착하면 안동사람들은 행선지의 절반이 지났다는 것을 누구나 파악했을 것이다. 또 안동에서 출발해서 제천을 지나면 승객들의 말씨가 달라지면서 완전히 고향을 떠났음을 실감하게 되는데 원주에 이르면 확실히 서울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또 알 수 있었다.  “긴 터널을 빠져나오면/치악역//저 아랜 또렷이 구획진 하오의 들판//서울행 중앙선 완행열차/숨을 죽이듯 기어가면//산정의 춘설은 멀리 남기고//원주근방은/저물고 있다.” 원주라는 도시 자체에 대한 자각이나 특별한 느낌 이외에 그저 고향 안동을 떠난 시간이 이제 한참 지났고 최종 목적지는 절반이 남았다는 이정표로서 원주였던 것이다. 누구에게 건네 들은 말인지는 모르지만 수없이 덜컥거리는 기차가 쇳가루에 기름까지 묻은 먼지를 차 안으로 가득 들여놓으며 많은 터널을 지나 달릴 때 그리운 고향은 벌써 등 뒤에서 더욱 멀어져 갈 뿐이었던 것이다. 그때 원주는 고향을 완전히 벗어났다는 자각지점이 될 것이고, 이제 살아가야 할 공간으로 들어갈 시간이 도래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이정표가 된다. 진주빛 흐르는 보릿짚을/낱낱이 엮은 방석을 깔고/달 밝은 뜰에 앉아 삼을 베낀다 밤 여울 물소리 울리는 언덕길을 돌아/물에 잠겼던 무거운 삼단을 지고/아희야 열 일곱 살 곧은 종아리/고이 고이 옮겨 오너라. 이웃 마을에 시집간 딸/산 넘어 돌아오고/봄에 맞은 어린 며느리- 어른은 삼가히 섬길 것이라/철들어 이제 알면서도/때로는 귀여운 희롱을 잊지 않음은/늙어가는 어버이 앞에 베푸는 고운 정성이려니 -삼 줄기 줄기 베끼면 하얀 겨릅대/겨릅대처럼 희고 곧은 마음들,/달 쳐다보며 삼을 베낀다. 달 쳐다보며 삼을 베낀다. (「달」 전문) 안동의 특산물 가운데 삼베가 있는데 삼베를 짜기 위해 삼단을 벗기던 일을 기억하는 작품이 있다. 삼단을 벗기는 일은 시집간 딸까지 친정으로 와서 거들 정도로 큰 행사가 되었던 것 같다. 달이 훤한 밤에 동네 딸, 며느리들이 모여 삼을 벗기는 일을 한다. 물에 잠겨 있어 더욱 무거운 삼단을 지고 오는 일도 동네 여자아이들이 하고, 시집간 딸까지 호출하여 동네 두레로 일을 한다. 달빛이 유난히 눈부셔 보릿짚 방석도 진주를 뿌려놓은 듯한 밤에 또 삼을 벗긴 겨릅대의 흰 몸도 더불어 빛난다. 올해 나온 남효선 시인의 시집 에도 보면 해거름에 동네 할머니들이 모여 삼을 양푼이에 담아서 비비는 일을 했던 것을 쓰고 있다. 삼을 삼은 두레의 우리말인 ‘둘게삼’은 삼을 가늘게 째서 올올이 자신의 다리에 비벼서 길게 연결시키던 이야기이다. 무릎을 걷어 세워서 그 위에다 삼을 가늘게 말고 연결시키는 일이 삼삼기의 기본이었다.  김종길 시의 미덕은 최소의 수사로 최대의 긴장을 끌어내는 것에 있고, 매우 진술적인 형태의 기술이 보이나 그것이 지리한 이야기로 마무리 되지 않는다. 절대 이야기를 삼가면서 가벼운 수사로 이어지는 것은 거리두면서 그 가운데 ‘정중동’ 지점에서 시를 꺼내기 시작한다. 2005년에 내놓은 는 시집의 황혼 무렵,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는 시점이 올해 시집에도 같이 놓여있다. 영미시인과 중국시인이 함께 황혼에 들어와 더욱 노을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시인이 동양과 서양을 관통했거나 경계에서 주로 머물렀다면 이제 황혼에서 노을의 붉은 기운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시간의 한계를 유념하거나 죽음을 두고 진지하게 고민한 사유의 세계가 잘 드러나는 시집이다. 유교를 두고 논의를 할 때, 이것의 사유와 현실의 억압체계에 대한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특히 가부장제 질서의 공고함 속에서 유교는 제 빛을 여전히 발휘하고 있기도 하므로. 그래서 감히 유교가 지닌 감성에 대한 언급을 거의 하지 못했다. 아니 감성이라는 말을 유교와 나란히 쓰겠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가부장제의 질서 속에서도 감성은 여전히 유효하고 그것의 힘이 끌어내는 끈으로 여전히 지속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전통적으로 시에 대한 견해는 시와 노래를 분명하게 구분하는 일인데, 시인은 노래를 거리두면서 시의 뜻을 찾아간다. 올해 들어 김종길 시인은 라는 시집을 냈다. 시인은 세월의 흐름, 그 속도와 무게 앞에서 겸허함을 넘어 순응, 그 자연회귀를 준비하는 목소리를 낸다. 시인의 말 그대로 이것도 시랍시고 쓴다는 듯, 일상의 긴장, 아무것도 꾸미지 않고 의도하지 않으면서 풀어낸 글, 말의 흐름을 멋스럽게 보여주는 시인의 시 몇 편을 살펴본다.  「이것도 시랍시고」라고 쓰면서 “늘그막의 미망/던지러운 미련” 우리들의 미련은 목숨을 어쩌지 못하는 무게만큼 강력하고 끈질기다고 자성어린 토로를 한다. 사실, 해거름 앞에서 이삭을 줍는 일은 미련과는 거리 멀고 그냥 바쁜 마음에 지나지 않는다. 몹시 황망하다는 건, 자신을 향해 있는 시선이며 자신을 매우 냉정하게 회초리 치는 격정의 자세이다. 그렇게 여전히 자신에게 냉정한 스스로를 미망과 미련이라는 주름살에 감추고 싶은 것이다. 누구나 시간의 흔적으로 갖는 주름살 같은 미련, 검버섯 같은 미망의 흔적이 있다는 것을 알아 그 속으로 여전히 팽팽한 활시위 같은 마음을 덮어두려는 것이다.  「자연은 실로」 봄날에 피는 꽃색이 거의 흰색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고 쓴 시인 거 같다. 사실, 곤충들은 붉은색을 못본다니, 나비를 부르거나, 벌을 모으고자 한다면 꽃들은 붉은색을 피해야한다는 것인데, 결국 자연의 선택과 결정은 생명의 지속성을 향해 있다는 사실이다. 화려한 벚꽃 역시 흰 바탕을 절대 포기하지 않고 그 안에서 은은한 분홍기운을 띄울 따름이니 봄날, 열매를 맺기 위해 피어나는 꽃들의 생명력은 흰색 꽃 몸과 무관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유독 눈에 띄는 장면은 일제 말기에 중학생이었던 시인이 강제 노역에 동원되면서도 “그래도 어디나 자연은 있다”는 위안의 말을 스스로에게 건넬 줄 알았다는 것이다. 언제나 원한을 품은 사람은 자신이 먼저 다쳐야 원한을 풀어내는 법인데 그 절박의 시절을 자연을 통해 해소했다는 것이 놀랍다. 스스로 자기정화 기제가 있는 사람이란 도라도 닦은 사람일 것인데. 십대 어린 소년이 자연을 향해 현실을 견디는 장치로 삼았다는 것은 이미 어린 날부터 자연의 놀라운 치유력이나, 항심을 꺼내 볼 수 있었기 때문일까. 어린날 어머니도 돌아가셨다고 하니 그 외로움을 모두 나무와 꽃들에게 하늘과 땅을 향해 뻗은 숲을 두고 위로 받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노인의 시간, 너무 많이 흐른 시간을 유독 절절이 기억하며 떠나갈 시간, 흙으로 돌아갈 시간을 매우 염려하며 마치 대기자가 되어 기다리는 시들이 제법 많다. 「가랑잎 한 잎」 추운 겨울 이른 산책길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 빈 의자에서 내린 가랑잎 한 잎에 앉아서 가을낙엽처럼 곧 땅으로 하강할 시간을 짐작한다. 「낙화」 목련의 우아하고 아름다움도 땅을 향해 떨어지면 낙엽처럼 짙은 고동색으로 변해가는 걸 보면서 사람 역시 목련의 무게 못지않게 지나친 욕심을 제대로 내려놓지 못하고 무거운 몸이 낙화할 것임을 시인은 이미 묵묵하게 짚어보고 있는 것이다.  안동과 관련한 작품들은 행사시에 필요해서 적은 글 「사랑하는 고향 사람들에게」와 굳이 고향을 떠올려 쓰고자 했을 「안동」이 눈에 들어온다. 시인이 사랑하는 고향은 역사가 긍정하는 분명 소중한 사실들이지만 왠지 행사시라는 성격 탓인지 자연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이 시 역시 어느 자리 행사를 위한 시임이 충분히 짐작이 되는 그런 작품이다. 3. 임하호 수면 아래 잠수한 지례마을의 사람들은 지례예술촌 고택이 있어 마을을 추억하기 어렵지 않을까, 아니면 더욱 서글퍼할까. 지례를 고향으로 둔 사람들에게 예술촌은 남다른 대상임에 분명할 터이다. 부러 예술촌 안으로는 한 발자국도 들여놓지 않으면서 담장 밖으로 빙빙 돌아봤다. 외지에서 오신 손들이 많은지 음식 하는 연기가 푸르스름하게 하늘 위로 올라가고 두런두런 이야기도 제법 들린다. 멀리서 온 차들도 이곳저곳에서 자리 잡고 있었다. 많은 차들이 쉴 새 없이 달리는 도로에서 벗어난 지 몇 분 되지 않은 시간인데 뚝, 세상과 절연한 공간이 바로 그곳이었다. 예술촌 입구의 그리 크지 않은 감나무는 감꽃을 가득 바닥에 떨어뜨리고 있었고, 그 감꽃은 바싹 말라들어 누렇게 변하고 있었다. 여러 유실수가 조그마한 열매를 맺고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어서 나무들은 찬란하였다.  지례를 더듬는 마음은 안타까움 그 자체인데 실향을 한 당사자들의 심사는 오죽하랴. 지례예술창작촌에서 강 쪽으로 3-400미터 전방 산기슭으로 생가가 있었으나 수몰로 실향했다. 또, 두 살 반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불운하게도 시인은 어머니도 고향도 없는 사람이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으로 일찍 홀로된 청상 조모의 사랑을 유난히 많이 받고 자라면서 철없던 시절에는 어머니의 빈자리를 제대로 몰랐고 점차 성장해가면서 알게 되었다. 그 시절엔 증조부, 증조모도 살아계셔서 귀한 장손을 위해 늙은 증조부모님들은 정성을 다했고 그것이 「성탄제」라는 시에 잘 드러나 있다. 시인이 실제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시 「성탄제」는 어린 시절 몹시 아프던 때 이들 조모, 증조부모님들의 극진한 살핌과 사랑으로 소생하게 된 이야기를 다룬 것이라고 한다. 집안이 청송 진보로 이사를 하면서 태어난 지례를 떠난 것이 우리나이 아홉 살 때였는데,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진보초등을 다니던 시절에 이미 어머니는 계시지 않았는데 특별히 둘째 외삼촌이 시인을 귀여워해 외가가 있는 영양 석보까지 함께 걸은 적도 더러 있다고 한다. 그 외삼촌이 당시 신문기자로도 활동했던 이병각 시인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시인은 증조부 무릎 아래서 책을 보기 시작했다. 아마도 정식 입학이기 보다는 마을 청년들이 아침이면 식전에 증조부에게 글을 배우러 왔기 때문에 자연스레 한문공부를 했을 것이다. 그러다 우리나이 여섯 살 무렵에 배운다는 천자문을 이미 반 정도 익힌 상태였고 한시 짓는 법도 제법 터득해 있었다고 하니 조선시대 뛰어난 학자들의 유년을 돌아보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시인이 유아시절에 사별해야 했던 어머니, 이 존재는 시인에게 어떤 의미로 자리하고 있을까. 차마 이렇게 직접적으로 여쭤보지 못했다. 사람은 하고 싶은 말을 피해 말을 하면 쓸데없는 말만 많아지고 허접하게 되는데 딱 그랬다. 전화로 질문 몇 가지 던지는 일 가운데 사실 가장 핵심적인 질문인 셈인데. 결국 질문으로 던지지 못했다. 그 이유를 돌아보니 사람의 고향인 어머니와 지리적인 고향 지례, 이 둘은 이미 구체 대상으로 놓여있지 않다는 것을 이미 감지하고 있던 내 생각 탓이다. 그래서 작품에서 어머니를 좀 찾아나서야 한다는 생각을 숙제처럼 해본다.  
353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허영자 - 자수 댓글:  조회:4226  추천:0  2015-12-20
자수(刺繡)- 허영자1)   마음이 어지러운 날은 수를 놓는다.   금실 은실 청홍(靑紅)실 따라서 가면 ㉠가슴속 아우성은 절로 갈앉고   처음 보는 수풀 정갈한 자갈돌의 강변에 이른다.   남향 햇볕 속에 수를 놓고 앉으면   세사 번뇌(世事煩惱) 무궁한 사랑의 슬픔을 참아 내올 듯   머언 ㉡극락정토(極樂淨土) 가는 길도 보일 상 싶다*. (시집, 1966) * 상 싶다 : 성싶다.   ■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여성적인 섬세함과 강렬한 생명력이 결합된 시풍이 특징인 허영자의 대표작으로, ‘수놓기’라는 일상적인 일을 통해 고뇌와 슬픔을 다스리고 마음의 평화를 찾아가는 체험을 노래한 시이다. 여성적인 소재와 언어와 감성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 성격 : 서정적, 여성적, 성찰적   ▶ 시상 전개 : 점층적 전개   ▶ 구성 : ①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수를 놓음.(제1연)             ② 번민은 가라앉고 아름다운 심성의 경지에 다다르게 됨.(제2-3연)             ③ 사랑의 슬픔도 참아 내고 번뇌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듯함.(제4-6연)   ▶ 제재 : 자수(刺繡)   ▶ 주제 : 수놓기를 통한 번뇌의 극복   ■ 연구 문제 1. 이 시의 화자의 고뇌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찾아 쓰라. ☞ 사랑의 슬픔   2. ㉠이 뜻하는 바를 25자 내외로 쓰라. ☞ 가슴 속에 끓어오르는 여러 가지의 갈등과 괴로움   3. 마지막 연에 담긴 의미를 완결된 한 문장으로 쓰라. ☞ 수놓는 행위를 통해 이루어지는 맑고 정돈된 마음의 상태가 극락 정토로 표현되는 영원한 평화에도 가까워질 수 있을 듯하다.   4. ㉡과 비교적 그 의미가 통할 수 있는 시구를 찾아 쓰라. ☞ ‘처음 보는 수풀 / 정갈한 자갈돌의 / 강변’   5. 고뇌를 견디는 방법, 극기의 방법을 상징하는 말을 이 시를 참고하여 한 어절로 쓰라. ☞ 수놓기   6. 행위의 진행에 따른 심리적 추이를 살펴보자. ☞ 번민(가슴 속의 아우성) → 평화(강변) → 초월(극락 정토 가는 길)     2연에서 '가슴 속 아우성'이 가라앉는 과정은 동적인 분위기가 점차 정적인 분위기로 변해 가는 과정을 연상시킨다.   ■ 텍스트 상호성 1. 내면의 번뇌와 갈등을 노래한 시를 찾아 번뇌와 갈등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 마음 속의 번뇌와 그를 정화하는 화자의 의지를 노래하는 작품 중, 시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는 조지훈의 '승무'가 있다. 세속의 미련을 떨쳐 버리지 못한 여승이 깊은 밤, 홀로 승무를 추며 내면의 번뇌를 종교적으로 승화하는 과정을 그린 이 작품에서 승무라는 춤은 '자수'의 수놓기와 비슷하게 고뇌와 갈등을 가라앉히는 방편이 된다. 또, 고은은 '눈길'이라는 시에서 지난 시절의 방황과 갈등을 가라앉히고 마음의 평정을 되찾은 상태를 노래하고 있다. 특히 이 시에서는 고요하고 정화된 정신적인 경지를 통념상 부정적인 이미지를 연상시키기 마련인 어둠에 비유함으로써 번민을 가라앉힌 마음 속의 평화로운 정경을 효과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문맥이 순탄하고, 분명한 3개의 문자이 여섯 연으로 나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세 개의 의미 단락으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첫 단락(제1연)을 보면 화자가 수(繡)를 놓는 것이 어떤 실용적 목적 때문이 아니라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임을 알게 된다. 수(繡)를 놓으며 색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자신이 꾸며 놓은 ‘수풀’이나 ‘강변’에 이른다. 그 ‘수풀’이나 ‘강변’은 마음의 평정을 구할 수 있는 휴식의 공간일 터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 수(繡)틀 속에 스스로가 마련한 내면적 상상의 세계이다. 그런데 화자가 무엇 때문에 ‘가슴 속 아우성’을 느끼며 마음이 어지러워진 것일까가 궁금해진다. 그 해답은 제5연에서 구할 수 있다. ‘사랑의 슬픔’으로 해서 화자는 괴로워하고 있으며 그것을 달래기 위해 수(繡)를 놓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임을 살아서 다시는 만날 수 없기에, 화자는 ‘극락 정토 가는 길’을 수(繡)틀 속에 그려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화자는 수(繡)를 놓는 행위를 통해 사랑의 슬픔을 극복하고 절대적인 구원을 얻는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이해와 감상 2   이 시는 사랑과 절제의 시인으로 불리는 허영자의 대표작으로 ‘수놓기’라는 일상적 일을 통해 ‘세사 번뇌’와 ‘사랑의 슬픔’을 다스리고 마음의 평화를 찾아가는 체험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의 제목이자 핵심 소재인 ‘자수’는 시인에게 있어 실제적인 수놓기라기보다는 고뇌를 견디는 방법이요, 극기(克己)의 상징으로 쓰이고 있다. 모두 6연으로 이루어진 이 시는 의미상 3단락으로 나누어진다. 첫 단락은 1연으로 화자가 수를 놓는 일이 어떤 실용적 목적이 아니라, 마음 속의 고뇌나 슬픔을 가라앉히기 위한 것임을 알려 주고 있다. 둘째 단락은 2~3연으로 오랜 번민을 가라앉히고 아름답고 평화로운 심경에 다다르는 수놓기의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여러 가지 색실을 따라가며 화자가 수를 놓다 보면, 어느덧 ‘처음 보는 수풀’이나 ‘정갈한 자갈돌의 강변’에 이른다. 그러므로 그 곳은 현실 세계가 아니라, 내면적 상상의 세계로 화자가 수를 놓으면서 되찾게 된 마음의 평화를 의미한다. 셋째 단락은 4~6연으로 수를 놓고 있으면 사랑의 슬픔도 이겨내고 번뇌로부터도 완전히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소망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1연의 ‘어지러운’과 2연의 ‘아우성’으로 암시되었던 고뇌의 내용이 셋째 단락에 와서 보다 분명해진다. 그것은 바로 화자를 오래도록 괴롭혀 왔던 사랑의 고뇌요 슬픔이다. 아마도 화자는 수를 놓는 행위를 통해 아픔을 극복하고 ‘극락 정토’라는 절대적 구원까지도 얻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허영자 시는 일반적으로 간결과 반복의 표현 특징을 갖는다. 간결함은 곧 함축성을 뜻하는 것으로 허영자의 경우, 행의 길이가 짧을 뿐더러 작품 전체의 길이까지도 짧다. 이 작품도 일체의 군말을 배제한 표현의 절제를 통해 고도의 압축미를 보여 준다. 또한, 전통적 서정을 주조로 하여 사랑과 기다림, 한과 고독의 본질적인 인간 내면을 구가하는 우리 여성 시단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이와 같은 언어 절제의 압축미를 통하여 시적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 이해와 감상 3  수놓기라는 일상적 일을 통해 고뇌, 슬픔을 다스리고 마음의 평화를 찾아가는 체험을 노래한 시. 여성적인 소재와 언어, 감성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작품의 특징으로서 무엇보다 주목되는 점은 수놓기라는, 매우 익숙한 생활 체험을 제재로 삼았다는 점이다. 수를 놓으려면 시선과 마음을 한 곳으로 집중해야 한다. 이 시에서 시인이 노래하고자 한 것은 이러한 집중을 통해 심적 갈등을 가다듬고 맑은 심성을 획득하는 체험이다. 작품 전체를 의미상의 단락에 따라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볼 수 있다.  첫 부분(제1연) :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수를 놓음. 여기서 수놓는 행위가 무엇인가를 만드는 실용적 목적보다 마음 속의 번민이나 고통을 다스리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둘째 부분(제2, 3연) : 수를 놓는 동안에 번민은 가라앉고 아름다운 심성의 경지에 다다르게 됨. 셋째 연의 `수풀', `정갈한 자갈돌의 / 강변'은 마음의 평온을 되찾으면서 만나게 되는 내면의 상상적 세계이다.  셋째 부분(제4~6연) : 수를 놓고 있으면 사랑의 슬픔까지도 참아 내고 번뇌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듯 싶기도 하다는 내용. 둘째 부분에서 어렴풋이 암시되었던 괴로움의 내용이 여기에 와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오랜 동안 계속되어 온 사랑의 고뇌요 슬픔이다. 이 고뇌의 이유는 사랑의 길이 막혀 있거나 아픔을 극복하고 절대적인 구원까지도 얻을 수 있을 듯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 작품의 구성은 이처럼 사상을 점층적으로 뚜렷하게 제시하여, 맨 마지막 부분(특히 5연)에 와서 핵심을 드러내는 방식을 취했다. 제목이자 핵심 소재인 자수(刺繡)는 바로 이와 같은 고뇌를 견디는 방법이요 극기(克己)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해설: 김흥규]       1) 허영자(許英子) 1938년 경상남도 함양 출생 1961년 숙명여자대학교 국문과 졸업 1962년에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73년 우리 시문학사상 최초의 여성동인회 조직 1986년 제20회 월탄 문학상 수상 1992년 제2회 편운 문학상 수상 현재  성신여자대학교 국문과 교수 시집 :(1966),(1972), (1977),(1984), (1990) 등     피리   허영자   어머니의 뼈는 피리가 되었다   속이 빈 피리 어머니의 뼈는   천파千波 만파萬波 헤쳐온 삶   구십 년 세월을 노래로 푼다.   -{시로 여는 세상} 2004년 봄호          * ‘어머니’라는 단어는 생각만 해도 눈시울이 붉어지고 가슴이 아려온다. 화자는 ‘어머니의 뼈=속이 빈 피리’의 등식을 통하여 ‘골다공증’ 증세로 고생하고 있는 어머니의 아픔을 노래하고 있다. 어머니의 뼈는 “천파千波 만파萬波 / 헤쳐온 삶”의 고달픈 여정이지만 화자는 그것을 ‘피리’로 대치함으로써 “구십 년 세월”의 한 많은 삶을 “노래로” 풀어내어 스스로를 달래고 있다. 그래서 그 노래소리는 ‘천파 만파 헤쳐온 삶’만큼이나 애틋하게 들린다. 아, 어머니―.       경남 함양에서 출생했으며 숙명여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성신여대 인문대 국문과 교수를 지냈으며 현재는 명예교수로 있다. 1962년 박목월시인 현대문학 추천, 주요 작품으로 〈가을 어느 날〉,〈꽃〉,〈자수〉 등이 있으며 주요 시집으로 《가슴엔 듯 눈엔 듯》,《어여쁨이야 어찌 꽃뿐이랴》,《그 어둠과 빛의 사랑》 등이 있으며, 수필집으로 《내가 너의 이름을 부르면》 등이 있다.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 ,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지냈으며 한국시인협회상, 월탄문학상, 목월문학상, 녹조근정훈장 등을 수상했다.   ---------------------------------------------------------------- 얼음과 불꽃 사람은 누구나  그 마음 속에  얼음과 눈보라를 지니고 있다  못다 이룬 한의 서러움이  응어리져 얼어붙고  마침내 마서져 푸슬푸슬 흩내리는  얼음과 눈보라의 겨울을 지니고 있다  그러기에  사람은 누구나  타오르는 불꽃을 꿈꾼다  목숨의 심지에 기름이 끓는  황홀한 도취와 투신  기나긴 불운의 밤을 밝힐  정답고 눈물겨운 주홍빛 불꽃을 꿈꾼다.  刺繡(자수) 마음이 어지러운 날은 수를 놓는다 금실 은실 청홍실 따라서 가면 가슴 속 아우성은 절로 갈앉고 처음 보는 수풀 정갈한 자갈돌의 강변에 이른다 남향 햇볕 속에 수를 놓고 앉으면 세사 번뇌 무궁한 사랑의 슬픔을 참아 낼 듯 머언 극락정토 가는 길도 보일 상 싶다 꽃 피는 날  누구냐 누구냐 또 우리 맘속 설렁줄을 흔드는 이는 석달열흘 모진 추위 둘치같이 앉은 魂을 불러내는 손님은 팔난봉이 바람둥이 사낼지라도 門 닫을 수 없는 꽃의 맘이다. 나목에게  캄캄한 밤은 무섭지만 추운 겨울은 더 무섭지만 나무야 떨고 섰는 발가벗은 나무야 시련 끝에 기쁨이 오듯이 어둠이 가면 아침이 오고 겨울 끝자락에 봄이 기다린단다 이 단순한 순환이 가르치는 지혜로 눈물을 닦아라 떨고 섰는 나무야. 비 오는 날  비 오는 날이면 처녀시절 생각이 난다 비 맞고 서 있는 나무처럼 마음 젖어 서러이 흐느끼던 그때 비 오는 날이면 처녀시절 생각이 난다 아득히 비 내리는 신비한 바깥 머언 머언 내일을 내다보던 그때 비 오는 날이면 처녀시절 생각이 난다 박쥐우산 하나를 바람막이로 용감하게 세상을 밀고 가던 그때. 빈 들판을 걸어가면  저 빈 들판을 걸어가면 오래오래 마음으로 사모하던 어여쁜 사람을 만날 상 싶다 꾸밈없는 진실과 순수 자유와 정의와 참 용기가 죽순처럼 돋아나는 의초로운 마을에 이를 상 싶다 저 빈 들판을 걸어가면 하늘과 땅이 맞닿은 곳 아득히 신비로운 神의 땅에까지 다다를 상 싶다. 여름 소묘  견디는 것은 혼자만이 아니리 불벼락 뙤약볕 속에 눈도 깜짝 않는 고요가 깃들거니 외로운 것은 혼자만이 아니리 저토록 황홀하고 당당한 유록도 밤 되면 고개 숙여 어둔 물이 들거니. 임  그윽히 굽어보는 눈길 맑은 날은 맑은 속에 비오며는 비 속에 이슬에 꽃에 샛별에... 임아 이 온 삼라만상에 나는 그대를 본다. 가을비 내리는 날  하늘이 이다지 서럽게 우는 날엔 들녘도 언덕도 울음 동무하여 어깨 추스리며 흐느끼고 있겠지 성근 잎새 벌레 먹어 차거이 젖는 옆에 익은 열매 두엇 그냥 남아서 작별의 인사말 늦추고 있겠지 지난 봄 지난여름 떠나버린 그이도 혼절하여 쓰러지는 꽃잎의 아픔 소스라쳐 헤아리며 헤아리겠지 ========================================   장소 : 혜화동 석정  일시 : 2009년 5월 20일 수 오후 6시 대담:  지연희 문파문학 발행인 (한국수필가협회 부이사장) 진행/ 사진  : 권남희 월간 한국수필 편집주간   허영자 시인은 얼마 전 모시고 있던 어머니를 잃었다. 지난 여름인가, 원고청탁을 위해 전화를 드렸는데 ‘90 넘은 어머니를 칠십이 돼가는 이 노인이 보살피느라 원고쓰기 힘들다’고 하셨다. 그때 ‘노인‘이라는 시인의 말이 참 생소하게 들렸다. 선생은 언제나 내 머릿속에 가녀리고 단아한 시인의 모습으로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시인의 모습은 수척해진 모습이었지만 고운 자태 그대로였다. “ 어려운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연희 발행인이 진심어린 인사를 드린다. “ 잡지 하기도 어려운데 이렇게 끌어나간다는 게 얼마나 대단합니까?”    저작권협회회장을  얼마 전 퇴임한  허영자 시인의 남을 배려하는 따뜻한 말씀은 여전하다.   “ 건강할 때 체크하세요.” 허영자 선생님은 일년 전에  시작한 목 디스크가 수술을 해야 할 만큼  심해져 통증 클리닉을 다니신다고 한다. 2년 전의 대담 인터뷰를 말씀드리며 가능하면 다른 시각으로 선생을 비추어보겠다고 했다. 박목월 선생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등단했던 선생이 46년만에 다시 목월문학상을 수상했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2008년도 12월 제 1회 목월 문학상을 받으신 일을 뒤늦게 축하드렸다. 수상작품 ‘은의 무게만큼’은 어머니에 대한 시이다. 당시 어머니는 병중이어서 모르셨다고 답한다.   선생님의 대부분 시들은 심사평에서처럼 압축되고 간결한 시풍이 목월의 시세계와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선생의 시 에 그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휘발유같은/ 여자이고싶다 / 무게를 느끼지 않게 / 가벼운 영혼 / 뜨겁고도 위험한 / 가연성의 가슴 / 한 올 찌꺼기 남지 않는 / 순연한 휘발 / 정녕 그런 액체같은        허영자 시인 (흑백수정 )     저는 자꾸 산문시가 나오는데 어떡하지요. 지연희 발행인이 묻는다. 10년 넘게 시작법을 가르치면서도 시 앞에서 그 또한 결코 자유롭지 못함을 번번이 느낀다. 소재에 따라 길게도 쓰지 않겠어요? 물론 목적시들, 행사를 위한 시나 칭송하는 시의 경우는 길게 쓴다고 한다. 형식에 지나치게 구애 받지 말라는 의미이다. 선생을 보면 문학이 사랑 받았던 시대에서  행복을 누리며 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김남조 시인의 제자인 김후란, 신달자, 허영자 모두 문단의 별이 되었다. 부러운 마음도 있어 당시 여성문학인들은 지금의 연예인처럼 인기스타급이었기에 영부인의 초청을 받아 청와대에도 가지 않았느냐고 운을 떼었다. 인기라기보다 희소성이라고 한다. 1960년대 들어 여성작가들이 늘어났는데 그 때 서정주 시인이 추천한 동국대 학생 박정희, 이화여대 김혜숙, 서울대 국문과 김후란 모두 학생이면서 시인으로 활동했다.  사상계는 강계순 시인 , 구혜영 소설가를 배출하였다. 작품을 써도 실을 곳이 없던 때 신문 1면에 시를 한편씩 실어 주었고 여성들로도 동인활동이 충분할 만큼 인적구성이 이루어졌다.    당시 결성된 동인은 아직도 활동을 하고 있냐고 지연희 발행인이 묻는다. 35년 활동하고 35주년 때 해체식을 갖고 지금은 교류만 하고 있다. 돌아보니는 우리나라  현대문학사상 최초의 동인회이며 동인지라고 해야 옳다. 남성들이 문학사를 쓰다보니  큰 가지를 잘라냈다고 본다. 그 이전 세대들의 청록파나 문학사에서 다루어주지만  여성동인지는 그렇게 평가받지 못한 점이 늘 아쉽다. 지금 재조명 사업으로 ‘문학의집.서울’에서나 한국여성문학인회에서 작고 여성문인을 다루는 일은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청미동인은 처음 김후란. 김혜숙. 김숙자. 추영수. 허영자. 김선영 시인이 우정으로 만나다가 시집을 같이 내면서 활동했다. 그런데 나중에 박영숙 .김숙자 두 분 선생이 미국을 가고 뒤를 이어 입회하신 분이 김여정. 임성숙.이경희 선생이었다. 주 활동은 시화전, 독자와의 대화, 시판화전이었고 신세계 백화점에서 시판화전을 할 때 그림을 맡은 화가들이 천경자. 박노수, 박수근, 김기창, 서세욱. 박래현으로 판매도 이루어졌다. 시화는 시와 그림에 걸맞게 해야 한다.  당시 기억이 남는 에피소드는 김숙자 시인의 ‘나목 ’시에 박수근 그림을 받았는데 후에 박완서 소설가가  ‘나목’을 발표해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요즈음 다시 동인지 시대가 돌아온 것 같아 반가운 마음이다. 이제 꼭 신춘문예나 특정 잡지를 고집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활동할 수 있는 시대이다. 잡지가 문제가 아니라 실력이라고 생각한다. 이문열,  김주영 모두 월간문학 출신이고 박완서 소설가도 늦게 나와 얼마나 왕성하게 활동했는가. 시 앞에서는 주눅이드는 나는 ‘어떤 시를 읽어야 좋을까요’ 그런 뻔한 질문을 하고만다.      시인이라고 시만 읽는 것은 아니다. 고전시가 ,예를 들면 ‘정철시가 ’ 등도 많이 읽어야 한다. 물론 나는 학생 때   헤세의 시, 라이너마리아 릴케, 영버틀러. 영미시인 등 을 주로 읽었지만 소설도 즐겨 읽었다. 도스또예프스키, 마르셀 푸르스트, 아우렐리우수의 ‘명상록’ 나도향의 ‘그믐달’ 김진섭의 ‘청춘’ 이런 작품도 나에게 영향을 주었다.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소양을 길러야 한다.  우리나라 국민의 시를 향한 애정은 다른 나라에 비해 각별한 이유를 다시 묻는다.    요즈음은 산문시대라 하지만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시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국민의 심성이 시를 사랑하게 되어있다. 최초의 문자로 남아있는 ‘공무도하가’ 는 문화유산 최초의 시다. 우리나라 국민의 시적 정서를 알 수 있는 예가 MBC 기획으로 국민 대상  시조를 모은 적이 있었는데 그 엄청난 양의 시조에 무척 놀랐다. 그 때 시조가 우리 국민의 노래라는 것을 깨달았다. 특별히 지도받지 않아도 국민 정서에 녹아있는 게 시정신이다.        지연희 발행인은 ‘ 시를 쓰는데 있어 언어문제와 짧은 언어호흡과 긴 호흡에 대해 궁금한 점’을 확인한다.     문학의 장르를 구분 할 때 시, 소설, 희곡 등이 일단 길이와 형식에 의존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내용과 형식은 필연적 관계지만 .형식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시만 보더라도 과거는 운문 시대였지만 지금 향가를 쓰는 사람은 없다.  정형시에서 자유시가 되고 산문시가 나오고 있다. 재미난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도 시의 형태는 엄연히 존재한다는 점이 어렵다. 행만 바꾸었다고 시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언어는 같지만 언어를 어떻게 쓰느냐 축약과 행간의 비유가 있어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그런 경계허물기지만 시는 그래서 더욱 어려워졌고. 다양하게 물고 물리면서 발전해 나가는 것이라고 본다. 라디오만 있다가 TV 분야가 나오고 다시 공중파, 케이블 등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새로운 형태가 나오고 하는 세상이다. 백남준이 왜 유명해졌는가. 미술과 접목시킨 비디오 아트를 아주 일찍 창조한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정서에 따라 사람들의 정서가 시에 반영되는 것을 본다. 외형적으로 산문시라 하더라도 전달력과 사회비판 등이 있어야 한다.  린드버그의 ‘바다의 선물’ 은 좋은 시이다.    어쨌든 시인은 에스프리(시정신)가 있어야 한다. 소설 ‘어머니’를 쓴 고리끼의 시에 당시 귀족과 천민의 빈부차이에 대해 시를 썼는데 부잣집에서 일하는 여자의  아들이 똑똑하니까 마나님이 칭찬을 하곤 했는데  죽었어요. 마나님이 조문을 가서 보니 그 여인은 엉엉 울면서 국을 떠 먹고 또 울다가 국을 떠 먹고 있는 모습에  얄미운 마음이 든 마나님은 ‘ 국이 입으로 들어가냐? 도대체 주검을 앞에 두고 ..’ 야단을 치자 여자는 ‘마나님 나는 아들이 죽어서 땅이 꺼지는 슬픔을 느끼지만 이 국에는 소금이 들어 있습니다.’이렇게 작품은 당시의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러시아 정부  전매품목에 소금이 들어  있어  그 값이 얼마나 비쌌는가. 착취 당하는 천민을   문태준 시‘ 가재미’ ‘수평’ 은 시 형상성이 얼마나 명료합니까. 피천득의 수필은 시처럼 응축이 되어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시를 쓰겠다’고  목월문학상 시상식소감에서 말씀하셨는데  문학 후배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려본다.     타고난 재능은 있어도 천재성이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기에  인간은 유한한 존재임을 알고 하나를 경험하면 열 개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 , 느낄 수 있는 감성을 노력해서 얻어야 한다. 재능 위에 노력이다. 결국 글로 사람을 느낄 수 있고 글은 인간의 반영이다. 자기를 투시하면서 잘 닦으면 글도 좋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글을 쓴다고 하는 것은 교양을 쌓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전문가로서 , 문필가로서 전문의식, 프로의식을 가져야한다. 자기 업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경주시키고 전인적 몰두와 전심전력의 쏟아 부음이 필요한 게 작가의 길이다. 치열한 창작정신이 있어야 한다. 문학애호가로 남아도 좋겠지만 창작으로 끝장을 내야한다는 정신도 필요하다. 창작의 고통을 필생의 업으로 받아들이고 작가의 길을 안 버리고 끝까지 쓰는 사람을 전문작가라고 하겠다. 물론 김광균시인은 30대까지 이미지즘(모더니즘을 시각적으로 쓴 ) 시를 써 이름을 날렸지만 문필업을 접고 다른 사업으로 성공을 거두었지만 아까운 시인이다.      시에 대한 이야기라면 밤이라도 세울 것 같은 두 선생 사이에서 슬쩍 화제를 돌린다. 나태주 시인이 쓴 보셨나요. 지연희님이 낭송을 한다.   무릇 훤칠한 여자란/ 그가 가진 가슴 속의  살향기와 따스함과 지혜로써 / 살맞은 산짐승인양  무잡한 사내들을 길들이나니,/ 천천히 천천히 길들이나니/ 호령보다는 낮은 속삭임으로 /교태보다는 맑은 눈빛으로 /세상의 모든 사내들을 홀리나니/ 홀리나니... 시인이시여 / 신라의 한낮 찬란한 함바꽃이었던 / 선덕여왕의 후신인 허영자 시인이시여 내 당신 앞에 지귀되어 무릎 꿇으리까! / 당신의 황금팔찌를 탐하리까! / 오로지 영롱하고 맑은 시로써 당신은 / 세상의 모든 사내들의 연인이 됩소서/ 술취해 계집질하고 나오는 / 부끄러운 사내들의 이마 위에도 / 새벽별 뜹소서   선생은 신기하고 재미있다는 듯 웃는다. 아쉽지만 무남독녀로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하여 살얼음 강을 조심스럽게 건너듯 관리 하시는  선생을 보내드려야 했다. 여기 저기 카페와 상점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 동숭동, 학림다방이 건너다보이는  거리에서 수인사를 하며 헤어졌다.        허영자(許英子 1938년 8월 31일 - )는 시인. 경남 함양에서 출생했으며 숙명여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62년 《현대문학》에 박목월 추천〈도정연가〉 〈사모곡〉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은의 무게만큼』 소장본 『허영자 시집 얼음과 불꽃』외 다수   2004년 제20대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 수상 2003년 제9회 숙명문학상. 2008년 제1회 목월 문학상 . 한국저작권 협회 회장 역임. 시인협회 회장.   ===============================================================                                                                                                  허허영자 시인 -'부끄러움' 자작시를 낭송하다...                               허영자 시인-선생님께 삼척문우들이 애정을 드림니다.   허영자 시인 - 삼척에서 조찬시간     허영자 시인              허영자 시인 이미지18 - 김진광 시인,김일두 시인,정연휘 시인에게 격려싸인       허영자 시인 이미지19-문협방명록에 친필과 싸인    허영자 시인 이미지20- 선생님 싸인에 참석시인 모두 친필싸인으로 한마음을 담았다.      허영자 시인    허영자(許英子 선생님/1938년 8월 31일 - )은  대한민국의 시인이자 전직 대학교수다.. 경남 함양에서 출생했으며, 경기여고와 숙명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문과에서 로 문학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졸업하였다. 성신여대 국문과 교수를 지냈으며 현재는 명예교수로 있다. 1962년 《현대문학》에 〈도정연가〉,〈사모곡〉 등이 박목월 추천으로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가을 어느 날〉,〈꽃〉,〈자수〉 등이 있으며 주요 시집으로 《가슴엔 듯 눈엔 듯》,《어여쁨이야 어찌 꽃뿐이랴》,《그 어둠과 빛의 사랑》 등이 있으며, 수필집으로 《내가 너의 이름을 부르면》 등이 있다. 2004년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2000년 한국시인협회상, 월탄문학상,목월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허영자 시인의 시비    허영자 시인의 육필 시비 (모산 한국육필문학공원 내)   [출처] 허영자 시 모음|작성자 ilamjcyong
352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정한모 - 나비의 려행 댓글:  조회:3286  추천:0  2015-12-20
+ 새벽·1                                ///장한모 새벽은 새벽을 예감하는 눈에게만  빛이 된다 새벽은 홰를 치는 첫닭의 울음소리도 되고 느리고 맑은 외양간의 쇠방울 소리 어둠을 찢어 대는 참새 소리도 되고 교회당(敎會堂)의 종(鐘)소리 시동하는 엑셀러레이터 소리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도 되어 울려 퍼지지만 빛은 새벽을 예감하는 눈에게만 화살처럼 전광(電光)처럼 달려와 막히는 빛이 된다 새벽이 된다. 빛은 바다의 물결에 실려  일렁이며 뭍으로 밀려오고 능선을 따라 물들며 골짜기를 채우고 용마루 위 미루나무 가지 끝에서부터 퍼져 내려와 누워 뒹구는 밤의 잔해들을 씻어 내어 아침이 되고 낮이 되지만 새벽을 예감하는 눈에겐 새벽은 어둠 속에서도 빛이 되고 소리나기 이전의 생명이 되어 혼돈의 숲을 갈라 한 줄기 길을 열고 두꺼운 암흑의 벽에 섬광을 모아 빛의 구멍을 뚫는다. 그리하여 새벽을 예감하는 눈만이 빛이 된다. 새벽이 된다. 스스로 빛을 내뿜어 어둠을 몰아내는 광원(光源)이 된다.  (정한모·시인, 1923-1991)   바다와 나비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 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김기림 (1939). (1946)   (1) 주제 :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과 좌절감.           냉혹한 현실에 대한 인식과 순진하고 낭만적인 꿈의 좌절   (2) 김기림 (1908-?) : 호 편석촌(片石村). 6,25 때 납북. 주지성(主知性)과 심상을 강조했으며 자연 발생적인 시에서 ‘제작하는 시’로의 전환을 꾀하는 모더니즘 문학을 추구하였다. 평론 서적도 많이 내었다.   (3) 심상 : 시각적 심상, 색채대비            (흰나비 푸른 바다, 청 무밭, 새파란 초승달)     성격 : 감각적, 상징적, 묘사적 (4) 바다와 나비의 상징성   바다 - 새로운 문명, 미지의 세계, 현대 문명의 거대함, 차가움, 냉혹함. 생명이 없는 공간 또는 죽음의 공간으로도 이해   나비 - 순수하고 연약한, 순진한 존재로서 당시의 낭만적인 지식인의 모습이기도 함. 순진무구(純眞無垢)하거나 철없는 존재, 또는           식민지 현실이나 거대한 신문명 속에서 자신을 제대로 파악하           지도 못한 채 우쭐거리는 지식인 정도로 이해된다. (5) 공주 - 원관념은 나비, 나비의 연약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이미지를 공주에다가 빗대어 표현함 (6) 꽃 - 나비가 추구하는 이상 (7)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 공감각적 심상       나비의 여행(旅行)                   - 아가의 방(房)․5    아가는 밤마다 ㉠길을 떠난다. 하늘하늘 밤의 어둠을 흔들면서 수면(睡眠)의 강(江)을 건너 빛 뿌리는 기억의 들판을, 출렁이는 내일의바다를 날으다가 깜깜한 절벽(絶壁), 헤어날 수 없는 미로(迷路)에 부딪히곤 까무라쳐 돌아온다.     한장 ㉡검은 표지(表紙)를 열고 들어서면 아비규환(阿鼻叫喚)하는 화약(火藥) 냄새 소용돌이. 전쟁(戰爭)은 언제나 거기서 그냥 타고 연자색 안개의 베일 속 파란 공포(恐怖)의 강물은 발길을 끊어 버리고 ㉢사랑은 날아가는 파랑새 ㉣해후(邂逅)는 언제나 엇갈리는 초조(焦燥) 그리움은 꿈에서도 잡히지 않는다.     꿈길에서 지금 막 돌아와 꿈의 이슬에 촉촉히 젖은 나래를 내 팔 안에서 기진맥진 접는 아가야! 오늘은 어느 사나운 골짜기에서 공포(恐怖)의 독수리를 만나 소스라쳐 돌아왔느냐.                  ///정한모 (1965)(1970)   (1) 주제 : 아가의 꿈 속 체험을 통한 인간주의 추구   (2) 정한모(1923-1991) 호는 일모. 충남 부여 출생. 전쟁의 참상, 기계 물질문명으로 인한 인간의 존엄성 상실 회복을 위한 인도주의적 경향을 보이는 시를 주로 썼다. 시집 , (3) 성격 : 관념적, 서정적 / 어조 : 순수에의 동경을 갈망하는 어조 (4) 해설 : 악몽때문에 놀라 깬 아기를 시적 자아가 안고 달래면서, 아가가 꾸었음직한 악몽을 전쟁이라는 참혹함과 연결시켜 그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순수한 인간애(人間愛)의 회복을 외치고 있다. (5) ㉠ 길은 꿈길을 의미하며, 순수한 세계로의 여행을 뜻한다.    ㉡ 꿈속에서 무서운 세계로 들어서고 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   ㉢ 사랑은 날아가는 파랑새 : 전쟁의 참상으로 인해 헤어진 민족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전제되어 있는 표현이다. ㉣ 해후(邂逅)는 언제나 엇갈리는 초조(焦燥) : 사랑은 파랑새처럼 쉽게 잡히지 않고, 어디론가 자꾸 날아가 없어져 버리는 상태를 비유 (6)‘아가’=‘나비’       나비처럼 꿈과 순수와 이상을 가진 인간 정신을 상징 (7) 아가가 꿈속에서 본 것은 전쟁으로 인한 화약 냄새와 아비규환, 공포뿐이다. 인간의 이상 가치와 하나인 사랑이 여지없이 무너져 버린 그런 어두운 세계뿐이었다. 아가는 결국 공포의 독수리에 쫓기어 기진맥진하여 돌아온다. 그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좌절감을 느끼게 한다. (8) 나비가 아가로 대치되면서 아가의 눈을 통해 무시무시한 인간의 세계를 고발         부여읍의 북쪽에 부소산이 있고, 백마강은 그 산의 북쪽에서 서쪽을 돌아 남쪽으로 흘러 부여읍의 삼면을 휘감고 있다. 그 부소산의 서쪽 끝 백마강과 만나는 곳에 구드래 나루터가 있다. ‘구드래’라는 지명의 유래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현재 우리말에는 그 구체적인 용례가 남아 있지 않고 일본으로 건너가 ‘구다라’(くだら)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었다고 전한다. 이때 ‘구다라’는 ‘큰 나라’(대국 大國)이라는 뜻으로, 곧 ‘백제’(百濟)를 의미한다. 그 구드래 나루터 뒤 부소산 아래에는 조각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그 옆으로는 음식 거리가 펼쳐져 있어, 부여 군민들에겐 편안한 쉼터이자 부여를 찾는 여행객들에겐 좋은 관광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공원에는 전시되어 있는 조각품들 말고도 눈여겨볼 만한 비석들이 몇 있다. 미마지 사적 현창비와 ‘백마강’ 노래비, 그리고 일모 정한모 시비가 그것들이다. 최근에 그 공원 안에 부여 출신의 유명한 특정 정치인의 공적비가 세워져 있어 다소 아쉬운 장면이 없진 않지만, 부여를 여행하는 문화예술 애호가라면 한번쯤 들러볼 만하다.  오늘은 그 비석들 중에서 일모(一茅) 정한모(鄭漢模, 1923~1991) 시인의 시비를 둘러보는 것으로 시작해보자. 시인은 석성면 출신으로, 그곳의 생가에도 시비가 세워져 있다(그것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다루기로 한다). 그 시비의 전면에는 시인의 흉상과 대표 시 「새」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시인의 약력과 시비 건립에 관한 사항이 씌어 있다. 4연 17행의 시 「새」에서 새벽의 미명을 뚫고 날아오르는 새의 비상이 희망찬 미래에 대한 지향을 암시하고 있는데, 이 시는 가곡으로도 만들어져 불리고 있다고 한다. 시비에는 시의 말미에 창작 일자도 밝혀져 있다. 연보라빛 안개의 저편에서/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날으고 있는/ 한 마리/ 새여// 햇빛을 받아/ 金빛 날개를 반짝이며/ 하늘을 누비고// 어둠 속/ 가는 빛으로 線을 그으며/ 내 가슴에 울려오는/ 맑은 바람소리// 문득 눈뜨는 새벽/ 연보랏빛 새벽안개 저편에서/ 보일 듯 나타날 듯 날으고 있는/ 한 마리/ 새여! 74.4.11. 시인의 흉상은 생전 모습과 아주 흡사하여 그 분의 온기가 느껴질 정도다. 그러한 기분이 드는 것은 아마도 그 분과 필자의 각별한 인연 때문일 것이다. 그 분은 필자의 젊은 시절에 학문의 길로 인도해 주신 대학의 은사님이시다. 특히 대학원 시절 필자는 선생의 지도를 받아 한국현대시 연구에 입문할 수 있었다. 항상 넓은 품으로 자애롭게 제자들을 보듬어주시던 선생의 모습이 아직도 필자의 뇌리에 생생하다. 선생은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지냈으며 당시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도 시가 실렸을 만큼 유명한 시인이기도 하지만, 한국현대시 연구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대학자이기도 하였다.  또한 문화정책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원장 및 문화공보부 장관과 같은 행정 요직을 맡기도 하셨다. 그런 가운데 선생이 한국문학에 남기신 가장 큰 공적은 아무래도 문화공보부 장관으로 재직하시던 시절인 1988년 7월 19일에 단행된 ‘월북 문인의 작품 해금’일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남과 북 양쪽에서 잊혔던 문인 120여 명의 우수한 문학작품들의 출판을 허용한 것이다. 이로써 주로 사상적·이념적 이유로 금지되어 반쪽의 불구성을 면치 못했던 한국문학이 마침내 온전한 제 모습을 되찾는 기반이 조성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정지용·임화·백석·오장환·이용악 같은 시인들의 주옥같은 노래들을, 이기영·한설야·이태준·박태원·김남천 같은 소설가들의 곡진한 이야기들을 마음대로 자유롭게 읽고 듣고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은 선생의 이같은 용단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는 선생의 올곧고 넉넉한 역사인식과, 이념의 좁은 한계를 넘어서는 높은 정치의식·문화의식이 아니었으면 쉬이 결행되기 어려운 일이었으리라. 국문학자로서의 선생이 가슴깊이 품었을 민족사적 고뇌와 결단으로, 날아오르는 저 ‘새’의 비상처럼 문화한국의 금빛 미래를 향한 위대한 도정의 일보를 내딛게 한 저 업적만으로도 선생의 존재는 충분히 부여의 자랑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나비와 광장(廣場)     현기증 나는 활주로의 최후의 절정에서 흰나비는 돌진의 방향을 잊어버리고 피 묻은 육체의 파편들을 굽어본다.     기계처럼 작열한 심장을 축일 한 모금 샘물도 없는 허망한 광장에서 어린 나비의 안막(眼膜)을 차단하는 건 투명한 광선의 바다뿐이었기에――     진공의 해안에서처럼 과묵한 묘지 사이사이 숨가쁜 제트기의 백선(白線)과 이동하는 계절 속 불길처럼 일어나는 인광(燐光)의 조수에 밀려 이제 흰나비는 말없이 이즈러진 날개를 파닥거린다.     하얀 미래의 어느 지점에 아름다운 영토는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푸르른 활주로의 어느 지표에 화려한 희망은 피고 있는 것일까.     신(神)도 기적도 이미 승천하여 버린 지 오랜 유역(流域)―― 그 어느 마지막 종점을 향하여 흰나비는 또 한 번 스스로의 신화와 더불어 대결하여 본다.   김규동 (1955)   (1) 주제 : 전쟁으로 피폐화된 인간성 회복의 갈망   (2) 김규동(1925- )호는 문곡(文谷). 함북 종성 출생. ‘후반기’ 동인으로 50년대 모더니즘 시 운동을 주도하였다. 초기에는 전쟁을 주제로 하여 기계 문명과 자연을 대비한 감상적 색조의 시풍이었으나 70년대부터 분단의 현실을 시로 표현하는 민족 문학 작가로 변모하였다. (3) 갈래 : 주지시, 성격 : 지적, 문명 비판적, 상징적 (4) 흰 나비 비행기  6.25 전쟁 체험을 바탕으로 전쟁터로서의 상황적 분위기를 비판적으로 그려 내려 한 것이다. 비행기와 나비의 이미지의 선명한 대조를 통하여 현대 문명사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질서와 평화 회복을 작자의 휴머니즘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시 (5) 활주로, 피묻은 육체, 묘지, 제트기’- 전쟁의 상황 (6) 광장에서 - 기계는 현대 문명의 상징이고, 허망한 광장은 현대 문명의 삭막하고 무의미한 현장을 뜻한다. (7) 감각적인 소재와 색채의 이미지로 비정한 현실을 비판적으로 그려  내고 있다. 1950년대 모더니즘의 기반이 되는 ‘후반기’와 ‘신시론’ 동인들의 보편적인 경향으로, 당시의 시대 상황을 인식하는 지식인 작가들의 또 다른 현실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 ​============================================================   서울 명동성당 꼬스트홀에서 열린 '사형폐지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에서 장한모 시인의 손녀인 배우 정수영이 시낭송을 하고 있다. /이한석기자        [출처] 바다와 나비(김기림),나비의 여행(정한모),나비와 광장(김규동)|작성자 pinkdage  
351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이형기 - 폭포 댓글:  조회:4160  추천:0  2015-12-19
폭포(瀑布)이형기(李炯基, 1933∼2005 )   그대 아는가 └시인 나의 등판을 └산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시퍼런 칼자욱을 아는가. └폭포-아픔의 상처 ▶칼자욱 난 산     질주하는 전율과 └속도감 전율 끝에 단말마(斷末魔)를 꿈꾸는 └숨이 끊어질 때의 고통의 상태 벼랑의 직립(直立)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 ▶벼랑이 있는 산     그대 아는가 석탄기(石炭紀)의 종말을 그 때 하늘 높이 날으던 한 마리 장수잠자리의 추락(墜落)을. └쏟아져 내리는 폭포. 날고자 하는 욕망 ▶떨어지는 폭포     나의 자랑은 자멸(自滅)이다. └폭포의 심상 무수한 복안(複眼)들이 그 무수한 수정체(水晶體)가 한꺼번에 박살나는 맹목(盲目)의 눈보라 ▶부딪히는 폭포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퍼런 빛줄기 2억 년 묵은 이 칼자욱을 아는가. ▶칼자욱 난 산 - (1963)     [어구풀이] 등판 : 등, 샘명체의 배의 반대쪽 내리친 : 위에서 아래로 내려친 단말마(斷末魔) : 숨이 끊어질 때의 마지막 힘을 쓰는 정황을 이르는 말 복안(複眼) : 눈이 여러 개 모여서 이루어진 눈 맹목(盲目) : 사리에 어두운 눈, 또는 그러한 안목 나의 등판 : 여기서 '나'는 산을 가리킨다. 즉 산 자신의 한 부분을 등판으로 표현했다. 의인법적 표현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칼자욱 : 산의 한부분에서 쏟아져 내리는 폭포의 모습. 날카롭고 섬뜩한 느낌의 표현(폭포는 산에게 고통을 주는 존재). 존재의 고통을 감각화시켜 표현함으로써, 인간 내면의 비극성을 느끼게 해주고자 한 것. 시퍼런 칼자욱 : 산의 한 부분에 쏟아져 내리는 폭포의 모습이 은유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질주하는 전율 : 무시무시한 속도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표현이다 한 마리 장수잠자리의 추락을 : 벼랑을 타고 쏟아져 내리는 폭포의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다. 추락할 수밖에 없는 실존적 한계를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또다시 하늘 높이 날고자 하는 인간 존재의 비극적 모습 나의 자랑은 자멸(自滅)이다 : 산 스스로 품고 있는 폭포의 하강을 자멸이라는 비극적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맹목(盲目)의 눈보라 : 바위에 부딪쳐 떨어지는 폭포의 무수한 물보라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구절. 현실적 고통으로 인해 끝없이 절망하는 실존적 존재인 인간 삶의 투영. 아무런 목적도 없이 떨어지는 폭포의 이미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폭포수의 떨어짐을 자연 현상 그 자체로 이해할 때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의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2억 년 묵은 칼자욱 : 삶의 역정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은 고통의 멍에. 폭포는 산에게 있어 오래된 상처이자 고통이다.(존재에 대한 시인의 비극적 인식)     [핵심정리] 갈래 : 서정시, 자유시, 관념시 운율 : 내재율 어조 : 인간 존재의 한계를 노래하는 관념적인 어조 성격 : 관념적, 주지적, 실존적 표현 : ① 정교한 언어구사를 통한 존재의 비극적 상황에 대한 인식을 보여줌. ② 수미상관의 구조로 안정감을 획득함 ③ 자연적 소재를 관념화하여 표현함 ④ 사람이 아닌 자연이 주체가 되어 시상이 전개됨 제재 : 폭포 주제 : 인간으로서 느끼게 되는 실존적 한계 출전 : (1963)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6, 70년대의 민중·참여 시인으로 손꼽히는 김수영의 폭포라는 시처럼 물이 위에서 곧장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를 소재로 시상을 발흥시키고 있다. 김수영의 폭포와 이 작품은 폭포를 시적 착상의 대상으로 하고 또 구체적인 자연물을 통해 관념의 세계를 표상하였다는 점에서 비슷한 성향을 지닌다. 그러나 작품 세계는 사뭇 다른데 작가가 이 작품에 내면화시키려고 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모습이다.   이 시는 산과 폭포라는 자연물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그것을 통해 순수한 서정의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 산의 절벽을 타고 내리는 폭포의 존재를 칼자욱이라는 섬뜩한 고통의 이미지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통의 이미지가 산 자신이 주체가 되어 구체화되고 있다. 이러한 사물 인식은 비극적이기조차 하다. 자연이 자연 자체로의 아름다움으로만 묘사되어 있지 않을 이 시를 통해 경험하게 된다. 자연은 우리 시에 있어서의 전통적 소재라 할 수 있다. 고전 작품 속에서의 자연은 인간에게 위안과 휴식을 제공하는 긍정적 존재로 등장한다. 또한 있는 그대로 아름답게 묘사되는 대상이다. 그러나 이 시의 자연 인식은 전통적 인식과는 상이하다.   그리고, 서정시는 대상을 파악하는 어느 한 순간의 가장 강렬하고 고양된 마음의 상태를 본질로 한다. 이 작품의 대상으로 채택된 폭포는 산의 깎아지른 벼랑을 타고 내리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 대상은 단지 자연적인 소재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관념적인 이미지를 투사(投射)시킨 형상물이다. 이 시의 발화 주체인 '나'는 시인이 아닌 '산'이며, 오히려 시인은 그 상대역으로서 청자인 '그대'가 되고 있다. 벼랑을 가로질러 내리친 칼자욱의 모습은 주체인 '산'의 입장에서 보면 지울 수 없는 고통의 멍에가 되며, 여기서 시인은 삶의 일상에서 느끼는 존재의 비극적인 상황에 대한 인식이라는 관념을 떠올리게 된다.   산 자체가 시적 화자가 되어 고통을 지니고 있는 존재로 자신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고 보았는데, 1연에서 '그대'는 사람이고 '나'는 산인 것이다. 자신의 몸에 칼자욱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2연에서는 섬뜩한 속도감과 벼랑을 타고 내리는 폭포의 모습이 장수잠자리로 묘사되어 드러나고 있다. 4연에서는 떨어지는 폭포의 시퍼런 물줄기가 자신에게는 아주 오래된 상처라고 절규하고 있다. 이는 존재에 대한 시인의 비극적 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교한 언어 구사를 통해 일상적 삶에서 느끼는 존재의 비극적인 상황에 대한 인식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이 시의 대상인 '폭포'는 산의 깎아지른 벼랑을 타고 흘러 내리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폭포'는 단순히 자연적 소재가 아니라, 시인의 뛰어난 상상력에 의해 관념적인 이미지를 투사(投射)시킨 형상물이다. 또한, 이 시의 발화 주체인 '나'는 시인 자신이 아닌 '산'이며, 시인은 그 상대역으로서의 청자인 '그대'가 되어 있다.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 시퍼런 칼자욱'의 모습은 주체인 '산'의 입장에서 보면, 지울 수 없는 고통의 멍에이며, 연속된 '벼랑의 직립'에서 '박살나는 맹목의 눈보라'를 피우며 떨어지는 폭포의 모습은 현실적 고통으로 인해 끝없이 절망하는 실존적 존재인 인간 삶의 투영이다. 추락할 수밖에 없는 실존적 한계를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또다시 '하늘 높이 날'고자 하는 인간 존재의 비극적 모습이 미약한 '장수잠자리'를 통해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 시는 인간적 삶이 거세된 암담한 현실 속에서, 진실된 양심의 소리를 세차게 토해 내는 '깨어 있는 자'의 모습으로 형상화된 김수영의 와는 전혀 다른 '폭포'의 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결국 이 시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느끼게 되는 존재론적인 한계와 그 비극성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시는 형식적으로 시의 발화 주체인 '나'가 시인 본인이 아니라 산으로 설정되어 있고 시인은 그 상대이면서 청자인 '그대'로 설정되어 있다. 시인은 폭포라는 외부의 대상을 묘사하면서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즉 이 시에서 폭포는 고도의 추상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낙  화                                             -이형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시를 보시니 쫌 익숙한 시인거 같지 않으세요? 교과서에서 한번쯤 봤을 법한 시인데요 오늘은 '낙화'라는 시를 지은 시인 이형기, 시인 이형기를 기리기 위해 매년 진주에서 개최되는 이형기문학제를 소개할까 합니다.   ▲이형기시인 이형기 시인은 1933년 6월 6일 진주 출생으로 6 ·25 전쟁이 끝난 뒤 신문 기자로 활동하다 『연합신문』, 『동양통신』, 『서울신문』 기자 및 『대한일보』 문화부장 등을 역임하고 모교인 동국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이형기 시인은 16살 때 한국 최초 예술제인 제1회 영남예술제(지금의 개천예술제) 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했고 , 서정주 시인과 모윤숙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했습니다. 첫 시집 『적막강산』(1963)을 시작으로 『돌베개의 시』(1971), 『풍선심장』(1981), 『알시몬의 배』(1995), 『절벽』(1998), 『존재하지 않는 나무』(2000) 등과 평론집 『감성의 논리』(1978), 『한국문학의 반성』(1980) 등 300여편의 시를 남겼습니다. 그중에서도 낙화는 첫시집인 적막강산에 수록된 시로 이형기의 대표 시로 손꼽힙니다. 이형기 시인은 2005. 2. 2일에 생을 마감하셨는데 그의 시는 초기에는 삶과 인생을 긍정하고 자연섭리에 순응하는 서정시를 주로 썼다면, 후기에는 허무에 기초한 관념을 중심으로 날카로운 감각과 격정적 표현이 돋보이는 시를 발표하였습니다.     ▲진주 신안동 녹지공원에 있는 이형기 시비 이형기시인을 기리기 위해 진주에서는 매년 이형기문학제를 개최...
  성북동 비둘기   김광섭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성북도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김광섭 / 1905. 9. 22 함북 경성~ 1977. 5. 23 서울. 시인·언론인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고뇌와 민족의식을 관념적으로 읊다가 차츰 구체적인 현실을 노래했다. 시어가 풍부하고 다양하다. 본관은 전주. 호는 이산(怡山). 김광섭   아버지 인준(寅濬)의 3남 3녀 가운데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1911년 가산이 기울자 온 가족이 북간도로 이주했다가 1년 만에 돌아왔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1915년 경성보통학교에 입학, 1920년 졸업했다. 1919년 이학순과 결혼했다. 1920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한 후, 중동학교에 들어가 1924년 졸업했다. 다음해 일본으로 건너가 나라의대[奈良醫大]에 지원했으나 색맹으로 불합격, 와세다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했다. 이때 이헌구·정인섭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해외문학연구회에 참여했다. 1932년 대학을 졸업한 뒤 귀국, 1933년 모교인 중동학교 영어 교사로 근무했다. 극예술연구회에 참가하여 서항석·함대훈·모윤숙·노천명 등과 사귀었다. 1941년 2월 창씨개명을 공공연히 반대하는 등 반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는 이유로 3년 8개월 동안 옥살이했다. 해방 후에는 민족주의 문학을 건설하기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는 데 참여했다. 1945년 중앙문화협회를 창립했고, 1946년 전조선문필가협회 총무부장, 1948년 이승만 대통령 공보비서관, 1956년 자유문학가협회 위원장을 지냈다. 1957년 자유문학사를 세워 〈자유문학〉을 창간했으며, 1958년 세계일보사 사장이 되었다. 1959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1952~70년 경희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1964년 〈자유문학〉이 운영난으로 무기정간되자 그 충격으로 고혈압 증세를 보였다. 이듬해 서울운동장에서 야구경기를 관람하던 중 졸도,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하다가 72세 사망. 1989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이산문학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다.         성북동 비둘기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 삶의 터전을 상실한 비둘기(자연 환경의 파괴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음)     성북동 ㉦메마른 산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 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 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 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 문명에 쫓기는 비둘기(이리저리 쫓겨다니며 옛날을 그리워하는 초라한 신세)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 사랑과 평화를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   (자연과 사람을 잃고 사랑과 평화까지 낳지 못하는 새가 됨)   김광섭(1968.11) p57   (1) 주제 : 자연 파괴와 인간성 상실의 비판과            자연에 대한 현대인의 향수    배경 : 1960년대 말 우리 사회가 산업화· 도시화되던 시대 (2) 김광섭(1905-1977) 시인. 호 이산(怡山). 함북 경성 출생. 초기에는 고독과 불안이라는 허무 의식을 노래하였고, 이후 생활적인 소재를 인간애로 노래하였다. 대표작으로 ‘동경’, ‘마음’, ‘성북동 비둘기’ 등이 있다.   (3) 상징시, 모더니즘 계열의 시 (4) 성격 - 비판적, 풍자적, 우의적    어조 - 비판적, 냉소적 어조    표현 - 비둘기를 의인화, 묘사와 서술을 혼합   (4)  ㉠성북동 산- 자연 ㉡번지 - 삶의 터전, 비둘기에게는 자연 그대로의 삶의 터전                   사람들에게는 자연을 도시화시킨 삶의 터전 번지가 생김 - 사람들이 살기 시작함 번지가 없어짐 - 비둘기가 살 터전, 자연이 사라짐 ㉢돌 깨는 산울림 - 자연 파괴의 소리, ㉣금 - 자연 파괴로 인한 아픔   금이 갔다 - 중의적 표현, 비둘기의 아픔               현대인의 가슴에 따뜻함과 인정이 사라짐 ㉤성북동 비둘기 - 산업화로 삶의 터전을 상실한 도시의 소시민         관습적 상징(평화)으로서의 의미를 넘어서서         개인의 창조적 상징으로 표현함, 현대 문명의 불모성에 대립되는 자연, 혹은 순수, 사랑을 상징 ㉥축복의 메시지 - 내용은 사랑과 평화 ㉦메마른 산골짜기 - 메마른 현실, 도시화된 공간 ㉧널찍한 마당 - 비둘기의 삶의 터전 ㉨채석장 - 현대 문명의 파괴적인 성격과 불모성을 상징하는 시어 ㉩포성 - 자연 파괴의 소리, ㉪피난하듯 - 터전을 잃은 비둘기의 처지            산업화, 도시화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은 소시민의 처지 ㉫향수 - 핵심어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 파괴전의 자연, 삶의 터전에 대해 그리워함 ㉭쫓기는 새 - 새와 인간은 공존의 관계를 지녔으나 인간에 의해 그 공존이 깨어짐   (5)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 현대 문명은 자연을 파괴시키고 인간마저도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변화시켰다는 인식을 내포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정서가 메마른 인간은 사랑과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를 보고도 더 이상 사랑과 평화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6) 문명 비판적인 태도를 보여 준다. 자연을 의인화하여 인간을 비판하고 있다. 사랑과 평화에 대한 열망을 보여 준다. 사라져 가는 자연에 대한 애정을 보여 준다. (7) 모더니즘 계열의 시 - 현대문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8) 화자가 지향하는 세계관    -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며 사랑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바람 (9) 시인의 의도 - 현대 문명에 대한 야유나 비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물질문명 시대에 자연의 소중함과 사랑, 평화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데 있다.         생의 감각     ㉠여명의 종이 울린다.   새벽별이 반짝이고 사람들이 같이 산다.   닭이 운다. 개가 짖는다.   오는 사람이 있고 가는 사람이 있다.     오는 사람이 ㉡내게로 오고   가는 사람이 다 내게서 간다.     아픔에 하늘이 무너졌다.   깨진 하늘이 아물 때에도   가슴에 뼈가 서지 못해서   푸른 빛은 장마에   넘쳐 흐르는 흐린 강물 위에 떠서 황야에 갔다.     나는 무너지는 둑에 혼자 섰다.   기슭에는 ㉢채송화가 무더기로 피어서   ㉣생의 감각을 흔들어 주었다. 김광섭(1967)   (1) 주제 : 생명의 신비로운 부활   (2) 시작(詩作) 배경 : 이 시는 1965년 고혈압으로 쓰러져 1주일간 사경을 헤매다 무의식 혼돈세계에서 다시 소생한, 내적 생명의 체험을 구상화한 작품으로서, 절망, 고통으로 이어진 참담한 투병생활 끝에 새롭게 피어난 생의 감각과 의지를 표현한 시이다.   (3) ㉠ 여명 - 부활의 시간적 출발점.  여명은 ‘날이 샐 무렵’ 즉, 밤으로부터 아침으로 연결되는 과도기적 시간으로, 밤의 절망에서 아침의 희망에로의 전이를 상징한다.   (4) 죽음 ----> 생(生)  ‘살아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가장 먼저 깨닫는가? (감각이다.) (5) 1연에서는 ‘살아있음’을 청각과 시각의 감각으로 느끼고 있다. * 종이 울린다(청각)/ * 별이 반짝인다(시각)/ * 닭이 운다(청각)/ * 개가 짖는다(청각)/ * 오고 가는 사람들(시각)   (6) ㉡ 내게서, 내게로 - 존재의 중심이 ‘나’임. 내가 존재함으로써 비로소 삶의 세계가 의미가 있음을 깨달음.   (7) A: '아픔/장마/흐린 강물', B: '하늘이 무너짐/하늘이 깨짐'과 같은 시어들이 등장한다. A와 B의 시어들이 각각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A : 병고의 체험(고통, 시련) B : 절망의 체험   (8) 3연 - 절망의 체험 * 아픔에 하늘이 무너졌다. - 육체적 고통까지 겹친 캄캄한 절망 의식 * 깨진 하늘 - 절망 * 흐린 강물 - 저승으로 흐르는 길   * 뼈 - 의지 * 푸른 빛 - 희망   (9) ‘채송화’의 의미 : 소생과 부활의 생명 의식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시어   (10) ‘흔들어 주었다’ = 일깨워 주었다. 채송화(희망과 부활, 생의 의지)가 나의 생의 감각을 일깨워 주었다.             마음/김광섭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가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리하여,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 위에 뜨고 숲은 말없이 물결을 재우나니     행여 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1939년 [문장]에 발표된 시이다.  이 시는 곱고 부드러운 격조와 적절한 은유로 아름다운 언어의 조화를 이룬다. 은유와 상징이 잘 구사되어 세련미와 함께 지적 관조도 보인다. 자기의 마음을 고요한 물결에 비유하여, 심리적 갈등과 함께 파문을 일으키기 쉬운 마음을 지키려는 경건한 자세를 잘 드러내고 있다. 초기 작품에 속하는 이 시는 자기의 꿈을 잃지 않고 '밤마다 덮음'으로써 시인 자신이 견지하고 있는 지적 관조를 곱게 다루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시 목록, 인터넷) ​ * 김광섭 시인의 말이다.  " 마음은 간단히 말하자면 '느낌'이다. (중략) 물욕을 버리자는 것이 내 일생의 양심이었다. 일생동안 나에게 변하지 않는 진리는 이 한 가지 뿐이다. 물욕을 버리고 내 마음을 순수하게 지키는 것이 이 풍파많은 세상에 나를 오래 살게 한데 대한 보은(報恩)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만큼 이 시 '마음'은 내게 중요한 작품이다 " ​ * ​김흥규의  ​  '물'이라는 사물을 통해 마음의 민감한 흔들림과, 그 평온함에 대한 소망을 노래한다. 그러나 그의 소망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과 일이 있어서 마음의 평화를 끊임없이 흔들어 놓기 때문이다. 둘째 연에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마음의 평화에 충격을 주어 깨뜨리는 사람(돌을 던지는 사람), 어떤 현실적 이득을 취하고자 접근하는 사람(고기를 낚는 사람), 그리고 고요함을 어지럽게 하는 사람(노래를 부르는 사람) 등이 그들이다. 작중 화자는 이러한 사람들과의 얽힘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리하여 그는 고요히 자신의 내면 세계에 고립되어 침잠하는 길을 택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별, 숲'은 앞에 등장한 방해자들과 달리 그의 평화를 돕고 지켜주는 자연의 사물들이다. 이 작품에 암시된 바에 의하건대, 세속적 욕망과 이해관계에 사로잡힌 인간들은 마음의 평화를 어지럽히기만 할 따름이며, 사람은 오직 자연 속에서 마음의 고요함을 지킬 수 있다.  그리하여 그는 밤마다 아무도 모르게 그의 꿈을 덮어서 고이 간직한다. 이처럼 하는 이유는 `백조'가 오는 날 그를 맞이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백조'가 어떤 의미를 가진 은유인가를 단정하여 말하기는 어렵다. 바람직한 것은 억지로 의미를 따지기보다 백조의 모습을 상상함으로써 그 분위기와 느낌을 파악하는 일이다. 한번 상상해 보자. 고요한 물결 위에 흰 백조가 고요히 떠온다. 그 얼마나 고고하고 순백하며 평화로운 모습인가? 이러한 모습의 백조는 이 작품에서 어떤 드높은 순결과 평화의 경지를 상징한다. 그것이 이 시에 나타난 시인의 간절한 소망이다. 현실의 어려운 굽이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그런 세계를 찾아 떠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때때로 이와 같은 경지를 소망하여 잠시 황홀한 도취의 상태에 잠기기도 한다. ​   ​ ​ ◈ 시인/김광섭 ​ 꽃은 피는 대로 보고 사랑은 주신 대로 부르다가 세상에 가득한 물건조차 한 아름팍 안아 보지 못해서 전신을 다 담아도 한 편(篇)에 二천원 아니면 三천원 가치와 값이 다르건만 더 손을 내밀지 못하는 천직(天職) ​   늙어서까지 아껴서 어릿궂은 눈물의 사랑을 노래하는 젊음에서 늙음까지 장거리의 고독 컬컬하면 술 한잔 더 마시고 터덜터덜 가는 사람 ​   신이 안 나면 보는 척도 안 하다가 쌀알만한 빛이라도 영원처럼 품고 ​   나무와 같이 서면 나무가 되고 돌과 같이 앉으면 돌이 되고 흐르는 냇물에 흘러서 자국은 있는데 타는 노을에 가고 없다   ​ ​ '시인은 어떤 사람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고 있는데, 화자는 시인이란 물질적인 이익이 아니라 아름다움과 삶의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임을 밝히고 있다. (현대시 작품, 인터넷) ​ ◈ 해바라기/김광섭 ​ ​바람결보다 더 부드러운 은빛 날리는 가을 하늘 현란한 광채가 흘러 양양(洋洋)한 대기에 바다의 무늬가 인다 한 마음에 담을 수 없는 천지의 감동 속에 찬연히 피어난 백일(白日)의 환상을 따라 달음치는 하루의 분방한 정념에 헌신된 모습 생의 근원을 향한 아폴로의 호탕한 눈동자같이 황색 꽃잎 금빛 가루로 겹겹이 단장한 아! 의욕의 씨 원광(圓光)에 묻힌 듯 향기에 익어 가니 한줄기로 지향한 높다란 꼭대기의 환희에서 순간마다 이룩하는 태양의 축복을 받는 자 늠름한 잎사귀들 경이를 담아 들고 찬양한다       ​ 해바라기가 피어나는 자연의 배경 속에서 자연의 아름다운 현상과 함께 어우러져 생명에 대한 강한 의욕을 느끼게 한다. 순수 자연의 감각을 시각적 이미지로 잘 표현하고 있다.  파란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떠 있는 해와 그런 해를 바라보고 있는 해바라기를 시인은 감정에 따라 일어나는, 억누르기 어려운 생각인 정념에 헌신하는 모습으로 보고 있으며, 그리고 해바라기의 모습이 태양을 찬양하는 해바라기의 강인하고 정열적인 모습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도 태양신인 아폴로(일부에서는헬리오스라고도 함)가 날마다 전차를 몰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하늘을 가로질렀으며, 밤에는 거대한 컵을 타고 북쪽으로 흐르는 대양의 해류를 따라 항해한 것 같은 모습으로 표현했다.  전체적으로 이 작품은 해바라기를 보고 느낀 서정적 화자의 서정이 집중적으로 노래되었다기보다는 그것을 주지적으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이미지가 전개된 일종의 주지시라고 할 수 있다. 표현 감각이 통일성을 부분적으로 결여한 데다 이미지 전개에 다소 혼선을 보이고 현학적인 수사를 많이 쓴 것도 이러한 주지적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 전체적으로 볼 때 해바라기의 인상을 화사하고 정열적인 성격으로 빠짐없이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시 작품) ===================================     저녁에/김광섭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서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서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69년 [월간중앙]에 발표된 작품으로 1975년 김광섭의 시집 [겨울날]에 실려 있다.   이산(怡山) 김광섭(金光燮)은 오염되어 가는 지상의 문명을 고발한「성북동 비둘기」의 시인이면서도 동시에 천상의 별을 노래한「저녁에」의 시인이기도 하다. 지상과 천상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시의 세계에서는 한 울타리 속에 있다. 인간은 땅위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 존재인 까닭이다.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는 것을 영어로 컨시더(consider)라고 하지만 원래의 뜻은「별을 바라다본다」라는 말이다.   옛날 사람들은 실제의 바다든 삶의 바다든 별을 보고 건너갔다. 점성술과 항해술은 근본적으로 하나였던 것이다. 인간의 이성과 과학(천문학)이 지배하는 시대에도「이 세상에서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은 밤하늘의 별이요, 마음 속의 시(도덕률)」라는 칸트의 경이(驚異)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저녁이 되어서야, 그러니까 어둠이 와야 비로소 그 정체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로 시작되는 그 시제(詩題)가「저녁에」로 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시의 의미를 더 깊이 따져 들어가면 알 수 있겠지만, 엄격하게 말해서「저녁에」의 시를 이끌어 가는 언술은「별」(천상)도「나」(지상)도 아니다.「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라는 언술의 주체는「나」가 아니라「별」이다. 나는「보다」의 목적어로 별의 피사체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그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의 다음 시구에서는 지상의 사람이, 그리고「나」가 언술의 주체로 바뀌어 있다. 시점이 하나가 아니라 병렬적으로 복합되어 있기 때문에 하늘과 땅, 별과 사람, 그리고「내려다 보다」와 「쳐다보다」가 완벽한 대구를 이루며 동시적으로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림과는 달리 언어로 표현할 때는 불가피하게 말을 순차적으로 배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때문에 자연히 그 순위가 생겨나게 마련이다.「저녁에」의 경우도「별」이「나」보다 먼저 나와 있다. 즉 별이 먼저 나를 내려다 본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시선에 있어서 나는 수동적이다. 첫행의 경우 시점과 발신자가 별쪽으로 기울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시점의 거리를 결정하는「이」,「그」,「저」의 지시 대명사를 보면 별의 경우에는「저렇게 많은 것」이라고 되어 있고, 사람의 경우는「이렇게 많은 사람」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시점 거리가「저렇게(별)」보다「이렇게(사람)」가 훨씬 더 가깝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사르트르처럼 본다는 것은 대상을 지배하고 정복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남을 보고 남이 나를 본다는 것은 끝이 없는 격렬한 싸움인 것이며, 인간의 삶과 존재란 결국 이러한 눈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유명한 명제「타자(他子)는 지옥」이란 말이 태어나게 된다.   그런데 별이 나를 내려다보고 내가 별을 쳐다보는 그 시선이 그러한 눈싸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정반대로 정다운 것이 되는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저렇게 많은 별중에」라고 불렸던 별이 나중에 오면「이렇게 정다운 별 하나」로 바뀌는 그 의미는 무엇인가.   저렇게에서 이렇게로 변화하게 만든 그 시점은 누구의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답하는 것이「저녁에」라는 시 읽기의 버팀목이라 할 수 있다.   답안을 퀴즈 문제처럼 질질 끌 것이 아니라 직설적으로 펼쳐보면 그것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 이 시의 제목처럼「저녁」이라는 그 시간이다. 별이 나를 내려다본 것이나 내가 별을 쳐다본 것이나 그 이전에 저녁이 먼저 있었다. 저녁이 없었다면, 어둠이라는 그 시간이 오지 않았으면, 내려다보는 것도 쳐다보는 것도 모두 불가능해진다.   저녁이란 어둠의 시작이 운명처럼 나와 별을 함께 맺어주고 끌어안는다. 그리고 그 저녁이라는 한 순간의 시간 속에서 우연처럼 별 하나와 나 하나가 만난다. 이러한 우연, 그러나 절대적인 운명과도 같은 이 마주보기를 가능케 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이차원(異次元)과 그 절대 거리를 소멸시키는 저녁인 것이다. 저녁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잉태하고 있는 인간의 삶 그것처럼 어둠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그래서 저녁은 정다운「너 하나 나 하나」의 관계를 탄생시키는 시간이지만 동시에 그것들의 사라짐을 예고하는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저녁은 밤이 되고 새벽이 되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을 지닌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라는 둘째 연의 시구이다. 만남은 곧 헤어짐이라는 회자정리(會者定離)의 그 진부한 주제가 여전히 이 시에서 시효를 상실하지 않고 우리 가슴을 치는 것은 그것이 시적 패러독스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에서 볼 수 있듯이 빛과 어둠의 정반대 되는 것이 그 사라짐의 명제 속에 교차되어 있다. 그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이면서도 사라지는 시간과 장소는 빛과 어둠이라는 합칠 수 없는 모순 속에 존재한다. 저녁의 시간이 빛과 어둠으로 다시 분리될 때 나와 별은 사라진다. 이것이 슬프고 아름다운 별의 패러독스이다.   그러나 김광섭은 한국의 시인인 것이다. 사람들은 멀고 먼 하늘에 자신의 별을 하나씩 가지고 살아오고 있다고 믿는 한국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학교에서 천문학의 별을 배우기 전에 멍석 위에서 별 하나 나하나를 외우던 한국의 어린이였다. 그러기 때문에 별의 패러독스는「타자(他子)는 지옥이다」가 아니라「타자(他子)는 정(情)이다」로 변한다. 그리고 그 한국인은 윤회의 길고 긴 시간의 순환 속에서 다시 만나는 또 하나의 저녁을 기다린다.   그것이 한국인의 가슴속에 그렇게도 오래오래 남아있는「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마지막 그 시구이다. 그 시구가 화가와 만나면 한 폭의 그림이 되고, 극작가와 만나면 한편의 드라마가, 그리고 춤추는 무희와 만나면 노래와 춤이 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과 만나서는「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의 만남이 된다. 저렇게 많은 별 중의 하나와 마주보듯이 박모(薄暮)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지상의 별 하나와 만난다. 누가 먼저이고 누가 나중인지도 모르는 운명의 만남을…….   그리고 그렇게나 먼 빛과 어둠의 두 세계로 사라진다해도 우리는「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시구를 잊지 않는다. 비록 그것이「만나랴」라는 의문형으로 끝나있지만 그러한 시적 상상력이 존재하는 한「정다운 너 하나 나하나」의 관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하늘과 땅의 몇 광년의 먼 거리를 소멸시키고 영원히 마주 보는 시선을 어떤 시간도 멸하지 못한다.   별이 나를 내려다보고 내가 별을 쳐다보는 수직적 공간, 그리고 그것을 에워싸는 저녁의 시간……. 그 순간의 만남을 영원한 순환의 시선으로 바꿔주는 것이야말로 시가 맡은 소중한 임무 가운데 하나이다. (이어령/교수) ​ * 인간의 존재성에 대한 성찰을 통해 인생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에 이르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그린 작품이다. 시의 형식은 전3연 11행으로 이루어진 자유시이고, 내용은 별을 시의 제재로 삼아 관조적·사색적 어조로 인간의 숙명적인 고독과 운명을 노래한 상징적 성격의 서정시이다. 제1연에서는 어둠 속에서 빛나기 시작하는 밝은 별들과 그에 대조되는 인간현실의 고뇌를 '저렇게 많은 중에서의 별 하나'와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나 하나'로 대응시켜 노래하여 인간의 절대고독감을 강조하였다.   제2연에서는 밝음 속으로 사라지는 별과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나를 통해 '별'로 대표되는 자연과 '나'로 대표되는 인간의 영원히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을 강조하였다. 별과 나의 거리감은 물질문명의 발달로 인해 갈수록 심해지는 인간관계의 단절감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며, 동시에 군중 속의 고독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숙명을 노래한 것으로 풀이된다.   제3연에서는 인간을 유한한 존재로 보는 시인의 생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을 엿볼 수 있다. 시인은 빛과 어둠이라는 정반대의 모순 속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는 존재의 만남을 통해 이별을 노래하고자 한다. 특히 불교적 인연관과 윤회사상을 느끼게 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구절에서 시인은 점점 물신화되어가는 각박한 인간사회라 하더라도 살아갈 희망과 가치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재회의 기대감으로 표현하였다.   이 시는 생명 자체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노래한 김광섭의 후기작품으로 화려한 시적 수사를 절제해 한폭의 수묵화와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물질문명으로 인해 인간적인 따뜻함과 진솔함을 상실해가는 현대인들의 고독한 모습을 '별'과 '나'의 대조를 통해 존재론적 차원으로 승화시켜 형상화한 수작으로 평가된다. 1970년 서양화가 김환기(金煥基)는 이 시의 마지막 구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화제(畵題)로 대작을 그렸으며, 이 시에 곡을 붙인 대중가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만들어져 애창되기도 했다. (두산백과)   * '별'과 '나'는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면서 위안을 삼고, 그 위안 속에서 새로운 삶을 계속해 가는 인간사의 일반적 원리를 보여 준다. 아울러 시적 화자인 '나'는 이런 진리를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도 발견하고 있다. 자연과 이에 의존하며 살았던 인간들은 현대의 물질문명 속에서 점점 서로 멀어져만 간다. 하나는 밝음 속으로, 하나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간다. 그러나 이 시의 화자는 이런 현대인의 생활 속에서 또 다른 평범한 진리를 찾아내고, 이를 계기로 새로운 미래를 기약하는 깨달음에 도달하고 있다. 즉 바라보며 사라지는 존재들 사이에서 정다움을 찾아내고 있다. 그리고 이 정다운 이별은 언제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든지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한권에 잡히는 현대시) ​ ​♣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유심초           * 조선일보 2014년 1월 7일 덕성여대 김현숙교수의 글이다.   "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수화 김환기(金煥基·1913~1974)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1970년에 열린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이자 뉴욕시대 점화(點畵)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김환기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환기미술관에서 개최한 기념전 1부의 제목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인 것만 봐도 이 그림의 위상과 상징성을 어렵지 않게 가늠할 수 있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화가는 두고 온 고국의 산천과 벗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김광섭의 시 '저녁에'를 하루 종일 되뇌며 점을 찍었다고 하는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그 시의 마지막 구절이다. '환기 블루'라 불리곤 하는 푸른빛이 어딘지 모르게 온화하면서도 애틋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화가가 고국의 산천과 벗들을 목 놓아 그리워하면서 점을 찍었기 때문일 것이다. 환기의 푸른색 추상화에서 온기가 느껴진다고 한다면 수긍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바로 앞 구절이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임을 상기한다면 이해가 될지도 모르겠다."       * 인연을 만드는 대장간 (구활/수필가, 매일신문 '구활의 고향 맛')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그림은 애절하고 그리운 정이 화폭 속에 알알이 박혀있다. 화가의 고향은 목포 앞바다의 안좌도라는 섬이다. 그는 어릴 적 바다를 보며 자랐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란 그림은 뉴욕 생활에 권태가 깃들 무렵 김광섭 시인이 소포로 부쳐준 ‘저녁에’란 시를 읽고 그걸 소재로 그린 것이다. 시 한 편이 까맣게 잊고 있었던 고향을 떠올려 준 것이다. 그는 큰 캔버스를 끄집어내 점을 찍고 그 속에 바다를 그려 넣었다. 화가는 하루 16시간씩 작업하면서 출렁이는 파도와 별빛과 달빛을 투사시켰다. 그 외에도 보고 싶은 고향 산천과 눈 감으면 떠오르는 얼굴들을 그려 넣었다.   화가의 아내는 재혼으로 얻은 김향안이다. 그녀는 시인 이상의 아내였다. 경기고녀와 이화여전 영문과를 다닌 신여성 중에서도 뛰어난 재원이었다. 스무 살 때 여섯 살 많은 이상과 결혼했으나 이상은 4개월 만에 요절하고 말았다. “결혼 4개월 동안 낮과 밤이 없이 즐긴 밀월은 월광(月光)으로 기억할 뿐”이라며 이상을 추억하곤 했다.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이었고, 김향안의 본 이름은 변동림이었다. 딸 셋을 둔 김환기와 결혼하면서 변동림이란 이름을 버린 것이다. 변동림은 화가 구본웅의 계모인 변동숙의 배다른 동생이다. 시인과 화가는 한 여인을 사이에 둔 두 남편들이다. 자매의 남편들을 동서라 부른다. 그러고 보니 변동림의 남편 이상과 김향안의 남편 김환기도 동서지간이라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서두에 ‘두 그림 사이에는 깊은 강이 흐른다’고 말한 저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번 덕수궁 100선 전에서 두 그림의 배치가 어찌 되었는지 사실은 그게 궁금했다. 대작과 소품이란 크기의 차이 때문에 가까이 붙어 있지는 못했겠지만 마주 서서 째려보거나 혀를 껄껄 차지는 않았을 것 같다. 왜냐면 동서지간이니까,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중략)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김광섭의 시 ‘저녁에’)   화가 구본웅은 이상에게 ‘친구의 초상’을 그려 주었다. 시인 김광섭은 친구인 김환기에게 ‘저녁에’란 시를 써 주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란 명화를 낳게 했다. 이상의 아내 변동림은 요절한 시인의 임종을 지켰으며, 김환기의 아내 김향안도 남편의 임종을 지킨 후 미술관을 지어 주었다.                                                                       * 1905년 함북 경성군 어대진 출생, 호는 이산(怡山). * 1917년 경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 * 1920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중동학교로 옮겨 1924년에 졸업했다. * 1926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하였다. * 1932년 대학졸업 후 귀국하여 * 1933년 모교인 중동학교의 영어교사가 되었다. * 1933년 [삼천리(三千里)]에 <현대영길리시단 (現代英吉利詩壇)>을 번역, 발표했고, 같은 해 시 <개 있는 풍경>, [신동아]에 평론 <문단 빈곤과 문인의 생활>을 발표했다. * 1934년 [문학(文學)]에 <수필문학고 隨筆文學考>, [조선문학(朝鮮文學)]에 <현대영문학에의 조선적 관심(朝鮮的 關心)>을 발표했다. * 1935년 [시원(詩苑)]에 <고독(孤獨)>을 발표하면서 시작(詩作)을 시작했다. 이 계열의 작품으로는 <동경(憧憬)>, <초추(初秋)> 등이 있다. * 1937년 극예술연구회에 참가, 연극운동에 가담하였다. * 1938년 제1시집 [동경(憧憬)]을 출간했다. * 1941년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하여, 일본경찰에 붙잡혀 3년8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 후에는 문화 및 정치의 표면에서 활동하였다. 중앙문화협회의 창립, 전조선문필가협회 총무부장, 민주일보 사회부장,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출판부장, 민중일보 편집국장, 미군정청 공보국장을 거쳐, 정부수립 후에는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공보비서관을 지냈다. * 1955년부터 경희대학(慶熙大學) 교수로 10여년간 교편생활을 했고, 한국자유문학가협회를 만들어 위원장직을 맡고, [자유문학(自由文學)]을 발행했다. * 1966년 시집 [성북동 비둘기]와 1971년 [반응(反應)]릏 출간했다. * 1977년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 저서로는 [김광섭시전집](1974)과 번역시 [서정시집(抒情詩集)](1958) 등이 있다. 1958년 서울시문화상, 1965년 5 · 16문예상, 1969년 문공부 예술문화대상을 수상하였고, 1970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했다.         * 나의 사랑하는 나라/김광섭 지상에 내가 사는 한 마을이 있으니 이는 내가 사랑하는 한 나라이러라 세계에 무수한 나라가 큰 별처럼 빛날지라도 내가 살고 내가 사랑하는 나라는 오직 하나뿐 반만년의 역사가 혹은 바다가 되고 혹은 시내가 되어 모진 바위에 부딪혀 지하로 숨어들지라도 이는 나의 가슴에서 피가 되고 맥이 되는 생명일지니 나는 어디로 가나 이 끊임없는 생명에서 영광을 찾아 남북으로 양단되고 사상으로 분열된 나라일망정 나는 종처럼 이 무거운 나라를 끌고 신성한 곳으로 가리니 오래 닫혀진 침묵의 문이 열리는 날 고민을 상징하는 한 떨기 꽃은 찬연히 피리라 이는 또한 내가 사랑하는 나라 내가 사랑하는 나라의 꿈이어니        
★詩人 신동엽(申東曄)"껍대기는  가라"      *생몰- 1930년 8월 18일 ~ 1969년 4월 7일  *출생지- 충남 부여군 *데뷔-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학력- 단국대학교 사학과   프로필- 주요 저서   아사녀(阿斯女)> 신둉엽전집(申東曄全集)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꽃같이 그대 쓰러진  금강 젊은 시인의 사랑   ※껍대기는  가라   껍대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대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대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대기는 가라, 이 곳에선, 두 가슴과 그 곳까지 내는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대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기로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시평 민족,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외세를 껍데기로,  순수한 민족적인 삶과 가치를 알맹이로 형상화시켜 민족, 민중 주체의 새로운 역사의 도래를 염원하는 시이다.           껍데기는 가라 이말을 듣는 순간 신동엽시인이 떠오르시나요? 그러면 문학공부를 열심히 하셨던 분이군요 ^^;;; 신동엽하면 개그맨을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지만 저는 신동엽하면시인이 먼저 떠오릅니다. 올해는 영원한 4월의 시인 신동엽의 45주기가 되는 해입니다.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껍데기는 가라"라고 외쳤던  시인의 정신을 되새기는 4월, 충남 부여에 위치한 신동엽 문학관과 생가, 그리고 백마강 길에 우뚝 선 시비를 찾아보며  민족시인 신동엽의 외침을 떠올려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 신동엽 문학관 입구     신동엽 문학관을 못가보신 분들도 이곳은 많이 봤을겁니다. 신동엽 문학관입니다. 신동엽 시인의 모든것을 다 담고 있는 이곳 그럼 지금 같이 떠나볼까요?         2013년 5월 3일 개관한 신동엽 문학관은 시인이 태어나고 자란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의 생가 바로 옆에 위치해 있습니다.  산업화 과정으로 우리의 근현대사와 관련된 주요 인물들의 유적들이 상당 부분 소실되어 안타까움이 큰데요.  그러함에도 신동엽 시인의 생가는 옛 모습 그대로 보존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아버지가 오랫동안 생가를 지켜온 덕분이라고 합니다.  또한 전통 한옥 구조의 생가와 실용성을 강조한 큐브 형태의 문학관이 신구의 조합처럼 어울려 보입니다.           신동엽 문학관에 들어서니 가장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이 시인의 흉상입니다.  민족시인으로서 1960년대 민중의 편에서 올곧은 저항정신을 보여준 시인의 결연한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흉상 옆으로는 신동엽 시인의 일대기가 그의 작품, 사진 등과 함께 벽면 가득 전시되어 있습니다.   신동엽 문학관에서는 신동엽시인에 대해 모든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신동엽 시인의 작품집과 연구서들 신동엽 시인은 1930년 부여에서 태어나 전주사범학교와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가 입선되어 등단했습니다.  서사시 을 비롯하여 , , , 등 수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김수영 시인과 함께 1960년대를 대표하는 참여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 전시관 전경   신동엽문학관 전경입니다.         신동엽 시인의 유품과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입니다. 시인이 습작한 육필 원고와 시집, 사진 등 여러 가지 소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전시실은 신동엽 시인의 생애를 , , , , 등으로 테마를 나눠 보여줍니다.  특히 부인 안병선 씨와 서로 주고받은 편지에서 민족시인의 면모와는 사뭇 다른  가장과 남편으로서의 자상하고 섬세했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신동엽 시인은 2003년 10월 20일에 국민문화 향상과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습니다.           신동엽 문학관의 북카페입니다. 시인의 대표시를 새겨넣은 조각작품과 도서들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무료로 제공하는 차를 마시며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읽을 수 있습니다.  근처의 관광지인 부소산성과 정림사지를 둘러 보고 신동엽 문학관을 찾았다면 잠깐 쉬면서 담소를 나누기에도 좋을 듯합니다.             신동엽 문학관 지하의 특별전시관입니다. 신동엽 시인이 문학을 극 예술과 같은 타 장르와 융합하려고 했던 것처럼 특별전시관에서는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해 전시하고 학술회와 세미나 등 시인의 정신을 잇는 열린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 세미나실   신동엽 문학관의 세미나실입니다.         신동엽 문학관은 옥상마당이라는 특별한 공간이 있습니다. 높낮이가 다른 건물을 연결하여 화단을 만들고  부여읍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로서의 기능을 갖추고 있습니다. 옥상마당으로 미로처럼 이어지는 계단과 자갈밭 길은  조금은 엄숙한 문학관의 분위기를 벗어나 생태 건축의 일면을 접할 수 있습니다.          ▲ 옥상마당에서 바라본 신동엽 시인의 생가           옥상마당에서 내려오면 신동엽 문학관 앞마당에 설치된 깃발 모양의 설치 예술 작품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신동엽 시인의 대표시의 구절을 깃발 모양으로 형상화한 설치 예술품으로 문학관을 찾는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찍기에 좋은 곳입니다.         신동엽 문학관 입구에는 이곳에 가 있었다는 안내판이 있습니다.  부여는 백제의 옛 도읍터로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만큼 곳곳이 문화 유적으로 가득합니다.  2005년 11월 22일부터 12월 6일까지 시굴조사를 한 결과 백제시대의 저장시설로 추정되는 수혈유구와 조선시대 주거지와 유물 등이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 신동엽 생가 전경           신동엽 문학관을 찾는 분들께는 먼저 생가를 둘러본 후 뒷마당으로 난 문을 통해 문학관으로 가는 코스를 추천합니다.         잠시 안채의 마루에 앉아 마당을 뛰어놀았을 시인의 어린 시절 모습을 떠올려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합니다.       ▲ 백마강 기슭의 신동엽 시비   =======================================================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생가ㆍ문학관           ***       '신동엽' 많이 들어본 이름이죠? 젊으신 분들은 연예인 신동엽 씨를 떠올릴 텐데요.  오늘은 연예인 신동엽씨가 아닌 민족시인 신동엽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중략...)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학창시절 한 번쯤은 들어보고 읽어봤던 시 '껍데기는 가라'  바로 그 시를 지은 시인 신동엽의 생가와 문학관을 다녀왔습니다. 신동엽이라는 이름하면 연예인을 떠올리시겠지만 껍데기는 가라는 시는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있는 작품이기 때문에 친숙하실 겁니다.      ▲ 시인 신동엽 생가 정문   부여 중심지인 군청사거리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골목길에 푸른색의 기와가 올려진 작은 집을 볼 수가 있는데  바로 이곳이 시인 신동엽이 태어난 생가입니다.        ▲ 시인 신동엽 생가 이 생가는 신동엽 시인이 태어나 청소년기를 보냈고 신혼 초기 살았던 집으로 한때는  다른 분의 소유가 된 것을 1985년 부인 인병선 시인이 다시 사서 복원을 했다고 합니다.   이후 유가족 분들은 부여군에 생가를 기증하였으며 2007년 등록문화재 제339호로 지정되어 오늘날까지 관리받고 있었습니다.        ▲ 소박한 신동엽 시인의 방 깔끔하게 복원을 하고 기와를 올려 예스러움은 다소 사라졌지만,  시인이 살았던 당시 생활을 가늠케 하는 소박한 모습들이 곳곳에 보였습니다.      ▲ 신동엽 문학관 외부 전경 생가 뒤편으로는 시인의 문학작품, 유물 등을 만날 수 있는  문학관이 자리 잡고 있어 일대기를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 문학관 내에 위치한 북카페 신동엽 문학관에 들어서니 북카페가 우선 보이게 되는데요.  이곳은 시인의 작품 등을 읽을 수 있고 휴식과 담소를 나눌 수 있게 깔끔하게 구성이 되어 있었습니다.        ▲ 신동엽 시인의 일대기 여기까지 왔으니 시인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이상향을 가지고 있었는지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신동엽(1930~1969)   일제 강점기 때 시인은 이곳 부여에서 태어났고 한국전쟁을 거치고 민주화 운동인 4·19혁명을 거치게 됩니다.  그야말로 민족의 아픔을 대변하는 파란만장한 근대 역사의 회오리 속에서 삶을 살았는데요.  이에 시인은 조국의 아픔, 외세와 분단, 부패한 권력을 이야기하고자 여러 편의 시와 산문 등을 남겼습니다.   직설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 고유의 민족 정서가 담긴 구절로 '영원한 민족시인'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하였습니다.        ▲ 2003년 추서된 은관문화훈장 타계하시기 전까지 꾸준한 집필과 교육에 힘썼으며 그의 작품은 이후 민중문학의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그 후 민중문학이라는 이유로 70년대에는 출판금지를 당하기도 하였지만 문화발전에 공을 인정받아 2003년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에 추서가 되었습니다.        ▲ 시인의 유품, 작품 등을 관람할 수 있는 문학관 내부 저도 신동엽 시인의 모든 작품을 읽어 보고 이해한 것은 아닙니다만   이곳에서 그분의 뜻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었는데요. 시인의 몇 작품과 설명문을 읽어보니 과거-현재-미래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현재가 어둡다고 해서 미래가 어두운 것은 아니요 힘든 시기를 잘 헤쳐나가고  바로잡는다면 미래가 밝다는 희망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 시인의 생전 모습과 육필원고   시인이 꿈꾸고자 하는 세상이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  과연 아직까지 현재 진행 중인가 아니면 아직도 먼 미래인가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지금 내리쬐는 한여름의 햇볕보다 더 뜨거운 애국심을 가졌고, 한낮의 갈증보다  더욱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을 원하던 시인 신동엽! 또한 민족의 아픔을 이야기하며 나아가야 할 길을 알려준 영원한 민족시인 신동엽!   이곳 생가와 문학관에서 시인이 가졌던 현실과 이상에 대해 새삼 깨닫게 되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신동엽생가와 신동엽 문학관 한번씩 들러보세요~!       ***             신동엽 시인의 시비는 생가와 가까운 백마강의 기슭에 있습니다. 1970년 4월 18일에 많은 문인들과 그의 동료, 제자들이 시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으며 시인의 대표작인 가 새겨져 있습니다. 샛별처럼 짧은 삶을 살다갔지만 한국 시단을 올곧은 저항의 목소리로 빛낸 민족시인 신동엽은 매년 4월마다 추모 행사와 함께 백일장이 개최되고 있습니다.  또한 신동엽 문학상이 제정되어 한국 문학을 이끌어갈 시인과 소설가들에게 창작기금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문학청년을 꿈꾸고 문학소녀였던 시절이 있었을 것입니다. 4월이 다 가기 전에 신동엽 시인의 생가와 시비, 그리고 문학관을 찾아 시인의 정신과 문학의 발자취를 밟아 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개관시간: 하절기(4월~10월) 09:00 ~ 18:00                     동절기(11월-3월) 09:00 ~ 17:00 *휴  관  일: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인 경우 다음 날)                     주요 명절(신정, 설날, 추석)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501-3 041-830-2723     ***       민족시인 신동엽 문학관,생가 탐방
348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고은 - 머슴 대길이 댓글:  조회:3545  추천:0  2015-12-18
머슴 대길이 / 고은 새터 관전이네 머슴 대길이는 상머슴으로 누룩 도야지 한 마리 번쩍 들어 도야지 우리에 넘겼지요. 그야말로 도야지 멱 따는 소리까지도 후딱 넘겼지요. 밥 때 늦어도 투덜 댈 줄 모르고 이른 아침 동네길 이슬도 털고 잘도 치워 훤히 가르마 났지요. 그러나 낯보다 어둠에 빛나는 먹눈이었지요. 머슴방 등잔불 아래 나는 대길이 아저씨한테 가갸거겨 배웠지요. 그리하여 장화홍련전을 주룩주룩 비오듯 읽었지요. 어린 아이 세상에 눈떴지요. 일제 36년 지나간 뒤 가갸거겨 아는 놈은 나밖에 없었지요.   대길이 아저씨더러는 주인도 동네 어른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지요. 살구꽃 핀 마을 뒷산에 올라가서 홑적삼 큰아기 때위에는 눈요기도 안 하고 지게 작대기 뉘여 놓고 먼 데 바다를 바라보았지요. 우르르르 달려가는 바다 울음 소리 들었지요.   찬 겨울 눈더미 가운데서도 덜렁 겨드랑이에 바람 잘도 드나들었지요. 그가 말했지요. 사람들이 너무 호강하면 저밖에 모른단다. 남하고 사는 세상인데   대길이 아저씨 그는 나에게 불빛이었지요. 자다 깨어도 그대로 켜져서 밤대우는 불빛이었지요.     ■ 핵심 정리 * 작가 : 고은 (1933~ ) 본명 고은태(高銀泰). 전북 군산 출생. 군산중학교 4학년까지가 공식적인 학력이다. 1952년 20세의 나이로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다. 법명은 일초(一 超)로 효봉선사의 상좌가 된 이래 10년간 참선과 방랑의 세월을 보내며 시를 써왔 다.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 성격 : 민중적, 존재론적, 토속적 * 어조 : 소박하고 친근한 이야기투 *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힘세고 근면한 대길이가 나에게 한글을 가르쳐 준 일 2연 - 인격적이고 생각이 깊은 대길이 3연 - 가난하지만 남과 함께 사는 대길이 4연 - 나의 영원한 스승 대길이 * 표현상 특징 : ① 이야기체 표현으로 소박하고 친근한 분위기 형성 ② 토속적인 시어의 사용으로 향토적, 민중적 정서 전달 ③ 인물의 대사를 직접 인용함으로써 사실감 강화 * 인물의 전형성 - 이 시의 주인공격인 ‘대길이’와 같은 머슴은 우리 사회의 소외받고 박해받는 계층 에 속하는 인물로, 소외된 삶을 이겨 나가려는 민족적인 삶, 민중적인 삶의 원초적인 모습으로서의 전형성을 지닌다. 이 시에서 머슴 ‘대길이’가 보여 주는 건강한 인간상 이야말로 이 땅의 수난의 역사를 이겨 온 원동력이며, 시인이 지향하는 바람직한 인 간상인 것이다. * 제재 : 머슴 대길이, 진솔한 민중의 삶 * 주제 : 함께 사는 삶의 아름다움     ■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30권을 예정으로 계속되고 있는 대하 연작시 ‘만인보’ 시리즈의 제1권에 실려 있다. ‘만인보’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분류해 보면 삶의 세 가지 층위가 있다. 시인이 개인적으로 만난 실존적 인물들의 층위, 사회 속으로 뛰어들어 만난 사회적, 역사적 인물군으로서의 사회적, 역사적 층위, 그리고 불교적 체험에서 만난 초월적 층위가 그것이다. 이 시의 주인공은 첫 번째 층위의 인물군에 속한다. ‘만인보’는 시인의 말대로 자신이 ‘이 세상에 와서 알게 된 사람들에 대한 노래의 집결’이면서 ‘사람에 대한 끝없는 시적 탐구이자 이름 없는 역사 행위’라 할 수 있다. ‘만인보’는 특정 인물을 시적 대상으로 삼고 있는, ‘사람 사는 이야기’로서의 실명시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 가운데 이채를 띠는 것은, 시인에게 삶의 올바른 지향을 감동적으로 일깨워 준 사람들에 관한 몇 편의 ‘성장시’다. 가장 강렬하게 각인된 인물은 ‘꿈’과 ‘모험’의 이미지로 각각 대표되는 아버지와 외삼촌이며, ‘세상에 대한 전율적 개안’을 가능케 한 또 하나의 인물로 이 '머슴 대길이'를 들 수 있다. 그는 단순히 한글을 깨우쳐 주어 ‘장화홍련전을 비오듯’ 읽게 해 준 인물에 머물지 않고 ‘자다 깨어도 그대로 켜져서 밤새우는 불빛’과도 같은 존재이다. 여기서 대길이는 ‘함께 사는 삶’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몸소 가르쳐 준 인생의 큰 스승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그러나 '함께 사는 삶'은 단지 인간 사이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터전인 대지에 모여 사는 모든 사물에까지 속속들이 적용되는 매우 폭 넓은 개념임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온전한 의미의 이 같은 인간주의야말로 ‘만인보’를 힘차게 관통하는 시인 정신의 저류이다. ‘대길이’와 같은 머슴은 소외받고 박해받는 인물군에 속한다. 이들은 크게 보아 역사 과정에서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소외당한 인물들이지만, 삶을 긍정하고 이겨 나가려는 민족적인 삶, 민중적인 삶의 원초적인 모습으로서 전형성을 지닌다. 천대받는 머슴살이 속에서도 꿋꿋하게 일하며, 남을 위해 넉넉한 마음을 갖고 사람을 사랑하는 인간상이야말로 이 땅, 수난의 역사를 이겨온 원동력이 아닐 수 없다.  ==========================================================   고은시인의 시서집 만인보는 [만인의 삶에 대한 기록] 이라는 뜻입니다만 완간된 만인보에서는 약 5천6백명이 등장한다고 합니다.   '만인보'는 지난 1980년 고은 시인이 내란음모 혐의로 육군교도소에 수감 중일 때 처음 구상한 것으로 86년에 1, 2, 3권이 처음으로 출간됐구요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2010년 총 30권의 시서집으로서 끝을 맺었습니다. 30권의 만인보에 실린 전체 작품 수는 4,001편이며,  등장 인물만 5,600여 명입니다. 시인 자신의 고향 이야기에서부터 4.19와 6.25 전쟁,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시인이 만났던 사람들이 만인보에 담겨 있습니다. 이번에 마지막으로 출간된 시집 제 30권에는 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다룬 '봉화 낙화암'도 실려 있답니다. 또 마지막 부분에는 주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가장 많습니다.   고은 시인은 완간 소감을 묻는 질문에 "술에 취했다가 깬 것 같다" 고 대답했다고 하네요. 역시 술을 좋아하시는 분 답습니다. 그리고 30년간의 과제를 훌훌 털어버렸지만 "만인보의 본질은 끝이 없다는 것" 이라고 말했습니다. 덧붙여서 고은 시인 자신의 가슴을 파고든 최초의 시어 '아련한'이란 단어를 생각하다 '오련 가련' '아련 가련'이라는 낱말을 전날 새로 만들었다고 기자들에게 소개했다고 하네요. 고은님은 모국어인 한글에 은혜를 갚기 위해 앞으로 자신의 작품 안에 이 시어를 넣어보겠다고 말했습니다...  --------------------------------------------------------------    고은 시비 위치 :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양수로 93       삶 / 고은   비록 우리가 가진 것이 없더라도 바람 한 점 없이 지는 나무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또한 바람이 일어나서 흐득흐득 지는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우리가 아는 것이 없더라도 물이 왔다가 가는 저 오랜 썰물 때에 남아 있을 일이다 젊은 아내여 여기서 사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가지며 무엇을 안다고 하겠는가 다만 잎새가 지고 물이 왔다가 갈 따름이다               고은문학관 건립 관련 수원문인협회의 성명서를 읽고      처음에 고은문학관 건립 관련 반대의견이 있다고 전해 들었을 때는 그럴 수도 있겠거니 생각했습니다. 모든 일에는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 있고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며 절충과 보완을 통해서 관철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 의견을 수렴해서 좀 더 완성된 계획으로 거듭날 수 있다면 행정 당국과 시민 모두에게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TV에서 뉴스로 전달되는 내용을 듣고 이건 아니다, 싶었는데 성명서 전문을 보니 정도가 심합니다. 고은문학관 건립과 관련해서 내어 놓은 수원문인협회의 성명서는 황당하기조차 합니다. 수원에는 경기시인협회,수원시인협회, 경기 수필 등 여러 문학단체가 있으며 어느 단체에도 가입하지 않은 문인들 또한 많습니다.몇몇 문학인의 견해를 마치 수원에서 활동하는 모든 문학인의 견해인 양 포장하여 기자들까지 불러모아 발표한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혹여 반대 의견을 가졌더라도 이런 식의 표출은 곤란하지 않겠나 싶은 것입니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성토하는 방식이 이렇게 ‘정치적’일 수가 있는가도 싶습니다.  수원 시민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정조대왕의 훌륭함에 경의를 표합니다. 수원시를 넘어 대한민국 국민들의 정서 또한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군이었던 정조대왕을 문학에 국한시키는 건 너무 왜소한 발상이라고 사료됩니다. 그분은 정치와 경제와 과학 등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영웅이기에 좀 더 포괄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문제라고 봅니다. 그렇기에 세계인들조차 관심을 가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문학과 관련해서 예를 들자면 정조숭모백일장의 위상을 크게 높여서 기성작가들까지 참여하는 공모전으로 전환한다든지, 홍제백일장과 하나로 묶어 이벤트를 추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신인과 본상으로 나눌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전국의 수많은 지역자치단체들이 그 지역 출신 작가의 문학관을 다투어 짓고 있는데 그 내용들이 대동소이 합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면 수원시에서 이미 발표한 계획보다 좀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관은 명칭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운영되는지가 더욱 중요할 것입니다. 또한 홍보의 수단이 다양하게 열려 있고, 홍보의 가치가 독보적일 때 수원시의 이미지는 한결 공고해질 것입니다. 고은문학관이란 주제를 던졌을 때 기자들이 몰려든 것처럼 말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반대는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사를 까발려 모욕감을 준다거나, 작품을 폄하한다거나, 일부의 평가를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한다거나, 하는 대목들은 너무나 치졸합니다. 어찌보면 문학은, 예술은 자기 자신을 못견뎌서 하는 행위 같습니다. 하덕규의 시어처럼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할 수밖에 없는 결과물이 문학이요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명세를 치르는 과정에서 공개된 개인사를 험담으로 이용하는 건 옳치 못합니다. 누구라 인생에 실수가 없을까요. 카메라를 들고 특정 개인을 따라다니면 하루에도 수십 번의 실수와 착오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유명하지 않아서 실수 또한 노출되지 않은 것입니다. 나무는 가시가 억셀수록 꽃이 아름답고, 시인은 삶이 거칠수록 글이 깊을 것 같습니다.  백이십만 명이 넘는 수원의 인구 중에 박힌 돌은 얼마쯤 될까요. 박힌 돌과 굴러온 돌을 가려서 어디에 쓸까요. 그리고 ‘남의 떡’은 또 무엇입니까. 수원시의 계획에 얼굴이 붉어진 ‘양식 있는 사람들’께서 어찌 이런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할 수 있습니까. 또한 우리 중에 어느 누가 ‘만인보’와 같은 작품을 비평할 자격이 있습니까.  노벨문학상을 두 번이나 받은 일본은 우리보다 문학성이 월등히 높아서 받았을까요. 우리 문학은 노벨상을 받은 수많은 나라들의 문학보다 그 질이 많이 떨어질까요. 고은 선생께서 노벨문학상을 받는다면 우리의 문학적 환경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행정 당국의 계획에 반대할 수는 있지만 이 일이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임을 잊지 말아 주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2015년 12월 8일 수필가 최희명     忍一時之忿 免百日之憂 得忍且忍 得戒且戒 不忍不戒 小事成大 한 때의 분함을 참으면 백일의 근심을 면한다. 참을 수 있으면 우선 참고, 경계할 수 있으면 우선 경계하라. 참지 않고 경계하지 않으면 작은 일이 크게 된다. 명심보감(明心寶鑑)   노벨상을 받지 못하는 이유?   세상에서 가장 유명하고 명예로운 노벨상(賞). 스웨덴 과학자 알프레드 노벨이 발명품인 다이너마이트 판매로 벌어들인 막대한 재산을 노벨상 만드는 데 기부했다.   그는 “인류복지에 가장 구체적으로 공헌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유언을 남겼다.  ================ 습작에 대한 이야기 수없이 많으나 그때그때  생각나는 것을 말씀 올립니다...  아래는 습작에 대한 개인의견이지 원칙이 아닙니다.  같은 연 행,詩 內에서 이미지가 같거나  같은 의미의 단어는 반복 수사하지 않는것이 좋습니다.  모든 詩는 詩의 외양이라는 態가 있고, 내양이라는 魂이 있는데  작자의 이야기를, 독자로 하여금 감을 전달 할 수있게 하는것은  기교에 해당됩니다.그래서 작문과 마찬가지로  작자의 혼에 대한 자기 노래를  기승전결의 흐름으로 이야기합니다  기승전결의 흐름은  순서를 바뀌기도 하고 뒤섞이기도 하면서 주고  [結기승전/기結승전等..일부 생략도가능.  시에 함축되거나 연상되거나 이미지로도 숨어있음]  시의 연상속에서 흐른답니다.  그래야 긴장감도 흐르고.점층/이미지에 이미지를 더하는 효과등이 나온답니다  그리고  문득.잠시...차마등등은 가능하면 회피하면 좋습니다.  시에서는 이러한 句들은 수사를 통하여 느끼게해야 함으로  [부사와 현란한 형용사]를 동원하여 직접적인 표현은 가능하면 회피하고,  담백하게 써내려 가면서 느낌으로 오게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절대 사용하지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시상을 詩로 빚어 내는 것은  곱고 고운 우리말.언어로 詩라는 집을 짓는데..  빚어 내고자하는 "새로운 의미[=이미지]" 생동감을 찾고  언어가 주는 상상,그 연상속에서  읽은 이의 공감 폭을[=독자해석] 확대해준다는 것입니다  詩에는 형식이 [이러이러 해야]한다.[이렇게 이렇게 써야한다]는  일정律은 없습니다.....그래서 자유자재,  작자 무한한 언어의 노래라는것입니다.  님이 생각하고 타 분의 시집을 읽고, 우선 느껴 오는  感대로 읽어 내는,  씌어지는, 그대로 습작하여,  님 만의 독창적인 시를 만들어 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통상 수 많은 詩들을 접해 보면  이 시인님의 시가 그 시인님의 시에서 본 것같고, 그 시인님이  그 시인 같은,그 시인의 시를 읽는것같은 느낌을 자주 갖습니다.  感과 모습[=외양]은 개성이 없는 詩가 되어 스스로  각개=개인문학=시인이라는 칭호를 들을 수가 없답니다.  오래가지 못합니다  제가 가장 강조하는것입니다.그래서 님의 스타일=내적 思想의 그림=思考.觀을  발전 시키시라는 것입니다.  천명의 문정희보다  한명 단 한명의 님이 되는 것이 좋겠지요...  단 한사람 자기 색깔을 낼 것  그래야,신춘문예에 당선도 되고  신인 문학상도 타고  등단도 되고..소위 신辛 맛이 난다고 합니다.  대부분 조금은 부족해도 어설프고 하면서도  심사위원이 선정하는 것은 신 맛..  그 다운 맛때문에 그런것입니다...동아 조선에 올라온 詩들을 보면  문정희.이해인.김춘수.곽재구 신경림..고정희등을 빰치는 우수한 시들이  수두룩 합니다.그러나 그런 시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좋은 시가  당선이 되지 않는 이유는 .....  개성..맛이 없음입니다.개성은 [아름다운 서투름][보기좋은 순수]랍니다.  [새로운 창작 이라는 의미입니다]  낯설기를 못함.  시가 낯이 설어야 한다고 합니다.수없이 많이 습작한다고  낯설기가 오는것이 아닙니다.시심-시혼과 기와 교와 술의 터득이여야합니다.  스스로 터득한 [설기]여야 합니다  맛이 없는 이유..통상..아무개 스승의 개인지도를 받아 그 스승의 풍에 이끌려  교정해주면 아..!!시는 이런가보다..저런가 보다 생각하고  그래서 결국 지도해주는 스승따라 감..그게 어디 시공부인가..  그 스승 판박이 공부이지..이기철이가  시를 잘 빚는다고 그가 해주는대로 공부하다보면 자기도  이기철 시인되는 것임 .이기철시인이 백날되면 무엇하겠습니까...  그래서 국문과를 전공안해도 그럭저럭 습작해서 한 분들이  톡톡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개성.낯 설기..무엇인가  자기 습작, 시상을 관조하는 밑 사상=버릇을 고치고 다듬어서 발전시키라는것입니다  누구든지..살아 온 생활에서 자기만의 서술 방법 스타일이 있습니다  사물,현상을 관조하는 자기만의 사상[=시상.느낌.관조주,  생을 사랑하는 동안의 인생관 등등 ]이 있습니다  소설가는 소설가대로,수필가는 수필가대로,극작가는 그대로..  문학을 멀리 지내왔다면  심지어 일기를 쓴 버릇/사상,  그대로..,이미 굳어진 각개의 습작 스타일  [...관]...  있음..  그것으로 님만의 꽃을 피울것!!  "어떤 분이 ㅇㅇ님의 시를 읽으니 꼭 어느 분의 詩를 對한것같습니다""  라는 칭찬?...좋은것이 아님...."  이에는 시어의 차용/수식/연행의 배치/비유/스타일 갖가지입니다.  어느 것이 정답이 없고 어느것이 원안이 없습니다.  책을 많이 읽고.글을 많이 쓰면서..우선 책을 많이 읽어야,  님이 책을 김춘수나 신경림보다 많이 읽고,그 만한 년륜 같은 시심,  시적철학을  지니신다면 김춘수.신경림 보다도 우수한 시인이 될것입니다.  수사...비유.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이 방에서 [습작 창작의 상호지도]가 주로  습작의 기와 교,술의 문제로 서로 지도해주는 것인데  기.교.술은  해가 지나면 해결되는 문제이니 걱정안해도 된답니다..  저절로 글에 붙어 다닌답니다.오지 말라해도  나중에는 못 된 것들은 쉬이 익히고,쉽게 따라 붙는다고  따라 붙어 다닌답니다.참말입니다.  대표시인 이재호 시인님등에게 물어 보십시요  아마 그 분도 그렇게 대답하실것입니다  습작 2-3년 하면 기.교.술은..그 버릇들은 붙습니다.  그러나 정작 읖조리고픈 수사의 제재.시혼.시상속의 철학과 수사어가 막힙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읖조릴 수 있는 수 많은 집의[詩의 소재]제재,단어  를 위해 책 등등을 읽으시라는 것입니다  [머리에 앎]이 없으면 시상을 빚어 낼 수 있는 어휘[=시력이 없으니  그만 좋은 시를 빚을수가 없지요.어휘.시어란 무엇인가요 무조건 처음 보고 읽고  좋아서 남이 사용하니 그럴 듯..하다하여 막 사용하는것이 아니랍니다  하나의 언어.낱말을 시어로 차용하기 위해서는 이미 그 언어는  내 안의 思潮.심상의 세계.詩想觀에서 충분하게 소화 되고. 이해 되고.  내 언어가 되어진 다음에 시어가 되는 것 이랍니다..  그래서 자주 독서가 필요한 것이고  시작보다는 먼저 작문력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시는 문장가.수필가 극본등등을 지나친... 마직막의 門이지요.  .  대부분 시인들이 좋은 詩를 못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보십시요...유명한 분들의 詩를 보면  지난 날 對했던 지금 보는 산문집,수상,소설.극본등 등에서  수 없이 비일비재 나오는 문구들로, 이미지만 차용하여  詩作기교로, 현란을 포장한  한심한 것 들입니다.머리에 든 것이 없으니 과過한  비유와 수사의 글들을 봅니다.  시를 만든답시고, 이미지를, 이리 뛰어 넘고 저리 뛰어 넘어  우리 말을 막 [깨댕이 뱃기듯이]  이리 주물럭 저리 주물럭하는데 통탄 할 일입니다.  다른 분들은 좋은시라고 하나  둔치의 소인은 곱디 고운 우리 언어를 이래도 되는지..의문이 갑니다.  아무리 시가 이미지와 수사의 학문이지만  말도 되지 아니한 것으로 비유와 술사를 불러오는 글들을 보면..  참말로 그것들이  정도문학이라는 착각이 듭니다 또 너도 나도 그러니 더욱 그렇습니다.  말도 안되는 [무엇 무엇같은 뭣 뭣 같은 ] 句로  온통 이상한 단어로 도배질하여  詩를 채웁니다.단어의 전체나 전체적인 이미지가 아닌  일부분의 이미지를 끄집어서  [ㅇㅇ같은] 하고 합니다.지나친 비유로 자연스럽지못한 이미지를 만듭니다.  또한 무절제한 언어 폭력과 서정성의 파괴로.. 과연 문학의 일부인지  그 가치가 의심이 됩니다...  비유와 이미지는 항상 [가능성의 연결.가능성과 상상성의 범위]內에서  고려 되어야 하는데 너무 아무데서나, 아무 곳으로 가져옵니다.  그래서  책을 많이 읽으십시요...  타고르 같은 詩聖이 되실것입니다  ...............................  덧글...  이동순교수의 시와 시학상 심사평 (김남조, 고은)  이동순 시인의 "아름다운 순간"은 단연 빼어난 시집으로 여겨졌다.  이분과 면식이 전무 하기에 심정의 선입견 없이 책을 펼쳐 보았다.  여기에 담겨있는 [단아한 서정],  [따뜻하고 겸허한 눈길],  [좋은 측면을 찾으려는 긍정적 모색] 등에 많이 글렸고  그것들이 건실한 기조에서 돋아 자랐음을 신뢰할수 있었다.  통틀어 바람직한 시의 제대로 된 결과물을 만난 기꺼움이 컸었다.  (김남조시인)  요사스런 기교 그물 저만치서 풍덩 던진 돌멩이 가라앉은 뒤  그 물무늬 다음 이동순의 일상강개가 떠 있고  민족 혹은 시대 맞은편의 의지가 적셔지던 것이다.  시인은 풀을 노래하되  풀의 은유를 쉽사리 불러들이지 않는다.  큰 시혼을 빈다.  (고은 시인)  감사합니다..    ‘술 먹은 박용래가/ 대전 유성온천 냇둑/ 술 먹은 고은에게 물었다/ 은이 자네는/ 저 냇물이 다 술이기 바라지? 공연스레 호방하지?/ 나는 안 그려/ 나는 저 냇물이 그냥 냇물이기를 바라고/ 술이 그냥 술이기를 바라네’ (고은 ‘어느 날 박용래’에서) 박용래 시인(1925∼1980·사진)의 삶과 문학을 추억하는 문인들의 글모음 ‘시인 박용래’(소명출판)가 나왔다.  간결한 시어로 아름다운 향토적 서정을 노래한 박 시인은 박목월 박두진 고은 이문구 등 많은 문인들과 우정을 나눴다. 책에는 고은 이근배 나태주 등이 박용래를 직접 등장시켜 쓴 시편들과 박용래의 작품에 대한 시인들의 시평 모음이 수록됐다. 김용택 시인은 박용래의 작품 ‘월훈(月暈)’을 인용하면서 “그이는 얼마나 조심스럽게 언어를 세상에 가져다가 시의 나라를 만드는가. 그는 시인으로서 가장 시인다운 삶을 산 사람”이라고 평했다. 문태준 시인은 ‘저녁눈’에 대해 “그의 시는 가난한 것과 세상이 거들떠보지 않는 작고 하찮은 것들을 세필(細筆)로 세세하게 그려내고 돌보았다”고 적었다. 눈물 많고 천진했던 시인을 돌아보는 소설가 김성동 씨의 추억 등 문인들의 회고담도 더해졌다. 시인의 딸이자 화가인 박연 씨의 그림도 함께 실렸다.
347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박재삼 - 흥부 부부상 댓글:  조회:5730  추천:0  2015-12-18
흥부 부부상                (박재삼) 흥부 부부가 박덩이를 사이 하고               가난한 삶 가르기 전에 건넨 웃음살을 헤아려 보자 웃음의 물살 --> 안분지족의 서민의 삶 금이 문제리. 금 보다도 황금 벼이삭이 문제리, 누렇게 익은 벼이삭보다도 웃음의 물살이 반짝이며 정갈하던 그것이 확실히 문제다 박덩이가 좋아서 웃는 순수한 웃음 박덩이를 사이 한 흥부 부부의 정갈한 웃음 없는 떡방아 소리도 있는 듯이 들어 내고 손발 닳은 처지끼리 같이 웃어 비추던 거울면들아. 서로 함께 웃어 마치 거울 면과도 같은 이들아 가난하지만 서로를 잘 이해하는 흥부 부부 웃다가 서로 불쌍해 서로 구슬을 나누었으리       눈물 --> 연민의 눈물 그러다 금시 절로 면에 온 구슬까지를 서로 부끄리며                              부끄러워 하며 먼 물살이 가다가 소스라쳐 반짝이듯                      깜짝 놀라 몸을 떨며 서로 소스라쳐 본웃음 물살을 지었다고 헤아려 보라 눈물을 극복한 후의 웃음 그것은 확실히 문제다 가난한 삶의 한까지도 진정한 사랑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삶의 자세 흥부 부부의 진정어린 눈물과 웃음  [개관정리]  ◆ 성격 : 전통적, 인유적, 회상적  ◆ 표현 : 인유(허구적이든 실제적이든, 유명한 인물이나 고사나 문구를 따오는 문학적 기교)               상징(인유의 형태를 빌어서, 물질 숭배에 젖어 있는 인간상과는 달리, 정신적 행복을 추구하는 소박한 인간상을 암시)               묘사적 심상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박덩이 → 가난한 생활의 상징      * 가르기 전에 건넨 웃음살 → 안분지족할 줄 아는 서민들의 삶을 느끼게 해주는 웃음.                                                 가난하지만 사심이 없는 웃음의 아름다움      * 그것이 → 가난하지만 사심이 없는 소박한 삶의 태도      * 없는 떡방아 소리도 / 있는 듯이 들어 내고 → 먹을 것이 없는 적빈(赤貧)의 상황에서도 사랑으로 소박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부분.      * 거울면들 → 서로에 대한 이해와 사랑으로 살아가는 흥부 부부를 가리키는 말.                          마치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보는 것처럼, 서로에 대한 이해와 사랑으로 닮아가는 사람.      * 웃다가 서로 불쌍해 / 서로 구슬을 나누었으니 → 가난한 생활 속에서 서로에 대한 연민으로 눈물을 흘림      * 본웃음 물살 → 눈물을 극복한 후의 진정한 웃음      * 그것은 확실히 문제다 → 단순히 소박한 생활에 만족하는 차원이 아니라, 가난한 삶의 한까지도 진정한 사랑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삶의 자세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임을 단정적인 어조로 나타낸 표현임. ◆ 주제 : 가난한 흥부 부부의 삶의 애환과 소박한 행복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박덩이를 사이에 둔 흥부 부부의 정갈한 웃음살  ◆ 2연 : 서로에 대한 이해와 사랑  ◆ 3연 : 흥부 부부의 진정한 눈물과 웃음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가난으로 인한 한(恨)을 지니면서도 그것을 사랑으로 극복해 내는 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박 타는 '흥부 부부'를 소재로 하여 표현하고 있다. 제 1연에서 흥부 부부는 안분지족(安分知足)하며 행복한 웃음을 짓고 사는 인간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시적 화자는 이러한 인간상을 소중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제 2연에서는 시적 화자는 가난 속에서도 서로를 이해하면서 살아 온 흥부 부부를 서로의 '거울'과도 같은 존재로 일컫고 있다. 제 3연에서는 시적 화자는 흥부 부부가 가난 생활에서 오는 한을 사랑으로 극복하였음을 말해 준다. 구체적으로 시적 화자는 가난으로 인한 고통 속에서 흥부 부부가 서로 울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한 울음은 바로 가난으로 인한 한(恨)을 가리킨다. 그러나 흥부 부부는 그러한 울음을 불현듯 느껴지는 서로에 대한 사랑 속에서 웃음으로 승화시킨다. 이 시가 궁극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은 가난한 삶의 애환과 그 극복이다. 이를 위해서 시인은 흥부 부부의 '웃음'을 '물살'에 비유하고 있다. 물론, 그 '물살'은 '한'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결국, 이 시에서 '한(눈물)'과 '웃음'은 서로 혼융되어 있는데, 시인은 이러한 비유를 통해서 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복합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흥부전의 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는 비교적 단순한 주제를 변형하여 행복의 의미를 추구하고 있다. 행복이란 흥부가 보답을 받아 부자가 되기 이전 가난한 때, 부부간에 존재하던 진정한 사랑을 간직한 바로 그 때 존재한다는 것이다. 박을 타려 할 때의 순수한 웃음, 없는 떡방아 소리로 듣던 순수한 사랑, 마주보며 웃음을 나누고 또한 상대와 슬픔을 함께하며 부끄러운 마음을 간직한 그 때가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는가고 시인은 질문하고 있다. 황금보다도 벼이삭보다도 더욱 소중한 것이 부부간의 진정한 사랑이며, 물욕 이전의 인간의 순수함이 진실된 것이라는 가치관을 보여 주고 있다 글꼴조정 공유하기 북마크   관련 Q&A 박재삼 흥부부부상 질문목록 흥부부부상같은 작품을 창작하였을 때 그 차이점을 가장 잘 지적한 것은? (여기서 윗글-->흥보가의 박타령) *** 흥부부부상 박재삼 흥부 부부가 박덩이를 사이 하고 가르기 전에 건넨 웃음살을 헤아려 보라. 금이 문제리. 황금... 박재삼의 흥부부부상 시 일부분 해석 부탁드립니다.을 위주로 가르치다 보면 참고서의 내용을 선행 학습한 학생에게는 다소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박재삼의 '흥부 부부상'에서 2연과 관련해서 본다면 3연의 '구슬'은 '재물'이 아니라 인간의 순수한 마음의 표현입니다. 즉... 흥부 부부상(박재삼)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먹을 것이 없어서 박 속을 타서 배를 채우려는 것이지요. 흥부부부가 박덩이를 타면서 하는 노래 속에서 바로 이 소박한 희망이 담긴 것이고요. 다음 해설을 참고하세요... '흥부의 가난' 시를 잘 모르겠습니다.질문하신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흥부의 가난 (박재삼) 시를 공부해 가야 하는데 인터넷 정말 야후, 네이버, 엠파스 등등 온갖을 다 뒤져도 없네요. '흥부부부상'만 있고... 박재삼 시인의 시 흥부의 가난 좀 해석 부탁드립니다... 시 질문요.'박재삼'의 '흥부 부부상' 입니다. 주제는 '인간의 순수함과 진실' 입니다. 이 시 전체를 알려드릴게요. ^ ^ 흥부 부부가 박덩이를 사이 하고 가르기 전에 건넨 웃음살을 헤아려 보라. 금이 문제리. 황금 벼이삭이 문제리. 웃음의... 이전다음 현재페이지123 'olivier21'님의 오픈지식 오픈지식 목록 골프규칙 제33조 위원회(The Committee) 제32조 보기, 파와 스테이블포드 경기(Bogey... 골프경기규칙 제31조 포볼 스트로크 플레이(Fou... 이전다음 현재페이지123456789 서비스 이용정보     박재삼(朴在森, 1933 ~ 1997) 생애 1933년 4월 10일 ~ 1997년 6월 8일 출생 일본 동경 분야 문학 작가 시인. 1953년 “문예”에 ‘강물에서’가 추천되면서 등단했다. 한(恨)이라는 한국의 전통적인 정서를 어학적, 예술적으로 묘사한 작품을 주로 창작하였다. 시집으로 “춘향이 마음”(1962), “햇빛 속에서”(1970), “울음이 타는 가을 강”(1987) 등이 있다. 작품 울음이 타는 가을 강 이 시는 제삿날을 맞아 큰집을 찾아가다가 저녁 노을에 젖은 가을강을 바라보며 인생에 대한 상념에 젖어 있는 시적 화자의 모습이 그려진다. 1연에서 화자는 저녁 노을에 물든 가을 강을 바라보며 친구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떠올린다. 가을이 주는 쓸쓸한 정서와 친구의 사랑 이야기로 인해 화자는 서러움을 느낀다. 친구의 사랑 이야기와 계절이 주는 쓸쓸한 정서로 인해 자신의 삶에 대한 한스러움이 자연스럽게 상기되는 것이다. 2연에서는 큰집에 모이는 불빛과 해질녘 노을진 강이 대조적 이미지로 제시되어 이런 서러움의 정서가 심화된다.여기서 화려한 불빛보다 서러운 노을빛이 더 큰 감흥을 불러 일으키는 이유는 인생의 본원적 서러움을 강이 보여 주기 때문이다. 특히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이라는 표현에서 저녁 노을이 울음으로 환치되어 화자의 서러운 정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3연에서는 서러움의 정체가 좀 더 구체화된다. 그것은 인생의 유한성에 대한 근원적인 한(恨)인데, 보편적인 자연 현상(강물의 흐름)을 통해 화자의 삶의 희로애락이 비유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즉, 이 시의 화자의 정서는 1연에서 발단하여 2연에서 고조되다가 3연에서는 절정에 달하는 의미의 심화 과정을 이루고 있는데, 보편적인 자연 현상과 연결하여 인간의 삶에 내재된 유한성과 삶의 희로애락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고나, ∼것네'와 같은 민요조의 종결 어미를 사용함으로써 예스런 정감을 살리고 애수 어린 분위기를 조성하여긴 여운을 남긴다. *수록교과서 : (문학) 창비 흥부 부부상 이 시는 가난으로 인한 한(恨)을 지니면서도 그것을 사랑으로 극복해 내는 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박 타는 흥부 부부를 소재로 하여 표현하고 있다. 1연에서 흥부 부부는 안분지족(安分知足)하며 행복한 웃음을 짓고 사는 인간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화자는 이러한 인간상을 소중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2연에서 화자는 가난 속에서도 서로를 이해하면서 살아온 흥부 부부를 서로의 거울과도 같은 존재로 보았다. 3연에서는 흥부 부부가 가난한 생활에서 오는 한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며 사랑으로 극복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이 시의 시인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가난한 삶의 애환과 그 극복이다. 이를 위해서 시인은 흥부 부부의 웃음을 물살에 비유하고 있다. 그 물살은 한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즉, 이 시에서 한(눈물)과 웃음은 서로 혼용되어 있는데, 시인은 이를 통해서 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복합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수록교과서 : (문학) (정재찬) 추억에서 이 시의 화자는 어린 시절, 가난했던 생활을 회상하며 어머니의 슬프고 한스러운 삶을 절제된 어조로 그려 내고 있다. 4연 15행의 산문체 리듬의 이 시는 시적 대상의 변화(어머니 → 오누이 → 어머니)에 따라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1, 2연에서는 어머니의 고달픔을 ‘은전(銀錢)만큼 손 안 닿는 한(恨)’으로 형상화하였는데, 이 ‘한(恨)’은 이 시의 지배적 정서로 어머니의 고달픔이 응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3연은 ‘울 엄매’가 돌아오기를 초조히 기다리며 떨고 있는 오누이의 슬픔을 ‘머리 맞댄 골방’과 ‘손 시리게 떨던가’와 같은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다. 어린 그들에게 ‘울 엄매’는 밤하늘의 별과 같은 존재로 그들의 생존과 애정의 근원임을 알 수 있다. 4연은 집으로 돌아오는 어머니가 별을 보고 느꼈을 심정을 보여 주는 부분으로, 어머니의 한을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으로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달빛을 받은 옹기의 표면이 반짝거리는 것에서 어머니의 눈물을 연상함으로써 고된 삶으로 인한 어머니의 한과 슬픔을 그려 내고 있는 것이다. *수록교과서 : (문학) (김윤식) 매미 울음 끝에 이 시의 화자는 한여름 내내 무섭게 울어 대다 이내 사라진 ‘매미 울음’을 통해 그렇게 맹렬히 찾아왔다 이내 사라진 자신의 사랑을 떠올리고 있다. 즉, ‘매미 울음’이라는 자연물의 특성에서 인간의 ‘사랑’과의 유사성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1연에서 화자는 한여름 무더위를 절정으로 올려놓고는 이내 사라진 매미 울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매미 울음이 사라진 자리에는 ‘정적’이라는 고요함이 남는다. 화자는 이러한 자연의 이치가 인간의 사랑과도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2연에서 화자는 소나기처럼 숨차게 찾아와 자신을 적셨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사랑이 떠나간 자리는 매미 울음이 사라진 자리처럼 고요하다. 화자는 이것을 하늘 위에 펼쳐진 ‘맑은 구름’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처럼 화자는 사랑이 떠나간 자리를 부정적으로 그렇다고 긍정적으로도 판단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사랑이 떠나간 자리에 대해 독자가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운을 남기고 있다. *수록교과서 : (국어) 신사고 수정가 이 시는 “춘향전”에서 소재를 취하여 춘향의 마음으로 상정된 그리움과 한(恨)의 정서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주목할 것은 1연에서 춘향의 그리움을 해맑은 이미지를 가진 '물방울'을 통해 형상화함으로써 이 도령을 향한 춘향의 사랑이 지순함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2연에서는 평범한 일상어와 의문형의 영탄적 어법을 통해서 비애의 감정이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는 점도 두드러진 특징이다. 춘향이 하루에 몇 번씩 푸른 산 푸른 언덕들을 눈 아래로 보고 있는 것은 헤어진 이 도령에 대한 그리움이 강하게 표현된 부분이다. 이는 바로 뒤에 이어지는 '일러여 오는 푸른 그리움'이라는 구절로 응축되어 나타나고, 그 그리움은 현실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안타까움을 환기하는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있다. 특히 옛스런 종결 어미를 반복하여 리듬감을 줌으로써 한의 정서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시 창작의 비법은 없다 / 박재삼    내용 요약  1.풍부한 문학 체험을 2.사고를 깊게 풍부하게 하여라 3.많이 읽어라 4.쓰고 또 써라 5.관찰하는 눈을 가져라 6.따뜻한 가슴으로 사물을 보라 7.고치고 또 고쳐라 8.자연에게 배우라.     1.풍부한 문학 체험을 인간은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방황하는 것이라고 괴테는 말했다. 언뜻 들으면 모순된 말 같지만 결코 모순된 표현이 아니다. 방황한다는 의미는 쓸데없이 헤매며 돌아 다니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것을 찾아서 모색하는 것이며, 어느 한 곳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탐구하는 자세를 말하기 때문이다. 일생동안 시 창작의 길을 걸어와 그쪽 분야에선 제법 달인의 경지에 섰을 법한 시인들도 한결같이 "시는 쓰면 쓸수록 어렵다"고 말한다. 지나친 겸손 같기도 하고 엄살을 떠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 말은 괴테의 그것과 같은 의미로서 시 쓰기 역시 죽을 때까지 부단한 자기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말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성급하게 시 창작의 비법을 묻은 것은 어리석은 짓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법은 없다 하더라도 좋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데생연습을 쉴새없이 하는 것처럼 시를 쓰기 위한 기초닦기나 준비운동 쯤은 있을 것이다. 시 창작을 하려는 지망생들은 창작의 비법을 알아서 지름길로 가려는 생각을 버리고 소와 같은 우직한 걸음으로 자기의 모든 생활습관에서부터 시창작을 위한 기초를 닦아 가야 할 것이다. 19세기 영국의 비평가 헤즐리트는 "시는 오직 상상의 언어"라고 했다. 이 말은 상상력 없이는 쓸 수 없는 것이 시라는 의미이며 실제적으로도 시는 어떠한 글보다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문학이다. 따라서 시를 쓰는 지망생들은 상상력을 풍부하게 키워야 하는데, 문학체험이야말로 이것을 위한 좋은 방법이다. 수많은 상상들이 집약되어 나타난 것들이 문학작품이기 때문에 무수히 문학작품을 접해 봄으로써 자신의 상상력을 키울 수가 있다.   특히 시야말로 상상의 산물이므로 부지런히 시를 읽어야한다. 나무를 다루는 목수는 그 나무의 재질을 알아야 하고, 돌을 다루는 석공은 그 돌의 성질을 잘 파악해야 하는 것처럼 시를 쓰려는 사람은 우리말에 능통해야 한다. 시는 극도의 예술이며, 언어의 정수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어떠한 문학보다도 언어에 대한 감각과 언어를 다루는 솜씨를 필요로 한다. 처음부터 이것을 타고난 사람도 있겠지만, 후천적인 자기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문학체험은 이 언어에 대한 감각을 키우고 언어의 대한 속성이나 특징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수많은 작품을 읽는 과정 속에서 우리말이 지닌 섬세하고 미묘한 부분까지 몸으로 느껴봐야 한다. 그리고 숱한 어휘까지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그것들이 어느 자리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일 수 있는가를 스스로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창작은 기존의 것을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진다. 창작은 무엇보다도 새로움을 찾아서 나아가는 것이지만 선배들이 쌓아올렸던 기존의 작품들을 밟아 본 후에 자신의 새로운 발자국을 낼 수 있을 것이다. 늘 한결같으면서도 늘 새롭고 늘 새로우면서도 한결같다는 뜻으로, 즉 "옛것을 모범 삼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말을 기억하길 바란다. 따라서 풍부한 문학체험은 자신의 시를 창작하고 자신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가는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통과제의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사고를 깊고 풍부하게 하라    '사고'는 창작의 바탕이며 밑천이다. 텅 비어 있는 돼지 저금통에서 돈을 꺼내 쓸 수 없는 것처럼 자신의 생각이 들어있지 않고서는 시를 쓸 수가 없다. 시 창작은 어떠한 것보다도 자신을 표현하는 일이며, 개성과 독창성을 발휘하는 창조적인 예술이다. 그런데 이 창조성과 개성의 근원은 다름 아닌 자신의 '사고'로부터 흘러나오는것이다. 사람들이 똑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각자가 보는 것이 틀리며, 느끼는 것이 다른 까닭은 품고 있는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남과 구별되는 자기만의 고유한 생각이 한 인간의 개성을 만들어 내고 창조적인 글쓰기의 핵심을 형성해 내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글은 그 사람의 인격을 반영한다"라든지 "글은 곧 그 사람이다"라는 말을 주위에서 듣곤 한다. 이 말은 글 속에 들어가 살고 있는 글쓴이의 '사고'가 그 사람의 정신과 인격 등의 총체적인 모습을 드러나게 해준다는 뜻일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시 창작에서도 마찬가지다. 시의 차이는 '사고'의 차이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사물과 세계에 대한 통찰이 달라지고 시의 성패가 좌우된다.       3.많이 읽어라    좋은 글을 쓰기 위하여 구양수가 말한 삼다(三多)가 필요하다. 그 중의 첫째가 다독인데 풍부한 독서가 시 창작에서도 예외가 될 리 없다. 좋은 시를 쓰기 위한 기초로서 독서체험을 풍부하게 가져야 하는 것은 시 창작의 필수조건이다. 독서체험은 실제의 체험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단순히 다른 사람의 글을 읽는 행위가 아니라 글쓴이의 체험, 사고, 감정, 인격, 사상 등의 총체적인 것과의 만남이 되며 새로운 세계를 접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실제로 우리들이 부딪치는 세계의 폭은 좁고 한정되어 있다. 당연히 경험도 거기에 비례해서 비좁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우물 안의 개구리 식의 자기 생각이나 세계를 뛰어넘어서 더 넓은 세계로 우리의 사고와 정신을 이끌어갈 수 있는 것이 바로 독서이다. 그러므로 독서는 우리의 정신세계를 살찌우고 삶을 풍요롭게 한다. 또는 사물을 보는 방법이나 시각을 다양하게 만들고 사고를 깊게 한다. 동시에 자기의 직접적인 체험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흔히 독서를 마음의 양식이라고 하는 것도 다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특히 문학경험은 시 창작에 있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 소설이나 시를 읽고 감동을 받았을 때 자신도 그와 같은 작품을 쓰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낀다. 이러한 충동이 창작의 씨앗을 만들기도 한다. 또 작품을 읽는 동안 자기의 내면 속에 감추어져 있거나 잊혀졌던 무수한 생각과 감정들이 이끌려 나와서 해후하게 되고 거기에서 자신만의 새로운 것을 탄생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나도 글을 쓰다가 생각이 막히면 그만 손을 떼고 다른 사람의 시나 소설, 수필 등을 읽는다.   그러다 보면 막혔던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글을 모방해서가 아니라 글을 읽는 동안 잠재해 있던 그 무엇들은 글을 낳고, 좋은 시가 좋은 시를 낳는다는 말처럼 문학경험은 창작의 훌륭한 활력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또 무수한 작품을 접해 봄으로써 훌륭한 작품을 볼 줄 아는 안목을 기르고 지금 쓰고 있는 자기 작품에 대해서 객관적인 잣대를 갖다댈 능력도 키우게 된다.  자, 그럼 하는 손을 짙은 안개가 잡는다 넌 남으로 천리 난 동으로 사십리 산을 넘는 저수지 마을 삭지 않는 시간, 산은 산천을 돈다 燈은, 덴막의 여인처럼 푸른 눈 긴 다리 안개 속에 초조히 떨어져 서 있고 허허들판 작별을 하면 말도 무용해진다 어느새 이곳 자, 그럼 넌 남으로 천리 난 동으로 사십리   -조병화, 全文   어떠한 만남이든지 그 만남은 이별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친구간의 만남이든, 사랑하는 사람과의 인연이든, 혹은 부모 자식간의 인연이든 영원한 만남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별의 운명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은 오히려 영원히 함께 있기를 맹세하고 갈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안타까운 소망에도 불고하고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어가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운명인 것처럼 이별 역시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불가(佛家)에서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로 표현했던 것이다. 더구나 무수한 만남들로 얽힌 인간들의 관계는 제아무리 절친하고 가까운 관계에 놓일지라도 인간은 하나의 개체일 뿐이며 엄밀한 의미에서는 단독자이다. 그것은 마치 서로 알아보기 힘든 짙은 안개 속에 각기 떨어져 있는 사물과도 같아서 자신의 외로움을 혼자서 짊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위에서 인용한 시는 이러한 우리들의 운명과 고독을 담담하고도 편안하게 노래하고 있다. 안개와 서로 교차되는 오산 인터체인지라는 일상의 사물을 여유롭게 응시하며 시인은 그 사물들을 통해서 인간이 지닌 고독함을 짚어 보고 그것을 넉넉히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의 깊이는 시인의 이러한 통찰, 즉 '사고'의 깊이에서 우러나오고 있다. 시 창작에서 사고란 어떤 심오하고 거창한 사상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위에서 인용한 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자기 삶과 주변의 사물들을 함부로 보아 넘기지 않고 거기에서 새로운 깨달음과 진실을 발견하도록 하는 생각의 힘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난 여름 내 땡볕 불볕 놀아 밤에는 어둠 놀아 여기 새빨간 찔레 열매 몇 개 이룩함이여. 옳거니! 새벽까지 시린 귀뚜라미 울음소리 들으며 여물었나니.   -고은, 전문   위의 시 역시 하나의 사물에 다다른 사고의 깊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는 찔레 열매지만 한 생명체가 탄생되고 성숙되기까지는 숱한 고난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시인은 작은 열매 몇 개를 통해 새삼 발견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는 그 열매가 환기하는 모든 생명체들에 대해 경이로움과 소중함을 느끼고 우리들의 삶 또한 이와 다를 바 없다는 자연의 섭리마저 깨닫도록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보더라도 시 창작에서 요구하는 '사고'는 한 사물의 개념을 파악하는 수박 겉핥기식의 사고가 아니란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그것은 사물마다 지닌 진실과 그 속에 갖고 있는 아름다음과 가치를 찾아내어 관습적이고 기계적인 우리들의 삶에 새로운 충격과 깨달음을 주도록 하는 '사고'인 것이다. 따라서 어떤 틀에박힌 생각, 사물의 거죽만을 보는 피상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사물을 넓고 깊게 보는 것이 시 창작에서 중요한 것이다.   4. 쓰고 또 써라   쓰는 일은 시 창작의 처음이자 끝이다. 시 창작의 실제는 쓰는 일에서 시작되고 쓰는 일로 끝이 나기 때문이다.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수많은 시 지망생들이 습작에 몰두하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치열한 습작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좋은 시가 창작될 리가 없다. 시 창작은 철저한 연습을 필요로 하고 문장과의 싸움을 원한다.   워즈워드의 말대로 "최상의 언어를 최상의 순서로 늘어놓은 것이 시"이기에 어떠한 문학보다도 준엄하고 치열한 언어의식을 요구하는 것이다. 써 보는 일에 부단한 노력 없이는 제대로 된 문장, 제대로 된 표현을 거쳐 제대로 된 시가 태어날 수가 없다. 이러한 노력은 비단 시 창작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분야이든 거기에서 프로가 되려면 자기와의 싸움과 수련은 필수적인 것이다. 나는 어쩌다가 TV에서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고난도의 기술을 완벽하게 소화해 내는 피겨스케이딩, 리듬체조, 기계체조 혹은 서커스의 묘기를 보고 놀라기도 하는데, 내가 더욱 더 감탄하는 것은 그런 묘기 뒤에 숨어 있는 그들의 피나는 수련이다. 도대체 얼마만큼이나 수련을 쌓았기에 저런 신기가 몸에 배었을까를 생각하면 가슴마저 서늘해지고 숙연해진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타고난 재능이 있다고 한다. 그 무엇이든 한 가지씩은 신께서 주었기 때문이다. 지금 시를 써 보려고 하고 거기에 뜻을 둔 지망생들은 분명 시에 대한 재능을 갖고 있다. 시에 관심이 있고, 또 그것을 좋아하고 자기 스스로 써 보려고 한다는 것은 재능의 싹을 갖고 있다는 표시이다. 그러나 자기 안에 무궁무진한 능력이 잠재되어 있더라도 각고의 노력 없이는 그것들은 스스로 솟아나지 않는다. 그냥 묻혀 버리기 십상이다. 거듭 써 보는 일이야말로 자신의 잠재된 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런 수련과정에서 자기만의 개성과 독창성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위대한 예술적 성취를 이루고 이름을 빛낸 사람들이 남다른 자기 노력을 기울인 일화들을 우리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중국에서 동진 때 서예가로 이름을 떨친 사람이 왕희지(王羲之)다. 그의 필체는 신기에 가까울 만큼 힘차고 살아있는 듯 생동했다고 한다. 이런 왕희지에게 서예의 비결을 묻는 한 젊은이가 찾아왔다. 왕희지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자기 집 후원으로 데리고 갔다. 그 후원에는 엄청나게 큰 물독이 18개나 있었는데 왕희지는 그 물독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물독 속에 내 서예의 비법이 있네." 젊은이는 조심스럽게 모든 물독을 들여다보고는 아무 것도 찾아낼 수 없다고 하자 그는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저 18개의 물독에 든 물을 다 쓴 다음이면 내 말의 뜻을 알게 될 거네." 우리는 왕희지의 이 말 속에는 그의 탁월한 서예 솜씨가 부단한 수련 속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심지어는 그의 붓과 벼루를 닦았던 연못이 검게 변해 버렸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붓글씨를 연습했나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프랑스의 사실주의 작가로 유명한 에밀 졸라도 그의 습작시절 파지가 자기 키를 훨씬 넘었다고 한다. 그래서 위대한 예술가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그만큼 수련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수영선수가 최고의 수영 실력을 쌓기 위해서는 물 속에 뛰어들어 온 몸을 놀려야 하고 소리꾼이 득음을 하기 위해서는 목구멍에서 피가 나도록 연습하는 것처럼 좋은 시를 창작하는 것도 다른 수가 없는 것이다. 오직 쓰고 또 쓰는 수련만이 있을 뿐이다. 5. 관찰하는 눈을 가져라   조지훈 시인은 글을 잘 쓰려면 눈은 과학자를 닮으라고 했다. 이 말은 사물을 관찰하는데 치밀하고 날카로운 눈을 가지라는 뜻이다. 우리는 평범하고 예사롭기만 한 사물이나 현상도 예리한 관찰을 통해서 전에는 알지 못했던 뜻밖의 사실이나 모습을 발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때에 새로움과 기쁨이란 우리들의 삶의 얼마나 큰 활력소가 되는지 그것을 체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실상 우리들은 주변의 모든 것에 익숙해져 있고 낮이 익어서 별반 새로움을 느끼지못한다. 이것을 봐도 무덤덤하고 저것을 봐도 시큰둥하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타성에 길들여진 우리들의 고정적인 생각일뿐 세상의 모든 사물은 어느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변화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아침에 본 꽃의 모양과 빛깔이 다르고 점심 때와 저녁 때도 각각 다르다. 또 빛의 각도, 세기, 밝기, 등에 따라서 꽃은 시시각각 변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것을 똑같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들의 섬세한 변화를 무심하게 지나쳐 버리는 것이다. 적어도 시를 쓰려고 하는 사람들은 사물 하나를, 그리고 자기 주변의 현상들을 주의 깊게 볼 줄 아는 섬세한 눈을 갖고 있어야한다. 여느 사람들 모양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가 무덤덤하고 무시경해서는 절대 좋은 시를 창작할 수가 없다. 정확하고 예리한 관찰을 통하여 자기의 눈으로 본 사물들의 의미를 붙잡을 수 있어야만 시가 우러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찰의 중요성을 강조한 작가가 플로베르다. 그는 한 개의 모래알도 똑같지 않을 정도로 묘사하라고 했는데, 이 말은 그만큼 사물을 정확하게 관찰하라는 이야기다. 이런 플로베르를 스승으로 모시고 글쓰기를 배운 사람이 바로 19세기 프랑스의 사실주의자 모파상이다. 그는 자신의 표현력이 시원치 못함을 느끼고 플로베르에게 표현의 비법을 물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날마다 자네 집 앞을 지나가는 마차를 관찰하고 그것을 기록하게나. 글쓰기의 가장 좋은 연습이라네." 모파상은 스승의 말에 따라 한 이틀 동안을 관찰해 보았지만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것은 너무나 단조롭고 따분해서 실상 관찰할 필요조차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플로베르는 이러한 생각을 갖고 찾아온 모파상에게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관찰이야말로 훌륭한 글쓰기의 연습인데 어째서 쓸모 없다고 하는가? 자세히 살펴보게나. 개인 날에는 마차가 어떻게 가며 비오는 날에는 어떤 모습인가. 또 오르막길을 오를 때 는 어떠한가? 말몰이꾼의 표정도 비가 올 때, 바람이 불 때 또한 뙤약볕 아래서는 어떻게 변화하는지 살펴보면 결코 단조로운 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될 거네." 그후 플로베르는 모파상이 원고를 가지고 올 때마다 더욱더 관찰하는 눈을 갖출 것을 요구하고 모파상은 끊임없는 글쓰기를 연습함으로서 후에 명작을 남길 수가 있었다.   중국의 저명한 서예가 왕희지 또한 그의 독특하고 개성적인 필체가 그의 관찰력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그는 거위를 무척 좋아하여 그것들을 기르며 관찰하는 것을 즐겼다고 하는데, 특히 연못에서 헤엄칠 때 물을 힘차게 가르는 거위의 발동작을 유심히 관찰한 결과 여기에서 새로운 운필법을 창안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관찰이야말로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개성과 독창성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새로움들을 창조해 내는 것을 생명으로 하는 시 창작에서는 아무리 이것을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 기계적인 관찰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형식적이고 기계적인 관찰은 사물에 대한 우리들의 관습적인 시각의 연장일 뿐이며 피상적인 모습만을 보게 만든다. 따라서 사물을 정확하게 보아내기는 고사하고 그것이 지닌 새로운 의미도 결코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의 사물을 제대로 관찰한다는 것은 우선적으로 상투적인 인식에서 벗어나는 일이며, 애정과 관심을 갖고 그것의 아름다운을 찾아내기 위해서 집중적으로 마음의 눈까지 열어 보이는 행위이다. 이때 사물을 경이로움과 눈부심으로 자신들의 모습과 의미를 우리 앞에 드러내 놓게 된다. 땅에 떨어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물방울 사진으로 잡으면 얼마나 황홀한가? (마음으로 잡으면!) 순간 튀어올라 왕관을 만들기도 하고 꽃밭에 물안개로 흩어져 꽃 호흡기의 목마름이 되기도 한다. 땅에 닿는 순간 내려온 것은 황홀하다. 익은 사과는 낙하하여 무아경으로 한 번 튀었다가 천천히 굴러 편하게 눕는다.   -황동규,     위의 시는 시인의 눈과 마음이 하찮은 '물방울'에 다가가서 섬세한 관찰이 얼마나 이 시적 대상의 아름다움을 끄집어낼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너무나 흔하고 사소해서 그야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물방울'아 시인의 눈과 마음을 통해 우주적 의미와 존재로서 무한하게 확대되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다. 시 창작을 위한 관찰이란 바로 이러한 것이여야 한다. 작은 사물 속에 깃들인 큰 세계, 큰 의미들을 놓치지 않고 잡아내어 그것을 알고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주변을 한번 둘러보라. 거기에는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들이 별로 없는 것 같아 어떤 이들은 쓸거리, 즉 창작 소재의 빈곤을 고민하기도 한다. 그러나 늘상 보던 낡고 진부한 눈을 빼 버리고 새롭게, 새로운 마음의 눈으로 사물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거기 무엇인가가 숨어있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될 것이다.   6.따뜻한 가슴으로 사물을 보라   "시인은 꾀꼬리처럼 어둠 속에서 그 고독하고 감미로운 목소리를 부르며 사람들을 위로 해준다."라고 영국의 시인 셸리는 말했다. 우리는 셸리의 이 말 속에서 시인의 가슴이 어떠해야 하며, 시의 자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다. 아마도 그것은 세상과 인간을 향한 따뜻한 사랑과 위로로써 우리들의 아픔과 슬픔을 어루만지는 자리에 시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한다. 나는 시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사랑을 모성적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모성적 사랑은 모든 사랑의 근원이다. 아무런 조건과 이해타산 없이 순수하게 자신이 지닌 것들을 내어 주며 한없이 베풀어 주는 사랑이다. 생명이 지닌 상처들을 기꺼이 감싸안고 포용하는 그 융숭한 사랑이야말로 사랑이 지닌 가장 본질적인 모습이며, 이런 사랑의 실체가 곧 우리들 어머니이다. 그래서 모성적 사랑은 우리 인류에게 영원한 지표요. 신앙이요. 구원이다. 결코 어떤 무엇으로도 훼손될 수 없는 사랑의 원형이다. 우리가 어머니를 회귀하고 싶은 영원한 고향으로 여기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시 속에서도 이러한 모성적 사랑이 근원적으로 흐르고 있다. 왜냐하면 시는 뭇 생명들에 대한 뜨거운 연민과 안타까움의 노래이자, 생명을 위한 노래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성이 모든 생명을 탄생시키는 생명의 원천이며, 그것들을 품고 기르는 위대한 창조성의 본(本)인 것 처럼 시 역시 온갖 사물들을 품으면서 그것들이 지닌 의미와 아름다움을 새롭게 창조해 내는 것이므로 모성과 시는 그 본질에서 서로 통한다. 그러므로 시를 창작하려는 사람이라면 어머니의 가슴이 되어 세상과 사물을 넉넉하고 깊게 포용할 줄 알아야 하고, 여기에 인간으로서 지닌 지순한 사랑도 담아야 하는 것이다. 어디서 나왔을까 깊은 산길 갓 태어난 듯한 다람쥐 새끼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 맑은 눈빛 앞에서 나는 아무 것도 고집할 수가 없다 세상의 모든 어린것들은 내 앞에서 눈부신 꼬리를 쳐들고 나를 어미라 부른다 괜히 가슴이 저릿저릿한 게 핑그르르 굳었던 젖이 돈다 젖이 차 올라 겨드랑이까지 찡해오면 지금쯤 내 어린 것은 얼마나 젖이 그리울까 울면서 젖을 짜 버리던 생각이 문득 난다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 난만한 그 눈동자, 너를 떠나서는 아무데도 갈 수 없다고 갈 수도 없다고 나는 오르던 산길을 내려오고 만다 하, 물웅덩이에는 무사한 송사리떼   -나희덕,     다람쥐 새끼를 보고도 젖이 도는 어머니의 마음이 곧 시인의 마음이다. 이것은 동시에 모든 생명을 향해 열려있는 뜨겁고 깊은 사랑이다. 시를 쓰는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내 앞에 눈부신 꼬리를 쳐들고/나를 어미라 부르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고, 그것들에게 젖을 물릴 수 있어야하며, 극한 상황에 처해있는 '송사리떼"에게도 애타는 모성의 눈빛을 반짝여야 한다.   비정하고 차가운 마음은 사물과 교감할 수가 없다. 아울러 뭇 생명들이 지닌 희열과 비극도 감지해낼 수가 없다. 우리로 하여금 한 인간에게 가장 깊이 가 닿을수 있게 하는 것이 사랑인 것처럼 사물 역시 사랑만이 그들의 가장 내밀한 세계까지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시인을 통하여 시를 쓴다는 말까지 나오는 것이다.   모든 생명은 서로 사랑의 교환을 원한다. 비록 영성이 깃들이지 않은 무생물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시의 궁극적인 모습은 이러한 생명들에게 주는 사랑의 노래다. 시인은 이것들을 가슴에 품고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 뭇 생명 속에 내재한 슬픔과 사랑을 느끼지도 못한다면 그건 시인이라고 할 수가 없다. 따뜻한 가슴으로 모든 사물을 바라보라. 그리고 안아 보라. 시는 영원한 모성인 것이다.     7. 고치고 또 고쳐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명작을 남긴 위대한 작가들에게는 퇴고에 의한 이야기가 무수하게 많다. 이러한 사실은 훌륭한 작품을 창작하는 비법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만큼 퇴고에 열정을 쏟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떤 작가들은 단숨에 써 내려간 글이 자신의 천재도 실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완벽할 수 없는 것이므로 거듭 다듬고 고치는 노력이 필요하다. 오히려 작품의 천의무봉()함은 수백 번 고치고 다듬는 과정을 통해서 생겨난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에서 가장 아름답게 문장을 썼다는 투르게네프도 어떤 문장이든지 쓴 뒤에 바로 발표하는 일 없이 원고를 책상 서랍 속에 넣어 두고 석 달에 한 번씩 꺼내보면 다시 고쳤다고 하고, 글자 한 자마다 완벽함을 기했던 구양수도 초고를 벽에 붙여 놓고 방을 드나들 때마다 그것을 고쳤다고 한다. 심지어는 체홉과 톨스토이한테서 문장이 거칠다는 말을들은 고리키가 퇴고를 얼마나 열심히 했던지 옆에서 보던 친구가 "그렇게 자꾸 고치고 줄이다간 어떤 사람이 태어났다. 사랑했다. 결혼했다. 죽었다. 이 네 마디밖에 안 남아나겠군"하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고리키에게 문장이 거칠다고 했던 톨스토이 자신도 이 글을 다듬기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던지 여기에 대한 유명한 일화를 가지고 있다. 한 젊은 작가가 톨스토이에게 창작에 관한 배움을 얻기 위해 그의 집을 방문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톨스토이는 외출중이었다. 집에 있던 사람은 그 젊은 작가를 서재로 정중하게 안내한 후톨스토이가 곧 돌아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혼자서 서재 안을 서성이던 그는 책상 위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원고 더미들을 발견하고는 호기심에 이끌려 그것들을 펼쳐 보았다. 그런데 그것들은 소설 의 제1차 미정고()에서부터 제10차 미정고 까지 쌓아 둔 것들이다.   이것을 본 청년 작가는 너무 놀라고 감동스러워서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꼼짝을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이때 마침 외출에서 돌아온 톨스토이가 살그머니 그의 등 뒤로 다가가 어깨를 툭툭 치며 "이상스러운가?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네"하고 말한 후 서류 궤 안에 들어있던 다른 원고들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의 90여종이나 되는 미정고들이었다. 그는 이 미정고들을 보면서 창작의 방법들에 대해서 더 이상 아무것도 톨스토이에게 묻지 않았다. 다른 어떠한 말이나 가르침보다도 톨스토이의 미정고들이야말로 창작의 비결이 무엇인가를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헤밍웨이도를 쓸 때에 400번 이상을 고쳐 썼다고 하니 작품이 탄생되기까지는 수백 번을 다듬고 고치는 지극한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깨달을 수가 있다.  더구나 시는 어떠한 문학보다도 엄격한 창작태도를 요구한다. 언어 하나의 정확함에서부터 문장부호 하나까지도 시의 전체적으로 흐르는 분위기, 호흡, 리듬, 질서에 관여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서로 유기적인 조직들을 이루어야 하는데, 퇴고를 하지 않고서는 이런 극도의 치밀함이 생겨날 수 있는 없다. 아울러 제대로 된 시도 탄생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붓놀림이 신선 같다던 두보조차도 "시언(詩言)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서도 시 다듬는 일을 쉬지 않는다."고 하며 자신의 시를 퇴고하는데 참담할 정도의 노력을 쏟았던 것이다.   농부가 씨앗을 뿌리고 알곡 한 톨을 얻기까지 수백 번의 손길이 못지 않게 거듭 매만지고 다듬는 퇴고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 시다. 이규보가 '시에 적합하지 못한 9가지체'를 이야기하면서 "글을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것 은 잡초가 가득 찬 밭"이라고 말할 것도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그러므로 시를 고치고 다듬는 일에 게을리하지 말며, 가벼이 여기지 말라. 죽어서도 시 다듬는 일을 쉬지 않겠다던 두보의 각오로써 자신의 시를 끊임없이 다듬는 노력과 정성이 좋은 시를 창작케 하는 지름길이며 비법인 것이다.     8.자연에게 배우라   자연은 뭇 생명들의 근원지이며 원형이며 모태이다. 뭇 생명들의 총체이자 본질인 것이다. 인간 역시 이러한 큰 생명체[자연]에서 뻗어나 온 한 부분인 까닭에 자연과는 결코 떨어지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오래 전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연은 문하그이 모방 대상이었으며, 재현해야할 '진실'의 척도가 되었다. 알렉스 프레밍거도 의에서 언급하길 "자연이야말로 문학의 진실성을 가늠하는 기준이며 시학의 개념"이 된다고 하였다. 이는 자연이 우주적인 질서와 법칙, 순리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본질과 진실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시는 생명의 노래이다. 생명의 발현이고 소망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시는 생명의 총체이며, 생명의 원형이 자연에 맞닿아 있다. 인간이 자연과 한몸인 것처럼 시 역시 자연과 하나가 될 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래서 조지훈 시인은 시를 가리켜 "시인이 창조한 제2의 자연"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생명의 모태인 자연을 통해서 뭇 생명들의 비의와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그것들을 끄집어낼 수가 있을 것이다.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이 자연을 자기의 스승으로 삼아야한다. 자연은 장황스런 설명 없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보여준다.   우리가 아름다움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묻고 수많은 언어를 통해 그것을 이해했다고 하자. 그러나 저 물가에 혹은 저 산 속에 피어 있는 한 송이 꽃을 보는 순간 아름다움의 실체를 느끼게 된다. 머리로써의 이해가 아니라 자신 전체의 체험으로써 아름다움의 본모습을 깨닫도록 해주는 스승이 바로 자연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아무런 꾸밈이나 기교 없이 명징하게 생명의 참모습들과 현상들, 더 나아가서는 그 생명의 아름다움 본질을 알려준다. 우리들이 얼크러진 삶의 실타래마저 정연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 또한 때묻고 탁해진 우리들의 마음과 눈을 순수한 빛으로 다시 채워준다. 그리고 더욱더 중요한 것은 언제나 새롭게 생성하고 변화하면서 운행하는 그의 모습이다.  나는 지금껏 '자연이 낡았다, 자연이 진부하다, 자연이 질린다, 자연이 틀에 박혔다'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낡고 타성에 젖는 것은 우리들의 몸과 마음이었을 뿐 자연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생성하면서 그때그때 순간마다 최선으로 제 생명을 누리고, 제 존재의 아름다움들을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시 창작은 자연의 한 부분인 우리들에게서 점점 소멸해 가는 이러한 생명들의 참모습을 되살려 놓는 작업이다. 즉, 잃어버리거나 망각해 가는 우리의 참 본질을 되찾는 일인것이다.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부고 있는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박재삼   천년 전에 하던 일을 바람은 지금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타성적인 되풀이가 아니라 영원한 새 모습이다. 바람[자연] 그 자체가 새로움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위의 시는 우리 인간에게 자연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새삼 깨닫게 해준다. 뭇 생명들의 원형이며 끝없이 새로움 그 자체인 자연, 이 자연이야말로 시 창작자들에게는 영원한 물음이며 또는 해답이기도 하다. 자연에 깊이 다가갈수록 우리는 생명의 본 고향에 인도될 것이며,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만나고 깨닫고 발견하게 될 것이다.       수정가/박재삼       집을 치면, 정화수 잔잔한 위에 아침마다 새로 생기는 물방울의 선선한 우물집이었을레. 또한 윤이 나는 마루의, 그 끝에 평상의, 갈앉은 뜨락의, 물냄새 창창한 그런 집이었을레. 서방님은 바람 같단들 어느 때고 바람은 어려울 따름. 그 옆에 순순한 스러지는 물방울의 찬란한 춘향이 마음이 아니었을레.   하루에 몇 번쯤 푸른 산 언덕들을 눈아래 보았을까나. 그러면 그때마다 일렁여 오는 푸른 그리움에 어울려, 흐느껴 물살짓는 어깨가 얼마쯤 하였을까나, 진실로, 우리가 받들 산신령은 그 어디에 있을까마는 산과 언덕들의 만리 같은 물살을 굽어보는, 춘향은 바람에 어울린 수정빛 임자가 아니었을까나.     1962년 시집 [춘향이 마음]에 수록된 시이다. 1962년 간행된 박재삼의 첫시집 《춘향이 마음》에는 총 10편의 연작시가 수록되어 있다. 《수정가》《바람 그림자를》《매미 울음에》《자연》《화상보》《녹음의 밤에》《포도》《한낮의 소나무에》《무봉천지 (無縫天地)》《대인사(待人詞)》 등이 그것이다.  이 시는 '춘향전'에서 소재를 취하여 춘향의 마음으로 상정된 그리움과 한의 정서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시에서 1행은 춘향의 집과 춘향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춘향의 집은 맑고 깨끗하며 단정한 우물집으로, 여기에 사는 춘향의 마음 또한 정화수처럼 깨끗하고 찬란했을 것이라고 한다. 2행에서는 임과 이별한 춘향이가 임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데, 푸르고 깨끗한 산과 들, 맑은 바람과 수정 같은 물살에 어린 마음 이 춘향이 마음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시의 내용에 잘 어울리는 표현 형식을 통해 감정을 절제하면서 유창한 언어로 한(恨)의 정서를 드러내고 있다. (현대시 작품, 인터넷)   ​◈ 자연/박재삼 - 춘형이 마음 초(抄)​   ​뉘가 알리 어느 가지에서는 연신 피고 어느가지에서는 또한 지고들 하는 움직일 줄 아는 내마음 꽃나무는 내 얼굴에 가지 벋은 채 참말로 참말로 사랑 때문에 햇살 때문에 못 이겨 그냥 그 웃어진다 울어진다 하겠네​.   1962년 시집 [춘향이 마음]에 수록된 시이다. 이 시는 한국적 여인의 한 전형인 춘향을 화자로 설정하여 그녀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자연적으로 솟아오르는 사랑을 꽃나무에 견주어 그린 작품이다. 이 시는 춘향전을 소재로 하여 현대적 변용을 가한 라는 연작시의 하나로 서정주(徐廷柱)의 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가장 한국적인 시를 쓴다는 서정주의 맥을 정통으로 이은 박재삼의 대표작인 이 작품에서 시적 자아인 '춘향'은 의 춘향처럼 현실 세계에 고뇌하고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기쁨과 슬픔을 꽃나무에 견주어 그것을 순수한 생명의 흐름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니까 사랑은 억지로 의도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꽃나무 가지에서 꽃이 피고 꽃이 지는 것과 같이 자기 자신도 모르게 가슴 속으로부터 샘솟는 것이므로 시제(詩題) '자연'이 시사(示唆)하듯, 자연의 힘이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사랑의 고운 꽃을 피우게 된다는 춘향의 독백을 통해 시인은 사랑의 실체를 보여 주는 동시에 인간의 마음과 자연을 동일시하고 있다. 꽃나무가 햇살을 받아 새 싹을 틔워 성장하고 마침내 꽃망울을 터트리는 것처럼, 사람도 자신도 모르게 제 가슴 속 에서 자라난 사랑의 감정으로 말미암아 행복에 젖거나 불행에 빠지게 된다는 자연 현상으로 사랑을 파악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사랑의 표현을 '웃어진다'와 '울어진다'라는 피동형으로 나타낸 것이다. (현대시 목록, 인터넷)         ◈ 내사랑은/박재삼   한빛 황토재 바라 종일 그대 기다리다, 나는 내 얼굴 여울 아래 가라앉는, 가야금 저무는 가락, 그도 떨고 있고나.   몸으로, 사내 장부가 몸으로 우는 밤은, 부연 들기름 불이 지지지 지지지 앓고 달빛도 사립을 빠진 시름 갈래 만 갈래.   여울 바닥에는 잠 안자는 조약돌을 날 새면 하나 건져 햇볕에 지쳐 주리라. 가다간 돌에도 대어 눈물 적셔 주리라.   ==================================================================     박재삼 시인 문학관 탐방                                                                                 글/ 사진 이 규 봉      박재삼 시인의 고향이자 그의 시 원천인 먼 삼천포 남쪽바다, 잔잔한 물결에 실려와 쉴새없이 솔가지를 간지르는‘천년의 바람’을 맞으러 천리 길을 나선다.      이미 추수를 끝낸 경부 고속도로 주변의 논들은 한적하고 여유롭다. 아카시아 잎, 싸리나무 여린 잎사귀들이 노랗게 물들어 마치 개나리꽃이 활짝 피어 있는것 처럼 계절을 혼동하게 한다. 천안을 지나자 짙은 안개가 길을 막아선다. 햇볕은 안개에 가려지고 대진고속도로로 접어들자 덕유산 정상에 걸쳐진 구름과 안개가 한 폭의 산수화를 펼쳐낸다.      햇볕과 안개가 숨바꼭질을 하고 다리와 터널이 숨었다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깊은 산골짝을 흘러온 냇물이 모이고 모여서 이룬 청청(靑淸)한 남강 상류를 지난다. 삼천포 바다가 그다지 멀지는 않았다. 길가 옹기종기모여있는 시골 마을, 탐스러운 감들이 나무 끝가지에서 가을빛으로 익어가는 성숙의 시간을 보네고 있다.   감나무쯤 되랴, 서러운 노을빛으로 익어가는 내 마음 사랑의 열매가 달린 나무는!   이것이 제대로 벋을 데는 저승밖에 없는 것 같고 그것도 내 생각하던 사람의 등뒤로 벋어가서 그 사람의 머리 위에서나 마지막으로 휘드러질까본데,   그러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안마당에 심고 싶던 느껴운 열매가 될는지 몰라!   새로 말한면 그 열매 빛깔이 전생의 내 전(全) 설움이요 전(全) 소망인 것을 알아내기는 알아낼는지 몰라! 아니, 그 사람도 이 세상을 설움으로 살았던지 어쨋던지 그것을 몰라, 그것을 몰라!                             -「한(限)」전문   ‘가장 슬픈 것을 노래한 한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을 노래한 것이다.’ 라는 명제를 금과옥조로 여기며 시를 써왔다는 박재삼 시인, 시인은 노을빛 아래 붉게 익어가는 감 빛깔이‘전생(前生)의 전(全) 설움이고 전(全) 소망’이라 느끼며 저승에서나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다 못한 사랑의 아픔, 세상살이 설음을 이렇듯 한(限)으로 노래한 것인가.     차는 사천 IC를 빠져나와 와룡산을 바라보며 바다 쪽으로 달린다. 멀리 쪽빛 바다가 보이고 섬들이 나타나고 섬과 섬을 이어주는 붉은 아치형의 남해대교가 시야에 들어온다. 푸른 바다와 붉은 다리, 검푸른 섬들이 조화를 이룬 절묘한 풍경이다. 생선 비린내가 물씬 풍겨오는 바다 가에 섬 같기도 하고 어머니 가슴 같기도 한 노산공원에 차가 닿았다. 노산공원을 끼고 해안으로 빠지는 박재삼 거리를 걷는다.      박재삼 시인의 대표시기 된「울음이 타는 가을 강」과「내 고향 바다 치수」시비가 공원에 세워져 있다.    -박재삼 시인 시비(울음이 타는 강)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江)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 보담도 내 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죽은 가을 강(江)을 처음 보것네.              -「울음이 타는 가을 강」 전문     친구의 서러운 사랑이야기는 자신의 사랑이야기 일런지도 므른다. 오르막 사랑과 내리막 이별로 갈라진 등성이에 이르러 시인(화자)은 어느새 눈물 흘리며, 마음은 해질녘 울음이 타는 서러운 가을 강으로 향하고있다, 첫사랑 그 다음 사랑의 열정도 다 사라져가는 사랑의 종말에 이르는 허무의 강으로 마음이 옮겨 가는 것이다. 문학평론가인 이건청 교수는‘한국 현대시사에 드물게 보는 견고한 서정’이라 했다.     박재삼 문학관으로 오르는 돌계단은 가파르다. 계단 옆 동백나무는 한겨울 추위를 견디고 나서 피워야 할 진홍 빛 꽃잎들을 가을에 성급하게 몽우리를 터트렸다. 꽃들이 잠시 계절을 착각한 것인가 아니면 먼데서 온 손님을 맞아주는 것인가. 여튼 꽃은 마음을 밝게 해준다. 등성이에 이르자 번듯한 현대식3층 건물 이 눈에 들어온다.     -박재삼 문학관    시원스레 터진 넓은 잔디마당 한쪽엔 몇 백 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서 있고, 한쪽엔 옛 서당이던 호연제(浩然齊) 한옥건물이 말끔하게 자리하고 있다. 바다와 섬과 남해대교가 내려다보이고 사천시가와 시가 뒤의 와룡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문학관이 공원 속에서 시민과 함께 호흡하며 시민의 쉼터를 재공해 주는 참 좋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배인숙 문학관 해설가가 친절히 안내를 해준다. 로비에는 박재삼 시인 흉상이 삼천포 바다를 배경으로 한 대형 그림 앞에 놓여 있고, 그림에는    -박재삼 시인 흉상   진실로 진실로 세상을 몰라 묻노니 별을 무슨 모양이라 하겠는가 또한 사랑을 무슨 형체라 하겠는가                      93년 봄 박재삼     시인의 친필 시가 적혀있고, 이 그림 양 옆으로 시인의 흑백 대형 초상 사진이 있다. 전시실을 들어서자 박재삼시인 연보를 사진과 함께 년대별로 기록하여 놓았다.      1930년대 : 1933년 아버지 박찬홍과 어머니 김어지의 차남으로 일본 동경에서 출생하였으며, 아버지는 노동 어머니는 행상을 하였다. 형이 있었고 후에 누이동생 두 명이 태어났다. 1936년 가족이 모두 귀국하여 어머니의 고향인 경남 삼천포 현 사천시 서금동(팔포)에 자리를 잡고 유년 시절을 바닷가에서 보냈다.    -박재삼 시인의 어린시절(형과 함께)    1940년대 : 1940년 현 삼천포 초등학교의 전신인 수남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삼천원의 입학금이 없어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삼천포 여자 중학교 사환(使喚)으로 들어갔다. 그때, 이 학교의 김상옥 선생님을 만나 시인의 길을 걷는다. 다음해 삼천포 중학교 병설 야간중학교에 입학, 당시 김상옥 시인의 첫 시조집『초적(草笛)』을 공책에 베껴 애송하였으며, 1948년 교내신문『삼중(三中)』창간호에 동요「강아지」시조「해인사」를 발표하였다.다음해에 장학생이 되어 주간 삼천포 중학교에 진학하였으며, 잡지『중학생』에 시「원두막」을 투고하여 실렸다. 진주에서 열린 제1회 영남예술제의 ‘한글시백일장’에서 시조「촉석루」가 차상으로 입상하였다.   -박재삼 시인의 학생 시절      1950년대 : 진주농림에 다니던 김재섭, 김동일과 함께 동인지『군상(群像)』을 발간하였다. 삼천포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모윤숙의 추천으로 시조「강물에서」가『문예』지 12월호에 발표되었다. 은사 김상옥 선생의 소개로 현대문학사에 취직하여『현대문학』창간 준비에 매진했다. 1955년 유치환의 추천으로『현대문학』에 시조「섭리」가 실리고 서정주의 추천으로「정적」이 발표되어 김관식, 신동준과 함께 등단하였다. 이해 고려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하였으며(3년 중퇴) 현대문학사가 제정한 제2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고은 시인과 함께    1960년대 : 구자운, 박성룡, 박희진, 성찬경등과 함께『60년대 시화집』동인으로 활동하였다. 1962년 김정림 여사와 결혼했다. 처녀시집『춘향이 마음』을 출간하였다. 이어 제2시집『햇빛 속에서』제3시집『천년의 바람』제4시집『어린것들 옆에서』를 출간하였으며, 제1수필집『슬퍼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출간하였다. 대한일보 기자, 출판사 근무, 신문에 바둑 관전기 수록, 한국 시인협회 사무국장, 대한기원 이사 등 저작활동과 사회 활동을 왕성하게 하였으며, 문교부 주관 문예상, 한국 시인협회 상(회장 박목월)을 수상하기도 하였으나, 1967년 남정현의‘분지’사건 공판을 보고 고혈압으로 쓰러져 지병으로 평생을 고생하게 되었다.     1970년대 : 제5시집『뜨거운 달』제6시집『비 듣는 가을나무』를 출간하였으며, 제2수필집『빛과 소리의 풀밭』제3수필집『노래는 참말입니다』제4수필집『샛길의 유혹』을 출간하였다. 제7회 노산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으나 이 무렵 고혈압, 위궤양으로 입원하는 등 지병으로 고통을 받았다.     1980년대 : 제7시집『추억에서』와 제8시집『대관령근처』제9시집『내 사랑은』제10시집『찬란한 미지수』제11시집『사랑이여』를 출간하였으며, 또한 제5수필집『너와 내가 하나로 될 때』제6수필집『아름다운 삶의 무늬』제7수필집『차 한잔의 팡세』제8수필집『사랑한다는 말을 나 그대에게 하지 못해도』를 출간하였고『바둑환담』도 책으로 펴냈다. 자랑스러운 서울 시민상,중앙일보 시조대상, 제2회 평화문학상, 제7회 조연현 문학상도 수상하였다.또한 고향 삼천포 노산공원에 시비 을 건립하였다.     1990년대 : 제12시집『해와 달의 궤적』제13시집『꽃은 푸른빛을 피하고』제14시집『허무에 갇혀』제15시집『다시 그리움으로』를 출간하였으며, 제9수필집『미지수에 대한 탐구』제10수필집『아름다운 현재의 다른 이름』을 출간하였다. 인촌 상, 삼천포 문화상, 제1회 겨레시조대상, 제1회 한맥문화 대상, 95바둑문화상 공로상를 수상하였다.1996년 신부전증으로 쓰러져, 1997년 6월8일 새벽 5시경 오랜 투병생활 끝에 영민하였다. 유택은 평소 고인을 따르던 시인 강경훈의 호의와 고인의 유지에 따라 충남 공주군 의당면 도신리에 마련하였고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문학관에는 ‘박재삼과 함께 한 아름다운 사람들’의 사진과 함께 글이 적혀있다. 박재삼 시인은 평소 소박 소탈하고 정이 많았다. 질병과 싸우면서도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고 겸손하였으며,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중용의 태도를 지녀 자연히 이치에 순응할 줄 알았다. 이런 성품은 문학계 저명인사들뿐만 아니라 바둑계 인사 등 다양한 사람들과의 인연을 맺었다.      스승 김상옥 시인과 문학계의 유명한 박목월, 서정주, 구자운, 김종길, 김남조, 성찬경, 박희진, 고은, 김후란, 박성룡 시인과 소설가 김동리, 조정래,바둑기사 조남철, 조훈현등 다양한 인물등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평화 문학상    문학관 한쪽에 재현해 놓은 박재삼 시인의 글방에는 시인이 사용하던 책상뿐 아니라 생전에 읽었던 책들과 친필 메모원고지, 스크랩북, 안경, 시계, 여권,도장, 지갑, 만년필 등 소품이 전시되어 있다. 개인 서신과 그리고 시인이 작고했을 때 김남조, 이근배 시인의 조사가 진열되어 있다.     시집 15권과 수필집 10권이 진열되어 있으며, 박재삼의 시세계를 간략하게 조명해 놓았다. 아직 시인의 전집이 나오질 않아 시중에서 시집과 수필집을 구입하기가 쉽지않다. 정가 15,000원 박재삼 시선집(민음사)이 중고가로28,000원이다. 필자는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박재삼 소년이 김상옥 시조집을 공책에 베끼듯이 필사 하였다. 더구나 수필집은 일반 도서관에도 없다. 진열된 수필집을 보고 해설가에게 좀 빌려줄 순 없냐고 농담으로 말했더니 그저 웃기만 한다. 어서 전집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재삼 시인의 시집     박재삼 시인은 다른 어떤 시인보다도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잘 드러나는 시를 썼고, 말소리와 말뜻을 조화시킨 오묘한 운율을 만들어 시인의 감정을 아름답게 표현했다. 그리고 광복 무렵과 한국전쟁기간을 전후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했던 경제적 빈곤을 뼈저리게 겪으면서, 일상적 자신의 체험을 중심으로 누구나 이해하기 쉽고 누구나 가슴깊이 새길 수 있는 시를 썼다. 또한 그 나름의 인생관으로 삶의 괴로움을 극복하는 시를 꾸준히 써 왔기에 그의 작품 속에는 그만의 독특하고 깊은 시세계가 자리 잡고 있다.     한과 슬픔의 정서 : ‘가장 슬픈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박재삼 시인의 말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박재삼 시의 주된 정서는 ‘한’과 ‘슬픔’이라는 두 단어로 함축된다. 이런 것은 시인이 어린 시절 경험했던‘가난’과 잦은 질병으로 인한 외로움 고통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박재삼 시인은 이 한과 슬픔을 다스려 그것을 극복해 내는 시를 썼다. 박재삼 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랑, 자연, 허무는 ‘한’과 ‘슬픔’을 극복하는 방편들이다.     자연을 통하여 승화된 한과 슬픔 : 박재삼 시는 햇빛, 나무, 땅, 바다,풀, 바람과 같은 자연적인 소재와 자연의 의미를 통해 형상화 되었다. 자연은 인간의‘한’과 ‘슬픔’을 포용하는 절대적 존재인 동시에 삶의 고통과 즐거움, 죽음에의 공포와 생명에의 경외가 하나가 되어 서로 화합하는 장소인 것이다. 박재삼의 시에 자연적인 존재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유년시절을 보낸 고향 삼천포라는 자연 환경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겠다.     사랑의 힘에 의한 ‘한’과 ‘슬픔’의 극복 : 한과 슬픔에 대한 극복을 위해 박재삼의 정신세계가 의지한 곳은 사랑이었다. 삶의 최상의 가치를 사랑에서 찾았다. 사랑이 있기에 삶은 가난하고 허무한 것일지라도 살만한 가치가 있다. 이 사랑을 가족 간의 사랑으로 춘향의 사랑으로, 흥부의 사랑으로, 남평문씨의 사랑으로 표현했다. 충만한 사랑이야 말로 ‘한’과 ‘슬픔’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박재삼 시인은 도처에서 노래하고 있다.     한과 슬픔의 근원인 허무에의 깨달음 : 박재삼의 시는 후기에 가까와 지면서‘허무’를 많이 이야기한다. 박재삼 시인은 ‘한’과 ‘슬픔’의 근원인 삶의 허무를 철저히 깨닫고 수용함으로서‘한’과 ‘슬픔’그리고‘허무’를 역설적으로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특정시어의 반복과 종결어미의 다양화 : 박재삼은 눈물, 강물, 나무, 햇빛, 달, 별, 구름, 바다, 바람 같은 특정적인 시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섬세한 묘사에 주력하고 있다. 그리고 종결어미인‘-이다'‘-라’를 ‘-것가’ ‘-을래’ ‘-것네’ ‘-이야’ ‘-까나’ 등으로 과감하게 바꾸어 다양하게 활용한다. 이와 같은 종결어미를 다양하게 활용하는 것은 옛 시와 현대시 사이의 문체 단절을 극복하고, 전통적인 정서를 잘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서술적으로 흐르기 쉬운 간접화법의 형식에서 벗어나 사실적인 언어에 활기를 불어넣는 역할도 하고 있다.   -박재삼 시인의 글방      시민과 함께 호흡하려는 문학관 2층에는 박제삼 시 맞추기, 박제삼 시를 직접 낭송하고 감상하는 시 체험 공간이 있다. 쥬크박스에서 시와 배경음악을 선택하여 시를 낭송하고 USB 등에 담아갈 수 있다. 필자는 평소에 좋아하던 시「아득하면 되리라」를 선정하여 낭송을 해 보았다.     해와 달, 별까지의 거리 말인가 어쩌겠나 그냥 그 아득하면 되리라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도 자로 재지 못할 바엔 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   이것들이 다시 냉수사발 안에 떠서 어른어른 비쳐오는 그 이상을 나는 볼 수가 없어라. 그리고 나는 이 냉수를 시방 갈증 때문에 마실 밖에는 다른 작정은 없어라.   -「아득하면 되리라」 전문     필자는 오래 전부터 사진을 많이 찍었다. 특히 안개 속의 풍경과 물그림자 사진을 즐겨 찍는다. 이때 셔터를 누르기 전에 속으로 중얼대는 말이‘아득하면 되리라’‘그냥 아득하면 되리라' 다. 세상이 자로 잰 듯이 매사가 반듯하고 분명하기만 하여서야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싶다. 안개 속에 아른 아른 비쳐오는 것, 물속에 어른어른 일렁이는 것, 이런 것들에 삶의 묘미는 더 보태지는 것이다.     사랑도 그런 거 아닐까. 박재삼 시인은 에서‘시’와 ‘눈물’이 없는 세상은 생활에 물기가 없는 세상이라고 했다.  “시에서 밥이 안 나오고, 눈물을 흘려서 일의 능률에 손해라는 것만 따진다면 세상은 너무나 삭막해지기 마련이다. 소득의 극대화를 계산기로 누르고 있을 때, 삶의 윤기를 찾을 도리가 없어지고 만다. 정거장이나 부둣가에서 손수건을 들고 눈물을 닦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생활이 메말라 가고 있다는 것” 이라고     박재삼 시인은 시를 잘 쓰기위한 비법은 없다고 했다. 많은 문학체험과 꾸준한 연습, 반복된 수정이 중요하며, 깊고 풍부한 사고 능력과 사물을 따뜻하면서도 날카롭게 볼 줄 아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그리고 생명의 근원지인 자연에서 그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전시관을 나선다. 해설가는 노산공원 남쪽 끝, 바다가 바로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한 박재삼 시비로 안내 했다. 이 시비는 시인이 작고하기 12년 전인1985년에 세워진 것으로, 박재삼 시를 좋아하는 삼천포의 한 부부가 박재삼 시비를 세우기로 작정하고, 몇 년간 적금을 부어 모은 돈으로 세웠다고 한다.빗돌은 경남 산청에서 운반해 왔으며, 시비 자리는 시인이 즐겨 사색 하였던 곳으로 박재삼 시인이 직접 지정했다고 한다.   -박재삼 시인의 시비(천년의 바람)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 새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년 전의 되풀이다.          -「천년의 바람」중에서     제3시집『천년의 바람』의 표제가 되기도 한 이 시는「울음이 타는 강」과 함께 박재삼 시인의 대표시가 되었다. 시비에 있는 시는 으로 까지 다 쓰기에는 돌의 면적이 부족했나보다. 주변에 소나무들이 많다. 지금도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소나무 가지를 쉴 사이 없이 간지르며 장난을 치고 있다.‘천년 전에 하던 장난’이란 표현이 참으로 절묘하고‘소나무 가지에 쉴새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준다’ 는 이미지는 손끝에 닿을 정도로 감각적이다.     시인은 만년에 쓴 시「노산에 와서」에“소시적 꾸중을 들은 날은 이 바다에 빠져드는 노산에 와서 갈매기 끼륵대는 소리와 물비늘 반짝이는 것 돛단배 눈부신 것에 혼을 던지고 있었다.” 고 회고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나이 들어“이제 나를 꾸짖는 이라곤 없이 심심하게 여기 와서 풀잎에 내리는 햇빛, 소나무에 감도는 바람을 이승의 제일 값진 그림으로서 잘 보아 두고, 또 골이 진 목청으로 새가 울고 가다간 벌레들이 실개천을 긋는 소리를 이승의 더할 나위 없는 가락으로서 잘 들어 주는 것 밖엔 나는 다른 볼 일은 없게 되었거든요.” 라고 나이 들어가는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해설가는 노산공원 입구에서 몇 십 미터 떨어진 골목길에 있는 시인이 살던 옛 집터(지금은 상가)를 알려 준다. 공원과의 거리로 보아 이 시 속의 이야기는 시인의 실체험 인것으로 보인다.     이쯤에서 배인숙 해설가와 아쉬운 작별을 한다. 친절하게 설명을 하여주고 안내를 해 주신데 감사를 드린다. 박재삼 기념사업회 정삼조 시인은 “그분의 시의 바탕은 고향 삼천포의 바다이며 섬이고, 바다위에 찬란히 부서지는 햇빛이고 달빛이며, 그 속에서 울고 웃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했다. 박재삼 시인의 또 다른 문학관이 되기도 할 삼천포 바다를 일주하는 유람선을 탔다. 붉은 아치형 남해대교가 우선 눈에 들어오고 멀리 가깝게 크고 작은 무수한 섬들이 보인다.   그의 형제와 그의 사촌들을 더불고 있듯이 바람받이 잘하고 햇볕받이 잘하며 어린 섬들이 의좋게 논다.   어떤 때는 구슬을 줍듯이 머리를 수그리고 어떤 때/ 고개 재껴 티없이 웃는다   그중의 어떤 누이는 치맛살 펴어 춤추기도 하고 그중의 어떤 동생은 뜀박질로 다가오기도 한다.   바라건대 하느님이여 우리들의 나날은 늘 이와 같은 공일날로 있게 하소서.   -「섬을 보는 자리」 전문     화안한 꽃밭 같내 참.   눈이 부시어, 저것은 꽃 핀 것가 꽃 진 것가 여겼더니, 피는 것 지는 것을 같이한 그러한 꽃밭의 저것은 저승살이가 아닌 것가 참. 실로 언짢달 것가 기쁘달 것가.   거기 정신없이 앉았는 섬을 보고 있으면, 우리가 살아닥 해도 그 많은 때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숨소리를 나누고 있는 반짝이는 봄바다와도 같은 저승 어디쯤에 호젓이 밀린 섬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 것가.   -「봄 바다에서」 부분       유람선이 삼천포 바다를 한 바퀴 도는 시간은 1시간 30분이 소요된다. 바다에서 의좋게 노는 어린 섬들과, 공일처럼 편안하고 평화스러운 섬도 만나 보았다. 바다위에 피는 것 지는 것을 같이 한 시인의 꽃밭도 찾아보았다.     갈매기는 새우깡 하나를 얻어먹기 위해 한 시간 동안 유람선을 따라 다닌다. 문득, 한 사발 밥을 얻어먹기 위해 아침부터 해 어스름 질 때 까지 종 끈에 매달려 있던 종치기 소년 박재삼이 눈에 그려진다. 그리곤 삼천포 노산공원 등성이에서 죽어 호강하는, 죽은 사람이 산 사람과 숨소리를 함께 나누고 있는 시인 박재삼을 생각해 본다. 시인의「나의 시」를 생각한다.   햇볕에 반짝반짝 윤이 나고, 파랗고, 또한 빛나는 것 밖에 할 줄을 모르는 저 연약한 잎사귀들을 보아라. 산들바람에 몸을 이리 눕혔다 저리 눕혔다 생명의 광휘(光輝)만을 이 세상에 즐거운 노래로써 남기는, 그러나 그 한때 뿐, 가장 귀한 짓을 하면서 결국은 그냥 사라져가는 끝없는 무욕을 하염없이 바라보노라니 오히려 부끄럽고 허전하고나.   나는 시를 쓰기는 쓴다마는, 하여간 죽고 나서 이 세상에 남을 것을 바라고 기록한다마는 저 이파리의 서늘하고도 그윽한 것에 미치지 못하고 빈약하고 헛된 짓만 하는 듯 마음 절로 외로워지느니.   -「나의 시」 전문   시인이시여, 당신의 시는 생명의 광휘(光輝)를 이 세상에 즐거운 노래로남기는 이파리들처럼 이 세상에 영원히 빛날 것 입니다. ==================================   [출처] 박재삼 시인 문학과 탐방|작성자 수산  
346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以後 시: 신석초 - 바라춤 댓글:  조회:4231  추천:0  2015-12-18
                              바 라 춤                         - 서장                                           신석초             언제나 내 더럽히지 않을   티없는 꽃잎으로 살어 여려 했건만   내 가슴의 그윽한 수풀 속에   솟아오르는 구슬픈 샘물을 어이할까나.         청산 깊은 절에 울어 끊긴   종소리는 아마 이슷하여이다.   경경히 밝은 달은   빈 절을 덧없이 비초이고   뒤안 으슥한 꽃가지에   잠 못 이루는 두견조차   저리 슬피 우는다.       아아 어이하리, 내 홀로   다만 내 홀로 지닐 즐거운   무상한 열반을   나는 꿈꾸었노라.   그러나 나도 모르는 어지러운 티끌이   내 맘의 맑은 거울을 흐리노라.       몸은 설워라   허물 많은 사바의 몸이여!   현세의 어지러운 번뇌가   짐승처럼 내 몸을 물고   오오, 형체, 이 아리따움과   내 보석 수풀 속에   비밀한 뱀이 꿈어리는 형역(刑役)의   끝없는 갈림길이여.       구름으로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 소리   지는 꽃잎도 띄워 둥둥 떠내려가것다.   부서지는 주옥의 여울이여!           너울너울 흘러서 창해에   미치기 전에야 끊일 줄이 있으리.   저절로 흘러가는 널조차 부러워라.                    = 이하 생략 =       - (1939) -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불교적, 구도적, 상징적, 명상적 ◆ 표현 : 격정적 어조로 내면적 고뇌를 표출함.              심리적 상승과 하강의 파동적 전개 구조를 취함.              '두견'에 화자의 감정을 이입함.              '꽃잎(해탈)'과 '샘물(번뇌)'의 대립적 이미지를 드러냄.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바라춤 → 부처에게 제를 지낼 때 바라(인도에서 유래한 악기)를 울리고 천수다라니를 외면서 추는 춤.     * 티없는 꽃잎 → 속세에 물들지 않은 맑고 깨끗한 정신의 경지(구도자의 정신 자세), 티없는 열반의 경지                              화자가 추구하는 맑고 아름다운 삶의 이미지     * 구슬픈 샘물 → 세속적 번뇌와 갈등     * 종소리 → 깊은 절에서 울리다 끊어진 종소리의 공허감은 화자 자신의 황량한 마음과 비슷하다고 인식.     * 잠 못 이루는 두견 → 티없는 꽃잎과 구슬픈 샘물 사이의 갈등 속에서 괴로워하는 화자의 모습이 투엳됨.                                      감정이입된 대상물.     * 무상한 열반 → 드높은 초월의 경지     * 어지러운 티끌 → 미처 떨쳐 버리지 못한 세속적 번뇌     * 맘의 거울 → 불교에서 말하는 진체로, 원래 본성은 맑고 깨끗하지만 삼독(三毒)에 의해 가려져 있어서                              흐리게 된다고 한다. 이 삼독을 제거하는 일이 곧 구도의 길이 된다.     * 내 맘의 맑은 거울을 흐리노라 → 마음의 고요함을 깨뜨림.     * 사바 → 속세     * 아리따움과 내 보석 수풀 속 → 열반을 추구하는 아름다운 몸뚱이     * 형역 → 육신의 욕망에 의한 정신의 예속을 뜻하는 말로, 정신이 육체의 지배를 받음을 의미함.     * 뱀이 꿈어리는 형역 → 생명을 지닌 존재로서 육체의 욕망(욕정)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상태.     * 내 보석 수풀 속에 / 비밀한 뱀이 꿈어리는 형역의 / 끝없는 갈림길이여              → 정신과 육체, 감각과 관념 사이에서 갈등하는 화자의 절절한 절규가 담긴 말.     * 5연 → 해탈에 대한 갈구가 '물'의 이미지와 함께 표현되고 있음. '창해'는 열반을 의미하며, '시냇물'은                  창해에 '저절로' 들어가지만, 화자는 저절로 열반에 들 수 없음에 부러움으로 바라보고 있다.      ◆ 제재 : 바라춤 ◆ 주제 : 삶의 고통과 번뇌의 초월 의지            해탈에의 염원과 번뇌의 갈등.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현실과 이상의 갈등      ⇒ 속세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마음으로 살려 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까닭모를 슬픔이 솟아오른다. ◆ 2연 : 내면 세계의 슬픔     3연 : 세속과 열반 지향 사이의 갈등     ⇒ 깊은 산속 빈 절에 울리는 풍경소리와 흐르는 달빛, 두견새의 슬피우는 소리는 신비로운 적막감을                    불러일으키고, 나는 여기서 열반의 경지를 꿈꾸지만 번지는 잡념을 누를 길 없다. ◆ 4연 : 세속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슬픔     5연 : 종교적 구원에 대한 염원      ⇒ 이승의 존재로서 나의 육신은 온갖 번뇌로 가득찬 몸, 이 깊은 계곡 흐르는 시냇물의 가벼움과                      자유가 부럽다.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은 신석초의 대표적 작품으로서 모두 421행에 달하는, 길이가 매우 긴 작품이다. 1941년에 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래 본시 부분은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1957년에 발표되었으며, 최종적으로 시집 『바라춤』에서 그 완성된 모습을 보인다. 시인이 여러 해 동안 한 작품의 완성에 몰두하였다는 것은 우리 시 문학사에서 흔히 발견되는 현상은 아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신석초가 이 작품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시의 제목인 '바라춤'이란 불교적 제의에서 연행되는 승려들의 춤을 가리킨다. 시인은 승려들의 춤을 바라보면서 느낀 감정과 그 영상을 바탕으로 시상을 구성한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이 시를 읽으면서 시상의 흐름이 춤의 율동에서 느낄 수 있는 리듬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나타남을 알 수 있다. 특히 시인은 이 시를 구성함에 있어서 시조의 운율에 자연스럽게 이끌려 갔음을 밝힌 바 있는데, 이것은 단순히 3 · 4조의 자수율이나 4음보 형식의 정형률을 고수했다는 측면에서보다는 우리의 전통 시가 양식으로서 시조가 지닌 음악적 측면, 즉 감정의 자연스런 흐름을 읊조리는 내면적 정서에 동화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조지훈의 와 제재 및 갈등 구조가 비슷한데, 이 작품에서는 춤의 동작에 대한 묘사가 없고 갈등의 양상은 좀더 강렬하게 나타나 있다. 이 시의 정서의 실체는 삶의 고독과 번민, 그리고 정한의 세계로 구현되고 있다. 그것은 바라춤이라는 시적 소재가 불교적 구도의 자세를 바탕으로 한 것과 관련된다. 즉 현세의 모든 인간적 번뇌에 몸부림치는 현실적 자아와 내세의 초월적 경지를 염원하는 이상적 자아 사이의 갈등을 관조적인 태도로 드러냄으로써 시적 승화를 꾀하고 있다. 이 시는 비록 수많은 관념어와 한자어, 특히 불교적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전체적인 시상은 흐르는 물의 이미지를 느낄 수 있을 만큼 유연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시인의 시집 『바라춤』의 후기에서 "아무도 부단히 전이하여 가는 세조(世潮)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일이며, 또 그것을 막을 수도 없는 일이다. 또 방대한 유역의 어느 안전한 언덕에 자기만의 특유한 위치를 안착시킬 수도 없는 일이다. (…) 우리들의 정신은 언제나 있지 않은 것을 희구한다. 보다 새로운 것을 보다 나은 것을 희구한다. 인류사조의 수많은 세대의 여울에 광망(光芒)있는 몇몇의 이름이 부침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등 독자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각자 세대가 남겨놓고 간 정신의 주옥이다." 라고 하여 삶의 역정에 달관하려는 태도를 천명하고 있는데, 그러한 정신적 지향을 바로 우리 고유의 서정적 세계 속에서 찾고자 한 것에 이 시의 특징이 있다.         바라춤                       - 신 석 초      "환락은 모두 아침 이슬과도 같이 덧없어라" ―싯타르타   언제나 내 더럽히지 않을 티없는 꽃잎으로 살아 여러 했건만 내 가슴의 그윽한 수풀 속에 솟아오르는 구슬픈 샘물을 어이할까나.   청산 깊은 절에 울어 끊인 종소리는 하마 이슷하여이다. 경경히 밝은 달은 빈 절을 덧없이 비추이고 뒤안 이슷한 꽃가지에 잠 못 이루는 두견조차 저리 슬피 우는다. 아아, 어이하리. 내 홀로, 다만 내 홀로 지닐 즐거운 무상한 열반을 나는 꿈꾸었노라. 그러나 나도 모르는 어지러운 티끌이 내 맘의 맑은 거울을 흐레노라.   몸은 설워라. 허물 많은 사바의 몸이여. 현세의 어지러운 번뇌가 장승처럼 내 몸을 물고 오오, 형체, 이 아리따움과 내 보석 수풀 속에 비밀한 뱀이 꿈어리는 형역의 끝없는 갈림길이여. 구름으로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 소리 지는 꽃잎도 띄워 둥둥 떠나려가겄다 부서지는 주옥의 여울이여. 너울너울 흘러서 창해에 미치기 전에야 끊일 줄이 있으리. 저절로 흘러가는 널조차 부러워라.   접동새, 우는 접동새야. 네 우지 말아라. 무슨 원한이 그다지 골수에 사무치길래 밤중만 빈 달에 피나게 울어 남의 애를 끊느니.   이화(梨花) 흰 달 아래 밤도 이미 삼경인 제 승방에 홀로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하나니 시름도 병인 양하여 내 못 잊어 하노라.   아아, 속세의 어지러운 진루(塵累)여. 허울 좋은 체념이여 팔계(八戒) 게송이 모두 다 허사런가 숙명이 낳은 매혹의 과실이여. 묻혀진 백옥의 살결 속에 묻혀진 백옥의 살결 속에 내 꿈꾸는 혼의 슬픈 심연이 있어라. 다디 단 꽃잎의 이슬 걷잡을 수 없이 흐르는 애끓는 여울이여 길어도 길어도 끊이지 않는 가슴 속의 샘물이여.   눈물이 꿰어진 진주 다래라면 눔비니 밝은 구슬성도 이루지 안 했으랴. 눈물이 꿰어진 진주 다래라면 수미 높은 뫼도 아니 이뤘으랴. 눈물이 흘러 이내 흔적이 없으니 내 그를 애달퍼하노라.   아아, 헛되어라 울음은 연약한 속임이여. 수유에 빛나는 거짓의 보석이여. 내가 호숫가에 쓸쓸히 설레는 갈대런가 덧없는 바람 달에 속절없이 이끌리는 값싼 시름의 찌꺼기여.   적멸이 이리도 애닯고나. 부질없는 일체관념(一切觀念)이여. 영생의 깊은 수기(授記)가 하마 허무하여이다. 관념은 모두 멸하기 쉽고 잠든 숲속에 세월이 흐르노라. 어지러운 윤회의 눈부신 여울 위에 변하여 가는 구름 연기 시간이 남긴 사원 속에 낡은 다비만 어리나니 세월이 하 그리 바쁜 줄은 모르되 멎는 줄을 몰라라.   덧없이 여는 매살한 손이여. 창 밖에 피인 복사꽃도 바람 없이 지느니 하물며 풍상을 여는 사람의 몸이야 시름한들 어이리 오오, 변하기 쉬운 꽃여울이여. 내 아리따운 계곡에 흐느껴 우는 소리 내 몸 잔잔한 흐름 위에 홀연히 여는 전이(轉移)의 물결 위에 내 끝내 지는 꽃잎으로 허무히 흘러 여는다.   다만 참된 건 고뇌하는 현유(現有)의 육신뿐인가. 순간에 있는 너 삶의 빛깔로 벅차 흐르는 내 몸뚱어리   순수한 욕구로 불타오르는 꽃송아리 황홀히 타는 구슬의 꽃술 속에 망령된 시름하는 나비들은 금빛으로 날아 빗발처럼 쏟아지느니   깊은 산 유리 속에 홀로 선 내 모습이 하마 청산의 허재비 같으니다.   장근 동산이 날 에워 한 조각 여는 구름모양 저 영을 넘지 못하는다 내 안에 내 안 내 누리 안에 무닐 수 없는 장벽이 있도소이다. 아아 애절한 구속의 모래문이여.   넓은 천지간에 속세를 등져 깊이 숙여 쓴 고깔 밑에 고이 접은 네 아미 죄스럼과 부끄러움을 가려 그늘진 푸르른 정의(淨衣) 남몰래 앓는 백합을 어리는 빈 산 칡 달은 하마 휘엿하여이다. 야삼경 호젓한 다락에 들리느니 물소리만 요란한데 사람은 없고 홀로 타는 촛불 옆에 풀어지는 깃 장삼에 장한이 너울져 춤추는 부나비처럼 끝도 없는 단꿈을 나는 좇니노이다.   아아, 고독은 죄스러운 사념의 뱀을 낳는가 내 맘 그윽히 떠오르는 마아야 남몰래 떠오르는 꿈결 같은 마아야의 손길. …………. 천만 겹 두른 산에 어리고 서린 두렁칡이 밋밋한 오리나무를 친친 감아 얽으러져 제멋대로 살어 연다. 사람도 저처럼 어러져, 멋대로 살어 열까 바람도 그리움도 천만 없소이다. 나는…… 절로 피인 꽃이니다. 만개한 꽃의 매력으로 부풀어오른 몸뚱어리 오오, 순수한 장미의 덩어리여. 바람으로 솟은 둥실한 도리(桃李)의 메여   팔상(八相)에 이끌리는 무릇 재앙의 씨여 오오, 끊기 어려운 삼계(三界)의 질긴 연(緣)이여 내가 오히려 사갈나의 꿈숲을 얼 없이 헤매느니 광풍에 지부친 뱃사공처럼 물 아래 세 가닥 모래 깊은 웅뎅이를 보지 못하는다.   `보리살타' 오오, `보리살타' 나무 여래보살 나무 관세음보살 나무 지장보살   중생을 건지신 높은 덕에 청정한 크신 법에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한산모시 전시관 뒤편 양지바른 언덕에 있는 신석초시비  신석초 시비는 화강석으로 구름을 형상화 한 모양이 특이하다. 시인의 흉상을 제작한 정성도 놀랍다. 시비에는 “꽃잎절구”라는 시 한편이 있기에 읽어보니 우리네 삶도 꽃처럼 짧은 생의 순간이 아닐까? 더욱 소중하게 느꺼 진다.   꽃잎절구  / 신석초   꽃잎이여 그대 다토아 피어 비바람에 뒤설레며 가는 가날픈 살갗이여,     그대 눈길의 머언 여로(旅路)에 하늘과 구름 혼자 그리워 붉어저 가노니     저문산 길가에 져 뒤둥글지라도 마냥 붉게 타다 가는 환한 목숨이여,   ▒ 신석초 시인과 서천  : 서용선]     벚꽃은 며칠 째 하얀 웃음 그칠 줄 모르고 도화는 두 볼 가득 분홍바람 머금었으니 붉은 명자는 담벼락 사이 수줍어 숨어 있구나!       신석초 시인을 찾아가다...    오늘은 신석초 신인님의 조카 신홍순(LG패션사장)씨도 함께 하신다니 더욱 뜻 깊은 문학기행이 될 것 같다. 신석초 신인의 사랑을 듬뿍 받아오신 제자 김후란 시인과 함께 신석초 시인을 회고하는 시간을 가지니 모두들 시인이 된 듯, 시인의 날개를 달아 본다.        “시인이란 나무들의 대화소리, 꽃들의 소곤이는 소리도 들어야 합니다.” 사분사분 들려오는 시인의 음성에선 고운 발 살짝 들어 꽃 잎 딛는 시인의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바람마져 잔잔해진 저녁나절에 또다시 돌아보고 싶은 누군가가 있다면 아마도 그는 분명 시인일 거라는 생각을 하며 멀어지는 차 창 밖을 오랫동안 바라본다.   수려한 외모에 넉넉한 눈빛으로 선친들의 업적을 소개하는 LG패션 신홍순 사장님은 (신석초 시인 조카) 신석초 시인의 수려했을 옛 모습을 잘 연상하게 한다.     신석초 시인의 생가 터에는 근사하게 큰 집이 자리하고 있는데, 현재의 집 주인은 대대로 신석초 시인의 머슴으로 이어온 분이란다. 집 주인은 신석초 시인의 마음 덕으로 지금은 유명한 목수가 되어 잘 살고 있고, 자신의 땅에 신시인의 생가터 표식을 만들어 놓는 지혜로움까지 가지고 있어 지나는 이들을 흐뭇하게 한다. 신시인이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는 논 둑  길에는 이름 모를 꽃들까지 신시인의 고향에 피어났음을 뿌듯해하고 있으니 하늘 높은 종달이도 한 몫 거든다.    원래 천석군 집안에 태어난 신석초 시인은 몸에 배인 겸허함과 고고한 지성의 향기가 마치 학과 같았다고 한다.    자신을 우주를 떠도는 나그네라고 언제나 말해왔던 석초는 청마, 이육사 시인과 경주, 부여, 금강산 등을 늘 같이 여행하며 동인지 ‘자오선‘을 함께 만들기도 했다. 청마, 이육사를 유난히 사랑했던 석초는 육사의 시비를 세우는데 기여했고 육사와의 옛 추억을 68년 4월에 발표한다.   우리는 서울 장 안에서 만나 꽃사이에 술마시며 놀았니라 지금 너만 어디 메에가 광야의 시를 읊느뇨 내려다보는 동해 바다는 한잔 물이어라 달아래 피리불어 여는 너 나라위해 격한 말씀이 없네 -육사를 생각한다-    신석초 시인은 67세에 별세, 무덤은 25년만에 고향으로 이장되었다.    석봉 선생은 신석초 시인의 7대조로 차관보까지 지냈지만 평생을 청빈하게 사셨다. 호구지책을 위해 임금이 하사품을 내릴 정도였던 그는 후대에 까지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아 왔다.    이성산이 둘러싸인 신석초 시인의 묘는 백제가 망하고 백제를 다시 준비하던 지역이었고 고려 말엔 문인들이 많이 살아 문향으로 알려진다.    평생을 민족의식 고취에만 힘써왔던 석초는 일제 말살시 선조 석북묘에 참배하고 이육사와 더불어 긴 여행을 떠난다.    6.25때 아들을 잃은 석초는 1950년 1월 토지개혁으로 땅을 빼앗기게 되고, 그 결과 지금은 머슴이 그 집터에 큰 집을 짓고 살게 된 것 이다. ... ... 시비를 찾아서         신 웅 순(시인·평론가·중부대교수)       - 신석초 편        충남 서천 한산에는 허균 일가와 비견될 수 있는 문장가 일가가 있다. 신석초 7대조인 석북 신광수 일가이다. 당시 일세를 풍미했던 석북 광수, 기록 광연, 진택 광하, 부용당 신씨 4남매 시인들을 말한다. 숭문동은 학문을 숭상하는 마을 이름이다.    낡은 체재를 일신하고 새 시풍을 세워 일신을 풍미했던 석북은 중국의 백거이와 비교되기도 한다. 생존시 석북 만큼 만인에 회자된 시인은 일찌기 없었다. 당나라 시인 두보가 만년에 악양루에 오른 행적을 읊은 석북의 유명한 과시「관산융마」는 평양의 교방 및 홍류계에 인기는 물론 전국 방방곡곡 애창되었고 중국에까지 널리 회자되었다. 애국애족, 애민사상을 유교적 이념으로 승화시킨 이 시는 서도창으로 정조가 매우 구슬프고 처연하다. 일제 치하 백성들이 이 노래를 듣고는 잃어버린 조국 생각에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춘원 이보경이 평양에 있을 때 이 노래를 듣고 석북의 인기를 흠모한 나머지 이름을 아예 이보경에서 이광수로 개명했다고 한다. 인간문화재 명창 김정연, 김월하, 오봉녀 창에 이어 지금도 인간문화재 김경배, 김광숙, 한자이 등에 의해 불리워져 내려오고 있다.    이「관산융마」를 지은 영조 대 시인 석북의 7대 손이 바로 신석초 시인이다. 시인은 석북이 살았던 한산면 숭문동, 속칭 은골인 현 화양면 활동리 17번지에서 1909년 6월 4일(음력 4월 17일) 부친 신긍우와 모친 강긍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중에 있을 때 문 앞의 오얏나무에 두 초립동이가 올라가 오얏나무 열매를 따서 모친께 드리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시인으로 타고난 운명이었을까.    일본 유학시절 운명처럼 만난 발레리. 그의 작품을 접하고 온 몸이 전율했던 신석초. 발레리는 석초에게는 방황하던 젊은 시절 인생의 지표가 되었다. 석초는 일제에 찬동하거나 이용당하지 않았다. 일제의 치욕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던 젊은 시절. 그의 지우 육사는 절정을 향해 치열하게 조국을 위해 살다갔지만 석초는 조용히 멸하지 않는 정신으로 전통을 지켜 내면화의 길을 걸었다. 석초는 한국적인 것과 서구적인을 조화시키며 한국 선비의 길을 걸었다. 신화와 현실을 오가며 자연을 노래했고 서양의 프로메데우스와 한국의 처용을 노래했고 또한 생명과 폭풍을 노래했다. 그리고 비밀한 사랑도 노래했다.    이 석초 시비가 건지산성 기슭 모시관 옆에 세워져 있다.     꽃잎이어 그대 다토아 피어 비 바람에 뒤설레며 가는 가냘픈 살갗이여   그대 눈길의 머언 여로에 하늘과 구름 혼자 그리워 붉어져 가노니   저문 산 길가에 뒤둥글지라도 마냥 붉게 타다가는 환한 목숨이어.   -「꽃잎 절구」전문                                                                    건지산성 기슭에 있는 신석초 시비        위 「꽃잎 절구」는 1972년 『시문학』지에 발표되었다. 당시 필자는 대학에 나녔다. 시문학이 창간된지 얼마 안되는 해였다. 그 때 이 작품을 접했다. 60대에 어떻게 이런 감각적인 시를 쓸 수 있을까 생각했었다.    꽃잎은 다투어 피었다가 비바람에 뒤설레며 가냘픈 살갗으로 가는가, 그대 눈길 먼 여로에 하늘과 구름 혼자 붉어져 갔노니 저문 산 길가에 뒤뒹글지라도 마냥 붉게 타가가는 환한 목숨이여. 석초는 만년에 이렇게 절창을 읊고 갔다.    2000년 5월 5일 조남익 추진 위원장을 비롯한 서천 서림문학동인회, 지원문학인과 함께 석초 시비가 세워졌다. 시비에 「꽃잎 절구」가 새겨져 있고 글씨는 서천 출신 국전 초대작가 지금은 고인이 된 벽강 조희구가 썼다. 조각은 김석우 충남대 교수가, 건립기는 서천 출신 소설가 박경수가 썼다. 석초는 필자의 재당숙이고 조희구는 필자의 중학교 선배이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 하나는 꽃잎 절구라는 시로, 하나는 예서체 글씨로 한산 건지산성 기슭 석초 시비에서 만난 것이다.    시비 뒷면에는 소설가 박경수 건립기가 있다.     우리 민족이 스스로 긍지를 갖고 세계 가운데 설 수 있는 것은 선대가 이룩한 문화 덕이다. 민 족이 이룩한 문화 말고 그 민족의 우수성을 재는 척도는 달리 없다. 민족을 한 고장으로 바꿔놓아 도 그 말은 그대로 맞는 말이 된다. 석초의 산지가 여기 금강 연촌인 숭문동인 것 말고도 시 「바라춤」의 무대가 북 칠리의 건지 산 봉서사인 것도 있다. 두루 이 비가 여기에 서는 소이다.   ///박경수        한산은 해마다 모시 축제가 열린다. 많은 이들은 한산 모시 축제와 한산 소곡주는 잘 알고 있으나 바로 옆에 석초 시비가 있는 줄은 잘 모르고 있다. 그윽한 수풀, 두견새 우는 고향, 7대조 석북이 묻혀있는 숭문동 활동리 어성산 산자락에 고고한 학, 석초가 잠들어있다.    시비 건립추진 위원장 조남익의 발간사에는 시 「꽃잎 절구」가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시비의 시 「꽃잎절구」는 인생론이 무르익은 하나의 절창이다. “저문 산 길가에 져/뒤뒹글지 라도/마냥 붉게 나다가는/환한 목숨이어”에서 보듯이 시인의 육신은 ‘저문산’으로 가고 없지만, ‘환한 목숨’의 살뜰한 서정과 문학은 그가 일찍이 「바라춤」을 구상하고 집필했던 여기 한산면 의 건지산 기슭을 맴돌며 영생을 얻을 것이다.        시집으로 『석초시집』,『바라춤』,『폭풍의 노래』,『처용은 말한다』,『수유동운』이 있으며 『현대문학』지에 조남익, 박제천, 황하수, 임성숙, 홍희표 등을 시인으로 추천했다.    석초는 1975년 3월 8일 아내와 함께 경기도 장흥 신세계 공원 묘지에 합장되었던 것을 2000년 11월 26일 그의 고향 생가인 활동리에 이장했다.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은 임종 시 그의 아들에게 석초의 시비 건립을 유언처럼 부탁했었다. 아들 장강재 사장은 선친의 뜻을 받들어 석초의 시비를 석초의 시를 사랑했던 부친의 묘 주위에 세웠다. 이 시비에 「바라춤」이 새겨져 있다. 장기영 사장은 생전에 이 「바라춤」을 애송하였으며 암기하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 시비가 있는 공원묘지에는 가보지는 못했다.     언제나 내 더럽히지 않을 티없는 꽃잎으로 살아 여러 했건만 내 가슴의 그윽한 수풀 속에 솟아오르는 구슬픈 샘물을 어이할까나.   청산 깊은 절에 울어 끊인 종소리는 하마 이슷하여이다. 경경히 밝은 달은 빈 절을 덧없이 비추이고 뒤안 이슷한 꽃가지에 잠 못 이루는 두견조차 저리 슬피 우는다. 아아, 어이하리. 내 홀로, 다만 내 홀로 지닐 즐거운 무상한 열반을 나는 꿈 꾸었노라. -「바라춤」 일절        석초의 대표작 장시 「바라춤」이다. 티없는 한 송이 꽃으로 살고자했으나 세속적인 욕망을 어찌할 수 없었다. 무상한 열반의 세계를 꿈꾸며 무상한 열반의 세계에 가고 싶어하는 화자의 욕망을 어찌 달랠 수 있을 것인가. 티없는 영혼에 닿기 위한 이 육체적이고 관능적인 몸부림, 바라춤이 처절하기까지 하다.                                                                                              * 시인 ․ 평론가, 중부대 교수             적(笛)     슬프다. 찬 달이여. 연기 낀 서라벌의 옛 하늘로 헛되이 네 먼 꿈을 보내는가.   아스라이 날과 달이 흘러가고 또 와도 네 인간의 어지러운 풍파를 그치지는 못할넨가.   어느 초월한 악공이 있어 널 부러 홍량(弘亮)한 소리를 내어 창해에 담뿍 어린 구름을 깨끗이 쓸지는 못하는가.   멸한 나라 옛 빈 터전에 남은 찬 달과 연기 오오. 애달픈 침묵의 적(笛)이여     고풍     분홍색 회장저고리 남 끝동 자주 고름. 긴 치맛자락을 살며시 치켜들고 치마 밑으로 하얀 외씨버선이 고와라. 멋들어진 이여머리, 화관 몽두리, 화관 족두리에, 황금 용잠 고와라. 은은한 장지 그리메 새 치장 하고 다소곳이 아침 난간에 섰다.       멸하지 않는 것     황홀하게도, 은밀하게도 내 가슴에 정열이 타고 남은 적막한 잿무덤 위에, 예지와 수많은 그리메로써 꾸며진 이 회색의 무덤 위에 페닉스! 오오. 너는 되살아서 불과 같은 나래를 펴고 죽은 줄만 여긴 네 부리에 매혹의 힘은 다시 살아나서 나를 물고, 나를 쪼으고 연애보다도 오히려 단 오뇌로 나를 또 이끌어가누나.   翡翠斷章 너 자신을 알라. - 소크라테스   슬프다. 바람 숲에 구르는 옛날의 옥석(玉石)이여 비취, 보석인 너 노리개인 너여 아마도 내 영원히 잊지 않을 너만의 자랑스러운 영화를 꿈꾸었으련만 뜬 세상에 어지러운 오뇌를 안고 거칠은 쑥대 구렁을 내가 헤매느니 적막한 깊은 뜰을 비추이는 푸른 달빛조차 어이 흐려 있는다.   푸른 기왓장 흐트러진 내 옛 뜰에 무정한 꽃만 피어 지고 쓸쓸한 파멸 속에 너는 굴러서 창백한 때의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볕살을 헤인다   아아, 이슷한 오경 밤에 그므레 타는 촛불 옆에 홀로 누워 잠 못 이루는 여인의 희고 나릿한 백설 같은 목덜미 숱한 머리쪽은 풀어져 물결치는 베개 위에 찬 달 그리메 애달픈 꽃잎을 그려라.   비취. 오오, 비취. 빛나는 옥석이여 내 전신(轉身)의 절 안에 산란한 시간의 발자취 다비의 낡은 흔적이 어릴 제 너는 매혹하는 꽃 같은 손길에 이끌리어 그지없는 애무 속에도 오히려 불멸하는 빛을 던진다.   나는 꿈꾸는 몸뚱이를 안고 소슬한 대숲 바람결에 솟아오르는 허무한 욕구를 사르면서 혼자서 헐린 뜰을 내리려 한다. 저 곳엔 시들어지는 고운 난꽃 한 떨기 또, 저 곳엔 깨끗한 댓돌 위에 꿈결같이 떠오르는 영원한 처녀의 자태……   어쩔까나 나의 난심을 내 어지러운 갈레는 마음을 비취. 내가 옛 동산을 가고 또 오는 내 몸 고달픈 시름의 넌출을 인간의 얼크러진 갈림길로 알고서 고독한 푸른 옥에 몸을 떨며 슬픈 리라의 가락을 탈까나   비취. 오오, 비취. 티없는 네 본래의 빛깔이야 부러워라 저, 심산 푸른 시냇가에 흩어지는 부엿한 안개 떠돌아서 창천은 흐득이는 여명의 거울을 거누나 아아, 오뇌를 알은 나 영겁을 찾는 나 비밀한 유리 속에 떠서 흔들리는 나여. 너를 불러라. 빛과 흠절의 수풀 위에 찬 보석이여. 나여. 정신이여. 멸하지 않는 네 밝음의 깊은 근원을 찾아라……       魅惑 1     바람이런가 숨결이런가 내 마음 천길 물 속처럼 잠잠한데 내 안의 구석진 기슭에 훌쩍이는 이 갈대는 무엇인가   노을이런가 달빛이런가 내 안의 먼 여울 속 물살져 쏟아지는 이 보석 조각들은 또 무엇인가   잠 못 이루는 하늘의 호수 속으로 가만히 부르는 소리 한 마리 백조가 날아와 깃드는 꿈결처럼 젖어드는 고운 꽃이파리 애끊는 여울에 구슬의 떨림이 이처럼 사무치는구나.     처용은 말한다       1 바람아, 휘젖는 정자나무에 뭇 잎이 다 지겄다 성긴 수풀 속에 수런거리는 가랑잎 소리 소슬한 삿가지 흔드는 소리 휘영청 밝은 달은 천지를 뒤덮는데   깊은 설레임이 나를 되살려놓노라 아아 밤이 나에게 형체를 주고 슬픈 탈 모습에 떠오르는 영혼의 그윽한 부르짖음……   어찌할까나 무슨 운명의 여신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도 육체에까지 이끌리게 하는가 무슨 목숨의 꽃 한 이파리가 나로 하여금 이다지도 기찬 형용으로 되살아나게 하는가   저 그리운 연못은 거친 갈대 우거져서 떠도는 바람결에도 몸을 떨며 체읍을 한다 굽이 많은 바다다운 푸른 물 거울은 나의 뜰이었어라 밤들어 노니다가 들어와 자리에 보니 가랄이 넷이어라   그리운 그대, 꽃 같은 그대 끌어안은 두 팔 안에 꿀처럼 달고 비단처럼 고웁던 그대, 내가 그대를 떠날 때 어리석은 미련을 남기지 않았어라 꽃물진 그대 살갗이 외람한 역신의 손에 이끌릴 때 나는 너그러운 바다 같은 눈매와 점잖은 맵시로 싱그러운 노래를 부르며 나의 뜰을 내렸노라 니의 뜰, 우리만의 즐거운 그 뜰을   아아 이 무슨 가면의 무슨 공허한 탈인가 아름다운 것은 멸하여 가고 잊지 어려운 회한의 찌꺼기만 천추에 남는구나 그르친 용의 아들이어 처용 도도 예절도 어떤 관념 규제도 내 맘을 편하게 하지는 못한다 지금 빈 달빛을 안고 페허에 서성이는 나 오오 우스꽝스런 제웅이어 =========================================== 옥룡암에서 신석초에게  바란 마음 그마음 지난 바램  하루가 열흘 같이 기약도 아득해라  바라다 지친 이 넋을 잠재올가 하노라  잠조차 없는 밤에 燭(촉)태워 안젓으니  리별에 病(병)든 몸이 나을길 없오매라  저달 상기보고 가오니 때로 볼가하노라  ---------------------------------  ‘항일시인’이육사 시조 첫 발견.  항일 민족시인 이육사의 미공개 작품 7편 발굴.  서간문과 산문등 7편을 첫 공개. 이육사작품 가운데 시조가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옥룡암에서 신석초에게’란 제목의 시조 두 수는 1936년 6월 이육사가 평생지기였던 시인 신석초에게 보낸 엽서에 실린 것이다.  시의 주제인 그리움도 그 대상이 신석초만이 아니라 민족과 국가에 대한 정서를 담고 있다‘고 김용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설명했다.  =======================================================   일제 침략기 저항 시인 이육사(본명 이활.1904~1944.사진)의 시조(時調)가 처음 발견됐다.  손병희 안동대(국문학)교수는 27일 "육사가 문우(文友)인 신석초(1909~1975) 선생에게 보낸 엽서에 쓴 시조 두 수를 최근 발견했다"며 "육사의 시조가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작품은 30일 출간되는 '육사 탄신 100주년 기념 시집'(성심)에 소개된다. 기다림과 그리움이 주제인 이 시조는 육사가 경주의 사찰 옥룡암에서 요양 중이던 1942년 8월 4일 충남 서천군 화양면에 있던 석초 선생에게 보낸 엽서에 펜으로 썼으며, '前書(전서.앞에 쓴 편지)는 보셨을 듯/하도 답 안 오니 또 적소/웃고 보사요'라는 머리글 다음에 적혀 있다.  손 교수는 육사가 독립운동을 하다 10여 차례 옥고를 치른 데 이어 41년 폐질환을 앓은 뒤 건강이 나빠져 사찰에서 요양 중 쓴 것으로 추정했다. 또 20여 일 전인 7월 10일 석초에게 보낸 편지의 답장이 오지 않자 엽서를 쓴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그는 안동시의 의뢰로 김용직(서울대 명예교수)박사와 기념 시집을 만드는 과정에 석초의 조카인 신홍순(63)씨에게서 이를 입수했다고 밝혔다.  김 박사는 "육사가 쓴 시.수필.평론.한시 등은 있지만 시조는 처음 발견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ŗ.4조의 운율에 전형적인 평시조이며 작품성도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그는 또 시조 첫 부분인 '뵈올까'의 대상을 석초나 민족.조국으로 해석했다.  손 교수는 "시조의 발견은 육사가 문학의 모든 장르를 아우른 뛰어난 문인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념 시집에는 이 외에도 육사가 쓴 '산''화제''잃어진 고향'등 3편의 시가 처음으로 실린다.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서 태어난 육사는 저항정신과 민족의 비극을 그린 '광야''청포도''절정'등의 시를 남겼으며, 37년 신석초.윤곤강.김광균 등과 함께 시 동인지 '자오선'을 발간하기도 했다. 육사는 이 시조를 쓴 다음해 독립운동을 한 혐의로 서울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돼 베이징으로 이송된 뒤 44년 베이징 감옥에서 숨졌다... =========================================== 보령 개화예술공원 內   [출처] 신석초 편- 신웅순|작성자 석야  
정념의 기(旗)  김남조  내 마음은 한 폭의 기  보는 이 없는 시공에  없는 것모양 걸려왔더니라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눈 오는 네거리에 나서면  눈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기는  눈의 음악이나 듣고 있는가  나에게 원이 있다면  뉘우침 없는 일몰이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가는  그 일이란다  황제의 항서(降書)와도 같은 무거운 비애가  맑게 가라앉은  하얀 모래펄 같은 마음씨의  벗은 없을까  내 마음은  한 폭의 기  보는 이 없는 시공에서  때로 울고  때로 기도드린다    작자 소개  김남조(金南祚: 1927 - ) 대구 출생. 서울대 사대 국어과 졸업. 숙명 여대 교수, 1951년 첫 시 집 '목숨'으로 등단. 종교적인 심성으로 인간의 사랑과 인내, 신의 은총 등을 노래. 40 년대 노천명의 뒤를 이은 50년대의 여류 시인. 시집 '풍림(楓林)의 음악'(1963), '사랑 초서'(1974), '동행'(1980), '바람 세례'(1988) < 깨어나소서 주여>(1989), (1989), (1990), (1991) 등이 있음  작품 경향 : 김남조 시의 정신적 지주는 카톨릭의 사랑, 인내,계율이다. 따라서 , 거의 모든 작품은 짙은 인간적인 목소리에 젖어 있으면서도 신에 대한 은총과 인간의 사랑, 그리고 밝고 경건한 삶에 대한 예찬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기법 상으로 보아 관심을 끄는 것은 리듬이다. 그의 시는 대부분 시행의 자유로운 배열로 형성되는데 그 형성이 우아하고 유연한 리듬으로 정밀하게 계산되어 있다. 이미지보다는 의미가 강조된 그의 언어가 생생한 생명력을 지니는 것도 언어를 꿰뚫는 리듬 때문이다.  요점 정리  성격 종교적, 기원적  심상 시각적, 비유적, 상징적 심상  어조 고독, 고뇌, 비애를 극복하려는 기원  표현 직유와 상징에 의한 표현  주제 순수한 삶에 대한 열망과 종교적 기원  구성 : 제1연 - 약하고 고독하며 번민하는 존재로서의 자신  제2연 - 인간이기에 겪어야 할 한계 - 혼란, 열기 : 번민, 갈등, 욕망 등  제3연 - 인간세계로부터 음악세계로 나아감(평화, 안정)  제4연 - 내면세계의 평화를 성취하고 싶은 마음 -고요히 다스리는 내면세계의 평화를 성취하는 일  제5연 - 단순한 애정의 대상자가 아닌 모랫벌 같은 마음씨를 가진 벗을 찾음  - 벗 : 번뇌, 열정으로부터 초탈한 존재  제6연 - 1연 1행의 반복(소망의 강조)  제7연 - 소망의 경지에 가기 위해 울기도 하고 기도하기도 하는 나  어휘와 구절  보이는 이 없는 시공에/없는 것 모양 걸려 왔더니라. ; 아무도 '나(기)'를 보아 주지 않는 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홀로 자신의 고독을 느끼면서, 신의 존재 앞에 자신을 스스럼없이 드러내 왔다는 의미로 신 앞에 단독자로 서 있는 고독한 시적 자아의 자성(自省)의 자세를 보여 준다.  스스로의/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 인간으로서의 한계와 비애를 느끼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번민하는 시적 자아의 모습을 암시한다. '혼란'은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와 불안을, '열기'는 신에 대한 투명한 의식을 가로막는 인간적인 욕망을 암시. 순수한 인간적 삶을 위한 깊은 애정.  나에게 원이 있다면/뉘우침 없는 일몰이 ; '내'가 희구하는 것은 뉘우침이 없는 시간 내지는 세월이나 순수한 삶이라는 의미이다. 즉 뉘우침이 없는 하루하루가 꽃잎처럼 쌓이는 삶,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기를 소망하고 있다.  하얀 모랫벌 같은 마음씨의/벗은 없을까. ; 순수한 삶을 갈망하는 내가 진실로 믿고 의지할 만한 깨끗하고 순결한 마음을 지닌 존재는 없는 것을까하는 의미이다.  때로 울고/때로 기도드린다. ; 신에 가까이 다가서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표현한 구절로 자신의 인간적인 한계에 대한 절망 때문에 울고, 신에 의한 구원을 갈구한다는 의미이다.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마음 속에 움직이는 갈등, 번민을 넘어서서 영혼의 순수함과 평화를 얻고자 하는 소망을 노래한 시이다. 마음을 깃발이라는 구체적 사물에 비유하여, 간절한 소망과 기도의 자세를 가시적(可視的)으로 형상화했다.  김남조의 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주제는 `사랑'이다. 초기시에서는 섬세한 감성과 정감으로 사랑의 그리움을 노래하는 작품이 많았고, 후기시에 와서는 종교적 성향이 짙어지면서 사랑의 의미를 지상적(地上的)인 것에서 보다 근원적, 초월적인 방향으로 심화시키는 쪽으로 변화했다. 위의 작품에는 이러한 후기시로 옮겨가는 모습이 담겨 있다고 하겠다.  이 작품에서 시상의 주축이 되는 두 요소는 `스스로의 / 혼란과 열기'라는 구절과 `뉘우침 없는 일몰(日沒)이 / 고요한 꽃잎인 양 쌓여가는 / 그 일'이라는 구절 속에 담겨 있다. 앞의 것이 인간 존재의 욕망, 번민, 갈등에 해당한다면, 뒤의 것은 이러한 것들을 고요하게 다스리고 고요한 내면 세계의 평화를 성취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의 마음을 은유하여 표현한 기(旗)는 바로 이러한 긴장 관계 속에서 앞의 요소들을 극복하고 후자의 경지로 나아가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의 모습이다. 따라서 이 작품이 노래하는 그리움의 대상은 일반적인 연가(戀歌)의 님과 달리 뜨거운 애정의 상대자가 아니라 모든 열정으로부터 초탈한 마음을 지닌 벗이다. 즉 열정을 초월하고, 지극한 비애조차도 잔잔하게 다스려서 `맑게 가라앉은 / 하얀 모랫벌 같은 마음씨'에까지 도달한 이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의 경지가 곧 이 작품이 지향하는 궁극적 지점이다. [해설: 김흥규]  김남조의 시는 수직·수평의 구도가 주를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나무, 기둥, 깃발' 등이 그것이다. 이 시에서는 깃발을 통해 화자의 의식이 드러나고 있다.  '기(旗)'는 이중성을 지닌다. 지상에 박혀 있으면서도 하늘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지상은 한계 상황이고 하늘은 자유의 공간이다. 인간이 지상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숙명이다. 그런데도 지상을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이 내부에 존재하는 것도 인간 조건이다. 이런 인간 존재의 모습을 '기'로 표상한 것이다.  제목의 '정(情)'과 '염(念)'은 이런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데, 인간적 삶의 모습이 '정'이라면 '염'은 초월적 삶의 모습이다. 인간적 고뇌와 초월에의 기도를 함께 지니고 살아가는 화자는 그대로 '정념의 기'가 되는 셈이다.  이 시의 기독교적 성격도 이런 구도 속에 형상화되는데, 기도와 인고의 성숙한 모습은 하늘을 향한 끊임없는 지향성으로 드러나고 있다.  화자는 하늘에 쉽게 도달하려는 염원을 가지지 않느다. 꽃잎이 쌓여 가듯, 비애가 무겁게 가라앉듯, 하나씩 쌓아 가며 마침내 하늘에 도달하려고 한다. 그 속에는 수없는 눈물과 기도가 쌓여 간다. 그리하여 깃대도 더욱 단단해져 간다.  김남조 시의 기도와 고독, 인내의 모습은 이런 구도 속에서 시적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자신의 마음을 사랑과 염원의 깃발로 표상하고 있다. 붙박인 푯대 끝에서 먼 곳을 향해 가냘픈 기폭을 나부끼고 선 존재, 바라보는 곳은 아득히 멀고, 나를 바라보는 이가 없는 허허로운 공간에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나부끼고 있다. 정념의 대상은 멀기만 하고 나는 알아줄 이 없는 고독한 모습이다.  자신의 내부에서 치솟아 오르는 정념의 열기는 스스로만 타 가눌 수 없다. 눈 오는 거리에 서면 아득히 그늘이 드리워지고 마음은 안식에 젖는다. 눈이 자아내는 고요와 안식과 서정의 분위기에 젖기도 한다.  뉘우침 없이 종말을 맞는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누군가 보아주지 않아도 내면에 가득히 쌓아 올린 순결한 그리움, 차곡차곡 쌓인 애뜻한 고독감, 그것은 꽃잎처럼 쌓여 가는 일몰(日沒)의 광경과 같으며, 그것이 유일한 소망이다.  비애감에 젖어 있는 사람, 명랑하지 않지만 성숙한 슬픔의 소유자, 그 맑은 애상(哀傷)을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벗으로 사귀고 싶다.  나는 정념으로 나부끼는 깃발. 보는 이 없어도 나대로 고뇌하고 기원하며, 고통으로 울기도 하고 때로 순결한 영원을 간구하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기도 하는 나의 고독한 실존.('한국 현대시 제대로 읽기'. 송승환)  김남조(金南祚)  예술가명 : 김남조(金南祚)    생몰년도 : 1927년~    전공 : 시   김남조 시의 정신적 지주는 가톨릭의 사랑과 인내의 계율이다. 이 때문에 모든 작품은 짙은 인간적인 목소리에 젖어 있으면서도 언제나 긍정과 윤리가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배경으로 인해 ‘종교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종교적인 배경은 인간적인 목소리를 더욱 짙고 깊이있는 것으로 만드는 구실을 한다. 한편 기법상으로 보아 관심을 끄는 것은 리듬이다. 그의 시는 대부분 시행의 자유로운 배열로 형성되는데, 그 형성이 우아하고 유연한 리듬으로 정밀하게 계산되어 있다. 이미지보다는 의미가 승한 그의 언어가 생생한 생명력을 갖는 것도 언어를 꿰뚫는 리듬 때문이다.  김남조는 1953년 첫 시집 을 발간하면서 본격적인 시작활동에 들어갔는데, 인간성에 대한 확신과 왕성한 생명력을 통한 정열의 구현을 그려내고자 하였다. 특히 은 가톨릭 계율의 경건성과 뜨거운 인간적 목소리가 조화된 시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두 번째 시집 로 이어지면서 종교적 신념이 한층 더 강조되고 기독교적 인간애와 윤리의식을 전면에 드러내게 된다. 이후의 시들은 대부분 기독교적 정조를 짙게 깔면서 더욱 심화된 종교적 신앙의 경지를 보여준다. 정열의 표출보다는 한껏 내면화된 기독교적 심연 가운데서 절제와 인고를 배우며 자아를 성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시는 시집 에 이르러 정감의 세계를 상상력의 풍요로움을 통해 묘사해내면서 더욱 정갈해진다. 감각적인 언어와 동적인 이미지들이 함께 어우러져 일구어내고 있는 시 정신의 풍요로움은 정념의 시를 추구해온 이 시인의 가장 큰 미덕이다. - 참고 : , 권영민 편, 누리미디어, 2002 , 국어국문학편찬위원회 편, 한국사전연구사, 1995         생애     [김남조 시전집 (서문당,1983)] 경북 대구에서 출생한 김남조는 일본 큐슈(九州)에서 여학교를 마쳤고, 1951년 서울사범대 국문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재학시절인 1950년 에 시 , 등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마산고교, 이화여고에서 교편을 잡았고 이후 1954년부터 숙명여대 교수로 재직하였다.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고 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제1회 자유문학가협회 문학상, 제2회 오월문예상, 제7회 시인협회상, 제33회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을 수상하였다. 모윤숙(毛允淑), 노천명(盧天命)의 뒤를 이어 1960년대 여류시인의 계보를 마련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재까지 발간된 시집은 모두 30여 권으로, 비교적 다작(多作)의 시인으로 꼽히고 있다. , 외에도 , , , 등을 대표시집으로 꼽을 수 있다. 1983년 서문당에서 이 간행된 바 있다.      약력   1921년 경북 대구 출생 1944년 일본 후코오카시 큐슈여고 졸업 1948년 에 , 에 등을 발표 195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문과 졸업 / 마산 성지여고·마산고 교사 1953년 이화여고 교사 / 서울대·성균관대·숙명여대 등 강사 1955년 숙명여대 전임강사 1958년 숙명여대 조교수 1961년 숙명여대 부교수 1964년 숙명여대 교수 1981년 가톨릭문인회 회장 1984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 교육개혁심의회 위원 1986년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 1987년 방송위원회 위원 1988년 한국방송공사 이사 1990년 제12차 서울세계시인대회 계관시인 /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피선 1991년 서강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 수여 1993년 숙명여대 정년퇴임 · 명예교수 2000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상훈   1958년 자유문학가협회상 - 1963년 오월문예상 - 1974년 한국시인협회상 1985년 서울시문화상 1988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1992년 3·1문화상 1993년 국민훈장모란장 1996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98년 은관문화훈장 2000년 지구문학상(일본 제정)         저서       • 시집 (1953) (1956) (1958) (1960) (1963) (1967) (1967) (1971) (1974) (1976) (1982) (1983) (1988) (1995) (1998)   [나아드의 향유 (산호장,1956)]   [김남조시집 (상아출판사,1967)]     • 단편소설집 (1984) • 수필집  (1964) (1966) (1968) (1971) (1972) (1977) (1979) (1983) (1985) (1991) (1999)         작품세계        작가의 말   (……) 나와 시는 동거인의 관계이다. 둘은 오랜만에 민감한 사이였고, 무수한 시행착오와 갈등의 터널을 지나와서야 겨우 얼마간 화친의 길목으로 접어들었다. 전날엔 긴장과 탄력을 유지했다 한다면, 이즈음은 헐렁한 사이로 편하고 자연스럽다. 오십 년 이상의 연륜을 포개면서 갈등과 격돌, 체념과 관용의 곡절들 끝에 겨우 다투지 않게 된 부부나 연인 사이처럼 되었음이 근래의 실정이다. “미국엘 가서 사막을 보았어.” 내가 말을 건네면 그는 대답한다. “알고 있어. 나도 함께 갔으니까”라고.  이럴 때 나는 따뜻해진다. 귀국해 그간에 미루어 둔 글과 다른 일거리들을 떠올렸으나 민망하게도 며칠간 쉬어버린다. 쉬면서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과 여행을 함께 다닌 이들에 대해 생각해보았고, 충격과 감동을 그칠 새 없이 안겨주던 대륙의 산하, 그 절묘한 풍광들을 떠올렸다. 도처에서 영원성의 모상을 그리고 소멸과 탄생의 거대한 드라마를 볼 수 있었으며 대자연에도 아니, 대자연에야말로 수난과 고통의 역사가 누적되어오고, 현재에도 끓는 용암이 그 자신의 살결을 뒤덮거나 거대한 수림을 일시에 불사르는 일이 생겨남을 알게도 되었다. (……) 문학은 종이 위에 먹을 적시는 서술이기 전에 분명한 획을 그으며 지나가는 삶 자체일 것이다. 물론 현장성이 곧 문학인 건 아니다. 그러나 문인들이 흔히 빠져들기 쉬운 관념 과잉과 체험 공백 등은 심각한 허점이 아닐 수 없다. 나 역시 진정한 의미에서의 준령과 절벽을 모르며, 살아있는 진실의 중심을 꿰뚫는 일에선 그 먼 거리에 있었을 것이다. (……) 창작이란 언제나 새로운 출발이어야 하며 그렇지 못하다면 시와 시인의 큰 과오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더 찾아내는 일, 그 중요 부분을 포기하게 되기에 말이다. 미래의 시는 무한한 가능성이며 찾아내는 이로 하여금 빛나는 탄생이 될 것이기에 시인은 끝없이 새로운 진실에 육박해야 한다. 밝은 눈에만 보이게 될, 청결한 출생들……. 이를 찾으면서 분발하는 이들 중에 부디 나도 있으려 하느니. - ‘나의 시는 나의 동거인이다’, 김남조, , 문학사상사, 2002      평론   시인은 독자에게 어떤 이미지로서 다가온다. 가령 이육사는 ‘천고 뒤에 백마 타고 올 초인’이란 그의 시구와 더불어 광야에 말 달리는 선구자, 민족의 앞날을 내다본 예언자의 풍모로서, 윤동주는 고뇌하는 나르시시스트, 청교도적 순결성을 지닌 영원한 청년의 모습으로 나타나지는 않는지? 또 김수영-하면, 비리와 팽팽히 대결하려는 반골정신의 표본쯤으로 독자들에게는 알려져 있다고 본다. 이런 뜻으로, 필자는 시인 김남조를 시의 전당을 지키는 여사제로 보고 싶은 것이다. 사랑의 시, 기도의 시를 누구보다도 많이 또 철저하게 써온 이 시인은, 들끓어 오르는 정념을 순백의 사제복으로 감싸고, 영과 육의 갈등, 천상적인 것과 지상적인 것과의 양면성을 변증법적으로 합일시키는 과정을 보이고 있는 것 같이도 생각되는 것이다. (……) 김남조의 등단은, 여느 시인들처럼 누구의 추천으로 신문이나 잡지에 그의 시가 실렸다거나 해서가 아니라, 단행본으로 시집을 간행함으로써 단번에 이루어졌다는 데 묘미가 있다. 단독으로 시집을 간행했다고 해서 문단인의 관심을 끈다거나, 독자들에게 널리 읽힌다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의 시는, 처음부터 완성도가 높은, 만만찮은 것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폐침윤을 앓고 있던 젊은 여성의 감수성, 이성에 대한 막연한 설렘, 전화(戰火)로 황폐하게 된 조국의 산하, 피난민의 물결과 생존의 몸부림,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생명에 대한 본능적인 집착으로 삶의 절실함을 목청 높이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연계정보        관련도서   , 김남조, 서문당, 1991 , 김남조, 문학사상사, 2002 , 김용직 외, 민음사, 1989 , 김복순, 서울여대 박사논문, 1990           대시인의 냉철한 작가 정신과 표절 논란 뒤에 숨은 신경숙 자기복제마저 용납하지 않는 작가 vs                                        창피를 모르는 몸     강다연기자        ▲ 김남조 시인 시인 김남조는 최근 ‘예술의 기쁨’ 개관식 겸 ‘제29회 김세중조각상’시상식에서, “나는 60년 동안 900편의 시를 썼지만, 그 어느 한 구절도 지금에 다시 쓰면 안 된다”며, “남의 작품을 따다 쓸 때 ‘표절’이라 해서 그의 문학은 끝나고, 세상에서 말하는 절도행위에 들어가는 것이다. 자기 글이라도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발언했다. 최근 사회적으로 이슈가 됐던 소설가 신경숙의 표절 논란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많은 사람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작가로서, 이 사태를 묵과하지 않고 기회가 있을 때 공식 태도를 밝힌 것이다. 자기복제마저 용납하지 않는 강직한 작가 정신을 보임으로써 후배 작가들의 본보기가 될법한 발언이다. 다만, 신경숙이 그의 말을 새겨들었는지 알 수 없어 답답하다. “기쁨을 아는 몸”을 표절했으니 이제 “부끄러움을 아는 몸”이 되어야 하는 게 맞는 순서가 아닌가. 침묵하는 문화권력 문화연대와 인문학협동조합은 지난 15일, '신경숙 표절 사태와 한국문학의 미래'를 주제로 끝장 토론회를 열었으나 '창비'와 '문학동네'는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 '문학동네'는 신경숙의 작품을 가장 많이 출판해 낸 곳이다. 지난 6월, 신경숙의 표절 행위에 대해 강한 목소리를 낸 비평가들에게 사전 협의도 없이 지상 좌담회를 제안했다 거절당한 후 더이상 성찰이나 반성의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어, 지상 좌담회 제안은 역시 “정치적 쇼”일 뿐이었다는 냉소만 키웠다. 신경숙과 창비, 문학동네의 반성을 촉구하는 문학계     ▲ 이명원 평론가 하지만 문학계 반응은 직설적이고, 날 섰다. 신경숙이 인기 작가인 만큼 표절 시비를 더 확실히 가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명원 문학평론가는 "(신경숙이) 작가 개인으로서 표절을 인정하고 절필해야 한다"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신경숙의 작품이 이미 30여 개국에 번역돼 있는 만큼, 그의 표절 문제를 묵인하는 건 한국 문학의 수준을 스스로 떨어뜨리는 행위나 마찬가지라는 주장이다. 이어 조정래 작가도 "운동선수만 은퇴가 있는 게 아니라, 예술가도 '아 도저히 능력이 안 되겠다' 싶으면 깨끗이 돌아서야 한다”며 신경숙의 절필을 촉구했다. 가려져 있던 표절 의혹 신경숙의 단편 '전설'의 일부가 일본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의 번역본을 표절했다는 이응준의 주장은, 많은 이들이 의혹이 아닌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실제로, 누가 썼는지도 기억 안 나는 글을 몇 문장이나 거의 그대로 외우고 있기란 쉽지 않다. 이후 ‘엄마를 부탁해’(오길순의 ‘사모곡’ 표절 의혹), ’딸기밭’ (안승준의 ‘살아는 있는 것이오’ 표절 의혹),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표절 의혹), ‘작별인사’( 마루야마 겐지 ‘물의 가족’ 표절 의혹)도 네티즌들의 날카로운 레이더에 걸려, 표절 논란이 더이상 묻히지 않고 만천하에 공개됐다. 하지만 신경숙의 글을 좋아했던 독자들의 배신감과 분노를 읽지 못하고, '전설'을 출판한 ‘창비’는 "몇몇 유사성을 근거로 표절 운운은 문제가 있다.", “('전설'과 '우국' 중에) 굳이 따진다면 신경숙 작가가 오히려 더 낫다”는 황당한 입장을 발표해 환멸을 키웠다. 진실을 철저히 조사하기보단, 출판사의 매출을 지탱하는 스타 작가를 두둔하는 쪽을 택하며 “이미 과거의 ‘창비’가 아니다”, “‘창비’가 아니라 ‘창피’다”라는 비아냥을 피할 수 없었다. 작가와 출판사의 자정 능력을 믿는다 신경숙의 표절 논란을 이대로 잠잠해지지 않길 바란다. 문학계 대선배들과 평론가들의 날카로운 비판의 소리가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표절은 범죄 행위이며, 표절로써 아무리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어도 독자들은 용서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주길 바란다. '창비'와 '문학동네'뿐 아니라 다른 출판사와 작가들도 표절을 방지하고 근절할 모니터링 체계를 구축하길 바란다. 독자들은 조금 부족하고 수수해도 다른 누군가의 문장을 베낀 것이 아니라, 그 작가만이 쓸 수 있는 개성 있는 글을 원한다.   ◇제29회 김세중 조각상' 시상식 및 개관식     ▲김남조 시인(김세중기념사업회 이사장). 김세중조각상 시상식과 ''예술의 기쁨' 개관식장에서. 젊은 시절 아름다운 사랑을 노래해 문학소년·소녀들의 우상이었던 김남조 시인(전 숙명여대 교수/김세중기념사업회 이사장)은 80대 후반인 지금도 맑고 낭랑한 목소리로 노래하듯 말했다. , 등 아름다운 시를 쓴 시인이자 교수였고, 유엔탑과 광화문 충무공 동상 등을 세운 조각가 고 김세중 전 서울대 교수의 부인이기도 한 그는 김세중 기념사업회의 이사장이다. 오는 14일, 예술인들의 둥지이자 무대가 될 문화공간 ‘예술의 기쁨’.(용산구 효창원로 70길 35) 개관식과 제29회 김세중 조각상 시상식을 앞두고 따로 인터뷰 스케쥴을 잡기 어려울 만큼 바쁜 김남조 시인과 전화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 내내, 그는 분명한 발음과 흐트러짐 없는 말투로 ‘예술의 기쁨’이 모든 분야 예술가들에게 장벽이나 문턱 없는 공간이기를 바란다는 메시지를 반복해서 전달했다. ‘예술의 기쁨’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직접 지으셨는데, 예술 행위가 인간에게 기쁨을 준다는 걸 단적으로 잘 표현하신 것 같습니다. 이름에 담긴 의미를 말씀해주시겠어요? 김세중 조각상이 29년째 시상되고 있지만, 3~40대 청년들은 수상자를 뽑는 5~60대에 밀려 장이 없었습니다. 그 지대가 너무 허전해 청년 조각상을 만들었고, 한국미술연구가들에게 시상하는 한국미술저작·출판상도 만들었습니다. 최근엔 저작물이 별로 없는데, 책이 잘 안 되는 시기니까요. 수상자의 수가 70명 가까이 되다 보니 내 생전에 그분들의 둥지를 마련해서 서로 만나고, 회의도 하는 장소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문인들이 와서 출판기념회 하는 것도 좋고, 연극이나 서예 등의 분야 사람들이 대관하기 쉽게, 부담 없는 선에서 대관료도 책정했어요. 춘하추동 냉방·난방을 잘할 테니 와서 행사를 벌였으면 싶습니다. 김세중 선생님이 조각가였고, 김세중기념사업회에서 공간을 만들었는데요. 미술관으로 한정하지 않은 이유는 뭘까요? 김세중 기념사업회에서 만들긴 했지만 김세중 미술관으로 붙이지 않고 ‘예술의 기쁨’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사실 ‘미술관’으로 이름을 붙이고 조건대로 정비하면 정부의 지원도 받을 수 있거든요. 그런데 그걸 포기했어요. 미술관에서 문학행사를 한다면 거부감 느낄 것 같아서. 구청에서 좋은 건물에 강당을 만들고, 은행에서 건물 한 층을 내어 좋은 공간을 만들어도 그런 공간에서는 시인들이 시낭송할 의욕을 느끼지 않거든요. 편안한 마음으로 오라고, 예술 전반에 대해 열려있는 공간이란 뜻으로 ‘예술의 기쁨’이라고 붙였습니다. 김세중 선생님의 조각상도 존중하고 김남조 선생님의 분야인 문학 쪽도 염두에 두신 공간인 것 같습니다. 네. 하지만 그걸 강조할 마음은 없습니다. ‘예술의 기쁨’ 건물은 그리 크지 않고, 총 건평이 230~240평 정도입니다. 강당은 조금 크게 지어서 150석 정도 됩니다만, 작은 방에서 작은 모임을 할 수 있게 하다 보니 김세중 교수 작품은 다른 장소에 두고 여기에 가져오지 않았어요. 김남조에 대한 자료집도 하나 놓지 않았죠. 그 집에서 60년 살다 이사 나왔으니 이제 다시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서 여생을 살까 합니다. 노인이 하나 있으면 사람들의 접근도 편하지 않을 거고, 주방 등으로 평수가 깎이는 것도 원치 않아요.     ▲문화예술공간 '예술의 기쁨' 외관.(용산구 효창원로 70길 35) 이번에 개관하면서 청년조각상 수상자들의 전시회를 엽니다. 약 26명이 작품을 냈고, 대강당에서 자리를 많이 차지하지 않도록 벽에 걸 수 있거나 규모가 작은 것들만 받았습니다. 역대 김세중 조각상 수상자 전시는 30주년이 되는 내년에 하려 해요. 청년조각상 수상작가들이 아주 우수합니다. 음악도 세계적으로 칭찬받는 이들이 있듯, 조각 분야도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문학은 상도 많은데 다른 분야는 상이 적어서. (상대적으로 시상의 변별력이 크죠) 상 제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많지는 않아요. 누적된 재능있는 이들 중에서 26년을 뽑다 보니 그중 훌륭한 작가가 많고, 올 해도 그 이들이 좋은 작품을 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김세중 교수 작품들과 함께 한 자리에 놓는 것은 우리가 삼가기로 했어요. 그들의 잔치로, 그들의 친구와 부모가 와서 보게 하고, 전시 기간도 6개월로 넉넉하게 잡았습니다. (어쩌면 전시 기간은 조금 줄일지도 모르지만) 좋은 계절인 가을에서 초겨울까지 그분들이 작품을 자랑할 수 있도록. 조각가들은 개인전을 열기에도 어려운가봅디다. 좋은 화랑은 희망자가 밀려있고 중개 수수료도 비싸고요. 우리는 그런 거 일체 없고,(기자 주 - 전시는 하되 작품 매매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는 뜻인 듯하다) 직접 보고 판단하도록 했거든요. 지금 다 걸어놨어요. 작고 아름다운 작품들을 겸손하게 가장자리에 쭉 놨어요. ◇예술의 기쁨에서 어려운 예술가들 와서 마음껏 작품을 펼쳐 보이길 그간 수상했던 청년조각상 수상자 26명이 모두 이번 전시에 참여하는지요? 3명은 외국에 있어서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모두 우수한 작가들이에요. 그들의 작품을 각각 하나씩 대형 스크린에 영상으로도 비춰줍니다. 총 16분쯤 걸리는데, 그게 재밌다며 오는 이들도 있다고 해요. 현대 조각의 여러 모습을 볼 수 있어서. 공부하는 이들이 원할 땐 자료를 찾아볼 수 있게, 앞으로 수상자들 자료를 체계 있게 정리하려 합니다. 행사 없을 때 김세중 교수 작품도 차츰 몇 개 정도는 가져와서 상설전시 해야겠죠. 올해 상을 받는 이완이란 사람은 나이가 어려요. 내가 본 적은 없지만, 리움에서도 전시를 했다 하고. 수상자들이 국내외에서 활동하는 역량 있는 작가들이에요. 대부분 교수고. 우스갯소리지만 김세중 청년조각상을 탔다고 하면 교수되기 쉽다는 말도 있어요. 음악회도 할 수 있겠지요? 그렇죠, 작은 음악회. 특히 연극 쪽으로 마음을 많이 썼어요. 연극의 희곡은 어렵게 신춘문예 관문을 뚫어도 대체로 문장이 대화로 되어 있어서, 배우가 발성해서 사람들 앞에서 대사를 발표하지 않으면 그대로 묻혀요. 시집이나 소설은 책으로도 나오지만요. 아주 어려워서 무대를 못 가지는 연극인 중에 우수한 사람이 많거든요. 내가 특별히 아는 인맥은 없지만, 좋은 연극 지도자들에게 내 뜻을 말하면 우수하지만 어려운 이들이 여기 오겠지요. 몇십 명이라도 여기 함께 앉고, 그 앞에서 공연하도록 스크린이라든지 좌석을 작게, 재밌게 해놨지요.     ▲문화예술공간 '예술의 기쁨' 실내 건축할 때 오래된 나무를 살리기 위해 중정을 만드셨다 들었습니다. 1955년엔 내가 숙명여대 교수가 됐고 결혼도 하고 조그만 집, 이 집을 사서 이사했어요. 이후 이층집으로 만들었다가, 가슴 아프지만 이번에 그걸 다 헐어버리고 이걸 지었어요. 옛날에 여기 나무가 몇 그루 있었는데, 아카시아 나무 같은 건 베어버리고 한 그루만 남겨뒀어요. 그게 굴참나무예요. 5~600년 됐다고 해요. 이 나무 중간 허리쯤에 얕은 유리지붕을 씌우고 그 아래를 온실로 몇 해 썼더니 나무가 좀 상했더라고요. 그래서 에버랜드에 계시는, 식물 쪽에 경험 많은 분을 청해서 말을 들었더니 문제를 얘길 해주더군요. 16cm 정도가 이미 아주 안 좋다고, 그래도 지금부터 살릴 수 있다고 해서 링거도 꽂아 줬어요. 그러고 나니 이 나무가 이 집의 주인이고 어른이라 생각하게 됐지요. 이 나무를 우리 집에선 끔찍이 존경하고, 집을 지을 때도 나무 밑 흙을 다치지 않게 했죠. 정문으로 들어오면 나무가 서 있고, 나무 뒤에 건물이 있게 설계했고요. 그래서 나무는 잘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몇백 년 더 가겠지요. ‘예술의 기쁨’은 전 장르의 사람들에게 열려있는 공간이잖아요. 대관료도 저렴하게 책정하셨고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예술의 기쁨에서 행사를 열고 싶을 것 같은데, 경쟁이 몰릴 때 심사 기준은 있겠지요? 좋은 질문이네요. 아직은 행사 청탁을 안 받고 있어요. 죄송하게도 올해는 자체 전시나 행사로 채우려고 해요. 집 짓는 것과 개관하는 것 때문에 너무 정신이 없었는데, 일단 열어놓고 나서 신청이 들어오면 되도록 그분들을 편하게 모시겠지만, 최소한도 예술성에 대해 고려는 할까 합니다. 너무 수준이 떨어지는 작품은 올 수 없을 거예요.     ▲'예술의 기쁨' 작은공간. 공연을 비롯 다양한 문화예술활동을 위한 공간이다. 올해는 손님이 많이 올 것으로 예상하지만, 내년부턴 줄겠지요. 대관 시작하면 첫 회부터 좋은 작품을 선정해서, 한 번만 길이 열리면 많은 인재가 찾아오지 않겠어요. 가령 누가 연극을 했을 때 친구들이 와서 봤는데 ‘나도 여기서 공연하고 싶다’든지, 시낭송을 하고 싶다든지 하는 마음이 들 수 있지요. 그런 희망이 모이면, 문학은 내가 봐도 알지만 다른 분야는 전문가에게 조언을 들어서 좋은 작품으로 골라야지요. 지금 좋은 작품으로 정평이 나 있는 건 아니더라도 장래성을 볼 겁니다. 명품이 오길 바라는 거지요. 그런데 그 명품이 세상에 알려진 것보다는 미래의 가능성을 뜻하는 거예요. 시라면, 신인이지만 좋은 작품을 가져와서 읽으면 참 좋지요. 친구들도 와서 함께하고. 희망 있는 젊은 작가들을 선정하고. 그렇게 몇 년 지나면 좋은 역사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김세중 조각상 1회 수상자이신 심문섭 선생님이 ‘예술의 기쁨’ 개관으로 “그야말로 우리 집이 생겼다”고 말씀하셨더군요. 여태까지 성곡미술관이나 백범김구기념관 등 바깥에서 시상식을 했잖아요. 올 해 김세중 조각상은 더 의미가 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참 좋은 말입니다. 수상자들이 이 집을 상속하는 겁니다. 그리고 다른 분야 사람들도 와서 같이 어울리라는 건데, 신문섭 선생이 여기에 애를 많이 쓰셨어요. 자주 와서 이번 전시도 진두지휘했고요. 애정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이 활달하고 성품도 좋지만, 두뇌도 굉장히 좋은 분이에요. 많이 도와줬죠. 셋째 아드님인 김범 씨와 며느님인 유현미 씨도 예술가이니 선생님의 유지를 받들어 사업을 이어가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상금이 부족하다든지, 유지가 안 될 때는 가족들이 거기에 대해 짐을 져야겠지만 내가 살아있는 동안엔 그렇게 되지 않게 운영하고자 해요. 가족이 관리에 개입하는 것보단 능력 있는 직원을 쓸 겁니다. 우리 가정은 ‘예술의 기쁨’에 대한 법적 권리가 없어요. 말하자면 아들들은 소유권도 없고 거주권도 없어요. 여기 와서 살면 안 됩니다. 그런 차단장치를 마련하셨군요. 실제 운영은 김세중 기념사업회에서 하는 겁니까? 기념사업회라는 게, 김세중 교수가 세상을 떠났을 때 서울대에서 퇴직금이 나왔는데 난 차마 쓸 수 없다고 했더니 머리 좋은 이어령 선생이 “조각가들은 작업도 힘들고, 작품을 집에 둘 공간도 없고, 작품 제작비도 많이 드니까 제작비를 지원하자”고 했어요. 이후 오늘에 이르도록 그럭저럭 잘돼 온 것 같아요. ◇이 공간은 예술가들을 위한 나의 선물 많은 시집을 내 오셨는데, 요즘도 시를 쓰고 계신지요? 네, 지난해에도 를 내긴 했지요. 그런데 오늘은 그 얘기는 하지 맙시다. 시인이니 누가 내 시를 칭찬해주면 좋지만, 어떤 이가 평생 모은 돈을 장학금으로 냈다더라 하는 식의 미담같이 자랑스러운 듯 비치는 건 부끄러워서요. 내가 여기서 떠나더라도 그대로 재밌게 운영하면서 내 선물이라 생각해주면 좋겠어요. 장차라도, 가능하면 기본운영을 유지하고 싶어요. 우리가 재단이기 때문에 아주 작은 것도 기록해서 서류로 옮겨놓게 진행하는데, 그런 데 필요한 최소의 인력, 최소의 냉·난방비만 들여서요. 자리 잡으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그 후엔 운영이 순탄하리라 생각합니다. 이 집이 사랑받게 되고, 이용자와의 유대가 생기면 좋을 것 같아요. 사실 그동안 (개관하느라)많이 힘들었지만 그렇게 되면 보람으로 생각할 겁니다. 대관 심사 기준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심사’라는 말은 강박감을 줄 수 있으니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예술가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원로 시인의 배려에 ‘예술의 기쁨’의 분위기가 어떻게 운영될지 미뤄 짐작할 수 있었다. 제29회 김세중 조각상 수상자는 여성주의 미술가 윤석남 씨, 제26회 김세중 청년조각상 수상자는 영상예술가 이완 씨, 제18회 한국미술저작·출판상 수상자는 서울시립미술관 관장이기도 한 김홍희 씨다. 올해는 이례적으로 여성이 두 명이나 수상자 명단에 올라와 있어 눈길을 끈다. 최만린, 심문섭,서도호, 김태곤, 정현, 이용덕, 이불, 임송자, 강태성 등 역대 수상자를 일부만 꼽아도, 김세중 기념사업회가 세심히 선정한 작가들의 활약과 명성을 알 수 있다. 2015년 시상식은 7월 14일 오후 5시, 용산구 효창동에 신축한 ‘예술의 기쁨’에서 진행된다. 김남조 시인     ▲김남조 시인 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 1950년 연합신문에 시 '성숙', '잔상' 으로 데뷔 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 2000.06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1998 한국방송공사 이사 1992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어문학연구소 소장 수상 2014.05 제25회 김달진문학상 2007 제11회 만해대상 문학부문 2000 제2회 자랑스런 미술인상 공로부문 주로 연가풍(戀歌風)이면서도 신앙적 삶을 고백하는 시를 썼다. 일본 규슈[九州]에서 여학교를 마치고, 195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마산고등학교·이화여자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성균관대학교 강사를 거쳐 1954년부터 숙명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사범대학 재학 때인 1950년 〈연합신문〉에 〈성숙〉·〈잔상 殘像〉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다. 첫 시집 〈목숨〉(1953)에서는 인간성의 긍정과 생명의 연소(燃燒)를 바탕으로 한 정열을 읊었으며, 제2시집 〈나아드의 향유〉(1955)에서부터 종교적 사랑과 윤리를 읊었다. 그후 시집 〈나무와 바람〉(1958)·〈정념의 기(旗)〉(1960)·〈영혼과 빵〉(1973)·〈김남조시전집〉(1983)·〈너를 위하여〉(1985)·〈깨어나 주소서 주여〉(1988)·〈끝나는 고통 끝이 없는 사랑〉(1990) 등을 펴냈다. 시에 있어서 가장 중심을 이루는 것은 가톨릭의 박애정신과 윤리라고 할 수 있다. 인간 내면의 목소리로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노래했고, 언어의 조탁을 통한 유연한 리듬과 잘 짜인 시형의 아름다움은 읽는 이에게 친숙한 느낌을 준다. 1958년 시집 〈나무와 바람〉으로 자유문협문학상, 1963년 시집 〈풍림의 음악〉으로 오월문예상, 1975년 시집 〈사랑의 초서〉로 한국시인협회상을 받았고, 1984년 서울특별시문화상을 받았다. 수필집으로 〈다함없는 빛과 노래〉(1971)·〈기억하라 아침의 약속을〉(1987)·〈그대 사랑 앞에〉(1987)·〈그가 네 영혼을 부르거든〉(1988) 등을 펴냈다.     김남조 시비 위치 : 충남 보령시 주산면 삼곡리 26 시와 숲길                   사랑                                      김남조       오래 잊히음과도 같은 병이었습니다 저녁 갈매기 바닷물 휘어적신 날개처럼 피로한 날들이 비늘처럼 돋아나는 북녘 창가에 내 알지 못할 이름의 아픔이던 것을 하루 아침 하늘 떠받고 날아가는 한 쌍의 떼 기러기를 보았을 때 어쩌면 그렇게도 한없는 눈물이 흐르고 화살을 맞은 듯 갑자기 나는 나의 병 이름의 그 무엇인가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김남조 1927. 9. 25 대구~. 시인·수필가. 주로 연가풍(戀歌風)이면서도 신앙적 삶을 고백하는 시를 썼다.   일본 규슈[九州]에서 여학교를 마치고, 195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마산고등학교·이화여자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성균관대학교 강사를 거쳐 1954년부터 숙명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사범대학 재학 때인 1950년 〈연합신문〉에 〈성숙〉·〈잔상 殘像〉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다. 첫 시집 〈목숨〉(1953)에서는 인간성의 긍정과 생명의 연소(燃燒)를 바탕으로 한 정열을 읊었으며, 제2시집 〈나아드의 향유〉(1955)에서부터 종교적 사랑과 윤리를 읊었다. 그후 시집 〈나무와 바람〉(1958)·〈정념의 기(旗)〉(1960)·〈영혼과 빵〉(1973)·〈김남조시전집〉(1983)·〈너를 위하여〉(1985)·〈깨어나 주소서 주여〉(1988)·〈끝나는 고통 끝이 없는 사랑〉(1990) 등을 펴냈다. 시에 있어서 가장 중심을 이루는 것은 가톨릭의 박애정신과 윤리라고 할 수 있다. 인간 내면의 목소리로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노래했고, 언어의 조탁을 통한 유연한 리듬과 잘 짜인 시형의 아름다움은 읽는 이에게 친숙한 느낌을 준다. 1958년 시집 〈나무와 바람〉으로 자유문협문학상, 1963년 시집 〈풍림의 음악〉으로 오월문예상, 1975년 시집 〈사랑의 초서〉로 한국시인협회상을 받았고, 1984년 서울특별시문화상을 받았다. 수필집으로 〈다함없는 빛과 노래〉(1971)·〈기억하라 아침의 약속을〉(1987)·〈그대 사랑 앞에〉(1987)·〈그가 네 영혼을 부르거든〉(1988) 등을 펴냈다.                                         김남조 시 모음  ☆★☆★☆★☆★☆★☆☆★☆★☆★☆★☆★ 너를 위하여 김남조 나의 밤 기도는 길고 한가지 말만 되풀이한다 가만히 눈뜨는 것 믿을 수 없을 만치의 축원 갓 피어난 빛으로만 속속들이 채워 넘친 환한 영혼의 내 사람아 쓸쓸히 검은머리 풀고 누워도 이적지 못 가져 본 너그러운 사랑 너를 위하여 나 살거니 소중한 건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 이미 준 것은 잊어버리고 못다 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 내 사람아 눈이 내리는 먼 하늘에  달무리 보듯 너를 본다  ☆★☆★☆★☆★☆★☆☆★☆★☆★☆★☆★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김남조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기다려 줍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해서 부끄러워 할 것은 아닙니다. 먼저 사랑을 건넨 일도 잘못이 아닙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 없습니다. 먼저 사랑하고 더 많이 사랑하고 진정으로 사랑하여 가장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 됩시다. ☆★☆★☆★☆★☆★☆☆★☆★☆★☆★☆★ 보통 사람 김남조 성당 문 들어설 때 마음의 매무새 가다듬는 사람, 동트는 하늘 보며 잠잠히 인사하는 사람, 축구장 매표소 앞에서 온화하게 여러 시간 줄서는 사람, 단순한 호의에 감격하고 스쳐가는 희망에 가슴 설레며 행운은 의례히 자기 몫이 아닌 줄 여기는 사람, 울적한 신문기사엔 이게 아닌데, 아닌데 하며 안경의 어룽을 닦는 사람, 한밤에 잠 깨면 심해 같은 어둠을 지켜보며 불우한 이웃들을 골똘히 근심하는 사람 ☆★☆★☆★☆★☆★☆☆★☆★☆★☆★☆★ 빗물 같은 정을 주리라 김남조 너로 말하건 또한 나로 말하더라도 빈 손 빈 가슴으로 왔다 가는 사람이지 기린 모양의 긴 모가지에 멋있게 빛을 걸고 서 있는 친구 가로등의 불빛으로 눈이 어리었을까 엇갈리어 지나가다 얼굴 반쯤 그만 봐버린 사람아 요샌 참 너무 많이 네 생각이 난다 사락사락 사락눈이 한줌 뿌리면 솜털 같은 실비가 비단결 물보라로 적시는 첫봄인데 너도 빗물 같은 정을 양손으로 받아주렴 비는 뿌린 후에 거두지 않음이니 나도 스스로운 사랑으로 주고 달라진 않으리라 아무것도 무상으로 주는 정의 자욱마다엔 무슨 꽃이 피는가 이름 없는 벗이여 ☆★☆★☆★☆★☆★☆☆★☆★☆★☆★☆★ 겨울 꽃  김남조 1 눈길에 안고 온 꽃 눈을 털고 내밀어 주는 꽃 반은 얼음이면서 이거 뜨거워라 생명이여 언 살 갈피갈피 불씨 감추고 아프고 아리게 꽃빛 눈부시느니 2 겨우 안심이다 네 앞에 울게 됨으로 나 다시 사람이 되었어 줄기 잘리고 잎은 얼어 서걱 이면서 얼굴 가득 웃고 있는 겨울 꽃 앞에 오랫동안 잊었던 눈물 샘솟아 이제 나 또다시 사람되었어 ☆★☆★☆★☆★☆★☆☆★☆★☆★☆★☆★ 겨울바다  김남조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의 새 보고 싶었던 새들이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마저 얼어 버리고 허무의 불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혼령을 갖게 하오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 바다에 갔었지. 인고의 물이 수심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 그대 있음에  김남조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그대 있음에  내 맘에 자라거늘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손잡게 해  그대의 사랑 문을 열 때  내가 있어 그 빛에 살게 해  사는 것의 외롭고 고단함  그대 있음에  사람의 뜻을 배우니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그 빛에 살게 해. ☆★☆★☆★☆★☆★☆☆★☆★☆★☆★☆★ 물망초  김남조 기억해 주어요 부디 날 기억해 주어요 나야 이대로 못잊는 연보라의 물망초지만 혹시는 날 잊으려 바라시면은  유순히 편안스레 잊어라도 주어요 나야 언제나 못잊는 꽃 이름의 물망초지만  깜깜한 밤에 속 잎파리 피어나는  나무들의 기쁨  당신 그늘에 등불 없이 서 있어도 달밤 같은 위로 사람과 꽃이  영혼의 길을 트고 살았을 적엔 미소와 도취만이  큰배 같던 걸 당신이 간 후 바람결에 내버린 꽃 빛 연보라는  못잊어 넋을 우는  물망초지만 기억해 주어요 지금은 눈도 먼  물망초지만. ☆★☆★☆★☆★☆★☆☆★☆★☆★☆★☆★ 사랑  김남조 오래 잊히음과도 같은 병이었습니다 저녁 갈매기 바닷물 휘어적신 날개처럼 피로한 날들이 비늘처럼 돋아나는  북녘 창가에 내 알지 못할  이름의 아픔이던 것을 하루 아침 하늘 떠받고 날아가는 한 쌍의 떼 기러기를 보았을 때 어쩌면 그렇게도 한없는 눈물이 흐르고 화살을 맞은 듯 갑자기 나는 나의 병 이름의 그 무엇인가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 사랑의 말  김남조 1 사랑은  말하지 않는 말 아침에 단잠을 깨우듯 눈부셔 못견딘 사랑 하나 입술 없는 영혼 안에  집을 지어  대문 중문 다 지나는 맨 뒷방 병풍 너메  숨어 사네 옛 동양의 조각달과 금빛 수실 두르는 별들처럼 생각만이 깊고  말하지 않는 말 사랑 하나 2 사랑을 말한 탓에  천지간 불붙어 버리고 그 벌이시키는 대로 세상 양끝이 나뉘었었네 한평생  다 저물어 하직 삼아 만났더니 아아 천만번 쏟아 붓고도 진홍인 노을 사랑은  말해버린 잘못조차 아름답구나 ☆★☆★☆★☆★☆★☆☆★☆★☆★☆★☆★ 사랑한 이야기  김남조  사랑한 이야기를 하랍니다 해 저문 들녘에서 겨웁도록 마음 바친  소녀의 원이라고 구김없는 물 위에 차갑도록 흰 이맛전 먼저 살며시 떠오르는 무구한 소녀라 무슨 원이 행여 죄되리까만 사랑한 이야기야 허구헌날 사무쳐도 못내 말하고 사랑한 이야기야 글썽이며 목이 메도 못내 말하고 죽을 때나 가만가만 뇌어볼 이름임을 소녀는 아직 어려 세상도 몰라 사랑한 이야기를 하랍니다 꽃이 지는 봄밤에랴 희어서 설운 꽃잎 잎새마다 보챈다고 가이없는 누벌에 한 송이 핏빛 동백 불본 모양 몸이 덥듯 귀여운 소녀라 무슨 원이 굳이 여껴우리만 사랑한 이야기야 내 마음 저며낼까 못내 말하고 사랑한 이야기야 내 영혼 피 흐를까 못내 말하고 죽을 때나 눈매 곱게 그려 볼 모습임을 소녀는 아직 어려 세상도 몰라 기막힌 이 이야기를 하랍니다 사랑한 이야기를 하랍니다. ☆★☆★☆★☆★☆★☆☆★☆★☆★☆★☆★ 상사(想思)  김남조 언젠가 물어보리 기쁘거나 슬프거나 성한 날 병든 날에 꿈에도 생시에도 영혼의 철사 줄 윙윙 울리는 그대 생각, 천번만번 이상하여라 다른 이는 모르는 이 메아리 사시사철  내 한평생 骨髓에 電話오는  그대 음성, 언젠가 물어보리 죽기 전에 단 한번 물어보리 그대 혹시  나와 같았는지를 ☆★☆★☆★☆★☆★☆☆★☆★☆★☆★☆★ 아가(雅歌) 2  김남조 나 네게로 가리 한사코 가리라 이슬에 씻은 빈손이어도 가리라 눈 멀어도 가리라 세월이 겹칠수록 푸르청청 물빛 이 한(恨)으로 가리라 네게로 가리 저승의 지아비를 내 살의 반을 찾으러 검은머리 올올이 혼령이 있어 그 혼의 하나하나 부르며 가리 나 네게로 가리 ☆★☆★☆★☆★☆★☆☆★☆★☆★☆★☆★ 연하장  김남조  설날 첫 햇살에  펴 보세요  잊음으로 흐르는  망각의 강물에서  옥돌 하나 정 하나 골똘히 길어내는  이런 마음씨로 봐 주세요  연하장,  먹으로써도  彩色(채색)으로 무늬 놓는  편지  온갖 화해와  함께 늙는 회포에  손을 쪼이는  편지  제일 사랑하는 한 사람에겐  글씨는 없이  목례만 드린다.  ☆★☆★☆★☆★☆★☆☆★☆★☆★☆★☆★ 허망(虛妄)에 관하여  김남조 내 마음을 열  열쇠꾸러미를 너에게 준다  어느 방  어느 서랍이나 금고도  원하거든 열거라  그러하고  무엇이나 가져도 된다  가진 후 빈 그릇에  허공부스러기쯤 담아 두려거든  그렇게 하여라  이 세상에선  누군가 주는 이 있고  누군가 받는 이도 있다  받아선 내버리거나  서서히 시들게 놔두기도 한다  이런 이 허망이라 한다  허망은 삶의 예삿일이며  이를테면  사람의 식량이다  나는 너를  허망의 짝으로 선택했다  너를 사랑한다  ☆★☆★☆★☆★☆★☆☆★☆★☆★☆★☆★ 가고 오지 않는 사람  김남조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더 기다려 줍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부끄러워 할 것은 없습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 없습니다.  요행이 그 능력 우리에게 있어 행할 수 있거든 부디 먼저 사랑하고 많이 사랑하고 더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 됩시다. ☆★☆★☆★☆★☆★☆☆★☆★☆★☆★☆★ 가난한 이름에게 김남조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검은 벽의 검은 꽂그림자 같은 어두운 香料(향료) 고독 때문에 노상 술을 마시는 고독한 남자들과 이가 시린 한 겨울밤 고독 때문에 한껏 사랑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얼굴을 가리고 고독이 아쉬운 내가 돌아갑니다. 불신과 가난 그 중에 특별하기로 역시 고독 때문에  어딘 지를 서성이는 고독한 남자들과 허무와 이별 그중 특별하기론 역시 고독 때문에 때론 골똘히 죽음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머리를 수그리고 당신도 고독이 아쉬운 채 돌아갑니까 인간이란 가난한 이름에 고독도 과해서 못 가진 이름 울면서 눈감고 입술 대는 밤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는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 가을 햇볕에  김남조 보고싶은  너  가을 햇볕에 이 마음 익어서  음악이 되네  말은 없이  그리움 영글어서  가지도 휘이는  열매,  참다 못해  가슴 찟고 나오는  비둘기 떼들,  들꽃이되고  바람속에 몸을푸는  갈숲도 되네  가을 햇볕에  눈물도 말려야지  가을 햇볕에  더욱 나는 사랑하고 있건만  말은 없이 기다림만 쌓여서  낙엽이 되네.  아아  저녁 해를 안고 누운  긴 강물이나 되고지고  보고 싶은  너  이 마음이 저물어  밤하늘 되네  ☆★☆★☆★☆★☆★☆☆★☆★☆★☆★☆★ 겨울나무  김남조 말하려나  말하려나  겨우내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이 말부터 하려나  겨우내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산울림도 울리려나  나의  겨울나무  새하얀 바람 하나  지나갔는데  눈 여자의 치마폭일 거라고  산신령보다 더 오래 사는  그녀 백발의 머리단일 거라고  이런 말도 하려나  ☆★☆★☆★☆★☆★☆☆★☆★☆★☆★☆★ 나의 시에게  김남조 이래도 괜찮은가 나의 시여 거뭇한 벽의 船窓(선창) 같은 벽거울의 이름 암청의 쓸쓸함, 괜찮은가 사물과 사람들 차례로 모습 비추고 거울 밑바닥에 혼령 데리고 가라앉으니 천만 근의 무게 아픈 거울 근육 견뎌내겠는가 남루한 여자 하나 그 명징의 살결 감히 어루만지며 부끄러워라 통회와 그리움 아리고 떫은 갖가지를 피와 呪言(주언)으로 제상 바쳐도 나의 시여 날마다 내 앞에 계시고 어느 훗날 최후의 그 한 사람 되어 주겠는가  ☆★☆★☆★☆★☆★☆☆★☆★☆★☆★☆★ 너에게  김남조  아슴한 어느 옛날  겁劫을 달리하는 먼 시간 속에서  어쩌면 넌 알뜰한  내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지아비의 피 묻은 늑골에서  백년해로의 지어미를 빚으셨다는  성서의 이야기는  너와 나의 옛 사연이나 아니었을까  풋풋하고 건강한 원시의 숲  찬연한 원색의 칠범벅이 속에서  아침 햇살마냥 피어나던  우리들 사랑이나 아니었을까  불러 불러도 아쉬움은 남느니  나날이 새로 샘솟는 그리움이랴, 이는  그 날의 마음 그대로인지 모른다  빈방 차가운 창가에  지금이사 너 없이 살아가는  나이건만  아슴한 어느 훗날에  가물거리는 보랏빛 기류같이  곱고 먼 시간 속에서  어쩌면 넌 다시금 남김 없는  내 사람일지도 모른다 ☆★☆★☆★☆★☆★☆☆★☆★☆★☆★☆★ 다시 봄에게  김남조  올해의 봄이여 너의 무대에서 배역이 없는 나는 내려가련다 더하여 올해의 봄이여 너에게 다른 연인이 생긴 일도 나는 알아 버렸어 애달픔 지고 순정 그 하나로 눈흘길 줄도 모르는 짝사랑의 습관이 옛 노예의 채찍자국처럼 남아 올해의 봄이여 너의 새순에 소금가루 뿌리러 오는 꽃샘눈 꽃샘추위를 중도에서 나는 만나 등에 업고 떠나고 지노니  ☆★☆★☆★☆★☆★☆☆★☆★☆★☆★☆★ 雪日 김남조 겨울 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지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 산에 와서 김남조 우중 설악이  이마엔 구름의 띠를  가슴 아래론 안개를 둘렀네  할말을 마친 이들이  아렴풋 꿈속처럼  살결 맞대었구나  일찍이  이름을 버린  무명용사나  무명성인들 같은  나무들,  바위들,  청산에 살아  이름도 잊은 이들이  빗속에 벗은 몸 그대로  편안하여라  따뜻하여라  사람이 죽으면  산에 와 안기는 까닭을  오늘에 알겠네 ☆★☆★☆★☆★☆★☆☆★☆★☆★☆★☆★ 산에 이르러 김남조 누가 여기 함께 왔는가  누가 나를 목메이게 하는가  솔바람에 목욕하는  숲과 들판  앞가슴 못다 여민 연봉들을  운무雲霧 옷자락에 설풋 안으신  한 어른을  대죄待罪하듯 황공히 뵈옵느니  지하地下의 돌들과 뿌리들이  이 분으로 하여 강녕康寧하고  땅 속에 잠든 이들  이 분으로 하여 안식하느니라고  아아 누가 나에게  오늘 새삼  이런 광명한 말씀 들려주는가  산의 안 보이는 그 밑의 산을  두 팔에 안고 계신  절대의 한 어른을  누가 처음으로  묵상하게 해주시는가 ☆★☆★☆★☆★☆★☆☆★☆★☆★☆★☆★ 산에게 나무에게 김남조 산은 내게 올 수 없어  내가 산을 찾아갔네  나무도 내게 올 수 없어  내가 나무 곁에 섰었네  산과 나무들과 내가  친해진 이야기  산은 거기에 두고  내가 산을 내려왔네  내가 나무를 떠나왔네  그들은 주인자리에 나는 바람 같은 몸 산과 나무들과 내가  이별한 이야기 ☆★☆★☆★☆★☆★☆☆★☆★☆★☆★☆★ 상심수첩 김남조 1  먼 바다로  떠나는 마음 알겠다  깊은 산 깊은 고을  홀로 찾아드는 이의 마음 알겠다  사람세상 소식 들으려  그 먼길 되짚어  다시 오는 그 마음도 알겠다  2  울며 난타하며  종을 치는 사람아  종소리 맑디맑게  아홉 하늘 울리려면  몇천 몇만 번을  사람이 울고  종도 소리 질러야 하는가  3  층계를 올라간다  한없이 올라가 끝에 이르면  구름 같은 어둠.  층계를 내겨간다  한없이 내려와 끝에 이르면  구름 같은 어둠.  이로써 깨닫노니  층계의 위 아래는  같은 것이구나  4  병이 손님인양 왔다  오랜만이라며 들어와 머리맡에 앉았다  커다란 책을 펴들고 그 안에 쓰인 글시,  세상의 물정들을 보여준다  한 모금씩 마시는 얼음냉수처럼  천천히 추위를 되뇌이며 구경한다  눈물 흐르는 일이 묘하게 감미롭다  5  굶주린 자 밥의 참뜻을 알듯이  잃은 자 잃은 것의 존귀함을 안다  신산에서 뽑아내는  꿀의 음미를.  이별이여  남은 진실 그 모두를  바다 깊이 가라앉히는 일이여  6  기도란  사람의 진실 하늘에 바침이요  저희의 진실 오늘은 어둠이니  이 어둠 바치나이다  은총은  하늘의 것을 사람에게 주심이니  하늘나라 넘치는 것  오늘 혹시 어둠이시면  어둠 더욱 내려주소서  7  전신이 감전대인 여자  바람에서도 공기에서도  전류 흘러 못견디는 여자  겨울벌판에서도 허공에서도  와아와아 몸서리치며 다가오는  포옹의 팔들. 팔들  8  그를 잃게 된다  누구도 못바꿀 순서란다  다른 일은 붙박이로 서 있고  이 일만 바람갈기 날리며 온다  저만치에,  바로 눈 앞에.  지금,  아아 하늘이 쏟아져 내린다  9  제 기도를 진흙에 버리신 일  용서해 드립니다  그간에 주신 모든 용서를 감사드리며  황송하오나 오늘은 제가  신이신 당신을 용서해 드립니다  아아 잘못하실 수가 없는 분의 잘못  죄의 반란 같은 것이여  전심전령이 기도 헛되어  하늘은 닫히고  사람은 이런 때 울지 않는다  10  아슴한 옛날부터  줄곧 걸어와  마침내 오늘 여기 닿았습니다  더는 갈 곳이 없는  더는 아무 일도 생기잖을  마지막 땅에  즉 온전한 목마름에 ☆★☆★☆★☆★☆★☆☆★☆★☆★☆★☆★ 새 달력 첫 날 김남조 깨끗하구나  얼려서 소독하는  겨울산천  너무 크고 추웠던  어릴 적 예배당 같은 세상에  새 달력 첫날  오직 숙연하다  천지간  눈물나는 추위의  겨울음악 울리느니  얼음물에 몸 담그어 일하는  겨울 나룻배와  수정 화살을 거슬러 오르는  겨울 등반대의  그 노래이리라  추운 날씨  모든 날에  추운 날씨 한 평생에도  꿈꾸며 길가는 사람  나는 되고 니노니  불빛 있는 인가와  그곳에서 만날 친구들을  꿈꾸며 걷는 이  나는 되고 지노니  새 달력 첫 날  이것 아니고는 살아 못낼  사랑과 인내  먼 소망과  인동의 서원을  시린 두 손으로  이날에 바친다 ☆★☆★☆★☆★☆★☆☆★☆★☆★☆★☆★ 새 김남조 새는 가련함 아니여도  새는 찬란한 깃털 어니여도  새는 노래 아니여도  무수히 시로 읊어짐 아니여도  심지어  신의 신비한 촛불  따스한 맥박 아니여도  탱크만치 육중하거나  흉물이거나  무개성하거나  적개심을 유발하거나 하여간에  절대의 한 순간  숨겨 지니던 날개를 퍼득여  창공으로 솟아 오른다면  이로써 완벽한 새요  여타는 전혀 상관이 없다 ☆★☆★☆★☆★☆★☆☆★☆★☆★☆★☆★ 새로운 공부 김남조 마술을 배울까나  거미줄 사이로  하얗게 늙은 호롱불,  욕탕만한 가마솥에  먹물 한 솥을 설설 끓이며  뭔가 아직도 모자라서  이상한 약초 몇 가지 더 넣으며  혼 내줄 사람과  도와줄 이를  따로이 가슴서랍에 챙겨 잠그고  빗소리보다 습습하게  주문을 외는  동화속의 마술할머니  마술을 배울까나  좋은 일도 많이 하고  먹물 가마솥에  좋은 풀도 많이 넣는  마술 할머니  내가 그녀의 제자 되어  새로운 공부에 열중해 볼까나  유년의 날  써커스의 말 탄 소녀를 본후  온세상 노을뿐이던  흥분과 부러움을  적막한 이 세월에  되돌려 올까나  마술을 배울까나  ☆★☆★☆★☆★☆★☆☆★☆★☆★☆★☆★ 새벽 외출 김남조 영원에서 영원까지  누리의 나그네신 분  간밤 추운 잠을  십자가 형틀에서 채우시고  희부연 여명엔  못과 가시관을 풀어  새날의 나그네길 떠나가시네  이천 년 하루같이  새벽 외출  외톨이 과객으로 다니시며  세상의 황량함  품어 뎁히시고  울음과 사랑으로  가슴 거듭 찢기시며  깊은 밤  십자가 위에 돌아오시어  엷은 잠 청하시느니  아아 송구한 내 사랑은  어이 풀까나  이 새벽에도  빙설의 지평 위를  청솔바람 소리로 넘어가시는  주의 발소리  뇌수에 울려 들리네  ☆★☆★☆★☆★☆★☆☆★☆★☆★☆★☆★ 새벽에 김남조 나의 고통은  성숙하기도 전에  풍화부터 하는가  간밤엔  눈물 없이 잠들어  평온한 새벽을 이에 맞노니  연민할지어다  나의 몰골이여  다른 사람들은  고난으로  새 삶의 효모와 바꾸고  용서하소서  용서하소서  맨몸 으깨어  피와 땀으로 참회하고  준열히 진실에 순절하되  목숨 질겨서  그 몇 번 살아 남는 것을  나의 고통은  절상 순간에  이미 얼얼하게 졸면서  죄와 가책에도  아프면서 졸면서  결국엔  지난밤도 백치처럼 잠들어  청명한 이 새벽에  죽고 싶도록  남루할 뿐이노니 ☆★☆★☆★☆★☆★☆☆★☆★☆★☆★☆★ 새벽전등 김남조 간밤에 잠자지 못한 이와  아주 조금 잠을 잔 이들이  새소리보다 먼저 부스럭거리며  새벽전등을 켠다  이 거대한 도시 곳곳에  불면의 도랑은 비릿하게  더 깊은 골로 패이고  이제 집집마다  눈물겨운 광명이 비추일 것이나  미소짓는 자, 많지 못하리라  여명黎明에 피어나는 태극기들,  독립 반세기라 한 달 간  태극기를 내걸지자는 약속에  백오십 만 실직 가정도  이리했으려니와  희망과의 악수인 건 아니다  참으로 누구의 생명이  이 많은 이를 살게 할 것이며  누구의 영혼이  이들을 의연毅然하게 할 것이며  그 누가 십자가에 못박히겠는가  심각한 시절이여  잠을 설친 이들이 새벽전등을 켠다 ☆★☆★☆★☆★☆★☆☆★☆★☆★☆★☆★ 생명  김남조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벌거벗고 언 땅에 꽂혀 자라는 초록의 겨울보리 생명의 어머니도 먼 곳 추운 몸으로 왔다 진실도 부서지고 불에 타면서 온다 버려지고 피 흘리면서 온다 겨울나무들을 보라 추위의 먼도날로 제 몸을 다듬는다 잎은 떨어져 먼 날의 섭리에 불려가고 줄기는 이렇듯이 충전 부싯돌임을 보라 금가고 일그러진 걸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상한 살을 헤집고 이 맞출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생명은 추은 몸으로 온다 열두 대문 다 지나온 추위로 하얗게 드러눕는 함박눈 눈송이로 온다 ☆★☆★☆★☆★☆★☆☆★☆★☆★☆★☆★ 소녀를 위하여 김남조 그가 네 영혼을 부른다면  음성 그 아니,  손짓 그 아니어도  들을 수 있으리  그가 네 이름의 글씨 쓴다면  생시 그 아니,  꿈속 그 아니어도  온 마음으로 읽으리  그가 너를 찾을 땐  태어나기 전  다른 별에서  항시 함께 있던 습관  예까지 묻어온 메아리려니  그가 너를 부른다  지금 그 자리에서  대답하여라 ☆★☆★☆★☆★☆★☆☆★☆★☆★☆★☆★ 송(頌) 김남조 그가 돌아왔다  돌아와  그의 옛집 사립문으로 들었느니  단지 이 사실이  밤마다 나의 枕上에  촛불을 밝힌다  말하지 말자  말하지 말자  제 몸 사루는 불빛도  침묵뿐인걸  그저  온마음 더워오고  내 영혼 눈물지우느니  이슬에 씻기우는  온누리  밤의 아름다움  천지간 편안하고  차마 과분한  별빛 소나기  그가 돌아왔다 ☆★☆★☆★☆★☆★☆☆★☆★☆★☆★☆★ 슬픔에게 김남조 정적에도  자물쇠가 있는가  문 닫고 장막 드리우니  잘은 모르는  관 속의 고요로구나  밤에서 밤으로  어둠에 어둠 겹치는  유별난 시공을  너에게 요람으로 주노니  느릿느릿 흔들리면서  모쪼록  소리내진 말아라  오히려 백옥의 살결  따스해서 눈물나는  아기나 하나 낳으려무나  소리 없이 반짝이는  눈물 빛 사리라도 맺으려무나  나의 슬픔이여 ☆★☆★☆★☆★☆★☆☆★☆★☆★☆★☆★ 시인(詩人) 김남조 1  수정水晶의 각角을 쪼개면서  차아로 이 일에  겁 먹으면서  2  벗어라  땡볕이나 빙판에서도 벗어라  조명照明을 두고 벗어라  칼날을 딛고도 벗어  청결한 속살을 보여라  아가케를 거쳐  에로스를 실하게  아울러 明燈명등에 육박해라  그 아니면  죽어라  3  진정한 玉옥과 같은  진정한 詩人시인  우리시대  이 목마름  4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더하여  그 공막空寞 그 靜菽정숙에  첫 풀잎 돋아남을  문득  보게 되거라  그대여 ☆★☆★☆★☆★☆★☆☆★☆★☆★☆★☆★ 시인에게 김남조 그대의 시집 옆에  나의 시집을 나란히 둔다  사람은 저마다  바다 가운데 섬과 같다는데  우리의 책은  어떤 외로움일는지  바람은 지나간 자리에  다시 와 보는가  우리는 그 바람을 알아보는가  시인이여  모든 존재엔  오지와 심연,  피안까지 있으므로  그 불가사의에 지쳐  평생의 시업이  겁먹는 일로 고작이다  나의 시를 읽어 다오  미혹과 고백의 골은 깊고  애환 낱낱이 선명하다  물론 첫새벽 기도처럼  그대의 시를 읽으리라  다함 없이 축원을 비쳐 주리라  시인이여  우리는 저마다  운명적인 시우를 만나야 한다  서로 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영혼의 목마름도 진맥하여  피와 이슬을 마시게 할  그 경건한 의사가  시인들말고  다른 누구이겠는가  좋고 나쁜 것이  함께 뭉쳐 폭발하는  이 물량의 시대에  유일한 결핍 하나뿐인 겸손은  마음에 눈 내리는 추위  그리고  이로 인해 절망하는  이들 앞에  시인은 진실로 진실로 죄인이다  시인이여  막막하고 쓸쓸하여  오늘 나의 작은 배가  그대의 섬에 기항한다 ☆★☆★☆★☆★☆★☆☆★☆★☆★☆★☆★ 심장이 아프다  김남조 “내가 아프다”고 심장이 말했으나 고요가 성숙되지 못해 그 음성 아슴했다 한참 후일에 “내가 아프다 아주 많이”라고 심장이 말할 때 고요가 성숙되었기에 이를 알아들었다  심장이 말한다 교향곡의 음표들처럼 한 곡의 장중한 음악 안에 심장은 화살에 꿰뚫린 아픔으로 녹아들어 저마다의 음계와 음색이 된다고 그러나 심연의 연주여서 고요해야만 들린다고  심장이 이런 말도 한다 그리움과 회한과 궁핍과 고통 등이 사람의 일상이며 이것이 바수어져 물 되고 증류수 되기까지 아프고 아프면서 삶의 예물로 바쳐진다고 그리고 삶은 진실로 이만한 가치라고  ☆★☆★☆★☆★☆★☆☆★☆★☆★☆★☆★ 아버지 김남조 아버지가 아들을 부른다  아버지가 지어준 아들의 이름  그 좋은 이름으로  아버지가 불러주면  아들은 얼마나 감미로운지  아버지는 얼마나 눈물겨운지  아버지가 아들을 부른다  아아 아버지가 불러주는  아들의 이름은  세상의 으뜸같이 귀중하여라  달무리 둘러둘러 아름다워라  아버지가 아들을 부른다  아들을 부르는  아버지의 음성은  세상 끝에서 끝까지 잘 들리고  하늘에서 땅까지도 잘 들린다  아버지가 불러주는  아들의 이름은  생모시 찢어내며 가슴 아파라 ☆★☆★☆★☆★☆★☆☆★☆★☆★☆★☆★ 아침 기도 김남조 목마른 긴 밤과  미명의 새벽길을 지나며  싹이 트는 씨앗에게 인사합니다.  사랑이 눈물 흐르게 하듯이  생명들도 그러하기에  일일이 인사합니다.  주님,  아직도 제게 주실  허락이 남았다면  주님께 한 여자가 해드렸듯이  눈물과 향유와 미끈거리는 검은 모발로써  저도 한 사람의 발을  말없이 오래오래  닦아주고 싶습니다.  오늘 아침엔  이 한 가지 소원으로  기도 드립니다.  ☆★☆★☆★☆★☆★☆☆★☆★☆★☆★☆★ 아침 은총 김남조 아침 샘터에 간다  잠의 두 팔에 혼곤히 안겨 있는  단 샘에  공중의 이슬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이날의  첫 두레박으로  순수의 우물, 한 꺼풀의 물빛 보옥들을  길어올린다  샘터를 떠나  그분께 간다  그분 머리맡께에 정갈한 물을 둔다  단지,  아침 광경에 눈뜨실 쯤엔  나는 언제나 없다  은총이여  生金보다 귀한  아침 햇살에  그분의 온몸이 성하고 빛나심을  날이 날마다  고맙게 지켜본다 ☆★☆★☆★☆★☆★☆☆★☆★☆★☆★☆★ 안식 김남조 이제 그는 쉰다  처음으로 안식하는 이를 위해  그의 집에  고요와 평안 넉넉하고  겨우 깨달아  그의 아내도  바쁜 세상으로부터 돌아와  손을 씻으니  해돋이에서 해넘이까지  바쁜 일이라곤 없어라  그가 보던 것  간절히 바라보고  그가 만지던 것  오래오래 어루만지는 사이  막힘 없이 흐르는 시간  가슴 안의 구명으로  솔솔 빠져나가고  머릿속에 붐비는 피도  옥양목 흰빛으로  솰솰 새어나가누나  울지 말아라  울지 말아라  남루한 그녀 영혼도  빨아 헹구어  희디하얗게 표백한다면  절대의 절대적 절망  이 숯덩이도  벼루에 먹 갈리듯  풀어질 날 있으리니  슬퍼 말아라  슬픔은 소리내고 싶은 것  조용하여라  달빛 자욱한 듯이  온 집안 가득히  그가 쉬고 있다 ☆★☆★☆★☆★☆★☆☆★☆★☆★☆★☆★ 안식을 위하여 김남조 겨울나무 옆에  나도 나무로 서 있다  겨울나무 추위 옆에  나도 추위로 서 있다  추운 이들  함께 있구나 여길 때  추위의 위안 물결 인다 하리라  겨울나무 옆에 서서  적멸한 그 평안  숙연히 본받고 지노니  휴식 모자라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여기는  내 자식들이  쉬라고 쉬라고 엄마를 조르는  그 당부 측은히  헤아린다 하리라  안식의 정령이어  산 이와 죽은 이를  한 품에 안아 주십사 비노니  겨울바람의 풍금  느릿느릿 울려 주십사고도 비노니  큰 촛불, 작은 촛불처럼  겨울나무와 내가  나란히 기도한다 하리라 ☆★☆★☆★☆★☆★☆☆★☆★☆★☆★☆★ 어떤 소년 김남조 꽃 배달처럼  나의 병실을 찾아온  소년에게  내 처지 지금 감방 같다 했더니  그 아이 말이  저는 어디 있으나  황무지며 사막이예요. 란다  넌 좀 낙관주위가 돼야겠어  놀라는 내 대꾸에  그건 비관주의보단 더 나쁜 거예요  헤프고 바보그럽고  맥빠져 있으니까요, 란다  아이야  천길 벼랑에서  밑바닥 굽어본 일  벌써 있었더냐  온몸의  뇌관이 저려들면서  허공에 두 손드는  시퍼런 투항도 해보았더냐  더하기로는  심장 한가운데를 쑤시던  사람 하나가  날개 달아  네 몸 두고 날아갔느냐  .... 아이야 ☆★☆★☆★☆★☆★☆☆★☆★☆★☆★☆★ 어머님의 성서(聖書) 김남조 고통은  말하지 않습니다  고통 중에 성숙해지며  크낙한 사랑처럼  오직 침묵합니다  복음에도 없는  마리아의 말씀, 묵언의 문자들은  고통 중에 영혼들이 읽는  어머님의 성서입니다  긴 날의 불볕을 식히는  여름나무들이,  제 기름에 불 켜는  초밤의 밀촉이,  하늘 아래 수직으로 전신배례를 올릴 때  사람들의 고통이 흘러가서  바다를 이룰 때  고통의 짝을 찾아  서로 포옹할 때  어머님의 성서는  천지간의 유일한 유품처럼  귀하고 낭랑하게  잘 울립니다 ☆★☆★☆★☆★☆★☆☆★☆★☆★☆★☆★ 연 김남조 연 하나  날리세요  순지 한 장으로 당신이 내거는  낮달이 보고파요  가멸가멸 올라가는  연실은 어떨까요  말하는 마음보다 더욱 먼 마음일까요  하늘 너머 하늘가는  그 마음일까요  겨울하늘에  연 하나 날리세요  옛날 저승의 우리집 문패  당신의 이름 석자가  하늘 안의 서러운  진짜 하늘이네요  연하나  날리세요  세월은 그렁저렁 너그러운 유수  울리셔도 더는 울지 않고  창공의 새하얀 연을  나는 볼래요 ☆★☆★☆★☆★☆★☆☆★☆★☆★☆★☆★ 영원 그 안에선 김남조 이별의 돌을 닦으며  고요하게 있자  높은 가지에서 떨어지려는 잎들이  잠시  최후의 기도를 올리듯이  아무것도 허전해하지 말자  가을나무의 쏟아지는 잎들을 뜯어 넣고  바람이 또 무엇인가를  빚는다고 알면  그만인걸  눈물 다해  한 둘레 눈물 기둥  불망인들 닦고 닦아  혼령 있는 심연 있는  거울이 되도록만 하자  이별의 문턱에 와서  마지막 가장 어여쁘게 내가 있고  영원 그 안에선  그대 날마다  새로이 남아 계심을  정녕 믿으마  말로는 나타 못낼  위안의 저 청람빛,  하늘 아래 생겨난 모든 일은  하늘 아래 어디엔가 거두어 주시리라 ☆★☆★☆★☆★☆★☆☆★☆★☆★☆★☆★ 오늘 김남조 1  눈 오늘 강물을 바라본다  어렴풋한 꿈속이듯 오랫동안  내 이렇게 있었다  오늘은 당신에게 줄 말이 없다  다만 당신의 침묵과 한 가지 뜻의 묵언(默言)이  내게 머물도록 빌 뿐이다  2  오늘 내 영혼을 당신에게 연다  마지막인 허락은  이래야만 함인 줄 알았기에 ☆★☆★☆★☆★☆★☆☆★☆★☆★☆★☆★ 올해의 성탄 김남조 정직해야지  지치고 어둑한 내 영혼을 데리고  먼 길을 떠날 줄도 알아야 한다  내밀한 광기  또 오욕  모든 나쁜 순환을 토혈인 양 뱉고  차라리 청신한 바람으로  한 가슴을 채워야 한다  크리스마스는  지등을 들고 성당에도 가지만  자욱한 안개를 헤쳐  서먹해진 제 영혼을 살피는 날이다  유서를 쓰는,  유서에 서명을 하는,  다시 그 나머지 한 줄의 시를 마지막인 양 끄적이는  어리석고 뜨거운 나여  만약에 만월 같은 연모라도 품는다며는  배덕의 정사쯤 쉽사리 저지를  그리도 외롭고 맹목인 열에  까맣게 내 두뇌를 태워 가고 있다  슬픔조차 신선하지가 못해  한결 슬픔을 돋우고  어째도 크리스마스는 마음놓고 크게 우는 날이다  석양의 하늘에 커다랗게 성호를 긋고  구원에서 가장 먼 사람이  주여, 부르며 뿌리째 말라 버린 겨울 갈대밭을  달려가는 날이다 ☆★☆★☆★☆★☆★☆☆★☆★☆★☆★☆★ 은혜 김남조 처음으로  나에게  너를 주시던 날  그날 하루의  은혜를  나무로 심어 숲을 이루었니라  물로 키워 샘을 이루었니라  처음으로  나에게  너를 그리움이게 하신  그 뜻을 소중히  외롬마저 두 손으로 받았니라  가는 날 오는 날에  눈길 비추는  달과 달무리처럼 있는 이여  마지막으로  나에게  너를 남겨 주실 어느 훗날  숨 거두는 자리  감사함으로  두 영혼을 건지면  다시 은혜이리 ☆★☆★☆★☆★☆★☆☆★☆★☆★☆★☆★ 음악 김남조 음악 그 위험한 바다에 빠졌었네  고단한 도취에 울어버렸네  살아 보아도  내 하늘에 무궁한 구름은  哀傷,  많은 詩를 썼으나 어느 한 귀절도  나를 건져 주지 못했다  사람 하나  그 복잡한 迷惑에 반생을 살고  나머지 쉽사리 입는  상처의 버릇  눈 오는 숲  나무들의 화목처럼  어진 일몰 후  편안한 밤처럼 ……  있고 싶어라  참말은 무섭고  거짓말은 부끄럽워 ☆★☆★☆★☆★☆★☆☆★☆★☆★☆★☆★ 의자 김남조 세상에 수많은 사람 살고  사람 하나에 한 운명 있듯이  바람도 여러 바람  그 하나마다  생애의 파란만장  운명의 진술서가 다를 테지  하여 태초에서 오늘까지 불어 와  문득 내 앞에서  나래 접는 바람도 있으리라  그를 벗하여  나도 더 가지 않으련다  삶이란 길가는 일 아니던가  모든 날에 길을 걷고  한 평생 걸어 예 왔으되  이제 나에게  삶이란  도착하여 의자에 앉고 싶은 것  겨우겨우 할 일 끝내고  내명 얻으려 좌선에 든  바람도사 옆에서  예순 해 걸어온 나는  예순 해 앉아 있고 싶노니 ☆★☆★☆★☆★☆★☆☆★☆★☆★☆★☆★ 이런 사람과 사랑하세요 김남조 만남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과 사랑하세요.  그래야 행여나 당신에게 이별이 찾아와도  당신과의 만남을 잊지 않고 기억해 줄 테니까요.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과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나 익숙치 못한 사랑으로  당신을 떠나보내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기다림을 아는 이와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나 당신이 방황을 할 때  그저 이유 없이 당신을 기다려 줄 테니까요.  기다림을 아는 이와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나 당신이 방황을 할 때  그저 이유 없이 당신을 기다려 줄 테니까요.  ☆★☆★☆★☆★☆★☆☆★☆★☆★☆★☆★ 인인(隣人) 김남조 보이지 않는 고운 영혼이  네게 있고 내게도 있었느니라  보이지 않게 곱고 괴로운 영혼  곱고 괴롭고 그리워하는 영혼이  네게 있고  내게도 있었느니라  그것은  인기척없는 외딴 산마루에  풀잎을 비비적거리며 드러누운  나무의 그림자 모양  쓸쓸한 영혼  쓸쓸하고 서로 닮은  영혼이었느니라  집 가족 고향이 다르고  가는 길 오는 길 있는 곳이 어긋난도  한바다 첩첩이 포개진 물 밑에  청옥빛 파르름한 조약돌이  가지런히 둥그랗게  눈뜨고 살아옴과 같았느니라  영혼이 살고 잇는 영혼들이 마을에선  살경이 부딪는 알뜰한 인인  우리는 눈물겹게 함께 있어 왔느니라  짐짓 보이지 않는 영혼의  곱고 괴롭고 그리워하는 손짓으로  철따라 부르는 소리였느니라  철 따라 대답하는  마음이었느니라 ☆★☆★☆★☆★☆★☆☆★☆★☆★☆★☆★ 잠 김남조 그의 잠은 깊어  오늘도 깨지 않는다  잠의 집  돌벽 실하여  장중한 궁궐이라 하리니  두짝 문 맞물려 닫고  나는 그  충직한 문지기라  숙면의 눈시울이어  평안은 끝없고  만상의 주인이신 분이  잠의 恩賜를  그에게 옷 입히시니  자장가 없이도  잠은 더욱 깊어라  그의 잠은 깊고  잠의 평안  한바다 같아라  잠의 은사를 배례하리니  세월이 흘러  내가 잠들 때까지  잠을 섬기는  나는 그 불침번이리 ☆★☆★☆★☆★☆★☆☆★☆★☆★☆★☆★ 장엄한 숲  김남조 삼천 년 된 거목들의 숲은  겨우내 끝이 안 보이는 설원雪原  나무들은  그 눈 벌에 서 있습니다  어느 겨울  그 중의 한 나무가  눈사태에 떠밀려 쓰러질 때  하느님이  품 속에 안으셨습니다  나직이 이르시되  아기야 쉬어라 쉬어라 ……  하느님께선  이 나무가 작은 씨앗이던 때를  기억하시며  거대한 뿌리에서 퍼져나간  젊은 분신들도 알으십니다.  쉬어라 쉬어라고  하느님의 사랑은 이날  자애로운 안도安堵이셨습니다  가령에  삼천 년을 노래해온 새가 있다면  쉬어라 쉬어라고 하실 겝니다  이 나무 기나긴 삼천 년을  장하게 맥박쳐 왔으니까요  레드우드 품종의  그 이름 와워나로 불리우는  이 나무는  세상에서 가장 복된 수면이요 안식이며  이후 삼천 년 동안  그는 잠자는 성자일 겝니다  장엄한 숲에서  이 겨울도  끝이 안 보이는 아득한 설원에서  ☆★☆★☆★☆★☆★☆☆★☆★☆★☆★☆★ 저무는 날에 김남조 날이 저물어 가듯  나의 사랑도 저물어 간다  사람의 영혼은  첫날부터 혼자이던 것  사랑도 혼자인 것  제몸을 태워야만이 환한  촛불같은 것  꿈꾸며 오래오래 불타려 해도  줄어드는 밀랍  이윽고 불빛이 지워지고  재도 하나 안남기는  촛불같은 것  날이 저물어 가듯  삶과 사랑도 저무느니  주야사철 보고지던 그 마음도  세월따라 늠실늠실 흘러가고  사람의 사랑  끝날엔 혼자인 것  영혼도 혼자인 것  혼자서  크신 분이 품안에  눈감는 것  ☆★☆★☆★☆★☆★☆☆★☆★☆★☆★☆★ 정념情念의 기旗 김남조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 없는 것 모양 걸려 왔더니라.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눈 오는 네거리에 나서면 눈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 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기(旗)는 눈의 음악이나 듣고 있는가. 나에게 원이 있다면 뉘우침 없는 일몰(日沒)이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가는 그 일이란다. 황제의 항서(降書)와도 같은 무거운 비애(悲哀)가 맑게 가라앉는 하얀 모랫벌 같은 마음씨의 벗은 없을까.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서 때로 울고 때로 기도 드린다. ☆★☆★☆★☆★☆★☆☆★☆★☆★☆★☆★ 참회  김남조 사랑한 일만 빼고  나머지 모든 일이 내 잘못이라고  진작에 고백했으니 이대로 판결해다오 그 사랑 나를 떠났으니 사랑에게도 분명 잘못하였음이라고 준열히 판결해다오 겨우내 돌 위에서 울음 울 것 세 번째 이와 같이 판결해다오 눈물 먹고 잿빛 이끼 청청히 자라거든 내 피도 젊어져 새봄에 다시 참회하리라 ☆★☆★☆★☆★☆★☆☆★☆★☆★☆★☆★ 편지 김남조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다.  그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 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귀절 쓰면 한귀절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번도 부치지 않는다 ☆★☆★☆★☆★☆★☆☆★☆★☆★☆★☆★ 평안스런 그대 김남조 평안 있으라  평안 있으라  포레의 레퀴엠을 들으면  햇빛에도 눈물 난다  있는 자식 다 데리고  얼음벌판에 앉아있는  겨울햇빛  오오 연민하올 어머니여  평안 있으라  그 더욱 평안 있으라  죽은 이를 위한  진혼 미사곡에  산 이의 추위도 불쬐어 뎁히노니  진실로 진실로  살고 있는 이와  살다간 이  앞으로 살게 될 이들까지  모두가 영혼의 자매이러라  평안 있으라  ☆★☆★☆★☆★☆★☆☆★☆★☆★☆★☆★ 평행선  김남조 우리는 서로 만나본적도 없지만 헤어져 본적도 없습니다 무슨 인연으로 테어 났기에 어쩔수 없는 거리를 두고 가야만 합니까 가까와지면 가까와 질까 두려워 하고 멀어지면 멀어질까 두려워하고 나는 그를 부르며 그는 나를 부르며 스스로를 져 버리며 가야만 합니까 우리는 아직 하나가 되어 본적도 없지만은 둘이 되어 본적도 없습니다. ☆★☆★☆★☆★☆★☆☆★☆★☆★☆★☆★ 하느님의 동화 김남조 절망이 이리도 아름다운가  홍해에까지 쫓긴 모세는  황홀한 어질머리로 바다를 본다  하느님이 먼저 와 계셨다  이르시되  너의 지팡이로 바다를 치면  너희가 건널 큰 길이 열릴 것이니라.  하느님께선  동화를 쓰고 계셨다  지팡이 끝이 가위질처럼  바다를 두 피륙으로 갈라  둥글게 말아 올리며  길을 내는 대목,  동화는  이쯤 쓰여지고 있었다  모세의 지팡이  물을 쳤으되  실바람 한 주름이 일 뿐이더니  일행 중의 한 사람이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자  그 믿음으로 길이 열려  그들이 모두 바다를 건넜다  홍해 기슭 태고의 고요에  홀로 남으신 하느님,  오늘의 동화는  괜찮게 쓰인 편이라고  저으기 즐거워 하신다 ☆★☆★☆★☆★☆★☆☆★☆★☆★☆★☆★ 허망(虛妄)에 관하여  김남조 내 마음을 열  열쇠꾸러미를 너에게 준다  어느 방  어느 서랍이나 금고도  원하거든 열거라  그러하고  무엇이나 가져도 된다  가진 후 빈 그릇에  허공부스러기쯤 담아 두려거든  그렇게 하여라  이 세상에선  누군가 주는 이 있고  누군가 받는 이도 있다  받아선 내버리거나  서서히 시들게 놔두기도 한다  이런 이 허망이라 한다  허망은 삶의 예삿일이며  이를테면  사람의 식량이다  나는 너를  허망의 짝으로 선택했다  너를 사랑한다  ☆★☆★☆★☆★☆★☆☆★☆★☆★☆★☆★ 후 조 김남조 당신을 나의 누구라고 말하리 마주 불러 볼 정다운 이름 없이 잠시 만난 우리 이제 오랜 이별 앞에 선다 갓 추수를 해간 허허한 밭이랑에 노을을 등진 긴 그림자 모양 외로이 당신을 생각해 온 이 한철 인생의 백가지 가난을 견딘다 해도 못내 이것만은 두려워했었음을 눈 멀 듯 보고 지운 마음 신의 보태심 없는 한 개의 그리움 별이여 이 타는 듯한 가책 당신을 누구라고 말하리 나를 누구라고 당신은 말하리 우리 다 같이 늙어진 정복한 어느 훗날에 그 전날 잠시 창문에 울던 어여쁘디 어여쁜 후조라고나 할까 옛날에 그 옛날에 이러 한 사람이 있었더니라...... 애뜯는 한 마음 있었더니라...... 이렇게 죄없는 얘기 거리라도 될까 우리들 이제 오랜 이별 앞에 섰다. ☆★☆★☆★☆★☆★☆☆★☆★☆★☆★☆★     김남조 시비 목숨 위치 :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양수로 93  -세미원     목숨 김남조   아직 목숨을 목숨이라고 할 수 있는가 꼭 눈을 뽑힌 것처럼 불쌍한 사람과 가축과 신작로와 정든 장독까지   누구 가랑잎 아닌 사람이 없고 누구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고 불붙은 서울에서 금방 오무려 연꽃처럼 죽어갈 지구를 붙잡고 살면서 배운 가장 욕심없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반만년 유구한 세월에 가슴 틀어박고 매아미처럼 목태우다 태우다 끝내 헛되이 숨져간 이건 그 모두 하늘이 낸 선천(先天)의 벌족(罰族)이더라도   돌멩이처럼 어느 산야에고 굴러 그래도 죽지만 않는 그러한 목숨을 갖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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